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 윌 듀런트 / 신소희
출판 : 유유
출간 : 2020.01.14
몽테뉴의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 이전에, 윌 듀런트의 '왜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두어야 할 것 같다.
저자는 우연히 만난 한 젊은이와의 대화에서 이 화두를 떠올렸다고 한다. 자살을 생각한다는 그는 '당신이라면 왜 살아야 하는지 답을 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며, '이유를 찾을 수 없다면 이대로 죽겠다'고 했다고 한다. 저자는 최선을 다해 답변했지만 그가 결과적으로 설득되었는지 알 수 없다며 당시를 회고했다. 이후 자신의 생각에 더해 수많은 유명인사들과 석학들의 서편 답변을 수록해 이 책을 펴낸다.
'왜 삶을 유지하는가?'
책임져야 할 것들이 있어서, 태어났으니까, 누군가가 슬퍼할 테니까, 죽음의 순간/고통이 두려워서...
대다수는 이런 범주의 답변들을 떠올리지 않을까 싶다.
그렇다. '어떻게' 살 것인가는 '산다'가 전제되어야 의미가 생기는 질문이다.
보다 근원적인 동기, 생의 이유를 고찰하는 일은 느슨하고 반복적인 일상에 새로운 목적과 방향성을 선사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쉽지 않다면.
햇살을 받으며 산책을 하자.
불어오는 바람과 쏟아지는 빛은 수많은 것들을 속삭여 준다.
여유가 생기면 <혼자의 가정식>을 쓴 신미경 저자처럼 1년에 한 번 정도 유언장을 작성해 보자.
지금의 삶에 감사하며 충분함을 느끼고, 떠난 후를 준비하는 자세는 어느 하루도 똑같지 않게 만들어줄 것이다.
죽음을 외면한 채로 삶만을 바라볼 수는 없다.
경계로 나뉘어지는 것들은 언제나 양쪽 모두를 바라보아야 한다.
고요한 시간, 가만히 생각해 보자.
<내가 왜 계속 살아야 합니까?>
편집자 서문
1930년 가을 윌 듀런트는 뉴욕주 레이크힐의 자택에서 갈퀴로 낙엽을 긁어모으고 있었다. 전형적인 가을 날씨였고, 교외에서 불어온 차갑고 상쾌한 바람이 그가 갈퀴질을 계속하도록 활력을 불어넣었다. 갈퀴질을 하는 듀런트에게 잘 차려입은 남자 한 명이 다가와 조용히 말을 걸었다. 그는 자살할 생각이라고 했다. 철학자인 듀런트가 자신에게 살아야 할 이유를 말해 줄 수 없다면 말이다. 논제를 철학적으로 다듬을 시간 여유가 없는 상황이었지만, 듀런트는 남자가 계속 존재해야 할 근거를 제시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이후에 듀런트는 이렇게 회고했다.
'그에게 직장을 구해 보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이미 직장이 있다고 하더군요. 맛있는 식사를 해 보라고 했죠. 하지만 배가 고프지 않다는 겁니다. 결국 그는 내 논지에 설득되지 않은 기색이 뚜렷한 채로 자리를 떠났습니다. 그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해에 나는 자살하겠다는 사람들의 편지를 여러 통 받았어요. (...) 이후에 알게 된 바로는 1905년에서 1930년 사이 미국에서는 284,142명이 자살했다고 합니다.'
이 얼마나 끔찍한 딜레마인가, 얼마나 끔찍한 통계 수치인가! 좀 더 최근의 통계 수치는 더더욱 경악스럽다. 세계보건기구에 따르면 2000년 한 해에만 100만 명의 사람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미국에서는 하루 평균 84.4명, 한 해에 30,903명이 자살하고 있다. 17.1분마다 한 생명이 희망을 버리고 스스로 삶을 끝맺는다는 이야기다.
이런 상황에서 '삶의 의미란 무엇인가?'라는 의문이야말로 철학의 영속적인 화두라는 것에 이의를 품을 수 있을까? 더 중요한 질문이 존재할 수 있을까? 학자와 현자 들은 수백 년 동안 수십억 개의 뇌세포를 모아 이 끝없는 물음의 대답을 궁리해 왔다. 이는 어떤 이들에게는 지적인 두더지 잡기 게임일 뿐이었지만 어떤 이들에게는 매우 심오한 의미와 어쩌면 치명적인 결과를 함축하고 있는 해답이었다. 물음 자체가 여러 다른 질문을 내포하고 있기도 하다. 우리는 왜 여기에 있는가? 신은 존재하는가?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어째서 이토록 고통받는가? 만약 그렇지 않다면 우리가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 행성에 우리가 존재하는 것은 단지 이후의 보다 개선된 연극을 위한 리허설에 불과한가? 그도 아니면 그냥 이게 전부인가? 애초에 존재란 무엇인가? 그저 천문학적인 미치광이 소극, 원자들의 우연한 결합일 뿐이다. 그 결합으로부터 수백만 년에 걸쳐 지각력 있는 존재가 탄생하기에 이르렀다. "소음과 분노로 가득할 뿐 아무런 의미도 없단 말인가?" 아니면 헤아릴 수 있는 어떤 심오한 의미가 존재하는 것일까? 듀런트에 따르면 이 삶의 의미라는 화두는 오래전부터 그에게 각별히 중요한 것이었다.
'신앙을 잃어버린 뒤로 나는 줄곧 이 화두를 숙고해 왔습니다. 그러다 보면 종종 절망감에 빠져들 때도 있었지요. 현대의 프랑스나 독일 실존주의자들이 말하는 불안 angoisse과도 비슷한 감정 말입니다. (...) 나는 다양한 유명 인사들에게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 질문하고 그들의 대답을 책으로 내면서 내 나름의 대답도 추가해 보자고 기획했습니다.'
듀런트는 책상 앞에 앉아 편지를 썼다. 화두는 철학적이고 감성은 시적인 편지였다. 그 편지를 100명의 인물에게 보내며 삶의 의미에 관한 기본적인 답변(일반적으로)뿐만 아니라 그들 각자가 삶에서 어떻게 의미와 목적과 만족을 찾았는지(개별적으로)도 이야기해 달라고 제안했다. 듀런트의 편지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당신의 영감과 활력은 어디에서 비롯되며 당신을 노력하게 만드는 목적 혹은 원동력은 무엇인지. 당신은 어디에서 위안과 행복을 구하는지. 당신에게 가장 소중한 궁극적 가치는 무엇인지."
듀런트는 유명 인사들의 답변에서 어느 가을날 자기 집 정원에 등장한 잘 차려입은 이방인의 질문에 충분한 해답이 될 만한 내용을 찾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이상이었다. 그가 받은 답변들은 어둡고 암울하기보다 오히려 유쾌하고 긍정적이었으며, 존재 자체에 대한 기쁨과 삶을 더욱 의미 있도록 만들 방법에 관한 각자의 통찰력을 담고 있었다. 각계의 여러 유명 인사로부터 응답이 답지했다. 위대한 영적 지도자 모한다스 카람찬드 간디와 당시의 인도 수상 자와할랄 네루, 미국의 괴짜 문필가 헨리 루이 멩켄, 자연주의 소설가 시어도어 허먼 앨버트 드라이저, 미국 최초의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 해리 싱클레어 루이스, 컬럼비아대학교 교수이자 소설가인 존 어스킨, 아마도 가장 영향력 있는 미국의 역사가 찰스 오스틴 비어드, 시인 존 카우퍼 포위스, 당대에 미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시인으로 손꼽혔던 에드윈 알링턴 로빈슨, 메이요클리닉 설립자 찰스 호러스 메이요 박사, 러시아에서 미국으로 귀화한 유명 피아니스트 겸 지휘자 오시프 살로모노비치 가브릴로비치, 캐나다의 북극 탐험가이자 저술가인 빌햘무르 스테판손, 도발적인 ...
- 모든 답변이 도착했고, 다음은 듀런트의 차례였다. 그는 자신이 제시한 화두에 대해 그 자체로 고도의 철학과 강력한 낙관주의가 담긴 걸작이라 할 답변을 작성했다. 그리고 <내가 왜 계속 살아야 합니까 On The Meaing of Life>라는 제목을 붙인 이 책을 1932년에 한 작은 출판사를 통해 세상에 내놓았다. 책은 홍보도 되지 않았고 소수의 독자에게만 읽혔다. 현재까지 남아있는 초판본도 몇 권 되지 않는다. 애석한 일인데, 이 책이야말로 듀런트의 저작 중에서 여러모로 가장 중요한 작품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런 상황을 만회하기 위해 초판본 원고를 재편집하여 다시 한번 독자의 처분에 맡기기로 했다. 지극히 강렬한 주제를 치열하게 풀어낸 책이며, 앞서 인용한 자살률 통계 수치를 고려해 보면 더더욱 절판되어서는 안 되고 여러 비관적인 사상의 대안으로 대중에게 제공되어야 할 책이기 때문이다.
- <내가 왜 계속 살아야 합니까>는 이제 막 돛을 올려 때로 폭풍이 몰아칠 인생의 바다로 나가려는 모든 대학 졸업생의 손에 쥐어져야 할 책이자 가족과 친구들의 서재에 항상 자리하고 있어야 할 책이다. '삶의 의미란 무엇인가?'라는 거대한 철학적 화두를 조명하고 새로운 희망을 제공하며 낙관적이고도 전향적인 결론으로 매듭을 짓기 때문이다.
- 듀런트가 우려했던 것처럼, 이 한 권의 책이 설사 억압받고 짓눌린 이들의 손에 쥐어진다 해도- 자살률을 줄이고 사람들의 삶을 밝히는 데 크게 공헌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시도해 볼 값어치는 있으리라.
존 리틀
인생의 의미 혹은 가치는 무엇일까요?
- 지금까지 이 질문을 다루어 온 사람들은 주로 이집트의 이크나톤에서 노자, 베르그송, 슈펭글러에 이르는 이론가들이었습니다. 그 결과는 일종의 지적 자살이었지요. 사상은 그 발전의 과정에서 오히려 삶의 가치와 의의를 파괴해 온 것처럼 보입니다. 그리도 많은 이상주의자와 개혁가가 기원했던 지식의 성장과 전파가 인류의 영혼을 거의 파탄시킨 환멸만을 초래한 것입니다.
- 천문학자들은 인간의 역사가 항성의 궤적에서 보면 일순간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지질학자들에 따르면 문명은 빙하기 사이의 위태로운 간주곡일 뿐입니다. 생물학자들에 따르면 모든 생명은 전쟁이며 실존을 위한 개체, 집단, 국가, 동맹, 종種 사이의 분투입니다. 역사학자들은 '진보'란 환상이며 모든 영광은 필연적으로 쇠하게 되어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심리학자들은 의지와 자아란 유전과 환경의 무력한 도구라고 주장하며, 과거엔 불후의 존재로 여겨졌던 영혼 또한 두뇌를 스쳐 가는 백열광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 산업혁명은 가정을 파괴했고 산아제한의 발견은 가족 제도, 구체제, 도덕률 그리고 아마도(지성인들의 피임을 통해) 인종을 파괴했습니다. 사랑은 물리적인 폭주 상태로 분석되었고 결혼은 방탕함보다는 살짝 나은 일시적·심리학적 편의가 되었습니다. 민주주의는 밀로 시대의 로마에서만 알려졌던 심각한 부패 상태로 빠져들었습니다. 우리가 젊은 시절 품었던 사회주의 유토피아의 꿈은 누구나 알듯 인간의 무한한 물욕 앞에서 하루하루 스러져 가고 있습니다. 모든 발명품이 강자를 더욱 강하게 하고 약자를 더욱 약하게 합니다. 모든 새로운 기계가 인간의 자리를 빼앗고 전쟁의 공포를 증식시킵니다.
- 한때는 짧은 인생에 위안을 주고 사별이나 곤경을 겪을 때 피난처가 되었던 신神도 이제 그 자리를 떠난 것처럼 보입니다. 그 어떤 망원경이나 현미경으로도 신을 볼 수는 없었습니다. 철학이라는 전지적 관점 하에서, 삶은 지상의 벌레일 뿐인 인류의 발작적 번식이요 머지않아 제거될 행성의 피부병이 되었습니다. 삶에서 확실한 것은 오로지 패배와 죽음 깨어남이라고는 없을 것처럼 보이는 깊은 잠-뿐입니다.
