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1

[정혜윤] 앞으로 올 사랑 - 디스토피아 시대의 열 가지 사랑 이야기

일루젼 2024. 7. 30. 21:21
728x90
반응형

저자 : 정혜윤
출판 : 위고
출간 : 2020.12.05


       

처음에는 디스토피아를 배경으로 한 열 편의 단편 소설집인 줄 알았다. 

다 읽고 난 지금은, 뭐라고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음... 여러 가지 측면에서 바라본 '사랑'에 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앞으로 올 사랑>에서 사랑의 대상은 계속해서 바뀐다. 그것은 때로는 동물이나 환경이었다가, 또 때로는 나 자신이었다가, 어떤 순간에는 존재를 넘어선 미래 그 자체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한 걸음 물러나서 바라보면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결국 '나'를 사랑하는 이는 '나'에게로 이어지는 모든 것들과 뻗어나가는 모든 것들까지도 사랑하게 될 것이므로. 

 

인용된 많은 책들에 관심이 생긴다는 점에서는 리뷰이기도 하다. 거기에 더한 저자의 생각을 조금 더 온전히 느껴보려면 인용된 책들을 읽어보아야 할 것 같은데, 이야기마다 적어도 두세 권의 책이 소개되니 한 번에 스무 권 이상의 책들이 독서 목록에 추가되고 말았다. 가벼운 마음으로 읽으려다 묵직함을 느끼고 말았지만- 기분 좋은 무게감이다. 

 

현재의 일상이 소중한 만큼 그 일상의 유지와 개선을 위해 할 수 있는 선택지들을 찾아내는 것은 기쁨이 될 것이다. 

그리고 아주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부채감이 아닌 사랑으로 선택했으면 좋겠다. 내가 수긍할 수 없는 정답은 적어도 나에게는 답이 아닌 것이다. 타인과 다른 답을 가질 수 있음이 당연한 세상이 될 때- 어쩌면 그 사회는 가장 자연스러운 형태의 생태계와 닮은 꼴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우리 도시에서는 이제 누구도 고양된 감정을 느끼지 못했다.
사람들은 하나같이 단조로운 감정만 느꼈다.
"이제 끝날 때도 됐는데."

- 알베르 카뮈, <페스트> 

 

 

 

- 나는 바로 그 이유, '이 시대에 꼭 필요한 말을 시작하는 방식을 배우기 위해' <데카메론>을 읽기 시작했다.

 

- 이렇게 해서 열 명, 열 개의 주제, 모두 백 개의 이야기가 탄생한다. 이야기의 구성은 이렇다. 

 

첫째 날, 각자 좋아하는 이야기

둘째 날, 쓴맛을 본 뒤 결실을 맺는 이야기

셋째 날, 오랫동안 열망하던 것을 손에 넣는 이야기

넷째 날, 불행한 결말로 끝나는 사랑 이야기

다섯째 날, 역경을 딛고 행복한 결론에 이르는 사랑 이야기

여섯째 날, 날카로운 통찰로 위기를 모면하는 이야기

일곱째 날, 골려먹는 이야기

여덟째 날, 농담이든 뭐든 재미난 이야기

아홉째 날, 각자 좋아하는 이야기

마지막 날, 관대한 마음으로 모험을 행하는 자의 이야기

 

 

- 여기서 좀 과격하지만 완전히 허무맹랑하지만은 않은 나 나름의 상상을 해볼 수 있다. 

<데카메론>에서 실컷 즐기는 사람들이 사실은 이미 죽어 땅 속에 묻혀 있는 사람들이라면? 발칙한 아홉 명의 수녀와 마세토 모두 유골이라면? 그렇다면 산 자는 죽은 자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만들어주고 싶어 하지 않았을까? 이렇게 허망하게 죽어버릴 거면 살아 있을 때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 현실을 더 즐기는 게 낫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 보카치오는 사랑이 아니라 위선이 가득한 도시에서 그곳에 '아직은 없던 사랑'에 대해 쓴 것일까? 아니면 아직은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미 현실화되고 있는 사랑의 가능성에 대해서 쓴 것일까? 어느 경우든 보카치오는 당시 사람들의 꿈이 원했던 이야기를 들려준 셈이다.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이야기를 들려줬을 것이다. 바이러스만 전염되는 게 아니고 행복도 웃음도 기쁨도 전염된다. 어쩌면 사랑도 전염된다

 

- 이 시대에 삶을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미 지치고 진이 빠진 우리가 다시 삶을 사랑하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우리 인간은 생존 그 자체로는 절대 만족하지 않는다. 생존 그 이상의 무언가를 원한다. 우리의 몸만 관찰해도 알 수 있다. 우리에게 몸은 몸 이상의 의미가 있다. 한 사람이 죽을 때 그와 함께 살아 있던, 우리에게 사랑스러움을 불러일으켰던 모든 것이 떠난다. 톨스토이가 <전쟁과 평화>에서 말한 바 그대로 타인의 몸은 입 맞추고 싶은 우리의 가장 가까운 추억이다. 우리의 몸이 하는 일, 우리는 그것을 영혼이라 부른다. 

   

- 우리는 늘 상황을 잘 읽어내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그 순간을 살아내느라 정신이 없다. 의미는 얼마 뒤에야 따라온다. 지금이 바로 그런 순간이다. 그러나 모든 행복한 이야기에는 제대로 알아보는 사람이 있고 모든 불행한 이야기는 잘못 보는 데서 시작된다(나는 언제나 내가 보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게 되기를 원해왔고 상황을 더 잘 볼 수 있게 해주는 것들은 모두 천사로 여긴다. 이 글도 대천사들의 도움으로 써보겠다.)

 

- 보카치오가 <데카메론>을 썼던 흑사병 시대를 포함해 어느 시대든 최고의 글에는 글 속의 누군가가 가치 있는 변화를 원한다. 세상이 변할 것이라는 사실은 나쁘기도 하지만 좋기도 하다. 상상해 본 적 없는 거대한 단절의 시기인 지금, 이 균열 속에서 좋은 무엇인가가 나와야 한다. 우리가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있다. 우리에게 아무런 힘이 없다고 생각하는 순간 어리석음은 꽃피고 나쁜 일은 벌어진다.

 


 

- 나에게는 아주 까다로운 친구가 있다. 그 친구는 매사에 비판적이고 어디서나 어떻게든 단점을 찾아내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기 일쑤였다. 천만다행으로 그에게도 대화 상대가 있었는데 바로 나다. 나는 그와는 정반대의 성격으로 매사에 긍정적이었고 어디서나 어떻게든 장점을 찾아내 내가 나타나면 분위기가 환해지는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 우리가 같이 버스를 타고 어딘가 간다고 생각해 보라. 나는 시시각각 달라지는 풍경에, 삭막한 도로 위에 피어난 꽃 한 송이에 눈길을 두고 흐뭇한 미소를 짓는다. 한편 나와 나란히 서 있되 정반대편을 바라보는 친구는 아무리 풍경이 바뀌어도 변치 않는 모습들 -거리에 가래와 침을 뱉는 사람, 마시던 테이크아웃 잔을 슬그머니 벤치에 두고 가버리는 사람에게 눈길을 두고 '거봐! 내 저런 걸 보게 될 줄 알았다니까!' 하는 득의만만한 표정을 지으며 내 옷을 잡아당겨 굳이 나도 같이 보게 만든다.

