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1

[아리스가와 아리스] 하얀 토끼가 도망친다

일루젼 2025. 4. 9.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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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아리스가와 아리스 / 김선영
출판 : 시작
출간 : 2008.07.10


       

 

 

발췌문만 다시 읽어도 한 권 전체를 재독한 느낌이 드는 책들이 있다.

생략된 부분들이 저절로 떠오르며 처음부터 끝까지 '그랬었지...' 하게 되는 책들.

 

<하얀 토끼가 도망친다>는 그런 책이었다.

 

특히 중단편집만이 가지는 호흡이 매력이었다.

아리스가와와 히무라라는 고정된 캐릭터들이 있지만 완전히 다른 배경과 사건, 주변 인물들이 등장한다. 각각의 이야기는 완전히 별개의 분위기를 뿜어내면서도 서로 연결되어 있다. 

하나의 이야기를 긴 호흡으로 가져가는 장편도 그 나름의 매력이 있지만, 개인적으로 아리스가와의 매력은 중단편에 있지 않나 싶다. 깔끔한 생략과 재치 넘치는 아이디어, 매력 있는 캐릭터. 

 

당시 연이어 읽었던 작가 아리스 시리즈 중 <하얀 토끼가 도망친다>와 <절규성 살인사건>이 가장 마음에 들었던 건 두 책 모두 중단편집이어서가 아니었을까 싶다.

 

최근의 휴일 루틴.

눈을 뜨면 가볍게 호흡을 가다듬고, 스트레칭을 하고, 이부자리를 정리하고 아침을 먹는다. 

씻고, 로봇청소기와 식세기를 돌린 뒤 커피를 내려 책을 읽거나 발췌를 정리한다. 

 

... 무서울 정도로 행복한 일상이다.

 

조금 더 안정되면 미루고 있는 큼직큼직한 부분들을 정리하고, 요가원이나 화실을 다니면 딱 좋을 것 같다.

그동안 고생했으니 누리는 시기도 좀 있어야지. 

 

어쩐지 좋은 일이 생길 것만 같은 하루. 

 

           

   


   

 

- 무슨 사정이 있어 공사를 중단한 모양인지 인부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토요일이라 쉬는 것 같지는 않았다. 임대 맨션이라도 세우려다가 자금난에 빠지고 말았는지도 모른다.

- 가지야마는 한숨 돌린 후에 핸드백을 열고는 뒤지기 시작했다. 돈이 될 만한 물건은 지갑뿐이었다. 그럼 얼마나 들어 있나 볼까? 지갑을 확인하는 순간은 언제나 그렇지만 기대와 흥분으로 가슴이 요동친다. 이번 수확은 과연...
지폐가 석장. 그것도 전부 천 엔짜리다. 가지야마의 입에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차림새는 그럴싸한 아줌마였는데, 이래서야 끔찍하게 보람이 없다. 버리고 온 자전거 -그것도 훔친 물건이지만- 값도 안 나온다. 겨우 반창고 하고 약값 아닌가. 실망하고 나니 대번에 옆구리가 욱신욱신 아파온다. 죽어라고 달린 게 무리였나 보다. 

- 옆구리의 통증은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았다. 하지만 지나치리만큼 인기척이 없어 숨어 있어도 조금도 불안하지 않았다. 4월의 태양은 빌딩 사이로 침몰하여 저녁노을이 주위를 감싸기 시작했다. 

- 가지야마는 철재 그늘에서 고개를 쏘옥 내밀고 사내의 모습을 뚫어져라 관찰했다. 본 적이 있는 얼굴이었다.
"저 사람은..."
소설가 구로스 도시야가 아닌가? 치켜 올라간 눈썹 밑에 약간 벌어진 두 눈 움푹 파인 턱, 책표지의 작가 사진과 똑같은 얼굴이다. 아니,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몸집이 가냘팠지만 체격은 얼굴 사진만 보고는 알 수 없는 법이다. 어째서 구로스 도시야가 이런 곳에 있을까? 가지야마는 의아했지만 오사카에 사는 소설가이니 오사카 시내를 돌아다녀도 이상할 건 없다. 저 빌딩에 사무실이 있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약간 초라한 사무실이긴 하지만 빌딩 입구에는 하라시마빌딩이라는 간판이 걸려 있었다. 구로스 도시야로 보이는 인물의 등장에 정신을 팔고 있는 사이에 옆구리의 통증이 잦아들었다. 언제까지 이곳에 숨어 있을 수도 없으니 이제 슬슬 떠나야겠다. 

- "자택은 어딥니까?"
"현장 바로 근처, 걸어서 1분쯤 되는 곳에 있는 맨션입니다. 요시에는 그곳에서 생활하면서 하라시마 빌딩의 작업실에 통근하고 있었던 거지요."
번역 같은 일이야 집에서도 할 수 있을 텐데, 돈도 많다 싶었다. 작업실을 만들어 거기로 통근한다는 소설가 이야기는 종종 듣는다. 기분을 전환할 수 있어 좋기야 하겠지만 내게는 그런 경제적 여유가 없다. 
"직업 탓이겠지만 엄청난 양의 장서가 있어요. 그게 2DK두 개의 방과 거실 겸 주방으로 구성된 집 구조의 맨션에 넘쳐나서 근처에 서고 겸 작업실을 얻었다나요. 사건 당일 요시에는 오후 1시부터 202호에서 어떤 공업특허와 관련된 번역을 하고 있었다는데, 맨션에 있는 책이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5시쯤 책을 가지러 자택에 돌아갔다고 합니다. 책을 찾는 김에 이것저것 집안일을 하다가 작업실로 돌아온 시간이 8시 전문은 잠겨 있지 않았습니다. 거기서 구로스 가쓰야의 타살 시체를 발견했습니다." 

- "우편함을 보니 사무실이 많은 것 같군요. 살고 있는 사람은 있나요?"
"없습니다. 건물주인 하라시마 씨도 자택은 따로 있고, 202호의 미노다 요시에도 아까 말씀드렸듯이 근처 맨션에서 살고 있어요. 나머지 세 방의 입주자도 마찬가지입니다. 301호와 302호의 임차인은 여성속옷 통신판매회사. 401호는 정보지 편집 프로덕션입니다. 통판회사는 토요일이 휴일이지만, 401호에는 사원이 한 명 출근해서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가가미 유키라는 여성입니다. 가가미는 2층에서 살인사건이 있었는지조차 몰랐다고 합니다. 나중에 이야기를 들어보시겠습니까?"
히무라가 "네"라고 대답하며 검은 실크 장갑을 꼈다. 그리고 테이프 밑으로 기어 들어가 202호로 들어갔다. 안에는 관할서의 수사관 한 명뿐이었다. 우리를 보자마자 정중하게 경례를 했다. 

- 방 면적은 10조 (疊, 다다미 장수를 세는 단위로 방의 크기를 나타낼 때 사용하는 단위. 다다미 한 장의 크기는 일반적으로 910×1820밀리미터이다) 정도 될까? 큼직한 사무용 책상이 창을 등지고 놓여 있고, 좌우의 벽은 책으로 가득 찬 책장이었다. 책상 위에도 외국서적이나 각종 사전이 몇 권이나 산처럼 쌓여 있다. 얼핏 둘러보니 문학서는 별로 없다. 미노다 요시에의 작업은 주로 기업의 의뢰였다는 사실을 엿볼 수 있다. 책상 위에는 무역상사나 컴퓨터 회사의 회사봉투도 널려 있었다. 

- "도저히 그렇게 생각할 수 없는 묘사를 발견했어요. 사실은 오른팔을 잃은 게 아니죠? 시리즈의 클라이맥스,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진 장면에서 류자키의 오른팔이 코트 밑에서 불쑥 나와 콜트 가버먼트를 쏜다. 그런 꿍꿍이를 숨기고 있는 시리즈죠, 그건."
"아, 안 됩니다, 아리스가와 씨. 그런 중요한 기업비밀을 공개적인 장소에서 떠들면 여기서만, 여기서만 하는 얘기라고 약속해 주세요. ... 어, 어느 묘사에서 눈치를 챘어요?"
"글쎄요. 그게 기억이 안 나네요. 서른넷이나 되면 기억력이 눈에 띄게 감퇴해서 말이죠."
히무라가 한심하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시시한 방법으로 동업자를 괴롭히지 말라는 듯이.

- 류자키 세이지는 사실 오른팔이 있다.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는 묘사가 있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단지 그건 작가가 시리즈 전체에 장치한 큰 함정이라기보다 단순한 실수였을 것이다. 도시야는 그 실수를 고백하지는 않고 마치 '그 아이디어는 내가 쓰겠다!'라는 듯이 덥석 물었다. 경멸은커녕 오히려 감탄했다.
프로다, 당신.

- "흔히 하는 말이지만 눈 하고 달라서 귀는 닫을 수 없습니다."

카페에서 내가 흘렸던 말을 인용한 것이다.
"마음이 딴 데 가 있을 수도 있죠. 그렇게 큰 소리를 못 들었냐고 물으셔도 달리 대답할 말이 없군요."
요시에는 의연하게 딱 잘라 말했다. 마치 히무라에게 대항하는 것 같은데, 그 이유 역시 이해하기 어려웠다. 당신이 범인이라고 규탄한 것도 아닌데.
"그렇게 정색하지 않으셔도."

"무례한 분이군요, 선생님은!"
요시에의 목소리가 커졌다.
"쓸데없는 질문으로 제 신경을 긁어놓고 '그렇게 정색하지 않으셔도' 라니, 기분이 좋지 않군요."
"사죄해야 한다면 나중에 몰아서 사과하겠습니다. 무례를 범한 김에 하나만 더 부탁드리고 싶군요. 그 터틀넥을 젖혀서 목을 보여주시겠습니까?"

- "경찰을 돕고 있다고는 하지만, 당신은 남에게 뭘 강요할 권리가 없어요, 히무라 선생님. 요시에 대신 말하겠는데, 지나친 월권행위를 하신다면 내쫓겠습니다." 
히무라는 두 손을 들어 그 말을 받는 시늉을 했다. 침착한 태도다. 

"강요할 생각은 없었습니다. 안 된다면 상관없습니다."

 

- 범죄현장이 된 빌딩 주위는 보도관계자와 구경꾼들이 넘쳐나고 있었다. 사건의 성질을 고려하면 그도 그럴 만하다.
경찰 수사를 도와 현장조사를 하는 '임상범죄학자' 히무라 히데오와 함께 나도 그동안 수많은 살인사건 현장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평소와 상황이 완전히 달랐다. 이상하리만치 팽팽하고 날카로운 공기가 감돌고 있어 무서울 정도다.

- "이쪽입니다.”
미리 기다리고 있던 사메야마 경부보는 우리를 채근하듯 출입금지 테이프 안쪽으로 부르더니 빌딩 입구 옆에 있는 방으로 안내했다. 과거에는 카페였으리라. 카운터의 잔해와 테이블 몇 개, 의자가 남아 있다. 그 의자 하나에 불안하게 앉아 있던 후나비키 경부는 우리를 보자마자 벌떡 일어섰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번에는 특히나 어려운 부탁을 드려 죄송합니다. 시간이 별로 없을지 모르다 보니."
"시간이 별로 없다니, 무슨 말씀이십니까?"
칠칠치 못하게 느슨히 푼 넥타이 매듭을 가다듬으며 -더 풀면서- 히무라가 물었다. 대머리 배불뚝이 경부는 우리 뒤쪽의 문을 흘깃 쳐다보며,

- "녀석들이 뛰어들었습니다. 자기들한테 맡기라고요. 하지만 우리도 양보할 수 없는 사건이라 줄다리기를 하고 있어요. 제 입장에서는 당연히 선생님과 아리스가와 씨의 지혜를 빌려 그놈들이 수사를 채가기 전에 해결하고 싶어서."
"양보할 수 없는 이유는 모리시타 씨 때문이지요?"
나는 묻지 않아도 될 질문을 했다.
"그렇습니다. 부하가 휘말린 사건을 공안에 넘길 턱이 없잖습니까. 그렇게 엉성한 수사밖에 못 하는 놈들한테. 게다가 그게 얽혀 있는 사건이니까요. 지금 우리 부장이 힘쓰고는 있지만, 이대로 가면 위에서 '후나비키, 나서지 말고 물러서' 하고 지시가 내려올 게 뻔해요. 그래서 시간이 없습니다." 

- 갑자기 문이 벌컥 열리면서 내 등을 스쳤다. 들어온 사람은 불쾌한 표정에 멧돼지처럼 목이 짧은 수사관이다. 뒤에 모리시타 형사를 대동하고 있다. 검은 재킷에 하얀 티셔츠, 청바지와 스니커 차림의 모리시타는 눈꺼풀이 퉁퉁 붓고 몹시 피곤한 기색이었다. 두 손목에는 붕대를 감고 있다.
"후나비키 씨, 모리시타 군을 돌려드리지."
거의 목이 없는 사내는 쌀쌀맞게 말했다. 알고 보니 공안 형사였다.

"또 이야기를 듣고 싶으면 부르겠네. 그나저나 자네들은 언제까지 여기 있을 텐가? 본부에서 다른 일들이 기다리고 있을 텐데."

그러더니 히무라와 나를 흘끗 보고,
"이 두 사람은 혹시..."

 


- "모리시타 씨가 묶여 있었던 곳은 어디입니까?"
히무라 히데오의 질문에 모리시타는 의자 하나를 가리켰다.
"아리스가와 씨가 서 있는 옆쪽의 그겁니다."
계단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구석에 있는 의자였다. 약 여섯 시간 전까지, 모리시타는 접착테이프로 그곳에 묶여 있었다. 그리고 세상에 둘도 없이 잔혹한 장면을 목격했다. 


- "손을 뒤로 돌려서 두 손목을 등받이에 두 발목은 의자 다리에 묶였습니다. 겨우 헝겊 테이프로 묶은 것쯤 어떻게 못하겠냐고 죽어라 몸부림을 쳤지만, 한심하게도..."
아이돌처럼 반듯한 얼굴이 분하다는 듯 일그러진다. 경부는 그 어깨를 가볍게 토닥였다.
"모리시타. 너는 슈퍼맨이 아니야."
위로하는 말이 별로 통하지 않았나 보다. 모리시타는 이를 갈며 자기가 묶여 있었던 의자를 노려보고 있다.

