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1

[박차민정] 조선의 퀴어 - 근대의 틈새에 숨은 변태들의 초상

일루젼 2024. 8. 8. 2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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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박차민정
출판 : 현실문화연구
출간 : 2018.06.15


       

조선 시대에 있었던 퀴어한 야담을 모은 책인 줄 알았는데 -사전 조사 없이 읽는 습관은 여전하다-, 당시 신문 기사를 중심으로 한 시대상 분석에 가까운 책이었다. 놀라운 점은 해당 시기에도 동서양을 막론하고 이상성학 異常性學 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고 있었다는 점.

현대보다 훨씬 공동체 중심적이었을 당시 시대를 고려하면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지만. 

 

다소 충격적인 내용들도 있지만, 기사화될 정도라면 대체로 드물고 화제성이 있는 일이었다는 뜻일 테니 현대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고도 볼 수 있겠다. 

 

어디선가 눈에 띈다면 가볍게 훑어보는 정도로 살펴보시길.  


   

 

- 이 책 <조선의 퀴어>는 한국사회에서 '이상한' 혹은 '기묘한' 존재들 queer로 알려진 사람들, 즉 '변태성욕자' '반음양 intersex' '여장남자' '동성연애자'의 역사를 탐구하려는 목적에서 쓰였다. 

- 이 책에서 다루는 시공간은 1920~30년대 식민지 조선으로 한정하였는데,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무엇보다 1920~30년대는 '변태성욕' '반음양' '여장남자' '동성연애'와 같은 새로운 분류와 이것을 뒷받침하는 앎의 체계들이 처음으로 등장한 시기였기 때문이다. 인간의 성적 유형과 성적 욕망들에 대한이 전적으로 새로운 이해와 접근법은 서구의 성과학 지식이 수입되고 번역되는 일련의 과정을 통해 비로소 출현할 수 있었다. 또한 1920~30년대는 식민지 조선에서 대중문화와 의료권력, 자본주의가 본격적으로 싹텄던 시기라는 점에서도 중요하다.  


- 언론의 선정적인 기삿거리로 발굴되지 않았던 사람들, 그렇기에 재현될 기회를 전혀 갖지 못했던 퀴어한 존재들의 경험들 역시 전혀 담아내지 못한다. 이러한 자료들이 보여주는 것은 퀴어의 '진실'과 무관하게, 당대의 경찰, 판사, 의사, 언론인들이 이 기이한 존재들에 대해 생산했던 담론들이라고 말하는 편이 정확할 것이다. 따라서 이 책에서는 이러한 자료들을 '잃어버린 역사'를 복원하고 과거에 대한 보다 완벽하고 정확한 설명을 제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당대의 퀴어한 존재들을 둘러싼 지배적인 담론에 접근하는 수단으로 사용하고자 한다!

- 결과적으로 이 책은 이상하고 기묘한 존재들을 둘러싼 사회적 담론들이 형성되는 과정들을 쫓는 일종의 계보학이 되었다. 책을 쓰면서 나는 퀴어한 존재들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어떻게 '정상적인 세계'의 경계들을 상상해 내는 과정들과 나란히 발전했는가를 함께 살펴보고자 했다. 왜냐하면 무엇이 위반적이고 일탈적인 성적 실천인가를 결정한다는 것은 결국 그 사회에서 '정상적인' 여성과 남성들이 어떤 방식으로 입고, 걷고, 말하고, 욕망하고, 사랑하고, 관계 맺어야 하는지를 정의하는 것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 책은 조선의 '퀴어' 존재들의 역사를 담고 있는 동시에, '정상적인' 여성과 '정상적인' 남성의 역사를 다루는 책이기도 한 셈이다. 

