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 작자미상 / 유성환
출판 : 휴머니스트
출간 : 2024.05.20
평생 읽고 접할 수 있는 글의 양은 얼마나 될까?
무의식 중에 흘려 넘기는 정보들까지 합한다 해도 생각보다 크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인간이 깨닫지 못할 뿐 세상의 진리는 만물 어디에나 담겨있다고 하지만, 내가 결코 읽지 못할 수많은 이야기들이 잠자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면 마음이 조금 괴로워지고 만다.
(그렇다고 열성을 다해 읽어나가는 것도 아니니 나는 그저 나를 괴롭히는 것을 즐기고 있을 뿐이다)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을 무용한 것들이 못 견디게 좋을 때.
그럴 때 나는 삶이 아름다울 수 있다는 희망을 품게 된다. 개개인의 삶 또한 그런 이야기들 중 하나일 테니까.
(동시에 김보영의 천재적인 표현을 떠올리게 된다. 세상의 모든 이야기는 0-1을 표기한 한 직선에 찍은 점으로 기록할 수 있다는. 무한히 이어지는 숫자들을 글자로 치환한다면 기록하지 못할 이야기가 없다는.)
<시누헤 이야기>는 한국에 처음으로 소개되는 건 아니지만, '완역본'이라 칭할 수 있는 최초의 한국어판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이집트 문헌학을 전공한 여가의 해박한 지식과 상세한 해설이 빛나는 판본으로, 실제 원문 일부가 상형문자로 수록되어 있어 미학적으로도 아름답다.
'시누헤'에게 '모세'를 겹쳐 보는 것은 지나친 비약 -혹은 이집트적 시각- 일 수 있겠다. 기승전결만을 압축하면 수많은 서로 다른 서사 문학들이 같은 이야기가 되어버리곤 하는데 -그것을 원형(archetype)이라고 볼 수도 있겠으나- 어디까지를 같은 이야기의 다른 본으로 볼 수 있을지에 관해서는 다양한 견해가 존재하니.
<시누헤 이야기>는 <길가메쉬 서사시> 같은 영웅의 이야기는 아니나, 그렇다고 영웅적 면모가 드러나지 않는 것도 아니다. 가볍게 본다면 자신의 뿌리를 떠나왔던 이의 귀환이요, 무겁게 본다면 한 인물의 일생이다.
일독은 각주와 해설까지 꼼꼼하게 읽고, 이후 다시 원문만 읽어나가는 방식을 추천하고 싶다.
좋았다.
옮긴이 서문
- 내가 고대 이집트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이집트 상형문자의 아름다움 때문이었다. 사람과 동물, 새와 물고기, 각종 곤충과 식물, 처음 봐서는 도대체 무엇을 묘사한 것인지 알 수 없는 수많은 사물이 온전한 그림의 형태로 문자 역할을 한다는 것이 경이로우면서도 그 원리가 무엇인지 궁금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이집트 상형문자에 어느 정도 익숙해지고 고대 이집트어 문법을 공부하는 단계로 접어들자 또다시 놀랐다. 문자가 발명되기 전부터 수천 년에 걸쳐 사용되다가 약 1,400년 전에 사멸한 고대 이집트어의 문법 체계가 현대의 어떤 언어와 비교해도 뒤지지 않을 만큼 정교하고 복잡했기 때문이었다. 이때부터 문자에 대한 호기심을 넘어 언어 자체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 학부에서 영어영문학을 전공할 때부터 언어학에 관심이 많았던 나는 자연스럽게 이집트학 중에서도 문헌학을 전공했다. 고대 이집트어가 수천 년의 시간을 거치면서 변화에 변화를 거듭한 문법 규칙과 시간이 지나면서 사라져 버렸거나 새롭게 편입생성된 어휘를 배우고 익히는 과정이 여러 해에 걸쳐 반복되었다. 당시 무엇보다 어려웠던 것은 고대 이집트 서기관이 문서를 작성하거나 필사할 때 사용했던 '신관문자(hieratic)'와 '민용문자(用文, demotic)'를 익히는 것이었다. 파피루스나 편평한 돌조각에 쓰인 텍스트 중 절대다수는 '상형문자'의 흘림체 또는 필기체라 할 수 있는 신관문자나 이보다 흘려 쓰는 정도가 훨씬 심한 민용문자로 작성되었기 때문에, 원전을 제대로 해독하려면 이들 문자를 반드시 공부해야 했다.
- 높은 수준의 역사서와 인문학 관련 교양서를 지속해서 출간하던 휴머니스트 출판사에 대해 나는 평소에도 좋은 인상을 받고 있었다. 특히 김산해 선생의 <최초의 신화 길가메쉬 서사시>의 개정판이 '국내 최초 수메르어·악카드어 원전 통합 번역'이라는 문구와 함께 출간된 것은 매우 고무적이었다. 내가 생각하기에, 고대 메소포타미아에 '최초의 신화'라는 수식어가 무색하지 않은 <길가메쉬 서사시>가 있었다면, 고대 이집트에는 '최초의 소설'이라 할 수 있는 <시누헤 이야기>가 있었다고 단언할 수 있다. <길가메쉬 서사시>는 여러 판본과 서로 다른 장르의 문헌들이 기원전 13세기경 바빌로니아의 신관이었던 씬-리키-운니니(Sinlege-unninni)에 의해 기승전결의 구조를 갖춘 한 편의 서사시로 편찬된 것이다. <시누헤 이야기>는 이와 마찬가지로 다양한 분야의 텍스트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신의 섭리에 지배받는 인간의 운명과 분열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끊임없이 고뇌하는 한 사람의 육체적·정신적 방황을 망명과 귀환의 서사로 승화시킬 수 있는 문학적 재능을 지녔던 이름 모를 서기관에 의해 창작된 고대 이집트 문학의 최고 걸작이다.
- <시누헤 이야기>가 창작된 시기는 중왕국 시대 제12왕조의 두 번째 파라오였던 센와세레트 1세 치세 말엽으로 추정된다. 지금으로부터 약 4,000년 전 작성된 문학작품이다 보니 번역 과정에서 현대 한국어의 어휘만으로는 그 의미를 정확하게 전달할 수 없는 개념이나 상황과 마주치는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부득이하게 지금은 사용되지 않는 단어나 표현을 번역문의 중간중간에 사용해야 했다. 이런 의고체(擬古體, archaism)가 어렵고 생소하게 느껴질 독자에게 이 자리를 빌려 미리 양해를 구한다. 아울러 원전 번역의 모든 실수와 오류는 온전히 나의 몫임을 밝힌다.
- 바쁘신 와중에도 흔쾌히 추천의 글을 써주신 한국고대근동학회 주원준 회장님과 서울대학교 신형철 교수님께 깊이 감사드린다. 끝으로, 책이 나오기까지 수고를 아끼지 않은 편집자를 비롯한 출판사의 모든 직원께 다시 한번 감사드린다.
2024년 4월 유성환
- "시누헤가 말한다"
- 귀족이자 고관, 아시아인의 땅에 자리한 폐하의 영지담당관, 폐하께서 총애하시는 왕의 진실한 지인이자 종자 시누헤가 말한다.
"나는 그의 주인을 따르는 종자, 귀족이자 높이 칭송받는 이, 케넨수트에 거하시는 센와세레트 폐하의 대왕비이시며 카네페루에 거하시는 아멘엠하트의 왕녀이자 공경받으시는 여주이신 네페루 마마의 왕실 사저의 궁인이다."
- 역주 : 고대 이집트어로 '자네헤트'로 발음되는 '시누헤'는 '돌무화과나무의 아들'이라는 뜻이다. 돌무화과나무(sycamore)는 뽕나무과에 속하는 열대성 교목으로, 이집트에 자생하는 나무 중에서는 드물게 우람하게 자라며 줄기의 무성한 가지가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주는 나무다. 이집트 지역에서 사철 푸르게 자라는 돌무화과나무는 관의 재료로도 사용되었으며, 종교적으로는 성애와 다산, 풍요와 부활을 관장하는 여신 하토르(Hathor)의 신수(神樹)다.
- 역주 : 네페루(Neferu) 공주는 아멘엠하트 1세의 딸이자 센와세레트 1세의 대왕비이며 다음 왕인 아멘엠하트 2세의 어머니다. 케넴수트(Khnemsut)와 카네페루(Qancferu)는 오늘날의 엘리시트(el-Lisht) 근처에 조성된 센와세레트 1세와 아멘엠하트 1세의 피라미드 단지를 말한다.
- "신께서 그의 아케트로 오르시다." (R6)
- (R5~11) 치세 30년 범람기 셋째 달 7일 신께서 그의 아케트로 오르시다. 상·하이집트의 왕 세헤텝이브레 폐하께서 하늘에 오르시어 태양 원반과 하나가 되시고 신의 몸은 그 창조주와 결합하셨다. 도성은 침묵에 잠겼고 심장은 비탄에 빠졌으며 두 대문은 잠겼으니, 궁인들은 머리를 무릎에 묻었고 귀족들은 애도했다.
- 역주 : '아케트(akhet)'는 태양(신)이 동쪽 지평선에 뜨기 직전이나 서쪽 지평선으로 진 직후 지평선 아래에서 변신(transformation)의 과정을 거치는 공간이다. 아케트에서 진행되는 신비로운 변신은 부활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왕의 분묘에서는 왕의 석관이 안치된 묘실(墓室)이 명계(冥界)에 해당한다면, 현실(玄室) 앞에 만든 전실(前室)이 바로 아케트에 해당한다. 현실에서 부활한 왕의 혼은 아케트에서 자신이 원하는 존재로 변신해 영생을 누린다. 이 작품에서 아케트는 중의적으로 사용되어 변신의 공간과 전실을 모두 가리키는 것으로 판단된다. 한편, 마치 일지(journal)와 같이 날짜 다음의 첫 번째 사건에는 '~함' 혹은 '~하다'로 번역될 수 있는 서사부정사(narrative infinitive)가 사용되었다. 서사부정사는 대개 일지와 같은 종류의 실용에서 자주 발견되는데, <시누헤 이야기> 같은 서사문학 작품에서 새로운 사건이 시작되는 서두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 역주 : "두 대문"은 왕궁의 정문을 의미한다. 왕궁의 정문이 잠겼다는 것은 왕의 알현실로 이어지는 통로가 닫혔다는 의미이며, 왕의 서거라는 비정상적인 상황을 상징적으로 그리고 있다. 두 문의 상징성은 이후 B188~189 행에서 다시 등장하는데, 여기서는 시누헤가 귀환을 실감하는 장소로 언급된다. 한편, 작품 속 R9행에서 잠긴 대문은 이후 시누헤가 오랜 망명 생활을 마치고 수도로 돌아올 때 다시 열린다.
- 역주 : "머리를 무릎에 묻"는 행위는 이집트인이 애도할 때 취하던 전형적인 자세다.
- "매는 자신의 종자들만 거느리고 날아올랐다." (R21~22)
- (R11~22) 한편 폐하께서 체메흐 땅에 군사를 보내시고 폐하의 장자를 그 우두머리로 삼으시니 (그가 바로) 젊은 신 센와세레트이시다. 그가 이방의 나라들을 정벌하시고 유목민을 치러 내려오신 후 이제 체헤누의 포로와 온갖 종류의 짐승을 끝없이 데리고 귀환하실 때 궁의 조신들이 왕태자께 알현실에서 사건이 발생했음을 알리고자 서쪽으로 (사람을) 보냈다. 전령들이 저물녘에 그에게 이르러 그를 길 위에서 찾아냈다. 그는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았으며 매는 원정대에게는 알리지 않은 채 자신의 종자들만 거느리고 날아올랐다.
- 역주 : "젊은 신(junior god)"은 죽어서 '위대한 신(senior god)'이 된 아멘엠하트 1세와 대조를 이루는 호칭이다. '위대한 신'은 서거한 왕에게 쓰는 호칭이지만, 아멘엠하트 1세와 센와세레트 1세의 공동통치 시기를 배경으로 하는 <시누헤 이야기>에서는 '위대한 신'과 '젊은 신'이 왕과 왕태자를 각각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되었다.
- 역주 : "체메흐(Tjemeh)"는 파이윰(Fayum) 호수에서 남쪽으로 누비아에 이르는 서부 리비아의 사막지대를, "체헤누(Tjehnu)"는 파이읍 호수에서 북쪽으로 지중해에 이르는 북부 리비아의 사막지대를 각각 가리킨다. 뒤이은 R29행(B6행)에 묘사된 시누헤의 도주 경로를 고려할 때, 센와세레트가 왕태자의 자격으로 지휘한 이 원정은 삼각주 지역 서쪽 사막에서 진행된 것으로 추정된다.
- 역주 : "매"는 왕권의 적법한 계승 문제를 다룬 <오시리스 신화(Osirian Cycle)>에서 이상적인 군주 오시리스(Osiris)의 적법한 후계자이자 왕가의 수호신인 호루스(Horus)의 화신으로 여겨졌다. 호루스는 송골매 또는 매의 머리를 한 남신으로 표상되며, 따라서 R21행에 언급된 매는 호루스의 화신인 센와세레트 1세를 뜻한다. 왕위를 계승하기 위해 황급히 도성으로 향한 왕태자의 행보를 매의 비상으로 묘사한 원작자의 절묘한 문학적 감각이 돋보인다.
- ... 그와 함께 있던 검은 땅의 사람들이 나를 보증했기 때문이었다.
(B34~43) 그가 나에게 (물어) 말하기를, "무슨 연유로 여기까지 왔소? 그것이 무엇이오? 본국에 무언가가 일어난 것이오?" 하니 (내가 그에게 대답하기를), "상·하이집트의 왕 세헤텝이브레 폐하께서 아케트로 돌아가셨습니다. 그로 인해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하고는 모호하게 말하기를, "체메흐 땅의 원정에서 돌아오는 길에 (그 사실이) 제게 보고되었습니다. 제 마음은 갈피를 잡지 못했고 제 심장-제 몸속에 있는 것이 그것이 아니었기에 저를 도주의 길로 내몰았습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저를 입에 담지 않았으며 제 얼굴에 침을 뱉지 않았습니다. 저는 책망하는 언사를 듣지 않았으며 그 누구도 제 이름을 전령의 입에서 듣지 못했습니다.
- 역주 : "그와 함께 있던 검은 땅의 사람들"이 이집트 본토에서 파견된 전령일 가능성도 있으나, 그보다는 이집트에서 레체누로 망명한 사람들로 추정된다. 제1중간기(기원전 2160~기원전 2055년)에 내전을 피해 레체누로 망명한 사람들이거나 아멘엠하트 1세의 즉위 당시 전 왕조인 제11왕조에 끝까지 충성하던 사람들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들의 보증으로 시누헤는 암무넨쉬의 신임을 얻었으나, 흥미롭게도 시누헤가 이들과 계속해서 교류했다는 정황은 작품 속에서 더는 발견되지 않는다.
- 역주 : 여기서 시누헤는 도주를 결정할 당시 고대 이집트인이 기억과 판단, 의도 등을 담당하는 기관이라고 생각한 (정상적인) 심장이 아닌 다른 무언가가 자기 몸 안에 들어있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도주를 결정했을 때 자신은 정상적인 판단력을 상실한 상태, 요컨대 일종의 심신미약 상태였다는 의미다.
아멘엠하트 1세는 암살당했나?
