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1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일루젼 2024. 9. 30.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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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밀란 쿤데라 / 이재룡
출판 : 민음사
출간 : 2011.11.25


       

소장하고 있다는 건 확실한데,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아서 결국 전자책으로 다시 읽었다.

 

밀란 쿤데라의 <농담>이 지독히 어렵게 느껴졌던 때가 있었다. 12-3년 전이었을 텐데- 아마 내 삶의 많은 부분이 경직되어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을 것이고, 아직 삶의 경험이 부족했기 때문이기도 했을 것이다. 지금 다시 읽는다면 어떨지 궁금하지만, 당분간은 계획이 없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하 참존가)은 밀란 쿤데라의 자전적 경험이 짙게 녹아든 글이다. 체코에서 프랑스로 망명할 수밖에 없었던, 그래서 모국어가 아닌 언어로 글을 써야만 했던 그는 작품 속 '나'라는 자전적 캐릭터로 등장한다. 그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이 작품은 전지적 작가 시점이기도 하고 1인칭 작가 시점이기도 하다. 

 

동시에, 밀란 쿤데라는 사비나의 에피소드를 통해서 '나'를 작가로 바라보는 독자에게 '그것이야말로 키치다!'라는 일침을 날린다. 누군가의 작품과 일생을 몇 줄의 말로 요약하는 것, 그마저도 가장 일반적인 무언가로 단순화해 버리는 것. 

 

작품 내에서 반복되는 '가벼움의 미학'은 동시에 가벼울 수밖에 없는 '키치'를 경계한다. 지나치게 진중하고 무거운 것들을, 하나의 가치가 또 다른 가치 위에 있을 수 없다는 '가벼움'으로 치환하는 순간 모든 것들은 '키치화' 될 위험에 처한다. 하지만 그것은 진정 위협인가? 그마저도 무거움은 아닐까?

 

토마시와 프란츠, 테레자와 사비나는 닮아 있는 듯하면서 다르고 다른 듯하면서 닮아 있다. 어떤 관계가 다른 관계보다 진중할 수 있을까? 관계의 본질은 무엇인가? 우리는 상대에게서 읽고 싶은 것을 읽고, 보고 싶은 것을 본다. 그것은 인간이기에 일어나는 오해이자 상대적 진실이다. 그렇다면 존재는 자기 자신을 직시하고 있는가?

 

스탈린의 아들은 똥 때문에 목숨을 버렸다. 이것은 우스운 이야기인가, 처절한 이야기인가? 누군가에게는 목숨을 걸어야 할 만큼 무거운 가치가 다른 누군가에게는 가볍기 그지없는 가치일 수 있다. 하지만 정말로, 다른 무엇보다 중요한 가치라는 것이 존재하는가?  

 

개인적으로 '일관성'에 관해 비슷한 고민을 품었던 적이 있다. 현재 가지고 있는 생각은, '일관성'이란 '저항'보다는 '고요함'을 더 닮아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자신의 고요함을 해치지 않는다면 표면적으로는 드러나지 않더라도 그것은 '일관적'이다.

 

정도의 잡생각을 하며 읽었다. 

전자책은 읽을 때는 가벼워서 좋은데 정리할 때가 너무 힘들다. 

 

끝.  

 


   


영원한 회귀란 신비로운 사상이고, 니체는 이것으로 많은 철학자를 곤경에 빠뜨렸다. 우리가 이미 겪었던 일이 어느 날 그대로 반복될 것이고 이 반복 또한 무한히 반복된다고 생각하면! 이 우스꽝스러운 신화가 뜻하는 것이 무엇일까?

 

- 뒤집어 생각해 보면 영원한 회귀가 주장하는 바는, 인생이란 한번 사라지면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기 때문에 한낱 그림자 같은 것이고, 그래서 산다는 것에는 아무런 무게도 없고 우리는 처음부터 죽은 것과 다름없어서, 삶이 아무리 잔혹하고 아름답고 혹은 찬란하다 할지라도 그 잔혹함과 아름다움과 찬란함조차도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14세기 아프리카의 두 왕국 사이에 벌어진 전쟁 와중에 30만 흑인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처참하게 죽어 갔어도 세상 면모가 바뀌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로, 인생의 잔혹함이나 아름다움 따위는 전혀 염두에 둘 필요가 없는 셈이다. 

- 이 전쟁이 영원한 회귀를 통해 셀 수 없을 만큼 반복된다면 14세기 아프리카의 두 왕국 사이에 벌어졌던 전쟁도 뭔가 달라질 수 있을까?

- 그렇다. 그 전쟁은 우뚝 솟아올라 영속되는 한 덩어리로 변할 것이고 그 전쟁의 부조리는 치유될 수 없을 것이다.
프랑스 혁명이 영원히 반복되어야 한다면, 로베스피에르에 대한 프랑스 역사의 자부심도 덜할 것이다. 그런데 역사는 다시는 되풀이되지 않을 것에 대해 이야기하기 때문에 그 피투성이 세월조차도 그저 말뿐, 새털보다 가벼운 이론과 토론에 불과해서 누구에게도 겁을 주지 못한다. 역사 속에 단 한 번 등장하는 로베스피에르와, 영원히 등장을 반복하여 프랑스 사람의 머리를 자를 로베스피에르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 그래서 영원한 회귀라는 사상은, 세상사를 우리가 아는 그대로 보지 않게 해 주는 시점을 일컫는 것이라고 해 두자. 다시 말해 세상사는, 세상사가 덧없는 것이라는 정상참작을 배제한 상태에서 우리에게 나타난다. 사실 이 정상참작 때문에 우리는 어떤 심판도 내릴 수 없다. 곧 사라지고 말 덧없는 것을 비난할 수 있을까? 석양으로 오렌지 빛을 띤 구름은 모든 것을 향수의 매력으로 빛나게 한다. 단두대조차도.

- 얼마 전 나는 기막힌 감정의 불꽃에 사로잡혔다. 나는 히틀러에 관한 책을 뒤적이다 사진 몇 장을 보곤 감격했다. 내 어린 시절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나는 어린 시절을 전쟁 통에서 보냈다. 내 가족 중 몇몇은 나치 수용소에서 죽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의 죽음이, 되돌아갈 수 없는 내 인생의 한 시절,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그 시절을 떠올리게 해 줬던 히틀러의 사진에 비한다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

 

- 이러한 히틀러와의 화해는 영원한 회귀란 없다는 데에 근거한 세계에 존재하는 고유하고 심각한 도덕적 변태를 보여 준다. 왜냐하면 이런 세계에서는 모든 것이 처음부터 용서되며, 따라서 모든 것이 냉소적으로 허용되기 때문이다.

 

- 반면에 짐이 완전히 없다면 인간 존재는 공기보다 가벼워지고 어디론가 날아가 버려, 지상의 존재로부터 멀어진 인간은 겨우 반쯤만 현실적이고 그 움직임은 자유롭다 못해 무의미해지고 만다. 

그렇다면 무엇을 택할까? 묵직함, 아니면 가벼움? 

이것이 기원전 6세기 파르메니데스가 제기했던 문제다. 그의 말에 따르면 이 세상은 빛-어둠, 두꺼운 것-얇은 것, 뜨거운 것-찬 것, 존재-비존재와 같은 반대되는 것의 쌍으로 양분되어 있다. 그는 이 모순의 한쪽 극단은 긍정적이고 다른 쪽 극단은 부정적이라 생각했다. 이 이론은 모든 것을 긍정적인 것(선명한 것, 뜨거운 것, 가는 것, 존재하는 것)과 부정적인 것으로 나누는 극단적 이분법이 유치하게 느껴질 정도로 안이하게 보일 수도 있다. 단 이 경우는 예외다. 무엇이 긍정적인가? 묵직한 것인가 혹은 가벼운 것인가? 

 

- 파르메니데스는 이렇게 답했다. 가벼운 것이 긍정적이고 무거운 것이 부정적이라고. 그의 말이 맞을까? 이것이 문제다. 오직 한 가지만은 분명하다. 모든 모순 중에서 무거운 것-가벼운 것의 모순이 가장 신비롭고 가장 미묘하다. 

 

- 그 순간 그녀가 오래전부터 그의 몸속에 있어 왔고 지금 죽어 가고 있다는 상상이 들었다. 불현듯 그녀가 죽고 나면 자신도 살아남지 못하리란 것이 너무도 당연한 진실처럼 느껴졌다. 그는 그녀 곁에 나란히 누워 함께 죽고 싶었다. 그는 이러한 상상에 잠겨 그녀의 얼굴에 뺨을 대고 오래도록 움직이지 않았다. 

 

- 지금 그는 그 순간을 떠올렸다. 그때 체험한 것이 사랑이 아니라면 무엇이었을까?

 

- 그런데 그것이 과연 사랑이었을까? 그는 그녀의 곁에서 죽고 싶었다고 확신했는데, 그 감정은 명백히 과장된 것이었다. 겨우 두 번째 만남이었는데! 자기가 사랑의 부적격자임을 뼈저리게 깨달은 한 남자가 스스로에게 사랑의 희극을 연기하면서 빠져들었던 신경질적인 반응은 아니었을까? 동시에 그의 무의식은 너무도 비열한 나머지 이 희극을 위해서 자신의 삶에 동참할 만큼 격상될 기회라곤 거의 없는 촌구석의 불쌍한 종업원을 선택한 것이다!

 

- 진정한 남자라면 당장 결정을 내려야만 하는 상황이지만 그는 머뭇거리면서 자기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그녀가 죽으면 자기도 따라 죽으리라 확신하고 여자 발치에 무릎을 꿇은 순간)으로부터 모든 의미를 박탈하는 자신을 책망했다. 

그는 한없이 자책하다가 결국 자기가 진정으로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 모르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 사람이 무엇을 희구해야만 하는가를 안다는 것은 절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사람은 한 번밖에 살지 못하고 전생과 현생을 비교할 수도 없으며 현생과 비교하여 후생을 바로잡을 수도 없기 때문이다. 

테레자와 함게 사는 것이 나을까, 아니면 혼자 사는 것이 나을까?

도무지 비교할 길이 없으니 어느 쪽 결정이 좋을지 확인할 길도 없다. 모든 것이 일순간, 난생 처음으로, 준비도 없이 닥친 것이다. 

 

- 그렇기에 삶은 항상 밑그림 같은 것이다. 그런데 '밑그림'이라는 용어도 정확하지 않은 것이, 밑그림은 항상 무엇인가에 대한 초안, 한 작품의 준비 작업인데 비해, 우리 인생이라는 밑그림은 완성작 없는 초안, 무용한 밑그림이다. 

 

- 토마시는 독일 속담을 되뇌었다. einmal ist keinmal. 한 번은 중요치 않다. 한 번뿐인 것은 전혀 없었던 것과 같다. 한 번만 산다는 것은 전혀 살지 않는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 그는 여자를 갈망하면서도 두려워했다. 두려움과 갈망 사이에서 어떤 타협점을 찾아야 했고 그 타협점을 그는 '에로틱한 우정'이라 불렀다. 그는 애인들에게 이렇게 못을 밖았다. 두 사람 중 누구도 상대방의 인생과 자유에 대한 독점권을 내세우지 않는, 감상이 배제된 관계만이 두 사람 모두에게 행복을 줄 수 있다고. 

