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2

[데이비드 호킨스] 놓아버림 - 내 안의 위대함을 되찾는 항복의 기술

일루젼 2024. 10. 11.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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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데이비드 호킨스 / 박찬준
출판 : 판미동
출간 : 2013.10.10


       

           

'어디로 가고 있는가'보다 '어디로 갈 것인가'에 집중해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지금 발 디딘 곳이 어딘지를 제대로 보지 않으면 아무리 달려도 '붉은 여왕의 저주'를 벗어날 수 없다는 걸 알았다. 외면하고자 피할수록 어디에서나 불쑥불쑥 고개를 내미는 똑같은 주제들.

그럴 때는 그저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다. 아, 지금은 이것에 집중할 때구나. 이걸 제대로 바라보지 않으면 다음 것들은 오지 않겠구나. 

 

마음먹기까지가 한 세월이지, 막상 세상에는 너와 나 둘 뿐이라는 듯 집중하기 시작하면 상황은 금세 변화한다. 이전까지 끈질기게 발목을 낚아채 제자리로 돌려놓던 건 꿈이었던 마냥. 

 

<놓아버림>은 읽는 동안도 집중하기 어려웠고, 정리하는 동안도 힘든 일이 많았던 책이다. 

'저항하지 않고 항복한다'는 기법이 영 낯설고 어색하게 느껴졌다. 허용하고 놓아버려라, 하지만 어떻게? 

막막했다. 많은 이들이 어려움을 겪는다는 '없애기 위해 사랑하는' 단계에 갇힌 것 같았다.

 

그래서 잠시 잊어버렸다. 

회피하고자 하는 목적이 아니라, 현재로서는 답을 찾을 수 없으니 새롭게 다시 마주하자는 마음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시간이 조금 지나 이전보다는 조금 난이도가 낮아진 듯한 '익숙한 나의 적'을 다시 만날 수 있었다. 

 

어떻게 흘러가게 될지는 내 소관이 아니다. 

그저 그것이 거기에 있음을 계속해서 보고, 다시 잊어버리고 있다.

이게 놓아버림이 맞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내 나름의 방식으로 그것을 마주하고 사랑하기 위해 노력 중이다. 

사랑하지 않는다면 떠나지 않을 것이므로.

떠나게 하기 위해 사랑한다면 사랑할 수 없을 것이므로.

 

 


   

 

이 책에서 제시하는 틀을 활용하면 각자 타고난 능력으로 행복과 성공, 건강, 안락, 직관, 조건 없는 사랑, 아름다움, 내면의 평화, 창조성에 이를 수 있다. 우리의 내면에는 이를 성취할 능력이 있다. 이 능력은 외부 환경이나 개인 특성과는 무관하다. 또 특정 종교에 대한 신념이 있어야만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내면의 평화는 단일한 집단이나 제도에 속하지 않은 인간 영혼이 태생적으로 지닌 특질이다. 위대한 스승, 현자, 성인 모두가 예외 없이 이런 뜻이 담긴 말을 하지 않았던가. "천국은 너희 안에 있다." 호킨스 박사도 비슷한 말을 자주 했다. "여러분이 찾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여러분 자신의 큰나입니다."

 

- 이런 능력이 타고난 어떤 것, 즉 진정한 자아와 떼려야 뗄 수 없다면 어째서 이토록 손에 넣기 힘든 것일까? 애초에 행복을 타고났다면 이 모든 불행은 다 뭐란 말인가? '천국'이 내면에 있다는데, 왜 툭하면 '지옥이 따로 없다'는 기분이 드는 것일까? 평화가 아닌 것만 잔뜩 쌓인 진창을 어떻게 하면 벗어날 수 있을까? 이진창 탓에 내면의 평화로 가는 여행은 몹시 힘들어 보이다 못해 목적지에 이를 가망조차 없어 보인다.


- 평화와 행복, 기쁨, 사랑, 성공이 본래부터 인간의 영혼에 있다는 것은 분명 반가운 소식이다. 하지만 분노, 슬픔, 절망감, 허영심, 질투, 불안, 사소한 일상의 판단이 우리 내면의 정적을 깨트리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일까? 진창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질 수 있는 방법이 과연 있을까? 어떤 거리낌도 없이 기쁨의 춤을 출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살아 있는 모든 존재를 사랑할 수 있는 방법은? 위대함을 한껏 떨치고 잠재력을 활짝 펼치며 살아갈 방법이 있을까? 세상 속 우아함과 아름다움의 통로가 될 방법이 있을까? 

- 우리가 그토록 갈구하는데도 찾아내지 못한 자유로 가는 길이 이 책에 담겨 있다. '놓아 버리면' 성공할 수 있다는 말은 언뜻 우리의 직관과 충돌한다. 그러나 저자인 호킨스 박사는 임상과 개인적 경험을 통해 항복이야말로 완전한 성취에 이르는 가장 확실한 길이라는 점을 입증한다.

- 우리는 어려서부터 청교도 윤리에 물들어 있는 문화의 영향으로 자신에게 엄격해야 한다는 철칙에 따라 세속적인 일에서 영성적인 일에 이르기까지 무언가를 성취하려면 '힘들게 일하고', '뼈 빠지게 일하고', '땀 흘리며 일해야 한다'는 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이 관점에 따르면 성공하기 위해서는 고통을 겪고, 고생하고, 노력해야만 한다. '고통 없이는 얻는 것도 없다.' 하지만 숱한 고통과 노력이 우리를 어디로 데려왔는지 보라. 우리는 진정 마음속 깊이 평화로운가? 그렇지 않다. 우리는 여전히 죄책감을 느끼고, 타인의 비판에 상처받으며, 상대가 맞장구쳐 주길 바라고, 적개심 때문에 속이 곪는다. 

- 이 책을 읽고 있다는 것은 '노력 기제'라는 밧줄을 이미 끝까지 당겨 보았음을 의미하는지도 모른다. 경험해 본 사람은 알겠지만 원하는 곳에 닿기 위해 열심히 당겨 봤자 밧줄은 점점 더 너덜너덜해질 뿐이다. 그러다 보면 의문이 드는 것은 당연하다.  

- 호킨스 박사가 보여 준 해방으로 가는 길을 따라 걷다 보면 우리도 언젠가는 그곳에 도달할 수 있지 않을까.
완전무결한 항복을 통해 우리에게 선물을 남겨 준 호킨스 박사에게 감사한 마음뿐이다.

 

베리타스 출판사 편집자

프랜 그레이스

 


 



- 육체적인 면에서는 억제된 감정을 없애면 건강에 이롭다. 몸속의 자율 신경계로 흘러들던 기운이 줄어들고 막힌 경혈이 뚫린다. (이는 간단한 근육 테스트를 통해 입증할 수 있다.) 항복 기법을 꾸준히 실천하는 사람은 신체 이상이나 심인성 신체장애가 나아지기도 하며, 장애가 한꺼번에 사라지는 경우도 흔하다. 몸속에서 진행되던 병리적 과정이 전반적으로 역전되면서 몸이 최적의 상태로 되돌아간다. 

- 행동 면에서는 불안을 비롯한 부정적 감정이 점차 줄어들면서 현실에서 도피하기 위해 약물이나 알코올, 오락거리, 지나친 수면 등에 의존하던 성향이 사라진다. 이에 따라 활력과 기운이 솟고 인상도 좋아지고 안락감이 커지면서, 매사에 힘들이지 않고 효율적으로 일할 수 있다.

- 대인관계 면에서는 부정적 감정을 항복하면, 긍정적 감정이 갈수록 증가한다. 그 결과 모든 관계가 신속하고도 눈에 띄게 좋아진다. 사랑을 나누어 줄 수 있는 능력이 커진다. 사람들과의 갈등이 줄어들면서 업무 성과도 좋아진다. 부정적인 걸림돌을 없애면 직업적 목표를 더 쉽게 이루고, 죄책감에서 비롯된 자기 파괴적 행동도 점차 줄일 수 있다. 갈수록 논리적 사고에는 덜 의존하고, 직관적으로 아는 상태를 활용한다. 여러 면에서 성장과 발전이 재개되면서 이전에는 깨닫지 못한 창조적 정신능력, 즉 부정적 감정으로 인해 발휘하지 못했던 능력들이 깨어난다. 대단히 중요한 점은 모든 인간관계의 골칫거리인 의존성이 점차 줄어든다는 사실이다. 아픔과 괴로움의 근저에는 의존성이 자리 잡고 있는 경우가 매우 많다. 최악의 경우 의존성은 폭력과 자살로 표출된다. 의존성이 줄어들면 공격성과 적대적 행동도 줄어든다. 부정적 감정은 타인을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감정으로 바뀐다. 

- 의식과 자각, 영성 면에서는 항복 기제를 끊임없이 실천하면 의식과 자각, 영성에 눈을 뜬다. 부정적 감정을 놓아버리면 계속 커지는 행복과 만족, 평화, 환희를 느낀다. 내면의 진정한 큰나에 대한 자각이 커지면서 큰나를 갈수록 또렷이 인식하고 경험한다. 위대한 스승들의 가르침이 자신의 경험이 되어 내면에서 의미를 드러낸다. 한계를 점차 놓아 버림으로써 마침내 자신의 진정한 정체성을 깨닫는 일이 가능해진다.

 

- 놓아 버림은 영적 목표에 도달하기 위한 수단 중에서 가장 효과가 뛰어난 편에 속한다. 

- 일상에서 온화하면서도 예민하게, 묵묵히 항복하는 사람은 누구라도 이 목표를 모두 이룰 수 있다. 부정성이 사라진 자리를 긍정적인 감정과 경험으로 채우는 과정은 지켜보기에도 즐겁고 몸소 체험하기에도 즐거운 일이다. 이 책에 정보를 담은 목적도 독자가 그처럼 보람 있는 경험을 하는 데 도움을 주고자 하는 데 있다. 
 
- 이것이 기법의 목적이다. 즉 마음만 먹으면 의식적으로 몇 번이든 놓아 버린다. 내가 어떻게 느낄지는 내게 달린 일이다. 나는 더 이상 세상에 휘둘리지 않는다. 세상에 대한 나의 반응에 휘둘리지 않는다. 더 이상 반응의 피해자가 아니다. 놓아 버림은 부처의 가르침을 적용한 것으로, 자기도 모르게 반응할 때 생기는 압박을 없앤다. 

- 우리는 부정적 감정과 마음가짐, 믿음을 어마어마하게 쌓아둔 저장소를 지고 다닌다. 여기에 압력이 쌓일수록 괴롭기 그지없고, 병이 생기며, 잦은 문제가 생긴다. 그래도 '사람 사는 일이 으레 그러려니' 하고 넘어간다. 압박에서 벗어나려고 수없이 많은 방법을 동원하기도 한다. 마음속 두려움에 갈팡질팡하지 않고 심한 괴로움에 겁먹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인생을 보낸다. 이로 인해 다들 마음 안팎으로 끊임없이 긍지를 위협받는다.

- 면밀히 살펴보면 인생이란 본디 마음속에서 겁내거나 기대하는 바를 투사해 세상에 덮어 씌우고는 거기서 벗어나려고 긴 시간 동안 이리저리 애쓰는 일이다. 이런 마음속 두려움에서 잠시 벗어나 신이 났던 때도 있지만, 여전히 마음 한구석에는 두려움이 도사리고 있다. 마음속 감정을 겁내게 된 까닭은, 감정에는 엄청난 양의 부정성이 들어 있어서 자칫 깊이 들어갔다가 압도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다. 또한 이런 부정적 감정을 두려워하는 까닭은 마음속에서 감정이 생기는 대로 놓아둘 경우 감정을 처리해 줄 의식 기제가 없기 때문이다. 감정 마주하기를 겁내기 때문에 감정은 계속 쌓이기만 하고, 마침내는 죽음이 모든 괴로움을 끝내 주길 은밀히 고대하기에 이른다. 생각이나 일 때문에 괴로운 것이 아니라 그에 따르는 감정 때문에 괴로운 것이다. 생각 자체로는 괴롭지 않은데, 그 밑에 깔려 있는 감정 때문에 괴로운 것이다!

- 감정이 쌓여 생긴 압력으로 인해 생각이 일어난다. 예를 들면 하나의 감정이 일정 기간 동안 수많은 생각을 자아낼 수 있다. 어렸을 적에 괴로웠던 기억이나 끔찍하게 후회스러워 내내 감추었던 일 하나를 떠올려 보라. 그 하나의 사건과 관련 있는 세월 모두와 그동안 일어난 생각을 살펴보라. 그 밑에 깔려 있는 괴로운 느낌을 항복할 수만 있다면 모든 생각은 즉시 사라지고 사건 자체를 잊을 수 있을 것이다. 

- 이러한 관찰 내용은 과학적 연구 결과와 일치한다. 심리학과 신경생리학을 통합한 그레이-라비올렛 Gray-Laviolette 이론은 생각과 기억은 감정의 분위기에 맞추어 정리되는 것임을 입증했다.(그레이-라비올렛, 1981) 즉 생각이 기억 저장고 속에 보관되는 일은, 그 생각과 결부되어 있으며 다양한 분위기를 지닌 감정에 걸맞게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따라서 감정을 놓아 버리면 그와 결부된 모든 생각에서 해방된다. 

- 항복하는 법을 아는 것이 가치가 높은 이유는 일단 방법을 알면 어떤 감정이든 언제 어디서나 즉시, 그리고 힘들이지 않고 계속해서 놓아 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 항복 상태란 어떤 상태를 말하는가? 항복 상태란 창조성과 자발성이 마음속 갈등에 가로막히거나 방해받지 않고 나타날 수 있도록 특정 방면의 부정적 감정에서 벗어난 상태를 뜻한다. 갈등과 기대에서 자유로워지면 주위 사람들에게도 최대한의 자유를 줄 수 있다. 또한 항복 상태를 통해 우주의 본성을 체험하게 되어, 우주의 본성은 어떤 상황에서든 최대한 좋은 것이 현실로 나타나게 하는 것임을 알게 된다. 철학적으로 들릴 수도 있겠지만 그 상태에 있는 사람이라면 몸소 경험할 수 있는 진실이다.

- 우리가 감정을 다루는 방식은 크게 억제, 표출, 회피로 나눌 수 있다. 이 세 가지를 하나씩 살펴보자.

- 억제와 억압
이 두 가지는 감정을 억누르거나 제쳐 두려고 할 때 동원하는 가장 흔한 방법이다. 억압은 무의식적으로 일어나는 것이고, 억제는 의식적으로 행하는 것이다. 우리는 감정 때문에 애먹고 싶지 않아 하면서도, 감정을 처리할 방법을 달리 알지 못한다. 그래서 감정에 시달리면서도 계속해서 제구실을 다하려고 최대한 애쓴다. 억제하거나 억압하려고 마음먹은 감정은 사회 관습이나 집안 교육에서 주입받은 의식적, 무의식적 프로그램에 부합하기 마련이다. 억제한 감정이 주는 압력이 커지면 나중에는 짜증을 잘 내는 성격이 두드러지거나, 감정 기복, 목이나 등의 근육 긴장, 두통, 복통, 생리불순, 대장염, 소화 불량, 불면증, 고혈압, 알레르기 및 기타 신체 문제를 느끼게 된다. 

- 어떤 감정을 억압하는 것은 그 감정에 대한 죄책감과 공포가 너무 커 의식적으로 절대 느끼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런 감정이 생겨날 조짐이 보이면 그 감정을 무의식에 곧바로 처넣는다. 그런 다음 다시는 자각하지 않으려고 다채로운 방법을 동원해 감정을 다룬다.

- 억압한 감정을 유지하기 위해 마음이 사용하는 기제 중에서는 아마도 부인과 투사가 가장 널리 알려진 수단일 것이다. 이 둘은 짝을 이루어 서로를 강화하기 때문이다. 부인은 정서와 성숙 면에서 큰 장애를 일으킨다. 또 부인에는 투사 기제가 으레 뒤따라온다. 죄책감과 공포 때문에 충동이나 감정을 억압하고는 그런 것이 내면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부인한다. 스스로 충동이나 감정을 느끼는 대신 세상과 주변 사람들에게 덮어씌우는 투사를 한다. 그러고는 그런 감정이 '그들'의 것인 양 느낀다. 이제 '그들'은 적이 되며, 마음은 투사를 강화하기 위해 정당한 이유를 찾는다. 사람, 장소, 기관, 음식, 기후, 별자리, 사회 여건, 운명, 신, 운, 악마, 외국인, 민족, 정치적 경쟁자 등 외부의 대상을 탓한다. 투사는 현대 사회에서 두루 쓰이는 주요 기제다. 전쟁, 분쟁, 폭동은 모두 투사에서 비롯한다. 심지어 좋은 시민이 되려면 적을 증오해야 한다고 부추기기도 한다. 우리는 자존감을 유지하기 위해 다른 사람들을 희생시키며, 이는 결국 사회 붕괴를 초래한다. 공격, 침략 등의 사회적 파괴는 모두 투사 기제를 바탕으로 한다. 

- 우리는 표출 기제를 사용해 감정을 분출하거나 입 밖에 내거나 몸짓으로 드러내거나 끝없는 집단 시위로 보여 준다. 부정적 감정을 표출해 내면의 압력을 내보내고 나면 억제할 수 있는 만큼만 남는다.

 

- 이 점을 이해하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오늘날의 사회에는 감정을 표출하고 나면 감정에서 자유로워진다고 믿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실제로는 정반대다. 그 이유를 꼽자면, 첫째, 어떤 감정을 표출하면 그 감정은 증식되면서 더 큰 에너지를 얻는 경향이 있다. 둘째, 그 감정을 표출한 까닭에 나머지 감정은 알아차릴 수 없도록 억제되고 만다. 

- 각 개인마다 억제와 표출 간의 균형점이 달라지는 것은 어릴 때 받은 훈육이나 현재의 문화 규범과 관습, 대중 매체의 영향에 달려 있다. 자기 표출이 유행하고 있는 것은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저작과 정신분석을 오해한 결과다. 프로이트는 억제가 신경증의 원인이라고 지적했고, 그 결과 사람들은 표출이 그 치료법이라고 잘못 받아들였다. 이런 오해에서 타인을 희생해 방종해도 좋다는 근거를 얻은 것이다. 그러나 고전 정신분석에서 프로이트가 실제로 말한 바는, 억압된 충동이나 감정을 중화하고 승화시켜 사회화해 사랑과 일, 창조성 같은 건설적 욕구로 돌리라는 것이었다. 

- 자신의 부정적 감정을 남에게 떠넘기면 이번에는 그 사람이 그것을 공격으로 느끼고 감정을 억제하거나 표출하거나 회피할 차례가 된다. 그래서 부정성 표출은 관계를 악화시키고 파괴하는 결과를 낳는다. 훨씬 바람직한 대안은 자신의 감정을 스스로 챙겨서 중화시키는 것이다. 그러면 긍정적 감정만 남기고 표출할 수 있게 된다. 

 

- 회피는 주의를 다른 데로 돌림으로써 감정에서 벗어나는 기제다. 회피는 연예 사업과 주류 산업을 받치는 근간인 동시에 일 중독자가 택하는 길이기도 하다. 마음속 느낌에서 달아나고 벗어나려는 기제는 사회에서 용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마음속 자아에서 벗어나고 감정이 올라오지 않도록 끊임없이 다양한 활동을 하는데, 이런 활동에 의존할수록 활동 자체에 중독되는 경우가 많다.

- 사람들은 필사적으로 무의식 상태에 머무른다. 집에 들어오자마자 텔레비전을 잽싸게 켠 다음 꿈꾸는 듯한 상태로 돌아다니며, 쏟아지는 정보에 끊임없이 프로그래밍되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 또 사람들은 자신과 마주하기를 몹시 두려워한다. 잠시라도 홀로 존재하는 것을 끔찍이 겁낸다. 그래서 계속해서 미친 듯이 행동한다. 끝없이 어울려 놀고, 대화하고, 문자를 주고받고, 책을 읽고, 음악을 틀고, 일하고, 여행하고, 구경하고, 쇼핑하고, 과식하고, 도박하고, 영화를 보러 가고, 좋다는 약을 복용하고, 마약에 손대고, 파티를 연다. 이런 회피 기제는 대다수가 불완전할 뿐만 아니라 별 효과 없이 스트레스만 준다. 또한 그 자체에 더 많은 에너지를 써야 한다. 억제하고 억압한 감정에서 오는 압박을 낮추려면 어마어마한 에너지가 필요하다. 결국 갈수록 자각을 잃고 성장하지 못한다. 창조성과 에너지를 잃는다. 타인에게 참된 관심을 갖지 못한다. 영적 성장이 멈춘다. 끝내는 몸과 마음이 아프고 병들면서 늙다가 때 이른 죽음을 맞이한다. 억압된 감정이 세상에 투사되면 사회 문제와 무질서가 생기고, 현 사회를 특징짓는 이기심과 냉담함이 증폭된다. 무엇보다 개개인이 다른 사람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신뢰할 수 없어 외로움을 느끼고 자기혐오가 생긴다. 

- 이와 반대로, 감정을 놓아 버리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감정 이면의 에너지를 즉각 포기하고 항복함으로써 압력이 줄어드는 결과를 얻는다. 즉 끊임없이 놓아 버리면 쌓인 압력이 줄어들기 시작한다. 이렇게 놓아 버리면 기분이 즉시 나아진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몸의 생리작용에도 변화가 생긴다. 피부색과 호흡, 맥박, 혈압, 근육 긴장도, 위장 기능, 각종 혈중 수치가 눈에 띄게 좋아진다. 마음속 자유를 얻은 상태에서는 모든 신체 기능과 기관이 정상을 되찾고 건강해지는 쪽으로 변화한다. 근력이 곧바로 좋아진다. 시력이 좋아지고 세상과 자신을 보는 눈도 긍정적으로 바뀐다. 보다 행복하고, 보다 사랑에 차 있고, 보다 느긋해진다.

- 대중과 언론은 스트레스라는 주제에 관심이 많지만 스트레스의 본질을 확실히 이해하지는 못한다. 현재 우리는 과거 어느 때보다도 스트레스에 약하다고 한다. 스트레스의 핵심 원인은 무엇일까? 외부 요인에 의한 것은 분명 아니다. 스트레스는 앞에서 이야기한 투사 기제를 보여 주는 본보기일 뿐이다. 보통 '그들'이나 '그 일'이 스트레스의 범인이라고 생각하지만, 스트레스라 느끼는 것은 사실 억압된 감정이 주는 마음속 압력이 새어 나오는 것일 뿐이다. 억압된 감정으로 인해 외부 스트레스에 약해진 것이다.

- 스트레스의 진정한 근원은 안 internal에 있다. 밖에 있다고 믿고 싶겠지만 그렇지 않다. 예를 들어 겁이 얼마나 나는지는, 안에 이미 차 있는 두려움의 양에 달렸다. 외부 자극은 그 두려움을 촉발시킬 뿐이다. 안에 두려움이 많을수록 세상을 보는 눈도 앞일을 겁내고 조심하는 쪽으로 바뀐다. 겁먹은 사람에게 세상은 섬뜩한 곳이다. 화난 사람에게 세상은 불만스럽고 짜증 나는 일투성이인 곳이다. 죄책감에 빠진 사람이 보는 세상은 유혹과 죄로 가득하다. 안에 품고 있는 대로 세상이 보인다. 죄책감을 놓아 버리면 순수해 보이지만, 죄책감에 사로잡힌 사람에게는 사악하게만 보인다. 즉 사람은 자기가 억압한 것에 정신이 팔리기 마련이다. 

- 스트레스는 억압되고 억제된 감정이 쌓여 생긴 압력에서 비롯한다. 압력은 탈출구를 찾으려는 속성을 갖고 있는데, 이때 외부 사건은 우리가 잡아 누르던 것이 터져 나오도록 의식과 무의식 양면에서 방아쇠 역할을 한다. 감정을 억누르면 그 에너지가 자율신경계를 통해 다시 나타나 병적인 변화를 일으키고 이로 인해 실제로 병이 생긴다. 부정적 감정이 생기면 근력이 곧바로 반으로 줄고, 시야도 몸과 마음 양면에서 좁아진다.

