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1

[슈테판 츠바이크] 광기와 우연의 역사 - 키케로에서 윌슨까지 세계사를 바꾼 순간들

일루젼 2025. 2. 16. 0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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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슈테판 츠바이크 / 정상원
출판 : 이화북스
출간 : 2020.11.30


       

           

슈테판 츠바이크의 <연민>이 참 좋았다.

처음에는 에디트에게 이입해서 읽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절망, 간절함, 원망에 압도되어 버렸다. 그 이상의 괴로움은 없을 것 같았다.

 

문득문득 다시 <연민>이 떠오른다. 그럴 때면 '나', 소위에 대해 생각한다. 선의라고도 악의라고도 말할 수 없는, 그저 약간의 안쓰러움과 난감함에 대하여. 되돌려 줄 수 없는 마음에 대하여.

 

<광기와 우연의 역사>는 슈테판 츠바이크라는 이름만 보고 집어든 책이었다. 그의 문학이 아닌 글을 더 읽어보고 싶었다.

 

개인적으로는 평작이라고 생각한다. 문장이나 표현이 빼어나지도, 번뜩이는 통찰력이 빛나지도 않았다. 그저 누군가는 흘려 넘겼을 순간들에 관심을 두고 주시했을 뿐이다. 

 

그럼에도, '그 순간'의 역동성이 잘 담겨 있다. 읽는 이의 심장을 뛰게 만드는 힘이 있는 책이었다.

어쩌면 츠바이크의 매력은 독자를 묘사대상에게 '이입'시키는 능력에서 비롯되는 게 아닐까 생각해본다. 

오랜만에 만난 블레즈 상드라르도 반가웠고.  

 


 

별처럼 빛나는 순간들

 



- 어떤 예술가도 하루 스물네 시간 내내 예술가로 살지는 않는다. 예술가가 만들어낸 불멸의 걸작 모두는 드물게 찾아오는 짧은 영감의 순간에 생겨난 것이다. 마찬가지로, 모든 시대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시인이자 이야기꾼으로 추앙받는 역사 역시 결코 쉴 새 없이 창조자로 살지는 않는다. 괴테는 역사란 "신의 신비스러운 작업장"이라고 경외심에 차서 말한 바 있지만, 이곳에서도 하찮고 평범한 일들이 숱하게 많다. 예술과 삶에서도 그렇듯이, 역사의 장에서도 영원히 기억될 숭고한 순간이란 드문 법이다. 대개 역사는 수천 년을 잇는 저 거대한 줄을 덤덤하고 우직하게 한 올 한 올 짜나가면서 연대기 기록자처럼 사실에 사실을 나열하곤 한다. 긴장된 순간이 있으려면 항상 준비 기간이 필요하고, 모든 사건에는 전개 과정이 있기 때문이다. 천재가 하나 나오려면 한 민족 안에서 수많은 범인이 태어나야 하듯이, 참으로 역사적인 순간, 별처럼 빛나는 순간이 오려면 억겁의 시간이 태평히 흘러가게 마련이다. 

- 예술 분야의 천재가 시대를 넘어 영향을 끼치듯이 역사에서 별처럼 빛나는 순간은 수십 년에서 수백 년의 역사를 결정짓는다. 이런 경우에는 모든 대기권의 전기가 피뢰침 꼭대기로 몰리듯이,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사건들이 지극히 짧은 구간의 시간에 몰린다. 보통은 느긋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일어나던 것들이 단 한순간 안에 응축되는 경우, 이 순간은 모든 것을 규정하고 결정짓는다. 이 순간 단 한번 '예' 혹은 '아니오'라는 말을 함으로써, 단 한 번 너무 빨리 혹은 너무 늦게 행동함으로써 사태는 영원히 돌이킬 수 없게 되면서 한 개인의 삶은 물론이고 한 민족의 삶, 심지어는 인류 전체의 운명이 결정되는 것이다.

- 이처럼 극적 긴장이 가득한 운명적인 순간이 닥치면 하루 만에 혹은 한 시간 만에, 심지어는 단일 분 만에 훗날을 좌우하는 결정을 내려야 한다. 그러한 순간은 개인의 삶에서도 드물고 역사에서도 드물다. 나는 이 자리에서 여러 시대와 다채로운 영역에서 추려낸 몇 개의 별처럼 빛나는 순간들을 기억해보려 한다. 내가 이렇게 이름 붙인 이유는 이러한 순간들이 부질없이 지나간 세월 속에서, 밤하늘의 별처럼 영원히 빛나고 있기 때문이다. 외적인 혹은 내적인 사건이 지닌 진실성을 나의 창작을 통해 왜곡하거나 강조하려는 시도는 전혀 하지 않았다. 역사는 저 숭고한 순간들을 완성된 형태로 내어놓았기에 첨삭이 필요하지 않다. 역사가 진정 시인이자 극작가로 활약하고 있는데 어찌 감히 일개 시인이 역사를 이기려고 하겠는가!

