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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와미 비베카난다] 기아나 요가 - 지식의 길

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2

by 일루젼 2025. 5. 28. 0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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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스와미 비베카난다 / 김우룡
출판 : 눈빛
출간 : 2024.10.30


       

           

이 책은 스와미 비베카난다의 강의를 정리한 <기아나 요가> 중 일부를 발췌 번역한 책이다. 총 16장 중 6장을 역자가 골라 번역했다고 하는데, 전부를 접할 수 없어 아쉬운 마음 반 읽을 수 있어 감사한 마음 반이다.

 

기아나 요가는 대부분의 요가 관련 저서에서 '야나 요가'로 번역되는 지식의 길이다.

비움, 호흡, 동작, 아사나 등 대부분 육체의 움직임과 연결된 다른 요가들과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진행되는데, <우파니샤드>나 <기탄잘리>, <베다> 등의 경전을 읽고 묵상하여 체화하는 형식에 가깝다. 

 

비베카난다는 '앎'에 대해서 설한다. 기아나 요가의 깨달음은 진정한 지식을 알게 됨으로써 찾아오지만, 그 '앎'은 '이해'와는 다른 것이다. 기아나 요가의 '앎'은 '체화 be'와 유사하다. 알기 때문에 의식하지 않고 행하게 되는, 바로 그 자체가 되는 것.

이는 결국 다른 길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것이 이것이고, 이것이 그것이다.

 

일상의 자잘한 일들을 아직 완전히 정리하지 못했다. 매달마다 다음달이면 얼추 정리가 될 것 같은데- 지금 생각에는 아직 7월 초는 되어야 할 것 같다. 매일의 일상에는 충분히 만족하고 감사하고 있지만, 그것과 '걱정 없는 평온함'과는 또 다른 모양이다. 걱정할 거리를 지속적으로 찾아내고 있는 내 자신을 보며, 그 불안과 두려움을 마주하려고 노력 중이지만 아직은 쉽지 않다. 

 

그 불안의 끝자락에는 회피와 미룸도 있다. 화실은 바로 시작할 수 있었는데, 디지털 드로잉이나 요가, 수영, 에어컨 청소는 자꾸만 한 발 물러서게 된다.

체력이 바탕이 되어야 더 활기찬 삶을 즐길 수 있을 테고, 보다 자유롭게 그리고 싶다면 아이패드 드로잉을 다시 시작하는 게 좋고, 인테리어 먼지를 가득 먹었을 에어컨들은 더 더워지기 전에 청소해두는 게 좋은데.

좋다는 걸 알면서도 자꾸만 물러서고 미루게 되는 나의 뿌리는 어디에 닿아있는 걸까. 

 

스스로를 너무 몰아세우지 말고 할 수 있는 것들을 조금씩 해나가기로 했다. 걱정하며 멈춰 있을 때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지만 -또는 점점 나빠지지만- 손가락 하나라도 까딱이다 보면 이전과는 달라져 있기도 하니까.

 

6월 초에는 저들 중 한 가지는 해야지. 

너무 지치는 날에는 올해 들어 내가 해낸 것들을 되새김질하며 스스로를 칭찬한다. 사실 뭘 많이 하긴 했지. 그것도 맞지.

매일 어제보다 더 나은 삶을 꿈꾸며 살아가다 보면, 어느 순간 깜짝 놀랄 만큼 달라진 삶을 살고 있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러했다. 

 

그러니까,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행복을 발견하는 하루가 되시길 바라며. 

 


   

 

역자 서문



- 제자가 물었다.

"왜 우주는 이리도 많고 많은 개별자들이 있는가요? 왜 하나만 있으면 안 되나요? 왜 여러 가지가 생겨 비교하게 만들고 불안하게 만들까요? 나 외의 타자는 왜 있나요?"

스승이 대답했다.

"그런 적이 없다. 하나가 다수가 된 적이 없다. 그냥 한 덩어리로만 있을 뿐이다."

 

- 인도에서 처음에, 하나와 다른 하나의 둘이 있다고 했다. 우주와 브라흐만의 둘이었다. 수천 년 전부터의 이원론적 힌두의 가르침이다. 세월이 흐르고, 하나든 다른 하나는 아무것도 없다고 했다. 공호(Sunyam)이라고 했다. 붓다의 가르침이다. 나가르주나의 불교 가르침과 이원론적 힌두의 가르침이 천 년을 논쟁했다. 기원후 8백 년경에 샨카라차리아가 나타나 비이원론인 아드바이타베단타를 말하면서 이 논쟁은 주춤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논쟁은 티벳으로 옮겨가 또다시 천 년을 탁마한다.) 인도에서는 그 후 5백 년을 이원론과 비이원론이 대립했다. 그 사이 힌두철학이 풍부해지고 정치(精致)해졌다. 

- 19세기말에 비베카난다가 출현했다. 우리의 경허 스님과 비슷한 때를 살았다. 지금 사람들은 비베카난다가 아바타라 avatara(신의 현현)인지 스와미 swami(승려)인지를 확실히 구별 짓지 못하고 있다. 그는 비이원론 힌두철학을 서양에 전했다. 1893년 시카고 만국박람회에서였다. 거기서, 한 없이 빼어났지만 불운했던 과학 천재, 니콜라 테슬라도 만난다. 서로가 서로를 알아보았다. 또한 하버드와 컬럼비아대의 교수 자리를 제안받는다. 거절하고 인도로 돌아갔다. 붓다, 샨카라차리아의 뒤를 잇는 종교적 천재 한 사람이 약 150년 전에 인도에서 나서 활동하다가 39세의 나이로 죽었다. 천식과 당뇨와 불면증이 있었고 뇌출혈로 죽는다.

 

- 후에 그의 전기를 냈던 로맹 롤랑은 비베카난다의 행적을 접하고 전기에 감전되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고 썼다. <호밀밭의 파수꾼>의 작가 샐린저는 미국 젊은이들이 주머니에 넣어 다니면 좋을 책으로 비베카난다의 <라자 요가>와 <카르마 요가>두 책을 권했다. 네루가 말했다.

"우리 세대는 모두 그의 책을 읽으면서 자랐다. 그 사람이야말로 최초의 인도인이었다."

 

- 힌두철학을 서양에 알린 인물이고, 영국 아래 있던 인도인들을 각성시킨 인물이다. 지금 전 세계의 인도문화원에는 비베카난다의 이름이 붙어 있다. 그런 비베카난다가 말했다.

"이 우주의 어느 작은 풀잎 하나가 살아남아 있더라도 나는 거기에 살고 있을 것이다."

- 그는 기아나 요가에 대한 책을 꼭 직접 쓰고 싶어 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그럴 짬이 없었을 것이다. 누군가들이 그의 강의를 받아 적었다가 이 책을 만들었다. <기아나 요가>는 비이원론적 베단타학파의 근본 교의를 담고 있다.

 

- 힌두의 가르침은 크게 네 가지 요가 way로 정리된다. 라자 요가, 이것은 파탄잘리 요가에 바탕하여 명상을 통한 삼매를 거쳐 깨달음에 이르는 길을 설한다. 다음으로 박티 요가가 있다. 신에의 사랑을 통해 깨달음으로 간다. 예배와 제의와 신에의 봉사를 통한다. 탄트라도 여기에 속한다. 그다음으로 카르마 요가가 있다. 바가바드기타의 아르주나가 크리슈나 성인에게 야단맞는 내용이 바로 이 카르마 요가의 가르침이다. 세속의 일을 통해, 일 자체를 위한 일을 통해 깨달음으로 간다. 마지막으로 기아나 요가다. 지식의 길을 뜻한다. 그 지식 하나를 알게 되면 모든 것이 다 풀리는 그런 지식을 말한다.

 

- 베다의 끝부분에 있는 우파니샤드의 가르침을 듣고 앎으로써 깨달음으로 간다. 존재 existence 자체가 신임을 가르친다. 존재와 인식과 기쁨이 신임을 가르친다. 이 가르침은 듣고 숙고하고 명상하는 단계를 거친다. 이 역서는 그의 1923년도 판본을 저본으로 했다. 전체 16장으로 된 두꺼운 책이나 여기서는 우리에게 꼭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6개의 장을 역자가 임의로 골라 번역했다. 빠진 장들을 다시 보완하는 작업을 기대해 본다. 이 공부 중에 조금씩 적어둔 짧은 글들을 본문 시작하기 전에 붙였다. 힌두의 넓은 바닷가에서 주운 조약돌 같은 것이다.

 

- 한 가지 덧붙인다. 산스크리트어에서 jn으로 음역(音譯) 표기된 것은 영어의 gy로 읽어야 한다. 간혹 g가 묵음이 되어 야나로 발음되는 경우도 있지만, jnana는 기아나로 음독하는 것이 맞다. 산스크리트어를 처음 로마자 알파벳으로 옮길 때의 약속인 것으로 보인다. 인도의 산스크리트 학자들은 또렷하게 gy로 발음한다.

- 돌아보면 아득하고 먼 걸음이었다. 언젠가 라자스탄의 힌두 승려를 그의 시골 사원으로 찾아갔었다. 서툴고 거친 솜씨로 흙으로 쌓아 올린 절집은 장식이라곤 없었다. 소마 soma였던 듯한 누런 물을 양동이 반쯤 채워와 함께 마시자며 내게 권했다. 나를 대접하려던 늙은 인도 사두 sadhu와 그때의 분위기가 요즘 자주 떠오른다. 한없이 땡볕이 내려쬐고 앞강은 말라 자갈만 드러나 있던, 너무도 황량하고 가난하던 풍광이었다. 그립다. 뉴욕베단타협회의 스와미 사르바프리야난다의 강의에 많은 도움을 입었다. 스님께 감사드린다. 이번 기회에 웹에 떠있는 성철 스님의 법문 250여 편을 들을 수 있었다. 스님은 불교를 위해 진리를 택한 것이 아니라, 진리를 위해 불교를 택했다고 말씀하셨다. 축복이었다. 스님이 이 땅에 계셨음에 감읍한다. 나가르주나와 샨카라차리아께 절 올린다.

2024년 10월 김우룡 


 

 

 

1896년 10월 27일, 런던에서의 강의



- 우파니샤드에는 논리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구절들이 나오기도 한다. 기아나 요가는 지식을 통한 깨달음의 길을 말하는데, 지식의 반대는 무지다. 베단타의 요가는 대개 넷으로 이루어지고 그것들은 박티, 카르마, 라자, 기아나 등으로 구성된다. 기아나 요가는 다른 셋과 뚜렷이 구별되는 특징이 있다. 길고 힘든 과정이 필요치 않다. 지식을 듣고 알면 되는 것이다. 그런 뒤에, 생각하면서 따져보고 명상하는 깨달음 후의 단계를 거친다. 하지만 일단 지식의 내용을 듣고 아는 것만으로 해탈에 이른다고 하는 파격적인 가르침을 베푼다. 우리가 아는 비이원론적 베단타학파가 추구하는 방법론이다. 박티는 예배와 의식, 카르마는 현실에서의 봉사적 노력, 라자는 삼매에 들기 위한 명상을 주로 강조한다. 한 우파니샤드에 이런 구절이 있다. 무지 Avidya의 상태로 계속 나아가면 곤란을 겪고 고통을 받는다. 하지만 지식 Vidya만을 가진 상태로 진행해 가면 더 나빠진다. 무지한 것으로 고통을 받는 것은 이해가 간다. 하지만 최고의 진리에 대한 지식을 지니고 공부하는 것에, 더한 고통이 결과된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 수많은 베단타 학자들이 이 구절의 해석에 골머리를 썩였다. 하지만 그 뜻은 이렇다고 한다. 무지의 상태는 제의 의식 ritual의 종교행위를 말하고 지식의 상태는 명상 meditation을 통한 종교행위를 말한다는 것이다. 제의 의식은 기도와 찬송과 사랑이다. 명상은 이른바 참선이다. 둘이 함께 있어야 한다는 말인데 둘 중의 하나만을 택해야 한다면 기도와 찬송이 덜 위험하다는 것이다. 박티 요가를 열심히 하는 것은 라자 요가나 기아나 요가의 삼매를 대체할 수 있다. 느낄 점이 있는 우파니샤드의 역설이다. 이샤 우파니샤드의 가르침이다. (역자)

- 친구가 그 모기를 죽이기 위해 머리를 때려 사람과 모기가 한꺼번에 죽었다고 한다. 악에 대한 치유 역시 비슷한 모습을 띠고 있다. 삶은 괴로움으로 가득하고 세계는 악으로 가득 차 있다. 세상을 알 만큼 나이를 먹은 사람이라면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런 악에 대해 종교들이 제안한 치유법은 과연 어떤 것들이었나? 이 세계는 아무 가치가 없다, 이 세계 너머에 진짜가 있다고 가르친다. 종교의 어려움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치유가 오히려 여기 있는 모든 것을 파괴하는 듯이 보인다. 그럴진대 그것이 치유가 되겠는가? 다른 길은 없는가?