 

- 일시적인 위안일 뿐이라는 걸 알면서도 말했다.
"하지만 혼자 힘으로 테이프를 끊은 사람은 모리시타 씨뿐이었잖아요? 모리시타 씨가 손목을 다쳐가면서까지 테이프를 풀지 않았다면,"
모리시타는 위로를 거절했다.
"위로는 필요 없어요, 아리스가와 씨. 제가 테이프를 끊지 않았어도 세 시간 후에는 구조대가 왔을 겁니다. 고미야마와 가게우라는 이곳을 떠날 때 했던 약속을 지켰으니까요."

- "그게 한심하면 혼자 의미 없는 자아비판을 할 게 아니라 적극적으로 머리를 써야지! 누가 어떻게 사가를 죽였는지 생각해 봐! 너도 1과 형사잖아!"
모리시타는 입술을 깨물었다. 히무라는 말없이 딱딱한 구둣소리를 내며 실내를 한 바퀴 돌았다. 하지만 눈여겨보아야 할 건 없는 듯했다.

 

- "위층으로 돌아갈까요?"
경부가 묻자 모리시타가 대답했다.
"아니요. 여기서 이야기하겠습니다. 불쾌한 장소지만 그 편이 기억을 더듬기 쉬우니까요. 히무라 선생님, 아리스가와 씨. 그래도 괜찮겠습니까?"
히무라는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았다.
"네, 물론."
히무라가 그리 말하는데 '조수'인 내게 이의가 있을 리 없다.

- 우리는 벽 쪽에 있는 네 개의 의자에 앉았다. 모리시타는 굳이 본인이 구속되어 있었던 불쾌한 의자를 골랐다. 그리고 시체가 쓰러져 있던 쪽을 바라보며 또박또박 이야기를 시작했다.

- 조금씩 의식이 돌아온다. 머리가 지끈지끈 아팠다.
처음 눈에 들어온 것은 스니커를 신은 자신의 두 다리. 그리고 싸늘한 콘크리트 바닥이다.
'여기는...?'
얼굴에 흘러내리는 앞머리를 쓸어 올리려다가 두 손이 자유롭지 못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손을 파이프 의자 뒤로 둘러 묶어놓았던 것이다. 두 발목도 헝겊 테이프로 의자 다리에 단단히 고정되어 있다. 

- '지하실인가.'
아무것도 없는, 텅 빈 방이었다. 위로 통하는 듯한 계단은 있지만, 창도 문도 보이지 않는다. 한쪽 구석에 접힌 파이프 의자를 몇 개 기대어 놓았다. 형광등 불빛은 약했고, 축축한 냄새가 코를 찌른다. 지하실이라고는 하지만 어떻게 생긴 건물의 내부인지 추측할 단서가 없었다.

- 나는 고미야마 렌을 발견하고 본부에 신고하려 했어. 전화를 걸었더니 지노 씨가 받아서... 그다음에 어떻게 됐지?
기억이 되살아났다. 누군가 뒤에서 입가를 막았다. 그래서 의식을 잃어버렸다는 말은, 클로로포름 종류를 맡은 것이 틀림없다. 놈들이라면 그 정도 소도구는 상비하고 다녀도 이상할 것 없다. 놈들- 샹그릴라 십자군이라면.

- 그들의 모체는 '카테랄의 빛'이라는 티베트 불교를 흉내 낸 신흥 종교이다. 전재산 기부와 출가를 강요하여 가족과의 연을 끊게 만드는 방법이 사회적 비난을 받고 있지만, 카테랄의 빛 자체는 그리 위험한 종교단체가 아니다. 거기서 파생된 과격분자가 샹그릴라 십자군이었다. 그들은 비현실적인 이상향 샹그릴라를 건설하기 위하여, 오욕에 물든 현세를 정화하기 위하여, 숙청의 철퇴를 가한다는 명목으로 방송국이나 경마장에서 폭탄을 터뜨렸다. 어리석은 광기의 샹그릴라 혁명. 공안 당국이 사전에 움직인 덕분에 그 계획은 단숨에 제압당했고 주요 멤버 -대원의 대다수- 를 체포할 수 있었지만, 대표인 오니즈카 류조 鬼塚瀧造를 비롯한 간부 네 명이 경찰의 손을 빠져나가 지금도 도주 중이다. 경시청이 전국에 지병수배를 내린 네 명이 바로 오니즈카 류조, 만다 다카아키 万田孝明, 가게우라 노리코 蔭浦典子, 그리고 고미야마 렌이다.

- 의식이 완전히 돌아와 머릿속을 덮고 있던 안개가 걷혔다. 뜻밖의 실수를 저질렀을 때가 오후 6시 10분쯤이었을 것이다. 그 후로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알고 싶었지만, 손목시계를 볼 수 없으니 한 시간이 지났는지, 반나절이 지났는지, 전혀 모르겠다. 그러니 이곳이 어느 부근인지도 짐작할 도리가 없었다. 

- "날 어쩔 셈이지?"
"당신을 어쩔 심산으로 여기 끌고 온 게 아니야. 전화로 친구들을 부르면 끝장이니까 긴급처치로 신병을 확보했을 뿐이지. 하하, 신병을 확보하다니, 마치 우리가 형사 같네." 
"아까부터 여유가 넘치시는군. 경찰이 여기 들이닥칠 리 없다고 안심하고 있나 보지?"
"우리가 이 부근에 잠복하고 있다는 확증을 얻어 이 잡듯 뒤지면 또 몰라도... 오늘 밤에는 절대로 안 와. 그리고 내일이 되면 우리는 이곳에 없지. 더 안전한 장소를 찾았으니 사라질 거야." 

- "그만 포기하시지. 당신들에게 안전한 장소는 이 나라 어디에도 없어. 다들 완전히 유명인이 되셨으니까."
"그럼 어째서 지금까지 안 잡혔을까? 혹시 경찰이 우릴 몰래 감시하면서 풀어놓고 계신가? 우리는 당신네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민첩하고, 인내심이 강해, 언젠가 샹그릴라 혁명은 반드시 달성될 것이다." 
 
- "도쿄 돔 이야기는 꺼내지 말아 줘. 애써 수하물 검사를 돌파했는데, 폭파까지 20분도 더 남겨놓고 들키는 바람에 망신살이 뻗쳤으니까. 이해 못 해도 상관없어. 썩어 문드러진 현 체제를 수호하기 위해 신발과 목숨이 다 닳도록 일하는 우매한 패거리들은 신의 뜻을 알 수 없다는 얘기지. 설법을 전할 마음도 들지 않는군. 쓸데없는 논쟁은 그만두지. 이사를 앞두고 있어서 우리는 바쁘거든."
"나를 여기 내버려 두고 갈 셈인가?"
'아니'라는 대답을 두려워하며 물었다. 고미야마는 짓궂은 웃음을 지은 채 예스라고도, 노라고도 대답하지 않고 손목시계를 보았다. 그리고 알려주었다.
"20분 후에 돌아오지. 처형을 집행하러 말이야."

- 이제쯤이지 않을까 싶었을 때, 문이 열렸다. 모리시타는 심장이 욱신거렸다.
고미야마는 처형 집행이라고 했다. 역시 살해당하는 것이다. 내 목숨은 이제 풍전등화다. 이렇게 부조리한 죽음이 또 있을까. 공포와 분노가 온몸에 가득했다. 
한껏 노려보려 했지만 구둣소리와 함께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고미야마 렌이 아니었다. 초가을인데 긴팔 스웨터를 껴입고, 뜨고 있는지 감고 있는지 종잡을 수 없을 정도로 가느다란 눈을 가진 장신의 호리호리한 남자였다. 그 창백한 얼굴에는 표정이 없고, 걸음걸이는 무겁다. 어딘가 부자연스러운 움직임이다. 오니즈카 류조도, 만다 다카아키도 아니다. 전혀 모르는 인물이었다. 

- "... 하지만 제 본심도 잘 모르겠어요. 난 지하실의 주민이 되고 싶었던 건지도 모르죠."
"지하실의 주민이라. 언더그라운드로 타락하는 기쁨 말이니?"

히무라는 가볍게 다른 말로 바꾸었다.
"네. 전과자에 대한 동경 같은 거죠. 내 입으로 말하기도 뭐 하지만 난 천성이 지나치게 성실해서 이렇게 되고 만 거예요."

- 지하실의 주민이란다. 네가 아키야마 슌(秋山峻, 일본의 문예평론가. 생의 고뇌를 다룬 <지하실의 수기>라는 작품을 남겼다)이냐, 도스토예프스키냐. 실제로 성실한 소녀일지도 모른다. 아웃사이더에 대한 동경도 모르는 바는 아니다. 하지만 근거도 따져보지 않고 지하실 주민에 대한 동경을 품었다면 사카구치 안고(일본의 소설가이자 수필가. 대표작으로 <타락론> 등이 있다)나 읽으면서 올바르게 타락하는 길을 모색해야 했다. 아마도 오이시 안나에게 필요한 것은 컬트적인 유사 종교가 아니라 문학이다. 안나는 알고 있을까? 굳이 백치가 되어가는 사회를 경멸하지 않아도, 이미 서점의 서가에는 세상을 저주하는 말을 풀어놓은 문학작품이 수백 권이나 꽂혀 있다는 사실을. 

- "어느 쪽이든 제 본심이 어떤지 모르지 않습니까? 부질없는 질문입니다. 뭐, 다소 동정은 했지만, 인간은 언젠가 죽어요. 어떻게 죽는가는 큰 문제가 아닙니다." 
"과연 '언제 죽어도 상관없다'라는 입버릇을 가질 만하군요. 희사염려希死念慮를 자각할 때가 있습니까?
히무라가 무슨 말을 했는지 순간 이해하지 못했다.

 

- "아니요, 별로 없습니다."
조가 거침없이 대답하자 조교수는 틈을 주지 않고 파고들었다.
"희사 -죽음을 바라는 증상으로, 객관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 죽음을 원한다는 면에서 일반적인 자살충동과 조금 다르다- 라는 말을 용케 알아들었군요."
조는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한숨을 쉬었다. 이제 지긋지긋하다는 듯이.
"누가 어떻게 죽든 저는 흥미가 없습니다. 사가 노부토가 권총으로 죽든 독극물 중독으로 죽든, 어차피 똑같아요. 그러니 제가 사가 씨에게 독을 먹일 이유는 없습니다." 
그 말에 가장 진실미가 있었다.

- 문제의 주방을 보고 나서 카페였던 방으로 돌아오니 공안 수사관들이 뭔가 회의를 하고 있었다. 우리를 보더니 그 멧돼지처럼 목 짧은 형사가 기분 나쁘게 웃는다.
"이제 속이 풀렸나, 후나비키 씨?"
경부는 퉁명스럽게 되받아쳤다.
"평소에 비해 진척이 별로 없나 보군요. 허허, 설탕단지에 들어 있는 캡슐을 찾아내는 데 몇 시간이 걸렸는지."

상대는 비꼬는 소리를 한 귀로 흘려듣고 신나는 표정으로 말했다.

 "이제 곧 좋은 소식이 들어올 거야. '후나비키 팀은 돌아가도 좋다'고 말이야. 대학 선생님들도 그만 돌아가시라고 해야지."

"뭣이라?"
경부는 눈을 희번덕 뒤집었다.
"이건 우리 사건이야! 그쪽은 도망친 테러리스트를 쫓아야 할 거 아냐!"
"샹그릴라 놈들이 얽힌 사건은 전부 우리가 처리해. 당신네들은 모르는 정보를 잔뜩 쥐고 있으니까 맘 편하게 맡기시게나."
잠자코 듣고 있을 수밖에 없었지만 경부에게 감정이입한 나는 분했다. 히무라는 냉정해 보였지만 모리시타는 이를 갈고 있다.

- 돼지 목이 호령하자 공안 일행께서는 방을 나갔다. 그 마지막 한마디를 못 참겠는지 모리시타가 "젠장!" 하고 욕을 했다.
그것이 신호인 것처럼 히무라가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그리고 집게손가락으로 천천히 입술을 더듬기 시작했다. 뭔가가 그의 두뇌에 내려오셨나 보다.

 

- "... 까맣게 잊고 있었군."
그렇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뭘 잊고 있었다는 거지? 

"아마도 그게 해답과 연결되어 있을 거야."
내가 왜 그러냐고 묻기 전에 히무라는 경부에게 힘차게 말했다.
"후나비키 씨. 청산가리의 출처만 알아내면 되니까 더 이상 현장에 볼일은 없습니다. 이곳은 공안 여러분께 맡깁시다. 샹그릴라 십자군을 쫓기 위해 이것저것 조사하고 싶겠지요. 그 사람들은 그 사람들 일을 열심히 하라고 하고, 우리는 사가 노부토 살인범을 잡으면 그만입니다." 

- "어이, 히무라 선생. '그게' 뭔데?"
히무라는 몸을 빙글 돌려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조 데루후미의 언동 말이야. 그건 정말 이상하잖아? 모르겠어, 아리스?"
그 말을 듣고 보니 짚이는 것이 있었다.

- "클로로포름 외에도 수상한 약품을 사들였겠지요. 그러다가 개인적인 욕구에 따라 약품을 사고 싶었다 해도 이상할 건 없습니다."
"제가 그 '약국'에서 청산가리를 샀다는 말씀입니까? 그리고 사가를 죽일 때 그 청산가리를 사용했다고..."
"아닙니까?"
조는 등을 문지르며 천장을 향해 한숨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묵비권을 행사하겠습니다.”
"상관없습니다. 그걸 조사하는 건 경찰이 할 일입니다. 살짝 귀띔해 드릴까요? 경찰은 3월 5일 수신기록에 있었던 '천사'라는 암호가 청산가리를 지칭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천사'를 받았습니다."
"'천사'가 청산가리라고요? 그런 게 아닙니다. 전 청산가리라는 약품을 산 적이, 절대로, 없습니다."
조는 한 마디씩 끊어가며 딱 잘라 말했다. 히무라는 그런 반응이 만족스러운 모양이었다.

- "같은 소릴 몇 번이나 되풀이해야 하나. 저는 사가노부토에게 아무런 원한도 없었고, 그 사람이 죽는다고 금전적인 이익을 얻는 것도 아닙니다. 참고로 살인광도 아닙니다."
"그게 이번 사건의 흥미로운 점입니다. 모든 범죄는 아니, 인간의 모든 행동은 이익을 기대하고 실행으로 옮긴 결과입니다. 이런 짓을 하면 파멸한다, 그런 우행도 있지만 그래도 굳이 우행을 범하여 얻을 수 있는 쾌감을 기대하는 법이지요."
"얘기가 어려워지네요. 왠지 철학적이군요."
조는 새끼손가락으로 귓구멍을 후볐다.
"그렇게 거창한 건 아닙니다. 그런데 철학이라고 하니 말인데 알베르 카뮈는 '참으로 중대한 철학상의 문제는 단 하나뿐이다'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즉 자살이다, 라고요."

