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1

[김종일] 마녀의 소녀 1, 2 (완)

일루젼 2025. 4. 10.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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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김종일
출판 : 황금가지
출간 : 2020.06.05


저자 : 김종일

출판 : 황금가지
출간 : 2020.06.05


 


1권만 있었던 <마녀의 소녀>.

초반부를 읽다 말고 뛰어나가 2권을 대출해 와서 연달아 읽었다. 

<나의 오컬트한 일상>이나 <타로 언니> 같은 가벼운 일상 미스터리일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는 딥한 연애물이었다.

 

다른 것들은 모두 제쳐 두고

- 이를 테면 사귀는 사람이 있는 사람을 좋아한다거나, 그런 상태에서 다른 사람을 좋아한다거나, 제대로 시작과 헤어짐을 정하지 않고 두 사람을 만난다거나 등등 - 

첫 장면을 완전히 다른 느낌으로 다시 사용한 진짜 '수미상관'의 구조가 인상적이었다.

 

단순히 시작과 같은 장면으로 끝을 맺는 게 아니라, 그 장면을 일종의 쿠키처럼 활용해 작품의 전체 내용이 한 번에 느껴지게 만들었다.

 

원숭이 손이나 토끼발 같은 토템에는 아무래도 '소원'이라는 기대가 따라붙는다. 애초에 그런 물건을 만들게 된 이유가 '수호'건 '행운'이건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함이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하다. 어떤 이유에서 전혀 상관이 없어 보이는 동물의 신체 일부가 그런 의미를 가지게 되었는가- 는 보다 문화사적인 관점에서 연구해야겠지만, 한 가지는 명확하다. 

 

인간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행운이나 불운보다는, 개연성이 떨어지더라도 설명이 가능한 매개체를 선호한다.

같은 이유로 설명할 수 없는 불행 또한 그것의 원인으로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대상을 지목하고 그 대상을 제거하는 쪽을 선호한다.

이는 <희생양>으로 볼 수도, <마녀>로 볼 수도 있다.

 

조금이라도 자신과 다른 것, 이해할 수 없는 것, 그리고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것을 배제하고 배척하는 마음. 

 

우리는 중세의 마녀사냥을 보며 인간이 인간에게 이런 일을 할 수 있는가 경악하곤 하지만, 현대에도 마녀사냥은 그 무대를 옮겨 여전히 벌어지고 있다. 단지 그때처럼 '눈에 보이는' 부분과 '보이지 않는' 부분이 나뉘어져 있을 뿐이다. 당시에는 처형 장면이 드러나고 심문 장면이 가려졌다면, 현대에는 심문 장면이 드러나고 처형 장면이 가리워졌을 뿐. 

 

인터넷에서 손쉽게 찾아 즐길 수 있는 비난과 가십과 폭로는 대중들에게 어느 정도의 무게와 가치를 가질까. 

당사자에게만 무거운 -그래서 평범한- 일상의 무게를 잠시 잊게 해 줄 오락 거리.

그러면서도 그 대상이 되어 조리돌림 당하고 싶지는 않다는 두려움.

혹은 그를 통해 이익을 얻고자 하는 이들의 욕망. 

어쩌면 당시에도 마녀사냥이란 이와 다르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온라인에서 일어나는 '정의'와 '윤리'의 이름의 처단을, 한 번 정도는 몇 발자국 뒤에서 바라볼 필요도 있지 않을까 생각하며.

이런 생각을 말할 자격이 있는가- 혹은 말하는 데에 자격이 필요한가- 또한 생각하며.  

 

 소녀는, 무사히 할멈이 되었을까.

 

          


   

 

 

악하기 때문에 악을 택하는 사람은 없다.
다만 그것을 행복과 선의 추구로 잘못 생각할 뿐이다.

- 메리 울스턴크래프트 

 





프롤로그



"소원 들어주는 원숭이 손 얘기 알아?"
"그게 뭔데?"
"100년도 더 된 외국 소설에 나오는 건데, 오늘같이 음침한 날씨에 어느 노부부가 사는 집에 손님 하나가 찾아와선 미라가 된 원숭이 손을 하나 보여 줘. 그 손에 어느 수도사가 주문을 걸어 놔서 그게 소유자의 세 가지 소원을 들어준다면서." 
"어디서 들어본 거 같은데? 그거 으스스하게 분위기 잡다가 나중에 깜짝 놀라게 하는 얘기 아냐?"


- "들어 봐, 일단 손님은 이 물건의 첫 번째 소유자가 세 번째 소원으로 자기 죽음을 빌었다는 둥, 이런 물건은 세상에서 없어져야 한다는 둥, 현명한 소원을 빌어야 한다는 둥 분위기만 겁나 잡다가 원숭이 손을 놓고 가. 집 문제로 골치를 썩던 노부부는 장난 삼아 당시론 상당히 큰돈인 200파운드가 필요하다고 원숭이 손한테 빌어보고."
"그래서?"
"아무 일도 안 생겨, 그날은.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 하고 넘어간 다음 날, 사람 하나가 노부부 집에 찾아와선 이러는 거야. 당신네 아들이 직장서 일하다 기계에 딸려 들어가서 죽었다고. 그리고 그 보상금으로 200파운드가 나올 거라고."
 
- "아들 장례 치르고 일주일이나 지났나, 자식 잃은 슬픔에 잠도 못 자던 아내가 남편을 막 조르기 시작해. 원숭이 손한테 두 번째 소원을 빌고..."
"아들이 살아 돌아오게 해 달라고?”
"빙고. 아내의 성화에 못 이겨 남편이 소원을 빌지. 근데 바람만 불던 밖에서 갑자기 누가 현관문을 똑, 똑, 똑, 두드리는 거야."
"소름 끼쳐. 그래서?"
"아내는 아들이 돌아왔다고, 문 열어 줘야 한다고 막 재촉하는데, 남편은 밖에서 문 두드리는 게 너무 무섭고 꺼림칙한 거야. 그래서 아내가 문을 열어 주러 간 사이에 세 번째 소원을 빌지."
"소원 취소?"
"아마 그랬겠지. 밖에서 문 두드리는 걸 사라지게 해 달라거나. 그게 그거지만."

 

-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
"갑자기 노크 소리가 그쳤다. 현관문을 열어 보니 밖엔 썰렁한 바람만 불고, 아무도 없더래. 노모는 구슬프게 흐느껴 울고 가로등만 텅 빈 거리를 비추더란 얘기."
"끝이야?"
"어."
"뭐야, 그게. 반전도 없고, 감동도 없고. 그 얘길 왜 한 거야?"

"그냥, 너 심심할까 봐."
 

- "너라면 뭘 빌겠어?"
"뭐야, 생뚱맞게."
"내 말은, 그 원숭이 손이 네 눈앞에 있고 그게 진짜로 세 가지 소원을 들어준다면 넌 무슨 소원을 빌겠냐 이거지."
"말도 안 돼. 그런 게 있음 다 부자 되고 다 여신 되게?"
"대가가 따른다면? 그것도 아주 살벌한 대가가. 너라면 어떡할래?"
"글쎄... 대가가 없을 소원을 빌면 되지 않나? 미리 지능적으로 치밀하게 계획을 짜서 애초에 대가를 방지하는 소원, 그러니까 갑자기 벼락부자가 되게 해 달라거나 전교 1등을 하게 해 달란 멍청한 소원이 아니라, 등가교환의 여지가 없는 소원을 비는 거지." 

"과연 그런 소원이 있을까?"
"그렇게 따지면 과연 소원 들어주는 원숭이 손이란 것도 있을까? 애초에 말이 안 되는 얘긴데 뭘."
"그건 그래."

- "솔직히 그 얘기도 가만 보면 쫌 그래. 원숭이 손한테 소원 빌고 생긴 일들이 소원을 빌어서 그게 진짜로 이루어진 건지, 아님 그냥 절묘한 타이밍에 터진 우연의 일치인지 누가 알아? 그 집 현관을 노크한 사람도 알고 보면 그냥 길 물어보려고 두들긴 건데 두 내외가 괜히 아들인 줄 착각하고 설레발치다 그 사람 가고 난 담에 문을 열었는지도 모르고..."
"결론은, 너라면 한번 해 보겠다 이 말이지?"
"그런 게 진짜 있다면야... 밑져야 본전이다 생각하고 해 볼지도 모르지."

 

- "그래? 소원이 뭔데?"
"소원?"
"어, 네가 지금 가장 간절히 바라는 거."
"간절히 바라는 게 어디 한둘인가. 근데 너 오늘 진짜 이상하다? 눈빛도 음흉한 게... 약 먹었냐?"
"괜찮으니까 말해 봐, 나한테만 살짝. 소원이 뭐야?"
 




- "소원이 뭐야?"
진희가 물었다.

- 짝꿍인 그 애는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여 턱을 괸 채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작고 보얀 얼굴에 자리 잡은 또렷한 눈코입이 사랑스러웠다. 여자인 내가 보기에도 혹할 천상의 비주얼이었다. 교실 창으로 들어온 황금빛 햇살은 후광, 그 애의 교복 블라우스 위로 살랑거리는 검은 머릿결은 하프의 현처럼 보일 정도였다. 창문으로 드는 바람에 그 애의 머리카락이 하늘거릴 때마다 하프의 감미로운 연주가 들려오는 듯했다. 바람결에 실려 오는 체취도 환상적이었다. 

- "너 향수 뭐 써?"
더러 아이들이 그렇게 물으면 진희는 미소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안 써."

 

- 지당하신 말씀, 미모는 말할 나위도 없었다. 성형으로는 따라잡지 못할 자연미인의 위엄이랄까. 진희의 미모는 찢고 넣고 꿰매어 만들어낼 수준이 아니었다. 
왼쪽 눈 밑에 살포시 자리 잡은 점은 미모를 완성하는 포인트였다. 언뜻 보면 그냥 동그란 점이었지만 유심히 들여다보면 원형이 아니라 별 모양에 가까운 점이었다. 그 오묘한 점이 바로 진희의 미모에 마성까지 더하는 화룡점정이었다. 

"소원 없어?"
진희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물어온 후에야 번뜩 정신이 들었다. 소원이라니... 이 무슨 자다 말고 '우리의 소원' 부르는 소리야.
"소원?"
그제야 내가 되물었다. 조금 전까지 나를 고문했던 물리의 후유증이 채 가시지 않아 비몽사몽이었다. 

- "어, 나린이 네가 지금 가장 간절히 바라는 것."
진희가 눈웃음을 생글거리며 알기 쉽게 설명해 주었다. 

 

- 진희는 예쁜 데다 성격까지 좋은 '완소녀'였다. 전교생의 시선을 한 몸에 받을 정도로 예쁘면서도, '예쁜 척'은 짚신벌레의 털끝만큼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기에게 쏠리는 관심과 시선을 부담스러워했다.
"글쎄..."
뜬금없는 질문이었지만 대답 못할 질문은 아니었다. 대답이 너무 많아 탈이지. 잠기가 걷히면서 이런저런 바람들이 머릿속에 방울방울 떠올랐다.  
너처럼 예뻐지고 싶다고 말하면 우습겠지?

- 몇 가지 선택지가 머릿속에 주르륵 펼쳐졌다. 그러나 입 밖으로 나오기도 전에 맥없이 툭툭 터져 버렸다. 그것들은 어디까지나 희망사항일 뿐 소원까지는 아니었다. 
 
- 교실을 둘러보다 창가 쪽에서 나를 바라보던 현민이랑 눈이 마주쳤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녀석은 황급히 눈을 내리깔았다. 연예인 현빈과 이름도, 생김새도 어설프게 닮았고 키도 현빈만큼 훤칠했지만 어둠침침한 무표정에 말수도 거의 없는 데다 교복 속의 티셔츠도 늘 검은 계통만 입고 다녀서 아이들 사이에서는 '흑민'이라는 별명으로 통했다. 쉬는 시간에는 늘 에어팟을 귀에 꽂고 요란한 음악을 들으며 책을 읽었는데, 읽는 책마다 <불안>이니 <유동하는 공포>니 <난징의 악마>니 하는, 소름 돋는 제목 일색이었다. 한마디로 정신세계가 의심스러운 애였다.

- 저 애의 시선을 느낀 지 벌써 한 달이 넘었다.
처음에는 어쩌다 눈이 마주친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우연도 반복되면 의도로 느껴지는 법이었다. 수업 중에도, 쉬는 시간이나 등하굣길에도 뒤통수가 가려워 돌아보면 황급히 고개를 돌리는 그 애가 보였다. 인사를 건네거나 말을 걸려는 심사도 아닌 듯했다. 현민이는 그저 나를 훔쳐보기만 했다.

나에게 호감이 있든 반감이 있든 솔직히 상관도 없고 상관할 바도 아니었다. 내 마음에는 현민이한테 내어 줄 공간이 없었다.
교실 맨 구석 뒷자리에 엎드린 동준이를 흘끔 돌아보았다. 가마가 두 개인 그 애의 정수리와 부스스한 머릿결, 넓은 어깨와 책상 밑으로 쭉 뻗은 긴 다리가 보였다. 늘 그렇듯 보고만 있어도 가슴 한편이 간질거렸다. 
 
- 꼭 한 마디씩 토를 달았다. 한 번은 참다못해 이유를 물었다.
"혜정아, 내가 너한테 뭐 실수한 거 있어?"
오혜정은 나를 흘끔 보고는 말했다.
"실수씩이나... 니가 그랬음 내가 가만 놔뒀겠어?"
그 후로는 오혜정이랑은 말도 섞지 않았다. 그 애가 나를 두고 뭐라 하든 못 들은 척했다. 도대체 동준이는 뭐가 아쉬워서 저런 밉상과 부둥켜안고 꽃다운 청춘을 낭비하나 몰라.

- "말해 봐, 나한테만 살짝."
진희의 은근한 목소리가 나를 현실로 끄집어냈다. 나를 보는 그 애의 얼굴에는 장난기 한 점 없었다.
"뭐든지 다?"
내가 진희에게 묻자, 그 애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몇 가지 제약이 있어. 첫째, 확률이 로또 1등 당첨급이거나, 규모가 천재지변급이거나, 너랑 전혀 관계없는 사람을 끌고 들어오는 소원은 안 돼. 길에서 100억 든 가방을 줍게 해 달라든가, 학교가 폭삭 무너졌음 좋겠다든가, 아이돌 멤버들이 널 사이에 두고 삼각관계에 빠지게 해 달라, 그런 소원은 빌어도 들어줄 수 없단 거지." 

 

- 진희는 진지했다.
"둘째, 누굴 죽게 해 달라거나 이미 죽은 사람을 살아나게 해 달라는 소원도 안 돼. 난 신이 아니니까. 셋째, 한 가지 소원에 두 가지 이상을 요구해도 안 돼. 예뻐지고 공부도 잘하고 싶단 식의 일타쌍피는 안 된단 말이지. 넷째, 한번 빈 소원은 개봉해서 써버린 상품과 같아. 상품의 특성상 교환이나 환불, A/S가 불가능해. 나중에 가서 취소해 달라고 울고불고해도 대답은 '노'야."

 

- 잠시 말을 끊었던 그 애가 덧붙였다.

"끝으로 소원은 딱 세 가지, 그 이상은 안 돼."

 

- 진희는 익숙한 매뉴얼을 읊듯 술술 털어놓았다. 그 품이 어찌나 자연스러운지 정해진 대사대로 연기하는 배우 같았다. 확실히 진희에게는 빼어난 외모 외에도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마력이 있었다.

- "참고로, 소원이 이루어졌다고 해도 제삼자의 눈에는 우연의 일치 혹은 본인 행위의 결과 정도로밖에 안 보여. 그러니 그 소원으로 어떤 말썽을 겪는다고 해도 뒷감당은 소원을 빈 당사자의 몫이다 이거지."
다른 아이가 했더라면 코웃음만 나올 그 썰렁한 농담이 진희의 입에서 나오니 꼭 진담처럼 들렸다. 진희는 우리 반에서 나와 유일하게 친한 아이이기도 했다. 

 

- 나는 우리 반에서 옥수수의 까만 알 같은 '아싸'였다. 전학 온 지 두 달이 넘었지만, 누구와도 친해지지 못했다. 대놓고 무시하거나 따돌리지는 않았지만 반 아이들은 은근히 나를 따돌렸다. 부모 없는 소녀 가장. 그것이 이유였다. 아이들의 눈빛이 언뜻언뜻 내비치는 속마음이 보였다.
'넌 우리랑 달라.'

- 하지만 정작 아이들과 다른 사람은 진희였다. 그 애는 전학온 날부터 내 옆자리에 앉았고 스스럼없이 먼저 말을 걸어 주었다.
"안녕."
환한 미소를 지으며 내게 인사하던 그 애의 얼굴은 사랑스러웠다. 오래지 않아 우리는 친해졌다. 만사가 다 귀찮아 별명도 '나무늘보'인 담임 선생님은 교실의 자리 배정도 따로 하지 않고 아이들에게 자율로 맡겼는데 진희는 늘 내 옆자리를 고집했다. 그 애가 내 옆자리에 앉는다는 사실만으로도 나는 자연스레 아이들의 주목을 받았다. 일종의 후광 효과라고나 할까. 나를 껄끄럽게 대하던 아이들의 태도도 눈에 띄게 부드러워졌다. 

- "자, 이제 소원을 정하셨습니까, 안나린 씨?"
진희가 재차 물었다.
어차피 잠이나 깨라고 하는 농담 따먹기인데 맞장구를 못 쳐줄 법도 없었다. 진희의 귓가에 대고 나직이 속삭였다.
"내 사랑이 이루어졌으면 좋겠어."
그 애의 눈이 반짝 빛났다.
"그래? 좋아, 딱 사흘 후면 그 소원 이루어질 거야."
진희가 말했다. 평범한 일상을 전하는 심상한 투였다.

 

- "단, 대가가 있어. 나도 책임 못지는 대가. 그래도 해 볼래?"
그제야 나는 허리를 곧추세우고 진희를 바라보았다. 그 애의 얼굴은 마냥 진지했다. 농담이 아닌 듯했다.
"무슨 말이야?"
내가 묻자, 진희가 내게 귓속말로 속삭였다.
"해볼 거야, 말 거야? 그것부터 결정해."
"대가가 뭔지 알려 줘야 하든지 말든지 하지."
"그건 나도 몰라. 내가 정하는 게 아니니까. 할 건지, 말 건지. 그것만 말해."

- 나와 짝꿍으로 지내며 진희는 단 한 번도 허튼소리를 하거나 실없는 장난을 친 적도 없었다. 그런 아이가 왜 느닷없이 소원이니 대가니 황당한 소리를 떠드는 걸까. 
동준이와 내가 커플이 된 상상을 해 보았다. 우리가 공식 커플이 되어 아이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는 상상, 상상에서나 가능한 일이기에 달콤하고 행복했다. 

 

- "어떡할래?"
진희의 재촉에 고개를 갸우뚱하며 대답했다.
"뭐, 대가가 뭔진 몰라도 해 볼 만할 거 같은데?"
진희가 되물었다.
"해 보겠다?"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계약한 거다?"
계약이라니...? 진희에게 물어보려던 찰나, 수업을 알리는 벨이 울렸다. 진희는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수학 교과서와 공책을 꺼냈다.
 
- "내가 톡 할 때까지 열어 보면 안 돼, 절대로. 알았지?"
그 목소리가 위협적이어서 나도 모르게 움찔했다.
그 애는 버스에 오르면서도 내게서 눈길을 거두지 않았다. 버스가 교차로 모퉁이 너머로 사라진 후에도 나는 버스정류장에 멍하니 서 있었다.
그 애가 내 주머니에 넣어준 물건은 삼베인지 마인지 모를 헝겊으로 된 두툼한 주머니였다. 손끝이 주머니로 갔다. 주머니로 들어가는 손끝이 떨렸다. 

- "진희가 뭐?"
태연한 척 물었지만 꺼림칙했다. 뜸을 들이던 현민이는 한참만에 말을 이었다.
"너무 친하게 지내면 안 될 거 같아서..."
"왜?"
진심으로 궁금해서 물었다. 그런데 돌아온 대답이 우스웠다.

"그냥 조심하라고."

- "나린아, 안녕? 피곤해 보인다. 어제 잠 못 잤어?"
교실에서 만난 진희는 평소처럼 인사를 건네며 안부를 물었다. 간밤에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천연덕스러운 얼굴이었다. 그 얼굴이 어찌나 해맑은지, 혹시 지난 새벽의 의식이 나만의 다중인격 놀이가 아니었나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 진희는 그 일을 입에 담지 않았다. 나도 모른 척했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라던 그 애의 신신당부 때문만은 아니었다. 창피해서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이토록 예쁘고 온화한 얼굴로그토록 괴상망측한 의식을 시킨 진희도 진희였지만, 그 애가 시킨다고 그 미친 짓을 하란 대로 한 나도 미쳤다. 

- 동준이에게도 이렇다 할 변화는 없었다.
그 애는 특유의 무심한 얼굴로 늦게 학교에 나와 수업 시간 대부분을 책상에 엎드린 채 보냈다. 행여 나를 대하는 태도가 전과 달라지지 않을까 싶었지만, 변화라고는 플랑크톤 눈곱만큼도 없었다. 전과 마찬가지로 녀석은 내게 눈길도 주지 않았다. 현민이 또한 평소처럼 에어팟을 꽂고 표지가 시커먼 책을 읽으며 내 쪽을 흘끔 댔다. 나와 눈이 마주치면 눈을 돌리는 녀석에게 물어볼까도 했다. 버스정류장에서 '내 말 잘 들어.'라는 말 뒤에 무슨 말을 하려 했는지... 하지만 긁어 뾰루지가 될까 봐 그만두기로 했다. 

 

- 그런데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
"너 가져라."
눈앞에 꽃다발이 불쑥 들어왔다. 안개꽃으로 둘러싸인 장미세 송이였다. 고개를 드니 동준이가 내 앞에 서 있었다. 교실 안의 이목이 한꺼번에 나에게로 쏠렸다. 

- "아아, 동준이? 전부터 너한테 맘이 있었던 거 아냐?"
"그러니까 그... 의식이랑은 아무 상관없는 우연의 일치란 거야?"
"의식? 무슨 의식?" 
진희가 되물었다. 자기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투였다.

 

- "사흘 전 새벽에 말이야, 만약에 그때 내가 빌어서 소원이 이루어진 거라면 네가 말한 대가란 것도 진짜 있는 거야?"
아까부터 마음에 걸려 내려가지 않던 질문이었다. 욕조 배수구에 걸린 머리카락 뭉치처럼...
"안나린, 도대체 무슨 소리야?"
진희가 걸음을 멈추고 물었다.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인 진희의 얼굴은 무표정했다. 말투도 평소와 달리 차가웠다.

- "아니, 난 전혀 모르겠는데?"
그렇게 말하고 내게서 돌아서기 직전, 아주 잠깐이었지만 진희의 얼굴에 뜻 모를 미소가 어렸다. 평소의 온화하고 상냥한 이미지와는 딴판인 냉소였다. 
 
- 딩동댕동 딩동댕 들려온다 바람결 따아라 저 멀리서
희망찬 가사가 마녀 인형의 오르골 멜로디와 만나니 어쩐지 반대의 뜻으로 들렸다.
"맘에 안 들어?"
동준이가 물었다.
"아니, 너무 예뻐. 고마워."
인형을 꼭 끌어안으며 미소 지어 보이려 했다. 하지만 볼에 와닿는 인형 드레스마저 까슬까슬해서 입술을 억지로 끌어올려야 했다.

