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1

[박상영] 대도시의 사랑법

일루젼 2025. 4. 15. 0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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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박상영
출판 : 창비
출간 : 2019.06.28


       

           

'누구에게나 자신만의 '규호'가 있지 않을까.

'재희'는 몰라도, '규호'는.

 

<순도 100퍼센트의 휴식>으로 박상영이란 작가를 처음 만났다. 

무척 유쾌하고 따뜻했던 글이라 '이 작가의 글을 찾아 읽어봐야지' 생각만 하다 근 2년이 지나서야 <대도시의 사랑법>을 읽어 보게 되었는데,

 

솔직히 말하자면 머리가 딩- 했다. 

 

아. 

그렇구나. 

 

뭐가 그렇고 뭐가 아 인지는 설명하기 어렵지만. 

그냥 딩- 했다. 

 

헤테로 여성인 나로서는 감히 소설 속의 '영'을 이해한다고 말하기 어렵다.

'재희'처럼 삶을 자기 방식대로 살아가고 있다고 말하기도 어렵다. 

 

그런데도 나는 '영'에게 이입했다. 

 

부모와 자식은 피를 나누었기 때문에 상처를 나눈다. 

연인은 피를 나누지 않았기 때문에 상처를 나눈다. 

타인은 상처를 치유하는 동시에 상처를 입히지만, 

상대가 타인이 아닌 자기 자신이라고 해서 다를 것도 없다. 

 

누구에게나

서로의 바닥을 보여줄 수 있었던 재희가 있고,

자신의 가장 뜨거운 조각을 가져간 우럭 -형- 이 있고, 

어디에선가 자신의 삶을 걸어 나가고 있을 규호가 있고, 

사무치게 외로운 순간 잠시 스쳐 지나가는 하비비가 있다.

남들에게는 차마 말하기 힘든 내 안의 카일리도 있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이 버거울 때, 원망할 수 있는 누군가도 있다.

그 누군가에게는 그만의 무게가 있다는 걸 알면서도, 누구의 탓도 아니란 걸 알면서도.  

 

<대도시의 사랑법>은 대도시에서는 흔할 것 같지만 어디에서도 보기 힘든, 하지만 누구나 해봤을 법한 사랑 이야기이다. 

 

봄날에 읽기 좋은 책이었다. 

  


 

- "너 죽었다는 소문 돌았는데 멀쩡하네."

"네 소설 어디서 볼 수 있어? 인터넷에 찾아봐도 없던데."

"근데 글 쓰느라 많이 힘들었나 보다. 살이 엄청 쪘네."

"너 아직도 술 그렇게 마시냐..."

- 내 책은 조만간 나올 예정이며, 술은 많이 줄었다. 늙고 살찐 건 너희도 만만찮은데 자꾸 이런 식이면 왕년의 술버릇이 나올 수밖에 없겠다, 말하고 싶었지만 30대의 사회인답게 교양을 차리며 대충 웃음으로 눙쳤다. 누군가가 내 소설을 봤다고 하면, 다 지어낸 거라고 해야지. 괜히 묻지도 않은 질문에 대답을 준비하고 있는 내가 웃겼다. 자의식 과잉도 병이라면 큰 병이었다.

- 결혼식 사회를 맡은 남자는 재희 남편 될 사람의 친구라고 했다. 하관이 빨고 피부가 번들거려 영 내 스타일이 아니었고, 경상도 사투리 억양이 심한 것이 진행 솜씨도 별로인 것 같았다. 방송기자라고 했나? 내가  낫겠구만. 그놈의 관례가 뭔지. 괜히 심술이 올라왔다.

- 단상 옆 커다란 스크린에 재희와 그의 신랑을 찍은 사진이 떠올랐다. 휴대폰 카메라로 찍어 화질이 떨어지는 두 남녀의 사진을 보며 나는 레드와인을 연거푸 들이켰다. 얼마 전에 기업은행으로 이직했다는 철구가 내 옆구리를 쿡 찌르며 물었다.
[근데 너 솔직히 말해봐. 너랑 재희랑 뭐냐. 소문이 사실이냐?]
소문은 사실인데 재희한테 들이대다 대차게 까인 철구, 네가 할 소린 아니지.

- 스무 살의 여름, 재희와 나는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술을 사주기만 하면 해달라는 건 다 해주는 술버릇이 있던 그 시절의 나는, 그날도 어김없이 연령 미상의 남자와 이태원 해밀톤호텔의 주차장에서 키스를 하고 있었다. 아마도 지하의 클럽에서 데낄라를 여섯 잔쯤 얻어먹은 상태였을 것이다. 달빛과 가로등과 온 세상의 네온사인이 나를 비추고 있는 것 같았고, 귀에서는 연신 카일리 미노그의 일렉트로닉 넘버가 흘러나왔다. 상대가 누구인지는중요치 않았다. 단지 내가 그 어두운 도시의 거리에 누군가와 함께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했고, 때문에 알 수 없는 누군가와 온 힘을 다해 혀를 섞었다. 세상 모든 것들이 다 나를 위해 뜨겁게 끓어오르고 있다고 믿게 될 즈음, 누군가가 나의 등을 세게 쳤다. 잔뜩 취한 와중에도 이건 혐오범죄가 분명해, 드라마 퀸다운 상상을 하며 포갰던 입술을 떼고 고개를 홱 돌렸다. 여차하면 몸싸움을 불사하리라 마음먹고 주먹을 꽉 쥐었는데 내 앞에 서 있는 것은 재희였다. 언제나처럼 필터에 립스틱이 묻은 말보로 레드를 쥔 채로 술이 확 깨는 것 같았다. 재희는 놀란 표정을 짓는 나를 보며 숨도 안 쉬고 웃었다. 그러곤 특유의 큰 성량으로 외쳤다. 
[아예 먹어라.]

- 나도 모르게 뭐래, 하고 웃음이 터져버렸고 그러던 사이 나와 키스를 하던 남자가 어디로 갔는지, 심지어는 그가 누구였는지조차 이제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재희와 내가 주차장에서 나눴던 얘기는 대충 기억이 난다.
[학교 사람들한텐 비밀로 해줄 거지?]
[당연하지. 내가 돈은 없어도 의리는 있다.]

- 재희가 부모님과 인연을 끊은 것은 스물한 살의 봄이었다. 우리 둘 다 부모님이랑 썩 사이가 좋지 않은 편이기는 했는데,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부모님이 뭐 대단한 악인이거나 한 것은 아니었고 평범한 중산층 가정의 보수적인 부모에 불과했다. 대부분의 평범한 부모가 그러하듯, 자식에게는 답답한 상식을 들먹이면서도 뒤로는 신나게 외도를 하거나 종교나 주식, 다단계 같은 것에 미쳐 있는 종류의 사람들이었다. 내 경우는 부모를 싫어하는 주제에 얻어먹을 것은 또 다 얻어먹겠다는 놀부 심보를 가지고 있어(그래서 갈수록 인상이 심술궂어지나?) 적당히 눈치를 보며 엄마에게 매달 몇십 만원씩 용돈을 타 쓰곤 했는데 재희는 부모님과 대판 싸운 뒤로는 아예 연락을 끊고 경제적인 원조마저도 거부해 버렸다. 역시나 대쪽 같은 구석이 있는 여자였다. 

- 재희가 처음으로 구한 일자리는 동네의 까페 '데스띠네'라는 곳이었다. 간판에 '운명'이라는 거창한 의미의 불어가 쓰여 있어서 그곳을 선택한 것은 아니었고 동네에서 흡연이 자유로운 몇 안 되는 까페였기 때문에 단박에 마음에 들었다고 했다. 담배를 뻑뻑 피우며 커피를 내리는 재희의 모습에는 20대 초반다운 천진난잡한 귀여움이 서려 있었다. 나는 새로운 썸이 생길 때마다 그들을 데스띠네에 데려가 재희에게 일종의 검사(?)를 받았고 재희는 매번 어디서 섹스만 밝히고 성격은 개차반 같아 보이는 놈들을 잘만 골라 온다고 평했다. 지나고 보면 다 맞는 말이었다.

- 재희는 낮에는 데스띠네의 점원으로, 밤에는 과외 교사로 투잡을 뛰면서도 새벽에는 알뜰히 술까지 퍼마셨다. 그러면서 학교 수업도 듣고 학점도 그럭저럭 받고, 아무튼 뭘 했다 하면 평균 이상은 하는 재희는, 다른 건 다 잘하면서도 제대로 된 남자를 고르는 것과 엉망진창인 남자에게 적절한 시점에 이별을 고하는 데 있어서는 천부적일 만큼 재능이 없었다. 그래서 내가 번번이 재희의 남자들에게 거절이나 이별의 문자를 보내곤 했다. 나는 또 그 방면에는 달인에 가까웠는데 내가 남자들에게 차이며 숱하게 들었던 말을 그대로 되돌려주기만 하면 됐기에 어려울 ...

- 재희는 한국에 돌아오기 무섭게 학교 정문 앞에 열 평짜리 전세 원룸을 구하고 영어학원을 등록해 토익 점수를 만들었다. 복학하고 나서는 경제학을 복수 전공하질 않나. 마케팅 동아리에 들어가 케이스 스터디를 하는 등 그럴듯한 취업준비생이 되어 있었다. 나는 재희의 그런 건실한 모습이 몹시 낯설게 느껴졌는데 일주일에 일곱 번씩 술을 마시는 걸 보면 여전히 내가 아는 재희가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 새로운 집에 들어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재희가 이상한 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밤 열 시마다 어떤 남자가 집 앞에 와서 재희네 집 창문 쪽을 하염없이 바라본다는 거였다.

- [전세방 귀하다던데 부동산에서 왔나 보다.]
대충 대답하고 치웠는데 아무래도 찝찝한 기분이 들기는 했다. 한 번은 속옷만 입고 머리를 말리는데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남자와 눈이 마주친 적도 있다고 했다. 충고가 낮고 2층밖에 되지 않아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베란다로 들어올 수 있을 것 같다는 말도 덧붙였다. 정 불안하면 꼴에 남자인 내가 며칠간 너희 집에 들어가 동거하는 ...

- 그런데 말하는 것을 봐도 표정을 봐도 뭘 봐도, 이번 남자는 촉이 좋지 않았다.
[재희야, 너 그 남자 왜 만나?]
[글쎄. 잘해줘서?]
[-별것도 없는데 그냥 자지 커서 만나는 거지?]
재희는 예수의 계시를 받아 든 모세 같은 표정을 지으며, 그걸 도대체 어떻게 알았냐고 물어봤고 나는 재희에게 누구보다도 새침한 말투로 말했다.
[내 영적 재능이야.]

- 지은이 가라사대 그 남자는 생식기가 크다 뿐이지 인생에 도움 될 게 하나 없어 보이는 관상이므로 얼른 정리하는 게 신상에 이로울 것이다, 하니 재희는 앞으로 어떤 남자를 만나든 나에게 일단 검사부터 받겠다며, 광신도 같은 표정으로 내 손을 잡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불쌍한 재희의 영혼을 끌어안았다.

- 불행히도 내 영적 재능은 틀리는 법이 없었다.
하루는 수업을 마치고 집에 들어왔는데 재희의 얼굴이 창백해져 있었다. 그녀의 손에 들린 것은 임신 테스트기였다. 나는 가방을 내려놓지도 않고 재희의 손에 들린 ...

- ... 몸이 걔 몸 같을 정도의 관계가 되어버려 뭐 하나 새로울 건 없었지만 둘 다 자존감이 낮고, 주기적으로 자살 충동을 느끼며, 학창 시절에 따돌림을 당해본 경험이 있고 꼴에 예술영화나 책 같은 것을 즐겨 보며 하루키와 홍상수, 불문학과 아우디 같은 구질구질한 것들을 혐오하는 공통점이 있는 게이라 서로를 꽤 특별히 생각하게 되어버렸다.

