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 아리스가와 아리스 / 최고은
출판 : 북홀릭
출간 : 2018.08.30
작가 아리스가와 시리즈를 시작했다. (정확하게는 '발견해서, 읽고 시리즈라는 걸 알았다'지만 그게 그거라고 생각하자.)
<자물쇠 잠긴 남자>를 읽은 후 <까마귀 어지러이 나는 섬>이라니, 순서가 영 엉망이지만 그런 것도 하나의 재미니까.
본격과 신본격의 경계를 정확히 나누는 건 어려운 일이지만, 개인적으로 나누는 기준에서 '아리스가와 아리스'는 신본격 작가다. (작가 스스로는 '본격'을 지향하고 있다고 인터뷰했지만) 집필 시기도 그렇지만 '트릭' 자체보다는 '동기'에 집중하는 작가의 성향은 신본격에 더 어울린다.
추리소설을 즐기는 방법은 다양하다.
처음부터 끝까지 작가의 목소리를 따라 하나의 이야기로서 읽어나가는 방법.
소설 속의 탐정보다 먼저 진상을 알아채고 말겠다며 적극적으로 추리하는 방법.
자세한 부분은 건너뛰고 직감으로 범인을 정한 뒤 정답을 확인하는 방법.
그리고 내가 생각하지 못한 또다른 방법들이 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가장 '추리소설'에 어울리는 읽기 방식은 두 번째, 작가와 추리 게임을 벌이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처음부터 의심의 눈길로 복선과 단서를 놓치지 않으려고 한 단어 한 단어 집중해서 읽는 독자와, 쉽게 눈치 채이지 않기 위해 -그러면서도 공정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여 단서를 배치하는 작가. 좋은 한 쌍이지 않은가?
하지만 내가 그런 방법으로 읽는 걸 즐기느냐 하면, 아니다.
나는 첫 번째 방법을 주로 선택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게임'이 아닌 하나의 '이야기'로서 읽어나간다.
반칙이 아니냐고? 글쎄, 그럴지도 모르지만, 일단은 '소설'이라는 이름으로 맺음 지어진 글이라면 이렇게 '읽어나가도' 재미있어야 하지 않을까?
물론 '추리소설'이라는 세트장 안에서 벌어지는 작가와의 암묵적인 게임 룰은 이게 아니라는 것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머리를 식히기 위해 읽는 글에서까지 치열하게 두뇌를 사용하고 싶지는 않다는 것이 내 입장이다.
그래서인지 나는 추리소설을 사랑하는 독자들과는 감상평이 갈라지는 경우가 많다. 얼마나 기가 막힌 트릭이었느냐, 얼마나 놀라운 반전이었느냐보다는 전체적인 이야기가 재미있었느냐를 더 중점적으로 보기 때문이다.
음. 그래서 <까마귀 어지러이 나는 섬>은 어땠는가.
주요 스토리는 보통.
그 곁가지로 들어간 주변 인물들의 설정과 대사, 전반적인 분위기는 상.
다른 추리소설들의 경우를 아예 대사 속에 녹여 오마주한 재치도 상.
추천은, 잘 모르겠다.
- 이루 말할 수 없이 기묘하고 신기하지만, 분명 우리 인간 세상에서밖에 일어날 수 없는 이야기의 막을 올리기 전에 어린 시절의 추억담을 들추어본다.
그것이 온당하다고 생각하기에, 변명처럼 들릴 위험을 무릅쓰고 말을 꺼낸다.
그 추억은 나 아리스가와 아리스에게 정체 모를 께름칙한 경험으로 기억 밑바닥에 달라붙어 있었지만, 물론 그 섬에서 마주친 현기증 나는 기기묘묘한 사건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 내가 열 살 아이였을 때의 일이다.
친구와 둘이서 책가방을 메고 집에 가는 길에 딴 길로 빠졌다. 이 끝에 무엇이 있는지 짐작조차 가지 않는 길로 가보자. 방과 후의 작은 모험이었다. 딱히 발견한 건 없었지만, 송전선을 따라 걸으며 친구와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즐겁게 나눴던 기억이 난다.
- 초가을 해질녘, 비디오테이프를 되감듯 왔던 길을 되돌아가려고 했는데 어디선가 길을 잘못 들었다. 이 길이 아니라는 걸 깨닫자마자 곧바로 발길을 돌렸지만, 어디서 헷갈렸는지 알 수가 없었다. 어스름한 땅거미 속에서 미아가 된 우리는 막연한 불안에 휩싸여 낯선 동네를 헤맸다. 그러다 우연히 길을 찾아, 저녁밥이 차려진 집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날이 저문 뒤였다.
- 친구와 둘이서 길을 잃은 정도로 울음을 터뜨릴 나이도 아니었고, 집에 곧장 오지 않았다는 어머니의 꾸중이 무서웠던 것도 아니었다. 내가 이제껏 이 체험을 잊지 못하는 것은 길을 잃은 이유가 어처구니없게 황당했던 까닭이었다.
- 그때 우리는 자로에서 실수를 저질렀다. 왔을 때는 왼쪽 모퉁이로 꺾었으니, 돌아가는 길에는 오른쪽 모퉁이로 꺾었으면 됐는데, T자로를 못 보고 그냥 직진했던 것이다. 떠드느라 정신이 팔렸던 것도 아니었는데, 둘 다 뭔가에 씌었던 모양이다. 가는 길에 맞닥뜨렸던 자로가 가는 길에도 같은 형태로 나타나리라고 착각했던 것이다.
- 알고 보면 별것 아닌 일에 휘둘린 게 너무 어처구니없어서, 우리의 멍청함을 인정하기보다, 딱히 신기할 것도 없는 풍경이었는데도 초자연적인 시간과 공간에 빠져들었던 거라고 생각해야 수긍이 갈 것 같았다. 얼마 뒤에 황혼녘에는 귀신 등 인간이 아닌 것과 마주치기 쉽다는 이야기를 듣고, 아, 그랬구나, 마물의 장난에 걸려들었던 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 마물과 다시 만난 건 그로부터 24년이 흐르고 나서였다.
이번에도 나는 친구와 함께 속아서 이계로 흘러들어 갔다. 하지만 어린 시절의 경험과 달랐던 건 그것이 백주대낮에 당당하게 나타났다는 점이었다. 또한 우리가 흘러들어 간 곳은 그때처럼 낯선 동네가 아니었다.
- 친구와 나는 수많은 범죄 수사에 참여해 상식에서 벗어난 사건을 수도 없이 봐왔다. 하지만 그곳에서 밝혀진 진상만큼 우리의 상식을 뛰어넘은 사건은 아마 없을 것이다.
- [바다 위에서 난간에 기댄 채 상념에 사로잡힌 선원이여, 밤의 어둠 속에서 사랑하는 이의 얼굴을 떠올리는 것에 주의하기 바란다. 그대의 그런 마음으로부터 아무것도 없는 사막 같은 곳에서 갖은 인간의 감성을 가진 존재가 생겨날 위험이 있다.]
<바다 위의 소녀>, 쥘 쉬페르비엘
- 대학 입시 채점을 마치고, 졸업하는 학생들을 떠나보낸 뒤에야 봄방학을 맞이한 히무라 히데오 조교수는 그동안 꽤 지쳤던 모양이다. 육체적인 피로 탓이라기보다는 뭔가 넋이 나간 사람처럼 허탈해 보였다. 학창 시절부터 모교인 에이토 대학의 조교수가 된 지금까지 히무라를 돌봐준 하숙집 주인 시노미야 토키에 할머니는 그렇게 증언했다.
- 주목받는 범죄사회학자이자, 경찰의 의뢰를 받아 범죄수사 현장에까지 필드워크를 나가는 히무라 교수는 원체 몸과 마음이 강인한 인물이지만, 그 역시 사람인지라 살다 보면 배터리가 바닥나는 날도 오기 마련이다.
- "카미코우라는 여기 맞아요. 손님들, 섬으로 가는 거죠? 그 근처 배를 타면 됩니다."
그렇다고 한다. 우리의 목적지인 카라스지마섬에는 정기선이 운항하지 않는다. 섬을 오가려면 그쪽에서 마중을 나오든지, 육지에서 어선을 얻어 타는 수밖에 없다. 팩스에는 '한가한 사람과 배가 반드시 항구에 있을 거다. 부탁하면 흔쾌히 들어줄 것이다.'라고 적혀 있었다. 상대방 사정으로 마중은 나오지 못한다고 했다.
- "그럼 누구한테 부탁해 볼까."
차 안에서 내내 흡연 욕구를 참았던 히무라는 내리자마자 담배에 불을 붙이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오늘 조교수는 까만 재킷에 펄 화이트 빛깔의 셔츠를 입었다. 살인현장에는 하얀 재킷 차림으로 나타나면서, 휴가지에서는 이 수수한 차림새라니. 무슨 심리인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 "파노라마 섬에 가는 것 같네."
- 에도가와 란포의 명작 <파노라마 섬 기담>의 무대는 이렇게 묘사된다.
'같은 M현에 사는 사람이라도 대부분은 알아채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I만이 태평양을 향해 돌출된 S군의 남쪽 끝, 바깥 섬들로부터 멀찍이 떨어진 곳에 초록빛 만두를 엎어놓은 듯한, 직경 2리 남짓한 작은 섬이 떠 있습니다.'
작중에서 주인공은 부잣집 아들인 죽은 친구 행세를 하며 막대한 자금을 투자해 무인도에 기상천외한 유토피아를 건설한다. 여기서 말하는 M현이 미에현, I만이 이세 만을 가리키는 것은 누가 봐도 명백했다. 과거 토바의 조선소에서 일했던 란포는 그 시절에 부인과 만났다. 파노라마 섬 기담』의 착상을 얻은 건 나중 일일지도 모르지만, 환상의 유토피아를 건설하고자 마음먹었을 때, 그의 뇌리에 바로 펼쳐진 건 그리운 이세 앞바다의 풍경이었으리라.
- 히무라는 보나 마나 <파노라마 섬 기담>을 읽지 않았을 것이다. 설명하려 했을 때 휴대전화가 울렸다. 담당 편집자였다. 바다 위에 있는 탓에 통화 상태가 좋지 않았지만, 간신히 원고의 부족한 부분에 대한 질문에 답하자 이제 넘길 수 있겠다며 기뻐했다. 드디어 작가와 편집자의 손을 떠나 인쇄소로 넘어가는 것이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이제 마음 편히 쉴 수 있겠네요. 혹시나 또 문의할 사항이 있으면 전화 주시고요."
- 나는 후련한 마음으로 전화를 끊었다. 그러자 담배를 물고 배를 몰던 어부가 큰 소리로 외쳤다.
"섬에 들어가면 휴대전화는 안 터져. 이세만 안쪽에서는 터지지만."
카라스지마 섬은 쿠마노나다 해역 북쪽 외곽에 있는데, 주변에는 사람이 사는 섬이 없었다. 기지국이 없는 것도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담당 편집자는 실로 절묘한 타이밍에 전화를 준 것이다.
- 다소 불편한 점은 있었지만 2박 3일쯤 휴대전화로부터 해방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볼일이 생기면 펜션의 전화를 빌리면 되니까. 산간벽지에 자리한, 전기가 통하지 않는 것을 내세운 '램프 펜션'이 성업 중이라던데, 이제는 '통화권 이탈 펜션'이 인기를 끄는 시대가 올지도 모른다.
- 그런 시시껄렁한 생각을 하고 있는데 어느샌가 어렴풋이 섬이 모습을 드러냈다. 배는 섬을 향해 화살처럼 나아갔다. 멀리서 보기에는 아까 지나친 섬보다 훨씬 작은 것 같았다. 돌아보니 육지의 산줄기는 보랏빛 안개가 되어 아득히 보였다. 오후 4시가 넘었는데도 아직 해가 중천에 있었다. 봄이 온 것이다.
- 카라스지마 섬이라 갈겨쓴 글씨를 보는 동안 카라스烏와 섬島이라는 한자가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다.
"카라스지마 섬이라, 별로 재수 좋은 이름은 아니네요."
나는 노인에게 말했다.
"여기 사람들은 다들 그렇게 부르지만, 카라스지마 섬이라는 건 별명이야. 왜 그리 부르는지는 곧 알게 될 거요. 그보다..."
노인은 우리를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저 섬에 무슨 볼일이요? 웬일로 사람들이 모여드는군."
- 호진마루호의 선장이 히무라를 향해 경고를 날렸다. 친구는 뱃전에서 몸을 내밀어 포말 사이에 맺힌 작은 무지개를 바라보고 있었다.
"떨어지면 골로 가는 거야. 여긴 물살이 세서 눈 깜짝할 사이에 떠내려간다고."
"쿠로시오 해류(일본 열도를 따라 태평양을 흐르는 난류-옮긴이)군요."
히무라는 몸을 일으켰다.
"그렇지. 딱 봐도 시커멓잖아. 저 섬처럼."
- 불길한 이름의 섬이 다가왔다. 육지를 향한 쪽은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라 가까이 갈 수조차 없었다. 거친 파도에 깎인 해식절벽 위에는 울창한 조엽수림이 펼쳐져 있었는데, 그 역시 검게 그늘져 있었다. 그리고 그 위의 하늘에도 검은 그림자가 맴돌고 있었다. 유유히 하늘을 나는 그것은...
"까마귀...?"
내 혼잣말에 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찌 된 영문인지 저 섬에는 예로부터 까마귀가 많아. 제대로 먹이도 없을 텐데 이상하지? 들쥐나 작은 동물 말고도 절벽에 부딪치는 물고기를 잡아먹는다는군."
- 까악 거리는 울음소리가 귀에 들리기 시작했다. 해질녘 도시에서 듣던 소리와 달리 고통에 찬 탁한 목소리였다. 종류가 다른 것이리라.
무리 지어 나는 까마귀를 란아라 한다. 이제 우리는 란아의 섬에 상륙한다.
- 뭔가 석연치 않은 기분이었지만 호진마루 호는 서둘러 섬을 떠났다. 쓸쓸한, 아니, 황량한 선착장에 나와 친구는 남겨졌다.
정말 이곳이 카라스지마 섬일까? 갑자기 무시무시한 의심이 솟아올랐다. 저 노인이 악의를 가지고 휴대전화도 통하지 않는 외딴섬에 우리를 버리고 떠난 게 아닐까? 만일 그렇다면 우리는 이곳에서 객사하고 말 것이다. 도움을 요청하려 해도 근처를 지나가는 고깃배는 없을 것 같았다.
...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저 노인에게 그런 범죄를 저지를 동기 같은 건 없었고, 펜션에 놀러 가는 손님을 실수로 무인도에 데려다 놓을 리도 없었다.
- "그런 것도 같네. 아니면 주문이 많은 요릿집이거나."
"살쾡이가 하는 레스토랑이라. 일단 가보기는 하자고. 아까 그 거대한 항구에서 헤엄쳐서 돌아갈 수도 없는 노릇이잖아."
에도가와 란포일지, 유메노 큐사쿠일지, 미야자와 겐지일지. 어느 작가가 그린 세계가 펼쳐져 있을지는 모르지만, 어찌 됐든 히무라의 말대로 가보는 수밖에 없었다.
까악- 길 위의 까마귀가 목청 높여 울었다.
