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1

[박서련] 마법소녀 복직합니다

일루젼 2024. 10. 17.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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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박서련
출판 : 창비
출간 : 2024.10.08


       


얼마 전 <폐월 : 초선전>을 만족스럽게 읽었다. 다른 작품들을 더 찾아 읽고자 온라인 서점에 접속했더니 전작 <마법소녀 은퇴합니다>에 이은 <마법소녀 복직합니다>가 메인에 떠 있었다. 

맞다. 그 책의 저자도 박서련 작가였지.

 

가끔 문장에서 눈을 떼기 힘든 경우가 생긴다. 잘 읽히지 않아 헛도는 게 아니다. 이미 읽었음에도, 그 의미를 파악했음에도 문장이 눈길을 잡고 놓아주지 않는 것이다. 몇 번이나 되읽으며 그 맛을 음미한 뒤에야 겨우겨우 다음 문장으로 넘어갈 수 있다. 

 

나는 그런 문장들로 쓰인 책을 만나면 매우 괴로워하면서도 동시에 무척 행복해한다. '읽는다'는 주체적 행위를 내 의지대로 할 수 없는 갑갑함이 괴롭지만, 그보다는 쉽게 벗어날 수 없을 정도로 곱씹어 읽게 하는 문장을- 표현을 만난 것이 더 감사하다. 그리고 짧은 시간을 두고 연이어 읽은 박서련 작가의 두 작품은 모두 그러한 글이었다. 전혀 다른 색깔과 다른 무게감으로 같은 흡입력을 가진다는 것이 이 작가의 강점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마법소녀 복직합니다>는 단독으로 권하기는 조금 망설여진다. <마법소녀 은퇴합니다>를 이미 읽은 독자들에게는 너무나도 반갑고 즐거운 이야기가 되리라 확신하지만, 이전작을 읽지 않은 이들에게 아로아나 최희진, 이미래 같은 캐릭터들의 개성과 관계성이 잘 전달될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작품 내의 구성이나 연출이 부족하다는 의미가 아니다. 나는 이미 전작을 읽은 사람이기에, 아닌 경우 어떻게 읽힐지를 잘 상상할 수 없다는 의미에 가깝다.) 

 

해서, 기왕지사 이 책을 손에 드신 분들이시라면 <마법소녀 은퇴합니다>부터 읽어나가시는 게 어떠실지. 

해당 작품의 끝인사에서 작품의 고료로 마법소녀 고전 완구를 샀다고 은근하게 자랑 했던 '작가의 말'을 이어 읽어보시면 가슴 한편이 찡해질 것이다. 부디 무사했기를      

 

슬쩍 덧붙이는 근황.

최근 '가진 것들로만 생활해 보기' 게임을 하고 있다. 성공했을 때의 보상도 없고, 실패했을 때의 벌칙도 없다. 그저 최대한 추가적인 유입 없이 이미 소장한 것들을 활용해 일상을 보내는 것뿐.  

 

그리고 놀라운 점을 새삼스레 깨달았다.

인간에게 혹은 나에게 몇 가지는 없으면 당장 괴로운 필수품이었다. 그런 것들이, 있었다.

그 외의 대다수의 것들은 없어도 그럭저럭 대체가 되거나, 아예 필요하지 않은 것들이었다... 이미 가진 것들을 잘 사용하는 데만 해도 상당히 긴 시간이 소요될 예정이다...

 

책을 읽고, 산책을 나가 다 읽은 책을 팔고, 그 돈으로 장을 봐서 돌아와 요리해 먹는 일상. 

생각보다 꽤 보람차고 재미있다.

몇 년간 생각만 하던 아로와나 이야기를 끄적여 볼까 생각하며. 

오늘 저녁은 애호박 팽이버섯 파스타다. 

 

    

           

   


    

지난 이야기

<마법소녀 은퇴합니다>


 

때는 오래지 않은 시점의 대한민국, 다양한 능력을 지닌 마법소녀가 범죄자를 소탕하고 재난 상황에 처한 시민들을 구조하는 시대. '나'는 이와 무관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스물아홉 살, 백수, 리볼빙 카드 빚 삼백만 원을 감당 못해 마포대교에서 뛰어내리려는 사람. 그런 '나'에게 예언의 마법소녀 '아로아'가 찾아와 달콤한 한마디를 건넨다. 당신은 마법소녀가 될 운명이라고. 그것도 사상 최강, 시간의 마법소녀가!

마법소녀의 힘을 모아 기후위기에 대응하려는 단체 '전국마법소녀협동조합'은 '나'의 각성을 응원하고, '나' 역시 그 말에 따라 마법소녀의 세계를 탐방하기 시작한다. 그런데 그사이, '나' 아닌 누군가가 진짜 시간의 마법소녀로 각성한다. 하필이면 인류 멸망을 기도하는 소녀 '미래'가. 

 




- "은퇴라니요?"
전국마법소녀협동조합 의장실 안에 놓인 난초 화분들이 잎줄기를 미세하게 떨었다. 서늘하다 못해 싸늘한 목소리에 놀란 쪽은 내가 아니라 자기들이란 듯이. 나와 아로아를 등진 채 분무기로 난초 잎을 적시던 연리지 의장님이 몸을 홱 돌리며 한마디를 더하셨다. 
"그런 것을 허용한 기억은 없습니다."

