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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벼운 마음으로 선택했었으나, 책장을 덮을 때쯤에는 많은 위안을 받았다.
마치 내 안을 들여다보고 쓴 것 같은 구절들이 많아 놀라면서 읽었다. 지난 가을 친구들에게 손편지로 토로했던 심정들이 비슷한, 혹은 더 쉬운 문장들로 드러나 있어 깊이 공감했다. 그리고 어느 정도 치유됨을 느꼈다.
예전엔 이런 류의 글들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는데, 지금은 생각이 조금 다르다.
이렇게 생각하고 느끼는 사람들이 나 외에 또 있다는 것, 그 사실에서 받는 정신적인 위안은 무시할 만한 것이 아니다.
자신이 그렇지 않다면, 이렇게 느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곱씹어보며 타인에 대해 보다 깊이있는 이해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책만 읽으라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한 번씩 읽어주는 것은 충분히 플러스가 될 수 있다고 본다.
이 책은 옴니버스 형식으로 개개의 등장인물들의 이야기를 소설 형식으로 풀어나가는데, 그 인물들이 자신들은 잘 모르지만 얽히고 섥혀있다. 오히려 비문학적인 전개보다 편안하게 몰입할 수 있었던 것 같아서, 개인적으로는 좋아하는 방식이 아니지만 괜찮았다고 본다.
도서관에서 예약해놓고 읽었는데, 아무래도 소장해야 할 것 같아서 구매했다.
이번은 정말 길고 긴 발췌가 될 것 같다.
[발췌]
정말 그랬는지도 모른다. 세상은 나날이 발전하는데, 정신은 오히려 퇴행하고 있는지도. 남에게 무작정 기대하고, 그 기대를 채워주지 못하면 배신감이나 분노를 느기며 토라지는 바보가 되어버렸는지도 모르겠다고 그는 생각했다.
오 대리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환상을 품어, 감히 신의 능력을 기대했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관계를 절벽 끝으로 밀어내며 초능력을 보이라고 몰아세운 것이다.
정에 치우친 나머지 '안전거리'를 잊고 서로를 파먹고 들어가는 경우도 많다. 막역하게 지내다가 하루아침에 원수 사이로 돌변하는 사람들을 주변에서 본 적이 있을 것이다. 호의를 갖고 참견했는데, 상대가 그대로 따라주지 않으면 섭섭한 게 대다수 사람들의 심리다. 그런 일이 반복되면 무시당했다는 생각이 들고 결국에는 원한으로 치닫는 것이다.
어떤 경우에는 지속적인 호의가 상대에게 '이상한 권리' 주장의 빌미를 주기도 한다. '지금까지 잘해줘놓고, 왜 더는 못 해주느냐'면서 당당하게 적반하장 권리를 들이미는 것이다.
사람의 불행 가운데 절반은 스스로와 잘 지내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내 생각에 나머지 절반은, 남과의 거리 조절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평화는 예의로 유지된다. 예의는 원래 서로의 안전을 확보하려는 목적에서 발전되었다. 예의의 기본인 인사만 봐도 알 수 있다. ... 관계는 양쪽 모두에게 유익해야 발전한다. 어느 한쪽이 지나치게 다가서면 '안전거리'가 위협당하기 시작한다. 관계의 건전성이 흔들리는 것이다. 가까워질수록 서로에게 의존하고, 더 많은 것을 기대하게 된다. 또 한편으로는 상대의 기대에 자신을 맞춰주며 희생한다.
상대에 대한 집착은 '잃고 싶지 않은 마음'이다. 그것이 도를 넘으면 상대가 자유로워지는 것을 원하지 않는 '구속하려는 마음'으로 발전한다. 결국에는 사랑과 관심이라는 허울로 가학과 피학을 거듭하며 서로를 외로움의 이빨로 물어뜯게 된다. 궁금한 마음, 걱정하는 마음의 이면 어딘가에는 통제하고 지배하려는 심리가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자기 의지의 관철을 위한 점검과 확인인 셈이다.
관계에 휘둘리지 않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선 긋기'에 익숙하다는 것이다. 그들은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도 '해서는 안 되는 말과 해서는 안 되는 행동' 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생각으로 상대와 경계선을 긋는다. 남의 영역으로 넘어가지 않으며, 다른 이의 침범도 허용하지 않는다.
야속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때에 따라서는 그것이 조금 더 차원 높은 배려일 수 있다. 사람 사이에는 '솔리튜드'라는 틈이 있어야 개성과 창의를 발휘해 함께 발전할 수 있다. 각자가 홀로 서야 관계도 조화로운 균형을 이루는 것이다.
정은과 함께 영화를 보고 나서 자증을 부린 적이 잇다. 슬픈 장면에서 훌쩍거리다가 클라이맥스에선 통곡을 해버린 정은 때문에 창피해서 영화가 끝나기도 전에 슬며시 밖으로 나와야 했다.
"넌 촌스럽게 그게 뭐니? 기껏해야 영화일 뿐이잖아. 진짜도 아닌 허구! 너 때문에 내가 얼마나 쪽팔렸는지 알아?"
