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2

[람 다스] 람 다스의 바가바드 기타 이야기 - 내 안의 빛, 내 안의 신성을 살기

일루젼 2024. 10. 18.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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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람 다스 / 이균형
출판 : 올리브나무
출간 : 2024.02.21


       

           

이 책은 <바가바드 기타> 자체를 다루고 있다기보다는, <기타>의 내용을 토대로 이루어진 강연 내용을 정리한 것에 가깝다. 기본적인 설명이 없지는 않지만, <기타>를 최소 일독했다는 전제 하에 진행되므로 아직 <바가바드 기타>를 읽기 전이시라면 <기타>를 먼저 읽는 것도 좋은 방법이겠다.

 

연초에 기획했던 일상에 가까운 나날을 보내고 있다. 비로소.

여유로운 한낮의 햇살을 즐기고, 차를 끓이고 책을 읽는 시간.

음악을 들으며 자판을 두드리거나 눈을 감는 시간. 

반드시 그 장소여야만 할 필요는 없었던 것이다. 

 

새롭게 등장한 불편함도 있지만 대체로 소소한 것들이다.

하나씩 다뤄나가다 보면 예전 생각이 나서 아릿해지기도 하고, 소꿉장난을 하는 것 같아 즐겁기도 하다. 

잠시 스스로를 소화하는 시간을 갖고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려 한다. 

 

람 다스는 유쾌하다. 진지한 이야기를 하다가도 바로 다음 순간 공기를 가볍게 바꿀 수 있는 힘이 있다.

람 다스 뿐만이 아니다. 여러 성자들과 구루들의 일화를 보면 그들은 대체로 자주 웃는 고요한 이들이었는데, 문득 생각이 '웃음'으로 튄다.

'웃음'에는 생각보다 큰 힘이 있는 게 아닐까? 웃을 수 있다는 건 삶을 즐겁게 바라볼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닐까?

 

마지막으로 박장대소해본 적이 언제였는지 기억이 까마득하다. 의식적으로 감사하는 것에 더해, 의식적으로 하루 한 번 이상 신나게 웃어보기로 다짐한다. 웃을 일이 없으면 직접 만들면 되는 것이고, 그러다 웃기 힘든 일에도 웃을 수 있게 되면 더욱 좋은 일 아닐까? 

 

그 무엇도 잘못 된 것은 없다.

그저 기뻐하고 감사하라.

그저 바라보라.

모든 것이 완벽함을 알게 되는 순간, 그대는 모든 것을 사랑하게 될 것이고 모든 것은 그대를 사랑하게 될 것이다.

그대가 존재하는 것도, 하지 않는 것도 완벽하다.

 

좋은 나날이다.

  

   


   

 

- 저자 람 다스는 60년대 히피 물결의 영적 기수 역할을 한 인물로서, 지금도 가장 존경받고 있는 미국 태생 구루의 원조다. 1960년대에 하버드 대학교의 심리학 박사 리처드 앨퍼트였던 그는, 동료 티모시 리어리와 함께 LSD 등의 일부 환각제가 인간 의식에 미치는 작용을 인류의식진화의 디딤돌로 활용할 방법을 연구하는 급진적이고 야심 찬 실험을 벌이다가 결국은 학계의 이해를 얻어내지 못하고 교수직을 박탈당했다. 반문화운동의 대부였던 티모시는 이에 굴하지 않고 공공연히 환각제예찬론을 설파하며 체제에 저항하는 전위적 활동을 펼치다가 체포와 수감과 탈옥과 망명생활의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수많은 저술을 남기고 1996년에 죽었다. 


- 한편 티모시와는 반대로 주의를 내면으로 돌렸던 리처드는, 환각제를 복용하지 않고도 깊은 정신적 경지를 노니는 수행자들이 살고 있다는 인도로 구도 여행을 떠났다가 북인도의 위대한 스승 님 카롤리 바바(1900년생)를 만났다. 흔히 '마하라지'라고 불렸던 님 카롤리 바바는 무수한 기사이적의 일화를 남기며 북인도를 종횡하다가 1973년에 몸을 떠난 매력적인 풍모의 성자이다. 그는 자신의 초월적인 면모를 깊은 박애와 지극히 소탈하고 유머러스한 인간적 면모 뒤에 늘 감추고 있었다. 그는 리처드에게 헌신의 길인 박티 요가를 가르치면서 람 다스('신의 종)라는 이름을 지어주었고, 그를 따라 몰려든 파란 눈의 히피 구도자들을 새로운 세계로 인도했다.


- 람다스는 미국으로 돌아와서 동서양의 다양한 수행 전통을 섭렵하며 봉사재단을 설립하고 강연과 저술 활동을 펼쳤다. 1997년에 뇌졸중을 겪은 후에도 오히려 그것을 노화와 죽음의 의미를 배우고 전파할 기회로 삼고 건강이 허락하는 한 여행과 강연을 계속하며 봉사하는 삶을 살았다.

"나는 내 수행을 위한 하나의 방법으로서 사람들을 돕는다. 그리고 사람들을 돕기 위해서 수행을 한다. 나에게는 이것이 내 앞에 펼쳐지고 있는 게임의 의미이다."

 

- 그는 2019년에 마우이 섬의 거처에서 88세를 일기로 몸을 벗었다.

- 이처럼 이 책의 배후에는 수천 년을 관통하는 인도의 요가 전통과 60년대 히피 운동이 상징하는 폭력적 물질문명에 대한 정신의 저항과 환각체험을 통한 서양의 영적 입문, 그리고 뒤따라 일어난 -그리하여 작금의 뉴에이지 사상으로까지 이어지게 된- 동서의 교류와 영적 전통의 현대적 부흥 등 다채로운 시대적 배경이 겹쳐 있다. 그리고 또 그 배후에는 그와는 무관하게 변함없는 그것, 크리슈나가 노래하는 브라흐만이 있다. 브라흐만에 이르는 길은 여러 갈래이고 이 책은 그 길들과 현대를 사는 우리의 삶과 그 길들 사이의 관계를 이야기한다.

 

- 이 책을 읽는 것은 자체가 하나의 영적 여행이 될 것이다. 그냥 즐겁게 여행을 떠나보시길. 그다음은 크리슈나, 곧 내면의 '그것'이 알아서 하시도록 맡기고...


- 옮긴이 이균형

 


 


- 이 책은 흥미로운 사연을 가지고 있다. 이 책은 람 다스가 1974년 여름에 열었던 "<바가바드 기타> 속의 요가"라는 제목의 워크숍을 기반으로 한다. 그는 콜로라도주 볼더에 당시 새로 세워진 나로파 인스티튜트의 여름학기 교과목의 하나로서 이 워크숍을 열었다.

- 나로파 인스티튜트는 티베트인 툴쿠(Tulku: 티베트 불교에서 의도적으로 환생한 존재를 이르는 말)이자 바즈라야나(티베트 밀교) 스승인 초 트룽파 린포체 Chögyam Trungpa Rinpoche에 의해 설립되었다. 트룽파는 티베트 불교의 두 계보 -카규파 Kargyu와 닝마파 Nyingma- 의 철학과 명상 전통을 배웠고 서양에 티베트의 수행법을 최초로 소개한 스승들 중 한 분이다.

- 나로파의 목표는 동양 종교전통의 가르침을 서구의 엄격한 학문적 환경 속에서 탐구해 보려는 것이었다. 나로파 여름학기 프로그램은 이렇게 선언했다. "나로파 인스티튜트의 목적은 동서양의 지적 전통의 상호 교류를 통해 그 수행법들이 교수와 학생들의 생활과 개인적 경험 속에 뿌리내릴 수 있게끔 하는 환경을 제공하는 것이다. 모든 교직원들은 심리적, 영적 성장과 관련된 다소간의 수행법을 실천한다. 이런 직접적인 경험이야말로 세속의 삶을 보완해 줄 지적, 감각적, 직관적 접근법들을 통합해 가는 데 든든한 바탕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 람다스는 나로파 인스티튜트의 설립을 후원했다. 이런 기관들이 뜻하는 실험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보다도 람 다스는 트룽파 린포체의 가르침과 전통을 존경했고 그것이 서구에서 뿌리를 내리도록 돕고 싶어 했다. 그래서 그는 1974년 6월과 7월에 나로파 인스티튜트의 첫 여름학기 교수진으로 합류했다. 나로파 인스티튜트의 그해 여름학기 교수진은 화려했다. 람 다스와 트룽파 린포체 외에도 앨런 긴즈버그, 그레고리 베이트슨, 호세 아르구엘레스, 잭 콘필드, 벤 위버, 그 밖에도 십여 명이 더 있었다. 람 다스의 조교들만 해도 크리슈나 다스, 조셉 골드슈타인, 라메슈와 다스 미라바이부시, 폴 고어만이 있었고, 람 데브 미라바이는 그해 여름의 나로파를 동양의 영성이 서양의 토양에 뿌리내리게 할 '가르침의 씨앗주머니'라고 ...

- 그러면 그는 왜 기타를 가르치기로 마음먹었을까? 람 다스는 말한다. "마하라지는 언제나 두 종의 책을 사람들에게 나눠줬어요. <라마야나>와 <바가바드 기타>가 그것이었지요. 그가 그 두 책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 같아서 나는 당연히 그것을 최대한 열심히 공부해야겠다고 생각했지요. 마하라지 주변을 얼쩡거리면서 그의 사원에서 오랜 세월을 보내고 나니 <라마야나>에 대해서는 최소한 어느 정도는 공부가 됐다고 느꼈습니다. 나로파에서 이 강연을 맡게 된 것은 다른 책인 <기타>를 좀 더 깊이 파고들 좋은 기회로 생각했기 때문이지요."

- <기타>의 철학은 우리 서구인들에게 특히 적합해 보인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세상에 등을 돌리게 만들지 않고, 속세의 삶을 영적 수행으로 바꿔놓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는 탁발승이나 동굴에서 수행하는 사두고행자들을 대접하지 않는다. 우리는 '행위자'의 문화에 젖어 있어서, 코스 안내문처럼 많은 사람들이 카르마 요가야말로 가장 적합한 수행법이라고 느낀다. 

- 랄프 왈도 에머슨은 그것을 "최상의 책... 고대 지성의 소리"라고 했다.

- <바가바드 기타>는 기원전 1천 년 동안의 어느 시점엔가 쓰였다. 그리고 나중에 그보다 훨씬 더 방대하고 아마도 훨씬 더 오래된 책인 <마하바라타>의 일부가 되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베다>나 <우파니샤드>와는 달리 <마하바라타>는 힌두 경전이 아니라 '푸라나'라 불리는 인도의 20여 가지 대서사시 중 하나이다. 푸라나는 신의 다양한 화신들의 생애에 관한 이야기로서, 예를 들자면 브라흐마 푸라나, 가루다 푸라나, 링가푸라나 등이 있다. 그리고 그중에 두 개의 '마하' 푸라나, 곧 '위대한' 푸라나가 있는데, 그것이 <마하바라타>와 <라마야나>이다. 이 두 개의 마하푸라나는 인도의 문화와 삶과 사상 속에 너무나 깊게 얽혀 있어서 어떤 판디트(경전학자)는 "<마하바라타>와 <라마야나>는 곧 인도"라고 했다.

- 이 마하바라타의 유장한 이야기 가운데 '힌두 사상의 핵심'이라고 불리는 <바가바드 기타>가 있다. 역사적으로 말하자면 사실 <기타>는 당시 인도의 사상에 갈수록 큰 영향을 미치기 시작하던 불교의 특정 사상에 대한 힌두교의 대응으로서 제시된 것이다. <기타>는 특히 신께로 가는 중요한 길로서 속세를 멀리할 것을 강조했던 불교 사상을 반박한다. <기타>는 합일로 가는 방법으로서 세상 속에 살면서 실천하는 '행위'의 기술을 가르친다. 

- <기타>는 영적 삶과 신성의 깊고 황홀한 계시를 맛보게 하는 지침서이다. <기타>를 아름답게 옮긴 영역판이 많지만, 나로파 워크숍을 위해 선택된 것은 후안 마스카로 Juan Mascaro의 번역판이었다.  

- 그러니까, 캘리포니아의 사막 한가운데 산토끼 가족 앞에서 시작했던 일련의 강의가 지금 당신이 들고 있는 책으로 완성된 셈이다. 이것은 인도의 심오한 영적 경전에 관한 람 다스의 깊은 지혜를 보여주는 책이다. 그는 현대 서양문화권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바가바드 기타>가 가르치는 요가를 각자의 살아있는 영적 수행으로 바꿔놓는 법을 가르쳐준다.


편집자 마를렌 로더 Marlene Roeder

 




- 나의 강연은 머리를 써서 '사색하는 인간'을 위한 코스가 아니었다.

- 나는 지성을 부정하는 사람이 아님을 밝혀둬야겠다. 나는 지성이 매우 생산적으로 활용될 수 있는 아름다운 도구라고 생각한다. '생각'이 최고라고만 생각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하지만 이제 우리 서양도 일종의 병을 벗어나고 있다. 생각이 너무 많아서 가슴과 몸의 지혜보다 지성이 너무나 앞질러 가버리는 그런 병 말이다. 우리는 이제 막 그것을 조금씩 가라앉혀서 추스르는 법을 배우고 있다. 그러니까 머리로 헤아리는 지성을 자신의 영적인 길로 이용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매우 뜨거운 불을 다루고 있는 것이다. 나는 그들을 존중하지만 그것은 나의 길이 아니다. 

- 조금쯤은 지적인 분위기에서 벗어난 듯한 기분 외에도 나의 강연 계획에는 또 다른 걱정거리가 있었다. 나는 그해 여름 강연을 하러 나로파로 가기 직전에 인도에서 온 (매우 아름다운 성자인) 스와미 묵타난다 Swami Muktananda와 대화를 나누다가, 내가 <기타>에 관해 강의를 하려고 덤비는 것이 주제넘은 듯이 느껴진다고 이야기했다. <기타>에 관해서 내가 말을 해봤자 얼마나 하겠는가? 아마도 인도인들 대부분이 나보다는 <기타>를 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인도에서는 평범한 사람들 중에도 오랜 세월 <기타>를 공부해 온 대단한 학자들이 많다. 인도에서 나는 종종 역무원이나 청소부들과도 장시간의 철학적 토론에 몰두하곤 했었다. 이들은 무슨 일을 하든 하루 일과가 끝나면 자신만의 중요한 일을 시작한다. <기타>나 <라마야나> 같은 영적인 책을 공부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스와미 묵타난다에게 내가 스스로 <기타>에 관해서 가르칠 거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좀 겸연쩍은 느낌이 든다고 말했다. 그는 그 대답으로서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온 크리슈나가 아름다운 청년으로 자랐을 때의 이야기다. <기타>를 무척이나 열심히 공부한 노인이 있었다. 그는 <기타> 공부에 열중한 나머지 모든 일을 그만두고 종일 <기타>만 읽었다. 이내 그와 아내는 먹을 양식이 떨어졌다. 아내는 그를 몹시 구박하면서 말했다.

"당신은 나가서 가족을 위해서 양식을 벌어올 의무가 있는 사람이에요."

그녀는 남편에게 날마다 바가지를 긁어댔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그는 말없이 집을 나가 숲 속에서 <기타>만 읽다 돌아오곤 했다. 
하루는 숲 속에서 <기타>를 읽고 있다가 책에서 크리슈나가 이렇게 말하는 구절을 읽었다.

"오로지 나만 믿는다면 세상 걱정에서 다 놓여나리라. 내가 모든 것을 돌봐주리니."

그래서 노인은 이렇게 생각했다.

"글쎄, 이 말은 참 이상하군. 봐라, 나는 <기타>와 크리슈나께 모든 것을 다 바치고 있는데 양식이 떨어져서 아내가 노여워하고 있지 않은가? <기타>에 모든 것을 바치기만 하면 만사가 걱정 없이 풀린다고? 그런데 왜 크리슈나는 나를 돌봐주시지 않는가? <기타>에 잘못이 있을 수도 있단 말일까?"

그러면서 그는 그 문장에다 밑줄을 그었다. 그 부분이 확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바로 그때, 누군가가 그의 집 대문을 두드렸다. 아내가 나가자 문밖에는 잘생긴 젊은이가 서 있었다. 그는 몇 달간 먹을 만큼의 쌀과 콩과 밀가루를 커다란 자루에 담아 가지고 왔다.
아내가 말했다. "누구신가요? 이건 또 다 뭔가요?"
청년이 말했다. "이것은 <기타>를 공부하는 사람의 가족에게 주는 것입니다."
젊은이가 자루를 집 안으로 옮겨 놓는 동안 아내는 젊은이의 젖혀진 웃옷 속에서 상처가 나서 피가 흐르는 가슴팍을 보았다. 그녀가 말했다. "무슨 일이에요? 누가 그랬어요?"
그가 말했다. "이것은 숲 속에서 <기타>를 공부하는 사람이 한 짓입니다." 그는 이렇게만 말하고는 자루를 내려놓고 떠났다.
집에 돌아온 남편이 쌓여 있는 양식을 보고 놀라서 묻자 아내가 대답했다. "정말 이상한 일이 일어났어요."

그녀는 젊은이가 다녀간 일을 모두 이야기했다.

"그런데 그 청년의 가슴에서 피가 나기에 물어봤더니 그는 숲 속에서 <기타>를 공부하는 사람이 그렇게 했다고 대답하더군요."

- 스와미 묵타난다에 따르면, 그 노인은 이 말에 사건의 전모를 깨닫고는 실신해버렸다고 한다. 의심스러운 문장에다 밑줄을 그음으로써 노인은 크리슈나의 몸에 상처를 냈던 것이다. 스와미 묵타난다는 말했다.

"이걸 알아야 합니다. <기타>는 크리슈나에 '관한' 책이 아닙니다. <기타>가 '곧' 크리슈나입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말해주었다.

"<기타>에 관해 가르치는 일을 걱정할 필요가 없어요. 그건 당신이 신경 쓸 바가 아닙니다. <기타>가 스스로 가르칠 테니까요. 크리슈나께서 당신을 대신해 주실 겁니다."
나는 스와미 묵타난다 덕분에 올가미에서 풀려난 기분이었다.

- 의식과 제례는 원래 살아 있는 영성으로부터 생겨난 것이지만 그것은 어느새 온데간데없이 잊혀져 버리고 기계적인 의식만 남았다.
하지만 의식의 다른 차원에 조율된 눈을 가지고 돌아와서 상황에 대한 낡은 반응패턴에 빠지지 않는 중심으로부터 바라보면, 갑자기 그 모든 것이, 살아 있는 영성이 거기에 돌아와 있는 것을 발견한다. 나는 우리 각자가 우리 사회를 살아 있는 영성으로써 되살려놓을 수 있는 능력을 기르는 데 자신을 바칠 준비를 해오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일은 우리 각자가 살아 있는 영성이 될 때 일어난다. 왜냐하면 상대방에게 진정으로 전해줄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우리 자신의 존재뿐이기 때문이다. 멋진 말들 속에는 아무런 의미도 담겨 있지 않다. 

- 우리 모두가 겪고 있는 이 깨어남의 과정 속에는 여러 단계, 즉 의식진화의 단계들이 있다. 그 단계들 중 일부가 18장에 걸친 <기타> 속에서 아르주나 Arjuna의 의식이 깨어나는 과정을 통해 묘사되어 있다. 맨 처음에 좌절이 있고, 그다음엔 가능성이, 그다음엔 깨달음이 오기 시작한다. 이어서 신비적인 통찰과 계시가 열리고 직접적인 체험이 깊어진다. 이것이 7장 12장까지 이어진다. 그다음에 마지막 부분이 전개되는데, 이것은 신심이 깊어지면서부터 일어나는 일이다. 즉 더 깊은 지혜가 열리는 것이다. 이것이 <기타>가 묘사하는 영적 여행의 단계들이다.

- 우리는 각자 다른 의식 수준에서 살아간다. 그것은 누가 더 낫고 못하고의 문제가 아니다. 저마다 여행의 다른 단계에 있는 것일 뿐이다. 이 인생게임이 전개되는 방식에 대해 약간의 불편함과 마땅찮은 느낌을 갖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신비롭고 축복에 찬 통찰에 흠뻑 젖어서 자기만의 소굴로 도망치지 않고 지금 여기에서 충만하게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다.

- 의식의 다양한 수준을 거쳐 가는 동안 우리는 삶의 본질에 대한 자신의 이해가 바뀌어가는 것을 발견한다. 이런 변화가 어떤 것인지 살짝 맛보기 위해서 이 과정을 다 거쳐 갔던 존재들의 말을 들어보자. 예컨대 기독교 신비가인 야콥 뵈메 Jakob Böhme는 이렇게 말한다.

"외부 세계는 겉모습에 치중하는 삶을 즐기는 자에게는 고통의 골짜기가 아니다. 더 높은 삶의 경지를 아는 사람들만이 겉거죽의 삶을 고통스럽게 여긴다. 동물은 동물의 삶을 즐기고, 지성인은 지성의 세계를 즐긴다. 그러나 거듭남을 겪은 자는 지상의 존재로서의 자신을 마치 짐처럼 감옥처럼 여긴다."

- 카비르 Kabir는 이렇게 말한다.

"춤은 더 이상 내 일이 아니다. 마음은 더 이상 노래 부르지 않는다. 욕망의 항아리는 깨지고 욕망의 저고리도 해졌다. 내가 맡은 역은 실컷 연기했으니 더 할 것이 없다. 친구와 동료들도 모두 날 떠났다. 이제 나에게는 신의 이름밖에 남은 것이 없다."

- 토머스 머튼 Thomas Merton은 말한다.

"벼락은 동에서 서로 번쩍여온 지평선을 밝히며 제멋대로 내리 꽂힌다. 그와 마찬가지로 신의 즉각적인 해방도 인간 영혼 깊숙한 곳에서 번쩍이며 일어나, 사람을 깨어나게 한다. 바로 그 순간, 그는 여정의 한가운데에 서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이미 종착지에 다다랐다. 그는 비록 시간 속을 여행하고 있으나 한 순간 영원에 눈을 뜬 것이다." 

- 이 모두가 인간의식 속에 천부적으로 내재되어 있는 '가능성'에 관한 말들이다. 그중 어떤 것은 지금의 당신으로서는 듣기 거북할 수도 있지만, <기타>를 공부하다 보면 당신도 사물을 바라보는 관점을 바꾸기 시작할지도 모른다. 

- P.D. 우스펜스키가 흥미로운 말을 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가장 어려운 것은 자신이 정말 '새로운 사실', 곧 이전에 결코 듣지 못했던 사실을 들었음을 깨닫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이 들은 것을 자신의 습관적인 언어로 옮겨놓는 짓을 끊임없이 하고 있다. 그들은 새로운 사실이 있다는 것을 더 이상 믿지 않는다."

그는 우리가 뭔가 새로운 것을 만날 때마다 거기다 대뜸 과거의 고정관념과 집착을 갖다 붙이지 않고 고스란히 마음을 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상기시켜 준다.

- 나는 당신이 뭔가 '새로운' 것을 듣게 될 가능성에 마음을 열고서 <기타>의 탐사작업에 임하기를 바란다. 새로운 관점에, 삶을 인식하고 살아가는 방법에 대한 새로운 이해에 마음을 열어두라. 기억하라. 기타는 크리슈나이다. 그리고 크리슈나는 우리 자신의 내적 존재의 현현이다. 그러니 마음을 열고 <기타>를 공부한다는 것은 곧 우리의 깊은 자아를 향해 자신을 여는 하나의 심오한 방법이다.

- 지금부터 하려는 이야기는 당신이 <바가바드 기타>를 최소한 대충 알고 있다는 가정하에 하는 것이다. 그러니 아직 <기타>를 읽어본 적이 없다면 먼저 읽어보기 바란다. 서너 시간밖에 걸리지 않을 것이다. 처음에는 그저 재미있는 이야기로 읽어봐도 좋다. 크리슈나는 누구이고 아르주나는 또 누구인가? 그들은 어쩌다가 싸움터 한가운데에서 전차에 앉은 채 고민에 빠져 있게 되었을까?

-

그리고 앞으로 <기타>를 두 번 더 읽을 작정을 하기를 권한다. 우리가 1장에서 아르주나가 빠져 있는 갈등을 다 논하고, 그 내용에 충분히 공감하고 그가 처해 있는 곤경이 무엇인지를 이해한 후에 그것을 다시 읽어보라. 자신이 아르주나라고 생각하고 읽어보라. 그러니까 당신 자신의 갈등은 무엇인지, 자신의 영적 문제는 무엇인지를 파악한 후에 그것을 뼈대로 삼아 당신 자신의 싸움터에서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크리슈나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라.

- 그다음에 준비가 되면 <기타>를 세 번째로 읽어보기 바란다. 이번에는 크리슈나가 되어서 읽어 보라. 왜냐하면 사실 크리슈나는 곧 당신의 본모습이기 때문이다.

- 이 마지막 읽기가 당신에게 흥미로운 문젯거리를 던져줄지도 모른다. 당신이 크리슈나라면, 당신은 곧 <기타>이다. 그런데 <기타>를 읽다가 어느 구절엔가에서는 '나라면 이런 말은 절대로 안 해!'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하지만 실제로 <기타>는 그렇게 말하고 있고, 우리는 크리슈나의 관점이 되기로 했다. 어쩔 텐가?

- 바로 이런 대목에서 깊은 음미와 명상이 필요하다. 조용한 곳에 앉아서 그 구절을 쓰여 있는 그대로, 그리고 당신이 이래야 한다고 생각하는 그대로, 양쪽 다 받아들이라. 그런 양쪽 생각을 품고 앉아 있어 보라. 그때 일어나는 일이 당신의 현주소를 정확히 보여줄 것이다. 당신은 이렇게 생각한다.

'나라면 그런 말 절대로 안 해!'

옳거니! 바로 그거다. 그런 말을 절대로 안 하는 그 '나'는 '누구'인가? 당신은 무엇을 붙들고 있는가? 이런 구절들이 당신에게 가장 풍부한 깨우침을 가져다줄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당신이 무엇을 붙들고 매달려 있는지를, 당신의 은밀한 집착이 무엇인지를 보여줄 것이기 때문이다.

- 세 번째 읽을 때에는 깊이 음미하면서 명상을 하라. 이런 주제를 놓고 탐구할 때면 으레 이런 권면을 한다. 이 책은 워크숍을 바탕으로 했기 때문에, 명상과 같은 수행을 권면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명상 수행은 책 속의 활자를 넘어서서 <기타>의 가르침이 삶 속에 어떻게 작용하는지 당신의 이해를 더 깊고 풍부하게 해 줄 것이다.

- 일기를 쓰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이런 경험을 통과한다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탐사여행을 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므로, 이 책을 자기 나름대로 읽어가는 동안 일기를 쓰고 싶어질 수도 있다. 여행을 할 때는 당신에게 일어나는 멋진 일들을 다 기록하지 않는가? 그런 것들을 기록해 놓는다는 것은 꽤나 유용한 일이다. 기록으로 남겨놓으면, 적어놓지 않으면 지나쳐버리고 잊혀져버릴 변화를 다시 돌아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당신을 당혹스럽게 하는 것이 몇 주 후에는 명쾌하게 보일 수도 있다. 그리고 그런 일이야말로 주목해야 할 흥미로운 사건이다. 혹은, 책을 읽으면서 당신이 소중히 지켜온 믿음 체계를 의심하게 될 수도 있는데, 적어놓지 않으면 에고는 자신의 일관성을 유지하기 위해 당신이 품은 의심에 대해서는 선택적으로 잊어버릴 수도 있다. 일기가 유용한 도구가 될 수 있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 (나의 구루인 마하라지는 언제나 일기를 썼다. 그는 날마다 방에 들어가서 두 쪽의 일기를 썼다. 구루가 쓰는 일기는 어떤 내용일까? 그는 도대체 일기에 무엇을 쓸까? 궁금증이 일지 않는가? '오늘 나는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그들을 어루만져 주었다. 오늘 오후에는 크리슈나와 라마와 예수와 함께 지냈다. 예수는 요즈음 훨씬 더 좋아 보인다.' 뭐 이런 식으로 쓸까? 마하라지가 몸을 떠난 후, 우리는 마침내 그의 일기를 볼 수 있었다. 매일의 날짜와 그날 마하라지가 머물렀던 장소가 적힌 줄 아래로는 그날 일어난 중요한 일을 적을 수 있는 두 쪽의 여백이 있었다. 거기에는 '람 Ram, 람, 람, 람, 람, 람, 람, 람, 람, 람, 람, 람, 람...' 두 쪽에 걸쳐 계속 '람'만이 가득 채워져 있었다. 날마다 기록할만한 내용이 신의 이름뿐이었던 것일까. 그리고 그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 일기를 적기로 마음먹었다면 당장 시작하라 일단 시작한 다음에는 빼먹지 말고 계속해야 한다. 그렇게 하다 보면 그것이 애초에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도움이 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기타>의 인상적인 구절에 대한 생각을 적어도 좋고 기타의 가르침을 자기 인생에 착용해 본 예를 적어두어도 좋다. 인용구나 그림을 넣을 수도 있다.
그러니 일기 쓰기는 이 여행길의 동참을 더욱 뜻깊은 것으로 만들어줄 방법으로서 고려해 볼 만하다. 나아가는 동안에 나는 또 다른 여러 가지 연습거리를 권하게 될 것이다. 당신은 자신에게 적당하다고 여겨지는 깊이만큼만 들어오면 된다. 이 책을 읽고 기타와 한두 사상에 대한 약간의 사색거리를 얻을 수도 있고, 자신의 것으로 소화시켜 다른 방식으로 활용할 수도 있다. 이 책이 말하는 것들을 따라가면서 하나의 영적 수행으로서 일기를 쓰고 푸자(run, 예배의식)를 하고 명상 수행을 하는 등 전 과정에 전적으로 빠져들 수도 있다. 이런 것들은 모두가 여행 속의 작은 보너스 코스와도 같다. 마음 내키는 대로 그것을 다 취할 수도 있고 몇 가지만 고를 수도 있다. 지금의 당신에게 무엇이 적당한 것인지는 당신이 직감에 따라 결정할 문제이다.

