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자 : 황현필
출판 : 역바연
출간 : 2021.12.16
독서모임에서 선정되어 읽게 된 책.
저자가 얼마나 이순신에 진심인가를 알 수 있었다.
고서와 한문이 난무하는 사이사이로 현대식 표현이 섞여 있어 신선했다.
마치 해당 인물이 된 양 심정을 유추하는 방식도 개인적으로는 호였다.
가끔은 그런 생각을 한다.
정제된 짧은 표현들로 가득한 교과서를, 조금 치우친 시각일지라도 -양측의 균형을 맞추면 될 테니- 생동감 넘치는 전기로 대체할 수는 없을까.
좀 더 어린 나이부터 각자의 입장이 있을 수 있음을, 위인들 또한 한 명의 사람이었음을, 누구나 실수도 하고 후회도 하며 살아간다는 것을- 알았더라면.
개인적으로 가장 반가웠던 건 '이억기 함'의 '이억기'가 어떤 인물이었는지 제대로 알게 되었다는 점이다.
낚싯배도 제대로 못 타는 멀미 체질이지만, 어쩐지 해전에 관한 내용을 읽다 보면 두근거린다.
우리는 겸손이라는 미명에 짓눌려 너무 많은 것들을 잊고 있지는 않을까.
넬슨 제독이라는 위명은 익히 접했지만, 이순신 또한 그에 비견되는 해장임은 몰랐던 사람으로서-
조금쯤 어깨에 힘을 주어봐도 괜찮지 않을까.
제2의 이순신을 찾아서 -이번에는 그를 잃지 않도록- 마음을 더해주어야 하지 않을까.
많은 말을 남기지는 못하겠다.
이제, 역사가 조금씩 재미있어지는 나이가 된 것 같다.
- 대한민국에 이순신 연구자만 5,000여 명이나 된다고 합니다. 역사 전공 여부를 떠나, 이순신에게 매료되어, 이순신의 행적을 좇고 흔적을 찾아 이순신을 연구하는 분들이 생각보다 많습니다. 그 많은 연구자들의 성과가 모여 후학들이 편하게 이순신을 접할 수 있게 되었으니 이순신을 먼저 연구하신 선배 역사가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 그러나 이순신을 주인공으로 한 유명 소설은 많이 있지만 이순신의 생애와 전투 및 승리 상황을 짜임새 있게 설명하고 손에 땀을 쥐게 만들 정도로 생동감 넘치는 역사서는 없었습니다.
- 이순신을 제대로 알려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누구보다 대단한 인물이 우리 역사 속에 있었음을 알게 하고 또 우리가 그의 후손이라는 것에 대한 자랑스러움을 느끼게 하고 싶었습니다. 역사서이지만 독자들의 마음을 뭉클하게 하고 눈시울이 붉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썼습니다.
- 이순신은 덕수 이씨이다. 덕수 이씨의 시조는 고려시대 무장이었던 중랑장 이돈이다. 이순신의 5대조 이변은 홍문관 대제학을 지냈고, 증조부 이거는 암행어사를 지냈다.
- 선조가 류성룡에게 물었다.
"이순신은 집안이 어떻게 되는가?"
류성룡이 답하길
"성종 때 관직에 있던 이거의 증손입니다."
그러자 선조가 바로 알아들었다고 한다.
- 이순신의 조부 이백록과 아버지 이정은 관직 생활을 하지 않았다. 이백록은 국상 國喪 중에 아들 이정을 결혼시키고 잔치를 했다는 이유로 곤장을 맞았다는 기록이 있다. 조부 이백록과 아버지 이정이 관직 생활을 못했다고 해서 이순신 집안을 몰락 양반가문으로 보기는 어렵다. 이순신의 아버지 이정은 초계 변씨와 결혼했는데 변 씨는 지방 현감의 딸이었다. 즉 이순신의 외할아버지가 지방의 사또였다. 이순신은 금수저까지는 아니어도 웬만한 양반 집안의 은수저로 태어난 셈이었다.
- <초계 변씨 별급문기>
이순신의 어머니 초계 변씨가 이순신과 그 형제들에게 재산을 나누어준 것을 기록한 문서이다. 이를 통해서도 이순신이 재산 있는 양반집의 자제였음을 알 수 있다.
- 이정과 부인 변씨 사이에는 아들 사형제가 있었다. 이정은 아들 4명의 이름을 중국의 선인인 복희씨, 요임금, 순임금, 우임금으로부터 차례로 따왔다. 그리하여 첫째가 희신, 둘째가 요신, 셋째가 순신, 넷째가 우신이었다. 이순신은 1545년 3월 8일 지금의 서울 중구 인현동 부근인 건천동에서 태어났다. 당시 한양의 건천동은 군사훈련장인 훈련원 부근이다 보니, 어린 시절 이순신은 전쟁놀이를 즐겨하였다. 그리고 이순신은 항상 대장역할을 맡았다. 하루는 이순신이 동네 길가에 진을 쳐놓고 군대놀이를 하고 있었는데, 동네 어른이 그 진을 무시하고 걸어 들어왔다. 그러자 분노한 이순신은 활 시위를 그 어른의 눈에 조준한 채 따져 물었다.
"여기 진 쳐놓은 게 보이지 않나요? 어째서 함부로 들어오는 겁니까?"
이때부터 동네 어른들은 이순신이 보통 녀석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피해 다녔다고 한다.
- 한 번은 이순신이 참외가 먹고 싶었는지 참외밭 주인에게 참외를 달라고 부탁했더니 밭 주인이 고개를 저어버린 모양이다. 화가 난 이순신은 집에서 말을 타고 와 참외밭을 오가며 밭을 엉망으로 만들어버렸다. 집에 말이 있었다는 것을 통해 이순신의 집안이 살 만한 형편이었음을 알 수 있다. 어쨌거나 남이 피땀 흘려 일군 참외밭에서 말을 타고 달렸으니 부모님이 어떻게든 합의하고 피해를 보상해 줬을 터다.
- 이순신이 태어나고 어린 시절을 보낸 동네인 한양 건천동에는 세 살 형이었던 류성룡이 함께 살고 있었다.
- 조선 전기까지도 처가살이를 많이 했기에 이순신의 아버지 이정이 처가 쪽으로 이주한 것으로 보인다.
이순신은 21세에 같은 아산에 살고 있었던 보성 군수를 지낸 방진의 딸과 혼인하였다. 이순신보다 두 살 어렸던 부인 방씨는 무남독녀로 재산을 모두 물려받을 수 있는 상황이었으니, 이순신 입장에서는 나름 장가를 잘 간 셈이었다. 이순신은 방씨와 사이에서 아들 셋과 딸 하나를 두게 된다.
- 형을 따라 문과를 준비하던 이순신은 결혼 1년 후인 22세부터 무과를 준비했다. 무관 출신이던 장인 방진이 이순신이 무예를 연마하는 데 많은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6년이 지난 28세에는 처음으로 무과 별시에 도전하였다. 그런데 시험 중 이순신의 말이 넘어지고 말았다. 이 광경을 본 대부분의 사람은 말에 깔린 이순신이 죽거나 크게 다쳤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순신은 다리를 절뚝이며 일어나 버드나무 근처로 가더니 나무줄기를 끊어 자신의 다친 허벅지를 묶었다. 그러고는 다시 말에 올라 무과 시험을 끝까지 치렀다. 포기하지 않았던 그의 의지는 많은 박수를 받았지만 이순신은 낙방하였다.
- 낙방의 아픔을 딛고 이순신은 다시 무과를 준비했다. 그리고 4년 후인 1576년 치러진 식년 무과에 합격을 하였다.
- 식년시는 3년마다 치르는 최고의 과거시험으로 무과는 전국에서 28명을 선발했다. 1576년 당시 식년 무과에는 동점자가 있어 29명이 선발되었고 이순신은 병과 4등(전체 12등)의 준수한 성적으로 합격하였다. 이순신의 나이 32세였다. 당시 무과 합격자의 평균 나이가 34세였으니 아주 늦은 나이는 아니었다.
- 조선의 무과 급제자들을 일반사람들과 같은 선상에 놓고 비교하는 무지를 범해서는 안 된다. 조선의 무과 합격자들은 말을 타고 칼을 쓰고 활을 다루는 등 제대로 된 정규 무인 코스를 수년간 밟은 프로급 무사들이었다. 그리고 엄청난 경쟁률을 뚫어낸 무인들이었다. 이순신 역시 젊은 시절 대단한 괴력의 소유자였다. 과거에 합격하고 선산에 인사드리러 가는 산길에 망부석이 쓰러져 있어 노비 몇 명이 달라붙어서 들어보려 했지만 옴짝달싹도 안 하던 것을, 이순신 혼자 번쩍 들었다는 일화도 있다.
- 이순신은 특히 활쏘기에 뛰어났다. 이순신의 기록들만을 통해 본다면 이순신보다 활을 잘 쏘는 이는 없었다.
- 이순신의 무관으로서의 공식적인 경력은 1576년 2월 식년 무과에 급제하면서 시작됐다. 임진왜란을 16년 앞둔 시점이었다.
32세에 발령받은 첫 임지는 함경도 동구비보('삼수갑산'의 삼수라는 고을)였고 직책은 말단 관리격인 권관(품)이었다. 당시의 함경도 감사 이후백이 활쏘기 대회를 열었는데, 활쏘기 능력이 상당했던 이순신은 이후백에게 칭찬을 받기도 하였다.
- 이순신은 함경도 권관 생활 3년 후 자신의 출생지인 한양 건천동으로 발령을 받았다. 인사과에 속한 훈련원 봉사직(종8품)이었다. 그런데 무관인사권을 가진 병조정랑(정품)이었던 서익이 이순신에게 인사 압력을 넣었다.
"아무개라고 아는가. 일도 잘하고 사람도 좋고, 요번에 7품 관리에 올리고 싶은데 알아서 처리 좀 잘해주게."
이순신은 서익의 인사 청탁을 당당히 거부했다. 서익은 하급 관리 이순신에게 상당한 모멸감을 느꼈고 이 일은 관료들 사이에 소문이 났다.
- 그리고 이 소문이 병조판서 김귀영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이순신의 대쪽 같은 성품을 알아본 병조판서 김귀영이 자신의 서녀를 이순신의 둘째 부인으로 주겠다고 나섰다. 요컨대 현직 국방부 장관이 위관급 장교에게 자신의 딸을 혼인시키려 든 셈이었다. '정2품의 병조판서가 종8품의 훈련원 봉사에게 뭐가 아쉬워서 딸을 주려고 하지?'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이건 품계로만 계산할 상황은 아니었다. 8품이건 9품이건 모두 과거에 합격한, 지금으로 치면 최고의 국가고시에 합격한 인재였다. 병조판서 김귀영은 이순신의 떡잎을 알아보고 먼저 손을 내밀었던 것이다.
- 그러나 이순신은 이렇게 답했다.
"벼슬길에 갓 나온 제가 어찌 권세가의 집에 발을 들여놓을 수가 있겠습니까."
혼담은 단박에 어그러졌다.
- 이순신은 35세 나이에 충청 병사 군관으로 발령받았다. 언제 어느 자리건 이순신은 관직에 있는 자로서 늘 청렴하고 결백했다.
'이순신의 방에는 베개와 이불, 옷가지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몇 달간 군관 생활 중 급료로 받은 곡식들을 동네 주민들에게 전부 나누어주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 이순신은 관직에 들어선 지 4년째가 되던 36세에 전라도 고흥 발포 만호직 (종4품)으로 발령받았다. 만호직은 오늘날 연대장급인 대령에 해당하는 계급이었다. 이순신이 훗날 전라좌수사에 임명되었을 때 산하의 5관 5포(5관-순천, 낙안, 보성, 광양, 홍양, 5포-사도, 여도, 녹도, 발포, 방답)를 거느리게 되는데, 이때의 고흥 발포 만호 생활 덕분에 훗날 전라좌수영의 돌아가는 여러 상황들을 용이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 대쪽 같은 이가 있었다니, 한번 만나고 싶었다. 그리하여 이이는 류성룡에게 중재를 부탁했다. 나이로 따지면 이이가 이순신보다 아홉 살 많았고 항렬로는 이순신이 이이의 삼촌뻘이었다. 어쨌거나 같은 집안의 명망 있는 이조판서가 먼저 만나자고 의사를 전해 온 것이었다. 그러나 이순신은 잘 나가는 나이 많은 조카를 만나려 하지 않았다.
"제가 이렇게 좌천당한 상황에서 인사권을 가지고 있는 이조판서를 만나는 것은 적절치 않아 보입니다."
뜻밖의 반응에 류성룡이 재차 설득하고 뜻을 전했지만 이순신은 완고했다. 류성룡도 결국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돌아섰다.
이순신의 남달리 강직하고 올곧은 성품은 요즘 기준으로 볼 때 사회성이 없다고 할 수 있을 정도였다.
- "그 공문이 바로 나에게 있소이다. 조정에서 만일 이런 사실을 안다면 죄가 나에게 있다 하지 않을 것이오. 또 내가 힘껏 싸워서 녹둔도를 지켰고, 바로 추격하여 잡혀간 백성들을 여러 명 구출해 왔거늘, 이것을 패배로 치는 것이 옳단 말이오?"
병력 차이가 큰 나머지 역부족으로 밀리긴 했지만 이순신은 녹둔도를 지켜냈다. 또한 이순신이 여진족을 쫓아가서 죽이고 잡혀가던 우리 백성들을 일부나마 구출해 온 일은 분명 사실이었다. 함경도 병마사 이일로서도 함부로 벌을 주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 내용이 조정에 알려졌고, 사실을 파악한 임금 선조는 이렇게 결론 내렸다.
"이순신은 전쟁에서 패배한 사람과는 차이가 있다. 병사에게 장형을 집행한 이후 백의종군으로 공을 세우게 하라."
이순신의 첫 번째 백의종군이었다.
- 백의종군이 이른바 이등병 강등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직위 해제되었지만 전장에서는 나름대로 무관 대접을 받으며 명예를 회복할 기회가 주어지는 것이었다.
이후 이순신은 백의종군 상태로 여진 공격에 참여하였다.
- 1588년 1월, 이일과 이경록, 이순신 등은 2,500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여진족 기지를 공격하였다. 끌려갔던 인질들, 빼앗겼던 말과 소 등을 구출해 온 것은 물론 상당히 많은 여진족을 죽이고 시전부락의 200여 가구를 불태웠다. 엄청난 승전이었다. 덕분에 이일은 임진왜란 당시 신립과 더불어 조선의 투톱 장수 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되었다.
