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 이승우
출판 : 민음사
출간 : 2020.05.19
처음 제목을 보고 기대했던 내용과는 달랐다.
하지만 다시금 곱씹어보면 이 책은 '지상에서 펼쳐지는 천상의 노래' 그 자체이기도 했다.
잊혀졌던 수도원의 벽서, '켈스의 서'에 비견될 만한 필사본...
그 고아한 천상의 노래가 지상으로 울려 퍼지면 박중위와 후, 후의 누나의 이야기가 된다.
어느 한 사람만의 개인적인 노래가 아니다. 그 시대, 수많은 이들의 삶들이 함께 노래해 온 합창이다.
우리의 사촌, 이웃, 아는 지인 중 누군가는 이 노래를 부르고 있을 것이다.
그렇게 읽었다.
- 천산 수도원의 벽서(壁書)는 우연한 경로를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그 벽서에 의지가 있다면 결코 그렇게 알려지길 원하지 않았을 거라는 뜻에서 하는 말이지만, 그렇게 알려지는 것이 그 벽서의 운명이었다고 말하지 못할 이유도 없다. 그 수도원의 벽서가 세상에 알려질, 우연하지 않은 다른 경로를 상정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경로든 우연한 경로일 수밖에 없다. 어떤 우연한 경로도 다른 경로보다 더 우연하거나 덜 우연하다고 말할 수 없다. 어떤 우연도 우연히 일어나지는 않는다. 운명을 만드는 것은 누군가의 욕망이다. 그렇다면 그 벽서가 어떤 경로로든 알려지게 되기를 간절히 원했다고 말하지 못할 이유도 없다.
- 경기도 부천에 소재한 한 신학대학에서 교회사를 강의하는 젊은 강사가 천산에서 발견된 벽서를 더블린의 트리니티 대학 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는 한 권의 책과 비교해서 소개했다.
- '켈스의 책(The Book of Kells)'이라고 불리는 그 책은 장식적인 서체로 필사된 라틴어 성경 원고이다. 사치스러울 정도로 화려하고 세밀한 그림이 곁들여져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책으로 알려져 있다. 송아지 피지 위에 다양한 재료에서 추출한 여러 색의 물감으로 직접 복음서를 베껴 썼다. 이 아름답고 섬세한 책을 어떤 사람들이 무슨 이유로 만들었는지는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대체로 이오나의 한 수도원 수도사들에 의해 필사가 시작되었을 거라고 추측한다. 이오나가 바이킹의 침략을 받자 수도사들은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 등지로 흩어졌는데 그때 이 원고가 켈스의 수도원으로 옮겨졌으며, 거기서 다른 수도사에 의해 채색이 더해지고 오늘날과 같은 책으로 완성되었다는 설이 가장 큰 지지를 받고 있다.
- 원고의 필체를 연구한 학자들은 이 원고 작업에 최소한 세 명의 필경사가 참여했을 거라고 추정한다. 책의 이름인 '켈스의 책'은 이 책을 완성하고 바이킹의 잦은 침략에도 무사히 지켜낸 켈스 수도원에서 유래했다. 한때 도난당하기도 했지만 최소한 1654년까지는 켈스에 있었다.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은 완전한 반면 네 번째 복음서인 <요한복음>이 일부밖에 없는 것은 도난당했을 때 훼손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1661년부터는 더블린의 트리니티 대학 도서관에 영구 소장되어 있다. 화려하고 복잡한 기교의 알파벳들, 섬세하고 신비스러운 그림들과 상징적인 도안들, 그리고 정교하고 우아한 장정으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책이라는 영예를 안은 이 책은 현재 두 권이 일반인에게 공개되고 있다.
