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자 : 아리스가와 아리스 / 최고은
출판 : 북홀릭
출간 : 2011.08.20
'~ 살인사건'이라는 연속된 제목의 단편 모음집.
총 여섯 편의 단편 중 표제작인 <절규성 살인사건>은 제일 마지막 순서로 수록되어 있다.
작중에 작가 '아리스가와'라는 캐릭터를 이용해 ''~ 살인사건' 같은 제목의 작품은 아직 쓴 적은 없다'고 생각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어쩌면 이건 저자 본인의 속마음을 살짝 드러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각각의 제목은 사건의 무대가 되는 장소를 한자어로 표기한 형태인데, 사건을 배제하고 보면 각각의 장소는 무척 개성적이고 아름답다.
몇몇 장소는 실존한다면 방문해보고 싶을 정도.
우선, 반어법적으로 느껴졌던 <월궁전 살인사건>이 제일 먼저 떠오른다. 추리소설로서는 높은 점수를 주기 어렵지만, 전체적인 분위기나 묘사, '월궁'이라는 표현이 마음에 들었다.
<흑조정 살인사건>이나 <설화루 살인사건> 같은 경우는 주인공들이 아직 어리기 때문인지 특히나 마지막 입맛이 씁쓸하다. 보통 최종장에서는 이전까지의 의문들이 모두 해소되며 시원한 짜릿함이 남게 마련인데- 그런 후련함보다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라는 막막함이 남는다.
가장 아름다운 무대였던 <홍우장 살인사건>도 좋았다. 돌고 돌아 이어지는 사랑이란, 때로는 그 '끝' 지점에 따라 안타까움을 남기게 되기도 한다.
(조금 다른 이야기지만 명물이라는 단풍잎 튀김은 꼭 한 번 먹어보고 싶다)
<호중암 살인사건>은 마지막이 제대로 기억이 나지 않는 걸 보면, 평이했던 모양이다. 책으로 가득 찬 항아리 같은 공간- 그런 공간 자체가 갖고 싶다고 생각했던 기억만 남아 있다.
<절규성 살인사건> 같은 경우는, 신선하고 재미있었지만- 주제의식을 전달하기 위해 조금 억지스러워진 부분이 있다고 생각했다. 작품 내에서 <절규성> 게임을 옹호하는 디렉터의 주장은, 거의 모든 에피소드에 살인이 등장할 수밖에 없는 추리소설 작가인 저자의 목소리이기도 하다. '영향을 주는' 것인가, '영향을 받는' 것인가.
그러나 이 논의를 결론짓는 건 부담스러웠을까, 사이코패스에 가까운 캐릭터와 그와 대비되는 가족을 내세움으로써 그에 대한 답은 회피하고 만다. 이 지점을 신선하게 느끼는 독자도 있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아쉬운 지점이었다.
전체적으로는 호.
읽어본 '작가 아리스가와' 시리즈 전체를 놓고 봤을 때도 상위권으로 꼽고 싶다.
하지만 추천은 미묘.
추리소설 애호가보다는 아리스가와 팬들에게 권하고 싶다.
- 그림자로밖에 보이지 않는 까마귀 여러 마리가 난다. 제 둥지로 돌아가고 있는 것이리라.
- 날은 이미 저물어 하늘에는 푸른빛이라고는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다. 교토에서 너무 늦게 출발했기 때문이다. 도중에 휴게소에서 저녁식사를 마친 뒤에 식사는 준비할 필요 없다고 아마노에게 전화를 하기는 했지만, 운전대를 잡은 나는 다소 마음이 급했다. 조수석에 앉은 친구는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쇼팽의 녹턴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것인지 팔짱을 낀 채 눈을 감고 있다. 편하게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불안한 마음으로 정신과 의자에 앉아 치료를 받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어쨌든, 밤이 풍경을 덧칠하는 가운데 해안도로를 달리고 있는 이 상황에서 녹턴은 부끄러울 정도로 잘 어울리는 배경음악이었다. 연주자는 하라셰비치인 것 같다.
- 해가 저물고 나서부터 우리는 별다른 이유 없이 입을 다물고 있다. 아니, 히무라는 논문을 구상하고 있거나, 다음 주 강의 내용을 확인하고 있거나 하는 이유로 침묵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으니 머릿속이 빈 것은 나 혼자뿐인지도 모른다.
- 사람의 마음이란 게 완전히 텅 빌 수는 없는 것이라, 그 빈 머릿속에도 여러 가지 사념의 조각들이 가로지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조각들도 아무 의미 없이 존재하는 것을 견디지 못했는지 지금부터 방문하려 한 아마노와 대학 시절에 나누었던 잡담이나, 그의 결혼소식, 딸의 출생을 알리는 연하장, 너무 이른 아내와의 사별을 전하는 슬픈 편지의 기억 등에 차례대로 수렴되어 가고 있었다. 나는 이틀 전 늦은 밤에 갑자기 걸려 온 전화를 떠올렸다.
- [히무라와 함께 우리 집에 와줬으면 하는데.]
보통 일이 아니야. 그렇게 강조할 필요도 없이 7년 만에 듣는 그의 목소리에는 긴장감이 배어 있었다. 그랬기 때문에 히무라도 나도 즉시 달려가려 했지만, 도저히 미뤄 둘 수 없는 일이 있어 엊그제 전화를 받았음에도 이틀 뒤인 오늘에서야 길을 떠나게 된 것이다. 게다가 예정보다 다섯 시간 정도 늦어지기까지 했다.
- 작은 항구가 위치한 거리를 지나쳤다. 국도는 바다와 멀어져 단고반도 丹後半島 안쪽을 향해 이어졌다.
"휴게소에서 전화했을 때 낌새가 어땠어?"
히무라는 눈을 뜨고 전조등이 비추는 도로를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그리고 검은 셔츠의 목덜미에 단정치 못하게 매어 있는 넥타이를 풀어 셔츠 주머니에 둥글게 말아 넣었다.
"엊그제 통화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한밤의 바다처럼 어두운 목소리였어. 뒤에서 또박또박 동화책을 읽는 귀여운 여자애 목소리가 들리던데, 그 목소리와 완전히 대조적이더군."
- 동갑인 친구의 딸이 이제 곧 초등학교에 들어갈 나이가 되었다고 생각하니, 나도 나이를 먹긴 먹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숙집에서 신나게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하며 반쯤 즉흥적으로 야심과 희망을 이야기하던 날들이 아득하게 느껴진다.
"추리소설가와 범죄사회학자와 화가.”
나는 하나씩 나열했다.
"청춘 시절에 이야기했던 우리의 꿈이로군. 굉장한데? 세 사람 모두 목표를 이뤘잖아."
- 나, 아리스가와 아리스 有栖川有栖도.
옆에 있는 히무라 히데오 火村英生도,
그리고 아마노 히토시 天農仁도.
- "이봐." 히무라는 타이르듯 말했다. "청운의 뜻, 낭만적인 꿈을 이룬 것은 너희 둘 뿐이지, 난 황홀한 눈빛으로 먼 곳을 바라보며 '난 언젠가 범죄학자가 될 거야' 하고 맹세한 적 없거든. 단순히 연구를 계속하다 보니 이렇게 된 거지."
"범죄사회학자가 되어 악과 싸우는 것이 어릴 적부터의 꿈 아니었어? '난 필드 워크 field work를 통해 경찰 조사에 합류해서 명탐정처럼 사건을 해결할 거야!'하고."
"그런 꼬맹이가 어딨냐?"
범죄학자는 카멜 담배를 꺼내 물었다. 좁은 차 안을 연기로 가득 채워 내게 보복하려는 것이다. 히무라가 라이터를 꺼내기 전에 나는 그에게 임무를 맡겼다.
"피우려면 제대로 길이나 가르쳐 주고 피워. 이대로 달리다간 반도를 한 바퀴 돌아기노사키까지 가 버리겠어."
- 히무라는 내 말대로 지도를 펼치더니 불도 붙이지 않은 담배를 문 채 내비게이터 역을 맡았다.
"이제 곧 버스정류장이 나와. 거길 지나면 바로 오른쪽으로 들어가는 길이 나오니까 그쪽으로 꺾어."
아까 버스정류장을 지나쳤는데, 그걸 말하는 건가? 그렇게 생각한 순간, 오른쪽으로 진입로가 보였다. 나는 황급히 핸들을 돌렸다.
"기노사키 온천에는 돌아오는 길에 들르자고, 흑조정은 이 길로 쭉 가면 돼."
히무라는 지도를 제자리에 놓더니 맛있게 담배를 피웠다.
- 휴게소와 레스토랑은 이제 보이지 않았고, 인가의 불빛도 드문드문 보일 뿐이라 마음이 불안해졌다. 겨우 300미터 정도 되는 고개를 넘고 있는 것뿐인데도, 어두운 숲과 적막한 공기 때문에 땅 끝에 와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라디오 프로그램은 재즈로 바뀌어 사라 본의 영혼에 스며들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지만, 이 상황에는 무소르그스키의 <민둥산의 하룻밤> 같은 곡이 어울리지 않을까?
"녀석, 굉장한 곳에 사는군. 상상 이상이야."
혼자서 운전하고 있을 때면 시시한 괴담이 떠올라 등줄기가 오싹해지는 것은 아닐까?
"커다란 저택을 상속받는 것도 마냥 좋은 일만은 아니군. 이렇게 외진 데서 살면 책을 사러 나갈 때도 고생이겠어."
히무라는 휘파람으로 사라의 멜로디를 따라 불렀다. 이런 지옥의 밑바닥 같은 곳에서 휘파람을 불면 어쩌자는 거야. 겁 많은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꼭 사악한 것들을 불러 모으는 것 같잖아.
- "흑조정이라. 마치 미스터리에 등장하는 연쇄살인사건이 일어날 법한 저택 이름 같군. 그런 이름을 붙이니까..."
"현실에서도 살인사건이 일어났다지? 하지만 맨 처음 사건이 일어난 건 아마노가 이사 오기 전이잖아? 그때는 그 집도 흑조정이란 이름이 아니었고."
하지만 주인이 바뀐 집에서 살인극이 되풀이된다는 것이야말로 드문 경우다. 말에는 주술적인 힘이 있다고 하니, 역시 흑조정이라는 단어가 가진 어딘지 모르게 음침하고 불길한 글자와 울림이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 흑조정은 국도에서 조금 들어간 아담한 곳에 위치하고 있어, 건물 전체의 희미한 실루엣이 서서히 보이기 시작했다. 배경은 칠흑처럼 검은 어둠이었지만, 아무래도 그것은 밤하늘이 아니라 바다인 것 같았다. 바다가 보이는 집인가? 그런 생각을 한 순간, 귀에 들릴 리도 없는 파도 소리가 환청처럼 들렸다.
- 흑조정은 미국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작은 마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2층집이었다. 외벽만 봐선 오래된 학교 건물처럼 보이기도 했다. 고급 주택이나 저택이라 부르기는 좀 그랬지만, 오사카나 교토 거리에 있었다면 대갓집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을 만한 집이었다. 처음에는 무슨 생각으로 흑조정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인지 의아했지만, 그 앞에 서자 '흑'이라는 글자를 넣은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집의 외벽은 모두 검은색으로 칠해져 있었다. 어두워서 잘은 보이지 않았지만, 지붕 슬레이트까지 새까만 것 같았다. 마치 무언가를 두려워하는 집이 밤의 장막 사이로 몸을 감추기 위해 보호색을 사용한 것 같았다.
- 오랜만에 만난 아마노는 야위어 있었다. 병에 걸린 사람마냥 뺨은 움푹 패여 있었고, 셔츠 사이로 보이는 목덜미에는 쇄골이 뚜렷하게 드러나 보였다. 옛날부터 눈이 푸석푸석해 보이긴 했지만, 이 정도로 쑥 들어가 있지는 않았었다.
"오랜만이다."
히무라는 오른손을 들며 가볍게 입을 열었다.
"잘 왔어."
그것이 아마노의 첫마디였다. 마치 서양 사람들이나 입을 법한 그의 낙낙한 셔츠 소매를 커다란 검은 눈을 동그랗게 뜬 파마머리 여자아이가 꼭 잡고 있었다. 집을 찾은 손님을 보고 당황한 것도 아니고, 수줍어하는 것도 아니었다. 단지 어린애 특유의 호기심으로 아버지의 친구들이 어떤 사람인지 관찰하고 있는 것이리라.
- 벽지는 차분한 연보라색이었다. 하지만 넓은 집에 부녀 둘만 살고 있어서 그런지 전체적으로 휑한 느낌이었고, 가구도 얼마 없어서 썰렁했다.
바다를 향해 난 들창에 커다란 새장이 놓여 있는 것이 보였다. 새장 안에는 검은 생물이 웅크리고 있었다. 설마 까마귀인가?
"구관조야." 내 시선을 눈치챈 아마노가 말했다. "숙모님이 키우시던 걸 물려받았지. 오, 일어났냐?"
푸드득 날갯짓 소리가 나더니 새가 고개를 들었다.
- "이 집은 겉모습이 이래서 까마귀 저택이라 불렸다고 하더군. 실제로 이 근처에는 까마귀도 많거든. 자주 지붕 위로 모여들곤 하지. 그 이름 때문도 아닐 텐데, 이곳에서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나서 숙모님이 흑조정이란 이름을 붙이신 거야. 새로 칠해서 백조정 白鳥亭으로 만들기에는 페인트 값이 아까웠던 게지. 그래서 까마귀 이미지를 불식시키기 위해 구관조를 키우기 시작했다나."
이걸로 이름의 유래에 대해서는 대충 알 수 있었다.
- "안녕하세요."
나는 복화술사의 인형 같은 목소리로 새에게 말을 걸어 보았다. 새는 내 쪽을 똑바로 쳐다보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리스 아저씨, 걘 말 안 해요. 한 번도 말하는 거 들어 본 적 없어요."
마키는 미안한 듯 말했다.
"옛날부터 이랬다." 아마노가 말했다. "마키랑 내가 아무리 열심히 훈련시켜도 '안녕하세요'라는 말도 못 한다니까. 성격이 나쁜 건지, 머리가 나쁜 건지."
우리 옆집 사람이 울지 않는 카나리아를 기르고 있던데, 이 녀석도 같은 종류인가 보군.
- "아빠, 큐우한테 머리 나쁘다는 소리 하지 마. 불쌍하잖아."
토라진 얼굴의 마키를 향해 아마노는 미안하다며 사과했다. 히무라는 새장 근처로 걸음을 옮기더니 큐우의 뒤로 다가갔다. 저 녀석, 구관조가 그렇게 신기한가? 그런 생각을 한 순간, 히무라는 갑자기 크게 손뼉을 쳐 우리를 놀래게 했다.
"뭐 하는 거야, 어린애처럼."
나는 기막혀하며 물었다.
"봐, 큐우는 날 돌아보지도 않았어. 이 녀석이 울지 않는 건 성격이 나빠서도 아니고, 머리가 나빠서도 아니야. 아마도 청각에 문제가..."
히무라는 그렇게 말하려다 마키도 알아들을 수 있도록 말을 바꿨다.
"큐우는 귀가 들리지 않는 거야."
- "그래서 사람 흉내를 못 낸 거예요?"
"그래. '왜 흉내를 내지 않을까' 생각할 때 '울지 못하는 게 아닐까'란 생각도 같이 해 주렴."
히무라는 허리를 굽혀 마키와 시선을 맞추며 이야기했다.
- "전 계속 큐우랑 같이 있었는데도 몰랐어요. 이무라 아저씨는 어떻게 알았어요?"
"그 아저씨는 탐정이거든. 탐정은 말이야, 다른 사람들이 모르는 걸 단번에 알아챈단다."
히무라는 아마노의 말을 막았다.
"멋대로 지어내지 마. 그보다..."
그는 마키를 향해 조용히 말했다.
"이무라가 아니라, 히·무·라란다."
- "작년에 날 예뻐해 주시던 숙모님이 돌아가셨거든. 그래서 내가 상속받게 됐어. 다른 친척 중에는 이런 집을 원하는 사람이 없었거든. 나라면 아틀리에로 쓸 수도 있고, 요양용 별장으로도 쓸 수 있겠다고 생각하신 거겠지."
아마노는 거실 가죽 소파에 앉으라고 권하더니, 주방으로 가 물을 올려놓고 싱크대에 기대 담배를 물었다. 파마머리 소녀는 까치발을 하고 찬장에서 찻잔을 꺼내 아버지에게 가져다주었다. 아마노는 고맙다는 말을 하며 마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조용하고 좋은 곳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생활하기에는 더없이 불편한 곳이야. 아무리 화가라 해도 생활하는 데 필요한 물건 정도는 사야 되고, 마키가 학교에 들어가면 다니기도 불편할 테니."
- "유치원도 너무 멀어서 못 갔어요."
마키는 딱히 불만스럽다는 기색 없이 남 일처럼 말했다.
"그래. 마키, 미안하다. 아빠가 돈이 많았으면 어떻게든 보내 줬을 텐데."
"괜찮아요, 유치원쯤이야. 유치원에 안 가도 아빠가 공부도 가르쳐 주고, 책도 읽어 주잖아요."
"고맙다. 마키, 거기 스푼도 좀 꺼내줄래?"
그런 부녀의 대화를 바라보던 나는 자신도 모르게 흐뭇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마노는 접대용으로 보이는 포트넘 앤 메이슨 (Fortnum & Mason. 1707년 포트넘과 H. 메이슨이 창립한 영국의 식료품 회사 및 홍차 브랜드 - 옮긴이) 상자를 열었다.
- "범죄 조사에 참여하는 임상범죄학자에 추리소설가라. 아리스가와 넌 히무라의 탐정 일도 돕고 있다며? 위험한 직업이군. 하긴 그 덕에 이렇게 지혜를 빌릴 수 있었지만."
"종이 위에 범죄 이야기를 쓰는 것뿐이니 위험할 건 없지."
나는 그렇게 대답했다.