- 신기전 : 1448년 세종 30년에 제작되어 군사적 목적의 로켓 추진 화살로써 이용되었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의 바다에서 신호탄 역할과 더불어 전투 시에도 상당한 위력을 발휘하였다.
- 비격진천뢰 : 임진왜란 때 화포장 이장손이 창제한 포탄의 일종이다. 겉은 무쇠로 둥근 박과 같지만 속에는 쇳조각과 화약이 들어 있다. 화약에서 나온 화승의 길이를 늘이고 줄임에 따라 폭파 시간을 조정할 수 있었다. 임진왜란 당시 경주성 탈환 전투(1592.9)에서 박진이 처음으로 활용하였고 이후 수군에서도 널리 사용되었다.
- 승자총통 : 왜군의 조총에 대응하는 조선군의 개인 화기이다. 총신이 짧고 사거리와 정확도가 일본의 조총에 비해 부족했다.

- 판옥선은 소나무로 만들어져 튼튼했다. 판옥선을 만들 때 사용된 나무못은 쇠못과 달리 부식의 염려가 없고 외부의 충격에도 쉽게 풀리지 않으며 본체를 단단히 고정시켜 주었다. 판옥선은 다른 나라를 침략하는 원거리 항해에는 적합하지 않지만 조석 간만의 차가 크고 파도가 센 조선의 바다를 수호하는 데 초점을 두고 만들어진 함선이었다. 배가 무겁다 보니 판옥선의 격군들은 고생스러웠고 일본의 함선들과 속도전을 하기에도 무리가 있었다. 그러나 '튼튼하다'는 장점이 이 모든 단점을 불식시키고도 남았다. 이러한 우수한 내구성 덕택에 판옥선은 갑판 위에 무거운 포대들을 배치하고 장거리 함포들을 발포해도 선체에 큰 무리가 없었다. 그리하여 조선의 뛰어난 함포들인 천자총통, 지자총통, 현자총통, 황자총통 등이 마음껏 발사될 수 있었다. 판옥선이 함포 사격에 금상첨화였던 또 하나의 ...
- 아시아에서 가장 강한 해군을 가지고 있다고 자부하는 일본이었고, 또 그것은 어느 정도 사실이기도 했다. 하찮게 여겼던 조선 수군에게 자신들이 해전에서 패배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분노를 삼키며 명령을 내렸다.
"조선 해군의 실체와 행각, 해전의 상황들을 빠짐없이 보고하라."
- 얼마 뒤 다음과 같은 내용이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보고되었다.
'적은 전라도 지역에 근거를 둔 조선 수군인 듯합니다.'
'나타나고 사라지는 것이 눈 깜짝할 사이에 이루어졌기 때문에 그 행방과 병력, 적장에 관한 것은 자세히 알 수 없습니다.’
100여 척이나 되는 적선이 한꺼번에 달려들었다는데, 이것이 적이 보유한 모든 병력인지 아니면 일부인지는 아직 확인할 길이 없습니다.'
'옥포에서는 수천의 사상자가 생겼고 거의 모든 전선이 해전 중 파괴되거나 전소되었습니다.'
- 나타나고 사라지는 것이 눈 깜짝할 사이에 이루어졌다는 것은 이순신의 전라좌수영 함대가 그만큼 첩보전을 잘 수행했다는 의미였다. 심지어 이들은 아직 이순신의 이름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100여 척이나 되는 적선이라지만 판옥선이 24척이요, 협선과 고기 잡는 배인 포작선까지다 합쳐야 100척 정도 될 터였다. 보고하는 입장에서는 이렇게라도 부풀려야만 했을 것이다. 일본 측의 기록에도 옥포해전의 사상자가 수천에 이르렀다고 되어 있었다.
- 이러한 보고를 접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분노하며 길길이 뛰었다. 그의 곁을 지키고 있던 구로다 간베에나 도쿠가와 이에야스 같은 참모들이 머리를 조아리고 어찌할 바를 몰라했다.
- 선봉은 당연히 이순신의 전라좌수영 함대가 맡았다. 전투 경험이나 훈련도가 조선의 다른 수군보다 월등했기 때문이었다. 이억기의 전라우수영 함대는 당항포 안에서 또 다른 매복조가 되어 숨었다. 전라좌수영의 함대가 당항포 소소강의 거의 막다른 곳인 두호리 앞바다까지 들어가자 아니나 다를까 왜군 함선 26척이 보였다. 도대체 일본군들은 무슨 이유로 이 구석까지 들어와 스스로를 가두었던 것일까?
- 임진왜란이 터지기 1년 전쯤이다. 기방 생활하던 월이라는 기생이 어느 날 승복 차림의 남자 손님 한 명을 만났다. 그를 접대하고 그와 하룻밤을 보내는데 아무리 봐도 수상했다. 승복을 입기는 하였지만 가짜 스님 같았고, 은연중에 일본 말투가 나오기도 했다. 그래서 월이는 의심스러워서 남자가 곤히 잠든 새에 짐을 뒤져봤다. 그랬더니 놀랍게도 남해안 지형을 자세하게 표시한 조선 지도가 나오는 것이었다. 일본이 조선을 침략할 것이라는 소문이 널리 퍼져 있던 상황이었기에 월이는 그 남자가 일본의 첩자임을 눈치챘다.
- 그림에 소질이 있었던 월이는 기지를 발휘했다. 그 지도에서 고성 당항만의 소소포(지금의 고성천 하류)와 죽도포(지금의 고성읍 남리) 사이 육지를 2km가량 지우고 마치 바다가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절묘하게 뱃길을 그려 넣었다. 일본 첩자가 그린 조선의 해안 지도를 변조한 것이다.
- 1년 후 조선을 침략한 왜군들은 월이가 거짓으로 그려놓은 지도를 근거로 고성 당항포 쪽으로 들어가 통영 쪽으로 빠져나오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갑자기 지도에 없던 육지가 가로막았다. 지도가 잘못된 것임을 안 왜군들은 당항포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뱃머리를 돌리려는 순간, 조선의 연합함대를 만난 것이었다. 더럽게 운 없는 일본군들이었다. 넓은 바다 쪽에서 강하다고 소문난 조선의 전함들이 뱀처럼 똬리를 틀면서 자신들이 있는 당항포로 밀고 들어오고 있었다. 일본군들은 얼마나 당황스러웠을까.

- 한편, 조선 수군으로서도 조심스러웠다. 왜선이 아무리 독 안에 든 쥐라지만, 무턱대고 공격해서는 안 되는 상황이었다. 함포의 사정거리 안으로 일본 함대에 가까이 접근해야 하는데, 그러자니 일본 육군들이 좁디좁 ...
- 조총은 일본군의 주요 무기였다. 전쟁 초기 조선군은 일본군의 조총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졌다.
- 그러나 엄청난 승리를 거둔 부산포해전에서 이순신은 가장 아끼는 부하장수 정운을 잃었다. 일본 저격병들이 주로 사용하는 대조총에 맞아 그만 쓰러지고 만 것이다. 하늘이 꺼진 듯 슬픔에 빠져 정운의 장례를 치르며, 이순신은 그를 떠나보내는 절절한 마음을 추모제문에 담았다.
어허, 인생이란 반드시 죽음이 있고
죽고 삶에는 반드시 천명이 있나니
사람으로서 한번 죽는 것은 진실로 아까울 게 없건마는
오직 그대 죽음에 마음 아픈 까닭은
나라가 불행하여 섬오랑캐 쳐들어와
영남의 여러 성이 바람 앞에 무너지자
몰아치는 그들 앞에 어디고 거침없이
우리 서울 하루저녁 적의 소굴 이루도다
천리 관서로 님의 수레 옮기시고
북쪽 하늘 바라보면 간담이 찢기건만
슬프다 둔한 재주 적을 칠 길 없을 적에
그대 함께 의논하자 해를 보듯 밝았도다.
계획을 세우고서 배를 이어 나갈 적에
죽음을 무릅쓰고 앞장서 나가더니
왜적들 수백 명이 한꺼번에 피 흘리며
검은 연기 근심 구름 동쪽 하늘을 덮었도다
4번이나 이긴 싸움 그 누구 공로런고
종사를 회복함도 기약할 만 하옵더니
어찌 뜻했으랴 하늘이 돕지 않아 적탄에 맞을 줄을
저 푸른 하늘이여 알지 못할 일이로다
돌아올제 다시 싸워 원수 갚자 맹세터니
날은 어둡고 바람조차 고르잖아 소원을 못 이루매
평생에 통분함이 이 위에 더할쏘냐.
여기까지 쓰고 나도 살을 에듯 아프구나
믿는 이 그대인데 이제는 어이할꼬
진중의 모든 장수 원통히도 여기거니와
그 재주 다 못 펴고 덕은 높되 지위 낮고
나라는 불행하고 군사 백성 복이 없고
그대 같은 충의야말로 고금에 드물거니
나라 위해 던진 그 몸 죽어도 살았도다
슬프다 이 세상에 누가 내 속 알아주리
극진한 정성으로 한잔 술을 바치노라
어허, 슬프도다
- '웅포해전'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발발했고 1592년 5월 1차 출정을 나선 이순신은 옥포와 합포, 적진에서 승리했다. 1592년 5~6월 2차 출정 때는 사천, 당포, 당항포, 율포에서 연전연승했다. 1592년 7월의 3차 출정에서는 한산도에서 승리하면서 남해의 재해권을 완전히 장악하였고 동시에 안골포에서도 승리를 거두었다. 그리고 1592년 9월 초, 대망의 4차 출정에 나서 당시 적의 본진인 부산포까지 완전히 쓸어버렸다.
임진년에 조선땅에서 벌어진 양국 간의 전투에서 육전은 일본군이 압승을 하였고, 해전은 조선군이 압승을 하는 상황이었다.
- 1592년 9월 부산포해전에서 대패한 이후 일본은 다시 한번 육지를 통해 호남을 공격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부산포해전 한 달 후인 1592년 10월, 일본군은 호남으로 넘어갈 수 있는 관문이었던 진주성을 공격했으나, 성주 김시민과 진주성 주민들의 끈질긴 저항으로 진주성은 지켜졌고 일본군은 육지로의 호남 진출을 다시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김시민은 전사하였지만 그의 위명은 일본에까지 남아 '모쿠소'라는 두려운 존재가 되었다. 일본인들은 '목사'를 모쿠소라 발음하였다.

- 나라의 군인 역할을 대신하고 있었던 의병들의 사정 역시 눈물겨울 정도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국에서 들불처럼 일어나 큰 활약을 펼쳤던 의병인데, 1593년 계사년에 들어서는 오히려 의병의 숫자가 줄어들었다. 나라를 지키겠다는 일념으로 민초들이 곡괭이를 들어가며 일본군과 싸웠지만 돌아오는 것은 국가의 푸대접이었다.
- 조선 조정은 의병들에게 무기나 군량이나 방한복을 지급해주지 못했다. 명나라의 참전 이후 군수품 보급이 명군에게 집중되면서 전쟁 중 아사를 걱정하던 조선의 의병들은 고향으로 내려가 일본군을 향해 내어들었던 곡괭이로 다시 밭을 일구었던 것이다. 백성들 역시 명군을 위해 군량미와 마초를 준비하고 명나라의 기마대가 이동할 수 있도록 다리를 놓고 길을 닦는 노역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이런 말이 돌았다.
'명나라군은 참빗이고 일본군은 얼레빗이다.'
- 일본군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보다 명군이 지나간 자리의 약탈이 더욱 심했다는 의미다. 전쟁이 휩쓸고 지나간 당시 조선의 참상은 끔찍했다.
[각도의 인민이 떠돌아 살 곳을 정하지 못해 굶어죽은 송장이 잇달았다. 마침내 사람이 서로 잡아먹는 지경에 이르러 아이를 잃은 자가 많았고, 산과 숲에 풀잎이며 소나무 느릅나무의 껍질과 줄기도 모두 없어졌다. <난중잡록>]
[왜적이 한양을 점령한 지 벌써 2년, 온 국토가 쑥대밭이 되어 농사지을 땅도 남아 있지 않은 까닭에 백성들은 굶어 죽는 것이 다반사였다. (중략) 마산 가는 길에 죽은 어머니의 젖을 빨고 있는 아기를 본사 총병(명나라 사령관)이 아기를 데려다 기르기 시작했다. <징비록>]
- 전쟁이 발발했던 1592년의 4월은 양력으로 5월 후반이었다. 모내기를 해야 할 때에 전쟁이 시작된 것이었다. 임진왜란 이전의 조선의 토지 결수는 대략 150만 결 정도였다. 그런데 전쟁통에 경복궁이 점령당하며 토지대장인 양안이 소실되었고 토지 결수기록도 죄다 사라졌다. 훗날 광해군이 양전사업을 시작하여 다시 양안을 만들었는데, 토지 결수가 채 30만결에 못 미쳤다. 전쟁으로 전 국토 70% 이상의 농경지가 황폐화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은 휴전에 찬성할 수 없었다. 일본군이 완전히 철수하지 않은 채 남해안에 왜성을 쌓고 웅크리고 있는 상태에서 조선 조정은 도저히 휴전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러나 명나라와 일본의 휴전에 대한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다.
- 바다 위를 떠다니던 일본의 함선들은 여기저기 포구로 숨어들기 바빴다.
조선의 작은 포작선들이 바다 이곳저곳으로 흩어져 탐색에 나섰다. 일본군 전함의 위치와 상황들이 이순신이 승선해 있는 기함으로 속속 전해져 들어왔다. 하늘 위 독수리가 육지의 여러 먹잇감 중 낚아챌 대상을 고르듯, 조선수군은 사냥감을 찾고 있었다. 그리고 확실한 먹잇감이 드러났다. 조선 수군이 견내량을 넘어섰다는 것을 모르는 일본 함대 30여 척이 무방비 상태로 당항포 안쪽에 모여 있다는 첩보였다.
- 2차 당항포해전의 영웅 어영담도 전염병을 피하지 못하였고 전장이 아닌 병석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이순신 자신은 가까스로 전염병을 극복했지만 수많은 장들이 죽어나가는 것을 보면서 이순신의 가슴은 새카맣게 타들어갔을 것이다.