- 교회사를 전공한 젊은 강사는 한국의 한 외진 산속 건물 벽에 필사된 성경이 켈스의 책에 비견할 만하다는 의견을 내비쳤다. 비록 책의 형태를 갖추진 않았지만 제작환경과 표현 방법, 제작자의 신분, 그리고 제작 동기 등에서 흥미로운 유사점을 찾을 수 있다는 분석이었다. 먼저 몇 가지 상이한 요소가 비교 대상으로 언급되었다. <켈스의 책>은 송아지 피지에 기록되었고 천산 수도원 지하실의 벽서는 흙벽에 기록되었다. 켈스의 책은 최소한 세 사람 이상의 필경사가 쓴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천산의 벽서는, 앞으로 보다 세밀하고 심도 있는 분석과 연구가 필요하지만, 한 사람이 쓴 것으로 추정된다. 켈스의 책은 복음서 네 권만을 대상으로 삼았지만 천산의 벽서는 구약성서와 신약성서 예순여섯 권 전체를 포함하고 있다. 장식적인 면은 몰라도 규모 면에서는 천산에서 발견된 것이 월등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상이점들은 이 젊은 교회사 강사의 마음을 크게 사로잡지 못했다.
- 그는 자기 글의 대부분을 이 두 개의 자료를 탄생시킨 동력을 유추하는 데 할애했다. 기본적으로 그는 두 자료가 동일하게 고립된 공간에서 특정한 신앙 공동체의 일원에 의해 공들여 필사된 경전이라는 사실에 주목했다. 내용은 경전이고, 방법은 필사이며, 필사가 이루어진 공간은 고립된 수도원이다. 경전의 필사는 신앙 고백의 순수한 표현이면서 고백된 신앙을 실천하는 구체적인 방법이기도 하다. 세속으로부터 자신들을 분리시킨 은둔자들이 영혼을 정화하고 수행을 하기 위해 경전을 베껴 쓴 예는 흔하다. 사해 근처의 쿰란 동굴에서 발견된 <사해사본>이 대표적이다. 사해사본의 필사자들은 엄격한 규율에 따라 금욕적인 생활을 하며 곧 도래할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렸다. 성경을 옮겨 쓰는 것이 그들의 기다림의 방법이었다. 둔황의 천불동에서는 2만 점이 넘는 엄청난 분량의 불교 경전이 쏟아져 나왔다. 대부분 손으로 직접 쓴 것들이었다. 소중한 자료들을 남기고 전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필사의 유일한 동기라고 할 수 있을까. 필사를 해서 얻은 가치 있는 결과물보다 중요하고 의미 있는 것은 그들의 필사 행위 자체이다. 그들의 필사 행위는 가치 있는 결과물들 때문에, 가치 있는 결과물들을 얻어 낸 행위이기 때문에 의미 있는 것이 아니라 그 행위 자체가 가치 있는 어떤 결과물보다 가치 있기 때문에 의미 있는 것이다. 켈스와 천산의 필사자들 역시 다르지 않을 것이다.
- 그런데 켈스와 천산의 필사자들은 왜 글자에 장식을 하고 그림을 그리고 색깔을 입혔을까. 그 역시 신앙의 표현이고 수행의 방법이라는 데 이의가 있을 수 없다. 제단을 장식하고 노래를 부르는 행위가 숭배의 대상에 대한 경배의 방법이라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 성당의 벽화나 천장화나 제단화가 그런 것처럼 켈스의 책이나 천산 수도원의 벽서에 사용된 화려한 장식과 신비스러운 그림들 역시 초월자를 경배하는 한 방법이고 믿음을 고백하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그것이 전부라고 서둘러 결론을 내리고 물러나는 것은 의도적인 단순화이거나 파렴치한 왜곡이기 쉽다고 교회사 강사는 썼다. 성당의 벽화나 천장화들이 초월자에 대한 숭배와 신심을 북돋우는 기능만 한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 그 앞에서 북돋아지는 것은 신심만이 아니라 미적 감각이기도 하다고, 때로는 미적 감각이 신심에 앞서기도 한다고 그는 이어서 썼다. 그 앞에 섰을 때 고양되는 것이 초월을 지향하는 영혼만이 아니라 아름다움을 느끼는 감각이기도 하다면, 그것을 제작한 사람의 동기나 의중에 그런 것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거나 꾸미는 사람의 마음속에 아름다움에 대한 동기가 없다고 말할 이유가 없다. 그런 동기가 섞여 있다고 해서 순수하지 않다거나 불경하다고 말할 이유도 없다. 그런 걸 가지고 있었다고 해서 신심이 훼손되는 것이 아니다. 아름다움에 대한 추구는 거룩함에 흠집을 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거룩함에 후광을 만든다. 실은 거룩함에 후광을 더하기 위해 아름다움이 필요하다. 거룩한 것들은 아름다움 때문에 더욱 거룩해진다.
