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1

[이장욱] 에이프릴 마치의 사랑

일루젼 2024. 7. 5. 0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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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이장욱
출판 : 문학동네
출간 : 2019.10.30


       

           

내 기억 상으로는 처음 만나는 작가다. 

<에이프릴 마치의 사랑>, 눈길을 끄는 제목과 표지가 마음에 든다.

 

여덟 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는데 각각의 색감이 무척 다양했다. 개인적으로 마음에 들었던 건 <복화술사>와 표제작 <에이프릴 마치의 사랑>. 애완 파충류도 좋아하는 편이라 <행자가 사라졌다>도 좋았다. 

 

자신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사랑과, 그것을 건네받은 사람의 입장에서 보는 사랑이란 얼마나 달라지는지.

수많은 것들이 달랐음에도 진정으로 이해하는 사랑이라고 믿게 되는 것은, 외로움 때문일지 자기 연민에서 출발한 자기 확신 때문일지. 

 

약간 불편하지만 불쾌하지는 않을 지점을 절묘하게 건드리는 단편들이었다.

 

조금 더 생각해 보고 싶었던 글은 <크리스마스 캐럴>.

내가 이해한 게 맞는지 자신이 없어지는 글이었다. 찰스 디킨스의 <크리스마스 캐럴>을 오마주 하면서도 비튼 것 같은.

친구였던 말리의 유령이 방문해야 했지만 그조차 없어 아내의 전 애인을 등장시킨 거라면, 그것을 의도하고서도 그렇게 묘사한 거라면...

곱씹어 보고 싶은 단편이었다.     

 

좋았다. 

   


   

 

 

- 경험이란 무엇일까? 입는 것일까? 먹는 것일까? 바삭바삭한가? 물렁물렁한가? 경험이 모여 추억이라는 게 되는 것일까?
행자에게는 그런 게 없다.
경험 말이다.
추억도 역시.
그것이 좋다.

- 경험이 없다고 해서 세상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할머니는 경험 많은 인간들이 외려 세상을 오해하는 법이라고 말씀하셨다. 그 이들은 대개 경험이 만든 틀에 갇혀 살아가니까. 육이오를 경험한 사람은 육이오에, 유신을 경험한 사람은 유신에, 가난을 경험한 사람은 가난에 갇혀 살아가는 법이다. 평생 돈 귀한 줄 모르고 살았다면? 다들 지들처럼 사는 줄 알겠지.

 

- 경험 많은 할머니가 하신 말씀이니 아마도 맞을 것이다. 경험이 많을수록 틀 밖으로 나가지 못하니 생각은 편협하고 믿음은 완고해진다. 이런 걸 보면 경험을 지혜의 원천이라고 하는 건 우스꽝스럽다. 차라리 경험 없는 지혜가 더 현명할 수도 있지 않을까?

- 경험 없는 지혜라고?
그렇다.
확실한 증거가 있다. 바로 우리 집 행자다.
행자가 지혜롭고 현명하다고 하면 어이없어할지도 모르겠다. 행자는 애완용 뱀의 이름이니까.

- 행자는 몸을 공처럼 잘 말아서 볼파이톤 또는 공비단뱀이라고 불리는 종이다. 길이 일 미터 정도의 소형이지만 파충류는 파충류이므로 냉동 쥐 같은 것을 먹고 산다. 가공 사료는 먹지 않는다. 순하고 저 혼자 스트레스를 잘 받는 체질에 어둡고 답답한 소형 리빙박스가 삶의 터전이다. 하지만 파충류답게 생존력이 강해서 아무것도 먹지 않고 두어 달은 버틸 수 있다. 내 손바닥 위에서 몸을 둥글게 말고 고개를 바짝 치켜든 행자는, 한마디로 말해서, 멋지다.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다. 두 갈래로 갈라진 혀를 날름거릴 때는 더더욱.

- 행자에게는 경험이 거의 없다. 살아 있는데 경험이 없을 수는 없으니까 '거의 없다'고 한 것이다. 행자는 성체가 되기도 전에 여기 이태리아파트 2동 301호에 들어와서 평생을 보냈다. 그것도 좁은 플라스틱 리빙 박스 안에서 말이다. 간혹 내가 물을 갈아주거나 박스에서 꺼내 핸들링을 할 때가 있지만, 기본적으로 행자에게는 톱밥 깔린 리빙박스와 집안이 전 세계인 셈이다.

- 하지만 행자는 엄연히 살아 있는 동물이며, 본능과 직감으로 세계를 이해하는 영물이다. 그렇다고 생각한다. 행자와 눈을 가만히 마주 보고 있으면, 이 영물이 모든 것을 꿰뚫어 보고 있구나 하는 느낌까지 든다. 나뿐만 아니라 엄마, 아빠, 할머니, 그리고 남동생 규의 기분이나 감정 상태 등을 귀신같이 알아채는 것이 틀림없다. 가령 행자의 움직임을 보면 그날의 집안 분위기를 정확하게 알 수 있다. 분위기가 좋을 때 행자는 내 손바닥 위에서 상체를 곧게 펴고 리드미컬하게 움직이며 혀를 날름거린다. 마치 <아라비안나이트>에 나오는 춤추는 뱀처럼 말이다. 하지만 분위기가 좋지 않을 때는 몸을 둥글게 말고 대가리를 제 몸에 파묻은 채 시선도 주지 않는다.

- 파충류가 집안 분위기나 주인의 기분을 알아챈다고 하면 다들 코웃음을 치겠지만, 행자를 키워보면 생각이 달라질 것이다. 작고 섬세한 얼굴, 아라비아 숫자 3을 눕혀놓은 듯한 귀여운 입, 그 입에서 쉭쉭 나왔다 들어가는 두 갈래 혀, 그리고 무엇보다도 단추처럼 까맣게 빛나는 눈. 아무런 감정도 깊이도 없이 반들반들 빛나는 두 개의 눈. 그걸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면, 확실히 뭔가 읽히고 있다는 기분이 드는 것이다.

- 행자는 떠들지도 않고 자기주장을 하지도 않으며 어둠과 침묵에 익숙하다. 냉혈동물답게 고독이니 우울이니 하는 것을 느끼지도 않는다. 하지만 행자는 우아한 자세로 은신하며 세상을 꿰뚫고 있다. 그렇다고 생각한다.

- 그런 행자가 사라진 것은 지난 일요일 아침이었다.

- 할머니는 아흔이 된 뒤부터는 매사에 별 반응이 없어서 점점 식물이나 사물에 가까워지는 것 같았다. 케이블 TV에서 매일 재방송으로 틀어주는 <전원일기>를 볼 때만 희미한 미소를 지을 뿐이다. 그런 할머니가 휠체어에 앉아 텔레비전을 보다가 문득 이렇게 물었다는 것이다. 시선은 허공에 둔 채였고, 아주 조용하고 낮은 목소리였다.
근데... 행자는 어디 갔네?

 

- 무슨 말씀인가 싶어 한참을 멍하니 있다가 엄마는 뭔가 깨달은 듯 거실 장식장에 올려둔 리빙 박스를 열어보았다. 엄마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박스 뚜껑이 열려 있었던 것이다. 요컨대 사건은 이미 터진 뒤였다.

- 엄마와 규가 집안 곳곳을 뒤졌지만 행자는 발견되지 않았다. 소파 밑부터 냉장고와 텔레비전 뒤, 그리고 베란다 하수구 변기 안까지 집안의 모든 외진 곳을 샅샅이 뒤졌지만 보이지 않았다. 엄마는 곧바로 나에게 전화를 했고 나는 전화를 끊자마자 막 새로 읽기 시작한 추리소설을 던져놓고 집으로 달려온 것이다.

- 그날 나는 집에 없었다. 어수선한 집에서 방학을 보내느니 한적한 기숙사에 머무는 쪽이 체질에 맞았기 때문이다. 방학중 계획이 있는 학생들을 위해 일부 방을 개방해 놓은 것이지만, 내게는 이렇다 할 계획 같은 것은 없었다. 도서관에서 알바를 하고 내키는 대로 책을 읽다가 어둠이 깔린 황량한 캠퍼스를 걸어 기숙사로 돌아오는 것이 좋았다. 신입생으로서 가질 법한 대학에 대한 기대치가 처음부터 낮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날도 나는 추리소설들을 손에 잡히는 대로 읽다가 행자의 실종 소식을 듣고 달려왔을 뿐이다. 

- 펀드 매니저로 성공한 '입지전적 인물이다. '성공'이니 '입지전적'이니 하는 건 사실 아빠가 스스로를 방어할 때 사용하는 레토릭일 뿐이다. 외환위기 이후의 폭락장을 역이용해 업계에 진입했다가 리먼 브라더스 사태 때 폭탄을 맞고 가산을 탕진한 처지에 입지전이라니, 꽤나 민망한 표현이었다. 지금도 빚이 남아 허덕이고 있기 때문에, 가계는 엄마의 수입을 보태야 근근이 유지될 정도였다. 

- 아빠는 자신이 중도라고 주장하지만 엄마는 대놓고 '꼴보수'라고 불렀다. 아빠는 조간신문을 애독하며 거기서 얻은 정보로 세상을 판단하는 데 익숙하다. 신문기사에 나온 수치를 외우고 그 수치로 상대를 제압하려 든다. 비정규직이 어떻고 하면 곧바로 한국의 고용유연성 수치가 OECD 34개국 중 몇 위인 줄 아느냐, 빈부격차가 어떻고 하면 한국의 GDP 수치가 1972년에서 2018년 현재까지 몇 배나 뛴 줄 아느냐,라고 대꾸하는 식이다.

- 물론 아빠는 자신을 '꼴보수'가 아니라 문화인이자 교양인이라고 생각한다. 모차르트를 좋아하고 바그너를 사랑하며 백남준이나 김환기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피력할 줄 아는 사람이었으니까. 특히 보기 드문 오페라 마니아로 DVD와 블루레이로만 백여 장을 소장하고 있으며 <라 트라비아타>에서 <마담 버터플라이>까지 오페라의 내용과 공연사를 줄줄 꿰는 사람이었으니까.
내연관계의 여자가 일 년마다 바뀌는 오페라 마니아를 상상해 본 일이 있는가? 나는 있다. 아니, 자주 본다. 게다가 나는 확신하고 있다. 그가 '오페라 마니아이기 때문에' 내연관계의 여자가 바뀐다는 것을 말이다. 진짜 오페라 마니아들에게는 미안한 얘기지만, 아빠를 보고 있으면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 아빠는 그날도 테니스를 치러 갔다가 돌아왔다. 우리 아파트 단지 뒤편에도 공용 테니스코트 한 면이 있지만 아빠는 그곳을 이용하지 않는다. 오 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사설 클럽으로 차를 몰고 간다. 알고 지내는 '사회지도층' 인사들이 거기 모여 주말마다 테니스를 친다는 것이다. 아빠는 그렇게 말했지만 엄마도 나도 알고 있었다. 그게 이런저런 이유로 업계에서 밀려나는 중인 중년 남자들이 정보를 교류하는 모임에 불과하다는 것을. 

- 아침에 운동복을 입고 거실에 나와 아몬드 우유를 마실 때만 해도 아빠의 기분은 가벼웠다. 이른 시각이었으므로 집안은 고요했고 창밖으로 보이는 하늘도 쾌청했다. 초여름 더위도 한풀 꺾인 데다 그날 아침에는 미세먼지 수치도 '보통' 수준이었다. 모든 면에서 평범하고 평화로운 아침이라고 할 만했다. 


- 하지만 아빠의 일진이 마냥 좋았다고는 할 수 없다. 여느 휴일처럼 차를 몰고 나가서 네 게임이나 뛰고 왔지만 별다른 소득이 없었다. 관심을 두던 스타트업의 동향에 대해서도 유의미한 정보를 얻을 수 없었고, 게임에서는 단식 복식을 가리지 않고 연전연패였다. 이상할 정도로 안 맞네. 아빠는 중얼거렸다 

- 아빠의 목덜미를 물어버린 것이다. 출혈은 없었고 약간의 상처가 났을 뿐이지만, 아빠 입장에서는 진심 경악할 만한 사건이었다. 애완용 뱀에게는 분명 독이 없다고 했는데, 이상하게도 아빠의 목덜미는 며칠 동안 붉게 부어올라 가라앉지 않았다. 아빠가 행자에게 악감정을 가질 만한 동기는 충분한 셈이다. 

- 그리하여 그날 아침, 갑작스러운 적의가 아빠를 휘어잡았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거실 장식장에 있는 행자의 박스를 내렸을지도 모른다. 박스 구석에 몸을 말고 있는 행자의 모가지를 잡아 비닐에 넣은 뒤 차 트렁크에 실어 야산이나 하수구 같은 곳에 버렸을지도 모른다. 아니, 비닐이고 야산이고 하는 게 번거로웠기 때문에 화장실 변기에 던져 넣은 뒤 물을 내려버렸을지도 모른다.

- 물론 아빠가 범인이라고 단정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사태가 지나치게 단순해 보인다면 그건 뭔가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는 뜻이다. 아빠가 범인이라면 그건 너무 단순한 추론이고, 사태가 그렇게 단순하다면 아빠가 그렇게 했을 리가 없다. 아빠는 욱하는 감정에 일을 저지르는 유형이 아니다. 치밀한 계획을 짜서 완전범죄를 모의한다면 모를까. 감정이 치민다고 곧바로 행동에 옮기는 유형도 아니다. 오히려 그런 종류의 인간을 경멸하는 편에 속한다. 무엇보다도, 박스를 그렇게 허술하게 열어놓고 외출했을 리가 없다.

- 엄마는 어떤가?
엄마는 내가 없을 때 행자에게 피딩을 해주는 유일한 사람이다. 내가 기숙사 생활을 시작한 뒤로는 행자에게 냉동 쥐를 넣어주는 것도 엄마였고 물을 갈아주는 것도 엄마였다. 그러니 엄마가 행자에게 못된 짓을 할 리가 없다... 고 적어보지만, 이런 확신의 순간이야말로 위험하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지 않는가?

- 엄마 역시 용의선상에서 완전히 배제되는 것은 아니다. 내가 없는 동안 물이나 먹이를 제공하는 일이 엄마 담당이라는 바로 그 점이 가장 중요한 동기일 수도 있으니까. 무엇보다도 엄마는 뱀을 키운다는 것 자체를 납득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저 징그러운 걸 꼭 키워야겠어? 뱀은 뱀이니까 독이 있을지도 모르잖아? 저게 예쁘게 보인다니 그게 말이 돼? 

엄마, 그건 그냥 편견이야. 뱀만큼 아름다운 생물은 없다니까.

- 집안 분위기... 라면 물론 나도 수긍이 가는 면이 있었다.
사실 엄마 아빠는 서로 갈라서기로 잠정적으로 합의한 상태였다. 아빠가 바람을 피웠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한다면 엄마를 얕잡아 보는 것이다. 왜냐하면 엄마에게도 따로 연인이 있었기 때문이다. 바람을 피운다기보다는, 서로가 상대의 애정생활에 간섭하지 않기로 했다고 쿨하게 말하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그게 사실에 부합하기도 하고. 

- 두 사람은 이미 오래전부터 별거 상태였다. 같은 집에 살기는 하지만 각방을 쓰고 서로의 삶에 개입하지 않으며 거의 남남처럼 행동한다. 그렇게 사는데도 겉으로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사랑 없이도 가족이 가능하다기보다는, 차라리 이런 것이 새로운 형태의 가족이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 하지만 최근에 엄마는 불면증과 함께 가벼운 우울증을 앓고 있었다. 아빠 때문에? 천만에. 아니라니까. 엄마는 아빠와는 질적으로 다른 사람이다. 버지니아 울프로 학위를 받은 영문과 강사이며, 무명이긴 하지만 무려 신춘문예로 등단한 소설가로 최근에는 90년대를 배경으로 한 장편소설을 쓰고 있었다. 소수자 이슈를 비롯한 각종 사회 현안에서 진보적인 견해를 지지하는 좌파에 팔로어가 천 명쯤 되는 트위터리언이었으며, 무엇보다도 이제 겨우 마흔네 살이었다.

- 그렇다. 엄마는 '자기만의 방'이 필요한 사람이었다. 당연하게도, 대학 졸업과 동시에 결혼을 하고 아이를 둘이나 낳아버린 자신의 지난날을 후회하고 있었다. 그것도 일곱 살이나 차이가 나는 남자와 말이다. 엄마는 학위를 받은 이후에는 논문을 거의 쓰지 못했으며, 등단 후 십 년이 지나도록 작품집 한 권 없는 무명이었다. 새로 시작한 장편소설은 엄마의 멱살을 잡고 침울과 우울 속으로 끌고 들어갔다.

- 그날도 엄마는 약을 먹고 잠이 들었다. 꿈속에서 엄마는 길을 걷다가 묻지마 살인을 저질렀다. 피살자는 낯이 익은데 누군지 알 수 없는 사람이었고, 꿈속의 엄마는 자신이 왜 사람을 죽여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엄마는 시체를 업고 아파트 옥상에 올라가 저 아래로 던져버렸다. 엄마는 비명을 지르며 깨어났다. 이게 꿈인가 아니면 정말 자신이 뭔가 저질러버린 것인가 헷갈릴 정도로 생생한 느낌이었다.