- 의장님의 그런 눈빛은 처음이었다. 만약 내가 무사히 나이 들어 할머니가 된다면 의장님처럼 꼿꼿하면서도 다정한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해 왔는데, 작정하고 노려보시니 오금이 저려서 눈을 맞출 엄두도 나지 않았다. 과연 국내 최초이자 최고령 마법소녀다운 기세였다. 겁이 났지만, 한편으로는 의장님이 아무리 대단한 분일지라도 나를 혼낼 자격 같은 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 "지난번에 분명히 말씀드렸는데요, 전마협 간부분들하고 간담회 형식으로 뵈었을 때요. 제 능력은 어떤 대가를 필요로 할지 예상할 수 없다고요. 마법소녀로 활동하기엔 위험 부담이 너무 커요."
떨리는 양손을 힘껏 쥐어 무릎 위에 올려둔 채 준비한 말을 끝까지 하고서, 나는 아로아를 쳐다보았다. 내 옆에 앉아 입술을 꼭 깨물고 고개를 끄덕이는 아로아. 아로아가 함께 와주지 않았다면 나는 의장님이 한마디 하시자마자 기절해 버렸겠지.

- "그건 능력이 아직 가다듬어지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능력을 연마할 시간, 능력을 계발해 줄 멘토, 어떤 자원이든 조합에서 제공할 수 있어요."
"아니, 저는 그럴 생각이 없다니까요. 저 출근해야 해요. 요즘 알바 두 탕 뛰어요."
"경제적인 차원에서의 거절이라면 더더욱 납득할 수 없군요. 조합에서 연계해 줄 케이스 사례금이 어지간한 직장급여보다 나을 텐데요."
그건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인데도 새삼스레 흔들리는 내가 싫었다. 나는 왜 이렇게 돈에 약하지? 세차게 고개를 젓고 다시 힘주어 말했다.
"아뇨, 싫어요."

- "하기 싫어서 안 하는 것 정도는 존중해 주셔야 하지 않나요? 제 능력이잖아요. 제 마음이고요."
이기적이라고 생각하시겠지? 내 능력이니까 내 마음대로만 사용하겠다는 말을. 


- 나는 내 능력이 그렇게 마음에 든다면 차라리 의장님이 사용하시는 게 어떻겠냐고 비꼬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내 능력은 의장님처럼 세상에 없던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것도 아니고, 아로아처럼 미래를 내다보는 것도 아니고, 무언가를 무작위의 다른 무언가와 바꾸는 것에 불과하니까. 인류를 멸망시키려던 시간의 마법소녀를 교환의 능력으로 저지한 사람은 나였지만, 그 대가로 다른 마법소녀들의 능력을 소멸시키다시피 한 장본인 또한 나였다.  
그런 나더러 계속해서 마법소녀 활동을 하라고?
나 때문에 능력을 잃은 마법소녀들 앞에서 블랙카드를, 나의 마구(魔具)를 휘두르란 말인가? 뻔뻔하게도.

- "잘 알았습니다."
의장님의 씁쓸한 목소리에 나는 감았던 눈을 떴다. 어? 이렇게 쉽게 물러나실 줄이야. 전마협의 호출을 받고 아로아와 함께 짜낸 예상 시나리오들이 머릿속에서 허무하게 흩어졌다. 긴장이 풀린 나는 하마터면 죄송합니다, 혹은 감사합니다 같은 말을 엎질러버릴 뻔했다. 당연히 내 뜻대로 되어야 할 일에 죄송은 무슨 죄송, 감사는 개코가 감사인데도.

- "하지만 조합에서도 완전히 양보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이해해 주면 고맙겠어요."
의장님의 이어진 말씀에 나는 다시 주먹을 단단히 쥐었다. 그럼 그렇지, 의장님의 고집에 대해선 이미 아로아에게 들을 만큼 들어 알고 있었다. 자랑은 아니지만 나 역시 할아버지를 두 손 두 발 다 들게 했던 고집불통인지라 물러날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현재 전마협을 지킬 수 있는 마법소녀가 한 사람도 없다는 점을 고려해주었으면 합니다."
그 말씀을 듣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 그렇지.

 

- 이럴 수가. 의장님한테 가서 뭐라고 말씀드릴지 나하고 머리를 모아 작전을 짜던 동안에 아로아는 사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구나.
"그러니까 부탁드릴게요. 전마협을, 우리를 지켜주세요. 새로운 마법소녀를 찾을 때까지만이라도." 


- 나는 약간의 배신감을 느꼈지만, 동시에 굳게 세우고 있던 마음의 방어선이 와르르 허물어지는 것도 느꼈다. 아로아까지 합세한 마당에 더 고집을 피울 수는 없었다. 아로아의 말은, 자기를 지켜달라는 것이었으니까. 아로아가 아니었다면 나는 지금처럼 전마협 의장실 소파에 앉아 뭐라도 된 양 부탁을 들어줄지 말지 고민할 입장도 되지 못했을 테니까. 이렇게 거들먹거리긴커녕, 나는 이때까지 살아 있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아로아가 나를 구해주지 않았다면.

