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1

[김윤나] 말그릇 - 비울수록 사람을 더 채우는

일루젼 2025. 2. 12. 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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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김윤나
출판 : 카시오페아
출간 : 2017.09.21


       

 

24년 나의 책정리는 작은 사화(士禍)나 분서(焚書)에 빗대볼 수 있다.

(정리한 책이 천 단위가 넘어서면 감히 그리 불러도 된다고 생각한다.)

 

이제 더는 못 비우겠다 싶을 때까지 비워내고 나니 드디어 벽과 바닥이 보였다.

(사실 아직 조금은 더 손을 대야 하지만, 나머지는 새로운 곳에서 다시 시작하려 한다.)

 

중고도서로 매입이 되지 않는 책들은 대부분 미련 없이 폐지로 버렸지만, 그중에서도 망설여지는 책들이 있었다.

판매도 도서관 기증도 어렵지만 그냥 버리기에는 조금 아쉬운 책들. 가볍게 한 번 훑어라도 볼까 싶었던 책들. 

<말그릇>은 그런 책들 중 한 권이었다. 

(그리고 '아름다운 가게'에서 기증을 받아주셨다.)

 

기왕이면 듣기 좋은 말이 좋다. 

그렇게 말을 다듬기 위해 혀끝에서 몇 번이고 굴려보았을 정성이 보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해도 포장이 내용을 대체하지는 못한다. 

그 말에 담긴 진의야말로 '전하고자 했던' 것이기 때문이다.

 

살면 살수록 '중도(中道)'가 가장 아름답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중심이 있기에 양극단이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절대적인 하나의 정답이 있다고 생각하게 되면, 그것이 아닌 다른 것들은 틀린 것이 되어야 한다. 다양성에 대한 존중이 힘들어지는 이유는 '내가 틀렸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 아닐까. 나와 다른 것을 인정하는 것이 내가 틀렸음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면 공존도 상생도 가능하다. 

나는 그 길은 중도에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있음을 모르는 기다림은 고통이었으나

있음을 아는 기다림도 고통이다. 

하루하루가 달다. 

 

모쪼록, 잘 진행되었으면. 

 


   

 

- "왜 말을 저렇게 하지?"
무조건 윽박지르는 상사나 솔직함을 핑계로 가슴에 비수를 꽂는 친구, 유독 아픈 말만 골라하는 가족에게 '꼭 그렇게 말해야 하냐'고 따지고 싶을 때가 있다. 물론 당신도 지금껏 몇 번이나 말로써 사랑하는 이의 마음을 무너뜨리고 아끼는 사람들을 밀어냈을지 모른다. 어쩌면 어제저녁에도 마음과 다른 말을 툭 내뱉고 돌아서면서 '너무 심했나...' 하고 후회했을지도. 

- 그렇게 우리는 어른이 되어서도 여전히 '말'에 서툴다.

 

- 무심코 던진 말이라도 일단 입 밖으로 나온 말은 사람의 마음에 파장을 일으킨다. '그렇게 할 거면 그만두라'는 상사의 말에 밤잠을 설치고, '해낼 거라고 믿는다'는 한 마디에 힘이 나서 두 팔을 걷어붙인다. 말은 사람을 들었다 놨다 할 만큼 힘이 세다. 게다가 수명은 어찌나 긴지. 주름이 자글자글한 노인이 어린 시절 들었던 격려의 말을 추억하며 눈물을 흘리거나 장성한 아들 딸을 둔 가장이 ‘그때 왜 내게 그런 말을 했냐'며 오래전 상처를 곱씹는 모습을 볼 때면 말의 질긴 생명력을 실감하곤 한다. 

- 안타까운 것은 말 때문에 자책하거나 타인을 원망하면서도 여전히 자신의 잘못된 말 습관을 그냥 내버려 둔다는 데 있다. '내가 그렇지 뭘', '언젠가는 내 마음을 알아줄 거야', 이런 생각을 하며 애써 덮어둔다. 그러다가 빈번한 말실수 때문에 소중한 관계가 어그러지거나 직장에서 리더의 위치에 올랐을 때 혹은 부모가 되어서 아이를 이끌어야 할 때가 되면 그때야 말 잘하는 방법을 찾는다. 좋은 시도이기는 하지만 단기속성 기술은 정작 중요한 순간에 무용지물이 되기 쉽다. 

- 후배들을 격려해야 한다는 것은 알지만 성에 차지 않는 보고서를 볼 때마다 화가 치밀어 오르니 일단 내뱉고 본다. 아이를 존중하는 대화법을 배우기는 했지만 길에서 떼를 쓰며 버둥거리는 아이 앞에서는 버럭 성질대로 말하게 된다. 새롭게 익힌 듣기 좋은 말은 길들여진 나의 언어를 넘어서지 못하기 때문에 결정적 순간에 힘을 잃는다.

- '그래서 이제 다르게 말해보자' 했던 모처럼의 결심은 물거품이 되고 만다. 10여 년 동안 커뮤니케이션 전문가로 활동해 오면서 사람의 말 한마디를 바꾸는 게 생각보다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다. '말'이란 것은 기술이 아니라 매일매일 쌓아 올려진 습관에 가깝기 때문이다. 살면서 보고, 듣고, 느낀 모든 것들이 뒤섞이고 숙성돼서 그 사람만의 독특하고 일관된 방식으로 나오는 게 바로 말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언어는 그 사람의 내면과 닮아 있다. 그렇기 때문에 무작정 말 잘하는 '기술'만 익혀서는 자신만의 새로운 말 습관을 기를 수 없다. 