- 외부의 촉발 요인이나 자극에 대한 감정 반응이 곧 스트레스다. 우리의 신념 체계 그리고 신념 체계와 결부된 감정 압력이 스트레스를 규정한다. 그러므로 스트레스의 원인은 외부 자극이 아니라 우리의 반응성 수준에 있다. 더 많이 포기하고 항복할수록 스트레스를 잘 받지 않는다. 스트레스로 인한 피해는 자신의 감정이 낳는 결과일 뿐이다. 

- 현재의 스트레스 경감 프로그램들은 핵심을 놓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스트레스의 원인 자체를 없애기보다 스트레스의 여파를 완화시키려고 하거나 외부 사건에 초점을 맞춘다. 이는 마치 감염을 치료하지 않고 열만 내리려 하는 것과 같다. 예를 들면, 근육 긴장은 불안, 공포, 분노, 죄책감의 후유증이다. 그렇기 때문에 근육이완 기법 강좌를 듣더라도 매우 한정된 성과만 얻는다. 대신 근육 긴장의 바탕에 깔려 있는 원인, 즉 억압받고 억제된 분노와 공포, 죄책감 등의 부정적인 감정을 없애면 훨씬 큰 효과를 볼 수 있다.

- 마음은 합리화에 능해 감정이 생긴 진짜 원인을 계속 외면하는 쪽을 택하며 그렇게 하는 데 투사 기제를 활용한다. 마음은 어떤 사건이나 타인이 감정을 일으킨 '원인'이라고 탓하면서 스스로를 그런 외부 원인에 당한 무력하고 순진한 희생자로 본다.

"걔들 때문에 화가 나.", "그 인간 때문에 속상해.", "그 일 때문에 겁이 나.", "세상일 때문에 불안해."

진실은 정확히 그 반대다. 억제되고 억압된 감정이 발산 수단을 찾다가 외부 사건을 방아쇠 겸 핑곗거리로 삼으면서 터져 나오는 것이다. 우리는 기회만 생기면 증기를 내뿜으려고 벼르는 압력솥과 같다. 언제든 폭발할 수 있도록 방아쇠를 당길 준비가 되어 있다.  

- 이런저런 일들이 나를 화내게 '만드는'것은 내가 원래 화가 나 있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항복하여 분노를 억눌러 놓은 저장소를 놓아 버리면 어떤 사람이나 어떤 상황도 나를 화내게 '만들기'가 아주 어렵고 사실상 불가능하다. 마찬가지로 다른 부정적 감정도 항복하고 나면 어떤 일로도 재발하지 않는다.

- 사회에서 길들여진 탓에 사람들은 긍정적 감정마저 억제하고 억압한다. 사랑을 억제하면 상심한 가슴에 심근경색이 일어난다. 억제된 사랑은 애완동물을 지나치게 떠받들거나 그 밖의 갖가지 것을 숭배하는 형태로 다시 나타난다. 진정한 사랑은 공포가 없으며 애착이 없는 것이 특징이다. 잃을 수 있다는 공포로 인해 과도한 애착과 소유욕이 힘을 얻는다. 예를 들어 여자 친구에 대해 자신이 없는 남자는 질투가 심하다.

- 억제되고 억압된 감정의 압력이 참을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서면, 마음은 '저 바깥'에 어떤 일을 만들어 내 감정 압력을 분출시키고 그 자리를 다른 것으로 채우려 한다. 그렇기 때문에 억압된 슬픔이 큰 사람은 무의식적으로 삶에서 슬픈 일을 만들어 낸다. 겁 많은 사람은 겁나는 일을 촉발시킨다. 화난 사람은 짜증 나는 상황에 둘러싸이고, 자부심에 찬 사람은 계속해서 모욕당한다. 그래서 예수가 이렇게 말했다. "왜 너는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느냐?" (마태복음 7:3) 위대한 스승들은 모두 우리의 내면을 가리키며 직시하라고 한다.

- 우주의 만물은 진동을 방출한다. 진동수가 높을수록 힘이 강력하다. 감정 또한 에너지이기 때문에 진동을 방출한다. 감정의 진동은 몸의 에너지 장에 영향을 주어, 보고 느끼고 측정할 수 있는 결과를 내놓는다. 초심리학자인 델마 모스 박사 등이 키를리안 사진술로 찍은 동영상을 보면, 감정이 바뀜에 따라 에너지 장의 색깔과 크기도 급격한 변동을 거듭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심리학자 스탠리 크리프너, 1974)  

- 마음은 차원이나 크기가 없고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다. 그래서 마음이 진동 에너지를 통해 마음의 기본 상태를 송출할 때 송출 거리에 제약이 없다. 이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무심결에 자신의 감정 상태와 생각으로 타인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뜻한다. 예컨대 감정 패턴과 그에 관련된 생각 형태는 심령 능력자들이 원거리에서 포착해 수신할 수 있는 것이다. 이 현상은 실험으로 입증할 수 있는 것이어서, 그 과학적 근거를 밝히는 일은 첨단의 양자물리학에서 큰 흥미를 보이는 주제가 되어 있다.

- 감정은 진동하는 에너지 장을 방출하기 때문에 우리가 살아가며 만나는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우리가 어떤 사람을 만나게 될지 결정한다. 억압되거나 억제된 감정은 정신적 차원에서 우리가 겪는 삶의 사건에 영향을 미친다. 즉 노여움은 노여운 생각을 끌어들인다. 정신적 우주의 기본 법칙은 '유유상종'이라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사랑'은 사랑을 더욱 활성시킨다. 그래서 내면에서 부정성을 많이 놓아 버린 사람은 사랑이 담긴 생각, 사랑스러운 사건, 사랑스러운 사람들, 사랑스러운 애완동물에 둘러싸인다. 이 현상은 지성인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드는 다음 같은 성경 구절이나 속담을 설명해 준다. "부익부 빈익빈", "이미 가진 사람이 더 가진다".  

- 살아 있는 모든 것은 진동하는 에너지 차원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 주변의 모든 생명은 우리의 기본적인 감정 상태를 포착하고 그에 반응한다. 동물이 인간의 감정 상태를 즉시 읽어 낼 수 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심지어 박테리아의 성장이 인간의 감정에 영향을 받기도 하고, 인간의 감정 상태에 따른 식물 반응을 측정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입증한 실험도 있다. (전 CIA 거짓말탐지 전문가, 백스터 거짓말탐지 학교 설립 및 운영, 클리브 백스터, 2003)

- 놓아 버림에는 어떤 감정이 일어나는지 알아차리기, 감정이 일어나도록 놓아두기, 감정과 함께 있기, 감정을 바꾸거나 어떻게 하려는 바람 없이 감정 스스로 제 갈 길을 가도록 놓아두기가 포함된다. 즉 감정은 있는 그대로 놓아둔 채 단지 감정 이면의 에너지를 방출시키는 일에만 집중하는 것이다. 그 첫 단계는 감정을 지니고만 있을 뿐 감정에 저항하거나 감정을 분출하거나 겁내거나 비난하지 않고, 감정을 가지고 도덕을 따지지 않는 것이다. 요컨대 판단을 멈추고 감정은 감정일 뿐임을 알아보는 것이다. 이 방법은 감정을 그저 생생히 느끼기만 하면서 어떻게든 바꿔 보려는 노력을 모두 항복하는 것이다. 감정에 저항하고 싶은 바람을 놓아 버려라. 저항 때문에 감정이 지속되는 것이다. 감정에 저항하거나 감정을 바꾸려는 노력을 포기하면 감정이 달라지면서 강도가 약해진다. 감정에 저항하지 않으면 감정 이면의 에너지가 사라지면서 감정이 없어진다. 

- 이 과정에 들어가 보면, 감정을 갖는 것 자체를 두렵고 죄스럽게 여기고 있음을 알게 된다. 즉 감정 전반에 저항이 있다. 감정이 일어나도록 놓아두기 위해서는 먼저 감정에 대한 반응부터 놓아 버리면 쉽다. 쉬운 예로 우리는 두려운 감정 자체를 두려워한다. 그러니 감정에 대한 두려움이나 죄책감부터 놓아 버린 다음, 감정 자체에 접근한다.

- 놓아 버릴 때는 모든 생각을 무시한다. 감정에만 초점을 맞추고 생각에는 신경을 끈다. 생각은 끝없이 이어지며 스스로 강해져 다른 생각을 더 많이 일으킬 뿐이다. 생각이란 감정이 생긴 까닭을 설명하려는 마음의 합리화에 불과하다. 감정이 생기는 진짜 원인은 감정 이면에 쌓여 있는 압력이 감정을 밀어붙여 특정 시점에 올라오게 하는 데 있다. 생각이나 마음 밖 사건은 마음이 지어내는 변명일 뿐, 감정의 원인이 아니다.

- 놓아 버림에 보다 익숙해지면, 모든 부정적 감정은 생존에 대한 근본적 두려움과 관련이 있으며 모든 감정이란 마음이 생존에 필요하다 믿고 있는 프로그램일 뿐이라는 점을 알게 된다. 놓아 버림 기법을 쓰면 프로그램이 점차 제거된다. 이 과정을 통해 감정이면에 깔려 있는 동기가 점점 더 명확하게 드러난다.

- 항복한다는 것은 어떤 일에 대해 격한 감정이 없음을 뜻한다. 그런 일이 생겨도 괜찮고, 생기지 않아도 괜찮다. 자유로워지면 애착을 놓아 버린다. 어떤 것을 즐길 수는 있어도, 그것이 행복에 꼭 필요하지는 않다. 자신 이외의 사물이나 사람에게 점점 덜 의존한다. 이러한 원리는 세상일에 애착을 갖지 말라는 부처의 근본 가르침과 일치하며, "세상 속에 있되 세상의 일부가 되지 말라."라는 예수의 근본 가르침과도 일치한다.

- 어떤 감정을 항복했는데도 그 감정이 돌아오거나 계속 이어질 때가 있다. 항복할 것이 아직 남아 있기 때문이다. 평생토록 감정을 잔뜩 쌓아 놓았기에 꽉꽉 눌러 놓은 에너지가 많을 수 있는데, 이것이 올라오게 놔두고 존재를 인정해야 한다. 항복이 일어날 때면 '황홀경' 같은 경쾌한 느낌이 즉시 따른다.

- 우리는 계속 놓아 버림으로써 이러한 자유 상태에 머물 수 있다. 감정은 오고 가지만 나의 감정이 곧 나는 아니며 진짜 '나'는 감정을 지켜볼 뿐임을 깨닫기에 이른다. 더 이상 자신을 감정과 동일시하지 않는다. 일어나는 일을 관찰하고 자각하는 '나’는 늘 똑같다.

 

- 아주 느긋하면서도 바쁘게 움직였다. 그러다 문득, 생각은 전혀 필요 없음을 깨달았다. 생각은 물고기 앞의 미끼와 같다. 생각을 덥석 무는 순간 우리는 사로잡힌다. 생각이라는 미끼를 물지 않는 것이 가장 좋다. 우리는 생각이 필요 없다.

- 자각하고 있지는 못하지만 우리 내면에는 "내가 알아야 할 모든 것을 나는 이미 알고 있다."라는 진실이 있다. 이 진실은 제 스스로 성립한다.

 

 

- 기법의 효과가 좋은 탓에 역설적으로 항복에 저항이 생기는 일도 벌어진다. 삶이 별로 여의치 않거나 불쾌한 감정으로 괴로울 때는 계속해서 놓아 버림을 실천한다. 그러다 마침내 항복을 통해 곤경에서 벗어나고 만사가 순탄하면 놓아 버림을 그만둔다. 이는 실수다. 느낌이 아무리 좋아도 더 놓아 버릴 것이 있는 법이기 때문이다. 놓아 버림으로써 얻은 고양 상태와 탄력을 활용하여 계속해서 놓아 버리라. 그러면 내내 더욱더 나아질 것이기 때문이다. 놓아 버림 자체에 어떤 탄력이 생긴다. 일단 놓아 버리기 시작하면 유지하기가 쉽게 된다.  

- 어떤 특정 감정을 떨쳐 버릴 수가 없다고 느낄 때도 있다. 그럴 때는 떨쳐 버릴 수 없다는 느낌을 그냥 항복하라. 느낌을 그대로 놓아두고 그것에 저항하지 말라.

 

- 이렇게 하면 감정과 생각 사이의 관계가 보다 명확하게 드러난다. 지켜보는 데 익숙해지고 나면 일종의 실험도 할 수 있다. 이를테면 되풀이해서 떠오르기 쉬운 유형의 생각을 골라내어 그와 연관된 감정이 어떤 것인지를 알아볼 수 있다. 이어서 그 감정을 다루기 위해서는 먼저 저항하거나 비난하지 않고 그 감정이 존재함을 받아들인다. 그런 다음 감정의 에너지를 비우는 일에 들어가는데, 방법은 감정이 소진될 때까지 감정을 있는 그대로 놓아두는 것이다. 조금 지나면 앞서 들었던 생각을 들여다볼 수 있게 되어 생각의 성격이 바뀌었음을 관찰하게 될 것이다. 감정을 완전히 항복하고 놓아 버렸다면, 그것과 관련된 모든 생각은 완전히 사라지고 지금 일을 신속히 마무리하자는 생각만 남는다.

- 과거 해결에 효과가 좋은 방법 중 하나로 새로운 맥락 만들기가 있다. 과거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다는 뜻으로,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과거의 곤경이나 트라우마 안에 선물이 숨어 있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 기법의 가치를 정신 의학계에서 처음 알아본 사람은 빅토르 프랭클이다. 프랭클은 자신의 명저 <죽음의 수용소에서 Man's Search for Meaning>에서 '의미 요법 Logotherapy'으로 명명한 접근법을 풀이했다.

- 아무리 '비극적인' 경험이라 해도 모든 인생 경험에는 교훈이 숨어 있다. 경험 속에서 숨은 선물을 발견하고 그것을 받아들일 때 치유가 일어난다. 앞에서 예로 든 실직자는 시간이 흐른 뒤 지난 일을 돌이켜 보고는, 이전 직장은 성장에 방해가 되었으며 그 안에서 판에 박힌 생활을 했을 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일하면서 궤양까지 얻었던 그는 실직하기 전까지는 그곳의 즐거운 면만 보았다. 일단 상황에서 벗어나자, 그동안 육체적, 정신적, 감정적으로 치렀던 대가가 보이기 시작했다. 실직한 뒤에 그는 새로운 능력과 재능을 찾아내는 일에 마음을 열었고, 나아가 더욱 유망한 직업을 새로 찾았다. 

- 이렇듯 삶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은 성장하고, 확장하고, 경험하고, 발전할 기회다. 어떤 사건들을 돌이켜 보면 그 이면에 무의식적인 목적이 있었다고 느낄 때가 있다. 중요한 무언가를 배워야 하는데, 그것을 경험할 유일한 길이 고통스럽더라도 그 같은 사건이었음을 무의식이 알고 있는 것이다. 이는 정신분석학자 칼 융이 제창한 이론의 일부다. 평생에 걸친 연구 끝에 융은 무의식 속에는 전체가 되고 완전해지고 큰나를 깨닫고자 하는 선천적 충동이 있어, 무의식이 설사 의식적인 마음에 상처를 준다 해도 충동을 실현할 방법과 수단을 고안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 또한 융에 의하면 무의식 속에는 우리가 지닌 어떤 측면이 존재하는데 이를 '그림자'라 한다. 그림자는 자신에 대한 생각과 감정, 개념을 억압한 것들의 일체로, 스스로 직면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위기의 이점은 위기 덕에 종종 자신의 그림자를 익힌다는 것이다. 또 위기 덕에 우리는 보다 인간미 있고 폭넓은 사람이 되어 자신이 모든 인간과 공유하는 점을 깨닫는다. '그들'의 죄라고 생각한 모든 것이 내 안에도 똑같이 있다. 따라서 이런 면을 의식적으로 자각해 인정하고 항복하면 더 이상 무의식적으로 휘둘리지 않는다. 일단 그림자를 인정하면 그림자는 힘을 잃는다. 단지 내게 어떤 금지된 충동과 생각, 감정이 있음을 알아보기만 하면 된다. 그러고 나면 그런 것들을 "그래서 뭐?" 하며 다룰 수 있게 된다.

- 삶의 위기를 통과하면서 우리는 보다 인간미 있고 인정 많은 사람이 될 수 있으며, 자신과 타인을 받아들이고 이해하게 된다. 더 이상 타인이나 자신을 비난하는 일에 빠질 이유가 없어진다. 감정적 위기를 해결하면 보다 큰 지혜를 얻게 되며, 그 지혜는 평생 이익이 된다. 삶을 겁내는 것은 감정을 겁내는 것이다.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은 사건이 아니라 사건에 대한 자신의 감정이다. 감정을 정복하면 삶에 대한 두려움이 줄어든다. 자신감이 커져 기꺼이 더 큰 모험을 한다. 감정으로 인한 결과가 무엇이든 해결할 수 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두려움은 모든 주저함을 낳는 근원이어서 두려움을 정복하면 이전에 꺼렸던 인생 경험에 들어가는 길 전체가 뚫린다.

 

- 삶의 위기가 주는 또 다른 이점은 자신에 대한 자각이 커지는 것이다. 위기 상황이 압도하는 가운데에서는 한눈팔 새도 없이 자신의 상황을 유심히 들여다보고, 자신의 믿음과 목표, 가치관, 삶의 방향을 되짚어 보아야만 한다. 위기는 죄책감을 되짚어 보고 놓아 버릴 기회다. 또한 마음가짐을 완전히 바꿀 기회이기도 하다. 삶의 위기를 통과하면서 우리는 극과 극에 마주친다.

- 그 사람을 증오할 것인가, 용서할 것인가? 이번 경험에서 교훈을 얻어 성장할 것인가, 분개하고 억울해할 것인가? 다른 사람이나 자신의 결점을 눈감아 줄 것인가, 화내며 따지고 들 것인가? 미래에 비슷한 상황이 닥치면 더욱 겁내며 물러설 것인가, 이런 위기를 완전히 초월하고 정복할 것인가? 희망을 선택할 것인가, 좌절을 선택할 것인가? 이번 경험을 나눔을 배우는 기회로 삼을 것인가, 겁내고 억울해하는 겉모습 속으로 움츠러들 것인가?

- 모든 감정 경험은 올라가거나 내려갈 기회다. 어느 쪽을 택할 것인가? 이 문제에 부딪친다. 우리에게는 감정 혼란을 움켜쥐고 싶은지, 놓아 버리고 싶은지 선택할 기회가 있다. 즉 감정 혼란을 움켜쥐는 대가를 살펴볼 수 있다. 대가를 치르고 싶은가? 아니면 기꺼이 감정을 받아들이고 싶은가?  

- 선택을 할 때는 고통스러운 경험의 잔재를 움켜쥠으로써 얻을 수 있는 보상을 살펴보면 좋다. 어떤 만족을 얻으려는 것일까? 얼마나 하찮은 것에 선뜻 만족하려는 것일까? 분노, 증오, 자기 연민, 억울함. 이 모두에 하찮은 싸구려 보상, 하찮고 은밀한 만족감이 들어 있다. 아닌 척하지 말자. 고통을 움켜쥐는 데서 오는 이상야릇한 쾌감이 분명히 있다. 이 쾌감으로 인해 벌을 받아 죄책감을 덜고자 하는 우리의 무의식적 요구가 충족된다. 아울러 비참하고 꺼림칙한 기분이 든다. "계속 이래야 돼?" 하는 의문이 떠오른다.

- 따라서 중요한 것은 "얼마 동안이나 계속 괴로워하고 싶은가?"이다. 언제가 되어야 기꺼이 괴로움을 포기할 것인가? 그만하면 되고도 남는 것이 언제인가?

- 자기혐오와 끝없는 죄책감, 벌을 받고 건강하지 못하고 병이 나길 바라는 마음이 생기는 것은 우리 안의 왜소한 측면 때문이다. 그런 측면과 자신을 동일시하고 싶은가? 그런 측면에 힘을 보태고 싶은가? 자신을 그렇게 여기고 싶은가? 내가 나를 그렇게 여기면 남들도 나를 그렇게 여긴다. 내가 나를 보는 대로 세상이 나를 볼 수밖에 없다. 이로 인한 결과를 감수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스스로 자신을 인색하고 옹졸한 사람으로 본다면, 연봉 인상 목록의 첫머리에 올라가기는 어렵다.

- 위대함은 사랑의 수준으로 높이 올라가려는 자발성이다. 위대함은 타인의 인간적 약점을 받아들여 상대의 입장에서 그 사람의 고통에 연민을 느끼는 것이다. 타인을 용서하면 자신도 용서되어 죄책감이 해소된다. 부정성을 놓아버리고 사랑을 선택할 때 진정한 보상을 얻는다. 이때 혜택을 받는 사람은 자신이다. 다시 말해 진정한 보상을 얻는 사람은 자기 자신이다.

- 자신의 참모습을 자각할수록 고통에 덜 상처받는다. 자신과 타인의 인간적 약점을 연민으로 받아들이면 더 이상 굴욕당하지 않는다. 참된 겸손은 위대함에 포함되기 때문이다. 자신의 참모습을 알아보면, 보다 큰 행복을 주는 근원을 갈구한다. 이것에서 삶의 새로운 의미와 맥락을 얻는다. 자신의 가치를 못 느껴 내심 허무해하는 대신에 자신을 참으로 사랑하고 존중하고 존경하면, 행복의 근원을 세상에서 더 이상 찾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 내면에 있기 때문이다.

- 부정성을 포기하는 기법과 긍정에 대한 저항을 항복하는 기법을 활용하면, 언젠가는 자신이 얼마나 큰 존재인지를 전체적으로 자각한다. 이는 일단 경험하면 절대 잊히지 않는다. 전과 같이 세상에서 위협을 느끼는 일은 없다. 세상 관례를 습관처럼 계속 따르긴 하겠지만, 사로잡히거나 쉽게 상처받고 의심 많던 마음속 성향은 이제 사라지고 없다. 겉으로 보이는 행동은 똑같아 보일지라도 마음속 원인은 이제 전혀 다르다. 의식적으로 감정을 해결한 결과, 다치지도 흔들리지도 않는 사람이 되었다. 어떤 총알에도 내면은 끄떡없다. 이제 평정과 품위를 잃지 않는 삶을 살아갈 수 있다.

- 어떤 특정 영역 한 가지에서 감정의 척도가 진보하는 경험을 하면, 한계에 부딪힌 삶의 다른 영역에서도 그렇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모든 '못해'의 이면에는 '안 해'가 있을 뿐이다. 그리고 '안 해’는 사실 "하려니까 겁이 나." 또는 "하려니까 창피해." 또는 "시도해 보기에는 난 자부심이 너무 세. 실패가 두려우니까."를 의미한다. 이면에는 자신을 향한 분노(150)가 있고, 자부심(175)으로 인한 사정이 있다. 이러한 감정을 인정하고 놓아 버리면 용기(200)의 수준으로 올라가고, 마침내 받아들임과 내적 평화에 이른다. 스스로 극복한 영역에서만큼은 그렇게 된다.

- 무의욕과 암울함은 자신의 왜소함을 만족스럽게 여기고 믿어버린 대가다. 피해자를 자처한 대가이며, 세상이 자신을 프로그래밍하도록 놓아둔 대가다. 부정성을 믿어 버린 대가이며, 사랑과 용기, 위대함을 가진 자신의 일면에 저항한 결과다. 또한 남이 나를 잘못된 인간으로 낙인찍도록 놓아두거나 내가 나를 그러하도록 놓아둔 결과며, 그에 따라 스스로 부정적인 맥락에 놓인 결과다. 사실 무의욕과 암울함은 자신을 그렇게 규정짓도록 부지불식간에 허용한 결과일 뿐이다. 이 상태에서 벗어나는 길은 보다 의식하는 것이다.