- 우리는 '진리'의 발견이야말로 인간이 저지른 역사상 최대의 실수였다는 결론을 내리기 직전에 와 있습니다. '진리'는 우리를 자유롭게 하지 못했습니다. 우리를 위로하고 보호하던 환상과 절제를 앗아갔을 뿐입니다. '진리'는 우리를 행복하게 하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아름답지도 않으며 그토록 열렬히 갈구할 가치가 없는 것으로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이제 와 그것을 바라보면 우리가 왜 그토록 성급하게 '진리'를 찾으려 했는지 의아할 뿐입니다. '진리'는 순간적인 쾌락과 내일의 사소한 희망 외에는 존재의 이유를 앗아갔으니까요.
- 우리를 지금의 이 길로 데려온 것은 과학과 철학입니다. 오랫동안 철학을 사랑해 온 나는 이제 삶 그 자체로 눈을 돌리려 합니다. '생각하는 만큼 실제로 잘 '살아온' 당신에게, 내가 이해할 수 있게 도와 달라고 청하려 합니다. 아마도 실제 삶을 살아온 이들의 의견은 그저 생각만 해 온 이들의 의견과는 다르겠지요.
- 저를 위해 잠시만 시간을 내어 말씀해 주십시오. 당신에게 삶은 어떤 의미인지, 무엇이 당신을 계속 살아가게 하는지, 종교가 당신에게 어떤 도움을 주는지(만약에 준다면), 당신의 영감과 활력은 어디에서 비롯되며 당신을 노력하게 만드는 목적 혹은 원동력은 무엇인지. 당신은 어디에서 위안과 행복을 구하는지, 당신에게 가장 소중한 궁극적 가치는 무엇인지.
- 여유가 없다면 짧게라도 답해 주시고, 가능하면 시간을 들여 긴 편지를 써 주십시오. 당신의 한마디 한마디가 제게 무척 소중합니다.
존경을 표하며
윌 듀런트 드림
- 이 편지가 '존재의 의미에 관해 내가 내린 '결론'을 담고 있는 것은 아니다. 내 성미는 이만큼 비관적이지 않다. 하지만 나는 애초부터 최악의 가능성을, 나 자신의 바람과는 반대되는 상황을 상정하려고 했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삶에서 한결 진지한 주제를 회피하려고 기대곤 하는 피상적 낙관주의를 차단한 상태에서 이 문제를 논하고 싶었다. 회의와 의심의 시기를 거친 인간만이 믿음을 가질 수 있기에, 나는 먼저 인류 역사의 가치와 중요성을 반박하는 근거를 충분히 이야기할 것이다. 그런 다음 여러 대륙, 여러 국가로부터 날아온 답장들을 살펴볼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세상에서 가장 거짓에 기대고 싶게 만드는 이 문제에 대해 지난 50여 년의 삶이 내게 남긴 진정성으로 직접 대답해 보려고 한다.
- 인류는 심지어 철학자들조차도 선천적으로 희망을 품게 마련이다. 인간의 가치와 운명을 믿고 싶어 하는 인류의 욕구 때문에 위대한 종교들이 생겨나고 번성했으며, 위대한 문명 또한 대체로 이처럼 위안을 주는 종교에 의존하곤 했다.
- 이와 같이 수 세기 동안 인류를 떠받쳐 온 믿음이 약화되면서 삶은 영적 드라마가 아닌 생물학적 삽화로 축소되었다. 운명의 영원함과 무한함이 부여한 존엄성을 상실하고 우스꽝스러운 출생과 무의미한 죽음 사이의 기괴한 간주곡으로 쪼그라든 것이다. 지식을 얻은 개인은 과학의 관점에 따라 미시적이고 사소한 존재가 되었으며 자신과 인류 전체에 대한 믿음을 잃었다. 과거에 인간이 노고와 존경을 쏟았던 위대하고 중요한 사업들은 이제 비판과 냉소만을 자아내게 되었다. 믿음과 희망은 사라지고 회의와 절망이 시대의 풍조가 되었다.
- 이것이 현대의 본질적 상황이다. 우리를 비관주의에 빠뜨린 것은 단지 세계대전만이 아니며 최근의 경제 침체는 더더욱 아니다. 지금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일시적인 부의 감소나 심지어 수백만 명의 죽음보다도 더욱 근본적인 문제다. 비어 있는 것은 우리의 집이나 금고가 아니라 우리의 '마음'이다. 이제는 인간의 변치 않는 위대함을 믿거나 삶에 죽음으로 지울 수 없는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 불가능해졌다. 우리는 영적 고갈과 의존의 시대로 들어서고 있다. 마치 예수의 탄생을 갈망했던 그 시대처럼.
- 18세기가 19세기의 기반을 닦을 때 하나의 관념을 위해 모든 것이 희생되었으니, 바로 '신학 대신 과학'이었다. 과학만 있으면 금세 부가 생겨날 것이며 그러면 인류는 행복해질 것이었다. 과학만 있으면 금세 진리가 밝혀질 것이고 그러면 인류는 자유로워질 것이었다. 공교육은 과학적 발견을 널리 전파시켰고 미신으로부터 인간을 해방시켰으며 민주주의에 적합한 인간상을 만들어 냈다. 영국의 철학자 제러미 벤담은 한 세기만 공교육을 실시하면 인류의 모든 주요 문제가 해결되고 유토피아가 탄생할 것이라고 예언했다. 프랑스의 철학자 콩도르세는 "인류의 진보에 한계란 없다. 인류가 위치한 이 지구라는 공간이 존속하는 한 말이다"라고 선언했으며 볼테르는 "젊은이들은 운이 좋다. 위대한 사건들을 보게 될 테니까"라고 말했다. 정말로 그랬다. 그들은 프랑스혁명과 공포정치, 워털루 전쟁과 1848년 혁명, 발라클라바 전투와 게티즈버그 전투, 스당 전투와 봉천전투, 아마겟돈과 레닌을 보았다. 그들은 과학의 발전과 승리를 보았다. 다윈의 생물학, 패러데이의 물리학, 돌턴의 화학, 라플라스의 천문학, 파스퇴르의 약학, 아인슈타인의 수학이 등장했다. 계몽에 대한 모든 희망이 실현되었다. 과학은 자유로워졌고 세계를 개조했다. 하지만 기술자들이 과학으로 지구를 변형시키는 동안 철학자들은 과학으로 우주를 변형시켰다. 다양한 과학 분야가 차례차례 각자의 발견을 보고하면서 전 세계적인 투쟁과 죽음의 큰 그림이 펼쳐졌다. 그렇게 수십 년이 지나면서 19세기의 낙관주의는 오늘날의 비관주의에 밀려났다.
- 천문학자들은 신의 발판이자 속죄자 그리스도의 고향이었던 지구가 사실 우주의 사소한 항성 중 하나를 공전하는 사소한 행성에 불과하다고 보고했다. 지구는 격렬한 폭발 속에 탄생하였고 충돌과 대화재 속에 종말을 맞을 것이며, 인류의 이야기를 전해 줄 인간의 작품들은 흔적조차 남기지 못하고 사라질 것이다. 지질학자들은 지구상의 생명이란 얼음과 불의 변덕, 용암과 비의 자비 아래 일시적으로 허용된 것에 불과하다고 보고했다. 대양과 산맥은 서로 잠식하고 침식하는 영원한 전투 속에 번갈아 가며 승리를 거두고, 대륙은 지진으로 파괴되어 왔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고생물학자들은 영겁이 한두 차례 지나는 동안 백만여 종의 동물이 지구에서 살았으나 이제는 모두 뼈 몇 조각과 바위에 찍힌 발자국만 남긴 채 사라져 버렸다고 보고했다. 생물학자들은 모든 생명이 다른 생명을 희생시키며 살아간다고, 큰놈이 작은놈을 잡아먹은 다음 더 큰놈에게 먹힌다고 보고했다. 강한 유기체는 약한 유기체를 수십만 가지 방식으로 영원히 이용하고 학대하며, 살상 능력이야말로 궁극적인 생존의 조건이고, 번식이 곧 자살이며 사랑은 교체와 죽음의 전주곡이라고.
- 울프는 짝을 짓고 새끼를 낳고, 그렇게 생명의 바퀴가 또 한 차례 돌아 제자리로 온다.
인간의 삶도 본질적으로는 이런 식이 아닌가? 쓸데없는 장식을 걷어 내면 우리의 탄생과 죽음이라는 회전목마가 울프의 그것보다 뭐 그리 더 의미 있단 말인가? 일간지의 '탄생', '결혼', '사망'이라는 표제 아래 인쇄된 눈에 띄지도 않는 작은 글자들이야말로 인류의 본질적 역사요, 그 외에 다른 것은 허식일 뿐이다. 엘로이즈와 아벨라르의 비장한 연애담이나 웜폴거리의 서정시도 개들의 관점에서 보면 존속을 향한 자연의 광기에 따른 결과일 뿐이다. 젊은 여자를 쫓아다니는 그 모든 남자, 그 모든 해부학적 적나라함, 뻔한 숨김, 유혹적인 향수, 우아한 움직임, 은밀한 관찰. 성적인 농담, 소설과 연극과 영화, 그 모든 돈벌이, 옷재단과 솔질, 몸치장, 댄스, 노래, 꼬리 치기, 끊임없는 재잘거림, 갈망-모두가 번식이라는 의식의 일부분이다. 절차는 점점 더 복잡해졌지만 결말은 예전 그대로이며, 그리하여 아이가 태어난다.
- 한때 아이는 불멸의 영혼을 지녔지만 이제는 분비샘을 가지고 있다. 물리학자에게 아이는 분자, 원자, 전자, 양자의 집합일 뿐이다. 생리학자에게 아이는 근육, 뼈, 신경의 불안정한 결합체다. 의사에게 아이는 붉게 달아오른 질병과 통증 덩어리다. 심리학자에게는 유전과 환경의 무력한 수신자이며 허기와 사랑으로 통제 가능한 조건반응의 집합체다. 이 희한한 유기체가 갖게 될 거의 모든 생각은 망상일 것이며 거의 모든 인식은 편견일 것이다. 그는 자유의지와 불멸의 삶에 관해 세련된 이론을 만들어 내면서 시시각각 서서히 부패할 것이다. 근사한 철학 체계도 수립하겠지만 그래봤자 바다를 설명하려 드는 물 한 방울에 불과할 것이다. 인간이라는 이름의 이 '가랑무'는 자기네가 자연을 스쳐 간 수십억 종의 실험체 중 하나일 뿐이라는 생각은 좀처럼 하지 못한다. 러시아 소설가 투르게네프가 말했듯 자연은 인간과 벼룩 중에 어느 한쪽을 편애하지 않는데 말이다.
- 어쨌든 로버트 번스가 어리석게도 신들에게 요청했던 선물(다른 인간이, 심지어 다른 생물 종이 보는 우리의 모습 그대로를 볼 수 있게 하는 것)을 우리에게 선사한 것은 오직 과학뿐이다. 우리 인간은 개에게는 혀로 쓸데없는 소음을 내는 어리석은 수다쟁이일 뿐이고 모기에게는 먹거리일 뿐임을 알게 된 것이다. 우리 중 일부는 객관성의 최종 단계에 도달하여 최후의 편견인 미적 잣대도 버리기에 이르렀다. 줄루족이 비만한 여성을 숭배하는 것에도 나름의 근거가 있으며, 화성인들은 인간 여성의 매력을 암컷 콜리나 암말의 아름다움과 비슷한 것으로 여길지도 모른다는 것을 우리는 받아들인다. 우리는 서서히 우주의 중심이자 정상에서 물러서고 있다. 과학적인 시각으로 보기에 우리 좋은 파멸을 향하여 탈선 중인 작은 파편에 불과하므로.
- 19세기는 과학의 시대인 만큼 역사의 시대이기도 했다. 사실에 대한 갈구는 과거에 대한 집단적 열광과 맞물렸다. 사실은 과거를 분석하고 해부하고 국가들의 흥망성쇠를 발견했으며, 그에 따라 발전과 쇠퇴의 파노라마가 그려졌다. 역사란 베이컨의 말처럼 난파선의 널빤지들이었고, 퇴폐와 몰락과 죽음 외에 확실한 것이란 하나도 없는 듯이 보였다.
- 필트다운인, 네안데르탈인, 아브빌인, 아슐리안인, 무스티에인, 오리냐크인, 크로마뇽인, 로디지아인, 북경인 등 다양한 인류가 수천 년에 걸쳐 살아갔다. 그들은 싸우고 생각하고 발명하고 그림을 그리고 조각하고 아이를 낳았다. 그리고 부싯돌과 끄적거린 흔적 몇 개 외에는 후세에 아무것도 남기지 못한 채 수천 년 동안 잊혀 있다가 호기심 많은 현대인의 곡괭이와 삽에 간신히 발견되었다.