- "제가 뭘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어요. 예를 들어 나쁜 사람에게 초강력 펀치를 먹이려고 했는데, 그 소망이 이루어진 직후에 손가락 뼈가 다 부러지면 어떡하죠? 손가락이 나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더니 발가락이 부러지면 어떡하죠. 그런 식으로는 싸울 수 없잖아요. 단숨에 필살기를 날릴 수는 있겠지만, 그걸로 적을 처치하지 못하면 내 발에 내가 걸려 넘어지는 셈이 돼요." 
나는 뒤늦은 걱정을 늘어놓았다. 일단 은퇴를 번복하고 나니 그제서야 내 진심을 들여다볼 수 있게 된 것 같았다. 나는 마법소녀가 되기 싫은 게 아니라, 내 능력이 별로라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내 능력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는 점을 무서워하는 거였다.
"이제 그 능력을 컨트롤할 방법을 찾아봅시다. 분명 조합이 도움을 줄 수 있는 부분이에요. 당장은 능력 있는 마법소녀가 없는 형편이지만, 누적된 경험이 있으니까요." 
의장님은 인자하면서도 위엄 있는 태도로 말씀하셨다. 나는 여유 없는 박자로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부탁을 들어주는 쪽은 나인데 왜 내가 더 자신 없는 태도일까, 부끄러웠지만 몸에 밴 소심함을 떨치기는 아무래도 어려웠다.

- 길게 늘어난 최희진의 리본이 순식간에 시야 한가운데를 찔러왔다.
'저걸로 맞는 건 죽기보다 싫어!'
순간 뇌리를 스친 생각은 바로 그거였다. 최희진의 마구에 화려하게 얻어맞느니 죽는 게 나을 것 같다는 생각. 그건 내가 스스로 한 생각이라기보다 누군가 귓가에 속삭여주기라도 한 것처럼 떠오른 생각이었기 때문에 통제할 수 없었다. 곧 오싹한 감각이 전신을 감쌌다. 아무리 무의식이라지만 왜 그런 생각을 한 거야? 언제나 대가를 필요로 하는 내 능력이, 공격을 막아주는 대신 진짜로 목숨을 빼앗아가면 어쩌려고.

- 동질감이 들었다. 얼마 전까지 나 역시도 진지하게 죽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그때 나는 마포대교에 갈게 아니라 상담센터나 신경정신과를 찾았어야 했던 거구나, 하는 깨달음도 뒤따랐다. 돈 때문에 죽으려 했으니 비용도 엄두를 못 냈을 가능성이 크지만.

- "저, 선생님. 상담하고는 상관없는 질문을 드려도 괜찮을까요."
"얼마든지요."
"선생님에게는 마법소녀의 능력이 얼마나 남아 있나요?"
내 물음에 선생님은 안경을 벗고 눈자위를 꾹꾹 마사지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개인적인 질문일 줄은 몰랐는데."
"죄송해요. 개인적인 질문이라고 생각 못했어요."
"사과하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아까 상담실 들어올 때에도 늦었다고 사과했죠? 조금 늦은 건 사실이지만, 사과할 게 아니라 사과받을 상황에 가까웠잖아요. 사과도 습관이 될 수 있어요. 사과하기 전에 정말 사과가 필요한 경우인지 생각해보셨으면 해요. 정말 미안한 건지, 아니면 그냥 내가 사과하고 끝내는 게 편해, 나는 그게 더 쉬워,라는 마음가짐인지."

- 듣고 보니 정말 그랬다. 언제부턴가 감당하기 힘든 상황에 부딪히면 내 사과로 수습할 수 있길 바라면서 허겁지겁 사과하는 게 습관이 된 것 같았다. 내가 사과하고 끝내는 게 편해,라는 것은 실제로 내가 자주 하는 생각이었다.

- "마법소녀로서의 능력은 이제 거의 없다고 봐야 할 것 같아요. 능력이 있었을 때는 마음을 직접 읽는 것뿐 아니라 어떤 사람이 마음속으로 그린 이미지, 즉 심상을 현실로 현상하거나 누군가의 마음을 여과 없이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는 것도 가능했어요. 지금도 대화 상대의 의중을 파악하는 것 정도는 보통 사람보다 잘하지만, 그건 마법소녀의 능력이라기보다 직관이랄까, 느낌의 영역에서 하는 일이에요. 만약 제게 아직 능력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면 그건 제가 저의 직무를 잘 수행하고 있다는 뜻이겠죠. 제 능력은 본업과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으니까."

- 이 순간만큼은 선생님이 상담자로서가 아니라 마법소녀 연대체의 구성원으로서, 나와 동등한 입장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사과하고 싶었다. 이미래의 가공할 능력을 몰수하기 위해 내가 대가로 지불한 건 모든 마법소녀의 능력이었으니까. 내게 그럴 의도가 없었다고 하더라도 (실제로 없었다) 어쨌든 그건 내가 사과해야 할 일 같았다. 내가 아니면 도대체 누가? 그 일을 한 건, 저질러버린 건 다름 아닌 난데. 게다가 다른 마법소녀들과 달리 나는 능력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 "저는 지금이 좋아요. 정확히는, 지금도 좋아요. 마법소녀, 또는 한때 마법소녀였던 사람들에게는 보통 사람들과 다른 종류의 정신적 외상들이 있어서 전담 프로그램이 꼭 필요했어요. 제가 해야 할 일, 진작 시작했어야 했던 일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행여라도 사과할 생각은 하지 마세요. 솔직히, 온 인류를 구해주고서도 미안한 마음이 든다면 상태가 조금 심각한 거예요."

