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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레미 테일러] 사람이 날아다니고 물이 거꾸로 흐르는 곳 - 꿈 작업 Dream Work을 통한 무의식의 지혜 탐색

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2

by 일루젼 2025. 5. 17. 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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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제레미 테일러 / 이정규

출판 : 동연
출간 : 2009.07.14


       

           

'일상적인 꿈'이라는 표현이 있다.

당신은 이것이 어떤 의미라고 느꼈는가?

혹시 위화감을 느끼지는 않았는가?

 

'일상적인 꿈'.

평소 일상과 다름없는 현실적이고 소소한 내용의 꿈.

일상적으로 늘 꾸던 것과 비슷한 결의, 딱히 특이한 점이 없었던 꿈.

 

나는 보통 후자의 의미로 쓰는 편이지만, 전자와 후자 모두를 의미할 수 있다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꿈' 자체를 일상과 연결하는 것에 위화감을 느낀다는 건 알지 못했다. 

내게 '꿈'을 꾸고 기억한다는 건 매우 익숙한 일이었기 때문에. 

 

예전에 자각몽을 몇 차례 성공했던 적이 있다. 당시에는 무의식을 더 정화하고 시도하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해 중단했었는데, 슬슬 지금 정도면 다시 시작해 봐도 괜찮지 않을까 싶어진다. 이런 바람이 들 때 더 조심해야 하는데... 가벼운 운동과 취미 생활이 안정적으로 자리 잡으면 시도해 볼 생각이다.

 

이 책은 자각몽에 초점을 맞추기 보다 꿈 전반에 대한 저자의 체험과 이론을 풀어나가는 책이다. 꿈이 어떻게 원형과 연결될 수 있는지, 꿈에서의 체험이 현실에서는 어떤 영향력을 발휘하는지, 그 과정에서 동시성이나 텔레파시 같은 일들이 일어나기도 하는지 등등.

 

저자의 꿈 작업은, 설명을 읽어보면 스스로는 칼 융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고 하는데, 개인적으로 읽어본 다른 융파 꿈 작업자들의 것과는 조금 결이 다른 것 같다. 나는 이 쪽에 대해 깊게 아는 것이 아니므로 뭐라 더 말하기는 어렵지만... 꿈 자체보다는 신비주의 쪽에도 무게를 둔, 그러니까 린포체나 족첸 쪽의 꿈 수행이 약간 섞인 느낌이다.

 

안에서와 같이 밖에서도, 위에서와 같이 아래에서도.

변화는 언제나 양방향이다. 

 

여름, 여름, 여름.

올해는 유독 여름이 기다려진다. 

 

   


   

 


- 이 책을 한국의 독자들에게 소개하게 되어 대단히 기쁩니다. 동료이자 친구인 고혜경 박사가 제 첫 번째 책 <꿈으로 들어가 다시 살아나라 Dream Work: Techniques For Discovering The Creative Power In Dreams>를 훌륭하게 번역했고 그 책에 이어 두 번째 책도 나오게 되었습니다. 꿈에 담긴 다양한 의미를 깊이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기 바랍니다. 

- 한국은 과거와의 연결고리를 유지한 채 기술 발전을 이룩한 문화권들이 흔히 그러하듯, 꿈에 대한 오래되고 풍부한 관심의 전통이 있습니다. 한국인들은 어떻게 하면 서로 조화를 이루며 살 수 있을지, 또 우리 삶에서 가장 중요한 진실과 열망에 일치하는 삶을 살 수 있을지, 꿈에 숨겨진 의미를 찾기 위해 꿈을 해석해 왔습니다. 

- (한국처럼) 꿈을 나름대로 해석하는 전통이 있는 문화권에서 자란 사람들은 꿈이 그런 아이디어와 패턴에 맞게 나타난다는 걸 알게 됩니다. 그리고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전통적이고 문화적인 해석을 넘어 더 깊은 의미가 있다는 걸 알게 됩니다. 이런 더 넓은 수준의 의미를 통해 우리는 모든 사람이 (언어나 성, 문화에 관계없이) 더 큰 자기 자신과 다른 모든 사람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 유명한 스위스의 심리학자 칼 융은 개인적인 자기 이해와 공통의 언어나 문화를 넘어서는 수준에서의 꿈의 의미를 해석하기 위해 전 생애를 헌신했습니다. 융은 이를 '집단 무의식'(나중에는 '객관적 정신')이라고 불렀는데 제가 관심이 있는 부분도 바로 이 집단적이고 보편적인 수준에서 꿈이 갖는 의미입니다. 

- 우리는 내면에 있는 무의식의 본질과 창의적이고 파괴적인 힘에 대해 배워야 합니다. 꿈은,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얘기했듯, 무의식을 이해하는 왕도입니다. 융과 프로이트의 동료인 헝가리의 산도르 페렌치는 말년에 '꿈은 진화의 연습장'이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이들 말이 옳다고 믿습니다.

- 꿈은 아주 사적인 것부터 완전히 집단적인 것까지 다양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를 이해하고 꿈을 바라보면, 우리 개인의 삶을 발전시키는 데 좀 더 의식적이고 창의적인 관점에서, 적극적이고 책임감 있게 참여할 수 있습니다. 꿈은 아주 오래되고 또 새로운 방식으로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나아가 온 세상과 깊고 친밀하게 관계 맺도록 우리를 이끌어 줍니다.

 




- 자신의 행동이 아들에게 미치는 폐해를 머리로 이해하는 데 그치지 말고 제대로 자각해 실제로 행동을 바꾸게 하려는 것 같다. 
사실 여기서 정말 중요한 건 이 사람이 꿈이 전하는 메시지를 제대로 이해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이다. 꿈꾼 사람 본인이 꿈이 전하는 의미를 제대로 보지 못하면 꿈이 또는 다른 사람이 아무리 얘기해 봐야 소용없는 일이다. 그래서 꿈에 담긴 의미가 무엇인지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꿈꾼 사람뿐이다. 다른 사람들이 아무리 흥미롭고 쓸모 있는 이야기를 하더라도 최종적으로 꿈을 꾼 사람만이 꿈의 의미가 무엇인지 얘기할 수 있다. 

- 그렇다고 무의식 전반과 꿈에 관한 흥미롭고 중요한 이론들이 없다거나, 뛰어난 꿈 작업가와 상담가, 치료사들이 없다는 얘기는 아니다. 꿈에 담긴 다양한 의미 중 무엇이 옳은지 말할 수 있는 사람이 궁극적으로는 그 꿈을 꾼 사람밖에 없다는 뜻이다.

- 꿈에 담긴 의미가 분명해질 때 대개 말없이 '아하' 라는 느낌을 받게 된다. '뭔가 탁 튀어 오르는 느낌' 혹은 '짜릿한 느낌'과 같은 어떤 '감각변화'를 느끼게 되는데, 나는 이 '아하'가 기억의 기능이라고 믿는다. 그러니까 은유적으로 표현된 꿈의 의미는 꿈을 이해하려는 노력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거기 있던 것이다.  

- 꿈은 꿈꾸는 사람 개인의 건강 상태뿐 아니라 사회 전반의 건강상태도 나타낸다. 깨어 있을 때 사회를 어떻게 인식하느냐 하는 것은 우리가 내리는 결정이나 행동의 무의식적인 '배경'이 된다. 그처럼 사회의 건강 상태를 보여 주는 의미 층도 흔히 꿈의 배경에 녹아들어 있다. 이런 배경이 전면에 드러날 때는 바바라와 피터가 그랬던 것처럼 우리가 사회와 문화와 맺고 있는 관계에 뭔가가 크게 '엇나가' 있을 때이다.

- 꿈과 꿈꾸기에 관련된 또 다른 원형적인 측면에는 인류의 미래에 대한 중요한 약속이 담겨 있다. 우리의 타고난 창의력이 꿈에 반영되어 있기 때문이다. 창의성은 인류가 보편적으로 타고난 권리로 무의식 깊숙이에 근원을 두고 있다. 꿈은 깨어 있을 때 상상력과 창의적인 충동을 불러일으키는 데 중요한 매개이다. 이런 창의성을 깨어 있을 때의 삶이나 활동을 통해 극적이고 독창적으로 또 상징적으로 '재구성'할 수 있다. 특정한 과제나 자기표현 행위에서 창의적인 영감의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 사람들은 대부분 꿈이 주는 창조적인 영감이 예술가들의 작품 활동에나 적용된다고 생각한다. 꿈이 '예술적인' 영감의 원천이 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대중적인 이해로 꿈이 삶의 모든 측면에 대단한 창의적인 영감을 준다는 사실이 가려져 버렸다. 꿈을 통해 얻게 되는 원형적이고 창의적인 충동은 예술뿐 아니라 모든 인간 활동에 ... 

- 예를 들어,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Robert Lewis Stevenson이 쓴 소설과 이야기에는 꿈에서 일어난 일에서 영감을 받아 쓴 것이 많다. 특히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는 심리학적인 걸작으로 잘 알려져 있다. 모차르트와 베토벤을 포함한 많은 작곡가도 꿈에서 들은 음악을 활용했다고 한다. 타르티니 Tartini가 작곡한 유명한 <악마의 트릴 Devil's Trill>은 꿈에서 보고 들은 즉흥 연주를 악보에 옮겨 적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 낭만주의 문학을 공부한 사람이라면 새뮤얼 테일러 콜리지 Samuel Taylor Coleridge가 꿈에서 받은 영감을 그대로 받아 적은 것이 <쿠빌라 칸 Kubla Khan>이라는 시임을 알 것이다. 그 시가 미완으로 남은 까닭은 누군가의 방문으로 꿈이 끊겼기 때문이라고 한다. 콜리지가 불청객을 보내고 났을 땐, 흔히 그렇듯, 꿈에서 받은 영감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 이렇듯 예술 분야에서 꿈에서 영감을 받는 이야기는 잘 알려져 있다. 실제로 꿈에서 영감을 받아 천재적이고 혁신적인 발상으로 위대한 발명, 발견을 한 분야는 철학을 비롯해 물리, 건축, 농업, 전자공학과 동물학까지 다양하다.

- 19세기에 러시아계 귀족 드미트리 멘델레예프 Dmitrii Mendeleev는 물리계를 구성하는 기본 단위, 즉 모든 물질을 구성하는 기본 원소들을 연구하고 있었다. 복잡하고 무작위로 보이는 원소들의 성질과 모양을 전반적으로 설명하고 예측할 수 있는 원리를 찾고자 했으나 별 성과가 없었다. 멘델레예프는 (소련 연방 상류층에서 오늘날에도 그러하듯) 여름이면 흑해 연안의 오데사 외곽에 있는 시골별장에서 보냈다. 그의 대가족은 무더운 오후엔 함께 모여 실내악을 연주하며 보냈다. 하루는 핑계를 대고 가족음악회에서 빠져나온 멘델레예프는 옆방의 소파에서 잠시 눈을 붙인다. 잠을 자는 동안 옆방에서는 음악 소리가 흘러나온다. 멘델레예프는 꿈에서 갑자기 우주의 모든 기본 원소들이 반복되는 음악의 소절처럼 질서 정연하고 아름답게 배치되는 것을 '본다'. 흥분상태에서 잠이 깬 그는 우리가 화학시간에 늘 보는 주기율표의 첫 모델을 그린다. 

- 반세기가 지난 후 덴마크 출신의 닐스 보어 Niels Bohr는 멘델레예프가 고민하던 것과 본질적으로는 같은 문제를 연구하고 있었다. 멘델레예프의 직관에 기반을 둔 채 보어는 자기만의 방식으로 질문을 약간 다르게 던져 본다. 처음부터 기본 원소들이란 게 있는 이유가 뭘까, 원소들이 불연속적으로 존재하게 되는 물리적인 원리는 무엇일까? 예를 들어 주기율표에서 수소와 헬륨은 왜 빈 공간을 두고 떨어져 있는지, 둘 사이에 과도기 상태의 무언가가 존재하지 않는 건 왜일까? 당시에 알려진 모든 아이디어를 소진하고도 만족할 만한 새로운 가설을 찾지 못한 보어는 꿈꾼다.

 

- 꿈에서 그는 경마장에 와 있다. (다른 곳에서는 아이스크림을 먹는 꿈을 꾸고 있었다고도 전한다. 나는 이 소박함이 맘에 든다.) 그가 관심을 가진 경주가 곧 시작될 거라는 안내방송이 나온다. (내 생각엔 이 사람이 돈을 건 경주일 것 같다.) 방송을 듣고 경주를 보려고 관중석으로 넘어간다. 관중석에서 그는 말들이 달릴 경로가 하얀 칼슘 가루로 아주 진하게 표시되어 있는 걸 본다. 지나치게 하얗게 표시된 경주로를 보면서 그는 꿈에서 말들이 정해진 경로 안에서만 달려야 하는 규칙이 있음을 '기억한다'. 말들이 경로를 바꿀 순 있지만 그건 서로 부딪치지 않을 만큼 서로 충분히 떨어졌을 때만 가능하다. 그리고 어느 말이든 경로를 벗어나 하얀 가루를 날리면 당장 실격이다.

- 보어는 이때 엄청나게 흥분했다고 한다. 이 신기한 '경마 규칙'이 자신이 찾고 있던 원소들이 지닌 불연속적인 성질에 대한 '기본적인 물리 법칙들'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는 것을 그 순간 깨달은 것이다. 원자핵 주위를 도는 전자들의 궤도가 경마장에 '그어진' 선들만큼이나 엄격하고 임의적으로 정해져 있다는 사실을 터득한 것이다. 경마장의 말들처럼 전자들도 아무 궤도나 '자유롭게' 도는 것이 아니라 불연속적으로 일정하게 미리 결정된 궤도를 따라서만 움직일 수 있다. 이렇게 한 궤도에서 다른 궤도로 이동하는 데 필요한 에너지의 양을 '양자'라고 한다. 이 변하지 않고 불연속적인 에너지의 '양자가 전자들이 운행하는 특정한 궤도를 정의하고, 나아가 불연속적이고 불변하는 기본 원소들 자체의 성질을 규정한다. 꿈에서 깨어난 보어는 (나중에 노벨 물리학상을 받게 되는) '양자 이론'의 첫 번째 공식을 급하게 받아 적는다.

- 에드윈 뉴먼이라는 언론인이 아인슈타인에게 상대성 이론에 대한 감을 언제 처음 잡았느냐고 물었다. 아인슈타인은 오래전 독일에서 보낸 청소년기에 수학에 낙제하고 집안에 부담이 되지 않으려고 배관공이 되면 어떨지 가족들과 상의할 무렵이라고 대답했다. 그 어려운 시기에 몹시 황홀하고 기억에 남는 꿈을 하나 꾸었다고 한다. 

