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1

[아리스가와 아리스] 말레이 철도의 비밀

일루젼 2025. 3. 27. 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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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아리스가와 아리스 / 최고은
출판 : 북홀릭
출간 : 2014.05.25


       

           

<까마귀 어지러이 나는 섬>을 발견하고 읽으면서 오래전 스쳐 지나갔던 '작가 아리스' 시리즈를 시작하게 되었다. 

 

예전에 <자물쇠 잠긴 남자>를 읽긴 했었지만, 당시에는 더 찾아 읽고 싶을 정도로 흥미롭지는 않았다.

그런데 이번에 읽을 때는 히무라와 아리스의 대화 사이사이에서 드러나는 '가치관' 차이가 눈에 들어왔다.

 

스스로를 평범한 축이라고 여기면서도 작가로서 살아가고자 하는 아리스.

스스로를 한없이 악에 가깝다고 여기기에 악을 파고드는 히무라. 

 

그럼에도 두 사람이 서로 주고받으며 사건을 해결해 나가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두 사람 모두 더없이 범상하 어지러이 나는 섬>을 발견하고 읽으면서 오래전 스쳐 지나갔던 '작가 아리스' 시리즈를 시작하게 되었다. 

 

예전에 <자물쇠 잠긴 남자>를 읽긴 했었지만, 당시에는 더 찾아 읽고 싶을 정도로 흥미롭지는 않았다.

그런데 이번에 읽을 때는 히무라와 아리스의 대화 사이사이에서 드러나는 '가치관' 차이가 눈에 들어왔다.

 

스스로를 평범한 축이라고 여기면서도 드문 인종인 작가로서 살아가고자 하는 아리스.

스스로를 한없이 악에 가깝다고 여기기에 악을 더 깊게 파고드는 히무라. 

 

그럼에도 두 사람이 서로 주고받으며 사건을 해결해 나가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두 사람 모두 더없이 범상하다. 

또 범상치 않다.

 

이야기 자체로서의 매력은 잘 모르겠다.

아마도 나는 일본 추리 소설이라는 장르를 좋아하는 편은 아닌 것 같다.

 

미나토 가나에나 무라타 사야카 (추리는 아니지만) 같은 정돈된 섬뜩함.

교고쿠 나쓰히토나 오쓰이치 같은 기담, 환담, 또는 그로테스크함.

이하 아리스가와 아리스나 히가시노 게이고 등 다양한 일본 작가들의 '캐릭터'. 

 

잘 설계된 장치보다, 그 장치 속에서 움직이는 자동인형의 매력이 더 마음에 든다. 

 

그래도, 즐거웠다.

실링팬 아래 느껴지는 습도 높고 미지근한 바람. 

물방울이 가득 맺힌 과일 주스.

늘어져 있는 것이 조금도 이상하지 않은 한낮의 실내.

 

생각나는 여름의 추억들. 

 

   


   

 

- 저녁나절에 쿠알라룸푸르 중심가의 호텔에서 나와 남동쪽으로 향했다. 야자잎으로 지붕을 올린 집들이 드문드문 자리한 마을을 빠져나온 차는 블란다(네덜란드) 언덕을 향해 달렸다. 등대가 있는 그 언덕에서는 말라카 해협에 지는 '200만 달러짜리 석양'을 볼 수 있다고 한다. 아직 한여름이라 일몰 시간이 늦어서 태양은 수평선 위에 떠 있고 바다가 황금빛으로 빛날 뿐이었지만, 그 역시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 우리와 함께 이 선택 관광에 참가한 건 신혼부부 한 쌍뿐이었다. 둘만의 세계에 빠진 그들은 서른넷 먹은 남자 2인조 -우리- 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럴 법도 하다. 이런 낭만적인 여행은 그렇게 즐겨야 한다.

-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는 야생 원숭이들을 보고 귀엽다는 말을 연발하며 서로에게 카메라를 들이대는 신혼부부에게 "찍어드릴까요?" 하고 말을 걸었다. 부부는 반색하며 카메라를 내밀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물어볼 걸 그랬다고 생각할 정도로 나 아리스가와 아리스는 성격이 좋다. 같이 온 친구는 담배를 피우며 짐짓 딴청을 피우고 있었다.  

- 우리 넷을 태운 봉고차는 최종 목적지에 도착하기 전에 강변 레스토랑에 들렀다. 여기서 저녁을 먹으며 해가 지기를 기다리면 된다. 완만하게 흐르는 수면 위로 튀어나온 개방형 레스토랑이다. 코코넛크랩이 메인인 중화풍 요리가 나왔다. 다른 테이블에 앉은 신혼 커플은 게 껍질을 부수는 망치를 들고 "이거 어떻게 하는 거야?", "이리 줘봐" 같은 대화를 나누며 깨가 쏟아졌다. 친구는 말없이 현지 특산품인 타이거 맥주를 들이켰다. 웃음이 터졌다. 여행지에서 평소보다 더 무뚝뚝해지는 히무라의 버릇은 여전했다.

- "하늘이 참 예쁘지?"
내 말에 그는 해질녘 하늘을 올려다보며 "그래, 예쁘네" 하고 기계적이지만 솔직하게 대답했다.
"따분해 보이네. 귀찮으면 취소하지 그랬어."
호텔에서 출발하는 이 관광 상품을 신청한 건 우리의 친구였다. 대자연의 아름다움에 감동을 느끼기보다 호텔 방에서 쉬는 게 좋으면 억지로 오지 않아도 됐는데.
"누가 따분하대? 그리고 피곤하지도 않아. 그냥 넋 놓고 있는 거야. 네 눈에 어떻게 비칠지는 모르지만, 이래 봬도 쉬고 있는 거야."

그것도 모르고 실례를 했군. 학창 시절부터 벌써 15년이나 알고 지냈는데 아직도 이해가 부족해서 미안하군 그래.

- 차례차례 나오는 음식을 비우는 동안 어느샌가 해가 저물었는지 하늘은 푸른빛에서 보랏빛으로, 다시 감청색으로 조금씩 변해갔다. 시시각각 변화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 풍경을 관찰하며, 나는 하늘을 그리는 데 얼마나 많은 종류의 물감이 필요할까 생각했다.

- "꼭 스트립쇼 같네."
무심코 내뱉은 말에 친구는 미간을 찌푸렸다.
"한낮의 하늘이 밤을 맞이하려고 한 꺼풀씩 벗고 있는 것 같잖아."
"옆 테이블의 신혼부부 안 보여? 해외까지 나와서 스트립 얘기나 하는 주책맞은 남자들이라는 오해를 받긴 싫어."
"작가적 감성에서 우러나온 표현이야."
"작가적 감성? 너, 작가 아니었어?"
만담가처럼 말꼬리 잡기는. 나는 한숨을 쉬었다.
"그런 오해를 살 일은 없으니 걱정 마. 우리가 일정 수준의 지성을 갖춘 지성인들이라는 건 척 보면 알잖아, 척 보면. '어머, 스트립이라는 말이 들린 것 같은데 저 두 분은 스트립쇼를 연구하는 문화연구자들인가?' 그렇게 생각할 거야."

 

- 말은 그렇게 했지만 단순한 내 희망사항에 불과했다. 헐렁한 셔츠 앞섶에 선글라스를 꽂은 우리는 휴양지에서는 자연스러운 차림새였지만 어딘지 모르게 불량스러운 분위기를 내뿜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추리소설가와 범죄학자라고 자기소개를 하면 역시 생긴 대로 끔찍한 일을 한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 수평선에 걸려 있던 해가 지자 밤이 찾아왔다. 히무라는 맥주 두 잔을 추가로 주문하더니 조금씩 말이 많아졌다. 식사를 끝내고 계산을 마친 우리는 차로 돌아왔다. 어둑어둑해진 하늘 한구석이 이따금 번뜩일 때마다 멀리서 천둥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앞 좌석에 앉은 신혼부부가 "비가 오려나?", "서해안은 우기더라고" 하는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 얼마 지나지 않아 목적지에 도착했다. 쿠알라 셀랑고르 강의 지류 어귀다. 우리는 두 시간이나 걸려 여기까지 반딧불을 보러 온 것이다. 주차장에서 내려 오두막처럼 생긴 사무소로 걸어가며 준비해 둔 벌레 쫓는 약을 각자 피부에 발랐다. 쨍쨍 내리쬐던 낮의 태양이 떠난 자리에 기분 좋은 밤바람이 불어왔다. 지금부터는 수면 위에서 반딧불을 감상하며 더위를 식힐 시간이다. 

- 과연 이 앞에 어떤 멋진 풍경이 기다리고 있을까. 수십만 마리의 반딧불이가 커다란 나무 한 그루에 몰려들어 빛을 발하는 장면을 텔레비전에서 본 적이 있었다. 넋을 잃을 정도로 환상적인 광경이었다. 이제 곧 그 광경을 실제로 본다고 생각하니 기대로 가슴이 벅차올랐다. 아직 멀었나. 어둠 저편을 바라보려던 순간이었다.
"반딧불, 반딧불."
사공이 어눌한 일본어로 말했다. 뭔가 싶어서 그가 가리키는 방향을 바라보니, 강가의 맹그로브 숲에 조그만 황록색 빛이 흩뿌려져 있는 게 아닌가. 히무라가 휘익, 휘파람을 불자 사공이 씩 웃으며 말했다.
"예쁘다, 예쁘다."

- 작가 주제에 진부하다고 욕을 먹을지도 모르지만 '크리스마스트리' 같다는 표현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고원의 밤하늘이 쏟아지듯,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에 있는 어둠이 눈앞에서 깜빡거렸다. 지상의 별들은 완전히 하나가 되어 일제히 반짝이다 꺼지고, 다시 반짝였다. 텔레비전에서 본 것처럼 커다란 나무가 불타오르듯 빛날 줄 알았는데 예상과는 달랐지만 실망스럽지는 않았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광경인가.
 

- 상류까지 계속 이런 풍경이 이어지는 거냐고 히무라가 물었지만, 사공은 영어를 알아듣지 못했다. 어둠에 눈이 익자 반딧불의 수는 점점 늘어났고, 맞은편 강가의 빛도 보이기 시작했다. 우리는 은하수 한가운데를 건너고 있었다.
노 젓는 소리와 뱃전을 때리는 물결 소리에 섞여 멀리서 코란 영창 소리가 들렸다. 손목시계를 보니 8시 20분이었다. 기도 시간인가. 청각부터 황홀경에 빠졌다. 생각해 보면 사랑을 나누려는 반딧불이들의 깜빡거림도 음악적이었다. 장대한 무음의 코러스가 온몸을 적시는 기분이 들었다. 
심호흡을 하자 달콤한 풀 내음이 났다.