- <기타>를 읽어 가는 동안, 우리는 그것이 매우 흥미로운 구조로 짜여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정말 필요한 말들은 첫머리의 두 장 속에 거의 다 들어 있다. 그다음에는, 그것이 계속 반복된다. 하지만 더욱더 절묘하고 세밀하게 되풀이됨으로써 책 전체가 하나의 나선과도 같이 진행된다. <기타>가 펼쳐지고, 우리의 몰입이 깊어짐에 따라, 우리는 그 주제들을 다양한 관점에서 살펴보게 될 것이다.

- 이 책은 아이디어들이 새로운 맥락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고, 연습과 수행법들이 서로를 받쳐주고 보완해 가는 방식으로 펼쳐져 간다. 전체 과정이 진행되면서 계속 새로운 관점과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해 줄 것이고 그것들 하나하나가 우리로 하여금 좀 더 깊이 들어가도록, 좀 더 깨어나도록 우리를 부르는 초대장이 될 것이다.
그리고 이 책이 정말 효과가 있다면, 이 책을 읽고 난 후 당신은 지금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과는 사뭇 다른 사람이 되어 있을 것이다.

 

- 본론으로 들어가기에 앞서, <바가바드 기타>를 그 일부분으로 포함하고 있는 마하바라타 속에서 <바가바드 기타>는 어떤 위치에 놓여 있는지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마하바라타>는 인도가 자랑하는 두 편의 대서사시 중 하나이다(다른 하나는 <라마야나>다). <마하바라타>는 방대한 책으로, 그 분량이 6천 쪽에 육박하고, 세계에서 가장 긴 문학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일리아드와 오디세이>를 합한 것보다 일곱 배나 길고, 하나뿐인 완역 영문판은 모두 열두 권에 달한다. <마하바라타>는 기원전 500년에서 200년 사이에 쓰인 것으로 추정되고 있고, 인도 고대사 중의 한 기간을 서술하고 있다. 전해지기로는 <마하바라타>의 배경을 이루는 쿠루크셰트라 전투가 기원전 3102년에 일어났다고 하지만, 역사가들은 이 사건이 일어난 시기를 기원전 1400년경으로 추정한다.


- 한 차원에서 보면 <마하바라타>는 한 왕국의 역사에 관한 기술이지만, 다른 차원에서 본다면 그것은 인간의 모든 상호관계와 거기에 얽히고설킨 인간적 감정들과 동기에 관한 비범한 상징적 통찰이다. 이것은 드라마의 형식을 빌린 놀라운 심리서이며 매우 용의주도한 관점에서 쓰인 책이다. 이는, 그 낭만적이고 통속적인 줄거리를 즐기며 읽어 내려갈 수도 있지만 그 속의 더 깊은 상징적 의미를 발견해 가며 읽어갈 수도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한 <마하바라타>의 중심 대목에서, 왕국의 두 가문 간의 절정에 이른 전투의 전야에 크리슈나와 아르주나가 대화를 주고받는데, 그 내용이 <바가바드 기타>, 곧 '신의 노래'라고 불린다.

- <마하바라타>는 북인도의 바라트 Bharat 왕국에 관한 이야기이다. 바라트 왕국의 왕에게는 드리타라슈트라 Dhritarashtra와 판두 Pandu라는 두 아들이 있었다. 드리타라슈트라는 부왕이 죽으면 왕위를 이어야 할 장남이었으나 날 때부터 맹인이었기 때문에 맹인을 왕위에 모시지 않는 그 시대의 관습에 따라 판두가 대신 왕이 되어 왕국을 다스렸다. 드리타라슈트라가 맹인이었다는 사실이 이 이야기 속에서 무엇을 상징하는가 하는 것은, 수백 년 동안 경전 주석가들이 논란을 일삼아왔던 주제이다. 어떤 이들은 그가 앞을 못 보는 것은 아들 두료다나 Duyodhana에 대한 애착을 상징하는 것으로서, 그것이 그로 하여금 다르마 dharma, 곧 진리, 혹은 높은 지혜에 눈이 멀게 한 것이라고 말한다. 또 어떤 이들은 앞을 못 본다는 것은 인간 조건의 본질을 상징하는 것으로서, 높은 차원의 지혜를 지니지 못한 것을 나타낸다고 말한다. 상징성은 깊고 풍부하다.

- 왕인 동생 판두는 쿤티 Kunti와 마드리 Madri라는 두 명의 아내를 가졌고 그들 사이에서 다섯 명의 아들을 낳았다. 유디슈트라 Yuddhisthira가 장남이었다. (이들은 선한 사람들로 바뀌게 되는데, '두의 아들들' 곧 판다바 Pandavas들이다.) 유디슈트라는 다르마(진리)의 화신과도 같은 인간이다. 그에게는 딱 한 가지 오점이 있었는데, 노름을 즐긴다는 것이었다. (그는 주사위 놀이를 무척 좋아했다.) 그리고 앞으로 보게 되겠지만, 그것이 결국은 쿠루크셰트라 전투에 이르는 곤경 속으로 독자를 끌고 간다. 판두의 둘째 아들인 비마 Bhima는 강인하나 성격이 저돌적이고 무모하다. 셋째 아들인 아르주나는 순수하고 고상하며 의롭고 영웅적이다. 그가 바로 <기타> 속 우리의 주인공이다. 그리고 마드리가 낳은 쌍둥이 동생 둘이 있다. 

- 장남이자 맹인인 드리타라슈트라는 한 명의 아내로부터 백 명의 자식을 낳았다. 그렇다. '백 명의 자녀'... 하지만 <마하바라타>에서는 이런 괴상한 일도 허용해야 한다. (구약성서에도 이런 비슷한 일이 나온다. 120살 먹은 노인네가 자녀를 낳는다는 둥... 그러니 그냥 옛날은 지금과는 달랐다고 해두자.) 드리타라슈트라의 아내인 간다리 Gandhari는 남편에게 지극히 헌신적이었다. 그녀는 남편이 앞을 보지 못하는데 자기만 보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니라며 평생 눈을 가리고 살았다. 이 얼마나 '헌신적인' 아내인가!

- 그런데 판두는 왕위에 오른 지 몇 해 지나지 않아 실수로 한 브라민(Brahmin, 카스트 중 가장 높은 브라만 계급의 사람)을 죽이게 된다. 브라민을 죽인다는 것은 아무리 실수라고 해도 '매우' 불경한 일이어서, 판두는 그것을 속죄하기 위해 타파시야(tapasya, 고행)를 행하려고 드리타라슈트라에게 왕국을 맡겨놓고 숲으로 들어간다. 몇 해가 지나도록 숲에서 고행을 하던 판두는 결국 저주를 받아 죽고 만다. 그리하여 드리타라슈트라는 계속해서 바라트 왕국을 다스리게 된다. 드리타라슈트라의 장남인 두료다나는 판두의 장남인 유디슈트라가 무럭무럭 자라고 있는 모습을 볼 때마다 질투심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 그리하여 판다바들은 다시 밀림 속으로 돌아갔다. 그들은 12년을 밀림 속에서 살았고 13년째는 몸을 숨기기 위해 이웃 왕국에 가서 왕의 시종이 되었다. 두료다나는 그들을 찾아내기 위해 온갖 수단을 다 동원했지만 결국 실패했다. 13년이 지난 후 바라트 왕국으로 돌아온 그들은 두료다나 앞에 나타나서 말했다. "자, 우리는 해냈다. 이제 왕국을 돌려다오."
두료다나가 말했다. "그건 곤란하지. 왕국은 내 거야. 너희들에겐 바늘하나 꽂을 땅도 내줄 수가 없어."

- 이것이 바야흐로 <바가바드 기타> 속의 사건들이 일어나려는 시점까지의 상황이다. 두료다나는 판다바들을 막다른 골목까지 밀어붙여 결국 싸움에 나설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그들의 왕국에 불의가 판을 쳤다. 아르주나와 그의 형제들은 속임수와 거짓에 놀아났다. 진실은 발아래 짓밟혔다. 다르마가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야만 했다. 좋은 편에서 뭔가 선언을 해야만 했다. 이제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전쟁뿐이었다.

- 이야기의 이 대목에서 흥미로운 일이 일어난다. 아르주나와 두료다나가 몸을 입고 내려온 신인 크리슈나에게로 가서 서로 자기를 도와달라고 청한 것이다. 크리슈나는 솔로몬 같은 지혜를 발휘하여 이렇게 말한다. "좋다. 너희가 선택해라. 둘 중 한 사람은 나의 모든 무기와 군대를 가질 수 있다. 다른 한 사람은 나를 가질 수 있지만 대신 무기도, 군대도 없다."
아르주나는 곧바로 대답한다. "그럼 저는 당신을 가지겠습니다. 군대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아르주나의 마음은 신께로 향해 있었다. "제가 원하는 것은 오로지 신께서 제 편에 서주시는 것입니다."

- 두료다나는 그 말을 듣고 '매우 기뻤다!' 속물이고 무지한 두료다나는 말했다. "아주 잘됐군! 썩 맘에 들어. 내가 모든 군대와 힘을 차지하리라."

그리하여 나쁜 편은 엄청난 군대를 차지하고 좋은 편은 그에 비하면 '보잘것없는' 힘을 차지했다. 게다가 신이라고는 해도 크리슈나는 단지 아르주나의 '전차몰이꾼'에 지나지 않았다. 크리슈나는 활 한 자루조차 지니고 있지 않았다.

- 여기서 크리슈나에 관한 이야기를 좀 더 들어보자. 그는 어떻게 이 싸움판에 등장하게 되었을까? 크리슈나는 바데브 Vasudev와 데바키 Devaki 사이에서 난 아들이었다. 데바키에게는 캄사 Kamsa라는 이름의 마음씨 고약한 오빠가 있었다. 캄사는 왕국을 차지하려고 친아버지를 감옥에 넣을 정도로 못된 아들이었다. 마음씨가 고약하기는 해도 캄사는 가슴 한편에 여동생 데바키를 보살피는 보드라운 부분이 있었던가 보다. 그래서인지 데바키가 바데바와 결혼할 때 그는 큰 잔치를 베풀었고, 잔치가 끝나자 손수 마차를 몰아 그들을 집까지 데려다주겠다고 나섰다. 그런데 가는 길에 갑자기 하늘에서 큰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소리는 캄사에게 이렇게 말했다. "조심해라! 이 부부의 여덟 번째 아들이 너를 죽일 것이다."
캄사는 이 말에 완전히 정신이 나가버렸다. 그는 그 자리에서 데바키와 바데브를 죽이려고 했다. 하지만 그들이 목숨만은 살려달라고 애원하자 결국 마음이 누그러져서 말했다. "좋다. 죽이지는 않겠다. 하지만 지금부터 남은 생을 감옥에서 지내고 아이를 낳자마자 모두 내게 주겠다고 약속해야만 한다."
어쩔 수 있겠는가? 그들은 마지못해 약속했다.

- 그리하여 데비키와 바수데브는 감옥에 갇혔다. 그리고 일곱 명의 아이들을 낳자마자 빼앗겼다. 처음 여섯 명의 아이는 캄사에게 죽었다. 일곱 번째 아이에 이르러서는 사연이 복잡해지지만 여기서는 언급하지 않겠다. 여덟 번째 아이가 태어날 즈음, 캄사는 지쳐 있었다. 그는 간수를 보강하고 바데브와 데바키를 족쇄로 묶어놓았다. 그런데 해산이 다가오자 간수들은 갑자기 졸음에 빠져 모두 곯아떨어져 버렸다. 그때 아기가 태어났다. 아기는(물론 그것은 크리슈나이다) 엄마의 배에서 나와 이렇게 말했다. "나를 고쿨에 있는 난다 Nanda네 집으로 데려가세요. 거기 가면 여자아이가 있을 거예요. 나를 그 여자아이와 바꿔주세요."
비데브가 말했다. "내가 어떻게 너를 고쿨로 데려갈 수 있겠니? 문도 잠겨 있고 나는 족쇄에 붙들려 있는데."

그 말이 끝나자마자 바데브의 족쇄가 떨어져 나가고 감옥 문이 스르르 열렸다. 바데브는 그것이야말로 분명한 계시라고 생각하고, 아기 크리슈나를 안고 고쿨로 가서 여자아이와 바꿔놓았다. 간수가 잠에서 깨어나서 아기를 발견하고는 캄사에게 알렸다. 사악한 오빠는 감옥으로 달려와서 그 여자아이를 여동생의 아이로 생각하고는 발을 집어 들어 바닥에다 내동댕이치려고 했다. 하지만 그가 아기의 발을 잡는 순간 아기는 손에서 빠져나가 하늘로 날아올랐다. 아기가 말했다. "너를 죽일 수도 있었지만, 네가 내 발을 만졌기 때문에 비록 그것이 나를 죽이려고 만진 것이라고 해도 나를 숭배하는 행위로 간주하고 이번만은 봐준다." 그 말을 남기고 아기는 하늘로 올라가 버렸다.

- 그리하여 아기 고빈다(Govinda, 이것이 크리슈나의 어릴 적 이름이다)는 고쿨에 있는 어떤 집에 남겨지게 되었다. 그는 난다의 아내이자 평범한 시골 아낙인 야소다 Yasoda의 손에 길러졌다. 고빈다가 자라는 동안, 온갖 기적적인 일들이 그를 둘러싸고 일어났다. 하지만 사람들은 모두 그것을 대수롭지 않은 착각으로 여겼다. 자기들의 마을에 신의 화신이 내려와 계시다는 것을 누군들 믿을 수 있었겠는가!

- 하루는 누군가가 크리슈나의 어머니에게 와서 말했다. "야소다, 당신의 아들 고빈다가 흙을 먹고 있어요!"
야소다가 말했다. "저런 끔찍해라! 고빈다, 이리 온 입을 벌려라, 어디 보자."

고빈다가 입을 벌렸다. 야소다는 그의 입속을 들여다보았다. 아이의 입속에서 그녀는 온 우주를 보았다. 모든 은하계와 별들과 혹성들, 그리고 작은 지구도 있었다. 그 지구 위에 그녀와 고빈다가 있었다. 야소다는 완전히 넋을 잃어버렸다. 경전은 이렇게 전한다.

"고빈다는 자비심으로써 그녀의 눈을 가려주었다."
얼마나 아름다운 장면인가? 그리하여 그녀는 다시금 자기 앞에 서있는 아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기억을 떨쳐냈다. "이상해라, 뭐가 보였더라. 아니, 아니야! 좀 누워야겠다. 어지러워."

그리고 그다음에 어떻게 되었는지는 당신도 잘 알 것이다.

- 고빈다가 아직도 요람 속의 작은 아기였을 때, 악마가 그를 죽이러 왔다. 고빈다가 그 악마를 얼마나 세게 후려쳤던지, 악마는 뱅글뱅글 돌면서 공중을 날다가 죽어버렸다. 마을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다. "아기가 다치지 않도록 태풍이 와서 악마를 날려 보내버렸으니 얼마나 다행한 일이야?"

크리슈나가 강 속에 사는 거대한 독사를 죽였을 때도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다. "독사가 크리슈나를 물기 전에 물에 빠져서 죽어버렸으니 정말 천만다행이야."

진짜로 일어난 일은 아무도 사실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이 본 것을 있는 그대로 믿지 않고 달리 해석을 붙이곤 했다. (이런 것들이 어쩐지 다 친숙하게 느껴지지 않는가?)

- 고쿨 마을 사람들은 한결같이 기적을 부인했지만, 크리슈나의 매력에 푹 빠져드는 것만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는 소년으로 자라서 목동이 되었다. 그는 장난꾸러기에다 대단한 악동이어서, 버터를 훔치고 마을 여자들을 장난질로 놀려댔다. 하지만 야단맞는 법은 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너무나 매력적이고 멋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피리도 멋들어지게 불었다!

- 우리가 여호와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것 또한 신에 관한 어떤 이야기임을 이해해야 한다. 크리슈나는 신의 속성의 한 표현이다. 여호와가 신의 정의로운 얼굴이라면, 크리슈나는 신의 사랑스럽고 장난기 넘치고 악동 같은 측면을 보여준다. 그와 함께 있으면 너무나 즐거웠으므로 사람들은 누구나 그와 놀고 싶어 했다. 다른 목동들도 그와 놀기만을 기다렸고, 젖 짜는 처녀들도 그에게 푹 빠져 그가 가는 곳을 졸졸 따라다녔다. 

 

- 우리가 아는 한, 크리슈나야말로 가장 명랑 유쾌한 화신일 것이다. 그는 언제나 웃고 장난치고 쉴 새 없이 뛰놀며 열정을 발산했다. 그는 따스하게 빛나는 생명 그 자체였다. 이 얼마나 놀라운 신의 이미지인가! 그리하여 세월이 흐르자, 기적의 소문이 캄사의 귀에까지 흘러들었다. 크리슈나가 누구인지를 깨달은 캄사는 음모를 꾸몄다. 그는 큰 잔치를 열어 크리슈나를 초대했다. 잔치가 무르익자 열두 살의 어린 크리슈나에게 거구의 험상궂은 씨름꾼이 시합 내기를 걸어왔다. 크리슈나는 물론 그에 응했고, 힘도 들이지 않고 씨름꾼을 죽여버렸다. 그리고 그는 단상에 뛰어 올라가서 숙부의 멱살을 잡고 말했다. "너도 이제 죽을 때가 왔다!"

크리슈나는 캄사를 땅바닥에 내동댕이쳐서 죽여버렸다. 그리고 감사의 아버지를 감옥에서 풀어주고, 다시 왕위에 앉혔다.

- 여기서 크리슈나는 마침내 본색을 드러낸다. 그는 더 이상 '온갖 장난을 일삼던 길거리의 꼬마'가 아니었다. 그는 그 일 이후로 고쿨로 돌아가지 않았다. 사실, 그는 그때 완전히 변신한 것이다. 그는 드와르카 Dwarka라는 이름의 도성을 건설하고, 거기서 살았다. 그로부터 그의 역할은 일종의 킹메이커, 즉 사회 지도자들의 스승이자 후견인이 되었다. 그는 외교술과 치국책을 가르쳤지만, 그 자신은 완벽한 요기로 살았다.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나눠주고 모든 사람을 도우면서 살았다. 그러는 가운데 판다바들도 만나게 되었던 것이다.

- 자, 이제 우리는 전장에서 크리슈나가 아르주나에게 이야기하는 장면에 이르렀다. 하지만 크리슈나의 이야기의 결말을 잠깐 들어보자. 이 쿠루크셰트라 전투가 끝난 뒤, 쿠라바의 백 명의 아들을 포함해서 사실상 양편 모두가 전멸했을 때, 이 아들들의 어머니인 간다리가 눈물을 쏟으며 전장을 걷다가 크리슈나를 만난다.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이 모든 일들이 일어나는 동안 너는 그것을 곁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네가 이 살육이 일어나게 했다. 이젠 네 가족들이 죽음을 당할 것이다. 36년 후면 너도 전장에서 살육당할 것이다."

- 이에 대한 크리슈나의 대답은 자못 흥미롭다. 그는 간다리에게 절을 하고 이렇게 말한다. "어머니, 고맙습니다. 빠져나갈 길을 찾도록 도와주셔서."

달리 말하자면, 크리슈나는 간다리의 저주를 자신이 화신의 삶을 마칠 수 있도록 도와줄 수단으로 보고 그것을 오히려 축복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기타>는 이런 식으로 우리를 비약하게 만든다. "아이구 저런, 끔찍하군", "아냐, 너무 멋져!" (이 책은 이런 식의 반전을 끊임없이 일으켜서 만사가 처음 생각과는 같지 않음을 상기시켜주곤 한다.)

- 마침내 간다리의 저주가 실현된다. 크리슈나 전장에서 휴식을 취하려고 눕는 순간, 그를 사슴으로 오인한 사냥꾼이 그를 죽이게 된다. 하지만 다른 차원에서 보면, 그 일은 크리슈나가 몸을 떠나기 위해 필요했던 하나의 방편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크리슈나는 죽으면서 사냥꾼에게 감사하고 그를 축복해 준다. 사냥꾼은 그 즉시 천국으로 갔다. 

- 이리하여 우리는 등장인물 중 또 한 명의 주인공인 아르주나에게로 돌아온다. 우리는 그가 형제들과 함께 공훈을 쌓는 모습을 이미 보았다. 아르주나는 크샤트리아(네 카스트 계급 중 전사)이다. 그는 왕자이고 순수하고 착한 아들이다. 그는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완벽하게 해낸다. 그는 매우 도덕심이 깊다. 그는 총명하지만 근본적으로 매우 실질적인 사람이다. 그는 철학자가 아니다. 행동하는 인간이다. 이것이 아르주나를 우리 사회를 적절히 반영하는 인물로 만들어준다. 우리 사회는 활동적인 라자스 문화이다. 

- 힌두 철학에서 사람의 성격이나 자연현상 등 만물에서 발견할 수 있는 세 가지 기본적 성질을 구나(gunas)라고 한다. 라자스(rajas) 구나는 욕망을 향한 충동과 활동성을, 사트바(sattva) 구나는 순수하고 균형 잡히고 질서 있는 성질을, 타마스(tamas) 구나는 부정적이고 무기력하고 자기 파괴적인 성질을 가리킨다.

- 전쟁 상황에서 아르주나와 두료다나는 사뭇 대비되는 연구대상이다. 두료다나는 자신의 에고로 한껏 부풀어 있다. 그가 하는 일이라고는 오만과 건방을 더욱 높이 쌓아 올리는 일뿐이다. 일이 험해질수록 그는 더욱 오만해진다. 그는 결국 장로들에게 명령을 내리고 심지어는 스승조차 호령하고 그 누구에게도 존경심을 보여주지 않는다. 이와는 반대로 아르주나는 똑같은 위기 속에서 정반대의 태도를 취한다. 그는 신을 향한다. 아르주나는 원칙에 충실하고 좋은 카르마를 갖고 있으므로 다음 단계로 나아갈 준비가 되어 있다. 그는 더 높은 지혜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는 것이다.

- <기타>의 첫 번째 장에 펼쳐지는 아르주나의 곤경을 얼마나 의미심장하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기타>의 나머지 부분이 갖는 중요성도 결정되기 때문에, 우리는 이 갈등이 드러내주는 다양한 차원의 의미들을 유심히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먼저, <기타>가 그 장면을 묘사하는 대목을 보자.
크리슈나가 말했다. "보라, 아르주나 쿠루의 군대가 이 전장에 집결해 있는 모습을."

아르주나는 포진해 있는 양편 군대 속에서 아버지와 할아버지와 아들과 손자와 아버지의 아내들과 숙부와 스승과 형제와 친구와 동료들을 보았다. 혈족들이 원수가 되어 얼굴을 맞대고 대치해 있는 그 광경을 보자, 아르주나는 슬픔과 절망에 사로잡혀 가슴이 무너질 것 같아서 이렇게 말했다. "크리슈나, 나의 모든 혈족들이 이 전장에 나와 있는 모습을 보자니 사지에서 기운이 빠져나가 주저앉고 입술은 말라서 바짝바짝 타고 온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리고 공포에 털이 곤두섭니다. 크리슈나, 불길한 예감이 듭니다."

- 첫 번째 차원에서 볼 때, 드러나는 곤경은 사회적 차원의 것이다. 아르주나는 적군을 바라보다가 그것이 사실은 아군임을 깨달았다. 그는 인간의 얼굴을 한 원수를 발견했다. 그가 무찔러야 할 적은 기꺼이 파멸시킬 수 있는 추상적인 악이 아니라 다름 아닌 자신의 친구들이요, 가족들이었다. 여기 전쟁터에 나가려는 사람이 있다. 예컨대 베트남이라고 해두자. 그는 미국을 위한 '성전'에 참가할 것이다. 그는 자신과 싸울 자들의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보다가, 문득 그들은 '그들'이 아니라 '우리'라는 것을 깨닫는다. 갑자기 내 나라의 이익에 매여 있던 마음이 다른 것, 곧 인류애라는 도덕성에 동화되려는 마음과 갈등을 일으키게 된다. 실제로 월남전에서 우리가 부딪혀야 했던 것이 바로 이 문제였다. 도덕성과 사회적 의무 사이의 갈등 어느 지점에서 사람들은 '그들'이 아니라 '우리'가 되는가?  

- 일단 '우리'가 되면 사람들이 서로를 대하는 방식은 즉각 바뀐다. 그러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게다가 아르주나의 경우에는 실제로 모두가 친족이다. 그가 싸울 사람들은 모두가 친척이고 스승이고 친구들이다. 아르주나는 크샤트리아이지만, 자신이 알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죽이고 다니기를 원하지는 않는다. 

- 아르주나가 가족과 싸우기를 꺼리는 데는 또 다른 측면이 있다. 양편의 모든 사람들에 대한 애정 말고도, 그는 그 상황의 사회적 맥락을 알고 있다. 그는 그 싸움이 가족의 신뢰를 무너뜨릴 것을 안다. 그가 가족에게 애착을 갖는 이유는 애정 때문만이 아니라 사회적 유대 때문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는 자신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가족 간의 애정뿐만 아니라 신뢰까지도 저버릴 것을 강요받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아르주나의 문화에서 매우 중요한 가치와 그의 깊숙한 자아상의 일부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일이다. 그는 이 모든 것에 등을 돌리고 전혀 다른 동기로부터 행위하기를 요구받고 있는 것이다. 달리 말해, 그는 도덕책을 집어던지고 크리슈나의 명령에 의지해야만 하는 것이다. 
이 같은 수준의 행동 변화는 내면의 뿌리 깊은 변화가 있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여태껏 의심하거나 반대할 꿈조차 꾸지 않았던 어떤 것을 정면으로 부정하게 만드는 깊고도 심오한 그런 변화가 선행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의 행동을 결정하는 바로 그 근원이 바뀌지 않으면 안 된다.

- 어느 겨울날 밤, 나는 티모시 리어리의 집에서 생전 처음으로 실로시빈(멕시코산 버섯에서 추출한 LSD 비슷한 환각제)을 복용하고 몇 블록을 걸어서 내가 기거하고 있던 부모님의 집으로 돌아왔다. 새벽 4시였다. 눈보라가 심하게 몰아치고 있었는데, 나는 집 주변 보도의 눈을 치우기로 마음먹었다. 내가 살아 있음을 새삼스럽게 느끼며 기운이 넘치던 차였는데, 마침 눈이 퍼붓고 있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눈을 치우리라. 그래서 눈을 치우고 있을 때, 2층 방 창문에 부모님의 얼굴이 나타났다. 그들은 창문을 열어젖히고 소리쳤다. "들어와, 이 멍청아! 한밤중에 눈을 치우는 놈이 어딨냐?"

- 권위의 목소리가 이렇게 명령하고 있었다. '이것이 규칙이다. 정해진 대로 해라.' 나는 언제나 그 목소리를 따랐다. 그때까지 나는 평생토록 정말 모범인간이었다. 내가 하버드 대학의 교수가 된 것도 그 덕분이었다. 눈은 언제 치워야 한다는 식으로 '그분들'이 세상에 대해서 말하는 것을 늘 고분고분 따랐던 덕분에 말이다. 하지만 그 순간만은 가슴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느꼈다. '아시나요? 눈은 언제 치우든 상관없다구요. 희한하죠?' 환각제에 취해서, 사회문화적으로 순응된 방식에서 벗어나서, 나는 '괜찮아, 계속해. 눈을 치워!' 하고 외치는 내면의 어느 부분과 직통으로 연결됐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부모님을 쳐다보고 씽긋 웃으며 손을 흔들어주고는 계속해서 눈을 치웠다. 그것이 그 후 몇 년 동안 이어졌던 내 인생 드라마의 서막이었다. 나는 그렇게 문화의 허례허식으로부터 점점 더 멀어져 갔다. 

- 이런 경험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리 낯설지는 않으리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머리가 커가면서 자신이 전통과 문화가 기대하는 가치 속에 갇혀서 살아왔음을 깨닫는다. 머리는 어떤 모양으로 깎고, 학교는 어딜 다니고, 어떤 공부를 하고, 공부를 해서 무얼 하고, 어떤 사람과 결혼하고, 결혼한 다음엔 어떻게 살고, 언제 아이를 낳고, 언제 아이를 낳지 말고, 얼마를 저축하고, 자동차는 얼마짜리를 사고, 텔레비전은 어떤 것을 사고...많은 사람들이 그런 가치관에 반감을 느끼며 갈등했고, 우리는 그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지, 그것이 속을 얼마나 쥐어짜는지를 알고 있다. 이것이 아르주나가 쿠루셰트라의 싸움터에서 맞닥뜨린 상황이며, 우리 자신도 그와 비슷한 경험을 하고 있음을 깨달을 때, 그것은 문득 한층 더 의미 있는 모습으로 다가온다. 그래서 우리는 아르주나의 처지에 공감할 수 있다. 그는 예수의 이런 말을 듣고 있다. "어머니와 형제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나를 따를 수 없다."
이것이 첫 번째 차원에서 바라본 아르주나의 곤경이다.

- 하지만 그것은 첫 번째 차원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시작일 뿐이다. <기타>의 주제는 한갓 도덕률과 사회적 의무 간의 갈등이 아니다. 가족 간의 유대나 문화적 가치관이 깨지는 정도의 문제도 아니다. <기타>의 게임은 그보다 훨씬 더 스케일이 크다. 좀 더 깊은 차원에서 보면, 그것은 그 모든 것 대화 더 높은 의식에 관한 문제이다. 말을 바꾸면, 이것은 깨어나기 게임, 영 Spirit으로 변신하기 게임이다. 사회적 역할을 깨는 것은 시작에 불과하다. 아르주나가 겪어야 할 변화는 그보다 훨씬 더 깊은 차원의 것이다. 