- 다만 당시의 서구에서 의료인이 아닌 사람들이 이 책에 접근하는 데에는 상당한 제약이 있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실제로 해블록 엘리스가 영국에서 처음 발간한 전집의 첫 권은 추잡하다는 비난을 받았고 출판사가 기소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기소 담당 판사는 이 책이 주장하는 과학적 가치가 단지 음란서적을 팔아먹기 위한 구실에 불과하다는 판결을 내리기도 했다. 

- 해블록 엘리스 전집의 첫 번째 책 <성도착 Sexual Inversion>이 영국에서 출판된 것은 1897년이었다. 그해는 오스카 와일드가 영국에서 '남색죄'로 고발당해 2년 강제노동형을 선고받은 지 고작 2년밖에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특히 해블록 엘리스는 성과학자로서는 드물게 성자유주의적 입장에 서 있었던 학자였다. 그는 정상과 비정상 사이에 분명한 경계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러한 믿음 아래 성충동, 동성애, 시체 애호증, 자위행위와 같은 주제들을 최대한 객관적인 관점에서 기술하려고 했다. 보수적인 당시 영국의 분위기 속에서 그의 책이 음란시비에 휘말렸던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고국에서의 반응에 낙담한 해블록 엘리스는 전집의 나머지 책들을 모두 미국에서 출판하였다. 하지만 해블록 엘리스의 책은 미국에서도 매우 제한적인 조건 속에서 판매되었다. 그의 전집은 1935년까지 자격증을 가진 전문 의료인만이 합법적으로 구매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한정된 부수만이 출판되어 매우 비싼 가격으로 판매되었다.  


- 1933년 <동아일보>에는 남편에게 학대받던 처의 원혼이 큰 뱀으로 변해 다시 태어났다는 기사가 실렸다. 기사에 따르면 생전에 남편의 학대를 받던 아내는 평소에 죽으면 구렁이가 되어 너를 해롭게 할 것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해왔는데, 실제로 아내가 사망한 뒤 큰 뱀이 되어 나타났다는 것이었다. 이 소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퍼져, 동리에서 이 뱀이 말을 한다거나 뱀이 위는 뱀의 모양이지만 아래는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다거나 등등 다양한 형태로 파생되었다. 따라서 이 진기한 복수사의 모습을 보기 위해 하루에 수십 명의 인파들이 몰리는 소동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었다. 
 
- 원한을 갖고 죽은 처가 뱀으로 환생해 복수한다는 기담 자체는 그다지 새로운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기담이 전국 단위의 주요 일간지에 어엿한 기사로 게재될 뿐 아니라, 소문의 진위를 판단하기 위해 기자가 직접 현장에 파견되는 것은 분명 새로운 풍경이었다. 현장에 도착한 기자는 뱀이 머문다는 뒷간으로 가서 변소와 돌담 사이에 머리를 내놓은 구렁이의 모습을 두 눈으로 확인했을 뿐 아니라, 일련의 사태에 대한 남편의 심경을 직접 인터뷰하여 기사를 작성하였다. 어떻게 이런 종류의 기담이 1930년대에 기삿거리로 여겨질 수 있게 된 것일까? 기사의 부제로 쓰인 "진주에 그로 100%의 화제"라는 구절에서 그 단서를 얻을 수 있다. 

- 조선에서 1920년대 후반에서 1930년대 전반에 이르는 시기는 '에로그로 넌센스'가 대중문화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던 시대로 평가된다. '에로그로 넌센스'는 '에로틱, 그로테스크, 넌센스'의 줄임말로, 일반적으로 일본의 모더니즘 시대와 파시즘 시대 사이에 존재한 데카당트한 사조를 의미했다. 서구의 근대성과 소비문화가 근대화되는 일본에 정착하면서 나타난 '에로그로 넌센스'의 유행은 식민지 조선에도 발 빠르게 수입되었다. 1931년 <조선일보>는 '에로그로 넌센스'는 "현대라고 하는 불가사의한 미국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가장 먼저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될 주문"이라고 썼으며  같은 해 잡지 <동광> 역시 '모던'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나팔바지를 입거나 단발양장은 하지 못하더라도 '에로그로'를 이해하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소개했다. 