 

- 그는 밤에 친구들과 썰매를 타고 있다. 눈 덮인 언덕을 올라가 미끄러져 내려오고 다시 올라가 미끄럼을 타고 내려오길 반복했다. 언덕을 미끄러져 내려오던 어느 순간 아인슈타인은 이번엔 썰매가 점점 더 빨리 달리고 있다는 걸 알게 된다.

썰매가 점점 더 빨라지더니 어느새 빛의 속도에 가까워지고 있다. 그때 고개를 들어 별들을 올려다본다. 굴절된 별빛이 무지개처럼 퍼져 보인다. 전엔 본 적이 없는 경이롭고 신비한 광경이다. 왠지 모르지만 아인슈타인은 뭔가 자기 삶에서 가장 중요한 걸 보고 있다는 걸 알아차린다. 


- 하나의 의미만 표현한 꿈은 없다
"그 꿈을 이해해야 한다는 걸 알았죠. 과학자로서 내 경력 전부가 실은 그 꿈에 대한 명상이라고 할 수 있어요."라고 아인슈타인이 말했다.

 

- 꿈을 통해 과학적인 발견을 하는 이야기들 중에 나는 일라이어스 하우 Elias Howe가 현대인들의 삶에 필수품이 된 재봉틀을 발명한 예를 제일 좋아한다. 1700년대 중반 산업혁명이 막 시작되었을 때 다축방적기와 동력으로 작동하는 직조기가 발명되었다. 하지만 이 두 기계가 실을 잣고 직조하는 것만큼이나 효율적으로 재봉이 가능한 기계가 발명되지 않아서 산더미같이 쌓인 직물은 여전히 숙련된 재봉사들의 손을 거쳐야 했다. 경제·사회적인 병목현상이 극심해서 산업혁명은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빠르고 질 좋은 재봉 기계를 발명해야 할 경제적인 압력이 대단했다. 전 세계적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 많은 창의적인 에너지가 집중되었지만 반세기가 지나도록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미국에서 직물업자들이 내건 막대한 보상에 고무된 하우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발 벗고 나섰다. 알려진 모든 방법을 동원해 바느질 기계를 만드는 문제를 해결하려 했지만 별 소득이 없었다. 그러다 방적기와 직조기가 발명된 지 75년쯤이 지난 어느 날 하우는 꿈을 꾼다. (흔히 그렇듯) 그는 한창 뭔가가 진행 중인 중간쯤부터 꿈을 기억한다.
하우는 아프리카에서 식인종을 피해 달아나고 있다. 

- 꿈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주장과는 아주 다른 이야기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인간은 어떻게 의미를 인식할까? 우리는 장기 기억의 목록을 이용한다. 순차적으로 늘어놓은 목록에서 이것과 저것을 대조해 비슷한 점과 차이를 알아내고, 숨겨진 구조적인 동질성이나 상징적·정서적인 '의미'와 '카텍시스 cathexis' 등 연관성을 찾아낸다. 이 목록 자체가 인간이 의미를 인식하는 기본 구조라고 할 수 있다. 일면 이상야릇한 꿈속의 이미지들과 경험을 열린 마음으로 들여다보는 것은 그 자체가 꿈과 꿈을 꾸는 것에 내재된 의미의 본질을 긍정하는 것이다.

- 꿈은 얼핏 보기에 '말이 안 돼' 보인다. 하지만 그렇다고 꿈이 의미 없다고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그 반대다. 표면에 드러난 말이 안 돼 보이는 이미지와 감정, 생각을 깊이 들여다보면 연상과정을 통하여 자기 자신에 대한 의미 있는 깨달음에 이르기도 한다. 

- 아세린스키와 클라이트먼의 연구 이후 많은 발견이 잇따랐다. 한 동물 연구에서는 눈꺼풀이 있어서 잠잘 때 눈을 감는 동물 대부분이 규칙적인 렘수면을 하는 것으로 관찰되었다. 이러한 발견을 통해 인간뿐 아니라 규칙적인 렘 주기를 보이는 모든 온혈동물이 꿈을 꾼다고 추정할 수 있다. 
 
- 의식이 온전하지 못하고 여전히 진화하고 있는 곳에서 아이러니와 모호함의 패러독스는 피할 수가 없다. 어차피 이럴 거라면 거기에 익숙해지는 게 나을지 모른다. 의식세계에서 누군가가 지닌 세계관의 구조와 내용은 (논리적인 사고패턴, 깨어 있을 때 습관적으로 느끼는 정서나 감정은) 어쩔 수 없이 그 사람이 지닌 자기기만, 부정, 성급하게 자신에 대해 규정해 놓은 한계들을 드러낸다. 이런 이유에서 이성적인 세계관과 거기에 녹아든 사고와 감정의 스타일들은, 그동안 복잡다단한 전체 all에서 늘 잘려 나온 제한된 것으로서 무의식에서 새로이 의식으로 등장하는 부분에 위협받는다. 궁극적으로 우리의 의식을 의식시키는 이런 새 정보는 꿈을 매개로 그 사람의 의식으로 흘러들어오기도 한다. 이제껏 억눌러 오고 터부시 해 온 생각과 느낌을 만날 때 괴로울 수밖에 없다. 이런 경험은 개인적인 수준에서 일어나기도 하고 집단적인 면도 있다. 집단적인 은유의 예로 '사고 전달'을 믿지 않는 사람들의 꿈에도 자주 등장하는 '텔레파시'를 들 수 있다.

- 대부분 사람들은 텔레파시를 믿지 않는다. 하지만 누구나 꿈속에서 다른 인물과 '텔레파시'로 대화하는 경험을 한다. 꿈속의 어떤 인물이 '말을 한다'고 느끼지만 그 사람 입술이 움직이는 것을 보는 일은 별로 없다. 드물게 그 사람 말을 들으며' 얼굴을 쳐다보고 입술이 움직이지 않는 것을 눈치챌 때도 있다. 다른 사람들과 꿈을 정기적으로 나누다 보면 예전엔 몰랐던 다른 사람의 생각이나 꿈에 대해 알게 되는 '오싹한' 경험을 하기도 한다.

- 깨어 있을 때 하는 이런 '오싹한' 경험을 통해 꿈의 의미가 더 확장되기도 한다. 깨어 있을 때 텔레파시를 확인해 주는 것이긴 하지만 그런 경험도 그 자체로 '꿈 은유'이다. 이런 경험은 분명 칼 융이 '동시성(아무런 인과관계가 없는데도 어떤 관계와 의미가 있는 듯한 느낌이 강하게 드는 우연)'이라고 부른 것에 해당한다.

- 텔레파시가 진짜 존재하는 현상인지 아닌지는 잠시 제쳐두고, 내가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텔레파시'가 내포하는 상징이다. 인류는 오랫동안 사고나 다른 정신 상태가 아무런 물리적인 수단 없이도 멀리 떨어진 곳으로 전해질 수 있다는 생각에 매료되어 왔다. 하지만 최근 들어 이런 생각은 실험실에서 분리·측정·반복하여 증명하지 못했다 하여 '신비주의'나 '병적인 자기기만으로 격하되었다.

- 이렇게 텔레파시라는 아이디어와 이미지는 현재 주류를 이루고 있는 이성적·과학적인 세계관에서 벗어난 모든 정서적·심리적·영성적 경험과 아이디어에 대한 아주 적절한 은유가 된다. 놀랄 만큼 많은 사람이 꿈에서 텔레파시를 경험한다. 이 경험은 제한된 이성적 세계관이 지배하는 세계를 미묘하게 건드린다. 꿈에 나타나는 텔레파시는 현대 서구 산업 사회에 '근본주의자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과학 발견의 장이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상징적으로 일깨워 준다.

- 세월이 가면서 나는 두 사람이 같은 꿈을 꾸는 것은 그들이 얼마나 정서적으로 가깝고 또 얼마나 비슷한 상징 드라마를 공유하고 있는지를 보여 주는 게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사람 손을 한 코끼리'의 이미지 덕에 나는 힌두 신화에 나오는 원형적인 인물인 가네샤에 끌리게 되었다. 가네샤는 코끼리 머리를 한 인도의 신으로 장애물 극복의 도사이자 상업의 수호신이다. 이 꿈을 꾸기 전에 가네샤는 내게 모양을 바꾸는 수많은 힌두교 신 중 하나였을 뿐이다. 매머드가 빙하기의 수렵·채취 사회에서 음식과 옷, 도구와 의례의 원료가 되었듯 아내에게 그 털북숭이 매머드는 풍요와 근심에서 해방되는 것을 의미했다. 나에게 가네샤는 여성성과 전쟁을 하는 수많은 남신 원형들과 달리 여성성과 조화를 이루는 원형적인 남성성의 이미지로 다가왔다.

- 루돌프 슈타이너는 (동물 머리에 인간의 몸을 한 이집트의 신들과, 인간의 머리에 동물의 몸을 한 수메르와 메소포타미아의 신들처럼) 동물, 인간의 혼합 형상은 자기 인식이 늘어감에 따라 무의식의 본능이 '인간'으로 진화해 가는 것이라고 제안했다. 칼 융도 (키메라와 만티코어 manticore와 같이) 신화와 꿈에 나오는 혼합된 형상들에 대해 비슷한 말을 했다. 아내와 내 꿈에 같이 등장한 '사람 손을 한 코끼리'는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 삶에서 '남성성'의 에너지가 같이 개발되고 있음을 나타내는 이미지이다.  

- 제목이 있으면 나중에 적어둔 꿈들을 다시 살펴볼 때 나무 하나하나가 아닌 숲 전체를 조망할 수 있다. 꿈을 순차적으로 살펴보는 것은 초기에서 중간이나 고급 단계로 넘어가는 중요한 단계이다. 꿈을 시리즈로 다루고 일정 기간에 걸쳐 자주 나타나는 주제와 이미지들을 찾아보라. 그러면 내면 깊은 곳에서 일어나는 전체적인 진화와 빙산의 움직임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 꿈 제목은 꿈에 담긴 의미에 대한 통찰력보다 꿈 경험 자체를 상기시키는 것이 낫다. 꿈을 기억하는 데는 구체적인 이미지가 훨씬 더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불타는 성에서 도망치기'라는 구체적인 제목이 장기적으로는 '두려움' 같은 추상적인 제목이나 '가족에게 화가 나다' 같은 분석적인 제목보다 꿈을 기억하는 데 더 도움이 된다. '두려움'이나 '가족에 대한 분노' 모두 꿈에 담긴 요소이긴 하지만 '불타는 성에서 도망치기'라는 제목에서 꿈에서 경험한 내용을 기억하기가 훨씬 쉽다. 꿈에서 얻은 통찰을 제목에 담고 싶다면 부제목으로 다는 것이 좋다. 위의 예라면 나는 '불타는 성에서 도망치기 두려움과 가족에 대한 분노' 같은 제목을 달 것 같다. 대개는 꿈을 기록하고 나면 제목 하나가 저절로 떠오른다. 이런 제목은 처음 꿈이 솟아오른 곳과 같은 무의식 깊은 곳에서 떠오르는 것이다. 흔히 꿈을 기록할 때 처음 적은 이미지가 제일 좋은 제목이 된다.

- 제목을 보는 것만으로 꿈을 기억할 수 있다면 몇 달, 몇 년 뒤에도 제목만 보고 새로운 통찰을 얻기도 한다. 예를 들어 '불타는 성에서 도망치기'라는 제목에서 처음에 들여다볼 때 놓친 새로운 의미를 발견할 수도 있다. 당시에 전국을 휩쓴 경제난이라는 집단적 의미나 그때는 놓친 건강이라는 개인적인 문제를 알게 될지도 모른다. 혹은 이후에 꾼 꿈들과의 맥락에서 살펴볼 때 꿈을 꾼 그 당시에 내가 부모님에 대해 갖고 있던 어떤 드라마를 '정말로 떠나보낸' 시점이라는 걸 알게 될 수도 있다. 이렇듯 꿈을 처음 적을 때 기억을 되살리기 쉬운 제목을 달아두면 지속적으로 꿈 작업을 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 세 가지 기본 준비 단계를 다 거치고도 꿈을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이럴 때 다음 한두 가지가 도움이 될 것이다.

- 처음 일어나 잠자리에서 움직이다 보면 꿈이 달아날 수도 있다. 잠이 깰 때 조용히 누워서 "내가 무슨 꿈을 꾸었지?" 하며 생각을 되살려 보라. 이렇게 하는 걸 잊어버리거나 움직이고 싶은 마음이 강할 땐 조금 움직여 몸을 풀어준 뒤 처음 깨어났을 때의 자세로 되돌아가 "무슨 꿈을 꾸던 중이지?" 하고 자문해 본다. 이렇게 하면 처음에 아무 기억이 나지 않았어도 대개는 꿈이 되살아난다.


- 잠을 자는 동안 우리는 습관적으로 일련의 자세를 한다. 그런 자세들을 하나하나 해 보는 것도 꿈 기억을 되살리는 데 도움이 된다. 추측컨대 어떤 자세로 자는 동안 꾼 꿈은 그 자세를 다시 하면 되살아난다.  

- 그 사람들이 꿈에 등장했을 가능성이 가장 많다. 잠자리에서 뒹굴면서 이들의 얼굴을 그리다 보면, 그 사람(들)의 얼굴이 어떤 장면과 함께 떠오를 것이다. 그렇게 떠오른 장면은 의식적으로 상상한 것이 아니다. 이런 예상치 못한 장면은 대부분 꿈속의 장면이다. 그 장면이 깨어 있을 때 경험한 것이라 할지라도, 이런 식으로 떠오를 땐 상징적인 중요성 때문에 그 장면을 꿈에서 다시 보았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꿈을 꾸지 않았더라도 꿈 기억을 되살리려고 할 때 이렇게 저절로 떠오른 장면들은 꿈처럼 다룰 필요가 있다. 이렇게 장면 하나와 연결되고, 거기서부터 유추하다 보면 더 많이 기억해 낼 수 있다.

- 얼굴 외에도 꿈에 자주 등장하는 장소들, 그러니까 어릴 때 집이나, 빛의 느낌, 창문이나 현관문, 경치, 애완동물, 자동차 등을 자주 마음속에 그려 보는 버릇을 들이면 이 방법은 아주 효과가 있다. 자신의 꿈 세계에 나타나는 특정한 지역과 계절에 익숙해지면, 이렇게 자주 반복해서 나타나는 이미지들이 다른 것들과 어우러져 저절로 채워질 것이다.