- 당혹스러웠던 상태라 길게 느껴졌지만, 계단 끝에서 그 저택에 도착할 때까지 대략 십 분도 걸리지 않았다. 부지는 낮은 울타리에 에워싸여 있었지만, 문은 열려 있었다. 문패는 없었다. 이런 데 이토록 근사한 집이? 밖에서 찬찬히 올려다보고 있으려니 새삼 놀라웠다.
모르타르 칠을 한 외벽은 비바람 때문에 원래 무슨 빛깔이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완만한 경사의 삼각형 지붕에 쓰인 군청색의 스패니시 기와는 색이 선명했다. 이층집 치고는 꽤 높은 높이였다. 내부로 들어가면 층고가 상당할 것 같았다. 툭 튀어나온 발코니 난간의 곡선이며 기다란 아치형 창문, 외벽의 일부에 장식된 ...
- "이 섬에 펜션 같은 건 없어요. 사람이 사는 집은 여기뿐이니 무인도나 마찬가지죠."
순간 잘못 들은 줄 알았다. 아닌 게 아니라 무인도처럼 황량하다는 생각은 했지만, 설마 민가가 하나밖에 없을 줄이야.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거 할머니의 집에서 하숙했던 키자키 씨는 이 카라스지마 섬에서 펜션을 경영하는 게 아니었나? 며칠 전에 할머니가 전화로 예약을 했고, 팩스로 답장까지 보냈는데 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
- "여기가 카라스지마 섬 맞죠?"
내가 물었다.
"그리 부르는 사람도 있지만..., 원래 이름은 쿠로네지마 섬이라고 해요."
- "키자키 씨, 무슨 일입니까?"
분명히 키자키 씨라고 했다. 그녀의 이름이 키자키라면 역시 이곳은 우리가 오늘 묵을 펜션이 분명한데...
이번에는 훤칠한 남자가 나왔다. 180센티미터는 넘을 것 같았다. 낙낙한 체크무늬 셔츠 차림의 남자는 두 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 우리를 훑어보았다. 짙은 눈썹에 이목구비가 뚜렷한 남방계 얼굴이었다. 이런 얼굴을 좋아하는 여자들도 꽤 많지 않을까. 나이는 우리보다 조금 아래인 것 같았다. 서른 전후일까.
"아, 자이츠 씨. 아무것도 아니에요. 이분들이 펜션을 찾으시는 것 같은데, 아무래도 섬을 잘못 찾아오신 것 같아요."
여자의 말에 자이츠라고 불린 남자는 놀란 듯 입을 벌렸다.
"집을 잘못 찾아왔단 얘긴 들어봤어도 섬을 잘못 찾아왔다는 얘기는 너무 스케일이 큰데요? 정말입니까?"
- "카라스지마烏島 섬이 아닙니다. 악필이지만 틀림없이 토리시마鳥島라고 적혀 있는데요."
- 계단 밑은 담소를 나누는 공간인 듯 탁자와 의자 세 개가 놓여 있었다. 은은한 상아색 벽에는 촛대를 본뜬 벽걸이 조명이 붙어 있었다. 반원형의 작은 탁자 위에는 금색 테두리의 거울이 걸려 있었고, 천장에 걸린 샹들리에는 기포가 들어간 투명 유리로 되어 있어서 아름다웠다. 그렇게 고가의 물건들은 아니었지만, 전체적으로 조화를 이룬 걸 보니 주인의 안목이 뛰어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 "맞아, 알아보겠다는 말만 믿고 기다렸다가 '죄송하지만 안 될 것 같습니다'라는 대답이 돌아오면 오도 가도 못하게 되잖아요. 사례를 한다고 하면 누군가는 와주지 않을까요?"
어디나 붙어 다니는 친구 사이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자매일 가능성도 있었지만, 내 직감은 그것을 부정했다.
- "실수로 여기 왔다고? 재미있는 소리를 하는군. 설마 저녁뜸의 바다에서 배가 난파했을 리도 없을 테고."
저 사람이 이 저택의 주인인가? 어떤 인물일까 궁금해하며 올려다본 순간, 나는 놀란 나머지 소리를 지를 뻔했다. 계단 난간에 두 손을 짚은 채 선 여윈 남자는...
"... 혹시 에비하라 슌 선생님이십니까?"
저택의 주인은 천천히 나를 보았다.
"그렇소만, 날 아십니까?"
- 머리 위에서 쏟아지는 시선을 느끼고 주눅이 들었다. 상대는 온화하게 바라볼 뿐이었지만, 내가 어떤 존재인지 가늠하는 듯한 기분이었다. 전설적인 상징주의 시인이자 작가이며 번역가에 영문학자이기도 한 에비하라 슌. 그와 3미터 거리를 두고 마주 보고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긴장으로 몸이 굳었다. 올려다보는 이와 내려다보는 이. 이 구도가 무척 의미심장하게 느껴졌다. 저 맑은 눈빛은 지성과 깊은 사색의 산물이리라.
- 갑작스런 등장이었지만 에비하라 슌을 잘못 볼 리가 없었다. 훤한 이마 위로 흘러내린 한 줌의 백발, 약간 부은 눈꺼풀, 눈꼬리에 잡힌 주름, 콧등 한가운데의 점, 핏기 없는 얇은 입술. 사진 몇 장으로 접한 게 전부였지만 그가 틀림없었다.
새까만 스웨터 차림의 그가 난간에 기대 모습에서 거대한 까마귀가 연상된 것은 지금도 그 울음소리가 멀리서 들리고 있기 때문 ...
- "이쪽으로 오세요."
미네가 가리킨 자리에 앉자 정면 벽에 그려진 그림이 눈에 들어왔다. 아니, 그림이 아니라 사진이었다. 보랏빛이 도는 파란 드레스를 입은 젊은 여자가 완만한 언덕에 앉아 미소 짓는 사진이었다. 모서리를 흐릿하게 가공한 데다, 근사한 액자에 담겨 있어서 언뜻 봐서는 한 폭의 초상화 같았다.
어쩌면 이 여성은 집주인인 에비하라 슌의 아내일지도 모른다. 쉰 살 나이에 딸뻘의 젊디 젊은 여성과 결혼했다 몇 년 뒤 사별했다고 알고 있다. 아주 아름다운 여성이었다고 들었다. 나중에 가까이서 확인해 봤지만, 사진 속 여인은 멀리서 봐도 미인이었다.
- "살인사건 조사면... 경찰이나 탐정하고 같이 수사를 하는 거예요? 들었어, 타쿠미? 굉장하다."
"아니야. 그건 연구가 아니지. 사건 기록을 조사하는 거란다."
하지만 이 아저씨에 한해서는 아유의 말이 옳았다. 설명하면 길어지고, 탐정 겸 임상범죄학자의 실태를 설명할 필요도 없었기에 히무라는 다양한 방법으로 연구한다고만 말했다. 하지만 타쿠미의 심문은 계속됐다.
"왜 범죄를 연구하는 거예요?"
"범죄를 없애려고.”
아유의 말에 소년은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너한테 묻지 않았다는 표정이었다.
"범죄를 완전히 없애기는 어렵지만, 조금이나마 도움은 될 수도 있지. 그보다 범죄를 연구함으로써 인간의 다양한 면을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인간에 대해 아직 밝혀지지 않은 점이 많잖아? 자기 마음을 능숙하게 제어하지 못하고, 나쁜 줄 알면서도 나쁜 짓을 하는 이유도 수수께끼지. 그러니까 범죄는 연구할 만한 가치가 있어."
- 보호자 앞에서도 할 수 있는 온당한 대답을 듣고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설마 '아저씨는 사람을 죽이고 싶었던 적이 있거든'이라고 말하지는 않을 거라 생각했지만.
- [죽은 이에게 말을 건다는 건 참으로 슬픈 인간의 습성입니다.]
<서정가 抒情歌>, 가와바타 야스나리
- 타쿠미와 함께 나무 사이를 지나 폭음이 들리는 쪽으로 달려갔다. 소년의 튼튼한 다리를 따라잡느라 운동부족인 나는 숨을 헐떡였다. 뒤늦게 출발했다고는 하지만 열 살짜리 어린애한테 진다는 건 말이 안 된다. 나는 스스로를 채찍질하며 앞서 달리는 작은 뒷모습을 따라잡았다.
숲 건너에는 테니스코트 두 개만 한 공터가 있었는데, 소형 헬리콥터는 그곳에 착륙하고 있었다. 풀들이 파도치듯 너울거리더니, 석산화 모양으로 흙먼지가 피어올랐다. 그 꽃 한가운데로 헬기의 다리가 내려왔다.
- "힘들겠네. 이대로 혼자 살면서 고양이나 상대하는 게 마음 편하겠어."
무슨 상관이냐는 투였다. 남의 집에서 엿듣기나 한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지만, 들리는 걸 들었을 뿐이다. 내가 거기서 잽싸게 숨지 않았으면, 부부는 더욱 머쓱해졌겠지.
- "그건 그렇고." 히무라는 발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후지이 케이스케 선생, 분명 어디서 본 것 같단 말이야. 직접 만난 건 아니고, 신문이나 잡지에서 본 것 같은데... 넌 기억에 없어?"
히무라 역시 그런 느낌을 받았던 것이다. 필시 후지이 선생은 어떤 의미로는 유명인이 틀림없었다. 우리는 깊이 파묻힌 기억을 파내려 애썼다. 의사의 얼굴이나 이름이 언론에 보도되는 건 어떤 경우지? 첫째, 중대한 의료사고를 일으킨 경우. 둘째, 세간의 주목을 받는 사건사고의 피해자를 치료했을 경우. 이 중 하나라면 기자회견에서 보았겠지. 셋째, 의학에 큰 공헌을 했거나, 일반인들도 목적을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연구를 하는 경우를 들 수 있었다. 그 연구가 소개된 걸 보았을 수도 있다.
- "기억이 안 나네. 답이 여기까지 올라왔는데 밖으로 나오질 않아."
히무라도 답답해하는 것 같았다.
"우리 둘 다 낯이 익으니, 신문이나 방송에 나온 걸 봤겠지. 맞아, 인터넷으로 찾아볼까? 컴퓨터를 가져오지 않았지."
- "생각지도 못한 대답이군요. 범죄라. 인간에게 죄란 무엇인가, 그런 문제도 연구하시겠군요?"
"그건 법철학의 영역이죠. 저는 더욱 레어한 범죄를 다룹니다. 밤낮 가리지 않고 살인사건에 대해 생각한다는 점에서는 아리스가와와 다를 바 없죠."
"레어? 아, 희귀하다는 뜻이 아니라 미디움, 레어, 할 때 그 레어군요. 피가 뚝뚝 떨어지는 레어 스테이크 같은 살인사건을 다루시는군요. 자극적이네요. 이해하기도 쉽고요. 살인이 죄악이라는 건 논의의 여지가 없으니까요. 왜 사람을 죽이면 안 되느냐고 지껄이는 어린애들도 있지만, 진심으로 그런 소리를 하는 거라면 인간도 아니죠. 그건 사회의 계약입니다. 상식을 거스르고 싶다면 '배는 왜 고플까?'라고 노래하며 단식이라도 하든지요."
살짝 취했는지 하츠시바는 쉬지 않고 떠들어댔다. 죄라는 말에 유독 집착하는 것 같았다.
- "범죄학자 선생님을 제 사업과 연관 짓기는 어려울 것 같군요. 제 파트너가 되어주실 만한 분은 아리스가와 작가님이시네요."
그래. 그는 나에게 뭔가 계획을 제안하려 했다. 히무라에게는 미안하지만 잠시 밤하늘의 별이나 감상하고 있으라고.
"저는 전 세계에 일본이라는 나라를 수출하고 있습니다. 일본 특유의 센스가 녹아든 팝 컬처를 수출해 한몫 챙기는 동시에, 일본에 대한 이해가 더욱 깊어지기를 바라죠. 이게 저희의 진정한 목표입니다. 저는 세계를 일본의 색으로 물들이고 싶습니다. 이 나라의 판타스틱한 문화가 지상에 널리 퍼지면 퍼질수록, 일본에서 전쟁의 불씨가 사라진다고 믿고 있죠. 오타쿠 문화로 자주국방을 이루고자 하는 겁니다. 방송에서 이런 말을 하면 비웃음을 살 게 뻔하니, 여기서만 하는 얘기입니다."
"국방? 농담이시죠?"
"일말의 진심은 담겨 있습니다. 이민자나 수입문화를 배척하는 자문화 지상주의자도 외국 음식 앞에서는 싱글벙글 거리며 입맛을 다시죠. 음식은 국경을 초월합니다. 전 세계 어딜 가도 중국요리는 인기를 끌지 않습니까. 엔터테인먼트의 경우는 음식처럼 쉽게 퍼지진 않지만, 맛처럼 재미에도 국경이 없습니다. 정치적으로 미국을 싫어하는 젊은이들이 미국의 팝 음악과 헐리우드 영화에 빠져드는 것처럼요. 글로벌리즘이 진행될수록 사람들의 오락은 균질화됩니다. 생활양식이나 즐길 거리가 미국화되는 현상을 우려할 틈이 있으면, 우리가 먼저 세뇌 전쟁이 벌어지는 전쟁터로 나가 세계를 일본화해야 합니다. 재미로 압도한다면 누구의 원한도 살 일이 없죠. 과거 로마제국이 영토를 확장할 때, 건축이나 조각, 회화 등 예술미로 피지배지의 주민들을 압도하고 통치한 선례를 따르는 겁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저는 다른 나라를 지배하고자 하는 게 아닙니다. 그저 일본화는 국익으로 연결된다는 말을 하고 싶을 따름입니다."
-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애니메이션, 만화, 게임, 캐릭터 상품 등의 수출로 그 원대한 목표를 달성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지만, 그것이 하츠시바의 신념이었다. 흡사 광적인 애국자의 연설을 듣고 있는 것 같았다.
- "생각해 보십시오. 큰 재미, 가슴 설레는 귀여움, 신선하고 멋진 문화가 차례차례 일본에서 건너온다면, 상대국은 일본을 해칠 수 없습니다. 강력한 무기를 손에 쥔 셈이니 싸우지 않고 우위에 설 수 있습니다. 일본은 전 세계의 동경의 대상이 되는 겁니다. ... 교수님은 제 얘기가 허무맹랑하다고 생각하십니까? 하품을 하시는 것 같은데..."
"요새 잠을 못 자서 저도 모르게. 말씀 중에 죄송합니다. 정말 원대한 비전이군요. 그런 큰 구상을 머릿속에 그리고 계실 줄은 몰랐습니다. 제 귀에는 다소 과대망상처럼 들리지만요."
"저에겐 칭찬입니다. 사람들이 과대망상이라 여기는 게 저에게는 현실적인 목표니까요. 실제로 목표를 이루기 위해 전진하고 있고, 그런 저의 미래에 투자하는 분들도 많습니다. 그래서 주식을 상장해 거액의 투자를 받아낼 수 있었죠. 요즘 세상에 성공하는 사업은 세 종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고객을 협박하거나, 치유하거나, 매혹하거나. 저는 '이렇게 안 하면 건강에 나쁘다'나 '대비책을 세우지 않으면 외국의 공세에 밀린다' 같은 말로 사람들을 겁박해 이성을 마비시킴으로써 이윤을 얻는 무뢰배들은 질색이라, 치유하고 매혹시켜 돈을 벌죠."