 

- 알다시피, 아르주나가 쿠루크셰트라 전투에 반대하는 논조는 소위 '참한 이기주의'에 초점을 두고 있다. 그는 한 카스트에 속해 있다. 그래서 그는 "카스트의 질서를 망가뜨리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그는 가족의 일원이다. 그래서 그는 "가족을 보호하고 싶다"고 말한다. 달리 말하면, 아르주나의 생각과 주장은 자신의 사회적 역할에 근거를 두고 있고, 그것은 외부의 시선을 의식하는 그의 자아상 모델에 근거해 있다. 그것이 객관적 모델, 생각하는 마음이 갖는 모델이다. 그러나 장차 아르주나에게 요구될 것은 특정한 자아상 모델을 버리는 것뿐만 아니라, 그 모델을 만들어낸 '생각하는 마음'에 대한 의존심 자체를 버리는 것이다.

(주 : 참한 이기주의. enlightened self-interest. '계몽된 이기주의', 단기적으로는 나에게 손해가 되는 것 같은 선한 일이 결국엔 자신한테 이익으로 돌아오게 된다는 관점에서 자기 유익을 추구하는 것.)

- 한 문화가 그 아이들을 사회화시키는 방법은, 외부로부터 가해지는 판단을 최우선으로 여기도록 그들을 세뇌하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가 그 과정의 산물이다.)

 

- 아이들을 사회화시키려면 그들의 마음속에 세 가지 원칙만 심어주면 된다. 첫째, 자신에 대한 정보를 외부로부터 받아들일 것. 둘째, 외부로부터 자신이 받게 될 보상에 대해 기대할 것. 셋째, 내면의 소리가 외부의 권위로부터 오는 소리와 갈등할 때는 내면의 소리를 무시할 것. 이것이 아이들을 사회의 일원으로 키우는 방법이다. 그래서 어머니가 "이것을 해라" 하면, 가슴속에서 마땅하게 느껴지지 않더라도, 그것을 해야 한다. 그것을 잘 해낼 수 있게 되면, 그는 사회에서 '성공한' 사람이 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쓸모없는 사람이 된다.

- 우리가 '네 직관을 믿으라'는 말에 따라 그렇게 하려고 하면, 우리는 이 과정을 거스르기 시작한다. 의식이 깨어나면, 우리는 '외부로부터 내부로'가 아니라, '내면으로부터 외부를 향해' 행동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가 진정으로 추구하는 변화이다. 이 변화는 '참한 이기주의적' 관심이 아니라 깨어난 가슴에서 비롯된 행동을 이끌어낸다.

- 깨어난다는 것은 의식의 흐름을 타고 한 세계로부터 다른 세계로 옮겨가는 것과 같다. 깨어나는 과정에서는, 새로운 세계와 더 깊이 조화되기 위해서는 낡은 세계의 흐름을 거스르지 않으면 안 된다고 느낄 때가 많게 된다. 아르주나가 바로 이런 상황에 처해 있다. 그는 아직도 낡은 가치관, 구태의연한 자아상에 매여 있다. 그것들은 그의 눈앞에 떠오르기 시작하는 새로운 이해와는 대립된다. 하지만 그것들은 깊이 각인되어 있어서 마음대로 쉽게 떨쳐버릴 수가 없다. 

- 이것은 에고에 대해서 누구나 느끼는 문제이다. 에고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에고는 한갓 허상에 지나지 않음을 깨닫는다. 그것은 자신의 우주를 정의하는 생각들의 집합체로서, 우리가 누구이며 나머지 사람들은 누구인지, 그리고 그것들이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에 대한 우리의 생각들이다. 하지만 그런 생각의 패턴들은 마음의 깊은 밑바닥에 각인되어 있어서 의지로써 없앨 수가 없다. 우주에 대한 다음 차원의 인식으로 넘어가려면, 이런 생각들의 거미줄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않으면 안 된다. 거기서 빠져나와야만 한다. 문제는, 이 생각의 거미줄은 사실 애초부터 우리를 그 속에 가둬놓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란 점이다. 그것은 우리를 쉽게 놓아주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영적 여행의 노고를 쏟아부어야 할 곳은 바로 이곳이다. 우리는 이 생각 덩어리들을 벗어나서 발 디딜 곳을 마련해 줄, 즉 생각하는 마음 밖으로 우리를 데려나가 해방시켜 줄 수행법들을 찾아 헤맨다. 

- 예컨대 명상은 우리를 생각으로부터 구출해 주는 좋은 도구이다. 명상은 우리를 가두어둘 생각의 그물을 스스로 끝없이 자아내고 있는 우리의 어리석은 꼬락서니를 확실히 깨닫게 해 준다. 당신이 앉아서 호흡에 집중하고 마음을 가라앉히면서 명상을 하고 있다고 하자. 마음을 가라앉힌다. 마음을 가라앉힌다. 그러다가 갑자기 당신의 내면에서 어떤 일이 일어난다. 평화로운 느낌이나, 어떤 에너지의 움직임을 감지한다. 당신은 '우와! 드디어 뭔가가 일어나고 있다!' 하고 환호한다. 뭔가가 몰려온다. 그런데 그 몰려 들어온 것은, 사실은 당신의 에고이다. 에고는 명상수행 때문에 밀려나 있었다. '들이쉬고 내쉬고, 들이쉬고 내쉬고...' 그저 숨을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동안에는 심리적 작용이나 자아상이 개입할 여지가 별로 없다. ('나는 들이쉬고 내쉬는 걸 잘하고 있다'가 아니라 그저 들이쉬고 내쉬고 있어야 명상을 제대로 하고 있는 것임을 명심하라.) 그러나 내 말을 믿으라. 에고는 매우 끈질기다. 그것은 끝까지 끈질기게 근처를 배회하다가 틈만 보이면 잽싸게 뛰어 들어온다.

- 나의 주된 수행법은 구루크리파 Gurukripa, 곧 스승의 은총에 의지하는 것이다. 그것은 독특한 방식으로 작용하여 관념의 제약을 깨부수고 나를 해방시켜 준다. 마하라지 Maharaji는 나의 합리적 이성을 가차 없이 망가뜨려서 내가 스스로에 대해 지니고 있던 관념들이 깨부숴지게 하는 사건들을 끊임없이 만들어냈다. 말하자면 이런 식이다.

 

- 한 번은 그가 나에게 아르주나와 같은 역할을 맡겼다. 그는 나를 '최고사령관'에 임명했다.

그가 나에게 말했다.

"람 다스! 이제부터 네가 총사령관이다. 이 서양 아이들을 모두 숙소로 돌려보내고 6시까지는 아무도 이곳으로 돌아오지 못하게 해라."

그래, 나는 스승의 분명한 지시를 받았다, 그렇지 않은가? 어렵지 않은 일이다. 나는 모든 사람들을 호텔로 데리고 와서 말했다.

"6시까지는 가지 마시오."

나는 그저 내 임무를 다했을 뿐이었다.

- 하지만 몇몇 사람들은 '람 다스는 지가 뭔데 우리한테 이래라저래라 하는 거야?' 하고 콧방귀를 뀌고는 4시에 아쉬람으로 갔다. 그들이 가자 마하라지는 먹을 것을 대접하고 같이 앉아서 담소하며 사랑을 듬뿍 베풀었다. 나는 나머지 무리를 이끌고 6시에 도착했다. 그러자 마하라지는 방으로 들어가서 문을 닫아버리고는 아무도 만나주지 않았다.

- 다음날 아침, 마하라지는 나를 불러서 이렇게 말했다.

"람 다스, 너는 총사령관이란 말이야, 알아? 어제 너는 4시에 사람들이 오도록 내버려 뒀다. 오늘은 6시까지 아무도 들여보내지 마라!"
그래서 나는 모든 사람들을 돌려보내면서 말했다.

"내가 뭐랬소. 6시까지 가지 말란 말이요!" 

글쎄. 하지만 어제 4시에 갔던 사람들은 오늘도 4시에 다시 가리라고 마음먹고 있었고, 더 많은 사람들이 그들과 합류할 작정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거의 절반의 사람들이 4시에 아쉬람으로 갔다. 마하라지는 그들을 반겨 음식을 대접하고 이야기를 나누며 사랑을 표현해 주었다. 나는 6시에 어제보다 적은 수의 사람들을 이끌고 갔다. 그러자 마하라지는 또다시 방 안으로 들어가 버리고는 아무도 만나주지 않았다. 그는 이런 짓을 계속했다. 그는 나를 형편없이 무시하여 부아가 들끓게 만들었다.

 

-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그의 가장 나이 많은 인도인 제자에게 불평을 늘어놓았다. "마하라지는 정말 나빠요! 공평하지 않아요!"
그러자 제자가 말했다. "그런 말씀은 마하라지께 직접 하시는 편이 나을 것 같군요."
내가 대답했다. "그러지요!"

내 속말이 당신에게도 들리지 않는가? 당신도 덩달아 속이 끓어오를지도 모른다. 갈 데까지 간 것이다. '더 이상 가만있을 수가 없어!'

- 그래서 나는 마하라지의 방으로 갔다. 그는 모포를 둘러쓰고 침상에 앉아 있었다. 그는 나를 물끄러미 보며 말했다. "무슨 일이지? 뭐가 문제지?"
"마하라지, 당신은 제 마음을 아십니다. 뭐가 문젠지 아시잖아요."

그는 내가 내 입으로 털어놓도록 계속 밀어붙였다. "무엇이 문제? 왜 그래?"
결국은 내가 말했다. "그러니까 마하라지, 당신의 처사는 옳지 않습니다."

나는 불만을 조목조목 말했다.

- 나는 말을 마치고 나서 이성적인 사람들과 이야기할 때처럼 물러 앉아서 그의 대꾸를 기다렸다. 마하라지는 잠시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그는 허리를 숙여 내 수염을 잡아당기면서 말했다. "람 다스가 화가 났구나!"

그러고는 껄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실컷 웃고 나서는 물러앉더니, 마치 '자, 내가 대꾸를 했으니 이젠 네 차례다' 하고 말하기나 하듯이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 나는 난감해졌다. 나는 '옳음'에 대한 나만의 관념을 버리든가, 스승을 버리든가 해야 했다. 그는 나를 이런 식으로 마구 밀어붙였다.

어쩔래, 아가야. 이렇게 말하고 떠날 테냐? '당신이 내가 바라는 방식으로 행동하지 않는다면 난 그렇게 행동해 줄 구루를 찾아보아야겠어. 난 내가 바라는 신의 이상에 걸맞게 행동하는 구루를 찾아 나설 거야.'

- 난 단지 '이성적인' 짓을 요구했을 뿐이다. 그건 그도 알겠지. 내가 터무니없이 군 것도 아니다. 이상한 것은 그다. 그런데도 그는 '눈도 깜짝하지 않는다!'

 

- 그래서 나는 그것을 잠시 생각해 보다가 진짜 문제가 무엇인지를 깨달았다. 그래서 나는 떠나지 않고 머물렀다.
아르주나와 마찬가지로, 그 순간 나는 나의 관념에 들어맞지 않은 자신의 모습을 직면했던 것이다. 마하라지와 함께하는 상황 속에서, 나는 '이성적인 행동을 추구하는 사람'인 나의 자아상을 버려야만 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했을 때, 내 에고의 일부가 부서졌다.

- 아르주나는 이제 자신을 '친척을 상대로 전쟁을 하지 않는 사람'으로 보기를 포기해야 했다. 그는 자신의 행동방식의 바탕이 되었던 전체 시스템을 완전히 포기해야 했다. 가족과 카스트를 보호한다는 자신의 역할모델을 포기해야 했다. 자신을 규정하는 모든 방식을 바꿔야만 했다. 그렇게 하면 그의 에고가 부서져서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었다.

- 에고의 틀을 구성하고 있는 자기규정들을 스스로 들여다보기 시작하면, 거기에는 강도의 차이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어떤 모델은 다른 것보다 훨씬 더 '나'로서 친밀하게 느껴진다. 그래서 그것들을 모두 버려야만 할 경우, 다른 것보다 상대적으로 버리기가 힘들다. 예컨대 부나 명예 따위는 비교적 쉽게 버릴 수 있을 것 같다. 가족이나 사회의 인정을 포기하는 일도 가능할 것 같다. 아르주나가 당면해 있는 그런 것들 말이다. 하지만 한 발짝 더 나아가, 즐거움을 포기하는 것은 어떨까? 당신은 그럴 준비가 되어 있는가? 즐거움? 그러니까, 분리된 개체로서의 자기 자신을 위해 최대한의 즐거움을 얻는 것, 이것이야말로 이 모든 게임의 목적이 아닌가? 그런데 속에서 어떤 변화가 생기는 것을 감지한다. 즐거움을 단지 또 하나의 다른 경험으로 보는 무언가와 자신을 동일시하게 되는 변화가 생겨난 것이다. 그것은 무척 두려운 순간이 될 수 있다.

- 깨어남의 과정에서, 당신은 우주에 대해 생각하는 당신의 '낱낱의' 습관적 방식들을 붙들고 씨름하게 된다. 이 씨름은 가장 깊은 부분까지 이루어져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들 하나하나가 당신이 동일시하는 무수한 자아상 속에다 당신을 가두어놓기 때문이다. 에고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정말 부지런히 깨달음을 향해 정진하고 있는 사람이야, 그렇지 않아?' 자신이 죽게 되는 최후의 순간까지도, 에고는 언제나 거기 숨어서 다음 카드를 꺼낼 준비를 하고 있다. 자아의 마지막 흔적까지 사라지기 전에는 싸움이 결코 끝나지 않을 것임을 알아야 한다.

- 자신의 자아상이 벗겨지는 이런 일을 겪을 때는 흔히, 어떤 것을 포기하는 대신 다른 것을 붙들게 된다. 붙들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은 정말 편안치 못한 일이다. 그래서 우리는 옛것 대신 새로운 것에 집착한다. 가족과 사회를 버리는 대신 '영적 지도자'라는 상에 집착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것 또한 '깡그리' 버려야만 한다. 대청소를 해야만 한다. 모든 것을 다 놓아 보내야만 한다.

- 단번에 모든 것을 버려야만 한다는 뜻은 아니다. 더 이상 절실하게 필요하지 않게 된 것들부터 버리면 된다. 그리고 이는, 영적인 겉모습을 '이용'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 아니다. 이용은 하되 언젠가는 그것도 버려야 한다는 것을 잊지 않으면 되는 것이다.

- 이 모든 것을 알고 나면 자신이 매우 연약해진 느낌을 갖게 된다. 기댈 만한 권위도 없고, 나에게 무엇을 하라고 일러줄 사람도 없다. 오로지 가슴으로 주의를 돌려서 다음에는 어떻게 하는 것이 옳게 느껴지는지를 귀 기울여 듣고 있을 수밖에 없다. 붙들 것은 아무것도 없다.

- 그것은 그런 상태를 끊임없이 견지할 수 있는 정신적 훈련을 요구하는 일이며, 그것은 아르주나에게 익숙하지 않은 종류의 훈련이었다. 그는 무엇이 옳은지를 언제나 알고 있고, 어떻게 행동해야 하고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사회적 규칙이 정해져 있는, 안전지대 안에서 사는 것에 익숙해져 있었다. 그는 언제나 이렇게 말할 수 있었다. "나는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안다. 바로 여기에 그렇게 적혀 있으니까."

 

- 그러나 그는 이제 트룽파 린포체가 그의 책 <영적 물질주의와의 결별 Cutting Through Spiritual Materialism>(한국어판 제목은 <마음공부에 관하여>)에서 이야기했던 그런 종류의 도전에 임해야 한다. 어떤 패턴에도 집착하지 말고, 어떤 것에도 기대지 말고 서 있어야 하는 도전. 그것은 매우 끔찍한 도전이다. 붙잡고 매달릴 아무런 정의도 없이 위태로운 낭떠러지에서 있어야 한다는 것은 겁나는 일이다. 비교할 만한 어떤 대상도 없이, 정체성이나 자아관념, 어떤 본보기도 없이 홀로 서야 한다. 당신은 과연할 수 있겠는가? '모든 것'을 다 던져버릴 수 있겠는가?

- 갈등이 정말 심각해졌을 때, 엄청난 혼란이 와서 다음에 무엇을 해야 할지 판단할 기준이 아무것도 없을 때, 우리는 오직 그런 때에만 뭔가 새로운 일이 일어날 가능성을 고려해 볼 수 있게 된다. 오직 그때에만 예전에는 들어보지 못했던 것에 귀를 기울일 준비를 하게 된다.

- <기타>의 가르침이 이런 위기 상황에서 시작되어야만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아르주나가 크리슈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기 위해서는, 그 이전에 아르주나의 존재 자체를 뿌리째 흔드는 일이 있어야 했다. 크리슈나와 아르주나는 오랫동안 함께 다녔다. 그들은 여러 해 동안 좋은 친구 사이였다. 하지만 아르주나는 크리슈나가 해주는 말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것이다.  

- 이것이 <기타>의 가르침의 가장 깊은 차원이다. 아르주나가 맨 마지막으로 대면하게 되는 것은 시바 Shiva이다. 그는 혼돈과 파괴의 모습을 한, 우리의 모든 환영을 파괴하는 신을 대면한다. 아르주나는 "만약 신이 있다면, 만약 법이 있다면, 이 모든 것에 일말의 의미라도 있다면, 어떻게 제가 친족과 싸우라는 요구를 받을 수가 있는 것입니까? 제가 어떻게 이런 끔찍한 짓을 하도록 요구받을 수 있는 것입니까?" 하고 묻지 않을 수 없는 고통에 직면해 있다. 아르주나는 끔찍한 사실 앞에 놓여 있다. 신의 법을 이해하려면 합리적 이성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

- <라마야나>에서 라마(혹은 람)는 되풀이해서 말한다. "그대는 시바를 숭배하지 않으면 나에게로 올 수 없다." 이 말은 곧 혼돈의 존재 자체를 온전히 받아들이지 않으면 문을 통과할 수가 없다는 뜻이다. 사랑과 아름다움을 보존하는 자가 되고자 한다면, 두 눈을 똑바로 뜨고 사랑과 아름다움이 파괴되는 것을 지켜보면서 이렇게 말할 수 있어야만 한다. "그래, 옳아. 그래 그것도 옳아." 자연에는 창조와 보존, 그리고 '파괴'가 있다. "기쁨과 환희와 새로워짐과 탄생이 신의 계획의 일부인 것과 마찬가지로 시련과 고통과 파멸과 죽음 또한 신의 계획의 일부이다." 

- 주 : 힌두 신화에서, 형상 없고 형언할 수 없는 궁극적 실재인 브라흐만은 브라흐마와 비슈누와 시바라는 이름의 세 가지 국면, 혹은 속성으로서 현상계 우주 속에 모습을 드러낸다. 브라흐마는 창조의 신, 비슈누는 보존의 신, 시바는 파괴의 신이다. 보존의 신인 비슈누는 종종 화신하여 창조된 우주 속에 내려온다. 라마와 크리슈나도 비슈누의 여러 화신(avatar) 중의 하나이다. 궁극적 의미에서, 모든 존재는 화신이다.

- 쿠루크셰트라에서 아르주나는 시바와 맞닥뜨리게 된 것이다. 그는 이성적인 마음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상황에 직면해 있다. 생각이 도움을 주지 못하는 상황, 모든 것을 내려놓고 복종하는 것만이 유일한 돌파구인 그런 상황이다. 자신이 좋은 사람이라는 그의 자아상, 이성적 사고에 대한 집착, 형상 자체에 대한 집착-그는 이 모든 것에 작별을 고해야 한다. 이 모든 집착을 낱낱이 놓아버려야만 한다. 새로운 어떤 것을 받아들일 여지를 만들기 위해서는,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는 근거 자체가 허물어져야만 한다.

- 자, 이제 무대가 다 설치되었다. 우리는 적군이 누구인지 안다. 판다바와 쿠라바 Kauravas(드리타라슈트라의 아들들)가 그들이다. 그리고 그들이 우리에게 무엇을 상징하는지도 안다. 우리는 그들이 전장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알고 있고, 아르주나가 처해 있는 곤경도 이해했다. 나아가, 그보다 중요한 것으로, 우리는 아르주나가 직면해 있는 선택의 기로가 우리가 처해 있는 선택의 기로와 같은 것임을 알게 되었다. 우리는 내려놓을 준비가 얼마나 되어 있는가? 에고로부터 자유로워질 준비가 얼마나 되어 있는가? 알 수 없는 신의 계획 앞에 얼마나 기꺼이 복종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이것이 아르주나가 직면하고 있는 의문들이다. 이것이 우리가 대면하고 있는 싸움이다. 이것이 쿠루크셰트라에서 판가름 날 것이다.

- 나는 그저 그들에게 나를 내맡겼다.

'예, 맞습니다!'

- 마하라지와, 내가 전적으로 신뢰하는 또 다른 인물들은 윤회에 관한 이야기를 자주 했다. 그들은 윤회가 어떤 것인지 이야기해 주었다. 이들은 우리네 서양인들이 물리 법칙을 확신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로 한결같이 윤회론을 확신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들이 하는 이야기의 진실성을 느낄 수 있었다. 이것이 내가 윤회를 받아들이게 된 주요한 경위이다. 마하라지나 그와 비슷한 인물들 주위에서 살다가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 실제로 나는 굉장한 체험들을 했다. 주로 환각제를 통한 것이었지만, 나는 다른 세계로부터 '나'라는 이미지의 안팎을 드나들어 보았다. 그것도 다른 생을 직접 경험한 것일까? 아니면 나의 환생을 경험한 것일까? 모르겠다. 하지만 마하라지가 윤회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는 사실은 안다. 그리고 그의 진실이 나에게 전해졌다. 크리슈나는 말했다. "이것(윤회)은 성자들이 인정하는 사실이다." 나에게는 이것만으로도 충분하다.  

- 페르시아의 신비가인 루미가 한 말이다.

"나는 돌로서 죽었다가 식물로 다시 태어났다. 나는 식물로 죽었다가 동물이 되었다. 나는 동물로 죽었다가 남자로 태어났다. 내가 왜 두려워해야 하는가? 죽어서 손해 본 적이 없는데? 나는 사람으로 죽어서 천사들과 함께 솟아오르리라. 하지만 천사의 신분에서도 계속해서 나아가야만 한다. 신의 얼굴을 제외하고는, 만물은 변화하게 마련이므로."

- 마호메트는 말했다.

"인간이란 영혼이 철 따라 껴입는 외투일 뿐이다. 시간이 지나서 낡아지면, 버리고 다른 것으로 갈아입는다."

- 다음은 교수형을 당한 사람에 관한 이야기를 쓴 잭 런던 Jack London의 글이다.
"나는 탄생으로 비롯된 것도 아니요, 수태로 비롯된 것도 아니다. 나는 무수한 세월을 통해 성장하고 발달해 왔다. 나는 여자에게서 태어난 남자다. 내 날들은 얼마 남지 않았으나 내 본질은 파괴되지 않는다. 나는 여자에게서 태어난 여자였고, 여자로서 살면서 아기들을 낳았다. 그리고 나는 다시 태어나리라. 오, 무수히 나는 다시 태어나리라. 하지만 저 멍청이들은 자기들이 밧줄로 내 목을 조르면 내 존재를 멎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누나." 

- 잭 런던은 미국인 작가이다. 그의 글에 비추어보면 서양에서도 특히 문학계에서는, 윤회에 대한 풍부한 믿음이 전해 내려오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윤회에 대한 일반인들의 문화적 태도는 문학보다는 서양 종교 전통에 의해 형성된 것이며, 거기서는 윤회 개념에 대한 수용성을 발견하기가 힘들다. 성당이나 교회에서는 대개 윤회를 신앙의 일부로 포함시키지 않는다. 하지만 성경을 읽어보면 윤회사상을 암시하는 구절들이 적잖이 눈에 띈다. 그리스도는 세례 요한이 예전에 엘리야였다고 말한다. 솔로몬의 지혜서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사지 멀쩡한 건강한 몸으로 태어나는 것은 전생에 덕을 많이 베푼 덕분이다." 예수의 제자들은 예수에게 이렇게 묻는다. "이 사람이 맹인으로 태어난 것은 그가 그전에 행한 짓 때문입니까, 아니면 부모 때문입니까?"  

- 그것이 '누군가'(somebody)가 아니라면, 그것은 대체 무엇일까?
개인적으로 나는, 윤회하는 그것을 '영혼(Soul)'이라는 말로 부르는데 익숙하다. 불교도들에게 '영혼'이라는 말은 너무 견고한 느낌을 가지고 있어서, 그들은 내가 이 말을 쓸 때마다 거북해한다. 하지만 나는 이 말을 매우 특별한 의미로 사용한다. 즉 영혼은 윤회하지만, 동시에 '영혼'을 포함한 모든 차원의 만물은 환영이라는 뜻이다. 영혼은 일종의 환영이다. 그것이 입고 태어나는 형상 또한 환영이다. 하지만 그 환영 속에는 변하는 형체와 이름과 그것이 취하는 에고와 상관없이 끈질기게 존재하는 미묘한 무엇, 곧 어떤 특징, 가치, 품성의 연속성이 있다. 이 연속성이 내가 '영혼'이라 부르는 그것이다. 

- 붓다는 윤회를 믿었다. 그는 '무엇인가'(something)가 환생한다고 생각했다. 팔리어 문헌은 이렇게 말한다.

"윤회의 바다를 허둥대며 지나가는 에고라는 실체는 없다. 단지 그 성질과 활동에 따라 여기서는 인간으로, 저기서는 동물로, 또 다른 곳에서는 보이지 않는 미물로 자신을 드러내는 생명이라는 물결이 있을 뿐이다."

 

- '생명의 물결'. 멋진 이미지다. 힌두교에서는 이것을 바사나 vasanas, 곧 미묘한 사념체라고 한다. 우리가 하는 모든 행위는 그 행위와 연결된 욕망에 근거한 바사나, 생명의 물결을 만들어낸다. 이 생명의 물결은 밖으로 밖으로 퍼져 나간다. 우리는 죽어도 그것은 계속 퍼져 나간다. 육신이 죽어도 이 미묘한 생명의 물결은 남는다. 그것은 당신의 다음 생을 결정하는 일종의 심령적 DNA 코드처럼 작용하는 정신적 경향성이다. 힌두교에서는 이것을 카르마라고 부른다. 카르마는 기본적으로 생명의 물결의 한 패턴, 혹은 욕망의 물결이다. 그것은 스스로 완전히 소진될 때까지 삶에서 삶으로 끝없이 유전한다.  

- 하나는, 아르주나가 직면해 있는 딜레마 자체가 그의 '선한' 카르마이며, 따라서 그는 그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가 그러한 갈등에 눈을 뜨기 시작한 것 자체가 그에게는 영광이다. 그것은 얼마나 축복인가! 신과 교제하는 삶이 허락되는 영광을 상상해 보라. 얼마나 멋진 삶인가! 그러나 아르주나가 풀어내야 할 카르마의 또 다른 일면은, 그가 깨어나기 시작하고 있긴 하지만 욕망, 아니, 그보다는 욕망에 대한 '집착'이 아직도 그의 주변을 얼쩡거리고 있다는 것이다. 

- 그것은 단지 아르주나만이 처해 있는 곤경이 아니다. 우리들 대부분이 처해 있는 곤경이다. 그렇지 않은가? 우리는 우리 내부의 분할된 영토 속에 갇혀 있다. 이 게임을 꿰뚫어 보는 우리의 부분이 있는가 하면, 시시콜콜한 세상사에 깊이 얽매여 있는 우리의 부분도 있다. 우리는 두 개의 다른 세상에다 한 발씩 담그고 있는 것이다. 

- 그러므로 아르주나는 깨어나는 삶에 속하는 영광을 누리고 있지만, 그에게는 아직 가야 할 길도 있다. 크리슈나가 그를 다음 단계로 이끄는 훈련을 시키고 있는 것이다. 크리슈나는 아르주나가 그가 행하는 행위들이 더 이상 그의 집착으로부터, 어떤 집착으로부터도 나오지 않게 되는 경지로 진화해 가도록 돕고 있는 것이다. 행위가 집착에서 나오지 않으면, 그것은 더 이상 새로운 카르마를 만들어내지 않는다. 그럼으로써 아르주나는 새로운 업을 짓는 일과는 결별하게 된다. 새로운 탄생과 죽음을 만들어내는 일에서 졸업한다. 남은 일은 단지 옛것들이 쌓아온 카르마가 제할 일을 다하도록 청산하는 일뿐이다.

- 이 마지막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잘 음미해 보자. 완전한 깨달음을 얻었다고 하더라도, 게임의 정체를 꿰뚫듯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춤사위는 제풀에 사그라질 때까지 계속된다. 쌓아놓은 카르마의 에너지가 남아있는 한, 생명의 물결이 남아 있는 한, 오온, 곧 창조의 실 가닥은 계속 나타날 것이다. 붓다는 깨달음을 얻었지만, 옛 카르마를 소진시키면서 40년을 보냈다. 하지만 우리가 그 모든 것을 '졸업하기를 원한다면', 그 첫 단계로 새로운 물결을 일으키기를 멈춰야 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날마다 새로운 물결을 계속 일으킨다면 끝을 낼 수가 없을 테니까! 크리슈나가 아르주나에게 설명하듯이, 그 방법은 집착이 행위의 동기가 되는 것을 멈추는 것이다. 욕망으로부터가 아니라 순전히 다르마로부터 행위를 일으키게 된다면, 더 이상 새로운 물결을 일으키지 않을 수 있다. 

- 그것이 바로, 크리슈나가 아르주나에게 전적으로 새로운 기반 위에서 행위를 하라고 하는 이유이다. 그는 아르주나가 카르마를 만들어내는 낡은 습관으로부터 행위하는 것을 멈추도록 훈련시키고 있는 것이다. 크리슈나는 아르주나에게 이렇게 말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저쪽 편 사람들에 대해서 네가 느끼는 '감정'이 아니다. 여기에는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걸려 있다. 너는 네 '카르마'가 요구하는 대로 행위해야 한다. 네가 이 순간 이 장소에 '크샤트리아'로서 서 있는 것은, 너의 카르마가 가져다주는 도전이다. 그러니 이 전쟁을 치름으로써 그 의무를 다하는 것이 너의 책임이다. 그것이 이 순간 네가 걸어가야 할 길이다." 