 

 

- 그러나 미래를 그 정도까지 생각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우리의 자기중심성 지수는 상당히 높아서 '당장 2021년도 모르겠는데 어떻게 몇 년 뒤를 생각하고 살아? 지금 당장 '내 코가 석 자'로 자신의 선택을 설명하기 시작하면 제일 먼저 포기하는 것이 타인과 미래다. 내가 불안한데 어떻게 남까지 생각해? 현재가 불안한데 어떻게 미래를 생각해? 그러나 위험은 늘 현재만을 생각할 때 온다. 미래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누구도 확신할 수 없는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이 일명 '미래인지 감수성' -'내가 이렇게 하면 미래한테 너무 폭력적인 거 아닐까?'라는 질문-이다.     

  

- 하여간 내 친구의 애타는 포효는 계속된다. 친구는 연인들이 서로를 사랑한다는 것 또한 믿지 않는다. 

"함께 있을 때 뭘 하는지 보라고. 각자 자기 핸드폰을 봐. 심지어 함께 인증샷을 찍을 때도 각자 자기 얼굴만 본다니까?"

- 내 친구의 의견에 따르면 우리 시대의 사랑은 자기중심적인 나르시시스트들의 이중주에 불과하다.

"사랑은 요구사항이 더럽게 많은 나르시시즘을 가리키는 말이야. 인정 욕구로 넘치면서 왜 또 계속 우쭈쭈 해주길 바라는 거야?"

 

- 보다시피 내 친구의 사랑관은 각양각층의 사람들의 분노 또는 무시를 골고루 일으키기 좋다. 한마디로 "재수 없어! 그러는 너는?"이라는 반항심을 불러일으키기 딱 좋은 사랑관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문제가 있다고 말하면 문제적 인물이 되는 곳이다. 그런 점에서 다른 사람들이 조금도 듣고 싶어 하지 않는 말을 일관되게 주장하는 내 친구야말로 진정으로 '미움받을 용기'를 구현하고 있는 우리 시대의 '성자'라고 볼 수 있다. 

 

- 내 친구는 언제나 일관되게 꿈을 현실보다 우위에 놓고 있을 뿐이다. 

사실, 친구의 사랑관은 우리가 사는 모습의 모든 면을 문젯거리로 느끼게 만들기 때문에 불편하다. 그러나 이 불편함이 현실을 사는 내 모습을 다시 보게 만든다. 의심을 품으면 자유, 의심을 품지 않으면 부자유라는 말에 입각해서 보면 내 친구는 자유다. 분명한 것은 아무것도 사랑하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반대할 일이 없다는 점이다. 아파할 일도 없다. 내 친구도 마찬가지다. 친구는 쓰레기를 양산하는 상품보다 생각을 혹은 지식과 꿈과 경험을 나누면서 사랑하고 싶어 했다. 소비가 아니라 인간관계에서, 대화에서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삶을 사랑했다. 함께 소비하는 것보다는 함께 추구하는 것을 사랑했다. 사물들로 이뤄진 세상이 아니라 가치들로 이뤄진 세상을 사랑했다. 지금 이대로의 삶이 아니라 지금 이대로의 삶을 고치고 수선하는 삶을 사랑했다. 내 친구는 새로운 인간관계를, 새로운 대화를 만드는 전문가일 수 있었지만, 할 수 있는 한 그렇게 해냈지만, 꽤 고독했다. 한 도시에서 가장 먼저 일어나 혼자 깨어 있는 사람처럼, 누군가 일어나는 기척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고독했다. 꿈과 욕망이 달랐고 보는 눈이 달랐기 때문이다.

 

- 두 보이저호에는 특별한 물건이 하나씩 장착되어 있었다. 금박을 입힌 축음기용 구리 레코드판이 그것인데, 레코드판에는 지구인이 우주인에게 보내는 메시지가 기록되어 있다. 118장의 사진과 90분에 가까운 인류 최고의 음악들, 그리고 지구와 생명의 진화를 표현한 12분짜리 소리 에세이 <지구의 소리들>, 대략 50여 개국 언어로 녹음된 60개의 "안녕"이라는 인사말(이중에는 고래의 인사말도 있다)이 그 내용들이다. 

 

- 음악은 피그미 소녀들의 성년식 노래, 세네갈의 타악기 연주, 루이 암스트롱의 <멜랑콜리 블루스>, 모차르트의 오페라 <마술피리> 중 

'밤의 여왕의 아리아',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 중 '신성한 춤', 나바호족의 밤의 찬가, 아제르바이잔의 백파이프 곡 <우감> 등 스물아홉 곡이 실렸는데 그중 <지구의 속삭임>에 실린 두 곡에 대한 설명이 유달리 아름답다. 

 

- 첫 번제는 불가리아 양치기의 노래 <이즈렐 예델요 하그두틴>이라는 곡에 관한 글인데 양치기의 노래가 우주선에 실린 것은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밤에 누가 가장 별을 많이 볼까를 상상해 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양치기다. 양치기는 밤에 양을 돌봐야 했기 때문에 깨어 있어야 했고 덕분에 별을 공부하는 학생이자 별자리 작성자가 되었다. 그런데 양치기들은 어둠 속에서 어떻게 양들을 돌봤을까? 양치기 개의 도움으로? 대답은 다른 곳에 있다. 양들을 달래고 한 곳에 모아 두기 위해서 양치기들이 이용한 것은 백파이프였다. 옛날 백파이프 소리는 양 울음소리를 닮았을 뿐만 아니라 백파이프 자체도 양을 닮았다. 양가죽으로 만들어졌고 심지어 발굽까지 달린 것도 있었다. 그 결과 양들은 백파이프를 자기 동료처럼 여기며 반응했다.  

 

- 양치기들은 수많은 음악을 창작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흘러넘치는 시간과 언제나 귀 기울이는 믿을 만한 청중이 있었으니까. 

 

- 이 이야기는 양치기 주위에서 음악에 귀를 기울이는 양들의 곱슬곱슬한 작은 머리통을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별들은 첫 번째 천사이므로 별이 있는 한 우리는 천사와 함께 있는 셈이라고 한 보르헤스의 말도 떠올리게 한다. 보르헤스는 이 이야기를 읽은 우리보다 먼저, 우리가 별들을 존경하게 된 데는 천문학자들의 노력만이 아니라 양치기와 양들의 역할도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밤과 별과 노래에 아름다움을 부여한 양들이라면 우리는 자자손손 양에게 영광을 돌리고 찬양해야 한다는 생각 또한 가지고 있었다. 

 

- 또 하나는 중국의 고금(古琴) 연주곡 <유수(流水)>에 대한 설명이다. 고금 기보에는 왼손으로 현을 누르는 방식이 자그마치 백 가지가 넘게 나열되어 있는데 백여 세대에 걸쳐 전수되는 동안, 각각의 운지법에는 시적인 장식 문구가 겹겹이 덧붙여졌다고 한다. 예를 들면 '희미하게 잦아드는 절의 종소리'라고 명명된 중간-느림 속도의 비브라토(진동음)에는 현에 댄 손가락을 '개천에 떠내려가는 꽃잎'처럼 떨라는 주석이 달려 있고, 화려한 꾸밈 악구로 끝나는 화음에는 '물고기가 튀어 오르는 소리'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 '표범이 와락 덮치는 것' 같은 기법도 있고, '물에 앉은 잠자리'처럼 가뿐하게 연주하라는 기법도 있고, '까마귀가 눈밭을 쪼듯이' 스타카토로 연주하라는 기법도 있다. 

 

- 이 이야기의 아름다움은 인간이 자연을 닮으려고 하는 데서 나온다. 이 글에 나오는 인간의 손동작 중 어느 하나도 부자연스럽거나 억지스러운 데가 없다. 이럴 때 인간은 섬세하고 우아하다. 이중 내가 보지 못한 것은 표범이 와락 덮치는 것뿐인데, 경험해보고 싶은 종류의 일은 아니다. 나머지 것들은 자연을 다시 한번 자세히 보고 싶게 만든다. 이럴 때 자연도 나도 다시 한번 생명력을 얻는다. 자연이 나를 길들인다. 