- 교회사 강사는 성스러움 속에 깃들어 있는 아름다움, 신에 대한 믿음의 표현 속에 깃들어 있는 인간의 예술적 욕구를 꿰뚫어 봤다. 수도사들이 세상으로부터 고립된 공간에서 성경을 필사할 때 그들을 충동한 것은 믿음만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아름다움에 대한 욕망은 믿음만큼 중요한 동력이었을 것이다. 사람은 숭배하면서 동시에 즐길 수 있다. 대개는 믿음을 드러내고, 더 잘 드러내기 위해 미적 감각을 활용한다는 것이 일반적인 인식이지만 모든 경우에 항상 그런 것은 아니다. 거꾸로 아름다움을 드러내고, 더 잘 드러내기 위해 믿음을 활용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아름다움을 드러내기 위해 믿음만큼 좋은 소재가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믿음을 드러내기 위해 아름다움만큼 좋은 도구가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드러내려고 한 것만 드러나는 것이 아니다. 믿음을 드러내기 위해 미적 감각을 활용한 작업이 믿음만 아니라 미적 감각 또한 고양하는 것처럼 아름다움을 드러내기 위해 믿음을 활용한 작업이 아름다움만 아니라 믿음 또한 고양하는 일도 가능하다. 의도했던 것보다 의도하지 않았던 것이 더 도드라지는 일도 일어난다. 결과는 동기에 의존하지만 그러나 동기는 결과를 제어하지 못한다.
- 엄격하게 말하면 사실 그것들은 작업자의 내면에 서로 엉켜 있어서 따로 구분하는 것이 불가능하고, 따라서 구분하는 것이 무의미한 경우가 더 많다. 작업자 자신도 내면에 있는 동기를 올바로 이해하지 못할 수 있다. 믿음을 전면에 내세우는 사람의 진짜 욕망이 아름다움일 수도 있고 아름다움을 전면에 내세우는 사람의 진짜 동기가 믿음일 수도 있다. 의도적으로 진짜 욕망을 감추고 다른 것을 앞세우는 경우도 있겠지만, 그 자신 스스로 속는 경우가 더 많다. 예컨대 무슨 이유로든 자신의 진짜 욕망이나 동기를 전면에 드러내는 것이 허용되지 않거나 그렇게 하면 불리하다고 판단되어서 은폐하려고 할 때, 자기가 정말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자신도 알지 못하게 하려는 힘이 작동할 수 있다. 그는 기꺼이 모르는 편을 택하고 교묘하게 무지한 자가 된다. 내용의 정확하고 올바른 전달이 핵심인 성경을 필사하면서 내용의 정확하고 올바른 전달을 방해할 수 있는 화려하고 복잡한 장식을 문자에 덧입히는 사람의 심리를 젊은 강사는 그렇게 읽어냈다. 초월자에 대한 믿음과 아름다움에 대한 추구는 둘 모두 근본적이고 본능에 가까운 욕망이라는 것. 사람은 숭배하면서 동시에 즐길 수 있다는 것. 숭배를 위해 즐기고 즐기기 위해 숭배할 수 있다는 것. 켈스의 책과 천산의 벽서를 탄생시킨 것은 믿음만도 아니고 아름다움만도 아니라는 것.
- 그러나 그는 그 믿음과 아름다움이 왜 그렇게 표현되어야 했는지 설명하지 못했다. 어떤 믿음이 그곳에서 그런 걸 만들게 했는지, 어떤 아름다움이 그런 걸 요구했는지 숙고하지는 않았다.
- 좌석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그는 앞에서 네 번째 오른편 복도 쪽 좌석에 앉았고, 별생각 없이 고개를 돌려 옆에 앉은 여자를 보았고, 순간 이런 시골에서 이런 여자를 보다니 하고 놀랐고, 자기의 놀람을 확인하기 위해 몇 번 더 훔쳐보았고, 그러다가 기회를 보아 말을 붙였다. 다른 빈자리를 놔두고 굳이 그 자리를 택한 데에 무슨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다른 자리에 앉을 수도 있고, 그 자리에 앉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가 그 자리에 앉을 확률은 다른 자리에 앉을 확률과 같았고 그가 그 자리에 앉지 않을 확률 역시 다른 자리에 앉지 않을 확률과 같았다. 그러니까 그것은 선택이라고 할 수도 없다. 그는 미리 결정한 것이 없었고 어떤 의도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미리 결정한 것이 없고 의도가 없었다고 해서 아무것도 작용하지 않았다고 할 수는 없다.
