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1

[박서련] 폐월 : 초선전

일루젼 2024. 10. 15.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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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박서련
출판 : 은행나무
출간 : 2024.07.01


       


지난여름 서울 국제 도서전에서 바로 읽고 싶었는데, 어찌저찌하다 보니 가을의 한중간에 와서야 읽게 되었다.

 

그러나 가을에는 가을만의 정취가 있는 법이다.

끝을 모르고 뻗어나가던 기운들이 한 꺼풀 사위고, 이전까지의 것들이 눈에 보이는 결실들로 매듭 지어지는 시기.

그런 시기가 가지는 한껏 날 서고 애상한 정취.

 

내게 <폐월 : 초선전>은 가을에 잘 어울리는 글이었다. 

 

박서련 작가는 삼국지 속에서 가장 빛나는 -적어도 이름자가 제대로 실리었으니- 여성 조연이었던 '초선'을 독특한 시각으로 재조명한다. 그에 관해 떠도는 여러 설들을 모으고 가다듬어 '가장 그럴 법하고' 또 '그럴 수밖에 없는' 이야기를, 잠시도 손을 뗄 수 없을 정도로 흡입력 있게 풀어낸 것이 <폐월 : 초선전>이다.

저자의 '초선'은 '살아있다'.

 

다소 가벼운 마음으로 집어 들었었는데 앉은자리에서 다 읽고 말았다.

하늘 천,으로 시작하는 첫 장을, 그 독백들을 읽고 나면 독자들은 '초선'이 될 수밖에 없다.

 

天으로 시작해 也로 끝나는 이야기. 

天으로 시작해 地을 디디고 살아낸 人의 이야기. 

 

나는 폐월이 애모의 정을 알았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이 진정한 정이 아니었음을, 그녀를 '살아있게' 하지 못함을 아는 순간 그녀의 빛을 다시 거둘 줄 알았다. 

 

과연 부자父子의 정은 인정人情인가? 

피를 잇지 않은 이들과는 다르다 함은 부부의 정을 어찌 설할 것인가.

피를 이었으니 품는다 함은 그것이 결국 자기애에 지나지 않음을 어찌 설할 것인가.

 

인간이 인간을 그 자체로 정情할 수 있음을 믿는가? 

 

그리하여, 나는 그녀가 항아가 되었다고 믿는다.               

           

   


    

 

- 하늘 天.

비록 배운 것 없어도 이 한 글자는 안다. 하나를 큰 것이 떠받들고 있는 모양.

- 예전부터 나는 이 글자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이치를 따지자면 맞는 말이다. 잘 만든 글자다. 세상이 아무리 크다 해도 그 위에 끊임없이 이어져 있는 하늘은 세상보다 더 크다. 끊어짐이 없기에 또한 하나다. 모든 것은 그 크디큰 하나 아래 있다. 

- 그렇지만 그것은 하나다.
열도 백도 천도 아니고 하나다. 모든 것은 여기에 있다. 저기가 아니라 여기 아래에 있다. 세상과 천하는 같은 말이다. 천하가 세상이고, 세상이 천하다.

- 그런데 단지 하늘 하나의 뜻 때문에 세상의 모든 것이 아등바등해야만 한다.

- 하늘의 뜻이라는 것.
그것이 아무리 크다 해도 그 하나가 여기 아래에 있는 모든 것을 합친 것보다 과연 더 큰가.
그것을 도통 알 수가 없다.

 

- 알 수가 없다.
하늘이 사람의 배곯음에 대해 무엇을 알까. 병듦에 대해서, 썩고 스러지고 뒹굴며 신음하게 하는 그 밖의 모든 곤고함에 대해서 알까. 사람처럼 하찮은 것이 얼마나 많은 것으로 어찌나 깊이 괴로워하는가를, 단순히 하나일 뿐인 하늘이 조금이라도 알까.

- 알아야 할까.
알고자 하는 마음인들 있을까.

- 마음.
하늘에는 마음이 없다.
아주 어렸을 때 이미 이것을 깨쳤다. 그리하여 나는 하늘을 믿지 않는다. 하늘에 뜻이 없다는 것을 알아버려서.

- 모르는 것은 나다.
내 이름을 잊어버렸다. 불린 지가 오래되어서.
잊어버린 것이 맞는지 모르겠다. 누가 지어준 기억도 없다. 하지만 누군가 분명 나를 부른 적은 있다. 그런 기억은 있다. 부른다는 것은, 이름을 이른다는 것은, 가까이 오라는 말이다. 여기에서 떠나지 말라는 뜻이다.

 

- 이름이 없는 사람은 어디에도 있을 수 없다.
여기저기 떠돌며 지냈다. 이름 대신 얘, 아가, 계집애, 거지, 꼬마, 불쌍한 것, 도적년, 강아지, 오랑캐, 예쁜이, 벙어리, 막내. 이렇게도 불리고 저렇게도 불렸다. 이렇게 불려도 싫지 않고 저렇게 불려도 좋을 것 없어 어떻게 부르든 나를 부르는가 보다 하며 따라가 빌어먹으며 살았다.

- 살았다.
살았다는 것이 이상하다.
이것은 너무 어리다, 우리 것이 두 살 더 먹었으니 우리 것과 이것을 맞바꾸려면 무엇이든 더 받아야겠다. 삼베 한 폭이라도, 다만 메밀 한 줌이라도. 
이런 세상 어느 집구석에 베가 있고 메밀은 또 어디 있다더냐, 이것이 비록 어리지만 그간 그 집 것보다 잘 먹여 두 근은 더 나갈 것이다, 바꾸기 싫으면 다른 데 가서 알아보아라, 누가 더 손해인지는 하늘이 알 것이다. 

- 하늘.
누군가 하늘을 들먹였다.

- 내가 기억하는 가장 오래된 일은 누군가 나를 잡아먹으려 하던 일이다. 나중에 듣기로 세상이 어지러워지고 온 식구가 굶게 되자 가장 어린 자식이라도 잡아서 먹으려는 자들이 있었는데, 차마 자기 자식을 스스로 잡기는 꺼려져서 이웃끼리 아이를 바꾸었다 한다. 천하 모든 집이 그러지는 않았겠지. 그런데 적어도 내가 살던 집에서는 그랬다. 
나처럼 어른들이 어깨를 꽉 붙들고 놓아주지 않는 이웃 애가 내 눈을 멀뚱멀뚱 보며 마주 서 있었다. 이후에 일어날 일을 저는 모른다는 듯. 모른다. 이 애는 모르는구나. 내가 몰랐듯 이 애도 모르는구나. 그것을 나는 알았다. 
인간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치사하고 더러운 일들을 몰라야 하늘이 될 수 있다. 몰랐기에 그 애는 하늘이고 알아차렸기에 나는 아니었다.

- 나는 달아났다. 그 애는 어떻게 되었을까.
다 배가 고파서 그러는 거다.
나는 그것을 알아버렸다. 이해하고 말았다. 헤아려서는 안 되는 것을 헤아린 바람에 누구도 원망하지 못하게 되었다.

 

- 어떻게 되었을까, 나를 판 자들은.
나를 판 자들이 내 진짜 양친이었을까. 그렇게는 생각하고 싶지 않아서 나는 내 양친이 더 오래전에 죽었을 거라 믿는다. 나를 판 자들은 어디선가 나를 주웠을 것이다. 없는 형편에 모자란 인애로나마 주워 온 고아를 어찌어찌 길러보려 했건만 세상이 흉흉해져 어쩔 수 없이 나를 팔았을 것이라고. 
양친이 내게 지어준 진짜 이름은 무엇이었을까.
나를 주운 사람들이 내게 붙인 이름은 무엇이었을까.

 

- 입이 마른다.
여기에는 나뿐이다.
지금은 천하에 오로지 나뿐이다.
원래부터 나에게는 나와 하늘밖에 없었는지도 모른다.  