- "환각에 빠질 것 같군."
히무라가 웃으며 말했다. 나 역시 같은 생각이었다.
"그러게, 무아의 경지야. 오길 잘했어. 타이론 덕에 좋은 구경 했네."
위 타이론. 이 투어를 추천해 준 친구의 이름이다.

- 하늘에 섬광이 번쩍이더니 천둥소리가 났다. 하지만 비구름은 아직 멀리 있는 것 같다. 이 나라에서는 대기 상태가 늘 이렇게 불안정하다고 한다. 또다시 하늘이 번쩍였다. 밤하늘 일부가 라벤더 빛깔로 물들었다.
"반딧불이의 작은 빛이 정말 갸륵하게 보이네." 나는 그렇게 말했다. "인간도 저러면 훨씬 사랑스러울 텐데."
"사람을 죽인 놈들은 붉게 빛나면 좋겠군."
또 그런 소리를. 아무리 피비린내 나는 범죄 현장을 연구실로 삼은 사내라고는 해도 이런 상황에서 그런 대답이 돌아올 줄은 몰랐다.

"넌 대체 무엇과 싸우는 건데?"
나는 정색하고 껄끄러운 질문을 했다. 이 질문 역시 느닷없이 튀어나온 것이라, 내 입으로 말해놓고도 조금 놀랐다. 히무라는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넌 날 '임상범죄학자'라고 부르잖아. 당연히 범죄지."
"한마디로 악과 싸운다는 소리군. 네가 생각하는 악이 뭔데?"

 

- 어스름 너머의 범죄학자는 카멜을 꺼내 불을 붙였다. 붉은 반딧불이가 배 위로 날아든 것 같았다.
"범죄는 곧 악이라는 도식에서 나온 발언이군."
"그래. 그런 도식은 범죄학계에서는 이미 구닥다리라고 말하고 싶은 거야? 이러저러한 행위가 범죄라는 규정을 세우기 때문에 그에 들어맞는 이가 범죄자가 된다. 그런 라벨링 이론 강의는 사양하겠어. 악이라 부를 수밖에 없는 행위가 분명히 존재한다는 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잖아. 그게 뭐라고 생각해?"
"고전적인 질문이군. 그런 건 위대한 철학자나 문학가, 종교가들이 책에 이미 다 써놓았잖아." 
"내가 궁금한 건 히무라 교수의 정의야. 네가 생각하는 악이란 무엇인지 알고 싶어."
"때와 장소를 고려하지 않은 멋대가리 없는 질문이군. 무엇보다 정의를 말하라는 그 고압적인 태도가 거슬려 정의가 무엇인지 미리 입을 맞추지 않으면 시작조차 못하는 거야? 애초에 그런 질문을 할 때는 먼저 자신의 정의를 제시해야지."
따지는 것도 많은 선생이다. 히무라가 지도하는 학생들은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닐 것 같다.

- "배움이 짧은 내 견해에 관심을 가질 줄은 몰랐네. 거저먹을 생각은 말란 뜻인가? 그럼 솔직히 말할게. 범죄를 주제로 한 소설을 써서 입에 풀칠하는 주제에 이렇게 말하기는 그렇지만, 나는 악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어. 붙잡으려 하면 도망쳐버리거든. 악에 대한 정의를 내리는 건 인간을 정의하는 것과 같다고 생각해."
"흐음, 계속해봐. 아리스가와 군."
"음... 가장 큰 죄라고 불리는 살인만 해도 그래. '한 사람을 죽이면 범죄자지만 전쟁에서 100만 명을 죽이면 영웅이다'라는 유명한 잠언처럼 악에는 종잡을 수 없는 일면이 있어. 때와 장소에 따라 판단이 나뉘는 성질이지. 하지만 그럼에도 인간은 악이라는 개념을 분명히 가지고 있어. 직관으로 이해할 수 있는 악은 존재하지. 살인이나 강도, 방화를 무조건적으로 비판하지 않는 문화는 없잖아."
"그렇지. 가로팔로가 말하는 자연범(법률 규범에 의하지 않고도 그 부당성이 자명한, 행위 자체가 반사회적이고 반도덕적인 범죄 - 옮긴이)이랄까."
"악은 존재해. 그건 인간만이 가진 개념이야. 악을 직관할 수 있어야만 인간이다- 그렇게 말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래서?"
뭔가 딱딱한 이야기가 되어버렸지만, 알아듣지 못하는 사공은 태평하게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노를 저었다.

- "음... 그러니까, 내 말은..." 나는 비틀거리며 말을 이었다. "그래. 악의 원천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자신의 불완전함을 견디지 못한 인간의 나약함과 오만함일지도 모르지. 불완전하고 자유롭지 못한 존재임에도 그 사실을 인정해야 하는 고통에서 도망치려 할 때, 인간은 악의 구렁텅이에 빠지게 돼. 어설프게 지성을 갖추면 이런 비극이 발생하는 거야. 절대로 체험할 수 없는 죽음을 두려워하거나 반대로 매혹되는 태도에 바로 그런 측면이 잘 나타나 있지." 
비웃음을 살 걸 각오했지만, 범죄학자는 내 실없는 이야기를 깔아뭉개지 않았다.
"어려운 생각을 하는군. 참고로 성선설과 성악설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해?"
"둘 다 틀렸어. 어느 한쪽을 주저 없이 고를 수 있을 거라 생각해? 생면부지의 어린애라도 우물에 빠질 것 같으면 본능적으로 구하게 되어 있고, 동시에 누구든 살다 보면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나쁜 짓을 하지. 태생적으로 악하거나 선한 사람은 없어."
"하지만 현실에는 유독 악랄하거나 선량한 사람이 존재하잖아."

히무라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어쩌면 선과 악은 뇌기능의 개체차에 의한 것이라는 과학적인 설명을 하려는 건가? 

- "론 유달이라는 캐나다의 임상신경심리학자가 반사회성 일탈행동에 푹 빠진 사람들의 뇌를 조사해 본 결과, 대상자의 90퍼센트에게 뇌 손상이 있다고 발표했어. 특히 전두엽에 손상 부위나 기능부전의 종류와 발생하는 인격장애 종류 사이의 상관관계라는 주제도 이미 연구된 바 있고, 요즘에는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범행 당시 심신쇠약상태였다는 점을 이유로 감형을 요청하는 전술을 펴는 변호사들이 많은 모양인데, 머지않아 뇌기능 부전이 유행할지도 모르겠어. '피고인은 정상적으로 생활했습니다만, PET스캔 검사 결과 실은 대뇌변연계의 편도체에서 심각한 손상을 발견했습니다'처럼 말이야."
머리 위에 큰 나뭇가지가 드리워져 있었다. 반딧불은 그 끝까지 점점이 흩어져 있다.
"그 학설에 따르면 범죄자, 악행을 저지르는 인간은 태생적인 악인이라는 건가. 만일 그렇다면 범죄자는 심판의 대상이라기보다는 치료의 대상이 되어야 하지 않아?"
히무라는 담배를 문 채 고개를 저었다.
"뇌의 기능부전이 범죄 행위와 얼마나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지 사회학자인 난 모르지. 전혀 무관하지는 않을 거라고 상상하는 정도야."

- "범죄자의 염색체에는 일반 사람들과 다른 점이 있다는 설도 있지 않아?"
"정상적인 남자라면 XY인 성 염색체가 XXY인 클라인펠터증후군 말이야? 그 질환과 범죄와의 관계는 입증되지 않았어. 난 생래적 범죄자가 존재한다는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어."

- 이야기가 확산되어 처음 던진 질문에서 점점 멀어져 갔다. 사공도 분위기로 우리의 대화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모양이었다. 흥얼거리던 콧노래를 멈췄다.
"유독 악랄하거나 선량한 사람이 존재한다는 대목부터 뭔가 이상한 데로 빠지기 시작한 것 같은데. 히무라 교수님은 악이란 그저 개성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건가?"
그는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개성이 아니면 뭔데? 우리 모두에게 배분된 성질이지. 무신론자가 아니라면 신이 내린 선물이라 불러도 좋아. 너는 검은 머리에 검은 눈, 너는 금발에 푸른 눈. 이런 최종적인 결정 요소로서 내려주신 건 아니겠지만. 저기 봐." 히무라는 반짝이는 나무숲을 가리켰다. "여기에 수많은 반딧불이들이 있어. 빛이 환한 녀석도 있고 약한 녀석도 있지. 그와 마찬가지야."

- 반환점에 도착한 모양이다. 강 한가운데에서 사공은 천천히 뱃머리를 돌렸다.
"악은 신이 만들고 내린 것이라. 왜 그런 걸..."
"황송한 배려지. 설마 신이 깨끗하고 아름다운 존재만 사랑한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신의 머리를 지배하는 건 대국적인 견지에서 본 시스템의 영구적인 안정성이야. 그러니까 분열을 반복하는 단세포생물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고, 암수를 만들어 그들의 유전자를 반씩 결합시켜 자손을 남기도록 한 거지. 그러면 알맹이가 조금씩 다른 수많은 변형체를 만들어낼 수 있으니까 더욱 생명력이 강한 생물체가 태어나지."
"환경 변화에 대응해 살아간다는 건가."

- 이야기는 초급 생물학 강의로 바뀌었다.
"그래. 악은 그 변형 중 하나에 지나지 않아. 선천적으로 몸집이 크고 튼튼한 개체도 있고, 작지만 재빠른 개체도 있지. 얌전하고 온화한 성질의 개체도 있는 반면, 활발하고 투쟁을 즐기는 개체도 있고. 그런 차이 없이 짚신벌레처럼 모두가 다 똑같다면 미묘한 환경 변화에도 전멸할지 몰라." 
"그런 건 생물에게 바람직하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에 개체차가 생겨났다. 덕분에 생물 전체적으로는 환경 변화에 대응하기 쉬워진 반면, 각 개체는 반드시 죽음을 경험하게 되었다. 자신을 사랑하거나 자랑스러워하는 한편, 외로운 존재임을 한탄하거나 슬퍼하게 되었다. 사랑과 증오가 태어났다." 