"그건 그렇군. 하지만 그런 귀찮은 걸 쓰는 것도 일이겠어. 어떻게 그런 신기한 이야기를 생각해 낼 수 있는지 대단하단 말이야. 난 잘 만들어진 추리소설과 마술을 보면 그냥 순수하게 박수를 보내고 싶어 지더라고."
이건 추리소설가에게 있어 최고의 찬사다. 쓸모없는 짓을 잘도하는군, 그런 비아냥거림이 섞이는 경우도 간혹 있지만.
- "아리스가와 남을 속이기보다 속는 타입이라고 생각했는데."
평소 같으면 아니 뭐, 하고 그냥 흘려 넘기겠지만 가끔은 제대로 대응하고 싶어진다.
"추리소설로 사람들을 속이는 테크닉은 마술과 달리 전혀 실용적이지 않아. 작가만 알고 있는 답을 맞춰 보라고 하면서 일부러 독자가 알아채기 힘든 힌트를 이곳저곳에 뿌려 놓고 혼란에 빠뜨리기만 하면 되니까."
"마술과 비슷한 거 아냐?"
"어떤 부분은. 사실 추리소설과 제일 비슷한 건 스무고개라고 할 수 있지."
- 그것은 이 안에 있습니까? 그것은 입는 것입니까? 그런 질문을 스무 번 하기 전에 출제자가 생각하는 물건이 무엇인지를 맞추는 게임 말이다. 질문의 답을 모으면 모을수록 정답은 점점 미궁에 빠지는 국면의 초조함과, 정답을 듣고 정신이 번쩍 드는 순간의 카타르시스가 이 게임의 참맛이며, 그 맛은 추리소설의 수수께끼 풀이와 아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 "그림 작업은 잘 돼가?" 히무라가 물었다.
"그냥저냥. 순조롭지는 않아. 돈이 있었으면 장점이라고는 집세가 공짜인 것밖에 없는 이런 이상한 꼬리표 붙은 집에 살지도 않지."
"좋아하는 그림을 마음껏 그리는데도?"
"그것만으로는 먹고살 수 없지. 사진 액자에 넣어 탁상에 장식하는 허접한 유화의 밑그림이라든지, 기업이 홍보용으로 제작하는 싸구려 그림책 삽화라든지, 그런 재미없는 일도 꾹 참고 하는 중이야."
"하지만 그런 일만 하는 건 아니잖아? 어찌 되었든 그림을 그릴 수 있으니 상관없잖아."
"뭐 그렇긴 하지."
- 아마노와 나는 대학에서 외국어 수업을 같이 들으며 알게 되었다. 그러던 중 사회학부 학생이면서도 형사소송법 등 법학부 수업을 청강하던 히무라와도 나를 통해 친해져서 서로의 하숙집을 드나들며 친하게 지냈지만, 3학년 중간에 아마노는 대학을 자퇴했다. 어릴 적부터의 꿈을 버리지 못하고 화가의 길을 걷기 위해 미대로 편입한다는 이유에서였다. 그에게는 전제군주 같았던 엄한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것을 계기로 그런 결단을 내리게 되었다고 한다. 성실한 지방 공무원이 되라는 아버지의 주박이 풀리면서, 그동안 억눌려 있던 희망이 눈을 뜨고 내달리기 시작한 것이다.
- 아마노는 쉿, 하고 손가락을 세웠다.
"그 사건, 마키한테는 얘기 안 했어. 애가 무서워할 것 같아서."
"아, 미안."
그렇게 말한 순간, "변사체가 뭐야?"란 질문이 날아왔다.
- "애가 책을 좋아해. 책 읽는 동안에는 귀찮게 안 할 거야."
"장래의 아리스가와 아리스 팬 후보로군."
여자는 싫어하지만 아이는 싫어하지 않는 히무라는 그렇게 말했다. 그는 다시 담배에 불을 붙이며 양탄자에 웅크리고 앉아 책을 펼치는 마키를 보고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금세 이곳에 온 용건을 떠올린 듯 입을 열었다.
"그 은행 지점장하고 숙모님은 어떤 사인데?"
"아무 사이 아냐. 바다가 보이는 별장을 가지고 싶었던 숙모님이 팔려고 내놓은 이 집을 보고 횡재다 착각하고 구입한 것뿐이야. 나중에서야 내력을 알고 놀라셨다고 하더군. 하지만 이 집 안에서 끔찍한 사건이 있었던 건 아니라는 말을 듣고선 신경 쓰지 않기로 하셨다나. 나도 숙모님처럼 생각하며 살고 있고."
- 지점장이 부인을 칼로 찔러 죽인 것은 뒤뜰에서 일어난 사건이라고 한다. 시어머니와 친척들과의 불화, 그리고 남편의 바람기 때문에 서로 맺힌 것이 많았던 부부는 이곳에서 조용한 휴일을 보내며 새로운 마음으로 재출발할 예정이었지만, 휴가 이틀째에 크게 다투었다고 한다. 일이 부부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간 것이다. 부인은 남편의 모든 것을 비난하며 오사카 집으로 돌아가겠다는 말을 남기고 집을 뛰쳐나갔다. 차에 올라타는 부인을 향해 남편은 무서운 기세로 달려왔다. 흥, 놀라서 잡으러 왔나 보군. 부인은 그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르지만, 이성을 잃은 남편은 이미 그런 소소한 부부싸움을 할 수 있는 정신 상태가 아니었다. 그는 부엌에서 가지고 온 칼로 부인의 배를 몇 번이고 찔렀다. 나중에 발견된 그의 유서에는, 부인이 차를 타고 돌아가면 자신의 이동수단이 없어질 테니 힘으로라도 막으려 했다고 쓰여 있었다. 그렇게까지 이성을 잃다니. 역시 평생 독신으로 살아야겠다고 결심할 정도로 끔찍한 사건이었다.
- "사건 현장은 뒤뜰이야. 이 집 안에서 살인이 일어난 건 아니지. 그것도 벌써 2년이나 된 일이고, 그렇게 생각했는데..."
아마노는 목소리를 깔았다.
"시체가 나왔으니, 곡할 노릇이지."
지점장 부부의 이름은 나미키 마사토, 나미키 미네코.
2년 전 여름에 미네코를 칼로 찔러 죽이고 도주하다 오토미 절벽에서 투신자살한 마사토의 시체가 엊그제 뒤뜰 구석에 위치한 오래된 우물에서 발견된 것이다. 죽은 지 고작 일주일밖에 지나지 않은 변사체였다.
- "이 아저씨가 읽어 주신대. 아저씨는 책을 쓰는 사람이라 책도 잘 읽는단다."
히무라는 내 등을 떠밀며 그렇게 말했다. 소녀는 살짝 고개를 갸웃거리며 "정말?" 하고 물었다. 그렇게 물으면 거절할 수 없잖아.
"결론은 어쨌든 방식이 너무 강압적인 거 아냐?"
손가락질하며 불평을 쏟아 냈지만 히무라는 전혀 미안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읽으면서 우리 얘기 들으면 되잖아. 요령 좋은 너밖에 부탁할 사람이 없다."
뭐라고 반박하고 싶었지만, 책을 내미는 마키를 보자니 나는 꾹 참을 수밖에 없었다. 이리하여 나는 아동도서관의 사서 역할을 맡으며 이상한 사건의 설명에 귀를 기울이는, 일찍이 경험해 본 적 없는 당혹스런 체험을 해야만 했다.
- "있잖아요." 하고 내게 이야기했다.
"이 이야기는 성실하게 일하지 않으면 나중에 고생한다고 말하고 싶은 거죠?"
아이의 입에서 이 이야기는 무엇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어 하는 거죠?라는 말이 나올 줄은 몰랐다. 조숙한 질문이군. 나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아빠는요. 이 개미가 심술쟁이라고 했어요. 베짱이의 음악을 듣고, 그 대신 맛있는 음식을 주면 될 텐데, 인정 없게 쫓아내다니 너무하대요. 아리스 아저씨도 그렇게 생각하세요?"
곤란한 질문이군.
- 솔직하게 대답해야 하는지 망설여졌다. 이솝우화는 아이들의 상식을 풍부하게 하는 동시에 도덕적인 교훈을 주려는 의도를 가진 동화다. '아저씨도 아빠랑 같은 생각이야. 개미는 속 좁고 예술을 이해 못 하는 재미없는 녀석이야'라고 해야 하나? 하는 생각에 당혹스러워하는 것도 아니고, '너희 아빠는 틀렸어'라고 규탄하고 싶은 마음을 토로하면 안 되겠지? 하고 주저하는 것도 아니다.
나는 이 이야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것은 개미가 심술궂어서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베짱이의 비열함 때문이다. 일하지 않았다고 비열하다는 게 아니다. 노동만이 인생의 전부는 아니라 믿으며 음악 한 우물만을 판 건 베짱이의 자유다. 길바닥에 쓰러져 죽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한 것인지, 아니면 처음부터 그만큼의 각오는 없었던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여름철 베짱이는 자유롭고 행복했을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겨울이 오자 개미에게 자비를 베풀어 달라며 구걸하러 간 거지? '여름 동안 나는 바이올린 실력을 키워서 겨울에 아름다운 음악을 들려줄게. 그러니까 겨울에 밥과 잘 곳을 제공해 줘'라고 개미와 계약한 것도 아닌데. 나는 이런 인종을 경멸한다. 이렇게 교활하고 생각 없는 녀석은 어차피 바이올린 실력도 형편없을 거다. 그러니까 개미도 냉담하게 대한 거겠지. 하지만 그런 나의 속마음을 털어놓았다간 마키의 아빠를 우습게 만드는 꼴이 된다.
- "개미는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
고뇌하던 나는 그렇게만 대답했다. 그러자 마키는 왜냐고 되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순순히 일반적인 해석을 하고 있는 것이리라.
"마키가 개미라면 베짱이를 집에 들어오게 해 줄 거니?"
마키는 눈을 꼭 감고 고개를 저었다. 그리 길지 않은 다섯 살 인생에서, 보육원 같은 곳에서 교활한 아이와 만났던 경험이라도 있었던 것일까?
"베짱이가 게으름뱅이라?"
"그건 베짱이 마음이지만, 개미에게 밥을 달라고 하는 게 싫어요."
예상치도 못하게 소녀와 나의 견해는 일치했다.
- "아저씨도 그렇게 생각한단다."
마주 보는 소녀와 내 눈 속에 연대감을 담은 빛이 깃들었다.
- "나미키 마사토가 누구에게 왜 살해당했는가라는 문제를 생각하기에 앞서, 왜 지금 와서 이 까마귀 저택, 흑조정에 되돌아왔느냐를 생각해야겠지. 그가 돌아온 이유를 알아내면 용의자도 좁혀질 거야."
"그 이유가 뭔지 난 도무지 모르겠군."
아마노는 두 손 들었다는 시늉을 하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술 가져올게. 애 보게 해서 미안해, 아리스가와 너도 마실 거지?"
나는 마시겠다고 대답했다.
- 아마노가 술을 준비하고, 내가 <욕심쟁이 개> -이 이야기의 일반적 해석에 대해서는 두 사람 모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를 다 읽을 때까지 히무라는 담배를 피우며 새장과 그 너머의 어두운 창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큐우는 벌써 잠들었군."
그의 말을 들은 마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하얀 천 조각을 들고 까치발을 하더니 그것으로 새장을 덮었다. 일을 끝낸 소녀는 다시 내 앞에 앉았다. 한 마리의 작은 새다. 작은 새가 방 안을 날아다니고 있는 것만 같았다.
- "스무고개 해요."
아까 내가 언급한 걸 듣고 그 게임이 하고 싶어진 걸까? 나는 그러자고 대답했다.
"누가 먼저 대답하지? 아리스 아저씨가 대답하세요. 마키가 문제 낼 테니까."
"좋아. 뭔가 떠올려 봐."
마키는 보조개를 지으며 천장을 올려다보더니, "생각했어요."라고 말했다.
"그럼 시작하자. 질문한다? 음, 그건 이 방 안에 있습니까?"
"아뇨,"
"그것은 가게에서 파는 건가요?"
"아뇨."
질문을 더할 때마다 손가락을 하나씩 접는 마키. 당연히 스무 개까지 세고 있는 것이리라.
"그것은 손으로 들 수 있는 겁니까?"
- "여기."
아마노가 잔을 건넸다.
"어린애 상대하게 해서 미안. 조금만 있으면 잘 테니 그때까지만 참아줘."
"아직 안 졸려." 마키는 그렇게 대답했다. "오늘은 계속 안 잘 거야."
아마노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소파로 돌아갔다. 히무라에게 잔을 건네주고서는 자신도 마시기 시작한다.
- "파도 소리가 어렴풋하게 들려, 들릴 듯 말 듯. 어두워서 여기서 바다까지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 알 수 없어서인가?"
히무라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들리는데? 계속 철썩철썩하는 소리가 들리잖아?"
"여기서 들으면 파도 소리까지 까맣게 들려서 기분이 어두워지는걸. 새카만 파도 소리랄까?"
"흑조정이라 어쩔 수 없잖아. 아리스가와, '흑조정 살인사건'이라는 소설 제목은 어때? 마음에 들면 써도 돼."
유감스럽게도 나는 '살인사건'이 들어가는 제목을 지금까지 한 번도 써 본 적이 없다. '살인'이나 '죽음'도 그다지 사용한 적 없다. 더구나 이 집에서는 실제로 두 번이나 시체가 발견되었으니 그런 제목을 빌릴 엄두도 나지 않았다.
- "아리스 아저씨, 다음 질문은요?"
마키가 재촉한다.
"그럼 그것은 살아 있는 것입니까?"
"아니오."
나는 마키와 게임을 하며 등 뒤에서 진행되는 히무라와 아마노의 이야기를 들었다.
- "죽은 지 일주일 정도 됐다고 했지? 시체가 우물에 던져진 게 언제인지 짚이는 거 있어?"
"그것도 잘 모르겠어. 나랑 마키 둘만 사는 데다 이웃집도 없으니까. 뭐, 대낮에 시체를 짊어지고 와서 버리지는 않았을 테니, 밤중에 버리지 않았을까?"
"그것도 이상한데? 현관에 불이 켜져 있으니 빈집이 아니라는 건 멀리서 언뜻 보기만 해도 알 수 있었을 텐데.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면 한밤중에 소리를 내는 건 위험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 까마귀는 목이 말랐지만 커다란 부리 때문에 병 안에 든 물을 마실 수가 없었다. 하지만 생각 끝에 까마귀는 좋은 생각을 떠올렸다. 작은 돌을 많이 모아 그것을 물병 안에 집어넣은 것이다. 그렇게 하면 수면이 상승해서 물을 마실 수가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영리한 까마귀는 지혜를 발휘해 물을 마실 수 있었다.
- "그게 어쨌다는 건데?"
히무라는 씁쓸한 표정으로 소파에 털썩 주저앉더니 담배를 꺼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닐 수도 있어."
"말해 봐. 뜸 들이지 말고."
"아니, 뜸 들이는 게 아니라... 근거도 없고, 별로 유쾌하지도 않은 상상이라."
잠시 동안 조용했던 2층이 다시 소란스러워졌다. 기다려! 아마노가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유쾌하지 않은 상상? 이 이야기를 마키가 읽었다면 어떻게 했을까? 혹시..."
내 머릿속에도 같은 상상이 펼쳐지고 있는 것을 눈치챘는지 히무라는 "그래."하고 대답했다.
- 옆에 있던 돌을 집어 하나하나 던졌다는 건가? 이야기에 나왔던 영리한 까마귀, 그 똑똑한 검은 까마귀를 흉내내 수면을 상승시키기 위해서? 그리고 운 나쁘게도 그중 하나가 머리 위의 둥근 하늘을 바라보고 있던 나미키 마사토의 이마에 명중했다는 건가?
머릿속에서 선명하게 수직궤도가 그려진다. 어둠을 꿰뚫는 돌의 궤도가...
- "설마. 실수라고는 해도 사람 머리 위에 돌을 떨어뜨려 놓고 그걸 아무렇지도 않게 숨기고 있다니, 말이 되냐?!"
"나미키가 비명도 못 지르고 즉사했다면, 그 애는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자각하지 못했을 거야. 거기다 시체가 발견되어 경찰이 왔을 때 무슨 일이냐고 묻는 마키에게 아마노는 아무 일도 아니라고 대답했잖아. 일부러 숨겼다고 할 순 없지."
"... 사고야."
나는 목소리를 쥐어짰다. 히무라는 화난 듯 말을 내뱉었다.
"사고도 아냐. 이건 상상이야. 있었을지도 모르고 없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지."
"그 애에게 직접... 확인할 거냐?"
- "상자에 들어 있었어요. 진짜 돈이 아니어서 마키가 가졌어요."
아마노의 손에서 금화를 건네받은 히무라는 작게 한숨을 내쉬더니 내게 그것을 넘겼다. 틀림없이 진짜 크루거란드 금화(1892년부터 1900년에 걸쳐 남아프리카 공화국이 발행한 투자용 금화로 한때 일본에서 유행하였음 - 옮긴이)였다.
아마도 이것이 이유일 것이다. 궁핍한 생활에 쪼들리던 나미키가 위험을 무릅쓰고 찾으러 온 것은 그의 비자금이자, 아내를 죽이고 공항 상태에 빠져 미처 다른 곳으로 옮기지 못했던 이 금화였던 것이다.
- "자, 대답해 보세요. 아리스 아저씨."
히무라도, 아마노도 얼어붙은 듯 빤히 우리를 바라보고 있다. 나와 이 순진무구한 순백의-.
갑자기 머릿속에서 정답이 번뜩였다.
"그것은..."
나는 원피스 차림의 천사에게 물었다.
"눈입니까?"
소녀의 얼굴에 나를 축복하는 웃음이 한가득 번져 나갔다.
"네."