- 귀를 후비던 손이 멎었다.
"카뮈가 그런 걸 썼어요? 책 제목이 뭡니까?"
"부조리와 자살이라는 논고의 첫머리입니다. 시지프 신화라는 책을 읽으면 됩니다. 우리가 직면한 독살사건의 중심에 있는 것은 청산가리입니다. 인터넷으로 수상한 약국'에 접속하던 당신은 청산가리를 입수할 수 있었습니다. 그날 지하실로 내려가기 전에 그 청산가리를 병에 넣을 수도 있었습니다." 

- "그래서, 그래서, 그래서요? 이야기가 하나도 진전되질 않는데요, 선생님. 독을 손에 넣고 사가에게 먹일 기회가 있었던 사람은 저 하나가 아니잖아요? 오이시 안나도 저와 마찬가지로 인터넷 카페에서 약국'에 접속해 청산가리를 살 수도 있었고, 그걸 잔에 넣을 수도 있었습니다. 저 하나만 붙들고 있는 이유가 있습니까?"
"예, 있습니다."
히무라는 재킷의 옷깃에 붙은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튕겨냈다. 

 

- <지하실의 처형>

 


- '저이'에 특별한 감정이 깃들어 있는 것처럼 들려서 가네시로는 질투했다. 그런 동요를 꿰뚫어 보았는지 하쓰네는 몸을 돌려 가네시로의 허벅지에 오른손을 얹었다. 그리고 피아노를 치듯 가녀린 손가락을 가만히 움직였다.
"자고 갈래?"
시곗바늘은 10시를 지났다. 가네시로는 고개를 꾸벅였다.
"위로 올라가자. 오늘 밤은 좋은 백단 향기가 나. 분명 당신도 마음에 들 거야."
그 한마디에 가네시로의 마음은 향기가 감싸고 있는 침실로 날아갔다.

- 엘러리 퀸의 X의 비극을 되읽는 게 몇 년 만일까? 열세 살에 처음 읽었고, 대학 시절에 다시 읽었던 적이 있으니 이번이 세 번째다. 얼추 12년 만인가? 잘 기억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예상치 못한 장면이나 대사가 튀어나와 내 기억력이 얼마나 미덥지 못한지 통감했다. 하지만 그 덕에 몇 번이나 즐겁게 읽을 수 있으니 기뻐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중반쯤 지나서 등장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 말하는 기묘한 우연의 일치 -9년 전 외국에서 목숨을 구해준 사내와 법정에서 재회해, 살인사건의 피고인 그에게 배심원으로서 유죄 판결을 내린다는 우연- 등은 완전히 까먹었다. 하지만 뒤이어 명탐정 드루리 레인이 펼치는 일장연설은 확실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 "인간의 두뇌는 죽음을 앞둔 바로 직전에 더욱 놀라운 일을 해낸답니다."
드루리 레인은 그렇게 화두를 꺼내며 설탕단지의 굵은 설탕을 움켜쥐고 죽은 살인사건 피해자에 대해 말한다. 피해자는 어째서 테이블까지 기어가서 설탕을 움켜쥐었나? '거기에 사건을 풀 열쇠가 있다는 사실을 나는 멋지게 꿰뚫어 보았소!' 하고 레인은 과거의 공적을 자랑하지만, 그 대답은 별로 강렬한 내용이 아니었다. 하얀 가루로 된 설탕은 코카인을 연상케 한다. 따라서 피해자는 범인이 코카인 중독자라는 사실을 전하려 했던 것이다... 그런 추리는 상상의 범주에 지나지 않는데.

- x의 비극은 퀸이 최초로 다잉 메시지를 다룬 작품이다. 만원을 이룬 시영 전철 안에서 살해당한 사내는 집게손가락과 가운뎃손가락을 X모양으로 겹치고 있었다. 물론 레인은 그 수수께끼를 마지막에 밝혀내지만, 범인만 알고 나면 뜻이야 어떻게든 갖다 붙일 수 있다. x의 비극은 틀림없이 명작이다. 그래도 이 다잉 메시지를 두고 말하자면 무릎을 치며 납득할 정도는 아니었다.

-  작가도 별로 자신이 없지 않았을까? 설탕단지의 다잉 메시지 에피소드를 소개하는 장면에서 레인은 이런 대사를 한다. 먼저 피해자가 하얀 분말을 움켜쥐어 범인의 속성을 나타낸 것을 '절묘한 생각'이라고 평가하면서.

 

- "죽기 직전의 아주 짧은 순간에 범인에 대해서 자신이 남길 수 있는 유일한 단서를 남겼던 것입니다. 곧, 이처럼 죽기 직전의 비할 바 없이 성스러운 순간에 인간의 두뇌는 한없이 놀라운 작용을 하는 것입니다."
해결을 향한 포석이라기보다 사전 변명이 아닐까? 퀸이 작품 속에서 시도한 다잉 메시지 중에는 성공한 예도 적지 않지만, 이것은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 인간이 죽기 직전의 비할 바 없이 성스러운 순간에 어떠한 돌발적 아이디어라도 낼 수 있다고 한다면, 그걸 해독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작품 속에 다잉 메시지를 사용하려면 그런 부자연스러운 문제도 유념해야만 한다. 

- 존경하는 거장에게 이러쿵저러쿵 트집을 잡고 있는데 벨이 울렸다. 나는 책에 책갈피를 끼우고 문으로 향했다. 인터폰으로 묻지 않아도 손님이 누구인지는 알고 있다. '20분쯤 후에 도착한다'는 히무라 히데오의 전화가 20분 전에 걸려왔으니까.

- "연말에는 선생님도 뛰어다닌다는 말은 이걸 두고 하는 말인가 보네."

(역자 주 : 연말의 음력 12월은 일본어로 '시와스師走'라고 하는데 원래 '연말은 제사가 많아 (염불 때문에) 스님도 뛰어다닐 정도로 바쁘다'라는 뜻에서 온 단어이다. 라는 한자 때문에 '연말은 (학교 행사가 많아) 선생님도 뛰어다닐 정도로 바쁘다'라는 속설이 널리 퍼져 있다.)
나는 그런 말로 조교수를 맞이했다.

- "굉장히 바쁜 모양이던데, 히무라 선생님."
'임상범죄학자'가 바쁘다는 사실이 세상에 바람직한 일은 아니지만.

"휴강을 너무 많이 해서 이제 못 쉰단 말이야. 그런 데다가 귀찮은 사건에 휘말리는 바람에."
히무라는 자기 집 안방 같은 거실로 성큼성큼 들어오더니 코트를 벗어 소파에 툭 던진다. 그리고 내게 커피를 청했다.

- "귀찮은 사건에 휘말리다니, 그 여성평론가 살인 말이지?"
1주일 전인 12월 14일에 나가오카쿄 시에서 발생한 사건이다. 사건 발생 직후 교토 부경은 히무라 조교수에게 수사 협력을 의뢰했고, 범죄학자는 추리작가인 나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어시스트 -이름뿐인 조수이지만- 를 요청했지만, 공교롭게도 마감에 미친 듯이 쫓기고 있던 나는 피비린내 나는 현장으로의 초대를 거절했다.
"사건 관계자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이라고 전화로 그랬는데-."

- "와카야마에 살고 있는 사람이 덴노지까지 나오겠다고 해서 호텔에서 만나 이야기를 듣고 오는 길이야. -그나저나 그쪽 일은 마무리 됐어?"
히무라는 캐멀을 입에 물고 칠칠치 못하게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었다.
"어제 간신히. 제법 고생했어."
그래서 오늘 오후는 느긋하게 독서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덕분에 그동안 텔레비전 뉴스도 못 봤어. 신문으로 훑어보니 수사는 난항에 빠진 모양이던데."
"시원찮아."

- "히무라 선생님께서 애먹고 있는 사건을 풀 수 있다면 자랑스럽지."
히무라는 두 개비째 담배에 불을 붙였다.
"고맙기도 해라. 역시 크리스마스이브에 약속 하나 없는 고독한 친구가 있고 봐야 한다니까. 그럼 사건 개요를 말할까? -우리에게 벅찬 사건일지도 모르지만."
평소와 다르게 마음 약한 발언이었다.
"그렇게 어려운 사건이야?"
"지나가던 강도의 범행이라면 나하고 넌 속수무책이야."
"그럴 가능성도 있나 보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말이지. 현장에서 피해자의 지갑이 사라졌어."

 

- "강도가 침입한 흔적은?"
"없어. 세일즈맨 흉내로 피해자를 속이고, 감언이설로 방에 들여보내달라고 했을 가능성도 있어. 저녁 무렵의 범행이었고, 지난달 하순부터 차림새가 불량한 사내가 빈번히 부지 안에 출입했다는 맨션 주민들의 증언도 있어. 경찰은 범행의 사전조사였을지도 모른다고 그 자에게 관심을 기울이고 있지. 하지만 맨션 현장에는 방범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지 않아서 찾을 도리가 없어. 사내는 사건 이후로 전혀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어." 
"피해자가 폭행을 당한 흔적은 없었지?"
"아아. 저항해서 몸싸움을 벌인 흔적 정도야."

- "절대로 아니라고는 장담 못 해."
"그렇지? 가네시로가 다잉 메시지를 밟아 지우려 했던 이유는 실행범인 공범자를 암시하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몰라. 세면대의 수건걸이에 지문을 남긴 사람은 그 공범이고." 
"하지만 아주 생각하기 어려운 경우야. 가네시로는 우에시마 하쓰네를 존경하고 있었으니까."
"본인 혼자 하는 소리잖아."
"무자비한 검사처럼 추궁하네. 그야 '저는 보스를 존경하고 있었습니다'라는 건 가네시로 본인이 하는 소리야. 하지만 주변에 탐문조사를 해보니 실태는 조금 다르더군. 예를 들어 가네시로와 함께 시체를 발견한 이보시 마사코는 확실하게 증언을 했어. 가네시로 씨는 하쓰네 선생님의 '비서 겸 정부였다'고. 특히 젊은 가네시로 쪽이 푹 빠져 있었던 것 같아."

- 가네시로 나오야는 원래 라쿠호쿠 대학 법학부의 대학원생이었는데 하쓰네가 대학을 떠난 후에 스카우트했다고 한다. 용모 단정하고 우수한 남자라지만 한 번도 만난 적이 없기 때문에 인간성에 대해서는 판단할 수 없다. 비서 겸 정부였다는 말을 들으니 은근히 수상한 느낌이 난다.
"사랑이 있으면 나이차는 아무것도 아니구나. 하지만 말이야, 애정관계가 복잡해져서 칼부림으로 발전하는 경우는 드물지 않잖아. 보스가 다른 남자로 갈아타려고 해서 열이 받아 그만 죽여버렸다고 생각할 수는 없어?" 
"열이 받아 그랬다면 앞뒤가 안 맞잖아. 살인청부업자를 고용했다면 계획적 범행이야."
"그도 그러네. 열이 받아서 그랬다는 부분은 철회하겠어. 원한이 쌓여서 계획 살인을 꾀했을지도."
"두 사람 사이가 안 좋았다는 증언은 없어."
"사랑싸움은 둘만 있을 때 하는 법이잖아."
"그렇게 억측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건 무의미하지 않을까 싶은데."
"가설을 읊는 것뿐이야."

- 히무라는 셔츠 첫 번째 단추를 풀고 천장을 향해 한숨을 토했다.

"난방이 너무 세?”
"아니, 이대로도 상관없어. 한숨을 흘린 건 좀처럼 사건의 윤곽이 보이지 않아서 그래. 피해자의 정부였다, 다잉 메시지를 밟았다. 그것만으로 가네시로를 의심해봤자야. 가네시로는 하쓰네의 죽음에 상당한 충격을 받았어. 연기로 보이지는 않아."
"넌 이상하게 비서를 감싸는데?"
"알리바이가 지극히 자연스러우니까. 경찰도 결백하다고 보고 있어. 사건 당일, 가네시로가 와카야마에 심부름을 가게 된 건 우연이야. 그 전날 밤에 하마다 교수가 슬슬 자료를 돌려주었으면 좋겠다는 전화를 했거든. 가네시로는 당일 아침에 와카야마에 갔다 와달라는 보스의 부탁을 받았어. 그것도 본인 혼자 그러는 소리고 전날 밤에 부탁을 받았을지도 모른다고 의심할래?" 
"사건 당일에 공범자에게 전화를 걸어 서둘러 살인계획을 결행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
히무라는 집게손가락으로 턱을 긁적이며 아까 그 사진에 시선을 던졌다.


- "그나저나 이 메시지는 뭘 나타내고 있는 것 같아? 피해자를 습격한 사람이 살인청부업자였다고 하면 우에시마 하쓰네는 상대의 이름을 몰랐을지도 모르잖아.”
"아아, 꼭 이름이라고 할 수는 없지. 1011이라면 음으로 인명 비유도 안 되고(우리나라의 '7942(친구사이)'처럼 일본에서도 숫자의 음을 빌려 다른 단어를 나타내는 표현들이 있다. 대표적인 예로 '4649(요로시쿠:잘 부탁한다)', '1564(히토고로시:살인자)' 등이 있다.) 아무 힌트도 없이 이 의미를 해독하는 건 상당히 힘들 거야."
현재 상황에서는 불가능하다고 단언해도 좋다. 피해자는 범인의 이름을 몰랐지만 상대의 전화번호나 회원번호 같은 것을 기억하고 있어서 그걸 쓰려했는지도 모른다. 또한 범인은 피해자가 모르는 인물이었고 그저 가슴에 1011이라고 인쇄된 셔츠를 입고 있었다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공상의 날개를 펼치면 끝이 없다. 여하튼 죽음에 직면한 우에시마 하쓰네는 비할 바 없이 성스러운 순간인지 뭔지를 맞이했으니까.  

- "1011이라는 숫자에서 연상되는 관계자는?"
"없어. 그런데 이게 정말 숫자일까?"
글쎄, 그것도 의문이다. 디지털 표시처럼 각이 진 숫자를 최후의 순간에 쓰는 것도 부자연스럽고, 자간이 너무 좁다. 하지만 1011 ...