- 지금까지와는 다른 말 습관을 지니고 싶다면, 말 그 자체에만 집중할 게 아니라 그 이면에 있는 나를 함께 들여다봐야 한다. 그럴듯하게 말하려고 노력하는 대신 말을 만들어내는 저 깊은 곳, 말의 근원지인 자신의 내면을 알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 혹시 유독 참지 못하는 말투가 있는가. 유독 가슴 아프게 다가오는 말이 있는가. 언어와 말투에 영향을 끼치는 심리적인 구조를 알고 나면 내가 왜 그런 말투를 사용하게 됐는지, 왜 특정한 말에 대해 예민하게 받아들이는지 알 수 있게 되고 비로소 자신의 말을 제대로 다룰 수 있게 된다.

- 습관적으로 팀원들을 비난하는 상사가 있다고 해보자. 칭찬기술을 달달 외운다고 그의 '말'이 바뀔까. 그보다는 자신의 내면의 특성, 말하자면 감정을 느끼는 방식이나 사람들을 바라보는 관점, 자라온 환경 등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그래야 어쩌다 지금 같은 말하기 패턴을 가지게 되었는지, 그래서 앞으로 무엇을 변화시켜야 하는지 알 수 있게 된다. 그리고 나는 이 모든 변화의 과정을 '말 그릇을 키우는 과정'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 사람들은 저마다 말을 담는 그릇을 하나씩 가지고 있다. 그런데 그 크기에 따라서 말의 수준과 관계의 깊이가 달라진다. 일명 말 그릇이 큰 사람들은 누군가를 현혹시키고 이용하기 위해 혹은 남들보다 돋보이기 위해 말을 사용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타인과 소통하기 위해, 갈등을 극복하고 사람을 이해하기 위한 말을 사용한다. 너와 나의 차이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소통이 어려운 상황에서도 사람들과 대화를 지속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다. 

- 사람은 누구나 인정과 공감을 갈망한다. 성공과 욕망을 쫓다가도 결국에는 쉴 수 있는 품을 그리워하게 마련이다.  

- '너는 모르겠지만', '내 말 좀 들어봐' 하며 상대의 말을 자르고 껴들지 않는다. 오히려 '그랬구나', '더 말해 봐', '네 생각은 어때'라고 하면서 상대방의 입을 더 열게 만든다.

- 말하기 실력이 부족해서 무조건 듣기만 하는 게 아니다. '그래, 너는 떠들어라' 식의 무시하기도 아니다. 사람마다 가지고 있는 '다름'과 '특별함'을 이해하고 있기에, 말 자체를 평가하거나 상대방의 말하기 실력을 비난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상대방의 불안함을 낮추고 마음을 열게 만든다. 그래서 사람들은 말 그릇이 큰 사람과 대화할 때 편안함을 느낀다.

- 이런 사람들은 말 때문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 말과 사람을 분리해서 바라볼 수 있기 때문에 상대방이 아무리 날카로운 말로 자신의 마음을 쑤셔대도 그것 때문에 진정한 자신의 모습을 의심하지 않는다. '네가 나를 비난하거나 원망한다고 해서 내가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지', '너는 말로써 내 모습에 상처를 낼 수 없어'라고 생각한다. 말과 진심을 일치시키려고 노력하지만, 궁극적으로 말은 수단이지 본질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타인의 분노에 휩쓸려 대항하지도 않고, 설령 말에 넘어지는 순간이 오더라도 순간의 감정을 조절할 줄 안다. 상대방에게 쉽게 충고하지도 않는다. 감정을 폭발시키는 대신 말보다 더 중요한 것들, 그 말속에 숨어 있는 상대방의 감정과 배경과 메시지들을 찾아낸다. 마음속에 채워진 말들이 서로 충돌하지 않고 구역별로 정리가 잘되어 있기 때문에 작은 일에 바르르 끓어 넘치지 않는다. 

- 한번 들어온 말들을 쉽게 흘리지도 않는다. '이건 비밀인데 말이야', '아무한테도 말하지 마', '너만 알고 있어'와 같은 가벼운 약속은 하지 않는다. 말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제대로 알고 있다.

- 그러나 분명하게 말해야 할 상황에서는 물러서지 않는다. 정갈하고 정확하게 자신의 메시지를 전달한다. 딱 필요한 순간에, 꽉 찬 말이 나온다. 그것은 세련된 말과는 다르다. 기교가 아니라 기세에 가깝다. 약간 촌스러울지 몰라도 결코 경박하지 않고, 화려하지 않아도 안정되어 있다. 그러니 자연스레 귀를 기울이게 된다. '끌리는 말'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 반대로 말 그릇이 작은 사람들은 조급하고 틈이 없어서 다른 사람들의 말을 차분하게 듣질 못한다. 자신이 하고 싶은 말로만 말 그릇을 꽉 채운다. 상대방의 말을 가로채고, 과장된 말을 사용하고, 두루뭉술한 말속에 의중을 숨긴다. 그래서 화려하고 세련된 말솜씨에 끌렸던 사람들도 대화가 길어질수록 공허함을 느끼며 돌아선다. 
 
- "그런데도 둘째를 쉽게 포기하지 못하는 이유는 뭐야?"
정해진 대답 대신 오히려 내게 질문을 던졌다. 먼저 가본 길인데도 아는 척하며 나서지 않고 스스로 생각을 정리할 수 있게 도와주었다.

- 사람들은 딱 자신의 경험만큼 조언해 준다. 도와주고자 하는 마음은 진심이지만 그것은 사실 그들의 말일 때가 많다. 상대방의 마음속에 숨겨져 있는 대답을 함께 찾아보는 대신 스스로 옳다고 생각하는 자신의 말을 해주고 싶어 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은, 나의 안쪽 어딘가에서 떠돌고 있는 말을 할 수 있도록 기다려주는 사람을 만났을 때 열리게 된다. 인생의 중요한 선택을 스스로 검토할 수 있도록 자리를 만들어준 사람, 자연스럽게 깨닫게 될 때까지 따뜻하고 세밀한 기술로 배려해 준 사람을 만났을 때 힘을 얻는다. 