- 그날 오후, 문학 수행평가 때문에 찾아볼 책이 있어 학교 도서실에 들렀다. 책장을 둘러보다 책꽂이 중간에서 반쯤 불거져 나온 책 한 권을 보았다. 제프리 버튼 러셀이라는 종교사학자가 쓴 <마녀의 문화사>라는 책이었다. 누가 빼서 보고는 대충 넣고 갔나 싶어 책을 제자리에 밀어 넣으려다 멈칫했다. 책 등 중간에 수정액으로 휘갈겨 쓴 '안나린'이라는 이름 석 자 때문이었다. 나는 이 책을 읽은 적도, 내 이름을 적어 놓은 적도 없었다. 책을 빼들고 펴 보았다. 무심코 책의 속지를 펼친 순간 책을 떨어뜨렸다. 

- [널 박살 내는 데에 내 목숨을 건다]
혈서였다. 검붉은 피로 휘갈긴 글자들이 살얼음 조각처럼 가슴에 박혔다. 절절한 원한이 글자 한 자 한 자에서 묻어났다. 'ㅇㄴㄹ'이라는 자음은 분명 내 이름의 초성일 터였다. 책등에는 내 이름까지 적어두었으니. 두말할 나위 없이 나를 두고 쓴 글이었다. 누구인지는 몰라도 악감정을 넘어 원한을 품은 인물이었다. 

- 에어팟으로 음악을 들으며 교실로 들어선 진희가 내 옆자리에 앉으며 인사를 건넸다. 마른침을 삼키며 진희에게 물었다.
"진희야, 혹시 전에 나한테 했던 말... 진짜야?"
"어? 방금 뭐라고 했어? 미안, 음악 땜에 못 들었어."

그제야 내 쪽으로 열린 귀에서 이어폰을 뺀 진희가 물었다. 

"그날 네가 그랬잖아. 소원이 이루어지는 대신, 대가가 있다고..."
진희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대가? 무슨 대가?"
잡아떼는 표정이 아니라 정말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 "에이, 너 지금 장난하는 거지?"
내가 묻고 싶은 말이었다. 장난이 아니고서야 이렇게 시치미를 뗄 리가 없었다. 진희는 아예 나를 외면하고는 교실로 들어서는 아이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온몸의 힘이 쭉 빠져나갔다. 도대체 왜 거짓말을 하는 걸까. 상황이 이렇게 된 이상, 진짜 장난일 리는 없었다. 보안상 소원과 관련된 정보는 누설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었지만 영 꺼림칙했다. 

- "어떻게 된 거야. 전화도 꺼놓고..."
내가 다가가 묻자 동준이는 모아이 석상처럼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이따 얘기하자."
낯빛이 흙빛이었다. 1교시 시작을 알리는 벨이 울렸기에 더는 다그치지 못하고 자리로 돌아왔다. 진희가 내게 물었다.
"왜, 무슨 일 있대?"
그런 진희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 애는 여전히 예뻤고 당장 화장품 광고 모델로 나서도 손색없도록 해맑았다. 창가로 새어드는 햇빛에 하늘거리는 머릿결도, 향수가 따로 없는 특유의 체취도 여전했다. 하지만 어쩐지 그 애가 전처럼 곱게만 보이지는 않았다. 저 여신급 미모 뒤에 시커먼 속내가 있다. 단기 기억상실증이 있지 않고서야 그날 일을 전혀 기억하지 못할 리가. 

- "혜정이 죽었대! 걔네 집에 불나서 소방차 오구 구급차 오구 난리였대. 근데 걔만 죽었대."
머릿속이 하얗게 바랬다. 얼이 빠진 채 옆자리의 진희를 돌아보았다. 진희도 입을 틀어막고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어쩐지 어딘가 부자연스러웠다. 얼마 전 분명 저런 표정을 본 적이 있었다. 내가 저주 글이 적힌 <마녀의 문화사>를 들이대며 따졌을 때 오혜정이 지어 보였던 표정이 딱 저랬다. 
그러다 진희와 내 눈이 마주쳤다. 1초도 되지 않는 순간이었지만, 저 눈빛 또한 분명 본 적 있었다. 진희가 눈으로 말했다.
'거봐, 내 말이 맞았지?'

- 눈앞이 아득해졌다. 나는 오혜정과 우정을 운운할 만큼 친하지도 않았고 그 애의 연락을 피한 적도 없었다. 그 애야말로 내게 누명을 씌웠다. 죽으면서까지 나를 저주할 작정이었다. 내게 남긴 말이 거짓말이듯 동준이에게 남긴 말도 마찬가지일 가능성이 컸다. 문제는 아이들의 반응이었다. 그 애의 글 밑으로 아이들의 댓글이 실시간으로 속속 올라왔다.  

- [안나린, 별일 없는 거지?]
현민이였다. 그 몇 자 안 되는 메시지에 가슴이 찡해졌다. 다들 나를 못 잡아먹어 안달인데 얘만은 예외였다.
답장을 보냈다.
[어]
한동안 녀석은 말이 없었다. 현실에서나 모바일에서나 말수 적고 오래 뜸 들이기는 여전했다.
[정말 괜찮은 거 맞아?]
꼭 내가 겪은 사건들을 훤히 들여다보기라도 한 듯한 말투였다.

- 상황을 알리는 건 나중으로 미루기로 했다. 아직 나는 이 애의 속내를 몰랐다. 이제는 누구도 쉽사리 믿지 못할 듯했다.

- 버스를 타고 가는 동안에도 나를 알아본 눈들이 째려보았다. 이 지긋지긋한 상황에서 벗어나려면 이 또한 지나갈 때까지 넋 놓고 기다리는 수밖에는 없을까. 동준이를 따라 가출했다면 차라리 나았을까. 그렇다고 나은이를 혼자 버려둘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눈 딱 감고 현민이에게 도와 달라고 해 볼까 하다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동준이와 섣부른 연애질에 빠졌다가 신세 망친 판국에 무슨 낯짝으로 현민이에게...

그때 머릿속에 커다란 백열전구가 켜졌다. 내가 왜 여태 그 방법을 까맣게 잊고 지냈는지 몰랐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학교까지 단숨에 내달렸다. 교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제자리에서 음악을 듣는 진희가 보였다. 여전히 인형보다 예쁜 마녀, 나의 망할지니. 진희의 옆자리에 앉았다. 
 
- 입을 한 일 자로 길게 벌리며 또박또박 말했다.
"지니 말이야. 내 두 번째 소원을 들어줄 지니."
이번에도 그 애가 나 몰라라 외면할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그래? 소원이 뭔데?"
그 애의 말을 들은 순간, 찌릿한 전류 한 줄기가 온몸을 꿰뚫고 지나갔다. 고개를 약간 기울여 나를 빤히 바라보는 얼굴과 나지막한 말투도 그날과 똑같았다. 첫 번째 소원을 묻던 문제의 그날.

- 한 가지만은 확실해졌다.
그날 이후로 진희가 줄곧 굳게 지켜온 시치미는 의도적인 연극이었다. 한편으로는 의아했다. 대체 무슨 꿍꿍이로 이번에는 빗장을 풀고 본색을 드러냈을까. 
 
- "어떻게?"
현민이가 멀찌감치 보이는 정원 어디쯤을 응시하며 대답했다.
"그냥... 느껴져."
그냥 느껴진다니... 그러고 보니 내가 진희에게 첫 번째 소원을 빌던 날에도 현민이는 비슷한 말을 했다. 
"그게 무슨 말이야?"
물어보았지만 현민이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

- 정원 벤치로 돌아왔을 때 마스크맨은 온데간데없었다. 그새 도망간 모양이었다.
"신고부터 하자."
현민이가 경찰에 신고하는 동안 나는 바닥에 널브러진 교복재킷을 집어 들었다. 산성 용액이 재킷 한복판을 녹인 자국이 보였다. 그런데 그 자국이 이룬 모양이 이상했다. 한가운데에 뻥 뚫린 구멍이 사람의 왼쪽 눈동자 같았고, 그 둘레를 에워싼 자국은 아이라인과 눈썹, 눈 밑으로 늘어진 두 갈래의 선은 왼쪽 획이 길게 늘어난 사람 인(人) 자처럼 보였다. 
"이 모양, 어디서 본 적 있는 거 같은데?"
내 말에 어깨너머에서 현민이가 중얼거렸다. 

"호루스의 눈."

- 전화기가 켜지자마자 인터넷에 들어가 검색어를 입력했다.
호루스의 눈.
검색 결과가 화면에 주르륵 떠올랐다. 첫 번째로 뜬 지식 답변을 보니 현민이의 말이 맞았다. 아까 황산이 교복 재킷 자락을 녹이며 만들어낸 묘한 문양은 영락없는 '호루스의 눈'이었다. 

- 호루스의 눈(우제트, Wedjat, Wadjet, Udjat, Udjet)은 고대 이집트의 신격화된 파라오의 왕권을 보호하는 상징이다. 태양의 눈, 라의 눈 또는 달의 눈이라고도 불린다. 호루스의 눈은 건강과 총체적인 인식과 이해를 상징한다. 오른쪽 눈은 라의 눈으로 태양을 상징하고 왼쪽 눈은 토트의 눈으로 달을 상징한다. 파라오와 왕권을 지켜주는 상징 외에, 이집트 장례의식에서 미라가 착용하는 귀금속으로 사용되었으며, 근동지역에서는 뱃머리에 그려 넣는 용도로 사용되었다.  
 
호루스는 죽음과 부활의 신 오시리스와 최고의 여성신 이시스의 아들이며 사랑과 미의 여신인 하토르의 남편이다. 오시리스가 동생 세트의 질투로 죽임을 당하자 이시스가 주술로 오시리스를 부활시키고 호루스를 잉태하였다. 이시스는 지식과 달의 신 토트의 도움을 받아 세트로부터 멀리 피해 호루스를 낳고 길렀다. 호루스는 원래 매우 허약했으나 이시스의 지혜와 주문으로 강하게 자랄 수 있었다. 언제까지나 세트로부터 피해 호루스를 기를 수 없음을 깨달은 이시스는 꾀를 부려 태양신 라의 성질과 힘을 빌려 호루스를 키웠다.

 

- 결국 성년이 된 호루스는 아버지로부터 병법을 물려받고 토트의 도움을 얻어 원수인 세트를 죽여 복수를 하고 이집트의 왕이 되었다. 그러나 세트가 죽기 전에 호루스의 왼쪽 눈을 먹어 버렸는데, 토트가 마법의 힘으로 왼쪽 눈을 다시 치유해 주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토트의 마법으로 회복된 왼쪽 눈은 검은빛을 띠며 치유와 달을 상징하게 되었고, 오른쪽 눈은 태양신 라의 성질로 인하여 태양을 상징하게 되었다. 또한 세트를 죽이고 이집트의 왕이 됨으로써, 호루스는 파라오와 왕권을 수호하는 상징이 되었다. 

- 호루스도 참 굴곡이 많은 인생을 산 양반이었다. 무슨 놈의 신들이 질투심은 그리도 많은지 신화란 신화는 죄다 패륜에 막장 드라마였다. 호루스 신화도 매한가지였다. 형을 질투해 죽인 동생이 조카의 왼쪽 눈까지 먹어 버렸다니 막장도 그런 막장이 없었다. 한데 토트의 마법으로 회복된 호루스의 왼쪽 눈이 치유와 달을 상징하게 되었다는 후일담이 어쩐지 의미심장해 보였다. 더 찾아보니 호루스의 눈에는 광범위한 뜻도 있었다.
'모든 것을 보는 것' 혹은 '완전한 자(者)'
다른 말로 '전시안'이라고도 부르며, 무수한 환생을 거듭해 최고의 경지에 이른 자에게 생기는 눈이라는 말도 있었다.  

- "특수 합금으로 된 금고야."
내 속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현민이가 말했다.
"진짜 왜 이래? 제대로 된 이유 못 댈 거면 당장 관둬. 나 있지, 너 아니어도 힘들어 죽기 일보 직전이야."
이번에는 곧바로 대답이 날아왔다.
"지켜주고 싶어."
그 말이 화살처럼 핑 날아와 내 가슴 한복판에 콱 박혔다. 갑자기 말문이 막혔다. 방심하다 한 방 맞은 기분이었다. 차마 얼굴을 마주 볼 수 없어 눈길을 창밖으로 돌렸다. 
 
- "내일 아침 7시 반에 데리러 올게."
차가 우리 집 앞에 멈춰 서자 현민이가 말했다. 애써 부정하고 싶었지만, 솔직히 든든하긴 했다. 입이 잘 떨어지지 않지만, 인사는 해야 했다.
"고마웠어, 오늘."
현민이는 내 인사에 묵묵부답이었다. 하지만 내가 대문으로 들어서고 2층에 올라설 때까지도 승용차는 그 자리에 붙박인 채 움직이지 않았다.
 
- 장식장 쪽을 돌아본 순간, 그 위에 올라앉은 마녀 인형과 눈이 마주쳤다. 태엽 감아 준 사람이 없는데도 인형은 목운동하듯 머리를 빙글빙글 돌리며 나를 마주 보았다. 까맣게 잊었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엄마아!" 
 
- 우연의 일치일까. 아니면 그렇게 보이는 필연일까.
이 와중에도 마녀 인형은 <종소리>를 콧노래처럼 흥얼거렸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장식장으로 다가갔다. 손만 뻗으면 닿도록 인형과 가까워진 순간 멜로디가 뚝 끊겼다. 인형이 동작을 멈추고 나를 빤히 바라보는 듯했다. 저 검정콩 같은 눈알도 어쩐지 망막과 홍채와 시신경으로 이루어진 진짜 눈처럼 보였다. 음흉한 꿍꿍이를 감추고 내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는 진짜 눈. 

 

- 곧바로 전화벨이 울렸다. 현민이였다.
"어, 나야."
내가 입을 떼기가 무섭게 현민이가 전화기 너머에서 외쳤다.
[그 인형, 당장 내다 버려.]
다급한 목소리였다.
"왜?"
[이유는 묻지 말고 일단 버려. 되도록 멀리!]

- "이 번호는 어떻게 알았어?"
일어나 앉으며 전화기에 대고 물었다. 바닥에 널브러진 마녀 인형은 움직이지 않았다. 오혜정의 목소리도 더는 들리지 않았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진희의 노래에 저 인형을 봉인하는 힘이라도 있었나? 진희가 이 상황을 어떻게 알아차리고 전화했는지도 의문이었다.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3시 다 됐어. 두 번째 의식을 치러야지.]
 
- "잠깐만, 저 인형 배를 따고 거기에 내 피를 넣으란 말이야?"

내 말에 폰 너머의 진희가 말했다.
[저걸 해치우지 않으면 네가 죽어.]
"그게 무슨 소리야?"

-'설마 너만 진희한테 소원 빌었다고 착각한 건 아니지?'

그 말뜻이 뭘까?
폰을 든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진희가 내 일거수일투족을 꿰뚫어 본다는 사실이 확실해졌다.
 
- 내가 죽도록 싫어서 제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나를 괴롭히겠다니...

미쳤다. 오혜정의 밑도 끝도 없는 증오와 악의에 치가 떨렸다. 전생에 원수라도 지지 않고서야 나를 그토록 미워할 이유가 없었다. 
[소원의 유효기간은 따로 없어. 당사자가 이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 한... 그 말은 혜정이가 앞으로도 쭉 너와 함께할 거란 뜻이야. 저 인형을 없애버려도 혜정인 어떤 방식으로든 너한테 돌아올 거야. 자, 선택은 너한테 달렸어.]

- 낭떠러지로 떠밀린 기분이 들었다. 등 뒤로는 나를 죽이려 드는 자들이 날 선 칼을 빼 들고 달려들고 눈앞으로는 깎아지른 절벽이 입을 벌린 듯했다. 현민이가 생각났다. 그 애라면 지금 내게 제일 나은 선택이 무엇인지 일러줄 듯했다.
진희와 연락하지 말라던 말이 떠올랐다. 현민이는 전화기를 새로 해 주면서까지 진희와 나를 떼어놓으려 애썼다. 그런데 인제 와서 내가 날름 두 번째 의식을 치러 버린다면 그 애의 호의를 깡그리 무시하는 셈이 된다. 마음을 독하게 먹고 진희에게 말했다. 
"나, 그냥 이대로 살래. 진희야." 

- 폰 너머의 진희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 침묵에 담긴 의미가 무엇인지 알 길이 없어 불안하고 무서웠다. 잠시 후, 피식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안나린, 너 아직 상황 파악이 덜 됐구나. 내가 지난번에 말 안 했나? 소원을 한 번 빌기 시작했으면 중간에 네가 죽지 않는 이상, 세 가지는 끝까지 빌어야 된다고...]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땐 그런 말 없었잖아."
[그래? 그럼 내가 깜박했나 보네.]
진희가 웃었다. 목덜미가 서늘해지는 웃음이었다.

- "내가 거부하면, 그땐 어떻게 되는데?”
[약간의 페널티가 있지.]
"페널티가 뭔데?"
내가 묻자 진희가 아무렇지 않은 듯 대답했다.
[너한테 가장 소중한 사람이... 죽어.]
진희의 그 말이 내 가슴에 던진 충격파는 어마어마했다. 뭐라 말을 하려 했지만 입도 떨어지지 않았다. 바들거리는 입술의 떨림이 느껴질 지경이었다.

"그게 어떻게 약간의 페널티야?”
한참 만에 간신히 입을 떼고 물었다.
[나한텐 약간의 페널티 맞는데?]
여전히 웃음기 어린 목소리였다. 진한 악의가 풍겼다. 애초에 현민이가 내게 진희와 가까이하지 말라고 경고했던 이유도 진희의 본모습을 꿰뚫어 봐서가 아닐까.
 
- 그러고 보니 기억났다. 첫 번째 소원을 빌던 밤에도 동준이의 이름을 입에 담지는 않았다. 그저 사랑이 이루어지기를 빌었을 뿐이었다. 그렇다면 그 상대가 동준이가 아니라 다른 누구일지도 모른다? 백번 양보해 그렇다 치더라도 여전히 의문은 남았다. 
"그래. 그렇다 쳐. 그럼 이건 뭔데? 소원은 쥐꼬리만 한데 대가가 너무하잖아. 등가교환까진 아니라도 정도껏 해야지. 최소한 그 두 개가 엇비슷하기라도 해야 되는 거 아냐?" 
[두 가지 약한 술을 섞으면 폭탄주가 돼. 너도, 혜정이도 비슷한 시기에 서로에게 영향을 주는 소원을 빌었어. 두 소원이 일으킨 시너지라고 이해하면 될 거야.]

- 두 소원이 일으킨 시너지? 언젠가 인터넷에서 읽은 기사가 떠올랐다. 락스와 표백제를 따로 쓰면 아무런 문제가 없지만, 그 두 가지가 섞이면 위험해진다는 기사였다. 락스에 든 차아염소산나트륨이라는 성분이 표백제의 염산 성분과 화학반응을 일으켜 황록색의 염소가스가 나오기 때문이라고 했다. 사람이 그 가스를 조금만 들이마셔도 눈물, 콧물, 기침이 나오고 오래 마시면 죽기도 한다고 했다.  

- [피 세 방울.]
진희가 시키는 대로 조각 끝으로 검지 손끝을 찔렀다. 따끔했다. 빨간 핏방울이 볼록 솟아올랐다. 인형 배 속에 핏방울을 떨어뜨렸다.
[시간 없으니 곧바로 인형을 품에 안고 거울 앞에 서서 소원을 빌어.]
손전등 불빛이 천장을 비추도록 폰을 뒤집어 내려놓고 벌떡 일어났다. 거울 앞으로 다가가 인형을 꼭 끌어안고 소원을 빌었다.
"이 지옥에서 벗어나고 싶어. 이 지옥에서 벗어나고 싶어. 이 지옥에서 벗어나고 싶어."
그때 깨달았다. 서두른 탓에 눈을 감지 않았으며 눈을 감지 않으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은 분명 나였는데 그 표정이 달랐다.
거울 밖의 나는 웃지 않는데 거울 속의 나는 웃었다. 마녀 인형을 품에 안고 나를 바라보며 웃는 저 얼굴은 내 얼굴이 아니었다. 입을 손으로 틀어막았다. 그런데도 거울 속의 나는 움직이지 않고 여전히 웃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 거울 속 얼굴에 웃음기가 가시더니 이질감이 사그라지기 시작했다. 이윽고 거울 속의 내가 오롯이 내 얼굴로 돌아왔을 때 다리에 힘이 풀려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방바닥을 더듬어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말해."
대답이 없었다. 통화는 이미 끊긴 후였다. 다시 전화를 걸어봐도 받지 않았다. 어쩌면 지난번처럼 마무리 요령을 일러주고 전화를 끊었는지도 몰랐다. 태우기와 먹기. 뒤처리는 내가 알아서 해야 했다. 

- [아니, 난 그냥 진희한테 소원을 빌었을 뿐이야.]
"날 죽어서도 괴롭히고 싶단 소원?"
[아니, 난 그런 소원 빈 적 없어.]
"진희는 네가 죽어서도 날 괴롭히고 싶다고 빌었다던데?"
[아니, 절대 아냐. 난 그렇게 빈 적 없어.]
그렇다면 둘 중 한 명은 거짓말을 한 셈이었다. 둘 다 못 미더웠지만, 거짓말을 한 아이는 진희일 가능성이 더 컸다.

 

- "그럼 뭐라고 빌었는데?"
망설이던 오혜정이 말을 이었다.
[그냥... 널 괴롭히고 싶다고 빌었어.]
"그게 다야?"
오혜정이 머뭇머뭇 덧붙였다.
[영원히...]

- 오혜정의 자백에 두 번 놀랐다. 얘가 나를 저주하는 소원을 빌 정도로 내게 앙심을 품었다는 사실에, 그 어이없는 소원을 들어주는 대가로 진희가 오혜정에게서 목숨을 앗아갔다는 ...

- 안나린을 영원히 괴롭히고 싶어.
안나린을 죽어서도 괴롭히고 싶어.
언뜻 보면 혜정이 털어놓은 소원과 진희가 내게 말해준 소원에는 '영원히'와 '죽어서도'라는 조건의 차이가 있을 뿐 큰 차이가 없는 듯했다. 하지만 진희가 강조한 두 번째 제약을 떠올려 보면 이야기가 달라졌다.  

- "동준이? 왜?"
짐짓 시치미를 떼고 물었다.
[너 전학 오던 날부터 동준이가... 널 좋아했거든.]
심장이 멎을뻔했다.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인지 몰라 머리가 띵했다. 여태껏 나 혼자 동준이를 짝사랑한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실은 걔도 나에게 관심이 있었다는 말이었다.
[동준이가 너한테 우산 준 날 있지? 사실 그 우산 내 거였어.]

 

- 비가 쏟아지던 저녁, 버스에서 내린 내게 동준이가 내밀었던 빨간 접이식 우산. 다음 날 돌려주려 했을 때 동준이가 귀찮다는 듯 툭 내뱉던 자기 것 아니라던 말.
어쩐지 걔가 쓰기에는 색이 화려하다 싶었다.
 
- 현민이가 물었다.
"별일 없었어?"

"어? 어..."
거짓말이었다. 간밤의 일을 곧이곧대로 털어놓자니 뭣했다. 지금 내 백팩 속에 오혜정이 깃든 마녀 인형이 들었다는 사실은 더더욱...
[아, 답답해. 나 좀 꺼내주면 안 돼?]
백팩 속에서 오혜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모른 척했다. 집에 두고 나오면 또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몰라 인형을 백팩에 넣고 나왔는데 괜한 짓이었다. 