- 재희도 역시 그 시간에 놀고만 있을 애는 아니어서, 신입사원 연수원에서 세 살 많은 동기 하나를 꼬셔 나왔다. 이번에도 대충 놀다 치우려나 싶었는데 꽤 진지하게 생각하는지 3개월쯤 만났을 때 정식으로 함께 식사를 하자고 했다.
[너 하나만 나오면 그림이 좀 어색하니까 네 애인도 데려와라.]
[애인 아닌데.]
[그래. 그 K3 데려와라.]
[싫어. 이상하잖아. 네 남친한테 걔 뭐라고 소개하게]

[말대답하지 말고 그냥 좀 와. 비싼 거 사줄게.]
[뭐 사줄 건데?]

- 우리는 한남동의 한 경양식 식당에서 1차를 했다. 재희의 남자친구에게는 우리가 보드 동아리에서 만난 친구들이라고 뻥을 쳤다. 그는 지금까지 재희가 만났던 남자들과는 사뭇 달랐다. 예술을 한답시고 (1년만 지나도 부끄러워질) 타투를 덕지덕지 발라놓지도 않았고, 눈빛이 얍삽해 보이지 않았으며, 대단한 대물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대신 나와 재희에게 없는 어떤 안정성이랄까, 인생에 대한 낙관 같은 게 느껴지는 사람이었다. 서울대 공대를 나와 반도체 연구 부서에서 일하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 나는 테이블 아래로 손을 내려 재희에게 문자를 보냈다. 
[니 인생에 서울대는 없다며.]
[인생이 뜻대로 되면 우리가 이러고 살겠니?]

- 너무 맞는 말이라, 재희의 남자친구에게 아이고 형님, 대단하십니다, 멋지십니다, 꼴같잖은 칭찬 같은 것도 했다. 내가 데려온 K3와 재희의 남친은 공대 출신이라는 공통점이 있기 때문인지 꽤 잘 맞아 보였다. 둘은 서로가 다니는 회사의 사내 문화나 연구 분야에 대해서 계속 뭔가를 떠들어댔다. 두 남자의 대화를 듣다가 지루해진 나는 재희의 왈가닥 대학 생활을 사회적으로 용인 가능한 선으로 편집해 들려주기도 했다. 그때, 우리 넷의 식사 자리는 꽤 적절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 재희의 남자친구가 재희와 지은이의 심상찮음을 눈치챈 것은 지난여름이었다.
[재희야, 네 룸메이트 지은이는 고양이야?]
[응? 무슨 소리야. 오빠.]
[이상하잖아. 왜 걔는 항상 집에만 있어? 왜 나한테 한 번도 보여주지를 않고, 목소리도 들려주질 않아? 같이 찍은 사진도 없어? 고양이도 가끔 우는 소리를 내는데, 왜 걔는 목소리도 흔적도 없어?]

- 그간 재희가 만났던 남자들이 워낙에 단타에 그쳐서 망정이지, 사실 정상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이라면 충분히 할 법한 의심이었다. 몇 번이고 지은 씨와 함께 밥을 먹자고 해도 일이 있다거나 쑥스러움이 많다는 식으로 둘러대곤 하니 당연히 이상하게 생각하지. 

- ... 재희를 집으로 끌고 온 적도 부지기수였고, 화장실인 줄 알고 방바닥에 오줌을 싼 재희의 스타킹을 내다 버리고 락스로 바닥을 벅벅 닦은 적도 있었다. 눈곱이 낀 눈을 비비며 일어난 재희가 미안하다고 빌면 언제나 대답 대신 재희의 등짝을 때리고는 누구보다 크게 웃었던 나였다. 그런데 그때, 나는 진심으로 분노하고 있었다.
배신감.
그것은 타인에게 별 기대가 없는 내가 평소에 좀처럼 느끼지 못했던 감정이기도 했다.

- 따지고 보면 웃긴 일이었다. 재희는 그저 있는 사실을 그대로 말했을 뿐이었다. 이전까지 나는 내 정체성이 밝혀지는 데 별 거리낌이 없는 편이었다. 술만 들어가면 길바닥에서 남자와 키스를 하는 주제에 소문이 나지 않기를 바라는 게 웃긴다고 생각했다. 다만 나의 비밀이 재희와 그 남자의 관계를 위한 도구로 쓰였다는 것을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누구든 떠들어대도 괜찮지만, 그 누구가 재희라는 것이 도저히 받아들여지지가 않았다. 다른 모든 사람이 나에 대해 얘기해도 재희만은 입을 다물었어야 했다. 
재희니까.
재희와 내가 공유하고 있던 것들이, 둘만의 이야기들이, 다른 사람에게 알려지는 게 싫었다. 우리 둘의 관계는 전적으로 우리 둘만의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언제까지라도. 

- [연락 안 해도 돼.]
나는 가방을 싸서 곧장 잠실의 본가로 들어갔다. 내가 왜 그토록 격렬한 반응을 보였는지 나 자신조차 알지 못하는 채로.
그 후로 재희에게서 몇 번 전화가 걸려 왔지만 받지 않았다. K3에게도 우리의 관계를 다시 생각해봐야 할 것 같다고 문자를 보냈다. 그는 자꾸만 일방적으로 도망치는 나를 이해할 수가 없다며, 이제는 진짜 끝이라고 하더니 새벽마다 술을 처먹고 (어디선가 긁어 온 것이 분명한) 사랑에 관련된 경구 같은 것을 맞춤법이 틀린 채로 보내왔다. 재희 역시 때때로 내 마음을 다 이해한다는 문자를 보냈는데, 나는 재희가 도대체 무엇을 이해하고 있다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자꾸만 고약해지는 마음이 웃겨서 혼자 가만히 누워 있다 ...

- 큰 짐들이나 겨울옷 같은 건 미리 신혼집으로 보내놨다고 했다. 남아 있는 5개월의 계약기간 동안은 나 혼자서 방에 살아도 된다고 했다. 그래도 전세금이 꽤 될 텐데 당장 돈이 급하지 않은 걸로 봐서는 아무래도 재희 쪽 집안 형편이 괜찮은 것 같았고, 은근히 기우는 결혼인 것 같기도 했다. 재희가 평범한 중산층 가정에서 누구보다 평범하지 않게 자라난 여자라고 생각했던 믿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녀가 사회적 통념 같은 것을 코 푸는 휴지처럼 여기며 자라날 수 있었던 건 어쩌면...

- 짐을 다 싼 후 나란히 이불을 깔고 누워 함께 마스크팩을 붙이고 있으니 꼭 스무 살로 되돌아간 것만 같았다. 그때의 그 망나니 같던 재희가 어느덧 다 커서(?) 결혼을 한다는 게 도통 실감이 나지 않았다.
[ 너 정말 결혼해서 시부모 챙기고, 애 낳고 기저귀 갈고 할 자신 있어?]
[오빠랑 계약서도 썼어. 애 안 낳기로 시부모님이야 엄마 아빠 생일 챙길 거 한번 더 한다고 생각하지 뭐. 그냥 연애하는 것처럼 계속 살 거야, 우리.]
[그럼 계속 연애나 하지, 굳이 결혼을 왜 해.]
[하자고 하니까 그냥 한번 해보는 거지 뭐. 살다가 아님 말고.]
[그래. 하다가 안 되겠다 싶으면 다 때려치우고 와.]
[내가 그걸 못하겠니?]

- 못해서 여기까지 온 거 아니었어, 물어봤는데 아무 대답이 들리지 않았다. 대신 우렁차게 코 고는 소리가 들렸다. 재희가 입버릇처럼 말한 '아님 말고'가 계속 머릿속에 맴돌았고, 평소에는 짜증만 치밀어 오르던 그 말이 이상하게 위안이 됐다.

- 결혼할 사람은 재희인데 정작 잠들지 못한 건 나였다. 그렇게 우리의 마지막 밤이 흘러갔다.

- 집에 돌아오자마자 침대에 재킷을 벗어던졌다. 속옷까지 벗어버리고 침대에 누웠다. 재희와 함께 살 때는 절대 할 수 없었던 일이었다. 혼자 사니까 시원하고 좋네. 해가 지지도 않았는데 이러고 있으니 꼭 술에 취해 새벽을 맞이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집도 비었는데 남자나 불러다 놀까 하다가 귀찮아서 관뒀다. 창 너머로 일렁이는 햇살을 보며 습관처럼 핸드폰의 문자들을 뒤졌다. 지긋지긋한 카드 결제 문자와 스팸 문자를 넘어 재희가 내게 싹싹 비는 문자를 읽다, K3가 내게 마지막으로 보냈던 문자를 열었다. 
[집착이 사랑이 아니라면 난 한 번도 사랑해 본 적이 없다.]

- 핸드폰을 닫아버렸다. 샤워를 할까 하다 갑자기 시원한 게 먹고 싶어져 버렸다. 냉동실을 열어보니 거의 다 먹은 블루베리 한 봉지와 비닐을 벗기지도 않은 말보로 레드 한 갑이 있었다. 담뱃갑에 암에 걸린 남자의 폐 사진이 붙어있어서 그것을 한참 동안 들여다보았다. 이 남자, 죽었을까. 선반에서 밥공기를 꺼내 블루베리 봉지를 뒤집었다. 보라색 얼음 조각 하나만이 툭 떨어질 따름이었다. 

- 그때, 영원할 줄 알았던 재희와 나의 시절이 영영 끝나버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 언제나 때에 맞춰 블루베리를 사다 놓던 재희. 내가 만났던 모든 남자들의 이름과 얼굴을 기억하는, 내 연애사의 외장하드 재희. 아무 데서나 담배를 피우며, 가당찮은 남자만 골라 만나는 재희.
모든 아름다움이라고 명명되는 시절이 찰나에 불과하다는 것을 가르쳐준 재희는 이제 이곳에 없다.


<재희>




- 밤새 글을 쓰다 늦잠을 자버렸다. 대충 세수만 하고 가방을 들었다. 엄마는 아마도 짜증을 꾹꾹 눌러가며 병실에서 성경을 읽고 있을 터였다. 점심을 먹고 난 후 엄마와 함께 올림픽공원을 산책하는 것이 일상이 된 지 오래였다. 
계단을 내려오다 습관처럼 흘끗 우편함을 바라봤는데, 서류봉투가 꽂혀 있었다. 꺼내서 만져보니 두툼했다. 발신인의 이름은 적혀 있지 않았다. 뭐지, 하는 마음에 봉투를 뜯어보았다. 누렇게 바랜 종이 뭉치가 나왔다. 

- 그것은 5년 전 그에게 던지듯 건넸던 나의 글, 일기였다.

 

 

- 나체로 전신 거울 앞에 선 것 같은 기분으로 첫 장을 읽기 시작했다. 검은색 펜으로 휘갈겨 쓴 일기 위에 빨간 펜으로 교정기호며 매끄럽지 못한 문장이 표시되어 있었다. 그러니까 그가 내가 쓴 일기의 교정지를 보내온 것이었다. 닷새도 아닌 5년 만에 나는 종이 뭉치를 세게 쥐었다. 그에 대한 기억들이, 격렬한 감정들이 홍수처럼 쏟아져 들어왔다. 아직도 내 집 주소를 기억하고 있었단 말이야? 종이 뭉치의 마지막 장은 내가 아니라 그가 휘갈겨 쓴 쪽지였다. 그의 필체로 적힌 빨간 글씨들이 눌어붙은 핏자국처럼 느껴졌다. 