- 프로이트주의자라면 우연한 부딪침이나 막연한 행동 속에서 우연하지 않고 막연하지 않은 동기를 찾아낼 것이다. 우연하지 않고 막연하지도 않은 동기를 숨기기 위해 우연과 막연을 전면에 내세운다고 할지도 모른다. 이를테면 우리는 보기 싫은 물건은 '우연히' 손이 닿지 않는 깊숙한 곳에 숨기고, 만나기 싫은 사람과의 약속은 '우연히' 잊어버린다. 박 중위를 그 자리에 앉게 한 것은 왼쪽 창가에 앉은 사람이 그의 마음속에 불러일으킨, 그 자신이 아직 의식하지 못하거나 의식하지 못한 척하는 어떤 정서, 추억이거나 기대 혹은 욕망일 수 있다. 왼쪽에 앉은 사람에게서 감지한 어떤 요소가 그의 과거나 미래와 연결된 어떤 줄을 흔들었고 그는 그 줄에 걸려 넘어졌다는 식이다.
- 왼쪽 창가에 앉은 사람의 어떤 요소? 박 중위는 나중에 그것이 그녀의 얼굴을 가린 긴 생머리였다는 것을 인정했다. 긴 생머리의 여자는 그가 사랑했던, 그러나 사랑을 얻어 내지는 못한 과거의 여자였다. 그는 고등학생일 때 자기보다 여섯 살이나 많은 주일학교 여선생에게 마음을 빼앗겼다. 그는 대범하게 자기 마음을 고백했지만 그 여선생은 헛웃음을 지으며 머리를 쥐어박는 것으로 그의 사랑을 간단히 무시했다. 그리고 곧 결혼을 해서 그의 곁을 떠났다. 그러나 그는 그녀를 마음속에서 떠나보내지 못했다. 그의 뇌리에 박힌 그녀의 가장 강렬한 인상이 긴 생머리였다. 그때 이후 긴 생머리는 여성에 대한 그의 환상 가운데 거의 유일한 것이 되었다.
- 그러나 그 버스에서 그가 관심 있는 척한 것은 그녀가 읽고 있는 책이었다. 그는 긴 생머리가 아니라 그녀가 읽고 있는 책에 관심 있는 척함으로써 그녀가 아니라 사실은 자신을 속였다. 그 책을 쓴 사람이 실제로 비행사였다는 거 알아요? 하고 말을 붙일 때 그는 자신이 그 책을 좋아한다고 착각했다. 그것이 착각인 이유는 그가 그 책을 읽은 적이 없기 때문이다. 책과 그 책의 저자에 대한 몇 가지 정보는 알고 있었지만 책을 직접 읽은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그는 그 말을 하면서 자기가 그 책을 읽었을 뿐 아니라 좋아하기까지 한다고 착각하게 만들었다. 그가 속인 대상은 그 자신이었다. 그러니까 그는 속이는 자신에게 속았다. 그는 속아야 했으므로 속였다. 필요가 착각을 유도해 냈다.
- 그는 그녀가 마음속에 불러일으킨 동요, 아직은 실체가 분명하지 않은 달콤한 설렘 속으로 뛰어들기 위해 그 책을 좋아해야 했고, 그렇게 했다. 그는 속았으므로 자기가 아주 자연스럽게 말을 붙이는 데 성공했다고 생각했다. 그는 착각했으므로 책에 관심이 있는 것처럼 말을 붙이는 자신의 모습이 아주 부자연스럽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러나 속을 일도 착각할 일도 없었으므로 남자의 행동에서 부자연스러움을 느낀 그녀는 잠깐 얼굴을 돌려 그를 보고는 곧 읽던 책으로 시선을 옮겨 버렸다. 그 짧은 순간 그는 긴 머리카락의 휘장을 들추고 잠깐 나타났다가 금세 사라진 그녀의 길고 우울한 얼굴에 매료되었다. 얼굴은 곧바로 사라졌는데도 그는 계속 그 얼굴을 눈앞에서 보고 있었다.