- "역이라니... 점치는 역 말이야? 아니, 그런 말은 듣지 못했는데 그렇다고 치면 어떤데?"
"역경에서 음이니 양이니 하는 걸 나타내는 기호가 있잖아. 쭉 뻗은 가로선하고 한가운데가 잘린 가로선 두 종류가 있는... 산목이라고 하지. 아마 이 메시지를 보고 있자니 문득 그게 떠올랐어. 이건 1011 이 아니라 다섯 개의 가로선이 아닐까. 무슨 괘를 전하려고 했던 것 같기도 해."
"죽기 전에 '보세요, 끔찍하죠? 저는 이렇게 운이 나빴어요'라고?"

"그래."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대답했다.
"운명의 잔혹함을 호소하고 싶었겠지. 누가 뭐래도 비할 바 없이 성스러운 순간의 일이니까."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히무라는 어깨를 으쓱했다. 하지만 갑자기 진지한 표정으로 돌아오더니 사진 다발을 뒤적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어느 한 장을 찾아내 미간을 찌푸리며 바라보았다.

- "네가 '다섯 개의 선'이라고 하니 신경 쓰이는데, 이것 좀 봐줘. 현장 대문에서 여기."
아무 특징 없는 대문에 '오피스 우에시마'라는 간판이 붙어 있다. 히무라는 그 간판 왼쪽 구석을 주목하라고 채근했다. 무슨 마크였다.
 
- "아아, 다음 세기에도 잘 부탁해."

뒷모습이 문 너머로 사라졌다.
히무라 히데오가 맞닥뜨린 20세기 최후의 사건은, 그 후 장장 수개월에 걸쳐 그를 괴롭히게 된다.

- 2001년 5월 12일, 오후 6시.
우메다 한큐 3번가에 있는 카페에서 가네시로 나오야는 이보시 마사코와 마주하고 있었다. 우에시마 하쓰네의 유고를 정리한 책을 출판하기 위한 의논 때문이다. 두 사람은 사무적으로 원고 게재 순서와 챕터 구분에 대해 결정한 후, 책 제목을 어떻게 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신세기 일본의 해도'... 이건 역시 임팩트가 부족해. 원고에 있던 단어를 발췌해서 '재패니즈 페레스트로이카'라고 하기도 좀 그렇고..."
"그렇죠."
건성으로 대답하고 있으려니 마사코가 노트를 탁 덮었다. 가네시로는 흠칫 놀라 고개를 든다.
"죄송합니다. 집중을 못 하고 있는 게 너무 눈에 보였죠."

"괜찮아."
편집자는 볼펜 끝으로 보브컷 헤어를 긁적였다.
"가네시로 씨만 낙담하고 있는 게 아니니까. 나도 아직 추스르질 못했어. 이번 황금연휴도 여행 갈 마음이 들지 않더라고. 유고집을 만드는 작업도, 선생님에 대한 최소한의 공양이 되면 좋겠다고 바라면서도, 잽싸게 장사를 시작한 것 같아서 기분이 좋지 않아. 하지만 속을 앓고 있어도 어쩔 수 없잖아. 산 사람은 할 일이 많으니까."
"하아. 맞는 말씀입니다."

- 비싸 보이는 손목시계를 찬 손이 뻗어와 가네시로의 오른손을 가볍게 다독였다.
"기운 냅시다. 어제 일도 내일 일도 생각하지 말고, 오늘 하루 일에만 전념해. 응?"
가네시로는 "네" 하고 순순하게 대답했다. 겨우 두 살 정도 많은 상대에게 어린애 취급을 받고 있는 것 같았다.

- "그건 그렇고 경찰은 뭘 하고 있는 걸까? 수사는 조금도 진척되지 않았나 봐. 모레면 사건이 일어난 지 딱 다섯 달째야. 정말 무능력하기 짝이 없다니까. 미해결 사건으로 처리하면 가만 안 둘 거야."
수사 당국에 분풀이를 해서 기운을 북돋아주려는 건지도 모른다. 가네시로는 찬성할 기력도 없어 적당히 맞장구쳤다. 비난을 퍼부어대는 마사코의 목소리에 섞여 옆자리에서 중년의 회사원이 나누는 대화가 들려왔다.
"이번 내각은 행정 개혁을 단행할 능력이 없어. 정부 조직 재편도 어중간한 형태인 게, 어물쩍 넘기려는 것뿐이고, 일본은 앞날이 어두워."
"정말, 21세기의 스타트가 이렇게 비참할 줄이야. 너무 꿈이 없어. 정부가 희망을 품을 수 있는 비전을 제시하지 않으니 경기가 회복되질 않는 거야."
마치 우에시마 하쓰네가 유고에서 쓴 내용을 요약해 놓은 것 같다. 결국 하쓰네는 무책임한 정치사회 비판의 재료를 제공하고 있었을 뿐일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하니 맥이 더 빠졌다. 

- "경찰이 나까지 의심했던 건 용서할 수 없어."
립스틱을 연하게 바른 입술은 잘도 움직인다.
"나하고 선생님의 의견이 맞지 많아 험악한 분위기였다는 엉뚱한 소문을 고자질한 동업자가 있을지도 몰라. 역에서 가네시로 씨하고 딱 마주쳤잖아. 그게 내가 선생님을 죽이고 도망치려던 게 아니었냐는 망상을 했나 봐. 바보 아니야? 만약에 내가 범인이었다면 5시에 선생님을 죽인 후에 7시까지 현장 근처에서 어슬렁거리겠어? 그렇지?"
"그러네요."

- 가네시로는 다시 손목시계를 보며 "저어, 마사코 씨"라고 말을 꺼냈다.
"쇼핑 좀 하고 돌아가려고요. 문을 빨리 닫는 가게여서..."
"어머, 그래. 그럼 타이틀에 대해서는 숙제로 하고, 조금 더 생각해 봐요. 나도 한큐백화점 지하에서 도시락 사서 신오사카로 갈까?"
거리낌 없이 말하며 테이블 위의 노트와 자료를 가방에 넣은 마사코는 재빨리 전표를 잡았다.
"여기 계산은 제가-"
"됐어, 커피 값쯤이야. 게다가 나는 이걸 경비로 처리해 줄 보스도 있고, 당신은 지금 힘들잖아?"
마사코의 호의로 번역 초벌 작업을 받아 어떻게 연명하고 있다. 감사하고 있다.
"죄송합니다. 그렇게 말씀해 주신다면."

- "고맙습니다."
수화기를 들고 꾸벅 고개를 숙이는 기척.
"마감까지 여유가 별로 없어서 거절하실까 봐 걱정했어요. 기뻐라. 매수는 50매... 아, 이건 말씀드렸죠. 요청 사항이 하나 있는데, 아리스가와 씨는 다잉 메시지가 나오는 작품을 써주셨으면 합니다."
이번 미스터리 특집은 밀실이니, 알리바이니, 의외의 흉기니 하는 본격 미스터리의 서브 테마를 골고루 갖출 거라고 한다.

 

- "다른 테마로 쓰고 싶다고 말할 권리는 있어요?"
"유감스럽게도..."
"마지막 남은 제비를 뽑아라 이거구나."
마음 상한척하자 편집자는 순진하게도 당황했다. 

절대 그런 일은 없다. 우연히 연락이 된 순서대로 희망을 물어봤더니 아리스가와 씨가 마지막이 되고 말았을 뿐이다,라고.
"아니, 사실은 아무거나 상관없어요. 어차피 아이디어 재고가 없어서 밀실이든 다잉 메시지든 이제부터 생각해야 하거든요."
"다행이다. 그럼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내달 하순에 오사카에 갈지도 모르니 그때 식사라도 같이..."
"좋지요."
그렇게 대답하고 수화기를 놓았다.

- 이것 참, 주제는 다잉 메시지인가. 비할 바 없이 성스러운 순간을 날조해야만 하는 셈이다.
거실 소파에 드러누워 정말 재고가 없었나 생각해 보았다. 가타기리에게 들은 집필진은 확실히 호화로워서, 레벨이 떨어지는 작품을 쓸 수는 없다. 새로운 아이디어를 곁들이면서 50매 속에서 색다른 맛이 있는 이야기. 플롯은 제쳐두고 일단 다잉 메시지를 고안하지 않으면.

- 본격 미스터리의 대표적인 테마인 밀실 살인 작품의 최근 경향은 어째서 범인은 현장을 밀실로 만들어야만 했나 하는 필연성이 테마가 된다. 다잉 메시지 작품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어째서 피해자는 그런 이해하기 힘든 메시지를 남겨야만 했나? 아직 범인이 떠나지 않았기 때문에 일부러 완곡한 메시지를 남겼다는 말은 이유가 되지 않는다. 뭔가 설득력 있는 사정이 필요하다. 거기에 새로운 아이디어를 곁들일 수 있다면 과제 하나는 끝나는데- 역시 메시지 자체의 참신함도 중요하겠지?
우에시마 하쓰네 살해 현장에 남아 있던 피의 메시지가 떠올랐다. 히무라의 현장조사 조수로서 보고 들은 바를 소설에 유용하지 않는다는 방침을 세우고는 있지만, 살짝 구미가 당긴다. 그 '1011'은 써먹을 수 있을 것 같다. 전례가 없는 다잉 메시지인 데다 히무라가 그 메시지에 대해 내린 해석은 빗나간 것 같았다. 빗나간 추리를 빌리면 현실을 재료로 삼았다고 할 수는 없을 텐데. 

- 아니다. 곧바로 부정했다.
내가 나의 금기로 삼고 있는 것은 현실을 재료로 삼는 일이 아니다. '허구를 구축하는 일에 남의 힘을 빌리지 말자'가 아니었던가? 히무라가 틀린 추리를 주워서 어쩌겠다는 거냐. 그런 추리는 개나 줘라. 히무라가 틀린 추리. 그런데 그건 정말 틀린 걸까?  

- [그럼 이르지만 내일이라도. 정말 누추한 곳이지만 모리구치에 있는 제 사무실까지 와주셨으면 합니다. 그래서 말씀인데, 어느 쪽으로 마중 가면 될까요?]
거주지가 일정치 않은 남자는 기타(오사카 역과 우메다 역 주변 번화가의 속칭)를 지정했다. 어제부터 우메다 근처를 어슬렁거리고 있다고 한다.
[아까도 말했지만 지금은 깔끔한 차림새야. 당당하게 거리 한복판에서 픽업해 줘.]
되도록이면 아카시와 거창하게 합류하고 싶지 않다. 우메다에서 떨어진 오기마치 공원 모퉁이에서 픽업하기로 했다. 시간은 요전보다 늦춰서 9시로 했다. 

- 흥. 가네시로는 코웃음을 쳤다. 하쓰네가 긴 짱이라고만 소개했기 때문에 아카시는 사우나에서 재회했을 때 이름을 물었다. 본명을 가르쳐줄 필요는 없어서 나쓰메 긴노스케라고 대답했다. '그래서 애칭이 긴 짱입니다'라고. 
아카시는 웃지 않았다. 나쓰메 소세키의 본명을 모르는 것이다. 놀림을 받았다는 사실도 눈치채지 못하고 '젊은데 예스러운 이름이군'이라고 했다. 

 

- 전화를 끊은 후, 찬장에서 미리 사두었던 빵을 꺼냈다. 카페에서 쓰러진 날 오후에 편의점에서 샀던 카레빵이다. 이튿날 아침에 먹을 생각이었는데 이젠 상해서 먹을 수 없다. 내용물을 쓰레기통에 버리고 유통기한이 인쇄되어 있는 비닐봉지만 남겨둔다. 지문은 신중하게 닦았다. 의심받을 염려는 없다. 
그렇게 추슬렀지만 만약에 의심을 샀을 경우를 대비한 버팀목이 필요했다. 버팀목이 사라지면 육지에 있어도 물에 빠진 기분이 든다. 생각해 보면 하쓰네와의 관계도 그랬는지 모른다. 그녀는 믿음직한 버팀목이었다. 

- "아아, 배부르다. 디저트가 안 들어가. 또 다이어트 실패했네. 하지만 맛있었어."
마사코는 흡족해했다.
가게 안에는 시타르 -인도의 전통 현악기- 의 선율이 흐르고 있다. 그 그윽한 울림을 듣고 있으면 두 번 다시 돌아오지 못할 어딘가로 끌려갈 것만 같았다. 아니, 나는 이미 두 번 다시 돌아오지 못할 곳까지 오고 말았다. 5월 15일의 그날 밤을 경계로.
마사코가 계산서를 쥐는 모습을 가네시로는 멍하니 바라보았다. 자기가 지금까지 뭘 먹고 있었는지 이미 잊고 있었다.
"당분간은 전화로 작업을 진행해요. 내달 중에 한 번 더 오사카에 올 테니까."
가네시로는 고개를 끄덕였다.
 
- 나비오 -오사카 우메다의 쇼핑센터- 앞의 교차점 한복판에서 헤어졌다. 가네시로는 한큐 우메다 역으로 향했다. 5월의 마지막, 오늘 저녁의 공기는 어딘지 감미롭다. 거리를 헤매다 보면 뜻하지 않은 사랑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은 분위기마저 감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귀찮은 일에 연연해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자기는 지금, 한창 생사가 걸린 승부를 하고 있고, 아직도 여전히 하쓰네의 망령에 사로잡혀 있다. 어쩌면 영원히 망령과 떨어질 수 없을지도 모른다. 


- 발차 직전의 전철에 뛰어들어 올라탔다. 우메다를 떠나자마자 요도가와를 가로지르는 철교의 굉음에 섞여 시타르의 음색이 들려왔다. 깜짝 놀라 고개를 휘저으며 정신을 되찾는다. 환청은 사라졌다. 
 
- 그런데 지역 뉴스 첫머리는 가네시로가 듣고 싶지 않은 소식이었다. 올 때가 왔다.
아카시가 발견된 것이다.
  
- "의외로 부자였네. 내 지갑 안은 항상 만 엔이 안 되는데, 그 노란봉투라는 건 아카시가 지갑 대신 쓰던 봉투야?"
"아닐 거야. 아직 새 봉투여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지문을 조사했는데, 아카시의 지문밖에 나오지 않았어. 살해당하기 직전에 뭔가 용돈벌이를 했는지도 모르지. 2만 엔을 받고 1엔도 써볼 새 없이 살해된 게 아닐까." 
"용돈벌이인지 뭔지, 그 내용이 신경 쓰이네. 그게 사건의 원인일지도 몰라."
"원인 그 자체야." 
히무라는 단정했다.
"뻔하잖아. 신권 지폐에도 노란봉투에도 아카시의 지문밖에 없었다는 소리는 말이지, 그걸 건넨 인물이 장갑을 끼고 있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어. 그 녀석이 아카시를 죽인 거야." 
듣고 보니 맞는 말이다. 그 인물이 꺼림칙한 의도 없이 우연히 다쳐서 장갑을 끼고 있었을 가능성도 없지는 않지만.

