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1

[박정배] 한식의 탄생 - 아는 만큼 더 맛있는 우리 밥상 탐방기

일루젼 2024. 10. 17. 1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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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박정배
출판 :  세종서적
출간 : 2016.11.30


       

 

이곳저곳에 흩어져있던 에너지들을 한 곳으로 모으는 중이다. 

돋보기처럼 한 점에 모이게 될지, 아니면 압축물처럼 짓눌려 쌓이게 될지는 아직 모르겠다.

관성에 젖어 내버려 두었던 것들을 하나씩 확인하고 유지/해지하는 과정은 무척 귀찮고 꽤나 설렌다. 

 

지금은 배만 곯지 않으면 그만이라는 마음으로 직원식당을 가장 애용하는 나지만, 한때는 지인과 맛있는 것들을 찾아다니며 맛보는 것이 도락(道樂)이었다. 빕구르망, 미슐랭, 블루리본, 자가드... 각종 서베이들을 검색하고, 내한 셰프의 디너를 예약하곤 했더랬다. 

 

그래서 내 혀가 그들의 미학(味學)을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잘 훈련되어 있었느냐 하면. 

그냥 보통이었다. 아무 맛도 못 느끼는 막혀까지는 아니었지만, 느껴지는 향미만으로 들어간 재료들을 유추할 수 있을 정도의 미감도 아니었다.

'이것은 다시 먹고 싶은 맛인가?' '이 가격을 지불하는 것이 아깝지 않은가?' 정도의 러프한 기준으로 내 마음에 드는 식당을 골라내는 정도였고, 그렇게 기억하고 있던 식당을 기념하고 싶은 날이나 축하하고 싶은 날 지인들과 다시금 찾아보는 정도였다. 돌이켜 보면 그래도 조금은 개발되었다 싶지만, 평양냉면처럼 누구나 여러 번 먹어보다 보면 맛을 좀 더 알게 되는 딱 그 정도. 

 

상당히 높은 앵겔지수를 유지하던 그때를 떠올리면, 뭔가 아득하다. 

아쉽거나 후회가 남지는 않는다. 다양한 맛과 톤앤매너를 경험했던 것은 꽤 의미가 있었고, 덕분에 조금씩 요리에 관심을 가져 일상에서 적당히 해 먹고살 수 있게 되기도 했으니까.

 

(TMI. 기왕이면 한 살이라도 어릴 때 맛있는 걸 먹어보는 게 좋지 않을까? 맛에 대한 기억이 더 강렬하게 남을 수도 있고, 그 시대가 아니면 다시 구하기 힘든 식재료가 될 수도 있다. 그에 더해 나이가 들수록 미뢰가 퇴화한다는 연구도 있으니까... 하지만 미뢰 연구의 결론은 제각각이다. 그래서 맛에 둔감해진다는 연구자도 있고, 쓴맛을 포함해 미묘한 맛을 더 잘 느끼게 된다는 연구자도 있다. 음...)  

 

최근 올리브TV의 폐지로 <마스터 셰프 코리아>, <한식대첩> 이후 명맥이 끊긴 줄만 알았던 요리 예능이 다시 각광받고 있다.

넷플릭스의 <흑백요리사>. <마셰코>에서 처음 백종원을 봤을 때만 해도 이런 위상을 갖추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는데, 대단한 분이다 싶기도 하고 격세지감이다 싶기도 하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좋은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코로나로 인해 어려운 시기를 겪었던 파인다이닝 식당들이 한숨 돌릴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도 있고, '맛'도 하나의 경험으로 인정하는 문화가 더 깊게 자리 잡았으면 하는 마음도 있다. 가성비만을 기준으로 따지며 '더 저렴한 대체제'만을 찾는 풍조에서 조금 벗어날 수 있었으면 싶었다. (물론 그럴 수 있는 경제적-사회적 여유가 갖춰지는 게 먼저겠지만)

 

'경험해 본 적 없는 것'을 대체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다양한 것들을 접하다 보면 자신만의 기준과 편안한 범위는 자연스럽게 생겨난다. 삶을 풍요롭게 채우는 것의 핵심은 '새로운 경험'이라고 생각한다. 

 

날씨가 무척 좋다.

짧게 지나갈 것 같은 가을에는, 이전까지 해본 적 없는 일들을 일주일에 하나씩 도전해보려고 한다. 

목표를 그렇게 잡으면 한 달에 하나 정도는 해보겠지.

게으른 나조차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은 날씨다. 

 

그러니 <한식의 탄생> 같은 식문화 책을 한 권쯤 읽고, 소개된 맛 지도를 따라 훌쩍 여행을 다녀오는 건 어떠실지.

 

   


   

 

- 봄볕이 스며들면 김치가 시어진다. 겨우내 숙성시킨 메주에 노란 곰팡이 꽃이 피면 사람들은 장(醬)을 담근다. 메주로 장을 담그면 위로 뜨는 맑은 국은 간장이 되고, 메주에 소금을 넣고 다시 숙성시키면 된장이 된다. 

 

- 음력 정월에 담근 장은 정월장, 음력 2월에 담근 장은 이월장이라 불렀고, 삼월장, 사월장까지 봄은 장 담그는 계절이다. 장은 주로 음력 2월에 담근 장이 주를 이루었다. 김치가 겨울 음식의 주인공이었다면, 장은 사계절 우리 밥상의 주역이었다. 장 담그기를 망치면 1년 내내 밥상이 불안했다.

 

- 청포묵은 봄날에 먹던 밤참이었다. <경도잡지>(1770년)에는 "탕평채(蕩平菜)는 녹두유(綠豆乳, 청포묵), 돼지고기, 미나리 싹을 실같이 썰어 초장에 묻힌 것으로 매우 시원하며 봄밤에 먹기 좋다"라는 내용이 나온다. 

 

- 묵에 관한 최초 기록은 1737년 발간된 <고사십이집>에서 찾을 수 있다. 이 문헌을 보면 "청포(淸泡)는 녹두로 두부처럼 만든다. 그러나 자루에 넣고 누르는 것이 아니라 목기에 담아서 응고시킨 후 이용한다. 가늘게 썰어 초장에 무쳐 나물로 한다"라고 그 제조법이 소개되어 있다.

 

- 묵이라는 한글 단어는 <방언집석>(1788년)에 '채두부(菜豆腐) 묵'이라고 처음 나온다. 채두부란 채소로 만든 두부라는 뜻이니, 묵을 두부의 일종으로 본 것이다. 