- 생물학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 믿음이 강하게 작동했던 시기였다. 특히 사회적으로 주변화된 집단은 지적으로 열등하고 기질적으로 퇴화된 존재라고 믿어졌는데, 이러한 주장이 표적으로 삼았던 집단은 주로 빈민, 여성, 범죄자, 비백인들이었다. 이들은 뇌와 신경 시스템이 근본적으로 퇴화되었거나 혹은 신경증에 걸려 병든 존재로 여겨졌다. 예를 들어 1930년 잡지 <별건곤>의 "모던복덕방"은 열대 지방 주민들이 대개 조숙하기 때문에, "5, 6세밖에 안 된 애어머니들이 수두룩하고 3, 4세만 되면 벌써 성인으로써 육체가 완전히 발달되어 넉넉히 결혼을 할 수 있다"고 소개했다. 이러한 기사는 열대 지방의 '토인들'을 문화적 야만인인 동시에, 진화적으로 완전한 인간다움을 성취하지 못한 존재, 동물로부터 충분히 분화되지 못한 존재로 취급했는데, 이것은 문명화 단계, 생물학적 진화, 성적 고결함에 대한 의미체계가 조선에서도 역시 같은 방식으로 작동했음을 보여준다. 

- 따라서 식민지인의 열등함을 발견하고자 했던 제국의 과학자들은 이러한 본질적인 차이를 발견하는 데 몰두했다. 학자들은 골상학이나 혈액형학을 동원해 조선인의 신체적 차이를 계측하고 분석하는 것과 나란히 성도덕에서의 상상된 차이들을 기록했다. 성과학자 코무로 슈진은 조선인들의 민족성은 일본인과 다르게 둔하고 단정하지 못하다고 주장하면서, 그 원인은 바로 조선 젊은이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는 '남색(남성 간의 성관계)'의 풍습 때문이라는 논리를 펼쳤다. 성과학자 다나카 지우라는 좀 더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는 1928년 잡지 <성이론>에 혼자 사는 남성이 성적 욕망을 참을 수 없어서 자신이 키우던 돼지와 성관계를 맺었으며, 이 돼지가 인간의 얼굴을 닮은 새끼들을 출산했다는, 수간으로 분류할 만한 이야기를 투고하였다. 그는 이 에피소드 뒤에 독자들을 위해 이러한 사례는 일본 본토에서는 물론 볼 수 없으며, 주로 대만, 조선, 중국, 인도 등에서 흔하게 발견된다고 덧붙였다. 이와 같은 예는 '남색'과 '수간'과 같은 특정한 성적 실천이 타 인종과 민족을 원시적이고 야만적인 존재로 정의하기 위해 인종주의적 기표로 동원되었음을 보여준다. 그뿐만 아니라 다나카 지우라가 이러한 '변태성욕'의 지도 속에 특별히 대만, 조선, 중국, 인도를 위치시키고 있다는 점 역시 주목할 만하다. 현실에서 식민지 확장이 진행 중인 지역들은 바로 이렇게 '에로 그로'한 상상력이 투사되는 장소들이 되었다. 식민지인들 역시 이러한 타자의 소비로부터 자유롭지 않았다. 