 

- 토마시는 생각했다. 한 여자와 정사를 나누는 것과 함께 잔다는 것은 서로 다를 뿐 아니라 거의 상충되는 두 가지 열정이라고. 사랑은 정사를 나누고 싶다는 욕망이 아니라 (이 욕망은 수많은 여자에게 적용된다.) 동반 수면의 욕망으로 발현되는 것이다.(이 욕망은 오로지 한 여자에게만 관련된다.)

 

- 라틴어에서 파생된 모든 언어에서 동정(compassion)이라는 단어는 접두사 '콤(com-)'과 원래 '고통'을 의미하는 어간 '파시오(passio)'로 구성된다. 다른 언어, 예컨대 체코어, 폴란드어, 독일어, 스웨덴어에서 이 단어는 똑같은 뜻의 접두사와 '감정(sentiment)'이라는 단어로 구성된 명사로 번역된다.(체코어로는 sou-cit, 폴란드어로는 wspol-czucie, 독일어로는 Mit-gefühl, 스웨덴어로는 med-känsla이다.)

 

- 라틴어에서 파생된 언어에서 동정이라는 단어는 타인의 고통을 차마 차가운 심장으로 바라볼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 달리 말해 고통스러워하는 이와 공감한다는 뜻이다. 거의 같은 뜻을 지닌 연민(pitié)이라는 단어는(영어로 pity, 이탈리아어로 pietà 등) 고통받는 존재에 대한 일종의 관용을 암시한다. 한 여인에게 연민을 느낀다는 것은 그녀보다 넉넉한 처지에 있는 사람이 몸을 낮춰 그녀의 높이까지 내려간다는 것을 뜻한다. 

 

- 그래서 동정이라는 단어는 일반적으로 의심쩍은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사랑과는 별로 관계없는 저급한 감정을 지칭하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동정 삼아 사랑한다는 것은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 그런데 돌이켜 보니 이미 추억이 된 그 시절이 당시에 느꼈던 것보다 훨씬 아름답게 느껴졌다. 

그와 테레자의 사랑은 분명 아름다웠지만 피곤하기도 했다. 항상 뭔가 숨기고, 감추고, 위장하고, 보완하고, 그녀에게 용기를 주고, 위로하고, 그녀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증명하고, 질투심과 고통과 꿈에서 비롯된 비난을 감수하고, 죄의식을 느끼고, 자신을 정당화하고, 용서를 구해야만 했다. 이제 피곤은 사라지고 아름다움만 남았다. 

 

- 그는 처음으로 혼자 취리히 거리를 산책했고 자유의 향기를 가슴 깊이 들이마셨다. 거리 모퉁이마다 연애 가능성이 널려 있었다. 미래는 다시 하나의 신비로 되돌아갔다. 그는 오로지 독신으로만 진정한 자신의 모습으로 살 수 있으니 자신의 운명은 그런 것이라고 굳게 확신했다. 삶, 독신자의 삶으로 되돌아간 것이다. 

 

- 파르메니데스와는 달리 베토벤은 무거움을 뭔가 긍정적인 것이라고 간주했던 것 같다. "Der schwergefasste Entschluss." 진중하게 내린 결정은 운면의 목소리와 결부되었다.("es muss sein!") 무거움, 필연성 그리고 가치는 내면적으로 연결된 세 개념이다. 필연적인 것만이 진중한 것이고, 묵직한 것만이 가치 있는 것이다. 

 

- 몇 년 전 그녀가 무심코 던진 말이 떠올랐다. 그들이 친구 Z에 대해 이야기하던 중 그녀가 말했다. "당신을 만나지 않았으면 나는 틀림없이 그를 사랑했을 거야."

당시에도 그 말을 듣고 토마시는 야릇한 우울함에 빠졌더랬다. 테레자가 그의 친구 Z가 아닌 자기와 사랑에 빠진 것은 철저히 우연이라는 사실을 문득 깨달은 것이다. 가능성의 왕국에는 토마시와 이루어진 사랑 외에도 실현되지 않은 다른 남자와의 무수한 사랑이 존재하는 것이다.  

 

- 우리 모두는 사랑이란 뭔가 가벼운 것, 전혀 무게가 나가지 않는 무엇이라고는 생각조차 할 수 없다고 믿는다. 우리는 우리의 사랑이 반드시 이런 것이어야만 한다고 상상한다. 또한 사랑이 없으면 우리의 삶도 더 이상 삶이 아닐 거라고 믿는다. 덥수룩한 머리가 끔찍한, 침울한 베토벤도 몸소 그의 'Es muss sein!'을 우리의 위대한 사랑을 위해 연주했다고 확신한다.

 

- 토마시는 그의 친구 Z에 대해 테레자가 한 말을 떠올리고 그들의 사랑의 역사는 'Es muss sein!'이라기보다는 'Es könnte auch anders sein.(얼마든지 달라질 수도 있었는데...)'에 근거한다는 것을 확인했다.   

 

- 작가가 자신의 인물들이 실제로 존재했다고 독자로 하여금 믿게 하려 드는 것은 어리석은 짓일 것이다. 그들은 어머니의 몸이 아니라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몇몇 문장, 혹은 핵심 상황에서 태어난 것이다. 토마시는 'einmal ist keinmal.'이라는 문장에서 태어났다.

 

- 그런데 어떤 한 사건이 보다 많은 우연에 얽혀 있다면 그 사건에는 그만큼 중요하고 많은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닐까?

우연만이 우리에게 어떤 계시로 나타날 수 있다. 필연에 의해 발생하는 것, 기다려 왔던 것, 매일 반복되는 것은 그저 침묵하는 그 무엇일 따름이다. 오로지 우연만이 웅변적이다. 집시들이 커피 잔 바닥에서 커피 가루 형상을 통해 의미를 읽듯이, 우리는 우연의 의미를 해독하려고 애쓴다. 

 

- 지금 카운터에서 코냑을 들고 토마시에게 다가가는 그녀는 이 우연의 의미를 해독하려고 애쓴다. 호감이 가는 이 낯선 남자에게 코냑을 가져다주려는 순간 베토벤의 음악이 들리는 것은 어찌된 일일까?

필연과는 달리 우연에는 이런 주술적 힘이 있다. 하나의 사랑이 잊히지 않는 사랑이 되기 위해서는 성 프란체스코의 어깨에 새들이 모여 앉듯 첫 순간부터 여러 우연이 합해져야만 한다. 

 

- 처음과 끝이에 동일한 테마가 등장하는 이러한 대칭 구성은 대단히 '소설적'으로 보일 수도 있다. 물론 나도 인정한다. 하지만 한 가지 조건이 있다. 당신이 생각하는 소설적이라는 말이 '꾸며 낸', '인공적인', '삶과는 유사성이 없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조건에서다. 왜냐하면 인간의 삶이란 이런 식으로 구성되기 때문이다. 

 

- 인간의 삶은 마치 악보처럼 구성된다. 미적 감각에 의해 인도된 인간은 우연한 사건(베토벤의 음악, 역에서의 죽음)을 인생의 악보에 각인될 하나의 테마로 변형한다. 그리고 작곡가가 소나타의 테마를 다루듯 그것을 반복하고, 변화시키고, 발전시킬 것이다. 안나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삶을 마감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역과 죽음의 테마, 사랑의 탄생과 결부되어 잊을 수 없는 이 테마가 그 음울한 아름다움으로 절망의 순간에 그녀를 사로잡았던 것이다. 인간은 가장 깊은 절망의 순간에서조차 무심결에 아름다움의 법칙에 따라 자신의 삶을 작곡한다. 

 

- 따라서 소설이 신비로운 우연의 만남에 (예컨대 브론스키, 안나, 플랫폼, 죽음의 만남이나 혹은 베토벤, 토마시, 테레자, 코냑 잔의 만남 같은 것) 매료된다고 해서 비난할 수 없는 반면, 인간이 이러한 우연을 보지 못하고 그의 삶에서 미적 차원을 배제한다면 비난받아 마땅하다. 

 

- 그녀는 번갈아 가며 세 가지 꿈을 꾸었다. 고양이로부터 학대받는 첫 번째 꿈은 생시에 그녀가 받는 고통을 설명하는 꿈이다. 두 번째 꿈은 수많은 변형된 이미지를 통해 학대 장면을 보여 준다. 세 번째 꿈은 자신의 모욕이 영원히 지속되는 저세상을 말해 준다. 

 

- 꿈들은 웅변적일 뿐 아니라 아름답기까지 하다. 프로이트가 그의 꿈에 대한 이론에서 놓쳤던 것이 바로 이런 측면이다. 꿈은 커뮤니케이션(암호화되긴 했지만)일 뿐 아니라 미학적 활동, 상상력의 유희이며, 이 유희는 그 자체가 하나의 가치다. 꿈은 상상하는 것, 없는 것을 희구하는 것이 인간의 가장 심층적인 욕구 중 하나라는 것을 보여 주는 증거다. 바로 그 점이 꿈속에 철면피한 위험이 은폐된 이유이기도 하다. 꿈이 아름답지 않다면 쉽게 잊힐 수도 있을 것이다. 

 

- "이 그림은 망친 거야. 붉은 물감이 캔버스에 흘렀거든. 처음에는 화를 냈는데 점차 그 얼룩이 맘에 들더군. 그 공사장이 진짜가 아닐 뿐 아니라 눈속임용으로 그려 넣은 낡은 무대장치 같았고, 붉은 물감 자국은 찢어진 틈 같았기 때문이지. 그래서 나는 이 틈을 확대해서 그 뒤에서 볼 수 있을 것을 상상하는 놀이를 시작했어. 그런 이유로 내가 그린 첫 연작을 무대장치라 불렀던 거야. 물론 아무도 내 그림을 보진 못하게 했지. 보았다면 나는 퇴학당했을 거야. 앞은 완벽한 사실주의 세계였고 그 뒤에는 무대장치의 찢어진 캔버스 뒤편처럼 뭔가 다른 것, 신비롭고 추상적인 것이 보였지."

그녀는 말을 멈추더니 다시 덧붙였다. "앞은 파악할 수 있는 거짓이고 뒤는 이해할 수 없는 진리였지." 

 

- 그녀는 마치 현기증에 끌리듯 이런 나약함에 마음이 끌렸다. 자신도 나약하다고 느꼈기 때문에 마음이 끌린 것이다. 그녀는 다시 질투에 빠졌고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토마시가 이를 눈치 채고 평소에 하던 동작을 했다. 그녀를 진정시키기 위해 그녀의 손을 잡고 손가락으로 꼭 눌러 주었다. 그녀가 손을 뺐다. 

"왜 그러지?"

"아무것도 아니야."

"당신을 위해 어떻게 해 주길 바라는 거야?"

"당신이 늙기를 바라. 지금보다 열 살 더. 스무 살 더!"

그녀가 하고 싶었던 말은 "당신이 나약하길 바라. 당신도 나처럼 나약하길 바라."였다. 

   

- 현기증을 느낀다는 것은 자신의 허약함에 도취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자신의 허약함을 의식하고 그에 저항하기보다는 투항하고 싶은 것이다. 자신의 허약함에 취해 더욱 허약해지고 싶어 하면 모두가 보는 앞에서 백주 대로에 쓰러지고 땅바닥에, 땅바닥보다 더 낮게 가라앉고 싶은 것이다. 

