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2

[신기율] 운을 만드는 집 - 돈 건강 관계의 흐름이 바뀌는 공간의 비밀

일루젼 2025. 4. 2. 0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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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신기율
출판 : 위즈덤하우스
출간 : 2018.07.27


       

           

원래는 매달 조금씩 정리해나가려고 했었는데, 문득 미래는 모르는 일이니 할 수 있을 때 많이 해두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빠르게 환경을 바꿔줘야 변화의 흐름이 끊기지 않을 것 같고- 좀 더 실감이 날 것 같아서.

 

잡설이 길었는데 간단히 말하면 엄청 질렀다는 이야기다.

오덴세 레고트 시리즈도 팍팍 사고, 로보락 S9 max도 사고, 스타일러도 벽걸이 TV도 사버렸다.

앞으로의 일은 미래의 내가 힘을 내주겠지. 그동안 미리 당겨서 행복하게 사용하고 있으면 되는 거 아닐까.

 

예상대로만 흘러가는 일은 없다. 

하지만 그 변수가 어떤 의미로 돌아올지 알 수 없을 때, 개인이 할 수 있는 건 그 순간에 최선을 다 하는 것뿐.

돌이켜보면 후회도, 만족도 다 순간일 뿐 총합은 비슷한 것 같다.

 

에스프레소 머신이 다다음주는 되어야 배송된다고 한다.

책장 새 걸로 바꾸고 싶다.

더 더워지기 전에 에어컨 청소해두려고 했는데, 다시 추워져서 좀 더 버티기로 했다.

 

그런 나날을 보내는 중이다. 

 

        

   


   

     

절대적으로 나쁜 터는 없다

 



- "이 집에 온 뒤부터 되는 일이 없어요. 아무래도 집에 문제가 있는 것 같은데, 선생님이 잠시 들러주시면 안 될까요?"
초로에 접어든 남자의 얼굴에는 피곤함과 불안감이 짙게 배어 있었다. 혈색이 좋았던 얼굴은 몇 년 새 반쪽이 됐고, 흰머리도 확연히 늘어나 있었다. 대기업 임원으로 승승장구하며 일하던 시절에는 나이에 비해 훨씬 젊어 보이고 늘 생기가 넘쳤는데, 대체 지난 3년간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 한강 변에 위치한 그의 집으로 들어서자마자 베란다를 가득 채운 한강의 풍광이 한눈에 들어왔다. 조금 오래됐지만 상당한 금액을 주고 얻었을 것이 분명한 집이었다. 집안 내부는 안주인의 깔끔한 성격을 보여주는 듯 단정했고, 흐트러짐이 없었다. 남서향에 볕도 잘 들고 한강이 한눈에 보이는, 누구나 부러워할 법한 이 집에 대체 어떤 문제가 있다는 것일까.

- "3년 전에 은퇴를 하면서 그동안 고생한 아내에게 경치 좋은 집을 선물하고 싶어 조금 무리를 해 이 집에 이사를 왔습니다. 그런데 그때부터 안 좋은 일이 한꺼번에 일어나기 시작했어요. 노후 자금을 마련하려고 나름 신중하게 투자했던 주식이 급락하면서 큰 손실을 봤고, 그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았는지 심근경색이 와 죽다 살아났죠. 그 뒤부터는 몸도 안 좋고 매사에 의욕이 없어서 방에 틀어박혀 있는 시간이 많아졌어요. 그러다 보니 자연히 집사람과 다툼이 잦아졌죠." 
처음에 그는 그저 운이 없었던 것뿐이라고 생각했지만, 언젠가부터 집이 점점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외출했다가 집에만 오면 마음도 몸도 축축 처지는 것이 느껴졌고, 그 감정을 아내에게 풀었다. 혹시 집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닌가 싶어 관련 책을 찾아본 그는 뜻밖의 곳에서 원인을 찾아냈다. 그것은 바로 눈앞에 펼쳐진 한강. 
"저길 보세요. 이 아파트 앞쪽이 한강 물줄기가 흘러나가는 자리예요. 이런 곳은 돈도, 건강도 물이 빠져나가듯 나가버려서 풍수에서는 '흉지'라고 한다면서요? 그걸 알고 나서부터 신경이 더 쓰이고 꺼림칙해서 이사라도 가야 하나 싶어요."

- 눈앞에서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휘돌아나가는 한강의 푸른 물결. 말없이 창밖을 바라보던 그의 얼굴에 불안감이 다시 떠올랐다. 혹자는 그런 그에게 요즘 세상에 무슨 미신 같은 걸 믿느냐고, 마음이 약해져 잡생각이 드는 것이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한강의 물살이 그의 불안, 우울과 공명해 마음속에 이미 어두운 '한강 효과'를 만들어버렸다는 사실이다.

- "말씀하신 것처럼 이곳은 '물이 흘러나가는 자리'가 맞습니다. 풍수에서 물살과 바람이 거칠게 빠져나가는 곳은 사람의 재물과 정신도 함께 빠져나가는 살지처(殺地處)로 보는 경우가 많아요. 하지만 세상에 절대적인 악인은 없듯, 절대적으로 나쁘기만 한터는 없습니다."

- 자연은 인간의 기준대로 좋은 것, 나쁜 것을 가리지 않는다. 저 강이 돈, 건강, 행운 같은 좋은 것들만 굳이 골라내 앗아간다는 것은 너무나 인간 중심적인 생각이다. 좋은 것이 나간다는 것은 나쁜 것 역시 나갈 수 있다는 말이다. 어쩌면 이 집은 보이지 않게 그런 역할 역시 해왔을지도 모른다. 또한 세찬 바람이 빠져나가는 곳은 때로는 다시 비상할 수 있는 공간이 되기도 한다. 강한 맞바람을 맞을 때 연이 하늘로 날아오르듯 마음을 다잡고 버티면, 나를 한 단계 성장시키는 수행의 집이 될 수 있다. 결국 동전의 양면 중 어느 쪽을 볼 것인지, 어느 쪽에 내 마음을 둘 것인지의 문제다. 

- 그러나 그는 내 말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며 물었다.
"그렇다면 사람이 마음먹기에 따라 흉당도 명당이 된다는 말입니까? 저같이 평범한 사람이 터의 기운을 바꾼다는 게 말이 됩니까?"
"물론 저 한강의 물길은 바꿀 수 없죠. 하지만 선생님이 살고 있는 집, 이 작은 공간만큼은 선생님의 힘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그걸 아셔야 이 집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어요. 외부 환경이 미치는 영향은 생각만큼 크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 그는 창 너머의 강에 시선을 빼앗긴 나머지 더 중요한 부분을 놓치고 있었다. 바로 그가 발 딛고, 매일 먹고 숨 쉬며 살고 있는 집이 '사람의 생기'를 잃어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의 집은 깔끔했지만 왠지 온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부부가 대화할 만한 공간은 식탁이 전부였다. 각방을 쓴지 조금 된 듯, 서재 한쪽 구석에 급하게 개어놓은 듯한 이부자리가 보였고, 묘하게 어수선했다. 방 안 전체에 무겁게 내려앉은 공기는 단지 창에 쳐진 암막 커튼 때문만은 아닌 듯했다. 이 아파트에 사는 모든 사람이 그와 같은 힘겨움을 겪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이 집의 문제를 만든 것은 결국 사람, 이 집에 사는 사람일 것이다. 

- 우리는 공간에 대해 이중적인 태도를 갖고 있다. 풍수를 믿는 그처럼 많은 사람이 공간이 가진 힘과 영향력을 절대화하고 수동적으로 받아들인다. 이는 '왕후장상의 터는 따로 있고 바뀌지 않는다'라는 생각으로 흐르기 쉽다. 과거 세도가들이 왕릉 주변에 사람이 살지 못하게 하고, 좋은 터를 찾기 위해 전국의 산천을 들쑤시고 다닌 것도 이 때문이다. 요즘에도 많은 사람이 사옥이나 중요한 건물을 지을 때 풍수 전문가에게 조언을 구하곤 한다. 가장 잘 알려진 예가 SK 사옥이다. 

- 최태원 회장이 취임한 지 1년쯤 되었을 때 완공된 서린동 SK 사옥은 신령한 거북이가 물을 마시는 형상인 영구음수형(靈龜飮水形)로 유명하다. 이런 곳에 자리 잡으면 거북이처럼 장수를 누리고 부귀를 누릴 수 있다고 알려져 있다. 건물 안에도 거북이를 형상화하는 문양들을 배치해 이 건물의 풍수적 상징성을 더욱 강조했다. 그 덕분인지 SK 주가는 상장 후 지금까지 10배 넘게 성장했고, 사세도 크게 확장됐다. 그러나 이런 대단한 명당도 다가오는 불행을 완전히 막을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회장이 여러 번 구속되고 스캔들에 휩싸이는 등 풍파 역시 끊이지 않았다. 좋은 일만 일어나야 할 대표적인 명당에서 왜 이런 반흉반복의 사건이 번갈아 일어난 것일까?

- 고전에서 말하는 명당은 그곳을 차지하는 순간 모든 게 결정지어질 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터의 힘을 발현시키기 위해서는 사람 역시 그 공간에 맞는 행동과 생각을 해야 한다. 아무리 땅이 좋아도 기온과 습도 등 또 다른 조건이 맞지 ...

- '유령 DNA가 공간의 에너지를 바꾼다'
1990년대 초, 러시아의 한 과학자가 독특한 실험을 했다. 블라디미르 포포닌 박사의 '유령 DNA' 실험이 바로 그것이다. 그는 진공 상태에서 빛의 패턴을 측정하는 장치를 개발했다. 먼저 아무것도 없는 진공 상태의 공간에 레이저를 비췄다. 당연히 어떤 반응도 나타나지 않았다. 다음에는 DNA 샘플을 넣고 레이저를 비췄다. DNA와 만난 레이저는 일정한 패턴의 무늬를 만들어냈다. 놀라운 것은 그다음이다. DNA 샘플을 제거한 뒤, 다시 그 빈 공간에 레이저 광선을 비췄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과학자들은 당연히 어떤 패턴도 나타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하지만 놀랍게도 처음과는 다른 독특한 패턴이 나타났다. 심지어 그 패턴은 아무것도 없는 진공 상태에서 몇 주 동안이나 남아 있었다. DNA 샘플의 자취가 마치 유령처럼 그곳에 남아 공간에 영향을 미친 것이다. 포포닌 박사는 이런 현상에 '유령 DNA 효과'라는 이름을 붙였다.

- 믿기지 않는 이야기 같겠지만 사실 이런 현상은 우리 역시 일상적으로 접하고 있다. 돌아가신 지 얼마 안 된 부모님의 집에 들어선 순간, 그분의 기척을 느낀 것만 같은 착각, 학자의 연구실에 들어서면 평소에는 쳐다보지도 않던 책에 손길이 가고 심지어 잘 읽히는 것 같은 기분, 예배당이나 법당에 들어서는 순간, 알 수 없는 고요함과 잔잔한 평화가 가슴 밑바닥부터 차오르는 느낌 등 우리가 보통 '분위기'라고 통칭하는 것들이 어쩌면 유령 DNA의 작용인지도 모른다. 그곳에서 생활하고, 공부하고, 기도하던 수많은 사람이 남긴 흔적이 그 공간을 그렇게 만든 것이다. 

- 스페인으로 여행을 다녀온 한 지인이 '가우디 성당'이라 불리는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에서의 색다른 경험담을 들려준 적이 있다.
"준비 없이 떠난 여행이라 아무 배경지식도 없었어요. 그냥 성당에 들어가 혼자 앉아 있었는데, 이유 없이 눈물이 줄줄 흘러서 깜짝 놀랐어요. 저는 천주교 신자도 아닌데 말이죠."  

- 일상에 지친 사람들에게 집은 그저 먹고, 자고, 쉬는 곳일 뿐이다. 그래서 거실에서도, 방에서도, 식탁에서도 비슷한 행동을 하고 비슷한 감정을 쏟아낸다. 현실 속의 골치 아픈 일을 잠시 잊기 위해 휴대폰 속으로 도피하거나 멍하니 TV를 보거나 답답한 현실에 한숨을 내쉰다. 아무리 넓고 방이 많은 집이라도 그 공간을 채우고 있는 감정의 색깔은 대부분 비슷하다. 보이지 않는 에너지 측면에서 보면 공간이 질서 없이 뒤섞여 있는 것이다. 때문에 많은 집이 명당도, 흉당도 아닌 나름의 아슬아슬한 균형을 유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마음이 우울이나 불안 같은 방향으로 기울어버리면 정서적 공간 역시 마음을 닮아버리게 된다. 

- 이런 악순환을 끊고 내 집을 조금 더 적극적으로 나를 살리고 도와주는 공간으로 창조하고 싶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먼저 공간에 의미를 부여하는 기술을 익혀야 한다. 예를 들면 '반성 의자' 같은 것이다. 한 의자에 '아이가 자신의 잘못을 생각하고 뉘우칠 시간을 주는 의자'라는 의미를 부여하면 평범했던 그 의자는 아이와 부모 모두에게 특별한 영향력을 발휘하기 시작한다. 반성과 용서를 만드는 상징적 공간이 되는 것이다. 

- 이처럼 우리는 집의 특정한 장소에 나만의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완전히 다른 정서적 공간을 만들 수 있다. 

- 나는 오랜 시간 그와 마주 앉아 공간에 대한 다양한 대화를 나누었다. 처음에 그는 스페이스로지를 이해하지 못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이런저런 생각에 잠기는 듯했다.
"실패의 기억과 에너지로 가득한 집은 떠나는 것도 나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제가 볼 때 선생님은 새로 이사한 집에서도 단점을 찾아낼 가능성이 커요. 선생님 자신이 바뀌지 않는 한, 이런 일은 얼마든지 반복될 수 있습니다."

- 은퇴라는 큰 변화를 겪었다면 가장 익숙한 공간에서 변화의 적응 기간을 갖는 것이 좋다. 편안하게 기댈 곳이 없으면 사람은 다급한 마음에 엉뚱한 선택을 하게 되고 무리수를 두게 된다. 그리고 그 선택은 고구마 줄기처럼 줄줄이 어긋난 선택을 하게 만든다. 그럴 때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자신의 고통을 투사할 대상을 찾는다. 비록 그것이 완전한 진실이 아닐지라도 말이다.

- 결국 그는 이사 대신 다른 선택을 했다. 그는 창업을 준비하는 청년들에게 무료 컨설팅을 해주고 있다며 한결 밝아진 목소리로 자신의 소식을 전했다. 우울함과 분노를 토해내는 것밖에 할 일이 없던 그의 공간. 그곳에서 그는 어느새 거친 물살에도 떠내려가지 않는 법을 알게 된 것이다.

 

힘들 때 이사하면 십중팔구 안 좋은 집을 택한다



- 이 작가의 이전 집은 한강 변에 위치한 고급 아파트 1층이었다. 이사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그의 집에 처음 초대받아 갔을 때였다.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무거운 공기가 온몸을 누르는 듯했다. 약간 무겁고 안정된 느낌이 아파트 1층의 특성이긴 하지만 그의 집은 유난히 그 정도가 심했다. 안정되다 못해 답답하고 정체된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실제로 거실에 피워둔 향초를 보니 촛불의 흔들림이라곤 전혀 없었다. 창가의 화초들은 이미 시들어버린 상태였다. 전형적인 '순환이 안 되는 집'이었다. 만약 이사하기 전에 이 작가가 내게 조언을 구했다면 고개를 저었을 집이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순환이 안 되는 것 같으니 작은 실내 분수라도 두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정도의 조언밖에 할 수 없었다. 이미 이사 온 사람에게 굳이 새집의 문제점을 이야기할 필요가 없었을 뿐 아니라 이 작가 본인도 힘겨운 시기를 보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제법 유명한 작가였던 그는 그 무렵,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당하고, 출판계에서 여러 가지 구설수에 오르는 등 많은 상처를 받았다. 그 바람에 급작스레 계획에도 없던 이사를 한 것이다. 

- 누구나 힘든 시절을 맞을 때가 있다. 갑자기 몸이 아프기도 하고, 일이 잘 풀리지 않기도 하고, 금전적으로 큰 손실을 보기도 한다. 그럴 때 '지금 사는 터가 안 좋다'라는 이유로 혹은 심기일전을 이유로 이사를 하는 사람이 많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그럴 때 이사를 하면 십중팔구 안 좋은 집을 선택한다는 것이다. 답답한 인간관계, 문제 있는 투자를 결정했던 선택의 패턴이 집을 고를 때도 똑같이 적용되기 때문이다. 우리의 선택에도 자기유사성을 반복하는 일종의 '프랙탈(fractal)'이 존재하는 셈이다.

