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1

[장강명] 표백

일루젼 2024. 8. 29. 17:17
728x90
반응형

저자 : 장강명
출판 : 한겨레출판사
출간 : 2011.07.22


       

<댓글부대>의 장강명을 다시 만났다.

날카로운 사회 비판과 인간에 대한 이해가 반짝인다.

 

이미 10여 년 전에 저자가 인식했던 세대적 특성은 이제 공공연한 현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대로 게임을 지속할 것인가, 새로운 게임을 시작할 것인가. 초연결된 사회에서는 어느 쪽도 선택이 쉽지 않다.

 

저자는 덧붙인 저자의 말에서 '어떤 선물이 기다릴지 모르니까요'라는 위로를 건넨다. 느릿한 종말로 걸어가고 있는 것일지라도, 그 과정까지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방향 전환은 작은 한 걸음에서 시작된다. 그 끝이 어디로 향할지를 예측하기는 어렵지만 이 순간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선택하는 것은 가능하다. 

 

그러나 이런 말들이 '승자만이 이의를 제기할 권리가 있다'로 들리지는 않을까 우려되는 것도 사실이다. 당장 새로운 게임을 시작할 수 없다면, 적어도 기존 게임의 변주와 수정 패치를 시도해야 한다. 게임은 플레이어가 있어야만 지속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은 여전히 자살률 1위 국가다. 청년층뿐 아니라 청소년과 노년층 자살률 또한 1위에 준한다. 

자신의 자살이 다른 어떤 '결격 사유'와도 연결되지 않기를 바랐던 세연의 노력은 일상의 유지 자체가 부담이 되는 현실을 반증한다. 스스로 밝히지도 않은 사유가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원인으로 받아들여지는 '비현실적'임이라니. 

 

당장 눈앞에 펼쳐진 세상이 너무 힘겨워 타인을 돌아볼 여유가 없는 이들에게 '사회적 안전망'은 뜬구름 잡는 소리처럼 들릴 것이다. 그러나 혁신은 '한 번의 실수'가 '돌이킬 수 없는 실패'가 되지 않는 사회에서 태어날 가능성이 높다. 기본적인 여유가 부족한 사회에서는 대부분의 선택이 '안전한' 방향으로만 흘러가기 때문이다. 정답이 이미 정해져 있는데 그와 다른 선택을 하는 건 모험이 아니라 일종의 '자해'에 가깝다. 

 

<표백>이 출간된 지 13년이 지났다. 20년이 되기 전에, '그런 시대가 있었지'라는 추억으로 남을 수 있기를 바란다. 

아직도 간간히 회자되는 세기말 괴담처럼.    

 


   

 

나는 전북 익산시청 7급 공무원의 2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할아버지도 공무원이었다.

할아버지는 국가유공자였는데, 내가 어렸을 때 부모님은 종종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할아버지처럼 너도 커서 훌륭한 일을 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어린 나는 할아버지가 독립운동을 하거나 한국전쟁 때 북한 괴뢰군에 맞서 싸우다 순국하는 모습을 상상하곤 했다. 
하지만 그가 부서 회식 중에 상한 회를 먹고 비브리오패혈증에 걸려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알게 된 뒤로 할아버지에 대한 존경심은 서서히 사라졌다. 아버지도 자신의 아버지를 그다지 존경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내가 하급 공무원인 아버지에 대해 별 존경심을 갖지 않았던 것처럼. 
할아버지는 살아 계셨을 때 곧잘 술에 취해 행패를 부리셨다고 하니 내가 그의 피를 물려받은 것은 맞는 듯하다.

- 그래도 나는 내가 태어나기 전에 돌아가신 할아버지 덕을 봤다. 국가 유공자 후손에 대한 가점이 없었다면 서울의 A대학에 입학할 수 없었을 것이다.

- 초등학생 때 나는 공부를 잘해 도 교육감 상을 받은 적이 있다. 중학생 때도 간혹 시험 공부를 제대로 하면 반에서 1등을 차지하기도 했다. 그러나 고등학생이 되면서 성적이 떨어졌다. 중학생 때부터 배우기 시작한 기타 때문이기도 했고, 쉬는 시간마다 교실에서 섰다판을 벌였기 때문이기도 하고, 학교와 교사들이 우습게 보이기도 했고, '언제든 내가 마음잡고 공부하면 금방 성적이 오를 수 있다'는 건방진 생각 때문이기도 했다.

- 고3이 되어서 다시 마음잡고 공부를 했지만 이미 수학과 과학 과목은 교과서 내용을 이해할 수 없었고, 성적은 오르지 않았다. 일부 과목은 성적을 올린다 해도 이미 내신 등급을 바꿀 수 없는 상황이었다. "고3 되면 늦는다"라는 말이 선생들이 고등학교 1, 2학년에게 겁주려고 하는 얘기인 줄 알았는데 정말이었던 거다. 정신 차리고 보니 이미 늦어 있었다.

- A대학은 서열로 치면 상위 10개 대학의 뒤쪽에 위치한 대학이었다. 성균관대나 서강대보다는 조금 낮고, 한양대와 비슷한 정도?
솔직히 나는 내 자식이 이 학교에 다니겠다며 서울로 유학을 가겠다고 돈을 달라고 하면 지방 국립대에 가서 등록금이나 아끼라고 할 테지만, 부모님은 생각이 달랐다. 큰아들에 대해 헛된 기대를 품고 있었던 데다 삼 남매 중 한 명은 서울에서 공부하게 해야 한다는 생각이었던 것 같다. 나도 부모님과 떨어져 혼자 사는 게 좋았기 때문에 유학 제안을 군말 없이 받아들였다. 

- 시건방진 소리지만, 대학교 1, 2학년 때까지도 여전히 나는 학교와 같은 과 동기들을 속으로 깔보고 있었다. 내가 다른 녀석들처럼 과외를 받았더라면, 또 고등학생 때 제대로 공부를 했더라면, 분명 더 좋은 대학에 갔을 것이라는 생각도 있었다. 그러니까 나는 너희와 동급이 아니고, 실은 더 잘난 존재라는 착각에 빠진 것이다.   

- 나이가 들면서 용기는 사라지고 기준은 마음속에 그대로 남았다. 그리고 그 기준에 따르면 내가 시골 시청의 공무원 아버지를 두고 시시한 대학을 다니는, 돈 없는 대한민국 남자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머릿속에 든 것도 없고, 허풍을 치는 것 외에는 잘하는 일도 없고, 전망도 없는.
군에서 제대해 복학할 때가 되니 왈칵 겁이 났다. 재수나 편입을 하기에는 시간도 없고, 돈도 없었다. 2년 뒤에는 취직을 해서 돈을 벌어야 했다. 그런데 평균 학점은 B와 C 사이였다. 
뭐야 씨발, 나 또 이미 늦은 거야?

- 스물다섯 살이 될 때까지 그렇게 남 탓을 하면서 인생을 살았다.
그런데 내 이야기는 여기까지다. 왜냐하면 이 책은 나에 관한 것이 아니니까.


- 이 책은 나의 후배인 세연에 관한 이야기다.

- 정세연이라는 인물을 뭐라고 설명하면 좋을까?
구약시대의 예언자들이 그와 비슷하지 않았을까 싶다. 어느 날 갑자기 자신이 신의 계시를 받았다며 도시의 멸망과 지옥 불에 대해 떠들어대는, 살짝 맛이 간 사람들. 그러나 묘하게도 개인 자체는 강한 매력을 지녀 주변 사람들에게 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캐릭터. 가만히 있어도 눈길이 가고, 정신 나간 주장을 해도 설득력 있게 들리는 사람.
현대의 예로는 살인마 찰스 맨슨을 들 수 있다. 사교(邪敎) 집단을 이끌며 기괴한 논리로 세상이 썩었다고 외치고 숭배자들에게 살인 또는 자살을 지시했다는 점에서 찰스 맨슨의 행적은 정세연과 상당 부분 겹친다. 
그렇다고 세연이 자신을 과시하는 유형이었다는 얘기는 아니다. 내가 본 세연은 오히려 그 반대다. 가능하면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는 성격이었다. 

- "찰스맨슨과 그 일당이 고작 8명을 죽이고서 얻은 불멸성을 생각하면 놀라울 뿐이야. 그는 타이타닉이나 제임스 딘과 같은 현대의 아이콘이 됐지. 퀴리 부인이나 히틀러보다는 덜하지만 25대 미국 대통령이라든가 한국의 초대 헌법재판소장보다는 훨씬 더 유명하잖아."
세연이 내 자취방 침대 위에 누운 채 말했다.
"25대 미국 대통령이 누구야?"라고 내가 묻자 세연은 "벤저민 해리슨, 한국 초대 헌법재판소장은 조규광"이라고 주저 없이 대답했다.

- 우리 패거리가 어울렸을 때, 세연은 내 자취방을 자주 드나들었다. 학교 근처에 자취방이 있는 사람이 나뿐이기도 했지만, 꼭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다른 멤버들보다 나를 하찮게 여겨서였는지도 모른다.
 

- "찰스맨슨보다 사람을 더 많이 죽인 범죄자는 그전에도 그 뒤에도 얼마든지 있었어. 테드 번디는 최소한 36명에서 60명 가까이 죽였고, 존 웨인 게이시는 33명을 죽였지.

그런데 왜 찰스맨슨만 그렇게 유명해졌을까?

샤론 테이트 같은 유명인을 죽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다른 연쇄살인범들이 변태 성욕이나 저급한 권력욕을 주체하지 못한 저능아였던 데 비해 찰스 맨슨 일당은 일단 멀쩡해 보였고, 자기들의 행위에 조잡하나마 어떤 주장을 담으려고 했기 때문일 거야.

8명을 죽인 게 베트남에서 네이팜탄으로 수천 명을 해치운 것보다 나쁜가, 내가 아니라 너희 아이들이 사람을 해치웠고, 그런 교육을 한 것은 이 사회다 따위의 주장을 말이야.

물론 그것은 찰스 맨슨의 허황된 계획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어. 그의 '헬터 스켈터' 철학은 찢어진 콘돔만큼의 가치도 없지. 그런데도 사람들은 맨슨의 말에 귀를 기울였어. 수십 년이나."

- "솔직히 8명을 죽이는 것보다 에베레스트 산을 무산소 등정하거나 위대한 문학작품을 쓰거나 울트라 마라톤을 완주하는 일이 더 어려울 것 같지 않니? 히말라야에 오르거나 대하소설을 쓰거나 100킬로미터를 달리려면 몇 년에 걸친 엄격한 자기 관리와 강한 의지, 뼈를 깎는 훈련이 필요해. 하지만 사람을 8명이나 죽이는 것은, 그것도 맨슨 패밀리처럼 증거를 숨기려는 노력 따위 하지 않고 되는 대로 저질러버릴 거라면, 그냥 마음만 먹으면 아무나 할 수 있지. 자동차 한 대나 어쩌면 식칼 한 자루만으로도 할 수 있어.
단지 정상인이라면 감히 넘을 생각조차 못하는 어떤 선을 살짝 넘기만 하면 돼. 
에드 게인이나 존 웨인 게이시처럼 완전히 미쳐버린 놈이 그 선을 넘는 건 의미가 없어. 그런 자들의 행위는 샴쌍둥이나 늑대인간증후군처럼 희귀한 유전병, 기이한 사건·사고의 영역에 속하는 것으로 간주되니까. 대개 사람들은 그 선을 넘은 자들을 완전히 미쳐버린 놈으로 규정함으로써 인간성의 정의를 보호하려 하지. 순환논법이야. 
그러나 가끔은 완전히 미친 건 아닌 것 같은 사람이 그 선을 넘어. 그러면 많은 것이 바뀌지. 처음으로 변기통을 미술관 안으로 갖고 들어온 사람은 예술의 개념을 바꿨고, 처음으로 비행기를 납치해 건물에 처박은 놈들은 전쟁과 테러의 개념을 바꿨어."

- "만약 찰스 맨슨에게 사람들이 납득할 수 있을 만큼 조리에 닿는 메시지가 있었다면 그의 말은 얼마나 파급력이 있었을까. 그는 정말로 세상을 조금 바꿀 수도 있었어. 그러기 위해서는 단 8명만 죽이면 됐어. 8명을 죽였더니 온 세상이 덜 떨어진 몽상가인 그에게 귀를 기울였지. 어떤 사람이 에베레스트를 등정한 그해에 울트라 마라톤을 완주하고 스무 권짜리 대하소설을 펴내도 그렇게 매스컴을 타지는 못할 거야.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던 선을 넘으며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던 하나의 메시지를 외치는 것. 
십자가형을 받고 죽은 사람은 수만 명이지만 사람들은 예수그리스도와 베드로만 기억하지. 그리스도교는 단 한 사람의 메시지와 단 한건의 십자가형에서 비롯됐어. 
계획을 잘만 세운다면, 사악한 상상력이 따른다면, 단 몇 명의 죽음으로도 세상을 흔들 수 있는 메시지를 전할 수 있지 않을까?"

- 찰스 맨슨 한 사람이 여러 명의 젊은이를 조종할 수 있었던 것이나 그네들의 주장이 어설픈 추종자들을 낳은 원인에 대해 히피즘이라는 시대적 배경을 지적하는 이도 있을 것 같다. 정상적인 사회에서 한 사람이 멀쩡한 젊은이들을 자살을 하거나 살인을 저지를 만큼 광적인 정신 상태에 빠뜨리는 것은 가능한 일이 아니라고. 
그런 비판에 대해 나는 이렇게 답하겠다. 우리는 히피즘보다 더 거대한 정신적 유령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시대를 살고 있다고. 우리는 위대한 좌절의 시대를 -세연의 표현을 빌리면 '그레이트 빅 화이트 월드'를- 살고 있다고.
그런 열패감을 극복하기 위해 붉은 티셔츠를 입고 국가 대표 축구 선수들을 응원하거나 촛불을 들고 광화문에 모였던 게 아닌가.