- '보다 의식한다.'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 첫째로 자신의 참모습을 찾는 일에 나서서 남이나 내 마음속 목소리가 나를 나약하고 무력한 쪽으로 깎아내리고 낙인찍으려 할 때, 그 목소리가 나를 프로그래밍하도록 놓아두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이 상황에서 벗어나려면, 그동안 자신이 부정성을 믿었으며 그것도 기꺼이 믿었다는 점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 벗어나는 길은 '모든 것'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이다.

- 생각이 솟는 근원을 살펴보고 생각을 어디서 얻는지를 확인해 생각에 '내 것'(이므로 신성불가침)이라는 딱지를 붙이는 허영을 버리면, 생각이란 객관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것임을 알게 된다. 생각의 근원은 부모나 기타 가족, 선생님에게서 아주 어릴 때 받은 교육에 있는 경우가 많고, 친구나 신문, 영화, 텔레비전, 라디오 ...

- 쑥스럽고, 자존심 상하고, 어색하고, 새로운 동작을 익히느라 애쓰고, 시간과 에너지를 들이는 것이 아깝다는 마음이 느껴진다. '못해'를 '안 해'로 바꾸고 나면 그 모든 감정이 드러나고, 그러고 나면 감정을 항복할 수 있다.

- 우리에게는 감정을 인정하고 항복할 자유도 있고 항복하지 않을 자유도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갖가지 '못해'를 검토해 그것이 실제로는 '안 해'임을 알아내더라도, '안 해'를 가져오는 부정적 감정을 놓아 버려야 하는 것은 아니다.

- 우리에게는 놓아 버림을 거부할 자유가 있다. 원하는 한 계속 부정성을 움켜쥘 자유가 있다. 부정성을 포기해야 한다는 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자유인이다. 그러나 "나는 감정의 피해자라서 못한다."라고 생각하는 것에 비해 "나는 안 하겠다."라고 하는 것은 사뭇 다른 느낌임을 깨달으면, 자아 개념에 큰 차이가 생긴다. 예를 들어, 원한다면 누군가를 미워하기로 마음먹을 수 있다. 남을 탓하기로 마음먹을 수도, 환경을 탓하기로 마음먹을 수도 있다. 그러나 분명히 의식해 '우리는 자유로이 마음가짐을 결정한다.'는 점을 깨달을 때 더 높은 의식 상태에 들어갈 수 있으며, 감정에 무력한 피해자가 되기보다는 더 큰 힘과 장악력을 가질 수 있다.

- 암울함과 무의욕에서 벗어나기 위해 넘어야 하는 커다란 걸림돌 가운데 원망이 있다. 원망은 그 자체만으로도 독립적인 주제이며, 파고들 만한 가치가 있다.

 

- 첫째, 남을 원망하면 큰 보상이 따른다. 나는 죄가 없어진다. 자기 연민을 즐길 수 있다. 순교자나 피해자가 된다. 동정받는 사람이 된다.
원망의 가장 큰 보상은 나는 죄 없는 피해자가 되고 상대방은 나쁜 자가 된다는 점에 있다. 이런 게임이 벌어지는 모습은 대중매체에서 늘 볼 수 있다. 수많은 논란과 비방, 인신공격, 소송으로 각색된 원망 게임이 끝없이 이어진다. 원망에는 감정적 보상만 아니라 상당한 경제적 이득도 따른다. 따라서 죄 없는 피해자가 되는 것은 구미가 당기는 일이다. 종종 경제적 보상까지 따르기 때문이다.
 
- 원망은 최고의 변명이다. 원망을 하면 매일 한계 속에서 왜소하게 있으면서도 죄책감을 느끼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대가가 있다. 자유를 잃는다. 또한 피해자 역할에는 '나는 나약하고, 상처받기 쉽고, 무력하다.'라는 자아 개념이 따라오기 마련이고, 이 개념은 무의욕과 암울함의 주요 성분이다.

- 원망에서 벗어나는 첫걸음은 우리가 원망하려고 '마음먹는다'는 점을 아는 것이다. 비슷한 상황에 처한 다른 사람들은 그 같은 상황을 용서했거나, 잊어버렸거나, 완전히 다른 방법으로 해결했다. 앞에서 빅토르 프랭클의 경우를 보았는데, 프랭클은 나치 수용소 간수들을 용서하기로 마음먹었으며, 수용소에서의 경험 속에 선물이 숨어 있음을 보았다. 원망하지 않기로 마음먹은 프랭클 같은 사람도 있으니, 우리에게도 선택권은 있다. 원망하려고 마음을 먹었기 때문에 원망하는 것임을 깨달을 수 있는 정직성이 있어야 한다. 상황이 아무리 원망할 만하게 보인다 해도, 모두 마음먹기에 달렸다. 이는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다. 스스로 자신의 의식을 책임질 것인가 하는 문제일 뿐이다.

- 원망해야 한다라고 보지 않고 원망하기로 마음먹을 뿐이라고 보는 사람은 입장이 완전히 다르다. 같은 상황에서 마음은 보통 "그래, 다른 사람이나 다른 일 탓이 아니라면 그럼 내 탓이 분명하네."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남을 원망하든 나를 원망하든 둘 다 필요 없는 일일 뿐이다.

- 위에서 든 예는 뛰어나가 생일 선물을 사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 선택한 결과로 현재 입장에 있는 것임을 자각하자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완전한 자유가 있어서 보다 자유롭게 행동하고 선택할 수 있다. 과거의 억울한 일에 붙들려 대책 없이 피해 보는 사람보다 훨씬 높은 의식 상태에 있는 것이다.

- 의식의 법칙 중에 이런 것이 있다. "자기에게 어떤 부정적 생각이나 믿음이 적용된다고 의식적으로 말하면, 실제로 그 영향 하에 놓인다." 우리에게는 부정적 신념 체계를 믿지 않기로 결정할 자유가 있다.

- 그렇다면 이런 신념 체계는 일상에서 어떻게 작용할까? 흔한 예를 들어 보자. 신문을 보니 실업률이 사상 최고다. 텔레비전 뉴스에서는 해설자가 "일자리가 없다."라고 잘라 말한다. 이 시점에서 우리에게는 부정적 사고방식을 믿는 일을 거부할 자유가 있다. 대신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내게는 실업률이 적용되지 않는다." 부정적 신념은 그것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면 우리 삶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내 경험을 밝히면,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실업률이 높았던 기간에도 일자리를 구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사실 동시에 두세 가지 직업을 가질 수도 있었다.  

- 이제 그냥 편히 있으면서 무슨 일이 생기는지 지켜본다. 이 실험에서 상대방이 '이해했는지'는 관심사가 아니다. 내가 이해했는지만이 중요하다. 문제를 대하는 나 자신의 입장을 바꾼 다음, 무슨 일이 생기는지 지켜보는 것만이 관심사다. 보통은 아주 보람찬 경험이 따라오기 마련인데, 이 경험은 상황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 이전에 겪은 트라우마의 찌꺼기를 아직까지 해결하지 못하면 이 또한 무의욕에 빠지는 원인이 된다. 마음은 과거가 되풀이되리라는 예상을 미래에 투영한다. 이런 무의식적 심리 역동이 나타나면, 감정 복합체를 다시금 잘 살펴보려는 마음을 먹고 그것을 낱낱이 나눠서, 부정적인 면을 놓아 버리고 긍정적인 면에 대한 저항도 놓아 버린다. 이렇게 하면 미래를 보는 눈이 달라진다. 격정에 압도되었을 때 해결할 방법을 몰랐던 자신을 용서할 수 있다. 당시에 남은 찌꺼기로 인해 감정 장애에 빠졌지만, 무의식적인 마음속에는 시간 같은 것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이제 언제라도 과거의 일을 치유하기로 마음먹으면 된다. 자신을 위해 감정 치유를 할 때, 과거 일이 다른 의미를 띠기 시작한다. 우리의 높은 큰나가 그 일을 이해할 새로운 맥락을 창출하기 시작한다. 숨은 선물이 보인다. 끝내는 그 일 덕에 배우고 성장하고 지혜를 습득할 기회를 새롭게 얻은 것에 감사를 표하기에 이른다. 

 

- 자신이 어떻게 조종되고, 이용되고, 기만당했는지를 깨달으면 분노가 치밀어 오를 것이다. 이런 시도가 있으면 즉시 상대하라. 화내도 괜찮다. 무의욕에 빠지느니 화내는 편이 백번 낫다. 분노 속에는 큰 에너지가 들어 있다. 그런 시도를 상대로 뭔가를 할 수 있다. 행동을 취할 수 있다. 마음을 바꿀 수 있다. 방향을 거꾸로 할 수 있다. 그러면 분노에서 용기로 뛰어오르기가 쉬워진다. 용기의 수준에서는 그런 시도를 보고, 조사하고, 대체 어떻게 발생하는지 관찰할 수 있다.

- 자신의 왜소함은 돈 주고 산 짝퉁 상품과 같은 것임을 알게 된다. 이 조사를 하다 뜻하지 않게 자기 내면의 결백성과 만날 때가 있을 것이다. 결백성을 재발견하면 죄책감을 놓아 버릴 수 있다. 죄책감이 사라지면 자학할 필요도 사라지고, 그러면 무의욕과 암울함에서 곧바로 탈출한다. 우리는 자기 자신을 인정하기로, 즉 자신이 중요하며 가치 있음을 인정하기로 마음먹을 수 있다. 또한 자신이 겪었던 프로그램이 다른 이들에게는 어떻게 설치되었는지 볼 수 있다. 그들 역시 당시에 최선이라 생각한 대로 행동했던 것뿐이다. 그들을 더 이상 원망할 필요도, 나 자신을 원망할 필요도 없다. 더 이상 쓸모가 없고 먹히지도 않으니, 원망 게임을 완전히 포기할 수 있다.

- 무의욕과 암울함, '못해'라는 생각에 시달리는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한 요긴한 기법이 또 있다. 자신이 씨름 중인 문제를 이미 해결한 사람들과 같이 있는 것이다. 이것이 자조 집단이 발휘하는 위대한 힘의 일부다. 부정적 상태에 빠져 있을 때 부정적 생각 형태에는 에너지가 많고 긍정적 생각 형태는 허약하다. 에너지 진동수가 높은 사람은 긍정적 생각 형태에 에너지를 불어넣는다.

-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생활 여건도 살펴본 후에, 심리 치료를 받는 대신 석 달 동안 간단한 권고대로 해 보라고 제안했다. 효과가 없으면 그때 가서 심리 치료를 받아야 할지 다시 따져 보기로 했다. 권고는 단지 그 집단에서 나와 이혼한 여성들과 얽히지 말라는 것과 이혼 경력에도 불구하고 관계를 다시 맺는 데 성공한 이들과 함께 있으라는 것이었다. 그녀는 처음에는 저항하면서 자기는 그런 사람들과는 아무런 공통점이 없다고 단언했다. 그러더니 두 가지는 분명한 사실이라고 인정했다. 첫째는 긍정적인 사람들과 관계 맺는 일에는 에너지가 훨씬 덜 들어간다는 것이고, 둘째는 의식의 법칙 중 하나가 '유유상종'이라는 것이다. 원통함은 원통함을 끌어당기고, 사랑은 사랑을 끌어당긴다. 그녀는 자문했다.

"원통함에 빠져 있었던 결과로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 걸까? 긍정적이고 도움이 되는 것에서 뭐라도 얻으려 한 적이 있었나?"

시간이 가면서 그녀는 기존 집단에서 시간 보내기를 그만두고, 자기보다 건강하고 균형 잡힌 사람들과의 관계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 그녀는 자기보다 행복한 사람들과 함께하면서 자신이 속으로 정말 많은 부정성을 부둥켜안고 있었음을 자연히 깨닫고 몹시 기뻐했다. 즉 부정성을 부둥켜안기로 마음먹고 의식적으로 그것을 쥐고 있었음을 깨닫고 부정성으로 인한 대가가 어떤 것인지도 제대로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렇게 하면서 사회생활 전체가 달라졌다. 웃음과 행복을 되찾았다. 편두통이 사라졌다. 결국 다시 사랑에 빠졌고, 사랑에 빠지는 것이야말로 이제껏 자기가 받아본 궤양치료 가운데 최고라는 농담도 했다.

- 자신이 무의욕 상태라 느껴지면, 스스로 무엇을 증명하려는 것인지를 자문함으로써 숨어 있는 프로그램을 찾아내면 된다. 삶이 끔찍하다는 증명을 하려는 것인가? 사랑할 만한 사람이 없다는 것인가? 이 세상이 절망적이라는 것인가? 내 잘못이 아니라는 것인가? 행복은 불가능하다는 것인가? 무엇을 정당화하려는 것일까? "내가 옳다."라고 하려고 얼마나 많은 대가를 치를 셈일까? 이때 생겨나는 감정을 인정하고 놓아 버리면, 해답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 도와줄 사람을 찾아 운다. 스스로는 상황에 대해 아무것도 할 수 없지만 다른 누군가가 자기를 위해 무언가를 해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무의욕과는 반대다. 무의욕 상태에는 아무도 도움이 안 된다고 여긴다.

 

- 우리 대부분은 비탄을 억제해 품고 있다. 특히 남자들은 비탄이라는 감정을 숨긴다. 울면 남자답지 못하다는 소리를 듣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대부분 자기가 억제한 비탄의 양에 두려움을 느낀다. 넘쳐 나는 비탄에 압도당할까 봐 겁을 잔뜩 먹는다.

"한번 울기 시작하면 절대 못 그칠 거야.", "세상에 비탄이 가득해, 나도, 가족도, 친구들도 인생에 비탄이 가득해.", "오, 이루 말할 수 없는 삶의 비극이여! 그 모든 실망, 박살 난 희망이여!" 

억제한 비탄은 심인성 신체질환과 기타 건강 문제의 원인이 될 때가 많다.

- 감정을 억제하는 대신 감정이 올라오게 놔두고 그 감정을 포기하면, 비탄의 수준에서 받아들임의 수준으로 단숨에 올라갈 수 있다. 어떤 상실에 대해 비탄이 계속되는 것은 상실을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저항하면서 비탄만 쏟아지도록 놓아두기 때문이다. 어떤 감정이 지속되는 것은 감정을 포기하지 않으려고 저항하기 때문이다.(그래서 "운다고 되나."라는 말이 있다.) 비탄을 해결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면, 이미 자부심 수준으로 올라간 것이다.

- 그러면 '할 수 있다.', '해결할 수 있다.'는 감정에 힘입어 용기로 올라간다. 마음속 감정을 직시해 놓아 버릴 용기가 있으면 그 힘으로 받아들임의 수준에 도달하고, 최종적으로는 평화의 수준에 이른다. 오랫동안 붙잡고 있던 비탄을 충분히 놓아 버리고 나면, 얼굴 표정이 바뀐 것을 친구와 가족이 알아본다. 발걸음도 가벼워지고 젊어 보인다.

- 비탄에는 시한이 있다는 사실에서 그것을 직시할 용기와 자발성을 얻을 수 있다. 비탄의 감정에 저항하지 않고 완전히 항복하면, 10분에서 20분쯤 지나면 감정이 줄어들어 없어진다. 그 후 감정이 멎어 있는 시간은 일정하지 않다. 비탄이 생길 때마다 계속 항복하면 결국에는 비탄이 없어진다. 완전하게 감정을 경험하도록 자신을 놓아두는 것이 전부다. 비탄의 압도를 10분에서 20분 동안 견디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어느 결에 비탄이 사라진다. 비탄에 저항하면 비탄은 이어지고 또 이어진다. 억제한 비탄은 수년을 갈 수도 있다.

- 사람들은 어떤 것이 자신에게 중요하거나 익숙하면 이것이 자기에게 영원히 딸려 있을 것처럼 느낀다. 따라서 이런 착각을 위협받으면 분노와 분개, 자기 연민이 생기는데, 이런 감정으로 인해 억울함이 오래갈 수 있다. 세상 돌아가는 방식을 바꾸고 싶지만 바꾸지 못하는 데서 오는 것이 '무력한 격노'다. 존재의 이런 실상과 직면하면 중요한 것을 잃었을 때 각자의 철학적 입장이 바뀐다. 한 번의 중요한 상실로 모든 애착과 관계의 본성을 깨우칠 수도 있지만, 모든 관계는 오래가지 않는다는 명백한 사실을 다시 부인하고 상실을 보상받기 위해 기존 유대를 맹렬하게 강화하기도 한다.

- 한편 피할 수 없는 상실을 부인하려고 끝까지 조종을 시도하기도 한다. 착각 속에서 마음은 상실을 피하기 위해 전술을 개발하려 든다. 이 전술은 더 착하거나, 더 열심히 일하거나, 더 정직하게나, 더 인내하거나, 더 충직하려는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종교를 가진 사람들의 경우는 약속과 협상으로 신을 조종하려는 모습으로 나타날 수도 있다. 인간관계에서는 과도하게 보상하려는 행동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결별을 막으려는 노력으로 배우자에게 잘해 주고, 다정하게 굴고, 배려하기도 한다. 무신경하던 남편이 문제의 근본 원인을 알아보는 대신 갑자기 선물과 꽃을 사 들고 귀가하기 시작한다.

- 부정적 감정을 모두 통과하고, 항복하고, 놓아 버리고 나면, 마침내 감정이 해소되면서 전처럼 고통을 겪지 않고 받아들일 수 있다. 받아들임은 감수와 다르다. 감수하면 여전히 이전 감정의 찌꺼기가 남아 있다. 감수할 때는 실상을 인정하는 것을 주저하고 미룬다. 감수는 "좋아하지는 않지만 참아야지." 하는 것이다.

- 받아들임과 함께 실상에 대한 저항을 포기한다. 따라서 받아들임의 징후 중 한 가지는 평정이다받아들임과 함께 분투가 끝나고 새 삶이 시작된다. 부정적 감정에 묶여 있던 에너지가 풀려나면서, 그 사람의 건강한 측면이 되살아난다. 마음의 창조적 측면이 새로운 삶의 기회와 더욱 성장하고 경험할 여지를 얻을 기회를 개척하면서 새삼 살아 있다는 느낌을 준다. '익명의 알코올 중독자들 Alcoholics Anonymous, AA' 모임에서 하는 <평정 기도 Serenity Prayer>는 많은 이가 따르는 유명한 가르침이다.

 

신이시여,
바꿀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는 평정과
바꿀 수 있는 것을 바꾸는 용기와
그 차이를 아는 지혜를 얻게 해 주소서.

 

 

- 애도와 상실에 딸려 오는 갖가지 감정을 통과하지 못하면 각 감정이 만성 정체에 빠질 수 있다. 우울이 장기화되고 부인이 장기화되어 고인의 죽음을 사실상 부인할 수 있다. 또한 노상 죄책감에 빠져 있거나, 상실에 따르는 감정 통과하기를 거부하면 비탄반응이 길어지고 몸에도 병이 생길 수 있다. 이런 과정 이면의 기제는 뒤에서 마음과 몸의 관계를 다룰 때 설명하겠다.

- 포기하지 않은 감정 속에 에너지를 억제하면 그것이 내분비계와 신경계에서 에너지 균형이 맞지 않는 현상으로 다시 나타나, 침술 경락상의 생명 에너지 흐름에 손상을 입힌다. 이렇게 되면 여러 장기에 병이 든다. 주변의 누군가를 떠나보낸 사람들은 일반 사람들에 비해 사망률이 훨씬 높으며, 특히 배우자가 죽은 사람의 경우 배우자 죽음 이후 1~2년 사이에 높은 사망률을 기록한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 비탄과 관련해 죄책감이 생기는 원인 중 한 가지는 사랑하는 이가 자신을 떠난 것에 대한 분노다. 의식적으로 품자니 비이성적인 것 같아 흔히 억제하는 감정이 분노다. 한편으로는 떠난 사람의 좋았던 점을 상상 속에서 더 좋게 부풀리기도 하는데, 이때 두 심리의 불일치가 죄책감을 악화시킨다.  

- 앞에서 보았듯이 모든 큰 슬픔과 상실은 애착에서 기인하며 모든 관계는 일시적이라는 점을 부인하는 데서 시작한다. 삶을 잘 살펴보고 자신이 어떤 것에 애착을 갖는지 찾아낸 다음 이렇게 자문하라.

"이런 것이 채워 주는 마음속 요구는 어떤 것일까? 잃는다면 어떤 느낌이 들까? 어떻게 하면 마음속 감정생활의 균형을 맞춰 마음 밖 물건이나 사람에 대한 애착의 양과 정도를 줄일 수 있을까?"

- 외부 사물에 대한 애착이 클수록 상실을 두려워하거나 상실에 상처받기 쉽다. 왜 그렇게 스스로 불완전하게 느끼는지 자문할 수도 있다.

"왜 이토록 내면의 공허를 느끼면서 애착과 타인 의존이라는 형태의 해결책을 찾아야 할까?"

- 내면에서 미숙한 부분을 잘 살펴본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이렇게 조사해 보아야 한다.

"사랑을 주기보다 사랑을 받기 위해 관심을 보이는 것은 어떤 것일까?"

다정할수록 비탄과 상실에 상처받기 어렵고, 애착을 가질 필요도 덜하다. 모든 부정적 감정을 인정하고 놓아 버리면 왜소함에서 벗어나 자신의 위대함을 알아보고, 주는 즐거움과 사랑하는 즐거움에서 내면의 환희가 일어난다. 때문에 상실로 상처받지 않는다. 행복의 근원을 '안에서' 발견할 때 우리는 세상을 잃는 상실에 면역이 생긴다.

- 자신의 삶을 비평적인 시선으로 살펴보면, 자신이 빠져 있는 모든 애착과 도피가 보인다. 그 하나하나가 미래에 아픔과 괴로움을 일으키는 근원이다. 그중에서도 정말로 중요한 부분들은 면밀히 조사해야 한다. 이런 문제를 직시하지 못하는 예로 은퇴 증후군이 있다. 이 증후군은 아이들이 자라 집을 떠나면서 자신의 역할을 잃은 여자나(빈 둥지 증후군) 퇴직할 나이에 이르거나 일자리를 잃었거나 신체장애로 이전에 하던 일을 못하게 된 남자에게 일어날 수 있다. 이런 상황에 처했을 때 중년기 사람이 보이는 보통 반응은 이전부터 수년간 해온 부인에서 비롯한다. 불가피한 일에 직면해 내면의 동일한 욕구를 충족시킬 만한 다른 활동을 미리 계획하지 못하는 경우가 흔하다. 여기서 내면의 욕구란 자존감이나 중요한 일을 한다는 느낌 또는 누군가 자신을 필요로 하며 그로 인해 자신이 중요하다는 느낌을 얻으려는 욕구, 무언가 기여하고 생산하려는 욕구 등을 말한다. 불가피한 일을 예상해 미리 준비하면 나중에 상실로 상처 입고 비탄에 빠지는 것보다 상대적으로 덜 불쾌하다. 

- 연애 관계도 정직하게 검토한다. 내면의 이기적 욕구에 상대가 얼마나 보탬이 되는 걸까? 나는 나의 이득을 위해 상대를 얼마나 활용하는 걸까? 상대는 나의 행복에 보탬이 되는데, 어느 정도로 그럴까? 이를 알기 위해서는 이렇게 자문하기만 하면 된다.

"나를 떠나는 것이 그 사람이 가장 행복해질 수 있는 길이라면, 어떤 기분이 들까?"

이 질문을 통해 내가 상대방을 얼마나 구속하고 통제하려 했는지가 드러난다. 그것은 애착이지 사랑이 아니다.