- 패배의식도 시간이 지나면 극복되기 마련인데, 일본군의 이순신에 대한 패배의식은 극복되기 힘든 고정관념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이순신 역시 더 이상 일본군에 대한 공격이 불가하였다. 명나라에서 '왜군을 공격하지 말라'는 패문을 보냈기 때문이었다. 또한 당시 남해 곳곳에 숨어 있던 왜군들을 토벌하기에는 아군의 상황 역시 녹록지 않았다.
- 첫 번째는 2년(1593~1594) 동안 조선 전체를 휩쓸고 지나간 대기근과 전염병 때문이었다. 이로 인한 조선 수군의 병력 손실이 매우 컸다.
두 번째로 남쪽에 주둔한 왜군 병력의 숫자가 생각보다 많았다. 전염병으로 많은 아군이 전사하여 조선 수군 전 병력이 6,000~7,000명 정도밖에 안 되는 상황에서 남해 바다에 산재해 있는 일본군 4만을, 더군다나 왜성에 웅크리고 있는 일본군을 선제 공격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세 번째로 왜성이 문제였다. 이 무렵 일본은 계속해서 왜성을 만들기 시작했다. 울산에서 순천에 이르기까지 조선의 남해안에 30개에 가까운 왜성이 만들어졌다. 왜성으로 말미암은 문제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겠지만 전투 중 기항지를 확보하기 어렵다는 것이 큰 문제였다. 조선 수군이 정박하여 휴식할 때 근처 왜성에서 일본군이 출격하여 충분히 기습을 당할 수 있으니 조선 수군의 전투수행 중 피로도는 훨씬 클 수밖에 없었다.
- 이상의 이유들로 이순신은 '선제공격이 불가하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한편 당시 일본군도 조선에 대한 공격을 재개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님을 스스로 잘 알고 있었다. 만약 다시 조선을 공격해서 한양을 점령하더라도 자신들의 수군이 이순신을 극복하지 못한다면 서해 바다를 통한 보급이 불가능해지기에, 이는 하나 마나 한 전쟁이라는 것을 일본군 역시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다.
- 이순신 또한 이를 잘 알고 있었다. 전함 숫자와 병력이 엄청나게 늘어난 일본군이지만 어차피 수군으로 조선을 공격하려면 견내량을 뚫고 내려오거나 아니면 거제도를 돌아서 나올 수밖에 없었다. 이순신 입장에서는 이들을 전라도 남해안과 서해 바다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막는 것이 최선의 전략이었다. 이순신의 판단은 너무나도 정확했다.
그러나 선조는 조급했다. 한양은 탈환했지만 적들이 여전히 남해안에 왜성을 쌓아놓고 주둔하고 있는 꼴을 보고 있기 힘들었다. 게다가 명나라는 더 이상 일본군과의 전쟁에 대한 의지를 보이지 않았다. 이때 새롭게 도체찰사가 된 윤두수가 일본 왜성에 대한 선제공격을 건의하고 나섰다. 류성룡이 반대했음에도 선조는 윤두수의 편을 들었다. 공격 목표는 거제도에 있는 장문포왜성이었다. 윤두수가 장문포왜성을 선제 공격하자는 주장 그 이면에는 원균이 있었다.
- 원균은 경상우수사 신분으로 자신의 상관인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을 건너뛰고 바로 도체찰사 윤두수에게 일본 공격에 대한 건의를 했다. 이는 지휘 체계를 무시한 월권행위였다.
- 1594년 9월 24일, 이순신에게 장문포 공격에 합류하라는 지시가 전달되었다. 추수철을 맞아 한산도에 있는 대다수의 병졸들을 고향으로 돌려보낸 직후였다.
- 장문포성 앞에 일본군이 세워놓은 팻말을 보고 조선군은 싸울 맛이 뚝 떨어졌다. 때마침 공격을 중지하라는 선조의 장계도 도착하였다. 결국 이순신은 장문포왜성 공격을 중단하고 한산도 본영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 장문포해전은 분명히 실패한 작전이었다. 총지휘를 해야 할 도체찰사 윤두수는 장문포 근처 전장에 없었다. 장문포해전 당시 그는 전장에서 멀리 떨어진 순천에 있었고, 그 긴박한 전투 상황에 이순신의 오른팔이라고 할 수 있는 순천 부사 권준을 탐관오리라는 죄명을 씌워서 잡아들이고 있었다.
- 그런가 하면 도원수 권율의 행동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권율 역시 전장에서 멀리 떨어진 구례에 주둔하고 있었다. 임금의 명으로 수륙양면작전을 시행한다면 육군이 먼저 나서야 마땅한 일이었다. 그러나 곽재우나 김덕령이 이끄는 의병들로 하여금 왜성을 공격하도록 하고 권율 자신의 육군 병력은 장문포 공격에 투입시키지 않았다. 다시 말해 사상 최초의 수륙합동작전에서 최고 지휘관인 윤두수와 권율은 전장 근처에 오지도 않았다. 이들은 이순신에게만 무리한 공격 명령을 내리고 있었다. 그럼에도 조선 수군은 장문포해전에서 단 한 명의 사망자도 내지 않은 채 2척의 일본 함선을 격침시켰다.
- [류성룡이 아뢰기를,
장문포 공격은 수전 중심이었기 때문에 대패까지는 안 하였지만 육전이었으면 반드시 대패하였을 것입니다.
<선조수정실록>]
- [4월 19일 맑다. 어머님의 영전에 인사를 올리고 울부짖었다. 어찌하리오, 어찌하리오? 천지에 나 같은 일이 또 어디에 있을 것인가! 일찍 죽는 것만 같지 못하구나!
<난중일기>]
- 이순신에게는 2명의 형이 있었지만 모두 일찍 죽었기에 이순신이 상주 역할을 해야 했다. 그러나 이순신의 백의종군 감시관인 금오랑의 서리 이수영은 빨리 떠나자고 다그치니, 이순신은 어머니의 시신을 거둔 지 일주일 만에 다시 눈물의 백의종군 길에 나섰다.
- 이순신은 이순신은 지방관이 내어준 관사에서 잠을 청하기도 했고, 정 쉴 곳이 없을 경우에는 백성들의 집에 가서 신세를 지기도 하였다. 종들이 고을 사람들에게 함부로 밥을 얻어먹은 것을 혼내고 쌀을 도로 갚아주기도 하였다.
- 이순신은 순천에서 자신의 꿈을 <난중일기》에 기록하였는데, 아무래도 예지몽을 꾼 듯하다.
[5월 6일 맑다. 꿈에 돌아가신 두 분 형님을 만나 서로 붙들고 울었다. 형님들이 말씀하시기를 "장사를 지내기도 전에 천리 밖에서 종군하고 있으니, 누가 일을 맡아서 한다는 말인가?" 하셨다. 두 형님의 혼령이 이와 같이 걱정하시니 슬프고 마음이 아프다. 또 남원의 추수 일을 감독하는 데 대해서도 걱정하시는데 그것은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난중일기>]
- 1597년 5월의 일기에 이순신은 왜 뜬금없이 남원의 추수 일을 걱정했을까? 훗날 정유재란의 최대 격전지이자, 일본군이 살육을 자행하고 조선 백성들의 귀와 코를 베어갔던 남원성전투(1597.8), 이순신은 이를 석 달 전 미리 꿈으로 보았던 것일까.
- 이순신은 순천을 떠나 구례로 이동하였다. 이순신은 손인필의 집에 머물면서 영의정이자 도체찰사였던 이원익을 다시 만났다. 1595년 한산도를 찾아와 잔치를 베풀며 수군을 위로해 주었고, 이순신이 옥에 갇혔을 때 구제하기 위해 노력했던 이원익은, 직접 구례까지 백의종군 중이던 이순신을 찾아와 준 것이다. 이원익은 이순신의 어머니가 돌아가셨음을 알고 소복을 입고 이순신을 문상했고, 밤이 깊도록 이야기를 나누었다.
- 이원익은 백의종군 중이던 이순신에게 이렇게 말했다.
"음흉한 사람 원균은 무고하는 짓이 매우 많지만 하늘이 살피지 못하니 나랏일을 어찌하겠습니까?"
이순신은 다시 구례를 떠나 경상도 하동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며칠 후 백의종군의 종착역인 초계의 권율 진영에 도착하였다.
- 1598년 6월 8일 이순신은 도원수 권율을 만나도착신고를 했다. 이순신이 백의종군 중이라 직책이 없었지만 권율은 이순신을 극진히 마중했다.
이후 이순신은 초계 이어해의 집에서 42일간을 머무르며 권율에게 군사일을 자문해 주었다. 권율 또한 원균에게 분노하고 있었다.
"원균의 일은 도저히 말로 할 수 없소. 육군이 먼저 공격해야 수군이 공격할 수 있다고 하니, 이건 적과 싸우지 않겠다는 뜻 아니오."
- 선조는 전쟁 초기 한양을 버리고 몽진을 가면서 광해군을 세자로 임명하고 조정을 둘로 나누는 분조를 결정하였다. 이후 광해군은 최전선에서 전쟁을 수행하는 반면 선조는 평양과 의주로 도망치기에 바빴다. 다른 왕자들인 임해군은 함경도로 보냈고, 순화군은 강원도로 파견하여 의병 모집과 민심 안정의 책임을 맡겼다. 그러나 강원도가 일본의 시마즈에게 점령당하자 순화군은 임해군이 있는 함경도로 향했고, 이들은 민심을 다독거리기는커녕 백성을 착취하고 주색잡기에 빠졌다. 참다못한 함경도의 백성들이 조선의 왕자 임해군과 순화군을 잡아서 가토 기요마사에게 넘겼고, 두 왕자는 일본군의 포로가 되었던 것이다.
- 일본군은 한양을 포기하고 후퇴하면서 임해군과 순화군 두 왕자를 풀어주었으니, 이제는 그 대가로 다른 왕자를 보내 항복의 예를 취할 것을 요구하고 있었다. 조선 입장에서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왕자를 보내 항복의 예를 취하라니, 그럴 수 없소."
그러자 일본이 한발 양보했다.
"그렇다면 조선 조정을 대표할 만한 정승이나 판서 중 한 명을 일본에 보내시오."
그러나 조선은 단호했다.
"먼저 남해안의 일본군을 철수시키고 쌓아놓은 왜성을 허무시오."
- 결국 조선과 일본의 휴전 논의는 아무 소득도 얻지 못한 채 중단되었고, 감정이 상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다시 조선을 침략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더욱 악랄해져 있었다.
- 하루 만에 한산도에서 부산 앞 절영도까지 도착한 조선 수군의 시야에 일본의 첩보선 몇 척이 보였다. 실은 일본군의 교란 작전이었다. 그러나 전공에 눈이 먼 원균은 전 함대를 휘몰아쳐 이 배들을 뒤쫓았다. 이때 마침 대마도에서 건너오는 일본의 보급선으로 보이는 수송선단 몇 척도 포착되었다. 원균은 부대를 쪼개 그 보급선까지 쫓으라는 명령을 했다.
- 그러나 우리 격군들은 이미 어깨의 근육이 파열되었을 정도로 지쳐 있었다. 게다가 그날 부산 앞바다의 파도는 너무 거셌다. 과거 이순신이 부산포해전에서 승전했을 때는 파도가 가장 잔잔한 날을 골라 공격을 시도했지만, 원균은 날씨와 파도에 대한 계산도 없이 공격을 밀어붙이고 있었다. 지친 격군들이 부산 앞바다의 거센 파도를 이겨내지 못했고 끝내 10척의 판옥선이 표류되었다. 10척의 판옥선은 하필 일본군의 본영이라 할 수 있는 부산 근처인 서생포와 두모포로 떠내려갔다. 이 판옥선들은 수십 척의 세키부네에 포위되었고 결국 판옥선에 탑승해 있던 1,500여 명의 조선 수군은 전멸을 면치 못했다. 구축함이 컨테이너선 쫓다가 표류하고 전멸을 당한 셈이었다.
- 일본의 첩보선과 보급선을 쫓다 실패한 조선군은 간신히 배를 돌려 가덕도에 함대를 정박시켰다. 갈증에 지친 400여 명의 조선군들이 대오를 지키지 않고 물을 찾아 가덕도에 급히 내렸다. 그러나 가덕도에는 벌써 일본군이 매복 중이었다. 놀란 원균은 가덕도에 내린 400여 명의 조선군을 버리고 도망쳤다.
- 이순신과 모든 게 비교되는 원균이었다. 과거 이순신도 항해 중 가덕도에 물을 뜨기 위해 5명의 수군을 내려 보냈고 그곳에 매복 중이던 일본군에게 한 명이 죽고 4명이 포로로 잡혔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순신은 이 4명의 포로를 구출하기 위해 함대로 가덕도를 포위하여 일본군을 압박하였고, 일본은 4명의 조선 수군을 이순신에게 돌려보낼 수밖에 없었다. 4명의 아군을 살리겠다고 전군을 동원하여 섬을 포위하고 무력시위를 했던 이순신과 달리 먼저 살겠다고 400여 명의 전우를 버린 채 도망가는 원균. 이런 차이가 전투를 함께 수행하던 휘하 장수들과 군사들의 사기에 미치는 영향력은 지대했다. 이 같은 상황을 예상했다는 듯 전라우수사 이억기가 백의종군 중이던 이순신에게 쓴 편지가 의미심장하다.
'수군은 오래지 않아 패할 것입니다. 우리들은 어디서 죽을지 모르겠습니다.'
- 가덕도를 도망치듯 빠져나온 조선 수군은 그날 밤을 거제도 영등포에서 머물렀다. 말도 안 되게 우스꽝스러웠던 7월 14일이 저물고 다음날인 15일이 밝았다. 병사들은 체력적으로 지쳤고, 물과 식량도 부족하여 보급이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게다가 연이은 패배로 군의 사기도 땅에 떨어졌다. 당연히 조선 수군은 한산도로 회군을 했어야 했다. 그러나 패전과 무능의 책임을 져야 할 처지에 놓인 원균은 한산도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원균은 거제도와 칠천도 사이의 칠천량 해협에서 하룻밤을 더 보내기로 결정했다.
- 수군통제사직을 하루 더 연명하고 싶었던 것일까? 원균의 결정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결정이었다. 폭풍우 때문에 칠천량에서 하루 더 머물렀다는 것도 변명이 안 된다. 그렇다면 그 폭풍우 속에 일본군은 칠천량 해협에서 조선 수군을 어떻게 포위하고 있었단 말인가. 일본군이 보기에도 이순신이 없는 조선 수군은 나사가 빠진 듯한 모습이었고 분명히 허우적대고 있었다.