- 찰스맨슨보다 몇 배 더 교활하고 야심이 컸던 세연은 자신의 뜻을 펼치기 위한 순교자를 아무렇게나 고르지 않았다.
나와 휘영, 병권은 결코 나약한 정신의 소유자도 아니었고, 사이비 종교에 빠질 만한 성격도 아니었다.
나는 20XX년 3월 'A대학 경영학과 취업 선배들과의 대화' 행사 뒤풀이가 있던 날 밤, 세연을 처음 만났다.

- '취업 선배들과의 대화' 행사 뒤풀이는 신촌에 있는 놀부 부대찌개집에서 열렸다.
나는 처음부터 이 행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요즘 같은 때 취직한다는 게 얼마나 힘든지는 나도 안다. 취직한 사람들의 요령을 배우자는 취지도 좋다. 그러나 취직한 게 존경할 일이라고까지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데 '취업 선배'들은 그런 존경을 강요했다. 
우습게도, 부대찌개 집에 모인 대학생 대부분이 실제로 그런 존경의 눈빛을 직장 초년병들에게 보내고 있었다. 특히 H그룹 인사부에 있다는 선배와 K그룹 채용 담당이라는 선배 두 명이 그런 눈빛을 집중적으로 받았다. 채용 담당 대리의 힘이 도대체 얼마나 크기에?

- 누군가가 끼어들어 제지하려 했으나 나는 멈추지 않았다. 나는 술을 마시면 멈추는 법이 없었다.
"저는요. 젊은이들더러 도전하라는 말이 젊은 세대를 착취하려고 하는 말이라고 생각해요. 멋모르고 잘 속는 어린애들한테 이것저것 시켜봐서 되는지 안 되는지 알아보고 되는 분야에는 기성세대들도 뛰어들겠다는 거 아닌가요? 도전이라는 게 그렇게 수지맞는 장사라면 왜 그 일을 청년의 특권이라면서 양보합니까? 척 보기에도 승률이 희박해 보이니까 자기들은 안 하고 청년의 패기 운운 하는 거잖아요." 
"이름이 뭐랬지? 넌 우리 회사 오면 안 되겠다."
그 말을 듣고 나는 빈정대는 말투로 한마디 내뱉었다.
"거 봐, 아까는 도전하라고 훈계하더니 내가 막상 도전하니까 안 받아주잖아."

- K그룹 대리가 옆자리에 앉은 여학생의 어깨에 손을 올린 것이 발단이었다. 심사가 꼬여 있던 나는 얼굴을 찡그리며 "그 손 내리시죠"라고 말했다. K그룹 대리도 움찔했다. 그의 행동을 성추행으로 몰고 가는 것은 치사한 일이었다. 다른 부위도 아닌 어깨였고, 손을 딱 한 번 올렸을 때 내가 지적한 것이었으니까. 
그래도 K그룹 대리가 뺨이 부딪치는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옆자리 여학생과 얼굴을 가까이하며 이야기를 한 것은 사실이었다. 가만히 뒀더라면 진짜 성추행이 벌어졌을지도 모른다. 그때까지 기다려야 했는데. 

- 평소 나의 말투나 눈빛이 시건방지기 이를 데 없다는 사실을 먼저 고백해야겠다. 내 친구 중 한 명의 표현을 빌리면 나는 상대방에게 '수컷 본능'을 불러일으키는 남자였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저놈한테는 지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녀석. 내게는 세상 많은 것이 우습게 보였고, 남자들은 자신이 우습게 보이는 것을 참지 못한다.

- K그룹 대리는 당황해서 "뭐?"라고 말했다. 그때 그가 조금 경륜이나 기지를 발휘해서 얼른 사과를 하거나 화제를 슬쩍 다른 데로 돌렸다면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뭐?"라고 말했고 나는 "아, 그 손 좀 떼고 이야기하시라고요"라고 대답했다.
그다음에는 두 수컷 사이의 전쟁이었다. "술을 많이 마셨구나" "멀쩡한데요"에서 "말버릇이 그게 뭐야, 건방지게" "선배면 단가?"까지는 2분도 안 걸렸다. 

"가끔 차라리 일제강점기나 1960년대쯤에 태어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지 않아? 난 왠지 네가 그런 캐릭터라고 생각해. 독립운동이나 민주화 운동을 해야 할 것 같거든." 
소크라테스는 재키를 따라 학교 안으로 들어가며 그녀의 이야기를 들었다. 방학인 데다 저녁 시간이라서 학교 안은 한산했다.

"무슨 말이야?"
시멘트로 만든 연못은 아주 작았다. 문과대학 건물 뒤쪽의 음침한 구석에서 고인 물 탓에 썩은 냄새를 풍기는 물웅덩이. 난데없는 이 연못의 용도는 아무도 몰랐다. 분수대를 만들다 만 것일까?
콘크리트 바닥은 물이끼와 수초에 덮여 있어서 잘 보이지 않았고, 물 위에는 빛바랜 나뭇잎이 몇 장 떠 있었다. 소금쟁이가 몇 마리 있었고, 작은 날벌레들이 날아다녔다. 
“의미 없는 삶을 못 견디는 것 같아서. 넌 공산혁명 같은 거창한 명분을 주면 겉으로는 왜 이런 시대에 태어났는지 모르겠다고 불평하면서 속으로는 흡족해 어쩔 줄 모를걸. 체제 전복 계획 같은 걸 짜면서 살아있음을 느끼는 성격이지."

 

- 소크라테스는 연못가의 다 썩어가는 벤치에 앉았다. 뒤로는 아무도 관리하는 사람이 없는 듯 음침하기 짝이 없는 작은 숲이 있고, 앞에는 연못과 문과대 건물이 있었다. 선명하지도 않은 석양빛과 햇무리를 쳐다보고 있으려니 기분이 불쾌해지는 데다 건물에 하늘이 정확히 절반이 가려 답답했다. 조금 떨어진 벤치에서는 커플 한 쌍이 서로 안고 있었다.
"오히려 그런 건 너 아니야? 만약 네가 일제강점기나 1960년대에 태어났다면..."
"내가 여전사가 됐을 거라고 생각해?"
자신이 하려던 말을 재키가 먼저 해버리는 바람에 소크라테스는 깜짝 놀랐다.
"응."
"아닌데."
"나도 네가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야. 나를 그렇게 생각해 주는 건 고맙지만, 그건 과대평가한 거야. 난 그저 비겁자 콤플렉스에 시달리는 중산층 자식일 뿐이야."
소크라테스는 자조 섞인 어조로 내뱉듯이 말했다.
 
"나는 내 인생에서 중요한 결정을 한 번도 스스로 내리지 못했어. 모든 걸 부모나 사회가 원하는 대로 했지. 고등학생 때에는 대학을 가지 않고 시를 쓰거나 영화감독이 되는 걸 꿈꾸기도 했지. 그런데 실천하지는 못했어. 대단한 부잣집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가난 때문에 고생한 적도 없지. 중간고사 성적이 떨어지는 것 따위 외에 진짜 위기라는 걸 내가 겪어본 적이 있을까? 아버지 사업이 망한 적도 없고 어머니가 돌아가시지도 않았지. 공부도 잘했고 심지어 부모님도 좋은 분이야. 그렇게 여기까지 왔어. 돌이켜보면 모든 게 합리적인 결정이었지만, 너무 쉬운 길로만 걸어왔다는 데에 죄책감을 느껴. 독립운동가까지 갈 것도 없이 그냥 자수성가한 사람 이야기만 들어도 부끄러워. 안전하게만 살아온 나 자신이 부끄러워." 
재키는 더 얘기해 보라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난 공부를 곧잘 하는 편이었어. 선생들도 부모님도 모두 내가 서울대에 갈 거라고 생각했지. 그런데 수능 성적이 너무 시원찮게 나온 거야. 2지망으로 우리 학교에 합격했는데 주변에서는 내가 재수를 할 걸로 알고 있었어. 하지만 나는 재수를 하지 않았지. 1년 더 공부해야 한다는 게 두려웠거든. 재수 학원에 가긴 했는데 그 건물 전체에 어린 패배의 기운을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어. 
나는 패배자가 되는 게 너무 무서웠고, 지금도 두려워. 내가 받은 교육이라고는 어떻게 하면 패배하지 않느냐에 대한 것뿐이었지. 그래서 승리도 하지 않고 패배도 하지 않는 안전한 방법을 익히고 그대로 살고 있어. 그런데 이게 뭐야?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가 몇 년인데 아직도 학벌 콤플렉스가 있다니. 
대학에 들어와서 처음 여자 친구를 만났을 때에는 성격이 별로 맞지 않는데도 얼굴이 예쁜 아이를 사귀었어. 못생긴 여자와 사귀면 패배한 것 같은 느낌이 들 테니까. 나중에 정말 괜찮은 아이를 만났다고 생각했는데 그 아이가 미국으로 유학을 간다고 했어. 가기 전에 헤어졌어. 그 아이한테 인생을 거는 게 두려웠거든. 군대도 육군 사병으로 가는 게 두려워서 카투사를 지원했지. 그리고 이제는 죽을 때까지 끝내 이런 모습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게 아닌가 두려워."


- 주변은 이미 어두워졌고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가로등이 금방이라도 꺼질 듯 위태롭게 깜빡였다.
재키는 벤치에서 일어나 연못을 향해 걸어가며 소크라테스에게 물었다.
"저런 연못에도 사람이 빠져 죽을 수 있을까?"
"술에 취해 거리에서 자다가 비가 올 때 생기는 웅덩이에 익사하는 사람도 있대."
수심이 고작해야 50센티미터 안팎일 시멘트 연못은 더러운 땅에 뚫린 더러운 구멍처럼 보였다.
"여기만 오면 항상 기분이 이상해져. 높은 곳에 오르면 뛰어내리고 싶은 기분 알지? 그런 기분이 들거든. 그런데 정말이지 저 물에 빠져 죽고 싶지는 않아."
소크라테스는 왠지 불안해져서 한 손을 재키의 어깨에 올려 부드럽게 잡아당겼다. 재키는 그 손을 거부하지 않았다.
"신문기자가 되는 건 어때?"

재키가 불쑥 말했다.

"기자?"

"어쨌든 바쁘고, 뭔가 옳은 일을 하고 있다는 감각 같은 것을 네게 줄 테니까. 아니, 적어도 뭐가 옳고 뭐가 그른지에 대해서 계속 생각할 거리를 줄 테니까 말이야. 너한테는 그런 게 필요해." 
서로 안고 있던 커플은 그때까지도 벤치에 앉아 있었다. 커플 옆을 지날 때 소크라테스는 커플 중 남자 쪽이 재키의 얼굴을 보고 입을 떡 벌리는 모습을 보았다. 재키는 그 정도로 아름다웠다.

- '취업 선배들과의 대화'가 있던 날 밤, 내가 예상하지 못했던 손님들이 지하방을 찾아왔다.
제일 먼저 온 사람은 휘영이었다. 동기였지만 그다지 친한 사이가 아니었기 때문에 나는 다소 어색하게 그를 맞았다. '저 자식이랑 둘이서 술을 마셔야 하면 어떡하지' 하는 걱정마저 들었다.
"들어가도 되냐?"
"당근이지."
휘영은 그 다운 차림이었다. 하늘색 니트 스웨터에 베이지색 면바지. 전 과목 A를 받고, 공모전을 준비하는 동아리를 이끄는 복학생 오빠.

- 휘영과 둘이서 소주를 반 병 정도씩 마셨을 때 병권이 왔다. 한 학번 후배로 말수가 적은 녀석이었다. 그는 항상 굳은 표정이어서 살짝 무섭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들어가도 돼요?"
"그럼, 그럼!"
나는 과장되게 그를 맞았다. 어쨌든 휘영과 둘이 있는 것보다는 한 명이라도 더 있는 게 좋았다.
"잘했다는 건 아니지만, 아까 기분은 통쾌하더라. 대기업에 다닌다고 거들먹거리는 꼴이 정말 같잖았어."
"저는 형 성격에 주먹이라도 휘두르는 건 아닌가 걱정했어요. 그 대린지 뭔지는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더라고요."
두 사람의 칭찬에 나는 기분이 좋아졌다.

- "우리처럼 시대를 잘못 만난 세대를 위해서는 사회가 어떤 보상책을 마련해야 해. 부잣집에서 태어나 재산을 물려받는 사람에게는 상속세를 부과하잖아. 그런 것처럼 호시절에 태어나 걱정 없이 사회에 진출하는 사람들한테는 '불경기에 취업 시장에 나오는 세대를 위한 지원세' 같은 목적세를 도입해야 해. 그렇게 마련한 돈은 우리 같은 세대를 위해 쓰는 거지. 그건 정당한 소득분배니까 그놈들이 뻐겨서도 안돼."
나는 흥에 겨워 또 헛소리를 늘어놓았다. 우리는 '저주받은 00년생' 류의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 "1980년대에는 대학생들이 정치의 상당 부분을 담당했고, 1990년대에는 대학생들이 대중문화의 중심이었지. 지금 우리는 뭘까? 아무것도 아니야. 작은 유행 하나 만들어내지 못해. 이렇게 형편이 어려운데도 반항 정신이나 독립심조차 이전 세대에 못 미치지." 
휘영이 불만을 토로했다. 병권은 거기에 하나를 더 보탰다. 이 세대에 태어난 남자들은 연애 시장에서도 앞선 세대에 위협을 받는다는 것이다. 1973~1977년에 태어난 한국 남자들은 자기와 비슷한 연배의 여자를 사귀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고, 1978년 이후에 태어난 여자들도 쉽게 사귈 수 있다. 경제력이 받쳐주기 때문이다. 반면에 1978년 이후에 태어난 남자들은 자기와 같은 세대의 여자를 사귀는 일도 힘들어진다. 
그래서 우리가 아무도 애인이 없는 거구나. 썩을 놈의 세상이다, 우라질 놈의 세상이야! 이게 다 시대를 잘못 타고 난 탓이야.