- 우리는 겁먹고 무능한 프로그램의 세트가 우리를 휘두르도록 부지불식간에 용납했는데, 왜소한 자아가 믿는 것이 이 프로그램 세트다. 이러한 프로그램들이 더 이상 우리를 휘두르지 못하도록 에너지 공급을 끊는 것이 놓아 버림의 목적이다. 이렇게 할 때 우리는 의식이 커지면서 높은 큰나에 대한 자각도 커질 수 있다. 우리 내면의 '큰나'라고 하는 것은 사랑을 구하기보다 그냥 사랑한다. 따라서 우리는 언제나 한계 없는 사랑에 감싸여 있다는 자각이 생긴다.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저절로 끌린다.
 
- 게다가 원인을 자각하지 못하는 공포도 있다. 바로 보복에 대한 공포다. 이 공포는 공개적으로 비판하고, 되받아치고, 공격하고 싶은 기대에서 생긴다. 공포의 대상에 대한 분노가 공포 이면에 있다가, 공포를 놓아 버렸을 때 종종 드러난다. 공포를 놓아 버려서 극복하려는 자발성 덕분에, 그다음 수준인 분노에 이른 것이다. 이 공포·분노 감정의 조합을 직시해 항복하면, 즉시 자부심과 용기의 수준으로 상승한다.

- 공포 자체에 대한 공포 놓아 버림은 아주 좋은 실험이다. 공포 겁내기를 멈추고 나면 공포도 단지 어떤 느낌일 뿐이라는 것을 안다. 사실 공포는 우울증보다는 훨씬 견딜 만한 것이다. 심한 우울증에 빠졌던 사람은 놀랍게도 공포의 감정이 되돌아오면 반긴다. 절망보다는 공포가 낫다고 느낀다.

- 나는 도저히 어찌할 바를 몰라 어떻게 하면 도울 수 있을지 몇 주간 머리를 쥐어짰다. 그러다 결국에는 놓아 버렸다. 그냥 완전히 포기하고 항복이 주는 후련함을 맛보았다.

"베티를 돕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유일하게 남은 일은 베티를 사랑하는 것뿐이다."
그래서 그렇게 했다. 베티를 마음에 떠올리며 사랑스럽게 여겼고, 전화로 이야기할 때마다 베티에게 최대한의 사랑을 보냈다. 그렇게 '사랑 요법'에 들어간 지 몇 달 만에 진료실에서 그녀를 만날 수 있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스스로 아무런 이해도 얻지 못하긴 했지만 베티는 조금씩 나아졌고 공포와 장애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그녀는 심리 문제를 놓고 이야기하기가 몹시 두렵다고 했다. 그래서 몇 달, 몇 년이 지나도록 진료하면서 내가 한 일은 그저 그녀를 사랑하는 것뿐이었다. 

- 우리가 무의식 속에 감추고 있는 공포도 감정 성장에 장애가 된다. 그렇듯 우리가 직시하고 인정하기를 싫어하는 영역을 칼 융은 "그림자"라고 명명했다. 융은 자아가 치유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림자를 직시하고 인정해야 한다고 했다. 우리 모두의 내면, 즉 융이 "집단 무의식"이라 부른 것 속에는 우리가 자신에 대해 받아들이기 싫어하는 것들이 모두 감추어져 있다는 것이다.

- 융에 의하면, 사람들은 자신의 그림자를 세상에 투사해 세상을 악으로 보고 규탄하면서 세상 속의 악과 싸우는 일이 자신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실제로는 자신의 내면에 그런 생각과 충동이 존재함을 인정하는 것이 문제다. 생각과 충동은 인정하면 조용해진다. 일단 조용해지면, 우리는 더 이상 그 생각과 충동에 무의식적으로 휘둘리지 않는다.

- 무의식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미지의 것에 대해 느끼는 공포를 잘 살펴볼 때는 유머 감각을 갖는 것이 도움이 된다. 일단 잘 살펴보고 인정하면 그림자는 더 이상 힘을 쓰지 못한다. 사실 유일하게 그림자에 힘을 부여하는 것은 그런 생각과 충동에 대한 공포 자체다. 일단 자신의 그림자와 친숙해지면 더 이상 자신의 공포를 세상에 투사할 필요가 없어져 공포가 신속하게 사라진다.

- 어떤 매력이 있기에 갖가지 형태의 아수라장을 다루는 텔레비전 프로가 끝도 없이 나올까? 화면에 나오고 있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안전한 장면들이 모두 우리의 정신 속에서 금지되어 있는 무의식적 환상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마음이라는 텔레비전 화면에 나오는 동일한 영화를 잘 살펴보고 그런 영화가 어디서 비롯되는지를 알고자 한다면, 이런 '오락'이 갖는 매력은 사라진다. 자신의 그림자에 담긴 내용을 인정한 사람은 범죄와 폭력, 무서운 재앙에 아무런 관심이 없다.

- 타인의 의견을 두려워하는 것도 마음속 공포와 친숙해지는 데 장애가 된다. 마음속에서는 타인의 동의를 기대하는 공상이 끊임없이 계속되고 있다. 따라서 권위 있는 인물을 포함한 다른 사람의 의견에 동조하고 그 의견까지 합쳐 자신의 의견처럼 마음속에서 듣는다.

- 공포를 살펴볼 때, 칼 융이 그림자 속에 있는 금지된 것들의 저장고를 '집단 무의식'의 일부로 보았다는 점을 기억해 두면 좋다. 집단 무의식이라는 용어는 그런 생각과 공상이 모든 사람에게 있음을 의미한다. 누구나 감정을 상징으로 표현한다. 또한 누구나 자신이 멍청하고 못생겼으며 귀여운 데라고는 없는 실패작이라는 공포를 남모르게 내내 품고 있다.

- 무의식적인 마음은 예의를 모른다. 지극히 무례한 개념을 떠올리며 생각한다. "노숙자를 죽여라!"라는 말을 떠올리면 무의식은 그 말 그대로 의도를 갖는다. 운전할 때 누가 끼어들면 자기 내면을 깊숙이 들여다보면서, 상대를 어떻게 하고 싶은지 아주 솔직하게 마음에 떠오르는 이미지를 상상해 보라. 상대방 차를 도로 밖으로 밀어내고 싶을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아주 박살 내 버려. 절벽 끝으로 밀어 버려. 이렇지 않은가? 그것이 무의식의 사고방식이다.

- 유머 감각이 도움이 되는 까닭은 잘 살펴보기만 하면 그런 이미지가 웃길 따름이기 때문이다. 하나도 무서울 것이 없다. 무의식이 이미지를 다루는 방식이 그럴 뿐이다. 내가 형편없는 인간이거나 범죄자가 될 가능성이 있다는 의미가 아니다. 인간의 동물적 마음이 무의식의 차원에서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정직하게 직시했음을 의미할 뿐이다.

- 그런 이미지가 떠오른다 해서 스스로 멜로드라마를 연출하거나, 자기비판에 열을 올리거나, 비극적인 기분을 느낄 이유는 없다. 무의식은 원래 상스럽고 미개하다. 우리의 지성이 초등학교에 다니는 동안, 우리의 무의식은 정글에 남아 여전히 나무에서 줄을 타고 있다! 그림자 측면을 살펴보는 시간은 얌전을 떨거나 비위가 약한 척하는 시간이 아니다. 그렇다고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시간도 아니다. 무의식에서의 상징은 상징일 뿐이며, 천성 자체가 원시적이다. 상징을 의식적으로 다룬다면 상징으로 인해 제약을 받기보다 힘을 얻을 수 있다.

- 그림자를 계속 감추고 그 많은 공포를 억제하려면 에너지가 많이 든다. 그 결과 에너지는 줄어들고 감정 면에서 사랑할 능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 의식의 세계에서 감정은 유유상종하는 법이라 공포는 공포를 끌어당기고 사랑은 사랑을 끌어당긴다. 공포를 많이 품을수록 무서운 상황을 삶에 더 많이 끌어당긴다. 각각의 공포에는 방어 장치를 만들어 낼 에너지가 더 필요해져 에너지가 전부 방어 조치를 확대하는 일에 소모된다. 

- 그들을 잃을까 봐 겁나서가 아니라 사랑하는 마음에서 할 수 있지 않을까? 모르는 사람에게 예의 바르고 공손하게 대하는 것도 좋지 않은 소리를 들을까 봐 두렵기 때문이 아니라 같은 인간으로서 보살피는 마음에서 할 수 있지 않을까? 일을 잘 해내는 것도 우수한 성과를 원하고 동료를 위하는 마음에서 할 수 있지 않을까? 업무를 문제없이 수행하는 것도 실직의 공포나 야망추구 때문이 아니라 내가 하는 일로 혜택을 받을 사람 때문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겁나는 경쟁보다는 협력을 통해 더 큰 성취를 할 수 있지 않을까? 운전을 조심해서 하는 것도 사고가 겁나서가 아니라 자신을 깊이 존경하기에 안전을 위해 할 수 있지 않을까?

- 영적인 차원에서도 마찬가지다. 같은 인간에 대해 연민을 느끼고 자기 일처럼 느끼기에 타인을 보살피는 것이 신에게 벌을 받을까 봐 두렵기에 사랑하려 애쓰는 것보다 진보가 빠르지 않을까?

- 우리는 공포가 취하는 특정 형태 중 한 가지를 죄책감이라고 부른다. 죄책감은 실제로든 상상으로든, 잘못했으니 처벌받을 수도 있다는 느낌과 연관된다. 처벌은 바깥세상에서 다가오거나, 감정상으로 자신을 처벌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 모든 부정적 감정에는 죄책감이 딸려 오며, 따라서 공포가 있는 곳에는 죄책감이 존재한다. 죄스러운 생각을 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근력을 시험해 달라고 하면, 근육이 순간적으로 약해짐을 알 수 있다.  

- 분노하는 편이 체념, 무의욕, 우울, 비탄에 빠지는 것보다 낫다! 분노한다는 것은 텔레비전이나 신문, 잡지, 이웃 사람, 지하철 대화, 종업원이 무심코 뱉은 한마디, 갖은 헛소리들에 넘어가지 않고 스스로 마음을 관장함을 뜻한다. 우리의 기억 장치에 들어온 것은 헛소리였다. 이 점을 알게 되면 공포가 크게 줄어든다. 감정이 일어나도록 놓아둔 채 그 본색을 알아보고, 모든 헛소리를 집어치우고, 모두 놓아 버리는 일을 즐긴다.

- 내면을 깊숙이 들여다보고 내면이 본래 천진하다는 것을 알면, 자신을 미워할 수 없다. 자신을 비난하지 않고, 남이 퍼붓는 비난을 믿지 않고, 가치 있는 인간이 되지 못한 것으로 못 박으려는 교묘한 시도에 당하지도 않는다. 자신의 힘을 되찾을 때다. 지나가던 사기꾼에게 번번이 힘을 넘겨주는 일을 그만둘 때다. 그들은 우리의 공포심을 자극해 주머니에서 돈을 털어 내거나 자기들이 내세우는 대의의 노예가 되게 함으로써, 우리의 에너지를 먹고 산다. 이제 선택할 능력이 있기에, 그 모든 공포에서 벗어나는 것은 쉬운 일이다.

- 우리는 내면 탐험을 하다가 끔찍하고 지독한 참모습을 만날까 봐 두려워한다. 이 두려움은 세상이 우리 마음에 설치한 프로그램의 하나로, 참모습을 발견하지 못하도록 세워 놓은 장애물이다. 세상이 우리가 발견하지 못하기를 바라는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바로 우리 자신의 참모습이다. 왜일까? 발견하면 자유로워지기 때문이다. 그러면 더 이상 통제하고, 조종하고, 이용하고, 착취하고, 노예로 만들고, 가두어 놓고, 헐뜯고, 힘을 뺏을 수 없다. 

- 바람이나 욕망의 작용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이들은 주로 이런 환상을 가지고 있다.

"원하는 바를 얻으려면 그것을 욕망하는 수밖에 없다. 욕망을 놓아 버리면 원하는 바를 얻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 반대가 진실이다. 욕망, 특히 갈망 같은 강한 욕망은 원하는 것을 얻는 데 장애로 작용하는 경우가 많다.

- 이유가 무엇일까? 사실 삶에 어떤 일이 생기려면 먼저 선택을 해야 한다. 벌어진 일은 의도가 낳은 결과다. 즉 그렇게 되기로 결정한 것이 먼저다. 삶에서 생긴 일은 욕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생긴 것이다. 어떤 것을 욕망하면 사실 그것을 이루거나 얻는 데 장애가 되기 때문이다. 뭔가를 욕망한다는 것은 말 그대로 '내게 없음'을 뜻하기 때문이다. 즉 어떤 것을 욕망한다고 말하는 것은 그것이 내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것이 내 것이 아니라고 말하면, 나와 내가 원하는 것 사이에 마음의 거리가 생긴다. 이 거리가 에너지를 소모시키는 장애물이 된다.

- 자신을 완전히 항복하자마자 불가능한 일이 가능해진다. 무엇을 원하면 그것을 받는 데 방해가 되며 그것을 얻지 못할까 두려움이 생기기 때문이다. 욕망의 에너지는 원하는 것을 바라기만 하면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을 본질적으로 부인한다.

- 이는 세상에서 주입받은 프로그램에 젖어 있는 관점과는 다른 목표 성취 관점이다. 우리가 야망이나 성공과 연관해 으레 상상하는 것은 노고나 '청교도 윤리'의 전통 미덕이다. 자기희생도 마다 않고, 금욕하고, 엄청난 수고와 노력을 퍼붓고, 쉴 새 없이 죽어라 일하고, 허리띠를 졸라매고, 마음을 단단히 먹고 덤벼들고, 엄숙한 자세로 힘들게 일하는 모습이다. 이런 모습을 전체적으로 살펴보면 몹시 힘들어 보이지 않은가? 사실이 그렇다. 모두가 분투하는 모습이다. 이렇게 노력해야 하는 이유는 욕망으로 인해 우리 a스스로 자기 앞길에 장애물을 놓았기 때문이다.

- 낮은 의식 상태에서 목표를 몹시 힘들게 성취하는 길과 욕망을 인정하고 놓아 버려 한결 자유로운 높은 의식 상태의 길을 비교해 보자. 한결 자유로운 상태에서는 선택한 것이 수월하게 현실로 나타난다. 욕망의 감정을 항복하고, 대신에 목표를 선택해 사랑스럽게 마음속에 그리고, 그것이 이미 내 것임을 보고 있으니 그대로 이루어지도록 놓아둔다.

- 왜 그것이 이미 내 것일까? 낮은 의식 상태에서 우주는 부정적이고, 거부하고, 좌절을 주고, 마다하는 것으로 보인다. 우주는 모질고 인색한 부모 같다. 높은 의식 상태에서는 우주를 다르게 경험한다. 이제 우주는 잘 주고, 다정하고, 무조건 찬성하는 부모처럼 내가 원하는 대로 전부 갖게 해 주고 싶어 하기 때문에 청하기만 하면 그것은 내 것이다. 이런 상태는 맥락을 새롭게 창조한다. 우주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다.

- 타인에게 인색하고 적대적인 세상에서 살더라도 세상이 늘 그런 식이라고 믿어야 할 이유는 없다. 그런 식이라고 믿으면, 삶은 그런 식으로 일을 만든다. 욕망을 놓아 버리는 경험을 하면 자신의 선택이 마술처럼 삶에 나타난다는 것을 알게 된다.

"마음속에 품는 것은 현실로 나타나기 쉽다."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실업률이 높았을 때에도 어떤 사람들은 일자리가 있는 정도를 넘어 동시에 두세 가지 일자리를 갖고 있었다.

- 처음 이 시각을 접했을 때 이는 충격적이고도 새로운 관점이었다. 진실이기를 기대하기도 했지만 회의적이기도 했다.

"실제로 활용하기는 불가능해."

엄격한 '청교도 윤리'를 근본으로 삼는 사람으로서 믿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렇긴 해도 나는 자발적으로 한번 시도해 볼 만큼 마음이 열려 있기는 했다.

 

- 욕망을 놓아 버리는 나의 첫 경험은 이러했다.
개인적인 목표를 몇 가지 적은 다음, 이에 대한 욕망을 놓아 버렸다. 역설적으로 보이지만 이렇게 하는 것이 순서다. 목표를 확인한 다음, 목표에 대한 바람을 놓아 버린다. 수년간 마음에 품고 있던 목표 하나는 뉴욕 시내에 있는 아파트였다. 맡고 있던 일을 하려니 통근 거리가 멀어 호텔 투숙에 돈이 많이 들어갔다. '삐에 아떼르'라 부르는 시내의 작은 아파트가 실속 있는 해결책이었다. 그래서 '뉴욕 시내에 있는 아파트'라고 목표를 적었다. 목표 성취에 이런 방법을 쓸 때는 이성적으로 보기에는 이루어질 것 같지 않더라도 온갖 세부 사항까지 포함시킨다. 나는 아파트로 이상적인 조건을 상세히 열거했다. 임대료가 알맞고, 70번대 블록에서 5번가에 있고, 거리 소음이 큰 길가는 아니면서 8~9층 이상이고, 거실과 방 하나가 있는 정도. 

- 다음 날도 평소처럼 바빴다. 담당한 환자도 많았고, 회의도 많았고, 찾아오는 환자도 많았다. 회의를 하고 환자를 보는 사이사이에도 아파트를 원하는 느낌이 인지되면 놓아 버리곤 했다. 그렇게 하루를 지내며 아파트 일을 정말로 잊었다. 오후 4시 30분에 마지막 환자를 보고 나니 문득 시내로 드라이브를 하고 싶었다. 혼잡할 시간이었는데도 도로가 비어 있어서 드라이브하는 데 30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천천히 달리다 73번 블록의 렉싱턴 가 부근에 있는 부동산 중개 사무소 앞에 차를 세웠다. 마법과도 같은 우연처럼 사무소 바로 앞의 주차 공간이 비어 있었다. 
5번가 아파트를 원한다고 농담처럼 이야기했더니 부동산 중개인이 놀란 눈을 했다.

"와, 정말 운이 좋으십니다! 정확히 한 시간 전에 76번 블록에서 5번가를 통틀어 딱 하나 남은 임대 아파트가 매물로 나왔습니다. 9층이죠. 이면 도로에 있고, 거실과 방 하나가 있는 구조입니다. 임대료도 중간에 올리지 않는 조건으로 월 500달러니까 합리적이죠. 칠도 새로 해 놓아서 언제든지 입주하실 수 있습니다."

- 중개인과 함께 걸어가 아파트를 둘러보았더니, 목표로 적어 놓은 집과 정확히 일치했다. 그래서 그 자리에서 계약서에 서명했다! 이렇게 해서 개인적인 특정 목표에 대해 놓아 버림 기법을 시도한 지 24시간 내에 목표가 현실이 되었다. 마련하기 거의 불가능한 아파트였는데 아무런 부정적 감정 없이 수월하게 상상한 그대로 이루어졌다. 쉽고도 기분 좋은 경험이었다.

- 이런 일은 으레 경험할 수 있는 것이다. 욕망이 적당한 수준이어서 힘들이지 않고 욕망을 완전히 항복할 수 있었다. 완전히 항복했다는 것은, 아파트가 생기면 좋고 생기지 않아도 좋았을 것이라는 말이다. 욕망을 완전히 항복한 덕분에 불가능한 일이 가능해졌으며, 수월하고 신속하게 현실화되었다. 

- 이런 기제는 의심하고, 바라던 바를 야망이나 욕망, 갈망, 심지어 강박적이고 미친 듯한 욕심을 통해 이루었던 경우를 되새겨 보게 한다. 마음이 따진다.

"바라던 바에 대한 욕망을 놓아 버렸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욕망이 없었다면 과연 그것을 이뤘을까?"

그래도 이룰 수 있었다는 것이 진실이다. (이루지 못할까 두려워하는) 걱정 없이, 에너지 소모 없이, 노력 없이, 시행착오 없이, 노고 없이도 이룰 수 있었던 일이다.

 

 

- 마음이 또 따진다.

"일을 수월하게 이룰 수 있다면, 성취할 때 생기는 자부심은 어쩌지? 그것도 버려야 한다는 말인가?"

음, 그렇다. 일에 쏟아붓는 희생이니 노고니 하는 허영에 찬 것을 다 포기해야 한다. 자기희생이라는 감상에 툭하면 빠지는 것도 포기하고, 목표를 이루기 위해 감내했던 모든 아픔과 괴로움도 포기해야 할 것이다. 그런 감정은 사회의 기이한 도착 증세가 아닐까? 힘들이지 않고 바로 성공하면 사람들이 시샘한다. 목표에 도달하는 데 아무런 고초도, 아픔과 괴로움도 겪을 필요가 없었다고 하면 정말로 약이 오를 것이다. 그들의 마음은 이런 고통이 성공을 위해 반드시 치러야 할 대가라고 믿고 있다. 

- 이런 믿음을 잘 살펴보자. 부정적 프로그램으로 인해 그렇게 믿는 일이 없었다면, 삶에서 뭔가를 이루기 위해 아픔과 괴로움을 조금이라도 감내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 그런 믿음은 세상과 우주를 보는 눈이 다소 가학적이라는 점을 보여 주는 게 아닐까?

- 바람과 욕망을 이루는 데 장애가 되는 것은 물론 무의식적 죄책감과 왜소함이다. 기이하게도 무의식은 우리 스스로 가질 만하다고 생각하는 것만 갖게 한다. 자신의 부정성과 이로 인해 커지는 왜소한 자기 이미지에 대한 집착이, 가질 만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줄어들게 하고 남에게는 쉽게 흘러드는 풍요를 무의식 중에 거부한다. 이것이 "빈익빈 부익부"라는 말이 생긴 까닭이다.

 

- 스스로를 왜소하게 볼 때 가질 만한 것은 가난이므로, 자신의 무의식에 의해 가난을 꼼짝없이 현실로 만난다. 자신이 왜소하다는 생각을 포기하고 내면이 무결함을 다시 인정할 때, 그리고 너그럽고, 열려 있고, 다정하고, 믿음직한 자신에 대한 저항을 놓아 버릴 때, 무의식에 의해 삶의 여건이 자동적으로 마련되어 풍요가 삶에 흘러들기 시작한다.

- 무의욕이나 공포 같은 낮은 의식 상태에서 벗어나면 욕망의 수준에 이른다. 전에는 '할 수 없고' 불가능하던 일이 가능해진다. 의식이 가장 낮은 수준에서 가장 높은 수준으로 나아가는 과정은 대체로 소유하는 상태에서 행하는 상태를 거쳐 존재하는 상태로 이어진다. 의식의 수준이 낮을 때, 중요한 것은 내가 가진 것이다. 바라는 바도 내가 갖는 것에 있다. 소중히 여기는 것도 내가 가진 것이다. 세상에서 가치와 지위가 있는 자아상도 내가 가진 것에서 얻는다.

 

- 소유할 수 있고, 기본 욕구를 충족할 수 있으며, 자기의 욕구와 자기에게 의존하는 사람의 욕구를 해결할 역량이 있음을 입증하고 나면, 마음은 자기가 하는 일에 더욱 관심을 보인다. 그러면 자주 어울리는 무리도 바뀌는데, 거기서는 내가 세상에서 하는 일로 나의 가치와 남이 나를 어떻게 평가하는지가 결정된다.

- 사랑하는 상태로 올라갈수록 나 자신에게 봉사하는 일보다는 타인에게 봉사하는 쪽으로 점점 더 행동하게 된다. 의식이 성장하면서 사랑을 담아 타인에게 봉사하면 자동적으로 자신의 욕구도 충족된다. (이는 희생을 의미하지 않는다. 봉사는 희생이 아니다.) 결국 자신의 욕구는 우주가 자연스럽게 충족시켜 준다는 것을 확신하면서, 모든 행위가 자동적으로 사랑하는 일이 된다.