- "본인의 비즈니스 모델에 절대적인 자신을 가지고 계시는군요. 하기야 정부에서도 애니메이션, 만화, 게임 같은 팝 컬처의 국제경쟁력을 높게 평가하기 시작했죠. 애초에 그런 산업에 기대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일본경제의 잠재력이 떨어졌다고도 해석할 수 있겠지만요."
"성숙한 견해를 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세계 콘텐츠 시장 규모는 이미 120조 엔이 넘었습니다. 일본의 수출액은 금세기 들어 3천억 엔에 이르렀고, 2010년에는 1조 5천억 엔까지 성장할 것이라는 전망이 있더군요. 그 추세를 반영해 2002년에는 고이즈미 총리가 시정방침 연설에서 지적재산입국을 선언하고 지적재산 전략회의실을 발족시키지 않았습니까. 콘텐츠를 전략적으로 창조, 보호, 활용함으로써 부를 생산하는 지적재산입국을 제창한 겁니다. 그로부터 2년 후에는 콘텐츠 촉진법이 성립되었고, 일경련에서 콘텐츠 전문부서를 설립한 걸 보고 식자들은 쓴웃음을 지었죠. 과거에는 '그딴 만화책이나 보고', '게임 좀 그만해라'면서 미간을 찌푸렸으면서, 갑자기 손바닥 뒤집듯 '앞으로는 이 산업이 대세다'라고 주장하니까요. 이웃 나라인 한국에서는 훨씬 일찍부터 만화나 게임 창작자 양성을 지원해 왔죠. 뭐, 정부는 계속해서 무능한 모습을 보여주면 됩니다. 국립 애니메이터 양성소가 대박 작가를 배출할 리는 없으니까요. 그간의 선례를 보면 이 나라에서 정부가 손댄 산업은 망한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죠."
"한국 정부에서는 잘 해낼까요?"
"어렵죠. 공무원이 진두지휘한다고 좋은 애니메이션이 나옵니까? 애니메이션, 만화, 게임은 기성세대의 양식에서 벗어나 있었기 때문에 자유롭게 발전해 온 겁니다."
히무라는 졸음이 달아난 듯, 하츠시바와의 대화를 즐기고 있었다.
- 핫시의 손을 거친 히트 상품의 대부분은 지적소유권 개념이 미성숙한 국가들에서 불법 복제되고 있었다. 그런 문제에 대해 그는 관용적인 태도를 보였다. 해적판이 나도는 걸 홍보의 일환으로 여기는 줄 알았는데, 들어보니 그게 아니었다.
"일본무역진흥기구는 베이징이나 상하이 사무소에 전문가를 두고 저작권 침해를 감시하고 있습니다. 필요한 조치죠. 해적판이 일본의 이익을 침해하는 건 사실이지만, 저는 해외에 나도는 것들은 일정 수준까지는 허용하고 있습니다. 해적판이 보급된 국가에서는 뛰어난 창작자가 나올 수 없기 때문이죠. 게임을 예로 들어볼까요. 중국이나 한국에서는 인터넷에 접속해 불특정 다수와 게임을 하는 온라인 게임이 인기를 얻고 있고, 한국에서는 60퍼센트 이상의 게임 유저가 온라인으로 플레이합니다. 인터넷망이 널리 보급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불법 복제판이 만연하기 때문이죠. 컴퓨터나 가정용 게임기용 소프트웨어를 만들어도 즉시 헐값에 해적판이 유통되면 누가 게임을 만들려 하겠습니까. 때문에 필연적으로 복제할 수 없는 온라인 게임이 발달한 셈이죠. 하지만 온라인 게임은 재미가 적습니다. 히트 게임을 만들면 책과 마찬가지로 계속 찍어내며 막대한 이익을 얻을 수 있지만, 온라인 게임은 유저가 늘어나는 만큼 비용도 더 들어가죠. 제 취향은 아닙니다. 타도의 대상이라 여기지도 않고요. 한마디로 해적판을 어느 정도 눈감아줌으로써 그 나라의 창작자 육성을 방해할 수 있는 거죠."
- 하지만 하츠시바의 생명은 유한했다. 때문에 그는 고민 끝에 궁극의 해결책을 찾아냈다. 과학의 힘을 빌려 자신의 분신을 만들면 된다. 복제 기술을 통해 자신의 복제인간을 유전적으로 완전히 동일한 아들을 가질 수 있다면, 하츠시바는 자신에게 배턴을 넘길 수가 있다. 아무리 많아도 부족하다고 여겼던 시간이 신의 의지에 반해 무한히 연장되는 것이다.
비대하기 짝이 없는 자기애, 황당하기 그지없는 발상이었다. 이런 형태로 사업의 확장을 생각한 인물이 일찍이 존재했을까.
- '인간은 유한한 생을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상식이며 신의 섭리죠. 하지만 인간복제 기술은 완성에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자연의 일부인 인간이 찾아낸 기술 또한 자연의 일부라고 봐야겠죠. 저는 망설임 없이 그 기술을 이용해 생명의 수레바퀴에서 벗어나려 합니다. 신이여 용서하소서. 날개도 없이 비행기로 하늘을 날게 된 인간의 다음 행보는 복제 기술로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 되었습니다. 순리를 거슬러 죄송합니다.'
- 당연히 나와 히무라는 의문을 제기했다. 복제인간은 분명 하츠시바의 유전자를 물려받을 테지만, 그의 능력이나 인격까지 똑같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자신의 분신이라는 건 거의 관념적인 개념이며, 그가 바라는 결과를 기대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하츠시바가 그런 것조차 생각하지 않았을 리는 없지만.
'물론 잘 압니다. 하지만 저는 잘 해낼 자신이 있습니다. 확실한 근거를 대라면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만, 아마 잘 풀릴 겁니다. 미다스의 손을 비롯해, 제가 가진 모든 것을 아들에게 쏟아부을 것이...'
- '네, 그래야죠. 완전한 상속 아닙니까. 미다스 지팡구는 저만 할 수 있는 사업을 목표로 삼고 있습니다. 말 그대로 저밖에 할 수 없는 사업입니다. 안타까운 일이지만요.'
'당신은 특별한 사람입니다. 무척 특이한 재능을 가졌죠. 하지만 그 재능이 대대손손 이어질 거라고 생각하는 건 단순한 망상 아닙니까?'
'교수님은 지극히 상식적이시군요. 하지만 남들이 못하는 일을 해내는 게 하츠시바 신지의 진면목이죠. 그냥 재미로라도 좋으니 지켜보십시오. 제 밑으로 3대까지는 활약하는 모습을 보실 수 있을 테니까요.'
'부디 오래 살아서 6대까지는 봤으면 좋겠군요.'
두 사람은 그런 대화를 즐기고 있었다. 외딴섬의 폐가에서 술잔을 기울이다 보니 점점 현실감이 옅어져 갔다. 이 섬은 역시 보통 섬이 아니었다. 쿠로네지마 섬이라는 이름도 클론(clone)을 암시하는 게 아닐까. 우연에 불과한 일들이 필연처럼 느껴졌다.
- '까마귀를 말하는 줄 알았는데.'
'그런 착각을 하신 게 더 신기하군요. 꽤 흥미로운 오해입니다. 죽음의 기운을 몰고 다니는 검은 새와 영원한 삶을 약속하는 테크놀로지의 결합이라, 아이러니하지만 흥미롭군요. 까마귀 나는 이 섬이야말로 지금 세상에서 가장 생명력이 흘러넘치는 곳입니다. 복제 기술에 관해서는 정상급의 권위자인 후지이 선생이 이곳에 있으니까요.'
- "이곳에서 인간복제 추진위원회의 정례회의가 열리고 있다는 게 확실한 것도 아니잖아. 넌 하츠시바가 한 얘기를 곧이곧대로 믿는 것 같은데, 그 말이 전부 상상이고 실제로는 에비하라 슌 팬클럽 모임일 수도 있잖아.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르는 거라고."
듣고 보니 히무라의 말이 옳았다. 하지만 저주에 걸렸는지, 내 눈에는 아까 만난 자이츠도, 카시이 부부도 하츠시바의 말처럼 뭔가 비밀을 가진 사람들처럼 보이기만 했다. 스스로도 단순하다고 생각했다.
- "애초에 에비하라 슌이 죽은 아내의 복제인간을 만들려 한다는 발상 자체가 부자연스럽지 않아? 핫시의 말을 빌리자면, 설령 내일 죽은 아내의 복제인간이 탄생하더라도 갓난아이로 태어나는 거잖아. 그 애가 철들 무렵이면 선생은 벌써 60대 후반이고. 아내가 남긴 자식이라 여기고 키운다 하더라도 이미 나이가 너무 많아. 집념을 불태울 정도의 일은 아니라고 보는데."
"그 점에 관해서는 견해가 엇갈리는군. 나는 그런 무모한 정열에도 공감을 느끼는데, 상식의 범주에서는 벗어나지만, 에비하라 슌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는 생각도 들어."
- 죽은 아내의 복제인간을 만든다. 마치 인공 유령을 만드는 듯한 느낌이라 당장이라도 부정하고 싶은 행위였다. 하지만 그것이 에비하라가 택한 길이라면 나는 뭐에 홀린 듯 납득해버리고 말 것이다. 극한까지 다다른 미의식이 그의 영혼이 원하는 일이라면 그걸로 ...
- "히무라 선생님은 일찌감치 타쿠미에게 끌려 나가셨죠? 방에서 캐치볼 하는 모습이 보이더라고요."
미네에 말에 야스에도 물었다.
"잠이 덜 깨신 것 같더라고요. 부스스한 얼굴로 공을 던지는 모습이 섹시하던데요."
여자의 심리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내 눈에는 수건을 목에 건 모습이 아저씨처럼 비치던데.
섹시라. 그 말에 얼마쯤 진심이 담겨 있다면, 하츠시바의 추측과는 달리 야스에는 남성에게 성적 매력을 느낀다는 뜻이었다.
- "너무 이상하게 받아들이지 마. 추리작가도 그 정도는 하잖아."
아니, 그건 아닌 것 같은데.
"까마귀 박제며, 기요틴이나 해골 모형처럼 재수 없다고 여겨지는 물건을 일부러 방에 장식한다. 그래, 나도 그 정도는 할 수 있어. 추리작가의 멋이라고 할까, 장난이라고 생각하면 그 정도는 양반이지. 미국 에드거 앨런 포 상의 트로피는 도자기로 된 갈가마귀 상이니까. 하지만 에비하라 슌이 서재에 까마귀 박제를 두었다는 건 말이 안 돼. 포의 <갈가마귀> 번역도 했는데."
에드거 앨런 포의 작품 중 유명하기로는 몇 손가락 안에 드는 시였다. 히무라도 그쯤은 알고 있었다.
"Nevermore였지?"
그 시에서 수차례 반복되는 인상적인 구절이었다. '이젠 끝이다', '끝이다', '두 번 다시는' 등등으로 번역되며, 에비하라는 '이제는 결코'라고 번역했다.
- "맞아. 그 시 내용은 알지?"
"학생 때 읽어본 게 다라 대충만 기억해. 귀스타브 모로의 삽화가 들어 있었는데."
모로의 그림은 유명했다. 말라르메의 프랑스어 번역본에 마네의 삽화가 들어간 책은 출판 역사에 길이 남을 초호화본이었다.
- "분명히... 연인을 먼저 떠나보내고 비탄에 젖은 남자가 본 환각이었지? 폭풍우 치는 밤, 남자의 방에 갈가마귀 한 마리가 들어와 그와 문답을 하는 내용."
히무라다운 대답이었다. 까마귀가 사람 말을 하는 내용이니 현실은 아닐 테지만, 구태여 환각이라 잘라 말할 필요가 있을까. 아무리 합리적 사고가 좋다지만...
하기야 포가 아편에 취한 상태에서 쓴 시니까, 히무라의 말대로 환각일 수도 있지만.
"일부 마음에 들지 않는 표현이 있지만, 대충 그런 내용이야."
- 때는 12월, 찬바람이 부는 밤. 사랑하는 여자를 떠나보낸 남자 가방에서 책을 펼쳐 들고 추상에 젖어 있었어. 죽은 레노어를 그리면서. 그러자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지. 문을 열어봤지만 아무도 없었고, '레노어!'하고 불렀지만 대답도 없었어. 단념했지만 다시 소리가 들렸어. 바람 소리인가 생각하며 덧창문을 열었더니, 갈가마귀..., 일본에는 없는 큰 까마귀로, 영어로는 crow가 아니라 raven이라 불리는 새가 날갯짓하며 방 안으로 들어왔어. 갈가마귀는 문 위에 있는 팔라스의 흉상에 앉아 검은 그림자를 드리웠지. 그리고 남자의 물음에 쉰 목소리로, 인간의 말로 대답했어.
'그대의 이름은 무엇인가?'
'Nevermore.'
'나는 천국에서 레노어를 다시 만날 수 있을까?'
'Nevermore.'
- 남자는 겁에 질려 갈가마귀에게 떠나라고 명하지만 이번에도 돌아온 대답은...
'Nevermore.'
갈가마귀는 흉상 위에 앉은 채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남자는 절망에 몸부림치던 끝에 겨우 깨닫는다. 자신의 영혼은 이 새까만 새에게서 결코 벗어날 수 없다는 걸. 이제는 결코!
- "사랑하는 여인의 영원한 상실을 슬퍼하는 에비하라 슌이 이런 잔혹하고 절망적인 시와 관련된 물건을 곁에 둘 리가 없다. 그래서 말이 안 된다고 한 거지?"
바로 그거였다.
"포가 <갈가마귀>를 발표한 건 1845년이었어. 그로부터 2년 뒤에 11년 동안 곁에 있었던 아내가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났지. 그녀는 포의 소꿉친구이자 사촌누이였던 버지니아였어. 포보다 열네 살이나 어렸지. 에비하라 부부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상당한 나이 차야."
- 포가 스물일곱 살에 결혼했을 때, 신부인 버지니아는 겨우 열세 살이었다. 새 신부를 향한 포의 애정은 정신적인 것이었고, 병약했던 그녀는 이름 그대로 버진, 평생 처녀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포가 성불구였다는 설도 있지만, 버지니아를 동생으로서 보호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고 들었다.
- 풍속 50미터의 폭풍이 날뛰고 있었다. 통화 상대는 미다스 지팡구의 부하직원일까, 얼굴도 모르는 상대가 불쌍해졌다. 후지이의 계속된 거절로 하츠시바는 성이 날 대로 난 모양이었다. 상황을 보아하니 별다른 비책도 없는 것 같았다.
"저게 본성이로군. 대단한 박력인데? 수사 1과의 조사관으로 스카우트해도 되겠어. 공포의 오타쿠 형사."
"조직폭력배 전담으로 일해도 되겠는데."
우리는 발소리를 죽이고 서둘러 핫시의 숙소를 떠났다.
하나 마음에 걸리는 점이 있었지만..., 하츠시바의 노성에 놀라 그게 무엇이었는지 잊어버렸다.
- 나른하고 평화로운 오후였다.