- 커피 받침에는 고깃국을 담을 수 없다. 깊이가 없는 그릇 안에 진한 맛을 내는 말을 담아두기는 어렵다. '말솜씨'는 여전히 탐나는 능력이지만, 나이가 들고 관계가 복잡해질수록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깊이 있는 말이지 듣기 좋은 말이 아니다. 말로 영향력을 끼치려고 하기 전에, 말 그릇 속에 사람을 담는 법을 배워야 한다.

- 이런 도전을 받을 때마다 스스로에게도 되묻게 된다. 말을 건강하게 변화시켜야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내달려도 부족한 시간에 멈추어 스스로를 탐색하고, 말 그릇을 다듬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 얼마 전 <어떻게 죽을 것인가?>라는 책을 다시 꺼내 읽었다. 저자는 철학자 조시아 오리스의 말을 빌려 이런 말을 남겼다.
[그는 왜 우리가 단순히 존재하기만 하는 것 - 안전한 환경에서 단순히 의식주만 제공받는 것-은 공허하고 의미가 없다고 느끼는지 알고 싶었다. (중략) 그는 우리가 스스로를 넘어서는 대의를 추구하기 때문이라고 믿었다. 그것을 인간 본연의 욕구로 보았다. 그 대의는 큰 것일 수도 있고, 작은 것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어떤 대의에 가치를 부여하고 그것을 위해 희생할 만하다고 느낄 때 우리는 자신의 삶에서 의미를 찾게 된다는 점이다. 로이스 교수는 자신을 넘어선 대의를 위해 헌신하는 것을 충성심이라고 얘기했다. (중략) 이 충성심은 우리처럼 평범한 존재가 겪는 역설적인 상황을 설명해 준다.] 

- 이 문장에서 나는 우리가 말 그릇을 다듬어야 하는 궁극적인 이유를 발견했다. 우리에게는 분명히 더 크고 깊은 것에 대한 충성심이 있다. 배부르고 등 따뜻하면 족하다는 개인주의의 다른 쪽에는 언제라도 가치 있는 삶을 위해 수고할 준비가 되어 있는 또 다른 내가 있다. 가치의 기준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분명 그것은 자신을 넘어서는 행동이다. 


- '사람들을 성장시키고 그들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고 싶다. 사람과 세상에 이로움을 남기는 존재가 되고 싶다. 그것을 통해 내 한계에 도전하고 싶고, 위로받고 싶고, 나의 의미를 확인하고 싶다.' 
누구에게나 이러한 소망이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누가 뭐라고 하지 않아도 어느 순간 스스로를 돌아보고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고 싶어 한다. 

- 에릭 에릭슨(Erik Erikson)도 이와 비슷한 말을 했다. 인간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계단을 오르듯이 일련의 단계를 거치는데 각 단계에는 해결해야 하는 중요한 과제들이 있고, 이를 뛰어넘을 때마다 삶에 필요한 능력을 하나씩 획득하게 된다고 말이다. 그런데 성인 중기부터 60세에 이르는 기간, 즉 각각의 성장 단계 중 가장 긴 시간 동안 가장 중요하게 대두되는 개념이 하나 있는데, 바로 '생산성'이다. 여기서 말하는 생산성이란 '나 아닌 다른 사람, 다음 세대를 위해 가치 있는 역할을 하는 것'을 뜻한다. 

- 맘껏 울고 난 아들은 마침내 속이 개운해졌는지 눈물을  닦더니 사라진 조각들을 다시 찾게 도와 달라고 말했다. 아들에게서 진짜 감정을 인지하고 해소한 사람의 시원함 같은 게 느껴졌다. 그날 아들은 속상함이라는 감정을 배웠다. 다양한 감정의 목록 중에서 '속상함'이라는 감정과 그 감정을 다루는 방식을 배웠다. 아마 다음에 또 비슷한 상황이 생긴다면 그때는 벌컥 화를 내기보다는 속상하다고 말하고 더 빨리 위로받고 감정을 추스르게 될 것이다. 

- 다시 신나게 아빠와 레고를 조립하는 아이를 보면서 생각했다. 아이들은 자신의 감정을 잘 모른다. 그것이 속상함인지, 당황스러움인지, 슬픔인지, 놀람인지 그 정체를 배운 적이 없다. 그저 낯선 상황, 무엇인가 잘못되었다는 판단이 들면 반사적으로 아무 감정이나 골라잡아 내지른다. 물론 그 감정을 어느 정도로 표현해야 하는지도 알지 못한다. 아이는 웃음이나 울음 같은 본능적 감정에 더 익숙하기 때문에, 급한 대로 그중 하나를 선택해서 힘껏 내질러 버린다. 웃을 만한 상황은 아닌 것 같으니 소리를 지르며 운다. 

- 다행스럽게도 아이들에게는 '아이니까'라는 너그러운 해설이 허용된다. 다소 부적절하게 감정을 표현했다 하더라도 지적보다는 다독임을 받는다. '잘 몰라서 그런 거지', '아직 어려서 그래'라며 감정의 부적응자 대열에서 제외시킨다. 그렇다고 해도 만약 엄마가 "뚝! 울지 마! 네가 조심하지 않고 어디서 울어!" 하고 다그치면 아이는 상황에 맞는 감정을 배울 수 없게 된다. 그래서 다음에 비슷한 상황이 와도 제대로 말하지 못하고 감정을 삼켜 버리거나 또다시 악을 쓰며 화를 내게 된다. 그럼 엄마는 아이를 더 다그칠 테고, 아이는 그런 엄마를 보면서 '화'라는 감정에 대한 잘못된 해석을 가지게 된다. '역시 화는 나쁜 거야' 또는 '역시 마음에 들지 않을 때는 강하게 화를 내야 해, 엄마처럼' 하면서 부적절한 감정을 강화시킨다. 그리고 갈수록 엄마와 아이의 대화는 엉망이 되어버린다. 

