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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샤오위안] 고양이의 서재 - 어느 중국 책벌레의 읽는 삶, 쓰는 삶, 만드는 삶

일루젼 2024. 7. 12. 2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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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장샤오위안 / 이경민
출판 : 유유
출간 : 2015.01.24


       

무척 행복하게 읽었다. 

 

책벌레는 어디에나 있다. 전 세계, 전 시대에. 

물론 앞으로는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일이지만 그때는 그때의 '책'이 있을 것이다. 

 

여건만 허락한다면 평생 여유롭게 책만 읽으면서 살고 싶었다.

표현이 과거형인 이유는 이제는 책 이외에도 관심이 가는 것들이 더 생겼기 때문으로...

그렇다. 책'만' 읽고 살기는 조금 어려울 것 같다. 그렇지만 책'을' 읽으면서 살아가고 싶다는 마음은 변함이 없다. 

 

지금 나의 책방에 쌓여 있는 책은 간단히 눈대중으로만 잡아도 2만권쯤 된다. 수량도 수량이지만 제대로 정돈이 되어있지 않기 때문에 굉장히 난감한 모양새다. (본문 중 '타인에게 보여줄 수 없는 서재 꼴'에 관한 에피소드가 나오는데, 정말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슬쩍 건드리면 무너지기 때문에 매우 조심해서 들어가야 한다.) 

 

저자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작가란 자신이 경험해 보지 못한 것을 상상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사람들이 아닐까 하고.

정정. 꼭 작가로 한정할 필요는 없겠다. 학자, 영화감독, 소설가, 만화가, 화가 등등 일종의 창작자라면 모두가 해당될 것이다. 

 

경험한 적이 없는 것은 표현할 수도 없다고 말했던 누군가도 있다. (꿈에서 경험한 것까지 포함한다면 이 역시 맞는 말이겠지만)

하지만 나는 자신이 경험한 적 없는 일상을 상상해낼 수 있는 힘이란 것 역시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이를테면 12시간을 연속해 책을 읽는 것을 상상도 할 수 없는 사람과 실제로 행하는 사람, 그리고 그 사이 어느 지점에 있는 사람으로 나뉘는 것처럼.

 

원하는 책을 읽을 수 있는 시간이 생겨서 기쁘다. 

동시에 김겨울처럼 눈 돌리지 않고 쉼 없이 읽어나갈 수는 없어서 조금 슬프다. 

 

먹고, 마시고, 읽는 삶.

요즘의 나날은 그러하다.

지금이 아니었으면 절대 이런 속도로 읽지도, 이런 속도로 치우지도 못했을 테다.

그런 점에서 감사한 나날이기도 하다. 

 

덧) 김용!! 김용!! 다시 달리고 싶다. 하지만 그러려면 치워야 할 책이...

   


   

 

추천사

책 좋아하는 사람의 행복

    

- 7세기의 삼장법사 현장, 13세기 칭기즈칸의 참모 야율초재, 그리고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의 유길준. 활동율초재한 시대도 나라도 분야도 다른 이들의 공통점은? 이들은 각자 다른 이유에서 서쪽으로 갔으며 그 결과 각각 <서유기>, <서유록 西遊錄>, <서유견문 西遊見聞>이 탄생하였다. 잘 알려져 있듯이 <서유기>는 소설문학이고, 야율초재의 <서유록>은 칭기즈칸이 서쪽으로 원정을 떠날 때 종군한 기록이며 <서유견문>은 유길준이 서양 체험을 바탕으로 쓴 근대화 전략과 방책이다.

- 이 세 문헌에 공통되는 '서유'에서 '서쪽'을 '책'(書)으로 바꾸어 '遊見聞'을 책을 유람하며 보고 들은 것이라 풀이할 수도 있겠지만, 격언 풍으로 이렇게 풀이하고 싶다. 유람하듯 책을 읽되 실제로 보고 체험하며 사람에게 들어서 배우는 일도 게을리하지 마라. '서유'와 '견문'으로 나누어 각각 책에서 얻는 것과 체험에서 얻는 것으로 풀이하고 그 둘이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곁들이는 것이다. 철학자 칸트를 흉내 내자면 '체험 없는 읽기는 공허하고, 읽기 없는 체험은 맹목' 쯤이 될 것이다.

- 중국의 과학사학자이자 천문학자인 장샤오위안의 <고양이의 서재>는 그의 서유록이자 서유견문이다. 학문, 독서, 번역, 편집, 서재, 서평 등을 아우르는 책 생태계에서 살아온 그의 삶이 녹아들어 있기 때문이다. 굳이 장르를 말한다면 수필 또는 에세이가 되겠으나 일정한 형식이나 체계 없이 느끼거나 생각나는 대로 쓰는 글, 만필이 가장 어울린다. 그러니 <고양이의 서재>를 읽는 독자들에게도 만독 漫讀, 즉 무언가를 얻거나 채우려 하지 않고 마음의 갈피를 책 문장의 흐름에 내어 맡기는 독서가 제격이다.

- 그렇다고 이 책이 그저 한가로운 소일거리로서의 독서만 말하는 것은 아니다. 과학과 인문학을 넘나들어야 하는 과학사학자 장샤오위안의 학문적 문제의식이 곳곳에 묻어날뿐더러, 한 사람이 학자로 성장하는 과정이 펼쳐지기 때문이다.

 

- 한 사람이 문과와 이과를 아울러야 하는 근본적인 이유를 장샤오위안은 이렇게 말한다. 
"중요한 것은 인간의 고른 발전이란 인간으로서 추구할 만한 목표임에 틀림없다는 사실이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단조롭고 재미없는 인생을 원하지도 않을 테고 원해서도 안 된다. 문과와 이과를 아우르려는 노력은 결코 시간 낭비가 아니다. 시간은 문제가 아니다. 관심이 있다면 시간은 생기기 마련이며, 문과와 이과를 두루 익히겠다는 목표는 평생을 들여 추구해야 하는 것이다." 

- 책에서 가장 깊이 공감하며 무릎을 친 대목은 "지금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날은 하루 종일 바쁘게 바깥을 돌아다니지 않아도 되는 날이며, 하루 종일 서재에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날"이라는 말이다. 책 좋아하는 사람에게 가장 큰 행복이 무엇인지, 이렇게 구체적으로 정확하게 표현하기도 쉽지 않다. 그런 그는 종종 다음 두 구절을 중얼거린다고 한다. '책 있으면 부자, 일 없으면 신선' '안온한 상태를 얻기가 가장 어려운 법'. 

- 빠르게 많이 효율적으로 달성하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오늘날 세태에서 독서도 예외가 아니어서, 독서는 하나의 전략적 행동이 되어 버린 듯하다. "오후의 햇살이 비스듬히 비치는 서재에서 게으른 고양이가 책과 디브이디 사이를 거닐다 앉았다 하며 동서고금의 신기하고 이상한 일들을 생각하는 모습을 언제나 상상"하는 장샤오위안에게 독서란 삶을 풍요롭게, 충만하게 해 주는 반려 伴侶다. 독서의 진정한 가치를 추구하는 많은 독서인들에게 이 책이 바로 그러한 반려가 될 수 있을 것이며, 나만의 '서유견문'을 써 보고 싶다는 의욕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좋은 책은 좋은 책을 낳는 법이니 바로 이 책이 그런 책이다.


표정훈

출판평론가, 한양대 특임교수

 



- 내가 어릴 적에 외할머니는 얼룩 고양이 한 마리를 키우셨다. 그때 마흔이 되면 나도 고양이를 키우겠노라 결심했다. 이름도 미리 지어 두었다. '케플러.' (그렇다. 행성 운동의 세 법칙을 발견한 천문학자의 이름이다) 하지만 쉰넷이 된 지금도 고양이를 키울 틈이 없다. 사실 고양이를 키우겠다는 소망은 이제 접었다. 

- 어떤 기자가 내게 "만약 스스로 묘비명을 쓴다면 뭐라고 쓰겠습니까?”라고 물은 적이 있다. 내 대답은 이랬다.
"그는 늘 자신이 즐거운 고양이이기를 바랐다."
이 바람은 지금도 여전하다. 오후의 햇살이 비스듬히 비치는 서재에서 게으른 고양이가 책과 디브이디 사이를 거닐다 앉았다 하며 동서고금의 신기하고 이상한 일들을 생각하는 모습을, 나는 언제나 상상한다. 고대 이집트인은 고양이가 귀신과 통한다고 믿었다. 
예전의 MSN에서나 지금의 페이신에서나 나의 별명은 항상 '고양이'다.

 

어릴 때 나는 무지몽매했고, 조금 이르게 책 읽기를 좋아하기는 했지만 꿈이나 포부 같은 것이 없었던 것 같다.
나중에 열심히 기억을 되짚어보고서야 내게도 <꿈>이 있었음을 떠올릴 수 있었다. 언제라도 책을 읽을 수 있고, 읽은 책에 대한 나의 느낌을 발표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꿈이었다.
그때의 나는 <서평>이나 <서평가>라는 게 있는 줄 전혀 몰랐다. 그러나 놀랍게도, 수십 년이 지나 이 꿈 같지도 않은 꿈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실현되어 있었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은 대부분 자신의 서재를 갖고 싶어한다. 그러나 서재를 갖기 전부터 독서 인생은 시작되기 마련이다. 독서 인생에서 보면 서재 이전의 시기라 말할 수 있겠다. 오랜 시간이 지난 뒤 돌이켜 보면 나는 선택해야 때 거의 항상 내가 읽은 책에서 답을 얻었다. 




- 진시황은 분서갱유를 일으키면서 모든 이단 사상 혹은 반역에 도움이 될 만한 책을 엄금했다. 그럼에도 장량은 노인의 병서를 전수받았고 진 왕조를 무너뜨리는 중요 인물 중 하나가 되었다. 후세 사람들은 이를 두고 "한밤중 다리에서 젊은이 부르는 소리, 세상에 아직 불타지 않은 책이 있었구나."라고 읊었다. 장량의 이 이야기가 믿을 만한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다만 누구도 세상의 책을 금하고 없앨 수 없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 문화대혁명(이하 문혁)이 시작되자 문화는 거대한 재난을 만났다. '봉자수'(봉건주의, 자본주의, 수정주의를 가리키는데, 이 말이 지금 사십 대 이상의 중국 사람이라면 귀에 익을 것이나 젊은이라면 사전을 뒤질지도 모르겠다)에 중국 전통문화, 서구 문화와 소련·동구의 사회주의 문화가 포함되면서 거의 모든 서적이 '독초'로 분류돼 금서 목록에 올랐다. 지식욕이 왕성한 청소년에게 남은 거라곤 마오쩌둥의 어록과 루쉰의 책뿐이었다. 읽을 책이 없는 그때의 괴로움을 많은 사람이 이야기하곤 한다. 그러나 이제 그 시절도 그리운 풍경이 되었다. 

- 몇 가닥의 통로와 '단선 연결'된 나를 통해 다른 통로들이 서로 이어져 책을 교환했다. 이렇게 한동안 시간이 지나자 나는 문득 새 책을 구하려고 더 이상 애쓸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책들이 모두 내 손을 지나간다는 점을 이용해 나는 '나'에게 빌려주기 전에 '가'의 책을 잠깐 먼저 완독하고, '가'에게 빌려주는 틈을 이용해 '나'의 책을 읽었다. 이런 식으로 꽤 많은 책을 읽을 수 있었다. 그렇게 자유롭게 책을 읽을 수 있던 그 시절은 무척 행복했다. 유일한 아쉬움이라면 체계와 초점이 없었다는 점이다. 있으면 뭐든 읽었다. 그러나 이것도 단점이라고만 할 수 없는 것이, 어린 소년이 이렇게 많은 책을 읽을 수 있었다는 자체가 이미 대단히 좋은 일이었다. 

- 이런 물밑 도서 교환에서는 책이 도는 시간이 굉장히 짧았다. 책 한 권이 손안에 있는 시간은 대충 사흘이었다. 짧으면 하루, 심하면 몇 시간에 불과했다. 그러나 다들 신의를 굳게 지켜 약속을 어기는 일은 거의 없었고, 날을 미루며 책을 돌려주지 않는 일 같은 건 겪어 본 적도 없다. 난 효율적으로 관리하려고 도서 대여장을 만들었다. 누가 누구에게 어떤 책을 빌리고 언제 돌려주기로 했는지 또박또박 기록했다(이 공책의 표시를 보고 어머니는 내가 무슨 위험한 그룹에 참여하고 있는 건 아닌지 걱정하셨다). 요즘만 봐도 친구 사이에 책을 빌리고 돌려주지 않는 일이 일상다반사다. "책 빌려주는 바보, 책 돌려주는 바보"라는 옛말을 들먹이는 사람도 있다. 그러고 보면 당시 어린 동지들 사이의 신의는 얼마나 훌륭했던가! 

- '눈 내리는 밤, 문을 닫고 금서를 읽는 것'은 중국 문인들이 줄곧 사랑해 온 경지다. 수많은 책이 금지됐던 그 시절, 문을 닫고 갖가지 '봉자수'의 '독초'를 읽는 것은 얼마나 자극적인 일이었는지! 이는 우리가 그때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책을 읽은 원인이기도 했다. 난 하루 사이에 톨스토이의 <부활>을, 반나절 만에 레르몬토프의 <우리 시대의 영웅>을 완독했고, 나와 동기들은 조르주 상드의 <안지보의 방앗간지기>를 스물네 시간 동안 다섯 명이 돌아가며 읽는 기록을 세웠다. 내게 배정된 시간은 자정부터 새벽 네 시까지였던 걸로 기억한다.

- 어머니가 가져오는 고전 문학 책은 손에 머무는 시간이 조금 길어도 괜찮았기 때문에 나는 옮겨 적기를 했다. 당나라의 시와 송나라의 사뿐 아니라 반악의 서정부나 같은 장편도 옮겨 적었다. 글자 유신의 애강남부하나 틀리지 않게 적었다. 심지어 붓으로 썼다. 이 책들이 앞으로 다시 출간될 날이 오리라고는, 당시의 우리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으므로.

그러나 몇 년 후 그런 날이 실제로 왔다.  

- 이제 책 읽기는 그렇게 매력적이지 않은 일이 되었다. 책은 대단히 많고 구하기도 쉽지만 책을 읽으려는 열정은 그때에 비하면 한참 못하다. 몰래 금서를 읽었을 때는 어떤 이익도 목적도 없었으나, 책 내용이 머릿속에 깊이 남았고 심금을 울렸다. 이 점은 문화를 독재하던 사람들이 예상하지 못한 결과일 것이다. 

- 이 무렵에 내가 글을 쓰는 데 큰 도움이 됐으리라 짐작하는 일이 하나 더 있다. 어디에서 어떻게 얻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한 번은 <요재지이 聊齋志異>를 구했다. 당연히 나는 호기심에 가득 찼다. 우연히 이 이야기를 외할머니께 들려 드렸더니 외할머니도 무척 기뻐하셨다. 그리하여 나중에는 매일 정해진 시간에 외할머니께 <요재지이>를 이야기로 들려 드리게 되었다.

- 1970년대 중국 장기의 포진 이론은 진작 초급 단계를 지나 있었다. 1957년부터 1962년 사이에 출간된 양관린의 세 권짜리 <중국 상기보 中國象棋譜>는 그 시대 포진 이론의 높은 수준을 보여 주었다(나는 1974년에 나온 4쇄본을 읽었다). 그러나 초급 단계를 지난 포진 이론은 전문가가 아닌 아마추어 기사에게는 재미가 없었다. 너무 담백했다. 현대 포진 이론에서 양쪽이 실수하지 않고 이론대로 장기를 두면 안정적으로 수가 유지되면서 무승부에 이른다. 두 사람 모두 실수를 하지 않으니 당연히 비길 수밖에 없는 것이다. 

- 그러나 <귤중비 橘中秘>와 <매화보> 같은 옛 기보에서 그런 절묘한 포진이 나올 수 있는 이유는 한쪽이 실수를 하기 때문이다. 그 실수가 대개 쉽게 인식되지 않거나 아마추어 기사가 종종 저지르는 것이라 하더라도 말이다. 실수를 상정하는 옛 기보의 이런 전통은 청나라 말기까지 이어졌다. '누군가 실수를 저지르는' 기보는 절륜한 포석 방법 덕에 아마추어 기사에게 훨씬 더 매력적이다. 그리고 이로 인해 이 절륜한 포석을 이끄는 실수는 독자의 머릿속에 더더욱 깊은 인상을 남긴다. 