- 왜 어떤 때는 꿈이 잘 기억나고 어떤 때는 그렇지 않을까? 원인은 다양하고 복잡하다. 오랜 시간을 관찰하다 보면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생리적 24시간 주기는 꿈꾸는 사람의 의지나 집중도, 심리영성적인 발전 단계 혹은 태양과 달, 계절적 변화 주기와 같은 자연 현상에 대한 반응과 연관이 없어 보인다. 꿈을 규칙적으로 기록하는 여성이라면 잊어버리고 기억하는 주기가 생리 주기와 어느 정도 일치한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남성들과 폐경기가 지난 여성들도 기억하고 잊어버리는 데 마찬가지로 27일에서 29일의 주기를 보인다. 그에 맞는 생체 주기가 있는 것도 아닌데 그렇다. 식습관이나 스트레스 등 일반적인 육체적·정신적 건강 상태가 꿈을 기억하는 데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 많은 사람에게 비타민 B 복합제가 꿈을 기억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 같다. 비타민 B와 꿈을 기억하는 능력 사이의 상관관계를 증명하기 위해 다양한 실험이 있었다. '자기 충족적 예언'과 무의식적인 반응까지 차단하기 위해 이중 삼중의 정교한 은폐장치를 고안해 참가자들이 연구자의 의도를 모른 채 참가한 실험도 있었다. 한 그룹은 플라시보 약을 다른 실험대상은 다양한 양의 비타민 B를 섭취했다. 이 연구에서 비타민 B 보조제를 섭취한 실험 대상의 75~80%가 '꿈'을 더 많이 꾸었다. 즉 예전과 달리 꿈을 기억하는 빈도가 늘었다고 보고했다. 반면 플라시보 약을 먹은 그룹은 같은 기간에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 내 경험으로는 합법적인 '꿈 약'에 가장 가까운 것이 평범한 복합비타민 B 보조제였다. 실험 결과 비타민 B군 전체를 다 먹는 것이 가장 믿을 만하다고 하고, 비타민 B만으로도 비슷한 결과가 나왔다는 보고도 있다. 개인적으로는 비타민 B 복합제에 비타민 C를 같이 먹는데, 비타민 C가 비타민 B의 소화에 도움을 주는 것 같다. 나는 잠자는 동안 소화·흡수되도록 잠자기 전에 비타민 보조제를 먹는다.

- 비타민 B는 수용성이기 때문에 과용할 우려가 거의 없다. 몸이 받아들일 수 있는 양보다 비타민 B가 많이 들어오더라도 (비타민 A와 같은) 지용성 비타민과 달리 체내 지방에 축적되지 않고 오줌으로 배출된다. 비타민 B를 과다 복용했을 때 증상은 화장실을 자주 가는 것이다. 볼일을 볼 때 약간의 불편한 느낌이 생기기도 하고 오줌 색깔이 평소보다 훨씬 밝은 노란색을 띤다. 하지만 비타민 B를 섭취하면 정상치 내에서도 오줌 색깔이 노랗게 변하므로 색깔만으로는 걱정할 필요가 없다. 혹 비타민 B를 과다 섭취해서 몸 안에 해가 될 만큼 축적되면 소변량이 늘고 손발이 저리다가 점차 손가락과 발가락에 감각이 없어진다. 이때도 비타민 B의 과다 섭취를 중단하기만 하면 증상은 금방 사라지고 감각도 정상으로 돌아온다. 부작용이 생길 우려가 있으므로 급작스럽게 식습관과 비타민 섭취를 바꾸기 전에 의사와 상의하는 것이 좋다. 

- 국가정신건강연구소의 실험에 따르면 극소량의 엘에스디 LSD와 메스칼린 mescaline, 페요테 peyote 등의 자연적인 '환각물질'도 깨어있는 동안 행동이나 인식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으면서 꿈 기억을 극적으로 증가시킨다고 한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이런 방법을 추천하고 싶지는 않다. 다른 정신상태로 바꾸는 약물들, 특히 알코올과 마리화나, 다양한 코카 추출물 등은 정반대의 효과를 낸다. 아주 조금만 투약해도 꿈을 기억하는 것이 힘들어진다. 진정제, '안정제'와 '근육 이완제'도 마찬가지로 부정적인 효과를 낸다. 거의 모든 수면제와 '긴장 완화제들'도 꿈 기억을 감소시킨다. 스텔라진, 할돌, 테그레톨과 같은 항정신성 약물들도 마찬가지이다.

 

- 꿈을 통해 심각한 정신적·정서적 동요가 표현되기 때문에 이런 부작용은 특히 비극적이다.
나는 심각한 정신분열이나 자폐 증상을 지닌 청소년과 성인을 대상으로 한 치유 프로그램에서 수석 치료사로 수년간 일했다. 융 학파의 방법을 이용해 내담자들과 꿈 작업을 하고 직원들에게 꿈 작업 방법을 훈련시켰다. 버클리에서 10년간 일하고 연구하는 동안 정말로 심각한 정신병을 앓는 환자들의 꿈조차도 건강과 온전함을 도모하고 있다는 데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래서 다른 기관들에서 이런 환자들의 치료에 화학 요법 의존도가 높은 것에 몹시 우려하게 되었다. 그런 약물들은 환자들이 효과적으로 치유되어 사람들과 제대로 교류하며 정서적으로나 창의적으로 살아가는 데 필요한 바로 그 근원으로부터 차단하기 때문이다.

- 오랫동안 꿈을 꾸지 못하면 정상적인 사람도 방향 감각을 상실한다. 정서불안과 환각, 미세동작 능력 상실, 성격 이상도 일으킨다고 한다. 이런 사실은 철저하게 통제된 실험실 환경에서 여러 차례 증명된 것이다.

- 혈중 알코올 농도가 높으면 렘수면으로 들어가기가 어려워서 비슷한 증상을 보인다. 어떤 원인에서든 오랫동안 꿈을 꾸지 못한 동물이나 사람은 '되튀김 효과'를 겪는다. 그렇기 때문에 수면 부족 상태의 인간이나 동물이 잠을 잘 기회를 얻으면 즉시 렘수면으로 빠져들어 잃어버린 꿈 경험을 자동적으로 '벌충'하는 것이다.

- 알코올로 유발된 섬망증 delirium tremens에 사로잡힌 사람들의 행동은 실험실 환경에서 렘수면을 조직적으로 방해받은 사람들이 보이는 행동과 실질적으로 구분하기 어렵다. 장기간 꿈을 못 꾸면 심각한 알코올 중독과 마찬가지로 정신적으로 무뎌지고 정서적으로 불안정해지며 근육 활동이 둔화된다. 일부 연구자들은 섬망증 환자들이 실은 꿈이 결핍된 수면 장애라고 얘기하기도 한다. 심각한 알코올 중독자는 잠이라고 이름 붙일 수도 없는 무의식 상태에 있다는 것이다. 혈중 알코올 농도가 높으면 술에 취해 정신을 잃더라도 꿈을 꾸지 못한다. 그러나 잠에서 깨어나 알코올 농도가 어느 정도 떨어져 '되돌아오기' 시작하면 '깨어 있는 동안 꿈을 꾸는' 것이다. 이들이 겪는 환각현상은 본질적으로는 자는 동안 자연스레 등장했어야 할 꿈속의 이미지들이 깨어 있는 동안 마음속으로 침입해 들어온 것이다.

- 비슷하게 환각작용이 있는 약을 복용한 사람들이 경험하는 '무서운 환각 체험 bad trips'은 이들이 깨어 있는 동안 꾸게 되는 꿈이다. '무서운 환각 체험'을 하는 사람들은 (어쩌다 꿈을 기억했을 때) 꿈이 대부분 악몽인 사람들이다. 반대로 이런 약물들을 사용해 긍정적이고 심오한 경험을 한 사람들은 대개 이전에 꾼 꿈들이 흥미롭고 긍정적인 경우이다.

- 이런 종류의 화학물질이 보통은 (프로이트가 '일차적 과정 primary process'이라고 부른) 무의식과, 깨어 있는 동안의 좀 더 합리적이고 선형적으로 작동하는 마음의 기능 사이에 있는 경계를 낮추는 것 같다. 수많은 '심리탐험가'들의 증언을 들어보면, 똑같은 약을 같은 양 먹더라도 사람에 따라 어떤 사람은 신성의 존재를 직접 느끼는 신비로운 체험을 하고 다른 사람은 '지옥'의 나락으로 떨어지기도 한다. 화학물질이 부정적인 반응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약물을 사용한 개인이 자신을 얼마나 받아들이고 긍정하며 안정적인 상태인지에 달려 있으며, 약물은 촉매 구실을 할 뿐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 모르핀은 다소 불명확하다. 모르핀을 사용하는 동안 지독한 악몽을 꾸었다고 보고한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이들이 극심한 통증에 시달리던 중이어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약 때문인지는 알 수 없다. 두 요소 모두 악몽을 꾸는 데 어느 정도 기여를 하는 것 같다.

- 내 경험으로는, 기도와 명상에서처럼, 각 개인이 어떤 꿈 생활을 하고 있느냐가 긍정적이고 생생한 심리영성적 경험에 대한 가장 믿을 만한 척도이다.

- 기억하지 못하면 사람들은 '억압'을 제일 먼저 떠올리고 가장 그럴싸한 설명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꿈을 잘 기억하는 편이고 오래 작업해 온 사람도 하룻밤에 두세 개 정도만 기억한다. 누구든 하룻밤에 두세 개의 꿈을 계속해서 기억한다면 그 사람은 아주 잘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사람을 겁쟁이로 보거나 꿈을 '억압'하고 있다고 보긴 어렵다. 실험실의 연구에 따르면 누구나 하룻밤에 대여섯 번, 심지어는 일곱 번 꿈을 꾼다고 한다. 따라서 가장 적게 억압되고 꿈을 잘 기억하는 사람조차 실제로 꾼 꿈의 절반이나 그 이하로 기억하는 셈이다.

- 꿈을 '컬러로' 꾸는지 아니면 '흑백으로' 꾸는지의 문제는 여기에도 상관이 있다. 나는 경험상 누구나 색깔이 있는 꿈을 꾼다고 확신하지만 흑백으로 꾸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통계에 따르면 '여자가 남자보다 컬러 꿈을 더 많이 꾼다'고 한다. 이런 연구는 손쉽게 또 상대적으로 적은 비용으로 할 수 있는 것이어서 여러 번 행해졌는데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꿈속의 색채가 얼마나 선명한지와 꿈꾼 이의 정서적인 생활은 직접적이고 원형적으로 상호 연관되어 있다. 꿈속에 나오는 색깔들을 더 잘 인식하고 있는 사람일수록 자신의 정서적인 생활을 좀 더 의식적으로 자각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색깔 꿈'에 관한 연구들이 사실은 성차별이 여성과 남성의 정서적인 삶에 얼마만큼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를 보여 준다고 생각한다. 

- 아이를 키울 때 우리는 관습적으로 여자아이들에게는 자신과 주변 사람들의 감정에 주의를 기울이도록 가르치는 반면 남자아이들에게는 정서적인 면을 별로 강조하지 않는다. 이렇게 검증·검토되지 않고 억압적인 성역할에 관한 고정관념이 우리의 의식적인 행동을 결정한다. 이런 현실에서 '여성이 남성보다 컬러로 꿈을 더 많이 꾸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왜곡되지 않고 건강한 인간이라면 누구나 풍부한 감성으로 가득 찬 삶을 누리며 자연스럽게 색깔 꿈을 꿀 것이다.

- 나는 이런 분석이 이론적인 관점에서도 설득력 있지만 경험으로도 명확하다고 생각한다. 내가 가르치는 꿈 작업 과정에서 '흑백으로만 꿈을 꾼다'는 사람들을 수도 없이 많이 만났다. 남자건 여자건 '색깔 없는 꿈을 꾸는 사람들'은 왠지 정서적으로 억압된 인상을 준다는 점은 흥미롭다. 이들은 다른 사람들을 지휘·통솔하는 자리에 있으면서 자신이 이끄는 일이나 삶의 모든 방면에서 '감정적으로 변할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하는 경향을 보인다.

- 정서적인 면에 대해 부정적인 태도를 가진 사람이 꿈 작업에 끌리는 경우는 대개 무언가 자기 삶이 불만족스러울 때다. 이들은 자신이 직장에서나 경제적으로, 어떤 때는 인관관계에서도 '잘 나가고 있다'고 묘사한다. 그런 '성공'을 거두었는데도 삶에서 '무언가가 빠져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는 것이다. 이들의 꿈 작업은 예정된 순서를 밟는다.

- 꿈을 나누고 탐색하는 어느 순간 이들은 갑자기 빨간색이 꿈에 등장했다고 보고한다. 강한 열정과 '피'의 따뜻함 속에 있는 깊숙한 감정을 담은 원형적인 색깔인 붉은색이 언제나 먼저 나타난다. 이 '흑백'의 꿈을 꾸는 사람들'은 '빨간색 차'나 '빨간색 꽃' 혹은 그 비슷한 것을 보았다고 하는데, 자신이 더 이상 회색조의 꿈을 꾸지 않는다는 사실을 의식하지도 못한다. 일단 붉은색이 등장하면 다른 색깔들도 금방 따라 나타나, 계획된 강의를 다 마칠 때쯤이면 이들도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색깔 꿈'을 꾸기 마련이다.

- 이런 상황이 반복될 때마다 나는 꿈이 꿈꾼 이의 건강과 온전성에 이바지하기 위해 온다는 데 매번 감동한다. 꿈은 깨어 있을 때의 사건들에 정서적으로 반응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의식하게끔 일깨워 준다. 그 결과 이들은 실제로도 점점 더 자신의 감정과 정서를 알아차리게 된다. 내가 내리는 이론적인 결론은 꿈속의 색깔은 늘 거기 있었지만 무시되다가, 꿈을 꾸는 사람이 점차 그 색깔들을 알아차린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깨어 있을 때 실제로 어떻게 감정을 무시해 왔는지를 직접적으로 반영한다.

- 우리가 성역할의 고정관념에서 자유롭게 풀려나면 전체 인구 중에서 '흑백으로만 꿈을 꾸는' 사람의 비율이 줄어들 것이다. 그리고 색깔 꿈을 꾸는 남녀 비율의 차이도 완전히 사라질 것이다. 이런 비율이 그 집단이 성역할의 고정관념에서 얼마나 자유로운지를 평가하는 '객관적'인 수단이 될지도 모른다.