 

- 그렇게 되지도 않는 수다를 떨고 있는데 갑자기 형광등이 나가버렸다.
"뭐죠? 안 되는 놈들은 뭘 해도 안 되는 건가?"
병권이 중얼거렸다.
나는 라이터를 켜고 서랍을 더듬어 손전등과 양초 몇 개를 꺼냈다.
"잠깐 기다려 봐."
"집에 초가 왜 이렇게 많아?"
"여자애 데리고 왔을 때 초를 켜놓으면 분위기가 얼마나 죽인다고. 너 같은 범생이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여자가 없잖아."
그때 마침 세연이 우리 얘기를 듣고 있었던 것처럼 나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 세연은 교내 유명 인사였다. 학생들 사이에 부러움의 대상이 되고 있는 '21세기 지도자 장학생'이었다.
21세기 지도자 장학생은 지금은 물러난 대학 총장이 야심 차게 도입한 제도였다. 수능 상위 0.1퍼센트에 해당하는 성적을 거둔 학생이 우리 학교에 지원하면 졸업할 때까지 전액 장학금과 얼마간의 생활비를 지원하고, 기숙사 독방과 교환학생 특전을 주며, 멘토 교수를 따로 지정해 학사 생활을 관리해 준다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졸업 후 우리 학교 대학원에 오고 싶다면 시험을 보지 않아도 되며, 21세기 장학생 출신은 본교 교수로 임용할 때에도 혜택을 주겠다고 했다.
세연은 얼굴도 무척 예뻤다. 그래서 3년째 학교 홍보 모델을 하고 있었다. 지하철에서 A대학 홍보 포스터를 보면 그녀가 책을 가슴에 안고 허리를 틀어 매력적인 미소를 짓고 있고, 그 아래 'A대학교 경영학과 00학번 정세연'이라고 적혀 있다. 

- 한편 세연은 경영학과 학생들 사이에서 수상한 여학생으로 알려져 있었다. 신촌 거리에서 그녀가 외제 차에서 내리거나 나이가 열 살은 더 많아 보이는 남자와 팔짱을 끼고 걷는 모습을 봤다는 아이들이 있었다. 사치스러운 그녀의 옷이나 명품 가방을 질시하는 목소리도 많았다. 집안 형편이 어려워 서울대에 가지 않고 A대학으로 온 것을 모든 사람이 알고 있는데 말이다. 악질적인 소문 중에는 그녀가 멘토 교수와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얘기도 있었다. 
무엇보다도 학생들은 그녀가 다른 동기나 선후배들과는 잘 어울리려 하지 않으면서 교수들이나 수업 조교와는 친하게 지내고, 결석이 잦으면서도 항상 시험은 잘 치르는 것을 못마땅해했다. 학생들은 그녀의 도도함을 싫어했다.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싫어하든 말든 그녀는 주위에 신경 쓰지 않고 승승장구하기만 할 뿐이라는 사실이 가장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거다. 

 

- 그런 세연이 온다는 소식에 우리는 갑자기 긴장했다.
"너 원래 개랑 친했냐?"
휘영이 내게 물었다.
"제대로 인사해 본 적은 없는데... 하지만 걔가 내 매력에 빠지는 건 시간문제라고 늘 생각하고 있었어."
세연은 터틀넥 티셔츠에 청바지 차림으로 나타났다.
"웬 촛불 파티예요? 남자들끼리."
세연은 남자들만 있는 방에 아무 거리낌 없이 들어와 안쪽 자리를 차지했다. 물론 남자들은 여왕에게 기꺼이 왕좌를 내주었다.
"다들 무슨 얘기를 하고 있었어요?"
"불행한 세대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어."
나는 그때까지 우리가 한 이야기를 좀 더 지적으로 들리게끔 포장해서 세연에게 들려주었다. 세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없이 듣기만 했다.
우리는 술을 여러 잔 마셨고, 촛불 불빛 속에서 나른한 분위기에 빠져들었다.

 

- "그 대리나 과장도 딱해 보이던 걸요. 딴에는 후배들의 존경과 관심을 한 몸에 받을 거라고 기대에 부풀어 학교에 왔을 텐데. 그걸 드러내놓고 하는 게 물론 세련되거나 고상한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비난받을 일도 아니잖아요? 그런 면에서 오늘 선배가 좀 야비했어요."
"잘도 관찰했네. 회식 자리에서는 어디에 있었던 거야? 그 부대찌개 집에서는 못 본 것 같은데."
"뒷자리에 얌전히 앉아 있었어요."

 

- 나는 세연 같은 유명 인사가 그렇게 눈에 띄지 않고 회식 자리에 앉아 있었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그녀는 어디에 있든 남학생들의 표적이 아니었던가?
"저는 제가 원하면 사람들의 관심을 받지 않을 수 있어요. 남자들이 접근하지 못하게 할 수도 있고요."
"그런 게 가능해?"
"전 사람들을 잘 다뤄요."
촛불에 비친 세연의 모습은 꿈을 꾸는 듯한 표정이었다. 세연은 가방에서 반짝거리는 담배 케이스를 꺼냈다. 그 안에 든 담배는 필터가 없었고, 담뱃잎 가루를 싼 종이도 뭔가 허술해 보였다. 
"젊은 남자들을 다루기란 특히 쉬워요. 젊은 남자들이 예쁜 여자애의 관심을 얻는 것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게 뭔지 알아요?"
세연은 자신을 예쁜 여자애라고 부르는 데 조금의 부끄러움도 없었다. 
"예쁜 여자애랑 섹스하는 거?"
"예쁜 여자애에게 무시당하지 않는 거요. 그래서 상대방에게 '여기서 잘못하면 자존심을 구길 수 있다'는 점을 슬쩍 암시하면 남자애들은 겁을 먹고 저를 모른 척해버리죠. 유용한 기술이에요."
그 방의 젊은 남자 세 사람은 바보처럼 세연의 말을 듣기만 했다.

- "이를테면 말이죠, 여기 약간 특이하게 생긴 담배가 있어요. 내가 선배들과 이 담배를 같이 피우고 싶다면, 어떻게 할까요. 우선 제가 이렇게 한 대 피우고 -세연은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리고 이 담배가 좀 위험한 물건인 것처럼 으스대볼까요? 그러면 선배가 먼저 한 대 달라고 할지도 모르죠.”
그녀는 새 담배 한 개비를 꺼내더니 내게 권했다. 나는 담배를 받아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살짝 겁을 먹었지만, 필터가 없어서 독하다는 것 말고는 특별히 일반 담배와 다른 점을 알아채지 못했다. 
"휘영 선배한테는 어떻게 해야 하죠? 뺨에 뽀뽀해 주겠다고 하면 피울지도 몰라. 그렇죠?"
휘영은 얼굴을 붉혔다. 그는 세연에게서 '담배'를 한 개비 얻어갔고, 순간 세연은 솜씨 좋게 휘영의 턱을 잡아끌더니 뺨에 입을 살짝 맞췄다.
"밖에 여관 잡아줄까?"
내 농담에 휘영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어둠 속에서도 병권이 바짝 긴장하는 것이 보였다.
시간이 흐르자 서서히 '담배'의 약효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우려했던 것처럼 사물이 비뚤어 보인다거나 환각을 겪는 일 따위는 없었다. 보이는 것도 들리는 것도 그대로였다. 다만 몇 분 사이에 몇 년이 지나가버린 것 같은 기묘한 느낌과 이 세상에 나 혼자밖에 없는 것 같은 외로운 기분이 들었다. 

- "혹시 종교가 있는 사람 있어요?"
세연이 물었다.
"저는 무신론을 믿어요. 설사 신이 존재하더라도 그 사실을 인정할 수 없죠. 저의 세계관은 세상에 신이나 절대적인 가치는 없다는 데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하느님이 등장하면 모든 게 망가져버려요..." 

- 우리 집에 온 날이면 세연은 대개 새벽 두세 시까지 음악을 들으며 컴퓨터로 글을 쓰거나 책을 읽었다. 나와 번갈아 기타로 곡을 연주하기도 했는데 그녀는 기타 솜씨가 아주 뛰어났다. 
밤이 되면 그녀는 미안한 기색도 없이 내 침대에서 잠을 잤고 나는 바닥에 이불을 깔고 잤다. 아침에 눈을 뜨면 그녀는 항상 먼저 일어나 화장을 마치고 옷도 깔끔하게 차려입은 뒤였다. 
"기숙사에는 안 가도 되나 보지?"
"기숙사에서는 집중이 안 돼서 고시원을 따로 마련했다고 얘기해 뒀거든."
나는 그녀에게 먼저 학교로 가라고 했지만 그녀는 나와 함께 등교하는 것을 꺼리지 않았다.
"어차피 아이들이 다 나를 걸레로 생각하는데 뭐."
그녀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 그러나 세연과 나 사이에는 신기할 정도로 성적인 긴장감이 별로 없었고, 우리는 섹스도 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신체 건강한 젊은 남녀가 한방에서 잠을 자면서 아무런 일도 생기지 않는다는 사실을 신기하게 여겼으나 이제는 그것이 세연의 용의주도한 관계 설정 때문이었음을 안다.
"나, 외음부 경직이 있어. 섹스를 하려고 해도 안 돼. 절개수술을 받아야 해."
어느 날 그녀는 진지하게 말했다.
그런 그녀가 휘영과 병권 앞에서는 요부 행세를 하고 있었다는 것을 그땐 몰랐다. 심지어 나와 밤을 보냈다는 사실을 두 사람에게 알려 자신을 위험한 여자로 여기게 하는 데 이용했다는 것도. 

- 솔직히 세연이 어떻게 다른 사람의 마음을 그렇게 쉽게 쥐락펴락할 수 있는지는 당하는 나조차 영문을 모를 지경이었다.
그건 마치 춤의 대가로부터 스텝을 배우면서 춤을 추는 것이나 처음 보는 컴퓨터게임을 할 때 고수가 옆에 붙어서 마우스를 함께 쥐고 내가 할 일을 코치해 주는 것과 비슷했다. 내 행동에 대한 통제권을 남에게 넘겼지만, 나도 어쨌든 신기한 경험을 하면서 거기에 빠져드는 상황.

- 실제로 박 회장은 선우 씨를 제외한 다른 3명의 자녀에게는 계열사 지분을 거의 나눠주지 않았다.
비록 후계자로 삼겠다는 얘기를 단 한 번도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박 회장은 뒤늦게 태어난 장남 선우 씨를 각별하게 생각했다. 진호그룹 관계자는 "선우 씨가 MBA 유학을 마치는 대로 (주)진호로 들어와 정식 후계 수업을 받는 것은 기정사실이나 다름없었다"라고 말했다. 
2세 경영인이지만 현재의 진호그룹을 거의 혼자서 일궈낸 박 회장은 '자식들도 스스로 커야 한다'는 생각이 강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가운데 일각에서는 장녀인 아영 진호C&I 상무보를 주목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리틀 박주영'이라는 별명까지 있는 아영 상무보가 진호그룹 경영권 승계 과정에서 태풍의 눈이 될 수 있다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박 회장도 지난해 아영 상무보가 진호C&I 기업의 로고 개편 작업을 성공적으로 이끌자 "아들이었으면 좋겠다"라며 애정을 표시하기도 했다는 후문이다. 아영 상무보 본인도 진호C&I에 기획관리실장으로 입사했을 때부터 경영에 활발히 참여하며 자회사들의 사업 보고까지 챙긴 것으로 전해졌다. 그룹 사정에 정통한 한 관계자는 "아영 상무보는 호오가 분명하고 대범한 성격"이라며 "그룹 안에서는 선우 씨가 박 회장의 '머리'를 이어받았다면 아영 상무보는 '가슴'을 물려받았다고 얘기한다"라고 말했다.

(리뷰자 주 : 국내 모 기업이 떠오른다.) 

- "뭔가 가치 있는 일을 하고 싶다고 했지. 공익 같은 것에 기여하면서 기자가 되고 싶다고 하지 않았나?"
"난 그런 얘기한 적 없어."
소크라테스가 화들짝 놀라서 반박했다.
"뭐 아무튼 괜찮아. 너희에게 문제는, 너희가 세운 그런 목표가 뭔가 찜찜하게 여겨진다는 것이겠지. 죽지 않고 살아야 하는 이유를 찾아야 하는 상황에서 세상과 타협한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게 문제겠지? 그런 목표들이 자기기만처럼 여겨지고 말이야. 난 주관적인 목표를 정해놓고 그것을 달성하기 위해 사는 건 전혀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 신이 없다고 해도 말이야. 신이 없고 내세가 없으면 역사도 없는 걸까? 그렇다고 본다면 각자의 쾌락을 추구하면 되지. 그것만큼 확실한 건 없으니까. 그리고 역사가 없는 것도 아닐 거야. 우리는 본성상 남의 시선을, 내가 죽은 다음에라도 신경 쓰는 존재거든. 너희도 죽기 전에 마지막 할 일이 하드디스크의 야동 지우는 거라고 농담하잖아. 
그러니까 자기만족을 위해 어떤 일을 하겠다거나, 역사에 남는 일을 하겠다거나 하는 목표는 다 좋은 거야. 그걸로 완결된 거야. 누구의 승인을 받거나 할 필요가 없어. 
그런데 왜 우리가 세운 목표가 마음에 차지 않는 걸까? 그 목표들이 시시하다는 걸 우리 스스로도 알고 있기 때문이야. 충분히 위대한 목표는 그 자체로 우리 가슴에 불을 지르고, 그러면 그걸로 충만해지지. 괜찮은 직업을 갖고 애를 낳아서 기른다는 목표로는 절대 이를 수 없는 경지야."
"그러면 무슨 목표를 세워야 해? 세계 평화? 열대우림 보호? 제3세계 인권 운동?"
"그런 뻔한 것들 말고 좀 참신한 것 없어? 꼭 정의롭거나 하지 않아도 좋으니까 말이야."