- 또다시 마음을 읽힌 나는 입을 벌린 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아로아를 보고서도 했던 생각이지만, 선생님은 정말 능력을 잃어버린 걸까? 신기하면서도 미심쩍었다.

- 상담이 끝난 직후에는 후련하고 왠지 충일한 느낌이 들기도 했지만, 의자에서 일어나 문까지 걸어가는 동안에 한 발짝 한 발짝 새로운 불안이 샘솟았다. 이 문 밖에서, 혹은 이 상담센터가 있는 건물 밖에서 이미래가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게 아닐까. 이제 시간의 능력은 없겠지만, 나를 때린다든지 흉기를 들이대며 협박한다든지 하는 정도는 굳이 마법소녀가 아니어도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잖아. 만약 이미래가, 내가 이 상담센터에 올 걸 미리 알고 있었던 거라면. 


- 하지만 상담실의 문을 나서도 이미래는 없었고, 나는 상담실에 들어가기 전과 별반 다르지 않은 나로 돌아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래, 이건 다 내 마음이 만든 불안이야.
이미래는 그렇게까지 나쁜 사람이 아니야(비록 인류 멸망을 기도하긴 했지만). 그리고 선생님도 분명 말했잖아, 나는 사과해야 할 만큼 잘못하지 않았다고. 

 

- 사과를 남발하는 사람이라는 건, 벌 받는 걸 그만큼 무서워하는 사람이라는 뜻도 된다. 나는 미안한 게 아니라 겁이 많은 거고, 이미래가 복수를 결심할 만큼 나를 미워한다고 생각하는 거다. 내가 미움받는 건, 벌을 받는 건 당연한 일이라고. 그래서 자꾸 사과를 하게 되는 거라고.

- "제 생각에는요, 바라는 것만 떠올릴 게 아니라 대가를 어떻게 치를지도 함께 떠올려야 할 것 같아요. 구체적이고 실현 가능한 동시에 단순하면 좋겠죠. 신속하게 떠올리는 것도 중요하고요."
"어떻게요?"
"글쎄요, 희진 씨가 돌아서는 대신 한 발짝 멀어지게 해 달라든가. 희진 씨의 마구가 나 대신 아로아한테 감기게 해 달라든가."
"아로아한테 그럴 순 없어요."
"예를 들자면 그렇다는 거예요. 로프에 감기게 해달라고 해도 됐겠죠. 들어봐요. 블랙카드의 마법이 개입하기 전 원래 일어났어야 할 현상과 블랙카드의 마법이 개입해 결과가 바뀐 현상, 그 둘 사이에는 일종의 제물이 필요해요. 그렇죠?"

- "내가 빌려줄 수도 있어요."
"아로아, 돈 많아요?"
내가 묻자 아로아는 훗 웃었다. 약간 건방져 보였달지... 그런 식으로 웃는 아로아를 보는 건 처음이었다.

 

- "아무리 작더라도 예견, 즉 앞날을 보는 능력은 몹시 높은 평가를 받아요. 왜일까요?"
"상대방의 공격 패턴을 미리 알 수 있어서?"
"아뇨, 경제적으로 말이에요."
"로또 번호 같은 거... 맞힐 수 있어요?"
나는 잔뜩 설레서 물었지만 아로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로또 같은 건 경우의 수가 너무 많아서 어렵지만, 지표가 높아지고 낮아지는 패턴 정도는 미리 읽을 수 있거든요. 그럼 뭘 할 수 있게요?"

- 그런 식으로 일 미터쯤 동전을 옮기고 나니 온몸이 땀에 흠씬 젖었다.
"마력을 많이 사용했다는 의미예요."
아로아가 수건을 건네주며 말했다. 마법소녀는 능력을 무한히 사용할 수 있는 거 아니었나? 나는 이마와 목둘레를 대충 닦으며 물었다.
"마력이라는 게 뭔데요?"
"결국은 체력이죠. 작은 일이지만 수십 번 연달아 ..."
 
- 뭐 먹고 싶은 것 있냐고 묻는 아로아에게 알로에주스를 집어 내밀고서 나는 할아버지 생각에 잠겼다. 할아버지가 살아 계셨다면 어디 어린애한테 집 가지고 장난질이냐고 집주인에게 호통을 쳐주었을 거란 생각. 애초에 이렇게 혼자 살다가 편 들어주는 사람하나 없이 내쫓기는 일도 없었을 거란 생각.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냐는 물음에 비로소 정신을 차리니 아로아가 병표면에 물이 맺힌 알로에주스를 건네주고 있었다.