점심식사 전후에는 아이들과 놀아줘야 했지만, 어제 시작된 신작 미스터리 만들기는 머리 식히기에 좋은 게임이었고, 범죄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조르거나 같이 트럼프 게임을 하자는 말에 "미치겠네."하고 중얼거리던 히무라도 성가셔하기는커녕 평소에는 거의 접할 일 없는 경험을 즐기는 기색이 역력했다.
정말 지쳐 있었던 모양이다. 새삼 그런 생각이 들었다.
- "네, 물론이죠. 사모님의 묘를 이곳에 짓고 선생님도 아예 거처를 옮기고 싶어 하신다고 들었습니다만, 현실적으로는 어렵죠. 언제까지 정정하시다는 보장도 없으니까요."
"묘라. 마치..."
자이츠는 내 머릿속에 떠오른 이미지를 대신 말했다.
"네, <애너벨 리>죠."
- <애너벨 리>, 버지니아의 죽음을 슬퍼하며 인생의 막을 너무 일찍 닫아버린 포가 남긴 마지막 시이기도 했다. 영영 떠나버린 사랑하는 아내에게 바치는 애절하고 감미로운 시. 애너벨 리는 바로 버지니아였다.
- <갈가마귀>와 마찬가지로 화자인 '나'는 슬픔에 젖어 있다. 바닷가 왕국에 살던 소녀 애너벨 리의 부재에 통곡하는 '나'는, 천국의 천사들이 질투하여 자신들을 갈라놓았다고 한탄하며 천사와 악마조차도 두 사람의 영혼을 갈라놓을 수는 없다고 외친다. 달이 뜰 때면 그녀의 꿈을 꾸고, 별이 뜰 때면 그녀의 반짝이는 눈동자를 떠올린다. 그래서 '나'는 매일 밤 바닷가 그곳, 그녀의 무덤에서 잠든다.
- "갑자기 생각났는데, 마츠모토 세이초의 <제로의 초점>도 저 시로 막을 내리죠. 무척 뜬금없는 인용이었습니다."
"좋아하는 사람이 워낙 많으니까요. 아리스가와 씨는 좋아하십니까?"
"글쎄요... 좋아한다고 말하기 뭣할 정도로 감미로워서요."
"일본어로 번역된 문장의 의미만 생각하면 설탕과자처럼 달콤하죠. 하지만 시는 운율이 중요하니까요. 에비하라 선생님의 원어 낭독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뭔가 주체하기 힘든 충동에 휩싸였는지 갑자기 책을 들고 낭독하시더군요. 사모님이 돌아가시고 나서 일이었습니다.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이 눈물을 훔쳤습니다. 비애미悲哀美의 극치였죠.”
이야기만 들어도 벌써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모든 사람이란 이곳에 모인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리라.
- "결국 바닷가 무덤을 만들지는 못했지만, 선생님에게는 이 섬 전체가 야치요 씨의 무덤일 겁니다.”
에비하라 슌의 귀에는 까마귀들의 소리가 달리 들리는지도 모른다.
Nevermore,라고.
- 한숨을 쉬는 하루미 앞에 에비하라와 히무라가 나타났다. 하루미가 마실 걸 가져오겠다고 했지만 두 사람은 사양하고 거실 소파에 앉았다. 에비하라의 표정이 밝은 걸 보니 히무라가 결례를 범하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선생의 이야기는 참으로 흥미로웠습니다. 오늘 밤은 아리스가와 씨가 쓰시는 소설에 대해서도 듣고 싶군요.”
숲 속을 산책하다 우연히 만나 고상한 대화로 에비하라의 환심을 산 것 같았다. 제법인데? 하지만 그 덕에 공연한 부담이 늘었다.
- "히무라 선생이 관여했던 범죄수사에 대해 질문을 좀 했습니다. 인간이란 실로 기묘한 행동을 한다는 걸 새삼 느꼈죠. 합리적으로 행동하면 할수록 광기에 가까워진다고 할까요. '합리적이며 논리적이고자 하는 의지가 지나치면 광기에 이른다'는 선생의 말은 정론입니다. 사상의 순수성이나 견고함, 행동의 철저한 정합성을 희구하는 자들은 종종 삶을 낭비합니다. 순교자의 법열을 우습게 보며, 정신 밑바닥에서 모든 타인을 비웃으면서 자기만족을 관철하는 데 인생을 바칩니다.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그런 식으로 쓸 바에야 충동에 휩싸여 사랑에 모든 것을 바치는 게 백배는 낫죠. 논리적인 것은 지옥입니다."
- "이런 걸로 끝나면 골치 아플 일도 없죠. 그 사장도 팔라스 상 위에서 '이제는 결코'라는 말을 반복하겠죠."
"하얀 재킷에 빨간 셔츠 차림이던데? 그런 화려한 큰까마귀도 있나."
에비하라는 '갈가마귀'가 아니라 '큰까마귀'라고 했다. 포의 시는 '갈가마귀'라고 번역되었지만, 애초에 원문에서 지칭하는 레이븐은 큰까마귀이지 갈가마귀가 아니었다.
- "너무 서두르지 마십시오. 제 눈이 천리안이 아니니, 다양한 가능성을 생각해봐야 한다는 말입니다. 거기도 없어?"
나는 없다고 대답했다.
- "그건 그렇지만, 히무라 교수님 이야기는 꼭 우리 중 누군가가 키자키 씨를 죽이고 전화를 훔쳐갔다는 투로군요. 그게 말이 됩니까."
히무라는 가운뎃손가락 끝을 물고 장갑을 벗었다.
"그럼 하츠시바 씨가 범인이라고요?"
"차라리 그 편이 마음 편하겠군요."
"감정적인 발언입니다. 심정은 알겠지만, 하츠시바 씨를 범인 취급할 근거가 부족합니다. 물론 그럴 가능성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말고 다른 누군가가 이 섬 안에 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습니다."
- "도박뿐 아니라 여자관계도 복잡했어요. 여초 직장인 콜센터에서 근무했던 게 발단인지, 시도 때도 없이 여직원들에게 찝쩍대서 제 속을 까맣게 태웠어요. 하려면 안 들키게나 하지, 바람피우면 항상 티를 냈어요. 그런 남자가 좋다고 달려드는 여자들도 이해가 안 갔지만... 젊었을 때는 나름대로 잘생긴 편이었고, 뭔가 미덥지 못한 면도 모성본능을 자극하는 건지 꽤 인기가 많았어요. 지금 모습만 보셨으니 제 말이 안 믿기실 테지만요."
"아닙니다."
"여기다 술버릇까지 나빴으면 당장 갈라섰을 텐데, 그쪽은 멀쩡했어요. 술이 안 받는 체질이었거든요. 맥주 한 캔도 못 비웠어요."
- 하루미는 초점 없는 시선으로 허공을 보다 방 한구석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뭔가 복작복작 물건이 많은 방이었다. 텔레비전 위에 시계가 있기도 하고, 옷이 든 수납 박스가 겹겹이 쌓여 있기도 했다. 집이 이렇게 큰데 관리인 부부의 생활공간은 비좁기 짝이 없었다. 평소에는 빈 방을 자유롭게 사용했을지도 모르지만, -안쪽에 침실이 있는 것 같았지만- 보아하니 그 방도 결코 넓을 것 같지는 않았다.
- "문단속을 철저히 하고 외부 침입에 대비하자는 소리입니다."
미네가 나서 달래고서야 야스에는 조금 누그러지는 듯했다. 쿠니아키의 사소한 발언에 촉발되어 살인귀 핫시라는 존재가 머릿속에 출현한 것이리라. 아니면 크리스티의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를 떠올린 걸까.
그런 대화가 하루미의 귀에 들어가는 걸 원치 않았기에 나는 다음 질문을 생각했다.
- "음. 에비하라 선생님과 부인은 어떤 부부였습니까?"
하루미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모나리자보다 은은한 미소였다.
"결혼 전에 한 번, 결혼 후에 한 번 보았을 뿐이지만... 아주 금슬이 좋은 부부였어요. 애정과 존경으로 이루어진 관계였죠. 부인이 일방적으로 남편을 존경하는 게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무척 존중했죠. 그런 부부는 없어요. 비교하는 것조차 송구스러울 정도로 우리 집 하고는 천지차이였죠."
이 대목에서 하루미의 마음은 현실에서 도피해 어딘가 꿈속으로 빠져든 것 같았다. 그녀는 지난날의 추억을 황홀한 눈으로 풀어놓았다.
"아름답고 자상한 분이셨어요. 정숙하고 기품 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아이처럼 천진난만했죠. 선생님이 사랑한 분이니 당연히 총명하셨고요. 어떻게 하면 그런 멋진 여자가 될 수 있을까요? 저도 다시 태어난다면 그런 분이 되고 싶어요."
실제로 그런 여성이었는지, 아니면 그녀의 추억 속에서 미화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 "결혼하고 나서 두 분이 여기 오셨을 때,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시는 모습을 봤어요. 주방 구석에서요. 그러려던 건 아닌데, 어쩌다 보니 훔쳐본 꼴이 됐네요. 사모님은 식탁 의자에 비스듬히 앉아 소파에 앉은 선생님에게 이야기했어요. 편집자로서 처음으로 선생님을 만났을 때 얼마나 긴장했는지를요. '까다로운 고집불통 영감인 것 같으니 분명 트집을 잡아 혼을 낼 테고, 그럼 우울해지겠지. 어차피 일어날 일이니 마음 다치지 않게 퇴근길에 긴자에 들러 단팥죽을 먹고 단골 액세서리 가게에서 살짝 비싼 액세서리를 사자.' 그런 생각을 하셨던 모양이에요. 재미있죠? 선생님 반응은 못 봤지만, 사모님은 말씀하시면서 웃으시더라고요."
- 하지만 백 번 상상하기보다 한 번 부딪쳐보라는 말처럼, 에비하라 슌은 친절하게 그녀를 맞이했다. 양쪽 모두 첫인상이 더없이 좋았던 것이다. 덕분에 야치요의 걱정은 훗날 훈훈한 에피소드가 될 수 있었다.
- "말씀 나누시는 데 방해가 될까 봐 조용히 안으로 들어갔어요. 잠시 후에 사모님의 노랫소리가 들리는 거예요. 누구 노래인지는 모르겠는데, 몇 년 전에 유행해서 자주 들었던 사랑 노래였어요. 당신을 사랑하니까 계속 곁에 있고 싶다. 당신 생각만 해도 가슴이 아파 눈물이 난다. 그런 달콤한 노래요. 사모님은 아무도 없는 줄 알고 선생님에게 그런 노래를 불러주신 거예요. 맑고 아름다운 노랫소리에 넋을 잃고 귀를 기울였답니다. 저는 그토록 열정적인 사랑을 해본 적은 없지만, 남편과 좋아하는 감정이 생겨 결혼했던 시절을 그리워하고 있는데... 노래가 끝나고 선생님의 목소리가 들렸어요. '난 모르는 노래야'. 사모님이 '제 청춘의 노래예요. 이런 감정을 품게 되는 날이 올까, 그런 사람을 만나게 될까 꿈꾸던 시절의 노래요. 몰라요?' 하고 물으시자 선생님은 '처음 들었어'라고... 무척 기운 없는 목소리였어요. 꼭 그 노래를 몰라서 미안하다는 듯이..."
- 아버지와 딸만큼이나 나이 차이가 나는 부부. 나이 든 남편은 쓸쓸했을지도 모른다.
"사모님이 돌아가신 뒤에 빈껍데기가 되어버린 선생님이 그 노래를 흥얼거리는 걸 여러 번 들었어요. 가사를 모르시는지 거의 콧노래였죠. 전 그걸 들을 때마다 눈물이 났어요. 선생님은 무의식 중에 그러신 거예요. 뭐지, 내가 언제부터 노래를 하고 있었지? 하며 본인도 놀라 멈추는 걸 봤거든요. 그 순간의 표정. 말로는 표현할 수가 없어요. 그 슬픔, 괴로움, 하지만 고귀하면서도 신비로운 그 모습을. 저도 모르게 넋을 잃고 바라봤어요. 그러다 눈이 마주쳤어요. 선생님은 '너무 짧았어'라고만 하셨어요."
- "네. 한 번 해보려고 했더니 남편이 싫어하더라고요. 그 뒤로는 안 건드렸어요."
"그런데도 이렇게까지 한 건가."
히무라의 의아한 표정에 나는 얼굴을 내밀어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그의 앞을 가로막은 건 이런 메시지였다.
[암호를 입력해 주십시오.]
- 식사가 끝났다.
접시를 다 비운 사람은 거의 없었다. 사람들 사이에 숨어든 로봇이나 우주인들이 정체가 들통나지 않도록 식사하는 시늉만 한 것 같았다. 그렇지만 따뜻한 스프와 주먹밥으로 배를 채운 건 잘한 일이었다. 마음이 가라앉았다.
- "이 장소와 시기가 이 사건을 일으킨 겁니다. 그러니까 저는 여러분이 여기 모이신 이유를 알아야 합니다."
미네가 손으로 얼굴에 부채질을 하며 말했다.
"무슨 설명인지 전혀 못 알아듣겠네. 애초에 설명 같지도 않고..."
히무라는 태연히 대꾸했다.
"제 설명이 너무 개성적이었나요? 그럼 알아듣기 쉽게 말씀드리죠. 숨기는 게 있는 사람들은 믿을 수 없다는 겁니다. 사건의 진상을 밝혀내기 위해 구할 수 있는 단서는 모두 수집해야 하는데, 모두 이렇게 비협조적으로 나오시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죠. 안 그래?"
마지막 말은 나에게 던진 것이었다. 나는 갑작스레 날아온 패스를 재빨리 받았다.
- 아유는 하츠시바에게 '안 좋은 느낌'을 받았고, '그를 이 집에 못 들어오게 하는 게 좋다'고 했다. '선생님'보다 핫시를 기피하는 것이다. 그 이유를 물어야 했다.
"핫시가 뭐가 무서워. 너희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지 않아. 혹시라도 그런 짓을 하려고 하면 밧줄로 꽁꽁 묶어서 절벽에 매달아 놓을게."
아유는 일단 히무라를 믿기로 한 모양이었다. "그럼..."하고 무겁게 입을 뗐다.
- "... 이모부한테 하는 말 같았어요."
그건 아니겠지. 히무라와 나는 동시에 같은 질문을 했다.
"어째서?"
- 히무라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그 속에는 힘이 깃들어 있었다. 아유의 용기를 끌어내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았다.
- 히무라의 유창한 언변에 눈 깜짝할 사이에 결정이 났다. 훌륭한 마무리였다. 그의 결정으로 나까지 밤새 불침번을 서게 생겼지만, 밤이야 평소에도 다반사로 샜고, 오후에 낮잠도 잤으니 딱히 문제 될 것은 없었다.
- "날 빼주는 건 최연장자에 대한 배려인가요?" 에비하라가 말했다. "호의는 감사하지만, 이 섬에 있으면 이상하게 아침에 일찍 일어나게 되더군요. 새벽에 내려오겠습니다."
"그래주시면 감사하죠. 그럼 오늘은 이쯤에서 마무리하죠. 다들 지치셨을 테니까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실상은 사람들을 물리려는 것이었다. 한시라도 빨리 후지이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다.