- [오랜만입니다. 형이에요. 작가가 됐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축하합니다. 원래 이름에 '제'자가 들어갔던 것 같은데, 맞죠? 예명을 쓰나 봐요.]
누굴 놀리나. 아무리 예전 일이라도 그렇지 1년도 넘게 만났던 사람의 이름조차 제대로 기억 못 하다니.
[살이 많이 쪄서 사진으로는 못 알아봤어요.]
됐다. 두 번 볼 것도 없다. 그냥 찢어버려야지. 그런데 다음 문장.
[엄마 건강은 좀 괜찮으신지 모르겠네요. 그땐, 미안했어요. 여러모로 다.]

- 남자들은 도대체 왜 자꾸 내게 미안하다고 할까. 그냥 미안할 짓을 안 하면 될 일인데. 그는 여느 때처럼 일방적으로 자신의 용건을 늘어놓았다.
[그간 몇 번이고 연락을 할까 했지만 아무래도 사정이 있어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다 시간이 훌쩍 흘렀고 당연히 전화번호가 바뀌어버렸더군요. 이렇게 갑자기 연락해서 미안합니다. 제가 일정이 빠듯해서 그럽니다. 월요일에 급하게 출국하게 되었어요. 아주 오랫동안, 어쩌면 아예 안 돌아올지도 몰라요. 괜찮다면 이번 주 일요일, 예전에 약속했던 시간에 약속했던 장소에서 만나요. 꼭 주고 싶은 게 있습니다.] 

- 쪽지의 마지막에 전화번호가 적혀 있었다. 일요일이면, 이틀 뒤였다. 이 남자는 도대체 무슨 염치로 나에게 또 만나자고 하는 것일까. 주고 싶은 것 같은 소리 하고 앉았네. 우리 사이에 더 주고받아야 할 건 욕밖에는 없었다.

 

- 서류봉투째로 쓰레기통에 처넣고 싶은 마음과, 누구의 손도 닿을 수 없는 곳에 소중히 보관해놓고 싶다는 마음이 교차했다. 결국 서류봉투를 가방에 집어넣었다.

- 길을 걷는데 심장이 빠르게 뛰는 게 느껴졌다. 그로 인해 출간된 내 책 두 권이 놓여 있었다. 책은 병문안 온 손님들을 위한 것이었고, 정작 엄마는 내 책을 읽지 않았다. 그녀는 내 책뿐만 아니라 내가 쓴 모든 글을 강박에 가까울 만큼 철저히 읽지 않았는데, 노안 때문에 글씨가 아지랑이처럼 너울거려서 못 보는 것이라고 말은 하지만 실은 다른 이유가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 스무 살 때 대학 신문에서 주최하는 문학상을 받은 적이 있다. 당선되면 백만 원의 장학금을 주는 대회였는데, 마침 신문사에서 수습기자로 일하는 동기가 경쟁률이 낮다는 얘기를 해줬다. 언제나 술값이 모자랐던 그때의 나는 학력 콤플렉스가 심해 방송통신대에서 학사학위를 두 개나 따고 난 후 자식의 교육에 모든 것을 바치는 50대 여성의 이야기를 썼는데, 그것이 당시의 내가 쓸 수 있는 가장 가까운 얘기이기 때문이었다. 던지듯 출품했던 내 첫 소설은 생동감 있는 인물 묘사가 돋보인다는 평을 들으며 당선됐다.

 

- 엄마는 어디선가(아마도 모든 소문의 원흉인 교회에서) 그 소식을 주워듣고는 내 당선작이 나온 대학신문을 구해다 읽었다. 그리고 사흘 밤낮을 울었다.

"네 마음이 그렇게 아팠다니, 내가 그렇게도 너를 착취해 왔다니..."니..."

안방 문을 넘어올 만큼 큰 소리로 통곡을 하는 그녀에게 "엄마, 소설은 그냥 소설이야. 다 지어낸 거라고" 소리를 질러보았지만 들릴 턱이 없었고 그 후로 엄마는 내가 쓴 그 어떤 글도, 심지어는 바닥에 떨어진 리포트나 메모조차도 읽지 않는 몸이 되었다.

- [명희가 네 책 재밌다더라. 지금까지 나온 건 죄다 사 봤대. 걔가 우리 중에서 제일 똑똑하잖니. 숙대도 나오고. 네 글 보더니 애가 아주 착하게 큰 것 같대.]
지난 3년 동안 쓴 소설이라고 해봤자 술 먹고 물건을 훔치고, 군대에서 계간(鷄)을 하고, 성매매를 하고, 바람피우는 사람들 얘기가 전부였는데 도대체 뭘 보고 착하다는 건지. 두 번만 착했다간 사람도 죽이겠네. 아무튼 교회 아줌마들의 립서비스는 알아줘야 했다. 

- 엄마가 특유의 골골대는 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키더니 밤에 잠을 잘 자지 못했다고 했다. 항암 치료를 시작한 뒤로는 통증 때문에 잠을 자기도 힘들다며 연신 하품을 해댔다. 엄마가 하도 코를 골아서 엄마와 같은 방을 쓰던 환자가 두 명이나 병실을 옮겼다. 결국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벌써 세 달 가까이 2인실을 혼자 쓰는 중이었는데, 옆에 사람이 있을 때는 뭐가 마음에 안 든다 난리더니 막상 아무도 없으니 밤에 저승사자가 너무 쉽게 데려갈 것 같다는 둥 40년 차 기독교인답지 않은 샤머니즘적 발언으로 다채롭게도 사람을 미치게 했다.

- [입이 쓰다. 그냥 사탕이나 까줘.]
생전 단것을 먹지 않다가 암수술을 한 뒤로는 계속 박하사탕을 찾았다. 어떤 날은 밥도 먹지 않고 사탕만 물고 있어 억지로 뱉게 한 적도 있었다. 소화기관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해서 그런 것이라고 했다. 나는 병실에서 풍기는 병자 특유의 콤콤한 냄새를 감추기 위해 이불과 침대에 천연 성분의 섬유탈취제를 뿌렸다. 

- 5개월 전 엄마의 암이 재발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에도 나는 놀라지 않았다. 수년 동안 잠잠하기는 했으나, 언젠가 벌어질 일이라고 생각했었다. 비극도 희극도 너무 자주 반복되면 하나도 좋을 게 없어서 이 모든 패턴이 지긋지긋하기만 했다. 나는 장례 말고는 암환자의 가족이 겪을 수 있는 거의 모든 일을 겪었다. 어쩌면 이제 겪어보지 않은 마지막을 준비해야 될 때가 온 것일지도 몰랐다. 

- 스피노자의 <에티카>를 중심으로 롤랑 바르트의 <밝은 방>과 <사랑의 단상>을 부교재로 삼아 인간에게 존재하는 감정을 나노 단위로 쪼개 분석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첫 수업 때 '재야의 철학자'라고 자신을 소개한 강사는, 강의력이 부족한 많은 강사들이 그러하듯 수강생들에게 자기소개를 강요했다. 인권단체에서 주최하는 수업이라 그런지 열다섯 남짓의 수강생 중에 반수 정도가 사회단체 활동가였다. 그들은 (아무도 묻지 않았는데) 자신이 속한 단체나 믿고 있는 신념, 성적 지향 같은 것을 밝혔고, 내 차례가 다가왔을 때 나도 중도좌파에 남성 호모섹슈얼, 이라고 고백해야 할 것 같은 압박감에 살짝 사로잡혔으나, 그냥 본명을 말하고 대학생이라고 소개했다. 조바람님, 제임스님, 샐리님, 맙소사님, 가을의 전설님... 국적과 출처를 알 수 없는 활동명과 닉네임이 줄줄 이어졌다. 모두가 소개를 마칠 때쯤 한 남자가 문을 밀고 들어왔다. 키가 몹시 커 천장에 닿을 듯했고, 그래서 구부정하게 허리를 숙인 남자 그가 내 옆자리에 앉아 가방을 내려놓고 후드 집업을 벗었다. 검은 후드 집업과 태극기가 오버로크된 이스트팩 백팩은 모두 기십년은 넘은 듯 낡아 있었다. 뛰어왔는지 그의 몸에서 피어오른 더운 기운이 내 얼굴로 확 끼쳐 들었다. 그의 목과 팔목, 손가락까지 길게 문신이 이어져 있는 게 보였다. 파충류의 꼬리 같은 것. 저 무늬를 타고 올라가면 어떤 모양이 그려져 있을지, 문신의 끝이 어디일지 궁금해졌다. 그의 몸 구석구석을 훑다 보니 나도 모르게 침을 크게 삼켜버렸다. 갑자기 남자가 내 옆에 바싹 다가왔다. 귀부터 발끝까지 털이 곤두서는 게 느껴졌다. 그가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저, 죄송한데, 커피 한 모금만 마실 수 있을까요?]

- 남자는 내 대답을 듣기도 전에 내 앞에 놓인 일회용 커피잔의 뚜껑을 열고 커피를 마시기 시작했다. 남자의 움직임이 슬로모션처럼 한 장면 한 장면 의미심장하게 다가왔다. 남자는 (아마도 몹시 뜨거웠을) 내 시선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바닥에 가라앉아 있던 얼음까지 와그작와그작 씹어 먹었다. 자기소개의 마지막 순서였던 남자는 자신을 '창작하는 사람'이라고 짤막하게 소개했다. 작곡을 하는 것도, 미술을 하는 것도, 글을 쓰는 것도 아니고 창작을 한다는 그 문장이 이가 시릴 정도로 쿨해서 나는 단번에 그에게 불길한 관종의 기운을 느끼고야 말았다(예감은 언제나 틀리는 법이 없었다). 

- 수업이 끝나고 난 후 남자가 내게 다가와 커피를 사주겠다고 했다. 아까 마신 커피에 대한 보답을 하고 싶다는 이유에서였다. 처음 보는 사람의 음료를 허락도 없이 마시질 않나, 남자의 말투며 눈빛 같은 게 아무래도 낌새가 좋지만은 않아, 나는 손사래를 쳤다. 남자는 꼭 은혜를 갚고 싶다고 거듭 말했다. 그와 아카데미 근처의 스타벅스로 향하게 된 것은 도의적인 차원에서 그의 간곡한 부탁을 거절할 수 없어서,는 아니었고 실은 그가 너무너무 내 스타일이기 때문이었다. 저음에 또렷한 목소리, 툭 튀어나온 눈썹 뼈에 속내를 종잡을 수 없는 작은 입술, 선크림 따위 생전 한 번도 바르지 않은 듯 군데군데 기미가 낀 피부까지. 성격은 이상한 것 같지만 그냥 얼굴이나 실컷 보다 와야지 하는 마음이 불길한 예감을 뛰어넘어버렸다(그러는 게 아니었다). 

- 남자와 계산대에 나란히 서고 보니 나보다 머리통 하나 정도가 훌쩍 컸다. 누군가를 올려다보는 것은 평균보다 조금 더 큰 키인 내게는 좀체 없는 일이었다. 우리는 나란히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받아 들고 자리에 앉았다.

- 대학노트를 일기장 삼아 그의 일상을, 나아가 그를 통해 변화하는 나 자신의 감정을 기록하고 탐구하기 시작했다.
기록의 양이 늘어날수록 나는 그에 대해 더 알 수 없어졌다.