정은은 그때, 미안하다면서 웃기만 했다.
그거였다. 정은이 가만있어도 사람들이 주변에 몰려들고 좋아해주는 이유. 공감 능력이라고 해야 하나? 고등학교 때만 해도 존재감이 거의 없던 친구였다. 그런데 대학 졸업 후 유학을 다녀오더니 묘하게 바뀌었다. 내보이지는 않지만 은근히 자신감 있게 보이고, '참견쟁이'라고 불릴 정도로 친구들을 세심하게 챙겨주었다.
설리는 정은이 강해진 이유를 이내 깨달았다. 힘의 근원은 '자연스러움'이었다. 정은은 고상한 척하지도 않고 강한 척 하지도 않았다. 그냥 물처럼 흐르고 다른 사람들과 섞일 뿐이었다.
"외로움은 변화의 용광로일 가능성이 높다. 혼자 있는 시간을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 삶의 길이 갈라질 테니까. 변화는 나 아닌 누군가가 되려고 할 대가 아니라, 나 스스로가 되려고 할 때에야 비로소 시작되는 것일 게다. 그러니까 혼자 있을 수 있는 능력은 변화가 필요할 때 그 가치를 제대로 발휘하는 자질이기도 하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혼자서 무엇이든 해본 사람과, 혼자서는 무엇 하나 해본 적이 없는 사람. 혼자 잘 지내는 것은 원래 당연한 것이었다. 그랬던 것이 이제는 '특별한 능력'이 되어버렸다.
그녀는 릴케가 말한 [말테의 수기]에서 강조했던 말을 이제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고독한 사람을 내벼려둬라. 그 사람은 당신보다 수준이 높은 사람이다.
"그때 많이 힘들었어. 다른 애들은 전부 친구가 있는데 나만 혼자였거든. 친구 같은 거... 다들 당연하다고 생각하지. 대부분은 그냥 친구가 있으니까. 하지만 나한테는 그게 당연하지 않았어."
이렇게 말해보지만, 엄마가 이해해줄 거라고 기대하지는 않는다. 그런 기대는 일찌감치 포기했다. 엄마와의 논쟁은 언제나 평행선이다. 말하면 할수록 외로워진다. 산속에 들어가 혼자 더들어도 이보다는 낫겠다.
... 엄마한테 그 말은 안 하려고 했는데. 이미 뱉어놓은 말. 차라리 잘됐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내 인생의 리모컨은 내가 쥐어야 하니까. 엄마로부터 홀로 서려면 어쩔 수 없이 '거절의 지혜'부터 시작해야 한다. ...
"엄마 얘기, 앞 뒤가 안 맞는 거 알아요? 윗집 아줌마한테 자전거 가르쳐주면서 인생 교훈도 줬다면서요? '아이들은 알아서 자기들 인생 살 테니까, 우리는 우리 인생이나 열심히 살아야 한다'고. 윗집 아줌마한테는 그렇게 말하면서 딸한테는 예외인 거예요?"
바가지가 날아왔다.
'이 계집애야, 그걸 몰라서 물어? 네가 남이야?"
엄마와의 언쟁은 당분간 계속 이어질 것 같다. 이해하지 못하는 엄마도 외롭고, 엄마의 이해를 받지 못하는 나도 외로울 것이다. 그래도 내 길을 가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을 것 같다. 엄마와 멀어질 수밖에.
세상에는 멀어질수록 가까워지는 관계가 있다. 멀어진 뒤에야 기억을 떠올리면서 상대의 깊은 속내를 야금야금 확인하게 되는, 너무 붙어 있어 괴롭기도 한 애증 관계. 멀어진 뒤에야 비로소 진짜 어른으로 성숙해가는 서로를 발견하는 관계.
때로는 사랑을 지키기 위해 거리를 두어야 할 때가 있다. 그런 사랑은 멀어질수록 깊어진다.
... '따님을 꼭 행복하게 해주겠습니다.' 오 대리가 오버해서 이런 소리나 하지 말아야 할 텐데. 내 행복은 내 소관이니까.
그녀는 자기감정에 충실한 사람이다.
영화를 볼 때 가급적이면 혼자 극장에 간다. 웃고 싶을 때 마음껏 웃는다. 남들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특히 모르는 사람들한테는 쪽 팔려도 안 죽는다.
그녀의 경험에 따르면, 솔리튜드에도 '단계'가 있다. 입문 수준은 혼자 극장에 가서 남을 의식하지 않고 영화를 즐기는 것이다. 영화관 입장부터 퇴장에 이르기까지 모든 과정이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기까지는 어느 정도의 적응기가 필요하다는 게 그녀의 경험담이다.
혼자 영화 보기의 백미는 슬픈 영화에 있다고 한다. 슬픈 영화를 보면서 실컷 울 수 있다. 통곡을 해도 괜찮다. 자막이 모두 올라간 것을 확인하며 마지막의 여운까지 마음에 담을 수 있다.