 

- 완전히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지 않다는 데서 오는 가난함, 사랑하는 사람들, 사랑하는 것들 속에 있지 않다는 데서 오는 가난함. 둘 다 치명적으로 우리 마음속 깊은 곳을 외롭게 한다.

 

- 그런데 우리에겐 최근 또 다른 가난함이 생겼다. 조회수에 매달리면서 생긴 가난함이다. 

 

- 우리는 안다. 못질당하는 몸의 고통을. 겪어봐서도 아니고 배워서도 아니고 그냥 안다. 감각적으로 안다. 마치 마취 없이 수술받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듯. 우리에게 몸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몸은 다른 몸이 고통받는 것을 보면서 아파한다. 그럴 때 우리도 동물이다. 고통받는 몸을 보고 즉각 가슴에서 솟구쳐 우리를 아프게 하는 것이 동물적 연민이다. 동물적 연민을 '느끼는', 이것이 '동물-인간'이다.

 

- 아파해야 한다. 그 아픔을 막기 위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음 또한 아파해야 한다. 가슴 아파함 없는, 안쓰러움 없는, 연민 없는 사랑은 없다. 가슴 아파할 수 있음이 앎과 변화를 낳는다.

 

- <첫째 날, 좋아하는 이야기 - 미래인지 감수성>

 

-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를 쓴 더글러스 애덤스는 동물학자 마크 카워다인과 함께 멸종위기 동물들을 찾는 기획에 참여했다. 더글라스 애덤스의 역할은 무슨 일만 생기면 까무러치게 놀라는 것이고 마크 카뮈다임의 역할은 전문가답게 들을 만한 말을 하는 것이다. 그 둘은 그 역할을 정말 잘 해냈다.

 

- 그들 일행이 그곳에 간 이유는 뉴질랜드의 날지 못하는 새 카카포를 보기 위해서였다. 그곳은 뉴질랜드 본토에서 마지막으로 카카포가 대규모로 서식했다고 알려진 곳이다. 야행성 녹색 앵무새인 카카포는 뉴질랜드에 사람들이 살지 않는 동안 날 수 있는 능력을 잃었다. 자신이 예전에는 날았다는 사실조차 잊었다. 

 

- 대체 이 새가 이 험한 세상에서 어떻게 살 수가 있겠는가? 이 문제는 내 근심거리가 되었는데 속 썩을 일은 또 있었다. 짝짓기를 할 때 수컷은 양쪽 가슴의 커다란 공기주머니를 부풀려서 그 속에 머리를 묻고 웅웅거리는 저음을 낸다. 들어본 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새소리라기보다는 심장이 고동치는 듯한 소리라고 한다. 대부분이 고음인 새소리와 달리 카카포의 울음소리는 대단히 멀리까지 퍼져나가는데 어디가 진원지인지 알 수가 없을 정도다. 문제는 암컷 카카포도 그 소리가 어디서 나는지 감을 잡을 수 없다는 것이다. 

 

- 신은 어째서 카카포를 이렇게 만들었을까? 더글러스에 따르면 신은 어떻게든 생존경쟁에서 살아남을 것들을 만들어야 한다는 압밤감에서 벗어나 '그냥' 되는 대로 한번 만들어본 것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나는 '인간중심주의자'가 아니라 '카카포중심주의자'가 되고 싶다. 어떻게든 생존하느라 지칠 대로 지친 나도 '그냥' 만들어진 창조물 계보에 속해 나름 있는 그대로 봐주고 나 같은 사람도 내가 무슨 쓸 만한 능력을 가졌는지 증명할 필요 없이 살게 해달라고 카카포의 목소리로 말하고 싶다. 

 

- 바로 이런 저변의 기회를 발판 삼아 바이러스가 동물에서 인간으로 일련의 도약을 시도해 왔다. 우리는 이런 이야기에서 미미하게나마 우리를 둘러싼 관계망을 감지한다. 조금이나마 우리가 어떻게 연결되었는지를 알게 되고, 그 안에서 나의 삶도 보이고, 타인의 삶도 보이고, 동물의 삶도 볼 수 있게 된다.   

 

- 빈곤의 문제가 인수공통감염병에도 영향을 미쳤고 그 빈곤이 식탁에 오르는 음식 때문이라면 슈퍼에서 음식을 한번 고를 때마다 머릿속이 꽤 복잡할 것이다. 도리가 없다. 먼저 알게 된 사람들부터 음식을 고를 때마다 불편을 감수해야 할 것이다. 프로스퍼 발로처럼 손에 든 것을 오래도록 들여다봐야 할 것이다. 인수공통감염병이든 기후위기든 알면 알수록 일상의 선택 하나하나에 찜찜함과 불편함이 깃든다. 그러나 전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하던 일이 마음 불편해지는 일이 되는 것에 희망이 있다. 뭔가를 불편하게 여기느냐 아니냐, 그것을 감수하느냐 마느냐, 전과는 다른 선택을 하느냐 마느냐가 우리의 행과 불행을 가르는 갈림길이 될 것이다.

 

- 아마존을 탐사했던 영국 작가 제이 그리피스의 말에 따르면 정글에서는 길을 잃기가 너무나 쉬운데 그것은 길이 금방 사라져 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글에선 길을 반복해서 걷는 것이 사랑의 행위가 된다는 것이다. 올바른 선택을 반복해서 하는 것도 사랑의 행위다.

 

- 최근에 환경에 대한 관심으로 자신의 일상적인 식습관이나 소비습관 등을 바꾸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그들은 자신이 과거에 하던 일을 더 이상 하지 않으려고 한다. 내 눈에 그들은 주의력과 절제야말로 우리 삶의 아름다움의 일부라는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앞으로 올 시대를 위해서라면 어떤 불편함을 감수하고서라도 자신이 만든 삶의 원칙을 지키는 것에 해방의 가능성이 있고, 그것이 일상에 활기와 아름다움과 품위를 부여하고 심지어 새로운 의미까지 줄 수 있다는 사실이 더 많이 이야기되었으면 한다. 삶의 해방은 다른 방식으로는 결코 쉽게 오지 않는다. 삶의 해방은 내가 하기로 한 일을 해내면서 온다.

 

- 다행히 우리에게는 무엇을 할 힘과 무엇을 하지 않을 힘이 다 있다(그런데 역설적으로 무엇을 하는 순간은 무엇을 하지 않는 순간이고, 무엇을 하지 않는 순간은 무엇을 하는 순간이다). 무엇을 하는 힘과 무엇을 하지 않는 힘, 이 둘을 합하면 능력이다. 그리고 무엇을 하는 힘과 무엇을 하지 않는 힘의 관계를 바꾸는 것을 변신이라고 부른다. 무엇을 하는 힘과 무엇을 하지 않는 힘 사이의 균형을 평화라고 부른다. 이 균형을 잡으면서 우리는 자기 삶의 주체가 된다. 이렇게 마침내, 자신이 누구인지 알아가게 된다.

- 자신을 알아가게 되는 과정에는 혜성의 꼬리 같은 것이 필수적으로 붙는다. 선택과 행동이다. 페터 한트케는 타인의 뿌리를 뽑는 것은 범죄 중에서도 가장 잔악한 범죄이나 자신의 뿌리를 뽑는 일은 가장 위대한 성취라고 했다. 하긴, 상황이 이 지경까지 왔는데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그들이 살아갈 지구를 위해서라도 다르게 살기를 선택하지 못할 이유가 뭐가 있겠는가? 우리가 지금 선택한 사랑의 행위들은 우리가 죽은 뒤에도, 아주 오래된 사랑이 있었다는 증거로 영원히 살아남을 텐데.