- 1929년 <조선일보>는 중국 사천성 지역에 거주하는 소수 민족인 요족의 성풍속을 소개하는 "현대 인류계의 괴기"라는 기사를 실었다. 민족지 형식을 따르고 있는 이 글은 요족이 호방하고 사나운 기질을 중요시하며 일부다처제의 풍속을 가지고 있는 민족이라고 전제한 후, 요족 사회에서 이상적인 남성성을 가진 남성들은 일부다처제로 인해 여러 여성을 아내로 맞을 수 있는 반면, 기운이 약하고 용기 없는 남성들, 즉 사회의 주류적 남성성에 부합하지 못하는 남성들은 아내를 얻기 어려운 처지에 놓인다고 설명한다. 그런데 기사는 돌연 이 때문에 요족 사회에서는 결혼 경쟁에서 탈락한 남성들이 '성의 번뇌'를 풀 수 있도록 하는 비공식적인 풍습인 '원류결혼'이 존재한다는 주장으로 나아간다. 즉 근처에 서식하는 원숭이를 잡아서 아내로 삼는 것이 사회제도적 차원에서 승인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 결과로 요족 사회에서는 사람과 원숭이의 교배종을 보는 것이 드물지 않으며, 이 교배종이 결혼 경쟁에서 밀려 다시 원숭이와 '원류결혼'을 한 경우, 그 자녀가 완전한 원숭이로 변하는 "진화에서 환원" ...

 

- 하지만 다양한 자료들은 죽음과 혐오의 감각과 관련해 당대의 조선에 이와는 다른 풍경들이 공존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여자의 묘를 파고 수의를 훔친 변태성욕자"의 기사가 나온 지 4년 후인 1933년에 경상남도 경찰부 위생과는 조선인들의 묘지와 관련된 믿음을 직접 조사해서 정리했는데, 그 내용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 조상 분묘지의 묘질이 좋지 않으면 자손 중에 병자가 발생하므로 그것을 막기 위해 묘를 파내어 적당한 장소로 옮겨 개장하면 병자가 발생하지 않는다.
• 집안에 흉한 일이 많으면 명태 한 마리와 명주 얼마간을 분묘로 가지고 가서 그 옆에 묻으면 나쁜 일이 생기지 않는다.
• 죽은 자를 돌산 밑에 묻으면 그 집안에서 높은 관직에 오르는 자가 나온다.
  조상의 관에 물이 새어 들어가면 가족 중에 병자가 발생하기 때문에 그것을 피하기 위해서는 양지바른 곳에 개장해야 한다.
유행병으로 죽은 시체를 매장할 때는 나무 위에 붙들어 매어풍장을 하거나 화장을 한다.
스무 살이 넘은 미혼 남녀가 죽었을 경우 그 가정에 불운이 찾아오므로 그 원한을 달래기 위해 죽은 두 남녀의 가정에서 합의를 하여 날짜를 잡아 혼인을 시킨 후 (만약 먼저 매장을 했으면 다시 시체를 꺼낸다) 둘을 접촉시킨 채 합장한다.

 

- 전라북도 장수 출신인 필자는 자신의 지역에서 목격한 성인례의 형식으로 '맴춤'을 소개하고 있다. '맴춤'이란 느티나무에 매어놓은 외줄을 아래에서 마구 흔드는 동안 성인식을 치르는 사람이 떨어지지 않고 무사히 외줄그네를 타는 풍습이다. '맴춤의 시련'으로 불리는 이 과정을 통과하고 마을 사람들에게 잔치를 베푸는 의식을 모두 마쳐야만 아이는 비로소 한 명의 장정으로 인정받고, 외지인은 마을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지게 된다. 필자는 촌락공동체에서 성인식의 위상이 매우 강력했다고 회상했다. 이 시험을 통과하는 사람만이 성인 남성한 사람의 온전한 품삯인 '온값'을 받을 수 있을 뿐 아니라, 마을의 집회소인 사랑방에 출입할 수 있는 자격을 얻기 때문이다. 반대로 말해 '맴춤의 시련'을 통과하지 못하거나 너무 가난해서 잔치를 베풀 여력이 없는 빈민들은 나이가 들어도 아이와 마찬가지로 온값의 절반밖에 되지 않는 품삯을 받아야 하며, 촌락에서 적합한 결혼 상대자로 여겨지지 않기 때문에 홀아비로 늙게 된다는 것이다. 