 

- 복날은 초복, 중복, 말복 세 번이다. 초복은 24절기 중에서 태양과 가장 가까운 여름의 절정 하지(夏至)의 세 번째 경일(庚日)이다. 경일은 열흘에 한 번 돌아온다. 초복 다음 열흘 후에 오는 경일은 중복이 된다. 말복도 대개 열흘 뒤에 오는데 때로는 스무날 뒤에 오기도 한다. 보름에 한 번씩 돌아오는 24 절기 입추(立秋)가 중간에 끼어 있기 때문이다. 스무날 만에 돌아오는 말복은 월복(越伏)이라 부른다. 

 

- 경일은 가을 기운을 지닌 날이다. 여름이 절정으로 치달을 때 가을의 기운이 생겨나는 것은 자연의 이치다. 그런데 여름 기운이 너무 강하면 가을 기운이 맥을 못 추고 납작 엎드려 있게 된다. 여름 기운에 가을 기운이 조금 남아 있으면 날이 선선할 텐데, 가을 기운이 전혀 힘을 못 쓰니 날은 더욱 더울 수밖에 없다.

 

- 호박과 민어는 삼복 기간에 맛이 가장 좋은 식재료다. 민어국과 더불어 복날 빠지지 않는 음식은 팥죽이었다. 팥죽은 더위를 몰아낸다는 민간신앙 때문에 생겨난 음식 풍속이다. 대한민국에서 날이 가장 더운 남해안 일대에서는 여름이면 장어탕 같은 음식을 먹으며 여름을 견뎌 낸다.

 

- 전남 장흥의 포구마을 회진면에는 '된장물'이라고 불리는 된장물회가 있다. 된장물에 열무김치를 넣고 문절이, 조기, 전어 같은 비린 생선도 넣어 먹는다. 열무김치가 들어가는 탓에 열무김치물회로도 불리는 장흥의 된장물회는 1940년대부터 선원들의 회식 겸 해장용 음식이었음이, 이 지역 노인들의 한결같은 증언이다.  

 

- 물회는 선원들의 음식에서 지역 음식으로 정착한 뒤, 1990년대 중반 낚시꾼들에게 선보이면서 외부로 알려졌다. 포항과 장흥의 이야기에서 알 수 있듯이, 물회는 장기간 뱃일을 하는 선원들이 만들어 낸 음식 문화다. 포항과 장흥은 물론 동해안의 유명한 물회도 선원들이 배에서 먹던 음식에서 시작되었다. 


- 하지만 제주도는 예외다. 제주의 여름 별식 자리물회는 제주 사람이라면 누구나 즐겨 먹는 음식이다. 제주 자리물회는 된장물을 기본으로 한다는 점에서 바다를 두고 마주한 장흥 된장물회와의 연관성이 거론되고 있다. 동해안의 물회가 고추장을 기본으로 하는 것과는 확연하게 다른 점이다. 자리물회의 주재료인 자리돔은 6~8월이 제철인 작은 돔류의 생선이다. 제주 사람들은 손가락만 한 작은 자리돔을 도토리 키 재듯 세 가지 크기로 구분해서 먹는다. 큰 것은 구이로, 중간 크기는 물회로, 작은 것은 젓갈로 먹는다. 


- 자리돔처럼 여름이 제철인 한치도 제주 사람들이 물회로 즐겨 먹는다. 달보드레한 한치와 구수한 된장은 잘 어울린다. 최근 들어 어랭이(노래미의 제주 방언) 물회도 인기몰이 중이다. 제주의 전통 물회는 된장을 기본으로 하지만 된장을 부담스러워하는 관광객들 때문에 고추장을 사용한 물회도 많이 등장했다.
 
- 포항의 물회 문화는 1990년대 들어서면서 대중화된다. 포항 물회의 주재료는 가자미지만 최근에는 냉동 광어가 많이 사용된다. 10년 전부터는 고추장물에 과일을 갈아 넣어 만든 물회가 등장하면서 젊은이와 대중에게 큰 인기를 얻으며 대세가 되었다. 


- 포항에서 시작된 물회 문화는 동해안을 따라 북상하며 다양해졌다. 포항 바로 위에 있는 감포에서는 물회에 물이나 육수를 붓지 않고 얼음만 몇 점 넣은 비빔물회가 유행이다. 채소와 회, 고추장을 비비면 얼음이 녹으면서 자박한 물회가 된다. 강릉과 속초에 이르는 동해 북부에는 오징어를 기본으로 한 물회와 더불어 모둠물회가 인기다. 오징어와 멍게, 해삼까지 들어간 모둠물회는 이 지역의 특별 조리법이 되었다. 고성 가진항 주면의 물회 역시 유명하다. 모둠물회에 국수사리를 넣어 먹는 방식으로 동해 북부 물회 문화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 물회는 여름이 제철이다. 시원한 육수에 매콤한 양념, 감칠맛 나는 여름 생선을 음료수처럼 마시면 더위는 금방 달아난다. 물회의 주재료는 제주도의 자리물회와 한치물회, 울릉도와 속초의 오징어물회, 고성과 포항의 가자미물회처럼 지역에서 나는 제철 생선을 기본으로 한다. 물회는 활어를 이용하는 방법과 선어를 이용하는 방법으로 대별된다. 선어는 활어보다 싱싱함과 탄력은 조금 떨어지지만 감칠맛의 주성분 중 하나인 이노신산이 증가한 탓에 깊은 맛이 난다. 옛날 어부들은 선어보다는 활어를 선호한다. 

 

- 생선과 더불어 물회를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재료는 장이다. 제주도와 남해안은 주로 된장을 기본으로 한 된장물회를, 동해안은 고추장과 초고추장을 이용한 물회를 먹는다. 드물지만 간장을 이용한 경우도 있다. 물회는 잡은 생선과 먹다 남은 채소를 비벼 물을 붓고 장으로 간한다는 점에서 비빔밥과 비슷하고 탕반 문화의 영향도 받은 음식이다. 


- 물회에 채소가 다양하게 들어간 것은 1970년대 이후 외식화의 결과다. 물회와 유사한 음식으로 냉국(창국, 찬국)이 있다. 식초와 함께 생선을 넣고 먹는 탓에 남해안에서는 '촛국'이라고도 부른다. 된장과 식초는 맛을 좋게 할 뿐만 아니라 여름철 식중독 예방 효과도 있다.  