- 알 수가 없었지만 몇 번을 곱씹어 보던 중에 문득 깨달음이 찾아왔다. 선생은 내게 넌지시 가르침을 주었던 것이다. 서양의 도서에 주의를 기울여 보라고. 그리하여 나는 서구 문학을 열심히 찾아 읽기 시작했다. <장 크리스토프>, <백치>, <우리 시대의 영웅>, <돈 후안>, <아이반호>, <파르마의 수도원> 등등을 읽다 보면 어느덧 한밤중이었다.

- 대학 전공을 정하는 일로 고민할 때도 선생은 내게 가장 귀한 충고를 해 주었다.
그때 주위 사람들은 모두 내가 천생 '문과쟁이'이니 당연히 문과를 지망하리라 믿었다. 반대로 나 자신은 이과 과목을 독학하기 시작하면서 어려움을 겪고 있으면서도 이과에 지망하고 싶었다. 이 독학의 어려움은 스승이 생기면 어떻게든 해결될 것 같았다. 부모님은 문과는 이런저런 화를 불러오기 쉽다고 걱정하시며 이과를 지원하길 바라셨다. 결정을 못한 채 나는 선생을 찾아가 상담했다. 선생은 이과든 문과든 괜찮을 거라고 말씀하셨다. 몇 달이나마 그의 학생이었으니 나에 대해 알고 계실 터였다. 그런 선생이 힘주어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과 계열 학문을 하다가 문과 계열 학문을 하는 건 문제없다. 그러나 문과 계열 학문을 하다 이과 계열 학문을 하는 것은 내 여태 본 적이 없다."

바로 이 말씀 한마디에 난 그 자리에서 이과에 응시할 결심을 했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 되돌아보니 확실히 선생의 말을 반박하는 사례는 본 적이 없다. 그리고 지금까지 문과와 이과를 오가면서 그것으로 내가 먹고살고 있으니 선생의 말씀 한마디에 힘입은 바가 크다고 해야 할 것이다.

- 난 대학부터 대학원까지 베이징에서 지내면서 대략 십여 년간 방학이면 늘 상하이에 가 선생을 만나 몇 시간이고 수다를 떨었다. 선생과의 대화는 환상과도 같았다. 선생은 언제나 날 과거의 세계로 데리고 갔다. 당신을 포함한 모든 사람과 사건을 내키는 대로 기억에서 불러내고 비평하는 그분의 이야기는 시공간을 넘어 끝없이 이어졌다. 중화민국 시기 정계 주요 인물의 사생활부터 지하당까지, 선배 문인부터 상하이탄의 유명한 뒷골목 인물(선생은 예전에 1930년대 상하이 삼대거물 중 하나인 황진룽 黄金榮을 다룬 극본을 쓴 적이 있다)까지 아울렀다.

 

- 여기에 선생에게는 '수재는 군사를 논한다'라는 중국 문인의 전통적인 취미도 있어서 2차 세계 대전에서 미국 태평양 함대의 병력 배치가 어땠는지, 사령관의 이름이나 기함이 무엇이라든가 탑재하는 비행기가 몇 기였고 어떤 모델인지를 마치 집안 살림 말하듯 속속들이 신명 나게 말씀하곤 했다. 선생의 영향으로 나도 전쟁사와 관련된 책을 읽고 모으기 시작했다. 이 역시 내 본업인 과학사 연구와 관계가 있었다. '수재는 군사를 논한다'라는 취미에는 확실히 독특한 맛이 있었다. <전함 지식>, <현대 병기> 같은 잡지가 언제나 잘 팔리는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 선생은 당신 스스로 '다섯 가지 독을 모두 갖추었다'라고 평했다. 그 다섯 가지 독에는 담배와 술과 차가 포함된다. 선생은 대단한 헤비스모커였다. 어떨 때는 담배꽁초로 새 담배에 불을 붙이기도 했다. 점심과 저녁을 먹을 때는 반드시 술이 있어야 했고, 차는 굉장히 진하고 쓰게 마셨다. 내가 뵈러 가면 선생은 항상 이 쓴 차를 내주셨다. 처음에는 쓴맛이 너무 싫었지만 나중에는 점점 익숙해지더니 마침내는 좋아하게 되고 말았다. 하지만 담배와 술은 결국 그분을 해쳤다. 선생은 만년에 후두암에 걸렸고 수술 후에는 성대에서 거의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내가 댁을 방문하면 선생은 나와 글로 대화를 나눴다. 뛰어난 말솜씨를 지녔던 분에게 얼마나 어울리지 않는 일이었는지.

- 대학에 입학했을 때는 마침 사상의 해방기였다. 그 덕에 나도 학교를 다니면서 전공 이외의 책을 많이 읽었다. 내 대학 시절 전공은 천체물리학인데 수업이 굉장히 어려웠다. 특히 첫해는 말도 못 하게 힘들었다. 나는 천문학과 77학번 동기 19명 중에 유일하게 고등학교를 다니지 않은 학생이었다. 그래서 고등학교 교과서를 빌려 보충 학습을 했다. 첫 학기가 끝났을 때 내 고등수학 점수는 65점이었다. 집에 돌아가자 어머니는 뼈만 남은 나를 보고는 내가 계속 버틸 수 있을지 걱정하셨다. 그러나 나 자신은 자신만만했다. 석 달 만에 다른 사람은 삼 년 걸린 고등학교 과정을 마쳤으니 대학 진학 후의 이 정도 차이는 당연히 따라잡을 수 있으리라 믿었다. 

- 2학년이 되자 난 부족한 부분을 완전히 만회했다. 이후 나의 성적은 언제나 9등이나 10등을 유지했다. 그때 나와 함께 9등과 10등을 유지하던 친구는 지금 국가천문대 대장을 하고 있다. 일 년간 고되게 공부한 후 몇 년이 흐르자 공부는 어느 정도 궤도에 올랐다. 그 덕분에 내게도 전공 공부 이외의 일을 할 여유가 생겼다. 장기, 서예, 고전 문학 읽기.

- 한동안 나는 <서상기>에 홀딱 빠졌다. 원나라 왕실보의 <서상기>부터 금나라 동해원의 <서상기제궁조>까지, 원진의 회진시부터 조영치의 <상조·접련화 商調·蝶戀花>까지 갖은 노력을 다해 <서상기> 관련 자료를 모았다. 심지어 원진의 염정시에도 마음이 갔다. 그의 시 중에 "한가롭게 도가의 책을 읽으며 게을리 누운 채 수정 발아래로 머리 빗는 이를 본다.", "쌍문 雙門의 얇은 저고리와 비녀에 비친 그녀의 붉은 뺨을 기억한다네." 같은 구절은 <서상기>의 이야기 원본인 <앵앵전>과 관계가 있다고도 하고, <앵앵전>에는 원진의 자전적인 내용이 담겨 있다고 일컬어졌기 때문이다.

- 전공은 천체물리학이었지만 나는 늘 본업에 충실하지 못하는 고질병이 있었다. 더구나 일찍부터 염정시를 좋아했고 그 사실을 숨기지도 않았다. 처음으로 고전문헌학자 왕피장의 <당인소설>에서 <앵앵전>을 읽었을 때 내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소설에서 "하남의 원진 또한 장생의 <회진시> 60구(30운)에 화답하여" 쓴 시였다. 그 시는 대단히 정련된 장편 오언배율시 五言排律詩로 당나라 사람의 작품 중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것이었다. "낮게 숙인 쪽진 머리는 매미 날개가 움직이는 듯하고, 움직이는 발걸음은 옥가루가 덮인 듯 하구나.", "고운 눈썹 부끄러움에 찡그리고, 붉은 입술 따뜻해 더욱 부드럽다." 같은 구절의 아름다움은 저절로 감탄이 나올 지경이었다. 그리고 "땀은 구슬처럼 방울방울, 머리카락은 흐트러져 푸릇푸릇”, “사향이 밴 옷은 향기롭고, 연지가 남은 베개는 매끄럽구나."와 같은 구절을 읽을 때는 내 가슴도 뛰었다. 마지막 부분의 "바다는 넓어 건널 수 없고 하늘은 높아 오르기 어려워라. 떠도는 구름은 갈 곳이 없고 소사蕭史만이 누대에 있네."에서 보이는 경지는 몹시 훌륭해서 나도 모르게 줄곧 읊게 되었다.

- 이런 마당이니 왕실보의 <서상기>를 손에 쥐었을 때는 당연히 단숨에 완독하고 말았고, 수많은 대목을 암기한 나머지 두 번을 읽을 필요가 없었다. 다만 안타깝게도 내 기억력은 염정을 다룬 부분에만 발휘되었다. 그리고 "떠나며 보낸 고운 눈빛을 어찌 감당할 수 있으리. 나뿐 아니라 철석같은 사람이라도 마음 들뜨고 끌리리라. 뜨락 난간 가까이, 꽃과 버들 아름다움을 다투고, 한낮 뜨락의 탑 그림자는 둥글구나. 봄빛은 눈앞에 있는데 옥 같은 이는 어이하여 보이지 않는가. 이 절이 무릉도원인가 하노라."처럼 아름다운 부분을 암송하는 동안 딱딱한 천체물리학 공식 따위는 일찌감치 머릿속에서 지워졌다.

- 나는 나중에야 <서상기>가 단순히 원나라의 잡극 雜劇에 머물지 않고 중국 고전 문학에서 독특한 자리를 차지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 작품은 당나라의 전기와 시, 송나라의 사, 원나라의 잡극을 아우를 수 있는 시작점이다. 원나라의 잡극 가운데 당나라 전기에서 소재를 얻은 것이 없지는 않지만 최앵앵의 이야기는 꽤나 매력적이어서 이 이야기에서 가지를 친 창작 활동은 그 뒤로도 수백 년이나 이어졌다. 더구나 <서상기>의 문장은 굉장히 고상하고 우아해서 이 작품과 관련된 것은 모두 염정과 우아함의 극치를 이루었다.

- 나는 누구나 청년 시절에는 감동을, 중년 시기에는 그리움을 주는 책을 만날 수 있다고 믿는다. 나에게는 <서상기>가 그런 책이다. 청년 시절의 감동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말했거니와 중년의 그리움은 그 시절에 책을 읽던 내 심정이라고 하겠다. 어떤 이해관계도 없이, 마치 시간이 거꾸로 흐르는 듯 느릿느릿 책을 읽고 깊이깊이 감동하는 그 마음은 겉은 안온해 보여도 속은 거친 들판 같았다. 이제 더는 그런 마음을 만날 수 없다. 

- 난징대학교에서 공부를 하면서부터 내게는 장서 藏書 개념이 생겼다. 문혁은 이미 끝나 수많은 책이 다시 출판되었다. 당시의 나는 천문학과에서 가장 부유한 학생이었다. 기사 시절의 월급을 받으며 대학을 다녔기 때문이다. 월급으로 받는 65위안은 우리 과 청년 강사의 월급보다 많은 금액이었다. 나는 도서 구입이라는 '사치' 행각을 벌였다. 학교 교문 입구의 신화서점 분점이 나의 단골집이었고, 나는 그곳에서 문학과 역사 분야의 책을 대량으로 구입했다. 

지금이야 대학생이 지갑을 열도록 유혹하는 것이 다양하지만 그때만 해도 그런 것이 전혀 없었다. 그러므로 책을 사들이는 나의 행동은 동기들 눈에 이중의 '사치'였다. 책을 구입하느라 열흘 치 밥값을 날린다는 것이 첫 번째였고, 천체물리학을 전공하는 학생이 큰돈을 들여 '상관도 없는' 구닥다리 책을 산다는 점이 두 번째였다.

난징대학교를 졸업할 무렵에는 꽤 많은 책을 가지게 되었다. 베이징에서 대학원을 다니기로 결정되자 나는 모든 책을 베이징으로 보냈다.

- 대학원 입학시험에서 나는 다시 한번 독서, 특히 전공 이외의 독서 덕을 톡톡히 보았다. 처음에는 푸단대학교에서 선진 문학을 전공하고 싶어 열심히 준비했다. 하지만 시험일을 코앞에 두고 내가 지도 교수로 희망한 선생님이 병으로 학생을 받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기숙사로 돌아오자 동기가 내게 말했다.

"천문학 개론과 중국 통사, 고대 국어 세 과목으로 시험 치는 이상한 전공이 있더라. 그거 너한테 딱 맞지 않냐?"

그 말을 듣고 조사를 해 보니 시쩌쭝이란 분이 지도 교수였다. 시쩌쭝 선생님의 성함을 들은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결정을 내리기 전에 우선 우리 과의 부주임인 루양 선생님을 찾아가 의견을 여쭈었다. 루 선생님은 "너한테 딱 맞는 선택을 했구나."라고 말씀하셨다. 루 선생님의 말씀에 따르면 시 선생님은 사 년째 학생을 뽑는데 지난 삼 년간 합격한 사람이 없었다. 난 곧장 지원서를 냈다. 그때가 대학 4학년 1학기였다. 2학기가 되었을 때 내 손에는 합격 통지서가 쥐여 있었다. 

- 시험 전에 나는 시 선생님께 편지로 이 전공을 이과라고 해야 하는지 문과라고 해야 하는지 문의했다. 정치 과목 시험을 칠 때 어느 쪽인지 시험지를 골라야 했기 때문이다. 시 선생님은 내 편지를 읽고 루 선생님께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한다. "이 친구는 꼭 문과 같구먼." 나중에 시 선생님은 나의 고대국어 성적이 그 대학원이 생긴 이래 최고 성적이었고 총점 역시 무척 높았다고 말씀해 주셨다.

- 당시 나는 시 선생님의 학생이 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전혀 몰랐다. 과학사가 무엇인지, 과학사 분야가 어떤지는 더더욱 몰랐다. 알고 보니 시 선생님은 중국 과학사 분야의 권위자였다. 나는 소 뒷걸음치다 쥐를 잡듯 생각지 못하게 훌륭한 분을 스승으로 모시게 된 셈이었다.

- 거의 하루를 다 보내고도 책을 구하지 못했다. 이미 오후 세 시가 넘어선 그때 마침 영화관에 판훙이 주연을 맡은 영화 두십랑이 걸려 있는 걸 발견했다. 영화를 보기로 하고 표를 산 다음 상영 시간까지 아직 삼십 분 정도가 남은 참에 슬슬 거리를 돌아다니다가 길 한구석에서 몹시 작은 중국 서점 영업소를 발견했다. 놀랍게도 그 서점에서 당종의 그 책을 찾았다. 오래된 책이라 할인 중이었지만 책 자체는 새것이었다. 그 일 후 생각해 보곤 한다. 만약 영화를 보기로 하지 않았다면 그 책은 사지 못했겠다고.

- 정가 75위안이라는 높은 가격 탓에 감히 살 엄두도 내지 못했다고 앞에서 잠깐 언급했던 <타임스 세계사 지도>는 그로부터 십 년 후 마침내 손에 들어왔다. 이때 이 책의 정가는 240위안이었다. 서점에서는 1985년에 인쇄된 책 위에 가격표만 바꿔 붙였지만 난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이 책을 샀다. 집에 돌아와 책을 가지고 놀고 있자 화려한 도판에 눈을 빼앗긴 아홉 살 난 딸아이가 책 쪽으로 다가왔다. 내가 아이에게 이 책이 예전에는 75위안이었다고 말하자 아이는 이렇게 말했다. "아빠는 바보야. 75위안일 때 사지 않고 240위안이나 된 지금 산 거야?" 나는 그때 75위안은 두 달 치 밥값이었지만 지금 240위안은 내 한 달 월급에서 그리 큰돈이 아니라고, 그때...

 

서재의 생명은 주인에게 달렸다.
주인이 진심으로 책을 사랑한다면 서재에도 생명이 깃든다.