- 말 탄 사람은 그냥 보내고 걷는 사람만 털었다. 밤이나 새벽 사이 성문 근처 다리를 건너는 어른은 취해 있거나 겁에 질려 있어서 어렵지도 않았다. 종종 우리는 우리에 대한 소문을 들었다. 다리 아래에 요괴가 산다지. 여기에 요괴가 산대, 하고 겁먹어 떠는 애들더러 바보들아! 우리가 그 요괴다 하고 대장이 소리를 지르고 와하하 웃었다. 소문을 낸 것은 털린 어른일 테지. 애초 취해 있었기 때문인지 얼이 빠져 정말 그렇게 착각한 것인지 어린애들에게 강도를 당한 것이 부끄러워서 그런 소문을 낸 것인지, 그 사정은 알 길이 없다. 아무튼 우리는 절로 거지 떼이자 요괴 떼가 되었다. 
거지 떼이자 요괴 떼인 것이 차라리 낫지 어른은 되고 싶지 않았다.

- 어른이 되어서 좋은 일이 무얼까.
어른 거지들은 밥을 우리처럼 잘 얻어먹지 못했다. 거지가 아닌 어른들이 보았을 때 어린 거지들은 딱하지만 어른 거지들은 한심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어른 거지들은 잘 죽지도 않았다. 운 좋게 품일을 하고 밥을 빌어먹거나 돈을 벌 수 있으니까. 이러니 저러니 해도 어린애들보다는 힘이 있고 수완도 있으니까. 그렇지 못한 어른 거지들 중 몇몇은 우리들 몇몇이 떨어져 다닐 때 우리한테서 밥을 빼앗아 먹었다. 대장을 비롯해 큰 애들이 뭉쳐 있으면 감히 설치지 못하면서 비열하고 용렬하다. 실로 한심하다. 어른 거지들은 거개가 밉고 싫었다. 그런데 어린 거지가 커서 어른거지가 되지 않을 도리는 없다. 
그중에서도 대장이 제일 먼저 어른거지가 될 것이었다.

- 대장은 겁이 없어서 혼자서도 구걸을 잘 다녔다. 시장에서도 구걸을 하고 벼슬아치의 집을 지나면서도 구걸을 했다. 이따금은 얻어맞고 쫓겨나기도 하는 모양이지만 먹거리를 섭섭지 않게 빌어 오는 때가 더 많았다.
어떻게 그렇게 한 거냐고 묻자 대장은 자기에게 좋은 수가 있다고, 내게만 긴밀히 알려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저는 본디 낙양에서 났으며 충신의 후손이오마는 십상시의 농단으로 멸문의 화를 입고 홀로 살아남아 이곳 예주로 흘러들어와 이 꼴이 되었습니다. 긍휼히 여기시어 작으나마 자비를 베푸소서." 

- 얼마나 좋은 수인지 들어나 보마 했는데 정말 좋은 수였다. 수도 낙양에 가신이 얼마나 많고 십상시에 당한 이는 또 얼마나 많은가. 우리처럼 멋모르는 어린애들조차 알 만큼이나 십상시의 악명은 높았고 그래서 얼마든지 팔아먹어도 되었다. 증거가 필요 없고, 속아주면 좋고, 속지 않아도 그만인 거짓말. 그렇지만 대장이 그렇게 어려운 문자를 섞어 막힘없이 지껄이는 것이 놀라웠다. 그게 정말이냐? 내가 묻자 대장은 웃었다. 
"명분이 좋으면 얻어먹기도 좋은 법이다. 아무것도 못 얻어먹으면 본전일 뿐. 그래도 아직은 민심이 살아 있어 충신의 후예라 하면 사람들이 뭐든 쥐여주려고 한다."
하지만 가끔은 감히 거지새끼가 충신의 후예를 참칭 한다며 두들겨 패는 이들도 있겠지. 눈자위가 멍들고 입술이 터진 채로 다리 아래 기어들어오는 꼴을 보면. 

- 대장도 어른이 되지 않고 나도 어른이 되지 않고 늘 잔칫집이나 상갓집 앞을 떠돌며 노래를 부르고 곡을 하고 굶지 않고 살기를 바랐다. 더 나은 것은 바랄 수 없었다. 우리 같은 사람들은 그날 모은 것을 그날 써야 하니까. 남은 것을 넣어둘 데도 없거니와 잘 숨겨봤자 분명 누군가 탐을 내 훔칠 것이고, 그러면 아끼던 것을 쓰지도 못하고 잃는 억울함은 둘째치고 서로를 의심하게 된다. 똘똘 뭉쳐 간신히 살아가는 마당에 서로 미워하게 되어서는 안 된다. 

 

- 태평도를 믿는 이들이 흔히 지니고 다니는 누른 천을 그들은 머리에 두르고 다녔기에 황건黄巾군이라 불렀다. 태평도를 믿는 사람들은 집 앞에 '갑자'라는 글자를 써두었다. 올해가 갑자년이고 갑자년에 천하가 크게 길한다는 태평의 진리를 알고 있음을 나타낸 것이다. 황건군은 갑자를 새긴 집에는 아무 해도 끼치지 않아서 나중에는 태평도를 믿든 믿지 않든 집 앞에 그 글자를 새기게 되었다.

- "나랑 같이 가자."
대장이 그랬다. 대장은 멀쩡한 옷을 강둑의 무른 흙에 더럽혀 물들이고 그것을 말려 머리에 썼다. 그런 짓을 안 해도 거지인데 더 거지 같게 되었다.
"황건군이 곧 사주로 진격할 거란 소문을 들었다. 우리도 언제까지고 이렇게만 살 수는 없지 않냐? 황건군 수장이 새 황제가 된다더라. 따라나서서 작은 공이라도 세우면 먹고살 길이 열릴 거다." 
작은 공?
"그래, 장수까지는 몰라도 졸병 몇은 잡지 않겠어? 설령 그러지 못한다 해도 부지런히 따라다니다 보면 땅 한 뙈기 얻을 요량이 없겠냐."
언제는 충신의 후손이라더니.
"충신 혈통 팔아 먹고살 길이 열리면 백 번 천 번 충성하겠지. 망조 뻔한 나라에 충성이 가당키나 하냐?"

- 대장을 놀리려다 오히려 대장이 정말 충신의 후손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넌 그걸 믿었냐?라고 하는 대신 충심이 왜 소용없는가를 말했기 때문에. 그렇다면 대장을 따르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충신의 후손도 이렇게 만드는 나라라면 대장 말대로 새 세상을 도모하는 게 당연한 것이다. 나는 하늘의 뜻을 믿지 않고, 따라서 태평도를 믿지 않고, 그러므로 황건군에도 마음이 없었으나, 어쩐지 대장은 믿었다. 너는 사람을 잘 믿어서 탈이다. 대장도 때로 그렇게 말했다. 내가 그런가? 모든 사람을 다 믿는 것은 아닌데. 

- "너는 씻지 않아도 얼굴이 곱고 말귀가 밝아 데리고 다니기 답답하지 않으니, 내가 잘 키워서 장차 각시로 삼을 거다."

- 뒤따라 다시 말에 오르며 장수는 말했다.
"하늘의 도를 사칭하여 혹세무민 하는 이들이 나타나지를 않나, 십상시의 횡행으로 너 같은 어린아이가 이 황야를 떠돌게 되지를 않나... 참으로 무도한 세상이다. 무도한 세상이야."
장수는 고삐를 후려 말을 가볍게 달리도록 했다. 나는 곧 울음을 그쳤다. 처음 타보는 말이 무섭고 신기했다.
"나는 황명을 띠고 황건적을 토벌하러 왔단다."
그렇습니까. 나는 대답하고 싶었으나 내가 다리로 간신히 껴안은 말목 위가 심하게 흔들려 정신이 없었다.
"내 형편이 넉넉하진 않아도 모자람 또한 없는지라 너 하나쯤은 거두어 키울 수 있다. 충신의 후손이라는 너를, 더구나 십상시에게 화를 당했다는 너를 내 어찌 모른 척하랴. 그러니 그만 울거라."