 

- 1924년에 이용기가 쓴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에는 깍뚜기와 외깍뚜기, 햇깍뚜기, 채깍뚜기, 숙깍뚜기 조리법이 나오는데 굴깍뚜기를 제외한 다른 깍뚜기에는 설탕이 들어간다. 이는 1920년대 중반 이후 본격적으로 음식에 설탕을 넣는 문화가 시작되었음을 보여 준다. 당시 설탕은 선진국과 후진국을 나누는 기준이었다. 설탕 소비가 많은 유럽과 미국의 식문화를 좋은 모델로 상정한 후 일본 유학파들을 중심으로 음식에 설탕을 넣은 조리법이 신문과 잡지에 소개된다. 


- 20세기 이전의 조리서에는 설탕이 전혀 등장하지 않지만 1917년에 간행된 <조선요리제법>에는 꿀, 엿과 함께 설탕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1920년 서울에 24개에 불과하던 설렁탕집이 몇 년 만에 100여 개로 폭증하면서 매콤하고 달달한 서울식 깍두기는 외식에 빠질 수 없는 반찬이 되었다. 1930년대 말에 영업을 시작한 '하동관'의 숨겨진 조연이 달달하고 시원한 '깍국(깍두기 국물)'임을 단골들은 잘 알고 있다   

 

- 깍두기는 서울이 가장 유명했다. "가자매(가자미) 식해, 이것은 함흥요리인데 서울 깍둑이와 비슷한 반찬입니다"(<동아일보>, 1934년 1월 3일)라고 비교할 정도였다.

 

- 옛날 방식으로 멸치 육수에 간장과 설탕으로 맛을 낸 시원한 국물에 소바를 넣어 먹는 냉소바 문화도 남아 있다. 소바 콩국수는 메밀 겉껍질이 많이 포함된 소바(메밀)에 밀가루 등을 섞고 설탕을 넣어 단맛이 나는 면발이다. 국물에 콩가루나 땅콩가루를 넣으면 고소한 맛이 단맛과 함께 난다. 단맛이 강해서 팥빙수 한 그릇을 먹는 기분이 드는 독특한 음식이다. 
 
- 밀면은 한국전쟁이 낳은 남북한 국수 문화의 결합체다. 함경도 출신의 실향민이 1950년대 말에 함경도식 국수를 부산의 기후와 재료 특성에 맞춰 변형한 것이 밀면이다. 함경도에서 국수를 만들 때 사용하던 감자녹말을 구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당시 미국의 원조로 가장 흔했던 밀가루와 고구마녹말을 7 대 3으로 섞은 냉면이 만들어지자 실향민과 현지인 모두에게서 커다란 인기를 얻었다. 초기에는 밀면을 밀냉면, 경상도냉면, 부산냉면이라고 불렀다.  


- 1960년 말에서 1970년대 초반에 밀면은 100퍼센트 밀가루로 만든 면이 나오고 한약재를 넣은 달달한 국물이 나오면서, 함흥식 냉면에서 탈피해 그만의 정체성을 지닌 밀면으로 거듭난다.   

    

- 자연산이 대부분이었던 몸통이 둥근 미꾸리는 몸통이 납작해 '납작이'라 불리던 미꾸라지로 바뀌었다. 양식에 적합하고 미꾸리보다 성장이 월등히 빠른 미꾸라지는 미꾸리가 2년 걸려서 성장할 몸을 1년 만에 키운다.  

 

- 그렇다고 미꾸리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소수의 미꾸리는 전통과 맛이라는 명분으로 '지수식' 논이나 인공 양식장인 '시설식'에서 자라나 미꾸라지의 홍수 속에서도 살아남았다. 미꾸리는 "집 근처에서 밥물 먹고 자란 미꾸라지나 말미꾸라지라는 큰 것은 먹지 않고 기름진 작은 미꾸라지(미꾸리)를 애용했다"(<매일경제>, 1981년 10월 5일)라고 한다. 
 
- 추어에 대한 기록은 고려시대 말 송나라 사신 서긍이 쓴 <고려도경>에 등장한다. 1610년경에 쓰인 《동의보감》의 <탕액편>에서는 한자 '추어(鰍魚)'와 한글 '꾸리'가 나온다. 19세기 초 <난호어목지>에는 시골 사람들의 별미로 밋구리죽이 언급되고, 선조 때(1850년경) 실학자 이규경이 쓴 <오주연문장전산고>에는 '추두부탕(鰍豆腐湯)'이 등장한다. 추두부탕은 주로 성균관 인근에 살던 반인(泮人), 백정들의 별식이었다. 조선시대 걸인 조직인 꼭지들이 청계천 부근에서 추탕을 독점해서 팔았다는 이야기도 전해져 내려온다. 추어탕은 서민 음식이었다. 미꾸리나 미꾸라지로 끓인 추탕(추어탕)은 전국에 걸쳐 나타난다.


- 지금은 남원 추어탕이 유명하지만 일제강점기에는 서울 추어탕이 더 많이 알려져 있었다. 서울의 추탕은 "미꾸라지 산 놈을 찬두부모와 함께 국에 넣고 불을 지펴 미꾸라지가 뜨거움을 피해 두부 속으로 들어간 채로 국을 끓이는 추탕두부국과, 미꾸라지를 푹 삶아 즙만 내어 쇠양을 넣고 다시 곰한 미꾸라지 곰국"(<매일경제>, 1981년 10월 5일) 두 가지가 있었다. 

 

- 서울식은 미꾸라지 형태를 유지하는 것이 기본이었다. 반면 지방에서는 미꾸라지의 형태를 없애는 것이 일반적이다. 경상도에서는 미꾸라지를 푹 끓여 낸 국물에 배추 우거지를 넣고 산초로 맛을 낸 추어탕을 먹고, 남원으로 대표되는 전라도식은 미꾸라지를 푹 고아 형태를 없애는 점은 경상도식과 비슷하지만 푸성귀, 시래기, 된장, 파, 들깨즙을 넣고 마지막에 산초로 매운맛을 내는 것이 큰 특징이다. 

 

- 전어만큼 시기, 크기에 따라 맛과 먹는 방법이 달라지는 생선도 없다. 크지 않은 몸통 덕에 1년생으로 아는 이들이 많지만, 전어는 6년 이상을 사는 다년생 생선이다. 자연산 전어는 부족한 먹이와 높은 활동성 때문에 1년이면 11센티미터 전후, 2년이면 16센티미터, 3년생은 18센티미터 정도 크기다. 드물게는 30센티미터까지 자라는 것도 있다. 