- 소크라테스는 잠시 궁리하다 입을 열었다.
"기자가 된다면 뭔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글을 쓰고 싶어."

 

- "시시해. 별로 위대하지 않아. 시시한 일을 추구하면 사람의 값어치도 낮아져 실패하더라도 굉장한 걸 쫓아야 해."
재키가 말을 잘랐다.
"그럼 뭐가 위대한 일이지?"
"아무도 전에 시도하지 못했고, 아무도 생각하지 못한 일. 그 일 이후에는 모든 사람의 생각이 바뀌게 되는 것, 반대하는 사람이라도 무시할 수는 없게 되는 그런 일. 진화론이나 상대성이론 같은 것."
"그런 게 있어?"
"오늘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 중 하나가 그건데, 사실 그런 일들이 별로 남아 있진 않아. 뇌 과학이라든가 분자생물학 분야에는 아직 혁명거리가 남아 있겠지. 하지만 내가 말하는 건 진짜 혁명 얘기야. 진짜로 세상을 바꾸고 사람들의 존경을 얻는 일에 대한 얘기. 진짜 영광스러운 일은 그런 일에 있지. 실패하더라도 칭찬을 듣는 일이라니까. 그런데 그런 일들은 이미 워싱턴이라든가 링컨이라든가 애덤스라든가 마틴 루터 킹 같은 사람들이 다 해버렸어. 동성연애자들이 결혼할 권리까지 이미 누가 먼저 주장해 버렸다니까."

- "아직은 네가 들을 준비가 안 돼 있어."
재키는 웃으며 말했다.
"사실, 너는 내가 죽은 다음에나 준비가 될 거야."
세연은 그해 6월에 죽었다.

- "그린 설계도를 따라 개선될 일은 많겠지만 그런 건 행동 대장들이 할 일이지. 참 완벽하고 시시한 세상이지 않니?
나는 그런 세상을 '그레이트 빅 화이트 월드'라고 불러. 그레이트빅 화이트 월드에서 야심 있는 젊은이들은 위대한 좌절에 휩싸이게 되지. 여기서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우리 자신이 품고 있던 질문들을 재빨리 정답으로 대체하는 거야. 누가 빨리 책에서 정답을 읽어서 체화하느냐의 싸움이지. 나는 그 과정을 '표백'이라고 불러."
"그래서 자살하려는 거야? 아무것도 할 게 없어서?"
"아니! 난 뭔가 위대한 일을 할 거야. 생각해 놓은 일도 있고."

"그게 뭔데?"
"글쎄, 설명하려면 시간이 한참 걸려. 그리고 이제 모텔에서 나갈 시간이야. 씻어야 해."
재키는 그렇게 말하고 샤워실로 들어가 버렸다.

- 세연이 죽기 몇 시간 전에 나는 신촌에서 그녀를 만났다. 나는 추와 함께 있었고, 세연은 내가 모르는 남자와 함께 있었다.
그날 낮에 추에게서 전화가 왔다. 괴상한 애라고는 생각했지만 예쁘긴 했고, 또 전화로 듣기로는 그날은 멀쩡한 것 같았으므로 ...

- 그런데도 나는 추에 대한 흥미를 잃거나 그녀를 버려두지 않고 또 술을 마시러 갔다. 실은 정말 이상한 일이었지만 그녀가 술에 취하면 취할수록, 그녀가 괴상해질수록 나는 그녀에게 더 빠져들었다. 
추는 제정신이 아닐 때 더 재미있는 인간이었고, 그건 나도 그랬다. 그리고 그녀 안에서 술에 취하면 자극되는 부분과 내 안에서 술에 취하면 자극되는 부분은 마치 암나사와 수나사처럼 잘 맞아떨어지는 듯했다. 그런 점에서 내게 추와 세연은 달랐다. 그리고 세연은 나와 추가 서로 잘 맞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추를 뒤따라 나가 보니 그곳에 세연이 있었다. 세연은 하늘색 원피스를 입고, 나와 비슷한 키의 인상 좋은 청년과 서 있었다. 추의 태도는 기이했다. 세연을 보자마자 울음을 터뜨리고 그녀의 손을 잡으며 뭐라고 말했는데 그 모습이 몹시 과장돼 보였다. 세연은 추를 다독였다. 
그동안 나는 세연과 함께 있던 청년을 안 보는 척하면서 살피고 있었다. 잘생긴 얼굴과 잘 차려입은 옷 때문에 얕잡아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어쩐지 그의 태도에는 상대를 기죽게 만드는 요소가 있었다. 잘난 녀석이 잘난 체도 안 하고 유약해 보이지도 않으면 흠잡을 데가 없어서 기죽게 되는 그런 것 말이다. 그가 세연과 추 사이에 끼어들지 않았으므로 나도 끼어들지 않았다.

- 그 답이 나를 아무 곳으로도 데려가지 않을 뿐이지.

"고르디우스의 매듭. '매듭을 푸는 자가 아시아를 지배한다는 전설을 들은 알렉산더 대왕은 매듭을 칼로 잘라버렸습니다.' 우리 아버지가 원하는 건 그런 거야. 몇 년 전에 가게에서 동전으로 계산을 하다가 셈이 맞지 않아서 아버지를 기다리게 한 적이 있어. 아버지는 짜증이 났는지 갑자기 만 원짜리 지폐를 꺼내서 점원에게 주고, 거스름돈은 필요 없다고 말하고는 내 뺨을 한 대 때렸어. 그러고 나서 '이게 교훈이다'라고 하셨던가? 뭐, 그런 문법에도 안 맞는 말씀을 하셨던 것 같아. 그보다 더 전에는 집에서 보고를 받다가 비서실장의 얼굴에 서류를 집어던진 적도 있어. 
당신이 어릴 때부터 천재라는 소리를 들으며 자랐고 파격적인 결정으로 남들을 여러 번 놀라게 했으니, 그리고 그 결정이 나중에는 다 선견지명이었던 것으로 드러났으니, 뻔한 모범생인 나를 보면 매사에 실망할 수밖에 없겠지. 그렇다고 해서 나까지 괴팍해져야 할까? 나는 내 길을 가는 거야. 아버지가 원하는 대로 성격까지 바꾸고 싶진 않아." 
"너희 아버지 기사를 찾아봤어. 삼성은 한번 그만둔 임원은 다시 부르지 않는데, 너희 아버지는 쫓아낸 임원을 몇 년 뒤에 다시 부르는 경우가 있어서 전직 임원들이 회사를 나간 다음에도 휴대전화 번호를 바꾸지 못한다더라." 
"임원 인사를 즉흥적으로 해서 그래. 진호그룹에서는 없는 것 중 하나가 정기 임원 인사라잖아. 어느 날 승진시켰다가 어느 날 갑자기 쫓아내니까. 쫓아낼 때도 그렇게 인정머리가 없어서 다들 한을 품는다더군." 
"영리한 방법 아니야? 난 너희 아버지가 사람을 부리는 법을 안다고 생각해. 그렇게 쫓아내니까 밑에 있는 사람들이 한시도 긴장을 늦출 수 없고, 쫓겨나서도 혹시나 다시 불러줄까 하는 생각에 회사에 대해서 비판도 못하고 기다리게 되는 거지."
"그건 이론일 뿐이야. 조직원들의 사기가 떨어지고, 임원들은 다른 회사로 이직하거나 오너 눈치만 보면서 보고를 정직하게 하지 않을 수도 있어."
"누가 그런 술수를 쓰느냐에 달려 있겠지."
"아마 너라면 그런 술수를 잘 쓸 수 있을 거야. 내 동생은 잘 모르겠어. 나는 아냐."

- '잡기 모음 1000~3999'은 세연이 그해 4월까지 겪은 일들을 3인칭 소설처럼 서술한 글이었다. 세연은 고등학생과 대학 시절 얘기, 자신에게 간질 증세가 있다는 고백 등을 여기에 썼다. 안네 프랑크의 일기처럼 중간에 그녀가 쓴 에세이나 동화도 나온다.
이 글에서 세연은 자신을 '재키'라고 부르고 있으며, 휘영은 '소크라테스', 병권은 '재프루더'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나는 '적그리스도'다. 실제 내 별명을 그대로 캐릭터 이름으로 쓴 것이다. 휘영을 '소크라테스'라고 한 것은 그의 고리타분한 성격 때문일 것이리라. 추는 이 글에서 '루비'인데, 그녀는 자신의 영어 이름이 '루비'라고 말한 적이 있다. 

- 나는 세연이 죽기 전날 밤 만났던 남자, 추와 술을 마시다가 이자카야 앞에서 봤던 그 단정한 청년이 '하비' 일 거라고 생각했다.

- "사람들을 가장 감질나게 하는 게 뭔지 알아?"
재키가 하비에게 물었고, 하비는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끝나지 않은 이야기지. 왜 어릴 때 그런 적 있잖아? '주말의 명화' 시간에 부모님이 일찍 들어가라고 하는 바람에 끝까지 보지 못한 영화의 결말이 궁금해 며칠 동안 머릿속을 떠나지 않던 경험. 그런데 정작 결말을 알아봤더니 시시했던 거." 
"아버지가 엄해서 저녁에 TV 자체를 못 봤어."
"전래 설화부터 최신 할리우드 영화까지, 아주 짧은 농담부터 긴 장편소설까지, 동양 고전이나 서양 고전이나, 왜 모든 이야기의 구조는 다 똑같을까? 난 인간의 뇌가 세상을 파악하는 방식이 그런 이야기 구조와 닮아 있다고 생각해. 뭔가 흥미로운 것이 출현하고, 그게 위험한 건지 아닌지 계속 정체가 밝혀지지 않아 긴장감이 점점 높아지다가 극적인 전환이 일어나 긴장감이 해소되면 비로소 안도감을 느끼게 된단 말이지. 
그래서 나는 내 얘기를 둘로 쪼개서 뒷부분을 몇 년 뒤에나 읽을 수 있게 하려고 해. 그러면 몇 년 동안 사람들의 마음을 붙들어놓을 수 있을 거야." 
"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그런 장치를 만들어낼 필요가 뭐가 있어? 현대는 매스컴 시대인데. 15분이면 누구나 유명인이 될 수 있는 것 몰라?"
"대신에 잊히는 데도 15분이면 충분하지. 난 잠깐 유명해지고 싶은 게 아니야. 난 불길한 악몽의 기억처럼 끈질기게 '그런 게 있었다'라고 사람들 머릿속에 끝까지 남고 싶어. 매스컴은 그다음이야."

- 하비는 '매스컴'이라고 한마디 중얼거린 뒤 갑자기 깨달았다는 듯이 말했다.
"내 역할이 그거군. 매스컴, 스캔들에 빠진 재벌 3세."
"그런 역할도 있어. 좋을 대로 생각해. 내가 널 어떻게 이용하든 너에 대한 평가는 그와 별개야. 그게 너 스스로 내리는 자기 평가만큼 중요한 것도 아니고."
하비는 잠시 침묵했다. 그는 자신이 타인의 시선을 지나치게 신경 쓴다는 사실이 약간 부끄럽게 느껴졌다. 하지만...

- "남들의 평가에 집착하는 건 너도 마찬가지야."
하비가 반박했다.
"당연하지. 난 선동가니까."
재키가 대꾸했다.

- "한 1, 2년 더 있다가 하면 안 돼?"
하비의 질문에 재키는 고개를 저었다.
"안돼."
"왜?"
"삼성전자에서 합격 통보를 받았어. 내년이면 그 회사에 다녀야 해. 회사를 다니다 자살하면 사람들은 업무 부적응과 우울증이 원인이라고 할 거야. 누가 봐도 아쉬울 게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실행해야 해."

"네가 7급 공무원 생활을 안 해봐서 그런 거야. 나이가 쉰이 되도록 젊은 애한테 고개 숙여야 하고, 아무리 수십 년을 일해도 자기 목소리 한번 낼 수 없는 게 하급 공무원 생활이다." 
도대체 반대하는 이유가 뭐냐는 내게 아버지가 한숨을 쉬며 한 말이었다.
"그런 건 괜찮아요."
"그런 게 괜찮다고? 너 7급 공무원 하라고 서울에 있는 대학 보내준 거 아니야. 시험 준비를 해도 왜 행정고시가 아니라 7급 공무원이냐? 왜 그렇게 야심이 없니?" 
"그러는 아버지도 7급 공무원 아니셨어요? 이제 겨우 5급 되신 거잖아요?"
"나한테는 너처럼 누가 그렇게 학비 보내주지 않았다."