- 잘못 보았나 싶어 눈을 감았다 떠 보았다. 역시 동준이가 맞았다. 특유의 무심한 표정과 껄렁한 눈빛도 여전했다. 절로 눈길이 가는 길쭉한 팔다리와 잘생긴 얼굴은 못 본 사이에 더 업그레이드된 듯했다. 패션 화보를 찍고 왔다고 해도 믿길 정도였다. 동준이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내 쪽으로 다가왔다. 의지와는 상관없이 가슴이 두근거렸다. 
'착각하지 마, 안나린. 지금 네 심장이 두근거리는 건 설레고 기대돼서가 아니라 짜증 나고 열받아서야.'

- 놀라운 점은 예전 오혜정의 자살 기사와 내 블로그에 무수히 달렸던 악플에 비하면 그 댓글이 비교도 안 될 만큼 적다는 사실이었다.
교실로 들어서는 나를 본 아이들의 반응도 평소와 그리 다를 바 없었다.
나를 돌아보며 수군거리거나 겸연쩍어하는 얼굴로 시선을 피하는 아이도 있었지만, 대개는 무관심했다. 적개심으로 번뜩이던 시선들은 줄었지만 단지 그뿐이었다. 그 무심한 얼굴들이 드러낸 네 글자의 심리가 절로 와닿았다. 아, 님, 말, 고.

 

- "네가 쓴 거야?" 
현민이가 교실 뒷문으로 들어서자마자 그 애에게 다가가 물었다. 더는 신세 지고 싶지 않아서 평소보다 일찍 등교했고 현민이가 보낸 톡에도 답장하지 않았다.
"아니."
고개를 가로젓는 현민이에게 거듭 확인했다. 

- "너 때문에 나, '매장녀' 됐어. 동영상에서 너 매장시킨 댔다고 인터넷에서 '매장녀'. 인제 내가 매장되게 생겼어. 벌써 신상 털기 들어갔더라."
영미는 내가 그 글을 올리기라도 한 양 삿대질까지 해가며 침을 튀겼다. 영미가 도끼눈 뜨고 덤비는 이유를 알 만했다. 그 말에 백팩 속의 오혜정이 낄낄댔다. 
[아이고, 꼬셔라. 주둥이로 흥한 자 주둥이로 망한다더니 잘됐네, 아주.]

 

- 나는 웃을 수 없었다. 오히려 무섭고 끔찍했다.
사람들에게 정의와 처벌과 응징이란 그저 허울뿐인 핑곗거리인지도 몰랐다. 애초에 사람들에게 필요한 가치는 정의 구현이나 진상규명 따위가 아닌지도 몰랐다. 남의 일이야 자기들 알 바가 아니니까, '나'만 아니면 상관없으니까. 사람들에게 필요한 대상은 바로잡아야 할 불의나 부조리가 아니라 물어뜯기에 만만한 먹잇감인지도. 

다들 하이에나 떼 같았다. 누가 하나 잘못 걸리면 너도나도 달려들어 물어뜯고 새로운 먹잇감이 나오면 그리로 우르르 몰려가는 하이에나 떼. 

 

간밤에 올라온 글 덕분에 나는 '통수녀' 오명을 벗었다. 하지만 내게 사과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잘못을 인정하는 이도 없었다.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냐고, 이제 괜찮다고, 위로하는 사람 또한 없었다. 
대부분은 '아님 말고'로 은근슬쩍 넘어갔고 몇몇은 '매장녀'라는 새로운 먹잇감을 만들어 그리로 옮아갔을 뿐이었다. 지금 아이들에게는 '통수녀 사건의 진실'보다 지난 금요일에 학교 근처에 생긴 싱크홀이 더 흥미로운 화젯거리였다. 만일 그 두 사건의 당사자가 모두 나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아이들 반응이 어떨까. 
  
도대체 무슨 영화인가 싶어 TV를 보니 '보이지 않는 연쇄살인마, 죽음과 맞서라!'라는 부제가 붙은 <데스티네이션>이었다. 오래전 채널을 돌리다 본 기억이 났다. 대형 참사를 예지하고 죽음을 모면한 10대 아이들이 죽음의 손길에 하나둘 죽어가는 공포영화였다. 흑인 장의사가 시신을 앞에 두고 주인공에게 경고하는 장면이 나왔다. 
"죽음에 사고란 없단다. 우연도, 실수도 없고, 탈출구도 없지."

시신을 내려다보던 남자가 덧붙였다.
"우리 모두 죽음 앞에선 고양이 앞의 쥐일 뿐이지."

일련의 사건을 겪으며 몸소 깨달은 진리는 그것이었다. 우연도 되풀이되면 필연이 된다. 세 개의 문장이 머릿속에 전광판 문구처럼 잇따라 떠올랐다. 두 번째 소원의 대가가 작동하기 시작했다. 첫 번째 소원의 대가는 마녀사냥이었다. 두 번째 소원의 대가는 내 목숨이다. 
 
- 머리카락을 헤치고 상처 부위를 살펴보려다 멈칫했다. 현민이 정수리 바로 밑의 두피에 뭐가 눈에 띄었기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상처인 줄 알았다. 하지만 상처라 보기에는 그 부위의 두피가 멀쩡했다. 점이라기보다는 문신에 가까운 문양이었다.

별. 
신기했지만 경황이 없어 더 자세히는 못 보고 넘어갔다. 상처가 심각했다. 돌조각에 좀 스친 정도가 아니었다. 손가락 두 마디 정도나 죽 찢겨 피가 흘러나왔다. 백팩을 열고 속에서 손수건을 찾았다. 백팩 안쪽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손수건이 어느새 마녀 인형 몸뚱이에 돌돌 감겨 있었다. 
 
- 손을 잡아끌자 현민이는 한사코 마다했다.
"괜찮다니까. 이보다 더 심하게 다쳤을 때도..."
"이보다 더 심하게 다쳤을 때도, 뭐?"
내가 묻자 현민이는 멈칫하며 입을 다물었다.
"그냥... 약만 바르고 나았어."

- "이게 어디가 수상한 건데?"
고개를 들어 현민이를 바라보자 녀석이 말했다.
"보자마자 느낌이 왔어. 뭔지는 모르지만, 분명 여기에 사실과 다른 게 적혀 있다는 느낌... 어제 당산고 행정실에 전화해서 물어봤어. 진희라는 학생이 4월 23일까지 당산고에 다니다 4월 24일에 홍주고로 전학 간 게 사실인지..."
 
- 들으면 들을수록 미궁으로 빠져드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미궁. 발명가 다이달로스가 크레타의 왕 미노스의 명을 받아 괴물 미노타우로스를 가두려고 한번 들어가면 출구를 못 찾게 설계한 미궁, 라비린토스, 헤매다 보면 사람 잡아먹는 괴물 미노타우로스와 덜컥 맞닥뜨리게 되는 곳. 그리고 그 예감은 들어맞았다.
 
"그럼 이따 나랑 같이 가."
"괜찮겠어?"
"솔직히 말해서 이건 내 일이잖아. 네 일이 아니라..."

내 말에 현민이가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현민이의 눈빛이 이렇게 깊은 줄도 예전에는 미처 몰랐다. 눈만 마주쳤을 뿐인데도 얼굴이 자꾸만 후끈거리고 심장이 쿵쿵 뛰었다. 현민이가 말했다.
"네 일은, 내 일이기도 해."
그 말에 순간 숨 쉬는 걸 잊었다.

- "어디 봐봐."
현민이의 머리에 생긴 상처를 들여다보았다.
"어...?"
거짓말처럼 피가 멎은 상태였다. 상처 크기도 아까보다 눈에 띄게 줄어든 듯했다.
"내가 괜찮다고 했잖아."
현민이가 내 손을 피해 머리를 떼며 말했다. 그제야 어색해져서 얼른 손을 거두었다.
현민이가 말했다.
"생각해 줘서 고마워."
고마워할 사람은 나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 애가 또 다정한 말을 하게 되면 심장이 멎어 버리거나, 나도 모르게 그 애를 확 좋아하게 될까 봐. 

- "안녕, 나린아."
여느 때처럼 에어팟을 낀 미노타우로스가 내게 인사를 건넸다. 그 옆자리에 앉으며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려 했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아까 현민이가 보여 준 '2017. 10. 30. 본인 사망'이라는 문구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안녕 못하다. 이년아!]
혜정이가 나 대신 받아쳤다. 고맙기도 하지.
 
- "네가 너무 예뻐서..."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자 그 애가 어이없다는 듯 픽 웃었다. 물론 진희는 여전히 예뻤다. 하지만 첫 번째 소원을 묻던 날 이 얼굴을 바라보며 느꼈던 경외감 따위는 이미 머나먼 공간 저너머로 사라진 지 오래였다. 이제는 다른 유의 경외감이 들었다. 어쩌면 그렇게 엉큼한 속을 감추고 저렇게 태연자약할 수 있을까! 

- "스테이지가 올라갈수록 퀘스트 난이도도 점점 높아지는 거 알지?"
"그게 무슨 소리야?"
내가 되묻자, 진희가 한쪽 눈을 찡긋하며 속삭였다.
"그냥, 네가 혹시 깜빡하고 있을까 봐."
나의 미노타우로스는 그렇게 다시 에어팟을 끼고는 음악 감상 모드로 돌아갔다. 볼일 끝났으니 내가 뭐라고 되묻든 더는 대답하지 않겠다는 듯한 태도였다. 

- 그리스 신화에서 아테네의 영웅 테세우스는 희생물로 자원해 미궁으로 들어가 미노타우로스를 해치우고, 자신을 사랑한 크레타 공주 아리아드네가 준 명주실을 풀어놨다가 다시 감으며 미궁을 무사히 빠져나왔다. 내가 과연 테세우스가 될 수 있을까?
머릿속에 떠오른 그 질문에 선뜻 대답할 수 없었다. 


- 철근의 목표물은 바로 나였다.
"조심해!"
[조심해!]
현민이와 혜정이가 거의 동시에 외쳤다. 현민이가 몸을 던져 나를 끌어안는 순간 어깨너머로 들이닥치는 철근들이 보였다. 둔탁한 충격음이 났고 현민이의 입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질끈 감았던 눈을 떴다가, 나를 내려다보는 현민이와 눈이 마주쳤다. 그 애의 어깨를 꿰뚫고 나온 철근이 보였다. 흘러내린 피가 철근 끝에 모였다 내 얼굴로 뚝뚝 떨어졌다.

- 놀랍거나 무섭기보다 슬펐다.
현민이의 피가 얼굴에 떨어지던 순간, 그 애의 턱과 목을 타고 흘러내린 핏물이 내 교복 블라우스에서 꽃처럼 피어나던 순간, 그런데도 현민이가 깊은 눈길로 나를 내려다보며 걱정하는 표정을 짓는 순간, 마냥 슬퍼졌다. 
나 때문에 현민이가 벽돌 조각에 맞은 지 한나절밖에 지나지 않았다. 나 때문에 동준이는 싱크홀에 빠질 뻔했고 나 때문에 현민이는 황산도 뒤집어쓸 뻔했다. 나 때문에 혜정이는 죽었고, 죽어서도 갓난아기만 한 인형에 매인 신세가 되었다. 다 나 때문이었다. 

- "... 도대체 왜 이래야 해?"
현민이에게 물었고, 진희에게 물었고, 나 자신에게 물었다. 누구에게서도 만족할 만한 대답이 나오지 않을 줄 뻔히 알면서도 물었다. 그리고 울었다. 
 
- ... 총알이나 폭탄을 대신 맞는 일이라는 말을 어느 다큐멘터리에서 본 기억이 났다. 만일 현민이가 경호원들이 하듯 나를 내리누르며 대신 과녁이 되어 주지 않았더라면 철근은 틀림없이 내 얼굴이나 목을 꿰뚫었을 터였다. 차라리 그랬어야 했다. 그래서 이 지긋지긋한 생존 게임에 종지부를 찍었어야만 했다.

- "내가 왜 그랬지?"
트럭 운전사 아저씨가 흙빛이 된 얼굴로 머리를 쥐어뜯는 광경이 차창 너머로 내다보였다. 자기가 해 놓고도 못 믿는 눈치였다. 제정신이라면 우리가 탄 차가 뒤따라오는 줄 뻔히 알면서 일부러 급정거할 리 없었다. 이런 사고는 여러 요인이 제대로 맞아떨어져야 일어난다. 정확한 타이밍에 차가 멈춰야 하고 정확한 타이밍에 철근 다발을 묶은 철사가 끊기고 정확한 타이밍에 철근들이 차창을 꿰뚫고 들이닥쳐야 한다. 이번 사고는 그 모든 타이밍이 맞아떨어졌다. 우연일 가능성은 이제 아예 제외하기로 했다. 영화 <데스티네이>에서 장의사가 했던 대사가 되살아났다.

[죽음에 사고란 없단다. 우연도, 실수도 없고, 탈출구도 없지.]

- 이 우연도, 실수도, 탈출구도 없는 미로에서 벗어날 방법은 두 가지뿐이었다.
미로를 장악한 미노타우로스의 희생양이 되거나, 미노타우로스를 해치우고 아리아드네의 명주실을 감아 미로를 빠져나가거나. 두 번째를 고르고 싶었지만 내 손에는 마노타우로스를 해치울 무기도, 아리아드네의 명주실도 없었다.

- 이상했다.
주위는 귀가 따갑도록 시끌시끌한데도 담요가 만들어낸 어둠 속에 현민이와 단둘이 마주 보니 어쩐지 아늑해졌다. 슬픔이 좀 가라앉자 민망하기는 했지만, 싫지 않았다.  

- '웃음소리만 듣고 어떻게 진희인 줄 알아?'

혜정이가 겁에 질린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 죽던 순간에도 들었거든, 그 웃음소리.]

- "다행이네요. 고생하셨어요."
현민이의 엄마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담당의에게 인사했다. 수술에 들어가기 직전, 응급실로 달려온 현민이네 엄마는 고등학생을 아들로 두었다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동안인 미인이었다. 현민이와 별로 닮지도 않은 듯했다.
"학생이 안나린이구나."
그녀는 첫눈에 나를 알아보았다.
 
- 두 사람의 대화는 수술을 받고 나온 아들과, 기다린 엄마의 대화라고 하기에는 고개를 갸웃할 정도로 형식적이었다.
"김 실장이 병실 지킬 거야. 지금 오는 중이니까 필요한 거 있으면 언제든지 말해."
그 말도 좀 의아했다. 입원한 미성년의 보호자로 부모가 있어 주지 않나? 나처럼 아예 부모님이 돌아가셨다면 또 모를까.

- "아녜요, 저는 좀 더 있을게요."
"그래 주면 나야 고맙지. 현민아, 몸조리 잘하고... 내일 또 올게."
현민이네 엄마는 짐을 던 듯 홀가분한 얼굴로 병실을 나섰다. 병원 엘리베이터 로비까지 배웅 나온 내게 아줌마가 넌지시 귀띔했다.
"현민이가 나린 학생한테 푹 빠져 있으니까 이 기회에 잘해봐요."
엘리베이터에 오른 아줌마는 내게 살가운 얼굴로 손을 흔들어 주었는데 문이 닫힐 즈음에는 놀랍도록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갔다. 혜정이가 말했다.
[새엄마라는 데에 내 손모가지랑 오르골을 건다.] 
 
- 진희가 멈칫했다.
[그만하긴 뭘 그만해? 제삼자는 빠지셔!]
혜정이가 받아치자 현민이가 내 쪽을 돌아보았다.
"혜정이 너도!"
"어?"
입이 떡 벌어졌다. 내가 잘못 듣지 않았다면, 방금 현민이는 혜정이에게 말했다. 진희가 흥미롭다는 얼굴로 현민이를 바라보았다. 그리 놀랍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 "전부터 남다르다 싶더니 내 감이 맞았네."
진희가 현민이를 빤히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 동준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은이가 부탁했어, 언니 태우고 그렇게 달려보라고."
"나은이가? 왜?"
[나은이도 알았던 게지. 미친 속도의 쾌감을.]
동준이가 나를 모터사이클에 태우고 워프할 기세로 홍주 시내를 관통한 짓이 나은이의 부탁 때문이었다니 어처구니없었다. 동준이의 대답도 어이없기는 매한가지였다.
"나야 모르지."

- 이쯤 되고 보니 다 의심스러웠다. 현민이의 병원까지 찾아왔던 진희도, 혜정이와 대화까지 나눴던 현민이도, 진희의 연락을 받고 병원으로 찾아왔다는 동준이도, 동준이에게 나를 태우고 미친 듯이 달려보라고 부탁했다던 나은이까지도... 다들 진실 하나쯤은 숨기고 내게 안 알려 주는 듯했다. 실타래가 완전히 얽히고설켜 버렸다.
 
- 낯익은 마녀의 뒷모습이 보였다. 늘 그렇듯 반듯한 자세로 앉아 에어팟을 꽂고 음악을 듣는 나의 마녀. 도대체 매일같이 무슨 음악을 듣는 걸까. 김윤아의 <착한 소녀>? 어반 자카바의 <소원>?
뒤로 다가가 막 어깨를 두드리려던 순간, 그 애가 먼저 한쪽 에어팟을 뺐다. 내가 다가와 어깨를 두드리고 말을 걸어올 줄 예상했다는 듯.
 
- 어쩌면 진희는 병문안을 핑계로 현민이를 떠보려는 속셈이었는지도 몰랐다. 중세 유럽에서 유행했다던 '악마의 증명'이라는 명제처럼.

- 악마가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기는 쉬운 일이다. 악마와 실제로 만나면 그만이므로.
그러나 악마가 없다는 사실을 증명하기는 불가능하다.
악마와 만난 사람이 없다는 사실이 세상 어디쯤 악마가 있을 가능성을 완전히 부정할 만한 증거가 되지는 않으므로.
악마가 없다는 사실을 증명하기는 불가능하나 악마가 있다고 주장하는 자가 그 존재를 증명해야 한다는 논리였다. 그 논리대로라면 마녀는 분명 세상에 존재한다. 단언컨대, 나는 마녀가 있다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다. 왜, 그 마녀가 바로 내 옆에 앉아 있으니까. 

- 복수할 거야.
그리로 막 내달리려던 순간, 시커먼 그림자가 눈앞을 가로막았다. 동준이였다. 동준이가 긴 팔로 내 허리를 휘감아 나를 낚아챘다.
"놔. 이거 놔!"
내 외침에 아이들이 일제히 내 쪽을 돌아보았다.
"어머, 쟤 좀 봐."
"미쳤나 봐."
아이들이 웅성거리는 중에도 교실에서 유일하게 나를 돌아보지 않는 아이가 있었다. 진희였다. 그 도도하고 자신만만한 뒷모습이 나를 더욱 자극했다. 
"놔, 놓으라고!"
내가 고함을 빽 지르자 동준이가 나를 끌어안다시피 한 채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아직 아냐. 때가 아냐, 아직은..."

- 동준이의 나직한 속삭임에 비로소 제정신이 돌아왔다. 머리끝까지 치솟았던, 무모하기까지 했던 살의가 조금씩, 아주 조금씩 누그러들었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부옇게 흐려진 눈으로 진희 쪽을 노려보다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내 자리 위의 천장에 박힌 칼이 보였다. 그러고 보니 궁금했다.
저 칼이 어떻게 저기에 박혔을까.
"이건 내가 갖고 있을게."
동준이가 쪽가위를 꼭 쥔 내 손가락을 하나씩 풀었다. 끝내 동준이는 내 손에서 가위를 거두어갔다.

- "약속해, 무모한 짓 안 하기."
고개를 끄덕이자, 녀석이 나를 끌어안았던 팔을 풀어주었다. 진희에게로 다가갔다. 여전히 마음속에서는 분노가 들끓었지만, 조금 전의 마그마 같은 분노와는 달랐다. <분노는 오렌지처럼 파랗다>라는 옛날 영화 제목이 떠올랐다. 케이블TV에서 틀어줄 때 채널을 돌리다 보고, 제목이 참 특이해서 기억에 남은 영화였다. 그 제목대로 지금 내가 진희에게 느끼는 분노는 오렌지처럼 파랬다. 
진희의 옆자리에 앉으며 그 애가 듣든 말든 또박또박 말했다. 

"오늘 네가 한 짓에도 대가가 있을 거야. 각오해."

- 무시무시한 속도로 눈앞에 다가드는 거리 풍경을 빤히 바라보는데, 조각난 영상들이 번뜩번뜩 머릿속을 스쳤다. 현기증이 일었다.
기시감.
분명 언제인가 이렇게 다가드는 풍경을 본 적이 있거나, 이런 속도감을 경험한 적이 있었다. 물론 지난번에도 동준이의 모터사이클을 얻어 타기는 했다. 하지만 이런 기시감은 일지 ...
  
- [염동력(念動力), 사이코키네시스(psychokinesis)는 대표적인 초능력의 일종으로 손을 대지 않고 물체를 움직이는 현상, 능력의 총칭이다. 텔레키네시스(Telekinesis)라고도 한다. 염동력을 사용하는 이를 염동력자, 사이코키네티시스트, 또는 사이코키노라고 부른다.]
그날 밤, 불 꺼진 방에서 노트북 앞에 앉아 가장 먼저 찾아본 단어는 '염동력'이었다.

- 화면 왼쪽 귀퉁이에 보이는 시커먼 물체 몇 개, 쫙 벌린 손가락 끝.
싱크홀이 생기기 직전, 동영상 촬영자가 보인 손짓이었다.
분명 아까도 저것과 비슷한 손짓을 보았다. 인사를 하듯 손을 들어 칼을 허공에 멈추게 한 뒤, 칼을 조종하던 손짓. 싱크홀 동영상에서보다는 그 동작이 희미하긴 했지만, 손끝을 움직이는 패턴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내 추측이 맞는다면 이 동영상을 촬영해 방송국에 제보한 장본인은 진희였다. 염동력으로 싱크홀을 만들어 나를 빠뜨린 것도...


-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싱크홀까지 만들어?"
[글쎄, 모르긴 해도 지반이 약하고 속이 텅 빈 부분을 느낄 수만 있다면 아주 강력한 힘이 아니어도 가능하지 않을까?]
혜정이의 말을 듣고 있노라니 온몸에 으슬으슬하게 오한이 일었다.
싱크홀이 생긴 직후, 동영상이 끝나기 전에 일시 정지 버튼을 눌렀다. 당시에만 해도 전혀 몰랐는데 싱크홀의 모양새가 낯익었다.  


- 검색 결과로 뜬 이미지를 본 순간, 또 한 번 눈앞이 아찔해졌다. 언뜻 보기에는 그냥 둥근 모양의 싱크홀에 불과했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싱크홀 둘레에 생긴 금이 아이라인과 눈썹처럼 보였고, 눈 밑으로 늘어진 두 갈래의 금은 왼쪽 획이 길게 늘어난 사람 인(人) 자처럼 보였다. 그러고 보니, 엊그제 공사 중인 건물에서 벽돌이 떨어졌을 때 안전망에 난 구멍도 꼭 커다란 눈 같았다. 현민이의 교복 재킷을 녹인 문양도 비슷한 모양이었다. 그 모든 것들이 하나로 모인 순간, 숨이 멎는 듯했다. 

- 호루스의 눈.
 