 

- 그 종교들이 제시한 말들이 정말 맞긴 하지만, 그 말들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베단타는 말한다. 종교에서, 그 의미하는 바가 명확하지 않아서 종종 오해된다고 말한다. 진정으로 요구되는 것은 머리와 심장의 종합이다. 심장(열정, 사랑, heart)은 실로 위대하다. 생의 커다란 영감은 심장을 통해서 온다. 내게 선택하라면, 심장 없이 나의 전체가 뇌로 되기보다, 뇌를 버릴지언정 작은 심장이라도 가지기를 백배 더 원한다. 심장이 있는 이는 생이 가능하고 진전이 가능하다. 심장이 없이 뇌만 있는 이는 건조함으로 죽어버릴 것이다. 하지만 심장만으로 삶을 꾸려나가는 이는 수많은 난관에 빠지게 됨을 우리는 안다. 그들은 시시때때로 위험에 쉽게 빠진다. 심장과 머리의 조화가 필요하다. 

- 하나를 위해 다른 하나를 희생시켜야만 한다는 말이 아니다. 모든 사람들이 무한히 큰 심장과 감정을 갖게 하고 또 동시에 무한한 양의 이성을 가지게 하자. 이 세상에서 우리가 원하는 것의 한계가 있을까? 세계는 거의 무한이지 않은가? 무한한 감정을 받아들일 수 있을 여지가 있고, 무한한 양의 교양과 이성을 수용할 여지도 역시 있다. 그 둘이 제한 없이 함께할 수 있도록 하자. 함께 달리도록 하자. 서로 나란히 평행선 위를 달리도록 하자.

- 대부분의 종교들은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들 모두는 동일한 실수를 저지른다. 심장에, 감정에, 넋을 내준다는 것이다. 세상에는 악이 있다. 세상을 포기해라. 이것이야말로 위대한 가르침이다. 의심할 바 없이 맞는 가르침이다. 세상을 포기하라. 진리를 성취하기 위해 거짓의 세상을 포기하라는 가르침에 누가 반박을 하겠는가? 선을 행하기 위해서 악을 포기해야만 한다는 사실에 이견이 있을 수 없다. 삶을 지니기 위해 죽음의 것을 포기해야 한다는 사실 역시 반박할 수 없다.

- 하지만, 이 이론에서의 포기의 대상에 감각의 삶-우리가 알고 있는 바의 그 삶-이 포함된다면, 우리에게 남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의 이 삶을 포기해 버리면, 삶 자체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우리가 이 삶을 포기한다면 무엇이 남을까?

- 남자가 아내를 포기한다. 이 말은 앞으로 아내를 버린다는 뜻이 아니다. 아내 안에서 신을 본다는 말이다. 아이들을 포기한다. 무슨 뜻일까? 여러 나라들에서 보는 짐승 같은 인간들처럼 아이들을 문 밖으로 내쫓는다는 말일까? 아니다. 그것은 극악무도한 행위다. 종교적임이 아님은 물론이다. 아이 안에서 신을 본다는 말이다. 모든 것에서도 그렇다. 삶과 죽음에, 행복과 불행에, 신은 공평하게 존재한다. 세상 전체는 신으로 가득 차 있다. 눈을 떠서 그 신을 보라. 이것이 베단타의 가르침이다. 억측해 온 세상을 포기하라. 당신의 억측은, 아주 편파적인 경험과 아주 빈약한 논리와 당신 자신의 취약함에 바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세상은 포기하라. 그토록 오랫동안 생각해 왔던 그 세상, 그토록 오랫동안 매달려 왔던 그 세상은 우리 자신이 만들어낸 거짓 세상이기 때문이다. 그 세상은 포기하라. 눈을 뜨고 보라. 그 세상은 결코 있지 않았던 세상, 꿈이요 마야 Maya다. 존재했던 것은 신 그 자신이다. 아이에게 아내에게 남편에게 있었던 그 He다. 선과 악 안에 있었던, 죄와 죄인 안에 있었던, 생과 사 안에 있었던 그 He다.

- 진실로 놀라운 주장이다! 하지만 베단타가 보여주려 하고 가르치려 하고 설파하려고 하는 내용이 바로 이것이다. 도입부의 내용이긴 하지만.

- 그렇다면 욕망 포기란 무슨 뜻일까? 삶은 어떻게 이어지는가? 욕망을 죽이고 인간 역시 죽이라는 것은 위에서와 마찬가지의 자살적 조언일 수 있다. 답은 이렇다. 재산을 가지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필요한 물건을 가지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나아가 사치품도 마찬가지다. 원하는 모든 것을 가져라. 오히려 더 많이 가져라. 다만 진실을 알고 그것을 체현(體現, realize)하라.

 

- 부 富는 모두에게 다 주어지지 않는다. 소유욕, 소유권에 대한 생각을 버려라. 당신도, 나도, 다른 어떤 사람들도, 사실 아무것도 아니다. 모든 것은 신에게 속해 있다. 위의 도입부에서 말했다. 모든 것에다 신을 부여하라고. 당신이 즐기는 풍요 안에 신이 있다. 당신 마음속의 욕망 안에 신이 있다. 욕망을 만족시키려고 구입하는 물건들 속에 신이 있다. 당신의 아름다운 의상 안에 있다. 아름다운 장신구 안에 있다. 생각이 가야 하는 길이 이렇다. 이런 식으로 보면 그 즉시에, 모든 것들이 변화된다. 모든 동작 안에, 모든 대화 안에, 당신의 형상 안에, 모든 것 안에 신을 부여하자마자, 모든 것이 변한다. 비애와 비참으로 드러나던 세상이 천국이 된다.

- 예수는 "천국이 너희 안에 있다"고 말했다. 베단타도 그렇게 말한다. 모든 위대한 스승이 그렇게 말한다.

"눈 있는 자는 보고 귀 있는 자는 듣게 하라."

베단타는 우리가 지금껏 내내 찾아왔던 진리가 여기 있음을 보여준다. 


- 나는 즐겁게 세상을 즐길 수 있었다. 하지만 세상과 얽히자마자, 세상으로부터 몇 번 타격을 받자마자, 그런 생각은 사라져 버렸다. 모든 사람에게 신이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 길을 걷고 있었다. 그때 힘센 사람 하나가 따라오더니 나를 밀치고 보도에 넘어뜨렸다. 나는 주먹을 불끈 쥐고 재빨리 일어났다. 머리로 피가 솟았다. 깊게 생각할 여유도 없었다. 순식간에 나는 미쳐버렸다. 신을 만나려는 생각은 말짱 잊어버렸다. 대신에 악마를 만났다. 태어난 뒤로 줄곧 모든 것에서 신을 보라는 말을 들어왔다. 모든 종교가 그렇게 가르쳤다. 모든 것에서 모든 곳에서 신을 보라고. 신약성서의 예수가 그렇게 말한 것을 기억하나? 우리 모두는 그렇게 배웠다. 하지만 실제상황과 부딪히면 난관은 시작된다.

 

- 이솝 우화의 튼튼한 수사슴 얘기를 아는가? 호수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제 새끼에게 말한다.

"얼마나 튼튼한가, 나는? 내 머리를, 내 다리를 보아라. 얼마나 강하고 얼마나 강건한가? 내가 얼마나 빨리 달리는지 너는 아니?"

그때, 멀리서 개 짖는 소리가 들린다. 즉시 도망가기 시작했다. 멀리 도망친 후, 한참만에 숨을 헐떡거리면서 다시 돌아왔다. 새끼가 말했다.

"아빠는 조금 전 강하다고 말했죠? 개 짖는 소리에 도망가는 것이 강한 건가요?"

"그랬지, 아들아. 하지만 개 짖는 소리가 들리니 내 자신감들이 몽땅 사라지더구나."

 

- 우리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높게 평가한다. 강하고 멋진 것으로 여긴다. 우리는 장대한 결심을 한다. 하지만 시험과 유혹의 '개들’이 짖으면, 우리는 우화 속의 수사슴처럼 된다. 하면, 사태가 이럴진대, 이 모든 가르침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아주 커다란 소용이 있다. 인내와 끈기가 이긴다는 가르침이 이때 필요하다. 무엇이든 하루 만에 되는 것은 없다.

- "이 자기 the self"에 대한 내용은 처음에는 듣고 stravana, 다음에는 생각해 보고 manana, 그런 뒤에는 명상해야 nididyasana 한다."

모든 이가 하늘을 볼 수 있다. 땅 위를 기는 벌레도 푸른 하늘을 본다. 하지만 그것에게 하늘은 얼마나 멀리 있는 것인가! 우리에게 이상도 이와 같다. 그 이상은 의심의 여지없이 멀리에 있다. 하지만 동시에 분명한 것은 우리는 반드시 그것을 성취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중에서도 최고의 이상을 성취해야 한다. 그 이상을 잊어서는 안 된다.

 

- 불행하게도 이 어두운 세상을 살아가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전혀 어떤 이상이 없이 세상을 더듬어 나가고 있다. 어떤 이상을 가진 사람이 천 번의 실수를 한다면, 이상이 없는 사람은 5만 번의 실수를 할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그러므로 이상을 가지는 것이 낫다. 그리고 이 이상에 대해 우리는 될수록 많이 들어야 한다. 우리 심장으로 들어올 때까지, 우리 뇌로 들어올 때까지, 우리 혈관으로 들어올 때까지, 우리 핏방울 한 방울 한 방울을 저릿하게 할 때까지, 우리 몸의 모든 구멍에 다 스며들 때까지. 그런 다음 그것에 대해 반드시 명상해야 한다. '심장의 충만함으로부터 입이 말하고, 심장의 충만함으로부터 손 역시 일하게 해야 한다.

- 우리에게 있는 추진력은 생각이다. 마음을 최고의 생각들로 채워라. 매일매일 그 생각들을 듣고, 달이 거듭될수록 그것들을 생각하라. 실패에 괘념치 마라. 아주 자연스런 것이다. 실패는 삶의 아름다움이다. 실패가 없다면 삶은 어떻게 될까? 분투와 고통이 없다면 삶은 가치가 없을 것이다. 삶의 시를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고투와 실수를 괘념치 마라. 소가 거짓말을 한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소니까. 인간이 아니니까. 그러니 이런 실패를, 이런 사소한 타락을 괘념치 마라. 천 번이라도 이상을 붙들어라. 천 번을 실패한다면, 한 번 더 시도하라.