- <흑조정 살인사건>
- 여전히 동굴같이 어두워서 처음에는 바닥에 떨어진 빗장밖에 보이는 것이 없었다. 사장님은 어디 계시지? 눈을 부릅뜨며 둘러보던 그녀는 이윽고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목격하고 얼어붙었다. 천장에 매달려 있는 저건 뭐지? 마치, 마치...
"왜 그래요?" 소야가 어깨를 친 순간, 그녀는 목이 찢어져라 비명을 질렀다.
- 다실보다 조금 넓은 정도의 지하실이었다. 보아하니 모양도 정사각형이다.
북쪽과 서쪽 벽에는 천장까지 닿는 책장이 놓여 있었는데, 그 안에는 빼곡히 책이 수납돼 있었다. 작은 틈새에도 책을 눕혀 넣긴 했지만 책들을 책장에 다 넣지 못해서 넘쳐 나는 것은 시간문제였을 것이다.
동쪽 벽에는 고인이 여행지의 골동품 가게에서 구해 왔다는 족자가 걸려 있었다. 콘크리트 벽에 한시 족자라니 어울리지 않는 조합인데도, 그것은 마치 무채색의 추상화 같은 느낌을 내뿜으며 이 방과 하나가 된 것처럼 보였다.
남쪽 벽에는 아무런 장식도 없었다. 작은 책상 하나가 회색 벽을 향해 바짝 붙어 있을 뿐, 책상 위는 펜 하나 없이 깨끗했다. 그리고 그 옆에는 1층으로 통하는 철제 사다리가 있다.
- 동서남북 어디에도 출입구가 없는 방은 역시 불안한 느낌을 주었다. 더구나 이 좁은 공간에 높은 책장이 두 개나 있으니 압박감도 상당했다. 고인은 뭐가 좋다고 이런 방에 자주 틀어박혀 있었던 걸까? 어머니의 태내로 돌아가고 싶다는 회귀 본능인가? 심리학자 흉내를 내며 지적하는 것은 쉬웠지만, 이곳에서 보니 역시 기이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 "호중암이라, 이름 한번 잘 지었군.”
히무라 히데오는 아무것도 없는 남쪽 벽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감탄하는 것 같지도, 그렇다고 기막혀하는 것 같지도 않다. 감정이 담겨 있지 않은 냉정한 목소리였다. 그리고 장갑 낀 손으로 천천히 머리를 긁적거렸다. 현장 검증을 할 때면 항상 착용하는 검은 실크 장갑이었다. 현장 검증이라고는 하지만, 그는 형사도 아니고 검시관도 아니다. 교토 소재의 에이토 대학에서 범죄사회학 강의를 하는 조교수다.
- "정상이 아닙니다. 좁은 항아리 속에 들어온 것처럼 불쾌한 기분이 드는군요."
진심으로 불쾌한 듯 말하며 넓은 이마를 문지르는 사람은 야나이 경부. 좁은 곳을 싫어하는 걸까?
"가메오카의 전답과 산을 팔아서 돈을 모은 땅 부자였다고 하더군요. 환갑이 넘은 나이에 일찍 은퇴해서 편하게 생활했다니 부럽 ... "
- 경부가 내게 물은 건 단순히 내가 소설을 쓰는 것을 생업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리라. 나는 중국 문학에 대해서는 대학 수험생만큼도 더 몰랐지만, 그래도 <호중천> 이야기 정도는 알고 있었다.
- 호중천은 후한서에 실린 이야기다. 어떤 시장의 관리인으로 일하는 사람이 기묘한 광경을 목격한다. 항아리를 하나 놓아두고 장사를 하던 약장수 노인이 시장이 파하면 그 항아리 속으로 쏙 들어가 버리는 것이다. 이를 이상히 여긴 관리인이 노인을 찾아가자, 그는 관리인을 항아리 속으로 안내해 주었다. 그리고 두 사람은 항아리 내부에 있는 화려하고 장엄한 저택에서 산해진미를 즐기다 다시 밖으로 나왔다, 그런 이야기다. 일종의 유토피아 스토리랄까?
- "그 이야기에서 따와 호중암이라고 이름 지은 거죠. 제가 보기에는 지하 감옥이지만요. 아, 그건 그렇고."
경부는 머리 위의 전등을 가리켰다. 화지로 갓을 씌운 등롱 분위기의 전등인데, 이것 또한 항아리 느낌이 들었다. 원래는 화실에 놓는 물건이리라. 그 조명 덕에 썰렁하니 살풍경한 지하실 분위기가 조금은 따뜻하고 부드럽게 보였다.
"저기 시체가 매달려 있었습니다. 조명을 매달기 위해 달아 놓은 튼튼한 쇠 장식입니다만, 저기에 줄을 통과시켜서 이렇게 만들어 놓았더군요."
- "물론이죠. 이 사건은 전형적인 위장 자살로 위장 공작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엉터리입니다. 보세요, 히무라 교수님이 지금 보고 계신 경부 확대 사진에 잘 나타나 있지 않습니까? 밧줄로 목을 졸린 흔적이 두 종류 남아 있죠? 하나는 목을 조른 범인에 의해 생긴 교살흔, 다른 하나는 사후에 천장에 매달려 생긴 액흔입니다. 그리고 후골 언저리에 고통을 참지 못하고 밧줄을 벗겨 내려 한 피해자의 손톱에 의한 방어흔이 발견되었습니다. 그리고 다음 사진을 자세히 보십시오. 이건 목덜미 사진인데, 이곳에 체중이 실릴 리 없는데도 확연하게 교살흔이 남아 있습니다."
- 히무라는 아무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프로가 보면 한눈에 알 수 있는 것인가 보다. 미리 말해 두자면, 히무라는 사회학자이긴 하지만 법의학적 지식도 갖추고 있다. 범죄 현장에서 범죄와 직접 대면하는 것을 연구 방법으로 삼고 있는 그에게 필요한 지식이기 때문이다. 심리학에도 일가견이 있다. 법의학과 심리학에 정통한 범죄사회학자, 그렇게 말하면 꼭 실력 자랑처럼 들리지만 그를 탐정'이라 칭할 경우에는 그 모든 능력을 갖추고 있다고 해도 이상하게 느껴지지는 않을 것이다. 혹은 '임상범죄학자'라고 불러도 좋다. 히무라가 범죄 조사 현장 -필드- 에서 사건 해결에 수많은 공헌을 해 온 것은 각지의 경찰들도 잘 아는 사실이며, 그래서 때때로 잘 아는 수사관들에게 수사에 협력해 달라는 요청을 받기도 한다. 그리고 그에게 연락이 오면 명목상 '조수'인 나, 아리스가와 ...
- "소야 씨는 사장님을 미워하게 된 거겠죠. 그러니까 사장님도 소야 씨를 싫어하신 거고요. 뭐, 피가 섞인 사람끼리 미워하고 싫어하면 생판 남끼리 그러는 것보다 더 끔찍하다고들 하니까요. 그래서 이 댁도 굉장했어요. 그건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소야 씨가 이 옆집에 살고 있다는 점이에요. 저쪽 집도 츠보우치 집안 소유긴 하지만, 아버님과 그렇게 사사건건 부딪치면 보통 다른 곳에 집을 알아보지 않겠어요? 그런데 옆집이 비어 있다고 그곳에 사는 건 아무래도 이해가 가질 않는달까... 사장님이 그러라고 허락하신 거니까, 어쩌면 마음 한구석에서는 서로를 의지하고 있었던 건지도 모르겠네요. 소야 씨도 전부터 '아버지 일로 곤란한 일이 생기면 저한테 말씀하세요'라고 하셨고. 인간이란 참 복잡하지요?"
"네, 복잡한 존재죠."
히무라가 동의를 표하자 키누코는 기쁜 표정으로 미소를 지었지만 경부가 어젯밤에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묻자, 갑자기 새침한 표정으로 "남편이 입원 중이어서 집에 혼자 있었어요."라고 짧게 대답했다.
- 기분이 상한 그녀를 보내고 다음은 소야에게 이야기를 듣기로 했다. 생전의 츠보우치 토마의 사진도 보았는데, 아버지와 아들의 생김새는 전혀 달랐다. 토마는 나막신이라는 별명을 붙여도 좋을 만큼 네모난 얼굴이었던 반면, 아들의 얼굴 모양에서는 럭비공이 연상되었다. 얼굴 모양뿐만이 아니었다. 토마는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눈썹도 짙었지만, 소야 쪽은 눈코입이 모두 자그마했고 눈썹도 여자처럼 가늘었다. 그렇지만 두 사람에게서는 어딘지 모르게 비슷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왠지 야박해 보이는 느낌. 물론, 단순히 착각 때문인지도 모르지만.
- 야나이 경부가 히무라와 나에 대한 소개를 마치자, 그는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아버지의 죽음이 타살이라고 하던데, 전 못 믿겠습니다. 우리가 아버지를 발견했을 때 저 방은 안에서 빗장이 걸려 있었다고 말씀드렸죠? 그런데도 자살이 아니라고 하시는 겁니까? 그 상황에서 타살이라니, 말도 안 됩니다. 범인이 방에서 빠져나갈 방법은 없었으니까요. 그걸 아시면서도 아버지가 살해당했다고 단정 지으시다니, 혹시 우리에게 혐의를 두고 계신 건 아니겠죠?"
소야는 토라진 어린아이 같은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았다. 경부는 일단 그런 게 아니라며 그를 달랜 다음, 오늘 아침 일에 대해 물었다. 그는 유창한 말솜씨로 키누코가 했던 것과 똑같은 이야기를 쏟아냈다. 경부와 히무라가 세세한 부분에 대해 질문해도 모순된 대답을 하는 일은 없었다.
"프리랜서 일을 하신다고 들었습니다만."
히무라의 물음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교토에서는 이걸로 먹고 살 수도 없죠. 오사카의 지방 잡지사에 ... "
- 실은 이때, 히무라는 이미 수수께끼를 모두 푼 상태였다.
- 다음 날 오전 10시.
장소는 츠보우치 가의 거실. 경부가 부른 세 명의 관계자와 마주한 히무라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부터 여러분께서는 어제 아침과 같은 경험을 하시게 될 겁니다. 끔찍한 경험을 또 하시게 해서 죄송합니다만, 잠시만 참아 주셨으면 합니다."
키누코는 괴로운 표정을 지었고, 나머지 두 사람은 긴장한 얼굴이었다.
- "어제 아침, 지금과 거의 같은 시간에 여러분께서는 집 앞에서 합류해 함께 안으로 들어가셨습니다. 그때처럼 지금부터 호중암으로 향해 주시겠습니까?"
세 사람은 불만스러운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 복도로 나갔다. 그리고 뭐라고 소곤거리며 서로 상의하더니, 키누코를 선두에 세우고 안쪽으로 향했다. 복도가 좁았기 때문에 키누코, 소야, 쿠마자와가 앞장서고, 그 뒤를 히무라와 경부, 형사 두 명이 일렬로 섰다. 그리고 지금부터 무엇이 시작되는지 놓치고 싶지 않았던 내가 줄의 맨 끝에서 그들을 따랐다. 히무라는 사전에 야나이 경부하고만 ...
- <호중암 살인사건>
- 차는 어느 현의 경계를 넘었다.
친구의 고물 벤츠로는 힘에 부쳤던 곳도 몇 군데 있었지만, 어찌어찌해서 가까스로 극복할 수 있었다. 오른편으로 이어지던 작은 계곡 바닥에서 점차 강물이 솟아올라 물살이 잔잔해지고 있었다. 조금 있으면 하얀 모래 언덕도 나타나는 게 아닌가 생각한 순간, 도로는 강에서 멀어져 관공서가 있는 작은 마을 안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몇 분 지나지 않아 마을을 빠져나오자 다시 오른편에 강이 나타났다.
- 나는 차창에 얼굴을 바짝 대고 뭔가를 찾고 있었다. 분명히 이 근처에 있었는데 쉽게 찾을 수가 없었다.
"분명 이 근처 강가에 재미있는 게 있었는데."
- 이나가키 타루호(稻垣足穗. 일본근대소설가로 메커니즘, 천체와 오브제 등을 모티프로 삼은 추상적인 작품을 발표했음 -옮긴이)의 환상적인 단편에서 빠져나온 듯한 광경이었다.
"그 근처까지 다가가 올려다보니, 탑 꼭대기에 잘 닦은 양철판 같은 것이 둘러져 있었어. 무척 신경 쓴 것 같더군. 물론, 그런 것에 실용성이 있을 리 없으니 단순한 장식이겠지. 태양 빛도 눈부시게 반사할 테지만, 분명 지은 사람은 달빛을 모아서 반사시키려 한 것일 거야."
나는 그렇게 역설했지만, 불탄 흔적밖에 보지 못한 히무라에게는 아무리 이야기해도 전해지지 않을 것이다. 백문은 불여일견이라 하니 어쩔 수 없지만.
- "우리 집 옆에 있는 절보다 나은데."
교토의 기타시라카와 北白川에 사는 히무라의 집 옆에 있는 절이란, 긴카쿠지 銀閣寺, 즉 지쇼지 慈照寺일 것이다. 그곳 정원에는 하얀 모래를 쌓아 만든 긴샤단 銀沙灘과 코게츠다이 向月台가 있어, 츠키마치 月待산에서 떠오른 달빛을 반사해 은각을 비춘다.
- "그런데 너도 참 괴짜다. 서둘러 밤길을 달리던 중에 일부러 차를 세우고 이곳까지 내려왔던 거냐?"
"소설가 특유의 광적인 호기심이라고 평가해 주면 좋겠군. 근처까지 간 덕에 고고하신 건축가 어른 얼굴도 뵐 수 있었고, 무척 가슴 뛰는 경험이었지."
- "상류에서 흘러내려온 나무도 주워다 쓰고, 마을 쓰레기장도 뒤지고, 철거된 집에서 폐자재도 가져오고. 그렇게 재료가 될 만한 것을 모으면서 조금씩 규모를 늘려 갔겠지. 왜 그렇게까지 했냐고 물어보니깐, '달리 할 일이 없어서 그랬다'고 건성으로 대답하더군. 조만간 온 가족 친지들을 불러 모을 생각이냐고 장난처럼 말했더니, '난 천애 고아요'라고 하더군. 별난 녀석이지. 하지만 그게 또 재밌더라고. 그쪽도 나 말고 친구가 있는 것도 아니었는지 말을 걸면 대답을 해줬어."
- 아마도 그 남자는 건축의 귀신에게 홀린 것이리라. 취미로 건축을 하다 집안을 말아먹는 사람들이 있다. 버는 돈의 거의 대부분을 집 짓는 데 쓰는 사람, 강박관념 비슷한 사명감에 휩싸여 여우신령 사당이다, 관음당 觀音堂이다, 그런 것을 짓는 데 인생을 바치는 사람. 그런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 돈이 없으면 없는 대로 건축에 목숨을 바치는 방법이 있다. 이 집 주인처럼 잡동사니만으로 커다란 집을 지은 고물상이나, 모아 온 돌덩이나 조개껍질로 궁전을 지은 프랑스의 집배원 이야기를 책에서 읽은 적이 있다. 건축이란 형상을 얻어 벌떡 일어난 관념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 비교적 평범한 예로는 이 월궁전을 들 수 있을 것이고, 극단적인 예로는 히틀러의 대베를린 계획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귀신에 씌었다는 것이 과장되게 들린다면 병이라고 불러야 할까? 때로는 애처롭고, 때로는 감미로운 건축이라는 이름의 병.
- 다음 날 오후.
우편함에서 우편물을 가지고 방으로 돌아오자 팩스가 와 있었다. 내가 받는 팩스의 대부분은 출판사에서 보낸 것이라 나는 원고 청탁이라도 들어온 건가, 생각하며 들여다봤다. 그러자 그곳에는 받는 사람의 이름도, 보내는 사람의 이름도 없는 의미 불명의 짧은 단어들이 나열돼 있었다.
[땅거미 성연 봉화대]
이게 뭐지? 기계는 계속 종이를 토해 냈다.
[구미호 마법의 알 세계 지도]
- "이 몸이 추리소설가인 줄 알고 이런 장난을 치는 건가?"
나는 바보 같은 소리를 입 밖으로 냈다. 잠깐.
[은세계 밤의 여왕 갑옷 무사]
- 이 필적은 히무라다. 녀석이 이런 장난을 치다니, 대체 무슨 생각이지? 의아하게 생각한 순간, 책상에 놓아둔 휴대전화가 울렸다. 팩스 겸용인 집 전화는 팩스를 수신하고 있는 중이라 급한 일이 있는 누군가가 이쪽으로 전화했나 보군. 그렇게 생각하며 전화를 받자 히무라였다.
"지금 그쪽으로 이상한 게 갔지?"
인사도 없이 그는 대뜸 그렇게 말했다.
"그래, 받았어."
[토성의 고리 기상주 奇想柱]
"'토성의 고리', 그리고 '기상주'? 대체 이게 뭐야?"
"조금만 기다려. 금방 끝나니까. 보고 있어."
- 이게 모두 선인장 이름이라고?
"원예에 요만큼도 관심이 없는 나만 깜짝 놀란 줄 알았는데, 너도 상당히 놀란 모양이군."
"아니, 관심이 없는 건 나도 마찬가지지만, 그렇다 해도 모두 참 기발한 이름들인데?"
"정말 아는 게 없는 작가 선생이군."
마음대로 지껄이시지. 우리 집 거실에 놓인 포토스(관엽식물의 일종 - 옮긴이)도 몰랐던 히무라 교수에 비하면 난 양반이라고.
- "잠깐. 타카 씨는 선인장을 가지고 있었어."
"그래, 네가 일 년 전 그곳에서 창가에 놓인 선인장 화분을 봤다고 했지?"
"혹시 그게 월궁전인가? 타카 씨는 그 선인장에서 자신의 성의 이름을 따온..."
히무라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부정했다.