... 혼자서 이따금 미술관에 간다. 솔리튜드 단계에서 '혼자 미술관 가기'는 '혼자 극장 가기'보다 난이도가 조금 높은 수준. 남들이 가니가, 요즘 유행이니까 가보는 경우란 많지 않다. 자기가 보고 싶은 전시회에 가서 혼자 즐긴다. 작품을 통해 작가와 둘이서만 대화할 수 있다. '나도가봤어족'과 같이 갈 경우, 배고프다고 보채는 소리에 솔리튜드의 시간을 방해받게 된다. 게다가 예술은 원래 혼자와의 대화라고도 한다.
감상이란 본질적으로는 혼자 느끼는 것이다. 어떤 예술을 만나든 각자의 방식으로 이해하게 된다.
'가면형 우울증'이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서비스업 종사자나 연예인 같은 사람들에게서 발견되는 유형이다. 겉으로는 언제나 웃고 있다. 하지만 그렇게 환하게 웃는 사람도 속으로는 찌푸린 채 울거나 절망에 빠져 있을 때가 있다. 명랑하던 사람이 어느날 갑자기 절망적인 선택을 했을 때, 대다수 사람들이 그걸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그런 페르소나 때문이다.
사르트르는 '혼자 있을 때 외로움을 느낀다면 같이 있는 사람, 즉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 사람을 마음대로 바꾸려 들지 마세요.
그 사람이 당신이 원하는 대로 모든 걸 해주는 사람이 된다면 좋겠죠? 그러나 그렇게 된다면 그는 당신 말은 잘 듣는 대신, 자신을 믿지 못하는 사람이 될 거예요. 그건 자신감을 잃고 무능해진다는 뜻과 일맥상통해요.
당신은, 당신 마음대로 움직여주는 그 사람을 보면서 과연 만족할까요? 저는 그렇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요. 무능하게 변한 그 사람을 보면서 후회만 하게 될 거예요.
"다음에는 혼자서도 충분하다는 판단이 들 때에야 사랑을 해. 아무리 좋은 사람도 지금의 너와 만난다면 숨이 막혀 질식해버릴 거야. 네가 등에 업혀선 딱 달라붙어 목을 계속 졸라댈 테니까. 그러면 누구라도 약해지겠지. 너는 그런 약한 모습이 싫을 테고."
고아란, 말 그대로 부모를 여의거나 버림받아 몸 붙일 곳이 없는 아이를 뜻한다. 어린나이에 적나라한 외로움에 무자비하게 노출된 상태, 그들의 어린 시절은 실패와 상실, 불행, 좌절로 점철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외로움 앞에 우뚝 섰고, 외로움이라는 에너지를 이용해 스프링처럼 도약하는 데 성공했다.
외로움의 에너지가 그들의 성취에 어떤 '결정적 역할'을 했을까.
나는 외로움이 그들의 '깊이'를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외로움 속에 머물며 더 깊이 내려갈수록 더 많은 '이해'를 쌓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 '이해'란 사람에 대한 것이다. 사람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은 외로움의 삽질을 통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언제 끝날지 기약이 없는 삽질로 바득을 향해 파들어가면, 그 바닥을 흐르는 다뜻한 물줄기를 만나게 되는 것이다. 인간 본연의 깨달음 말이다.
사랑이란, 같은 곳을 향해 나란히 가는 것이 아닐지도 몰라요.
각자의 길을 가다가 만나서 함께 쉬고, 또 각자의 속도로 각자의 길을 가는 것일 가능성이 높아요. 아무리 사랑해도, 서로 다른 일을 하고, 다른 날 다르게 죽잖아요, 그렇죠?
그렇게 서로가 다ㄹ다는 것을 인식하면서 서로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상대가 바로 지기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사람은 누군가를 진심으로 도울 때 오히려 가장 많은 도움을 받는다'는 진리를 실감할 수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제각각 자기 문제를 안고 있으면서도 더 힘든 사람들을 기꺼이 도우러 나서는 거였다.
굳이 비유하자면 론리니스는 그런 것이다. 자기 외로움에만 급급해 세상을 돌아보지 못한다. 반면 솔리튜드는 더 많은 것을 풍부하게 보고 느낀다. 숲 속에서 나무들 사이로 파고드는 햇살을 보고, 새 소리를 듣고, 바람을 느낀다.
상황에 따라 다르겠지만 단 한 번에 무너지는 사람은 많지 않다. 사람마다 제각각의 임계점이라는 게 있는데, 여러 번에 걸친 충격이 그 포인트를 넘어서는 순간에야 와르르 무너지는 것이다. 누군가 신중하지 못하게 던진 말 한마디만으로도 임계점을 넘어버리는 경우가 있다.
그녀는 남자친구 도균에게 두 가지 모습을 원했던 것이다. 하나는 모든 것을 받아주고 용서하며 한없이 보살펴주는 아빠의 모습, 다른 하나는 그녀만을 사랑해주며 그녀가 원하는 대로 따라주는 남자의 모습, 즉 엄마에게 있어서의 아빠의 존재.