- 찜찜한 지점은 바로 여기다. 예전에 텔레비전에서 본 적도 있지만, 우울증 약에 취한 채로 술을 마시면 사람은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 자기도 모르게 거리를 헤맬 수도 있고, 정리해 놓은 책들을 이유 없이 바꿔 끼울 수도 있고, 가스를 켜놓은 채 라이터를 손에 들 수도 있다. 엄마가 약이나 술에 취한 채 일을 저질렀다고 하면 적어도 나는, 그럴 수도... 라고 생각할 것이다.

- 게다가 엄마는 죽음에 대한 소설을 쓰고 있었다. 심연을 들여다보면 심연도 자신을 들여다본다고 했던 철학자가 누구였던가. 그게 상투적인 얘기라고 생각된다면, 자살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하는 사람의 내면을 상상해 보면 된다. 우리가 죽음을 들여다보면... 죽음도 우리를 들여다본다.

- 내가 지금 무슨 얘길 하고 있지?
아, 행자다. 행자가 사라졌다면, 그건 아마도 규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규, 이제 중학교 3학년인 내 남동생 말이다. 남동생이라고는 했지만, 규가 중학생이 된 이후로 남매로서의 우애 같은 것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중딩 동생이 있는 사람은 이해할 것이다. 그냥 생활이 그렇게 만든다는 것을. 녀석은 이제 나를 누나라고 부르지도 않는다. 

- 이렇게 말하고 나니 규야말로 유력한 용의자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사실 아빠와 엄마가 이혼을 미루었던 데는 이유가 있다. 규 때문이다. 규가 대학에 입학할 때까지 두 사람은 평화적 관계를 유지하기로 합의했다. 자식의 미래 때문에 이혼을 미룰 만큼 엄마 아빠가 규에게 엄청난 관심을 갖고 있었느냐... 하면 그렇지는 않다. 두 사람의 이해관계에 따른 것이라는 뜻이다.

- 앞서 말했듯이 엄마 아빠는 둘 다 자기 삶이 있고 자기 관심사가 있는 사람들이다. 아빠에게는 S&P500이나 항셍, 닛케이 지수 외에도 내연의 연인과 오페라와 테니스가 있었다. 엄마에게는 버지니아 울프가 있었고 버지니아 울프를 이해하는 연하의 연인이 있었으며 무엇보다도 소설이 있었다. 
게다가 아빠 엄마는 과도한 자식 사랑이 자식을 망친다고 믿는 신세대 학부모였다. 아이들은 아이들 자신의 의지에 따라 살도록 해야 한다는 데는 기본적으로 의견이 일치했다. 특히 엄마는 모성애라는 관념에 합리적인 적대의식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규에게 마음이 쏠릴수록 그런 자신에게 거리를 두려고 노력하는 편이었다.

- 엄마 아빠는 규에 대해 다음과 같이 합의했다. 규의 인생은 규의 인생이다. 대학 때까지는 케어하겠지만, 그 이후에는 자신의 인생을 살아야 한다. 행복이든 불행이든 기쁨이든 슬픔이든... 스스로 감당해야 한다. 자신이 선택을 하고 자신이 책임을 지는 것이 인생 아닌가.


- 뭐, 당연한 얘기다. 부모라고 해서 자식들에게 올인하는 건 이미 구시대적이다. 부모가 있다고 해서 스물이 넘어서까지 의지하는 건 철없는 캥거루 같은 짓이며, 자식이 부모의 삶을 독립적인 삶으로 인정하는 것 역시 당연한 일이다. 엄마는 90년대에 대학시절을 보낸 소위 X세대였고 아빠 역시 스스로를 문화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면에서는 손쉽게 의견 일치를 보았다. 나 역시 학비 일부를 지원받는 걸 제외하면 이미 나 자신이 스스로를 감당하고 있었다.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이 끝나자마자 알바를 두 개나 시작했고, 지금도 도서관에서 근로장학생으로 일하고 있으며, 조만간 교외 장학금에도 도전해 볼 예정이니까. 나에게 낭만적인 대학생활 같은 것은 뒷전이었다. 

- 동의하기 어려운 것은 이런 것이다. 대체 왜 규 때문에 이혼을 미룬다는 말인가. 그냥 이혼을 해버리고 경제적 환경만 제공해도 좋지 않은가. 바로 그 점에 불만을 가진 것은 엄마도 아빠도 아닌, 규 자신이었다.
이혼할 거면 그냥 이혼해도 좋아요.
어느 날 아침 식탁에서 규는 그렇게 말했다. 덤덤한 어조였다. 아빠 엄마는 서로의 얼굴을 한 번 바라보았을 뿐, 금방 입을 열지 못했다.
한참 후에야 엄마가, 얘가 쬐그만 게 별소리를 다 하네...라고 대꾸했지만, 거기에 무슨 말을 덧붙여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 후 꽤 오랫동안 식탁에는 숟가락 소리만 울렸다. 침묵을 깬 것은 규였다.
뭐 그럼 알아서들 하시든가.
규는 그런 말을 남기고 제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엄마 아빠는 다시 한번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았지만 먼저 입을 여는 사람은 없었다. 엄마의 표현에 의하면, 둘 다 '벙찐' 표정이 되었던 것이다.

- 이 대목에 대해서는 해설이 좀 필요하다. 사실 엄마 아빠는 규를 과소평가하고 있었다. 그들이 말한 대로 규의 인생은 규의 인생이다. 그것은 당연하다. 대학 때까지 케어는 하겠지만 그 이후는 자신의 인생을 살아야 한다...라고 아빠 엄마는 말했지만, 그건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얘기다. 규는 이미 오래전부터 '자신의 인생'을 살고 있었다. 자신이 선택을 하고 자신이 책임을 지고 자신의 행복과 불행을 스스로 감당하고 있었다는 뜻에서.

- 사춘기 소년으로서 규는 세상의 거의 모든 것에 불만을 갖고 있었다. 우선 아빠 엄마에 대한 적의가 강했다. 규에게 아빠는 겉과 속이 다른 위선자였고, 엄마는 자기 믿음에 취한 설교자였다. 의외였던 것은, 위선자보다 설교자에 대한 반감이 더 컸다는 점이다. 규 자신의 표현을 빌리면, 위선자는 선량한 척할 뿐이지만 설교자는 자신이 믿고 있는 것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는다.

- 대개 중산층 이상 고학력에 문화적이고 교양 넘치는 인간들이 산다. 엘리베이터에서 만나면 예의 바르게 인사를 하고 아파트 안에서는 모든 걸 다 감싸 안을 듯 너그러운 미소를 짓는다. 하지만 매매가격을 낮춰 내놓는 집이 없도록 담합하고, 관리비 부담 때문에 경비 인력을 감축하고, 옆 단지 놀이터 라인이 대지를 침범했다며 소송을 벌일 때는 대단히 호전적이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그런 곳에서 관리사무소나 입주민 대표자 회의의 허가를 받지 않은 동물이... 그것도 파충류가... 무려 뱀이... 아파트 여기저기에 출몰한다면?
창으로 스며든 뱀이 자정의 식탁 위에 똬리를 틀고 있다면?
화장실에도 스며들고 침실에도 스며든다면?
두 갈래로 갈라진 혀를 내민 채 그 검고 빛나는 눈으로 잠든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다면?
잠에서 깨어났는데 그것과 눈이 마주친다면?
엄마는 머리를 쥐어뜯었다.

 

- 냉혈동물답게 뱀은 길들여지지 않는다. 그것은 차갑고 미끈거린다. 깊은 밤에 침대 위로 기어올라온 그것은 우리의 꿈속까지 스며들지도 모른다. 뱀이라는 동물은 스르르, 스며들기가 특기이기 때문에. 

- <행자가 사라졌다!>



- 나는 그녀가 오늘 아침 늦은 시간에 일어나 잠시 스트레칭 자세를 취한 뒤 슈만의 환상소곡집을 틀어놓고 맞은편 빌라의 외벽에 가로막혀 있는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녀는 커피포트에 물을 끓이고 알라딘 마일리지로 구입한 머그잔에 카누를 털어 넣었으며 냉장고에서 어제 먹다 남은 피자 조각을 꺼내 전자레인지에 돌렸다. 편의점 샐러드 팩을 뜯어 피자와 함께 먹는 동안 주위는 조용했고 이런 순간에는 갑자기 인생이 정지해서 다시 시작되지 않아도 좋을 것 같다는 기분에 사로잡혔다. 그녀는 마커스 밀러로 음악을 바꾸고 볼륨을 높인 뒤에 내키는 대로 상체를 흔들어보았지만 베이스 기타의 둔중한 비트 속에서도 어쩐지 깊은 물속 같은 느낌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녀는 이런 조울증적 기분 자체가 상투적이라고 느꼈으며, 감정이 요동치는 것과 무관하게 오늘도 어제와 같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채 흘러갈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하루종일 아무에게서도 전화가 걸려오지 않을 것이고 스팸을 빼면 아무런 메일도 도착하지 않을 것이며 그녀에게 카톡 같은 것을 보내 대화를 청하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물론 인터넷 개설을 권유하는 전화에는 깍듯하고 공손하게 관련 내용을 확인한 뒤에 미안하지만 집에서 이미 쓰고 있는 인터넷 서비스가 나쁘지 않아서 바꿀 필요가 없을 것 같다는 의사를 밝히고 수고하시라는 인사까지 정중하게 건네며 통화를 마칠 것이다. 그런 뒤에는 아니 에르노의 소설을 읽다가 인터넷 서핑을 하다가 다시 아니 에르노의 소설을 읽다가 이런 연애담이라면 한 달에 한 권씩은 쓸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겠지만, 나는 내가 결코 그렇게 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지... 라고 혼자 중얼거린 뒤에 쓴웃음을 지을 것이다. 늦은 오후에는 박노식과 도금봉이 나오는 60년대 공포영화를 틀어놓고 화면을 바라보다가 뮤트로 전환해 두고는 다닐로 키슈의 <죽은 자들의 백과전서>를 읽으며 최근에 출시된 에일맥주를 마실지도 모른다. 현재의 은행 잔고를 고려해 볼 때 숨만 쉬고 조금씩 먹는 정도라면 앞으로 두 달 정도는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버틸 수 있으리라는 계산이 서자 그녀는 약간의 안도감을 느낄 것이다. 두 달이 지나면 다시 무슨 일이든 시작하겠지만 당장은 아무 계획도 없으며 실은 아무 계획도 없는 상태야 말로 가장 좋은 상태라고 그녀는 생각할 것이다. 맥주 한 캔을 비울 즈음 어제 느꼈던 격렬한 공허감이 다시 엄습하는 듯해서 그녀는 아티반 일 밀리그램을 삼키고 한 시간 반 동안 꿈 없는 잠을 자게 될 것이다. 깨어난 뒤에는 잠시 멍한 상태로 앉아 있다가 생각났다는 듯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고 싶어질지도 모른다. 이태원에서 알게 된 스티브에게 연락을 취해 클럽에서 맥주를 마시며 한국인들의 구질구질한 인간관계에 대해 불평을 늘어놓거나, 예전에 반년 간 연애를 한 적이 있는 한국인 박에게 전화를 걸어 최근 그의 영화작업은 잘 돼가는지 질문할지도 모른다. 스티브는 오케이 네가 원한다면 난 무엇이든 할 수 있어, 물구나무를 서서 밤을 새우라고 하면 그럴 수도 있지...라고 너스레를 떨 것이고, 박은 뭔가 생각하는 듯하다가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홍대입구 쪽에 새로 생긴 이자카야로 그녀를 초대할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이 모든 게 부질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정확하게 말하면 그들을 만나 수다와 뒷담화와 하소연을 나눈 뒤에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일이 지극히 트리비얼하고 무의미하며 구토가 날 지경이라는 사실을 뻔히 알고 있기 때문에, 그들에게 연락을 취한다든가 하는 짓을 실행에 옮기지 않으리라는 것도 나는 알았다... 

- 그녀는 누군가에게 전화를 거는 대신 책을 읽기 시작하겠지만, 그것이 어제 읽던 베케트는 아닐 것이다. 집요하게 내면적이며 병적인 주관성에 의지하는 20세기 초 유럽풍의 정신상태와 거리를 두기 위해 그녀는 베케트를 사랑하는 모더니스트들의 자의식적인 문장은 읽지 않기로 결심했으며, 차라리 알베르트 산체스 피뇰의 무인도 모험담이나 인종문제를 다룬 쿳시의 장편이나 필립 K. 딕의 사이버펑크물을 읽는 쪽이 낫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정작 스스로는 그런 책들을 끝까지 읽어내지 못하고 다시 베케트로 돌아가리라는 것도 그녀는 알고 있었다. 그런 생각을 하는 순간 그녀는 자신이 하나의 기호라든가 글자로 변해가다가 급기야 소설 속의 인물이 되어버렸다고 상상했는데, 그것이 상상이 아니라 실제 같다는 느낌이 들어 화들짝 놀라 방 안을 둘러보기도 할 것이다. 침대와 책상과 오픈형 화이트 수납장으로 이루어진 미니멀한 방 풍경이 눈에 들어오면 작은 한숨을 내쉴지도 모른다. 밤에는 늘 해오던 것처럼 오늘 손에 쥐었던 책들에 대한 소감을 내키는 대로 적어 블로그에 올릴 것인데, 자신의 무언가를 건드린 책에 대해서는 길게, 그냥 읽었다는 느낌만 남는 책에 대해서는 두세 줄로.  

- 자정이 되면 그녀는 가벼운 옷을 입고 여성 안심 귀갓길로 지정된 어둡고 음침한 뒷골목들로 산책을 나갈 것이다. 부코스키 같은 마초를 좋아하고 바타유의 빨간 소설에 열광하는 수컷들에게는 한 번도 끌린 적이 없구나, 그런 생각을 하며 인적 없는 골목의 ...

- 그렇다는 것에 별다른 이의가 없다. 언젠가 안정된 출판사에서 시집 한 권을 낼 수 있다면 그뿐, 그 이상은 아무런 의미도 가치도 없다고 나는 생각해 왔다. 시인이 쓰는 것이 아니라 쓰는 자가 시인일 뿐이다. 명망가와 권력자에 대한 혐오야말로 시의 동력이니 차라리 무명의 무명을 누릴 것. 그것으로써 시인의 삶을 살아낼 것. 누군가에게는 유치하게 느껴질지도 모르지만, 내가 가진 최소한의 자존심은 그런 것이다.

- 하지만 아침의 허무이며 저녁의 음악, 그리고 밤의 불꽃인 그녀에 관해서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그녀는 명망가도 아니고 권력자도 아니지만 적어도 나와 나의 시에 대해서라면 세상의 모든 명성과 세상의 모든 권력을 합해놓은 것을 초과하는 존재라고 나는 생각한다. 어떻게 그렇게 되었는가? 왜 그렇게 되었는가? 그 내력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그녀가 블로그에 업로드한 게시물 가운데 나의 시가 있었다는 사실을 먼저 언급해야겠다. 그것이 나와 그녀의 첫 만남이었으며 내가 그녀를 '발견'한 최초의 사건이었으니 말이다. 

- 외롭고 쓸쓸하던 어느 밤, 나는 게임을 하기에도 지쳐 인터넷 검색창에 내 이름을 넣어보았다. 쓸모없는 허영이라는 건 알고 있다. 나는 온라인에 독자들의 평이나 반응 같은 것이 올라올 만큼 유명한 시인도 아니고, 무엇보다 독자들이나 평론가들의 평판 같은 것에는 별반 관심이 없는 인간에 속한다. 남들의 평가에 일희일비하느니 차라리 랄리 푸나의 일렉트릭 사운드를 귀에 꽂고 시간을 죽이는 편이 훨씬 흥미롭다고 생각하는 인간이다. 

- 하지만 무료하고 가난하고 외로울 때 인간은 무료하고 가난하고 외로운 일을 하는 법이다. 좋아요 수가 늘어나고 팔로어 수가 늘어나는 것이 우리 삶을 보증해 줄 리 없건만, 또 그것이 아니라면 다른 무엇이 우리의 빈곤한 삶에 의미를 부여해 줄 수 있다는 말인가? 가족이? 가문이? 학벌이? 국가가? 그럴 리가.

- 독자들이 업로드한 나의 시가 검색 화면에 뜨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아직 시집 한 권 낸 적이 없으니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뜻밖에도 내 시가 게시된 포스트가 눈에 띄었으니, 바로 그녀의 블로그였다. 나는 곧바로 클릭해서 그녀가 옮겨 적은 내 시를 읽었다. 제목은 '리듬은 나의 것'. 리듬을 타고 흘러가는 내 삶의 모든 것. 당신 삶의 모든 것, 우리 모두의 삶에 가까운, 바로 그것. 흐릿하게 피아노가 보이는 사진이 시의 배경에 떠 있었다. 음악은 야나체크의 <수풀이 우거진 오솔길에서>. 시 뒤에 그녀는 짧은 감상을 달아놓았다. 