- 수천 개의 문명이 아틀란티스 대륙과 같은 전설만을 후세에 남기고 대양 속이나 지면 아래로 사라졌다. 투르크스탄, 모헨조다로, 우르, 칼데아 제국, 사마르칸트, 티무르 제국, 크메르 제국과 앙코르 왕조, 유카탄반도의 마야 문명, 페루의 잉카 문명. 이들은 거의 완벽하게 사라진 문명들의 무덤에서 우리가 발굴한 극소수의 사례에 속한다. 그렇다면 역사에 어떤 흔적도 남기지 못하고 소멸된 문명은 얼마나 될까? 인간의 기억 한구석에 간신히 자리를 차지한 애처로운 소수의 문명들은? 바빌론, 이집트, 페르시아, 크레타, 그리스와 로마. 이들의 장엄함과 퇴폐를 떠올려 보라. 역사란 얼마나 불확실한 것인지, 이 위대한 이름들이 어떻게 물 위에 쓴 듯 사라져 갔는지 생각해 보라. 심지어 셰익스피어조차도 죽은 지 한 세기가 지나자 자기 나라 사람들에게조차 멜로드라마 풍의 번지르르한 말과 서투른 말장난밖에 모르는 속물 취급을 받으면서 반쯤 잊혔다.
-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든 것이 여러 차례 거듭하여 발견되고 잊히게 마련이라고, 진보는 환상일 뿐이라고 단언했다. 인간사는 바다와 같아서 수면만 보면 수많은 동요가 일며 어딘가로 흘러가는 것 같지만 밑바닥은 비교적 변화 없이 잔잔하다는 것이다. 우리가 진보라고 부르는 것은 어쩌면 피상적인 변화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패션, 교통수단, 정부, 심리학, 종교는 계속 변화한다. 크리스천 사이언스(신앙 치료법을 사용하는 기독교 교과), 행동주의, 민주주의, 자동차, 바지 같은 것들은 진보하는 것이 아니라 변화하는 것이다. 오래된 것을 새롭게 수행하는 방식, 영원한 수수께끼를 이해하려는 헛된 시도에 따른 새로운 시행착오. 이처럼 다양한 현상 아래서 본질은 여전히 그대로 남아있다. 굴착기와 전기 드릴, 트랙터와 탱크, 계산기와 기관총, 비행기와 폭탄을 쓰는 인간은 나무 쟁기, 부싯돌 칼, 통나무 바퀴, 활과 화살, 매듭 문자, 독 묻힌 작살을 쓰던 인간과 같은 부류의 인간이다. 도구는 달라져도 목적은 다름이 없다. 규모가 더 커졌을 뿐.
- 우리도 마음 깊은 곳에서는 자본주의자이며 부자가 되는 것에 진지하게 반발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노동자 조직을 통한 해방을 꿈꾸었지만, 거대 노조들이 타락한 기계와 사악한 집단에 협력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가난한 지식인이 유토피아건설을 계획하면 그것을 실현할 방편이 되어 주리라고 여겼던 그들이 말이다. 이후 우리는 소련에 희망을 돌렸지만, 그들이 가난을 정복하기 위해 심신과 노동과 사상의 자유를 희생시킨다는 것을 깨달았다. 윌리엄 고드윈에서 클래런스 대로, 랄프 왈도 에머슨에서 표트르 알렉세예비치 크로포트킨, 프랑수아 라블레에서 아나톨 프랑스에 이르기까지 진보 사상과 급진주의의 정수였던 그 자유를 말이다.
- 그리고 이 모든 드라마 위로 즐거운 전쟁의 신이 수많은 팔이 달린 시바 신처럼 배회하고 있다. 이집트의 화려함은 잔혹한 정복과 전제 왕권의 소산이었다. 그리스의 영광은 노예제도라는 진창에 뿌리박고 있다. 로마의 장엄함은 삼단노선과 군단을 기반으로 성립되었다. 유럽 문명은 총과 함께 흥하고 쇠했다. 역사는 나폴레옹의 신이 그랬듯 대포가 있는 쪽의 편을 든다. 예술가와 철학자를 비웃고 발작적인 애국심으로 그들의 업적을 파괴하며 모든 명예와 동상과 글귀를 전쟁의 신 마르스에게 돌린다. 이집트가 건설하면 페르시아가 파괴했다. 페르시아가 건설하자 그리스가 파괴했다. 그리스가 건설한 것은 로마가 파괴했다. 이슬람이 건설하면 스페인이 파괴했고 스페인이 건설하면 영국이 파괴했다. 그리고 유럽이 건설한 것을 유럽이 파괴했다. 처음에 인간은 막대와 돌로 서로를 죽였다. 그다음엔 화살과 창으로, 중장갑보병대와 군단으로, 대포와 소총으로, 전함과 잠수함으로, 탱크와 비행기로 죽였다. 파괴와 전쟁의 규모와 공포는 건설과 진보의 규모와 장대함에 필적한다.
- 이처럼 공평한 역사의 파괴성, 선악과 생사에 대한 자연의 중립 앞에서 과거의 인간은 한층 더 정의로운 세상이 오리라는 믿음으로 영혼을 달래곤 했다. 그곳에서는 모든 잘못이 바로잡힐 것이며, 천국으로 간가난한 자는 지옥에 떨어진 부자의 타는 혓바닥에 물방울을 떨어뜨리는 즐거움을 누릴 터였다.
- 과거의 신앙에는 뭔가 잔인한 면이 있다. 부처와 예수의 온유한 복음은 시간이 지나면서 성스러운 복수에의 탐닉으로 더럽혀졌다. 천국이 있다면 지옥도 있어야 했고, 선량한 자는 삶에서 지나치게 성공한 자나 그릇된 미신을 받아들인 자를 열심히 지옥으로 떠넘겼다. 그 '복된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은 삶이란 사악한 것이라는 데 동의했다. 싯다르타는 개인의식의 소멸을 지복 至福이라 불렀고 교회는 인생을 눈물의 골짜기로 묘사했다. 인간이 지상에 대해 비관주의자일 수 있었던 것은 천상에 대한 낙관주의를 품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구름 뒤에서 축복받은 섬들을, 영원한 환희의 거처를 보았다.
- 내가 이 글을 쓰는 동안 아래쪽 거리에서 노랫소리가 들려온다. 검은 옷을 입은 여자가 꽝꽝 울려 대는 관악대 반주에 맞춰 <만세반석 The Rock of Ages>을 부르고 있다. 가만히 후렴구를 따라 부르자 내 안에서 경건했던 젊은 시절의 이상화된 추억들이 솟구쳐 오른다. 나는 거리로 내려가 어느새 음악가들 주위에 모여든 군중 속으로 파고든다. 제복을 차려입은 구세군악대 연주자들은 그리 인상적이지 않다. 거의 대부분이 딱딱한 표정에 심드렁한 기색이다. 오래전부터 나는 종교가 저들에게는 그저 비즈니스가 된 것이 아닌지 우려해 왔다. 새된 목소리로 노래를 불러 대는 제복 차림의 여성은 창백하고 여위었으며 심신이 공허해 보인다.
- 이렇게 된 것은 오늘날의 과학이 그 경이로운 창조물로 인해 이제는 사람들이 과거에 목사를 신뢰했던 것만큼 신뢰하게 된 과학이 사람들에게 말해 주었기 때문이다. 과거 그들에게 행복을 약속했던 하늘은 그저 푸른색의 무이고 차갑고 텅 빈 공간에 불과하며, 그 사이로 천사들이 노닐었던 저 구름은 지구에서 증발한 수증기일 뿐이라고.
- 과학은 위안을 주지 못한다. 죽음을 줄 뿐이다. 천문학자들이 규명 중인 우주부터 아름다움과 웃음과 생기를 뿜어내는 여대생까지, 모든 것은 소멸하게 마련이다. 지금 막 운동 경기에서 우승한 저 꼿꼿하고 활기찬 미청년도 내일이면 어느 보잘것없지만 끈덕진 세균에 감염되어 땅속에 눕게 되리라. 완벽함으로 당대를 풍미했고 백만의 영혼이 아름다운 음악에 빠져 그들 자신을 잊게 만들던 저 고귀한 피아니스트도 이미 죽음의 손길에 붙들려 십여 년 뒤면 무덤 속에서 썩어가리라.
- 이 시대에 가장 중요한 문제는 '공산주의냐 개인주의냐' 하는 것도, '유럽이나 미국이냐' 하는 것도, 심지어 '동양이냐 서양이냐' 하는 것도 아니다. 바로 인간이 신 없이 살아갈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종교는 철학보다 심오하며, 지상에서 인간적 행복을 구하기를 거부했다. 종교는 인간의 희망을 지식이 결코 가닿을 수 없는 곳인 무덤 속에 가져다 두었다.
- 어쩌면 아시아가 유럽보다 더 심오했고 중세가 근대보다 더 심오했는지도 모른다. 그들은 과학으로부터 항상 적당히 거리를 두었기 때문이다. 과학은 가닿는 모든 것을 죽이고 영혼을 뇌로, 생명을 물질로, 인격을 화학으로, 의지를 운명으로 전락시키기 마련이니까. 어쩌면 어느 대담하고 금욕적이며 아직도 종교적 열정이 강한 인종이 죽음과의 '과학적인' 사랑 속에서 환멸에 빠진 서구인들을 사로잡아 흡수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이것이야말로 사상의 최종 승리인 셈이다. 모든 사회는 분열될 것이며 마침내 사상가 자신마저 무너지리라. 어쩌면 사상의 발명이야말로 인류의 근본적 실수가 아닐까?
- 사상은 제일 먼저 도덕을 붕괴시켰다. 도덕에서 초자연적 처벌과 신성을 제거하고 그것이 경찰관을 보호하기 위해 고안된 사회적 도구일 뿐임을 폭로함으로써 말이다. 그런데 신 없는 도덕이란 경찰에게 순찰차가 없을 때의 교통법규만큼 허약하기 마련이다. 다음으로 사상은 섹스와 양육을 분리해서 사회에 균열을 만들었다. 방탕함이 처벌받지 않게 하고 개인을 인류로부터 해방시켰다. 이제는 무지한 자들만이 자손을 번식한다. 마지막으로 사상은 사상가 자신에게 천문학, 지질학, 생물학, 역사학에 근거한 파노라마를 보여 주어 그를 무너뜨렸다. 파노라마 속에 보인 그 자신의 모습은 우주의 하찮은 파편, 무한한 시간 가운데 덧없는 한순간이었다. 그는 자신의 의지와 미래에 대한 믿음을 빼앗겼고, 운명에서 모든 고귀함과 위엄을 박탈당한 채 나약한 의존과 무기력 상태에 빠졌다.
- 그리하여 이 최후의 잔혹극에서 철학은 과학과 손을 잡고 파괴에 착수한다. 철학이 그토록 오만하게 설파하고 열렬하게 추구하는 총체적인 시각이야말로 의지와 환희의 (매우 드물지만) 가장 위험한 적이다. 세상이 그토록 거대하고 생물 종은 무수히 많으며 시간은 무한한 것이라면 한 개인이 그 어떤 의미나 존엄을 지닐 수 있겠는가? 지식이 늘어나는 자에게는 그만큼 슬픔도 늘어나며, 지혜는 딱 그만큼의 허무뿐인 것을.
- 바로 이것이 우리 시대가 직면한 난제다. 이 난제 앞에서는 철학과 종교, 경제학과 정치학에 관련된 다른 모든 문제가 무색해지며, 우리 경제 체제의 명백한 몰락조차 심각하게 고민할 가치가 없는 사소하고 일시적인 것으로 보인다.
- 여기까지 읽고 당신의 마음이 불편해졌다면 다행이다. 이제 당신의 지적 자산에서 믿음의 기반을 찾아보라. 이 절망의 철학에 대한 당신 자신의 답변을 성실하게 작성해 보라. 최악을 인지하고 최선을 칭송하며 의식 있게 살아가기를 바라는 우리가 이성적 삶이라는 허울을 유지하려면 이 모든 회의에 답을 제시해야 하기 때문이다.
- 종교에 관해 말하자면 저는 무교에 가깝습니다. 어른이 된 후로 한 번도 진정한 종교적 자극이라 할 만한 것을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어렸을 때 주일학교를 다닌 탓에 기독교 신학에 노출된 적은 있지만 그걸 믿어야 한다고 가르침 받은 적은 없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내가 기독교를 있는 그대로 배워야 한다고 생각하셨지만 내가 그걸 수용해야 한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한 적이 없으셨습니다. 아버지는 뛰어난 심리학자였어요. 내가 주일학교에서 얻은 것은 -찬송가에 관한 전반적 지식을 제외하면- 기독교 신앙이 그저 명백한 불합리로 가득하며, 기독교의 신은 미신적이라는 확신뿐이었습니다. 그때 이후로 신학 책을 여러 권, 아마도 보통의 성직자보다 훨씬 많이 읽었습니다만 결코 내 마음을 바꿀 만한 이유를 찾지는 못했습니다.