- 합리적인 태도로 현실에 요구하다 보면 집단 무의식의 영역에 중심을 둔 꿈들을 깨어 있을 때 기억하기가 완전히 불가능해지는 것이다.
집단 무의식을 집중적으로 다루는 꿈에서 꿈이 얼마나 길게 느껴지느냐에 상관없이 시작과 중간, 끝이 모두 한꺼번에 일어난다. 시간 순서대로 사건을 되살리는 일은 거의 불가능하다. 이런 꿈에서는 '나’는 동시에 꿈속의 모든 사물이자 인물로 이들 '내'가 느끼는 감정과 생각들을 모두, 한꺼번에 경험하게 된다. 어느 시점에서 기억을 정리해야 할지 중심을 잡을 수가 없다. 사건이 일어나는 걸 보는 분리된 '나'가 없이 복잡하고 다양하고 미묘한 경험이 동시에 모든 사람과 사물에서 일어나는 경험만 존재한다. 

- 이제 나는 꿈에서 내가 여럿의 인물로 한꺼번에 등장하는 꿈도 기억할 수 있다. 동시에 진행된 여러 개의 이야기도 자주 기억한다. 하지만 꿈속에서 내가 가진 주관적인 깨달음을 '나눠 가진' '인물들이 서넛 이상이 되면 아직도 제대로 기억하기가 힘들다. 깨어나서 내가 세상의 모든 사람이자 사물이라면 어떤 느낌일지 상상해 보지만, 그걸 말로 표현하기는 정말 어렵다. 하지만 우리 모두 어느 정도는 이런 식으로 꿈을 꾼다고 확신한다.

- 전통적인 용어를 사용하자면, 나는 모든 사람이 매일 밤 '하느님께로 되돌아간다'고 믿는다. 이때 평소의 자아는 사라지고 다가오는 죽음에 대한 근심과 심층무의식에 자리 잡고 있는 우리 본연의 신성과 ...

- 그냥 꿈을 나누기만 한 게 이런 효과를 낼 수 있다면, 그렇게 뿌리 깊고 무의식적인 인종차별의 근원에 이런 눈에 띌 만한 영향력을 발휘한다면 "꿈 작업으로 어떤 일을 더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확하게 바로 그 순간, 나는 꿈 작업이 지닌 정치·사회적 잠재가치를 제대로 탐색해 봐야겠다고 결심했다. 20여 년이 지난 지금 나는 여전히 꿈 작업이 지닌 흥미롭고 극적이고 창의적이며 집단적인 변화를 가능하게 하는 방법을 탐색하고 있다. 이 작업에 한계가 있어 보이진 않는다. 분명한 것은 사람들이 함께 꿈을 나누고 탐색하다 보면 억압된 내면과 차별적인 외적 행동들을 극복하게 된다는 점이다. 그것은 꿈 작업이 가져오는 아주 긍정적인 변화들 중 하나라는 점이다.
시험적인 첫 그룹 꿈 작업의 성공 이후 나는 무슨 일이 있었기에 그토록 극적이고 놀라운 변화가 나타날 수 있었는지 많은 생각을 했다.

- 처음에 우리는 어둡고 불길하며 적대적이고 위험한 다른 인종에게서 공격받고 위협당하는 무섭고 불쾌한 꿈들을 나누었다. 나는 바로 그 순간 무의식에서 거부하고 억압하며 다른 인종에게 투사하던 우리 인간성의 일부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다고 확신한다. 꿈속의 기분 나쁜 사람들은, 늘 그렇듯, 우리가 받아들일 수 없는 우리 내면의 문제를 반영하고 있다. 그런 요소를 무의식적으로 부정하고 '억압'하면서 그 요소를 투사한 대상을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감정적으로 거부하는 것이다. 그것을 '존중'과 '예의 바름'으로 '변장'한다고 해도 마찬가지이다. 

- 선택적인 내면에서의 억압과 투사가 바로 인종차별이라는 뿌리 깊고 무의식적인 심리과정이다. 기분 나쁜 '인종차별'적인 꿈을 나누면서 우리는 이런 부정과 거부라는 원형적 순환을 끝내고 변화하기 시작했다. 꿈속에서 겪은 두려움과 긴장은 자기 수용이 부족하여 생긴 내면의 스트레스에 대한 은유였다. 자신의 일부를 받아들이지 못하기에 우리는 이 '받아들일 수 없는' 내면의 에너지들을 외부로 투사한다. 그래서 깨어 있을 때 '객관적'으로 보이는 경험과 상호작용을 무의식적인 '인종차별'로 조직적으로 왜곡한다. 바로 이런 '억압과 투사'의 심리적인 역학이 인종차별의, 나아가 모든 형태의 집단적인 편견과 억압의 뿌리이다. 

- 처음 꿈을 나누기 시작한 '인종차별 극복' 모임에서 우리는 서툴긴 하지만 프리츠 펄스 Fritz Perls와 게슈탈트 Gestalt 학파에서 얘기하는 '내 꿈속의 모든 사물과 인물이 나'라는 것을 재발견했다. 꿈속에서 다른 인종의 모습으로 가면을 쓰고 나타난 우리 내면의 억압되고 '부정적'으로 보이는 에너지들을 그냥 나누고 이야기하는 것만으로 의식하고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깨어 있을 때 그런 에너지를 억압하고 다른 사람에게 투사하려는 경향도 줄기 시작했다.
꿈을 나누면서 우리는 상대에게 주의를 더 기울였고, 람 다스 RamDass의 말대로 '내가 저것이기도 하다'는 것을 인정할 수 있었다.  

- 꿈의 언어는 보편적이기 때문에, 꿈 작업에서 서로 투사하는 행위는 참여한 모든 이에게 값진 통찰을 준다.

- 아마추어들의 자발적인 모임에서건 전문가와 함께 하는 일대일 상담실에서건 꿈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투사를 거쳐야 한다. 그래서 모든 꿈 작업은 궁극적으로 자기 고백일 수밖에 없다. 꿈꾼 사람이 얘기하는 꿈속 감정들과 이미지들을 나름대로 상상하고 살아보지 않으면 다른 사람의 꿈에 담긴 의미에 대해 얘기할 수 없다. 그래서 남의 꿈에 담겼을 의미에 대한 그 어떤 얘기도 꿈이 지닌 '객관적' 중요성을 반영한다기보다, 그 코멘트를 하는 사람의 내면생활과 상징 드라마를 반영하는 투사이다. 장 콕토의 유명한 영화 <오르페우스 Orpheus>에서 같은 이름의 주인공이 좌절한 미술가에게 말하듯, "당신네 예술가들은 언제쯤 돼야 자기 초상을 그리는 것 외에 당신네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걸 알게 될까요?"

- '이게 내 꿈이라면'이란 형식에는 '고백' 성격이 있다. 그래서 모든 제안이 잠재적으로는 꿈꾼 이뿐 아니라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위한 것임을 모든 참석자에게 계속 일깨워 준다. 한 꿈 작업 그룹에 일정 기간 함께 한 사람이라면 특정 참석자가 하는 코멘트와 투사가 얼마나 그 사람에게 중요한 문제들과 진화하는 드라마를 반영하는지 점점 더 명확하게 보게 된다 

- 예를 들어, 작업이 정서적인 문제에 집중됐다면 그때까지 건드린 내용 외에 꿈이 건강이나 영성적인 삶, 자신에게 맞는 삶이나 특정한 기술적 문제를 창의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방법 등의 관점에서 생각해 볼 수도 있다. 이런 시기에 나는 늘 사람들이 너무 '당연하다고 여겨 말하지 않은 것들'을 얘기해 보라고 권한다. (아서 코난 도일이 말했듯 "당연한 것을 분석하는 데는 뛰어난 재능이 필요하다")

 

- 꿈 작업이 이런 '마지막' 질문을 할 정도로 진행되고 이런 '당연한' 점들을 아무도 얘기하지 않았다면, 내게 '당연해 보이는 것'들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언급할 필요가 있다. 이 단계에서 나는 그때까지 조용히 있던 사람들에게 꿈이나 작업과정에 대해 할 얘기가 없는지 물어보기도 한다. 종종 이렇게 마지막 질문으로 터져 나온 생각이나 투사의 단편들이 이전에 한 작업 전체보다 더 생산적인 직관을 보여 줄 때가 있다.

- 다음으로 '의례적 질문'은 꿈을 꾼 사람을 향한다. 꿈 작업을 마치기 전에 좀 더 다루고 싶은 꿈속의 장소나 요소들이 있는지를 묻는다. 대개 대답은 '아니오'이지만 때로 꿈꾼 사람이 그룹이 간과한 중요한 점들을 끄집어내기도 한다.

- 직관으로, 심리적인 눈으로 들여다보고 그 특정한 모양과 구조에 반영된 '숨겨진' 다양한 층위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
꿈이 진실만을 말하지만 그 진실을 어떤 식으로 암시하고 드러낼지, 어떤 이미지나 경험을 통해 나타낼지는 아무 제한이 없는 듯하다. '원하는 건 뭐든' 할 수 있고 어떤 합리성이나 논리, 물리 법칙의 제한을 받는 것 같지도 않다. 그래서 꿈에 나온 것은 뭐든 꿈이 다양한 층위의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 '최선의 방식'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꿈이 전달할 의미에 충실하면서 뭔가 '더 잘하거나' '더 잘 말할' 수 있다면 그렇게 했을 것이다.

- 그래서 이미지가 복잡하고 '이상한' 꿈일수록 깨어 있을 때 기대하고 가정할 수 있는 자연스러운 것에서 벗어난다고 보면 된다. 물이 거꾸로 흐르거나 사람이 아무런 기계의 도움 없이 날아다니고, 사람이나 사물이 바로 눈앞에서 모양을 바꾸는 등의 이미지가 나타나는 것이다. 이미지들이 '꿈같은 형태'를 띨수록 전달하려는 의미는 다양하다.

- 같은 꿈을 계속 반복해 꾼다면 그게 처음에나 지금이나 그 꿈이 전하려는 내용을 최고로 표현한 것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더 나은 표현이 있었다면 꿈이 그렇게 했을 테니 말이다.
이론적으로는 반복되는 꿈이나 꿈 이미지는 그 순간 진화하고 있는 꿈 꾼 이의 건강과 온전함에 더 나은 표현이 없기 때문이다.

- 꿈을 꾸다가 "어, 알겠어, 이건 꿈이야!" 하고 분명하게 느끼게 될 때가 있다. 이런 꿈을 '자각몽 lucid'이라고 부른다. 깨어나서야 "아, 그게 꿈이었구나." 하게 되는 보통의 꿈과 달리 자각몽을 꿀 때는 꿈 꾸는 동안 펼쳐지는 내용이 꿈이라는 것을 제대로 인식하게 된다.

- 자각몽 상태에서 깨어난 사람들은 놀라운 통찰을 발휘하고 비상한 창의적인 에너지를 풀어낼 수 있다. 이런 에너지를 불러내 낡은 습관을 고치고 원하는 대로 사용하고 문제를 해결하고 초월하기도 하며, 부인하고 억압해 오던 것들을 의식화하고, 혼란스럽던 감정과 정서가 명확해지면서 조화를 이루기도 한다. 이런 일은 자각몽이 아니더라도 우리가 기억한 꿈으로 작업을 하면서도 일어나는 일들이다. 하지만 자각몽에서는 그런 치유 작업이 꿈에 극적으로 엮여 들어가 있어 꿈 체험의 폭과 가능성을 극적이고 마술적으로 넓혀 준다.

- 예를 들어 알렉스라는 남자가 나눈 꿈이다.
불에 타고 그을린 곳이다. 아직도 연기가 나고 있고 나는 무섭고 사나운 용에게 쫓기는 중이다. 달리고 달리던 어느 순간 마법처럼 이게 다 꿈인 걸 알게 된다. 내가 느끼는 공포도 뒤쫓아 오는 괴물도 모두 내 꿈속에서 일어나는 일인 걸 그냥 '알게 된다'. 나는 뒤돌아서 용을 똑바로 쳐다보며 뭐 하는 거냐고, 왜 이렇게 날 쫓아다니며 위협하냐고 다그쳐 묻는다. 불을 내뿜던 용이 멈춰 서서 "나는 네 흡연 중독이야!"라고 말한다. 그 괴물이 '말하는 동안 흡연 중독이 '불을 내뿜는 용'으로 나타난 게 얼마나 적절하고 재미있는 아이러니인지 이해가 된다. 그렇게 깨닫는 순간 갑자기 용이 변하기 시작한다. 정말 달라진 건 아닌데 왠지 '표정'이 변하는 것 같다. "짜잔, 마법의 용입니다~" 뭔가 애교 넘치고 매력적이기까지 하다. 위협적으로 삼킬 듯 불을 내뿜는 용이라기보다는 집에서 오래 키워 친구 같은 덩치 큰 개처럼 보인다. 꿈인 걸 알기에 이 '바뀐' 괴물을 보다 가까이 볼 수 있다. 괴물의 몸은 더럽고 끈적끈적하고 거무스름한 점액들로 뒤덮여 있다. 몸에 난 구멍이란 구멍에서, 눈과 비늘 사이에서도, 역겨운 연기가 스며 나와 사방으로 튀고 있다. 몸에서 나는 더럽고 역겹고 혐오스런 냄새도 맡을 수 있다. 혐오감이 되살아나 나는 괴물을 쳐다보며 온 마음을 다해 "저리 꺼져! 널 더 이상 원하지 않아."라고 소리친다.
잠이 깼을 때 알렉스는 자신이 더 이상 폐에 연기가 가득한 느낌을 원하지 않음을 알게  됐다. 아마 보다 중요한 것은 담배를 피울 때마다 누군가 함께 있는 듯하고 금방 만족을 주곤 하던 그 느낌도 사라지고 없었다. 이 꿈을 꾼 다음부터 알렉스는 담배에 손도 대지 않았다.  