- 이러한 공동체의 의례는 '성인례'라는 이름을 달고 있지만, 거주민이든 아니면 최근에 이주한 외부인이든 남성만이 도전자가 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의례의 목적이 공동체가 도전자를 완전한 성인 남성으로 인정하는 것에 있었다는 점에서 사실상 남성입문의례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성인례를 통과하지 못한 남성이 '늙어도 아이'인 채로 남는다면, 성인례에 도전할 자격을 갖지 못한 여성은 이미 언제나 '늙어도 아이'인 셈이다. 

- 57세의 홍종팔이라는 남성으로, 그는 근 1년 동안 자신이 가르치는 동리의 아이들(13세)을 방으로 불러 '계간'을 해오다 발각돼 청진지방법원 회녕지청에서 징역 8개월을 선고받았다. 판결에 불복한 그는 경성복심법원에 즉시 항고를 제기했다. 이 기사는 이러한 유형의 범행을 지칭하기 위해 '남색' '계간'과 같이 남성 간의 성관계를 지시해 온 매우 전통적인 어휘들을 동원하고 있다는 점에서 특징적이다. 실제로 조선 시대의 '남색' 풍습은 다양한 방식으로 기록에 남겨져 있다. 혼마 규스케가 황해도, 경기도, 충청도 지방을 여행하며 조선의 생활과 풍습을 정탐해 엮은 책 <조선잡기>(1893)에는 조선팔도 가는 곳마다 '남색'이 유행하지 않는 곳이 없으며, 경성에 사는 좋은 집안의 자제들조차도 아름다운 옷을 입고 시내를 돌아다니면서 "공공연히 볼깃살을 팔고도 부끄러운 기색이 없다"고 기록되어 있다. 

- 마찬가지로 이규태는 앞선 글에서 과거 평안도와 황해도 지방에 존재했던 성인례로서 '구리'의 풍속을 소개하고 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구리'는 '맴춤'과 마찬가지로 남성이 성인이 되기 위해 치르는 의식으로, 독특하게도 "선임자들에게 호모를 대주는" 방식, 즉 성인이 되려는 소년이 강제로 성관계를 당하는 방식으로 실행되었다는 것이다. '남색'에 대한 언급은 당대의 조선 지식인들의 글 속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역사학자이자 민속학자인 이능화는 신라 시대부터 조선 시대 말까지의 기녀들을 다룬 책 <조선해어화사>(1927)에서, 조선에서 한때 성행했다는 '남색'과 '미동'의 풍속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 [미동은 세속에서는 비역이라 칭하는데 남색을 이른다. (…) 앞서 우리나라 풍속에서는 만약 미동이 하나 있으면 여러 사람들이 질투하여 서로 차지하려고 장소를 정해서 각법, 속칭택기연으로 싸워 자웅을 결정지어 이긴 자가 미동을 차지한다. (…) 조선조 철종 말년부터 고종 초까지 이 풍속이 대단히 성하였으나 오늘날에는 볼 수 없다.] 