- 결과적으로 원균의 우유부단함과 패전에 대한 책임 회피가 조선 수군을 최악의 상황으로 몰고 간 셈이었다.
만약 한산도로 회군했더라면 견내량을 틀어막아 일본군의 파상 공세를 막아내었을 것이다. 과거 한산도에서 큰 패전을 경험한 바 있는 일본군으로서도 견내량을 쉽게 뚫고 내려오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칠천량에서 하룻밤을 더 머무르는 탓에 칠천량 해협 양쪽에서 일본군에게 포위되어 버린 것이었다. 그 많은 전투에서 단 한 번도 일본군에게 포위된 적이 없었던 이순신의 작전들을 감안해 보면 너무 답답한 상황이었다.
- 다른 지휘관들 역시 칠천량에서 머무르는 상황이 위험하다는 것을 알고 원균에게 면담을 청했으나 원균은 분노의 술만 들이킬 뿐 소통을 거부했다. 이 상황에 대해 원균에게 항명을 했던 이가 경상우수사 배설이었다. 배설은 칠천량에 진을 치는 상황이 위험하다고 판단했고 한산도로의 회군을 주장했다. 그러나 통제사 원균이 자신의 의견을 들어주지 않자 12척의 판옥선과 함께 칠천량의 조선군 진영을 이탈했다. 배설의 행동은 분명한 항명이었고, 칠천량에 남은 조선 수군의 사기는 바닥을 쳤다.
- 7월 15일 밤. 원균은 칠천량 해협 양쪽에 척후선을 세웠다. 그러나 척후선의 병사들이 너무 피로에 지친 나머지 모두 잠에 곯아떨어져 버렸다. 적진 한복판 전장에서 가장 중요한 군율인 경계 태세조차 지켜지지 않고 있었다. 일본군의 소형 전투선들이 칠천량의 조선군을 정탐했지만 조선수군은 이를 눈치채지 못했다. 칠천량의 조선군은 소리 없이 일본의 대규모 함대에 의해 양쪽에서 포위되고 있었다.
- 7월 16일 새벽. 포위망을 갖춘 일본군의 기습이 시작되었다. 조선의 척후선을 쉽게 제압하고 한 치 앞을 보기 힘든 어둠을 이용하여 일본군은 입에 칼을 문 채 조용히 노를 저었다. 갑자기 사방에서 달려드는 일본군의 기습을 받은 조선군은 당황했고, 소리 없이 갑판 위로 뛰어올라 오는 일본군들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 압도적인 격차를 보이며 일본 수군을 거의 갖고 노는 수준의 승리를 했었다. 그런 최강 조선 수군의 전 병력이 멍청한 지휘관 한 명 때문에 어이없이 괴멸되다시피 한 전투가 칠천량해전이었던 것이다. 판옥선만 무려 122척이 소실되었고 1만여 명의 경험 많은 조선 수군들이 죽거나 행방불명되었다. 사령관 중에 경상우수사 배설만이 살았고, 삼도수군통제사 원균과 전라우수사 이억기, 충청 수사 최호가 전사한 전투였다.
- 이순신은 칠천량해전의 패전 소식을 듣고 터져 나오는 울음을 참지 못하고 흐느껴 울었다. 자신을 믿지 못해 파직시키고 고초를 주었던 임금, 자신을 시기하여 음해하고 자신의 직을 가로챈 경쟁자, 그 둘이 대패를 당한 모습을 보고 한편으로는 고소해할 수도 있었을 텐데, 이순신은 울음부터 나왔다. 자신이 몇 년에 걸쳐 만들어냈던 조선의 무적함대가 사라졌다. 모든 전투장비가 없어졌고, 철통 방비를 자랑했던 한산도의 군비가 무용지물이 되었다. 수년간 훈련시키고 함께 승리하며 전투 경험을 갖춘 정예병 수천 명이 칠천량 바다에서 억울하게 수장되었다. 어떻게 울지 않을 수 있겠는가.
- 놀라 찾아온 도원수 권율에게 이순신은 이렇게 말했다.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 되겠습니다."
이순신은 직접 몸을 일으켜 남해 바다 쪽 전장을 향해 움직였다. 임진년부터 자신과 동거동락을 했던 장수들의 생사 여부를 먼저 확인해야 했다. 병사들의 생사 여부도 확인하고 싶었다. 이순신이 직접 전투 현장에 가야만 패잔병들이라도 모을 수 있었다.
- 노랑에서 살아남은 거제 현령 안위와 영등포 만호 조계종을 만났다. 이들은 이순신을 보자마자 대성통곡을 하였다. 그들에게 칠천량 패전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와중에도 이순신을 찾아온 군사와 백성들이 울부짖었다. 이순신은 피난민 행렬을 만나면 말에서 내려 그들을 위로하며 손을 잡아주었다.
이순신을 만난 우후 이의득이 패전 상황을 보고했다.
"원균은 뭍으로 달아나고 장수들도 그를 따라 뭍으로 달아나 이 지경이 되었습니다."
모두 분노하며 말했다.
"원균의 살점이라도 뜯어먹고 싶습니다."
- 칠천량에서 도망하여 살아난 경상우수사 배설과도 만났다. 이순신은 배설에게 물었다.
"12척의 판옥선은 어디에 숨겨두었소."
경상우수사 배설이 답했다.
"내가 왜 판옥선의 향방을 당신에게 말해야 하오?"
- 이순신은 진주에 머물던 중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제수되었다.
- 임금은 이와 같이 이르노라.
[생각하건대 그대의 명성은 일찍이 수사로 임명되던 그날부터 드러났고 그대의 공로와 업적은 임진년의 큰 승첩이 있은 후부터 크게 떨쳐 변방의 군사들은 마음속으로 그대를 만리장성처럼 든든하게 믿어왔었는데, 지난번에 그대의 직책을 교체시키고 그대로 하여금 죄를 이고 백의종군하도록 했던 것은 역시 나의 모책이 좋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며, 그 결과 오늘의 이런 패전의 욕됨을 만나게 된 것이니, 더 이상 무슨 말을 하리오! 더 이상 무슨 말을 하리오!
<삼도수군통제사 임명장> 중 일부]
- 삼도수군통제사직을 다시 내릴 것이면 기분 좋게 내릴 것이지, 선조는 임명장에 '더 이상 무슨 말을 하리오!' 하고 이순신에 대한 미안함을 표현한 듯했지만 은근히 이순신의 자존심을 또 건드렸다.
- 이순신은 파직당하기 전에 정2품이었다. 이순신의 벼슬을 가로챈 원균 역시 정2품이었다. 그런데 다시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지만, 이순신의 품계는 정3품이었다. 이는 현재로 치자면 4성 장군으로 대장인 해군참모총장을 직위해제했다가, 다시 해군참모총장으로 임명하면서 3성 장군인 중장으로 임명한 것과 같았다. 이렇게 되면 삼도수군통제사가 다른 수사들과 품계가 같아지는 것이었다. 오죽하면 조선 임금 선조의 이러한 조치에 명나라 장수들조차 비아냥거렸을까.
- 그럼에도 이순신은 아무런 불만을 표하지 않고 삼도수군통제사직을 제수받았다. 이순신은 왜 통제사직을 순순히 받아들였을까? 자신을 죄인으로 만들고 죽음직전까지 몰고 갔던 왕에 대한 분노와 원망은 없었을까?
- 조선 수군은 칠천량의 패전으로 완전히 궤멸되었고, 자신과 손발을 맞추었던 장수와 군사들은 거의 죽었다. 전함과 주요 무기들 역시 전무했다. 더군다나 적의 수군은 훨씬 강해져 있었고 사기도 하늘을 찔렀다. 삼도수군통제사직은 허울뿐인 자리였다. 이순신은 왜 죽으러 들어가는 그 자리를 두말없이 받아들였을까?
- 충忠이었다. 국가에 대한 충이고 백성에 대한 충이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순신의 충은 더 이상 임금을 향하고 있지는 않았다.
- 실제로 이순신은 삼도수군통제사직을 다시 임명받은 후 정유재란이 전개되는 동안 임금 선조를 향한 망궐례(지방관이 궁궐을 향해 행하는 의례)를 올리지 않았다. 지방관이면 당연히 보여야 할 충성의 의무를 이순신은 행하지 않았다. 이것은 분명한 일종의 항명이었다. 이순신은 무슨 생각으로 망궐례를 올리지 않았을까? 임금에 대한 미움의 마음이 있었을까? 아니면 어차피 자신은 이 전쟁에 목숨을 걸었고, 승리와 죽음을 바꾸고자 하는 마음으로 싸우기에, 전쟁 이후에 자신의 거처에 대한 계산 따위는 필요 없었던 것일까? 도대체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어 하고자 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 진주에서 삼도수군통제사로 제수된 바로 다음날 이순신은 조선 수군을 재건하기 위한 길을 나섰다. 이순신의 옆에는 송대립, 유황, 윤선각 등 군관 9명과 병졸 6명이 전부였다. 수군 재건을 위해 이순신은 전라도로 향했다. 이순신은 민첩하게 움직여야 했다. 흩어진 패잔병들을 다시 불러 모아야 했고, 새로운 병사를 선발해야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군량미를 확보해야 했다. 또한 경상우수사 배설이 숨겨놓았던 12척의 판옥선을 찾아야 했다. 이순신 일행은 진주에서 하동으로 갔다가 구례로 들어섰다.
- 이순신은 구례 현감 이원춘을 만나 밤새 회의를 하였다. 다음날 이순신은 구례에서 조선 수군 출정식을 가졌다. 이원춘은 이순신의 합류 제의에 자신은 남원을 지키러 가겠다고 정중히 거절했고 훗날 남원성에서 싸우다 전사하였다.
- 나중에 알려진 사실이지만, 이순신 일행보다 하루 늦게 5만 6천여 명의 고니시 병력이 구례까지 진격해 왔다. 일본군도 하룻길 앞서 이순신이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몰랐고, 이순신도 일본군이 바로 뒤에 따라온다는 것을 까맣게 모르는 상황이었다. 천만다행이었다.
- 구례를 떠나 곡성으로 가는 길에 많은 피난민들을 만났다. 피난민들은 이순신을 볼 때마다 길에 엎드려 대성통곡을 했다. 이순신 일행도 함께 울었다. 곡성에서는 칠천량해전에서 죽은 줄로만 알았던 거북선의 돌격대장 이기남을 다시 만났다. 그러나 곡성에서도 군량미를 확보하기는 쉽지 않았다.
- 이순신은 곡성에서 남쪽으로 방향을 틀어 순천으로 향했다. 당시 순천은 큰 도시였지만 이순신은 여기서도 낭패감을 맛보았다. 칠천량해전 이후 일본군의 침략 방향이 호남으로 결정되자 이 지역에서는 청야 작전(방어 측의 초토화 전술)이 행해진 나머지, 주변에서 곡식 한 바가지도 건지기 어려웠다. 이순신 입장에서 군량을 확보하지 못하면 군대 재건은 물 건너가는 상황이었다. 중앙정부가 해야 할 역할을 전장의 사령관이 스스로 해내고 있었지만, 이순신은 이러한 말도 안 되는 상황을 담담히 받아들이며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 이순신은 정철총통을 만들었던 정준을 순천에서 재회했다. 이순신은 화포 제작에 관한 일을 정사준과 정사립 형제에게 맡겼다. 또한 순천에서는 승병장 혜희를 비롯한 승병들이 이순신에게 합류했다. 승병들의 합류는 이순신에게 큰 힘이 되었다.
- 순천을 떠나 보성으로 들어섰다. 보성 조양에서 이순신은 상당량의 군량미를 확보했다. 이순신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또 칠천량에서 죽은 줄만 알았던 송희립을 다시 만났다. '좌정운 우희립'이란 말이 있듯이 송희립은 항상 이순신의 옆에서 이순신의 수족 역할을 하였던 군관이었다.
- 그리고 칠천량해전 이후 이순신을 만나 패전의 경위를 설명했던 거제현령 안위가 보성으로 찾아와 합류하였다. 전라좌수영부터 이순신과 함께 근무했던 이몽구도 이순신을 찾아왔지만 이순신은 이몽구에게 곤장을 쳤다. 이몽구가 전라좌수영 소유였던 군량미를 불태우지도, 그렇다고 챙겨 오지도 못한 범실을 그냥 넘길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재회의 반가움 속에도 군령에 지엄했던 이순신이었다.
- 이순신이 보성에서 여러 장수들과 재회의 기쁨을 나누고 있을 때 선조의 교지가 내려왔다. 이순신은 보성의 열선루에서 선조의 교지를 들고 온 선전관을 맞이하였다. 교지의 내용은 이러했다.
'수군의 전력이 약하니 권율의 육군과 합류해 전쟁에 임하라.'
이순신은 억장이 무너졌다. 수군이 육군에 합류하여 무슨 도움을 줄 수 있단 말인가. 왜군이 서해 바다를 돌아 한강을 통해 한양으로 들어간다면 그때는 어쩔 것인가.
최악의 상황을 막아내고자 어떻게든 조선 수군을 재건하려 몸부림치고 있건만, 왕은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이토록 맥 빠지는 교지를 내려 보낸 것이다.
- 이순신은 교지를 받은 다음날 선조에게 장계를 올렸다.
"지금 신에게 아직 12척의 전선이 있습니다 今臣戰船 尙有十二."
"전선의 수는 비록 적으나 미천한 신이 죽지 않았으므로 적들이 감히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 戰船雖寡 微臣不死則不敢侮我矣."
- 임금의 교지를 받은 후 항명에 가까운 장계를 써 올려 보내야 했던 이순신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장계를 올려 보낸 직후 이순신은 식음을 전폐하고 몸져누웠다. 반면 이와 같은 이순신의 장계를 받아본 선조도 기막혀했다.
"이순신 이 자가 또 왕명을 거역하는구나."
- 이순신이 다시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자 경상우수사 배설은 그제서야 이순신에게 숨겨둔 판옥선 12척의 위치를 고했다. 이순신은 배설에게 명령했다.
"장흥군영 구미 쪽으로 판옥선과 함께 오시오."
배설이 답했다.
"제가 뱃멀미 탓에 몸이 힘듭니다."
수군 제독이 뱃멀미 핑계를 대었다.