- 그리고 다시, 이번에는 좀 더 노골적인 착각이 이루어졌다. 그는 그녀의 얼굴에서 예전 주일학교 여선생을 보았다고 느꼈다. 그녀가 주일학교 여선생을 정말로 닮았는가, 얼마나 닮았는가는 문제의 핵심이 아니다. 많이 닮았을 수도 있고 조금 닮았을 수도 있고 전혀 닮지 않았을 수도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새로 만난 사람이 과거의 누군가와 닮아서 그 사람을 떠올리고 그 사람에게 향하게 한 것이 아니라 새로 만난 사람에게 다가가기 위해 과거의 누군가가 불러내졌다는 것이다. 이 길은 새로 만난 사람을 통해 과거의 누군가에게 가는 길이 아니라 과거의 누군가를 통해, 그를 이용해서 새로 만난 사람에게 가는 길이다. 과거의 누군가에게 가기 위해서는 새로 만난 여자가 과거의 그 사람과 실제로 닮아야 하지만, 새로 만난 사람에게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녀가 과거의 누군가와 닮아야 할 필요는 없다. 과거의 누군가와 닮았다는 발견 혹은 암시만으로 충분하다.
- 모든 새로운 연인은 언제나 기억 속의 간절한 '그 사람'을 닮는다, 는 것이 아니라 닮았다고 인식된다. 그 인식이 새로운 만남에 의미를 부여하고 적극적인 행동을 유도하는 발판이 된다. '그 사람'과 닮았으므로 이제 사랑해도 된다. 그것을 위해 기억 속의 '그 사람'은 기억 속에서 빠져나와 새로운 사람과 닮은꼴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 과정이 그렇게 억지스럽고 부자연스러운 것은 아니다. 큰 눈이 어떻게 작은 눈과 같고, 가는 허리가 어떻게 두꺼운 허리와 닮은 꼴일 수 있으며, 까무잡잡한 피부가 어떻게 흰 피부를 연상시킬 수 있느냐고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다. 닮은 꼴을 발견한 사람에게 발견되는 그것은 모양이나 색의 근사가 아니다. 그를 사로잡은, 구체적으로 실체가 느껴지지만 눈에는 보이지 않는,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그 실체를 부정할 수는 없는, 그 사람 주변의 어떤 기운의 근사이다. 그 기운은 상대에게서 나온 것일 수도 있고 자기에게서 나온 것일 수도 있다. 더러 자기에게서 나온 것을 상대에게서 나온 것으로 오해하기도 한다.
- 사랑에 빠질 때 우리를 감싸는 것은 언제나 설명할 수 없고, 그렇다고 부정할 수도 없는 그런 기운이다. 그 기운의 유사가 모양이나 색깔의 같음이나 다름에 우선한다. 아니, 그것들을 초월해서, 모양과 색깔의 같음이나 다름과 상관없이 기시감을 불러낸다. 사랑에 빠졌을 때 분비되는 세로토닌이라는 호르몬이 상대의 결점을 인식하지 못하게 한다는 보고가 있다. 마약중독자와 사랑에 빠진 사람의 뇌 활동이 놀라울 정도로 유사하다는 보고도 있다. 사랑을 하면 눈이 멀게 된다는 말은 정확하게 맞는 말이 아니지만 아주 틀린 말도 아니다. 사랑에 빠진 사람의 시력 문제는 보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너무 잘 보는 것,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것, 더 분명하게는 보고 싶지 않은 것은 보지 않고 보고 싶은 것은 확대해서 보는 데 있다. 그러니까 만난 지 얼마 안 된 남자가 당신은 내 첫사랑을 닮았어요, 하고 고백할 때, 그 사람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사랑에 빠졌다.
- 아는 것 같았다고 할까. 아니, 이미 안다는 걸 모르는 것 같았다. 그가 모르는 것은 그 이야기가 아니라 그 이야기를 이미 안다는 사실인 것 같았다. 그리고 그는 그 사실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 그에게 '말씀'을 전해 주던 형제는 후의 말을 듣고 빙그레 웃었다.
