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 이시다 히사쓰구 / 이수경
출판 : 세개의소원
출간 : 2020.09.15
아무리 간단한 문장이라도 100일 동안 매일 꾸준히 기록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도 공을 들여서라니.
저자는 '밑져야 본전이다'는 마음으로 시도해 보라고 말하지만, 나는 '지성이면 감천이다'라는 말이 먼저 떠오른다.
그 정도로 간절한 소원이 있나? 하고 스스로를 되돌아보게 되는 것이다.
가장 기억에 남는 건 "'3년 뒤의 나'는 어떤 모습이면 좋겠는가?"라는 질문이다.
쉽게 답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이런 나의 막연함이 어제와 비슷한 오늘을 살게 하고 있구나 싶었다.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는 중요하지 않다.
내게 달걀이 있다면 부화를 시키면 되고, 닭이 있다면 달걀을 얻으면 된다.
둘 다 없다면?
찾아 나서야겠지.
작은 변화가 큰 물줄기를 바꿀 수 있다고 믿는다.
음... 그런 점에서 '100일 쓰기'...
하지만 아직은 그리 내키지 않는 걸.
꿈이 이루어지는 우주의 법칙
대부분의 꿈이 이루어졌다
"인생은 마음먹기에 달렸다."
- 만약 다음 생에 태어날 때 오직 한 가지만 기억할 수 있다면, 나는 망설임 없이 누군가 내게 해준 이 말을 꼽겠다.
- 그것은 바로 극한까지 내몰려서 몸에서 완전히 힘이 빠졌을 때 소원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자기 계발서를 읽다 보면 '소원은 머릿속에서 지웠을 때 이루어진다'는 내용이 자주 나오는데, 그것과 같은 이치다. 그 상태를 '깨달음'이라고 한다.
- 깨달음이라고 하면 보통 몸을 고통스럽게 만들어 고행을 하는 사람, 몇 시간 동안 앉아서 명상하는 사람, 또는 모든 물욕을 깨끗이 지워버린 사람 등 마치 성자나 도인 같은 특별한 사람을 떠올리기 쉽다. 그런데 막상 "깨달음이란 무엇인가?"라고 물으면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알 수가 없다. 사전을 찾아보면 "사물의 본질이나 의미 따위를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라든지 "불교에서 마음의 어지러움을 버리고 영원한 진리를 터득하는 것"이라고 설명되어 있다. 하지만 머리로는 의미를 이해하더라도 실감하기는 어렵다. 사실 깨달음은 체감하는 것이기 때문에 머리로 이해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 여기에서는 가능한 한 깨달음에 대해 언어로 설명해보고자 한다. 내가 '그렇구나' 하며 고개를 끄덕였던 깨달음에 대한 세 가지를 소개한다.
1. 차이를 없애는 것
2. 자아가 사라지는 것
3. '뭐야, 이거였어?'
- 우리는 예외 없이 이렇게 자신이 만든 필터를 거쳐 세상을 바라보고 이것이 자기만의 인식이나 가치관을 만든다. 39페이지의 그림과 같이 사람들은 이 필터를 통해 보는 것이 세상의 전부라고 믿는다. 만일 자신이 좋아하는 것만 보는 필터를 가졌다면 인생이 행복해지고 반대로 싫은 것만 보는 필터를 가졌다면 불행해진다.
- 내 앞에 상자가 있고 내부를 엿볼 수 있는 구멍이 두 개 뚫려있다고 가정해 보자. 구멍 하나로는 귀여운 고양이가 보이고 다른 하나로는 바퀴벌레가 보인다. 고양이를 보는 사람은 기분이 좋지만 바퀴벌레를 보는 사람은 불쾌할 것이다. 이처럼 우리는 늘 구멍, 다시 말해 필터를 선택하며 살아간다. 그러므로 인생살이가 힘들다고 느껴진다면 눈앞의 필터를 살짝 바꾸면 된다. 우리는 이 세상을 각자 자신이 가진 필터를 통해 바라보지, 있는 그대로 보지 않는다. 깨달음이란 바로 이 필터를 걷어버리는 ...
- 완성된 구두는 좋은 값에 팔렸고, 그 돈으로 가죽을 사서 다시 구두를 만들 수 있었다. 그리고 구두 판 돈으로 다시 가죽을 살 수 있었다. 이렇게 반복하는 동안 어느새 돈도 벌고 소원도 이루어졌다. 바꾸어 말하면 지금까지 위험하다고 생각했던 변화를 잠재의식이 받아들인 것이다.
-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잠재의식이 극도의 스트레스 상태에 놓였다는 점이다. '가난'과 '구두를 만든다'는 상반된 현상이 충돌하는 딜레마에 빠지면서 큰 스트레스를 받은 것이다. 가난을 유지하면 구두를 만들 수 없다. 구두를 계속 만들면 가난을 유지할 수 없다. 곤란에 빠진 잠재의식은 의식에 도움을 구한다. 이때 의식이 내린 지령은 '구두를 만들어 풍족하게 살라'이다. 그리고 '구두를 만들면서 가난하게 산다'는 지금까지의 현상을 일단 리셋하는 것이다. 다른 소원도 이와 마찬가지다.
- 의식으로부터 '매출을 올리고 싶다'는 지령(소원)을 받았지만 잠재의식은 변화가 두려워 지금처럼 매출이 적은 상태를 유지하고 싶다. 이 사람은 매출을 늘리기 위해 부지런히 몸을 써서 일한다. 게다가 이대로 계속 매출이 오르지 않으면 '계속 일하는' 현상을 유지할 수 없다. 어쩌지, 어쩌지, 어쩌지, 스트레스를 받다가 뻥! 의식의 지령은 계속 일하는 것이므로 이제는 매출을 늘리는 수밖에 없다. 지금까지의 현상이었던 '매출이 오르지 않는데도 계속 일한다'를 일단 리셋하고 '매출을 늘려서 계속 일한다'는 변화를 받아들인다. 이것이 바로 소원 실현의 과정이다.