 





- 사색을 즐기는 창조적 인간은 항상 다음과 같은 내부의 분열을 겪곤 한다. 사색하는 인간은 시대의 어리석음을 다른 사람보다 잘 통찰하기에 그것을 시정하려 든다. 그 과제에 푹 빠져 있는 동안은 열정적으로 정치판에 뛰어들어 싸우지만, 곧 그는 폭력에 폭력으로 맞서기를 주저한다. 책임감 때문에, 폭력을 행사하고 사람을 해치는 일을 하기를 꺼린다. 주변을 배려하지 않고 행동하는 게 용납될 뿐 아니라 불가피한 절체절명의 순간에 이처럼 주저하고 주변을 배려하다 보니 그의 행동력은 마비된다.

- 처음에는 열광해서 뛰어들었던 키케로는 곧 예리한 눈으로 상황을 직시한다. 어제는 브루투스 일당을 영웅이라고 칭찬했건만 알고 보니 일을 저질러 놓고 뒷감당이 안 되어 주춤거리는 겁쟁이들이다. 민중은 어떤가 들여다보니 그가 기억하던 예전의 영웅다운 로마 민족은 간데없고 타락한 천민에 불과하다. 이익을 좇고 쾌락을 누릴 궁리만 하고, 먹이와 유희만 있으면 흡족한 사람들이다. 로마 민중은 하루는 살인자 브루투스와 카시우스를, 다음날은 복수를 외치는 안토니우스를, 셋째 날은 카이사르의 초상을 짓밟는 돌라벨라(로마의 정치가, 키케로의 딸 툴리아의 세 번째 남편 -옮긴이)를 열렬히 환영한다. 키케로는 타락한 로마 시민 중 누구 하나도 자유의 이념을 진심으로 섬기지 않음을 깨닫는다. 카이사르를 제거해 봤자 아무 소용없다. 그를 죽인 건 말짱 헛일이다. 모두 다 카이사르의 유산, 즉 그의 돈과 군대와 권력을 차지하려고 갖은 수를 써가며 흥정하고 다툰다. 이들은 둘도 없는 성스러운 대상인 로마를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자신만을 위해서 이익을 취하려 든다.

- 너무 성급히 열광하며 2주를 보내던 키케로는 점점 지치고 회의에 빠져든다. 자신의 말이 무력하다는 사실을 더는 외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의 몫인 조정자 역할은 끝이 났음을 스스로 인정하는 수밖에 없다. 고국이 곧 내전에 빠지는 것을 막기에는 자신이 너무 약한 존재이거나 용기가 모자란 사람임을 인정해야 한다. 이렇게 그는 고국을 운명에 맡기고는 4월 초 로마를 떠나 나폴리만의 푸에톨리로 간다. 또 한 차례 실망과 패배를 겪은 후 사랑하는 책이 있는 한적한 별장으로 돌아간 것이다.

-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는 두 번째로 세상을 등지고 외로운 삶으로 도피한다. 이제 그가 궁극적으로 깨달은 것이 있다. 힘이 곧 법으로 통용되는 영역, 지혜롭고 유화적인 사람보다는 파렴치한 사람이 치고 나가는 영역이 있으며 학자이며 휴머니스트이고 법의 수호자인 자신은 아예 이 영역에 발을 디디지 말았어야 했다는 사실이다. 비록 현실이라는 고집스러운 물질을 구해내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후세는 더 현명할 거라는 희망을 품고 그는 자신의 꿈을 전하려 한다. 육십 년을 살면서 애써 얻은 깨달음이 아무런 소득 없이 사라지게 할 수는 없다. 그는 겸허하게 본래 자신의 강점이 무엇인지 ... 