... 도균도 아빠와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다. "숨이 막혀서 질식해버릴 것 같다"고. 그렇다면...
한 심리학자가 '어린 시절의 불행이 인생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알아보기 위해 아이들을 대상으로 장기간의 연구에 들어갔다. ... 예상대로 대부분이 학습장애와 사회 부적응을 드러냈으며 갈등과 사건의 중심에 서 있었다 ... 그러나 학자는 곧 예외를 발견했다. ... '도대체 이런 차이는 어디서 발생한 것일까?'
학자는 심층 면담을 통해 그 해답을 찾아낼 수 있었다. 그들 72명에게서 공통점이 발견된 것이다. 그 공통점이란 자신의 입장을 이해해주고 받아주는 사람이 인생에 걸쳐 한 명은 있었다는 것이다.
"그 사람 혹시, 진짜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 진심으로 받아본 적이 없어서 주는 법을 모르고, 바라기만 하다 보니까 원하는 만큼 받지 못해 외로워서 그렇게 이상하게 구는 것 아닐까."
나는 이 책에 등장하는 설리와 닮아있었다.
이 책은 외로움을 '론리니스'와 '솔리튜드'로 구분하고 있는데, 조금 겸연쩍지만 나는 내가 '솔리튜드'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지금의 나는.
'론리니스'는 자신의 외로움에 매몰되어 끊임없이 자신의 발 아래를 받쳐줄 희생물을 찾아 끌어당기는 외로움이라면
'솔리튜드'는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며 '나'에 대해 생각하고, 그를 통해 다른 누군가와 함께 할 때도 균형감을 잃지 않는다.
지금의 나는 영화를 혼자서 보지 못하겠다는 사람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안 해봐서 그런 것 아닐까?
사실 그 부분을 읽기 전까지 공연, 영화, 연극, 전시회는 당연히 혼자 보는 게 기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하긴 나도 맨처음 혼자 밥을 먹고 혼자 영화를 볼 때는 조금 떨렸던 것 같기도 하다. 지금은 그걸 이상하게 보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는 걸 까먹을 정도로 자연스러워졌지만.
(나는 먹고 싶으면 혼자 국밥도 먹고 고기도 굽는다. 1인분을 팔지 않으면 2인분을 시켜 우걱우걱 먹기도 한다.)
자신의 외로움을 채우기 위해 다른 누군가를 끌어들여 자신을 채우려한다면, 그 끝은 비극적일 수 밖에 없다.
혼자서도 행복한 사람, 그런 온전한 두 사람이 만나 삶의 플러스 알파로 더 행복해지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이대로 홀로 산다는 게 그리 두렵지 않은데, 만약,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할 수 있다면 더 행복하리라는 것 뿐이다.
진정으로 사랑받은 적이 없어서- 라는 구절을 읽으며 소스라치게 놀랐다. 아마 나도 다른 어딘가에서 읽었던 것이 잠재적으로 남아있었던 것이겠지만, 저건 내가 늘 달고 살던 말이었다. 나의 과거를 떠올릴 때마다 함께 떠오르는 씁쓸한 말.
그랬던 내게, 정은처럼 자연스러움으로 고아 같은 기아 상태에 있었던 나를 이해해주고 지지해준 고마운 친구.
이 책을 읽는 동안 내내 네 생각이 많이 났다. 나의 가시까지 품어안아주었던 너에게 감사와 존경을 바친다.
그리고, 처음으로 내게 따뜻함이라는 저주를 알려준 사람에게도 감사한다.
물론 끝까지 온도와 색채가 있는 세상에 대해 모른 채 살았다면, 훨씬 덜 고통스럽고 절망스러웠겠지만.
그런 세상도 있다는 걸 몰랐다면 애초에 동경할 일이 없었겠지만.
단 한 순간이었어도 잊지 못할 행복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에 그것에 대해서는 단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다.
나는 그것을 알려준 것에 대해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다. 그리고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다.
'너는 너의 울음이 너무 커 다른 사람의 울음 소리를 들을 수가 없구나.'
그때 나는 내 상처를 더 보듬어주지 않는 그가 야속했던 것 같기도 하다. 이제야, 나만이 울 수 있는 건 아니라는 걸.
똑같이, 혹은 더 울면서도 나를 위해 내 울음에 귀기울여 주었었다는 걸 알았다. 그제야 다른 사람들의 울음에 기울일 귀가 내게도 있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 감사한다.
하고 싶은 말이 많지만, 삼켜야겠다.
뱀발)
어쩌면 나는 지금 나의 행보에 대한 확신을 잃어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내 생각에 부합되는 글을 읽었을 때 기뻐하고, 자신의 생각과 다르게 행동하는 사람들을 불편해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이 정신적인 여유를 잃었기 때문인지, 혹은 확신을 잃었기 때문인지는 명확치 않다.
다만, 하나 하나 집어 설명해가면서까지 누군가에게 나를 이해시키겠다는 욕심이 안 드는 것을 보면 아무래도 전자인 것 같다.