- 아르주나는 자신이 그런 역할을 원한 적이 없다고 느낄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엄연한 현실이다. 이제 그것을 이루는 것만이 그의 의무이다. 당신은 자신이 이 삶과 그 모든 것의 의미에 관한 골치 아픈 문제들을 직면해보고 싶어서 이 책을 집어든 것이 아니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신'에 의해 당신은 여기까지 와 있다. '신'에 의해 여기에 와 있는 것이다. 이곳이 그곳이다. 이곳이 그 전쟁터다. 이곳이 당신 내면의 쿠루크셰트라이다. 당신은 그런 것을 원한 적이 없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다른 차원에서 보면, 당신은 아르주나와 마찬가지로, 당신이 받아야 할 몫을 받고 있는 것뿐이다. 당신은 자신이 지금까지 행해온 모든 행위들 덕분에 대부분의 인간들이 거들떠보지도 않는 이상한 주제를 가지고 떠드는 이 별난 책을 읽고 있는 이 자리까지 오게 된 것이다. 기이하지 않는가? 당신은 왜 이따위 책을 읽고 있는가? 왜 하필 당신이? 

- 당신을 여기까지 데리고 온 카르마가 무엇이었든, 이제 그것을 해내는 것이 당신의 '다르마'이다. 이 책을 읽는 상황 속에서 이 일을 겪어내고, 이런 의문들을 대면하는 것, 그것이 당신의 할 일이다. 당신은 이렇게 물을 것이다. "그게 정확히 무슨 뜻이요? 그래서 내가 무엇을 '해야'한단 말인가요?" 글쎄, 그게 바로 당신이 혼자서 해결해 내야 할 문제다. 우리는 각자 자신의 길을 가고 있다. 나는 당신의 길이 어떤 것인지 모른다. 사실은 나 자신의 길조차 헤매고 있다. 내가 예측할 수 있는 것은, 그 일에는 아르주나와 마찬가지로 당신도 아마 당신이 애지중지해 온 자아상, 곧 내가 누구이고 어디로 가고 있는지에 관한 생각들을 버리는 것이 포함되어 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 생각해 보라. 당신과 나는 '여정의 한 부분' 이상의 그 무엇도 아니다. '나'라는 것은 일정한 무엇이 있는 것이 아니라,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마음의 순간들이 연속되는 과정이다. 그 순간들은 서로 분리되어 있다. 영원한 '나'란 없다. 환생하고 환생하는 거기에는 원인과 결과의 법칙이 있을 뿐이다. 꼬리를 물고 끝없이 이어지는 원인과 결과, 원인과 결과... 그것은 모두가 자연의 법칙, 현상계의 환영이 펼쳐지는 법칙의 행진일 뿐이다. 

- 이러한 관점에 마음을 열수록, 우리는 자신의 삶이 펼쳐지는 것을 더욱 초연하게 바라보게 된다. 우리는 그 모든 삶의 통속극이, 심지어는 '나는 깨달음을 얻으려고 노력하는 중이야' 하는 통속극조차 단지 더 많은 카르마를 만들어낼 뿐임을 안다. 우리는 더 이상 감당할 수가 없다. 붙잡고 의지할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니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한다.

- 크리슈나가 아르주나에게 모든 자아상을 놓아버리고 자신의 의무만 다하라고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왜 친족과 싸운다는 생각 때문에 흥분하느냐고 크리슈나는 묻는다. 이 싸움이 일어난 것은 그들의 카르마이자 너의 카르마이다. 자신의 운명과 맞서 싸울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니 카르마의 법칙이 순리대로 펼쳐지도록 내버려 두라. 너에게 주어진 역할을 연기하라. 그것을 다할 때, 자신의 의무에 온전히 승복할 때, 그 어떤 것을 위해서도 애쓰지 않을 때, 그것이 네가 가야 할 길 위에 서 있는 것이다.

- 크리슈나의 논지는 토론의 맥락을 완전히 뒤집어 버림으로써 아르주나의 온갖 반박을 그 싹부터 잘라버린다. 게임의 규칙이 변했다. 크리슈나는 아르주나의 행위가 이제는 전혀 새로운 곳에 근거하여 나와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 모든 사회적 규범은 어쩌고 그것들은 그것들 나름대로 때와 장소가 있었다. 하지만 가족과 사회의 역할에 대한 아르주나의 느낌은 더 이상 그의 행위에서 중심 가치가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이제부터 그는 자신의 다르마를 다하기 위해 브라흐만을 가치의 중심으로 삼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이제 행위의 배후에 새로운 목적을 가지게 되었다.

- <기타>는 아르주나에게 그러했듯이, 우리의 관점을 거듭거듭 뒤집어놓는다. 삶의 의미에 대한 우리의 느낌을 바꿔놓는다. 그리하여 <기타>의 관점을 우리의 것으로 수용해 가는 동안, 우리는 자신의 관심사가 변해가기 시작하는 것을 깨닫는다. 내가 필요로 하고 원한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얻는 일에 몰두하는 대신, 이제는 마음을 가라앉혀 가만히 귀를 기울이기 시작한다. 우리는 내면으로부터 올라오는 요청을 기다릴 것이다. 다음에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결정하기보다는, '들으려고' 애쓸 것이다. 그렇게 귀를 기울이면 우리는 자신의 다르마를 더욱 분명히 들을 것이며, 자신의 행위를 더 깊은 지혜의 자리를 향해 돌리기 시작하게 될 것이다. 그러는 동안, 자신의 역할과 계획과 욕망과 삶이라는 멜로드라마에 대한 우리의 모든 애착이 떨어져 나갈 것이다. 자신을 그저 다르마의 도구로서 있게 하는 일에 더욱더 마음을 열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오랫동안 삶을 잃어버리고 있었음을, 그리고 그것을 되찾았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 "그러니 아르주나, 일어나라. 네 영혼으로 싸울 준비를 하라."
'의무'는 크샤트리아에게는 가장 높은 소임으로, 매우 엄숙한 것이다. 그래서 크리슈나가 다르마를 그런 식으로 설명하고 아르주나에게 의무를 다할 것을 촉구하자, 크샤트리아인 아르주나에게 강력한 설득력을 발휘했다. 하지만 아르주나에게 크게 어필했음에도, 크리슈나에게는 그것이 원래의 논점이 아니었다. 그는 아르주나에게 사회적 의무를 다하라는 뜻에서가 아니라, 지고한 법칙에 대한 책임을 다하라는 뜻으로 그렇게 요청한 것이다.

- 사회적 의무와 다르마 사이에는 미묘한 관계가 상호작용한다. 다르마에 따라 행위하고자 한다면, 사회적 의무에 따라 행위를 결정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다르마의 길을 간다고 해도 사회적인 상황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나의 카르마는 내가 어떤 특정한 역할을 행할 수 있도록 특정한 시간과 특정한 장소에 나를 데려다 놓는다. 크리슈나는 아르주나에게 말한다. 그것이 네가 크샤트리아로 태어난 이유라고. 그럼으로써 너는 이 역할을 행할 수 있고, 그럼으로써 너의 다르마를 실천하게 되는 것이라고.

- 힌두교 전통에서 카스트(크샤트리아는 그중 한 계급이다)는 출신과 역할에 따른 사회적 구분이었다. 그래서 카스트가 어디에 속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인생이 결정되었다. 그것과는 달리 인생의 단계를 구분하는 방법이 있는데, 그것을 아쉬라마 ashrama라고 한다. 여기에는 네 시기가 있다. 먼저, 태어나서부터 스무 살까지의 기간에는 학생으로서 배운다. 그다음은 스무 살부터 마흔 살까지의 기간으로, 가장으로서 돈을 벌고 가족과 사회를 부양해야 하는 시기이다. 세 번째 단계는 마흔 살부터 예순 살까지로, 이 기간에는 종교 공부를 한다. 마지막으로 예순 살 이후로는 출가자, 곧 산야스 sunnyas가 되는 시기로, 세속적인 것을 모두 버리고 주의를 오롯이 신께만 향하게 한다.

- 사람을 이 두 개의 좌표 위에서 정의하는 힌두교 체계를 차투르바르나쉬라마-다르마 Chaturvarnashrama-dharma, 곧 카스트와 아쉬라마의 다르마라고 한다. 한 사람의 삶은 카스트와 아쉬라마라는 두 좌표 위에서 마치 모눈종이 위의 설계도처럼 선명하게 드러난다. 당신이 만약 크샤트리아라면, 그 나이에 따라 지금 무엇을 하고 있어야 한다는 <베다>의 정확한 처방이 있는 것이다. 그것은 각자의 스와다르마 swadharma라 불리는 것으로 그 사람이 할 수 있는 적절한 일이 무엇인지를 정의해 주는, 절대적으로 분명한 체제였다. 아르주나에게 네 의무를 다 해라, 너에게 마땅한 행동을 하라고 말할 때, 크리슈나는 바로 이 체제 안에서 말하는 것이다.

- 우리 문화에서 누구에게 무슨 일이 합당한지를 결정하는 것은 이보다 훨씬 더 어렵다. 우리에게는 어떤 때에 어떤 일을 하고 있어야 한다고 일러주는 카스트나 아쉬라마 같은 것이 없다. 실제로 우리는 이 스펙트럼의 반대쪽 끝에 있다. 우리에게 무엇을 해야 할지를 일러주는, 사회 속에 깊이 뿌리 박힌 분명한 문화적 처방은 거의 없다. 그 같은 편리한 지침이 없으므로, 우리는 스스로 자신의 다르마가 무엇인지를 알아내야 한다. 우리는 각자의 상황에 따라 매 순간 자신에게 합당한 일이 무엇인지를 결정해야 한다. 우리 주변의 모든 환경이 그 결정에 자료를 제공한다. 내가 가진 특별한 지성이나 경제적 여건이 어떤 길을 제시한다. 남편이나 아내가 어떤 가능성을 제시하기도 하고, 동시에 어떤 한계를 부여하기도 한다.

-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나는 다르마에 절대적으로 부합하는 일 외에는 할 수 없다. 불순한 돈을 버느니 차라리 굶어 죽겠다."

어떤 이들은 또 이렇게 말한다. "나는 내게 주어진 여건 속에서 최선을 다하겠다."

어느 경우든 잘잘못은 없다. 각자가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를 정해야 한다. 내가 사두 sadhu, 곧 독신출가자라면 나에게 의지하는 사람이 없으므로 주변에 끄달림 없이 순수성을 더 잘 지킬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가족을 거느린 가장이라면, 그들에 대한 책임이 있으므로 최선을 다해서 일을 해야 할 것이다. 만일 내가 가장인데도 너무나 순진파라서 처자식을 먹여 살릴 돈도 못 버는 사람이라면, 나는 결국 다르마보다는 아다르마 adharma(反 다르마)를 더 많이 행하게 될 것이다. 당신이 만일 이런 처지에 있어서 자신의 다르마에 전적으로 부합하지 않는 일을 해야만 하게 되었다면, 그 일을 최대한 의식적으로 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라. 그것이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이다. 주어진 일을 행하라.

- 당신이 부자라고 하자. 그러면 그것이 부분적으로는 당신의 다르마를 규정한다. 당신이 '부자가 아니라고' 짐짓 믿을 수는 없다. 설령 돈을 다 갖다 버리더라도 카르마를 없애지는 못한다. 게다가 그것은 카르마를 짓는 행위이다. 그 대신, 당신은 자신의 돈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 그에 관한 의무가 무엇인지를 생각해보아야 한다. 그러면 돈이 당신의 다르마가 된다.

- 삶의 모든 면을 다 존중하는 마음으로 다르마를 실천하라. 자신의 역할이 무엇이든, 그저 그 역할을 하라. 할 수 있는 한 '의식적으로' 그것을 하라. 이것이 다르마를 다한다는 것의 가장 근본적인 뜻이다. 좌표 위에서 자기 자리를 찾는 것, 그리고 그것을 온전히 살아내는 일! '왜' 당신의 다르마를 실천해야 하는지는 나중에 알게 될 문제다.  

- "모두에게 음식을 대접해라. 모든 사람을 접대하란 말이다"
"마하라지... 쿤달리니를 끌어올리려면...??!"
그가 말했다.

"쿤달리니는 스승이 건드려주면 끌어올려질 수 있다. 스승이 그저 그것을 생각만 해도 네 쿤달리니가 상승할 것이다. 그런 건 걱정하지 마라. 그냥 사람들을 대접해라."

그는 '네 다르마를 다하라'고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내 다르마는 명상하는 것이 아니었다.

- 시간이 지나자, 나의 요가는 헌신과 봉사임이, 내가 좋아하든 싫어하든 그것임이 분명해졌다. 그것이 나의 다르마였다. 그것이 내게 주어진 길이었다. 하지만 그것을 받아들이고 따르는 데는 시간이 좀 걸렸다.

- 아르주나는 지금 이와 동일한 곤경에 처해 있다. 그는 이 싸움터에서 마주치게 된 자신의 다르마를 달가워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이 가고 싶은 길에 대해 그만의 생각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차츰, 그 길을 따라가도 자신이 원하던 곳이 나오지 않을 것임을 깨닫게 된다. 우리는 다르마야말로 자신의 길임을 인식하면서 거기에 순종하기 시작한다. 이것이 크리슈나가 아르주나에게 권하고 있는 것이다.

"법의 바퀴는 그렇게 돌아간다. 쾌락을 좇아 죄악에 찬 삶을 살면서 이 바퀴의 회전에 도움을 주지 못하는 자는 헛되이 사는 것이다. 그러나 영의 기쁨을 발견하고 영의 품 안에서 만족하는 자는 행위의 법을 초월한다."

- 이것은 흥미로운 사실이다. 순수히 다르마에 따라 행위하면 그는 행위의 법을 초월한다. 다르마에 온전히 순종하면, 그의 행위는 더 이상 몸부림이 아니라 영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된다. 그렇게 될 때, 그는 더 이상 카르마를 만들어내지 않는다. 개인적 동기에서가 아니라 다만 다르마를 성취하기 위해 행위하므로 카르마는 생겨나지 않는다.

- 그뿐만이 아니다. 카르마를 더 이상 지어내지 않을 뿐 아니라 삶과의 모든 관계가 변한다. 삶은 온통 놀이마당이 된다. 플로티누스 Plotinus는 말한다.

"살육과 죽음의 광경, 점령되고 약탈당하는 마을이 모든 것도 다 공포와 비명의 한바탕 연극 장면들로 받아들여야 한다. 삶의 변화무쌍한 운명 속에서 슬퍼하고 고통받는 것은 진정한 인간, 내면의 영혼이 아니며, 모두가 인간의 유령, 겉껍질 인간이 세상이라는 무대 위에서 벌이는 자기 역할의 연기일 뿐이기 때문이다." 

- 헤르만 헤세의 <동방으로의 여행(Journey to the East)>에서 레오는 말한다.

"인생을 어떻게 보든 그것은 각자의 자유다. 삶이라는 것을 의무로 볼 수도 있고, 싸움터나 감옥으로 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인생을 조금이라도 낫게 해주지 못한다. 인생이 정말 아름답고 행복하게 느껴질 때는, 인생이 마치 하나의 게임처럼 여겨진다."

- 마이스터 엑크하르트 Meister Eckehart는 이렇게 썼다.

"신께서 주시는 것을 우리는 모두 다 동등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어느 것이 더 중요하고 높고 좋은 것인지를 비교하거나 따지지 말아야 한다. 그저 신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따라야 한다. 전체 설계의 정교함을 점점 더 깊이 깨달을수록, 지혜가 자라난다. 어느 한 부분도 다른 부분보다 더 낫지 않고, 어떤 부분도 다른 부분보다 못하지 않으며, ..."

- 무엇이 사랑을 일으키며 무엇이 욕망을 일으키는지를 알게 될 것이다. 그 모든 것을 그저 지켜보라. 그것과 말다툼하지 말고 심판하지 말며 그저 지켜보라. 이 같은 관점을 계속 키워가면 집착으로부터 행하는 일이 적어지고, 차츰차츰 단순히 법칙에 따른 흐름에서 나오는 행위를 하게 될 것이다.

- 다르마를 실천하고 자신의 역할을 하라는 크리슈나의 논지는 <기타>의 주요 주제 중 하나로, 카르마 요가라 불리는 수행법의 바탕이다. 지금까지 크리슈나는 아르주나에게 그가 '왜' 이 싸움에 임해야 하는지를 이야기하면서 설득해 왔다. 이제 그는 아르주나에게 그것을 '어떻게' 해야 할지 설명해주려 하고 있다. 이 싸움을 어떤 태도로 임해야 할지 알려주려고 한다. 그는 우리가 행위를 '변화'시켜서 다르마와 조화되게 하는 방법을 설명해주려고 하는 것이다.

- 이 주제를 우리 마음속에 심어줄 몇 구절이 있다.
"그러나 집착의 힘을 조화롭게 다스림으로써 집에서 '해방되어' 카르마 요가의 길을 가는 자는 위대하다."
"집착의 구속에서 벗어나서 행해져야 할 일을 하라. 순전한 마음으로 일하는 자는 지고의 경지를 얻게 된다."
"너의 일을 하되, 집착 없이 하라."

이것이 처방의 첫 부분이다. 아직 집착을 어떻게 멈춰 세우는지는 말하지 않았지만, 그것이 목표라고 말하고 있다. 집착 없이 일하는 것, 그것은 결과에 대해 걱정하지 않고 행위하는 것을 뜻한다. '행위의 결과에 집착하지 말라'는 것은 카르마 요가의 주요 가르침 중의 하나다.

"가슴으로 일하라. 그 보상에는 마음 쓰지 말라. 보상에 개의치 말고, 부단히 너의 할 일을 하라."

- 마하트마 간디는 그것이 실제로 어떤 상태인지를 말했다.

"사람은 모든 행위에 대해 그에 따를 결과를 알아야 하고, 그것을 이룰 수단과 그것을 해낼 능력을 알아야 한다. 결과에 대한 욕심 없이, 그럼에도 자기 앞의 일을 완수하기 위해 혼신을 다하는 사람, 그런 이를 '행위의 결과를 포기한 사람'이라고 부른다." 

- 정말 그렇게 하여 행위의 결과에 대한 집착을 버리게 되면, 우리는 마침내 어떤 행위든 다르마가 이끄는 대로 자유롭게 할 수 있게 된다. 우리는 더 이상 집착에 의해 이리저리 끌리고 밀려다니지 않는다. 아무것도 얻어내려고 하지 않을 것이므로, 오로지 자신의 다르마를 다하기 위해서 행위하는 것뿐이다. 게다가, 어떤 '결과'를 기대해야 할지 우리가 어떻게 알겠는가? 어떤 일이 벌어질지 우리가 어떻게 알겠는가? 카르마의 물결이 펼쳐지는 전경을 내려다볼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은 이상, 우리는 과연 어떤 결과가 우리에게, 또 모두에게 최선일지 결코 알 수가 없다.

- 우리는 카르마 요가의 길이 작용하는 방식, 그리고 그것을 우리 자신의 삶에 어떻게 적용시킬 것인지를 큰 틀에서 알기 시작하고 있다. 우리가 행하는 나날의 일들을 모두 신께로 가는 길로 바꿔놓을 수 있음을 깨닫기 시작하고 있다. 지금까지 크리슈나는 아르주나에게 -우리에게- 그 방법에 대한 두 가지 지침을 주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첫째, 자신의 다르마가 무엇인지 귀 기울여 들으라. 그리고 자신의 행위가 다르마와 조화되게끔 노력하라. 둘째, 하나하나의 행위를 그 어떤 보상도 기대하지 말고 최대한 순전한 마음으로 행하라.

- 하지만 이 카르마 요가를 실천하는 데에는 중요한 지침이 하나 더 있다. 그리고 그것은 이 게임을 또 다른 차원으로 가져다 놓는다. 결과에 개의치 말고 자신의 다르마를 행하는 것에서 한술 더 떠서, '자신을 행위자라고 생각함이 없이' 행하라는 것이다. 그 행위는 나를 통해서 일어나지만, 내가 그것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거기에서 빠져나와 있다. 이것은 나와 행위의 관계에 대해 완전히 새로운 관점을 열어놓는다.

 

- 크리슈나는 아르주나에게 말한다.

"모든 행위는 현실이라는 사건들의 천을 짜내는 자연의 힘(구나)에 의해 제때에 일어난다. 하지만 자기중심적인 환상에 빠져 있는 사람은 자신이 그 행위자라고 생각한다."

크리슈나는 이렇게 말한다.

"보라, 너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네가 무엇을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이다. 너는 행위자가 아니다. 사실 모든 사건은 단지 너를 통해서 전개된 무수한 법칙들의 결과일 뿐이다. 이것을 알면, 이것을 진정으로 깨달으면, 너는 모든 구속을 벗어나 고향집에 와 있게 된다. 세상 속에서 행위하는 '나'라는 느낌이 벗겨져 나갈 것이기 때문에."

 

- 그러므로 카르마 요기란 자신의 삶을 통하여 신께로 가는 자이다. 다르마에 부합하는 행위가 무엇인지 귀 기울이고, 그 결과에 집착하지 않고 행위하며, 동시에 자신이 어떤 식으로도 그 행위자가 아님을 인식함으로써. 이것이 삶을 영적 수행으로 바꿔놓는 방법의 전부이다.

- 카를로스 카스타네다 Carlos Castaneda의 책에 나오는 전사(warrior)는 완벽한 카르마 요기의 또 다른 본보기를 보여준다. 돈 후앙 Don Juan이 전사에 대해서 하는 말은 모두 카르마 요기에게도 해당된다.

"전사는 사냥꾼이다. 그는 모든 것을 계산한다. 그것이 상황을 장악하는 힘이다. 하지만 계산이 끝나면 그는 행하고, 내맡기고, 가능한 한 최선을 다하여 살아남는다. 전사는 자기 자신을 장악할 것과 동시에 자신을 포기할 것을 스스로에게 요구한다."

- 여기서 우리는, 결과에 집착하지 않고, 행위자 역할에 빠져 마음이 분주하지 않을 때, 그 행위가 띠게 되는 몇 가지 덕목들을 읽을 수 있다. 예컨대 거기에는 평정심이 있다. 카스타네다는 이것을 '통제력인 동시에 자기 포기'의 태도라고 표현한다. 거기에는 또 대단한 자발성과 동시에 사랑에 찬 마음이 있다. 왜냐하면 그 하나하나의 행위는 우리의 공양물, 곧 신의 발아래에 바치는 꽃다발이기 때문이다. 

 

- 구르지예프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차 한 잔을 잘 대접할 수 있으면, 뭐든지 잘할 수 있다." 즉, '어떤' 행위든 진정한 카르마 요기의 자세로서 해낼 수 있다면, 그것은 그가 집착으로부터 자유롭고 자신이 행위자라는 생각으로 바쁘지 않은 그런 자리에서 행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자리에 있다는 것 자체가 그의 '모든' 행위를 다듬어줄 것이다.

- 도덕경은 이렇게 말한다.

"내맡기면 모든 일이 스스로 되어간다. 세상은 내맡기는 사람의 편이다. 애쓰고 발버둥 칠수록 세상을 얻기는 요원해진다."

 

- 차 한 잔을 제대로 끓이려고 한다면, 차 한 잔을 제대로 끓이려고 열심히 '애써서'는 안 된다. 소기의 결과를 위해 열심히 애쓰는 동안에는 마음이 차를 끓이는 일에 가 있지 않기 때문이다. 두 가지 일을 한꺼번에 할 수는 없다.

- 차를 끓이는 동안에는 단지 차만 끓인다. 다른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차 맛이 어떨지, 차를 제대로 잘 끓일 수 있을지, 그것을 어떻게 내놓을지 걱정하지 않는다. 마음은 다만 차를 만드는 거기에 있다. 찻주전자를 씻는다. 물을 담는다... 불 위에 올린다... 한 동작 한 동작에 마음이 가 있어야 한다. 매 순간의 온전한 조화로부터 행위가 나와야 하는 것이다.

- 자신의 카르마가 부여하는 조건 속으로 더욱 순수하게 흘러들수록 우리의 행위는 절로 일어난다. 거기에는 어떠한 저항도 없다. 행위의 결과에 대해 개의치 않으므로, 초조함이 없다. 행위자가 없으므로, 자의식도 없다.

"행위 속에 있는 무위를, 무위 속에 있는 행위를 보는 자는 참으로 지혜롭다. 그는 행위에 몰두할 때도 아트만(atman, 모든 존재 속에 깃들어 있는 브라흐만의 불씨)의 고요 속에 머물러 있다."

- 이 모든 것은 거짓으로 꾸며서 할 수 없는 일이다. 그것은 더 강한 집착일 뿐이다. 차를 끓이는 데 마음이 없으면서, 자기가 정말 차를 잘 끓인다는 생각에 빠져 있으면서, 온 마음으로 거기에 있는 척할 수는 없다. 지금 이 순간 자기가 있는 그곳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자, 우리의 현주소는 여기다.

 

- 우리는 아직도 온갖 욕망에 빠져 있고 우리가 하는 일은 대부분 거기서 뭔가를 얻기 위함이다. 그런데 자신 아닌 다른 것을 꾸며낼 수는 없다. 그렇다면 어쩔 것인가? 우리가 얼마나 구속된 존재인지를 아는 마당에, 어떻게 하면 우리의 행위를 요가로 승화시킬 수 있을까?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어떻게 하면 확실히 알 수가 있을까?

- 답은, 모른다는 것이다. 진실은 이것이다. 어떤 식으로든 더 이상 에고에 끌려 다니지 않게 될 때까지는, 우리의 모든 행위 속에는 에고가 감추어져 있다는 것! 그러지 않을 '가능성'이란 없다! 복잡 미묘한 동기와 자신이 행위자가 되기 위한 교묘한 술수가 마지막 순간까지 끝없이 끼어들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이 싸움의 흥미롭기 그지없는 부분이다!

- 앞서 나는 영적 행로의 보폭은 각자의 키만큼의 너비라고 말했다. 우리는 한 발짝 내딛다가 땅바닥에 엎어진다. 발걸음이 순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시 일어나서 발을 내딛는다. 그러고는 다시 엎어진다. 우리는 이런 식으로 가고 있는 것 같다. 그러니 자신의 다르마가 무엇인지를 알려고 귀를 기울일 때, '순수한 메시지'를 들을 가능성은 매우 적다. 우리는 '엉뚱한' 메시지를 받는다. 하지만 우리는 공부와 명상과 시행착오를 통해서 점점 주파수를 더 섬세하게 맞춰간다. 그리고 서서히, 자신의 방법이 먹히기 시작하면서, 모든 일에 대한 집착이 차츰 떨어지기 시작한다.

 

- 사실 에고는 당신이 자신을 그것과 동일시할 때만 당신을 가둬놓을 수 있다. 에고가 저쪽에서 제짓거리를 벌이고 있을 때는 눈이 보거나 귀가 듣는 것처럼 그저 에고가 에고 짓을 하고 있을 때는 그것은 단지 어떤 기능을 지닌 물건과 같은 것이 된다. 그보다 흥미로운 일이 있을까!

- 그러는 동안, 우리는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한다. 다음 단계에 할 일을 내다보면서 스스로 물어본다. '다음엔 무엇을 하는 게 옳을까?' 그러고는 마음을 고요히 가라앉히고, 내면의 답에 귀를 기울인다. 가능한 한 마음을 고요히 하고, 가능한 한 귀를 더 기울인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것이 아무래도 가장 높은 곳에서 오는 순수한 메시지는 아닐 수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십중팔구, 그 속에는 아직도 우리의 욕망덩어리가 많이 섞여 있다.

- 최선을 다해서 일단 어떤 결정이 내려지면, 자신이 행위자가 아님을 명심하면서 일을 한다. 일하는 동안에는 뒤돌아보지 않는다. 자기가 옳은 판단을 내렸는지 되씹느라고 시간을 낭비하지 않는다. 결정은 이미 내려진 것. 우리는 지금 그것을 행하고 있다. 자신의 행위에 마음이 가 있게 하라. 일을 마친 후에는, 원한다면 물러앉아서 뒤돌아보고 이렇게 물어볼 수 있다. '그게 옳은 선택이었을까?' 이것은 다른 문제다. 하지만 일을 하는 중에는 오롯이 그것만 하라.  

-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자신을 비판하는 해묵은 내면의 소리에서 자유로워진다. 바보처럼 보일까 봐, 실수할까 봐, 일을 그르칠까 봐 두려워하는 터줏대감인 슈퍼에고 super-ego에 더 이상은 자리를 내주지 않게 된다. 당신도 알게 되겠지만, 슈퍼에고란 개인을 뛰어넘어 존재하는 내면의 주시자 inner witness와 같은 것이 아니다. 내적 주시란 자신이 경험하고 있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기르고자 하는 습관이다. 주시자는 슈퍼에고와는 판이하게 다른 속성이 있다. 그것은 '지켜보기'이다. 분별이 아니다. 분별하는 슈퍼에고는 순간 속에서 행위할 줄 모른다. 나를 뛰어넘어 존재하는 또 하나의 내가 되어 지켜보는 것이야말로 이 순간 속에서 행위하기 위한 핵심이 되어야 한다.

- 그러니까 카르마 요가는 행위하지 않음으로써가 아니라 자기의 행위에 대한 관점을 전환함으로써 자신을 삶의 소용돌이 속에서 구출해 내는 기술이다. 우리의 행위는 더 이상 욕망을 채우는 수단이 아니다. 이제 그것은 영적 수행의 기회가 된다. 결과에 집착하지 않는 연습, 자신이 무엇을 한다는 생각을 없애는 연습 말이다. 우리는 자신이 하는 일을 하면서 그것이 카르마의 바퀴임을, 신의 유희에서 나온 춤사위임을, 우리를 통해 엄정하게 펼쳐지는 법칙임을 늘 인식하면서 하게 된다. 우리는 '우리가' 그것을 한다고 생각하게 만든 것이 단지 우리의 엄청난 자기중심주의였을 뿐임을 깨닫게 된다.