- 물론 어른들에게는 이런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다. 다 컸다고 봐주는 구석이 없다. 너무 아파서 화를 내는 사람에게 "넌 지금 슬퍼서 그런 거야. 겁내지 말고 충분히 슬퍼해도 괜찮아"라고 말해주지 않는다. 그저 '성격이 이상한 사람' '가까이하면 피곤한 사람'으로 취급할 뿐이다.

- 우리는 실수해서 속상한 사람에게 "그러니 내가 뭐라고 했니, 진작 좀 준비하라고 했지!"라고 말하면서 감정을 숨기도록 조장하고, 연인과 헤어져서 슬퍼하는 사람에게 "남자가 걔 밖에 없냐! 당장 소개팅 하자!"라며 감정을 덮어두도록 부추긴다. 지금 이 순간의 감정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느끼고, 숨겨진 의미를 해석하고, 올바르게 다루도록 연습할 기회를 박탈해버리고 만다.

- 감정을 연구하는 폴 에크만(paul Ekman)은 인간의 감정체계는 긍정적인 감정은 최대화하고 부정적인 감정은 최소화하는 행동으로 우리를 이끌어 간다고 했다. 기본적으로 인간은 고통을 피하고 싶은 동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좋지 않음'에 대해서는 모른 척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속상함, 상실감, 수치심과 같은 부담스러운 감정들도 다 존재하는 이유가 있다. 그 이유에 걸맞게 대우해주어야 한다. 그것으로부터 도망가거나 대항해서는 안 된다. '그래, 난 지금 슬픈 거야'라고 감정 자체를 인정하고 '내 얘기를 들어줘' 하면서 공감의 방식으로 감정을 해소해 나가야 한다.

- 감정으로부터 도망가기 시작하면 외로워지고 억울해진다. '이게 아닌데', '무엇인가 잘못되었어' 하는 찝찝함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의도하지 않은 쪽으로 말을 하기 시작한다. 잘못 선택한 감정이라도 일단 들어선 길이기에 다시 돌아오지 못하고 제대로 된 감정과는 점점 멀어진다.  

- 적극적으로 해결해보려는 의지를 스스로 꺾고, 주변의 관심과 위로를 기다리면서 삶을 소비한다. '화병'과 '우울증'이야말로 감정에 서툰 사람들이 자주 걸리는 덫이다. 자신의 감정과 어울려 살지 못하면 자신과 대화하는 것은 물론, 다른 사람들과 대화하고 어울리는 것에도 서툴 수밖에 없다. 감정을 정확하게 알지 못하니 엉뚱한 곳에서 감정이 넘치고 말이 샌다.

 

- 얼마 전 함께 대화를 나누었던 회사원도 그랬다. 
"후배 한 놈 때문에 아주 죽겠습니다. 후배라고 처음 들어와서 좀 키워보려고 공을 들였거든요. 모르는 것도 하나하나 일러주고, 실수해도 눈감아주면서 기회를 여러 번 줬는데. 입사한 지가 언제인데 아직도 제대로 일을 못해요. 실력이 늘 만도 한데 당최 나아지질 않아요. 제가 언제까지 뒤를 봐줘야 하냐고요!"
그는 화가 많이 나 있었다. 얼마 전에는 후배에게 "도대체 입사한 지가 언제인데 이것밖에 못하냐! 다른 일을 알아봐야 하는 것 아니냐"고 말해버렸다고 한다. 순간적으로 감정조절을 못한 것은 맞지만 너무 화가 나서 참을 수가 없었다고 털어놓았다.

 

- 일단 나는 그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다. 
"그때 후배를 보면서 어떤 감정을 느끼셨나요?"
"화가 나죠! 참을 수가 없더라고요."
"네, 그럼 화를 내면서 얻고 싶으셨던 것은 무엇이었나요?"
"얻고 싶은 것이요? 음... 후배가 긴장도 좀 하고, 정신 차리면서 일하기를 바라죠."
"화내는 선배를 보면서 후배는 무엇을 배웠을까요?"
"네? 글쎄요. 녀석도 한다고 하는 건데 그런 말을 들으니 서운하긴 했겠죠..."

 

- 나는 얼핏 보면 '화'로 보이는 감정도 원래는 화가 아니었을 수도 있다고 말해주었다. 감정은 미묘하게 원래의 색을 바꾸기 때문에 자신의 진짜 감정을 알아차리려면, 처음에 가졌던 기대가 무엇인지를 따져보아야 한다.
나는 그에게 상대방이 오해하지 않게 만들려면, 먼저 자신의 '오리지널' 감정을 찾아야 한다고 설명했다.

 

- 잠시 후 그가 입을 열었다.
"음. 그럼 제 오리지널 감정은 실망감이었던 것 같네요. 첫 후배기도 하고... 충분히 해줄 거라고 믿었는데 그렇지 못하니 실망한 거죠."
"실망이 화로 둔갑해 버렸네요."

- '실망해서 화가 난 것 아니냐'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실망과 화는 전혀 다른 감정이다. 실망이라고 생각하면 '너에 대한 믿음과 앞으로의 기대'에 대해 함께 말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기지만, 화라고 생각하면 '너 때문에 생긴 분노'만 남겨질 가능성이 높다. 결국 상대방에게 감정을 표현하는 것은 '그것을 통해서 얻고 싶은 게' 있기 때문인데, 화의 목적은 상대방을 물러서게 하고 웅크리게 만드는 데 있다. 선배가 화를 내면서 말하면 후배는 속뜻을 헤아리기는커녕 야속하다며 화를 낸 사람을 원망하게 된다. 결국 원하지 않은 방향으로 대화가 흘러가 버린다. 