- 그는 자신이 무슨 일을 하는지 극도로 말을 아꼈으나, 어쨌든 출퇴근을 하지는 않았고, 만나는 사람도 거의 없어 보였다. 그는 시시때때로 별다른 용건이 없는 문자를 보내왔으며(오늘은 산책하기 좋은 날씨입니다), 노인들처럼 암에 좋은 음식이나 면역력을 높여주는 식품에 대한 기사를 보내오기도 했다. 일단 대화가 시작되고 난 후엔 하나도 특별할 것이 없는 자신의 일상이며(오늘은 칸트를 읽고 길고양이에게 밥을 주었습니다) 모친의 알코올 의존증 치료 상황과(어머니가 병원을 탈출해 술을 마신 뒤 택시기사와 싸움을 벌였습니다), 하다못해 매일 별다를 게 없는 1인분의 식사까지 찍어 보냈다(고등어찜을 먹었습니다). 나는 그런 그의 메시지에 간신히 아, 네, 힘드시겠어요, 밥 맛있게 드세요, 와 같은 하나 마나 한 대답밖에 할 수 없었다. 그런 쓸데없는 말이나마 끊어질라치면 그는 괜히 웃는 이모티콘이며 뚱뚱한 고양이 스티커 같은 것을 보내 어색한 대화를 이어나가려고 했다. 그렇게 한참 동안 의미 없는 메시지를 주고받다 보면 갑자기 바람 빠진 풍선처럼 모든 게 다 부질없어지곤 했는데, 그가 나에게 (어떤 의미에서든) 관심이 있는 게 아니라 단지 벽에 대고서라도 무슨 얘기든 털어놓고 싶을 만큼 외로운 사람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나는 그런 외로운 마음의 온도를, 냄새를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때의 내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으니까.

- 토요일 오후, 요양병원에서 힐링 요가 수업을 마친 엄마가 산책을 가자고 나를 채근했다. 평소와 하나도 다를 게 없는 산책길이었으나 그 길을 걷는 내 마음의 온도는 평소와는 확연히 달랐다. 그가 보내온 종이 뭉치가 내 일상을 통째로 바꿔놓았다. 나는 마치 5년 만에 돌아온 기차를 잡아탄 것처럼 초 단위의 감정기복을 반복하고 있었다. 도저히, 아무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  불편했지만 그의 삶을 알게 되는 것은 좋았다. 숱한 밤 동안 그의 얘기를 하염없이 듣고 싶었다. 그래서 내 머릿속에서 구멍이 숭숭 뚫린 채 자리한 그라는 존재의 퍼즐을 완벽히 맞추고 싶었다. 내가 모르는 그의 인생, 내가 모르는 그의 습관, 내가 모르는 그의 호흡까지도 오롯이 재구성해 내 것으로 만들고 싶었다.

- 그토록 치열한 나의 내적 고민 따위는 알지 못한 채 그는 내 다리에 쥐가 날 때까지 늘어지게 자다가, 누군가 자기 이름이라도 부른 것처럼 화들짝 눈을 떴다. 한참을 숨을 고르던 그에게 말했다.
[침 흘린 거 알아요?]
그는 누구보다도 귀여운 얼굴로 입을  닦았다. 느릿느릿하게 일어나 (아마도 그의 어머니가 사들였을) 조형적으로 완벽한 나이트 스탠드를 켰다. 은은한 조명이 그의 몸을 비추었고 나는 그의 몸을 덮고 있는 문신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 손가락 끝에 그려진 뾰족한 날은 꼬리가 아니라 뿌리였다. 그의 팔다리를 타고 가슴과 등까지 커다란 나무가 그려져 있는 거였다. <어린 왕자>의 한 페이지에서 본 듯한, 작은 행성을 뒤덮는 규모의 나무였다.
 
- [바오바브나무인가요. <어린 왕자>에 나오는 그건가.]

[아뇨. 생명의 나무예요.]

[그게 뭔데요?]
[별 뜻이 있는 건 아니고요, 제가 공부했던 우주의 구성 원리를 담은 겁니다.]

- 남자는 우주가 하나의 커다란 나무와 같다는, 동서양의 성수(聖樹) 신화를 조합해 만든 개똥 같은 철학을 읊으며 눈에 보이지 않는 계절이나 죽음, 재생 같은 단어를 떠들어댔으나, 내가 볼 때는 그냥 소싯적에 좀 놀았던 흔적을 딴은 그럴듯해 보이는 그림으로 덮은 것 같았다(그리고 별로 그럴듯하지도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커다란 나무 사이사이에 흐릿하게 귀신의 형상과 빨간 장미, 연꽃과 용이 그려져 있었는데, 아무래도 그쪽이 조금 더 오래된 미완의 이레즈미 흔적으로 보였다. 

- [그냥 이레즈미 문신 위에 나무를 덧칠한 거 아니에요?]
[우와, 귀신이네. 어떻게 알았어요?]
[눈이 있으니까요...]

- [영 씨는, 내가 어떤 세상을 살아왔는지 상상도 못 할 거예요.]
그러는 당신도 내 세상을 알지 못하잖아요. 알고 싶어 하지도 않고.

 

- 목구멍까지 올라온 그 말을 하지는 못했다. 그런 종류의 말이 당시의 우리에게는 꽤 치명적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것은 그와 나의 육체적 거리를 더욱 멀어지게 만들 뿐이기에.

- 내가 그에게 빠져 있던 시간 동안 엄마는 '암의 완치'라는 목표에 사로잡혀 특유의 성실성을 발휘하고 있었다. 두 번의 크고 작은 수술을 거치는 동안 엄마는 (자신의 머릿속에서만큼은) 세상 누구보다도 뛰어난 암 석학이 되어 있었다. 시중에 있는 암 관련 서적을 닥치는 대로 독파했으며 인터넷 커뮤니티에 가입해 암과 관련된 최신 정보들을 업데이트했고 유방암은 삼성의 누구, 자궁암은 아산의 누구, 간암은 누구 하는 명의의 명단을 줄줄 꿰게 되었 ...
 
- 한창 운동을 하던 시절 자신이 경찰의 블랙리스트에 올라 있어서 통화 내용을 감청당하고, 미행까지 당해봐서 잘 알고 있다고 했다. 이야기가 거기까지 흘러가자 나는 정말 이게 뭔 소리인가, 하는 기분에 사로잡혔고, 그러고 보니 그가 카카오톡이나 다른 국내 메신저가 아니라 오직 아이메시지로만 대화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는 해외에 서버가 있는 메신저들이 안전하다고 했다. 그러고는 덧붙였다.
[요즘도 누군가 자꾸만 저를 감시하는 거 같아서 불안해요.]
[요즘도 그런 사람들이 있어요?]
그는 세상 누구보다 진지한 표정으로 덧붙였다.
[지금 이 순간에도 도청을 당하는 사람이 있어요. 사회운동을 하다 죽는 사람이 있고요.]

- 네, 알죠. 지금 이 순간에도 사람들이 죽고, 투쟁하고 그러죠. 그건 알죠.
그런데 그게 형인지는 잘 모르겠어요. 못 믿겠다는 것은 아니고, 안 믿겠다는 것도 아닌데, 다만 형이 그렇게 중요한 사람인지는 잘 모르겠어요. 형이 과거에 학생회장이었는지, 뭐 얼마나 대단한 운동을 했는지는 잘 모르지만 지금은 그냥 하루 종일 방구석에 처박혀서 저자 욕이나 하며 맞춤법을 고치는 별 볼 일 없는 남자잖아요. 나만큼이나 보통의 사람이잖아요. 형은 그냥 나한테나 중요한 사람인 거 같은데, 그래서 나한테 이런 헛소리를 할 수 있는 거겠죠. 압구정동 출신으로 학생운동에 투신해 도청을 당하는 20대를 살았으며 지금은 죽은 철학자의 글을 읽고 고치는 당신의 뇌는 도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걸까. 엉망진창 낙서장이 되어버린 당신의 등과도 꼭 닮아 있지 않을까. 그런 당신을 좋아하는 나는 어떻고. 뭐 이런 말들을 정신없이 쏟아놓고 싶었지만 하지 않았고, 다만 그의 입술에 키스를 해버렸다.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게.

- 그해 가을의 올림픽공원은 전에 없이 아름다웠다.

- [체기가 올라오더라고. 얼마나 속이 상하던지. 그땐 인생이 다 끝난 것 같은 기분이었는데, 여직 살아서 이러고 있네.]
[그 시절에도 꽃배추가 있었구나.]
[있지. 요즘 있는 건 그때도 다 있었지.]
나는 언제나 있는 것들을 생각하며 엄마를 부축해 병원으로 돌아갔다.

- 그 가을의 끝자락, 출판사에 외주 원고를 넘기고 왔다는 그와 만났다. 홍대의 실비집에서 술을 마시다 조금 싸웠는데, 그는 술을 절제하지 못하는 내 모습이 누군가(아마도 자신의 엄마)를 떠오르게 한다고 했다. 무슨 얘기를 하든 자신의 학생운동 시절이나 모친에 대한 얘기로 귀결되는 게 어이가 없어서, 형은 대화의 중심이 자기 자신이 되지 않으면 견디지 못하는 게 분명하며 마더 콤플렉스까지 있는 것 같다고 톡 쏘아버렸더니, 그건 너도 마찬가지라고 응수해 왔다. 틀린 말은 아니었고, 틀린 말이 아닌 소리들이 그러하듯 서로에게 꽤 치명적인 상처를 주었으며 결국 큰 싸움으로 번졌다. 당초에 예상했던 화기애애한 술자리는 온데간데없고 밤늦도록 서로에게 못할 소리를 해버리고야 말았다. 그렇게 감정이 상한 채로 술집에서 일어난 우리는 택시를 잡기 위해 거리로 나왔다. 사람들이 얼굴에 피칠갑을 한 채 돌아다니고 있었다. 슈퍼히어로 분장을 한 사람들도, 죽은 군인의 옷을 입은 사람들도 있었다. 핼러윈이라고 했다. 젠장, 기분도 좆같은데 택시 잡기까지 힘들겠군, 생각하고 있는데 그는 상한 것을 먹은 듯한 표정으로 미제의 명절인 핼러윈을 반대한다고 말했다. 기원도 모른 채 서양의 명절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세태에 대해 논평했고 나는 다 지겨워져서 그냥 입을 다물었다. 우리는 누구보다도 신나 보이는 사람들 사이를 요리조리 피해 다녔다. 그러다 누군가 내 팔을 잡았다. 고개를 돌려 보니 좀비 복장을 한 남자가 자신과 친구들의 사진을 찍어달라고 했다. 나는 웃으며 그의 폴라로이드 카메라를 받아 들고 좀비며 드라큘라, 원더우먼 무리의 사진을 찍어주었다. 그는 우리의 사진도 찍어주겠다며 둘이 나란히 서라고 했다. 

- 오직 단 하나의 질문이 내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는 누구이며, 우리는 무슨 관계일까.

- 그와 만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의 삶을 알아갈수록 그가 나와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당연했다. 애초에 그는 나와 뭔가를 맞출 생각이 없었고, 다만 아무도 없는 칠흑 같은 밤마다 순진한 척,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는 어린애인 나에게 뭔가를 가르쳐주고 나와 몸을 섞는 일을 즐거워했을 뿐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언제나 나를 바꾸고 가르쳐야 할 대상으로 여겼으나, 불행히도 나는 누군가에 의해 쉽게 바뀌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런 생각에 젖어 잠을 이루지 못하는 밤이 많았다.

 

- 꼬박 일주일 만에 그에게서 문자가 왔다. 
[잘 지내지요?]
어이가 없을 정도로 쉽고 일방적인 연락이었다. 화가 나기보다는 왈칵 반가워하는 내 마음이 싫었지만 그 마음을 멈출 수는 없었다. 눈물이 고였다. 그가 내가 알지 못하는 미지의 세계라는 것을 알게 될수록 나는 더 그가 알고 싶어졌고, 그를 가지고 싶어졌다. 숨 쉴 수도 없을 만큼 그를 옥죄고 싶어졌다. 내가 아니어도 상관없는 그에게 꼭 ...