- 자신을 이렇게 행위자가 아니라 자연의 법칙이 펼쳐지게 하는 매개체로 바라보기 시작하면, 우리는 이것이 예전에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흥미롭고 심오한 게임임을 서서히 깨닫게 된다. 크리슈나는 그것을 이렇게 표현한다. "아르주나야, 나는 이 우주에서 해야 할 일이 없다. 이 모두가 내 것이기 때문에 나는 가져야 할 아무것도 없다. 모든 것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럼에도 나는 행위한다."

- 그는 말한다. "봐라, 나는 카르마가 없다. 내가 해야 할 일은 아무것도 없다. 그래도 나는 한다."

에고와 집착이 없는 그 자리에는 행위에 대한 완전히 다른 종류의 동기가 있는 것이 틀림없다.

- 그런데 우리가 다르마에 귀 기울이고 그것을 실천하는 것은, 하나가 되고자 하는 '욕망', 해탈하고자 하는 '욕망', 순복하고자 하는 '욕망'에서 오는 것이다. 거기에는 '집착', 해탈에 대한 집착이 있다. 그것이 우리의 수행을 부추기는 동기이다. 하지만 그게 모두 사실이라고 해도, 해탈하여 아무런 집착도 없다면 그때는 또 무엇 때문에 행위를 한단 말인가?

- 크리슈나는 여기서 우리에게 행위를 하는 완전히 새로운 근거를 보여주고 있다. 인간적 욕망이 없어 '어떤 짓'도 하려 하지 않는 어떤 사람을 상정해 보자. 깨달음조차 원하지 않는 사람 말이다. 그녀는 그것을 가졌다! 그녀는 그것이다! 그녀는 자신을 더 발전시키려고 하지 않는다. 그녀는 이미 거기에 있다. 그녀에게는 도덕적인 욕심이 없다. 그녀는 선과 악을 초월해 있다. 그러니 그녀가 무엇을 '행한단' 말인가? -

- 아난다모이 마 Anandamayi Ma는 인도의 아름다운 성녀이다. 그녀는 그 자리에서 살고 있었고, 그녀의 행위는 완전히 자유로웠다. 하지만 그녀는 병원과 약국과 학교를 세웠다. 아쉬람과 그 모든 봉사행위를 통해 그녀는 대체 무엇을 행한 것일까? 카르마 요가를 한 것일까? 외면적으로는 그런 것처럼 보였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녀의 정신, 그녀의 행위의 동기는 완전히 달랐다. 그녀의 동기는 '동기가 없었다'는 점에서 달랐다. 그녀의 행위 뒤에는 어떤 의도도 없었다. 그녀는 그저 다르마의 표현이었고, 자비 자체였다.

- 그러한 존재, 아난다모이 마나 나의 스승 같은 존재들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행위 뒤에 있는 정신이다. 진정한 스승이란 그 삶 자체가 하나의 선언 -모든 것을 초월하면 어떻게 되는지를 그대로 보여주는 하나의 선언- 인 그런 사람이다. 그리고 스승이 동원하는 모든 겉모습과 행위는, 단지 그것을 보여주는 매개체일 뿐이다. 이런 존재들은 자연의 온갖 힘에 끌려다니지 않는다. 더 이상 몸과 마음과 이성과 감각에 묶여있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부린다. 그런 자리에서는 카르마 요가를 '할' 필요가 없다. 그 자신이 카르마 요가의 표현인 것이다. 

- 메허 바바는 말했다.

"모든 존재와 의미의 핵심을 꿰뚫는 것, 그리고 그 내적 성취의 향기를 내뿜어 진실과 사랑과 순수함과 아름다움을 세상에 표현함으로써 다른 이들을 인도하고 이롭게 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본질적이고 절대적인 가치를 지닌 유일한 게임이다. 이 밖의 모든 성취와 일은 그 자체로서 아무런 영속적 의미도 갖고 있지 않다."

- 요가란 에고의 한계를 뛰어넘기 위해서 자신의 모든 능력을 한 점에 집중시키는 훈련이라고 한다. 그런데 카르마 요가란 또 뭔가? 집안일이나 시장바닥의 일이 신께 이르는 길이 되리라고 누가 생각이나 했겠는가? 속세가 우리를 세속적 집착의 거미줄로부터 풀어주는 도구라니! 이 얼마나 기상천외한 뒤집기인가! 갑자기 행위가 우리를 거미줄에 걸리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풀어준다니! <기타>는 말한다.

"자신의 모든 일 속에서 신을 보는 자는 진정 신께로 가리라."

- 자신의 일을 하나의 영적 수행으로 삼고자 목표를 갖고 시도하는 초기에는, 여전히 집착과 욕망의 자리로부터 그렇게 하기 쉽다. 대자유나 깨달음에 이르고자 하는 욕망도 별수 없이 욕망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파야 upaya, 곧 '방법'이 먹히기 시작하면, 우리는 이 모든 것의 밑바닥에 깔려 있는 지혜와 이치를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다. 우리는 자신의 본성과 존재의 이치를 새로운 눈으로 발견하게 된다. 그와 함께, 자신의 삶을 더욱더 객관적으로, 나라는 울타리를 뛰어넘어 이해하게 된다. 나라는 울타리를 뛰어넘는다는 것은, 일에서 발을 뺀다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덜 감정적, 덜 세속적인 눈으로 보고, 행위자라는 느낌을 덜 가진다는 뜻이다. 우리는 계속 자신의 삶을 살아간다. 가능한 한 완벽하게, 하지만 점점 더 초연하게 갈수록 어떤 동기나 욕망 없이 행위하게 된다. 깨달음 같은 고상한 욕망조차 없어진다. 그저 행위하는 것이 다르마이기 때문에 행위한다. 이것이 카르마 요가의 핵심이다.

- 크리슈나가 말했다. "네 영혼이 믿음을 지니고 있으니 너에게 가장 깊은 비전을 말해주겠다. 이것은 계시이고 지혜이다. 이것을 알면 너는 죄에서 풀려난다."

이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잘 보라. 크리슈나는 이제 '기법'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그는 아르주나에게 신께 다가가기 위해 행할 수 있는 요가의 다양한 기법을 가르치고 있다. 이로써 크리슈나는 이 대화의 가장 매력적인 부분을 시작한다. 크리슈나가 이야기하고 있는 '계시와 지혜'는 야나 요가의 길, 곧 '생각하는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이해의 길'에 속한다.

 

- 주 : jnana yoga의 발음법은 간단치 않다. 초기에 국내에 번역될 때는 즈나나로 잘못 표기됐으나 실제 발음은 갸나와 야나의 중간쯤이다. 이 책에서는 람 다스의 강연에서 들리는 대로 야나로 옮겼다.


- 우리가 어떤 수행을 하고 있든, 그것을 완전히 이해하려면 크리슈나가 이야기하고 있는 '계시와 지혜'를 적용해야 한다. 우리가 수행에 대해 '생각'하고 '이야기'할 때, 그 생각과 말은 일종의 야나 요가이다. 내가 당신에게 카르마 요가나 박티 요가에 대해 설명하면, 그 설명은 야나 요가의 기법이다. 헌신의 요가를 '이해'하거나 명상을 하는 이유를 '이해'하거나 만트라를 암송해야 하는 이유를 '이해'하려면, 진실과 비진실을 알아내는 일종의 분별지를 길러야 하는데, 그 분별지를 기르는 길이 곧 야나 요가이다. 명상을 '하는' 것은 명상 수행이고 헌신을 하는 것은 헌신의 수행이지만, 그것에 대해 '이야기'할 때, 우리는 야나 요기가 되는 것이다.

- 살펴보면, 여러 가지 영적 수행법들은 서로 의존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들은 독립적이지 않고 서로 손을 잡고 일한다. 힌두교 전통이나 다른 수행 전통들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예컨대 남방의 소승불교에서 '올바른 이해(지혜)'인 반야는 하나의 영적 수행법의 세 측면 중 하나이다. 지계와 삼매三昧가 나머지 둘이다. 지계는 정화 과정이고, 삼매는 마음의 집중이다. 이 세 측면은 일종의 나선형을 그리며 서로 꼬리를 물고 협동작용을 한다. 수행자는 이 세 가지를 반복한다. 이들은 서로를 보완하고 보강해서 한 바퀴씩 돌 때마다 조금씩 올라간다. 그것은 상승작용을 일으킨다.

- 당신이 이런 책을 집어 들었다는 것은, 당신은 이미 상당한 정도의 지혜를 터득했다는 증거일 수 있다. 당신은 눈에 보이는 현실의 게임 너머에 뭔가가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 그래서 당신은 이 책을 읽고 명상을 시작해 보기로 마음먹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은가? 명상을 통해서 마음이 고요해지면, 더 깊은 지혜가 생길 것이다. 그러면 그 깊어진 지혜가 당신 내면의 불순물을 알아차리게 만들 수 있다. 지혜는 그것을 정화하는 작업으로 당신을 안내할 것이다. 당신이 더 순수해지면, 그것이 명상을 더욱 깊어지게 할 것이다. 그리고 명상이 깊어지면, 그것이 더 밝은 지혜를 길러줄 것이다. 이런 식으로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 이렇게든 저렇게든, 야나 요가의 모든 행법들은 우리의 지적 능력이나 마음의 여러 수준을 동원하여, 마침내는 마음이 파악할 수 없는 무엇에 다다르게 한다. 그것을 높은 지혜라고 하고, 높은 지혜는 지식과는 전적으로 다른 무엇이다. 지혜는 지식과 비슷하지만, 그보다 훨씬 높은 무엇이 아니라 전혀 성질이 다른 것이다. 지식은 지성의 기능이다. 높은 지혜는 마음과 지성 너머에 있다. 그러므로 높은 지혜야말로 우리가 추구하는 바이며, 그것은 마음 밖에 있다. 하지만 우리는 거기에 다다르는 (혹은 다다른다고 생각하는) 길을 찾아야 하고, 지식과 지성의 길은 그 길들 중의 일부이다.

- 모든 방법에는 함정이 있다. 그러니 지성을 도구로 사용하는 데에도 난관이 있어 보인다는 말을 일찌감치 해두는 게 좋겠다. 지성은 싯디 siddhi, 곧 요기의 초능력과도 같아서, 모든 능력이 그렇듯이 매우 유혹적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온갖 매력적인 것들은 우리를 쉽게 유혹할 수 있다. 하지만 아는 것은 지혜가 아니다. 그것은 지식이다. 그리고 무언가를 안다는 유혹은, 결국 우리를 내면이 아니라 바깥으로 데려다 놓는다. 우리는 아는 것의 세계에 갇힌다. 세속적인 지식을 더 많이 끌어모으느라 바빠진다. 자신의 더 깊은 지혜를 여는 대신, 논리적인 마음의 미로 속으로 빠져들어 간다. 그리하여 탈출하기 위해서 손에 잡았던 바로 그 도구가 우리의 함정이 되어버린다. 앎이 있는 곳에서는 언제나 틀림없이 '아는 자'와 '알려지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문까지 곧장 달려가서 문을 두드릴 수는 있지만, 자신이 안다는 것을 아는 한, 그 문을 통과할 수는 없다. 문지기가 "미안하지만 안 돼!" 하고 소리친다. 아는 자와 알려지는 것이 하나가 될 때에만 그 '하나'가 문을 지나갈 수 있다. 무엇이든 아는 것이 있는 자는 문을 지날 수 없다. 이것은 지성의 길을 가는 '야나' 요기에게 궁극의 희생은 모든 앎의 포기임을 뜻한다.

- 이렇게 말하기는 하지만, 어떤 식으로도 지성을 비하하려는 뜻은 없다. 나는 다만 생각이란 것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바꿔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성은 매우 섬세하고 훌륭한 도구이다. 그것은 인간의 강력한 장비이고 어떤 면에서는 우리의 여행길에 지니고 다니며 쓸 수 있는 가장 훌륭한 도구이다. 다만 그것이 어떤 여행인지를, 그리고 지성은 주인이 아니라 종이라는 점을 철두철미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자신이 찾아낸 온갖 멋진 것들에 매혹되거나 '천기'를 다 파헤치려는 에고의 미혹에 빠지지 않고 자신의 지성을 솜씨 있게 부릴 수 있게 된다. 그리하여 마침내 우리는 자기 마음의 포로가 되는 상태를 종식시킬 수 있게 되는 것이다.

- 지식은 최대한 순수하게, 그리고 강렬하게 집중시켜서 사용하기만 하면 틀림없이 관문을 돌파하게 해 준다. 아인슈타인은 말했다. "나는 이성적인 마음으로 우주의 근본법칙을 깨닫게 된 것이 아니다." 그는 분명히 자신의 이성이 고도의 명쾌성에 이르도록 마음을 가다듬었다. 그것은 그를 경계까지 데리고 갔다. 그러고는... 아하! -이것이 바로 지혜가 나오는 곳이다. 지혜는 '아...!' 속에 있다.

- '보여주는 만큼'밖에 스크린을 보지 못한다는 점이다. 슬라이드가 그림으로 꽉 차 있다면, 스크린을 볼 수가 없다. 하지만 슬라이드에 아무런 이미지도 없어서 완전히 투명하다면, 스크린을 제대로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 자, 이제 이것을 하나의 모델로 자신에게 적용시킬 수 있다. 자신의 내면에 광원이 있다고 상상해 보자. 그것을 아트만이라고 부를 것이다. -아니면 우리는 지바 jiva, 곧 개인이니까 지바트만 jivatman이라고 하자. 그것은 당신의 아트만이다. 그것은 우주의 모든 빛 중에서 아주 작은 한 줄기의 빛이다. 그것은 당신의 중심에 있다. 그 중심의 신경생리학적 위치가 어딘지는 따지지 말기로 하자. 그저 그 광원이 당신 내부에 있다고 상상하자. 그것은 모든 것, 곧 온 우주인 백색광을 방사한다. 하지만 당신의 스크린에 무엇이 비추어지는지는 그 빛이 통과하는 여러 겹의 반투명막에 의해 정해진다. 그 막이란 당신의 마음, 생각하는 마음의 막이다. 그 막은 생각과 감각의 욕망과 기분이다. 그것은 당신 인격의 여러 부분들이다. 그것을 아카라 ahamkara, 곧 에고의 구조물이라 부른다. 이것은 당신이 외부세계에서 발견하는 것은 단지 당신 자신이 만들어낸 슬라이드의 그림자 쇼일 뿐임을 의미한다.

- 물론 이것이 새삼스러운 사실은 아니다. 누구나 이런 이야기를 들어보았을 것이다. 이것은 현대 심리학이 흔히 사용하는 비유이다. 심리학자라면 누구나 동기가 인식에 미치는 영향을 증명하는 실험 사례를 열 손가락으로 꼽고도 남을 정도로 열거할 수 있다. 길을 걸어가는데 배가 몹시 고프다면 당신의 눈에는 먹을 것만 보일 것이다. 도넛 가게와 피자 가게만이 눈에 띈다.  

- 에고인 아함카라로부터 지능인 마나스, 붓디, 심지어는 아트만에까지 이르는- 에 대해 상상할 때, 그것이 고정되고 단단한 것이라는 생각에 갇히지 말라. 그것은 오히려 오펜하이머의 전자와도 같아서 끊임없이 유동하는 에너지 패턴이다. (그것은 일시적으로 단단한 것처럼 '보이게' 하는 강렬함과 명료함은 지니고 있으나, 고정된 것은 아니다.)

- 그러니까 먼저 감각의 대상이 있고, 그다음에 감각 자체가 있다. 그다음엔 생각, 곧 저급한 마음인 마나스가 있다. 그다음에 아함카라, 곧 에고의 구조물이 있다. 이것은 이 온갖 생각의 패턴들이 지향하는 방향, 혹은 지점으로서, 우리의 주변세계에 대한 우리의 모델을 나타낸다.

- 그다음의 동심원은 붓디 buddhi라고 불리는 '높은 지성'이다. 이것은 우리 본연의 성품 중에서 내면세계의 높은 영역을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부분이다. 이것은 종종 '제3의 눈'의 지혜와 연결된 것으로 간주되기도 하지만, 사실 붓다는 일종의 '시소'와 같은 속성을 지니고 있어서 양쪽으로 다 갈 수 있다. 즉, 저급한 마음에 빨려 들어가서 세상으로 나가기도 하고 내면으로 돌아와서 빛을, 아트만을, 그 모든 것의 근원을 향하기도 한다. 붓디가 처음으로 외부로부터 내면으로 눈을 돌리면, 내면의 빛을 인식함과 함께 지혜의 동이 터온다. 거기서부터 붓디는 지성을 더 깊은 내면의 탐사에 이용하기 시작한다.

- 하지만 붓디는 여전히 우리의 개체성의 일부분이다. 그것은 여전히 분리된 '나'를 반영하고 있다. 서양에서는 이것을 영혼(soul)이라고 부른다. 기독교 신비주의 문헌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너희의 눈이 하나일 때 너희 존재가 빛으로 가득하리라." 그것이 붓디이다. 그것은 아직도 우리의 일부분이다. 하지만 그것은 바로 경계선 위에 서 있다. 그것은 정신과 물질 사이에 있으며, 양쪽을 다 지향할 수 있다.

- 그다음에, 가장 안쪽의 동심원이 아트만이다. 바가바탐은 이렇게 말한다.

"아트만, 곧 신성한 자아는 육신과 별개이다. 이 아트만은 둘 없는 하나이며, 순수하고, 스스로 빛나며, 속성이 없고, 자유로우며, 무소부재하다. 그것은 영원히 주시하는 자이다."

 

- 생각해 보라. 그것은 바로 지금 당신 내면에 있다.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다. 획득해야 하는 무엇이 아니다. 그것은 이미 거기에 있다! 선가禪에는 이런 가르침이 있다. "빛나는 보석이 네 손안에 있다." 그것은 '바깥'의 어딘가에 있는 것이 아니다. 당신은 그것을 이미 가지고 있다. 당신은 이미 그것이다. 다만 당신이 스스로 그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일 뿐이다. 희한하지 않은가?

- 신약성경에서 누가는 이렇게 쓴다. "바리새인들이 하늘의 왕국이 언제 오느냐고 묻자, 그가 이렇게 대답했다. '하늘의 왕국은 (감각을 통해서) 보이게 오지 않으리니, 사람들이 여길 보라! 저길 보라!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늘의 왕국은 너희 안에 있기 때문이다." 너희 '안에'! 하지만 당신은 그 왕국에서 살고 있는가? 그 내면의 당신과 당신이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당신의 사이에는 온갖 생각의 장막이 드리워져 있다. 온갖 색깔과 형상이 슬라이드 필름처럼 빛을 걸러 당신이 경험하는 세계를 만들어낸다.

- 우리가 방금 했던 모든 과정, 곧 슬라이드 영사기 모델을 만들고 그것을 종류별로 설명한 것도 야나 요가의 한 형태이다. 우리는 지성을 작동시켜서 모델을 만들었다. 그런데 그 모델은 지성 너머의 것을 가리킨다. 이것이 정확히 야나 요가의 과정이다. 저급한 지능인 마나스를 가지고 공부를 시작한다. 경전을 공부하고, 스승에게서 배우고, 책을 읽고, 수련회에 참가하고, 지식을 끌어모은다. 그것들은 지혜가 아니다. 우리는 그것이 그곳에 다다르도록 도와줄 '수레'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우리는 지성을 사용하여 지식을 모은다. 다음 일을 준비하는 것이다. 그런데 '다음 일'의 중요한 부분이 그 모든 지식을 버리는 것임이 밝혀진다. 그것을 놓아버려야 한다. '앎'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또 하나의 집착일 뿐이다. 지식은 버릴 수 있는 것이다. 본분을 다했으니 그것을 그만 버리라. 훗날 우리는 그것이 여전히 거기에 있음을 깨달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거기 있다. 우리는 애지중지 부지런히 끌어모았던 멋들어진 그 지식들을 진정으로 놓아버려야 한다. 그러면 결국, 그것과 함께 있을 수 있는 완전히 새로운 방식이 떠오를 것이다. 

- 지식이란 화려한 옷차림과도 같다. 지식은 멋지고, 지식을 과시하는 것은 재미있다. 내가 하버드 대학 교수였을 때, 우리는 둘러앉아서 서로 자신의 지식을 과시하곤 했다. 정말 신나는 일이었다! "난 이런 걸 알아." "그게 어디에 나오는지 아니?" "그럼, 최신 연구논문에서 봤지." 우리의 지식은 '놀라웠다'! 하지만 안을 들여다보면, 나는 내 '앎'과 내 '존재'사이에 상당한 불일치가 존재함을 알 수 있었다.

 

- 지식은 '알' 수 있다. 하지만 지혜는 아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되어야' 한다. 나는 내가 위선적이고 절망적으로 끔찍하게 무지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주변의 모든 사람들에게 내 지식으로써 감언이설을 쏟아냈다. 지혜가 없는 지식은 절망으로 막이 내린다.

- 사실 어떤 발달단계에서든, 우리는 오직 한정된 만큼의 지식밖엔 써먹을 수가 없다. 그것을 넘어서면 그릇이 넘칠 뿐이다. 우리는 그것을 다 빨아들이지 못한다. 우리 '존재'가 그만큼 성장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세 살짜리 아이가 복잡한 수학공식을 욀 수는 있지만, 그것이 공식을 이해한다는 뜻은 아니다. 사람의 내적 존재와 지식의 수준 사이에는 일정한 균형이 유지되어야 한다. 그래야 그 지식이 유용해진다. 몽테뉴 Montaigne는, 마음속에 너무 많은 지식을 집어넣는 것은 나무에 물을 지나치게 주는 것과 같다고 했다. "온갖 것으로 가득 찬 마음은 자신을 해방시킬 힘을 잃고 그 무게에 짓눌린다."

- 구르지예프는 말했다.

"존재와 어울리지 않는 지식은 클 수가 없고 자신의 진정한 필요에 부합하지 않는다. 그것은 언제나 다른 쪽의 무지를 수반한 한쪽의 지식, 전체에 대한 무지를 수반한 한 부분의 세부적 지식, 본질에 대한 무지를 수반한 견해가 된다."

그는 또 이렇게 말했다.

"지식은 한 중추, 사고중추의 기능일 수 있다. 그러나 이해는 '여러' 중추의 기능이다. 사고기관이 무엇을 '알' 수는 있을 테지만, '이해'는 그에 관련된 것을 느끼고 감을 잡을 때만 일어난다."

그의 말은, 지혜를 향해 갈 때 우리는 지성으로부터 직관으로, 무엇에 대해 안다는 생각으로부터 만물의 상호연결성에 대한 직감을 향해 움직여간다는 것이다.

 

- 직관적 지혜란 어떤 것과 하나가 됨으로써 관념을 초월한 이해를 터득하는 것이다. 그것이 사물을 더 깊게 이해하는 방식이다. 그것이 지혜가 되는 길이다.

- 알고자 하는 우리의 욕망, 즉 확실성을 확보하고자 하는 욕망은, 직관이 발달하지 못하게 가로막는 하나의 장애물이 된다.

 

- 라마나 마하리쉬는 지식과 장애물에 관해 멋진 말을 했다.

"배움이 적은 사람들에게는 아내나 자식 등이 가족을 이루지만, 많이 배운 사람에게는 마음속의 무수한 책들이 가족이다. 그것은 요가에도 장애물이 된다."

- 라마 크리슈나는 말했다.

"오로지 두 부류의 사람들만이 자아에 관한 지식을 얻을 수 있다. 배운 것, 다시 말해서 남에게서 빌려온 생각들로 마음이 꽉 차 있지 않은 사람과, 모든 과학과 경전을 연구한 후에 자신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이 그들이다."

 

- 후자는 야나 요가의 길이 제대로 먹혀드는 단계를 가리킨다. 왜냐하면 '아무것도 모르기'야말로 이 길의 다음 단계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배우고 배우고 또 배워서 마침내는 배운 그 모든 것들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거쳐야 할 길이다. 우리는 지성의 모델을 사용하여 길을 간다. 지성은 그 용도로는 정말 유용하다. 하지만 그 모델에 매달리지 말아야 한다. 그것을 계속 놓아 보내야 한다. 지성이 만들어낸 것들을 놓아버려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그것들이 길을 가로막는다.

- 나는 대개 사원에 앉아서 나만의 호흡명상을 하곤 했다. '들이쉬고 내쉬고... 들이쉬고... 내쉬고...' 그러면 '원의 면적은 원주율 곱하기 반지름의 제곱', 혹은 '아모 아마스 아마트 amo amas amat' 따위가 튀어나온다. 집안 청소를 엄청나게 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이제 나는 마음속에 온갖 잡동사니를 주워 담는 짓을 하지 않도록 조심한다. 나중에 모두 다시 치우려면 고생이니까.

- 동양의 전통에는 마음속의 난장판을 청소해 주는 기법이 있다. 불교의 심리학 체계라고 할 수 있는 아비담마 Abhidhamma는 매우 분석적인 기법을 사용하여 존재의 경험을 탐구한다. 그러고 나서는 바로 그와 동일한 분석 과정을 통해 그 과정 자체로부터 당신을 빠져나오게 해 준다. 아주 멋진 과정이다. 기본적으로 아비담마는 정교한 분류체계이다. 그것은 클립을 넣는 곳, 고무밴드를 넣는 곳, 핀을 넣는 곳 등, 작은 서랍이 무수히 달린, 마치 옛날에 사용했던 비둘기집 모양의 수납장과도 같다. 당신이 이런 식의 수납장을 좋아하는 성격이라면, 아비담마는 그야말로 환상적일 것이다. 아비담마의 서랍에 들어가지 않는 것은 없다. 그것은 책상 밑에도, 뒷면에도 온통 작은 공간들이 있고, 비밀서랍도 달려 있는 놀라운 수납장이다.

- 이 체계의 유용한 점은, 모든 것을 제거할 수 있는 방법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당신의 마음이라는 수납장 위는 언제나 먼지 한 점 없이 깨끗하다. 


- "나는 저것이 아니다" 하고 모든 것과의 동일시를 하나씩 떼어내는 대신, 모든 것을 자신 속으로 품어 안는 수행을 할 수도 있다. 즉, 경험하는 것마다 "네띠, 네띠" 하는 대신에 "타트 트밤 아시 Tat Twam asi", 즉 "나는 그것이다"라고 하는 것이다. 자신이라고 보는 그것을 확장시키고 확장시켜서, 마침내는 모든 것이 자신 속에 포함되게 하는 것이다.

- 람 티르타 Ram Tirtha라는 이름의 아름다운 성자는 그런 경지가 어떤 느낌인지를 이렇게 묘사했다.

"나는 형체도 없고, 경계도 없다... 공간도, 시간도 초월한다. 나는 모든 것 안에 있고, 모든 것이 내 안에 있다. 나는 우주의 환희다. 모든 곳에 내가 있다. 나는 사트 sat(절대존재), 치트 chit(절대의식), 아난다 ananda(절대지복)이다. 타트 트밤 아시, 나는 그것이다."

 

- 그는 내면으로부터, 지금으로부터 말하고 있다. 그는 내면으로 깊숙이 들어가, 자기 자신 안의 그 자리를 체험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지금 우리가, 우리 '모두'가 누구인지를 말해주고 있다. 우리는 공간과 시간 너머에 있으며, 형체와 경계도 초월해 있다. 그것이 우리의 정체이다. 삿, 칫, 아난다.

- 이 두 가지 방법 -'네띠, 네띠'와 '타트 트밤 아시'- 은 서로 반대극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하지만 이 둘은 결국 같은 곳에서 만난다. 한쪽의 수행에서는 모든 것으로부터 자신을 객관화시키고, 다른 쪽의 수행에서는 모든 것을 품어 안는다. 하지만 그것들은 우리를 같은 곳으로 데려다 놓는다. 텅 빈 상태? 충만한 상태? 모두 같다.

- 이 만남에는 엄격한 형식이 있다. 우리는 들어가서 이마가 땅에 닿도록 여러 번 절을 올린다. 그러고는 제자의 방석에 앉는다. 그는 종과 방망이를 들고 맞은편에 앉아 있다.
그가 묻는다. "박사, 귀뚜라미 소리에 어떻게 당신의 불성을 깨닫겠소."

그래, 나는 이 순간을 위해서 몇 시간을 수행했지. 나는 작전을 짰다. 그가 질문을 하면, 나는 마치 밀라레빠가 동굴 앞에 앉아서 우주의 소리에 귀 기울일 때 그랬던 것처럼, 귀 뒤에 손을 대리라.

'나는 힌두교를 믿는 유대인이고 그는 일본인 불교도니까, 대답은 티베트 식으로 해주리라. 그러면 최소한 그를 어리둥절하게는 만들 수 있을 테지.'

그렇게 생각하고 최소한 그를 약간은 놀려줄 수는 있으리라고 기대했다. 그래서 그가 공안을 물었을 때, 나는 귀 뒤에다 손을 갖다 댔다. 그는 종을 들면서 나를 쳐다보더니 "60퍼센트." 하고는 종을 울려 대담을 끝냈다.

- 물론, 나는 거기서 완전히 빨려 들어가 버렸다. 내 안의 유대인 성취가는 그 나머지 40퍼센트를 기필코 성취해야만 했다!

- 몇 달 후, 나는 멕시코 산타페의 한 사우나에서 앨런 긴즈버그와 바그완다스와 한 티베트인 비구니와 함께 목욕을 하고 있었다. 벌거벗고 사우나에 둘러앉으니, 우리는 정말 색깔이 울긋불긋했다. 그때 나에게 전보가 왔다. 남캘리포니아의 볼디산에 있는 사사키 노사의 선원에서 온 것이었다. 거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정진 수련회가 시작됩니다..." 날짜가 적혀 있었는데, 이틀 후였다. "연중 수련회 중에서도 가장 힘든 수련입니다. 수련회는 아흐레 동안이며, 당신의 자리가 예약되어 있습니다."