 

- 때문에 이사는 가장 안정적이고 상승세일 때 하는 것이 좋다. 아니면 그런 사람에게 조언을 구하거나 전문가에게 맡기는 것도 방법이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볼 때 이미 '실패의 자기 복제'를 하고 있는 사람은 누군가의 조언을 받아들이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만큼 자신의 패턴을 깨는 것은 쉽지 않다. 지난번 집을 구했을 때도 좋지 않은 선택을 했던 이 작가는 이번에도 비슷한 실수를 반복하고 있었다.

- "저 집이 어딜 봐서 병든 집이라는 건지 이해가 안 되네요. 햇볕도 잘 들고, 깨끗하고, 집도 잘 고쳤잖아요."
"지금은 그렇게 보이지만 막상 들어가면 이전 집과 비슷한 느낌이 들 거예요. 평수는 더 넓지만 마치 고인 연못에 갇힌 듯한 답답함 때문에 몸도, 마음도 힘들 수 있습니다. 집 내부의 공기와 에너지가 제대로 순환되지 않고 있어요. 게다가 저 집은 주변과의 밸런스도 깨져 있습니다. 이 동네는 성북동이나 평창동 같은 전통적인 부촌이 아니에요. 평생 소박하게 살아온 주민들이 대부분인 곳에서 높은 담장과 부를 뽐내는 듯한 집의 외관이 밸런스를 무너뜨리고 있어요. 한마디로 안도, 밖도 꽉 막힌 '불통의 집'인 셈이죠."

- 높은 담장이나 눈에 띄는 외관 자체가 문제라는 것이 아니었다. 비슷한 집들이 즐비한 부촌에 있었다면 자연스러웠을 집이었지만 이곳에서는 부동산 사장의 말처럼 '차원이 다른 집'이었다. 가끔 시골길에서 주변 풍경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화려한 전원주택을 발견할 때가 있다. 한눈에 보아도 확연한 이질감이 느껴지는 집들은 도무지 주변 풍경에 녹아들지 않는다. 그런 공간에 들어가면 누구라도 '나는 이곳 사람들과는 다르다'라는 정서가 생길 수 있다. 공간이 마음의 허세를 만들고 그것이 다시 현실과의 괴리감을 만들어 주변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것이다. 

- "잠을 못 주무셨다며 저와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고 하시더라고요."
알고 보니 그 방은 전당포였을 때 금고가 놓여 있던 자리였다. 사람들은 경제적 위기에 몰려 절실한 마음으로 전당포를 찾았을 것이다. 그중에서도 금고가 있던 방은 절망과 좌절, 불안이 묻어 있는 물건들로 가득 차 있던 곳이다. 이런 부정적 공간에 뜬금없이 사랑이 넘치는 신혼부부가 들어왔으니 편안한 기분이 들었을 리 없다. 부부는 계약이 끝나 이사를 갈 때까지 그 방의 불안한 느낌에 익숙해지지 못했다고 했다. 

- 될 수 있으면 이사 갈 집의 전 주인이 어떤 사람인지 확인하는 것이 중요하다. 실제로 집주인의 직업이 괜찮거나 그 집에 사는 아이가 좋은 대학에 들어갔다면 부동산 업자들의 은근한 마케팅 포인트가 된다. 그러나 단지 겉으로 보이는 사실로만 그 집을 판단하기에는 이른 감이 있다.
정말 주의 깊게 봐야 할 것은 '그 집과 그곳에 사는 사람과의 관계'다.

 

- 집을 팔기 위해 잠깐 집 안을 깨끗이 치울 수는 있지만 그 집을 다루는 태도까지 완전히 숨길 수는 없다. 눈빛이나 말투, 표정을 보면 집주인이 집에 어느 정도의 애정을 갖고 있는지가 보인다. 집을 아끼고 소중히 여기는지, 아니면 빨리 비싼 값에 팔고 벗어나고 싶어 하는지를 금방 알 수 있다. 그곳에 사는 사람에게 공간에 대한 자부심과 애정이 있다면 집과 사람이 좋은 시너지를 일으켰다고 볼 수 있다. 정말로 아이가 명문대에 갈 만큼 공부가 잘 되는 집, 가족들이 무탈하게 성장하도록 도와주는 집일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아이가 아무리 명문대에 가고 집주인의 명함이 대단해도 정작 그들이 집에 관심이 없고 방치하는 듯한 느낌이 든다면 그것은 공간과는 상관없는 일이다. 아이의 머리가 특출하게 뛰어났거나 노력의 정직한 대가일 뿐이다.

- 그 집에 살고 있는 사람이 특별하지 않더라도 공간에 애정을 갖고 있다면 적어도 병든 집은 아니다. 불편하고 떠나고 싶은 공간에 일부러 정성을 들일 리 없지 않겠는가. 낡아도 구석구석 반질반질한 손때가 묻어나는 집이 있다. 지겹다고, 트렌드에 뒤처진다고 함부로 뜯거나 부수지 않고 오래되었으면 오래된 대로 정성스레 가꾸고 조심스레 매만진 집 말이다. 그런 집은 자연 미인처럼 그 자체로 곱고 단정한 느낌이 든다. 반면 낡지 않았는데도 시시때때로 고친 집은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겉으로는 깨끗해서 좋아 보이지만 사실은 성형 미인 같은 집이다. 사람의 성향 탓으로 돌릴 수도 있지만 아무리 고쳐도 계속 고칠 점이 보인다는 것은 그 집과 사람이 충돌을 일으키고 있다는 방증이 될 수 있다. 그런 집은 터가 사람에게 원하는 것이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들어가도 바뀌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 사람은 본능적으로 좋아하는 사람에게 끌리고 싫은 사람은 멀리하듯 집 역시 편안하고 좋으면 애착을 갖고, 불편하면 미련 없이 떠나게 마련이다. 공간의 에너지와 기운을 짧은 시간에 파악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집과 사람은 서로 닮아가기 때문에 사람을 통해 집을 파악하는 것이 어쩌면 가장 빠른 길일 수 있다. 

- 과거에 집은 단순히 사람들의 생활공간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집 우(宇), 집 주(宙), 집들이 모이면 우주가 되었고, 집을 지탱하는 4개의 기둥이 모이면 사람의 운명을 말하는 사주(四柱)가 되었다. 옛날 사람들에게 집은 미지의 에너지로 가득 찬 우주이자 나를 붙잡고 있는 운명과도 같은 것이었다. 

- 그래서 이사를 한다는 건 요즘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단순하고 쉬운 일이 아니었다. 새로운 집에 이사를 갈 때면 미리 이사 갈 집의 주방이나 마루에 쌀이 든 솥을 두고 절을 하며 가신(家神)에게 신고식을 치렀다. 마당이 넓은 집에서는 맨발로 터를 밟아 발끝에 전해지는 땅을 온몸으로 느끼며 나의 존재를 미리 알리기도 했다. 이사를 한 후 낡은 초가지붕을 바꿀 때는 새짚 한 단을 용마루 위에 올려 미리 집수리를 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이는 짚 속에 살고 있을지도 모르는 벌레나 곤충들에게 옮겨갈 터를 미리 제공해 준다는 의미였다. 

- 과거에 이사는 지금처럼 환금성과 투자 가치를 따지는 실리의 영역만이 아니었다. 버스나 지하철을 갈아타듯 몸과 물건만을 갈아타는 단순한 이동도 아니었다. 집이라는 공간이 바뀌는 것은 또 다른 우주, 또 다른 운명 속으로 들어가는 일이었다. 또한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을 새로운 신(神)들과의 만남이자 인생 역변의 운을 맞이할 기회이기도 했다.

- 시대는 변했지만 예전처럼 집이라는 공간을 살아 있는 생명으로 대할 때 이사는 내 운명과 삶의 흐름을 바꾸는 중요한 전환점이 될 수 있다. 굳이 솥단지를 가지고 다닐 필요는 없지만 새로운 집에 애정을 담아 가볍게 인사하며 그 공간이 내게 전하려는 말을 느껴보려 애써야 한다. 그러다 보면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내가 살아갈 공간에 무엇이 비워져 있고 무엇을 채워야 할지 조금씩 알게 된다. 그때야 비로소 새로운 집, 또 다른 우주로의 진정한 이사가 시작된다. 
 
- '센 캐릭터'를 가진 공간도 분명 존재한다. 경험적으로 봤을 때 전체의 3할 정도 되는 이런 공간은 한 사람이 들어가서 바꾸기가 쉽지 않다. 오히려 그 공간의 에너지가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며 충돌을 일으키는 일이 더 많다. 물론, 그런 공간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도 분명 존재한다. 그런 사람과 공간이 만나면 생각지도 못한 시너지 효과가 나기도 한다. 마치 나를 알아주는 인연을 만났을 때 잠재력이 폭발하는 것처럼. 

- 그러나 산과 언덕 대신 고층 빌딩이 들어서고 물길을 막아버린 현대에 와서는 이마저도 알기 쉽지 않게 됐다. 하지만 땅 위의 산을 깎았다고 해서 산을 만든 DNA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물길이 사라져도 물을 흐르게 했던 본질적인 부분들은 여전히 땅속 깊은 곳에 뿌리 박혀 공간 고유의 성격을 만든다. 때문에 공간을 볼 때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 판단해서는 안된다. 사람을 겉모습만 보고 판단해서는 안 되듯, 공간도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다.

 

- 박 회장은 그 부분을 놓치고 말았다. 산이 가깝고 공기가 좋은 것은 단지 겉모습에 불과하다. 많은 사람이 몸이 아프거나 힘들면 도시에서 벗어나 산과 바다로 떠난다. 그러나 우리가 '자연'이라 뭉뚱그려 부르는 곳들도 저마다 고유한 성격과 캐릭터를 갖고 있다. 만약 병이나 체질 등에 맞는 적합한 곳을 선택하지 않는다면 두통이 심한데 비뇨기과에 가는 식의 우를 범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 동양의학의 바이블로 여겨지는 <황제내경>의 <이법방의론 異法方宜論>을 보면 '땅의 기운인 지세(地勢)에 따라 사람이 걸리는 병도 달라진다'라고 적혀 있다. 양기가 생성되는 동방에서는 염증성 피부질환인 옹창에 걸리기 쉽고, 양기가 왕성한 남방에서는 관절염이나 근육통이, 기운이 수렴되는 서방에서는 내장질환과 같은 속병이 발병하기 쉽다는 것이다. 지세는 그 터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특이한 기후와 토양, 음식을 만드는데, 그런 요소들이 모여 질병을 유발한다는 말이다. 이런 관점은 현재에도 유효하다. 습도가 높고 더운 중국 남방 지역의 호수나 댐 근처에는 관절염 환자가 많다. 또한 중국의 동방에 해당하는 해안 지역에는 다른 지역에 비해 피부암 발병률이 유독 높다는 통계가 있다. 치유를 위해 혹은 노후를 위해 전원생활을 준비한다면 눈에 보이는 환경은 물론,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 공간의 성격까지 신중하게 살펴야 한다.

- 나는 우울증으로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물가를 피하는 것이 좋다고 조언한다. 마음이 우울할 때 강물을 보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우울한 기분이 더 커진다. 끊임없이 흘러가는 물결이 내 안의 정체된 마음을 더 선명하게 확인시키기 때문이다. 가난한 이가 부자를 보면 박탈감을 느끼는 이치와 같다. 반대로 불안 증세가 심한 사람은 조용한 숲 속 오두막이 더 힘들 수도 있다. 마음이 쉬지 못하고 요동치고 있는데 너무나 정적인 곳에 있으면 오히려 불안감이 더 선명해진다. 한가롭게 여기서 이래도 되나 싶은 마음이 불안감을 더 자극시키는 것이다. 자연 속에서의 힐링이 무조건 능사가 아니라 나와 맞는 공간을 찾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이야기다. 

- "터가 워낙 기운이 세니 석물을 몇 개 세워서 누르면 된다고 하는데, 그 말을 믿어야 할지, 어째야 할지 모르겠어요."
어떤 상황인지 충분히 이해가 됐다. 풍수를 잘 아는 누군가가 화기(火氣)를 상징하는 봉황이나 말, 뱀 모양의 석상이 도움이 된다고 훈수를 둔 모양이었다. '화기로 금기를 다스린다'라는 오행의 전형적인 공식을 따른 셈이다.
"그분의 말도 틀린 건 아니지만 솔직히 말씀드리면 마음의 위안을 얻는 것 이상의 효과는 기대하기 힘들 겁니다. 성형 수술을 해도 사람의 겉모습만 바뀔 뿐 성격은 그대로인 것처럼 기운이 강한 공간은 외형을 바꿔도 타고난 기질을 바꾸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지요. 비보풍수로는 한계가 있습니다."

- 풍수에서 말하는 비보(裨補)란 '더하고 채운다'라는 뜻으로, 바람이 강한 해안가에 방풍림을 만들어 바람을 막고 건조한 집 마당에 인공 못을 조성해 습기를 돌게 하는 처방 등을 말한다. 시골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거북이나 두꺼비 모양의 바위나 조각은 홍수나 가뭄에 대한 비보처방이라 할 수 있다. 장승이나 솟대, 돌탑 역시 마을의 부족한 형세나 기운을 메꾸기 위한 풍수적 조치다.

 

- 흥미로운 점은 이런 풍수적 식견이 없을지라도 사람의 본능 속에는 부족한 곳을 채우고 틀린 것은 바로잡으려는 타고난 균형감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외나무다리에 서면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양팔을 벌려 균형을 잡듯 무의식적으로 기울어진 것에 반응하고 행동하는 감응센서가 존재한다. 그래서 제주도처럼 음기가 강한 땅에는 남성의 성기 모양을 한 하르방이 자연스레 만들어지고, 서울의 진관동처럼 양기가 강한 땅에는 비구니절이 자리를 잡으며 음양의 조화를 맞추는 것이다.

- 때문에 성북동 집처럼 캐릭터 강한 집과 사람이 부딪쳤을 때도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비보풍수적 처방을 떠올린다. 강한 에너지를 누르고 중화시켜 균형을 맞추려는 것이다. 그러나 공간에 대한 인간 중심적 사고를 지양하는 나의 관점은 조금 다르다. 일단 실효성도 문제이지만 조금 더 큰 그림을 보지 못할 가능성이 있다. 음기가 강하거나 지기(地氣)가 약한 곳은 분명 그런 모습으로 있어야 하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미시적으로는 부족하거나 넘쳐도 자연이라는 거시적 시각에서 보면 틀림없이 전체의 균형을 이루고 있을 것이다. 사람을 위한 풍수가 시각적 안정감과 안락함을 줄 수도 있겠지만 자칫 그 공간특유의 힘을 발현하지 못하게 할 수도 있다. 이런 이유로 나는 개성을 없애는 것보다 공간이 가진 고유의 성격을 있는 그대로 인정할 때 오히려 새로운 힘이 생길 수 있다고 믿는다. 

-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비보풍수 중에 광화문의 해태상과 남대문의 현판이 있다. 관악산의 화기가 강해 광화문 앞에 물을 다스리는 해태상을 세우고 남대문의 숭례문 현판을 세로로 걸어둔 것이다. 숭례문(崇禮門)의 예(禮)는 오행상 화(火)에 해당하고, 이를 세로로 세워두면 큰 산을 의미하는 숭(崇) 자에 불이 붙는 모양이 되어 글자의 화기로 불을 막는다는 '이열치열'의 의미가 된다. 한마디로 맞불을 놓은 것이다. 그러나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궁은 여러 차례 화마의 잿더미가 됐고, 결국 숭례문마저 불길에 휩싸였다.

- 이 공간은 권력의 눈이 억지로 맞춰놓은 균형 속에 있을 때는 그리 빛나지 않았다. 그러나 시청 앞 광장에서 붉은색 옷을 입은 사람들이 산불처럼 출렁이고 부정에 맞선 촛불이 들불처럼 일어났을 때는 전에 없던 놀라운 에너지를 보여주었다. 서울의 화기는 억지로 눌러야 할 힘이 아니라 함께 뜨겁게 달아올라야 하는 힘이었다. 어쩌면 서울이라는 공간은 그럴 수 있는 시대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 박 회장의 성북동 집도 마찬가지다. 타이밍만 제대로 맞았다면 강하고 열정적인 기질의 공간은 그의 든든한 기반이 됐을 것이다. 그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 그의 집에서 멀지 않은 '석은 변종하 기념미술관'이다. 현대미술의 거장인 변종하 화백이 살았던 그곳은 공간의 성격을 그대로 인정하고 살려낸 좋은 예라 할 수 있다.