- 사공이 뭐라고 말했다. 우리가 아니라 스쳐 지나간 다른 배의 사공을 향해서였다. 히무라는 손으로 강물을 뜨며 말했다.
"인류의 미래에 어떤 위기가 기다리고 있을지 예측할 수는 없어. 닥쳐오는 위기의 종류에 따라 똑똑하고 행동력이 있는 이들이 살아남을 수도 있고, 교활하고 비겁한 이들이 생존 경쟁을 펼칠 수도 있겠지. 한없이 잔인하고 흉악한 자들만이 인류의 씨앗을 남기는 경우도 충분히 상상할 수 있고, 어떤 위기에도 대응할 수 있도록 신은 유성생식을 통해 개체차를 늘리는 방법을 떠올렸어. 네가 아까부터 악이라 부르는 건 그중 하나야." 
반론의 여지는 얼마든지 있었다.
"피상적이고 산만한 사고방식이네. 태생적으로 똑똑한 사람이나 태생적으로 잔인하고 흉악한 사람이 있다고 생각해? 더구나 태생적인 악이란 게 존재할까?"
"없어." 히무라는 순순히 부정했다. "뇌기능 이상이 원인인 범죄는 있을 수도 있지만, 그건 악과는 본질적으로 달라."
"그렇겠지. 사람은 후천적으로 주어진 조건에 따라 악에 빠지거나 피하는 법이니까. 그 개체를 둘러싼 환경이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는 거잖아..."
내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히무라가 그 사실을 이해하지 못할 리가 없었다. 그의 전공인 범죄사회학은 바로 그것을 연구하는 학문이니까.
"'사회는 범죄의 배양기이고 범죄자는 미생물이다'는 말로 대표되는 환경학파의 주장이군. 물론 인간이 범죄자가 되는 배경에는 사회적인 요인이 복잡하게 얽혀 있지. 신이 '거기 너, 잠깐 이리 와 봐'라며 미리 낙인을 찍은 결과는 아니야. 신이 창조한 건 '범죄자'가 아니라 '악'이니까."


- 나는 잠시 입을 다물고 생각에 잠겼다. 히무라는 소설 속 명탐정처럼 경찰 수사에 협조하여 범죄자들을 사냥해 법정에 세우고 있다. 그들을 증오한다. 그리고 증오하는 이유를 물어도 "나 자신이 사람을 죽이고 싶었던 적이 있었기 때문에"라고 얼버무릴 뿐이었다. 대체 왜지?

- "... 히무라 교수가 범죄자를 증오하는 건, 뼛속까지 무신론자로서 신이 던진 악이라는 떡밥에 달려드는 그들의 어리석음을 용서할 수 없기 때문인가? 한마디로 넌 악을 선택하지 않는 자유를 버렸다는 이유로 범죄자를 비난하고 싶은 거지?"
히무라는 두 개비째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인간에게는 악을 피할 자유가 있는데도 그것을 게을리했기 때문에 벌한다는 논리는 너무 난폭하잖아. 그런 건 사르트르 철학 같은 중산계급의 개인주의와 자기중심주의에서 나온 생각이다... 라고 에리히 프롬에게 비판당할지도 몰라. 인간이 그토록 자유로운 존재일까?"
모르겠다. 하지만 아마 그렇지 않을 것이다.

- "네가 악과 싸우는 게 아니라는 건 어렴풋이나마 알겠어. 이렇게 말하면 꼭 SF의 주인공 같지만, 네가 적대하는 상대는 신이로군."

그는 웃었다.
선착장이 보였다. 이제 곧 반딧불과 이별할 시간이다.
"신이 암수를, 유성생식을 만들어준 덕에 아름다운 광경을 구경했네."
히무라는 휴대용 재떨이에 꽁초를 버리며 말했다.
또다시 하늘이 번쩍였다.

- 이튿날.
호텔 레스토랑으로 내려갔지만 히무라의 모습은 없었다. 먼저 뷔페식 조식을 먹고 있으려니 영자 신문을 한 손에 든 히무라가 하품을 하며 내려왔다. 오늘은 바둑알처럼 검은색 상의에 흰색 하의 차림이었다. 패션 센스는 여전하군.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말레이시아식으로 "헬로헬로"라고 인사했다. 영어의 '헬로'지만 이곳 사람들은 같은 단어를 반복하는 게 습관인 모양이었다. “아니, 아니", "고마워, 고마워" 같은 말을 즐겨 쓰는 오사카 사람들과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다. 
그런 대화를 나누고 있는 차에 웨이터가 다가왔다. 점심 메뉴는 토마토 크림수프와 프라이피시, 비프스트로가노프와 버터라이스처럼 이름만 봐도 쉬이 상상이 가는 음식들이었다.

 

- 근처 기둥에 붙어있는 종이를 들여다보자 타이론이 웃음을 흘렸다. 
"아리스가와 씨, 그건 못 먹습니다. 구인광고거든요."
"여전하지?"
히무라가 히죽 웃으며 말했다. 젠장, 본의 아니게 훈훈한 분위기를 만들었군.
콜라와 주스로 건배하고 먼저 서로의 근황을 보고했다. 메일을 통해 대충 알고는 있었지만, 12년 만에 만난 자리라 쌓인 이야기가 산더미 같았다. 타이론은 내가 선물로 가져온 신간을 훑어보더니, 내용도 모르면서 좋은 책이라고 칭찬했다. 꼭 읽어보겠다는 말도 했다.

- "일본하고 달리 여기는 1년 내내 여름이긴 하지만, 그래도 여름방학 기간인 8월인데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야 하는 거 아냐?"
히무라는 걱정이 된 모양이었다. 하지만 타이론은 가슴을 툭 치며 말했다. 사흘 뒤에는 예약이 꽉 차서 방이 없다고 한다. 그리고 일본과 달리 성수기가 7, 8월이 아니라 가장 더운 1월부터 4월이라 그 시기에는 주말마다 피서객으로 넘쳐난다고 했다.
"그러니까 걱정 마세요. 그리고 로터스 하우스는 호텔이 아니라 게스트하우스입니다. 고객 분들이 예약 전화를 주실 때면 반드시 그 점을 명시하죠. 객실은 모두 열 개인데, 지금 그 가운데 일곱 개가 찼습니다. 내일이면 다섯 개가 비고요. 일본인 단체 손님들이 내일 떠나시거든요." 
"일본인 손님이 많은 모양이네."
뜻밖이었다. 카메론 하일랜드는 말레이시아에서 손꼽히는 휴양지로, '말레이시아의 카루이자와'(고급 별장이 많은 것으로 유명한 일본의 휴양지 - 옮긴이)라 불릴 만한 곳이지만 일본에서는 페낭이나 랑카위에 비해 지명도가 낮은 편이다.

- "아리스가와 씨는 모르시는군요? 카메론 하일랜드는 일부 일본인들에게 매우 사랑받는 곳입니다. 바로 곤충 마니아들이죠. 카메론 하일랜드에는 희귀한 나비나 장수풍뎅이가 많아서, 일부러 여기까지 곤충 채집을 하러 오는 사람이 많습니다. 지금 계신 손님들도 곤충 채집을 하러 오신 손님들이고요. 이곳은 곤충의 천국이거든요."
아, 그건 미처 몰랐군. 
 
- 카메론 하일랜드는 과거 말레이시아의 종주국이었던 영국의 국토조사관 윌리엄 카메론이 피서지로 개발한 곳이다. 서양인이 발견한 휴양지라는 점은 카루이자와와 비슷했다.

- "지금도 영국인들이 자주 피서를 오나 보지?"
"과거 말레이시아와 인연이 있던 사람들이나 배낭여행자, 그리고 곤충 마니아들이 자주 찾지만 그렇게 많은 건 아닙니다. 독일 사람이나 미국 사람, 호주 사람들도 있어요. 많기는 싱가포르 사람들이 제일 많습니다. 말레이시아에는 겐팅 하일랜드나 프레이저힐, 구눙르당 등 고원 휴양지가 여럿 있지만, 싱가포르에는 피서지라 할 곳이 없으니까요. 지금 계신 영국인 글래드스턴 씨는 소설을 쓰신다고 하더군요."
동업자일까? 만일 그렇다면 참으로 우아한 작업 환경이다. 나도 질세라 테라스에서 보란 듯 일을 해볼까. 아니, 역시 그러기는 싫 ...

- [말레이시아로 돌아가려고 합니다.]
일본의 학기에 맞춰 봄에 교토를 찾은 타이론이 그렇게 결심한 건 10월. 아직 교토가 울긋불긋한 단풍으로 물들기 전이었다.

 
- 점점 길이 좁아졌다. 반대편에서 대형차라도 오면 지나는 데 애를 먹을 것 같다. 구불구불한 길이 이어졌다. 차는 깊은 밀림 속에 놓인 가느다란 실 같은 길을 따라갔다. 길 양쪽에는 높다란 야자나무와 낯선 열대 식물이 무성하게 자라 있었다. 특히 눈길을 끄는 건 양치식물이었다. 평소 보던 것과는 전혀 스케일이 달라서, 흡사 자신이 코로포클(아이누 전승에 나오는 난장이로, 머위 잎 아래 사는 사람이라는 뜻 - 옮긴이)이 된 듯한 착각이 들 만큼 거대한 잎사귀였다. 풍요로운 비와 햇빛 속에서 식물들은 쑥쑥 성장했겠지. 민가는 소박한 고상식 가옥(무덥고 습한 열대 지방에서 홍수 피해와 벌레, 뱀 등이 기어오르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지상에 기둥을 세워 그 위에 지은 집 - 옮긴이)이 드문드문 자리한 정도였다. 말레이시아의 원주민인 오랑 아슬리 족의 집이라고 했다.
"오랑 아슬리 족은 바람총으로 사냥을 합니다. 이포라는 지명은 그들이 화살촉에 바르는 독의 이름에서 유래했죠."

- 차는 100미터 남짓한 중심가를 지나 더 안쪽으로 들어갔다. 세련된 리조트 호텔과 골프장, 그림으로 그린 듯한 고원 휴양지의 풍경이 펼쳐졌다. 너무 전형적이라 어느 나라에 있는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내 말을 들은 타이론이 말했다.
"그렇게 비칠 수도 있겠군요. 하지만 길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정글입니다. 아름다운 꽃과 희귀한 나비들을 볼 수 있죠. 폭포도 있습니다. 나비 농장에서도 나비를 볼 수 있죠. 장미 정원도 있습니다. 호수도 아름답고요. 이 위의 브린창에는 삼포라는 절도 있습니다. 그 안쪽 산비탈은 전부 다원입니다. 홍차 밭이 펼쳐진 멋진 풍경을 구경할 수 있죠. 흡사 초록 양탄자를 깔아놓은 듯한 풍경이 근사해요. 카메론 하일랜드는 세계적인 홍차 명산지거든요. 멋진 곳입니다. 모험을 해도 좋고, 자연의 품에서 휴식을 취해도 좋죠. 맛있는 음식과 음료도 많습니다."

타이론은 가이드처럼 유창했다. 먼 길을 찾아왔는데 일본의 고원과 별다를 바 없어서 내가 불만을 느낀 줄 안 모양이었다. 결코 그런 의도는 없으니 친구의 마음을 달래줘야지.
"기대되는데? 내일 천천히 돌아봐야겠어."