 

- 인간의 이상은 모든 것에서 신을 보는 것이다. 하지만 모든 것에서 그를 볼 수 없다면, 하나의 것에서라도 그를 보라. 네가 가장 좋아하는 그 하나의 것에서 신을 보고, 그다음으로 다른 것에서 보라. 그렇게 나아갈 수 있다. 영혼 앞에는 무한한 생이 있다.
너의 그 무한정의 시간을 써서 너의 목표를 달성하라.

- "마음보다 더 신속히 진동하면서, 마음이 결코 따를 수 없을 만큼의 빠르기를 가진, 신들도 미칠 수 없고, 생각도 따라잡지 못하는 한 덩어리의 그, 그가 움직이면 모든 것이 움직인다. 그 안에 모든 것이 존재한다. 그는 움직이고 있다."  

- 나는 쇼펜하우어의 철학이 베단타의 해석에 있어서 이 부분에서 잘못을 저질렀다고 생각한다. 그의 철학은 모든 것 앞에 의지를 두려고 했다. 쇼펜하우어는 의지를 절대의 자리에 놓는다. 하지만 절대는 의지로 나타낼 수 없다. 의지는 가변적이고 현상적이기 때문이다. 시간, 공간, 인과율 위에 그어진 선 위에는 변화도 움직임도 없다. 외적인 움직임과 생각으로 불리는 내적인 움직임이 시작되는 것은 그 선 아래에서만이다. 그 위에서는 의지가 있을 수 없고 따라서 의지는 우주의 원인이 될 수 없다. 쉽게 생각해 보더라도, 우리 몸 안에서 의지가 모든 움직임들의 원인이지 않다. 이 의자를 옮긴다. 내 의지가 움직임의 원인이다. 의지는 다른 끝단에서 근육의 움직임으로 드러난다. 그러나 의자를 움직인 힘은 심장과 폐, 또 다른 것들을 움직이기도 한다. 하지만 이때는 의지를 통하지 않는다. 같은 힘이라 볼 때, 그 힘이 의식의 차원으로 올라갈 때에만 의지가 된다.(수의근 운동과 불수의근 운동을 비교한 것이다 - 역자) 그 차원으로 올라가기 전에 의지라고 부른 것은 잘못된 호칭이다. 이 잘못이 쇼펜하우어 철학에서 많은 혼동을 일으킨다.

- 돌멩이 하나가 떨어진다. 그리고 우리는 묻는다. 왜 떨어지냐고, 어떤 일도 원인이 없으면 일어나지 않는다는 가정 아래서만 이런 질문이 성립한다.  

- 신은 알 수 있음의 단계보다 더 크다고, 아드바이타 철학은 말한다. 배워야 할 중요한 사실이다. 오늘 강의를 들은 뒤, 불가지론자들이 말하는 의미에서의 신의 불가지성 개념을 가지고 돌아가서는 안 된다. 예를 들면, 여기에 의자가 있고 우리가 그것을 안다. 하지만 에테르 ether (산스크리트어의 akasha를 말하고 공간이라고 옮기는 것이 알맞다. 가장 기본이 되는 우주의 요소 - 역자) 너머는 무엇이 있는지, 혹은 거기에 사람이 존재하고 있는지 없는지는 알 수 없는 문제다. 신이 무엇인지 모르며 알아낼 수도 없는 것이란 말은 이런 뜻에서다. 그는 안다는 것보다 훨씬 높은 차원의 것이다. 신을, 모르는 존재, 알아낼 수 없는 존재라 할 때의 의미가 이런 것이다. 어떤 질문의 답이 무엇인지 모르며 알아낼 수도 없는 것이란 뜻으로 쓰인 표현이 아니다. 신은 단순히 알고 모르고의 차원이 아니다. 이 의자는 알아진다. 하지만 신은 훨씬 더 강렬하게 그 의자 이상이다. 왜냐하면 그 Him, 안에서 또 그를 통해서 이 의자 자체를 알아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는 목격자다. 모든 지식의 영원한 목격자다. 그 어떤 것을 알든, 우리는 그 안에서 그를 통해서 안다. 그는 우리 자기 the self의 정수다. 우리의 이 에고 this ego 이 나 this I의 정수다. 우리는 그 나 안에서가 아니거나, 혹은 그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어떤 것도 알 수가 없다. 그러므로 당신은 브라흐만 안에서 또 그를 통해서 모든 것을 알아야만 한다. 의자를 알려면 신 안에서 또 신을 통해서 알지 않으면 안 된다. 


- 모든 작용에는 두 가지 구성 성분이 있다. 주체와 객체가 그것인데, 삶의 목적 중 하나는 주체로 하여금 객체의 주인이 되게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어떤 사람에게 꾸중을 들으면 내가 불행을 느낀다. 나의 투쟁은 나 자신을 강하게 만들어 환경을 정복하는 것이어서, 꾸중을 해도 불행을 느끼지 않게 되면 된다. 우리 모두가 원하는 방식이다. 도덕이 의미하는 것이 무언가? 주체를 절대에 맞게 조율해서 강하게 만들어, 유한한 우주 자연이 나를 지배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우주 자연이란 유한한 것이므로, 그 모든 환경을 무한인 우리가 정복하는 때가 반드시 온다는 것이 우리 철학의 논리적 결론이다.

- 여기 배워야 할 것이 하나 더 있다. 자연이 유한한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나? 형이상학을 통해서만 알 수 있다. 우주 자연은 한계들 아래 놓여 있는 무한이다. 그래서 유한이다. 따라서 모든 환경을 정복하게 되는 때가 반드시 와야 한다. 어떻게 그것들을 정복할까? 우리는 모든 객체적 물질세계의 환경을 몽땅 정복할 수는 없다. 불가능하다. 물에 있는 적으로부터 도망하기 위해서 작은 물고기가 할 수 있는 방법이 무얼까? 날개를 진화시켜 새가 되는 것이다. 물고기는 물이나 공기를 변화시킬 수 없다. 변화는 스스로에게 일어나게 해야 한다. 변화는 언제나 주격이다. 진화 전체를 통해서 볼 때 우주 자연에의 정복은 주체의 변화에서 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종교나 도덕에 이것을 적용하면, 악에의 정복은 주체 쪽만의 변화로 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드바이타 체계가 그의 모든 역량을 인간의 주체적 측면에만 경주한 이유이다. 악이나 비참에 대해 말하는 것은 헛소리다. 인간 바깥에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모든 분노에 대해 면역이 되어 있다면 [분노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면] 결코 분노를 느끼지 않을 것이다. 모든 증오에 방탄이 되어있다면 결코 증오심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 주격, 주관자의 완성에 의해 저 정복을 이루는 과정이 이것이다. 실례를 무릅쓰고 말한다면, 물리적 도덕적 두 측면 모두에서 현대의 연구들과 합치하거나 어쩌면 조금 더 앞서 나가는 유일한 종교는, 아드바이타(비이원론적 베단타 - 역자)가 아닌가 한다. 현대과학자들에게 그처럼 큰 매력이 있는 이유도 이 때문일 것이다. 현대의 과학자들은 옛날의 이원론적 이론은 그들에게 불충분하고 자신들에게 필요한 것들을 만족시키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사람은 신앙뿐 아니라 지적 신념도 반드시 가져야 한다. 이제 19세기의 후반부에 이르러, 오랫동안 전해 내려오던 자기 고유종교가 아닌 다른 원천으로부터 나온 신념은 엉터리라는 생각은 약점을 지닌 생각이라는 것이 확인된다. 그런 생각들은 포기되어야만 한다.

 

- 나는 이 나라만의 경우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모든 나라들에 다 있지만 우리나라가 최고로 많다. 이 아드바이타는 대중들에게 다가갈 수 없었다. 처음에는 승려들이 이것을 움켜쥐고 숲으로 들었다. '숲의 철학'이라고 불렸다. 하지만 신의 도움으로 붓다가 출현했고 대중들에게 설교했다. 모든 사람들이 불교도가 되었다. 그 후 오랜 시간이 지난 다음, 무신론자들과 불가지론자들이 나라를 또 파괴했다. 그때에 이르러, 아드바이타만이 인도를 물질주의[유물론, materialism]에서 구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알게 되었다.

- 이렇게 해서 아드바이타가 인도를 유물론에서 재차 구한다. 붓다가 오기 전에, 유물론(물질 및 쾌락주의인 차르바카 학파를 가리킨다 - 역자)은 두려울 정도로 퍼져 있었다. 오늘날의 것과는 달랐지만 훨씬 더 나빴고, 최고로 끔찍한 종류였다. 나는 오직 하나만이 있다고 믿는 사람이기에, 어떤 면에서 보면 나도 유물론자다. 유물론자들은 세상이 하나로만 존재한다고 믿는다. 그들은 물질이라 부르고 나는 신이라 부르는 것이 다를 뿐이다. 유물론자들은 이 물질로부터 모든 희망과 종교와 다른 모든 것들이 나왔다고 한다. 나는 브라흐만으로부터 이 모든 것들이 나왔다고 말한다. 하지만 붓다 출현 이전의 유물론은 좀 조악한 수준의 것이어서, "먹어라, 마셔라, 즐겨라, 신도 없고 영도 없고, 하늘도 없다. 종교는 나쁜 중[승려]들이 만들어낸 엉터리 물약이다"라고 가르쳤다. 살아있는 동안 즐겁게 살려고 애쓰는 것이, 먹을 것을 위해 돈을 빌려야 하고, 갚을 생각은 절대 하지 않는 것이, 도덕이라고 가르쳤다.  

- 종교가 사라지고 비종교가 판을 칠 때마다 아드바이타가 등장했다. 유럽과 미국에서 기초를 다지게 된 이유도 바로 그것이다. 
이 철학과 관련하여 하나만 더 보태려 한다. 옛 우파니샤드에는 고상한 시들이 있다. 그것을 쓴 작가는 시인들이었다. 플라톤이 말하기를 영감은 시를 통해 사람들에게 온다고 했다. 그 고대의 리쉬 rishi들, 진리를 본 사람들은 시를 통해 이런 진리들을 보여주기 위해 인류 너머의 차원으로 고양되었던 것처럼 보인다. 그들은 목소리 높여 설교하지 않았고, 현학화하지 않았으며, 마음대로 써제끼지도 않았다. 그들의 심장으로부터 음악이 나왔던 것이다. 붓다 안에서 우리는 위대한 우주적 동정심과 무한한 인내가 종교를 실제적인 것으로 만들어 모든 사람의 문간으로 가져다준 것을 본다. 샨카라차리아 안에서 우리는 엄청난 지성적 힘이 모든 것에 타는 듯한 이성의 불을 비추는 것을 본다. 오늘날 우리는 지성의 밝은 태양이, 붓다의 인정, 사랑과 자비의 놀라운 심장과 합쳐지는 것을 희망한다. 이 연합이야말로 우리에게 최고의 철학을 줄 것이다. 과학과 종교가 만나 손을 맞잡을 것이다. 시와 철학이 친구가 될 것이다. 이것이 미래의 종교가 될 것이고, 우리가 그것을 해낼 수 있다면 모든 시대와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 될 것이라 확신한다.  

- 사람이 감각기관에 매여서, 그것을 놓지 않으려는 집착은 대단하다. 하지만 사람들이 그 안에서 살아가고 있고 움직이고 있는 감각기관의 대상이 되는 외부 세계가 아무리 생생하게 여겨지더라도, 개인이나 종족들의 삶에서 부지불식간에 이렇게 묻는 때가 온다.

"이 보이는 세상이 진짜인가?"