 

- 화가였던 그녀는 프라하 시절부터 사람들의 얼굴을 관찰하고, 타인을 감시하고, 평가하는 것을 즐기는 사람들의 생김새를 구별할 줄 알았다. 이런 사람들은 한결같이 중지보다 검지가 조금 더 길었고 그 손가락을 상대방에게 겨누었다. 하긴 1968년까지 십 사 년 동안 보헤미아를 통치했던 노보트니 대통령은 저 남자와 똑같이 미용실에서 파마한 회색 머리였고 중부 유럽 모든 주민 중에서 가장 긴 검지를 뽐낼 수 있었다. 

 

- 사비나가 반박했다. 갈등, 드라마, 비극에는 아무런 뜻도 없고 아무런 가치도 없으며 그러므로 그것들은 존경도 존중도 받을 만하지 않다고 말했다. 모든 사람이 부러워하는 것은 프란츠가 묵묵히 해내는 연구다. 

프란츠는 고개를 끄덕였다. "부유한 사회에서는 손으로 일할 필요가 없고 정신적 활동에 몰두하지. 대학도 점점 많아지고 그에 따라 학생도 많아져. 학위를 따기 위해서는 논문 주제가 있어야 해. 그런데 어느 것에 대해서나 논문을 쓸 수 있으니 주제는 무한대로 널려 있어. 그렇게 해서 써 낸 원고 뭉치는 자료실에 산더미처럼 쌓이고 그것은 무덤보다도 쓸쓸하지. 만성절이 되어도 찾아오는 사람이 없으니까. 무수한 저작물, 문장의 눈사태, 양(量)의 광적인 팽창 속에서 정작 문화는 실종되지. 당신 나라에서 금서가 된 단 한 권의 책이 우리네 대학들이 토해 낸 단어 수억 개보다 훨씬 의미 있어." 

 

- 프란츠가 모든 혁명을 동경하는 이유를 이런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한때 그는 쿠바에 공감했고 다시 중국에 공감했으나 그들 체제의 잔인성에 역겨움을 느껴 이제 그에게 남은 것이라곤 아무런 무게도 없고 생기도 없는 언어의 바다뿐이라고 스스로 쓸쓸하게 인정하고 말았다. 그는 제네바(시위라고는 없는)에서 교수가 되었고 일종의 체념 속에서 (여자들도 없고 승진도 없는 고독 속에서) 조금은 좋은 평판을 받은 학술서적을 몇 권 발간했다. 

 

- 아! 사비나는 이 드라마를 사랑하지 않았다. 감옥, 박해, 금서, 점령, 장갑차 같은 단어는 그녀에게는 모든 낭만적 향기가 빠져 버린 추한 단어들이다. 그녀 고향에 대한 아련한 향수처럼 그녀의 귓가에 부드럽게 울리는 유일한 단어, 그것은 공동묘지였다. 

 

- 보헤미아의 공동묘지는 정원과 비슷하다. 무덤은 잔디와 생생한 빛깔 꽃들에 덮여 있고, 초라한 비석들은 짙푸른 나뭇잎 속에 숨어 있다. 저녁나절 공동묘지는 불 켜진 자그마한 초로 가득 차서 죽은 자들이 유치한 무도회를 여는 것만 같다. 그렇다. 유치한 무도회였다. 죽은 자들은 아이들처럼 순진무구하기 때문이다. 삶이 잔인했기에 공동묘지에는 항상 평화가 감돌았다. 심지어 전쟁 동안, 히틀러 시절, 스탈린 시절, 모든 점령 기간 중에도. 그녀는 울적해질 때면 자동차를 타고 프라하를 멀리 벗어나 그녀가 좋아하는 공동묘지를 산책했다. 푸르스름한 언덕배기에 있는 시골 공동묘지는 요람처럼 아름다웠다. 

 

- 프란츠에게 공동묘지는 뼈다귀와 돌덩어리의 추악한 하치장에 불과했다. 

 

- "천만에!" 마리클로드가 당당하게 외쳤다. "나는 교통사고를 당했는데 정말 신났어. 병원에 있을 때만큼 기분 좋았던 적이 없었어! 한잠도 잘 수 없어서 밤낮으로 줄곧 독서를 했지."

모든 사람이 놀라서 그녀를 바라보았고, 그녀는 그런 시선을 즐기는 것이 역력했다. 프란츠는 그녀의 말에 역겨움(그 교통사고 이후 그의 부인은 극도로 우울증에 빠져 쉴 새 없이 불평을 늘어놓았다.)을 느끼면서도 일종의 감탄(자신이 체험한 모든 것을 변모시키는 마리클로드의 모습은, 그녀가 존중받을 만한 생명력을 지녔다는 증거다.)도 뒤따랐다. 

그녀는 말을 이었다. "내가 모든 책을 주간용과 야간용, 이렇게 두 범주로 분류하기 시작했던 것은 바로 병원에서였어. 사실 낮을 위한 책이 따로 있고, 밤에만 읽을 수 있는 책이 따로 있어."

 

- "당신이라면 스탕달을 어느 범주에 넣겠어?"

조각가는 건성으로 듣다가 어색한 표정으로 어깨만 한 번 으쓱했다. 그의 곁에 있던 미술 평론가는, 자기 생각에는 스탕달이라면 낮을 위한 독서라고 선언했다. 

마리클로드는 고개를 내저으며 낭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천만에! 절대로 아니야. 뭘 모르는군! 스탕달은 밤의 작가야!"

 

- 한 사람은 소파에 앉아 있고, 다른 사람들은 서 있었으며, 마리안은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프란츠는 거실 반대편 끝에 있는 마리클로드도 머지않아 양탄자 위에 앉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 당시에 손님들 앞에서 바닥에 앉는 것은 자신이 자연스럽고 긴장이 풀렸으며 진보적이고 사회적이며 파리 스타일임을 의미했다. 마리클로드가 아무 곳에서나 바닥에 주저앉는 것을 너무 좋아해서, 프란츠는 종종 그녀가 담배를 사러 갔다가 담배 가게 바닥에 주저앉은 모습을 보지 않을까 두려웠다.  

 

- 사비나에게 있어 진리 속에서 산다거나 자기 자신이나 타인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군중 없이 산다는 조건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행위의 목격자가 있는 그 순간부터 우리는 좋건 싫건 간에 우리를 관찰하는 눈에 자신을 맞추며, 우리가 하는 그 무엇도 더 이상 진실이 아니다. 군중이 있다는 것, 군중을 염두에 둔다는 것은 거짓 속에 사는 것이다. 사비나는 작가가 자신의 모든 은밀한 삶, 또한 친구들의 은밀한 삶까지 까발리는 문학을 경멸했다. 자신의 내밀성을 상실한 자는 모든 것을 잃은 사람이라고 사비나는 생각했다. 또한 그것을 기꺼이 포기하는 자도 괴물인 것이다. 그래서 사비나는 자신의 사랑을 감춰야만 한다는 것을 괴로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은 '진리 속에서' 사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 프란츠는 모든 거짓의 원천이 개인적인 삶과 공적인 삶의 분리에 있다고 확신했다. 개인적인 삶 속에서의 모습과 공적인 삶 속에서의 모습은 별개다. 프란츠에게 있어서 '진리 속에서 살기'란 사적인 것과 공개적인 것 사이에 있는 장벽을 제거하는 것을 뜻했다. 그는 아무것도 비밀이 아니며 모든 시선에 열린 '유리 집' 속에서 살고 싶다고 말했던 앙드레 브르통의 구절을 즐겨 인용했다.

 

- 그의 부인이 사비나에게 "목걸이가 흉측하네요!"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 그는 계속해서 거짓 속에서 사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순간 그는 사비나를 두둔해야만 했다. 그가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은 그들의 은밀한 애정 관계가 드러날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 그 순간, 그는 불현듯 자신이 불행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고 놀랐다. 사비나라는 육체의 존재가 그가 믿었던 것보다는 훨씬 덜 중요했던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녀가 그의 삶에 각인해 놓았던 황금빛 흔적, 마술의 흔적이었다. 그 누구도 그로부터 앗아 갈 수 없는 것이었다. 그녀는 그의 지평선 너머로 사라지기도 전에 일찌감치 그의 손에 헤라클레스의 빗자루를 쥐어 주었으며 그는 그가 사랑하지 않는 모든 것을 그의 삶으로부터 쓸어 내 버렸다. 그의 자유와 새로운 삶이 부여한 이 예기치 못한 행복, 이 편안함, 이 희열, 이것은 그녀가 그에게 남겨 준 선물이었다. 

- 하긴 그는 항상 현실보다 비현실을 선호했던 터였다. 그래서 학생들에게 강의하는 교탁 뒤보다는 데모 대열 (이미 내가 말했듯 그것은 하나의 광경, 하나의 꿈에 불과한 것이다.) 속에 있을 때 마음이 더 편했던 것처럼, 그녀와 함께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그들 사랑을 위해 매번 가슴 조이던 때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여신으로 변모한 사비나와 함께 있을 때가 더 행복했다. 그녀는 혼자 사는 남자의 자유를 불쑥 선물하면서 그에게 매력의 후광을 씌워 주었다. 그는 여자들에게 매력적인 남자로 변했다. 그의 여학생 중 하나가 그에게 반해 버렸다. 

 

- 아니다. 그녀의 드라마는 무거움의 드라마가 아니라 가벼움의 드라마였다. 그녀를 짓눌렀던 것은 짐이 아니라 존재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이었다.

 

- 사비나는 그녀를 둘러싼 공허를 느꼈다. 그리고 바로 이 공허가 그녀가 벌인 모든 배신의 목표였다면?

물론 지금까지 그녀에게 이런 의식은 없었고, 그것도 이해할 수 있다. 우리가 추구하는 목표는 항상 베일에 가린 법이다. 결혼을 원하는 처녀는 자기도 전혀 모르는 것을 갈망하는 것이다. 명예를 추구하는 청년은 명예가 무엇인지 결코 모른다. 우리의 행위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우리에게는 항상 철저한 미지의 그 무엇이다.    

 

- 더 이상 테레자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신체 각 부위가 커지거나 작아진다면 그래도 여전히 자기 자신일까? 여전히 하나의 테레자로 남을 수 있을까?

 

- 당연하다. 테레자가 전혀 테레자를 닮지 않았다고 가정해도 그녀의 영혼은 언제나 변함없을 것이며 그녀 육체에 일어난 일을 경악스러운 눈으로 바라볼 것이다. 그렇다면 테레자와 그녀 육체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 그녀의 육체는 테레자라는 이름에 대해 어떤 권리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육체에 이런 권리가 없다면, 그 이름은 무엇과 관계되는 것일까? 오로지 비육체적이며 비물질적인 것과 관련되는 것이다.

(이런 질문들은 어렸을 때부터 언제나 테레자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왜냐하면 진정 심각한 질문들이란 어린아이까지도 제기할 수 있는 것들뿐이기 때문이다. 오로지 가장 유치한 질문만이 진정 심각한 질문이다. 그것은 대답 없는 질문이다. 대답 없는 질문이란 그 너머로 더 이상 길이 없는 하나의 바리케이드다. 달리 말해 보자. 대답 없는 질문들이란 바로, 인간 가능성의 한계를 표시하고 우리 존재에 경계선을 긋는 행위다.)