- "일단 봐요."
[땅 중에 높은 것을 봉이라 하고 낮은 것을 곡이라 한다. 봉에는 빛이 닿고 곡에는 물이 고인다. 고이는 것에는 무게가 있다. 무거운 것은 더 아래를 향한다. 
힘의 성질이 이와 같다.
물이 증기와 습기의 형태로 모습을 감추듯 힘도 우주 어디에나 그 존재를 숨긴 채 고여 있다. 깊은 곡에 물이 모이듯 힘 또한 낮은 자리에 고여 그 주인을 기다린다. 이렇듯 힘이 스민 땅을 옛사람들은 명당이라 일컬었다. 명당의 기운을 입어 태어난 이들은 장사라고 하였다.
시절이 변하여 장사는 마법소녀가 되고 명당은 성지가 되었다.] 

- 한동안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고 고됐을 아로아를 깨우고 싶진 않았다. 다만 아로아가 깨어있다면 이렇게 묻고 싶었다. 모든 것의 마법소녀라니, 그런 게 가능해요? 그게 왜 마법소녀예요? 신... 아닌가요, 모든 것의 마법소녀라면? ...하긴 그러니까 종교의 구색을 갖출 수 있었던 거겠지. 꽤 큰 의구심과 황당함에도 불구하고 오래 지나지 않아 단순한 결론에 이를 수 있었다. 신이라는 칭호를 마법소녀로 바꾸고 신 대신 마법소녀를 숭배할 뿐이구나.  

- 출장이라는 걸 난생처음 해보는 처지라서 내가 뭘 모르긴 하지만, 역시 아무래도 이건 출장 같지가 않다는 생각.
"쉴 수 있을 때 푹 쉬어둬야 해요. 내일은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아로아는 거품을 모아 어깨에 문지르며 말했고, 예언의 마법소녀가 내일 일을 모른다고 말하는 게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하며 나는 웃었다.
"내일 어떻게 할 건데요?"
 
- 목욕을 마치고 널찍한 침대에 눕자 아로아가 불을 꺼주었다. 호텔에서는 침대에 누운 채로도 불을 끌 수 있구나, 다른 게 아니라 이게 마법 같다, 촌스러운 생각을 하며 잠을 청하려던 차에 아로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마 잘 안 될 거예요. 그쪽에선 다른 마법소녀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니까, 정확히는 자기들 사상에 공감하지 않는 마법소녀는 진정한 마법소녀가 아니라고 하니까요. 대화의 여지 자체가 없다고 생각할 가능성이 크겠죠. 그런데 잘 안 된다는 게 대화 차원에서인지, 좋은 말로 안 끝나서 실력 행사를 각오하는 게 좋겠다는 의미인지는 저도 아직 모르겠어요." 

- "아로아는 미래를 알 수 있잖아요."
"예언의 능력은요."
아로아는 긴 숨을 내뱉어 호흡을 고른 뒤에 나직하고 나긋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미래 그 자체를 보는 능력이라고 할 수는 없어요. 여러 가지 가능성이 동시에 눈앞에 떠오른다는 말 했던가요? 어떤 때는 떠오른 장면들 뒤로 펼쳐질 미래가 보이기도 해요. 미래 너머의 미래가요. 예를 들어 내가 내일 점심에 햄버거를 먹는 미래, 비빔밥을 먹는 미래, 감자전을 먹는 미래가 보인다고 쳐봐요. 그중 무엇이 진짜로 일어날지는 나도 몰라요. 그런데 그 모든 미래들 다음에는 단 하나의 미래가 기다리고 있는 거예요."
"어떤 미래요?"
"우리가 만나는 미래요."

- 결국은 미래를 볼 수 있다는 말 아닌가?

- "내가 점심에 뭘 먹든 저녁에 우리가 만나는 일은 예정되어 있다는 거죠. 물론 미래 너머의 미래라는 것에도 여러 가지 경우의 수가 있기는 해요. 그중에서 가장 안정적이거나 피해가 적은 미래를 선택하는 게 예언자의 역할이죠. 가끔은..."
잘 이해되지 않는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잠기운이 조금씩 진해지는 것 같았다. 가끔은? 하고 잠에 취해 되묻자 아로아는 부스럭부스럭 뒤척이는 소리를 냈다. 나를 향해 돌아눕고 있는 모양이었다. 
"미래는 이미 정해져 있다는 걸 확인할 뿐이라는 생각에 무력감이 들기도 해요. 하지만 요즘은요, 이미 정해져 있는 미래가 나를 받아주는 거란 생각도 들어요." 

- "네, 내가 최선을 골라도 최악을 골라도 바뀌지 않을 미래요. 당장의 내 선택으로 인해 미래가 어느 정도 영향을 받긴 하겠죠. 그렇지만, 그러면 미래도 최소한의 변화로 내게 몸을 맞춰오려 하는 것 같아요. 우리는 미래를 선택하려 하지만, 미래는 우리에게 적응하려 해요. 그걸 알고 있는 사람은 나뿐이지만, 말하자면 그게 예언자와 미래의 관계가 아닐까요." 

- "그러니까 예언의 마법소녀로서 내가 맡은 역할은 미래를 보는 게 아닐 거예요. 미래를 믿고 미래에게 말을 거는걸 거예요. 부디 우리의 선택을 포용해 달라고."