-
"피치 못할 상황이니, 여러분의 비밀을 허락 없이 폭로해도 넓은 아량으로 이해해 주십시오. 미즈키 야스에 씨와 카시이 키미코 씨의 턱에 점이 있었습니다. 좌우만 반대일 뿐 같은 위치였죠. 유전적으로 점은 혈연관계가 있는 사람들끼리는 같은 위치에 생기는 경향이 있죠. 좌우대칭의 경우도 마찬가지고요. 그걸 보니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그 두 사람은 자매가 아닐까."
후지이는 침묵을 지켰다. 나는 히무라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파악하지 못하고 그저 당혹스러워할 뿐이었다.
"의대 재학 중에 선생님은 인공수정을 원하는 불특정 다수의 환자들을 위해 정자를 제공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때 태어난 아이들은 지금쯤 30대가 되었겠군요. 여기 모인 네 명의 남녀처럼요. 그런 모임이죠?"
후지이는 부정하지 않았다. 그저 굳은 표정을 풀고 씩 웃을 뿐이었다.
- [소원을 하나 더 빌어요. 자, 어서 아래층으로 내려가 가져와요. 그리고 소원을 빌어요..., 그 애를 다시 살려달라고.]
<원숭이 손>, 윌리엄 제이콥스
- 깜빡 잠이 들었었다.
낮잠도 잤고, 평소에도 직업상 밤을 새는 일이 잦았는데도 어느샌가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긴장이 풀려서가 아니라, 시체를 발견한 뒤로 줄곧 신경이 곤두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불침번으로는 실격이었다.
완전히 잠든 건 아니었다. 현실에 얇은 막이 씌워진 듯, 눈을 가늘게 뜬 채 의식이 멀어져 가는 상태였다. 담배를 피우는 히무라와, 팔짱을 낀 채 흉상처럼 움직이지 않는 쿠니아키의 모습을 바라보며 순식간에 사라지는 짧은 꿈을 여럿 꾸었다.
그 역시 순수한 꿈은 아니었다. 방금 전까지 히무라와 후지이가 나눴던 대화가 기억의 메아리가 되어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하지만 ...
- '살인사건에 말려들다니 정말 놀랐습니다. 기적처럼 우연으로부터 태어나 언젠가는 죽을 게 분명한 생명을 어째서 굳이 뺏어야 했을까요? 사람을 해치는 심리를 이해할 수가 없군요.'
'안타깝게도 인간 세상에서 살인은 드문 일이 아니죠.'
히무라는 무덤덤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안타깝다는 말밖에 표현한 길이 없군요. 인간은 생명의 신비를 더욱 자세히 알아야 합니다. 그 메커니즘을 잘 안다면 결국에는 흉기를 쥔 손을 내려놓게 될 수도 있지 않을까요.'
'머리로는 이해해도 어려울 겁니다. 살인을 저지르는 순간, 인간은 이성을 잃으니까요.'
- 서글픈 일이군. 그렇게 중얼거리더니 후지이는 뜬금없이 아인슈타인 이야기를 꺼냈다.
'천재물리학자인 그는 '신은 주사위를 던지지 않는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지만, 신은 도박사가 맞습니다. 우주는 원인과 결과의 그물망으로 이루어졌고, 우연처럼 보이는 현상들도 물리법칙에 기초해 일어났다고 하죠. 하지만 직접 주사위를 던졌는지의 여부는 제쳐두고, 신이 도박의 승자를 좋아하는 건 분명합니다. 그 예로, 우리 인간은 세상에 태어날 때 일생일대의 승부에 도전해 이겨야 하죠.'
- 눈 아래로 보이는 내가 입을 열었다.
'수정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수정의 어떤 측면에 대해 말한 건지 아시겠습니까?'
마치 시험하는 듯한 투였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정중히 대답했다. 난세포를 향해 수억 개의 정자가 열심히 헤엄치지만 수정되는 것은 단 하나뿐이다. 그 가혹한 경주를 '일생일대의 승부'라고 표현한 줄 알았는데, 조금 달랐던 모양이었다.
- '아리스가와 씨가 말씀하신 건 약산성의 질내를 헤엄쳐 나팔관의 팽대부까지 도달할 수 있는 강인함을 갖춘 단 한 마리를 선별하기 위한 생존 경쟁이죠. 하지만 그것은 신성한 경쟁이므로 도박이라 부를 수는 없습니다. 가장 빠르게 헤엄치는 정자가 반드시 수정된다는 보장은 없으니, 약간의 도박적 요소도 포함되어 있지만요.'
후지이가 말한 도박적 요소란 이런 것이었다.
'대충 말씀드리죠. 먼저 배란에 대해서. 뇌하수체의 자극으로 난소에서 여성호르몬이 분비되면 원시난포가 성숙되어 난자 하나가 만들어지죠. 그러면 난관채가 그것을 잡아 나팔관으로 이동시키는데..., 임신을 위한 기관이 어떤 형태인지 아십니까?'
갑작스레 물어도 설명할 수 있을 만큼 자세히 알지는 못했다. 로르샤흐 테스트에 쓰이는 모양 같은 좌우대칭의 기관을 떠올리는 게 고작이었다. 후지이는 손동작을 곁들여 설명을 시작했다.
- '난소에서 나오는 난자는 한 달에 하나뿐입니다. 그게 나팔관에 머무르는데, 좌우 어느 쪽의 난소에서 난자가 생길지, 어느 쪽 나팔관으로 이동할지는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오른쪽과 왼쪽, 난자는 어느 한쪽으로밖에 갈 수 없는데 정자는 그걸 예측하지 못하죠. 정자는 이미 배란된 난자를 찾아 헤엄쳐가는 경우와, 나팔관 안에 도달한 뒤에 배란을 기다리는 경우가 있다고 합니다. 나팔관의 점액은 약알칼리성이라 정자는 이틀에서 사흘까지 살 수 있죠. 어느 경우든, 정자는 양자택일의 도박에 도전해야 하죠.'
- '자기는 도박에 영 재능이 없고, 승부에 약하다. 지금까지 어떤 제비 뽑기에서도 꽝을 뽑았으며, 가위 바위 보를 해도 중요한 대목에서는 항상 졌다고 한탄하는 사람들이 있죠. 아, 아리스가와 씨도 그쪽이시군요? 하지만 그건 쓸데없는 콤플렉스입니다. 그들은 이미 태어나기 전에 가장 큰 승부에서 승리했거든요. 다른 수억 마리의 경쟁자들을 물리쳤을 뿐 아니라, '자, 여기서 오른쪽으로 갈 것인가, 왼쪽으로 갈 것인가'라는 오직 운이 좌우하는 승부에서도 승리를 거뒀죠. 신은 그저 우수한 개체를 좋아하는 게 아니라, 도박에서 이긴 자의 편을 들죠. 이제 아시겠습니까? 인류는 한 사람도 빠짐없이 오른쪽이나 왼쪽이냐? 유인가 무인가?를 건 홀짝게임의 승자입니다.'
- 후지이는 열변을 토했지만, 자신의 불운을 슬퍼하는 이들에게 과연 그런 말이 위로가 될지는 의아스러웠다. '자네는 태어나기 전에 이미 승리를 거뒀어.'라고 어깨를 두드리면 오히려 부아가 치밀 것 같은데?
- 그렇게 태어난 둘도 없는 소중한 생명이 왜 이 세상에서 먼지만도 못하게 함부로 다뤄지는 걸까. 부조리의 극치였다. 정자들의 생존 경쟁이 상징하듯, 신은 일개 개체에게는 철저히 무관심한 것 같았다.
- '그런 식으로 우리는 수정란이 되기 전부터 목숨을 건 도박 속에 내던져지고, 태어난 뒤로도 그러한 도박은 끊임없이 이어집니다. 사는 게 참 힘들죠.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소설에 나오는 갓파는 출산길을 지나기 전의 아이에게 태어날 생각이 있느냐고 묻죠. 원래는 사람도 그리해야 하는 건지도 모릅니다. 산부인과 의사가 할 말은 아니지만요.'
후지이는 점차 달변가로 변했지만, 답이 없는 이야기를 하며 뭔가를 감추려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무엇을 감추려 하는지는 역시 짐작이 가지 않았다.
히무라는 후지이의 이야기에 관심을 잃은 듯, 주먹으로 턱을 받친 채 저 너머의 바닥을 바라보고 있었다.
- 자식을 찾는 이유에 대해서도 상상할 여지가 있었다. 현재 후지이 선생의 집안 사정이 어떤지는 전혀 아는 바 없었지만, 어쩌면 상속 문제 등으로 자기 자식을 찾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수한 인재여야 한다는 등의 조건이 있어서, 가장 적합한 인물을 선별하기 위해 후보자들을 이곳에 불러 모은 게 아닐까? 그것이 사실이라면 이곳에서 벌어지는 일은 인간복제 추진회의가 아니라 후지이가 주최한 자식 품평회라고 해야 하리라.
- 결국 어찌 된 일인지 잘 모르겠다. 잠이 덜 깬 머리로 이것저것 생각해 봤지만 딱히 납득이 갈 만한 게 없었다. 퍼즐 맞추기를 하다 틀린 조각을 억지로 끼워 맞출 때의 위화감이 느껴졌다. 가설을 세우는 과정에서 뭔가 중요한 것을 잊고 있는 듯한 기분도 들었다.
- "전부터 생각했는데... 도쿄의 아침도 쓰레기를 뒤지는 까마귀 소리로 시끄럽지만, 여기 까마귀들은 또 목소리가 다르네요. 까악까악이 아니라 가악가악 하고 탁하게 우는 것 같아요."
쿠니아키는 나의 동의를 구했지만, 내가 뭐라 말하기 전에 에비하라가 대답했다.
"지금 숨넘어가게 우는 녀석들은 그냥 까마귀고, 도시에 사는 놈들은 큰부리까마귀니 종류가 다르지. 하지만 덩치가 커서 보는 사람에게 위압감을 주는 건 큰부리까마귀야. 이 섬에는 그 두 종류가 섞여 살고 있지. 서로 영역이 다른지, 같이 어울려 사는지는 모르겠지만."
- "큰까마귀는 없습니까?"
포의 시에 나오는 까마귀에 대해 묻자 에비하라는 고개를 저었다.
"레이븐은 더 추운 지방에 살죠. 몸길이가 큰부리까마귀의 갑절은 된다니, 가까이서 보면 박력이 넘칠 겁니다. 큰까마귀의 울음소리는 무척 다채로워서 인간을 제외한 생물 중에서는 가장 다양한 종류의 소리를 낼 수 있다고 합니다. 포가 그 새에게 인간의 말을 하게 한 것도 허무맹랑한 이야기는 아니란 거죠."
- "하지만 선생님, 포는 원래 큰까마귀가 아니라 앵무새를 등장시키려고 했다고 들었는데요. 직접 그런 기록을 남겼던 걸로 기억합니다."
쿠니아키는 커피 잔을 내려놓으며 그렇게 물었다.
"그래, 잘 아는군. <큰까마귀> 창작 뒷이야기에 대해 포는 상세한 해설을 남겼어. The Philosophy of Composition. '창작 철학'이나 '창작의 원리'로 번역되는 시론이지. 그 시에 대해서는 이렇게 분석했네. '단숨에 읽을 수 있는 약 백 행 길이로 분량을 잡은 뒤에, 비애가 흐르는 아름다움을 추구한다는 목적을 세우고, 반복의 기법을 떠올렸다. 그리고 연인에게 보내는 시라는 모티프를 생각해 냈고, 화자를 청년으로 설정하고 그가 대화를 나누는 상대는 비일상적인 존재로서 동물을 택했다. 사람의 말을 한다는 속성 때문에 처음에는 앵무새를 떠올렸지만, 결국 큰까마귀로 바꾸었다.' 앵무새와의 대화에서는 왠지 우스꽝스러운 느낌이 들어서인지도 모르겠군. 어쨌든 포 본인은 애수 어린 느낌이 덜 들어서라고 해설했네."
- 백발의 문학자는 거기까지 말하더니 나를 보았다.
"하지만 괴짜에 허풍쟁이 남자가 한 말이니 어디까지가 사실인지는 모릅니다. 나는 이렇게 치밀한 계산을 바탕으로 창작을 했다고 과시하기 위해 나중에 창작 과정을 날조했을지도 모르죠. 하지만 그가 주장한 창작의 비결은 무척 흥미롭습니다. 특히 아리스가와 씨 같은 탐정소설 작가라면 무릎을 탁 칠 만하지 않습니까?"
순간 놀라서 대답이 늦어졌다.
- 포의 시론은 나도 읽은 적이 있지만, 거의 기억에 남아 있지 않았다. 하지만 <창작 철학>만은 각별한 의미가 있었기에 내용은 대충 기억하고 있었다. 본격 미스터리를 쓰는 사람으로서 시사할 점이 많을 거라 생각했지만, 그 점을 에비하라 슌이 지적할 줄이야. 상대는 포 연구의 권위자이기도 하니 놀랄 일은 아닐지도 모르겠지만, 허를 찔린 건 분명했다.
"네. 무척 공감했습니다. 그가 어떤 표현을 썼는지는 잊어버렸지만, <창작 철학>은 미스터리 작가에게 '역시 내 방식은 틀리지 않았다'는 용기를 주었습니다. 어떤 효과를 택해야 하는가,부터 시작해서 시나 소설을 구상하는 점을..."
- 포는, 플롯이라 부르는 것은 집필 전에 결말까지 완전히 완성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자명한 진리라 말하며, 결말 자체를 최우선시해야 할 착상으로 보고 그에 이르는 과정을 거꾸로 구축해 가는 수순이 '유리'하다고 논했다. 대다수의 본격 미스터리 작가의 방법론이지만, 때로는 불순하고 지루하게 느껴지는 수법이기도 했다. 유리하기는커녕 본격 미스터리 작가가 독자에 대해 우위를 확보하려면 결말부터 거꾸로 써 내려가는 길을 택할 수밖에 없지 않는가.
- 치밀한 본격 미스터리 작가가 반드시 두뇌 명석한 인물이라는 법은 없다. 무엇보다 본격 미스터리 창작과 탁월한 지성은 거의 상관관계가 없다. 작품을 쓰는 데 상식을 제외하고 필요한 것은 이 장르에 관한 기초적인 지식(예를 들자면 재미를 이해하는 능력이 큰 비중을 차지한다)과 몇몇 기법의 습득, 그리고 쓸데없는 데 공을 들이는 끈기였다. 남들이 풀지 못하는 난해한 수수께끼를 작중의 명탐정이 쾌도난마처럼 해결한다고 해서 작가 역시 똑똑하리라는 법은 없다.
- 명탐정은 결말을 아는 작가가 진상을 귀띔해 줬기에 천재나 현자인척 행동하는 것뿐이다. 하지만 위대한 두뇌를 가진 듯 연출된 명탐정을 보고 소설의 작가 역시 똑똑할 것이라고 착각하는 사람도 분명 있겠지.
- '결말을 아는 사람=작가'를 등에 업은 명탐정과 맨주먹의 독자가 대등하게 지혜 겨루기를 할 수 있을 리 없으니, 명탐정 작가는 압도적인 어드밴티지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 정도 핸디캡은 당연히 있어야 한다. 작가는 홀몸으로 만용을 부리며 '너 같은 놈한테 속을 줄 알고' 하고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드는 수천, 수만 명의 독자에게 작품을 내놓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중에 지력이나 상상력, 경험이 작가보다 훨씬 풍부한 이들이 있을 게 당연하니, 불특정다수와 자신을 대치시키며 '그 어떤 독자보다 내가 똑똑하다'고 자부할 수 있는 작가가 있다면 뇌파 검사를 받아보는 게 좋을 것이다. 그런 착각은 자존심이라고 표현할 수도 없다.