- [맨해튼 미드타운, 내 청춘의 어두운 시절을 보낸 그 좁고 낡은 아파트먼트의 쪽창으로 떨어지는 낙엽의 궤적을 이해할 수 있는 것만큼이나, 나는 이 시의 어휘 하나하나를, 조사 하나하나를 느낄 수 있을 듯한 기분. 마치 이 시가 쓰이기 이전에 이미 이 시를 알고 있던 것처럼, 모든 문장들을 한 올 한 올 이해할 것 같은 느낌. 지금은 그것만이 나의 리듬, 지금은 그것만이 나의 슬픔.] 

- 나는 군말 없이 감동했다. 나의 시가 누군가의 삶에 이렇게 인용될 수도 있다니. 내 고독한 문장에 반응하는 이토록 개인적이며 내밀한 감각이 세상에 존재한다니. 말하자면 그녀는 내게 최초의 독자에 다름 아니었고 그녀의 글은 내게 최초의 독후감이라 할만했다. 게다가 그 독후감은... 나의 시보다 오히려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 나는 그녀의 블로그를 훑어보기 시작했다. 예민한 감각을 가진 블로거답게 흥미로운 게시물이 많았다. 한두 개의 꼭지에 관심이 간 것이 아니었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그녀가 적어놓은 모든 문장들이, 그녀가 올려놓은 모든 음악들과 이미지들이 그녀가 살아가는 사소한 일상의 세목들 하나하나가, 나의 무언가를 건드렸다.

- 새로 나온 에일맥주 캔을 손에 들고 나는 그녀가 올린 최초의 게시물부터 최근의 게시물까지를 차근차근 읽어갔다. 새벽이 깊어가고 취기가 혈관에 퍼져가면서 나는 서서히 깨닫게 되었다. 그녀와 내가 아주 깊고 은밀한 운명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우주의 어둠 이편과 저편에 떨어져 있으나 수십 광년을 지나온 희미한 별빛으로 이어진 외로운 별들이라는 것을.

- 그저 내 시를 인용했기 때문에 하는 말이 아니다. 그녀가 좋아하는 음악, 그녀가 좋아하는 영화, 그녀의 마음을 움직인 어느 저녁의 하늘빛, 심지어 그녀가 취하는 리버럴 특유의 정치적 포지션까지, 그 모든 것들이 놀라울 만큼 나와 유사했던 것이다. 단지 비슷하다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녀의 삶을 구성하는 모듈들은 나의 우주를 구성하는 모듈들과 거의 동일해서 마치 평행우주처럼 서로가 서로를 비추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 집에 남아 있는 마지막 맥주 캔을 손에 들었을 때는 꽤 깊이 취한 뒤였다. 그녀가 올린 게시물들을 읽어가는 동안 나는 그녀의 얼굴을 그녀의 이목구비를 그녀의 뒷모습을 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가 블로그에 걸어놓은 것은 아주 희미한 실루엣의 프로필 뿐이었다. 그 이미지만으로는 그녀가 어떻게 생겼는지, 키가 큰지 작은지, 헤어스타일이 어떤지 짐작할 수 없었다. 사실은 남자인지 여자인지조차 단정적으로 말하기 어려웠다. 

- 하지만 그 모호한 음영만으로도 나는 알 것 같았다. 그녀가 거리를 걸을 때 주위를 두리번거리지 않으리라는 것을, 어느 식당에 든 혼자 들어가 식사하는 것을 꺼리지 않으리라는 것을, 태생적으로 우울증 기질에 속하여 결국 낮보다 밤의 시간에 지배되는 인간이라는 것을, 나는 직감할 수 있었다.

 

- 물론 그녀 자신은 그런 종류의 경험 때문에 정신적 상처를 받거나 하지는 않았는데, 트라우마 따위로 현재를 규정하려는 프로이트식 접근에는 헛웃음밖에 안 나온다는 게 그녀의 지론이었다. 추악한 추억 덕분에 과거에 대한 향수 같은 것에 빠지지 않게 되어 다행이라고 농담처럼 덧붙이기까지 했다. 아니 그것은 농담이 아니었을지도 모르는데, 사실 그녀가 적는 모든 문장은 허술한 농담 같으면서도 동시에 농담일 수 없을 만큼 정교하기도 했다. 우리의 존재 자체가 이 세계의 농담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한 것과 비슷할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 그녀는 미국으로 이민 간 외숙의 도움에 은행 대출을 더해 미국 유학을 결행한 적이 있지만 이 년 반 만에 모든 것을 포기하고 귀국했다. 맨해튼 미드타운 이스트의 뒷골목에서 보낸 유학 시절을 그녀가 그리워하는가 하면 꼭 그렇지는 않았다. 힙한 뉴요커 흉내를 내려면 커트 보니것이나 앤디 워홀에 대해 냉소적인 의견을 피력하고 코맥 매카시나 뱅크시에 대해 호의적인 의견을 제시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고 그녀는 적었다. 하지만 사실은 커트 보니 것의 유머와 앤디 워홀의 유희에 대해 자신은 전혀 다른 생각을 갖고 있으며, 심지어는 그들을 사랑하기까지 한다고 그녀는 덧붙였다. 

- 그녀가 게시물을 업로드하지 않는 날이면 나는 쉽게 초조해지곤 했다. 하루에도 몇 번씩 그녀의 블로그를 방문해 상황을 체크했으며 심지어는 그녀가 체류하거나 여행한 지역을 구글 맵으로 검색하기까지 했다. 스트리트 뷰를 통해 그녀가 살았을만한 미드타운 이스트의 뒷골목 풍경을 일별 했으며, 그 거리에 떨어지는 낙엽의 궤적을 상상했으며, 그 거리에서 그녀가 읽고 들은 책과 앨범들을 하나하나 섭렵했다. 나는 그녀가 곧 일본 여행을 계획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고 일본에서는 도쿄보다 교토를 좋아하며 교토에서는 금각사보다 은각사를 좋아하지만 실은 금각사 은각사 같은 명승지에 관심을 갖는 유형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주로 대학원생들이 모이는 소규모 인문학 사이트에서 논객으로 활동한 적이 있지만 멤버들의 은밀한 자기 과시와 노골적인 영역독점 욕구에 질려버린 뒤로는 한국에서 그런 종류의 삶은 살지 않겠다고 결심한 적이 있었다. 

- 그녀는 특히 잠에서 깨어났을 때 극심한 외로움에 시달리지만 바로 그 외로움을 삶의 어떤 요소들보다도 사랑하며, 그 외로움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사실을 나는 알았다. 하지만 밤은 또 달랐는데, 밤에는 외로움 같은 것은 전혀 없이 엔도르핀이 도는 듯 닥치는 대로 음악을 듣고 혼자 술을 마시고 인터넷 서핑을 하고 게임을 하며 심지어 브라질리언 댄스를 추기도 했다. 그녀는 미국에 체류할 때 브라질리언 댄스를 배운 적이 있으며 그때 함께 춤을 추던 히스패닉과 짧은 동거를 하기까지 ...  

- ... 음. 최선은 아니지만 대안이 없구나.
나의 문장들은 조심스럽고 곡진해서, 가장 중요한 용건 -그녀가 업로드하는 내 시가 원래의 내 시와 다른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것- 은 마치 아무것도 아니어서 전혀 중요하지 않은 질문이라는 투로 숨겨져 있었다. 마치 그녀의 흥미로운 문학적 실험에 내가 무슨 도움이 될 수는 없을까 문의하는 뉘앙스였다. 나는 내가 작성한 메일에서 뭔가 역겨움을 느꼈지만, 그녀에 대한 나의 사랑은 이 위선적인 메일을 그대로 발송하도록 방치했다.  

 

- 답장은 없었다.
메일 주소가 잘못된 건 아닐까 다시 확인했다. 어쩌면 그녀가 사용하지 않는 주소인지도 모르고, 아니면 내가 보낸 메일이 스팸메일함으로 직행했을지도 혹시 모른다. 수신확인란에는 읽었다는 표시도 뜨지 않았지만 그것만으로는 그녀가 메일을 보았는지 보지 않았는지 단정할 수 없었다. 나는 그녀에게 동일한 메일을 다시 보냈는데, 이번에는 "답장이 없으셔서 다시 보냅니다"라는 문구를 첫 줄에 넣는 세심함까지 발휘했다.
이틀을 더 기다렸으나 역시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 업로드된 나의 시는 처연하면서도 경쾌한 정서로 충만해 있었으며, 또 어느 날 올라온 나의 시는 영혼의 깊은 상처와 함께 의미의 절묘한 소실점들을 품고 있었다. 그리고 가을이 깊어가던 어느 날 그녀가 올린 나의 시는 소멸해 가는 것들에 대한 애정을 차갑고 냉정한 몇 개의 문장만으로 포착해내고 있었다. 그 시들은 삶의 공허와 세계의 피폐와 영원의 무서운 침묵을, 그것들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 자각한 자의 것이었다. 점점 더 넓고 깊고 다양해지는 나의 시 세계를 나는 목도하고 있었다. 

- 그리고 나는... 그 가운데 두 편을 저명한 문예지의 신작 시란에 발표했다. 두 편 가운데 앞의 시는 전체적으로 손을 좀 보았고, 뒤의 한 편은 그녀가 업로드한 그대로 게재했다. 망설임 같은 것은 없었다.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내가 저자인 내 시를 내 이름으로 발표하는 것뿐이니까. 내 이름으로 올라온 내 시를 내 이름으로 발표하는 데 무슨 문제가 있다는 말인가. 게다가 그녀의 블로그는 소수의 '이웃'들만 볼 수 있도록 설정되어 있지 않는가.
 
- 나 자신을 매료시켰다. 이것은 내 영혼의 이면에서 흘러나온 나의 문장들이다... 나는 이 시들을 통해 나 자신을 넘어서서 어떤 무의식에 도달하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 이 문장들은 그동안 내가 이해할 수 없었으며 내가 표현할 수 없었던, 바로 나 자신의 심연에 다름 아니다...

- 하지만 어째서 좋은 것은 오래가지 않는 법일까. 어째서 우리는 한번 지나간 강물에 다시는 손을 담글 수 없는 것일까.

-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업로드가 뜸해지기 시작했다. 전에는 며칠에 한 편씩 내 시를 올리기도 했는데, 언젠가부터는 일주일이나 이 주일에 한 편 올라오는 것조차 드문 일이 되었다. 시가 올라오지 않자 나는 서서히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나의 시만 뜸한 것이 아니었다. 그녀가 블로그에 올리는 글 자체가 줄어들었다. 아무런 글도 올라오지 않는 날이 점점 늘어갔다.

- 그녀가 오랜만에 '일기' 카테고리에 올린 글에 단서가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다고 그녀는 적었다. 이태원에서 만난 스티브나 예전의 연인이었던 한국인 박은 물론 아니라고 했다. 그들과는 모든 면에서 이질적인 사람이라고 그녀는 적었는데, 그것은 경제력이나 매너, 생활 습관 또는 삶에 대한 자세 같은 것만을 얘기하는 게 아니었다. 사랑을 회의하고 경멸해 온 지난 시절을 한꺼번에 잊을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그녀는 피력하고 있었다. 그녀의 연인은 한국계 외국인으로 현재 한국 지사에 파견 나와 있는 사람이었다. 클로즈업으로 올린 그녀의 연인은 옆모습만으로도... 과연 아름다웠다. 이마에서 콧날을 거쳐 입술에 이르는 선은 부드러웠으며, 턱은 유려하면서도 날카로운 각을 이루고 있었다. 풍성한 머릿결이 사진에 흘러넘치고 있었다.

- 나는 기묘한 감정에 사로잡혔다. 그것은 말 그대로의 질투이기도 했고 이제 뭘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불안이기도 했으며 이제 끝났구나 하는 희미한 체념의 감정이기도 했지만, 결국은 알 수 없는 저주와 원망의 감정이었다. 그녀의 블로그는 이제 외로움의 광휘를 잃어갈 것이라고 나는 단정했다. 다른 블로그들처럼 음식사진을 올리고 귀여운 고양이 컷을 올리고 신기한 동영상들을 링크하겠지. 생활의 소소한 즐거움과 관심사를 기록하고 여행지의 멋진 풍경을 업로드하는 데 정성을 기울이겠지. 그리고 어느덧 그녀 특유의 고독한 영혼은 사라지고 세계와 대결하려는 감각의 독창성도 자취를 감출 것이다. 드디어 삶에 대한 희망과 일상에 대한 긍정과 인생의 소중함 같은 상식적인 감정이나 피력할 것이다. 그러다가 나이듦에 대한 회한에 사로잡힐 것이다. ... 나는 유치하고 치졸한 저주와 원망의 감정에 휩쓸린 채 그렇게 단정했다.  

- [안녕, 친구들. 모두들 안녕.
이 블로그는 개인 사정으로 폐쇄합니다. 개인 사정이라고 해서 별일은 아니에요. 그냥 모든 것에는 끝이 있는 법이니까. 그리고 지금이 가장 좋은 끝이니까. 
저는 티벳으로 떠나기로 결정했답니다. 엉뚱한가요? 거기서 <티벳 사자의 서>를 읽으며 영적인 삶을 살겠다는 로맨틱한 신비주의는 제게 없어요. 그런 낭만적 포즈는 어쩐지 우스꽝스러운 느낌이라서요. 티벳에도 또 다른 삶과 또 다른 사회와 또다른 권력관계가 있을 뿐이죠. 저는 아주 현실적이며 명백한 삶만을 선호한답니다. 거기서 한국어와 영어를 가르치는 교사 자리를 얻었거든요. 야호.
저는 떠나갑니다. 티벳으로, 티벳의 수도 라싸로, 영혼의 구조가 조금쯤은 다른 그 세계로... 

아듀, 굿바이, 사요나라, 안녕.

당신은 여전히 이 세계를 살아가겠죠. 저 역시 어디서든 당신을 생각하며 살아가겠습니다. 나는 당신의 글을 읽고 당신도 언젠가 다시 나의 글을 읽을 거예요.
그것으로 문장들의 아름다운 우주 같은 게 이루어지리라는 달콤한 말은 믿지 마시길. 우리는 그저 앙상하고 외로워서 서로를 그리워하고, 안간힘을 다해 서로가 서로의 의미를 채워줄 뿐이니까요. 그리고 스르르 사라지는 거예요.
영원의 이야기란 언제나 그렇게 단순하고 소박한 것이라고 저는 생각한답니다.
아. 굿바이 사요나라. 그리고 안녕. 

에이프릴 마치 드림.]



- 이것이 그녀의 마지막 게시물이었다. 배경에는 티벳의 뒷골목인 듯 허름한 풍경이 깔려 있었고 풍경과 어울리지 않게 경쾌한 노래가 흐르고 있었다. 
티벳이라니. 라싸라니. 하지만 티벳이라니. 라싸라니. 나는 내내 그렇게 중얼거릴 뿐이었다. 맨해튼 미드타운에서 서울까지 서울에서 티벳까지. 그리고 라싸의 뒷골목까지... 그녀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그녀는 어디에서 어디까지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마침내 아듀, 굿바이 사요나라. 안녕. 나는 그녀의 무의미한 작별인사를 반복해서 중얼거리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 며칠 뒤에는 그녀의 마지막 게시물마저도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에이프릴 마치의 사랑'이라는 블로그 자체가 소멸된 것이다. 그녀의 흔적은 온라인에서는 더 이상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끈이 툭 끊어진 느낌이었다. 내가 그녀에게 보낸 메일이 내가 그녀에게 보낸 조난신호가 내가 온 영혼의 힘을 바쳐 쓴 시들이, 그리하여 그녀가 현실세계에 업로드한 나의 시들이 우주의 소실점으로 사라져 버린 듯한 기분이었다.

- <에이프릴 마치의 사랑> 




- 저는 복화술사입니다. 여러 가지 목소리를 가졌어요. 진짜 내 목소리가 뭔지 헷갈릴 때도 나는 여러 개로 흩어진 나인 것이 틀림없습니다. 의심스러우신가요? 의심스럽다고? 야 이 새끼야, 그렇다면 그런 줄 알아.

- 아, 죄송합니다. 진정하십시오. 그렇게 말한 것은 제가 아닙니다. 저는 그렇게 상스러운 인간이 아닙니다. 그냥 복화술 시범을 보였을 뿐이니까요. 다른 목소리를 내본 것뿐입니다. 목소리가 바뀌면 뉘앙스가 달라지고 옷이 바뀌면 사람이 달라지지 않습니까? 양복을 빼입은 저와 추리닝을 걸친 저는 삼사 센티미터쯤은 다른 존재일 겁니다. 예비군복을 입으면 사람이 좀 껄렁껄렁해지지 않나요? 그런 것이죠. 

- ... 비읍, 이 네 가지 자음 -입술을 움직여야만 소리가 난다고 해서 순음이라고 합니다만- 을 입술을 쓰지 않고 발음할 줄 안다고 해서 다 복화술사가 되는 게 아니라는 얘깁니다. 물론 발음 기술도 중요하죠.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니까요. 각고의 훈련이 필요합니다. 가장 초보적인 복화술을 하려고 해도 최소 두 달은 연습해야 하고, 관객들 앞에서 프로페셔널한 공연을 하려면 적어도 십 년은 수련을 해야 합니다. 
하지만 진정한 복화술사가 된다는 것은 수련 기간과는 또 다른 문제입니다. 복화술에도 철학이 있고 인생관이라는 게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말하려는 게 바로 그거예요. 진정한 복화술은 관객들의 착오나 착각을 일으키는 게 아닙니다. 속임수는 더더욱 아닙니다. 그건 복화술에 대한 모독입니다. 왜 그렇냐고요? 지금 그걸 질문이라고 하나? 응? 