- 카이사르의 뒤를 이으려고 나선 것이다. 옥타비아누스는 이탈리아에 도착하자마자 키케로에게 편지를 보내서 자신을 도와 달라고 청한다. 같은 시기에 안토니우스도 키케로에게 로마에 와 달라고 간청한다. 전쟁터에 있는 브루투스와 카시우스 역시 자신들 편이 되어달라고 키케로를 부른다. 모두 다 탁월한 변호인인 그를 자기편으로 만들려고 갖은 애를 쓴다. 저명한 법학자 키케로가 자신들의 불법행위를 합법적인 것으로 만들어 주리라는 기대 때문이다. 권력을 잡으려는 정치가는 아직 권력을 거머쥐지 못했을 때는 늘 본능적으로 자신의 나쁜 행위를 지지해 줄 사상가를 찾는 법이다. 목적이 달성되면 이 한심한 사상가를 떨쳐내면 그만이다. 키케로가 예전처럼 허영심 많고 야심에 찬 정치가였더라면 유혹에 빠져들었을 것이다.

- 그러나 키케로는 한편으로는 지쳐 있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현명해져 있었다. 이 두 상태가 서로 비슷해지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그러면 위험하다. 자신의 작품을 끝내는 것이 가장 급선무임을 그는 잘 안다. 작품을 끝내야만 자신의 삶과 사유를 질서 있게 마무리할 수 있다. 오뒷세우스가 사공들이 세이렌의 노래를 듣지 못하게 귀를 틀어막았듯이, 그도 권력자의 유혹이 들리지 않게끔 마음의 귀를 틀어막는다. 그는 안토니우스와 브루투스의 부름은 물론이고 원로원의 부름에조차 응하지 않는다. 자신이 행동보다는 말에서 강하며, 떼를 지어 있을 때보다는 혼자 있을 때 더 영리함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는 꾸준히 자신의 저서를 계속 써나간다. 이 저서를 끝으로 세상에 작별을 고하게 되리라고 그는 예감한다. 

 

- 안토니우스는 갈리아를, 레피디우스는 스페인을 차지하기로 한다. 두 번째 안건을 놓고는 조금 고민을 해야 한다. 군대와 정치 깡패들에게 주어야 할 임금이 밀려있는데 이 돈을 어떻게 장만할지 걱정이다. 셋은 체계적 해법으로 이 문제를 수월히 풀어낸다. 나라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들 재산을 빼앗고는 이 사람들이 항의하지 못하게끔 즉시 제거하면 된다. 후세의 정치인들은 자주 이 해법을 모방할 것이다. 세 남자는 유유히 탁자에 살생부를 올려놓는다. 거기에는 이탈리아 최고의 갑부 2,000명의 이름이 적혀 있다. 그중 100명은 원로원 의원이다. 각자가 지인 중 사이가 좋지 않은 사람과 적수의 이름을 꼽는다. 새로운 삼두 정치의 주역들은 철필로 몇 번 쓱쓱 갈겨쓰더니 영토 문제뿐 아니라 경제 문제까지 깔끔히 해결했다.

- 이제 세 번째 안건이 논의된다. 독재를 구축하려는 자는 제일 먼저 모든 폭정의 영원한 적인 자주적인 인간들이 입을 열지 못하게 조치해야 한다. 소수의 자주적인 인간은 정신의 자유가 있는 유토피아를 집요하게 수호하려 하기에 이들이 없어야 독재자는 지배를 확고히 할 수 있다. 안토니우스는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의 이름을 살생부 맨 앞에 올리자고 요구한다. 자신의 참된 속내를 꿰뚫어 보고는 적나라하게 폭로한 사람이 바로 키케로다. 명철한 지성과 자주적 의지를 지닌 그는 이런 부류 여럿보다 더 위험한 존재이다. 그러니 그를 없애야 한다.

- 사건이 끝이 났음을 직감한다. 그러나 가장 암울한 시간에는 고통의 영원한 벗이 위안을 주러 나타나는 법이다. 고통받는 사람에게 수호정령이 내려온 것이다. 속세에서 위안을 찾지 못하는 사람은 신을 부르곤 한다. 괴테는 체험의 세계에서 문학 세계로 도망친다. 이미 여러 차례 했던 일을 마지막으로 한 번 더 하는 셈이다. 일흔네 살 노인은 이 마지막 은총에 감사하면서 40년 전에 쓴 <타소>의 한 구절을 자신의 시 서두에 적는다. 다시 읽어도 정말 놀라운 구절이다. 
[인간이 고통에 빠져 침묵할 때 내 고통을 말할 재능을 신이 내게 주셨네.] 