- 꿈이 계속 반복될 때 어느 순간 "이 꿈을 꾼 적이 있는데... 잠깐, 이 꿈을 전에도 꾼 적이 있어! 그럼 지금도 꿈이란 말이잖아!" 같은 꿈을 자꾸 꾸게 되는 건 억눌러 둔 에너지를 풀어내 더 큰 의식 수준으로 이끌기 위함이다. 거부해 온 감정이 오래된 것이고, 반복해 꾸게 되는 꿈과 악몽이 그런 감정들을 보다 높은 의식 수준으로 이끌기 위한 것이라면 자각몽을 꾸게 될 가능성은 더 커진다. 왜냐하면 꿈에 담긴 기본적인 치유의 목적을 자각몽보다 더 잘 상징적으로 일깨워 주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 알렉스가 꾼 '불을 내뿜는 용' 꿈이 이런 종류의 반복되는 꿈이었을지 모른다. 그게 꿈이란 걸 깨닫는 '마법의 순간'이 실은 "잠깐, 이 꿈 전에 꾼 적이 있어!"라고 선의식에서 깨달았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금연을 하려는 사람이라면, 당시에 그런 꿈을 기억하느냐와 상관없이, 뭔가 발버둥 치는 꿈을 꿀 가능성이 높다. 내 경험으로는 기억하지 못한 꿈도 자각 상태를 불러올 수 있다. 잊고 있던 꿈이 떠오르는 것도 꿈의 중심 주제를 깨어있을 때도 점점 더 의식하게 됨을 알려 주는 좋은 잣대이다.

- 꿈을 꾸는 동안 의식이 강화된 '자각' 상태가 있다는 걸 서구에서 집단적으로 알게 된 것은 상대적으로 최근의 일이다. 1895년 헤르베이드 생-데니스 Hervey de Saint-Denys는 "꿈을 꾸는 줄 알면서도 계속 꿈을 꿀 수 있다."라고 썼다. 그 경험을 묘사하기 위해 '자각몽'이라는 단어를 만들어 냈지만 그의 연구는 1백여 년 동안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 

- 서구 산업화 사회에서 자각몽에 대한 일반의 관심은 지난 30여 년간 커져 왔다. 킬튼 스튜어트 Kilton Stewart가 쓴 <말레이 반도 사람들의 꿈 이론 Dream Theory in Malaya>이란 책이 그 계기였다. 이 책으로 한세대 전체가 개인의 성장과 공동체를 위해 자각몽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 후 스테판 라 버지 Stephan La Berge의 선구적인 연구로 이런 관심은 더 커졌다. 스텐포드 대학의 수면 연구실에서 실험을 통해 자각몽이 개발할 수 있는 기술이며 훈련을 통해 자각몽 상태를 바깥에서 관찰할 수도 있는 걸 알게 된 것이다. 반면 극동에서 자각몽이 관심을 받은 건 900년이 넘는다. 수세기 동안 힌두교와 불교, 특히 티베트 불교에서는 자각몽을 영적수련에서 중요하다고 보았다. 죽은 뒤 육체가 없는 영혼이 경험하게 되는 것이 우리가 살아 있을 때 꿈꾸는 것과 똑같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 잠이 '작은 죽음'과 같고 꿈을 꾸는 것이 사후에 영혼이 경험하는 것과 같다는 생각은 원형적인 것으로, 거의 모든 민족의 종교적·시적 전통에서 찾아볼 수 있다. 예를 들어 북미 평원 인디언에겐 "죽는 건 돌아오지 않고 꿈길을 걷는 것과 같다."라는 속담이 있다. 이런 원형적인 관점에서 보면 꿈에 대한 관계를 근본적으로 바꾸면 죽음에 대한관계가 바뀔 가능성이 크다. 

- 불교 전통에서 중심 이야기는 무사계급 석가족의 왕자 고타마 싯다르타가 자신의 지위를 포기하고 금욕과 명상을 하며 도를 찾아 헤맨 후 생의 비밀을 꿰뚫어 보고자 깊은 명상에 든다는 것이다. 불경들은 고타마가 보리수나무 아래서 완전히 깨닫기 전까지 집중을 깨지 않으리라 맹세를 하고 명상에 들었다고 전한다. 그가 명상에 들자 그 영적인 기운이 얼마나 큰지 욕망과 망상의 마왕이 금방 알아차린다. 자신의 광대한 제국이 전복될 위기에 처해 있음을 깨달은 것이다. 마왕 마라(마야의 남성형으로 '환영'을 뜻한다)는 무서운 마귀들과 무시무시한 폭풍우, 천둥과 번개, 해일, 끔찍한 지진과 화산 폭발 등을 보내 고타마의 마음과 몸을 공격했다. 전쟁, 배고픔, 페스트, 전염병, 갈증, 기근, 가뭄, 불행, 분노, 두려움, 아픔, 불확실, 폭력, 상실이란 이름의 마귀들이 그를 공격했다. 하지만 명상에 빠진 고타마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 끔찍한 마귀들과 재앙들이 환영이며 자신의 훈련되지 않은 생각의 소산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부처는 마귀들의 출현에 미동도 하지 않고 그들의 공격에도 평온하게 있었다. 다른 버전에서는 고타마가 명상 중에 공격하는 마귀들의 무기를 꽃으로 바꿨다고도 전한다. 무수한 무기꽃은 그의 발로 부드럽게 떨어져서 부처가 이룬 우주 구원에 자연과 대지가 바치는 제물이 되었다고 한다. 

 

- 끔찍한 마귀들의 공격에도 명상에 잠겨 고요히 내적으로 흔들림 없이 있는 것이 육체를 떠난 영혼들이 해야 할 영적인 과제이다.
사실 이것은 <티베트 사자의 서 The Tibetan book of the dead>라는 책의 요지이다. 이 책은 육체를 떠난 영혼에게 바르도 계에서 경험하는 진짜 같고 압도적인 경험들이 실은 '단지 꿈'일 뿐임을 상기시켜 주는 긴 기도문으로 사후 세계에서 경험하는 모든 기쁨과 두려움이 꿈에서 보는 이미지들과 꼭 같다는 것을 일깨워 준다. <티베트 사자의 서>에는 "오, 고귀하게 태어나신 이여, 일부 전통에서는 망자의 이름이나 별명을 여기에 넣기도 한다.) 그대가 듣고 느끼는 것 모두가 그대 자신의 생각이 발현된 것일 뿐임을 기억하소서."라는 말이 반복되어 있다. 몸을 벗어난 영혼이 여전히 몸에 희미하게 연결되어 있어서 시신 앞에서 말하는 것의 일부를 들을 수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죽은 이가 바르도에서의 경험이 궁극적으론 실체가 없는 것임을 깨닫도록 죽은 자의 시신에게 바르도 퇴돌 Bardo Thodol을 들려주는 것이다. (많은 불교도들은 육체를 갖고 깨어있을 때의 삶도 마찬가지라고 얘기한다.) 망자 가족이 능력이 되면 사후 40일 동안 주문을 욀 사람을 고용하고 시신을 보존한다. 깨어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사후의 바르도 세계에서 신성과 하나임을 깨달으려면, 그러니까 고대 산스크리트어로 '니르바나'에 이르려면 실체가 없는 꿈속의 마귀에 대한 두려움뿐 아니라 실체가 없는 꿈속의 즐거움과 호화로움까지도 극복해야 한다. 

- 이때 모든 초월적인 환희와 더 없는 기쁨이 함께한다. 이 순간 육체를 떠난 영혼은 완전히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데 불교에서는 열반의 법열을 스스로 포기하고 아직 깨닫지 못한 이들의 고통을 덜어 주려고 다시 태어나기를 선택하는 것을 신성과의 합일보다 더 높은 차원의 소명이라 한다. '삼사라(윤회)'에 빠져 자신들이 처한 고통스럽고 끔찍한 (사실은 꿈인) 현실을 벗어나지 못하는 중생들을 구하려는 것이다. 이런 선택을 하는 존재들을 보살이라 하는데, 고통 속에 있는 다른 이들을 구제하고자 자신을 희생하는 이들로 부처가 되는 경로에 있다. 보살들은 열반의 법열을 포기하고 두려움에 차 무턱대고 환생하는 대신 사랑으로, 의식적으로 선택한다. 깨달음을 퍼뜨리고 "모든 지각 있는 존재들의 고통을 덜어 주는 데 특별히 이바지할 수 있는 삶"을 선택하는 것이다. 보살의 맹세를 하고 지키는 것은 티베트 불교 전통에서 가장 높은 영적인 행위이다. 이렇게 헌신하는 이는 기회가 오더라도 열반을 포기하고 "모든 지각 있는 존재가 깨달을 때까지" 되풀이해서 환생할 것을 맹세한다. 이런 맹세를 유지하는 데 가장 중요한 명상 훈련을 지금 서구에서는 자각몽이라 부르는 것이다.

- 달라이 라마와 카르마파, 툴쿠, 린포체와 같은 티베트 불교의 지도자들 모두는 지난 전생들과 바르도에서 한 체험을 기억한다고 한다. 티베트 불교의 각 교단'은 예전 지도자들이 전한 전생과 바르도 이야기를 보존하고 있다. 그리고 현 지도자들이 그들의 경전과 독경에 언급된 특정 보살이 환생한 것이라 믿는다. 예를 들어 현 달라이 라마는 관세음보살, '완전한 자비의 보살'의 환생이라고 한다.

- 실제로 수도승들은 이 '혈통 계승'을 위해 위대한 보살이 죽은 지 9개월 하고도 40여 일 후에 태어난 남자아이를 찾아 나선다. 임무를 맡은 수도승들은 어디로 가야 할지 징표를 얻기 위해 꿈을 들여다보고, 전통적으로 환생한 보살이 몸에 지니는 것으로 알려진 표식을 가진 아이를 찾아다닌다. 그런 표식 중 하나는 코 위에 눈썹이 만나는 곳에 소용돌이 모양으로 난 털이라고 한다. 그런 조건을 가진 아이가 둘 이상 발견되면 종파가 분리될 정도로 큰 분쟁이 생기기도 한다. 티베트 전통 불교에서 서로 경쟁하는 교파들이 역사적으로 분리된 연유의 대부분을 보살이 환생한 아이를 찾는 과정이 제대로 됐는지 아닌지에 대한 논쟁 탓이다. 블라바트스키 부인이 어린 크리슈나무르티를 '이 시대의 아바타'로 공인했는데, 여기서도 위대한 영혼이 뭔가 다른 미묘한 표식을 가지고 환생하고 아주 어려도 그걸 알아볼 수 있다는 원형적인 생각이 잘 드러난다. 크리슈나무르티가 성인이 되어 그 호칭을 정중히 거절하기는 했지만 말이다. 

- 티베트 전통에서는 '성스러운 표식'을 보이는 아이는 수도승들이 데려와 키운다. 자각몽을 키우는 의례들과 다른 영적인 수련을 꾸준히 하면서 자신의 전생이라 믿어지는 보살들의 삶과 바르도 '전기'를 ...

- 돈 후앙 Don Juan이라는 인디언 야키족의 샤먼은 인류학자이자 모험가인 카를로스 카스타네다 Carlos Castaneda에게 '꿈을 만드는 방법'을 가르쳤다. 깨어있을 때 왼손이 눈에 들어올 때마다 꿈에서 왼손을 보게 되면 그게 꿈인 걸 기억하겠다고 스스로에게 상기시키라는 것이었다. 불교와 탄트라 수행자들도 거의 똑같은 기법을 쓴다. 자기 손을 볼 때마다 기독교인들이 '화살기도'를 하듯 "내가 꿈을 꾸네!"라고 외치는 것이다. 손이 시야에 들어올 때마다 꿈을 꾸고 있음을 연상하는 것이 습관이 되면 실제로 꿈을 꿀 때 자각 상태를 더 자주 얻게 된다. 손 자체에 어떤 마술적인 힘이 있어서라기보다 꿈에 자기 몸이 등장할 확률이 더 높고 따라서 그 어떤 '신호'나 '자극이 되는 이미지’보다 손을 보게 될 확률이 더 높기 때문이다.

- 당대의 꿈 연구가 스티븐 라 버지 Stephen La Berge는 '자각몽 기억유도법'이라 이름 붙인 효과적인 기법을 개발했다. 그도 기억을 강조하는데 자신이 자각몽을 꾸고 싶어 한다는 걸 기억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한다. 낮 동안 주기적으로 또 생각이 날 때마다 자각몽을 꾸고 싶음을 떠올리라고 추천한다. 이렇게 자신이 원하는 바를 끊임없이 반복하면 원하는 효과를 볼 수 있다.

- 소개된 기법들 외에 다른 방법들도 여러 실험을 통해 잘 통한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개인이 가진 기질이나 성향에 따라 다른 기법에 끌리게 된다. 대부분 사람들은 아무런 훈련 없이 어쩌다가 자각몽을 꾸게 된다. 위에서 언급되었듯 되풀이되는 악몽의 경우가 그렇다. 그럴 때 자각몽이 지닌 강점과 이점이 분명해진다. 보리수나무 아래 앉은 부처처럼 꿈꾸는 사람이 명료하게 '깨어있으면' 꿈에서 두려움과 혼란스러움을 극복할 수 있다. "이건 꿈이야. 그러니까 두려워할 필요가 없어! 내 생각처럼 내 몸은 이 꿈속에 있는 게 아니라 안전하게 내 침대에 있어. 지금까지처럼 겁먹을 필요가 없어." 위에서 다룬 꿈에서 자연스럽고 명료하게 '부처와 같은' 깨달음을 얻은 덕분에 알렉스는 뒤돌아서 무서운 '용'을 직면하고 담배를 끊을 수 있었다.

- 악몽을 꿀 때 그게 꿈인 걸 자각하게 되면 두려움을 극복하고 꿈을 계속 꿀 수 있다. 흔히 그러듯 잠에서 깨어나 '도망치는' 대신 꿈속에 남아 쫓아오는 귀신을 대면할 수 있게 된다. 최선의 전략은 (알렉스가 했듯 꿈속에서 살기등등하고 위협적으로 보이는 대상에게 "내 꿈에서 뭘 하는 거야? 원하는 게 뭐야?"라고 묻는 것이다. 정신을 차리고 이런 질문을 할 수 있게 되면 보상으로 답을 얻게 된다. 대개의 경우 그 답은 깨어있을 때 꿈꾼 이의 삶에서 아주 심오한 의미가 있는 것이다. 여기서 "두려워하지 말라"는 부처의 메시지가 새로운 의미를 띠게 된다. 꿈을 꿀 때나 깨어있을 때 원형적인 상징의 드라마를 만나고 응답한다는 맥락에서, 부처의 "두려워하지 마라", 예수의 "적을 사랑하라", 아폴로의 "자신을 알라."는 모두 같은 말을 다르게 표현한 것이다.

- 깨어서나 잠에서 자신을 알고 적을 사랑하려면 두려움을 놓아 버려야 한다. 두려움을 놓으려면 스스로에 대해 알고 자기 안에서 적을 사랑할 힘을 발견해야 한다. (여기서 적은 안과 밖 모두의 적을 가리킨다. 둘 다 서로를 반추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자신을 알려면 두려움을 내려놓고 열린 가슴으로 적을 만나야 한다. 이는 내면과 외면에서 창의적이고 역동적인 심리영성적 균형과 조화를 동시에 이루는 데 필요한 실제적인 처방전이다. 꿈꾸는 이가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기억하기만 하면 자각몽을 꾸는 동안 이런 역동적인 균형과 창의적인 조화를 이룰 수 있다.