- 이 시점에서 중요한 것은, 세상에서 내가 하는 일이 아니라 나라는 존재 자체다. 자발성만 있으면 필요한 것을 가질 수 있고, 뭐든 해낼 수 있는 역량이 있음을 입증할 수 있다. 그러면 이제 나라는 존재 자체가 나의 내면과 타인에게 있어 가장 중요해진다. 사람들이 나와 친해지려는 이유가 내가 가진 것이나 내가 하는 일, 사회적 명성에 있지 않고, 이제 내 존재 자체에 있게 된다. 나라는 존재의 질 때문에 사람들은 그저 내 곁에 있으면서 나를 경험하고 싶어 한다. 사회에서 나를 가리키는 말도 달라진다. 더 이상 상류층 아파트나 큰 차, 잡다한 수집품을 가진 사람이라거나, 무슨 기업의 회장이나 어떤 조직의 이사진이라고 하지 않는다. 매우 인상적인 사람, 사람들이 무조건 만나려 하고 알려고 하는 사람이라고 칭한다. 카리스마 있는 사람이라고 부른다.

- 존재의 수준은 자조 집단에서 쉽게 볼 수 있다. 자조 집단에서는 다른 사람이 세상에서 하는 일이나 소유한 물건에는 아무 관심이 없다. 내적 목표를 성취했는지에만 관심 있다. 정직하고, 열려있고, 나누고, 사랑하고, 기꺼이 돕고, 겸손하고, 진심이고, 깨어 있는지가 목표다. 존재하는 상태의 질에 관심이 있다.

- 매력은 이해하면 매우 도움이 되는 주제다. 매력을 이해하고 나면, 욕망 놓아 버림이 대단히 쉬워진다. <매력, 범세계적 문제 Glamour: A World Problem>(1950)라는 책에서 앨리스 베일리는 주제 전체를 노련하게 다루었다.

원하는 어떤 사물을 바라보면서, 사물의 속성이 지닌 오라, 은근한 멋, 반짝임, 자석처럼 마음을 끄는 느낌 등은 사물 자체와 서로 다른 것임을 분별할 수 있다. 이때 그러한 속성을 가장 잘 묘사할 수 있는 말이 '매력 glamour'이다. 우리는 어떤 사물 자체와 우리가 사물에 부여한 매력 간의 차이에서 환멸을 느낀다. 그래서 어떤 목표를 추구해 막상 그것을 이루고 나면 실망하는 경우가 많다. 사물 자체와 사물에 대한 마음속 그림이 서로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매력이 있다는 것은 사물에 감상적인 느낌을 덧붙였거나 실제보다 과장했음을 의미한다. 사물에 어떤 마술적 특성을 투사해 놓고는, 그런 특성으로 인해 그것만 얻으면 왠지 더 행복하고 더 만족스런 상태를 마법처럼 성취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 매력 불어넣기가 뻔히 보이는 분야는 광고다. 광고에서 매력을 불어넣는 방식은 매우 독특하다. 카우보이는 남성성에 매력을 불어넣은 것이고 발레리나는 여성성에 매력을 불어넣은 것이다. 남자는 개성에 끌리지 브랜드에 끌리지 않는다. 그래서 카우보이는 강인한 외모에 침착하고, 정중하고, 평정을 잃지 않는다는 매력을 불어넣은 남성을 상징한다. 소비자는 제품에 그 제품을 사면 바라던 대로 광고 속 성격 특성을 얻을 것이라는 환상을 투사한다.

- 이러한 매력 불어넣기는 공상 속에서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어떤 욕망을 놓아 버리려면, 과장하고 공상해 낭만적으로 만든 부분을 잘라내야 한다. 매력을 포기하고 나면 욕망 자체를 항복하는 일은 비교적 쉽다. 예를 들어 카우보이를 낭만적으로 만들지 않고 놓아 버리면, 카우보이가 광고에서 들고 있던 담배나 치즈버거가 호소력을 잃는다. 그리고 아주 놀랍게도 욕망은 매력 넘치는 환상에 부여된 것일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애초부터 욕망에는 현실성이 없었다. 욕망에 현실성이 없기에, 세상은 정직하지 못한 어떤 것을 끊임없이 납득시키려 하면서, 낭만적인 매력을 불어넣어 우리의 욕망에 영합한다. 우리를 실제보다 대단한 인물로 만들어 주겠다고 약속한다. 그런 이유로 부정직한 매력은 모조품과 같다.

- 마음은 항의한다.

"그렇게 매력 넘치고 흥분되는 일을 다 그만두어야 한다고? 감정에 만족과 흥분을 주는 일을 놓아 버려야 한다고?"

그에 대한 답은 명백히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전혀 포기할 필요가 없다. 자신이 뭘 하고자 하는지 의식하면 수월하게 목표를 이룰 수도 있다. 그것을 곧장 가질 수 있다. 마음을 끄는 힘을 얻을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특정 스타일의 차를 모는 식으로 거짓을 꾸미지는 않는다. 왜소함을 놓아 버리고 위대함을 되찾아 위대함을 세상에 비춤으로써 마음을 끄는 힘을 얻는다.

- 사람들이 친해지고 싶어 안달할 만큼 흥미진진한 인물이 되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런 인물이 되기로 결정하고, 그렇게 되려는 욕망이 장애가 되지 않도록 놓아 버리면 된다. 좌절과 실망만 안겨줄 사기성 약속에 넘어가 멀리 둘러 가는 일 없이, 곧장 원하는 바를 가질 수 있는 것이다.

-  자신이 되고 싶은 유형의 인물을 마음에 그리고 그렇게 되지 못하도록 만드는 부정적 감정과 장애물을 모두 항복한다. 그러면 가져야 하는 것 전부, 해야 하는 일 전부가 자동으로 아귀가 맞게 들어온다. 소유 having하거나  doing 하는 수준에서가 아니라 존재 being 하는 수준에서 힘과 에너지가 가장 크기 때문이다. 우선권이 주어지면, 존재하는 수준은 자동적으로 사람의 행동을 통합하고 조직한다. 이러한 기제는 "마음에 품은 대로 실현되기 쉽다."라는 공통 경험으로 입증된다.

- 이는 철학적 명제가 아니라 실제로 벌어지는 과정이며 경험으로 증명할 수 있는 것이다. 이 개념에 대한 실험을 하면 결과가 저절로 일어나는 것을 볼 수 있다. 하지만 마음은 자기의식의 힘이 아니라 다른 것 덕분에 일어난 일로 보려 하기 때문에 정말로 이루고 싶은 목표를 적어 놓은 일지를 만들어 나중에 결과와 대조해 상황을 기록하는 것이 좋다. 왜냐하면 실제로 자신의 힘으로 그런 목적을 성취했다는 것을 믿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 내면의 힘을 부인하는 예로 흥미로운 것이 있다. 일자리를 간절히 원하다 못해 몹시 광분하던 남자가 직장 문제에 놓아 버림을 적용하는 법을 배웠다. 남자는 종교가 있었기 때문에, 일자리 얻는 일은 잊어버리고 그 일을 신에게 넘긴 다음, 욕망을 항복하면서 무슨 일이 생길지 마음을 열고 있으라는 조언을 받았다. 일주일 후에 남자가 말했다.

"일자리를 원하는 마음을 항복한 다음 날,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그러다 매형의 전화를 받고 매형 회사에 들어가기로 했습니다. 매형이 아니었으면 절대로 얻을 수 없는 일자리죠. 신이 해결해 줄 때까지 기다리지 않았던 것이 참 다행입니다!"

- 이는 마음이 어찌하기 쉬운지를 보여 주는 좋은 예다. 스스로 항복했기에 매형이 전화하게 된 것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 남자가 너무나도 일자리를 욕망했기에 욕망이 목표의 실현을 가로막고 있었다. 남자가 일자리를 원하는 마음을 놓아 버리자, 24시간 내로 일자리가 나타났다. 그러나 마음은 사람의 힘을 인정하지 않고, 세상의 다른 것을 투사한다. 이런 이유로 사람들은 자신은 힘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누구에게나 있는 힘을 외부의 힘에 투사했을 뿐이다. 우리는 모두 힘이 있는 존재지만 자신의 힘을 의식하지 못한다. 죄책감과 자신이 왜소하다는 느낌 탓에 남에게 자신의 힘을 투사하기 때문이다.  

-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들은 과거 어느 때에 의식적이거나 무의식적으로 내린 어떤 결정의 결과인 경우가 많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삶을 살펴보고 역추적해 과거의 결정을 알아내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이다.

- 문제는 역시 "나는 관계가 잘 풀리는 법이 없다."라는 첫마디에 들어 있었다.
우리는 자기 마음의 힘을 부인하기 때문에, 아주 확실하고 명백한 것을 보지 못한다. 어떻게 그토록 자각하지 못하게 되었는지 궁금할 정도다. 본인이 답을 가진 채 바로 그 자리에 앉아 있는데도 여자는 그 답이 답임을 알지 못했다. 여자는 자신의 신념 체계가 지닌 힘을 전혀 알지 못했다. 우리의 마음은 힘이 너무 세서 마음에 '나는 관계가 잘 풀리는 법이 없어.'와 같은 생각 하나만 품으면, 삶에서 그런 일이 생기기 매우 쉽다. 무의식 속의 요정은 명령을 받을 줄만 알지 결정을 내릴 줄은 모르기 때문에 꼼짝없이 관계가 잘 풀리지 않도록 한다. 

- 물론 여자는 자신의 실망스런 연애 이력에서 보상을 제법 얻었다. 자기 연민, 분개, 시샘, 부러움 같은 작은 자아를 끊임없이 먹여 살리는 온갖 만족감을 경험했다. 자신의 왜소한 부분을 잘 살펴보면 이런 종류의 감정이야말로 작은 자아가 빠져서 뒹굴며 좋아  

- 요약하면, 이기심과 욕망에서 동기를 부여받는 대신 바라는 일을 마음속에 그림으로써 그 일을 삶에 수월하게 가져올 수 있다. 그렇게 하는 방법은 의도를 선언하고, 받아들이고, 결정하고, 의식적으로 선택하는 것이다.

- 이렇게 자문함으로써 자신이 자기중심적이었음을 깨달을 수도 있다. 무신경했다. 그 사람을 알아주지 못했다. 상대방과의 관계 속에서 벌어지는 일을 의식하지 못했고, 알아차리지 못했다. 
이런 과정을 거듭 밟으면, 삶에서 만나는 모든 이가 거울 역할을 한다는 점을 알아차리게 된다. 그들은 사실 내가 마음속으로 알아주지 못한 것을 내게 되비춰 준다. 신경 써야 하는 것을 바라보도록 나를 몰아붙인다. 

- 그렇다면 나의 왜소한 자아가 지닌 측면 중 어떤 것을 포기해야 할까? 상대의 분노를 취소하려면 내가 자부심을 거듭 놓아 버려야 한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매일 겪는 경험에서 끊임없이 주어지는 성장의 기회에 감사할 수 있다.

- 그러자면 자신과 타인을 '그릇된' 자로 모는 일에 푹 빠지고 싶은 유혹에 저항해야 한다. 자신의 '작은 자아'를 잘 살펴보면, 자신과 타인을 '그릇된' 자로 모는 일은 작은 자아가 아주 좋아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예를 들어 정치적 조직체와 대중 매체) 왜냐하면 작은 자아는 목표를 이루는 더 나은 방법을 모르기 때문이다. 자유롭게 선택해서 상황을 바꾸겠다고 결정할 수도 있지만, 작은 자아는 그런 대안을 알지 못한다. 만족스럽지 못한 상황에서 억지로 빠져나오는 방법은 자기 자신이나 상황을 '잘못된' 것으로 모는 것이다. 예를 들어 단순히 더 나은 직장을 찾는 대신에 우리의 작은 자아는 직장과 상사와 동료를 '잘못된' 것으로 몬다. 잘못된 곳이라는 인상 탓에 이제 그곳을 참을 수 없게 되었으니 바꿔야만 한다. 그저 단순히 더 나은 곳으로 옮기기로 했다면 얼마나 수월했을 일인가.

- 그러나 의무감으로 인해 죄책감이 단순한 해법을 가로막는 경우가 아주 많다. 다시 말해, 우리는 어떤 곳에서 덕을 보았으면 그곳을 떠나는 것에 죄책감을 느낀다. 그러면 무의식은 기발하게도 '잘못으로 모는 기제'를 통째로 창조해 내가 막다른 지경에서 벗어날 수밖에 없게끔 한다. 이런 일은 대인 관계에서도 흔하다. 어떤 사람을 떠나는 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상대를 '잘못된 사람'으로 만들 필요를 느낀다. 이런 '잘못으로 모는 기제'에 의지하는 것은 스스로 택할 수 있는 자유를 부인하는 것에 불과하다.

- 타인에게 사랑을 행동으로 표현했다가 인정받지 못하는 것도 분노의 근원이 된다. 이 맥락에서의 사랑이란 모든 인간관계에서 벌어지는 일상적이고 소박한 형태를 말한다. 즉 사려 깊고, 배려하고, 태도를 바르게 하고, 격려하고, 베푸는 형태로 나타나는 사랑이다. 상대에게 느끼는 감정을 알아주지 않는 것에 분개하는 마음속 대화를 몇 년이고 계속하는 경우가 아주 많다. 내가 그렇다면 남도 그럴 것이 틀림없다. 그래서 우리의 삶에는 자기감정을 알아주지 못한 것으로 인해 마음속에서 나에 대한 생각을 끝없이 흘려보내는 사람들이 주변에 있기 마련이다.

- 타인이 내게 보여 주는 감정 표현을 알아주는 것의 가치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면, 그런 분노가 벌어질 무대 자체를 막아 버릴 수 있다. 상대가 내게 전달하는 의사 전체를 알아주는 것이다. 예를 들어, 친구가 내게 전화하면 전화해 준 것에 감사한다.  

- 남이 내게 기대를 거는 것은 감정상으로 협박하는 것과 같다. 남이 내게 어떤 감정 '자산'을 내놓으라고 하면 저항이 생기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감정상으로 협박받지 않으려면 나는 어떻게 남을 협박하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그러고 나면 나에게 보여 주는 타인의 감정 반응을 조종하고 싶은 바람을 놓아 버릴 수 있다.

- 분노를 예방하는 또 다른 방법은 타인이나 나 자신의 왜소한 측면이 내게 낙인찍으려는 것을 더 이상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마음속으로 결정하는 것이다. 이 결정은 단호하게 확언하는 형태가 될 수도 있다.

"나 자신이나 남이 내게 낙인찍으려는 것을 더 이상 받아들이지 않겠다."

이 결정이 자신과 타인의 내면에 있는 긍정적 측면을 전부 알아주려는 습관과 결합하면, 관계는 빠르게 변화하고 분노의 잠재적 근원은 제거된다.
 
-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 자신은 확실히 옳고 상대방은 확실히 '잘못 되었다'라고 생각하기를 좋아한다. 이렇게 분노하면서 일시적이고 하찮은 저질 만족을 얻지만, 근육 테스트를 해보면 감정 및 육체 건강 전반에 어떤 손실이 있는지 확인할 수 있다. 만성적인 분노와 울분으로 치르는 대가는 질병과 때 이른 죽음이다. 내가 옳다는 작은 만족에 그런 대가를 치를 가치가 있을까?

-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기꺼이 치르고자 하는 대가는 놀랍다. 누구에게 돈을 빌려주었는데 갚을 생각을 전혀 하지 않는 상황이라고 하자. 이 때문에 만성 울분이 생겨 모임 등에서 그 사람과는 될 수 있는 한 말을 나누지 않는다. 아마 스스로 속내를 정직하게 들여다보면 나는 옳고 그자는 틀려먹었다는 데서 만족을 얻고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사실 우리는 이런 만족을 몹시 즐기기 때문에 마음 한구석에서는 그 사람이 빚을 갚기를 바라지 않는다. 빚을 갚으면 더 이상 그 사람을 그릇된 인간으로 모는 은밀한 즐거움을 누릴 수가 없기 때문이다.

- 직감을 통해 임시로 가설을 세운 다음, 이성과 논리를 통해 그 가설을 확인하는 것이 이상적이다. 이렇게 하면 오해와 오산에서 생기는 분노가 없어짐은 물론, 감정을 더욱 능란하게 장악할 수 있다.

- 또한 감정을 포기하겠다는 자발성만으로도 분노가 소멸된다. 더 나은 길을 찾을 것이며, 더 이상 분노에 의존하지 않을 것이며, 용기와 받아들임의 수준으로 올라가겠다는 결정의 총화가 자발성이다. 이런 자발성이 있으면 분노 놓아 버림의 과정이 이미 시작된 것이다.

- 무술을 배우는 사람이라면 잘 알고 있듯이, 분노는 무력함과 취약함을 드러내는 표시다. 분노하는 것은 상대방에게 무기를 넘겨주는 것과 같다. 그 이유는 근육 테스트를 통해 알아볼 수 있다. 화난 사람은 근력이 이미 절반으로 줄기 때문에 육박전에서 승리하는 데 결정적인 타이밍을 놓치게 된다.

 

 

- 일반적으로 사회에서는 화를 잘 내는 성향도 남자다운 '마초'의 자질에 포함된다. 우리는 사람들이 자부심에 똘똘 뭉쳐 의기양양한 태도로 자기가 '그 녀석에게 어떻게 호통을 쳤는지' 이야기하는 것을 본다. 이렇게 자문해 보자.

"적이 왜 필요하지? 적 하나를 추가하지 않아도, 우리 삶에 부정적으로 영향을 주는 것들은 이미 충분하지 않나?"

게다가 모든 감정은 우주에 진동 에너지를 방출한다는 사실을 볼 때, 적으로 여기는 사람들에 대한 부정적 생각형태로 자신을 에워쌀 이유가 있을까?

- 왜 굳이 그 사람들을 적으로 붙들어 놓으려고 내면에 울분과 부정성을 대량으로 비축하는 것일까? 자신의 경험을 되새겨 보면, 한때 적으로 여겼던 사람들을 친구로 바꾸는 데 들어간 노력은 그 자체로 만족스러웠고 나중에는 보상도 있었음을 알게 될 것이다. 대부분의 경우, 그들은 나의 삶에 이득을 주었다. 우리는 인생이라는 책의 마지막 장에서 누가 친구가 될지 전혀 알지 못한다.

- 우리는 부지불식간에 '부당한 일 수집가'가 되었음을 자각해야 한다. 언론 보도는 이런 식의 만성 울분으로 가득 차 있다. 국제 관계에서 볼 수 있는 '부당한 일 수집'은 다른 국가를 '잘못된 것'으로 모는 것이 주목적이다. 우리는 '부당한 일 수집'을 '정상적인' 일로 믿도록 프로그래밍되어 있다. 이런 습관적 패턴은 파괴적이며 힘 빠지게 하는 것이다. 그와는 대조적인 놓아 버림 기제를 사용하면, 주위에서 나에게 '잘못하는 일’을 일일이 세지 않는다. 대신 주변의 아름다움과 기회를 보는 데 시간을 들이고 주의를 기울이게 된다.

- 분노는 구속하는 것이지 자유를 주는 것이 아니다. 분노는 나를 타인에게 연결해 상대방을 나의 생활 패턴 속에 붙들어 놓는다. 분노의 에너지, 의로운 분노라는 하찮은 이득, 부당하게 취급받았다는 느낌, 복수의 열망 등을 놓아 버릴 때 우리는 비로소 부정적 패턴에서 벗어날 수 있다.

 

- 내 삶에 거듭 출현하는 사람의 유형이 정확히 같지는 않다. 그 사람이 아니면 내게 분노와 울분을 일으킬 만한 성질을 똑같이 지닌 다른 사람이 나타날 것이다. 내가 마침내 내면의 화난 상태를 해결할 때, 비로소 그런 일은 재발하지 않을 것이다.  

- 부정적 감정을 항복할수록 자부심이라는 목발에 의지하지 않는다. 자부심 대신 이른바 '겸손'이 들어서고, 주관적으로는 평화로운 상태를 경험한다. 진정한 겸손은 공개 석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겸손을 자부하는 모습'이나 '거짓된 겸양'과는 뚜렷이 구별된다. 거짓된 겸양이란 자부심이 지나치다 보니 내놓고 떠벌리지는 못하는 자기 업적을 남들이 알아주기를 기대하는 마음에서 자신을 깎아내리는 척하는 것이다.

- 참된 겸손은 겸손하다는 말을 듣는 사람 스스로는 느낄 수가 없는 것이다. 참된 겸손은 감정이 아니기 때문이다.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진정으로 겸허한 사람은 굴욕을 느낄 수 없다. 굴욕에 면역이 되어 있다. 방어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 상처받지 않으므로 타인이 가하는 비판적인 공격을 경험하지 않는다. 타인이 가하는 비판적 언사 비판자 자신의 내면 문제를 드러낸 것으로 여길 뿐이다.

- 예를 들어 누가 "넌 네가 꽤나 잘났다고 생각하지?"라고 하면 진정으로 겸허한 사람은 질문자에게 남을 시샘하는 문제가 있을 뿐 질문 자체에는 애당초 현실적 근거가 없음을 안다. 기분 상할 것이 없으므로 반응할 필요가 없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자부심에 찬 사람은 이런 질문을 모욕으로 여겨 상처받기도 하고 말로 되받아치기도 하며 폭력으로 끝맺는 경우도 있다.

- 자부심은 때로 성취할 동기를 제공하는 것으로 보이기도 하는데, 그렇다면 그보다 높은 수준의 대체물은 어떤 것일까? 환희가 답이 될 수도 있다. 성공적인 업적에 대한 보상으로 자부심 대신 환희를 얻는다면 문제가 될까? 자부심에는 남에게 인정받으려는 욕망이 따르기 때문에 조만간 인정받지 못한다면 분노와 실망으로 상처받기 쉽다. 만약 어떤 목표를 이루려는 동기가 기쁨과 즐거움, 성취에 대한 사랑, 성취가 안겨 줄 내적 환희에 있다면, 타인의 반응에 상처 입지 않는다.

- 소유욕과 애착은 자부심의 결과로 생긴다. 따라서 애착은 고통의 원인이 될 수 있다. 애착이 있으면 잃어버릴지 모른다는 공포가 생기고, 잃어버림과 함께 무의욕과 우울, 비탄의 수준으로 되돌아간다. 차에 자부심을 갖고 있는데 차를 도둑맞는다면 우리는 비통과 고통을 경험한다. 그러는 대신 (감정상) 느슨하게 차를 보유한 채로 차의 아름다움과 완성도를 즐기면서 차를 가진 것에 감사한다면, 차를 잃어버려도 가볍게 낙심하게 될 뿐이다.

- 감사는 자부심의 해독제로 꼽을 수 있다. 높은 지능 지수를 타고났다면, 자부심을 갖는 대신 감사하면 된다. 지능은 업적이 아니다. 타고난 것일 뿐이다. 주어진 것에 감사하고, 신이 주신 재능에 큰 노력을 더해 이루어낸 일에 감사한다면, 항상 평화로운 마음상태에 있으면서 아픔에 상처받는 일이 없을 것이다. 

 

- 어떤 사람들은 모순되게도 거꾸로 된 속물근성에 빠져 있다. 그들은 '싸게 산 물건'이나 중고 가게 섭렵에 자부심을 갖는다. 물건에 지나친 값을 치르는 사람들을 보고 털을 깎이는 양 같다고 하면서 "바보는 머지않아 돈과 헤어지기 마련"이라는 말을 되뇌인다. 이 중고 가게 속물 집단 안에서는 믿기지 않을 만큼 싸게 산 물건이 지위의 상징이다. 그들은 가장 싸게 파는 물건을 누가 찾아낼지를 두고 서로 경쟁할 때가 많다. 관찰해 보면, 중고 가게에 걸려 있던 옷 한 벌은 우습게도 누군가의 '내 것'이 된 후에야 비로소 값어치가 생긴다. 그 즉시 대단한 값어치가 그 옷에 붙는다.