- 전어는 봄에서 여름 사이에 산란을 한다. 산란 직후의 전어는 "개도 안 먹는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맛이 없다. 알에 모든 영양이 가는 생선의 공통된 특징이다.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되면 전어는 몸에 살집이 오르고 기름기가 낀다. 11월까지 연안에 있다가 놈들은 이내 한반도의 바다를 떠나 버린다. 

 

- 가을 전어가 우리 음식 문화에 가을을 대표하는 생선으로 등장한 것은 생태적 순환의 자연스러운 결과다. 태어난 해가 달라 크기가 들쭉날쭉해도 순환 주기는 일정해서 큰 놈이든 작은 놈이든 몸의 상태는 같은 법이다. 다만, 클수록 뼈가 더 억세다. 전어를 통째 썰어 먹는 이른바 '뼈꼬시'를 최고의 맛으로 치는 전어 마니아들이 제법 있지만, 큰 전어는 억센 가시가 있어 통째 먹기가 힘들다. 뼈꼬시를 좋아하는 이들이라면 9월 중순 전, 시장에 나오는 1~2년산 자연산 작은 전어를 먹는 것이 좋다. 이후에는 몸집은 좀 커도 가시는 연한 양식산 전어를 뼈꼬시로 먹을 수 있다.  

 

- 전어의 기름기와 살집을 만끽하고 싶은 사람들은 9월 중순 이후에서 10월 말까지 제맛을 내는 15센티미터 이상의 자연산 전어구이를 먹는 것이 제격이다. "집 나간 며느리도 돌아오게 한다"는 전어 맛은 구이에서 온 것이기 때문이다.  

 

- 그런데 대도시의 대중적인 전어 전문점에 가 보면, 전어 굽는 냄새 때문에 며느리는 돌아올지 몰라도 그 맛은 다시 집을 나가고 싶을 정도로 좀 처참하다. 전어 냄새를 맡고 밀려든 손님들 때문에 전어는 센 불에 급하게 구워져 나온다. 지느러미와 꼬리는 숯덩이처럼 검게 타 버리고 속은 익지 않은 전어의 몸은 푸석한 인조고기를 먹는 맛이 난다. 센 불에서 멀리 구워야 한다는 굽기의 기본 원칙은 난장판 같은 식당에서 찾아보기 힘들다. 더군다나 전어구이에서 최고 미각을 선사하는 내장 부위 역시 촉촉함 대신에 마른 식감만 되돌아온다.

 

- 그런데 전어를 즐겨 먹는 또 다른 나라 일본에서는 우리와 사뭇 다른 계절에, 다른 요리법으로 전어를 먹을 뿐 아니라 우리와 다른 민간 속설까지 남아 있다.

 

- 일본에서 전어는 대표적인 출세어(出世魚)다. 출세어는 커 가면서 이름과 먹는 방법이 달라지는 생선을 말한다. 일본에서는 10센티미터 정도의 어린 전어를 '고하다(小魚耆)'라고 부른다. 봄이 제철인 고하다는 초절임 한  스시의 네타(초밥에 얹는 재료)로 즐겨 먹는다. 혼마구로(참다랑어)의 최고급 부위인 오도로(대뱃살)와 동급으로 쳐줄 만큼 귀하고 비싼 네타다.

 

- 현재 일본의 대표적인 스시인 니지리즈시가 식초의 대중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은 널리 알려진 이야기다. 오도로와 고하다 같은 최고급 스시 재료는 공통적으로 기름기가 많다. 식초가 대중화되기 전에는 기름기가 많아 빨리 상하는 탓에 거의 사용되지 않는 식재료였다.

 

- 일본에서는 전어구이를 거의 먹지 않는다. 전어의 일본말인 '고노시로(このしろ)'는 직역하면 '아이를 대신한다'는 뜻이다. 영주가 자신의 딸을 데려가려 하자 전어를 관 속에 넣어 태운 뒤 딸이 죽었다고 속인 어부의 일화에서 나온 말이다. 일본인들은 전어 굽는 냄새를 시체 타는 냄새로 연상할 정도로 전어구이를 좋아하지 않는다. 같은 재료가 문화적 차이로 인해 이처럼 상반된 결과를 낳은 것이다.

 

- 가을이면 남해에는 전어를 먹으려는 사람들로 넘쳐난다. 여수, 보성, 고흥의 전어는 살이 단단하고, 광양의 망덕포구와 부산이 명지 전어는 부드럽다. 9월 초에 가면 회를 먹는 게 낫고, 9월 중순이 지나면 구이를 먹는 게 좋다. 전어처럼 양식산과 자연산의 맛 차이가 도드라진 생선도 없을 것이다. 특히 고소한 내장의 맛은 자연산 전어가 아니면 제맛을 느낄 수 없다. 통째 먹는 뼈꼬시도 좋지만 기름기가 오른 9월 중순 이후에 전어의 살만 발라내 숙성시켜 먹는 회는, 내게는 최고의 전어를 먹는 방법이다.

 

- 술을 깨는 음식이 처음 등장하는 문헌은 고려 말엽의 어학서인 <노걸대>다. <노걸대>에는 해장국이 성주탕(醒酒湯)이라는 이름으로 고기 국물에 국수, 산초, 초, 파, 각종 채소를 한데 넣어 끓인다고 나와 있다. 하지만 성주탕은 중국에서 먹는 음식이었다. '해정'이라는 말은 1856년 쓰인 자전 <자류주석>에 처음 기록되어 있다. 1880년 <한불자전>에는 '해정국'이 아닌 '해정주'라는 단어가 먼저 등장한다. 20세기 초반 들어서 해정주 혹은 해정술은 술 먹은 다음 날 술 깨기 위해 마시는 술로 대중화된다.  