- 서구의 꿈 이론가들 중에는 최근 들어 자각몽에 대한 관심이 급증하는 걸 걱정하는 이들도 있다. 자각몽을 키우는 연습이 '우물에 독을 타는' 게 될까 두렵다는 것이다. 깨어있을 때 자기기만적인 자아가 의식적으로 꿈을 '통제'하려다 자연스럽게 꿈꾼 이의 온전성과 건강을 증진하는 꿈의 본성을 억누르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그럴싸하고 정교해 보이지만 내 경험에서 보자면 부질없는 생각이다. 자각몽이 위험하다는 걱정은 사실 오만이자 자기기만이다. 의식이 내재적으로 꿈보다 우등하고 더 강하다는, 검증되지 않고 의문시되지 않은 가정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가정은 사실이 아니다. 자각몽을 꾸는 자아(꿈에서 꿈을 꾸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나'란 인물)는 꿈 자체에선 부차적이다. 꿈꾸는 사람이 자신의 자각 상태를 사소한 일에 사용하거나 잘못 이용하려 하면 꿈은 그런 개입을 그냥 무시하거나 무효화시켜 버린다. 이런 일은 '특허받은' 자각몽 기술 신봉자들이 인정하는 것보다 훨씬 더 빈번하게 일어난다. 그게 아니면 단순히 꿈꾸는 사람이 중단되거나 오용된 자각몽에서 드러난 중심적인 드라마나 문제들을 다른 꿈에서 다루기로 약속하고 깨어나게 된다. 

- 이렇게 보면 자각몽도 보통의 꿈과 그렇게 다르지 않다. 꿈이 꿈꾼 사람이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는 정보를 가져다주지만 어떻게 반응하느냐는 꿈꾼 이에게 달려 있다. 꿈에서 자각 상태를 얻게 되는 사람들도 흔히 착각이나 실수로 결정을 내린다. 하지만 그건 꿈꾼 이가 가진 자기기만과 부정을 보여 주는 것이지 꿈 자체에 관한 것은 아니다.

- 고대 샤먼들이 습득한 기술과 통찰에 귀를 기울이면 자각몽의 세계에서 창의성을 성급하게 막아 버리고 스스로를 기만하게 되는 일을 피하는 데 도움이 된다. 전 세계 샤머니즘은 어디서나 모두 기본적으로 모든 것은 살아 있다는 것을 믿는다. 모든 사물에 생명을 불어넣는 영의 존재들과 에너지와 우리가 의식에서 보다 온전하게 관계 맺으려면 이들에 대해 알고 이름 붙일 수 있어야 한다. 인류학계에서는 이런 영적인 세계관을 낮춰서 애니미즘(물활론)이라 부르고, 이런 세계관과 연관된 제례와 의식을 '유아적'이고 '원시적인' 단계에 있는 종교의 특징이라 보았다. 하지만 꿈 세계의 본질에 대해 "모든 것은 살아 있다."라고 말하는 것은 고도로 정교하면서 또 절대적으로 옳은 분석이다. 꿈에서는 처음에 어떻게 보이는지에 상관없이 모든 것이 살아 있다. 프리츠 펄이 시작한 꿈에 대한 게슈탈트 접근법의 핵심이 바로 이 '물활론'이다. 즉 꿈속에 있는 모든 사물과 사람은 꿈꾼 이 내면에 살아 있는 존재와 정신의 어떤 측면을 보여 주는 것이다. '무생물'로 간주되는 기계와 의자, 탁자, 바위, 흙, 구름, 대지도 꿈에서는 모두 살아 있고 의식이 있으며 자기표현을 할 수 있다. 내가 용기를 내어 열린 마음과 존중하는 태도로 이들에게 말을 걸기만 한다면 말이다.

- 게슈탈트 방식으로 꿈을 다룰 때 꿈꾼 이는 꿈으로 다시 들어가 꿈에 등장한 다른 인물이나 형상들의 입장이 되어 꿈을 다시 상상하고 경험한다. 여기선 돌이나 나무도 의식이 있고 자기 인식 능력이 있어서 '샤먼 같은' 탐험가와 말을 나누며, 꿈에서 벌어진 일에 대해 놀라운 통찰과 새로운 해석을 준다. 꿈이 반영하고 형상화한, 깨어있을 때 자기 삶에서의 드라마에 대해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게 된다.

- 자각몽을 꾸는 사람은 꿈속의 모든 것이 살아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사실 깨어있을 때도 마찬가지지만 꿈에 펼쳐지는 삶은, 한 사람이 지닌 개인적인 생명 에너지가 원형들과 우주라는 더 큰 생명과 뒤섞여 있다. 하나의 생명력이 모든 것에 생명을 불어넣는다는 데에는 원형적인 직관이 담겨 있다.  

- 이 '물활론적인' 세계관을 깨어있을 때의 물리적인 세계에 적용해 보면 윤리적으로 행동하고 두려움과 불안을 극복하는 데, 우리가 일상에서 만나게 되는 '동시성'의 경험과 다른 원형적인 패턴들을 정서적이고 영성적으로 만족스럽게 받아들이는 데 아주 긍정적이고 심오한 효과가 있다. 이런 사실 하나만으로도 '물활론'은 좀 더 연구해 볼 가치가 있다. 현대 과학이 이런 고대의 원형적인 아이디어에 가까이 가고 있다는 점을 볼 때 물활론을 다시 생각해 볼 여지는 더더욱 충분해 보인다. 

- 이런 '원시적인' 세계관이 실은 가장 정확하고 정교하며 과학적인 가설이기도 하다고 볼 만한 이유가 늘고 있다. '가이아 가설'은 지구 자체가 거대 규모의 생태적인 기제를 가지고 행성 전체의 신진대사를 조절하는, 거대한 살아 있는 유기체라고 본다. 동식물 개체가 그러하듯 지구가 비슷하게 신진대사와 신체 기관의 항상성을 유지하고 자율적으로 조절하고 흉내 낸다는 것이다. 이 가설은 지구를 마치 태모 the Great Mother의 살아 있는 몸으로 본 고대 모계 농경 신학이 되살아난 것처럼 보일 수 있는데, 태모 개념은 사실 수렵채취 시대, 에 '물활론적' 샤머니즘에서 자라나 온 것이다. 

- 현대 물리학과 우주론은 물리적인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원자가 우주의 기원으로 믿어지는 '빅뱅'이란 미분화된 심장에서 생겨났다고 한다. 칼 세이건이 말했듯 우리는 모두 '별 같은 존재 star stuff'이다. 분화되지 않고 '생명이 없는' 것으로 여겨지는 원자들이 유기 분자들을 만들고 오랜 시간 동안 (이 글을 쓰고 있는 나와 읽고 있는 독자를 포함해)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로 진화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내 생각에는 이들 원자들이 처음부터 쭉 살아 있었다고 보는 게 가장 타당할 것 같다. 지난 400년 동안 현대 과학의 기반이 된 '살아 있는 것'과 '생명이 없는 것' 사이의 구분은 점점 더 '명백한 것'과 '미묘한 것' 사이의 차이에 불과해 보인다. 그러니까 어떤 유기원자 집합체는 살아 있는 게 뻔히 관찰되고, 어떤 유기원자 집합체는 신진대사율이 너무 낮다 보니 오늘날까지 우리가 '생명이 없는 것'으로 생각해 온 것이다. 하지만 실은 이들의 신진대사가 너무나 천천히 또 미묘하게 일어나 우리가 관심을 갖고 지켜보는 짧은 시간 동안에는 관찰되지 않는 것일 뿐이다. 

- 비기술사회의 샤먼에게 그런 말은 너무 당연한 것이다. 우리가 가진 제한된 귀로는 돌이나 별에게서 언어로 된 답을 얻을 수는 없다. 하지만 시간을 초월하는 꿈의 세계와 치유가 일어나는 황홀경과 집단적인 신화의 세계에서 바위와 물과 바람과 별의 생명인 '미묘한' 영적인 에너지를 서로 만지고 이해할 수 있다. '물활론'이 인간의 기본의식을 표현하는 것으로 본다면 칼 융이 말한 '집단 무의식의 원형들과 조응한다.

- 두 '잡역부'가 가까이 다가온다. 그들은 아시아인, 그것도 티베트 사람들이다. 그 사람들이 더 가까이 오고 우리 눈이 마주친다. 순간 그들이 그냥 '잡역부'가 아니라 망명 중인 티베트 불교 승려들임을 알게 된다. 난민 공동체에서는 높은 학식과 권위로 존경받는 이들이 잡역부로 일한다. 아니면 갑자기 나는 이 잡역부 행세가 위장임을, 일종의 '시험'이란 걸 분명하게 알겠다. 작업복과 청소도구에도 이 사람들이 누구인지, 정말 어떤 사람인지 내가 알아볼 수 있을 것인가? 나는 이들이 중요한 티베트 불교 지도자들이라는 것뿐 아니라 내가 꿈을 꾸고 있다는 것을 확신하게 된다. 흥분을 가라앉히며 나한테 묻는다.

이 꿈에서 내가 제일 하고 싶은 게 뭘까?


- 텔레파시로 그들을 반겼다. "환영합니다! 저는 제가 꿈을 꾸고 있고 당신들은 꿈속 인물들이란 걸 알아요." 둘은 함박웃음을 터트린다. 한 명이 조금 더 젊긴 하지만 둘은 '같은 급'으로 편안하고 동등한 사이다. 서로 '경쟁 관계'인 계파, '붉은 모자'와 '노란 모자' 출신으로 둘이 이렇게 서로 도우며 편하게 친구처럼 지내는 것은 아주 드문 일이다. 이 지혜로운 이방인들에게 중요한 질문을 하고 싶다.

내가 제일 알고 싶은 게 뭐지? 이 순간 어떻게 최상의 질문을 말로 잘 표현할 수 있을까?

나는 질문을 모호하게 했다가 의도치 않게 자각 상태를 잃고 꿈에 의식적이고 창의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능력도 잃을 수 있음을 알기에 조심스럽다.

 

- 내가 텔레파시로 묻는다.

"어떻게 하면 의식에서의 자각 능력을 손상하지 않고도 신성과의 관계를 강화하고 깊게 할 수 있을지 얘기해 주세요."
둘이 무슨 말인지 알겠다는 듯 웃는다. 어떤 뿌듯한 성취감이 든다. 이 순간 내 온 존재를 다해 물을 수 있는 최선의 질문을 제대로 해냈다.
나이 많은 사람이 텔레파시로 말한다.

"우리 전통에 따라 완벽한 제단을 만들게나."
실망감이 몰려든다. 얼마 전에 깨어있을 때 티베트 불교광인 여동생이 준 논문을 읽은 적이 있다. 동생이 따르는 '바즈라요기니' 교파에서 제례를 위해 아주 정교하게 제단을 차리는 절차에 대한 것이었다. 기본적인 내용은 기억하지만 책이 앞에 있어야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무엇보다 내 질문에 그토록 기계적이고 의례적인 답을 주다니, 실망스럽다. 꿈 자아에게서 뭔가 더 끌어내고 싶었는데 말이다. 왜 이 순간 꿈은 내가 생각할 수 있는 최선의 질문에 이토록 불만스런 대답을 주는 걸까?

- 갑자기 관심이 오른쪽으로 쏠리면서 방 중간쯤에 티베트의 의례용 제단이 아름답고 완벽하게 차려져 있는 것을 본다.
조금 전만 해도 없었던 제단이 제물과 의례용 기구까지 완벽하게 갖추어져 있어 나는 깜짝 놀란다. 웃음이 난다. 두 사람이 여동생이 준 논문에서 읽은 내용을 자세하게 기억해 이 '완벽한 제단'을 차리도록 도와준 것이다. 거기다 나는 제단을 구성하는 것들과 기구 하나하나에 담긴 미세하고 다양한 상징적 의미를 자세하게 기억하고 전체 디자인과 의미도 이해하고 있다. 기분이 좋아진다. 왜 이 꿈이 내게 왔는지 깊이 깨달으면서 기쁨이 몰려온다. 하지만 내가 실수를 하나 한 걸 퍼뜩 깨닫고 놀란다. 두 사람을 돌아다보며 말한다/생각한다.

"고맙습니다. 도와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그리고 죄송합니다. 두 분이 그냥 제 꿈속의 인물만이 아닌 걸 몰라 봤어요... 두 분은 원형적인 인물이신 거죠. 저와 제 꿈에 기댄 존재들이 아니세요. 저를 찾아와 주셔서, 또 이렇게 꿈에 나타나 주셔서 고맙습니다."

- 내가 생각하는 동안 두 사람은 더 크고 환하게 웃는다. 이제 그분들이 더 이상 작업복 차림이 아니고 나도 정장 차림이 아니다. 우리 셋 모두 티베트식으로 '천사들의 체현'을 위한 의례에서 쓰는 가운을 입고 있다. 탑같이 생겨 중심에서 사방으로 뻗어나가는 금속으로 된 '햇살' 혹은 '꽃잎'이 달린 전통적인 헬멧/모자도 쓰고 있다. 이 의례용 모자가 지닌 모양과 구조는 우리 몸과 마음에 있는 우주의 에너지를 집중하기 위한 것이란 걸 알겠다. 우리는 이제 각자 다른 쪽에서 제단을 보며 서 있다. 사방은 투명하고 아름다운 천으로 둘러싸여 있다. 우리는 제단으로 함께 '들어간다'. 각자 선 자리에서 중심을 향해 움직여 나간다. 꿈은 계속되지만 그걸 어떻게 묘사할 말이나 이미지가 없다.

- 이 꿈은 그때나 지금이나 내게는 아주 만족스러운 꿈이다. 꿈속의 두 인물은 '원형적인 존재'로 나 개인이나 내 꿈과 상관없는 존재들이다. 하지만 그분들이 거기 나를 위해 있었고 그걸 내가 명확하게 알고 있었다는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아주 감동적이다. 꿈에서 가장 답답했던 '제단으로 들어가는 부분'이 실은 가장 신나는 부분이기도 했다. 그게 원형들 자체의 세계임을 어떤 면에서 나는 알고 있다. 그때 느낌은 아주 구체적이고 물질적인 것과, 보다 생생하면서도 비물질적인 것 둘 다였다. 그 비물질적인 것은 겉모습 너머에 있는 가장 진정한 존재로, 실상 모든 겉모습을 만들어 내는 근원이기도 하다. 이들 인물들과 직접 교류할 수 있었다는 것은, 그것도 꿈인 줄 알면서 그랬다는 것이 내게는 매우 소중하고 지금도 무척 흥미롭다. 