- "그나저나 천 엔짜리를 쥐고 범인 이름을 전하려고 했다면 범인은 나쓰메가 되겠네."

(역자 주 : 이 작품을 발표했던 2001년에 일본의 천 엔 지폐에는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도련님> 등으로 유명한 나쓰메 소세키의 초상화가 그려져 있었으나 현재는 세균학자 노구치 히데요의 초상으로 변경되었다.)
"단순하긴."

히무라는 웃었다.

- "아직 더 남았어?"
억지로 갖다 붙이려면 아직 더 남았지.
"일본 은행 직원이 범인이라는 가설은 어때? 천 엔짜리라는 건 의미가 없고, 피해자는 지폐, 즉 일본은행권을 쥐고 싶었던 거야. 더 듣고 싶어?"
"들어줄 수도 있지."
"범인은 소설가일지도 몰라. 나쓰메 소세키는 작가의 대명사니까. 아니면 '도련님'이라는 별명을 가진 사나이."
"상당히 억지가 심해지는데."
"더 억지스러운 것도 있어. 다도 용기였나, 뭐 그런 것 중에 나쓰메라는 게 있었을 거야. 범인은 다도 관계자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
"진심이야?"
"물론 아니지. 덧붙여서 추리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건 이 정도 선까지 상상의 범위를 넓힌 추리야."
누가 뭐래도 끈질기지만 비할 바 없이 성스러운 순간에 찾아오는 아이디어니까.

- 히무라는 딱 잘라 부정했다.
"아무리 한가한 인간이라도 자기가 갖고 있는 지폐 번호를 외우지는 않아. 우물 바닥에 떨어진 상황에서 의미가 있는 번호의 지폐를 골라낸다는 말은 하지도 마라. 우물은 깜깜했을 테고, 피해자가 성냥을 그은 흔적도 없어." 
"그렇다면 범인은 나쓰메야."
"그래. 단도직입적으로 그럴지도 모르지."
히무라는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말이지, 설령 나쓰메라는 이름의 용의자를 찾아냈다고 쳐도 '피해자가 천 엔짜리 지폐를 쥐고 있었기 때문에 당신이 범인입니다' 하고 체포할 수는 없어. 정말 아무런 증거 능력도 없는 메시지야."
 
- 새치가 잘 어울리는 중후한 학자.
이보시 마사코는 히무라를 그렇게 평가했다. 나쁘지 않은 인상을 받았나 보다. 

 

- 가네시로 나오야의 견해는 달랐다. 저이는 만만치 않은 사내다. 차분하고 신사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지만 그걸 신용할 수 없다. 지성으로 야성을 감추고 있는 듯한 위험한 분위기가 있다. 범죄학자라는 길을 선택한 것은 범죄의 마력에 매료되었기 때문 아닐까? 흑막이 있을 것 같아 친구는 되고 싶지 않다. 색안경을 끼고 보게 되는 이유는 본인이 떳떳치 못하기 때문이라고 자각하면서도, 역시 마음에 걸린다. 뭐라 표현하면 좋을까... 만약 알고 지내게 된다면 그가 나를 가장 깊이 이해하겠지만, 그러면서도 나는 속이 탈 정도로 그 사람을 이해하지 못할 것만 같다. 그런 타입의 인간은 질색이다. 누구든 마음에 높이 벽을 쌓은 인간을 좋아할 수는 없을 것이다. 
  
- 요도가와의 수면이 초여름 햇살을 반사해 찬란히 빛나고 있다. 눈이 부실 정도다.  


- 히무라의 예리한 점은 '오피스 우에시마'의 회사 마크와 피로 쓴 메시지의 유사성을 찾아낸 점이다. 가네시로는 회사 마크의 유래에 대해 물어봐도 '모릅니다' 하고 시치미를 뗐지만, 히무라는 끝내 자력으로 정답에 도달했다. 그 마크는 겐지 향의 기호에서 따왔다는 사실을.

- 가네시로는 하쓰네가 알려주기 전까지 겐지 향이라는 우아한 유희를 몰랐다. 하쓰네의 취미는 향이었다. 언제나 침실에는 기분에 맞는 향을 피워, 두 사람은 어느 날 밤은 백단, 또 어느 날 밤은 사향 향기에 감싸이곤 했다. 향수에는 별로 관심이 없는지 향목을 태워 향기를 즐기는 향도에 심취해 있었다. 

 

- [향기를 즐긴다는 건 변화의 아름다움, 변환의 아름다움을 즐기는 일이야. 완성된 그림이나 조각과는 달리 향기는 시시각각 변화하잖아. 그 점이 심오하지.]
하쓰네가 흥미를 느끼는 일이라면 가네시로도 관심을 가지고 싶었다. 그래서 가네시로는 그녀의 강의에 순순히 귀를 기울였다.

- [향도에서는 '향을 맡는다'고 하지 않고 '향을 듣는다'고 표현해 문향이라고 하는데, 음악 같지? 실제로 19세기의 조향사 피에스 -George William Septimus Piesse 1820~1882, <향수의 예술>이라는 저서를 남겼다- 는 48종류의 향료를 소리에 대응시켜서 7옥타브의 향계를 만들었어. 코를 찌르는 향이 고음이고, 향기가 오래 남는 게 저음이야. 재미있지? 일본에는 겐지 향이라는 놀이가 있어.


- 다섯 가지 향료를 다양하게 조합해 만든 52종류의 향을 '하하키기', '스에쓰무하나'와 같이 겐지 이야기의 소제목에 빗대어, 그 향을 듣고 향의 차이를 맞히는 놀이가 겐지 향이라는 유희다. 각각의 향에는 이름뿐만 아니라 그것을 나타내는 기호도 정해져 있다.
'오피스 우에시마'의 회사 마크는 그중에서 '하쓰네'라는 기호였다. 물론 우에시마 하쓰네의 하쓰네에서 따온 것이다. 그녀는 득의양양하게 설명하면서 겐지 향의 그림을 가네시로에게 보여주었다. 뛰어난 아이디어라고 자부했겠지. 

 

- 그래서 하쓰네가 남긴 피의 메시지를 본 순간, 가네시로는 감을 잡았다. 이건 겐지 향의 기호가 아닐까? 조사는 간단하다. 겐지 향의 기호 일람표를 보니 그것은 '아카시'였다. 

 

- 히무라가 떠들어대고 있었다.
"하쓰네 씨가 아카시라는 이름을 가진 인물이 범인이라는 사실을 나타내려 했다면, 특수한 지식을 배경으로 삼는 그 메시지는 지나치게 난해하다. 마치 아는 사람만 알아주면 된다는 식 아닌가. 어쩌면 그게 진상이 아닐까. 그게 틀림없다. 하쓰네 씨는 일부러 진의가 전달되기 어려운 메시지를 남겼던 겁니다. 특정 인물에게만 전해지도록."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일 뻔했다. 가네시로는 그 가설에 백 퍼센트 동의한다. 그렇다. 그건 가네시로 나오야에게만 전해지길 바라며 ...

- <비할 바 없이 성스러운 순간>


- 마아코는 메뉴를 내밀었다.
"라면을 사준다는 약속이었는데 미안하군요. 이렇게 배불리 얻어먹다니."
"미래의 대선생 아니셔? 선술집에서 모듬회를 얻어먹는 정도로 그렇게 기뻐하면 어떡해? 난 정말 걱정했단 말이야. 요즘 젊은 남자들은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까."
"아, 또 그런다. 요즘 젊은 남자라는 표현은 그만두세요. 저나 하치야 하고 마아 씨는 다섯 살 차이밖에 안 나니까요."
"그 다섯 살 사이에 서른이라는 단층이 있는 거야. 자, 뭘 주문할래?"
"그럼 사양 않고."
가메이는 몇 가지 요리를 주문했다. 호리호리한 체형에 어울리지 않는 대식가 스타일이다.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았다.

- "하지만 아직 방심은 금물이야. 스토커 사나이가 그렇게 산뜻하게 물러날 리 없으니까. 레이나한테 경계를 늦추지 말라고 해둬야겠네."
"네, 저도 같은 소릴 했습니다. 밤늦게 귀가하는 날이 있으면 한동안 자동차로 바래다줄 생각이에요. 어차피 애인도 없어서 한가하니까."

 

- 그리 큰 키도 아니고 미남 부류에도 들지는 않지만, 가메이는 결코 인기 없는 타입이 아니다. 빠른 두뇌 회전, 풍부한 화제, 제법 우아한 동작은 대부분의 여성에게 매력적으로 보일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처진 가느다란 눈도 귀공자의 눈매로 보인다. 하얀 이를 드러내며 싱긋 웃는 얼굴이나 턱에 손을 대고 생각에 잠긴 얼굴도 필살기로 효과적이다. 애교만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이지적이기만 한 것도 아닌 남자. 게다가 자유롭고 경제적으로도 여유가 있다고 하면...

 

- "이게 계기가 되어서 문 짱하고 레이나 사이에 사랑이 싹틀지도?"

"말도 안 돼요. 서로 취향이 아니에요."
가메이는 담박하게 말하더니 두부구이를 젓가락으로 집었다.
"걔 귀엽잖아. 취향이 아니라고 딱 잘라서 말해도 되는 거야?"

"매력적인 여성이기는 하지만, 제 연애 대상은 드세다 싶은 여자예요. 건방질수록 좋아요. 레이나는 부족하죠."
 
- 어린애 같은 말도 아니꼽지가 않다. 곱게 자란 티가 난다고 해야 하나.
"문짱 아버님, 유명한 화가셨지?"
"유명하다고 해봤자 거기서 거기죠. 흔해빠진 일본화를 잔뜩 남겨줬는데, 그게 몇 백만 엔이나 한다니 그림의 세계는 이해할 수 없어요."
부러운 얘기다. 가난한 배우인 마아코가 한 턱 내는 건 원래 말이 안 되는 이야기다.

- "일거리를 소개해줘서 고마워. 역시 친구가 최고야."
"웃기지 마. 자산가에게 시시한 아르바이트를 소개해서 실례했습니다 그려. 그래, 요새는 뭘 하고 지내?"
"뭐라니..." 말문이 막혔다. "뭐, 그냥 이것저것 너하곤 상관없어."

"사사건건 밥맛 떨어지는 놈일세. 그만 간다. 이쪽은 견실한 회사원이라 내일도 아침 일찍 일어나야 하니까. 너처럼 맘 편히 살 수 없는 게 유감이다. 6월까지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찾기 바라고 있으마."
돌아가려던 혼다는 갑자기 뒤를 돌아보았다.

- "히라이주가 널 찾는 것 같던데. '말도 없이 이사하다니. 연락이 안 돼'라고 화내던데, 여기 있다고 일러바칠까?"
"비밀로 해줘."
"얽히기 싫다."
혼다는 그렇게 내뱉고 문을 닫았다.

- 한숨 돌렸다. 경비원 아르바이트, 고작 20만 엔의 빚, '내가 하고 싶은 일'.

하나같이 짜증스럽다. 살아간다는 건 어째서 단락이 없는 걸까? 시간이 한 번 멈춰준다면 생기가 솟아나 좋은 지혜도 떠오를 텐데.
세상이라는 건 좀 더 섬세하고 아름다운 것이라고 믿었다. 이럴 리 없었다. 사내는 이를 갈며 아코디언커튼을 젖혔다.

- 바로 정면에 시미즈 레이나가 서 있었다. '메탈릭 블루'의 팸플릿 사진을 복사해 벽 전체 크기로 확대한 것이다. 길거리에서 몰래 찍은 사진은 전부 초점이 안 맞아서, 역시 이 사진이 최고다. 안드로이드의 이미지 그 자체인 무기질의 고고한 얼굴, 검은 민소매 드레스에서 뻗어 나온 늘씬한 사지. 그 하얀 빛, 그만 숨이 막힌다.

사내의 뺨이 누그러들었다.
구원이다. 이 세상에는 아름다운 존재도 있다.

- 하얀 녀석, 까만 녀석.
우리 안에는 일곱 마리의 토끼가 있었다. 어떤 녀석은 채소 부스러기를 오물오물 입에 물고 있고, 어떤 녀석은 모래밭에서 배설중. 또 어떤 녀석은 하늘을 우러러보며 근심에 빠져 있는 듯하다. 가까이서 토끼를 보는 건 꽤 오랜만이다. 다들 무구함의 결정체 같아서 귀엽다. 
"이런 곳에 시체를 내팽개치다니, 범인을 용서할 수 없군."
양식 있는 나, 아리스가와 아리스는 분노를 드러냈다. 물론 적절한 장소에 시체를 유기한다고 살인범의 죄가 감면되는 것은 아니다. 그래도 그렇지. 
"보통 죽인 다음에 일부러 초등학교 교정에 옮겨놓나? 대체 신경이 어떻게 생겨먹은 놈이야. 악취미도 정도가 있지. 아니, 정신이상자의 행동이라고 해야 할까."
곁에 있는 히무라 히데오는 칠칠치 못하게 푼 넥타이 매듭에 손가락 ...

- 석양을 봐야지. 그런 생각을 하니 금세 기분이 풀렸다.
연노란색 니트 원피스로 갈아입고 식당으로 향했다. 크루아상과 카페오레로 아침식사를 하며 방금 전의 꿈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 아들은 밀리터리 스타일의 블루종 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냈지만 비어 있는 것을 알고 구겨버렸다. 히무라가 캐멀을 책상 위에 얹자 "됐습니다" 하고 사양했다. 
"번거롭게 해서 죄송합니다. 빨리 끝내겠습니다. 당신은 하치야 씨가 반년 전부터 비쇼엔의 아파트에 살았다는 사실도 몰랐다고 하셨지요."
사메야마 경부보가 분별 있는 태도로 말했다. 안경과 올백이 잘 어울리는 지적인 풍모는 히무라 조교수보다 더 학자 같다.
 