- 문학가이자 경성방송국 아나운서였던 이석훈 역시 1932년에 쓴 "동성애 만담"에서 과거 조선에서는 남색이 매우 번성해 남성들의 출세를 위한 무기로 사용되었으며, 문무양반을 막론하고 실력이 없는 자도 "남색의 포로 되기에 굴복하면 쉽게 벼슬을 얻고 입신양명을 할 수 있었다"고 소개했다. 이석훈과 이능화는 조선에 남색 풍습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이를 매우 가까운 과거(고종 초)까지 존재했지만 현재는 찾아보기 어려운 것으로 언급하고 있다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비록 '남색 선생'의 사례에서 보듯이 당시에도 '남색'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지만, 이러한 주장은 일부 타당한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일부의 '남색'은 분명히 이 시기 동안 처벌받아야 할 범죄로 다루어졌으며, '남색' 행위 전반이 문명화된 사회에서 눈에 띄어서는 안 될 야만적인 성적 실천으로 여겨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 물론 식민지 조선에서 남성 간의 모든 성행위가 불법화되었던 것은 아니었다. 일부 서구 국가들이 로마 가톨릭의 전통을 따라 "신에 반하는 악덕(항문 섹스, 구강 섹스, 수간 등)"을 형법으로 처벌하는 소도미 sodomy 조항을 운영했던 데 반해, 식민지 조선에 적용된 근대 일본 형법에는 이에 상응하는 조항이 존재하지 않았다. 일본의 형법 개정 과정에는 프랑스 법학자 귀스타브 브아나드 Gustave Boissonade가 주도적으로 참여했는데, 이에 따라 남성들 사이의 성관계를 시민의 사적 영역으로 간주하는 프랑스 법의 전통이 개정안에 반영되었다. 따라서 일본과 1912년 이후 일본형법을 적용받은 식민지 조선에서는 다른 조건(연령 제한과 폭력의 사용)을 위반하지 않는 한 성인 남성들 사이에 이루어지는 합의에 의한 성행위를 금지하는 법은 명시적으로 존재하지 않았다. 

- 한민족지 연구 1940년대의 <'남자동성애' 연구>는 전통과 근대의 이분법 사이에서 일어난 교착과 지연의 양상을 잘 보여준다. 연구 참여자들은 해당 지역에서 한국전쟁 이전까지 남성들 사이의 성적 접근이 관습적으로 허용되었으며, 아이부터 어른까지 그리고 가난한 이들부터 양반, 훈장, 승려 같은 지도층의 남성들까지 이러한 관계에 참여했다고 회고했다. 이 지역에서 남성들이 맺었던 파트너 관계의 유형은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해 볼 수 있는데, 이러한 구분에서 가장 핵심적인 기준은 파트너의 연령이었다. 동년배의 성인들 사이에 맺어지는 파트너 관계는 '맞동무'로, 성인과 소년(12~16세 정도의 '미동' 사이에 이뤄지는 파트너 관계는 '수동무'로 불렸다. 

- 이러한 관계의 형식은 내용에도 중요한 차이를 만들어냈다. ‘맞동무’는 지속적인 파트너 관계들을 전제하지 않았으며 성관계의 교환이 주축을 이뤘다. 성관계 안에서도 삽입하는 역할과 삽입당하는 역할은 엄격히 나누어져 있지 않았고 유동적이었다. 반면에 '수동무'를 맺는다는 것은 보다 장기적인 친밀성의 관계로 진입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따라서 '수동무' 관계는 이성애의 혼인과 마찬가지로 일정한 사회적 인정의 의례들을 동반했는데, 연구 참여자들은 '수동무' 관계가 맺어지면 성인과 소년 양측의 친구들을 모아놓고 개를 잡아 동리에서 공개적으로 잔치를 벌였다고 증언했다. 
 
- 오히려 이 경계 자체를 심문하고 이에 깊은 불안을 드리우는 위협적인 존재로 여겨질 수밖에 없었다. 만약 여성이 과거 시험에 비견되곤 했던 당시의 치열한 입학시험에서 남성과 나란히 경쟁할 뿐 아니라, '남자 양복'을 입고 같은 교실에서 같은 교과를 공부할 수 있다면 여성과 남성 사이의 본질적인 차이는 어디에서 발견될 수 있는가? 