- 거미줄이 너무 많아 온몸으로 거미줄을 헤치며 302호의 문을 두드렸다. 한참을 부서질 듯 두드려봐도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복도로 난 창문을 통해 집 안을 한참 동안 들여다보던 우리 모자는 결국 아빠(와 그의 내연녀)의 색출에 실패하고 다시 마티즈에 올라탔다. 차를 돌려 집으로 향하려는 순간, 아파트 뒤편의 공터에서 아빠를 발견했다. 
[엄마, 저기 봐.]
아빠는 자그마한 중년의 여자와 함께 배드민턴을 치고 있었다. 아빠와 아빠의 내연녀는 내가 상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서로 얼굴이 닮아 있었고, 짝이 맞는 퍼즐처럼 조화로워 보였다. 심지어 아빠는 엄마와 함께 살 때는 한 번도 보인 적이 없던 고요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엄마와 내가 선량한 두 남녀 주인공을 처단하러 온 악인이나 빚쟁이처럼 느껴질 지경이었다.

 

- 그때 그들을 바라보던 엄마의 표정을 나는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세상천지가 다 멎어버린 듯한 그 얼굴은 마흔여덟 가지의 감정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어떤 것임이 분명했다. 절망이나 고통 따위로는 단순화할 수 없는 감정의 결을, 아빠와 아빠의 내연녀와는 조금 다른 형태의 고요를, 뭔가를 꾹꾹 눌러 담는 형태의 감정을 나는 그때 처음으로 배웠다. 

- 수술을 마친 후 엄마는 복부에 피 주머니와 관을 줄줄이 꽂고서도 새벽 다섯 시에 득달같이 일어나 침대에 앉았다. 협탁에 촛불을 켜놓고 30분이 넘도록 손을 모아 기도를 했다. 배며 다리가 접히는 게 환부의 회복에 좋을 리 없는데도 구태여 그런 습관을 반복했다. 기도를 마친 후에는 침대의 식탁을 펴놓고 하루에 몇 장씩 성경 구절을  내려갔다. 나는 그녀의 집요한 필사가 구도자의 고행과 닮아 있다는 생각을 했다. 본의 아니게 일어난 불행에 대해 울고불고 난리를 치고 머리를 쥐어뜯고 소리를 지르는 대신 모나미 볼펜으로 공책에 꾹꾹 성경을 눌러쓰는 방식을 택한 것이겠지. 마취조차 거부했던 엄마에게는 그것이 유일한 삶의 방편이었기에 그녀의 필사는 일종의 호흡처럼 느껴졌다. 

들숨에 한 글자, 날숨에 한 글자.

 

-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내가 지난 시간 동안 앓았던 열망과도 닮아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상에 대한 열망? 대상에 사로잡혀 있는 자기 자신의 모습에 대한 열망?
그래, 한없이 나 자신에 대한 열망.
예수를 사랑하고 누구보다 열렬히 삶에 투신하는 자신에 대한 열망. 어쩌면 한때 내가 그를 향해 가졌던 마음, 그 사로잡힘, 단 한순간도 벗어날 수 없었던 그 에너지도 종교에 가까운 것일지 모르겠다. 새까만 영역에 온몸을 던져버리는 종류의 사랑. 그것을 수십 년간 반복할 수도 있는 것인가. 그것은 어떤 형태의 삶인가.
사랑은 정말 아름다운 것인가. 

- 한 번은 오줌줄이 빠진 걸 모른 채로 그러고 앉아 있길래, 부아가 치밀어 소리를 쳤다. 도대체 왜 그러냐고, 그런다고 뭐가 달라질 것 같냐고. 그게 엄마 인생에 무슨 도움이 될 것 같냐고.
엄마는 기적이라는 단어를 썼다. 꼬박 천일 동안 성경을 옮겨 쓴 자매님에게 치유의 은사가 내려졌다고. 자신 역시 그런 기적을 겪게 될 것이라고 했다. 엄마가 직접 아는 사람은 아니고 권집사의 질부에게 일어난 일이라고 했다. 권집사의 질부에게 일어난 기적이라니.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분쟁이 끝나는 것만큼이나 멀고 아득하게 느껴졌다. 자신의 경우 굳이 기적을 바라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주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삶을 살고 싶다고도 덧붙였다. 완강한 그녀 앞에서 나는 간호사를 호출해 오줌줄을 다시 달고 시트를 갈아달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 그 시절, 오로지 통증과 병만이 남은 그녀의 삶에서 기도하고 성경을 옮겨 쓰는 활동 말고는 다른 어떤 일도 의미가 없어 보였다. 실제로 그랬을 것이다. 그녀는 거울을 보지도, 누군가와 연락을 하지도 않고 그저 자기 자신만 남은 채로 묵묵히 문자를 써 내려갔다. 나는 그것을 (동성애라는) 악습을 끊지 못한 나에 대한 시위, 혹은 그토록 열심히 살아온 자신에게 내린 병마에 대한 저항, 삶에 대한 열정, 혹은 그 모두가 섞인 절대적인 존재에 대한 항의의 메시지로 읽었다. 나는 결국 엄마에게 그에 대해, 사진에 대해 말하지 못했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 일요일, 그와 연락이 되지 않았다.

 

 

- 내 날것의 마음을 던졌다.
보름 만에 그에게서 문자가 왔다.
[작가가 돼보는 게 어때요.]
다시 생각해 달라는 내 물음에 대한 답은 없었다.

- 그 사람은 끝까지, 정말이지 끝까지 자기가 하고 싶은 말만 했고, 내게 뭔가를 가르치려 들었다.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하다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나를 위한 선택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눈을 감고 그의 번호를 지웠다. 눈꺼풀에 인두로 지져놓은 것처럼 그의 번호가 선명히 떠올랐지만 언젠가는 이것조차 기억에서 지워지리라 생각했다. 

- 결국에 우리는 함께 따뜻한 파스타 한 접시조차 제대로 먹지 못했다.
대신에 나는 농약을 마셨다. 차가운 아메리카노에 농약을 부으며, 이 커피조차도 그에게는 미제의 산물이자(이름이 아메리카노이기까지 하니) 제3세계 노동착취의 결과물로 보일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게 웃겨서 한참을 웃다가 눈을 감았다. 눈물이 나지는 않았다. 

- 다시 눈을 떴을 땐 중환자실이었다. 공교롭게도 엄마가 입원해 있던 아산병원이었다. 위세척을 마친 뒤 혈액투석을 하고 있는데 발치에 엄마가 서 있는 게 보였다. 내가 바랐던 얼굴은 아니었다. 내가 아는 우리 엄마는 이런 상황에서 소리를 지르며 나를 때리거나 냅다 울어버리거나, 주님으로 시작하는 기도의 형식을 띤 한탄을 시작하거나 일단은 뭐가 됐든 아침 드라마처럼 감정을 터뜨리고 보는 사람이었는데, 그날의 엄마는 그저 나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말했다.
[너무 애쓰지 마. 어차피 인간은 다 죽어.]

- 그게 엄마가 할 말이냐고 묻고 싶었다. 왜 이렇게 됐는지 묻는 게 순서가 아니냐고, 사실은 내내 내게 묻고 싶은 말이 있지 않았냐고, 물어봐야만 할 게 있지 않냐고 묻고 싶었다. 당장이라도 묻고 따지고 싶었지만 목구멍으로 인공호흡기가 삽관돼 있어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 한동안은 사람들이 사랑이라는 말을 하는 게 싫었다.

- 010 81로 시작하는 그의 번호 뒷자리는 이제 기억에서 희미해져 버린 지 오래였으나, 나는 내내 진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혀 있었다. 망각조차도 내게는 일종의 부자연스러운 상황으로 진입하는 것에 불과했다. 그동안 나는 도대체 무엇을 바라고, 무엇을 기다리고, 무엇을 꿈꾸었던 것일까.

- 기이하게 생긴 조각들이 모여 있는 잔디밭의 벤치에 앉았다. 5년 전, 그와 만나기로 했던 그 장소, 조각공원이었다. 그러지 않으려 하면 할수록 계속 뒤에 뭔가가 밟혔다. 고개를 돌리면 언제고 그가 서 있을 것만 같은 그런 느낌. 바보같이 왜 이러는지 나 자신조차 나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자 문득 어깨에 멘 가방 속에 두꺼운 봉투가 있다는 것이 떠올랐고, 그것이 종이 뭉치가 아니라 벽돌이나 아령처럼 무겁게만 느껴졌다. 

- 그와 헤어지고 나서도 숱하게 많은 남자들을 만났었다. 가랑비에 아스팔트가 젖는 사랑, 뜨거운 사랑, 하룻밤 만에 사그라든 급한 사랑... 숱한 종류의 감정과 맞닥뜨리면서도 그만큼 깊게 빠져든 대상은 맹세코 없었다. 그보다 더 나은 사람들, 객관적인 기준으로 그보다 훨씬 더 훌륭한 사람들을 만나도 언제나 변죽만 울리는 관계들을 이어갔다. 그가 나의 가장 뜨거운 조각들을 가져가버렸다는 사실을, 그로 말미암아 내 어떤 부분이 통째로 바뀌어버렸다는 것을 후에야, 아주 많은 시간이 지난 후에야 알게 되었다. 

- 엄마가 갑자기 벤치에서 일어나 언덕으로 천천히 걸어 올라갔다. 나도 엄마를 뒤따라 걸었다. 낮은 언덕의 꼭대기까지 간 엄마는 잔디밭에 털썩 주저앉았다. 가을 저녁의 올림픽공원. 마른 낙엽의 향긋한 냄새가 내 코까지 전해지는 것 같았다. 나도 가방을 벗어던지고 엄마의 앙상한 허벅지를 베고 누웠다. 마치 열 살짜리 꼬마로 다시 돌아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엄마, 왜 맨바닥에 그냥 앉아. 잔디밭에 앉으면 유행성출혈열 걸린다고 엄마가 그랬잖아.]

- [얘좀 봐. 또 이런다. 내가 언제 그렇게 심한 말을 했다 그래.]
[진짜야. 엄마는 잘 기억 못 하잖아. 난 다 기억해. 그때 엄마가 그렇게 말해서 클 때까지 잔디밭을 엄청 무서워했다고. 풀에 닿지 않으려고 언제나 보도블록 쪽으로만 걸어 다녔어.]
[정말? 나도 참. 애한테 별소리를 다 했구나.]

- 노을이 지기 시작했다. 우리 모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잔디밭에 앉아 한동안 그것을 바라보았다. 엄마가지는 태양에서 시선을 거두지 않은 채 말했다.
[아름답구나. 저무는 것들은.]
[그런가?]
[아들아, 나는 내가 되게 대범한 편이라고 생각했다.]
[갑자기 뭔 소리야.]
[예전부터 내가 좀 남자 같고 그랬잖니. 간도 크고 후회 같은 건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너를 낳고 보니까 그게 아닌 걸 알겠더라. 아기 때, 너를 안고 있으면 막 지갑이 뚱뚱한 것처럼 배가 부르고 행복하고 그랬어. 그래서 자꾸만 겁이 나더라. 다치거나 부서지거나 없어질까 봐.]

- [너 유치원 다닐 때였나. 한번은 너를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어. 애가 유치원이 끝난 지 한참이나 지났는데 집에 오지 않더라. 전화해 보니 유치원 버스에도 타지 않았다고 하고. 친구 집에 간다고 했대. 난리가 났지. 신발만 대충 꿰어 신고 나와서 유치원에서부터 허겁지겁 너를 찾는데 멀리 네 뒷모습이 보였어. 나는 가만히 네 뒤를 따라갔다. 네가 두 발쯤 걷다 자꾸만 멈춰 서기에 뭐 하나 봤더니, 거리에 있는 모든 가게 앞에 서서 일일이 들여다보고 관찰하고, 때로는 만져도 보고 그러고 있더라. 호기심이 가득한 얼굴로. 그 모습을 뒤에서 보는데 화가 나는 게 아니라, 덜컥 무섭더구나. 네가 더 이상 내가 아는 아이가 아니라는 생각에 네가 보고 싶은 것을 보고, 네가 걷고 싶은 길을 너의 속도로 걷는 게, 너만의 세계를 가진 아이라는 게 그렇게 섭섭하고 무서웠다.] 
[그때부터 산만했나 봐, 나.]
[그래서 너를 많이 괴롭혔던 것 같네. 간이 작아서. 너를 간장종지처럼 좁은 내 품 안에 가둬놓고 싶었나 보다.]