"아니, 그게 아냐. 그 집에는 멋들어진 이름 같은 건 없었어. 월궁전이라는 선인장이 있었던 것뿐이지. 그가 목숨 다음으로 소중히 여겼던 것은 그 선인장이고, 불길에 휩싸인 집 안으로 뛰어든 것도 그 선인장을 가지고 나오기 위해서였어. 마을 사람들도 모두 착각하고 있었던 것 같은데, 타카 씨가 말을 애매하게 해서 오해를 불렀 ... "
- <월궁전 살인사건>
- "너무 안 됐네요."
느낀 그대로 말하자, 냉정한 야나이 경부는 살짝 턱을 아래로 내렸다. 고개를 끄덕인 건가?
"네, 정말 안 됐습니다. 하지만 사건이 일어나지 않은 채 그냥 그대로 생활했다면 신나와 각성제 중독에 빠져 더욱 비참한 상황에 빠졌을 겁니다."
"기억 결함은 약물 복용 때문인가요?"
"키노시타 선생님이 진단하기로는 그건 그다지 상관없을 거라고 하더군요. 쿠라다는 약물을 복용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심각한 영향은 받지 않았다고 합니다."
- "사건에 대해서 기억해 내지 못해서 괴로워하는 것 같기도 하고, 기억해 내는 게 두려워서 거부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군요."
단정치 못하게 맨 넥타이를 만지며 내 옆에 있는 히무라 히데오 가입을 열었다. 확실히 나 역시 그런 인상을 받았다. 임상범죄학자인 그와 달리 내게는 심리학에 대한 소양 같은 건 없었지만.
"저도 동감입니다." 야나이는 그렇게 말했다. "남자 친구가 그렇게 죽은 것을 봤으니 큰 충격을 받아 정신적으로 문제가 생긴 것은 이해가 갑니다. 이해가 가긴 하지만, 저 반응은 마음에 걸리는데요. 모가미 료가 어떻게 목숨을 잃었는지 현재로서는 분명치 않습니다만, 그녀는 그 죽음에 직접적으로 관여된 것인지도 모릅니다."
- 계단을 올랐다. 저벅저벅. 발소리가 차갑게 얼어붙은 주변 공기를 흔들었다.
설화루는 중앙 계단과 엘리베이터 -물론 아직 설치되지 않았지만- 를 객실이 둥글게 둘러싸는 구조로 만들어져 있었다. 2층 객실은 모두 여섯 개, 복도를 한 바퀴 돌며 각 방을 살펴봤지만 어디에도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두 사람은 다시 귀를 기울였다. 카나이의 뇌리에 떠오른 것은 누군가에게 폭행을 당한 상처 입은 몸으로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흐느끼는 여자의 모습이었다. 토츠카가 떠올린 것은 동거하던 남자와 싸우다 결국 칼로 상대를 찌르고,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닫고는 부들부들 떠는 여자의 모습이었다. 서로 다른 상상을 품은 채, 두 사람은 3층으로 올라갔다.
- "이봐요, 누구 있습니까?"
토츠카가 복도에서 그렇게 소리치자, 계단 근처의 반쯤 문이 열린 방에서 흐느끼는 소리가 한층 더 크게 들려왔다. 두 사람은 경계를 늦추지 않은 채 들고 있던 손전등으로 방 안을 비췄다. 젊은 여자가 있었다.
여자는 불도 켜지 않은 방 한가운데에 털썩 주저앉아 양손으로 눈을 비비며 어린애처럼 훌쩍이고 있었다. 얼굴을 비춰 보니 아직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소녀였다. 소녀는 검은 가죽 재킷에 청바지, 운동화 차림이었다. 난로도 없는 이 방에서 저런 차림으로는 상당히 추울 텐데.
- 에이토 대학 사회학부의 히무라 히데오 조교수에게 그런 전화가 걸려 온 것은 그로부터 이틀 후인 12일 -오늘- 이었다. 범죄 수사 현장에 직접 참여하는 것을 연구 방법으로 삼은 히무라는 현장에서 탐정의 재능을 발휘하는 경찰의 좋은 협력자이기 때문에 이렇게 경찰에서 연락이 오곤 한다. 그리고 히무라와 학창 시절부터 가깝게 지내던 추리소설가, 나 아리스가와 아리스는 그의 조수로서 조사에 동행하는 것을 허락받고 있었다. 거의 이름뿐인 조수이긴 하지만.
- 오사카에 사는 나는 차를 몰고 교토로 갔다. 그리고 강의를 마친 히무라를 캠퍼스 입구에서 태우고 현장으로 향했다. 왼편으로 케이블카 역을 지나쳐, 쿠라마 거리를 빠져나와 경부가 기다리는 설화루에 도착했을 무렵에는 오후 3시가 지나 있었다.
- 노란 테이프로 봉쇄되어 있긴 했지만 몰려드는 구경꾼들도 없는 곳이었다. 기괴한 사건의 무대인 설화루는 그런 벽지와는 어울리지 않는 멋진 건물이었다. 7층밖에 안 됐지만 나무숲 사이로 우뚝 서있는 그 모습은 마치 탑 같았다. 게다가 건물 양식도 꽤 공을 들인 듯, 코린트 풍의 장식이 달려 있는 외벽은 옛날 사진에서 본 아사쿠사의 12층 운각 雲閣같은 복고적인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아니, 관동대지진 때 무너진 그 마천루를 상상한 것은 싸구려 장식 때문이 아니라, 건물 그 자체가 다각형 모양이기 때문이리라. 능운각은 팔각형, 설화루는 육각형이지만,
- "그렇군, 그래서..."
내가 건물을 올려다보며 혼자 중얼거리자, 히무라는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이 건물 이름의 유래가 뭔지 알겠어. 설화라는 건 눈꽃, 눈의 결정을 뜻하지. 눈의 결정 모양인 육각형 형태의 건물이라 설화루라는 이름을 지었을 거야."
"대단한데, 벌써부터 조수로서 이렇게 활약해 주시고."
칭찬한다기보다는 쓸모없는 소리만 한다고 비아냥거리는 것 같았다. '오오, 그렇군' 하고 순순히 감탄하면 될 것을.
- "오늘도 춥네요." 경부는 장갑 낀 손을 비비며 말했다. "특이한 현장이죠? 상황도 기괴합니다. 처음에는 흔한 자살이나 사고인 줄 알고 교수님께 연락드리지 않았습니다만, 어제 하루 동안 조사해 보니 그게 아닌 것 같아서요. 자, 이쪽으로 오시죠."
우리는 스쳐 지나가는 수사관들에게 가볍게 인사를 건네며 안으로 들어갔다. 경부는 우리를 3층의 한 방으로 안내했다. 이곳이 신고를 받고 출동한 순경들이 흐느껴 울고 있던 쿠라다 미즈에라는 소녀를 발견한 방이라고 했다. 그곳이 어떤 상황이었는지는 앞에서 말한 대로다. 모닥불을 피운다 해도 이런 냉동창고 같은 곳에서는 반나절도 못 있겠군.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 "지금 사건이 일어난 것처럼 비명을 질렀다."
상대는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당신, 잘도 그런 삐뚤어진 생각을 하는군."
기가 막히다는 표정이다. 하지만 그 가설이 얼마나 취약한지는 나도 잘 알고 있었다. 과연 그녀에게 시체를 옮길 체력이 있었는지는 둘째 치고서라도, 힘들게 그런 짓을 해 봤자 알리바이 공작에는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메리트가 너무 적다. 그리고 미즈에가 범인이라고 가정하면, 그 착란상태와 기억장해도 모두 연극이라는 건데, 그녀가 과연 그런 뛰어난 연기력을 가지고 있는지도 의문이다. 또한, 옥상에 남은 발자국의 수수께끼도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문으로 남는다.
- "쿠라다도 아니고, 이지치 씨도 아니라면 두 사람 외에 다른 누군가가 설화루에 있었다는 건데..."
나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이지치는 바로 부정하려 하지 않았다. 당시 5층에 있었으니 그 가능성이 아주 없다고 단언할 수는 없는 것이리라. 하지만 히무라는 "아니야"라고 말했다.
"경찰이 현장에 도착하고 바로 찍은 사진 봤지? 설화루에서 나온 발자국은 이지치 씨 발자국밖에 없었어. 만일 제4의 인물이 현장에 있었다면 이지치 씨보다 빠르든 늦든 녀석이 건물 밖으로 나간 발자국이 어느 시점인가에 분명히 남았을 거야. 아니면 범인이 지금 현재도 건물 안에 있다고 할 생각이냐?"
- 그렇게 말하며 나는 완전히 얼어붙은 양손을 비볐지만 그다지 따뜻해지지는 않았다. 히무라가 켠 라이터 불빛이 우리의 그림자를 벽에 비추었다.
"아무리 연인과 둘이라고 해도 여긴 너무 추운데. ...애초에 그 두 사람이 얼마나 사랑하는 사이였는지는 모르겠지만."
히무라는 담배를 문 채 고개를 끄덕였다.
- 미즈에와 료가 정말 불타는 사랑을 했는지 그것은 두 사람만이 알 일이다. 외로움을 견디지 못한 사람들끼리 서로를 위로하기 위해 함께 있었던 것 같다는 느낌도 들었다. 그들은 고독의 파도에 휩쓸려 같은 해안에 표류했을 뿐- 그렇지만은 않겠지만.
- 귀를 기울이자, 콘크리트 벽에서 두 사람이 나누었던 달콤한 대화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나는 이지치가 들었다는 대화의 단편들을 짜 맞추었다. 두 사람이 처음 대화를 나누었던 건 아메리카 마을(오사카 중앙구 일부 지역의 별칭, 빅스텝은 그곳에 있는 대형 복합 쇼핑몰이다 - 옮긴이)에서였다고 한다. 빅스텝 앞의 계단에 멍하니 앉아 있던 미즈에에게 료가 접근했다고 했다.
[네가 말을 걸어 줘서 다행이야.]
[전부터 지켜보다가 오늘에야말로 말을 걸겠다고 각오하고 접근한 거야. 헌팅 같은 건 한 번도 안 해봤거든.]
- [가지 마.]
[갈 거야. 넌 여기서 평생 불평이나 하고 있어. 넌 나보다 더 어중간한 놈이야.]
눈을 감고 그 광경을 떠올리고 있으려니. 마치 그 말들이 자신에게 던져진 것처럼 느껴졌다. 그런 식으로 두 사람은 이곳에서 서로 상처 입히고, 다시 화해하고, 또다시 어긋나기를 되풀이했던 것이리라.
- 사건이 일어나기 며칠 전인 어느 눈 오는 날에는 이런 대화를 나누었다고 한다.
[이 빌딩 말야, 눈의 결정 모양인 거 알아?]
[눈의 결정을 본 적 있어?]
[없어. 사진으로밖에.]
[굉장히 예뻐. 눈이 내릴 때마다 돋보기로 관찰하고 마음에 든 모양을 스케치하곤 했지.]
[참할 일도 없었나 보네. 눈의 결정은 모두 다른 모양이라는데, 그거 진짜야?]
[진짜야. 전부 달라. 인간들에게 시키면 하나 디자인하는 것도 큰일일 텐데, 어쩜 그렇게 아름다운 것들을 수없이 만들어 내는지 감동했다니깐. 자연의 경이, 우주의 신비지.]
[그렇구나, 끝없이 만들어지는 거구나. 그렇게 생각하니까 굉장한데? 정말 굉장해. 봐, 밖에 눈이 쌓여 있잖아. 하늘에서도 계속 내리고 있고. 저 눈송이 하나하나가 전부 다른 모양이라니, 정말 굉장한데?]
[하지만 생각해 보면 인간도 마찬가지로 수많은 형태를 띠고 있잖아? 과거에도, 현재에도, 미래에도, 같은 인간은 두 번 다시 나타나지 않으니까. 얼굴도, 성격도 모두 달라. 그렇게 생각하면 용서하고 싶어져.]
[아무나 다?]
[그래. 모두 용서해 줘야겠다.]
[우와, 료, 너무 위선적이잖아. 이런 기분은 내일 아침이 되면 다 녹아서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을 텐데.]
[오늘 밤 한정으로.]
[알았어. 오늘 밤만은 용서해 주겠어. 알겠냐? 너희들, 감사하라고!]
[야, 갑자기 큰 소리 내지 마. 위층 할아범 놀라겠다.]
[할아범도 감사하라고!]
- 그리고 다음 날에는 오전부터 시너를 넣은 비닐봉투에 코를 들이박고 있었다고 한다.
- <설화루 살인사건>
- 새빨갛게 물든 낙엽이 11월의 바람에 날리고 있었다. 노년의 분위기가 감도는 남자가 2층 발코니 의자에 앉아 오늘도 정원을 내려다보고 있다. 나무 사이로 보이는 검게 빛나는 문을.
- 때때로 개를 산책시키는 소녀나 장을 보고 돌아오는 주부가 문 너머를 지나쳐 갔다. 문 앞에 멈춘 신문 배달 자전거가 석간을 던져 넣는 것을 보고 그는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나?" 하고 갈라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사장님."
갑자기 뒤에서 그를 부르는 소리가 났다. 그는 이마를 가린 백발을 쓸어 올리며 돌아봤다. 가정부가 웃음 띤 얼굴로 서 있었다.
"벌써 날이 저물었어요. 그런 차림으로 계시다간 감기 걸리시겠 ... "
- [나야. 미노오 살인사건을 조사하러 가게 됐어. 관심 있고 시간 괜찮으면 연락해.)
어제 오후에 녹음된 것이었다. 임상범죄학자인 히무라 히데오 조교수는 또다시 오사카 경찰과 함께 살인사건을 조사하고 있는 모양이다. 미노오 사건이라니, 대체 뭐지? 방금 도쿄에서 돌아온 터라 무슨 사건인지 짐작이 가질 않았다. 오사카와 도쿄를 왕래하며 두 곳의 신문을 비교하며 읽어 보면 알겠지만, 범죄를 보도하는 방식에 상당한 차이가 있다. 살인이나 현금 수송 차량 습격 같은 흉악범죄가 일상적인 것이 되어 버려서일까? 관동 북부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을 도쿄의 신문이 떠들썩하게 보도하는 것을 보고 오사카로 돌아왔는데, 이쪽에서는 거의 보도되지 않았던 적도 있었다.
애초에 이번에 도쿄에 머문 동안, 제대로 신문을 읽었던 적이 없으니 어쩌면 미노오 사건이라는 걸 이미 도쿄 신문에서도 크게 다루었을지도 모르겠군. 나는 바닥에 놓인 봉투에서 신문을 꺼내 테이블 위에 놓고 순서대로 펼쳤다.
- "이건가...?"
오늘, 9월 8일 조간신문에 그 사건에 대한 기사가 실려 있었다. 현립 미노오 공원 부근의 한적한 주택가 한구석에서 혼자 살고 있던 55세의 부인이 변사체로 발견되었다고 한다. 거실 대들보에 세탁용 로프로 목을 매어 숨져 있는 부인을 발견한 것은 어머니를 찾아온 아들이었다. 언뜻 봐서는 자살 같지만 수상한 점이 몇 가지 있 ...
- 그렇게 유명한 이지마 쇼코가 피해자인 사건이라면, 내 호기심을 자극하고 세상의 이목을 모으는 것도 당연하다. 그리고 사건의 현장 역시 관심을 끌었다. 기사에도 '홍우장의 주인'이라는 문구가 있었다. 일찍이 베니쉬의 사장이었던 이지마 쇼코를 모른다 해도, 홍우장의 주인이라는 말을 들으면 관심을 보일 사람이 많을 것이다. 기사를 쓴 기자도 그것을 알고 있는 것이리라.
- 홍우장.
그런 이름을 가진 저택을 일약 유명하게 만든 것은 한 편의 영화였다. 올해 초여름에 개봉해 큰 히트를 거둔 <바람도 모른다>는 러브스토리다. 그 영화를 촬영한 곳이 바로 이지마 쇼코가 소유한 저택이었다. 극 중에서 홍우장이라는 이름은 등장하지 않지만, 주인이 붙인 그 이름은 영화 이미지와 딱 맞았기 때문에 잡지를 통해 나까지 알 정도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 사전에서 '홍우란 말을 찾아보면, ①꽃 위에 내리는 비, ②붉은 꽃이 지는 모양, 이라고 나와 있다. 여성을 대상으로 화장품을 판매하면서 꽃이 진다는 뜻의 이름이라니 어울리지 않는 것 같지만, 아마도 '꽃 위에 내리는 비'라는 뜻으로 지은 이름일 것이다. 홍우장은 저택 기와와 외벽에 다채로운 붉은색을 사용했으며, 저택 안에도 새빨갛게 단풍이 지는 정원수들이 다수 존재했다. 그 아름다움은 영화 속에서 마음껏 감상할 수 있었다.
- 영상으로 <바람도 모른다>의 한 장면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영화 마지막 부분, 여주인공이 문을 지나 저택에 들어서는 장면이었다.
나는 기억을 떠올렸다. 이 장면에서 나는 그만 눈물을 흘렸었다.
- 나는 한큐 다카라즈카 선 이시바시 역에서 미노오 선으로 갈아탔다. 이 전차를 타는 건 무척 오래간만이었다. 고등학교 시절에 친구와 함께 미노오 공원으로 놀러 갔을 때 탔던 게 마지막이니까, 벌써 17, 8년 만이다. 미노오 공원은 당일치기로 가볍게 다녀올 수 있는 오사카 제일의 관광지로, 온천도 있고, 메이지의 숲 미노오 국정공원으로 지정된 곳이다. 그때는 명소인 폭포를 보고, 마찬가지로 명물인 원숭이를 보고, 명물인 단풍 튀김을 먹었었다. 단풍이 물드는 계절이라 수많은 관광객들로 시끌벅적했었지.
- 과거를 돌아보며 감상에 젖어 있는 사이, 전차는 금세 미노오 역에 도착했다. 이시바시에서 불과 세 정거장이었다. 개찰구에 하얀 재킷을 걸친 히무라의 모습이 보였다. 나보다 한 발 먼저 도착한 모양이다. 그 사이에 담배 두 개비는 태웠을 것이다.