- 이것은 감정이 원했던 게 아니다. '감정'은 당신을 해치려고 온 도둑이 아니라 도와주기 위해 찾아온 친구다. 당신의 말이 가야 할 방향을 알려주는 길잡이다. 그러니 감정이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가를 제대로 보아야 제대로 말할 수 있게 된다.

- 매일 감정에 목줄을 달고 살아갈 수는 없지만, 어떤 이유로든 감정이 삐걱댄다고 느낄 때는 총체적인 점검이 필요하다. 감정은 '찰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몇 개의 단계를 거쳐 나타나고 사라진다. 감정에 끌려가지 않고 주인 노릇을 하기 위해서는 이것을 하나의 온전한 프로세스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제대로 알아야 내 것처럼 사용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 [출현 - 자각 - 보유 - 표현 - 완결]
감정은 '출현-자각-보유-표현-완결'이라는 다섯 개의 단계를 거쳐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지금부터 우리가 할 일은 각 단계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감정이 우리에게 기대하는 반응은 무엇인지 함께 살펴보는 것이다.
 
- '출현' : 나는 어떻게 감정을 느끼는가?
출현이란, 감정이 우리에게 보내는 신호이자 그에 따른 몸의 반응이다. 어떤 자극이 주어지면 뇌가 그것의 정체를 알아내고 호불호를 판단하기 이전에 몸이 먼저 반응한다. 그리고 그 반응은 심장의 두근거림, 손 떨림, 동공의 확장, 체온의 상승. 얼굴의 화끈거림, 몸의 경련, 가슴의 조임, 위장의 쓰림 등 다양한 방식으로 나타난다. 만약 이 몸의 신호를 잘 알아채는 사람이라면 감정에 더 예민하게 반응할 수 있다. 그러나 요즘 사람들은 외부의 소음과 자극에 반응하느라 몸이 보내는 신호에 예민하지 못하다. 카페인과 니코틴, 설탕과 알코올에 중독된 상태라면 몸의 소리를 들을 길이 없다. 몸은 신체적 기능을 담당할 뿐 아니라 감정의 신호를 받아들이는 통로이기도 하므로 몸이 막혀 있으면 진짜 감정에 닿는 게 어려워진다. 

- 그럴 때는 명상이나 요가를 통해 몸이 보내는 신호에 귀를 기울이는 훈련을 하면 좋다. '바쁘다'는 이유로 무시했던 몸의 감각들을 살리기 위해 '호흡', '땀', '체온 변화', '심장 소리', '혈류의 움직임' 등에 집중해 보자. 머리로 생각하는 시간 대신 몸을 느껴보는 시간, 감각을 바라보는 시간, 몸의 변화를 찾아보는 시간을 통해 온몸을 관통하는 자극들을 의식해 보자. 몸은 우리에게 조용한 방식으로 말을 건다. 그래서 귀를 기울여야 그 소리를 들을 수 있다. 감정과 어울리기 위한 첫걸음은 당신의 몸이 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 것, 하루 중에 잠시라도 몸에 집중하며 미세한 신호들을 감지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 '자각' : 지금 떠오르는 감정의 이름은 무엇인가? 

- "저는 직장 개념 자체가 달라졌다고 생각해요. 이제 한 곳에 목을 매는 시대는 아니잖아요. 그러니 자기를 계발하고 관리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끊임없이 공부하면서 몸값을 올리기 위한 준비를 해야죠." 

 

- 네 명은 모두 한 기업에서 일하고 있는 경력이 비슷한 또래 집단이다. 그러나 직장생활을 잘하기 위한 공식은 모두 달랐다. 첫 번째 사람은 '관계'를 강조했다. 그에게는 사람을 남기는 게 중요한 과제로 보인다. 두 번째 사람은 '실력'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일을 못하는 것은 민폐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했다. 세 번째 사람은 '태도'를 꼽았다. 성실하고 겸손한 자세 없이는 큰일을 이루어낼 수 없다고 말했다. 마지막 사람은 '자기 계발'을 강조했다. 변화 속에서 살아남는 생존자가 되기 위해서는 공부만이 살길이라고 했다.

- 네 사람이 이렇게 같은 질문에도 다른 반응을 보이는 이유는, 자신만의 관점이나 공식을 만들어낸 자신만의 사연이 모두 다르기 때문이다. 인간관계에 치여서 지독하게 힘들었거나, 실력이 없는 동료를 만나서 죽도록 고생해 봤거나, 태도가 좋지 못한 누군가 때문에 마음고생을 했거나, 회사에 충성하다 배신당하는 ... 

- 무시란 '네가 그러니까 이 모양이지', '네가 알아들을 수나 있겠니' 하고 생각하면서 더 이상의 대화를 진전시키지 않는 것을 말한다. 속으로는 '두고 봐라, 누구 말이 맞는지' 하면서. 반면에 강요하기란 나의 생각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무조건 밀어붙이는 방식이다. 상대방에게 어떤 사정이 있는지, 내 의견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지 알아보는 것은 안중에도 없다. 오로지 내 의견이 관철되는가만 중요할 뿐이다. 나의 말이 그를 굴복시킬 수 있는지에만 관심이 있다. 

- 반면 말 그릇이 넉넉한 사람들은 한 사람의 공식 안에는 그들만의 사정이 있음을 알고 있다. 각각의 공식에 관심을 보이고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아보려고 노력한다. 내 생각과 다른 생각을 들을 때도 쉽게 대화를 포기하지 않고, 상대의 공식을 먼저 찾으려고 노력한다. 그래서 그들은, 한 사람의 공식 속에는 숨겨진 배경과 충분한 이유가 있게 마련이다. 그 삶을 직접 살아보지 않고 공식의 가치를 논할 수는 없다. 따라서 말 그릇이 큰 사람들은 '좁힐 수 없는 차이'를 자연 ...  