- 해정주와 함께 먹는 술국인 해정국도 1924년 발간된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에 삼태탕으로 등장할 정도로 본격화된다. 콩과 두부, 명태를 넣은 탓에 삼태탕(三太湯)이라 불렀다. 삼태탕은 '술 먹는 사람이 그 전날 취해 자고 깨서 해정하는' 음식이었다. 오늘날 해장국으로 자주 먹는 콩나물해장국, 명태해장국, 두부해장국이 한 몸이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 해장국으로 가장 유명한 전주콩나물해장국도 초창기에는 탁배기막걸리와 함께 먹는 술국이었다. <전주콩나물국밥>, <별건곤>, 1929년 12월 호 지금도 전주에서는 콩나물해장국과 함께 '모주(母酒)'라는 해장술을 판다. 모주는 막걸리에 계피, 흑설탕을 넣고 달인 술이다.

 

- 1920년대 말에는 콩나물을 소금물에만 끓여 탁배기와 함께 먹었다.  


- 전주콩나물국밥은 겨울 음식이었다. "겨울 콩나물이 가장 맛있다. 80년 전에 콩나물을 즐기기 시작했다. 토질을 막기 위해 사흘이 멀다 하고 콩나물을 먹어야 한다는 이야기가 수세기 동안 구전돼오면서 향토의 관습으로 돼버렸다. 70~80년 전 전주 남북으로 쌍벽을 이뤘던 완산동 김제노파 해장국집과 다가동 도린노파 해장국집의 요리는 깨끗이 씻은 콩나물을 간이 맞는 소금물에 끓여 마늘과 파는 썰어 담근 똑대기깍두기에 해묵은 겹장 요리를 한 다음 참깨를 한 수저 넣고 부뚜막에 말린 붉은 고추를 수저로 깨뜨려 넣으면 그만이었다는 것이다." (<경향신문>, 1977년 11월 5일)

 

- 현재는 멸치 국물에 밥과 콩나물을 말아 내는 남부시장 방식과, 뚝배기에 소뼈 국물과 콩나물, 밥을 넣고 끓이는 '삼백집' 방식이 대세를 이루고 있다.

 

- 한반도와 가장 가까운 산둥 지역은 중국의 밀 문화가 본격적으로 탄생한 곳이자 가장 강력하게 남아 있는 곳이다. 이곳에서는 음력 마지막 날 '자오쯔(餃子, 교자)'를 빚어 가족과 함께 먹는다. 자오쯔는 '자시(밤 11시에서 새벽 1시 사이)가 된다(交在子時)'는 말과 발음이 비슷하다. 자오쯔를 먹는다는 것은 '해가 바뀌고 자시가 된다(更歲交子)'는 의미, 즉 송구영신(送舊迎新)이라는 뜻이 있다. 중국에서는 잠을 자지 않고 새해를 맞이해야 하고, 자정에 자오쯔를 먹기 시작한다. 새해 첫 식사가 자오쯔다.  


- 자오쯔의 모양은 중국 돈 원보(元寶)를 닮았다. 자오쯔를 먹으며 '부자 되라'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또한 자오쯔를 뜻하는 한자 '餃子'의 발음은 '交子'와 같다. '交子'는 '아이를 낳는다'는 뜻이다. 자오쯔를 먹으며 자손을 낳아 번성하라는 의미다. '交'는 '영원하다', '지속된다'는 의미도 있다. 자오쯔에 들어가는 소는 고기(肉, Rou)와 야채(菜, Cai)를 섞어 만드는데, 이는 '돈이 많이 있다(有財, Youcai)'는 말과 발음이 비슷하다.

 

- 훈툰은 자오쯔보다 4분의 1정도로 작은 만두다. 면 국물에 훈툰 두 개를 넣어 먹는 것도 중국 춘절의 음식 문화다. 훈툰도 원보를 닮았다. 국수가 훈툰을 이어 주어 큰돈을 모으는 상징으로 여겼다. 밀가루와 이스트로 반죽해 속에 아무것도 넣지 않은 '만터우(饅頭, 만두)'도 중국의 춘절 음식이다. 둥근 모양은 복을 받고 원만하게 살라는 뜻이고, 부풀어 오르는 모양은 돈을 벌라는 의미다.  


- 남쪽에서는 자오쯔를 먹지 않고 '녠가오(年糕)'라는 설 떡이나 국수를 먹는다. 녠가오는 남쪽에서는 주로 찹쌀을 이용하고, 북쪽에서는 수수 등을 사용한다. 녠가오는 '오래 살라'라는 뜻을 지닌 '年高'와 발음이 같다. '매년 형편이 좋아져라'라는 의미다. 녠가오는 다양한 모양과 재료로 만드는데, 한국의 가래떡과 비슷한 모양의 녠가오도 있다. 북방의 자오쯔와 남방의 가래떡 모양의 녠가오는 한반도에 전해져 떡국과 만두로 변형된다.

 

- 외래어가 한국어로 정착할 때는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된다. 쌍하, 쌍화, 상화는 전부 투르크계의 튀겨 먹는 만두인 '삼사 samsa'에서 시작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개성의 독특한 만두인 편수는 '변씨만두(卞氏饅頭)'라고도 불리는데, 삼사처럼 모양이 사각형인 것이 특징이다. 삼사의 어원은 아름다운 삼각형이라는 의미가 있는 페르시아어 '산보삭'이다. 삼각형이나 사각형은 보는 각도에 따른 차이다. 사각형의 밑부분을 삼각형으로 연결한 것이 삼사이기 때문이다. 삼사는 기름에 튀기거나 구워 먹는 음식이다. 반면 한민족은 만두를 주로 찌거나 국물에 넣어 먹는다.        

- 설날에 떡국 먹는 풍습은 중국 송나라 때(960~1279년) 시작되었다. 남송南宋 시인 육유가 쓴 <세수서사>에는 세일(歲日), 설날에는 탕병(湯餠)을 먹는데, 이것은 '동혼돈연박탁(冬餛飩年餺飥)'과 같은 것이라고 나온다. '박탁'은 수제비를 말한다. '떡국'이라는 한글 표기는 19세기 후반에 등장한다. 이전에는 '탕병'이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다. 중국에서 '병(餠)'은 밀가루로 만든 음식을 칭한다. 쌀을 갈아 만든 음식은 '이(餌)'라고 부른다. 밀이 거의 나지 않던 한반도에서는 멥쌀을 이용해 떡을 만들었다. '병'이라는 한자어가 한반도에서는 쌀과 밀은 물론 다른 곡물로 만든 음식을 지칭하는 단어로 정착한다.