- 사람들은 왜 자신의 의견 때문에 그토록 얼굴을 붉히는 것일까? '내 것'이라는 느낌 탓이다. '하나의 의견일 뿐'이라고 보면, 자부심에 찬 분노로 상처받을 일이 없어진다.

- 자신의 생각에 자부심을 느끼는 대신에 생각을 그냥 사랑하면 어떨까? 어떤 개념을 사랑하는 것이 단지 그 개념이 아름답거나, 영감을 주거나 유용하기 때문이라면 어떨까? 자신의 생각을 그런 식으로 보면 '옳다'는 자부심은 더 이상 필요 없다. 자신이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을 그와 같이 여기면, 더 이상 따지려 들지 않는다.  


- 가치 있게 여기는 것은 선호하는 것이다. 즉 내가 어떤 것을 가치 있게 여기는 것은, 그것을 사랑하고 즐기며 그것에서 기쁨을 얻기 때문이다. 그런 맥락에서 가치 있게 여기면 평화로이 즐기게 된다.

- 자부심이 공격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더 낫다'는 암시 탓인데, 이 '더 낫다'는 암시는 자부심에서 핵심을 이루는 부분이다. 자기가 하는 식이요법에 자부심을 가진 사람을 많이 볼 수 있다. 자부심의 결과로, 그들은 자신들의 식이요법과 영양학적 견해가 옳은지를 놓고 끊임없이 논쟁을 치른다. 그들은 자신들의 식이요법을 가족과 친구에게 강요하면서 도덕적으로나 건강 면에서나 다른 어떤 방법보다 우월하다고 주장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같은 식이요법을 하되 요법을 따르는 일 자체가 즐겁거나, 요법대로 하면 느낌이 좋거나, 어떤 영적 규율을 지키려는 이유가 있어서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결코 논쟁할 일이 없다. 방어할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어떤 식사법을 즐기기 때문에 그렇게 먹는다고 하면 그에 대해 별로 할 말이 없지 않겠는가. 반면에 어떤 사람들이 자기들 식사법이 옳고 우리 식사법은 잘못되었다고 암시한다면 그것은 결국 자기들이 우리보다 우월하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므로 틀림없이 분노를 불러일으키게 된다. 

- 자기 의견에 자부심을 세우지 않을 때 의견을 바꿀 자유도 있다. 어떤 의견에 바보 같이 자부심을 세운 바람에 하고 싶지도 않은 일을 꼼짝없이 했던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 이런 점은 과학처럼 엄정한 사실에 입각하고 관찰 가능한 데이터를 바탕으로 한 분야에서도 마찬가지다. 과학에서 다루는 것은 사실 가설이며, 이런 과학적 입장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과정 속에 있다. 전문가가 아닌 사람들에게는 매우 놀랍겠지만 과학적 견해라고 하는 것도 일시적 유행이나 인기에 휘말리고, 기존 패러다임에 눈이 멀어 볼 것을 못 보고, 정치적 압력마저 받는다. 예를 들어 과거에는 정신 의학 분야에서 영양, 혈중 화학 수치, 뇌 기능, 정신 질환 간의 관계를 다루는 주제는 인기가 없었다. 이 분야에서 일하는 과학자와 임상의는 자신이 '비주류' 집단에 속한다고 여겼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 주제가 가치 있는 연구 분야로 입증되자 다수가 공유하는 과학적 입장이 바뀌었다. 중요한 발견이 이루어졌고 영양과 뇌 기능 사이의 관계를 밝힌 기초 연구 결과를 활용해 제품을 내놓는 일에 산업 전체가 달려들었다. 이제 이 분야를 연구하는 임상의와 과학자는 '주류' 집단으로 인정받고 있다.

- 자부심으로 인해 우리는 엄청나게 이로울 수 있는 것을 보지 못할 때가 많다. 자부심에 찬 마음이 보기에, 그것을 받아들이면 자기가 틀렸다고 인정하는 셈이 된다. 우리의 내면은 강할수록 더욱 유연해지고 모든 이로운 것에 마음을 연다. 자부심이 눈을 가리면 전적으로 명백한 것을 보지 못한다. 자부심 때문에 죽음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수없이 많다. 그들은 말 그대로 건강과 생명 그 자체를 포기한다. 마약 중독자와 알코올 중독자가 죽음에 이르는 것은 자부심에 내재하는 부인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이 문제가 있는 것이지, 나는 아니야!"라는 것이다. 자부심으로 인해 자신의 한계를 알아보지 못하며 극복에 필요한 도움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자부심에 찬 상태 때문에 우리는 고립된다.

- 자부심을 놓아 버릴 때, 고전 중인 문제를 해결해 줄 도움이 삶에 나타난다. 이런 원리의 진실을 실험으로 입증할 수 있는 방법은 자신이 어려움을 안고 있는 분야 하나를 골라 그와 관련된 자부심 전체를 철두철미하게 항복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놀라운 일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자부심을 놓아 버리면, 내게 가장 이로운 것이 들어올 수 있는 문이 열린다.

- 이제 자부심을 기꺼이 놓아 버려 남보다 우월하다는 느낌을 놓아 버릴 수 있는가? 자부심이 주는 가짜 안도감을 기꺼이 놓아 버릴 때 우리는 용기, 자기 받아들임, 환희와 더불어 진짜 안도감을 경험한다.
 
- 용기의 수준은 항복 기제에 큰 도움이 된다. 용기의 수준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을 안다.

"나는 내 감정을 잘 살펴볼 수 있어." "더 이상 내 감정을 겁내지 않아도 돼." "해결할 수 있어." "책임질 수 있어." "받아들이는 법을 배워, 벗어날 수 있어." "기꺼이 위험을 감수해서, 낡은 관점은 놓아 버리고 새 관점을 탐구할 수 있어." "아주 기쁜 마음으로 기꺼이 내 경험을 다른 사람들과 나눌 수 있어." "나는 내가 적극적이고 능력 있다고 생각해."

- 용기를 가지고 잘 살펴보고 감정을 다스리겠다고 단언하는 것만으로도 낮은 수준의 감정에서 용기의 수준으로 수월하게 뛰어오를 때가 많다. 감정을 잘 살펴보고 다스리려는 자발성만 있어도 자존감이 높아진다. 예를 들어 살펴보기가 꺼려지는 어떤 공포가 있다면, 위축을 느끼고 자존감이 낮아진다. 기꺼이 공포를 들여다보면서 조사하고, 공포가 있음을 인정하고, 공포가 어떻게 삶을 저해하는지 보고, 공포를 항복하기 시작하면 공포가 사라지든 사라지지 않든 간에 자존감이 올라간다.

- 우리는 모두 공포를 직시하는 데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공포를 직시하고 공포에 대해 애써 뭔가를 해 보려는 사람을 응원한다. 그런 용기야말로 고귀함의 특징이며, 그 용기로 인해 사람은 진정으로 위대해진다. 자신이 지닌 모든 부정적 프로그램과 모든 공포에도 불구하고, 용기 있는 사람들은 아무런 보장도 없고 사정이 나아질지 어떨지 알지도 못하는 채로 삶에서 전진한다.  

- 용기의 수준에서는 행동에 역점을 둔다. 나와 남에게 필요한 것을 줄 능력이 있음을 알고 있어서, 노력 쏟기를 주저하지만 않으면 원하는 바를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안다. 그래서 용기 수준의 사람들은 이 세상의 행동가들이다. 가지고 있는 것만 내줄 수 있으므로, 용기 수준의 사람들은 남을 돕고 격려할 줄 안다. 그들은 받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줄 수도 있는데 받기와 주기 사이에서 균형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 용기 아래의 의식 수준은 주로 이득에 관심이 있다. 용기의 수준에는 더욱 큰 힘과 에너지가 있어서 남에게 줄 수 있는 능력이 있다. 다른 사람들을 지원과 지지를 얻거나 생존을 의지할 대상으로 더 이상 보지 않기 때문이다.

- 안전을 의지하던 대상을 놓아 버리면 위험을 감수하는 자발성이 용기와 함께 나타난다. 새로운 경험을 통해 성장하고 이득을 얻으려는 자발성도 생긴다. 이런 자발성에는 죄책감과 자책에 빠지지 않고도 실수를 인정할 수 있는 여유도 포함된다. 개선이 필요한 부분을 마주해도 자아 존중감이 줄지 않는다. 위축되지 않고도 문제가 있음을 인정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에너지와 시간, 노력을 자기 계발에만 쏟을 수 있다.
 
- 용기의 수준은 진정한 영적 자각이 가능한 수준이다. 이기주의에서 빠져나왔고 작은 자아와의 동일시를 포기했기 때문에 더 높은 에너지를 경험하면서 더 큰 자각을 희망한다.

 

- 낮은 수준에서는 각 수준의 감정적 색안경을 통해 신을 본다.

그래서 무의욕 수준에서도 신과의 관계라 할 법한 것이 존재한다면, 그 관계는 전체가 절망적이다.

비탄의 수준에서는 스스로가 신이 내미는 도움의 손길에서 절망적으로 멀어져 있다고 느낀다. 죄책감에 압도되어 있는 사람은 자신이 신과 어떠한 관계도 이룰 자격이 없으며 사랑보다는 벌을 받을 것이라고 느낀다.

공포의 수준에서는 신을 직면할 수조차 없을 만큼 공포가 너무 클 수도 있다. 그러면 문제 자체가 의식에서 잊히면서, 신을 무섭고, 벌주고, 복수하고, 질투하고, 분노하는 존재로만 여긴다.
한편 분노의 수준에서는 신을 가진 것을 빼앗고, 독단적이고, 변덕스럽고, 실망을 안겨 주는 존재로 여긴다.

자부심의 수준에서는 자신의 종교적, 영적 입장에 대해 우월감을 느끼는데, 이런 우월주의는 엄격하고, 융통성 없고, 편협하고, 특권 의식에 빠지기 쉽고, 극도의 편견이 있고, 배타적이고, 종교논쟁이나 종교전쟁에 빠지기 쉬운 것이 특징이다.

- 용기의 수준에서는 자신의 종교적, 영적 입장에 대해 기꺼이 책임지고자 한다. 자각이 커지면서 영적 탐구자가 되는 경우가 흔하며, 종교적 내지 영적인 의미에서 진정한 진리를 추구하기 시작한다. 이로 인해 자신의 이전 입장을 재확인하기도 하지만 전적으로 새로운 관점, 즉 선택의 관점에서 진리를 발견한다. 이에 따라 변화가 일어날 수 있는데, 이 변화는 느리거나 점진적일 수도 있고 갑작스러울 수도 있다.
 
- 편안해지면 기법 사용을 멈추었다가 비상사태 때나 혹은 고통스러워진 부정적 감정에 주목해야 할 때만 다시 사용하고 싶은 유혹이 생긴다. 그러나 아직 얻을 것이 더 있다. 항복할 수 있는 감정이 늘 존재하기 때문에 놓아 버림 과정을 지속하면 더욱더 큰 혜택을 얻는다.

- 현 상태 이상으로 성장하려는 욕망을 강화하는 데 용기를 활용할 수 있는 것은, 용기의 수준에서 우리가 지금까지 예상하지 못한 어떤 것이 내면에 있음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우리가 문득 완벽한 고요와 평화 속에 들어가는 사건을 통해 나타난다. 고요와 평화 속에서 우리는 더욱 명료해지고, 이해를 얻고, 아름다움을 느끼는 감수성이 높아진다. 이는 음악을 통해 나타나기도 한다. 음악으로 인해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그때 우리는 마음이 문득 고요해짐을 느끼며, 그 고요의 순간에 더 높은 차원을 경험할 수 있다. 마치 전혀 분리되어 있지 않은 듯, 타인을 자기와 완전히 동일시해 하나 됨을 느끼는 찰나가 있을 수도 있다.

- 이것이 우리가 진정한 내적 큰나의 경험에 돌입하는 순간이다. 이런 순간은 절대로 잊히지 않는다. 처음 경험이 일어날 때는 그 의미를 알지 못한다. '돌발적인 일'이거나 '순전히 우연'이라고 생각한다. 그때의 느낌을 석양이나 교향곡의 한 소절, 사랑스런 몸짓이 보여 주는 아름다움 덕으로 돌린다. 그러나 조사해 보면, 그런 아름다움은 다른 일이 일어날 수 있게 만든 환경일 뿐이었음을 알게 된다. 원인이 아니었다. 그런 아름다움으로 인해 마음에 어떤 고요가 깃든다. 그러면 그 고요 덕분에 우리는 감각과 기분, 생각, 감정, 기억이 끊이지 않고 쉴 새 없이 펼쳐지는 가운데, 마음의 수다가 아닌 어떤 것을 경험할 수 있는 순간에 들어선다.

- 시간이 멈춘 듯한 순간에 우리는 어떤 가능성을 언뜻 본다. 이런 순간은 너무나 값진 것이어서 소중한 기억으로 평생 남는다. 그런 순간이 일어날 때 우리는 매우 인상적인 경험을 한다. 세상의 격동과 우리 마음의 혼란 너머에는 과연 고요가 존재하고 있을까? 평화의 세계가 항상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까?

- 받아들임의 상태에는 아무것도 바뀔 필요가 없다는 느낌이 있다. 모든 것이 있는 그대로 완벽하고 아름답다. 세상은 누리라고 있는 곳이다. 다른 사람들과 모든 생명체에게 연민을 느낀다. 받아들임 상태에서는 희생하는 느낌 없이 반사적으로 타인을 보살피고 도와준다. 마음속으로 든든하고 넉넉하다고 느끼기 때문에, 인심 후하게 쉽게 줄 뿐 돌려받을 기대도 하지 않고 '이건 당신을 위해서 하는 일'이라고 적어 놓지도 않는다. 받아들임의 상태에 있을 때면 친구를 비판하는 대신 사랑한다. 모자란 점이 있더라도 기꺼이 사랑하며 눈감아준다. 이 우주에서 내 눈앞에 있는 사람들 모두는 사실 최선을 다하고 있으며, 이 순간에 각자 갖고 있는 것만으로 그렇게 하고 있음을 안다. 모든 생명체는 그 완성을 향해 진화하고 있고, 우리의 삶은 우주와 의식을 지배하는 법칙과 맞아떨어지고 있다.

- 이 상태에서는 사랑이 어떤 것인지를 정말로 이해하기 시작한다. 받아들임 수준에서 사랑은 안정된 상태, 즉 관계가 영속적인 상태로 경험할 수 있다. 사랑의 근원은 우리 내면에 있으며, 그 사랑이 우리의 본질에서 뻗어 나가 타인을 품는다고 본다. 욕망의 상태에서는 이와 대조적으로 "사랑에 빠진다"라고 하면서, 행복과 사랑의 근원이 우리 외부에 있다고 생각한다. 욕망 수준의 낮은 에너지 상태에 있으면 사랑받기를 기대한다. 사랑은 우리가 '얻는' 어떤 것처럼 보인다.  

- 우리가 행한 모든 일은 그 시점에서는 그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한 것이다. 그 시점에서 더 나은 방안을 알았다면 그렇게 했을 것이다. "그때는 그게 좋은 생각 같았다."라고 말한다. 다른 사람들도 이와 똑같이 맹목적으로 행한다는 사실을 알면, 그들의 성격 결함으로 눈이 가려지는 일 없이 내면에 있는 천진한 아이를 볼 수 있다.

- 자신의 천진성이 보이면 타인을 자신과 동일시해 외롭다고 느끼며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다. 지극히 경솔하고 끔찍한 행동의 이면에서도 천진성을 볼 수 있다. 어떤 사람의 속내를 들여다보면 더 나은 방안을 모른 채 겁에 질려 있는 짐승이 보인다. 구석에 몰리면 그 짐승이 틀림없이 우리를 공격하고 물 것이란 사실을 안다. 짐승은 우리의 의도가 평화에 있음을 깨닫지 못하고 미친 듯이 팔다리를 휘두를 것이다.

- 받아들임의 상태에서는 자신의 과거뿐만 아니라 타인의 과거도 용서해 과거의 울분을 치유할 수 있다. 또한 과거에 분개했던 사건 속에서 숨은 선물을 발견할 수 있다. 사건이 가질 수 있는 카르마적 의미도 그런 선물에 포함된다. 받아들임의 수준부터는 과거를 보는 맥락을 새롭게 만들어 냄으로써 과거를 치유할 수 있다. 받아들임 상태를 최종적으로 완성하고 미래에 대해서는 불안을 느끼지 않으면서 계속해서 사랑과 평화의 수준으로 나아갈 수 있다. 이성과 논리는 이와 같은 가능성을 실현하기 위한 도구가 된다.

- '좋다', '나쁘다'를 따지는 도덕주의적 판단에 더 이상 연연하지 않는 것이 또 다른 특징이다. 어떤 일은 되는 일이고 어떤 일은 되지 않는 일인지가 뚜렷이 보일 뿐이다. 어떤 것도 '악'이라 심판하지 않고도, 일을 망치는 것과 일에 가장 알맞은 것이 무엇인지를 쉽게 안다. 타인이나 자신을 심판할 때마다 따라오는 죄책감이 없어진다. 이제 우리는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래야 너희도 심판받지 않는다." (마태복음 7:1)라는 말씀의 의미를 알 수 있다. 

- 받아들임 수준은 사심 없이 봉사하는 자세가 특징이다. 작은 자아를 일으키는 부정적 감정을 항복하면 자신을 작은 자아와 동일시할 수 없다. 대신에 마음속에서 우리의 큰나는 본질이 화평함을 느낀다. 부정적 프로그램들을 포기한 덕에 더욱 큰 창조성과 영감, 직관력이 생긴다. 또한 개인적으로 필요한 것들은 어떻게든 충족될 것이라는 확신이 있다. 그 결과 다른 사람과의 관계가 그들의 안녕과 행복에 초점을 두는 쪽으로 바뀐다. 받아들임 수준에서는 더 이상 남에게 의존하는 식의 결핍이 없는 덕분에 그렇게 바뀌기 쉽다. 남에게 '얻어야겠다'고 느끼는 것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다정하게 받아들이는 관계에서 사소한 결점 정도는 더 이상 심각하게 여기지 않고 눈감아 준다. 

- 받아들임 상태에서는, '행하는 상태'에는 점점 덜 사로잡히고 존재하는 상태의 질 자체에 점점 더 초점을 둔다. 또한 보살피고 사랑하는 능력을 내면에서 완성하는 일에 관심이 커진다. 부정적 감정이 올라오더라도 빈도가 덜하며 더 쉽게 처리한다. 이제 제구실하기가 쉽다. 워낙 힘을 들이지 않고 하는 까닭에 매일 하는 일은 알아채기도 어렵게 된다.

- 받아들임 상태는 의식을 스스로 챙기는 것이 전형적 특징이다. 명상이나 다양한 묵상법에 관심 있는 사람이 많다. 그리고 영적, 윤리적 문제가 중요해진다. 예를 들어, 종교가 있는 사람이라면 가톨릭의 피정이나 불교의 안거에 참가하기도 하고, 영적이거나 인도주의적인 활동을 지향하는 사람이라면 관련된 영역에 몸담기도 한다. 조화롭게 보이던 세상이 조금이라도 조화롭지 않게 보일 때는 자기 내면의 갈등을 세상에 투사했기 때문임을 깨닫는다. 받아들임 수준에서는 부정적 감정은 모두 자기 자신의 문제임을 자각해. 감정 해결을 위해 더 이상 외부를 보지 않는다.

- 의식과 자아 자각을 크게 하는 일에 진지해서 의식의 질 자체를 연마하는 데 초점을 둔다. 받아들임의 수준에서는 정신과 영혼이 지닌 최고의 잠재력을 탐구하는 철학이나 과학 연구, 영성 분야 고전에 관심을 기울이기도 한다. 그리고 가진 것이나 하는 일보다는 어떤 존재가 되고 있는지가 점점 더 중요해진다. 받아들임 수준에서는 자기 내면의 잠재력을 최대한 실현하고 타인의 잠재력과 꿈을 양성하는 일에 도전한다.

 

- 사랑하는 상태에 있게 되면 결코 다시는 할 수 없는 어떤 일들이 있다. 또한 사랑의 에너지 장 속에서만 할 수 있는 불가능한 일들이 있다. 게다가 사람들이 다른 이에게는 해 주지 않을 일을 내게는 해 준다. 굳이 '기적'이라 이름 붙이지 않아도 사랑으로 인해 기적 같은 일이 가능해진다. 사랑에는 변모시키는 효과가 있다. 


- 가끔 사람들에게 사랑한다고 이야기하지 않는 것이 최선일 때가 있다. 그런 말을 들으면 겁을 집어먹고는 자기들에게 속셈이 있거나 바라는 것이 있다고 생각할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사랑을 겁내고 의심한다. 사랑하는 상태는 에너지를 내뿜어 주변의 모든 것을 변형시키는 존재 방식이다. 사랑하는 상태는 저절로 일어난다. 아무것도 '행할 필요'가 없고, 무엇이라고 부를 필요가 없다. 사랑은 소리 없이 모든 상황을 변형시키는 에너지다.


- 이 말은 곧, 지극히 못된 사람도 우리와 같이 있으면 갑자기 타인을 용서할 마음이 든다는 의미다. 바로 눈앞에서 그 사람이 바뀌는 것을 볼 수 있다. 분노를 놓아 버리고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다. "그 애한테 열받을 이유가 없네요... 너무 어려서 뭘 모르니까요." 상대를 비난하기보다 두둔하는 이유를 스스로 찾아낼 것이다. 사랑은 나와 주변 사람들에게 힘을 주어 사랑의 힘이 없이는 할 수 없는 일을 하게 해 준다.

- 한편 사랑의 일면인 용서를 통해 삶 속의 일을 은총의 관점에서 볼 수 있다. 미성숙했을 때 저지른 실수에 대해 자신을 용서한다. 자신의 에고나 왜소한 측면을 작고 귀여운 아기 곰처럼 보면 도움이 된다. 아기 곰은 '나쁜' 녀석이 아니다. 그래서 이 작은 곰을 미워하거나 야단치지 않는다. 있는 그대로 사랑하고 받아들인다. 에고는 뭘 모르는 작고 귀여운 짐승이다. 우리가 자신의 왜소한 측면을 초월하는 길은 그것을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것이다. 에고를 '부족한' 것으로 볼 뿐 '나쁜' 것으로 보지 않는다.
 
- 결국 우리는 그냥 사랑이 된다. 우리가 하는 모든 행동과 말, 우리가 일으키는 모든 움직임이 우리 내면에 보유한 사랑하는 상태에서 에너지를 얻는다. 많은 청중 앞에서 이야기하든 강아지를 쓰다듬든 모든 행동에서 사랑의 에너지가 쏟아져 나옴을 느낀다. 경험적 앎으로서 가슴에 품고 있는 바를 나누고 싶어 한다. 만인과 만물을 위해 가슴에 품고 있는 것이기에 그들도 그것을 느끼게 된다. 또한 주위의 모든 사람과 동물들이 내면에서 무한한 사랑을 느낄 수 있기를 기도한다. 나의 삶이 주위의 모든 것에 축복이 된다. 타인과 동물이 나에게 선물이라는 점에 감사한다.
  
- 사랑 에너지는 여건만 적절하면 육체를 치유하는 힘이 있다. 정신적으로 긍정적 상태가 우세하므로, 육체적으로도 병이 저절로 낫는 경우가 많다. 어떤 병들은 특별히 주의를 기울이지 않아도 저절로 치유되고, 나머지 병들은 의식 기법을 쓰면 대개 차도를 보인다. 치료에 차도를 보이지 않고 지속되는 병은 카르마에서 비롯하거나, 상징성이 있거나, 영적 의미가 있는 것이다.