"차는 어떻게 됐어?"
인사 대신 그렇게 묻자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어젯밤에 움직여 보니까 제대로 움직이더군. 하지만 수리를 맡겨야지, 이거 원 무서워서 못 타겠어. 사고가 나도 그런 차에 타다 그렇게 된 거니 당연한 결과라고 하면서 아무도 동정해 주지 않을 테니."
"수리를 맡기려 해도 마음이 무겁겠어. '우와~ 손님, 이런 차를 계속 타시게요?'라고 할 것 같은데?"
"무슨. 내 차에는 전속 수리공 아저씨가 있는데, '이번에도 저한테 맡기시죠?'하고 자진해서 나서 줄 걸."
말은. 그게 사실이라면 그 수리공 아저씨는 '이런 차를 용케도 고쳐서 달리게 만드는 난 대단해'하고 자아도취에 빠져 있을 테지.
-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할 건데? 현장까지는 꽤 거리가 있잖아. 택시로 움직이려고?”
히무라는 아무 말 없이 근처에 세워져 있는 차를 가리켰다. 앞 유리창 너머로 낯익은 얼굴인 모리시타 형사가 경찰 무선으로 이야기하는 모습이 보였다.
- "안녕하세요. 오늘도 수고가 많으십니다."
잠시 후 차에서 내린 모리시타는 쾌활하게 인사했다. 언제나 의욕에 가득 찬 모리시타 형사는 오늘도 기운이 넘쳤다. 수사 1과 형사답지 않게 아르마니 양복으로 쫙 빼입은 것도 평소와 똑같았다.
"오늘은 제가 운전사 역할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죄송합니다." 어쩐지 송구스러운 기분이었다. "어떻게 둘 중 한 명도 멀쩡한 차가 없어서, 이렇게 모리시타 형사님께 폐를 끼칩니다."
- "장녀도 그 커다란 집의 가사를 담당하고 있다니 편하지만은 않을 거고, 호스트라는 셋째는... 잘 모르겠네요. 호스트라고 해도 일하는 방식은 여러 가지일 테니."
"뭐, 그건 그렇지만.” 모리시타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아리스가와 씨도 그 사람들을 만나 보시면 생각이 바뀔지도 모릅니다. 뭐랄까, 왠지 한심하다고 해야 하나? 부잣집 자식이라고 꼭 좋은 것만은 아닌 것 같더군요."
열혈남아인 모리시타 형사 입장에서는 어떻게 생각해도 비판적이 될 수밖에 없는 것 같았다.
"도착하면 바로 장남인 미키히코 씨와 만나게 되실 테니 자세히 관찰해 보시죠. 그 사람이 제일 먼저 어머니의 시체를 발견했기 때문에 다시 한번 증언을 해 달라고 이쪽으로 불렀거든요.”
- "네 인상은 어때?"
나는 히무라에게 물었다. 무뚝뚝한 대답이 돌아왔다.
"만나서 자기도 모르게 자세를 바로잡고 싶어질 만한 위인은 아니더군."
"그것도 신랄한 평가라고 해야 하나. 하지만 유산이 탐나서 친어머니를 죽일 정도로 흉악하지는 않다는 건가?"
"글쎄, 친어머니를 죽인 남자와 면담한 적이 네 번 있었는데, 넷 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런 범죄를 저지를 것 같지는 않았어. 인상으로 범죄자를 가려낼 수 있다면 점쟁이에게 경찰수첩을 줘야겠지. 네가 쓰는 추리소설에 나오는 명탐정들도 필요 없어질 테고."
히무라는 다소 장황하게 이야기했다. 아마도 그 역시 이지마 쇼코의 자식들에게 좋은 인상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이리라. 그래서 색안경을 끼고 보지 않도록 노력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 모리시타가 핸들을 왼쪽으로 꺾자, 차는 산기슭을 왼쪽으로 돌았다. 인가가 드물어졌다. 한적하니 좋은 환경이긴 하지만 밤에는 쓸쓸할 것 같다. 나는 문득 떠오른 의문을 입 밖으로 냈다.
"쇼코가 미노오에서 혼자 살았던 건 정말 그녀가 원해서였을까? 자식들과 맞지 않아서 따로 살고 있었던 건 아니고?"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순전히 본인이 원해서였다고 하더군. 자식들뿐 아니라 주위 사람들도 그렇게 증언했고, 남편과 세운 베니쉬가 급성장한 20년 전에 지은 집에서 조용한 노후 생활을 보내고 싶었던 거겠지. 자식들과의 사이가 어땠는지 아직 확실하게 말할 단계는 아니야. 험악한 사이는 아니었지만 좋았다고도 할 수 없었던 것 같더군. 그 원인 중 하나가 쇼코가 베니쉬를 통 크게 남의 손에 넘겼던 것이라고 하더군."
"어머니 회사에서 부사장이네, 전무입네 하는 직책을 맡고 싶었던 건가? 그 마음을 이해 못 하는 것도 아니지만, 생각이 너무 무른 거 아냐? 설사 그게 서운했다 해도 충분히 혜택 받은 환경이잖아. 집세 한 푼 내지 않고 커다란 저택에 살고 있으니, 수입이 없다 해도 길거리를 헤맬 염려도 없고."
- 그런 환경에서 소설을 써 보고 싶군. 나는 그런 시샘 섞인 생각을 했다. 이런, 정신 차려. 그 사람들은 그 사람들, 나는 나다.
- "혹시..." 룸미러 속의 모리시타가 히죽 웃으며 말했다. "아리스가와 씨는 그 세 남매가 공모해 범행을 저질렀을 가능성에 대해 생각하고 계신 겁니까?"
아무리 나라도 그렇게까지 성급하진 않다.
"아직 이름도 외우지 못했는데 벌써부터 의심하기야 하겠어요. 음, 장녀가 미카코 美香子고..."
"둘째가 아름다운 나무란 의미를 넣어서 미키히코 美樹彦. 셋째가 아름다울 미 美 자에 오오츠의 大津의 진 津 자, 그리고 센나리뵤탄 千成り瓢簞의 성 成 자를 써서 미츠나리 美津成. 모두 이름에 아름다울 미 자가 들어갑니다. 그야말로 화장품 회사 자제분들 다운 이름이죠."
- 센나리뵤탄의 성 자라니, 그야말로 오사카다운 표현이다. 그러고 보니 오사카 경찰의 헬리콥터 중에도 '센나리' 호라는 게 있었지.
(역자 주 : 센나리뵤탄은 호리병박의 일종으로, 작은 열매가 주렁주렁 열리는 식물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이 센나리뵤탄 모양을 자신의 마구(馬印)에 사용하기도 하였는데, 히데요시와 인연이 깊은 오사카 부(府)의 심벌마크 또한 이 센나리뵤탄을 도안화한 것이므로 오사카다운 표현이라고 한 것.)
- "실내에 발 디딤대가 될 만한 건 이것밖에 없습니다. 의자나 소파는 너무 낮죠. 일단 이 의자에 올라선 다음, 이 기둥 같은 것에 올라갔을 거라고 추측하고 있습니다."
나는 도무지 저 기둥 같은 물체의 정체를 알 수 없었다.
"이게 뭐죠?"
"장식적인 기능을 극도로 강조한 테이블이라고 하더군요. 보십시오, 여기에 커피 잔 세 개 정도는 놓을 수 있죠. 세련된 물건이죠. 놓을 곳만 있으면 우리 집에도 하나 들여놓고 싶군요. 밑부분이 약간 부풀어 있어서 보기보다 안정감이 있는 것 같습니다."
위장 자살의 도구로 사용된 물건인데도 경부는 그것이 무척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 "확실히 안정감이 있군요. 그리고 여기 서면 딱 들보까지 손이 닿겠어요. 148센티인 피해자에게는 어렵겠지만."
히무라는 평소처럼 검은 실크장갑을 끼며 말했다. 장갑이 없는 나는 자칫하다 지문이 묻을까 싶어 양손을 바지 주머니에 계속 넣고 있기로 했다. 이유도 없이 폼을 잡고 있는 어린애처럼 보여도 하는 수 없지.
"범인은 발 디딤대로 사용하기 위해 이 테이블을 저기에서 옮겼을 겁니다. 저기 양탄자 구석 말입니다."
경부가 가리키는 곳에는 타원형 자국이 뚜렷하게 남아 있었다. 몇 년 동안 계속 저곳에 놓여 있었던 것이리라.
- "음, 하지만 만일 그가 범인이라면 자진해서 먼저 나타나지는 않을 것 같은데요."
"그건 그렇지만, 먼저 나타나지 않으면 지문을 대조할 수 없으니까요."
히무라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야 그렇죠. 모리시타 씨의 바람은 잘 알았습니다."
"아아." 형사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제가 또 멍청한 소리를 했나 보군요."
- 나가미 고속도로를 달리던 두 대의 차는 이바라키 인터체인지에서 아래로 빠져 국도 171번을 타고 동쪽으로 달렸다. 나란히 달리는 JR, 한큐, 신칸센의 고가도로 아래를 몇 번이나 지나치다 보니 어느새 마을의 모습이 사라지고 왼편으로 산이 보이기 시작했다. 오사카와 교토라는 2대 도시의 사이인데도 이런 전원 풍경을 볼 수 있다니, 수도권과 간사이 지방의 격차가 얼마나 큰지 알 수 있었다. 애초에 글로벌 스탠더드라는 관점에서 보면, 이쪽이 정상인 것 같지만.
-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사이에 시마모토쵸 島本町 근처까지 와 있었다. 그 건너편은 이제 교토부 나가오카쿄 시다. 앞서 달리는 세드릭을 따라 운전대를 왼쪽으로 꺾은 모리시타는 대숲을 지나 낯익은 문 앞에서 차를 세웠다. 영화로 유명해진 바로 그 저택에 도착한 것이다. 미키히코가 리모컨으로 조작했는지 천천히 대문이 열렸다.
- "모리시타 씨도 그 영화 보셨습니까?"
"네. 누가 표가 있는데 보러 가지 않겠냐고 해서요."
"아, 그렇군요."
인기 많아서 좋겠군.
"이 문 앞에서 여주인공이 서 있는 장면이 좋았습니다."
"함께 봤던 사람은 눈물을 글썽거리더라고요. 28년 전에 헤어진 연인의 집 문 앞까지 왔으면서,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하고 떠나 버릴 것 같아서 가슴이 죄어들었다나요. 남자니까 울진 않았지만 저도 조마조마했습니다. 아리스가와 씨, 왜 그러시죠?"
"아뇨, 아닙니다."
- 문이 열렸다. 두 대의 차는 포석이 깔린 길을 지나쳤다. 근처에서 올려다본 붉은색 지붕 저택은, 분명히 영화에서처럼 호화롭지는 않았지만, 배후에 있는 산록과 대비되어 무척 아름다웠다. 고베의 기타노 같은 곳으로 옮겨 놓으면 분명히 멋진 관광자원이 될 것이다.
- <바람도 모른다>의 주인공은 일찍이 사랑했던 여자가 이 저택에 나타날 것을 믿고, 눈이 오나 비가 오나 그 발코니에서 문을 바라보았다. 이루어질 것 같지 않은 덧없는 소망이었다. 두 사람이 서로 사랑했던 28년 전 어느 날, 우연히 지나가게 된 이 저택 앞에서 그들은 언젠가 이런 집에서 함께 살자며 희망에 불타올랐었다. 단지 그것뿐이었는데, 기구한 운명을 이겨 내고 성공한 남자는 정말 그 저택을 사들인다. 바람 따라 들려오던 소식조차 끊기고, 사방팔방 찾아봐도 행방을 알 수 없었던 연인이 살아가다 28년 전의 대화를 떠올리고 그리움에 이 저택을 찾을 것을 믿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일 재회한 그녀가 독신이라면 그때는 두 사람을 갈라놓은 잔혹한 운명을 잊고, 불행한 오해를 모두 풀고 다시 한번 시작하고 싶다고 바랐다. 남자는 노후를 맞이했지만 계속 혼자서 그녀를 기다린다. 문 옆에는 자신과 연인의 이름을 나란히 새긴 문패를 걸어 놓았다. 그는 자신이 할 일을 모두 마친 후, 단지 그녀를 기다리는 데에 인생을 바친 것이다.
이런. 생각하니까 또다시 눈시울이 뜨거워지네.
- "여긴 가을에 특히 볼만합니다." 미키히코는 걸으면서 그렇게 말했다. "영화에도 가을 장면이 몇 번 나왔었죠. 단풍나무, 은행나무, 황로나무 등이 물들고, 산호수와 남천에 붉은 열매가 열려서 정원 전체가 불타오르는 것처럼 보이거든요. 들어오시죠."
- 미키히코는 공손하게 문을 열었다. 곧바로 현관이 보였고, 그 안은 넓고 바람이 잘 통하는 거실이었다. 천장 가까이에 있는 스테인드글라스에서 쏟아져 내리는 빛이 하얀 양탄자 위에 붉은색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그 빛은 영화에서 본 대로였지만, 유럽풍 거실가구와 캐비닛, 양탄자 등은 영화에서 나온 것과는 완전히 달랐다.
- 무도회용 드레스로 치장한 귀부인이 보인다. 천사 같은 하얀 옷을 입은 갓난아기가 보인다. 민속 의상을 입은 아가씨가 보인다. 드레스도 리본도 모두 똑같은 쌍둥이 자매가 보인다. 웨딩드레스를 입은 신부가 보인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있다. 천진난만한 표정. 화사한 표정. 새침한 표정. 고상한 표정. 정열을 감춘 표정. 너무나도 무구한 나머지 밋밋하게 느껴지는 표정. 푸른 눈동자. 녹색 눈동자. 잿빛 눈동자. 금과 은의 눈동자. 하얀 피부. 하얀 피부. 창백한 피부.
바라보고 있으려니 그녀들의 세계에 스르륵 빨려 들어갈 것 같았다. 나는 인형을 두려워하지는 않았지만, 이렇게나 다양하고 많은 인형들에 둘러싸여 있으니 마음에 동요가 이는 것을 억누를 수 없었다. 인형들은 태곳적에는 부장품 副葬品으로 묘에 매장되었고, 중세에는 마술이나 종교의 도구로 사용되었다. 사람들은 인형에 강력한 힘이 깃든다고 생각한 것이다. 아이들을 즐겁게 하고 어른들의 감상용으로 사용되지만, 인형이 주술적인 존재라는 것은 지금도 변함없다.
주인이 돌아올 때까지 우리는 아무 말 없이 인형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 "고급 홍차는 아닙니다만, 드시죠."
그녀는 내 앞에 김이 피어오르는 찻잔을 놓았다. 나는 무레 마히로의 긴 손가락을 빨려들 것처럼 쳐다보았다. 이 손이 인형들을 만들어 낸 건가? 성서가 가르치는 대로 신이 자신의 모양을 본 따 인간을 만들었다면, 자신을 본 따 인형을 만드는 그녀는 신을 모방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것이 신의 손인가?
- "네. 영화에서 봤던 방에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영화에서는 상당히 다른 느낌으로 나오더군요. 센스 없는 그림을 걸어 놓지를 않나, 커튼도 그 방과는 맞지 않았어요. 그 점은 마음에 들지 않더군요."
자신의 미적 감각에 확고한 자신감을 가진 사람의 발언이었다.
- "그럴지도 모르겠군요." 나는 말을 맞췄다. "그 원기둥 모양 테이블 같은 것도 촬영에 쓰면 좋았을 것 같던데."
"주연 배우도 무척 마음에 들어 했어요. 마지막까지 멋진 물건이니까 하나 정도 사용하면 좋을 텐데,라고 하더군요. 드시죠, 식기 전에."
그녀는 우리에게 손을 내밀며 홍차를 권했다. 그 바로 뒤에는 다른 인형들보다 훨씬 큰 비스크 인형이 창조주를 지키듯 앉아 있었다. 물결치는 풍성한 금발과 푸른 눈동자, 진홍빛 드레스가 선명하게 대비를 이루고 있었다.
"여기 있는 인형은 전부 무레 씨께서 만드신 겁니까?"
나는 홍차에 설탕을 넣으며 물었다.
- "네. 직접 타는 건 무서워하고 항공사 이름조차 세대로 알지 못하지만, 비행기가 이륙하는 걸 보는 걸 아주 좋아해요. 그래서 때때로 이타미로 비행기를 보러 가요. 특히 밤에는 더 아름다워요."
"하지만 오사카 공항에 마지막 비행기가 도착하는 것은 8시 반일 텐데요. 때부터 9시 반까지 무얼 하셨습니까?"
"그 시간에도 공항 안에 사람은 있어요. 저는 공항 그 자체의 분위기를 좋아하는 까닭에, 떠나지 못하고 어슬렁거리고 있었죠."
"모노레일로 이바라키까지 갈 수 있는데, 공항에서 여기까지 택시를 타셨더군요... 음. 요금이 꽤 나올 텐데요."
모리시타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외출 중 알리바이의 일부만이라도 날조하려는 속셈으로 택시에 탄 것이 아니냐고 말하고 싶은 것이리라. 하지만 마히로는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요즘에는 세상이 흉흉해서 날이 진 후에는 대부분 택시로 이동한답니다. 그리고 그때는 너무 걸어서 다리가 아팠거든요. 역 계단을 오르락내리락거리며 모노레일을 탈 상황이 아니었어요."
그렇게 이야기하면 정면으로 반박하기도 어려웠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 이야기가 진실처럼 들리는 것도 아니었다. 택시 회사와 운천수의 이름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던 것, 차내에서 인형을 화재로 삼아 이야기했던 것, 좌석에 손수건을 두고 내린 것 등 경찰의 수사를 대비한 공작이 아니었을까, 그런 의심스러운 생각이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 "어머니가 타고 온 차를 홍우장으로 가져다 놓을 필요가 있었겠지요."