나는 생각했다. '맙소사! 그걸 아흐레나 한다고?'   

- 지금 생각하면, 그 모든 것은 단지 또 하나의 지나가는 순간이었다. 나는 잠시 의식이 맑아지는, 소위 작은 견성 체험을 한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어떤 것에 강한 집착을 가지고 있다면, 습관적인 생각과 사념이 깊이 각인되어 있고 거기에 집착을 놓지 않고 있다면, 강렬한 수행이 -참선이든 쿤달리니 요가든 환각제 체험이든 뭐든 간에- 잠시 동안은 그런 집착을 떠나게 해 줄지 모르지만, 결국은 열이면 열, 이내 옛 습관 속으로 되돌아오고 만다. 물론 아주 약간 달라진 모습으로 돌아온다. 하지만 돌아온다. 변성이 완성되지 않은 것이다. 결혼식에 가긴 했는데 예복을 입지 않아서 쫓겨 나온 꼴이다. 
그렇긴 해도 씨앗은 뿌려지고, 깨어남은 시작되었다.

- 우리는 야나 요가의 수행법들에서, 합리적 마음의 길을 통해 합리적 마음 밖으로 탈출할 수 있게 해주는 도구들에 대해 살펴보았다. 흥미로운 대목은, 그것들은 지성을 사용하여 지성의 지배로부터 자신을 해방시킬 수 있도록 용의주도하게 고안된 수행체계라는 것이다. 교묘하지 않은가?

- 이런 기법들, 야나 요가의 수행법들을 따라 마음을 내면으로 돌리기 시작할 때, 지성과 지식이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것은 우리 내면에 빛, 혹은 순수 의식, 혹은 만물의 이치에 대한 앎이 있다는 느낌이다. 그것은 원래부터 우리 안에 있던 것이다. 그러니까 그것은 뭔가 새로운 것을 얻는 것이 아니라 그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은 것들, 우리의 길 앞에 끼어드는 것들을 모두 버리는 것에 관한 일이다.  

- 우파니샤드는 말한다.

"보는 자, 유일한 그것은 이원성 없는 대양이다. 이것은 지고의 길, 가장 고귀한 상 가장 높은 세계, 가장 귀한 축복이다. 이 축복의 한 귀퉁이에 의지하여 뭇 존재들이 살아간다."

- 불심을 묘사하는 불경의 한 구절은 말한다.

"형상과 느낌과 지각과 감각과 습관적 성향과 의식으로부터 해방된 그는, 대양처럼 깊고 측량할 수 없으며 상상할 수 없다."

- 중국의 3대 조사 승찬은 그 경험을 이렇게 썼다.

"이 자연의 세계에는 나도 없고 나 아닌 것도 없다. 이 세계의 실재와 몸소 어울리려면, 의문이 일어날 때 그저 이렇게 말하라. '불이不二'. 이 불이 속에서는 그 어떤 것도 떨어져 있지 않다. 언제 어디서든, 그 어떤 것도 분리되어 있지 않다. 도는 언어 너머에 있다. 그 안에는 어제도 내일도, 오늘도 없다."

- 나는 과학적 전통에 뿌리를 둔 서양인이어서, 물리학 모델 속에서 발견되는 브라흐만의 반영에 더 끌린다. 그것은 내 안에 있는 야나 요기에게 더 큰 호소력을 발휘한다. 이 모델은 우리가 물질의 미세한 단위로 자꾸자꾸 들어가면 우리의 몸처럼 보이는 것, 혹은 이 책이나 공기나 화성처럼 보이는 것들이 모두 미세한 에너지 단위로 변한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이 극미한 에너지 차원(오펜하이머의 말처럼 이것, 혹은 저것이라고 부를 수 없고 다만 이런 혹은 저런 종류의 에너지라고 할 수 있을 뿐인 차원)까지 내려가면, 우주 만물은 바로 이것으로 만들어져 있으며, 매 순간 그것은 완벽히 서로 맞바꾸어질 수 있다. 나의 전자는 당신의 전자나 별의 전자와 분리할 수 없다. 모두가 완전히 동일하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은 상호연결되어 있다.

- 우스운 것은, 우리가 그것의 분리된 일부분으로 존재하는 일에 더 이상 집착하지 않게 되면, 우리는 그 모두의 일부가 된다는 사실이다. 그때 우리는 그 주체로서 그 '모든 것'을 알게 되며, 모든 곳에 동시에 있게 된다. 왜냐하면 우리는 더 이상 분리성에 의해 시공간 속의 한 점에 붙박여 있지 않기 때문이다. 형이상학이 그렇게 말하고, 물리학이 그렇게 말한다. 내 내면의 모든 수행 경험이 그렇게 말한다. 마하라지가 늘 들려주던 경구도 그렇게 말한다. "수브 에크 sub ek(모두가 하나다). 람 다스, 모르겠어? 모든 게 하나야. 수브 에크!"

- 모두가 하나인 그곳에 머물 때, 그곳의 속성은 지복의 느낌이다. 프랭클린 메릴 울프의 말을 빌자면, '지극한 만족 상태'이다. 그는 미국 과학자 타입의 흥미로운 인물이다. 그는 캘리포니아 론스타에 있는 작은 오두막에서 아내와 함께 살았다. 40대 초반이었던 1937년에 그는 이런 체험을 했다. 그는 오두막 안에서 명상을 많이 했다. 그는 이렇게 썼다.

"나는 곧 지배적인 어떤 느낌과 함께 의식이 깊어지고 있는 것을 감지했다. 그것은 지극한 만족 상태였다. 느껴지는, 혹은 느낄 수 있는 모든 감각으로써 모든 것을 '얻으면', 욕망은 그저 떨어져 나가 버린다. 이런 상태와 함께 있으면 이전에는 욕망의 대상이었던 다른 모든 상태는 이에 비해서는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세속적인 세계는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살아 있으며 만물을 감싸고 있는 신성 그 자체의 임재만이 남아있다."

- 그가 니르비칼파 사마디에 완전히 몰입해서 일정 기간이 지나면 (마하라지는 43일이라고 했고, 나는 21일이라는 주장도 들은 적이 있다.) 몸이 해체된다. 육신을 돌볼 자가 거기에 없기 때문에 그저 무너져 내리는 것이다. 이것은 몸을 떠나는 흥미로운 한 방식이다.

- 이와는 또 다른 부류도 있다. 그 상태에서 머물지만, 현상계의 존재는 지속된다. 단지 다른 방식으로, 이것은 브라흐만이 인간의 형상으로 -와서 나타나는 것이다. 아무도 돌아온 것 같지 않지만, 거기에 뭔가가 있다. 그런 존재에게는 게임의 룰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의 자비는 만물을 두루 감싸기 때문이다. "이것은 좋으니까 해야만 해"라든가, "이것은 나쁘니까 해서는 안 돼!" 하는 식의 틀은 모두 우리의 한정된 시야로부터 나온다. 그러나 이 자비는 그 모든 것을 아우르는 전체에 대한 그의 총체적인 의식으로부터 나온다.

- 트룽파 린포체도 그것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는 그것을 '못 말리는 지혜(Crazy wisdom)'라고 불렀다. 그는 못 말리는 지혜란 '상식'에 입각한 착실한 사고방식이나 자아 같은 것을 찾아볼 수 없는 터무니없는 지혜라고 말했다. 못 말리는 지혜는 난폭하다. 사실 그것은 보살의 마지막 영적 단계의 역동성을 최초로 표현하고자 하는 조건화되지 않은, 관념을 넘어선 벌거벗은 마음으로 뛰쳐나오려는 노력이다.

- 하쿠인의 선시 -우리는 교토의 절에서 새벽 4시마다 이 선시를 읊었다- 는 이렇게 말한다.

"내면으로 눈을 돌려 자신의 진정한 본성을 보면, 참자아는 무아이다. 우리 자신의 자아는 무아이며, 우리는 에고와 영리한 말을 초월한 존재다. 그때 인과의 합일에 이르는 문이 활짝 열린다. 둘도 아니고 셋도 아닌 길이 눈앞에 곧바로 펼쳐져 있다."  

- 하지만 그런 희생은 자연스럽게 우러나온 것이 아닌 경우가 많다. 자발적으로 우러나와서 하게 해 줄 직접적 체험이 없기 때문이다. '이것을 하는 것이 나의 의무다' 하는 생각에서 희생제사를 드리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 힌두교 전통에는 브라만이 날마다 행해야 하는 다양한 종류의 희생, 야갸 yagya가 있다. 브라흐마 야가는 경전을 배우고 전파하는 것이다. 피트리 Pitri 야가는 죽은 조상들에게 물과 쌀을 바치는 것이다. 브후타 Bhuta야가는 말 못 하는 짐승과 새들을 먹이는 것이다. 느리 Ni 야가는 손님이나 불쌍한 사람을 모시는 것이다.

- 느리 야갸를 살펴보자. 이는 참으로 놀라운 관습이 아닐 수 없다. 마하라지는 말했다.

"너에게 오는 사람은 누구든 너의 손님이다. 그를 사랑하고 존경하고 대접하라. 배고픈 사람을 먹이는 것이 진짜 예배다. 먼저 보잔 bhojan(음식)으로, 그다음엔 바잔 bhajan(기도)으로."

인도에서 친구의 집에 들어서면 나는 신으로 대접받는다. 나는 마치 신이나 된 것처럼 사랑과 존경과 음식으로 대접받는다. 그것은 나이기 때문이 아니다. 누구든지 그 문으로 들어온 사람은 똑같이 대접받는다. 그것은 그들이 삶을 영성화하는 수행법의 일부이다. 자기 집으로 들어서는 모든 손님이 신으로 변하는 것이다. 그것은 뜻밖의 손님으로 온 유대교의 엘리야와도 같다. 그래서 인도인들은 우리를 환영하고, 예배하고, 우리의 이마에 틸락 tilak(재, 염료 등을 이마에 묻히는 힌두식 장식)을 찍어주고, 선물을 주고, 특별한 자리에 모신다. 단지 우리가 그들을 방문했다는 이유만으로! 이것은 자기 집을 방문한 존재를 바라보는 완전히 새로운 방식이다. 이것은 하나의 영적 수행법이다.  

- 앞의 두 줄은 이런 뜻이다. (브라흐만을 '신'으로 옮겨 본다.)

'이 음식을 먹는 동안, 이 음식은 신의 일부임을 깨달으라. 모든 형상 배후에 있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 또한 보이지 않는 신의 일부임을 깨달으라.'

지난번 식사 때 그대는 그것을 깨달았는가? 그대가 그것을 음식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때도, 사실 그것은 진실로 밀도 높은 영 spirit인 것을.

- 오, 하지만 그것이 다는 아니라고 만트라는 말한다. 음식도 신이지만, 그대가 음식을 살라 바치는 불(그것은 음식에 대한 허기의 불, 욕망의 불, 또한 동시에 그대가 끼얹는 버터기름에서 타오르는 제단의 신성한 불일 수도 있다), 그것 또한 신의 일부이다. 그대 시장기의 불, 그것이 그저 불이라고 그대는 생각했는가? 아니다, 그 불은 신이다. 그러니 지금 그대는 신으로써 신을 먹이고 있는 것이다.

- 아, 하지만 아직도 끝난 것이 아니다. 그대는 누가 그것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그대'가 그것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그대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그대가' 음식을 먹으려고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아니다, 따지고 보면 그대 또한 신이다. 그러니 신의 불에다 신이 신을 바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누구에게 바치고 있는가? 그 모든 존재들은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신들과 그 모든 것? 그 모든 것의 '그’는 무엇을 가리키는가? 그것 역시 신이다. 굉장하지 않은가?

- 그러니까 그대는 신의 불에 신을 바쳐서 신께 공양하는 신인 것이다. 그것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있다는 뜻이다. 알겠는가? 모든 것이 환영이다. 그 모두가 신께서 신과 노는 짓거리이다. 모두가 거룩한 릴라 lila(신의 유희, 모노드라마)이다. 그런데 그대는 그저 자기는 막 식사를 할 참이었다고만 생각했었다! 그렇지 않은가?

- 이것이 이 만트라의 전반부이다. 후반부는 영이 우주에 자기 모습을 드러내는 다양한 방식 앞에 음식을 바친다는 뜻이다. 음식은 '형상을 띤 신'이라는 뜻인 '구루'에게 바쳐진다. 창조자인 구루, 보존자인 구루, 변화의 힘인 구루, 즉 브라흐마, 비슈누, 시바에게, 또한 이 모든 측면들의 배후에 있는 파람브라흐마 Parambrahma, 곧 궁극자에게. 그리고 마지막으로 만트라는 이렇게 말한다. '구루의 연꽃 같은 발을 어루만집니다.'그것은 다시 한번 순복한다는 뜻이다. 그다음엔 침묵의 순간을 갖고, 세상을 향해 축복과 사랑을 보낼 수 있다. 그리고 '옴 샨티 샨티 샨티', 곧 ‘평화, 평화, 평화'라는 말로 만트라를 마무리한다.

- 그다음에는, 그 모든 것을 마음에 담은 채 음식을 즐긴다. 음식을 씹을 때마다 '먹는' 것이 아님을 명심한다. 그대는 신을 신께 바치는 신이다. 그러면 이제 그대는 더 이상 시장기와 동화되어 있지 않으므로, 또한 먹는 자와 동일시하지 않으므로, 음식은 그저 그것일 뿐이며, 그대는 그저 필요한 만큼 먹을 뿐이다. 그대는 그것을 모두 신의 놀이로 본다. 그 속에서는 모든 과정이 신 속에 만물이 녹아들게 하는 희생제로서 행해지는 것이다.

- 만트라를 읊는 것은 식사를 수행으로 만드는 단지 한 가지 방법일 뿐이다. 먹는 경험의 의미를 바꿔놓는 많은 방법들이 있다. 예컨대 불교에는, 자신이 먹고 있는 그것이 무엇인지를 다시금 인식하게 한다든가 먹는 행위 그 자체를 명상하게 하는 수행법들이 있다. 유대교도들의 금식법이나 기독교인들의 사순절 단식도 익히 알려져 있는 수행이고, ...

- 사원을 유지하기 위해서, 지혜가 깊어지게 하기 위해서, 사마디가 이어지게 하기 위해서, 에고를 타파하기 위해서, 그리하여 브라흐만에 도달하기 위해서 음식을 먹는다. 얼마나 멋진가! 여기에는 물론 피자와, 그 모든 것이 다 포함되어 있다. 우리가 먹는 모든 것이 제물이 된다. 먹는다는 것이 공양이요, 희생이 되는 것이다.

- 하지만 이런 식으로 음식을 이용하는 것은 단지 시작일 뿐이다. 제물에는 우리가 하는 모든 행위가 포함된다. 남몰래하는 비열한 짓거리까지도 포함된다. 예컨대 방금 누군가를 험담했다고 해보자. 누군가를 마구 씹다가 문득 이렇게 생각한다.

'지금 이 순간은 신께 올리는 나의 공양물이다- 멋지군! 내가 오늘 신께 올린 공양물을 좀 보게.'

험담? 탐욕? 욕정? 다 괜찮다.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라. 심판하지 말라. 신께서는 그것들을 모두 아무런 트집도 잡지 않고 받아들인다.

'그저 자신의 행위를 알아차리라.' 자신이 신께 바치는 공양물이 무엇인지를 알아차리기만 하라.

- 고난은 어떤가? 당신은 고난을 신께 바치는가? 우스펜스키는 구르지예프에 관해 쓴 책에서 이렇게 말한다.

"제물로 바쳐야만 할 또 한 가지는 고난이다. 어떤 것도 고난 없이는 얻지 못한다. 하지만 그것은 동시에 그 고난을 제물로 바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만 한다."

그런 일이 일어날 때 내면에서 전환이 일어난다. 고난을 은총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 그렇다고 해서 "신이시여, 신이시여, 더 많은 고통을 주소서"하고 외치는 고행자처럼 될 필요는 없다. 그처럼 피학대음란증적인 짓을 벌일 필요는 없다. 하지만 고난이 정화의 불이 되는 지점까지는 가야 한다. 고난은 당신이 불 속에 바치는 당신의 제물이다.

- 그 시점에서는 고난이 무겁지만은 않은데, 그것이 중요하다. 자기 연민에 빠진 채 앉아 있어서는 수행을 하기 어렵다. '오, 이건 너무 힘들어! 나는 이 사원에 있고 음식은 끔찍해. 게다가 너무 고통스러워.' 여기에는 바친다는 느낌이 별로 없다. 대신, 스와미 람 다스처럼 되는 것이다. 그는 사원에서 쫓겨나서 강가에서 밤을 새워야 했다. 모기가 계속 물었다. 그는 라마 신께 계속 기도했다.

"오,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항상 당신을 생각할 수 있도록 모기를 보내서 절 깨워주시니 말입니다."

- 마지막으로, 공양할 수 있는 것이 또 하나 있다. 이 모든 것에 대한 자신의 애착을 바치는 것은 어떤가? 경험을 위해서 공양하고 있는 것이라면, 희생의 의미는 바래진다. 당신은 이렇게 말한다. '희생제 불에다 버터기름을 끼얹으면 참 재밌겠군.' 이런 경험자, 혹은 즐기는 자의 태도도 버려야 한다. 즐기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즐기는 것에 집착하지는 말아야 한다. 그것조차 희생해야 한다. 물론, 그러면 색다른 기상천외한 것을 발견할 것이다. 더 많은 것을 희생할수록 더 영적으로 될 것이고, 더 많은 것을 얻을 것이다. 매 순간 모든 것을 더욱 '갖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일은 그 모든 것을 진정으로 버리기 전에는 일어나지 않는다.

- 그러므로 희생의 거대한 아가리는 브라흐만께 들어가는 문이다. 그것은 당신의 삶을 브라흐만 속으로 부어 넣는 입구이다. 그저 그대의 온 존재를 브라흐만 속으로 계속 쏟아 넣어라. 그러나 당신은 또 잊어버리고 자신을 위해서 그 안에 들어간다고 생각한다.

'오, 이제 난 깨달음을 얻을 거야!'

- 하지만 이것 또한 꼭 기억해야 한다. 그대는 그 모든 것의 일부, 끝없이 순환하는 희생제물의 일부인 것이다!

- 희생의 에너지를 일깨우기 위해서 내가 잘 외우던 만트라가 있다. 나는 여섯 번째 차크라인 아즈나 차크라에 의식을 모으고 말한다.

"나는 신의 맹렬한 의지 속에 붙들린 한 점 희생제의 불이다. 나는 신의 맹렬한 의지 속에 붙들린 한 점 희생제의 불이다."

이것을 충분히 오랫동안 되풀이하면 제3의 눈인 아즈나 차크라가 희생제의 불처럼 타오르게 된다. 그것은 강력한 만트라이다. 그것은 '그대'를 희생제의 불의 일부로 변화시킨다.

- 그리하여 그 에너지가 깨어나면, 그대는 자신의 모든 행위를 그 불길 속에 던져 넣을 수 있다. 모든 경험, 모든 생각, 모든 느낌을 다 그 불속에 집어넣는다. 자신의 모든 욕망, 모든 인식을 제물로 바꿔놓는다. 그것은 세속적인 것을 영적인 것으로 바꿔놓는 완전한 변신이다. 만트라는 이를 위한 도구가 된다. 그대는 자신을 행위자, 즐기는 자, 아는 자, 기뻐하는 자, 경험자로 동일시하던 태도를 제물로 바친다. 그렇게 그 모든 것을 제물로 바치고 나면, 그대는 '진정' 즐기는 자가 된다. 희생을 통해 그 모든 것이 하나가 된다. 그 진정 즐기는 자란 그대 안의 아트만이다. 그것은 진정한 지복이며, 그대는 즐거움을 희생함으로써 진정으로 즐기는 자가 되는 것이다.

- 앞의 본보기에서, 우리는 제물을 던져 넣을 희생의 불을 일깨워주는 만트라를 사용했다. 그것이 이 장의 두 번째 주제인 만트라를 부각시킨다. '만트라'라는 단어는 '마음을 보호한다'는 뜻이다. 만트라란 마음을 마음으로부터 보호하는 어떤 것이다.  

- 자신을 거친 진동 차원에서 끄집어내어 의식을 정화시켜 가면, 우리는 형체 없는 상태로 돌아간다. 만트라 수행은 우리를 미묘한 진동 차원에 동조시키기 위한 기법이다. 만트라 속으로 깊이 들어갈수록, 소리는 창조와 복귀의 행위 양쪽을 경험할 수 있게 하는 도구가 된다. 그리하여 우리는 만트라에 힘입어 여럿으로부터 하나로, 그 하나로부터 또 여럿으로 왕래하는 것이다.

- 물론, 기계적인 진동 자체가 그런 일을 하는 것이 아니다. 만트라와 만트라를 외우는 사람은 분리되어 있지 않다. 그리고 만트라의 힘과 효과는 그것을 하는 자의 믿음과 열린 마음과 준비된 자세에 달려 있다. 사실 만트라 자체는 아무런 힘이 없다. 모든 것은 그것을 수행하는 사람에게 달려 있다. 만트라는 마법의 주문이 아니다. 아무리 '강력한' 만트라도 당신이 그 만트라가 힘을 발휘하게 할 정도로 일심집중하는 특별한 성격의 소유자가 아닌 한 그저 소리일 뿐이다.

 

- 다시 말해, 만트라가 하는 일은 당신 속에 이미 존재하는 것에 집중을 하게 해 준다. 만트라는 그것을 하나의 초점에 모아준다. 마치 돋보기가 햇볕을 모아주는 것과도 같다. 돋보기는 그 자체가 열을 갖고 있지 않지만, 햇볕을 한 점에 모아준다. 집중되게 하는 것이다. 만트라는 의식에게 돋보기와 같은 역할을 한다.

- 만트라는 생각을 잠잠해지게 하거나 생각을 집중시키는 방법으로 사용될 수 있다. 마음이란 것을 생각의 물결이 일어나고 스러지는 대양과 같다고 상상해 보라. 물결은 조류와 바람에 밀려 제멋대로 이리저리 어지럽게 인다. 이러한 마음의 대양 속에서 만트라는 오로지 한 가지의 물결만을 일으키고, 그것이 다른 모든 물결을 덮어서, 결국은 만트라만이 유일한 생각의 물결로 남게 된다.  


- 다른 금계들에 관해서는 좀 더 간략하게 짚어보고자 한다. 하지만 아힘사 같은 계행에 대해서는 그 깊은 의미를 충분히 맛보기 위해서 여유 있게 탐사해 보는 것도 가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이런 계행들을 원칙적인 수준에서 안이하게 받아들일 수도 있다. 삶 속에서 그것을 실천하고자 할 때 실제로 부딪히게 되는 문제들을 대면해 보려고 하지도 않은 채 말이다.

- 두 번째 금계는 사트야이다. 진실함, 거짓말하지 않음이다. 간디는 이렇게 말했다. "진실은 신이며, 신은 진실이다." 그리고 그의 삶은 가능한 한 진실에 가깝게 살려고 애써온 사람의 선언 그 자체였다.

한 번은 한 여인이 어린 아들을 데리고 간디를 찾아왔다. 그녀가 말했다. "마하트마지, 제 아이에게 설탕을 먹지 말라고 말해주세요."

그러자 간디가 어머니에게 말했다. "사흘 후에 오세요."

사흘 후에 어머니와 아들이 다시 왔다. 그러자 마하트마 간디는 소년에게 "설탕을 그만 먹어라!" 하고 말했다.

어머니가 의아해서 물어보았다. "그런데 그 말씀을 해주시는 데 왜 사흘이 걸려야 했나요?"

디가 대답했다. "사흘 전에는 제가 설탕 먹기를 그만두지 않았거든요."

 

- 이것은 기준을 아주 높여 놓는다. 이것은 자신에게 요구하기에는 아주 높은 수준의 진실성이다. 그리고 사트야 행은 이런 수준의 내적 진실성에 우리의 삶을 맞추는 일에 관한 것이다.

- 지금, 우리들 대부분이 머물러 있는 수준에서 보자면, 우리는 '모든' 차원에서 정직할 수 있을 만큼 진실성에 깊이 뿌리박고 있지 못하다. 하지만 우리는 어디에 있든 그 자리에서부터 정직해지기 시작할 수 있다.

- 진실에 귀 기울이기를 배우고 진실에 따라 살기를 배운다. 거기에 상당한 대가가 따르더라도.

- 간디가 대답했다.

"나는 절대적인 진실을 모른다. 절대적인 진실은 신만이 아신다. 나는 인간이다. 나는 단지 상대적인 진실을 알 뿐이다. 그리고 그것은 날마다 바뀐다. 내가 헌신해야 하는 것은 진실이지, 일관성은 아니다."

그러니까 나는 진실에 대한 나의 헌신을 존중해야 한다는 말이다. 비록 그것이 변덕을 의미하더라도.

- 영적인 길을 즐겁게 걸어갈 때, 우리는 종종 진실을 지키려면 변덕을 부려야만 한다는 사실을 깨닫곤 한다. 자신의 다르마를 발견한다는 것은 물 위에 떠 있는 과녁을 겨냥하는 것과 비슷하다. 그것은 한 곳에 머물러있지 않는다. 늘 자리를 바꾼다. 당신은 자신의 길이 무엇인지 알았다고 생각한다. 새로운 분장에 필요한 염주와 수행복과 배지 등등, 새로운 용품 일체를 방금 마련했는데, 갑자기 모든 일이 공허하고 의미 없고 끔찍해진다. 어쩌겠는가? "나는 진실에 헌신하지, 일관성에 헌신하지 않는다."

용품들을 가장 가까운 나눔 장터에 갖다주고, 갈 길을 가라. 시간이 좀 지나면, 당신은 도복을 사지 않고 빌린다. 왜냐하면 당신은 자신이 심심찮게 길을 바꿔 탈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진실하게 살기 위해서 가능한 한 가장 진실에 가깝게 머물 뿐이다.

- 마하라지는 나에게 언제나 진실을 말하라고 가르쳤다. 그것은 그가 나에게 버릇처럼 하는 말 중의 하나였다.

"람 다스, 진실을 말해라."

"예, 마하라지."
이런 대화가 마하라지와 나 사이에서 반복되었다. 그는 나를 침상 앞으로 불러놓고는 말했다.

"람 다스, 분노를 버려라."

"예, 마하라지."

- 그는 이 두 가지 훈계 사이를 오갔다.

"람 다스, 진실을 말해라." "람다스, 분노를 버려라.”

- 당시 그 사원에는 나와 함께 온 서양인들이 버글거렸다. 그들이 몰려온 것은 모두 내 탓이었다. 마하라지는 누구에게도 자신과 만난 사실을 말하지 말라고 했는데 나는 말해버렸고, 이제 그들이 몰려와 있었다. 그들은 모두 나를 따라다녔다. 나는 그것이 정말 귀찮았다. 나는 그들이 아닌 인도인들과 어울리고 싶었다. 그래서 그들이 모두 지긋지긋해졌다.

- 그래서 나는 마하라지의 가르침에 대해 생각해 보기 시작했다.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자, 봐라, 진실은 내가 이 사람들을 정말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나는 마하라지가 말한 대로 분노를 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나는 항상 좋은 사람이 되기를 원했고 화나지 않은 척했다. 화나지 않은 척하기 위해서 나는 진실을 외면해 왔다. 하지만 속은 늘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결심했다.

'이젠 반대로 하면 어떨까? 변화를 위해서, 진실을 말하는 거다. 그 진실이란 내가 이 사람들을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

- 그래서 나는 '매우 정직하게' 굴기 시작했다. 누군가가 내 방으로 들어오면 ... 

 

- 그러니까 마하라지는, "난 네가 너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그것이기를 그만두면 어떤 존재가 되는지를 가르쳐주고 있는 거야." 하고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 그다음 순간 나는 그들을 모두 둘러보았다. 지긋지긋했던 그들을... 그러자 한 껍질의 생각 밑에서 내가 그들을 너무나 깊이 사랑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내가 그들에게 화가 났던 유일한 이유는, 내가 만사는 '이래야 한다'는 모델을 가지고 있었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것을 문득 깨달았다. 어떤 사람이 생긴 모습을 가지고 그렇게 생겼다고 화를 낼 수는 없지 않은가? 그것은 신을 능가하려고 덤비는 짓이다. 그들은 그저 신이 만들어준 대로 존재하는 것이다.

 

- 무엇 때문에 화내고 있는가? 누가 너에게 거짓말을 한다고? 그들은 그저 자신의 카르마를 따르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왜 네가 화를 내는가?

'글쎄, 나는 그들이 내게 거짓말을 하리라고는 생각지도 않았지.'

아하, 기대- 거기에 네 문제가 있구나. 다음에 화가 나면 무엇에 대해 화가 나는지를 잘 살펴봐. 넌 신께서 네가 생각하는 대로 세상을 만들어주지 않은 것 때문에 화를 내고 있다는 걸 깨달을 거야. 하지만 신은 세상이 스스로 만들어가는대로 세상을 만드신다!

- 그러니 사트야행(진실하기)은 우리의 모든 행위에서 -사람들을 대함에서, 자신의 영적인 길을 헤쳐나감에서, 또는 무엇에서든- 그것을 요구한다. 우리는 가능한 한 최선을 다해서 진실에 가까이 머물러야 한다.

 

- 마하라지는 이렇게 말했다. "진실은 가장 어려운 타파시야다." 그것은 가장 힘든 금욕행이다. 가장 힘든 수행이다.

그는 말했다. "사람들은 네가 진실을 말한다고 미워할 거야."

때로는 과연 그랬다. 그가 말했다. "사람들이 너를 조롱하고 욕하고 심지어는 죽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래도 진실을 말해야만 한다."