작품을 읽는 독자 중에는 반드시 작가보다 똑똑한 이들이 있다. 그렇다면 본격 미스터리 작가로서 포가 '유리하다'고 판단한 순서를 전적으로 활용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것은 '우수한 예술가의 창작법'이니까.
- "포는 포죠. 다른 시인들은 백지 상태에서 시를 쓰기 시작한다고 합니다. 발단부터 결말이 밝혀지는 건 시라고도, 창조라고도 할 수 없다는군요. 길은 하나가 아니니까요."
"... 그야 그렇지만."
"나도 일단은 작가 나부랭이니까."
에비하라는 듣는 사람이 민망해지는 겸손을 떨더니 말을 이었다.
"창작 과정이 부연 안개에 휩싸여 있다는 사실은 압니다. 다른 작가들이 어떤 식으로 한 편의 시와 소설을 완성하는지에 대해 끊임없이 관심을 가지고 있죠. 그런 욕구를 충족시켜 준 이가 바로 포였습니다. 갈가마귀의 창작과정이 밝혀지는 것을 보며 나는 역시 탐정소설의 시조답다며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하지만..."”
- "밖에... 뭐가 있나요?"
밖에 별다른 게 없는 걸 보고 더욱더 신경이 쓰였는지 하루미는 재차 물었다.
"아뇨,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냥 까마귀 소리가 시끄러워서..."
에비하라와 같은 말을 하더니, 히무라는 창가로 다가가 유리창에 이마를 댔다. 이른 아침인데도 행동거지가 굼뜨지 않고 빠릿빠릿했다.
- "저 근처에 까마귀들이 무리 지어 있네요.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어제 아침에는 저러지 않았는데."
"그래봤자 까마귀지. 정 신경 쓰이면 같이 가볼까?"
그는 말없이 의자 등받이에 걸쳐놓은 재킷을 입었다. 아직 쌀쌀할 시간이라 나도 겉옷을 들고 현관으로 나갔다.
때마침 2층에서 나카니시 미네가 내려오고 있었다. 일찍 깼는지 화장도 한 얼굴이었다.
"불침번 서시느라 고생하셨어요. 아무 일도 없었나요?"
"네."
히무라는 그렇게만 말하고 문을 열었다. 바빠 죽겠는데 말 시키지 말라는 투였다. 그럴 것까지는 없잖아.
- "조용한 밤이었습니다. 잠도 깰 겸 산책 나가는 길입니다."
나는 나름대로 예의를 갖춰 말했다.
아침햇살이 섬을 감싸 안았다. 화창한 날씨를 약속하는 빛이었다. 바다는 일찌감치 노래하듯 빛나고 있었다.
아름다운 축복에 휩싸인 아침이었다. 신음하듯 지저귀는 까마귀 소리와 그 새카만 실루엣을 제외하고는.
- 암호를 걸어놓은 컴퓨터에 이어 새로운 비밀의 영역이 나타났다. 그 금고가 하츠시바 신지와 만날 구실이 되어준 것일까?
"자물쇠는 못 열어?"
"아니. 드라이버 하나만 있으면 몇 분 안에 열 수 있어."
나중에 시험해 볼 작정인 듯했다. 살인현장을 건드리는 건 아니니, 하루미의 허가를 받은 뒤에 지켜보는 사람이 있는 데서 열어보면 큰 문제는 없겠지.
- 그 광경이 머릿속에 절로 떠올라서, 봄날 아침의 아름다움도 한순간에 그 빛을 잃었다.
그나저나 신경을 자극하는 이 불쾌한 소리가 거슬렸다. 환한 빛으로 가득한 풍경 어딘가에 난 균열이 삐거덕거리는 듯한 소리였다. 누군가를 원망하듯 우는 소리처럼 들렸지만, 나에게는 괴로움을 연상시키는 소리라도 그들에게는 환희의 외침일지도 모른다.
- 섬에 상륙한 당일 밤, 통나무 벤치에 나란히 앉아 잔뜩 취한 하츠시바에게 원대한 경영전략을 듣고, 미다스의 손길을 하사 받았던 전망대였다. 그 부근 상공을 한 무리의 까마귀들이 날고 있었다. 대략 삼십에서 오십 마리쯤 되는 것 같았다. 그저 유유히 나는 게 아니라, 오르락내리락하는 게 눈에 띄었다.
"이제 다 왔어. 마음의 준비는 됐지?"
히무라는 알 수 없는 소리를 했다. 아침에 산책하며 새 구경을 하는 데 무슨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다는 말인가.
"이유도 없이 까마귀 떼가 저 난리를 치지는 않을 거야. 저 절벽 아래 뭔가가 있어. 나는 거 보면 알겠지?"
- 바닥이 바다를 향해 완만하게 기울어져 있어서 제대로 설 수가 없었다. 나는 갓난애처럼 네 발로 기었다. 높은 곳에 올라도 태연한 것은 생물로서 유리한 속성이 아니니까 그러는 게 당연했다. 이따금 위험에 대해 감각이 둔해지는 히무라도 한쪽 무릎을 꿇고 손으로 바닥을 짚고 있었다.
- "무리하지 마. 밑으로 내려갈 수 있을 것 같으니까."
절벽 아래로 고개를 내민 히무라는 내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발견한 듯했다.
- "내가 먼저 내려갈게."
나는 만용을 부리며 앞장섰다. 그런 나의 속내를 알아채고 히무라는 씩 웃었다.
"떨어질 거면 혼자 떨어지겠다는 거지? 숭고한 마음가짐이로군. 고마워."
"척하면 척이네. 하지만 네가 뒤에서 떨어지면 잽싸게 피할 테니까 알아둬."
농으로 받아친 건 긴장했기 때문이었다. 돌계단뿐 아니라 그 밑에서 기다리고 있는 뭔가와 대면하는 게 두려웠다.
- 천천히, 조심조심 내려갔지만 실제로 걸린 시간은 고작 삼사 분이었을 것이다. 도중에 수면 부족으로 다리가 후들거리거나, 까마귀가 갑작스레 눈앞을 가로질러 기겁하는 일 없이 모두 무사히 바위에 발을 디뎠다. 짙은 바다 내음에 휩싸였다. 내려서자마자 차가운 물보라가 다리와 허리를 적셨다.
"조심하세요. 발밑이 미끄러워서 아차 하면 넘어집니다."
말을 마친 쿠니아키는 엉거주춤한 자세로 암벽을 따라 걸음을 ...
- 그리고 계속 이쪽을 등진 채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파도 소리가 무겁게 울려 퍼졌다.
[파도 소리 들리는 바닷가 그녀의 무덤에서.]
해변의 죽음과 마주하자 <애너벨 리>의 마지막 구절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하지만 그 시가 불러일으키는 정경과는 너무나도 달랐다.
- 잔혹한 해변의 의식이었다. 에너지와 야심이 흘러넘쳤던 카리스마적 인물이, 왕이라고까지 칭송받았던 사내가 이런 최후를 맞이할 줄이야. 이건 마치...
"조장鳥葬이로군."
쉰 목소리가 목구멍을 타고 올라왔다.
"맞아." 히무라가 말했다.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조장을 당했어. 범인은 티베트나 서인도 출신의 독실한 조로아스터 신자일지도 몰라."
이런 상황에서 무슨 농담이냐고 생각했지만, 나 역시 쓸데없는 지적을 하고 말았다.
"아니, 그쪽 지방에서는 시신을 산 위로 옮겨서 먹기 좋게 해체한 뒤에, 혼백을 저승으로 데려다줄 독수리에게 바치는 거야. 이런 바닷가에 버려두는 건 작법에 어긋나지. 그리고 일본에도 조장 풍습이 있잖아. 교토의 토리베노 근처는 옛적부터 묘지였는데, 과거에 조장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은 거야."
머릿속에 든 지식을 떠벌림으로써 내가 그나마 냉정하다는 걸 확인하고 싶었다. 한심한 자기 위안이었다.
- 흔히 볼 수 있는 지갑이, 바지 주머니에서는 손수건이 나왔다. 지갑 안에는 만 엔짜리 지폐 스물다섯 장과 천 엔짜리 지폐 네 장, 약간의 동전, 은행 현금카드, 그리고 실물로는 처음 보는 새카만 아멕스 신용카드도 있었는데, 이거 한 장만 있으면 뭐든 살 수 있을 듯했다. 마지막으로 운전면허증이 나왔다. 이상, 댓츠 올. 레코드 가게 포인트 카드나 각종 선불카드, 카페 쿠폰 등 잡동사니들로 가득한 내 지갑에 비하면 깔끔했다. 특히 만 엔짜리 지폐 장수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없어."
히무라는 내뱉듯 말하더니 샴푸를 하듯 머리를 긁적였다. 기대했던 뭔가를 찾지 못한 모양이었다.
- "처음부터 해칠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고 말하진 않겠지만, 하츠시바가 목적이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군요. 왜냐하면 우리 중에서 두 분만..."
"아웃사이더니까요. 그 이유로 의심하시는 건 이해가 가지만 입 밖으로 내는 건 경솔한 행동이라 말씀드리고 싶군요."
대화에 야스에가 끼어들었다. 그녀는 나무라듯 말했다.
"그만해요. 에비하라 선생님도 계신데. 그리고 얘기를 하려면 좀조리 있게 하든지요. 외부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두 분을 살인범 취급하다니, 평소의 자이츠 씨답지 않네요. 좀 진정해요."
평소의 너답지 않다. 현명한 표현이었다. 남에게 반성이나 자제를 촉구할 때 이 표현은 무척 효과적이다. 자이츠는 즉각 얌전해졌다.
- "그래, 좀 진정하게." 에비하라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바다가 갈라지거나, 무덤에서 망자가 기어 나온 것도 아니잖나."
기껏해야 널리고 깔린 살인사건이다. 그런 말까지는 하지 않았지만, 뭔가 가슴이 술렁거렸다. '무덤에서 망자가 기어 나온 것도 아니다'라는 표현 때문일까.
사랑하는 아내를 잃은 에비하라 슌에게 세상 모든 것은 이제 별다른 의미를 가지지 않는 게 아닐까. 흔해빠진 기쁨, 흔해빠진 슬픔, 흔해빠진 분노. 그런 감정들이 만화경처럼 그때그때 나타났다 사라질 뿐, 죽은 아내가 저승에서 살아 돌아오는 게 아닌 이상 딱히 놀랄 일도 없을지도 모른다.
- "범인의 정체를 알았을 때 충격으로 쓰러지는 사람이 없었으면 좋겠군요. 누가 범인이라 해도."
히무라가 담배를 문 채 말했다. 자이츠의 말이 불쾌했던 게 아니라, 말 그대로 가까운 사람 중에 살인범이 있다는 게 밝혀졌을 때 너무 당황하지 말라는 충고였다. 자세한 사정은 모르지만 당신들이 친밀한 관계로 서로 연결되어 있는 건 안다는 비아냥 섞인 말처럼 들리기도 했지만.
- "잠깐 실례하겠습니다."
조교수는 발길을 돌려 전망대로 향했다. 우리도 그 뒤를 따랐다. 살인현장에서는 히무라의 일거수일투족이 주목의 대상이었다. 히무라는 전망대 주변의 나무를 둘러보았다. 나무줄기에 뭔가 흔적이 남았는지 찾는 것 같았다.
"찾았다."
이내 히무라는 그렇게 말하며 그 자리에 멈춰 섰다.
- [내가 지금 짓고 싶은 건 직사각형 집이다. 거기서 키워야 하는 원기둥의 사아死児. 승산 없는 싸움과 조우하기 위해 선잠을 자는 아내를 깨워 들볶는다.]
<상복>, 요시오카 미노루
- 그때 아유가 여기 있으면 안 되냐고 저항하자, 타쿠미가 올라가자며 손을 잡았다. 소년과 시선이 마주쳤다. 아이의 동그란 눈동자가 '나중에 사실대로 말해주세요.'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자." 히무라는 머리를 쓸며 운을 뗐다. "어른의 시간이 되었으니 자극적인 이야기를 시작해 볼까요."
- "하지만 그 점을 따지고 들면, 명확한 동기가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아무래도 그 동기란 건 지하수맥처럼 눈에 보이지 않게 흐르는 모양입니다."
"범죄 전문가이신 히무라 교수님도 모르시겠습니까?"
"네. 남모르는 원한이 있을지도 모르죠."
"그러니까 여기 있는 사람들은 모두 똑같이 수상하다는 겁니까? 하지만 잘 아는 사람들 중에 살인범이 있다니 믿기지 않는군요. 히무라 교수님과 아리스가와 씨까지는 잘 모르겠지만요."
또다시 공격이 들어왔다. 점차 거세지는 공격에 무서운 상상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히무라가 범인을 지목하자마자 에비하라 슌에 대한 존경심 아래 강철 같은 단결력으로 똘똘 뭉친 그들이 그 인물을 옹호하려 드는 게 아닐까? 그리고 비밀을 지키기 위해 배가 오기 전에 히무라와 나를 비밀리에 없애버릴지도 모른다. 떼로 달려들어 때려죽인 뒤, 추를 매달아 적당한 절벽에서 던지면 고기밥이 되겠지. 아니, 바위틈에서 까마귀 먹이가 될까. 무시무시한 의식이 끝날 때까지 지금처럼 미네 야스에가 아이들의 주의를 끄는 역할을 맡겠지. 이렇게 쿠로네지마 섬의 비밀은 지켜졌다. 말도 안 돼.
하지만 이 섬에서라면..?
- "범인 찾기를 시작할까요."
히무라는 이 모든 위험을 무릅쓰고 그렇게 선언했다.
- "좋습니다. 경찰이 이 섬에 도착해 우리 중 한 명의 손목에 수갑을 채우기 전에 우리 손으로 범인을 찾아내면 더할 나위가 없겠죠. 어차피 찾아올 슬픔이라면 빨리 겪고 싶군요. 경찰의 수고를 덜어줌으로써 국민의 혈세도 절약할 수 있고요. 그리고 가까운 이가 재판정에 서는 걸 피할 수 없다면, 국가권력의 폭력장치가 작동하기 전에 우리끼리 해결하는 게 차라리 낫겠죠. 이의 있는 분 계십니까?"
답답한 말투였다. 듣고 있으려니 속이 터졌다. 범죄학자나 상징시인이나, 왜 그렇게 멀리 돌아가려 하는 걸까.
- "그건 만일 우리 중에 범인이 있다면... 이란 가정이 바탕이 되었을 때 이야기죠. 진상은 우리에게 그다지 충격적이지 않을지도 모르겠군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또다시 적대적인 발언이었다. 우리가 범인일 가능성을 진심으로 믿는 것일까? 아니면 그런 말을 함으로써 본인과 지인들의 정신적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려는 걸까? 대체 얼마나 진심인 건지 알 수 없었다.
- 히무라가 잡말을 차단했다. 예상대로 머리를 굴리는 중인 모양이었다. 자이츠는 야스에와 미네를 향해 어깨를 으쓱했다.