- 테레자는 무엇에 홀린 듯 거울 앞에 꼼짝 않고 서서 자기 몸을 마치 이물질인 양 바라보았다. 이물질이지만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자기에게 할당된 것. 그것이 그녀에게 혐오감을 불러일으켰다. 그 이물질은 토마시에게 유일한 육체가 되는 힘을 지니지 못했다. 그 육체는 그녀를 실망시키고 배신했다. 그녀는 밤 새도록 토마시의 머리카락에서 풍기는 다른 여자의 은밀한 냄새를 속수무책으로 맡을 수밖에 없었다.

- 불현듯 그녀는 하녀를 내쫓듯 이 육체를 파면하고 싶었다. 오직 영혼만이 토마시와 함께 있고, 육체는 다른 여성의 육체들이 남성의 육체들과 하는 짓을 똑같이 할 수 있도록 멀리 추방하고 싶었다! 그녀의 육체가 토마시에게 유일한 육체가 될 수 없었고, 테레자 인생의 가장 큰 전쟁에서 패배한 육체이기에. 그렇다면 멀리 꺼질지어다, 육체여!

 

- "집이 아주 초라하죠. 실망하지 않으셨으면 좋겠는데."

"아니요, 천만에요." 테레자는 책이 가득한 책꽂이에 완전히 가린 벽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대답했다. 남자에게 책상다운 책상은 없었지만 책이 수백 권 있었다. 테레자는 그게 기뻤다. 여기 오면서 그녀를 따라다녔던 불안감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어릴 적부터 책에서 은밀한 동지애의 징후를 보았다. 이런 책꽂이를 가진 사람이라면 그녀에게 나쁜 짓을 할 리가 없었다.  
 

- 왜 그 생각을 못했을까? 그의 집에는 뭔가 수상한 구석이 있었고 그 남자와 집은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잘 차려입은 기술자가 왜 그토록 초라한 집에 살았을까? 그자는 정말 기술자였을까? 그렇다 하더라도 오후 2시에 어떻게 직장에서 자리를 비울 수 있었을까? 그리고 소포클레스를 읽는 기술자가 가당키나 할까? 아니다. 그곳은 엔지니어의 서재가 아니었다. 그 방은 지금은 철창 신세가 된 불온한 지식인으로부터 압수한 집 같았다.

 

- 대개의 경우 사람들은 고통에서 벗어나려고 미래로 도망친다. 그들은 시간의 축 위에 선이 하나 있고 그 너머에는 현재의 고통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상상한다. 그러나 테레자는 자기 앞에 이 선이 있다고 보지 않았다. 뒤돌아보는 시선만이 그녀에게 위안이 될 뿐이었다.

 

- 그는 병원에서 가장 뛰어난 외과의사라고 인정받았다. 은퇴할 날이 가까운 과장이 머지않아 그에게 자리를 물려줄 거란 말이 벌써부터 돌던 터였다. 고위 당국에서 그에게 자아비판을 요구한다는 소문이 퍼지자, 누구도 그가 고집을 피울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 무엇보다도 그 점에 그는 놀랐다. 그런 짐작을 하게 할 만한 행동은 하지 않았는데도 사람들은 그의 지조보다는 변절 쪽에 내기를 걸었던 것이다.
또 다른 놀라운 점은 그들이 지레짐작했던 토마시의 처신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이었다. 나는 그것을 크게 두 부류로 나눌 수 있었다.

- 첫 번째 반응 유형은 그들 자신도 (혹은 그들 측근이) 뭔가를 부인했고 점령군 체제에 동의한다는 공개 선언을 강요당했거나 그렇게 할 자세가 되어 있던 (물론 마지못해 그런 것이지만. 누구라도 기쁜 마음으로 그렇게 할 리 만무하니까.) 사람들에게서 발견되었다.
그들은 토마시가 한 번도 본 적 없던 이상한 미소를 그에게 지어 보였다. 은밀한 공범자끼리 나누는 어정쩡한 웃음. 그것은 창녀촌에서 우연히 마주친 두 남자가 지을 만한 웃음 같은 것이었다. 그들은 조금은 부끄러워하지만, 동시에 그 부끄러움이 피장파장이라는 점 때문에 즐거워한다. 그들 사이에는 일종의 연대감 같은 것이 형성된다.
토마시가 이전까지는 한 번도 타협주의자로 보인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더욱 기꺼이 그에게 미소를 지었다. 과장의 제안을 받아들였다고 가정하는 것은, 이제 비열함이 천천히, 그리고 확실하게 하나의 처세술이 되었으며 조만간 더 이상 비열하다고 취급되지 않을 것이란 증거였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한 번도 그의 친구인 적이 없었다. 그가 당국이 요구하는 대로 후련하게 자술서를 써 버린다면, 그 작자들이 집으로 초대하여 술을 권하고 가깝게 지내려고 할 것임을 알았기 때문에 그는 경악했다.

- 두 번째 유형은 그 자신(혹은 그의 측근)이 박해받았는데 점령군과의 타협을 거부했거나, 또는 어떤 타협이나 자술서를 요구받은 적은 없지만 (아마도 너무 젊어서 아직 아무것에도 연루되지 않았기에) 그런 것에 굴복하지 않으리라 확신하는 사람의 반응이었다. 

 

- "자네의 철회에 대해." 하고 S가 말했다. 악의로 말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오히려 웃고 있었다. 여러 가지 종류의 웃음이 있겠지만 그것은 전혀 다른 웃음이었다. 도덕적 우월성에 근거한 자신만만한 미소였다.   

 

- 토마시는 한 가지 이상한 것을 깨달았다. 모든 사람이 그에게 미소를 짓고, 모든 사람이 그가 철회서를 쓰기를 바라며, 자기가 의견을 철회한다면 모든 사람이 기뻐할 것이라는 점이다! 어떤 사람들은 비굴함의 인플레이션이 그들 자신의 행동도 평범한 것으로 만들며 그 실추된 명예를 돌려주기 때문에 즐거워했다. 또 다른 사람들은 자신들은 결코 포기하려 들지 않았던 명예에 각별한 특권이 여전히 유지되는 것을 보는 데 익숙했다. 

 

- 그가 그런 사람들의 의견을 그토록 대단하게 여겼던가? 천만에. 그들에 대해서라면 우선 그는 조금도 좋게 생각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들 시선에 마음이 흔들리는 자기 자신을 나무랐다. 도무지 논리적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것이었다. 다른 사람들을 경멸하는 사람이 그들의 판단에 그토록 매달릴 수 있는 것일까?

 

인간에 대한 그의 뿌리 깊은 불신(인간이 자신의 운명을 결정하고 판단할 권리가 있는가에 대한 회의)이 그가 직업을 선택하는 데 이미 어떠한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그의 직업은 대중의 시선에 노출될 가능성이 없었기 때문이다. 예컨대 정치가의 길을 택한 사람이라면 기꺼이 대중을 자신의 심판관으로 삼아 그들의 호감을 얻겠다는 순진하고도 노골적인 믿음을 갖게 마련이다. 그들은 군중의 적개심을 불러일으킬지도 모른다는 가능성 때문에 보다 완벽한 정치 행위를 추구하는데, 그것은 토마시가 진단의 어려움에 한결 의욕이 솟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에서 비롯된 것이다. 

 

- 의사는 (정치인이나 배우와는 달리) 오직 그의 환자나 가까운 동료들에 의해, 따라서 네 면이 닫힌 방에서 일대일로 마주 보는 상황에서 평가된다. 그는 자신을 평가하는 사람들의 시선을 대면하고, 그 자리에서 대답하고, 해명하고, 자기 방어를 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의 토마시는 (난생 처음으로) 그가 포착할 수 없는 수많은 시선이 그에게 고정된 상황에 빠져 있다. 그는 자기 자신의 시선이나 말로 그들에게 답할 수 없다. 그는 그들의 손아귀에 내맡긴 것이다. 병원에서, 그리고 병원 밖에서 그에 대해 사람들이 떠들고 (프라하 전체가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으며, 누가 숙청되고, 누가 고발하고, 누가 부역했는지 하는 소문이 아프리카 북소리처럼 기막히게 빠른 속도로 떠돌아다녔다.) 그 사실을 토마시도 알고 있었지만 속수무책이었다. 그것이 그토록 참기 어렵고 그를 너무도 당황케 하여 자신도 놀랄 지경이었다. 세상 사람들이 그에게 쏟는 관심은 마치 군중이 밀쳐 내는 압력이나 악몽 속에서 우리 옷을 벗겨 내는 사람들의 손길처럼 그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 그는 과장을 찾아가 아무것에도 서명하지 않겠다고 선언해 버렸다.
과장은 평소보다 훨씬 세게 그의 손을 잡으며 그의 결심을 기대했다고 말했다.
토마시는 말했다. "과장님, 제가 철회를 하지 않아도 저는 계속 여기 남을 수도 있을 겁니다."

이 말을 통해 그는 자기가 강제로 내쫓긴다면 동료 의사 모두가 사표를 던질 거라는 점을 넌지시 암시하려고 했다.
그러나 아무도 사표를 쓸 생각을 하지 않았고, 얼마 후 토마시는 병원을 떠나야만 했다.

(과장은 지난번보다도 더욱 세게 그의 손을 잡아서 손에 멍이 들었다.)

- 토마시는 테레자를 즐겁게 해 주기 위해 다시 베토벤을 좋아하기 시작했지만 음악에 그리 푹 빠진 애호가도 아니었고, 과연 베토벤의 그 유명한 'muss es sein? es muss sein!'이라는 테마에 얽힌 진짜 이야기를 아는지는 의심스럽다. 
그 이야기의 진상은 이렇다. 뎀브셔라는 사람이 베토벤에게 50프로링을 빚지고 있었는데, 언제나 땡전 한 푼 없는 이 작곡가는 그에게 빚을 갚아 달라고 요구했다. "Muss es sein? 그래야만 하는가?"라고 불쌍한 뎀브셔는 한숨을 지었다. 베토벤은 경쾌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Es muss sein! 그래야만 한다!" 그러면서 그는 수첩에 멜로디까지 곁들여 이 단어를 적어 넣었고 이 사실적인 테마를 중심으로 4중창을 위한 소품을 작곡했다. 세 명이 "es muss sein, ja, ja, ja. 그래야만 한다, 네, 네, 네."라고 노래하고, 네 번째 사람이 "heraus mit dem Beutel! 네 지갑을 꺼내!"라고 덧붙였다.

- 일 년 후 이 테마가 작품번호 135 마지막 4중주 4악장의 핵심이 되었다. 베토벤은 뎀브셔의 지갑은 더 이상 염두에 두지 않았다. "es muss sein!"이라는 말이 그에게는 운명의 신이 몸소 발설한 것처럼 점차 장엄한 톤을 띤 듯 느껴진 것이다. 칸트의 언어로는 '안녕!'이라는 말도 그럴듯하게 발음하면 형이상학적 주제와 흡사하게 될 수 있다. 독일어는 무거운 단어로 이뤄진 언어다. 이제 "es muss sein!"은 더 이상 농담이 아니라 'der schwer gefasste Entschluss', 즉 신중하게 저울질한 결정이 된 것이다.

