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 EBS 가족 쇼크 제작팀
출판 : 윌북
출간 : 2015.11.25
별다른 걸 하지 않고 '노는' 시간을 보내기 위해 노력 중이다.
노는 건 그냥 놀면 되는 거 아닌가 싶을 수 있지만, '놀다'도 엄연한 동사다. 의지와 활동이 뒷받침되어야 하는 능동적 상태란 말이다. 다시 말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존재하기'와는 다른 활동이라는 것.
내가 가장 즐거워하는 활동, 해보고 싶었던 활동 위주로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노는 일상을 보내고 있다. 어차피 때가 되면 다시 머리를 싸매야 하는데, 쉴 수 있을 때 쉬어두고 놀 수 있을 때 놀아둬야 한다.
라는 마음으로 만화카페로 직행, <도쿄구울 :re>, <지옥락>, <장미왕의 장례 행렬> 등을 탐독했다.
<도쿄구울 :re>는 <도쿄구울> 때의 충격적 감성은 없었지만 성장형 캐릭터의 고뇌와 휴머니즘을 잘 섞어냈다고 생각한다. 리제의 활용에 대해서는 다른 방식들도 있지 않았을까 싶지만- 뭐. 모체가 구울인 경우가 훨씬 힘들었겠구나 하는 깨달음도 남았다.
<지옥락>은 꽤 마음에 들었다. 화려한 그림체와 담백하고 깔끔한 진행, 그런 게 가장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캐릭터들의 낙관에 대한 의지가 감동적이었다. 타오라는 도교의 태극 사상과 오행을 섞은 설정도 흥미로웠고. 다만 최종장은 조금 아쉬움이 남는다. 처음부터 끝까지 '부부애 만만세'라서 통일감은 있었다만... 주무대로 설정한 신선향이 워낙 화려하고 기괴한 풍경이라, 애니메이션으로 본다면 어떨까 싶은 작품이었다. TV 세팅이 끝나면 정주행 할 생각이다.
<장미왕의 장례 행렬>은 잉글랜드의 '장미전쟁'을 주무대로 하는 리처드 3세의 이야기다. 셰익스피어의 희곡을 기본 설정으로 삼았다고 하지만 은근히 고증에 충실한 부분도 있고, 작화가 무척 아름다워서 보는 눈이 즐거웠다. 흰 장미 요크가와 붉은 장미 랭커스터가의 다툼과 리처드 3세의 짧은 즉위, 이후 한 시대를 풍미할 새로운 왕가 '튜더'의 등장으로 마무리된다. 주요 사건과 결말이 역사적으로 스포가 되어 있지만, 그럼에도 매력적인 캐릭터와 현실을 살짝 비튼 각색이 아주 매력적인 작품이었다. 일본에서는 외전이나 회지가 발간되는 모양인데, 언젠가 정발 된다면 더 읽어보고 싶은 작품이다. 애니메이션이 있다는 건 확인했지만 개인적으로는 원작 작화가 훨씬 마음에 든다. 굳이 찾아서 보지는 않을 것 같다.
영국의 역사를 일본에서 각색한 작품으로 읽는 한국의 독자,라는 상황이 묘하게 느껴졌다. 타국의 역사와 인물들에 관심을 가지고 조사하려면 충분히 할 수 있는 시대라는 점에 감사하고, 다양한 작품을 접할 수 있는 시대라는 점에도 감사한다.
(2012년 리처드 3세의 유골이 발굴되어 역사가들의 상상력에 불을 지폈는데, 작가는 아마 거기에서 양성구유의 영감을 받은 게 아닌가 하는 평도 있었다. 아버지 요크의 리처드 캐릭터 디자인이 멋지다... 버킹엄 공작도... 헨리 6세는 너무 미화된 게 아닌가 싶지만.)
라는 이야기가 왜 <가족쇼크>인가?라는 본질적인 질문으로 돌아가보자.
왜냐하면!
딱히 할 이야기가 별로 없기 때문이다.
단란한 핵가족에 대한 환상은 미국의 '아메리칸 드림'에서 출발했다는 건 대다수의 사람들이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다.
이전까지의 대가족이나 마을 중심의 단체 생활의 장단점은 동서양 양측 모두 이미 충분히 기록되어 있다. 보다 자유롭고 수평적인 관계인 남태평양 쪽 사회와 수직적이고 위계중심적인 아시아권의 사회, 종교를 중심으로 단체를 위해 개인을 억압했던 중세 유럽 사회 등등.
가족이란 시대와 사회에 따라 그 정의를 달리해왔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저질러지는 폭력에 대한 '인식'. 새로운 구성단위로 인한 '혼란'. 이런 중도기적 현실에서 '가족'이란 혈연보다는 관계 중심이며, 그런 점에서 늘어가는 1인 가구와 고독사 같은 사회적 문제는 새로운 '가족'의 정의를 통해 해결될 수 있지 않겠느냐는 질문.
근미래에 우리는 인공태를 이용해 번식과 양육을 공공재화 할지도 모르겠다는 상상을 해본다.
아. 그러면 <불새 2772 : 사랑의 코스모스존>이 되는 건가.
끝.
- '가족'이라는 말과 함께 떠오르는 당신 안의 단어들은 어떤 것인가? 따뜻함이나 그리움처럼 긍정적인 것들도 있겠지만 상처나 폭력 같은 부정적인 단어도 있을 것이다. 가족에는 세상 어떤 곳보다 안전한 보호처이자 마지막 피난처라는 이미지와 함께 타인이 침범할 수 없는 고립되고 소외된 곳이라는 이미지가 공존한다. 후자의 이미지가 먼저 떠올랐다고 해서 죄책감을 가질 필요는 없다. 본래 가족은 그렇게 생겼다.
가족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수많은 사건과 사고들, 이전과 달라진 다양한 가족의 형태는 모두 그 양면성에서 나온다.
현상만
- 사람들은 달라진 가족의 모습을 보며 가족이 붕괴하고 있다느니, 해체되고 있다느니 하는 우려 섞인 진단을 한다. 하지만 가족은 사회적 산물이기에 사회가 변화하면 당연히 달라진다. 시대의 변화와 무관한 불변의 절대적 개념이 아니다.
- 가족은 인류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제도다. 그동안 그 형태나 범위에서 수많은 변화를 겪어왔다. 우리가 가족의 일반적인 모습으로 떠올리는 부모와 미혼의 자녀로 이루어진 가정은 산업화와 도시화의 결과로 1980년대에야 비로소 나타난 형태다. 1980년 한국 사람의 절반은 5인 이상으로 구성되어 있는 가구의 구성원이었다. 자녀가 없는 2인 가구는 5인 이상 가구의 5분의 1 정도, 혼자 사는 1인 가구는 전체 가구의 4.8퍼센트에 불과했다. 그러나 급격한 노령화, 저출산과 도시화, 국제화는 오늘날의 가족 형태를 극단적일 만큼 빠른 속도로 변화시켰다. 1인 가구의 급격한 증가가 대표적이다. 30년 후에는 1인 가구가 가족의 일반적인 형태가 될 만큼 많아질 것이라는 예측도 있다. 대부분 미혼남녀일 것이라 생각하는 1인 가족에는 의외로 홀로 사는 노인들의 비중이 크다. 고독사가 가족 문제의 하나로 거론되는 이유다. 노령화 사회의 그늘인 셈이다.
- 가족 안팎의 변화로 끊임없이 흔들리면서도 가족이 사라지지 않는 이유는 그것의 본원적 역할이 인간에게 꼭 필요하기 때문이다. 심리적으로는 친밀감과 소속감의 근원으로, 기능적으로는 다수를 차지하게 될 1인 가족의 잠재적 문제들을 보완해 줄 열쇠가 '혈연'이 아니라 '관계'임을 확인시킨다.