- 과거 영국의 식민지 지배를 받은 까닭에 카메론 하일랜드에는 영국풍 건물이 많았다. 로터스 하우스 역시 튜더 양식의 2층집으로, 하얗게 옻칠한 벽에 짙은 갈색 기둥과 대들보 끝부분만 튀어나와 있었다. 하프팀버 양식이다. 영국 전원에 있는 집을 야자나무 그늘로 옮겨놓은 듯한 풍경이었다. 다양한 관상용 야자나무를 심은 정원 한구석에는 연꽃이 떠 있는 자그만 분수가 있었다. 로터스 하우스라는 이름은 여기서 유래했으리라.

- 차가 멈추는 소리를 듣고 인도계로 보이는 젊은 남자가 입구로 나와 기다렸다. 그리고 오너의 손님인 우리에게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하얀 하이칼라 유니폼 가슴에 연분홍빛 연꽃이 수놓아져 있었다. 
타이론은 말레이어로 그에게 뭐라고 말했다. 우리 이름이 들렸다. 그는 다시 우리를 보며 말했다.
"이 친구는 오스카라고 합니다. 여기 있는 동안 불편한 점이 있으면 뭐든지 이 친구에게 말씀하십시오."
오스카는 다시 고개를 숙였다. 너무 깍듯하게 대하면 불편하니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고개를 든 오스카의 얼굴에는 살가운 미소가 번져 있었다.

- 안으로 들어서자 남쪽 나라의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벽에는 홍차 밭과 정글에서 날아다니는 극채색 나비들을 짜 넣은 태피스트리가 걸려 있었다. 라운지에는 등나무 의자와 테이블, 천장에는 실링팬이 돌아가고 있었고, 커다란 창문 너머로 정원이 훤히 보였다. 차에서 내렸을 때 고원의 맑은 공기가 기분 좋게 살갗을 어루만졌는데, 하우스 안은 약하게 냉방이 되는 것 같다. 오스카는 가벼운 몸놀림으로 카운터 안으로 들어가 우리가 묵을 객실 열쇠를 꺼냈다. 
"숙박 카드를 꼭 써주십시오. 히무라 씨와 아리스가와 씨가 로터스 하우스를 찾은 기념으로요."

 

- "또 올게. 아리스는 소설을 쓰러 와야지."
히무라는 영어로 능숙하게 사인을 했다. 나는 흉내 낼 수 없는 기술이었다. 아니, 필기체로 사인을 하는 건 어렵지 않지만 매번 서체가 달라져버렸다. 중국인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를 둔 타이론은 한자로 서명했다.

- 라운지 구석의 괘종시계를 보니 3시가 지나 있었다. 관광은 내일부터 해야 할 것 같다. 나는 카운터에 몸을 기대고 앞으로의 스케줄에 대해 히무라와 이야기를 나눴다. 방에 짐을 풀고 라운지에서 잠깐 쉬었다 타나 라타를 둘러보기로 했다. 타이론도 그게 좋겠다고 했다.
"여기 묵는 동안 아까 타고 온 차를 쓰십시오. 말레이시아는 일본과 같은 좌측통행이니 운전하기 편할 겁니다. 길을 잃을 일은 없겠지만 혹시 모르니 지도도 챙겨 가시고요." 
국제면허가 있는 히무라가 가이드 맵을 받아 들었다. 오스카가 객실 열쇠를 건넸다. 나는 204호, 히무라가 205호였다. 오스카의 안내를 받아 프런트 옆의 엘리베이터를 타고 2층으로 올라갔다. 조용한 하우스 안에 짐 가방 끄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널찍하고 깨끗한 방이었다. 특히 침대가 커서 좋았다. 3인 가족이 잘 수 있는 트리플베드인데, 베갯머리에는 나비를 그린 판화가 장식되어 있었다. 오스카는 욕실 문을 열고 샤워기 사용법을 설명하고 나서 다른 궁금한 점은 없느냐고 물었다.
"저기..." 나는 천장을 가리키며 물었다. "저건 뭡니까?"
의미심장한 금색 화살표가 그려져 있었다.
"키브라입니다."
오스카는 공손하게 말했지만, 그게 뭔지 알 도리가 없었다.

"무슬림 손님들을 위한 표시입니다. 저 화살표는 메카 방향을 가리키고 있죠."
그랬구나. 말레이시아가 이슬람 국가인 건 알고 있었지만, 막상 ...

- 타나 라타를 슬렁슬렁 돌아봤다. 다양한 인종이 오가는 거리는 활기가 넘쳤다. 노점이 늘어선 모퉁이에서 풍기는 맛있는 냄새에 저도 모르게 발길이 향했다. 쿠알라룸푸르에 도착한 날 밤에 히무라와 호텔 근처의 노점에서 늦은 저녁을 먹었는데, 정말 맛있었다. 어찌나 맛있는지 나시고렝과 미고렝, 사테-말레이풍 볶음밥, 볶음국수, 닭 꼬치구이처럼 일본에서도 쉽게 볼 수 있는 음식들로만 배를 채우지 않도록, 일부러 다양한 음식을 주문했다. 닭튀김인 아얌고렝과 정어리나 병어 같은 생선 요리.

 

- 맛있다는 말을 연발하던 히무라였지만, 주인이 느닷없이 "닭새우."라고 일본어로 말하며 칠리소스로 볶은 새우 요리를 내놓았을 때는 영어로 "이게 무슨 닭새우입니까"라고 항의했다. 계속 닭새우라고 우기는 주인에게 히무라는 물러서지 않고 "아니라니까요. 이건 그, 뭐냐, 흰줄닭새우야. 동남아시아에서는 새우를 죄다 닭새우라고 부르지. 닭새우라고 하면 일본인들이 좋아할 거라고 생각하나 봐."라고 주장했다. 주인은 웃으며 '닭새우'라는 말을 되풀이할 뿐이었다. 조교수는 맥주를 들이키며 "야, 아리스. 이 마하티르 총리를 어설프게 닮은 주인장이 닭새우라고 하는 건 가짜야. 난 일본에 돌아가면 진짜 닭새우를 먹겠어."라고 선언했다. 

- 오늘은 로터스 하우스에서 저녁 식사로 영국풍 가정요리를 선보인다고 해서, 노점은 그냥 지나치고 기념품 가게로 들어갔다. 진열장에는 주석 제품과, 영문은 알 수 없지만 앵무조개가 진열되어 있었고, 벽에는 곤충 표본이 걸려 있었다. 에메랄드블루와 진홍빛의 아름다운 나비들이 눈에 들어왔다. 10센티미터는 더 됨한 장수풍뎅이와 사슴벌레, 손바닥만 한 거대 거미 등 희귀한 곤충이 가득했다. 타이론의 말대로 이곳은 곤충의 천국인 모양이었다. 1만 엔이나 하는 장수풍뎅이를 놓고 독일인 관광객이 가격을 흥정하고 있었다. 다른 쪽 벽에는 원주민 오랑 아슬리 족의 것으로 보이는 목각 가면이 걸려 있었고, 그 아래 선반에는 크고 작은 화살이 놓여 있었다. 집어서 살펴봤더니 기념품으로 만든 것이라 실제로 사용할 수는 없을 듯했다.

- "홍차도 좋지만 커피가 그립지 않아?"
커피파인 히무라가 말했다. 이웃 카페의 간판을 본 모양이다. '디스턴트 밸리', 머나먼 계곡이라는 세련된 이름의 가게였다.

- 커피 한잔하고 가라는 뜻이었는지, 남자는 카운터 근처 자리에 앉았다.
히무라와 내가 주문하자 마스터는 커피를 만들며 꽃무늬 셔츠와 이야기를 나눴다. 대화 내용은 여전히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마스터의 이름이 존, 꽃무늬 셔츠가 웡후라는 건 알았다. 샤리파라는 단어도 몇 번인가 나왔다.
이내 주문한 커피를 가져온 마스터는 "놀라셨죠, 죄송합니다."라고 사과하며 쿠키가 담긴 접시를 내려놓았다. 안쪽 여자 손님의 테이블에는 없는 걸 보면 서비스인 모양이었다.

- "웃기지 말라고 그래요. 그놈이 먼저 내 동생에게 치근덕거렸다고요."
유일하게 그 말만 알아들을 수 있었다. 샤리파란 그의 누이동생의 이름이었다. 웡후의 말은 부분적으로만 알아들을 수 있었기에 나는 그의 표정과 태도를 관찰했다. 제법 잘생긴 축이었다. 아까는 불량배처럼 으름장을 놓았지만, 다시 보니 그리 거친 사내는 아닌 것 같았다. 잘 차려입으면 귀공자로 변신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퇴폐적인 느낌을 내뿜고 있었다. 뭔가 자포자기한 듯한, 무절제한 생활을 보내는 냄새가 났다.

- 마스터가 남자를 나무랐다. 신경 꺼, 내버려두라는 뜻이리라. 말을 마친 마스터는 다시 영어로 우리에게 말했다.
"이 친구 동생이 대단한 미인이거든요. 지나가다 보고 첫눈에 반하는 사내들도 많습니다."
"내 동생이 나비인 줄 알아? 그물로 잡아가려는데 그걸 가만히 보고 있어?"
웡후도 영어로 말했다. 아까 그 청년이 어떤 무례를 저질렀는지 구체적으로는 모르지만, 우리가 그걸 알 필요는 없었다.
  
- 여성 손님들이 나가자 이번에는 젊은 아가씨가 가게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그녀는 마스터와 잡담을 나누는 남자를 향해 '후'라고 이름을 불렀다. 그럼 이 아가씨가... 이 호리호리한 여자가 미색으로 소문난 샤리파인 모양이다. 검은 머리를 어깨까지 늘어뜨린 미소녀다. 크고 뚜렷한 눈망울이 매력적이었고, 도톰한 입술도 사랑스러웠다.

- 히무라의 물음에 황갈색 머리의 영국인이 말했다.
"세상 빛을 볼 기약조차 없는 문장을 말씀하시는 거라면, 쓰고 있습니다. 피아니스트가 매일 피아노를 연습하듯 쓰라는 문필가의 가르침을 지키고 있죠. 그리고 막상 써야 한다는 의무에서 해방되어도, 소설가는 손이 근질거려서 좀이 쑤시는 인종이거든요. 그렇죠, 아리스가와 씨?"
"그럼요."
내 영어 실력으로는 세련된 말들이 오가는 대화에 끼어들 수 없었다. 영국인 작가는 그런 나를 과묵한 사람이라 생각한 모양이었다. 히무라가 슬쩍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아리스가와는 낯을 가리는 성격이고, 영어도 썩 잘하는 편은 아니지만 시간이 지나면 말문이 트여서 쓸데없는 소리를 지껄일 겁니다. 동남아시아에서는 상거래에 이용하는 피진 잉글리시라는 간략화된 영어가 있죠. 아리스가와 그와는 또 다른 독특한 사무라이 잉글리시로 말하니까,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추리하며 들으십시오." 