- 복화술을 배 복 자를 써서 복화술 腹話術이라고들 하는데, 사실 정확한 용어는 아닙니다. 실제로 복부를 사용하는 건 아니니까요. 차라리 겹 복 자를 써서 복화술 複話術이라고 말하는 게 정확할 겁니다. 목소리가 여럿이라는 뜻이죠. 여러 목소리를 내는 것, 다른 영혼의 목소리를 빌려오는 것, 그것이야말로 복화술의 본질이 아니겠습니까. 

- 영매나 강신술사들이 대개 복화술사였다는 건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중세 불란서의 복화술사 루이 발루아는 죽은 이의 목소리를 내는 것으로 유명했습니다. 복화술사이자 영매였던 것이죠. 그는 한때 특이한 일을 하기도 했어요. 살인자의 법정에서 피살된 이들의 목소리를 재연하는 일이었죠. 죽은 이들을 증인이자 고발자로 소환했던 것입니다. 상상해 보세요. 이미 죽은 사람의 목소리가 복화술사의 입을 통해서 나오는 장면을. 그것도 살인을 저지른 자의 면전에서 말입니다. 

- 옛날 사람들 중에 신의 목소리를 들었다는 사람들이 있지 않습니까. 모세라는 사람이 하느님에게서 십계명을 들었다는 얘기는 잘 아실 겁니다. 바로 그 모세가 천재적인 복화술사였다는 주장도 있더군요. 시나이산 꼭대기에서 모세가 들었던 신의 말씀이 바로 모세 자신의 입에서 나온 목소리였다는 것이죠. 아, 물론 이단으로 치부된 주장이긴 합니다만.

- 예전에는 저도 비슷한 의심을 한 적이 있습니다. 복화술을 해놓고 그걸 신의 목소리로 포장한 게 아닌가. 결국 눈속임으로 거짓말을 지어낸 게 아닌가...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걸 확실하게 깨닫고 있어요.

 

- 자신의 내부에서 진정한 목소리를 끌어냈을 뿐이다. 그들은 진심으로 신의 목소리를 듣고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 그래요. 우리 자신도 모르는 내면의 목소리가 신의 목소리라고 한들 그게 잘못이겠습니까? 그 목소리가 거부할 수 없는 진실을 알려준다면 그게 바로 신의 목소리가 아닙니까? 그걸 인간을 넘어선 초월자의 목소리라고 한들 대체 무슨 잘못이겠습니까? 뭐라구요? 주제넘은 얘기는 그만두라구요? 이 자식이 보자 보자 하니까... 
그래요. 알겠습니다. 닥치고 제 소개나 계속하지요. 앞서 말씀드린 대로 저는 복화술사입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복화술사였다고 해야겠군요. 지금은 수련도 공연도 하지 않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한때는 저도 복화술로 생계를 꾸린 적이 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배우며 자랐기 때문에 그것 외에는 달리 할 수 있는 것도 없었으니까요. 

- 우리나라 최초의 복화술사는 1940년대 전방일 씨로 알려져 있지만, 실은 1930년대에도 이미 복화술사가 있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본각이었습니다. 이름에서 보듯 한때 승려였던 분이죠. 복화술에 빠져서 스스로 환속한 뒤에는 전국을 유랑하며 복화술을 전파했다더군요. 그분이, 그분이 바로 제 조부셨습니다. 할아버지는 제 아버지에게 복화술을 가르쳤고, 아버지는 나에게 복화술을 전수했습니다.

- 어머니요? 어머니는... 어머니도... 처음에는 아버지의 제자였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와는 차원이 다른 세계로 가버리셨죠. 태주무당이 되었다고 했어요. 아이의 혼령을 받아 아이의 목소리로 말을 하는 사람 말입니다. 상상해 보십시오. 다 큰 어른의 영혼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아이의 목소리를 말입니다. 잔주름이 진 중년의 입에서 맑고 정결한 어린아이의 목소리가 나옵니다. 그건 얼마나 아름다운 광경입니까? 아니라구요? 크리피하다구요? 크리피? 크리피가 무슨 뜻입니까?  
어쨌든 어머니 자신은 스스로 무속인이라는 것을 부인했다더군요. 자신은 복화술을 했을 뿐 무속을 한다고 생각한 적이 없다는 것이죠. 태주무당이라서 복화술을 한 것이 아니라 복화술을 하다가 태주무당으로 불린 것뿐이다... 복잡하다고요? 업어치나 메치나 마찬가지라고요? 물론 그렇습니다만, 그런 식으로 안이하게 생각하는 게 니 문제인 거야, 알아? 

- 아버지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네 몸에는 복화술사의 피가 아니라 강신술사의 피가 흐른다. 떠돌이의 피가 아니라 영매의 피가 흐른다. 그게 무슨 뜻인지 알겠습니까? 그건 아버지 자신을 낮추는 얘기였습니다. 자괴감이라고도 할 수 있겠죠. 어머니나 할아버지와 달리 아버지는 자신을 단순한 기술자로 생각했습니다. 시골을 돌아다니면서 복화술로 동화 구연을 하고 밥 벌어먹는 사람이라고 말이죠.
하지만 복화술은 영혼을 받는 일이다. 아버지는 입버릇처럼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오래전에 헤어진 어머니를 숭배했습니다. 차원이 다른 먼 곳의 존재라고 생각했어요. 아버지에게 어린 나를 맡기고는 홀연히 사라져 버렸는데도 말입니다. 어머니를 원망하느냐구요? 천만에. 나는 전적으로 이해합니다. 어머니에게는 아버지나 나와는 다른 종류의 피가 흐르니까요. 

- 그 시절이 끝난 것은 80년대 들어서였습니다. 저는 초등학교도가지 않고 아버지를 따라 남도의 후미진 마을을 돌았습니다. 아버지가 어린 나를 데리고 광주로 흘러든 것도 그 무렵이었어요. 아시겠지만, 입에 담기도 고통스러운 비극이 도시 전체를 휩쓸고 지나간 뒤였습니다. 군인들이 커다란 도시 하나를 통째로 포위하고 자기 국민들을 공격하다니. 지금 생각해 보면... 이건 대체... 상상을 초월하는 일이 아닙니까.

 

- 아버지는 사실 그 방면으로는 별생각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정치니 경제니, 좌니 우니 하는 걸 모르고 살아온 떠돌이였으니까요. 권력 같은 걸 가져본 적도 없고 그런 것에 휘둘려본 적도 없는 분이었어요. 그저 내 몸 안에서 나오는 여러 목소리들로 사람들을 즐겁게 할 줄 안다, 그뿐이었지요. 
그런 아버지가 그 시절의 그 음울한 도시에서는 우울증에 걸린 듯 음침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제가 말하지 않았던가요? 복화술사는 그가 있는 곳의 대기에 민감하다고 말입니다. 복화술은 배로 소리를 내는 것이 아니에요. 그를 둘러싼 세상의 공기를 몸 깊은 곳에 모아 소리를 내는 것입니다. 공기가 무거우면 목소리가 무거워집니다. 공기가 가벼우면 목소리가 가벼워집니다. 그런데 복화술사를 둘러싼 대기 전체에 음울하고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져있는 곳이라면? 글쎄요.  

- 충장로 우체국 앞에서 거리공연을 할 때였습니다. 아버지는 여느 때처럼 인형을 손에 들고 전래동화를 구연하고 있었습니다. 이금도끼가 네 금도끼냐? 이 은도끼가 네 은도끼냐? 산신령 목소리로 이런 대사를 하는 중이었죠. 웃음이 터져야 할 대목이었어요.

- 아버지는 이제 뭘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멍하니 서 있을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의 오른손에 끼워져 있던 오누이 인형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이번에는 PD를 향해서였어요. 독! 재! 타! 도!
거기서 끝이었을까요? 오누이 인형이 이번에는, 아이들이라고는 믿을 수 없이 낮고 굵은 목소리로, 아버지를 향해서, 아버지 자신을 향해서, 또박또박 말했던 것입니다. 인형이 자신의 주인을 향해서, 이렇게 말입니다. 너도 마찬가지야, 이 새끼야. 

- 나는 그제야 할아버지가 겪었다는 일을 떠올렸습니다. 아버지가 생방송에서 겪은 일은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반복한 것이었으니까요. 할아버지 역시 일제 때 관청에 가서 공연을 한 적이 있다 더군요. 아사달 아사녀 이야기를 우스꽝스럽게 각색해서 연기하던 중이었어요. 일본 고위 관리들 앞에서 갑자기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는 인형의 입을 막은 건, 물론 할아버지 자신이었다고 했습니다. 그 사건 이후 할아버지는 실종자로 처리되었다죠. 말하자면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라고 해야 할까요... 

- 아버지는 모처에서 돌아온 뒤 점점 말이 없어졌습니다. 말이 없어진 게 아니라 말을 할 능력을 잃었다고 하는 게 맞겠군요. 인형을 손에 끼워야 겨우 몇 마디를 하곤 했으니까요. 자신은 이미 죽어버렸고 인형만이 살아 있다는 듯이 말입니다.  


- 원거리 복화술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일반적인 복화술이 인형을 손에 끼우고 근접한 거리에서 하는 반면에, 원거리 복화술은 목소리가 먼 데서 들리는 것 같은 착각을 유발합니다. 이쪽에서 말을 해도 저기 먼 데서 하는 말처럼 들리는 것이죠. 온몸의 울림을 공명 기관처럼 이용해야 가능한, 복화술의 고급 경지입니다. 
목소리만으로 사람을 압도할 수 있다고 하면 믿으시겠습니까? 복화술의 목소리는 보통 고음역에서 만들어집니다만, 일정한 수준에 이르면 저음역까지 커버할 수 있습니다. 낮고 굵은 목소리지요. 게다가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들린다면? 마치 징벌하는 신의 목소리처럼? 

 

- 소매치기는 나를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신의 목소리는 머리 위에서 울렸고, 나는 그냥 내 신발을 바라보고 있었으니까요. 게다가 얌전하게 입을 다물고 있었죠. 물론 약간 벌어져 있기는 했겠습니다만. 
목소리는 다시 울려 퍼졌습니다. 모든 승객들의 머리 위에서, 낮고 굵은 목소리로.

- 우스꽝스러운가요? 버스에서 일어난 이 희비극적인 사건이? 하지만 웃지 마라. 웃는 것도 때를 가려서 해야지.
그래요. 웃을 일이 아니었습니다. 나는 그때 필사적이었습니다. 내 입에서 나오는 다른 목소리를 막기 위해서 말이죠. 내 의도와 관계없이 튀어나오는 그것, 스스로 발생하고 스스로 움직이는 그것, 그 목소리를 나는 견딜 수 없었던 것입니다. 

- 회계원이라는 직업은 나에게 잘 맞았습니다. 숫자들은 말이 없지 않습니까. 그 점이 무엇보다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회계장부라든가 복식부기는 아름다운 세계입니다. 아름답기 때문에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는 세계입니다. 아니,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기 때문에 아름다운지도 모르지.   

- 그 후 나는 온갖 임시직을 전전했습니다. 이삿짐센터에서도 일하고 마트 배달원으로도 일하고 공항 물류센터에서 상하차 일을 하기도 했습니다. 말로 하는 일이 아니라면 무엇이든 했습니다. 하지만 오래가지 못했어요. 어쨌든 임시직이었으니까요.
그중 가장 오래 했던 건... 화장터 일이었습니다. 요즘은 화장터라고 하지 않고 승화원이나 추모공원이라고 하더군요. 좋은 표현이에요. 내가 하는 일 역시 승화나 추모에 걸맞은 일이었으니까. 단정하게 정복을 입고 시신을 인계받아 화로에 넣는다. 일정 시간이 지난 뒤 화로에서 고인의 유골을 수습한다. 수습한 유골을 희고 정갈한 종이 위에 뿌리고 이물질들을 솎아낸다. 남은 뼈들을 모아 분쇄기에 넣어 가루로 만든다. 그렇게 모든 과정이 끝나면 지정된 유골함에 고인을 모시고 정중하게 구십 도로 몸을 굽혀서 인사를 한다. 고인을 향해서, 그리고 통유리 저편에서 이 과정을 바라보며 침통한 표정을 짓고 있는 유족들을 향해서. 
그래요. 말은 필요 없습니다. 삶과 죽음에 대한 겸허하고 정중한 자세, 프로페셔널한 직업인으로서 맡은 바 직무에 대한 숙지, 이런 것만 필요하니까요. 나는 그 일을 사랑했습니다. 가능하다면 평생 그 일만을 하고 싶을 정도로. 

- 언제부터인가는 잠꼬대조차 복화술로 하더군요. 잠을 자면서 여러 목소리를 내는 것이죠. 잠든 사람이 어떻게 자기 목소리를 듣느냐고요? 혼자 사는 사람이 자기가 잠꼬대를 한다는 걸 어떻게 알았느냐고요? 간단합니다. 아랫집 사람이 올라와서 말해주었거든요. 
아랫집 남자는 초인종을 누르고는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험악한 표정이었고 잠옷을 입은 채였어요. 아니, 이런 야심한 밤에 자꾸 사람들을 들이면 어떻게 합니까? 우리도 잠을 좀 자야 하는 것 아닙니까? 이 새벽에 대체 몇 명이 모여서 떠드는 겁니까? 
시계를 보니 새벽 세시더군요. 나는 혼자 잠을 자고 있었을 뿐인데... 이젠 잠도 자지 말라는 것이냐...라고는 되묻지 못했습니다. 복화술이 어떻고 다른 목소리가 어떻고 그런 설명을 할 수는 없었으니까요. 나는 안간힘을 다해서, 정중하게, 겨우 이렇게 대답했을 뿐입니다.

죄, 죄송합니다. 모두에게 조용히 해달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선생님, 또 소리가 나면... 또 소리가 나면 말입니다... 우리 집에서 사람들이 떠들기 시작하면 말입니다... 선생님 귀를 틀어막아다오. 손으로 틀어막아다오. 솜으로 틀어막아다오. 사람 사는 데 소리도 나고 소음도 있는 거지, 왜 그렇게 까다롭게 굴어. 안 그래?

 

- 아랫집 남자는 내 얼굴을 보더니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습니다.
그러고는 황급히 계단을 내려가버렸습니다. 현관문을 닫고 들어와 거울을 보니 가관이더군요. 얼굴이 기이하게 일그러져 있었어요. 웃는 것도 같고 우는 것도 같았습니다. 무슨 피카소 그림 속의 얼굴이랄까요. 얼굴 부분 부분이 각각 따로 노는 것 같았습니다. 오른쪽 눈은 웃고 있는데 왼쪽 눈은 울고 있고, 입꼬리는 올라가 있는데 볼은 씰룩거리고... 누가 이런 얼굴을 하고 있다면 저라도 인상을 찌푸리면서 멀리할 것 같더군요. 아무래도 그런 걸 사람의 표정이라고 할 수는 없을 테니까요. 

- 나는 유명한 복화술사들을 찾아가 보기로 했습니다. 복화술사들 중에는 나와 같은 경험을 한 사람이 있지 않을까. 있다면 뭔가 조언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그런 기대를 갖고 말이죠.


- 내가 찾아간 복화술사들은 멋진 분들이었습니다. 탁월한 실력자이자 엔터테이너였고 무엇보다도 훌륭한 배우들이었어요. 복화술을 하는 것에 자부심이 있더군요. 인생의 경험도 저보다 다채로워 보였습니다. 
하지만 내 하소연을 주의 깊게 들은 뒤에 그분들은 대동소이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차분한 어조로 이렇게 말했던 것입니다. 자신은 그런 일을 겪지 않았다고. 당신이 겪은 이야기들은 복화술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그러니 이렇게 복화술사들을 찾아다닐 게 아니라... 미안한 얘기지만... 정신과를 가보는 게 어떻겠느냐 ...  

- 이제 자신은 더 이상 사람의 목소리에는 관심이 없다고 했습니다. 차를 마시고 땀 흘려 일을 하고 먼산을 바라보는 것으로 족하다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고개를 갸우뚱했습니다. 무슨 도사처럼 흰머리를 하고 앉아서, 침묵을 벗한다느니, 사람의 목소리에는 관심이 없다느니, 먼산을 바라본다느니, 그런 얘기를 천연덕스럽게 하고 있으니까요. 나는 조금 화가 나기까지 했습니다.

- 동물과 식물의 세계에 대해 길게 말하던 그가... 문득 이상한 얘기를 꺼낸 건 막 자리를 털고 일어나려 할 때였습니다. 실은 내가 말한 증세에 대해 들은 적이 있다는 얘기였습니다. 
자네가 겪고 있는 걸... 나뉠 분 자를 써서 분화술이라고 한다네. 분화술에 사로잡힌 복화술사들은 진정한 마스터가 되거나... 자살해 버리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더군.