- 이와 같이 성별의 경계를 둘러싼 신경증적 불안은 당대의 다양한 텍스트들에서 두드러지게 발견된다. 1928년 잡지 <별건>의 "신유행예상기"는 "기괴천만한 중성남녀의 떼"라는 만평에서 단발머리에 안경, 파이프 담배, 단장을 착용한 여성과 장발에 하이힐, 실크스타킹을 신고 여자의 목소리로 사랑을 구걸하는 남성의 모습을 그려 넣었다. 남성과 마찬가지로 단발을 하고 스포츠를 즐기는 모던걸과 여성처럼 머리를 기르고 외모 치장에 몰두하는 당대의 모던보이에 대한 비판이 최종적으로 당도하는 곳은, 외형적인 차이들과 함께 남성과 여성의 본질, 사회적 역할, 최종적으로는 성별 권력의 차이가 사라질지 모른다는 불안이었다. 그것은 "수염 난 남자가 버선짝을 기우고 유지청년일수록 아궁이와 도마 옆을 떠나지 못하고, 여자가 선술집 안주를 얻어다가 아이를 임신하고 누워있는 남편에게 가져다줄지 모르는"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반영한다. 

 
- 결과적으로 '경찰범처벌규칙'은 거리에서의 단속을 통해 법적 성별, 정체성, 의복이 일치하지 않는 이들을 식별해 내고 처벌함으로써 무엇이 한 성별에 적절한 의복이며 삶의 형태인지를 규정하는 데 깊숙이 개입했던 셈이다. 공적 공간에서 강화된 단속은 단속의 대상이 되는 이들의 삶에 커다란 곤경을 불러일으켰음이 분명하다. 김창룡은 화천서로 소환된 해 5월에 이미 경성에서도 유사한 상황을 경험한 바 있었다. 결정적인 차이점은 김창룡이 경성에서 "남자의 옷"을 입고 있었다는 데 있다. 경성에 업무를 보기 위해 출발하려던 그녀는 소문을 듣고 역까지 출동한 춘천서의 경관들로부터 상경 조건으로 반드시 "남자의 옷"을 입으라는 경고를 받았다. 할 수 없이 경관의 권고대로 "본색대로"의 "남자 옷"을 입고 경성에 간 김창룡은 곧 종로 부근에서 경관에게 체포되었다. 경관은 김창룡을 경찰서에 구금했는데 그 이유는 "여자가 왜 남자로 변장하였느냐"는 것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여자로 살아온 김창룡이 '남자의 옷'을 입는 것은 오히려 남장한 여자처럼 부자연스러워 보였기 때문이다. 이것은 성별경계를 신체로 완벽하게 체현하지 못하는 김창룡과 같은 인물들은 이제 '남자의 옷을 입든 '여장을 한 채로든 안전하게 공적공간에 존재할 수 없음을 보여주었다. 

- 기사는 아내의 그림 모델을 하는 과정에서 처음으로 "여장"을 경험했던 덴마크 출신의 평범한 화가가 "성전환수술"을 받아 "완전한 여자"로 변해 다른 남자와 결혼을 했다는 "기괴한 이야기"를 독자들에게 전하고 있다. 이 남성의 이름은 "안드레어스"로 소개되어 있지만, 덴마크 출신의 화가라는 인물의 배경과 "성전환수술" 집도와 관련된 정보(1931년 드레스덴), 수술 후에 그녀가 사용한 이름(릴리), 기사에 인용되어 있는 수술 전후 사진을 종합해 보면, 기사의 주인공은 세계 최초의 '성전환수술'의 주인공으로 알려진 에이나르 베게너 Einar Wegener, 즉 릴리 엘베 Lili Elbe 임을 확인할 수 있다.

- 당시 신문과 잡지를 통해 소개된 '성전환수술'은 인터섹스를 위해 이루어진 '치료적 목적'의 수술에 한정되지 않았다. 마그누스 히르쉬펠트  Magnus Hirschfeld의 독일 성과학연구소는 1921년부터 인터섹스가 아니더라도 자신의 법적 성별과 다른 성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들을 위해 수술을 제공했는데, <조선중앙일보>에 소개된 릴리 엘베의 수술이 바로 이러한 사례에 속했다. 물론 기사가 차이들을 세심하게 다루었던 것은 아니었다. <조선중앙일보>는 릴리 엘베가 "여장을 하고 수술을 받게 된 원인"이 "아랫배에 있는 여자의 기관"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마찬가지로 1933년 <동아일보>의 "남자가 여자가 되어 다시 시집간 이상한 이야기" 기사는 이에 대해 "차차 몸이 이상하여지며 그만 여자로 변해 버렸기 때문에 수술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소개했다! 