- [기독교의 숭배 행위는 내게 고귀하기보다 오히려 천박해 보입니다. 존경할 게 아니라 비난해야 마땅할 존재 -정말로 존재한다면 말 입니다만- 앞에서 굽실거릴 것을 요구받지요. 세상에서 소위 신의 선량에 대한 증거를 찾기는 어렵습니다. 오히려 평소 활동에 비추어 보면 그는 가장 어리석고 잔인하고 사악한 자가 분명해 보입니다. 이런 말을 하는 데 양심의 가책은 전혀 없습니다. 신은 내게는 썩 잘해 준 편이니까요- 사실 무척이나 정중했죠. 하지만 나머지 대부분의 인간을 그가 얼마나 야만적으로 학대했는지 생각하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전쟁과 정치, 신학 공론과 암을 만들어 낸 신을 숭배한다는 건 나로서는 도무지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
나는 불멸을 믿지 않고 불멸하고 싶은 욕망도 없습니다. 불멸에 대한 믿음은 열등한 인간의 유치한 자아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것의 기독교적 형태는 대체로 이승에서 더 잘살았던 자들에게 복수하려는 수단에 지나지 않습니다. 인생의 의미가 무엇인지 나는 모릅니다. 사실 전혀 존재하지 않는 게 아닐까 의심스럽고요. 내가 아는 건 삶이 적어도 내게 있어서는 지속되는 동안 상당히 즐거웠다는 것뿐입니다. 심지어 고난을 겪던 때도요. 더구나 그런 고난은 내가 인간에게서 가장 감탄하는 특성 용기나 그 비슷한 것들을 길러 주기 마련입니다. 내 생각에 가장 고귀한 인간은 신과 싸워 그에게서 승리를 거두는 자입니다. 나는 살아오면서 그럴 일이 거의 없었지만요. 죽을 때가 되면 나는 기꺼이 무無 속으로 스러질 것입니다. 아무리 근사한 쇼라도 영원히 근사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 헨리 멩켄
- 훌륭한 글이다. 이 편지 전체를 책에 실으려니 보물이라도 훔치는 것 같은 양심의 가책이 느껴진다. 언젠가는 멩켄 씨도 나의 글을 가져다 쓰는 영예를 베풀어 주리라고 믿는다. 그가 내 글 중에서 이만큼 솔직하고 겸허한(멩켄이 자신을 암소와 암탉에 견주어 분석한 것처럼) 내용을 찾아낼 수 있다면 말이다. 이 편지에서 멩켄은 단순히 아메리칸 머큐리의 편집자에 그치지 않는 다채롭고 섬세한 면모를 드러낸다. 그는 음악과 자신의 가정을 '사랑'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아내와 사이좋게 지냄으로써 우리 문학계 전반의 관습에 과감히 맞서고 있다. 물론 그가 일부일처제를 감당할 만한 나이가 되고 나서야 결혼할 만큼 현명했기 때문이겠지만.
- 어쩌면 그는 자신의 천성에 숨겨진 섬세함과 부드러움을 두려워하고 불신하기 때문에 기계론과 결정론이라는 현실적 철학을 고수하는지도 모른다. 그는 초자연적 위안을 구하려는 인류의 영원한 갈망에 대해서 그 어떤 공감도 드러내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받은 답장 전체를 살펴봐도 이만큼 직설적인 답변을 또 찾을 수 있을지 의문이다. 멩켄 씨는 종종 비관주의자로 간주되어 비난받지만, 세상에 대해 비관적인 사람이라도 실제 삶에서는 유쾌하고 괜찮은 친구일 수 있다.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 그럼 이 시대의 가장 유명한 소설가 싱클레어 루이스의 편지를 보자. 그는 우리 가엾은 위선자들에게 영합하고 싶은 생각이 별로 없는 것 같고, 그의 저서들로 미루어보건대 냉소와 분노로 가득한 사람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의 소박한 답장은 기계론과 무신론에서 무조건 비통함과 절망만 나오는 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 준다.
- [내 생각에, 인생을 살 만하게 만들거나 비통함에 위안을 얻기 위해 어떤 형태로든 종교가 필요하다는 믿음은 잘못된 것입니다. 종교 속에서 자라 성인기에 종교를 잃게 되면 상실감에 시달릴 사람이나 사고방식 전체가 종교에 길든 사람이라면 예외겠지만요. 나는 교회에 관해 전혀 생각하지 않고 기독교 신학을 비롯하여 그 어떤 종교적 관점도 없이 자라난 젊은이들을 많이 알고 있습니다. 그들이 배운 윤리는 신의 율법이 아니라 사회적 편의를 위한 것입니다.
내가 보기에 그들은 충분히 행복하고 목적의식이 뚜렷하며 인생에 열의도 있습니다. 자신의 모든 고민을 신이나 신의 지역 대리인인 목사에게 떠넘기도록 훈련된 그 어떤 사람에게도 뒤지지 않을 정도지요. 그들의 만족감은 사회에서 건전하게 제 기능을 하는 것과 심신 활동에서 -테니스를 치든 천문학적 문제를 연구하든 나옵니다.
나는 또한 그들 대부분이 나이가 들어도 종교적 위안의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않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평생 그런 식으로 지내 왔지만 완벽히 평화로운 상태로 살아가는 노인도 몇 명 알고 있으니까요. 클래런스 대로는 74세의 무신론자이지만 그 어떤 주교보다 인생의 모험에 대해 유쾌하고 적극적이며 '영적인' 태도를 지니고 있습니다. 나이 든 주교의 경우 천국에 대한 열망보다 지옥에 대한 공포가 앞서곤 하니까요.
내가 연극을 보러 갈 때 그 내용을 창작하고 연출한 이가 신이 아니라고 해서 즐거움이 줄어들진 않습니다. 연극은 영원히 지속되는 게 아니라 11시면 끝날 것이고, 대부분의 내용은 몇 달 후면 내 기억에서 사라질 것이며, 그것이 내게 특별히 도덕적인 영향을 미치지도 않겠지만 상관없습니다. 그리고 나는 그런 연극을 즐기듯이 인생을 즐깁니다.
이 편지 내용을 인용하고 싶다면 원하는 대로 하십시오.]
- B 싱클레어 루이스의 답장
- 위의 세 답변 모두 기계론 혹은 유물론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우리 시대 문학의 가장 특징적인 성취는 이런 암묵적 전제하에 이루어졌다. 한 세대의 철학은 다음 세대의 문학이 된다. 우리 시대의 소설과 연극 -토마스 만과 아르투어 슈니츨러, 막심 고리키 ...
- 시인이자 평론가인 존 카우퍼 포위스의 답장은 문학적 영혼이 현대성이라는 가면 뒤에서도 여전히 간직하고 있는 이상주의를 가장 뚜렷한 형태로 보여준다. 그는 내 평생 만나본 사람 중에 가장 심오하고 예리하며 고상한 천재라는 점을 반드시 말해 두어야 하겠다.
- 존 카우퍼 포위스(John Cowper Powys, 1872-1963). 영국의 철학자, 소설가, 시인, 평론가. 신비주의와 현실주의가 얽힌 회의주의적 세계관을 가진 특이한 작가였다. 소설집 <글래스턴버리 로맨스>, 시집 <루시퍼> 등을 펴냈다.
- [조직화된 초자연주의의 몰락, 그리고 인간에게 꼭 필요한 사회적 자유 및 문화가 결핍된 각국의 정치조직은 개인을 그 자신에게로 내던져 버렸습니다. 그가 믿음, 희망, 행복의 비결을 재발견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자기 안에서, 자기만을 위해서입니다.
이런 삶의 비밀과 연결되는 지극히 경이로운 힘, 가치, 감각을 우리는 여전히 자연 속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약자도 거의 강자에 뒤지지 않을 만큼 이를 만끽할 수 있지요. 개인의 신비적 삶이라는 맑은 샘물은 지나가는 사상의 유행이 파괴할 수 있는 범위를 완전히 벗어나 있습니다. 게다가 그 어떤 정치적·경제적 조직이나 혼란 속에서도 유지될 수 있지요. 자연은 강자만큼 약자에게도 다정합니다. 진실은 법과 방법론의 합리적인 일반화가 아니라 직관적 성장 속에 있습니다. 그런 성장에는 개인의식과 자연 간의 섬세한 적응이라는 고도의 유기적 과정이 따릅니다. 자연과 생명의 신비에 대한 개인적 체험은 자유의지, 영혼의 원동력, 존재의 신비론적 해석 속에서 믿음의 자리를 되찾아 줍니다. 개인의식은 자연에 적응하며 자신의 소명과 아름다움, 진실, 경건함, 행복을 발견하고 그 외의 모든 것을 역설적인 조심스러움과 너그러움으로 대합니다. 이 문제에 있어서 시대에 따른 논리적 유행은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개인의 자아는 과학이 자연을 대하는 방식과는 반대로 개별적 방식에 의지해야 하며, 슈펭글러가 괴테를 인용하여 '상모적 관점 physiognomy vision'이라고 불렀던 것을 실천해야 합니다. 모든 일반화와 설명을 조심스럽고 내밀하게 의심하는 한편 개별적인 자연현상 자체에는 어린아이처럼 신선한 감탄을 유지하는 관점 말이지요.
개인의 삶에 겸허한 동시에 비판적이며 내밀한 사상과 감정의 자유를 어느 정도나마 복구하기 위해, 외부조건을 육체와 영혼의 요구에 최대한 맞게 교묘히 비트는 동시에 개인 행복의 맑은 샘물을 외부에 대한 의존에서 해방시키기 위해, 필수적인 것에는 수위를 회복하려는 물처럼 유동적이고도 완강한 동시에 필수적이지 않은 것에는 타협할 수 있기 위해, 자연과 생명에 대한 '합리적인' 해석을 자신의 위치와 한계 내에서 가능한 한 활용하되 '경이로움'에 대해서도 열린 마음을 유지하기 위해, 잔혹한 이기심뿐만 아니라 불건전한 연민에서도 자유롭기 위해, 눈앞의 모든 화려함을 언젠가는 죽음에 의해 끝날지 모를 꿈속의 꿈으로 인식하기 위해, 모든 잔인함은 사악하며 모든 생명은 신성하다는 것 외에는 그 무엇도 확신하지 않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리하여 개인은 어마어마한 우주에서 그에게 적절한 위치, 신비로움에 대한 인간 의식의 전념과 비교하면 부차적인 중요성 밖에 없는 위치로 환원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의식 안에 존재하는 것은 '그 자체'로 삶을 영원하게 만드는 간절함이겠지요.]
- 존 카우퍼 포위스의 답장
- 시인이란 유물론 철학의 냉혹한 판결을 받아들일 수 없게 마련이다-그리고 포이스는 뼛속까지 시인인 사람이다. 시인은 보통 이상주의적이며, 마치 대학 운동선수가 쓴 편지에서처럼 보란 듯이 무신론을 과시하면서도 한편으로 자신이 부정한 신을 향해 찬송가를 부르곤 한다. 앨저넌 찰스 스윈번이 그랬고 퍼시비시 셸리와 존 키츠도 그랬다. 시는 기계론의 손길이 닿으면 죽어 버리고 생명과 성장이라는 주제 아래에서 번성하기 때문이다. 거의 태초부터 시는 이 세상의 영적인 해석에 바쳐져 있었다. 우리 시대 미국의 가장 뛰어난 시인이 기계론을 맹렬하게 반박하는 편지를 읽어 보자.
- [답장이 늦어서 죄송합니다. 파리를 떠나 있느라 한참 뒤에야 질문지를 받아 보았는데 당신이 제시한 문제가 매우 흥미로워서 답변 삼아 아예 에세이를 한편 썼습니다. 그 글을 보내 드립니다. 당연한 얘기지만 내용이 적당하다고 판단한다면 발췌하여 책에 실어도 좋습니다. 조만간 출간될 내 에세이집에는 확실히 실을 예정입니다.]