- 후배가 인사를 하지 않았다고 크게 화를 내는 사람이 있다고 해보자. 미처 자신을 못 봤을 수도 있고, 눈이 나쁜 것일 수도 있는데 앞뒤 따지지 않고 '나를 무시해?' 하고 화를 낸다면 아마 '거절'에 대한 잘못된 공식이 작용하기 때문일 것이다. 자신의 보고서가 거절당했을 때 '이깟 회사 때려치워야지' 하고 크게 화를 내거나 절망하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하나의 사건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나를 거절하는 것'으로 받아들여 필요 이상으로 감정을 분출하면, 자신도 상대방도 상처를 입게 된다.

- 사람들과 어울리려는 노력은 하지 않으면서 나만 빼고 간식 먹은 일, 술자리에 부르지 않은 일들만 기억하며 '역시 나를 좋아하지 않아'라는 공식을 끌어안고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다. 그럴수록 관계는 멀어지고 자신은 점점 더 고립된다.

- 이렇게 비상식적인 공식에 따라 행동하는 사람이 주변에 있다면, 당신은 그와 싸울 수도 있고 설득할 수도 있으며 무시할 수도 있다. 그것은 선택의 문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살면서 이런 사람들과의 만남을 피할 수 없다는 데 있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우리는 누구나 상대적으로 비정상적이기 때문이다.
 

- 개인의 성향차이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물론 두 사람은 자신의 주장만 반복할 뿐 상대방의 공식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들의 대화에는 질문이 없었다. 아마도 커피숍에 들어올 때까지 공유했을, '함께 노력해서 아들의 사회성을 키워보자'는 마음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결국 그들의 대화는 비난과 방어로 끝을 맺었다. 그들은 둘째를 위한 방법을 찾지도 못하고 자식농사가 얼마나 힘든지 서로의 마음을 위로하지도 못한 채 그저 '말이 안 통하는 저 인간 때문에 그동안 얼마나 외로웠던가!'만 확인하고 말았다. 

- 상대를 '적'으로 만들고 싶다면 나의 공식만 고집하면 된다. 반대로 성숙한 대화를 하고 싶다면 사람마다 가진 공식의 차이를 받아들여야 한다. 차이를 '문제'로 바라보지 않고 같이 풀어야 할 '과제'로 바라볼 때, 당신의 말 그릇은 흔들리지 않는다.
 
- 일단 내가 가진 공식을 발견하는 연습부터 해야 한다. 당신의 공식도 누군가에게는 비정상적인 것일지도 모른다. 어떤 공식들이 나의 말을 주도하고 있는지, 어떤 한계를 만들고 부작용을 남기는지 알아봐야 한다. 그렇게 나의 공식을 알게 되면 그 후에는 자연스럽게 타인의 공식을 알아볼 수 있는 능력이 생기게 된다.

- 공식을 찾는다는 것은,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기준들을 인지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내가 지키고 싶은 것, 해내고 싶은 것, 참을 수 없는 것, 모순을 가진 것, 넘어서야 하는 것들을 찾다 보면 내가 지닌 공식들을 어렴풋이 알 수 있게 된다.

일단 머릿속의 생각들을 문장으로 만들어 가만히 바라보자.

- 말은 대를 이어 흘러가고 결국 그녀의 아이들도 강한 어머니 때문에 외로워졌다.
그러나 놀랍게도 시간이 흐를수록 그녀는 변화되는 모습을 보였다. 처음으로 아이들을 바라보는 자신의 눈빛, 표정, 말투를 명확하게 인식하게 되면서 스스로 깨닫게 된 것이다. 

- 말의 대물림은 그녀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엄마의 짜증스러운 잔소리를 당해낼 사람은 없어. 정말 지겨워. 나는 절대로 저렇게 안 될 거야.'
늘 아빠와 싸우는 엄마를 보면서 이렇게 다짐한 여성이 결혼한 후에 엄마를 닮아가는 자신을 깨닫게 되는 경우도 있다. 말의 유전이 관계의 반복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나는 아빠처럼 무뚝뚝한 가장이 되지 않을 거야' 하면서도 결국 자녀를 낳은 후에 어떻게 말하고 상대해야 할지 몰라 굳어버리는 사람들도 있다. 이것이 바로 혀끝에 붙어버린 습관이다. 공기처럼 호흡처럼 익숙해져 버린 말 습관.

- 심리학자 알버트 반두라(Albert Bandura)는 '우리는 상황 속에서 많은 것들을 모방함으로써 학습한다'고 말했다. 단지 보는 것만으로도 수많은 정보를 획득하게 된다는 뜻이다. 이 과정은 무시행학습(no trial learning), 즉 직접 해보지 않고도 단지 관찰하는 것만으로 동일한 방식을 획득하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게다가 그 행동이 어떤 결과를 일으키는지 지켜보고, 만약 어떤 보상을 받거나 기대한 결과를 일으키면 그 특정 행동이 더 강화되어 마음속에 각인되는데, 이를 대리강화(vicarious reinforcement)라고 한다. 

- 말도 동일한 원리를 따른다. 자주 듣고 보고 배운 말은 기억 속에 저장되고, 가장 익숙한 말로 튀어나온다. 특히 자신의 정체성과 주관이 생기기 전에 저장된 말이라면 필요한 것과 필요하지 않은 것을 거르지 못한 채 그대로 내면에 자리 잡는다.