- 원래 터의 자연미를 살리고자 했던 집주인의 요청에 따라 지어진 집은 언뜻 보면 거대한 돌탑처럼 보인다. 어른 머리만 한 크기의 자연석으로 담을 올리고 돌을 붙여 집의 외벽을 만들었다. 정원은 북악산 바위를 그대로 노출시켰고 바위틈 사이로 흐르던 물길 역시 살려놓았다. 그 바위들 사이로 돌계단과 화백의 수집품인 석물들이 조화롭게 자리를 잡고 있다. 

- 2층에 있는 그의 화실 또한 거대한 석굴을 연상시킨다. 층고가 6미터에 이르는 실내는 바위의 서늘한 기운으로 가득 채워져 있고, 공간에는 그 기운을 상쇄시키려는 어떤 시도도 보이지 않는다. '바위에 은거한다'라는 뜻인 석은(石隱)이라는 호처럼 화백은 이터의 원형과 함께 동락하며 자신의 영감과 재능을 증폭시켰다. 이곳에 거주하기 시작한 1980년대부터 현실 비판적이었던 그의 작품이 본질을 추구하는 서정적 화풍으로 변모할 수 있었던 것도 동락의 결과물이었을 것이다.

- 개성과 독창성이 중시되는 현대 사회에서는 두루두루 무난한 사람보다 에너지가 한쪽으로 집중된 사람이 두각을 나타내는 경우가 많다. 적당히 균형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있는 힘을 더 강하게 증폭시켜 새로운 결과물을 만들어냈을 때 사람들이 더 열광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공간을 보는 시각도 이제는 좀 더 다양하고 풍부해질 필요가 있다.

- 그렇다면 강한 공간, 나와 맞지 않는 공간을 어떻게 알아볼 수 있을까. 가장 쉽게는 내 몸의 반응을 보면 알 수 있다. 박 회장처럼 노력해도 몸과 마음이 불편해지는 경우나 내 몸이 평소의 기질과 다르게 움직인다면 의심해 볼 필요가 있다.

- 예를 들면 평소에는 집을 꾸미는 일에 큰 관심이 없었는데 이사한 뒤부터 자꾸 집을 꾸미거나 손을 대는 사람들이 있다. 잠자리나 앉는 자리가 불편해 침대나 소파의 위치를 자주 ... 

 

- "몇 달 전부터 갑자기 그런 느낌이 들긴 했어요. 워낙 집이 작아서 그런 것이라 생각했죠."
"5년 넘게 잘 살던 집이 갑자기 그렇게 느껴지는 건 이유가 있어서예요. 이 집의 '유통기한'이 다되어서 그래요."
"유통기한이요? 다시 지은 지 고작 5년밖에 되지 않았는데요?"
A 씨가 놀랍다는 듯이 되물었다.
"이 집 자체는 물리적으로 아무 문제도 없고 멀쩡해요. 유통기한은 보이지 않는 공간의 에너지를 말하는 겁니다. 마치 배터리가 방전되듯이 이 집이 갖고 있는 에너지가 거의 바닥난 상태예요."

- 그와 대화를 하던 중 한 가지 짚이는 것이 있었다. 1년 전, 그의 아버지가 갑자기 암으로 세상을 떠나셨고, 어머니마저 몇 달 전에 쓰러지셨다. 맏아들인 데다 가까이 사는 그가 병수발은 물론, 장례까지 도맡아 하느라 마음고생이 상당히 심했다. 무뚝뚝해 보이지만 누구보다 효심이 깊었던 그는 지금도 매일 어머니가 계신 요양병원을 찾고 있었다. 그가 느낀 상실과 우울감, 그 힘겨웠던 마음의 잔상들이 공간에 그대로 남아 영향을 미치고 있었던 것이다.

- 정신과 의사이자 영성가인 데이비드 호킨스 박사는 저서 <의식혁명>에서 인간의 의식 수준을 20에서 1,000까지의 상태로 분류해 설명했다. 가장 낮은 레벨 20은 수치심에 차 있는 상태로, 모욕과 멸시를 당하며 죽지 못해 살아가는 단계다. 가장 높은 700에서 1,000에 이르는 상태는 영적 깨달음의 상태로, 개인을 초월해 순수한 구원의 삶을 살아가는 의식의 최고단계다. 의식의 각 단계는 레벨에 맞는 에너지장을 만들고, 레벨이 높을수록 긍정적이고 강한 에너지장을 갖게 된다. 

- 의식의 에너지장은 우리가 사는 공간에도 그대로 반영된다. 굴욕과 비난, 절망 같이 낮은 수준의 감정에 휩싸여 있는 사람은 자신의 약한 에너지를 채우기 위해 자연적으로 주위의 에너지를 끌어들인다. 부정적인 사람과 대화를 할 때 점점 힘이 빠지고 지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흔히 말하는 '기 빨린다'라는 표현이 사실은 맞는 말인 셈이다. 이런 사람은 주변 사람뿐 아니라 자신이 머무는 공간 역시 같은 수준의 에너지 상태로 만들어간다. 때문에 낮은 의식 수준의 사람이 많은 곳일수록 공간은 쉽게 황폐화되고 빠르게 생명력을 잃는다. 

- 반대로 높은 레벨의 에너지장은 자신의 빛나는 에너지로 주위를 비추며 누구에게나 있는 잠재된 긍정의 에너지를 끌어낸다. 이런 강력한 에너지 발산은 주위 사람이나 공간을 높은 에너지 상태로 만들어놓는다. 기쁨이 충만한 사람은 주변 사람 역시 밝게 만들어주고 오래된 성당이나 절 같은 수행처는 ...

- 지인은 방대한 자료를 정리해야 하는 직업상 집에서도 집중력을 높이기 위한 인테리어라고 말했지만 정작 요즘 그는 집이 아닌 근처의 카페를 전전하며 작업을 하고 있다. 집에서는 이상하게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는 것이다.

- 기존의 집과 어울리지 않는 이런 시도들은 집의 유통기한이 다됐음을 알리는 전조 증상과 같다. 실제로 직관이 발달한 사람들은 뭔가 달라진 느낌을 받는다. 분명 집에 오기 전까지는 기분이나 컨디션이 괜찮았는데 현관문을 여는 순간 마음이 울적해지고 무거워지는 것이다. 편히 쉬고 충전해야 할 공간이 신경을 더 날카롭게 만드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집에서 쉬면 쉴수록 몸이 아프고 모든 게 마음에 들지 않기 시작한다. 가구는 낡아 보이고 어디선가 퀴퀴한 냄새가 나는 것 같고 거실의 불빛마저 짜증이 난다. 이런 집에 살고 있는 내가 한심해 보이기도 한다. 남들이 보기에는 좋은 집, 좋은 환경처럼 보일지라도 내 눈에는 부족하고 지루해 보이는 것이다. 마치 헤어지기 전의 연인처럼 처음 집을 고르고 꾸몄을 때의 장점은 보이지 않고 단점만 크게 보이는 것이다. 

- 또 한 가지 증상은 집에 대한 그리움이 더 이상 느껴지지 않는 것이다. 먼 곳으로 여행을 가면 집이 그리워지게 마련이다. 하루이틀 여행을 하다 보면 처음의 흥분은 가라앉고 집이 제일이고 집보다 편한 곳이 없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런데 반대인 경우가 있다. 집에만 들어오면 밖으로 나가고 싶고 여행에서 도착한 그날부터 또 다른 여행 계획을 세우기 시작한다. 여행 가방은 늘 대기 중이고, SNS에는 낯선 곳에 대한 정보들로 가득 차 있다. 한 곳에 정착하지 않는 유목민처럼 자신의 집을 텐트 정도로 여기는 것이다. 

- 물론 이런 변화가 다른 요인에 의해 생길 수도 있다. 함께 살고 있는 사람이나 여러 가지 사건 때문에 기분이 바뀌고 변화를 주고 싶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모든 변화는 결국 내가 사는 공간에 담겨질 수밖에 없고, 지금의 공간이 이제는 더 이상 내면의 변화를 담아내지 못하게 됐다는 것을 의미한다. 개인적 공간의 유통기한이 다된 것이다.

- 이럴 때 우리의 선택은 두 가지다. 과감하게 다른 집으로 이사하거나, 공간의 부족한 에너지를 채워 유통기한을 늘리는 것이다. 공간 에너지가 다시 채우기 힘들 정도로 너무 떨어졌다면, 더 나은 곳을 찾는 게 최선책이다. 그러나 이사는 당장 계약문제나 돈, 자녀 교육 등 여러 가지 복잡한 문제와 직결되어 있기에 쉽게 결정할 수 없다. 그럴 때는 적극적으로 유통기한을 늘리는 방법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 사람이 건강한 몸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좋은 음식을 먹고 꾸준히 운동을 해야 한다. 공간도 이와 다르지 않다. 건강한 양분과 적당한 순환이 공간의 에너지 레벨을 높여줄 수 있다. 그렇다면 항상 그곳,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는 공간에 줄 수 있는 최고의 양분은 무엇일까. 당연히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의 '건강한 의식'이다. 밝고 건강한 생각과 감정은 나는 물론, 내가 있는 공간까지 빛나고 건강하게 만든다.

- 의식 수준을 높여 긍정적인 공간의 에너지장을 만들기 위해 내가 자주 권하는 방법은 '낭송'이다. 오랜 세월 동안 검증된 동서양의 고전이나 존경하는 작가의 작품 혹은 성경이나 불경 같은 종교적인 책을 읽는 것도 좋다. 수행의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자신만의 만트라(mantra)를 외우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내 마음을 감동시키고 나를 돌아볼 수 있게 했던 책이나 글이라면 무엇이든 괜찮다. 하루에 5분만이라도 일정한 공간에서 소리내 읽거나 외우면 그 파장이 내 몸 그리고 집 안에 새로운 에너지를 불어넣어 준다.

- 낭송이 일상화되었다면 다음 단계는 '고요함'이다. 하루에 딱 5분만 집에서 고요함의 시간을 가져보는 것만으로도 공간의 에너지 레벨을 비약적으로 높일 수 있다. 어린아이가 있는 집이라면 아이를 재운 밤 시간 혹은 잠자기 전 시간을 활용하는 것이 좋다. 언제나 붙잡고 있던 휴대폰을 잠시 내려놓고 온몸의 긴장을 풀면서 조용히 눈을 감아보는 것이다. 이왕이면 정좌를 하는 것이 좋지만 편안한 의자에 앉아도, 침대에 누워도 괜찮다. 처음에는 어색하고 온갖 생각이 떠오른다. 이럴 때 굳이 생각을 버려야겠다는 생각도, 고요해져야겠다는 의식도 할 필요가 없다. 생각을 버려야겠다고 생각할수록 생각은 더 많아지고, 고요함을 의식할수록 오히려 더 시끄러워진다.

- 중요한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다. 어떤 일에 대해, 또는 나에 대해 하루 종일 가혹할 정도로 해왔던 판단과 지시를 멈춰야 한다. 좋은 생각이든 나쁜 생각이든 생각이 떠오르면 지나갈 때까지 그냥 지켜봐야 한다. 그렇게 5분 묵상을 매일 반복하면 어느 순간 하루 종일 힘을 주고 있던 미간과 나도 모르게 올라가 있던 어깨, 상처를 피해 굳게 닫혀 있던 마음들 ...

- 집 안에 자연을 끌어들일수록 유통기한이 길어진다.

- 나는 출간이나 연재 등 중요한 프로젝트가 하나 끝나면 반드시 서재의 배치를 바꾼다. 3평 정도밖에 되지 않는 작은 공간이지만 책상의 방향을 바꾸거나 작은 보조 책장을 들이거나 하다못해 벽에 걸린 그림이라도 바꾼다. 이는 그저 단순한 징크스가 아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유통기한이 지난 음식을 먹은 것처럼 나도 모르게 병들고 가라앉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서재라는 작은 방에서 글을 쓰느라 온갖 에너지를 다 끌어다 쓴 탓에 공간 에너지가 쇠한 것이다. 농사에 비유하면 똑같은 땅에 너무 오랫동안 작물을 키워 지력이 쇠한 것과 비슷한 이치다. 이럴 때는 순환농법처럼 공간의 용도를 바꿔주는 것이 좋다. 너무 오랫동안 생각하고 일하는 공간으로 썼다면 그곳을 잠시 휴식의 공간으로 바꿔주고, 고요했던 공간이라면 시끄러운 공간으로 써보는 것이다.

- 또한 같은 공간이라도 가구의 배치를 바꾸고 소품에 변화를 주어 공간에 새로운 기류와 분위기를 만들어줄 필요가 있다. 화합물의 분자 구조가 달라졌을 때 전혀 다른 물질이 만들어지는 것처럼 크고 작은 변화를 주는 것만으로도 완전히 다른 공간이 될 수 있다. 그리고 그에 맞는 새로운 에너지가 다시 세팅될 수 있다. 직장인이라면 힘든 프로젝트가 끝났을 때, 학생이라면 중요한 시험이 끝났을 때, 주부라면 계절이 바뀌었을 때 공간을 조금만 바꿔주면 그곳에 사는 사람도, 공간도 새로운 활력을 얻을 수 있다. 

- 인테리어를 바꾸기로 마음먹었다면, 리모델링을 하기로 마음먹었다면 이왕이면 자연을 끌어들이는 방식을 고민해 보는 것이 좋다. 인공 재료보다 그 자체로 에너지를 품고 있는 천연재료를 써볼 것을 권한다. 흙, 나무, 돌 등 최대한 자연에 가까운 재료를 쓸 때 집 안 에너지의 유통기한이 더 늘어난다. 물론 자연을 끌어들일수록 집은 불편하고 손봐야 할 곳이 많아진다. 그러나 사람을 움직이게 하고, 몸을 쓰게 만드는 그 과정이 새로운 에너지를 만들어내는 발전기 역할을 할 수 있다. 

- 자연을 끌어들이는 또 다른 방법은 '계절을 느끼는 것'이다. 시를 쓰는 내 친구는 도시에 살면서도 봄에는 민들레를 따서 말리고, 가을에는 고추를 말리고, 대봉으로 홍시로 만들어 먹는다. 창가에 풍경(風磬)을 달아 바람 소리를 들으며 계절마다 피는 꽃을 말려 차로 마신다. 건조해지면 솔방울에 물을 뿌려 천연 가습기로 쓰기도 한다. 이처럼 철마다 자연의 소리와 냄새, 맛, 향을 집 안으로 끌어들인 덕분에 그의 집은 갈 때마다 늘 새로워 보이고 숲 속 오두막에 온 듯한 청량한 기운을 느끼게  준다. 자연을 받아들이는 그의 부지런함이 집을 늘 충전시키고 있는 것이다. 

- 마지막으로 집에 사람들을 초대하는 것도 에너지를 순환시키는 방법 중 하나다. 뜻이 맞고 대화가 잘 통하는 사람들, 같이 있는 것만으로 힘이 되는 사람들이 집 안의 에너지도 긍정적으로 바꿔준다. 때로는 존경하는 선배나 스승, 눈 맑은 성직자를 모셔서 대접하는 것도 좋다. 에너지 레벨이 높은 사람들은 다녀간 자리도 맑고 청정하게 만들어준다. 귀한 분을 모시기 전에는 자연히 집 안의 묵은 때를 벗기고 정성을 들이게 되니 공간의 분위기를 환기시키는 더없는 기회가 된다. 

- 가족의 감성과 기호가 골고루 들어간 집이 건강한 집이다. 
한 사람의 의견대로 공간이 만들어지거나, 한 사람이 아끼는 물건으로만 채워진 독재적인 공간은 사람으로 치면 강박증이나 자폐증에 걸린 것과도 같다. 때문에 공간도, 그곳에 사는 사람도 건강하려면 공간 민주주의가 구현되어야 한다. 가족 구성원 모두에게 민주적으로 공간을 배분하고, 각자의 물건이 적당한 조화와 균형을 이루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런 면에서 나는 A 씨에게 남편의 방을 따로 마련하는 것이 좋겠다고 충고했다. 
"물론 아이들이 자연스럽게 아빠 방에 들어가겠지만, 심리적으로 내 방이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는 굉장히 큽니다. 작더라도 집 안에 내 영역, 내 공간이 있어야 아버지로서의 자존감이 지켜질 수 있어요. 지금처럼 정서적 유목민 생활을 계속하면 마음이 집에 안착하지 못하고 밖으로 떠돌게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 실제로 대한민국의 수많은 아버지가 자신만의 공간을 잃어버린 채 '소파 유목민', '자동차 유목민으로 살아가고 있다. 아내들은 남편들에게 왜 소파에 붙어서 떨어지질 않느냐, 왜 집에 일찍 들어오지 않느냐고 타박하지만 사실 남편들은 그곳 외에는 갈 데가 없다. 남편을 집 안에서 활력 있게 움직이게 하려면 그럴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주는 것이 중요하다. 형편상 방 하나를 내줄 수 없다면 안방의 한쪽 코너나 거실 한켠도 좋다. 남편이 안정감을 느낄 수 있는 의자, 소중히 여기는 물건을 둘 수 있는 책상 등 그만의 영역, 함부로 터치하지 않는 '자치구역'을 만들어주는 것이 좋다. 아무리 작은 공간이라도 구획하고 편집하는 힘만 있으면 가능하다.