- 앙드레 모루아의 답장
- 우리의 소박한 토론을 위해 모루아 씨가 집필한 에세이는 볼테르나 아나톨 프랑스도 울고 갈 걸작이다. 그는 한 무리의 영국인 남녀가 로켓을 타고 달로 가는 데 성공하는 이야기를 썼다. 하지만 그들은 도착한 다음 계획대로 로켓을 지구에 돌려보내지도, 지구에 연락을 취하지도 못해 결국 달에 영구 정착할 수밖에 없게 된다. 10년이 지났고, "그동안 영국인 신사 숙녀들은 여전히 잉글랜드에 있을 때와 똑같이 행동해 왔다. 총독인 찰스 솔로몬과 그의 아내는 매일 정장 차림으로 저녁 만찬에 참석했다. 영국 왕의 생일에 총독은 폐하를 위한 건배를 제창했고, 그러자 달 식민지의 모든 주민이 <신이여 왕을 보호하소서>를 웅얼거렸다. 감동적인 광경이었다."
- 2백 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지구에서는 소식이 없다. 일곱 번째 세대는 멀리 떨어져 있는 데다 볼 수도들을 수도 없는 왕을 믿기 어렵다며 어리석은 노인들이 희미하게 전승해 온 관습을 버리려고 한다. 왕의 존재 자체를 거부하는 불경한 학생 집단도 생겨난다. '영국과 아일랜드의 왕, 인도의 황제, 달의 보호자'이며 그의 이름하에 모든 법을 공표하고 모든 도덕률을 엄숙하게 승인하는 왕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보수파는 성을 내며 반박한다. "조심해. 너희가 우리의 왕과 우리에게 전통을 물려준 전설 속 영국인들의 존재를 지구에서 지워 버린다면 달에서의 생활도 훨씬 힘겨워질 거다. 그들이 아니라면 이곳에서의 삶에 어떤 의미가 남겠어? 어디에서 원동력을 얻을 건데? 어떤 내면의 가치에 의지해서 살아갈 거야?"
- 결국 급진파가 승리한다. "달의 젊은이들에게는 우울함과 낭만주의적인 절망의 시기였다. 성적性的 자유에 관한 실험은 심신에 심각한 불안정을 가져왔다. 자유 뒤에는 권태가 왔고 권태 뒤에는 반란이 왔다. 대중은 불만스러워했고 사람들은 힘들어했지만 문학만은 번성했다." 그때 위대한 철학자가 나타나 산문시를 통해 당대의 환멸을 비판한다.
- "어째서 삶의 의미를 삶 그 자체가 아닌 외부에서 찾으려 합니까?" 그가 물었다. "우리의 전설이 말하는 왕이 실제로 존재하느냐고요? 나도 모르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내가 아는 것은 초승달처럼 가느다란 지구의 반사광 아래로 달의 산들이 아름답게 빛난다는 사실입니다. 태어난 이후로 한 번도 왕을 보거나 들을 수 없었으니 나 역시 그의 실제성을 의심할 만하지요. 하지만 나는 삶을, 순간의 아름다움을, 행동하는 기쁨을 의심할 수는 없습니다. 오늘날 소피스트들은 인생이라는 별의 궤도에서는 찰나에 불과하며 패배와 죽음 외에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가르칩니다. 하지만 나는 승리와 삶 외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겠습니다. 우리가 죽음에 관해 무엇을 압니까? 영혼이 불멸한다면 우리는 죽지 않을 것이고, 영혼이 육체와 함께 소멸한다면 우리는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도 모를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영원한 존재인 것처럼 살아가십시오. 지구가 텅 비어 버렸다는 것을 확인했다고 해서 여러분의 삶이 바뀌었다고는 믿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지구에 사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 자신 안에 살고 있습니다."
- "그렇습니다." 모루아는 이렇게 말한다. "이 이야기는 미국인 질문자에게 적절한 대답이 되겠군요."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썩 만족스럽지 않았는지 또 다른 세계를 궁리한다. 공원의 오솔길을 두 줄로 기어가는 개미 떼가 그의 눈에 들어온다. 한 줄은 개미탑에서 나오는 참이고, 한 줄은 그리로 돌아가고 있다. 양쪽 다 소위 '공공사업'에 종사하는 중이다. 문득 그는 "더듬이를 불안하게 쫑긋 세우고" 지혜로운 연설로 개미의 행렬을 멈춰 세우는 철학자 개미를 상상한다.
"내 자매들이여, 내가 그랬듯이 여러분 또한 개미의 세계만이 중요한 세계라고 믿어 왔을 것입니다."
- 이 시점에서는 윌 로저스의 유쾌한 격려가 필요했다. 왜냐면 다음 답장은 미네소타주 로체스터의 찰스 메이요 박사에게서 온 것이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외과 의사인 그는 매우 짧은 편지를 보냈다.
- [나는 당신이 지금 세상에서 인간의 삶이 어떠한지를 설득력 있게 정리했다고 봅니다. 그런데 지금은 내가 너무 바쁩니다. 일거리가 계속 늘기만 하고 절대 줄진 않는 듯해서 제대로 편지를 쓸 시간이 없군요. 하지만 당신이 이 주제로 글을 쓰면 기꺼이 읽을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해야 인간 벌레보다 나은 존재가 될 수 있을지에 관한 당신의 조언을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 찰스 메이요의 답장
- [내가 어디에서 위안과 행복을 구하는지, 그리고 나에게 가장 소중한 궁극적 가치는 무엇인지 물었지요. 나라는 개인이 행복을 구하는 곳은 두 가지, 예술과 내 가족입니다. 하지만 미래 세대도 계속 이런 보물을 지닐 수 있을까요? 바로 그 점이 문제입니다! 예술의 아름다움은(내가 아름다움을 이해하는 바에 따르면) 우리 눈앞에서 체계적으로 파괴되는 중이며 그 자리를 싸구려 선정주의가 차지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예술의 선지자라 할 사람들은 우리를 향해 아름다움은 더 이상 예술의 제1 목표가 아니라고 설파합니다. 가족의 미래에 대해서라면 당신의 편지에 표현되어 있는 진지한 우려에 전적으로 공감하는 바입니다. 이제 동방에도 산업혁명의 새벽이 밝았고, 그것이 전 세계를 휩쓴다면 가정 역시 파괴될 것입니다. 이전에는 파괴될 수 없을 거라 여겨졌지만 결국 소멸해 버린 그토록 많은 것들처럼 말이지요. 친애하는 듀런트 씨, 이 편지가 당신의 질문에 대한 만족스러운 답은 못 되겠지요. (...) 사람들은 개인이 운명과 직접적인 불화를 겪지 않고서도 비관주의 철학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좀처럼 이해하지 못합니다. 심지어 쇼펜하우어 같은 위대한 사상가도 그 때문에 비난받는 것을 피하지 못했는데 내가 어찌 그럴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나 개인에게는 전혀 불평할 일이 없습니다. 운명의 손은 나를 매우 친절히 다루어 주었지요.
내가 항상 믿어 온(그리고 지금도 믿고 있는) 바에 따르면, 개인의 철학은 자신만의 경험이 아니라 폭넓고 편견 없는 관찰에 근거하여 성립되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는 볼 수 있는 눈과 들을 수 있는 귀가 있습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자기 자신이 아닌 수백 명의 삶을 지켜볼 기회가 주어집니다. 자신만의 우연하고 개인적인 행운이나 불운에 근거하여 세상을 판단할 만큼 소견이 좁아서 되겠습니까? 내가 하루에 세끼를 다 먹는다고 해서 세상 어디에도 굶주림이 없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을까요? 우리 중 일부가 건강하다고 해서 날마다 수천 명의 사람이 육체적 고통을 견뎌 내야 한다는 사실에 눈을 감아서야 되겠습니까?]
- 오시프 가브릴로비치
- 오시프 가브릴로비치(Ossip Salomonovich Gabrilowitsch, 1878-1936). 러시아의 유대계 가정에서 태어나 알렉산드르 글라주노프, 안톤 루빈시테인 등과 함께 상트페테르부르크음악원에서 피아노와 작곡을 공부했다. 미국으로 건너가 피아니스트로 활약하며 성악가였던 마크 트웨인의 딸 클라라 클레먼스와 결혼했고 지휘자, 작곡가로도 활발히 활동했다.
- 오직 음악가만이 가질 수 있는 섬세한 영혼의 생생하고 정직한 숨결이 느껴진다. 이와 다른 종류의 북극의 바람처럼 화통하고 투박한 정직함을 북극 탐험가 빌햘무르 스테판손의 답장에서 느낄 수 있다. 그는 북극과 남극을 오가며 인생을 배운 사람이다.
- 인생의 문제는 보통 이렇게 해결되기 마련이다. 궁극적 의미에 골몰하기에 우리의 삶은 너무나 분주하다. 일을 해치워야 한다는 의무감이 머릿속 생각에 종지부를 찍는다. 먹여 살릴 가족이 있는 사람에게는 인식 철학을 논할 시간이 없다. 설사 그럴 시간이 있다 해도 그는 삶의 의미란 자기 가족을 먹여 살리는 것이라고 대답할 터이며, 사실 그보다 더 나은 답을 찾기도 어려우리라.
- 이번에는 전 다트머스대학교 총장의 눈을 통해 이 문제를 살펴보자. 그의 전공 분야를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 최고의 명성을 누리고 있는 사람이다. 이 편지에서도 우리는 삶과 분리된 사상에 대한 건전한 불신을 읽을 수 있다.
- [편지는 잘 읽었습니다. 당신이 던진 질문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숙고해 보았고요. 졸업식 이후의 정신없는 시기에 과연 쓸모 있는 대답을 할 수 있을지, 내 감정을 표현할 만큼 유려한 문장을 쓸 수 있을지 잘 모르겠지만 당신이 던진 질문에 나름대로 답을 해 보겠습니다.
(...)
현대의 정신적 문명 세계 전체는 진실이 목적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로 목적이라는 착각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삶의 충만함에 접근하려면 진실의 길을 따라가야 하겠지만 그 길 자체가 목적은 아닙니다. 종교의 영속적 가치는 그것이 인간의 정신에 일으키는 열망과 희망입니다. 소위 철학이라는 것의 불모성은 기껏해야 감정의 가치를 고려하지 않은 부정확한 생각의 표현일 뿐인 말들에 지나친 가치를 부여하고 변증법에 기울어지는 성향 때문입니다. 표현될 수 없는 감정이라고 해서 무조건 거짓된 것은 아닙니다. 모든 위대한 종교 지도자들은 사실상 예수가 말했던 내용을 서로 다른 방식으로 선언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생명을 주기 위해, 그것을 더욱 풍요롭게 베풀기 위해 왔다고 말입니다. 철학자들은 그런 확신을 주지 못했지요. 그들은 종종 주지주의에 빠져 모든 감정적 욕구를 부정하고 삶에서 만족스럽게 매진할 수 있는 일체의 목표를 부정합니다.
내가 보기에 철학이 인간을 다스리지 못하는 것은 지금껏 인간의 경험을 무시해 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니 자신의 지적 과정이 타당한지 점검하는 일에도 실패했지요. 고대의 철학자와 제왕들을 다룬 플라톤의 저 유명한 글에 따르면, 생각과 행동이 각각 전문 활동으로 분리될 경우 양쪽 다 제대로 기능할 수 없기 마련입니다. "서로를 몰아내려는 이 인간 본성의 두 구성 요소를 어떻게든 공존하게 만들어야 한다. (...) 그렇게 되어야만 우리의 의식이 삶의 가능성을 누리고 세상의 빛을 볼 수 있으리라."]
- 어니스트 홉킨스의 답장
- 종교가 죽지 않았다는 것은 확실하다. 압도적 다수의 인류에게 종교는 여전히 선악을 판단하는 기준이다.
- [ (...) 나는 대답할 수 없습니다. 단지 내가 인생을 어떻게 생각해 왔으며 어떤 동력이 날 행동하게 만들었는지 이야기하는 것 외에는 말이지요.]
- 자와할랄 네루
- 고귀한 영혼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현재 전 세계 어느 지역보다도 인류의 윤리적 이상주의가 눈부시게 타오르고 있는 곳이 인도일 것이다. 우리 자신보다 크고 위대한 목적을 성취하려는 노력은 삶을 의미 있게 만드는 비결 중 하나다. 그것이야말로 한 사람의 의미와 가치가 개인이라는 한계를 초월하여 죽음 이후로도 살아남게 되는 근거니까. 또 한 명의 인도인이 보내온 똑같이 순수한 열망을 들어 보자. 1930년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의 답장이다.