- 결혼 상대를 찾는 소원도 여기에 대입해 보자. 잠재의식은 이런 식이다. 지금까지 살던 대로 독신 생활을 유지하고 싶다. 하지만 이 사람은 열심히 결혼 상대를 찾는다. 잠재의식은 어떻게든 소원을 방해하고 싶은데 아직도 계속 결혼하려고 노력한다. 남자를 만나고 이야기를 나누고 외모에도 신경 쓰면서 적극적으로 애쓴다. 결혼하고 싶다는 의식도 강하다.
스트레스+릴랙스=꿈의 실현
- 지금까지 이야기한 잠재의식이 일으키는 '현상의 리셋'은 긴장이 확 풀린 이완 상태에서 일어난다. 가령 '잔다', '잊는다', '몰두한다', '체념한다' 같은 행동이 리셋에 해당한다. 돈다발을 계속 움켜쥐고 있는 것은 스트레스 상태다. 움켜쥐고, 또 움켜쥐고, 끝까지 움켜쥐었다가 놓으면 쾌감이 느껴진다. 하지만 돈다발을 쥐었던 감각은 남아 있다. 돈을 가질(벌) 힘도 생겼다. 나중에는 '스트레스를 좀 덜 받고 돈다발을 움켜쥘 수 있겠다'같은 느낌이다.
- 나는 요가를 배우면서 그 메커니즘을 깨달았다. 요가는 몸에 부하를 주어서 말 그대로 스트레칭(스트레스를 가한다)하는 것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스트레스를 받은 상태가 아니라 그 후에 이완하는 것, 다시 말해 릴랙스다. 이 이완된 감각이 요가의 묘미다. 하지만 이 묘미를 맛보려면 극한까지 스트레스를 주어야 한다. 따라서 스트레스와 릴랙스는 늘 세트다. 릴랙스를 위해서는 스트레스가 반드시 필요하고, 스트레스를 주면 언젠가는 릴랙스로 전환한다.
- 마음속으로 소원을 강하게 원하는 것 역시 큰 스트레스다. 그 스트레스가 계속되면 나중에 뻥 하고 터져 릴랙스로 전환된다. 그때가 소원이 실현되는 순간이다.
- "꿈을 이루는 최고의 방법은 죽을 만큼 간절히 염원하고, 강하고 선명하게 이미지화하는 것. 그리고 술을 마시며 이야기하는 것."
이것은 영화배우, 코미디언뿐만 아니라 사업가로도 성공한 시마다 신스케가 경영하는 횟집에 걸려 있는 문구다.
-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했지만 자신이 천사라는 것에 한 치의 의심도 없는 모습이었다. 나도 당연히 처음에는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다가 넌지시 말을 걸어보았다.
"천사는 무슨 일을 합니까?"
"남을 행복하게 하는 일을 합니다."
참으로 평범한 대답에 바로 흥미가 사라졌다. 하지만 갑자기 대화를 중단할 수도 없어서 계속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그렇다면 한 가지 물어봅시다. 세상에는 왜 이렇게 불행한 사람이 많을까요? 천사가 일을 제대로 하는 겁니까?"
이때 그의 대답이 정말 흥미로웠다. '행복은 마음먹기에 달렸다든지 '이미 행복한데도 행복한 줄 모르고 있을 뿐'이라는 뻔한 대답을 할 거라는 내 예상이 완전히 빗나갔다.
"아무도 내게 소원을 빌지 않기 때문이죠."
- 그 말을 듣고 보니 정말 그랬다. 만일 눈앞에 천사가 나타나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다고 해도 부탁하지 않으면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소원을 이루고 싶다면 천사에게 빌 정도의 명확한 바람, 욕망이 있어야 한다.
- 다만 한 가지 큰 의문이 들었다. 자기 계발서를 읽거나 세미나에 참가하는 사람은 대부분 소원이 명확할 텐데, 그럼에도 소원을 이루지 못한 사람이 여전히 많다. 왜 그럴까? 천사는 이렇게 대답했다.
"나도 바쁘기 때문에 작은 소원은 들어주기 어렵지요."
- 그 소원이 단순히 자신의 욕구를 만족시키는 정도라면 그것은 작은 소원이다. 천사가 말하기를, 한 번에 가능한 한 많은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는 것을 소원하라는 것이다. 한 사람보다 열사람, 열 사람보다 백 사람이 행복해지는 소원이 아니면 천사는 돕기 어렵다고 했다. 가령 '벤츠를 타고 싶다'는 소원을 이루어주면 실제로 행복해질 사람은 자신과 외제차 딜러, 그리고 자동차 회사 정도다. 또 월수입 1000만 원이 소원이라면 그 소원으로 행복해지는 사람은 누구일까?
- 그렇게 열심히 일하다 문득 깨달았을 때 거기에 자아는 없다. 그 순간 우주의 무한한 에너지가 소원에 주입되어 급가속하며 실현을 향해 달려간다. 천사도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자신의 능력을 모조리 발휘한다. 결국 천사는 욕심쟁이다. 한 번에 가능한 한 많은 사람을 행복하게 하려고 하니까 말이다. 그러므로 여러분도 욕심쟁이가 되어야 한다. 작은 소원에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큰 소원을 이루려고 욕심을 부려야 한다.
- "네 생각이 정 그렇다면..." 하면서 지금까지와는 반대로 남자 친구와의 교제를 응원해 줄지도 모른다. 여기에서 가장 큰 포인트는 '고맙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 감사하는 것이다. 엄마는 딸의 안심과 안전을 지키려고 반발했다. 딸이 그런 엄마의 마음을 이해하고 그것을 말과 태도로 보여준다면 정말로 딸을 걱정하는 엄마라면 더는 반대할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이 잠재의식의 메커니즘이다.
- 잠재의식은 늘 최선을 다해서 안심과 안전을 지키려고 애쓴다. 잠재의식에게 가장 위험한 존재는 변화이고, 그것이 아무리 바람직한 일이라도 잠재의식이 바라는 것은 지금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잠재의식의 임무는 감사로 인정받는 순간 완료된다.
- 잠재의식에 안심과 안전을 전하는 방법이 바로 감사다. 고맙다는 말은 곧 괜찮다는 뜻이다. 다른 사람이 친절을 베풀었을 때 고맙다고 인사하는 것은 '당신의 친절로 나는 괜찮아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 남이 베푸는 친절을 거절할 때도 고맙다고 말한다. 이것은 당신의 친절을 받지 않아도 나는 이미 괜찮다는 의미다. 이로써 친절을 베푸는 사람의 임무는 끝이 난다.