- "아버지, 저 무슨 장차관 하려고 7급 공무원 하겠다는 거 아니에요. 제가 진짜 하고 싶은 일 하면서 살고 싶어서 그런 거예요. 공무원 생활은 안정적이니까 낮에 일하고 퇴근한 다음에 제가 하고 싶은 일하려고요. 아인슈타인도 특허청에 다니면서 밤에 물리학 연구 했다잖아요."
"네가 진짜로 하고 싶은 일이 뭔데?"
"밴드요. 기타 치고 노래 부르는 거요. 그런데 제가 그거 하겠다고 하면 돈벌이가 되겠냐며 말리실 거잖아요. 그러니까 공무원 생활 하고 제 앞가림하면서 남는 시간에 밴드를 할 거예요. 그게 제 야심이에요."
"회사 다니면서도 기타 치고 노래도 부를 수 있어. 저번에 TV 보니까 스위스에서 박사 공부하면서 노래 부르는 젊은이도 있고, 치과의사 하면서 작사·작곡하는 애도 있더라. 다 네 또래들이야. 서울대 다니면서 대학가요제 나와서 우승하는 사람도 있어. 너 윤장배 씨라고 들어봤냐. <나 어떡해>라고 우리 때 아주 유명한 노래 부른 양반이다. 그 양반 그렇게 노래 부르고 그룹사운드 하면서도 행시 합격해서 청와대 갔어."
 
- "스터디하는 애들도 다 학원 다녀요. 스터디는 서로 아침에 도서관 나왔는지 체크하고 정보를 교환하기 위한 거라고요. 학원 나가는 건 필수예요."
"네가 무슨 얘기하는 건지 모르겠다. 고작해야 국어, 영어, 국사 시험 정도일 거고, 그거 다 서점에 문제지들 나와 있는 거 아니냐. 너 정말 학원 다닐 거냐? 어디 돈 필요해서 학원 다닌다고 하고는 돈 받아 쓰려는 거 아니야?"
어머니가 옆에서 '애한테 기회 한 번 줘보라'고 나를 거들었지만 아버지의 역정에 본전도 건지지 못했다.
더욱 기가 막힌 일은 막 군대를 제대한 동생 녀석이 장사를 하겠다고 하자 아버지가 크게 칭찬하며 밑천을 빌려주기로 한 사실이었다. 이 녀석은 전주 시내 B대학 앞에서 친구와 함께 노점을 내고 머리핀과 휴대폰 줄 같은 장식품을 팔겠다며 아버지에게 500만 원을 빌려달라고 했다.

- "걔가 너보다 나아."
동생에게 물어보니 시장조사를 한 것도 아니고 자기 친구와 그냥 유행하는 아이템 몇 가지를 서울 동대문에서 사 와 길거리에서 팔겠다는 것이었다.

[이런 변화는 일부 신경학자가 측두엽 인격이라고 부르는 것을 만들어낸다. 이 환자들은 감정 상태가 고양되어 있으며, 사소한 사건에도 우주적 의미를 부여한다. 그들은 유머가 없고, 자신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는 경향이 있다. 또 평범한 사건들을 매우 자세하게 기록하는 일기를 쓴다. 이는 글쓰기 중독이라 부르는 특징이다... 그들은 철학적이고 신학적인 주제에 강박적으로 집착한다.]

<라마찬드란 박사의 두뇌 실험실>, 빌라야누르 라마찬드란


- '자살을 통한 어떤 선언'은 오랜 기간 계획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해 초에 갑자기 떠오른 어떤 생각을 구체화하는 과정에서 나왔다. 발단이 된 생각은 '취업 선배들과의 대화' 행사 뒤풀이에서 적그리스도가 H그룹 인사부 과장에게 "왜 청년들에게 도전 정신이 있어야 하는 거죠"라고 따질 때 떠올랐다.
사실은 이미 세계가 완벽한데, 기성세대가 자신들이 하기 싫은 일들을 대신 시킬 수 있는 싼 노동력이 필요하기 때문에 다음 세대에게 꿈과 도전 정신을 불어넣고 있다는 아이디어를 재키는 그날 저녁 머릿속에서 발전시켰다. 

- "그냥 네가 죽고 싶어서 만들어낸 계획이잖아? 명분이 필요했던 거지? 왜 그렇게 자살하고 싶어 해?"
언젠가 루비가 물은 적이 있다. 재키에 대한 집착과 의존적인 성격이 있긴 했지만 루비는 머리가 좋고 감도 빨랐다. 재키는 루비의 주장을 부정하지 않았다.

 

- 숨은 동기가 있다거나 입안자의 정신 상태가 건강하지 못하다고 해서 계획이 틀어지거나 선언의 의미가 축소되는 것은 아니다. 찰스 맨슨 일당이 저지른 살인 사건들은 물론 그 일당이 제정신이 아니었다는 걸 알려줬지만, 동시에 미국 사회 역시 정상적이지 않다는 것을 드러내기도 했다. 이것이 테러범들이 그토록 유리한 이유다. 어떤 것이 완벽하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기는 쉽다. 아주 작은 균열, 아주 작은 실패를 찾아내기만 하면 된다. 그런 이야기를 루비에겐 말하지 않았다. 재키는 자기 자신의 진정성을 확신할 수 없었다. 그러나 세상 모든 일이 그렇다. 

- 재키는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자신이 비정상임을 깨달았고 자살을 꿈꿨다.  

- 뒤에는 눈꺼풀을 손가락으로 누르면서도 정신을 집중하면 발작을 어느 정도 참을 수 있다는 것까지 알게 됐다.
그런 일들을 한 이유는 도스토옙스키가 간질성 발작 중 신(神)을 보았다고 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도스토옙스키의 경험을 재현하기 어려웠으나 차차 익숙해지면서 발작 직전의 어느 짧은 순간에 무섭고도 황홀한 기분을 얻을 수 있었다. 그것은 마치 끝없는 구멍 속으로 빠르게 떨어지면서 다음 순간 세상의 모든 것을 한꺼번에 알아차릴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또는 끝없이 펼쳐진 미로를 둥둥 뜬 상태에서 내려다보는 기분이었다.

 

- 그런 기분은 도스토옙스키가 묘사한 것과는 달랐다. 대문호는 '지혜와 정서가 더없이 밝은 빛으로 빛나고 온갖 의혹과 불안이 신성한 평온 속에 녹아버린다'라고 썼다.
재키가 경험하는 정신적 체험은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까웠다. 모든 희망과 절망의 감정이 다 사라져 버리고 어떤 가능성도 남지 않은, 압도적으로 절대적이고 완벽한 끝이었다. 그것은 그녀가 열역학 제2법칙에 대해 생각할 때마다 사로잡히곤 하는 개념, 엔트로피가 최대에 이르러 에너지로 쓸 수 있는 것이 조금도 남지 않은 열종말 상태와 같았다. 그 나름대로 종교적인 체험이었다.
오랜 역사 속에서 가장 수치스러운 병으로 간주돼 온 지랄병이 그런 가능성을 품고 있다는 사실에 재키는 강한 인상을 받았다.  


- 아니다. 그들은 그저 예수가 제자들을 필요로 할 때 어느 정도 의지를 갖고 근처에 있던 사람이었다.
예수가 종교 지도자와 왕족들로 12제자를 구성했더라면 그토록 세를 확장할 수 있었을까? 처음에는 세를 불리기 쉬웠을지라도 거기에는 어떤 한계가 있었을 것이다. 그 지도자와 왕족들이 죽고 난 다음에는 추종자들이 소리 없이 사라졌으리라. 오히려 주 예수를 세 번씩 부정한 수제자와 직접 그리스도의 옆구리 상처를 만져봐야 부활을 믿겠노라고 했던 복음서의 저자가 있었기에 후세 사람들이 예수의 이야기를 더 열렬히 믿을 수 있었다. 

- 그렇다고 재키가 자신의 제자들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소크라테스와 재프루더, 적그리스도, 루비, 하비, 제리, 메리 등은 모두 자질이 있었다. 그들은 옳다고 믿는 것을 위해서라면 다른 많은 가능성을 희생할 수 있을 정도로 순수했고, 21세기의 한국사회가 구성원들에게 지상 과제로 제시하는 성공의 가치를 의심할 수 있을 정도로 영리했다.
그들은 그 성공의 가치와 자신들이 옳다고 믿는 것 사이의 모순을 감지할 수 있을 정도로 예민했고, 무엇보다 그 모순을 해소하기 위해 어떤 일을 저지를 수 있을 정도의 에너지를 지닌 젊은이들이었다.
 
- "누가 어느 남자랑 자라고 하면 그러는 애로 보여, 내가?"
어떤 의미에서는 추가 세연보다 더 이해하기 힘든 인간이었다. 세연은 미치긴 했지만, 논리적이고 사고와 행동에 일관성이 있었다. 추는 그런 게 없었다. 정말 예측 불능이었다. 
나는 그런 추의 기행이 세연의 행동을 어설프게 흉내 내다 학습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쩌면 추가 원래부터 불안정한 성격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 해도 나와 지내던 시기 추가 벌였던 괴상한 행동들은 분명 관객인 나와 죽은 세연을 의식한 것이었다. 추는 세연을 숭배하면서도 그녀 자신도 완전히 없애버릴 수 없는 시기심을 마음 밑바닥에 지니고 있었다. 
그녀는 제2의 세연이 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런 시도는 범재가 천재인 척 굴 때 대부분 그렇듯 우스꽝스럽게 보일 뿐이었고, 추 자신도 그것을 잘 알았다. 세연처럼 미칠 수 있는 사람은 세연밖에 없다. 세연의 자유로움과 당당함은 광기의 결과가 아니라 원인이거나 아니면 같은 원인을 두고 있는 서로 다른 종류의 결과물이다.

- 왜 내가 이 기회를 저버려야 해?


- ["당신은 신비적인 숭배의 대상이자 전설적인 존재, 멀린. 당신의 정체가 무엇인지 나는 모르오. 하지만 그런 당신의 힘을 성전(聖戰) 따위에 허비하지는 마시오. 이번에는 뭔가 다른 일을 하는 것이 어떻겠소. 의사가 되어서 고통과 싸운다든지, 그림을 그리시오. 역사학 교수가 될 수도 있고, 골동품 연구자가 될 수도 있지 않소. 아니면 아예 사회평론가로 변신해서 인간의 악을 지적하고, 어떻게 그걸 고칠 수 있는지 지적하면 되지 않소."
"그런 일들이 나를 만족시킬 수 있다고 정말로 믿고 있나?"]

<캐멀롯의 마지막 수호자>, 로저 젤라즈니

 

 

"어떤 젊은 여자가 나를 찾아올지도 모르는데, 누가 나를 찾아와도 내가 여기 있다고 말하지 말아 주세요"라고 총무에게 사정했다.
30대 중반의 총무는 무슨 범죄를 저지른 건 아니냐고 물었다.

"아이, 그런 건 아니고요. 그냥 사정이 좀 있어서 그래요."

나는 울컥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비굴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총무는 "여자애 임신이라도 시킨 거야?"라고 물었다. 그는 내게 정말 무슨 범죄를 저지른 게 아니냐고 다시 한번 묻고 다른 사람이 오면 숨겨주겠지만 경찰이 찾아오면 자기도 어쩔 도리가 없다고 말했다.

- 새로운 담론을 제기할 수조차 없는 환경은 우리 세대의 가치관에도 예상치 못한 영향을 미친다. 이른바 '표백 세대'의 등장이다. 이 세대에게는 실질적으로 어떤 사상도 완전히 새롭지 않으며, 사회가 부모나 교사를 통해 전달하는 지배 사상에 의문을 갖거나 다른 생각에 빠지는 것은 낭비일 뿐이다. 그런 시도는 기껏 잘돼봤자 기존 지배 사상이 얼마나 심오하고 빈틈없는지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되는 효과만 낳는다.

이들에게 지배 사상은 큰 틀에서 항상 옳으며, 그 사상을 받아들이는 데 개인마다 과정과 깊이가 다를 수는 있으나 결론은 언제나 같다. 이들은 지배 사상을 받아들이는 것 외에 다른 선택지가 없다.
따라서 실제 삶에서 온갖 종류의 불편함과 부당함을 겪어야 하는데도, 이에 대한 문제 제기는 개인이나 작은 이익집단 단위를 넘어서지 못하게 되며, 세계는 사상적으로 완전무결한 상태가 된다.
이것이 바로 표백 과정이다. 아무도 더 나은 시스템을 떠올리지 못한다. 거대한 흰색 세계는 모든 빛을 흡수하며 무결점 상태를 유지한다.

- 나는 도서관에도 가지 못했다. 추가 학교 도서관 정문에서 아침저녁으로 나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1시간이면 중앙도서관의 모든 자리를 다 살펴볼 수 있다. 
나는 되도록 외출을 자제하며 고시원에 틀어박혔고, 꼭 필요한 물건을 사러 밖을 나갈 때에도 최대한 거리에 오래 있지 않으려 했다. 나는 점점 비쩍 마르고 피부가 허옇게 됐다. 고시원의 탁한 공기 때문에 코에는 언제나 코딱지가 가득했고 수시로 손가락을 콧구멍에 집어넣어 코를 파는 버릇이 생겼다. 낮과 달리 밤에는 냉방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때 이른 열대야에 잠을 설치기도 했으며, ...