- 고대 서아시아의 전제군주와 마찬가지로 고대 이집트에서 파라오의 지위와 권력은 한마디로 절대적이었다. 파라오는 국가의 최고 통치자로서 행정과 사법을 담당했으며, 최고위 신관으로서 전국의 신전에서 거행되는 모든 의례를 주관했다. 그러나 파라오에게는 고대 서아시아의 전제군주와 크게 다른 점이 하나 있는데, 바로 신성한 왕권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이다. 파라오는 단순히 한 나라의 최고 통치자가 아니라 창조주인 태양신을 대신해 인간 세계에 신적 질서를 구현하고 유지하는 존재였으며, 인간을 대표해 신과 홀로 소통할 수 있는 지상에 현현한 신이었다. 따라서 왕을 시해하는 것은 신을 시해하는 것이었으며, 창조주가 세운 우주적 질서를 파괴하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범죄였다. 그러나 문헌 증거를 통해 이집트에서 왕을 시해하려는 시도가 실제로 여러 차례 일어났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왕을 시해하려는 음모를 꾸민 사람은 대부분 왕비나 후궁이었다. 이들은 왕을 제거한 후 자기 아들이 왕위를 계승하도록 음모를 꾸몄으며, 궁정의 유력한 인사나 왕의 측근 관리를 음모에 끌어들이기도 했다.
- 왕의 시해 음모와 관련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고왕국 시대 제6왕조 페피 1세(Pepy I, 기원전 2321~기원전 2187년) 치세에 작성된 기록에서 발견된다. 당시 왕의 측근이었던 궁정 관리 웨니(Weni)는 아비도스(Abydos)에 자리한 자신의 분묘에 새겨진 자전적 기록에서 왕비가 연루된 음모에 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왕의 사저에서 정비, 거룩한 홀을 쥐신 이에 대한 심문이 비밀리에 이뤄졌다. 폐하께서 (이 사건을) 심리하도록 나를 홀로 내려보내시니 나를 제외하고 거기에는 (다른) 어떤 추밀사(樞密使)-총리대신도 (다른) 어떤 관리도 없었는데, (이는) 내가 탁월했고 폐하의 마음에 내가 깊이 자리 잡았으며 폐하의 마음에 내가 흡족했기 때문이다. (비록) 내 관직이 왕실 소작인 담당관에 불과했으나 한 명의 고관-네켄(히에라콘폴리스)의 대변인과 함께 홀로 문서를 작성한 사람은 바로 나였다. 폐하께서 내게 심문하시게 한 일을 제외하면 이전에 나와 같은 이가 왕의 사저의 비밀을 심리한 전례는 없었는데, (이는) 폐하의 마음에 (다른) 모든 관리, (다른) 모든 궁인, (다른) 모든 일꾼보다 내가 (더) 탁월했기 때문이다.
- <웨니의 자전적 기록>, Urk. I, 100.13~101.7
- 여기서 웨니는 음모에 관해서는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았지만, 사안의 중대함으로 볼 때 왕비가 연루된 왕의 시해 음모였을 가능성이 높다.
- 신왕국 시대에도 왕의 시해 음모와 관련된 기록이 풍부하게 전해진다. 제20왕조 람세스 4세(Ramesses IV, 기원전 1153~기원전 1147년) 치세에 작성된 심문 및 재판 기록에 따르면, 왕녀 중 일부가 선왕 람세스 3세(Ramesses III, 기원전 1184~기원전 1153년)를 시해한 후 적법한 후계자인 람세스 4세 대신 정비의 다른 왕자 중 한 명인 펜타웨레트(Pentaweret)를 왕으로 옹립하려는 음모를 꾸미고 이를 실행에 옮겼다. 그러나 람세스 3세는 바로 사망하지 않았고, 음모에 가담한 사람은 모두 체포되어 심문과 재판을 받았다. 이 시해 음모에는 알현실 담당관, 시종, 이재국 관리, 고위 장교 등 상당수의 고위 관리가 연루되었으며, 일단 왕궁 안에서 시해한 직후 반란군이 왕궁 밖에서 군사 쿠데타를 일으킨다는 계획까지 수립되어 있었다. 아울러 시해 음모에 가담한 주술사는 왕실 도서관에서 훔친 주술 파피루스에 따라 흑마술에 사용될 신상을 밀랍으로 만들기도 했다. 체포된 국사범들에게는 가혹한 고문이 행해졌으며 왕족에게는 자살형, 다른 범인들에게는 사형이 선고되었다. 죄가 가벼운 범인들은 코와 귀가 잘리는 형벌을 받았으며, 음모를 알면서도 당국에 고발하지 않는 사람들은 그 배우자에게까지 불고지죄가 적용되었다.
- 불고지죄와 관련해 후기왕조 시대(기원전 664~기원전 332년)에 창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데모틱(Demotic)어 문학작품 <앙크셰숑키의 교훈서(Instruction of Ankhsheshonqy)>에서도 재미있는 일화가 발견된다. 이 교훈서의 도입부에는 저자인 앙크셰숑키와 관련한 일화가 소개되는데, 여기에서도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파라오를 시해하려는 음모가 등장한다. 한 궁인이 근위대, 장군, 고위 관리가 연루된 시해 음모가 있음을 왕에게 알린다. 왕은 다음 날 음모에 연루된 사람들을 모두 화형에 처한다. 그리고 지금까지 자신이 믿어왔던 앙크셰숑키를 불고지죄로 투옥한다. 얼마 후 파라오는 다른 사람은 모두 풀어주지만 앙크셰숑키만은 풀어주지 않는다. 낙담한 앙크셰숑키는 왕의 허락을 받아 감옥에서 아들을 위한 교훈서를 작성한다. <앙크셰숑키의 교훈서>는 왕의 시해 음모 모티프를 교훈서가 쓰인 배경으로 사용했다. 물론 여기서 언급되는 시해 음모는 독자의 주의를 끌려고 마련된 문학적 장치일 뿐이다.
- 그렇다면 <시누헤 이야기>에 언급된 왕의 급작스러운 죽음은 어떻게 봐야 할까? 작품 속에서 왕의 죽음은 아무런 배경 설명도 없이 간략하게만 언급된다.
신께서 그의 아케트로 오르시다.
상·하이집트의 왕 세헤텝이브레 폐하께서 하늘에 오르시어 태양원반과 하나가 되시고
신의 몸은 그 창조주와 결합하셨다.
- <시누헤 이야기>, R6~8
- 왕이 예기치 않게 죽었다는 사실은 원정 중이던 왕태자 센와세레트 1세에게 왕실 전령이 파견되는 대목에서 확인된다. 이집트에서는 왕의 서거를 앞둔 시점에서 왕태자가 원정을 위해 왕궁을 떠나는 일은 있을 수 없다.
- <오시리스 신화>에 따르면 호루스는 세트(Seth)에게 살해당한 선왕 오시리스에 대한 장례를 치른 후 적법한 왕이 된다. 이집트에서는 왕의 장례를 치르는 자가 적법한 후계자가 될 수 있었다. 센와세레트 1세로서는 만일 제때 귀국하지 못한다면 다른 왕자가 왕위에 오를 수도 있는 급박한 상황에 놓인 것이다. R21행에서 센와세레트 1세가 말 그대로 날아오른 것("매는 날아올랐다.")은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아멘엠하트 1세의 암살과 관련해 이런 정황 증거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시누헤 이야기>와 거의 같은 시기에 창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아멘엠하트 1세의 교훈서(Instruction of Amenemhat1)>에서는 암살당한 왕이 유령이 되어 아들 센와세레트 1세의 꿈에 나타나 훌륭한 왕이 되는 데 필요한 조언을 한다. 꿈에 나타난 선왕의 유령은 자신이 암살당했음을 분명히 밝힌다.
저녁을 물린 뒤라 밤이 되었다. 나는 쾌락의 시간을 가졌고 노곤해져 침대에 누웠다. 내 심장이 잠을 따르기 시작했는데 (갑자기) 위호(衛護)의 병기가 되레) 나를 겨누므로 나는 사막의 뱀처럼 행동했다. (의식이) 돌아와 싸우려고 정신을 차려보니 그것이 근위병의 일격임을 알았다. 내가 병기를 재빠르게 잡았더라면 겁쟁이들이 혼비백산 뒷걸음치게 할 것이었으나 밤에 강한 자 없으며 홀로 싸울 수 없고 조력 없이 성공할 수도 없는 법이다. 보라, 네가 없을 때, 내가 너에게 (왕위를) 양도한다는 말을 궁인들이 아직 듣지 않았을 때, 내가 너와 함께 앉아 너의 일을 아직 도모하지 않았을 때 이런 일이 일어났으니, 이는 내가 그것에 방비하지 않았고 숙려하지도 않았으며 종들의 불충에 괘념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 <아멘엠하트 1세의 교훈서>, p. Millingen, I. 10~11.5
- (B156-164) 이 도주를 결정하신 신이 누구시든. 만족하시고 저를 고국으로 보내주소서. 어쩌면 제 심장이 온종일 머무는 곳으로 저를 보내주시겠지요. 저를 낳으신 땅에 제 시신이 묻히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그러니 저를 도와 좋은 일이 생기게 하시고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고난을 주시어 그의 마음이 고통스러운 자를 위해, 사막에서 살게 했던 자를 위해 끝이 좋을 수 있도록 부디 행하소서. 그리하여 이것이 오늘 그가 만족하셨다는 뜻이라면 멀리 있는 자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가 다다랐던 곳에서 그가 그를 데리고 나온 곳으로 팔을 구부리소서.
- 역주 : 고대 이집트인이 가장 두려워했던 것 중 하나가 외국에서 사망하는 것이었다. 시신이 미라로 제작되어 방부처리가 되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올바른 강례 절차를 거쳐 (B190~199형 참조) 아름답게 조성된 분묘에 묻히지 못하므로 내세에서 영생을 누릴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은 센의 세레트 1세가 시누헤에게 보낸 서신 중 일부인 B197~198행에서도 확인된다.
"그대의 죽음이 이방에서 있을 수는 없으며 아시아인이 그대를 매장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대의 무덤이 만들어질 것이니 그대가 양가죽 속에 놓여서는 안 될 것이다."
- 역주 : '좋은 일'은 이집트로 귀국해 적합한 장례 절차를 치르는 것을 뜻한다. 이와 같은 소망은 B161 행의 '고난을 주시어 그의 마음이 고통스러운 자를 위해, 사막에서 살게 했던 자를 위해 끝이 좋을 수 있도록 부디 행하소서'에서 다시 한번 반복된다.
- 역주 : "행렬"은 '장례 행렬(funerary procession)'을 말하며, 따라서 "행렬에 다가간 자"란 '죽음을 눈앞에 둔 자'를 의미한다. 한편, 형용사 술부 "기력이 쇠하다", 즉 "지치다"는 '망자'를 가리키는 고대 이집트어의 완곡어법인 '심장이 지친 이(weary-hearted)'를 연상시킨다.
- "그들이 저를 영겁회귀의 성읍으로 보내오니 저는 궁극의 여주를 따르겠습니다. 그리하면 여주께서 저를 위해 자기 자녀들에게 잘 말씀드릴 것이며 제게 영겁회귀의 축복을 내리실 것입니다."
- 역주 : "영겁회귀의 성읍"은 '공동묘지'를 뜻한다. "궁극의 여주"는 하토르와 세크메트에게 사용되던 호칭 중 하나다. 이것은 주인공의 이름이 의미하는 '돌무화과나무의 아들'과 조응한다. 아울러 '궁극의 여주'는 B166행 "그의 왕궁에 계신 그 땅의 여주", 다시 말해 이제는 대왕비가 된, R4행에 언급된 네페루 대왕비의 이미지와 겹친다. 마찬가지로 B167행에 언급된 "그 자녀들", 즉 왕실의 자녀들은 B172행에 언급된 "자기 자녀들", 즉 하토르의 자녀들과 조응한다. 또한 '궁극의 여주'는 모든 망자의 어머니인 하늘의 여신 '누트(Nut)'를 의미하기도 하는데, 이 맥락에서 '그녀의 아이들'은 망자가 다다르는 별들을 의미한다. 누트는 땅의 지배권을 상징하는 남신 '게브(Geb)'의 아내인데, 이들은 <오시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오시리스', '이시스(Isis)', '세트', '네프티스(Nephthys)'의 부모 신들이다. 이 선언을 통해 시누헤가 영생의 방법으로 '궁극의 여주'를 따르는 것을 택했음을 알 수 있다. 요컨대, 여기에서의 '궁극의 여주'는 하토르/세크메트 또는 누트를 말하는 동시에 대왕비를 뜻하도록 설정되었는데, 이런 문학적 장치는 시누헤의 대표적인 직함인 '종자'를 연상시킨다.
- 역주 : 직역하면 "그녀가 제 위로 영겁회귀를 덮을 것입니다."가 된다. 이것은 누트가 망자에게 부여하는 영겁회귀의 축복을 의미하는 동시에, 말 그대로 누트의 형상이 새겨진 관 뚜껑을 의미한다. 이집트인은 관 뚜껑에 누트를 새김으로써 누트가 망자를 포옹할 수 있게 했다. 이런 풍습은 태양신이 매일 밤 누트의 몸속으로 들어가 잉태시킨 후 매일 아침 어린이의 모습으로 부활한다는 믿음에서 나온 것이다. 따라서 누트의 포옹은 태양신과 동일시된 망자의 부활을 의미한다.
- (B173~177) 이제 상·하이집트의 왕, 진실한 목소리, 케페르카레 폐하께서 내가 처한 이 상황에 관해 들으시고 왕실의 선물과 함께 전갈을 보내시어 열방의 군주와 같이 이 종의 심장을 기쁘게 해 주셨다. (그리고) 그의 왕궁에 있는 왕실의 자녀들도 내가 그들의 소식을 듣게 해 주셨다.
- 역주 : 필사본 B에는 센와세레트 1세의 즉위명인 '케페르카레(Kheperkare)' 대신 센와세레트 3세의 즉위명인 '카카우레 (Khakaure)'가 적혀 있다. 아마도 필사 작업을 한 서기관이 두 왕명을 혼동한 것으로 보인다(번역문에서는 이를 바로잡았다). 이후 B180 행의 왕실 포고문에서도 탄생명이 '센와세레트'가 아니라 '아멘엠하트'로 잘못 표기되어 있는데, 이런 오류를 고려할 때 필사본 B는 센와세레트 3세와 아멘엠하트 3세의 공동통치 기간(기원전 1831년 전후)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시누헤의 기도에 왕이 바로 응답하는 서사구조는 왕이 B163행에 묘사된 "멀리 있는 자의 기도를 들으시는" 자애로운 신임을 시사한다. 한편, "진실한 목소리(true of voice)"는 일반적으로 죽은 이후 명계에서 받는 심판에서 의로움을 인정받은 망자의 호칭으로 사용되지만, 왕과 관련해 사용될 때는 신들의 법정에서 세트를 물리치고 적법한 왕위 계승자로 인정받은 <오시리스 신화>의 호루스를 가리킨다. 요컨대, '진실한 목소리'는 왕의 경우에는 왕위 계승을 둘러싼 법정 분쟁에서 승소한 호루스를, 망자의 경우에는 최후의 심판을 통과해 오시리스 왕국의 일원이 될 자격을 받은 의인을 각각 의미한다. 아울러 여기서 굳이 "열방의 군주와 같이"라는 표현이 사용된 이유는 당시 이집트를 비롯한 고대 서아시아의 군주들이 양국의 우호 증진을 위해 선물을 주고받는 것이 일종의 외교적 관례였기 때문이다. 여기서 시누헤는 자신이 마치 외국의 군주나 소국의 왕들처럼-파라오로부터 외교 선물을 받은 것을 자랑스럽게 밝히고 있다. "이 종"은 고대 이집트의 서간문에서 화자를 나타내는 관용적 표현이며, 이후 이어질 왕과 시누헤의 서신 교환을 예비한다.