 

- 그래서 이런 질문이 남는다. 우리의 사랑 이야기에 무엇이 빠져 있는가? 우리의 사랑에 무엇이 없어서는 안 되는가?   

 

<둘째 날, 쓴맛을 본 뒤 결실을 맺는 이야기 - 무엇을 할 힘과 무엇을 하지 않을 힘>

 

- 레이첼은 썰물 때 바닷가에 밀려오는 소금 냄새를, 파도 소리와 안개의 부드러움을 사랑했다. 그녀는 몇 시간이고 조수 웅덩이를 첨벙이며 표본을 수집하고 관찰했다. 특히 그녀는 밤에 해변을 산책할 때 야생을 충분히 느끼려고 손전등을 끈 채 거닐었다. 그럴 때 파도는 검은 빛을 배경으로 다이아몬드와 에메랄드 빛 광채를 뿜곤 했다.

 

- 레이첼 카슨은 이 반딧불이 이야기로 '경이로움'이라는 어린이책을 만들려고 했다. 그녀는 경이로움이야말로 권태와 피로, 무기력, 소외로부터 우리를 지켜주는 착한 요정 같은 단어라고 생각했고, 어른들이 다른 무엇보다도 아이들에게 '경이의 감정'을 알려주길 바랐다. 카슨의 이 말은 진리다. 호기심과 열정, 감탄, 깜짝 놀라는 능력이 없다면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시로 길을 잃을 것이다.

 

 

이런 꿈을 꾼다는 게 정말 신나지 않아요?

 

 

 

- 1954년 새해 첫날 레이첼은 처음으로 도로시를 '내 사랑'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 사랑을 "결코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돌아가지 않으리라"라는 키츠의 시구절로 표현했다. 1955년 레이첼은 도로시에게 "저와 제가 창조하려고 애쓰는 것까지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이 곁에 있다는 느낌이 너무나 벅차다"고 편지를 보냈다. 이 표현은 의미심장하다. 그때 레이첼이 말한 "제가 창조하려고 애쓰는 것"은 책만을 말하는 게 아니었다. 두 사람은 자연세계에 대한 감탄의 감정만이 아니라 이 세상에 존재하는 온갖 아름다운 장소들을 보존하려는 욕구도 나눴다. 1956년 카슨은 해안 숲 보존에 대한 편지를 프리먼 부부에게 썼다.

 

- 이런 꿈을 꿀 줄 아는 것은 "정말 신나는 일"일 뿐만 아니라 이런 꿈을 꿀 줄 아는 것이야말로 자율적이고 독립적인 인간의 삶이다. 레이첼 카슨을 비롯해 신비로운 꿈을 꾸는 사람들의 특징이 무엇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보통 제일 잘할 수 있는 일을 생각하고 잘할 수 있는 일이 없음에 낙담한다. 그러나 신비로운 꿈을 꾸는 사람들은 자아를 넘어선 어떤 것을 생각한다. 제일 잘하는 것이 아니라 제일 성장하고 발전할 수 있는 일을 찾아내 그 일을 한다. 그때 꿈의 주소, 꿈의 목적지는 돈이 아니다. 우리 사회에는 충분한 돈에 대한 꿈은 있지만 충분한 돈으로 무엇을 할 것인지에 대한 이야기는 대동소이하다. 대체로 꿈의 주소는 풍족한 소비다. 짐작컨대 '세련됨'이라는 이름의 화려한('개성 넘치는' 혹은 '독특한' 혹은 '자기만의' 등으로 표현되기도 하는) 라이프스타일은 1960년대 이래 우리 꿈의 목적지가 되었다. 

 

- 그녀는 책을 팔아서 숲을 사고 싶어 했다. 해안숲 보존에 대한 생각은 레이첼에게 각별했던 것 같다. <우리를 둘러싼 바다>는 출간되자마자 이내 대단한 인기를 끌었다. 사방에서 우호적인 반응이 쏟아졌는데 그때 카슨의 머릿속에 막연히 떠오른 생각은 "내가 어떤 일을 했다"기보다 "나를 통해서 어떤 일인가가 일어났다" 같은 것이었다. 

 

- 마조리 스포크와 메리 리처즈, 두 사람은 루돌프 슈타이너가 창안한 전인적 예술철학운동을 공부하면서 스위스에서 만나 사랑에 빠졌고 미국으로 돌아와 롱섬에 집을 한 채 구입했다.    

 

- 1957년 최초의 살충제 소송을 제기한 사람들은 레이첼 카슨에게 워싱턴에 살면서 도움을 줄 누군가를 찾아달라고 청했다. 카슨은 그들에게 도움이 될 누군가를 찾는 과정에서 그 '누군가'가 바로 자신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누군가가 되어가는 과정이 <침묵의 봄>을 쓰는 과정이다. <침묵의 봄>을 쓰는 일은 그녀의 거의 모든 시간과 전적인 헌신을 요구했다. 그녀는 '어떤 사람이다' 혹은 '어떤 사람으로 보인다'가 아니라 '어떤 사람이 되어간다'의 삶을 살았다. 

 

- 생명체들은 모두 어딘가에서 출발해 어딘가로 향한다는 것을 레이첼 카슨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우리는 시간 속에서 산다. 그 시간 속에서 향하는 목적지는 누구에게나 죽음이다. 그렇다면 탄생과 죽음이라는 생물학적 사실을 어떻게 가치 있는 일로 만들 것인가? 그 선택만이 우리에게 남는다. 우리는 죽기 때문에 모든 것이 덧없고 무의미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죽기 때문에 숭고해질 수도, 죽기 때문에 다른 생명체의 죽음을 절절하게 느낄 수도 있다. 우리의 삶은 생물학적 '사실'과 인간적 '가치' 사이 어딘가에, 간밤에 꾼 꿈의 흔적처럼 흐릿하고 신비롭게 묻어 있다. 

 

- 그런데 우리가 향하는 곳이 죽음만은 아니다. 우리가 향하는 곳은 자기 자신이기도 하다. 우리는 인생을 걸 만한 가치가 있는 일에 스스로를 맞춰가고, 그 방법을 통해서만 자기 자신이 되어가고 자기 자신을 향해 다가갈 수 있다. 그녀는 이런 방식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왜 살아야 하는지 혼란을 겪는 대신 자신을 실현해 냈다. 

- 책이 출간되자 살충제를 둘러싼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우리는 새나 벌레 없이는 살 수 있어도 기업 없이는 살 수 없다는 친기업적 입장을 가진 측과 그녀가 인류 전체를 위해 용기 있게 발언했다는 측이 대격돌했다. 많은 시민들, 특히 미래 세대를 보호하는 것에 관심과 책임감을 지닌 여성들이 그녀를 지지했다. 그녀는 <침묵의 봄> 출간 후 많은 상을 수상했지만 특히 의미 있었던 것은 그녀가 존경했던 슈바이처 메달을 수상한 것이다. 그녀는 시상식에서 이런 연설을 했다.
[우리가 오직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 속에 있다고만 생각한다면 우리는 진정으로 문명화한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사람과 모든 생명의 관계입니다. 이 관계가 이토록 비극적으로 간과된 시대는 일찍이 없었습니다. 지금 우리는 기술을 통해 자연 세계와 전쟁을 벌이고 있습니다. […] 불필요한 파괴와 고통을 묵인하며 우리는 인간으로서 우리의 명성을 땅에 떨어뜨리고 있습니다.] 