엄마는 반쯤 잘려나가고 없는 간 부분을 만지며 씨익 ...

- 뇌가 없는 것처럼 마구잡이로 달리는 나의 문장. 그러다 어디선가 타는 냄새가 훅 끼쳐 들면 빨간 마티즈처럼 끝을 모르고 뻗어나가던 나의 문장들이 잠시 멈춰 섰다.

- 그녀에게 나의 글쓰기가 어떤 의미가 될 것인가 생각하면 언제나 낭떠러지 아래를 바라보는 것처럼 막막한 기분에 사로잡힌다. 나는 벌써 서른한 살이고, 성인이 된 지도 10년이 넘었고, 그녀가 내 삶을 지연시키는 존재가 아니라 그저 누구보다도 성실히 자신의 삶을 살아내고 있는 한 명의 인간일 뿐이라는 사실을 잘 알 정도로 성장했다. 그녀는 그저 그녀 자신으로서 존재하고 있을 뿐 나를 옥죌 의도가 없고, 나 역시 그저 나로 존재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똑같은 인간에 불과하다. 다만 운이 나빴을 뿐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렇게 된 것은 우리의 잘못이 아니며 암이나 곰팡이처럼, 지구의 자전이나 태양의 흑점처럼 너무나 자연스러운 우주의 현상이다. 이런 것들을 다 알고 있으면서도 나는 자꾸만 그녀가 내 모든 문제들의 원인인 것만 같았다. 살가죽만 남은 채 다 죽어가는 사람을 앞에 두고 그런 생각을 하게 되는 나 자신이 혐오스럽지만 그 생각을 멈출 수는 없었다. 

- 온몸의 피를 쏟으며 죽어갈 것을 걱정하는 열한 살의 나와 엄마의 얘기를 써서 돈을 벌었던 스무 살의 나, 그리고 내게 친절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들려주고자 이렇게 원한에 사로잡혀 글을 쓰고 있는 서른한 살의 내가 오늘 이 순간 엄마의 뒤에 앉아 있었다.

- 석양을 바라보는 엄마의 뒷모습만큼은 단단하고 아름다웠던 예전의 모습과 별반 다를 바 없어 보였다. 그 모습을 보니 불현듯 엄마가 그간 내가 발표한 소설을, 글을 모두 읽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다. 그렇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었다.

 

- 엄마가 감상에 젖은 목소리로 말했다.
[너를 안고 있으면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았는데.]

병이라는 것은 인간을 통째로 바꿔놓는다. 누구보다도 강건하고 언제나 앞만 보고 걷던 그녀가, 간지러운 소리라고는 할 줄을 모르던 그녀가 노을을 보며 저런 소리까지 하게 만든다. 그래서 자꾸만 나도 뭔가를 털어놓고 싶게 만들어버린다.
[엄마 있잖아. 그런데...]
나도 모르게 입을 뗐는데, 다음 말을 차마 내뱉을 수가 없었다. 할 말이 너무 많았고 무슨 말이든 하고 싶었는데,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그러니까 말이야, 엄마 있잖아,]

 

- 단 한 번이라도 내게 사과를 해줬으면 좋겠어. 그때 내 마음을 짓밟은 것에 대해서. 나를 이런 형태로 낳아놓고, 이런 방식으로 길러놓고, 그런 나를 밀어내고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곳에, 무지의 세계에 놔두기로 결정한 것에 대해서, 제발 사과를 해줬으면 좋겠어. 그게 엄마의 본심이 아니었다는 것도, 누군가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지만, 알지만, 나는 엄마를, 당신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것 같아.

- [뭘?]
[정말 미안한데, 아마도 영영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아.]

[얘가 갑자기 뚱딴지같이 뭔 소리래.]

갑자기 눈물이 날 것 같아서 얼른 고개를 돌렸다.
[나 화장실.]
자리에서 일어나 가방을 멨다. 그리고 얼른 화장실 쪽으로 뛰어갔다. 정신을 차려보니 습관처럼 장애인 칸에 들어와 있었다. 나는 좌변기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가방을 벗었다. 그 속에서 서류 뭉치를 꺼내 손에 쥐었다. 종이 위에 삐뚤삐뚤한 내 글씨와, 그의 빨간 글씨가 겹쳐 보였다. 손에 들린 종이 뭉치를 두 번에 나눠 찢었다. 종잇장 하나하나를 낱낱이 찢어 좌변기에 집어넣었다. 글씨가 물에 닿아 빨갛게 번졌다. 물을 내렸다. 종이들이 파문을 그리며 검은 구멍으로 빨려 들어갔다. 

- 그를 안고 있는 동안은 세상 모든 것을 다 가진 것 같았는데.
마치 우주를 안고 있는 것처럼.

- 눈물이 날 것 같았지만 울지 않았다. 그동안 울 시간은 충분했다. 종이가 모두 없어질 때까지 물 내리기를 반복한 나는 숨을 고른 뒤 빈 가방을 다시 둘러멨다. 화장실 밖으로 나왔다.  
엄마는 아예 잔디밭에 드러누워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늘을 보는 그녀의 표정은 누구보다도 고요하고 평화로워 보였다. 어쩌면 내 앞에서 노을을 바라보는 저 사람도, 45킬로그램에 쉰아홉 살의 그녀도 나와 비슷한 마음을 느끼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나라는 존재로 말미암아 인생이 예상처럼, 차트의 숫자처럼 차곡차곡 정리되지는 않으며, 오히려 가장 그러지 말았으면 하는 방향으로 홀러 가버릴 수도 있다는 것을. 핏줄이 연결된 것처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고 믿었던 존재가 실은 커다란 미지의 존재일 수도 있다는 것을. 그래서 인생의 어떤 시점에는 포기해야 하는 때가 온다는 것을. 그러니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모든 생각을 멈추고, 고작 지고 뜨는 태양 따위에 의미를 부여하며 미소 짓는 그녀를 그저 바라보는 일. 그녀의 죽음을 기다리는 일. 그녀가 아무것도 모른 채 죽어버리기를 바라는 일뿐이다.

<우럭 한점 우주의 맛>

 

- 집으로 돌아온 우리는 세 번째 법칙을 지켰다. 비록 성공적이지는 못했지만.

- 규호는 조용히 빼고 해도 돼?라고 반말로 물었고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규호가 쑥스러운 듯 말했다.
[미안해요. 끼고 하면 자꾸 죽어서.]
[(그거 발기부전 환자들의 흔한 변명이라던데.) 괜찮아요. 제가 할까요?]
[그건 좀... 제가 잘 못해서.]

- 눈을 뜨니 규호가 부엌에 서 있는 게 보였다. 안 쓴 지 6개월은 넘은 전기밥솥이 돌아가고 있었고, 집에 있는지도 몰랐던 조미료며 간장이 나와 있었다. 가스레인지에 뭔가를 끓이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수증기가 자욱한 내 좁은 방을 보며, 약간 환상에 빠진 듯한 기분에 젖어 있었다. 규호는 내가 일어난 것을 발견하고는 숙박비를 대신해 밥을 해주겠다고 말했다. 나는 침대맡에 접어놓았던 작은 상을 펴 물티슈로 먼지를 훔쳤다. 닦아도 닦아도 먼지가 계속 나오는 게 참 우리 집다웠다. 그사이 규호는 다 끓인 오뎅탕이며 처음 보는 밑반찬 같은 것을 상 위에 올려놓았다. 반찬은 다 어디서 난 거냐고 물으니, 요 앞마트에서 사 왔다고 했다. 자세히 보니 싱크대에는 음식물쓰레기 종량제 봉투가 걸려 있고, 욕실 앞에는 못 보던 발깔개까지 깔려 있었다. 이 사람의 적응력은 도대체 뭘까. 민들레씨도 이렇게 신속히 뿌리내릴 수는 없지 않을까. 나는 묵묵히 그가 끓여준 조미료 맛의 국을 퍼먹었다.

 

- 규호가 내게 물었다. 
[이사 온 지 얼마 안 됐나 봐요. 커튼도 아직 안 다시고.]

[2년 됐어요. 귀찮아서 커튼이며 침대 시트며 사놓고 그냥 다 처박아놨어요.]
[어떻게 사람이... 그럴 수가.]

- 왜 다 보여줘.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이쪽 생활을 하면서 자기 자신에 대해서 포장하지 않고 한없이 진실에 가깝게, 정말로 투명하게 치부까지 다 드러내는 사람은 규호가 처음이었다. 게다가 남의 말은 하나도 안 듣게 생겨서 묘하게 시키는 대로 다 하는 구석이 있는 애였다. 나는 그런 규호를 보며 조금 특별한 기분이 들었다. 아무 대답도 않고 멍해져 있는 나를 보고 규호가 약간은 풀 죽은 얼굴로 말했다. 
[진짜 인천 사람들은 다 아는데, 유설희.]
나는 오뎅 국물을 바닥까지 퍼먹고 규호에게 말했다.

[오늘 시간 있어요?]

- [내가 공짜로 뮤지컬 보여줄게요.]
[우와, 진짜요? 그래도 돼요? 저 뮤지컬 보는 거 처음인데.]
태어나서 처음 보는 뮤지컬이 최악의 캐스팅으로 소문난 이번 회차라니. 괜히 미안했지만 어쩔 수 없지. 그게 당신의 운명이야.
 
- [어릴 적부터 육지에, 서울에 오고 싶었어. 할 수 있는 한 가장 높은 곳에 오고 싶었어.]
[한라산을 올라가지 그랬어.]
[있잖아...]
[응.]
[우리... 만날까?]
[지금 만나고 있잖아.]
[꼭 두 번 말하게 해. 무슨 뜻인지 알면서.]

- 알지. 잘 아는데, 너무 듣고 싶은 말이었고, 그러고 싶고, 그래,라는 말이 혀뿌리까지 차올랐는데... 있잖아, 그럴 수 없는 사정이 있거든. 아무리 당장 그러고 싶어도 그전에 먼저 해야만 하는 얘기가 있거든. 진작 해야 했던 얘기가 말이야. 그 얘기를 규호에게 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냥 내 감을 믿어보기로 했다. 

 

- [규호야, 나랑 사귀기 전에 알아야 할 게 두 가지 있어. 일단 나는 단 걸 싫어해. 그러니까 마카롱 같은 건 사줄 필요가 없어. 차라리 돈으로 줘.]
[미친.]
[그리고 또 하나 알아둘 게 있어. 그러니까 말이야,]

- 내가 말이야.
카일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

- 자잘한 일에는 신경을 쓰지만 크나큰 고난 앞에서는 꽤나 초연한 성격인 나임에도, 카일리와 맞닥뜨린 후 처음 두어 달은 정신이 없었어. 의병제대를 하고 방 안에 앉아 있는데, 이게 내 일이 맞나 싶고, 얘가 내 것이 맞나 싶고. 근데 뭐 별거 있나. 약이 있으니 죽을 때까지 아침마다 비타민 한 알씩 먹는다고 생각하기로 했어. 섹스야 콘돔 끼고 하면 그만인 거고. 다들 교양 차원에서 그 정도는 하고 살잖아? 남들 2년 동안 군대에서 썩을 걸 6개월 만에 끝냈으니까 인생 편해졌다 생각하자, 그러고 말았어. 엄마랑 티아라 애들한테는 허리 디스크 때문에 나오게 됐다고 했어. 자세도 안 좋고, 진짜 허리 디스크가 있긴 했으니까.