- 흐름은 늘 그렇듯 부정적인 방향으로 잽싸게 발을 들여 넣고 있었다. 조합에서 돈을 빌려 일부는 리볼빙 빚을 메꾸고 대부분은 보증금에 보탠다고 하자. 그런다고 뭐가 크게 나아질까? 빚을 빚으로 바꾸는 것뿐인데.
"돌려막기 아닌가요?"
"대환이라는 개념이 있어요. 이자가 센 대출 상품을 보다 유리한 대출 상품으로 바꾸는 거예요. 빚으로 빚을 갚는다는 차원에선 비슷해 보일 수도 있지만 돌려막기랑 똑같다고 생각하면 곤란해요. 돌려막기는 이자고 뭐고 그때그때 급하게 돈을 빌려 다른 데서 꾼 돈을 갚는 거지만, 대환은 이자 지출을 최소화하려는 경제적인 선택이니까요."


- 그렇구나. 이자를 얼마나 낼지 선택할 수도 있는 거였구나. 인터넷에서 부채도 자산이라느니 영리하게 대출 계획을 세워야 한다느니 하는 말을 보고서 무슨 개소리지? 빚은 안 지는 게 무조건 좋은 거 아닌가, 하고 무시하던 순간들이 떠올랐다. 새삼스레 아로아가 대단해 보였고 아무 생각도 없이 리볼빙 빚만 굴려온 나 자신은 더욱 바보처럼 느껴졌다.

- 나달의 능력이 무엇인지 모르는 채로는 승산 있는 싸움을 펼치기 어려울 듯했다. 그때 아로아가 뜬금없이 물었다.
"혹시 홍콩영화 좋아해요?"
"갑자기요?"
홍콩영화라면 글쎄, <중경삼림>? <아비정전>? 그것도 아니면 <희극지왕>? 아로아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몰라 눈만 동그랗게 뜨고 있자, 아로아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정무문> 스타일로 가볼까 해서요."

- 아, 마주치는 인간은 모조리 다 쓰러뜨리면서 최종 보스에게 다가가는 스타일. 어쩐지 가슴이 미어질 듯한 기분이 들었다. 소파에 앉아 있는 할아버지의 무릎에 기대 앉아 바나나킥을 까먹으며 영화를 보던 어느 날이 떠올라서. 입안에서 킥 소리를 내며 경쾌하게 바스라지는 과자가 좋았고 주인공이 적을 타격할 때마다 할아버지가 긴장해 들썩거리는 느낌이 재미있었다. 잠깐, 그런데 그 영화 주인공 마지막 장면에서 죽지 않았던가...
"그럼 가볼까요."
 

- "예언의 능력을 사용한다는 건 말이죠, 문제집 해답을 미리 보는 것과 비슷해요. 드라마에서 십분 뒤에 나올 장면을 남들보다 먼저 아는 것과도 답이 뭔지, 이후에 일어날 사건이 뭔지 남들보다 먼저 알 수는 있지만, 현실세계에선 결과만큼 거기까지 이르는 과정도 중요하잖아요."
그런가... 결과보다 과정이 중요하다는 말은 지긋지긋하게 들었다. 그렇지만 그 말에 정말로 공감한 적은 별로 없었다. 다들 결과를, 화려하고 그럴싸한 결과를 좋아하잖아? 무슨 수를 써서라도 부자가 되는 편이 좋고, 굶어서든 토해서든 날씬한 몸매를 가지려 애쓰고, 댓글 부대를 써서든 테러 자작극을 벌여서든 권력자가 되고 싶어 하잖아. 아로아가 믿는 현실세계와 내가 경험하는 현실세계가 서로 다르다고 생각하고 싶진 않았기에 잠자코 듣고만 있었지만, 내가 아는 한 결과론은 크게 나쁜 대접을 받은 적이 없었다. 맥락에서 벗어난 생각을 골똘히 하는 사이 아로아가 계속해서 말했다.

- "나는 ... 죄를 인정하는 미래를 봤어요. 그렇지만 어떻게 해서 그 일이 일어나는지는 몰라요. 내가 본 미래가 법정에서 증언으로 채택될 리도 없겠죠. 저 사람이 죄인인 걸 인정하게 될 테니까 저 사람은 죄인이다, 이런 논리니까요. 어떻게든 이번 기회에 신병을 확보해야 해요. 더구나 내가 그 사건에 대해 안다는 걸 내 입으로 실토했으니까 시간을 끄는 사이에 증거를 무마하려 할 수도, 관계자 입막음을 하러 다닐 수도, 최악의 경우 도주할 수도 있겠죠." 
 
- 아로아가 돌아오면 어떤 방식으로 능력을 사용했는지 물어봐야겠다. 배울 게 무척 많겠어, 경험 많고 마법에 대한 직관도 뛰어난 아로아가 내 능력을 직접 사용해 본 후라면... 물론 아로아가 내 능력을 돌려준다면 말이지만.
하지만 아로아가 나를 여기에 두고 영영 떠나버린다고 해도 어쩔 수 없었다. 그건 내 선택에 따른 결과니까. 더할 수 있는 일도 많지 않았다. 아로아가 보았다는 미래를 믿고, 아로아를 믿으며 기다리는 것밖에는. 