- 문제는 우리가 보호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자신의 어떤 부분과 동화되기를 그쳤을 때에야 비로소 진실을 말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조롱받고 모욕당하고 죽임을 당하는 것이 '두렵다면', 진실을 말할 수 없다. 어떤 입지를 지키느라 바쁘다면, 진실을 말할 수 없다. 오직 우리가 자신이 우려하는 만큼 나약한 존재가 아님을 깨달을 때만, 자기에게 진실을 말할 힘이 있음을 안다.

 

- 가령 내가 당신에게 진실을 말했는데, 당신은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하자. 당신은 자리에서 일어나서 나가버린다. 그렇다면 그것은 당신의 문제이지 나의 문제는 아니다. 하지만 내가 당신의 사랑을 필요로 한다면, 나는 당신이 나가버리게 만드는 모험을 무릅쓸 수 없다. 그래서 나는 진실을 말할 수 없게 된다. 내가 당신에게서 뭔가를 필요로 한다면, 나는 결코 진실을 말할 수 없다. 그러므로 진실을 말하기 위해서는, 내 안에 있는 모든 요구를 포기해야만 한다. 이것이 사트야가 포기행의 하나인 이유이다. 우리가 버려야 할 것은 진실을 말하지 못하게 하는 집착이다.

- 진실에는 매우 멋진 점이 있다. 진실에 뿌리박으면, '정말' 뿌리박고 살면, 그의 말은 권능(사실 이것이야말로 '권능'의 의미이다.)을 지니게 되어서, 그가 무엇을 말하면 그렇게 된다. 누군가에게 축복을 주면, 축복이 그에게 주어진다. 그냥 그런 일이 일어난다. "나아라!" 하고 말하면, 그 사람이 낫는다. 이것이 말씀의 권능이다. 그 말이 온전한 진실의 자리로부터 나온다면 말이다. 그러면 당신에게서 나오는 모든 말은 진실 그-자체의 가장 깊은 핵과 긴밀히 연결된 당신 속의 그 자리에서 나오므로, 모든 수준에서 참이다. 사트야 행이 가져오는 정화는 우리를 이 같은 진실의 차원을 위해 준비하게 해 준다.

- 세 번째 금계는 아파리그라하이다. 문자적으로 이것은 '쌓아놓지 않기'란 뜻이지만, '탐내지 않기', '소유하지 않기', '주고받지 않기' 등의 뜻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주고받지 않기'란 아무것도 오고 감이 없어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그보다는 주고받는 정신에 관한 것이다. 이 계행은 주는 자와 받는 자가 동등함을 인식하게 한다. 그럼으로써 거래가 탐욕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 이것이 아파리그라하 행의 핵심이다.

- 나는 돈이라는 주제를 놓고 아버지와 늘 작은 씨름을 벌이곤 했다. 아버지는 매우 자애롭고, 멋지고, 부유한 사내였다. 나는 매우 자애롭고, 멋지고, '가난한' 사내였다.

그는 나에게 이렇게 말하곤 했다. "리치 Rich(생각해 보면 이건 아주 웃기는 이름 아닌가?), 뭐 필요한 거 있어?"

그러면 나는 언제나 이렇게 말했다. "아뇨."

 

 

- 그는 한 번도, "리치, 자, 천 달러다. 받아둬라." 해서 내가 "고맙습니다." 하고 대답하도록 만들어 본 적이 없다. 그는 꼭 "뭐 필요한 거 없냐?" 하고 물었다. 그때 내가 "예, 천 달러가 필요해요."라고 말만 한다면, 그 돈을 얻게 될 것이다. 하지만 내가 그걸 요구해야 했다면, 그 돈은 마치 거미줄처럼 온갖 것들을 주렁주렁 달고 왔을 것이다. 이를테면, '저 녀석은 아직도 날 필요로 하는군'이라든가, '한심한 녀석, 아직도 번듯한 생활을 못하다니!'라든가, 아니면 '그럼 그렇지, 저 녀석들이 나한테서 바라는 건 돈 뿐이야.' 하는 식의 생각들 말이다.

- 돈과 관련된 온갖 망상 때문에 우리들 대부분은 주고 또 받는 사업에는 발조차 들여놓지 못한다. 대부분의 경우, 무엇을 남에게 준다는 것은 우리가 그 대가로서 뭔가를 바라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다. 그것은 너그러움이 아니라 탐욕이다. 물질적인 대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받은 사람의 감사를 바라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그들이 우리에게 고맙다고 말하는 것을 듣고 싶은 것이다. '뭔가를 주었던 사람'이라는 자신의 좋은 이미지를 반대급부로 원할 수도 있다. 익명으로 준 경우라 하더라도 그것은 단지 좀 더 미묘한 형태의 위선일 뿐이다. "봐라, 내가 얼마나 훌륭한지를 난 '익명으로' 희사한단 말이야."

알겠는가? 그저 에고의 또 다른 먹이일 뿐이다!

- 돈을 다룰 때, 자신이 한 회사의 회계원일 뿐이라는 상상을 해보는 것도 도움이 된다. 그건 당신의 돈이 아니다. 당신은 그저 그것을 책임 있게 관리하려고 있는 것일 뿐이다. 그것은 사실 아버지의 돈이 아니었다. 그는 그 순간에 그 에너지를 관리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 역할을 하는 것이 그의 카르마였기 때문이다. 당신의 돈이든 에너지 시장의 한 코너든, 그것을 다루는 것은 당신의 카르마이다. 하지만 그 에너지는 당신의 소유가 아니다. 우리는 모두가 그저 신의 에너지를 손에서 손으로 전달하고 있을 뿐이다.

- 물질적인 대상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다. 아스테야행에는 과분한 칭찬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나, 다른 사람의 생각을 자신의 것으로 주장하지 않는 것 등도 포함된다. 그것은 가능한 한 가장 넓은 의미에서, 정당하게 자기 것이 아닌 것에 대해, 물질이든 다른 무엇이든, 그것을 훔치지 않는 것을 뜻한다. 이것이 아스테야이다. 

- 음욕을 품지 않기를 마지막 주제로 남겨놓은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것에 대해서는 별로 듣고 싶어 하는 것 같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을 의미하는 '브라흐마차리야'라는 말은 문자적으로 '브라흐마의 제자답게 행동하기'를 뜻한다. 그리고 그것은 모든 형태의 욕망을 끊을 것을 요구한다. 그것은 모든 상황과 장소와 시간 속에서, 어떤 대상에 대한 생각과 말과 행위 형태의 모든 갈망을 버리는 것을 의미한다. 이건 정말 엄청난 일이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기도했다. "신이시여, 저에게 순결과 절제력을 주소서. 하지만 지금 당장은 말고요." 이것은 지금의 우리에게도 적절한 좌우명일 것이다. 짝짓기를 통해서 종을 퍼뜨리는 동물로 태어난 우리에게 짝짓기를 둘러싼 그 모든 욕망이란 정말 강력한 것이다. 이것은 모두 두 번째 차크라와 관계된 것이다. 그곳에는 엄청난 에너지가 자리 잡고 있다.

- 마하라지 같은 존재는 다르마의 법칙, 우주 법칙의 선언 그 자체이기 때문에, 적절한 순간에 특정한 사람의 의식에 전환을 일으켜서 그가 다음의 새로운 단계로 나아가게 해 줄 말이나 행위를 하는 것이다. 구루는 무엇이든 그 순간의 다르마가 요구하는 일을 하면서, 그저 거기에 있다.
구루는 대개의 경우 제자에게 어떤 변화가 일어날 시기가 무르익었을 때 그것을 촉발시켜 주기 위해 싯디를 사용한다. 라마크리슈나는 이렇게 말했다. "덜 익은 견과의 껍질을 까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지만, 마른 견과는 툭 건드리기만 해도 까진다."

- 이런 존재들과 함께 지내다 보면, 그들은 누가 준비된 상태인지를 늘 감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날마다 수백 명의 사람들이 찾아와서 마하라지의 발을 만진다. 그는 그냥 내버려 두고 계속 이야기만 한다. 그들은 음식을 대접받고, 사원을 떠난다. 이어서 또 다른 사람이 찾아온다. 내가 보기에는 음식이나 먹고 떠나가야 할 사람이다. 전혀 준비가 안 된 사람처럼 보인다. 그런데 마하라지는 하던 일을 멈추고 그 사람을 향한다. 그리고 그와 오랜 시간 대화를 나누고, 특별히 축복을 해주고 대접한다. 나의 이성적인 마음으로는 구루의 속마음을 헤아리기가 불가능했다. 그가 누구에게 어떤 이유로 무엇을 할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어쨌든 그는 그 사람에게서 때가 무르익었음을, 약간의 다독거림이 필요함을 감지했던 것이다.

- "이 일에 끼어들지 마라. 일어난 일 그대로가 최선이다. 그 아이의 영혼은 이미 다른 몸속에 들어갔다. 거기서 그는 매우 훌륭한 일을 할 것이다. 이번에는 할 수 없었던 일을 하게 될 것이다. 내가 만일 그를 이 몸속으로 다시 불러들이면, 새로운 몸은 이 몸을 살리기 위해서 죽어야만 한다. 너를 위해서 그렇게 해줄 수도 있지만, 너는 그 결과를 생각해보기나 했느냐?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을 질 각오가 되어있느냐?"
이것이 구루가 초능력을 행사할 때 품는 진정한 자비심의 본보기이다. 제자는 단지 죽음과 어머니의 슬픔만을 보고 있었다. 사이 바바는 우리의 인간적인 감정이 그리는 것보다 훨씬 더 큰 그림에서 나오는 자비심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 싯디에 관한 이야기들은 눈에 보이는 것 너머에 뭔가가 있음을 상기시켜 줌으로써 우리의 믿음을 강화시켜 준다. 스와미 묵타난다의 구루인 스와미 니티야난다 Swami Nityananda는 정말 아름다운 요기였다. 또한 사이 바바처럼 매우 독특한 인물이었다. 날마다 수천 명의 사람들이 그를 보러 오곤 했다. 그러면 니티야난다는 그들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고 혼자 뭔가를 흥얼거리면서 앉아 있곤 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어떻게든 그의 반응을 해석하는 방법을 깨쳤다. 그래서 그들은 그에게 와서 "바바지, 이 주식을 살까요?" 하고 묻고, 바바지가 "흐으으음..." 하면 "바바지께서 사라고 하시는군." 하고 주식을 사서 대박을 터뜨리곤 했다.

- "그래, 고맙군. 나도 이미 알고 있어. 하지만 자네가 그렇게 말해줬던 것을 고맙게 여기고 있어. 왜냐하면 자네가 날 그 지경으로 밀어 넣어주지 않았다면, 나는 그걸 깨닫게 해 준 그 모든 발버둥을 쳐볼 생각조차 안 했을 테니까 말일세."

- 이것은 좀 빗나가는 얘기인지는 몰라도, 이왕 환각이라는 구더기가 든 깡통을 열어놨으니 환각제에 관해서도, 그것이 어떻게 영적 여행과 맞물리는지에 대해서도, 이야기해 보는 것이 좋겠다. 환각제의 사용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역사가 오래된 일이다.

 

- <바가바드 기타>에서 크리슈나는 "나는 소마 Soma다."라고 말한다. 크리슈나가 말한 '소마'는 고대의 힌두 요기들이 신비체험을 하기 위해서 사용했던 식물 추출액이다. 소마가 정확히 어떤 것이었는지는 잘 모른다. 그것에 관한 지식은 수백 년 전에 잊혀져버렸다. 그 화학성분이 어떠했든 그것은 신들의 약, 신들의 음료였다. 그것은 존재를 변성시켜 '영으로 변신시키는' 음료였다. <리그 베다>에는 '천 개의 눈을 가진 한 방울의 수정'이라는 소마를 찬양하는 시가 있다. 그 시는 소마를 복용한 경험을 이렇게 묘사한다. 
[우리는 소마를 마셨노라 그리하여 불사의 존재가 되었노라. 우리는 빛을 얻었고 신들을 발견했노라.]

- 60년대에 환각버섯과 LSD 연구에 관계했던 사람들도 그런 환각제들을 통해서 비슷한 체험을 했다. 그것은 우리를 영적으로 열리게 했다. 그것은 진정한 성체였다. 올더스 헉슬리는 그것을 '무상으로 주어진 은총의 선물'이라고 했다.

- 힌두교 수행체계들은 소마와 비슷한 물질에 대한 언급을 많이 한다. 예를 들어, 파탄잘리의 아쉬탕가 요가에는 의식을 변성시키는 물질의 사용에 대한 언급이 있다. 요가 수행의 뿌리는 환각버섯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것은 고든 왓슨 Gordon Wasson의 이론이다. 고든 왓슨은 균류학자이다. 균류학자가 되기 전에 그는 뉴욕의 모건 게런티 트러스트 회사의 부사장이었다. 그러다가 멕시코에서 테오나나카 Teonanacatl, 곧 '신들의 살'로 알려진 신성한 버섯에 흥미를 가지게 되었다. 그것은 실로시빈 성분을 함유한 버섯 중의 한 가지로서, 사람의 의식을 변성시킬 수 있었다. 그는 테오나나카틀을 체험한 뒤 모건 게런티 회사 부사장직에서 물러났다. 그리고 세계 각지를 여행하면서 버섯과 그것의 종교적 용도를 연구했다. 그는 '버섯돌'(버섯 모양으로 깎은 돌)이 있음을 발견했고, 그것이 매우 오래된 고대 종교와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의 이론인즉슨, 인도의 원조 요기들은 북부 산악지방의 버섯복용자들이었는데, 그들이 인더스 계곡으로 내려오면서 그곳에 신성한 버섯이 자라지 않음을 알고는 원래 버섯이 도달할 수 있게 해 주었던 것과 동일한 의식 상태를 재생시키기 위한 노력으로서 그 모든 요가 수행법들을 -프라나야마와 하타요가와 라자 요가 등을- 개발해 냈다는 것이다.

- 그러한 지식이 인도에만 있었던 것도 아니다. 캘리포니아 산타 크루즈의 민속식물학자인 칼 하인리히 Carl Heinrich는 예수가 최후의 만찬에서 제자들에게 나눠주었던 '빵'이 사실은 파리버섯이라 불리는 환각버섯으로서, 중동지방의 빵과 비슷하게 생겼는데 맛이 좋고 환각 효과가 있어서 널리 알려져 있었다고 주장한다. 서양에서도 환각물질이 이용되었다. 고대 그리스인들의 제례의식에 '화학'을 통한 더 나은 삶을 위한 의식변성방법이 포함되었다는 데는 더 이상 이견이 없어 보인다. 엘레우시스 비전 의식 Eleusinian Mysteries에서는 보리균류에서 추출된 키케온 kykeon이라고 불리는 약이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엘레우시스 의식에는 한꺼번에 3천 명의 사람들이 참석했는데,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도 입문자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 

- 물론, '신세계'에는 환각 선인장인 페요테 peyote가 있었다. 나는 페요테 의식에 참가해 본 적이 있다. 그것은 아메리카 원주민들에게 전통으로 내려오는 아름다운 의식이다. 이 같은 의식의 가치는 환각체험을 완전히 의식화한다는 점이다. 거기에는 사회적인 형식이 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긴장해서 악몽과 같은 일을 겪으면, 집단은 처치법을 가지고 있어서 그 사람을 도와줄 수 있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하룻밤 내내 함께 지내면서, 힘든 지경에 빠진 어떤 사람을 도왔는데, 그 사람이 거기서 빠져나오지 못하면 해가 뜨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다. 새벽 4시가 되었다. 길고 추운 밤이었다. 모두 해가 뜨기를 열망하고 있었지만, 그 사람이 곤경을 돌파하고 나오기 전에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를 돕는 일이 모든 사람의 임무가 되었고, 그 사람을 향해 쏟아지는 사랑과 관심은 엄청났다. 그것은 강력한 의식이었다. 

- 자, 다시 티모시와 나의 이야기로 돌아가자. 알다시피, 나는 나 자신의 느낌을 다른 방식으로 보기 시작했다. 나는 티모시가 나에게 부정적 감정을 투사하여 내 속에 일으켜놓은 모든 느낌들로 시달렸지만, 그것들은 결국 서서히 서서히 나를 위한 가르침이 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인격(개인성)의 게임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그 시점에서는, 그 문제가 나를 좌절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해방시키는 도구가 되었다.

- 그것이 반전이다. 우리들 감정의 게임을 반전시키는 방식이 바로 그것이다. 우리를 붙들어 매는 분노나 좌절이나 권태나 외로움 등, 그 모든 감정적 상태를 다룰 수 있는 기술이 있다. 그것을 밀어내려고 안간힘을 쓰거나, 그것으로 신에게 화풀이하는 대신, 그것을 맞아들이고 그것이 가져오는 가르침에 대해 감사하고 음미하는 것이다. 이렇게 상황을 뒤집어버리면, 우리는 거기에서 해방될 수 있다.

- '분노'를 예로 들어보자. 누가 내 심기를 건드리면, 나는 정말 불같이 광분한다! 그런데 아드레날린이 뿜어져 나오면서 내 상표인 '광분'에 불이 붙을 찰나! 문득 거기에 그 상황의 우주적 유머가 슬쩍 끼어든다. "또 걸려들었어!" 하는 마하라지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이다.

 

- 누군가 우리의 기대를 어그러뜨릴 때, 만사는 이래야 된다고 생각하는 우리의 모델이 일그러질 때, 우리는 화가 난다. 그리고 이 게임에서 우리의 전략은, 우리가 이런저런 모델에 '매달리게 되는' 바로 그런 곳들을 잡아내는 것이다. 그러니 주변 사람들이 따라다니면서 우리를 일깨워주는 역할을 해준다면, 그 이상 무엇을 더 바랄 수 있겠는가?  

- 우리가 부자 관계를 맺게 된 것은 우리의 카르마 때문이었다. 우리는 서로가 상대방의 업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의 배경에 있는 것은, "너 거기 있니? 난 여기 있어, 굉장하군!"이었다.

- 그것이 내가 있는 자리에서 바라본 모습이었다. 그렇지만 내가 날마다 그에게 "당신 거기 있어요" 하고 말했다면, 그는 이렇게 대꾸했을 것이다. "또 그 얼간이 같은 소리로구나." 게다가 나의 관점을 누구에게 주입시키려고 애쓰는 것은 내 일이 아니다.

<기타> 3장은 이렇게 말한다.

"지혜로운 자여, 자기 일에 열심을 부리는 지혜롭지 못한 자의 마음을 훼방하지 말라. 그가 몸 바쳐 일하게 하고 좋은 일을 하고 있다는 기쁨을 느끼도록 내버려 두라. 자연의 힘에 속아 지배받는 자들은 그 힘의 작용에 매여있도록 내버려 두라. 이것을 보는 자여, 보지 못하는 자들을 방해하지 말라." 

- 그러니 나의 일은 아버지에게 "보세요, 당신은 사실 제 아버지가 아니에요" 하고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나의 출생증명서를 가지고 있었고, 그것이 그의 현실이었다. 나의 역할은 '내 인식의 영역 안에서 우리의 관계에 또 하나의 다른 차원을 더하는 것'뿐이었다. 나는 그를 내 아버지로 보았지만, '동시에 나와 같은 또 하나의 영혼'으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 영혼은 그의 생애와 관련된 생각들과 완전히 동화되어 있는 그런 인생이었다. 그는 그것들에 너무나 동화되어 있어서, 그의 관점에서 볼 때는 그런 생각들이 조금도 틀림없는 현실이었다. 그건 좋다. 나의 관점이 어떤지 그에게 말해줄 필요는 없다. 우리는 함께 앉아서 부자간의 대화를 나눈다. 그러는 한편, 나는 늘 나만의 만트라를 외운다. 나는 부자간의 대화를 나누면서도 동시에, 우리가 그저 두 영혼으로서 함께 춤을 추고 ... 

- 존재가 하나의 화신化身임을 인식한다. <기타>는 이렇게 말한다. "적과 아군에 대한 사랑이 동등한 자, 명예와 불명예 앞에서 영혼이 초연한자, 비난과 칭송 앞에서 이리저리 흔들리지 않는 자, 이 세상에 집을 두지 않은 자, 그리고 사랑을 지닌 자, 이 사람이 내가 사랑하는 이다."

- 3번이나 4번 채널에서 타인들을 바라볼 때, 우리는 그들을 심판하거나 비난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들 각각의 존재의 완벽함을 알아보고, 사람들에게 온갖 판단을 갖다 붙이기를 그친다.

'넌 이래야 해.' '넌 저래야 해.' '당신이 좋은 아버지라면 이렇게 할 텐데...' '우리 애는 ㅇㅇㅇ가 될 거야.' '내 환자는 ㅇㅇㅇ하게 될 거야.' '능력 있는 직원이라면 절대로... 않을 거야.'

이 모든 심판과 기대의 목소리들이 들리는가?

'내 남편은 ㅇㅇㅇ해야 한다고 생각해.' '나는 아내란 모름지기 ㅇㅇㅇ하기를 바란다.'

이보다 더 인간관계를 갉아먹는 짓이 어디 있겠는가?

 

- 숲에서 나무를 바라보면서 "저 참나무가 느릅나무였으면 좋겠네."라고 말할 사람은 없다. 어째서인지는 몰라도, 우리는 나무를 저마다 제 생긴 그대로 놔둔다. 각각의 나무가 그저 생긴 그대로 완전함을 인정한다. 하지만 사람의 경우에는 달라진다. 사람들은 나를 두고 이런저런 사람이어야 한다고 마음대로 생각하고, 내가 그런 기대에 어긋나면, 만사가 엉망진창이 된다! 우리는 죽치고 앉아서 모든 사람에 대해 이의를 달고 온갖 판결을 내린다.

- 우리의 이런 심판은 문제에 부딪힌다. 사실, 모든 사람은 언제나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것.

마하라지는 늘 이렇게 말했다. "람 다스, 만사가 완벽한 것이 보이지 않나?"

모든 사람이 '있는 그대로' 완벽하다. 모든 구나들이 씨줄과 날줄처럼 엮이고 상호작용하여 우주를 ...

- 내 인격과, 내 에고와, 내가 나라고 생각했던 모든 것들을 그리고 그 죽음과 재탄생 체험을 통해 죽음에 대한 나의 이해는 변화되었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것을 박사논문들은 어떻게 확인해 주는지 알고 싶지 않은가? 버클리의 캘리포니아 대학교에서 행한 연구는 3년 이상 명상을 해온 사람이나 환각제를 복용해 본 사람들이 전체 인구 중의 어떤 사람들보다도 죽음에 대해 훨씬 더 초연하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 시카고 의대의 연구원인 에릭 캐스트 Eric Kast는, 말기암 환자들을 대상으로 LSD를 이용하여 선구적인 연구를 했다. 간호사였던 한 환자는 이렇게 말했다. "그래요, 난 암으로 죽어가고 있다는 걸 알아요. 하지만 이 아름다운 우주를 좀 보세요!" 그 순간에 그녀는 죽어가고 있는 한 사람과의 동일시로부터 떨어져 나와, 이 우주와 하나가 된 것이다. 그 안에서 그녀의 죽음은 하나의 작은 조각에 지나지 않았다.

- 내가 처음으로 환각버섯을 먹어보았던 그 무렵, 티모시와 나는 MIT의 방문교수로 와 있던 올더스 헉슬리와 함께 연구를 시작했다. 올더스는 우리에게 티베트 사자의 서를 소개해주었다. 매우 비범한 책이었다. 그 고대 경전은 사후 49일 동안에 일어나는 일들을 잘 겪어 나가도록 안내해 주기 위해서 티베트 라마승들이 사자死者에게 읽어주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당신이 죽어가는 동안에 누군가가 옆에 앉아서 "바로 여기, 여기에 그대로 머무세요. 매 순간 속에 머물면서 죽음과 함께 있으세요. 놓아 보내세요... 괜찮아요 놓아 보내세요... 괜찮아요." 하고 속삭여주는 셈이다. 이 얼마나 환상적인 '도움 시스템'인가! 죽음을 준비하려고 마음먹은 사람이라면, 이렇게 해줄 사람을 일찌감치 물색해 두는 것도 아주 좋은 생각일 것이다.

- 티베트 <사자의 서>는 바르도, 곧 중음계中陰界에 관한 책이다. 그것은 물질 차원을 떠난 후에 영혼이 거쳐 가는 의식의 상태들, 혹은 현실차원들이다. 중음계는 죽고 나면 갑자기 나타나는 그런 것이 아니다. 그것은 현실의 차원들로서 늘 존재한다. 그것은 바로 여기, 바로 지금 존재한다. 사자의 서에서 언급하는 모든 중음계는 우리가 볼 수만 있다면 바로 여기에 있다. 하지만 우리가 살아 있는 한 에고에 눈이 가려서 그 차원들을 보지 못한다. 이는 우리로 하여금 현실의 일상적 상태에 초점을 맞추게끔 만드는 에고의 술수 중 하나이다. 하지만 죽어버리면 에고가 더 이상 그 짓을 못하므로 우리는 갑자기 그런 다른 차원들을 보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그런 차원들에 눈이 열려 있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모든 중음계를 경험할 것이다.

- 티베트 사자의 서를 읽을 때 놀라웠던 점은, 중음계의 상태에 관한 묘사를 읽을 때마다 '맙소사, 이건 지난 목요일에 버섯을 먹고 경험했던 거잖아!' 하는 대목에 부딪히게 된다는 사실이었다. 우리가 '묘사할 수 없는', 혹은 '말로 할 수 없는' 환각체험들이 묘사되어 있는 2,500년 전의 책을 본다는 것은 정말 소름 끼치는 일이다. 보라, 그 모든 것을 25세기 이전에 이미 다 소상히 적어놓았지 않은가!

- 그래서 티모시와 랄프 매츠너와 나는 티베트 <사자의 서>를 환각여행의 언어로 '번역'하여 <환각 체험 The Psychedelic Experience>이라는 이름의 책으로 출판했다. 우리는 사자의 서를 환각제 복용을 통한 죽음과 재탄생의 안내서로 생각했다. 우리는 환각제를 신성한 방법으로 사용하게 해주는 안내서를 쓰고 싶었다. 

- 바라나시는 죽어가는 자들의 도시다. 여기서는 우리 문화처럼 죽음을 감추지 않는다. 바라나시에서는 누가 죽으면 오렌지색 천에 싸서 일종의 칠성판 위에 눕힌다. 그러면 사람들이 그것을 메고 거리를 지나 '가트 ghat'로 간다. 그 노천에서는 모든 사람이 라마 신의 이름을 찬송한다. 모든 것을 인간미 없게 만들어놓은 우리의 장례식과는 너무나 대조적이다. 힌두교도들은 바라나시에서 죽기를 원한다. 거기서 죽으면 죽음의 순간에 시바 신이 와서 라마 신의 이름을 죽는 자의 귓가에 속삭여주고, 그것이 그를 깨달음으로 데려간다는 것이다. 달리 말해, 게임의 내용을 우리가 이해한다면, 이곳은 죽을 장소로서는 매우 신성한 곳이다. 

- 바라나시의 풍경은, 인도인들도 사자의 서를 읽는 티베트의 라마승들처럼 죽음의 순간에 우리의 마음이 어디를 향해 있는지가 매우 중요하다고 이해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 두 종교는 모두 윤회론을 믿으며, 죽음에 대한 영적 시각 속에 두 가지 중요한 요소를 담고 있다. 첫째는 죽음의 순간에 무엇을 생각하느냐가 중요하다는 믿음이고, 둘째는 환생하지 않는 비결이 집착하지 않는 것이라는 믿음이다. 바라나시와 <사자의 서>는 모두 죽음의 순간에 곧바로 문을 통과해 신의 품에 안길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준다. 이들은 각각 죽음의 순간 그 자리에서, 일이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 것인지를 이해할 수 있도록 깨우쳐주는 고유한 상징체계와 의식체계를 만들어냈다. 크리슈나는 <기타>에서 이렇게 말한다. "죽음의 순간에 나를 생각하라." 이것이 그렇게 되도록 하는 방법들이다.

- "너희들은 너무 걱정이 많아. 그러니 내가 다 보여줄게. 그러면 너희도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을 거야. 나는 모든 고난을 겪어내겠어. 심지어는 최후의 의심까지도. '아버지시여, 아버지시여, 왜 나를 버리시나이까?' 하고 말이야. 나는 그 모든 것을 몸소 겪겠어. 그것이 다 정말 아무렇지도 않다는 것을 너희들이 볼 수 있도록. 나는 심지어 죽기까지 할 거야. 그것도 별것 아니란 것을 보여주겠어. 그러고는 다시 돌아와서 너희를 만날게. 그 모든 것이 다 괜찮은 일이며 죽음이 바꿔놓는 것이 별로 없음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말이야."

- '십자가에 매달리신 가엾은 예수'라는 생각을 버리기만 하면 얼마나 시원한 해탈을 맛볼 수 있는지, 나는 그 가르침의 힘을 깨닫기 시작했다. 두려워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것이 예수의 진정한 가르침이었다.

 

- 라마나 마하리쉬가 암으로 죽어가고 있을 때, 제자들이 말했다. "스승님, 제발 당신의 몸을 낫게 하십시오!"
그러자 그가 대답했다. "아냐, 아냐. 이 몸은 다 됐어."
제자들은 더욱 간청했다. "저희들을 떠나지 마십시오! 저희를 떠나지 마세요!"
제자들은 울음을 터뜨렸다. 그는 당혹스런 표정으로 제자들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떠난다고? 어리석은 소리 하지 마라. 내가 어딜 갈 수가 있단 말이냐?"

- 그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한 것이다. 나는 여기에 있다. 죽음은 아무것도 바꿔놓지 않는다. 떠나는 것은 단지 몸뿐이다.

