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1

[정세랑] 청기와 주유소 씨름 기담

일루젼 2024. 10. 6.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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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정세랑 / 최영훈

출판 : 창비
출간 : 2019.06.21


       

국민학교와 초등학교를 모두 경험해 본 세대-라고 하면 대략적인 나이대가 나올 것이다. 당시 나는 하교길에 하천을 따라 난 둑길을 걷는 걸 무척 좋아했는데, 훨씬 가까운 보도블럭 길을 두고도 그리로 다녔던 걸 보면 진심이었던 것 같다. (철로를 건너고 싶을 때만 블럭 길로 갔다) 바로 옆이 아파트 단지라 완전한 시골이었다고 하기는 좀 어렵지만, 그런대로 자연적인 삶을 잘 누릴 수 있었다. 

 

둑에서 하천으로 내려가 천변에서 놀다 들어가는 게 일과였다. 메밀을 찾아 씨를 쪼개보기도 하고, 송사리나 개구리, 물잠자리 등을 잡으며 뛰놀았던 기억들은 좋은 추억으로 남아있다. (지금은 곤충들을 쉽게 만지지 못하는 새가슴이 되었지만)

 

매일 가도 매일 바뀌는 물길을 구경하는 것도 큰 재미였다. 특히 노을빛을 받으며 흘러내려가는 강을 보고 있으면 그냥 좋았다. 물비늘이라고 불렀던 그것들에 '윤슬'이라는 이름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 내 이름도 아니지만 더 예쁜 이름이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물비늘이라는 단어도 좋아했었지만 어쩐지 윤슬이 더 좋았다.)

 

고학년이 되며 시내 중심가로 이사하게 되었을 때는 무척 아쉬웠는데... 성인이 되고 다시 찾아가 본 하천은 정비공사가 끝나 더는 내가 기억하던 그곳이 아니었다. 그때 처음으로 '다시는 볼 수 없는 장면'들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머릿속에서는 사진처럼 선명한데도, 그 어디에서도 다시는 볼 수 없는.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매 순간 같은 강이었던 적은 없었다. 그저- 그저 물리적으로 존재하지 않을 뿐이다. 가만히 집중하면 여전히 그 순간의 햇빛, 모래사장의 온도, 불어오는 바람과 옅은 물비린내까지 기억해 낼 수 있다. (때로는 있었을 법하지 않은 일들마저 너무 생생해 고민스러울 정도다.)

 

정세랑의 <청기와 주유소 씨름 기담>은 이런 지점을 담은 책이다. 동화인 것 같으면서도 추억인 것 같은.

 

어린 시절의 힘겨움을 씨름으로 극복하는 주인공인가, 싶었는데 어느 순간 주유소에서 일하고 있다. 그렇게 현실에 맞춰 살아가나, 싶었는데 갑자기 도깨비와 씨름을 해야 한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도깨비보다 곰팡이가 더 무섭다고 말하는 주인공을 낭만적인 동화 속으로 등 떠밀어 보낼 수가 없었다. '살기 위해 무엇이든 해야만 하는' 이들에게 보내는 희망이라고 말하자니 도깨비도 아닌 어둑시니가 손목을 잡아채는 듯이 서늘하다. 

 

이것은, 그냥 기담이다.

기담이 아니었으면, 하는 기담. 

 

 

뱀발 하나. 나는 그 둑길에서 나무에 묶어둔 누렁소를 본 적이 있다. 

하지만 그 인근에 소를 키우는 축사는 몇십 km를 훑어도 없었으며, 그 길은 소를 실은 트럭이 지나다닐 수 있을 만한 길이 아니다. (애초에 둑 위로 올라올 방법이...) 

 

뱀발 둘. 나는 그 둑길을 걸으며 축지법을 쓴 적이 있다. 