- 4부에서는 이주 노동자 가족과 공동체의 가치를 유지하는 모계 사회의 모습을 살펴본다. 1960~80년대 우리나라 가장들의 모습과 겹쳐 보이는 이주 노동자의 삶은, 이주 노동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이들의 뒤에 지켜야 할 가족이 있다는 사실을 담담하게 알려준다. 가족을 위해 희생을 감내하는 이주 노동자 가장과 그 가족들이 존중받고 보호받을 수 있는 법적 장치와 사회적 인식이 왜 중요한지 공감할 수 있는 이유는, 우리가 이들의 삶을 이미 겪어보았기 때문이다. 또한 여전히 모계 전통의 공동체 문화를 유지하는 남태평양의 원시 섬 키리위나의 삶은 가족이 맡고 있는 사회적 역할 가운데 공동체가 분담해야 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 우리나라는 사회가 분담해야 할 짐을 개인과 가족에게 과도하게 지우고 있다. 다음 세대의 양육과 교육, 이전 세대의 노후에 대한 책임, 사회적 약자의 돌봄 등은 개인과 사회가 함께 해결해야 할 문제임에도 전적으로 가족에게 책임 지움으로써 가족 피로가 한계에 다다라 있는 상태다. 공동으로 생산하고 공동으로 소유하는 키리위나의 모습은 우리 사회의 분배 문제, 육아와 교육의 연대책임, 사회적 약자를 함께 돌보는 복지 시스템을 다시금 점검하게 한다.
- 세상은 계속해서 변하고 그에 따라 가족의 개념이나 형태도 변한다. 그럴수록 변화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하지 않는 가치에 주목해야 한다. 그것은 '가족의 가치’다. 이 책을 통해 지금 이 시대의 가족의 가치와 의미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이 되길 바란다. 그리고 과연 지금 자신이 가족 안에서 행복한지 자문해 보길 바란다. 만약 불행하다면 이 책이 그 이유를 찾는 작은 실마리가 되어줄 것이다.
- 뭐가 잘못되었는지 모르겠다. 아이가 중학생이 된 후부터 여태까지 알던 내 아이가 아닌 것 같다. 집에 들어오면 입도 닫고, 제 방문도 닫는다. 말이라도 건넬라치면 얼굴에 짜증이 먼저 마중 나온다. 어릴 때는 그렇게 순했는데... 억울하고 속상하다. 아이가 태어난 후 10년 넘게 좋은 부모가 되기 위해 남편과 함께 얼마나 노력했나. 아이를 낳기 전부터 온갖 태교법과 육아서를 독파했다. 갓난아기 때는 마음대로 나다닐 수 없어 인터넷 육아 커뮤니티에서 좋다는 정보를 모두 모았다. 아이가 학교에 들어가기 전까지 안 해본 것이 없었다. 그렇게만 하면 똑똑하고 너그러우면서도 예술적 감성이 살아 있는 아이로 자랄 거라고 생각했다. 모든 책과 부지런히 챙겨본 TV 부모 교육 프로그램도 그럴 것이라고 했다. 남편도 적극적으로 도왔다.
- 고학년이 되고 학원 개수가 하나둘 늘면서 아이의 짜증도 함께 늘었다. 초등 4학년 성적이 평생을 좌우한다는데, 손 놓고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그래도 초등학교 때까지는 괜찮았다. 아이도 제법 잘 따라와 주었다. 하지만 점수와 등수가 고스란히 나오는 중학교 첫 성적표를 받았을 때의 충격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고등학교에 가면 더 어려워질 텐데, 그 성적 가지고는 대학 근처에도 가지 못할 것 같았다. 대학을 나와도 어렵다는 취업은 과연 할 수 있을까, 비정규직으로 살면 결혼이나 할 수 있을까. 그래도 조금 더 살아본 부모 이야기를 잘 들으면 좀 낫지 않을까 싶은데 요즘은 통제 불가능이다.
- 좋은 부모가 되면 좋은 아이들이 되고, 이 모두가 모여 행복한 가족이 될 줄 알았는데, 도대체 뭐가 문제일까?
- 아이가 태어나면 부모들 몸속에 자동 버튼이라도 눌린 것처럼 모성애와 부성애가 샘솟아 저절로 자애로운 부모가 되리라는 터무니없는 믿음은 깨진지 오래다. 부모가 되는 데도 자격과 교육이 필요하다는 계몽 운동이 사회 전반에서 이루어진 지도 벌써 10년. 서점마다 부모 교육서가 넘치고 각종 TV 프로그램이 학부모들을 불러 모은다. 아이와 함께 서점을 찾은 부모들은 부모 교육서 코너에서 저마다의 고민에 맞는 책을 뒤적인다. 영아에게 좋은 수면 습관을 들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떼를 부리는 아이를 어떻게 훈육해야 하는지, 초등학교에 들어간 아이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좋은 대학에 들어간 아이들의 학습법은 어떤 것인지, 부모의 양육태도 전반을 이야기하는 책부터 아이 상황에 꼭 맞는 맞춤 육아법까지 종류도 다양하다.
- 해외에서 주목을 받고 있다는 새로운 트렌드의 육아법도 순식간에 번진다. 유대인 육아법이나 프랑스식. 스칸디나비아식 교육까지, 좋다는 육아 및 교육 방법은 점점 더 늘어난다. 아이를 낳은 것만으로 부모가 되던 시절은 오래전에 끝났다. 이런 공부를 통해 되고자 하는 부모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 그 모든 노력이 성공적일까? 지금 우리 시대 가족의 모습을 알아보기 위해 가족의 근간이 되는 부모와 자녀의 관계를 먼저 살피기로 했다. 과연 부모가 생각하는 좋은 부모와 아이들이 바라는 좋은 부모는 같은 모습일까? 더 나은 부모가 되기 위해 애쓰는 여러 부모의 모습을 통해 이들의 노력으로 가족이 더 행복해졌는지 알아보고, 현재 가족의 모습을 살펴 부모가 된다는 것의 진짜 의미를 찾아보기로 했다.
- 폭풍 같은 잔소리가 지나가고 엄마가 나가자 방 안이 갑자기 확 더워진다. 선풍기를 끌어다 강풍에 맞추자 문제집이 펄럭펄럭 넘어간다. 바람에 날리는 문제집 끄트머리를 손으로 누르며 다시 집중하려 하는데, 이번엔 아빠 차례다. "뭐해? 집중해서 봐야지. 이래서 시험 범위까지 시간 내에 어떻게 다하려고 해? 큰일 났네!" 이 모든 게 책상 앞에 앉은 지 10분 만에 벌어진 일이다. 스스로도 할 수 있는 만큼은 하고 있는데, 엄마 아빠가 바라는 만큼 공부를 잘하지 못한다는 게 너무 힘들어서 모든 걸 그만두고 싶어진다. '이대로 삶을 놓아버리면 이 모든 짜증과 스트레스가 다 사라지겠지. 그냥 살지 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재영이가 이런 생각까지 하고 있다는 걸 과연 엄마 아빠는 알까?
- 재영 아빠는 스스로에 대해 굉장히 좋은 아빠는 아니지만 그래도 기본은 하고 있는 아빠라고 생각한다. 집에 들어오면 말 한마디 없이 집안을 무겁게 만들었던 자신의 아버지에 비해 그래도 아이의 공부에 대해 대화를 나누는 자상한 아빠 아닌가. 직업 군인을 할까 하고 군대에 너무 오래 있다가 사회생활이 남들보다 늦은 재영 아빠는 늦은 사회생활을 따라가느라 하루 13시간씩 일을 한다. 집에 들어오면 밤 11시, 깨어 있는 아이들과 얼굴을 마주하는 시간이 짧은 만큼 아이들에게 살과 피가 ...
- 재영이 뒤에서 바라보는 아빠. 부모는 아이가 부모의 실패를 반복하지 않게 하겠다며 조언을 하지만 그 말들은 모두 지시나 감시하는 잔소리일 뿐 아이들에게 전혀 영향을 주지 못한다.