자신이 지닌 감각들의 진정성에 대해 한순간도 의문을 품지 않았던 사람에게라도, 삶의 모든 시간들이 감각적 즐김으로 꽉 차 있었던 사람에게라도 죽음은 온다. 그리고 이렇게 물을 수밖에 없게 된다.

"이게 진짜일까?"

종교는 이 질문에서 시작되고 여기에 대한 대답에서 끝난다. 기록된 역사가 없었던 먼 과거에서도, 신비스런 신화 속에서도, 문명의 희미한 여명에서도, 같은 물음이 물어진 것을 우리는 본다.

"이거 어떻게 되는 걸까? 뭐가 진짜일까?"

- 가장 시적인 우파니샤드 중의 하나라 할 카타 우파니샤드는 이런 의문으로 시작된다.

"사람이 죽는다. 이런 논쟁이 일어난다. 한쪽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아무것도 없이 다 끝난다고 한다. 다른 쪽에서는 무언가 여전히 계속 있다고 한다. 어떤 게 맞는가?"

여러 답들이 주어졌다. 모든 형이상학, 모든 철학, 모든 종교는 이 질문에 대한 다양한 답으로 채워져 있다. 이와 동시에, "저 너머에는 무엇이 있나? 뭐가 진짜인가?"라고 묻는 물음에서 비롯하는 동요를 그치게 하려는 그것을 억누르려는 ...

- 이 끊임없이 변하고 덧없는 세상의 한가운데서, 진실한 것이라면 그것이 무엇이든 발견하고자 하는 입장이다. 물질 분자의 집합체인 이 몸 안에, 진실된 것은 어떤 것일까? 역사 전체를 통해 그 탐색이 이어져왔다. 아주 오랜 옛날에는, 사람의 마음 안으로 빛이 들어오는 것을 흘낏 보는 때도 있었다. 이 육신의 몸과 아주 닮았지만, 그것보다 훨씬 완전하고, 육신의 몸이 흩어지고 난 뒤에도 남아 있는 것이 있어, 이 육신의 몸 너머로 한 걸음 더 나아가는 것도 보았다. 리그베다에는 죽은 육신을 태우는 불의 신에게 바치는 노래가 있다.

"그를 데려가세요. 오! 불의 신이여, 당신의 팔로 곱게 안아서, 완전한 몸을 주세요, 밝은 몸을, 조상들이 계신 곳으로, 슬픔이 없고, 더 이상 죽음이 없는 곳으로."

이런 개념은 모든 종교에 다 있다. 신화적 단어의 옷을 입고 있든, 명료한 철학적 언어를 쓰든, 아름다운 시적 표현 속에 있든, 이 개념은 사람이 원래의 것에서 타락된 것임을 말하고 있다. 모든 경전과 모든 신화로부터 알 수 있는 하나의 사실로, 사람은 그 전의 상태로부터 퇴행되어 지금의 사람이 되어 있다. 유대인의 경전에 있는 아담의 타락 얘기의 핵심도 이것이다. 스스로 죽으려 하지 않는 한 죽지 않고, 원하는 때까지 몸을 보전할 수 있고, 그 마음이 깨끗하고 강건한 진실의 시대라 불리는 그 시절에 대한 꿈.

 

- 힌두 경전에도 이 얘기는 되풀이되어 있다. 거기엔 악도 없고 비참도 없었다. 지금 시절은 그 완전의 시절로부터의 타락이다. 이런 얘기 사이사이에, 대홍수의 얘기가 모든 지역에서 나온다. 그 얘기들 자체가, 지금 시대는 지난 시대가 타락되어 생긴 것임을 증명하고 있는 셈이다. 모든 종교에서 다 그렇게 말한다. 점점 타락을 계속하여 많은 사람들이 홍수에 쏠려갈 때가 오고 나서, 다시 위를 향해 올라가는 일련의 진행이 시작된다. 천천히 위로 상승하여, 그 오래 전의 순결의 상태에 다시 닿는다. 구약성서 대홍수 편을 모두 알고 있을 것이다.

 

- 바빌로니아, 이집트, 중국, 그리고 인도, 모든 곳에 같은 얘기가 유포되어 있다. 위대한 현자 마누 Manu가 갠지스 강둑에서 놀고 있을 때, 작은 잉어 한 마리가 도움을 요청하며 그에게 왔다. 작은 도자기 항아리를 가지고 있던 마누는 거기에 물고기를 숨겨주었다. 마누가 물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큰 물고기가 쫓아오니 도와달라고 했다. 그 물고기를 집으로 가져왔다. 다음 날 아침이 되니 그 사이에 잉어는 항아리만큼 커져 있었다. 물고기가 말했다. "이 항아리에서는 더 못 살 것 같아요." 마누는 큰 물통으로 옮겨주었다. 그다음 날이 되니, 그 물통만큼 커진 물고기가 거기서도 살 수 없다고 말했다. 마누는 다시 다른 강으로 데려갔다. 다음 날은 강을 가득 채울 정도로 커졌다. 마누는 큰 바다로 물고기를 데려갔다. 그때 물고기가 말했다. "마누여, 나는 우주의 창조주예요. 내가 이 모양으로 변한 것은, 당신에게 와서, 내가 대홍수를 일으킬 것이라고 경고해 주기 위함이었소. 큰 방주를 만드시오. 그 안에 모든 종류의 동물 한 쌍씩을, 또 당신의 가족을 태우시오. 그런 후면, 내 뿔이 물 위로 튀어나올 거요. 거기에 방주를 잘 묶으시오. 홍수가 잦아들면, 나와서 사람들로 땅을 채우시오." 그리하여 땅은 대홍수를 맞게 되었다. 마누는 그의 가족과 모든 동물과 식물의 종류마다 한 쌍씩을 보전했다. 홍수가 지나가고 물고기의 말대로 땅을 채웠다. 이렇게 하여 우리를 사람 Man이라 부르게 되었다. 마누의 자손들이기 때문이다.

- 또한, 인간의 언어란 것도 내면의 진리를 표현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다. 아기들은 그것을 표현할 신체기관이나 수단을 갖지 못했기 때문에, 소리로만 구성되어진 아주 비지성적인 표현방법을 쓰지만, 사실은 가장 높은 철학을 표현하기 위한 한 시도라고 한다. 설득력이 있는 주장이다. 가장 높은 철학자의 언어건 아기들의 울음이건, 그 내는 소리들은 종류가 아니라 정도에서 다르다. 현대의 가장 정확하고 체계적이며 수학적인 말과, 고대의 흐릿하고 신비적이며 신화적인 말의 차이도 정도의 차이로서만 다른 것이다. 그것들 모두, 그 너머에는 스스로 표현하고자 하는 어떤 장대한 생각이 담겨 있다. 종종, 이 고대의 신화들 이면에는 진리의 금덩어리가 있고, 말하기는 좀 미안하지만, 반짝반짝 빛나는 현대의 말들도 오히려 그 이면을 보면, 영락없는 쓰레기인 경우도 있다. 그러므로 신화의 옷을 입고 있다고, 그것이 현대의 것 ...

- 순환의 논리가 그것이다. 모든 파도는 떨어짐이 있다. 다음 순간은 올라간다. 그런 후엔 다시 떨어지고 또 올라간다. 움직임은 순환된다. 현대의 연구 역시 그 바탕에는 그러하므로, 인간이 단순히 진화만 할 수는 없다는 것은 확실한 진실이다. 모든 진화는 퇴축 involution을 전제한다. 기계의 경우, 이전에 넣어둔 에너지 양만을 그 기계에서 얻을 수 있다고 현대과학은 말한다. 아무것도 없는 것에서 어떤 것이 만들어질 수는 없다. 인간이 연체동물에서 진화된 것이라면 완전한 인간이 -부처 인간이든, 예수 인간이든- 그 연체동물 안에 포함되어 있었어야 한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이 거대한 인격들이 어디로부터 왔단 말인가? 어떤 것이라도 아무것도 없는 것에서 나오지 않는다. 경전은 이런 방식으로 현대적 지식과 타협할 수 있게 된다. 여러 단계를 거쳐 완전한 인간이 되기까지, 천천히 스스로를 드러내는 저 에너지는, 없음으로부터 나올 수가 없다. 어딘가에 있었을 것이다. 연체동물과 원형질이 우리가 추적할 수 있는 최초의 것이라면, 원형질이든 혹은 또 다른 어떤 것이든, 그것은 반드시 그 에너지를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 우리의 몸은 물질이 모인 덩어리다. 우리가 영혼, 생각 등으로 부르는 것은 일종의 힘이고 에너지다. 물질이 힘의 원인인가, 반대로, 힘이 물질의 원인인가? 이런 물음에 대한 거대한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 어떤 현대 사상의 학파는 우리가 생각이라고 부르는 것은 우리가 몸으로 부르는 기계의 어떤 부분품들이 세부적으로 섬세하게 조합된 것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영혼이나 생각 덩어리들이 몸이라는 기계의 소산이라고, 몸과 뇌를 구성하는 물질이 물리적 화학적으로 조합되어 만들어진 것이 영혼이나 생각이라고 이 학파는 주장한다. 하지만 이것은 좀 모자라는 주장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몸은 무엇인가? 분자를 몸이라는 형태로 조합하는 것은 무엇의 힘인가? 물질들의 입자에서 취사선택하여 내 몸을 하나의 방식대로 만드는 한편, 다른 몸은 또 다른 방식으로 만드는 등등의 일을 하는 것은 과연 무엇의 힘인가? 무한히 다른 이런 분별을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 영혼이라는 힘이 몸 분자들의 조합에서 만들어진 산물이라고 하는 것은 말 앞에 수레를 두는 격이다. 그 조합은 어떻게 생기며, 그것들을 만드는 힘은 어디에 있었나? 이 조합들을 만든 원인이 되는 또 다른 힘이 있고, 영혼이 그 조합된 물질의 소산이라고 말한다면, 그 영혼 -어떤 물질의 조합- 은 그 자체로 물질 조합의 결과물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논리에 맞지 않다. 전부는 아니라도 대부분의 사실을 설명할 수 있는 이론, 다른 이론들과 모순되지 않는 이론이 있어야 할 것이다. 물질을 취하여 몸을 형태 짓는 그 힘이야말로, 그 몸을 통해 드러나는 힘과 동일한 것이라 말하는 것이 더 논리적일 것이다. 따라서 몸을 통해 드러나는 생각의 힘들이 분자배열의 산물이라고 말하는 것이나, 독자적 존재를 지니지 못한다고 말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두 주장 모두, 힘이 물질에서 진화된 것으로 보게 하는 데 도움이 안 된다.

 

- 반면에, 우리가 물질로 부르는 것들이 전혀 독립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은 증명할 수 있다. 물질은 힘의 어떤 한 상태일 뿐이다. 물질의 단단함, 경도, 고체성, 혹은 여타 다른 상태 등은 움직임의 결과임을 증명할 수 있다. 액체에 소용돌이 운동을 증가시키면, 고체의 힘을 만들 수 있다. 토네이도에서처럼, 소용돌이 운동 속의 기체 덩어리는 고체 비슷하게 되어 그 충격으로 고체를 파괴하거나 관통한다. 거미줄을 무한한 속도로 움직일 수 있게 한다면 쇠로 만든 사슬만큼 강해져서 참나무 둥치를 자를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보면, 우리가 물질이라고 부르는 것이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음을 보다 쉽게 증명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힘[에너지]이 없다는 것을 증명할 수는 없다. (영혼, 힘, 에너지를 동일한 존재로 보고 있고, 다른 한편으로 물질은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다 - 역자)

- 몸을 통해 스스로를 드러내는, 이 힘이라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그게 무엇이든 간에 우리 모두에게 분명한 사실은, 입자들을 주워 모아 그것들로부터 형태 -인간의 몸- 를 빚어내는 어떤 것이다. 당신과 나를 위해 몸을 만들어준 것은 이것 외에 어떤 다른 것도 없다. 나를 위해 음식을 먹어주는 어떤 다른 사람도 있지 않다. 내가 그 음식으로부터 소화하고 동화작용을 하여, 피와 뼈, 그 밖의 모든 것을 만들어야 한다. 이 불가사의한 힘은 무엇인가? 미래나 과거에 대한 생각들은 많은 사람들을 겁나게 한다. 또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는 공론으로만 비칠 수도 있다. 