- 이렇듯 베토벤은 희극적 영감을 진지한 4중주로, 농담을 형이상학적 진리로 환골탈태시킨 것이다. 이것은 가벼운 것에서 무거운 것으로의 전이(파르메니데스에 따르자면 긍정적인 것이 부정적으로 변화한 것)라는 흥미로운 예다. 이상한 노릇은 이 환골탈태가 우리를 놀라게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역으로 베토벤이 4중주의 진지함으로부터 뎀브셔의 지갑에 대한 4중창에서 보여 준 가벼운 농담으로 변했다면 우리는 분개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랬다면 그것은 완전히 파르메니데스의 정신에 부합한 행동이 되었을 것이다. 무거운 것을 가벼운 것으로, 그러니까 부정적인 것을 긍정적인 것으로 바꿀 수도 있었다! 처음에는 (불완전한 초고 형태로서) 형이상학적 진리였지만 끝에 가서 (완성된 작품으로서) 더할 나위 없이 가벼운 농담이었을 수도 있었다! 다만 우리는 더 이상 파르메니데스처럼 사고할 수는 없다.

- 내 생각에 토마시는 이미 오래전부터 이 공격적이고 장중하고 엄격한 "es muss sein!"에 짜증이 났고, 그의 가슴속에는 파르메니데스의 정신에 따라 무거운 것을 가벼운 것으로 바꾸고 싶다는 깊은 욕망이 있었다. 그가 단숨에 첫 번째 부인과 그의 아들을 더 이상 보지 않기로 작정하는 데에는 일 초도 걸리지 않았고, 아버지와 어머니가 그와 인연을 끊겠다는 것을 알고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는 점을 상기하도록 하자.

- 외과의사는 사물의 표면을 열고 그 안에 숨은 것을 들여다본다. 토마시에게 "
es muss sein!"의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보러 가고 싶은 생각을 불러일으킨 것은 아마도 이런 욕망일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그때까지 자신의 소명이라 믿었던 모든 것을 털어 버렸을 때 삶에서 무엇이 남는지 보고 싶은 욕망.   


- 토마시의 시적 기억에는 그녀를 위한 자리가 없었다. 그녀를 위한 자리는 양탄자밖에 없었다. 

토마시와 테레자의 사랑은 그와 다른 여자와의 사랑이 끝났던 시점에서 정확하게 시작되었다. 그 사랑은 그를 여자 사냥에 나서게 했던 필연성과는 다른 차원에서 이루어졌다. 그는 테레자의 그 어느 것도 들춰내려 하지 않았다. 그는 이미 완전히 드러난 상태인 그녀를 만난 것이다. 그는 세계의 육체를 열기 위해 사용하는, 그의 상상력의 메스를 채 손에 쥐기도 전에 그녀와 정사를 했던 것이다. 그녀가 정사 중에 어떠할 거라고 궁금해할 시간도 갖지 못한 채 이미 그녀를 사랑해 버린 것이다. 

 

- 사랑의 역사는 그 후에나 시작되었다. 그녀의 몸에서 열이 나는 바람에, 그는 다른 여자들에게 그랬듯이 그녀를 돌려보낼 수 없었다. 그녀의 머리맡에 무릎을 꿇고 앉자 불현듯 그녀가 바구니에 넣어져 물에 떠내려 와 그에게 보내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이 은유가 위험하다는 것을 나는 이미 말한 적이 있다. 사랑은 은유로 시작된다. 달리 말하자면, 한 여자가 언어를 통해 우리의 시적 기억에 아로새겨지는 순간, 사랑은 시작되는 것이다. 

 

- 며칠 후 모든 신문이 탄원서에 대해 떠들어 댔다. 

물론 그것이 정치범 석방을 요구하는 소박한 청원에 불과하다는 것은 어디에서도 언급되지 않았다. 어느 신문도 이 짧은 문건의 한 구절도 인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사회주의에 대항하는 새로운 전투의 발판으로 사용될 것이라며 이 체제 전복적 탄원을 막연하고 위협적인 어조로 장황하게 문제 삼았다. 서면한 인사들의 이름이 공개되었고, 등골을 오싹하게 하는 중상모략이 뒤따랐다.

 

- 그리고 나는 다시 한번 이 소설 첫머리에서 내게 드러났던 그의 모습을 본다. 그는 창가에 서서 건너편 건물 벽을 바라보고 있다. 

그는 이 이미지에서 탄생했다. 이미 말했듯 소설 인물들은 살아 있는 사람들처럼 어머니의 육체에서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하나의 상황, 하나의 문장, 그리고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았거나, 본질적인 것은 여전히 언급되지 않았지만 근본적이며 인가적 가능성의 씨앗을 품고 있는 은유에서 태어난다.

그러나 작가란 자기 자신 이외의 것은 말할 수 없다고들 하지 않는가? 

 

- 마당에서 무기력하게 바라보며 아무런 결정도 내리지 못하는 것. 사랑이 고조된 순간 자기 배 속에서 끈질기게 꾸르륵거리는 소리를 듣는 것. 배신하고 또한 이토록 아름다운 배신의 길 중간에서 멈출 수 없는 것. 대장정 행렬 속에서 주먹을 치켜드는 것. 경찰이 숨겨 둔 도청 마이크 앞에서 유머 감각을 과시하는 것 등. 나도 직접 이런 상황을 겪어 보았다. 그러나 내 이력서 속 자아로부터 그 어떤 인물도 도출되지 않았다. 내 소설의 인물들은 실현되지 않은 나 자신의 가능성들이다. 그런 까닭에 나는 그들 모두를 사랑하며 동시에 그 모두가 한결같이 나를 두렵게 한다. 그들은 하나같이 내가 우회하기만 했던 경계선을 뛰어넘었다. 나는 바로 이 경계선(그 경계선을 넘어가면 나의 자아가 끝난다.)에 매혹을 느낀다. 그리고 오로지 경계선 저편에서만 소설이 의문을 제기하는 신비가 시작된다. 소설은 작가의 고백이 아니라 함정으로 변한 이 세계에서 인간 삶을 찾아 탐사하는 것이다. 자, 이제 그만 하자. 토마시의 이야기로 돌아가자.    

 

- 그는 다시 생각에 잠겼다. 무엇을 해야만 했을까? 감정에 속하는 모든 것(기자에 대한 존경심, 아들이 그에게 불러일으킨 불편함)을 배제한다 해도 그에게 내민 문서에 서명을 해야 했는지 아닌지를 그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 

- 한 사람을 침묵으로 몰아넣으려 할 때 목청을 높이는 것이 정당한 일인가? 그렇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무슨 이유로 신문들이 이 탄원서에 많은 지면을 할애해야 할까? 언론은 (모두 국가에 의해 조작되니) 이 사건에 대해 함구할 수도 있으며 아무도 모르게 지나칠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언론이 떠드는 것은 그것이 이 나라의 주인들에게 유리하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이것은 하늘이 준 선물이고, 그들은 이것을 새로운 탄압의 물꼬를 트고 정당화하는 데 써먹었다.

 

- 그렇다면 그는 무엇을 해야만 했을까? 서명해야 했는가 말아야 했는가?
이 문제를 다른 식으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목청 높여 자신의 종말을 재촉하는 것이 나았을까? 혹은 침묵해서 그 대가로 좀 더 느린 종말을 사야 했을까?
이런 질문들에 한 가지 해답만이 존재할까?

- 그리고 다시 한번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생각이 그의 머리에 떠올랐다. 인간의 삶이란 오직 한 번뿐이며, 모든 상황에서 우리는 딱 한 번만 결정을 내릴 수 있기 때문에 과연 어떤 것이 좋은 결정이고 어떤 것이 나쁜 결정인지 결코 확인할 수 없을 것이다. 여러 가지 결정을 비교할 수 있도록 두 번째, 세 번째, 혹은 네 번째 인생이 우리에게 주어지진 않는다.
역사도 개인의 삶과 마찬가지다. 체코인들에게 역사는 하나뿐이다. 토마시의 인생처럼 그 역시 두 번째 수정 기회 없이 어느 날 완료될 것이다.

- 1618년 오스트리아 황제에게 분개한 보헤미아 귀족은 종교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대담하게도 그의 전권 대사 중 두 명을 흐라친 성 창밖으로 내던져 버렸다. 이렇게 해서 체코 국민 거의 전부를 몰살로 이끈 삼십 년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당시 체코인들에게는 용기보다 신중함이 필요했던가? 
대답은 간단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삼백이십 년 후인 1938년, 뮌헨 회의에 따라 세계는 그들의 나라를 히틀러에게 희생시킬 것을 결정했다. 그들은 숫자 면에서 그들보다 여덟 배 우세한 적군에 대항하여 싸움을 시도해야 했을까? 1618년과는 반대로 그들은 용기보다는 신중함을 보여 주었다. 그들의 타협은 결과적으로 수십 년, 혹은 수세기 동안 국가로서의 그들 자유가 결정적으로 상실되는 것으로 결판난 2차 세계 대전의 시작을 초래했다. 그들에게 신중함보다 용기가 필요했을까? 그들이 무엇을 해야만 했을까?

- 체코 역사가 반복될 수만 있다면, 매번 다른 가능성을 시도하여 두 결과를 비교해 보는 것은 필경 흥미로운 일일 것이다. 이런 실험이 없었기 때문에 모든 추론은 그저 일련의 가설에 불과하다.

- Einmal ist keinmal. 한 번은 중요하지 않다. 한 번이면 그것으로 영원히 끝이다. 유럽 역사와 마찬가지로 보헤미아 역사도 두 번 다시 반복되지 않을 것이다. 보헤미아 역사와 유럽 역사는 인류의 치명적 체험 부재가 그려 낸 두 밑그림이다. 역사란 개인의 삶만큼이나 가벼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가벼운, 깃털처럼 가벼운, 바람에 날리는 먼지처럼 가벼운, 내일이면 사라질 그 무엇처럼 가벼운 것이다.

- 토마시는 다시 한번 일종의 향수, 거의 사랑에 가까운 감정을 느끼며 구부정한 키 큰 기자에 대해 생각했다. 이 남자는 역사가 밑그림이 아니라 완성된 그림인 것처럼 행동했다. 그는 자신이 하는 일이 영원회귀 속에서 셀 수 없을 정도로 무한히 반복되어야만 한다는 듯 행동했으며 자신의 행위에 대해 한 번도 의심해 본 적이 없는 것이 틀림없다. 그는 자기가 옳다고 확신했고 그것이 편협한 정신의 징후가 아니라 미덕의 표식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토마시와는 다른 역사 속에서 살고 있었다. 밑그림이 아닌 (혹은 그런 의식이 없는) 역사 속에서.

- 얼마 후 그는 다시 이런 생각을 했고, 나는 앞 장의 뜻을 밝히기 위해 이를 언급하고자 한다. 우주 어디엔가 우리가 두 번째 태어나는 행성이 있다고 가정해 보자. 또한 지구에서 보낸 전생과 거기에서 익힌 경험을 완벽하게 기억한다고 해 보자.
그리고 이미 두 번의 전생 체험을 가지고 세 번째로 태어나는 또 다른 행성이 존재할 수도 있다.
그리고 인류가 매번 더욱 성숙하면서 다시 태어나는 다른 행성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 이것이 영원회귀에 대한 토마시의 생각이다.

- 지구(1번 행성, 미체험 행성)에 사는 우리는 당연히 다른 행성에서 인간에게 무슨 일이 벌어질지에 대해서는 막연한 개념밖에 지닐 수 없다. 인간이 더 현명해질까? 인간이 완숙한 경지에 도달할 수 있을까? 반복함으로써 이에 도달할 수 있을까?