 

- 1986년, 박사 과정의 수업을 마치고 논문 작성으로 들어서면서 상하이에 남을 수 있게 되었다. 이해에 딸아이가 태어났다. 내 집이 생기자 난 진짜 서재를 만들기 시작했다. 베이징에서 지낸 몇 년 동안 나는 꽤 많은 책을 모았다. 그 책 가운데 아내와 겹치는 건 친구들에게 나눠 주었고 나머지는 상하이로 보냈지만 그러고도 상당히 많은 책이 남았다. 

- 그때 상하이의 내 집은 방 하나 거실 하나짜리로 방은 16제곱미터, 거실은 10제곱미터에 베란다가 있었다. 그다지 크지 않은 집이었지만 그 시절의 젊은 사람으로서는 그 정도면 굉장한 호사였다. 나는 16제곱미터의 방 한쪽 벽을 내 책장으로 꾸몄다. 책장 설계에도 공을 들였다. 대부분의 책장은 오래 쓰면 나무판의 가운데가 처지기 마련이다. 사람들은 나무가 튼튼하지 못한 탓이라 여기고 더 두꺼운 나무판을 써 보지만 결과는 마찬가지다. 나는 집성목을 썼다. 집성목판으로 틀을 만들고 양옆은 합판으로 막았다. 그렇게 만든 책장에는 원목으로 만든 책장보다 훨씬 많은 책을 꽂을 수 있다. 

- 내 서재를 다룬 책은 중국뿐 아니라 타이완과 홍콩에서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했다. 그 덕에 중앙방송에서도 내 서재를 촬영하러 온 적이 있다.
이동 책장을 설치하자 19제곱미터밖에 되지 않는 내 서재는 이만 권의 책을 두고도 전혀 꽉 차 보이지 않았다. 사실 이런 레일식 이동 책장은 대단히 흔한 디자인이지만 집에 설치해서 사용하는 사람이 적을 뿐이다. 

- 진정한 의미의 서재를 갖게 된 뒤 나는 더 많은 책을 모았다. 며칠에 한 번씩 서점에 가서 책을 찾는 지경이었다. 한 번은 작은이모에게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여자들이 옷을 쇼핑하는 게 내가 책을 사러 서점을 다니는 것과 비슷하지 않을까? 예를 들어 오늘처럼 서점을 몇 군데나 돌았는데도 좋아하는 책을 전혀 구하지 못하면 돌아오는 길에 다리도 유난히 뻐근하고 온몸에 힘이 없더라고." 그러자 작은이모는 정말 딱 맞는 비유라며 이렇게 대답했다. "우리 여자들이 옷을 살 때도 그래. 아무것도 못 사고 돌아올 때는 다리가 말도 못 하게 무거워. 그렇지만 좋아하는 옷을 샀을 때는 돌아올 때도 전혀 피곤하지 않고 집에 와서도 거울 앞에서 옷부터 입어 보면서 혼자 신나 하지."

- 내 서재에는 삼만여 권의 책이 있어 꽤 많은 편이지만 나는 나 자신을 장서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대체로 장서가가 신경 쓰는 판본이나 가치 등에 난 아무런 관심이 없다. 누군가 '애서가'라는 말을 하던데, 나는 그 말에 더 맞는 것 같다. 다만 판본 같은 데에는 욕심이 없지만 책의 상태에는 무척 신경을 쓴다. 그래서 서점에서 책을 살 때면 쌓인 책을 몽땅 살펴본 다음 깨끗하고 장정이 멀끔한 책으로 고르곤 한다. 사 왔는데 책의 상태가 좋지 않을 경우에는 내 손으로 직접 수선하기도 한다. 

- 그 외에 복사한 책도 있다. 책값이 너무 비싼데 몹시 좋아하거나 필요한 경우에는 책을 복사해서 장정했다. 인쇄술이 갓 발명되었을 때는 이런 일이 흔했다. 그때는 책을 산다고 하면 책의 알맹이만 사는 것이었고, 그렇게 내용물만 산 다음 장정을 맡기고 표지를 만들었다. 장정과 인쇄는 나중에 합쳐진 셈이다. 

- 학술 연구에 쓸 책을 빼면 대부분의 책은 내 관심과 애정에서 비롯되었다. 내 서재에서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는 분야는 예술사다. 한동안 나는 예술사에 흠뻑 빠졌고 갖은 노력을 기울여 예술 분야를 다룬 사료 史料 총서를 구해 읽었는데, 이는 순전히 나 자신의 흥미 때문이었다. 난 이런 충동을 무척 소중하게 생각한다. 중년으로 접어들수록 더욱 귀하게 느껴져서 이런 충동이 일어날 때마다 소중히 하려고 한다. 젊을 때는 지식욕이 강하기 때문에 이런 걸 모른다. 인생에는 흥미를 느끼면 무엇이든 관련서를 찾아보는 단계가 있다. 영화 <버킷리스트: 죽기 전에 꼭 하고 싶은 것들>에 이런 말이 나온다. "발기했을 때는 낭비하지 마." 독서의 흥미라는 문제에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겠다. 마치 내가 어릴 때 탁자에 언제나 장기판을 펼쳐 놓았다가 밤에도 한 수 놓고 싶으면 벌떡 일어나 기어가서 장기를 두었던 것처럼. 

- 어떤 일에 흥미가 생기고 그 분야에 좀 더 깊이 들어가고자 할 때는 관련된 책을 읽는 편이 좋다. 이런 방법은 책상물림 같지만 제법 유용하다. 전에 나는 장기에 빠지자 수많은 기보를 모았다. 고대부터 현대까지, 심지어 장기의 역사를 다룬 책까지 수집했다. 나중에 영화를 좋아하게 되었을 때는 영화를 좀 더 이해하고 싶어서 관련된 책과 잡지를 모아 읽었다. 이는 학문을 하는 원리와 같다. 

- 지금까지 독서는 나의 낙이었다. 내 인생의 정신적 지주였다. 나는 독서를 통해 나 자신을 지탱하고자 했다. 독서는 나 자신이 진실로 꽉 차 있다고 느끼게 해 주었고 허황되지 않았다. 다른 사람에게도 독서가 이런 의미인지 모르겠다. 적어도 내게는 그랬다.

- 인용한 부분이 있어서 원문을 찾아야 했다. 관 교수가 전자책으로 검색해 보았지만 찾지 못했다. 나는 그 부분이 왠지 인상에 남아 집으로 돌아와 찾았고, 놀랍게도 내게 마침 그 책이 있어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 나는 다른 사람에게 책을 빌려주지 않는 편이다. 돌려받지 못할까 걱정하는 탓이다. 책에 대한 나의 애정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책을 빌려 가고도 신경 쓰지 않고 아무렇게나 굴리다가 책을 잃어버리면 없어졌나 하고 만다. 잡지사의 편집자였던 작은이모가 만상창간호를 빌려 간 적이 있다. 나는 다소 망설였지만 어쨌든 빌려주었다. 두 달이 지난 뒤 아무래도 느낌이 이상해서 지펑서점 季風書園에 가 창간호를 다시 샀다. 예상대로 어느 날 작은이모가 내게 말했다. "전에 빌린 <만상> 말야. 잃어버렸어. 정말 미안해." 이 얼마나 간단한가. 내 진작 그럴 줄 알고 책을 한 권 더 사 두었단 말이지.

- 난 깔끔하게 정리된 걸 좋아한다. 서재든 컴퓨터든. 이 버릇의 기원은 내가 전기 기사로 일할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내 서랍은 공장에서 가장 깔끔했다. 난 공구를 용도별로 나누길 좋아했다. 큰 것부터 작은 것까지 정리 완료. 지금도 내 서랍 가운데 하나에는 공구만 담겨 있다. 그리고 이 버릇 덕분에 책이 어지럽게 널린 적이 없다. 컴퓨터와 서재의 상태는 대체로 비슷하다. 모은 재료는 각각 다른 폴더를 만들어 정리하기 때문에 필요한 것을 찾는 속도가 빠르다. 

- 최근 우리 집에는 몇 가지 우스운 일이 연달아 일어났다. 아내와 작은이모가 놀러 나가기로 했다. 아내는 나가기 전에 서재에 들러 길에서 읽을 책을 뽑아 갔다. 공교롭게도 나간 후에 내가 그 책이 필요해졌고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자 아내에게 전화를 걸어 혹시 그 책을 가져갔는지 물었다. 아내가 놀라 말했다. "삼만 권이 넘는 책 중에 한 권이고, 이제 겨우 몇 시간 지났는데 대체 어떻게 알았어?" 며칠 전에는 아내가 '웨슬리 시리즈'의 한 권을 가져갔는데 마침 '웨슬리'의 자리가 빈 걸 본 나는 아내에게 문자 메시지를 보내 책을 가져갔는지 물었다. 나중에 작은이모가 말했다. "장샤오위안 책은 집어 가기 힘들어. 감시 카메라처럼 수시로 살펴본다니깐."

- 책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의 책장을 보는 일이 무척 즐거울 것이다. 하루 종일 나가지 않아도 된다면, 나는 대부분의 시간을 서재에서 보낼 것이다.
난 책벌레가 된 건지도 모르겠다.

- 새 한자를 배우기 전에는 지난주에 배운 한자를 확인시켰는데 평균 다섯 글자는 까먹었다. 그렇게 수십 쪽을 공부하고 나자 아이는 보통 어른처럼 신문을 읽고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초등학교에 들어간 딸아이가 다른 아이와 달랐던 점은 입학했을 때 이미 일반 성인 수준의 독해능력을 가졌다는 점이었다. 나의 이런 시도는 딸아이에게 부정적인 영향은 전혀 끼치지 않았다. 그저 동년배의 아이들이 텔레비전을 볼 때 딸아이는 책을 읽었을 뿐이다. 

- 그러면서 딸아이는 초등학교 입학과 동시에 서재에 들어와 볼 만한 책을 고르기 시작했다. 딸아이가 책을 내가는 일은 적은 편이었지만 이 책 저 책 살펴보기는 했다. 난 선정적인 책도 딱히 숨기지 않았다. 십 년 전 지금의 집으로 이사 온 후 딸아이는 자기 방에도 책장을 놓고 싶다고 말했다. 그리고 어느 날 자기 책장을 보며 만족스러운 듯 "나한테도 이렇게나 책이 많구나."라며 중얼거렸다. 나중에 딸아이는 건축을 공부하고 싶다고 했고 나는 아이에게 건축학 관련서를 찾아 주었다. 아이가 그 책들을 자기 책이라고 믿어 버리는 바람에 여전히 그 책들을 포기할 수 없었던 난 어쩔 수 없이 책을 한 권씩 더 장만했다. 

딸아이는 내게 책에 대한 탐욕을 물려받았고, 아이의 독서 취향은 다시 내게 영향을 미쳤다. 예컨대 '웨슬리'에 대한 관심도 딸아이의 추천에서 시작되었다.

- 홍콩의 저명 작가 니쾅의 작품을 처음 접한 것은 베이징에서 공부할 때 망년지교인 한 노선생에게서 빌린 홍콩판 <진융의 소설을 읽다 我看金庸小說>였는데 그 뒤를 이은 <진융의 소설을 두 번째 읽다>, <진융의 소설을 세 번째 읽다>에서 <진융의 소설을 열 번째 읽다>에 이르기까지 열 권을 단숨에 읽어 치웠다. 그러고는 상하이에 가져와 어머니께도 보여 드렸다. 이 가운데 내게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그가 쓴 대련 對聯이었다. "언제나 장처 張徹를 위해 극본을 썼고, 일찍이 진융을 대신해 소설을 썼다네."

(리뷰자 주 : '진융'은 '김용'이다!! 한국에도 니쾅의 작품들이 번역되어 나오면 좋겠다...!!)


- 서점에서 '웨슬리'는 보통 '과학 소설'로 분류되지만 사실 각 이야기의 내용은 무협, 추리, 모험, 보물찾기, 로맨스, 폭력조직, 사이비과학, 역사 미스터리, 정치 혼란, 민간 전설 등 대단히 다양하다. 거의 모든 대중적인 읽을거리에서 독자가 관심을 가질 만한 내용은 다 나온다고 보면 된다. 보통 '과학소설'이라고 하면 반드시 있어야 할 '과학'과 '상상'이라는 요소로 보면 '웨슬리'는 상상이 과학보다 많고, 형식이라는 면에서 봐도 과학 소설로 분류하기가 상당히 억지스럽다. '웨슬리'의 이야기는 외계인, 시공 변환, 타임터널, 바이오테크놀로지 등의 현대 과학이나 신선, 불로장생, 풍수, 전생과 내세, 영혼불멸, 예지 등의 중국 고대 전설에서 영감을 얻기도 한다. 니은 '과학'에 속박되지 않은 채 과학에서 영감을 얻는 동시에 사이비 과학이나 신비주의도 기꺼이 받아들인다. 

- 예전에 크게 성공을 거둔 영화 <매트릭스> 시리즈에서 나온 두 가지는 '웨슬리'에도 진작 쓰였다. 하나는 인간이 외부에서 모든 걸 통제하는 환경(영화에서는 '매트릭스')에 빠진다는 설정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의 영혼이 빠져나와 순식간에 공간을 넘나드는 설정이다(중국 신괴소설 神怪小說에서 자주 ...)

- 서재의 책이 풍요로워지면서 활자 중독증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 장서가 늘어나는 이유가 오로지 내 탓만은 아니다. 중국의 도서 출판 종수도 점점 늘어났다(2003년 19만 종, 2004년 21만 종, 2009년 현재 25만 종). 더불어 내가 책을 손에 넣기는 점점 쉬워졌다. 월급도 올랐고 출판사 친구도 늘어난 데다 서평을 쓰면서 신문사나 잡지사에서도 내게 책을 자주 보내줬다. 새 책이 나오면, 나는 보통 서점에 들러 차례와 머리말, 후기나 옮긴이 후기 같은 걸 본다. 그리고 내 장서인을 찍고 책 꼴 어딘가에 문제가 있으면 손을 본다. 그러나 새 책이 늘어나는 속도가 갈수록 빨라지면서 내가 서점에 들르기도 전에 책상에 새 책이 한 무더기 쌓이기도 했다.

- 내게는 옛사람 같은 '세 곳 독서三上讀書'라는 나쁜 버릇이 있다. '세 곳'이란 침대, 화장실, 말이다. '말'은 현대인에게는 자동차나 비행기 같은 교통수단이라고 할 수 있겠다. 나의 '활자 중독증'은 처음에는 화장실과 말에서 나타났다.

- 내게는 집을 나서기 전과 화장실에 가기 전에 읽을 책을 찾는 버릇이 있다. 전에는 책을 고르는 데 망설이지 않고 금세 한 권을 뽑아 들었다. 책이 늘자, 특히 서점에서 직접 살펴보지 못한 책이 늘자 집을 나설 때나 화장실에 가기 전에 책을 찾으며 망설이게 되었다. 이 책은 서평을 써 주기로 했으니 먼저 봐야 하지 않나? 그런데 이 책은 내가 오래 찾던 책이고 어제 겨우 도착한 건데 대체 얼마나 기다린 책이냐. 아, 이 책은 지금 보니 굉장히 재미있네? 왜 여태 먼저 읽지 않았지? 이런 식이다. 도대체 어떤 책을 골라야 한단 말인가? 어떨 때는 반나절을 망설이다 결국 아무거나 집기도 한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야말로 '활자 중독증'의 전형적인 증상이다.

- 여기에 방증이 두 가지 더 있다.
첫째, 전에 진나라 하증의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다. 그는 하루에 만금을 쓰면서도 젓가락 둘 곳이 없다고 했단다. 하증을 묘사하는 이 말은 귀족의 사치한 생활을 가리키는 예로 여겨져 왔다. 하증이 왕이 먹는 것보다 더한 산해진미를 추구했다는 말도 있다. 식탐이 있는 사람일 것이다. 그러나 이제 '활자중독증'이라는 입장에 서서 생각해 보면 하증은 그저 '요리 중독증'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매일 끼니마다 한 상 가득 온갖 고량진미를 마주한다면 당연히 젓가락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모를 것이다.  

- 지금 사는 집으로 막 이사 왔을 때 내 움직이는 책장에는 책을 채우려면 한참 걸릴 듯한 너른 공간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어디든 가득 차서 요 몇 년 전에는 벽에도 책장을 놓은 데다 딸아이의 방까지 침범한 상태다.