- 역주 : 여기서 "왕실의 자녀들"은 B167행에 언급된 "그[대왕비] 자녀들"을 뜻한다. "왕실의 자녀들도 내가 그들의 소식을 듣게 해주셨다."를 통해 B166~167행의 "제가 그 자녀들의 전갈을 듣게 하소서."라고 했던 기도도 이뤄졌음을 알 수 있다. '왕실의 자녀들'에는 귀족의 자녀도 포함되었으며, 이들은 어렸을 때부터 왕궁에 설치된 교육기관에서 함께 교육받았다. 아울러 신왕국 시대에는 이집트의 지배 아래 있던 보호국에서 일종의 인질로 보내진 외국 왕의 자녀도 포함되었다. 이들 '왕실의 자녀들'은 이후 B269~279 행에서 이집트로 돌아온 시누헤를 위해 왕을 찬양하는 노래를 부른다.
- 역주 : B178행의 표제 다음부터 왕실 포고문 사본이 작품에 삽입되면서 서사의 흐름이 일시적으로 끊어지는데, 이야기의 흐름은 이후 시누헤의 회신이 들어가면서 한 번 더 끊어진다. 포고문은 다섯 개의 전통적인 왕명으로 시작되는데, 왕명이 적힌 B179행은 수평으로 쓰인 본문과 달리 수직 방향으로 쓰였다. 한편, 왕이 보낸 서신은 <시누헤 이야기>의 표면적인 서술 형식인 자전적 기록과도 잘 맞는다. 이집트 귀족은 왕에게서 받은 개인적인 서신이나 왕의 명령을 큰 영광으로 여겼으므로 이들을 분묘의 자전적 기록에 포함했다. 가장 대표적인 예로는 이집트 최남단 엘레판틴(Elephantine) 지역의 행정관으로서 누비아를 여러 차례 방문했던 고왕국 시대의 귀족 하르쿠프(Harkhuf)에게 당시 소년 왕이었던 제6왕조의 페피 2세(Pepy II, 기원전 2278~기원전 2184년)가 보낸 서신을 들 수 있다. 이 서신에서 왕은 태양신을 위한 무용수로 고용될 피그미를 이집트로 데려오는 하르쿠프에게 피그미가 수도에 무사히 도착할 때까지 주의를 게을리하지 말라고 거듭 당부한다.
- (B178~189) 소인에게 전달된, 그를 검은 땅으로 데려오는 것에 관한 왕실 포고문 사본
호루스 명: 탄생으로 살아계신 이, 두 여신 명: 탄생으로 살아계신 이, 즉위명: 케페르카레, 탄생명: 세와세레트 -영생하소서- 종자 시누헤에 대한 왕실 포고문. 보라, 왕의 이 포고문이 그대에게 전달되었으니 이는 케뎀에서 레체까지 나아가며 이방땅을 방황하므로 한 나라를 지나 다른 나라가 나온 것이 결국 그대의 심장의 조언에 따른 것임을 그대가 알게 하려 함이다.
- 역주 : 고대 이집트의 왕은 공식적으로 '호루스 명(Horus Name)', '두 여신 명(Two Ladies Name)', '황금 호루스 명(Golden Horus Name)', '상·하이집트의 왕(Dual King)'='즉위명(throne name)', '태양신의 아들(Son of the Sun)'=΄'탄생명(birth name)' 등 모두 다섯 개의 이름을 가졌다. <시누헤 이야기>의 왕실 포고문에는 세 번째 '황금 호루스 명'이 생략되어 있다. 아울러 앞서 언급한 것처럼, 원문의 탄생명에는 '센와세레트' 대신 '아멘엠하트'가 표기되었다(번역문에서는 이를 바로잡았다).
- 역주 : 왕실 포고문에서 수신자인 시누헤의 직함은 그가 이집트를 떠날 당시의 직책인 "종자"로만 되어 있다. B180 행의 간결한 직함은 이야기 도입부 R1~2행에 나열된 다양한 직함과 대조를 이룬다. '종자'는 궁인을 뜻하는 가장 일반적인 직함으로 추정된다. R2에서 시누헤가 이름 바로 앞에 배치한 직함도, <난파당한 선원>의 주인공인 이름 모를 선원의 직함도 '종자'였다.
- 역주 : 여기서 왕은 시누헤의 도주가 바로 시누헤 자신의 의지에 따른 일임을 분명히 밝힌다. 앞서 B147~149 행에서 시누헤는 "신께서 자신이 책망한 자, 이방으로 보내신 자에게 자비를 베푸셨음이 틀림없네."라고 언급하며, 이어 B156행에서는 "이 도주를 결정하신 신이 누구시든"이라고 기도를 시작하는 등 자신의 도주가 신의 결정이나 섭리에 의한 것이라고 여러 차례 주장해 왔으나 왕은 그 책임을 일관되게 시누헤에게 돌린다. 이런 맥락에서 왕의 서신이 무단 도주를 저지른 망명자에 대해 그의 최종 직함인 '종자'를 사용했다는 점 역시 역설적인 색채를 더한다.
- (B188~199) 검은 땅으로 귀환하라. 그리하면 그대가 자라난 도성을 볼 것이며, 두 대문이 솟은 땅에 입맞춤할 것이며, 궁인들과 회동하리라. 이제 그대도 나이가 들어 기력을 잃었으니 명예로운 노년에 이르렀을 때 매장의 날을 명심하라. 그대를 위해 백향목 기름이 발린 타예트의 매듭을 이용한 철야 의례가 거행될 것이며, 장례 당일에는 사람들이 행렬을 따를 것이니, 속관은 금으로 만들어질 것이요 (그) 머리는 청금석으로 제작될 것이며, 그대가 상여에 누울 때 천개(天蓋)가 덮일 것이요 황소가 그대(의 상여)를 끌 것이고, 곡꾼들이 그대의 (상여) 앞을 인도할 것이며 무덤의 입구에서는 장례의 춤이 거행될 것이니, 봉헌물 목록이 그대를 위해 낭송될 것이요 제단 입구에서 희생 제의가 있을 것이며, 그대 (분묘의) 기둥들은 석회암으로 만들어질 것이요, 왕가의 자녀들이 그들 중 있으리라. 그대의 죽음이 이방에서 있을 수는 없으며 아시아인이 그대를 매장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대의 무덤이 만들어질 것이니 그대가 양가죽 속에 놓여서는 안 될 것이다. 이제 방황하기에는 너무 늦었으니 노환을 염려해 귀환하라.
- 역주 : B191~196행에는 장례식 전날 밤의 철야에서 장례 행렬과 분묘 앞의 의례에 이르기까지 이집트 장례 풍속이 상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B191 행의 "(그대를 위해) ... 철야 의례가 거행될 것이며"를 직역하면, "(그대를 위해) 밤이 나뉘리라."가 되는데, 여기서 '자르다', '나누다', '구획하다'를 의미하는 동사가 사용된 이유는 장례식 전날에 망자를 위해 철야 의식을 진행할 때 밤을 12시간으로 나눠 각 시간에 대응하는 몸의 부분을 기름과 매듭으로 감싸는 의식이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한편, "타예트(Tayet)"는 길쌈을 관장하는 여신을 말하는데, 그녀의 이름은 아마포로 만든 '수의(壽衣)'를 의미한다. 향기로운 백향목 기름에 담근 아마포로 미라를 감싸는 것은 미라 방부처리과정의 마지막 단계였다.
- 역주 : "속관(inner coffin)"은 '미라 형상을 한 관(mummiform coffin)'을 의미한다. 중왕국 시대 제11왕조에 처음 도입된 이 속관은 하나 이상의 사각형 목관 안에 안치되었다. 한편, 고대 이집트인은 신들의 몸은 금, 뼈는 은, 모발과 체모는 청금석(lapis-lazuli)으로 만들어졌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발상은 <난파당한 선원> 64~66행에서도 발견된다. "그[섬을 다스리는 신]의 몸은 금박으로 둘러싸였으며 눈썹은 진품 청금석이었습니다." 따라서 B193행은 관의 재료를 설명하는 동시에, 사후 영생을 얻어 신적인 지위로 격상된 망자의 모습을 묘사한다고 할 수 있다.
- 역주 : 직역하면 "하늘이 그대 위에 있고 그대는 상여 위에 놓여있다."인데, 여기에 언급된 "하늘"을 "천개"로 번역했다. 분묘에 묘사된 '천개'를 보면 대개 '하늘'을 나타내는 성각문자 형태다. 여기서 '하늘-천개'의 이미지는 B172~173행의 "그녀가 제 위로 영겁회귀를 덮을 것입니다", 즉 "여주께서 제게 영겁회귀의 축복을 내리실 것입니다."와 조응한다. 한편, '상여'는 '이동식 사당'으로 번역될 수도 있는데, 시신을 분묘까지 운구하는 데 사용되었던 고대 이집트의 상여는 썰매 형태로 제작되었으며, 망자의 지인들이나 황소가 끌었다.
- 역주 : 고대 이집트에서는 장례식 때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애곡(哀哭)하는 전문곡꾼을 고용하는 풍습이 있었다. 이들 전문 곡꾼 중에는 여성도 있었는데, 신왕국 시대에 만들어진 귀족의 분묘에는 이들을 묘사한 장면이 관습적으로 그려졌다. 장례식에서 곡꾼이 날카로운 소리를 내는 풍습의 유래는 <오시리스 신화>에서 찾을 수 있다. 세트가 오시리스를 살해하고 시신을 유기하자 오시리스의 아내인 이시스와 그녀의 자매인 네프티스가 오시리스의 시신을 찾아내 수습하는데, 이때 두 여신은 솔개로 변신한 모습으로 등장한다. 고왕국 시대의 왕실 전용 장례문서인 <피라미드 텍스트(Pyramid Texts)> 532번 주문에는 이 장면이 다음과 같이 묘사되어 있다. "이시스가 왔도다. 네프티스가 왔도다-그들 중 하나는 서쪽에서부터 그들 중 (다른) 하나는 동쪽에서부터, 그들 중 하나는 날카롭게 우는 새로서 [네프티스가 왔도다] 그들 중 (다른) 하나는 솔개로서, 그들 중 하나는 날카롭게 우는 새로서 그들 중 (다른) 하나는 솔개로서 그들이 오시리스를 찾은 후에, 그의 동생 세트가 그를 네디트로 던진 후에." (PT 1255c~12566) 이 신화적 선례(mythological precedence)에 따라 이집트인은 두 여신이 오시리스를 애도하면서 냈던 날카로운 소리를 장례식에서 재현했다.
- 역주 : "장례의 춤"은 "활기 없는 자들의 춤"을 의역한 것이다. 여기서는 조상신으로 꾸민 무용수들이 분묘 앞에서 장례 행렬을 맞으며 추는 춤을 말한다.
- 역주 : 봉헌물이 올려지는 "제단"은 음식물과 각종 제기(祭器)가 새겨진 석판을 말한다. 제단은 일반적으로 망자의 혼이 분묘를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도록 만들어놓은 '가짜 문(false door)' 앞에 설치되었는데, 제단에 제물을 바치면 망자의 혼이 지하에 조성된 묘실(burial chamber)에서 수직 갱도를 타고 올라와 '가짜 문'을 통해 제의가 행해지는 곳으로 이동한 후 이곳에 마련된 자신의 조각상에 깃들어서 제물을 흠향(歆饗)한다고 여겨졌다.
- 역주 : 시누헤의 분묘가 왕실 공동묘지에 건립될 것이라는 내용이 이집트에서 귀족의 일원으로서 엄수될 장례의 대미를 장식한다. 석회암 기둥으로 장식된 귀족 분묘는 아래 B198행의 "양가죽"과 선명한 대조를 이룬다. "석회암"은 "흰 돌"을 의역한 것인데, 이집트에서 흔한 석재 중 하나로, 분묘를 건립하는데 자주 사용되었다.
- 역주 : 시신을 양가죽에 넣어 매장하는 아시아의 장례 풍습이 언급되었다. 이집트에서는 양모를 의복의 재료로 사용했으나 신전이나 분묘 같은 곳에서는 금기시되었는데,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다. 헤로도토스는 <역사>에서 양모와 관련된 금기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그들[이집트인들]은 다리까지 내려오는, 술 장식이 달린 아마포 키톤(kiton, 소매가 짧고 무릎까지 오는 윗옷을 입는데, 그들은 그것을 칼라시리스(kalasiris)라고 부른다. 그리고 그 위에 흰 모직 외투를 입는다. 그러나 신전 안으로 양모를 갖고 들어가면 안 되고, 사후에 양모 제품과 함께 매장되어서도 안 된다." (<역사>, II. 81) 요컨대 이집트의 기준에서는 아시아인의 장례 풍습이 완전하지 않고 영속적이지 못하며 정결하지 않은 금기에 해당한다.
- <사자의 서> 삽화에 묘사된 장례 행렬
황소와 망자의 친인척, 지인이 상여를 끄는 장례 행렬이 신왕국 시대 제19왕조(기원전 1295~기원전 1186년) 때 활약했던 서기관 아니(Ani)가 소장했던 <사자의 서(Book of the Dead)>의 삽화에 묘사되어 있다. 아니가 소장했던 <사자의 서>는 현재 영국박물관 (British Museum)이 보관하고 있다.
- 장례식 때 분묘 앞에서 '장례의 춤'을 추는 '무우 무용수들(Muu-dancers)'이 중왕국 시대 제12왕조의 귀족 인테피케르(Intefiqer)와 그의 아내 세네트(Senet)의 분묘(TT60) 벽화에 묘사되어 있다. '무우'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학계에서는 고대 이집트어의 '물'에서 파생된 용어로 추정하는데, 이때 '물'은 고대 이집트의 창세신화에서 태초부터 스스로 존재했던 '태초의 대양(Primeval Ocean)'을 의미한다. 원문에 언급된 "활기 없는 자들" 역시 아무런 움직임 없이 관성적으로 존재했던 태초의 대양이 신격화된 '눈(Nun)' 또는 '누(Nu)'와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 "이 포고문에 대한 회신 사본. 궁인 시누헤" (B204)
- (B199~204) 이 포고문이 나에게 전해졌을 때 나는 내 부족 사이에 서 있었다. 그것이 나에게 낭독되었을 때 나는 배를 깔고 엎드렸으며 몸을 땅에 댔다. 나는 그것을 내 가슴 위에 펼친 채 내 진영 주위를 뛰며 외치기를, "그의 마음이 낯선 이방으로 벗어난 종에게 어떻게 이 같은 일이 이루어졌는가! 저를 죽음에서 구한 결정은 마땅히 공명한 것이니 이는 폐하의 카께서 제 육신의 끝을 본국에서 있게 해 주실 것이다."라고 했다.
- 시누헤의 회신(또는 보고서)
- (B204~214) 이 포고문에 대한 회신 사본. 궁인 시누헤가 아룁니다. 강녕하소서! 소인이 무지 속에서 행한 도주를, 태양신께서 사랑하시고 테베의 주 몬투께서 축복하시는 젊은 신, 두 땅의 주이신 폐하의 카께서 양지(諒知)하셨습니다. 두 땅의 왕좌의 주이신 아문, 소벡-레, 호루스, 하토르, 아툼과 그의 아홉 주신, 소피두-네페르바우-셈세루 동방의 호루스, 임헤트의 여주-(모쪼록) 여신께서 폐하의 머리를 감싸시기를, 아울러 누의 첫째 동아리, 이방의 민-호루스, 웨레레트, 푼트의 여주, 누트, 하리스-레, 수로의 땅과 바다 섬들의 모든 신-이들께서 폐하의 코에 생명과 권세를 내리시고 이들의 너그러움과 폐하가 하나가 되게 하시기를, 무궁한 영겁회귀와 끝없는 영원불변의 축복을 폐하께 내리시기를, 폐하의 존외(尊畏)가 온 땅과 사막에 거듭되고 태양 원반이 주행하는 모든 곳이 폐하께 복종하기를 바랍니다. 이것은 서방으로부터 구원받은 소인이 그의 주를 위해 올리는 기도입니다.