- 이처럼 공간의 분배에 어느 정도 균형이 잡혔다면 인테리어적인 면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요즘 자신의 집을 촬영해 SNS에 공개하는 '온라인 집들이'가 유행하면서 세련되고 감각적인 인테리어에 대한 관심이 그 어느 때보다 높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부러워하고 따라 하고 싶은 집들은 눈에 보이는 분명한 콘셉트가 있다. 빈티지 하우스, 북유럽 인테리어 등 보통 한 가지 콘셉트로 집을 꾸민다. 집 안 전체의 색깔, 가구, 심지어 디테일한 소품까지 깔끔하게 통일되어 있는 집들도 ...

- 120도 법칙은 심미성뿐 아니라 영혼을 다루는 운명학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서양의 점성학에서 영혼과 마음의 조화가 이루어진다는 트라인(trine)은 행성 간의 위치가 120도가 될 때를 말한다. 서로 다른 3개의 힘이 모여 하나의 강력한 힘으로 변하는 명리학의 삼합(三合)도 중심에서 보았을 때 각 지지(地支)가 120도의 관계를 맺는다.

- 이런 120도 법칙을 집 안에도 적용할 수 있다. 대화를 위한 가장 중요한 가구인 소파의 위치를 잡아보자. 집에 있는 소파가 일자형이라면 마주 보고 앉을 수 있는 일인용 소파나 안락의자를 마련하는 것이 좋다. 거실이 좁아 불가능하다면 방석도 괜찮다. 소파 사이에는 테이블을 둔다. 이때 중요한 것은 의자들의 위치가 120도가 될 수 있도록 조정하는 것이다. 

- 철학자 알랭 드 보통은 '가장 고귀한 건축이 때로는 낮잠이나 아스피린이 주는 작은 위안에도 미치지 못한다'라고 말한다. 아무리 훌륭하고 아름다운 공간일지라도 우리에게 실질적인 힘을 주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꽃향기가 나는 종이로 싼 물건에서는 꽃향기가 나고, 생선 냄새가 나는 종이로 싼 물건에서는 생선 냄새가 나게 마련이다. 어떤 공간이 우리를 감싸고 있느냐에 따라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공간의 철학을 세우고 효율적인 구조를 만들고 공감하며 즐길 수 있는 놀이터를 만드는 것. 이는 소통이라는 종이로 우리를 감싸는 일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공간에 담긴 우리는 어느새 소통하는 존재들이 되어 있을 것이다. 

- "공간을 바꾸기 전에 일단 책장부터 정리해야 할 것 같은데요. 아이가 초등학교 때 풀었던 문제집과 책까지 그대로 쌓여 있네요."
"안 그래도 너무 정신이 없어서 정리 좀 해보려고 몇 번이나 이야기했는데, 애가 절대 못 버리게 해요."

- 공간은 언제나 사람의 내면을 그대로 보여준다. 그것은 머릿속으로 생각하는 방식, 생각을 현실화하는 메커니즘까지 닮아간다는 말이기도 하다. 지금 책장은 아이의 뇌 구조와 닮아있을 가능성이 크다. 여러 과목의 참고서, 교과서, 심지어 만화책까지 무질서하게 뒤엉킨 책장은 아이가 가진 지식의 시스템을 단면적으로 보여주었다. 정보의 옥석을 쉽게 가려내지 못할 정도로 구조와 체계가 잡히지 않은 상태일 것이 분명했다.

- 지식의 용량이 매우 큰 일부 사람을 제외하고는 필요 없는 것을 버려야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런데 확실히 알고 있다고 해도 언젠가 잊어버릴 수 있다는 불안감 때문에 아는 것을 필요 이상으로 반복 학습하는 아이들이 있다. 성적에 대한 압박감으로 자존감이 낮아져 있을 때 나타나는 모습이다. 이런 상태라면 새로운 것을 배우고 익히고, 지식을 통합하는 속도가 떨어져 노력한 만큼 성과가 나오지 않을 수 있다.

- 어떤 분야의 전문가라면 오래된 책을 쌓아놓는 게 문제될 리 없다. 그러나 입시 공부를 하는 학생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입시의 기본은 기동성이다. 속도와 시간의 싸움에서 지면 경쟁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 물론 오랫동안 만들어온 지식의 시스템을 한순간에 바꾸기란 쉽지 않다. 이럴 때는 내 머릿속을 거울처럼 보여주는 공부방을 바꾸는 게 도움이 된다. 버릴 건 버리고 모을 건 모으면서 정리하다 보면 복잡한 지식들도 머릿속에서 정리되기 시작한다. 언젠가 도움될 거라며 버리지 못한 필기 노트들을 깔끔하게 치우겠다고 마음먹으면 아이의 두뇌도 그에 맞게 시스템을 바꾼다. 카테고리를 만들고 구조화시켜서 생각의 틀 속에 끼워 맞추는 습관이 생기는 것이다. 또한 필요할 때 빨리 꺼내 쓸 수 있도록 책장을 일목요연하게 바꾸면 머릿속도 그에 따라 편집될 수 있다. 지식이 빠르게 순환되도록 공간을 바꿨을 때 가시적인 효과가 있다면 방향을 제대로 짚었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아이에게는 이 방법이 통했다. 어지럽던 책장을 절반 가까이 비우고 과목별로 책들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는 연습을 하면서 오랜 슬럼프에서 서서히 벗어나기 시작했다.

- 이처럼 우리가 살고 있는 공간은 우리 내면의 실사 버전이자 확장판이다. 공간은 언제나 거울처럼 가감 없이 나를 비춰준다. 때문에 내 패턴을 직접 바꾸기 어렵다면 마음의 확장판인 공간을 살피고, 작은 변화를 주는 것에서부터 시작할 수도 있다.

- 전통 풍수에서 공부에 영향을 미치는 공간은 공부하는 방이 아니라 집이 지어진 '터'였다. 과거 학문의 요람이었던 서원은 그 지역을 대표하는 산의 혈처에 자리를 잡았고 뱀처럼 구불거리는 문곡성(文曲星)이나 붓을 닮은 탐랑성(貪狼星)의 기세를 받는 곳을 공부의 명당으로 여겼다. 공부란 '나 홀로 머리를 굴리는 일이 아니라 자연의 기운과 공명하며 하늘의 뜻을 알아가는 일'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반면에 요즘은 과거의 자연 합일적 공간이 아닌 기능적 공간이 대세를 이루고 있다. 인체공학적인 의자와 책상, 뇌의 알파파를 유도하는 조명이나 음악, 환경심리학에 근거한 인테리어 등을 이용해 얼마나 최적화된 기능적 공간을 만드느냐가 학습공간의 화두가 되었다. 

- 집중이 잘됐던 공간을 아이 방에 그대로 적용하라.
최근 한 연구에 의하면 인간의 창의성은 뇌의 DMN(Default Mode Network)이라는 부분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한다. 뇌의 안쪽 전두엽과 바깥쪽 측두엽 그리고 두정엽에 있는 DMN은 생각 없이 멍하게 있거나 잠들었을 때 활성화되는 부위다. 그래서 독창적이고 새로운 아이디어가 필요한 공부를 하는 경우에는 먼 곳을 바라볼 수 있는 창가에 책상을 두는 것이 좋다. 창이 없다면 방 안을 전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는 곳에 책상을 두어 최대한 넓은 시야를 확보해야 한다. 반대로 내가 방어할 수 없는 등 뒤의 공간이 너무 넓거나 등이 출입문을 향해 있다면 본능적인 불안감을 느껴 학습 효율이 떨어질 수 있다. 단순한 반복이나 순간적인 집중이 필요한 공부를 할 때는 벽에 책상을 붙이거나 사방에 칸막이를 설치해 최대한 시야를 ...

- 이는 범인(凡人)이 쓴 책도 마찬가지다. 비록 편집과 인쇄 과정을 거친 책일지라도 글자 한 자 한 자에 담아놓은 작가의 공력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놀라운 점은 우리가 책을 읽지 않아도 책에 담긴 문자의 힘이 계속 위력을 발휘한다는 것이다. 흔히 말하는 '서권기(書卷氣)'는 그런 보이지 않는 힘까지를 내포하는 말이다. 그래서 책장에는 부정적이거나 잔인한 내용의 책보다 긍정적이고 따뜻한 내용의 책을 꽂아두는 것이 좋다. 그래야 나도 모르는 사이에 부정적이고 어두운 기운에 노출되는 일을 막을 수 있다. 


- 공부방은 공부만 할 수 있는 환경으로 만드는 것이 좋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공간에 여유가 없어 공부방과 침실을 함께 쓰는 경우가 많다. 어쩔 수 없이 공부방에 침대를 놓아야 한다면 침대를 하나의 책상처럼 사용하는 것이 좋다. 생각보다 많은 학자와 작가가 침대나 소파에 편안히 기댄 채 작업을 하고 공부를 한다. 척추의 긴장이 풀리고 이완된 상태에서 집중력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 아이 방을 꾸밀 때 침대를 어느 방향으로 둬야 하는지 궁금해하는 부모가 많다. 방향을 정하는 것만으로도 수면의 질이 달라지고, 공부의 효율에 영향을 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실제로 '북쪽을 향해 머리를 두지 말라'라는 속설이나 '반안(말의 안장에 올라탄 듯 편안한 기운)살 방향으로 머리를 두어라'라는 사주의 이론이 가정에서도 많이 적용되고 있다. 문을 열었을 때 머리부터 보이는 위치, 거울이 몸을 비추는 위치가 좋지 않다는 말도 있다. 이 이론들은 공간에 흐르고 있는 '보이지 않는 에너지의 방향'에 내 몸을 어떻게 둘 것인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 하지만 온갖 종류의 전자파가 난무하고 무질서하게 세워진 건축물로 가득한 도시에서는 예상치 못한 에너지의 흐름이 만들어질 수밖에 없다. 더군다나 나의 동선과는 상관없이 구획이 획일화된 공간 구조에서 특정한 방향을 고집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이론은 언제나 하나의 예로 받아들이는 것이 좋다. 대신 내 몸을 통해 나에게 가장 잘 맞는 방향을 찾는 것이 좀 더 실증적인 방법이 될 수 있다. 갓난아이들은 제자리에서 얌전히 자는 게 아니라 빙글빙글 몸을 움직이며 잔다. 이는 주위 환경에 민감한 아이들이 자신에게 가장 편한 위치를 찾기 위한 탐색 과정이다. 두침(頭寢) 방향을 정하기 전에는 이런 탐색 과정이 필요하다. 일단 아이를 잠자리 가운데에 눕히고 '네 몸이 네가 가장 편한 곳을 향해 움직일 것이라는 사실'을 인지시킨 뒤 잠든 아이의 몸이 어느 방향을 향해 움직이는지를 살펴야 한다. 뒤척임에도 이유가 있게 마련이다. 그렇게 목적을 품고 이완된 몸은 나침반처럼 스스로 가장 편한 방향을 찾아 움직인다. 그곳이 바로 아이가 머리를 둘 방향이다. 

- 학습 공간은 보이는 것만큼이나 들리는 것도 중요하다. 많은 사람이 소리를 공부의 적으로 여긴다. 하지만 소란스러운 지하철이나 버스 안에서 한 잠깐의 공부가 효과적이었던 경험이 있을 것이다. 책을 읽거나 휴대폰을 보는 동안 지하철 실내의 규칙적이고 반복적인 소음이 전혀 들리지 않았던 경험도 있을 것이다. 이런 소음을 '백색 소음'이라고 한다.

- 백색 소음은 비가 내리거나 물이 흐르는 소리처럼 많은 소리를 담고 있지만 마치 하나의 소리처럼 잘 융화되어 거슬리지 않게 들리는 소리를 말한다. 신경을 건드리지 않으면서도 적막함과 지루함을 달래주어 요즘에는 집중력과 기억력 등 학습력을 높이는 데 많이 활용되고 있다. 과거 자연의 백색 소음을 활용한 최적의 장소는 서원(書院)이었다. 서원의 강학(講學)은 새소리와 물소리, 풀벌레 소리가 들려오던 대청마루에서 주로 이루어졌다. 사방이 트여 산만해 보이는 이곳에서 강학이 가능했던 것은 멀리 보이는 주위의 풍경이 뇌의 DMN을 활성화시키고, 백색 소음이 학습력을 키워주는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철학적 사색과 낭독이 공부였던 과거에는 최적의 공간이었던 셈이다.

- 요즘 쉽게 접할 수 있는 백색 소음은 자연의 소리가 아닌 기계 소리다. 냉장고, 공기청정기, 컴퓨터의 팬이 돌아가는 소리가 바람소리와 물소리를 대신하게 됐다. 이런 도시의 백색 소음이 가장 잘 구비된 곳이 바로 '카페'다. 다양한 기계가 쉬지 않고 돌아가고 사람들이 드나들며 남기는 속삭임이 풀벌레 소리처럼 가득한 곳. 그곳에서는 내가 내는 적당한 소음과 움직임 역시 허용된다. 숨 막히는 도서관에서 공부하는 것보다 카페에서 공부하는 것을 더 선호하는 사람이 많아진 것도 백색소음이 주는 안락함과 편안함 때문이다. 

- 공부는 눈과 귀로만 하는 것 같지만 오감이 충분히 자극될수록 더 큰 효과를 낸다. 내가 공부하는 공간에 어떤 소리가 나느냐에 따라 공부의 결과물이 달라질 수 있다. 혀로만 느껴질 것 같은 음식의 맛도 후각과 청각, 시각에 영향을 받는다. 음식 자체에 첨가된 향이나 색뿐 아니라 음식을 먹는 공간의 향과 소리에 따라 음식에 대한 평가가 달라지기도 한다. 


- 공부를 할 때 공간의 기술은 꽤 중요하다. 그러나 말을 물가에 데려갈 수는 있어도 억지로 물을 먹일 수는 없듯 기능적 공간 자체가 아이들이 공부를 하게끔 만들어주지는 않는다. 이때 필요한 것이 '탐랑성'이다.

- 옛사람들은 우주라는 광활한 공간에 학문과 지식을 관장하는 특별한 별이 있다고 믿었다. 그것이 바로 탐랑성이다. 탐랑성은 언제나 북극성을 향하고 있는 2개의 지극성(指極星) 중 하나로 북두칠성의 머리에 해당하는 별이다.

- 옛날 어머니들은 과거를 앞둔 아들이나 남편을 위해 정화수를 떠놓고 그 물 위에 지극성을 띄운 뒤 정성을 다해 기도를 드렸다. 거기에서 지극정성이라는 말도 유래됐다. 또한 탐랑성의 기운을 받은 산은 봉우리가 붓의 끝처럼 뾰족한 모양의 산이 되는데, 이를 문필봉(文筆峰)이라 하여 학문과 관련된 힘을 준다고 생각했다. 서울에서 눈에 띄는 문필봉 중 하나가 바로 북악산이다. 이런 필봉들은 우리나라 곳곳에 수없이 많다. 옛날에는 문필봉의 기운이 서린 곳에서 뛰어난 학자가 나온다고 믿었다. 탐랑성이라는 우주적 장치가 인간의 마음에 지적인 공명을 일으킨다고 본 것이다.

- 정화수와 문필봉이라는 말 자체가 생소해진 요즘에도 나는 가끔 탐랑성을 만나곤 한다. 아이에게 학문의 별이 되어주는 사람, 지극정성으로 아이를 키우는 부모들 말이다. 얼마 전에 TV에서 본 한 아버지는 부모님이 한글도 몰랐을 정도로 가난한 집에서 자랐다. 먹고살기 위해 해보지 않은 일이 없었던 그는 가난한 삶을 자식들에게 물려주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경제적인 이유로 1년에 한 번꼴로 이사를 해야만 했는데, 그때마다 늘 도서관 옆으로 자리를 잡았다. 아버지는 아이들이 어릴 때부터 도서관 앞마당에서 신나게 놀아주었고, 도서관 식당에서 함께 밥을 먹었다. 책을 골라주거나 읽어보라는 말은 일체하지 않았다. 그저 도서관이 재미있고 즐거운 곳, 공부가 흥미로운 것이라는 생각을 하도록 만들어준 것이다. 또한 공부하라는 잔소리 대신 아버지 스스로 공부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아이들은 공부하는 아버지 옆에서 늘 함께 책을 읽었고, 수많은 대화를 나눴다. 덕분에 첫째 아들은 사교육 한 번 받지 않고도 최고의 명문 고등학교에 합격했다. 스페인어와 영어로 원어민과 자유자재로 대화하고, 시사 문제에도 논리적으로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 등 공부뿐 아니라 다양한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 우리는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를 말할 때 맹자의 어머니가 맹자의 교육을 위해 이사시킨 것에만 집중한다. 하지만 맹자의 어머니가 가장 잘한 일은 이사한 그곳에서 맹자와 함께 많은 '대화'를 나눈 것이다. 맹자가 어떤 것을 보고 무엇을 들었는가에 대해 이야기할 소재를 찾아 옮겨 다닌 것이다.