- 책에 대한 탐욕이 늘자 수많은 좋은 책을 점점 더 챙기지 못하게 되었다. 책상 위에 봐야 할 책이 한 무더기 쌓인다. 몇 달이 지나서도 내가 그 책들을 보지 못하면 그 책들은 다른 새책 무더기에 자리를 내주게 된다. 얼마 전에 책을 정리하다 이십 년 전에 보고 싶다고 말했던 책을 발견했다. 그 책은 이십 년이 지난 지금도 읽지 못했다. 정말이지 낯부끄러운 버릇이다. 딸아이에게도 몇 년 전부터 이런 증상이 나타나고 있다. 보겠다고 하던 책을 한쪽에 둔 채 두 학기가 지나도록 보지 못하고 있다. 아이 말로는 바쁘단다. 요즘의 생활 리듬이 몹시 빠르다는 것은 확실하다. 이러다가는 보고자 하는 다수의 양서를 전혀 보지 못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 1986년 전후, 내 학문 인생은 바야흐로 '다산' 시기로 접어들었다. 이 시기 초반 몇 년 동안 나는 유난히 논문 쓰기가 좋았고, 그 덕에 적잖은 논문을 발표했다. 상하이 생활 중 초창기의 두 집에서 살 때다. 정말 그리운 시절이다. 조용해서 더 많은 시간을 나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 온전히 쓸 수 있었다.

- 누군가 일찍이 내가 연구하는 학문을 네 글자로 개괄해 보라고 한 적이 있다. 나는 '침실'과 '노대'라고 대답했다. '침실'은 성학 연구를 가리킨다. 침실은 보통 남녀가 사랑을 나누는 곳이니까. '노대'는 천문학을 말한다. 노대에서는 천문 현상을 관측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물론 농담이다. 그러나 천문학사와 성학사는 분명히 내 연구 분야다. 다만 중국 고대에는 '노대'라는 말이 남녀의 성애를 지칭하기도 했다는 건 밝혀 두고 싶다.

- 그리고 이때 나의 독서에 변화가 생겼다. 이전의 독서는 대부분 나 자신의 흥미에 따랐다. 그러나 이 시기에는 학술 텍스트를 쓰다 보니 논문과 관련된 문헌을 조사하고 열람했고, 흥미와는 거리가 아주 먼 것도 읽었다. 어쨌든 학문을 하는 게 아닌가. 흥미와 동떨어졌어도 읽어야 했다. 물론 그렇더라도 관심사 위주의 독서는 유지한 상태였다.

- 일찍이 나는 몇 달의 시간을 들여 <쐐기 문자 천문표 Astronomical Cuneiform Texts>를 연구한 적이 있다. 몹시 고된 일이었지만 수확은 상당히 컸다.

- 베이징에서 대학원에 다닐 때는 은사인 시쩌쭝 선생님을 따라다니며 보조를 하곤 했다. 선생님은 강의를 하시고 시간이 나면 학계 선배들의 여러 재미있는 일화를 들려주셨다. 나는 이야기에 푹 빠져 새로운 세계를 발견하기도 하고 동경하는 마음에 어쩔 줄 모르기도 했다. 어느 날 선생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어떤 선생이 나한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네. '내 평생의 공부는 책 몇 권에서 나온 거야'라고 말일세." 처음에 그 말을 들었을 때는 과장이 심하다고 생각했다. 내가 언제나 진심으로 신봉하는 '박학다식'과는 너무나 어울리지 않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선생님은 다시 말씀하셨다. "그런 책이라면 당연히 학문의 한 분야에서 기초를 닦게 할 수 있는 책일 테니 일반적인 부류와는 비교할 수 없겠지." 나는 냉큼 공손히 여쭸다. "그럼 저희 천문학사 분야에서는 어떤 책이 그렇다고 할 수 있습니까?" 선생님은 잠시 고민하시고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노이게바우어 Otto E. Neugebauer의 <고대 수리천문학사 A History of Ancient Mathematical Astronomy>라면 아쉬운 대로 괜찮겠구먼."

학문 초심자였던 탓에 향학열에 불타올랐던 난 당장 그 다음날 대학원 도서관(지금까지도 과학사 전문 도서관으로 가장 완비된 최고의 장소다)으로 달려가 노이게바우어의 <고대수리천문학사>를 빌렸다. 두 권의 텍스트와 한 권의 도판서로 이뤄진 엄청난 책이었다. 다 읽을 수 있을지 어떨지도 가늠하지 않고 무작정 책에 덤벼들었다. 

- 노이게바우어의 이 책에는 바빌론 천문학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부분이 있었고, 거기에는 언제나 'ACT'로 축약 표기되어 인용되는 문헌이 있었다. 자주 이 약어를 보다 보니 이 문헌이 어떤 것인지 궁금해졌다. 그 문헌이 <쐐기 문자 천문표>이고 노이게바우어 본인이 편집해 1955년 런던에서 출간했다는 사실은 조사하여 알게 되었다. 선생님들은 항상 '일차 문헌'의 중요성을 강조하셨지만, 예전에는 중국 학자가 서양의 일차 문헌에 접근하기 어려웠던 까닭에 서양 천문학사를 연구하는 이가 몹시 적었다. 그런데 지금 내가 찾은 이 <쐐기 문자 천문표>는 두말할 필요 없는 최고의 일차 문헌이었다. 나는 호박이 넝쿨째 굴러 들어왔구나 하는 심정으로 다시 대학원 도서관의 서고를 뒤졌고, 마침내 그 책을 찾아내고야 말았다. 역시나 헝겊으로 양장된 엄청난 크기의 세 권짜리 책이었다. 이미 누렇게 바랜 도서 대여 카드는 이 책이 1956년이 입고되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그리고 삼십여 년 이래로 내가 이 책의 첫 독자였다. 

- 고대 바빌론은 서아시아의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 유역으로 지금의 이라크 지역이며, 옛날에는 메소포타미아라고 불렸다. 이 일대의 문명은 기원전 4000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가 수메르인, 그 이후의 아카드인, 아시리아인, 칼데아인이 이룩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기원전 330년에 이 지역을 정복하고 기원전 323년에 사망하자, 그의 부하들은 한순간 활짝 핀 꽃과 같던 이 대제국을 갈가리 찢어 나눠 가졌다. 그리고 이 지역에는 셀레우코스 왕조가 시작되었다. 칼데아인의 점성학과 천문학은 유럽에서 일찍부터 대단히 유명했지만, 이는 그저 이제 겨우 백 년쯤 되는 고고학 연구로 드러난 사실 때문이다. 기원전의 마지막 몇 세기 동안 고도로 발달한 수리천문학 체계는 메소포타미아에 있었다. 이미 발견된 천문학의 원시 문헌의 절대다수는 셀레우코스 왕조 시기에 만들어졌고, 이 시기는 중국의 전국 시대 후기에서 서한 말에 해당한다. 서양 과학사에서는 무척 중요한 '그리스화 시기'에 속한다.

- 이 책은 이해하기도 어려웠지만 급하게 읽을 필요도 없었다. 대체 그때 내가 무슨 마음으로 '양동 작전'(당연히 발등의 불은 박사학위 논문 준비였다)까지 써가면서 그 책들을 파고들었는지 지금도 잘 모르겠다. 그저 순수한 호기심이었을 것이다.

- 이 천문표를 열심히 연구하면서 나는 무척 독특한 느낌을 받았다. 그 허름한 집에서 나는 이천여 년 전의 바빌론 점성학자들을 생각했다. 아마도 무술인 巫術人(고대 중국식으로는 여성이라면 무쯔, 남성이라면 격이다) 일 그들도 나처럼 이 표를 연구했겠지. 내가 바빌론 왕실의 견습 박수이고 진짜 박수가 되기 위해 훈련을 받고 있는 거라고 상상하자. 이천여 년 전 사람도 이해할 수 있었으니 나도 좀 더 노력하면 이해할 수 있을 거야. 


- 역대 천문대장은 모두 나의 재택근무를 특별히 허가해 주었다. 그러나 엄격하게 이 일을 따지고 들며 "누가 장샤오위안에게 출근하지 않아도 된다고 허락했느냐?"라고 묻는 사람이 많았다. 천문대장이 그랬다고 대답하면 정말 천문대장 사무실로 찾아가는 사람도 있었는데, 그러면 역대 천문대장들은 모두 그게 사실이라고 확인해 주었다. 그중 한 천문대장은 "매년 그렇게나 많은 논문을 내는 것만으로도 장샤오위안이 열심히 일하고 있다는 건 충분히 증명되고도 남습니다."라고 말해 주기도 했다. 당시 젊었던 나는 항상 길을 걸으며 책을 읽곤 했다. 우리 천문대의 허먀오푸 何妙福대 장은 길에서 나와 마주친 세 번 모두 내가 걸으며 책을 읽는 걸 보고는 나중에 나를 불러 안전에 유의하라고 주의를 주었다. 허 대장은 이후에 천문대에서 장샤오위안은 전혀 게으름을 피우지 않는다, 내가 길에서 그 사람을 세 번 봤는데 매번 책을 읽으며 길을 가더라고 말했다고 한다. 

- 내가 이름을 알리게 된 책도 천문대에서 지낸 몇 년 사이에 완성되었다.
대부분의 사람에게 책의 집필은 대단히 고통스러운 일이다. 오랜 시간을 투자해야 하고 뇌의 노동이라는 게 그렇게 녹록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책을 쓸 때는 집 안이 고요하고 정적에 휩싸여야 한다. 내가 당나라 시인 노조린의 시에서 이 구절을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쓸쓸하고 고요한 구석의 집. 해마다 언제고 시렁 가득 책뿐. 오로지 남산의 계화꽃잎만이 옷자락 사이를 팔랑팔랑." 이 구절이 묘사하는 정경은 쓸쓸할 정도로 고요해서 책을 읽고 쓰기에 좋은 상태다. 천문대는 내게 그런 환경을 제공했다. 

- 집필 과정에서 느낌이 가장 좋았던 책은 <천문학의 근원 天學眞原>과 <성이라는 장력 아래의 중국인>이다. 외부의 간섭을 전혀 받지 않은 채로 쓸 수 있었던 까닭이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나 자신의 서재를 갖게 된 이후 나는 여름이면 방바닥에 돗자리를 펴고 방석에 앉아 책을 읽다가 졸리면 그 자리에서 잠이 들었다. 글을 쓸 때는 컴퓨터 앞으로 기어 올라가 썼고 언제든 졸리면 오 분쯤 마음대로 졸았다. 그렇게 자고 일어나면 정신이 반짝반짝해졌다. 이 두 권의 책은 그런 상황에서 써냈다.  

- 지금까지 누구도 감히 과학출판사에 이렇게 쓴소리를 한 적이 없는데, 장샤오위안이 그 출판사를 위협해서 돈을 받아냈다며 속이 시원하다고 말했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대학원 동기의 남편이 과학출판사의 편집장실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는 내 편지를 보고 바로 자기 아내에게 보여줬고 아내인 그 동기는 그 편지를 대학원으로 가져왔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나는 '악명'을 떨치게 되었다. 좋게 해석하는 사람은 내가 자신의 지적재산권을 지켰다고 말했고, 나쁘게 해석하는 사람은 내가 돈에 집착해서 기껏 자기 책을 팔아 줬는데도 트집을 잡아 돈을 뜯어냈다고 말했다.

- 이런 상태에 염증을 느끼면서 나는 학술성과는 거리가 먼 글을 쓰는 일이 잦아졌다. 내 독서에는 여전히 내 취향과 다른 것들이 있다. 서평이나 서문, 비평 혹은 추천사 등을 써야 하는 경우 어쨌든 책을 읽어야 쓸 수 있으니까. 어떤 출판사에서는 내 덕에 많은 책이 상하이 시의 지원을 받았다며 내 추천이 꽤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 나는 책의 서문을 쓰기 시작했고 이따금 이름을 걸고 편집을 주관하기도 했는데 이런 일은 젊었을 때는 말도 안 된다고 비난하던 짓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이런 일들이 많은 경우 다른 사람을 위해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안다. 그 다른 사람들은 이런 일을 필요로 하며, 이런 일에는 여러 사람이 얽히기도 한다. 지금 젊은 학생 시절로 돌아간다면 나는 그때처럼 분노하지 않을 것이다. 이제 나는 적지 않은 책의 서문을 썼고, 기꺼워하면서 이 일을 할 때도 있다. 

- 몇 년 전 언론 인터뷰에서 청소년 시절의 꿈이 무엇이었는지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난 순간 뭐라고 대답해야 좋을지 몰라 망설였다. 어릴 때 나는 무지몽매했고, 조금 이르게 책 읽기를 좋아하기는 했지만 꿈이나 포부 같은 것은 없었던 것 같다. 나중에 열심히 기억을 되짚어 보고 나서야 내게도 '꿈'이 있었음을 떠올릴 수 있었다. 언제라도 책을 읽을 수 있고, 읽은 책에 대한 나의 느낌을 발표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꿈이었다. 그때는 '서평'이라는 게 있는 줄 전혀 몰랐다. 그러나 놀랍게도, 수십 년이 지나 이 꿈 같지도 않은 꿈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실현되어 있었다. 요 몇 년 사이에 나는 매년 수십 종의 서평과 추천사를 쓰고 있고, 심지어 2006년에는 중국 도서평론학회와 전국의 스물일곱 군데 관련 매체에서 뽑은 전국우수 서평가가 되었다.

- 서평가라는 이름 외에도 신문 서평란 편집자라는 직함도 있다. 팔 년 동안 난 줄곧 <문회독서주보 文匯讀書週報>의 과학 문화란 편집을 책임져 왔다. 다른 편집자와 마찬가지로 작가에게 서평 원고를 청탁하고 원고 독촉도 한다. 이런 이중 역할은 꽤 재미있다.

- 서평을 쓸 때 서평가가 자기 돈을 주고 해당 책을 사야 그 서평이 독립적이고 '깨끗하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 출판사에서 증정하는 책으로 추천의 글을 쓰거나 평론하는 것은 믿을 수 없다고도 한다. 이 생각은 유치하다. 서평가가 어떤 방식으로 서평을 쓴 책을 손에 넣었는지는 서평이 독립적인지 읽을 만한지와 하등의 관계가 없다. 출판사에서 좋은 책을 보냈다 치자. 그 책을 돈을 주고 사지 않았다고 해서 명백하게 좋은 책을 추천하지도 않고 평론도 쓰지 않는다니 말이 되는가? 출판사에서 보낸 책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당연히 추천도 평론도 쓰지 않으면 된다. 나는 보통 그렇게 한다. 내가 쓰는 대부분의 서평이 칭찬인 건 인정한다. 하지만 비난하는 글도 있고 서평 자체를 거절하기도 한다. 대체로 언론과 출판사에서도 나를 잘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내가 쓰고 싶지 않아 하는 서평은 억지로 권하지 않는다. 

- 사실 내가 서평을 쓰는 데에는 약간의 사심이 깔려 있다.
우리는 늘 세상이 참 경박하다며 한탄하지만 솔직히 수많은 사람이 이런 경박을 즐긴다. 이 화려하면서도 번잡한 세상에는 유혹도 있고 만족도 있으니까. 나도 나 자신이 보통 사람이라는 점을 알고 있다. 그저 인간일 뿐이고 세속을 뛰어넘을 수 없는 내게 조금의 경박도 없다고 하면 그건 거짓말이다. 이삼십 년 전 경박하지 않았던 나는 온전히 책에 몰두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속됨을 버릴 수 없다. 나 자신이 책에 몰두할 수 없는 데에는 일이 바빠서라든지 하는 여러 가지 이유를 찾을 수 있다. 그러나 반성해 보자면 유혹을 거절하지 못한다든가 게으름을 극복하지 못한다든가 하는 중요한 원인이 있다. 어차피 그렇다면 누군가 내가 게으름을 떨칠 수 있도록 독서를 독촉해 준다면 기쁜 일이 아니겠는가.

- 다만 '이런 경박한 세상' 어디에서 독서를 독촉해 줄 사람을 찾을 수 있을지가 문제다. 그것도 오랜 시간 동안 지속적으로 해 줄 사람이! 내게 서평을 의뢰하는 편집자들은 언제나 내게 책을 보내 주고 나와 책에 대해 토론하고 주제를 고르고 원고 마감일을 어기면 재촉함으로써 내가 어쩔 수 없이 항상 책을 읽도록 해 준다. 그들이야말로 내가 게으름을 극복하고 책을 읽도록 도와주는 사람이다.