 

- 그녀는 이제라도 우리가 자연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정복하는 성숙한 면모를 보여주기를 바랐다. 그것을 인류가 처한 도전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는 개인적인 도전에 직면했다. 그녀는 하나의 연약한 생물학적 존재로서 암의 전이라는 문제를 피할 수 없었다. 레이첼은 도로시에게 이런 편지를 보낸다.
[우리는 행복해질 거예요. 인생에 의미를 부여하는 모든 사랑스러운 것들, 해돋이와 해넘이, 만에 비치는 달빛, 음악, 좋은 책, 지빠귀의 노랫소리, 지나가는 야생 거위의 울음소리를 함께 즐길 겁니다.] 
깊은 고통 속에서도 이런 아름다운 생각이 솟구쳐 올랐다. 그녀와 세상을 연결해 주는 끈은 언제나 사랑이었다. 그 사랑 안에는 달빛, 지빠귀의 울음소리도 있지만 "서로가 서로를 위해 살아가는 기쁨"을 함께 누렸던 도로시가 있었다. 둘의 사랑 이야기에는 인내와 헌신이 있고 둘이 누린 추억과 기쁨이 있다. 

 

- <셋째 날, 오랫동안 열망하던 것을 손에 넣는 이야기 - 그녀는 그녀 삶의 예언자가 되었다>

 

- 조르주 페렉은 "빵부스러기를 찾아 바닥을 쪼는 비둘기"의 행위가 독서와 유사한 면이 있다고 봤다. 책을 읽을 때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표시하고 접어두고 메모하고 다시 찾아보는 독자의 행동을 비둘기의 쪼기와 비슷하게 본 건데 동의한다. 

 

- 간단한 줄거리는 이렇다. 주인공 이름은 플로랑클로드 라브루스트. 나이는 마흔여섯. 중상층 출신. 부모님으로부터 안전하게 보호받아 '위험한 계층'은 아예 보지도 않고 살 수 있었다. 그 계급만이 누릴 수 있는 풍요, 이를테면 고급 호텔의 탄탄한 매트리스 같은 것을 체험하고 자랐다. 대학 진학을 위해 파리로 올라와 농업대학에서 생태학을 공부했고 졸업 후에는 농업 관련 일을 하며 괜찮은 커리어를 쌓으며 살았다. 유전자조작식품(GMO)을 생산하는 다국적 회사 몬산토에 다니다가 일종의 농업 관련 별정직 공무원으로 일했는데 프랑스 농업을 널리 알리고 지지하기 위한 무역 협상 보고서 및 평가서를 작성하는 것이 그의 일이었다. 

 

- 캅토릭스를 복용하면 세로토닌이 분비되면서 행복해진다. 인류의 관점에서 보면 이제 행복은 애써 추구하고 연구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적절한 호르몬 처방의 문제로 변한 셈이다. 사랑이 도파민과 옥시토신 같은 호르몬의 문제가 되면서 신비로움을 잃었듯 행복의 처지도 비슷해졌다. 플로랑클로드가 정신과의사를 찾아가 자신의 상황을 대략적으로 설명했을 때 의사는 즉각 신약인 캅토릭스를 소개한다. 우울의 원인이 무엇이든지 간에 거대 제약회사들은 처방전으로 낫게 해 줄 것을 약속한다. 그러나 앞으로 우울은 가장 중요한 주제가 될 것이다.  

 

- 뉴스에 한 줄도 나오지 않는 실직, 소리 소문도 없는 구조조정, 노후 대비, 사랑, 인간관계... 불확실성이 도처에 깔린 삶은 우리를 우울하게 한다. 여기에 더해 그 상황에서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 없는 무지, 할 수 있는 일이 없고 빠져나갈 길이 없다는 무기력, 그리고 이에 따르는 굴욕감이 우리를 한층 더 우울하게 한다. 조증과 울증을 야기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울은 사회학적 병리 현상에 가깝다(2020년 버전의 주식시장을 생각해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자본주의적 우울과 자본주의적 쾌락은 출렁출렁 궤를 같이한다. "아, 재미없어"라는 말에는 안개처럼 자욱한 짙은 우울이 깔려 있다. 그러나 만연한 우울증이 사회와 인과관계가 있음을 밝히려는 시도들은 늘 부정당해왔다. 대신 자본은 스스로가 낳은 질병조차도 돈으로 바꿔왔다. 인수공통감염병이었던 사스의 백신 개발이 이뤄지지 않았던 원인 중 하나도 시장성 면에서 백신이 한번 먹기 시작하면 일생 먹게 될 수 있는 항우울제와 비교가 되지 않아서였다. 

  

- 이제 돈은 과거에 사랑이 하던 역할을 거의 대체하고 있다. 한 사람을 반짝반짝 빛나게 하고, 자신감 넘치게 하고, 안정되게 하고, 자다가도 웃게 하고,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고, 신비로운 아우라로 감싸는 그 불가해한 수수께끼 같은 일을 돈이 다 한다. 사랑이 아니라 돈이야말로 초월적인 존재다. 

 

- 클레르와 만날 당시 그가 다니던 직장이 몬산토다. 몬산토는 우리가 셋째 날 나눈 레이첼 카슨의 이야기와도 관련이 있다. 레이첼 카슨이 <침묵의 봄>을 출간하자 살충제 회사들에는 비상이 걸렸다. 기업별로 언론사가 친기업적인 기사를 쓰도록 홍보부를 가동하고 '레이첼 카슨에 대처하는 법'이란 소책자를 내기도 했다.

 

- 기업들이 레이첼 카슨을 공격할 때 쓴 전형적인 논리는 그녀는 박사도, 대학교수도 아니고 세계 유수의 과학저널에 논문 한번 낸 적 없는, 달랑 석사학위만 하나 가지고 있는 아마추어라는 점과 그녀가 이성적이지 않다는 점이었다. 그녀는 고양이를 좋아한다, 그녀는 새를 좋아한다, 그녀는 자연의 조화를 선호한다, 그러므로 그녀는 낭만적이고 감상적이고 소녀 취향이다. 그녀의 책은 아무리 좋게 봐줘도 감정이 이성을 앞선 것으로 히스테리에 가깝다. 기업들과 결탁한 저명한 남성 전문가 그룹은 생태에 대한 문제 제기를 슬쩍 성 문제로 바꿔놓았다. "아이도 없는 노처녀가 웬 유전학에 그렇게 관심이 많을까?" (이에 대한 레이첼 카슨의 반응이 훌륭했다. 난 여자로서도 아니고 남자로서도 아니고 인간으로서 관심이 많다!)  

 

- 우리는 많은 말을 한다. 그런데 무슨 말을 하든, 그게 영화든 드라마든 음악이든 책이든 전공이든 연애든 모든 것이 돈으로 귀결되는 숱한 대화 자리들이 있다. 진짜 관심 -이를테면 성공이나 돈, 커리어- 은 교묘하게 숨긴 채 말은 자신이 어떤 사람으로 보이는가에나 필요한 장식품에 불과한, 그런 맥 빠진 대화 자리.

 

- 사실 우리가 어떤 말을 하고 사느냐는 생각보다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삶을 만약 선물이라 하면 이상한 선물이다. 우리더러 채우라고 주어진 텅 빈 선물이다. 비어 있으니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하고 무슨 행동이라도 해야 한다. 없는데 있어 보이고 싶은 것, 없는데 있는 척하는 것을 허위의식이라고 부른다면 허위의식은 우리 운명에 깊게 새겨져 있다. 문제는 가끔은 공허하다는 거다. 가끔은 허튼 소리나 하고 있기 싫다는 것이다. 가끔은 자신이 불행하고 무의미하게 살고 있다고 생각되는 것이다. 가끔은 인생에 의미가 있으면 좋겠다고 바라게 되는 것이다. 가끔은 사는 것같이 살아보고 싶다고 바라게 되는 것이다. 