- ... 도움을 받기는 했지만 순순한 호의로만 받아들일 수는 없는 내용이어서 얼굴이 굳어버렸다. 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 히무라의 말도 알아듣지 못한 멍청이처럼 보일 테니 뭐라도 한마디는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아시아를 자주 찾으시는 편입니까? 서머싯 몸처럼요."
앨런 글래드스턴은 뺨에 살짝 경련을 일으키며 웃었다.
"몸! 제가 동경하는 작가죠. 식사 후에 몸이 즐겨 마시던 칵테일이라도 같이 한잔 하시죠?"
"물론이죠."

 

11시에 잠자리에 들어 아침까지 푹 잤다. 다음 날 아침, 일어나자 9시였다. 세수를 하고 식당으로 내려가니 이야기를 나누는 히무라와 이케자와의 모습이 보였다. 아침 식사는 벌써 마친 모양이다. "안녕하세요." 나는 잠이 덜 깬 목소리로 인사했다. 오스카가 나타나 영국식 아침 식사를 가져다주었다.
"아주 푹 쉬신 모양입니다."
이케자와가 말했다. 물론 비아냥거리는 기색은 전혀 없었다.

"글래드스턴 씨는 잠깐 이포에 다녀오겠다면서 일찍 나갔어. 이곳에 엿새 동안이나 머물렀으니 지상이 그리워질 법도 하지."
히무라가 담배를 피며 말했다.  

- "타이론."
히무라의 목소리에 타이론은 "무슨 일입니까?" 하고 돌아봤다. "고마워, 덕분에 근사한 휴가를 보내고 있어."
타이론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교토에서 신세를 졌던 보답입니다. 그때 제가 얼마나 고마워했는지 두 분은 모를 겁니다."
그가 우리에게 빚진 게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러니 우리도 그에게 빚졌다는 생각은 하지 않기로 했다.
   
- 10시가 되었다.
이케자와는 패스 Path 12를 따라 오랑 아슬리 부족의 마을 근처에 다녀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출발했다. 이 고원의 숲을 잇는 좁은 도로에는 번호가 붙어 있었다. 타이론이 몇 시에 돌아오느냐고 물은 건 혹시 조난을 당했을 때 신속하게 수색을 요청하기 위해서인 모양이다. 짐 톰슨도 문라이트 코티지의 뒤편에서 정글로 들어간 후 실종됐다.

- "해본 적은 없지만 타이어 갈아 끼는 게 뭐 그리 어렵겠어요. 잭으로 차를 들어 올리고 타이어를 뺀 다음 스페어타이어로 갈아 끼면 되잖아요."
그 정도는 누구나 아는 상식이지만, 문제는 실제로 할 수 있느냐였다. 샤리파는 불안해 보였고, 부인도 기계를 다루는 데 익숙해 보이지는 않았다. 
"하얀 원피스가 더러워집니다.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천성이 선량한 타이론은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지금 그는 게스트하우스로 돌아가봐야 했다. 우리가 나서야 할 때였다.
"우리가 도울 테니까 넌 그만 가봐. 멀지 않으니까 우리는 숙소까지 걸어가면 돼."
"어머, 그래도..."

내 말을 들은 부인은 사양하려 했지만, 이내 "그럼 부탁드릴게요." 하고 말했다. 다른 이의 호의를 한사코 거절하지 않고 고맙게 받아들이는 모습에서 오히려 타고난 기품이 느껴졌다. 나라면 곤란한 상황이더라도 조금 더 고사하는 시늉을 했으리라.

- 충격이 컸는지, 생각만 해도 가슴이 미어진다는 표정이었다.
"히키 씨 말고도 사업 파트너가 한 분 더 계셨어요. 오이 군의 아버님이셨죠. 저희 남편의 대학 후배인데, 같이 조리사로 일했던 적도 있어요. 그런데 이분도 6년 전에 아들 후미치카를 두고 돌아가셨죠. 안 좋은 일이 연달아... 정말 점이라도 한번 봐야 하는 게 아닌지 모르겠어요. 오이 군은 아버님의 뒤를 이어 남편을 도와줘서 고맙긴 한데..."
분위기가 어두워진 걸 깨달았는지 아니면 제삼자인 우리에게 옛이야기를 떠벌린 게 부끄러웠는지, 부인은 "어머, 나 좀 봐." 하고 고개를 숙였다.
"쓸데없는 얘기를 했네요. 모레까지 여기 계시면 숙소도 가까우니까 또 놀러 오세요. 내일 이맘때에는 남편도 집에 있을 거예요. 샤리파가 직접 만든 딸기 케이크를 대접할게요."
우리는 그러겠노라고 약속했다.

- 운전대를 잡은 부인이 은빛 세단의 시동을 걸었다. 바깥으로 나가는 길에 오른쪽 수풀 너머로 크림색의 네모난 상자 같은 건물이 언뜻 보였다. 이 근사한 저택의 별채인가? 부인에게 묻자 "트레일러하우스예요."라고 대답했다.
"대단한 건 아니에요. 창고로 쓰는 것도 아니라 애물단지죠. 몇 년 전에 남편이 빚 대신 받아왔는데, 거치적거려 못 살겠어요. 필요한 분이 가져갔으면 좋겠는데 저런 걸 누가 가져가겠어요."
이곳이 일본이고 나에게 땅이 있다면 작업실로 쓰면 좋을 텐데. 스티븐 킹은 트레일러하우스에서 기거하며 쓴 소설로 데뷔해 대작가가 되었다. 그 흉내를 내고 싶었다.

- 전날과는 달리 오늘 저녁 식탁에는 말레이시아 전통 요리가 올랐다. 투숙객이 네 명으로 줄어든 까닭에 식당 한가운데의 커다란 테이블에 모여 가정적인 분위기에서 식사를 즐겼다. 물론 싫어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지만. 


- 오랑 아슬리 족의 마을에 갔던 이케자와 아키히코는 그들의 전통 가옥에서 차 대접을 받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고 했다. 신이 난 표정으로 이포에 갔던 이야기를 하는 앨런 글래드스턴의 이야기에 적절히 맞장구를 치기 위해 나는 열심히 귀를 기울였다.
 
- 케리 스미스는 요양을 위해 스코틀랜드로 돌아가는 길에 배 위에서 세상을 떠났다고 했다.
이야기를 듣고 호기심이 생긴 나는 혼자서라도 이포에 다녀올까 생각했지만, 왕복 다섯 시간이 걸린다고 생각하니 역시 귀찮았다. 그리고 내일은 하리마오 코티지의 티타임에 초대를 받았다.
"아리스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내 사무라이 잉글리시를 듣고 싶은 모양이다.
"흥미롭군요. 미스터리한 사건이 일어날 법한 곳이네요. 작품 속에 등장시켜보고 싶지 않습니까?"
그는 입술을 오므리며 말했다.
"흐음, 좋은 생각이네요. 나도 XX(알아듣지 못함)할 수 있도록 생각해 봐야겠군요. 아리스와는 다른 이야기일 겁니다."

 

- "앨런은 어떤 소설을 씁니까? 소설 얘기는 한 번도 못 들었네요."
이케자와가 후식으로 나온 아이스 까창을 스푼으로 뜨며 물었다. 까창은 흑조청을 얹은 말레이시아식 팥빙수인데, 아메리카무라나 하라주쿠의 노점상에서 팔면 틀림없이 유행할 것 같은 후식이다.

"지금 쓰는 건 동남아시아에서 길을 잃은 영국인이 현실인지 환상인지 구분이 가지 않는 일을 겪는 이야기입니다. 몸의 <비> 같은 작품을 쓰고 싶어요. 내 소설도 몸의 작품처럼 전 세계 사람들이 읽었으면 좋겠군요. 그러면 백만장자가 될 텐데."
"서머싯 몸을 좋아하시나 보죠?" 이케자와는 그렇게 묻더니 우리에게 "저는 안 읽어봤지만요."라고 말하며 웃었다.

- "영국 비평가들은 몸처럼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는 이야기를 써서 널리 사랑받은 작가들을 경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자기가 나설 자리가 없어지니까요. 적개심을 드러내기도 하죠. 직접 소설을 쓰지 못하는 치들은 비평이란 이름으로 XXX(알아듣지 못함)한 자기 이야기를 못해서 안달이죠. XXX(알아듣지 못함)예요. 누가 그런 데 돈을 쓴답니까. 결국 아무 의미도 없는 침(비유적인 표현?)을 남기고 아무에게도 사랑받지 못한 채 관에 들어가는 거죠. 나는 내 뜻대로 쓸 겁니다. 몸처럼 아흔이 넘어서도 소설을 쓰면서 독자들에게 사랑받고 싶어요."

- 현실인지 환상인지 구분이 가지 않는, 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는 난해한 소설을 쓰는 줄 알았는데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가 쓰고 싶은 건 정반대의 이야기인 모양이었다. 내가 묻고 싶었던 걸 이케자와가 대신 물어봐주었다.

"앨런은 지금까지 어떤 작품을 썼습니까? 출판된 책 제목이 뭔지 궁금하네요."
영국인은 어깨를 으쓱했다.

 

오늘은 일찍 자고 내일 아침에 산책을 나갈 생각이었다.
메카를 가리키는 천장의 키브라를 힐끗 보고 나서 불을 껐다. 어둠 속에서도 창가 근처는 어렴풋이 밝았다. 달빛과 별빛 때문이리라.
금세 잠이 몰려왔다. 잠들기 전까지 잠깐 동안 오늘 하루 있었던 일이 차례차례 떠올랐다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행복했던 시간이어야 할 텐데.

- 어째서일까?
눈꺼풀 뒤로 펼쳐지는 어둠. 그 속에서 회색의 뭔가가 다가왔다. 수분을 듬뿍 머금은 비구름 같다. 아, 이건 홍차 밭에서 본 풍경이다- 그렇게 생각했지만 뭔가 이상했다. 어둠에서 솟아오른 구름은 범상치 않은 요사스러운 기운을 띠고 있었다.
저게... 뭐지?
어느샌가 나는 그 어둠 속에 있었다. 무엇에 홀린 것처럼 바라보는 동안 회색 구름은 머리 위를 뒤덮었고, 그 그림자는 나를 삼켰다. 영문도 모른 채 나는 까마득한 불안에 휩싸였다. 어떻게든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뭘 어떻게 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잠에서 깨고 나서야 그게 꿈이었음을 깨달았다.
 