"이동의 자유가 보장된 시민을 몰래 촬영하는 그 더러운 기계에 찍혔다고요?" 미츠나리는 독설을 내뱉었다. "거짓말이죠. 옴진리교 사건이 있은 후로 유명해진 그 비밀병기 정도는 저도 알고 있습니다. 녀석의 아래를 지나갈 때는 언제나 손을 흔든다고요. 제가 운전대를 잡았다면 오사카 내의 모든 N카메라를 피해 달렸을걸요."
"그 지나친 자신감 때문인지 카메라 하나를 놓치셨더군요."
"미츠나리, 쓸데없는 소리 그만해!"
장녀는 거칠게 동생을 나무랐다. 뾰로통해진 차남을 무시하고 장남은 당연한 질문을 던졌다.
"그런 고생과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저희가 어머니의 시신을 미노오로 옮겨야 하는 이유가 뭡니까? 범행 현장을 위장해 마히로 아주머니를 감쌌다고 하시고 싶은 겁니까?"
"아뇨. 무레 씨의 알리바이는 성립되지 않았으니 그녀를 감싸기 위한 행동은 아니었죠. 그것이 이 사건을 기괴하게 만들었습니다. 여러분들은 자기 자신의 이익을 위해 시신을 움직인 겁니다."
- 히무라는 학생을 가르치듯 말했다.
"여러분은 맨션에서 살아 본 적이 없으실 겁니다. 맨션에서는 발코니 난간에 이불을 널어놓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아십니까?"
세 사람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히무라는 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친구에게 들었습니다. 이야기를 듣기 전까진 저도 몰랐습니다. 그 이유를 아시겠습니까? 건물 미관을 해쳐서 집값이 떨어진다더군요. 이 규칙은 미학에 기초한 것도, 윤리에 기초한 것도 아닙니다. 중요한 건 자산가치죠."
- 정곡을 찌른 것 같다. 세 남매는 동요하는 기색을 보였다. 내 어시스트를 히무라가 받아 골로 연결지은 것이다.
- "여러분이 집착한 것도 바로 그겁니다. 이 저택은 아름다운 영화 촬영에 사용되면서 유명해졌습니다. 그곳에서 주인이 목을 매 자살했다면 그 소문은 삽시간에 불길처럼 번지겠죠. 그리고 대중의 호기심의 표적이 될 뿐 아니라, 저택의 자산 가치도 급격히 떨어질 겁니다. 여러분은 그것을 견딜 수 없었던 겁니다. 설마 살인사건이었을 줄은 상상도 못했다고 항변하시고 싶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렇다 해도 어머니의 죽음의 존엄성을 한낱 이해타산으로 짓밟았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죠."
남매는 모두 눈을 내리깔고 고개를 푹 숙였다. 어머니의 죽음을 우롱한 자신들의 추함을 눈치채고 큰 충격을 받은 것일까? 돌아가신 어머니에 대한 악의가 그들에게 그런 행동을 하게 만든 것은 아닐 것이다. 그들은 단순히 보유한 부동산의 가치가 떨어지는 것에 공포를 느낄 정도로 나약했던 것이다. 그 때문에 경찰에게 어머니의 죽음이 타살이라는 것을 듣고서도 진실을 밝히지 못했던 것이 ...
- "그렇군요... 왜, 왜 마히로 아주머니는 어머니를 죽인 건가요? 이유를 알고 싶어요."
"그건 질투 때문입니다. 무레 마히로 씨는 여러분의 아버님을 사랑하셨습니다."
"아버지를요? 하지만 아버지는 이제 안 계신데, 왜 지금 와..."
히무라는 미카코의 물음에 입을 다물었다. 마히로는 병석에서 정신을 잃고 헛소리를 할 때 그에 대해 고백했다. 아마도 자신이 살인을 저질렀다는 사실이 발각되는 것보다 남이 그 동기를 알게 되는 것을 피하고 싶었던 것이리라. 하지만 피해자의 자식들에게 밝히지 않을 수도 없다. 나는 입을 열었다.
- "그날, 불쑥 이곳을 찾은 쇼코 씨는 때마침 이곳을 찾아온 무레 씨와 이야기하는 도중 다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오랜 세월 동안 입을 다물고 있던 사실을 폭로했죠. '내가 집을 비웠을 때 남편이 너하고 딱 한 번 실수했던 걸 알고 있어. 행동이 수상해서 캐물었더니 자백하더군' 하고요. 그 이야기를 들은 무레 씨는 화를 이기지 못하고 스카프로 쇼코 씨의 목을 졸랐습니다. 타카히로 씨가 저지른 단 한 번의 실수가 그녀에게는 보석 같은 일생의 추억이었고, 살아가는 힘이었을 테니까요. 아마도 그 추억의 방이 2층의 손님방일겁니다. 그래서 그녀는 그곳에서 시간을 보내기 위해 자주 이 집을 찾은 거겠죠. 그리고 그곳에서 목숨을 끊으려 한 겁니다..."
구름이 흘러와 해를 가린 것일까? 스테인드글라스에서 쏟아져 들어오던 붉은빛이 갑자기 흐려졌다. 실내 분위기가 침통해졌다.
"아버지를 사랑했다 하더라도 어쩔 수 없었을 거예요. 아버지와 어머니는, 그 두 분 나름의 강한 인연으로 이어져 있었으니까."
미키히코는 애처롭다는 듯 말했다. 미카코 역시 그 의견에 동조했다.
"맞아. 영화도 아니고, 아버지가 마지막에는 자신에게 올 거라고 생각하고 계셨던 걸까..."
- 보답받을 수 없는 사랑이었다.
그래도 그녀는 언젠가 타카히로에게 사랑 받으리라는 기적을 믿은 채, 인형들의 시중을 받으며 무력한 인형처럼 그저 계속 기다리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붉은빛으로 물든, 올 리 없는 라스트신을 꿈꾸며.
- <홍우장 살인사건>
- 매 끼니를 호텔 레스토랑에서 해결하다 보니 물려서 JR오차노미즈 역 근처까지 나가 불고기를 먹고 방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앞으로 한 번 더 힘을 낼 에너지 보급 완료, 하며 스스로를 고무시키고는 책상과 마주한다. 아직 9시밖에 되지 않았으니 한밤중까지 열심히 하면 오늘 분량은 여유 있게 달성할 수 있을 것이다. 내일 밤에는 탈고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내일 밤... 아아, 아직도 멀었군.
- '통조림' 상태에서의 작품 집필에 동경심을 가지고 있던 것도 그것을 경험해 보기 전까지의 일이다. 막상 실제로 호텔에 틀어박혀 일을 해 보니 상상도 못 할 정도로 따분해서 전혀 유쾌하지 않았다. 자판을 치던 손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봐도 질리도록 본 벽과 천장이 있을 뿐, 기분 전환이라 할 만한 것은 1층 라운지에서 차를 마시거나 근처를 산책하는 것 정도였다. 반나절 정도 방에서 나가 간다에서 고서점 순회를 하거나 니시신주쿠의 레코드 가게에서 희귀한 프로그레시브 음반을 뒤져도 안 될 것은 없지만, 근본이 소심한 나는 주저할 수밖에 없었다. 출판사 경비로 하룻밤에 2만 엔 가까운 호텔에서 머물고 있으니 멋대로 행동할 수는 없었다. '우와, 분발하셨네요' 하고 담당 편집자가 놀랄 정도의 매수는 완성하고 싶었고, '역시 통조림 시키길 잘했네요' 하고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어슬렁어슬렁 호텔에서 멀어진 탓으로 집중력이 떨어져 집필 페이스가 떨어지면 안 되지.
- 하지만-
"하나도 재미없어."
때때로 책상 앞 거울에 비치는 자신을 향해 중얼거려 본다. 장난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재미없다는 어린애 같은 불평은 하지 마,라고 이성을 관장하는 또 하나의 자신이 타이른다. 다시 손을 움직여보지만, 채 5분도 되기 전에 또다시 거울을 보며 한숨을 쉰다. 계속 그것의 반복이다.
- 도심에 위치한 호텔에 틀어박힌 지 오늘로 6일째. 갈아입을 옷도 벌써 떨어졌고 욕조 위에는 빨래가 널려 있다. 다다음달 하순에 출판할 예정인 장편의 최종 마무리를 위해 반쯤은 스스로 지원해, 반쯤은 편집자의 명령으로 통조림이 되었다. 좋아, 여기서 단번에 완성해야지, 그런 마음으로 분발한 것도 처음 이틀뿐. 사흘째부터는 별로 좋지 못한 기분으로 아무튼 빨리 해치우고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일념으로 스스로를 채찍질했다. 집에서 일했으면 이런 속도로 하지는 못했겠지, 란 생각을 할 수 있을 정도의 진척이 있었으니 도쿄까지 온 보람은 있었지만
- 한숨만 쉬어 봤자 달라지는 건 없는지라 나는 다시 일을 하기로 했다. 설명조의 대사가 많은 해결 부분을 쓰는 까닭에 가속도가 붙어서 페이스가 빨라져 갔다. 이것이 미스터리의 편한 점이다. 아니, 다른 장르 소설에서도 클라이맥스를 쓸 때에는 손이 빨라질까? 미스터리밖에 써 본 적 없는 재주 없는 소설가라 잘 모르겠다. 이런 두서없는 생각을 하는데도 페이스는 더욱 빨라지고 있었다.
- 어떤 동업자의 말이 떠올랐다. 그는 이미 탈고했으면서도 통조림을 당해 궁지에 몰리지 않으면 마감을 맞추지 못하겠다고 편집자를 속여 보고 싶다고 했다. 그리고 호텔에 틀어박혀 아침부터 밤까지 좋아하는 게임에 빠져 있다가, 편집자에게는 오늘은 여기까지 썼다며 조금씩 원고를 내밀고 싶다나. 멋진 아이디어였지만 우리는 그런 꿈 같은 일이 가능할 리 없다며 함께 웃어넘겼다. 마감이 닥치지 않으면 쓰지 못하는 게 소설가라는 인종이니까. 하지만 재미있는 상상이긴 했다. 나는 게임 같은 건 하지 않지만 -그런 것에 빠져있다간 인생이 짧아질 테니- 그것이 가능하다면 재미있을 거란 상상이 간다. 이 호텔도 각 방에 최신 게임기가 비치되어 있으니, 그 친구라면 분명 통조림 중에 게임의 유혹과 싸워야만 할 테지.
- 속에서 발견된 종잇조각이 결정적인 증거가 된 것 같다. 실물의 복사판은 공표되지 않았지만 흔한 리포트 용지를 명찰만 한 크기로 잘라 낸 것이라고 한다. 위아래는 가위로 잘려져 있고 양 옆은 아무렇게나 찢겨져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종잇조각의 오른쪽 가장자리는 2주 전 사건 현장에 남아 있던 종잇조각과 완벽하게 이어졌다고 한다. 즉, 범인은 자신의 범행이 연쇄적인 것이며, 이후에도 계속된다는 것을 도발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 NIGHT PROWLER라는 단어에 대해, 경찰은 아무런 견해도 밝히지 않았다. 밤에 배회하는 자'라는 단어의 의미로 유추해 볼 때, 심야에 흉악한 범행을 되풀이하는 범인의 사인이 아니냐는 기자의 질문에 경찰은 대답을 회피했다. 단정 지을 만한 근거는 없지만, 나는 아마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다. 분명 미국의 유명한 무차별 연쇄살인범 중에 리처드 라미레즈라는 남자가 있었다. LA 교외의 주택가에 들이닥쳐 열세 명을 살해하고, 원으로 둘러싸인 뒤집어진 펜타그램과 잭 더 나이프'의 사인을 현장에 남긴 그를, 타블로이드 잡지에서는 '나이트 스토커'라 명명했다. 하지만 25세의 범인은 자신을 '나이트 프라울러'라 불러 주기를 원했다고 한다. 헤비메탈 밴드인 AC/DC의 동명 노래를 좋아했기 때문이라나.
오사카의 연쇄살인범은 그것을 인용한 것이 아닐까? 범죄 실화를 다룬 책을 자주 읽는 사람이라면 -직업상 나 자신도 그렇지만- 그 정도의 기지는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 "안녕하세요. 어라, 아리스가와 씨. 샤워하시고 바로 나오셨나 봐요. 머리가 아직 덜 말랐는데요?"
데뷔 당시부터 알고 지내는 한 살 어린 파트너는 내 얼굴을 보자마자 그렇게 말했다.
"머리 말릴 시간도 없이 썼다고요."
그렇게 이야기했더니 곧이곧대로 믿는다. 여전히 사람이 좋군. 카타기리는 이발을 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듯, 머리가 짧았다.
- "열심히 하시는군요. 그 노력에 보답하는 뜻으로 제가 오늘 점심은 거하게 사죠. 이 근처에 맛있는 이탈리안 레스토랑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10분 정도 걸어야 하는데, 괜찮으신가요?"
"괜찮습니다. 카타기리 씨가 추천하는 가게에다 하쿠유샤가 사는 건데, 어디든 못 가겠습니까?"
그가 안내한 곳은 야스쿠니 도로를 따라 간다 진보쵸 쪽으로 가는 중간에 위치한 빌딩 2층에 있는 가게였다. 아담한 규모였지만 테이블 등 내부 인테리어가 고급스러웠다. 파트너가 거하게 먹자는 말까지 했고, 점심시간이 됐는데도 빈자리가 있는 걸 보니 가격대가 꽤 높은 레스토랑인 것 같았다. 웨이터의 동작도 세련되어 보였다.
- 우리는 갖가지 요리가 늘어서 있는 메뉴판에서 각자 에피타이저와 파스타를 선택했다. 내가 글라스와인을 주문하자 카타기리는 자기도 마시겠다며 강하게 주장했다. 와인이 나오기 전에 원고를 넘기며 '열심히 하면 오늘 밤 안으로 탈고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라고 말하자, 그는 안심한 표정으로 말했다.
"대단하시군요. 그럼 스케줄대로 8월 안에 낼 수 있겠어요. 다행입니다."
사실은 8월이든 9월이든 상관없었지만, 담당 편집자의 열의에 보답할 수 있어 다행이다. 와인이 나오자 건배한 다음, 일 이야기는 그것으로 끝을 냈다.
- "오사카에서 또 사건이 일어났더군요."
잡담 모드로 전환한 내가 그렇게 말하자, 상대는 씁쓸한 얼굴로 말했다.
"무차별 살인 말이죠? 정말 소름 끼치는 사건입니다. 게다가 참타이밍도 기막히지, 마침 저희 쪽에서 나이트 프라울러 관련 기획을 진행 중이었거든요."
나는 입 안의 와인을 서둘러 목구멍으로 넘겼다.
"나이트 프라울러 관련 기획이라니, 대체 뭡니까?"
"쿠지라오카 라오 씨에게 <절규성>의 소설판을 의뢰했었거든요. 제 담당은 아니지만요. 쿠지라오카 씨도 열심히 쓰고 계셨던 모양인데, 일이 복잡하게 됐어요."
- 쿠지라오카 라오는 오사카에 거주하는 신인 호러 작가다. 출판 파티에서 두세 번 정도 인사를 나눈 적이 있다.
"뭐의 소설판이라고요?"
"어라, 아리스가와 씨, <절규성> 모르세요?"
"모르겠는데요. 신작 호러 영화예요?"
"아뇨, 게임입니다. 아아, 그쪽에는 관심 없으셨죠."
"관심이 없다고 할까... 옛날에는 잠깐 했던 적도 있었는데 지금은 손을 뗀 것뿐이죠. <절규성>이라는 게임이 있나 보죠?"
"네. 올 초에 발매된 호러 어드벤처 게임입니다. 게임에 별로 관심이 없으시면 모르실 수도 있겠네요. 대대적으로 히트 친 게임은 아니니까요. 하지만 무척 잘 만든 게임이라는 평이 입소문으로 퍼지면서 발매되고 얼마 지났을 무렵부터 꾸준히 판매량이 늘었습니다. 게임업계에서는 조금 특이한 케이스죠. 우리 편집부에도 <절규성> 팬이 있는데, 그 사람이 쿠지라오카 씨하고 이야기하다 소설화 기획이 나오게 된 겁니다. 저희 회사에서는 <절규성>의 공략집도 냈거든요."
- "나이트 프라울러라는 것은 무엇을 가리키는 겁니까?"
"게임의 부제이기도 한데요, 작중에 등장하는 살인귀라고 할까, 괴물의 이름입니다. 나이프를 휘두르며 차례차례 여성을 습격하죠."
"난 프로파일러 실격이군."
내가 그렇게 중얼거리자, 카타기리는 무슨 말인가 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니, 그런 사실은 몰랐거든요. 그래서 나이트 프라울러라는 잰 척하는 단어를 남겨 둔 범인이군, 하고 생각했습니다. 뭐야, 게임에 나오는 괴물이었군." 완전히 어린애 발상이다.
"그렇지만 텔레비전과 신문에서는 그런 사실은 언급하지 않던걸요?"
"사회 현상이 될 정도로 폭발적 인기를 얻은 게임은 아니니 무리도 아니죠. 하지만 오늘 아침 모닝 쇼를 보니 슬슬 알려지기 시작한 것 같던데요. 범인은 <절규성>이라는 게임에 나오는 괴물 나이트 프라울러를 모방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고요. 그리고 뭐 뻔한 전개죠. 요즘 잠잠해졌던 게임에 대한 공격이 다시 시작될 것 같습니다. 가상세계와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는 젊은이. 범인에 대해 그렇게 추리하며 성급한 게임 비판, 호러 비판을 내뱉는 출연자들이 나타나고 있더군요."
"성질도 급하시긴. 나이트 프라울러에 다른 뜻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나는 수제햄을 곁들인 시금치 크레이프를 먹으며 쓴웃음을 지었다.
- "아뇨. 피해자의 입속에 들어 있던 종잇조각에 적힌 나이트 프라울러는 <절규성>의 그 괴물이 분명합니다."
"어떻게 아시죠?"