- 많은 부모가 공부에 집중할 수 있는 공간, 환경을 조성하는 것에만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 아이가 어렸을 때부터 거실이며 방에 글자와 동물이 그려진 포스터들을 붙여놓고 다양한 책과 교구를 책장 가득 채워놓는다. 그러나 정작 그것을 가지고 아이들의 눈높이에서 자세히, 끈질기게 설명해 주는 부모는 드물다. 아이 옆에서 함께 책을 펼치고 공부하는 부모는 더더욱 찾아보기 힘들다. 아이의 탐랑성은 책으로 가득한 책장도, 사교육도 아니다. 칠흑 같은 밤을 밝혀주는 별, 따뜻한 사랑으로 나를 지켜봐 주는 부모의 지극정성이 가장 중요하다. 그 탐랑성이 아이의 마음에 내려앉았을 때 아이 스스로가 문필봉이 되어 공부하기 시작할 것이다. 
 
- 정신과 전문의 유상우 박사는 저서 <부자가 되는 뇌의 비밀>에서 '많은 부자가 배외측 전전두엽을 집중적으로 사용한다'라고 말했다. 배외측 전전두엽은 뇌의 사령탑 역할을 하는 곳이다. 동기를 부여하고 계획을 세우며 전체적인 맥락을 짚어 다양한 사고를 가능하게 하는 영역이다. 실험에 의하면 일반인들은 신문을 볼 때 각각의 기사를 읽으며 그 기사들을 서로 다른 이야기로 자연스럽게 구분했다. 반면 배외측 전전두엽이 발달한 부자들은 특히 헤드라인에 주목하며 각 헤드라인 간의 연결고리를 만드는 데 집중했다. 100억 원대 자산을 가진 한 여성은 전혀 관련 없는 기사를 한 편의 소설처럼 만들며 자신만의 이야기를 창조해내기도 했다. 

- 사물이나 상황을 보고 해석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부자들은 지엽적인 상황에만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상황이 만들어지는 여러 요소 간의 연결고리를 찾아냈다. 그리고 자신의 상황에 가장 잘 적용할 수 있는 공식으로 패턴화 시킨다는 공통점을 보였다. 이는 부자들이 공간을 대하고 활용하는 데에도 '일정한 패턴'이 있을 수 있음을 말해준다. 그들만의 뇌 구조가 만들어내는 특별한 스페이스로지, 그 비밀을 안다면 내 공간 안에 숨겨져 있을지 모르는 '부자의 조짐'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 그들의 스페이스로지를 내 공간에 접목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분명 그것이 집 안에 어항을 두는 것보다는 조금 더 합리적이지 않을까.

- 그런데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부자의 공간을 벤치마킹하고 싶다고 무조건 그들의 공간을 분석하는 것은 별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부자의 공간은 이미 완성된 부자의 공간이다. 값비싼 미술 작품과 인테리어 소품, 수입산 대리석, 특별 제작한 가구들은 부의 결과이지 부를 이룰 수 있었던 원동력이 아니다. 때문에 '완성형 부자'의 공간을 따라 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이런 우를 범하면 박탈감을 느끼기 쉽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지금 한창 성장하고 있는 부자들, 특히 자수성가형 부자들이다.

- 얼마 전 나는 이 기준에 딱 맞는 성장형 부자를 만났다. <엄마의 돈 공부>라는 베스트셀러를 쓴 이지영 작가다. 그녀는 20대에 보증금 1,500만 원의 원룸에서 시작해 불과 10년 만에 23채의 부동산을 운영하게 된 투자가로 유명하다. 그런데 수십억 원의 자산을 운영하는 투자가이자 강연가, 작가임에도 자신을 위해 마련한 작업실이 없었다. 집 안의 작은 서재가 유일한 작업실이었다. 저녁 식사 초대를 받아 방문한 그녀의 집은 일반 가정집과 다를 바가 없었다. 30평대의 아파트에는 평범한 가구와 가전제품이 무난히 놓여 있었고, 두 아이가 놀기에 편하게 꾸며져 있었다. 단란한 가정에서 느낄 수 있는 여유로움이 집안 가득 묻어나 있었다. 편안함에 긴장이 풀어질 무렵, 인터뷰를 하기 위해 들어간 서재에서 그녀가 진정한 투자가라는 사실을 비로소 다시 떠올릴 수 있었다.

- 서재 문을 열자 벽을 가득 채운 책들의 숨결이 훅, 하니 밀려왔다. 책을 그저 모양새로 전시해 놓은 사람인지, 제대로 읽는 사람인지는 서재에 가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사람의 눈을 타고, 손때가 묻은 책들은 읽혀진 공간 속에 자신의 흔적을 남겨놓게 마련이다. 그런 곳은 서권기(書卷氣)로 가득 채워져 전혀 다른 공기의 밀도를 만든다. 반면 전시용 책들은 물리적 공간만 차지할 뿐이다. 서재 문을 여는 순간 마주한 두터움은 실로 오랜만에 느껴본 강렬한 기운이었다. 그 공간은 이지영 작가가 얼마나 치열하게 공부하고 생각했는지 말해주고 있었다. 그녀는 서재에서 인터뷰를 진행하는 내내 눈을 반짝이며 질문하는 내게 답변과 동시에 그에 대한 자료를 책장이나 서랍에서 순식간에 찾아 보여주었다.
"책은 필요할 때마다 바로 볼 수 있도록 주제와 소재별로 구분해 놓는 편이에요. 도서관 서가처럼 자기만의 자리가 있는 거죠. 부동산 관련 자료도 지역과 물건별로 분류하고 하위 카테고리를 만들어 늘어나는 정보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게 그때그때 정리하고 있어요."

- 이지영 작가는 자신의 서가를 완벽하게 통제하고 있었다. 공간을 통제한다는 것은 단순히 청소를 잘하고 정리를 잘한다는 말이 아니다. 머릿속에 물건들의 지도가 완벽히 그려져 있다는 말이다.

 

- 어떤 부자들은 잡다한 것으로 발 디딜 틈 없이 집을 채우기도 한다. 그런데 그들이 저장강박증 환자와 다른 점은 그 복잡한 틈바구니 속에서 남이 손댄 흔적을 귀신처럼 찾아낸다는 것이다. 없어진 책 한 권, 옷 한 벌도 금세 눈치채고 민감하게 반응한다. 남들이 보기에는 무질서한 공간이 본인에게는 나름의 질서 속에 존재하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본인이 공간을 얼마나 통제하고 있는지를 보려면 컴퓨터 파일이나 휴대폰 주소록을 열어 보면 된다. 주방을 담당하고 있다면 냉장고도 괜찮다. 만약 파일들이 산산이 흩어져 있고 필요한 자료를 한 번에 찾을 수 없다면 일단 통제력은 없다고 보면 된다.

 

- 현재 통제력이 부족한 사람이라면 아주 작은 것부터 관리하는 연습을 하는 것이 좋다. 냉장고의 오래된 음식들을 정리하고, 한눈에 보일 정도의 음식만 채워 넣으며 무엇이 어디에 있는지 꿰기 시작하면 그 패턴대로 통장도 새롭게 리뉴얼할 수 있다. 목적에 따라 통장을 쪼개고 디테일한 예산을 짜면서 자신의 소비를 통제하게 될 것이다.

- 이처럼 시스템화가 된 뇌 구조를 가진 부자들은 집을 독립된 존재로 생각하지 않는다. 자신이 다양하게 투자해 놓은 거대한 투자 시스템의 한 부분으로 여긴다. 때문에 보통 사람들이 피하고 싶은 단점을 장점으로 활용한다. 예를 들면 '경매'가 그렇다. 부동산 투자에서 일반인과 전문가 사이에 가장 큰 관점의 차이를 보이는 것이 경매일 것이다. 아직도 많은 사람이 '경매' 하면 사업 실패나 빚보증, 빨간 차압딱지 같은 것들을 떠올린다. 그런 전적이 있는 집을 샀다가 나도 똑같이 되는 것은 아닌지 꺼림칙하게 생각한다. 하지만 대다수의 부동산 부자는 경매를 통해 고수익을 올린다.

- 이지영 작가 역시 경매를 통해 활발한 투자를 하고 있었다. 지금 살고 있는 집 역시 경매로 얻었다고 했다. 집을 잠시 머물다 떠나는 정류장이라고 생각하면 다소 불길하고 불편하더라도 개의치 않을 여유를 가질 수 있다.  

- 부자의 마인드와 공간감각을 보여주는 또 다른 스페이스로지는 바로 '결핍'이다. 미국 LA 한인타운 중심가에 자리 잡은 '마당몰'은 한국의 유명 프랜차이즈 음식점과 영화관이 입점해 있는 복합 쇼핑몰로, 한인타운의 랜드마크다. 이전 회사에서 마당몰의 프로젝트 매니저를 맡았던 이가 한인 건축가 백선필 씨다. 가난한 유학생으로 단돈 300만 원을 들고 미국으로 온 그는 현재 AIA(미국 건축사)와 캘리포니아 주 건축사 자격을 가진, LA의 촉망받는 젊은 건축가로 성장했다. 할리우드, 오렌지 카운티, 말리부 등 LA 부촌의 고급 저택을 주로 설계하는 그는 몇 달치 일이 밀려 있을 정도로 현지에서 남다른 실력과 감각을 인정받고 있다. 
이렇게 명성을 쌓은 건축가의 공간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 몇 달 전, LA 웨스턴 가의 한 빌딩 4층에 자리한 그의 디자인 사무실을 찾았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나는 속으로 두 차례 놀랐다. 첫 번째는 생각보다 작은 사무실 크기 때문이었고, 두 번째는 그 작은 공간을 이렇게나 효율적으로 쓸 수 있다는 것 때문이었다. 


- 사무실은 작업하는 공간과 자료를 모으는 공간, 고객을 접대하고 상담하는 공간으로 구획되어 있었다. 파티션으로 구분한 작업 공간에서는 큰 도면을 출력할 수 있었고, 자료실은 벽한 면을 나무 수납장으로 짜 넣어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수납장은 어떤 곳은 면으로, 또 어떤 곳은 선으로 만들어 명암을 조절했다. 일단 기능 중심으로 공간을 분리하고 효율적으로 꾸민 뒤, 디자인 감각을 입혀 작지만 결코 답답하지 않은 공간을 만들어낸 것이다. 이 공간에서 지낸 시간만 무려 7년. 이곳에 있는 동안 그 어렵다는 미국 건축사 자격시험도 패스하고 LA의 이름난 건축가로 성장했지만 그는 아직 사무실을 넓히거나 옮길 생각이 없었다. 
"주변에서 이제는 그럴듯한 사무실로 옮겨도 되지 않느냐는 말을 많이 해요. 그런데 인건비나 공간 확장에 투자할 돈으로 컴퓨터 시스템을 업그레이드해서 여기서도 충분히 작업을 할 수 있어요. 10평이라는 공간에서 해낼 수 있는 최대치가 어디까지인지 보고 싶기도 하고요."

- 손님도 늘어날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6개월이 채 되지 않아 문을 닫았다. 벽을 무너뜨리고 가게를 확장했을 때 이상하게도 손님이 끊기고 장사가 잘 되지 않는 경우가 있다. 민간에서는 이런 경우를 '동티가 났다'라고 말한다. 집의 운을 담고 있는 중요한 곳을 함부로 건드려서 탈이 났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이를 부자의 뇌로 생각해 보면 또 다른 해석이 나온다. 비좁고 협소한 공간은 결핍으로 보이기 쉽지만 사실은 그 공간만의 레버리지였을 수도 있다. 좁은 공간이라도 그 공간만의 밸런스가 있고 손님들이 그런 분위기를 좋아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공간이 협소해 어쩔 수 없이 손님이 줄을 서는 것도 훌륭한 홍보 수단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다른 공간으로 확장 이전하는 것이 아니라 옆집과 합쳤다는 것은 준비되고 계획되지 않은 결정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 공간에서 낼 수 있는 최대한의 효율과 가능성이 어디까지인지 확인하지 않은 것이다. 

- 보통 사람은 돈을 벌면 공간에 무엇을 더할까를 고민한다. 크기를 더하거나 그동안 갖고 싶었던 혹은 남들에게 괜찮게 보일 고급스러운 가구나 장치를 더하는 식이다. 그러나 효율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자들의 스페이스로지는 정반대다. 그들은 어떻게 하면 불필요한 것을 빼고 조금 더 효율적으로 가성비 높은 공간을 운영할지부터 생각한다.

- 친환경 건축설계사 자격(LEED AP)이 있는 백선필 씨의 디자인이 부자들에게 인기 있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그는 설계 초기 단계부터 집에 들어가는 에너지 비용을 계산한 뒤 에너지 효율을 가장 높일 수 있는 디자인을 제시한다.
"만약 1년에 1,500달러가 냉방비에 들어갈 때 이렇게 설계하면 1,000달러의 감소 효과가 있다고 설명하면 부자들은 자신이 생각한 디자인이 아니더라도 받아들여요. 돈이 많아서 전기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닐 것 같지만 장기간에 걸쳐 나가는 돈에 상대적으로 예민하죠." 
돈이 많을수록 어떤 조명을 더할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전기세를 줄일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마이너스적인 발상. 이런 요소들이 부자들의 공간에서 최고의 효율을 내는 것이다.

- 자수성가한 부자일수록 명확한 목표를 가지고 의도적으로 결핍된 공간을 만들기도 한다. 최근 백선필 씨가 설계한 한 펀드 회사 CEO의 저택에는 차고가 없다. 차고를 만들 돈으로 옥상정원을 꾸미면 고객들과 사적인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미국 기업가들은 중요한 고객을 집으로 초대하곤 한다. 자신의 집에서 더 유리한 협상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의 집은 주거와 휴식을 위한 일반적인 공간이 아닌, 처음부터 비즈니스를 위해 만든 쇼룸의 목적이 강했기 때문에 가장 기본적인 차고를 만들지 않은 것이다. 부자들은 줄인 만큼의 가치 역시 소득이기 때문에 겹핍된 공간에서도 충분히 만족한다.

- 따라서 내가 부자가 될 가능성이 있는가 혹은 돈을 버는 방향으로 가고 있는가를 알려면 내 공간부터 살펴봐야 한다. 내 공간이 의도했던 목적에 맞게, 본질에 맞게 구성되어 있는지, 효율적인 측면에서 최대치를 내고 있는지 등을 다시 점검할 필요가 있다. 집에 결핍된 곳, 부족한 곳이 없다고 느껴진다면 어쩌면 부자로서의 운도 멈춰 있는지도 모른다. 재운은 반드시 결핍의 공간에 머무는 법이다.

- 재불백년(財不百年). 즉, '100년 가는 재산은 없다'라는 말이 있다. 어렵게 쌓은 재물은 인고의 과정을 경험하지 못한 후손을 만나면 봄눈 녹듯 사라져 버리게 마련이다. 그런 면에서 경주최 부잣집은 무려 12대, 400년 동안 부를 이어왔으니 가히 독보적이라 할 만하다.

 

- 많은 사람이 최 씨 집안의 부를 말할 때면 지리적 혜택이나 경영 능력이 아닌 '육훈'으로 불리는 가훈에 대해 먼저 말하곤 한다. 가훈에는 사방 100리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고 진사 이상의 벼슬은 하지 말라는 식의 사회 환원적이고 반권력적인 내용이 담겨 있다. 이런 가훈의 실천이 400년 부를 가능하게 한 주요 요인이 됐다는 것이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좋은 가훈을 둔 것과 그것을 대대로 실천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세상에 좋은 가훈을 가진 집이 어디 최 부잣집뿐이겠는가. 아마도 그들에게는 부의 세습을 가능하게 해 준 또 다른 무언가가 있을 것이다. 나는 그 흔적을 '집'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 최 씨 고택은 지역의 한옥 양식을 그대로 따른 것 같지만 자세히 보면 다른 집들과 차이점이 있다. 일단 모든 건축물이 화려하고 사치스러워 보이지 않았다. 가장 좋은 목재로 지어진 한옥 자체의 고급스러움은 있었지만 그 큰 공간을 채워온 방식은 소박하고 검소했다. 집이 유독 아담해 보이는 것은 주위 향교와의 갈등을 피해 터의 위치와 용마루를 낮췄기 때문이다. 다른 집들에 비해 솟을대문을 작게 만든 것도 주요하다. 지금이야 아파트가 대부분이라 대문이라 부를 만한 문도 없지만 과거의 대문은 중요한 상징성을 갖고 있었다. 예를 들면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이라도 그곳에 문을 세워두면 문을 기준으로 이곳과 저곳은 다른 공간이 되었다.