- 몸져누워 있던 이순신은 판옥선을 회수하기 위해 몸을 일으켰고 장흥의 군영구미에서 나룻배를 타고 직접 회령까지 갔다. 그리고 장흥 회령포에 정박해 있는 12척의 판옥선을 만났다. 기적과도 같은 조선 수군 재건이었다. 이순신은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된 후 보름 동안 전라도 해안 일대를 수백 km 돌았다. 많은 장정들이 의병으로 찾아왔고 패잔병들도 수습되었다. 마하수라는 인물은 4명의 아들을 데리고 합류하였다. 수천의 병사가 모였고 군량미가 확보되었다. 비록 12척이지만 판옥선도 수습되었으니, 이제 수군이라 불릴 만했다.
- 이순신은 회령포에서 여러 장수와 병졸들을 한자리에 모아놓고 임금의 교서를 보이며 삼도수군통제사 취임식을 가졌다.
[우리들은 지금 임금의 명령을 다 같이 받들었으니 의리상 같이 죽는 것이 마땅하다. 그렇지만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한 번 죽음으로 나라에 보답하는 것이 무엇이 그리 아깝겠는가. 오직 우리에게는 죽음만이 있을 뿐이다.
<이충무공행록>]
- 칠천량에서 이겼지만 어디선가 매복하고 있을 판옥선과 조선의 함포가 여전히 두려웠기에 일본 함대의 서진 속도가 더뎠다. 이는 이순신에게 천운이었다. 덕분에 이순신은 조선 수군을 재건해 낼 수 있는 시간을 벌었던 것이다.
- 칠천량에서 패전한 후 조선의 남해 바다는 차차 일본군의 놀이터가 되어가고 있었다. 고흥반도를 지난 일본의 전함들이 해남의 어란진까지 얼쩡거렸다. 칠천량해전에서 승리한 자신감에 취한 일본군 함대 8척은 오랜만에 만난 조선의 판옥선 12척을 쫓아왔다. 반면에 그 많은 승리의 기억을 잊어버렸는지 칠천량의 패배감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조선 수군들의 낯빛이 창백해져 있었다.
- 그러나 적선을 바라본 이순신의 표정은 임진년에 처음으로 해전을 지휘하던 그 모습 그대로였다. 조선의 수군이 패한 것이지, 아직 이순신은 패한 적이 없다. 사령관의 심리 상태가 부하들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 이순신은 오히려 선제공격을 명령했다. 조선 수군이 구호에 맞추어 함포사격을 개시하자 일본의 함선 8척은 등을 보이며 도망하였다. 어란진 해전은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로 복귀한 후 해낸 첫 승리였다.
- 이순신은 적의 대규모 공격을 방어하기에는 불리한 해남 어란진을 떠나진도 벽파진에 진을 쳤다. 칠천량에서 죽은 이억기를 대신하여 새롭게 임명된 전라우수사 김억추가 판옥선 1척을 이끌고 합류하였다. 조선 수군의 판옥선은 모두 13척이 되었다.
- 이순신은 어란진해전과 벽파진해전에 대한 장계를 선조에게 올리지 않았다. <난중일기>에만 그 기록이 전해진다.
- 벽파진에서 일본군의 기습에 잘 대비했던 이순신의 함대는 울돌목을 넘어서 해남에 있는 전라우수영 본영에 도착하였다. 오랜 기간 전라우수사로 있었던 이억기에 대한 그리움이 밀려왔을 것이다. 이순신은 울돌목을 지나며 마음의 결정을 내렸다.
'바로 이곳이다.'
- '내가 여기 있으니 잡을 테면 잡아보거라.'
이순신은 자신을 노출하면서 울돌목을 숨기고자 하였다.
- 울돌목은 서해 바다와 남해 바다가 만나는 곳이다. 물살이 너무 세서 '울면서 돌아가는 길목'이라는 의미의 울돌목이다. 한자어로 울 명 鳴자를 써서 '명량'이다. 울돌목은 우리나라 삼면 바다의 해협 중 물살이 가장 센 곳이다. 두 번째로 물살이 센 곳이 강화해협이다. 몽골이 침략하자 무신집권자 최우가 고려의 임금 고종과 개경의 백성을 이끌고 강화도로 피난 갔을 때, 몽골군이 무려 38년 동안 강화 해협을 못 넘어온 것은 '염하라고도 불리는 강화 해협의 거친 물살 때문이었다. 세 번째로 물살이 센 곳이 진도를 끼고 바깥으로 돌아가는 맹골수도다. 그곳에서 세월호가 가라앉았다.
- 이순신에게 최악의 경우는 일본군이 자신이 막아서고 있는 울돌목이 아닌, 진도를 돌아 맹골수도를 타고 서해 바다로 올라가는 것이었다. 그럴 경우 판옥선보다 빠른 일본의 함선들을 추격하며 싸워야 했다. 그래서 이순신은 울돌목 앞 벽파진에 진을 치면서 일본군이 자신을 향해 오기를 기도 했다. 이순신은 자신을 미끼로 내던진 것이었다. 이순신에게 패배의 오명이나 죽음에 대한 공포감 따위는 전혀 없었다. 이순신은 오로지 적의 수군이 서해 바다를 돌아 여러 강을 타고 내륙으로 보급을 할 수 없도록 신명을 다할 뿐이었다.
- 칠천량해전 직후 조선에는 전라좌수사 겸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과 경상우수사 배설, 그리고 전라우수사 김억추까지 총 3명의 수군 사령관이 있었다. 새로이 전라우수사가 된 김억추는 수군 제독 경험이 전무했다. 그를 전라우수사로 앉힌 자가 당시 좌의정이던 김응남이었다. 김응남은 이순신을 미워하며 계속해서 원균을 편들었던 인물이다. 김억추를 전라우수사로 앉혀서 이순신을 견제하려는 것이 김응남의 의도였다.
- 이순신은 김억추를 이렇게 평했다.
'김억추는 딱 만호까지만 승진했어야 될 인물이지 절대로 전라우수사감이 아니다.'
- 경상우수사 배설은 칠천량에서 원균에게 항명을 하며 12척의 판옥선과 함께 칠천량을 빠져나와 살아난 인물이다. 물론 배설 덕분에 12척의 판옥선이 무사할 수 있었다. 그런 경상우수사 배설은 국운을 건 전투를 앞두고 또다시 탈영을 했다.
- 영화 <명량>을 보면 배설이 배를 타고 달아날 때 거제 현령 안위가 활을 쏘아 죽이는 장면이 나온다. 그러나 실제로 배설은 탈영에 성공했고 왜란이 끝난 뒤 자신의 고향에서 붙잡혀 처형당했다. 경상우수사가 전투를 앞두고 탈영할 정도니, 당시 조선 수군들의 사기가 얼마나 저하되어 있었는지 알 수 있다.
- 이순신조차도 전투를 앞두고 심란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이순신은 명량해전 전날 중압감으로 여러 징후가 보이는 꿈에 시달렸다.
- 일본의 전투선들이 해남의 어란진에 모여들었다. 임진년의 부산포처럼 해남의 어란진이 새로이 일본 수군의 전진 기지가 되었다. 어란진의 일본군 함선의 숫자는 수백 척이 넘었다. 일본군들 입장에서는 자신들의 육군이 벌써 천안 근처까지 진출해 명나라와 직산에서 전투를 치르고 대치를 하고 있는 입장이었기에, 이번만큼은 수군이 제때에 발맞추어 육군을 지원해주어야 했다.
- 이순신은 13척의 판옥선과 함께 울돌목이 끝나는 지점에 일자진을 쳤다. 육지인 해남과 섬인 진도 사이의 울돌목은 300m 남짓에 불과한 해협이었다. 울돌목은 좁았으니 13척의 판옥선이 일자진을 형성할 수 없었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일자진은 울돌목이 끝나는 지점에 펼쳐졌을 가능성이 크다.
- 구루시마의 함대가 명량의 거친 물살을 뚫고 이순신의 함대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순신의 함대도 울돌목을 향해 나아갔다. 그러나 전라우수사 김억추의 판옥선은 오히려 뒤로 물러서고 있었다. 겁을 먹은 김억추가 격군들의 노질을 중단시킨 것이었다. 김억추의 판옥선은 조선 12척 함대의 일자진으로부터 700m 뒤처졌다.
- 이순신은 동요하지 않고 전군에 명령을 내렸다.
"일자진을 유지한 채 진격하라!"
대장선인 기함에 진격의 깃발이 올랐다. 이순신의 기함은 전속력으로 명량을 향해 나아갔다.
- 그러나 대장선을 제외한 나머지 11척의 판옥선은 더 이상 앞으로 움직이지 못했다. 명량의 거센 물살도 무섭지만 그 물살을 헤치고 다가오는 일본의 대규모 함대에 공포감을 느낀 것이다. 12척 판옥선의 함장들은 서로 간에 공포감만을 확인할 뿐 대장선의 진격 신호를 외면하고 있었다. 이순신은 휘하 제장들의 불복종에 분노했다. 당장 대장선을 뒤로 돌려 함장들의 목을 쳐서 군율의 지엄함을 보이고 싶었다. 하지만 이순신의 대장선이 등을 보이면 적선들은 더욱 맹렬히 추격해 올 것이고, 후방에 있는 12척의 판옥선들은 일본의 함선보다 이순신의 대장선을 피해 더욱 뒤로 도망갈 게 뻔했다. 그렇게 되면 일본의 선발대 133척이 모두 울돌목을 넘어서게 된다.
- 이순신의 기함에서는 부관을 비롯한 모든 장병들이 겁에 질린 채 이순신의 얼굴만 쳐다보고 있었다. 그들의 눈빛은 후퇴를 갈망하고 있었다. 일단 살아서 훗날을 도모하자는 애원의 눈빛이었다. 그러나 이순신은 차가웠고 단호하게 그들의 눈빛을 외면했다. 이순신은 거센 물살의 명량을 향해 돌격 명령을 내렸다. 이순신의 명령에 갑판의 모든 장병들은 어안이 벙벙했다.
대장선만으로 100척이 넘는 적선과 싸우자는 것인가?
모두들 창백한 얼굴로 입술만을 앙다물 뿐이었다. 군기를 흐트러뜨리는 행동을 이순신이 용서할 리 없기 때문이었다.
- 그러나 갑판 아래의 상황은 달랐다. 명령이 하달되자 격군들은 울부짖었다.
"다들 도망간 마당에 우리만 싸우자는 것인가?"
"인제 죽는 일만 남았네, 혼자 남으신 우리 엄니 어찌할까?"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한 세상인디, 장군께서 가자 하면 가야제."
"아들아. 아버지 제사는 울돌목에서 지내거라."
명령은 이순신이 내렸지만, 대장선이 울돌목으로 홀로 나아가려면 격군들의 노질이 있어야만 했다. 그 울돌목은 조선에서 가장 물살이 빠른 해협이기도 했지만, 무려 133척의 적선이 공격해 오고 있는 해협이었다. 그럼에도 대장선의 격군들은 이순신이 내린 명령을 수행했다.
1597년 9월 16일 그 새벽, 밀려드는 공포감을 분연히 떨쳐내고 울돌목을 향해 노를 저어 앞으로 나아갔던 이순신 대장선의 모든 격군들에게 경의를 표하는 바이다.
- 이순신은 달려드는 적의 선두 함선을 향해 함포 발사를 명령했다. 왜선 몇 척이 우리 함포에 맞았다. 부서져 가라앉는 세키부네 뒤로 새로운 세키부네들이 몰려들었다. 이순신 기함의 함포 사격을 뚫고 구루시마의 세키부네들이 이순신의 판옥선을 향해 돌진해 왔다. 세키부네들이 어느새 이순신의 기함에 배를 갖다 대었다. 수척의 세키부네가 단 1척의 판옥선에 등선하기 위해 갈고리를 던지고 사다리를 올려 걸었다. 돛의 기둥까지 판옥선의 갑판을 향해 넘어뜨렸다. 일본군들은 대장선의 갑판을 점령하기 위해 기어오르기 시작하였다.
병사들이 당황하는 모습을 보고 이순신은 소리쳤다.
"동요하지 말라! 적선이 아무리 많더라도 우리 배에 올라타지 못한다. 내 명령에 따라서 움직이되 절대 동요치 말라!"
- 이순신은 정확히 알고 있었다. 판옥선은 세키부네보다 몸체가 큰 데다 그만큼 높이가 있기에, 일본 수군 입장에서는 판옥선에 기어오르기 쉽지 않았다. 명량의 거센 물살도 한몫했다. 물살이 강하다 보니 가까이 붙은 양국의 전함이 심하게 흔들렸고, 판옥선에 내던진 돛 기둥과 사다리와 갈고리 모두 심하게 흔들렸다. 그로 인해 이순신의 판옥선으로 기어 올라가려던 일본군들은 중심을 잃으며 바다에 빠졌고 명량의 강한 물살에 쏠려내려 갔다.
- 이순신은 대장선에 가까이 달라붙은 세키부네를 떼어내기 위해 함포의 포신을 아래로 내리고 조준사격을 명령했다. 세키부네에 포탄이 작렬하고, 그 진동이 이순신의 판옥선에도 전달될 정도였다. 갑판 위의 장병들과 갑판 아래의 격군들이 모두 이리저리 날아가 부딪힐 정도로 큰 충격이었다. 조준 사격을 당해서 구멍이 난 세키부네들은 1척씩 바다에 빠지고 있었다. 다시 정신을 차린 조선의 사수들은 활을 쏘았고, 판옥선을 기어 올라오는 적들을 긴 낫으로 내려찍었다. 또 가까이 붙은 세키부네에 비격진천뢰를 던지고 불화살을 날려 적선들을 불태웠다. 격군들도 각자의 무기를 들고 갑판 위로 뛰어올라 등선을 하려는 일본군을 막아내었다.
지금껏 이순신의 해전사 중 가장 치열하고 난잡한 전투가 이순신의 대장선에서 행해지고 있었다.
- 이순신의 대장선이 홀로 왜선들을 상대로 고군분투를 이어가고 있음에도 후방에 뒤처진 11척의 판옥선들은 아직도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병사들 역시 죽을 듯 싸우면서도 지켜만 보고 있는 조선의 판옥선들을 애타는 눈길로 한 번씩 쳐다보았다.
"썩을 놈들, 기어오르는 왜놈들보다 저놈들이 더 야속하구만."
"장군님이랑 우리가 죽는 꼴을 그냥 지켜보겠다는 것인디. 저것들이 사람이당가."
대장선의 모든 이들이 아군의 도움을 포기할 즈음 조선의 판옥선 1척이 빠른 속도로 홀로 싸우는 대장선을 향해 다가왔다. 거제 현령 안위의 판옥선이었다.