- 마스터가 되거나 자살을 해버리는 경우라니. 내 표정이 일그러졌습니다. 기분이 좋지 않았습니다. 다소 공격적인 어조로 나는 되물었습니다.
그런데 마스터가 된 분화술사와... 자살한 분화술사는... 혹시 동일인이 아닙니까?
그는 그게 무슨 말인가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비스듬하게 기울이고는 나를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뭔가 생각하는 듯하더니 이렇게 대꾸했습니다. 아주 느린 어조였어요.
이보게, 분화술은... 병이 아니라네. 그건... 능력이야.

그렇게 말하고 그는 입을 다물었습니다. 나도 입을 다물었습니다. 창밖으로 숲이 바람에 일렁이고 있었습니다. 먼 곳에 산이 서 있었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대화할 것이 남아 있지 않다고 느낀 사람들처럼 오래 침묵을 지켰습니다. 

- 아니, 그런데 당신은 왜 그런 표정을 짓고 있습니까? 얼굴이 일그러져 있군요. 내 얘기가 그렇게 재미없습니까? 뭐 불만이라도 있습니까? 아니라고요? 원래 표정이 그렇다고요? 그럼 원래 표정을 지금 갑자기 되찾았다는 말입니까? 아니면 표정이 그렇게 여럿이에요?
뭐, 아무래도 좋습니다. 당신, 소설가라고 했지요? 지금 내가 한 얘기가 소설이 될까요? 된다구요? 뭐라고 쓸 건데? 복화술로 무책임하게 욕이나 하는 놈이라고 쓰는 건 아니겠지? 정신없이 이 말 저 말 왔다 갔다 하는 게 복화술이라고 쓰는 건 아니겠지? 

- 다시 말하지만, 복화술은 기술이 아닙니다. 그저 여러 목소리를 내는 재주가 아니에요. 복화술은 영혼의 문제입니다. 생명의 문제입니다. 세상의 다른 곳에서, 당신의 깊은 곳에서 무언가를 불러오는 능력입니다. 의심스러우신가요? 의심스럽다고? 야 이 새끼야, 그렇다면 그런 줄 알아.

 

- <복화술사>




- 우리는 누구나 다른 존재가 되고 싶다. 공무원이 드러머가 되고 싶고, 은행원이 이종격투기 선수가 되고 싶고, 모범생이 일진처럼 존나 욕을 해대고 싶은 것이다. 
충분히 이해할 만한 일이다. 그런데 반대쪽은 어떨까? 드러머는, 이종격투기 선수는, 일진 멤버는 뭔가 다른 것이 되고 싶을까? 그럴 것이다. 그들 역시 때로는 자기 삶에서 벗어나고 싶을 테니까 리듬에서, 주먹다짐에서, 욕설에서 벗어나고 싶을 때가 있을 테니까. 


- 뭔가 다른 존재가 되고 싶다는 것, 그건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조금씩 있는 마음속의 구멍과 비슷하다. 구멍으로 바람은 들게 마련이고, 그런 바람이라도 좀 들어야 숨을 쉴 수 있는 법이니까. 

- 집안으로 들어갔다.
아내는 없었다. 이 야심한 시간에 또 강변에 나간 건가? 작업실에서 글을 쓰고 있는 건가? 그녀는 올빼미에 잠이 없는 사람이라서 나와는 라이프 스타일이 맞지 않았다. 취침시간도 기상시간도 달랐지만 나는 그런 것에 연연하는 스타일이 아니다. 아내가 쓰는 글은 무슨 소설 같은 것이라고 했지만, 나는 아내의 취미생활에까지 관여할 만큼 여유가 있는 사람이 아니다. 

- 나는 등뒤로 조용히 현관문을 닫았다. 철컥, 육중하면서도 부드러운 소리와 함께 센서 등이 스르르 켜졌다. 고요한 공간이 눈에 들어왔다. 꽤 널찍하고 중후한 느낌을 주는 거실이다. 얼마 전 이 아파트로 이사 올 때 마음에 들었던 건 칠십사 평이라는 크기만은 아니었다. 내 마음을 움직인 건 창밖의 풍경과 거실의 적절한 매칭이었다. 쓸데없이 화려하다거나 들뜬 느낌 같은 게 없었다. 부분적으로 리모델링을 하면서 거실만은 내 취향대로 꾸몄다. 블랙과 화이트 컬러를 베이스로 절제된 분위기를 연출하자 거실의 차분함은 더 내 마음에 들었다. 창밖에 탁 트인 한강 뷰와 잘 어울렸다. 

- 게다가 오늘은 크리스마스이브가 아닌가. 자, 창밖으로는 우편엽서 속처럼 눈이 내리고 있다. 소담스러운 눈송이가 검은 하늘을 배경으로 천천히 떨어져 내린다. 허공으로 루돌프가 끄는 썰매가 지나가도 이상하지 않을 듯한 분위기랄까? 나는 교회를 다니지만 신을 믿지 않는다. 와이프는 교회를 다니지 않지만 신을 믿는다.

하지만 그게 뭐 대수인가? 잠시 이런 식으로 분위기를 즐기는 건 어떨까요? 경쾌한 캐럴을 들으며 잠시 숨구멍을 틔우는 것도 좋지 않겠어요?라고 사회가 권하는 것이다.

- 나는 소파에 앉았다. 휴대폰을 귀에 대려다가, 리모컨을 들어 새로 들인 오디오에 파워를 넣었다. 바흐의 평균율이 낮고 절제된 볼륨으로 흘러나왔다. 모든 음악은 결국 평균율로 돌아간다. 음과 음 사이의 간격이 규칙적인 것. 이미 완성되어 있는 것. 제자리를 지키는 것. 적정 기준으로서의 평상심. 그런 것은 내 생활신조이기도 하다. 그런데 지금은? 뭔가 어긋난 느낌이었다. 밤하늘의 별자리들이 잠깐 궤도에서 이탈한 기분이라고 할까. 밤늦게 걸려온 이상한 전화를 받아야 하니 당연한 일이다. 나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 휴대폰을 귀에 댔다. 

- 작년에 우리가 결혼할 당시, 와이프는 대학을 갓 졸업한 상태였다. 외교관이던 부모가 해외 체류 중 태어났으며 한국에 돌아와 러시아 문학과 철학을 전공하고 미모 상당함. 말하자면 모든 면에서 상위 이 퍼센트 안에 속해 있는, '시장'이 있는 여자였다. 남친은 당연히 있어야 하고, 그것도 한 트럭분은 되어야 했다. 그래서 내가 그녀를 와이프로 맞이한 것이라고 하면 너무 속물적으로 들릴까? 그렇다. 나는 속물이다. 그래서 뭐 어떻다는 말인가? 속물을 욕하면서 자기만족을 얻는 인간들은 널리고 널리지 않았나? 도덕적인 척 윤리적인 척은 다 하면서 뒷구멍으로 못된 짓들을 하는 게 그런 인간들 아닌가? 그런 인간들이 더 얄팍하고 이중적이라는 건 뻔한 얘기 아닌가? 

- 나는 그녀가 나와 유사한 종류의 인간이기를 바랐다. 최신 트렌드에 민감하며 고급문화에 박학하되 자신의 욕망을 적절히 포장할 줄 아는 인간. 정치적으로는 중도파지만 정부의 복지정책을 지지하고 매달 일정액을 아프리카 구호단체에 납부하는 인간. 하지만 최저임금 인상이 경제에 미칠 부정적 영향이라든가, 한국 사회에 만연한 반기업 정서가 얼마나 해로운 것인지에 대해서라면 몇 시간이고 떠들 수 있는. 
나는 내가 만든 사내 자선 모임의 부인회에서 그녀가 다정다감한 막내이자 숨은 권력자 역할을 수행하기를 바랐다. 나는 그녀가 친구들과 어울려 해외 쇼핑을 다녀도 거부감이 없고, 내 허락 없이 지인들을 초대해 미니바에 앉아 수다를 떨어도 용인할 의사가 있으며, 무엇보다 아우디와 호텔 피트니스 센터와 갤러리아 명품관으로 구성된 일상을 무한 제공할 충분한 재력이 있다. 재수 없다고? 오케이. 타인들의 동의나 공감 여부는 내 관심사가 아니다. 

- 진짜 문제는 내가 제공하려는 인생에 대해 와이프 자신이 별로 호응을 안 한다는 데 있다. 나의 관심사에는 철저히 무심한 데다 부인회에도 나가지 않으면서 쇼핑이나 해외여행 또는 부동산 같은 것에도 관심이 없었다. 부자들을 경멸하면서 자기만족을 얻는 한국인 종특을 갖췄다면 차라리 스테레오타입일 텐데, 그런 것도 아니다. 어딘지 다른 세상 사람 같은 눈으로 그녀가 나를 응시할 때는, 이봐요, 나는 그런 삶에는 관심이 없어요,라고 말하는 듯한 느낌이랄까. 솔직히 말하면, 실은 바로 그 눈빛이야말로 내가 그녀에게 끌린 이유이기도 하지만.

- 그런 와이프의 옛 남친이라니, 나로서는 아무래도 호기심이 생길 수밖에. 게다가 이 친구의 목소리에는 묘하게 마음을 끄는 힘이 있었다. 여러모로 어리숙하고 횡설수설하는데도 왠지 모르게 어필하는 데가 있달까. 또는 허점투성이라는 바로 그 이유로 상대에게 친근감이 들게 하는 유형이랄까. 게다가 크리스마스이브의 자정에 이 친구가 나오라는 곳, 그곳은 내 모교 앞의 주점이었다. 놀랍게도 그 주점은 대학 시절 내가 단골로 다니던 바로 그 술집이었던 것이다.


- "이 친구, 뒷조사를 꽤 철저히 한 모양이군."
소파에 앉은 채 나는 중얼거렸다. 하지만 무슨 속셈인 것일까? 그녀를 행복하게 해주지 않으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식의 로맨틱하고 귀여운 위협을 하려는 건 아니겠지? 그녀와 자신이 얼마나 자주 모텔을 돌아다녔는지, 그녀와의 섹스가 얼마나 훌륭했는지, 그런 것을 떠벌리고 싶은 유치한 복수심에 시달리는 건 아니겠지? 
나는 그런 치기만만한 이야기를 듣는 데 시간을 허비할 만큼 한가한 사람이 아니다. 연인의 과거까지 독점하려는 미성숙한 남성호르몬에 지배되는 유형도 아니다. 술에 취하면 아무에게나 플러팅이나 스토킹을 해대면서, 정작 제 연인의 과거에 집착하는 질 낮은 부류들과 나는 종류가 다르다. 심지어 나는, 어떻게 하면 그녀와 훌륭한 섹스를 할 수 있는지에 대해 강의를 들을 수 있다면 강의료를 지불할 용의도 있는 사람이다. 그것도 꽤 두둑하게. 

- 나? 물론 나에게도 과거가 있고 비밀이 있다. 없을 리가 있겠는가. 하지만 나는 그녀가 나의 과거나 비밀을 알게 되더라도 나를 떠나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다. 여기에는 한 가지 전제가 있긴 하다. 내가 그녀에게 내 모든 걸 고백할 만큼 어리숙한 인간이 아니라는 점 말이다. 그건 그녀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어리숙한 것을 솔직함이나 진실함으로 착각하는 부류가 아니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이보게, 지고지순한 과거 같은 건 자네가 가지게. 나는 현재와 미래만 필요하니까. 그렇게 말해주면 이 친구, 말귀를 알아먹을까? 

- 하지만 그런 추상적인 말이 먹힐 것 같지는 않다. 이 친구는 이미 정상궤도를 벗어나 있으니까. 옛 애인의 남편에게 전화를 거는 친구가 아닌가? 이런 걸 정상적인 행위라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것도 크리스마스이브의 자정에. 눈이 소담스럽게 내리는, 우편엽서 속처럼 흘러가는, 이 달콤하고 희귀한 시간에.

- 나는 집을 나왔다. 차를 몰고 갈까 하다가 택시를 택했다. 대학가의 주점으로 나오라지 않는가. 구질구질한 대학가 술집 대신 서초동의 단골 바로 오라고 하려다가 마음을 바꿔 먹은 데는 이유가 있다. 평소와는 다른 분위기에서 색다른 상대와 한잔하고 싶은 기분도 있었고, 입이 무거운 게 장점이었던 마담이 최근 나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쓸데없는 얘기를 흘린다는 소문도 한몫했다. 이 바닥의 권력자들에게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으로 먹고살면서, 자기가 권력을 가지고 있다고 착각하는 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 사실 내가 만나는 인간들은 대개 정형화되어 있다. 그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익을 취하는 데 도가 튼 인간들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무해한 인간들이다. 그들은 상대에게 호감을 표시하는 데 익숙하며, 상대의 기분이 상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는 종류의 인간들이다. 물론 돌아서면 온갖 욕을 다 하고 갖은 음모와 계략을 꾸민다는 건 알고 있다. 상관없다. 돌아서서 하는 말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공개된 말과 태도다. 증명할 수 없는 진실이 아니라 오픈된 프로세스가 중요한 것이다. 나는 그게 인류사회의 발전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 자리에 앉으면서 나는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악수나 하자는 뜻이었는데 이 친구, 내 손을 보지 못한 척, 몸을 가누지 못하는 척, 그냥 제자리에 주저앉는 것이 아닌가. 악수를 하고 싶지 않다는 뜻인 줄은 알겠으나, 이만한 형식을 갖출 여유도 없는 것일까? 나는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소리 나지 않게 의자를 빼고 앉았다. 코트를 벗어 옆자리에 자연스럽게 올려두었다. 

- 경력이든 신입이든, 사원을 뽑을 때 나는 외양을 중시한다. 적당한 긴장감, 섬세한 시선 처리, 말투의 고저장단 및 어미 활용, 노련하고 자연스러운 손동작, 그런 것들 말이다. 자기소개서의 정형화된 미사여구나 경력 과시보다 그런 것들이 훨씬 더 중요하다. 말의 내용보다는 유려한 말투나 뉘앙스가 불필요한 피알이나 과도한 의욕보다 말꼬리의 적절한 높낮이가 중요한 것이다. 그런 것들은 연습한다고 쉽게 얻어지는 게 아니다. 단순한 형식이 아니라, 그 인간의 물질적인 기반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성장환경, 기질, 습성 같은 조건반사의 구조들 말이다. 서류가 말하지 않는 것, 직감만이 알아볼 수 있는 것, 그걸 발견해 내는 게 오너의 능력이다.

- 면접을 보러 온 취업 지망생을 바라보듯이, 나는 그의 얼굴을 살폈다. 면접 때의 얼굴은 물론 가면일 뿐이다. 면접이 끝나고 문을 열고 나갈 때 스쳐가는 표정이 더 중요하다. 그리고 호프집에서 친구를 만나 회사를 씹을 때의 표정이 더 '진짜'에 가까울 것이다. 하지만 인생은 호프집에서 흘러가는 게 아니다. 친구와 시시덕거리며 보낼 수 있는 종류의 것도 아니다. 진짜 얼굴이 아니라 가면을 쓰고 살아가는 것. 그게 인생의 본질에 좀 더 가깝다는 걸 알아야 한다. 

- 가면을 벗고 살아가자고 떠드는 자들은 아직 인생을 이해하지 못한 애송이들일 뿐이다. 가면을 벗으면 거기 있는 것은 진실이나 진심 같은 게 아니라, 붉은 피로 물든 살갗이다. 피와 모세혈관과 꿈틀거리는 힘줄로 가득한 '진짜 얼굴' 말이다. 아무도 그런 얼굴로는 살아갈 수가 없다. 상상해 보라. 이런 주점 같은 곳에서 서로 피가 뚝뚝 떨어지는 얼굴로 마주 앉아 핏발 선 진실을 안주로 술을 마시는 꼬락서니를. 

- 카운슬링은 상대가 이미 가진 답을 밖으로 끌어내는 일이고, 컨설팅은 답을 만들어주는 일이다. 카운슬링이 상대의 몸속에 숨어 있는 답안을 내장 꺼내듯이 끄집어내 보여주는 일이라면, 컨설팅은 다르다. 거기에는 책임이 따른다. 하다못해 인공장기라도 새로 추천해줘야 하는 것이다.
일을 의뢰받으면, 우선 나는 해야 하는 일이 카운슬링인지 컨설팅인지 판단한다. 그리고 거기에 맞게 태도와 가격을 정한다. 돌고래와 상어를 헷갈리는 일은 없다. 의뢰인이 자본주의에 대한 기초적 이해도 갖고 있지 않다면? 돌고래로는 안 된다. 상어를 택해야 한다. 체제의 메커니즘은 이해도 못하면서 욕심만 과도하거나 반대로 맹목적 적의를 가진 경우라면? 빨리 손 털고 일어서는 편이 낫다. 돌고래고 상어고 무의미할 확률이 높으니까. 