- 우리는 지금이라는 주제를 놓치지 않고 가자. 우리를 통해 지금 작동하고 있는 이 힘은 무엇인가? 옛날에는, 이 힘, 이 힘의 현현을, 사람 몸의 형태를 지니면서 몸이 떨어져 나가고 난 뒤에도 그대로 유지되는 어떤 밝은 물질로 생각했다. 모든 옛 경전을 통해 그것을 알 수 있다. 그다음 단계에서는, 이 밝은 몸 bright body (미세체 [subtle body]. 베단타에서는 이것을 마음 mind으로 본다 - 역자)과 그 힘이 같은 것이 아니라는, 보다 고차원의 생각에 이르게 된다. 모양을 지닌 것은 어떤 것이든, 입자들이 모인 합성물의 결과여야 하고, 그 뒤에서 그것을 움직이는 어떤 다른 것이 있어야 할 필요가 있다. 이 육신의 몸이 그것을 조종하는 어떤 다른 몸 -밝은 몸- 이 필요하다면, 꼭 같은 필요성에 의해, 그 밝은 몸과는 다른 어떤 것이 그 밝은 몸을 조종하기 위해 필요해진다. 그리하여 그것을 일러 영혼이라, 산스크리트어로 아트만이라 부르게 된다. 눈에 보이는 바깥의 육체적 몸을, 밝은 몸을 통해 부리는 것이 아트만이다. 밝은 몸은 마음을 담는 용기이고 아트만은 그 밝은 몸 뒤에 있다. 그것과 마음은 다르다. 그것은 마음에 작용한다. 그리고 마음을 통해 몸에 작용한다.

- "지구는 왜 떨어지지 않지?"

아마도 중력에 대한 답을 끌어내기 위한 것이었던 것 같다. 대부분의 아이들이 답을 못했고 몇몇 아이들만이 중력 등등의 말을 했다. 한 반짝이는 아이가 이런 반문으로 대답했다.

"어디로 떨어져야 하는 거지요?"

질문이 엉터리였다. 지구는 어디로 떨어져야 하는가? 지구에는 떠오름도 떨어짐도 없다. 무한한 공간에는 위도 아래도 없다. 그것들은 오직 상대에서만 있다. 무한에게 가고 옴이 어디 있겠는가? 무한이 어디서 와서 또 어디로 간단 말인가?

 

- 따라서, 사람이 과거와 미래에 대한 생각을 그치면, 또 가고 오고 한정되어 있는 육신이란 생각을 포기하면, 그때에 사람은 높은 차원의 사고로 올라간다. 진짜 사람은 육신이 아니고, 마음 역시 아니다. 마음도 찼다가 이지러지기 때문이다. 진짜는 영 the Spirit이다. 그 하나만이 영원히 산다. 육신과 마음은 끊임없이 변하고, 실로 그것들은 가변적인 일련의 현상에 붙인 이름에 불과하므로, 계속적인 흐름 속에 있으면서 끊임없는 물줄기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과 같다. 이 육신 안의 모든 입자들은 끊임없이 변한다. 몇 분 동안만이라도 꼭 같은 몸을 가진 육신은 없지만 우리는 같은 육신으로 생각한다. 마음도 마찬가지다(베단타에서는 마음도 물질로 본다- 역자). 한순간 행복했다가 다음 순간 불행하다. 한순간 강하다가 다음 순간 약해진다. 한시도 쉬지 않는 소용돌이다. 그러므로 마음은 무한한 영이 될 수 없다. 변화라는 것은 한정되고 제한된 속에서만 일어난다. 무한이 어떤 식으로든 변한다는 것은 헛소리다. 그럴 수 없다. 당신도 움직이고 나도 움직인다. 한정되고 제한된 몸으로서다. 이 우주의 모든 입자는 끝없는 흐름 상태에 있다. 하지만 우주를, 하나의 단위로 하나의 전체로 보면, 그것은 움직일 수가 없다. 움직임, 운동은 언제나 상대적인 것이다. 나는 무엇인가 다른 것과 비교되어 움직인다. 이 우주의 여느 입자는 다른 여느 입자와 비교하여 변한다. 하지만 전체 우주를 하나로 볼 때, 무엇과 비교하여 움직일 수 있겠는가? 그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그러니 이 무한 단위는 변할 수 없고, 움직일 수 없으며, 절대이다. 이것이 진짜 인간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실체는 전체를 포괄한 것 속에 있지 한정된 것 속에 있지 않다. 우리를 끝없이 변하는, 한정된 작은 존재들로 생각하는 것은 아무리 그게 편하더라도 지난 세월의 착각이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어디서나 편만한 우주적 존재라는 말을 들으면 놀란다. 우주의 모든 것을 통해 일하고, 우주 안의 모든 발을 통해 걸으며, 우주 안의 모든 입을 통해 말하고, 우주에 있는 모든 심장을 통해 느낀다. 

- 이 얘기를 들으면 놀란다. 그러면서 자신들의 개인성을 계속 지킬 수 있느냐고 묻고 또 묻는다. 개인성이란 무엇일까?  

- 어떤 사람이 저 진리를 무슨 권리로 요청하느냐고 묻는 물음도 효용과 돈의 기준으로 판단된다. 효용이 없다면 진실함도 적어지는가? 효용이 진실함의 시금석이지는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에는 최고의 효용이 있다. 우리가 알기로, 모든 사람이 찾아 마지않는 것이 행복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덧없고 가짜인 물건들에서 그것을 찾는다. 이제까지 감각으로부터 행복이 찾아지지는 못했다. 감각으로부터나 감각의 즐김으로부터 진정한 행복을 찾았다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행복은 영으로부터만 찾아졌다. 따라서 인류를 위한 최고의 효용성은 이 행복을 영으로부터 찾는 것에 있을 것이다.

 

- 그다음의 요점은, 무지가 모든 비참의 최고 어머니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가장 근본적인 무지는, 무한이 슬퍼하고 보챈다고 생각하는 것, 그가 유한이라 생각하는 무지다. 우리 불멸이, 늘 순결함이, 완전한 영이 스스로를 작은 마음과 작은 몸이라고 알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모든 이기적인 삶의 어머니다. 내가 이 작은 몸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다른 몸들을 희생하여, 내 몸을 아끼고 보호하며 멋진 것으로 유지하려 한다. 그리하여 너와 나는 분리된다. 이 분리의 생각이 생기는 순간, 모든 곤란한 일들로의 문이 열리고 모든 비참이 찾아든다. 오늘을 사는 인류의 아주 작은 부분이라도, 이기심과 좁음, 그리고 작음이 자기라는 생각을 옆으로 치워놓는다면, 내일 이 땅은 낙원이 될 것이다.  

- 우주의 힘이 당신 안에 있다.

"친구여, 왜 울고 있는가? 당신에겐 태어남도 죽음도 없다. 왜 우는가? 병도 비참도 당신에겐 없다. 당신은 무한한 하늘과 같다. 다채로운 색깔의 구름들이 그 하늘을 가리고 있다. 구름은 조금 그렇게 노니다가 사라져 없어진다. 하지만 하늘은 영원히 변함없는 푸른 하늘이다."

왜 사악함을 보는가?

 

- 나무 그루터기 하나가 있었다. 어둔 밤에 도둑이 보고는 "경찰이 있구나"라고 한다. 애인을 기다리는 젊은이가 보고는 그의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한다. 귀신 얘기를 들은 아이는 그것을 보고 귀신으로 알고 비명을 지른다. 하지만 그건 늘 나무 그루터기일 뿐이다.

우리는 우리 나름으로 세상을 본다. 어떤 방에 아기 하나가 있고 테이블 위에 금이 들어 있는 가방이 놓여 있는데, 도둑이 들어 금을 훔쳐갔다 하자. 금을 도둑맞았다는 것을 아기가 알까? 우리 안에 있는 것을 우리 바깥에서 본다. 아기의 안에 도둑은 없다. 그래서 바깥에서 도둑을 못 본다. 모든 지식이 그렇다. 세상의 사악함과 그 모든 죄를 말하지 말라. 당신이 여직 사악함을 보는 것에 붙들려 있는 것을 슬퍼하라. 모든 곳에서 죄를 보는 것에 붙잡혀 있는 당신을 슬퍼하라. 세상을 돕고 싶다면 세상을 저주하지 말라. 더 이상 세상을 약화시키지 말라. 죄니 비참이니 하는 것들 모두가 유약함의 결과이지 않나? 오랜동안의 잘못된 가르침으로 세상은 하루하루 더 약해지고 있다. 어릴 때부터 사람들은 자신들이 약하고 죄인이라고 배운다.  


- 전체의 해답을 구한다는 것은 전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선 존재의 모든 다른 영역들이 시작되는 중심으로서의 어떤 자리를 발견하려 한다. 그 자리에 서서 해답을 찾아야 한다. 이런 논리 전개는 논리학적으로 객관적 사실을 보여주는 것으로, 하나의 명제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 중심은 어디에 있는가? 우리 안에 있다. 고대의 현자들은, 인간 영혼 가장 깊숙한 핵심이야말로 전체 우주의 중심임을 발견할 때까지, 깊이깊이 파고들었다. 모든 차원들이 그 한 점을 향해 끌려들었다. 이것이 공통기반이다. 그곳에서만 우리는 공통 해답을 구할 수 있다. 따라서 누가 이 우주를 만들었는가 하는 물음은 별로 철학적이지 않다. 그에 대한 해답도 별로 가치가 없다.

- 이 카타 우파니샤드 Katha Upanishad는 아주 비유적인 언어로 말한다. 오랜 옛적에 한 부자가 살았다. 그가 가진 모든 것을 신에게 바치고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야 하는, 큰 희생 제사를 지냈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 희생제를 통해 명성과 명예를 얻기 바랐지만, 정작 자기에게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은 것들만 희생물로 내주었다. 더 이상 새끼를 배지 못하는, 눈먼, 다리를 못 쓰는, 늙은 소들만 내주었다. 그런 그에게 나치케타 Nachiliketas라는 아들이 있었다. 그의 아버지가 희생제를 준비하면서 스스로 한 맹세를 깨고, 옳지 않은 일을 한 것을 본다. 하지만 아버지에게 어떻게 말해야 할지를 몰랐다. 고대 인도에서 자식들에게 부모는 살아있는 신이다. 아버지에게 최대의 존경으로 다가가 공손하게 물었다.

"아버지의 희생제는 가진 것 모두를 다 바치는 것이어야 하는데, 그렇다면 아버지, 저는 누구에게 바칠 셈인가요?"

이 질문에 아버지는 크게 당황한다.

"아비가 제 아들을 희생물로 바치다니, 얘야, 그게 무슨 말이냐?"

하지만 아들은 같은 질문을 두 번, 세 번을 다시 한다. 화가 난 아버지가 말했다.

"죽음[Yama]에게 주련다."

그리하여 아들은 죽음의 신인 야마를 찾아가는 것으로 얘기는 이어진다. 가장 처음으로 죽은 인간이 야마였다. 그는 죽어서 하늘로 가, 모든 조상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착한 사람들이 죽으면 그와 함께 오랫동안 있게 된다. 아주 고결하고 순전한 이로서, 이름이 의미하는(yama, 의무 준수, 자제 등을 뜻함 - 역자)대로 품위 있고 선했다.