마치 내 안을 들여다보고 쓴 것 같은 구절들이 많아 놀라면서 읽었다. 지난 가을 친구들에게 손편지로 토로했던 심정들이 비슷한, 혹은 더 쉬운 문장들로 드러나 있어 깊이 공감했다. 그리고 어느 정도 치유됨을 느꼈다.
예전엔 이런 류의 글들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는데, 지금은 생각이 조금 다르다.
이렇게 생각하고 느끼는 사람들이 나 외에 또 있다는 것, 그 사실에서 받는 정신적인 위안은 무시할 만한 것이 아니다.
자신이 그렇지 않다면, 이렇게 느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곱씹어보며 타인에 대해 보다 깊이있는 이해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책만 읽으라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한 번씩 읽어주는 것은 충분히 플러스가 될 수 있다고 본다.
이 책은 옴니버스 형식으로 개개의 등장인물들의 이야기를 소설 형식으로 풀어나가는데, 그 인물들이 자신들은 잘 모르지만 얽히고 섥혀있다. 오히려 비문학적인 전개보다 편안하게 몰입할 수 있었던 것 같아서, 개인적으로는 좋아하는 방식이 아니지만 괜찮았다고 본다.
도서관에서 예약해놓고 읽었는데, 아무래도 소장해야 할 것 같아서 구매했다.
이번은 정말 길고 긴 발췌가 될 것 같다.
[발췌]
정말 그랬는지도 모른다. 세상은 나날이 발전하는데, 정신은 오히려 퇴행하고 있는지도. 남에게 무작정 기대하고, 그 기대를 채워주지 못하면 배신감이나 분노를 느기며 토라지는 바보가 되어버렸는지도 모르겠다고 그는 생각했다.
오 대리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환상을 품어, 감히 신의 능력을 기대했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관계를 절벽 끝으로 밀어내며 초능력을 보이라고 몰아세운 것이다.
정에 치우친 나머지 '안전거리'를 잊고 서로를 파먹고 들어가는 경우도 많다. 막역하게 지내다가 하루아침에 원수 사이로 돌변하는 사람들을 주변에서 본 적이 있을 것이다. 호의를 갖고 참견했는데, 상대가 그대로 따라주지 않으면 섭섭한 게 대다수 사람들의 심리다. 그런 일이 반복되면 무시당했다는 생각이 들고 결국에는 원한으로 치닫는 것이다.
어떤 경우에는 지속적인 호의가 상대에게 '이상한 권리' 주장의 빌미를 주기도 한다. '지금까지 잘해줘놓고, 왜 더는 못 해주느냐'면서 당당하게 적반하장 권리를 들이미는 것이다.
사람의 불행 가운데 절반은 스스로와 잘 지내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내 생각에 나머지 절반은, 남과의 거리 조절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평화는 예의로 유지된다. 예의는 원래 서로의 안전을 확보하려는 목적에서 발전되었다. 예의의 기본인 인사만 봐도 알 수 있다. ... 관계는 양쪽 모두에게 유익해야 발전한다. 어느 한쪽이 지나치게 다가서면 '안전거리'가 위협당하기 시작한다. 관계의 건전성이 흔들리는 것이다. 가까워질수록 서로에게 의존하고, 더 많은 것을 기대하게 된다. 또 한편으로는 상대의 기대에 자신을 맞춰주며 희생한다.
상대에 대한 집착은 '잃고 싶지 않은 마음'이다. 그것이 도를 넘으면 상대가 자유로워지는 것을 원하지 않는 '구속하려는 마음'으로 발전한다. 결국에는 사랑과 관심이라는 허울로 가학과 피학을 거듭하며 서로를 외로움의 이빨로 물어뜯게 된다. 궁금한 마음, 걱정하는 마음의 이면 어딘가에는 통제하고 지배하려는 심리가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자기 의지의 관철을 위한 점검과 확인인 셈이다.
관계에 휘둘리지 않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선 긋기'에 익숙하다는 것이다. 그들은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도 '해서는 안 되는 말과 해서는 안 되는 행동' 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생각으로 상대와 경계선을 긋는다. 남의 영역으로 넘어가지 않으며, 다른 이의 침범도 허용하지 않는다.
야속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때에 따라서는 그것이 조금 더 차원 높은 배려일 수 있다. 사람 사이에는 '솔리튜드'라는 틈이 있어야 개성과 창의를 발휘해 함께 발전할 수 있다. 각자가 홀로 서야 관계도 조화로운 균형을 이루는 것이다.
정은과 함께 영화를 보고 나서 자증을 부린 적이 잇다. 슬픈 장면에서 훌쩍거리다가 클라이맥스에선 통곡을 해버린 정은 때문에 창피해서 영화가 끝나기도 전에 슬며시 밖으로 나와야 했다.
"넌 촌스럽게 그게 뭐니? 기껏해야 영화일 뿐이잖아. 진짜도 아닌 허구! 너 때문에 내가 얼마나 쪽팔렸는지 알아?"