- 그런데 이번에는? 좀 애매한 데가 있었다. 와이프의 옛 애인을 만났을 때는 돌고래가 필요한가, 상어가 필요한가? 위로를 해야 하는가, 논쟁을 해야 하는가? 헤드기어를 쓰고 아웃복싱을 해야 하는가. 맨몸으로 이종격투기를 해야 하는가? 답은 하나이면서 동시에 여럿이다. 상황과 상대에 따라 가변적일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 젊은 친구의 얼굴을 보자마자, 나는 일단 카운슬링 쪽으로 진로를 잡았다. 요컨대 '상담을 해주기로 마음먹은 셈인데, 그건 그의 나이가 어렸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우선 시선 처리가 형편없었다. 상대와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유형이었다. 자신감이라고는 전혀 없는 스타일에, 노련하다거나 유려하다거나 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초식동물처럼 예민하고 순해 보이지만, 돌발적인 발언이나 극단적인 행동으로 상황을 망치는 것도 이런 친구들이다. 내가 채용을 기피하는 유형인 것이다. 
이런 친구가 와이프의 옛 남자라니. 약간은 김이 새는 기분이었다. 뭔가 세련된 스타일에 자신만만할 거라고 기대한 건 아니었다. 그런 유형이 아니라는 것쯤은 전화 통화를 할 때 이미 간파했다. '자살' 같은 자극적인 어휘를 발음할 때의 미세한 떨림, 애원도 아니고 협박도 아닌 어정쩡한 어투, 스스로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는 말솜씨. 뻔한 노릇이었다. 

- 가수의 노래만이 허공을 맴돌았다. 역시 비현실적인 밤이로군. 나는 속으로 뇌까렸다.
나는 이따금 짧은 질문을 던지면서 그의 말을 끌어냈다. 그렇군. 어떻게? 그런가? 등등. 약간의 추임새를 넣어주는 것만으로도 그는 예민하게 반응을 보였다. 제 얘기를 구구절절 털어놓았다는 뜻이다. 
물론 그게 모두 의미 있는 정보는 아니다. 핵심은 취하고 쓸데없는 정보는 버린다. 불필요한 정보를 폐기하는 것이야말로 핵심으로 다가가는 지름길이다. 불필요한 잉여를 제거하지 않고는 인생도 사회도 업그레이드되지 않는다. 그게 자본주의의 냉정함이자 힘이다. 

- 몇 개의 유도질문만으로 나는 다음과 같은 핵심 정보를 추출해 냈다. 나이는 이십오 세, 철학과 4학년. 하지만 흔해빠진 어학연수조차 가본 적 없음. 동아리방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게임에 빠져있는 잉여. 취업은 거의 포기 상태. 생활비가 떨어지면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다 다시 잉여로 돌아가는 패턴, 운동권은 아니지만 좌파신문 애독자에 문학청년. 모친은 다소 이른 나이에 병사 부친은 지방 소도시에서 회사원 생활을 하다가 명예퇴직을 하고 혼자 늙어가는 중. 
듣지 않아도 훤히 알 것 같은 유형이었다. 어디에나 널려 있는 허름한 청춘의 스테레오타입이랄까. 만일 그가 원한다면 나는 그의 하루와 그의 과거와 그의 미래까지 다 묘사해 줄 수 있다. 어쩌면 그 자신보다도 더 정확하고 더 상세하게 말이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갈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젊은 친구가 선수를 쳤다. 
"나한테 유일한 희망은 그 친구였어요. 그쪽이 와이프라고 부르는 그 친구."

- 하지만 언제나 중요한 것은 감정이 아니라 팩트다. 팩트에 의거하지 않으면 감정 따위는 헛것에 불과하다. 감정에 휩쓸리는 예술가 따위를 공적 영역에서 추방해야 한다고 말한 플라톤은 백번 옳았다. 나는 중요한 사실을 환기시켰다.
"죽는다고 한 건 내가 아니라 자네 아닌가? 아마 잊었나 본데." 

명백한 팩트 앞에서 상대는 말이 없었다.
"다시 말하지만, 자살 운운한 건 내가 아니라 자네라는 말이야. 아닌가?"
나는 반복해서 말했다. 내 목소리가 약간 높아진 듯했다. 젊은 친구가 고개를 숙였다가 천천히 들면서 입을 열었다.
"그렇습니다. 자살은 내가 하는 것이죠. 그쪽은 그런 데는 관심이 없을 테니까."

- 당연한 말이었다. 나는 자살 같은 것에 관심이 없다. 서른이 되면 죽을 거라는 둥, 예수보다 오래 살 필요는 없다는 둥, 그런 치기 어린 대화만큼 식상한 것은 없다. 나는 당연한 말을 하는 자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에너지 낭비일 뿐이니까. 나는 대꾸 없이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잠시 주저하는 듯 술잔을 비우더니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슬픔에 젖은 듯 축축한 목소리였다. 우울증 환자의 표정에 우울증 환자의 목소리. 내가 가장 혐오하는 유형. 

- 나는 속으로 그렇게 말했다. 속으로 말했을 뿐인데, 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손을 내밀어 순순히 돈을 받았다. 하긴, 자존심 같은 걸 챙길 계제가 아니겠지. 그렇게 생각하는데, 노인이 다시 입을 열었다. 말을 하는 건지 마는 건지 알 수 없을 만큼 웅얼거리는 목소리였다.
그건 그렇고... 자네는 이 젊은 양반 얘기를 잘 들으시게.
이건 또 뭔가? 또 무슨 헛소리를 하려는 것인가? 노인이 다시 중얼거리듯 말했다.
헛소리가 아니라니까. 실은 난 오늘 일어날 일을 구경하러 온 거라네. 아니, 구경만 할 건 아니지. 이 친구가 스스로 못하면 내가 이 친구를 대신해서 일을 치러줄 수도 있으니까. 히히.

 

- 히히? 나는 깨달았다. 아아, 이건 미친 노인이었구나. 꽁지머리를 말리지 말았어야 했는데. 이런 노인이니까 내쫓으려고 한 거겠지.
나는 내 경솔함을 후회했다. 젊은 친구는 이제 할 말을 다 했다는 표정으로 창밖만 바라보고 있었다. 세상의 모든 것을 다 덮을 것처럼 쏟아지는 폭설과, 그 폭설에 묻혀가는 도시 쪽에 시선을 둔 채, 노인과 나에게는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 대체 이건 누군가? 누군데 남의 침대에 누워 있는 건가? 나는 놀라서 벌떡 일어서지는 않았다. 얼굴을 찌푸리고 침대 위의 낯선 여자를 노려보았을 뿐 소리를 지르지도 않았다.
확실히 이것은 노파의 얼굴이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것이 죽음이 아니라면 무엇이 죽음이란 말인가? 그렇게 외치는 듯한 얼굴이다. 하지만 동시에, 침대에 누워 있는 이 늙은 여자는 정확하게... 내 와이프가 아닌가...

- 기이한 직감이었지만, 동시에 거부할 수 없는 직감이었다. 나는 얼어붙었다. 아아, 나의 와이프는 어디로 가버린 것인가? 매끄럽고 부드러우며 탄력이 넘치는 그녀의 얼굴은 어디로 사라진 것인가? 그녀는 어째서 이런 엉뚱한 존재가 돼버린 것인가? 나는 소리 나지 않게 비명을 질렀다. 
몸 안의 세포들이 하나하나 흐트러지는 느낌이었다. 영혼의 뼈마디들이 제각각 움직이려는 듯했다. 거의 해골에 가까운 그녀의 얼굴이 곧 내 얼굴인 것처럼 느껴졌다. 그때 채 닫히지 않은 방문사이로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아주 느리고, 부드럽고, 아름다운, 늙은 아이의 목소리였다. 
창밖을 보라 창밖을 보라

흰 눈이 내린다

- <크리스마스 캐럴>

 




- 절묘한 타이밍이라고 할 만했으니, 그가 살아난 것은 하필이 아니라 필연이었다.

 

- 이게 끝이 아니다. 달리는 버스에 뛰어든 적도 있었다. 날씨도 좋고 미세먼지도 적어 시야가 탁 트인 날이었다. 손님도 몇 없는 오후여서 시내버스 기사는 편안한 마음으로 운행 중이었다. 남산 근처 버티고개 인근을 지나고 있을 때 이 위인이 도로로 뛰어들었다. 기사는 급브레이크를 밟았다. 굽잇길이라 속도를 줄인 참이어서 뛰어든 사람과 부딪치지는 않았다. 위인이 지레 넘어지면서 실신해 버렸을 뿐이다. 처음에는 보험금을 노린 자해 사기극이 아닌가 의심했는데, 나중에 자살 시도라는 것을 알고는 기사가 말했다. 어이없어하는 표정이었다. 아니, 그런 걸 하시는 데 보통 버스를 이용하지는 않잖아요? 위치도 좀 그래요. 버티고개는 차선도 좁고 오르막에 굽잇길이라 원래 속도가 안나는 곳인데...
네 번째로 살아난 뒤에는 아무도 그에게 호의를 보이지 않았다. 병원 침대에 누워 있는 위인 앞에서 나는 노골적으로 탄식하며 이렇게 뇌까렸다. 
아, 쪽팔려.
병상의 그가 인상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그게... 애비 앞에서 할 말이냐.

- 부친이 자살 중독증인 건 아니다. 자살 같은 것을 할 만한 위인도 아니지만, 그럴 이유도 없었다. 그는 번듯한 대학 출신에 시력문제로 병역을 면제받은 신의 아들이었으며 심지어 전직 공무원이었다. 퇴직 후에는 사회교육원에서 각종 인문학 강좌를 성실하게 수강했고 작은 문예지에서 수필가로 등단하기까지 했다. 그런 인간이 뭐 하려고 자살 같은 걸 한다는 말인가? 하려면 나 같은 인간이 해야지. 

- 나? 나로 말하자면 그런 데가 있나 싶은 대학을 나온 실업자로서 토익 최고점이 입에 담기 민망한 수준에 빡빡 기는 최전방 맹렬부대 병장 출신이다. 몇 군데 중소기업에서 저임금 계약직으로 일했지만 오래갈 리 없었다. 보수가 최저임금에도 못 미치는 데다 일할 의욕을 쥐꼬리만큼도 주지 못하는 자리들이었으니까. 
작년부터는 부친에게 붙어 기생하는 처지였고 집구석에 틀어박혀 게임이나 하는 게 생활의 전부였다. 가끔 취직한 친구들을 불러내 거나하게 한잔 걸치기도 했지만 시간이 갈수록 대화 주제가 사라졌다. 친구들은 회사 얘기에 애새끼들 얘기를 주구장창 늘어놨고, 나는 퇴화하는 기생충이 되어 소주잔이나 기울여야 했으니까. 
콤플렉스가 심하겠다고? 그렇지는 않다. 나는 뭐, 그냥 살아간다. 즐거우면 즐거운 대로, 배고프면 배고픈 대로. 어차피 다 모래로 돌아가는 인생, 고민할 거 뭐 있나? 그게 내 인생관이니까. 

- 하지만 언젠가 부친이 이렇게 말한 것은 지금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처음에는 무슨 강아지 풀 뜯는 소리인가 싶은 얘기였다.
퇴화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진화다.

- 돌아보니 부친이 방문에 기대서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새로 나온 RPG 게임에 열중해 있었기 때문에 나는 한참 뒤에야 부친이 거기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그가 한 말의 뜻을 서서히 이해했다. 아, 이런 식으로 갈구는 것인가? 아무리 내가 기생충이라고 해도 당신이 이런 식으로 말하면 안 되는 것 아닌가? 나는 부친을 노려보며 입을 앙다물었다. 그래, 나야말로 인류가 퇴화하고 있다는 증표다. 그래서 뭐? 내가 뭘 어쨌다는 말인가? 어쩌라는 말인가? 내 게으른 뇌세포들이 대체 어디서 나온 것인가? 바로 당신에게서 나온 게 아닌가? 꼭 이런 식으로 자식을 비꼬아야겠는가? 

- 그렇게 울분을 터뜨리긴 했지만, 사실 부친의 뇌는 나와는 모든 면에서 정반대였다. 비유하자면, 나는 느리고 게으르고 비만한 뇌의 소유자였고, 부친은 예민하고 집요하며 깡마른 뇌를 지녔다는 얘기다. 게임에 중독된 나의 뇌도 그렇지만 부친의 뇌 역시 정상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사람들은 그런 것을 만성 신경과민이라고 부른다.

- 우선 부친은 잔소리가 심했다. 잔소리치고는 어딘지 좀 기묘했는데, 잔소리라기에는 뭣한 데가 있었다는 뜻이다. 차 조심해서 다니고 술 담배 하지 말고 공부 열심히 하거라 따위의 전통적인 잔소리와는 달랐다. 

 

- 잔소리란 무엇인가. 우리의 귓등을 간질이며 스쳐가는 바람 같은 것이 아닌가. 잔소리는 너무 상식적이기 때문에 귀에 들어오지 않고, 벌써 다 알고 있는 하나마나 한 얘기이기 때문에 흘려듣게 된다. 하지만 잔소리에는 누구에게나 도움이 되는 훌륭한 지혜가 담겨 있다. 때로는 위대한 진실까지도 말이다. 그 지혜와 진실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깨달았을 때는... 대개 너무 늦은 뒤지만.

- 내 경우가 그랬다. 거리에서 호기를 부리다 교통사고를 당한 게 여러 차례였고, 술 담배 등등에 중독돼 이십 대 때부터 만성질환을 달고 살았으며, 공부 따위는 고리타분한 범생이들이나 하는 짓이라며 호언했다가... 아아, 그만두자. 자기혐오야말로 혐오스러운 감정이 아닌가. 자기혐오는 자기 연민을 불러오게 마련이고 자기 연민이란 기껏해야 심리적 자위행위에 불과하지 않은가.

- 어쨌든 부친의 잔소리에는 상식적이며 일반적인 진실 같은 것은 눈을 씻고 찾아도 없었다. 보통 잔소리와는 뭔가 코드가 달랐던 것이다. 그의 뇌에서 일어나는 일은 백악관의 각료회의나 은하계 저편에서 일어나는 입자 분열처럼 불가사의해서, 나처럼 평범한 조선인으로서는 상상하기가 쉽지 않았다. 신경과민 환자답게 그의 말은 집요하고 치열하고 논리 정연했으며, 무엇보다도 어이가 없었다. 이런 것이었다. 

 

- 너는 알고 있느냐? 확인되지 않은 수많은 전제 위에서 우리가 일생을 보낸다는 것을? 신호를 무시한 트럭이 돌진해오지 않으리라는 근거 없는 믿음 위에서 우리는 횡단보도를 건너는 것이다. 주방장이 음식에 독을 타지 않으리라는 무신경한 신뢰 속에서 우리는 식사 주문을 하는 것이다. 엘리베이터 케이블이 끊어져 무서운 속도로 추락하지 않으리라는 밑도 끝도 없는 신념과 함께 우리는 아파트를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이다. 테러범이 없으리라는 근거 없는 추정과 함께 공항에도 가고 비행기도 타고 콘서트장에도 가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하루에도 수십 명, 수백 명에게 목숨을 맡긴 채 살아가는 것이 아니냐. 

- 부친은 그런 이상한 이야기를 하면서 슬픔에 빠지곤 했다. 신경과민도 그런 신경과민이 없었다. 그는 이발을 하다가 면도칼에 목을 베이고, 커피포트의 끓는 물을 얼굴에 뒤집어쓰고, 배관을 타고 침입한 강도에게 살해당하고, 가스가 폭발해서 집과 함께 온몸이 산산조각 나는... 그런 상상을 하며 인생을 살아가는 것 같았다. 밖에 나갈 때면 아무리 더운 날이라도 마스크를 하고 다녔으며, 공공장소는 전염병의 위험이 있다는 이유로 회피했으며, 발코니나 옥상 같은 데는 추락의 유혹에 사로잡힌다는 이유로 올라가지 않았다. 그뿐인가. 테러의 희생양이 되고 싶지 않다며 비행기를 이용하지 않았고, 교통사고의 위험을 무릅쓰고 승용차를 타고 다니는 사람들을 비난했으며, 안전 점검을 재촉하느라 겨우 삼 년 된 아파트의 관리사무소를 들락날락했다. 그러니 내가 이 위인의 뇌에서 일어나는 복잡다단한 알고리즘을 굳이 이해하려 하지 않는 건 당연한 일이 아닌가?

- 놀라운 일이 아니냐? 인간이라는 나약한 존재에게 갑자기 그런 충동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어떻게 보장한다는 말인가? 그런 근거 없는 과신이 현대 교통체계의 출발점이라니 놀랍지 않으냐?
물론 어이가 없는 건 나였다. 그런 말을 듣고 있으면 누구라도 짓고 있을 표정, 즉 얼빠진 표정을 하고 있는 나를 향해 부친은 다음과 같이 외쳤다. 장엄한 어조였다.
쇼펜하우어를 기억하라. 그는 이발사의 면도날에 목을 베이지 않을까 우려하여 목만은 면도하기를 거부했다. 기나라 사람의 걱정을 기우라고 비아냥거리지 말아라. 하늘이 무너질까 두려워했던 그분이야말로 현자가 아니었으랴. 
운운. 이윽고 그는 오후의 거리를 내려다보며 이렇게 덧붙이는 것이었다. 낯설고 신비로운 것을 바라보는 사람처럼 눈을 게슴츠레하게 뜬 채였다.
아아, 인간이란 얼마나 놀라운 존재이냐. 