- 좋은 서평에는 세 가지 의무가 있다. 첫째, 책을 소개한다. 이 점은 책을 읽고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다. 둘째, 책을 평가한다. 책을 적절한 배경에 놓고 평가하는 일인데 일부 사람은 해내지 못한다. 서평가는 해당 책과 비슷한 책이나 관련된 주제를 이해하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셋째, 이건 상대적으로 더 어려운데 서평가의 취향에 달렸다. 책에서 재미있는 어떤 것을 찾아내 독재와 공유하는 작업이다. 자기 취향이 없는 사람은 이 작업을 할 수 없다. 자기 자신이 제대로 가지고 놀지 못했으니 그 안에서 재미있는 걸 찾기도 어렵다. 아니면 분명히 재미있는 것인데 작가가 재미있게 여기지 않아서 언급할 가치를 느끼지 못하기도 한다. 제법 힘겨운 일이다. 

- 내가 보기에 이 세 가지는 뒤로 갈수록 요구치가 높다. 물론 상위 의무는 하위 의무를 수용할 수 있다. 적절한 평론은 어쩌면 해당 책과 관련된 것을 소개하는 것일 수 있다. 진지한 서평가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물론 적절한 평론은 간단한 책 소개보다 어렵다. 책의 내용이 닿는 배경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책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면 서평을 쓸 때 적당한 평가를 내리기가 어렵다. 내 경우, 평론하는 책의 범위가 상당히 넓지만 평론을 결코 쓰지 않는 책도 많다. 경제경영 분야는 써 본 일이 없다. 난 그쪽 분야의 배경 지식이 전혀 없어서 그 책을 어떤 맥락에도 두지를 못한다. 내가 이 분야에 대해 아는 바가 전혀 없어 배경 지식을 형성하지 못한 까닭이다. 대신 과학사나 성학에 대한 책을 평론하라고 한다면 난 그 책을 적당한 맥락에 놓을 수 있을 것이다.

- 서평에서 서평자 개인의 색깔은 서평자가 그 책에서 재미있는 것을 읽어냈느냐 혹은 읽을 만한 부분을 찾아내 글로 풀었느냐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이 과정에서 그 서평에 취향의 방향이 생기고, 서평을 통해 학술 분야든 예술 분야든 서평자 자신의 취향도 검증된다.

 

- <아무도 읽지 않은 책>(장석봉 옮김, 지식의숲, 2008)은 많은 이에게 확실히 지루한 책이다. 대부분의 내용이 문헌의 판본 논술이다. 하지만 책의 몇몇 부분은 굉장히 재미있다. 안목이 있다면 재미있게 다루고 가지고 놀 만한 부분이나 이야기를 발견할 텐데, 서평가에게 이런 일은 자기 자신에 대한 시험이나 다름없다. 취향이 조금 떨어지는 사람이라면 웃기는 걸 짚을 것이고 사람들은 금세 이 서평가의 취향 수준이 떨어진다는 걸 알아챈다. 또는 책의 배경지식이 얕아 뭔가 희귀한 내용을 발견한 줄 알고 중요하게 다루었는데, 그 분야 종사자라면 누구나 아는 내용일 경우 서평가는 저자와 책의 수준을 제대로 보여 주지도 못할뿐더러 배경 지식이 부족하다는 사실만 들키게 된다. 서평을 잘 쓰려면 해당 책의 분야에 익숙해야 한다예컨대 어떤 학생에게 서평 연습을 시켰더니 관련서에 대해 아는 바가 없어 그저 그 책에만 집중했다. 대체로 서평은 이렇게 쓰이지만 이런 서평은 사실 좋지 않다. 앞에서 말한 첫째 기능만 할 뿐, 평가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취향은 꿈도 꾸지 못한다. 

- 서평을 자주 쓰면서 출판사와의 관계가 꽤 가까워진 덕택에 책이 필요할 때 출판사에 요청할 수도 있게 되었다. 이런 점은 기쁘다. 책벌레로서 많은 책을 읽을 수 있게 되니까. 요즘은 책을 꽤 적게 사는 편이다. 젊었을 때는 형편이 옹색하기도 했지만 책을 보내 주는 사람도 없어서 좋아하는 책은 어쨌든 스스로 사야 했다. 그런데 지금은 도리어 책을 살 일이 적어졌다.

- 가끔 생각한다. 깨닫고 보니 독서와 글쓰기로 먹고살고 있었다. 이 두 가지는 원래부터 내가 원하던 것이었으니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그러니 만족할 줄 알아야 한다. 대부분의 사람은 먹고살기 위해 하는 일과 가장 좋아하는 일이 다르지 않은가.

- 내가 난징대학교에 다닐 때는 학교에 이런 규정이 있었다. 문과 학생은 대강당에서 상영하는 외국 영화를 봐도 되지만, 이과 학생은 안 된다. 문과 학생은 도서관의 대외 열람이 가능한 모든 도서를 대외 열람할 수 있지만 이과 학생은 안 된다. 이런 제한은 학생증이나 도서 대출증 따위를 확인해 실행되었다. 이과 학생은 어떤 종류의 인문 도서를 '분석하고 비판하는 능력'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이 제한의 이유였다. 모교를 사랑하기는 하지만 지금 와서 보면 이런 규정은 사실 대학으로서 수치라고 생각한다. 

- 사람들은 쉽게 과학과 인문의 분리를 교육 제도 탓으로 돌린다. 고등학교 때부터 문과와 이과를 나누고 대학의 수업과정도 불합리하다는 식이다. 그렇지만 교육 제도가 그런 건 사회의 수요에 맞추기 위해서다. 사회의 발전과 운영에는 기술과 학업에는 각 분야에 전문인 사람이 적합하다는 연유다. 아리스토텔레스처럼 박학다식한 사람이 되고자 한다면 다른 사람에 비해 엄청난 노력(시간과 돈도 포함)을 기울여야 한다. 그 보답은 크지만 성공하기도 어렵다. 그러므로 오늘날 문과와 이과를 두루 통달하기란 대단히 사치스러운 일이 되었다.

- 다윈은 소년 시절에 시와 노래, 연극, 그림, 음악 등에 관심이 깊었고 열렬히 사랑했다. 몇 시간이고 가만히 앉아 셰익스피어의 역사극을 보곤 했다. 그러나 그가 자서전을 쓸 무렵에는 이미 다른 상황이 벌어져 있었다. "지금까지 오랜 시간 동안 난 시 한 구절조차 읽기를 용납하지 않았다. 최근에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읽으려고 했더니 무미건조해 견딜 수 없었고 혐오감마저 들었다. 난 미술과 음악에 대한 관심마저 거의 잃었다." 다윈의 '예술을 감상하는 고상한 취향'은 놀랍게도 완전히 사라져 그를 경악과 슬픔에 빠뜨렸다. 다윈은 근심 어린 목소리로 말한다. "이런 취향의 상실은 행복의 상실이며, 우리의 천성에서 감성 부분을 도려냄으로써 지성에도 손실을 입히고 품성에도 해를 끼칠지 모른다."

- 다윈의 슬픔은 깊다. 시와 노래, 연극 등에 대한 그의 혐오가 외부의 압박에 따른 결과가 아니라 내부에서 저절로 일어난 일이라는 것을 스스로 의식하는 까닭이다. 긴 세월 자연과학 연구에 종사하면서 그는 세상을 보는 눈이 바뀌었다. 그는 수많은 사람이 보지 못한 깊은 이치를 보았지만 그와 동시에 다른 수많은 사람이 지닌 어떤 감각을 잃었다. 그런 다윈에게서 높이 살 점은 그가 자신의 이런 취미와 능력의 상실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그 결과를 평가했다는 점이다. 적지 않은 과학자가 이런 '변화'의 한가운데에 빠져 있으면서도 그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자기가 알고 있는 작은 과학 지식에 만족하여 자만하고 남을 우습게 본다. 

- 문과와 이과 사이의 거대한 틈을 메우고 '두 문화'가 소통하려면 개인의 노력과 함께 사회 환경의 조성이 필요하다. 내 개인적인 경험으로 말하자면, 철딱서니 없는 어린애일 때문과와 이과를 모두 통달하는 사람이 되겠다면서 천체물리를 전공으로 삼았다. 경이롭게도 기회가 닿아 문과와 이과의 경계에서 일을 하고 이 일로 먹고살게 되었으니 실로 행운이라 할 것이다. 나는 당시의 환경 덕을 보았다. 그때는 지금처럼 입시 교육에 속박된 채 공부하지 않았다. 요즘의 일반적인 교육 방식은 나 같은 '사도'를 전혀 장려하지 않기 때문에 그 시절의 상황이 재현되는 건 불가능하다. 지금의 젊은 세대는 문과와 이과에 두루 통달하기가 너무 어렵다. 이런 상업 사회에서 어쩔 수 없이 실리를 추구해야 하는 그들은 직장, 승진, 결혼을 위해 낭만적인 자세가 아닌 이성적인 자세를 취할 수밖에 없다. 현 체제에서는 경제 조건이 대단히 좋거나 금전의 압박이 전혀 없는 부잣집 자녀나 문과와 이과를 모두 마음 편히 전심으로 익힐 수 있을 것이다. 

- 학과 분리로 인해 생긴 손상을 가까운 장래에 뿌리 뽑기는 힘들겠지만 적어도 그 손상을 최소화하기 위해 노력해야지 더 심하게 만들어선 안 된다. 문과와 이과에 모두 통달하기란 대단히 어려운 일이나 절대 이룰 수 없는 일은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은 인간의 고른 발전이란 인간으로서 추구할 만한 목표임에 틀림없다는 사실이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단조롭고 재미없는 인생을 원하지도 않을 테고 원해서도 안 된다. 문과와 이과를 아우르려는 노력은 결코 시간 낭비가 아니다. 시간은 문제가 아니다. 관심이 있다면 시간은 생기기 마련이며, 문과와 이과를 두루 익히겠다는 목표는 평생을 들여 추구해야 하는 것이다. 

- 심지어 어떤 영화평은 내가 느낀 점과 너무나도 큰 차이가 났고, 어떤 평은 완전히 불공평했다. 그들은 SF 영화의 뒤에 있는 과학 사상과 정보에 대해 아는 바가 없는 탓에 이면에 아주 많은 것이 담겨 있는 영화에 대고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늘어놓았다.

- SF 영화평을 쓰면서 나는 더 많은 SF 영화를 보기 시작했는데 수많은 유명 SF 소설이 영화화되었음을 영화를 보고 나서야 알았다. 그래서 영화화된 SF 소설을 봤다. 물론 이 소설들을 읽게 된 데는 수동적으로 끌려간 부분이 있다. 소설을 바탕으로 제작된 영화가 재미있어서 소설을 읽거나 그런 영화에 대한 평을 써야 할 때 소설을 찾아 읽었기 때문이다. SF 영화평을 쓴 이후로 나는 SF와 관련된 사람들과 알게 돼, 중국중앙방송국의 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 SF 작가 류츠신, 왕진캉 王晉康, 한쑹 韓松과 인연을 맺었다. 이 덕에 2007년 청두에서 열린 국제 SF 대회에 초청을 받았고, 거기에서 두 번이나 주제발표까지 했다. 또 잡지 <새로운 발견>은 이 대회에서 나와 류츠신, 유명 시인 디밍을 묶어 '백야의 술집'을 만들고는 '어째서 인류는 여전히 구원받을 가치가 있는가?'라는 주제로 대담을 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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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 오랫동안 난 중국 작가의 SF 작품을 읽지 않았다. 그러다 요 몇 년 사이에 손을 대기 시작했는데 류츠신, 왕진캉의 작품을 높이 친다. 그들의 작품은 본래 국내 SF계에서 상당히 평가받았지만 문제는 이 평가가 대부분 문학이나 전통적인 SF의 의미에서 이뤄질 뿐 사상적인 면에서는 파헤쳐지지 않는다는 데 있다. 이에 나는 그들의 작품을 다른 관점에서 평가했다. 예컨대 왕진캉의 작품은 반유토피아라는 기조에서 탄생했다고 본다.

- 최근 몇 년 동안 줄곧 사색한 결과, 2007년 청두의 국제 SF 대회에서 난 'SF 작품의 세 겹 경계'라는 주제로 강연을 하게 되었다. 세 겹 경계의 첫 번째 경계는 과학기술의 대중화, 두 번째 경계는 문학, 세 번째 경계는 철학이다. SF의 최대 가치는 과학기술을 고민하고 과거와 미래를 사고하는 사상에서 온다. 반과학주의를 말한다면 SF 작품만이 반과학주의를 말할 수 있다. 순문학 작품으로 반과학주의를 말하는 데에는 어려움이 있다. SF는 본래 과학을 중심으로 하며, 미래의 발전에서 펼쳐질 과학기술의 전망을 상상함으로써 수많은 사상적 가치를 생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초기에 우리, 그러니까 출판계의 이전 세대를 포함한 수많은 사람들은 SF를 첫 번째 경계에서 이해했다. 즉 SF를 '어린이에게 보여 주는 것', 과학기술과 지식을 대중화하는 하나의 형태일 뿐이라고 여겼다.

 

- 두 번째 경계는 SF가 문학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SF 작품을 문학의 전당에 두려고 하지만 문학은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내가 보기에 이건 노력할 가치가 전혀 없다. 문학에 포함되지 않으면 SF 작품의 자아가 사라지기라도 하는가?

- 나는 세 번째 경계가 가장 높다고 본다. 철학의 높이에서 과학기술을 반성하는 것은 SF 작품의 가장 강력한 사상 기조가 될 것이다. 실제로 요즘 해외의 몇몇 작품은 거의 이런 기반 아래에서 창작되는데, SF 영화 속에서 묘사되는 미래가 암흑세계인 이유이기도 하다. 처음에는 서양에서는 어째서 미래를 어둡게 그리는지, 왜 좀 더 참신하고 새로운 건 없는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다들 어두운 미래를 그리면 왜 밝은 미래를 그리는 사람은 없나 말이다. 그러나 지금은 반성이라는 관점에서 이 점을 이해하게 되었다. 밝은 미래로는 반성을 이야기하기 힘들다. 그렇게 해석하면 맞을 듯하다. 

- SF의 세 겹 경계는 각각 하위 경계를 수용한다. 세 번째 경계는 많은 독자를 끌어오지는 못하지만 원래 있던 독자를 기반으로 SF에 관심을 갖는 학술인과 문화인을 끌어올 수는 있다. SF를 과학기술의 대중화나 문학으로 본다면 그들은 SF를 거들떠보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나 SF의 철학, 사상 가치는 이 문제에 관심을 두는 그들의 시선을 끌지 모른다. SF의 사상가치를 이해하지 못하는 이도 SF를 문학 작품으로 읽으며 흥미진진해할 수 있고 세 번째 경계 때문에 SF 읽기를 그만두지도 않을 것이다.

- 아주 긴 시간 동안, 우리는 SF를 과학기술의 대중화 수단 중 하나로 여기고 전통적인 과학기술 대중화의 울타리에 가둔 채, SF에서 드러나는 과학 지식만 보고 인문적 관심은 전혀 기울이지 않았다. 그리하여 우리가 창작한 SF 작품은 일률적으로 과학기술이 미래에 가져올 찬란한 빛만을 노래했다. 그 탓에 서구의 SF 작품을 오랫동안 받아들이지 않았다. 


- '양이 없다면 어디에서 질을 담보하는가? 어쨌든 없는 것보다는 낫다. 양이 많은 게 적은 것보다 좋다.'

사람들은 여전히 이렇게 믿는다.
여기서 SCI 논문의 가치를 재평가하도록 하려는 마음은 전혀 없다(이미 서로 다른 평가가 많이 나와 있다). 상금을 받은 SCI 논문이 좋지 않다고 지적할 마음도 전혀 없다. 난 그저 계속 '효과적인 정책'으로 학문 연구 결과의 양을 장려한다면 단기적으로는 바라는 숫자를 얻을지 몰라도 장기적으로는 이로 인해 무거운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말을 하고 싶다. 그리고 논문 수로 순위를 끌어올리는 등의 '효과'에 비하면 그 대가는 득보다 실이 많을 가능성이 높다. 