 

- 나의 삶은 소중한가, 무의미한가? 매일매일 새로운 일상인가, 매일매일 그저 그런 일상인가? 누가 알려줬으면 좋겠다. 누가 살아갈 이유라도 알려주고 살아갈 힘이라도 주면 좋겠다. 그렇다면 역시 방법은 하나, 사랑인 걸까?

 

- 그렇다고 플로랑클로드는 생각한다.

신은 우리를 사랑한다. 

한낱 영장류인 우리에게 '저 황홀한 사랑의 격정'을 느낄 수 있게 만들어주었으므로.

그러나 알약에서 시작한 이야기는 알약으로 끝난다. 

 

- 그러나 결국 그는 자기 이야기 밖으로 밀려났다. 그의 인생 이야기는 저 바깥세상이 대신 만들었다. 그에겐 자기 목소리와 인생 이야기를 만들어낼 변화란 것이 없었다. 

인생 결산 후 그에게 남은 네 가지. 텔레비전, 배달앱, 쓰레기, 병원.

 

- 나는 처음에 당신을 하나의 이야기로 파악해보라고 제안했다. 그래서 이 이야기에는 숨은 질문이 있다. 당신에게는 끝까지 함께할 사람이 있는가? 끝까지 헌신할 만한 어떤 것이 있는가? 끝까지 지켜주고 싶은 게 있는가? 상황과 이해관계에 흔들리지 않을 관계가 있는가?

이 사랑스럽지 않은 삶, 우리에게 살아갈 이유를 주는 것은 우리가 사랑하는 그 무엇이다.  

 

- <넷째 날, 불행한 결말로 끝나는 사랑 - 당신을 하나의 이야기로 파악해보라고 제안한다>

 

- "상처가 뭐예요?"

토비는 "상처는 네 몸에다 글쓰기를 하는 것과도 같아. 그것이 너에게 일어난 일에 대해서 말해줄 테니까"라고 대답한다. 과연 이 말을 크레이커 아이가 이해할 수 있을까? 

"상처가 말을 해줘요? 그럼 상처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어요? 말을 하는 상처를 어떻게 만들 수 있는지 알려주세요."

 

- '말을 하는 상처'가 책이다. 책은 상처들의 목소리다. 토비는 블랙 비어드에게 글자를 가르쳐준다. 블랙 비어드는 글자를 배워 살아남은 인류와 크레이크, 오릭스, 지미, 토비, 젭, 그들 모두의 일을 노트에 기록하기 시작한다. 세상은 한 권의 책이 되었다. 그들은 커다란 이야기 속에서 결국 만난다. 그 책은 새로운 인류의 탄생 신화였고 크레이크, 오릭스, 지미, 토비, 젭 모두 새로운 인류의 조상이 되었다. 아마도 우리 또한 커다란 이야기 안에서 만날 것이고, 그렇게 만난 우리들의 이야기도 아주아주 커다란 한 권의 책이 될 것이고, 지구는 우리 모두가 함께 쓰는 책 중에 최고로 커다란 책이 될 것이다. 이렇게 해서 책은 이제는 사라진 존재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온기가 있는 다정한 곳이 되고 과거의 깊은 상처가 미래를 위해 의미를 획득하는 곳이 된다. 

 

- <다섯째 날, 역경을 딛고 행복한 결론에 이르는 사랑 이야기 - 왜 상처의 말을 들어야 하나요?>

 

- 언웨더 unweather : 고대 영어 단어. 날씨가 너무 극단적이라 다른 기후대 또는 시간대에서 온 것처럼 보인다는 뜻.

 

- 우기아나크투크 uggianaqtuq : 캐나다 북극권의 배핀섬에 거주하는 이누이트족은 날씨의 변화, 얼음의 변화 그리고 그로 인한 자신들의 변화를 지칭하는 단어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우기아나크투크는 예측할 수 없이 이상하게 행동한다는 뜻이다. 기후변화는 사람의 영혼마저 바꾼다. 

 

-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는 거울을 두려워했다. 그는 거울이 끔찍하고 공포스럽다고 생각했다. 그는 거울을 밤과 악몽의 세계와 나란히 놓기를 좋아했다. 그는 어떻게 해서 한 남자가 거울을 두려워하게 되었는지에 관한 시를 썼고 그 시는 내가 기억하는 한 "인간이 한낱 반영과 미망임을 깨닫도록 신은 꿈으로 수놓은 밤과 갖가지 거울을 창조하셨네"라고 끝난다. 반영와 미망이 거울과 꿈의 세계다. 그러나 이 시는 공포에 대한 시는 아니다. 거울의 공포는 이야기로 표현되었다.

 

- 보르헤스는 어느 날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입수했다. 18세기 초, 파리에서 <교화적이면서도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서간집>이라는 책이 출판되었다. 저자는 예수회 신부였던 P. 젤링거였다. 그는 서문에서 중국 광둥 지방 사람들의 환상에 대해 언급했다. 그중 눈길을 끄는 것은 아직 아무도 잡아보지는 못했지만 많은 사람들이 거울 깊은 곳에서 보았다고 말하는, 빛나는 물고기에 관한 것이다. 그러나 젤링거 신부는 1736년에 세상을 떠났고, 빛나는 물고기에 대한 이야기는 미완성으로 남았다. 그로부터 150여 년 후 한 남자가 중단되었던 빛나는 물고기 이야기를 이어나간다. 

 

- 그는 물고기에 대한 믿음은 전설에 나오는 황제 시대와 관련된 수많은 신화 중의 하나라고 주장했다. 황제시대에는 거울 속의 세계와 인간이 세계가 단절되어 있지 않았다. 두 세계 사이에는 오고 갈 수 있는 작은 통로들이 많았다. 거울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는 평화를 지키며 왕래할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거울 속의 동물들이 인간을 공격해 왔다. 피비린내 나는 전투가 이어졌다. 황제의 신비한 능력 덕에 인간이 승리했고, 황제는 침략자들을 거울 속에 가두어버렸다. 그리고 그들에게 꿈처럼 인간의 행위를 따라 하라고 명령했다. 그들의 힘뿐 아니라 본연의 모습까지도 빼앗아 인간에 종속된 그림자로 만든 것이다. 이 종속이 언제까지 계속될 것인가? 다음 부분부터는 예언으로 남는다. 

 

- 거울 속 동물들은 언젠가 이 신비로운 동면 상태에서 깨어날 터였다. 물고기가 가장 먼저 잠에서 깨어날 것이다. 그다음에 다른 여러 가지 것들이 깨어날 것이다. 그것들은 점점 자신의 모습을 찾을 것이고 인간과 닮지 않을 것이고 더 이상 인간의 행동을 흉내 내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계속 거울 속에만 머물지 않으리라. 유리벽을 깨고 뛰쳐나올 것이리라. 그리고 이번에는 쉽게 굴복하지 않을 것이리라. 윈난 지방에는 물고기 대신 거울 속 호랑이 이야기가 전해진다.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거울 속에서 무기들이 쨍그랑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올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 보르헤스는 이 이야기를 <보르헤스의 상상 동물 이야기>에 '거울 속의 동물들'이란 제목으로 실었다. 보르헤스는 이 이야기를 채집했다고 하지만 사실은 지어냈을 것이다. 그는 늘 거울과 호랑이를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 보르헤스의 글에서 '거울'이란 단어는 생각할 거리를 준다. 거울을 함정을 가지고 있다. 거울을 보는 사람은 주로 자신만을 볼 수 있다. 거울 속에서 자기 얼굴 외에 나머지는 배경이다. 거울은 우리를 세계의 일부분로 만들어주기보다는 폐쇄된 자기 세계에 갇히게 만든다. 온 세상이 자신을 중심으로 돈다고 생각하는 사람일수록 세상 전체를 자신만을 비추는 거울쯤으로 여긴다. 어디서나 나를 본다. 맥주를 마시는 나, 거리를 걷는 나, 웃는 나, 행복한 나. 세상이 나를 봐주길 바라지만 내가 세상을 볼 마음은 없다.