- (B214~218) 신민을 두루 살피시는 통찰의 주께서는 소인이 아뢰기 두려워하던 것을 왕궁의 현신(現身)으로서 인지하고 계십니다. 그것은 거듭 여쭙기 중대한 일과 같은데 위대한 신태양신의 현현께서는 자신을 위해 일하는 자를 스스로 깨치게 하십니다. 소인은 시교(示敎) 하시는 분의 손에 있으니, 그분의 의도 아래 놓이게 하소서. 폐하께서는 (모든 것을) 취하시는 호루스이시니 폐하의 양손은 모든 땅을 제압합니다.
- 역주 : "카(ka)"는 고대 이집트인이 생각한, 인간을 구성하는 다섯 가지 요소 중 하나다. '생기(生氣, life force)' 정도로 번역될 수 있는 '카'는 말 그대로 육신에 생기를 불어넣는 생명력이다. 여기서 "폐하의 카"는 센와세레트 1세의 '의식' 또는 '이성'을 의미하는데, 문맥에 따라 '이성적 판단'으로 해석하는 것도 가능하다.
- 역주 : 이집트 서간문의 서두는 대개 수신자에게 신의 축복을 내려달라는 기원으로 구성되는데, 여기서 시누헤는 다양한 신의 이름을 늘어놓으며 왕에 대한 자신의 충심을 과시한다. 따라서 작품을 더욱 잘 이해하려면 서신 서두에 관례로 언급된 각종 신의 이름과 신격의 기본 정보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우선 "아문(Amun)"은 '(그 본질이) 숨겨진 자'라는 뜻이다. 대개 두 개의 기다란 깃털로 장식된 관을 쓴 하늘색 피부의 남성으로 표상된다. 아문은 중왕국 시대 제12왕조의 종교 중심지인 테베 카르나크 신전(Karnak Temple)의 주신으로서 중왕국 시대부터 지위가 상승하다가 신왕국 시대로 접어들면서 국가신의 반열에 올랐다. 국가신이 된 아문은 '신들의 왕(king of the gods)'이자 왕가의 수호신이었으며, 모든 파라오의 영적인 아버지였다. 이와 같은 아문의 신격은 본문에 사용된 아문의 "두 땅의 왕좌의 주(Lord of the Throne of the Two Lands)"를 통해서도 확인된다. 시누헤의 회신에 나열된 신 중 아문이 가장 먼저 언급되는 것도 바로 이런 아문의 신격에 기인한다.
- 역주 : "소벡-레(Sobek-Re)"는 물의 신 '소벡'과 태양신 '레'가 하나로 습합(習合)된 신이다. 소벡은 악어의 민첩함과 파괴적인 속성을 구체화한 신으로, 대개 악어 또는 악어의 머리를 한 남신으로 표상된다. 소벡은 악어가 출몰하는 지역에서 특히 인기가 높았는데, 중왕국 시대 제12왕조 이후 대대적인 개간작업이 이뤄진 파이읍 호수 지역과 엘리시트에서 광범위하게 숭배되었다. 고대 이집트인은 악어가 물에서 나오는 모습에서 태양이 태초의 대양에서 솟아오르는 모습을 연상했으며, 이런 이유로 소벡은 태양신의 한 측면인 소벡-레가 되었다.
- 역주 : "호루스"는 '멀리 떨어져 있는 자'를 의미한다. 초기왕조 시대부터 남부 상 이집트 지역에서 천신과 태양신으로 숭배되었다. 앞서 R21~22행에서 언급된 것처럼, 호루스는 일반적으로 송골매나 매의 머리를 한 남신으로 표상되며, 지상의 파라오로 현현한 천신(天神)이자 왕가의 수호신이다.
- 역주 : "하토르"는 '호루스의 거처(Enclosure of Horus)'를 의미한다. 천신이자 태양신 호루스의 활동무대인 하늘을 체화한 여신으로서, 어린 파라오에게 신유(神乳)를 먹이는 자애로운 암소의 신이자 왕가의 수호신이다. 여기서는 이방에 머무는 이집트인의 수호신이라는 신격이 주로 두드러진다.
- 역주 : "아툼과 그의 아홉 주신"은 이집트 창세신화에 언급되는 아홉 명의 신으로 구성된 동아리와, 고대 이집트 신화체계에 편입된 모든 신의 집합체(pantheon)를 동시에 의미한다. 한편, 태양신을 중심으로 한 창세신화에서 창조주-원발자로 여겨지는 아톰(Atum)은 우주의 지배자인 동시에 신성한 왕권의 원천이다.
- 역주 : "소피두-네페르바우-셈세루 동방의 호루스(Sopedu-Neferbau-Semseru, Eastern Horus)"는 시누헤의 도주 경로였던 와디 투밀라트와 동부 사막지대의 수호신이다. '소피'는 '뾰족한 자'라는 뜻으로 웅크리고 앉은 송골매로 표상되며, 시나이반도에 자리한 터키석 광산 세라빗 엘-카딤(Serabit elKhadim) 등지에서 이방의 수호신인 하토르와 함께 숭배되었다. 소피는 송골매로 표상되는 호루스와 동일시되어 원문에서처럼 '동방의 호루스'로 불린다. "네페르바우"는 '훌륭한 권능을 가지신 이' 또는 '뛰어난 인상을 보유하신 이'라는 뜻으로 소피두의 호칭 중 하나인데, 특이하게도 <시누헤 이야기>에서만 언급된다. "셈세루" 역시 소피두의 호칭 중 하나인데 소피두의 호칭 중 하나인 '장자'에서 파생된 것으로 보인다. 여기까지 나열된 신들이 회신에서 첫 번째 동아리를 이룬다. 이들은 왕권의 원천이 되거나 왕실을 수호하는 신들, 우주의 질서를 주관하는 신들, 동부 사막지대를 수호하는 신들의 순서대로 언급된다.
- 역주 : "임헤트의 여주(Lady of Imhet)" 또는 "성스러운 동굴의 여주(Lady of the Sacred Cavern)"는 파라오의 수호신인 우레우스를 가리킨다. 여기서 '임헤트', 즉 '동굴'은 오늘날의 텔 엘파라인(Tell el-Fara'in)의 고대 지명인 부토(Buto)를 말한다. 원문에 삽입된 기원문인 "(모쪼록) 여신께서 폐하의 머리를 감싸시기를"은 파라오의 이마 위에 곧추서서 파라오를 호위하는 우레우스의 신격을 표현한다.
- 역주 : "누의 첫째 동아리 (First Conclave of Nu)"는 태초의 대양 누, 다시 말해 창조력으로 충만한 물의 힘과 나일강의 범람을 주관하는 창조신들을 말한다.
- 역주 : "이방의 민-호루스(Min, Horus of Foreign Lands)"는 "민, 즉 이들 사이의 호루스"를 의역한 것이다. 선왕조 시대(기원전 5300~기원전 3000년경)부터 숭배되었던 민은 생식력과 다산의 신으로서 발기한 성기를 드러낸 남신으로 형상화되었는데, 상이집트 동부의 사막·광산·채석장의 수호신이었다. 테베 지역에서는 아문과 습합되어 '아문-민(Amun-Min)'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호루스와 습합되어 '민-호루스'로 각각 숭배되었다. 여기까지가 신들의 두 번째 동아리다. 첫 번째 동아리와 마찬가지로 왕권과 관련된 신들, 우주의 질서를 주관하는 신들, 동부 사막지대의 수호신 순서로 언급되었다.
- 역주 : "웨레레트(Wereret)"는 '위대한 여신(Great One)'이라는 뜻으로 여신으로 의인화된 왕관을 의미하며, B208행에서 언급된 "임헤트의 여주", 즉 우레우스와 조응한다.
- 역주 : "푼트의 여주(Lady of Punt)"는 하토르를 가리킨다. 푼트는 고왕국 시대부터 이집트인이 중앙아프리카의 특산물과 신전의 여러 의식에 꼭 필요한 향을 수입하던 곳이다. 이집트인은 이곳을 '신들의 땅'으로 불렀는데, 정확한 위치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았다. 학자에 따라 에리트레아 인근이나 소말리아 북부의 해안지대 등이 후보지로 거론된다.
- 역주 : 누트는 B207행에 언급된 헬리오폴리스의 아홉 주신 중 한 명으로 하늘의 여신이다. 앞서 B172~173행에 언급된 것처럼 누트는 매일 밤 태양신을 잉태한 후 매일 아침 어린 태양신을 분만하는 부활의 권능을 가졌다. 원문에서는 바로 다음에 언급된 "하리스-레(Haroeris-Re)"와 함께 우주의 질서를 주관하는 신으로서 언급되었다.
- 역주 : "하리스-레"는 '장자 호루스-레'를 의미한다. <오시리스 신화>에 편입되기 이전부터 존재했던 천신-태양신으로서의 호루스를 '위대한 호루스(GreatHorus)', 그리스식으로는 '하리스(Haroeris)'라고 부르는데, '장자 호루스(Horus the Elder)' 역시 이와 유사한 신격을 보유한다. 태양신 레와 습합되면서 높은 신격을 갖춘 노년의 태양신을 지칭하게 되었다.
- 역주 : 마지막으로 시누헤는 "수로의 땅과 바다 섬들의 모든 신", 다시 말해 이집트와 이방의 모든 신을 언급한다. "수로의 땅(Canal-Land)"은 검은 땅과 함께 이집트를 가리킨다. "바다 섬들", 즉 "거대한 푸른 물의 섬들"은 이집트를 제외한 이방의 모든 지역을 상징하는 표현이다. 세 번째 동아리는 웨레레트와 하토르가 왕권의 수호신으로, 누트와 하웨리스-레가 우주의 섭리를 주관하는 신으로, 수로의 땅과 바다 섬들의 모든 신이 이방의 신들로 각각 언급되었다.
- 역주 : "이들의 너그러움"은 "이들의 선물"을 의역한 것으로, B175행의 "왕실의 선물"을 상기시킨다. 고대 이집트의 도상(圖像, iconography)에서 신들은 생명을 상징하는 성각문자를 왕의 코에 댄 모습, 즉 생명을 코로 불어넣는 모습으로 자주 묘사된다. 본문의 표현은 조형예술상의 묘사를 반영한 것이다.
- 역주 : 고대 이집트인은 (영원한) 시간을 하나의 개념이나 단어를 사용해 포괄적으로 정의하지 않았다. 대신 "영원한 반복성(Eternal Recurrence)"과 "영원한 동일성(Eternal Sameness)"이라는, 서로 대극(對極)이 되는 두 가지 개념을 사용했다. 순환적 시간관 속에서 '영원한 반복성'은 역동적이고 반복적인 변화(change)를, '영원한 동일성'은 완전한 상태로 완결된 정체(停滯, stasis)를 각각 의미한다. 여기서 '영원한 동일성'은 창조의 순간 정해져 세상이 끝날 때까지 변하지 않는 완전한 양식을, '영원한 반복성'은 '영원한 동일성'을 통해 영구적으로 고착된 원칙을 바탕으로 발현되는 반복적이고 다양한 현상을 각각 상징한다. 이 책에서 '영원한 반복성'은 "영겁회귀(continuity)"로, '영원한 동일성'은 "영원불변(perpetuity)"으로 각각 번역했다.
- 역주 : "통찰의 주"는 전통적으로 창조주를 가리키는 호칭 중 하나다. 창조의 권능을 가진 신은 창조되어야 할 대상을 인식하는 '창조적 인식력' 또는 '창조적 기획력'과 창조하려는 대상을 실제로 창조할 수 있는 '창조의 능력' 또는 '창조적 발화의 능력'을 모두 가지고 있어야 한다. 고대 이집트의 창세신화에서 이 두 권능은 신격화되어 '창조적 인식력'을 상징하는 '시아(Sia)'라는 신과 '창조적 발화'를 상징하는 '휴(Hu)' 또는 생각한 것을 실행할 수 있는 '주술의 권능'을 상징하는 '헤카(Heka)'로 각각 표상되는데, 일반적으로 태양의 전용 범선인 태양선(solar barque)에서 태양신을 보좌하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한편, 이 문장에서는 '인지하다', '통찰하다'를 의미하는 '시아'라는 발음의 동사가 각기 다른 품사로 세 차례 사용되었는데, 고대 이집트인은 붉은색으로 쓰인 이 문장의 첫 부분을 "넵 시아시아 레쿠트 시아에프"와 비슷하게 읽었을 것이다. 같은 어근에서 파생되었기 때문에 발음은 같지만, 문장성분은 서로 다른 단어들이 절묘하게 반복되면서 마치 동어반복과 같은 효과를 구사할 수 있었던 창작자의 문학적 기교가 그 어느 때보다 돋보이는 부분이다. 여기서 첫 번째 '시아'는 명사로 전용된 동사로서 바로 다음 명사인 '주인'과 직접 속격(direct genitive) 관계로 결합해 명사구 "통찰의 주"를 구성한다. 두 번째 '시아'는 분사로서 선행사인 "인지의 주"를 수식해 "(두루 살피시는 통찰의 주"를 구성한다. 세 번째 '시아'는 동사로서 "신민을 인지하는 인지의 주, 그가 인지한다."라는 문장을 완성한다.
- 역주 : 직역하면, "그것을 반복하기(에는) (너무) 큰 문제와 같다."이다. 한편, "큰 문제"를 '대단한 일' 또는 '대단한 사건'으로 해석해 왕이 시누헤에게 포고문을 보낸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 역주 : "시교하시는 분"은 "그에 대해 자문하는 자"를 의역한 것인데, 여기서는 왕을 가리킨다. 전치사구 "그에 대해"에서 "그"는 시누혜를 말한다. 이 문장에서 시누헤는 자신이 완전히 왕의 처분 아래에 놓여있음을 강조한다.
시리아-팔레스타인을 어떻게 볼 것인가?
- 고대 이집트인은 주변의 외국인에게 언제나 양가적인 태도를 보였다. 우선, 외국인이 집단·민족·국가일 때는 거의 예외 없이 이집트인이 생각했던 우주적 질서이자 사회적 준거였던 '마아트(ma'at)'의 적으로 묘사되었다. 신적 질서인 마아트는 그 자체로 신성했으나 저절로 유지될 수는 없는 취약한 질서였다. 따라서 우주가 창조 이전의 '무질서한 원래의 평형상태(original equilibrium of the disorderedstate)'로 되돌아가는 것을 막으려면 신과 인간을 비롯한 우주의 구성원 모두가 질서와 정의가 유지될 수 있도록 '지속적인 에너지의 투입(constant input of energy)'에 동참할 필요가 있었다.
- 마아트의 대극 지점에 '이제페트(izefet)'가 있었다. 이제페트는 '무질서', '불의', '거짓(falsehood)' 등을 개념화한 것으로, 신적인 우주의 질서를 지속해서 위협하는 존재로 인식되었다. 마아트와 이제페트라는 이분법적인 사고방식은 이집트의 국경 밖에 존재하는 지역과 그곳의 거주민에 대한 인식에도 영향을 미쳤다. 고대 이집트인은 국경의 남쪽에는 누비아인, 서쪽에는 리비아인, 동북쪽인 시리아-팔레스타인과 서아시아에는 아시아인 등이 존재한다고 생각했는데, 우주의 질서가 이상적으로 확립된 이집트와 달리 이집트의 국경 밖에서 집단·민족·국가를 형성한 주변의 이방인은 이제페트의 구현이자 마아트의 적으로 여겨졌다.