 

- 홍어의 강한 암모니아 냄새는 홍어나 상어만이 지닌 특징이다. 심해에 사는 상어나 홍어는 강한 압력을 견디기 위한 삼투압 작용을 위해 몸속에 요소를 저장하고 있어야 한다. 홍어가 죽으면 그 요소가 암모니아와 다른 물질로 가수분해가 된다. 이 암모니아가 잡균이 살지 못하게 하는데, 이는 오랫동안 삭혀도 홍어가 부패하지 않는 이유다. 1970년대 이전 신문 기사를 보면 홍어 내장을 먹고 식중독에 걸린 기사가 종종 나오지만 사실은 간재미의 내장을 먹고 식중독에 걸린 것이다. 참홍어는 식중독균보다 강하다. 

 
- 예부터 지금까지 홍어의 종착점은 나주 영산강이다. 고려 말에 왜구의 침입을 피하기 위해 섬을 비우는 공도(空島) 정책을 실시한 결과, 흑산도 사람들은 지금의 영산포 부근에 정착했다. 왜구가 소탕되자 주민 일부는 섬으로 돌아가고 일부는 남았다. 이때부터 흑산도와 나주 영산포 간 홍어 커넥션이 생긴 것으로 추정된다. 일제강점기에 영산강 주변은 번성한 포구였다. 현재 포구는 사라졌지만 주변에는 홍어의 거리가 조성되어 있다.  

 

- 영산포에서는 주로 삭힌 홍어를 먹는다.

 

- 설날에 떡국만 먹은 건 아니다. 1939년 <가정지우> 1월 호에 실린 글 <거의 조선에 공통되는 정초 음식>에는 떡국과 만두, 약식, 수정과, 식혜 다섯 가지를 꼽고 있다. 이 중 수정과는 "조선 요리로는 본격적인 정월 음식"(<동아일보>, 1937년 12월 23일)으로 설이면 반드시 마련하던 대표적인 명절 음식이었다.  

 

- 수정과는 우리 전통 음식인 정과(正果)의 일종이다. 정과는 과일이나 생강, 연근, 당근, 인삼 등을 설탕이나 꿀에 조려서 만든 과자류다. 19세기에 필사된 <군학회등>에는 정과를 수정과(水正果), 음료 형태의 정과와 건정과(乾正果)로 나누고, 수정과는 다시 건시수정과와 잡과수정과로 구분한다. 건시수정과는 오늘날 우리가 먹는 곶감으로 만든 수정과다. 잡과수정과는 유자수정과, 화채수정과, 유월도수정과, 들쭉수정과, 반도수정과 등 다양한 재료를 이용한다. 
 
- 수정과를 건시와 잡과로 나눈 것에서 알 수 있듯, 가을 햇살을 닮은 붉은 홍시를 따서 꼬치에 꽂아 말린 곶감이나 꼬치에 끼지 않고 납작하게 말린 백시(白枾)는 수정과를 대표하는 재료였다. 수정과는 사신을 접대할 때(<승정원일기>, 1644년 9월 13일)는 물론이고 제사상과 궁중 잔치에도 빠지지 않고 등장한 귀한 음식이었다.  


- 우리나라 물산에 관한 다양한 기원을 기록한 <해동죽지>(1925년)에는 "백제호(白醍醐), 곶감제호탕 옛 풍속에 원나라 때 고려의 궁녀가 백시를 생강 끓인 것에 담가 꿀을 넣어 백시제호(白枾醍醐)라고 했다. 지금도 집집마다 아직까지 전해 오는데 이것을 수전과(수정과)라고 한다"라고 적혀 있다.

 

- 한국인이 가장 즐겨 먹는 삼겹살의 기원도 개성이다. 개성에서 먹던 '세겹살'이 삼겹살로 바뀌어 가장 대중적인 고기 음식이 되었다. 불고기의 원형으로 보이는 설적(薛炙)도 개성의 음식이다. 서울에서 백정과 더불어 고기를 취급할 수 있었던 성균관 반인들도 모두 개성 성균관에서 옮겨 온 개성 사람들이었다.  

 

- 우리 민족이 사용한 고기 국물을 지칭하는 대표적인 말은 '육즙(肉汁)'이다. <조선왕조실록> 태종 3년(1403년)에 육즙을 신하에게 내려 주는 것을 시작으로 조선시대 기록에는 육즙이 빈번하게 등장한다. 그러나 육즙은 '즙'이라는 이름처럼 주로 치료용으로 많이 사용되었다. 원기가 부족한 환자들에게 고기 국물은 약이었다. 고기 국물이라는 의미의 '대갱읍(大羹湆)', 쇠고기 국물을 뜻하는 '향(膷)', 양고기 국물을 의미하는 '훈(臐)', 돼지고기 국물을 지칭하는 '효(膮)'도 조선시대에 자주 사용되었다. 하지만 거의 제사에 올리는 음식으로 등장한다는 점에서 대중 음식인 설렁탕이나 곰탕과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 이북식 돼지국밥의 원조집 중 하나인 범일동의 '할매국밥'은 1956년 문을 열었다. 할매국밥은 당시 가장 싼 부위인 돼지머리로 국을 끓여 돼지머리 살코기를 얹어 낸 국밥을 팔았다. 이북식 돼지국밥의 큰 특징은 돼지 살코기를 이용한 맑은 국물을 기본으로 한다는 점이다. 실향민에게서 돼지국밥 만드는 법을 배워 1952년 창업한 '하동집'이나, 국제시장 옆 케네디시장에서 돼지국밥을 팔던 실향민 할머니들에게서 돼지국밥 만드는 법을 배워 1968년 장사하게 된 '신창국밥'은 모두 맑은 국물의 돼지국밥을 낸다. 그렇지만 돼지머리를 이용한 돼지국밥이 최근 들어 부산에서 사라지고 있다. 대신 삼겹살이나 향정살 같은 비싼 부위로 국물을 내는 새로운 돼지국밥이 생겨났다. 할매국밥도 창업주가 돌아가신 뒤로는 돼지머리 대신에 삼겹살을 주로 사용한다.

 

- 경상도식 돼지국밥은 주로 뼈를 사용하는 탓에 국물이 탁하다. 경상도식 돼지국밥은 사상버스터미널과 옛날 부산서부터미널이 있던 범일동 평화도매시장 주변에 많다. 