그들이 무엇으로 일치단결한 것인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말할 수 있는 건, 지금 이 상황이 탐정인 히무라에게 무척 불리하다는 것이었다.
정보가 부족한 게 아니라 지금까지 얻은 모든 정보가 불확실했다. 미심쩍지 않은 게 없었다. 그들이 밝힌 나이, 거주지, 직업이 진실이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었고,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히무라가 상상한 대로 모두가 혈연으로 이어진 가족일지도 모른다. 확실한 게 하나도 없다면, 탐정은 바닥에 발을 디디지 못한 채 허공에서 허우적거릴 뿐이다. 이번만큼은 백기를 들고 미에 현경의 도착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는 걸까.
- 불길한 상상이 한여름의 소나기구름처럼 피어올랐다. 내일 배가 온다는 말을 믿어도 되나? 경찰에 신고할 의지가 과연 있는 걸까? 합심하여 사건의 존재 자체를 묻어버릴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러면 나와 히무라는 절벽에서 바다로...
무슨 어처구니없는 생각을 하는 거야. 생각을 털어버리려 고개를 젓자, 키미코가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주변에 보는 눈도 많으니 포커페이스로 생각하자. 문제는 나와 히무라를 제외한 모든 사람이 단단한 유대관계로 이어져 있다는 사실이다.
- "뭐 해?"
뒤통수에 대고 묻자, 히무라는 돌아보지 않은 채 오른손을 까닥했다. 다가가서 어깨너머로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암호를 입력해 주십시오'라는 화면과 눈싸움을 벌이는 줄 알았는데... 문이 열려 있었다.
- "아리스, 이 섬에 오는 길에 이상한 안내문을 봤다는 이야기를 했지? 그냥 지나가는 이야기처럼 했잖아. 도쿄 어디를 걷다가 본 황당한 안내문 말이야. '외부인 외에는 출입 금지'라고 했나?"
어느 제본회사 창고에 붙어 있던 안내문이었다. 언뜻 보면 넘어갈 수도 있지만, 자세히 보면 말도 안 되는 안내문이었다. 외부인 외에는 출입금지라면, 외부인만 들어갈 수 있는 곳이니 관계자들은 나가달라는 뜻이다. 시시한 이야기였지만 차 안에서 문득 생각이 나서 히무라에게 했던 기억이 난다. 그때는 별 반응 없더니, 속으로는 웃었던 건가.
"그래. 그 황당한 안내문이 왜?"
"실수는 어디에나 존재하는 법이야. 이 섬은 더 엄청난 착각이 버젓이 통용되는 곳이었고. 너나 나나 지금까지 계속 가만히 듣고만 있었던 게 억울하네. 착각도 그런 착각이 없어."
화가 난 게 아니라는 건 목소리를 들으면 알 수 있었다. 말은 저렇게 해도 후회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 "무슨 착각이 버젓이 통용됐다는 건데?"
의자를 홱 돌려 탐정은 나를 바라보았다.
"외부인 취급받은 게."
"아, 외부인 입네 아웃사이더 입네 하는 말들? 사실이잖아. 가까운 사람들끼리 모인 파티에 낀 외부인이니 어쩔 수 없지. 근데 그게 왜?"
"우린 아웃사이더가 아니야. 엄연히 그들의 일원이라고. 지금 이 섬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동등한 동료야, 탐정도, 범인도, 아이들도 모두.”
딱 잘라 말하는 걸 보니 어딘가에서 다른 문을 여는 데 성공한 모양이었다. 입가에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 "그걸로 뭐가 달라지나? 서민에게는 상당한 금액이지만, 고작 다섯 주면 개미 주주나 마찬가지인데, 그게 살인사건의 원인이 되었을 리 없지. 어찌 된 상황인지 설명해 주겠나?"
우두커니 선 하루미의 뒤로 에비하라가 보였다. 시인은 관심 없다는 듯 무관심한 표정이었다. 번잡스러운 속세를 초연히 관찰하는듯한 눈빛이었다.
후지이의 말에 히무라는 지금까지의 울분을 터뜨리듯 선언했다.
"설명해 드리죠. 날이 저물어 까마귀 울 적에요."
- 한숨 돌리기 위해 다락방으로 올라왔다. 묻고 싶은 건 많았지만, 히무라는 입을 굳게 닫고 있었다. 지금까지 입수한 정보를 머릿속에서 짜 맞추느라 바쁜 것이다. 나는 방해가 되지 않도록 한동안 내버려 두었다.
- 암호를 풀었다. 키자키 신지의 컴퓨터를 여는 데 성공한 히무라는 짧은 시간에 뭔가 단서를 잡은 것처럼 보이는데도 무엇을 밝혀냈는지 말하려 하지 않았다. 자이츠나 야스에가 질문을 던졌지만, 무뚝뚝하게 보고 싶으면 보라며 턱을 까닥해 책상을 가리켰다. 도발당한 두 사람은 지금 오기가 생겨 컴퓨터에 남은 정보를 샅샅이 뒤지고 있겠지.
- "난 타쿠미하고 아유 알리바이나 알아보고 와야겠어. 놀라운 사실이 밝혀질지도 모르잖아."
진심으로 한 소리는 아니었다. 아이들의 행동은 어른들의 증언을 통해 자연스레 밝혀졌다. 유익한 정보 같은 게 나올 리 없었다.
그런데 히무라도 "가보자"며 일어나는 게 아닌가. 내심 실망했다.
"그렇게 잘 안 풀려? 아이들한테 무슨 얘기를 물어보려고?"
"그게 아니라 그냥 좀 움직이고 싶어서, 공하고 글러브를 빌리려고"
이런, 조교수는 그새 캐치볼에 중독된 것일까. 아니면 적절한 운동으로 뇌를 자극하려는 걸까.
- 우리 이야기를 들은 아유가 "사진 방이에요" 하고 대답했다.
"사진 방?"
조교수가 되묻자 아유는 우리를 지나쳐 복도 안쪽으로 가서 문을 열고 손짓했다. 안을 보여주겠다는 건가?
주인의 허락을 받지 않은 게 마음에 걸렸지만, '사진 방'의 정체가 무엇인지 궁금했다. 우리는 아유의 머리 위로 고개를 내밀어 방 안을 살며시 들여다보았다.
- 소녀가 '사진 방'이라 부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네 벽에 앤틱 풍의 사진 액자가 빼곡히 걸려 있었다. 피사체는 모두 한 사람이었다.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시인의 아내였다. 카비네판 사이즈로 인화한 사진도 있었고, 쓸데없는 부분을 잘라낸 것 같은 사진도 있는 등 크기는 제각각이었다. 무질서 속의 질서라고 할까. 전체적으로 하나의 작은 우주를 보는 듯한 아름다움이 느껴졌다. 커튼 사이로 새어드는 빛이 바닥에 날카로운 선을 그렸다.
- "사진이 가득하죠?"
아유는 태연하게 안으로 들어가더니 방 한가운데에서 빙그르 돌았다. 히무라와 나는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이 지극히 사적인 공간을 지배하는 엄숙한 분위기 때문이었다.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 창가에는 서랍이 달린 낡은 책상이 놓여 있었다. 누런 등갓의 전기스탠드와 촛대 하나가 보였다. 그 옆에 액자 다섯 개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그중에는 부부가 같이 찍은 사진도 두 장 있었다. 먼발치에서 봐서는 어떤 상황에서 찍은 사진인지까지는 알 수 없었다.
촛대에 절로 눈이 갔다. 세 자루의 양초에는 촛농이 흘러내린 흔적이 남아 있었다. 에비하라 슌은 이 책상에 앉아 초에 불을 붙였겠지. 일렁이는 불꽃이 그와 그가 사랑한 여자의 사진에 숨을 불어넣었으리라. 그리고 깊어가는 밤의 밑바닥에서 고독한 회상에 빠져있었으리라. 자신의 행복과 불행을 곱씹으며.
- '녹색 방'...
프랑소와 트뤼포가 감독하고, 직접 주연을 맡은 그 영화가 떠올랐다. 헨리 제임스의 원작 죽은 자들의 제단은 읽어보지 않았다.
- 주인공 줄리앙은 제1차 세계대전을 겪은 중년의 남자이다. 수많은 전우들이 목숨을 잃었는데 혼자 살아남았다는 사실에 죄책감을 느끼고 있다. 그리고 사랑하는 아내 줄리를 먼저 보낸 뒤, 그는 죽은 자들과 함께 살아왔다. 시류에 뒤떨어진 잡지에 부고 기사를 쓰며 생계를 이어간다. 아내를 잃고 오열하는 친구를 정성스레 위로했지만, 그가 재혼하자 경멸의 눈초리를 보내는 줄리앙의 소원은 세상을 떠난 사랑하는 이들을 추모하는 공간을 만드는 일이었다. 황폐한 예배당을 보수해도 좋다는 허락이 떨어지자 그는 신부에게 '신앙을 갖지 않은 걸 자랑스럽게 생각한다'고 말한다. 옛 친구의 딸인 세실리아는 그런 줄리앙을 사랑하게 되지만 그는 그 마음을 알아채지 못한다. 그저 자기와 함께 죽은 자들의 제단을 지키는 수호자가 되길 바라며, 자신이 죽으면 촛불을 켜주기를 부탁한다. '녹색 방'이란 줄리앙이 아내와의 추억을 그리는 장소다. 그 영화를 흉내 낸 건 아니겠지만, 영화 속 공간과 무척 비슷했다. 푸른색 벽지도.
- "나가자. 에비하라 선생님 방이니까 마음대로 드나들면 안 돼."
내 말에 아유는 순간 놀란 토끼눈이 되었지만, "네" 하고 대답했다. 우리의 반응을 보고 뭔가 느낀 게 있는 모양이었다. 사람은 그렇게 조금씩 어른이 되어간다.
- "다시는 그 문을 열지 마세요. 선생님만의 공간이에요."
"죄송합니다."
히무라를 따라 나도 고개를 숙였다.
- "에비하라 선생님은 자주 이곳을 찾으십니까?"
조교수의 물음에 하루미는 시선을 떨궜다.
"사모님이 쓰시던 방이라고 들었어요. 한때 선생님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이곳에서 시간을 보내셨죠. 그리고 나오실 때마다 더 수척해지셨어요. 보기만 해도 괴로웠죠. 선생님께는 지옥 같은 나날이었을 거예요. 선생님 얼굴에 조금이나마 웃음이 돌아올 때까지 얼마나 긴 세월이 걸렸는지 몰라요."
상은 오래도록 계속되었다. 아니,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 "서재에서 까마귀 박제를 보셨죠? 그걸 보시며 이런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마음 같아서는 야치요를 박제해두고 싶었다고. 계속 함께 있고 싶어서. 그러지 못한 건 세간의 상식 때문이라고요."
'녹색 방'에 난 불로 줄리앙은 소중한 아내의 사진과 추억이 담긴 물건들을 잃었다. 깊은 후회 끝에 그는 아내를 꼭 빼닮은 인형을 만들려 했다. 하지만 완성된 인형은 줄리와는 너무나 달랐다. 격노한 그는 장인에게 돈을 주며 인형을 부수라고 한다.
죽은 아내를 박제한 방에 만족하지 못하지만 그렇다고 부수라는 말도 하지 못한 채 절망하는 에비하라 슌. 그런 무참한 광경이 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 복도 끝을 돌아보았다.
봐서는 안 될 방을 보았다. 하지만 우리가 저 문을 열 일은 없으리라. 이제는 결코.
- 조그맣게 회전하던 공이 팡, 하는 소리를 내며 글러브 안쪽에 꽂혔다. 잘못 받은 탓에 손바닥이 얼얼했다. 이런 실수를 하다니.
"이러고 있어도 괜찮겠어? 하얀 공에 서른넷의 청춘을 걸 때가 아닐 텐데."
나무 사이로 새어 들어오는 빛을 받고 서 있는 히무라에게 다시 공을 던지며 말했다. 공은 왼쪽으로 살짝 치우쳤지만, 히무라는 역동작으로 팔을 뻗어 어렵지 않게 잡았다.
"까마귀 울 적에 진상을 밝히겠다는 연극 같은 대사를 읊었잖아. 진심이야? 진짜면 수사에 힘써야 하지 않아? 캐치볼이나 하고 있을 때가..."
눈앞으로 묵직한 볼이 날아왔다. 잔소리 말라는 뜻인가. 나는 팔을 힘껏 휘둘러 비슷한 속도로 공을 던졌다. 얼굴을 향해서.
"지금 심심풀이로 이러고 있는 게 아냐. 시간을 조절하는 거지."
이제야 대답이 돌아왔다.
"앞으로 다섯 번만 더 하고 전망대로 가자. 내 가설이 정리되려면 아직 시간이 좀 걸리니까."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더는 캐묻지 않기로 했다.
- "네 관점은 무척 흥미로워. 이 섬에서 일어나는 일에 그 아이들은 불가결한 요소야. 쿠로네지마 섬이 품은 비밀의 윤곽이 어스름한 저편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것 같군."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그걸 저 사람들의 눈앞에 들이밀어야 하지 않을까? 그렇게라도 안 하면..."
"그건 동감이야. 그들의 결속을 무너뜨려 범인을 떼어내야지. 그러지 않으면 진상을 은폐할 테니까."
"네 자릿수 암호를 알아내는 것보다 어려운 문제야. 이 수수께끼의 문은 묵직한 데다 튼튼하기까지 하군."
날아가는 까마귀를 눈으로 좇으며 히무라는 시를 읊듯 말했다.
"그게 무엇인지 아직은 몰라. 하지만 열린 문 너머에는 한 번도 보지 못한 뭔가가 있겠지."
- 통나무 벤치에 나란히 앉아 우리는 파도 소리를 들었다. 그날 밤, 카시오페이아자리가 빛나던 하늘에는 조각구름이 떠 있었다.
손목시계 바늘은 5시 반을 가리키고 있었다. 까마귀들이 울기 시작했다.
우리는 일어나 계단 위에서 바위를 내려다보았다.
"만조滿潮로군. 시간도 만조야."
그는 별장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약속을 지키기 위해. 수수께끼로 잠긴 문이 드디어 열린다.
- [그건 그렇지만, 자네도 알잖나. 누구나 굳이 실현하려 들지 않는 일이나 상황을 마음속에 품고 있다는 걸.]
<솔라리스>, 스타니스와프 렘
- "주인공 이름도 제대로 정하는 게 좋겠어. 대충 짓지 말고, 그럴싸한 걸로."
"당연하지. 소설이잖아, 이름이 중요해."
“그럼 둘이 상의하며 하나씩 정하자. 쓰는 건 내가 할게. 괜찮아?"
아유는 좋다고 말하며 타쿠미에게 노트를 건넸다. 열은 이미 내렸는지 어제보다 더 기운이 넘치는 것 같았다. 아이들의 솔직함이 고마웠지만, 한편으로는 은근한 죄책감을 느꼈다. 내일이면 헤어져야 하니까 셋이서 생각한 소설의 아이디어를 정리해서 노트에 기록하자. 나의 제안을 아이들은 기꺼이 받아들였다. 게임과 퍼즐에 질려 있던 차에 덥썩 달려든 건지도 모른다.
- "상상으로 만든 곤봉이 대체 뭡니까? 무고한 죄를 뒤집어쓸 것 같은 예감이 드는군요. 제대로 추리해 주시죠. 명탐정의 필수품은 논리적 증명 아닙니까."