- "몸은 좀 어때?"
[괜찮아, 많이 좋아졌어.]
그나마 다행이었다. 하지만 황산에 팔뚝을 데었을 때도, 벽돌 조각에 머리가 찢겼을 때도, 심지어 철근이 어깨를 관통한 순간에도 괜찮다던 현민이였다. 이번에도 나를 안심시키려는 말인지도 몰랐다.
 
- 그러다 멈칫했다. 아침에 녀석이 혜정이의 목소리를 듣고 대화까지 나누던 일이 떠올라서였다. 그렇다면 지금도 혜정이의 목소리를 듣고 있을지도...
주위에 싱크홀이라도 있으면 숨고 싶었다.
"혹시... 너, 지금도 들려?"
현민이에게 물었다.
 
[그냥 넘겨짚은 거야. 너랑 진희가 혜정이 얘기하길래.]
"그 거짓말, 정말이야?"
믿기지 않았다. 물론 현민이가 혜정이에게 말을 건네기 전에 진희와 내가 혜정이 이야기를 꺼내기는 했다. 그렇다 쳐도 현민이가 그다음에 한 말은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 그냥 넘겨짚었다는 말이 사실이라면 현민이는 넘겨짚기 세계선수권대회의 강력한 우승 후보다. 현민이는 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침묵은 때로 긍정의 의미다.

- "진희한테 달려들려고 할 때 동준이가 막 뜯어말리면서 이러는 거야. '아직은 때가 아냐.'"
[그래? 동준이 고놈이 뭘 알고 그러나? 내가 아는 정동준은 그런 말을 할 만큼 똑똑한 녀석이 아닌데...] 
"아직 때가 아니라면 곧 때가 온다는 말이잖아." 
그 말은 내가 진희와 맞설 만큼 강하지 못하다는 말인지도 몰랐다. 사실이었다. 진희는 벅찬 상대였다. 너무 화가 나서 가위 하나 들고 달려들었지만, 동준이가 뜯어말리지 않았다면 진희에게 무슨 수모를 당했을지 몰랐다. 
 
총 네 장으로 좌우 사진 두 장, 앞뒤 사진 두 장이었다. 좌우 사진만 봐도 아찔했다. 앞에서 찍은 사진을 터치하며 내 추측이 그저 뇌피셜이기를 바랐다. 사진을 확대한 순간, 혹시나 했던 마음은 역시나 무너졌다. 
차창을 꿰뚫고 들어간 철근이 눈동자처럼 한데 모였고 그 둘레 유리가 금 간 모양은 절묘하게 아이라인과 눈썹, 눈 밑의 사람 인(人) 자 주름을 그린 형태였다. 혜정이가 사진을 들여다보며 감탄했다. 
[이야, 일부러 이렇게 만들라고 해도 못 하겠다. 맞네, 호루스의 눈.]
 
- [어, 칼날이 막 들어오는데, 와, 레알 호러, 공포영화에서 살인마한테 난도질당하는 희생자가 된 느낌. 죽는 느낌 알아?] 
"어떤 느낌인데?"
[엄청 슬프고 무서운 느낌. 사실 죽고 나면 아무것도 몰라, 죽은 줄도 모르지. 근데, 이제 진짜 죽는구나 싶은 순간은 장난 아냐.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 내가 좋아하는 음식들, 전부 안녕이고 내 마음과 생각도 영영 사라진다는 거, 그게 너무너무 슬프고 무서워. 누가 그랬잖아. 결혼이랑 죽음은 미룰수록 좋다!] 
아직도 몸을 떠는 인형을 꼭 끌어안았다. 천과 솜으로 이루어진 인형에 깃들기는 했어도 혜정이는 아직 살아 있었다.
 
- 내 최초의 기억은 등을 두드려주며 엄마가 자장가를 불러주던 어느 밤이다. 그 자장가가 무슨 노래였는지는 기억이 안 나지만 하나만은 또렷이 기억난다. 그 순간이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었다. 그날 엄마가 그랬듯 나는 마녀 인형을 안고 다독다독 등을 두드렸다. 창밖이 부옇게 밝아올 때까지... 

- 혜정이는 그랬는지 몰라도 나는 아니었다. 방금 가위와 핀셋 등이 꽂혔던 쟁반이 어느새 원상 복구되어 선반 위에 놓여 있었다. 도구들이 꽂혔던 구멍도 그 흔적을 교묘하게 메워서 유심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알아차리기 힘들 정도였다. 그 짧은 시간 동안 저렇게 흔적을 말끔히 처리하고 가다니 역시 마녀였다. 하지만 그 애가 헤집고 지나간 자리에 남은 찝찝한 뒷맛은 여전히 가시지 않았다. 내 역습에도 잃지 않던 웃음기도, 인형을 공중 분해하려 들기 직전 들이닥쳤던 기시감도, 시간이 슬로비디오처럼 늘어졌던 현상도 못내 마음에 걸렸다. 사람이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지면 반사 신경이 극도로 예민해지면서 시간의 흐름을 더디게 느낀다고 하던가. 사람도 동물과 다를 바 없어서 싸워야 하거나 달아나야 하는 위기 순간이 닥치면 교감신경계가 활성화되어 비상체제에 돌입한다고, 맥박이 빨라지면서 호흡이 거칠어지고 피가 활발히 휘돌면서 온몸의 감각도 예민해지며 더 많은 시각 정보를 받아들이려고 눈동자까지 커진다고 들었다.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시간의 흐름이 느려졌다고 착각하게 된다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 이삼 초도채 안 되는 순간이 열 배는 뻥튀기된 듯한 느낌을 과학적 근거로 설명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 '아아, 내가 이대로 미쳐가는 건가.'
[미치긴... 니가 미쳐가는 거면 난 지구 세 바퀴는 돌아버렸겠다.]
혜정이의 위로도 그다지 위안이 되지 않았다. 무엇보다 진희가 남기고 간 알쏭달쏭한 말이 어쩐지 의미심장해서 귓가를 떠나지 않았다.
'네가... 내 짝이라서.'

"나 염력 좀 가르쳐 줘."
[염력? 그건 배워서 뭐 하게?]
"가르쳐 주기나 해."

- 진희와 맞서려면 지금보다 강해져야만 했다.
동준이의 모터사이클을 타고 집에 오는 내내 진희의 가장 강력한 무기가 무엇인지 떠올려 보았다. 소원놀음도 소원놀음이었지만 그 애의 술수를 떠올려 보면 대부분이 염력을 이용한 것들이었다. 현장마다 마녀의 표식처럼 나타나는 호루스의 눈은 아직 뭔지 모르겠으니 일단 보류.
지금 진희를 상대할 만한 무기는 염력이었다. 
  
- "그래, 동네북 맞아 엄청 깨졌지. 더는 안 깨지려고. 어떻게 하는 건지나 가르쳐 줘."
[근데 그거 알아? 지금 네 질문은 물고기한테 어떻게 헤엄을 치는지, 새한테 어떻게 하늘을 나는지 알려달란 거나 마찬가지야.]
"물고기도, 새도 요령은 있겠지. 그걸 알려주면 되잖아."
[에효, 알려 준다고 네가 배울 수 있을지나 모르겠다. 나한텐 팔다리 움직이는 거나 마찬가진데...]
 
- 혜정의 말인즉슨, 염력의 비결은 어느 한 대상에게 품는 강력한 감정이라는 말이었다. 그렇다면 필요충분조건은 성립했다. 나 또한 진희를 죽이고 싶게 미워하니까.

- "지금은? 지금도 염력 쓸 때마다 날 죽이고 싶다 생각해?"
[아니지, 지금은 감정도 풀렸고 그나마 말 통하는 사람은 세상에 너 하나밖에 없는데 왜? 요샌 그냥 예전에 손발 쓰듯이 물건을 바라보면서 정신만 집중하면 자연스럽게 조종이 돼, 리모컨 쓰는 거처럼.] 
염력도 훈련을 거듭하면 능숙해진다는 말이었다.

- 염력. 영미가 내게 퍼부은 찬물세례는 분명 염력 테러였다. 그 애는 화장실에 들어오지도 않고 수도를 틀었다. 그러고는 허공에서 수돗물의 방향을 틀어 눈덩이처럼 뭉친 후 내게 내던졌다. 손에는 물 한 방울 묻히지 않았다. 염력이 아니고서야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염력이 생기게 해 달라는 소원을 빌었을까, 아니면..."
[무슨 소리야, 지금?]
"소원을 빌어서 염력이 생겼을까."
내 발치에 뚝뚝 떨어진 물줄기가 두 개의 물웅덩이를 이루더니 타일의 홈을 타고 퍼지다 하나로 이어졌다. 그 모양이 꼭 무한대 기호 같았다. 점점 그 영토를 넓혀가는 그 기호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 "누구든 진희한테 소원을 빌었다 하면 염력이 생기는지도 모른단 말이야."
혜정이도 진희에게 소원을 빈 후 염력이 생겼다. 나 역시 진희에게 소원을 빈 후 어설프게나마 염력이 생겼다. 영미가 혜정이에게 염력이 생기게 해 달라는 소원을 빌었든, 소원을 빌어서 염력이 생겼든 한 가지만은 분명했다. 
영미도 진희에게 소원을 빌었다. 
 
- 여기서 빠져나갈 수 있을까.
뫼비우스의 띠를 빙빙 맴도는 개미가 된 기분이었다. 진희가 만들어 놓은 뫼비우스의 띠. 미노타우로스가 쫓아오는 미궁. 변기에서 일어나 무한대 기호를 짓밟고 칸을 나섰다. 
 
- [눈을 감아, 안나린.]
"뭐? 눈 뜨고도 못 맞추는 타이밍을 눈감고 어떻게 맞춰?"
[마음의 눈으로 봐.]
"그런 게 어딨냐? 명상의 시간도 아니고..."
[아냐, 눈을 감고 느껴 봐. 느낌적인 느낌이라고나 할까? 오히려 그게 더 예리할 수도 있어.]

말도 안 되는 소리였지만, 일단 한번 시도는 해 보기로 했다. 눈감고 가만히 등 뒤의 존재를 마음속으로 떠올렸다. 신기하게도 방 안의 모든 사물이 사라지고 온 세상에 나와 미니 금고만 남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등 뒤로 미니 금고가 떠오르는 낌새가 느껴졌다. 지금이다! 그런데 등 뒤가 아닌 머리 위였다. 눈을 번쩍 뜨고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천장에서 금고가 수직으로 빙그르르 날아들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운동장에서 철모가 내게 돌멩이를 던졌던 그 순간이 눈앞에 겹쳐졌다. 그 주먹만 한 돌멩이가 내 얼굴로 날아오던 그 순간처럼 눈앞에 다가든 미니 금고가 대문짝만 하게 보였다. 내 코뼈와 부딪히기 직전, 금고가 우뚝 멈췄다. 
[브라보, 안나린! 훼이크까지 알아보다니 대단한데? 나한테 손이 있었음 손뼉 쳤을 거야.]
 
- 대체 왜 그때의 기억이 지금 뜬금없이 떠올랐을까. 그러다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 사소한 기억 따위에 연연할 때가 아니었다. 기억이야 때로 미화되기도, 과장되기도, 심지어는 지워지기까지 하니까.

- "아침에 발인 마치고 왔어."
현민이가 쉰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 어떡해. 현민이...] 
나 대신 혜정이가 백팩 속에서 탄식했다.

"내일부터는 다시 아침에 집 앞으로 데리러 갈게."

현민이의 말에 짐짓 차갑게 받아쳤다.

"아니, 그럴 필요 없어. 동준이 오토바이도 필요 없고."

동준이를 바라보며 말했다.

- 나를 걱정스레 보는 현민이의 시선에 가슴이 아팠다. 하지만 복도 저만치서 우리를 바라보는 마녀가 있었기에 더더욱 그래야 했다. 교실로 들어오자마자 자리에 앉아 칠판만 봤다.

- 하루를 송곳방석에 앉은 기분으로 보냈다.
내 옆에 앉아 착한 척은 다 하는 가증스러운 마녀는 물론이거니와 나를 졸졸 따라다니는 두 남자에 호시탐탐 내 빈틈을 노리는 영미까지 죄다 신경 쓰였다. 하지만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 토끼몰이할 때에는 내리막길에서 오르막길이 아닌, 오르막길에서 내리막길로 해야 한다고 들었다. 앞다리가 짧고 뒷다리가 긴 토끼의 신체구조 때문이었다. 토끼는 오르막길을 잘 올라가지만, 내리막길 달리는 데에는 서툴다. 더 늦기 전에 토끼를 내리막길로 내몰아야 했다.
 
- 뒤이어 거실 소파 옆의 분재에 눈길이 갔다. 분재 속의 화초는 여러 쌍의 겹잎이 손바닥처럼 펼쳐진 관상식물이었다.
"신경초다. 사람들은 미모사라고 그러더라."
할아버지가 거실 탁자 위에 보리차가 담긴 컵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아, 미모사... 처음 봐요."
"건드려 봐라."
잎에 손끝을 대보았다. 손이 닿자, 잎이 뜨거운 물건을 만진 손처럼 움츠러들었다.
"신기해요."
"진희가 아주 좋아했던 화초다."

- "미의 여신 비너스한테 미모사라는 공주가 있었단다. 예쁘고 재주 많고 악기도 곧잘 연주하는 아이였는데 딱 하나, 겸손이 없었지. 그러다 웬 목동과 아홉 여자가 그 애 앞에 나타나선 하프를 켜면서 노래를 불렀는데 미모와 실력이 너무나 빼어나더란다. 목동이 미모사한테 그랬지. '겨우 저 얼굴로 예쁘다고 뽐내다니.' 공주는 자만했던 자기를 부끄러워하다 풀 한 포기가 되었다더구나. 알고 보니 그 소년과 여자들이 아폴론과 시녀들이었다나..." 
나도 읽은 적 있는 그리스 신화 이야기였다. 거기 나오는 신들은 어쩌면 그렇게 시기와 질투만 많고, 자비나 관용은 없는지. 신이라는 지위가 무색할 지경이었다. 그래서 호메로스가 <일리아스>에서 아폴론을 가리켜 '쥐의 신'이라 불렀는지도 몰랐다.
 
- 혜정이가 끼어들었다. 그렇게 따지면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사랑을 이루고 싶다고 소원 좀 빈 게 인생 파탄 날 정도로 나쁜 짓이었을까.
"그렇게 마음씨가 곱디고운 애였는데... 어쩌면 그런 애라서 이 험하고 더러운 세상에서 오래 못 배기고 일찍..." 

- "그래, 정말 미안해. 그 점에 대해서라면 나도 죽도록 후회하는 중이니까 그만하자."
[야, 난 내가 이 지경이 됐어도 널 친구라고 생각했어. 그...]
"이 지경이 안 됐으면? 안 됐으면 뭐? 그럼 과연 네가 나랑 친구가 됐을까?"
오랜만에 혜정이와 나 사이에 골이 생겨났다.

"이사를 하거나 전학을 가 보면 어떠니?"
엄마 아빠가 돌아가신 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에 시달리던 내게 의사가 권했다. 이사는 차마 갈 수 없었다. 이 집은 엄마 아빠의 유산이었으니까. 집안 곳곳에 밴 두 분의 흔적들을 떠나 다른 집으로 갈 수는 없었다. 차선책이 전학이었다. 홍주고는 이 집에서 통학하기에 적당한 위치를 고른 끝에 가게 된 학교였다. 그 모든 과정이 혹시 동준이의 소원을 이루어주는 과정은 아니었을까. 엄마 아빠가 돌아가신 사고가 소원의 대가는 아니었을까. 동준이가 빈 소원의 대가. 그 와중에 내가 살아남은 이유도 내가 죽으면 그 소원을 들어줄 수 없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의심이 불어날수록 복수심도 불어났다. 벌떡 일어나 앉으며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 "몰라서 물어? 너한테 소원 빈 후로 살아도 산 게 아닌 거 알잖아."
[그게 내 탓이니? 사람들은 참 웃기더라. 다 자업자득인데 왜 남을 원망하는지 모르겠어.]
"그래? 진짜 진희가 죽은 것도 자업자득이니?"
[진짜 진희가 누군데?]
"작년 10월 30일에 네가 죽인 애." 

 

- [그래? 정 못 믿겠으면 내 생기부 스샷 찍어서 보내 줄게. 기다려 봐.]
전화가 끊긴 지 오래지 않아 카톡으로 사진 한 장이 날아왔다. 진희의 생활기록부 캡처 사진이었다. 사진을 뜯어보던 내 손에서 전화기가 툭 떨어졌다.


- "죽은 진희가 마지막으로 문자 보낸 사람, 왜 이름이 9로 저장돼 있었을까?"
그날 밤, 잠자리에 누워 나도 모르게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나와 멀찌감치 떨어져 벽을 보고 누운 채로 혜정이가 퉁명스레 대꾸했다.
[알 게 뭐야. 상대 성이나 이름에 9가 들어가나 보지.]
"그럴 수도 있겠네. 성이 구 씨라든가, 이름이 '구'로 끝난다든가."
내가 아는 사람 중에 성이 구 씨인 사람이 있는지 헤아려 보았다. 하지만 없었다. ‘구’로 끝나는 이름이 있는지도 곰곰이 떠올려보았다.

- 9를 영어로 발음하면 '나인(Nine)', 일본어로 발음하면 '큐'...
"이름이 '나인'이거나 '나인'과 비슷한..."
사람은 아닐까, 하고 말하려다 멈칫했다. 순식간에 심장이 얼어붙었다. 이름이 '나인'과 비슷한 사람. 멀리 갈 필요가 없었다.

- 나였다.
나린. 


 

 


- "혹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때문에 기억이 지워지기도 하나요?"

의사는 내 질문에 씩 웃었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의 증상은 크게 세 가지로 나타나. 첫째가 재경험. 그 사건이 자꾸 머릿속에서 반복되는 거지. 잊고 싶어도 자꾸만 생각나고 꿈에도 나오고 그럴 때마다 괴롭고.... 둘째로 회피. 그 사건이 일어난 장소를 피하고 싶고 사건이랑 관련된 생각이나 대화는 아예 안 하려고 피하는 거야. 세 번째는 과잉 각성. 자기가 항상 위험하다고 느끼는 거야. 신경도 날카로워지고 화도 잘 내고 잠도 못 자고..." 

- "그럼 기억이 지워지는 증상은 없는 건가요?"
"망각이 두 번째 회피 증상에 들어가긴 해. 그 경우는 대개 외상과 관련된 부분을 잊어버리는 경우지. 그 지워졌단 기억이 뭔지 선생님이 물어봐도 될까?"
"제가 사고 전까지 썼던 전화번혼데요, 그 번호가 제 번호였는지 전혀 모르겠어요."
"글쎄... 나린이 네가 그 번호를 사고와 밀접하다고 인식했다면 번호가 기억나지 않는 증상도 회피 증상으로 봐야 하지 않을까." 


- PTSD로 괴로워할 즈음, 한 달에 여섯 번씩 EMDR이라는 치료를 받았다. 안구운동 민감소실 및 재처리 요법이라는 치료였는데, 막상 받아 보니 별것 없었다. 눈앞에 한 일(一)자로 기다란 기계를 눈앞에 세워놓는데 거기에 일렬로 달린 수십 개의 초록색의 작은 전구가 달려 있었다. 전구에 불이 좌우로 왔다 갔다 들어오는데 그 불빛을 따라 눈동자를 움직이며 상담받는 치료였다.

 

- "뇌의 자연치유기능을 이용해 견디기 힘든 기억을 견딜 만한 기억으로 처리해 주는 치료법이야. 렘수면 알지? 눈동자가 좌우로 움직이는 수면이라는 뜻인데 그때 우리 뇌가 나름대로 머릿속의 기억을 정리한다고 해. 거기서 착안한 치료법이지."

그때 의사는 그렇게 EMDR을 설명했다.
"네가 받았던 EMDR은 불필요한 기억을 정리하는 치료법이었어. 나쁜 기억을 일상생활에 지장을 주지 않는 기억으로 바꿔 주지, 기억 자체를 지우진 않아." 

- [안나린, 우리 기억은 믿을 게 못 돼. 난 죽기 몇 달 전까지 킹크랩이나 홍게 같은 갑각류를 못 먹었다니까. 어릴 때 내가 꽃게 먹고 두드러기 때문에 죽을 뻔했거든. 근데 알고 보니 갑각류 알레르기가 있는 사람은 내가 아니라 우리 엄마였던 거있지. 어릴 때 엄마가 해 줬던 말을 내가 겪은 걸로 기억하고 평생 그 맛있다는 대게 한번 못 먹었단 거, 믿어져?] 

- 혜정이의 외침이 들려왔지만 대꾸할 여력도 없었다. 이만 쉬고 싶었다. 진득한 어둠이 나를 집어삼켰다. 까무러치기 직전, 진희의 목소리를 들었다.
'소원이 뭐야?'

- 몸이 서서히 떠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아니, 떠오르는 것은 형체 없는 나였다. 물 밑으로 가라앉는 내 몸이 보였다. 등에 멘 백팩과 겹쳐진 혜정이도... 혜정이가 나를 올려다보며 뭐라고 외치는 듯했지만 들리지 않았다. 그리로 헤엄쳐 다가가는 동준이를 보았다. 대단한 녀석이었다. 무엇이 녀석에게 목숨을 걸게 했을까. 광적인 집착일까, 아니면 사랑일까. 뭐든 상관없었다. 여기서 그만하고 싶었다. 그대로 돌아서는 기분은 홀가분했다. 물 밖으로 빠져나오니 밖은 훤했다. 위쪽에서 나를 내려다보는 거대한 존재가 보였다. 테두리가 금빛으로 빛나고 가운데에 박힌 눈동자가 태양의 흑점처럼 검은 눈. 그 눈알이 나를 노려보았다. 호루스의 눈이었다.
 
- "뭐해?"
현민이가 물었다. 대답하지 않고 손을 전화기 쪽으로 뻗어 손끝으로 기운을 끌어모았다. 서서히 손끝이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기운이 뻗어 나가는 듯했다. 멀찌감치 떨어진 전화기에 손끝이 닿는 느낌이 들었다. 하늘이 보이게 손바닥을 눕히고 손끝을 위로 까닥였다. 전화기가 부르르 떨리더니 조금씩 허공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내 눈높이까지 전화기가 떠오르자, 검지를 까딱여 전원 버튼을 눌렀다. 액정이 켜졌다. 또 한번 검지를 까딱여 배경화면의 카카오톡 아이콘을 터치했다. 메신저가 화면에 떴다. 나와의 대화 창을 불러와 입력 칸을 눌렀다. 액정에 떠오른 자판에 대고 한 자 한 자 입력하기 시작했다. 버튼을 누르자 내가 염력으로 입력한 단어가 전송되었다. 각성. 

- "그만."
현민이가 외치는 바람에 집중력이 흐트러졌다. 전화기가 허공에서 위태롭게 흔들렸다.
"그만해!"
현민이가 버럭 고함을 질렀다. 화들짝 놀라 전화기를 떨어뜨렸다. 전화기가 잔디밭에 맥없이 떨어져 나뒹굴었다. 어안이 벙벙해졌다. 아까 동준이는 '그거 어떻게 한 거야?'라고 물었고 현민이도 비슷한 반응일 줄 알았다. 그런데 예기치 않았던 반응이었다. 현민이가 지켜보는 앞에서 굳이 염력을 쓴 이유는 반응을 보려는 의도였다. 친구가 염력을 부리는 광경을 봤을 때 평범한 고등학생이 보일 법한 반응은 몇 가지였다. 깜짝 놀라거나, 신기해하거나, 겁을 먹거나. 하지만 현민이의 반응은 어디에도 해당되지 않았다. 