 

- 한국의 짜장면은 중국에서 왔지만 중국의 짜장면과는 다른 음식이다. 중국에서는 짜장면을 '자장멘(炸醬麵)'이라 부르고 산둥성의 푸잔(福山)을 기원으로 한다. 산둥은 중국 8대 요리 중에서도 최고로 치는 루차이(鲁菜)의 고향이다. 산둥성은 밀의 주산지라 국수 문화가 발달했고, 채소의 본향이기도 하다. 한국 김치의 주종을 이루는 결구형 배추도 산둥에서 넘어온 것이다.

 

- 산둥 사람들은 "대파 한 뿌리면 겨울을 난다"라는 말을 입에 달고 다닐 정도로 대파를 사랑한다. 밀가루를 발효시켜 만든 달달한 텐멘장(甛麵醬)에 대파를 찍어 먹는다. 대파(大蔥)를 텐멘장에 찍어 먹는다 해서 텐멘장을 '취옹장(蔥醬)', 면에 얹어 먹는다 해서 '멘장(麵醬)'이라 부르기도 한다.

 

- 산둥의 겨울은 춥다. 그래서 기름을 많이 사용한다. 기름진 음식을 먹을 때 시원한 대파는 기름기를 중화시킨다. 기름지고 짠 음식은 홋카이도 라멘에서도 나타나듯 추운 지역의 공통된 겨울나기용 레시피다. 산둥의 요리사들은 30여 가지 불 다루는 기법 중 '바오(爆)', '차오(炒)', '자(炸)' 등 주로 센 불을 다루는 것에 능하다. '자'는 세 기법 중에서도 기름을 가장 많이 사용하는 조리법이다. 기름에 장을 튀기듯이 볶아 면 위에 얹어 먹는다. 황제가 있던 베이징의 조리사는 대부분 산둥의 푸잔 출신이다. 그래서 산둥 요리와 베이징 요리는 깊은 연관이 있다.

 

- 산둥 이외의 오래된 자장멘 문화가 있는 곳은 베이징이 유일하다. 베이징에는 자장멘을 파는 전문점이 몇 군데 있다. 그런데 베이징의 자장멘은 산둥의 자장멘과 조금 다르다. 다름은 장의 차이에서 오는데, 베이징은 황장(黃醬)을 주로 사용한다. 텐멘장은 달지만 물기가 있고 깊이가 없다. 황장은 깊지만 짜고 퍽퍽하다. 그래서 베이징의 자장멘 식당은 황장과 텐멘장을 섞어 사용하기도 한다.

 

- 갈비에는 13개의 갈빗대가 있다. 1번에서부터 13번까지 번호가 커질수록 갈비에 붙은 고기는 적어진다. 지역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대개 4번에서 7번 사이의 고기를 꽃갈비라 부르고 최고로 친다. 생갈비나 최고급 양념갈비는 꽃갈비를 이용한 것이다. 균일한 고기 양과 적당한 마블링에 탄력감이 넘치기 때문이다. 살집이 많은 1번에서 3번까지의 갈비는 갈비탕으로 많이 먹는다.

 

- 평양이 소로 이름을 날렸다면 개성은 돼지가 유명했다. 개성 출신의 동화작가이자 미식가였던 마해송이 1957년에 쓴 <요설록>에는 "개성산 삼층제육(三層豬肉)'이 제육으로 치는 것은 정평이 있는 일이지만 개성산이라고 모두 삼층이 되는 것은 아니다. 양돼지 아닌 순종을 그것도 소위양돈장 같은 대규모로 기르는 것이 아니라 과부댁 같은 데서 집에서 기르는 것이다. 뜨물을 얻어다가 먹이는데 얼마 동안은 잘 먹이고 그다음 며칠 동안은 뜨물을 주지 않는다. 잘 먹을 때에 그것이 살이 되고 못 먹을 때는 기름이 된다고 한다. 그래서 살, 비계, 살 삼층제육이 된다는 것이다." 

 

- 서울에서는 한강의 명물 웅어를 싸 먹는 것을 최고로 쳤다.

 

- 깻잎장아찌는 초여름의 계절 요리였다.(<동아일보>, 1960년 6월 23일) 깻잎장아찌에 관한 기록은 1960년대 초반부터 본격적으로 등장한다. 당시 깻잎은 "쉽게 구할 수 있고 값이 싼" 식재료였다. 이 깻잎을 "간장, 고추가루, 파 다진 것, 마늘 다진 것, 실고추 깨소금으로 만든 양념간장에 적셔 차곡차곡 단지에 담가 3~4일이 지나면 시원하고 새큼한 미각으로 우리 식탁의 구미를 돋구어준다."(<동아일보>, 1963년 8월 29일)

 

- 마늘장아찌도 하지(夏至) 전에 담가 놓아야 좋은 초여름 음식이었다.(<동아일보>, 1960년 6월 18일) 연한 마늘의 줄기를 자르고 껍질만 한 겹 벗겨 소금에 절인 후 설탕에 버무리고 식초에 넣어 1개월 뒤에 먹었다. 

 

- 마늘장아찌는 의주에서는 장과 꿀을 넣어 담그며, "송도(개성)에서는 장을 아니치고 만들어 이것을 초선"이라고 불렀다.(<동아일보>, 1931년 7월 5일) 마늘장아찌를 고급스러운 음식으로 먹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 멸치젓은 전라도와 경상도의 남쪽 지방에서 주로 사용하는데 젓국으로 주로 이용한다. 

"멸치 젓갈은 전라남도 추자도와 거문도산이 조선 제일이라 기중에는 추자도산 멸치 젓갈은 고래로 명성이 자못 높아 가격이 타지방산보다 2,3할이 고가다. 젓갈용 멸치는 너무 크지도 안코 너무 작지도 아니한 중형 멸치가 가장 적합한 법인데 추자도 근해에서 젓갈용에 알맞은 멸치가 잡히는 것이다."(<동아일보>, 1939년 6월 15일) 서울에서는 오래전부터 마포로 들어온 새우젓을 주로 사용했다.