- 울음은 그친 지 오래였는데 그가 그렇게 말해서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한 점 의심 없이 내 말을 믿는 것도 이상하게 느껴졌다. 왜 이렇게 내 말을 믿지? 여우가 둔갑한 것인 줄 알았다면서. 바보인가. 어린애 거짓말 하나도 꿰뚫어 보지 못하는 바보.
바보.
나를 바보라고 불렀던 내게 그 거짓말을 가르쳐주었던 사람이 문득 생각났다. 그러자 그쳤던 눈물이 다시 흘렀다.

- "정 눈물이 나거든 그냥 울어라. 그래도 내가 앞으로 너를 어찌 부르면 좋을까를 생각하며 울거라."
이름을 지어 부른다는 것은 가까이 오라는 뜻이다. 멀리 가지 말라는 뜻이다.
곁에 있겠다는 말이다.
나는 몸의 힘을, 별달리 남아 있지도 않았으나 긴장하여 몸을 뻣뻣하게 하던 힘을 풀고 장수에게 기댔다. 그래도 될 것 같아서 그렇게 했다.
장수는 내 등을 받쳐 말에서 떨어지지 않게 잡아주었다.

- 하는 말을 보면 높은 벼슬을 지내는 사람이고 벌여놓은 세간을 보면 보통 부자가 아닌데 그런 사람이 나를 왜 이렇게 대접해 주는 걸까?
어리고 어리석은 내가 잠깐 생각한들 알 수 있는 답이 아니거니와 그의 말대로 곤하디 곤했으므로 어쩔 수 없이 잠들었다.
후가 있으려면 우선 전이 있어야 한다. 뒤가 있는 것에는 반드시 앞이 있다.
내일도 자기가 살아 있을 것을 의심하지 않는 사람에게만 후가 있고, 그런 사람이라야 전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다.
시간이 얼마간 흐르고서야 나는 이것을 알아차렸다. 내게도 이제는 후가 생겼다는 것.
하루는 남의 옷을 입었어도 곧 몸에 맞는 옷을 지어 입을 내일이 온다는 것.

- "기억나지 않습니다."
"그래, 큰 화를 입으면 옛일을 떠올리기가 어렵게 되는 경우도 있다고 하더구나."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수염을 만지며 한동안 서성대다 다시 나를 향해 돌아섰다.
"다시 낙양에 가면 너희 가문을 찾아 너를 돌려주어야 할 것인데 얼마나 가르쳐야 더하지도 않고 덜하지도 않을지 모르겠구나. 여자가 가장 크게 되는 길은 천자를 섬기는 황후나 미인이 되는 것, 아니면 영웅을 보필하는 아내가 되는 것인데, 너무 많이 배우면 욕심을 내서 나라를 그르치고 너무 적게 배우면 그릇이 작아 사내의 뜻을 읽지 못한단다. 어찌 보면 네 평생에 가장 중요한 때가 지금이련만 내가 아이를 길러본 적이 없어 이런 일을 잘 모른다..." 
그가 말하는 동안 나는 다시 고개를 숙이고 배 위에 포개놓은 내 양손만 보았다. 손톱 밑에 티끌 한 점 끼어 있지 않은, 잘 씻고 보니 희고 잘 먹고 보니 부드러운 손. 
"제 이름도 모르는 아이인데..."
그가 긴 한숨에 섞어 한 말에 내내 궁금하던 것이 떠올랐다.

"제게 은인의 이름을 알려주십시오."

 

- "저의 아버지가 되어주신단 말입니까?" 

"네 뜻도 그렇다면 말이다."

어두워 잘 보이지 않는 얼굴로 왕공은 믿기지 않는 말을 하고 있었다.
주워온 아이인데도 이렇게 융숭히 대접해 주는 사람이라면 가족에게는 더 극진할 것이다. 그건 내 눈으로 내 손금 들여다보듯 훤히 알 수 있는 일이었다. 그렇지만 그가 왜 그런 말을 하는가는 알 수 없었다. 훤한 손금을 내 눈으로 보면서도 내 운명을 읽어내지는 못하듯이. 

- 생각나는 이유는 오직 하나뿐. 내가 충신의 자손인 줄로만 알고 있어서.


- 내가 오랫동안 말이 없자 그가 입을 열었다. 내 짐작이 옳다는 것을 알려주려는 듯이.
"끝내 네 집안을 찾아 너를 돌려주지 못하면 나라도 나서서 너의 혼처를 알아보아야 할 터인데, 그때 가서 왕 씨가 아이를 게을리 키웠다는 말을 듣기는 싫구나. 잠시 맡은 아이가 아니라 내 딸이라 여겨야 그런 일이 없겠지."
"베풀어주시는 은혜에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내가 간신히 대답한 다음에야 그는 평소처럼 호기롭게 소리 내 웃었다.
"아버지한테 너무 내외를 하는구나!"

그런가.  

- 아버지처럼 자사가 되고 싶다는 내 말에 아버지는 한번 크게 웃고 말했다. 아비가 일러주지 않았니, 여자로 가장 크게 되는 길은 천자의, 태자의 비가 되는 것이다. 자사 같은 것은 손발이 곤하기나 하지 실속이 없으니 생각도 말려무나.
더 나중에 아버지는 이런 말도 한 적이 있다.
이런 난세에 계집으로 태어나 얼마나 다행이냐. 사내놈들은 예와 법을 모르고 분수도 깨닫지 못한 채로 영웅이 되겠다며 날뛰다 죽는데 여자가 되어서는 그런 일이 없지 않니.

- 그렇지만 그때, 아버지가 자사 같은 것은 생각도 말라던 때에 나는 어려서 아버지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계속 고집을 부렸다. 저도 자사가 되고 싶습니다. 아버지처럼. 왜냐하면 어떤 아이도 다리 밑에서 굶어 죽는 일이 없게 하고 싶어서. 아버지는 그제야 여자에게는 벼슬을 주지 않는다고 말했다. 정말 여자는 관리가 될 수 없습니까? 그래, 여인으로서 관모에 손댈 수 있는 자는 오직 초선뿐이란다.

- 초선관모는 담비[貂] 털과 매미[蟬] 날개로 만들어 망가지기가 쉽다. 삼공이나 그 이상 가는 높은 관직에 오른 사람의 집에나 황제의 곁에는 그 관만을 모시고 손보는 여인을 둔다. 그런 여인을 초선이라 부른다.

- 그러면 저도 초선이 되겠습니다.
아버지의 말을 다 듣고 나는 그렇게 말했다.
그래, 언젠가 아비가 초선관을 받거든 네가 그것을 돌보고, 훗날 네 지아비가 초선관을 쓸 차례가 되면 그 또한 네가 돌보거라.

- 그날부터 나는 초선이라 불리게 되었다.

- 왕공을 아버지라 부르게 되면서는 조반을 함께하는 일이 없어졌다. <예기>에 이르기를 비제비상 불상수기 非祭非喪 不相授器, 남자와 여자는 제사 때나 상을 당했을 때가 아니면 서로 그릇을 주고받는 일이 없어야 하기 때문에, 나를 손님으로 여길 동안에는 살을 잘 찌우려고 조반이나마 보면서 먹이려 했으나 이제는 가족이니 법도대로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 이상한 법도도 다 있군. 거지일 적에는 얻어온 것을 한자리에 둘러앉아 나눠 먹었는데. 너무 배가 고파 얻은 음식을 몰래 먼저 먹고 애초 조금밖에 얻지 못한 척한 적은 있지만, 많지만, 실은 매번 그랬지만, 음식을 앞에 두고 누구는 여기서 먹고 누구는 저리 가서 따로 먹으라 한 적은 없었다. 감히 <예기>에 나온 법도가 어린 거지 떼의 의리보다 못하다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 별명처럼 불리던 초선이라는 이름이 귀에 익게 되었을 즈음부터는 글을 배웠다. 종복들 중에 조금 학식이 있는 자가 집사 노릇을 하며 아버지의 세간 살림을 돌보고 있었는데 그가 나를 가르치게 되었다. 이럭저럭 못 읽는 글자가 없게 되었을 즈음부터 배운 것이 <예기>의 내칙편이었다. 뼈대 있는 집안의 여식인 체하려면 아버지가 조반을 함께하자 할 적부터 남녀가 유별하니 말씀을 거두어달라 청했어야 한다는 것을 뒤늦게 알았다. 그래서 이따금은 그런 생각도 들었다. 어쩌면 아버지는 내가 본데없이 뒹굴며 자랐음을 이미 꿰뚫어 보지 않았을까.