- 당신의 소원이 실현되지 않는 것은 잠재의식이 착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잠재의식이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당신을 위험에 처하게 하고 싶지 않고, 당신의 안전한 환경을 변화시키고 싶지 않은 것이다. 실로 사랑 그 자체다. 그 사랑에 응하려면 감사하는 수밖에 없다.
- 당신의 소원을 이루어주지 않는 것도 잠재의식이고 이루어주는 것도 잠재의식이다.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처음에는 어떻게든 위험에 처하지 않게 하려고 최선을 다해 저지한다. 이때 당신이 잠재의식의 의도를 이해해주기만 하면 잠재의식은 긴장을 풀고 오히려 당신을 응원한다. 감사하는 마음을 전하는 것이다. 그러면 잠재의식은 힘을 빼고 릴랙스 된다. 이것 역시 깨달음이고, 이때 비로소 진짜 소원이 이루어진다.
- 이 모든 메커니즘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소원을 명확히 한다 → 소원을 이루기 위해 강하게 집착한다(스트레스를 받는다) → 힘이 빠질 때까지 집착한다 → '위해서'라고 생각한다 → 감사한다 → 힘이 빠진다=깨달음(릴랙스 한다)→ 소원이 이루어진다 ]
- 나처럼 아무것도 가진 게 없었는데, 그렇게 빈손에서 시작해 겨우 넉 달 만에 매달 1000만 원 이상을 벌게 되었다고 했다.
어느 날 친구 서너 명이 모여서 '너 진짜 대단하다, 부럽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그가 한마디 불쑥 내뱉었다.
"나 그거 아직도 계속하고 있어."
- 그것이란 예전에 그 자리에 있던 다른 친구들도 함께 들은 이야기였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때나 지금이나 수입에 변화가 없고 그런 이야기를 들었다는 것조차 잊고 있었다. 그것은 어떤 비즈니스에 성공한 사람이 극비라며 알려준 방법이었다.
'소원을 날마다 종이에 열 번 쓴다.'
- 그는 종이에 날마다 열 번씩 "월 수입 1000만 원을 넘었다"라고 쓴다고 했다. 물론 이것 말고도 성실하게 일했기 때문에 얻은 결과였겠지만, 겨우 넉 달 만에 그것을 꾸준히 실천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명암이 갈렸다. 실로 놀라운 이야기였다.
- <실천 6단계>
1단계 : 필기도구와 이 책의 부록인 비법 노트를 준비한다.
(필기도구는 2색 볼펜, 비법 노트는 시중에서 판매하는 수첩 크기의 노트로 대신해도 된다.)
2단계 : 세 가지 소원을 정한다.
(100일 후에 이루어질 것으로 정한다. 부정어와 형용사는 사용하지 않는다. 완료형이나 진행형으로 한다. 소원은 각각 15~25자 사이로 한다. 자기 이외의 누군가가 행복해지는 모습을 머릿속으로 그린다.)
3단계 :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 잠시 참는다. 그사이에 첫 번째 소원을 세 번 쓴다. 그다음 크게 숨을 내쉰다.
4단계 : 다시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 잠시 참는다. 그사이에 두 번째 소원을 세 번 쓴다. 그다음 크게 숨을 내쉰다.
5단계 : 다시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 잠시 참는다. 그사이에 세 번째 소원을 세 번 쓴다. 그다음 크게 숨을 내쉰다.
6단계 : 마지막으로 릴랙스 하면서 '고맙습니다'라고 한 번 쓴다.
- <실천 규칙>
100일 동안 매일 밤 자기 전에 여섯 단계를 반복한다.
(각 페이지에 날짜와 며칠째인지 적어두면 좋다.)
각 소원을 쓸 때 전날 쓴 소원은 보지 않는다.
(소원을 쓰는 표현은 매일 조금씩 달라져도 된다.)
정성껏 마음을 담아서 쓴다.
(단, 한 번에 쓴다.)
깨달은 점이 있다면 노트 여백에 적어둔다.
(빨간색으로 쓰는 것이 좋다.)
100일 이내에 한 가지 소원이 이루어졌다면 한 단계 더 나아간 소원으로 바꾼다.
소원이 이루어졌든 이루어지지 않았든 100일만 한다.
(다음에 같은 소원을 다시 쓸 때는 100일 이상 간격을 둔다.)
하루도 빠뜨리지 않고 쓴다. 만일 쓰는 것을 한동안 잊어버렸다면 처음부터 다시 한다.
(깜빡했을 때는 다음 날 일어나서 1시간 이내에 쓰면 괜찮다. 단 세 번까지만.)
- 어쩌면 '이렇게 한다고 정말 소원이 이루어질까?', '대체 뭐가 비법이라는 거야?'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 회사를 그만둔 후 정말로 가진 게 아무것도 없던 나는 이 비법을 터득하기 전까지 세간에 효과가 있다고 알려진 비법이란 비법은 모두 실천했다. 예를 들면 이런 거다.
'보름달 빛에 통장을 비춰보면 임시 수입이 생긴다.'
'1달러짜리 지폐를 지갑에 넣어두면 돈이 들어온다.'
'만트라(신비한 힘이 있는 문구. 원래는 <베다> 성전 중 찬가 - 옮긴이)를 외면 부자가 된다.'
특히 돈에 관한 것이라면 닥치는 대로 따라 했다. 사실 모두 주술적인 것이어서 효과가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모르겠다. 당시에 들은 이야기 중에는 전 재산과 맞바꾸어서 배워야 할 만큼 대단한 비법이라는 것도 있었다. 효과가 절대적이라고 했다.