- 행운이나 재앙이 들어오는 것도 대문을 통해서였다. 여러 문중에서도 한옥의 메인 출입구라 할 수 있는 솟을대문은 집의 위엄과 권세를 나타내는 집의 얼굴이기도 했다. 그런 문을 낮고 작게 만들었다는 것은 자신들의 권위를 내려놓겠다는 선언이기도 했다. 그 낮아진 문턱으로 하루에만 100명이 넘는 과객과 유랑객이 넘나들었다.  

 

- '북쪽 끝 검푸른 바다에 물고기가 있으니 이름을 곤(峴)이라 한다. 곤의 크기는 몇 천 리가 되는지 알 수 없다. 어느 날 곤이 변해 새가 되니 그 이름을 붕(鵬)이라 한다.'

- 이 대목은 '자아의 초월적 비상'으로 해석되는 <장자>의 첫 구절이다. 물고기가 스스로를 초월해 새가 되고, 물 밖 세상으로 나와 반대편 바다를 향해 비행을 시작한다는 것. 이는 하늘 끝까지 날아오르는 새처럼 세상을 바라보는 원대한 시야를 갖게 한다. <장자>를 읽을 때마다 장쾌한 동양 철학의 정수를 음미했던 구절이다. 그런데 최근 새로운 분야의 공부를 하면서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무언가가 보이기 시작했다. 수천 년간 서양의 정신문화를 지배했던 점성학이 알려준 붕새의 비밀. 그것은 바로 '물병자리 시대의 도래다.

- 점성학에 의하면 2,160 년을 주기로 한 시대가 바뀐다고 한다. 지금 우리는 대략 2,000년 정도 이어져온 물고기자리 시대의 말미에 살고 있다. 그리고 머지않아 새롭게 물병자리 시대가 열릴 것이다. 이른바 '뉴에이지'의 도래다.

- 흥미로운 것은 시대가 바뀔 때면 동서양을 막론하고 특정한 상징, 코드가 나타난다는 것이다. 특히 예수와 부처 장자는 이전 시대에서 지금의 물고기자리로 넘어오던 과도기에 태어난 인물들이다. 불가에서는 지금도 목어(木魚)를 두드리며 새벽을 맞이하고 풍경 끝에 물고기를 매달아 놓는다. 항상 눈을 뜨고 있는 물고기를 수행자의 표상으로 삼기도 한다. 기독교에서 물고기는 예수를 나타내는 상징물로 쓰인다. 마치 자신들이 맞이할 시대가 물고기자리 시대임을 인증하는 것처럼.

- 공교롭게도 <장자>의 첫 구절 역시 '곤'이라는 물고기로 시작한다. 그리고 곤은 스스로를 변화시켜 붕새가 된다. 주목할 점은 새가 그다음 도래할 물병자리 시대를 상징한다는 것이다. 고대의 선인이 직관과 통찰로 다가올 또 다른 시대를 예언하기라도 한 것일까. 인간 의식의 진화가 가게 될 길을 누군가는 새라는 문학적 비유로, 누군가는 별자리라는 우주적 장치로 설명했는지도 모른다. 

- 점성학은 단순히 점성술이라는 미신으로 치부되기도 한다. 하지만 점사를 제외한 점성학은 별과 인간이 수천 년간 함께한 공존의 기록이자 역사다. 일정한 주기를 갖는 별자리의 출현은 사람의 몸과 마음이 그 주기에 따라 어떻게 변하는지를 알려주는 통계가 된다. 수만 광년 떨어진 별에 놀라운 힘이 있어 나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다. 이들은 거대한 우주의 공간에서 내 위치를 알려주는 지표가 된다. 그리고 그 위치의 변화가 가져다줄 새로운 공간의 에너지를 암시해 줄 뿐이다.

- 그러나 물병자리 시대는 '너와 나는 다르지 않다'는 데에서 출발한다. 역설적이긴 하지만 그런 의식 변화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코드가 요즘의 '금수저 흙수저' 논란이다. 출신에 따라 인생이 결정된다는 서글픈 담론에는 '부모만 잘 만났다면 나도 너와 다르지 않았을 것'이라는 수평적 사고가 깔려 있다. 이처럼 누구나 자기만의 세계와 철학이 있고 그것을 존중받고 싶어 하는 시대가 바로 물병자리 시대다. 시대에도 인격이 있다면 부모의 보호와 통제로부터 벗어나 독립하고 싶어 하는 청년의 모습을 닮아 있다.  


- 높은 책장을 마주하고 있었다. 안락의자에 앉으면 책장의 책들이 쏟아질 듯 올려다 보이고 누군가 들어오면 안락의자에 앉아 쉬고 있는 그의 얼굴과 마주하게 된다. 그에게 이런 구조를 갖게 된 이유를 물으니 간단하고 명료한 답변이 돌아왔다.
"그게 가장 편하니까요."

- 그는 정발산을 보고 싶어 그곳에 책상을 뒀을 뿐이다. 쭉쭉 뻗어 있는 산줄기와 녹색의 식물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충전이 된다고 했다. 안락의자도 마찬가지였다. 책장을 보고 앉는 게 편해 그곳에 앉을 뿐이었다. 나와 책장 사이의 좁지만 아늑한 거리가 먼 풍경보다 훨씬 안정감이 든다는 것이다. 각각의 가구는 각자의 자리에서 독립적으로 존재하며 상황에 맞는 기능을 공평하게 수행할 뿐이다. 전체의 뻔한 조화는 이런 기능 위주의 공간에서 중요한 부분이 아니다. 그의 집무실은 자기 자신이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에 대한 확신이 있을 때 만들어질 수 있는 공간이다. 이는 자신의 판단에 대한 신뢰와 믿음이 있을 때 가능한 일이다. 이런 신뢰의 미학은 회사 경영에도 그대로 반영되고 있었다.

- 하루가 다르게 진화하며 새로운 종류의 영화와 게임을 보여준다. 
하지만 빠른 세상의 변화가 늘 좋은 것만은 아니다. 기술은 정체되기 쉽고, 속도감에 길들여진 사람들은 쉽게 지루해지게 마련이다. 이런 문제는 기존의 암기식 위주의 지식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새로운 감각의 해답을 필요로 한다. 이때 필요한 해결사가 바로 크리에이티브(creative)다.

- 우리에게는 너무나 익숙하지만 지금 같은 의미의 크리에이티브가 보편적으로 쓰이기 시작한 것은 불과 150년이 되지 않는다. 그렇기에 전통적 공간에서도 창조적 공간이란 개념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 당시 창작에 대한 인식은 공자의 술이부작(述而不作), '선인의 가르침을 그대로 기술하지만 창작하지는 않는다'라는 말로 정의된다. 기존의 것을 부정하고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창조적 행위는 자기 합리화에 빠진 삿된 편견이나 위험한 도발로 취급받기 일쑤였다. 충분한 당위성을 가지고 왕권을 통해 창작된 한글조차도 국문으로 인정되기까지 450년의 시간이 걸렸다.

- 이런 부정적 뉘앙스는 동양의 운명학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명리학에서 창조성으로 해석할 수 있는 편인(偏人)이란 용어는 다른 말로 올빼미를 의미하는 효신(梟神)이라 불린다. 올빼미는 고대 중국에서 자신의 어미를 잡아먹는 새로 알려져 있다. 결국 창조란 나를 있게 해 준 것에 대한 패륜과도 동일시됐다는 말이다. 그렇게 부정한 에너지를 주는 공간을 굳이 찾을 필요도, 공론화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리뷰자 주 : 편인의 한자는 偏印이 맞을 것 같다.)

 

- 하지만 효신의 올빼미는 서양의 로마로 넘어오면서 환영받는 지혜의 동물이 된다. 지혜의 신 미네르바는 황혼녘에 산책을 나갈 때마다 올빼미와 함께했다고 한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에도 눈을 밝혀 먹이를 찾아내는 올빼미의 습성을 지혜의 한 부분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 동양에서 효신의 올빼미가 패륜의 아이콘으로 새장에 갇혀있을 때 미네르바의 올빼미는 저 멀리 보이지 않는 곳을 향해 끊임없이 비행했다. 사소할 수도 있는 인식의 차이가 본격적인 결과물로 드러나기 시작한 시기는 18세기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18세기 서양 점성학에서 창조를 상징하는 별, 천왕성이 처음으로 발견된 때이기도 하다. 새로운 별의 발견은 기술의 발전에 따른 인간 의식의 확장을 의미한다.

- 점성학에서 말하는 것처럼 그 별이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미친 것일 수도 있지만 한편으론 그 별을 찾아낸 인간의 의식이 그동안 알지 못했던 삶의 가치들을 각성시켰다는 의미일 수도 있다. 이때 별은 그 시대의 열망을 상징하기도 한다.

 

 그 유명한 독일의 산업 디자이너 잉고 마우러의 LED 조명과 이탈리아 디자인계의 거장 알레산드로 멘디니의 스탠드, 국내에는 거의 없다는 뵙 (Böhm) 사(社)의 스털링 엔진 세트까지. 그중에서도 내 눈을 사로잡은 것은 너무나 고급스럽게 '잘생긴' 연필깎이였다.

-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정치호 씨의 집은 마치 새하얀 이집트 사원 같았다. 연희동 언덕에 걸터앉은 삼층집은 군더더기가 없었다. 겉모습은 단순해 보였지만 어딘가 비밀스러운 분위기를 풍겼다. 실제로 1층 작업실로 들어가니 오래된 보물 창고(?)가 펼쳐졌다. 옛날 할머니 집에 있었을 법한 구식 TV들이 한쪽 벽에 가득 쌓여 있었고, 싱크대 옆에는 외국에서 가져온 빈티지 자판기가 서 있었다. 책상으로 쓰는 널찍한 테이블 위에는 한눈에 보기에도 예사롭지 않은 물건들이 무심히 놓여 있었다.

 

- "그건 스페인의 엘 카스코가 1976년에 만든 M430 시리즈 중 하나예요. 엘 카스코는 100년 전통의 총기 회사인데, 대공황 시대 때 자구책으로 연필깎이를 비롯해 탁상용 소품을 만들기 시작했죠. 제련 기술이 워낙 좋은 회사라서 여기 들어가는 모든 소품을 일일이 수작업으로 만들었어요." 
자신이 아끼는 물건을 설명하는 순간, 뿔테 안경 너머의 눈이 빛나기 시작했다. 정치호 씨는 자신이 가진 수집품만큼이나 다양한 일을 한다. 그는 일간지 사진기자 출신으로, 본업인 사진 이외에도 <빅이슈>란 잡지를 디자인하고 가구, 조명 등 생활용품을 만드는 디자인그룹 엇모스트를 이끌고 있다. 지난해 '리버스(REBIRTH, 재생)'라는 주제의 전시회에서 아날로그 TV를 재해석한 월넛 TV장과 전통 고가구인 반닫이를 재현한 작품들을 선보여 주목받기도 했다. 이뿐만이 아니다. 유명 기업들의 기업 이미지를 통일하는 CI(Corporate Identity)부터 제품 패키지, 공간 디자인까지 그의 손을 거치지 않은 것이 없다. 모든 것의 경계를 허무는 '크리에이터'라는 수식어가 이보다 더 잘 어울리는 사람이 있을까.

- "수집하는 물건이 참 다양하네요. 보통의 콜렉터들은 피규어라든지 안경이라든지 한 가지 품목을 정해서 모으는 경우가 많은데요."
"일부러 수집하려고 모은 게 아니라 실생활에 필요해서 산 것들이에요. 제가 연필을 써서 연필깎이가 필요했는데, 이왕이면 디자인적으로 괜찮고 스토리가 있는 것을 사고 싶어서 찾게 된 거예요. 여기 있는 조명이나 스피커도 마찬가지고요. 모든 디자인에는 원류라는 게 있잖아요. 그 처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포인트가 될 만한 물건은 저를 비롯해 함께 일하는 디자이너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죠." 

- 그가 곁에 두고 쓰는 물건 하나하나에는 역사와 스토리, 디자이너의 철학이 숨겨져 있었다. 그중에는 정말 구하기 힘든 희귀한 물건들도 있지만 일부러 진열장을 만들어 따로 전시하지 않았다. 자연스러운 풍경처럼 작업실 어딘가에 녹아들기 바랐기 때문이다. 그러다 손님이나 의뢰인의 눈에 우연히 발견되면 대화의 물꼬를 터주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그날 내가 '꽂힌' 연필깎이처럼 무수한 소품 중에 한두 개쯤은 의뢰인의 시선을 끌게 마련이니까. 

- 그와 대화를 나눌수록, 그의 공간에 익숙해질수록 이곳은 정치호 씨의 전장(戰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전투복을 연상케 하는 야상점퍼를 즐겨 입는 그는 이곳에서만큼은 뛰어난 공간의 지배자이자 사령관이었다.

- 물건에 대한 사람의 반응을 보면 그가 어떤 사람인지 파악할 수 있다. 디자인을 보는 안목, 관심사, 사람에 대한 태도 등 그에 대한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속내를 전혀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상황을 통제하고 관계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그의 작업 방식과도 일맥상통한다. 예전에 한번 그가 인물 사진을 찍는 모습을 지켜봤는데, 상대와 5분 남짓 몇 마디 나누며 '인생 사진'을 찍어내는 걸 보고 깜짝 놀란 적이 있다. 상대가 일상적인 대화에 집중하는 사이, 그가 가진 가장 깊은 얼굴을 포착해 버리는 식이다.

- 크리에이터들은 기본적으로 자신의 의도를 들키고 싶어 하지 않는 속성이 있다. 들키는 순간, 뭐든지 금방 카피되기 때문에 그것이 어떤 원천에서 나오는지 쉽게 노출되는 것을 꺼린다. 그런 그의 내면이 작품에도, 공간에도 고스란히 스며들어 있었다. 그 중심에는 공간 곳곳에 놓인 그만의 소장품들이 있었다. 그가 소유한 모든 물건은 자신이 불어넣은 의미와 감정을 통해 새로운 생명력을 갖게 되었다. 이런 물건들은 제페토 할아버지가 만든 피노키오처럼 언제든지 자신의 소리를 내며 또 다른 스토리를 이어간다. 때론 물건들의 단순한 배열이 악기의 배열처럼 아름다운 화음을 들려줄 때도 있을 것이다. 그만이 느낄 수 있는 이런 공간의 파장은 그곳에서 치열하게 해결책을 찾아나갈 크리에이터에게 편안하고 익숙한 만족감을 선물해 준다. 그리고 그렇게 기분 좋은 이완의 상태에 들어갔을 때 비로소 새로운 문이 열리게 된다.

- 창조는 '무의식'과 깊은 연관이 있다. 일반적으로 뇌가 처리할 수 있는 정보는 초당 4천억 비트 정도라고 한다. 우리는 그중에서 2천 비트 정도의 정보만을 실제로 처리할 뿐이다. 나머지 대다수의 정보는 무의식 속에 저장된다. 이렇게 무의식에 저장된 방대한 빅데이터들은 스스로의 편집 과정을 거치며 우리에게 쉴 새 없이 그 결과물을 전달해 준다. 이 결과물들이 바로 영감과 창조의 원천이 되는 것이다.

- 이런 무의식의 답을 의식의 세계로 가져오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완된 몰입'이 필요하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의식의 몰입은 집중이라는 긴장된 상태를 필요로 한다. 하지만 무의식의 몰입은 분산이라는 이완의 상태를 필요로 한다. 수많은 예술가가 꿈속에서 자신이 만들어낼 노래의 선율을 듣거나, 그림에서 영감을 얻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100여 년 전 '천재 과학자'로 불린 니콜라 테슬라는 궁금한 것이 생기면 그것을 꿈속에 넣어 해답을 찾는 방법을 터득했다고 한다.