- 비관주의와 낙관주의가 의미를 갖는 것은 바로 이런 유토피아에 대한 전망 속에서만 가능하다. 낙관주의자란 5번 행성에서는 인간 역사가 피를 덜 흘릴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비관주의자란 그런 것을 믿지 않는 자이다.

 

- 장례식이 끝나고, 모든 사람들이 고인의 가족에게 악수를 할 때, 토마시는 한구석에 모여 있던 작은 무리에서 키가 크고 구부정한 기자를 보았다. 그는 다시 한번 아무런 두려움도 없고 필경 서로 각별한 우정으로 얽혀 있을 사람들에 대해 일종의 향수를 느꼈다. 그는 기자에게 다가가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하려 했지만, 구부정한 거구 사내는 그에게 말했다. "조심하시오, 의사 선생. 다가오지 않는 편이 낫습니다."

 

- 참으로 묘한 말이었다. 진지하고 우애에 찬 경고로 볼 수도 있지만 ("주의하시오, 촬영 중이니 우리에게 말을 걸면 당신은 새로운 취조거리가 될 것이오.") 냉소적인 의도도 배제되지 않았다. ("당신에게는 탄원서에 서명할 용기가 없었으니 일관성을 갖고 우리 같은 사람과 접촉하지 마시오!") 

어떤 것이 맞는 해석일지 모르나, 토마시는 그의 말에 따라 슬그머니 자리를 떴다. 마치 플랫폼에서 마주친 미지의 아름다운 여인이 급행열차 침대칸에 올라탈 때, 그가 '당신을 사랑한다.'라고 말하려는 순간, 그녀가 그의 입술 위에 손가락을 대며 말을 막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 그는 이 젊은 의사에게 당장 자기 심정을 설명할 수도 있었다. 그는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그렇게 어색한 표정 짓지 말게. 굳이 날 만나려고 하지 않는 것이 세상 물정으로 보아 너무도 당연하지! 콤플렉스를 갖지 마! 자네를 만난 게 기뻐!" 그러나 이조차도 그는 말하기가 두려웠다. 이제껏 그가 한 어떤 말이라도 의도된 의미를 전달하지 못했고, 옛 동료는 진지한 말 뒤에 조롱이 숨어 있다고 의심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미안하네. 내가 좀 바빠서."라고 S가 말하며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전화할게."

예전에 동료들이 그가 비겁하다고 생각하고 그를 경멸했을 때, 그들은 모두 그에게 웃어 보였다. 그를 더 이상 경멸할 수 없고 심지어 존경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 된 지금, 그들은 토마시를 피하는 것이다. 

하긴 그의 옛 환자들도 더 이상 샴페인을 마시자고 초대하지 않았다. 몰락한 지식인들이 처한 상황은 이제 더 이상 예외적인 것이 아니었다. 지속적인 상태인 동시에 보기에도 거북살스러운 것이었다.

 

- 나는 어릴 적 귀스타브 도레의 판화가 삽화로 실린 어린이 구약성서를 읽으면서, 거기에서 구름을 타고 있는 선한 신을 보았다. 늙은 아저씨 모습에다가 눈과 코가 있었고 수염이 길었으며, 입도 있으니 나는 그가 먹기도 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먹는다면 창자도 있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이 생각에 곧 질겁을 했다. 나는 무신론자에 가까운 집안에서 자랐지만 신의 창자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신성 모독이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신학적 예비지식은 조금도 없었지만, 어린 나는 인간적으로 똥과 신은 양립할 수 없으며 또한 인간이 신의 모습을 본 따 창조되었다는 기독교의 인류학적 근본 명제가 지닌 허약성을 일찌감치 깨달았던 것이다. 둘 중 하나다. 인간은 신의 모습에 따라 창조되었고 따라서 신도 창자를 지녔거나, 아니면 신은 창자를 지니지 않았고 인간도 신을 닮지 않았거나. 

 

- 고대 그노시스파 사람들도 다섯 살 적의 나처럼 이를 분명하게 느꼈다. 이 저주받은 문제를 단칼에 해결하게 위해 2세기 그노시스파의 대스승 발랑텡은 예수는 "먹고 마시지만 절대 똥은 싸지 않는다."라고 단언했다는 것이다.   

 

- 우주가 신에 의해 창조되었다고 주장하는 사람과 저절로 나타났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간의 논쟁은 우리의 직관과 체험을 넘어서는 무엇인가와 관련 있다. 인간에게 주어진 존재 그 자체(어떻게 누구에 의해 주어졌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를 의심하는 사람과 주어진 존재에 아무런 조건 없이 동의하는 사람들 간의 견해차도 이와 마찬가지로 엄존한다.

그것이 종교적 믿음이건 정치적 믿음이건 간에 모든 유럽인들의 믿음 이면에는 창세기의 첫 번째 장이 존재하며, 이 세계는 마땋이 그래야만 한다는 모양으로 창조되었고, 존재는 선한 것이며 따라서 아이를 가지는 것이 좋은 것이라는 생각이 거기에서 유래했다. 이러한 근본적 믿음을 존재에 대한 확고부동한 동의라고 부르도록 하자. 

 

- 최근에도 책 속에서 똥이라는 단어가 점선으로 대체된 적이 있는데 그것은 윤리적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똥이 비윤리적이라고 주장할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똥과의 불화는 형이상학적인 것이다. 똥을 누는 행위는 창조의 받아들이기 어려운 성질을 일상적으로 증명하는 것이다. 둘 중 하나를 택해야만 한다. 똥은 수락할 만한 것이라거나 (그렇다면 화장실 문을 잠그고 들어앉지 말아야 한다!) 또는 우리가 창조된 방식은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이라는 것 중에서. 

- 그러므로 존재에 대한 확고부동한 동의가 미학적 이상으로 삼는 세계는, 똥이 부정되고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각자가 처신하는 세계라는 결론이 도출된다. 이러한 미학적 이상은 키치라고 불린다.

- 이것은 감상적이었던 19세기 중엽에 생겨나 그 이후 다른 모든 언어에 퍼졌던 독일어 단어다. 그러나 그 단어를 자주 사용함에 따라 그것이 지닌 원래의 형이상학적 가치가 지워졌는데, 말하자면 키치란 본질적으로 똥에 대한 절대적 부정이다. 문자적 의미나 상징적 의미에서 그렇다. 키치는 자신의 시야에서 인간 존재가 지닌 것 중 본질적으로 수락할 수 없는 모든 것을 배제한다. 

 

- 전체주의적인 키치 왕국에서 대답은 미리 주어져 있으며, 모든 새로운 질문은 배제된다. 따라서 전체주의 키치의 진정한 적대자는 질문을 던지는 사람인 셈이다. 질문이란 이면에 숨은 것을 볼 수 있도록 무대장치의 화폭을 찢는 칼과 같은 것이다. 사비나가 테레자에게 자기 그림의 의미를 이런 식으로 설명했다. 앞은 이해 가능한 거짓말이고 그 뒤로 가야 이해 불가능한 진실이 투명하게 드러난다. 

 

- 그러나 소위 전체주의 체제에 대항하는 사람은 질문과 의심을 가지고 투쟁할 수 없다. 가장 많은 사람들에게 이해되어야만 하고 집단적인 눈물샘을 자극해야만 하는 확신과 단순화된 진리가 그들에게도 필요한 것이다. 

 

- 어느 날 한 정치 단체가 독일에서 사비나 작품의 전시회를 개최했다. 사비나는 안내 책자를 보았다. 그녀의 사진 앞에 철조망이 그려져 있었다. 책자 안에는 순교자나 성인의 전기와 흡사한 그녀의 약력이 적혀 있었다. 그녀는 고통 받았고 불의에 대항해서 싸웠으며 고문받는 조국을 버려야만 했으나 투쟁을 계속한다고 했다. 마지막에는 "그녀는 자유를 위해 그림으로 싸운다."라고 씌어 있었다.  

 

- 그녀는 항의했으나, 사람들은 그녀를 이해하지 못했다. 뭐라고요? 공산주의가 현대 예술을 박해하는 것이 사실 아닌가요?

그녀는 격분해서 대답했다. "나의 적은 공산주의가 아니라 키치예요!"

그 후 그녀는 자기 약력을 애매모호한 문구로 감쌌고 미국에 와서는 드디어 자기가 체코인이라는 사실조차 감추는 데 성공했다. 사람들이 그녀의 삶을 가지고 만들어 내려고 했던 키치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그녀는 처절히 노력해야만 했다.

 

- 그녀는 일생 동안 자신의 적은 키치라고 단언했더랬다. 그러나 그녀조차도 자신의 존재 깊숙한 곳에 키치를 품고 살았던 것은 아닐까? 그녀의 키치, 그것은 사랑하는 어머니와 지혜로운 아버지가 군림하는 평화롭고 부드럽고 조화로운 가정의 모습이다. 이 이미지는 그녀의 부모가 죽은 후에 가슴속에서 배태되었다. 그녀의 삶이 이 아름다운 꿈과는 아주 달랐기 때문에 이것이 지난 매력에 더욱 민감할 수밖에 없었다. 텔레비전의 멜로드라마 속에서 배은망덕한 딸이 버림받은 아버지를 품에 껴안는 모습이나 행복한 가족이 살고 있는 집의 창문이 황혼 속에서 반짝이는 것을 보면, 그녀는 두 눈이 축축해지는 것을 느꼈다. 

 

- 지금 그들 셋은 식사 중이다. 부인은 사비나를 "내 귀여운 딸!"이라고 불렀으나 어느 모로 보나 그것은 오히려 반대였다. 여기서 사비나는 그녀 치마 끝에 매달린 두 아이를 데리고 있는 엄마 같았고, 그들은 그녀를 존경한 나머지 그녀가 어떤 명령이라도 내리면 즉시 복종할 태세인 아이 같았다. 

 

- 그녀는 어릴 적에 빼앗긴 부모를 노년의 문턱에서 되찾은 것일까? 아니면 한 번도 가져 본 적 없는 아기를 마침내 가진 것일까?

 그녀는 이것이 환상임을 잘 알았다. 이 매력적인 노인네들 집에서 체류하는 것은 잠정적으로 간이역에 머무르는 것에 불과했다. 늙은 신사는 중태이고 그의 부인은 홀몸이 되면 캐나다에 사는 아들 집에 갈 것이다. 사비나는 다시금 배신의 길로 들어설 것이며 이따금 그녀 가슴 깊은 데에서 행복한 가족이 살고 있는 환한 두 창문에 대해 이야기하는 우스꽝스럽고 감상적인 노래가 존재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 속에서 울려 퍼질 것이다. 

 

- 그녀는 이 노래에 감동하지만 자신의 감동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녀는 이 노래가 아름다운 거짓말에 불과하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안다. 키치는 거짓말로 인식되는 순간, 비-키치의 맥락에 자리 잡는다. 권위를 상실한 키치는 모든 인간의 약점처럼 감동적인 것이 된다. 왜냐하면 우리 중 그 누구도 초인이 아니며 키치로부터 완전하게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아무리 키치를 경멸해도 키치는 인간 조건의 한 부분이다.