- 집사는 아버지가 문무양도 출중하고 충심 또한 곧고 정하여 왕좌지재王佐之才라 불린다 일러주었다. 나라에서 제일가는 신하, 천자를 보좌할 인재라 불리는 대단한 사람이 내 얄팍한 거짓말 같은 것에 속을 리 없지. 맹랑한 아이 하나가 그 순간을 모면하려고 둘러댄 임기응변을 그리 간단히 믿을 리 없지. 그 생각은 대개 속이 타들어가게 만드는 불안이었으나 얼마간 달콤한 부분도 없지 않았다.
누구에게도 속을 리 없는 아버지, 나의 현명한 아버지가 한편 끝없이 너그럽기도 하여, 내게만은, 나의 뻔한 거짓말에만은 눈감아주는 것이 아닐까를.. 그러면 얼마나 좋을까를, 나는 내내 생각했던 것이다.

- 계절이 몇 번 바뀌었다.
<시경> 주남편에 이르기를 그윽하고 정숙하고 맑은 여인이 군자의 좋은 짝이라 하였다. 그런 여인이 되라는 가르침을 받는 동안에 나는 키가 자라고 살이 올랐다. 빌어먹고 다니던 시절에 못다 자란 것을 보상해야겠다는 듯. 아침에 소세할 물을 받아두고 대야에 뜬 동심원이 가라앉기를 기다리면 낯선 얼굴이 떠올랐다. 
사람의 낯을 비추는 거울이라는 물건이 있다는 것을 들어서 알고는 있었지만 아버지를 만나기 전에는 본 적 없었다. 거울은 동판을 갈아 반들반들하게 만드는 것이어서 무척 비쌌다. 그래서 나는 내가 어떻게 생겼는지를 잘 몰랐다.
어린 거지 떼끼리는 서로 어떻게 생겼는지 이야기해 주며 놀기도 했다. 너는 눈이 크다. 작다. 코가 높다. 낮다. 넓다. 좁다. 눈썹이. 입술이 뺨이 귓불이 못났거나 잘났거나 이도 저도 아니거나.

- 아버지가 아시면 어찌 될까?
내가 한 거짓말이 아버지 앞에 엎질러지면.
거짓말은 들통에 부어 끓인 오물 같다. 더럽고 냄새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뜨겁기까지 해서 사람을 다치게 할 수가 있다.
내가 아버지에게 고한 거짓은 단 한 가지뿐이다. 그렇지만 아버지는 그 한 가지 거짓을 믿고 나를 딸로 삼았다.

- 아버지, 나를 귀애하는 아버지.
이 초선을 아끼시지요?
집안의 모든 종복이며 시비들을 통튼 것보다도 예뻐하시지요?
온 예주의 모든 백성 목숨을 다 헤아려도 저 하나를 당하지는 못하겠지요?

 

- 아버지. 저도 그렇습니다.
그렇기에 아버지에게만큼은 들키지 않기를 바랐다. 비단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이미 나를 듬뿍 아끼게 된 아버지를 위해서.

- 목숨을 내놓을 각오로 거짓말을 하다 보면 어느덧 그것이 참이 되기도 한다. 시늉도 백 번이 되고 천 번이 되면 더는 시늉이라 할 수 없게 되는 이치다. 하지만 신분만은 시늉으로 고칠 수 없다. 천출이 천 번 만 번 귀인 행세를 해봤자 무소용이다. 저 스스로 천하다는 것을 잊어야 진정으로 귀한 행세를 할 수 있는데, 천하지 않으려 애씀이 이미 천한 것이다. 제가 천한 것을 모르면 귀하려 애쓰지도 않는다.

 

- 불운하게도 나는 내가 천한 것을 알고 말았다. 그렇다면 적어도 이를 아는 사람은 천하에 나 하나뿐이어야 했다.
어디서 나타났는지도 모를 미천한 계집종 하나가 아버지에게 나의 정체를 일러바치게 둘 수는 없었다.

- 그때껏 집에서 일하는 종들에게는 관심이 없었다.
그들이 나보다 아랫사람이어서는 아니었다. 우선 신분의 높고 낮음을 어림잡을 줄 안 지가 얼마 되지 않았다. 이 집에서는 아버지가 제일 높고, 종들은 모두 그 아래에 있고, 아버지가 나를 종들보다 위에 두었다. 종복들과 시비들 사이에도 차례와 서열이 있다는 것을 나는 굳이 알 필요가 없었다. 
얼굴을 익히고 사람을 구별하는 재주가 적기도 했다. 

 

 

- "그러면 어떻게 되는 거지?"
"예주에서 혼사를 치르시겠지요."
내 물음에 집사는 무슨 당연한 소리를 하느냐는 듯 웃으며 말했다.
"아니, 그런 말이 아니야."
"그러면요, 아기씨?"
"나는 예주 사람의 아내로 예주에서 살고, 아버지는 낙양으로 가시고?"
"그렇게 되겠지요."
싫은데, 그런 것은.

 

- "물론 주인어른께서도 아기씨를 이런 고장의 관리쯤이 아니라 천자를 곁에서 모시는 높디높은 분께 보내고 싶으실 것이니 염려 놓으십시오. 다만 확언할 수 없는 앞일이다 보니."
내 얼굴이 어두워졌음을 그제야 알아차렸는지 집사는 손을 내저으며 얼버무렸다.
"소인이 쓸데없는 소리를 너무 늘어놓았습니다. 부디 괘념치 마십시오."
"아니야, 마음 써주어 고맙네."
집사는 눈썹을 팔자로 모으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찌 이리 심성이 고우십니까. 소인 같은 아랫것에게 고맙다, 미안하다 말씀을 아끼지 않으시니."
어찌라는 말을 붙이자면, 집사가 내가 별 마음도 담지 않고 건넨 말에 돈이라도 받은 듯이 감격하는 거야말로 어찌가 아닌가. 그에 말문이 막혀 잠자코 있자 집사는 죽간을 거두어 척척 접었다. 
"오늘은 이것으로 마칠까 합니다. 후원 구경이라도 하시는 게 어떠신지요? 사람을 붙여드리겠습니다."

- 붙이겠다는 사람은 물론 그 여종이겠지. 생각만 해도 한숨이 나오는 일이었다. 마다할 수도 없었다. 뾰족한 까닭도 없이 그 애를 싫다 했다가 오히려 일을 그르칠 수가 있으니까.
내내 딴생각을 하느라 공부는 제대로 하지 못했지만 그 무엇보다 중요한 것을 배웠다. 원하는 바를 곧이곧대로 내보이면 도리어 그것이 멀어진다는 것. 이 난국을 제대로 헤쳐 나갈 묘수가 보이기 전까지는 계집종을 가까이 해두는 게 좋겠다고 나는 생각했다. 

- 그 애를 떼놓고 아버지를 따라 낙양으로 갈 수는 없을까? 나를 아는 사람이 아예 없는 곳으로 안전하게 달아날 도리는 없는 걸까.

