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1

[산호] 장례식 케이크 전문점 연옥당 1

일루젼 2024. 10. 18. 15:00
728x90
반응형

 


저자 : 산호
출판 : 문학동네
출간 : 2021.12.20


       

           

텀블러에 크게 얼린 구슬 얼음을 넣고, 우유와 냉침 코나 커피를 따른다.

반쯤 마신 다음 애플시나몬 시럽을 넣어 달달하게 마무리한다.

 

단 걸 그리 좋아하는 편은 아닌데도 한 번씩 달콤한 맛이 끌리는 때가 있다.

기억을 더듬어보면 대체로 늦가을이나 초겨울, 찬 바람이 불기 시작할 때 즈음이었던 것 같다. 조금씩 차가워지는 공기를 달달함이나 따뜻함으로 달래고 싶었던 걸까. 버터 향 가득한 달달함이 끌리는 시기다.

 

아직 한낮은 땀이 나기도 하는 지금은, 사실 예년보다 좀 이른 편이다. 

하지만 이것도 나름대로의 사정이 있다. 작년에 사두고 까먹었던 수제 시럽을 냉장고 안에서 찾아냈기 때문이다. 집에서도 차이티 라떼를 마시고 싶다며 차이 시럽과 애플시나몬 시럽을 사두고는 스팀 밀크 한 잔 뽑지 않았더랬지. 사는 사람 따로 있고 쓰는 사람 따로 있는 것도 아닌데 왜 나는 항상 과거의 나에게 '너는 왜 이걸 샀니?'라고 물어봐야 하는 걸까...

그러니까! 미래의 나를 위해 더 이상의 지름은 멈추도록 하자. 

라는 의식의 흐름 덕이다. 

 

'가지고 있는 것들부터 제대로 활용하는 일상을 보내자'는 게 이번 가을의 목표다.

그래서 시럽을 찾은 김에 꿀 대신 사과버터구이에 뿌리기도 하고, 라떼에 섞어 시나몬 라떼 맛을 내보기도 하고 있다.

 

그런 시기라 그런지 달콤하면서도 오싹한 제목에 끌렸다.

<연옥당>. 

약속 시간 전에 우연히 들른 카페에서 발견한 책인데, 확인해 보니 이미 예전에 독서 목록에 저장해 두었던 책이라 다시금 당황했다. 담아두었던 것마저 잊을 정도라면 목록을 만들어두는 게 의미가 있을까, 하고 잠시 슬퍼한 뒤 앉은자리에서 다 읽어 버렸다. 단정하면서도 섬세한, 화려해 보이기까지 하는 그림체와 강렬한 적흑의 색감이 매력적이다.

 

동화 같은 이야기이지만, 서글프고 아름다운 세계관이다. 

죽은 이를 기리기 위해 '달콤함'을 보내는 추모 케이크. 

거기에는 남은 이들과 죽은 이들을 연결해 주는 가장 소중한 기억을 녹여 담는다. 

그리고 다음생을 위해 벌판을 걸어가는 망자는 49일 동안 그 케이크를 나눠 먹으며 길을 걷는다.

 

케이크를 공양해 줄 이가 없는 망자도 배를 곯을 일은 없다.

그런 이들을 위해 최고의 파티셰리들이 숨끝에 상주해 있으니까.

 

2권이 있다는 걸 알게 되어서 안심하고.

아껴 읽고 싶어져서 목록에만 담아둔다.

 

또다시 달달한 게 먹고 싶어지는 날이 오면 2권을 읽을 생각이다. 

아마도 눈이 쌓인 겨울의 어느 날이 되지 않을까.

그날도 지금처럼 달콤했으면.    

 

 

   


   

 

 

 

 

 

- 여는 이야기

- 아주 오래전 이 땅에 살던 사람들은 죽음이 또 다른 생으로 가는 첫 번째 단계라고 믿었어요.
사람이 숨을 거두는 것은, 다시 태어나기 위해 기나긴 여정을 떠나는 거라고요.