- 살아보니 제때 공부를 해서 자리를 잡지 않으면 회복하기가 어려웠다. 공부가 전부는 아니지만 자신의 경험으로는 공부를 잘해놓으면 좀 더 편하고 좀 더 기회가 많은 영역으로 진출하게 된다. 아이의 성공으로 자식 덕을 보자는 게 아니라 재영이만큼은 자신이 겪은 어려움을 겪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다. 처음부터 아이에게 감시하듯 잔소리를 해댔던 건 아니다. 중학교 들어가서 처음 본 시험 성적표를 받아 든 후 불안과 조바심이 커졌다. 감당하기 힘들 정도의 성적표를 보는 순간, 이게 그동안 애면글면하며 아이에게 필요하다는 뒷받침을 해온 결과인가, 허무하기도 하고 실망스럽기도 했다. 무엇보다 이대로 두어도 괜찮을까, 너무 무르게 대해서 아이의 의지가 약한 건 아닌가 하는 생각에 한 번은 좀 세게 나가야겠다고 다짐했다. 성적표를 받아온 날, 독한 마음으로 매를 들었다. 한동안 마음이 아팠다. 부디 재영이가 진심을 알아줬으면 싶었다.
- 초등학교 5학년 수현이는 은경 씨의 외동딸이다. 은경 씨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이를 위해 못할 게 없다고 생각한다. 특히 요즘 같은 시험 기간 동안은 공부에만 집중할 수 있게 모든 허드렛일을 대신하고 있다. 젖은 머리에 드라이기를 대주며 은경 씨가 묻는다. "오늘 저녁에는 뭐할 계획이야?" 수현이의 답은 짧다. "국어, 과학." 어제 학원에서 내준 영어 숙제도 다 마치지 못한 것을 알고 있는데, 국어, 과학까지 과연 다할 수 있을까? 은경 씨는 수현이가 지키지도 못할 계획을 무리하게 잡는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입을 다문다. 식탁 위에 멀리 놓인 반찬까지 손이 안 닿는지 헛손질을 하는 걸 보고 얼른 반찬 그릇을 수현이 앞으로 당겨놓는다. 그것으로 성에 차지 않아 반찬을 한 젓가락 집어 입에 넣어준다. 피곤한지 눈을 감은 채 입을 벌리는 수현이를 보니 아직도 품속의 아이 같다. '이렇게 아기 같은데 이 험한 세상에 나가서 어찌 살려나. 그래, 공부가 아무리 힘들어도 어른이 돼서 살아갈 세상보다 더 힘들겠어? 지금 해두지 않으면 몇 배 힘든 세상이 펼쳐지겠지. 아이가 스스로 못하는 건 당연해. 그래서 부모가 있는 거지.'
- "집중력이 중요해. 1시간쯤 하다가 딴짓하면 그전에 1시간 한 건 다 까먹고 다시 시작해야 하는 거야, 알아? 정 집중이 안 되면 낙서라도 하면서 일단 책상 앞에 앉아 있어야지."
귀담아들었는지 말았는지 세롬이도 잠깐 아빠 말을 듣는 체하더니 방으로 들어간다. 세정이와 세롬이는 자신들이 무슨 이야기를 해도 들은 체 만 체하면서 자기주장만 내세우는 아빠 이야기가 달갑지 않다. 아빠가 하는 말이 별로 틀린 말은 아니고 자신들 잘되라고 하는 말인 줄은 알지만 듣기 싫은 건 어쩔 수 없다. 아빠는 맨날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면 다하라고 하지만 속는 것도 한두 번이지. 어차피 귀 기울여 들어주지도 않기 때문에 이젠 별로 하고 싶은 이야기도 없다. 이대로라면 점점 더 아빠와 이야기하는 시간도 줄어들고 아빠랑도 멀어질 것 같아 세정이도 내심 걱정이 되긴 한다.
- 부모가 아이를 생각하는 마음에 비해 아이들은 아빠의 훈계에 세정이는 고개를 떨군 채 조용하다. 부모는 아이들에게 늘 교훈적인 이야기를 늘어놓지만 아이들은 귀 기울이지 않는다. 그 말이 틀려서가 아니다. 아이들의 마음에 와닿지 않기 때문이다.
- 부모에게 너무 모질다. 그래서 부모가 하는 자녀에 대한 사랑은 짝사랑이다. 언제나 몸에 좋은 약은 입에 쓴 법이다. 저희들 잘되라고 이렇게 듣기 싫은 소리를 계속할 수밖에 없는 아빠 엄마의 진심을 언젠가는 아이들도 알아주겠지 하고 생각할 뿐이다.
- 제작진이 관찰한 네 가족은 공통점이 있다. 첫 번째는 모두 좋은 부모가 되려고 굉장히 노력하는 부모라는 점이다. 이들은 아이들과 어떻게든 더 많은 대화를 나누기 위해 애쓴다. 하지만 그렇게 노력하는 부모가 아이들과 실제로 하는 대화가 제대로 된 대화, 혹은 소통일까?
- 아주대 정신건강의학과 조선미 교수는 네 가족의 관찰 카메라 내용을 살피고 "부모님들이 하는 말은 지시와 확인, 일방적인 간섭과 감시인 경우가 많습니다. 대부분 '이거 했니 안 했니' 식의 확인하는 말과 안 했다고 하면, '왜 안 했니, 이런 건 이렇게 해야지' 하는 지시죠. 언성을 높여서 '정신 차려! 빨리 안 해?" 하는 건 거의 폭력이에요"라고 말한다.
- 비단 이 네 가족뿐만의 일일까? 부모와 자녀가 나누는 대화시간에 대한 통계 자료를 보면, 가족 간 대화 혹은 소통에 대해 자녀와 부모의 입장에는 큰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부모들 입장에서는 자녀와 허물없이 잘 소통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비율이 아주 높지만 아이들은 충분하다고 느끼지 않았다. 그나마 아이들이 어렸을 때는 대부분 아이들의 마음을 읽기 위해 노력하던 부모가 자녀들의 학업 성취가 가시화되는 청소년기부터는 갑작스럽게 돌변한다. 예전에는 그 시기가 중학교 입학이었다면, 요즘은 초등학교 고학년만 되어도 거의 입시 전야 같은 분위기가 생긴다. 이때부터 아이와 부모 사이는 점점 멀어지기 시작한다. 청소년들 중 고민을 부모한테 털어놓는 비율은 21.7퍼센트(친구 46.6퍼센트, 스스로 해결 22퍼센트) 정도이고, 가출한 아이들의 61.3퍼센트가 부모와의 갈등이 가출 이유라고 답하고 있다.
- 독립된 인격체라는 것을 어릴 때부터 분명히 하는 것이다. 이러한 프랑스 육아 철학은 프랑스의 대표적인 정신분석가 프랑수아즈 돌토(1908~1988)에서 비롯되었다. 그전까지만 해도 아이는 하나의 작은 주체, 미래의 한 인격체가 아니라 단지 교육해야 할 미숙한 대상에 불과했다. 그런데 프랑수아즈는 아이가 어른과 똑같이 욕망이나 관점, 불안과 두려움을 가진 실재하는 독립된 인격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부모는 그들에게 귀를 기울이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때부터 아이를 제대로 키운다는 것은 그들의 이야기를 잘 듣는 것이 되었고, 아이들은 정말로 부모님과 '함께' 살며 키워졌다. 여기서 '함께'라는 뜻은 대화가 있는 공동체를 말한다. ‘너희들은 어른들의 세상에 대해 잘 몰라, 너희들이 사는 세상은 어른들의 세상과 달라'가 아니라 아이들에게 부모가 사는 삶에 대해 설명해 준다. 무엇을 해야 하는지, 특정 상황에서 왜 그에 맞게 행동해야 하는지, 사람들이 그들에게 기대하는 바가 무언지에 대해 설명해 준다. 그러면 아이들은 삶에 대해 잘 알게 된다.