- 예전에 코칭을 시작하고 몇 달 뒤, 수행한다는 생각으로 '무료 100명 코칭'을 실행하던 때의 일이다. 그때 나는 무서운 사실을 한 가지 알았다. 세상 사람 중에는 명확한 목표가 없는 사람이 많다는 것이었다. 하루하루를 아무 생각 없이 사는 사람이 많았다. 그들은 매일 판에 박힌 듯한 하루를 보내면서 그저 숨만 쉬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면서 늘 마음 한구석에는 막연한 불안과 불만을 품고 있었다. 돈 걱정, 건강 걱정, 인간관계 걱정, 결혼 걱정 등. 그렇다고 자신이 어떻게 하고 싶은지 명확하게 표현하지도 못했다.
- 어느 날 평소처럼 집단 활동에서 "3년 뒤에는 어떻게 살았으면 좋겠습니까?"라고 물었더니 대답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좋습니다. 그럼 가령 경제적으로 자유롭고 싶다든지, 시간적 여유가 있으면 좋겠다든지, 뭐 그런 생각을 해본 적 없습니까?"라고 묻자 "아, 그걸로 하겠습니다"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이래서야 코칭을 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안타깝지만 자기 인생은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
- 좀 더 구체적인 상황으로 쓰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잠재의식이 헷갈리지 않는다.
반드시 이루어지는 목표를 정하고 싶다면 다음의 SMART 모델을 기준으로 삼으면 좋다.
S: Specific 구체적이다
M: Measurable 측정 가능하다
A: Achievable 달성 가능하다
R: Reasonable 가치관에 부합한다
T: Time 정해진 날짜가 있다
- 어쨌든 기본적으로는 자기 전에, 하루도 빠짐없이 쓴다. 잠재의식은 리듬이 중요하다고 말했는데, 날마다 쓰는 리듬이 도중에 깨져버리면 전체가 무너진다. 그 하루의 실수가 계속 꼬리를 잡고 흔들어서 결국 큰 차이를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리듬이 깨졌다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 그런 만큼 절실한 마음으로 하길 바란다.
- 날마다 쓴다는 것이 간단해 보이지만 사실은 매우 힘든 일이다. 해보면 안다. 겨우 1분 정도 걸리는 작업이지만 이게 상당한 스트레스다. 이 스트레스가 중요하다. 100일만 하면 일단 해방되는데 스트레스가 많이 쌓일수록 에너지도 압축되어 릴랙스 했을 때 폭발력이 엄청나다. 이것을 깨달음이라고 설명했는데, 그렇게 해서 소원도 이루어지는 것이니 우선 100일 동안 열심히 해보자.
- 이런 의심이 들수록 소원의 실현이 가까워지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중간에 그만두는 이유를 객관적으로 알아두기만 해도 불쑥불쑥 나타나는 잠재의식의 저항에 휩쓸리지 않게 된다. 이것은 비법뿐만 아니라 다이어트, 근력운동, 공부, 일찍 일어나기처럼 일상생활에서 겪는 일에서도 마찬가지다. 어떤 일에 자극을 받아서 한 결심이 2~3일은 쉽게 가지만 꾸준히 지속하기는 매우 어렵다. 오죽하면 작심삼일이라는 말이 있을까.
- 한번 하겠다고 결심한 일인데 도저히 계속하지 못할 때 누구든 곧바로 자기 상황에 맞는 이유를 찾아낸다. '아무래도 아닌 것 같다', '지금은 때가 아니다', '계속할 수 없다는 걸 알게 된 것만으로도 다행이다', '해보지 않으면 모른다' 등등 실로 다양한 변명을 쏟아낸다. 그런 변명은 모두 '잠재의식이 저항하기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다.
- 소원이란 미래에 바라는 변화다. 그곳을 향해 언덕을 오르면 언젠가는 도착, 다시 말해 소원을 실현할 수 있는데, 이 언덕을 오르는 일이 만만찮다. 미끌미끌한 언덕을 아무런 장비도 없이 오르는 것과 같다. 그런데 이 언덕을 만들고 있는 것이 바로 실현을 멀어지게 하는 빌리프다.
- 사실 이 우주에는 어느 것 하나도 예외 없이 늘 질량이 일정하다. 요컨대 일정한 에너지를 얻으면 그에 상응하는 에너지를 방출해야만 한다. 이 에너지에 해당하는 것이 행동이다. 지구는 행동의 별이고, 우주가 유일하게 우리에게 기대하는 에너지가 바로 행동이다. 우주에 '월수입 1000만 원'을 요청했다면 그에 걸맞은 에너지, 즉 행동을 보여주어야 한다.
- 인간을 제외한 동물은 본능에 따라 정해진 대로 살아가면 된다. 하지만 인간은 의식이 본능을 지배하기 때문에 자신의 삶을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 이것이 인간 세계에 차이가 생기는 이유인데, 그렇다고 '준 에너지와 받은 에너지는 늘 일정하다'는 우주의 법칙에서 벗어나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어떤 소원이든 그 소원에 걸맞은 에너지 등가의 행동을 해야 한다. 따라서 소원이 실현되지 않는 사람은 늘 '행동 < 소원' 방정식을 따르고 있는 것이다. 소원을 실현하려면 '소원 < 행동'이어야 한다. 따라서 소원이 실현되지 않는 사람은 소원과 행동 사이에 간극이 있다. 그 간극, 즉 공백은 그냥 내버려 둬도 메워지는 성질이 있다.
- 예를 들어 1만 피스짜리 직소 퍼즐이 있다고 치자. 열심히 맞췄지만 조각이 하나 모자란다. 겨우 사방 2센티미터짜리 조각하나 빠졌는데 그로 인해 전체 퍼즐에 구멍이 생겼다. 당신이라면 이 퍼즐을 방에 걸어둘까? 보통은 걸지 않는다. 제조 회사에 요청해서 퍼즐 조각을 다시 받아 끼워 맞춰 벽에 걸든지,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서랍에 처박아둘 것이다. 기분이 좋지 않을 테니까. 그렇다, 인간은 공백이 생기면 굉장히 불안해진다. 이는 미지의 것, 알 수 없는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사람들은 왜 도깨비를 무서워할까? 그것은 도깨비가 위해를 가해서가 아니라 위해를 가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요컨대 알 수 없기 때문에 두려운 것이다. 하지만 정체를 알면 아무것도 아니다. 여담이지만 나도 어렸을 때 유령을 자주 보았는데, 그 정체를 알고 난 뒤로는 보이지 않았고, 당연히 무서워하지도 않았다. 그 정체란 '왠지 기분 나쁜 감각'이 시각화된 것이었다.