- 거기서 각자 조용히 식사를 했다. 전기밥솥에 있는 밥은 공짜였고, 조리 기구나 밥그릇도 사용하고 나서 설거지만 하면 마음대로 이용할 수 있었다. 나는 마가린에 비빈 밥을 김에 싸 먹는 게 전부였기 때문에 초라한 반찬을 남들에게 들키기 싫어 일부러 오후 2, 3시쯤 부엌으로 갔다. 그러다 나와는 반대의 이유로 일부러 그 시간에 부엌을 찾은 사람들과 마주치기도 했다. 구운 스팸 같은 맛있는 반찬이 있어서 다른 사람 몰래 먹으려는 사람들이었다. 
구운 스팸 따위 때문에 그렇게 구차해지는 꼴이라니... 그런데 정말 먹고 싶었다. 고시원 방까지 스팸 냄새가 따라오는 듯했다.

- 위대한 일을 할 기회를 박탈당한 세대는 어떻게 되는가? 그들은 출세나 개인적인 성공과 같은 보다 작은 성취에 매달리게 된다. 그런데 완성된 사회는 개인적인 성공에 대해 사실상 단 하나의 평가기준만 지니고 있다.
이는 자유민주주의와 수정자본주의의 결합에서 필연적으로 나올 수밖에 없는 결과다. 자유민주주의는 교리에 따라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근본적으로 우월할 수 없고 모든 사람이 가치 면에서 평등하다고 주장한다. 수정자본주의는 시장 가치를 바탕으로 하는 평가 척도 한 가지만을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두 이데올로기가 결합한 가치 체계에서 한 인간의 가치를 재는 방법은 '그 사람이 자유민주주의가 허용하는 범위 안에 있는가(독재자나 범죄자가 아닌가'와 '그 사람이 얼마나 높은 시장가치를 갖고 있는가'가 된다.

- 따라서 완성된 사회에서 표백 세대의 젊은이는 부에 대한 욕심이 크지 않더라도 자신의 능력과 야망을 증명하려면 돈을 버는 경쟁에 뛰어들어야 한다. 그 외에는 다른 사람들에게 그의 존재 가치를 주장할 다른 방법이 없다.
군대를 일으켜 무공을 세우는 일은 자유민주주의의 이념에 어긋나며, 단식과 묵상으로 깨달음을 얻는 행위는 시장에서 높은 평가를 받지 못한다.
그러나 돈을 얼마나 많이 버느냐를 놓고 벌이는 시합에서도 표백 세대는 좌절할 수밖에 없다. 완성된 사회는 가능성이 그만큼 고갈된 사회기 때문에, 부를 창출하는 능력에서도 성숙한 단계에 있다. 닷컴 열풍, 부동산 시장 활황과 같은 국지적인 성장은 때때로 가능하지만 산업화 초·중반에 볼 수 있었던 '경제 전반에 걸친 활기'는 찾아보기 어렵다. 완성된 사회의 경제성장률은 이론적으로 0퍼센트에 가까워야 한다. 


- 즉 표백 세대들은 아주 적은 양의 부를 차지하기 위해 이전 세대들과는 비교도 안 되는 경쟁을 치러야 하며, 그들에게 열린 가능성은 사회가 완성되기 전 패기 있는 구성원들이 기대할 수 있었던 것에 비하면 아주 하찮은 것에 불과하다. 가장 똑똑하다는 젊은이들조차 엘리트 조직의 끄트머리가 되기 위해 몇 년을 골방에 처박혀야 하고, 그런 노력이 결실을 얻은 뒤에도 조직의 말단에서 다시 경쟁을 시작해야 한다.
표백 세대는 같은 세대뿐 아니라 이미 사회에서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기성세대들과도 경쟁해야 하는데, 사회 각 분야가 고도로 발전해 있고 표백 세대들이 가진 자원이 거의 없다는 점을 고려하면 매우 불리한 게임이다. 분배 방식이라는 게임의 규칙조차 기성세대가 정한 것을 따라야 한다. 

- 이런 한계 속에서 표백 세대의 내면은 추하게 일그러진다. 그들은 자신의 역사적인 위치나 사명에 대해 깊이 고민할 것이 없으므로 역사의식이 희박해지며, 민족주의처럼 그들의 자존감을 손쉽게 높여줄 수 있는 불합리하고 값싼 이데올로기에 의존하는 경향이 생긴다. 
박탈감과 좌절감은 뿌리 깊이 박혀 있지만 이런 좌절감은 집단적인 분노로 발전하지 못한다. 투쟁은 손해 보는 일이라는 것을 모두 다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인터넷 게시판에서는 선배와 상사, 기성세대를 찢어 죽일 것처럼 성토하다가도 면접 시험장에서는 한없이 고분고분해지고 공손해진다. 
패배를 자연스러운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이들 중 몇몇은 정면 승부를 벌이고 작은 이득을 위해 아득바득 싸우는 태도를 촌스럽다고 여기게 된다. 기왕에 지는 것, 한발 물러난 자세로 "나는 크게 개의치 않는다"와 같은 태도를 보이거나 아예 싸움을 피하는 것이 그나마 자존심을 지키는 길이다. 그것이 '쿨한 모습'으로 받아들여진다. 

진정으로 새로운 주장이나 사상이 없는 상태에서 조롱과 비아냥거림, 의미 없는 장난이 이 세대의 트레이드마크가 된다. 사유와 생산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지 못하는 표백 세대는 소비를 삶의 표현 양식으로 삼는데, 이는 여가와 사교 생활에서 문화예술 및 창작 활동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면에 걸쳐 이들의 사고와 행태에 깊숙이 영향을 미친다.

- 물론 이들이라고 해서 바보는 아니며, '뭔가가 잘못됐다'는 느낌 정도는 갖고 있다. 그러나 논리적으로 모순이 없는 사회에 대해 그런 의심을 품는 행위는 자칫 그 자신을 바보라고 인정하는 셈이 될 수도 있기에, 이들은 그런 생각을 겉으로 잘 드러내지 않는다. 고로, 음흉함은 그들의 제2의 천성이 된다. 

- "그래, 알았어. 담배 한 대만 더 피우고 갈게."
추는 담배를 피우며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 나는 그 눈물의 의미를 알 수 없어 그 시간이 불편하기만 했다.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그녀가 나를 깊이 사랑하고 있었던 걸까 싶어 불안했다. 그녀의 눈물에는 어떤 진심이 얼마나 담긴 것인지, 누군가의 진심을 이렇게 거절해도 괜찮은 것인지, 그게 괜찮지 않다면, 그렇다면 진심이라는 이유만으로 다른 사람의 요구를 들어줘야 하는 것인지에 대해 나는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가 세연이나 세연과의 약속을 떠올리며 눈물을 흘린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기차역으로 가는 어두운 골목길은 끝나지 않을 것 같았다. 추는 아무 말이 없었고, 나는 그녀의 미국행에 대해 물었다. 그녀는 부모님 돈으로 어학연수를 떠난다고만 대답했다. 추가 나에게 공무원 시험 준비는 잘 돼가는지, 지난번에는 몇 점 차이로 떨어졌는지, 앞으로 어떻게 할 참인지 등을 묻지 않는 것이 고마웠다.

- 자살 선언은 무엇이며, 자살 선언자는 누구인가.
자살 선언은 자의식적이고 자주적인 운동이며, 다수의 이익을 위한 것이기는 하나 다수의 운동은 아니다.
자살 선언은 위에 언급한 네 가지 삶의 방식 어느 것에도 해당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자살 선언은 완성된 사회를 살아가는 방법이 아니라 그것을 거부하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 자살 선언은 완성된 사회에서 표백 세대가 할 수 있는 가장 극단적인 저항 운동이다. 그것은 극단적이면서 저항이 불가능한 사회에서 유일하게 논리적으로 기능하는 저항 운동이기도 하다. 물을 인정할 수 없는 물고기가 할 수 있는 일은 한 가지뿐이다.
자살 선언자들은 완성된 사회에서 그들이 얻을 수 있는 미약한 대가를 사양하며, 완성된 사회를 긍정해 그 구조 안에서 성공을 거두는 것을 거부한다. 그들은 죽음의 고통과 사후에 당할 모욕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사후 세계에 대한 어떤 기대나 선망도 갖고 있지 않다. 

나는 자살 선언자에 대해 완성된 사회가 쏟아낼 비난이 어떤 것인지 이미 알고 있다. 그들은 자살 선언자의 자살이 비겁한 도피와 현실 부정이며, "그럴(자살할) 용기와 의지가 있다면 그 힘으로 살아라"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패전을 각오한 군인과 순교자들처럼 명백하게 죽음을 선택한 이들에 대해서는 같은 주장을 하지 않는다.

기실 완성된 사회는 어떤 사상이나 자존심을 위해 개인이 모든 것을 포기하는 행위에 대해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다. 완성된 사회는 인간을 하찮은 욕망에 의해 움직이는 존재로 규정하기 때문이다.

- 이것으로 완성된 사회가 왜 그토록 자살 선언자를 두려워하는지도 설명이 된다. 자살 선언자는 그 존재만으로 완성된 사회의 기본가정을 부수며, 완성된 사회가 완전하지 않음을 고발한다. 자살 선언자는 희고 완벽한 완성된 사회에서 지워지지 않는 한 점 얼룩이다. 완성된 사회는 자살 선언자가 필요로 하는 것을 줄 능력이 없으며, 자살 선언자의 행위를 이해조차 할 수 없다.

- 자살 선언자들은 봉건사회를 무너뜨린 부르주아지나 공산혁명을 시도한 프롤레타리아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자살 선언자들의 목표는 완성된 사회를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라 완성된 사회의 천박함과 불완전성을 고발하고 자신들이 품고 있는 위대한 가능성을 증명하는 데 있으며, 그 방법은 오로지 죽음이라는 완전한 거부뿐이다. 왜냐하면 봉건 시대의 부르주아지와 산업시대의 프롤레타리아에게는 대안과 미래가 있었으나 표백 세대와 자살 선언자들에게는 그런 것이 없기 때문이다. 

- 완성된 사회는 사람들이 그 안에서 살아가는 것 자체가 '살아 있기를 선택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완성된 사회는 구성원들의 최대 복리를 위해 시스템을 움직이지만 구성원들의 자존심을 허락하지 않는다. 이런 생각이 잘못됐음을 증명하기 위해 모든 표백 세대가 자살해야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최소한 수천 명은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 할 것이다. 이 글을 쓰는 나 자신도 이미 5년 전에 자살했다.
우리는 영웅으로 태어났으나 우리가 태어난 이 세상은 영웅의 삶을 허락하지 않는다. 우리에게 허락된 것은 영웅다운 죽음뿐이다.

- 부모 세대가 만들어놓은 무대 위에서 하찮은 욕망을 채우는 데 시간과 열정을 허비하며 의미 없는 삶을 보내고 우리 세대가 별 볼일 없음을 시인할 것인가, 아니면 담대한 결단으로 그대 안에 있는 위대한 가능성을 증명하고 우리를 비웃어오던 세상에 충격과 공포를 줄 것인가.
선택은 그대에게 달렸다.

- 나는 추가 미국으로 간 다음 해에 국가직 7급 공무원 시험에 합격했다.
추는 미국으로 간 지 3년째 되던 해에 자살했다. 나는 기묘한 방식으로 추의 죽음을 알게 됐다.

- 아우디 TT 쿠페는 6,000만 원 중반대의 가격으로, 수입차 중 아주 비싼 차라고는 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하비는 도로에 그 차를 끌고 나오기가 싫었고, 특히 신촌 거리에 TT를 갖고 나오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나 재키는 '주다스 오어 사바스' 앞까지 자신을 태워다 달라고 우겼다. 재프루더를 우울하게 하는 데 그 정도 차면 충분했다. 하비와 재키는 주다스 오어 사바스 앞에서 헤어졌다.
어두컴컴하고 시끄러운 바에서 재키는 이미 도착해 있던 재프루더와 술을 마셨다.


- "차 주인이 궁금하지? 너랑 비슷한 연배야. 차는 아버지가 꼭 끌고 다니라며 무조건 한 대 사라고 해서 샀다던가?"
"설마 그 녀석도 예비 선언자 중 한 명은 아니겠지."

재프루더는 중얼거리며 병맥주를 비웠다.
"예비 선언자 중 한 명 맞아."
"말도 안 돼."
재프루더가 고개를 저었다.
"왜 안 돼?"
"그 녀석은 부잣집 아들이잖아! 어느 정도나 부잣집이어야 그런 차를 자식에게 사줄 수 있는 건지 모르겠다. 그런 집 아들 녀석이 우리의 좌절을 뭘 이해하겠어?"
"너는 전혀 이해를 못 하고 있구나. 표백 세대의 좌절은 돈이 많거나 적은 것과는 상관이 없어. 나한테는 너나 쟤나 아무 차이가 없어."
"아무 차이가 없다고?"
재프루더가 고개를 들었다. 숭배자들은 어느 시점이 됐을 때 모두 재키에게 "너한테 나는 무슨 의미냐"라고 따졌다. 재키는 그런 질문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만하면 너한테 엄청나게 유리한 것 아니니? 가난하고 가진 게 없으니 더 잘 봐줘야 한다는 거야? 돈 없는 게 뭐 자랑이야?"
재프루더는 가슴이 답답해져 고개를 숙이고 양 주먹을 불끈 쥐어 머리 높이로 들었다.