- "제가 몇 번이나 그 녀석한테 하치야가 어디 있는지 알게 되면 가르쳐달라고 부탁했다는 이야기를 못 들으셨습니까?"
"들었습니다. 지지난 주 화요일에도 혼다 씨에게 전화를 걸어 '어이, 너. 하치야 하고 만나고 있는 거 아니겠지?'라고 물어보셨다고 하던데-"
"그렇게 난폭하게 묻지는 않았습니다."
"혼다 씨에게 들은 대로 말씀드리는 거라. - 전화한 지 2주일이 지났습니다. 그 사이에 당신이 하치야 씨와 접촉하는 데 성공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찾아뵌 겁니다."

- "다만... 스토커 행위나 불법침입은 범죄겠지만, 절대 나쁜 놈은 아닙니다."
히무라는 상대의 입을 좀 더 열어보려 했다.
"당신은 하치야 씨의 어떤 점에 친근감이나 호의를 느끼고 친구로 지냈습니까?"
"으음, 친근감이나 호의 말인가요."
조금 망설이는 태도를 보였다.
"이런 말은 냉정할지 모릅니다만, 과연 그 정도의 감정이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녀석은 뭐랄까... 내버려 둘 수 없는 면이 있어요. 처음 말을 하게 된 계기는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 걸 구해준 일이었습니다. 5학년 때 학급을 바꾼 직후였던가? 괴롭힘을 당하는 타입의 녀석이었어요." 

- "당신이 의협심을 발휘해서 감싸준 거로군요?"
"하치야를 괴롭히는 놈들이 제가 싫어하는 녀석들이어서 그랬어요. 그랬더니 그 녀석이 절 따르더라고요. 일단 속내를 트면 사람을 잘 따르는 녀석입니다. 저도 남이 절 의지하면 기분이 썩 나쁘지 않은 편이라, 악연처럼 교제가 이어졌습니다.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계속 같은 반이었던 탓도 있었죠." 
하치야의 또 하나의 옛 친구인 혼다는 중학교 3학년 때 반 친구라고 한다.

 

- "뭘 하고 싶은지 본인도 몰랐던 게 아닐까요. 그럴 때는 방 안에 틀어박혀서 고민하지 말고 일단 일을 해야 하는데, 3년쯤 전에 양친이 황혼 이혼을 한 후로 특히 무기력해졌던 모양이에요. 이혼 원인은 성격 차이라는 흔해빠진 이유였다고 하지만, '사람들 사이의 관계도 간단히 끊어지는 거더라'라는 소릴 중얼거렸습니다. 굉장히 미련 없이 헤어졌다는 것 같더군요." 
"가까이 지낸 여성은 있습니까?"
"한 사람도 모릅니다. 자기가 말을 걸지 않는걸요. 여자가 먼저 다가올 만큼 미남도 아닌데, 그래서야 못쓰죠. 그러면서 스토커 짓을 하고 있으니 난감한 녀석입니다." 
히라이는 자기 눈에 비친 하치야 요시유키의 이미지에 대해 더 이야기했다. 하지만 심약한 사내의 프로필 가운데 범죄와 직접적으로 연결될 만한 것은 없었다. 

- 자리에서 일어나기 전에 나는 하나만 물어보았다. 시체 발견 장소에 의미가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에서 나온 질문이었다.
"하치야 씨하고 토끼에 얽힌 에피소드는 없나요?"
히라이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에피소드라니... 토끼를 키웠다거나, 학교 토끼를 죽인 적이 있다거나, 그런 거 말인가요? 아뇨, 아무것도. 작은 동물은 좋아했던 것 같던데. 길가에서 강아지나 새끼 고양이를 보면 좋다고 신경 쓰더라 ... "

- "제대로 먹고는 있나, 그 정도는 걱정했지요. 모아둔 돈이 있으니 6월까지 괜찮다고 했지만, 결국 생활비가 떨어지면 '뭐 일거리 없어'하고 제게 전화했을 거예요. 어리광쟁이입니다. 그래서 내버려 둘 수 없었어요."
"하치야 씨는 금전에 대한 집착은 희박했나요?"
"그럴 리 있겠어요. 남들만큼, 아니면 그 이상의 집착은 있었을 겁니다. 다만 그걸 쟁취하려는 에너지가 부족했어요. 금방 '귀찮아'라고요."
어린애 같은 말투다.

- "스토커 짓을 할 때는 대단한 행동력을 발휘한 모양인데 말이지요."

사메야마가 짓궂은 투로 말했다.
"상당한 끈기와 인내력이 없으면 그만큼 찍지 못했을 겁니다."
"그런가요? 형사님이나 사립탐정이 되면 성공했을지도 모르겠네요. 에너지를 잘못 사용한 거예요."
"하치야 씨가 뭔가 나쁜 일에 가담했다거나, 혹은 얽혀 있었던 낌새는 느끼지 못했습니까?"
"형사님이 말씀하시는 건 범죄 같은 일 말인가요? 마약 매매나? 단언하기는 어렵지만 없을 겁니다. 정말 지갑 사정이 안 좋아 보였거든요. 이곳을 가택수색 해보시고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셨나요? 변변한 음식도 없지 않던가요?" 

- 컵라면 종류만 잔뜩 있었다. 은행 예금 잔액도 40만 엔 이하로 떨어져, 올해 들어 입금은 제로였다고 한다. 하치야 요시유키에게는 그 정도만 있으면 6월까지는 충분했다는 소리다.


- "검소한 생활을 했던 것 같은데, 훌쩍 연극을 보러 가는 일은 있었나 보군. 그래서 시미즈 레이나에게 반했을 테니까."
히무라가 흘리는 말을 듣고 혼다가 대답했다.
"연극이나 영화 감상은 비교적 좋아했던 모양입니다. 그림 감상 같은 것도요. 그런 점은 저보다 고상해요. 니시텐마 부근을 함께 걸었을 때, 훌쩍 화랑에 들어가서 당황했던 적이 있습니다. 전 그런 무서운 곳에 발도 들여놓은 적이 없는데, 하치야는 익숙해 보였어요. '보기만 해도 손님이야. 당당하게 굴면 돼'라고 하면서."

 

- "미술 애호가였군요.”
의외였다. 혼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글쎄요? 그건 과한 표현 아닐까요. 알기 쉽고 예쁜 그림에 끌리는 것 같았어요. 자기 생활이 메말라 있었으니 아름다운 것에 굶주려 있었을지도 모르겠네요."


- 혼다는 그 이상으로 심도 있게 하치야의 내면을 표현할 단어를 가지지 못했다. 하지만 아름다운 것에 굶주려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말은 흥미로운 표현이다. 그 연장선 위에 여성에 대한 동경이 있었던 게 아닐까?

 

- 레이나는 창을 열고 '여기까지 올라오세요'라고 말없이 손짓했다.
"녀석은?"
문을 열자마자 묻는다. 먹잇감이 도망쳤다는 걸 알면 어깨가 처지겠지. 레이나는 우선 커피라도 어떠냐고 권했다.
"제가 누구하고 전화하는 걸 보고 돌아갔나 봐요. 문 작가님이 쫓아온다는 걸 눈치챘겠죠. 고생하셨어요."
 
- "아까 편의점에 갔을 때도 봤는데, 움찔거리더라고요. 박력이 없어요. 겁을 잔뜩 집어먹었는지도 모르겠네요.”
그렇게 말하자 가메이는 단호한 말투로 타일렀다.
"우습게 보면 안 돼. 그런 패거리들은 갑자기 태도를 바꾼단 말이야. 너는 그 녀석 하고 직접 관계하지 않는 편이 나아. 부드럽게 대하든 차갑게 대하든, 분명 좋지 않은 결과가 될 거야. 기왕 시작한 일이니 내게 맡겨. 마아 씨의 라면도 있으니까.”
"라면?" 하고 되물었더니 "그런 게 있어" 하고 말을 돌렸다.


- 가메이는 테이블 너머로 몸을 내밀었다.
"요전에 차 안에서 했던 얘기 기억하지? 각본을 써보고 싶다는."

"예... 그랬죠."
'꼭 도전해 봐라', 가메이는 그렇게 격려해 주었다. 그리고 '만약 조용한 곳에서 집중해서 집필하고 싶다면 내가 장소를 제공해 줄게'라고도. 가메이는 돗토리에 선친으로부터 상속한 별가를 가지고 있었다. 그곳을 써도 된다는 고마운 제안이었다.
"스토커 소동 때문에 그럴 새가 없었겠지만, 진지하게 몰두해보지 않겠어? 네가 어떤 연극을 쓸지 궁금하다구. 공연도 끝났고, 아르바이트도 금요일이면 정리된다면서, 지금이 절호의 기회 아닐까? '조만간'이런 소리를 하고 있으면 언제까지고 한 장도 못 써. 말뿐인 건 좋지 않아. 그렇지?" 

- "만약에 달리 일이 없다면 이번 주말께부터 돗토리에 가지 않겠어? 나도 가끔 유행 작가 흉내를 내서 자발적으로 틀어박혀 각본을 완성하는 경우가 있으니까, 글 쓸 도구는 갖추고 있어. 손에 익은 컴퓨터가 좋으면 그것만 들고 가도 돼. 어때?"
이상하게 열심히 권하는 바람에 설마 흑심이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가메이는 앞머리를 손으로 쓸어 올리며 신사적으로 말했다.
"거기라면 아무도 방해하지 않아. 집 열쇠를 줄 테니 마음대로 쓰면 돼. 나는 따라가지 않을게. 오래되고 낡은 집이지만 바다가 가까우니 집필 사이사이에 해변 산책을 즐길 수 있어. 식재나 일용품 정도는 근처에서 조달할 수 있고, 틀어박혀 일하기에는 이상적인 환경이지. 분명 차분하게 창작에 몰두할 수 있을 거야. 하치 공도 쫓아오지 않을 테고."

- 좋을지도 모르겠다. 마음이 움직였다. 선배의 호의에 기대어볼까? 하지만 다음 순간, 두 가지 불안이 고개를 들었다.
한 가지는 하치야가 그곳까지 쫓아오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다. 나고야까지 1박 2일로 쫓아온 사람이니 돗토리까지 끈질기게 따라올 가능성은 부정할 수 없다. 가메이의 집이 벽지의 독채는 아니라지만, 이곳보다 훨씬 적적한 곳에 세워놓았을 것이다. 익숙하지 않은 장소에서 스토커를 만나면, 불안은 지금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또 한 가지 불안은 가메이가 보디가드 역할에 질려, 귀찮은 자기를 멀리 떼어놓으려는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이었다. 마아코의 명령으로 마지못해 돌봐주는 거라면 미안하다. 아니, 그렇다기보다 몹시 마음이 무겁다. 

- "굉장히 좋은 말씀이지만..."
레이나는 자신의 생각을 그대로 말했다. 가메이는 눈을 내리뜨고 쿡쿡 웃었다. 그런 면은 전직 배우답게 연극 동작이 배어 나왔다.
"이건 내가 잘못했군. 배려가 없는 말투였나 봐. 둘 다 부질없는 걱정이야."
"하지만-"

- 가메이는 집게손가락을 꼿꼿이 세웠다.
"먼저 확실히 해두자. 나는 네 호위 역할을 귀찮다고 생각하지 않아. 눈곱만치도 말이야. 오늘 밤처럼 볼일이 있을 때는 '미안하지만 보디가드는 못하겠어' 하고 주저 없이 말하잖아? 어디까지나 가능한 범위에서 시간을 할애하고 있었던 것뿐이야. 이건 의심하지 말기."
안도한 레이나는 "네"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하치야가 돗토리까지 따라오면 어쩌나 하는 걱정에 대해서. 이건 나도 불안했던 부분이야. 네가 마을 변두리 집에 혼자 있다는 사실을 그 녀석이 알면 무슨 일이 벌어지지 않는다고 단정할 수 없어. 그래서 절대로 돗토리까지 따라오지 못하게 할 필요가 있어. 하지만 그런 건 어렵지 않잖아? 나고야까지 그놈이 따라온 건 네가 경계하지 않아서 그래. 상대는 고작 한 명이야. 미행을 떨쳐내는 것쯤이야 간단해." 

- 이번에는 약간의 불안을 남기며 "네..." 하고 대답했다. 가메이는 그런 흉중을 금방 이해했다.
"미행 같은 건 못하게 할 거야. 네가 돗토리에 가기 전까지 그 녀석을 붙잡을 거니까. 네가 출발하는 날은 반대로 내가 하치 공을 감시할 수도 있어. 아니, 그보다 좀 더 재미있는 방법도 있는데."
거기서 또다시 뭐가 즐거운지 입술 언저리를 일그러뜨렸다.
"돗토리에 가지 않겠냐고 제안하기 직전에 생각해 낸 게 있어. 레이나짱 혼자 돗토리에 보내려면 하치야를 어떻게 해야겠다 싶어서. 그랬더니 이상한 아이디어가 떠올랐어."

- "오전에 마아 씨하고도 이야기했는데, 이번 일을 계기로 레이나 짱이 크게 도약하길 바라. 이제 아르바이트 일에서는 발 빼고 배우에만 전념하겠다는 배수의 진을 쳤으면 해."
두말하면 잔소리, 그것이야말로 레이나의 소원이었다. 그렇게 대답하자 가메이는 고개를 주억거리면서도 단호한 표정을 풀지 않았다.

- "오케이. 그럼 하나 더. 마아 씨는 연줄을 써서 네가 텔레비전 일을 맡을 수 있도록 계획하고 있어. 물론 시미즈 레이나가 좋으라고 하는 일이야. 하지만 난 솔직히 그건 찬성하지 않아. 너는 무대에서 활짝 꽃을 피웠으면 좋겠어. 먼저 여배우로서, 그리고 각본을 쓸 수 있는 연출가로서 일류가 되어주지 않겠어? 다재다능한 너를 텔레비전 같은 작은 상자에 가두고 싶지 않아. 좀 더 솔직히 말하지. 텔레비전에서 성공하면 너는 우리 극단을 떠나버리겠지? 나는 그게 두려워. 워프시어터에서 너는 없어서는 안 될 존재야. 가능하면 극단과 함께 성장해 주길 바라." 
가메이가 진심으로 말하고 있다는 사실은 눈을 보면 알 수 있다. 과찬인 것 같기도 했지만 그것으로 납득이 갔다. 가메이가 레이나의 호위를 받아들인 이유도, 돗토리의 별가에서 집필할 수 있도록 편의를 봐주는 이유도, 간판 여배우를 극단에 붙들어두고 싶어서 그랬던 것이다. 