- 아까 말한 고구마의 비유를 좀 더 이어 보자. '학문의 고구마' 생산 정책을 결사코 격려한다면 이런 결과가 나오기 쉽다.
새로운 세대는 고구마가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식물이라고 오해한다.

새로운 세대의 농부는 벼를 심거나 소와 양 등을 키우는 기술을 잃는다(장기간 고구마 재배 수익이 가장 컸으므로).
중국의 농업은 세계적으로 명성을 잃게 된다(오래도록 고구마만 심었으므로)
그 결과는 지금 벌써 나타나고 있다.
 
우리가 식량 부족으로 고구마가 없다면 당장 굶어 죽을 위기라면 앞에서 말한 정책이 아무래도 옳다(적어도 부득불 써야 한다). 그렇지만 학문 관리는 식량 공급과 다르며 학술연구 결과가 좀 줄어든다고 '굶어 죽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저명한 소설가 첸중수는 "학문은 본래 황량한 강가 거칠고 낡은 늙은이의 집에서 마음이 맑은 한두 사람이 함께 논의하는 일이다."라며 학문이 태생적으로 청정한 것이라는 의견을 표명했다. 학문에서 양이란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것이 아니다. 하물며 학문 생태계에는 한계가 있고, 지금 우리의 학술생태계는 이미 '과열되어 있어 학술 연구 결과가 조금만 적어져도 '굶어 죽기'는커녕 오히려 좋은 점이 생겨날 수 있다. (최소한 멀리 내다봤을 때는 그러하다).

- 자신의 서재를 가지면서 나는 서재를 조금씩 새로이 이해하게 되었다.
오늘날의 중국인 대부분은 아직 서재가 없다. 범위를 좀 더 줄여 중국의 지식인 가운데에서도 서재를 가진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내가 가리키는 것은 진정한 의미의 서재다. 그러나 요즘은 서재가 있는 사람이 점차 늘고 있다. 

수많은 지식인이 자기의 서재를 말한다. 긴 시간의 동경, 마침내 만든 서재, 여기에 배치를 어떻게 했는지 그 안에서 어떻게 책을 읽고 글을 쓰는지... 이런 내용은 진작 신문이나 잡지 독서란의 단골 메뉴가 됐다. 


- 그러나 서재에서 단지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것만으로는 서재에 생명을 불어넣을 수 없다. 책을 그저 도구로 삼고, 서재에서 그 책들을 이용하기만 한다면 대단히 편하고 효율도 좋은 데다 유쾌하기까지 할 것이나, 그러면 서재는 공구 상자나 작업장에 불과하게 된다. 애정 없는 결혼이라도 서로 의무를 다하고 어울리면서 손발을 맞출 수는 있지만 거기에는 생명이 없는 법이다. 

- 서재의 생명은 주인이 부여한다. 주인이 진심으로 책과 사랑해야 서재는 생명을 얻는다.
어떻게 해야 책과 사랑할 수 있을까? 책을 대하는 태도와 관련해 두 가지 예를 들고 싶다.

- 첫째, 다른 사람의 책을 대하는 태도를 본다. 자기 책을 사랑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어려운 일은 자기 책이든 아니든 세상의 좋은 책을 모두 사랑하는 일이다. 그렇게 책을 사랑하는 사람 가운데는 친구나 도서관에서 빌린 책에서 흠을 발견하면 나서서 책을 손보는 이가 있다. 서점에서 책을 보다가 책 정리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걸 보면 아무렇지도 않게 책 정리를 한다. 누군가 책을 더럽히거나 망가뜨리는 걸 본다든가 책이 잘못될 가능성만 느껴도 그러지 못하도록 저지하거나 좋은 말로 말린다. 그들에게 좋은 책이 더럽혀지거나 부적절한 대우를 받는 것은 미인이 모욕을 당하는 것과 같아서, 아름다운 것을 아끼는 마음에 보호하려 드는 것이다.  

- 둘째, 이건 친구가 내게 말해 준 실화다. 이십 년 전, 대학생이 대단히 인기 있던 시절에 어떤 허영심 많은 여성이 바라던 대로 문과 대학생과 결혼했다. 이 여성은 서생인 남편을 둔 것을 명예로 여겼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다른 사람들의 남편은 부자가 되거나 관리가 되는데 자기 남편은 여전히 일개 서생인 걸 보면서 아내는 조금씩 원망이 생겼고 남편에게 무능하다고 투덜거리며 저 망할 놈의 책이 대체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캐물었다. 나중에는 책을 모두 불태워 버리겠다며 큰소리쳤는데 그 말을 들은 남편은 무서운 얼굴로 아내에게 경고했다. "내 책을 태운다면 날 죽이는 거야." 어느 날 아내가 정말로 남편의 책을 태우자 남편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이혼을 요구했다. 친구들과 장인까지 찾아와 두 사람을 화해시키려고 노력했으나 서생은 이렇게 말하며 거절했다. "난 분명히 아내에게 책을 태우는 것은 날 죽이는 것과 다름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도 책을 태워 버렸으니 우리 사이에 무슨 할 말이 더 있겠습니까?" 이 이야기의 결말은 몹시 처참하다. 그 서생은 울적해하다 오래 견디지 못하고 사랑하는 책의 뒤를 따르듯 병사했다. 책에 대한 그의 사랑이 지나치다고 비웃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이 사랑에는 쓸쓸한 아름다움이 있다. 물론 나는 대부분의 애서가가 이 정도로 심각하게 책을 사랑하지는 않으리라 생각한다.

- 생명이 있는 서재의 또 다른 증표는 책의 변화다. 책의 변화에는 두 가지 분야가 있다. 

- 첫 번째 분야는 책의 성분 변화다. 사람에게 소년, 청년, 장년, 노년이 있는 것처럼 서재의 책도 성장한다. 주인의 학문 영역과 흥미 및 취미의 변화에 따라 책의 성분도 계속 바뀐다. 그러므로 장서가 풍부한 학자가 세상을 떠나면 그가 남긴 책들은 같은 학문을 하는 다음 세대의 사람에게 가장 귀한 재산이 된다. 보통의 도서관과는 비할 바 없이 세심하게 선택된 책들이기 때문이다. 관련된 자료가 종류별로 모여 있는 장서는 학문의 후배에게 안내 역할을 하며, 나아가 장서 주인이 과거에 걸었던 노정을 읽을 수 있도록 한다.

- 두 번째 분야는 책 수량의 변화다. 책은 언제나 늘기 마련이다. 어떤 학자들은 노년에 가까워지면서 장서의 앞날을 고민한다. 마치 자기가 더 이상 살펴 주지 못할 오랜 벗의 미래를 걱정해 보살펴줄 사람을 찾는 것처럼 말이다. 어떤 이는 친구에게 조금씩 책을 선물하기도 하고 무더기를 나눠 여기저기 기증해 장서의 수를 줄여 나간다. 학자라면 당연히 장서를 통째로 넘기는 편을 더 선호하지만 진심으로 자신의 장서를 알아줄 기구나 단체를 찾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 주인의 학문은 시간에 따라 깊어지므로 이치대로라면 장서 또한 옛 책은 적어지고 새 책이 늘게 된다. 그러나 책에 대한 사랑으로 인해 옛 책을 정리하기는 무척이나 어렵다. 서재에 책을 놓을 공간에 한계가 있어 포화 상태가 되면 옛 책을 버리는 것이 필연인데도 예전에 정성껏 모은 책들을 보면 괴롭다. 책 한 권 한 권에 인연이 있고 사연이 담긴다. 옛일을 떠올리게도 하고 옛사람의 깊은 정을 생각나게도 한다. 어떤 책인들 쉽게 떼어 낼 수 있겠는가? 책을 만지며 한숨을 쉬다 결국 계속 곁에 두기로 마음을 먹게 되는 것이다. 

- 서재의 생명은 주인이 죽기 전에 끝나기도 한다.
일찍이 진심으로 책을 사랑했으나 이후에 영욕의 생활에 빠져 발을 빼지 못하는 사람의 경우가 그렇다. 젊은 시절 누추했던 그들의 서재는 생기발랄했지만 이후의 서재는 거짓된 문화에 타락한 장식품이 되고 만다. 공명을 얻은 후 그들의 서재는 번듯하고 화려해지며 내부는 다른 사람이 보낸 호화 양장본으로 가득 차게 된다. 그런 이들은 물론 때때로 서재를 방문객에게 자랑하곤 한다. 그러나 그런 서재에는 이미 생명이 없다.

- 유럽 문화에서 우리는 종종 이런 풍경을 목격한다. 저명한 학자가 세상을 떠난다. 유언에 따라 그의 장서는 (대체로 그가 오랫동안 일했던) 어떤 대학이나 기관에 기증된다. 그렇게 기증받은 곳에서는 그 장서를 위한 전용실을 마련하기도 한다. 이렇게 마련된 장서실은 항상 개방되지는 않으며, 일주일에 하루만 대외 개방을 하기도 한다. 개방하는 날에는 노부인이나 노선생이 의무적으로 그곳을 돌보며 방문객을 접대한다. 이런 장서실은 당연히 인기 작가의 사인회처럼 사람으로 미어터지지 않는다. 조용하고 쓸쓸하다. 하지만 그러던 어느 날 머나먼 어떤 곳에서 장서 주인을 존경하던 사람이 장서실을 찾아와 장서의 주인이 그 책들 사이에서 울고 웃던 모습을 상상하기도 하고, 장서실에서 일하는 노부인과 장서 주인의 옛일을 도란도란 나누기도 한다. 마치 하얗게 머리가 센 궁녀와 궁궐에서 있었던 옛이야기를 주고받는 것처럼. 장서실의 방문자는 서글픈 마음으로 조용히 그곳을 떠난다. 이런 풍경을 보며, 어느 누가 이 학자의 서재가 생명력을 잃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 나 자신의 서재에 대해 나 역시 몇 가지 생각을 해본 적이 있다. 예를 들면 이렇다. 난 대체 이 책들로 뭘 하려는 것인가? 나는 이 책들이 나와 함께하길 바랄 뿐이다. 책 가운데 다수는 아마 읽지 못할 테지만 그래도 난 그 책들이 내 곁에 있기를, 내가 필요로 할 때 가까이 있기를 바란다. 지금은 영상 디스크도 마찬가지다. 많은 유명 인사가 자기가 살아 있을 때 자신의 책이 좋은 곳에 갈 수 있도록 생전에 책을 기부한다. 그렇지만 나는 내 책이 나와 같이 있기를 바라는 까닭에 책을 기부하더라도 내가 살아 있을 때는 하지 않을 것 같다. 많은 사람이 죽을 때 책이나 골동품 따위를 여기저기 뿌리고, 그것들은 헌책방이나 골동품 가게를 떠돈다. 당나라 때의 두섬은 자신의 장서 목록서 말미에 이런 말을 적었다. "녹봉으로 산 책 직접 다듬어, 자손이 이를 읽고 성현의 도를 깨달을 지니, 팔거나 빌려주면 불효로다." 이 구절은 입에 붙는 맛이 있어 종종 중얼거리지만 이런 정서가 오늘날에는 현실적으로 의미가 전혀 없다는 건 나도 안다. 

 

- 그리고 책을 둘 다른 방을 마련하는 방법도 싫다. 곁에 두지 못하는 책은 내 책이 아니다.

- 서재에서 하는 대화와 거실에서 하는 대화는 다르다. 서재 쪽이 좀 더 사고를 고무시킨다. 난 서재에서 멍하니 있는 걸 좋아하지만 다른 방에서는 그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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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그와 친구가 된 것은 완전히 책 덕분이다.

- 나 역시 친구들의 서재에 손님이 되어 깊은 인상을 받은 경험이 있다.
고문헌학자이자 과학기술사학자 후다오징선생의 서재. 첫 방문은 후 선생이 나를 국가자연과학기금에 추천해 주신 걸 사양하러 갔을 때였다. 선생의 서재에는 '해우문고'라는 이름이 있었는데 이전까지는 그 이름을 글에서만 봤다가 그날에야 서재의 벽에 그 글자가 쓰여 있는 걸 보게 되었다. 서재 안에는 들어갔으나 앉을 자리가 없었다. 서재의 모든 의자와 책상에 책이 쌓여 있어서 후 선생이 앉은 자리 말고는 앉을 만한 공간이 없었다. 후 선생이 근처의 책들을 한쪽으로 치워 주시고서야 겨우 앉을 수 있었다. 우리는 대화를 하다 거실로 자리를 옮겼다. 

 

- 벽을 가득 덮은 책, 밝은 창과 깨끗한 책상은 학자의 서재라면 언제나 보는 풍경이다. 하지만 특별한 사람들의 서재에는 의외의 면모가 있다.
내 대학 동기 중 한 명은 졸업 후 학계에서 노는 걸 좋아하지 않아 엔지니어 겸 프리랜서로 일했다. 그의 서재는 무척 넓었다. 그가 새 집으로 이사했을 때 찾아간 적이 있는데 그 서재 역시 벽이 책으로 덮여 있었고 밝은 창에 책상이 깔끔했다. 그렇게 십 년이 지난 후인 얼마 전에 그의 집에 갔더니 놀랍게도 서재가 잠겨 있었다. 그의 아내가 원망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는 도저히 손님에게 그이의 서재를 보여 드릴 수가 없어요. 거긴 서재가 아니라 쓰레기장이에요!" 그 말을 듣자 오히려 호기심이 동한 나는 꼭 서재에 들어가 보고 싶다고 부탁했다. 그와 나는 삼십여 년이나 된 오랜 친구니 보통 손님과는 다르다고 사정한 끝에 겨우 '서재를 관람할 권리'를 얻을 수 있었다. 그렇게 해서 들어간 서재는 과연 보통 서재와는 달랐다. 아주 기이한 광경이었다.   

- 여기서 말하는 '삼국'은 중국인에게 익숙한 '삼국'이 아니라 한반도에 있었던 신라, 백제, 고구려 세 나라를 가리킨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한국 고대사에서 쌍벽을 이루는 책이다. <삼국유사>란 이름을 오래전부터 들어 알고 있던 까닭에 1993년 한국의 학회에 참석했을 때 그 책을 찾고자 틈을 내 서울의 큰 서점을 여러 군데 다녔다. 서울 최대의 서점이라는 곳까지 포함해 여러 서점에 들르는 동안 난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한국인이 이 책을 중요하게 보지 않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한국인은 이 책을 대단히 중시하는 것 같았다. 한국의 고대 문헌이 대체로 그렇듯 <삼국유사> 역시 한자로 쓰였는데 (중국인이 고대 문헌을 현대어로 번역하듯) 이미 현대 한국어로 번역돼 있던 것이다


- 결국 크게 실망해서 낙담한 채 돌아가려는데 신경도 쓰지 않았던 책장에서 번역되지 않은 <삼국유사>를 발견했다. 두터운 한 권짜리 양장본이었고 책에는 '서울도서중심'이라는 영수증이 꽂혀 있었다. 가격은 한국 돈으로 구천 원, 당시 인민폐로는 구십 위안이었다.
이 <삼국유사>의 본문 앞에는 한국 학자 최남선이 수십 쪽에 걸쳐 쓴 해제가 있다. 최남선은 <삼국사기>를 정리한 사람이기도 하다. 해제는 한국어로 쓰였지만 대단히 '학술적인 글이라 글에 한자가 많았다. 이런 분야에서 일본과 한국은 꽤 닮아서, '학술적'인 글일수록 한자가 많다. 본문 뒤편에는 한반도의 옛 역사가 기록된 고대 문헌 일부가 수록되어 있는데 그 가운데 유일하게 <광개토왕릉비>(일명 '호태왕비'로, 이 비석은 중국 지린성 지안시에 있다)만 내가 전에 읽은 적이 있다. 