- 노인은 달리는 마차 안에서 마음속 질문들을 되새겨보지만, 답이 불확실한 탓에 괴로울 따름이다. 울리케는 이른 아침 여동생과 함께 나를 보려고 '요란스러운 이별'의 장소로 달려왔다. 그러고는 아직 풋풋한 사랑스러운 입술로 나에게 키스했다. 사랑하는 마음을 담아 키스한 걸까, 아니면 딸이 아버지에게 하듯 그런 걸까? 그녀가 나를 사랑할 수 있을까? 나를 잊지는 않을까? 아들과 며느리는 많은 유산을 상속받으려고 조바심 내고 있지 않은가! 그들이 이 결혼을 용납할까? 세상 사람들이 나를 비웃지는 않을까? 한 해가 지나면 내가 너무 늙어버려서 그녀를 감당하지 못하게 되는 건 아닐까? 그녀를 다시 만난다 해도 무슨 희망이 있겠는가? 이런 질문들로 그의 마음은 편치 않다.  

- 왕국으로 오라고 청한다. 이제 그는 남부러울 일이 없다고 느낀다. 그는 노이 헬베티엔의 주인이고 세계 최고의 갑부 중 하나이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마침내 아메리카 합중국은 버려진 정착촌 캘리포니아의 소유권을 멕시코에게서 빼앗는다. 이제 모든 게 탄탄대로에 들어선다. 몇 년 후 서터는 세계 최고의 갑부가 된다.

- 1848년 1월 갑자기 목수 제임스 마샬 James W. Marshall이 잔뜩 흥분해서는 서터의 집으로 들이닥쳐서 급히 이야기할 게 있다고 말한다. 서터는 의아해한다. 새 제재소를 세우기 위해 마샬을 콜로마에 있는 농장으로 보낸 게 바로 어제다. 그런데 그가 허락도 없이 돌아와서는 흥분에 몸을 떨며 자기 앞에 서 있다니! 마샬은 서터를 방으로 끌고 가서 문을 잠그더니 호주머니에서 모래 한 줌을 끄집어낸다. 거기에는 노란 알갱이가 몇 알 섞여 있다. 어제 땅을 파다가 이 희한한 금속이 눈에 띄었는데 금인 것 같다고 했다가 사람들의 놀림을 받았다고 마샬은 말한다. 서터는 진지해진다. 알갱이를 질산수로 분해해 보니 금이 맞다. 서터는 즉시 다음 날 마샬과 함께 농장으로 가기로 한다. 하지만 목수는 곧 세상을 뒤흔들 무시무시한 황금 열병에 걸린 첫 환자이다. 마샬은 조바심을 참지 못하고 폭풍우가 몰아치는 밤에 말을 달려서 콜로마로 돌아간다. 


- 다음 날 아침 서터 대령은 콜로마에 도착한다. 그의 일행은 운하를 막고서 모래를 조사한다. 체로 한 번 퍼서 이리저리 몇 번 흔들어 보니 금 알갱이가 검은 망 위에서 반짝인다. 서터는 몇 명의 백인들을 주위에 불러 모으고는 제재소가 완공될 때까지 침묵하겠다는 맹세를 받아낸다. 그러고는 진지하고 결연한 태도로 자신의 농장으로 돌아간다. 별별 생각이 다 들면서 마음이 요동친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금을 이처럼 손쉽게 손에 넣을 수 있었던 경우는 여태 없었다. 금이 땅에 널려 있다니, 이 땅이 나, 서터의 것이라니! 하룻밤 사이에 10년이 흘러간 기분이다. 이제 그는 세계 최고의 갑부이다. 

 

- 골드러시 때 강에서 금을 채굴하고 있는 장면. 특히 1849년에 수많은 사람들이 금을 캐기 위해 캘리포니아로 몰려왔는데, 이들을 포티나이너 forty niner라고 한다. 현재 샌프란시스코 미식축구 팀에서 이 이름을 쓰고 있다.

- 최고의 갑부라고? 천만의 말씀이다. 이 지구상에서 가장 가난하고 불쌍하고 낙담한 거지가 바로 서터이다. 1주일 후 비밀이 새어 나간 것이다. 한 여자가 어떤 나그네에게 이 이야기를 하면서 금 알갱이를 몇 개 주었다. 그러자 역사상 유례없는 일이 벌어진다. 서터의 일꾼들은 너나 할 것 없이 하던 일을 팽개친다. 대장장이는 대장간을 빠져나오고 목동은 가축 떼를 내버려 둔다. 포도 농사꾼은 포도밭을 등지고 병사들은 무기를 내려놓는다. 모두 귀신에 홀린 듯 서둘러 체와 냄비를 장만해서는 제재소 자리로 달려온다. 모래에서 금을 가려내려는 것이다. 하룻밤 사이에 경작지 전역이 텅 비어 있다. 젖소는 아무도 젖을 짜주지 않아서 고통에 울부짖다가 죽어간다. 물소 떼는 우리를 부수고 나와 밭을 짓밟고, 밭에는 알곡이 줄기에 매달린 채 썩어간다. 치즈 공장은 가동을 멈추고 곳간은 무너져 내린다. 거대 기업의 엄청난 톱니바퀴가 멈추어 선 것이다.