- 충분히 '들릴' 만한 거리를 훌쩍 벗어나버린 아로아에게선 마음이 잘 전해지지 않았다. 아주아주 집중해서 건져낸 단 한마디는 이랬다.
[우와, 이 능력 존나 편하네.]
 
- 대환의 논리가 성립 가능하다면, 즉 남의 돈으로 남의 돈을 갚는 게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라면, 타인의 힘을 거두어 또 다른 이들에게 나눠주는 것도 가능하겠지. 사실 나는 더할 나위 없는 확신을 품고 있었다. 왜냐하면 내가 처음으로 발휘한 마법소녀의 능력이 바로 그것이었으니까. 사상 최강의 마법소녀인 이미래에게서 시간의 능력을 거두었을 때, 대가를 제대로 제시하지 못한 탓에 그 막대한 마력이 길을 잃고 산산이 흩어짐과 함께 무고한 마법소녀들의 힘도 공중분해되었지만, 그때 나는 이미 다른 누군가의 힘을 빌려 나의 빚을 갚는 대환의 거래 방식을 체험한 것이었다.
이번에는 더 자신 있어. 나는 이제 거래에 무엇을 사용할 수 있는지 정확히 알고 있으니까. 나의 능력을 알고 있으니까.

-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카드는 빛나지 않았다. 결제가... 승인되지 않은 것이었다.
 
- 꼭 마법소녀가 되어야 한다면, 마법소녀 되기를 피치 못한다면... 기왕 될 거 훌륭한 마법소녀가 되는 게 좋겠지.
할아버지가 지금의 나를 자랑스러워할 거라는 근거 없는 확신이 들었고, 그 생각을 하자 가슴이 따뜻해지는 것 같았다.

- "정말 많이 좋아졌네요."
목요일 오전 상담센터에서 만난 배진희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한참을 떠들고 보니 심리상담과는 거리가 먼 이야기를 하고 말았다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지만, 그 어느 때보다도 개운하고 뿌듯한 마음이었다.
"여전히 사과 남발하는 습관은 못 고쳤는데요."
"아니에요. 많이 나아졌어요. 예전 같았으면 방금 그 타이밍에도 사과를 했을 텐데."
내가 그 정도였나. 머쓱했지만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 제일 먼저 든 생각은 그 말이 완전한 진심은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그저 내 마음을 편하게 만들어주고 싶다는, 나로선 따라잡을 수 없는 깊은 배려심에서 나온 말인지도 모른다는 생각. 그렇지만 그 말이 진심이든 아니든, 선생님은 정말 어른스럽고 근사하게 말씀하셨고 나는 그 자세를 배우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사과도 용서도 전혀 어려워하지 않는 자세. 진정으로 넉넉하고 여유로운 마음을 품은 사람만이 지닐 수 있는 자세.
 



| 작가 노트 |

마법소녀, 죽지도 않고



또 왔네.

또 써버렸네, 마법소녀 소설을.

 

- 물론 경장편 소설 한 권으로 끝내기에는 아쉽다는 생각을 했다. 보여주고 싶고, 보여줄 수 있는 이야기가 얼마든 더 나올 수 있는 세계관이니까. 그런데 처음부터 이렇게 쓸 생각이었냐 하면... 그건 잘 모르겠다. 2탄을 쓰게 된다면 주인공을 반지하 방에서 탈출시켜주고 싶었고 1탄에 이어 기후 재난 이야기도 더 하고 싶었다. 좀 더 하고 싶은 이야기들에 집중하다 보니 미처 챙기지 못한 부분들이 많다.

- 시리즈물을 쓰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톡톡히 배웠다. 전작의 설정을 고스란히 유지하면서, 전작을 경유하지 않은 독자들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게 하면서, 전작만큼 혹은 전작보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써야 한다는 것은... 코끼리를 타고 불타는 고리를 통과하면서 김치볶음밥을 만들어야 하는 느낌? 엄살이 심하다고 해도 좋다. 어쨌든 나는 해냈고 (적어도 그렇게 생각하고) 이 성취를 만끽하고 싶다. 성취감은 시리즈에 대한 나의 애정과도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 1탄 작가 노트에서 나는 이 책의 고료로 마법소녀 아이템을 몇 점 샀다고 밝혔다. 한편 이 작품을 쓸 때 나는 주인공처럼 반지하에 살았다. 1탄이 출간된 해 생일에 기분을 내고 싶어서 호텔에 묵었는데 다음 날 집에 와보니 베란다에 물이 차 있었다. 2022년 8월 8일은 서울에 손에 꼽히게 큰 비가 내린 날이었다.