- 인간에게는 '미지'를 '기지'로 만들고 싶어 하는 성질이 있고, 그 원천은 미지(공백)에 대한 불안함이다. 그런데 소원과 행동 사이에 공백이 있으면 보통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공백을 메우려고 한다. 또는 소원을 하향 수정해서라도 '소원 < 행동'으로 만들려고 한다.
- 그런데 여전히 '행동 < 소원'인 채 소원을 이루지 못한 상태에서도 아무렇지 않게 지내는 사람이 많다. 왜 그럴까? 그것은 공백을 메우는 다른 재료가 있기 때문이다. 그 재료란 무엇일까?
- 이와 같은 변명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간단히 반문할 수 있다.
• 사실 돈이 그렇게까지 많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할까?
• 힘들게 고생하면서까지 돈에 얽매이고 싶지 않다. → 월수입 1000만 원인 사람이 모두 힘들게 돈을 벌까?
• 점을 보니까 지금은 때가 아니라고 한다. → 당신의 인생을 점으로 결정할 텐가?
• 월수입 1000만 원이 되면 친구를 잃는다더라. → 누가 그렇게 말하는데? 근거는?
• 능력, 학력, 경험이 없기 때문에 나한테는 무리다. → 그런 조건 없이도 부자가 된 사람이 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데?
• 내 주위에 월수입 1000만 원인 사람이 없으니까 나도 좀 어렵지 않을까? → 찾아보지 않아서 모르는 게 아닐까?
- 이런 식으로 모든 변명에 하나하나 반문하다 보면 '어쩌면 월 수입 1000만 원이 가능할 수도 있겠다'며 행동으로 나서게 된다. 다시 말해 소원과 직결되는 행동으로 공백을 메워가는 것이다. 이처럼 변명을 제거하는 것은 모든 소원에 유효하다. 거꾸로 말하면 소원을 실현하는 사람은 변명하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애초에 변명 따위가 없다.
- 그러므로 만일 소원이 실현되지 않고 목표를 달성하지 못해서 고민이라면 일단 자기 자신에게 이렇게 반문해 보는 게 좋다.
'그 소원을 방해하는 변명은 무엇인가?'
- 소원을 이루려면 분노가 필요하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존재 가치가 있다. 이것은 소원 실현을 위해서는 물론이고 풍족하고 즐겁게 살아가기 위해서도 빼놓을 수 없는 요소다. 그런데 왜 이처럼 중요한 것을 잃어버리는 사람이 있을까? 여기에도 안심과 안전을 향한 잠재의식의 강한 욕구가 숨어 있다. 가치를 빼앗긴 채 성장한 사람은 어렸을 적 가치를 빼앗은 사람과의 사이에 어떤 거래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빼앗은 사람은 주로 부모(그 밖에 가족, 선생님, 친구 등인 경우도 있다)다. "너 같은 애는 태어나지 말았어야 해"라는 말을 듣고 자란 사람은 애초에 우주에서 부여한 존재 가치를 빼앗긴 대신 잠재의식이 원하는 안심과 안전을 받아들인 것이다.
- 가치는 누구에게나 똑같이 존엄한 것이므로 빼앗아서도 빼앗겨서도 안 된다. 만일 누군가 내 가치를 훼손하려고 한다면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이때 필요한 감정이 바로 분노다. 분노는 자기에게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서 꼭 필요한 감정이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소중한 가치를 다른 사람이 빼앗으려 할 때 보통은 분노로 방어할 수 있다.
- 하지만 빌리프가 형성되는 유소년기에 부모와 자녀 사이에는 힘이라는 면에서 엄청난 차이가 존재한다. 분노는 상대를 공격하는 에너지이지만 압도적으로 힘이 센 부모 앞에서는 무용지물이다. 왜냐하면 부모에게 화를 내며 공격하면 그보다 몇 배로 강한 보복이 되돌아오니까. 그래서 잠재의식은 스스로 '안심과 안전을 지키기 위해서 화를 내는 대신 가치를 내놓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나는 가치가 없다'는 믿음, 그리고 분노를 봉인한 채 어른이 된다.
- 반면 심각할 정도로 가치를 빼앗긴 채 자랐음에도 오히려 그 상황을 발판 삼아 열심히 노력하고 더욱 창조적인 활동으로 성공한 사람도 있다. 자신이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대체로 인생에 쉽게 절망하고, 그렇게 인생을 흘려보낸다. 하지만 힘든 환경을 딛고 일어서는 타입은 '나는 가치가 없다'는 생각 자체에 반항한다. 그래서 주위 사람들에게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는 것을 인생의 첫 번째 목표로 삼고 활동 범위를 넓힌다.
- 안심과 안전을 지키기 위해 분노를 봉인하고 자신의 가치를 내주고 살아온 사람들. 그들은 소원을 이루기를 포기할 것인가, 아니면 가치를 되찾기 위해서 자신에게 상처를 주더라도 열심히 살아야 할까? 어느 쪽이든 사는 것은 힘든 일이다. 사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럽다. 이는 단순히 정신적인 면뿐만 아니라 현실이라는 면에서도 큰 영향을 미친다.
- 제2장에서 이야기했듯이 애초에 인간의 감정은 흥분에서 시작해 쾌와 불쾌로 분화한다. 그리고 거기에서 다시 네 가지 감정으로 가지를 뻗는다. 인간의 네 가지 기본 감정인 기쁨, 분노, 슬픔, 두려움이다.
- 기쁨은 삶의 윤활유로 꼭 필요하다. 분노는 현재에 중요한 것을 지키는 데 필요하다. 슬픔은 과거에 잃어버린 것을 극복하는데 필요하다. 두려움은 미래의 위험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는 데 필요하다. 말할 것도 없이 모든 감정이 꼭 있어야 하고 중요하기 때문에 기본으로 갖추고 태어나는 것이다. 흔히 분노, 슬픔, 두려움은 부정적인 감정이라고 여기기 쉽다. 하지만 결코 부정되어서는 안 되는, 인간으로서 살아가기 위해, 나답게 즐겁게 살기 위해 없어서는 안 되는 감정이다. 그런데 분노, 슬픔, 두려움 중에서 특히 분노는 드러내지 않는 편이 좋다는 인식이 있다. 남 앞에서 분노를 표출하는 것은 보기에도 좋지 않고, 때로는 남에게 상처를 주거나 자신이 상처를 입기 때문이다.