- 그 결과, 고대 이집트의 문헌과 조형예술에서 이집트를 둘러싼 외국인이 하나의 동아리로서 적으로 취급될 때는 '열방(列邦)의 적'을 뜻하는 '아홉 활(Nine Bows)'이라는 용어가 사용되었다. 고대 서아시아의 전투에서 활은 기원전 12000~기원전 9000년경부터 사용되기 시작했으며, 원거리에서 적을 살상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로 널리 선호되었다. 이 때문에 이집트에서는 이민족을 상징하는 문학적·도상적 기표로 활이 널리 사용되었다. 반면, 이집트는 창조주에 의해 최초로 구현된 (질서 잡힌) 공간이자 신과 인간, 인간과 인간 사이에 완벽한 조화가 실현된 마아트의 영역이었다. 지상에 구현된 유일한 마아트의 영역인 이집트가 '야만적인' 이민족에 둘러싸여 있다는 일종의 '문명의 고립' 개념은 스스로 중화(中華)를 자처하고 동서남북 사방이 오랑캐로 둘러싸여 있다고 믿었던 중국의 자국 중심적 세계관과 대단히 유사하다.
- 이처럼 마아트와 이제페트를 바탕으로 하는 이분법적인 사고방식은 외국인을 바라보는 이집트인의 시선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마아트는 우주적 질서를 구현할 뿐만 아니라 사회질서를 유지하는 원리로서 고대 이집트의 사회적 윤리의 바탕이 되었다. 따라서 삶 속에서 마아트를 실천하고 보호하는 것은 모든 이집트인의 의무였다. 특히 왕에게는 마아트를 자기 삶뿐만 아니라 이집트 사회 전반에 걸쳐 구현해야 하는 이중의 의무가 부과되었다.
- 결투를 신청했을 때 시누헤는 "진실로, 저는 다른 무리 사이에 있는 야생황소라서 (그) 무리의 우두머리 황소가 공격하려 하고 거세한 황소들이 달려듭니다."라고 한탄한다.
- 그러나 이집트인이 외국인을 언제나 적대적이고 부정적으로 본 것은 아니었다. 외국인이 집단·민족·국가로 표상될 때는 거의 예외 없이 마아트의 적으로 묘사되었으나, 이들이 직접적이고 개인적인 접촉을 통해 개별적 존재로 인식될 때는 고유의 인격과 특성을 보유한 개인으로, 더 나아가 교류하고 신뢰할 수 있는 인물로 묘사되었다. 집단이 아닌 개별적 존재로서의 외국인에 대한 우호적인 시각은 <시누헤 이야기>에서도 발견된다. B26~28행에서 한 시리아 길잡이는 도주중인 시누헤에게 물을 주고 우유를 끓여주는 친절을 베푼다. 또한 암무넨쉬도 자기 장녀뿐만 아니라 자기 영지 중 가장 좋은 곳을 시누헤에게 내주는 우호적인 인물로 묘사된다. 더구나 이야기의 후반부인 B243~246행에서 국경 초소를 통과해 이집트로 돌아오는 시누헤는 그의 귀향길을 동행한 레체는 친구들의 이름을 일일이 부른다. 이것은 이집트인인 시누헤와 친구가 된 외국인은 이제 이름 없는 이제페트의 화신이 아니라 이집트인과 똑같은 육신과 영혼을 가진 개인으로 인식되었다는 의미다. 요컨대, 이미 중왕국 시대부터 외국인을 바라보는 이집트인의 현실적인 시각이 왕권의 정통성을 강조하고 고착된 이념을 강화하려는 어용문학 작품에서 발견되는 시각과 달랐음을 드러낸다.
- 외국인을 대하는 고대 이집트인의 양가적인 태도는 '토포스(topos)'와 '미메시스(mimesis)'라는 두 개념으로 설명할 수 있다. 토포스는 '이집트 사회가 이념적으로 기대하는 바로서 지배층에 내재화되는 것'으로 정의되며, 미메시스는 '이러한 기대에 대한 (또는 반하는) 개개인의 반응'을 반영한다. 이념적 토포스는 귀족의 자전적 기록, 교훈서, 왕을 위한 찬가 등 고대 이집트에서 비교적 높은 지위를 차지했던 어용문학 장르를 통해 표현되었으며, 이집트인이 주변의 외국인과 직접 대면하며 체득한 개인적인 경험은 더 자율적인 서사문학 장르에 속하는 문학작품 속에서 미메시스로 반영되면서 외국과 외국인에 대한 더욱 사실적인 묘사를 가능하게 했다.
- 이집트인은 외국인이 거주하는 땅에 대해서도 양가적인 태도를 보였다. 고대 이집트의 창세신화를 바탕으로 한 공적인 국가이념에 따르면 이집트는 세상에서 가장 축복받은 땅이자 지상의 유일한 문명국이지만, 외국은 하나같이 비참한 상황을 벗어나지 못하는 황폐한 곳인 동시에 자신들과 다른 부류의 사람들이 사는 혼돈의 영역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경제적이고 실용적인 관점에서는 외국이 노동력의 공급원으로, 진귀한 보석이나 석재, 이집트에서 구할 수 없는 원자재와 특산품이 풍부한 곳으로 여겨졌다. 그리고 <시누헤 이야기>에서 볼 수 있듯이 외국을 직접 체험한 이집트인을 통해서는 심지어 일종의 지상낙원처럼 묘사된다. B81~85행에서 언급된 것처럼 시리아에 자리한 시누헤의 망명지 이아이는 모든 게 풍족한 풍요의 땅으로 그려진다.
- 특히 시누헤 이야기》와 동시대의 서사문학 작품인 <난파당한 선원>에는 "온갖 좋은 것"으로 넘쳐나는 외국이 더 구체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이 작품은 항해 중에 난파를 당해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미지의 땅으로 표류한 선원의 이야기인데, 섬에 표류한 선원은 오래지 않아 그곳에 먹을 것이 풍부하다는 걸 알게 된다. 아울러 섬은 뱀의 형상을 한 신의 지배를 받는, 온갖 진귀한 것이 지천으로 넘쳐나는 전설 속의 유토피아로 묘사된다. <난파당한 선원>의 끝부분에서 선원은 자신에게 이런저런 호의를 베푼 뱀 신에게 자신이 이집트로 돌아가면 온갖 진귀한 재물을 바치겠다고 약속한다. 이 말을 들은 뱀 신은 선원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대에게 몰약이 그렇게 많은가? (그대가) 향의 주인이 되었는가? 나야말로 푼트의 주인이며 몰약은 내 소유물이네.
그대가 가져오겠다는 그 헤케누 기름은 이 섬의 주산물이네.
- <난파당한 선원>, p. Hermitage 1115, 150~152
- 푼트는 비블로스와 함께 이집트가 평화적인 교역 활동을 지속했던 몇 안 되는 외국 땅이었으며, 이들 지역에 대한 이집트인의 인식도 대체로 우호적이었다. 따라서 이집트인이 자신들의 땅이 유일하게 풍요로운 곳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은 분명하다.
- <시누헤 이야기>에서 시누헤는 말년에 이르러 이아아에서 성취한 재산과 사회적 지위를 모두 포기하고 이집트로 돌아가고자 한다. <난파당한 선원>의 주인공 역시 무엇 하나 부족하지 않은 '신들의 땅'인 푼트에 머물면서도 이집트로 되돌아갈 날만 기다린다. 시누헤나 선원에게 외국은 그곳이 아무리 풍요롭고 안락하다 하더라도 삶의 특정 단계에서 부득이하게 통과하는 곳이지, 결코 새롭게 뿌리내리고 영구히 정착할 곳은 아니었다. 다시 말해, 이들에게 외국은 일종의 '통과의례'를 경험하는 공간일 뿐이었다. 중왕국 시대의 서사문학에서 일관되게 찾아볼 수 있는 이런 '귀향 지향적 성향은 이들의 의식 속에 깊이 뿌리 박힌 '심형 공간개념'을 드러내는데, 이런 공간개념은 신왕국 시대에 접어들어서야 비로소 약해진다.
- 신왕국 시대에 창작된 서사문학 작품은 대부분 외국을 현실적으로 묘사하지 않는다. 중왕국 시대의 서사문학에서 주인공들의 '통과의례' 장소로 묘사되었던 외국은 신왕국 시대가 되면서 안과 밖의 실체가 분명하지 않은 '가상적 공간'으로 그려진다. 이 가상의 외국이 등장하는 신왕국 시대 이집트인의 심성은 '원심형 공간개념'으로 설명될 수 있다. 요컨대, 이집트 내부와 외부 사이의 차별성이 사라짐으로써 작품의 주인공들은 이집트에서 외부로 이행하는 것이 아니라 '실재'의 공간에서 '가상'의 공간으로 이행하는 것이다.
- (나를) 수행한 궁인들은 나를 알현실로 이르는 길로 안내했다. 나는 폐하께서 호박금(琥珀金)으로 만든 감실(龕室)에 안치된 옥좌에 좌정하신 것을 보았다. 그때 나는 배를 깔고 엎드려 있었으며 그 눈앞에서 혼절하고 말았다. 그 신께서는 유쾌하게 하문하셨으나 나는 어둠에 홀린 사람 같았으니, 내 바는 떠나갔고 내 사지는 후들거렸다. 내 심장-내 몸속에 있는 것이 그것이 아니었으니, 나는 삶과 죽음을 분별할 수 없었다.
- (B256~263) 그러자 폐하께서 궁인 중 한 사람에게 하교하시기를, "그를 부축해 그가 과인에게 말하게 하라." 하시고 나에게 말씀하시기를, "보라, 그대는 이방 땅을 방황한 연후에 돌아왔다. 도주가 그대를 상하게 했으니, 노인장, 그대는 (이미) 노년에 이르렀다. 그대의 시신을 매장하는 것은 사소한 일이 아니니 활잡이들이 그대를 매장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제) 더는 스스로에게 해가 되는 일은 행하지 말라. 그대는 그대의 이름이 불렸을 ..."
- 역주 : 고대 이집트인은 '태초의 대양'에서 처음 출현한 세상의 모습이 파피루스 등과 같은 수생 식물이 밀집한 습지와 유사했으리라고 생각했고, 지상에 재현된 우주를 상징하는 신전을 만들 때 이 '태초의 습지'를 그대로 재현하려고 했다. 이 공간은 신전 앞뜰에서 실내로 이어지는 공간에 기둥을 밀집시켜 만든 열주실의 형태로 구현되었는데, 열주실은 실제로 수생 식물을 상징하는 파피루스를 묘사한 기둥머리를 갖춘 석조 기둥이 빽빽하게 세워진 넓은 방이었다. 여기 묘사된 왕궁의 열주실도 신전의 열주실과 거의 같은 구조였을 것이다.
- 역주 : "옥좌"는 열주실에서 '알현실(audience chamber)'로 이어지는 문 맞은편 벽 앞에 조성된 좌대 위에 놓였다. 옥좌가 안치되는 벽 중앙에는 중후한 벽으로 둘러싸인 '감실(niche)'이 만들어졌는데, 이런 감실은 신전의 지성소(sanctuary)에서 신상이 안치되었던 신당(shrine)과 같은 역할을 했다. 여기서 감실은 B250행에 사용된 "두꺼운 부분"="(왕궁의) 통로"와 똑같은 단어를 문맥에 따라 다르게 번역한 것이다. 서로 다른 두 구조물에 똑같은 단어가 사용된 것은 이들 구조물의 외관이 비슷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한편, 감실은 '호박금(electrum)'으로 도금되었는데, 호박금은 금과 은이 일정 비율로 섞인 은백색의 합금을 말한다. 고대 이집트에는 이들 두 금속을 인공적으로 합금할 기술이 없었으므로 천연 호박금은 극소량만 채취할 수 있는 매우 귀한 금속이었다.
- 역주 : "그 눈앞에서 혼절하고 말았다."는 "그의 눈앞에서 나 자신을 몰랐다."를 의역한 것이다. 고대 이집트인은 신이나 왕처럼 자신이 감히 감당할 수 없는 존재와 맞닥뜨렸을 때 혼절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런 발상은 <난파당한 선원>에서도 발견되는데, 섬을 다스리는 신과 마주했을 때 선원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대는 말하시나 저는 듣지 않고 있으며 제가 그대의 눈앞에 있으나 저는 저 자신을 알지 못합니다." (p. Hermitage 1115, 73~76)
- 역주 : "내 바는 떠나갔고 내 사지는 후들거렸다."는 "내 바는 나간 상태였고 내 사지는 지친 상태였다."를 의역한 것이다. B253 행에서 언급된 것처럼 시누헤는 왕을 알현한 자리에서 심신미약 상태가 되고 만다. 각 개인의 개별적인 '개성(personality)' 또는 '생령(生靈, soul)'으로 이해할 수 있는 '바(ba)'는 자기 의지에 따라 그 사람의 몸을 떠날 수 있는 존재로 여겨졌다. 일례로, 중왕국 시대의 서사문학 작품 중 하나인 <한 사람과 그의 바와의 대화(The Debate between a Man and his Ba)>에서 주인공은 자신의 바에 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내 바가 (내 몸으로부터) 나가고자 하는 것은 마치 자기 몸 안에 있는 것을 무시하는 사람과 같네." (p. Berlin 3024, 6~7) 여기서 '바'가 떠났다는 말은 자아의 완전한 상실로 해석될 수 있는데, 우리말에서 '혼이 쏙 빠졌다'와 거의 같은 어감이다.
- 역주 : B39행에서 사용되었던 표현이 같은 형태로 반복되었다. B255행에 언급된 '바'와 달리 고대 이집트에서 심장은 육체와 절대로 분리될 수 없는 존재로 여겨졌다. 따라서 심장의 부재는 시누헤의 황망한 심경을 그만큼 통렬하게 표현한다. 한편, "나는 삶과 죽음을 분별할 수 없었다."는 말은 '내가 지금 산 것인지 죽은 것인지를 알 수 없었다'라는 의미다.
- 역주 : 한편, B263행 전체가 붉은색으로 표기되어 있는데, 파피루스 맨 윗단에 자리한 이 행의 마지막 부분부터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 (B264~268) 그때 왕실의 자녀들이 입시(入時)했는데 (그때) 폐하께서 왕비께 이르시되, "보시오, 시누헤가 활잡이들이 만들어낸 아시아인이 되어 돌아왔구려." 하시니 왕비께서 크게 비명을 지르셨고 왕실의 자녀들도 하나같이 비명을 지르고는 폐하의 말씀에 여쭈기를, "진정 그입니까, 폐하, 주여?" 하니 폐하께서 이르기를 "진정 그로다." 하셨다.
- (B268~279) 이제 그들[왕실의 자녀들]이 시스트럼을 손에 들고 메니트와 홀을 가지고 오더니 그것을 폐하께 보이고는 (폐하께 이르기를,) "폐하의 두 손이 아름다운 것, 오, 영속하시는 왕이시여, 하늘 여주의 표징(標徵)으로 향하시기를. 황금(의 여신)께서 폐하의 코에 생명을 주시고 별들의 여주께서 폐하와 하나가 되시기를. 상이집트의 왕관이 하류로, 하이집트의 왕관이 ...
- 역주 : "시누헤가 활잡이들이 만들어낸 아시아인이 되어 돌아왔구려."라는 왕의 선언은 지금까지 아시아 지역에서 오랜 도피 생활을 한 후 돌아온 시누헤의 정체성을 한마디로 압축한다는 점, 아울러 이 선언 이후 시누헤는 왕으로부터 사면을 받고 다시 이집트인의 정체성을 회복한다는 점에서 <시누헤 이야기> 전체 서사의 절정이자 분수령이라 할 수 있다.