 

- 말은 대처 전략이기도 하다. 아이들은 어른들을 통해서 세상과 사람에 대한 대응전략을 배운다. '아, 이럴 때는 이렇게 말하면 되는구나', ‘이런 상황에서는 이렇게 말하면 안 되는구나'와 같은 것을 배우면서 옳고 그름을 구분하지 못한 채 하나의 규범으로 받아들인다. 좋아하는 노래가 아닌데도 엄마가 설거지를 하면서 흥얼거리던 노래를 어느 날 똑같이 읊조리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것처럼. 

- 말의 영향력은 부모에게서만 물려받는 것은 아니다. 함께 일했던 상사의 말을 닮아가는 사람들도 꽤 있다. 선배의 말을 모방하고 하나의 대처방식으로 삼는 것이다. 후배들이 실수했을 때, 결과가 마음에 들지 않을 때 자신도 모르게 예전에 들었던 대로 재생한다. 사실 사람과 상황에 따라 그때그때 '말하는 방식'이 달라져야 하는데, 고정된 패턴대로만 말하는 사람은 다른 말이 필요한 상황에서도 앵무새처럼 같은 말만 반복한다. 위로가 필요할 때 충고하고, 격려가 필요할 때 비난하고 만다. 

- 이런 사람들의 가장 큰 어려움은 자신이 어떤 말 습관을 사용하고 있는지, 그것이 어디로부터 기인한 것인지 자각하지 못하는 데 있다. 말을 많이 하면서도 자신의 말을 되돌아보지 않는다. 그래서 말실수를 반복한다. 회의할 때, 보고하고 보고받을 때, 회식자리에서 원해서 하는 말과 익숙해서 하는 말을 구분하지 못한다. 어떤 말이 상대를 혼란스럽게 하는지, 그것 말고 필요한 말이 무엇인지 눈치채지 못한다. 

- 당신에게도 지금까지 의식하지 못한 말 습관이 있는가? 그것은 무엇인가?

- "솔직하게 말해줘서 고마워요. 이런 말까지 꺼내기 조심스러웠을 텐데 왜 마음을 바꾸게 되었는지 말해줄 수 있을까요?"
그러자 그녀는 '안전하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대화 중 함부로 말을 가로채지 않고, 다른 의견이 있더라도 성급하게 조언하지 않았던 것이 차곡차곡 쌓여 나에 대한 믿음이 생겼다고.
'솔직하게 말해도 될까. 비밀을 지켜준다고는 하지만 이 사람도 팀장이지 않은가. 팀장끼리는 만날 일도 많을 텐데 어떤 식으로든 전해지지 않을까.'
수많은 의심과 불안이 잦아들고 나서야 그녀는 숨겨진 진심을 내게 꺼내 보였다.
만약 그녀를 돕고 싶은 마음에 내 말만 바쁘게 했다면, 나만 신나서 대화를 이끌고 갔다면 우리는 끝날 때까지 가짜 목표를 가지고 씨름했을 것이다. 의미 없는 과제를 하느라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했을 것이다. 

- 사람들은 안전한 사람에게만 속마음을 열어 보인다. 어떤 이야기를 해도 아는 척하며 평가하지 않을 사람, 어떤 이야기를 꺼내도 성급히 결론짓지 않을 사람에게만 이야기를 나누어 준다. 

- 많은 사람들이 대화 중에 눈치를 보느라 진실을 은폐한다. 특히 아이들이 그렇다.
부부 사이에도 정작 풀어내야 할 속내는 꺼내지 않고 세금이나 경조사 이야기만 늘어놓는다. 친구들 사이에서도 서로 듣기 좋은 말만 주고받는다. 
"네, 좋은 생각이에요." (별로라고 해도 어차피 할 거잖아요.)
"어쩜 그렇게 완벽하세요." (그래야 좋아하잖아요.)
"네, 저는 괜찮아요." (안 괜찮다고 하면 또 잔소리할 거잖아요.)

 

- 정말 좋을까? 진짜 괜찮은 걸까? 상대방의 말을 자꾸 가로채면 그들도 듣기 좋은 말, 오가기 좋은 말, 그럭저럭 때울 수 있는 말들로 시간을 채운다. 결국 들어야 하는 말을 듣지 못하게 된다. 그래서 윗사람일수록 바닥에 가라앉은 이야기는 눈치채지 못하는 것이다.
나는 모르고, 상대방만 알고 있는 진짜가 있다. 그런 말을 듣고 싶다면 자신의 말을 줄이고, 상대방의 말을 들어야 한다.

- 그리고 그 과정에서 가장 먼저 보듬고 이해해야 할 사람은 바로 자기 자신이다. 말과 사람에 대한 태도를 정비하는 작업은 자기 성찰과 자기 수용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사람들과 연결되려면 일단 나 자신과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 흔들리지 않는 대화능력을 갖추려면 먼저 자신의 내면과 이야기를 나눠야 한다. 나에 대한 다양한 증거들을 이해하고 숨기지 않고 받아들이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내면의 안정감을 얻게 되고, 그때야말로 안정된 말이 나온다. 

-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은 사람들은 말을 두루뭉술하게 한다. 마음과 대면할 용기가 없기 때문이다. 감정 다루기를 어려워하고, 타인의 감정에 대해 필요 이상으로 민감하기 때문에 애매하게 말하고, 돌려 말한다. 특정한 감정을 억누르거나 과도하게 부풀리기 때문에 한쪽으로 치우친 관점을 가지기 쉽다.

- '억울함'에 치우쳐 있는 사람들은 작은 일에도 '왜 나만 이러는 거야' 하는 심정이 된다. 자신을 향한 안쓰러움과 연민이 결국 세상에 대한 부정과 왜곡을 만들어내기 때문에 다른 사람과의 깊이 있는 교류를 방해한다.