- 이순신은 안위에게 호통을 쳤다.
"안위야, 도망간다고 한들 갈 곳이 있겠느냐! 정령 군법에 따라 죽기 싫거든 어서 싸우거라!"
곧이어 또 다른 1척의 판옥선이 이순신의 대장선을 돕기 위해 가까이 다가왔다. 중군장 김응함의 배였다.
"김응함아, 너는 중장으로서 대장선을 보호해야 할 역할을 저버렸다! 당장 너의 목을 칼로 내려치고 싶으나 지금 전투가 급하니 공을 세울 기회를 주겠다. 싸워라!"
안위와 김응함의 판옥선까지 이제는 3척의 판옥선이 명량을 막아서고 있었다. 이제 3대 133의 대결이 되었다.
- 안위의 판옥선이 왜선들에게 에워싸이고 말았다. 이번에는 일본군들이 안위의 판옥선 위로 기어오르는 데 성공했다. 안위의 판옥선에서 육박전이 벌어졌다. 백병전에 밀린 조선의 수군들이 살기 위해 바다로 뛰어내렸다. 이순신과 김응함의 판옥선이 안위의 판옥선 쪽으로 이동하였고 안위의 판옥선 주변에 달라붙은 세키부네들에게 근접하여 함포 사격을 퍼부었다. 안위의 판옥선이 가까스로 위기에서 벗어났다.
- 정오가 되자 물살이 바뀌었다. 지금까지는 일본군이 순류를 타고 공격을 했고, 조선 수군은 역류에서 맞서며 몇 시간 동안 버티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명량의 물살도 이순신의 편이 되었다.
- 물살이 바뀌면서 난파된 세키부네의 잔해들이 거친 물살을 타고 일본군 진영으로 쏟아져 내려오기 시작했다. 뒤편에서 대기 중이던 일본의 100여 척의 함선들은 떠내려오는 자기 편의 난파선들을 피하기에 급급하였다. 반면 이순신과 안위와 김응함의 판옥선은 순류 물살을 타고 빠르게 전진하면서 함포사격을 전개하였다.
- 3척의 판옥선이 승기를 잡자 후방에서 구경하던 9척의 판옥선들이 용기를 얻어 합류하였다. 이제야 12 대 133의 해볼 만한 전투가 시작되었다.
- 녹도 만호 송여종 등이 지휘하는 9척의 판옥선들이 이순신의 기함을 앞질러 가면서 함포사격을 하였다. 이대로 전투가 끝나게 되면 명령 불복종 죄로 이순신에게 처형당할 위기에 처해 있었던 9척의 판옥선들은 갑자기 용맹한 야수로 변하여 왜선들을 침몰시켜 나갔다. 이때 이순신의 기함에 탔던 항왜 장수준사가 호들갑을 떨며 바다를 가리켰다.
"마다시! 마다시!"
붉은 비단 군복을 입은 왜장이 죽었는지 기절했는지 바닷물 위를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준사가 외친 '마다시'는 바로 일본군 선봉장 구루시마였다.
- 이순신의 명에 구루시마의 시신이 건져졌고 그 목을 잘라 뱃머리 높이 매달았다. 구루시마의 잘려진 목을 본 일본군들은 혼비백산하며 도망치려 할 뿐 더 이상 저항하지 못했다.
- 구루시마의 선발대가 불리한 상황임에도 당시 일본군의 중군장이던 와키자카는 위기에 빠진 구루시마를 돕지 않았다. 와키자카는 한산도에서 이순신에게 패했던 공포감이 다시 밀려왔다. 와키자카는 끝내 중군의 후퇴를 명령하였다.
- 명량에서 살아남아 뒤돌아 나온 구루시마의 함대와 후방의 일본 함대 300여 척이 공포에 질린 채 무질서하게 후퇴를 하였다. 후퇴하면서 난파된 함선이 더 많은 지경이었다. 이 과정에서 총사령관도도 다카토라는 부상을 입었고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파견한 중앙 감찰관 모리 다카마사는 바닷물에 빠져 허우적대다가 익사 직전에 겨우 건져 올려져 목숨만을 구했다. 일본 함대 300여 척의 망신스러운 대패였다.
이순신은 가장 이기기 어려운 전투를 대승으로 마무리 지었다.
- 울돌목의 양측 언덕에서 손에 땀을 쥐며 전투를 바라보고 응원했던 진도와 해남의 백성들은 함께 얼싸안으며 승리의 함성을 외쳤다.
"이겼다. 우리가 이겼다!"
1597년 9월 16일 명량에서는 일본군 전함 31척이 바다에 수장되었다. 1척에 100명만 탑승했다고 계산해도 도합 3,000여 명의 일본군이 바다에 빠진 셈이었다. 판옥선에 기어오르려다 죽거나 조선의 함포 공격과 활에 맞아 죽은 일본군이 1만여 명으로 추정된다. 여기저기 부서지고 훼손되어 당장 전투가 불가능한 함선도 100여 척이 넘었다.
기적과도 같은 엄청난 승리였다.
- 정유재란을 일으켜 남원을 점령하고 전주마저 집어삼켰던 일본군은 천안에서 명나라 육군과 대치하면서 수군이 서해 바다로 돌아오기를 학수고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명량해전에서 대패한 일본군은 끝내 서해 바다로 들어서지 못했다. 결국 보급의 차질을 우려한 일본의 육군까지 후퇴하게 되었다. 단 한 번의 해전으로 전쟁의 양상이 180도 바뀐 것이다.
- 명량해전 이전에도 이순신은 조선의 영웅이었다. 그러나 명량해전 승리 이후 이순신은 성웅이 되었다.
- 이순신은 명량해전이 끝나고 이렇게 말했다.
"명량해전 승리는 실로 천운이었다."
칠천량의 대패를 보고받은 선조는 이렇게 말했었다.
"이 패배는 하늘의 뜻이다."
- 일본군은 명량에서 패배한 복수를 이순신 가족에게 대신했다. 이순신의 본가와 아산 마을 전체가 일본군에 의해 불태워졌다. 그 과정에 이순신의 셋째 아들 이면이 전사하였다.
- 정조 때 남인 출신 정승으로 유명한 채제공이 이렇게 말하였다.
"이순신이 통제사 시절에 그 아들 면이 고향집에 있다가 적의 한 부대를 상대하여 적장 셋을 죽이고 본인 또한 죽으니 당시에 총각이라 참으로 충무의 아들이라 할 것입니다."
- 이순신은 국가를 보호하였건만, 제 가족은 지키지 못하였다. 셋째 아들 이면은 담력이 있고 활을 잘 쏘는 등 무인적 기질이 다분하였다. 이순신으로서는 자신의 뒤를 잇는 무장으로 각별히 기대했던 아들이었다. 이순신은 면의 죽음 소식에 비통함을 일기에 남겼다.
- [저녁에 천안에서 온 어떤 사람이 집에서 보낸 편지를 전하는데, 봉함을 뜯기도 전에 온몸이 먼저 떨리고 정신이 어지러웠다. 거칠게 겉봉을 뜯고 열이 쓴 글씨를 보니 겉면에 '통곡' 두 글자가 쓰여 있었다.
면이 적과 싸우다 죽었음을 알고, 간담이 떨어져 목 놓아 통곡하였다.
하늘이 어찌 이다지도 어질지 못하는가? 간담이 타고 찢어지는 것 같다. 내가 죽고 네가 사는 것이 이치에 마땅한데, 네가 죽고 내가 살았으니 어쩌다 이처럼 이치에 어긋났는가? 천지가 깜깜하고 해조차도 빛이 변했구나.
슬프다. 내 아들아.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갔느냐. 영리하기가 보통을 넘어섰기에 하늘이 이 세상에 머물게 하지 않은 것이냐. 내가 지은 죄 때문에 화가 네 몸에 미친 것이냐.
내 이제 세상에서 누구에게 의지할 것이냐. 너를 따라 죽어서 지하에서 같이 지내고 같이 울고싶지만 네 형 네 누이, 네 어미가 의지할 곳이 없으므로 아직은 참고 목숨을 이을 수밖에 없구나. 마음은 죽고 껍데기만 남은 채 울부짖을 따름이다. 하룻밤 지내기가 한해를 지내는 것 같구나.
<난중일기 1597년 10월 14일>]
- 이순신도 한 가정의 아버지였다. 자식을 잃은 아픔이 하룻밤으로 치유될 리 만무했다. 그러나 전쟁으로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이가 이순신뿐이었으랴. 이순신은 부하들 앞에서 자식을 잃은 아비의 슬픔을 보이지 않으려 애썼다.
- [나는 내일이 막내 아들의 죽음을 들은 지 나흘이 되는 날인데도 마음 놓고 울어보지도 못했다.
<난중일기 1597년 10월 16일>]
- 1597년 9월 명량에서 승리한 후 이순신은 서해를 타고 고군산도까지 올라갔다. 명량에서 승리한 이순신은 왜 적을 피하듯 서해 바다로 올라갔을까?
- 조선 수군은 명량에서 사력을 다했다. 병사들도 지쳤고 화약과 염초도 다시 확보해야 했다. 명량에서 구루시마의 선발대 133척을 격파했지만 아직도 일본군은 수백 척의 함대가 건재하였다. 시간을 벌기 위해 이순신은 서해 바다로 작전상 후퇴를 한 것이었다. 그러나 일본군은 이순신을 쫓아올 엄두를 내지 못했다. 일본 수군에게 있어 명량에서의 패배는 너무 큰 충격으로 남았고, 이들은 이순신이 두려웠다. 일본군은 스스로 수륙병진작전을 포기했다. 그러자 이순신은 다시 영산강 하구 고하도로 남하하였다. 이순신은 고하도에서 108일간 머무르며 판옥선 40여 척을 건조하는 등 군세를 정비하였다. 그 후 전라도 완도의 고금도에 자리를 잡으니 1598년 2월의 일이었다.
- [1598년 2월 17일, 고금도로 진을 옮겼다. 그 섬은 강진에서 남쪽으로 30여 리쯤 되는 곳에 있어서 산이 첩첩이 둘려 지세가 기이하고 또 그 곁에 농장이 있어서 아주 편리하므로 공은 백성들을 모아 농사를 짓게 하고 거기서 군량공급을 받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군대의 위세가 이미 강성해져서 남도 백성들이 공을 의지해 사는 자들이 수만 호에 이르렀고 군대의 장엄함도 한산진보다 10배나 더하였다.
<이충무공행록>]
- 이순신은 고금도에서 피난민들을 받아들였다. 또 해로통행을 발행하고 염전을 운영하며 군량미를 확보하였다. 당시 고금도에 4만여 호가 있었다는 기록을 통해서 한 집에 5인 가족이 살았다 치면 이순신에 의지하여 사는 백성이 20만 명도 넘었다는 계산이 나온다. 아마 섬이었던 고금도에 20만 명이나 거주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근처의 약산도와 신지도, 그리고 해안가의 강진과 해남, 진도까지 이순신의 행정력이 미쳤던 것 같다.
- 고금도에서 조선 수군은 완전히 다시 일어났다. 군세는 한산도 시절을 능가하고도 남았다. 임진왜란 때 한산도가 일본 수군의 서진을 막는 요충지였다면, 정유재란 당시에는 남해 바다의 서쪽 끝인 고금도가 그 역할을 하고 있었다.
- 명나라 수군을 이끌고 진린이 조선에 들어왔다. 임진왜란 이후 명나라 수군이 조선에 들어온 것은 처음이었다.
- 1598년 5월, 한양에 도착한 진린이 선조에게 이렇게 말했다.
"조선의 장수 중에 군율을 어긴 자가 있으면 내 혼쭐을 내겠소이다."
아무리 상국의 장수라지만 일개 장수가 일국의 왕 앞에서 하기에는 꽤나 건방진 소리였다. 그리고 그 소리는 왠지 이순신 들으라고 하는 소리 같았다.
- 진린은 장수로서의 능력은 탁월하되 성질이 고약한 자였다. 명나라에서 여러 전공을 세워 장수로서 지휘 능력은 인정받았지만 탐욕스럽고 포악하여 평이 좋지 못했다. 진린은 군량미 조달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이를 담당하는 조 선 관리의 목에 밧줄을 묶은 채 말을 타고 끌고 다니기도 했다. 보다 못한 영의정 류성룡이 따졌으나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이처럼 포악하기 이를 데 없는 진린에 대해 우려하는 목소리들이 커졌다.
'진린과 이순신이 잘 지낼 수 있을까?'
- 1598년 7월 진린이 고금도에 도착하였다. 이순신은 진린을 정성스럽게 대접했다. 사슴과 멧돼지 고기, 생선과 좋은 술을 내어 5,000여 명의 명나라 수군을 배불리 먹였다. 조선에 와서 제대로 대접을 받기는커녕 군량미 지급조차 되지 않아 화가 머리끝까지 차 있던 진린은 이순신과의 첫 대면부터 이순신에게 호감을 가졌다.
"내가 명나라에 있을 때 장군의 이름을 많이 들었소이다. 환대를 감사히 생각하오."
- 명나라 수군 5,000여 명이 고금도에 합류했다는 소식은 일본군의 귀에 들어갔다. 명량에서 이순신에게 패한 이후 몇 달 가까이 싸울 엄두를 못 내고 있었던 일본군들 입장에서는 고민이 되었다. 조선 수군과 명나라 수군이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지휘 체계는 아직 어수선할 터였다. 남의 나라 전쟁에 투입된 명나라 수군이 어느 정도의 전투력을 가지고 있는지, 싸울 의지가 확실히 있는지도 궁금하였다. 그래서였을까. 명량 이후 도망만 다니던 일본군이 느닷없이 고금도를 기습하였다.
- 옥포와 명량에서 이순신에게 혼쭐 났던 일본 해군의 총사령관인 도도 다카토라와 안골포에서 이순신에게 패했던 가토 요시아키가 무려 100여 척의 함대와 병력 1만 6천여 명을 이끌고 고금도를 향해 오고 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이순신은 진린을 떠보았다.
"제독, 어떻게 하시렵니까. 명군이 출정하겠습니까? 아니면 조선 수군과 함께 출정하여 합을 맞춰보시겠습니까?"
그러고는 진린이 뭐라 대꾸하기도 전에 다시 덧붙였다.
"아니지. 먼 길을 오시느라 아직 여독도 안 풀리셨을 텐데, 이번에는 조선 수군이 단독으로 전투를 수행해도 괜찮겠습니까?"