- "풍경 속에서도 새로운 영감이 떠오르죠. 물론 지금 살고 있는 집의 작업 환경도 그리 나쁜 편은 아니에요."
그녀와 대화를 나누는데, 책상의 위치가 새삼 눈에 들어왔다. 이곳저곳에서 구한 여러 가지 자료와 기록들이 모여 작품으로 승화되는 작가의 책상은 창작의 단계에서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 대부분의 작가는 본능적으로 벽을 등지고 방을 전체적으로 볼 수 있는 위치나 창가 근처에 책상을 둔다. 책상에 앉아 볼 수 있는 사소한 것들에서도 창작의 단서를 찾아야 하는 크리에이터들에게 시시각각 변하는 창밖의 풍경이나 빛의 느낌, 소품 하나로 분위기가 바뀌는 방의 모습은 좋은 자극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드물게 그녀처럼 면벽하며 작업을 하는 작가들도 있다. 김수영 작가의 책상은 밖이 보이는 커다란 베란다 창을 뒤로한 채 방의 가장 그늘진 벽에 붙어 있었다. 벽을 보고 그림을 그리는 화가나 벽을 향해 연주하는 음악가를 떠올리기 힘들듯, 벽을 보며 영감을 떠올리는 작가도 찾아보기 힘들다.

- '이런 식으로 집필실을 만들었던 작가가 있었나?'
<주홍글씨>를 쓴 나다니엘 호손과 이문열 작가가 떠올랐다. 호손은 강이 내려다보이는 전망 좋은 창가가 있는 곳에서 ...

- 하지만 책상은 창가와 떨어진, 시야가 막힌 벽 앞에 두었다.

 

- 이문열 작가는 일부러 채광이 덜한 서북향 방에 서재를 마련하고 풍경과 상관없이 벽을 향해 책상을 두었다. 그곳에서 그는 시험공부를 하듯 작품을 쓴다고 한다.

- 그들이 작품을 위해 영감을 받는 방식은 고행하는 순례자의 모습과 닮은 점이 있다. 종교적 공간에서 종교인들은 한결같이 벽을 향해 기도한다. 그 벽에는 십자가나 불상 같은 종교적 상징물들이 걸려 있다. 선(禪) 수행자들은 벽에 조그만 점 하나를 찍어놓고 그 점에 집중하거나 촛불을 보며 깊은 명상에 들기도 한다. 벽에 십자가가 걸리거나 점 하나가 찍히는 순간, 그 벽은 더 이상 단순한 벽이 아니다. 사람들은 그 신성한 상징들을 통해 자신의 깊은 내면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그곳에서 잠들어 있던 기쁨과 슬픔의 감정, 기억과 경험의 편린들을 만나게 된다. 

 

- 누구에게나 살면서 힘들었던 시기가 있다. 나는 20대 후반 시절이 그랬다. 대학교를 졸업했지만 취업하는 것이 쉽지 않았고, 공부에 대한 미련도 버리지 못했다. 형편이 어려운 집에 더 이상 손을 벌릴 수도 없었다. 꿈이 뭔지, 어떻게 살아야 할지 그 어떤 판단도 내리기 힘들었던 그때, 나는 무작정 서울 외곽의 값싼 고시원을 찾아 생애 첫 독립을 했다. 3평 남짓한 공간에 있는 것이라곤 작은 침대와 책상 하나가 전부였다. 화장실도, 주방도 없었다. 창이 있긴 했지만 옆방에 사는 사람들과 나눠 쓰는 열리지 않는 창이었다. 옆방의 소리와 냄새가 창을 타고 고스란히 전해졌다. 그곳에 살면서 낮에는 아르바이트를 하고, 밤에는 책을 읽거나 글을 썼다. 만나는 사람도, 나를 찾는 사람도 점점 줄어들었다. 일을 하지 않는 날은 하루 종일 한 끼도 먹지 못하고, 한마 디도 하지 않았던 적도 있다. 고시원에서 산지 한 달 만에 15킬로그램이 빠지고, 얼굴에는 자주 병색이 돌았다.

- 이렇게 설명하면 무척 불행한 시간을 보냈을 것 같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적어도 그 작은 방 안에 있을 때는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었다. 방을 치우지 않아도, 발가벗고 있어도, 밤새도록 차를 마셔도 오로지 나 혼자일 수 있는 시간들이었다. 그곳은 스스로를 가두며 세상과 단절될 수도 있고, 반대로 자신을 풀어두며 자유로울 수도 있는 양면성이 공존하는 곳이었다. 

- 운 좋게도 나는 이 양면성을 십분 활용하는 이웃을 만나고 시원 생활의 노하우를 전수받을 수 있었다. 그는 졸업 후 2년째 변리사 시험을 준비하고 있었다. 평범한 고시생이었던 그를 주목하게 된 것은 특이한 생활 패턴 때문이었다. 그는 늘 같은 시간에 일어났고, 같은 시간에 밥을 먹고, 같은 시간에 산책을 나가고, 공부를 하고 잠을 잤다. 손님이 찾아와도 정해진 시간이 되면 자신의 규칙대로 움직였다. 나중에 알게 됐지만 놀랍게도 그의 방에는 시계나 휴대폰이 없었다. 일부러 시계를 두지 않고 자신의 습관을 시계처럼 만든 것이다. 그는 결국 시험에 합격했고 지금은 특허 법률 사무소의 대표가 되었다. 그가 고시원을 떠나고 나도 그처럼 내 시간과 공간을 통제하려 노력했다. 그 노력의 산물들이 지금 쓰는 글들의 밑천이 되어주고 있다. 

- 지금도 나는 어려운 일이 생기면 고시원에서의 생활을 떠올린다. 과거를 회상하며 추억에 젖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곳에는 인생의 막막함 속에서 어떻게든 살아보려 했던 열망과 노력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기 때문이다. 흔히 이야기하는 '초심으로 돌아가라'라는 말은 처음의 어설픔과 낯설음으로 돌아가라는 말이 아니다. 그때의 절박함 속에 쥐어 짜냈던 강렬한 에너지를 다시 한번 돌이켜 생각해 보라는 뜻이다.

- 프로이트 심리학에서는 이를 '주둔군 이론'으로 설명한다. 전열을 정비하며 물자와 전력을 임시로 모아두는 곳이 주둔지다. 힘들고 어려운 전쟁일수록 주둔지에는 더 많은 자원과 주둔군이 잔류하게 된다. 사람의 마음에도 이런 주둔지가 있다. 죽도록 힘들지만 이겨내야만 하는 상황에서 사람들은 자신이 쓸 수 있는 극한의 에너지를 쏟아붓는다. 그 치열한 전투의 현장에 내 모든 능력치가 모여 있는 주둔지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감당하기 힘든 어려운 일이 생길 때마다 고난의 시절이 생각나는 것은 그곳에 나를 구원해 준 경험과 기억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삶은 끝나지 않는 기나긴 전쟁의 여정인지도 모른다.  


- "답답하고 우울할 때면 창문을 활짝 열어두고 음악을 들어요. 음악이 내 안의 답답한 공기를 환기시켜 주는 것 같아요."

 

- 고요한 평화로움이 이전 시대의 휴식을 의미했다면 요즘 젊은 세대들은 반복되는 프레이즈의 단순한 음률에서 안정을 느끼는 경우가 많다. 너무 단조로우면 지루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들은 음악이나 게임을 하면서도 충분히 집중하고 좋은 성적을 내며 자신만의 결과물을 만들어낸다.

- 작은 공간은 그곳에 사는 사람을 위축시킬 만한 충분한 위력을 가지고 있다. 움직일 수 있는 몸의 동선을 제약하고 그에 따른 마음의 움직임도 제한한다. 공간이 작아질수록 마음도 작아지기 쉽다. 특히 공간을 자신과 동일시하는 사람일수록 그런 경향이 강해진다. 필요 이상의 큰 집을 선호하는 사람일수록, 집에 투자한 돈이 많을수록 사람들은 집과 나를 일체화시킨다. 좋은 가구를 두고 내 취향의 인테리어가 되어 있지 않으면 내가 부정당하는 느낌을 받는다. 집의 크기가 곧 권력의 크기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이런 스타일의 사람이 작은 공간에 살게 되면 문제가 생긴다. 나와 동일시되는 작은 공간은 한없이 자신을 부정하고 무력화시키는 공간이 된다. 스스로를 어둡고 질퍽하게 만들며 구덩이 속에 빠진 듯 스스로를 세상과 단절시키며 괴로워한다.


- 다행히 박인애 씨는 자신의 공간과 충분한 거리를 두고 있었다. 공간이 곧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대신 자신이 공간을 돌봐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집을 자기와 함께하는 반려 대상이나 손이 많이 가는 친구 정도로 여기는 것이다. 내가 사는 공간에 거리를 두면 그 주위에 더 관심을 두며 즐기게 된다. 그녀가 이곳을 선택한 이유도 집 자체의 장점보다는 동네가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우선 시장이 가깝고 망리단길이 조성되어 볼거리가 많았다. 회사로 가는 셔틀버스 정류장도 가까웠다. 근처에 보틀숍이 있어 마음에 드는 맥주를 쇼핑할 수 있다는 것도 선택의 중요한 요소가 됐다. 

- 그녀는 앞으로 경제적 여유가 생겨도 투룸 이상의 공간은 필요 없다고 했다. 그녀가 집중해서 넓히고 싶은 공간은 내면의 공간이었다. 경험치를 높이고 원하는 사람들과의 관계에 집중하고 커리어를 쌓는 일에 투자하고 싶은 것이다.

- 박인애 씨의 8평짜리 공간이 주둔지가 될 수 있는 것은 그녀가 그 공간에 기대거나 안주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이곳을 발판으로 자신의 커리어와 삶의 스타일을 완성해 나갈 것이다. 확신할 수 있는 건 지금의 공간 안에 채워둔 삶의 철학들이 먼 미래에 나를 지원해 줄 든든한 주둔군이 되어줄 것이라는 점이다. 자신의 공간에 더하거나 뺄 것이 없냐는 그녀의 질문에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 책상 위에 놓인 컴퓨터와 그림 도구들, 벽에 멋스럽게 걸려 있는 그녀의 작품들이 한눈에 시선을 사로잡았다. 공간 자체도 너무나 깔끔했다. 작은 소파가 밤에는 침대로 변신하고, 장식장처럼 보였던 유리 캐비닛이 그녀의 옷장이었다. 안이 보이는 투명한 가구를 놔야 덜 좁아 보일 것 같아 학교 과학실에 납품하는 가구를 구한 것이다. 흰 벽에 빛이 잘 들어오는 커다란 반투명 창문도 집이 넓어 보이게 하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집안 곳곳에는 그녀가 취미로 만든다는 펠트공예 작품들도 아기자기하게 전시되어 있었다.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생활은 물론, 일과 취미가 모두 담겨 있었기에 공간이 실제보다 더욱 크게 보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런 꽉 찬 공간이 전혀 과해 보이지 않고 오히려 넓어 보이는 비결은 과연 무엇일까. 

- 그것은 공간의 '첫 단추'부터 제대로 끼웠기 때문이다. 40대 초반의 그녀가 이 공간을 갖게 된 것은 고작 1년도 채 되지 않았다. 그 전까지는 계속 부모님과 한 집에서 살았다. 지난 10여 년간 작가로서 한창 커리어를 쌓고 창작을 해오면서 누구에게나 그렇듯 그녀에게도 슬럼프가 찾아왔다. 한동안 깊은 우울감과 무기력에 빠져 힘든 시간을 보냈지만 우연히 좋은 상담가를 만나 다시 용기를 낼 수 있었다. 자신의 내면과 소통하고 대화하는 법을 배우면서 그녀는 스스로를 가두었던 작은 상자에서 마침내 벗어날 수 있었다고 했다.  

 

- "저 스스로 밝아지고 에너지가 커졌다는 게 느껴지니까 자연스럽게 나만의 공간을 갖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부모님과 함께 살았던 집은 숟가락 하나까지 모두 엄마의 취향이 담겨 있는 엄마의 공간이잖아요. 그래서 완전히 저만을 위한, 제 취향이 제대로 담긴 공간을 갖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구체적으로 그런 집을 머릿속으로 상상하기 시작했어요." 

- 그녀는 하얀색에 창이 커서 답답하지 않고 햇볕이 잘 들어오는 집 그리고 일러스트레이터로서 자신의 작품을 온전히 보여줄 수 있는 공간을 머릿속으로 그려냈다. 그리고 집을 보러 다닌 지 얼마 되지 않아 운명처럼 이 집을 만났다고 했다. 머릿속으로 상상하고 꿈꾸던 집과 거의 비슷했던 것이다.

- "신기한 건 이 집을 구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저한테 큰 일이 들어온 거예요. 보통 일러스트레이터는 프리랜서라서 고정된 일이 없는데, 1년간 연재를 하게 되어 안정적인 수입이 생겼어요. 집터가 좋아서일 수도 있지만 제 에너지가 바뀌면서 생긴 변화라고 생각해요. 저는 '유인력'을 믿는 편이거든요."

- 사람은 누구나 자신만의 에너지와 파장을 발산한다. 그 에너지는 크고 작은 회오리바람을 일으키며 때때로 자신도 모르게 나와 공명하는 무언가를 끌어온다. 특히 그녀처럼 끌어오는 힘, 유인력을 믿는 사람들은 그 대상을 구체적으로 머릿속으로 그리며 끌어올 대상을 먼저 설정한다. 그녀는 마치 아는 사람을 떠올리듯이 자신의 공간과 일을 그려냈고, 실제로 그것은 하나씩 눈앞의 현실이 되었다. 

- 누구나 살다보면 상승세의 회오리바람을 일으킬 때가 있다. 내 안의 에너지가 커지고 내 바람이 커질 때는 그녀처럼 자신을 믿고 구체적으로 나를 성장시킬 수 있는 공간을 상상해 볼 필요가 있다. 인터넷 검색에만 그치지 말고 발품을 팔아 만지고 냄새를 맡으며 온몸의 감각을 동원해 원하는 공간을 섬세하게 그려내야 한다. 그러면 마음이 어딘가에 있을 실제와 공명하며 그곳을 향해 나를 움직이게 한다.

- 그렇게 운명처럼 만난 집이었기 때문에 김령언 씨는 공간에 자신의 색깔과 취향을 정성스럽게 담아냈다. 가구는 물론이고 조명, 숟가락, 쟁반 하나까지 신중하게 고르고 배치했다. 모든 물건에 자신의 감각과 철학을 담은 것이다. 이런 일관된 질서가 있을 때 쓰임이 다른 물건들이 모여도 조화가 이루어질 수 있다. 그녀는 이런 조화를 '공간의 관상'이라고 표현했다. 
"저는 낯선 가게에 들어가기 전에 그 가게의 관상을 봐요. 사람의 첫인상이 있듯 공간에도 그런 게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인상이 좋지 않은 곳은 들어가지 않아요." 

- 이렇게 여러 가지 물건의 조화를 하나의 이미지로 표현한다는 것은 사실 엄청난 내공이 필요한 일이다. 그녀는 10여 년간 그림이라는 도구로 자신만의 패턴을 만든 사람이다. 그 인고의 시간을 통해 서로 다른 물건들을 마치 하나의 캐릭터로 만들 듯 자신의 감각과 철학을 일관성 있게 투영시킬 수 있게 된 것이다. 

- 많은 사람이 자신만의 취향과 감각을 중요한 가치로 생각한다. 그런데 정작 소비는 그때의 유행이나 분위기에 맞춰 즉흥적으로 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 것들로 채워진 공간은 물건이 많지 않아도 뭔가 조화롭지 않고 복잡한 느낌이 든다. 한마디로 흉상의 공간이 되는 것이다. 이럴 때는 적어도 나의 작은 방 하나만큼은 공간의 철학이 지배하는 취향의 공간으로 만들어보는 것이 어떨까. 균일한 질서가 있는 공간은 물건이 많고 적음에 상관없이 심플해지는 것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어느 곳을 보아도 마음이 안정되고 단순해지는 공간. 그런 공간에서 우리는 정서적인 안정과 자유를 느낄 수 있다.

- 따라서 중요한 것은 밸런스를 잡는 것이다. 공간을 단순하게 바꾸고 싶다고 해서 당장 불필요한 것을 다 버릴 것이 아니라 몸을 부지런히 움직이게 하는 무언가를 같이 두는 것이 좋다. 김령언 씨는 창가의 식물들을 가꾸고 공예품을 관리하는 수고로운 과정을 통해, 박인애 씨는 바닥에 놓인 100여 권의 책을 정리하고 때때로 위치를 바꿔주는 일을 통해 균형을 잡았다. 그래서 그들의 공간은 미니멀하지만 동시에 따뜻한 온기를 품고 있을 수 있었다. 잘 잡힌 균형 속에서 사람 중심의 미니멀리즘을 조용히 구현한 것이다.