- 우리나라는 아이들끼리 아이들 세상을 살아가고 부모의 삶은 따로 있다. 심지어 부모는 아이를 자신의 분신, 즉, 확장된 자아로까지 여긴다. 물론 아이들은 아기였을 때 부모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과정을 거친다. 하지만 부모가 무의식 중에 아이를 자신 ...
- 어린 시절부터 자신의 의견을 존중받으며 자립심을 키우고, 다른 사람을 배려하며 인내와 절제를 배우는 프랑스 아이들. 과연 이런 과정이 아이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알아보기 위해 제작진은 만족 지연 능력 테스트를 해봤다. 1966년 스탠포드 대학의 월터 미셸 박사가 시도한 '마시멜로 테스트’를 응용한 이 실험은 아이들에게 초콜릿을 한 개 준 후 먹지 않고 15분 동안 기다리면 초콜릿을 하나 더 주는 것이다. 그사이 참지 못할 것 같으면 종을 치고 먹도록 했다. 아이들에게 15분은 꽤 긴 시간이다. 제아무리 프랑스 아이들이라고 해도 그 시간을 잘 참고 견뎌낼 수 있을지. 프랑스의 한 유치원에서 실행한 실험에서 놀랍게도 아이들은 모두 눈앞의 유혹을 견디고 상으로 초콜릿을 하나씩 더 받았다. 선생님의 잘했다는 칭찬과 함께 초콜릿 두 개를 얻은 아이들의 얼굴에는 뿌듯함이 가득했다.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자신의 욕구 충족을 미루는 능력을 가진 아이들은 청소년기의 자아탄력성과 인지 기능이 향상되고 또 좌절과 스트레스를 극복하는 자아 통제력이 발달해 학업 성취도 매우 높다고 한다.
- 한양사이버대학교 아동학과의 조희연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아이들 같은 경우에는 부모가 환경을 어떻게 만들어주느냐가 굉장히 중요해요. 사실 규칙을 만들어놓으면 부모만큼 힘든 사람들이 없거든요. 한 번 규칙을 정하면 그 규칙을 지키기 위해 부모가 뼈를 깎는 노력을 해서 무슨 일이 있어도 그것을 지켜가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 아이가 '힘들어도 참고 무언가를 해야 되겠구나'라고 느끼며 그런 분위기를 저절로 익히게 되죠. 이런 환경이라면 아이들의 만족 지연 능력을 더 잘 키울 수 있을 것입니다."
- 특히 프랑스에서는 아이에게 일찌감치 기다림을 가르친다. 갓난아이가 울어도 바로 달려가지 않고 15분 정도 기다렸다가 가는 것이다. 아기가 태어나도 가정의 중심은 부부다. 때문에 아기라는 새로운 가족이 생겼을 때, 아기의 생활 리듬을 파악한 후 규칙적으로 양육하려고 한다. 그래서 특별히 아기가 아파서 우는 것을 제외하고는 우는 것에 대해 우리나라처럼 민감하게 반응 ...
- 세월호 참사로 아이를 잃은 부모나 병에 걸려 애틋한 마지막 시간을 나누는 가족들처럼 서로의 가슴에 새겨져 오래도록 지워지지 않는 죽음이 있다면, 여기 또 다른 죽음이 있다. 아무도 알아채지 못하고 세상으로부터 잊혀진 채 모두에게 외면당한 죽음. 고독사다. 가족과 친구, 동료라는 사회적 관계의 울타리 안에서 살아가는 보통 사람들은 고독사를 특별히 불행한 사람들에게 닥치는 예외적인 사건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가파르게 증가하는 1인 가구 숫자를 생각하면, 과연 그것이 나와 언제까지나 무관한 사건일 수 있을까. 그들이 정말 우리와는 다른 특별히 불행한 사람들인지, 대체 어떤 사연으로 가족이나 친족, 친구 하나 없이 아무도 모르게 세상을 떠나게 된 건지 알아보기로 했다.
- 유가족이 없는 무연고 사망자는 물론, 가족과 친척이 있음에도 임종 당시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하고 시신이 방치된 채 발견되는 고독사는 점점 더 늘고, 연령대도 점점 낮아지고 있다. 이들의 사연을 대학생취재단이 추적했다.
- 아주 특별히 기구한 사연을 가진 사람들만 맞는 운명 정도로 생각해 온 고독사. 하지만 대학생 취재단이 사람들의 삶을 추적하자 이는 어느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는 현실 문제임을 알 수 있었다. 1인 가족의 급속한 증가세나 이혼, 비혼의 증가 등 가족붕괴의 징후들과 불안정한 경제 상황, 취약한 사회 안전망 같은 사회적 여건이 합세하면서 고독사는 더 이상 나와 무관한 일이 아니었다.
- 노숙자로 죽은 그 노인은 교사였다.
- 취재는 쉽지 않았다. 대부분 쪽방 생활을 했거나 거처 없이 전전했던 이들은 죽은 지 며칠이 지난 후 발견되었다. 한 달 이상 아무도 알아채지 못하다가 썩은 냄새로 세상에 자신의 죽음을 알리기도 했다. 세입자 이상의 관계는 전혀 없던 집주인들에게 그들의 죽음은 '불쾌함'이나 '재수 없음'일 뿐이다. 취재가 달가울 리 없었다. 사체 인수조차 거부당한 무연고 사망자가 남긴 유품은 버릴 수도, 안고 있을 수도 없는 처치 곤란의 쓰레기 더미였다. 남의 영업집에 와서 무슨 짓이냐며 문전박대를 당한 날은 이상하게 하루 종일 거절의 연속이었다. 어느 정도 각오한 일이었지만 막상 당하고 보니 더 막막하고 당혹스러웠다.
- 가족들은 대부분 사체 인수를 거부한다. 그들은 '오래 연락하지 않아 남보다 못한 사이'라고들 한다. 이들은 과연 가족에게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 독거노인, 고독사가 왜 사회 문제가 될까? 단순히 가족 없이 혼자 살았기 때문일까? 세계에서 1인 가구가 가장 많은 나라는 스웨덴이다. 단지 1인 가구가 늘어나는 것만이 고독사와 관련이 있다면 고독사 문제는 스웨덴에서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크게 제기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고독사는 일본에서 가장 큰 문제가 되었다. 일본과 우리나라의 공통점을 생각하면, 유난히 전체를 위해 개인의 희생을 강요하는 사회라는 것이다. 가족 관계 안에 위계질서가 확실하고 엄마, 아빠, 자녀 등 각각에게 기대하는 역할이 분명하다. 배려와 절제를 기본으로 하는 타인과의 관계와는 달리 '가족' 안에서는 구성원들에게 이타주의와 희생을 강요한다. 그 과정에서 친밀함을 무기로 상대를 억압하거나 과도한 책임감을 부여해 죄책감을 느끼게 만들기도 한다. 한계 설정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곳에서 제 역할을 못한다고 느낄 때 사람들은 그 안에 계속 머물기가 어려워진다.
-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고독사하는 사람 가운데는 특히 남자가 많고, 그들은 대개 경제적으로 무능해졌을 때 가족으로부터 분리되는 경우가 많았다. IMF 구제금융 같은 경제적 불황기에 직장을 잃거나 사업에 실패한 후 길거리로 나온 가장들 가운데도 고독사로 생을 마감한 경우가 많았다. 물론 이들이 단지 경제적 부양자로서의 역할을 다하지 못한 것만으로 가족에게서 떨어져 나오게 된 것은 아니다. 경제적 부양자로서의 역할에만 매몰되어 가족 간의 바람직한 관계를 챙기지 않았던 것이 부메랑이 된 것이다.