"우연의 일치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여러 가지가 들어맞거든요. 먼저, 몰래 뒤로 다가가 칼로 등을 찌르는 범행 수법. 다음으로 피해자가 모두 젊은 여성이라는 것. 모두 <절규성>의 설정과 같습니다."
"우연이겠죠. 뒤에서 칼로 찌르는 무차별 살인범이 그리 드문 것도 아니고, 이런 쾌락 살인범들은 젊은 여성만을 노리는 경우가 많잖아요."
"네, 그건 아리스가와 씨 말씀이 맞습니다. 하지만 기분 나쁜 것은 피해자의 입속에 범인이 남긴 메시지입니다. 뉴스에서 보니 첫 번째, 두 번째 피해자의 입속에서 발견된 메시지는 난폭하게 휘갈겨 썼기 때문에 판독이 불가능했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세 번째 메시지부터는 가까스로 나이트 프라울러라고 읽을 수 있게 되었다지 않습니까. 바로 그겁니다."
"... 무슨 뜻이죠?"
"게임을 해 보시면 압니다. 처음에 새빨간 글씨로 '절규성'이라고 나온 다음, 바늘로 세게 긁은 것 같은 모양이 떠오릅니다. 그리고 그것이 경련하듯 움직이며 차례대로 NIGHT PROWLER라는 글자가 되어 가죠. 문제의 메시지가 어떤 것인지 경찰에서 공개하지 않았으니 단정 지을 수는 없지만, 아마 범인은 게임의 오프닝을 흉내 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 그렇군. 그건 우연이라 할 수 없다. 분명 수사원들은 게임숍으로 달려가 수사 자료로서 <절규성>을 구입했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쯤은 내가 왜 이런 게임을 해야 하냐고 불만을 터뜨리며 컨트롤러를 조작하고 있겠지.
- "카타기리 씨도 <절규성>을 해 보셨습니까?"
"소설화를 기획한 사람이 의견을 좀 들려 달라고 해서 빌려서 해봤습니다. 밤늦게 혼자 하는데 상당히 무섭더군요. 영상이나 연출도 그렇지만, 사운드가 장난이 아니더라고요. 살해되는 여성의 단말마의 비명이 몇 번이고 나오는 바람에 이웃들의 오해를 살까 봐 헤드폰을 끼고 플레이했다니까요. 그랬더니 소리가 더욱 리얼하게 들려서 등골이 오싹해지더군요."
"여성의 비명이 몇 번이고 나오다니, 상당히 악취미로군요. 잔혹한 묘사도 많이 나옵니까?"
"패키지에는 '이 게임에는 폭력적인 장면과 그로테스크한 표현이 포함되어 있습니다'라고 주의사항이 적혀 있습니다. 담배 패키지의 경고문과 마찬가지로, 해당되는 게임은 그렇게 표시하게 되어 있죠."
그런 규정이 있는 줄은 몰랐다. 게임업계에서 자발적으로 그렇게 하기로 정한 모양이다.
"하지만 잔혹한 장면만 내세우는 싸구려 게임은 아닙니다. 움직이는 것은 실사와는 거리가 먼 폴리곤 캐릭터라, 스플래터 영화 쪽이 훨씬 쇼킹하다고 느끼는 사람도 많을 겁니다. 어딘지 알 수 없는 환상의 숲, 그 속에 우뚝 솟은 미궁 같은 고성이 무대라 실사 영화로 만드는 건 어렵겠죠. 하지만 소설로 만들면 재밌을 것 같은 이야기입니다. 쿠지라오카 씨라면 잘 써 주실 것 같았는데..."
"사건을 계기로 <절규성>이 전국적인 화제가 된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소설을 출판하면 대박이다, 그런 생각을 하시는 건 아니겠 ..."
- 나는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카타기리는 콧등을 긁적이며 말했다.
"재밌어한다기보다는... 교수님의 활약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으니까요. 수사에 극적인 진전이 있는 게 아닌가 해서..."
"무차별 연쇄살인이라면 범인과 피해자 사이에 접점이 없을 테니 감식이나 조직적인 수사가 중요할 겁니다. 범죄사회학자인 히무라가 가봤자 조언이나 하는 정도겠죠."
"현장상황이나 시신을 조사한 다음 프로파일링이라는 걸 하시는 게 아닐까요?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범인의 연령이나 성격, 가족 구성, 교육 정도, 직업, 사는 곳과 거주 형태 등을 추정할 수 있는 거 아닙니까?"
미국 FBI에서 사용하는 수사 방법이지만, 일본에는 전문적인 심리분석관은 존재하지 않는 데다, 히무라도 그런 연구는 하지 않는다.
- "하지만 교수님은 지금까지 몇십 건이나 되는 사건을 해결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런 경험이 있으니 가능하실 것 같은데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히무라는 프로파일링이라는 수법을 믿지 않습니다. 용한 관상가와 다를 게 뭐냐며 비웃은 적이 있었거든요. 예상 못한 사고나 범인의 작위적인 행동이 섞여 있을 경우에는 그 즉시 수사에 착란을 가져오는 요인이 되어 버리기도 하고, 프로파일러가 실패했을 경우에 그 이유를 설명하지 못하는 것에 큰 불만을 가지고 있더라고요."
"그것은 프로파일링이란 기술이 아직 발전 중이기 때문 아닙니까?"
"아뇨. 히무라는 프로파일러는 일정한 수준 이상으로는 기술을 발전시킬 수 없을 거라고 예상하더군요."
"그럴까요? 책에서 읽은 정도지만 프로파일링이 멋지게 적중해서 어려운 사건을 해결한 사례도 많다고 들었습니다만."
"그 친구 말에 의하면 그것도 점이나 예언과 마찬가지라고 합니다. '어느 정도는 적중하지 않는 게 오히려 이상하지. 성공 사례만을 나열하면 멋진 프로파일링의 전당을 세울 수 있겠군'이라고 일축하더군요."
- 카타기리는 무척 진지한 눈빛으로 와인을 한 모금 마셨다.
"그렇게 말씀하시면서 프로파일링을 응용하고 계시는 거 아닙니까? 제가 보거나 아리스가와 씨에게 들은 바에 의하면 히무라 교수님은 사건의 전체적인 모습을 관찰해서 범죄의 패턴을 꿰뚫어 본 다음, 과거의 경험과 조합하며 진상을 들여다보려고 하시는 것 같던데요."
그럴까? 히무라가 어떻게 사고하는지, 평범한 사람인 나는 잘 이해하지 못한다. 하지만-
- "표현이 이상하지만, 그 친구가 사건의 전체를 관찰해 꿰뚫어 보는 건 범죄의 패턴이라기보다는... 범인이 믿는 구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어떤 때는 공들인 위장 공작이기도 하고, 또 어떤 때는 파악하기 힘든 동기이기도 하죠..."
"범인이 믿는 구석이라고요? 음, 전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네요."
- 제대로 전달되지 않은 모양이다. 작가인 주제에 적절한 단어를 사용하지 못했기 때문이리라. 즉, 이런 것이다. 히무라가 필드워크라 칭하며 경찰 수사에 협력하여 범인을 궁지에 몰아넣을 때마다, 그 자리에 있던 나는 때때로 어떤 현상에 대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그 현상이란 아직도 항변할 여지가 남아 있을 것 같은 범인이 그의 추리를 듣고 곧바로 무너져 버리는 일이었다. 아무리 히무라의 지적이 타당하다고 해도, 죽을힘을 다해 발버둥 쳐야 할 것 같은 장면에서도 대부분의 범인들은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쉽게 무너져 내렸다. 왜 그렇게 되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자신들이 믿는 구석을 찔렸기 때문이다. 어떤 범죄라 할지라도 이것만은 눈치채지 못했으면 하고 범인이 바라는 급소가 있을 것이다. 히무라의 눈은 그곳에 초점을 맞추고 '넌 이걸 들키는 걸 싫어하지?'라고 하는 듯 빛을 비추며 범죄자를 쏘아 떨어뜨린다. 순전히 내 생각에 지나지 않지만.
- "아무튼 위험한 녀석입니다. 교수님이 활약하셔서 어서 붙잡아야 할 텐데."
카타기리는 그렇게 이야기했지만 나는 건성으로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과연 히무라가 이 사건에서 활약할 여지가 있는지 내게는 의문이었다. 수사에 공헌하지 못한다 해도 상관없다. 그런 건 아무래도 좋지만 범인이 분출하는 강력한 독에 감염되어 히무라가 정신적인 대미지를 받지 않을까 걱정이었다. 지금까지 이런 느낌을 받은 적은 별로 없었다. 왜 이번에는 불길한 예감이 드는 것일까.
- 그것은 아마도 내가 나이트 프라울러를 두려워하고 있기 때문이리라. 아직 정체를 알 수 없는 범인에게서 인간의 능력을 뛰어넘은 괴물의 그림자를 보고 두려움에 떨고 있는 것이다. 내가 떠올린 나이트 프라울러는 마음이란 것이 존재하지 않은 괴물이다. 그런 놈을 상대해도 괜찮은 걸까?
- 히무라는 범죄를 연구하는 학자이면서도 범죄를 마음속 깊이 증오하고 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예전에 사람을 죽이고 싶다고 갈망했던 적이 있다고, 새카맣고 어두운 구렁텅이에 빠졌던 적이 있다고. 그 구렁에서 빠져나오긴 했지만 그 때문에 더더욱 사람을 죽이는 놈들을 용서할 수 없다고. 나는 그의 비약적인 논리에 당혹스러워하면서도 연구자로서 범죄 현장에서 살아가는 것을 선택한 그를 지켜봐 왔다. 위태롭게 균형을 유지하고 있으면서도, 반면에 무척이나 터프하기도 한 그 남자는 지금 나이트 프라울러를 사냥하는 것에 혈안이 되어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만일 붙잡은 범인에게 마음이라 부를 만한 것이 없다면...
무서운 저주를 받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것을 걱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이미 범죄에게 저주받아 붙잡혀 있으니.
- "아리스가와 씨가 묵고 계신 호텔 방에는 게임기가 비치되어 있다면서요?"
"네, 그렇더군요."
나는 포크를 움직였다.
"식사를 마치면 전 바로 회사로 돌아갈 예정입니다. 아리스가와 씨, 혹시라도 이 근처 게임숍에서 <절규성>을 구입하시는 건 아니겠죠?"
"뭐라고요? 그런 걱정을 하고 계셨던 겁니까? 저도 참 신용이 없나 봅니다."
그렇게 웃으며 나는 그런 방법이 있었군, 하고 생각했다.
- 달려간다. 천장이 뻥 뚫린 대형 홀로 들어가 중앙계단을 올라갔다. 추적자는 보이지 않았다. 네 개의 문이 보인다. 그중에 제일 왼쪽 문을 열고 안으로 뛰어들었다. 화면이 실내로 바뀌었다. 앵글 역시 천장 모퉁이에서 내려다보는 각도로 바뀌었다. 예전에는 흡연실이었던 방이다. 안에는 아무도 없다. 조금 전 닫혀 있던 발코니 쪽 창문이 미세하게 열려 있는 것은 누군가가 창문을 통해 침입했던 흔적일까? 북쪽, 서쪽, 남쪽, 세 방향에 문이 있었다. 남쪽문은 방금 들어온 문이다. 서쪽 문을 열었다. 또다시 화면이 바뀌며 ...
- "게임을 가지고 있긴 하겠죠. 하지만 단순히 가지고 있던 게임에서 괴물의 이름을 빌린 것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고, 좋아하지도 않는 게임의 설정을 모방함으로써 수사를 혼란시키려 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너무 어렵게 생각하시는 거 아닙니까, 교수님? 제 생각에는 범인은 무척 좁은 세계에 틀어박힌 인물이지 싶습니다. 다른 뭔가로 변신하려고 마음먹었지만 떠올리는 것이라고는 고작 게임 캐릭터 정도뿐인 그런 남자 말입니다. 실제 연령과 맞지 않게 정신연령이 어린 녀석이고요. 그런 녀석은 널려 있지만요."
히무라가 종이컵을 드는 것을 본 사메야마는 지갑에서 동전을 꺼내 모리시타에게 건네며 "나도 커피 부탁해" 하고 말했다. 젊은 부하는 아르마니 정장을 휘날리며 밖으로 나갔다.
- "지금부터 게임을 제작한 회사에 가려고 하는데, 교수님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아직 못 보신 자료가 많은 것 같은데."
목적지가 신오사카라면 그다지 시간을 잡아먹지는 않을 것이다. 히무라는 의자 등받이에 걸쳐 놓았던 재킷을 집어 들었다.
"저도 가겠습니다. 그 뒤에 어젯밤 사건 현장을 다시 한번 보러 가죠."
- 히무라에게 다가와 지금까지 탐문 수사한 결과를 전했다.
"피해자가 집을 나선 것은 편의점에 택배를 보내기 위해서였습니다. 인터넷 경매에 출품했던 명품 가방을 발송해야 하는 것을 잊고 있었다고 하더군요. 약속한 기한 내에 보내지 않으면 믿을 수 없는 출품자라는 꼬리표가 붙기 때문에 마음이 급했겠죠. 잘 아는 점원과 그런 대화를 나눴다고 합니다. 다음 날 출근 전에 보내도 되지만, 아침에는 정신이 없을 테니 오늘 밤에 보내러 왔다고 말했다더군요. 겨우 그런 이유로 목숨을 잃다니."
"이른 아침이나 대낮에도 무차별 살인사건이 일어나기도 하니, 그녀의 판단이 목숨을 잃게 한 결정적 원인이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죠. 어디서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릅니다. 산다는 것은 눈을 감고 지뢰밭을 지나가는 것이나 마찬가지니까요."
공원 안에서 현장 부근을 둘러보며 히무라는 적당히 대답했다. 범인이 몸을 숨기기에 알맞은 나무나 풀숲 그늘이 많이 눈에 띈다.
"범인이 기다리고 있던 흔적 같은 건 발견되지 않았죠? 그렇다면 길 위에서 스쳐 지나가는 순간 덮친 건지도 모르겠군요."
"실은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피해자의 사진을 보고 뭔가 짐작 가는 게 없으셨습니까?"
사메야마는 조교수의 얼굴을 들여다봤다.
"얼굴이 그렇게 닮은 건 아닌데, 세 사람 모두 둥근 얼굴형에 머리가 짧더군요."
- 디렉터는 낮은 목소리를 쥐어짜며 열변을 토했다. 아직 서른 전후로 보이는데도 엄청난 관록이 느껴지는 남자였다.
[저희는 그로테스크한 묘사를 그저 나열하기만 하는 게 아닙니다. 그것을 승화시켜서 작품으로 만들었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단 말입니다. 살인 장면이 많다는 이유만으로 비난받아야 한다면 텔레비전에서 시대극을 방영하는 것도 즉시 중지시켜야 하지 않습니까? NHK <예술극장>에서 오페라 <살로메>를 방영하는 것도 금지시켜야죠. 저희 게임에는 피가 뚝뚝 떨어지는 사람의 목을 가지고 싶어 하는 여자는 등장하지 않습니다. 가부키에서 사람을 죽이는 장면 같은 것도 위험하고요.]
- [시대극이나 가부키는 도식화된 것이니 괜찮다고요? 그 말에는 좀 어폐가 있는데요? 저희 작품도 충분히 도식화되어 있습니다. 게임에 대해 무지한 사람의 시선으로 판단하면 곤란하죠. 예술 작품인 오페라와 동일선상에서 논하는 건 주제넘을지도 모르지만, 모두 하나의 완성된 표현이라는 점에선 다를 바 없습니다. <절규성>을 플레이하고 엽기 살인을 저지르는 바보는 있어도, <살로메>를 관람하거나 희곡을 읽고 사람의 목에 대한 욕망을 불태우는 사람은 없다고 단언할 수 있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만일 그런 살인귀 '살로메'가 나타난다 해도 그 작품을 인류 문화사에서 말살하라고 하지는 않을 겁니다. <죄와 벌>을 읽고 사채업자를 죽일 계획을 세우는 학생, <채털리 부인의 사랑>에 영향을 받고 불륜을 꿈꾸는 유부녀, <우라시마 타로> (일본의 만화로 바닷가에서 아이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거북이를 구해준 어부 우라시마 타로가 그 보답으로 용궁에 초대되어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는 이야기 - 옮긴이)를 읽고 거북이를 괴롭히는 즐거움에 눈뜬 어린애. 얼마든지 상상할 수 있지 않습니까? 애초에 잘 만든 작품이라면 어딘가 사람의 마음을 흔드는 힘을 가지는 게 당연합니다. 그 힘을 두려워한 나머지 자유로운 표현을 금지할 수는 없죠.]
- [아, 일단 들어 보십시오. 그런 명작과 잔혹한 게임은 사정이 다르지 않냐고 말씀하실 것 같으니 미리 선수를 치겠습니다. 저희 게임을 즐기는 대다수의 유저들은 그것을 단순한 게임으로 즐길 뿐, 진짜로 살인을 저지르지는 않습니다. 당연한 거죠. 하지만 세상에는 놀랄 정도로 별의별 인간이 존재하는 법이니, 아주 드물긴 하지만 개중에 진짜로 게임을 흉내 내 여자를 찔러보고 싶다고 생각하는 녀석도 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 위험성을 먼저 생각해서 게임 제작을 금지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살로메>는 괜찮고 <절규성>은 안 된다는 판단을 내릴 권리는 아무에게도 없습니다. 저희는 <절규성>이 폭력 욕구를 증진시키는 게임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플레이어는 작중의 여성 캐릭터에게만 감정을 이입하기 때문에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오히려 폭력에 대한 혐오감을 느끼게 될 겁니다. 정상적이지 않은 녀석이 컨트롤러를 잡을 가능성이 있으니 위험하다고 하실 겁니까? 하지만 그런 비정상적인 케이스를 전제로 한다면 사회의 기능은 모두 정지하겠죠. 생판 모르는 사람이 운전하는 버스에 어떻게 탈 것이며, 레스토랑에서 나오는 식사에는 독이 들어 있을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먹겠습니까? 아시겠습니까? 저희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럴 것이라는 가정 하에서밖에 살아갈 수 없습니다. 호러 비디오나 <살로메>를 보고 살인마가 될 녀석도 있을지 모른다는 걱정을 하다간, 사회의 모든 기준을 최악의 멍청이들에게 맞춰야 할 필요가 생기겠죠. 과연 최악의 멍청이들을 위한 사회를 건설하고 싶다는 바람을 가진 사람이 있을까요?]