 

- 트위스트 캡을 반으로 접어 애벌레 모양으로 만든 뒤에도 재키는 재프루더를 잡은 손을 풀지 않았다. 반으로 접힌 병뚜껑 모서리가 날카로웠다. 재키는 다른 손으로 의자에 놓아둔 샤넬 백을 테이블 위로 올리고는 접힌 병뚜껑 모서리로 백 양쪽에 커다랗게 X자를 그려 천을 찢었다.
"그냥 가방일 뿐이야. 그나마 선물 받은 거고."
재키는 모서리가 날카로운 병뚜껑을 재프루더의 주먹에 끼우고 자신의 양손으로 재프루더의 팔을 들어 올렸다. 그때서야 재키의 이마에 혈관이 도드라지며 그녀가 온 힘을 다하고 있음이 얼굴에 드러났다.
"그러는 너는 내 얼굴 때문에, 나를 좋아하는 것, 아니니?"
재키는 병뚜껑이 끼워진 재프루더의 주먹을 들어 올려 제 얼굴에 갖다 댔다. 재프루더는 재키가 병뚜껑으로 자기 뺨을 그으려는 것을 필사적으로 막았지만 재키의 뺨에는 짧고 굵은 생채기가 났다. 재프루더는 냅킨으로 재키의 피를 닦았고, 몸에서 힘을 뺀 재키는 웃기만 했다. 재프루더는 넋이 나간 듯한 표정으로 재키를 쳐다보았다. 주변이 잠시 조용해졌다가 다시 소란스러워진 것 같았다.

 

- "난 네가 부자라거나 가난하기 때문에 선택한 게 아니야. 난 너의 진심을 보고 있어. 아까 그 부자 아이도 순수해."
재키는 말을 이었다.
"넌 내가 너에게 출구를 열어준 걸 얼마나 후회하는지 아니? 내가 얼마나 너와 함께 죽고 싶은지 아니? 네가 나를 의심하는 것만큼 나도 너를 의심하고 있어. 넌 지금은 나를 찬미하지만 곧 내게 눈을 돌리고 나를 죽은 과거로 치부할 위선자야. 내 얼굴이 썩어 문드러질 때쯤 나를 외면하겠지."
"아니야, 그렇지 않아."

- [그런 걸 고민할 필요도 없었는데 말이죠. 제 생각에는 '완성된 사회'에서도 그 자신의 능력만으로 좁은 사다리를 올라 성공할 수 있었던 사람이 바로 세연 자신이었습니다. 
어제와 오늘 자살 선언에 대한 신문 기사와 와이두유리브닷컴에 올라온 게시물들을 읽어보았습니다. 단순한 인상 비평이나 넋두리. 남의 관심을 끌기 위한 글이 대부분이었고, 자살 선언문이 말하는 바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은 거의 없는 것 같았지만, 그 또한 예상하지 못했던 바는 아닙니다.  
조금 신경 써서 읽어봐야 할 글들은 자살 선언에 대해 여러 가지 비판을 담고 있었는데, 자살 선언을 하는 사람으로서 여기에 몇 가지 대답해야 할 의무감 같은 것을 느낍니다. 제가 보기에 그런 비판의 대부분은 자살 선언의 취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엉뚱한 논지를 펼치거나 일부 형식을 꼬투리 잡는 것이었지만, 상당히 날카롭게 저희가 주장하는 바를 이해하고 반박하는 글도 있었습니다. 
우선 노력해서 성공하는 것이 가장 큰 복수라거나, 우리 세대가 사회의 주도권을 쥐었을 때 변화를 일으키면 된다. 또는 시간이 지나면 어차피 우리 세대가 사회의 주도권을 쥐게 된다는 식의 주장은 자살 선언이 지적하는 바를 잘 이해하지 못한 데서 나온 것 같습니다.
개인적인 '성공 신화'는 완성된 사회에서도 계속 나타날 것입니다만, 그것이 사회의 변화를 일으킬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한 세대가 주도권을 갖게 됐다는 것은 완성된 사회에서 그냥 그 세대가중·장년층이 되어 각 조직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할 뿐, 그 세대가 사회구조에 어떤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과학과 공학 분야에서 끊임없이 혁명이 일어나고 있으므로 그런 방향으로 눈을 돌리라는 조언이나 "남들이 알아주지 않는 위대한 일도 많다"는 지적도 하십니다.  
현재 사회는 결코 정체된 것이 아니며 불안정한 상태가 지속되고 있다는 식의 주장은 단순히 '완성'이라는 개념을 서로 달리 쓰고 있는 데서 비롯된 것 같습니다. 맨눈으로 보면 다 굳어서 더 움직이지 않지만 현미경으로 보면 불안정하게 흐르고 있는 물질도 있습니다. 대표적인 게 유리죠. 그렇다고 유리를 액체라고 해야 하나요?
소(小) 영웅주의라거나 감상 과잉이라는 비판은 부분적으로 옳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본질에 대한 비판이 아닙니다. 그래서 뭐가 문제라는 겁니까?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하기 직전 안중근 의사에게도 영웅 심리가 없진 않았을 것이고, 안 의사는 아마 평소 감성도 남달랐을 것입니다. "세대 간 갈등을 심화한다"라는 지적도 같은 범주에 있다고 봅니다. 그 지적이 맞습니다. 그래서 뭐요? "인명 경시풍조를 부추긴다" 따위의 비판에 대해서는 더 반박하지 않아도 되겠지요?] 
 
죽기로 한 날이 다가오면서 재키는 자신이 갈팡질팡하고 있음을 알았다. '죽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인정하자 발아래 땅 일부가 무너져버리는 느낌이 들었다.
첫 번째 순교자가 되어야 할 자신이 이렇게 두려움을 느낀다면 자신의 뒤를 이을 사람들은 얼마나 공포에 떨 것인가.
그들이 겁에 질려 자살을 포기한다면?
죽음 그 자체와 아무도 자신의 뒤를 따르지 않아 자신의 죽음이 무의미하게 되어버리는 상황 중에서 어떤 것이 더 두려운지 알 수 없었다. 그토록 부정해 오던 절대자에게 기도라도 올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제발 저를 따라 제 친구들이 자살하게 해 주옵소서.
자신의 죽음 뒤에 진행될 미래를 미치도록 보고 싶었다. 하늘을 날고 싶은 마음만큼이나 강렬한 욕망이었다.

- 극심한 스트레스와 긴장 속에 재키는 종종 비명이 터져 나오려는 것을 이를 악물고 참아야 했다. 그녀는 사람들이 가득한 대낮의 신촌 거리에서 거의 무의식 상태에 빠져 길을 잃고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어디로 가는지 잊어버리기도 했다. 재키가 신촌 거리에서 종종 사로잡혔던 환상은 거대한 톱니바퀴가 꼭 그녀의 키 정도 높이에서 날아와 주변 사람들을 모두 베어버리고 그녀만 남기는 내용이었다.
그녀는 이 환상을 논리적으로 해석할 수도 있었다. 죽음이 다가올수록 삶의 감각이 더 생생해지고, 별생각 없이 좀비와 같은 일상을 보내는 군중 속에 살아 있는 것은 자신밖에 없다는 잠재의식 속의 결론이 구체화된 것. 그러나 그런 해석이 마음을 진정시키는 데 도움이 되진 않았다.

반대로 정신이 깜짝 놀랄 만큼 날카로워지고 세계의 숨은 구조를 단박에 이해할 수 있을 것처럼 모든 것이 명료해지는 것 같은 순간도 있었다. 그럴 때 재키는 자신의 계획이 어설프고 현실성이 없다는 것을 불현듯 '깨닫고'는 무엇을 어떻게 고쳐야 할지 고민하다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잘못됐다는 결론을 내리고 완전한 절망에 사로잡혔다. 그러다가 다시 몇 분 뒤에는 수백 수천 명의 심리학자, 정신과 의사, 범죄 전문가들이 자신의 사후에 자살 선언을 연구하고 자신이 쓴 잡기를 단어 하나하나 뜯어가며 분석하고 자신에 대한 책을 쓰는 환상에 푹 잠겨, 혼잣말로 환상의 심리학자들이 품고 있는 질문에 친절히 대답해주기도 했다. 
재키는 한국에서 모든 인터넷 사용자에게 실명제가 적용된다거나 온라인 뉴스 서비스가 모두 유료화되는 가능성까지 우려했다. 하물며 자살하겠다는 다짐을 받은 '예비 선언자'들이 마음을 바꿔먹을 가능성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었다.

- 의연하게 구는 것이 가장 자발적인 협조를 이끌어낼 수 있는 방법임은 그녀도 알았지만 이따금 재키는 히스테리를 부렸고, 대개 그 대상은 소크라테스였다.
애초에 그녀 자신이 부여하고 설정한 캐릭터와 역할극에 스스로 한쪽 다리를 잡혀버린 셈이었다. 하비에게 재키는 함께 음모를 꾸미는 동지이자 공범자였으며, 재프루더에게는 저주받은 공주, 그 자신을 희생해 지켜야 할 귀부인이었다. 제리에게는 갇힌 벽 안에서 상처투성이로 부조리한 싸움을 벌이는 투사였으며, 루비에게는 차갑고 잔인하지만 거부할 수 없는 운명의 연인이었다. 
소크라테스에게는 폭군이었다. 소크라테스의 순수함과 젊은이다운 죄책감을 지렛대로 삼는다는 것이 그녀의 전술이었으나 이는 잘 되지 않았고, 어느 순간부터 그녀는 자신이 그저 소크라테스의 유약함을 나무라거나 비웃기만 하고 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제자들'을 자기와 같은 결론으로 유도해 다짐을 받고, 의지를 북돋워주고 흔들리지 않게 하는 데에는 엄청난 감정적 에너지가 필요했다.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데 스스로 탁월하다고 여겼던 재키가 힘이 부친다고 느낀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적그리스도에게 자살 선언 동참을 권유하지 못하는 이유도 그래서였다. 그녀 자신이 감정적으로 흔들리는 상황에서 또 한 사람의 제자를 감당할 수가 없었다. 오히려 누구에게라도 자신의 계획을 전부 다 폭로하고 그저 "잘될 거야, 훌륭한 계획이야"라는 위안을 받고 싶은 충동을 느낄 지경이었다. 

- 재키는 종종 어디론가 떠나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오래전부터 티베트에 가보고 싶었다. 구름이 없어서 비현실적으로 높고 파란 하늘과 밤이 되면 너무 많아서 땅으로 쏟아질 것만 같다는 라사의 크고 작은 별들.
자살 직전 현금 서비스와 개인 금융 대출을 잔뜩 받아 보름 정도 티베트와 중국 서부를 다녀온다는 상상은 그 자체만으로 유쾌했다. 물론 이뤄질 수 없는 꿈이었다. '카드 빚을 못 이기고 자살한 여대생'이라는 기사 제목이 달릴 테니까. 죽음을 앞두고 여행을 떠나는 것은 후대의 자살 선언자들에게도 나쁜 전례가 될 것임이 틀림없었다. 그들은 죽음을 마주 보고 두려움에 맞서야 한다. 

- 그래서 재키는 티베트 대신 서강대교 앞으로 갔다. 그녀는 몇 번 밤늦은 시각에 신촌로터리에서 서강대교까지 걸어갔고, 강변을 따라 서강대교에서 양화대교까지 더 걸었다. 
새벽녘 서강대교에서 양화대교 사이는 다른 사람들을 피할 수 있는 장소이면서 여러 면에서 그녀가 생각하는 티베트와 달랐다. 그녀는 바닷가에서 자랐는데도 물을 무서워하고 산을 좋아했다. 잔잔하고 조용하며 소금 냄새도 없는 검은 강물은 검은 바닷물보다 더 으스스했다. 
한강보다 더 두려운 것은 문과대 뒤편의 시멘트 연못이었다. 재키는 거기서 죽을 예정이었다. 그녀는 가장 낮은 곳에서 죽을 예정이었다. 고개만 들면 살 수 있는 곳, 살고 싶다는 본능을 절대적으로 포기해야 겨우 죽을 수 있는 곳에서 자살하면서 자신이 약하지 않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고 싶었다. 

- 세연-세화 자매라고 미래를 내다보는 능력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들 자매는 일어날 수 있는 각각의 상황에 맞게 대응 계획과 백업 플랜을 준비하는 능력이 탁월했다. 자살 선언에 맞설 궁리를 하는 내가 배워야 할 점이었다.
내가 양화대교에 나타나지 않거나 선착장 앞에서 도망쳤더라면 세화는 나를 거짓말쟁이에 비겁자라고 비난했을 것이고, 우리가 함께 또는 세화 혼자 익사했다면 그것도 그 나름대로 자살 선언을 지킨 효과가 났을 것이다. 
처음에 내가 경찰을 대동하고 양화대교로 가서 보자마자 세화를 붙잡았더라면 나는 우리 세대의 배신자이자 변절자로 찍혔을 것이다. 만약 세화가 한강에 뛰어들었을 때 내가 그녀를 구하지 않고 도망쳤다면, 그리고 그 장면이 카메라에 담겨 동영상으로 공개됐다면 어떤 비난들이 내게 쏟아졌을까. 생각만 해도 섬뜩하다. 

- 그다음 해 1월에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벌어졌다. 와이두유리브닷컴의 도쿄 지부와 베이징 지부가 만들어진 것이다. 와이두 유리브닷컴의 한글 홈페이지는 그에 맞춰 이름을 서울지부로 바꿨다. 메리의 작품이었다.
취업난과 가치관 혼란을 비슷하게 겪고 있을 테니 동북아시아 젊은이들이 같은 고민을 하고 있으리라고 대강 이해할 수 있는 일이지만, 세 번째 해외 지부는 놀랍게도 헝가리에서 생겨났다. 한국의 이상한 자살 열풍이 어떻게 동유럽으로 전해질 수 있었는지, OECD 회원국 중 남성의 자살률이 가장 높은 나라가 헝가리라는데 왜 그런지 이유는 모른다. 