 

- 그 사람은 그 캠페인이 정치범을 돕지 못하리라는 것을 잘 알았다. 진정한 목표는 정치범의 석방이 아니라 아직도 두려움을 모르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데 있다. 그가 했던 것도 구경거리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다른 가능성이 없었다. 그에게는 행동과 구경거리 사이에서 선택할 권리가 없었다. 그에게는 한 가지 선택밖에 없었다. 구경거리를 제공하거나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 인간이 구경거리를 제공할 수밖에 없게 선고된 상황이 있게 마련이다. 침묵하는 권력(강 건너의 침묵하는 권력, 벽 속에 숨긴 조용한 도청 장치로 변신한 경험)에 대항하는 그의 전투란 군대를 공격하는 연극 단원의 전투인 것이다. 

프란츠의 눈에 소르본 대학 친구가 주먹을 치켜들고 강 건너의 침묵을 위협하는 모습이 들어왔다.

 

- 다리로 뛰어가 하늘을 향해 끔찍한 욕설을 퍼붓고는 요란한 총성 속에서 죽고 싶다는 엄청난 욕망에 사로잡혔다.

프란츠의 이러한 돌연한 욕망에 우리는 뭔가 떠오른다. 그렇다. 인간 존재의 극과 극이 거의 닿을 정도로 서로 가까워져 고상한 것과 천한 것, 천사와 파리, 신과 똥 사이에 더 이상 아무런 차이점이 없게 되는 꼴을 차마 보지 못하여 고압 전류가 흐르는 철조망에 달려가 매달린 스탈린의 아들이 떠오르는 것이다. 

 

- 대장정의 영광이 행진하는 사람들의 코믹한 허영심으로 축소되고, 유럽 역사의 장대한 소란이 무한한 침묵 속으로 실종되어 역사와 침묵 간에 더 이상 아무런 차이점도 없게 되는 것을 프란츠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는 대정정이 똥보다 더 무겁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천칭에 자기 목숨까지도 기꺼이 올려놓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일이 벌어질 거라는 것을 전혀 증명할 수 없다. 천칭의 한쪽 접시에는 똥이 있었고, 스탈린의 아들은 몸뚱이 전부를 다른 접시 위에 올려놓았지만 천칭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총을 맞고 죽는 대신 프란츠는 고개를 숙이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일렬로 서서 버스로 돌아갔다.

 

- 우리 모두는 우리 자신을 도와주는 누군가를 필요로 한다. 우리가 어떤 시선을 받으며 살고 싶어 하는지에 따라 네 범주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 첫 번째는 익명의 무수한 시선, 달리 말하자면 대중의 시선을 추구한다. 독일 가수와 미국 여배우가 이런 경우에 속하며 주걱턱 신문기자 역시 이런 경우에 속한다. 독자들에게 인기가 높아진 그의 주간지를 소련인이 정간하자, 그는 산소가 백배나 희박해진 공기 속에 있는 것 같았다. 그에게는 그 누구도 수많은 미지의 시선을 대신할 수 없었다. 그는 질식할 것만 같았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가는 곳마다 경찰의 미행을 받고, 전화를 걸 때마다 도청당하고, 심지어는 거리에서 은밀하게 사진까지 찍힌다는 사실을 알았다. 갑자기 익명의 시선이 도처에서 그를 따라다녔으며, 그러자 그는 숨을 쉴 수 있었다! 그는 행복했다!  

 

- 두 번째 범두에는 다수의 친한 사람들의 시선 없이는 살 수 없는 사람들이 속한다. 이들은 지칠 줄 모르고 칵테일 파티나 만찬의 기회를 만들어 내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대중을 잃으면 그들 인생의 무대에 불이 꺼졌다고 상상하는 첫 번째 범주의 사람들보다는 행복하다. 반면 두 번째 범주의 사람들은 언제나 어떤 시선을 획득하는데, 마리클로드와 그녀의 딸이 이에 속한다.   

 

- 그리고 세 번째 범주가 있는데, 사랑하는 사람의 시선 속에서 사는 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이 범주에 속한다. 이들의 조건은 첫 번째 그룹에 속한 사람들의 조건만큼이나 위험천만하다. 사랑하는 사람의 눈이 감기면 무대는 칠흑에 빠질 것이다. 테레자와 토마시를 이런 사람들 속에 분류해야만 한다. 

 

- 끝으로 아주 드문 네 번째 범주가 있는데, 부재하는 사람들의 상상적 시선 속에서 사는 사람들이 이에 속한다. 이들은 몽상가이다. 예를 들면 프란츠가 그렇다. 그가 캄보디아 국경까지 간 것은 오로지 사비나 때문이다. 버스가 태국의 도로에서 덜컹거릴 때, 그는 그녀의 시선이 오랫동안 그에게 고정되었다고 느낀다.

 

- 토마시의 아들도 같은 범주에 속한다. ... 그는 토마시도 시골에 사는 것을 알자 기뻐했다. 운명이 그들의 삶을 대칭적으로 만들었다고! 그것 때문에 그는 토마시에게 편지를 썼던 것이다. 그는 답장을 요구하지 않았다. 그가 바라는 것은 한 가지뿐이었다. 토마시가 그의 삶에 시선을 보내는 것. 

 

- 시몽은 아버지와의 만남을 떠올리면서 자신이 그토록 떨었다는 것을 부끄러워했다. 그는 필경 아버지의 마음에 들지 않았을 것이다. 반면 아버지는 그의 마음에 들었다. 그는 아버지의 말 한 마디 한 마디를 기억했고 시간이 갈수록 더욱 그의 말이 맞다고 생각했다. 특히 한 문장이 그의 기억 속에 각인되었다. 

"자신이 한 일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들을 벌주는 것은 야만적인 짓이다."

 

-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하는 짓을 알지 못합니다."

그는 아버지가 무신론자인 것을 알지만, 두 문장의 유사성은 그에게 은밀한 징조였다. 아버지는 그가 선택한 길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 자신을 집으로 초대한다는 토마시의 편지를 받은 것은 시몽이 시골에 산 지 이 년도 넘었을 때였다. 만남은 화기애애했으며 시몽은 편안하게 느껴서 더 이상 말을 더듬지 않았다. 아마도 그는 두 사람이 서로를 그다지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을 것이다.   

 

- 그는 계속해서 자기 삶을 관찰하는 상상의 눈을 처절히 필요로 했기에 이따금 그녀에게 긴 안부 편지를 쓰곤 했다. 

 

- 사비나는 시골에 사는 슬픈 발신자의 편지를 죽는 날까지 끊임없이 받았다. 그녀는 자기가 떠나온 나라에 대해 점점 관심을 두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보낸 편지 중 많은 것을 뜯어 보지도 않았다. 

늙은 신사는 죽었고, 사비나는 캘리포니아로 가서 정착했다. 항상 서쪽으로, 언제나 보헤미아에서 더욱 먼 곳으로. 

 

- 그녀의 그림은 잘 팔렸고, 그녀는 미국을 아주 좋아했다. 그러나 단지 껍질만을 좋아했다. 껍질 안에는 그녀에게 낯선 세계가 있었다. 땅 아래에는 그녀의 어떤 할아버지나 아저씨도 없었다. 그녀는 관 속에 갇혀 미국의 땅속으로 내려가는 것이 두려웠다. 

그래서 그녀는 시신을 화장하고 재를 뿌려 달라고 명시한 유언장을 작성했다. 테레자와 토마시는 무거움의 분위기 속에서 죽었다. 그녀는 가벼움의 분위기에서 죽고 싶었다. 그 가벼움은 공기보다도 가벼울 것이다. 파르메니데스에 따른다면 부정적인 것이 긍정적인 것으로 변모하는 것이다.  

 

- 그는 다른 누구도 아닌 그녀만을 생각했다. 그녀 아닌 다른 누구도 마리맡에 있는 것을 참지 못하겠다고 소리치고 싶었다. 그러나 말을 할 수 없는 것을 확인하고 경악했다. 그는 무한한 증오심에 찬 눈길로 마리클로드를 바라보며 그녀를 외면하기 위해 벽 쪽으로 돌아누우려고 했다. 그러나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그는 적어도 머리만이라도 움직여 보려고 했다. 그러나 머리조차 조금도 움직일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그녀를 보지 않기 위해 눈을 감았다.  


- 그러나 오십 대 남자는 누구라도 젊은 살덩어리를 위해 영혼까지도 팔죠. (우리 모두 다 알듯이!) 오로지 부인만이 그가 얼마나 괴로워했는지 알 수 있지요! 그것은 그에게 진정한 도덕적 고문이었어요! 프란츠의 본색은 정직하고 선했으니까요. 아시아의 외딴 구석까지 절망적이고 엉뚱한 여행을 했던 것을 달리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어요? 그는 거기에 죽음을 찾아갔던 거예요.

그렇다, 마리클로드는 이렇게 확신했다. 프란츠는 의도적으로 죽음을 추구했던 것이다. 죽기 전 고통에 빠져 있던 마지막 나날 동안 더 이상 거짓말할 필요가 없었던 그는 오직 그녀만을 보고자 했다. 그는 말은 할 수 없었지만 시선만으로도 그녀에게 고마움을 표시했다. 그의 눈은 마리클로드에게 용서해 달라고 했다. 그리고 그녀는 그를 용서했다. 

 

- 캄보디아에서 죽어 가는 사람들에게 남은 것은 무엇일까?

품에 노란 아기를 안은 미국 여배우의 커다란 사진 한 장. 

토마시에게 무엇이 남았을까?

비문(碑文) 하나. 그는 지상에서 하느님의 왕국을 원했다. 

베토벤에게 무엇이 남았을까? 우울한 목소리로 "Es muss sein!"이라고 말하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헝클어진 머리에 침울한 표정을 한 남자. 

프란츠에게는 무엇이 남았을까?

비문 하나. 오랜 방황 끝의 귀환.

그리고 그다음도 또 계속될 것이다. 잊히기 전에 우리는 키치로 변할 것이다. 키치란 존재와 망각 사이에 있는 환승역이다.

 

- 창세기 첫머리에 신은 인간을 창조하여 새와 물고기와 짐승을 다스리게 했다고 씌어 있다. 물론 창세기는 말[馬]이 아니라 인간이 쓴 것이다. 신이 정말로 인간이 다른 피조물 위에 군림하길 바랐는지는 결코 확실하지 않다. 인간이 암소와 말로부터 탈취한 권력을 신성화하기 위해 신을 발명했다고 하는 것이 더 개연성 있다. 그렇다. 염소를 죽일 권리. 그것은 가장 피비린내 나는 전쟁 와중에도 전 인류가 동지인 양 뜻을 같이 한 유일한 권리다.

이 권리가 당연하게 보이는 것은 우리가 서열의 정점에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이 바로 우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3자가 이 게임에 끼어들기만 한다면 끝장이다. 신이 "너는 다른 모든 별들의 피조물 위에 군림하거라."라고 말한 다른 행성에서 온 방문자가 있다면, 창세기의 자명함은 금세 의문시된다. 화성인에 의해 마차를 끌게 된 인간, 혹은 은하수에 사는 한 주민에 의해 꼬치구이로 구워지는 인간은 그때 가서야 평소 접시에서 잘라 먹었던 소갈비를 회상하며 송아지에게 사죄를 표할 것이다.