- "경부보님은 그건 궤변이라고 하시고 싶었던 게 아닙니까?"
경부보는 집요하게 안경을 닦고 있었다.
"그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오긴 했지만, 꾹 참았습니다. 저는 그런 폭력적인 게임은 포르노와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것이 존재하기 때문에 욕망을 발산할 수 있다는 측면도 있는 거죠. 하지만 그런 범죄 억지 효과는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으니, 좋은 점과 나쁜 점을 논하기 어렵죠."
그 말을 이링크스에서 했다면 장발의 시나리오 라이터는 맹렬히 반발했을 것이다. 그는 반항적인 태도로 이렇게 말했다.
[<절규성>에 죄가 있다면, 너무 많이 팔렸다는 거겠죠. 그 작품은 웬만한 현대문학의 수준을 뛰어넘은 작품이니까 허구를 허구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멍청한 인간이 플레이했을 경우, 나쁜 부분만 ... ]
- 밤이 깊어지자, 비는 더욱 거세게 내리는 것 같았다.
"잘도 내리는군. 장마 때니 이러는 것도 당연하지만, 일기예보에서는 밤이 되면 그친다고 하더니."
나는 두 번째 캔 맥주를 마셨다. 너저분하게 소파에 걸터앉은 히무라는 담배를 피우며 아무 말 없이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거실에는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이 흘러나오고 있다. 히무라가 좋아하는 글렌 굴드의 피아노 연주가 아니라, 내 취향인 스콧 로스의 쳄발로 연주다.
- 결국 도쿄에서의 통조림 생활은 예정보다 이틀이나 길어졌다. 내가 사랑하는 파트너의 충고를 무시하고 호텔 밀실에서 <절규성>에 푹 빠져 있었기 때문이니 자업자득이지만. 문제의 게임은 열 시간 이상이나 붙잡고 있었지만 도무지 클리어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집으로 가지고 돌아온 <절규성>을 다시 플레이하기 위해 일부러 게임기를 살 생각은 없었다. 아마 이대로 영원히 엔딩을 보지 못하고 끝나겠지.
- 사흘 전에 오사카로 돌아온 뒤로는 계속 흐린 날씨가 이어졌지만, 오늘 아침부터는 비가 세차게 내리기 시작했다. 음울한 날씨가 이어진다. 그리고 더욱 내 마음을 무겁게 한 것은 무차별 연쇄살인범, 나이트 프라울러를 붙잡을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 오사카로 돌아온 수요일 오후, 나는 히무라와 함께 첫 번째, 두 번째 범행 현장을 돌아본 다음 합동수사본부에도 얼굴을 내밀었다. 모든 수사 요원들의 눈에는 핏발이 서 있었는데, 그 모습에서는 살기 어린 분위기마저 느껴졌다. 임상범죄학자의 조수 자격으로 경찰에 드나드는 것은 익숙했지만, 이번만은 왠지 마음이 불편해서 나는 히무라에게 먼저 돌아간다고 말하고 -도쿄에서 막 돌아온 터라 피곤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일찍 자리를 떴다. 히무라도 매일 연속해서 수사에 참가할 수는 없었던 듯, 목요일과 금요일은 학교에 출근하고, 강의가 없는 오늘은 사흘 만에 본부에 발걸음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수사 회의에 참가한 뒤에 유우가오카에 있는 우리 집을 찾은 것이다. 시간이 시간이니만큼 재워 줄 수밖에 없었다.
- 히무라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냉장고에서 콜라 캔을 꺼냈다. 오늘 밤은 알코올이 들어간 것은 마시지 않을 생각인 듯, 그는 미리 신작 완성 기념 축배는 혼자서 들라고 이야기했었다.
"에사카에서 사건이 일어난 지 내일로 일주일이 되는군. 매스컴의 경찰 비판도 점점 심해지던데 수사상황은 어때?"
히무라는 느릿느릿 몸을 일으키더니 단정치 못하게 맨 넥타이를 풀었다.
"별로 좋지 않아. 목격자 정보도 없고, 범인이 남긴 물건이라고는 그 메시지 정도밖에 없으니 수사도 완전히 정체 상태지. 다음 희생자가 나오지 않는 한 수사에 진척이 없는 것 아니냐며 기자가 비아냥대는 바람에 수사주임인 후나비키 경부가 엄청나게 화를 냈었지."
- 나는 정부의 시원하게 벗겨진 머리에서 김이 피어오르는 모습을 상상했다. '우미보즈(중머리를 한 바다도깨비 - 옮긴이)'라는 별명을 가진 후나비키 경부와는 우리 둘 다 가깝게 지내고 있었다. 그래서 어떻게든 힘이 되고 싶었다.
- "그때까지 진전이 없으면 매스컴의 비판도, 시민들의 동요도 더욱 거세질 거야."
히무라는 콜라를 한 모금 마시더니 몇 개비 째인지 모를 담배를 입가에 물었다.
"일개 조교수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지. 잠깐! 뭐야, 그 비난하는 듯한 눈빛은? 보잘것없지만 나도 애쓰고 있다고. 하지만 현장과 시신만 보고서 '범인의 나이는 25세부터 30세. 성별은 남자. 고등교육을 받았지만 현재는 직업이 없거나 자신의 능력 이하의 일을 하는 등 불우한 처지에 놓여 있다. 복잡한 가정환경에서 자라 충분한 애정을 받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 눈에 띄지 않는 타입. 말쑥하고 수수한 옷차림을 좋아하며, 깔끔하게 정돈된 방에 혼자 살고 있다. 독신, 가학적인 성향이 강하며, 성적으로 불구일 가능성도 있다. 오른쪽 뺨에 점이 있고 광동어와 핀란드어에 능통 ...'"
- 담배를 입에 문 조교수는 새치 섞인 머리를 천천히 긁적였다.
"철벽 같은 알리바이가 있는데 어쩌라고? 그리고 두 번째 피해자인 카와모토 오리에, 세 번째 피해자인 미즈오 치사와도 전혀 접점이 없어. 추궁할 여지가 없지."
"그렇군. 카와모토 오리에 주변에 수상한 인물은 없었어?"
"그녀는 운노 미츠에와는 대조적으로 사교적인 성격이라 이성 관계도 꽤 복잡하더군. 매번 남자 친구가 바뀌었다나. 그러면서도 언제나 뒷마무리는 깔끔했다고 하더군. 헤어진 남자들에게 물었더니 모두 '오리에는 연애의 달인이에요', '좋은 추억이었습니다'라는 식으로 이야기하더라고. 미워할 수 없는 캐릭터였던 거지. 그녀의 전 남자 친구들의 사건 당일 밤의 알리바이도 조사했는데, 편의점이나 심야 영업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경우가 많아서 거의 대부분 알리바이가 성립되더군. 수상한 사람은 딱 하나, 미나토에서 접골원을 운영하는 서른 살의 남자야. 피해자가 일하던 술집에서 만나서 몇 번인가 함께 식사를 했다더군. 동료들의 이야기에 의하면 카와모토 오리에는 '구두쇠에다 따분한 사람이라 연락을 끊고 싶은데 또 한잔하러 가자며 귀찮게 군다'고 그 남자에 대해 불평했다더군."
"그것만으로는 수상하다고 할 순 없겠는데."
"문제의 남자는 체중이 100킬로그램에 육박하는 거한인데, 예전에 사귀던 여자가 헤어지자는 이야기를 꺼내자 상대의 얼굴을 때려서 경찰서 신세를 진 적도 있다더군. 폭력적 성향이 있는 남자야. 하지만..."
- "여자로 태어나면 남자가 어떻게 보일까?"
나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데?"
"부조리하게도 그저 살인 그 자체만을 목적으로 남자가 지나가는 여자를 찌른다. 어느 시대, 어느 나라에서든 일어나는 사건이야. 그 반대 경우는 들어 본 적 없고, 내가 여자라면 그 사실만으로도 남자를 믿을 수 없을 거야."
히무라는 밤의 어둠을 씻어 내리는 빗줄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왜 그런 일이 일어나는지 설명할 의무는 남자에게 있지. 너도 포함해서 말이야."
- "'절규성'에 갇혀 도망쳐 다니다 결국 살해되는 것도 여자였어. 왜 그런 거지? 남자가 여자를 미워하니까? 원망하니까? 무서워하니까? 경멸하니까? 두려워하니까? 아니면..."
갑자기 우타다 히카루의 <First Love>가 울려 퍼졌다. 뭐지? 의아해하고 있는데 히무라가 휴대전화를 꺼냈다. 그는 네, 네, 대답하며 펜을 들고 옆에 있던 신문지에 메모를 했다.
"바로 가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전화를 끊더니, 똑바로 날 바라봤다.
"나타났어, 나이트 프라울러가."
- "... 아직 세 번째 사건이 일어난 지 일주일밖에 안 됐잖아?"
"내가 어떻게 알겠어? 무슨 이유로 속도를 올린 건지는 범인을 붙잡아서 직접 물어볼 수밖에 없지 않겠어?"
재킷을 걸친 히무라는 금방이라도 방을 뛰어나갈 것 같았다. 나는 황급히 옷장으로 달려갔다.
- "너, 설마 이런 사태를 예상하고 술은 입에 대지도 않은 거냐?"
술기운을 없애기 위해 자신의 뺨을 두드리며 그렇게 묻자, 히무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상했다기보다는 막연히 두려워하고 있던 것뿐이야. 나이트 프라울러는 밤에만 활동하니까."
- 비가 더욱 세차게 내리고 있었다.
- 히무라가 받아 적은 주소는 미나토 구 이시다 1가였다. 지도를 보니 벤텐 부두 근방이었다. 커다란 창고가 늘어선 그 근처겠지. 대충 위치를 짐작한 나는 지도를 덮고 히무라에게 길을 설명했다. 사건 때문인지 타니마치 거리와 센니치마에 거리에서 경찰차 몇 대가 스쳐 지나갔다. 밤거리의 공기는 평소와 달리 긴박감이 넘치고 있었다. 그리고 세찬 빗소리가 불안을 더욱 가중시켰다.
와이퍼로 아무리 닦아 내도 비는 폭포처럼 앞 유리창에 흘러내렸다. 이윽고 그 폭포 너머로 멈춰 선 경찰차의 붉은 불빛이 번지듯 보이기 시작했다. 현장에는 건설용 푸른 비닐 시트가 덮여 있었다.
-
"실은 이번에 <절규성>의 소설화를 맡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나이트 프라울러의 권위자라고 생각하셨는지 전에 형사님들이 방문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그 게임을 하는 거냐? 당신 소설을 읽는 독자들은 어떤 사람이냐? 그런 질문을 하셔서 질문에 성의 있게 대답했습니다만... 아무래도 절 이상한 소설을 쓰는 수상한 남자로 보신 것 같군요."
"이런 시간에 이런 빗속을 헤치고 만화카페라."
경부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쿠지라오카는 자동차 천장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저는 공무원이 아니라 하찮은 글쟁이니까요. 그 정도 변덕을 부렸다고 수상하게 여기시면 곤란합니다. ... 정말 좀 봐주세요."
- 그 마음은 나도 알 것 같았다. 하지만 위로하려 했더니, 그는 벌떡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하지만 이상하군요. 스플래터 호러물을 쓰는 저는 이런 취급을 받는데, 아리스가와 씨는 수사에 협력하고 있는 겁니까? 오사카 경찰에서는 이분이 어떤 소설을 쓰는지 알고 계십니까? 외딴섬에서 일어나는 연쇄살인, 시간표를 이용한 알리바이 공작, 밀실에서 일어난 토막살인, 그런 것들이라고요. 암흑세계에서 찾아온 식인 괴물 이야기를 쓰는 저보단 아리스가와 씨가 훨씬 현실의 범죄에 가까운 위치에 있는 것 같은데요."
아니, 이 자식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나는 발끈했다.
- "왜 나이트 프라울러를 모방해 살인을 저질렀지? 게임이라고 생각했나?"
나는 참지 못하고 질문을 던졌다. 납득할 만한 대답 따위는 돌아오지 않을 거라는 걸 알면서도 물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또다시 침묵했다. 역시 그랬군. 이 남자의 마음에는 어둠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
어둠조차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 그 순간, 두꺼운 입술이 천천히 움직였다.
"가상세계와... 현실세계. 그 경계를 구분하지 못하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알고 싶어서..."
세면대에서 끄극, 하는 소리가 났다. 마치 악마가 끅끅대는 것처럼.
- 그의 대답은 내 인생을 통틀어 제일 웃긴 농담이었다. 그 말은 너무나도 우스꽝스러워서 웃음을 터뜨리지 않은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이 사건은 가상세계와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는 젊은이의 범행이라고 잘난 척 이야기했던 사람이 누구였더라? 정신과 의사 교육평론가? 사회학자? 소설가? 아무튼, 거기 있는 너! 너 말이야! 이리 와서 오와다 에이지 군의 이야기를 경청하라고. 네가 만들어 낸 이야기가 이 녀석을 낳았다고 하잖아. 텅 빈 마음에는 아무거나 다 들어갈 수 있는 것 같다고.
- 히무라는 얼음 같은 눈으로 병상 위의 청년을 바라보고 있었다.
차가우면서도 공허한 눈이었다.
- 정신이 이상해질 것 같아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나는 벌떡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꽃바구니에서 피어오르는 향기 때문에 숨이 막힐 것 같았다.
- 동생이 나이트 프라울러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유키에는 비명을 질렀을 것이다. 그녀의 비명이 환청처럼 내 귓속에서 울려 퍼졌다.
돌아보자, 에이지는 아무 말 없이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감정 없는 그 눈빛에 혐오감을 느꼈지만 마음속을 들여다볼 수도 없었다.
- 공허함을 안은 채 굳게 닫힌 성 같은 그의 마음.
그 성 깊숙한 곳에서는 암울한 절규가 길게 꼬리를 끌며 메아리치고 있을지도 모른다.
- <절규성 살인사건>
- 이런 명작에는 '살인사건'이란 제목이 잘 어울리는지라 내심 동경하고 있기도 했다. 그래서 아오키 씨의 청탁을 기회로 '~살인사건'이란 제목을 써 보기로 했다.
- 그와 동시에, 어차피 쓸 거라면 같은 패턴의 제목이 늘어선 단편집을 내고 싶다고 생각했다. 한 권으로 만드는 데 5년이나 걸리긴 했지만, 완성도는 둘째치고 자신의 취향에 맞는 작품들만 모을 수 있어서 작가로서 일단 만족하고 있다.
- 각 작품에 관한 여담을 풀어놓으려 한다.
다만 <설화루 살인사건>에 대한 서술 중에 트릭을 연상시키는 부분이 있으므로 작품을 먼저 읽은 다음 읽어 주셨으면 한다.
- <흑조정 살인사건>에서 아리스를 괴롭히는 '스무고개' 문제는 아내가 초등학교 저학년 소녀와 함께 놀았을 때 들은 것인데, 나는 아내에게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무척 감동했다. 힌트를 들으면 들을수록 더욱 혼란스러워지며 상대방에게 농락당하면서 현기증 비슷한 쾌감을 얻을 수 있다는 점이, 잘 만들어진 본격 미스터리와 일맥상통하는 것 같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는 밤의 정경을 묘사하는 것을 무척 좋아하는지라 이 작품은 특별히 쓰면서 즐거웠다. 하라셰비치의 연주는 아니었지만, 쇼팽을 들으면서 썼다. 독자들이 느끼기에 야상곡 같은 이야기였으면 좋으련만.
|문고판을 내며 |
작품 외적으로 보충 설명할 만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매번 덧붙이고 있는 문고판 후기 용 잡담 소재가 달리 생각나지 않았던지라 잠깐 음악에 대해 이야기해 볼까 한다.
표제작인 <절규성 살인사건>에서 아리스가 히무라와 함께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듣는 장면이 있는데, 히무라가 좋아하는 글렌 굴드의 피아노 연주가 아니라, 내 취향인 스콧 로스의 쳄발로 연주다. 이것은 바흐의 원곡을 피아노로 치는지, 아니면 쳄발로로 치는지 그 차이만이 아니라 각각 두 캐릭터에 맞춰 설정한 것이다.
굴드와 로스는 모두 북미 출신으로,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굴드는 52세, 로스는 38세) 것 또한 같지만, 그들이 남긴 <골드베르크>는 대조적이었다. 단순히 악기와 연주 스타일(곡의 해석)이 전혀 다른 것만이 아니다. 서른두 살에 '콘서트는 죽었다'는 말을 남기고 무대 활동을 거부한 굴드의 명반은 당연히 스튜디오 녹음이지만 로스의 명반으로 일컬어지는 것은 필생의 라이브 음반이다. 중고함으로 가득 찬 고고한 존재였던 굴드와는 대조적으로, 로스의 배후에서는 청중의 뜨거운 기운이 느껴진다. 모두 감동 넘치는 명연주다. 골드베르크를 좋아한다면 비교해서 들어보는 건 어떨까?
아리스와 히무라의 취향을 꼬아서 서로 바꿔 버릴까도 생각했지만, 뭐 이대로가 좋은 것 같다.
끝으로, 문고본 출판 시에 디자인을 맡아주신 오지 히로미 씨 건축가의 시선으로 해설을 써 주신 타케지마 키요시 씨, 편집부의 이지마 카오루 씨, 그리고 독자 여러분께 감사 인사를 드린다.
03.12.15
아리스가와 아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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