- 너는 참 곱게 생겼지만 잘 웃지도 않고 통 울지도 않아서 목석같다.
다른 애들을 봐라. 먹은 것 없어 기운도 없는데 하루 종일 뭐가 좋은지 쟁쟁거리고 깔깔거리지 않니. 배가 고프다며 울기도 잘 울고.
그렇게 말했던 건 아마도 대장. 나는 이렇게 되물었던 것 같다. 대장처럼 큰 아이들도 잘 웃지도 잘 울지도 않지 않느냐고.
그건 말마따나 조금 커서 그런 거다. 사람은 말이야, 어른이 될수록 감동도 적어지고 표정도 적어진다. 어리면 어린 대로 웃음이 나면 웃고 눈물이 나면 울어야지.
하지만 나는 정말이지 웃음이 날 때에만 웃고 눈물이 날 때에만 우는데.
우리 같은 처지일수록 그래선 안 된다. 나를 봐라. 너희들 앞에선 큰형님이랍시고 무게를 잡지만 구걸을 할 때에는 우는 시늉도 하고 감사하다고 굽신거릴 때에는 헤실헤실 잘 웃지 않니.

 

- 시늉, 시늉이 중하다. 약할수록 시늉을 잘해야 돼...
몸을 일으키자 비단 이불이 부스럭거리며 흘러내렸다. 두화는 잠들어 있었다. 위아래 너비가 내 침상 가로 너비만도 지 않는 작은 간이 침상에, 내 발아래 누워 세상모르고 잠들어 있었다. 한참 동안 나는 그 애의 몸뚱이가 그려낸 어둡고 굽이진 그림자를 바라보았다.

- 이제야 대장의 말뜻을 조금 알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딱히 기쁘지 않아도 기쁜 체하는 법, 슬프지 않아도 슬픈 체하는 법을 알아야 했다.
좋아하지 않아도 좋아하는 것처럼 보이게.
싫어도 싫지 않은 것처럼 보일 수 있게.
그러는 법을 알아야 사람을 뜻대로 부릴 수 있음을 대장은 진작에 내게 가르쳐준 것이었다.

- 한편 두화는 느끼고 생각하는 바가 만면에 낱낱이 드러나는 아이였다. 제 딴에는 제가 나를 교묘하게 주무르고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는데, 그 수가 얕고 빤해서 모른 체해주는 게 더욱 힘든 노릇이었다. 

 

- 가령 이러했다.
"아기씨, 닭고기는 아무래도 삶고 국물을 내는 것보다 굽고 지져 노릇하게 먹는 게 맛있지요?"
두화는 내 침소에 머물면서 식사도 함께하게 되었는데, 상은 따로 썼지만 찬은 내 상에 오르는 것을 몇 가지 나누어 받는 식이었다. 나는 아버지와 같은 상을 받으므로 두화도 아버지와 같은 것을 먹는 셈이 되었다. 삶고 국물을 내 연하게 만든 닭고기 요리는 연세가 높은 아버지의 입맛대로 한 것이었고 두화는 그게 마음에 들지 않는 듯했다.

- 어찌 나오는지 보려고 곧이곧대로 말해주었다. 아버지 입맛에 맞게 지은 것이어서 나도 이게 좋다고. 곁눈질로 보니 두화는 입을 딱 다물고 젓가락도 딱 소리 나게 상에 내려놓았다. 이게 감히 윗전 앞에서,라고 꾸짖을 수도 있고 종복들더러 데려가라 하여 매질을 할 수도 있었지만 참고, 잠깐 뜸을 들이다 이렇게 말해주었다.
"먹어본 기억이 없어 맛을 모르는지도 모르지. 궁금한데 한번 구워달라고 여쭤나 볼까."
그러자 두화는 내가 눈을 돌리지 않아도 그 기뻐하는 기색이 보일 만큼 팔을 휘적거리고 힉힉 소리를 내며 호들갑을 떨었다.

- "가끔 물 구경이나 하시면 좋지 않겠어요?"
옛날 생각도 나실 테고... 두화가 작은 소리로 그렇게 덧붙인 게 맞는지 내가 없는 말을 들은 듯 착각하는 것인지 영 헷갈렸다.
"그럴까? 후원에 작은 못이라도 파자고 아버지께 말씀 드릴까?"
"그래요 아기씨, 너무 좋은 생각이셔요."
좋은 생각은, 내 생각이 아니라 네 생각이어서 그렇겠지. 만면 득의양양한 기색이 꼴 보기 싫으면서도 나도 두화를 보고 웃어주었다. 그래, 그렇게 생각하렴. 이 집에서 제일 높은 어른이 양녀라면 사족을 못 쓰고, 그 양녀는 제 몸종이 하자는 대로 다하는 천치인가 보다 여기렴. 이 집의 실세가 된 듯 기세등등해져 보란 말이야. 

- 아버지는 기뻐하셨다. 여태껏 먼저 무얼 달라거나 떼쓰는 법이 없던 내가 요 얼마간 이것저것 요구한 것이 아이다워 흡족한 듯했다. 짐짓 엄한 얼굴로 더 크면 이런 큰 청은 들어주지 않을 것이다, 아직은 어리고 별히 호사를 누려본 적 없는 것을 알아서 들어주는 것이다. 알겠느냐, 하시는 아버지 앞에서 예를 갖추어 인사를 올렸다. 
아버지, 실은 저는 바라는 게 없습니다. 아버지 곁에 오래오래 있고자 할 뿐입니다.
그렇게 털어놓고 싶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 다음날로 공사가 시작되었다. 풍수를 본다는 도사가 한 명, 도사가 데려온 일꾼이 두 명, 집에서 일하던 종이 다섯 명 붙어 후원에 못 팔 자리를 보러 다녔고 곧 삽을 꽂았다.
"아기씨, 땅 파는 것 구경하러 가요."
두화는 언제나처럼 허튼 일을 졸라댔다.
"못이 다 되거든 보러 갈 일이지 땅파기가 무슨 구경거리라고 거길 가니?"
"제가 언제 아기씨한테 해 될 것 권한 적 있나요?"
그 말이 묘하게 들려 끝까지 사양하지 못하고 두화를 따라 후원에 갔다.

- 구경거리는 구경거리였다. 오며 가며 보는 집안의 종복들이야 유별날 것이 없었지만 풍수꾼이 데려온 청년들이 그러했다. 웃옷을 벗어놓고 바지를 무릎 한 뼘 위까지 접어 올려 거의 벗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거지 떼와 어울릴 적 헐벗은 어린아이는 얼마든지 보았지만 다 큰 남자의 맨몸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다른 몸이구나.
한동안 나는 장정들의 몸을 유심히 보았다. 팔과 가슴을 잇는 힘줄이 움직이는 것이나 장딴지와 허벅지가 무른 흙에 반발하며 단단하게 뭉치는 것이나 흐르는 땀과 묻은 흙과 몸에 난 털이 서로 섞이고 누웠다 서는 것 등을 샅샅이 보았다.
남자들의 몸은 저렇게 생겼구나.

- "그이가 아기씨를 뵙고 싶어 했어요."
그런 것이었나. 후원에 못을 파라고 종용한 것은 어떻게든 대장을 집 안으로 끌어들여 나와 마주치게 하려는 수작이었나. 아둔하다는 평가는 거두어야겠다. 수완이 영 없지는 않구나.
"그이는 잠시만이라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게 해 달랬는데, 아기씨가 싫다시면 제가 말을 전할게요."
내가 언제 싫다고 했지. 두화가 내 의중을 넘겨짚으려는 것이 우습고 같잖았다. 아니, 읽으려는 뜻이나 있었을까. 생각건대 내 속을 떠본 것이 아니라 제 뜻을 넌지시 밝힌 것이었으리라.