- 자, 이 모든 경험들 -환각제와 어머니와 마하라지-이 나에게 누적되기 시작하여 죽음에 대한 나의 사고방식을 바꿔놓았다. 그것은 내게 세상을 새로운 관점으로 보게 해 주었다. 나는 우리가 문화라는 이름으로 이 주제와 관련하여 자신에게 어떤 짓을 벌여왔는지를 깨닫기 시작했다. 우리는 '밀실 속에 감춰놓고 점잖은 자리에서 발설되지 않게만 하면 죽음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고 믿으려고 엄청나게 애를 쓴다. 그러나 사실은 우리가 그렇게 감추려고 애쓸수록 죽음은 더욱 두려운 대상으로 변해간다. 나는 그것을 깨달았고, 그래서 나는 죽음에 좀 더 주의를 기울여보기로 마음먹었다. 나는 강연이나 워크숍 같은 곳에서 죽음을 더 많이 거론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죽음과 관계를 맺는 확실한 방법은 죽어가는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임이 분명해 보였다.

- 나는 지니의 방으로 들어가서 침대 곁에 앉았다. 그리고 명상에 들어갔다. 하지만 나는 그녀로부터 멀어져서 내 속으로 들어가는 명상을 한 것이 아니라, 눈을 뜨고 그녀의 노쇠해 가는 육신을 명상했다. 나는 불교 명상법을 활용했다. 스님들은 시신이 썩도록 버려두는 공동묘지에서 전통적으로 이 명상법을 사용했다. 그들은 거기서 시신이 부어오르고, 벌레가 생기고, 곪아 짓무르고, 결국 뼈만 남는 과정을 명상했다. 이 명상법의 가치는 몸에 대한 집착을 떠나게 한다는 데 있다. 어떤 사람들은 이 모든 것을 매우 역겹게 느낀다. 그들은 시신에 대한 명상을 매우 좋지 않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 긍정적 사고방식에 빠진 사람들이 보이기 쉬운 거부의 몸짓일 뿐이다.

- 지니와 함께 명상을 하면서, 나는 노쇠한 육신의 고통을 보았다. 하지만 그것이 야기하는 감정에 흥분하기보다는 그 느낌을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그것을 지켜보았다. 그것은 있는 그대로 완벽했다. 우주의 경이에 찬 아름다움이었다. 방 안은 아주 아주 평화로워졌고, 아주 아주 그윽해졌다. 공간 전체가 일종의 푸르스름한 빛으로 가득 찼다. 정말 특별한 순간이었다. 그 공간 속에서 함께 20분쯤 지내고 나자, 지니가 나를 향해 몸을 돌리며 말했다. "너무나 평화로운 느낌이에요." 

- 하지만 그러는 중에도 그녀의 몸은 통증에 몸부림치고 있었다. 통증은 여전히 거기에 있었다. 그것은 없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지니는 통증에 시달리는 그 사람과 동일시된 자리에서 빠져나와 있었다. 더 이상 예전의 그녀가 아니었다. 그녀는 그 '배후'에 있는 존재와 연결되어 있었다.

- 지니와 함께한 그 경험은 통증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 약간의 가르침을 주었다. 죽음과 관련하여 가장 힘든 것은 통증과 두려움이다. 준비되어 있지 않고 의식이 깨어 있지 않으면, 통증과 두려움이 큰 혼란을 야기한다. 마음은 그 와중에 길을 잃어버릴 것이다. 죽음에 다가가려면 전략이 필요하다. 명상을 할 때, 다리와 무릎이 아파오면 그 통증과 함께 앉아 있는 법을, 그것에 마음을 열어놓는 법을 배우게 된다. 죽음에 이르러 뜻밖에 극심한 통증이 닥쳐오더라도 그에 대처할 수 있는 방법을 터득하게 하는 긴 여행의 첫발을 내딛는 것이다. 나에게 지니는 스승이었다. 그녀는 그러한 과정의 필요성을 보여주었고, 그런 통증에 대처하는 법을 깨닫도록 도와주었다.

- 죽어가는 사람들과 어울림으로써 내가 얻은 또 하나의 깨달음이 있다. 우리 문화가 의식적인 죽음을 위해 여유를 베푸는 데 얼마나 무능한가 하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바라나시가 없고, 그 대신 병원이 있다. 내 친구 데비 러브가 죽어가고 있었다. 그녀는 네팔과 히말라야에 관한 아름다운 책을 여러 권 썼던 피터 매테이센의 아내이기도 했다. 그녀는 뉴욕의 마운트 시나이 병원에 입원했는데, 병원이란 곳은 죽기에 정말 번거로운 곳이다. 그들은 온갖 수단을 다 동원해서 사람이 살아 있게 만들도록 구조화되어 있다. 그러니까 환자가 죽는다는 것은 병원 시스템의 실패를 뜻한다. 

- 아무튼, 죽는 일에는 전문가가 따로 없다. 하지만 나를 포함해서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는 사람과 함께하는 일이야말로 엄청나게 강력한 수행임을 깨닫고 있다. 그리고 죽음을 앞둔 사람들 중에는 그 공간 안에 진정으로 함께할 수 있을 만큼 내면을 깊이 수행한 사람이 곁에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 그래서 죽음의 전화는 마치 중매쟁이처럼, '죽는 사람'과 안내자를 서로 연결시켜 주는 역할을 할 것이다.

- 나는 서양에도 결국은 바라나시가 생길 거라고 상상해 본다. 사람들이 와서 이렇게 말하는 곳이 생기리라고 생각한다.

"내가 죽고 싶은 곳은 바로 이런 곳이야. 죽음을 거부하고 생명을 붙드느라 정신없지 않은, 이런 사람들 틈에서 죽고 싶단 말이야."

- 죽음을 위한 이런 장소에서 사람들은 자신이 원하는 종류의 의사를 선택할 수 있을 것이고 얼마 동안 명상할 것인지, 어떤 종교 분위기 속에서 죽을 것인지를 스스로 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기독교적 상징, 이슬람교나 불교나 힌두교적 상징, 혹은 그 어떤 상징이든 선택해서 그 속에서 죽음을 맞을 수 있다. 각각의 전통의식을 행하는 사람들을 이곳에서 쉽게 구할 수 있을 것이고, 우리는 모든 전통이 포함되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다. 예컨대 위칸(마술숭배교), 조로아스터교, 라스터패리아교(에티오피아 황제를 믿는 종교)까지도. 그러니까 죽는 사람이 죽음의 순간에 신을 향해 갈 수 있도록 그 가능성을 최대화할 수 있는, 죽는 사람이 느끼기에 가장 이상적인 환경을 만들어주도록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그러나 '서양의 바라나시'가 아무리 멋진 미래의 꿈이라고 할지라도, 현재로서는 우리가 가진 것으로써 해내야 한다. 그런 점에서 데비의 경우는 그것이 어떤 방식으로 가능할지를 멋지게 가르쳐주었다. 

- 더 이상 어떤 형체도 입고 싶지 않다면, 죽음의 순간에 품을 수 있는 최상의 생각은 무념이다. 죽음의 순간에는 모두가 투명한 빛 속으로 들어간다. 모든 사람이 각자가 브라흐만, 니르바나, 공을 체험한다. 그러나 강력하게 끌어당기는 카르마의 힘, 우리를 형체 속으로 다시 끈질기게 끌어들이는 생각과 느낌과 인식의 강력한 충동에 저항하려면 영적으로 준비된 마음, 단련된 마음이 필요하다. 강렬한 욕망이 일어나면, 우리는 곧장 따르던 빛으로부터 등을 돌려 자신의 카르마에 이끌려서 중음계를 한 단계 한 단계 내려가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 욕망이 실현될 수 있는 차원으로 내려가는 것이다. 그러나 죽음의 순간에 어떤 욕망도 없는 사람, 이것은 삶이고, 이것은 죽어감이고, 이것은 죽음이다. 그렇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 그 사람은 아무것도 움켜쥐지 않고 아무것도 밀쳐내지 않는다. 그리하여 죽음을 통해 그는 생과 사의 쳇바퀴를 벗어난다. 그는 죽음을 통해 신으로 태어난다. 

- 변성이 일어난다. 이때 나는 여전히 지켜보는 자이지만 또한 즐기는 자이다. 나는 경험이며, 경험자이며, 전적인 참여자이다. 이중에 내가 아닌 부분은 없다. 크리슈나가 "나는 지켜보는 자이다. 나는 모든 전장을 아는 자이다"라고 말할 때 가리키는 것이 바로 이 지켜보는 자이다. 이것은 에고의 지켜봄이 아니다. 이것은 야나 요가의 수행이 아니다. 이것은 신이다. 브라흐만이다. 이 수행은 그 자체를 초월한다. 그것은 나를 모든 것 속으로 녹아들게 하고, 모든 것을 지켜보는 자리로 나를 데려다준다. 내가 곧 모든 것이기에, 이것이 높은 지혜가 나오는 일체성(oneness)의 자리, '너머의 너머'이다. 

- 그러면 이 모든 것은 어떻게 총합되는가? 이 모든 것은 우리의 수행과 관련하여 무엇을 의미하는가? 영적 여정에서 우리는 저마다 다른 지점에 있다. 뭔가 새로운 출발점에 제대로 서 있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길에서 벗어나 헤매고 있다고 느끼는 사람들도 있다. 규칙적인 수행을 하는 사람들도 있고, 다음에 무엇을 해야 할지를 모르는 사람들도 있다.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이 수행에 관해 많은 혼란을 겪고 있다. 난 무엇을 해야 할까? 내가 제대로 하고 있나? 이 길보다 나에게 더 좋은 길이 또 있을까?

- 수행의 길을 찾을 때 염두에 두도록 권하고 싶은 전략이 몇 가지 있다. 그 첫 번째이자 가장 중요한 것이 '긴장을 풀라'는 것이다. 그다음에 무엇을 할 것인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그게 무엇이든 간에 그것은 당신이 다음에 배울 거리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쨌든 중요한 것은 당신이 하는 '일'이 아니다. 그것을 누가 하는가, 그것이 당신 내면의 어디서 나오는가 하는 점이 중요하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우리가 고민하고 번민하는 모든 선택과 결정이, 우리가 표현하고 싶어 하는 것과는 달리, 실제로는 그렇게까지 복잡하고 멜로드라마이지는 않다는 것이다.

- 두 번째 전략은, 내면에 귀 기울이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어느 순간에는 자신이 관심을 기울이는 것에 대한 내면의 직관적인 느낌을 신뢰하기를 배우라. 그렇게 하다 보면 전혀 뜻밖의 경험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사실은 이미 그렇다. 예컨대 오늘 명상수련에 참가하는 사람들 중 대다수가 몇 년 전만 해도 그런 것이 가능한 것인지조차 몰랐을 것이다. 모처럼만의 휴가를 하루에 열여섯 시간씩 방석 위에 앉아서 몸을 뒤틀면서 보낸다는 것이 상상이나 할 수 있는 일인가? 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그것이 당연한 것처럼 느껴진다. 그것이 다음에 해야 할 당연한 일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 그러니 자신의 영적 여행의 다음 단계가 어떤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느라 머리를 굴리기보다는 직관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편이 낫다. 그것은 앞으로 자신에게 정직해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직관의 지혜가 시킨다면 바꾸기를, 혹은 바뀌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수행을 시작하고, 거기에 완전히 헌신하고, 그것을 깊이 들이키라.

 

- 하지만 그러다가 당신은 그것이 당신을 위해 마련해 놓은 한계를 경험하기 시작한다. 이럴 때 당신이 잘 빠져드는 태도는, 그대로 뭉개기 위해 자신의 직관적 지혜를 부인하거나 방법을 비판할 꼬투리를 찾기 시작하는 것이다.  

- 이 모두가 서로 다른 순간들이다. 한 순간에는 어떤 것이 편안하고 좋고 유용하다. 다른 순간에는 다른 것이 또 그렇다. 그저 그것들 속으로 흘러들어 갔다가 흘러나오라. 그것을 사용하고, 그다음엔 버려라. 그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어떤 수행법, 또는 어떤 스승에게 매달리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이 순간' 살아있는 영성 속으로 우리를 열어젖힐 수 있다면 무엇이든지 활용하는 것이다.

 

- 어떤 수행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조금이라도 의심이 든다면, 멈추라 수행을 하는 데 조금이라도 불안한 느낌이 있으면, 내가 왜 그것을 하고 있는지 조금이라도 의심이 든다면, 멈추라. '수행'이란 말을 듣기도 전에 살던 방식으로 되돌아가서 살아라. 스위치가 켜지기 전으로, 명상이나 기도를 시작하기 전으로, 말도 안 되는 이 모든 것들을 알게 되기 전으로 돌아가라. 정확히 과거로 돌아가서 정신 나간 이 모든 짓을 잊어버리라. 그리고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잘 살펴보라. 뭔가 내면의 실마리에 이끌려 영적인 책을 뒤적이다 몇 구절을 읽게 되거나, 조용히 앉아서 촛불을 응시하게 될 수도 있다. 그렇더라도 당신이 어디에 끌리고 있는지를 지켜보기만 하라. 

- 우리 안의 모든 의무와 해야 하는 것들을 잠재울 수 있게 되면, 지금껏 해온 그 모든 청교도적 윤리 행각을 집어치울 수 있게 되면, 우리는 자신이 스스로 인정했던 것보다 이미 훨씬 더 멋진 존재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우리는 정신없이 쫓겨서 앞으로 달리고 있으면서도 늘 자신을 뒤에서 밀어붙여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이것을 알면, 우리는 수행이 자신을 어딘가로 데려다주는 무엇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 수행이란 우리 자신을 그 길 위에서 치워버려서 우리로 하여금 장애물이 되지 않 ...  

- 마음을 가라앉히고 무엇을 할 것인지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자신의 길에 감정적인 것들이 많이 가로놓여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들과 잘 지내려면, 우리가 쌓아온 모든 개인적인 것들을 청소해야 하는데, 청소한다는 말은 먼저 그것들을 직면해야 함을 뜻한다. 누구나 마음속에 많은 것들을 감춰놓고 있다. 자신에 대한 생각들, 조잡하거나 개인적이거나 모욕적이거나 이상한 것들, 생각만 해도 구역질 나는 것들.. 다른 사람이 들여다보기를 결코 원치 않는 것들이 우리 속에는 너무나 많다. 우리는 청소해야 할 대상들의 목록을 만들 수 있다. 하지만 그게 무엇이든, 그것들은 우리 자신에 대해 너무나 거북한 기분이 들게 만든다. 그래서 그저 피하고만 싶어 진다. 우리는 그것들을 마음속 후미진 곳에다 처박아놓고 들여다보지 않는다.

- 나는 사람들과 상담할 때, 그들이 이런 것들을 테이블 위에 내놓고 들여다볼 수 있게 도와주고자 한다. 그럴 때, 가끔씩 사용하는 방법이 있다.

나는 상대방에게서 떨어져 앉아서 말한다. "서로 상대방의 아즈나 ajna(양미간보다 약간 위, 제3의 눈이 위치하는 자리)를 주시하기로 합시다."

그러고는 그에게 말한다. "다른 사람에게 털어놓기엔 너무 거북하거나 당황스럽거나 구역질 나거나 불쾌하거나 두렵거나 조잡한 것이 마음에 떠오르면, 주저하지 말고 저에게 털어놓으세요."

 

- 이것은 "코뿔소를 생각하지 마세요"라고 말하는 거나 마찬가지다. 그의 마음에 곧장 떠오르는 것은 가장 감추고 싶은 것들이다. '나는 혼자 있을 때 콧구멍을 후벼요.' 혹은 '엄마와 섹스를 하고 싶어요.' 무엇이든 지금껏 숨겨왔던 것들을 떠올리게 된다.  

- 그리하여 법칙과, 그것이 어떻게 작용하는가 하는 문제가 자유의지와 결정론, 카르마와 책임이라는,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의문으로 우리를 다시 데려왔다.

버몬트에서 트룽파와 대담을 나눈 적이 있었는데, 그가 내게 말했다. "흑마술사들을 어떻게 봅니까?"
내가 대답했다. "파, 흑마술사라뇨? 저는 흑마술사를 본 적이 없습니다. 게다가 저는 그런 사람들에 대해서는 아무 생각도 없습니다. 제 스승이 저를 돌봐주시니까요. 그게 그의 일이거든요. 저는 그저 신을 사랑할 뿐입니다."
그러자 린포체가 말했다. "당신은 발을 빼고 있군요. 지금은 중요한 시기이고, 우리는 책임을 져야 합니다, 람 다스."

- 나는 그것에 대해 잠시 생각하다가 그가 나를 놀리고 있는 거라고 결론지었다. 그래서 이렇게 말했다. "모든 시기가 다 중요한 시기지요, 린포체. 그리고 신께서 그 모든 책임을 지십니다."
그가 대답했다. "아닙니다. 당신은 이해를 못 하고 있군요. '당신이' 책임을 져야 합니다."

- 잠시 생각해 보다가 나는 트룽파가 어떤 면에서는 옳고, 내가 정말로 발을 빼려고 하고 있다고 믿게 되었다. 내가 만일 '흑마술사'의 존재를 부인한다면, 선악으로 얼룩진 이 물질세계를 부정한다면, 나는 함정에 빠진 것이다. 나는 이 세계와 만상에 대한 '두려움'으로 그것을 아예 부정해 버리는 함정에 빠진 셈이다. 그것은 세속적인 분별에 빠져서 모든 것의 배후에 있는 '하나'를 인식하지 못하는 것보다 조금도 나을 게 없다.

- 그래서 나는 그 '책임'이라는 개념에 대해 몇 년 동안 곰곰이 사색을 해 보았다. 그러자 자유의지와 결정론, 그리고 그 둘이 동시에 다 옳다는 역설에 대한 이해가 갈수록 깊어지기 시작했다. 자유의지와 결정론은 마치 샌드위치처럼 서로 층을 이루고 있었다. 자신의 진정한 본성을 깨닫기 시작하기 전까지 우리는 카르마의 법칙 속에서 살고 있고, 그것은 기계처럼 작동한다. 하지만 그 기계적인 작동 속에서도 우리는 자신이 선택을 한다고 '생각'하고, 그래서 선택을 해야만 한다. 우리는 자신의 '자유의지'를 행사해야만 한다. 그러다가 뭘 조금 더 알게 되고, 그리하여 우리에게는 자유의지가 없다는 것을, 그 모두가 단지 드러나는 법칙 아니면 가해진 법칙임을 깨닫는다. 모든 것이 그저 법칙에 따라 우리를 지나간다. '선택'처럼 보이는 것들까지 포함하여. 그래서 우리는 "내겐 책임이 없어. 난 단지 작동하는 카르마일 뿐이야."라고 말한다. 하지만 우리는 거기서 계속 더 나아가서 구나를 초월하고, 브라흐만의 경지에 이른다. 그리고 그 경지에서는 우리의 의지가 진실로 완전히, 절대적으로 자유롭다.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

- 단 한 가지 장애물이란, 거기에 이르면 우리 안에 욕망이랄 것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완전한 지복의 상태에서 바랄 게 무엇이 있겠는가? 그런 자리에서 '자유의지'로써 하게 되는 유일한 행위란, 다르마의 작용에 이끌려서 하는 행위뿐이다. 즉, 우리는 오로지 법칙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만 행위한다. 왜냐하면 그 밖에는 할 일을 상상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르마의 순수한 도구가 되도록 자신을 내맡기는 데에 자유의지를 발휘한다. 그토록 오랜 세월 우리를 지배해 온 모든 욕망들은 어떡하냐고? 그런 것쯤은 생각 하나로써 충족시킬 수 있다. 그것들이 이미 오래전에 사라져 없어지지 않았다면 말이다. 행위를 충동질하는 개인적 사연은 더 이상 없다. 그래서 전적으로 자유로움에도 불구하고 순리 속에서 자신의 역할을 충족시킬 행위만을 하게 된다. 

- 그렇다면 나는 책임이 있는가 없는가? 글쎄,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 그건 지금 내가 어디에 서 있는가에 달린 문제다. 요즘 나는 양쪽 차원을 모두 인식하려고 애쓰고 있다. 모든 것을 구루께 내맡기는 것과, 동시에 내가 추는 춤사위의 책임을 떠맡는 것. 나에 관한 한, 모든 일은 마하라지에 의해 되어간다. 하지만 나는 할 수 있는 한 완벽하게, 책임감 있게 최선을 다해서 내 역할을 한다. 나는 양쪽의 관점이 동시에 이루어지도록 하는 법을 배우고자 애쓴다. 처음에는, 마하라지를 만나기 전에는, 내가 모든 결정을 내린다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오리발의 함정에 빠져서는 이렇게 말했다. "마하라지께서 알아서 하신다." 이제 나는 그것이 양쪽 다 맞는 것임을 깊이 이해하고, 그 역설이 주는 모든 다채로운 맛을 음미하며 살아간다.

- 그렇게 가고 또 간다. 우리는 우리의 본성이라는 이 복잡하고도 다층적인 차원을 끌어안고 살아가는 법을 배우려고 애쓴다. 자신이 발을 들여놓은 길을 인식하고, 그것이 자신을 어디로 데려갈지를 안다. 그것이 모두 불가피한 전개임을 알고, 그 과정 속으로 더욱더 자신을 내맡긴다. 그런 한편으로 우리 모두는 저마다의 인연을 따라 법칙대로 끌려가고 있는 ...

 



<바가바드 기타>의 체화를 위한 실습 코스



- <기타>가 삶의 중심이 되어 생활 속에서 살아 숨 쉬게 해 줄 사다나(영적 수행을 위한 프로그램)를 소개한다.

A. 수행일기 쓰기
B. 묵상(시간, 죽음을 포함한 다양한 주제에 관하여)
C. 명상
D. 지켜보기
E. 주기와 받기
F. 침묵
G. 타파시야(금욕, 예를 들면 단식, 욕망 다루기 등)
H. 하타 요가 아사나와 호흡법(프라나야마)
I. 자파 요가
J. 교회나 절에 다니기
K. 키르탄
L. 사트상
M. 푸자 테이블
N. 카르마 요가



- 시간이 무엇인지, 그리고 시간과 관련하여 우리의 삶이 어떻게 기능하는지에 대한 느낌을 키우기 위해서는 다음의 실험들을 해보면 도움이 된다.

- 다음을 순서대로 하나씩 각각 10분 동안 하라.

 

1. 호흡, 곧 숨이 몸 안으로 들고나는 것을 지켜보라.

2. 좋아하는 음식을 먹으라.

3. 눈을 감은 채 TV를 시청하거나 라디오를 들으라.

4. 아무것도 하지 말고 앉아 있으라.


- 각각의 연습을 할 때 시간에 대한 인식이 어떻게 바뀌는지를 알아차리라.

- 20분 동안 고요히 앉아 있으라. 수행일기의 한쪽을 세로로 두 칸으로 나누어 각각 과거와 미래라는 제목을 달라. 각 제목 아래에 당신의 생각들을 단순히 나열하라. 얼마나 많은 생각이 이 두 범주 아래에 쓰이는지를 살펴보라.

- 이미 아사나와 프라나야마 수행법을 알고 있는 사람들도 많지만, 모르는 사람들은 전문가를 찾아가 안내를 받으라.
이번 수련회에서는 수리야 나마스카람('태양 예배')이라 불리는 일련의 복합 아사나를 가르쳐줄 것이다. 이것은 조용한 곳의 평평한 자리에서 4-6회씩 행해야 한다. 옷차림은 가볍고 느슨해야 한다. 식후 두 시간 이내에는 하지 말라.

- 수리야 나마스카람: 해맞이 예배
전통적으로 이것은 이른 아침 시간에 태양을 마주 보고 예배하는 마음으로 행한다. 이것은 아사나 수행을 시작하기에 좋은 방법이다.

- 숨을 내쉬면서

1) 똑바로 서서 양 손바닥을 가슴 앞에 모아 합장한다.

 

- 숨을 들이쉬면서

2) 엄지를 서로 겹친 채 양팔을 머리 위로 치켜올린다. 양발을 바닥에 단단히 고정한 채 몸을 뒤로 젖히며 위를 쳐다보라.

 

- 숨을 내쉬면서

3) 손을 떼면서 몸을 앞으로 굽히라. 무릎을 펴되 살짝 굽어 있게 하라. 머리는 양팔 사이에 늘어뜨리고 가능하다면 손바닥을 바닥에 대라.

- 숨을 들이쉬면서

4) 왼쪽 다리를 뒤로 빼면서 무릎이 바닥에 닿게 하라. 오른발은 양손 사이 그 자리에 남아 있다. 눈을 위로, 뒤로 향하면서 척추를 뒤로 젖혀 펴라.

- 숨을 내쉬면서

5) 오른쪽 다리도 뒤로 빼어 양발이 만나게 하라. 몸 전체가 활처럼 굽혀진다.

- I. 자파 요가
'말'은 나날의 경험에 대한 인식을 바꿔주는 가장 강력한 도구 중 하나이다. 영적 자각의식을 계속 깊어지게 해주는 단어나 문장을 되풀이해서 외는 것은 중요한 것을 상기시켜 주는 즉각적인 방법이 될 수 있다. '라마'나 '크리슈나' 같은 신의 다양한 측면에 붙은 이름을 되풀이해서 외는 것이 그런 식으로 작용한다. 혹은 우리의 가슴속에 피는 연꽃 위의 보석을 상기시켜 주는 티베트의 주문 '옴마니 파드메 훔'도 비슷한 용도로 사용된다.

- 만트라의 단어나 주문이 계속 이어지도록 돕기 위해서 염주(말라 mala, 혹은 묵주로 불림)와 같은 것을 계속 굴리기도 한다.

- 만트라 수행을 시작할 때는 오로지 만트라 수행만을 할 수 있도록 최소한 3, 4시간 혹은 그 이상의 긴 시간을 따로 내기를 권장한다. 이것은 초기 투자 기간이다.

- 그런 다음에는 아침마다 깨어나면 '기억이 떠오르는 즉시' 만트라 수행에 들어가라. 처음에는 소리내어 하라. 그러다가 적절하다고 느껴질 때부터는 만트라가 입안에서만 외어지게 하라. 나중에는 만트라가 마음속에서 외어지다가 마지막에는 오직 가슴속에서만 소리가 이어진다. 마음속의 되뇌임마저 떨어져 나가고 나면 남는 것은 느낌뿐이다. 그러면 이 만트라의 느낌에 '귀 기울이기'는 데만 집중하라.

- 하루의 나머지 시간은 가능한 한 만트라가 계속 이어지게 하라. 만트라가 입술로만 반복되고 가슴속에서 되뇌어지지 않는다고 해도 걱정하지 ... 

- K. 키르탄
키르탄이란 가슴을 정화하여 열리게 하는 힘을 지닌 헌신적 요가 수행법으로, 신의 이름을 찬송하는 것이다. 헌신에도 여러 수준이 있듯이, 키르탄도 마음의 어떤 상태에서든, 진화의 어떤 수준에서든 행해질 수 있어서, 더 깊은 차원의 열림과 이해로 이끈다.

- 키르탄은 친교의 도구로서 음악을 사용한다. 하지만 그것은 음악적 재능과는 상관이 없다. 노래를 얼마나 아름답게 하는가도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가슴으로 노래하는 것이다. 인도에서 신께 바치는 노래를 할 때, 맨 마지막으로 노래하는 사람은 흔히 치아도 없고 삐걱거리는 목소리에 거친 기침까지 섞인 노인이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누구를 향해 무엇을 노래하는지를 알고 있기 때문에 모든 사람을 완전히 감동시키곤 했다. 이처럼 신과의 친교는 감동적이고 강력했다.

- 키르탄 수행을 위한 가르침은 언제나 초연한 기분으로 하라는 것이다. '죄를 면하고자' 하는 마음이나 분별하고 심판하는 태도를 버리라. 열린 마음으로 그 안으로 들어가서 이 방법이 작동하는 방식을 경험하는 데 필요한 노력을 하도록 자신을 허용하라. 키르탄을 부르기 위해 '헌신적인 기분'을 느껴야 할 필요는 없다. 내면에서 새로운 것이 나올 공간을 만들어 줌으로써 생각이나 기분은 지나가게 하라. 행복감을 느끼면 행복하게 노래하라. 지루함을 느끼면 지루하게 노래하라. 그저 그 모든 것을 신의 이름의 불 속에다 바치라 더 많은 것을 버릴 수 있게 될수록 당신의 주의는 더 많이 그 만트라의 주위를 맴돌 것이다. 


- 누군가가 주고받기 방식의 찬송을 이끌고 있다면, 듣는 것도 노래하는 것만큼이나 중요해진다. 그리고 그것은 원숭이 같은 마음이 방황하지 못하도록 도와줄 것이다.

- 우리는 힌두교의 전통 '야갸 yagya'(성화 의식)와 찬송을 함께할 것이다. 밤을 새워 하는 찬송 수행을 위해서 깔고 앉거나 누울 때 쓸 담요와 베개를 지참하라. 잠시 눈을 붙이고 싶을 때는 그 자리에 누우라. 당신은 꿈속에서 만트라를 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것은 하룻밤 공간을 함께하는 격식 없는 경험이다. 몸의 차원에서 함께하는 데 필요한 것이라면 무엇이든(마실 쥬스 등) 가지고 오되, 소박하게 준비하라.

- 깊이 들어갈수록 아는 것은 줄어들고 더 현존하게 된다. 때로는 자신이 만트라를 찬송하고 있는 것인지 만트라가 당신을 찬송하고 있는 것인지 구분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 혹은 자신이 멀찍이 뒤로 물러나 있어서 찬송을 하는 동안, 그 전 과정과 생각들이 내면의 깊고 고요한 자리로부터 주시되고 있으며, 만트라를 반복할 때마다 그 자리가 더욱 깊어지고 더욱 '여기에' 있게 되는 것을 발견하게 될 수도 있다.

- 키르탄은 헌신적인 요가(박티 요가)의 수행법이다. 신을 경애하는 이들에겐 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 자체가 환희를 가져다준다.

"가장 높은 경지에서 신의 사랑이란 곧 해탈의 영원한 희열에 다름 아니다."

- "오 마음이여, 신의 이름을 품고 끝 모를 가슴의 심연 속으로 뛰어들라, 거기엔 온갖 (사랑의) 보석이 묻혀 있나니. 대양의 밑바닥이 텅 비어 있다고 믿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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