- 황금의 땅을 찾았다는 소문이 전신기를 통해 산을 넘고 바다를 건너간다. 그러자 여러 도시와 항구에서 사람들이 몰려든다. 선원은 배를 떠나고 정부 관리는 사무실을 떠난다. 금을 채취하려는 자들이 끝이 보이지 않는 긴 줄을 이루며 동과 서에서 몰려든다. 걸어오는 사람, 말이나 마차를 탄 사람들이 메뚜기 떼처럼 노이 헬베티엔을 덮친다. 이들에게는 주먹이 곧 법이고 권총이 곧 진리이다. 이런 고삐 풀린 난폭한 무리가 한창 발전 중인 이민촌으로 밀려든다. 이들 눈에는 임자 있는 물건은 없다. 아무도 이 무법자들을 막을 엄두를 내지 못한다. 그들은 서터의 암소를 죽이고 그의 곳간을 허물어서 자신들이 살 집을 짓고 그의 밭을 짓밟고 그의 기계를 훔친다. 순식간에 서터는 거지가 되어버린다. 신화 속 미다스왕처럼 황금에 파묻혀 죽는 신세가 된 것이다.

- 이 유례없는 황금 돌풍은 점점 더 거세게 몰아친다. 금 소식이 전 세계로 퍼지자 뉴욕에서만 백 척의 배가 떠나고 독일, 영국, 프랑스와 스페인에서 1848년부터 1851년까지 엄청나게 많은 모험꾼들이 건너온다. 배를 타고 남아메리카의 혼곶 Cape Horn을 돌아서 오는 사람들도 있지만, 성질 급한 사람들은 이렇게 먼 길 대신 파나마 지협을 지나는 몹시 위험한 길을 택한다. 사업가들은 서둘러 회사를 차려서 신속히 이 지협에 철도를 건설한다. 성질 급한 사람들이 3, 4주 더 빨리 황금을 캘 수 있게끔 공사는 번개같이 진행된다. 이 과정에서 수천 명의 노동자들이 열병으로 사망한다. 다양한 언어를 쓰고 다양한 인종에 속하는 수많은 사람이 줄지어 대륙을 가로질러 와서는 서터의 땅을 제 땅처럼 파헤친다. 정부와 체결한 계약을 보면 샌프란시스코 땅은 서터의 소유가 분명한데 바로 이 땅에 믿기지 않는 속도로 도시가 세워진다. 타지인들끼리 서터의 토지를 사고판다. 서터가 붙였던 노이 헬베티엔이란 이름은 사라지고 캘리포니아의 엘도라도라는 마술 주문 같은 이름이 남는다.

- 또다시 파산한 서터! 그는 재앙의 씨앗이 낳은 엄청난 결과에 사지가 마비된 듯 꼼짝할 수가 없다. 처음에는 서터도 함께 금을 캘 생각이었다. 하인과 동료들을 동원해서 금을 차지하려 하지만 모두 그를 떠난다. 결국, 그는 금이 출토되는 지역을 벗어나서 외딴 자신의 농장에 처박힌다. 에레미타제 농장은 산등성이에 있고 저 빌어먹을 강과 몹쓸 모래와는 뚝 떨어져 있다.  

- 그러자 서터는 돌연 앞에 나서서 자신의 권리를 주장한다. 샌프란시스코 시가 세워진 땅 전체가 법적으로 자신의 재산이라는 얘기이다. 따라서 국가는 강탈당한 자신의 재산과 손실을 보상할 의무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자기 땅에서 채취된 모든 금에 대해 자신의 지분을 요구한다. 소송이 시작된다. 인류 역사상 여태껏 없었던 엄청난 규모의 소송이다. 서터는 자신의 정착촌에 들어와 사는 1만 7,221명의 농장주를 상대로 소송을 건다. 이들에게 훔친 토지를 내놓으라고 요구한다. 캘리포니아주가 자신이 건설한 도로, 운하, 다리, 댐, 방앗간 등을 거저 점유했으니 주 정부는 그 대가로 2,500만 달러를 지급해야 한다. 합중국은 파괴된 재산에 대한 보상과 채굴된 금에 대한 지분으로 2,500만 달러를 지급해야 한다. 그는 둘째 아들 에밀을 워싱턴으로 보내 법을 공부하게 했다. 소송을 벌이기 위해서였다. 새 농장에서 나오는 엄청난 수입을 모조리 소송 비용에 쏟아붓는다. 4년 내내 서터는 온갖 심급의 법원에서 소송을 벌인다.