- 사랑 상태에서는 대체로 몸을 덜 의식하게 된다. 몸은 제 할 일을 하면서 알아서 스스로를 돌보는 듯하다. 더 이상 자신을 몸과 동일시하지 않는다. 순전히 육체적으로 건강 문제를 다루는 것에는 흥미를 잃게 된다. 특별한 이유로 몸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몸에 대한 자각이 완전히 사라질 때도 있다. 그리고 '생각하는 상태'가 점차 직관적 이해로 대체되면서 사라지기 시작한다. 시간이 흐르면 '생각하는 상태'와 그 정신적 과정은 자연발생적이고 직관적인 '아는 상태'로 대체된다. 논리는 건너뛴다. 이런 현상이 생기는 것은 높은 진동 수준에서 우주의 만물이 다른 만물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얻는 이해는 서로 연결된 장으로부터 '계시'처럼 펼쳐진다. 아는 작용은 한정된 부분에서가 아니라 전체를 망라해 이루어진다.

- 더불어 내면의 고요 덕분에 다른 사람의 생각과 감정을 비언어적 차원에서 감지할 수 있게 된다. 다른 사람과 비언어적으로 의사소통하는 것이 가능해지고 놀라울 것도 없어진다. 부정적 감정을 더 이상 느끼지 않는 것은 작은 자아를 초월해 이 작은 자아가 큰나에 흡수되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감정 현상이 완전히 바뀐다. 예를 들어 누가 죽는 일은 비탄에 빠지기보다는 일시적으로 낙심하거나 애석해할 일들로 경험할 수 있다.

- 끊임없이 항복하면 (540으로 측정되는) 무조건적 사랑의 상태에 이른다. 인구의 0.4퍼센트만 이 상태에 도달할 정도로 매우 드문 상태다. 이 상태의 에너지는 기적적이고, 폭넓고, 차별 없고, 변형을 일으키고, 한이 없고, 힘들지 않고, 환히 빛나고, 헌신적이고, 성자와 같고, 널리 퍼지고, 자비롭고, 이타적이다. 또한 내면의 환희, 믿음, 황홀감, 참을성, 연민, 끈기, 본질, 아름다움, 동시성, 완벽, 항복, 고양감, 진정한 시각, 개방성 등이 특징이다. 개인의 자아를 인과 관계를 일으키는 행위자로 보기를 포기한다. 만사가 동시성에 의해 쉽게 일어난다.
 
- 사랑은 타인에게서 그의 결점보다는 긍정적인 면을 키운다. 사랑은 생명이 구현된 모든 것에서 생명의 좋은 점에 관심을 집중한다. 무조건적인 사랑은 타인에게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사랑이다. 사랑하는 상태에 있으면 타인에게 아무런 제약을 가하지 않으며, 사랑받기 위해 어떤 식으로 존재해야 한다고 요구하지도 않는다. 타인이 어떻든 간에 사랑한다. 설사 아주 불쾌한 사람이라도 사랑한다! 범죄자에 대해서도 그들이 범죄를 저지른 인생을 최선의 선택으로 여기는 것을 안쓰러워할 뿐이다. 사랑이 무조건적이면, 애착과 기대와 숨은 의도가 없고 누가 누구에게 무엇을 주었는지 적어 놓지 않는다. 나의 사랑은 내가 어떻든 남이 어떻든 상관없이 무조건적이다. 조건 없이 준다. 아무런 단서도 붙지 않는다. 아무것도 돌려받기를 기대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에 대한 의식적이거나 무의식적인 기대를 모두 항복했다.
 
- 사랑은 타인의 본질에 빛을 비추며, 따라서 타인의 사랑스러움에 빛을 비춘다. 사랑으로 인해 가슴이 열리기 때문이다. 지각은 사물을 인지할 뿐이지만, 가슴은 안다. 마음은 생각하고 말다툼하지만, 가슴은 알고 넘어간다. 그래서 누가 잘못을 저질렀을 때도 그를 사랑한다. 생각은 한 가지만 알려 주지만, 가슴은 다른 것도 알려 준다. 마음은 비판적일 수도 있고 의견이 다를 수도 있지만, 가슴은 어찌 되었든 계속 사랑한다. 가슴은 무엇이 어떠해야 한다는 조건을 아무것도 걸지 않는다. 마음은 조건을 건다. 하지만 사랑은 아무런 요구도 하지 않는다.

- 사랑에서 조건을 없애는 열쇠는 용서하려는 자발성이다. 용서하면 사건과 사람을 새로운 맥락에서 고려해 '못됐다'거나 '마음에 안 든다'라고 보지 않고 단지 '부족하다'라고 본다. 겸손하면 지난 일에 대한 인식을 기꺼이 포기한다. 상황이나 인물의 진실을 보는 기적을 얻도록 기도하고, 문제에 대한 의견은 모두 항복한다. 벌어진 일을 보는 자신의 인식을 고집할 때 얻는 이득을 잘 살펴보고, 작은 이득을 하나씩 놓아 버린다. 자기 연민에 빠지거나, "내가 옳다"라고 주장하거나 "부당하다"라고 외칠 때의 은근한 즐거움이 그런 이득이다.

- 결국에는 용서한다는 생각 자체를 항복한다. 누군가를 용서한다는 것은 여전히 그 인물이나 상황을 '잘못된' 것으로 보고 있어 용서해야 함을 암시한다. 진정한 항복은 일을 그렇게 보는 것을 완전히 놓아 버림을 의미한다. 자신의 인식을 완전히 항복해 판단을 전부 놓아 버릴 때, 상황 전체가 모습을 달리하면서 상대가 사랑스럽게 보인다. 사실 판단이란 것은 모두 자기가 내리기 때문에 판단을 놓아 버리는 과정에서 우리는 자기 자신을 해방시킬 수 있다.

 

 

- 무조건적 사랑의 수준에서 우리는 만인과 만물을 사랑한다. 아돌프 히틀러마저 사랑한다. 히틀러를 부정적 에너지에 장악된 사람으로 보고, 자기에게 일어난 일에 어쩔 수 없었던 그를 기꺼이 용서한다. 히틀러는 악에 압도되었다. 우리는 악을 증오하는 대신, 사람들이 그 같은 부정성에 압도되는 것에 슬픔과 연민을 느낄 수 있다. 히틀러는 자기 딴에는 명예로운 의무라고 생각한 일을 했다. 이것이 히틀러가 그 시점에서 자신의 일을 놓고 생각한 맥락이다. 히틀러는 시대를 풍미하던 어떤 이상과 신념에 사로잡혀 있었다.
 
- 한동안은 내면의 갈등이 끝이 없을 것 같아 보였다. 그러나 이전의 항복 과정 경험으로 보아, 계속 놓아 버림만 하면 조만간 느낌이 모두 바닥날 것이 확실했다. 임시로 숲 한가운데의 작은 오두막집으로 거처를 옮겼더니 집중을 방해할 것이 아무것도 없어 항복 과정을 심화할 수 있었다. 그러자 갈등의 근원이 깊어지면서 훨씬 더 고통스러운 감정이 최대한의 강도로 발생했다. 내면에 엄청난 혼란이 왔고, 때로는 극도의 고통과 절망에 가까운 상태가 닥쳤다. 포기하지 않을 것이며 과정의 흐름에 장애가 없게 하겠다고 굳게 결심하자, 마침내 구덩이의 밑바닥에 이르렀고 암담한 절망이 압도적인 강도로 발생했다. 그런데도 다 괜찮을 것이라는 앎이 있었다. 절망과 동일시하기보다는 항복하기 자체와 동일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 마침내 절망에 대한 모든 저항을 전적으로 완전하게 놓아 버렸다. 절망이 즉시 사라졌다. 압도적이었고 견딜 수 없었던 절망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절망이 있던 자리에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깊은 평화가 있었다. 이 평화는 정도가 무한하고 기이하게 강력하며 전적으로 난공불락인 것이었다. 심오한 정적이 내면에 감돌았고, 시간에 대한 지각이 완전히 멈추었다. '시간' 대신에 현상들이 일으키는 움직임만 존재했다. 다음 날에도 경험은 계속되었고, 사실 훨씬 강했다.

- 다른 부정적 생각들도 딸려 나온다.

"위험한 사람일 거야. 피하자.", "저런 사람 때문에 세금 부담이 커져. 아마 사회보장연금으로 사는 사람일 거야.", "경찰은 거리에서 저런 부랑자를 없애야 해.", "감옥에 보내거나 정신병원에 처넣어야 해."

- 이와는 대조적으로, 사랑하는 상태인 사람은 노신사의 얼굴만 봐도 그가 풍부한 인생 경험과 개성, 지혜가 엿보이는 흥미로운 인물이라고 본다. 노신사는 세상에서 볼일을 거의 마치고, 행하는 상태와 소유하는 상태를 넘어 존재하는 상태로 진화한 자유로운 영혼으로서 그곳에 나타났을 수도 있다.

- 5번가에서 바로 그런 사람과 마주치는 일이 있었다. 앞에서 서술했듯이 완전한 내적 정적 상태에 빠져 있는 동안에 생긴 일이었다. 인도를 따라 걸어가는데, 노신사가 나의 내적 정적 상태를 한눈에 알아보더니 그에 대한 반응으로 자신을 완전히 열었다. 폭넓게 응시하는 그 시선 앞에서 모든 것이 드러났고, 완전히 열린 그의 영혼을 읽을 수 있었다. 노신사는 자신의 진정한 내적 큰나를 깨닫고 완전한 평화 속에 존재하는 사람임이 분명했다. 사실상 그는 뉴욕 시를 관통하고 있는 강력하고 긍정적이고 사랑하는 에너지에서 핵심을 이루는 존재였다. 서로를 흘낏 보는 것으로 우리는 우리의 일체성, 시간을 넘어선 일체성을 공유했다. 모르는 사이였지만 우리의 영혼은 통합되었고 서로에게 울려 퍼졌다. 하나의 큰나가 밖으로 빛을 발했다. 그 일체성이 그 순간 뉴욕 시의 부정성 전체를 상쇄하는 에너지가 되었다. 우리의 열린 응시 속에 우주적 일체성이 존재했다. 

- 그러고 나니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인지가 드러났다. 분리된 존재를 느끼기를 소망하는 생각이 존재하자, 이 생각이 개별 인간으로 나타났으며 각 인간은 개별적인 정체성과 그 정체성에 어울리는 육체를 지니고 있었다. 만물이 내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은 명백했다. 부처와 첨단 이론물리학이 묘사했듯이 우주는 3차원 입체 사진을 보여 주는 홀로그램 같은 것이었다. 부처와 이론 물리학은 우주의 본질이 그러하다는 점에 동의한다. 만물은 완벽하기에 소망하거나 욕망하거나 창조할 것이 없었고 어떻게 되어야 할 것도 없었다. 존재가 생겨나는 '존재하는 상태'의 본질인 '그것'만이 있었다. 그 '존재하는 상태'가 존재가 생겨나는 '근원'이며, 이상하긴 하지만 존재를 생기게 하는 '원인'은 아니다.

- 자각 상태는 엄청나게 익숙한 것이었다. 마치 자각 상태를 항상 알고 있었던 듯했고, 마침내 집에 돌아온 듯도 했다. 감정이나 기분은 존재하지 않았다. 감각의 존재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런 것들이 계속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해도 더 이상 개인적인 것은 아니었으며 관심사가 되지 못했다. 어떤 일이 생기는지 보려고, 실험 삼아 생각 하나를 찰나 동안 품었다. 즉시 물질세계에 영향을 미쳤다. 예를 들어 버터나 커피를 생각하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웨이터가 즉시 가지고 왔다. 아무 말도 필요 없는 것 같았다. 어떤 사람과도 무언 수준에서 의사소통이 일어났다.

- 육체가 차를 몰고 가서 그날 저녁에 있었던 회의에 참석했다. 달라진 점을 눈치챈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모든 사람이 강렬하게 살아 있는 것으로 보였다. 그들의 살아 있는 상태가 그들의 '존재하는 상태'로부터 보였고, 그들 모두에게 동일한 것인 '큰나'가 그들의 눈을 통해 보였다. 육체는 다른 사람들에게 말을 걸어 평범한 대화를 계속 나누는 등 평소에 하던 대로 행동했다. 이때 육체는 마치 카르마적 태엽을 감아 놓은 장난감이 자체의 모든 익숙한 패턴과 프로그램에 따라 작동하는 것처럼 보였다. 육체는 무슨 일을 해야 할지를 알고 있는 듯했고, 그 일을 힘들이지 않고 매우 효과적으로 했다. 모든 대화와 상호 작용은 현상으로 목격되었을 뿐, 지시를 받아 이루어지지 않았다. 작은 자아가 육체가 하는 행동의 창작자로서 존재한다는 믿음은 이상한 허영심 때문이었던 것 같았다. 사실 육체는 우주 전체의 영향을 받는 것으로 행동을 하는 행위자는 전혀 존재한 적이 없었다. 마음이 일으키는 진동으로서 현상이 존재할 뿐이었고, 마음은 분리된 존재나 분리된 현실을 갖고 있지 않았다. '모든 것인 상태'만이 존재했다.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그 '하나인 상태'뿐이었다.

- 다음 날 오후에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현실'로 통하는 길이 밝혀졌으니, 개인 상태의 의식으로 복귀하는 것도 가능하겠다는 생각이었다. 이전까지 실제라 여겼던 그 개인이 되는 것이었다. 방 안의 공기는 방 안에 있는 내용물을 경험하지 않듯이, '자신의 존재'를 경험하는 '나'는 더 이상 없었다. 그 공간에는 '나는 존재한다.'를 경험할 '나'가 없었다. 개별 의식으로 복귀한다는 것은 한 가지 선택을 의미했다.  

- 평화 : "오, 이거 운 좋은데? 안 그래도 범퍼가 덜그럭거려서 고칠 참이었는데, 펜더도 조금 찌그러져 있었고, 거저 고치겠네.

어, 조지 씨 처남 아닌가요? 꼭 뵙고 싶었습니다. 저한테 아주 괜찮은 비즈니스 건이 있는데, 맡아 주실 수 있을 겁니다. 둘 다 이익이 될 거예요. 이 일을 검토해 줄 적임자이신 것 같네요. 커피나 한 잔 하면서 이야기 나누면 어떨까요? 그건 그렇고, 제 보험증은 여기 있습니다. 와, 보험 회사가 같은 곳이네요. 이게 웬 우연이죠. 다 잘 될 겁니다. 전혀 문제없어요."

(새 친구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자리를 옮긴다. 사고는 벌써 잊었다.)

- 위의 예화에 지금까지 이야기한 모든 내용이 담겨 있다. 마음속에 품고 있는 바가 일으키는 결과로 스트레스 반응을 만들어 내는 사람은 우리 자신이다. 억제된 감정에 따라 신념 체계가 결정되고 자신과 타인에 대한 인식이 결정된다. 결국 이 신념 체계와 인식이 말 그대로 세상에 사건과 사고를 창조하고, 우리는 자신의 반응을 비난한다. 이것이 상상이 스스로를 강화하는 방식이다. 이것이 깨달은 현자들이 하는 "우리는 모두 환상 속에서 살고 있다."라 ...

- • 궁지에 몰린 무력감을 느끼는가?
• "돌아다니는 병이 있으면 나도 아마 옳을 것"이라는 말을 스스로 하는가?
• 인간관계의 질보다 소유물이나 지위의 상징에 신경 쓰는가?

• 많은 보험에 가입했지만 충분치 않다는 걱정이 계속 드는가?

- 요컨대 몸이 달라지려면 생각과 감정을 바꾸는 것이 방법이다. 부정적인 생각과 신념 체계를 놓아 버리고 부정적 감정에서 오는 스트레스도 버려야 한다. 스트레스는 부정적인 생각과 신념 체계에 에너지를 불어넣는다. 세상에서 주입받는 부정적 프로그램뿐 아니라 자신의 신념 체계에서 오는 프로그램도 삭제해야 한다. 식품이나 화학 물질, 환경 속 물질에 대한 공포에 영향을 받은 사람들을 보면, 공포 가득한 부정적 프로그램이 주는 파괴적 영향을 알 수 있다. 어떤 화학 물질이 유해하다는 발표가 매일 새로 나온다. 겁을 먹을수록 더 빠르게 프로그래밍되고, 몸이 그에 걸맞게 반응한다. 여러 물질과 식품, 공기, 에너지, 각종 자극에 대한 사람들의 공포는 거의 환경 편집증 수준에 이르렀다. 어떤 사람들은 환경 속 모든 것에 대한 공포증이 너무 심해져서, 마음 놓고 살 수 있는 세상이 점점 더 좁아진다고 토로한다. 나날이 겁을 먹는다. 어떤 사람들은 공포에 굴복한 나머지 세상에서 달아나 대형 비눗방울 속 같은 곳에서 자기 마음의 희생자가 되어서 산다. 

- 이성적인 사람에게도 이런 공포증이 있다. 심지어 의사인 나에게도 생겼다.  

 

- 마음이 바뀌며 과거의 결정을 후회한 적이 얼마나 많았는지 생각해 보라. 그것은 인식이 되지 않아 포기하지 못한 감정이 결정의 이면에 있기 때문이다. 결정한 대로 행동을 취하면 밑에 깔려 있던 감정이 바뀐다. 그러고 나면 새로운 감정 공간의 관점에서는 이전 결정은 틀린 것으로 밝혀진다. 이런 일이 워낙 정기적으로 일어나다 보니 대부분은 의사 결정에 두려움을 갖는다. 과거 결정이 틀린 것으로 밝혀지는 경우가 아주 흔해서 그렇다. 

- 문제 해결에 항복 기제를 사용하면 오래 끌던 문제도 번개같이 해결할 수 있을 때가 많다. 얼마나 빠른지 알아보기 위해 시험적으로 사용해 보자. 오래된 문제 여러 개를 놓고, 답 찾는 일을 그만둔다. 애초에 문제를 일으켰던 문제 밑에 깔린 감정이 어떤 것인지 알기 위해 들여다본다. 그 감정을 놓아 버리고 나면 답이 저절로 모습을 드러낸다.

- 우리는 공포와 분노, 죄책감, 자부심 때문에 활동을 벌이거나 무언가에 애착을 보일 때가 많다. 어떤 방면에서든 이런 부정적 감정을 포기하면 용기의 수준으로 올라간다. 용기의 수준에서는 삶에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한다. 혹은 같은 활동을 계속하기로 결정하더라도 동기가 달라져 있어서, 결과적으로 과거와는 다른 결과를 얻게 된다. 적어도 감정적 이득이 달라진다. 음침한 만족감 대신 환희를 경험할 수도 있다. 문득 깨닫고 보면 이전과 똑같은 활동을 하고 있을 수도 있지만 이제 의무감에서가 아니라 즐기기 위해서 한다.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일 뿐 해야 해서 하는 것이 아니다. 필요한 에너지도 당연히 훨씬 적다.

- 사랑을 베푸는 능력이 상상 이상으로 커졌다는 기분 좋은 발견도 하게 될 것이다. 놓아 버릴수록 더욱 다정해진다. 점점 더 사랑을 느끼는 사람들과 더불어, 사랑하는 일에 시간을 더 많이 쓰게 된다. 이런 일이 생기면서 삶이 바뀐다. 사람이 다르게 보인다. 사람들이 나에게 다르게 반응한다. 나는 느긋하고, 행복하고, 태평하다. 사람들이 내게 끌리는 것은 내 주위에 있으면 편하고 행복하기 때문이다. 이상하게 식당 종업원이나 택시 기사도 갑자기 세심하고 정중하게 맞이해 준다. 그래서 궁금하다. "무슨 영향으로 세상이 이렇게 된 걸까?" 의문의 답은 이렇다. "나의 영향이다!"

- 부정성을 놓아 버리고 나면 자기 자신의 힘을 돌려받는다. 저절로 그렇게 된다. 행복을 가로막던 걸림돌을 항복하고 나면 줄곧 내면에 있던 행복이 밖으로 빛을 발한다. 만나는 사람마다 좋은 쪽으로 영향을 준다. 사랑은 감정 에너지 진동 중에 가장 강력한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돈 때문이라면 절대로 하지 않을 일을 사랑을 위해서라면 어떤 고생도 마다하지 않고 한다.

- 부정적 걸림돌과 '난 못해'를 없애고 나면, 삶에서 완전히 새로운 방면이 활짝 열린다. 성공은 가장 좋아하는 일을 했을 때 이루어지는 것이지만, 사람들은 대부분 자기가 해야 하는 것으로 상상하는 일에 매여 있다. 한계를 포기하면 창조성과 재능 표출의 길이 완전히 새롭게 열린다.

 

- 우리 각자가 저장해 놓은 부정적 감정은 그 양에 한계가 있다. 어떤 감정 이면의 압력을 놓아 버리고 나면, 그 감정은 더 이상 일어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일정 기간 동안 공포를 끊임없이 항복하면 결국에는 공포가 바닥난다. 그러고 나면 공포를 느끼기가 더 어렵거나 불가능해진다. 공포 반응을 끌어내려면 자극이 더 많이 필요하다. 다량의 공포를 항복한 사람은 나중에는 열심히 공포를 찾아도 없을 정도가 된다. 공포의 에너지가 떨어진 것이다. 

- 항복의 목표는 완전한 초월이다. 완전한 자유를 기준으로 삼는 관점에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수준의 행동을 심리 치료에서는 건강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예를 들어, 심리 치료에서는 최소의 공포와 분노, 자부심을 필요하거나 받아들일 수 있는 수준의 기능으로 여길 수 있고 심지어 '건강한' 것으로 여길 수도 있다. 그러나 앞에서 보았듯이 낮은 상태 이면의 파괴성은 낮은 상태를 완전히 초월하는 항복의 힘이 있다면 결국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받아들일 만한 수준'의 기능을 넘어선 곳에 우리의 큰 운명이 기다리고 있다. 그것은 완전한 자유다.

- 누구나 쉽게 해낼 수 있는 일이라 여긴다. 사실 이 같은 수준의 성공과 행복이 부분적으로는 불가능해 보이겠지만, 이 책을 다 읽었을 때면 더 높은 수준이 이미 발생해 있다. 그렇기 때문에 높은 수준으로 제구실하는 일은 가능한 정도가 아니라 태어날 때부터 갖고 있는 권리라고 처음부터 자신에게 일러두어도 된다. 그것이 본연의 상태인데, 태어나면서부터 영향을 받은 프로그램 일체에게 그 상태를 빼앗겼을 뿐이다.

- 글을 더 읽기 전에 먼저 조용히 자리에 앉아, 한결 높은 수준으로 제구실하는 일에 대한 저항을 놓아 버리겠다고 마음속으로 결정하면 좋다. 이것은 더 높은 수준에 도달할 수 없다고 스스로 부인하기를 그만두고 행복, 성공, 건강, 받아들임, 사랑, 평화를 가로막는 모든 걸림돌을 놓아 버리겠다는 결정을 의미하는 행동이다. 이렇게 하면 할 일을 이미 다 한 것이다. 저절로 펼쳐지기 시작할 맥락에 경험 전체를 고정시켰기 때문이다.

- 사람은 보통 몸에 사로잡혀 있다. 몸의 기능과 능력, 외모, 생존에 사로잡혀 있다. 마음 역시 일반적으로 갖은 걱정, 병에 대한 공포, 고통, 질병, 죽음에 완전히 포위되어 있다. 그 결과 마음은 대단히 다양한 방법으로 몸을 방어하기 위해 먹는 일, 몸무게, 운동, 건강에 좋은 환경에 과도하게 신경 쓴다. 이런 마음속 긴장 속에서 하루가 끝나면 누구나 자신이 피해자라고 느낀다. 진이 빠지고, 공허하고, 너무 피곤하다.