- "염력... 말이야. 왜 각성했어?"
원망 조였다.
[하, 누가 들으면 사람이라도 죽인 줄 알겠네.]
나도 현민이의 입에서 '각성'이란 단어가 나올 줄은 몰랐다. 전화기에 그 단어를 입력한 사람은 나였지만 우리 둘이 마주보고 있는 탓에 현민이는 내가 입력한 화면을 볼 수 없었다. '염력'과 '각성'을 하나의 고리로 엮으려면 그 둘의 공통분모를 알아야만 했다. 
 
- 손을 휘둘러 현민이에게로 전화기를 날렸다. 현민이가 제 눈앞으로 휙 날아온 전화기를 붙잡았다. 여전히 놀라는 기색도 없었다.
기분이 묘해졌다. 절체절명의 위기를 몇 번이나 넘기고서야 염력을 제대로 부리게 된 데서 오는 기쁨과 현민이의 석연치 않은 반응에서 오는 의심이 엇갈렸다.

- "말하기 싫으면 하지마. 대신 앞으로 절대 내 일에 상관 마, 다시는."
그러자 현민이가 겨우 입을 뗐다.
"내 말은... 괴물들하고 싸우려고 굳이 괴물이 될 이유까지 있느냐 말이야."
"괴물? 염력 쓰면 괴물이 되는 거야? 좋아, 그렇다 쳐. 그런데 이렇게라도 안 하면 내가 뭘 어떻게 해야 해? 오늘 나은이, 내가 염력 안 썼으면 차에 치여 죽었어. 알아?" 
현민이의 눈빛이 눈에 띄게 흔들렸다.
 
- "각성을 했는지 소원을 빌었는지는 몰라도 염력을 쓸 줄은 알더라."
현민이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세 시간 후 지구가 멸망하게 된다는 소식을 들은 듯한 표정이었다.
"나린아, 지금 네가 가려는 길, 너무 위험해."
그 점잖은 경고에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생각할수록 어이가 없어서 깔깔 웃어 버렸다.
아이고 배야. 너무 위험하대 없던 복근이 다 생기겠네.
"모현민, 지금은 가만히 앉아서 숨만 쉬어도 그래. 이 순간에도 어디서 뭐가 날아올지 모르는데 그걸 몰라서 하는 말이야? 내가 각성을 안 했으면, 지금 이렇게 너하고 얘기도 못 해."

- "아침에 네가 그랬지. 이제 우린 한 배를 탔다고... 근데 지금 보니 아닌 거 같아." 
집에는 또 어떻게 가야 하나. 신세를 지고 싶지는 않았다. 버스도 끊겼고 택시 잡기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도로를 오가는 차들이 있긴 했지만, 차를 얻어타자니 세상이 워낙 험해서 불안했다. 현민이의 말이 맞았다. 지금 내가 가려는 길은 너무 위험했다. 모르겠다. 어떻게든 되겠지.
 
- "괴물들하고 싸우려고 굳이 괴물이 될 이유가 있느냐고?"

도로 쪽으로 성큼성큼 나서며 나 자신을 다잡듯 중얼거렸다.

"괴물들과 맞서 싸우려면, 괴물이 되어야 해."


- 아닌 게 아니라 코끝이 시큰거리고 오한이 일었다. 그나마 운 좋게 택시를 잡아타지 않았다면 지금도 오들오들 떨며 밤거리를 헤매고 있을 터였다. 내리며 돌아보니 콜택시였다는 사실이 못내 마음에 걸리기는 했다.
[현민이가 보낸 거야, 틀림없이. 차 타고 가면서 지네 기사한테 부탁했겠지. '무연타워 쪽으로 택시 한 대 보내세요.' 딱보면 촉이 안오냐.] 
혜정이의 추측이 맞는지도 몰랐다. 그러든 아니든 신경 끄기로 했다. 동준이든, 현민이든 내게 숨겨둔 진실을 털어놓을 때까지는 그 어떤 공조도 하지 않기로 했다. 그래 봐야 내 손해겠지만... 


- 그래서 옛말에 그랬지, 신선놀음에 도낏자루 썩는 줄 모른다고.
혜정이의 말이 맞았다. 그렇게 마음을 독하게 먹고도 왜 현민이의 연락만 받으면 나도 모르게 무장해제가 되어 버리는지 몰랐다. 따뜻한 물에 씻고 방으로 돌아오자마자 침대에 드러누웠다. 기진맥진했다. 하루 동안 감당하기 벅찰 만큼 많은 일을 겪었고 죽을 고비를 넘겼다. 
  
- 혜정이의 재촉을 들으며 장식장 쪽으로 손을 뻗었다. 염력에 익숙해질 겸, 헤어드라이어의 코드를 콘센트에 꽂고 스위치를 켜서 인형 말리기를 전부 염력으로 했다. 그러면서 내가 몸소 배운 요령을 머릿속으로 하나하나 정리해 보았다.
하나, 움직이려는 대상이 손끝에 닿는 느낌이 들 때까지 정신을 그쪽에 집중해야 발동한다.
둘, 염력의 강도는 대상의 무게와 크기에 반비례한다.
셋, 염력의 강도는 상황의 급박성에 비례한다. 절체절명의상황에서는 나보다 훨씬 무거운 물건을 움직일 수도 있다.
넷, 염력의 범위는 Wi-Fi와 비슷해서 대상과 거리가 멀수록 감도도 떨어진다.
다섯, 염력의 강도는 손놀림의 약 10배에서 100배까지 불어나며 기력 소모도 그에 비례한다.

- "혹시 각성이 폭주로 이어질까 봐 그랬나?"
[폭주?]
"어, <크로니클> 같은 영화 보면 염력 생긴 애들이 힘을 제어 못하고 폭주하다 불행하게 죽고 그러잖아. 그럴까 봐 그런 건 아닐까?"
[더 심오한 이유가 있는지도 몰라. 아까 니가 염력 쓰는걸 보면서 놀라지도 않는 걸 보면 매번 이런 걸 봐온 애 같더라니까.]

- 그러고 보니 그랬다. 진희와 엮이게 된 후로 내게 일어난 일들은 비일상적이고 초현실적이기까지 한 사건들이었다. 세상에, 염력이라니... 하지만 그럴 때마다 현민이의 반응과 대처를 보면 지나치게 침착했고 때론 심하게 능숙하기까지 했다. 

- [그래, 니가 소원을 빈다 쳐. 뭐가 달라지는데?]
"적어도 진희가 페널티인지 뭔지 들먹이며 나은일 해코지할 궁리는 더 안 하겠지. 그거면 됐어."
[야, 넌 여태 당하고, 내 꼴도 봤으면서 모르니? 난 진희 고년한테 소원 하나 빌고 이 모양 이 꼴이 됐어. 너도 몇 번이나 죽기 일보 직전까지 가봤잖아. 그럼 세 번째 소원의 대가는 어떨지 대충 감이 안오냐?] 
"상관없어, 나은이만 살릴 수 있다면."
혜정이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 [그년한테 백날 긍정적인 소원을 빌어봐라, 부정적이고 절망적인 대가만 돌아올걸? 관둬. 이건 친구로서가 아니라, 소원빌었다가 먼저 인생 종친 선배로서 하는 충고야.]
"나도 관두고 싶어. 그런데 그렇게 안 되는 걸 어떡해. 당장 내일이라도 나은이가 어찌될지 모르는데 이대로 넋 놓고 있으란 말이야?"
[염력이 있잖아. 막말로 니가 어 하고 있었음 지금 나은이가 살아 있겠어? 각성했으니 그나마 이 정도지. 그런데 뭐야, 이제 겨우 각성했는데 소원을 빌겠다고?] 

- [나은이가 널 닮았음 그렇게 호락호락 당하진 않을 거야.쟤 좀 봐, 아까 죽을 뻔했는데 지금은 배 깔고 누워서 뒹굴뒹굴잘만 놀잖아. 널 닮아서 강철 멘탈이라니까.]
"쟤가 보기보다 속 깊은 애라 그래. 겉으로 티 안 낸다고 상처 안 받은 건 아니야. 멘탈이랑 위기대처 능력은 엄연히 별개고... 웬만하면 버텨보려고 했는데 저 피멍까지 보니 도저히 불안해서 안되겠어." 
나은이의 몸에 새겨진 호루스의 눈에 담긴 진회의 메시지는 소원 독촉이었다. 그래도 내가 버틴다면 어떻게 될지는 뻔했다.
 
- "지금 현민이까지 끌어들여서 진희를 죽이기라도 하자 이 말이야?"
혜정이가 움찔하더니 내 눈을 피하며 얼버무렸다.
[뭐... 꼭 죽이자는 건 아니고, 그냥 고년이 허튼짓 못 하게 한동안 혼수상태로 만들어 놓는다거나...]
"솔직히 나도 진희가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웠던 적도 많았어. 그래도 살인자가 되거나 살인을 사주하고 싶진 않아."

- "어때, 생각 좀 해 봤어?"
다음 날 아침, 교실로 들어선 내가 옆자리에 앉자마자 진희가 물었다.
그 예쁘고 음흉한 얼굴을 마주 보노라니 만감이 교차했다. 만일 호루스의 눈이 표식이라면, 이 마녀가 어제 나은이의 교통사고에도 관여했다면 앞으로도 그런 사건이 이어지지 않으리라는 법이 없었다. 어제는 용케 무사히 넘겼지만, 앞으로도 그러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온종일 나은이와 함께하며 철벽 수비를 한들 그 애를 지킬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만일 내가 세 번째 소원을 빌지 않는다면...? 눈앞의 마녀를 바라보았다. 답은 뻔했다. 밤새 혜정이와 머리를 맞대고 고민했지만, 모범해답이 있을 리 없는 문제였다. 결국, 차악을 택하기로 했다. 

- 진희를 똑바로 바라보며 또박또박 마지막 소원을 빌었다.
"마녀가 되게 해 줘. 너 같은."
그것이 내 세 번째 소원이었다.

- 진희 같은 마녀. 이 지긋지긋한 미궁에서 벗어나게 해 줄 마지막 명주실, 마녀와 맞서 싸우려면 스스로 마녀가 되어야만 했다. 소원을 말하는 와중에도 온갖 의문과 걱정과 불안이 머릿속에서 토네이도처럼 회오리쳤다. 하지만 혜정이가 다시 사람으로 돌아올 방법이 없듯 한번 내뱉은 소원도 그와 같았다. 

- 진희의 표정이 살짝 흔들렸다. 제 딴에는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려 애쓰는 듯했지만 동요가 엿보였다.
"왜, 무슨 문제라도 있어? 니가 알려준 제약 중 어느 항목에도 해당 안 되는 거 아냐?"
진희에게 묻자 그 애가 이내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아, 그야 물론이지. 문제없어."
"그래? 그렇담 다행이고."
나 역시 아무렇지도 않은 듯 씩 웃어 보였다. 하지만 속으로는 어금니를 깨물며 쏘아붙였다.
'좋아, 마녀 대 마녀로 어디 한번 붙어보자, 이 빌어먹을 마녀야.'

- 사실 이번 세 번째 소원은 내가 진희에게 보내는 일종의 선전포고였다. 내내 당하기만 했으니 이제 맞서 싸울 작정이었다.

- "아, 근데 나린아."
진희가 지나가는 투로 덧붙였다.
"어, 왜?"
"네가 감당할 수 있을까."
"그게 무슨 말이야?"
내가 묻자 진희가 어깨를 으쓱했다.
"뭐, 별건 아닌데 살짝 걱정돼서. 아니다. 겪어 보면 차차 알게 될 거야."

- "규칙은 전이랑 같지?"
내가 묻자 진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규칙은 전과 같아. 새벽 3시 의식, 사흘 뒤 소원 성취."
사흘 뒤 나는 어떻게 변하게 될까.

- 진희가 내게로 슬며시 다가오더니 귓가에 속삭였다.
"노파심에 몇 가지 일러두자면, 마녀가 되면 정해진 기한 내에 너랑 가장 가까운 친구한테 소원을 빌게 해야 해."
"무슨 말이야?"
"일종의 게임 룰이라고나 할까. 제약에 걸리는 게 없는 한, 소원은 무조건 들어줘야 하는 것도 룰이야. 소원의 대가로 일어나는 일은 고스란히 스탯 포인트로 돌아와."
 
- "기한 내에 소원 빌게 못 하면?"
"그럼 그로 인한 페널티도 있겠지? 그리고..."
그때 교실 문이 열리고 영미가 들어왔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그 애가 내게 다가왔다.
 
- 싸늘하기 그지없는 말투였다. 여태껏 한 번도 본 적 없던 모습이었다. 공사 현장으로 달려왔던 아까까지만 해도 이러지 않았다. 불과 한 시간 만에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듯했다. 
주위의 눈이 일제히 우리에게로 쏠렸다. 개중에는 앞자리에서 우리를 돌아보는 영미의 시선도 있었다. 교실 맨 뒷자리에 앉아 엎드려 자던 동준이도 부스스 눈을 뜨고 돌아보았다. 

- "너 같이 재수 없는 애한테 시간 낭비한 내가 한심해서. 더는 그러기 싫어. 그게 다야. 그러니 좀 꺼져줄래?"
현민이의 입에서 나온 '재수 없는 애'와 '꺼져줄래?'라는 말이 가슴 한복판에 커다란 돌덩이를 퉁 내던졌다. 진심으로 한 말처럼 들렸다. 지금 이 말이 연기라면 현민이는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감이었다. 

- "지금 뭐 하냐, 너.”
동준이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몰라서 물어? 안나린이랑 절교 중이다."
현민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를 밀치고 그 애가 향한 곳은 영미의 자리였다.
“가자."
영미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현민이의 팔짱을 꼈다. 나를 돌아보는 영미의 얼굴에 회심의 미소가 어렸다. 교실을 나가기 전, 현민이가 동준이에게 귀찮은 물건을 던지듯 툭 내뱉었다. 
"난 필요 없으니 둘이 다시 사귀든지 말든지 알아서 해."

다리에 힘이 풀려 자리에 주저앉을 뻔했다. 나를 바라보며 수군대는 아이들 때문에 이를 악물고 참았다. 뭔가 잘못되었다. 잘못되어도 단단히 잘못되었다.

- "기한 내에 가장 가까운 친구한테 소원을 빌게 못 하면 페널티가 있다며. 그다음에 말하려다 만 거."
"아, 그거? 별거 아냐. 이번 소원은 너의 극적인 변화를 끌어낼 중차대한 건이기 때문에 의식도 살짝 달라진단 말이었어."
"어떻게?"
"지니가 좀 특별하다고나 할까?"
아, 지니... 소원의식 때 불에 태우는 제물. 하도 정신이 없어서 소원 성취에 필요한 지니를 깜박했다.

- "이번 지니는 사람이거든."
"사람?"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 들었다. 세상에, 오늘 밤 내가 불에 태워야 할 제물이 사람이라니...
"그래, 사람."
"그게 누군데?"
마녀가 턱짓으로 나를 가리켰다.

- "다른 소원은 언제 빈 거야?"
[동준이가 너한테 고백한 날. 진희 고년한테 막 따졌지. 어떻게 된 거냐고, 소원은 이뤄지지도 않았는데 이 무슨 날벼락이냐고.]
"그랬더니 뭐래?"
[진희 고년이 이러더라. '소원이 이루어지는 과정 중 일부야. 대를 위한 소의 희생은 어쩔 수 없는 거 아니겠어?' 겁나 어이없어 난 동준이랑 중학교 때부터 사귀었는데 너 좀 괴롭히자고 걔한테 차인다는 게 말이 돼?]
대를 위한 소의 희생. 그 말이 어쩐지 마음에 걸렸다.

- [그날 밤에 톡으로 물어봤지. 소원의 판을 좀 더 키워도 되냐고...]
"그랬더니?"
[된대. 그래서 나도 될 대로 되란 마음으로 빌었지.]
"뭐라고?"
[불로불사.]

- [그리고 그 결과...]
허공으로 붕 떠오른 마녀 인형이 내 눈앞에서 한 바퀴 빙그르르 돌았다.
[이렇게 된 거야. 진희 고 개년이 소원 성취와 그 대가를 동시에 선사한 거지.]

- 예전에 어떤 책에서 봤는데, 고대인들은 불로불사의 개념을 두 가지로 나눴다고 했다. 젊음을 유지한 채 영생을 얻거나, 일단 죽고 나서 다시 살아나거나. 진희는 혜정에게 두 가지를 동시에 선사했다. 일단 불에 타서 죽게 만든 후 마녀 인형 속에 자아가 깃들게 해 주었으니까.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진희가 만만치 않은 마녀인 줄은 진작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 내 앞에 고개 숙인 인형의 작은 몸과 군데군데 꿰맨 자국들을 보니 짠했다.

"너도 참 너다. 그냥 말하지 그랬어, 누가 뭐라고 한다고... 난 너보다 더 한심한 소원을 빌었는데..."
인형에게 손을 뻗어 품에 안았다. 혜정이가 내 품을 파고들며 울음을 터뜨렸다.
[역시 넌 내 하나뿐인 친구야. 이런 널 한때나마 죽도록 미워했던 내가 또 한심해진다. 미안해, 안 그래도 현민이 때문에 심란할 텐데 나까지 한몫 거들어서...]
"괜찮아."
[난 앞으로 영영 어른도 못 돼. 이 쬐끄만 인형에 지박령처럼 붙박여서 지구가 멸망한 뒤에도 혼자 살아가야 할지도 모르는데... 아씨, 눈물샘이 없어서 눈물도 안 나오네.]

- [말이 나와서 말인데... 네 세 번째 소원 말이야.]
"어, 그건 왜?"
[지금이라도 취소하면 안 될까?]
"취소해 달라 해도 안 해 줄 거고, 취소하지도 않을 거야."

약간의 페널티. 차라리 내가 그 모든 대가를 달게 받아들이는 편이 나았다.

- [너도 내 꼴 날까 봐 그래. 진희 고년이 너까지 불에 타서 죽게 한 담에 마녀 인형으로 부활시켜 주고 '왜, 네 소원대로 마녀가 되게 해 줬잖아.' 이러면서 나랑 쌍으로 마녀 인형 컬렉션이라도 만들면 어떡할래?] 
창밖으로 들리는 빗소리가 점점 더 커졌다.
"그렇게 되더라도 밀고 나가는 수밖에 없어. 이미 소원은 빌었으니까."
 
- 새 생명을 찾은 전화기를 내려다보았다. 한낱 기계일 뿐이지만 내게는 의미 있는 물건이었다. 현민이를 떠올리니 새삼 가슴 한편이 아렸다. 
어제 식당에서 현민이가 차갑게 대하던 순간이 되살아나 가슴팍을 쿡쿡 찔렀다. 어쩌면 그 애가 돌변한 이유가 나를 지키려는 마음 때문만은 아니었는지도 몰랐다. 전화기를 손에 꼭 쥐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그냥 이 폰 계속 쓸래."

- 그날 밤, 새벽 2시가 되기도 전에 진희에게서 카톡이 왔다.

[왜?]
[의식을 치를 장소가 따로 있거든]
[어딘데?]
[네가 어제 영미랑 놀았던 데]
이 마녀는 어제 일까지 훤히 알았다. 그렇다면 현민이와 영미 사이에도 있었던 일도 알아차렸을지 몰랐다.

- 지켜달라고 하려다 얘가 나은이를 돌보면 얼마나 돌보겠나 싶어 그만두었다. 오히려 나은이가 얠 돌봐야 할 판이었다.
[됐어, 이왕 이렇게 된 거 죽어도 너랑 같이 죽고 살아도 너랑 같이 살 거야.]
비장한 각오가 어린 목소리였다. 고맙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했다. 마녀 인형을 백팩에 담고 살그머니 방을 나오는데 등 뒤에서 방문이 벌컥 열렸다. 
"언니, 어디가?"
 
- "비도 엄청 오는데 오늘은 그냥 자고 내일 사 먹으면 안 돼?"
나은이가 어쩐지 이상했다. 꼭 뭘 알고 그러는 것 같았다.
"안 돼. 오늘 꼭 먹어야 직성이 풀릴 거 같아. 그러니까 얼른 들어가."

- 울렁거렸다. 식은땀이 나고 다리가 후들거렸다. 달아나고 싶었다. 현장 모퉁이에 몸을 숨기고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안나린, 정신 차려. 3시 다 됐다.]
혜정이의 외침에 간신히 마른침을 삼키며 마른세수를 했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정신이 번쩍 들어 진희에게 톡을 보냈다.

- [도착했어]
곧바로 답장이 날아왔다.
[엄지와 검지, 중지를 차례로 찔러서 피를 한 방울씩 마셔]

뭐로 찔러야 하나 고민하는데 눈앞에 옷핀 하나가 떴다.

 

- [이제 불 앞에 서서 눈을 감고 소원을 세 번 빌어]
길게 심호흡을 하고는 모퉁이에서 나왔다. 거대한 혓바닥을 날름대는 불길을 보니 달아나고 싶어졌다. 하지만 달아날 길은 없었다. 떨어지지 않는 발을 떼서 한 걸음 한 걸음 불길로 다가갔다. 불길이 뿜어대는 열기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눈을 질끈 감고 세 번째 소원을 빌었다. 
"마녀가 되고 싶어. 마녀가 되고 싶어. 마녀가 되고 싶어." 
내 목소리가 휑한 공사현장에 울려 퍼졌다. 눈을 뜨고 보니 전화기에 진희가 보낸 톡이 떠 있었다.
[이제 뛰어넘어]

- 바라보기만 해도 영혼까지 타버릴 듯한데 뛰어넘으라니... 미친 소리였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네가 감히 나를 뛰어넘겠느냐고 묻는 듯 불길이 천장까지 닿을 듯 치솟았다. 
[미쳤나 봐. 산 채로 태워 죽이려고 작정했나 보네, 그년이. 안나린, 설마 진짜로 할 건 아니지?]
대답 대신 백팩을 뒤쪽에 내려놓았다.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야. 안 죽어. 여기서 죽진 않을 거야. 두고 봐. 어떤 대가가 찾아오든 보란 듯이 마녀가 돼서, 받은 만큼 갚아줄 거야."

- 불길 속으로 몸을 날렸다. 후끈한 열기가 얼굴에 확 다가들었다. 얼굴만이 아니라 온몸을 통째로 태워버릴 기세의 열기였다. 그때 예상 밖의 일이 일어났다.
불길을 통과한 몸이 그대로 허공을 날았다. 벽이 다가왔다.

그대로 꿰뚫고 비가 쏟아지는 교정을 가로질렀다. 추진 로켓이라도 단 듯 무시무시한 속도로 밤거리를 날았다. 순식간에 무수한 건물과 거리를 뚫었다. 날이 밝고 날이 저물었다. 무수한 산과 들, 강을 지나 넓고 큰 바다를 날았다. 내가 뛰어넘은 영역은 공간만이 아니었다. 블랙홀로 빨려든 우주선처럼, 제어장치가 고장 난 타임머신처럼 시간마저 거슬렀다. 수많은 낮과 밤이 눈앞을 스쳤다. 세상이 생겨나고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산이 사라지고 강이 말랐고 화산에서 용암이 솟구치고 거대한 버섯구름이 피어올랐다. 생성과 소멸이 미친 듯 엇갈리면서 형체도 구분이 안 갈 정도였다. 눈을 뜨기 버거울 정도로 눈앞이 어지러웠다. 이윽고 눈앞이 확 밝아졌다. 