 

- 온 세상에서 자신밖에 보지 못하면 자신 외의 것을 상상하지 못한다. 상상력은 빈곤해진다. 빈곤해진 마음은 자기 자신을 포함해 세상의 어느 것도 밝게 비추지 못한다. 그리고 불행히도 우리가 거울을 볼 때 제일 보지 않는 것은 자기 자신이다. 거울과 함께 있으면 우리는 더 이상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 있다. 우리는 이상적인 나를 연기한다. 보이고 싶은 나를 연기한다. 혼자만의 무대에 서서 무언극을 한다. 우리는 완전무장한 채 거울을 본다. 그럴 때 거울은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는다. 애가 타게 보이기를 원하는 우리의 자의식 말고는.  

 

- 진실은 거의 매 순간 우리가 자신을 있는 그대로 대면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진실은 자신'만'을 사랑하는 것도 피곤하고 공허하고 외롭고 지치는 일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자신을 사랑하는 방법을 찾다가 길을 잃는다. 이것이 나르키소스의 비애다. 우리는 자신이 만든 환영 속에 있다. 우리는 현실과 직접적으로 관계 맺는 법을 잃고 있다. 현실을 빈껍데기로 만들어버리고 그 껍데기 위에 외로이 위태롭게 떠 있다. 그러나 자기애야말로 우리가 동물과 다르게 가지고 있는 것이다. 동물적 생존본능만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애가 있다는 것이 우리에겐 득도 되고 실도 될 수 있다. 분명한 것은 우리가 스스로를 가꾸고 거울을 보고 꿈을 꾸는 것도 혼자가 되기 위해서는 아니라는 점이다. 

 

- 내가 내 삶을 사랑하기 위해서 나에게 무엇이 필요한가는 중요한 문제다. 나는 발견되는 기쁨을 말하고 싶다. 자기를 사랑하기에 가장 좋은 방법, 그것은 누군가에게 발견되는 것이다. 사랑받을 만한 어떤 것을 가지고 있음이 누군가에게 발견되는 것이다. 건강한 자기애는 감사와 사랑을 보낸 타인들이 곁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뜻이다. 내가 좋지 않게 행동하면 슬퍼할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뜻이다.  

 

- 빙모는 세계에서 가장 큰 거울이다. 그 노을의 강력한 아름다움에 압도된 한 이방인이 마을에서 제일 높은 곳으로 뛰어 올라갔다. 그러다가 그만 발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발밑의 작은 만은 마을의 쓰레기장이었다. 수천 개의 쓰레기봉투, 플라스틱 상자 더미, 부서진 카약, 하얀 냉장고가 절벽 너머로 두엄 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세계에서 가장 큰 거울 밑에는 쓰레기가 살고 있었다. 키슈왁은 바라보는 사람을 밑에서부터 덮친다고 전해진다. 저 아래 깊은 곳으로부터. 키슈왁의 정체는 지구 온난화로 비단처럼 얇아진 얼음이었다.

(키슈왁 이야기는 로버트 맥팔레인의 <언더랜드> 일부분을 내가 잔재주 측에도 못 끼는 잔재주를 부려서 살짝 고친 것이다)

 

- 이 거울은 황혼 녘에 접어든 노쇠해 가는 우리 문명을 비춘다. 우리의 맨 얼굴은 쓰레기다. 우리는 쓰레기와 함께 몰락하리라. 

우린 우리를 사랑했다. 그러나 우리를 바꿀 만큼은 아니었다.

 

- <여섯째 날, 날카로운 통찰로 위기를 모면하는 이야기 - 거울 깨기> 

 

- 이 소설은 노인의 관점에서 이야기되고 있지만 소설의 한 중심에 있는 것, 진정한 주인공은 살쾡이다. 이 소설은 살쾡이의 운명을 잊을 수 없는 방식으로 그렸다. 사랑이라는 단어를 끝까지 살아낸 것은 살쾡이였다. 아름다운, 피비린내 나는 사랑의 복수에 자신을 바친, 스스로 죽음을 택한 짐승. 

 

- 노인은 우리 인간을 고발하는 역할도 했지만 우리를 아마존으로, 야생동물의 세계로 인도하는 길잡이이기도 하다. 그가 그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인간의 탐욕, 인간의 돈이라는 이해관계를 나누어 갖지 않아서다. 돈을 택하지 않은 그의 눈에는 이 모든 불행의 원인이 잘 보인다. 그는 동물을 잘 알고, 동물 또한 인간을 잘 알고 있다는 것을 알고, 동물의 슬픔을 헤아리므로 일종의 천사다.

 

- 인디언과 동물은 아마존에서 상호존중, 상호의존, 절제의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아마존은 죽은 살쾡이, 죽은 재규어, 죽은 표범, 죽은 인디언들의 이야기와 분리될 수 없다. 우리가 파괴해 버린 아름다운 세계다. 우리는 가난을 모르던 인디언들에게 가난을 줬고 숲에서 누리던 그들의 존엄을 빼앗았다. 자급하던 사람들에게 설탕과 술과 커피와 식량을 사게 만들었다. 동물들에게서도 존엄성과 생명, 가족, 서식지를 빼앗았다. 만약 아름다움을 나 자신도 그 안에 속하고 싶은 것이라고 정의를 내린다면 우리는 또 하나의 아름다움을 없애버린 채 그것이 없어졌다는 것은 안중에도 없이 헛되이 추에 추만, 공허에 공허만 쌓는다. 우리가 다른 생명을 얼마나 외롭게 했는지는 잊은 채 외로움을 호소한다.

 

- 나는 인디언들이 잃어버린 단어 하나를 기억하고 있다. 퍼퍼위. 아메리카 원주민의 말인데, 퍼퍼위는 '버섯을 밤중에 땅에서 밀어 올리는 힘'을 뜻하는 단어다. 내가 이 단어를 발견한 것은 아메리카 원주민 부족 출신의 로빈 월 키머러가 쓴 <항모를 땋으며>라는 책에서였다. 이 단어를 만든 사람은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생명을 만드는 에너지가 우리를 감싸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런 것이 주변에 있다고 생각하면, 그런 것을 느끼기 시작하면 더 잘 살 수 있다.

 

- 키머러가 만난 그녀 부족에서 증조할머니뻘 되는 위치를 차지하는 원주인 할머니의 말에 따르면 언어는 그냥 말이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이 담겨 있는 문화다. 인디언들이 사라질 때 세상(자연)을 바라보는 가장 좋은 방식 하나가 사라져 갔다. 가끔 아침 출근길에 공원에서 '퍼퍼위'하고 속으로 한번 속삭여본다. 밤새 생명을 키운 보이지 않는 힘에 조금 더 가까이 있고 싶어서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힘들과 함께 힘을 낸다. 

- <일곱째 날, 골려먹는 이야기 - 다른 누구도 더는 건드리지 말라> 

 

- 책에 실린 이 글의 제목은 '지구 위에 지적 생명체가 있는가'였다. 이 글이 문제시한 것은 데카르트 이후의 명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이다. 생각하는 존재가 대재앙을 가져올 수 있는 일을 그대로 놔둘 수 있을까? 그러고도 미래에 대해 말할 수 있을까? 나중에 올 사람들이 겪을 일을 알고도 모르는 척 방치하고 그들의 희망을 미리부터 갉아먹고 그러고도 수치심 없이 살 수 있을까? 이런 상태에서도 여전히 인간을 이상화해야 하는가? 우리는 인간에 대한 재평가 시점에 와 있고 관점을 재조정하지 않는 한 해결책들을 발견할 가능성은 낮다.