 

- 그녀는 목이 메어 말하기가 어려웠다. 이웃집 여자는 테레자의 눈물을 보고 화를 냈다. "맙소사, 설마 개 때문에 우는 건 아니겠지요." 심성 고운 그녀의 말은 악의가 아니라 테레자를 위로하기 위한 것이었다. 테레자도 이를 안다. 그녀가 카레닌을 좋아하듯 농부들도 그들의 토끼를 좋아해서, 그들이 동물과 함께 굶어 죽는 한이 있어도 결코 토끼는 한 마리도 죽이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 정도로 그녀는 이 마을에서 오랫동안 살았던 터였다. 하지만 이웃집 여자의 말이 적대적으로 들렸다. 그녀는 아무런 반박도 하지 않고 "나도 알아요."라고 말하고 서둘러 등을 돌리고 계속 자기 길을 갔다. 개에 대한 그녀의 사랑 때문에 외톨이가 되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바람피운 것보다 개에 대한 사랑을 더욱 조심스럽게 감춰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쓸쓸하게 웃었다. 그녀가 토마시를 속이고 바람을 피운다는 사실을 이웃집 여자가 안다면 그녀는 공범자의 표정으로 그녀의 등을 쾌활하게 두드릴 것이다!

 

- 테레자는 애정어린 눈길로 소들을 바라보았고 조충이 인간에 기생하듯 인류는 소에게 기생하며 산다는 생각을 했다. (이 생각은 이 년 전부터 억제할 수 없을 정도로 끈질기게 떠올랐다.) 인류는 거머리처럼 소 젖에 들러붙어 있다. 

 

- 이러한 정의를 단순한 농담으로 보고 너그럽게 웃어넘길 수도 있다. 그러나 테레자는 이를 심각하게 고민하며 미끄러운 내리막길로 접어들었다. 이런 생각은 위험하며 그녀를 인류로부터 소원하게 한다. 창세기에서 이미 신은 인간에게 동물 위에 군림할 권한을 주었으나, 그 권한이란 단지 빌려 준 것에 불과하다고 설명될 수도 있다. 인간은 이 행성의 주인이 아니라 단지 경영인에 불과하고 어느 날엔가 경영 결산을 해야만 할 것이다. 데카르트는 한술 더 떴다. 그는 인간을 '자연의 주인이자 소유자'로 만들었다. 그리고 다름 아닌 그가 동물에게도 영혼이 있다는 것을 부정했다는 사실에는 필경 심오한 물리적 일관성이 있다. 인간은 소유자이자 주인인 반면, 동물은 자동인형, 움직이는 기계, 즉 Machina Animata에 불과하다고 데카르트는 말한다. 동물이 신음 소리를 낸다면, 그것은 하소연이 아니라 작동 상태가 나쁜 장치의 삐걱거림에 불과한 것이다. 

 

- 그것은 뒤이어 일어난 모든 일의 예고였다. 소련이 침공한 후 첫 두 해 동안은 공포를 거론할 정도는 아니었다. 거의 나라 전체가 점령 체제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소련은 체코인들 중에서 새로운 인물을 찾아 권좌에 앉혀야만 했다. 그러나 공산주의에 대한 신앙과 소련에 대한 사랑이 죽은 거나 마찬가지였던 때에 어디에서 새로운 인물을 찾을 것인가? 그들은 살아 있는 생명에 원한을 품고 복수의 정열을 불태우는 자들 중에서 찾아야만 했다. 그들의 공격성을 강화하고 관리하며 항상 깨어 있는 상태로 유지해야 했다. 우선 이 공격성을 일시적 목표물로 몰아가야 했다. 이 목표물이 바로 동물이었다. 

 

- 그녀는 대충 이런 생각을 해 보았다. 자기와 비슷한 대상에게 잘 대해 준다는 것은 아무런 미덕도 아니다. 테레자는 다른 마을 사람들에게 정중하게 대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거기에서 살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심지어 토마시에 대해서는 어쩔 수 없이 사랑받는 여인으로 처신해야만 했다. 왜냐하면 그녀는 토마시를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우리와 타인의 관계가 어디까지 우리 감정, 우리 사랑이나 비-사랑, 우리 호의 혹은 증오의 결과인지 또는 어디까지가 개인 간 역학 관계에 의해 사전에 규정 되었는지 정확하게 가늠할 수 없을 것이다. 

 

- 인간의 참된 선의는 아무런 힘도 지니지 않은 사람들에 대해서만 순수하고 자유롭게 베풀어질 수 있다. 인류의 진정한 도덕적 실험, 가장 근본적 실험, (너무 심오한 차원에 자리 잡고 있어서 우리의 시선에서 벗어나는) 그것은 우리에게 운명을 통째로 내맡긴 대상과의 관계에 있다. 동물들이다. 바로 이 부분에서 인간의 근본적 실패가 발생하며, 이 실패는 너무도 근본적이라 다른 모든 실패도 이로부터 비롯된다.

 

- 그녀는 자기 말이 틀렸다는 것을 알았고(개는 자고 있지 않았다.) 자기가 남의 아픈 곳을 찌르고 싶어 하고 그러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통달한 가장 천박한 여자처럼 행동하고 있음도 알았다. 

 

- 두 사람은 각각 한쪽에서 개를 내려다보았다. 이 공통된 행동은 화해의 몸짓이 아니었다. 정반대였다. 각자 홀로 있는 셈이었다. 테레자가 자신의 개와 함께 있고, 토마시도 자기 개와 함께 있었던 것이다. 

나는 이들이 마지막 순간까지 이렇게 각각 떨어져서 혼자 있지 않을까 무척 두려웠다. 

(리뷰자 주 : 지속적으로 등장하는 이 '나'는 밀란 쿤데라일까? 혹은 그의 자아를 일부 담은 또다른 자전적 캐릭터일까?)

 

- 그들은 카레닌에게 한 번도 단 것을 주지 않았는데, 며칠 전 그녀는 초콜릿을 샀다. 그녀는 은박지를 벗겨 작은 조각으로 잘라 카레닌 주위에 모아 두었다. 그녀는 거기에 물그릇도 곁들여 주면서 카레닌이 집에 홀로 남아 있는 동안 부족한 것이 없도록 해 주었다. 그러나 그녀에게 던졌던 시선 때문에 카레닌은 피곤해 보였다. 주위에 초콜릿 조각이 있는데도 그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리뷰자 주 : 동물들에게 초콜릿은... 테레자는 카레닌을 위한 안락사 무대를 만들어 주었던 것이다.) 

 

- 토마시는 정맥에 바늘을 찌르고 피스톤을 눌렀다. 가벼운 경련이 카레닌의 다리를 스치고 지나갔고, 그의 호흡이 가빠지더니 뚝 멈췄다. 테레자는 침대 발치에 무릎을 꿇고 얼굴의 그의 머리에 꼭 밀착했다.

(리뷰자 주 : 카레닌은 암컷이었다. '그'라고 번역되었다면 이 문장에서 카레닌은 비인격체로 명명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 테레자는 자기 꿈을 떠올렸다. 카레닌은 작은 크루아상 두 개와 벌 한 마리를 낳았다. 이 문장이 돌연 비문처럼 보였다. 그녀는 사과나무 사이에 이런 비문이 새겨진 묘비를 상상했다. '여기 카레닌이 쉬고 있다. 그는 작은 크루아상 두 개와 벌 한 마리를 낳았다.'

정원의 어둠이 짙어 갔다. 밤도, 낮도 아니었고, 하늘에는 죽은 자의 방에 켜진 채 잊힌 램프 같은 창백한 달이 떠 있었다. 

두 사람의 신발에는 흙이 가득히 찼고, 그들은 갈퀴, 곡괭이, 물뿌리개 같은 연장이 보관된 광에 삽과 괭이를 가져다 두었다. 

 

- 두 사람은 나란히 앉았고, 테레자는 토마시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었다. 최초의 공포는 사라져 슬픔으로 변했다. 

공포는 하나의 충격, 완벽한 맹목의 순간이다. 공포에는 모든 아름다움의 흔적이 결핍되어 있다. 오로지 우리가 기대하는 미지의 사건이 내뿜는 광폭한 빛만 보일 뿐이다. 이와는 반대로 슬픔이란 우리가 무엇인가를 안다는 것을 상정한다. 토마시와 테레자는 그들을 기다리던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공포의 광채는 휘장에 가리고, 우리는 전보다 세상을 훨씬 아름답게 만드는 푸르스름하고 부드러운 빛 속에서 세상을 발견한다.

 

- 그녀가 편지를 읽었던 순간, 테레자는 토마시에게 사랑을 느끼지 않았고 오로지 그를 단 한 순간도 떠나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만을 했다. 공포는 다른 모든 감정, 다른 모든 감흥을 억눌러 버린다. 그의 품에 안겨 있는 지금 (비행기는 구름 속에 떠 있다.) 공포는 사라지고 그녀는 사랑을 느끼며 이것이 한계도 절제도 없는 사랑임을 알았다. 

 

- 방에는 소파, 작은 탁자, 그리고 의자가 있었다. 탁자 위에는 예전부터 그녀를 기다리던 램프가 켜져 있었다. 그리고 램프 위에는 커다른 두 눈이 장식된, 날개를 활짝 편 나비 한 마리가 앉아 있었다. 테레자는 자기가 목표를 달성했음을 알았다. 그녀는 소파에 누워 토끼에 얼굴을 비볐다.   
  

- 그녀는 목욕물을 받았다. 그녀는 뜨거운 물속에 누워 자신이 일생 동안 자신의 허약함을 빌미로 토마시를 이용해 먹었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에게는 힘 있는 자들 중에서 범인을 찾고 약한 사람들 속에서 무고한 희생자를 찾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지금 테레자는 자신들의 경우는 정반대라는 것을 깨달았다! 심지어 꿈조차 이 강한 남자의 약점을 찾아내 그를 뒷걸음질치게 만들려고 테레자의 고통을 과시한 것이다. 테레자의 약함은 그가 더 이상 강하지 않아 그녀 품에서 토끼로 변할 때까지 매번 그에게 타협을 강요했던 공격적인 약함이었다. 그녀는 쉴새없이 그 꿈에 대해 생각했다.

 

- "임무라니, 테레자, 그건 다 헛소리야. 내게 임무란 없어. 누구에게도 임무란 없어. 임무도 없고 자유롭다는 것을 깨닫고 나니 얼마나 홀가분한데."

그의 목소리로 미뤄 보아 그 말의 진실성을 의심할 수는 없었다. 그녀는 그날 오후의 장면을 다시 떠올렸다. 그는 트럭을 고치고 있었고, 그녀는 그가 늙어 보인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그녀가 도달하고 싶은 곳에 이르렀다. 그녀는 항상 그가 늙기를 바랐다. 그녀는 다시 한번 어린 시절 그녀가 쓰던 방에서 뺨에 대고 비비던 토끼에 대해 생각했다. 

토끼로 변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할까? 그가 힘을 잃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제부터 두 사람 모두에게 더 이상 힘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 안개 속을 헤치고 두 사람을 싣고 갔던 비행기 속에서처럼 그녀는 지금 그때와 똑같은 이상한 행복, 이상한 슬픔을 느꼈다. 이 슬픔은 우리가 종착역에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 행복은 우리가 함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슬픔은 형식이었고, 행복이 내용이었다. 행복은 슬픔의 공간을 채웠다.  

    

- 그런 뒤 네 사람 모두 위층으로 올라와 방으로 들어갔다. 

토마시가 문을 열고 불을 켰다. 그녀는 나란히 붙어 있는 침대 두 개와, 머리맡 램프가 달린 탁자를 보았다. 불빛에 놀란 커다란 나방이 전등갓에서 빠져나와 방 안을 맴돌기 시작했다. 아래에서 희미하게 피아노와 바이올린 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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