무슨 바람이었는지 한 번은 평소 가지 않던 산 쪽으로 방향을 틀어서, 혼자 산을 넘어 귀가했던 적이 있다. 그리 높은 산은 아니었지만 도토리나 밤도 주울 수 있는 동산쯤은 되었다. 그 고갯길을 넘어 다시 내려가야 하니 아이 걸음으로 못 해도 한 시간은 넘게 걸렸어야 했다. (평소보다 늦게 도착할까 봐 그날은 놀지도 않고 하교하자마자 바로 산을 탔다) 

꼭대기쯤에서 발을 헛디디며 미끄러져, 바지 무릎에 흙물을 잔뜩 들이고 집에 도착했는데-

그날따라 집에 계시던 부친이 나를 보자마자 매섭게 화를 내시는 것이었다. 옷을 버려서 그런가 하고 가만가만 듣고 있었더니...

하교하고 곧바로 직선로를 따라 걸어와도 2-30분은 걸릴 거리였는데, 그날 나는 15분도 못 되어 귀가했다는 것이다. 거기다 흙까지 묻히고 돌아왔으니 필시 학교를 빼먹고 다른 곳에서 놀다 온 게 아니냐는 것이 골조였다.

너무 억울해서 한참을 설명했으나, 결국 담임 선생님과 통화까지 마친 뒤에야 미심쩍은 표정으로 어서 씻으라고 하셨더랬다.    

그날 나는 어디를 다녀왔던 걸까?

만약 거기서 그대로 굴러 떨어졌더라면... 

 

마지막. 그리고 몇 년 뒤 나는 소풍을 갔다가 또다시 산에서 미끄러진다.

이때는 청바지가 찢어질 정도로 쓸렸는데, 용케 다치지는 않고 살짝 피가 맺히게 까지는 정도로 하산할 수 있었다. 당시 찢어진 청바지가 유행이었고, 돌에 쓸리며 깨끗하게 찢어지는 바람에 -베였다고도 할 수 있다- 이번에도 내 말을 믿어주시지 않고 일부러 바지를 찢었다고 한참 혼이 나고 말았다. 그러고 보면 나는 어디든 가면 물에 빠지고 산에서 미끄러지고 자잘한 일들을 겪는 편이었는데 용케 잘 살아 있다는 생각을 -이제와- 한다.

 

이제는 그럭저럭 순하게 사는 편인가...?   

 


 

 

- 나는 열 살이 되기 전에 이미 60킬로를 넘었다. 어른들은 뚱뚱한 아이를 보면 모두 그 사실을 알아채지 못하는 척하려고 애를 쓰는데, 나는 대놓고 무례한 사람들만큼이나 지나치게 모른 척하는 사람들 역시 불편했다. 늘씬하고 훤칠한 완성형의 내 모습이 미래의 어딘가에 존재한다고, 듣는 나는 물론 말하는 자기 자신까지도 설득하려 하던 사람들 말이다. 젖살일 뿐이야, 키가 크려고 그래, 나중에 몰라보게 변할 거야... 거짓말쟁이들이 지겨워서 모른 척 말고 못 본 척을 해 주었으면 했다. 항상 숨고 싶었다. 숨기에 나는 너무 커다랬지만.


- 언젠가 할머니와 전철을 타고 먼 길을 가야 했던 날이 있었다. 할머니는 어린 나를 굳이 자기 무릎에 앉혔다. 할머니는 내가 아는 한 최고의 모른 척쟁이였고, 아마도 다리가 저렸을 테지만 맞은편 검은 창에 비친 얼굴은 태연했다. 아마 남들 보기 편한 장면은 아니었을 것이다. 발끝은 가까스로 바닥에 닿았다. 나는 할머니 무릎에 앉은 채 있는 힘껏 다리에 힘을 주었다.


- 맞은편에 앉았던 누나가 기억난다. 그 누나는 아주 귀여운 아이를 발견한 것처럼 나에게 미소 지었다. 그것은 아마도 친절이었겠지만, 아직도 그 얼굴이 기억나는 것을 보면 나는 무척 슬펐거나 어쨌든 그런 유의 미소가 견디기 힘들었던 것 같다.

- "우리 고조할아버지, 집안을 어떻게 일으켜 세우셨게?"
점장님이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글쎄요."
"씨름을 했어."

- "대회에서 한몫 마련하신 거예요?"