- 역주 : "시스트럼(sistrum)", "메니트(menit)", "홀"은 고대 이집트의 신전 의례에 사용되던 대표적인 악기다. '메니트'는 여러 줄에 구슬을 꿰어 만든 목걸이와 중심추로 구성된 악기를 가리킨다. 장식용으로 목에 걸 수도 있었지만, 대개는 손에 쥐고 흔들어 잘그락거리는 소리를 내는 데 사용되었다. '시스트럼'은 둥근 테두리 안에 두세 개의 가로대를 만들고 그 가로대에 얇은 금속 원반을 끼워 흔들면 찰랑거리는 소리가 나게 만든 악기이며, '홀'은 모양만 다른 유형의 시스트럼이다. 여기서 '홀'로 번역한 시스트럼은 '나오스형 시스트럼(naos-sistrum)'으로서 손잡이 위의 울림통이 사각형의 신전 모양을 하고 있으며, '시스트럼'은 '고리형 시스트럼(loop-sistrum)'으로서 울림통의 테두리가 둥근 모양이다. 이들 악기는 모두 춤과 음악을 관장하는 신 하토르에게 속한 악기로서 다양한 신전 의례나 축제에서 신을 기쁘게 해 주려고 연주되었다. 여기서는 왕실의 자녀들이 시누헤에 대해 왕이 품고 있을지도 모르는 분노를 누그러뜨리려고 악기를 연주한다.
- 역주 : 여기서 왕실의 자녀들은 왕에게 시누헤에 관한 관심을 거두라고 청원하고 있다. 문장의 중간에 "영속하시는 왕"이라는 표현이 호격으로 삽입되었다. 한편, "아름다운 것"과 "하늘 여주의 표징"은 같은 대상, 즉 하토르의 악기 또는 그 악기에서 연주되는 음악을 가리킨다. 일반적으로 '장식(물)'으로 번역되는 '표징'은 원래 건축물의 상단부에 조각되거나 그려졌던 양식화된 갈대다발을 의미하지만, 여기서는 하토르의 상징물을 뜻한다. '하늘의 여주'는 하토르의 호칭 중 하나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하토르는 춤과 음악을 관장하는 신인 동시에 성애의 신이자 부활의 신, 이방의 수호신, 시누헤의 이름을 구성하는 돌무화과나무의 신이다. 따라서 이 시점에서 하토르의 출현은 시누헤의 안전한 귀환과 사면, 회춘과 영생 등 다중적인 의미를 제시한다.
- 역주 : 첫 번째 기원문의 주어인 "황금(의 여신)"은 태양신의 딸이라는 하토르의 신격을 말한다. 이 첫 번째 기원문은 시누헤의 회신 B237~238행에 언급된 마지막 기원, 즉 "태양신과 호루스, 하토르께서, 테베의 주 몬투께서 영원불변하도록 생존하기를 바라시는 폐하의 이 고귀한 코를 사랑하시기를 기원합니다."를 상기시킨다. 두 번째 기원문의 주어인 "별들의 여주"는 밤하늘의 신이라는 하토르의 신격을 말한다. 왕실의 자녀들은 왕이 하토르와 하나가 되기를 기원하고 있는데, 여기서 왕은 '카무테프(Kamutef)', 즉 '그의 어머니의 황소(Bull of His Mother)'라는 태양신의 신격과 동일시되고 있다. 앞서 언급한 대로 태양신은 매일 밤 하늘의 여신을 잉태시킨 후 매일 아침 그 여신의 아들로 다시 태어나는데, 카무테프는 이처럼 스스로 잉태시키고 스스로 탄생하는 태양신의 신비로운 신격을 표현하는 호칭 중 하나다.
- "나는 모래를 그 속에 사는 사람들에게, 나무 기름은 그것을 바르는 사람들에게 돌려줬다."(B294~295)
- (B283~295) 그리하여 내가 알현실에서 퇴장하다. 그때 왕실의 자녀들이 나를 부축했으며 그 후 우리는 두 대문으로 갔다. 나는 왕자의 저택에 배정되었는데, 그곳에는 온갖 진귀한 물건과 함께 욕실과 아케트의 형상이 있었으며, 이재국(理財局)의 보재(寶財)와 왕실 세마포로 만든 의복과 관리들을 위한 몰약과 왕실의 최상급 연고가 있었다. 원하는 것들이 방마다 넘쳐나고 시종들이 (어디든) 시중을 들었다. 내 몸에서 세월의 흔적이 지워졌으니, 체모는 제거되고 머리는 빗질이 되었으며, 짐은 이방으로, 의복은 사막의 유랑민에게 보내졌다. 고운 아마포가 내 몸에 걸쳐졌으며 최상급 연고가 (내 몸에) 발렸고 침대에서 잤다. 나는 모래를 그 속에 사는 사람들에게, 나무 기름은 그것을 바르는 사람들에게 돌려줬다.
- (B295~300) 나에게 궁인에게 어울릴 만한 농장주의 저택이 주어졌다. 많은 장인이 그것을 짓고 있었고 모든 나무가 새로이 심어졌다.
- 역주 : "왕실의 자녀들이 나를 위해 그들의 팔을 줬다."를 의역한 것이다. 이제 나이가 많아진 시누헤는 가는 길에 이들의 부축을 받은 듯하다.
- 역주 : R9행에서 언급되었던 "두 대문"은 왕궁의 정문이다. 이 문은 아멘엠하트 1세가 서거했을 때 닫혔다. 한때 굳게 닫혔던 대문을 시누헤가 통과했다는 것은 독자들이 그의 귀환을 실감하게끔 해주는 문학적 장치로 볼 수 있다.
- 역주 : "욕실"은 '시원하게 만들다'를 의미하는 사역동사에서 파생되었다. 요컨대, 고대 이집트인에게 '욕실'은 '몸을 시원하게 만드는 장소'인 것이다. "아케트의 형상"이 정확하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알 수 없다. 이집트 신화에 따르면 태양신은 매일 아침 동쪽 지평선에 떠오르기 전에 불의 호수에서 목욕한다고 여겨졌는데, 왕이 매일 아침 행했던 정화의식은 이와 같은 신화적 선례를 바탕으로 한다. 여기서 "아케트의 형상"은 일출을 준비하는 신의 형상이거나 각종 동식물이 일출에 기뻐하는 모습을 새긴 벽화로 추정된다. 이것을 욕실에 비치된 '거울'로 보는 견해도 있다.
- 역주 : "이재국의 보재"는 "은의 집의 봉인된 것들"을 의역한 것이다. 여기서 "은의 집"은 국가의 재산을 관리하던 '이재국'을, "봉인된 것들"은 이재국의 창고에 봉인되어 보관되다가 필요할 때마다 관리들에게 배분되던 고가의 물품을 의미한다. B289~290행 전반에 걸쳐 묘사된 왕실의 풍족함은 "원하는 것들이 방마다 넘쳐나고"라는 표현으로 대변되는데, B81~85행에서 시누헤가 자신이 정착한 이아아의 풍요를 묘사했던 말과 대비된다.
- 역주 : "내 사지 위로 해[年]들이 지나가게 했다."를 의역한 것이다. 이집트로 돌아온 시누헤는 오랜 망명 생활 동안 잊고 지냈던 이집트의 풍습과 문명의 혜택을 다시 누리며 궁극적인 회춘(rejuvenation)을 경험한다.
- 역주 : 머리를 기르고 뾰족한 수염을 길렀던 당시 아시아인과 달리 고대 이집트인은 더위를 피하려고,아울러 이 같은 기생충이 서식하는 것을 막으려고 체모를 제거하는 풍습이 있었는데, 면도칼처럼 날카로운 연장을 사용하는 대신 족집게 같은 도구로 뽑아내는 것이 일반적인 방법이었다. 목욕과 제모를 마친 시누헤는 이제 이집트인의 외모와 정체성을 완전히 되찾는다.
- 역주 : 이집트인의 외모와 정체성을 되찾는 과정은 망명 생활 내내 몸에 걸쳤던 아시아인의 옷을 벗어버리는 것으로 완성되며, 이로써 B264~265행의 "보시오, 시누헤가 활잡이들이 만들어낸 아시아인이 되어 돌아왔구려."라는 왕의 선언은 이제 그 의미를 상실한다. 이와 반대로, 외모와 복장의 변화를 통한 정체성의 변화는 <구약성서> <창세기> 41장 14절의 "요셉이 수염을 깎고, 옷을 갈아입고, 바로 앞으로 나아가니"와 41장 42절의 "바로는 손가락에 끼고 있는 옥새 반지를 빼서 요셉의 손가락에 끼우고, 고운 모시옷을 입히고, 금목걸이를 목에다 걸어주었다."에서 요셉이 이집트인으로 만들어지는 과정을 상기시킨다.
- 역주 : 시누헤가 실제로 "모래"와 "나무 기름"을 이방인에게 돌려줬다는 말이 아니라 자신의 생활양식이 이집트식으로 완벽하게 바뀌었다는 의미다. "나무 기름"은 백향목에서 추출한 기름으로 추정되는데, 고대 이집트에서는 주로 미라를 만드는 데 사용했다.
- 역주 : B286행에서 "왕자의 저택"에 임시로 머물렀던 시누헤는 이제 왕에게서 저택을 영구히 하사 받는다. "농장주의 저택"은 "저지대 주인의 집"을 의역한 것이다. 여기서 "저지대"는 물이 영구적으로 고인 '호수' 또는 범람기 이후에도 일시적으로 물을 머금고 있는 '농지'를 뜻하는데, 이 문맥에서는 후자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 역주 : 여기서 "높은 곳은 귀족 분묘가 밀집된 사막의 '고지대'를 의미하며, 따라서 "높은 곳 위에 있는 작업의 관리인"은 '귀족 묘역의 작업을 총괄하는 관리인'을 의미한다. "땅을 가로지르고 있었다"는 것은 작업할 일꾼을 모집하러 다닌다는 의미일 수도 있고, 작업을 수행하려고 여기저기 바쁘게 돌아다닌다는 의미일 수도 있다.
- 최고위 궁인에게(나) 행해지는 것과 같이 장례 신관이 배정되었으며 접안시설 앞에 자리한 경작지가 포함된 장례 영지가 하사되었다. 내 형상에는 금박이 입혀졌으며 요의는 호박금으로 만들어졌다.
- 역주 : "장례 신관"은 '카의 시종'을 의역한 것이다. 장례 후 분묘를 관리하고 예배실 제단에 정기적으로 봉헌물을 바치는 업무를 수행하는 신관을 가리킨다. 고대 이집트의 귀족은 자신이 소유한 토지 중 일부를 장례 영지로 지정했으며, 여기서 생산된 농산물을 자신을 위한 장례 공물과 장례 신관을 위한 급료로 사용했다. 시누헤가 언급한 "장례 영지"는 나일강 유역에 자리한 경작지보다는 높은 곳에 있었지만, "접안시설 앞"이라서 관개와 농경을 할 수 있는 땅이었다. '접안시설'은 나일강을 오르내리는 배가 접안할 수 있는 곳으로, 주로 관개수로가 끝나는 사막의 고원지대 기슭에 만들어졌다.
- 역주 : "내 형상"은 귀족 분묘에 안치되었던 망자의 인물상을 의미한다. 고대 이집트인은 분묘에 적어도 하나 이상의 인물상을 안치했는데, 이것은 미라가 훼손되더라도 '카'와 '바'가 깃들고 머물 곳이 필요하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한편, 고대 이집트의 사생관(死生觀)에 따르면 망자는 명계의 왕인 오시리스와 동일시되는데, 고대 이집트인은 신들의 피부는 금, 뼈는 은, 모발을 비롯한 체모는 청금석으로 이뤄졌다고 생각했다. 본문에서 망자, 즉 시누혜의 조각상이 금박으로 도금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한편, 시누헤의 조각상에 사용된 값비싼 귀금속 역시 왕의 하사품으로 봐야 할 것이다.
- "글로 쓰인 그대로 처음부터 끝까지 이렇게 왔노라."(B311)
- 역주 : "글로 쓰인 그대로"는 "글에서 발견된 것과 같이"를 의역한 것이다. 이 구절을 통해 이 문서가 필사본임을 알 수 있다. 한편, <시누헤 이야기>의 결구는 <난파당한 선원>의 결구 앞부분과 같다. 그러나 <난파당한 선원>과 달리 필사를 담당한 서기관의 이름이 기록되지 않아서 원작자와 마찬가지로 필사자가 누구였는지도 알 수 없다.
고대 이집트인의 내세관과 장례 절차
- 죽음을 대하는 고대 이집트인의 반응에는 조금 유별난 데가 있다. 미라, 부장품, 분묘, 피라미드, <사자의 서> 등 이집트인이 남긴 유물 중에서 죽음과 연관되지 않은 것을 찾기가 쉽지 않다. 현대인만 이런 인상을 받은 것은 아니다. 기원전 1세기경 활동했던 것으로 알려진 디오도로스 시켈로스(Diodorus of Sicily)는 자신의 저서 <역사 총서(Historical Library)>에서 죽음에 대한 이집트인의 유별난 태도를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그 나라 사람들[이집트인]은 삶의 시간을 완전히 무가치한 것으로 여기고, 죽은 다음에 자신이 쌓은 미덕에 의해 기억 속에 남을 시간을 훨씬 중요하게 생각한다. 지상에서는 잠시만 머무를 것이기에, 그들은 살아있는 사람들의 집을 여인숙이라고 부른다. 반면 무덤을 영원한 안식처라고 부르는데, 왜냐하면 죽은 자들은 피안에서 끝없이 삶을 이어갈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그들은 살 집을 짓거나 꾸미는 일에는 관심이 없고, 무덤을 만드는 일에 모든 노력을 쏟아붓는다.
- <역사 총서>, 1.51:2
- 여기서 디오도로스가 옳게 파악한 것부터 살펴보자. 그의 말처럼 이집트인이 "죽은 다음에 자신이 쌓은 미덕에 의해 기억 속에 남을 시간"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던 것은 사실이다. 이런 사실은 이들이 분묘에 남긴 다양한 텍스트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아울러 이들이 실제로 거주할 가옥은 -심지어 왕궁이라 할지라도- 진흙 벽돌처럼 내구성이 떨어지는 재료를 사용해서 지었던 반면, '영원의 집(House of Eternity)'이라고 불렸던 분묘는 석재로 지었던 것 또한 사실이다. 따라서 이 그리스 출신 역사 저술가의 눈에는 이집트인이 현세의 삶에는 관심이 없고 죽음 이후에 펼쳐질 내세에서의 부활과 영생에 모든 노력을 쏟아붓는 불합리한 민족으로 보였을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이집트인이 "삶의 시간을 완전히 무가치한 것"으로 여기고, 다시 말해 삶의 의미와 중요성은 경시한 채 오로지 죽음에만 집착했다고 단언할 수 있을까? 그리고 이런 문화가 가능하기는 한 것일까?
- 영국의 종교학자인 캐런 암스트롱(Karen Armstrong, 1944년~)은 <신화의 역사(A Short History of Myth)>에서 죽음의 경험은 사람을 극한적 상황에 놓이게 함으로써, "거대한 침묵의 중심"을 응시하게 함으로써, 그리하여 직관적으로 감지하던 실제에 구체적인 형태를 부여하고 신성을 경험하게 함으로써 신화와 제의와 종교를 탄생시켰다고 설명한다. 죽음이 신화·제의·종교의 기원이라는 주장은 학계에서도 폭넓게 지지받는다. 그렇다면 이런 주장을 고대 이집트 문명에도 적용할 수 있을까? 나는 그렇다고 생각한다. 고대의 모든 민족과 마찬가지로 이집트인도 죽음에 대해 양가적인 태도를 보였다. 요컨대, 죽음을 긍정하는 태도와 죽음을 두려워하는 태도가 공존했다.