- <낙천성 연습>




- 당신은 누구인가. 방금 무엇을 했는가. 워커홀릭인가. 불안한가. 사소한 일에 자꾸 화가 나는가. 당신은 어떤 종류의 뉴스를 즐겨 보는가. 야구광인가. 라면을 좋아하는가. 야구광이면서 라면도 좋아하는가. 당신은 당신의 삶이 유일하다고 생각하는가. 수많은 당신들이 이 도시에 바글거린다면 어떤가. 내가 당신을 살해한다면 그건 자살인가 타살인가. 이런 문장들을 읽으면 어지러운가. 

- 물론 당신을 만나서 이런 대화를 나누려는 것은 아니다. 나는 3분의 1쯤은 이미 죽어 있다고 생각한다. 나머지 3분의 2쯤은 죽이고 싶다는 감정으로 충만해 있다.  

- 그런 적이 언젠가는 있었나. 그런데 당신이 죽는다면 그것은 자살인가 타살인가. 
당신은 쉰다섯 살이고, 당신은 매일 바쁘다. 당신은 열심히 일하고, 자주 피로를 느끼고, 만성이니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고, 아주 가끔씩 사소한 즐거움을 느낄 뿐이다. 당신은 엘지가 역전승했을 때 잠깐 즐겁고, 엘지가 역전패했을 때 급격히 기분이 나빠진다. 포털의 정치면 사회면 기사들에 쉽게 열이 받고, 기사에 악플을 달면서 잠깐씩 통쾌해진다. 야구선수가, 연예인이, 국회의원이,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킨 재벌들이 당신의 제물이 된다. 당신은 당신의 욕설에 동의를 표하는 사람들이 많을수록 존재감을 느낀다. 추천수가 올라갈수록 승리감을 느낀다. 고개를 들면 당신은 어서 오세요. 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세요를 본능적으로 반복하고 있는 편의점 점주다. 

- 당신은 오늘 화가 나 있다. 아니, 실은 언제나 화가 나 있다. 당신은 정산 때 천칠백 원의 차이가 생기는 것에 화가 나고, 그걸 채워 넣지 않고 퇴근한 알바에게 화가 난다. 그 알바가 매장 안 시식대에 국물만 남은 컵라면을 방치한 것에 화가 나고, 잔소리 한 번 했다고 한 달도 안 돼 그만둔 것에 화가 난다. 최근 오 개월간 알바가 네 명이나 바뀌었구나 생각하면 화가 나고, 매출액이 계속 떨어지는 것에 화가 나고, 주위에 또 편의점이 생긴 것에 화가 나고, 본사에서 떠넘긴 특판 물량에 화가 나고... 당신은... 습관처럼 화가 난다.

- 당신의 기분은 중고로 구입한 승합차가 잔고장을 일으키는 것에 영향받는다. 깜빡이를 켜지 않고 끼어든 택시에 미친 듯이 클랙슨을 울리고, 막둥이의 성적이 점점 떨어지는 것에 짜증이 나고, 위층에서 나는 소음에 분을 못 참고, 돈 들어갈 곳이 점점 많아진다는 아내의 말에 급기야 폭발 직전이 된다. 당신은 자주 집을 박차고 나와버린다. 당신의 뇌는 누군가 건드리면 언제든 폭발할 준비가 되어 있다. 

- 당신의 뇌라니. 매뉴얼에 따라 작동하는 뇌도 뇌인가. 기계적인 조건반사로 움직이는 뇌도 뇌인가. 정해진 알고리즘을 벗어날 수 없는 뇌도 뇌인가. 당신의 뇌는 스위치를 누르면 온 오프가 바뀔 것 같다. 탈칵 켜지고 탈칵 꺼질 것 같다. 뇌가 켜지면 일어나 세수를 하고, 밥을 먹고, 변기에 앉아 힘을 주고, 장롱에서 옷을 꺼내 입고, 승합차를 몰고 가게에 나간다. 재고를 체크하고, 발주를 넣고, 손님이 억지 교환을 요구해도 참아내고, 알바들의 트위터와 블로그를 몰래 들여다보고, 재무제표를 확인하고, 클랙슨을 울리며 퇴근하고, 스포츠 하이라이트를 보다가, 잠이 든다.  

- 당신은 알바생처럼 열심히 일했다. 아니, 당연하게도 알바생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열심히 일했다. 갈 봄 여름 없이. 밤 낮 저녁 없이, 먹이를 찾아 헤매는 킬리만자로의 표범 같은 얼굴로. 당신은 일을 했다. 당신의 얼굴에는 점주 특유의 피로와 고독이 흔적을 남기기 시작했다. 이제는 씹을 상사도 없고 같이 씹을 동료도 없는 당신. 월급을 받다가 이제는 월급을 주게 된 당신, 당신은 계약기간 오 년을 채워야 한다는 생각에 시달리고, 시키지 않으면 절대 스스로 하지 않는 알바들에게 시달리고, 술 취한 진상손님들에게 시달렸다. 확실히 당신은 예전에 비해 자꾸 화가 나고, 사소한 일에도 열이 받고, 참을성이 없어졌다. 소형차가 앞을 가로막으면 신경질적으로 경적을 울리고, 마을버스가 느리게 움직이면 거친 핸들링으로 추월하고, 외제 차가 끼어들면 욕설을 내뱉으면서도 어쩐지 경적은 누르지 않았다.
 
- 원래 당신은 낮에 가게를 보고 야간에는 알바를 썼다. 얼마 전 야간 알바가 그만둔 뒤에는 당신이 밤 시간으로 옮겼다. 야간수당을 절약할 수 있어서만은 아니었다. 밤에 일하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밤은 조용하고, 손님이 적고, 상대적으로 여유롭게 시간을 보낼 수 있으니까. 자정 이후 연이어 도착하는 물류를 받고, 재고 상품의 유통기한을 확인하고, 폐기할 삼각김밥과 샌드위치 등속을 골라내고, 새벽에 도착하는 조간신문들을 배치하고, 청소를 하고. 그리고 나머지 시간에는... 휴대전화로 게임을 하는 것이다. 포털 뉴스에 악플을 다는 것이다. SNS에서 욕설을 남발하는 것이다. 밤은 그렇게... 평화로운 시간이다.

- 당신처럼 나도 밤을 좋아한다. 특히 새벽 네시, 일찍 일어나는 사람이라도 그 시간에 일어나기는 쉽지 않고, 늦게 잠드는 사람이라도 그 시간까지 깨어 있는 경우는 많지 않다. 인기척이 희박한 시간. 인간의 시간이라고는 할 수 없는 시간. 고양이라든가 벌레라든가 나뭇잎들의 시간.
게다가 새벽 네시는 매일 온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온다. 평등하게 온다. 당신에게도 똑같이. 그런 시간에 오는 것들과 함께. 가령 만취한 손님이라든가, 범죄 현장을 답사하러 온 청년이라든가. 

- 나는 패딩점퍼를 매만졌다. 글록 26을 확인했다. 겨울의 권총답지 않게 총신이 뜨거웠다. 심장의 뜨거움 때문인지도 몰랐다. 이 모든 게 꿈은 아닐까 따위의 생각은 하지 않았다. 꿈이라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없을 테니까. 꿈이라면 더욱 단호해질 테니까. 꿈이든 아니든 변하는 것이 없다면, 꿈인지 아닌지를 고민해 봐야 소용없는 것이다. 꿈속의 나와 꿈 밖의 내가 마주 본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다. 냉장고 문을 열고, 코끼리를 넣고, 냉장고 문을 닫으면 되는 것이다.  
 
- 자네는 지금 뭘 하고 있나. 불안한가. 사소한 일에 자꾸 화가 나는가. 게임을 좋아하는가. 라면을 좋아하는가. 게임도 좋아하고 라면도 좋아하는가... 나도 그렇다네. 인간들에게는 아무래도 공통점이 많지. 이 골목과 저 골목이 비슷한 것처럼 말이야. 하지만 잘 살펴야 한다네. 그저 비슷해 보일 뿐, 이 골목과 저 골목은 전혀 다른 골목이니까. 다른 물건들이 놓여 있고, 다른 흔적들이 남아 있고, 다른 인생들이 살아가고 있으니까. 이 골목에서 사는 사람이 저 골목에서 사는 사람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 그게 또 인생 아니겠나. 

- 사실 희수도 자네에게 호의를 보인 적이 있지. 그렇지 않은가. 자네는 키도 크고 꽤 멀끔하게 생겼으니까. 다정하고 상냥한 표정을 하고 있으니까. 하지만 마음이란 게 그런 것만으로 움직이던가. 희수는 자네와 맞지 않는다는 걸 금방 느꼈다네. 함께 길을 걸으면 알게 되는 것들이 있잖은가. 버스나 지하철에 나란히 서 있으면 알게 되는 것들, 대화를 나눠보면 알게 되는 것들 말일세. 뭔가 딱 맞는다는 느낌이 들기도 하고, 이유 없이 불편하고 부자연스럽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 
희수는 후자였어. 이 사람, 어딘지 불편하고 부자연스럽다. 어딘지 맞지 않는다. 그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그저 체형 문제가 아닌 것.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것. 어떤 어긋남. 조금씩, 점점이 스며드는 이물감.

- 희수는 자네에게서 서서히 멀어졌지. 희수의 마음이 자네에게서 멀어질수록 자네는 그 애에게 몰입했어. 희수의 마음이 멀어졌기 때문에 몰입했다고도 할 수 있겠지. 이상한 감정의 역설이었지. 
거리에서, 골목에서, 그녀의 집 근처에서, 자네는 불쑥불쑥 나타났다네. 솔직하고 다정하고 열정적인 어조로 마음을 드러냈어. 우직하게 밀어붙이는 것만이 진심이라는 듯이. 너도 나처럼 사랑을 느껴야 한다는 듯이. 하지만 진심이란 대체 얼마나 폭력적인 것인가. 인간이 무슨 일이든 저지를 수 있는 것도 바로 그것 때문 아닌가. 
희수는 자네를 견딜 수 없었어. 처음에는 달래기도 했다네. 연락하지 말고 찾아오지 말아 달라고 간청했지. 그래도 안 되자 이건 스토킹이며, 명백한 범죄이며, 신고할 수도 있다고 경고했어. 자네는 그때마다 차가운 표정이 되어 희수에게서 물러났다네. 

- 활극이라도 벌이고 싶었던 것일까. 희수는 자네 손에 들린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네. 선물이었어. 곱게 포장한 희수는 그게 뭔지 전혀 궁금하지 않았지. 당연한 얘기야. 선물 같은 것으로 마음이 움직이던가. 
처음에 희수는 자네를 달래려고 했다네. 하지만 자네의 눈을 바라보며 입술을 떼려는 순간, 희수는 벽을 느꼈어. 이 사람, 다른 세계에 살고 있구나. 뭔가 선을 넘어갔구나. 먼 곳에 혼자 있구나. 그녀는 그날따라 불길한 기분을 느꼈다네. 저 선물 상자 안에 있는 것은 매우 해로운 것이다. 그런 직감. 그것이 싸구려 편의점 초콜릿이라고 하더라도. 

- 이 도시의 골목들은 모두 다르면서 왜 또 그토록 비슷한 것일까. 골목을 나가면 보이는 이면도로들까지 말이야. 어지러운 간판들, 아스팔트에 덧댄 흔적들, 지워진 차선들, 차도와 인도의 구분이 없는 길. 차량 두 대가 겨우 빠져나갈 만큼 아슬아슬한 길.  

- <최저임금의 결정> 



- 잠결이라든가 어둠이라든가 무의식이라든가 그런 게 없는 아주 투명한...이라고 말하려는 순간, 나는 무언가 내 머릿속에 떠오르려 하는 것을 깨달았다. 뇌에서 간지러운 무엇인가가 자꾸 올록볼록 튀어나오는 것 같았다. 그게 무언지 잘 알 수 없다고 생각하는데 문득, 나는 무언가에 도착한 것 같았다. 

- 잊고 있던 무엇이 전기자극을 받은 것처럼 떠오를 때가 있잖아. 뇌에 전류를 흘려 넣어서 신경세포들이 갑자기 연결되는 느낌이라고 해도 좋겠지. 세포에서 세포로 전달되는 것들이 있어. 그것들이 어떤 단어나 이미지를 만들고. 

- 나는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구남 씨는 식탁에 앉아 조금씩 표면이 흔들리는 카레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내가 보았으나 보지 못한 것들을 떠올리고 있었다. 밤에 눈을 부릅뜬 채 바라보았으나 낮에 깨어나 기억하지 못한 것들을 떠올리고 있었다. 밤에 나는 눈을 뜬 채 잠이 든 사람이었다. 잠 속에서도 바로 그것을 바라본 사람이었다. 
그 밤에 구남 씨는 단잠에 빠져 있었고 무슨 꿈을 꾸는지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어딘지 차가운 웃음이어서 나는 옆에 누워 ...

 

- < 스텔라를 타는 구남과 여>




- 재발이라고 단정할 수 없어요. 재발인지 아닌지는 조직검사 결과가 나와봐야 아는 거니까 벌써부터 환자라고 생각하실 필요는 없어요. 혈액종양내과 의사 전양일 씨가 그렇게 말했을 때 김은 세상에서 자신을 가장 깊이 이해하는 사람은 바로 이 혈액종양내과 의사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살아오면서 수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수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쓴 책을 읽었고 수많은 사람들과 술자리를 가졌다. 하지만 최근에는 혈액종양내과 의사 전양일 씨와의 대화만이 의미가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고 김은 말한 적이 있다.

- 적어도 깊이라는 면에서는.

- 김이 친구들 앞에서 웃으며 그렇게 덧붙였을 때, 그건 확실히 농담이었다. '깊이'라니. 존재의 깊이인가, 죽음의 깊이인가? 아니면 내장의 깊이? 자못 셰익스피어 극의 대사 같은 말을 중얼거린 뒤 김은 혼자 웃었다. 친구들은 웃지 않았다.

- 자신이 암에 걸렸다는 사실에 김이 큰 의미를 두는 것은 아니었다. 처음 발병한 뒤 시간이 꽤 흘렀기 때문에 그저 익숙한 삶의 조건에 가까웠다. 사람들은 김을 만나면 건강부터 물었는데 김은 오히려 그게 불편했다.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깊고 더 어두운 절망에 빠졌다가,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빨리 더 열심히 그것을 자기 삶의 일부로 받아들인 사람. 그럼으로써 지금은 그것을 공기처럼 수긍한 채 다른 종류의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 '당사자'란 대개 그런 것이라고 김은 생각했다.

- 그는 자신의 삶이 무언가를 정리해야 하는 시점에 도달했음을 알았다. 가족이라든가 재산, 인간관계 등 모든 면에서 그리 복잡하지 않은 삶을 살아왔으므로, 실제로 그에게 특별히 정리해야 할 무엇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지난 삶의 몇몇 장면을 돌이켜보는 정도면 충분하다. 아침 창문으로 조용히 흘러드는 햇살을 바라보며 김은 그렇게 생각했지만 그조차도 부질없게 느껴졌다. 정리라니. 그건 또 무슨 민망한 짓이란 말인가. 

- 변두리에서 솜틀집을 하는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김은 학창 시절부터 자신에게 무언가 특별한 점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특별한 점? 가령 이런 것이었다. 어떤 종류의 감정에 사로잡혔을 때 그 감정을 객관화시켜 바라보는 능력... 가령 자신의 괴로움을 인형에게 투사한 뒤 그 인형을 위로하는 능력... 같은 것이었다. 자신이 느끼는 불안, 고통, 외로움 등의 감정을 김은 어떤 사물, 어떤 대상의 것이라고 생각하곤 했다. 그는 자신에 대해 생각할 때조차 삼인칭으로 그는...이라고 중얼거리기를 좋아했다. 그는 오늘 힘겨운 하루를 보냈다... 그는 오늘 멍청하고 자존심만 남은 교사의 폭력에 노출되었다. 그는 오늘 부자이며 오만한데 염치까지 없는 친구를 미워하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 그 삼인칭의 힘으로 김은 중고등학교라는 정글을 통과할 수 있었다. 대학을 졸업한 후에는 소규모 오퍼상에 취직해 기계처럼 일을 하다가, 잘 알려지지 않은 공모전을 통해 소설가가 되자마자 회사를 그만두었다. 이후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뒤에는 서울역 근방의 좁고 어두침침한 대본소를 인수해 운영하면서 글을 썼는데, 그의 소설 대부분은 그 대본소 구석에 놓인 책상의 거친 질감과 미세하게 기울어진 각도의 산물이라고 해도 좋았다. 

- 김의 작품은 범죄와 살인과 하드고어가 난무하면서도 인간의 감정은 기이하리만치 드러나지 않는 소설이라는 평판을 얻었다. 인물들은 자기 자신에게조차 냉정하고 차가웠기 때문에 독자들은 연민이나 공포를 느끼지 못했다. 게다가 비슷한 경향의 다른 소설들과는 달리 플롯이 약하고 인과관계가 불명확했기 때문에 대개의 독자들은 눈살을 찌푸린 채 김의 소설을 덮곤 했다. 그리고 다시는 그의 소설을 찾지 않았다.