- 연관된 또 다른 층위에서 보면 이 꿈은 내 개인의 심리영성적인 성장에서 그림자의 진화라는 문제를 장난스럽게 다루고 있기도 하다. 지금까지 나는 모든 종교와 세상의 권위를 근본적으로 미심쩍어해 온 편이다. 특히 밀교의 도그마나 모든 사람이 쉽게 금방 얻을 수 있는 지식이나 정보에 기반을 둔 권위라면 더욱 그러하다. 하지만 동시에 꿈 작업을 하고 공동체를 조직하는 사람으로서 또 누군가가 읽을 책을 쓰는 사람으로서 지식과 경험에서 오는 정당한 권위가 있다는 ...

 
- 동시에 명쾌하고 설득력 있으면서도 심리적인 표현이 세련된 티베트의 원형적인 종교 제도와 철학 사상에 끌린다. 그래서 권위와 싸우는 나를 표현하는 데 '경직되고 의례적인 요구'를 한 '현명한 티베트 수도승'의 이미지는 더욱 적절해 보인다. 내가 가진 창의적인 가능성들을 펼치기 위해선 '밀교적인 권위'가 지닌 그림자를 포용하고 수년 동안 공부하고 경험한 것들을 의식 수준에서 존중하고 잘 활용할 필요가 있음을 보여 준다. 두려운 것은 다른 사람들의 예에서 너무 많이 봐 온 것처럼 내가 가진 권위를 잘못 사용하는 것이다. 여기서 아이러니는 의식 수준에서 내가 지닌 권위를 인정하고 포용하지 않으면 어떤 무의식적인 투사를 통해 이 권위를 잘못 사용할 게 뻔하다는 점이다. 이렇게 자신이 가진 기술과 능력을 받아들이는 게 때로는 자신의 어리석음과 결점을 인정하는 것보다 더 어렵다.

- 전 세계의 샤먼들은 '영의 세계 spirit world'와 만나는 게 꿈꾸는 것과 아주 비슷하다고 증언한다. '영들 spirits'은 항상 선물과 장난스럽지만 궁극적으론 지혜와 용기를 키울 도전거리를 준다. 영들은 다양한 모습으로 위장하고 나타나 제한된 개인의 자아를 뛰어넘어 어떤 존재와 에너지를 느끼게 해 준다. 이런 식으로 자각몽에서 집단 무의식의 에너지가 실린 '영원한 원형'과 만나게 되면 고대 샤먼들이 영적인 수행에서 얻던 기본적인 통찰과 은유를 재발견하고 그 수행에 담긴 구체적인 기술과 전략을 '재창조'하게 된다.
 
- 샤먼 체험은 손상되지 않고 미개발 상태인 자연과 접할 때 그 생기를 회복한다. 하지만 이렇게 일깨워진 에너지가 현대 사회의 기술/언어적인 세상과 만나 적용되지 않으면 '샤먼'의 되살아남은 자기기만과 부인이 그런 만남이 가져다주는 창의적인 가능성과 변화해야 하는 책임으로부터 도피하는 또 다른 수단이 될 뿐이다. 진정한 샤먼 전통은 열려 있고 모험을 좋아한다. 보통 '이성'으로 삶을 다루는 것보다 더 의식적이고 복잡하며 다층적이다. 집단 무의식의 원형적인 패턴들을 실용적인 실재로 인정하는 세계관으로, 자아보다 환시와 꿈을 진정한 에너지와 교감하는 더 실제적인 수단으로 받아들인다. 기술 이전 사회에서 뿐 아니라 현대 산업 사회에서도 진정한 샤먼은 새로운 기술과 새로운 일처리 방식, 새로운 사회관계와, 경험의 틀을 잡고 개념화하는 데 열려 있다. 진정으로 샤먼다운 탐색은 '미신'과는 정반대이다. 늘 열려 있고 도그마에 빠지지 않으며 사회적 인습을 받아들이기보다는 익숙하고 사회에서 받아들여진 것 너머의 것을 탐색하기 때문이다. 기술 개발 이전의 인습을 우리 시대의 인습으로 대체하는 것은 전 세계의 진정한 샤먼 전통이 지닌 아이러니한 안티테제 antithesis이다. 최근에 되살아나고 있는 샤먼 전통에는 전통적으로 샤먼 관습에 있던 극적이고 권위적인 장신구들을 너무 많이 포함하고 있다.  

- 사실 꿈 자체로는 그리 별날 게 없다. 그 시설에서 근무하는 사람들이 자기가 맡은 아이의 꿈을 꾸는 일은 흔했다. 정신분열과 자폐를 앓는 청소년을 매일 치료하다 보니 우리 안에서 해결되지 않은 정서적 드라마를 만나게 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누군가는 심리영성적으로 자신의 한계에까지 몰리기도 하고, 때로는 우리가 지닌 최고의 창의적인 변형 에너지와 가능성을 만나게 되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직원들 내면에서 일어나는 성장과 치유에 대한 은유로 '아이들'을 치유하는 꿈을 꾸는 일이 잦았다. 하지만 보통의 '아이를 치유하는 꿈'들보다 이 꿈에 더 마음이 끌렸던 것은, 특히 자각 상태와 샤먼 행동과 관련해, 그다음 날 일어난 일이다.

- 이튿날 아침 나는 자주 그러듯 시설 안에 있는 한 건물에서 다른 건물로 가고 있었다. 나무 그늘이 진 길을 지나는데 에릭이 수련 중인 치료사와 함께 내가 있는 쪽으로 오고 있는 게 보였다. 나를 보자마자 에릭은 직원에게서 벗어나 내게로 맹렬하게 뛰어왔다. 두려움이 엄습했다. 지금까지 그랬듯 에릭이 이유 없이 나를 심하게 공격할 줄 알았다. 에릭의 공격을 최대한 잘 받아 내고 무마할 요량으로 시멘트 길에서 벗어나 잔디로 내려섰다. 놀랍고 다행스럽게도 에릭은 내 얼굴 몇 센티미터 앞에서 멈춰 소리만 질렀다. 
"어젯밤에 나한테서 뭐 훔쳐 갔지. 당장 내놔."

아이가 화난 목소리로 말했다.
그날 아침 나는 기회가 없어서 아내를 포함한 그 누구에게도 꿈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그래서 에릭이 한 말이 놀랍고 믿기 어려웠다. 뒤따라온 직원이 불안해하며 에릭 바로 뒤에 섰다.
"어젯밤에 난 우리 집 침대에서 자고 있었는데." 내가 말했다.
"아냐. 어젯밤에 나한테서 뭘 훔쳐 갔어. 돌려줘!" 에릭이 계속 소리쳤다.
치료 현장에서는 '환자의 망상'에 참여하는 일을 장려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 순간 이론에 충실하기보다는 정서적으로 정직하고 진실한 게 치료에 더 중요한 것 같았다. 사실 전날 밤 내가 '뭔가 가져온' 느낌이 들기도 해서 조심스레 대화를 이어가기로 했다.
"그럼 그렇다고 치자. 근데 어젯밤에 내가 너한테서 뭘 가져왔지?"

"기억 안 나. 그렇지만 뭘 가져갔잖아. 돌려줘!" 에릭이 대답했다.

 

- "기분이 어때?"
에릭은 내 질문에 놀란 것 같았다. 보통 때라면 에릭은 자기 기분에 대해 말하려 하지 않고 말할 능력도 없었다. 하지만 그날 아침 놀란 에릭이 대답했다.

"괜찮아... 기분이 괜찮아."
"그래? 그거 꽤 드문 일이잖아, 그치?"

대화의 톤이 바뀐 기회를 놓치지 않고 내가 말했다.

"그럼 어젯밤에 잃어버린 거 정말 돌려받고 싶은 건 아닌가 봐?"
우리는 서로를 오래 쳐다봤다. 누구와도 눈을 맞추지 않는 에릭으로선 이 또한 드물고 놀라운 일이었다. 그러다 아이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눈으론 여전히 나를 쳐다보면서 내 말에 자기 기분이 괜찮다'는 걸 갑자기 깨닫고는 '잃어버렸다'는 것에 대해선 까맣게 잊어버린 듯했다. 
"그래, 네 말이 맞을 수도 있겠다."

에릭이 평소 자기답지 않게 차분하고 또렷하게 대답하고는 직원과 같이 걸어갔다.

- 이 이야기가 '마술'이나 '미신' 같이 들릴지 모르겠다. 이런 종류의 체험은 샤먼들이 자기네가 하는 일이 효과가 있고 추구할 만한 것이라 옹호할 때 내놓는 것이다. 또 오랜 시간 동안 꿈의 세계를 꾸준히 탐색하면서 의식 수준이 높아짐에 따라 하게 되는 체험이기도 하다. 함께 꿈 작업을 하면서 어느 정도 깊이 있게 정서적인 교감을 나누게 된 사람들일 때 특히 더 그렇다. 깊은 정서적/감정적 교감은 사실 '미신'과는 반대되는 것이다.

- 내가 에릭과 같은 꿈을 꾼 걸 그저 우연이나 운으로 무시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나는 그 사건이, 그리고 20여 년 꿈 작업을 하면서 경험한 다른 많은 경우가, 겉모습 아래 감춰진 '상징들'에 담긴 의미를 의식적으로 찾고 개발한 결과라고 짐작한다. 에릭이 내가 자기한테서 뭔가 가져가는 꿈을 꾸었다면, 자신의 정신 안에 치유 능력이 있는 부분을 내 이미지로 동일시했다고 볼 수 있다. 그 치료시설의 프로그램을 만들 때 우리는 아이들이 직원에게 그런 투사와 '전의'를 일으켜 그 과정을 통해 치유되게 주의를 기울였다. 이 예에서 우리의 그런 노력이 어느 정도 성공했다고 볼 수도 있 ... 

- 그리고 내가 에릭이 받는 치료에 충분히 동조되어 있어서 그런 전이가 일어났고 또 분열되어 있던 인격의 일부가 막 통합되려 한다는 것을 선의식에서 알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 사건이 우연이 아니라는 것은 에릭이 평상시와 달리 거친 행동을 자제하고 대화하는 동안 기꺼이 눈을 맞추고 있었다는 데서도 알 수 있다. 이런 상황이라면 내가 '에릭을 치유하는 꿈'을 꾸었다고 할 수 있다. 부분적으로는 아이가 새롭고 보다 적절한 행동을 할 준비가 되었다는 무의식에서 이뤄진 관찰을 치료사로서 의식의 표면으로 가져올 수 있었기 때문이다. 동시에 아이 또한 자신의 오랜 습관적인 '미친' 반응을 치료사인 내 이미지가 '훔쳐 가는' 상징적인 치유 행위를 한 것으로 생각해도 말이 된다. 어쨌든 그 꿈 덕분에 내가 열린 마음으로 에릭을 긍정적으로 대할 준비가 되었고 또 긍정적인 결과가 나온 것은 분명했다. 에릭으로선 그런 정상적인 반응이 아주 드문 것이었고, 이후 그의 행동에도 많은 영향을 미친 것 같았다. 

- 꿈에서는 텔레파시라고 불릴 만한 것이 자주 일어난다. 개인들 사이의 정서적인 관계가 어떤지에 따라 또 비슷한 상징에 정서적으로 어떻게 반응하는지에 따라 텔레파시는 이들을 연결시키는 '다리' 같은 것이다. 이 경우 에릭과 나 사이에는 치료와 '치유'라는 정서적인 연결이 있었고 상징적으로 내 꿈에서는 "에릭의 아우라에서 보기 싫은 가시를 제거하는" 것으로 (또 에릭의 꿈에서는 내가 “뭔가 훔쳐 가는" 것으로), 그래서 정말 어떤 '샤먼 같은' 텔레파시로 같은 꿈을 꾸는 요소가 있었던 것 같다. 

- D. T. 스즈끼 박사가 처음 선 불교를 미국으로 가져왔을 때 LA 지역에서 자주 강연을 했다.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어느 날 저녁 박사가 한 시간 반 정도 강연을 한 후 청중으로부터 질문을 받았다고 한다. 한 청년이 일어나 "박사님 말씀을 집중해 들었습니다. 계속 '깨달음'에 대해 말씀하셨는데 그에 대한 정의는 안 내리셨어요. 그 말의 의미가 뭔지 설명 좀 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스즈끼 박사는 좌절감으로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고 한다.

"그런 질문을 하는 걸 보니 오늘 저녁 내가 한 말을 하나도 이해 못 한 모양이네. '깨달음'이란 어떻게 말로 정의할 수 있는 게 아니네. 경험이지. 한결같은 명상 수련을 통해 직접 이해할 수 있는 것이라네."
그 청년은 쉽게 기죽지 않고 다시 물었다.

"예, 그건 이해하겠어요. 하지만 그런 경험을 하려면 어디서 시작해야 할지 도움이 될 만한 정의를 내려주셔야죠. 솔직히 박사님이 무슨 말씀을 하는지 이해 못 하겠어요. 전 정말 이해하고 싶거든요.”
다시 한번 스즈끼 박사는 난색을 표하며 말했다.

"내 말 잘 듣게나. '깨달음'은 말로 정의할 수가 없네."
청년이 끈질기게 다시 한번 물었다.

"스즈끼 박사님, 저는 미국인입니다. 저희는 무슨 정의가 있어야 명확하게 생각할 수 있어요. 정말 박사님 생각을 이 나라에 퍼트리고 싶으시다면 이런 질문에 조만간 답을 하셔야 할 거예요. 그래서 '깨달음'을 말로 정의하기가 힘들다는 걸 인정하더라도, 이 질문에 답을 한다면 어떻게 하실 건가요?" 
스즈끼 박사는 이제 아주 심각해져서 대답했다.

"젊은이, 자네가 방금 무슨 짓을 했는지 아는가. 내가 온 곳에서는 선생이 대답을 거부하는데도 학생이 용기 있고 끈기 있게 세 번 질문을 하면 선생이 반드시 대답을 해야 한다네. 그래서 자네를 돕기보다 잘못 인도할까 걱정이 되지만 '깨달음'의 정의를 내려 보도록 하겠네. '깨달음'은 습관적인 직관(habitual intuition)으로 이해해도 될 걸세." 

- 같은 질문에 답을 하라는 요청을 받았을 때 알란 와츠 Alan Watts가 이 이야기를 전해 주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간단하게 덧붙였다.