- 대나무 조각에 새겨진 작은 글씨는 아흐레쯤 뒤를 가리키는 숫자와 짧은 글귀로 이루어져 있었다.
"뭐라 다른 말은 없었니?"
대장이 나를 직접 만나지 않고 두화를 통해 중요한 이야기를 전할 리 없거니와, 그런 이야기를 들었어도 두화가 내게 곧이곧대로 말해줄 리 없다 생각하면서도 나는 물었다.
"그리도 궁금하시면 아기씨가 직접 나와보시지 그러셨어요?"
그러면 그렇지.

 

- "됐다. 수고했어. 자리에나 들자꾸나."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두화는 제 침상에 발랑 드러누워 있었다.
"에유, 이제 더러운 노릇도 끝이다, 끝."
나 역시 저 애를 아둔하다 여기기는 하지만, 저 애는 또 얼마나 나를 바보로 알기에 저런 소리를 들으란 듯 하는 걸까. 나도 거지 패거리에 섞여 밥 빌어먹으며 살던 사람이어서 눈치라면 누구 못지않게 빠른데.

- 대장이 두화를 통해 내게 보낸 대나무 조각에는 일자와 함께 '면사지편'이라는 말이 쓰여 있었다.
죽음을 면하게 해주는 조각, 지니고 있으면 죽음을 당하지 않는 조각. 바꾸어 말하면 이 조각을 지니지 못한 자는 죽음을 당한다는 말. 단순히 나를 데리고 달아나는 것만이 대장의 생각은 아닌 듯했고, 따라서 이제 더러운 노릇도 끝이라는 두화의 말 또한 흘려들을 수 없었다.

- "아기씨, 주인어른께서 급히 찾으십니다."
집사였다. 나는 서둘러 머리를 매만지며 침상을 나섰다. 조반조차 나와 함께하시지 못하는 아버지께서 아침부터 나를 찾는 것은 보통 일의 조짐이 아니었다. 서두르다 보니 나를 보는 집사의 눈길이 평소와는 다르다는 것도 아버지 침소에 들기 전까지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문턱을 넘을 즈음에야 집사가 나를 위아래로 유심히 보고 있었다는 것, 그것은 그가 내게 한 번도 보인 적 없는 불손한 태도라는 것을 의식했으나, 아버지를 뵙는 것이 먼저여서 따질 틈이 없었다. 
 
- 들어서자마자 손을 모으고 머리를 조아린 나에게 아버지는 말씀하셨다. 분부하신 대로 몇 걸음 앞으로 가 고개를 들자, 그 어느 때에도 내겐 보이신 바 없는 노기탱천한 아버지의 얼굴이 보였다.
아아, 저것이 아버지가 전장에서 짓고 계신 표정이겠구나.

- 아버지는 문관이지만 장수이시기도 하다는 것을 나는 한참 잊고 지냈다. 그전에는 자주 궁금해했었다. 한없이 부드럽고 점잖으시며 다정하신 나의 아버지, 화 같은 것은 평생 한 번도 내본 적 없을 듯한 인자한 나의 아버지가 도대체 어떻게 적들을 섬멸하시는지. 이렇겠구나, 아버지는 전장에서 이런 표정을 지으시겠구나. 그것을 깨달아 기쁘면서도 슬펐다. 지금 아버지께서는 적들을 벨 때의 모습으로 날 대하고 계시구나.

- "바른대로 말하란 말이다. 아직도 네 출신이 기억나지 않느냐?"
밤사이 나는, 두화가 날 밝기 무섭게 아버지를 찾아가리라는 것을 빼놓고는 이런저런 생각을 이미 정리해 놓은 참이었지만, 꾸짖는 듯한 아버지의 말씀에 잠시 말문이 막혔다.
그것이 그리 중합니까?
그간 아버지께서 저를 귀애하셨던 세월이며 제가 아버지를 혈육보다도 따랐던 시간보다 저의 진짜 신분이 더 중합니까? 아직은 저를 믿는다는 말씀은 제가 꾸며낸 신분을 믿는다는 말씀입니까? 제가 그간 아버지께 보인 진솔하고 성실한 딸로서의 태도가 아니라?

- 아버지는 헛웃음을 터뜨리셨다. 외마디로 튀어나온 웃음소리가 온 방안을 울렸다.
"네 어찌 너를 그들에 빗대느냐."
"제가 그들 같은 인물이란 말이 아니오이다. 한때 거지 패거리와 어울린 것은 참이로되 그 이전은 기억하지 못하며 증명할 수 없다는 말씀이옵니다. 아버지께서 믿어주시지 않으면 제가 살길이 없나이다." 
"그저 믿어야 한다?"

나는 다시 고개를 조아렸다. 아버지는 말씀이 없으셨다. 수염을 쓰다듬고 계시겠지. 분을 다스리고 다시 나를 보시려 하는 것이겠지. 이상할 만큼이나 마음은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으나 그와는 따로, 어쩐지 자꾸 눈물이 나려 했다. 눈물을 참으려 입술을 깨물며 나는 아버지의 처분을 기다렸다.

 

- "너를 믿는다."
아버지께서 한참 만에 말씀하셨다. 기쁘고 기꺼운 말씀이었으나 마냥 그렇지만은 않았다. 나는 아버지가 거짓말을 하고 계시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아버지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기에 아버지가 먼저 내게 속아주셨으니 나 역시 한 번은 아버지께 속아드려야 마땅하련만, 나는 그럴 수 있을 만큼 어질거나 아둔하지가 못했다.
"하오면 아버지, 이것을 보소서."

- "하지만..."
아버지는 망설이셨다. 어질게도 나를 위해 망설여주셨다.
"네 말대로 하는 것은 군사적으로 모범된 작전이다. 그러나 그러려면 네가 고초를 겪어야 하지 않니."
"아버지..."
나는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더욱 조아렸다.
"아버지께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소녀는 어떤 고초든 달게 겪을 수 있나이다."
이것이야말로 내 속에서 나온 뜻 중 가장 참된 것이었다.

- 두화와 대장이 남긴 단서를 짜 맞추어 만든 내 이야기를 나는 다 믿지 않았다. 앞뒤가 맞는 이야기인 한편, 빠져나갈 구멍이 많아 내게 유리하다고만 여겼다. 나를 데리고 간답시고 대장이 올 것만은 확실했고, 딱 한 사람 대장만 잡혀도 아버지는 내 말이 옳았다 생각하실 테니까.
곳간 문이 열리고 펼쳐진 광경은 기대 이상이었다.  


- 나는 내가 아버지에게 과장된 이야기를 들려드린 줄 알았는데, 실은 그것이야말로 착각이었겠다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애초 그들의 목표는 자사 왕윤의 목이었고, 그의 양녀를 납치하는 것은 무리 중 하나, 내가 아는 대장만의 사적인 목표였던 거다.

- "낙양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아버지는 뚜렷한 기쁨을 점잖게 숨기며 말씀하셨다.
"다 네 덕이다. 네 공이야."
아버지가 기뻐하셔서 나도 기뻤지만 머리 한구석이 어지럽기도 했다. 모든 것이 그렇게 맞아떨어졌던 것은 왜였을까. 나조차도 이것은 꾸며낸 이야기라 생각하며 고한 것이 어째서 다 사실로 드러났을까. 못 파러 온 일꾼들은 어찌 모두 태평도를 믿고 있었으며 대장도 두화도 태평도를 따른 것은 왜였을까. 사실 집 밖의 모두가 예주 백성 대부분이 태평도를 믿고 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러니까 칼을 휘둘렀는데 운 좋게 황건의 무리에만 닿은 것이 아니라, 실은 칼 닿는 곳에 있는 사람 누구나가 황건을 품고 있어 그중 누구를 쳐도 황건적을 죽여 공을 세운 셈이 되는 게 아닐까? 

- 얼마 전까지는 아버지를 지아비로 모실 생각까지 한 것을 오히려 당연하다면 당연하게 생각되었다. 모르는 사람과 다리를 엮는 것보다야 아버지와... 어르신과 그렇게 눕는 것이 바른 일처럼 여겨졌다.
"미친년."
도화가 툭 내뱉고 돌아누웠다. 그렇게 말이 없던 애가 갑자기 욕을 하니 좀체 화나는 일이 없는 나도 부아가 확 치밀었다.