- "마녀를 찾아라!"
재판관이 입을 모아 외치는 쩌렁쩌렁한 고함이 광장 한복판에 울려 퍼진다. 광장을 에워싼 군중들이 그를 따라 일제히 외쳐댄다.
"마녀를 찾아라! 독 있는 뱀처럼 박살 내 버려라!"
분노에 찬 외침이다. 그 기세에 놀란 새 떼 한 무리가 푸드덕거리며 한여름 태양이 이글대는 하늘로 날아오른다. 쥐와 벌레가 들끓는 지하 감옥에 사흘 밤낮을 갇혀 있다 밖으로 끌려 나오니 햇빛에 눈이 멀 듯하다. 온몸의 물기는 말라버린 지 오래다. 갈라진 입술에서 진득한 액체가 흐른다. 목이 말라 죽을 지경이다. 광장 한복판의 무대에 선 재판관은 햇빛을 받아 거인처럼 보인다. 피둥피둥한 그의 얼굴이 땀과 기름으로 번들거린다. 그가 두 팔을 번쩍 들어 올린다. 손에 들린 두툼한 갈색 양장본 책이 칼날처럼 번뜩인다. <MALLEUS MALEFICARUM>이다.

- "본관은 사흘간 금식하며 신께 요청했다."
그가 외치자 군중들의 광분이 삽시간에 잦아든다.
"이렌느 슐츠가 과연 유죄인지, 무죄인지... 마녀인지, 마녀가 아닌지를 요청하고 또 요청했다. 그리고... 바로 오늘 새벽 그 요청의 답이 내게 내려왔다."
군중들이 성호를 그으며 두 손을 모은다. 재판관이 내 쪽을 보며 고개를 끄덕이자 눈앞을 가로막았던 군중의 벽이 양옆으로 우르르 갈라진다. 재판관이 선 광장의 무대로 한 줄기 길이 트인다.

- 초주검이 된 나를 시자(侍者)들이 질질 끌고 향한다. 군중들의 시선이 나에게로 쏠린다. 나를 악마와 교접한 마녀로 몰았던 자들이다. 아프다. 무수한 채찍질에 살이 갈기갈기 찢겼고 딱지 앉은 상처에서 피고름이 흘러나온다. 살을 찢고 튀어온 복사뼈가 빠각거린다. 뒤로 묶인 손목 아래로 쇳덩이를 매단 손은 손가락이 모조리 비틀려 감각도 없다. 이대로 죽고만 싶다. 시자들은 내 머리를 박박 밀고, 잘린 머리채를 불구덩이 속 ...

- "마녀의 별!"
재판관이 외친다.
"악마와 교접한 마녀에게는 그 표식으로 마녀의 별이 몸뚱이에 새겨진다. 오늘, 나는 이렌느 슐츠의 몸뚱이에 새겨진 마녀의 별을 만천하에 내보이겠노라."
형리가 내 어깨에 걸친 누더기를 와락 끌어내린다. 내 왼쪽 어깻죽지에 새겨진 별을 본 자들이 탄식한다. 성호를 긋는 이도 있다. 아무도 모른다. 이 문신 또한 사흘 전 형리들이 내 어깻죽지에 새긴 것임을... 
"자, 이제 모든 것이 밝혀졌다. 나, 도미니크 비제는 신의 대리인인 집행관의 자격으로 마녀 이렌느 슐츠의 화형을 언도하노라!"

- 그가 외치자 형리들이 내게로 달려들어 나를 광장 한복판에 세워진 화형대에 매단다. 나는 이제 죽는다. 아침에 해가 뜨고 저녁에 해가 지듯 내 의지로는 바꾸지 못할 일이다. 하지만 이대로 죽기에는 원통하다. 신의 대리인을 자처한 저 가증스러운 자들을 노려본다.
'당신들은 나를 겁탈하려고 했다.'
당장에라도 진상을 털어놓고 싶다. 열흘 전 깊은 밤, 저놈들이 우리 집에 찾아와 나를 침대로 끌고 가 욕보이려 했다. 내가 저항하며 비명을 지르자 이웃집에 하나둘 불이 켜졌다. 결국, 놈들은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뒷문으로 달아났다. 그러고는 며칠 후 마녀의 오명을 들고 들이닥쳤다. 

- 내가 말라비틀어진 입술을 달싹거리자, 재판관의 우렁찬 외침이 내 목소리를 덮어버린다.
"신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성화로 악마와 계약한 마녀의 더러운 육신과 영혼을 불태우겠노라!"
신의 이름으로...?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온다. 낄낄 웃다가 쿨럭거리며 핏덩이를 토해내고 나자, 비로소 목이 트인다.
"날 불태우면 끝인 줄 아느냐? 네놈들도 언젠가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재판관과 형리들, 그리고 군중을 하나하나 둘러보며 외친다. 군중이 웅성거리기 시작한다.

 

- 그때 사방이 어두컴컴해진다. 검은 그림자가 빠르게 태양을 좀먹는다. 하늘을 올려다본 군중들이 겁에 질려 탄식한다. 비명을 지르는 이도 있다.
"마녀의 소행이다. 마녀를 불태워라! 독 있는 뱀처럼 박살 내버려라!"
재판관이 침을 튀기며 외친다. 그는 형리에게서 성화를 빼앗아내 발밑에 쌓인 검불과 마른 장작에 불을 붙인다. 분노와 증오의 불길이 발밑에서 솟구친다. 누린내가 진동하고 살이 타들어가는 고통에 비명이 터진다. 눈을 부릅뜨고 놈들을 쏘아본다.
"검은 태양의 눈에 대고 맹세하나니, 네놈들도 대가를 치르게 되리라!"

- 사방이 어두워지고 나를 태우는 불길만이 게오르겐탈의 광장을 밝힌다. 시커먼 하늘을 올려다본다. 둥글고 검은 그림자가 태양을 완전히 가린다. 그림자에 가려진 태양은 그 자체로 이 더럽고 추악한 세상을 내려다보는 거대한 눈이다. 그 눈을 올려다보며 외친다.
"내 불의 제물이 되어 간절히 비나니, 내게 저놈들을 심판할 힘을 주소서!" 
몸을 파고든 불길이 성대와 눈마저 태워버린다. 말할 수도, 볼 수도 없다. 오로지 온몸을 파고드는 고통뿐이다. 이윽고 불길은 고통마저도 태워버린다. 

- [괜찮아, 안나린! 정신 좀 차려!]
그제야 눈앞의 마녀 인형이 눈에 들어왔다. 간신히 제정신이 돌아왔지만, 한동안 내가 누구이며 여기가 어디인지도 몰라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깊은 물에 빠져 가라앉다 물 위로 올라온 듯 머릿속이 멍했다. 한참 만에 내가 안나린이라는 대한민국의 여고생이며 새벽에 소원 의식을 치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벌떡 일어나 몸 여기저기를 살폈다. 놀랍게도 멀쩡했다. 
[살았구나! 역시 안나린! 너도 나처럼 죽는 줄 알았잖아.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기나 해?] 
혜정이가 내 품에 폭 파고들었다. 엉겁결에 인형을 안고 다독이며 돌아보았다. 등 뒤로 너울대는 불길이 보였고 쏟아지는 빗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뛰어넘었던 모닥불은 어느새 수명이 다한 듯 수그러드는 중이었다. 

- "내가 얼마나 이러고 있었어?"
[기억 안 나?]
"어, 꽤 오래 지난 거 같은데..."
한 수백 년쯤.
[불쇼 찍고 자빠진 담에 바로 그 난리를 쳤으니 한 10초도 안 됐겠네.]
"10초?"

- 입이 떡 벌어졌다. 그 멀고도 길었던 여정이 고작 몇 초였다니... 꿈인지 환상인지 분간 못할 상황이었지만 너무나 생생했다. 지금도 온몸을 파고들던 열기가 잔영으로 남아 살갗이 화끈거릴 정도였다. 그러고 보니 기억났다. 첫 번째 소원의 대가가 찾아오기 전날 밤에도 이와 비슷한 악몽을 꾸었다. 아니, 어쩌면 악몽이 아닌 다른 것. 

- "처음이 아니었어."
[뭐가?]
"불."
[불? 어릴 때 한 불장난?]
"아니, 훨씬 오래전..."
오늘은 그때와 달리 또렷이 기억났다. 나를 재판하던 재판관의 얼굴과 그가 들었던 책, <MALLEUS MALEFICARUM>.

- 마녀의 망치.
'말레우스 말레피카룸'으로 다시 검색해 보았다. '인류사에 재앙을 불러일으킨 책들'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검색 결과에 떴다.

- [마녀사냥의 교본 '말레우스 말레피카룸(Malleus Maleficarum)'. '마녀의 망치'라 불리는 이 책에는 마녀 색출과 근절 방법을 담고 있다. 이 책의 등장으로 유럽 전역은 마녀사냥의 분위기로 들끓게 된다. 책은 총 3부로 나뉘는데, 1부에서는 마술과 주술이 존재하며 여자가 악마의 유혹에 넘어간 마녀의 실상과 타락상을 강조하고, 2부에서는 마녀들이 벌이는 기괴한 일들, 예컨대, 악마와의 계약, 교접, 공중을 날아다님, 변신 등에 관한 이야기들을 수집한다. 제3부는 마녀재판의 법 절차를 해설한다. 마녀에게서 자백을 받아내기 위한 방법으로 고문을 인정했으며, 사탄 편에 가담한 자들을 없애는 종교재판관을 돕기 위해 평신도와 세속 권력자들을 소환했다. 저자는 도미니코 수도회의 수사인 하인리히 크레머와 요하네스 슈프렝거다.] 

 

- 책의 이미지도 검색 결과에 같이 나왔다. 뱀 같은 덩굴 문양이 새겨진 두툼한 갈색 양장본. 오랜 세월에 빛바래기는 했지만 내가 환영에서 보았던 그대로였다. 

- "난 전생 같은 거 안 믿어."
[나도 영혼 같은 거 안 믿었거든. 이 모양 이 꼴이 되기 전까지는...] 
하기는 뭐든 겪어 봐야 믿게 마련이었다. 염력이니 마녀니 하는 개념들도 말로만 들으면 황당하기만 했다. 하지만 겪어보니 염력도, 마녀도 진짜 있었다.

- 이렌느 슐츠는 실존 인물일까. <말레우스 말레피카룸>은 실제 책이었다. 그런데 진희도 한 권 소장 중이라는 말이 어쩐지 찝찝했다. 모든 환상이 진희의 농간은 아니었을까. '게오르겐탈'을 검색해 보았다. '마녀사냥'이라는 제목의 지식백과 문서가 떴다.

- 마녀사냥은 15세기 초부터 산발적으로 시작되어 16세기말~17세기가 전성기였다. 당시 유럽 사회는 악마적 마법의 존재, 곧 마법의 집회와 밀교가 존재한다고 믿고 있었다. 초기에는 희생자의 수도 적었고, 종교재판소가 마녀사냥을 전담하였지만, 세속법정이 마녀사냥을 주관하게 되면서 광기에 휩싸이게 되었다. 
뒤이어 프랑스와 독일을 비롯한 유럽 각 지방의 마녀재판 횟수와 희생자 수의 기록이 이어졌다. 밑으로 쭉 넘겼다.

있었다.
[튀링겐 숲에 인접한 게오르겐탈이라는 인구 4000명에 불과한 작은 도시에서 1652~1700년에 64회의 마녀재판이 실시되었다.]

 
- [맞다, 개기일식 한번 검색해 봐.]
이렌느 슐츠가 불타던 순간, 그림자가 태양을 뒤덮은 현상은 분명 개기일식이었다. 달이 태양과 지구 사이에 놓여 지구에서 볼 때 달이 태양을 완전히 가리는 현상. 검색어를 이리저리 바꾸어가며 찾아봤지만 1652년부터 1700년 사이 독일에 개기일식이 일어났다는 기록은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 결국, 동틀 무렵쯤 검색을 포기했다. 잠시라도 눈을 붙이려 했지만 이렌느의 외침이 귓가를 떠나지 않았다.
[검은 태양의 눈에 대고 맹세하나니, 네놈들도 대가를 치르게 되리라!]
그 아이가 죽기 직전 올려다본 검은 태양의 눈은 호루스의 눈을 빼닮았다. 어쩌면 둘은 가깝게 이어져 있는지도 몰랐다.
[내 불의 제물이 되어 간절히 비나니, 내게 저놈들을 심판할 힘을 주소서!]

- 마음에도 없는 인사로 답하며 곁눈질로 진희의 얼굴을 흘깃 살폈다. 왼쪽 눈 밑에 살포시 자리 잡은 미인 점. 언뜻 보면 그냥 동그란 점이었지만 가까이에서 가만히 들여다보면 원형이 아니라 별 모양에 가까운 점. 이 마녀의 미모에 마성까지 더하는 화룡점정. 재판관의 말이 떠올랐다.

'악마와 교접한 마녀에게는 그 표식으로 마녀의 별이 몸뚱이에 새겨진다.'
혹시 저 점이 정말 마녀의 표식은 아닐까. 교실 문이 열리고 영미와 팔짱을 낀 현민이가 들어섰다.

- 아이들이 환호했다. 영미가 손으로 브이 자를 만들어 보이며 화답했다. 현민이는 여전히 나를 못 본 척했다. 그때 뭔가 번뜩 뇌리를 스쳤다. 현민이의 정수리 바로 밑에도 별이 있었다. 그 애가 나 대신 벽돌을 맞았던 날 상처를 살피다 봤던, 점이라기보다는 문신에 가까운 문양. 현민이의 별은 점에 가까운 진희와는 약간 달랐다. 진희의 별은 속이 검은 육각별이었지만 현민이의 별은 속이 비어 있었다. 그날 내가 현민이의 별을 문신에 가까운 문양이라고 여겼던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었다.

- [혹시 현민이도 마녀는 아닐까?]
화장실 칸 안에 들어서자 혜정이가 조심스레 추리했다. 

"남자 마녀도 있어?"
[있어, 나도 좀 찾아봤는데, '위치(Witch)'가 대개 여자를 의미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남자 마녀가 아예 없는 건 아니래. 그래서 '마녀'라는 단어 자체가 정확한 번역은 아니래.]

- "그럼 현민이가 마인일지도 모른다 이 말이야?"
[외국에서 마녀는 두 가지로 나뉜대. 검은 마녀와 흰 마녀. 검은 마녀는 저주나 흑마술로 농작물을 말라 죽게 하거나, 인형에 바늘을 찔러 누군가를 죽게 하는 저주를 내렸고, 흰 마녀는 주문이나 약초로 병을 고치고, 가뭄이 오면 비가 오기를 하늘에 비는 일을 했대.] 
"그럼 진회의 별은 검은 마녀란 뜻이고, 현민이의 별은 흰 마녀, 아니, 흰 마인이란 뜻이다?"
일리가 있는 추리였지만 확신이 생기지는 않았다.

- [죽어가는 생명을 살리는 건 긍정적인 일이니 검은 마녀가 아니라 흰 마녀의 일이야. 현민이 정수리에 별 모양 표식까지 있었다며? 그럼 현민이가 흰 마녀, 아니, 마인이란 소리지. 아아, 난 아무래도 탐정을 했어야 해. 셜록 혜정!] 
혜정이가 자신의 추리에 뿌듯해하며 허공을 한 바퀴 빙그르르 돌았다. 기분이 좋을 때 하는 행동이었다. 하지만 그 애의 추리보다 더 복잡한 내막이 있을지도 몰랐다. 어쩌면 그 모든 것들이 그저 우연의 일치인지도... 

- "아!"
어깻죽지에 통증이 일었다. 어릴 때 선산에 성묘 갔다가 땅벌에 쏘였던 때처럼 아팠다.
[왜 그래?]
"어깨가 아파."
[뭐가 물었나? 어디 봐봐.]
블라우스 단추를 풀고 왼쪽 어깨를 드러냈다.

 

- [글쎄, 이건 니가 직접 봐야 될 거 같은데...]

혜정이가 그렇게 얼버무렸을 때 불길한 예감이 일었다. 인형을 백팩에 넣고 화장실 칸막이 문을 열었다. 화장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세면대 거울 앞으로 다가갔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통증은 여전히 은은하게 왼쪽 어깻죽지를 찔렀다. 
'악마와 교접한 마녀에게는 그 표식으로 마녀의 별이 몸뚱이에 새겨진다. 오늘, 나는 이렌느 슐츠의 몸뚱이에 새겨진 마녀의 별을 만천하에 내보이겠노라.'
재판관의 말이 귓가에 땅벌처럼 웽웽 맴돌았다. 통증이 시작된 곳은 어깻죽지 위에 새겨진 문양이었다. 점처럼 검은 별 모양이었다.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지든 감수할 각오는 되어 있었다. 내가 가장 감명 깊게 본 영화는 <그래비티>였다. 개봉 첫날 엄마 아빠와 디지털로 보고, 다음 날 3D로 또 봤다. 극장에서 내릴 때까지 열 번도 더 보아서 클라이맥스의 대사는 줄줄 외울 정도였다.

"내가 보기에 예상되는 결과는 두 가지다. 멀쩡한 상태로 내려가 멋진 모험담을 들려주거나, 앞으로 10분 안에 불타 죽거나. 어느 쪽이든 밑져야 본전이다. 어떻게 되든 엄청난 여행일 거다. 난 준비됐다."
그래, 어느 쪽이든 밑져야 본전이었다. 나도 준비됐다.

- 그날도 현민이는 교문 앞에 대령한 승용차를 영미와 함께 타고 사라졌다. 현민이가 곁에 없는 방과 후는 주인공이 실종된 로맨스 소설처럼 텅 빈 느낌이었다.

- 모터사이클을 타고 뒤따라 나온 동준이가 내게 헬멧을 건네며 말했다.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너, 진희한테 소원 몇 개 빌었어?"
"몇 개는 무슨... 하나가 다야."
대충 감은 잡았는데도 녀석은 소원 이야기만 나오면 발을 뺐다. 잡아떼려면 티나 덜 나게 잡아떼든가.
"확실해?"

 

- 혜정이의 말에 기억이 났다. 나를 불러 세운 그 할아버지는 죽은 진희의 할아버지였다. 덥수룩했던 그날과 달리 오늘은 이발과 면도를 말끔히 한 듯 말끔했다. 그날이 간달프였다면 오늘은 매그니토였다. '꽃할배'라는 말이 딱 어울릴 모습이었다. 그날은 연락처도 남기지 않고 돌아왔다. 아마 내 교복을 기억하고 무작정 학교로 찾아와 교문 앞에서 기다리신 모양이었다.
 
- "진희가 죽기 전날, 나한테 남긴 거다."
"근데 이걸 왜 저한테..."
"이거 주면서 진희가 그러더라. 나중에 혹시 자기한테 무슨 일이 생기고 찾아오는 친구 있으면 꼭 전해 주라고..."
 
- "진희가 그랬거든. 언젠가 찾아올 친구가 나쁜 애는 아닐 거라고..." 
귀에 익은 말이었다. 너 나쁜 애 아닌 거 안다는 그 말. 그 말을 어떻게 잊을까. 아마 죽는 날까지 못 잊을 터였다. 세상 누구도 나를 믿지 않고 돌을 던질 때 나를 보듬어 주었던 단 한 사람. 정말 현민이는 전생에 이렌느 슐츠를 좋아했던 목동 하인즈였을까. 아니면 검은 마녀 진희에 맞서는 흰 마인일까. 이도 저도 아니면 그저 나를 좋아하는, 아니, 좋아했던 남자일까. 어쩌면 셋 다일지도 몰랐다.

 

"네가 다녀간 뒤에 미모사가 꽃을 피웠더라. 진희가 죽은 뒤로 이파리를 잔뜩 움츠리고 곧 죽을 듯 시들시들했는데 살아났어.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 지도 모르겠다만, 진희 말과 늙은 이 감을 한번 믿어보기로 했다. 보고 불태워 버리라더라." 
그 말을 끝으로 할아버지는 미련 없이 멀어져 갔다. 이번에는 내가 뭐라고 물어도 돌아서지 않을 듯했다. 쪽지와 할아버지를 번갈아 보았지만, 뭐라 말해야 할지 몰랐다. 
 
- 쪽지에 적힌 열세 글자의 메시지를 확인한 순간, 온몸이 얼어붙었다.
[너는 마녀를 살려두지 말지니라]


- 스마트폰을 꺼내어 인터넷에 접속해 그 문구를 검색해 보았다. 검색 결과가 뜬 순간, 전화기를 떨어뜨릴 뻔했다. 어느 블로그의 포스트 제목에 낯익은 문구가 눈에 띄었기 때문이었다. <말레우스 말레피카룸>! 미리 보기로 보이는 블로그 내용은 그 둘을 제대로 묶었다.
 
- "세상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하인리히 크라머가 <말레우스 말레피카룸>을 쓴 줄은 알았지만, '너는 마녀를 살려두지 말지니라.'라는 성경 구절을 이용했다는 사실은 처음 알았다. 아래 검색 결과에는 더 상세한 출처가 나왔다. 
[출애굽기 22장 18절 너는 무당을 살려두지 말라]
같은 문구이지만, 어떻게 번역하느냐에 따라 '마녀'가 되기도 하고 '무당'이 되기도 하는 모양이었다. 결국, 죽은 진희는 마지막 메시지로 출애굽기 22장 18절에 명시된 문구를 남긴 셈이었다. 대체 왜...? 죽은 자는 말이 없다. 그러니 다잉 메시지를 해석하는 일은 오롯이 산 자의 몫이었다. 
 
- "<말레우스 말레피카룸>을 쓰는 데에 결정적인 근거로 삼은 구절이 출애굽기 22장 18절이라잖아. 그 책이 마녀사냥의 교본이 됐고... 출애굽기의 문구를 악용한 거지. 죽은 진희가 나더러 그러지 말라는 경고를 남긴 건 아닐까."
[야, 그건 꿈보다 해몽이다. 이 쪽지는 말 그대로 그냥 진희 고년을 살려두지 말란 소리야. 진희 고년 때문에 인생 파탄 난 사람이 몇이니? 죽은 진희도 걔가 마녀란 사실을 알았던 거야.]
"좋아. 그렇다 쳐. 그럼 죽은 진희는 그 사실을 어떻게 알았던 건데?"
[어떻게 알긴... 죽은 진희도 마녀였던 거지.]
 
"왜 이걸 보고 불태워 버리라고 했을까?"

- [나 좀 봐]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현민이의 카톡을 받았다. 그 세 글자밖에 안 되는 카톡이 어찌나 반갑고 설레던지 눈물이 날 뻔했다. 답장도 몇 번이나 썼다 지웠기를 되풀이했다. 화를 낼까, 따질까, 아니면 그냥 무덤덤하게 대할까. 혹시 영미가 또 현민이 폰으로 연락한 건 아닐까. 오만가지 생각들이 떠올랐다가 사그라졌다. 고심 끝에 답장을 보냈다. 
[왜?]
[볼일이 있어서]

- [집 앞으로 갈게]
현민이는 그렇게 용건만 말하고 톡을 끊었다. 어찌나 단호한지 뭐라고 더 물어보면 한 대 칠 기세였다.
[완전 단호박이네. 얘 요즘 왜 이러냐. 원래 이런 애였는데 너한테만 아닌 척한 건가?]
앞으로 맨 백팩 지퍼 틈으로 전화기를 보여 주자 혜정이 중얼거렸다.
"모르겠어, 왜 그러는지."