- <삼국유사>는 다섯 권으로 나뉘지만 내용으로 보면 편폭이 다른 아홉 부분으로 다시 나뉜다. 권1에는 <왕력 제일 王歷第一>과 <기이 제이 紀異第二>가 실려 있다. <왕력>은 <사기> 史記의 연표와 비슷하며, <기이>는 권2 전체까지 이어져 역대 왕의 치세에 일어났던 여러 가지 신기한 사건(오늘날의 눈으로 보면 황당한 사건이지만)을 기록했다. 권3에는 <흥법 제삼興法 第三>, <탑상 제사 塔像第四>, <의해 제오 義解第五>가 포함되며 모두. 불교의 신비한 이야기를 다룬다. 권5에는 <신주 제육 神呪第六>, <감통 제칠 感通第七>, <피은 제팔 避隱第八>, <효선 제구 孝善第九>가 있다. <신주>와 <감통>은 제목만 봐도 각종 놀라운 일을 가리키는 걸 알 수 있고(중국 육조 시기의 지괴필기 志怪筆記 소설과 무척 닮았다) <피은>과 <효선>은 차지하는 양 자체가 적다. <삼국유사>의 황당하고 재미있는 이야기로 말하자면 중국의 당녠밍웨가 쓴 통속 역사물보다 훨씬 더 강렬하다. 눈에 짚이는 대로 몇 가지 예를 들어 보겠다.

- 죽고 죽이는 얘기가 너무 피비린내 난다면 조금 부드러운 얘기를 해 보자. 경문대왕의 재미있는 얘기다. 경문대왕은 젊을 적에 뛰어난 재주로 선왕의 총애를 받아 부마로 결정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그의 부모는 너무나 기쁜 나머지 일가친척을 불러 모아, 왕의 두 딸 가운데 큰 공주는 박색이고 작은 공주는 미인이니 작은 공주를 고르자고 정했다. 이때 화랑의 우두머리인 범교사 範敎師가 홀연히 나타나 그에게 이렇게 말한다. "반드시 큰 공주를 택해야 합니다. 그래야 좋은 일이 있을 것입니다. 잊어서는 안 됩니다." 다음 날 왕은 그에게 공주를 택하라고 했고 그는 큰 공주를 선택했다. 혼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갑자기 왕이 위독해져 당장 후계자가 필요하게 되었다. 그러나 후사가 없던 탓에 큰 공주의 남편이 뒤를 잇게 되면서 그가 왕이 되었다. 

- <피은>에는 중국의 개자추와 비슷한 이야기가 있다. 효성왕은 잠저 潛邸시기의 어느 날 현인인 신충과 잣나무 아래서 바둑을 두며, 잣나무를 두고 절대로 신충을 잊지 않겠다는 언약을 했다. 신충은 이에 효성왕에게 큰절을 올렸다. 몇 달이 지나 효성왕이 즉위해 논공행상을 벌이는데 신충의 몫이 없었다. 신충은 원망의 노래를 적어 그 잣나무에 붙였고, 잣나무는 노랗게 시들었다. 효성왕은 나무의 노래를 보고 자책하며, "내 어찌 그를 잊을 수 있단 말인가."라고 말하고는 즉시 신충에게 작위를 내렸다. 그러자 시들었던 잣나무도 자기 색을 되찾았다. 

 

- 낯선 곳에서 책을 구입하다 보면 종종 염문이 일어난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염문'은 '그런 뜻'이 아니다.
 
- 그러니까 아방가르드 사상, 성적 방탕, 동성애 등을 보여주는 작품이 집중되어 있다. 당시 영향력이 큰 일군의 예술가(앞에서 언급한 게오르게 그로스도 그 가운데 한 사람)는 회화와 공예품에 이런 분위기를 한껏 부여했다. 이 분야의 작품은 베를린 에로티크 박물관 소장품의 중요 부분을 차지한다. 내가 상대적으로 익숙한 중국과 일본의 에로 예술품으로 말하자면 <베를린 에로티크 박물관 도록>에는 유명한 작가의 작품도 훌륭한 작품도 없다. 우키요에 춘화에서 가장 이름 높은 몇몇 작가 작품조차 없다. 고급한 중국 춘화 역시 없다. 도록에는 그저 중국 민간의 에로 공예품 몇 점이 실려 있다. 예컨대 성교 시의 체위를 모방한 소형 도기 인형으로 신혼부부의 성교육을 도모하는 동시에 자식을 기원하는 물품이다. 또한 에로틱한 장식물을 단 정밀하지 못한 공예품이 있다. 유곽이나 그와 유사한 곳에서 생활용품으로 쓰였을 법하다. 
종합해서 말하자면 이 <베를린 에로티크 박물관 도록>에서 가장 가치 있는 것은 유럽의 에로 회화와 공예품이다. 특히 1920~1930년대 유럽의 '성 해방' 사조를 집중적으로 반영한 작품은 문화사 분야에서나 사상사 분야에서 가치가 높다.

- 홍콩청스대학교에서 강의하던 시절은 굉장히 한가해서 매일 저녁이면 밥을 먹고 대형 쇼핑몰 페스티벌 워크 Festival Walk의 서점 페이지원 Page One에서 시간을 보내며 <푸슈킨 비밀일기>(김승욱 옮김, 작가정신, 1997), 타이완의 여성 작가 추먀오진 邱妙津의 <몽마르트르에서 쓰는 유서 蒙馬特遺書> 같은 책의 타이완판을 사곤 했다. 한 번은 홍콩의 다른 서점에서 <춘몽유 夢遺葉>을 발견했다. 이 책은 중국 춘화를 모으는 외국 수집가의 소장 작품 도록으로, 내가 오래도록 찾아다니던 책이기도 했다. 난 얼른 책을 집어 책에 붙어 있는 가격대로 사백오십 홍콩달러를 지불했다. 그런데 서점 직원이 미안하다고 사과하더니 책 가격을 잘못 표시했다며(당연히 더 적은 금액으로 적혔다는 말이다) 매니저에게 물어보겠다고 하는 것이었다. 별수 없이 카운터에서 직원이 돌아오길 기다렸다. 돌아온 직원은 매니저가 지금 적힌 가격으로 팔라고 했다고 전했다. 그리고 직원은 진열장으로 가 책의 가격표를 바꿔 붙였다. 

- 외국에서 책을 구입한 경험 가운데 가장 인상이 깊었던 곳은 일본이다.
교토 가와라마치의 헌책방에서는 한 간 가량의 넓이에 점원이라고는 할아버지나 할머니 한 분뿐인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짐작이지만 분명히 가게 주인일 것이다). 에로물 전문점(서적, 영상물, 음반 등)에는 입구에 '18세 미만 금지'라고 쓰여 있다. 내가 머문 숙소의 이웃에도 한 곳이 있었는데 매일 오전 열한 시에 영업을 시작해 자정에 닫았다. 방문하는 독자의 수도 중국의 일반 서점에 못지않았고 거래도 끊이지 않았다. 이렇게 큰 서점에서도 점원 한 명이 혼자서 모든 손님을 접대한다. 일반 서점에 가까운 서점도 있어서 고조 거리의 미야코도 서점 같은 경우는 여러 가지 서적을 다룬다.

- 일본 출판업의 번영을 제대로 음미할 수 있는 곳은 도쿄의 간다 지역이다.
어떤 일본 경찰이 내게 줬던 간다 헌책방 명단에 따르면 당시 간다 지역에는 자기 나름의 개성을 가진 헌책방 백서른여섯 곳이 있었다. 그 외에도 간다 지구에는 새 책을 파는 서점과 출판사가 삼십여 곳 있었다. 이 서점들은 주로 야스쿠니 거리의 양쪽에 분포했다(이 거리의 서쪽에 야스쿠니 신사가 있다). 거의 한 집 건너 한 집 수준이었다. 

- 비교적 큰 일반 서점에서 진열하는 도서 종류의 양은 중국의 서점에서 따라잡을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일본 서점은 크든 작든 일반 서점이든 헌책방이든 책을 단 한 권씩만 진열하고 손님이 사면 점원이 즉시 새로 갖다 놓는다. 중국 대형서점처럼 책 한 종을 열 권이고 수십 권이고 쌓아 두지 않는다. 그 결과, 중국 서점에서는 같은 면적이라도 진열할 수 있는 도서의 종류가 외국 서점의 십 분의 일에 지나지 않게 된다.
 

- 해외에 나갔을 때는 중국인이 아직 그다지 풍요롭지 못했고 일개 서생인 내 주머니 사정은 더더욱 어려웠다. 해외의 서점에서 좋은 책을 만날 때면 몇 번이나 망설이고 고민하다가 결국은 빈손으로 돌아오곤 했다. 1990년대에 들어서자 주머니 사정은 조금씩 나아졌다. 이즈음에는 외국에서 책을 사면서 나의 행동에 명분을 붙였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외국에서 사는 책값은 대체로 국내에서 사는 것보다 비싸다. 내 마음에 든 책이라도 살 만한 가치가 있는가? 이 점에서 난 기회비용을 고려한다. 만약 이 책이 국내에서 구할 수 없는 탓에 (혹은 장시간 국내에서 살 수 없는 탓에) 리스본 같은 이역만리까지 가서 책을 사야 한다면 얼마만큼의 비용이 들겠는가? 만약 국내에서 절대 살 수 없는 책이 있다면 외국을 나가지 않는 한 그것을 구하는 기회비용은 한도 없이 크다. 지금은 항공비도 누군가 대신 내주었고, 난 이미 이 자리에 있으니 그 부분의 비용은 없다고 할 수 있다. 책값이 조금 비싼들 '아까워할 이유가 어디에 있으랴!' 이렇게 생각하며 흔쾌하게 돈을 꺼내는 것이다. 

- 이런 명분은 대단히 유용해서, 언제나 나의 아쉬움을 덜어 주는 동시에 기쁨을 가져다주었다. 전에는 돈이 없어서든 망설이다 결정을 내리지 못하든 갖가지 이유로 좋은 책을 손에 넣지 못한 채 그 자리를 떠났다가 귀국 후에 아쉬워했다. 그러나 지금은 용감하게 좋아하는 책을 사서 돌아오고, 집에서 찬찬히 감상하며 흥에 겨워하다 먼 외국에 나가 좋은 책을 구해 올 수 있다는 사실에 기뻐하곤 한다. 책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이 아쉬움과 기쁨의 간극만큼 큰 것이 있을까?
 
- 나와 거거 선생이 망년지우가 된 것은 우리 두 사람의 공통된 독서 취향 때문이었다.
베이징에서 대학원을 다닐 때 내 룸메이트는 과학사학자 쉬량잉 선생의 제자 슝웨이였다. 어느 날 슝웨이가 내게 말했다. "쉬 선생님께서 나한테 거거 선생님 학문이 대단히 깊다면서 종종 찾아가 가르침을 청하라고 하셨거든? 그런데 내가 뵈러 가면 거거 선생님은 나랑 물리학 얘기는 하지 않으시고 다른 책을 권해 주시지도 않아. 만날 진융 소설만 추천하셔. 진짜 이상해." 그때의 난 아직 진융의 팬이 아니었지만 언제나 마구잡이 독서를 하는 덕에 마침 <중국석유대학학보 中國石油大學學報>에 실린 거거 선생의 논문을 읽은 적은 있었다. 그 논문은 국내의 물리학사에서 이름난 어떤 사람에 대한 학술 논의를 펼쳤는데 논문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진지한 이야기와 농담이 사방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섞여서 튀어나와 그간 내가 읽어 왔던 '학술 논문'과는 엄청나게 달랐다. 예를 들면 글에 "진정 원더풀하다!" 같은 말이 나오는 정도다(이 표현은 나중에 슝웨이가 흉내 내어 여기저기 써먹었다). 내게는 좋은 글이나 책을 읽으면 작가를 기억해 두는 훌륭한 습관이 있다. 그런데 이렇게 선생의 이름을 들은 데다 그런 행동거지에 대한 얘기까지 들으니 동경하는 마음이 들었고, 결국 날을 잡아 슝웨이를 끌고 거거 선생을 뵈러 갔다. 

- 처음 만났을 때부터 우리는 얘기가 잘 통했다. 대화 내용은 이제 기억할 수 없지만 염정 시사를 얘기했던 건 기억이 난다. 슝웨이가 나중에 날 만나고 난 후 거거 선생이 그에게 "저 장샤오위안이란 친구, 재미있구먼. 자기 입으로 염정시사를 좋아한다고 말하는 녀석이라니."라고 말씀하셨다고 전한 덕분이다. 인생의 고수는 사람을 볼 때 대체로 작은 데에서 큰 것을 아는 법이다. 염정 시사를 좋아하는 사람은 있기 마련이지만 보통은 민망해서 솔직하게 드러내지 않는데, 난 아무렇지도 않게 취향을 밝혔던 것이다. 

- 이날부터 나와 거거 선생은 나이를 넘어선 벗이 되었고 난 선생 댁의 단골이 되었다. 선생 댁에 가면 우리는 천문학사(내 전공)나 물리학사(선생 전공)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그저 옛 시가, 무협 소설, 진융, 전각, 서예, 명인의 일화 같은 것만 가지고 대화를 했다. 어쨌든 과학사 관련으로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선생은 당신이 번역한 '닐스 보어 선집'이 나왔을 때는 내 부탁대로 각 권마다 글을 써서 선물해 주셨다. 이 일이 물리학사와 연관된다고 말한다면 이는 아마도 우리의 교제에서 유일한 예외일 것이다. 

- 거거 선생은 문학에 재능이 있는 분이어서 지은 사사에도 풍격이 높았다. 오대 시기의 사인연사의 운을 따라 지은 열네 수짜리 <작답지 鵲踏枝(접련화 蝶戀花)>에는 온화하고 다정하면서 어딘지 떨쳐지지 않는 애절함이 있었다. 나로선 풍연사의 작품과 비교하건대 그보다 나은 부분도 있다고 본다. 열네 수의 배후에는 문득문득 아름다우면서도 절절한 사랑 이야기가 드러날 듯 말 듯 보이는데, 혹시나 싶어 거거 선생에게 그런 일이 실제로 있었는지 여쭸으나 선생은 웃기만 할 뿐 대답해 주지 않았다. 거거 선생이 사를 지으면서 선명하게 드러내는 개인의 풍격에 대해서는 일화 하나를 소개하겠다. 

- 거거 선생과 더불어 시와 문장을 이야기하는 친구가 된 이후, 선생은 내가 선생의 작품을 워낙 좋아하기에 새로 작품을 쓰면 언제나 그걸 옮겨 적어 내게 보내 주었다. 나중에 내가 상하이에서 일하게 되고부터는 전처럼 댁에 자주 가지 못해 편지만 주고받으며 지냈다. 어느 날 아내는 채소를 다듬고 난 송나라의 사를 읽으며 놀고 있을 때였다. 몇 수를 중얼중얼 읊은 다음 막 받은 거거 선생의 신작을 탁자에서 집어 소리 내어 읽었다. 그러자 아내가 부엌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건 누구 거지? 들어 본 적이 없는 사 같아. 꼭 거거 선생님 것 같네?" 그 말에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이거, 그분 거야!"

 

- 우리는 이게 그냥 우연이 아니라는 사실을 금세 알아차렸다. 거거 선생의 사에는 그분만의 풍격이 있기에 우리가 분명하게 알 수 있던 것이다. 난 당장 이 일을 편지로 써서 거거 선생에게 알렸고, 선생은 몹시 기뻐하며 새로 글을 지어 보내 주었다. 그 글에는 지음을 만나 느끼는 기쁨이 "박사는 사를 만지고, 미인은 채소를 다듬으며, 품평에서 고갱이를 알아보는 경지에 이르렀구나. 공부하는 그대를 오래도록 만나지 못해, 옛 운율을 다듬어 새로운 모습을 더해 보네."라는 구절에 넘치듯 실려 있다. 소소하지만 즐거운 이야기다.

- 십여 년 전 어느 날, L이라는 사람에게서 전화가 왔다. 서점에서 내 책 <성이라는 장력 아래의 중국인>을 읽고 그 주제와 관련된 '재미있는 책'을 보여 주고 싶다고 말했다. 난 생면부지의 사람인 데다 어디서 뭘 하는 사람인지도 모르는 그를 함부로 집에 초대할 수가 없어서 나중에 보자며 확답을 미뤘다.