 

- 개중 멀쩡히 정신 박힌 애들은 아무래도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물어보긴 하더라. 
[뭐야. 너 똥 찍어 먹은 거 아냐?]
[앗, 들켰네.]
다들 와르르 웃고 치웠지 뭐. 애들이랑 술 마실 때, 길에 보균자라고 소문난 애가 지나가면 개그 담당인 은정이가 어김없이 "야, 다들 잔 가려" 말했고, 모두 웃기 바빴어. 나도 눈물이 나게 실컷 웃다가 아 맞다, 내 몸에도 그게 있구나, 생각이 들면 그제야 등골이 서늘해지고 빳빳해지고 그랬지. 그치만 평소에는 아무 생각도 뭣도 없어. 그러니까 종합하자면 나에겐 카일리가 있어. 이건 5년도 넘게 나와 함께 살아온 가족이나 다름없고. 어쩌면 가족보다도 더하지. 같은 혈관을 공유하고 같은 양분을 먹고 같은 숨을 쉬고. 그러니까 이건 나야. 또 다른 나. 앞으로도 나일 거고 죽을 때까지 나일 테니까. 그리고 오직 나만의 것이어야 하고...

 

- 나랑 만나고 싶으면 말이야, 그걸 알아둬야 해. 내가 나이며 동시에 카일리라는 사실을 말이야. 이 사실을 털어놓는 건 네가 처음이야. 그렇다고 부담 갖지는 마. 철석같이 남자만 믿다가 이 꼴 난 내가 할 소리는 아니지만 이상하게 네가 믿음이 가서 하는 말이니까. 만약에 이런 내가 부담스러우면, 실은 그게 더 자연스러운 일이고 자연의 섭리고, 따라서 그냥 가도 돼. 대신 조용히만 있어줘. 내가 지금처럼만 살 수 있게. 그냥 낙산공원 언저리에 어느 털이 많이 난 남자가 있다 정도만 기억해 줘. 아니 아예 잊어줘. 나 같은 건 네 인생에 없던 사람으로 치고 언제나처럼 주중엔 유설희 간호학원에 가고 주말이면 클럽에서 술을 말고 그러면 돼. 

- 규호는 한참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정말 아무 얘기도 듣지 못한 것처럼 눈썹 하나 움직이지 않은 채 계속 서울을 내려다보고 있었고, 나는 무슨 말을 덧붙일까 고민을 하다가,
[그럼 나 먼저 갈게. 서울 구경도 하고 생각도 더 하고 연락 줘. 귀찮으면 안 해도 돼.]
그리고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척 성곽길을 따라 아래로 내려왔다. 나사처럼 생긴, 멀미가 날 만큼 어지러운 길을 비효율적으로 걸어 내려오는데 이상하게 다리에 왜 자꾸만 힘이 풀리지. 입술은 왜 깨물고 있으며, 아래턱은 왜 떨리냐. 아직 난 멀었다. 멀었다고 생각하며 발걸음을 내딛는데, 내 어깨를 잡는 손. 고개를 돌리자 내 앞에 규호가 있었고 평소에는 내 눈높이에 있던 규호의 얼굴이 한 뼘은 위에 있었다.  

- 규호가 상담실장으로 승진했다며 호주산 소고기를 사들고 왔다. 너네 병원은 무슨 동네 점방도 아니고 벌써 승진을 시켜준다니, 말하며 고기를 구웠다. 들어보니 실장이 뭐 대단한 직책 같지는 않았지만, 확실히 규호가 원장의 눈에 든 것 같기는 했다. 원장이 규호에게 요즘 애들 같지 않아서 좋다는 말을 자주 한다고 했다.
[요즘 애들 같지 않은 게 뭘까.]
[촌티 난다는 얘기야.]
원장의 마음을 모를 것도 없었다. 규호 특유의 군말 없이 성실한 성격, 날티가 나면서도 묘하게 신뢰감이 가는 외모 같은 것은 내가 규호를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 <그리스> 공연이 막바지로 향할 때쯤 나는 한 중견 무역회사에 우연히 얻어걸렸다. 내 주제에 비해 월급을 꽤 많이 주는 곳이었는데 문제가 하나 있었다. 취업의 마지막 관문인 신체검사가 그것이었다. 규모가 큰 회사인 만큼 지정된 의료재단에서 혈액검사를 포함한 신체검사를 받아야 한다고 했다. 평소 약을 타 먹는 대학병원의 주치의에게 이 사실을 털어놓으니 환자의 동의 없는 바이러스 검사는 불법이니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남의 인생이니 하는 얘기인 거 같았고 아무래도 찜찜한 기분을 떨칠 수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인터넷에 몇 번 검색을 해보니 나와 같은 이유로 대기업 합격이 취소된 사례가 있었다. 고민을 하는 와중에 규호가 묘안을 짜냈다.
[내가 너 대신 갈게. 우리 혈액형도 같잖아.]

- 연애 초기에 혈액형이며 별자리 같은 걸 물으며 궁합을 본다고 하기에, 멍청한 소리는 다 하고 자빠졌네, 핀잔을 줬던 기억이 있는데 이렇게 도움이 될 줄이야. 우리는 키도 몸무게도 비슷했을 뿐만 아니라 혈액형도 AB형으로 같았다. 아닌 게 아니라 (내 눈엔 너무 달랐지만) 모르는 사람들은 우리 둘의 얼굴을 잘 구별하지 못했다. 둘 다 경도 비만급으로 살이 찐 이후에는 더더욱 그랬다. 잘됐다. 일단 시도는 해보자. 규호를 나 대신 신체검사장에 보내기로 했다. 막상 규호가 내 민증을 들고 검사를 받으러 간 날에는 어리바리한 짓을 하다 뽀록이 나는 건 아닌지 ... 
 
- 둘 다 돈을 좀 만지고 나니까 그래도 밥다운 밥도 사 먹게 되었고, 호캉스랍시고 괜히 서울 시내의 호텔을 예약해 함께 하룻밤을 보내기도 했다. 입욕제를 풀고 나란히 욕조에 앉아 샴페인도 마시고, 그걸 찍어 인스타나 페이스북에 올리는 일도 게을리하지 않았으며, 샤워 가운을 입고 서울의 전경을 보는 등 남들 하는 짓은 다 했다. 물론 제일 중요한 단 하나는 하지 않았다. 못했다고 보는 쪽이 나을 것이다. 규호의 것이 어김없이, 정말 어김없이 콘돔을 끼면 죽어버리곤 했고, 또 기껏 내가 콘돔을 끼고 하면 규호에게서 피가 나는 경우가 있었고, 둘 다 비아그라를 먹고 하는 경우도 있었고, 근데 또 왜 비아그라를 먹으면 소화가 잘 안 되는지, 코도 막히고. 가뜩이나 아침 약을 챙겨 먹는 것도 짜증나 죽겠는데 소화제에 간 보호제에 챙길 것도 많아지고(물론 규호가 살뜰히 약을 챙겨주기는 했지만). 평소에는 존재조차 희미했던 카일리가 그럴 때마다 불쑥 내 인생에 끼어든 기분이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것이 한없이 평범하고 보편적인 3년 차 커플의 모습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하며 감상에 젖지 않기로 했다.

 

- 규호의 옷 주머니에서 비아그라 복제약이나 사정지연제 같은 게 발견되기도 했다. 제약회사에서 샘플을 보내온 것이라고 했다. 병원에 막 굴러다녀. 그래 그렇겠지. 근데 왜 이런 걸 굳이 가지고 다니는 걸까, 뭐 그런 생각이 들 때면 나는 규호가 홀로 일본에 갔을 때를 떠올리곤 했다.

"바람 많이 피우고 와, 나는 괜찮으니까."

먼저 말했던 것은 나였지. 내게 카일리가 있으므로, 나 때문에 규호가 하고 싶은 것을 다 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너무 순진하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나는 아무것도 믿지 않는 것을 통해서 규호를 내 곁에 둘 수 있었다. 나를 지킬 수 있었다. 괜찮아. 인생에서 모든 것을 가질 순 없으니까.

- 카일리,
이것은 온전히 내 몫이니까.
 

<대도시의 사랑법>


- 알 수가 없었다. 나는 일상의 리듬을 완벽히 잃어버렸다. 처음에는 인생을 허비하고 있다는 일말의 죄책감이라도 느꼈다면, 시간이 지나고 나니 뭐, 다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돈이 써지는 대로, 인생이 남아날 때까지 이대로 버텨보자.

 

- 그렇게 방 안에만, 내 템퍼 베드 위에만 누워 있으니 아, 정말 이것은 참으로 폭신하고도 완벽한 죽음의 상태가 아닌가 하는 깨달음에 도달했고, 지겨움조차도 지겨울 수가 있구나라는 마음이 생겨나 핸드폰을 들어 평소에는 하지도 않던 틴더를 켰다. 아무나 걸려라, 누구든 걸려서 나를 이 관 같은 침대 밖으로, 잔뜩 고인 채 썩어가는 일상 밖으로 끌어내주기를 바라며 전 인류를 다 갈아치울 기세로 라이크 버튼을 눌렀다. 그중 누군가와 간신히 매칭이 되면, 지금 어떠세요? 메시지를 보냈고, 비로소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그닥 좋지도 않은 섹스를 하기 위해 밖으로 나섰다.

- 그와 매칭이 된 것은 순전히 실수였다.
정장을 입고 있는 몸 사진에 서른아홉의 나이. 굳이 컬럼비아대 경제학과라고 적어놓은 꼴이 웃겨서 자세히 보려고 프로필을 눌렀다. 어떤 미친 작자이기에 얼굴은 철석같이 숨기면서 출신 학교 -그것도 아이비리그- 를 적어놓나 싶었는데 이름은 알렉스요, 싱가포르계 말레이시아인이었다. 좋아하는 책은 케인즈의 <고용, 이자 및 화폐의 일반이론>, 좋아하는 아티스트는 바흐와 라흐마니노프? 그래, 그렇겠지. 해외 출장이 잦은지 온갖 나라에서의 체류 일정을 거추장스럽게 달아놓았다. 수상하기 짝이 없는 프로필을 이리저리 뒤지다 나도 모르게 슈퍼 라이크 버튼을 눌러버리고 말았다. 우리는 매칭이 됐고 곧바로 그에게서 쪽지가 왔다. 지금 자신의 호텔로 와줄 수 있냐고. 나는 3초쯤 생각하다, 그럴 수 있다고 대답했다. 그는 내게 포시즌스 호텔의 룸 넘버를 알려주었다. 나는 씻을 생각도 없이 잠옷 대용으로 입고 있는 트레이닝복 차림에 모자를 푹 눌러쓰고 호텔로 향했다. 프런트에서 직원의 수상쩍은 시선을 받으면서도, 그가 일러준 넘버의 방문을 두드리면서도, 나는 아무런 기대가 없었다. 내가 뭘 상상하든 그 이하를 보여줄 준비가 된 게 인생이었으니까.

- 그의 방에서 샤워를 하면서 꼬박, 나흘 만이라는 생각을 했다. 두피가 간지럽다 못해 아플 수도 있구나 싶어서 웃겼다.

- 그와의 섹스는 좋지도 나쁘지도 않았다. 조명을 어둡게 해 놓았고, 방은 생각보다 넓었으며, 그의 목덜미에서는 톰포드 레더의 냄새가 났다. 샤워를 한 후 아무것도 바르지 않은 얼굴이 당긴다는 생각이 들었을 따름이었다.