- 여성성과 남성성은 정도의 차이일 뿐 인간은 신체적으로 양성적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이러한 새로운 사유의 발달에 있어 1920~30년대 내분비학의 발전은 매우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 모든 인간이 남성 호르몬과 여성 호르몬을 함께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을 때, 과학자들은 이것을 모든 여성들이 남성의 요소를 가지며 모든 남성들이 여성의 요소를 가지고 있다는 증거로 받아들였다. '성전환수술'을 가능하게 했던 것이 바로 이 '양성성'에 대한 인식이었다. 내분비학 학자 오이겐슈타이나흐를 비롯해 인간과 동물을 대상으로 한 성전환 실험/수술에 참여했던 과학자들은 이러한 작업을 '창조'라고 보지 않았다. 이와 같은 수술은 호르몬을 사용해 지배적인 성별의 신체적 특징과 성행동을 억제하고 잠재된 반대 성의 잠재력을 끌어내는 과정으로 이해되었다. 가장 중요한 전제는 남성과 여성이 하나의 스펙트럼 안에 있는 존재이며, 호르몬을 통해 신체를 한 방향이나 다른 방향으로 이동시키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관점 속에서 성별이란 내분비물의 추가나 감량에 따라 변화할 수 있는 양적인 차이로 이해되었다.  

- 따라서 동성애와 이성애, 남성과 여성은 상호배타적인 이분법적 범주가 아니라 하나의 연속체 안에서의 단계적인 차이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모든 남성들이 극단적인 "완전한 남성"으로부터 벗어나 있고 모든 여성들이 극단적인 "완전한 여성"으로부터 벗어나 있다면, 동성애자는 그저 보통보다 조금 더 멀리 벗어난 사람들에 불과했다. 물론 정자와 난자를 통해 차이를 규명하고자 한 의사 정석태와 마찬가지로 식민지 조선의 많은 지식인들은 남녀의 본질적인 차이를 찾는 데 몰두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인간의 양성성에 대한 인식 역시 등장하고 있었다. 

- 1924년 <동아일보>는 "차별"이라는 글에서 남녀평등의 필요성을 '양성성'이라는 인간의 특징으로부터 논증했다. 필자는 대개의 사람들이 남녀가 엄격히 구분된다고 믿는 반면, 지식인들("상당한 학식이 있는 사람")은 모든 생물들을 "양성혼합체"로 보고 있다고 소개했다. 필자에 따르면 인체의 세포에 있는 성은 단일하지 않으며 여성적인 것과 남성적인 것이 혼합된 것("음양양성이 혼합한 것")으로 그 "분량"에 따라 남녀 간의 차이의 스펙트럼이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이어서 필자는 오토 바이닝거 Otto Weininger와 에드워드 카펜터 Edward Carpenter와 같은 학자들의 연구를 인용하면서 남성과 여성의 양극단에서는 심한 차이가 있지만, 중간영역에 위치한 대다수 남녀는 감정과 기질에서 매우 유사하다고 설명했다. 마지막으로 필자는 내분비 호르몬을 통해 성전환에 성공한 근래의 과학적 실험의 성과("음양기질을 자유로 변환할 수 있는 것")와 성과학("변태성욕학")의 "남성탈화" "여성탈화" 이론 등은 잠재된 제2의 성("잠재 제2성")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뒷받침하는 증거라고 평가한 후, 이렇듯 남녀 간의 차이가 절대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남녀는 근본적 지위에서 평등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 물론 모든 '양성성'에 대한 인식이 해방과 평등의 논의와 연결된 것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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