- 행인들이 함부로 침범하지 못하게 촘촘히 또 단단히 세워둔 베란다 쇠창살 그림자 아래에서 나는 우선 내가 수집한 마법소녀 아이템들이 무사한지를 확인했다. 너무나 갖고 싶어서, 매물이 워낙 희소해 당장 손에 넣지 못하면 다시는 못 구할 것 같아서 무턱대고 사들였지만 둘 곳이 마땅치 않아 상자에 넣고 베란다에 보관하던 수집품들. 언젠가 좋은 집에 살게 되면 가장 좋은 자리에 두고 감상해야지, 그런 생각을 하게 했던... 즉 나에게는 언제나 좋은 집의 환유로 기능했으나, 내 집에서 가장 위험한 공간에 머물던 물건들.
비가 오면 물에 잠기는 집에 살던 내가 부린 터무니없는 사치.

 

- 나는 항상 내가 경제적인 감각이 조금 떨어지는 편이라 생각했다. 이는 거의 객관적인 사실일 것이다. 나는 힘들게 벌어들인 돈을 장난감 사는 데 써버린다. 반지하 방에 살며 리볼빙 빚 때문에 끙끙거리는 사람, 그건 나의 모습이기도 했다. 스물아홉은 내가 첫 장편소설을 쓰던 때의 나이이다. 나는 주인공이 나라는 주장을 하려는 게 아니다. 그러나 나는 주인공이다. 비슷한 곤경을 겪었던 모든 이들과 함께 나도 주인공이 된다. 문명 최초로 등장한 부모보다 가난한 세대로서 기후 재난의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주인공의 자격이 있다... 


- 또 세대론이냐? 그렇게 됐군요. 여하간 세대론적으로 접근하면 나는 크게 사치하고 있는 게 아닌 듯도 하다. 옛말에 개처럼 벌어 정승처럼 쓴다고 했지. 우리 세대는 쥐꼬리만큼 벌어 사람처럼 쓰려할 뿐이라고 느낀다. 그저 사람만큼 소비하고 싶은 것이다, 사람만큼... 가끔은 생존과 무관하지만 그냥 내가 좋아하기 때문에, 내가 그렇게 쓰고 싶으니까 부리는 단순한 사치.

- 경험한 바 사치는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개념이다. 예술의 시작이 다름 아닌 잉여였음을 생각하면 그건 당연한 일이다. 나는 현재의 처지 때문에, 이를테면 가난 때문에, 누군가의 시선과 사회적 위신 때문에, 또는 지금이 적절한 시기가 아니라는 생각 때문에 자기의 기호를 포기하지 않는 태도에 품위가 깃든다고 믿는다. 사치는 예술이 아니지만 예술은 사치다. 이런 관점에서라면 하물며 나의 생업도 사치에 연루되어 있다. 예술이 인류 문명의 사치라면 문학도 그 예외일 수 없으니까. 누군가 바쁜 일상 속에서 시간과 돈을 소비해 내 책을 읽어주는 덕에 나는 먹고살고, 남는 돈으로는 생일에 호텔에서 묵고 마법소녀 아이템을 살 수 있는 거다. 

- 그래, 사치는 교환되는 것.
당신의 사치가 나의 사치를 가능하게 하며 나는 내 사치의 기록을 당신이 소비할 사치로 재생산한다. 기부, 수집, 덕질, 멋 부리기, 어떤 형태의 사치라도 그렇다. 우리의 사치는 교환된다.

- 참고로 1탄인 『마법소녀 은퇴합니다』는 지금까지 내가 쓴 작품 중 가장 큰돈을 벌어준 책이다. 나는 주인공을 등 뒤에 남겨두고 지상으로 이사했다. 이 책만의 공로라고 할 수는 없지만 (나는 일을 정말 많이 한다. 1탄과 2탄 사이에 나온 출간 목록을 살펴보면 알 것이다) 이 책의 지분이 가장 큰 건 확실하다. 리볼빙 빚은 다 갚았는데 그 수십 배에 달하는 전세 보증금 빚이 생겼다. 그래도 그 이자를 건사할 능력이 있다고 판단되었기에 대출이 승인된 것이겠지. 그렇게 생각하면 나는 이 시리즈에, 이름을 비워둔 나의 마법소녀 주인공에게 빚이 있는 셈이다. 

- 제목을 놓고 오랫동안 여러 사람이 고민했다. 교환합니다, 상환합니다, 대환합니다, (환장합니다), 복귀합니다... '복직합니다'는 편집부에서 제안해 준 제목이다. 주인공의 마법소녀 능력을 표현한 '교환'과 시리즈물의 성격을 고려한 '복귀' 사이에서 고민하다 '교환합니다'를 가제로 써서 보냈는데, 편집부에서 이건 어떠세요? 하며 보내온 제목. 그 말을 보자 '해고는 살인이다'라는 구호가 떠올랐다. 나에게 복직은 은퇴보다는 해고와 상대되는 말이라서 해고가 살인이라면 복직은 활인(活人)이다.

- 복직의 복(復) 자는 회복의 복, 복수의 복과 같다. 2탄에 잘 어울리는 제목이라고 생각한다. 2탄을 쓸 수 있게 된 것도 일종의 복직이라 생각하면 마음이 벅차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나는 나의 일을 사랑하는 것 같다. 이 일이 코끼리를 업고 불타는 굴렁쇠를 굴리며 김치를 담그는 것처럼 느껴질 때조차도. 
이 사랑을 내가 가진 마법소녀의 능력이라 해도 좋겠다.

2024년 가을

서울에서
박서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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