- 과장은 나를 불러 와이두유리브닷컴 사태와 나의 관계, 내가 이런 곤란에 빠지게 된 경위를 물었다. 그러나 나는 신기할 정도로 과장과의 면담에 대해 아무런 부담도 느끼지 않았다. 묻는 말에 생각하는 대로 대답하고, 상대방 의중이 뭔지 좀 생각해 보고, '당분간은 당신에게 협조하겠노라'라는 신호를 보낸 것이 전부였다. 

- 휴가 첫날 청량리역에서 기차를 타고 영월역에서 내려 별마로 천문대에서 별을 보고, 영월 시내 모텔에서 잠을 잤다. 별마로 천문대는 가로등이 하나도 없는 산봉우리에 있었다. 산 위에는 별이 가득했고, 나는 난생처음으로 유성을 보았다. 산을 좋아했던 세연이 마음에 들어 했을 만한 광경이었다. 나는 소원을 빌었다.

- 모텔은 난방이 잘 되지 않았다. 다음 날에는 단종이 유배 생활을 했던 청령포에 갔다. 관리사무소의 직원을 전화로 불러 표를 사고, 나룻배로 얼음을 깨 가며 강을 건넜다. 소나무 숲과 자갈밭은 아무도 밟지 않은 눈으로 덮여 있었고, 나밖에 없었다. 나는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아무 말 없이 소년 왕의 유배지를 1시간가량 걸었다.
그 옛날 소년 왕은 이곳에서 여러 차례 자살을 강요당했다.
청령포에서, 나는 3년 안에 뭔가를 보여주겠다는 약속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세화뿐 아니라 나 역시, 상대방이 아니라 와이두유리브닷컴 회원들을 향해 말하고 있었다. 어쨌거나 "3년 안에 중대한 제안을 하겠다"라는 내 말이 녹음되고 자막까지 달려 인터넷에 돌아다니고 있으니 이제 물러날 수도 없는 상황 아닌가. 이렇게 퇴로가 끊겨버려 후련하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세연이 잡기에서 인용한 것처럼 '우리는 적수가 누구인지 알 때만 내가 누구인지 알게 된다.' 그러니 나는 남은 인생의 길을 바로잡아주고 내가 누구인지 알려준 세연과 세화 자매에게 감사해야 한다.

- 나는 감정에 북받쳐 사표를 내거나 갑자기 산티아고 순례 여행을 떠나거나 하지는 않았다. 내게 주어진 기회를 그렇게 망쳐선 안 된다. 자살 선언을 이기려면 세연이나 세화 못지않은 정교함과 치밀함으로 꽉 짜인 논리를 준비하고, 이벤트를 계획하고, 마케팅을 벌여야 한다. 그런 작업들을 진행하는 중에 언젠가는 사표를 제출해야 할 시점이 올 것이다.

-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해서는 아직 머릿속이 텅 빈 상태였다. 다만 철저히 보통 사람으로서 생활에 기반을 둔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은 알았다. 청년 연대니 청년 노조니 하는 단체가 우스워 보인다는 세연의 주장에는 나도 동의했다. 나중에 그런 단체를 만들 수는 있겠으나 단체를 만들기 전에 먼저 새롭고 강력한 강령을 정해야 했다. 
어쩌면 나는 종교를 하나 창시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 서울로 돌아온 뒤 나는 내 나름대로 잡기를 쓰기 시작했고, 중고 소형차를 한 대 샀다. 그해 겨울 나는 몇 번 그 차를 타고 강변북로를 달려 한강 둔치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서강대교와 양화대교 사이 세연과 세화가 걸었던 길을 서성였다.
세연이 강물에서 봤던 절망과 우울은 여전히 내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 강 건너 여의도의 야경은 아름다워 보이기만 했고, 사실 점점 더 호화로워지고 있었다. 상하이나 홍콩의 야경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한강은 여전히 수은처럼 반짝반짝 빛을 내며 부드럽게 흘렀다.
별로 두렵진 않았다.
나는 아무도 모르는 먼바다에서 공기가 태양에너지를 듬뿍 받아 힘을 키우고 있는 모습을 상상했다. 열대성 저기압은 갑자기 태풍으로 발달해 육지를 향하고 강한 비바람으로 그 존재를 과시한다.  

- 그녀의 마음은 평안해지지 않았으며, 자신에게 기회를 허락하지 않는 세상에 대한 복수심도 가라앉지 않았다.
이제 5년 뒤에 연속 자살이 시작된다.
재키는 마지막 순간에도 연쇄살인마처럼 다른 사람의 죽음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않았다.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만 연민을 느꼈다.
그녀는 문과대 뒤 학교 연못으로 향하면서 다른 학생들을 마주칠 때마다 속으로 빌었다.
당신들도 나처럼 상처받길 바라요. 당신들도 나처럼 상처받길 바라요.

 



작가의 말



'작가의 말'은 200자 원고지 10매 분량으로 쓰면 된다고 했다. 나는 그 2,000자를 쪼개 세 가지 이야기를 하고 싶다.

 

첫 번째는 이 책을 읽은 20대와 30대 초반에게 들려주고 싶은 얘기다.
나는 지금의 20대에게는 '언젠가는 위대한 일을 해낼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이 허락되지 않았을 수 있다는 생각을 글감으로 삼아 이 소설을 썼다.
정말 그런 희망이 허락되지 않은 걸까? 이 소설에서 세연이 펼치는 주장을 어떻게 반박해야 할까?
실은 나도 잘 모르겠다.

이 책이 다루는 가능성은 20대를 옹호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동시에 그들을 모욕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 사실에 나는 약간 죄책감을 느낀다. 이것도 일종의 착취에 해당하는 것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든다.

어쩌면 '그레이트 빅 화이트 월드'에서 위대한 과업이란 철저히 개인화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니면 위대하다는 개념이 변질되고 있는 중인지도 모르겠다. 위대함의 본질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에 있고, 스토리텔링 기법으로만 묘사할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20대가 스스로 자신의 과업을 찾아주길 바란다. 내게 20대는 여러 흥미로운 주제 중 하나일 뿐이다. 반면 젊은이들에게는 과업을 찾는 일이 바로 그들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게 되는 길이다.

이 책에서도 인용한 새뮤얼 헌팅턴의 말처럼, 사람은 적수가 누구인지 알 때만 자신이 누구인지 알게 된다. 20대를 정의하는 각종 담론이 대체로 공허한 이유는 그 청년 세대가 해야 할 일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쩌면 자신들의 과업을 찾는 것이 바로 지금의 20대에게 부여된 가장 중요한 임무인지도 모르겠다. 

두 번째는 작가를 꿈꾸는 직장인들에게 보내는 격려와 제안이다. 당선된 뒤 "실은 나도 작가가 꿈이었다"라는 고백을 여러 후배에게 들었다. 정작 나는 너무 기쁘기도 하고 또 이리저리 잘난 척하느라 바빠서 그런 꿈을 가진 후배들에게 별 다른 조언을 해주지 못했다.

역대 한겨레문학상 당선자를 보니 당선 시점에 봉급생활자였던 분은 나를 포함해 2명이나 3명 정도에 불과한 듯하다. 그럴 자격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나라도 나서서 현재 직장인인 예비 작가들의 꿈을 응원해주고 싶다. 이는 스스로에 대한 다짐의 성격도 있다.

장편소설을 쓰는 작업은 마라톤 풀코스 완주와 비슷했다. 처음 시작할 때 '내가 과연 해낼 수 있을까' 하고 자신이 없었던 게 그랬고, 매번 3분의 1 지점쯤에서 '내가 이걸 왜 하고 있나' 하고 마음이 흔들리는 게 그랬다.

내가 장담할 수 있는 게 두 가지 있다. '계속 쓰다 보면 끝까지 쓸 수 있다'는 것과 '계속 쓰면 점점 나아진다'는 것이다. 3분의 2 지점을 통과하면 그다음부터는 저절로 끝까지 가게 된다는 점도 글쓰기와 마라톤의 공통점이다.

마지막 이야기는 연세대학교 도시공학과 94학번들에게 들려주고 싶다.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싶은 분이 굉장히 많다. 가족, <동아일보> 선후배, 심사위원님들, <한겨레신문>과 한겨레출판에 계신 분들, 옛 과 소동과 멋진 <월간 SF 웹진> 회원들, 그리고 렛잇비 멤버들. 하지만 딱 한 그룹만 골라 감사의 말을 전하라면 그 대상은 대학 동기들이다.

소설을 쓰는 동안 대학 시절을 자주 돌이켜보게 됐는데, 그러면서 과 동기들이 나를 얼마나 잘 대해주고 너그럽게 감싸줬는지 깨달았다. 덕분에 퍽 불쾌한 인간이었던 나는 이제 좀 덜 불쾌한 인간이 됐다. 

이름을 일일이 열거하고 싶지만 그러면 2,000자를 넘어버리고, 작가의 말도 촌스러워진다. 이름을 부르지 않아도 친구들은 다 알 것이다. 그 친구들에게 "얘들아, 고맙다"라고 말하고 싶다.

 

2011년 7월
장강명
 


 
작가의 말 - 10쇄 출간을 맞아

 
제가 쓴 소설이 처음으로 10쇄를 찍게 돼 감개무량합니다. 많은 사랑을 주신 독자님들께, 또 한겨레출판 관계자분들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얼마 전 어느 누리꾼이 이 책의 '자살선언문'을 인용하면서 자살을 암시하는 글을 자신의 SNS 계정에 올리는 소동이 있었습니다. 다행히 해프닝으로 끝났지만 저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 전에는 어느 단체의 대표가 사회의 이목을 끌 목적으로 한강에서 투신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젊은 독자로부터 '그래서 우리는 도대체 어쩌란 말이냐'는 질문도 몇 차례 받았습니다.

초판 1쇄 작가의 말에서 저는 이렇게 썼습니다.
'이 소설에서 세연이 펼치는 주장을 어떻게 반박해야 할까? 실은 나도 잘 모르겠다.'

지금은 몇 가지 지점에서 자살선언문을 반박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는 자살선언문은 그럴듯한 난센스라고 생각합니다.

우선 첫째, 저는 '위대함'은 실제로는 별 중요한 의미가 없는, 고리타분한 단어라고 생각합니다. 두 가지 다른 뜻을 교묘하게 섞어놓은 단어에 불과합니다. '역사의 흐름이 바뀔 때 우연히 해당 장소에 있을 것', 그리고 '개인의 한계라고 알려진 선을 넘을 것'입니다. 나폴레옹은 유럽의 역사가 바뀌는 순간 알프스 산맥을 넘어서 위인전에 올랐습니다. 그러나 그가 알프스 산맥을 넘었건 넘지 않았건 프랑스혁명정신은 온 유럽에 퍼졌을 것입니다. 심지어 나폴레옹은 프랑스혁명정신과 정반대인 인물이었습니다(그는 황제가 되었습니다). '위대함'이라는 개념의 실체는 고작 이 정도입니다. 위대함은 삶의 목표로 추구하기에 적당한 가치가 아닙니다.

둘째, 저는 현대에 대단히 중요한 과업이 많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구글 무인자동차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이 자동차가 나오면 택시기사, 버스기사, 대리운전기사들이 모두 일자리를 잃을 것입니다. 반면 무인자동차로 인해 새로 만들어지는 일자리는 고도의 상징 지식이 필요한 영역일 것입니다. 구글 때문에 실직하는 분들은 다른 저숙련 저임금 노동자들과 경쟁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무인자동차로 인해 교통사고가 엄청나게 줄고, 자동차를 이용한 범죄도 급감할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늦기 전에 이 질문에 답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과업입니다. 무인자동차는 조만간 반드시 등장합니다.

이외에도 종교에 근거를 두지 않은 보편적인 윤리 체계를 만드는 일, 국가-대륙 간에 존재하는 부조리한 삶의 질 격차를 없애는 일, 경제의 활력을 해치지 않으면서 빈부 격차를 해소하는 방법을 개발하는 일 등 우리 시대의 중요한 과업은 많습니다.

셋째로, 저는 과업과 무관하게 사람이 의미 있는 삶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표백>을 쓰고 난 뒤 저는, '위대한 일'에 집착하는 세연과 달리, 남들이 무가치하다고 무시하는 일에 매달려 끝내 의미를 찾아내고야 마는 주인공에 대해 3년 안에 쓰려했습니다.

그렇게 쓴 소설이 <열광금지, 에바로드>입니다. 이 책의 화자는 <표백》의 등장인물 장휘영입니다. 자살선언을 거부한 장휘영이 세연과 정반대 되는 주인공을 만나게 되는 거지요. <열광금지, 에바로드>는 장휘영이 "꼭 랠리를 완주하세요. 어떤 숨은 선물이 있을지 모르니까요"라는 말을 들으며 끝납니다. 이는 <표백>에 대한 저의 답이기도 합니다.

1부 제목이자 현시대를 가리키는 세연의 말인 '그레이트 빅 화이트월드'는 마릴린 맨슨의 앨범 <메커니컬 애니멀스>의 첫 곡입니다. 2부 제목인 '코마 화이트'는 같은 앨범의 마지막 곡입니다. 미스터 맨슨은 온몸을 표백한 이미지로 이 앨범 커버 사진과 '도프 쇼' 뮤직비디오를 찍었습니다. 화자인 '나'의 별칭인 '적그리스도'는 마릴린 맨슨의 앨범 <안티크라이스트 슈퍼스타>에서 따왔습니다.

세연이 가사를 조금 고쳐서 부르는 랜디 뉴먼의 노래는 'I want you to hurt like I do'입니다.

귀한 상을 주신 심사위원님들, 그리고 HJ에게 다시 한번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2011년에 가졌던 마음가짐 그대로, 계속 열심히 쓰겠습니다.


2015년 가을

장강명 올림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