- [나는 결코 인생의 가치가 한순간의 기쁨이나 내일의 사소한 희망에 있다고 믿은 적이 없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의 거대한 신비를 온전히 파악하기에 인간의 정신은 너무 연약한 도구입니다. 하지만 나는 항상 지금보다 세상을 좀 더 잘 이해하려고 시도하기 위해서라도 인생은 살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실제로 내 삶과 활동의 주축은 언제나 지적·과학적 자극이었습니다. 종교의식과 신조는 나에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도 부처와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지나치게 문자 그대로만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시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을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내가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은 일하고 성취하며 다른 이들도 그리하도록 돕고 싶은 욕구입니다. 내 생각에는 자기도취가 아닌 자기 절제야말로 진정한 행복의 원천입니다. 결국 자신을 이기는 것이 전 세계를 정복하는 것보다도 더 위대한 업적이니까요.]
- 찬드라세카라 라만의 답장
- [무엇이 나를 계속 살아가게 하느냐고요? 거짓, 위선, 불의, 사악한 행위를 보았을 때 격렬한 불꽃처럼 타오르는 내 안의 무언가가 나를 계속 살게 합니다. 이 세상이 어떠해야 할지, 우리가 충분히 노력한다면 어떤 곳이 될 수 있을지 문득 느꼈을 때 사랑처럼 강하게 나를 끌어당기는 나 자신을 초월한 어떤 힘말입니다.
내가 죽기 전에 뭔가를 이룩할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내가 한 말이나 행동으로 이 세상이 바뀌는 걸 보게 될 거라고요. 이제 내게 그런 개인적 기대는 마치 수백만 년 뒤에도 이 행성이 존재할 거라는 우주적 기대만큼이나 부질없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나는 내가 처음 눈을 떴던 세상과 똑같은 세상에서 언젠가 눈을 감게 되겠지요. 이 세상이 적절한 시기에 시작되었던 것과 똑같은 상태로 끝나게 될 것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그동안 우주의 창조적 생명력은 마치 강물처럼 눈에 보이지 않고 꿈조차 꿀 수 없었던 머나먼 곳까지 흘러갔습니다.
(...)
교향악이나 오페라 공연장에서 '감미로운 소리의 집합'이 나의 영혼을 사로잡아 작곡가가 최초의 악보에 불어넣은 감정을 되살릴 수 있게 했던 찰나도 있지요. 갑자기 어떤 영적 비전이 떠오르더니 경이에 찬 내 입술 위에서 언어의 옷을 입고 나타났던 순간도 있습니다. 정의롭고 옳은 대의에 투신하여 승리하든 패배하든 싸워나갔던 시간도 있고요. 하지만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아마 내가 기도하거나 적어도 기도하려 애쓰던 중에 희미하게나마 내면에서 어떤 대답을 들었을 때일 겁니다. 이 모두가 창조의 경험이지요. 혼란에서 질서를, 질서에서 아름다움을 이끌어 내어 나의 한계 내에서 '모든 것을 새롭게 만드는 행위' 말입니다. 그런 순간에 나는 소위 날것 그대로의 생명력을 느끼며 그러므로 신을 보았다고 믿게 됩니다.
나를 계속 살게 하는 건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가 자신을 초월하여 고양되는 그 순간 속에서 허락받는 인식, 우리가 창조의 과정에 꼭 필요한 일부분이고 우리 자신도 신과 함께 창조의 주체로서 어떤 위대한 우주적 미래를 만들고 있다는 인식 말입니다. 내가 미래를 볼 수도 없고 상상할 수조차 없다면 어떻게 될까요! 솔직히 고백하자면, 그런 무지는 실제로 '보다 더 큰 존재들'에 이르는 인식- 경험 앞에서 빛을 만난 어둠과 같이 스러지게 마련입니다. ]
- 존 헤인즈 홈스의 답장
- 하지만 여전히 청년 시절의 신앙에 묘한 미련을 느끼는 -종교의 진실성을 의심하는 동시에 그 아름다움을 사랑하며 과연 아름다움이 진리보다 덜 진실한 것인지 의문을 품는- 내가 보기에, 종교적 태도에 관한 가장 설득력 있는 편지는 <생각의 기술>의 저자인 온화한 딤닛 신부가 보낸 것이었다. 그의 답장은 길지만 아마 나만큼 독자에게도 흥미로운 내용일 것이다.
- [당신의 편지를 읽으니 Ch. M. 게랑의 시가 떠오릅니다. 아마 당신도 아시겠지만 이 두 구절로 시작하지요.
"내가 신을 믿게 했던 신앙은 이제 죽어 버렸지만 나는 죽는 날까지 신앙이 준 환희를 애도하리라."
이 프랑스 시인은 당신처럼 자신의 내면을 분석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의 의식 심층에 언젠가 자신을 다시금 예전 신앙의 수원지로 이끌어 갈 물길이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듯하지요. 당신도 이젠 종교를 버렸지만 여전히 신앙이 주는 위안을 갈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게랑이 각운을 맞춘 시어로 빚어낸 비탄을 당신은 편지의 끝까지 꼬리를 물며 이어지는 일련의 숨 가쁜 질문들에 담아낸 것이지요.
과학은 당신에게 매정한 계모였습니다. 당신은 천문학, 지질학, 생물학 각각의 이야기를 들었지만 거기서 신앙도 희망도 사랑도 발견하지 못했지요. 당신은 과학적 데이터에 따라 자신의 철학을 수립했고, 그 철학은 레미 드 구르몽의 말을 빌리자면 스스로 이렇게 논평할 것입니다.
"진리를 구하는 행위의 끔찍한 점은 인간이 그것을 찾아냈다는 사실이다."
몇 년간 그런 데이터 속에서 쓰디쓴 만족감 혹은 순수한 지적 기쁨을 누린 후 당신은 충분히 짐작 가능한 반응을 보이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실망스러운 사실을 안다는 게 무슨 소용인가? 우주가 잔혹한 힘들의 전쟁터일 뿐임을 알게 되는 것보다는 차라리 아무것도 배우지 못하는 게 낫지. 앎에 환멸하고 고문당하기보다는 그 모든 걸 모른 채로 짧은 한평생 살다가는 편이 백배 천배 낫다고. 우리 선조들은 우리보다 행복했습니다. 인간은 아는 게 적을수록 행복한 법이지요. 원시인은 그의 상상력이나 주변 환경과의 조화로운 감각을 넘어서는 의문 따윈 애초에 품지 않았습니다. 자신을 분석하며 고통스러워하지도 않았고요. 그저 살아가면서 매분 매초 경험하는 것들로 충분했습니다. 지적인 기쁨으로는 설사 최고의 기쁨이라 해도 절대 이를 수 없는 최고의 행복 상태지요. 이 점을 인식한 당신은 아마도 자신보다 더 현실적 삶에 가까운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에게 편지를 보내 다음과 같이 묻습니다.
"무엇이 당신을 계속 살아가게 하는지, 당신의 영감은 어디에서 비롯되며 당신을 노력하게 만드는 원동력은 무엇인지. 당신에게 가장 소중한 궁극적 가치는 무엇인지."
당신의 진솔한 고백은 다른 이들의 고백을 끌어낼 만 ...]
- 에르네스트 딤닛의 답장
- [스물다섯 살 여성은(혹은 남성이라도) 선생님이 편지에 거론하신 것처럼 거창한 주제에 관해서는 말을 아껴야 하겠지요. 인생에 관해 깔끔하고 완벽한 결론에 도달했다는 느낌이야말로 젊음의 증거라고들 하더군요. 정말로 그렇다면 아마도 그렇겠지만 나는 상당히 나이를 먹은 게 분명하네요. 그 무엇에 관해서도 좀처럼 확신할 수가 없으니까요.
내가 확실히 원하는 단 한 가지는 내 마음속에 항상 머물러 있는 듯한 불안을 해소할 수단입니다. 테니스든, 그림이든 뭐든 상관없어요. 어릴 때는 그게 무엇인지 몰랐지만 이제는 대충 알 것 같습니다. 내가 오래전부터 그토록 빠르고 격렬하게 테니스를 쳤던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지요. 학교에서 열심히 공부하고 어쩌다 문법 시험에서 만점을 못 받았을 때 울기까지 한 것도 그 때문이었고요. 대학교에서 파이베타 카파 열쇠를 받으려고 그렇게 노력한 것도 그 때문이었습니다. 나는 결국 목표를 이루었지만 그러지 못했더라면 분명히 울음을 터뜨렸을 테지요.
이 같은 불안, 어느 정도의 완벽함에 도달하려는 끝없는 바람이 특이한 형태의 자만심은 아니기를 간절히 바랄 뿐입니다. 내게는 바로 그것이 종교니까요. 나를 "노력하게 만드는 원동력"(내가 얼마나 '노력'했는지요!)이고요. 내가 좋아하는 일에 꾸준히 매진함으로써 순간순간 마음을 사로잡는 슬픔과 초조와 분노를 해소할 수 있습니다. 그러고 나면 내 마음은 행복해지고 거의 평화로워지기까지 하지요.
이처럼 부단한 불안, 계속 나아가 어느 정도의 완벽함에 이르고 싶은 희망은 아름다움에 대한 애정과 뒤섞여 있습니다. 어쩌면 아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고도 할 수 있겠지요. 적당한 단어를 찾기가 어렵네요. 예술 작품의 완벽한 아름다움을 감상하다 보면 그런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마치 내가 다른 차원으로 이동하는 것 같지요(계속 단어를 늘어놓고 있네요. 하지만 여전히 딱 맞는 말이 생각나지 않는군요). 음악, 조각, 특히 회화에 있어서 말이지요. (물론 내가 말하는 예술 작품의 완벽함이 마무리의 매끄러움이나 '그럴싸함', 즉 기존의 '완벽함'을 의미하는 건 아닙니다.)]
- 헬렌 윌스의 답장
- 출판사에서 한 가지 제안을 해 왔다. 나의 편지를 최근 전과 4범으로 종신형을 선고받은 죄수에게 보내자는 것이다. 부당하게도 미래를 빼앗기고 죽을 때까지 공허한 시간밖에 남지 않게 된 사람의 관점에서 삶은 어떤 의미를 지닌 것처럼 보일까?
그의 답장은 매우 사려 깊고도 유려하여 마땅히 이 토론의 장에서 한 자리를 차지할 만하다. 우리가 이처럼 뛰어난 지성을 영구히 가두어 놓는 대신 더욱 유용하게 활용할 길을 찾아내지 못했다는 사실이 경악스러울 뿐이다.
- [어느 유명 작가이자 철학자가 해묵은 질문에 대한 답을 구한다고 하더군요. 인생의 의미 혹은 가치는 무엇인가 하는 질문 말이지요. 그 사람만큼이나 유명한 어느 출판사에서는 나에게 현재의 상태를 어떻게 견디고 있는지 물어 왔고요.
철학자에게 내가, 즉 종신형을 받고 감방 벽 안에 갇혀 있는 사람이 들려줄 수 있는 대답은 나에게 인생의 의미란 거대한 진리를 이해할 수 있는 나 자신의 능력, 교훈을 배워 요긴하게 써먹을 수 있는 그 능력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다른 한계는 존재하지 않아요. 한마디로 인생의 가치란 딱 그것을 쟁취하고 활용하려는 나의 의지만큼인 것이지요.
출판사에는 이렇게 말하겠습니다. 삶이란, 심지어 감방 안에서도 바깥에 있는 사람의 삶만큼이나 흥미로우며 가치로울 수 있다고요. 그 자신의 인생철학이 건전하다고 믿기만 한다면 말입니다.
내 인생철학은 투박하며 진실만을 길잡이 삼는 단순한 믿음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내게는 인생의 진면목을 볼 수 있는 능력이 있기에 무수한 추측과 모순되는 생각 속에서도 표류하지 않고 정신적 균형을 유지할 수 있지요.
철학자는 이렇게 논합니다.
"우리는 '진리'의 발견이야말로 인간이 저지른 역사상 최대의 실수였다는 결론을 내리기 직전에 와 있습니다. '진리'는 우리를 자유롭게 하지 못했습니다. 우리를 위로하고 보호하던 환상과 절제를 앗아갔을 뿐입니다. '진리'는 우리를 행복하게 하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아름답지도 않으며 그토록 열렬히 갈구할 가치가 없는 것으로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이제와 그것을 바라보면 우리가 왜 그토록 성급하게 '진리'를 찾으려 했는지 의아할 뿐입니다. '진리'는 순간적인 쾌락과 내일의 사소한 희망 외에는 존재의 이유를 앗아갔으니까요."