- 분명 일상생활에서 분노는 밖으로 드러내지 않는 편이 좋을 때가 많다. 그리고 특히 어려서부터 분노를 드러내지 않도록 교육받은 사람은 어른이 된 뒤에도 화를 잘 내지 못한다. 그래서 분노가 생길 때마다 그냥 마음에 담아둔다. 이렇게 차곡차곡 쌓인 분노는 어떻게 될까?
- 몸에 쌓인 분노는 다음과 같이 두 가지 영향을 미친다.
• 분노를 증명해 보일 현실을 끌어당긴다.
• 다른 사람에게 향해야 할 분노가 자신에게 향한다.
- 앞에서도 여러 번 이야기했듯이 잠재의식은 바로 몸이다. 다시 말해 몸이 감정을 기억하고 잠재의식이 현실을 끌어당긴다. 그렇기 때문에 '잠재의식=몸=감정'이다.
- '끌어당김의 법칙'이 생각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면 그 원인은 이렇다. 머리로는 하고 싶다고 생각해도 몸이 기억해 버린 감정이 그 소원을 방해해 역효과가 나는 것이다. 가령 결혼하고 싶다고 생각(의식=머리)해도 감정(잠재의식=몸)이 거부반응을 일으킴으로써 '역시 불가능한 일'이 되는 것이다. 그만큼 감정의 힘은 절대적이다. 이미 이야기했듯이 사고의 2만 배니까.
- 그리고 사람은 늘 무의식적으로 어떤 감정을 품고 사는데, 그중에서도 네 가지 기본 감정이 강력하게 현실에 영향을 미친다. 기쁨이 크면 당연히 현실도 기쁨으로 가득 차지만, 분노가 봉인된 채로 마음 밑바탕에 깔려 있다면 그 감정이 그대로 현실이 되어버린다. 다시 말해 분노를 증명해 보일 현실을 끌어당기는 것이다. '왠지 화나는 일이 많다', '나만 불행하다', '운이 나쁘다'는 생각이 자주 든다면 원인은 모두 몸에 쌓인 분노에 있다. 그것이 바로 끌어당김의 법칙이니까.
- 이와 함께 중요한 것을 지키는 데 꼭 필요한 공격 에너지가 타인이 아닌 자신을 향해 칼끝을 겨누는 일이 있다. 그래서 자신에게 상처를 입힌다. 원인을 규정할 수 없는 난치병 환자들을 살펴보면 그 원인에 분노가 숨어 있는 경우가 많다. 고통스러운 삶을 해결하기 위한 키포인트 역시 분노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분노를 해방시키는 것이야말로 빼앗긴 가치를 되찾고 '애초에 소원은 이루어지지 않는다'라는 믿음을 없애버리는 계기가 된다. 분노는 봉인이 아니라 분출시켜야 한다
- 진짜 감정에 충실해야 한다. 내가 정신세계에 관한 공부를 하면서 가장 엉터리라고 생각한 것도 이 부분이었다. 보통 영적인 사람, 정신성이 높은 사람, 파동이 높은 사람, 달관한 사람은 '화를 내지 않는다', '슬퍼하지 않는다', '두려워하지 않는다', '언제나 빙긋이 웃는다' 등등의 오해들을 한다.
- 소중한 사람을 잃었을 때는 그저 하염없이 슬픔의 눈물을 흘린다. 있는 그대로의 감정에 솔직한 것, 이것이 선의 깨달음이다. 마찬가지로 소중한 것을 빼앗기면 화를 내도 된다. 뭔가 걱정스러운 일이 있다면 두려워해도 된다. 감정을 죽이고 늘 방긋방긋 웃을 필요는 없다. 그것은 깨달음도 뭣도 아니다. 정신세계에 관심 있는 많은 사람들이 깨달음을 오해한다. 게다가 깨달은 사람은 감기에 걸리지 않는다, 돈 욕심도 없다, 섹스도 하지 않는다, 욕심도 없고 부처님처럼 언제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웃는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심지어 그렇게 되려고 노력하고, 다른 사람에게도 그렇게 하라고 요구하기도 한다. 나도 언뜻 보면 정신세계 분야(실제로도 어설픈 정신세계 분야지만)인 '우주와 사이좋게 지내기'라는 블로그를 운영하고 있지만 나는 화나는 일이 있으면 곧바로 글로 써버린다.
- 뭐, 확실히 내 그릇이 좀 작기는 하다. 하지만 화나는 건 화나는 거다. 나는 특별히 좋은 사람이 될 생각은 조금도 없다.
많은 사람이 오해하는데, 깨달음을 얻었다거나 정신수양을 하는 것과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은 전혀 관계가 없다. 오히려 평소에 좋은 사람이라는 소리를 듣는 사람이 훨씬 문제가 많다. 그건 솔직하지 않다는 뜻이니까. 화가 나면 화를 낸다. 이것이 자연스럽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다. 물론 기쁠 때는 솔직히 기뻐하면 된다. 이런 솔직한 감정을 억누르면 그저 무난하기만 한 사람이 된다. 좋은 사람이란 '이래도 흥 저래도 흥'인 사람이다. 남자나 여자나 좋은 사람이 인기 있는 경우는 거의 없다. 일할 때도 잘한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그보다는 있는 그대로 자신의 기분에 솔직한 것, 이것이 자기다움이고, 이것이 깨달음으로 통하는 본연의 자세다.