 

- "새우젓은 오월에 잡는 것을 오젓이라 하고 유월에 잡는 것을 육젓이라 하고 삼복 후에 잡는 것은 추젓이라 하는데 제일 성숙하야 익는 때가 유월이라 하야 육젓을 제일로 치는 것이니 육젓 중에서도 초복을 지내고 중복이 되기 전에 잡은 것이라야 더욱 조타는 것입니다. 새우를 잡을 때에 밥에 잡는 것을 밤물잡이라 하고 낮에 잡는 것을 낮물젓이라 하고 새벽에 잡는 것을 새열둑이라고 하는 것인데 밤에 잡는 새우는 붉은 색깔이 왼 몸으로 잇게 된 것으로 제일 조타는 것이요, 낮에 잡은 것은 그 색깔이 희게 된 것인데 썩 조타할 수 없고 새벽에 잡은 새우는 머리와 꽁지가 붉게 된 인대 중품 새우라고 해서 같은 날에 잡아도 주양의 구별이 잇어 그 색택이 다르고 호불호가 있는 것입니다."(<동아일보>, 1937년 8월 17일)

 

- 1930년대 신문에는 일본 음식인 스키야키에 당면을 넣어 먹은 기록도 있다. 스키야키는 채소와 고기를 함께 먹는 일본의 고기 요리로, 국물이 자작한 한국의 불고기와 연관성이 제기되고 있는 음식이다. 공교롭게도 지금 불고기에는 당면이 빠지지 않고 들어간다.

 

- 중국의 당면인 펀쓰는 녹두와 잠두의 녹말을 원료로 만든다. 일본산 당면인 하루사메(春雨)는 감자녹말과 고구마녹말, 옥수수녹말을 섞어 사용한다. 한국의 당면이 서민적인 식재료인 반면, 중국 산둥성의 펀쓰는 저렴한 것부터 비싼 것까지 재료의 질과 가격의 폭이 크다. 녹두녹말을 사용한 펀쓰는 매끄럽고 탄력감이 넘치는 세련된 식재료다. 현재 한국에서 당면을 만드는 공장은 몇 군데 남아 있지 않다. 대부분은 당면의 고향인 산둥성에서 수입해 온다. 

 

- 지금처럼 딱딱한 쥐포도 있었지만, 한 번 삶아서 조미한 쥐포는 굽지 않고 먹어도 될 만큼 부드러웠다. 감칠맛과 달콤함이 공존하는 쥐포는 한번 먹기 시작하면 완전한 포만감이 들 때까지 멈추기 어려웠다.

 

- 쥐포 문화는 일본식 생선 말리기 문화를 기원으로 한다. 삼천포에는 '화어(花魚)'라는 건어물 문화가 있다. 1930년대부터 화어를 만들어 왔다는 신선수산 사장님에 의하면, 화어는 그때부터 최고의 건어물이었다고 한다. 지금도 화어는 최상의 선물로 팔려 나간다. 

 

- 화어는 학꽁치, 홍감평, 밀지어, 바닥대구, 쥐치, 가오리, 복어, 새우 여덟 종의 생선을 원료로 국화, 해바라기, 장미 등의 모양으로 만들어 일본인들에게 선물용으로 수출하기 위해 개발한 것이다.

 

- 화어는 어디서 온 것일까? 지금도 삼천포의 건어물 생산자들은 '사쿠라보시(桜)는 화어와 쥐포의 조상이다. 사쿠라보시(さくらぼし)는 다른 말로 '미림보시(みりん干)'라 부른다. 미림보시는 일본의 대표적인 조미용 술인 '미림'으로 간해 말린 생선을 말한다. '보시()'는 말린 생선이라는 뜻이다. 

 

- 사쿠라보시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정어리가 벚꽃 피는 3~4월이 제철이라는 설과, 생선을 펴서 말리는 것이 벚꽃과 비슷해서 붙은 것이라는 설이 있다. 관련 자료는 없지만 사쿠라보시가 화어로 개명되었을 수도 있다. 지금 일본의 사쿠라보시는 정어리 말린 것을 말한다. 쥐치로 만든 쥐포는 '가와하기미림보시(カワハギみりん干)'라 부른다.

 

- 우리 쥐포처럼 완전하게 말린 것도 있지만, 일본 쥐포는 쥐치의 꼬리를 그대로 살리고 반건조한 것을 주로 먹는다. 화어에 사용되는 건어물은 한결같이 꼬리를 달고 있다. 일본인은 쥐치를 주로 먹고, 한국인은 말지취로 만든 쥐포를 더 많이 먹는다. 서유구가 1820년경에 쓴 어류 박물지 <전어지>에 쥐치는 '서어(鼠魚)'로 나온다. 쥐처럼 생긴 생김새와 찍찍거리는 소리가 쥐와 비슷해 붙인 이름일 텐데 쥐치가 먼저인지 서어가 먼저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 조선시대에 쥐치는 불길한 생선이라 해서 먹지 않았고, 1960년대 쥐포가 개발되기 전까지 어부들은 쥐치를 잡으면 재수 없다고 바다에 버렸다. 해방 이후 삼천포의 화어 문화는 한국인들에 의해 변화, 발전한다. 화어는 1967년 삼천포의 명산물로 지정되었다. 1960년대 초반 남해안에서 쥐치가 대량으로 잡히면서 이학조라는 사람이 화어 어포 기술을 적용해 쥐포를 만든다. 1960년대부터 남해안 일대에서 유행하던 쥐포는 오징어포와 대구포의 대체제로 떠오르면서 큰 인기를 얻는다.

 

 


 

- 2012년 5월 6일 오후 1시 25분, 나는 여수 국동항에서 1,500원을 내고 대경도로 들어가는 배를 탔다. 봄이 숨넘어가던 시절이었다. 선착장에서 내려 밥집을 찾아가다가 혹시나 하여 동네 분에게 물어보니 딱하다는 눈길이었다. 철이 일러 그 집에 가도 찾는 물고기가 없다고 했다. 나는 친구를 째려봤고 그자는 머리를 긁적였다. 새벽부터 오밤중까지 조국을 구하고 민족을 위하느라 정신이 없는 나더러 기막힌 게 있다며 꼬신 그자는 박정배다. '호박잎이 날 때부터 호박잎이 질 때까지'가 제철인 갯장어를 호박잎이 나기 전에 찾아간 거였다.   

 

- 여수 읍내로 나와 장어구이와 돌게장, 서대회와 기타 등등을 마구 섭취하며 분노한 위장을 달랬기에 망정이지 박정배는 이날 나한테 절단 날 뻔했다. 

 

- 2박 3일의 도쿄대첩은 대박이어서 그간의 허물은 다 눈감아 주기로 했다. 선술집 순례도 좋았지만 110살 잡순 돈가스 가게와 미슐랭 별 두 개를 받은 가게까지 구경했으니, 용서하지 않았다간 전화번호 목록에서 잘릴 것 같아서였다. 

 

- 안충기(<중앙일보> 섹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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