"아니면 아니라고 하지 왜 욕을 하고 그래?"
"어르신과 그러는 사람은 처첩이지 가기가 아니라."
그 또한 이치에 맞는 말 같았다. 그런데 그러고 보면 처첩은 두지 않고 가기만 부리는 아버지도 이해하기 어려운 분 같았다. 사내들이 그 짓을 그렇게 좋아한다면 아버지는 어째서 남 좋은 일만 하시는가. 
"아버지의 속을 헤아릴 수가 없어."
도화는 대답하지 않았다.

- "나를 버리지 않고 내처로 보내신 것도 그래, 나를 아끼시니 버리지 않은 것일 테지만, 왜 지아비로 섬기게는 해주시지 않는 걸까..."
"바보구나."
도화가 웅얼거렸다.
"자는 줄 알았네."
"널 버리긴 왜 버리니. 가르칠 것 다 가르쳤지, 얼굴 예쁘지."
"내가 예뻐?"
도화는 또 대답하지 않았다. 가만 보니 제가 대답하고 싶은 말에만 대답하는 못된 버릇이 있는 애였다.

 

- "나는 사람의 미추를 모르겠다."
도화는 꾸물거리며 다시 나를 향해 돌아누웠다.

"애초에 다 똑같이 보이니까. 생김새로 사람을 구분할 줄 모르는데 얼굴이 잘나고 못난 건 어떻게 알겠니."
"너는 몰라?"
"뭐를?"
"네가 예쁜 걸 몰라?"


- 언성을 높이는 일은커녕 말수 자체가 적은 도화가 벌컥 화를 내며 물었다. 내가 예쁜데 왜 네가 화를 내지? 그보다, 예쁜 게 무슨 소용이지? 어차피 아버지는 나를 거들떠보지도 않으시는데. 가슴이 답답해져 눈물이 나려고 했다. 나도 모르게 울음 섞인 목소리로 물은 것은 목과 가슴을 옥죄는 그 괴로움 때문이었다.
 
- 가마 밖에서 옥이 깨지는 소리가 일정하게 들려왔다. 나는 봉선에게 말할까 말까 망설였다. 그대에게서 피비린내가 납니다. 저 멀리로 가주세요. 왜 그런 냄새가 나는 것일까. 군인이기 때문인가. 하지만 나의 아버지도 군인인데, 나는 아버지에게서 불쾌한 냄새를 맡은 적이 없었다.
"그대에게서 피 냄새가 난다."
내가 봉선에게 하려던 말을 봉선이 내게 던졌다. 나는 황당해서 가마 창의 발을 걷고 밖을 내다보았다.
"소인이 아니라 귀공에게서 나는 냄새겠지요."
"분명 이 몸에도 피 냄새는 배 있겠지만, 그대에게서도 난다. 내게서 나는 냄새와는 다른 것이다."

- 몸에서 좋은 냄새가 나게 하려고 하루 종일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향을 피워대는데, 지금도 가슴팍에 향낭을 품고 있는데 이 무슨 실례인가. 내가 불쾌해져 창 안으로 얼굴을 집어넣자 봉선은 말했다.
"월사가 나오는 것 아닌가?"

- 나는 그 말을 듣고서야 겹겹의 옷을 걷고 헤집어보았다.  

- 그것이 나의 첫 월사였다.
 
- "양녀라고는 하나 귀하게 키운 우리 초선이를 아무하고나 짝지을 수도 없고..."
"내가 왕 씨가 되면 어떨 것 같소?"
어떻게 되기는, 여포가 왕포가 되고 여봉선이 왕봉선이 되겠지. 봉선은 덥석 끼어들었고 나는 코웃음을 참느라 고개를 숙였다. 봉선이 아버지를 또 바꾸어 이번엔 성씨마저 갈아치운다면 세상 사람들이 그를 두고 뭐라 입방아를 찧겠는가. 세상에 이렇게 우스운 청혼도 다 있군. 

 

- 그건 그렇고 과연 아버지셨다. 직입하여 성급하게 정치적인 입장을 이야기하던 봉선이 에두른 혼담에 정신을 못 차리고 말려들지 않았는가. 아버지가 그런 우스꽝스러운 혼사를 진지하게 생각하실 리 없지. 재를 휘날려 연기처럼 보이게 해서 불이 났다고 믿게 하는 전법이 아닌가.

 

- "그렇게 된다면야 그보다 더 좋은 길이 없겠소마는 어찌 그런 호사를 원하겠습니까? 저와 우리 초선이가 아무리 간구하여도 장군께는 이미 식솔이 있으니 이제 와서 성씨를 바꾸는 것도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아버지는 그렇게 말씀하시고 나를 내 침소로 돌려보내셨다. 과연. 마치 봉선이 아니라 나와 아버지가 안달이 난 것처럼 말하면서도 그의 뜻대로 해주지를 않는구나. 나는 감탄했으나 내가 없는 사이 봉선이 아버지를 더 조르지 않을까, 혹여 윽박질러 억지로 혼약을 받아내지는 않을까 불안하기도 했다. 살피건대 봉선은 내가 침소로 돌아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내원을 나갔다.
참으로 알기 쉬운 사내였다.

- 국책이라고는 하나 기실 미오는 황상의 처소가 아니라 동 태사의 사유지가 될 터였고 따라서 더더욱 우리 집안이 일손을 보탤 이유가 없었으나 아버지는 굳이 그런 결정을 내리셨다. 사사로운 것을 내주고 중한 것을 지키는 결단이려니 나는 짐작했다. 아버지가 일꾼을 내주든 안 내주든 미오는 축조될 것이고, 자기 실속을 차린 태사는 이후 누가 제 결정에 반대했는지를 되짚을 것이니, 차라리 당장은 동조하는 척하는 게 이롭지 않겠는가. 알면 알수록 아버지가 처한 상황은 살얼음판처럼 위태롭게만 보였고 그 가운데에서 꼿꼿이 버티고 계신 아버지는 홀로 얼지 않고 꽃대를 올린 연 같았다.

- 아버지도 예외일 수는 없었다. 미오에 드나들 때마다 아버지는 관복 속에 독이나 암기를 소지하지 않았는지 몸수색을 당해야 했고 그것이 분해서 처음에는 끙끙 앓기도 하셨다.
문제는 동중영을 만나야 동중영에게 정조를 넘길 수 있다는 것이었다.
내가 아버지를 따라 미오로 갈 수는 없었다. 이미 그런 식으로 품음 직한 여인을 갖다 바치는 자들이 셀 수 없이 많았다. 동중영이 먼저 나를 제 눈으로 보아야 했고, 준다 하지 않았는데 스스로 탐내야 했다. 그러지 않고는 수천수만의 여인들과 구별되어 그의 눈에 들 도리가 없었다. 

- "공히 초청하지 마시고 긴히 오게 하십시오."
"무엇이 다르냐?"
"공공연히 불러들이면 남에게 보이고자 하는 목적이 있으리라 여기어 수락하지 않을 것입니다. 보는 눈이 없는 새벽녘에 와주십사 하면 도리어 무슨 꿍꿍이인지 궁금해서라도 찾아올 것인 즉."
"그렇게 제 목숨을 아까워하는 자가 어찌 야심한 시각에 미오를 나서려 하겠느냐?"
"아버지께서 직접 동행하십시오. 아무것도 지니지 않은 몸으로 미오에 머무시다가 동 씨가 직접 고른 호위 하나만 붙여 나오자고 하시면 됩니다. 수가 틀리면 아버지를 해치면 되니 안심하고 따라나설 것입니다." 
애초 봉선이 언급하였듯 아버지는 그 세도 높은 동중영으로서도 휘하에 부리고 싶어 안달인 고고한 분이었다. 비싸게 팔고 싶은 것은 은밀하게 파는 것이 이치에 맞다는 것이 내 생각이었고, 그것은 맞아떨어졌다.