- 쓰는 것만으로도 감정이 해방된다. 언뜻 부정적인 감정이라고 생각하기 쉬운 분노, 슬픔, 두려움은 인간에게 꼭 필요한 것이지만, 또 그런 이유로 봉인되는 경향이 있다. 화를 잘 내는 사람은 피하게 된다. 울보나 겁쟁이라고 생각하면 우습게 본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감정은 드러내지 않는 편이 득이 된다. 우리는 실제로 그렇게 교육받으면서 자랐다. 이렇게 드러내야 할 감정을 억누른 결과 분노, 슬픔, 두려움을 증명해 보일 현실을 끌어당겨 자신을 불행하게 만들기도 한다. 게다가 그런 감정은 '나는 가치가 없다'라는 빌리프와 짝을 이루어 점점 자신을 괴롭히고 삶을 고통스럽게 만든다. 만일 괴롭고 힘든 상황에서 자유로워지고 싶다면 우선 솔직해지자.
- '나는 화를 내도 된다.' '나는 슬퍼해도 된다.' '나는 두려워해도 된다.'
먼저 이것부터 인정하고, 화가 날 때는 화를 내고, 슬플 때는 울고, 두려울 때는 몸을 움츠리고 무서워한다.
- 그다음, 준비가 되었다면 이렇게 말해보는 것도 좋다.
'나는 화가 난다. 왜냐하면...' '나는 슬프다. 왜냐하면...' '나는 두렵다. 왜냐하면...'
'왜냐하면' 뒤에는 무엇 때문에 화가 났고, 뭐가 슬프고, 뭐가 두려운지를 구체적으로 말하면 된다. 그리고 종이에 써본다. 그러다 보면 머리로 피가 솟구치기도 하고, 눈물이 나기도 하고, 몸이 부들부들 떨리기도 할 것이다. 그래도 괜찮다. 오히려 그렇게 하면 감정이 적절히 해방된다. 어쨌든 쓰고 쓰고 또 쓴다. 마음 내키는 대로 마구 휘갈겨 써도 된다.
- 사실 가장 좋은 방법은 분노, 슬픔, 두려움을 확실히 받아줄 사람이 있는 것이다. 그런 사람이 가까이 있다면 더욱 좋은데, 다만 이때 이야기를 들어주고 감정을 받아줄 상대의 그릇이 커야 한다. 어설픈 사람이라면 격렬한 감정에 짓눌려 서로 괴로워질 수 있다.
- 주위에 그렇게 받아줄 사람이 없다면 종이에 적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자신이 얼마나 화가 났는지, 슬픈지, 두려운지, 그저 쓰기만 하면 된다. 나도 매일 블로그에 글을 올리는데, 앞에서 말한 것처럼 가끔 화나는 일을 솔직히 쓸 때가 있다. 그렇게 하면 분노의 감정이 눈처럼 녹아서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다시 웃으며 지낼 수 있다.
- 끌어당김의 법칙에 따르면 감정은 현실을 끌어당긴다고 한다. 분노가 쌓여 있으면 그것이 더욱 화나는 현실을 끌어당긴다. 슬픔이 쌓이면 더 슬픈 현실을 끌어당기고, 두려움이 쌓이면 더욱 두려운 현실을 끌어당긴다. 이 같은 현실에서 벗어나려면 분노, 슬픔, 두려움이라는 감정을 글로 쓰는 행위로 적절히 처리해야 한다. 그러고 나면 네 가지 기본 감정 중 하나인 기쁨이 남는다.
- 기쁨, 분노, 슬픔, 두려움은 모두 인간에게 필요한 감정이지만 기쁨과 분노, 슬픔, 두려움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분노, 슬픔, 두려움은 적절히 드러냄으로써 해소되는 데 반해 기쁨은 오히려 드러낼수록 커진다. 기쁨은 드러낼수록 자신을 더 기쁘게 해 줄 현실을 끌어당긴다. 그러면 기쁨은 더욱 커지고, 그렇게 커진 기쁨을 증명해 줄 현실을 또 끌어당긴다. 그러면 기쁨은 더더욱 커지고, 그 커진 기쁨을 증명해 줄 현실을 또 끌어당긴다. 결국 기쁨은 눈덩이처럼 걷잡을 수 없이 커진다. 점점 더 두근두근 설레고 가슴이 부풀어 오른다. 나는 이런 현상을 '기쁨의 거대화'라고 부른다.
- 배운 사람이 평생 자전거 타는 법을 잊지 않듯이 앞으로의 인생은 즐거운 일로 가득해진다.
내가 바로 그렇다. 지금은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고 수입도 그럭저럭 괜찮고 건강한 몸으로 즐겁게 하루하루 살고 있지만, 프롤로그에도 썼듯이 20대부터 30대 초반까지의 인생은 정말 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일은 힘들고 월급은 오르지 않았으며 스트레스로 점점 살이 쪄서 건강에도 적신호가 오고, 게다가 미래도 어두웠다. 그렇게 별 볼일 없던 월급쟁이의 인생이 어떻게 지금처럼 행복하게 바뀌었을까? 그것 역시 깨달음에서 비롯되었다. 이제는 돈이 없어도, 자격증이 없어도, 인맥이 없어도 잘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 계기가 된 이야기를 하고 싶다.
- 당시에 쓴 일기를 들춰보니 정확히 20번, 다시 말해 통산 820번째 즈음에 접어들 때 갑자기 벌어진 일이었다.
몸이 부들부들 떨리고 슬프지도 않은데 이유도 없이 눈물이 흘렀다. 눈물의 의미를 생각하려고 했지만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쉴 새 없이 흘러내리는 눈물. 다시 반야심경을 읽으려고 했지만 떨려서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때 갑자기 '감사', 이 두 글자가 눈앞에 전광판처럼 번쩍 하고 나타났다. 그렇구나, 감사였구나. 이 세상은, 이 우주는 감사로 만들어진 걸까? 지금까지의 인생도, 그리고 인도에 도착하고 나서 두들겨 맞고, 돈을 빼앗기고, 밟히고 차이고 했던 사건도 모두 감사였던 것이다. 그 사실을 알아차린, 아니 체험한 순간 눈앞의 풍경이 일순간에 바뀌었다. 굳이 말하자면 지금까지 흑백이던 세계가 갑자기 온갖 색채를 띤 것처럼 평면이었던 세계가 입체가 된 것 같았다. 어쨌든 이 강렬한 체험으로 나를 둘러싼 세상과 우주의 구조가 완전히 달라졌다.