- 판자 바닥을 물들인 거무튀튀한 얼룩은 역시 핏자국이었다. 사람의 피일까? 만일 그렇다면 이 피를 흘린 사람은 상당한 중상을 입었으리라. 과도로 살짝 손가락을 벤 정도의 출혈이 아니었다.
순간 간밤에 꾼 기묘한 꿈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불길한 구름의 그림자가 밀려오는 것이 느껴졌다. 설명할 수 없는 무엇이 내 귀에 속삭였다. 예사롭지 않은 뭔가가 다가온다고.
불현듯 왼쪽 관자놀이에 시선을 느꼈다. 창밖에서 누가 쳐다보는 듯한 느낌에 뒤돌아봤지만 벽에 걸린 가면이 있을 뿐이었다. 귀신같은 형상의 가면 세 개가 조금씩 다른 위치에 걸려 있었다. 오랑 아슬리 족의 가면이라고 했던가. 기념품 가게에서 보았던 것과 달리 골동품인 듯, 때가 탄 데다 금이 간 곳도 보였다. 무기물에서 시선을 느끼다니 뭔가 불쾌했다. 나는 다시 바닥을 관찰했다. 

- 나는 소리도 내지 못한 채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섰다. 이런 사태를 예상하지 못했던 건 아니지만, 부릅뜬 남자의 눈이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한동안은 잊지 못할 것 같은 눈이었다.

- 젠장, 올 것이 왔군. 카터 딕슨의 장편은 '그가 뱀을 죽일 리가 없다'는 뜻의 제목이었는데, 뱀을 스네이크 snake라고 했는지 서펀트 serpent라고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아마 서펀트겠지. 나는 일단 'He couldn't kill his serpent'라고 말했다. 아닌가? 로슨은 번역된 제목과 원제가 아예 다를지도 모르기 때문에 로슨의 '어떤 작품'이라고만 말했다. 
"그런 소설이 있습니까? 어떤 내용인지는 모르지만 이번 사건을 해결하는 데 참고할 수 있나요?"
이케자와가 홍차를 마시며 물었다.
"모두 살인범이 트릭을 써서 현장의 창문과 문을 봉했거나, 그렇게 보이도록 꾸몄다는 내용의 작품입니다. 하지만 그 트레일러하우스의 상황과는 일치하지 않아요." 

"아쉽네요. 참고로 소설에 등장한 트릭이 어떤 건지 물어봐도 됩니까?"

(작가 주 : <파충류관의 살인>의 정확한 원제는 'He Wouldn't Kill Patience'(페이션스는 뱀의 이름), <다른 세상에서>는 'From Another World'다.)

남이 만든 트릭을 밝히는 건 도의에 어긋나는 짓이지만, 이번만은 특별히 가르쳐주기로 했다. 이케자와는 놀란 표정으로 감탄사를 내뱉더니, 앨런에게 "이런 트릭이 있는 걸 아십니까?"라고 신이 나서 말했다. 반면 히무라 교수는 철가면을 쓴 듯 무표정했다. 마음에 들지 않았나?

- "말했잖아. 출발 시간을 넉넉하게 잡고, 만한전석이나 먹으며 말레이시아와의 이별을 아쉬워하자는 계획이라고. 난 분명히 말했어."
나 원 참, 교직을 생업으로 하는 사람들은 학생들에게 잔소리를 해대면서 정작 남의 말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으니 황당할 뿐이었다. 저번에도 택시기사에게 "선생님들을 태우면 금방 알아봅니다. 남의 이야기는 하나도 안 듣거든요."
라는 말을 들었다.


- "아, 그랬나? 그럼 말레이시아에 이별을 고하는 시간을 생략하면 되겠네. 계획을 변경하면 몇 시 차를 타면 돼?"
말레이 철도의 시간표가 내 머리에 저장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모른다고? 그럼 쿠알라룸푸르까지 차로 가면 되겠네. 네 시간쯤 걸리니까 카메론 하일랜드에서 오후 7시쯤에 떠나면 되겠어."
아리스가와 여행사의 담당자로서는 적극 추천하고 싶지 않은 일정이었다. 나는 상관없지만, 비행기를 놓치면 피를 보는 건 바로 너라고.
"그래, 마음대로 해. 그렇게 하자고. 우리에게 남은 시간은 앞으로 30시간. 고된 싸움이 되겠네."

- 이야기하다 보니 어느새 코티지에 도착했다.
주변은 고요했다. 경찰차도 보이지 않았다. 일상의 공간에 구멍이 뻥 뚫린 것 같았다. 그 정적 가운데 우리가 차 문을 닫는 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그는 부하를 불러 이런저런 지시를 내렸다.

"몸싸움을 벌인 흔적이 없었던 건? 아직 옷을 벗겨 확인하지 않았지만."
히무라는 다시 주저앉아 시신을 살펴봤다. 티셔츠와 청바지 자락을 들쳐서 타박상과 찰과상이 있는지 확인했다. 분주하게 움직이던 히무라의 손이 갑자기 멈췄다. 청바지의 종아리 부분에 뭔가 있는 모양이었다.
"여기 뭔가 있어."
히무라는 시신의 벨트를 풀어 청바지를 벗겼다. 혼자서는 힘겨워 보여서 나도 거들었다. 다 벗겨내자 히무라는 바지를 안쪽으로 뒤집었다. 종아리 안쪽에 작은 주머니가 보였다. 안에 뭐가 들었는지 툭 튀어나와 있었다. 

- "안에 뭔가 들어 있는데?"
안에 들어 있던 건 자그마한 비닐 꾸러미로 싼 말린 잎이었다.
"이게 뭐지?"
히무라는 한숨을 내쉬었다.
"카나비스라고도 하지."

- "그가 로터스 하우스에 묵었을 때부터 그 사실을 알고 계셨죠?"

히무라의 물음에 이케자와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기분 좋게 술을 마시다가 슬쩍 흘리더라고요. 24시간 내내 목숨을 건 모험을 한다고요. 무슨 소리냐고 물었더니 베트남에서 산 마약을 가지고 있다지 뭡니까. 기겁했습니다. 그래서 입국할 때 입국카드를 보지 않았느냐, 약물 소지는 사형이라는 경고문이 장난인 줄 아냐고 했더니 실실 웃는 겁니다. 물론 자기도 안다면서요." 
쿠알라룸푸르에 착륙하기 전에 기내에서 입국 카드를 작성할 때나도 그 경고문을 보았다. 'DEATH FOR DRUG TRAFFICKERS'라는 강렬한 문구에 압도되어 잘못한 것도 없는데 괜히 제 발이 저렸다. 

- "위험하다고 말했는데도 '위험하니까 하는 거다. 그게 모험 아니냐?'라고 헛소리를 지껄이더군요. 듣고 있으려니 어처구니가 없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소름이 끼쳤습니다. 약물 반입이 사형으로 법제화된 나라에 마약을 반입하다니. 그런 어처구니없는 짓을 정말 모험이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게 말이 됩니까? 정신 나간 거죠. 히무라 교수님은 사회학부 조교수라고 하셨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정신 나간 게 멋지다고 생각하는 거죠." 
히무라는 카멜을 문 채 눈을 가늘게 뜨고 담배 연기를 바라보았다. 그런 것보다 따로 생각할 게 있는 것이리라.

- "멋지다고요? 하긴, 허세 부릴 생각만 머리에 가득한 녀석이었습니다. 하지만 정신 나간 걸 멋지다고 생각하다니. 아리스가와 씨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나는 사회학자가 아니지만 할 말은 있었다.
"정말 정신 나간 놈들은 제쳐두고, 허세를 부리려고 '정신 나간 척'을 하는 심리는 패션에 비유하자면 파격을 추구하는 거고요. 그 반대는 정석대로 단정하게 입는 거죠. 어느 쪽이 멋진지는 때와 장소, 사람에 따라 다르죠. 츠쿠이는 파격적인 패션을 추구한 겁니다. 단정하고 깔끔한 패션은 촌의, 파격적인 패션은 도시의 센스라고 여겨지는 모양이니 젊은 애들은 자연히 파격을 추구하게 되죠. 하지만 서글픈 건 그가 단정하고 깔끔한 패션도 세련되게 구사하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촌뜨기의 센스로 파격을 추구하면 보는 사람만 괴롭죠."

 

- "통렬한 비판이로군요." 이케자와는 히죽거리며 말했다. "말레이시아에 대마를 반입하는 게 도시의 센스이자 파격적인 패션이라는 비유는 좀 엉뚱하지만, 무슨 뜻인지는 알겠습니다." 
"파격을 추구하는 건 어렵지 않습니다. 어린애도 할 수 있죠. 하지만 정말 세련되게 꾸미려면 일종의 -아까는 도시의 센스라고 표현했습니다만- 미의식이 필요합니다. 그게 없으면 단정하고 깔끔하게 입으면 되죠. 하지만 그러려면 다른 종류의 -촌기의 센스라고 표현했습니다만, 나쁜 뜻은 아닙니다- 미의식이 필요하죠. 덧붙여 이쪽에는 최저한의 기술이 필요하겠죠. 어느 쪽에도 통달하지 못한 어설픈 사람, 한마디로 도시 사람인 척하는 촌뜨기들이나 정신 나간 척하는 겁니다.”
"츠쿠이는 도쿄 출신이었습니다."
"나고 자란 곳과 센스가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죠. 보면 한식구라도 각자 성향이 다르지 않습니까."
참고로 나는 넥타이 매듭을 느슨하게 매는 히무라 조교수의 센스에 부정적인 견해를 가졌지만, 여기서 고려해야 하는 건 그가 파격을 추구하는 의식을 가지고 있느냐다. 물론 그런 의식조차 없겠지만.

- "그러면 이런 경우에는..."
우리가 화기애애하게 잡담을 나누는 내내 히무라는 침묵을 지켰다. 탐정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는 것도 조수가 할 일이다.

 

- 모모세 준코가 추천한 치킨라이스가 나왔다. 나시고렝 위에 큼지막한 닭고기 조각을 올렸다. 파격을 추구한 말레이풍 중화요리였다. 조리법을 물을 필요도 없는 소박한 음식이었지만 먹어보니 과연 맛있었다. 
"그나저나 츠쿠이 군이 마약을 소지한 것과 이번 사건이 관련이 있을까요? 가지고 있던 대마초가 그대로 있던 걸 보면 그걸 빼앗으려고 저지른 범행도 아닌 것 같고요. 아, 이 치킨라이스 정말 맛있네요."
입맛이 별로 없다는 말과는 달리 이케자와는 쩝쩝대며 말했다.

- 뛰어난 통찰력을 자랑하는 히무라 선생도 나와 사정은 다르지 않았는지 자조하듯 말했다.
"생각지도 못한 사실이 밝혀졌군요. 저희가 못 미더웠나 봅니다."