정은은 그때, 미안하다면서 웃기만 했다.
그거였다. 정은이 가만있어도 사람들이 주변에 몰려들고 좋아해주는 이유. 공감 능력이라고 해야 하나? 고등학교 때만 해도 존재감이 거의 없던 친구였다. 그런데 대학 졸업 후 유학을 다녀오더니 묘하게 바뀌었다. 내보이지는 않지만 은근히 자신감 있게 보이고, '참견쟁이'라고 불릴 정도로 친구들을 세심하게 챙겨주었다.
설리는 정은이 강해진 이유를 이내 깨달았다. 힘의 근원은 '자연스러움'이었다. 정은은 고상한 척하지도 않고 강한 척 하지도 않았다. 그냥 물처럼 흐르고 다른 사람들과 섞일 뿐이었다.
"외로움은 변화의 용광로일 가능성이 높다. 혼자 있는 시간을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 삶의 길이 갈라질 테니까. 변화는 나 아닌 누군가가 되려고 할 대가 아니라, 나 스스로가 되려고 할 때에야 비로소 시작되는 것일 게다. 그러니까 혼자 있을 수 있는 능력은 변화가 필요할 때 그 가치를 제대로 발휘하는 자질이기도 하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혼자서 무엇이든 해본 사람과, 혼자서는 무엇 하나 해본 적이 없는 사람. 혼자 잘 지내는 것은 원래 당연한 것이었다. 그랬던 것이 이제는 '특별한 능력'이 되어버렸다.
그녀는 릴케가 말한 [말테의 수기]에서 강조했던 말을 이제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고독한 사람을 내벼려둬라. 그 사람은 당신보다 수준이 높은 사람이다.
"그때 많이 힘들었어. 다른 애들은 전부 친구가 있는데 나만 혼자였거든. 친구 같은 거... 다들 당연하다고 생각하지. 대부분은 그냥 친구가 있으니까. 하지만 나한테는 그게 당연하지 않았어."
이렇게 말해보지만, 엄마가 이해해줄 거라고 기대하지는 않는다. 그런 기대는 일찌감치 포기했다. 엄마와의 논쟁은 언제나 평행선이다. 말하면 할수록 외로워진다. 산속에 들어가 혼자 더들어도 이보다는 낫겠다.
... 엄마한테 그 말은 안 하려고 했는데. 이미 뱉어놓은 말. 차라리 잘됐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내 인생의 리모컨은 내가 쥐어야 하니까. 엄마로부터 홀로 서려면 어쩔 수 없이 '거절의 지혜'부터 시작해야 한다. ...
"엄마 얘기, 앞 뒤가 안 맞는 거 알아요? 윗집 아줌마한테 자전거 가르쳐주면서 인생 교훈도 줬다면서요? '아이들은 알아서 자기들 인생 살 테니까, 우리는 우리 인생이나 열심히 살아야 한다'고. 윗집 아줌마한테는 그렇게 말하면서 딸한테는 예외인 거예요?"
바가지가 날아왔다.
'이 계집애야, 그걸 몰라서 물어? 네가 남이야?"
엄마와의 언쟁은 당분간 계속 이어질 것 같다. 이해하지 못하는 엄마도 외롭고, 엄마의 이해를 받지 못하는 나도 외로울 것이다. 그래도 내 길을 가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을 것 같다. 엄마와 멀어질 수밖에.
세상에는 멀어질수록 가까워지는 관계가 있다. 멀어진 뒤에야 기억을 떠올리면서 상대의 깊은 속내를 야금야금 확인하게 되는, 너무 붙어 있어 괴롭기도 한 애증 관계. 멀어진 뒤에야 비로소 진짜 어른으로 성숙해가는 서로를 발견하는 관계.
때로는 사랑을 지키기 위해 거리를 두어야 할 때가 있다. 그런 사랑은 멀어질수록 깊어진다.
... '따님을 꼭 행복하게 해주겠습니다.' 오 대리가 오버해서 이런 소리나 하지 말아야 할 텐데. 내 행복은 내 소관이니까.
그녀는 자기감정에 충실한 사람이다.
영화를 볼 때 가급적이면 혼자 극장에 간다. 웃고 싶을 때 마음껏 웃는다. 남들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특히 모르는 사람들한테는 쪽 팔려도 안 죽는다.
그녀의 경험에 따르면, 솔리튜드에도 '단계'가 있다. 입문 수준은 혼자 극장에 가서 남을 의식하지 않고 영화를 즐기는 것이다. 영화관 입장부터 퇴장에 이르기까지 모든 과정이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기까지는 어느 정도의 적응기가 필요하다는 게 그녀의 경험담이다.
혼자 영화 보기의 백미는 슬픈 영화에 있다고 한다. 슬픈 영화를 보면서 실컷 울 수 있다. 통곡을 해도 괜찮다. 자막이 모두 올라간 것을 확인하며 마지막의 여운까지 마음에 담을 수 있다.