- 이런 내면의 부정성으로부터 "사람은 홀로 태어나서 홀로 죽는다."와 같은 신념이 생긴다. 사실 이보다 진실과 거리가 먼 이야기도 없다. 임사체험을 다룬 책들이 밝히고 있듯, 사람이 혼자라고 느낄 때는 살아 있는 동안이고, 죽음의 순간에는 전적으로 일체성과 연결성을 느낀다. (<그 빛에 감싸여 Embraced by the Light>, 에디 1992: 닐 2011)

- 애착이 많고, 타인에게 의존하고, 내면이 왜소한 탓에 자신이 약하고 한계가 있다고 느낄지도 모른다. 죄스러워 견딜 수 없는 내면의 생각과 감정을 세상에 투사하면 세상은 무시무시한 곳처럼 보인다. 이 같은 공포를 마음에 품기 때문에 무서운 사건과 일이 말 그대로 자기 삶의 경험으로 나타난다. 공포로 인해 만성 분노가 생기고, 비난에 민감해지고, 내면에서 감정적 난장판이 벌어지기 쉽다. 절망이 주기적으로 찾아오고 언짢은 감정에 민감해지면서 아픔과 괴로움이 생긴다.

- 둔감함은 종종 자기변명과 함께 나타난다. "저는 숨김없이 속내를 털어놓는 사람입니다.", "저는 솔직한 타입이라. 다른 사람은 제가 자기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다 압니다." 이런 말로 둔감함을 은폐하는데, 그냥 무분별하다고 하는 것이 더 나은 표현일 것이다. 낮은 자존감에서 생기는 것으로는 자신과 타인이 가하는 비판, 끊임없는 경쟁과 비교, 분석, 경멸, 감정을 차단하고 이성만 과도하게 작동시키는 주지화, 의심, 복수하는 공상 등이 있다.

- 이 모든 기제가 실패하면 무의욕과 체념, 피해 의식이 재발한다. 이런 상태에서는 갈수록 사람들과 멀어진다. 자신에 대해 감춰야 할 것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자신의 행동으로 인해 다른 사람들로부터 고립되는 일이 생기고, 아직 유효해 보이는 삶의 측면을 과대평가함으로써 불균형이 생긴다. 

- 이런 내적 혼돈 상태 때문에 일반적인 사람들은 불가피하게 항상 무의식 상태로 남아 있고자 한다. 이 목적을 이루기 위해 마음이 고안하는 방법을 지켜보면 흥미롭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라디오나 텔레비전을 켜서 마음이 자아와 자아의 수다에서 즉시 벗어나게 한다. 이렇게 놀거리를 투입해도 마음이 그날의 프로젝트, 일, 성취나 재미를 위한 다양한 계획에 사로잡히기 전까지는 마음에 생각과 감정이 계속 생기기 쉽다.

- 마음은 몸에도 사로잡히기 시작한다. 이 닦고, 씻고, 향수를 뿌리고, 파우더를 바르고, 탈취제를 뿌리고, 그날 입을 옷을 세심하게 고른다. 옷을 고르자니 그날의 일정이 떠오른다. 하루치 일로 구겨 넣은 업무들 때문에 바쁠 것이다. 끝없이 이어지는 약속, 전화 통화, 심부름, 사교상 약속, 집안일, 이메일 처리 등이 기다리고 있다. 출근하거나 일을 보러 가는 도중에 동료와 잡담하고, 차에서 라디오를 듣고, 휴대전화로 통화하고, 문자 메시지를 보내고, 지하철에서 조간신문을 본다. 목적지에 도착하면 곧바로 그날 있을 외부 사건에 사로잡힌다. 비즈니스, 거래, 할인 상품, 준비, 걱정, 조종, 끝없는 권력 추구, '한 건' 올리기 위한 탐색, 항상 존재하는 생존의 공포에 사로잡힌다. 이 모든 일에 동기를 부여하는 것은 어떻게든 의미와 안도감을 얻고 어떤 방법으로든 자존감을 높이고 지키려는 욕망이다.

- 문득 어떤 외부 일이 끼어드는 바람에 억지로 멈추고 나서야 자신이 광분하며 분투 중이었음을 비로소 깨닫는다. 그러고는 내면의 공허와 마주친다. 공허를 피하려면 소설이나 잡지, 텔레비전, 인터넷에 쉴 새 없이 탐닉해야 한다. 아니면 끊임없이 파티에 나가고, 약물을 통해 환각의 세계로 탈출하고, 인사불성이 되도록 술을 마시고, 영화를 보고, 여타 놀거리를 추구한다. 우리는 내면의 공허감을 직면하는 일만 피할 수 있으면 무엇이든 하려고 한다. 

- 뭐가 되었든 활동 자체는 문제가 아니다. 다만 그런 활동을 하면서 의식의 상태와 자각의 상태는 어떠하며, 활동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 활동을 추구하고 경험하는 방식은 어떤지 자세히 살펴보아야 한다. 내면이 자유로운 상태에서는 똑같은 사건과 경험이 완전히 다른 의미를 갖는다. 
 
- 같은 활동이 내면의 행복감과 자아존중감, 충족감에서 나올 수도 있다. 같은 목표를 성취하더라도 타인과 경쟁하기보다는 내면에서 이룬 바를 외부에 실현하는 길을 선택할 수 있다. 인간관계도 질투하고, 경쟁하고, '한 건' 해내서 인정받으려고 기를 쓰기보다는 나누고 사랑한다. 부정적 충동이 없을 때 우리는 만족스런 관계를 누린다. 사람들에게 애착을 갖기보다 사람들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 질투와 협박을 받는 대신 자유를 누린다. 우리는 내면에서 성취를 이미 이루었기 때문에 타인에게 조종당하는 피해자가 아니다.

- 부정적인 생각과 감정, 마음가짐을 포기할 때, 세상에 넘겼던 힘을 되찾는다. 세상에서 얻는 재미와 즐거움은 많은 부분이 내가 세상에 투사한 매력에서 나온다. 이 점에서 자기 성찰을 요하는 의문이 생긴다. "나는 정말 더 많은 돈을 원하는 걸까, 아니면 내가 돈에 갖다 붙인 매력을 원하는 걸까?", "나는 특정 직함이나 '박사님', '선생님', '목사님' 같은 호칭에서 무엇을 원하는 걸까? 직함에 맞는 책임과 활동일까, 직함에 따라오는 매력과 존경일까?", "나는 정말 그 사람을 사랑하는 걸까, 아니면 내가 그 남자나 그 여자에게 투사한 매력과 사랑에 빠진 걸까?"

- 많이 놓아 버릴수록 세상에서 매력을 많이 벗겨 낸다. 세상에서 매력을 많이 벗겨 낼수록 세상에 덜 휘둘린다. 매력에 영향받지 않아, 더 이상 매력으로 조종당하지 않는다. 대중 매체와 정치적, 사회적 분야의 프로페셔널 프로그래머들에게 더 이상 해를 입지 않는다. 남에게 인정받고자 하는 내면의 욕구에 더 이상 영향받지 않는다.

- 내게 무엇을 해 줄 수 있어서 누구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 그대로의 존재를 사랑한다. 다른 사람을 더 이상 이용할 필요가 없고, 설득하려고 애쓸 필요도 없다. 죄책감의 강도가 약해지면서 자존감이 커진다. 인간관계가 진실성에 바탕하면서 감정적 협박에는 더 이상 영향 받지 않는다. 역으로 더 이상 감정적 압박을 동원해 다른 사람을 협박하려 들지도 않는다. 정직성에 바탕하므로 인간관계가 한결 높은 차원에서 존재하고 기능하며, 소외될까 봐 두렵거나 혼자라 느끼는 일이 없다. 항복한 사람은 더 이상 개인적 성취에 타인이 필요하지 않다. 사랑과 즐거움을 위한 선택에 의해 타인과 함께할 뿐이다. 타인과 그들의 인간성에 대한 연민이 자신의 삶과 모든 인간관계를 바꾼다.

- 끊임없이 항복할 때 삶은 어떻게 될까? 어떤 일이 가능할까?
항복한 상태에서는 만족의 근원이 바깥세상에 있지 않기 때문에 바깥세상과 무관해진다. 행복의 근원을 내면에서 발견했기 때문이다. 항복한 사람은 행복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니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돕고, 격려하고, 참을성 있고, 관대하다. 타인의 가치와 소중함을 쉽게 인정하고, 감정을 배려한다. 권력 투쟁을 하거나, 내가 '옳다'고 하거나, 내 주장을 증명하는 일은 포기한다. 비판하지 않는 마음가짐을 저절로 갖게 되며, 타인이 성장하고 배우고 경험하고 자신의 잠재력을 실현하도록 돕는다.

- 그러나 이제 자신이 시간을 벗어난 공간이며 그 속에서 현상들이 일어나고 있음을 깨닫는다. 우리는 스크린 상에서 깜박거리며 드라마를 펼치는 이미지가 아니라 스크린 그 자체다. 삶에서 펼쳐지는 영화를 비판 없이 목격하는 자이며, 시작도 끝도 없고 잠재력은 무한하다. 이렇게 자신의 참된 본성을 깨달을수록 '의식'의 정체성과 '신성 그 자체'에 대한 '궁극의 깨달음'이 일어날 장이 마련된다.

 

- 위와 같은 초기 편집증을 극복하려면 자신의 행위를 정화하는 수밖에 없다. 정화할 면을 알아내는 일은 쉽고 간단하다. 다른 사람이 나에 대해 알면 곤란한 것이 무엇인지 살펴보고 그것을 항복하는 일에 들어가는 것이다!

- 관찰해 보면 극심하게 부정적인 감정은 반향을 불러일으켜서 본인에게 해로운 결과를 낳으며 인간관계에 깊은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다른 사람들은 단지 내가 그들에게 투사하는 바를 비출 뿐이다. 증오에 찬 사람은 자신이 지극히 불유쾌한 세상에 살면서 많은 이의 증오를 받고 있다고 느낀다. 그에게는 외부 상황과 세상이 지극히 불쾌하게 보인다. 그가 보지 못하는 것은 이런 상황을 모두 스스로 창조한다는 점이다.

- 우리는 타인을 향한 분노의 감정으로 상대방을 처벌해 고통을 주면 좋겠다는 비밀스런 소망이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타인에게 나를 미워해도 좋은 이유를 제공하고 있을 뿐이다. 아울러 상대방의 보복과 자신의 무의식적 죄책감에 공포를 느끼며 살기도 하고, 이로 인해 육체적으로 병이 생기는 경우도 많다. 내가 느끼는 분노와 울분은 모두 나의 인식, 즉 내가 주어진 상황을 보는 관점에서 기인한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 내면의 감정을 포기하면 상황을 보는 관점도 바뀌고, 문득 용서의 감정이 생기면서 관계가 달라져 놀란다. 내적 변화를 보여 주기 위해 겉으로 한 일이 없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도 그렇게 된다. 이런 현상은 나의 의도가 나의 울분을 극복할 때 빈번하게 발생한다. <기적 수업>에서는 상황을 보는 관점을 변화시키는 정밀 과정을 활용하는데, 이 과정은 상황을 다르게 보고 용서하려는 자발성을 통해 이루어진다. 용서의 기적적인 힘을 이야기했을 때 예수가 의도한 바가 이것이다. 매우 흥미롭게도 적을 축복하고 사랑하라는 예수의 강력한 충고에는 과학적 근거가 있다. 낮은 감정은 에너지로서 진동 주파수가 낮고 힘이 약하다. 그래서 분노나 증오, 폭력, 죄책감, 질투, 그 밖의 다른 부정적 감정의 낮은 에너지 상태에 있을 때 우리는 정신적으로 타인에게서 상처받기 쉽다. 반대로 용서와 감사, 자애는 에너지 진동이 훨씬 높고 힘도 훨씬 강력하다. 낮은 에너지 패턴에서 높은 것으로 옮겨 가면 에너지 차원에서 일종의 보호막이라 할 수 있는 것을 만들어 내, 더 이상 정신적으로 타인에게 해를 입기가 어렵게 된다. 반대로 분노의 상태에 있으면 상대방의 역 분노가 초래하는 에너지 고갈에 취약해진다. 

- 다른 사람들에게 진정으로 영향을 미치고 싶으면 그들을 진정으로 사랑해야 한다. 그때 나에 대한 그들의 분노는 본인들에게 해로운 결과를 가져올 뿐 내게는 아무 영향이 없다! 이것이 <법구경 Dhamma-pada>에서 부처가 말한 지혜다.

"증오는 증오로 정복하는 것이 아니다. 증오는 사랑으로 정복하는 것이다. 이는 영원한 법칙이다."

- 충분한 자존감이 있으면 내면의 겸손과 감사에서 동기를 부여받으므로 타인(이나 신)에게서 애정을 끌어낼 필요가 없다. 누가 나를 좋아하기를 더 이상 바라지 않으면, 어느새 사람들이 나를 좋아한다. 남들의 구미에 맞추고 그들을 조종해서 인정받으려 하지 않으면, 어느새 정말로 존경을 받는다. 노여움을 달래고, 아첨하고, 경의를 표하고, 자기를 낮추고, 뭐든 받아들이는 형태로 나타나는 자기 폄하는 호의적인 대우를 받아 자기 식대로 하기 위해 남들의 에고에 영합해 그들에게 영향을 주려는 시도다. 거짓된 겸손을 보이는 것은 남들에게 "저는 사람이 작습니다. 부디 그렇게 대해 주세요."라고 하는 것과 다를 바 없고, 그러면 사람들은 즉시 그렇게 대한다.

- 명백한 것은 위와 같은 감정은 모두 타인을 교묘하게 조종하고 진정한 관계를 파괴한다는 점이다. 모두가 취약한 입장이기 때문에 자존감을 깎아내린다. 따라서 자부심의 수준에서는 자신이 무사하고 평안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자부심은 기본적으로 취약하기 때문에 항상 방어적인 태도가 따라온다. 사람은 자신이 없을 때마다 자부심으로 부풀어 오른다. 그렇게 팽창한 자부심은 지나가는 말 한마디나 찌푸린 눈살 한 번에 펑크 나기 쉽다.

- 모든 부정적 감정은 근본적으로 공포가 형태를 달리 한 것이다. 즉 자신과 타인의 존경을 잃을 것 같은 공포, 살아남지 못할 것 같은 공포, 앞날을 안심하지 못하는 공포 등이다. 부정적 감정 대부분은 그 가치를 부정적으로 평가받으므로, 억제되거나 억압되거나 투사된다. 억제와 억압, 투사는 모두 파괴적 심리 역동으로 인간관계에 갈수록 스트레스를 주어 관계를 위축시킨다.

- 가장 내밀한 감정들은 남들이 모른다고 가정하고 싶지만, 과연 그럴까? 우리는 모두 정신적, 직감적 수준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우리의 감정은 다른 사람들에게 읽히고 알려진다. 이점을 의식적으로 알아차리지 못할 수는 있지만, 남들이 내게 하는 것을 보면 그들을 향한 내 내면의 마음가짐과 감정을 그들이 알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 예를 들어, 일에 임하는 자신의 태도가 남들이 보기에 모범적이라고 하자. 그런데 왜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승진하거나 인정받는 것일까? 답을 알려면 상사와 일에 대해 자신의 속내에 어떤 감정이 숨어 있는지를 살펴보면 된다. 부러워하고, 비판적이고, 분개하는 자신의 속내를 상사가 정말로 알아채지 못한다고 생각하는가? 남들이 내 내면의 감정과 감정에 따라오는 생각을 알고 있다고 넘겨짚는 편이 손해가 없다. 내가 남에 대해 하는 생각은 남이 나에 대해 하는 생각과 비슷할 유형일 가능성이 아주 높다. 이 원리를 깨달으면 삶에서 일어나는 많은 일이 이해되기 시작한다.

- 이렇게 자문해 본다. "내가 저 사람이라면, 내 속내의 감정과 생각이 어떤지를 정확히 알았다면, 나는 어떻게 반응할까?" 이 질문에 답을 해 보면 그 사람의 행동이 왜 그런지 대개는 명확해질 것이다. 내가 승진을 못한 것은 무언의 에너지 수준에서 상사에게는 비판적이고 동료들에게는 분개하면서, 인정하고 알아 달라 아우성만 치고 있었음을 상사가 알기 때문일 수 있다.

- 부정적 감정을 찾아 내면을 살펴보기 전에, 이런 감정은 진정한 내적 큰나가 아님을 기억하면 가장 좋다. 부정적 감정은 학습된 프로그램이며 인간으로서 타고나는 것들이다. 부정적 감정을 면제받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즉 가장 높은 수준에서 가장 낮은 수준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은 현재 에고가 있거나 과거에 에고가 있었다. 깨달음을 얻은 몇 안 되는 사람들조차 에고가 있었다가 나중에야 에고를 초월했을 따름이다. 인간이라는 상태가 원래 이렇다. 자신의 감정을 정직하게 관찰할 수 있으려면 비판하지 않는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 내면에서 벌어지는 일부터 확실히 알아차려야 그에 대해 무언가를 할 수 있다. 어떤 감정을 놓아 버리면 그것이 더 상위의 감정으로 대체된다. 어떤 감정을 알아보고 인정하는 목적은 오직 그 감정을 놓아 버리려는 데 있다. 항복한다는 것은 어떤 감정을 느끼기만 하고 바꾸려 하지 않음으로써 그 감정을 기꺼이 포기함을 의미한다. 애초에 감정이 내면에 유지되는 것은 저항하기 때문이다.

- 일부 부정적 감정은 욕구 충족에 필요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이런 생각은 환상임을 알 수 있다. 욕구가 충족되는 데는 상위의 감정이 훨씬 더 강력하고 효과적이다. 예를 들어,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어떤 일까지 기꺼이 할 수 있을지 자문해 보자. 거의 모든 일임을 즉시 알 수 있다. 사랑을 위해서는 넘어서지 못할 한계가 없다. 이제 그 일을 내게 겁을 주는 누군가를 위해 기꺼이 할 수 있는 일과 대조해 보자. 마지못해 가능한 한 적게 할 것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겁주는 사람들이 무언가를 잠시 빼앗아 가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그들은 전체를 잃은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그들의 승리는 피상적이고 일시적이며, 심지어 진짜 승리도 아니다. 겉으로 보기에만 승리일 뿐이다. 세상은 결국 바뀌기 때문에 겁주는 사람들은 자신이 파멸할 씨앗을 뿌리는 것과 같다. 부정적 감정으로 쟁취하는 것은 오래가지 못하고 진짜가 아니다. 만족을 주지도 못한다. 옆구리 찔러 절 받기와 같다. 진정한 행복은 둘 다 이기는 상황에서 온다. 나는 이기고 상대는 진 상황의 대가는 증오와 낮은 자존감이다. 내가 다른 사람을 이용하려고 애쓰고 있으면 그 사람은 언제나 그 사실을 안다.

- 감정을 포기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면 그 감정의 의도를 살펴보면 도움이 된다. 이 감정의 목적은 어떤 것일까? 타인에게 어떤 영향을 줄 수 있다고 보고 그런 영향을 주려는 것일까? 타인이 보일 가장 큰 반응은 어떤 것일까? 그 반응을 나는 정말 원하는 걸까? 오늘이 내 삶의 마지막 날이라면, 그 반응이 내가 정말 원한 것일까? 어쨌거나 오늘은 내 삶의 마지막 날, 모든 갈등과 불안, 공포와 함께해 온 옛 삶의 마지막 날이다. 그리고 지금의 갈등과 불안, 공포는 옛 것을 고수한 대가다. 

- • 기법에 대한 저항을 놓아 버려라. 기법 수행으로 하루를 시작하라. 하루를 마칠 때면 그날 활동에서 남은 부정적 감정을 모두 포기하는 시간을 가져라.
• 마음에 품은 것에만 영향을 받는다. 부정적 생각이나 신념에 영향을 받는 것은, 그것이 내게 적용된다고 의식적이나 무의식적으로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 육체적 장애에 이름 붙이지 말라. 꼬리표를 붙이지 말라. 하나의 꼬리표는 하나의 프로그램이다. 실제로 느끼는 것, 즉 감각 자체를 항복하라. 우리는 질병을 느낄 수 없다. 질병은 마음에 품은 추상적 개념이다. 이를테면 우리는 '천식'을 느낄 수 없다. "무엇을 실제로 느끼고 있지?" 하고 자문하면 도움이 된다. 예를 들어, '가슴 속이 조이고, 쌕쌕거리고, 기침하는' 육체적 감각을 그냥 관찰하라. 예컨대 '공기를 충분히 마시지 못하고 있다.'라는 생각을 느낄 수는 없다. 그것은 겁에 질린 마음속 생각일 뿐이다. 하나의 개념, '천식'이라 부르는 프로그램일 뿐이다. 실제로 느끼는 것은 목구멍이나 가슴 속의 긴장 내지 조임이다. 같은 원리가 '궤양'이나 다른 장애에도 적용된다. 우리는 '궤양'을 느낄 수 없다. 가슴이 타는 듯하거나 찢어지는 듯한 감각을 느낀다. '궤양'이라는 단어는 꼬리표이자 프로그램이라, 자신의 경험에 꼬리표를 붙이는 데 이 단어를 쓰자마자 자신을 '궤양' 프로그램과 동일시한다. '통증'이라는 단어조차 프로그램이다. 실제로는 어떤 특정한 육체적 감각을 느끼고 있을 ...

- 어떤 높은 힘의 보살핌에 의지와 인생을 넘기려면 과연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의지라는 것을 살펴보면 의지는 욕망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 욕망은 애착과 결부되어 있습니다. 항복 기제를 사용하면 애착에서 벗어나기가 쉬워지기 때문에 항복 기제는 기제의 의도 면에서 3단계와 거의 같습니다. 신에게 항복한다는 것은 자신의 고집을 놓아 버림을 뜻합니다. 고집은 에고 그 자체입니다.

- 음주 강박은 강제되는 상태, 애착으로 인해 강요받는 상태입니다. 이 강박을 항복 과정으로 약화시켜서 줄일 수 있습니다. 음주는 또한 부정적 감정이 주는 고통을 회피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정적 감정을 놓아 버리면 음주라는 특정 형태의 회피를 하려는 심리적 욕구가 줄어듭니다. 이는 다른 약물에도 적용됩니다. 그 모두가 낮은 감정을 높은 감정으로 바꾸어 놓으려는 시도이기 때문입니다.

- Q. 저는 오랫동안 영적인 길을 걸었는데, 왜 아직도 부정적 감정을 겪는지 이해가 안 됩니다.
A. 영적으로 발전해 타인을 사랑하는 사람은 마치 천사인 양부정성이 전혀 없을 것이라는 공동 환상이 있습니다. 이런 환상에 젖은 사람들은 자신에게 아직도 부정적 감정이 있는 것에 짜증을 내고, 거기에 죄책감과 자기 불만이 겹칩니다. 그들이 알아야 할 것은 감정은 일시적이고 발전하려는 의도는 변함없다는 점입니다. 천사가 되려는 야심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평범한 인간에 불과하다는 점에 대해 죄책감을 놓아 버리세요! 자신이 타고난 인간적 측면과 신경계, 신경계에 따르는 뇌 기능에 대해 연민을 가지면 한결 담담해질 수 있습니다. 천국에 야심이 있다고 해서 반드시 천사가 되지는 않습니다! 

- Q. 일에서 자기 몫을 다하지 않는 동료가 있습니다. 그를 볼 때마다 울분을 느낍니다. 그러고 나면 그에게 분개한 것에 죄책감을 느낍니다. 이 상황에서 놓아 버림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A. 상황에 대해 자신의 감정이 어떤지를 알아채고 이를 인정한 다음, 감정적 상태에 탐닉하기보다 감정을 치우는 일에 들어갑니다. 일터에서는 억울한 심정을 억제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고 갈등이 곪아 터지게 됩니다. 놓아 버림 기법을 쓰려면 내면으로 들어가서 부정적 감정이 올라오는 대로 인정하세요. 감정을 억제하지도 말고 터뜨리지도 말고, 올라오게 놔두세요. 그런 다음 주의를 감정에서 다른 데로 돌리세요. 감정을 그대로 내버려 두어서 없어지게 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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