- 그리하여 소년은 야마가 있는 세계로 간다. 하지만 신들도 가끔 집을 비우는 수가 있어서, 소년은 그가 돌아올 때까지 사흘을 집 앞에서 기다려야 했다. 사흘이 지나자 야마가 돌아왔다. 야마가 말했다.

"오, 배운 바 있는 사람이여. 여기서 사흘을 먹지도 않고 나를 기다렸구나. 존경을 받아 마땅한 사람이구나. 너에게 경의를 표한다. 오! 브라민의 아이여, 내게 이 무슨 행운인가. 집을 오래 비워서 미안하다. 대신에 세 가지 상을 내리고 싶다. 기다린 하루에 한 가지씩, 세 가지 소원을 들어주마."
 
- 나치케타가 말한다.

"그것들은 살아있을 때의 일일 뿐이지요. 오! 죽음이여, 감각기관의 힘을 빼 갈 뿐이지요. 아무리 오래 산다 해도 눈 깜빡할 사이지요. 이 말들, 수레들, 춤과 노래들, 모두 다 가지세요. 인간은 부로써 만족할 수 없어요. 당신을 만나게 될 때, 부가 우리에게 남아 있나요? 당신 마음만큼만 우리는 살 수 있는걸요. 제가 바라는 소원은 이것 외엔 더 없어요."
나치케타의 이 말에 야마는 속으로 기뻤다. 그리고 말했다.

"완성과 즐김은 다르다. 서로 끝이 다르다. 사람을 다르게 이끈다. 완성을 택한 사람은 순결하게 된다. 향락을 택한 사람은 진짜 목적지를 놓친다. 완성과 즐김, 둘이 스스로를 사람에게 드러낸다. 현명한 사람은 둘을 구분해 낸다. 현명한 사람은 즐김보다 완성을 택한다. 어리석은 사람은 육신의 쾌락을 위해 즐김을 선택한다. 오, 나치케타여! 겉으로 드러나는 욕망의 것들을 숙고한 너는 현명하게도 그것들을 버렸구나."

죽음은 그제야 나치케타를 가르치기 시작한다.

- 종교가 책이나 사원에 있지 않다는 것을 이해할 때에만 끝날 것이다. 그것은 실제적인 인식이다. 실제적으로, 진짜로, 신과 영혼을 인식하는 사람만이 종교를 가진다. 많은 말을 쏟아낼 수 있는 최고 성직자나 아주 무식하고 낮은 유물론자나 진정한 차이는 없다. 우리 모두는 무신론자다. 고백하자. 단순히 지적으로 동의한다고 해서 종교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기독교인이건, 회교도건, 다른 종교의 교인이든 한번 보자. 복음서의 산상수훈의 진리를 진짜로 체현하는 사람은 완성에 이른 사람일 것이다. 곧바로 신이 될 것이다. 세계에는 수많은 기독교인이 있다고 한다. 가끔은 그 산상수훈을 체현하려 시도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라는 의미다. 하지만 2천만 중의 한 사람도 진짜 기독교인은 없다. 인도도 그렇다. 3억 명의 베단타 교인이 있다고 한다. (이 모든 숫자들은 130년 전을 기준하고 있다. 1890년대 런던에서 행한 강연이다. -역자) 하지만 진짜로 종교를 체현한 사람이 천명 가운데 한 사람이라도 있다면 우리 사회는 아주 크게 변화될 것이다.

 

- 우리 모두는 무신론자들이다. 그러면서도 이 사실을 인정하는 사람과 싸우려고 한다. 우리 모두는 어둠 속에 있다. 종교는 우리에게 단지 지적인 동의일 뿐이다. 단지 말뿐이다. 다른 아무것도 아니다. 종종 우리는 말 잘하는 사람을 종교인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말 연결을 빼어나게 잘하는 것, 수사적 능력, 온갖 방법으로 책 설명하기- 이 모든 것들은 학식을 즐기는 것이지 종교가 아니다."

리 자신의 영혼에서 진짜 체현이 시작될 때 종교가 된다. 종교의 새벽이다. 그때에만 우리는 도덕적이 된다. 지금의 우리는 동물보다 그리 도덕적이지 않다. 사회의 채찍에 의해 단지 억제되고 있다. "도둑질을 해도 처벌하지 않는다"고 오늘 사회가 말하면, 서로의 재산을 뺏기 위해 지금 당장 내달릴 것이다. 경찰에 의해 도덕이 유지되고 있다. 여론이 우리를 도덕적으로 만든다. 진실로 동물보다 나은 것이 없다. 우리 가슴속에 감추고 있는 비밀이 이와 같음을 우리는 안다. 그러니 이제 위선자가 되지 말자. 우리들이 종교인이 아님을 고백하고 다른 이들을 내려다볼 권리가 없음을 고백하자. 우리 모두는 형제다. 종교를 체현할 때 비로소 우리는 진짜로 도덕적이 될 것이다.

- 당신이 어떤 나라를 보았다고 하자. 어떤 사람이 있어, 당신에게 그 나라를 보지 않았다고 말하기를 강요한다고 하자. 그렇다 해도 당신 가슴속 깊은 곳에서는 그 나라를 보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처럼 바깥세상에서 본 것보다 더욱 강한 의미에서 종교나 신을 본다면, 당신의 신념을 흔들 수 있는 것은 없을 것이다. 그런 때, 진짜 신앙을 가지는 것이다. 당신의 복음서에 나온 말, "겨자씨 한 알만큼의 믿음이 있다면"이 의미하는 바가 이것이다. 사람은 스스로가 진리가 되었을 때, 진리를 알게 되는 것이다. 
 
- 무지와 허위의 것들을 포기해야만 한다. 그럴 때에만 진실이 스스로를 우리에게 드러낸다. 진실을 파악하게 되면 처음에 우리가 포기했던 것들이 새로운 모습을 취하고 새 빛 안에서 드러나며 신으로 변하게 된다. 그들이 고상하게 순화되면 그들의 진실된 빛 안에서 이해하게 된다. 하지만 그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우선 진실을 보지 않으면 안 된다. 처음에 그들을 포기하고 다시 그들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신으로서, 모든 비참과 슬픔, 모든 우리의 작은 기쁨들을 포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

- "베다 전체가 말하고 있는 것, 모든 속죄의 시간에 절제와 극기로 이끄는 한마디 말, 그것을 들려주려 한다. 그것은 '옴 Om'이다."

베다 전체에서 아주 높이 받들리고 있는 이 말은 아주 성스런 말이다.

- 이제 야마는 질문에 대답한다.

"사람은 몸이 죽으면 어떻게 되는가?"

"이 결코 죽지 않는 현명한 이는 결코 태어난 적이 없었다. 어떤 것으로부터도 나오지 않았고, 또한 그로부터 어떤 것도 일어나지 않았다. 태어나지 않았고, 영원하고 끝없이 지속되는 이 옛적의 하나는, 몸이 파괴되었다고 결코 파괴되지 않는다. 죽이는 자가 있어 그가 죽일 수 있다고 한다면, 혹은 죽임을 당하는 자가 자신이 죽는다고 생각한다면, 둘 모두 진실을 모르고 있다. 자기는 죽일 수도 죽지도 않기 때문이다."

 

- 가장 빼어난 지위이다. 앞에서 말한 문장에서의 '현명한'이라는 형용사에 주목하면 좋겠다. 앞으로 진행하면서 보게 되겠지만 베단타가 가리키는 것은, 모든 현명함과 모든 순수함이 영혼에 이미 있다는 사실이다. 단지, 흐릿하게 혹은 보다 또렷하게 드러나는가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인간과 인간 사이, 또한 창조의 모든 것들 사이의 차이는 종류가 아니다. 정도 degree 일 뿐이다. 모든 이들의 바탕과 실체는 영원하고 항상 있는 축복이며 늘 순결하고 늘 완성된 동일한 하나다. 성인과 죄인, 행복한 이와 비참한 이, 미인과 추녀, 사람과 동물에 모두 있는 아트만, 영혼이다. 모두를 통틀어 같다. 빛나는 하나다. 차이는 표현력에 기인한다. 어떤 이에게는 표현력이 낫고 어떤 이에게는 못하다. 하지만 표현력의 차이는 아트만에는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몸을 더 잘 보여주는 옷을 입었다고 해서 몸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차이는 옷에 있을 뿐이다.

 

- 베단타 철학 전체를 통해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있지 않다는 것이다. 서로 다른 두 개가 아니다. 같은 것이 좋기도 하고 나쁘기도 하다. 그리고 그 차이는 단지 정도에 있다. 오늘 내가 즐길 만하다고 하는 것이, 상황이 좀 나아진 내일에는 고통이 될 수도 있다. 우리를 따뜻하게 해 준 불이 나를 태울 수도 있다. 그렇다고 그것이 불의 잘못은 아니다. 순결하고 완전한 영혼으로서의 한 사람이 나쁜 일을 한다면 그 사람 자신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이 된다. 자신의 본성을 모르고 있다. 살인자에게도 깨끗한 영혼이 있다. 죽지 않는 영혼이다. 그의 실수다. 그 영혼은 드러나지 못하고 가려져왔다. 자신이 죽임을 당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도 그 영혼은 죽지 않는다. 영원하다. 결코 죽임을 당하지 않고 결코 파괴되지 않는다.

 

- 작은 것보다 한없이 작고 큰 것보다 한없이 큰, 우리 모두의 주인은 우리 모든 이의 심장 속 깊은 곳에 있다. 비참을 모두 여읜 죄 없는 이는 하느님의 자비를 통해 그를 본다. 몸이 없으면서도 몸에서 살며, 자리를 차지하지 않으면서도 공간을 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며, 무한하고 모든 곳에 있다. 영혼을 그렇게 알면서, 현자들은 결코 절망에 빠지지 않는다.

- "이 아트만은 언설의 힘에 의해, 방대한 지성에 의해, 베다의 학습에 의해 체현되지 않는다."

아주 도전적인 발언이다. 앞서도 말했지만 현자들은 아주 담대한 사람들이었고 무슨 일이든 주저하지 않았다. 알다시피, 인도에서는 베다가 아주 귀하게 여겨져 왔다. 기독교인이 성경을 그리 여긴 것보다 오히려 더 중요하게 여긴다. 성경에서는 신에 의해 영감이 불어넣어져서 계시를 받는다고 한다. 하지만 인도에서는 베다 안에 그저 있기 때문에 존재한다고 한다. 베다 안에서 베다를 통해서 모든 것들이 생겨났다. 지식이라 불리는 모든 것이 베다 안에 ...
 
- 달이 박살나 먼지가 되며, 체계와 체계가 몽땅 절멸된다 해도, 네게 무슨 대수냐? 바위처럼 굳건히 서라. 너는 파괴될 수 없는 존재다. 네가 우주의 자기이고 우주의 신이다. 이리 말하라.

"나는 절대 존재다. 나는 절대 행복이다. 나는 절대 지식이다. 내가 그다 I am He."

우리를 부수고 밖으로 나온 사자처럼 네 사슬을 깨뜨리고 영원히 자유로워져라. 무엇이 너를 두렵게 하는가? 무엇이 너를 억압하는가? 무지와 망상만이 그리 할 수 있다. 다른 어떤 것도 너를 묶을 수 없다. 너는 순전한 하나이다.  