... 혼자서 이따금 미술관에 간다. 솔리튜드 단계에서 '혼자 미술관 가기'는 '혼자 극장 가기'보다 난이도가 조금 높은 수준. 남들이 가니가, 요즘 유행이니까 가보는 경우란 많지 않다. 자기가 보고 싶은 전시회에 가서 혼자 즐긴다. 작품을 통해 작가와 둘이서만 대화할 수 있다. '나도가봤어족'과 같이 갈 경우, 배고프다고 보채는 소리에 솔리튜드의 시간을 방해받게 된다. 게다가 예술은 원래 혼자와의 대화라고도 한다.
감상이란 본질적으로는 혼자 느끼는 것이다. 어떤 예술을 만나든 각자의 방식으로 이해하게 된다.
'가면형 우울증'이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서비스업 종사자나 연예인 같은 사람들에게서 발견되는 유형이다. 겉으로는 언제나 웃고 있다. 하지만 그렇게 환하게 웃는 사람도 속으로는 찌푸린 채 울거나 절망에 빠져 있을 때가 있다. 명랑하던 사람이 어느날 갑자기 절망적인 선택을 했을 때, 대다수 사람들이 그걸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그런 페르소나 때문이다.
사르트르는 '혼자 있을 때 외로움을 느낀다면 같이 있는 사람, 즉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 사람을 마음대로 바꾸려 들지 마세요.
그 사람이 당신이 원하는 대로 모든 걸 해주는 사람이 된다면 좋겠죠? 그러나 그렇게 된다면 그는 당신 말은 잘 듣는 대신, 자신을 믿지 못하는 사람이 될 거예요. 그건 자신감을 잃고 무능해진다는 뜻과 일맥상통해요.
당신은, 당신 마음대로 움직여주는 그 사람을 보면서 과연 만족할까요? 저는 그렇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요. 무능하게 변한 그 사람을 보면서 후회만 하게 될 거예요.
"다음에는 혼자서도 충분하다는 판단이 들 때에야 사랑을 해. 아무리 좋은 사람도 지금의 너와 만난다면 숨이 막혀 질식해버릴 거야. 네가 등에 업혀선 딱 달라붙어 목을 계속 졸라댈 테니까. 그러면 누구라도 약해지겠지. 너는 그런 약한 모습이 싫을 테고."
고아란, 말 그대로 부모를 여의거나 버림받아 몸 붙일 곳이 없는 아이를 뜻한다. 어린나이에 적나라한 외로움에 무자비하게 노출된 상태, 그들의 어린 시절은 실패와 상실, 불행, 좌절로 점철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외로움 앞에 우뚝 섰고, 외로움이라는 에너지를 이용해 스프링처럼 도약하는 데 성공했다.
외로움의 에너지가 그들의 성취에 어떤 '결정적 역할'을 했을까.
나는 외로움이 그들의 '깊이'를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외로움 속에 머물며 더 깊이 내려갈수록 더 많은 '이해'를 쌓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 '이해'란 사람에 대한 것이다. 사람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은 외로움의 삽질을 통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언제 끝날지 기약이 없는 삽질로 바득을 향해 파들어가면, 그 바닥을 흐르는 다뜻한 물줄기를 만나게 되는 것이다. 인간 본연의 깨달음 말이다.
사랑이란, 같은 곳을 향해 나란히 가는 것이 아닐지도 몰라요.
각자의 길을 가다가 만나서 함께 쉬고, 또 각자의 속도로 각자의 길을 가는 것일 가능성이 높아요. 아무리 사랑해도, 서로 다른 일을 하고, 다른 날 다르게 죽잖아요, 그렇죠?
그렇게 서로가 다ㄹ다는 것을 인식하면서 서로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상대가 바로 지기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사람은 누군가를 진심으로 도울 때 오히려 가장 많은 도움을 받는다'는 진리를 실감할 수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제각각 자기 문제를 안고 있으면서도 더 힘든 사람들을 기꺼이 도우러 나서는 거였다.
굳이 비유하자면 론리니스는 그런 것이다. 자기 외로움에만 급급해 세상을 돌아보지 못한다. 반면 솔리튜드는 더 많은 것을 풍부하게 보고 느낀다. 숲 속에서 나무들 사이로 파고드는 햇살을 보고, 새 소리를 듣고, 바람을 느낀다.
상황에 따라 다르겠지만 단 한 번에 무너지는 사람은 많지 않다. 사람마다 제각각의 임계점이라는 게 있는데, 여러 번에 걸친 충격이 그 포인트를 넘어서는 순간에야 와르르 무너지는 것이다. 누군가 신중하지 못하게 던진 말 한마디만으로도 임계점을 넘어버리는 경우가 있다.
그녀는 남자친구 도균에게 두 가지 모습을 원했던 것이다. 하나는 모든 것을 받아주고 용서하며 한없이 보살펴주는 아빠의 모습, 다른 하나는 그녀만을 사랑해주며 그녀가 원하는 대로 따라주는 남자의 모습, 즉 엄마에게 있어서의 아빠의 존재.