- 또한 우리나라의 경우, 개인의 복지에서 가족이 감당하는 부분이 너무 크다는 것도 문제다. 가족 구성원에게 부여된 부담이 너무 클 경우 결혼을 기피하고 아이를 낳지 않는 선택을 하게 된다. 천문학적인 결혼 비용이나 육아 부담, 노후에 대한 걱정 등을 오로지 가족이 책임져야 한다면, 어느 개인이 그런 경제적. 심리적 책임을 기꺼이 감당하려 하겠는가. 전체를 위한 개인의 희생만을 요구할 것이 아니라 사회 내 모든 개인들이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생활 방식 선택의 자유를 누릴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 취재를 시작할 때 취재팀은 생각했다. 무연고 사망자들에게는 드라마틱한 사연이 있을 것이라고. 혹은 게으름이나 무책임함, 불성실 같은 개인적 결함이 있을 거라고 말이다. 그러나 그들의 삶은 특별하지 않았다. 한두 번의 실패가 있었지만 한 사람의 삶을 완전히 무너뜨릴 만큼 거대하고 결정적인 것은 아니었다.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실패였다. 그럼에도 그들은 왜 혼자서 죽을 수밖에 없었는가. 그들을 지켜주었어야 할 가족은 다 어디로 갔는가? 왜 그들을 지켜주지 못했을까? 결혼을 했다면, 아이를 낳았다면 혹시 달라질 수 있었을까?
- 사람들이 착각하는 것 중 하나가 가족이 자연발생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가족이 흔히 혈연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가족이 노동 공동체였을 때의 결혼은 개인의 일이 아니라 가족의 일이었다. 하지만 결혼이 낭만적 사랑의 결과물이 되어버린 근대에 들어서 전적으로 개인적인 일이 되어버렸다. 가족을 만드는 것에서부터 유지하는 데 개인의 결정과 노력이 어느 때보다 중요한 시대가 된 것이다. 과거는 공동체가 아니면 생존 자체가 어려운 시대였지만, 지금은 혼자서도 얼마든지 살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 고독사한 사람들에게도 가족이 있었지만 그 사이에 '관계'가 남아 있지 않았다. 가족이 정서적 공동체로서 온전히 제 역할을 다하기 위해서는 과거처럼 단순히 '피는 물보다 진하다'를 외치는 것만으로 충분치 않다. 가족이라는 관계를 유지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가족은 사람이 사람으로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소속감과 애착, 심리적인 안정감을 주는 가장 기본적인 사회 단위다. 하지만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상호 관계하며 역동하는 관계다. 이 관계가 제대로 만들어져야 불이익을 감수하고라도 서로를 보호한다.
- 가족은 가장 친밀한 관계를 지닌 타자다. 그 때문에 예기치 않게 가장 큰 상처가 되기도 한다. 가족의 친밀함은 상대도 자신과 같은 생각을 할 거라는 믿음을 낳고, 그것이 충족되지 않았을 때 더 큰 실망과 갈등을 낳는다. 내 마음대로 정한 '어떤 특정한 행동'을 상대가 그대로 수행할 것이라고 믿기 때문에 그렇지 않았을 때 실망은 더 크다. 하지만 아무리 가족이라도 개별 존재인 사람들에게 이런 기대를 하는 것은 안타깝게도 언제나 빗나가고 실망감을 안겨주게 된다. 가족으로부터 상처를 입고 떨어져 나온 사람들은 더 이상 갈 곳이 없고, 결국 고립 속에서 죽어간다.
- 게다가 가족 관계의 실패는 다른 사회적 관계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고독사한 사람들은 가족 간의 관계뿐 아니라 사회나 지역 사회와의 관계도 전혀 없었다. 가족과의 관계에서 인정받지 못한 사람은 사회나 직장에서도 인정받지 못한다고 느끼고, 가족에게 버림받은 경험이 있는 사람은 집 밖의 관계에서도 자꾸 그런 상황으로 스스로를 몰아간다. 이럴 때 공동체나 제도의 관심이 중요하다. 소속감과 애착에 상처가 있는 사람이라면 이들을 위해 먼저 손을 잡아주는 사람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 이미 가족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사람이라면 사회적 안전망이 그런 역할을 해줄 수 있다. 어떤 상황에 처하더라도 나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며 더는 혼자 버티지 않아도 된다는 믿음이 있다면 사람들은 훨씬 덜 외로울 것이다. 2013년에 출범한 '한국 1인가구 연합'이나 부산 지역을 중심으로 아파트 관리사무소를 확장한 형태의 '마을관리사무소'는 사회적 가족을 지향하는 다양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하지만 기억해야 할 것은 이런 상호 신뢰의 관계를 형성하고 지속하는 것은 상대만의 책임이 아닌 나의 책임이기도 하다는 사실이다. 취재를 마친 팀들은 입을 모아 말했다.
"요새 만나는 사람마다 이렇게 얘기해요. 나중에 네가 혼자가 되어 너무 외롭고 쓸쓸하면 나한테 꼭 연락하라고. 왜 고독사 취재를 우리 같은 젊은이에게 맡겼나 생각했는데, 이걸 하면서 좋은 어른이 되어야겠다. 그런 생각을 많이 했어요."
- 아마도 이들은 이제 길거리를 배회하는 노인들을 예전과 같은 눈길로 바라보지 못할 것이다. 이웃에 누가 살고 있는지, 혹시 외롭게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 있는지 두리번거리게 될 것이다. 그들이 무엇을 먹고, 어떻게 지내는지 관심을 가지고 살펴보게 될 것이다. 길거리에 쓰러져 있는 사람을 한 번 더 돌아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기꺼이 나서서 그들을 도울 것이다. 이렇게 타인은 누군가의 가족이 된다.
- 언제부터인가 우리 곁에 혼자 사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직장, 학업, 취업, 이런저런 이유로 의도적인 가족 분리가 곳곳에서 이뤄졌기 때문이다. 1980년 4.8퍼센트였던 1인 가구는 2013년 25.3퍼센트를 넘어 2040년에는 전체 가구의 절반을 차지할 거라는 전망이다. 비자발적 가족 분리 외에도 독신, 사별, 이혼, 애초부터 혼자 살아가는 삶을 고른 비혼자도 늘었다. 현재 전체의 4분의 1 정도를 차지하고 있는 1인 세대. 이들은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취재팀이 궁금한 것은 이들의 식탁이었다. 가족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부모와 미혼의 자녀가 꾸리는 4인분 식탁과 이들 1인분의 식탁은 어떻게 다를까? 취재 결과 짐작대로 1인분의 식탁은 단출하고 허술했다. 24시간 편의점에는 다양한 형태의 간편식이 넘쳐난다. 전자레인지에서 몇 분이면 완성되는 레토르트 음식은 1인 세대에게 주식이나 다를 바 없다. 이에 비하면 라면은 요리 축에 들 정도다.
- 이혼이 늘면서 이로 인한 1인 세대도 급격히 늘었다. 특히 최근에는 이혼하고 혼자 사는 50대 남성 1인 세대가 급격히 늘고 있다고 한다. 9년 전 이혼하고 혼자 사는 김중호 씨도 이런 경우. 하지만 중호 씨는 끼니를 잘 챙겨 먹는 편이다. 오이소박이 정도는 거뜬히 담글 수 있을 정도로 거의 모든 음식을 손수 한다. 장 보는 것도 쑥스러워하지 않고 혼자서 잘 해낸다. 혼자 사는 사람일수록 건강을 스스로 챙겨야 한다는 생각에 단백질, 비타민, 무기질, 칼슘 등 영양소를 생각하여 상을 차린다. 오늘도 계란찜에 고추 장아찌, 멸치와 오징어채, 된장찌개와 콩나물국으로 균형 잡힌 7첩 반상을 차려냈다. 그래도 혼자 밥상이 쓸쓸한 건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다. 회사에서 직원들과 함께 먹을 때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먹지만, 혼자 먹을 때는 켜놓은 TV만이 유일한 친구가 되어준다. 밥 먹는 시간과 야구 중계 시간이 겹치면 혼자 밥 먹는 것도 나쁘지만은 않다.
- 고령층에서 1인 세대를 구성하는 경우는 대부분 배우자 사별이 이유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혼자 사신 지 1년이 된 유명남 할머니가 이런 경우다. 할아버지와 결혼하고 50여 년을 함께 살아온 터라 돌아가신 자리가 허전하다. 볼 일이 있어 집을 나설 때면 할아버지 사진에 인사를 한다. 그러면 혼자 산다는 느낌이 안 나서 훨씬 좋다. 혼자 사시는 할머니라 정부 보조금을 받고 있지만 부족한 생활비도 벌 겸 농산물 시장에 나간다.