우리의 행복과 존재 이유가 환상과 잘못된 관습과 미신 속에서 위안을 구하려는 천성에 의존하고 있다는 얘기라면 나 역시 동의합니다. 진리가 그런 미심쩍은 위안들을 빼앗아 간다면 우리는 당연히 불행해지겠지요.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진리는 아름답지 않지만 딱히 추하지도 않습니다. 왜 둘 중 한쪽이어야 합니까? 통계의 숫자가 그저 숫자일 뿐이듯 진리도 그저 진리일 뿐입니다. 자기 사업의 정확한 상태를 알아보고 싶은 사람은 통계를 확인합니다. 통계가 불량한 사업 상태를 드러낸다 해도 그는 통계를 욕하거나 자신의 환상을 깨뜨린 통계가 추악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진리를 저주하겠습니까? 진리가 그의 인생에서 하는 역할은 사업에서 통계가 하는 역할과 다를 바 없는데 말입니다. 우리는 선천적인 우상 숭배 성향 때문에 진리의 조각상이 고귀한 의복을 둘렀을 거라고 상상합니다. 그러나 막상 초라하고 벌거벗은 모습의 진리가 눈앞에 나타나면 환상이 깨졌다고 외치지요. 관습과 전통 탓에 우리는 진리와 자신의 믿음을 혼동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관습과 전통, 현재의 생활방식은 우리가 이런저런 물질적 안락을 누리는 이런저런 신체적 상태가 아닌 이상 행복할 수 없다고 믿게 만들었지요. 그것은 진리가 아니라 믿음일 뿐입니다. 진리가 우리에게 말해 주는 것은 행복이란 정신적으로 만족스러운 상태라는 점입니다.
(...)
태초의 시간에 인간의 신체는 여러모로 변화를 이루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향해 가고 있는 머나먼 미래에도 그렇지 않겠습니까? 생명이 깊은 바닷속에서 여울로 나오고 다시 여울에서 땅으로 올라왔듯이 말입니다.
오늘 저녁 나는 감옥 마당에서 다른 죄수들 가운데서 있습니다. 다들 고개를 쳐들고 우리 머리 위로 장엄하게 흘러가는 거대하고 아름다운 비행선 '로스앤젤레스' 호를 바라보고 있지요. 내 마음속에 문득 이런 생각이 떠오릅니다. 선사 시대의 생물체가 바다를 빠져나와 육지로 올라왔듯. 인간도 육지에서 하늘로 올라가기 위해 분투하는 중이라고. 언젠가는 인간이 광대한 행성 간의 공간을 통과하여, 지금 우리가 선사 시대의 인간보다 더 높은 차원에 이르렀듯이 저 비행선만큼 드높은 또 다른 차원으로 올라설 수 있는 지식을 얻어 내지 못할 거라고 어느 누가 장담하겠습니까?
운명이 어떤 위대한 목적지로 인간을 이끌어 갈지나는 모릅니다. 딱히 알고 싶지도 않고요. 그 목적지에 도달하기 한참 전에 나는 내 역할을 다하고 대사를 마친 다음 사라졌을 테니까요. 내게 중요한 것은 오직 내가 그 역할을 어떻게 수행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내가 인간의 생명이라는 이 거대하고 놀라우며 꾸준한 상향 운동에서 분리할 수 없는 존재라는 인식, 역병이나 신체적 고통이나 절망이나 감옥조차도, 그 무엇도 이 역할을 내게서 빼앗아 갈 수 없다는 인식이 내게는 위안이자 영감이자 궁극적인 가치입니다.]
- 오언 C. 미들턴(뉴욕 싱싱 교도소 종신형 죄수 79206번)의 답장
- 마지막은 회의론자들의 답장이다. 결국 우리의 질문은 대답 불가능한 것임을 상기하기 위해서라도 어쩌면 이들의 답변으로 마무리하는 것이 좋을지 모르겠다.
첫 번째로 영국의 악동이자 모든 대륙에 명성이 자자한 말썽꾼, 그리고 이제 상원의사당의 골칫거리가 될 예정인 사람의 답장을 읽어 보자.
- [이렇게 말하려니 유감입니다만, 지금 당장은 내가 너무 바쁜 나머지 삶에는 의미도 뭣도 없다는 데 동의할 수밖에 없군요. (...) 진리의 발견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우리가 판단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아무것도 발견되지 않았으니까요.]
- 버트런드 러셀의 답장
- 버트런드 러셀(Bertrand Arthur William Russell, 1872-1970). 영국의 철학자, 수학자, 역사가, 사회비평가, 반핵, 반전, 시민불복종 운동 등을 전개하고 당대 사회의 주요 현안에 적극 참여한 실천적 지식인이었다. <서양철학사>, <인간 지식>, <결혼과 도덕> 등을 집필했으며 1950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 두 번째이자 개중에 가장 솔직한 답장은 다른 저자의 인세에 보탬이 되고 싶지 않았던 사람에게서 온 것이다.
- [당신이 제시한 것 같은 질문에 편지라는 형태로 진지한 답변을 한다는 건 결단코 불가능합니다. 게다가 굳이 나의 생각을 드러내겠다면 다른 저자의 책에 내용을 제공하기보다 내가 직접 무대를 세우는 쪽이 더 나을 듯합니다.]
- 헤르만 카이절링 백작의 답장
- 마지막이자 가장 짧은, 그리고 아마도 가장 현명한 답장은 거대한 두상과 톨스토이를 닮은 얼굴을 가진 버나드 쇼가 보낸 편지다. 그는 꼼꼼하고 나무랄 데 없는 필치로 다음과 같이 몇 마디만 적었다.
- [젠장. 내가 어찌 알겠소?
그런 질문에 뭔 의미가 있단 말이오?]
- 버나드 쇼의 답장
- 버나드 쇼(George Bernard Shaw, 1856-1950). 아일랜드의 극작가, 화가, 비평가. <무기와 인간>, <인간과 초인>, <피그말리온> 등을 썼고 1925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 당신이나 나 같은 생명의 한 파편, 한 단면이 자기의 한계를 벗어나서 세상의 총체성을 파악하거나 이해하는 척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세상'이나 '삶', '영원', '무한', '태초'와 '종말' 같은 단어들로 말장난을 합니다만, 마음속으로는 그런 말들이 단지 우리 무지의 표식에 불과하다는 걸 잘 압니다. 그 단어들의 진정한 의미를 우리는 절대 이해할 수 없으니까요. 철학은 신을 추방한 뒤 인간을 그 자리에 놓았습니다. 그리고 오직 절대적, 초자연적 지성에게만 속할 수 있을 보편 개념과 우주적 관점을 인간에게 부여했지요.
- 만약에 우리가 자신의 정신적 한계를 솔직히 직면한다면 우리의 비관주의조차도 좀 더 겸허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지 모릅니다. 현대 과학이 그려낸 우울한 세계관을 인간 관점의 만화경 안에 떠다니는 하나의 형상으로 간주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요. 그 형상에 확실하거나 영원한 것이라곤 없으며 오늘날 우리가 아퀴나스, 안셀무스, 스코투스, 아벨라르의 중세철학을 보고 비웃듯 미래 세대는 우리의 과학을 보고 비웃으리라는 걸 떠올리게 되겠지요. 천문학자들의 이야기를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맙시다. 우리의 행성이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갈 것인지, 언제 시작되었으며 언제 존재하기를 멈출 것인지는 그들도 모르니까요. 사실 그들도 철학자만큼이나 과감한 예측가일 뿐입니다. 지질학자들로 말하자면, 선사 시대 지구를 묘사한 그들의 알록달록한 지도는 순전히 그럴싸한 상상 놀음일 뿐입니다. 사라진 대륙과 바다에 관해 그들이 어떻게 확신할 수 있겠습니까. 어쩌면 화석 지층이 저 어리바리한 암석 해석자들을 놀려주려고 스스로 뒤집어졌던 건지도 모르지요. 인류가 얼마나 오래되었는지, 정말로 '빙하 시대'가 존재했으며 그로 인해 문명이 멸망했던 것인지 그들도 알지 못합니다. 물리학자는 물질이 무엇인지 모르고 생물학자는 생명이 무엇인지 모르며 심리학자도 의식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그들의 대담한 독단은 일부분이나 한 측면을 총체로 착각하고 임시로 부각시킨 결과입니다. 그처럼 허황한 가설을 전제로 지나치게 고민해서는 안 됩니다. 그랬다가는 온갖 부조리한 이론을 위해 목숨을 희생한 성인들의 기나긴 명단에 추가될 뿐이겠지요. 우리는 심지어 과학자에 대해서도 회의적일 수 있어야 합니다.
- 당신의 절망이 기계론 철학에 근거했다는 점은 다소 의아하게 느껴집니다. 스펜서의 유산인 그 이론은 19세기 중반의 단순함 그 자체이니까요. 현대 비평가와 소설가는 기계론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지만, 오히려 그 이론을 지키려 투쟁했던 과학자는 이제 그것이 의심스럽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원자와 세포의 복잡함과 의도성 앞에서 혼란에 빠져 발을 빼는 중이지요. 우리 개인에게 불멸의 영혼이 있을 가능성은 거의 없겠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우리 스스로의 기계성을 기계적으로 한탄하는 기계일 가능성은 더욱더 없어 보입니다. 그런 철학은 자살의 이유가 될 수 없습니다. 오류를 저지르고 갈팡질팡하는 전 세계의 연구실에서 과거의 독단을 싹 쓸어 낼 한바탕 웃음의 이유라면 몰라도요.
- 우리가 과학에 대해 확신할 수 있는 것이라면 형이상학적 가정이 아니라 물질적 성취입니다. 증기선, 비행기, 공중위생이 시험관 속 거품에서 나온 철학보다는 한층 현실적이지요. 뉴욕으로 가는 야간 비행기에 올라 인류라는 기계의 무모한 용기와 힘을 느껴보세요. 위험과 속도의 짜릿함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과학의 실재성을 찬양하되 거기서 나온 추상적 이론은 일소에 부치세요. 우리 바지 입은 원숭이들이 다양한 발견을 통해 성취할 수 있는 일에 한계란 없어 보입니다. 인간은 분명 언젠가는 별들 사이로 엔진을 발사하고 베텔게우스로 범죄자를 귀양 보내겠지요. 그런데도 죽기를 고집하겠다면 무언가 위험한 임무를 맡아 인류의 발견에 공헌하는 쪽을 택하십시오. 의학이나 기계 실험에 자원해 당신의 생사에 의미를 부여해도 좋겠지요. 하지만 무얼 하든 간에 철학 때문에 죽지는 마세요.
- 자살의 이유를 과학이 아닌 산업과 정치에 돌린다면 당신의 목숨을 무한 속으로 쏘아 보낼 더 합당한 근거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확실히 우리의 경제와 정치는 혼란에 빠져 있으니까요. 이 세상의 노동과 행정을 관리할 더 나은 체계를 만들어 내지 못한다면 다른 인종이나 다른 생물 종에 지구를 넘겨야 할지도 모르지요. 정부라는 것이 형태를 막론하고 귀찮은 존재임은 사실입니다. 인류는 제왕과 귀족의 악정으로 불만스러워했듯 현재의 민주주의 체제하에서도 뇌물과 부패에 시달리지요. 게다가 우리는 20세기 소유 경제의 몰락에 분노한 나머지 불손하게도 19세기에 그 체계가 보여 준 역동적 생산성을 잊어버렸습니다. 이전의 어떤 체계도 그만큼 부를 생산하고 안락을 전파한 적이 없는데도 말이지요. 하지만 타락하고 허점 많은 우리의 사회생활을 공허한 낙관주의로 덮지는 않으렵니다. 현 상태를 축소하기보다는 과장하는 편이 낫지요. 우리가 불만족스러운 전망에 슬프고 분노한 나머지 무의미한 절망에 빠져들지만 않는다면 말이지요. 우리의 부를 소수에 집중시키고 디플레이션을 불러온 바로 그 탐욕이 우리 영혼에도 있다는 걸 기억하십시오. 부자와 우리의 동기에 있어 유일한 차이는 대체로 양심이 아니라 기회와 수단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결국 우리는 모두 공범입니다. 서로에 대해 불평하는 것을 그만두고 자기 마음속 악의 뿌리를 뽑아야 할 때입니다.