- 1855년 3월 15일 드디어 판결이 떨어진다. 캘리포니아 최고위직 판사인 정의파 톰슨은 문제의 땅이 의심의 여지없이 서터의 소유이며 그의 소유권은 침해될 수 없음을 인정한다. 이날 서터는 목표를 이룬다. 그는 세계 최고의 갑부이다.

- 서터가 세계 최고의 갑부라고? 천만의 말씀이다. 이번에도 그렇게 되지는 못했다. 가장 불쌍한 거지에다가 시련에 시달리는 지극히 불행한 사람이 바로 서터다. 운명은 이미 몇 차례 그에게 치명타를 날렸지만, 이번에는 사정없이 주먹을 휘둘러서 그가 영영 바닥에서 일어나지 못하게 만든다. 판결이 알려지자 샌프란시스코와 인근 지역에 폭동이 일어난다. 재산을 잃게 된 수만 명의 사람들은 거리의 폭도와 한패가 되어 신나게 약탈을 하며 미쳐 날뛴다. 그들은 법원으로 몰려가 불을 지르고 린치를 가하기 위해 판사를 찾아 나선다. 이 무시무시한 무리는 서터의 전 재산을 약탈하려고 몰려간다. 서터의 맏아들은 폭도들에게 쫓기다 자살하고 둘째는 살해당한다. 셋째 아들은 도망쳤다가 돌아오는 길에 익사한다. 노이 헬베티엔은 불바다가 된다. 농장은 잿더미가 되고 포도밭은 짓밟힌다. 서터는 수집품과 돈을 비롯한 동산動産일체를 잃는다. 미쳐 날뛰는 무리는 그의 엄청난 재산을 파괴한다. 서터 본인은 가까스로 살아남는다. 

- 서터는 이 치명타를 영영 극복하지 못한다. 그가 이룬 성취는 파괴되었고 아내와 아이들이 죽었으니 정신이 온전할 수가 없다. 오직 하나의 생각만이 총기를 잃은 머릿속에서 도깨비불처럼 번뜩이고 있다. 소송을 벌여서 권리를 되찾겠다는 생각이다. 정신이 혼미한 노인은 이후로도 25년을 남루한 옷을 걸친 채워싱턴의 법원 주위를 맴돈다. 관청 사람들 모두가 더러운 윗도리에 ...

- 여전히 샌프란시스코 전체는 남의 땅이다. 여전히 그의 권리는 실현되지 않고 있다. 상드라르 Blaise Cendrars라는 작가가 잊힌 서터에게 거대한 운명을 겪은 이가 갖는 유일한 권리를 선물했을 뿐이다. 후세 사람들이 감탄하며 기억하는 인물로 남을 권리이다. (서터의 삶을 다룬 상드라르의 소설 <금>은 1925년에 프랑스어로 처음 발표되었고 이후 독일어와 영어로도 번역되었다. - 옮긴이)

(리뷰자 주 : 블레즈 상드라르. 맞다.) 


- 전류를 공급하려면 엄청난 힘을 가진 발전기가 필요한데 어디에 그런 것이 있겠는가?
이렇듯 모든 전제 조건이 미흡하다. 대양 깊숙한 곳에는 자기류 磁氣流가 순환하고 있어서 전류의 방향이 바뀔 수 있다는 사실은 아예 알려지지 않은 상태이다. 충분한 절연체도, 정확한 계측기도 아직 없다. 전기라는 것이 백 년을 잠들어 있다가 방금 깨어난 만큼, 사람들이 아는 것은 전기의 기본 법칙뿐이다. 그래서 학자들은 대서양 연결 계획이 거론되기만 해도 강하게 반발한다. "불가능한 일이다! 황당무계한 생각이다!" 기술자 중 매우 용감한 자들은 "어쩌면 나중에는 가능할 수도 있다"는 의견이다. 전신을 완성시키는 데 크게 기여한 모스조차도 이 계획을 위험부담이 큰 도박이라고 본다. 그러고는 예언이라도 하듯 덧붙인다. "대서양을 가로지르는 케이블이 설치되기만 한다면 그것은 한 세기의 가장 위대한 업적이 될 것이다."