- 현대건축의 아버지라 불리는 르 코르뷔지에는 '카바농'이라는 4평짜리 오두막에서 말년을 보냈다. 미니멀리즘의 진수를 보여주는 카바농은 그 어떤 공간보다도 실용적이고 합리적으로 만들어졌다. 바다를 향해 창을 놓아 차경이 주는 여유로움도 잊지 않았다. 평생을 건축에 몸담았던 거장의 마지막 선택은 어떤 공간이 진정 우리를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는가를 말해주고 있는 듯하다. 크거나 비싼 곳만이 우리를 만족시키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집은 '살기 위한 기계'라는 그의 말처럼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스페이스로지, 즉 '내가 그 공간을 다루는 기술'이다. 

- A 씨는 일복이 타고난 사람이다. 직장에서 늘 남들보다 두세 배의 일을 한다. 모든 일은 성공과 실패라는 결과를 내게 되어있어 일하는 만큼 당연히 스트레스 지수도 올라간다. 그러나 워낙 그런 생활을 오래해 그러려니 하고 살아간다. 누구나 이 정도는 하고 살지 않느냐고 자신을 위로하며 말이다. 그런 그녀가 지난겨울, 오랜만에 휴가를 냈다. 차로 몇 시간을 달려 도착한 곳은 전라남도 담양. 그녀는 오래전부터 푸른 대나무밭이 꼭 보고 싶다고 했다. 며칠 후, 그녀의 SNS에 담양 죽녹원의 사진과 글 하나가 올라왔다. 
'바람이 불면 대나무들이 부딪쳐 신비한 소리를 낸다. 바람소리가 마음을 씻어줄 수 있다는 것을 처음 배웠다.'

 

- 하얀 눈밭에 선명하게 서 있는 짙푸른 대나무 사이에서 A 씨를 사로잡은 것은 바로 '소리'였다.
"바람이 불면 '쏴아' 하는 소리와 함께 잎이 떨리는 소리가 나고 뒤이어 대나무들이 서로 '통통' 부딪치는 소리가 나요. 눈을 감고 그 소리를 듣는데 가슴속까지 시원해지고 숨통이 트이더라고요. 지금도 가끔 지치면 눈을 감고 그 소리를 떠올려요."
"그렇죠. 사람의 소리는 자꾸 분석하게 되고 복잡해질 때가 많은데 자연이 내는 소리는 뜻도, 의미도 없지만 그저 듣는 것만으로 숨통이 트일 때가 있어요."


- 그녀와 대화를 하고 있자니 문득 <장자>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세상을 잊은 듯 마른나무처럼 앉아 있던 '남곽자기'에게 '안성자유'가 그 이유를 묻자 이렇게 말한다.
'너는 인뢰(人籟, 사람의 퉁소 소리)는 들었어도 아직 지뢰(地籟, 대지의 퉁소 소리)는 들어본 적이 없을 것이다. 또 대지의 퉁소 소리는 들었어도 아직 천뢰(天籟, 하늘의 퉁소소리)는 들어본 적이 없을 것이다.'

- 여기서 인뢰와 지뢰는 사람과 자연이 내는 소리, 즉 인위적이고 의존적이며 듣는 사람에 따라 달라지는 유위(有爲)의 소리를 말한다. 반면 천뢰는 바람이 불기 전부터 존재하고 있던 무위(無爲)의 소리를 말한다. <장자>는 천뢰를 듣는다는 설정을 통해 우리가 자유로워지기 위해 진정 들어야 하는 소리는  

- 그곳만의 강렬한 힘이 느껴진다. 하지만 마니산은 다른 점이 있었다. 강한 끌림이 산의 정상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늘을 향해 내달리고 있었다. 동양 철학에서 '본다'라는 것은 망막에 닿는 빛이 시각 세포에 의해 흡수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내 눈에서 나온 기운이 내가 보고자 하는 곳에 닿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보는 것만으로도 만지듯이 상대방을 감지하고 해석할 수 있게 된다. 특히 마니산처럼 상승하는 기운이 있는 곳에서는 그 기운에 편승해 사람의 시야도 함께 확장된다. 이런 곳에서 하늘을 보면 평소 내가 볼 수 있는 시력의 한계를 넘어 더 많은 것을 느끼게 된다. 아마도 이곳에서 조상들은 더 먼 하늘의 별들을 느끼며 기도했을 것이다. 천제를 지낸 것도 이곳이 땅의 도움을 받아 하늘과 가장 가까워 질 수 있는 곳이었기 때문이 아닐까.

- 마니산이 어떤 이유로 그런 특별한 에너지를 갖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혹자는 이를 볼텍스(vortex) 에너지로 설명하기도 한다. 볼텍스란 지구에서 나오는 특정한 주파수의 전자기 에너지를 말한다. 인더스 강의 발원지인 티베트의 카일라스산, 호주의 거대한 사암(砂巖)인 울룰루, 미국의 세도나 등 전 세계 21곳이 볼텍스 지역으로 알려져 있다. 이 장소들은 지역의 원주민들에게 성지(聖地)로 여겨졌던 곳으로, 지금도 치유와 명상의 에너지를 받고자 많은 사람이 찾고 있다. 

 

- 볼텍스 지역에서는 공통적으로 일치하는 점이 있다. 에너지가 소용돌이 모양으로 뻗어 나온다는 것이다. 이는 몸이 특별히 예민한 사람이 아니라도 느낄 수 있다.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이미 볼텍스 에너지의 영향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이중나선 모양을 한 DNA, 탯줄의 꼬임, 머리의 가마, 손발의 지문은 모두 소용돌이 모양을 한 볼텍스 에너지의 흔적이다. 몸에 이런 문양이 새겨져 있는 것은 지구가 은하계를 공전하고 있는 태양을 쫓아 볼텍스 모양으로 회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구의 움직임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볼텍스 에너지를 만들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몸은 그 에너지의 흐름을 몸에 새기며 진화해 왔다. 

- 그렇기에 땅이 뿜어내는 강렬한 볼텍스 에너지를 느끼는 것은 의외로 어려운 일이 아니다. 참성단 앞에 서서 몸에 힘을 빼고 두 손을 모은 채 조용히 땅을 느끼면 된다. 그러면 몸에 각인된 볼텍스 문양들이 반응하기 시작한다. 지치고 불안정한 내 몸의 파장이 지구의 파장과 공명하며 고요하지만 강렬한 자연의 생명력이 온몸에 가득 퍼진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대자연의 '급속 충전'이라는 생각지도 못한 선물을 받게 되는 것이다.

- 마니산이 하늘로 솟구치는 천뢰의 소리를 들려주는 곳이라면 여주 신륵사는 또 다른 리듬의 천뢰를 들려주는 곳이다. 신륵사는 마니산처럼 강렬한 비트가 아닌 깊은 명상에 든 것처럼 편안한 호흡으로 막혔던 숨통이 트이게 해 준다. 처음 이곳에 와본 사람들은 가장 먼저 사찰이 품고 있는 특유의 고요함에 감탄한다. 적막함이나 지루함이 아닌 몸과 마음을 내려놓게 하는 기분 좋은 고요함. 하지만 역사 속 신륵사는 이렇게 조용한 곳이 아니었다. 남한강을 타고 지방에서 서울로 들어가는 세곡과 물자들이 모여들며 밤낮으로 요란하고 부산한 곳이었다. 특히 신륵사 일주문 앞의 조포 나루터는 한강 4대 나루터에 들 정도로 규모가 컸고, 그 주위는 언제나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이런 변화는 불과 100년도 되지 않아 일어난 ...

- 이런 모양은 티베트 불교에서 사용하는 울림주발(周鉢)을 닮아 있다. 울림주발은 놋쇠로 만든 그릇 모양의 수행 도구를 말한다. 주발의 주둥이를 막대로 문지르거나 때리면 청아하고 오묘한 소리가 난다. 그 소리는 '차크라(chakra)'라고 부르는 인간의 에너지 센터와 공명하며 몸의 막힌 곳을 뚫어주는 역할을 한다. 스님들은 주발을 울리며 기도를 하고 몸을 깨운다. 서구에서는 울림주발의 주파수를 따와 실제 소리를 이용한 심리 치료에 사용하기도 한다. 

- 그 모양 때문인지 신륵사에 있으면 실제 울림주발 소리를 들었을 때의 진동이 느껴지는 듯하다. 쉼 없이 밀려드는 강물은 주발을 문지르는 막대가 되고, 화강암 터는 놋쇠주발이 되는 것이다. 서로 다른 기운이 만나는 곳에서는 언제나 미묘한 떨림의 파장이 일어난다. 특히 신륵사처럼 단단한 화강암 지형 위에 터가 만들어진 곳은 부딪치는 단면이 놋쇠처럼 단단해 더 강하고 청명한 울림을 갖는다. 물을 만나면 지기(地氣)가 멈춘다고 하지만 이는 지기의 소멸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신륵사가 보여주듯 서로 다른 기운이 만나 더 강한 울림을 갖게 됨을 의미한다.

- 또 하나 특이한 것은 강과 마주하는 절벽 위에 뜬금없이 삼층석탑이 세워져 있다는 점이다. 석탑 바로 뒤에도 벽돌로 만든 다층전탑이 세워져 있고, 그 옆에는 강월헌이라는 정자도 ...

- 서울로 돌아오는 날, 일정에는 없었지만 만장굴에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인들에게는 세계에서 가장 큰 용암석주를 볼 수 있다는 이유를 댔다. 만장굴은 단체 관광객이 들르는 여행 코스 정도로 여겨지던 곳이라 모두가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사실 만장굴은 내 마음속에서도 제주도에 오면 꼭 가봐야 하는 곳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왠지 가봐야 할 것만 같았다. 아마도 지친 내 몸이 위로받을 곳을 찾아 안테나를 세웠던 것 같다. 그 안테나에 걸린 소리가 바로 만장굴의 천뢰였다.

- 단순히 생각하기에 만장굴처럼 용암이 흘러 만들어진 동굴은 오랜 시간이 지났어도 원래의 뜨거운 화기를 머금고 있을 것 같았다. 더구나 습도가 높고 환기가 되는 공간도 아니니 그 안의 온도가 낮아도 오랜 시간 있으면 눅눅하고 답답한 느낌이 들 것이다. 첫인상은 예상과 다르지 않았다. 울퉁불퉁하고 경사가 진 바닥은 물이 고여 있어 걷기 불편했다. 어두운 간접 조명이 듬성듬성 있을 뿐이라 뚜렷이 보이는 것도 없었다. 어슴푸레 보이는 벽에는 거대한 손톱으로 긁어놓은 듯한 자국들이 층층이 다른 모양으로 새겨져 있었다. 용암종유나 용암유선 같은 용암의 흔적들도 보였다. 그 무늬와 모양이 너무도 웅장하고 거칠어 어느새 벽에 코를 대고 관찰하며 찰박거리는 웅덩이들을 걸어가게 됐다. 

- 그러다 문득 이렇게 어두운 곳에서 오랫동안 벽과 천장을 둘러보는데도 눈이 피로해지지 않는다는 걸 느꼈다. 아니 오히려 점점 시려지고 있었다. 동굴 입구에 들어설 때부터 느껴졌던 냉기는 시간이 지날수록 온몸을 파고들었다. 단순히 피부로 느껴지는 것이 아닌 뼛속을 파고드는 전율이 일었다. 에어컨이나 냉장고의 냉기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밀도 있는 서늘함이었다. 이러다 감기가 들지 않을까 걱정돼 서둘러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냉기는 더 이상 몸을 파고들지 않았고, 오히려 몸 구석구석을 돌며 쌓여 있던 열독들을 공략했다. 몸이 정화되는 느낌이 들었고, 체한 듯이 막혀 있던 숨통이 트여 호흡이 가벼워졌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신선한 체험이었다. 

- 만장굴에서는 왜 이토록 참신한 에너지가 느껴진 것일까? 답은 의외로 가까운 곳에 있었다. 이곳이 바로 용암동굴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산속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석회동굴과 달리 만장굴은 용암에 의해 형성된 현무암질 동굴이다.

- 현무암은 과거 샤먼이나 인디언들이 애용하던 '치유의 돌'이다. 생리통이나 복통이 있는 여성의 배나 허리에 뜨겁게 달군 현무암을 올려놓기도 했고, 돌을 넣은 물로 목욕을 하기도 했다. 또한 뭉치고 아픈 근육에 뜸처럼 사용하기도 했고, 작은 조각으로 만들어 몸에 지니고 다니기도 했다. 다양한 연구를 통해 현무암이 정수, 정화의 효능이 있고, 원적외선이 다량으로 방출되어 면역에 도움을 준다는 사실이 밝혀지기도 했다. 제주도의 물과 공기가 유난히 좋은 것은 바다 가운데에 있는 외딴섬이라는 지리적 특성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섬의 대부분이 현무암으로 이루어진 독특한 지력(地力)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 치유의 에너지가 가득한 현무암으로 된 동굴. 기본적으로 동굴은 에너지가 쉽게 빠져나가지 못하는 압축된 공간이다. 산과 바다에서 산림욕과 해풍욕을 하듯 굴속 에너지는 오랜 시간 압축된 에너지를 통해 그곳에 들어온 사람들에게 강력한 암석욕을 시켜준다. 만장굴은 개방 길이가 자그마치 7.4킬로미터나 되고 최고 높이가 23미터에 이르는 초대형 동굴이다. 그 안에 있다는 것은 엄청난 크기의 현무암 덩어리 속에 들어가 자연 치유를 받고 있다는 말이 된다.

- 공간이 주는 치유의 에너지는 그것을 느낄 수 있는 사람에게 더욱 강렬하게 다가온다는 특징이 있다. 의사의 손을 뿌리치듯 공간을 느끼지 못하고 알아보지 못하면 몸은 더디게 반응한다. 사람과의 관계가 그렇듯 공간 역시 자신을 알아봐 주는 사람에게 더 강한 에너지를 선물해 주는 것이다. 나는 만장굴의 천뢰를 느끼며 '그냥 구경이나 해야겠다'라는 경솔한 생각을 버리고 이 동굴이 내뿜는 치유의 에너지를 마음껏 들이마시기 시작했다. 공간을 대하는 태도를 바꾸자 울적했던 마음의 울결이 확연히 풀리는 듯했다. 부어서 뜨겁게 달아오르던 다리도 한층 가벼워졌다. 내 몸이 '굴'이 된 것처럼 시원한 바람을 일으키고 있는 것 같았다. 만장굴에서의 서늘한 감동은 서울로 돌아온 뒤에도 오랫동안 잊히지 않았다.

- 복잡한 도시에 살며 많은 사람과 마주치다 보면 하루에도 몇 번씩 숨 막히는 답답함을 느끼게 된다. 그럴 때마다 일상에서 벗어나 자연으로 떠나고 싶지만 여행비를 감당하기도, 시간을 내기도 쉽지 않다. 그래서 나는 집 안에 숨통이 트이는 공간을 만들어놓고 애용하고 있다. 안방과 안방 화장실을 이어주는 작은 공간이 그곳이다. 집 안 가장 깊숙한 곳에 있고 창이 없어 문을 닫으면 외부와 완전히 차단된 곳. 그곳에 앉아 숯을 가득 채운 통에 물을 뿌린 후 숯이 물을 먹는 모습을 지켜본다. 그러면 숯은 서늘한 공기를 내뿜으며 자신의 소리를 낸다. 한때는 우거진 나무로 바람과 태양을 품었던 자신의 천뢰를 나지막이 들려주는 것이다. 그 담담한 소리를 듣고 있으면 깊은 숲 속에 있는 것처럼 현실감이 옅어지며 애잔하고 평온한 마음이 든다. 비로소 어깨에 얹힌 짐을 내려놓으며 한숨 돌리게 되는 순간이다. 

- 장자의 천뢰가 무위의 자유로움을 선사한다면, 공간의 천뢰는 내 몸이 그 공간에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말해준다. 무엇을 해야 할지 안다는 능숙함은 공간 속의 나를 좀 더 자유롭게 만든다. 공간을 다루는 기술은 생각보다 사소한 곳에 있다. 이곳이 무엇을 해야 하는 곳인지를 아는 것이 첫 번째 단추다. 

- 아름다운 풍경과 웅장한 광경이 항상 우리의 숨통을 틔우지 못하는 것처럼 의외의 작고 소박한 공간이 우리에게 도움을 줄 수도 있다. 집이라는 작은 공간의 삶과 역사를 만드는 것은 그 집에 살고 있는 우리 자신이다. <장자>에서 무위가 마른나무처럼 앉아 세상을 잊고 있는 남곽자기의 모습으로 그려졌듯 시름을 잊고 잠시 앉을 수 있는 곳에서부터 숨통이 트이는 공간이 시작되는 것이 아닐까. 그러다 보면 어느새 자연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멋진 천뢰의 음률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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