- "문 작가님이야 말로 사서 걱정이네요."
극단의 뒤통수를 치는 짓은 절대로 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자 그제야 ...

- 대합실밖에 없는 무인역인 듯하다.
"제 별가는 그 역이 제일 가깝습니다. 하쿠토 해안 쪽으로 터덜터덜 걸어서 10분쯤일까요."
"하쿠토 해안이라면... 혹시 '슈퍼 하쿠토'라는 이름은 거기서 따왔습니까?"
경부보가 물었다.
"네, 그렇습니다. 하얀 토끼라고 써서 하쿠토 고지키 나오는 오쿠니누시와 이나바의 하얀 토끼 설화의 무대가 되는 경승지입니다. 토끼가 건너온 오키노시마 섬까지 바위가 규칙적으로 늘어서 있는 광경이 잘 보입니다. 그 바위를 토끼에게 속아서 줄지어선 상어에 빗댄 거죠. 근처에는 하쿠토 신사가 있는데."

(역자 주 : 이즈모의 전승 중 하나. 오키노시마(소재불명)에 살던 한 마리 토끼가 바다 건너 이나바 지역에 가보고 싶었다. 헤엄을 치기는 싫었던 토끼는 누가 더 친구가 많은지 세어보자고 상어를 속여 이나바까지 줄을 서게 한 다음 수를 세는 척하며 그 등을 밟고 바다를 건넌다. 그러나 마지막에 탄로 나게 되자 화가 난 상어는 토끼의 가죽을 벗겨버리는데, 지나가던 신들이 심술을 부려 거짓 치료법을 알려주어 토끼는 더욱 고통을 받게 되나 오쿠니누시가 올바른 치료법으로 토끼를 구해준다.)

- 시미즈 레이나가 창작에 몰두하기 위해 향한 곳에서 하얀 토끼의 전설이 기다리고 있었나. 그녀를 그곳으로 데려간 열차의 이름도 '하얀 토끼'라고 하니 누군지 애 많이 쓰셨다.
아니, 잠깐 난카이 전철의 명물 특급인 '라피트 rapit'의 이름은 빠르다'는 뜻의 독일어에서 유래한 것으로 아는데, 영어의 래빗 rabbit과도 발음이 유사하다. '라피트'의 일본식 발음은 '라피토', 'rabbit'는 라빗토'이다. 

- "레이나 씨께 받은 슈트케이스를 끌고?"
"네, 물론이죠. ... 그게 왜요?"
"아니요."
히무라는 말을 집어삼켰다.
후일 히무라에게 그때 무슨 말을 하려고 했냐고 물은 적이 있다. 조교수는 저도 모르게 이렇게 질문할 뻔했다고 한다.
[그 슈트케이스에, 사람은 들어갑니까?]

- 객석은 7할 정도 찼다. 극장 수용규모는 3백 명 정도이고, 입장료가 2천 엔이니 매상은 40만 엔 남짓. 이 공연에 드는 경비가 얼마인지는 모르겠지만 도저히 수지가 맞을 것 같지는 않다. 연극을 한다는 건 고된 일이다.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에 조명이 꺼졌다. 객석의 수런거림이 어디론가 흡수되듯이 빠져나갔다. 
그러자 막이 내려와 있던 무대에 안경을 쓴 중머리 남자가 나타났다. 그는 목례를 하고 관객에게 고했다.

"여러분, 오늘은 '인랑'의 공연에 와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공연 시작에 앞서 부탁이 있습니다. 손에 들고 계신 팸플릿에도 쓰여 있는 대로 지금부터 시작될 연극은 여러분의 도움이 있어야 비로소-"

 

- "하얀 토끼? 아아, 저 사람 말이야?"
히무라가 시선을 앞쪽으로 던져서 나도 덩달아 쳐다보았다. 두꺼운 화장의 중년 부인이 일방적으로 떠드는 소리를 듣고 있는 레이나는 난처한 기색. 조명에 빛나는 하얀 어깨가 눈부시다. 
"하치는 레이나가 10시 40분에 출발하는 비행기를 탄다고 믿었잖아? 출발 시각이 다가오는데도 탑승 게이트에 나타나지 않은 시점에서 속았다는 걸 눈치챘을까? 아니면 토끼가 '하루카 12호'를 타려고 JR 개찰구를 빠져나간 순간에 눈치챘을까."
"어느 쪽인지는 모르겠어. 간사이공항 관할서의 도움도 빌려서 공항 안에서 목격한 사람을 찾고는 있는데, 하치야를 봤다는 사람이 없어."
"누구의 기억에도 남아 있지 않았다. 이런 걸지도 모르지만... 도망치는 토끼의 움직임에 재빨리 반응해서 하루카를 탔을 가능성은 없을까?"
 
- "분명하게 말해서... 하치는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었을까?"
"하치야를 아는 사람들의 증언을 통해 종합적으로 판단해 보면 인격장애나 경계장애에 해당한다고 보기도 어려워. 형식적인 심리학 용어를 끄집어내서 이야기를 복잡하게 만들 필요는 없겠지. 요컨대 그는 고독함과 동시에 철없고 미숙했던 거야. 호감을 품은 존재가 자기 지배하에 들어오지 않자 투정을 부린 거지." 
"투정 부리기 때문에 사랑인 건데 말이야. 그 점이 말이지... 으응, 고민스러운 부분인데."
"뭘 끙끙대는 거야, 이 녀석."


- 흉포하고 끈질긴 사내에게 쫓기는 여주인공을 그린 통속 서스펜스 드라마가 여전히 제작되고 있지만, 나는 훨씬 강렬한 스토커 영화를 알고 있다. 스토커라는 단어가 없었던 시절의 작품이다. 

 

- 이야기의 주인공은 실존했던 빅토르 위고의 딸, 아델. 그녀는 청년사관 하나를 격렬하게 사랑한 나머지, 바다를 건너 부임지인 캐나다에 있는 청년을 찾아가 결혼을 조른다. 그럴 마음이 없는 남자로서는 못 견딜 노릇이다. 아델을 연기한 배우가 미모의 이자벨 아자니였던 만큼 '배부른 놈이네' 하고 화를 내는 관객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건 차치하고-아델의 행동은 정상을 벗어나 남자에게 창부를 보내질 않나, 아버지에게 결혼했다고 연락해서 소동을 일으키질 않나, 남자의 부대가 서독 제도로 이동하게 되자 거기까지 쫓아가는 상황. 끝내 아버지의 원조도 끊기고 그녀의 정신은 이국에서 무너진다. 아델은 비렁뱅이 같은 모습으로 비웃음을 사며 거리를 헤매고, 사랑하는 남자와 스쳐가도 그를 알아보지 못한다. 남자가 불러도 돌아보지 않고, 그저 영혼이 빠져나간 텅 빈 껍질이 되어 한없이 걸어가는 것이었다.

- 궁극의 스토커 영화이자 애정 영화이다. 보는 사람에 따라서는 혐오감을 느낄지도 모른다. 당시 짝사랑을 했던 나는 아델을 위해 눈물 흘리며 그녀를 축복했다. 다행이야, 하고. 아델의, 아자니의 미모가 있기에 아름다운 영화였던 거지, 라스트 신에서 방황하는 사람이 나였다면 그냥 비참하고 한심한 정경이었겠지. 그걸 알면서도 나는 아델을 동경했다. 이루어지지 않는 짝사랑을 한탄하며 자신의 머리를 쏘아버린 베르테르보다도, 아델이 되기를 희망했다. 먼 옛날의 기억이다.

- 하치야를 생각해 본다. 그의 짝사랑은 영화가 될까? 있을 수 없다. 하치아는 멀리서 레이나를 관찰하며, 사진을 찍고, 위협하고 어르다가 침묵하는 전화를 반복적으로 걸었지만, 사랑하는 대상과의 거리를 유지했다. 진심으로 연애에 뛰어들지 않았다. 역시 너무 미숙하다고 고개를 젓고 싶었다. 

아델을 봐. 이런 짓을 하면 나는 얼마나 상처 입을까 하는 계산은 하지 않는다. 그쪽이야말로 분별없고 철없다고 느끼는 사람도 있겠지만, 상처도 입기 전에 상처 입기를 두려워하는 사람은 연애에 맞지 않는다. 무슨 일에나 적성은 있다.

 

- "이번에는 무서울 정도로 진지한 얼굴이 됐네, 아리스, 너, 배우가 되고 싶어서 연기 연습이라도 하고 있는 거야?"
"히무라 프랑소와 트뤼포가 감독한 <아델 H 이야기>라는 영화 본 적 있어?"
"아니."
"... 그렇겠지. 이 여성혐오자는."
친구를 황당하게 만들고 말았다.

- 그때 레이나가 찾아왔다. 둥근 테이블의 빈 의자에 앉아 “늦었습니다" 하고 말한다. 모스그린색 코트를 벗자 속에 입고 있는 옷은 하얀 니트 스웨터였다. 이게 또 토끼 같다.
"피곤하실 텐데 죄송합니다. 뭐라도 좀 드시겠습니까?"
히무라의 물음에 "아뇨" 하고 대답하고 커피만 주문했다.
"이 가게, 들어오기 어렵죠? 그래서 연극을 본 손님이 흘러들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런 배려가 있었던 건가.

- "전위적인 취향이었는데 재미있으셨나요?"
내 반응도 신경 쓰이나 보다.
"환경 음악의 시초라고도 할 수 있는 <가구의 음악>을 처음 상연했을 때, 평소대로 조용히 감상하려는 청중에게 작곡가 에릭 사티는 계속 말씀들 나누세요. 돌아다니세요. 음악을 들어서는 안 됩니다! 하고 외치고 돌아다녔다고 해요. 그 일화가 떠올랐습니다. 신선한 체험이더군요."
재미있는 연극이라고 하기는 어렵지만.
"인정해 주시니 안심이 되네요. 아리스가와 아리스 씨의 성함은 본명이시더군요. 신기한 우연이에요. 전 지금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패러디 비슷한 각본 ('앨리스'의 일본식 발음은 ‘아리스'이다)을 쓰고 있거든요.”
 
- "범인은 아직 모르나요?"
이 설명은 히무라에게 맡겨야지. 특별히 감춰야 할 정보도 없는 현재 상황을 범죄학자는 요령 좋은 이야기로 들려주었다. 그 이야기가 끝나자 히무라는 질문자로 돌아섰다.

- 히무라가 물어도 경부는 대답하지 않았다.
"짧게 말할 수가 없어요. 일단 와주십시오. 아이고야, 저도 형사생활 오래 했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입니다. 수사본부가 발칵 뒤집혔어요."
갈 수밖에 없을 듯하다.
레이나에게 무례를 사과하고 우리는 가게를 뛰쳐나왔다.

- 챙그랑, 글라스를 맞대어 건배를 한 후 이노 마아코는 묘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우리 지금 뭐에 건배한 거야?"
가메이 메이게쓰는 레드체리와 레몬을 곁들인 올드 패션드를 한 모금 마시고 '무슨 말이에요?'라는 식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하치야라는 사람이 살해당한 걸 축하하는 것 같아. 나쁜 취향이야."
"마실 게 왔으니 별 뜻 없이 건배한 것뿐이에요. 취향이 나쁘다니 말도 안 됩니다."
"하지만 내가 아까 문 짱한테 사준 라면은 스토커에게서 레이나를 지켜준 답례잖아? 그리고 그다음에 당신이 '이번에는 제가 살게요'하고 이런 고급스러운 가게로 안내해 줬어. 거기서 건배를 하면 ... "

- 가메이는 비둘기처럼 쿡쿡 웃었다.
"잘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어요. '인랑좌'의 '파티 효과'잖아요? 그런 연극은 중학교 연극부원이라도 할 수 있다고요."
"신랄하네."
"돈을 내고 보는 손님의 마음을 모르겠어요. 뭐, 레이나 짱은 의리가 있어서 도왔겠지요. 재능을 낭비하는 겁니다. 그랬구나, 오늘 밤은 그 연극을 하는 날이었구나. 완전히 깜빡했어요. 보세요, 저하고 레이나짱 사이에는 아무것도 없죠?"
"문짱도 배우 출신이니까. 배우들끼리 서로 믿기란 어려워."
"말도 안 돼. 그쪽은 서툴러서 발을 뺐어요. 아아, 정말, 시시한 소리를 하는 그 입을 막기 위해 비장의 카드를 공개하죠. 마아 씨, 진지하게 들어주세요. 오늘 밤 이 호텔에 방을 예약해 두었습니다."
멀리서 글라스가 깨지는 소리가 났다. "Sorry" 하고 외국인 손님이 사과하고 있다.
"안 돼요, 마아 씨. 염력으로 장난을 치면."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가메이는 진지한 얼굴 그대로다. 마아코는 입가에 힘을 주었다.

- "그건 말하자면... '저하고 함께하지 않겠습니까?' 하는 유혹?"
"당연히 그렇죠. 진지하게 얘기하는 겁니다. 흑심이 있어서 이 스카이라운지에 데리고 온 거예요."
이를 어쩐다? 마아코는 야경으로 눈을 돌렸다. 수면은 아무리 봐도 어두워서 검은 띠 같았다.
"난생처음 들어봐. '방을 예약해 두었습니다'라니. 드라마에서는 자주 듣는 대사지만 말이야. 나, 전부터 신경 쓰였어. 만약에 거기서 여자가 거절하면 남자는 어쩔까? 이제 와서 취소할 수도 없을 테고, 그럴 땐 혼자서 쓸쓸하게 자고 가는 거야?"
"경험이 없어서 대답할 수가 없네요. 혹시 제가 바로 지금 거절당한 건가요?"
거절한 건 아니라고 말하자 가메이의 얼굴에 천진한 웃음이 퍼져나갔다. 마아코는 그 웃음을 보고 농담은 아닌 것 같다고 생각했다.

- "당신, 언젠가 말했었지. '레이나는 취향이 아니다, 내가 연애 대상으로 보는 사람은 드세다 싶은 여자다' 랬나 뭐랬나. 난 확실히 드센 편이기는 해."
"드세다고는 해도 불같은 누님이 제 취향인 건 아니에요. 제가 동경하는 사람은 여성 특유의 굳은 심지를 갖추고 있고, 그런 내면의 매력이 겉으로 배어 나오는 사람입니다. 거기에 좋아하는 일에 외골수이고, 찬란하게 빛나는 재능을 가졌다면 완전히 항복이죠. -분위기나 재미로 방을 예약한 건 아닙니다."
가메이의 시선은 뜨거웠다. 남자의 유혹은 오랜만이다. 아니, 이렇게 확실한 말로 구애를 받은 기억은 없다. 마아코는 망설였다. 그런 마음을 가슴에 담고 있었다면, 하다못해 조금 더 태도로 보여주면 좋았을걸. 너무 갑작스럽잖아.