- 기적 혹은 기적과도 같은 일이 이루어지려면 먼저 기적을 믿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학자들이 주저할 때 어떤 소박한 문외한이 용감히 추진하면 창조 작업에 박차가 가해질 수 있다. 대부분 그렇듯이 여기서도 하나의 단순한 우연이 웅대한 계획에 시동을 건다. 1854년 기즈번이라는 영국 기술자는 뉴욕에서 미국 북동쪽 끝 뉴펀들랜드섬에 이르는 케이블을 설치하려고 한다. 그렇게만 된다면 구대륙에서 배가 가지고 온 소식을 며칠 더 빨리 신대륙에서 받을 수 있다. 하지만 자금이 다 떨어지는 바람에 사업을 멈출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는 자본가를 찾으려고 뉴욕으로 간다. 거기서 아주 우연히 -우연은 진정 수많은 위대한 업적의 아버지이다- 한 젊은 남자와 마주친다. 바로 사이러스 필드이다.

 

- 목사의 아들 필드는 벌이는 사업마다 순식간에 성공한 덕에 젊은 나이에 이미 막대한 재산을 모으고는 한가한 생활을 하고 있다. 하는 일 없이 계속 빈둥거리기에는 너무 젊고 힘이 넘치는 사람이다. 기즈번은 이 사람을 뉴욕과 뉴펀들랜드를 잇는 케이블 설치사업의 투자자로 확보하려 한다. 사이러스 필드는 결과를 놓고 보면 다행스럽게도 기술자도 아니고 전문가도 아니다. 그는 전기에 관해서 아는 게 없고 케이블이란 것을 본 적도 없다. 그러나 그의 혈관에는 목사의 아들답게 열렬한 믿음이 흐르고 미국인답게 무모한 모험을 즐기는 기질이 흐른다. 전문 기술자인 기즈번은 뉴욕과 뉴펀들랜드를 연결하겠다는 눈앞의 목표만을 보지만, 젊고 정열에 넘치는 필드는 즉시 그 이상을 내다본다. 그렇다면 바로 해저 케이블로 뉴펀들랜드를 아일랜드와 연결해도 되지 않을까?

- 사이러스 필드는 모든 장애를 극복하겠다는 단호한 기세로 즉시 작업에 착수한다. 이후 목적을 이룰 때까지 서른한 번이나 대서양-을 건너 신구 대륙을 오갈 것이다.   


- 가장 요란스럽게 환호했던 사람들이 오늘은 가장 격하게 분노한다. 뉴욕 시민과 미국 국민은 지나치게 열을 올리며 성급히 열광에 빠졌던 것을 수치스러워한다. 사이러스 필드는 이 분노의 제물이 될 수밖에 없다. 어제만 해도 국민의 영웅이자 위인이라 불리며 프랭클린에 필적하는 인물이며 콜럼버스의 후예라고 추앙받던 사람이 옛날 친구들과 숭배자들을 피해서 범죄자처럼 숨어야 하는 처지가 된다. 하루 만에 최고 자리에 오르더니 하루 만에 모든 걸 잃게 된다. 필드는 끝없이 추락하며 자본을 잃고 신용을 잃는다.  


- 1912년 1월 18일 로버트 스콧, 위도 90도 남극점에서다.

- 20세기가 되면서 비밀이란 아예 없는 세상이 도래한다. 사람들은 육지 구석구석을 탐색하며 아득히 먼바다를 휘젓고 다닌다. 한 세대 전만 해도 홀가분하게 달콤한 늦잠에 취해 있던 이름도 없는 지역들이 있었다. 그런데 이제 그런 지역들은 유럽 시중을 드는 노예 신세가 되어 있다. 오랫동안 사람들은 나일강의 원천지를 찾아 나섰는데 이제는 증기선이 그곳까지 운항한다. 유럽인이 처음 빅토리아 폭포를 대면한 게 불과 50년 전인데 이제 빅토리아 폭포는 꼼짝없이 전력을 생산하는 도구가 되어 있다. 최후의 원시림인 아마존숲은 벌채되었고 유일한 처녀지이던 티벳의 허리띠마저 풀려버렸다. 지식을 축적한 인간은 옛날 지도와 지구의 표기된 '미지의 땅 Terra incognita'이란 용어를 지우고 새 이름을 쓴다. 20세기의 인간은 자신이 사는 별, 지구를 잘 알게 된다. 이제 새로운 길을 찾는 연구자들은 깊은 바다에 사는 환상적인 동물을 찾아 잠수하거나 무한한 창공으로 비상해야 한다. 아무도 밟지 않은 길은 오직 하늘에만 남아 있기 때문이다. 비밀을 잃은 대지가 인간의 호기심을 자극하지 못하는 존재가 되어버린 이후, 이제는 비행기라 불리는 강철 제비들이 경쟁하며 날아올라서 더 높고 더 먼 곳에 이르려고 한다.