- 그러니까 당신 삶의 마지막 순간이 지금 막 끝났다고 상상해 보세요. 새카맣게 끊겼던 의식이 돌아와 문득 다시 눈을 뜨면 식은 몸을 덮었던 흙더미나 가루가 되어 올랐던 바람은 스치듯 사라져 있겠지요. 그리고 아마 수백 번도 더 와보았던 곳일지 모르는, 생과 생 사이 연옥의 낯익은 빛이 당신을 감싸고 있는 거예요.

- 그 빛을 따라 나아가면 머지않아 삶과 죽음을 가르는 경계가 보이죠.

우리 연옥 사람들은 그 경계를 '숨끝'이라고 불러요.
살아 있는 것의 숨이 마지막으로 닿는 곳이라는 의미로 붙은 이름이랍니다.

- 숨끝 너머에는 연옥 벌판이 맞닿아 있지요. 망자들은 그 벌판 끝 환생을 향해 기나긴 여정을 떠나요.
숨끝을 넘어가는 것이 그 여정의 첫 번째 단계랍니다.

- 연옥 경계를 지키는 세 까마귀신 중 하나가 숨끝의 뚫린 문에서 당신을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그는 새카만 부리를 열어 당신이 건너야 할 연옥의 벌판에 대해 이야기할 테지요. 49일 동안 끝도 없이 펼쳐질 벌판이 얼마나 황량한지, 왜 붉은 돌로 지은 우물의 물만 마셔야 하고 죽은 사슴의 말은 듣지 말아야 하는지, 어째서 사흘째 되는 밤에 뜨는 달을 맨눈으로 보아서는 안 되는지 말해줄 거예요. 하루에 하나씩, 생전의 소중한 기억 마흔아홉 개를 버리는 일이 얼마나 괴로운지도요. 

- 모든 이야기를 끝내고 나면, 까마귀신이 곡식과 피와 꿀을 섞은 반죽을 한 덩어리 빚어줄 거예요. 당신이 연옥에서 믿고 먹을 수 있는 유일한 것이랍니다. 아주 달고 믿을 수 없을 만큼 부드럽지요.

- 벌판에 닿기 전에 꼭 한입 먹도록 해요. 그리고 벌판을 건너는 동안 단 한 조각도 남겨서는 안 돼요.
연옥 벌판은 허기진 영혼 냄새를 맡으면 더 거칠어지거든요.

- 장례식에 가본 적 있나요? 지금도 단맛이 나는 것에 칼을 꽂고 향을 피우잖아요.
예나 지금이나 떠나는 사람들에게 보내는 마지막 선물은
가슴이 아리도록 달지요. 담긴 마음도 한결같고요.

- "저요? 아, 저는... 이레에게 가지 않는 날에는 일을 했어요. 졸업은 했지만 학자금 대출했던 게 고스란히 남았거든요.

틈틈이 썼던 글을 엮어 출판사에 보내기도 했는데... 답신은 은행에서 더 많이 왔어요.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계속 쓰면서 살 수 있을까?'
스스로에게 몇 번이고 물었는데 답을 찾기 어려웠어요.
글을 쓰다 보면 문장과 문장 사이에서 길을 잃은 것 같았죠."

- "그즈음 어느 출판사에서 연락이 왔어요. 그런데 책을 출판하려면 이런저런 부분을 고쳐야 한다고 했죠. 그래야 출간해 줄 수 있다고 했어요." 

- "글은 다 좋아요. 진짜 글은 다 좋은데... 주인공을 조금 바꿔보는 건 어때요?"

"네?"

"그러니까, 여자 탐정을 남자 형사로 바꾸고... 미녀 조수를 붙여주는 거예요. 어때요? 잘 팔릴 거 같은데..."

'뭔 헛소리람...'
 
- 현실과 타협해 내 삶을 영위하는 것과
내 소신껏 가라앉는 것.

- '내용이 재미가 없다는 거면 수정이라도 하겠는데... 글쎄.'

"아."

 

- "갈림길에 놓인 선택지가 정말이지... 길을 잃고 싶게 만들었죠."

 

많고 많은 길 중에
내가 가고 싶어서 고른 길이
막다른 길이라면

나는 그 선택을 견딜 수 있을까?