- 아니라면 쪽지를 불태워 버리라는 말도 있는 그대로의 의미가 아닐지도 몰랐다.
"쪽지... 불태워 버리다..."
그러다 머리에 뭐가 번뜩 스쳤다. 쪽지에 코를 들이대고 냄새를 맡았다. 희미한 레몬 냄새가 났다. 유레카! 서둘러 책상 서랍을 뒤졌다. 전에 혜정이를 위협할 때 써먹고 처박아둔 라이터를 꺼내어 쪽지를 책상에 고르게 폈다.

- 불꽃이 종이 밑에 어른거리자 쪽지 군데군데에 희미한 갈색 획들이 마술처럼 드러났다. 쪽지가 불타지 않을 만큼 거리를 유지하며 불꽃을 쪽지에 골고루 쬐었다.
[아하, 비밀편지!]
종이에 묻은 레몬의 시트르산이 종이의 셀룰로오스에서 수소와 산소를 뽑아내고 탄소만 남겨놓으면서 레몬 잉크가 묻은 자리만 갈색으로 변하는 원리였다. 이윽고 글자가 또렷이 나타났다. 죽은 진희가 남긴 진짜 다잉 메시지였다

- [그 무슨 영화더라? 사랑의 기억을 지우는 영화 있었잖아, '인터넷 선샤인'인가? 짐 캐리 나오는 거.]
백팩에서 나온 혜정이가 말했다.
"<이터널 선샤인>?"
[맞다. 그거. 그 영화에 나오는 기억 삭제 방법이 그렇게 황당한 얘기만은 아니래. 실제로 네덜란드의 어떤 신경학자가 환자 뇌에 전류를 보내서 짧은 충격을 주는 전기치료로 기억을 지우는 실험을 했는데 성공했대.] 

- 만에 하나, 유진이란 아이가 실제로 나와 친했고 그 아이가 죽은 일도 사실이라면 관련된 내 기억도 지워진 모양이었다. 그렇지 않고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미스터리였다. 인터넷에 접속해 '기억 지운다'로 검색을 해 보았다. '내 머릿속 트라우마, 공포기억만 찾아 지운다'는 제목의 기사가 떴다. 
[미국 리버사이드 캘리포니아대의 한국인 교수와 연구원이 실험용 쥐에게 어떤 소리를 들려주고 그때마다 전기충격을 줬다. 그 뒤로 쥐는 전기충격 없이 소리만 들려줘도 공포기억 때문에 겁에 질려 움직이지 않았다. 그다음 빛으로 뇌를 제어하는 '광유전학(Optogenetics)' 기술로 공포기억을 담당하는 편도체와 청각 신경세포 사이의 연결을 약하게 했더니 쥐의 공포 반응도 약해졌다고 했다.]

- '기억 지워'로 다시 검색해 보았다. 불행한 기억을 지워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치료하는 실험이 세계적으로 활발히 진행 중이라는 기사가 여럿 떴다. 미국 하버드대 의대 교수팀은 제논 가스로 실험용 쥐의 기억을 지웠고, 미국 MIT의 도네가와 스스무 교수팀은 공포를 느끼는 신경세포에 빛을 전달하는 광섬유를 이식해 실험용 쥐의 감정까지 바꾸는 실험에 성공했다. 그렇게 머릿속의 기억을 지우거나 바꾸는 일을 '브레인 모듈레이션'이라 부른다고 했다. 

- 진희라면 기억 조작이 마냥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다. 소원도 들어주는 마녀니까.

이번에도 그러기를 간절히 바랐다. 심호흡을 깊게 세 번 한 후 숨을 멈췄다.
[나, 무서워, 안나린, 진짜로...]
내 의도를 알아차린 혜정이가 겁에 질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불에 타 죽은 기억이 떠오르는 모양이었다.
"나도 무서워. 근데 무섭다고 달아나면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아."

- 방문 손잡이를 잡아 돌렸다. 문을 열자마자 연기와 불길이 확 달려들었다. 불길은 이미 거실 바닥에서 소파까지 번져 활활 타오르는 중이었다.
지지 않아. 죽지 않을 거야!

이를 악물고 왼손을 등 뒤로 뻗어 염력으로 홑이불을 치켜들어 홱 날렸다. 거실 바닥으로 날아간 홑이불이 불길을 뒤덮자, 잠깐이나마 불길이 잦아들었다. 불길을 더 돋우는 불쏘시개 역할을 하기 전에 오른손을 주방 싱크대 쪽으로 뻗었다. 손을 허공에 돌려 수도꼭지를 최대한 틀었다. 물이 쏟아지자마자 물줄기를 불길 쪽으로 틀어 흩뿌렸다. 거실이 매캐해졌다. 쿨럭거리면서도 물러서지는 않았다. 
 
- "나 처음 본 게 작년 12월이라며?"
내가 나은이와 선생님에게 전해 들은 말이 맞는다면 유진이란 애는 10월 말에서 11월 초에 죽었다. 그렇다면 나와 12월에 함께 있었을 리 없다. 동준이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건 진희한테 내 여친이 너였음 좋겠다고 빌었을 때고."
"그럼 날 처음 본 게 언젠데?"
"10월 초."

- 10월 초라면 유진이가 죽기 전이었다. 그때 내가 걔랑 있었다고?
"나 처음 본 날 얘기했을 때 걔 얘긴 안 했잖아."

"안 물어봤으니까."
스마트폰을 꺼내어 갤러리로 들어가 동준이에게 유진이의 사진을 들이댔다.

- [안나린, 아무래도 너 빼고 다들 얠 아나 보다, 야]
혜정이가 중얼거렸다. 나 빼고 다 아는 아이. 어쩌면 이 미궁을 빠져나갈 아리아드네의 명주실이나 진희와 나 사이의 빠진 퍼즐 조각이 될지도 모르는 아이, 유진. 우선 이 아이와 관련된 기억부터 되살려야만 했다. 죽은 진희가 마지막으로 남긴 단서였으니 파고들어야만 했다. 

- "동준오빠라도 있어서 다행이네."
속사정을 알 리 없는 나은이는 멋모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 애가 근처 제과점에서 사 온 샌드위치로 아침을 때우고 나가 가구점과 전자대리점에서 새 소파와 텔레비전을 사며 오전을 보냈다. 소파와 텔레비전을 설치하고 유리 기술자를 불러 유리창을 갈았다. 통장을 탈탈 털어 현관에 CCTV까지 달고 벽지를 사다 거실 도배까지 새로 했다. 그러고 나니 어느덧 해 질 녘이 되었다.

 

하루 더 있겠다는 동준이의 등을 떠밀어 보내고 서둘러 집 근처의 시립도서관으로 갔다. 
<마녀의 문화사>라는 책을 빌려왔다. 인터넷에서 '말레피쿠스'를 검색하다 알게 된 책이었다. 제목이 익숙해서 생각해 보니, 혜정이가 혈서로 나를 저주하는 글을 써 놓았던 책도 이 책이었다. 마녀라는 존재가 어떻게 생겨났고 어떤 박해를 받았는지를 역사학적으로 분석한 책이라고 해서 도움이 될 것 같았다. 책을 훑어보다 내가 찾던 단어를 발견했다. 

- 때때로 번역은 박해를 촉진하기도 했다. 이와 관련해 가장 중요한 예는 '출애굽기 22장 18절'인데, 원래 히브리어 판에는 이 대목이 '카샵은 살해당한다'로 명시되어 있다. 카샵이란 주술사, 점술사 또는 마법사이긴 하지만, 악령숭배와는 아무런 관련도 없다라틴어판 성서인 울가타 Vulgate에는 이것이 'Maleficos nos patieris vivere(너는 말레피쿠스를 살아 있게 해서는 안 된다)'로 번역되었다. 울가타의 번역이 완성되었을 당시에는 말레피쿠스('악을 행하는 자'라는 뜻의 형용사 및 명사형의 남성 주격 - 옮긴이)라는 말 자체의 뜻이 아직 분명치 않아서, 해악을 끼치는 마법사를 가리키기도 했지만, 뭔가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이라는 뜻으로도 쓰였다. 이후 유럽에 마녀가 속출하게 됨에 따라, 이 말은 특히 악마에게 바쳐진 마녀를 가리키게 되었고, 이 구절은 다시 마녀 처형을 정당화하는 근거로 이용되었다. 

<마녀의 문화사>에서 인용, 제프리 버튼 러셀 지음, 김은주 옮김, 르네상스 출판사

 

- [다 진희 고년의 전략이야. 고년이 유진이랑 닮았기 때문에 너도 친근감을 느껴서 고년이랑 친해졌고 그러다 홀딱 넘어간 거지. 노렸네 노렸어.]
과연 그럴까. 그날 밤도 늦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였다. 내가 잠들면 또 다른 테러가 집으로 날아들지도 몰랐다. 무엇보다 디데이가 코앞이었다. 내 세 번째 소원이 이루어지는 날.

- [잠이 안 와? 내가 자장가 들려줄까?]
혜정이가 오르골로 <종소리>를 들려주었지만, 오히려 역효과가 났다. 새벽 4시가 넘어 겨우 잠들었다가 지독한 악몽을 꾸기까지 했다. 꿈에서 나는 이렌느 슐츠였고 내 발밑에 불을 놓은 장본인은 현민이였다. 불길이 치솟는 와중에 불길 너머에서 나를 바라보는 얼굴들을 보았다. 죽은 진희와 유진이 있었고, 영미와 진희도 있었다. 내 머리 위에서 검은 달그림자가 태양을 완전히 뒤덮었다.

- 그렇게 마녀가 되어 맞는 첫 번째 날이 밝았다.
눈을 떴다.
[어때? 뭔가 달라진 느낌 들어?]
혜정이가 물었지만, 딱히 느껴지는 변화는 없었다.

- [거울 봐. 봐 보면 알아.]
일어나 거울 앞으로 다가갔다.
"어!"
거울에 비친 나를 보자 절로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뭔가 달라졌다. 하룻밤 사이에 딴판이 되지는 않았어도 분명 달라졌다. 일단 눈동자 색부터가 어제와는 미묘하게 달라졌다. 어제까지 내 눈에 감돌던 푸른빛이 선홍빛으로 바뀌었다. 눈빛은 눈동자를 둘러싼 홍채의 멜라닌 색소로 정해진다고 배웠다. 대개 멜라닌 색소는 흑갈색인데 멜라닌 색소가 많을수록 흑갈색으로 보이고, 색소의 양이 적을수록 청색, 색소가 모자란 홍채는 적색으로 보인다고 했다. 그런데 난데없는 이 눈빛은 뭐지? 

- 변화는 그뿐이 아니었다.
[너 되게 예뻐진 거 알아? 뭐야, 그거. 무서워.]
내 옆으로 다가온 혜정이가 거울에 비친 나를 이리저리 들여다보며 중얼거렸다.
[에이,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마녀가 되게 해 달라고 빌걸! 완전 일타쌍피잖아.]

- 혜정이의 호들갑이 과장은 아니었다. 내 눈에도 얼굴이 어제와는 사뭇 달라 보였다. 눈도 더 커지고 콧대가 더 높아지고 얼굴은 더 갸름해졌다. 근 두 달간이나 제대로 못 자서 푸석푸석했던 피부도 물광을 낸 듯 보얗고 매끄러워졌다.

- 내 변화를 알아차린 사람은 혜정이만이 아니었다.
"어, 뭐야?"
욕실에서 세수하고 나오던 나와 마주친 나은이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밤새 어디 가서 쁘띠 성형이라도 받고 옴?"
“뭔 소리야, 잠 덜 깼어?"
"우리 언니 아닌 거 같아. 어이, 당신, 우리 언니 맞아? 혹시 우리 언니 손톱 먹고 둔갑한 쥐 아냐? 어디 보자. 등에 점이 있나, 없나."
나은이가 장난기 어린 얼굴로 다가와 티셔츠의 왼쪽 어깨 부분을 끌어내렸다.

- "이 점들은 또 언제 생겼대?"
"점들?"
엥? '점'도 아니고 '점들'이라니...
이상했다. 지난주 금요일에 학교 화장실에서 비춰봤을 때만 해도 분명 왼쪽 어깻죽지에 생긴 점 하나가 전부였다. 거실 한편에 놓인 거울로 가서 왼쪽 어깨를 비췄다. 왼쪽 어깻죽지 한복판에 자리 잡은 별은 그대로였다. 그런데 별을 에워싼 새로운 문양들이 보였다. 꼭지가 키세스 초콜릿처럼 기울어진 네 개의 세모꼴이었다. 고깔모자 같기도 하고 잎사귀 같기도 했다. 세모꼴 아래로 이어진 짤막한 줄기에는 물결표 모양의 떡잎이 달렸다. 꼭지 부분이 별로 모인 세모꼴 네 개가 동서남북으로 별을 에워쌌다. 

 

- "어? 이게 언제 생겼지?"
내가 중얼거리자 나은이가 나직이 탄식했다.
"어떡해."
아이고, 이제 큰일 났다. 딱 그런 투였다.

- "보일 만한 위치는 아니긴 한데..."
그러다 말을 멈췄다. 소원 의식 때 본 환상 속에서 재판관이 했던 말이 또다시 귓가에 되살아났다. 

'악마와 교접한 마녀에게는 그 표식으로 마녀의 별이 몸뚱이에 새겨진다. 오늘, 나는 이렌느 슐츠의 몸뚱이에 새겨진 마녀의 별을 만천하에 내보이겠노라'

'오 쟤 끝내주는데? 아이돌 연습생인가?'
'우유에 콘후레이크라도 말아먹고 나올걸. 배고파.'
'주식이 너무 떨어졌네. 지금이라도 팔아야 되나?'
'쟤 보니까 나도 고치고 싶어. 쌍수에 앞트임 뒤트임에 필러까지만... 돈 벌면 해야지.'
'카드대금을 막아야 하는데 미치겠네. 어디서 돈벼락 좀 안 떨어지나?'
버스 안의 승객들이 저마다 소곤거리는 듯한 목소리들이었다. 주위를 휘둘러보았다. 입을 열고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는데도 속삭임들은 또렷이 들려왔다.

- ''이 새끼를 죽여야 하는데...'
바로 옆에서 들려온 소리였다. 돌아보니 내 옆에서 이야기하는 정장 차림의 회사원들이었다.
"이번에 내가 발로 안 뛰었어 봐. 계약도 물 건너갔지."
"그러게요, 김 대리님 아니었으면 어찌 됐을지 상상만 해도 끔찍하네요."
웃으며 대꾸하는 앳된 남자에게서 속삭임이 들려왔다.
'너 아니었으면 지난달 승진은 내가 했어, 이 재수 없는 새끼야.'

그제야 알아차렸다. 그 속삭임들은 사람들이 마음속에 감춘 욕망이었다.

 

- [그러니까 사람들의 욕망이 속삭임으로 너한테 들려온다 이 말이지?]
교문에 다다를 즈음, 혜정이가 물었다.
"어, 그렇다니까."
'아, 누가 학교 폭파 좀 안 시키나? 졸 가기 싫네.'
내 옆으로 한 아이가 속삭이고 지나갔다.
“방금 지나간 애는 학교를 폭파하고 싶대."

- [아, 맞다! 진희 고년이 소원 뭐냐고 물어보던 게 딱 이런 타이밍을 이용한 거 아니었을까?]
"상대의 마음속 욕망을 엿듣고 소원을 빌게 한다?"

[바로 그거야.]

- 진희에게 첫 번째 소원을 빌었던 날이 생각났다.

"소원이 뭐야?"

그 애가 그렇게 묻던 순간, 나는 동준이를 생각하고 있지는 않았다. 오히려 진희가 소원을 물었기 때문에 녀석을 떠올리게 됐을 뿐이었다.
"선후가 바뀐 거 같은데? 소원을 빌게 한 게 먼저인 거 같은데..."
[입은 삐뚤어져도 말은 바로 하랬다고 그날 니가 진희 말 듣고 처음으로 동준이한테 그런 맘 품었겠어? 전부터 니가 동준이를 은근 좋아하던 걸 진희 고년이 알고서 적당한 타이밍 ... ]
 
- 호루스의 눈은 그 너머의 하늘이 비칠 정도로 반투명하지만 또렷했다.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손을 뻗으면 손끝에 눈동자가 닿을 듯했다. 눈동자와 눈가는 개기일식 때 태양을 가린 달그림자처럼 검었고 그 둘레가 달그림자 사이로 새어 나오는 햇빛처럼 환하게 빛났다.

- [안나린, 침착해. 아무것도 아니야.]
낌새를 눈치챈 혜정이가 나를 진정시키려 애썼다. 하지만 놀란 가슴이 쉽사리 가라앉지 않았다. 천적과 맞닥뜨린 동물처럼 온몸이 굳고 진땀이 났다. 그동안 여러 번 표식을 남기기는 했지만 저것이 눈앞에 나타나기는 처음이었다. 
제게 날 덮칠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에 온몸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휘청 중심을 잃는 순간, 동준이가 내 허리를 감아 부축하며 물었다.
"괜찮아?"
"아니..."

- 내가 눈을 깜박일 때마다 눈앞에 어떤 영상이 번뜩이며 지나갔다. 눈을 질끈 감아보았다. 평소 눈을 감으면 보이는 거라고는 망막에 남은 잔상이나 눈꺼풀을 통과한 빛, 눈알의 유리체 속을 떠다니는 먼지 같은 부유물이 고작이었다. 오늘은 달랐다. 눈을 감으니 더 또렷이 보였다. 밑에서 위를 향하고 있는 내 얼굴이었다. 드론이나 헬리캠을 띄워 내 머리 위에서 찍은 동영상을 실시간으로 보는 듯했다.  

- "기분은 좀 어때?"
그 말 앞에 붙였어야 할 '마녀가 된'은 생략했을 터였다. 

"좋아."
거짓말이었다. 정수리 위에 떠서 나를 내려다보는 호루스의 눈과 아이들 근처를 지나칠 때마다 들려오는 속삭임들 때문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안나린 쟤 왜케 예뻐졌지? 짜증 나게... 나도 이번 방학 때 양악해 달라고 해야지.'
'개쩐다. 나도 저 얼굴 반만 됐으면...'
속삭임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쏟아졌다.

- "곧 익숙해질 거야."
진희가 지금 내 상황을 다 이해한다는 투로 말하고는 제 귀에 에어팟을 끼웠다. 에어팟! 무릎을 칠 뻔했다. 진희가 왜 늘 에어팟을 끼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내 짐작이 맞는다면 주위 사람들의 내밀한 속삭임은 마녀에게만 들리는 일종의 정보인 듯했다. 마녀는 그 속삭임을 들어뒀다가 적당한 때에 소원 떡밥을 던지는 게 아닐까? 시스템이 어찌 됐든 의지와는 상관없이 사방에서 쏟아지는 속삭임에 밤낮없이 시달린다면 그것도 보통 고역이 아닐 터였다. 저 에어팟은 그 속삭임을 막아 주는 일종의 귀마개 아닐까. 백팩을 뒤적거렸다. 주머니 어디인가 잘 쓰지 않는 이어폰이 처박혀 있을 텐데...

-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내어 이어폰을 연결했다. 현민이가 사주었던 스마트폰이 아니라 예전 폰이었다. 메모리에 MP3 몇 곡을 저장해 두었다. 음악을 틀었다. 이어폰을 귀에 꽂자 김윤아의 <착한 소녀>가 흘러나왔다.
가만, 내가 언제 이 노래를 넣었더라? 한동안 현민이가 준금고에 묵혀 두었으니 그전에 넣었단 뜻인데 그런 기억이 없었다.
'뭐지, 정말 알츠하이머라도 오나?'
그때 진희가 뭐라고 말했다.
"어?"
이어폰을 빼고 물으니 그 애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내가 넣어뒀다고, 기념 선물로..."

- [이어폰 끼니 어땠어?]
혜정이가 물었다. 방과 후,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온 뒤였다. 내게 쏟아지는 시선과 속삭임들 때문에 버스 타기도 껄끄러웠다.
"안 들렸어. 속삭임들이..."
[대박이네. 너한테만 들리는 속삭임이라는 거, 결국 텔레파시 같은 심령 현상이란 얘긴데 그런 걸 이어폰으로 안 들리게 한다는 게 웃긴다. 아, 그래서 마녀인가? 마성의 안나린!]

마녀가 되고 생긴 변화를 꼽아보았다. 눈빛과 외모, 어깻죽지의 문양과 사람들의 마음속 욕망 그리고 호루스의 눈.

- "해 볼게."
시선을 옮기듯 그 눈으로 다른 곳을 보려 했다. 그러나 눈은 고정 카메라처럼 내 정수리에 시선을 붙박고 움직이지 않았다. 무던히 애를 썼지만 헛일이었다. 

- [아이고, 초보 마녀님, 그게 바로 되겠어요? 쟤가 보는 걸 네가 보는 것만도 대단한 거지. 저 눈이 네 눈이라고 생각하고 다시 해봐.]
심호흡하고 다시 눈을 돌려보려 애썼다. 아무리 눈을 이리저리 돌려봐도 호루스의 눈은 옴짝달싹하지 않았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말 중에 해병대 나온 울 아빠가 하던 말이 있거든? 뭔지 알아?]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안 되면 되게 하라!]
"돼야 되게 하지."
[바로 그거야. 그래서 내가 그 말을 싫어했어. 안 되는 걸 어떻게 되게 하냐고, 돼야 되게 하지. 근데 말이야, 죽어도 안 되는 건 안 되지만, 요령만 알고 보면 이 쉬운 걸 내가 왜 안된다고 했나 싶게 되는 게 더러 있긴 하더라고.]

- [어, 방금 생각난 건데 목표물을 한번 찾아보면 어떨까?]

"목표물?"
[내가 소원 빌었을 때 진희가 그랬댔잖아. 니가 궁금할 때마다 눈 꼭 감고 니 이름 세 번 중얼거리라고. 그럼 내 도플이 나한테서 너한테로 가고, 니가 보일 거라고... 넌 이제 마녀가 됐고 저게 니 분신이라면 단순한 도플하곤 비교도 안 되게 강력하지 않을까?]
"어떤 대상을 생각해 보라 이거지?"
[그래, 지금 니가 가장 보고 싶은 대상.]

- 가만히 떠올려보았다. 가장 보고 싶은 대상. 멀리서 늘 나를 지켜주던 현민이가 생각났다. 어제 집으로 와서 내게 했던 몹쓸 짓도 어쩌면 배려였는지도 몰랐다. 현민이가 영미에게 다가간 후로 영미의 공세는 주춤했다. 적어도 현민이가 지켜보는 앞에서는...
"모현민, 모현민, 모현민."
현민이의 얼굴을 떠올리며 외치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꿈쩍도 하지 않던 호루스의 눈이 부르르 용틀임했다. 눈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천장과 콘크리트를 꿰뚫고 쏘아 올린 폭죽처럼 공중으로 솟구친 눈이 서서히 골목길로 내려섰다. 이제 막 불을 밝힌 전봇대가 보였고 리어카를 끌고 폐지를 수집하는 할머니가 지나갔다. 잠시 머뭇거리는 듯했던 눈이 목표를 정한 듯 내달리기 시작했다. 현기증 나는 속도였다. 

- "톡 할게."
"어, 들어가."
차 문 손잡이를 잡은 영미가 현민이를 빤히 바라보았다.