- 그가 욕실에 들어간 사이 협탁에 놓인 루이비통 장지갑을 뒤져봤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신분증도 핸드폰 카메라로 찍어두었다. 나이는 40대 중반, 본국에서의 이름은 하비비였다. 역시나 나이를 속인 거였군. 중국 돈과 홍콩 달러, 태국 바트와 정체를 알 수 없는 돈, 해외 출장이 잦은 직업인가? 5만 원짜리 원화 몇 장이 있길래 훔칠까 하다가 말았다. 때때로 나는 나 자신조차 놀랄 만큼 부도덕해진다.

- 그가 베스타월을 허리에 두른 채 욕실 밖으로 나왔다. 나는 크게 잘못한 것도 없는데 -돈을 훔친 건 아니니- 괜히 마음이 켕겨 눈을 피했다. 산짐승이라도 된 것처럼 잔뜩 웅크리고 있는 나를 그가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혹시 한국어로 '즉페이칭사이'가 무슨 뜻입니까?]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호텔 밖에서 내내 그런 소리가 들려서요. 시위대가 ... ]

- 살살 문질러주는 규호의 약지. 그의 손에서 나던 물 냄새. 나는 장난으로 규호의 손가락을 깨물고 규호는 아픈 척을 한다. (정말 아팠을 수도 있다.) 내가 원하는 작품을 쓰는데 실패할 때마다, 세상에는 닿을 듯 닿을 수 없는 것들이 있다는 사실을 절감할 때마다 규호는 내게 일본식 카레며 경양식 덮밥 같은 것을 사준다.

- 내 소설 속에서 규호는 여러 번 죽었다.
농약을 마시고, 목을 매고, 교통사고를 당하고, 손목을...
규호는 헤테로 남자가 됐다 게이도 됐고, 여자가 되기도 하고, 아이도, 군인도 되고...

아무튼 인간이 될 수 있는 거의 모든 것이 다 되었다가 결국 죽는다.
죽은 상태로 내 사랑의 대상이 되고, 추억의 대상이 되고, 꿈의 대상이 되며 결국 대상으로 남는다. 내 기억 속의 규호는 언제나 완결된 상태로 차갑게 얼어붙어 있다.
그렇게 규호와 나의 기억도 유리막 너머에서 안전하고 고결하게 보존된 상태로 남는다.
영영 둘인 채로.

- 가끔은 내가 모든 걸 다 잘못한 것만 같고, 때로는 이유 없이 모든 게 다 억울했다.

- 아침에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든 생각이었다. 논리 없이 마구잡이로 떠오르는 생각들이 내 인생의 시간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게 분명했다. 이런 생각에 사로잡히기 시작한 건 규호가 떠나기 전이었던가 후였던가. 시계를 확인해 보니 정오가 넘었고, 그러니 아침은 아니었다. 

- 간밤에는 그때의 그 루프톱 바를 하비비와 함께 갔었다. 당시에는 개방되어 있지 않던 옥상 플로어까지 모두 열려 있었고, 우리는 천장이 뻥 뚫린 바의 가장자리 테이블에 앉아 샴페인 한 병을 시켜 나눠 마셨다. 이번에는 셔츠며 면바지 같은 것을 준비해 왔다. 날씨가 쌀쌀해 담요 한 장을 요청해 덮었다. 하비비는 어깨에 담요를 두른 채 떨면서도 샴페인 잔을 놓지 못하는 나를 보며 웃었다. 나도 그를 보며 이따금 웃을 수밖에 없었는데 국적도 세대도 뭐 하나 공통점이 없는지라 대화는 금방 끊기곤 했다. 나는 하비비에게 미국에서의 대학 생활은 어땠냐고 물었다. (경험상 엘리트들의 말꼬를 트는 데는 이만한 질문이 없었다.) 의외로 하비비의 대답은 짧았다.
[치열하고, 외로웠지요.]
[그랬나요?]
때문에 3년 만에 학사학위를 받고 바로 귀국해 홍콩에 있는 국제투자은행에 입사해 버렸다고 했다. (역시나 엘리트 특유의 은근한 자랑과 적당한 자조가 섞인 대답이었다.)

- [투자은행에 다닐 당시 감정을 억누르고 사느라 위염과 편두통, 스트레스성 불면증을 달고 살았죠. 그리고 어느 날 어둠이 찾아왔습니다.]
[네?]
[문자 그대로 어둠이요. 앞이 자꾸 캄캄해져서 병원에 가봤더니 원인이 없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보름 동안을 집에만 박혀 지냈습니다. 삶에 불이 꺼지고 나니 이상하게 나 자신이 나에 대해 하나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나의 방이 어떻게 생겼는지, 무엇을 어떤 방식으로 먹고살았는지, 쉴 때는 도대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다시 불을 켜기 위해서 어떤 것들을 해나가야 할지... 인생에 뚜렷한 지표나 청사진이 없었던 적이 처음이었고, 그래서 지독한 무능에 빠진 기분이었지요.]
[그렇군요.]

- 나로서도 이해 못 할 감정은 아니었다. 격무나 스트레스, 예상치 못한 상실이 인간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으니까. 다만 물리적으로 앞이 보이지 않는다는 상황이 뭔가 좀, 너무 드라마틱한 거 아닌가 싶었고, 대화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버려 당황한 나는 급하게 질문 하나를 더 짜냈다. 조금 더 가벼워질 수 있는 것으로.

- [그곳에서 남자를 만난 적은 없나요?]
하비비는 가볍게 미소를 짓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덧붙였다.
[아랍어로 내 이름의 뜻이 사랑이라고 하더군요.]


- [오늘 밤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불꽃을 보게 될 거야.]
불꽃이 불꽃이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불꽃은 또 뭐람. 제일 비싼 폭죽이란 뜻인가. 그래서 어쩌라고.
[잠을 잘 수 없을 정도로 큰 소리가 날 거야. 바로 앞 대사관 거리에서 폭죽을 터뜨릴 거거든.]
갑자기 모든 게 견딜 수 없어져버린 나는 별 대답을 하지 않고 욕실로 들어가 욕조에 더운물을 받기 시작했다. 물이 다 차기도 전에 머리부터 집어넣었다. 물속에서 눈을 뜨니 수면에 일렁이는 그림자만 보였다. 모든 게 고요한 가운데 물 떨어지는 소리만 들려서, 그게 좋았다. 이대로 가만히, 모든 게 멈춰버렸으면 좋겠다. 

 

- 숨을 참을 수 있을 때까지 참다가 고개를 들었다.
[넌 전생에 물고기였나.]
모텔에 가든 어딜 가든 욕조만 있으면 꼭 물을 받아서 앉아 있곤 하는 나를 두고 규호가 했던 말.

- [그 안에 누군가 똥오줌을 다 싸놨을 거야.]
너도 들어오라는 말에 규호는 하수구에 몸을 담그고 있는 거나 다름없다며 거절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욕조가 꽉 찰 때까지 물을 받아 정수리까지 몸을 푹 담그곤 했었다. 정수리를 담그면 무릎이 삐져나오고 무릎을 넣으면 머리가 자꾸 튀어나와서 결국엔 완벽히 물에 들어가는 데 실패하고. 나중에 돈을 많이 벌면 수영장만큼 큰 욕조를 사야지,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 어메니티로 나온 르라보 보디 클렌저 한통을 다 들이붓고 물을 최고로 세게 틀어놓으니 거품이 휘핑크림처럼 맹렬히 피어올랐다. 부풀어 오르는 거품에 질식해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눈을 감았다.

- 그날 우리의 발걸음이 멈춘 곳은 낯선 게스트 하우스였다.
평소에는 손만 들면 드라마의 한 장면처럼 척척 잡히던 방콕의 택시가 우리를 모두 스쳐 지나갔다. 비가 더욱 거세져 발목까지 물이 차버리고 난 후로는 그마저도 잘 보이지 않았다. 우리는 손을 잡고 민가 사이를 미로처럼 ...

- 스탠드 조명 아래에서 더욱 짙게 보이는 이마의 주름.
그는 도대체 나를 왜 이곳에 부른 것일까. 그저 방에 들어왔을 때 누군가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어 주기를 바라서일까. 조명을 켜놓고 방을 어질러놓고,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일지언정 아무 목소리라도 내줄 누구라도 필요했기 때문일까. 출장이 잦은 사람이니까. 빈 베개를 홀로 베고 누웠을 때의 차가움이나 사각거리다 못해 베일 것 같은 시트의 나쁜 감촉을 아는 사람이라서? 어쩌면 그 모든 것 때문일지도. 그러는 나는 지금 도대체 왜 이곳에 와 있는 걸까. 다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의 마음을 가장 이해할 수 없어서, 나는 바닥에 널브러진 그의 깨진 핸드폰을 잠시 가만히 바라보았다. 

- 불꽃놀이를 했는지 안 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깜빡 잠든 사이에 모든 게 지나가버린 듯했다. 언제부터인가 모든 게 희미한 날들이 계속됐다.

- 나는 조명의 조도를 살짝 낮춘 채 방 밖으로 나왔다. 문을 닫고 나니 이상하게도 하비비의 얼굴이 기억나지 않았다.

- 때때로 그는 내게 있어서 사랑과 동의어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내게 규호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은, 규호의 실체에 대해 말하는 것은 사랑의 존재와 실체에 대해 증명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 나는 지금껏 글이라는 수단을 통해 몇 번이고 나에게 있어서 규호가, 우리의 관계가,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둘만의 특별한 어떤 것이었다고, 그러니까 순도 백 퍼센트의 진짜라고 증명하고 싶었던 것 같다. 온갖 종류의 다른 방식으로 규호를 창조하고 덧씌우며 그와 나의 관계를, 우리의 시간들을 온전히 보여주고자 했지만, 애쓰면 애쓸수록 규호라는 존재와 그때의 내 감정과는 점점 더 멀어져 버리고야 만다. 진실과는 동떨어진 희미한 것이 되어버리고 만다. 내 소설 속 가상의 규호는 몇 번이고 죽고 다치며 온전한 사랑의 방식으로 남아 있지만 현실의 규호는 숨을 쉬며 자꾸만 자신의 삶을 걸어 나간다. 그 간극이 커지면 커질수록 나는 모든 것들을 견디기가 힘들어진다. 지난 시간 끊임없이 노력하고 애써왔지만 결국 나의 몸과 나의 마음과 내 일상에 남은 게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더 여실히 깨달을 따름이었다. 공허하고 의미 없는 낱말들이 다 흩어져 오직 글을 쓰고 있는 나 자신만이 남는다. 어깨를 잔뜩 구부린 채 미간에 짙은 주름을 짓고 있는 내가 나 자신의 호흡만을 들을 수 있는, 그런 세상.  

- 그날 우리가 날렸던 풍등은 높이 떠오르지 못했다. 방파제를 넘어선 순간 풍등에 불이 붙었고, 검은 연기를 내뿜으며 사선으로 나부끼다 곧 먼바다로 추락해 버렸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던 몇몇 사람들이 와하하 웃었다. 빨간 립스틱을 바른 여자는 특유의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풍등 어딘가에 구멍이 난 것 같다고 했다. 나는 멀리 날아가는 다른 사람들의 풍등과 검은 바다 어딘가에 잠겨 있을 우리의 풍등을 번갈아가며 바라보았다. 한참 동안이나 그러는 사이 사람들은 모두 저마다 갈 길을 가기 시작했다. 규호도 내게서 등을 돌려 멀어졌는데, 나는 좀체 자리를 뜰 수가 없었다. 모든 게 사라져 버렸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 나는 풍등에 쓸 문장을 여러 번 고쳐 썼다. 다이어트, 주택청약 당첨, 포르셰 카이엔, 첫 책 대박 나게 해 주세요... 뭔가 다 내 진짜 소원이 아닌 것 같아 빗금을 쳐서 지워버렸다. 아마도 그러는 사이 구멍이 나버린 것이겠지.

- 나는 결국 풍등에 두 글자만을 남겼다.

- 규호.
그게 내 소원이었다.

<늦은 우기의 바캉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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