- 그로부터 한동안 L은 종종 내게 전화를 걸었다. 내가 무슨 책을 내고 어떤 간행물에 어떤 글을 발표했는지 모두 알고 있었다. 그는 엄청난 양의 신문과 잡지를 구독하는 것 같았고 언제나 서점을 둘러보는 듯했다. 마침내 그는 다시 한번 우리 집으로 책을 가져와 내게 보여 주고 싶다고 제안했다. 그즈음에는 우리가 서로 전화 통화를 한 지도 제법 되어, 그가 나쁜 사람도 아니고 문제를 일으킬 만한 사람도 아니라고 믿을 수 있었으므로 그를 집으로 초대했다. 

- L은 그때 마흔 가량 되어 보였고 노란 얼굴에 비쩍 마른 데다 초췌해 잘생겼다고 말하기는 어려웠다. 아니 실은 못생긴 외모라고 볼 수 있었다.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그는 타이완에서 새로 출간된 <비희도대관 秘戱圖大觀>을 가져왔다. 도서수출입공사를 통해 인민폐 오천 위안을 주고 구입했다고 했다. 그는 마침 주식으로 돈을 좀 벌었고, 쉽게 번 돈이니 쓰기도 쉬웠다고 말했다. 관련 자료에서 이 책이 타이완에서 어느 정도 가격으로 팔리고 있는지 봤던 난 L의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그렇게 만난 그날 우리는 책을 사고 모으는 요령을 교환하며 신나게 이야기를 나눴다.

- 그 이후 우리는 자주 전화로 책 소식을 교환했다. L은 국영 서점의 매니저와 민영 서점의 사장을 많이 알고 있었다. 그는 서점에서 내게 전화해 새 책 소식을 알려 주는 걸 좋아했다. 그는 내 취향을 잘 알았다. 내가 그 책을 원하면 내 대신 책을 할인 가격에 구입해 주었다. 가끔 그가 책을 한 보따리 들고 올 때면 그 안에는 자주 볼 수 없는 책이 있기도 해서, 그중 내가 필요로 하는 책은 그 자리에서 돈을 주고 넘겨받곤 했다. 어떨 때는 그가 내게 책에 대해 묻기도 했다. 예컨대 어떤 책에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 같은 문제였다. 어떨 때는 내가 오래도록 찾아봐도 구하지 못한 책을 그에게 부탁하기도 했는데 그러면 그는 대체로 그 책을 구해 왔다. 

- L과 알고 지낸 얼마 뒤부터 나는 궁금증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는 거의 매일 여러 서점에서 살다시피 하는 것 같은데 그럼 출근은 하지 않는 걸까? 뭘로 먹고사는 걸까? 왕래가 잦아지면서, 나는 L 자신과 민영 서점의 사장들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통해 그에 대해 조금씩 알게 되었다.

- L은 일곱 살 때부터 서점을 누비는 취미를 들이기 시작했고 이것이 병이 되고 말았다. 서점을 돌지 않으면 괴로워지게 된 것이다. 그는 광고 회사를 다녔지만 일이 불안정해 이따금씩 실직 상태가 되곤 했다. 그는 매일 서점을 돌았고 가끔 증권가를 어정거리다 목돈을 쥐었다. 듣자니 수입이 꽤 짭짤했다고 한다. 부유하다고는 할 수 없어도 책을 살 돈이 부족하지는 않았던 듯하다. 그는 책을 살 때면 무슨 공금 처리 같은 건 전혀 하지 않고 오로지 자기 돈을 썼다. 문학과 역사 분야의 서적 수집을 좋아해서 지금까지 모은 책이 만여 권, 아니 그보다 더 많을 것이다. 그의 집은 그리 넓지 않아 엄청난 양의 책이 한 곳에 무더기로 쌓여 있다. 제대로 정리하는 것만도 보통 일은 아닐 것이다. 그는 산 책은 대개 읽고, 적어도 대강의 내용은 훑어본다. 그는 상업적인 안목이 있는 장서가가 아니다. 기본적으로 작가 예링이 말하는 애서가에 속한다.

- L은 책과 출판 관련의 신문과 잡지를 다수 구독해 그 분야의 움직임과 중심 화제 등을 놓치지 않고 파악했으며, 수많은 책의 작가와 역자와 출판사와 판본 같은 상황을 손바닥 보듯 훤히 꿰고 있었다. 요즘 몇몇 출판사(아마도 해적판을 내는 곳)에서는 어떤 책들을 계속 재출간하면서 책 제목을 바꿔 내곤 하는데 그는 그런 책을 보면 한눈에 알아채고 이렇게 말한다. "이 책은 어디 어디 출판사에서 이미 낸 무슨무슨 책이네요."

 

- 한편으로 그는 각종 출판사와 연락하는 데 몰두하기도 해 어떨 때는 심지어 서점을 도와 책을 입고시키기도 한다. 그의 목적은 그저 자기가 원하는 책이 유통돼 그 책을 살 수 있게 되는 것뿐이다. 한번은 서점 매장에서 손님에게 얼마나 열심히 책을 추천하고 설명했는지 서점 직원으로 오해받기도 했다. 또한 자기와 같은 취미를 가진 친구들과 자주 교류하며 장서와 관련된 일을 토론하기도 한다. 

- <요재지이> 권11에는 <책벌레>라는 제목의 이야기가 있다. 이 이야기에 나오는 사람은 대단히 사랑스럽고, 나중에는 책 속에서 안여옥이라는 아름다운 선녀를 만나 혼인한다(포송영감은 삼백여 년 전에 벌써 이런 '포스트모던'한 내용을 다룰 줄 알았다). 난 줄곧 책벌레는 소설가의 펜에서나 나오는 '문학 속 인물'인 줄 알았다. 그러나 L을 만나고 몇 년이 지난 후 나는 실제로 세상에 책벌레가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깨달았다. 

- L은 학문을 하지도 않고 프리랜서 작가도 아니다. 그가 모으는 책들은 그의 생계에 거의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한다.
내가 보기에 그가 책을 사고 모으고 책 이야기를 하는 것은 순수하게 오로지 그 과정을 즐기기 위함이다. 서점에서 내게 전화해 새로 나온 책을 말해 줄 때, 서점 손님에게 좋은 책을 소개할 때, 책을 모으는 친구들과 서로 자기가 모은 좋은 책에 대해 이야기할 때 그는 형언할 수 없는 최고의 기쁨을 느낀다. 이 기쁨을 맛보기 위해 그는 기꺼이 대가를 치른다. 그의 생활수준은 보통 사람이 보기에 몹시 처참하다. 물론 그 자신은 전혀 그렇게 여기지 않는다. 

- L은 지금도 결혼을 하지 않은 상태다. 그는 내게 자기 같은 사람을 좋아하는 여성은 무척 적다고 말한다.
지금은 많은 여성이 스스로 '독서를 사랑'하고 '문학을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그녀들의 진정한 사랑은 어디에 있는가? 그녀들의 진정한 사랑은 돈이다. 물론 직접 그렇게 말하지는 않는다. 듣기 좋은 말로 표현할 뿐이다. 예를 들면 남자친구에게 '일에서 어느 정도 성공해야 한다'라고 요구하는 것 말이다. L 같은 사람이야말로 진정 책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그의 사랑은 어떤 실리도 추구하지 않는다. 그는 책을 사랑한 나머지 이미 상당한 정도로 정상적인 생활에 방해를 받고 있지만 책에서 행복을 얻었다. 많은 사람이 그의 사랑이 지나치다고 느낄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 지나친 사랑으로 인해 그는 지나치게 성실하고 지나치게 사랑스럽다. 

- 처음 L을 만났을 때 그의 초췌한 얼굴은 남당의 후주 이욱 李煜의 시 구절 "일단 포로가 되어 돌아오니 허리는 마르고 머리는 반백으로 쇠약하도다."를 떠올리게 했다. 나중에 난 나의 이런 연상에 어느 정도 일리가 있음을 깨달았다. 그는 실제로 책(혹은 책에 대한 사랑)의 포로였던 것이다. 다만 그는 포로이면서도 삼국 시대 촉나라 후주처럼 "그 사이에 즐거움이 있어 촉나라가 그립지 않다네."의 경지에 이르러 있어서 스스로 책을 위해 초췌한 상태가 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는 것이다.
나는 이 망망한 사람의 바다 어딘가에서 그와 천생연분이 될 책벌레가 그를 기다리고 있기를 마음속 깊이 바란다.

 


맺음말


서재는 내게 작업실이자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고 매체의 방문을 맞는 응접실이자 시청각실이기도 하다. 나의 일도 공부도 휴식도 여기에서 이뤄진다.

전부터 책에 대한 내 탐욕을 단속하고자 노력하고는 있지만 책과 영상물이 갈수록 느는 데다 책을 다른 곳에 두고 싶어 하지 않는 바람에, 책과 디스크는 점점 집 안 곳곳을 침범하고 있다. 침실, 거실, 복도, 현관 등에는 차례로 책장과 디스크장이 만들어졌다. 건축보존학을 공부하는 딸아이는 진작 독립해서 살고 있는데, 우리 집에서 가장 보기 좋은 공간이 책장과 디스크장이 설치된 복도라고 말해 주었다. 딸아이의 말은 내게 적잖은 위로가 되었다. 딸아이가 출국한 후 그 아이의 방은 내 '두 번째 서재'가 되어 벽면 가득 책이 들어차 있다. 그곳에는 주로 가지고 놀 만한 책들을 둔다.

지금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날은 하루 종일 바쁘게 바깥을 돌아다니지 않아도 되는 날이며, 하루 종일 서재에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날이다.
 

요즘 내가 종종 중얼거리는 구절 두 가지는 이렇다.

'책 있으면 부자, 일 없으면 신선'

'안온한 상태를 얻기가 가장 어려운 법'



역자 후기

다음 생은 책고양이로...

 



책은 요물이다. 

올해는 반드시 책을 줄이자고 다짐했건만 줄이기는커녕 늘어난 책을 감당하지 못해 책장을 새로 들이게 되었다. 요즘은 다 읽은 책이나 더 읽지 않을 책을 팔 곳도 있어서 정리를 해가며 신중하게 구입하는데도 그렇다. 자가 증식이라도 하는 건가, 세포 분열이라도 일으키는 건가 의심의 눈초리로 책을 노려볼 때도 있다. 

책의 물성으로만 보면 글씨가 찍힌 종이를 묶은 것뿐이다. 하지만 일단 책을 펼치고 그 글씨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하면 앉은자리에서 새로운 세상에 들어갈 수 있다. 한 사람 혹은 여러 사람이 만든 또 다른 세계. 그것은 소설만이 아니라 수필이든 역사나 철학이나 과학이든 마찬가지다. 혹은 흥미진진하고 혹은 우습고 혹은 지루하고 혹은 슬픈, 오롯한 하나의 세계다. 

그래서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는 길이 되어 주는 책에 한번 발을 들이면 되돌아 나오기 쉽지 않다. 책장에 꽂힌 책들 중 원하는 책을 골라 손에 쥐는 감각부터 종이의 결을 만지며 활자를 눈으로 좇는 기분, 한 장씩 넘어가는 책장 사이로 느껴지는 두근거림. 그리고 마지막 책장을 덮을 때의 만감은 다른 무엇으로 대체할 수 없다.

번역을 위해 이 책을 처음 읽기 시작하며 저자 장샤오위안이 만든 책벌레의 세상으로 들어갔을 때의 즐거움이 지금도 기억난다. 나는 중국 현대사에서 판에 박힌 듯 뻔하고 큰 맥락이 아닌 개개인의 역사가 궁금했다. 그런데 어린 시절에 문화대혁명(문혁) 시기를 보내고 개혁개방을 거쳐 지금의 중국을 살고 있는 책벌레의 이야기라니, 딱 읽고 싶은 이야기였다. 

요즘은 중국의 문혁에 대해 새로운 해석이 여럿 나오고 있지만 문혁의 존재를 아는 외국인에게 문혁은 여전히 어둡고 무섭고 두려운 시절이다. 그 시절의 혹독함을 절절히 읍소하는 책이 한때 얼마나 많이 나왔던지. 그러나 저자 장샤오위안의 추억은 다르다. 그 힘든 시절에 책을 사랑하게 되었고 힘든 시절이기에 만든 기쁨이 있었다. 저자만이 아니라 그의 망년지우 장칭디 선생의 이야기는 내가 궁금했던 중국 현대사의 한 구석을 보여 주었다. 역사의 질곡을 지나 그 와중에서 자기 자신의 삶을 엮는 사람들의 이야기였다. 

물론 무엇보다 즐거운 건 책 이야기였다. 중국과 소련의 관계에 따라 변하는 중국 내 소련 소설의 위상이라든지, 중국어권 문화계를 풍미한 니의 '웨슬리 시리즈'와 진융의 무협소설 이야기, 중국의 과학 소설 상황 같은 부분은 내 개인적인 관심사와 함께 무척이나 흥미롭게 읽었다(그리고 거거 선생의 <진융 소설 인물 인보>에 이르러 실물을 보고 싶다는 마음이 폭발할 지경이 되었다).

장샤오위안이 하는 이야기만 즐거운 게 아니다. 이 책에서 보는 장샤오위안의 개인사도 대체로 유쾌하다. 아마도 장샤오위안이라는 사람 자체가 낙천적인 성격은 아닐까 짐작한다. 천문학과를 나와 중국에 처음으로 과학사학과를 만든 일이나 전공이 천문학이면서 성학 性學을 자기의 두 번째 전공이라고 공공연히 말하는 데다 이후에 과학소설 서평과 영화평을 쓰고 책을 내는 일에 이르기까지 여기저기에서 다양한 비난을 들었을 법하다. 그래도 그의 글에는 별다르게 우울해하거나 억울해하는 기색이 없다. 이과와 문과의 경계선에서 살고 있다는 그의 말처럼, 어쩌면 그는 자기 자신을 주류에서 벗어난 사람으로 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냥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즐기는 데 거침이 없다.

그런 사람이라서 그런지 저자의 관심사 역시 잡식성이다. 내키는 대로 다 건드려 본다. 그리고 그 잡식성의 관심사를 확장하는 데 일가견이 있다. 어릴 때는 장기에 미쳤다가 <서상기>에 푹 빠졌다가, 사내만 가득한 대학원에서 성 이야기에 눈을 뜨더니 그대로 성학을 연구하기도 하고, 진융의 무협 소설은 기본이며, 사스를 핑계로 과학 영화를 보기 시작해 과학 소설로 넘어가 아예 그 분야로 서평과 영화평을 쓰고, 열심히 책을 읽더니 이제 편집도 한다. 한번 호기심이 들면 끝까지 파고들어 취미를 업으로 삼는 경지에 이른 사람인 것이다. 그의 호기심은 학회로 오게 된 한국에서 <삼국유사>를 찾아 서울 시내를 누비게 만들고, 포르투갈의 작고 초라한 서점에서 에로티크 박물관의 도록을 발견하는 행운을 안겨 준다. 그의 관심 분야와 열정은 종횡무진 끝이 없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내내 '아, 잘났어 정말.' 하며 부러움 섞인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런 그의 바람은 고양이가 되는 것이다. 게으름뱅이 고양이. 서재 가득 꽂힌 책과 디브이디 사이를 나른하게 오가며 자다가 깨다가 읽다가 보다가 상상에 빠지는 고양이. 떠올리기만 해도 행복해지는 일이다. 아, 이건 모든 책벌레의 꿈이 아닐까. 이번 생이 안 된다면 다음 생에서라도. 따뜻한 차를 마시며 맛있는 책을 읽다가 잠드는 일은 언제나 행복할 테다. 

저자의 바람이 사랑스럽게 담긴 표지의 그림에는 사연이 있다. '이상한 나라의 헌책방'의 주인장 윤성근 씨가 책방의 느낌을 잘 살린 명함을 만들고자 했다. 몇 가지 기준을 가지고, 대안학교에서 교사로 일하며 그림을 그리는 성진경 씨께 문의했다. 그렇게 해서 나온 고양이 그림이다. 유유출판사 대표가 이 그림을 보고 썩 마음에 들어 하면서 사용 허가를 받고 디자이너에게 의뢰해 지금의 표지가 나오게 되었다. 나 역시 표지를 보고 좋아서 어쩔 줄 몰랐다는 사실을 여기에 살짝 붙여 둔다.

 

- 이경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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