- "'그저 하고 싶다는 이유로 계속해도 되는 걸까? 나는 나를 끝까지 믿을 수 있을까?' 그런 의문에 스스로를 소모하곤 했습니다."

- "방 한편에 쌓여가는 반송 원고와 함께 무력감까지 켜켜이 내려앉고 있었을지도 모르겠어요. 스스로를 의심하다 타협하고 내 것이 아닌 글을 쓰게 되지는 않을까? 그런 비관이 종종 고개를 불쑥 들었죠."

- "그 모든 생각이 내 소중한 독자에게 실례가 된다는 걸 알면서도요."

- 언니.
이마에 눈이 하나 더 있는 사람들은 꿈으로 미래를 보거든.
... 요새 언니에 대한 꿈을 꿔.

 

 

언니는
정말 아무것도,
아무것도
걱정할 필요 없어.

 

 

- "그런 이야기가 있죠. 세 눈 사람들은 꿈으로 미래를 본다는 얘기요. 지금에야 세 눈 사람들이 가진 세 번째 눈은 일종의 신경계 기관이고 그들이 꾸는 꿈은 환시에 가까운 것이라고 말들 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겠어요. 그 말 한마디가 그 순간의 저에게는 전부였는데요. 평생 걱정을 달고 살아온 사람한테 걱정하지 말라니... 그런데 이상하게 그 짧은 한마디에 걱정이 눈처럼 녹아버렸어요. 다른 누구도 아닌 이레의 말이어서 그랬는지도 모르죠."

- 연옥 남쪽으로 가면, 사옥천이라는 못이 있습니다. 그곳엔 환생하지 못한 이들의 기억이 가득 고여 있어요.
환영화는 바로 그 사옥천 주위에서만 자라는 연옥의 토착 식물입니다.

- 환영화의 꽃송이 안에는 사옥수라는 특별한 즙이 고여 있습니다. 사옥수는 수많은 이의 기억이 한데 모여 수백 년 동안 뒤엉켜 뭉친 결과물입니다. 사옥수는 혀끝에 닿으면 환영으로 기억을 보게 해 줘요. 물론 연옥 땅에서만 효능이 있고, 지상에서는 그저 검은 이슬처럼 보일 뿐이지요.

- 연옥에서는 주로 책 쓰는 잉크로 사옥수를 사용합니다. 사옥수로 책을 쓰면, 글쓴이가 보여주고 싶어 하는 장면을 환영으로 녹여내 보여줄 수 있죠.

이 사옥수 잉크는 케이크에도 쓸 수 있습니다. 
고인에게 마지막으로 전할 말을 하지 못했거나 고인이 사랑했던 글귀를 보내고 싶을 때 사용합니다.

- "그 약. 억지로 잠들게 하고 환각을 보게 만드는 약이었어. 삼촌은 내가 그걸 먹지 않으면 가둬두고 밥을 주지 않았어.
하루에 세 알씩 먹었어. 아침, 점심, 저녁.
알약을 삼키고 잠들면 아주 나쁜 꿈을 꾸곤 했어.
어느 순간부터 글씨를 읽는 게 조금씩 어려워졌고 낮과 밤을 구별하는 것조차 힘들어지기 시작했어.
해질녘과 늦은 밤과 이른 새벽과 정오 무렵의 오후를 더 이상 내 눈으로 가늠할 수가 없었지.
눈을 뜨고 있을 때도 감은 것과 다를 바 없는 암흑이었어.
총천연색 꿈속에서만 나는 내가 잠들었다고 확신할 수 있었지."

- 원 선생은 풀이든 나무든 동물이든 아주 크게 키워내는 재주가 있습니다.
가혹한 황무지였던 연옥 벌판에 나무그늘과 숲이 생긴 것도 모두 그의 공입니다.
연옥의 꽃감관에서 물러난 뒤, 원 선생은 지상으로 와지상의 식물들을 연구하고 있습니다.

- "필요하신 만큼 가져가세요. 꽃들한테도 귀띔해 두었으니까 다들 웬만해선 놀라지 않을 겁니다."
"꽃만 떼어가서 왠지 미안하네요..."
"열대 꽃들은 다들 너그러운 편이니 괜찮을 거예요."