- 자녀 교육을 위해 자발적 기러기 생활을 시작한 황만호 씨는 아내와 아이들을 캐나다에 보냈다. 고등학교 졸업한 후 대학 때부터 자취를 시작해 결혼하기 전까지 혼자 살았는데, 결혼 10년 만에 다시 혼자가 되었다. 대기업에 다니면서 보니 아무래도 외국어 실력에 아쉬움이 많았고, 또 우리나라 교육 환경이 아이들에게 너무 버거운 것 같아서 싫다는 아내를 설득해 외국으로 보냈다. 5~10년 정도 각오하고 있는데, 여전히 혼자 먹는 밥은 적응이 안 된다. 식사를 한다기보다 배만 채우면 된다는 느낌으로 밥을 먹는다. 그래서 여섯 끼를 내리 혼자 먹어야 하는 주말이 싫다.
- 혼자 사는 사람들 중 가장 높은 비율은 미혼 남녀다. 프로젝트에도 미혼 남녀가 제이미까지 넷이다. 갈수록 결혼을 미루는 이들이 많아진다. 1981년 각각 26.4세, 23세였던 남자, 여자의 혼인 평균 연령은 불과 30년 만에 32.2세, 29.6세로 높아졌다. 결혼은 낭만적 사랑의 결과물이며 아주 개인적인 선택이라지만 이게 꼭 스스로의 선택에 의한 것일까? 서른네 살의 민현진 씨는 EBS 교육방송의 프리랜서 카메라 감독이다. 방송 일의 특성상 밤낮이 뒤바뀐 생활을 할 때가 많다. 자신의 일에 대한 자부심이 크지만 안정적이지 않다 보니 결혼에 큰 걸림돌이 된다. 소개팅을 하거나 결혼을 전제로 한 만남에 나서려고 할 때마다 비정규직이라는 사실에 왠지 움츠러든다. 삼포세대니 오포세대니 하는 말들이 우리 사회에서 이제 일상적이다. 최악의 청년 실업률과 바늘구멍 통과하기보다 어려운 취업, 결혼 비용이나 육아 비용 등도 결혼과 출산을 포기하는 이유가 된다. 하지만 결혼에 대한 인식의 변화가 더 큰 이유인 듯하다. 식구 실험을 위해 모인 8명 가운데 4명이 미혼이었는데, 이들 모두 결혼과 출산을 누구나 꼭 해야 하는 필수적인 통과 의례라기보다 개인의 선택일 뿐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 6주차에 접어들었을 때, 8명이 결혼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서로에게 궁금한 것을 묻는 과정에서 결혼을 꼭 해야 하느냐는 질문이 나왔는데, 모두 꼭 할 필요는 없다고 입을 모았다. 행복하려고 하는 결혼인데, 다른 사람들이 하니까, 혹은 등 떠밀려서 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한단다. 함께 삶을 꾸려나가며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만난다면 결혼을 하겠지만 단지 해야만 한다는 이유로 결혼을 선택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 가정을 꾸린 황만호 씨는 살면서 아이 키우는 기쁨을 못 누리는 건 좀 아닌 것 같다는 의견도 내놓았다. 하지만 이혼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김중호 씨는 결혼을 꼭 할 필요는 없는 것 같다고, 사람마다 추구하는 라이프 스타일이 다르고 삶의 지향이 다르니 그걸 잘 맞춰 살 자신이 없다면 혼자 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고 말했다. 자신도 장남이고 남자니까 부모님이 걱정하시기도 해서 별다른 생각 없이 결혼을 했는데, 혼자 살아보니 그 삶도 재밌고 나름대로 만족스럽단다.
- 8주 동안 일주일에 한 번 만나 식사를 나누는 것으로 과연 타인이 가족이 될 수 있을까? 가족은 이제까지 혼인과 주거를 함께하는 혈연 집단으로 정의되어 왔다. 그리고 경제적 기능뿐만 자녀 양육과 사회화, 노부모 봉양 등을 책임지는 기능적 역할을 해왔다. 하지만 현대로 오면서 이 모든 기능을 정부나 요양소, 탁아처럼 가족 안에서 기능적으로 주어진 역할이 없었다. 자연히 서로에 대한 막연한 기대 대신 배려와 절제가 앞섰다. 자신이 하는 음식이 사람들 입맛에 맞을지 걱정하던 유명남 할머니에게 가족들에게는 어떤 음식을 해주시는지 물었더니 뭘 그런 걸 묻느냐는 표정으로 그냥 자신이 먹던 것을 준다고 했다. 우리가 생각하는 가족은 그런 것이다. 말 안 해도 아는 사이. 내가 좋으면 너도 좋아야만 하는 것. 하지만 그런 사이라는 건 세상에 없다. 그래서 가족은 애정의 근원이면서 폭력의 근원이 된다. 그 안에서는 관계보다 역할이 더 중요하다. 경제적 부양자로서 아버지는 아내와 아이들에게 보답을 요구하고, 아이들은 부모가 지운 부담을 감내하며 부모가 기대한 것을 제대로 해내지 못한 것에 죄책감을 느낀다. 그러는 사이 원망이 쌓여간다. 잘못 만들어진 가족 간의 관계는 외부와의 관계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 진짜 바람직한 관계라면 어떤 갈등과 위기를 겪고 나서 얼마나 성장했는가가 중요하다. 그렇지만 우리의 가족은 너와 내가 같은 마음이라는 것을 전제로 갈등과 위기를 덮거나 모른 체한다. 버림을 받지 않을까, 비난을 받지 않을까, 화를 내면 어쩌나 생각하면서 가족이라는 이유로 부당한 요구나 억압에 시달리는 한, 행복한 가족이 되기는 어렵다. 가족 간에도 한계와 예의가 필요하다. 내가 행복하지 않은 채 가족이 행복할 수는 없다.
- 그러니 가족을 떠나왔다고 슬퍼할 일도 아니고, 가족과 떨어져 있다고 모두 고독사의 위험에 처하는 것은 아니다. 가족이라는 틀, 혈연이라는 당위보다 관계가 훨씬 중요하다. 지금 이 순간 만나는 사람들과 솔직하고 다정하게 함께 이 시간을 누릴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역할과 서열이 강조되는 혈연관계가 아니라 지금, 여기 서로 소통하고 사랑하는 이들이 진짜 가족이다. 우리가 만났던 8명의 가족들처럼. 일생을 통해서 어느 기간은 한 번쯤 혼자 살아야 하는 시대, 당신 곁에는 따뜻한 밥 한 끼를 함께할 '식구'가 있는가?
- 가족은 인류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제도다. 당연히 그 형태나 범위에서 수많은 변화를 겪어왔고 지금도 끊임없이 변하고 있다. 사회의 기본 단위인 만큼 사회의 변화가 가족 제도 혹은 관계에 영향을 미치기도 하고, 또 가족의 변화가 사회에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그렇기에 우리가 일반적으로 떠올리는 가족의 모습으로 <가족 쇼크>의 문을 열었다. 부모와 자녀라는 일반적인 관계로부터 어떤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지, 혹은 어떤 변화가 필요한지를 통해 지금 이곳의 가족 모습을 돌아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 형태가 바뀌었든 관계가 달라졌든 그렇게 오랜 시간 '가족'이라는 형태가 존속한 데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개체로 독립하는 데 다른 동물보다 훨씬 긴 시간이 필요한 인간에게 가족은 최초의 보호처이고, 불확실하고 위험한 외부 세계로부터의 안식처이며, 막다른 순간 기댈 수 있는 근거지다. 가족 역시 사회의 다른 체제들과 마찬가지로 다양한 사회의 모순이나 이데올로기에 맞닿아 있어 때로는 불합리하고 모순된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근원적인 모습은 초시간적이고 불변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과거의 가족 모습이라고 해서 모두 뜯어고쳐야 할 모순투성이가 아니며 미래에 도래할 가족의 모습이 완전무결한 이상적 모습은 아니라는 뜻이다.