- "제가 남자로 보이지 않는다면 그렇게 말씀해 주세요. 하치야의 흉내는 내고 싶지 않으니까, 포기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그렇게까지 거절하는 건 아니지만 오늘 밤은 그럴 기분이 아니라면, 다른 기회를 기다리겠습니다. 어때요?"
연하인 주제에 강하게 밀어붙인다. 각오를 하고 말하는 것이리라. 마아코의 마음은 촛불처럼 흔들렸다.

 

- "사건이 정리되고 나서... 그런 심정인데."
"하치야 사건 말인가요? 그 사내의 죽음이 제 앞길을 막을 줄은 생각도 못 했군요. 그 사람은 극단 단원 한 사람을 귀찮게 했을 뿐인 지나가는 사람이에요. 살해당했다는 소식에는 놀랐지만 그것으로 우리하고 인연은 끝났습니다. 마아 씨가 마음을 쓰거나 상을 치를 필요는 없어요."
"아무리 사람 좋은 마아 씨라도 그 사람을 위해 상을 치를 리 없잖아. 난 그저 경찰이 용의자 취급하는 게 귀찮을 뿐이야. 아직 관계가 완전히 끊어지지 않은 게 싫어."
또 토라진 말투가 되었다. 그런 개운치 못한 기분을 가메이가 없애주길 바라고 있구나. 마아코는 스스로를 그렇게 분석했다.
"자의식이 강하지 않으면 무대에는 못 서겠지만, 실생활에서는 못쓰겠네요. 아시겠어요? 경찰은 마아 씨에게 전혀 관심 없어요 단언해도 좋아요. 왜냐면 하치야를 죽일 동기가 눈곱만치도 없으니까요." 

- "살해당한 학생하고 가메이를 이어줄 끈은 아직 발견하지 못했잖나."
후나비키는 가메이를 감싸듯이 말했다. 옆에서 끼어들어 관계자를 들쑤시는 게 싫은 거겠지. 가시와바라는 능글능글 웃고 있다.
"그건 이제부터 찾아줘야지. 자네하고 이 사건을 조사하는 척하면서 일단은 가메이와 안면을 트고 싶군. 사메야마 주임한테도 부탁해 뒀네만, 내일이라도 어서 아무나 우리 수사관 하고 동행하게 해 주게." 
"잠깐 기다리게. 멋대로 우리 수사관을 연막으로 쓰면 곤란해. 우리가 갖고 있는 정보는 주잖나."
"그쯤이야 주임한테서 대충 다 뽑아냈어. 내가 소네자키 관할서에서 잔뼈가 굵은 건 자네도 알잖나. 그 사건은 빨리 처리하고 싶어. 우리는 그것 말고도 강도 사건을 끌어안고 있네. 내일 오전 중에 한 명이면 되니까 빌려줘. 뭐 하면 히무라 선생님을 받아갈까? 자네 팀은 선생님을 빌려서 너무 편하게 일한다고. 우리 정보를 원한다면 젊은 놈을 하나 그쪽에 보내줄 수도 있어." 

- 일방적으로 떠들어대는 가시와바라 경부를 히무라가 제지했다.
"저라도 괜찮다면 돕는 건 상관없습니다만, 트레이드되기 전에 가르쳐주십시오. 전문대생이 살해당한 것은 13일 언제쯤입니까?"

"선생님께 협력을 부탁드릴 수 있다니 고마운 일이군요. 이쪽의 범행시각 말입니까? 오전 0시에서 1시 사이입니다."
"범인과 피해자가 호텔에 체크인한 시각은 몇 시입니까?"

- 후나비키는 우리를 불러주었다. 틀림없이 편승할 줄 알았는데, 히무라는 부드럽게 거절했다. '곧 따라가겠다'라고.

 

- 경부 일행을 배웅한 후 히무라는 복도 구석의 흡연구역에서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리고 목제 벤치에 걸터앉더니 말 걸기가 꺼려질 정도로 험상궂은 표정으로 묵고를 시작했다. 나는 그 옆에 앉아 급진전된 사태를 반추하기로 했다. 

- 아름다운 하얀 토끼를 깊이 연모하던 하치야 요시유키, 소심한 사내는 스토커가 되어 토끼를 -시미즈 레이나를- 쫓아다니지만, 이윽고 가메이 메이게쓰가 그 앞을 가로막고 호된 소리와 함께 하치야를 쫓아버렸다. 사과하고 물러난 하치야. 그러나 토끼를 쉽게 포기할 수 없었던 그는 눈에 거슬리는 보디가드가 어디 사는 누구인지 조사하기 위해 가메이를 미행하기로 했다. 12일 밤의 일이다. 아니, 그 이전에도 미행을 시도한 적이 있었을지 모른다. 
날짜가 13일로 바뀌려 할 즈음, 스토커는 경악스러운 장면을 목격한다. 레이나의 연인인 줄 알았던 남자가 다른 여자와 어떤 곳에서 만나 러브호텔에 들어가는 게 아닌가? 하치야에게 실수가 없었다면 애용 카메라로 현장사진 한 장쯤은 찍었을 것이다. '이걸 레이나에게 보내면, 가메이에게 정이 뚝 떨어질 거다' 하고 혼자 실실 웃으면서. 
그러고 나서 어떻게 했지? 대기했을 것이다. 바람의 결정적인 증거사진을 찍고 싶다면 남녀가 어깨를 나란히 하고 러브호텔에서 나오는 장면을 포착하는 게 최고다. 추위를 참으며 노상에서 한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이윽고 가메이가 나왔지만, 여자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 ...

- "가메이는 하치야에게 역습을 당했던 거로군."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담배를 재떨이에 버렸다.
"아아. 시미즈 레이나가 13일 낮에는 쾌활했던 가메이가 밤에는 초췌한 목소리로 전화를 걸었다고 했지. 아마도 그사이에 하치야가 가메이를 협박했을 거야. 그리고 가메이는 그날 밤이 가기 전에 하치야를 살해할 계획을 짜냈고." 
"어떤 계획이야? 하치야를 홋카이도로 날려버리자는 게임은 그거 하고 상관있어?"
"아니, 그 이야기가 나온 것은 12일이고, 14일 낮에는 기차표 마련까지 끝나 있었어. 게임 스타트는 전문대생 살해보다 먼저야. 가메이는 하치야의 협박을 받고 나서 게임을 활용한 살인 계획을 급히 짜냈다는 말이 되지. 마감 직전 글쟁이의 괴력이라고나 할까."

- 목숨을 걸고 스토리를 끝맺었다는 소리다.

 - <하얀 토끼가 도망친다>

 




해설

 

솔직하고 순수하게 미스터리의 즐거움에 빠지길



아리스가와 씨의 작품은 데뷔작인 <월광 게임> 이래로 빠짐없이 읽고 있지만, 처음으로 함께 일했던 것은 -이렇게 말하면 왠지 합작이라도 한 것 같은 표현이지만- 철도 미스터리에 관한 좌담회에서 아리스가와 씨가 사회자를 맡아주셨을 때였다. 그때의 출석자는 레일웨이 라이터인 다네무라 나오키 씨, 도쿄여자대학 교수(당시)이자 철도 팬인 고이케 시게루 씨, 그리고 나, 세 사람이었다. 나는 남들 흉내 내는 정도이지만 다른 두 사람은 일류 뎃짱(鐵ちゃん, 철도 마니아의 애칭)이어서 사회를 맡는 사람은 고생이겠다 싶었는데 이게 웬걸. 철도 지식이 꽉 들어찬 아리스가와 씨에게 깜짝 놀랐던 일을 어제 일처럼 기억하고 있다.

미야와키 슌조(宮脇俊三 1926~2003, 일본의 편집자이자 기행작가. 철도 여행을 중심으로 한 작품을 다수 발표) 씨의 작품들이 세상의 빛을 보기까지, 다 큰 어른이 칙칙폭폭 기차 따위에 정신을 파는 것은 한심하다 그런 풍조가 이 일본에는 만연해 있었다. 하지만 철도가 훌륭한 어른의 취미라고 그 존재가치를 인정받게 되자 줄줄이 음지의 철도 팬이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 그러나 '철도'는 유독 미스터리에 관해서는 이미 오랜 옛날에 시민권을 획득했다. 크로프츠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지 않아도 일본에는 <페트로프 사건>을 시작으로 철도 트릭의 선구자 역할을 한 아유카와 데쓰야 씨가 있었다. 지금도 건필을 휘두르는 니시무라 교타로 씨의 막대한 작품군 역시 상당수 철도 미스터리로 분류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철도에 깊은 조예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아리스가와 씨의 철도 미스터리는 결코 많지 않은 듯하다. 표제가 <말레이시아 철도의 비밀>이라고 되어 있는 장편을 읽은 적이 있다. 그 밀실 해명에는 완전히 속아 넘어가 대단히 만족스러웠지만, 내가 멋대로 상상했던 철도 미스터리는 아니었다. 그래서 이번 작품집에서 타이틀로 사용한 <하얀 토끼가 도망친다>는 저자 본인이 '철도 관련 중편'이라고 밝히고 있는 만큼 절대적인 기대를 품고 읽었다- 그리고 또다시 속아 넘어갔던 것이다. 

거참, 미스터리 독자라는 사람들은 이상한 심리를 가지고 있어서, 속지 않겠다고 두 눈을 부릅뜨고 읽는 주제에 완벽하게 속아 넘어가면 통쾌한 기분이 들어, 쾌감마저 느낀다. 훌륭한 미스터리 독자에게는 피학성이 요구되는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미스터리 독자층이 이렇게나 많아졌으니 개중에는 시각표를 보기만 해도 두통을 일으키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에 대해 저자는 잊지 않고 배려를 했다. 해설의 매너로써 트릭의 힌트를 입에 담을 수는 없지만 시각표 보는 법 따위는 몰라도 범인의 트릭은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 

시각표는 나의 애독서 중 하나인데 홀랑 속아 넘어갔다. 이거 정말. 과거의 철도 운행에는 열차 추월도 있고, 차량 분할병합도 있고, 편성에 다양한 장치가 있어서 미스터리 트릭에 써먹기 편했다. "특급 어쩌고 하는 놈이 등장하고 나서 재미가 없어졌어. 옛날이 좋았지..." 어쩌고 지껄이는 나이 먹은 미스터리 작가도 있지만 철도 미스터리 <하얀 토끼가 도망친다>를 읽어보면 그런 뒤처진 작가(아, 제 얘깁니까?)는 토끼처럼 냅다 도망칠 게 틀림없다. 

뎃짱 나부랭이로서 그만 하얀 토끼가 도망친다만 도마 위에 올렸지만, 또 하나의 재미는 이 작품이 '중편'이라는 점이다. '저자 일생일대의 역작, ㅇㅇㅇ매의 대장편!' ... 이렇게 선전하는 미스터리도, '아무리 퍼내도 마르지 않는 주옥같은 단편집!' ... 이렇게 소리 높이는 미스터리도 물론 귀중하다. 묵직한 읽는 맛, 거듭되는 반전으로 독자를 마음대로 쥐고 흔들며, 급작스러운 강렬한 결말로 독자를 깜짝 놀라게 하는 것도 전부 미스터리의 묘미이기는 하지만, 막상 그 사이에 낀 중편은 어렵다. 분량으로 압도하기에도, 깔끔한 결말로 감탄을 자아내기에도 어중간한 길이일 테니까. 출판되는 장편이나 단편집에 비해 중편의 등장이 적은 이유도 거기에 있을 듯하다. 잡지에서 팔아보려 해도 단숨에 게재하기에는 너무 길고, 단행본으로 엮어내기에는 너무 짧다.

하지만 작가 쪽에서 보면 내용물에 어울리는 그릇의 크기라는 문제가 있다. 양을 늘린 것도, 급하게 전개한 것도 아니라, 그것이 뽑아낸 내용에 어울리는 매수라 한다면 중편은 분량과 결론이라는 양쪽의 이점을 취할 수 있을 것이다. <하얀 토끼가 도망친다>가 트릭을 살리기 위한 인물 조형과 스토리의 깊이를 배려할 수 있었던 것은 이 길이였기 때문이다. 중편 미스터리만이 가지는 재미를 맛보시길 바란다.

표제작으로 쓴 <하얀 토끼가 도망친다> 외에 이 책에는 세 개의 단편 미스터리가 담겨 있다. 차례를 읽고 제목만 보아도 재미있겠다!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점이 작가의 뛰어난 역량이라 할 만하다.

...


인상 깊다는 면에서는 <비할 바 없이 성스러운 순간>도 지지 않는다. 내게는 드문 경우지만 작가가 제시한 다잉 메시지에 대해서는 '아항, 그거구나 분명히' ... 거의 예상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마지막에 내놓는 범인 추궁의 결정적 단서는 내 상상을 초월했다.

앗... 그렇게 된 건가! 정말 기분 좋게 당했다.

가끔 이런 생각을 한다. 나도 같은 일을 하는 미스터리 작가다, 이런 국면에서 '과연, 그렇게 나오셨습니까...' 싱글벙글 웃고 있어선 안 된다, 도저히 제대로 된 작가는 될 수 없겠다고 반성하고 싶어지기는 해도, 하지만- 또 이렇게도 생각하는 것이다. 작가로서 보다 독자로서의 경력이 긴 만큼, 나는 이럴 때 멋들어지게 솔직하고 단순하고 순수하게, 미스터리의 즐거움에 목청을 울리고 만다. 작가의 자존심 따위야 아무래도 좋다. 재미있는 미스터리를 발견하면 일개 독자로서 너무 기쁜 나머지 남들에게 퍼뜨린다. 전도사처럼 대단한 위인이 될 생각은 없다. 사람들과 함께 미스터리를 추앙하며 시끌벅적 떠들며 뛰놀고 싶다! 난 그 수준이구나, 그런 것 같다. 

그리고 이 아리스가와 작품집은 그런 내가 입맛을 다시며 감상한 한 권이다. 그렇게 다시 한번 보증하면서 해설을 마치고자 한다.

쓰지 마사키 辻眞先

일본 추리모험작가, 여행평론가, 애니메이션 각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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