... 도균도 아빠와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다. "숨이 막혀서 질식해버릴 것 같다"고. 그렇다면...
한 심리학자가 '어린 시절의 불행이 인생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알아보기 위해 아이들을 대상으로 장기간의 연구에 들어갔다. ... 예상대로 대부분이 학습장애와 사회 부적응을 드러냈으며 갈등과 사건의 중심에 서 있었다 ... 그러나 학자는 곧 예외를 발견했다. ... '도대체 이런 차이는 어디서 발생한 것일까?'
학자는 심층 면담을 통해 그 해답을 찾아낼 수 있었다. 그들 72명에게서 공통점이 발견된 것이다. 그 공통점이란 자신의 입장을 이해해주고 받아주는 사람이 인생에 걸쳐 한 명은 있었다는 것이다.
"그 사람 혹시, 진짜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 진심으로 받아본 적이 없어서 주는 법을 모르고, 바라기만 하다 보니까 원하는 만큼 받지 못해 외로워서 그렇게 이상하게 구는 것 아닐까."
나는 이 책에 등장하는 설리와 닮아있었다.
이 책은 외로움을 '론리니스'와 '솔리튜드'로 구분하고 있는데, 조금 겸연쩍지만 나는 내가 '솔리튜드'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지금의 나는.
'론리니스'는 자신의 외로움에 매몰되어 끊임없이 자신의 발 아래를 받쳐줄 희생물을 찾아 끌어당기는 외로움이라면
'솔리튜드'는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며 '나'에 대해 생각하고, 그를 통해 다른 누군가와 함께 할 때도 균형감을 잃지 않는다.
지금의 나는 영화를 혼자서 보지 못하겠다는 사람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안 해봐서 그런 것 아닐까?
사실 그 부분을 읽기 전까지 공연, 영화, 연극, 전시회는 당연히 혼자 보는 게 기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하긴 나도 맨처음 혼자 밥을 먹고 혼자 영화를 볼 때는 조금 떨렸던 것 같기도 하다. 지금은 그걸 이상하게 보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는 걸 까먹을 정도로 자연스러워졌지만.
(나는 먹고 싶으면 혼자 국밥도 먹고 고기도 굽는다. 1인분을 팔지 않으면 2인분을 시켜 우걱우걱 먹기도 한다.)
자신의 외로움을 채우기 위해 다른 누군가를 끌어들여 자신을 채우려한다면, 그 끝은 비극적일 수 밖에 없다.
혼자서도 행복한 사람, 그런 온전한 두 사람이 만나 삶의 플러스 알파로 더 행복해지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이대로 홀로 산다는 게 그리 두렵지 않은데, 만약,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할 수 있다면 더 행복하리라는 것 뿐이다.
진정으로 사랑받은 적이 없어서- 라는 구절을 읽으며 소스라치게 놀랐다. 아마 나도 다른 어딘가에서 읽었던 것이 잠재적으로 남아있었던 것이겠지만, 저건 내가 늘 달고 살던 말이었다. 나의 과거를 떠올릴 때마다 함께 떠오르는 씁쓸한 말.
그랬던 내게, 정은처럼 자연스러움으로 고아 같은 기아 상태에 있었던 나를 이해해주고 지지해준 고마운 친구.
이 책을 읽는 동안 내내 네 생각이 많이 났다. 나의 가시까지 품어안아주었던 너에게 감사와 존경을 바친다.
그리고, 처음으로 내게 따뜻함이라는 저주를 알려준 사람에게도 감사한다.
물론 끝까지 온도와 색채가 있는 세상에 대해 모른 채 살았다면, 훨씬 덜 고통스럽고 절망스러웠겠지만.
그런 세상도 있다는 걸 몰랐다면 애초에 동경할 일이 없었겠지만.
단 한 순간이었어도 잊지 못할 행복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에 그것에 대해서는 단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다.
나는 그것을 알려준 것에 대해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다. 그리고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다.
'너는 너의 울음이 너무 커 다른 사람의 울음 소리를 들을 수가 없구나.'
그때 나는 내 상처를 더 보듬어주지 않는 그가 야속했던 것 같기도 하다. 이제야, 나만이 울 수 있는 건 아니라는 걸.
똑같이, 혹은 더 울면서도 나를 위해 내 울음에 귀기울여 주었었다는 걸 알았다. 그제야 다른 사람들의 울음에 기울일 귀가 내게도 있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 감사한다.
하고 싶은 말이 많지만, 삼켜야겠다.
뱀발)
어쩌면 나는 지금 나의 행보에 대한 확신을 잃어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내 생각에 부합되는 글을 읽었을 때 기뻐하고, 자신의 생각과 다르게 행동하는 사람들을 불편해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이 정신적인 여유를 잃었기 때문인지, 혹은 확신을 잃었기 때문인지는 명확치 않다.
다만, 하나 하나 집어 설명해가면서까지 누군가에게 나를 이해시키겠다는 욕심이 안 드는 것을 보면 아무래도 전자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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