- 이제 우리는 과거의 우리 가족의 모습을 돌이키면서 시간의 흐름에도 변치 않는 가족의 가치는 무엇인지 되짚어보고자 한다. 1960년대 베트남이나 1970-80년대 중동으로 일하러 나갔던 우리나라 가장들의 모습과 겹쳐 보이는 이주 노동자의 모습에서, 여전히 모계 중심 원시 공동체의 특징을 지니고 있는 남태평양 키리위나 섬의 가족의 모습에서 그것들을 엿볼 수 있으리라.
- 1인 가구의 증가나 고령화 같은 변화를 보면서 가족의 해체 혹은 붕괴를 걱정하는 사람들도 많다. 하지만 그것은 변화일 뿐, 가족이라는 근원적 가치의 해체는 아니다. 이럴 때일수록 오히려 심리적으로는 친밀감과 소속감의 근원으로서, 기능적으로는 위험으로부터의 보호와 사회의 재생산을 위해 존속해 온 가족의 원 모습을 돌이켜보는 것이 필요하다. 거기에는 혈연으로 이어진 가족만이 아닌 새로운 형태의 가족도 포함될 수 있다. 이 모든 성찰이 지금, 여기의 가족의 가치와 의미를 되묻는 소중한 작업이 될 것이라 굳게 믿는다.
- 세계적으로 이주 노동자의 역사는 식민주의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난 직후, 전쟁으로 젊은 인력을 대거 잃어버린 프랑스와 영국이 자국의 식민지를 중심으로 노동력을 끌어들였다. 경제 발전의 정도가 다른 두 나라가 있다면 발전 정도가 높은 나라에서 낮은 나라의 인력을 끌어당기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문제는 일자리니까. 그러한 이주 노동에는 늘 희망이 뒤따랐다. 더 나은 삶을 향한 기대와 희망.
- 경제 후발 국가였던 우리나라 역시 이주 노동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역사를 갖고 있다. 일본 제국주의하에서 강제 노역에 동원된 이후로 1970년대는 베트남 파병과 독일 광부 및 간호사 파견, 1980년대는 중동 건설 붐으로 이어졌다. 이런 해외 이주 노동 덕분에 우리나라도 절대 빈곤 국가에서 벗어났지만, 베트남이나 독일, 중동으로 떠나던 개인에게는 국가가 아니라 가족이 먼저였다. 마석의 이주 노동자들에게서 독일로 떠나던 우리 아버지 세대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었다. 독일에 광부로 갔던 청년인 우리네 아버지는 핫산과 같이 스물 남짓이었다. 대졸자는 학력을 속이고 총각들은 조금이라도 높은 급여를 받으려고 없는 아내와 자식들을 꾸몄다. 연평균 기온이 40도가 넘는 중동 땅에서 하루 10시간을 넘게 일했다. 오죽하면 한국 건설업자들이 나가 있는 중동 국가에서는 사막에서 움직이는 거라곤 도마뱀과 한국인 뿐이라는 말이 생길 정도였다. 그들은 번 돈의 대부분을 고국으로 보냈다. 그 돈으로 집을 사고 동생과 자식들 공부를 시켰다. 마석에서 우리는 과거 우리 아버지의 모습을 본다.
- 비혼자, 아이 없는 부부, 초고령 부부, 다문화 가족, 1인 가족, 조손가정 등 다양한 형태의 가족이 출현하고 있다. 그래서 가족이라면 결혼한 부부와 자식으로 구성된 핵가족을 정상 혹은 이상으로 생각해 왔던 기존 사회는 혼란을 겪고 있는 듯하다. 이렇게 가족 형태를 한 가지로 정하고 가족은 어떠어떠해야 한다는 가치를 기반으로 하는 것을 '가족 이데올로기'라고 한다. 가족 이데올로기는 부부가 된 남녀 역할, 부모와 자식 간 혹은 부부 간의 권력 관계, 가족 개개인의 존재 의미까지 규정해 그렇지 않은 가족이나 구성원을 배척한다. 특히 우리나라 가족 문화는 오랫동안 개인과 가족의 일체감을 강조해 왔고, 가족을 위한 개인의 희생 또한 당연하게 여겨왔다. 서로의 인생을 지지하기는커녕 가족 구성원의 일방적인 희생을 요구하거나 철저한 무관심으로 상처를 주어도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견뎌야 하는 일도 많았다. 그런데도 사회는 가장 이상적인 공동체로 가족을 들먹이며 가족 가치를 사회적 가치로 확산시킨다. 가족 같은 회사, 고객을 가족으로 모시는 기업. 하지만 지금의 개인화 경향은 일체감과 희생을 전제로 하는 가족을 견디지 못한다.
- 돈 벌어오는 것 외에 어떠한 자기의 긍정성도 느끼지 못하는 남편이자 아버지, 자식을 위한 희생 이외에는 자기를 향한 어떤 배려도 알지 못하는 어머니이자 아내, 그들은 가족 구성원 고유의 역할에 충실하지만 정작 당사자는 고유의 개체성이 부정되거나 소외된 삶으로 인해 내면에 불안과 억울함, 갑갑함과 우울감이 쌓인다. 이런 관계가 가장의 가족 살해나 동반 자살, 집착에 가까운 부모와 자녀라는 기이한 관계를 만들어낸다. 여기에 젊은 세대가 겪고 있는 경제적 불안정, 노년 세대가 겪고 있는 장기 부양의 부담은 이제까지 가족이 해온 계급 재생산과 소비·생산의 기초 단위 역할까지 어렵게 만들었다. 가장 한 사람이 벌어서 가족 구성원 전체의 교육, 양육, 주택, 보건, 노후 문제 일체를 해결할 수 있었던 시대는 이제 끝났다. 한편으로는 편의 시설과 교통·통신의 발달로 누구와의 교류 없이 혼자서도 살 수 있는 시대가 되자 더 이상 가족 안에서 부대낄 필요가 없어졌다. 이혼율 상승, 저출산, 비혼 등은 그동안 가족이 져왔던 모든 부담으로 인한 가족 피로가 임계점에 도달한 결과다. 그렇다면 가족은 해체되어야 마땅한가?
- 분명 과거에는 사회적으로도 개인적으로도 전통적인 가족 형태를 유지해야만 하는 요인이 분명히 있었다. 사적 폭력에 대한 대응, 노동과 경제 공동체로서의 가족, 하지만 전자는 공권력으로, 후자는 시장 경제에 의해 대체되면서 가족의 울타리를 벗어나더라도 개인이 충분히 혼자 살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실제로 1인세대의 증가는 폭발적이고, 여기에 비혼이나 동거처럼 제도로서의 가족을 선택하지 않는 사람도 늘었다. 지금대로라면 20대 초반 5명 중 한 명은 평생 미혼으로 남을 전망이다. <혼인 동향 분석과 정책 과제>(한국보건사회연구원, 2013)에 따르면 연령대별 미혼율이 계속 유지될 경우 20세 남자 중 23.8퍼센트가 45세 때까지 미혼 상태로 남는다고 예측할 수 있다. 여성은 18.9퍼센트로 남성보다 조금 낮을 뿐이다. 45세는 사실상 평생 미혼의 임계점이기 때문에 이때까지 결혼하지 못하면 이후는 평생 미혼으로 간주된다. 그렇다면 혼자 사는 것으로 충분할까?