- 그러나 지구 최후의 수수께끼는 20세기까지도 그 수줍은 자태를 아무도 못 보게 감추고 있었다. 속속들이 난도질을 당한 지구의 몸뚱이 중 작은 두 점은 인간의 욕망이 닿지 않는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바로 지구의 등뼈를 잇는 남극과 북극이다. 거의 존재감이 없을 정도로 막연하기만 한 이 두 점을 축으로 지구는 수천 년 전부터 자전하고 있다. 이 두 점은 짓밟히지 않은 채 온전히 보존되어 있었다. 지구는 이 최후의 비밀을 얼음 빗장으로 가로막아 놓았고, 영원한 겨울이라는 수문장을 앞세워 욕심 많은 인간을 가로막고 있었다. 그리로 가려면 극심한 혹한과 폭풍을 헤치고 나가야 한다. 죽음을 각오해야 할 만큼 무섭고 위험한 길인지라 용감한 사람들조차 엄두를 내지 못한다. 태양조차도 이 꽉 닫힌 지역을 잠시만 엿볼 수 있을 지경이니 이곳을 본 사람이 있을 리 없다.

- 수십 년 전부터 탐험대들이 잇따라 극지방을 향했지만, 누구 하나 목적지에 이르지 못한다. 둘째가라면 서러울 만큼 용감했던 안드레는 기구 풍선을 타고 남극으로 가려고 하다가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 33년 동안 투명한 얼음관 속에서 잠자던 그의 시체가 최근에야 발견되었다. 정복에 나선 자들 모두 매끈한 얼음 장벽에 부딪혀 실패하고 말았다. 이처럼 수천 년 전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이 땅은 얼굴을 가린 채 인간의 욕망에 맞서서 마지막 승리를 거두고 있다. 처녀다운 수줍음으로 세상의 호기심을 뿌리치고 있는 것이다. 
 
- 외로운 곳에서 2년을 함께 살면서 대원들의 친구가 되어 주었다. 대원들은 말들의 이름을 부르며 여러 차례 다정히 쓰다듬어주곤 했는데 이제는 슬프게도 이 착한 동물들을 죽일 수밖에 없다. 그들은 이 비극의 장소를 '도살장'이라 부른다. 유혈이 낭자한 장소에서 탐험대 일부는 갈라져 돌아가고 나머지 대원들은 최후의 살인적인 구간을 정복하기 위해 나아간다. 남극점을 둘러싼 가파른 빙벽인 비어드모어 빙하를 넘어가야 하는데 그러려면 뜨거운 의지를 활활 불태워야 한다.

- 탐험대의 행군 속도는 점점 줄어든다. 이곳의 눈은 단단하게 덩어리져 있어 썰매를 타지 못하고 질질 끌고 가야 하기 때문이다. 딱딱한 얼음에 썰매의 활대가 부러지고 얼음 알갱이로 울퉁불퉁한 눈밭을 걷느라 발은 상처투성이다. 그러나 그들은 포기하지 않는다. 12월 30일 탐험대는 남위 87도에 이른다. 섀클턴은 이 지점보다 더는 가지 못했다. 여기서 마지막으로 또다시 대원들을 돌려보내야 한다. 남극점까지 갈 수 있는 건 다섯 명의 정예 대원뿐이다. 스콧은 사람들을 골라낸다. 선택받지 못한 사람들은 감히 항의는 못하지만 마음이 쓰리다. 목표가 손을 뻗치면 닿을 듯한데 처음으로 남극을 보았다는 명예를 동료에게 넘기고 돌아서야 한다니! 그러나 선택은 이미 끝났다. 그들은 남자답게 감정을 감추려 애쓰며 악수를 한다. 그러고는 두 개의 작은 그룹으로 나뉜다. 하나는 미지의 땅을 향해 남쪽으로, 다른 하나는 전초기지가 있는 북쪽으로 가려는 것이다. 전진하는 사람도, 돌아가는 사람도 몇 번씩이나 고개를 돌려 멀어지는 동료를 본다. 마지막으로 살아 있는 친구의 모습을 보려는 것이다. 금세 그 모습마저 사라진다. 선택된 다섯 대원은 외롭게 미지의 땅을 향해 나아간다. 스콧, 보워즈, 오츠, 윌슨, 에반스가 바로 그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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