- 실없는 바보들이 네게 말한다. 네가 죄인이라고. 너는 모퉁이에 앉아 울고 있다. 당신들을 죄인이라고 말하는 것은 우매함과 사악함이고, 비열함의 극치이다! 당신들은 모두 신이다. 당신을 신으로 보지 않고, 신을 사람이라고 부른다고? 그러니 담대하게 앞의 사실 위에 서서 당신 전체 인생을 그 위에 세워 주조해 보라. 어떤 사람이 네 목을 끊으려 한다면 거절하지 마라. 네 스스로가 네 목을 끊으려 하는 것이니까. 가난한 사람을 돕는다면, 손톱만큼의 우월감도 가지지 마라. 네 스스로를 경배하는 것이니 어떠한 우월감의 이유도 될 수 없다. 전체 우주가 너 아니냐? 너 아닌 곳이 어디 있느냐? 너는 이 우주의 영혼이다. 너는 해요 달이요 별들이요, 모든 곳에서 빛나고 있는 것이다. 전체 우주가 너다. 누구를 미워하고 누구와 싸우려 하는 ...

- 다음으로는 기체가 된다. 그다음에는 보다 섬세하고 보다 균질적인 열진동이 된 후, 모든 것들이 원래의 아카샤로 돌아가고 우리들이 인력, 척력, 운동이라 부르고 있는 것들이 원래의 프라나로 천천히 환원된다. 그런 후 이 프라나는 한 동안 잠을 잔다. 그 뒤, 다시 나타나 앞서의 모든 형태를 밖으로 밀어낸다(project, 사출[射出] - 역자). 다시 이런 기간이 끝나고 모든 것들이 스러진다. 이렇게 이 창조의 과정은 일어났다가 가라앉는 것이다. 후진과 전진을 반복하는 것이다. 현대과학의 용어를 빌면, 한 시기엔 정적으로 되고 다른 한 시기엔 동적으로 되는 것이다. 한 시기엔 잠재력이 되고 다른 한 시기엔 활력이 된다. 이런 교류가 영원히 계속된다.

- 하지만 이런 분석은 불완전한 것일 뿐이다. 이 정도는 현대물리학에 의해서도 밝혀져 있다. 이것보다 더 높은 차원의 것은 물리학이 미치지 못한다. 그렇다고 해서 탐구가 멈추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어느 것 하나를 앎으로써 모든 것을 알 수 있는 그 어느 것을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

 

- 우리는 우주를 두 개의 구성 요소로 귀착시켰다. 물질과 에너지가 그것이다. 인도 고대 철학자들이 아카샤와 프라나로 불렀던 것들이다. 그다음 단계는 이 아카샤와 프라나를 그것들의 근원으로 귀착시키는 일이다. 둘은 마음이라 불리는 보다 높은 실체로 환원될 수 있다. 둘은 우주적으로 존재하는, 생각의 힘인 마하트, 다시 말해 마음에서 나온 것들이다. 생각은, 아카샤나 프라나보다 더욱 미묘하고 섬세한, 존재를 드러내는 현현이다. 물질이나 에너지는 생각이 스스로를 갈라내어 만들어진 것들이다. 시작 시에 있었던 우주적 생각이 현현되고 변화하고 스스로 진화하여, 아카샤와 프라나라는 두 개가 되었다. 이 두 개의 조합으로 하여 전체 우주가 만들어져 왔다.

- 그다음으로는 심리학이다. 나는 지금 당신을 보고 있다. 외부 감각들은 눈을 통해 내게 온다. 외부 감각들은 감각신경을 통해 뇌로 전달된다. 눈은 시각기관이 아니다. 외부 도구에 불과할 뿐이다. 왜냐하면 감각을 뇌에 전달하는 진짜 시각기관이 망가지면 스무 개의 눈을 가지고 있더라도 나는 당신들을 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 비록 망막에 비치는 그림이 완전한 것이라 할지라도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시각기관은 시각 도구와는 다른 것이다. 시각 도구인 눈의 뒤 단계에 시각기관이 반드시 있어야 하는 이유이다. 다른 감각들도 모두 마찬가지다. 코는 후각이 아니라 그것의 도구일 뿐이다. 그것 뒤에 후각기관이 있다. 육신의 신체 안에 외부 감각 도구가 있고 그 뒤 같은 신체 안에 감각기관이 있다. 하지만 이것으로도 충분하지 않다. 내가 당신에게 말을 하고 있고 주의를 기울여 그 말을 듣는다고 하자. 이때 종이 울린다고 하자. 아마 당신은 그 종소리를 듣지 못할 것이다. 그 소리의 파동은 당신 귀에 닿아 고막을 ... 

- 역자 : 몸이 죽을 때 옮겨가는 것으로 그려지는 아트만이 개별적 아트만이다. 이것은 인간을 몸, 마음, 의식으로 대별할 때 마음에 속하는 것으로, 마음[마음은 베단타에 의하면 프라나, 마노, 부디 buddhi의 세 부분으로 되어 있다]의 가장 높은 영역인 지성 buddhi에 해당한다. 절대적 아트만의 정확한 번역인 의식 cit은 몸이 죽는다고 옮겨 다니지 않는다. 의식을 영어단어 영혼 soul이라고 옮긴 데서 일어나는 혼란이다. 번역 중에 계속 곤란을 겪었다. 비베카난다도 여기의 혼란에서 자유롭지 않다. 

- 베단타에 의하면 영혼의 서로 다른 세 가지 목적지가 있다. 아주 영적인 사람들은 죽으면 햇빛을 따라 해의 영역이라 불리는 곳에 이른다. 그곳을 지나 그들은 달의 영역이란 곳에 다시 이른다. 그런 후 번개의 영역이란 곳에 닿는데 그곳에서 이미 축복을 받은 다른 영혼을 만난다. 그 영혼의 안내를 받아 가장 높은 영역인 브라흐마의 영역, 브라흐마로카 Brahmaloka로 나아가게 된다. 여기서 영혼들은 전지전능함을 얻게 되고, 신 자신과 거의 마찬가지로 모든 것을 알고 모든 힘을 지니게 된다. 그곳에서 영원히 머물게 된다. 이원론자나 비이원론자에 공히 따르면, 우주순환 주기의 끝에 보편적 실재와 하나가 된다.

 

- 다음으로, 좋은 일을 했지만 이기적인 동기를 가지고 했던 사람들의 경우인데, 그들이 죽게 되면 여러 다양한 하늘이 있는 달의 영역으로 가서 신의 몸인 미세체를 얻게 된다. 그들은 신격 Gods이 되고 거기서 살며 오랫동안 하늘의 축복을 즐긴다. 이 기간이 끝나면 오래 전의 카르마가 다시 그들에게 덮쳐 다시 이곳 땅으로 돌아오게 된다. 대기와 구름 혹은 여러 다른 영역들을 거친 후, 빗방울을 통해 땅에 닿는다. 땅에 닿아 곡식에 자신을 부착하고 마침내는 자신에게 새 몸을 줄 수 있을 어떤 사람에게 먹히게 된다.

 

- 마지막의 종류라 할 사악한 사람들의 경우, 죽으면 유령이나 악마가 되어 달의 영역과 땅 사이의 중간지대에서 산다. 사람에게 폐를 끼치거나 혹은 친하게 지내거나 하면서 한동안 거기 살다가 땅으로 돌아와 짐승들이 된다. 짐승의 몸으로 한동안 살다가 거기서 놓여나고 다시 돌아와 인간으로 되며, 그때 다시 구원을 도모하게 된다.

 

- 이제 우리는 거의 완성의 경지에 이른 사람들, 불순물이 아주 조금 남아있는 사람들의 경우, 햇빛을 통해 브라흐마로카로 가는 것을 알게 되었다. 중간쯤의 수준인 사람들, 하늘에 가려고 좋은 일을 행한 사람들은 달의 영역에 있는 하늘로 가서 신격의 몸을 받게 되고, 다시 땅으로 돌아와 완전의 경지에 이를 기회를 얻게 된다. 아주 사악한 사람들은 유령이나 악마가 되고 짐승으로 태어나야만 하며, 그런 후 다시 인간이 되어 완성에 이를 또 다른 기회를 갖게 된다. 우리가 사는 이 땅을 일러 카르마부미 Karma-Bhumi, 카르마의 영역이라 한다. 여기에서만 사람은 선업과 악업을 지을 수 있다. 사람이 하늘로 가고 싶고 그 목적을 위해 좋은 일을 한다면, 그런 만큼 좋아질 수 있고 악한 업이 쌓이지 않을 수 있다. 땅에서 행한 좋은 일만큼의 결과를 즐길 수 있고, 그 좋은 업이 다 소진되면, 그 이전에 쌓여진 악업의 힘이 그에게 덮쳐 이 땅으로 다시 오게 된다. 마찬가지로 유령이 된 사람들은 그 상태에 머물면서 새 업을 짓지 않으면서 지난 비행들의 나쁜 결과들로 고통받는다. 그런 후 당분간 어떤 새로운 업도 짓지 않고 짐승의 몸에 머문다. 그 기간이 끝나면 그들 역시 다시 사람이 된다. 선업과 악업에 기인된 보상과 처벌의 상태에서는, 새로운 업을 지을 힘이 결여되어 있다. 단지 보상을 즐기고 처벌을 괴로워할 뿐이다. 아주 특별나게 선한 업이나 악한 업이 있을 경우, 그 열매가 빨리 맺힌다. 예를 들어 일생 내내 나쁜 일을 많이 하고 좋은 일을 한 경우가 하나만 있을 경우, 그 좋은 일의 결과는 곧바로 나타난다. 하지만 그 결과가 지나가면, 모든 나쁜 일들의 결과들이 반드시 나타나게 마련이다. 어떤 선하고 대단한 일들을 했지만 전체적 삶의 경향이 옳지 않았던 사람들의 경우, 신격이 된다. 한동안 이 신격의 상태로 살면서 신의 힘을 즐긴 후, 다시 인간이 된다. 선행의 힘이 소진되었을 때, 예의 악행이 해결되기 위해 나타난다. 특별히 나쁜 일들을 한 사람들은 유령이나 악마의 몸을 받는다. 악행의 효과가 소진되었을 때, 남아 있던 작은 선행에 의해 다시 사람으로 된다.

 

- 더 이상 추락하거나 돌아오지 않을 브라흐마로카에로의 길을 일러 데바야나 Devayana- 신에로의 길이라 한다. 하늘로의 길은 피트리야나 Pitiriyana- 조상들에로의 길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베단타 철학에 의하면, 인간이야말로 우주 안에서 가장 위대한 존재이며, 일을 할 수 있는 이 세상이야말로 우주 안에서 최고의 장소이다. 왜냐하면 오직 여기에서만 인간으로 하여금 완성에 도달할 수 있는 최고 최선의 기회가 주어지기 때문이다. 천사들이든 신격들이든, 무엇으로 부르든 간에, 그들이 완성을 이루기 위해서는 인간이 되어야만 한다. 이 인간으로서의 생이야말로 위대한 중심, 놀라운 위치, 멋진 기회인 것이다.

- 이제 우리는 조금 다른 철학도 만나게 된다. 불교도들의 그것이다. 그들은 이제까지 내가 제시해 온 영혼(아트만 - 역자) 이론의 전체를 부정한다. "이 몸과 마음의 실체로서 또 배경으로서 무엇인가 있다는 것을 가정하는 것이, 대체 무슨 쓸데가 있는가?"라고 말한다.

"생각이 계속 작동하는 것을 왜 허락하지 않는가? 왜 몸과 마음으로 된 이 생체 너머 제3의 토대를 받아들여야 하는가? 그것의 용도는 무엇인가? 이 생체는 이것 자체로 설명될 수 없는가? 제3의 어떤 것을 왜 새로 받아들이려 하는가?"