- 동중영이 마침내 우리 집에 온 것은 그믐달이 뜬 새벽이었다. 계산 밖이었던 것은 긴히 찾아온 동중영이 고른 유일한 호위가 다름 아닌 봉선이라는 점이었다. 이쯤은 예상했어야 하는데. 호위로 단 하나를 고른다면 당연히 가장 빼어난 무인을 고르겠지. 그러나 탄식할 겨를도 없었다.  


- "아버님께 말씀드리게. 미오에 두고 온 것이 있다고 하시라고 알아들으실 것이니."
종복이 바삐 나가고 나는 방에 켜둔 등불을 껐다. 잠시 정문 방면에서 소란한 기색이 전해져 왔다. 나는 서상방 문을 살며시 열어둔 채 아버지의 그림자가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남자들의 발소리가 먼저 들렸고 이어 정방을 환히 밝힌 등불에 드리운 긴 그림자들이 내원을 지나쳤다. 나는 칼춤에 쓰는 쌍검을 침상에 올려두고 마지막으로 거울을 보았다. 어둠 속에서 안광 한쌍이 나를 마주 보고 있었다.

- 아버지는 과장된 소리로 웃으시다가 내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웃음을 그치셨다.
"이 아이는 본디 천애고아로 이 사람이 거두어 가기로 길렀습니다마는, 타고난 재색이 집 안에만 두기에 아깝습니다."
아버지가 손짓하시기에 나는 춤을 추기 시작했다. 가락은 없었으나 칼을 서로 부딪치고 발을 구르고 빙빙 돌아 옷자락을 깃발처럼 펄럭거리게 하여 박자를 만들면서 검무를 추었다. 돌면서 이르는 무아의 경지에서 나는 무엇을 생각했나. 춤을 생각했다. 춤을 어떻게 배웠던가를 생각했다.  

 

- 아버지가 나를 가기라고 소개한 것을 생각했다.
여봉선에게는 나를 딸이라고, 동중영에게는 나를 가기라고 아버지는 소개하셨다.
내가 무엇인지를 잊기 위해 나는 빙빙 돌고 팔을 휘둘렀다. 금속이 부딪치고 옷자락이 펄럭이고 발이 바닥을 텅텅 울렸다. 나는 소리가 된 것 같았다. 사람도 아니고 춤도 아니고 소리가.

- "인상적이군."
춤추며 흘깃흘깃 본 동중영의 얼굴은 무표정했기에 그 말을 하면서도 요지부동일는지 알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하나 고작 이걸 보여주려고 나를 장안까지 불러들였나?”
깊고 온후한 목소리로 동중영은 말했다. 들어본 가운데 가장 특출난 음성이라 할 만 하였는데 기이하게도 피가 얼어붙을 듯했다. 아버지가 입을 여셨다.

- 왜 싫증을 내지 않지. 그렇게 변덕이 심하고 어린애처럼 잘 질린다는 그가 어째서 내게는 이렇게 끈질기지.
나는 미자하의 고사를 생각했다.
먼 옛날에 천자가 귀애하던 미자하라는 소년이 있었고, 소년도 천자를 연모하여 제가 먹던 복숭아를 스스럼없이 천자에게 건넸다. 후일 마음이 식은 천자는 제가 이미 상하게 한 것을 감히 천자에게 건넨 미자하에게 역모의 죄를 물었다.
내가 아는 바 총애란 그렇게도 상하기 쉬운 것이어서 받지 않는 편이 나았다.

- 중영은 겉옷을 벗고 침상으로 가 누웠다.
"이리 와라."
"그것으로 끝입니까?"
나는 진심으로 놀라 물었지만 중영에게는 동요의 기색이 없었다.

- 그의 말이 옳은 듯했으나 무엇인가 근본적으로 잘못되었다는 느낌은 영 가시지 않았다.

- "내가 너를 왜 예뻐하는지 아느냐?"
"어째서입니까?"
"제일 예쁘기 때문이다."
갑자기 무슨 소리지? 소금이 왜 짠지 아느냐? 짜기 때문이다 같은 싱거운.
"너보다 예쁜 것을 발견하면 나는 가차 없이 너를 버릴 것이다."
일어나 침상에 앉은 중영의 광활한 등이 등잔을 가렸기에 나는 어둠 속에서 곰곰이 그 말의 뜻을 곱씹었다. 목소리가 워낙 좋아서인지 중영의 말은 실제로 뜻하는 것보다 훨씬 좋은 의미로 들리곤 했다.

- 오히려 동요한 쪽은 봉선이었다.
"그렇지, 그게 아버지시지."
봉선은 움직임을 멈추지 않았다.
"가장 좋은 것은 모두 아버지 것이다."

- 앞에 놓인 석상을 껴안지 못했다면 거기에 머리를 찧었으리라. 내가 그러든 말든 봉선은 쉴 새 없이 말하고 쉴 새 없이 움직였다.

- 후환이 될까 두려운 물건이 있다면 어쩌려느냐? 없앨 수 없다면 소유하는 것이 맞지 않으냐? 봉선은 나조차도 겁에 질리게 하는 칼이었다. 그걸 내 손에 쥐면 내 적들이 나를 어떻게 여기겠느냐?

 

- "대체 어떻게 하셨습니까? 어찌 동 씨와 여 씨의 마음을 모두 사로잡았습니까?"
퇴궐하신 아버지는 들떠 물었다.
"말씀을 낮추세요, 아버지."
내가 봉선과 중영의 마음을 사로잡았는가? 내 생각에는 그렇지 않았다. 내가 한 일은 다만 견딘 것뿐.

- "저는 다만 두 사람 모두 제가 그를 연모한다 믿도록 애썼습니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했습니까?"
연모하는 것처럼 보이려고 연모하였습니다.
"대답해 드리면 제 원을 들어주시려는 지요?"
견디다 못해 그렇게 되었습니다.
"이 늙은이가 들어드릴 수 있는 것이라면 얼마든지요."

- "저를 아내로 맞아주십시오."
아버지는 내 청을 무시하고 자리를 뜨셨다.

- 그들이 어리석다고 할 수는 없다. 독한 약을 먹어 일찌감치 머리가 세고 어금니가 밥알처럼 아무렇지 않게 빠져 볼이 훅 꺼진 나는 예전 그 여자가 아니니까.

- 그러면 그 여자는 어떻게 되었을까. 그 젊고 아리따웠던 초선은 어디로 갔을까.

- 혹자는 내가 봉선을 따라가 조용히 가정에 종사하였다고 믿고 또 어떤 이는 내가 조맹덕에게 거두어져 관운장에게 하사되었다고 한다. 관운장은 내 의기에 탄복하여 나를 거두기도 하고 나라를 망칠 요녀라며 나를 죽이기도 한다. 나는 때로 의리를 지키고자 관운장의 검 앞에 뛰어들어 자결하고 닳디 닳은 정조를 한탄하며 몰래 자결하기도 한다. 진작에 아버지를 따라 자결하였음을 굳게 믿는 이도 있다.

- 어떤 이야기에서는 내가 살고 어떤 이야기에서는 내가 죽는다.
죽다니, 내가. 웃기고 있네.

 





죽지 않는다. 죽지 않기로 했기에 미모와 충절을 모두 잃지만 그쯤에서 아름답고 뜻있는 여자의 역할은 이미 끝나 있기에 어떤 모순도 발생하지 않는다. 

이리하여 이야기의 필요로 발명된 여자는 살아서 이야기를 빠져나간다. 나의 초선은 살아남는다. 이것이 당신이 원한 이야기였는지 묻지 않겠다. 원하든 원치 않든 그 여자는 살아 있다. 

살아 있다는 건 정말 이상하지?

마지막으로 할 만한 질문은 역시 이것이겠다.

 

2024년 여름

박서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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