"그것은 성경이 큰 거울이기 때문이다. 성경이 비추지 못하는 것, 비출 수 없는 것은 없다. 성경은 크고 환하고 깊다. 세상은 거울인 성경보다 크지 않고, 기억은 거울인 성경보다 환하지 않다. 사람의 마음은 성경인 거울보다 깊지 않다. 성경은 형제의 모든 것을 비춰 낸다. 형제가 한 일과 하려고 한 일, 한 생각과 하려고 한 생각을 비추고, 드러낸 것과 감춘 것을 비추고, 드러낸 것 속에 드러내지 않은 것과 감춘 것 속에 감추지 않은 것, 드러내려고 감춘 것과 감추려고 드러낸 것을 비춘다. 그 앞에서는 아무것도 감출 수가 없다. 하늘로 올라가도 피하지 못하고 마음속 깊은 곳으로 내려가도 달아날 수 없다. 성경은 크고 환하고 깊은 거울로 우리가 무엇을 했고 무엇을 하지 않았는지, 무엇을 해야 했고 무엇을 하지 않았어야 했는지, 무엇을 하려고 무엇을 했는지, 혹은 하지 않았는지, 무엇을 하지 않으려고 무엇을 했는지, 혹은 하지 않았는지 알게 한다. 거울을 들여다볼수록 형제는 거울이 아니라 형제를 더 잘 알게 될 것이다."
- 그것은 그들의 일원이 되기 위해 치러야 하는 의식과 같은 것이었다. 그는 그곳에서 살아야 했고, 따라서 그 의식을 치러야 했다.
- 후는 차츰 그 의식에 적응되어 갔다. 밤의 어둠과 모든 것이 사라진 듯한 적막과 무덤덤한 벽에 대해서도 익숙해졌다. 성경을 읽고 쓰는 일도 몸에 익었다. 말하자면 점차 하늘집의 형제가 될 자격을 얻어 가는 중이었다.
- 양심의 고발을 받고는 다시 하룻밤을 새웠다. 후는 여태 자기 손에 묻은 피 때문에 괴로워했다. 그러나 칼을 쥐고 휘두르고 찌른 행동이 문제가 아니었다. 그 행동의 안쪽에 도사린 맨얼굴을 대하고 그는 당황했다.
- 그는 오랫동안 다말과 압살롬에 대해 생각했다. 압살롬은 왕자였고, 이스라엘에서 가장 아름다운 용모를 지닌 젊은이였다. 그에 관한 최초의 언급이 다말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여동생을 범한 이복형을, 2년 동안 기회를 엿보다가 마침내 죽인다. 그리고 자기가 낳은 딸에게 다말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다말과 관련된 에피소드는 더 이상 나오지 않는다. 다말이 어떻게 되었는지 성경이 말하지 않으므로 우리도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압살롬의 삶이 이 일로 인해 완전히 달라졌다는 걸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압살롬은 아버지인 왕에게 반역하고 한때 성을 차지하기도 했지만 결국 전쟁터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는데, 그 모든 일들이 다말을 위한 복수 후에, 그 일의 결과로 일어났다. 왕권을 이을 장자인 암논을 처치한 이상 압살롬의 선택은 외길이었을 것이다.(왕권에 대한 그의 욕심이 여동생에 대한 복수심을 이용했을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기록은 그 부분에 대해 선명하게 말하지 않는다.)
- 부지중에 살인을 저지른 사람은 희생자 가족의 보복을 피해 가장 가까운 도피성으로 몸을 피할 수 있었다. 대제사장이 죽으면 그곳에서 나가야 한다는 규정이 있었지만 대개 그곳에서 남은 생을 살았다. 후는, 특별한 일이 없는 한 그곳에서 남은 생을 살 수 있었다. 적극적으로 그러겠다고 작정한 것은 아니지만, 적극적으로 그러지 않겠다고 작정하지도 않았다. 별다른 조치가 없다면 그렇게 될 것이고, 막연하지만 그렇게 되어도 나쁠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후가 그곳을 떠난 것이 자의가 아니었다는 것은 명백하다. 그리고 도피성을 벗어남으로써 더 이상 보호받을 수 없어졌다는 것도 명백하다. 요컨대 더 이상 압살롬을 자기 안에 가두고 목소리만 내게 하는 것이 불가능해진 것이다.