- 해가 진 뒤에는 해변의 펍에서 혼자 맥주를 마시고 호텔의 낡고 좁은 방으로 돌아오는 하루가 반복되었다. 윌리 맥텔에겐 시력이 없었지만 그랬기 때문에 청각과 촉각은 놀라울 만큼 민감했다. 그는 음과 음 사이의 미세한 차이를 지각할 수 있었고 까마득히 먼 곳의 소리를 들을 수 있었으며 피부에 닿는 모든 것의 형태를 본능적으로 구분할 수 있었다. 그의 감각들은 밤에는 밤의 박쥐처럼 예민했으며 낮에도 낮의 박쥐처럼 예민했다. 

- 하지만 삶의 막바지에 블라인드 윌리 맥텔은 그 섬세하고 예민한 청각과 촉각의 세계를 잃어버리게 된다. 먼 곳의 소리들은 점점 희미해져서 창백한 대기와 똑같이 느껴졌다. 음의 높낮이는 차이를 잃고 동일한 음으로 지각되었다. 사물의 형태와 재질과 심지어 보이지 않는 깊은 곳까지 분별하던 촉감 역시 빠른 속도로 무디어졌다. 윌리 맥텔은 손에 닿는 것들을 구분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는데, 그것은 마치 그를 둘러싼 모든 것들이 꿈틀거리는 느낌만을 남긴 채로 멀어져 가는 느낌이었다. 

- 윌리 맥텔은 어느덧 주위의 모든 것들이 동일한 질감으로 멀어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쇠로 된 난간과 자신이 쥐고 있는 지팡이가 구분되지 않았다. 손에 쏠리는 모래와 바닷물이 같은 느낌이었다. 가만가만 만져본 자신의 얼굴과 가만가만 쓸어본 가로수의 질감이 다르지 않았다. 태양을 만져볼 수 있다면 태양조차 먼지의 느낌과 같을지도 몰랐다.

- 윌리 맥텔은 자신의 인생 전부라고도 할 수 있는 십이현 기타를 손에 잡았다. 기타의 현이 손가락과 구분되지 않는다고 그는 생각했다. 하지만 이것은 기타다... 기타를 치던 평생의 감각이 그에게 중얼거렸다. 그는 본능적으로 손가락을 움직여 기타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자신이 불러온 노래들을 하나하나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손가락의 감각과 기타의 감각이, 기타 소리와 자신의 목소리가 뒤섞이는 느낌이었다. 연주하는 것과 노래 부르는 것이 구분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한 번도 해보지 못한 연주를 지금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자신이 한 번도 불러보지 못한 노래를 지금 부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스트 코스트의 인적 없는 해변에 어스름이 깔리고 있었고 그 어스름 사이로 윌리 맥텔의 노래가 가만가만 퍼져나가고 있었다. 그 노래를 듣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뭇가지와 바닷물이 가만가만 반응할 뿐이었다. 

- 그는 이제 해변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가야 할 때가 왔음을 직감했다. 조지아의 먼지 날리는 거리로 돌아가 아직 그곳에 살고 있는 형제들과 친구들을 만나고, 이미 세상을 떠난 형제들과 친구들을 생각하면서, 그들 곁에서 남은 삶을 보낼 때가 되었다고 윌리 맥텔은 생각했다. 이제 아무런 음악도 연주하지 않고 아무런 노래도 부르지 않고 시간을 흘려보낼 것인데, 누군가 그것을 윌리 맥텔의 음악이라 불러도 좋다고 그는 생각했다.

 

- 침대 전체를 바라보면 천천히 위치를 바꾸며 움직이고 있는 게 느껴졌다. 느낌이 묘해 내려다보니 이미 발등에도 몇 마리가 올라와 있었다. 벌레들이 점점 늘어나리라는 것을 그는 알았다. 벌레를 피하려고 했는데... 지난 방이 이래서 새로운 방으로 옮긴 건데... 또 다른 방을 달라고 해야 하나. 김은 의자로 옮겨 앉아 쓴웃음을 지었다.

- 벌레가 나오는 이야기들이 셀 수 없이 많다는 것을 김은 알고 있었다. 카프카의 벌레와 카사레스의 벌레와 레몽 장의 벌레와 우루시바라 유키의 벌레들을 생각했다. 그 벌레들은 그냥 벌레이며, 벌레는 벌레 자체로서 아무런 의미가 없으니까 매력적이라고 김은 또 생각했다. 벌레들을 바라보며 김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또 다른 방으로 옮길 생각은 들지 않았다. 

(리뷰자 주 : 와. <충사>의 우루시바라 유키다.)

- 김은 모텔에서 가까운 횟집에 자리를 잡고 앉아 창밖을 바라보았다. 저녁 시간이라서 안주로는 조개구이밖에 안 된다고 늙수그레한 주인이 말했다. 일 인분에 삼만오천 원이지만 일 인분은 팔지 않는다고도 덧붙였다. 주인은 이곳에서 생활하니까 해변의 저 황혼에 대해서는 아무런 느낌이 없겠지... 아무래도 생활이란 무서운 것이니까. 김은 생각했다. 그럼 어쩔 수 없지요. 김은 이인분을 주문했다.

- 소주를 한 잔 마시고 불판 위에서 쪼그라든 대합 한 점을 집어 입에 넣었다. 술이 달다는 느낌이 들었다. 썰물과 석양이 먼 곳에서 함께 저물어가고 있었다. 다시 소주 한 잔을 마신 뒤 가리비 한 점을 입에 넣고 천천히 씹었다. 해안 쪽에 우두커니 놓인 벤치가 보였다. 스물몇 살쯤 되어 보이는 젊은 남자 하나가 멍하니 앉아 수평선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젊은 남자는 챙이 달린 야구모자를 쓰고 있었다. 김은 소주를 한 잔 마시고 조개 한 점을 천천히 씹었다. 서해안의 작은 해안가 횟집에서 이 풍경은 꽤 오랜 시간 동안 유지되었다. 

-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치자, 개그맨이 고개를 갸우뚱히 기울이더니 작은 미소를 지었다. 관객들은 웃지 않았다. 김은 그 개그 프로그램을 끝까지 유심히 시청했다.

- 김은 새벽에 눈을 떴다. 방안을 떠도는 흐릿한 빛으로 시간을 어림할 뿐이지 사실 새벽인지 아침인지 단정할 수 없었다. 빛은 불규칙한 문양을 만들며 방안을 떠돌고 있었다. 김의 소설 속에서는 언제나 밤과 새벽에 사건이 일어났다. 초등학생이 초등학생을 살해한 것도 자정 무렵이었고, 야구모자를 쓴 젊은 남자가 아버지의 시신을 냉장고에 유기한 것도 새벽이었으며, 민머리에 턱수염을 기른 연쇄 살인마가 결국 자기 자신을 살해한 것도 이렇게 흐릿한 시간이었다. 

- 김은 심장이 불안정하게 뛴다는 것을 깨달았다. 머릿속에 벌레가 기어 다니는 느낌이 들었다. 수많은 단어들과 수많은 문장들이 자글자글 끓는 듯했다. 사람들이 한 말과 자신이 한 말들이 뒤섞여 거대하고 검은 구멍 속으로 빠져들어가는 기분이었다. 김은 꼼짝 않고 어둠 속에 누워 있었다. 머릿속의 문장들이 점점 흐릿해지면서 한편으로는 불규칙하게 흩어졌다. 죽어가는 승현 씨 곁에 누워 있던 밤이 떠올랐다. 호스피스 병동의 임종실로 옮긴 뒤였다. 새까만 어둠이 임종실을 메우고 있었지만, 김은 몸을 움직이지 않았고 승현 씨도 움직이지 않았다. 

- 몇 시나 됐을까. 김은 휴대전화를 집으려고 손을 뻗었다. 손끝에 차가운 것이 닿는다는 것을 김은 불현듯 깨달았다. 무언가가 거기 있었다. 가위에 눌린 것인가. 가위에 눌리면 뱀도 나타나고 쥐도 나타나고 살인마도 나타나지. 그것들은 언제나 놀랍도록 생생하고 놀랍도록 예민하지. 김은 가위에 눌릴 때마다 현실보다 더 현실적인 세계가 있다는 것을 깨닫곤 했다.  
 
- 지금 손끝에 닿은 것이 어떤 종류의 생물이라는 것을 김은 천천히 깨달았다. 무언가 다른 존재가 꿈틀거리며 김과 함께 침대에 누워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차갑고 부드럽고 끈적거리는 피부를 가진 존재인 듯했다. 김은 비명을 지르지는 않았다. 대신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곁에 누운 그것 역시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까맣고 캄캄해서 모양을 구분할 수 없었기 때문에 김은 그것이 자신의 그림자가 아닐까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그림자 같은 헛것이 아니었다. 

- 그것은 벌레들이었다. 벌레들의 덩어리였다. 김은 자신이 아직 꿈에서 깨지 않았으며, 어젯밤에 술을 너무 많이 마셨다는 것을 상기해냈다. 술을 마신 다음날 심장이 불안정하게 흔들리고 머릿속에서 벌레가 기어 다니는 느낌이 어떤 것인지는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지금 이것은 머릿속이 아니라 나와 함께 침대에 앉아 있지 않는가. 그는 고개를 흔들었다. 눈을 감았다가 천천히 떴다. 확실히 사람의 모습을 한 검은 덩어리가 김의 옆자리에 앉아 김을 바라보고 있었다. 검고 까맣고 캄캄한 눈동자로 김을 바라보고 있었다.

- 김은 오른손을 들어 그것을 만져보았다. 손끝에 닿는 그것은 차갑고 부드럽고 스르르 움직이는 피부를 갖고 있었다. 벌레들이 벌레들 위에서 꼬물꼬물 움직이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김은 얼굴에 해당하는 부분을 만져보았다. 그것은 웃음이랄까 미소랄까 그런 표정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친근하고 그리운 느낌이 김을 휘감았다. 

- 아침에 깨어났을 때 김은 아침마다 몸 깊은 곳에서 올라오던 통증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낮고 묵직한 아픔이 사라져 있었다. 무언가 신선한 기분이 들었다. 그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모든 게 그대로였다. 낡고 비좁은 모텔방도 그대로였고, 창밖의 먼 곳에서 천천히 움직이는 바다도 그대로였고, 밀려갔다가 밀려오는 일을 반복하는 바다도 거기 그대로 있었다. 그리고 김과 똑같은 자세로 곁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 벌레 인간 역시 그대로였다.

- 그는 벌레 인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벌레의 모습을 한 그것도 김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김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것과 함께 산책을 나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눈먼 윌리 맥텔>




 

작가의 말



소설들 한 편 한 편을 가만히 떠올린다. 내가 이 소설들을 쓴 것이 아니라 이 소설들이 나를 쓴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 편 한 편이 나를 다른 펜으로, 다른 스타일로, 다른 인물로, 마침내 다른 세계로 쓴 것이라고 생각한다. 앞으로도 나는 쓰이기를 멈추지 않겠지. 그렇게 다시 쓰이는 것이, 또한 이 세계이기를. 

<행자가 사라졌다!>에 나오는 애완 뱀 볼파이톤은 성체가 되기까지 일 년 반에서 삼 년 정도 걸린다. 달포에 한 번씩 탈피를 하는데, 껍질을 벗고 새로운 피부를 갖게 되는 것이다. 사람도 탈피를 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세상에는 볼파이톤을 무서워하는 사람, 귀여워하는 사람, 징그러워하는 사람, 아름답다고 느끼는 사람... 들이 있을 것이다. 깊은 밤 외로운 잠에서 깨어 눈을 떴을 때, 우리 눈앞에서 뾰족한 혀를 내밀고 있을 그것을 생각한다. 

<에이프릴 마치의 사랑>에서 에이프릴 마치 April March는 보르헤스의 소설 한 대목에 나오는 이름이다. 나중에 알았지만 뮤지션 중에도 에이프릴 마치가 있고, 최근에는 비슷한 제목의 영화도 개봉되었다. 에이프릴 마치의 노래는 경쾌하고 즐거웠지만 영화는 아직 보지 못했다. 언제나 4월이 가고 3월이 오는 마음으로 살아가면 모든 게 좋을 거라고 생각한다. 

<복화술사>에 언급된 인명 중 전방일님, 곽규석 님, 윤부길 님, 윤항기 님, 윤복희 님 등 다섯 분은 실존 인물이고, 다른 이름들은 모두 허구이다. 복화술과 관련된 정보는 여러 책과 웹 페이지의 도움을 받았는데, 그 가운데 복화술사 이영재 님의 웹 페이지와 미국 및 러시아의 복화술 관련 문서들을 주로 참조했다. 감사드린다. 분화술 등 일부 설정은 허구이며 실제의 복화술과 무관함을 밝혀둔다. 끝으로 나의 복화술 인형 '몽키맨'에게도 감사를.

<크리스마스 캐럴>은 2014년 여름호 문예지의 단편소설란에 게재한 것이다. 그런데 이 단편을 끝내자마자 이야기가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 후 나는 실제로 이 단편을 확장해서 장편을 썼다. 장편은 조만간 나올 예정이지만, (나올까?) 이 단편은 단편으로서 독립된 것으로 여겨져 이 책에 싣기로 했다. 

 

<낙천성 연습>의 제목은 원래 '낙천성 훈련'이었다. 하지만 '훈련까지 하는 건 좀 심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표현을 순화해 '낙천성 연습'이 되었다. 나는 생래적으로 낙천적인 사람이 못 되지만, 낙천적인 사람들을 좋아하고 존경하는 마음은 오래전부터 가지고 있었다. 나 역시도 언젠가는 깊은 의미에서 낙천적인 사람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연습과 훈련이 필요한 일인지, 연습과 훈련을 하면 가능한 일인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최저임금의 결정>을 쓰던 2015년은 보수 정권 시절이었다. 나는 실제로 글록 26을 손에 쥐고 이 소설을 썼다. 모조품이고 플라스틱 비비탄을 쏘게 되어 있는 장난감 총이지만, 총을 손에 쥐는 순간 적의가 솟아올랐다는 것은 적어두어야겠다. 하지만 대체 어떤 적의? 무엇을 향한 적의? 이 소설의 인물들이 사는 골목을 지나다닐 때마다, 나는 여전히 질문할 것이 남았다고 느낀다.

<양구에는 돼지코>는 유독 아픈 마음으로 썼다. 원고를 보낸 뒤에, 앞으로 이런 이야기를 이런 방식으로 쓰지는 않으리라고 생각했다. 문장이나 인물이 아무리 담담해도, 쓰는 사람은 그럴 수 없는 소설이 있다. 문장이나 인물이 아무리 희망적이어도, 쓰는 사람은 그럴 수 없는 소설이 있다. 이것을 모순이나 괴리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그냥 그렇겠거니 하고 받아들일 수는 또 없는 것이다. 

<스텔라를 타는 구남과 여>는 인디 밴드 구남과여라이딩스텔라의 라이브를 직관하면서 시작되었다. 앨범 '우정모텔'의 첫 곡 <건강하고 긴 삶>은 가사의 일부를 이 단편에 인용하기도 했다. 감사드린다. 그 외에 이 소설 속의 인물 사건 내용 등은 실제 구남과여라이딩스텔라나 팬분들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언젠가 기회가 되면 다시 구남과여라이딩스텔라의 뜨거운 라이브에 가보고 싶다. 

<눈먼 윌리 맥텔>은 실존했던 블루스 가수 블라인드 윌리 맥텔(1898~1959)의 노래를 들으면서 썼다. 그는 시골 레스토랑의 주차장에서 노래를 부르며 블루스의 전설이 되었다고 한다. 구슬픈 인생을 살았던 수많은 사람들의 흔적이 그의 노래에 스며들었을 것이다.

"개 한 마리씩을 관찰하면 차이가 크지만, 종족 전체에서 보면 별 차이가 없다."

카프카의 소설에 나오는 구절인데, 개만 그럴까. 인간도 그렇고 소설도 그럴 것이다. 인간을 한 명씩 관찰하면 차이가 크겠지만, 인류 전체로 보면 그 차이는 사소하고 미미할 것이다. 소설들을 한 편 한 편 관찰하면 차이가 크겠지만, 소설의 세계 전체를 염두에 두고 보면 사소하고 미미한 차이만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반대의 방향도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종족 전체로 보면 별 차이가 없겠지만, 개 한 마리씩을 관찰하면 차이가 크다고 말이다. 개만 그럴까. 인간도 그렇고 소설도 그렇겠지. 인류 전체로 보면 별 차이가 없겠지만, 인간을 한 명 한 명 관찰하면 큰 차이가 있을 것이다. 소설의 세계 전체로 보면 별 차이가 없겠지만, 소설을 한 편 한 편 관찰하면 깊고 넓은 차이가 있을 것이다. 

나는 이런 마음이 소중하다고 생각한다. 전체적인 것으로 고유한 차이를 지우는 마음보다, 전체적인 것의 압력을 고유한 차이들이 견뎌내고 이겨내고 급기야 변경시키는 마음이 더 소중하다고. 사회도 그렇고 인간도 그렇고 소설도 그럴 것이다. 일생을 고독 속에 살았던 카프카도 비슷한 견해였으리라고 믿는다. 

책이 나오도록 애써주신 문학동네에 깊은 감사를 드린다.

2019년 가을

이장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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