- 자신을 껴안지 못한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상호작용은 지속되기 어렵다. 자신만으로 충분치 않기 때문에 서로에게 지나친 기대를 하고 또 실망하기를 반복한다. 상대방의 반응에 따라 기분이 좌지우지되고 말과 행동을 결정하지만 현실은 늘 불안하고 불만족스럽다. 그래서 때로는 오히려 사람을 교묘하게 조정하거나 이용하려고 든다.

- 해결되지 못한 채 마음속에 남아 있는 문제들은 자꾸 현재로 튀어나와 비슷한 문제들을 만든다. 문제를 해결하려면 그것을 똑바로 응시해야 한다. 그것이 두렵다고 주변만 서성이다 보면 상처는 깊어진다. 만족스럽지 않은 현실이 싫어서 자꾸 누군가를 탓하지만, 그럴수록 자신에 대한 실망과 미움이 자란다. 자신을 알고 이해하고 용서하고, 화해하며 격려하는 연습이 안된 사람이 다른 사람에 대한 너그러운 마음을 가지기란 어렵다.

- 잘 나가는 친구나 선배들을 볼 때마다 어릴 적부터 비교당했던 형 생각이 나서 마음이 불편해진다는 사람, 엄마와 대화할 때마다 나를 외롭게 방치해 두던 예전 기억이 떠올라서 화가 난다는 사람, 배신하고 떠난 누군가 때문에 새롭게 만난 이들에게 마음을 열기 어렵다는 사람 모두 상처 입었을 때 자기를 안아주고 다독이는 과정이 충분치 않았기 때문이다. 불편한 현실을 마주하고 그 속에서 감정을 분리하고 털어버려야 하는데  과정을 ... 

- 이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거리다. 너무 붙어 있지도, 그렇다고 동떨어져 있지도 않은 적당한 거리 말이다. '따로 또 같이'라고 할까.

- 경계가 애매하면 필요 이상으로 서로에게 관여하게 된다. 지나치게 얽혀 있어서 의무감과 피곤함을 느끼는 사이가 된다. 특히 "NO"라고 말할 수 없게 되면 사적인 영역이 애매해진다. 시간이 갈수록 누군가는 고마운 일을 당연히 여기게 되고, 미안함은 점점 무뎌진다. 잘해도 좋은 소리 못 듣고, 조금만 소홀해지면 욕을 먹는 사이가 되는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끊을 수 없는 족쇄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 반대로 경계가 경직되면 서로를 외롭게 만든다. 상대방을 향한 관심을 거두고, 서로를 고립시킨다.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의 심리 상태이기 때문에 힘들 때 위로받을 수 없고, 도움이 필요해도 협력하지 않는다. 물리적 거리가 가깝다고 해도 마음이 닿지 않으니 외로울 수밖에 없다. 냉랭함 속에서 외로움을 키우는 관계. 뒤를 돌아보고 서로를 보살피면 될 텐데, 밖에서만 애정과 관심의 욕구를 채우려 든다.

-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명료한 경계선이 살아 있는 관계다. 내가 지켜야 하는 거리, 네가 다가올 수 있는 거리가 명확한 상태. 그래서 기꺼이 하나가 되기도 하고, 필요하면 다른 방식으로 각자의 필요와 욕구를 충족시키는 관계. 그러한 건강한 거리감을 존중하면서 상대방에게 무리한 요구를 하지 않는 관계 말이다.

- 사람은 평생 동안 두 가지 힘의 균형을 맞추면서 살아가야 한다. 그것은 개별성(individuality)과 연합성(togetherness)이다. <부부 다시 사랑하다>의 저자이자 상담치료사인 린다 캐럴(Linda Carroll)은 인간에게 필요한 두 가지의 영혼을 두고 "결합에 능한 영혼"과 거리 두기에 능한 영혼이라고 표현했다. 삶이란 이 두 개의 영혼을 보살피면서 함께 가는 여행이다. 자기 안에서 평화를 이루어야 상대와 화합할 수 있고, 적당한 거리를 지켜야 내면에 안정감이 생기고 타인과의 관계에서도 활력을 유지할 수 있다.

- 경계선이 명확한 관계는 개별성과 연합성을 자유롭게 오갈 수 있다. 혼자도 좋고, 둘도 좋다. 타인과 가깝게 지내면서도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고, 기쁨과 슬픔을 공유하면서도 감정을 짊어지지 않는다. 할 수 있는 만큼의 도움을 주려고 애쓰되,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안다. 나를 향한 불만이 있을 때도 곧바로 비난하기보다는, 그 이유에 대해서 생각한다. 건강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상대방의 볼멘소리에 즉각적으로 상처를 입는 대신 한 걸음 물러서서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 "누구나 건강한 관계를 위해서는 경계가 필요하다."
이 법칙은 누군가를 위해 노력했던 것들이 어떤 마음에 의한 것이었는지를 돌아보게 한다. '너를 위한 거야'라면서 바닥까지 퍼주고, 혼자 기대하고 혼자 실망한 것은 아니었는지. 그래서 너무 빨리 지쳐버린 것은 아닌지, 아니면 가까워지려는 노력은 하지 않으면서 속상하다는 말만 쏟아낸 것은 아니었는지. 그래놓고 기대할 것이 없다며 너무 빨리 돌아서 버린 것은 아니었는지.

- 지나치게 붙어 있으면 형태가 일그러져 보이기 쉽고, 너무 멀리 있으면 자세하게 볼 수 없다. 부부든, 부모든, 선후배든, 친구든 서로가 맺고 있는 거리가 편안하고 자연스러운지 살펴야 한다. 내가 다가서는데 상대가 물러선다고 속상해하지 말자. 가장 최적의 위치를 지켜야 서로가 제대로 만날 수 있다. 그것을 존중해야 손을 놓지 않고 멀리 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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