 

- 뭔가를 보지 못하게 하는 것은 인간의 '확신'이다. 그러나 우리는 매일 조금씩 죽기 때문에 매일 탄생의 기적을 경험할 필요가 있다. 매일 새롭게 봐야 한다. 매일 다르게 보면서 더 풍요롭게 살아내야 한다. 앞으로 우리가 인간중심주의를 어떻게 벗어나느냐에 따라 인류 역사는 달라질 것이다. 인류세는 인류가 각성한 시기가 될 수도 있다. 인류는 어느 시기나 다른 방식으로 보는 사람들이 수많은 대안을 내면서 출구를 찾고 위험을 피해왔다. 우주는 결코 우리를 속이지 않고 세계는 늘 우리에게 말을 건다. "이봐, 주위를 좀 보리니까! 눈 좀 뜨라니까!"

 

- <여덟째 날, 농담이든 뭐든 재미난 이야기 - 이봐, 주위를 좀 보라니까!>

 

- 내가 들려준 바빌로프와 동료들 이야기는 주로 폴 나브한의 <지상의 모든 음식은 어디에서 오는가>에서 가져왔는데 한 부분을 더 인용해 보겠다. 전쟁이 끝난 후 러시아 작가가 포탄이 쏟아지는 가운데서도 씨감자 밭을 지켰던 바빌로프의 동료 바딤 레흐노비치를 인터뷰한 적이 있었다. 질문은 여러 달 굶주리는 동안 씨감자를 먹지 않고 견디는 게 힘들지 않았느냐는 것이었다. 

[일하는 게 힘들었죠. 매일 아침 일어나기도 힘들었고 손발을 움직이기도 몹시 힘들었답니다. [...] 하지만 씨앗을 먹지 않고 견디는 일은 하나도 힘들지 않았어요. 그걸 먹는다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죠. 씨앗에는 나와 내 동지들이 살아가는 이유가 들어 있으니까요.]

 

- '하나도 힘들지 않았다'는 말이 참 좋다. 바빌로프와 동료들은 단순하게 죽어갔다(우리는 단순함이 부족한 채 죽어갈 것이란 말이 있다.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바빌로프와 동료들을 읽으면서야 겨우 이해했다.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채 혼란스럽게 죽어갈 수 있다. 얼마든지 그렇다). 그들은 자신이 지키는 씨앗(종자)을 믿었다.  

 

- 그들은 다가올 세상에 책임감을 가졌다. 최후의 순간까지 삶을 미래와 연결시켰다. 그들은 죽었지만 이미 미래에 속해 있었고 미래의 일부였고 언제나 미래의 일부일 것이었다. 그들 중 아무도 몰랐지만 당시 그들은 어두운 세상을 받치는 버팀목이었다. 그들은 "왜 내가 그 일을 해야 해?", "내가 그 일을 하면 남들은 나를 위해 뭘 해주는데?"라고 묻지 않고 해냈다. 사실 이렇게 묻기 시작하면 사랑도 끝이다. "왜 내가 너를 사랑해줘야 하는데? 너는 나에게 뭘 해줄 건데?"

 

- 사랑과 연대는 이런 말들 속에서 깨져왔다. 그들에게는 다른 숨은 이유 같은 건 없었다. 대가도 보상도 이유가 아니었다. 그냥 그렇게 하는 게 살아가는 이유 자체였다. 다른 이유는 필요 없는 것, 이것이 가장 급진적인 사랑이다. 이런 자발성이 주체적인 인간을 만든다. 

 

- 나는 그들의 죽음을 느끼고 사랑을 느낀다. 모든 좋은 사랑은 무언가의 소멸과 관련이 있다. 자아의 소멸, 이해관계의 소멸, 나쁜 상황의 소멸... (나는 그들에 비하면 너무 조금 사랑하고 산다). 그들의 사랑은 내 마음을 미래로 이끈다. 미래를 생각하게 만든다. 

 

- 바빌로프와 동료들이 식량을 맡았다면 나는 무엇을 맡으면 좋을까? 나에게도 나만의 노력, 나만의 어제가 있다면 나만이 만들 수 있는 변화, 나만이 만들 수 있는 내일이 있을 것이다. 이 세상에 나만이 줄 수 있는 사랑이 있을 것이다. 나만이 낼 수 있는 용기가 있을 것이다. 나만이 질 수 있는 책임이 있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내게도 단순하게 나아갈 길이 또렷이 보인다.  

 

- 아름다움에 압도된다는 것은 그토록 힘이 세다. 나는 이후로 몇 번 더 열대의 바닷가로 여행을 갔다. 내게 열대 바다 여행의 의미는 점점 더 확장되었다. 향기에서 출발해 생명으로 이어졌다. 매번 나는 바다의 많은 것들과 부드럽게 섞였다. 열대의 바닷가에서 책을 읽을 때, 바닷바람을 쐬며 걸을 때, 해가 뜨고 지거나 바다에 별이 쏟아지는 것을 볼 때, 스콜이 쏟아지면 읽던 책을 들고 맨발로 뛰어 숙소로 돌아갈 때, 소금기 묻은 머리를 감을 때, 그럴 때 삶은 참을 수 없이 환했다. 내가 있던 곳들에서는 생명력이 넘쳤고 나는 그것을 들이마시기만 하면 되었다. 세상엔 아직 아름다움이 여기저기 분산되어 남아 있었다. 세상은 우리가 알아야 할 세부사항으로 가득했다.  

 

- 가끔 나는 도시에서도 마치 열대의 향을 찾으려는 듯 코를 벌름거리는 나를 발견한다. 훗날 마르셀 프루스트가 나와 같은 경험을 한 단어로 표현했음을 알게 되었다. '용해'라는 단어였다. 프루스트는 용해를 대략 이렇게 설명했다. "마치 사랑처럼 내 안에 번져가는 그 행복감과 더불어 내가 어떤 귀한 생명의 정수로 가득 채워지는 느낌이었다. 나는 이제 그저 우연히 태어나서 살아가는 무의미한 존재, 결국 나중에는 덧없이 죽어가고 말 존재로 더는 생각할 수가 없었다." 

 

- 어쨌든 나는 그 단어를 알기 전부터 그 단어를 살아내고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 그러나 나는 지금 살아 있는 사람들의 얼굴 속에서 사랑을 보고 싶다. 이 위험한 세상 한가운데서 홀로 애쓰고 있는 사람은 늘 감동을 준다. 약간이라도 나아지려고 다시 시작하는 사람도 감동을 준다. 하루하루를 힘겹게 살면서도 미래를 생각하는 사람도 감동을 준다. 자신이 맡은, 해야 할 일을 해내기 위해 가진 힘을 다 쓰는 사람도 그렇다. 나는 이런 것들을 사랑하면서 버티고 있겠다.

 

- 이제 다섯째 날의 이야기에서 크레이크 아이들과 단어들을 이야기하듯 인사하고 싶다. 

"잘 자요!"

"'잘 자요'는 무슨 뜻인가요?"

"'잘 자요'는 오늘의 가장 좋은 시도와 내일의 가장 좋은 시도 사이에서 잠드는 거예요."

 

- <열째 날, 관대한 마음으로 모험을 행하는 자의 이야기 - 오늘의 가장 좋은 시도와 내일의 가장 좋은 시도 사이에서>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