"잘못 인도하는 게 될지 모르지만 ‘습관적인 직관'은 내가 생각할 수 있는 최고의 답이에요. 실제적인 수준에서 그게 의미하는 것 하나는 문외한들에게 '깨달음'이 또 깨달은 사람의 삶이 행운으로 보인다는 거지요."

- 내가 꿈을 탐색하고 나누는 걸 깊이 믿는 이유 중 하나는 '아하' 인식을 구하는 동안 직관력이 동원되고 맞춰지기 때문이다. 꿈 작업이 습관이 된 사람이라면 조만간 중요한 메시지를 '아하' 하고 깨닫는 것이 꿈 작업을 하지 않을 때도 보다 의식적이고 쉽게 일어난다는 것을, 즉 '습관적'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꿈으로 작업하는 것이 진정한 '영성적 훈련'이 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이런 '습관적 직관'을 키우기 때문이다. (이 또한 '행운으로 보이는 편이다.) 

- 선의식에서 벌어지는 관찰과 치유의 직관이라는 면만으로도 에릭과 내가 같은 꿈을 꾼 것은 단순한 '행운'이라 보기엔 아주 의미심장해 보인다. 하지만 이런 종류의 '교차 꿈꾸기'와 지난 20년 넘게 내가 경험한 다른 '샤먼' 꿈과 경험들로 인해 나는 전통적으로 텔레파시라 불리는 것에, 그리고 텔레파시가 가진 '샤먼적인 치유'에 대해 아주 열린 마음을 갖게 되었음을 인정해야겠다. 비록 꿈 덕에 길에서 에릭을 만나 계획에 없는 치료 세션을 할 준비가 되긴 했지만, 이 꿈은 내 심리에서 계속되고 있는 '미친 아이'를 치유하고 변모시키려는 그림이기도 하다. 에릭이 내 꿈에 나타난 것이 부분적으로는 내가 아이와 그리고 아이가 겪고 있는 정서적인 상징 드라마와 동일시한 부분이 있기 때문이고, 기괴하게 과장된 나 자신이 가진 드라마에 대한 풍자였다. 그런 꿈과 관련해 나 스스로를 치유하는 데 실제로 관여하게 되면 내가 똑같거나 비슷한 문제를 다루는 사람들에게 보다 나은 치료사가 될 것이란 것도 나는 알고 있다. 이건 "상처를 받아 본 자만이 치유할 수 있다."는 오랜 원형적인 지혜이다. 전 지구상에서 '치유의 신들'은 그들 자신이 아프고 상처를 받은 적이 있다. 스스로의 심리영성적인 성장과 회복에 적극적이고 창의적으로 참여한 치료사나 상담가는 다른 이에게 많은 도움을 줄 수 있다. 내 경험으로 "아닌 사람은 아니다." 칼 융이 즐겨 말했듯 "사람들은 우리가 무슨 말을 하는지가 아니라 우리가 누구인가에서 배운다.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은 마음의 병이다.” 

- 지난 세월 동안 내 경험으로 치료사/상담사와 내담자의 꿈이 이런 식으로 ‘겹치게' 되면, 혹은 서로에 대한 꿈을 꾸기만 해도, 의미가 있으며 결코 ‘단순한 우연'으로 치부해서는 안 된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그런 '우연들'은 분명히 융이 동시성(겉보기에 아무 연관 없이 우연히 일어난 듯한 사건들 사이에 존재하는 깊이 중요한 관계)이라 불렀던 원형적인 현상의 중심에 있는 것들이다. 원주민 샤먼들도 이런 동시성을 가진 사건들을 눈치챘고 모든 사물에 생명을 불어넣는 '영적인 에너지'와 가까이 만날 때 일어나는 것이라고 믿었다. 나는 이것이 똑같은 걸 그저 다르게 말하는 것이라고 갈수록 확신하게 된다.

- 고대 샤먼들이 가진 개념과 용어와 통찰은 특히 가치 있다. 직관적인 깨달음과 개인의 용기, 아름다움에 깨어있는 것을 추상적인 이론이나 이성적인 사고만큼이나 중요한 것으로 끌어올리기 때문이다. 나는 이런 종류의 에너지가 내 삶에서 창의적인 에너지를 성장시키고 풀어내는 데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체험으로 알고 있다. 또 이들'개인적인' 특성과 에너지가 다른 사람을 치유하고 변환시키는 데 아주 효과적이란 것도 알고 있다. 

- '원형'은 오늘날 또는 역사적으로 반복되는 에너지와 형태, 상징적인 의미 등을 통해 자신을 드러낸다. "원형이 우리 안에 있다기보다 우리가 원형에 둘러싸여 그 안에서 살고 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다."라고 그리스의 치유자인 에반젤로스 크리스토우 Evangelos Christou는 말했다. 우리는 날마다 원형의 영향을 경험한다. 원형적인 패턴과 상징 드라마가 정기적으로 우리 꿈에 나타난다. 그뿐 아니라 우리는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알아볼 수 있는 동일한 신화적 주제를 개인과 집단의 삶에서 끝없이 변주하며 반복한다. 지구 전체와 인류의 역사를 되돌아볼 때, 이 원형의 에너지들은 다양하고 서로 연관된 물리적인 형태와 구조, 상징적 의미, 심리영성적인 중요성을 띠고 나타났다. 이 원형적 패턴들은 우리가 개인으로서 또는 집단적으로서 진화함에 따라 발전하고 변화해 왔다. 우리의 꿈이 그것을 증명한다. 하지만 칼 융이 지적했듯이 집단적인 영역의 원형이 진화하는지 그렇지 않는지는 확실히 대답할 수 없다. 우리가 원형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모두 우리 삶에서 원형이 등장할 때 우리의 제한된 인식과 선조들이 해 준 설명을 근거로 한 것이다. 우리가 '집단 무의식의 원형'의 존재를 추정하는 방식은 플라톤이 '이상형'의 존재를 동굴 벽에 생긴 그림자에서 추정한 것과 마찬가지이다.

- 원형을 직접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은 실존적으로 제한되어 있다. 따라서 원형을 보는 우리의 '발전'이 원형의 에너지 자체가 변해서인지 아니면 원형의 에너지를 인식하고 개념화하는 우리의 능력이 바뀌어서인지 분간할 수 없다. 플라톤처럼 우리도 그림자를 만드는 대상 자체가 아닌 '그림자'에 대해서밖에 얘기할 수 없다. 인간의 인식이 근본적으로 제한되어 있긴 하지만 우리에게 원형이 엄청나게 느린 모습이긴 하지만, 진화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틀림이 없다.

- 칼 융이 '집단 무의식' 혹은 '객관적 정신'이라고 부른 영역은 이들 '원형'으로 구성된다. 이 영역의 실재는 원형적인 형태가 어떤 '모방'이나 빌려오는 일이 없는 곳에 자발적으로 등장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전 세계 어린아이들의 꿈이나 그림에 등장하는 기본적으로 동일한 형태가 있다. 역사적으로 완전히 분리되고 독립된 사회에서 기본적으로는 비슷한 문화적 표현이 있다.

 

- 우리의 사회적·개인적 경험을 반복적이고 원형적인 이미지와 상징으로 표현하는 경향이 있다. 이 원형적인 형상들은 우리가 그 표현에 어떤 변화를 주더라도 본질적으로 같은 형태이다. 융은 원형들을 자기 보존, 생산 본능, 다양한 모습으로 변용되어 나타나는 타고난 '본능'이라고 제안했다. 이 장에서 나는 꿈에 등장하는 한 가지 원형과 그 원형이 개인의 의식과 집단 무의식에서 성장하는 역할에 집중하고자 한다. 

- '자발적 희생'이라는 원형은 개인과 집단의 성장과 발전에 아주 중요한 구실을 한다. 자발적 희생이 변용되어 나타나는 예는 무수히 많으면서도 '누군가 다른 사람을 살리기 위해 자기 목숨을 자발적으로 버린다'는 이야기는 본질적으로 유사하다. 역사적으로 자발적 희생의 이야기는 늘 처음에는 동물의 형태로 등장해서 점점 더 인간의 형태로 진화해 간다. 이 원형적인 상징 드라마의 '진화'에서 자발적 희생이 초기 동물의 모습일 때조차 신성한 존재라는 것은 분명하다. 불교와 그리스도교에서도 자발적 희생은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여기서 개인의 심리영성적인 성장과 인류와 세계 전체의 '구원'은 연결되어 있다. 개인의식과 지능, 호기심, 용기, 창의성, 자비심은 자발적 희생이라는 원형의 등장과 성장에 중요한 것 같다. 그건 인류의 진화와 병행하는 것 같다. 우리가 이런 미덕을 개인의 삶에서 체화할수록 종으로서 우리도 한결 더 잘 살게 된다. 이런 인간적인 에너지를 표현하는 것은 인간의식을 발전시킬 뿐 아니라 원형이 펼쳐지도록 돕는다.

- 용기 있고 양심적이며 자비심 넘치는 행동은 추상적이거나 일반적인 것이 아니며, 구체적이고 개별적이다. 개인의 인식과 관계, 창의적 표현이 이룬 성과가 누적되어 전체 사회와 문화를 만들어 낸다. 이런 의미에서 원형들이 자신을 드러내고 성장 발달하기 위해 인간 개개인의 삶이 필요하다고 표현할 수도 있다. 개인의 의식을 발전시키는 개별적인 행위와 경험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달마가 말했듯 "네가 망상에 빠져 있으면 부처가 중생을 해탈하게 하고, 네가 깨달으면 중생이 부처를 해탈하게 한다. 부처가 홀로 부처가 되는 것이 아니며 중생들이 해탈하게 하는 것이다."

- 칼 융은 <욥에 대한 대답 Answer to Job>에서 이 과정의 구체적인 예를 보여 준다. 욥기에서 그는 신성의 원형의 진화는 욥의 고통과 질의에, 결과적으로 인간의 윤리적 이해에 정비례한다고 분석한다. 융이 지적하듯 신성은 그 자체가 실제로 변하는 게 아니라 욥이 비탄에 빠져 정의를 갈구한 결과에 따라, 또 우리의 반응에 따라 인간에게 '얼굴'을 조금 더 보여 줄 뿐이다. 그렇더라도 신성을 볼 수 있는 인간의 능력이 진일보한 것은 틀림없다. 그 자체만으로도 '원형의 발전'이라고 볼 수 있다. 

- 꿈에 나타난 원형의 형태가 명백하고 극적으로 나타날 때가 있다. 또 '신화적'이고 '신비롭고 특별한 에너지'로 가득 차 있을 때가 있다. 그런 꿈은 꿈꾼 이와 꿈 작업을 같이 하는 이들을 종교적이고 영성적인 영역으로 이끈다. 융은 이런 꿈들을 '큰 꿈'이라고 불렀다. 이 꿈들은 개인적인 것을 넘어서 초월적인 의미가 담겨 있다. 하지만 내 경험에는 모든 꿈 안에 초월적인 요소가 담겨 있다. 아무리 '작고' 조각나고 사적으로 보이더라도 깨어 있을 때의 삶과 꿈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것의 기본적인 배경은 원형적이다. 전면에 등장하는 인물이 '과장되게' 보이건 그렇지 않건 상관없다.

 

- 오염되었을지 모르는 잔을 나누는 것은 내면작업과 영적 성장을 위해 그림자와 아니무스를 포용하려는 그레이스의 의식적인 노력을 확인해 주는 것이기도 하다. 꿈속에서 죽음은 항상 정서적인 성장과 변화에 대한 은유이다. 지진으로 죽어 있는 사람과 포도주 잔을 나눈 세 사람도 죽을 것이라는 암시는 모두 그런 성장과 발전이 어렵고 고통스럽지만 얼마나 뿌리 깊은 것인지를 보여 준다. 집단적이고 원형적인 은유로서 이 꿈은 순교한 중미의 오스카 로메로 주교의 "우리의 죽음은 가난한 자들의 운명을 나누는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라는 신비하고 예언적인 말을 다르게 표현한 것이다. 개인적이고 제도화된 종교 생활에 고통과 불확실함과 환멸을 느끼면서도 그레이스는 이 꿈에서 자신의 삶과 다른 모든 이의 삶을 긍정한다. 이렇게 성장하면서 그레이스는 모든 사람과 인간애를 나눈다. 특히 교회가 무시하고 거부하는 이들도, 심지어는 '신의 조화'인 '지진'으로 벌을 받은 것 같은 사람까지도 감싸 안는다.

- 꿈에 '참여자이면서 관찰자이기도 한 경험'이 이 꿈 전체의 '틀'이다. 흔히 이는 꿈꾼 이가 깨어 있을 때 자기 삶의 문제들을 평가하는데 뭔가 '객관성'을 얻어가고 있다는 얘기다. 이 꿈은 자신이 경험하고 있는 사적인 정서의 분출과 지적인 회의, 현대사회에서 느끼는 복잡한 도덕성의 문제를 그레이스가 냉소나 우울함에 빠지지 않고 깊은 사랑으로 받아들이고 있음을 보여 준다.


- 배경이 다시 바뀐다. 이번에는 폭풍이 치는 바위산 꼭대기이다. 어둠 속에서 거대한 번개가 폭포처럼 쏟아진다. 눈이 멀 것 같다. 번개가 늙은 신을 태워 버린다. 나는 무사하다. 나는 그가 내 팔 안에서 정화되고 자유로워졌다는 데 흥분하고 기뻐서 잠이 깬다. 
이 꿈이 원형들 자신이 개인의 의식과 행동을 통해 변화하는 방식에 대한 은유적인 그림, 즉 ‘작은 신화'일까? 나는 그렇다고 믿는다. 꿈을 꿀 때마다, 꿈을 기억하든 못하든, 이 과정에 우리 모두 참여하는 걸까? 나는 그렇다고 믿는다. 우리 인류가 진심을 다해 겉보기엔 사적이고 개별적인 꿈들을 다루다 보면 집단의 원형의 에너지들이 모양을 갖추고 분명해질 것이다. 

- 우리는 이제 지구상의 모든 생명을 파괴할 수 있는 힘을 손에 쥐고 좋은 일을 위해서건 나쁜 일을 위해서건 매일 행사하고 있다. 살아남으려면, 원자의 구조나 별의 구성을 아는 것만큼 우리 무의식의 깊이와 창조적인 가능성에 대해 배울 필요가 있다. 꿈은 그 무의식에 접근하는 긴요한 열쇠이다. 이 영역을 의식적으로 탐험해야 한다. 더 이상 기다릴 시간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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