"그러게요. 위 사장님은 반딧불이 같은 사람이니까 두 분이 신경 좀 써주세요."
"타이론이 반딧불이 같다고요?"
준코의 말뜻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도도이츠(일본 속요 俗謠의 하나로, 주로 남녀 간의 애정에 관한 노래임 - 옮긴이)에도 그런 시가 있잖아요. '사랑에 빠져 우는 매미보다 울지 않는 반딧불이가 사랑에 속이 타들어간다'고요. 위 사장님은 사랑을 몰래하는 타입이에요. 소설가인 아리스가와 씨 앞에서 이런 말을 늘어놓기 쑥스럽지만, '반딧불'이라는 마쿠라고토바(일본의 전통 시에서 습관적으로 일정한 말 앞에 놓는 4, 5음절의 일정한 수식어 - 옮긴이)가 있잖아요. '희미하다' 앞에 붙이는 말이요. 저는 위 사장님을 보면 항상 반딧불이가 떠올라요."

- 지금까지는 그저 우아한 부인이라고 생각했지만 꽤 풍류를 즐기는 모양이다. 투박한 인상의 남편과는 대조적이었다. 아니, 지금은 그보다...

- "미즈호 씨는 타이론의 마음을 알고 있습니까?"
내 물음에 준코는 고개를 저었다.
"전혀 모를 거예요. 미즈호는 웡후에게 푹 빠져 있었으니까요. 위 사장님의 게스트하우스에는 일본인 손님들이 많아서 저희 가게를 홍보해 달라고 부탁해 두었거든요. 그래서 미즈호가 홍보 팸플릿을 들고 찾아가거나, 사장님이 우리 사무실을 찾아오는 동안에 낯이 익었겠죠. 위 사장님과 사귄다면 저희도 축복해줄 텐데, 남녀 사이는 본인들 의사가 제일 중요하니까요." 
마치 미즈호에게 슬쩍 귀띔이라도 하고 싶다는 투였지만 이어서 이런 말도 했다.
"하지만 제 솔직한 바람으로는 후미치카 군과 잘됐으면 좋겠어요. 둘이 잘 어울리는 한 쌍이잖아요. 그리고 남편이 친구들과 힘을 합쳐 일궈낸 회사를 그 아들과 딸에게 물려주면 얼마나 좋겠어요. 여러모로 모양새가 좋죠."
토라오는 별말이 없었다. 남녀 사이에 주변 사람들이 이러쿵저러쿵하는 건 부질없는 짓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 "타이론은 모모세 씨를 무척 좋은 분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히키 시즈오 씨가 돌아가셨어도 미즈호 씨를 잘 보살펴줄 거라고 생각하고 싶은 모양입니다. 또 그러실 거고요."
"과대평가한 겁니다." 토라오는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남들보다 정이 많아서 그런 것도 아닙니다. 저희 회사는 작지만 일단 주식회사거든요. 미즈호는 아버지에게 회사의 주식을 물려받았고, 출자도 했습니다. 후미치카에게 맡아둔 자금도 있고요."

- 8시가 가까워지자 타이론은 주방을 둘러보러 자리를 떴고, 대신 2층에서 이케자와가 내려왔다. 우리는 식당으로 이동했고, 이내 카메론 하일랜드에서의 마지막 만찬이 시작됐다. 보란 듯 화려한 요리가 아니라 말레이시아의 갖가지 맛을 즐길 수 있도록 준비된 메뉴를 보고 우리는 무척 기뻐했다. 

- "두 분이 처음 오신 날에 있던 곤충 마니아 단체 관광객들 기억하시죠? 노래방에서까지 벌레 타령을 하는 데는 질렸습니다만, 재미있는 이야기도 좀 들었습니다. 생명이란 참 신기하더군요. 그 사람들은 벌레만 아는 게 아니라 생물 전반에 빠삭하더라고요."
이런 종류의 순수한 잡담은 식사 자리에서 환영할 만한 주제였다.
"특히 흥미로웠던 이야기는 수컷의 행동입니다. 인간 남자만 파트너의 마음을 끌기 위해 고생하는 게 아니라 곤충이나 파충류, 포유류, 조류, 어류까지 모두 마찬가지더군요. 아니, 인간이 그들과 같다고 해야겠군요." 

 

이케자와가 이야기를 주도하는 덕에 우리는 식사에 집중할 수 있었다.
"파트너의 마음을 끈다는 건 다른 말로 하면 번식 상대를 얻어 자손을 남긴다는 뜻이죠. 그 목적 하나를 이루려고 생물은 눈물겹게 노력합니다. 수많은 예를 들었는데, 놀랍기도 하고 우습기도 하더군요. 저도 모르게 눈물이 찔끔 나는 얘기도 있었고요. 남성 우위의 사회에 이의를 제기하는 페미니스트들은 할 말이 많겠지만, 기본적으로 생물은 암컷이 수컷을 선택하는 구조잖습니까. 어릴 때 사자의 갈기나 공작의 화려한 깃털이 암컷을 유혹하기 위한 장치라는 얘기를 듣고 수컷들도 참 살기 힘들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인간 역시 여자가 남자를 선택하는 구조라는 걸 깨닫고 맥이탁 풀리더군요, 하하, 수적으로도 대부분의 생물은 암컷에 비해 수컷이 많고요. 수억 마리의 정자가 하나의 난자를 향해 돌진하지만 수정되는 건 결국 한 마리뿐인 생식 시스템은 참으로 상징적이죠. 수정 시 세포가 복제될 때 미토콘드리아도 결국 '하나만 있으면 된다'는 원리에 따라 아버지의 미토콘드리아를 파괴하는 거 아닙니까. 유럽어 중에는 영어의 'man'처럼 남성이라는 단어가 '인간'의 뜻을 포함하는 차별적인 경우가 많지만, 불합리하기 짝이 없죠. 실상은 정반대 아닙니까. 암컷은 인간을 비롯한 생물 본체라면 수컷은 정보를 제공해 새로운 개체를 만드는 걸 돕는 하위 존재일 뿐이죠."

"하위라니, 그건 좀 지나치지 않습니까? 원본이 없으면 복제는 불가능하잖습니까."
나는 어설픈 예를 들며 반박했다.
"수컷의 정보가 고스란히 쓰이는 것도 아닌데 원본이라고 뭐 자랑스러울 게 있겠습니까."
그야 그렇지만.
"생물의 본체가 암컷이라는 말은 지나친 비약인 것 같으니 그 발언은 철회하겠습니다. 하지만 강한 수컷, 아름다운 수컷, 요컨대 뛰어난 수컷부터 암컷의 간택을 받는 게 자연의 섭리임을 저는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 개개인에게 자연의 섭리는 별반 의미는 없을 테고, 빼어나고 아름다운 여성이 실연하는 경우도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야기가 재미있어서 가만히 있었다.

- "그럼 그리 우수하지 않은 수컷은 어떻게 하면 될까요? 조물주는 자손 같은 건 남기지 말라고 하지만, 세상에 태어난 이상 어떻게든 번식하려 하죠. 곤충 마니아 모 선생에게 들은 이야기입니다만, 어떤 도룡뇽의 예가 무척 흥미롭더군요. 인기 있는 수컷이 걸어가면 매력을 느낀 암컷이 그 뒤를 따라간다고 합니다. 그러면 수컷은 정자 덩어리가 든 정포라는 주머니를 배출하고, 암컷은 그걸 몸 안에 넣어 수정시킨다고 하죠. 그럼 아무도 따라오지 않는 인기 없는 수
컷은 어떻게 할까요? 인기 있는 수컷과 그 뒤를 따르는 암컷 사이에 끼어듭니다. 암컷 흉내를 내면서요. 그러면 앞장선 수컷은 암컷이 따라오는 줄 알고 정포를 배출하죠. 동시에 뒤따라가던 수컷은 자기 역시 정포를 배출해 암컷에게 주고, 앞선 수컷이 배출한 정포는 자기가 먹어버린답니다. 정말 비열하지 않습니까?"
"치사하네요."

나는 딱 잘라 말했다.
"그렇죠? 물고기 중에는 수컷과 암컷이 짝짓기 하는 걸 바위 뒤에 숨어서 바라보다 암컷이 산란한 순간 뛰어나가 상대 수컷보다 먼저 정자를 뿌리는 녀석도 있답니다. 정말 좀스러운 행동이죠. 또 어떤 어종에서는 인기 있는 수컷이 제 영역에 여러 마리의 암컷을 끌어들여 산란시키고 나중에 한꺼번에 정자를 방출한다는데, 여기서도 인기 없는 놈은 암컷인 척 영역에 숨어들어 주인이 다른 데 정신이 팔렸을 때 모아놓은 알에다 정자를 뿌린다는군요."
"아름답지 않군요."
"네, 치사하고 한심하죠. 하지만 그러지 않으면 자손을 남기지 못하는 개체도 있습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릴 처지가 아닌 거죠. 더구나 그런 비겁한 수컷일수록 격렬한 싸움을 벌여 다치는 경우도 없기 때문에 오래도록 잘 살아남는다고 하는군요. 수컷의 삶이란 싸워서 만신창이가 되든지, 맥없이 한심하게 살아가든지 둘 중 하나인 거죠. 참 고달픈 인생 아닙니까?" 
평소에 그런 식으로 생각해 본 적은 없지만... 그런 건가?

(리뷰자 주 : 갑오징어도 비슷한 전략을 취한다.)

- "왜 이런 이야기가 나왔느냐면... 아, 어떤 사람이 타이완에 곤충채집여행을 갔던 이야기를 꺼낸 게 계기였습니다. 타이완의 푸리라는 도시는 세계 제일의 나비 서식지로 나비를 이용한 공예품이 유명한데, 전문가들은 하루에 1만 마리나 잡는다고 합니다. 그렇게 잡아대도 수가 줄지 않는 건 수컷만 잡기 때문이죠. 그 이야기를 들으니 서글퍼지더군요. 수컷은 역시 정보를 제공하고 나면 쓸모없는 존재인 건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요..."
"비하가 심하시네요. 남자로 태어난 게 슬프십니까?"
"그건 아닙니다. 힘든 일도 많지만 여자라고 뭐 다르겠습니까. 인기 없는 남자로 태어난 게 슬프다는 거죠."
이야기는 젠더론으로 빠지지 않고 농담으로 마무리되었다.


- "히무라 교수님에게는 지루한 이야기였나요?"
말없이 음식을 먹는 히무라를 향해 이케자와는 그렇게 물었다.
"아닙니다. 잘 들었습니다. 그런데 수컷이 슬픈 존재라면 그를 상대하는 암컷 역시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이케자와는 잠시 동작을 멈췄다.
"오호, 그렇게 받아칠 수도 있군요. 히무라 교수님께 걸리면 세상은 단숨에 슬픔으로 뒤덮이겠네요."
우리는 웃음을 터뜨렸다. 웃지 않으면 어쩌겠는가. 신이 만든 모든 것을 생각하며 웃었다. 비웃는 건 아니었다.