"증명 가능(probable)과 확률(probability)은 어원이 같은 말들입니다. 논리란 일종의 확률이죠. 이 세상에 논리로 완벽하게 증명할 수 있는 일이나 현상은 없습니다. 아무리 정밀한 논리를 구축해도 반드시 어딘가에 불확실성이 숨어 있으니까요. 때문에 법치국가의 법원에서도 일억 분의 일의 우연은커녕, 백만 분의 일의 우연조차 '터무니없다'며 배제하고 판결을 내리죠. 일만 분의 일의 우연이 인정받지 못하는 경우도 있을 테고요."
"안타깝군요. 수학적인 논리를 구경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논리란 상당한 확률로 일어나는 일을 지적한 것에 불과합니다. 그런 거죠. 수학사에 이름을 남긴 라이프니츠는 법학자이기도 했는데, 그는 확률을 증명 가능성으로 봤습니다. '있을 법한 일'을 지적하는 게 논리죠. 수학용어를 동원하면, 논리적 확률이 높으면 증명은 이루어졌다고 봅니다."
- "하츠시바 사장은 미다스 왕을 자인했습니다. 손에 닿는 모든 걸 황금으로 바꾸는 능력을 가진 전설의 왕. 말하자면 연금술사죠. 하지만 입에 들어갈 음식마저 황금으로 바뀌는 바람에 고통스러워했다는 희비극의 주인공입니다만, 사장은 그런 결말은 신경도 쓰지 않았을 겁니다. 그런데 이 미다스 왕에 얽힌 유명한 에피소드가 하나 더 있습니다."
히무라는 에비하라를 보았다. 박식한 그에게 소개해줄 것을 요청하는 신호였지만, 당사자는 묵묵부답이었다. 하는 수 없이 내가 대신 나섰다.
"신들의 음악 경기가 열렸을 때, 심판을 맡은 미다스 왕은 판의 승리를 선언하여 아폴론의 노여움을 샀습니다. 아폴론은 미다스 왕의 귀를 당나귀 귀로 바꿔버렸고, 왕은 부끄러워 두건을 써 감췄습니다만, 이발사만은 속일 수 없었죠. 입이 근질거려 참을 수 없었던 이발사는 궁여지책으로 땅을 파서 구멍에 대고 외쳤습니다. 임금님 귀는..."
- 히무라는 쉼 없이 말을 이었다.
"여기 계신 몇몇 분들은 저와 아리스가와 외부인이라 부르셨죠. 외딴섬에서 은밀히 열린 여러분의 모임에 끼어든 아웃사이더니, 충분히 그러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관점을 달리하면 저와 아리스가와는 여러분의 동료가 됩니다. 현시점에서 하츠시바 사장의 죽음을 아는 건 전 세계에서 오직 우리뿐이니까요. 우리 모두 내부자라 할 수 있죠."
- "제가 무례한 사람이 되지 않게 먼저 말씀해 주시죠."
하늘의 붉은빛이 짙어졌다.
창밖에서 까마귀가 우짖고 있었다.
인간들은 여전히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 "여러분은 저에게 지그소 퍼즐을 시키고 싶으신 모양이니 맞춰보죠. 이미 조각이 여러 개 모였습니다. 에비하라 선생님, 그 숭배자들, 후지이 선생님, 그리고 두 아이들. 이 중 하나라도 빠지면 이 비밀스런 집회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각각의 조각을 자세히 보면 다른 조각과 연결되는 게 보입니다. 가장 특징적인 건 후지이 선생님과 인간복제 기술. 이건 딱 들어맞죠. 그다음으로 눈길을 끄는 게 에비하라 선생님과... 돌아가신 사모님입니다."
히무라는 공손한 손길로 벽에 걸린 사진을 가리켰다. 그 모습이 미즈키 야스에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그녀에게 죽은 야치요는 신성한 존재였으리라.
- "하지만 논리를 초월한 희망이나 욕망도 분명히 존재하는 법이죠. 그런 마음을 품게 되는 게 인간입니다. 에비하라 선생님 정도의 지성인이라도 그런 모순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질 수는 없죠."
"무슨 근거로 그렇게 단정 짓는 겁니까."
-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습니다. 제가 범인의 이름만 덜렁 말하면 여러분은 믿지 않으실 겁니다."
- 해가 지고 있었다.
밤의 어둠 속에 녹아들며 까마귀들이 다시 시끄럽게 울고 있었다. 차츰 잦아드는 그 울음소리는 마치 이승으로 새어 나온 저승의 웅성거림 같았다. 귀를 기울이면 어느샌가 이계로 빠져들 것 같았다.
- "신기한 섬이야, 이곳은."
히무라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 "이보다 더 역설적인 건 젊음과 영원이 담긴 이름을 가진 아내가 인생의 내리막길에 접어든 나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이죠. 신의 장난이라 표현하고픈 아이러니입니다. 우리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세상에 생을 받았을 때부터 이처럼 어긋날 운명이었던 게 아닐까 그런 생각마저 듭니다."
"역설, 아이러니. 저도 그런 느낌을 받았습니다."
시인과 범죄학자는 온화한 눈빛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들만 이해할 수 있는 뭔가가 생겨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 "하지만 히무라 선생, 이건 끔찍한 아이러니가 아니라 조심스레 맛봐야 하는 알레고리일지도 모릅니다. 특히 시간을 주제로 삼은 소설을 써온 나 같은 사람은 말이죠. 영원과 순간은 한없이 대립하며 결코 떼어놓을 수 없는 개념입니다. 우리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것 중에 이 둘만큼 서로를 매료시키는 조합은 없을 겁니다. 사람은 찰나라 불러도 무방한 유한한 시간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까닭에 영원이라는 무한한 시간에 끌리는 법이죠. 바닥이 보이지 않는 그 무의미함을 두려워하면서도 끌릴 수밖에 없는 겁니다. 대부분 종교라는 이름 아래 신앙의 대상이 되어온 것들은 모두 영원을 그 제단 위에 올렸습니다. 유한한 인간이 희구하는 건 오직 하나, 영원뿐이죠. 어째서 그렇게 영원을 동경하는 걸까. 그러한 자문 속에서 인간은 순간만이 가지는 의미를 알게 됩니다. 그 가장 일상적인 형태는..."
에비하라는 말을 흐렸다. 기다려도 뒷말을 잇지 않자, 히무라가 다시 말문을 열었다.
"섬세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고 아직 독신인 저도 짐작 가는 게 두 가지쯤 있군요. 이런 식으로 말하면 무디다는 말을 들을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한없이 깊은 슬픔을 수반하는 일이죠. 첫째는 남편이 한참 어린 아내를 먼저 떠나보내는 일. 아무리 사랑하는 사이라도 종국에는 죽음이 갈라놓을 것을 알면서, 그럼에도 인간은 그 사실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더구나 그 죽음의 순서가 예상과 크게 달랐을 경우라면 그 슬픔은 배가되어 폐부를 찌르겠죠."
- "다른 이들도 상상력을 가진 사람이라는 걸 기억해 주시길 바랍니다. 사모님과 함께했던 그리 길지 않은 나날들은 에비하라 선생님의 삶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을 겁니다. 하지만 그 평화롭고 즐거운 시간 속에서도 불현듯 찾아온 쓸쓸함으로 가슴 깊은 곳이 욱신거리지 않았을까... 제가 선생님이었다면 그런 경험을 했을 거라는 상상이 드는군요."
이야기를 듣고 있으니 쓰라린 기분에 휩싸였다. 하루미가 말해줬던 정경이 뇌리에 떠올랐다. 마치 내 눈으로 그 장면을 본 것처럼.
- 아버지와 딸만큼이나 나이 차이가 나는 부부. 나이 든 남편은 역시 쓸쓸했던 것이다. 에비하라 슌의 사랑을 받았던 야치요는 뛰어난 미의식을 가진 시인에게 공명했지만, 한편으로는 학창 시절에 유행했던 유행가를 흥얼거리는 그 또래의 모습도 가지고 있었다. 에비하라는 그때 결코 좁힐 수 없는 세월의 격차를 뼈저리게 느꼈을지도 모른다.
"나이 든 남자가 젊은 여자와 사귀거나 결혼하면 일부러라도 부러워하는 게 예의라고 생각하는 남자들이 있죠. 시시한 관습입니다. 뭐, 개중에는 진심으로 그리 생각하는 이들도 있겠죠. 하지만 그건 시작부터 슬픔을 내포한 관계입니다. 남녀 평균수명을 따져봤을 때, 여자가 남자보다 7년 정도 오래 살죠. 애초에 남자가 부인보다 먼저 떠날 공산이 크니, 서로 사랑하는 두 남녀가 공유할 수 있는 시간은 평균보다 훨씬 적어집니다."
"당연한 소리를 뭐 하려 하는 겁니까." 자이츠가 토라진 듯 말했다. "그걸 모르는 사람이 있습니까. 알면서도 예의상 말하지 않는 거죠."
히무라는 일단 들어보라는 듯 오른손을 저었다.
- "자기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고 믿는 자들이 수도 없을 테지. 나도 그중의 한 사람이네. 이런 행복한 남자가 어디 있겠나. 한 번뿐인 인생에서 아내와 만났지 않나."
"하지만 사모님은..."
그는 활짝 편 오른손을 가슴에 올렸다.
"여기 있네. 이제야 겨우 믿겨지는군. 바로 여기에 영원히 살아있어."
그런 말로 구원받을 수 있다면 지금까지 괴로워하지도 않았겠지, 세상에 이토록 많은 슬픔이 존재하지도 않을 테지. 그렇게 따지고 싶었다. 그는 미네의 마음을 편하게 해 주려고 미사여구를 늘어놓는 것뿐이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 환상을 보았다.
서재에 장식된 박제된 까마귀.
그가 날개를 펼쳐 아치형 창문을 박차고 밤하늘로 힘차게 날아오르는 환상을.
- [나는 죽을 것이다.]
<죽지 않는 사람>,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 눈을 뜨자 아침이었다.
누워 있던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잠들기 전까지 곁에 있던 후지이 케이스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새벽녘에 뭔가 소리를 들은 것 같으니, 아마 방으로 돌아갔겠지.
- "오늘 밤은 다들 바쁘군요. 에비하라 선생은 혼자 있고 싶은지 일찌감치 방으로 들어갔고, 외톨이가 됐군요. 아리스가와 씨 파트너는 어디 갔습니까?"
어젯밤 한숨도 자지 못한 탓인지 히무라는 다락방에서 숙면을 취하고 있었다. 자다가 사람들에게 끌려가 절벽에서 바다로 던져질 위험이 없다는 걸 확신한 덕에 겨우 눈을 붙이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잠이 오지 않았던 나는 목적도 없이 이곳으로 내려왔다.
- 후지이는 위스키 병을 꺼내 미즈와리 두 잔을 만들었다. 그리고 술을 홀짝이며 독백하듯 말했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는 옛말이 틀린 게 없군요. 눈앞에 나타나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결심한 증오스러운 남자가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졌으니 말입니다. 이런 일은 유성끼리 부딪칠 확률에 가까운 우연이죠."
그 표현은 다소 과장됐다고 생각했지만, 구태여 반박할 마음도 들지 않았다. 기괴한 우연이었던 건 분명했다.
- 잔이 비었다. 우리는 서로의 잔에 술을 채웠다.
- 야치요는 내 가슴에 영원히 살아 있다. 나는 에비하라의 말에 의혹을 나타냈다. 후지이는 불쾌해하는 기색 없이 타이르듯 말했다.
"에비하라 선생 같은 이들은 시간이 모든 걸 해결해 주리라 기대하지도 않고, 종교에 의지하지도 않습니다. 고통을 논리로 극복하려 하죠. 나 역시 그런 부류이고, 내 보기엔 작가 선생이나 히무라 선생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그는 남자와 여자가 만나 서로 사랑하는 그 행위의 생물학적인 의미를 곱씹으며 불행을 행복으로 바꾸려 하고 있습니다. '이 여자가 아니면 안 된다', '이 남자밖에 사랑할 수 없다.' 그건 순간을 살아가는 우리의 숙명이죠. 짚신벌레처럼 세포분열해서 영원토록 자기를 복제할 수 있는 생물은 타자와 만날 기회가 없을 테니, 사랑도 미움도 모른 채 살아가겠죠. 그게 바로 영원입니다. 사랑을 알 수 있는 건 영원에서 분리되어 순간을 살아가는 사람뿐이죠. 순간을 살아가는 슬픔과 괴로움은 순간을 살아가는 행복과 환희를 보장해 줍니다. 그렇게 믿죠. 그런 믿음이 있어도 슬픈 건 마찬가지지만, 그래도 믿는 겁니다. 그는 죽음이 머리맡에 찾아올 때까지 그 노력을 멈추지 않을 겁니다. 끝은 없어요."
- 오늘도 아침 하늘에서 까마귀가 울고 있었다.
- 식후에 정원에서 햇볕을 쬐고 있는데 히무라가 다가왔다.
- 이 중요한 장면에서, 글쟁이 나부랭이가 되어가지고는 이런 소리밖에 못하다니. 늘 그렇지만, ...
- 갑판에 서서 뒤돌아본다.
저 섬은 까마귀 나는 죽음의 섬일까, 바닷가 무덤일까.
- 어느 쪽도 아니었다. 아득히 보이는 섬은 마치 거대한 배 같았다. 영원이라는 바다에 떠 있는 순간이라는 이름의 방주. 그 위로 봄빛이 쏟아져 내렸다.
- 구약성서에 나오는 노아의 방주 이야기에서 까마귀는 어떤 역할을 담당했다. 신에게 선택된 노아와 그의 가족들은 방주를 만들어 모든 동물들을 암수 한 쌍씩 태웠다. 이윽고 50일간에 걸친 대홍수로 타락한 세상은 물밑으로 사라졌다. 대홍수가 끝난 뒤, 노아는 비둘기 한 마리를 날려 보냈다. 비둘기가 월계수 가지를 물고 돌아온 걸 보고 노아는 물이 빠져 육지가 나타났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런데 사실 노아는 비둘기에 앞서 까마귀를 날려 보냈다. 까마귀가 돌아오지 않은 건 육지에 도달하지 못하고 중간에 힘이 빠졌기 때문이겠지만, 태양을 향해 날아갔다는 설도 있다. 영리한 새니까 육지를 발견하자마자 돌아갈 생각은 않고 그대로 눌러앉은 건지도 모른다.
- 그런 까마귀가 사랑스러웠다.
얼굴을 스치는 바람이 사랑스러웠다.
바닥의 얼룩도, 난간을 잡은 내 손도, 손가락, 손톱도, 모두 사랑스러웠다.
나에게 주어진 임무를 생각하면 마음이 무거웠지만, 신기하게도 마음 한구석은 달떠 있었다.
- 다시 돌아본 섬은 흐릿한 윤곽으로만 보였다. 하늘엔 강풍이 부는지 구름이 시시각각 그 모습을 바꾸었다.
순간이 영겁이 되었다. 눈에 비치는 모든 것들이 온전히 시詩가 되었다.
뱃전에 부스러지는 포말 사이로 작은 무지개가 맺혔다.
나는 순간이다.
그걸로 족하다.
- 종장 <아득한 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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