- "저는 저기서 식충식물을  조금 살펴보고 올게요. 길 잃지 않게 조심하세요! 파리지옥이 오늘 조금 예민하거든요."
"네, 조심할게요. 원 선생 손길이 닿은 파리지옥이라면... 뭐든 다 삼킬 수 있겠군요."

- 케이크에 올리는 꽃은 신선함이 생명입니다. 꽃을 퓌레나 마멀레이드로 만들지 않고 케이크 위에 바로 올려야 할 때는 상처 없이 온전한 꽃송이를 쓰는 것이 중요합니다. 덧붙이자면, 꽃마다 맛이 조금씩 다른데 한련은 아주 매콤한 맛이 납니다.

- "혹시 제가 도와드릴 수 있는 부분이..."
"아, 그게. 확신이 들지 않아서... 엄마랑 30년을 같이 살았거든요. 그러니 엄마가 뭘 좋아하는지 알고는 있지만... 제가 아는 엄마가 엄마의 전부는 아닐 테니까요. 제 기억만으로는 어딘가 틀린 데가 있을까 봐 조금 걱정이 돼서..."

 

- "걱정하시는 것이 당연해요. 사실 본인이 미리 케이크를 주문해놓지 않는 이상 완전한 기억으로 케이크를 만들기란 불가능하지요. 하지만 정말 작은 기억 하나가 가장 큰 재료의 뼈대가 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말씀드리자면... 장례식 케이크는 고인뿐 아니라 남아 있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기도 해요."

- "엄마랑 제가 조금 다른 시간을 살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어요. 엄마는 항상 이렇게 해질 때쯤 눈을 떴거든요. 남들은 일터에서 집으로 돌아갈 법한 때가 엄마한테는 하루의 시작이었어요." 

 

- "엄마와 함께 사는 건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는 시계를 맞춰가는 순간의 연속이었어요. 서로가 속한 시간이 완전히 달랐으니까요. 낮과 밤 사이의 틈을 메우기 위한 크고 작은 규칙도 있었습니다. 잠들기 전에 온 집안의 커튼 단추를 확인하는 건 규칙을 넘어 일상이 되었죠."

- "엄마는 엄마가 왜 밤에만 나올 수 있는지 천천히 설명해 줬어요. 그리고 그래서 남들이 모르는 풍경을 수도 없이 볼 수 있으니 좋다고도 얘기했죠. 아마 그때부터 엄마가 사는 세계를 미약하게나마 이해하게 된 것 같아요."
 
- 엄마. 엄마가 지금 있는 곳에서는 햇빛에 다치는 일이 없을 거라 믿어. 
연옥 들판을 다 건너려면 평생 가지고 있던 기억을 전부 버려야 한다는데...
나도 엄마의 기억 속에서 사라지게 될까?
잊어야만 새 삶을 얻게 된다면 잊어도 괜찮아.
내가 엄마를 기억하고 있을 테니까.
엄마가 늘 말했던 것처럼 삶이 한 편의 영화라면, 엄마의 영화는 이제 결말에 다다른 거겠지.
 
- 그리고, 가장 중요한 업무를 위해 만반의 준비를 합니다.
바로 망자를 벌판으로 인도하는 일이지요.
혈혈단신으로 벌판을 건너려면 꼭 숙지해야 할 것들이 있거든요.

- 연옥 벌판은 하나의 거대한 유기체입니다. 망자가 버리는 기억을 먹고 점점 넓어지지요.
그래서 벌판은 지나가는 망자가 어떤 삶을 살았느냐에 따라 그 모습을 바꾸기도 합니다.
시시각각 바뀌는 벌판은 다양한 방법으로 망자를 현혹합니다.

 

- 하지만 차사들의 역할은 안내자일 뿐으로, 숨끝 안으로 들어간 영혼의 일에는 관여할 수 없습니다.

- 이제 영혼이 가는 길은 벌판의 몫입니다. 저는 그저 멀어지는 뒷모습을 보며 안녕을 바랄 수밖에요.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