- "그러고 나서 캐비닛에 들어가면 밀실은 완성됩니다. 그리고 눈에 띄지 않게 도망쳐 진짜 시체와 바꿔치기한 거죠."
부채를 부치던 경부의 손이 순간 멈췄다.
"트레일러하우스 밖에서 내부의 문과 창문을 테이프로 봉하는 건 불가능합니다. 그렇다면 안쪽에 살아 있는 인간이 있었음이 틀림없다. 앨런은 그렇게 생각했겠죠. 그런 가정에서부터 추리를 시작했고 끝까지 그 주장에 집착했죠. 그 결과 완성된 건 어처구니없는 스페인 성이고요." 
스페인 성, 캐슬 인 스페인이 '백일몽'을 뜻한다는 이야기는 나중에 히무라에게 들었다.

- "어처구니없는 추리를 했군요. 믿어지지 않을 만큼 참담합니다. 트레일러하우스 안에 살아 있는 사람이 있었다고 가정했다면 그보다 훨씬 제대로 된 가설을 세웠어야죠. 웡후와 꼭 닮은 대역을 찾아내 범죄에 끌어들이지 않아도 범인은 침실이나 욕실에 숨어 있었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교수님과 아리스가와 씨가 시체를 발견해 놀란 틈을 타서 문을 통해 빠져나갔고요. 그 자리에 있던 두 분을 제외하고, 존을 포함한 모든 사람이 공범이라 가정하면 되죠. 이 추리는 어떻습니까?"
"지당한 말씀이십니다. 공범의 수에 제한이 없다면 차라리 그 가설이 합리적이죠. 하지만 애초에 존에게 연민을 느꼈기 때문인지, 아니면 그와 이야기를 나눴을 때 수상한 점이 없었기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앨런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끝까지 대역을 이용한 시체 바꿔치기 설을 고집했죠. 저와 아리스가와 산 사람과 시체를 구별하지 못하고, 웡후의 얼굴도 알아보지 못하는 걸로도 모자라 대역과 진짜 시체를 바꿔치기하는 것도 알아채지 못하는 얼빠진 녀석이라 생각한 겁니다."
마지막 대목을 들으니 짜증이 치밀었다. 히무라가 '범행 현장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엉터리 추리를 떠올렸을 가능성이 있다'고 했던 건 바로 이것이었다. 어처구니없는 가설이었지만 앨런이 했던 말들을 떠올려보니 대략 아귀가 맞았다.

- 앨런의 추리가 히무라가 말한 것과 일치한다 해도, 그가 노트에 그 내용을 기록했다는 보장은 없었다. 기록하지 않았을 경우에는 앨런의 머릿속에 있던 추리는 영원히 수수께끼로 남는다. 하지만... 


- 모두 히무라가 말한 그대로였다.
 
- 생기 없는 얼굴의 타이론이 서 있었다.
"엄청 시달린 얼굴이군."
타이론은 대답 없이 비틀거리며 다가와 내 옆자리에 앉았다.

"심하게 시달린 건 아닙니다. 그저 이런 경험이 없어서 좀 겁이 나네요."
"이런 경험이 있으면 안 되지. 앨런이 남긴 OOI 때문에 경찰이 위라는 성을 가진 사람을 괴롭히는 것뿐이야. 그러는 거 보면 단서가 없긴 정말 없나 봐." 

 

- "글래드스턴 씨는 왜 그런 걸..."
타이론은 인상을 쓰며 고민했다. 내가 그건 범인의 위장공작이라고 해도 표정은 계속 어두웠다.
"범인이 저에게 죄를 뒤집어씌우려는 거라면 나를 미워하는 사람이라는 말이잖습니까. 나를 그렇게 미워하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면 무서워요. 남의 미움을 받는다고 생각하면 너무 싫어요."
"네가 미워서가 아니라 쓰기 쉬운 이름을 대충 골랐을지도 몰라."

"어쨌든 싫어요. 남에게 미움받는 건."
친구는 정신적으로 약해져 있다. 알고는 있지만 짜증이 났다.
"서른넷씩이나 먹어서 사춘기 애들 같은 소리 하지 마. 남에게 미움받는 게 무서워서 이 험한 세상 어떻게 살려고 그래. 주변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사람은 없어. 자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셋이면 싫어하는 사람은 열 명이라고 생각하면 편해. 아무에게도 미움받지 않는다는 건 아무에게도 사랑받지 못한다는 뜻이나 마찬가지야. 알겠어?" 
타이론은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내가 왜 핏대를 세우는지 이해하지 못한 것이리라. 그럴 만도 했다. 나는 미즈호가 타이론의 마음을 불편하게 여기는 게 분했다. 하지만 그녀를 비난할 수 있는 일도 아니라 어쩔 수 없이 타이론에게 화풀이를 한 것이다.

- "아리스가와 씨에게 이렇게 혼난 건 처음이네요. 놀랐습니다."

타이론은 멍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건 네가 잘못 생각한 거야." 히무라가 입을 열었다. "아리스가 한번 화나면 아무도 못 말려. 언제 폭발할지 몰라서 이 녀석 담당 편집자는 방탄조끼를 입고 다닌다고." 
"헛소리 집어치워. 취급 주의 딱지가 붙은 건 너잖아, 인간 니트로글리세린 주제에. 평소에 내가 널 얼마나 조심스럽게 대하는지 모르지?"
"아이고, 그만들 하세요."

타이론이 중재에 나섰다.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거지?
비가 그친 하늘에는 수많은 별들이 빛나고 있었다.  

 

- 경부는 히무라와 나를 무시하듯 홱 발길을 돌려 떠났다. 일본에서 경찰 수사를 돕는다더니, 실제로는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경찰차 두 대가 연이어 나타났다. 도착한 게 아니라 돌아온 것이다. 관계자들에게 들은 이야기를 보고하러 온 것이리라. 뭔가 수확이 있어야 할 텐데.

- "홍차를 내오겠습니다. 히무라 씨는 커피로 드릴까요?"
자리에서 일어나며 묻는 타이론에게 조교수가 대답했다.
"뼛속까지 서비스 정신이 배어 있군. 고마워, 커피로 부탁해." 그리고 한 마디 덧붙였다. "너 같은 사람이 있어서 이 세상이 조금이나마 조화로울 수 있는 거야."
타이론이 웃으며 떠나자 히무라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나 같은 놈들만 우글거리면 지옥이겠지."
옆자리의 친구는 날카롭지만 쓸쓸한 눈빛으로 밤하늘 저편을 바라보았다. 미즈호가 웡후와 닮았다고 한 건 히무라의 이런 눈빛이었는지도 모르겠다.

- "이케자와는 하루 더 묵어간다고 하더군. 우리도 그러면 좋을 텐데. 네 볼일이라는 거, 절대로 미룰 수 없는 일이야? 친구가 살인혐의를 쓰고 있는 상황인데도?"
"벌써부터 앓는 소리야? 아직 열아홉 시간이나 남았잖아."
그 말에 손목시계를 보자 자정이 지나 있었다. 벌써 돌아갈 날이 밝았다.
"아리스."
밤공기 속에 히무라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난 네가 의심스러워."
뜬금없이 무슨 소리지?

- "내가? 설마 의외의 범인으로 날 지목하려는 건 아니지?"
"그런 거창한 게 아니라, 더 지루하고 시시한 일상적인 얘기야. 너, 앨런의 마지막 전화 내용을 제대로 들은 거야?"
"물론이지. 내가 들은 대로 너한테 말했잖아. 쓸데없는 말을 더 보태지도 않았고, 놓친 것도 없어."
"하지만 잘못 전했을지도 모르잖아. '아이돈트 미스 어 트릭'을 '나는 트릭이 없어도 쓸쓸하지 않다'라고 해석했으니 말이야."
내 영어 실력이 의심스럽다는 소리였군. 그런 거라면 당당하게 반박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어설프게나마 히무라와 다른 사람들의 영어 대화를 알아들었고, 앨런과의 마지막 통화에서도 어렵고 복잡한 이야기는 나오지 않았다. 잘못 해석한 기억은 없었다.

"확실해?"
"예스."
"통화하면서 계속 시끄러웠다고 했잖아. 그거 때문에 잘못 들었을 가능성은 없고?"

- 타이론의 어깨를 두드린 뒤 서장은 다시 수사의 중심으로 돌아갔다. 나는 볼멘소리를 했다.
"수사는 난항을 겪는 모양이군. 모든 관계자들에게는 알리바이가 없고, 흉기는 누구나 구할 수 있었던 쇠파이프, 게다가 앨런 글래드스턴이 몇 시에 로터스 하우스에 돌아오는지도 모두 알고 있었어. 동기는 입막음인 것 같으니 이 또한 모두에게 해당된다고 해야겠지. 골치 아프군."
"아리스가와 씨, 히무라 씨. 피곤하실 텐데 그만 쉬시는 게 어떨까요?"
"지금 상황에서는 잠자는 시간도 아깝지만 머리도 좀 쉬어야지."

히무라는 말없이 웬일로 커피에 설탕을 넣고 있었다. 지쳤을 때는 뇌세포도 육체도 당분을 필요로 하는 법이다.

- 쨍, 하는 소리가 났다.
히무라가 스푼을 떨어뜨린 것이었다.
"불길하게 왜 수저를 떨어뜨리고 그래."
조교수는 힘없이 웃는 나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두 손으로 테이블 가장자리를 움켜쥐더니 찻잔 속을 들여다보았다. 이물질이라도 들어간 건가.
"아리스. 내가 멍청했어."
"뭐?"
히무라는 고개를 숙인 채 말했다.
"더 일찍 깨달았어야 했어. 나도 들었으니까.”
"들었다니, 뭘?"

 

- "어떻게 트레일러하우스를 봉했는지, 그 답 말이야. 그것만 알면 범인은 대충 짐작이 가는데."
뭔가 이상하다. 히무라는 마치 사건의 진상을 알아낸 듯 말하고 있었다.
"밀실의 수수께끼를 풀면 범인의 정체도 밝혀진다는 말은 앨런도 했어."
"아냐, 앨런은 처음부터 끝까지 완전히 헛짚었어. 밀실의 수수께끼를 풀어 범인을 알아낸 건 나야. 지금 나를 말하는 거라고."
테이블 가장자리를 움켜쥔 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드디어 고대하던 순간이 찾아온 건가.

히무라는 뭐라고 중얼거렸다.

"침착해, 잘 생각해 봐."

자기 자신한테 하는 말이었다. 신중하게 마지막 추리의 조각을 맞추고 있는 것이리라.

- 반대쪽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타이론이었다. 어찌 된 영문인지 그는 히무라를 보고 겁먹은 것 같았다. 나는 혼란에 빠졌다.

"오오... 뭔가 알아낸 겁니까?"
범죄학자는 그 물음에 대답하지 않고 나에게 뭔가 물었다. 마지막 질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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