이런 주장들은 아주 강력하다. 그 논리는 아주 강하다. 철학 외부의 연구가 진전됨에 따라, 이 생체는 그것 자체로 충분히 설명이 가능하다. 적어도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은 이런 견지에서 사안을 보고 있다. 그럴진대 하부구조로서의 영혼이 따로 있어야 할 필요가 있는가? 마음과 몸이 아닌 어떤 것, 마음과 몸을 위한 배후로서의 어떤 다른 것이 있어야 할 필요가 ... 

- 누가 온단 말인가? 네가 없는 곳이 어딘가? 네가 이미 있지 않은 하늘이 어디 있는가? 인간의 자기는 편재다. 가지 않는 곳이 어디인가? 모든 곳에 있다. 따라서 태어남과 죽음, 낮은 하늘과 높은 하늘, 낮은 세상 같은 유치한 꿈과 미숙한 착각들은 모두 완벽하게 바로 없어져버린다. 브라흐마로카의 몇 장면들을 보여주면 거의 완벽하게 그런 생각들은 사라져 버린다. 하지만 무지한 이들에게는 계속된다. 

- 온 세상이 믿고 있는 바, 하늘로 가고 죽고 태어나는 사실은 어떻게 된 걸까? 책 한 권을 공부할 때, 페이지마다 읽고 넘긴다. 다음 페이지가 나타나고 또 넘긴다. 무엇이 변하는 것인가? 무엇이 오고 무엇이 가는가? 내가 아니고 책이다. 이 세상 전체는 영혼 앞의 한 권의 책이다. 각장 각장은 읽히고 넘겨진다. 그리고 그때마다 새로운 장면이 열린다. 그것들은 읽히고 또 넘겨진다. 새로운 것이 오지만 영혼은 늘 그대로다. 영원하다. 변하는 것은 세상이지 사람의 영혼이 아니다. 그것은 결코 변하지 않는다. 태어나고 죽는 것은 세상에 속한 것이지 네게 속한 것이 아니다. 하지만 무지한 사람은 속는다. 지구가 아니라 태양이 움직인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꼭 마찬가지로, 착각에 빠지면 세상이 죽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죽는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니 이 모든 것이 환각이다. 기차가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땅이 움직인다고 생각하는 것이 환각인 것처럼, 태어남과 죽음에의 환각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이 어떤 특정한 심적 프레임에 있을 때, 지구, 태양, 달, 별들이라는 특정한 존재를 본다. 같은 심적 상태에 있는 사람들 모두가 같은 사물들을 본다. 당신들과 나 사이에는, 서로 다른 존재의 차원들에 있는 헤아릴 수없이 많은 존재들이 있다. 그들은 우리를 보지 못하고, 우리도 그들을 보지 못한다. 우리와 동일한 마음 상태와 우리와 같은 차원에 있는 이들만 우리는 본다.

 

- 이를테면 동일한 주파수로 조율된 악기들만이 반응한다. '인간 주파수'라고 불리는 것이 바뀐다면, 인간은 보이지 않게 될 것이다. '인간계 man-universe' 전체가 사라질 것이다. 대신에 다른 광경들이 우리 앞에 나타날 것이다. 신과 신계, 혹은 사악한 사람에게는 악마와 악마계가 나타날 것이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한 우주에 대한 다른 관점일 뿐이다. 인류라는 차원에서 이 우주를 보면, 지구, 태양, 달, 별들 혹은 그와 같은 모든 것들로 보이고, 사악함이라는 차원에서 보면 그 꼭 같은 우주가 처벌의 자리로 보인다. 또한 하늘로 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그 우주가 하늘로 보인다. 죽어서, 옥좌에 앉은 신에게로 가서 세세토록 그 앞에 서서 찬양하는 모습을 꿈꾸던 사람들은 그들 마음에 지니고 있던 환상을 본다. 이 우주가, 옥좌에 앉은 신 주위를 날개를 단 온갖 천사들이 날아다니는, 그저 광대한 하늘로 변한다. 사람들이 스스로 만든 하늘들이다. 비이원론자들은 이원론자들의 이런 말들이 다 사실이라고 받아들여준다. 하지만 그것들은 모두 스스로가 만든 것들이다. 이런 영역들, 악마들, 신들, 환생, 윤회 모두가 신화다. 이 인간으로서의 생도 역시 신화다. 인간들이 언제나 하는 커다란 잘못은 이 생만은 진짜라고 하는 생각이다. 앞의 다른 여러 가지가 신화로 불리는 것은 잘 이해하지만, 그들 자신의 생이 신화라는 것은 결코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이 생을 포함하여, 모든 것 전체가 그저 신화일 뿐이다.

 

- 그리고 모든 거짓말 중에서 가장 큰 것은 우리가 몸이라는 거짓말이다. 우리는 그랬던 적도, 앞으로 그럴 수도 없다. 우리가 단지 인간이라는 것보다 더 큰 거짓말은 없다. 우리는 우주의 신이다. 신을 예배하면서 우리는 늘 우리 자신의 감추어진 자기를 예배해 왔다. 늘 자신에게 해왔던, 죄인이나 악한 인간으로 태어났다는 말이 가장 큰 거짓말이다. 다른 사람에게서 죄인을 보는 사람만이 죄인이다. 아기 하나가 여기 있다고 하자. 그리고 테이블 위에 금이 가득 든 가방이 하나 있다 하자. 도둑이 들어 그 가방을 훔쳐갔다고 하자. 아기에게는 아무 일도 없다. 아기의 안에도 밖에도 도둑은 없으니까. 죄인이나 나쁜 사람에게는 바깥에 사악함이 있다. 그러나 착한 사람에게는 없다. 사악한 사람은 이 우주를 지옥으로 본다. 하지만 그나마 조금이라도 선한 사람은 하늘로 본다. 완전한 존재들은 신 그 자체로 본다. 신 자체로 볼 그때에만, 눈에서 장막이 떨어져 나가고 순수하게 정화된다. 그 사람에게 그의 모든 시각은 변화된다. 수백만 년 동안 그를 괴롭혀온 나쁜 꿈들이 모두 사라지고, 자신을 사람으로, 신으로, 혹은 악마로 생각해 오던, 자신을 낮은 곳, 높은 곳, 땅 위, 하늘 등에 사는 자로 생각해 오던 그 사람이 실상은 어디에나 다 있는 자임을 발견한다. 모든 시간이 자기 안에 있고 자신이 시간 안에 있지 않음을 발견한다. 모든 하늘이 자기 안에 있고 어떤 하늘에도 자신이 있지 않음을 발견한다. 인간이 경배하던 모든 신들이 모두 자기 안에 있고, 자신이 그 신들 중의 어느 하나 안에도 있지 않음을 발견한다. 자신이 신들과 악마들, 인간들, 식물들, 동물들, 바위들을 만들어낸 이이고, 자신의 진정한 본성이 하늘보다 높고 이 우주보다 더 완전하며, 무한한 시간보다 더 무한하며, 편재한 에테르보다 더욱 편재한 것임이 자신 앞에 펼쳐져 드러나게 된다. 이런 때에 이르러서, 비로소 이럴 때라야만, 인간은 두려움을 모르게 되고 자유롭게 된다. 그리하여 모든 착각이 그치고, 모든 비참함이 사라지며, 모든 공포가 영원히 끝이 난다. 태어남도 가버리고 죽음도 가버린다. 고통도 날아가버리고 즐거움도 날아가버린다. 땅도 사라지고 하늘도 사라진다. 몸도 사라지고 마음 역시 사라진다. 그 사람에게는 말 그대로 이 전체 우주가 사라진다. 찾고 움직이고 힘이 서로 부딪쳐 일어나는 갈등은 영원히 그친다. 힘과 물질, 우주의 갈등, 세상 그 자체, 하늘, 땅, 동물, 인간, 천사들로 나타나던 그 모든 것들이 하나의 영원하고 깨지지 않고 변하지 않는 존재로 전환되고, 그것을 알게 된 사람은 자신과 그 존재가 하나인 것을 발견하게 된다. 


- "종교의 요체는 영혼의 체현이다"라고 말한다. 종교는 체현될 수 있다. 준비되었나? 그걸 원하는가? 원하면 그 체현을 얻을 수 있다. 그때면 진실로 종교적이 될 것이다. 체현을 얻기 전까지는 당신과 무신론자는 다를 것이 없다. 무신론자는 진지한 사람이다. 하지만 종교를 믿는다고 하면서 한 번도 체현하려 하지 않은 사람은 진지하다고 할 수 없다.

- 그다음으로 오는 질문은, 체현 다음에는 무엇이 오는가이다. 우주가 하나임을 깨닫고, 우리가 무한한 한 존재임을 깨닫고, 이 자기가 유일한 존재임을 깨닫고, 이 모든 다양한 현상적 형상들로 나타난 것이 동일한 자기임을 깨달았다 하자. 그런 다음에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걸까? 무기력하게 구석으로 가서 앉아 죽어가는 걸까?

"그 체현이 세상에 무슨 좋은 일일까?"

오래된 물음이다! 우선, 세상에 무슨 좋은 일이 될까? 그런 체현이 있어야 할 무슨 이유가 있나?

"세상에 무슨 좋은 일을 할 수 있나?"

무슨 권리로 이런 질문을 하는가? 대체 그 질문의 뜻은 무엇인가? 아기는 사탕을 좋아한다. 아기에게 전기와 연관된 어떤 설명을 한다고 하자. 아기가 묻는다. “그걸로 사탕을 살 수 있어요?" 당신이 대답한다. "아니." 아기가 말한다. "사탕살 수 없다면 그게 뭐가 좋아요?" 이제 사람들이 일어서서 말한다. "대체 종교를 공부하고 실행하면 세상에 무슨 좋은 일이 생긴단 말이요? 돈을 가져다주나요?" "아니오." 

- 매일처럼 갈등하고 싸우고, 빵 한 덩이를 위해 다투던 감옥이 이 우주가, 놀이터가 된다. 그런 때, 이 우주는 아름다워질 것이다. 그런 사람만이 일어나 "이 세계는 얼마나 아름다운가!"라고 말할 권리가 있을 것이다. 그런 사람 홀로, 모든 것이 잘되었다고 말할 권리가 있을 것이다. 마찰이나 충돌과 함께 가는 대신에, 그런 체현으로부터 주어지는 이 세계를 향한 위대한 선이 될 것이다. 오늘날의 모든 인류가 저 위대한 진리의 한 조각만이라도 체현한다면, 전체 세계의 양상이 변화될 것이다. 싸움과 다툼 대신, 평화의 지배가 들어설 것이다. 다른 사람보다 앞서겠다고 우리를 내모는 이 야만스럽고 꼴사나운 다그침이 세계로부터 사라질 것이다. 그와 함께 모든 갈등이 사라질 것이다. 모든 증오가 사라질 것이다. 모든 질투가 사라질 것이다. 모든 악이 영원히 사라질 것이다. 그때는 신이 이 땅에 살 것이다. 그리하면 바로 이 땅이 하늘이 될 것이다. 신들이 신들과 놀고, 신들이 신들과 일하고, 신들이 신들을 사랑하는 그때, 무슨 악이 있을 수 있겠는가? 이것이 신적 체현의 위대한 효용이다. 그때는 사회에서 보게 되는 모든 것이 변화되어 거룩하게 된다. 인간을 더 이상 악하게 보지 않는다. 그것이야말로 첫 번째 위대한 이득이다. 더 이상, 실수를 저지른 가난한 남녀를 향해 일어나 조소의 눈길을 던지지 않을 것이다. 더 이상 늦은 밤거리를 걷는 가난한 여인에게 경멸의 눈초리를 보내지 않을 것이다. 거기서도 신 자신을 볼 것이기 때문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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