- 진린 입장에선 이순신이 제안한 조선 수군의 단독 출정은 정말 고마운 소리였다. 제아무리 용장이래도 다른 나라에 파병되자마자 싸움터에 나가고 싶을 리 없었다. 조선 남해안의 지형이나 바닷길, 일본군의 전력 등에 대해 아직 파악조차 되지 않은 상태이기도 했다. 진린은 이순신의 단독출정에 동의하였다. 조선 수군 역시 명량해전 승리 이후 몇 달 만에 나서는 출정이었다.
- 살아서 돌아가는 배가 절반이었고 격침되어 바다에 빠지는 배가 절반이었다. 소록도 앞바다에는 살기 위해 육지로 헤엄치는 일본군들이 물고기 떼만큼 많았고 이들이 간신히 소록도 등의 섬에 다다랐을 때는 이미 지쳐 망둥어가 기듯이 갯벌을 기어갈 뿐이었다. 아무리 백병전에 능한 일본군이라 하더라도 칼을 들 힘조차 없었다. 이들은 섬에 상륙한 조선군에게 쉽게 목이 잘렸다.
- 이순신은 전투 중에 적의 수급 베는 것을 꺼려했다. 수급 때문에 1척의 왜선이라도 놓쳐서는 안 된다는 것이 평소 지론이었다. 그랬던 이순신이 유독 이번 절이도해전에서는 부지런히 수급을 챙겼다.
- 금당도에서 조선군의 전투 모습을 지켜보던 진린은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조선 수군이 명불허전임도 알았지만 자신은 아무런 전공을 세우지 못하고 구경만 한 꼴이니 이순신과 함께 출정하지 않았음을 후회했다. 그런 진린의 마음을 알았는지, 이순신은 절이도해전에서 얻은 수급 40개를 진린에게 선물로 주었다. 진린은 뛸 듯이 고마워했다.
- 절이도해전은 일본의 전함 50여 척이 바다에 수장되고 일본군 수천 명이 전사했던 역사적 승리였다. 절이도해전은 승리 규모만 놓고 보면 한산도대첩이나 명량대첩에 뒤지지 않은 상당히 큰 승리였지만 의외로 덜 알려진 해전이었다.
- 절이도해전 이후 이순신은 선조에게 두 종류의 장계를 올렸다.
'조선 수군의 단독 참전이었지만 진린이 공을 시샘하여 안타까워하기에, 우리 군이 거둔 수급 가운데 40개를 건넸다.'
'진린이 열심히 싸운 끝에 왜선을 침몰시키고 수급을 얻었다.'
- 이순신은 왜 두 종류의 서로 다른 장계를 올렸던 것일까? 진린은 치밀한 이순신의 거미줄에 걸린 셈이었다. 이순신에게 수급을 선물로 받은 진린은 명나라 본국에 자신의 승리라는 거짓 보고를 올렸다. 그러나 절이도 해전에서 싸운 것은 이순신과 조선 수군이었다는 소문이 돌았고, 급기야 명나라 감찰관이 사실 여부를 조사하러 조선에 들어왔다. 거짓 보고가 들통나게 되면 진린은 명나라로 압송되어 목이 달아날 판이었다. 이때 조선 조정은 이순신의 두 가지 장계 중에서 '진린이 열심히 싸운 끝에 왜선을 물리치고 수급을 얻었다'고 기록된 것을 명나라 감찰관에게 보여주었고, 천만다행으로 진린은 죽을 위기를 벗어났다.
- 이순신의 기지가 진린을 살려주는 한편, 진린의 '목숨줄 하나'를 잡아쥔 것이었다. 진린으로서는 이순신에게 약점을 잡힌 셈이며 더불어 이순신에게 절을 하고 싶을 만큼 고맙기도 했을 것이다.
- 또한 이순신은 진린과 명나라 부총병 등자룡에게 판옥선 1척씩을 선물하였다. 엄청난 선물이었다. 사실상 당시 명나라의 수군은 내세울 것 하나 없는 수준이었다. 명나라의 해금 정책(먼바다로 나가는 것을 금하는 정책) 이후 바닷길이 막히며 해군력의 성장이 멈추고 만 것이다. 실제로 명나라의 주력선인 사선과 호선은 일본의 안택선이나 세키부네만도 못했다. 일본의 안택선과 세키부네는 빠르다는 강점만은 분명했다. 그러나 명나라 주력선인 사선과 호선은 한 공간에서 포를 쏘고 노를 저어야 했기에 함포 위력도 약했고 그렇다고 빠르지도 않았다.
- 우리 판옥선은 많으면 200명이 승선할 수 있는 대형 함선이었던 반면 명나라의 최고 함선인 사선은 최대 80여 명밖에 태우지 못했다. 그런데 이런 전시 상황에 자신들의 전함보다 훨씬 크고 튼튼한 판옥선을 선물로 받아 대장선으로 사용할 수 있게 되니 진린의 기쁨은 대단했다. 이후 진린이 이순신을 대하는 태도가 180도 달라졌다. 이순신을 작은 나라의 장수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대등한 전장의 동료이자 전우로서 인정했다. 진린이 이순신과 함께 행차할 시 자신의 가마가 이순신의 가마를 앞서 나가지 못하게 했다. 진린은 이순신을 '이야'나 '노야'로 불렀다. 중국에서 '야' 자는 '어르신'이라는 의미로 완전한 존칭이었다. 진린이 이순신을 얼마나 높게 평가하였는지는 선조에게 이순신을 칭찬하는 글을 보아도 알 수 있다.
[통제사는 천하를 다스릴 만한 인재요, 하늘의 어려움을 능히 극복해 낼 공이 있다. - 진린이 선조에게 올린 글]
- 그러나 조선의 임금 선조는 진린의 글을 받고 흐뭇해하며 자신의 장수를 치하할 만한 그릇이 아니었다. 오히려 이순신을 경계하고 두려워하는 마음만이 더해졌다.
-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자신의 가신들 중 믿을 만한 다이묘들과 그들의 군대를 조선에 원정 보냈다. 그들로 하여금 전쟁 경험을 쌓게 하는 동시에 전쟁에서 승리한다면 정복한 조선땅을 영지로 나누어주어 가신들의 힘을 키우려는 목적이었다. 하지만 현실은 도요토미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조선에서의 전쟁은 장기화되었고 자신의 측근 다이묘들은 조선에서 엄청난 병력 손실을 입어야 했다. 반면에 조선에 원정군을 투입하지 않았던 에도 지역의 권력자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그 힘이 점점 강해지고 있었다. 죽음이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느낀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불안했다. 자신의 아들 도요토미 히데요리가 너무 어렸기 때문이었다. 도요토미는 이시다 미쓰나리와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자신의 어린 아들을 부탁하며 죽었다. 1598년 8월 18일이었다.
[몸이여, 이슬로 왔다가 이슬로 가나니. 나니와(오사카)의 영화여, 꿈속의 꿈이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절명시다. 이 자의 미친 야욕 때문에 조선인은 무참히 죽었다. 총과 칼에 맞아 죽은 사람이 부지기수였고 병에 걸려서, 굶 ...
- 우리 역사상 3대 대첩은 을지문덕의 살수대첩(612), 강감찬의 귀주대첩(1019), 이순신의 한산도대첩(1592)이다. 임진왜란 3대 대첩은 이순신의 한산도대첩(1592.7.8)과 권율의 행주대첩(1593.2.12), 김시민의 진주성대첩(1592.10.6)이다. 물론 이치전투(1592.7.8)가 임진왜란 3대 대첩에 포함되어야 한다고 본다. 그리고 이순신 개인사에 있어서 3대 대첩을 꼽는다면 한산도대첩(1592.7.8)과 명량대첩(1597.9.16) 그리고 노량해전(1598.11.19)이다.
- 이순신의 한산도대첩은 임진왜란의 전쟁 향방을 바꿨다. 명량해전 역시 기적 같은 승리였고 정유재란의 전쟁 양상을 바꿨다. 그러나 노량해전은 승패 여부로 인해 전쟁의 양상이 바뀌지는 않았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죽음으로 전쟁은 어차피 끝나게 되어 있었다. 엄밀히 말하면 침략 전쟁에서 실패하고 자국으로 돌아가려는 일본군을 이순신이 돌려보내지 않겠다며 길을 막고 벌인 전투가 노량해전이었다. 또한 노량해전은 전투 규모만 따지자면 한산도대첩과 명량대첩을 합친 것보다도 규모가 컸다. 임진왜란사를 뛰어넘어 제1차 세계대전 이전까지, 역사상 최대의 해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 이순신은 크고 작은 전투에서 승리할 때마다 꼼꼼하고 객관적인 기록을 남겼다. 수하들의 잘잘못을 낱낱이 기록하는 한편 이름 없는 노비 출신이 공을 세워도 이를 빠짐없이 기록했다. 그래서 지금까지 이순신이 싸워왔던 전투들은 이순신이 조선 조정에 올려 보낸 장계와 <난중일기> 등을 통해 양상을 파악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순신은 노량해전의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아니, 남기지 못했다.
-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사망 후 조선에 남아 있던 일본군들을 본국으로 송환시키라는 명령이 하달되었다. 그러나 일본군의 무사 귀향을 용납하지 않았던 조명연합군이 사로병진책으로 일본군을 공격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가토 기요마사가 울산성, 시마즈 요시히로가 사천성, 고니시 유키나가가 순천왜성을 지켜냈다.
- 시마즈와 소 요시토시 등이 이끄는 대규모 일본 함대가 노량 쪽으로 건너오고 있다는 정보가 이순신의 귀에 들려왔다. 이순신도 고민했다. 가장 우려되는 것은 800여 척이나 되는 일본의 대규모 함대 사이에서 조선 수군이 에워싸이는 상황이었다. 이순신 입장에서는 고니시를 구하러 오는 시마즈 함대를 먼저 격파해야만 했다.
- 이순신은 명나라 제독 진린에게 함께 전투에 나설 것을 청했다. 그러나 진린은 머뭇거렸다. 고니시한테 받은 뇌물도 있거니와, 남의 나라의 다 끝난 전쟁에 나서고 싶지 않았다. 화가 난 이순신은 진린을 설득하는 것을 포기하고 조선 수군만의 단독 출정을 결심했다.
- 진린은 홀로 전투를 준비하는 이순신을 보고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처음에 고금도에 도착했을 때 이순신이 성대하게 잔치를 베풀어 명나라 말단군인 한 명에게까지 융숭하게 대접해 주었던 일, 이순신이 절이도해전의 공을 양보해 주었던 일, 순천왜성전투에서 진린 자신의 판옥선이 갯벌에 갇혀서 위험에 빠졌을 때 이순신이 자신을 살려준 일 등, 진린으로서는 홀로 전장에 나가는 이순신을 나 몰라라 할 수 없는 입장이었다.
- 전쟁을 끝내고 본국으로 돌아가려는 적을 막아서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진린도 잘 알고 있었다. 살아서 돌아가려는 자들의 발악은 충분히 예상 가능했다. 그러나 적이 돌아가도록 내버려 두면 끝날 전쟁을 기어이 막아선다는 것은 군인으로서 너무 훌륭한 신념이었다. 나라와 강토를 짓밟은 외적이 살아서 돌아가는 길을 허락하지 않겠다는 국가의 자존심을 건 큰 신념이었다. 진린 입장에서 이순신의 이러한 신념을 외면할 수 없었다. 다른 한편으로 이번 전투에서 이순신이 단독으로 공을 세운다면, 진린 자신은 명나라 본국에 돌아가서도 입장이 난처해질 터였다. 울면서 겨자 먹듯, 진린의 명나라 수군은 이순신의 함대와 함께 참전을 결심하였다.
- 이순신은 노량해전을 앞두고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
"오늘 진실로 죽음을 각오하니, 하늘에 바라옵건대 반드시 이 적을 섬멸하게 하여 주소서 今日固決死願天必殲此賊."
"이 원수를 갚을 수 있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나이다 此讎若除 死即無憾.”
- 해전사의 한 획을 긋게 될 노량해전은 그야말로 삼국의 에이스들이 모두 모인 전투였다. 시마즈의 부대는 일본 내에서 가장 용맹하기로 유명한 규슈의 사쓰마번의 군대였고 병력이 1만 명에 달했다. 바로 이 시마즈의 군대에게 원균이 칠천량에서 통한의 패배를 당했다. 일본의 소 요시토시의 부대는 대마도 출신들로 바다와 해전에 능한 특공대들이었다. 한편 진린의 명나라 수군 역시 요동 기병에 비해 전투 수행 능력이 훨씬 더 뛰어났던 절강성의 남병 1만 명 규모였다. 그러나 당시 해전 능력만큼은 세계최강이라고 자부해도 손색이 없는 이순신의 조선 수군이야말로 분명 최고의 에이스였다.
- 1598년 11월 19일 새벽 2시. 창신도에 모여 있던 사천의 시마즈 요시히로, 대마도주 소 요시토시, 거제도의 다치바나 무네시게, 부산의 다카하시 무네마스가 무려 500척의 함대를 이끌고 노량 해협으로 들어왔다. 500여 척의 일본군 함대에 탑승한 일본군은 2만 명에 육박했다. 여기에 더해 순천교에서 빠져나올 궁리를 하고 있는 고니시에게는 함대 300척과 1만 5천의 병력이 있었다. 서쪽의 고니시와 동쪽에서 진격해 오는 시마즈 등의 연합군까지 총괄하면 전함 800척과 3만 5천에 달하는 병력이었다. 당시 조선 수군의 함대는 판옥선 80척에 협선까지 더하면 200여 척이었고 병력은 1만 정도였다. 진린이 이끄는 명나라 수군 역시 300척의 함대에 병력은 1만이었다.
- 분명히 노량해전은 기존에 이순신이 싸워온 방식과는 많이 달랐다. 명량해전 이전의 이순신은 전투 중에도 철저한 아웃복싱을 선호했고, 지형을 이용한 장거리 함포사격을 통해 대부분 우위를 가져왔다. 다만 명량해전에서는 겁을 먹고 물러서는 아군들에게 보란 듯이 1척의 판옥선으로 수십 척의 일본의 전함들과 맞서서 오전 내내 버티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러나 노량해전에서는 전투에 임하는 자세가 달랐다. 전투의 승리가 목적이 아닌 우리 강토를 침략했다가 돌아가는 외적을 한 명이라도 더 죽이는 게 목적인 전투였기에, 애초에 우리의 피해를 최소화하려는 작전 따위는 성립되지 않았다. 조선군들 눈에는 살기가 서려 있었다. 일본군도 그것을 느꼈을 것이고 두려웠을 것이다.