- 이데올로기로서의 가족은 모순과 결함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가족' 그 자체는 그렇지 않다. 가족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가장 근원적인 욕망이자 보편적인 본능인 소속감의 근원이다. 또한 불확실한 미래와 환경 속에서 개인의 유일한 위안처이며 근거지다. 그 역할을 무엇이 대신해 줄 수 있을까? 그래서 가족의 가치나 의미는 없어져야 하는 것이 아니라 재정의되어야 한다. 이미 가족의 시작인 결혼이 사랑 이외의 다른 목적을 갖지 않게 된 때부터 가족의 중심은 권위나 책임이 아니라 정서적 결속감과 사랑이 되었다. 이제 새로운 형태의 가족은 서로에 대한 책임과 의무만 과도했던 전통적인 혈연 중심의 가족 대신 서로의 인생에 대한 지지와 소통으로 만들어진 연대와 공존의 관계로 변화하고 있다. 몇 끼의 식사를 함께하는 것만으로 공존과 연대의 가능성을 보여줬던 3부의 '식구의 탄생' 실험은 어쩌면 앞으로 가족이 지향해야 할 공동체로서의 미래일지도 모른다.
- 핏줄에 집착하지 않으면서 서로가 서로를 돌보되, 소통을 통해 공존하는 사회. 그 사회를 만나기 위해 우리가 찾은 곳은 아직도 모계 사회의 전통을 유지하고 있는 남태평양 남서부에 위치한 산호섬 키리위나다. 지금까지 문명사회에 잘 알려져 있지 않았던 신비의 섬 키리위나에서 자연의 풍요로움을 나누며 혈연이 아닌 이웃을 서로 돌보며 행복하게 사는 사람들을 만나보자.
- 인류학자 리누스 교수(파푸아뉴기니 국립대학 사회인류학과)는 키리위나에서 얌이 갖는 의미를 다음처럼 설명한다. "키리위나에서 암은 거의 모든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얌이 없는 사람은 아무것도 아닌 거죠. 얌은 음식이며 나와 내 그룹의 이름이기도 합니다. 얌으로 무역과 교환을 할 수 있고, 또 암은 사회적 지위이죠. 나의 이름을 알리고 싶다면 더 많은 얌을 재배하면 됩니다." 특이한 것은 이들은 사유 재산을 갖고 있음에도 수확한 얌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을 마을 공동 창고에 모은다는 것이다.
- 마을 잔치가 있는 날은 여성들이 마음에 드는 남성을 골라 연애를 할 수 있다. 고요한 밤의 적막을 깨는 청년들의 세레나데에 소녀들은 수줍은 미소를 띤다. 그러면서도 누가 자기 짝일지 곁눈질을 하다가 마음에 드는 남자와 슬그머니 자리를 비운다.
- 남자 선택의 주도권을 여성이 가지고 있고, 그래서 키리위나 여인들은 성에 대해서도 감추거나 숨기지 않는다. 여성 자신의 건강을 위해, 또 가족을 잘 이끌기 위해 콘돔을 받아 활용하는 것이 전혀 부끄럽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키리위나 섬에서 여성들은 남성 못지않은 힘을 가지고 있다.
- 이웃의 아이들을 돌보고 있는 키리위나 여성들, 키리위나에서는 이웃이면 누구나 모든 아이들의 엄마가 된다. 누구나 엄마가 된다. 아이 맡길 곳이 없어 전전긍긍하지 않아도 되고, 믿을 만한 사람을 찾아 동동거리지 않아도 된다. 누군가 도움이 필요하다면, 그것이 누구든 상관없이 서로 돕고 의지하며 살아가는 것이 키리위나의 방식이다. 공부가 더 필요한 아이인데 돈이 없으면 친족과 공동체가 지원한다. 혜택을 받은 아이들은 그것을 사적인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공동의 이익을 위해 사용하고자 노력한다.
- 물론 키리위나도 점점 달라지고 있다. 사적 소유권의 개념이 나타나고, 땅과 호흡하며 살아가기보다 도시에서 봉급생활자로 일하고 싶어 한다. 잉여 생산물이 많아지면 이곳에서도 선물이 아닌 진짜 무역이 나타나고 재산을 축적하는 사람들이 나타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키리위나가 보여준 공동체로서의 가치가 퇴색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도 키리위나가 되자거나 원시 공동체로 돌아가자는 주장이 아니라 가족이 처음 만들어질 때의 기본 가치가 어떤 것이었는지를 돌이켜보자는 것이다.
- 단순히 한집에 사는 것만으로 가족이 되는 시대는 끝났다. 가족은 서로의 인생을 지지해주는 '공동체'다. 과거를 공유했더라도 만약 그 과거가 불행했다면 새로운 관계를 만들 수도 있다. 학교친구나 오랫동안 함께한 직장 동료도, 그 밖에 다양하게 맺어지는 인간관계도 넓은 의미의 가족이라고 할 수 있다. 식구 실험에서 본 것처럼 타인이 가족이 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 엘리자베트 벡 게른샤임은 가족 이후에 무엇이 오는가라고 묻고, 가족 이후에 가족이 온다고 답했다. 그때의 가족은 역할에만 충실하면서 서로 의존하고 상처를 주고받는 가족이 아니라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개체성을 인정하며 존중하고 협력하는 새로운 가족이다. 과거 가족 내에서 해결하다가 공공의 영역으로 넘어가면서 복지라는 이름으로 제도화된 양육, 주택, 교육, 노후 문제를 서로 돌보는 새로운 가족이다. 가족 이후에는 새로운 가족이 온다. 우리는 새로운 가족이 될 준비가 되었는가?
새로운 가족이 온다
가족은 마땅히 이러저러해야 한다. 즉 아버지는 돈을 잘 벌어와야 하고, 어머니는 집안 살림을 윤나게 하면서 남편을 보필하고 아이들을 잘 키워야 하며, 아이들은 부모님 말에 순종하고 공부를 잘해야 한다는 것은 오랫동안 통용되어 온 우리나라 가족이데올로기다. 국가 정책 또한 가족 단위로 만들어진다. 미디어에서도 부모와 자녀로 구성된 가족생활이 '정상'인 것으로 그려지고, 학교 같은 사회 기관도 아버지 역할, 어머니 역할, 자식의 역할을 나눠 맡는 식으로 가족과 비슷한 형태로 운영된다.
이런 가족 이데올로기에 비추어 보자면 지금의 가족은 위기다. 아버지와 어머니, 자녀로 구성된 가족이 점점 줄어들고, 한 부모 가정이나 비혼, 동성 부부까지 등장했다. 그런데도 모든 구성원을 언제든 안아주는 가족이라는 신화적 개념은 더 공고해지고 있다. 가족을 한껏 치켜세우는 이런 분위기가 사회 불안과 미래의 불확실성이 높아지면서 가족에게 그 부담을 전가하려는 술책일 뿐이라는 냉소적인 반응도 있다. 사회 불안이 심화될 때마다 비슷한 분위기가 조성되는 것으로 봐서는 맞는 말이기도 하다.
사회의 한 요소로 가족은 사회의 모순에 맞닿아 있어 때로 개인들을 억압하고 희생을 강요한다. 하지만 가족은 이런 모순과의 결별을 통해 본래 의미로 얼마든지 재생할 수 있다. 어떻게 보면 <가족 쇼크>는 가족의 상실이나 소통 부재의 부모와 자녀, 1인 가족, 고독사, 이주 노동자 문제 등 현대 가족의 어두운 모습만을 보여주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이것은 이제까지 가족은 마땅히 이러저러해야만 한다는 이데올로기를 뒤집어 보여준 것이다.
개인적 차원에서 부모가 아이를 독립된 인격체로 양육하고(프랑스 육아), 가족 구성원들이 서로를 존재 자체로 긍정하고 무조건적으로 사랑하는 것(세월호의 남겨진 부모와 호스피스 환자 가족의 당부), 그리고 사회적 차원에서 서로가 서로를 돌보는 공동체 연대(식구 실험, 고독사), 교육이나 노후 부담, 가족 보호의 사회적 책임(키리위나 사람들, 이주 노동자들의 생활) 등을 통해 더 완전한 가족을 이룰 수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이런 깨달음이 내가 속한 가족의 변화, 나아가 사회의 점진적인 변화로까지 이어지길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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