- 한 선생님이라고 불린 사람이 누구인지 알 만한 사람은 안다. 그러나 알 만한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다. 알 만하다는 것은 관계의 정도를 나타내기보다 관계에 대한 의지를 나타내는 경우가 더 많다. 조금만 생각을 집중하면 누구인지 알 수 있는 사람이지만 사람들은, 젊은 시절의 장이 그랬던 것처럼, 그가 누구인지 알아내려고 생각을 집중하지 않는다. 알게 되었을 때 따라올 의무에 대한 부담감, 알게 된 다음에 맞이할 처신의 곤란함에 대한 우려가 집중을 막는다. 때때로 우리는 의무에 대한 부담감이 부담스러워 자연스럽게 알 수 있는 것을 부자연스럽게 모르려 한다. 그가 누구인지 아는 것이 그가 누구인지 모르는 것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라고 이유를 대는 사람이 있지만 정말로 그런지는 의문이다.
- 하지만 만일 그 자신이 알아주기를 원치 않는다면 이야기는 조금 달라진다. 때때로 우리는 의도하지 않은 채로 누군가의 원을 들어준다. 심지어 죄책감을 느끼며 행한 떳떳하지 않은 어떤 행동, 겉으로 알려지지 않았으면 하고 바라는 은밀한 어떤 행동이 그 누군가가 진심으로 간절히 원한 것일 때도 있다.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혹은 우리의 의지에 반하여 우연히 이루어진 누군가의 만족 때문에 의기양양해선 안 된다. 그것은 우리의 업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결과를 위해 의지를 쓰지 않았거나 의지를 반대로 썼다는 죄책감에서 자기 자신을 풀어 준다고 나무랄 일도 아니다.
- 사람들이 그를 기억하지 않는 것이 그를 위해서가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가 원한 것이 그것이었다면? 세상의 기억에서 자기를 없애는 것이었다면? 자기의 기억에서 세상이 사라지지 않아 괴로워했다면? 사람들은 그를 위해서 하지 않았지만 결과적으로 그가 원하는 것을 했다. 이것을 그의 간절한 염원이 만들어 낸 결과라고 말할 때 우리는 신비주의자가 된다. 신비주의자가 되지 않고는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이 우리를 신비주의자로 만든다. 누군가를 위해서 하지 않은 어떤 일이 누군가가 정말로 원한 일이거나 누군가를 위해서 한 어떤 일이 누군가가 원하지 않은 일인 경우는 뜻밖에 많다. 원한 대로 되는 일보다 원한 대로 되지 않는 일이 더 많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되어진 일은, 그것이 무엇이든, 어쨌든 누군가 원한 것이다. 행한 사람이 원하지 않았다고 해도 누군가 원한 사람이 있다면, 그 일은 원한 대로 된 것이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작용하는 변수는 실로 다양해서 다 헤아리기 어렵다. 우주는 헝클어진 채로 정연하다. 당연히 그는 우리에게 고마워해야 할 이유가 없다. 우리는? 우리가 그에게 생색을 내는 것은 뻔뻔한 일이지만 죄책감을 털어 버리는 정도는 용납될 수 있지 않을까.
- 세상의 기억에서 자기를 없애는 것이 소원이었던 그 사람의 이름은 한정효다. 그의 소원이 이루어진 것은 다른 누구의 공로도 아니고 바로 그 자신이 간절히 원했기 때문이라고 말하며 그의 공로를 치켜세울 때 신비주의는 교조주의가 될 위험이 있다. 그를 교조주의자로 만들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그의 소원이 이루어지는 데 기여한 것이 세상의 무의식적 의지와 이기심이라는 사실을 밝혀 두는 것이 좋겠다. 어떤 일도 누군가의 적극적인 의지나 의식적인 동의만으로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우리는 우리의 적극적 의지나 의식적 동의와 상관없이 누군가를 돕고 누군가를 방해한다. 예컨대 그는 세상이 자기를 기억하지 않기를 바랐다. 그것은 그가 자기 기억을 없애고 싶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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