- 일본군 역시 지금껏 이순신 함대를 보기만 하면 도망 다니던 때와는 달랐다. 함대 수가 무려 500척에 달하기도 했지만 자신들이 이곳에서 물러서면 고니시의 1만 5천 군이 전멸당할 상황이었고, 이 전투에서 이겨야만 자신들도 무사히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기 때문이었다. 바다 위에 생사를 건 처절한 싸움이 전개될 수밖에 없는 이유가 각자 분명했다.
- 세 나라의 전투선들은 서로 간에 근접 사격을 하고 있었다. 판옥선에서는 일본의 전함을 향해 신기전과 조란탄을 쏘아대고 비격진천뢰를 집어던졌다. 일본군은 조총을 쏘며 접근하면서 함선끼리 서로 가까워지는 틈을 노려 칼을 꼬나쥐고 판옥선에 뛰어오르려 하였다. 판옥선에 기어오르는 일본군을 향해 조선의 사수들은 죽을 힘을 다해 활을 쏘고 창과 낫으로 내려찍었다. 그러다 보니 판옥선에 올라타지도 못하고 바다에 빠지는 일본군들이 부지기수였다. 바다에 빠진 일본군은 살기 위해 헤엄을 쳤지만 격군들의 노가 그들의 뒤통수를 후려갈겼다.
- 일본군은 판옥선보다 높이가 높았던 안택선에서 판옥선을 내려다보면서 볏짚에 불을 붙여 내던지며 화공을 전개했다. 그러나 이순신은 이러한 상황까지도 계산해놓고 있었다. 당시 계절은 겨울이었고 북서풍이 불고 있었다. 조선 수군은 북서쪽에서 일본 수군을 남해도 쪽으로 밀어붙이고 있었다. 볏짚에 불을 붙여 화공으로 조선의 판옥선을 공격하려다 오히려 일본의 함선들에 불이 붙었다.
- 시간이 지날수록 일본군의 전함들은 1척씩 바다 밑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일본군은 조총 사격으로 조선군을 전사시킬 수는 있었지만 조선의 판옥선을 바다에 수장시키기는 어려웠고, 그렇다고 조선의 함선을 빼앗기도 어려웠다. 더군다나 일본군에게 있어 이 전투의 목적은 승리가 아니었다. 이들은 고니시의 탈출 해로를 열어주면서 자신들 역시 부산으로 후퇴하는 것이 목적이었기에, 전황은 이를 악물고 싸워서 일본군을 한 명이라도 더 죽이려는 조선군에게 유리해지고 있었다. 서쪽에서 함께 협공해 줄 것으로 기대했던 고니시의 함대는 보이지도 않았고, 일본군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남해도를 돌아 도망치는 것뿐이었다. 새벽 2시에 시작된 전투가 새벽 5시가 넘도록 계속되고 있었다.
- 이 지옥 같은 전장인 노량 앞바다를 간신히 벗어난 일본의 전함들은 남해도를 돌아나간다고 생각하고 전속력으로 배를 몰았다. 그러나 일본군이 다다른 곳은 남해도 깊숙이 위치한 관음포였다. 지금 이곳은 간척된 상태지만 당시에는 만의 형태로, 바닷길이 깊숙하게 패인 지형이었다. 어둠을 헤치며 정신없이 도망가는 일본군 눈에는 영락없이 바닷길로 보였을 것이다.
- 당황한 일부 왜군들은 살아남기 위해서 함선을 버리고 남해도 육지로 기어올라갔다. 미리 언급하지만 전투선을 이탈하여 남해도로 도망간 일본군들은 섬에 갇힌 채 훗날 조선과 명나라군에 의해 처참한 토벌을 당했다. 그런가 하면 일부는 남해도에 내리는 것을 포기하고 다시 배를 돌려 조선 수군에게 돌격해 오기도 했다. 남해도 섬에 갇혀 있어 봐야 나중에 구해주러 올 아군도 없을 테니 죽기 살기로 조선 함대를 뚫고 바다로 돌아나가야 한다는 판단이었다. 이순신으로서는 하늘이 내린 기회였다. 이순신의 명령에 따라 전 함대가 힘차게 북을 치고 포를 쏘면서 일본군이 몰려들어 밀집해 있는 관음포 쪽으로 달려 나갔다.
- 막다른 골목에 몰린 일본의 함대도 거칠게 저항했다. 일본군들은 관음포에서 빠져나오며 자신들을 향해 선두에서 공격해 오는 조선의 기함을 향해 수십 발의 조총을 발사했다.
조준사격이었다.
이순신의 기함을 향해 수십 발의 총탄이 날아들었다. 항상 이순신의 옆을 지키던 송희립이 먼저 총탄에 맞고 쓰러졌다.
- 이순신도 총에 맞았다.
아들 이회가 지휘대로 달려와 아버지 이순신을 끌어안았다. 조카 이완 역시 이순신에게 달려왔다. 아들과 조카가 오열했다.
이순신은 이들에게 마지막 말을 남겼다.
"싸움이 급하니 부디 내 죽음을 말하지 말라 戰方急 愼勿言我死."
- 1598년 11월 19일 새벽 2시부터 시작된 노량에서의 전투는 날이 밝고도 계속되었다. 오후가 되어서야 바다가 고요해졌다. 도망갈 수 있는 일본군은 도망갔고, 그러지 못한 일본군은 모두 죽었다. 바다에는 조선과 명나라의 함선뿐이었다. 일본군 500여 척의 연합함대는 바닷속으로 침몰했거나, 비어 있거나 부서진 채로 관음포에 정박 중이었다.
- 노량에서 시마즈 요시히로를 집요하게 공격한 조선 수군은 적선 200여 척을 불태우고 100여 척을 나포했다. 일본군의 피해는 너무 컸다. 고니시를 구하기 위해 출전했던 일본의 연합함대 500여 척 중 부산으로 살아 도망간 함선은 50여 척에 불과했다.
조선군의 대승이었다.
- 조명연합군은 노랑에서 일본의 연합 함대를 상대로 엄청난 승리를 거두었다. 그럼에도 노량해전을 노량대첩이라 하지 않는다. 이유는 노랑해전에서 이순신이 전사했기 때문이다.
- 이순신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우리 군사와 명나라 군사들은 각 진영에서 통곡을 그치지 않았는데, 마치 자기 부모가 세상을 떠난 듯 슬퍼했다. 그의 영구 행렬이 지나는 곳에서는 모든 백성이 길가에 나와 제사를 지내면서 울부짖었다.
"공께서 우리를 살려주셨는데, 이제 우리를 버리고 어디로 가시나이까?"
수많은 백성이 영구를 붙들고 울어 길이 막히고 행렬은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할 지경이었다.
<징비록>
- 아산으로 옮겨진 다음날 이순신의 장례가 치러졌다. 장례 역시 수많은 백성들이 함께했다. 유생들은 글을 지어 그를 추모했고, 승려들은 재를 올리며 죽어 돌아온 영웅의 극락왕생을 빌었다. 이순신의 운구행렬을 따라 함께 아산까지 올라온 진린은 이순신의 큰아들 이회를 만나 두 손을 붙잡고 울면서 위로했다. 진린은 조선 원정에 함께 따라온 지관 두사충에게 이순신의 자리를 당부했다. 이순신의 유해는 두사충이 정해준 아산의 금성산 아래 묻혔다. 그러나 15년 후, 이순신의 묘는 아산 어라산으로 가족들에 의해 이장되었고 지금까지 그곳에 묻혀 있다.
- 그러나 훗날 시마즈 가문의 사쓰마번이 조슈번과 연계하여 에도 막부를 타도하면서 메이지 유신을 이끌어내었고, 그들이 정한론(한반도 정벌과 대륙 진출)의 선두주자가 되어 강화도조약(1876)을 체결하며 조선을 또다시 침략했던 중심 세력이 되었으니, 역사가 참 아이러니하다고 할 수 있겠다. 지금까지도 이들은 일본 내 가장 극우적 성향을 보이고 있다.
- 명나라는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돕게 되면서 재정의 곤란을 겪었다. 만력제(명나라 신종)가 문제였다. 오죽하면 고려 천자라고 불리었을까?
만력제는 꿈에 관우가 나타나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유비 형님, 조선의 임금이 형님의 아우 장비인데, 도와주셔야죠."
억만금 재산을 쌓아놓고도 명나라 백성을 구휼하지 않았던 만력제는 아낌없이 자신의 재산을 조선에 희사했다. 만력제로 인해 많은 조선인들이 굶주림을 면했다.
- 명나라 만력제(신종)은 고려 천자로 불릴 정도로 임진왜란 당시 조선을 적극적으로 도와주었다.
- 반면에 중국인들은 이에 대한 분노를 기억하고 있다가 문화대혁명 (1966~1976) 당시 만력제의 무덤을 파헤쳐버렸다. 명나라는 쇠약해졌고 떠오르는 누르하치의 여진족을 이겨내지 못했다. 훗날 명나라는 여진족의 청나라에 멸망당한다.
- 조선에 명나라 제독으로 참전하여 이순신과 깊은 전우애를 맺고 돌아간 진린의 자손들은 청나라 오랑캐의 지배를 받을 수 없다 하여 대거 조선으로 이주해 들어왔다. 그들이 이순신과 진린이 함께 있었던 고금도까지 왔고, 그 옆 해남에 터를 잡고 살아가니 이들이 광동 진씨이다. 지금도 해남에는 광동 진씨 집성촌이 있다.
- 만약 조선에 이순신이 없었다면 임진년에 일본은 조선 정벌을 끝내고, 직후 만주와 명나라를 공격했을 것이다.
만약 그랬다면 어떤 역사가 전개되었을까?
최소한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는 아니었을 것이다. 이처럼 한 인물의 존재로 인해 한 나라 역사의 큰 줄기뿐 아니라 주변 여러 국가의 역사까지 바뀐 사례는 많지 않다.
- 시대에 따라, 후손이 누구냐에 따라, 어느 국가나 어느 지역 출신이냐에 따라, 혹은 누군가 관심을 갖고 대중들에게 어떤 바람을 일으켰냐에 따라 역사적 인물에 대한 관심은 천차만별로 달라진다.
어떤 역사 속 인물일지라도 후대의 역사가가 어떤 해석을 하느냐에 따라 평가 역시 완전히 달라지기도 한다.
그러나 그 예외, 즉 시대와 세태를 뛰어넘어 일관적인 평가와 찬양을 받는 인물도 있다.
- 우리 역사에는 세종과 이순신이 그러하다. 우리는 어릴 적부터 가장 훌륭한 왕은 세종대왕이고, 국난극복의 최고 영웅은 이순신이라는 이야기를 늘상 듣고 자라왔다.
- [뛰어난 재주에도 불구하고 운이 부족해 백 가지 경륜을 하나도 제대로 펴보지 못한 채 죽고 말았으니 참 애석한 일이다.
<징비록>]
- 대제학 이민서는 명량대첩비에 이순신에 대한 기록을 남겼다.
[공은 평소에는 차분해서 단아한 인품이 마치 선비와 같았다.]
- 조선의 왕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북벌을 꿈꾸었던 효종은 이순신 같은 장수를 얼마나 그리워했을까?
[아침에 이순신의 비문을 보았는데, 죽을 힘을 다하여 싸우다가 순절한 일에 이르러서는 눈물이 줄줄 흘렀다. 이는 하늘이 우리나라를 중흥시키기 위하여 이런 훌륭한 장수를 탄생시킨 것이다. 원균의 패배가 있었으나 그 뒤 순신이 대적을 격파하였으니, 참으로 쉽게 얻을 수 없는 인재이다.
<효종실록 1659년 윤3월 30일>]
- 장희빈과 인현왕후로 유명한 숙종 역시 이순신을 존경하였다.
[절개에 죽는다는 말은 예부터 있지만, 제 몸 죽고 나라 살린 것은 이 분에게서 처음 보네.
숙종이 쓴 <현충사 제문> 중에서]
- 특히 정조는 이순신을 과하다 싶을 정도로 존경했다.
- 일본의 사토 테츠타로는 이순신과 영국의 넬슨을 이렇게 비교했다.
[역사상 최고의 제독은 동방의 이순신과 서방의 호레이쇼 넬슨이다. 거기에 넬슨은 인간적, 도덕적인 면에선 이순신에 떨어진다. 조선에서 태어났다는 불행 덕분에 서방에 잘 알려져 있지 못하다.
<제국국방사론>]
- 일본의 도고 헤이하치로는 러일전쟁 승리 직후 축사를 듣고 나서 이렇게 말했다.
[나를 넬슨에 비하는 것은 가하나 이순신에게 비하는 것은 감당할 수 없는 일이다.
<일본 조선사 연구소>]
- 제2차 세계 대전의 영웅이었던 영국의 버나드 몽고메리 역시 조선의 이순신을 알고 있었다.
[조선에는 이순신이라는 뛰어난 장군이 있었다. 이순신 장군은 전략가, 전술가이며 탁월한 자질을 지닌 지도자였을 뿐만 아니라, 기계 제작에도 뛰어난 재능을 지니고 있었다.
<전쟁의 역사>]
- 해전사 전문가이자 해군 제독이었던 영국의 조지 알렉산더 발라드 제독은 이순신과 넬슨을 비교했다.
[영국인의 자존심은 그 누구도 넬슨 제독과 비교하길 거부하지만, 유일하게 인정할 만한 인물을 꼽자면, 한반도의 이순신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실수가 없었으며, 그야말로 모든 면에서 완벽해 흠잡을 점이 전혀 없을 정도다.]
- 세계 전쟁사에 회자되고 감탄사를 연발케 하는 이순신이다. 외국인들이 우리 이순신을 극찬한 것은 고마운 일이다. 그러나 그들이 우리만큼 이순신을 알까? 우리가 이순신에 대해 느끼는 감정을 그들이 헤아릴 수 있을까?
- 나는 오히려 국권피탈 무렵의 애국계몽사학자였던 신채호가 <이순신 전>에 남긴 글이 더 폐부를 찌른다.
[나는 제2의 이순신을 기다리노라.]
- 또한 이순신에 대한 그 어떤 평가나 기록보다도 우리의 가슴을 가장 뜨겁게 하는 것은 우리 대한민국 해군의 다짐이다.
"해군의 다짐. 우리는 영예로운 충무공의 후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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