- 죽음을 긍정하는 태도는 <한 사람과 그의 바와의 대화>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작품의 주인공은 자신의 '바'와 대화하는데, 이때 '바'는 내면에 존재하는 '또 다른 자아(alter ego)'로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주인공은 사실상 자기 자신과 대화한다고 할 수 있는데, 이 때문에 이 작품을 세계 최초의 모놀로그(monologue)로 평가하기도 한다. 아무튼 주인공은 절망으로 가득한 현실 세계와 평안과 행복으로 가득 찬(그러나 실제로는 어떨지 알 수 없는) 죽음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며 자신의 '바'와 논쟁을 벌인다. 그는 죽음을 현세에서의 부조리가 모두 해소된 이상적인 상태로 여기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죽음이 오늘 내 앞에 있네,
앓았던 사람이 회복된 것처럼, 애도를 끝내고 밖으로 나가듯이.
죽음이 오늘 내 앞에 있네,
몰약의 향기처럼, 바람 부는 날 돛 아래 앉은 것처럼.
죽음이 오늘 내 앞에 있네,
연꽃의 향기처럼, 만취(漫醉)의 강둑에 앉은 것처럼.
죽음이 오늘 내 앞에 있네,
홍수가 물러나듯이, 원정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사람처럼.
죽음이 오늘 내 앞에 있네,
하늘이 개듯이, 그가 미처 알지 못한 것에 빠져버린 사람처럼.
죽음이 오늘 내 앞에 있네,
자기 집을 보고자 하는 사람처럼, 억류되어 여러 해를 보낸 후.
- <한 사람과 그의 바와의 대화>, p. Berlin 3024, 130~142
- 이와 같은 완곡어법(euphemism)은 생명이 끊어진 사람을 말할 때도 마찬가지로 적용되었으며, 그 결과 '망자' 대신 <인테프 왕묘의 하프 연주자의 노래>에 언급된 것처럼 "심장이 지친 이"라는 표현이 사용되었다.
- 고대 이집트인은 인간이 존재하려면 다섯 가지 요소인 육신, 그림자, '카', '바', 이름이 반드시 갖춰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집트인에게 있어 육신은 마리오네트와 같은 존재였다. 다시 말해, 육신 그 자체는 정교하긴 하지만 일종의 '빈 껍데기'이므로 스스로 살아있거나 움직일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이집트인은 살아있는 사람의 생명 작용, 즉 정신적인 활동과 육체적인 활동을 가능하게 하는 어떤 힘이 존재할 것이라고 막연하게 짐작한 것으로 보인다. 이들이 육체적인 활동을 가능하게 하는 것, 다시 말해 마리오네트처럼 불완전한 육신을 살아 움직이게 하는 그 무언가를 개념화한 것이 바로 '카'였다.
- <헬리오폴리스 창세신화(Heliopolitan Cosmology)>에 따르면 창조주이자 태양신인 아툼은 첫 번째 세대의 신들인 슈(Shu)와 테프루트(Tefnut)가 형태를 갖추자 이들을 뒤에서 끌어안아 자신의 '카'를 불어넣었다. 이처럼 '카'의 기원은 창조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인간세계에서는 창조주-지배자에게서 신성한 왕권을 위임받은 왕이 창조주에게서 받은 '카'를 지상에 두루 전달하는 매개 역할을 한다고 여겼으며, 개개인에게 깃든 '카'는 아버지에게서 자녀에게로 전달된다고 생각했다.
- 고대 이집트인의 세계관에 따르면 사람뿐만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것에는 모두 '카'가 깃들어 있다. 그리고 생명을 유지하려면 '카'가 지속해서 공급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입이 달린 모든 것이 먹는 이유는 바로 '카'를 섭취하기 위해서였다. 요컨대, 우리가 무언가를 빅으면 원래는 살아있던 음식의 재료에 깃들었던 '카'가 우리 몸으로 옮겨오므로 우리가 계속 살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 그런데 '카'를 강화하고 고양하는 것은 음식에 국한되지 않았다. 이집트인은 맛있는 것을 먹고 마시는 것, 질 좋고 산뜻한 옷을 입는 것, 화려한 장신구를 걸치는 것, 시각적 쾌락을 줄 수 있는 우아한 대상을 보는 것, 아름다운 음악을 듣는 것, 기분 좋은 향기를 맡는 것, 몸에 좋은 연고나 기름을 바르는 것 등 오감을 만족시킬 수 있는 모든 감각적·관능적 쾌락이 '카'를 북돋는다고 믿었다. 그러므로 이집트인에게는 금욕과 고행이 결코 종교적인 미덕이 아니었다. 한마디로, 고대 이집트 문명은 '쾌락주의의 역설(paradox of hedonism)'을 불러오는 지나친 쾌락은 경계해야겠지만 쾌락을 긍정하는 문명이었다.
- 아울러 '카'를 유지하고 고양하는 일은 사람이 사망한 뒤에도 지속해서 이뤄져야 하는 과업이었다. 고대 이집트인에게 죽음은 존재의 비가역적 종말(irreversible end)이 아니었다. 사람이 죽으면 육신의 기능은 멈추고 -따라서 죽음의 의학적 정의는 '전신부진(全身)'이라 할 수 있다- 몸에 깃들어 있던 '카'나 '바' 같은 비물질적 요소는 일시적으로 몸 밖으로 빠져나오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들이 소멸하거나 작동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카'는 죽음 이후에도 치속해서 유지되고 고양되어야 했으며, 그 방법은 살아있을 때와 마찬가지였다. 다만 망자는 이제 능동적으로 '카'를 위해 필요한 조치를 할 수 없는 상황에 직면했으며, 따라서 망자에게 가장 절실한 문제는 '카'가 고사(枯死) 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는 것이었다.
- 이때 망자는 우선 살아있는 가족 또는 생전에 계약을 체결한 신관에게 의지했다. 그리고 이것이 여의찮을 때는 가족이나 신전의 지원이 영원할 수는 없으므로 -이런 상황은 반드시 찾아오게 마련이다- 결국 주술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이집트인은 주술적인 효력을 가진 주문이나 기원, '카'를 부양할 수 있는 여러 형상을 벽에 그리거나 새겼으며, 내세에서 영원히 사용할 수 있는 수많은 물품을 자신과 같이 매장했는데, 이렇게 봉헌물이나 음식에 깃든 '카'를 형상화함으로써 망자가 이들의 '카'를 영원히 공급받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귀족의 분묘에서 가장 자주 발견되는 장면이 망자가 자신에게 바쳐진 각종 봉헌물을 취하는 모습인 것도, 파라오의 왕묘나 귀족의 분묘에 그렇게 많은 부장품이 매장된 것도 모두 이런 이유 때문이다.
- 신들 역시 '카'를 유지하고 고양해야 했다. 신들은 불사의 존재지만 그들의 '카'는 인간이 제공하는 다양한 봉헌물에 의해 강화될 수 있었다. 신들이 지상에서 쾌적하게 머물 수 있도록 가장 내구성이 뛰어난 재료인 석재로 거대한 신전을 건설한 것도, 그 신전의 내부를 웅장한 기둥과 화려한 부조로 장식한 것도, 하루도 빠지지 않고 신전 의례를 통해 먹을 것과 마실 것, 향과 의복 등을 제공한 것도, 찬가를 통해 신을 찬양하고 악사와 가인(歌人)이 악기를 연주하고 노래를 합창한 것도 모두 신들의 '카'를 강화·고양하고, 이렇게 드높아진 신적인 생기가 -마치 경제학자들이 말하는 낙수효과(落效果, trickle-down effect)처럼- 지상에 구현된 유일한 신국(神國)이었던 이집트에 차고 넘치게 함으로써 지상에 신성하고 고결한 평화와 풍요가 영원히 지속되도록 하려는 노력의 일환이었다.
- 고대 이집트의 신들이 <구약성서> <아모스서>에서처럼 신전 의례에 대해 거부감을 보이거나 정해진 절차에 따라 행해지는 의례를 질책하는 경우는 찾아볼 수 없다. <아모스서> 5장 21~24절, "나는, 너희가 벌이는 절기 행사들이 싫다. 역겹다. 너희가 성회로 모여도 도무지 기쁘지 않다. 너희가 나에게 번제물이나 곡식제물을 바친다 해도, 나는 그 제물을 받지 않겠다. 너희가 화목제로 바치는 살진 짐승도 거들떠보지 않겠다. 시끄러운 너의 노랫소리를 내 앞에서 집어치워라! 너의 거문고 소리도 나는 듣지 않겠다. 너희는, 다만 공의가 물처럼 흐르게 하고, 정의가 마르지 않는 강처럼 흐르게 하여라." 고대 이집트에서 공의(公義), 즉 마아트는 종교적 의무가 아니라 정치적·사회 규범적 의무였다.
- '카'와 함께 인간을 구성하는 또 다른 비물질적 요소는 '바'다. '바'는 사실 다섯 가지 요소 중 가장 설명하기 어렵다. '바'의 가장 기본적인 정의는 '누군가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길 수 있는 파악되지 않는 힘(impressiveness)'이다. 다시 말해, 내가 누군가를 만났을 때 상대에게서 받는 인상, 내가 누군가에게 주는 인상의 배후에 작용하는 힘이 '바'의 기본적인 개념이다.
- 그런데 나에게 인상을 남기는 것이 반드시 사람을 비롯한 생물일 필요는 없다. 우리는 장엄한 자연의 풍광이나 웅장한 건축물에서도 강렬한 인상을 받을 수 있다. 그러므로 생명체가 아닌 대상도 '바'를 가질 수 있을 텐데, 실제 고대 이집트의 문헌을 보면 거대한 문과 같은 무생물에도 '바'가 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때의 '바'는 대상이 주는 독특하거나 경이로운 인상으로 해석될 수 있다. 그러나 사람들이 가장 자주 인상을 주고받는 상대는 다른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내가 타인에게서 받는 인상이나 내가 타인에게 주는 인상이 바로 상대의 '바' 또는 나의 '바'가 된다. 요컨대, '바'는 한 개인이 타인에게 보여줄 수 있는 그만의 개별적이고 고유한 특성이라 할 수 있으며, 따라서 '바'는 일반적으로 '개성(personality)'으로 정의·이해된다. 이집트인은 '바'가 비물질적이긴 하지만 뚜렷한 실체(entity)를 가졌다고 생각했으며, 각 개인의 '바'는 신왕국 시대부터 그의 얼굴에 매의 몸을 한 모습으로 표상되었다. 이때 새의 몸은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바'의 기동성(機動性, mobility)을 구체적인 이미지로 구현한 것이다.
- 고대 이집트인은 사람이 죽으면 '카'와 함께 '바'도 몸에서 떨어져 나오는데, 몸에서 분리된 '카'는 천상에 있는 창조주의 품으로 되돌아가지만 '바'는 마치 영혼(soul)처럼 망자의 몸에 계속 머문다고 믿었다. 죽음을 계기로 육신의 구속에서 자유로워진 '바'는 망자가 영생을 부여받은 다음부터 낮에는 무덤 밖으로 나와 마음대로 돌아다니다가 저녁이 되면 -마치 사람들이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귀가하는 것처럼- 미라로 제작되어 영원히 소멸하지 않을 망자의 육신 속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했다. 이 때문에 사후에 '바'가 몸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사태는 존재의 존속을 위협하는 심각한 위기였다. 이런 사태를 막으려고 <사자의 서>와 같은 장례문서에는 '바'를 다른 초월적인 존재로부터 보호하는 주문이나 '바'가 육신을 영원히 떠나지 않게 하는 주문 등이 수록되어 있다.
- 요즘 유행하는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남녀 주인공이 의식은 그대로인 채로 몸만 바뀌는 상황이 종종 나오는데, 만일 고대 이집트인이이와 같은 상황을 봤더라면 이것은 두 사람의 '바'가 바뀌었기 때문이라고 말했을 것이다. 이처럼 '바'는 구체적인 실체로 구현된 개성 또는 자아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런 이집트인의 관점을 잘 보여주는 예가 앞서 언급한 <한 사람과 그의 바와의 대화>다. 이 작품에서 '바'는 독자적으로 사고하고 판단할 수 있는 존재로서 주인공의 '또 다른 자아'로 묘사된다. 그런데 개성과 내면이 구체화된 '바'는 살아있을 때는 인간을 구성하는 다른 요소와 결합해 있으므로 몸 밖으로 빠져나올 수 없다. 그러나 <시누헤 이야기> B255 행에서는 시누헤가 센와세레트 1세를 알현할 때 너무 긴장한 나머지 '바'가 몸에서 빠져나가는, 다시 말해 '혼이 쏙 빠지는 경험'을 한다.
- 이집트인에게 인간보다 훨씬 강렬한 인상을 줄 수 있는 존재는 신이었다. 그러므로 신이 인간과 마찬가지로 '바'를 소유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특히 권능이 높은 신은 하나 이상의 '바'를 가졌다고 여겼다. 이집트인은 눈에 보이지 않고 다른 감각으로도 감지할 수 없는 신이 인간의 오감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형태로 구현된 것이 바로 신의 '바'라고 생각했다. 한 예로, 신왕국 시대의 이집트인은 하늘에 떠있는 물리적인 태양을 창조주 '아톰의 바'로 생각했다. 다시 말해, 태양은 '아톰의 바'로서 실제로는 인간이 볼 수 없는 창조주의 권능을 현실 세계에서 구현한 존재(자연현상)였다.
- 아울러 신과 신-왕인 파라오가 상대방에게 주는 매우 강렬하고 위압적인 '인상'은 그것을 대면할 준비가 되지 않은 사람에게 굉장한 공포감을 심어줄 수 있었는데, 이런 '바'는 복수형으로 '바우', 즉 '신성한 바들(divine bas)'이라고 불렸다. 이 신성한 바들은 인간이 감히 발휘할 수 없는 매우 강렬한 인상으로서 '장엄', '위엄', '권능'과 같은 의미로 확대해서 해석할 수 있다. 특히 신 또는 파라오에 적대적인 세력 앞에 나타나는 '신성한 바들'은 보기만 해도 화들짝 놀라 감히 도전할 의지를 잃어버리게 만드는 심리적인 효과를 줄 수 있다고 여겨졌다. 이런 맥락에서 '신성한 바들'을 '수호령(守護靈, protective souls)' 정도의 의미로 확대 해석하기도 한다.
- 고대 이집트에서 태양신은 창조주이면서 우주의 순환적인 재생을 상징하는 가장 대표적인 신이었다. 태양신은 또한 창조자이면서 창조된 세상의 지배자이기도 했다. 고대 이집트 창세신화에 따르면 일출은 창조가 끝나는 순간인 동시에 항구적인 순환 주기가 시작되는 순간이다. 태양의 상승과 하강으로 대표되는 이 순환 주기는 창조가 끝나는 시점인 첫 일출을 시작으로 영구히 고착된다. 고대 이집트인에게 태양의 상승과 하강은 태양신이 매일 저녁 하늘의 신 누트의 입으로 들어가 밤새 그 몸속을 통과한 후 매일 아침 하늘의 신의 자궁에서 다시 태어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 이처럼 태양신은 우주적 영역(cosmic sphere), 왕권의 영역(kingshipsphere), 장례의 영역(funerary sphere)에서 재생과 부활을 상징한다. 우주적 영역은 다시 창조의 순간과 창조 후의 순간으로 나뉜다. 창조의 순간 어린아이의 모습을 한 태양신은 태초의 대양(자궁)에서 모습을 드러내면서 창조의 과정을 완성한다.