- 감사였다. 눈앞에 일어난 좋은 일도, 그렇지 않은 일도 모두 감사였다. 그렇다면 무슨 일이 있어도 괜찮은 거네. 눈물을 있는 대로 다 쏟고 나서 마음을 가라앉히고 반야심경을 1000번 다 읽은 다음 언덕에서 내려와 다음 날 델리로 돌아갔다. 그리고 집에서 보내준 돈으로 무사히 여행을 마쳤다.
- 이 체험을 통해 말하고 싶은 것은 우주는 감사로 이루어졌고, 결국은 무슨 일이 있어도 괜찮다는 것이다. 하지만 역시 깨달음 전에는 많은 일이 있다. '스트레스 → 릴랙스'의 정도가 클수록 깨달음도 크다. 그러므로 혹시 지금 몹시 괴로운 일이 있다거나, 도저히 이룰 수 없는 꿈 앞에서 안달하고 있더라도 절대로 걱정할 필요가 없다. 힘든 일, 괴로운 일도 언젠가는 끝난다. 그리고 시간이 지난 뒤에 정신을 차리고 보면 전보다 좋아져 있다. 지금까지 우리가 줄곧 경험해온 것이다. 10년 전 무슨 일로 고민했는지 기억할 수 있을까? 지금 조금이라도 그 고민을 계속하고 있는지? 대개는 그렇지 않다. 고민을 한다 해도 조금 오래 끌 뿐 머지않아 잊을 날이 온다. 그리고 잊힐 때쯤이면 틀림없이 그때의 나보다 더 성장해 있다.
- 그러니까 지금 힘들어도 괜찮다. 머지않아 잊을 테니까.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아도 괜찮다. 머지않아 이루어질 테니까. 그보다는 지금을 깊이 음미하라고 말하고 싶다.
- 내 인생은 확실히 30대 초반 무렵까지는 되는 일이 없었지만, 딱 하나 스스로 칭찬해주고 싶은 게 있다. 그것은 내가 내 인생을 매우 소중하게 여겼다는 점이다.
- '집 안에 틀어박혀서 불평만 쏟아내는 인생은 자신을 조금도 소중히 여기지 않는 것이다. 내 가능성은 이것보다 훨씬 크다!'
지금 생각하면 역시 움직이면 움직인 만큼 뭔가 일어난다. 제3장에서 우주는 에너지 등가라고 말했는데,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그만큼 주변도 움직인다. 그렇다면 무엇인가 변한다. 이렇게 움직이다 보면 '이거구나' 하고 깨달을 때가 온다.
- 점쟁이는 사람을 겁주는 말은 하지 않는다. 정신적(영적)인 일을 하는 사람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구분하는 기준도 이것이다. 진짜는 결코 사람을 위협하지 않는다. 가짜는 열에 아홉은 좋은 소리를 하지만 한 번의 강렬한 부정적인 메시지로 사람을 겁먹게 한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아무리 좋은 말을 했어도 한 번이라도 위협하는 말을 했다면 그 사람은 가까이하지 않는 편이 좋다.
- 하던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면, 우주의 진리는 '괜찮다'는 이 한 마디가 전부다. 괜찮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괜찮은 게 아니라 애초에 괜찮기 때문에 괜찮은 것이다. 그러므로 소원을 이루고 싶을 때도 어쨌든 할 일만 제대로 하고 나머지는 우주에 맡기면 된다. 우주를 믿으면 된다. 결국 괜찮으니까 하고 싶은 일은 전부 하면 된다. 필요 이상으로 두려워할 필요도 없다.
- 고생하다가 마침 내가 지나갈 때 이집트인 세 사람에게 느닷없이 돈을 빼앗겼다. 오랫동안 여행을 하다 보면 이런 일은 일상다반사다. 같은 일본인이기도 해서 도움의 손길을 내밀자 그는 매우 기뻐했고 감사의 표시로 그가 가진 일본식 즉석 카레와 된장국으로 파티를 벌였다. 그때 그에게 상당히 인상적인 말을 들었다. "나는 기도하면 되기 때문에 괜찮다." 그는 경건한 크리스천이었는데, 그의 확신에 가득 찬 말에 무종교인 나조차도 묘하게 감동시키는 뭔가가 있었다. 그리고 지금, 그 말은 특정 종교를 뛰어넘은 진실이라는 것을 실감한다. 중요한 것은 '괜찮다'는 것이다. 이것이 진실이다. 어쩔 방도가 없을 때는 기도하면 된다. 따라서 지금이라면 이렇게도 말할 수 있다.
"나? 괜찮아! 기도하면 되니까."
- 단순하게 바라고, 그리고 말로 표현해 보자. 말로 표현하면 그만큼 소원이 훨씬 쉽게 이루어진다. 비법도 좋고, 블로그도 좋고 먹고 마시면서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어도 좋다. 이것저것 따지지 말고 그저 솔직하게 바란다. 그리고 때때로 기도한다. 어느 순간 뭔가 뻥 하고 터지면서 소원이 이루어질 것이다. 그것도 갑자기, 제멋대로 말이다.
- 여기까지 읽고 '그래, 솔직하게 원하면 되는 거야'라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이미 된 거다. 어떤 소원이든 이루어지는 영역에 들어온 것이다. 하지만 '아니, 여전히 이해가 안 돼'라며 거부감이 든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 일단 100일 동안 비법이라도 실천해 보면 어떨까? 그러는 중에 뭔가 이해가 되었다면, 그래서 인생이 즐거워졌다면 적어도 손해는 아니니까. 어쨌든 이것저것 고민하지 말고 솔직히 원하면 된다. 어린아이처럼 말이다. 그리고 이 책을 베개 삼아 낮잠이라도 청해보자. 혹시 꼬마 요정이 나타날지도 모르니.
- 마지막으로 나는 이 책을 정말로 열심히 썼다. 그러니까 여기까지 읽어준 것만으로도 더없이 기쁘고 고맙다. 하지만 여러분의 꿈이나 소원이 더욱더 많이 이루어진다면 훨씬 더 기쁠 것이다. 혹시 괜찮다면 '꿈이 이루어졌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으면 좋겠다. 흥분해서 함께 기뻐하고 싶다. 그리고 하이파이브 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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