"아니, 도깨비랑 씨름을 해서 이겼어."
그 순간 마음속 어딘가가 덜컥했다. 우리 점장님이 멀쩡한 직장 없이 부동산 투기를 시작하더니 결국엔 정신을 놨구나 싶었던 것이다. 내가 대꾸도 못 하고 컵 가장자리를 물고 있자, 점장님은 계속 말하라는 뜻으로 받아들였던 듯하다.

 

- "그 땅이 주유소 자리지. 근데 주진 못하고 빌려주겠다 했대. 50년 동안 진 게 그렇게 싫었나 봐, 그 도깨비는. 50년 후에 네 자손과 씨름을 해서 다시 결정하자고, 재시합을 약속한 거지. 그 땅 자체는 그리 크지도 않지만 그 땅을 손에 넣고 나자 대단한 속도로 부를 모을 수 있었다고 해. 마치 저절로 모이는 것 같았다고 말이야."
"점장님은 그 이야기를 진짜로 믿으시는 거예요?"
"처음엔 믿지 않았어, 처음엔. 그런데 그 땅이 나를 잡아당긴 것처럼 주유소에서 일하게 된 것도 ..."

- "동화책에 나오는 것 같진 않다더라고."
점장님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정말로 믿고 있구나 싶어 나는 좀 아득해졌다. 도깨비의 얼굴을 머릿속으로 그려 보려 했지만 바보 같고 우스꽝스러운 그림밖에 생각나지 않았다. 그런 걸 미리 그릴 수 있을 리 없었다. 

 

- 그믐이라, 하고 나는 대수롭지 않게 중얼거렸던 것 같다. 현대인에게 그믐은 의미를 잃은 지 오래였다. 달이 없어도 거리는 언제나 희게 빛났으니 말이다.

- 모델하우스의 영업은 오후 6시까지였고, 일하는 사람들은 7시 즈음에 전부 퇴근했다. 나는 점장님이 모종의 수를 써 7시 이후에 모델 하우스에 남게 되었다. 문단속에 대한 여러 주의 사항을 전달해 주던 직원은 그 상황을 이상하게 생각했지만 딱히 더 알고 싶어 하진 않았다. 

- 그믐에다가, 늦장마의 한가운데였다. 도깨비보다 곰팡이가 더 무서워서 나는 집을 나와 밤을 보내는 게 오히려 반가울 정도였다. 집에 있으면 숨을 쉴 때마다 곰팡이 포자를 들이마시는 것만 같았다. 그 느낌이 정말이지 지겨워서 도깨비든 뭐든 엎어 버려야겠다고 다시 결심하게 되었다. 돈이 필요했다. 장마철에 끔찍한 집에 살지 않으려면 돈이 필요했다. 한여름과 겨울에 특히나 처참해지던 집이었다.  

 

- 나는 바로 곁에서 배우자의 표정이 변하는 걸 지켜보았다. 전화 내용을 듣지 못한 채로도 코로는 비릿한 비 냄새를 맡았다. 그때까지 내 이야기가 허풍이라 생각했던 배우자는 굳은 얼굴로 어떻게 할까 물었다. 그렇게 물으면서도 내 대답을 미리 알았을 것이다. 

- 약속한 50년이 8년 남았다. 그 사실이 더 나를 아득하게 만든다. 벌써 42년이 지나 버렸다는 것이 충만한 시간이었지만 어떤 날은 바람처럼 지나가 버린 듯 느껴진다.

 

- 문제는 절박하고 절박한 씨름 선수를 어디서 구할 수 있을지다. 그때의 나처럼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듯, 안쪽으로는 살아가는 일의 비참함에 이를 악문 이가 어딘가에 아직은 무른 살로 걷고 있을 텐데. 물 밑에서 걸어 나온 끔찍한 몰골의 도깨비에 등 돌리지 않고, 샅바도 없이 밤새 씨름을 할 스스로의 단단함을 미처 발견하지 못한 이가. 우리는 서로를 도울 수 있을 것이다.

- 어쩐지 머지않은 날, 만나게 될 거라는 예감이 든다. 나를 닮은, 일찍 은퇴한 씨름 선수 한 명이 내 인생에 걸어 들어올 거라는 그런 예감이 8년이 남아 있으니까. 8년이나 남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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