- 앞서 설명한 것처럼 이집트인은 사람이 죽는 것은 '카'가 몸을 떠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사망 후 사체는 소금의 일종인 천연 탄산소다(natron)에 절여 체내의 습기와 지방을 모두 제거한 후 미라로 처리했는데, 이때 간·폐· 위 · 창자 등과 같은 장기도 몸 밖으로 빼내어 '카노푸스 단지(Canopic jars)'라고 불리는 특수한 용기에 보관했다.
- '카노푸스 단지'의 뚜껑에는 '호루스의 아들(sons of Horus)'이라고 불리는 네 명의 수호신 모습을 새겼는데, 사람 모습을 한 '임세티(Imsety)'는 간을, 비비원숭이의 모습을 한 '하피(Hapy)'는 폐를, 자칼의 모습을 한 '두아무테프(Duamutef)'는 위를, 매의 모습을 한 '케베세누에프(Qebehsenuef)'는 창자를 각각 보호한다고 여겨졌다. 반면, 뇌는 시신을 망가뜨리는 불필요한 장기로 여겨 제거했다. 심장만 유일하게 몸에 남았는데, 이것은 내세에서의 심판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건조작업이 끝나면 고운 아마포로 시신을 감싼 후 기름을 발랐다.
- 사망 시점에서 장례식과 매장까지는 총 70일이 걸렸는데, 이 중 미라 제작에 40일 정도가 소요되었다. 미라로 만들어진 시신은 미라 공방을 떠나 유족에게 인도된 후 공동묘지에 있는 분묘로 옮겨졌다. 공동묘지는 대개 해가 지는 나일강 서안 사막의 절벽지대에 조성되었다. 장례식이 절정에 달할 무렵 신관들은 분묘 입구에 관 또는 망자의 인물상을 세운 후 '개구의식(儀式, Mouth-Opening Ritual)'을 거행했다. 말 그대로 특수한 연장을 이용하여 망자의 입을 여는 의식인데, 이로써 미라를 만드는 과정에서 오감을 잃어버린 망자가 다시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볼 수 있게 된다고 여겼다. '개구의식'이 끝나면 황소를 비롯한 제물을 제단 앞에 바쳤고, 이어 망자의 관을 비롯한 다른 부장품을 분묘에 안치했다.
- 미라가 매장되기 전 행해졌던 장례 의식의 목적은 단순히 망자의 의식을 회복시키는 데만 있지 않았다. 또 다른 목적은 '바'를 몸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게 하는 데 있었다. 이렇게 몸에서 풀려난 '바'는 '카'와 결합했는데, 앞서 설명한 것처럼 '바'와 '카'가 무사히 결합하면 '권능을 가진' 존재인 '아크(akh)'가 되었다. 일단 '아크'가 되면 망자는 죽지 않고 영원히 살 수 있는 존재로 바뀌었다. 이집트인은 만일 '바'가 '카'와 제대로 결합하지 못하면 악령이 되어 사람들에게 불운과 질병을 가져다준다고 생각했다. 사실 <피라미드 텍스트>를 비롯한 이집트의 장례문서는 모두 파라오를 비롯한 모든 망자가 무사히 '아크'가 될 수 있도록 돕기 위해 창작되었다고까지 말할 수 있다.
- 일반인의 분묘는 전실과 묘실로 구성되었다. 미라 처리된 시신은 장례 의식을 거쳐 부장품과 함께 지하에 있는 묘실에 매장되었으며, 이후 외부인, 무엇보다 도굴꾼의 출입을 막으려고 영구히 봉쇄되었다. 반면, 지상에 지어진 추모실은 가족과 친지가 망자의 넋을 기리기 위해 방문할 수 있도록 조성되었으며, 따라서 벽에는 망자의 형상이나 방문객이 분묘의 주인에게 봉헌물을 바치는 장면 등이 벽화나 부조로 묘사되었다. 추모실에서 가장 중요한 공간은 서쪽 벽에 조성된 '가짜 문'이다. '가짜 문'이란 문 모양을 석재나 목재로 재현했지만 사람들이 실제로 드나들 수는 없는 공간을 말한다. 이집트인은 이 공간을 통해 (마치 엘리베이터를 탄 것처럼) 망자의 혼이 현실에서 진실로 이동할 수 있다고 생각했으며, '가짜 문' 앞에 제단을 설치해 전실로 올라온 분묘의 주인이 방문객이 제공한 봉헌물을 취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 '최후의 심판(final judgement)'은 망자가 오시리스가 다스리는 명계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지기 전에 거쳐야 할 마지막 관문이었다. 심판은 저울의 한쪽에는 망자의 심장을, 다른 한쪽에는 마아트를 상징하는 타조 깃털을 올려놓고 둘의 무게를 재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이때 망자의 심장과 마아트를 상징하는 타조 깃털의 무게가 같으면 망자는 이승에서 정의로운 삶을 산 것으로 판정받았고 '진실한 목소리'로 불렸다. 앞서 미라 제작 과정에서 심장만 시신에 보존되었던 것도 바로 이 '최후의 심판'을 염두에 둔 조치였다. '최후의 심판'을 무사히 통과하면 앞서 언급한 것처럼 '바'는 '카'와 결합했으며 망자의 영혼은 '아크'가 되어 영생을 누렸다. 만일 망자의 심장이 타조깃털보다 무거우면 망자의 '바'는 재판정을 지키고 있던 '삼키는 자(devourer)'를 의미하는 '암무트(Amut)'라는 괴물에게 먹혔다. 고대 이집트인에게 있어 암무트에게 먹히는 것은 돌이킬 수 없는 존재의 파멸을 뜻했다. 사후에도 자신을 구성하는 요소가 여전히 존재했으므로 이들이 정말로 두려워했던 것은 죽음이 아니라 최후의 심판에서 자신의 '바'가 괴물에게 먹혀 사라지는 것이었다.
- 당연한 이야기 같지만, 고대 이집트인은 고대 이집트어를 사용했다. 동어반복과 같은 사실을 굳이 언급하는 이유는 현대 이집트인이 아랍어를 사용하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이집트인은 일상생활에서 '마스리(مَصْرِِي)'라고 불리는 아랍어 방언을 사용하는데, '이집트 구어체 아랍어'라고 불리는 이 방언은 '푸스하(اللغة العربية الفصحى)'라고 불리는 현대 표준 아랍어와 원만하게 의사소통을 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차이를 보인다. 그러나 문어체로 문서를 작성할 때라거나 방송 등과 같은 공적인 상황, 또는 현대 표준 아랍어를 사용하는 다른 아랍 국가 사람들과 의사소통할 때는 이집트인도 표준 아랍어를 사용한다.
- 이집트의 상용어가 고유의 토착어에서 아랍어로 대체된 과정은 7세기부터 이슬람 제국이 확장하면서 서아시아와 북아프리카 전역에 걸쳐 아랍어가 현지 언어를 대체한 과정과 매우 유사하다. 이집트는 641년부터 아랍 제국의 지배를 받았는데, 제국의 공용어인 아랍어,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아랍어와 토착 이집트어의 변종이 이집트인의 일상어로 정착한 시점은 11세기 무렵으로 추정된다. 아랍어는 북부에서 먼저 일상어로 자리 잡았으며, 이후 콥트어(Coptic)의 영향력이 강했던 남부로도 퍼졌다.
- 토착 이집트어의 마지막 단계였던 콥트어는 '콥트교도'로 알려진, 기독교로 개종한 이집트인이 <성서>를 번역하고 각종 종교문서를 작성할 때 고대부터 사용하던 문자 체계를 버리고 그리스어 자모(알파벳)를 채택하면서 붙은 이름이다. 콥트어를 기록하는 데 사용되었던 콥트 문자 체계는 자음과 모음을 모두 표현할 수 있었는데, 그 결과 콥트 문자로 작성된 문헌을 통해 고대 이집트어 모음체계의 전모가 처음으로 밝혀질 수 있었다. 콥트 문자는 1세기 말에 처음 등장했으며 이후 약 1,000년간 사용되었다. 마지막 콥트어 문헌은 18세기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 고대 이집트어는 세계에서 가장 오랜 기간에 걸쳐 사용된 언어다. 이 언어를 기록하는 데 사용되었던 최초의 문자는 기원전 3250년경 출현했다. 흔히 '이집트 상형문자'로 알려진 이 문자 체계는 하나하나의 문자가 일정한 의미를 전달하는 표의문자와 말소리를 기호로 나타내는 표음문자가 한데 뒤섞여 있었다. 그 출현 시기는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독특한 문자 체계인 쐐기문자 또는 설형문자(楔形文, cuneiform)가 출현했던 시기와 거의 일치한다.
- 한편, 고대 이집트어는 베자어(Beja)·베르베르어(Berber)·오로모어(Oromo) 같은 아프리카계 언어로 구성된 '함계(Hamitic)' 언어와 아카드어(Akkadian)·히브리어(Hebrew)·아랍어 같은 서아시아의 '셈어계(Semitic)' 언어의 특징을 두루 갖춘 '함-셈' ...
- 다른 모든 문명권에서와 마찬가지로, 고대 이집트에서도 이야기는 언제나 큰 인기가 있었다. 이야기 자체는 이집트 문명만큼, 아니, 이집트 문명이 시작된 때보다 훨씬 오래되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문자로 기록된 이야기 중 가장 오래된 것은 중왕국 시대에 기록 또는 창작되었다. 이 때문에 고대 이집트의 서사문학을 대표하는 작품 대부분은 고전어라고 할 수 있는 중기 이집트어로 쓰였다. 이들 작품 중 일부는 단편만 남아있으나 이집트 문학의 최고 걸작이라고 할 수 있는, <시누헤 이야기>를 제외한 다음 세 작품은 거의 완벽한 상태로 보존되어 전해진다.
- 남아있는 이집트 문학작품 중 가장 오래된 것은 <난파당한 선원(Shipwrecked Sailor)>이다. 이 작품은 단 한 장의 파피루스 필사본을 통해 보존되었는데, 이 파피루스는 현재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Sankt Peterburg)에 소장되어 있다. 중왕국 시대를 이루는 제11왕조 말기 또는 제12왕조 초기에 쓰인 것으로 추정되는 이 이야기는 도입부 없이 바로 시작된다(도입부가 소실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왕의 명령을 받고 탐사에 나섰던 원정대가 이집트의 수도로 무사히 돌아온다. 하지만 이렇다 할 성과를 거두지 못한 원정대장은 파라오가 자신을 벌줄까 두렵다. 그런데 한 선원이 나서더니 자신의 경험담을 통해 원정대장을 안심시키려고 한다. 선원은 이전 원정에서 자신이 겪은 일을 설명하기 시작한다.
- 선원에게는 이번이 첫 원정이 아니다. 그는 전에도 유능한 선원들과 함께 바다로 원정을 나선 적이 있다. 그러나 원정 도중 폭풍을 만나 원정대는 전멸하고 그만 살아남아 한 섬에 도착한다. 난파 후 사흘을 홀로 보낸 선원은 먹을 것을 찾으러 섬을 방황하다가 거대한 뱀을 만난다. 뱀은 무서워서 어쩔 줄 모르는 선원을 안심시킨 후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말해준다. 뱀은 원래 가족과 함께 살았는데, 어느 날 운석이 떨어져 자신을 제외한 다른 가족이 모두 죽었다고 말한다. 그러고는 지금 선원에게 닥친 가혹한 운명을 참고 견디면 곧 다른 원정대가 이곳을 지날 것이고, 선원은 무사히 가족의 품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예언한다. 뱀의 예언대로 원정대가 도착하자 선원은 뱀이 선물해 준 섬의 진귀한 보물들과 함께 이집트로 돌아온다. 그는 보물을 파라오에게 바치고 그 보답으로 파라오는 선원을 진급시키고 하인들을 하사한다. 그는 또한 가족과 재회하는 기쁨을 누린다.
- 이야기 끄트머리에서 선원은 원정대장에게 이번 역경을 이겨내고 다시 희망을 품으라고 말하지만, 원정대장은 "그날 아침 죽을 거위에 새벽에 물을 주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라고 반문한다. <난파당한 선원>은 그 결말이 전형적인 해피엔딩이 아니라는 점, 등장인물의 이름이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 한 이야기 속에 다른 이야기가 포함되는 액자구조(narrative of frame)라는 점에서 고대 이집트에서 창작된 다른 이야기와 확연히 구별된다.
- <난파당한 선원>과 마찬가지로 단 하나의 필사본만 전해지는 <쿠푸 왕과 마법사 이야기 (The Tale of King Khufu's Court)>는 필사본을 처음 소유했던 사람의 이름을 따 흔히 <웨스트카 파피루스(Papyrus Westcar)>라고 불린다. 이 파피루스는 현재 베를린 국립 박물관(Staatliche Museen zu Berlin) 산하 고대 이집트 박물관 및 파피루스 컬렉션(Ägyptischen Museum und Papyrussammlung)에 소장되어 있다.
- 작품은 힉소스 침입기인 제2중간기 제15왕조에 쓰인 것으로 추정된다. 파피루스의 시작 부분과 끝부분은 소실되었다. 남아있는 부분에는 기자고원의 대피라미드를 세운 고왕국 시대 제4왕조 쿠푸의 궁정에서 그의 아들들이 왕을 즐겁게 해 주려고 마법과 관련된 신비한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 첫 번째 이야기는 파피루스의 맨 뒷부분만 남아있어 내용을 알 수 없다.
- 두 번째 이야기에서는 아내가 자기 몰래 부정을 저지른 것을 안 마법사가 아내의 정부를 밀랍으로 만든 악어가 잡아먹게 만든다.
- 세 번째 이야기는 쿠푸 왕의 아버지인 스네페루 치세에 권태에 빠진 왕에게 기쁨을 주고자 궁녀들이 그물로 만든 옷을 입고 궁전의 호수에서 뱃놀이한다는 내용이다. 뱃놀이 도중 한 궁녀가 노 젓기를 멈추자 왕이 이유를 묻는다. 궁녀가 자신의 장신구가 물에 빠져 노를 젓기 싫다고 답하자 왕은 궁정 마법사를 불러 호수의 물 중 반쪽을 떼어내 다른 반쪽과 포갠 후 호수 바닥에서 장신구를 찾아낸다(이 이야기는 <출애굽기>에 등장하는 모세가 홍해에서 행한 기적을 연상시킨다).
- 네 번째 이야기는 쿠푸 왕의 동시대 마법사와 관련되어 있다. 이 마법사가 왕에게 헬리오폴리스에서 태양신을 모시는 한 신관의 아내로부터 제5왕조의 첫 번째 세 왕 -즉, 우세르카에프, 사후레, 네페르이르카레- 이 탄생하리라고 예언한다는 이야기다.
- 마지막 다섯 번째 이야기는 이들 왕의 탄생과 그들의 어머니에 관한 내용인데, 끝부분이 소실되어 결말은 알 수 없다.
- 물론 고대 이집트에는 이보다 더 많은 서사문학 작품이 있었을 것이다. 이와 같은 추정은 여러 이야기가 단편의 형태로 발견된다는 사실을 통해서도 뒷받침된다. 일례로, 한 목부가 늪지대에서 반인반수의 모습을 한 여신을 만나는 이야기는 앞부분만 전해진다. 파라오가 파이윰 호수에서 겪은 모험을 기록한 파피루스 조각도 확인된다. 또한 중왕국 시대의 이야기뿐만 아니라 후기 이집트어와 데모틱어로 적힌 필사본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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