- 하지만 우리의 탐욕은 생물학적으로나 역사적으로나 너무도 튼튼하고 깊게 뿌리를 내리고 있어 한 세대, 심지어 한 세기를 들여도 뽑아내기 어려울 것입니다. 우리 선조들은 음식을 찾으면 바로 뱃속에 욱여넣었지요. 언제 다시 음식을 찾아낼 수 있을지 몰랐으니까요. 오늘날 돼지들이 품종을 막론하고 음식을 보면 집어삼키는 것처럼 말이지요. 인간의 탐욕은 이런 원시 시대의 불확실성에서 생겨났습니다. 우리의 악덕이 한때는 생존 투쟁에 꼭 필요한 미덕이었던 것이지요. 이는 우리의 시초에 대한 일종의 기념물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유물을 나름대로 담담하게 받아들여야 하겠지요. 충수 돌기나 잉여 분비선 등의 흔적 기관처럼 말입니다. 인간의 삶이 무척 안락해져 아무도 자기와 피부양자의 식량을 걱정할 필요가 없게 될 때까지 사람들은 계속 탐욕스럽게 물질을 손에 넣고 운 나쁜 시기를 위해 축적하려 할 것입니다. 어쩌면 정부의 복지와 기본노동 및 소득 보장으로 이런 충동을 제어할 수도 있겠지요. 아니면 인간의 공포가 줄어들 듯 탐욕 자체도 부의 증대와 공급 및 질서의 증대에 따라 서서히 줄어들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어찌 보면 소유하려는 것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본능이기도 합니다. 한 사람이 안락함을 얼마나 확보했는지에 따라 그의 성공 여부를 판단하는 것이나 국가가 그 경제력에 따라서 흥하거나 망하는 것도 마찬가지이지요. 어쨌든 결국 책보다는 빵이 중요하며 예술은 부의 축적 덕분에 가능해진 사치품이니까요. 이 문제를 역사적 맥락에서 본다면 머리를 쥐어뜯거나 뇌가 터지도록 고민할 필요가 없습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우리 시대에 와서야 음식과 옷, 보금자리와 자동차, 학교와 도서관을 갖게 되었으며 방송을 통해 광고와 색소폰 음악을, 스크린을 통해 살인과 간통을 부자들과 마찬가지로 즐길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심지어 불경기인 지금도 여러 면에서 우리가 젊었던 때보다는 살기 좋아졌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으며, 나아가 우리 아이들을 위해서 지금보다 더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하게 됩니다.
- 정말로 진보는 환상일까요? 맞습니다. 그것이 끊임없고 규칙적이며 영구히 지속되는 진보를 얘기하는 거라면요. 우리 역사에서 볼 수 있는 진보는 온갖 장애물에 굴복해야 했고 결코 일관되게 규칙적으로 진행되지 않았습니다(현재 과학과 산업 분야의 진보는 철학과 예술 분야의 진보를 크게 앞서가 있지요). 게다가 아마도 언젠가는 그 성과가 모조리 파괴될 테고요. 하지만 그런 결말 때문에 진보의 실재성을 의문시한다는 것은 '태양은 저녁에 지니까 환상'이라고 말하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먼 훗날 닥쳐올 거라는 진보의 종말도 하나의 가정에 지나지 않으며 이론적인 가능성에 대한 인정일 뿐입니다. 반면 오늘날 지구에 사는 평범한 인간의 물질적, 신체적, 정신적 상태가 설사 그리 좋은 상태라고 할 수는 없을지라도 과거의 어느 때보다도 훌륭하다는 증거는 차고 넘칩니다. 학생들이 우리 시대에 절망하는 것은 그들 주변의 평균적 인간을 과거의 예외적 인간과 비교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조금만 더 공부하면 아테네인이 전부 천재는 아니었으며 천재도 전부 성인은 아니었음을 깨닫게 될 겁니다. 플라톤과 아리스티데스 뒤에는 부패한 민주주의, 억압된 여성들, 미신에 사로잡힌 대중, 잔혹한 폭도들이 존재했다는 것을 말이지요.
국가는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으며 문명도 대부분 사라져 버립니다.
- 설사 삶의 의미가 일순간 스쳐 가는 아름다움 그 이상이 될 수 없다 해도(뭐가 더 있긴 한지 의문스럽지만요), 그걸로 족합니다. 빗물 속에서 첨벙대거나 바람과 싸우며 나아가는 시간, 햇빛을 받으며 눈길을 산책하는 시간, 어둠 속으로 스러져 가는 저녁노을을 지켜보는 시간만으로도 삶을 사랑할 이유는 차고 넘칩니다. 죽음더러 와 보라고 하세요. 그동안에 나는 사우스다코타의 자줏빛 언덕을, 저녁 하늘에 조용히 자리를 잡고 반짝이는 별빛을 보았으니까요. 자연은 나를 파괴하겠지만 충분히 그럴 권리가 있습니다. 자연이 나를 만들고 내 감각을 수천 가지 기쁨으로 타오르게 했으니까요. 자연이 내게서 빼앗아갈 것은 모두 자연이 내게 준 것이지요. 내게 오감을 준 것에 대해, 이 손가락과 입술, 눈과 귀, 쉼 없는 혀와 커다란 코에 대해 내가 어찌 충분히 감사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 사랑에 대해서도 마땅히 감사해야 합니다. 사랑의 정신적 진화를 무시하는 건 사랑의 생리적 기반을 망각하는 것만큼이나 비현실적인 행동이지요. 그렇습니다. 사랑이란 최저 단계에서는 수압 조절과 화학적 자극의 문제가 됩니다. 하지만 최고 단계에서는 이따금 헌신과 기사도의 서사시가 되기도 합니다. 서로의 충동을 초월하여 서로를 배려하게 되는 것입니다. 낭만적 연애를 이야기하는 게 아닙니다. 욕망의 좌절에 따른 대상의 이상화는 이제 사라져 가는 현상이지요. 욕망은 예전보다 한층 쉽게 충족시킬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내가 말하는 건 친구나 동료 간의 애착, 손을 맞잡고 수많은 지옥과 몇몇 연옥과 한두 번의 천국을 지나왔으며 인생이라는 불꽃에 녹아서 하나로 융합된 관계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런 친구나 동료도 종종 서로 다투고 신경을 긁기도 한다는 건 알지요. 하지만 내게 관심을 갖고 의지하며 나를 높게 평가하고 기차역으로 나를 마중 나오는 사람이 있다는 것, 그런 존재에 대한 무의식적인 의식만으로도 충분한 보상이 됩니다.
- 모건타운에서 피츠버그까지 가는 이 기차 안에는 함박웃음을 띠고 자기 아이와 놀아 주는 여자가 있습니다. 아, 도시의 불행한 지성인들이여! 당신네가 저 여성보다 심오하다고 생각합니까? 총체의 일부에 지나지 않으면서 다른 일부를 이해해 보겠다고 헛되이 애쓰는 소피스트 과학자여, 저 여성이 당신보다 더욱 위대한 철학자라는 사실을 모르겠습니까? 그는 부분으로서의 자신을 잊고 총체 속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아낸 것입니다.
- 그러니 나로서는 삶의 의미와 만족에 이르는 길을 이렇게 얘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총체에 참여하십시오. 몸과 마음을 바쳐 헌신하십시오. 삶의 의미는 우리가 보다 더 큰 존재를 위해 생산하고 기여할 수 있도록 부여받은 기회 속에 있습니다. 그것이 꼭 가족일 필요는 없습니다- 가족은 말하자면 자연이 특유의 눈먼 지혜로써 가장 소박한 이에게도 마련해 준 가장 곧고 넓은 길이지요. 개인의 잠재된 존엄성을 이끌어 내고 그가 죽은 뒤에도 사라지지 않을 대의를 부여해 주는 것이라면 어떤 총체든 상관없습니다. 그것은 성별을 떠나서 누구나 헌신할 수 있는 혁명적인 집단일 수도 있습니다. 페리클레스나 악바르 대제만큼 뛰어난 인물이 자신의 천재성과 목숨을 바쳐서 지키고 번영시키려 하는 위대한 국가일 수도 있고요. 때로는 창작자가 영혼을 불어넣어 이후 여러 세대에 선사하는 아름다운 걸작일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삶의 의미를 찾아내려면 그것은 개인이 자신을 초월하여 더욱 큰 설계의 조화로운 일부가 될 수 있는 존재여야 합니다. 삶의 의미와 만족을 찾는 비결은 한 사람의 모든 에너지를 필요로 하며 그 대가로 그의 삶을 한층 충만하게 만들어 주는 과업의 발견입니다.
- 나로 말하자면 다른 여러 사람에게 제시했던 질문에나 역시도 직접 대답해 보고 싶거든요- 삶의 의미를 내 가족과 내 저술이라는 다소 협소한 범위에서 찾는 듯합니다. 더욱 거창한 대의에 공헌한다고 자랑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말이지요. 내 활력은 자기 중심주의와 이기적 이타주의에서 비롯됩니다.
- 대부분을 만족시켰던 조야한 기계론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지금도 여전히 중세의 신앙에서 상징적 깊이를 발견하며 기뻐합니다. 어쩌면 계속 내 마음속에서 아우성치던 신앙이 종국에는 나의 회의를 깨뜨릴지도 모르고, 그러면 나는 위스망스와 체스터턴이 갔던 길을 따르게 되겠지요. 내가 늙은 뒤에 쓴 글을 읽을 때면 독자들은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겁니다.
- 지금 내게 불멸의 의미는 우리 모두가 총체의 일부, 생명이라는 몸을 이루는 세포라는 점입니다. 일부의 죽음이 총체에 새로운 생명을 주며, 개체로서의 우리가 사라진다 해도 총체는 우리의 존재와 기여로 영구적 변화를 겪는 것이지요. 내게 신이란 제1원인 혹은 우리가 살고 움직이고 존재하게 만드는 모든 생명과 동력의 원천입니다. 또한 목적인이고 우리 분투와 열망의 목표이자 실현이며, 현존하지 않지만 언젠가는 존재할지 모를 아득한 완벽성이기도 하지요. 어쩌면 완전한 일체, 모든 시대에 걸쳐 가장 위대한 이들이 헌신했던 그 존재가 미래의 종교에서는 신이라 불릴지도 모릅니다.
- 하지만 내가 너무 내 얘기만 늘어놓느라 당신을 잊어버리고 있었군요. 내 이름 모를 절망의 병사, 자살을 생각하는 당신을 말입니다. 당신도 알게 되겠지만,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철학이 아니라 배우자와 아이 그리고 근면한 노동입니다. 볼테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난 이미 몇 번이나 자살했을지도 모른다. 지금 당장 해야 할 일이 이렇게 많지만 않았다면." 절망은 그럴 여유가 있는 사람들만의 것이라는 또 다른 사례지요. 이 혼란스러운 산업화 체계 속에서 일자리를 찾아낼 수 없다면 나가서 가장 먼저 만나는 농부에게 당신을 일손으로 쓰고 더 나은 시기가 올 때까지 음식과 잠자리를 달라고 청하십시오. 그 역시 과잉생산이라는 경악스러운 질병에 시달리는 상황이라면 오직 당신이 소비할 수 있는 만큼만 생산하겠다는 데 동의하세요. 아마도 우리 모두가 스스로 생산하는 만큼만 소비하도록 허용될 때 '과잉생산' 문제는 사라지게 될 겁니다.
- 결국 이 모든 조언이 얼마나 헛되고 속물적인 것인지나 역시 잘 압니다.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을 이해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도요. 하지만 오셔서 나와 한 시간만 함께해 주십시오. 그러면 당신에게 숲으로 난 오솔길을 보여 드리겠습니다. 내가 가진 책 속의 모든 논쟁보다도 그쪽이 당신을 만류하는 데 더욱 효과적일 테니까요. 오셔서 내가 얼마나 어수룩한 낙관주의자인지 말해 주십시오. 내 논리를 실컷 공격하고 이 중간계를 마음껏 저주하십시오. 나는 당신이 말하는 모든 것에 동의하겠습니다(당신의 결론만 제외하고요). 그러고 나면 우리 함께 평화의 빵을 나누어 먹읍시다. 아이들이 재잘대는 소리 속에 우리의 젊음을 되살리면서 말입니다.
옮긴이의 말
-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좀 더 단순하게 말해 '왜 사냐'고 묻는다면 바로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출퇴근길에 혼잣말로, 술자리에서 서로에게, 책장을 넘기다 문득 저자에게 평생 수없이 듣고 또 말하기도 한 질문일 텐데 말이다. 20세기 미국을 대표하는 철학자로 손꼽히는 윌 듀런트는 이 책에서 독특한 시도를 한다. 당대의 유명 인사들에게 편지를 보내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 의견을 구한 것이다.
- 우리에게 <철학 이야기>, <문명 이야기>의 저자로 잘 알려진 듀런트는 가톨릭 신자로 태어나 신학대학원에 들어갔지만 사회주의와 신앙을 조화시킬 수 없음을 깨닫고 성직자의 길을 포기한 이력이 있다. 그가 이 책을 쓰고 출간한 1920-1930년대에 서구 세계는 큰 충격의 여파에 시달리고 있었다. 수십 년간의 평화(적어도 유럽 대륙에서는) 이후 발발한 제1차 세계대전의 잔혹함, 그에 이어진 경제 대공황은 서구인들을 트라우마에 빠뜨렸다.
- 신소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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