"나, 그냥 보낼 거야?"
그 애의 목소리에 혀 짧은 교태가 어렸다.
"아..."
현민이가 잊을 뻔했다는 듯 영미에게로 다가갔다. 영미가 눈을 감고 입술을 내밀었다. 현민이는 영미의 입술 대신 뺨에 입을 맞췄다.
"뭐야."
눈뜬 영미가 입을 삐죽이며 눈을 흘겼다. 내게는 다행스러우면서도 씁쓸한 장면이었다. 영미는 차에서 내리고도 아파트 입구로 들어서던 순간까지 현민이의 차를 돌아보며 손을 흔들었다. 현민이도 미소 지으며 손을 들어 보였지만 영미가 아파트 입구로 들어가자 얼굴에서 미소가 가셨다. 현민이는 손에 든 선물을 옆자리에 툭 던졌다. 그러더니 나를, 아니, 호루스의 눈을 휙 돌아보았다. 마치 진작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  

 

- 그 바람에 당황해 움찔 물러났다. 뒤로 급히 빠진 눈이 빠르게 되감은 영상처럼 왔던 길을 거슬러 돌아왔다. 밤거리를 광속으로 날아온 눈은 순식간에 우리 집이 있는 주택가로 접어들었다. 2층 난간을 꿰뚫고 벽을 지나 내 방으로 날아든 순간, 보였다. 내 방 천장 위에서 나를 지켜보는 또 다른 호루스의 눈, 비명을 지르며 눈을 떴다. 전력 질주를 한 듯 숨이 가빴다.

"하나가 아니야.”
[뭐가?]
"호루스의 눈."
[호루스의 눈이 또 있다고? 어디, 어디?]
"저기."
천장을 가리켰다.
[그럼 지금 호루스의 눈이 두 개 떠 있다 이 말이야?]
겨우 정신을 가다듬고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하나였다. 다른 호루스의 눈은 사라지고 없었다.
"지금은 하나밖에 안 보여."

- [확실히 본 거 맞아? 쟤랑 헷갈린 거 아냐?]
"아냐. 저거랑은 달랐어. 크기랑 생김새는 거의 비슷한데 빛깔이나 분위기가 완전 달라."
[어떻게?]
"눈도 더 시커멓고 빛도 더 어두웠어."
그랬다. 손을 뻗으면 손끝에 시커먼 재가 묻어날 성싶을 정도였다. 눈동자 둘레의 빛도 햇빛이 아닌 달빛 같았다.

- 그러고 보니 그랬다. 오늘 종일 나를 따라다녔던 호루스의 눈은 하나뿐이었다.
"그게 내 거가 아니라서 그랬나. 호루스의 눈으로만 보이는 다른 사람 거 말이야."
[혹시 그 눈깔, 진희 고년 거 아냐?]
진희? 수수께끼의 해답 하나가 툭 튀어나왔다. 눈에 불을 켜고 찾아도 없던 퍼즐 조각을 장판 밑에서 찾아낸 듯한 기분이 들었다. 무릎을 탁 치며 외쳤다. 
"맞아!"
[아, 깜짝이야. 왜 갑자기 소리를 빽 지르고 그래?]
"혜정이 네 말이 맞았어."

- "수정구슬! 저게 내 수정구슬일지도 모른단 말.”
[저 눈깔이 니 수정구슬이다 이거야?]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녀가 되면 저마다 수정구슬 역할을 하는 저 호루스의 눈이 생기는 거야. 그래서 제 목표물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는 거지."
첫 번째 소원 의식을 치르던 날부터 여태까지 진희가 어떻게 내 일거수일투족을 훤히 꿰뚫었는지 이제야 알 만했다. 몰래카메라도, CCTV도, 악성코드도 아니었다. 호루스의 눈이었다. 

"현민이가 내 쪽을 쳐다봤어. 꼭 호루스의 눈을 볼 줄 아는 것처럼..." 
[진짜? 그냥 누가 자길 지켜보는 느낌이 들어서 본 거 아닐까? 왜 우리도 가끔 그럴 때 있잖아. 꼭 누가 뒤에서 나를 보는 거 같아서 돌아보면 진짜로 그러고 있을 때. 호루스의 눈 때문에 그런 느낌이 든 거 아니었을까?] 
"글쎄... 아직은 잘 모르겠어. 근데 하나는 확실해졌어."

[뭐가?]
"현민이가 영미한테 완전히 넘어간 건 아니란 거."

- [여태껏 훼이크였다 이건가?]
"어쩌면..."
그러다 멈칫했다. 내가 호루스의 눈으로 보는 광경들은 진희 또한 얼마든지 제 호루스의 눈으로 지켜볼 터였다. 현민이가 넘어가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영미에게도 알릴 가능성이 컸다. 

- "아무래도 나은이가 뭘 아는 거 같아."
[뭘 아는데?]
"지난번에 나은이가 동준이한테 그런 말 한 적 있잖아."
병실로 찾아와 나를 모터사이클에 태우고 워프할 기세로 홍주를 관통했던 그날, 동준이는 분명 나은이가 언니를 태우고 이렇게 달려 보라고 부탁했다고 했다.

- [그게 어쨌다고?]
"호루스의 눈으로 길거리 달리는 느낌이 꼭 동준이 오토바이 뒤에 타고 달리던 때랑 비슷했어. 호루스의 눈이 비교도 안되게 빠르긴 했지만... 나은이도 뭘 알고 있었던 거야."
그날 카톡으로 캐물었을 때 나은이는 기분전환이라도 하라는 뜻이었다고 은근슬쩍 둘러댔다.
[그럼 나은이가 호루스의 눈이 뭔지도 알고 니가 그걸 기억하는지 떠보려고 동준이한테 그렇게 부탁했다 이거야?]
"나은이 오면 한번 물어봐야겠어."
그 애까지 끌어들이고 싶지는 않았지만 만에 하나, 이미 관련되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 그러고 보니 여태 교복 차림이었다. 날이 더운 데다 호루스의 눈으로 현민이를 지켜보는 동안 진땀을 빼서 찝찝했다. 방 안에 앉아 호루스의 눈으로 천 리 밖을 내다보는 일은 분명 굉장한 기적이었지만 그만큼 피곤한 일이기도 했다. 자리에서 일어나 교복 블라우스를 벗었다.

 

- [니 어깨에 생긴 문신, 아니, 문양 말이야.]
"그게 왜?"
[왠지 어디서 봤다 싶어서 니 전화기로 찾아봤거든.]

"그래서 찾았어?"
[어, 바로 이거!]
혜정이가 스마트폰을 허공에 띄워 인터넷 검색창에 '말레우스 말레피카룸'을 치고 이미지 검색을 눌렀다.

 

- 내 어깨의 문양과 <말레우스 말레피카룸> 속지에 새겨진 문양을 비교해 보았다.

- 똑같았다.

- "호루스의 눈? 그게 뭔데? 먹는 거야?"

나은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었다. 정말 몰라서 묻는 듯했다.
"아니, 내 말은... 혹시라도 들어본 적 없냐 이거지."

"글쎄? 목 아플 때 먹는 사탕?"
[얘가 정말 모르는 거야, 아니면 모르는 척하는 거야?]

내 방에서 대화를 엿듣던 혜정이가 중얼거렸다.

- 늦은 저녁을 먹고 방으로 돌아왔지만 찝찝한 기분은 가시지 않았다.
[으아, 헷갈려. 도대체 누구 말이 맞는지 통 모르겠네. 그럼 그날도 그놈의 자작극이었단 말이야, 뭐야?]
혜정이가 허공을 빙글빙글 돌아가며 투덜댔다.
"아무래도 동준이도 의심스러워."
책상 앞에 앉아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마녀의 문화사>를 건성으로 넘기며 중얼거렸다. 그러다 어느 페이지에서 손이 우뚝 멈췄다. 익숙한 단어가 보였다.

- [일반적으로 원래는 '악행'이라는 뜻으로 쓰이던 말레피키움 maleficium(제4장 이후부터 계속 나오는 말레피키아 maleficia의 복수형. 말레피쿠스 maleficus와 말레피카 malefica는 '악을 행하다'라는 뜻을 가진 형용사의 남성형과 여성형. 명사적으로 사용할 땐 각각 '악을 행하는 남자', '악을 행하는 여자'의 뜻이 된다. - 옮긴이)이라는 말은, 이때부터 특히 유해한 마법을 가리키는 말이 되며, 말레피쿠스와 말레피카는 악마와 친밀한 관계가 있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마녀의 문화사>에서 인용, 제프리 버튼 러셀 지음, 김은주 옮김, 르네상스 출판사


- "가만, 왜 '말레피카'가 아니고 '말레피쿠스'였지?"
[말레피카? 그건 또 뭔데? 말레피쿠스 친구야?]
혜정이가 다가와 책장을 들여다보았다.
"동준이가 날 처음 본 날, 유진이가 버스 타기 전에 그랬댔잖아. '말레피쿠스'라고... 근데 이 책에 보면 '말레피쿠스'는 '악을 행하는 남자'래. '악을 행하는 여자'는 '말레피카'고... 유진이는 왜 하필 동준이한테 그런 말을 했을까?"

- "... 혹시 유진이가 동준이를 경계해서 한 말은 아니었을까?"
[에이, 그거야말로 오바다.]
유진이는 대체 어떤 아이였고 왜 죽었을까. 의혹은 동준이에게서 유진이에게로 옮아갔다. 그 애의 죽음에 얽힌 내막을 진작 알아내야 했는데, 하도 복잡한 일이 동시다발적으로 터져 그러지 못했다. 스마트폰을 집어 들고 유진이와 같이 찍은 사진을 불러왔다. 

- "어쩌면 얘가 언제 죽었는지 알 수 있을 것도 같아서."
[어떻게?]
여전히 천장에 떠서 나를 내려다보는 호루스의 눈을 올려다보았다.
"저 수정구슬로..."
스마트폰에 뜬 유진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머릿속에 아로새기고 눈을 감았다.
"가보자."
유진의 얼굴을 떠올리며 유진의 이름을 세 번 되풀이하자, 호루스의 눈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 죽은 진희가 교통사고로 의식불명에 빠진 날, 유진이란 애가 죽었다. 전영고의 담임 선생님은 유진이가 10월 말에 교통사고로 죽었다고 했다. 죽은 진희와 유진이는 교통사고를 당했다. 2017년 10월 27일에... 

 

- 눈을 번쩍 떴다. 내 방으로 돌아오자 속이 뒤집히고 눈앞이 노랬다. 자리에서 일어서다 방바닥에 철퍼덕 고꾸라져서 헐떡였다.

- [안나린, 왜 그래? 도대체 뭘 봤길래... 유진이란 애 송장이라도 본 거야?]
혜정이가 물었지만 대답할 힘이 없었다. 짐승처럼 방바닥에 웅크린 채 가쁜 숨을 몰아쉬는데 온몸이 바들바들 떨렸다. 호루스의 눈이 앗아간 체력도 체력이었지만 날짜가 안겨 준 충격이 더 컸다.
둘이 어떤 식으로든 연관이 있을 줄은 알았지만 같은 날짜에 교통사고를 당했을 줄은 상상도 못했다. 그저 우연의 일치일까? 아니면... 
[피! 너 코피 나.]
혜정이의 외침에 고개를 드니 인중을 타고 뜨뜻한 액체가 흘렀다. 방바닥에 피가 뚝뚝 떨어졌다.

- [야, 인제 그만해. 호루스의 눈인지 뭔지 세 번 썼다간 사람 잡겠다. 세상에, 얼굴이 완전 백지장이네.]
코피까지 쏟을 정도이니 호루스의 눈으로 다른 장소를 보는 일도 체력 소모가 상당하다는 사실이 확실해졌다. 무엇보다 현실 감각이 없었다. 단 몇 분 만에 우주왕복선을 타고 대기권 밖까지 나갔다가 돌아온 듯했다. 숨을 고르고 몸을 일으켜 침대에 걸터앉는 데에도 한참이 걸렸다. 어지간히 정신을 차리고 나서 스마트폰을 집어 들었다. 이로써 유진이의 죽음에 얽힌 미스터리 중 '언제?'라는 문제의 답은 알아냈다. 하지만 '어디서?'라는 숙제는 아직 풀지 못했다. 
  
- 다시 택시를 타고 트리플타워로 향하는 내내 혜정이가 투덜댔다. '흑눈이'는 나를 감시하던 호루스의 눈이 어두침침했다던 내 말을 듣고 그 애가 붙인 줄임말이었다. 그런데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로 내려가는 순간, 의심이 놀라움으로 바뀌었다. 줄곧 나를 따라다니던 호루스의 눈이 지하 2층부터 쓱 사라졌다. 눈을 감아 보아도 호루스의 눈은 여전히 지상 풍경만을 보여 줄 뿐이었다.
"안 보여."
[뭐가? 호눈이?] 
"어."
[진짜? 오호, 신기한데? 지하로 내려오면 핸드폰 신호 약해지는 거랑 비슷한 원리인가?]
"모르겠어. 근데 현민이가 그런 걸 다 알고 이리로 오라고 한 건가?"
[그러게. 뭐지?]
 

- 엘리베이터 밖으로 나와 보니 현민이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인적이 없는 지하라 여름인데도 목덜미가 서늘했다.
[이번에도 함정 아냐? 지하주차장이라서 그런가, 꼭 분위기가 지난번에 우리 집 갔던 날, 마스크맨이 차로 달려들던 때 같아.]
혜정이가 자꾸만 불안해하니 나도 덩달아 불안하고 미심쩍었다.

 

그때 주차장 구석의 모퉁이 너머에서 누가 쓱 나타났다.

"나린아."
현민이였다. 지하주차장의 조명을 받아서 그런지 더 잘생기고 멋있어 보였다. 얘가 원래 이렇게 훈남이었던가?
[이야, 얼굴은 여전히 존잘이네. 드라마 찍어도 되겠다.]
백팩 지퍼 틈으로 내다본 혜정이도 감탄했다. 내게로 다가온 녀석이 물었다.
"오느라 고생 많았지?"
그 말을 들은 순간, 눈물이 왈칵 쏟아지려 했다. 예전의 그 살갑던 말투였다. 이게 꿈은 아닐까. 눈을 감았다 떠 보면 현민이의 모습이 신기루처럼 사라져 버리는 꿈. 

- "왜 보자고 한 거야?"
마음과는 달리 차가운 말이 내 입에서 나왔다.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현민이가 입을 열었다.
"왜 그랬어."
현민이의 말투에 어린 감정은 안타까움이었다.

- "지금 왜 마녀가 됐느냐고 묻는 거야?"
현민이가 대답 대신 눈빛으로 답했다. 긍정이었다. 역시 현민이도 알고 있었다. 진희와 나 사이에 일어났던 일들을... 허탈하고 화도 나서, 마음과는 상관없이 가시 돋친 말이 나왔다. 
"그게 너랑 무슨 상관인데? 내가 죽든 살든 나 몰라라 영미랑 희희낙락하더니, 인제 와서 참견이야?"
[야, 안나린, 너 왜 그래? 갑분싸하게...]
"너를 위해서였어."
"아, 그래? 다들 말은 그렇게 하더라. 그럼 네가 나를 위해서 영미랑 룰루랄라 하는 동안 내가 혼자 어떻게 했어야 해?"
"끝까지 버텼어야지."
"버텼어. 그런데도 도저히 안 되는 걸 어떡해?"
"넌 넘지 말았어야 할 선을 넘었어. 더는 안돼."

- 현민이가 두 손을 내 어깨에 얹고 말했다.
"부탁이야, 제발 진희랑 똑같아지지 마."

말을 마친 현민이가 돌아섰다. 이제 자기 용건은 다 끝났다는 듯... 다시 모퉁이 쪽으로 저벅저벅 걸어가는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참나, 뭐야. 기껏 그 말 하려고 여기까지 뺑뺑이 돌린 거야?]

- 마침내 그 애가 내 손을 꼭 잡으며 속삭였다.
"안가. 어디에, 누구랑 있든 난 너랑 같이 있어."
"떠난 줄 알았어. 영영 나한테서..."
"한 번도 없었어, 널 떠난 적."
눈물이 뚝뚝 흘렀다. 나는 현민이를 끌어안은 채 어린애처럼 펑펑 울었다. 그 애가 덧붙였다.
"그래서 더 아파."

- 때로 영원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있다. 현민이가 그렇게 말한 뒤에 일어난 일이 바로 그랬다. 그 말이 무슨 뜻인지는 확실치 않았다. 내게서 마음이 한 번도 떠난 적 없지만 떠난 척해야 해서 더 아프다는 말인지, 내게서 떠나고 싶은데 떠날 수 없어서 더 아프다는 말인지, 둘 다인지... 그 말뜻을 묻지 않아도 진심은 가슴에 절절히 와닿았다.

- "아프지 마, 너 아프면 난 더 아파."
겨우 그렇게 말했다. 울음기가 섞여 나와 내가 듣기에도 처량했다. 현민이는 대꾸하지 않고 내게로 돌아섰다. 그 애의 눈도 촉촉이 젖어 있었다. 손을 뻗어 현민이의 두 뺨으로 흐르는 눈물을 닦아 주었다. 눈물도 따스했다. 이번에는 그 애가 나를 부둥켜안았다. 마주 끌어안자 비로소 완전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어쩌면, 애초에 우리는 한 몸이었는지도 몰랐다. 뜨거운 입술이 내 이마와 코와 뺨을 거쳐 내 입술을 찾았다. 두 입술이 맞닿는 순간, 눈을 감았다. 잠시만이라도 이대로 있고 싶었다. 그 애의 입술을 오롯이 느끼고 싶었다. 

시간이 멈췄다.
눈앞이 까맣게 어두워졌고 그 속에서 따스한 빛 한 점이 생겨났다. 점에서 시작한 빛이 점점 커다랗게 불어났고, 파도가 되어 나를 덮쳤다. 파도는 나와 나를 둘러싼 주위의 모든 사물을 집어삼켰다. 빛의 바다는 별이 되었고 별은 곧 우주가 되었다. 그 우주를 커다란 일체감과 충만감이 눈부시게 물들였다. 과학 준비실에서 첫 키스를 하던 순간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는 영원이었다. 

- 현민이는 끝내 내게서 떨어져 나갔다.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한없이 슬퍼 보였다. 내가 그랬듯 내 뺨에 흐르는 눈물을 말없이 손으로 훔쳐 준 현민이가 다시 돌아서며 말했다.
"갈게, 이제."
더는 붙잡지 못했다. 현민이가 모퉁이 너머로 사라졌다. 차문이 열렸다 닫히는 소리가 들렸고 모퉁이 뒤편에 대기하던 승용차가 출발했다. 출구 쪽으로 멀어져 가는 차를 마냥 바라보았다. 현민이가 지나간 자리가 텅 빈 후에도 내 입술에 아로새겨진 온기는 오랫동안 가시지 않았다. 

"내 마음이 뭔 줄 알아? 여기서 현민일 못 구하면 나도 죽어. 그게 내 마음이야."
난간 너머로 몸을 날렸다. 한동안 많은 일을 겪는 바람에 중요한 한 가지를 잊고 지냈다. 모든 소원에는 끔찍한 대가가 따른다는 사실. 마녀가 되어 달라진 일상에 적응하느라 그 사실을 깜빡했다. 이제야 알듯 했다. 내 세 번째 소원의 대가는 현민이의 죽음이었다. 

- '내가 구할 거야, 널!'
그 생각 외에는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아찔한 높이에서 뛰어내리면서도 두렵지 않았다. 지금 내게 두려운 일이라고는 현민이를 잃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뿐이었다. 홍주천의 출렁이는 수면이 다가왔다. 다리부터 배와 얼굴이 수면에 부딪힌 순간 눈앞이 아득해질 정도의 충격이 일었다.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하려다 덩달아 죽게 되는 이유를 알 듯했다. 
무수한 물거품이 눈앞을 스쳤다. 엉겁결에 숨을 들이쉬자 코와 입으로 물이 쏟아져 들어왔다. 몸이 물속으로 완전히 빠져들자 위아래도 모를 지경이었다. 물속은 탁하고 어두웠다. 물속으로 가라앉은 현민이의 승용차는 보이지 않았고 몸도 움직이지 않았다. 아니, 구속복을 입은 듯 손발이 몸에 붙어 꼼짝할 수 없었다. 보이지 않는 사슬이 온몸을 칭칭 감은 듯했다. 

- "물의 길이 너를 심판하리니 네가 마녀라면 신성한 물이 너를 밖으로 내칠 것이요, 네가 마녀가 아니라면 물속으로 집어삼키리라."
귓가에 쩌렁쩌렁한 외침이 들려왔다. 불에 뛰어들던 날, 환상 속에서 보았던 재판관의 목소리였다. 몸부림을 치는 와중에도 몸은 서서히 물속으로 가라앉았다. 코와 입으로 쏟아져 들어온 물 때문에 송곳 수백 개가 머릿속을 찌르는 듯했다. 

- [안나린, 정신 차려! 헤엄을 쳐야지. 이러다 너까지 죽겠어!]

백팩 속의 혜정이가 외쳤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몸은 커다란 쇳덩이를 매단 듯 물 밑으로 내려갔다.
'그래, 그냥 이렇게 죽을래. 모현민, 너랑 한날한시에 죽는다면 그것도 나쁘진 않겠다.'
마음이 편해졌다. 몸부림을 포기하자 나를 죽이려 들던 탁한 물이 엄마의 양수처럼 포근하게 나를 감쌌다. 그때 어떤 따스한 기운이 온몸을 휘감더니 나를 위쪽으로 끌어당겼다. 내 의지가 아니었다. 기운이 나를 물 위로 끌어올렸다. 이윽고 몸이 떠올랐다. 

- 본능적으로 물을 토해내며 숨을 들이마시고 내뱉었다. 허공에서 나를 내려다보는 호루스의 눈이 보였다. 나를 물속에서 끌어올린 따스한 기운은 바로 그 눈에서 흘러나온 빛줄기들이었다. '흑눈이'에서 기어 나온 검은 연기와는 사뭇 달랐다. 그것이 어둠이라면 이것은 빛이었다. 물 위에 드러누운 자세로 둥둥 떠서 숨을 고르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모현민!"
현민이를 구하려고 곧바로 몸을 틀어 물속으로 다시 뛰어들려 했지만,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물속에서의 구속력과는 다른 힘이었다. 전자는 나를 옥죄었고 후자는 나를 감쌌다. 자궁 속의 태아가 된 기분이 들었다. 몸은 편안해졌지만, 마음은 그렇지 않았다. 

- '놔줘!'
놈은 내 말을 듣지 않았다. 눈을 감고 현민이를 떠올려보았지만 헛일이었다. 호루스의 눈은 움직이지 않았다. 만에 하나, 현민이가 차에서 탈출해 물 밖으로 빠져나왔다면 호루스의 눈이 찾아냈어야 했다. 눈이 움직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현민이는 아직도 물속에 있었다. 차가 하천으로 추락한 지 적어도 5분 이상이 지났다. 베테랑급의 해녀도 5분이 넘도록 물속에서 버티기는 어려웠다. 멀리서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다. 

- [안나린, 만약에, 이건 정말 만약인데... 현민이가 죽은 거면 너 어떡할 거야?]
한치도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죽일 거야."
[누굴?]
현민이가 사라진 홍주천을 노려보며 대답했다.
"진희."

- "무슨 수를 써서든... 마녀도 됐는데 그거라고 못하겠어?"
진희는 이미 무고한 생명을 셋이나 해쳤다. 혜정이와 현민이네 엄마 그리고 현민이의 운전기사. 어쩌면 셋 이상일지도 몰랐다. 죽은 진희와 유진의 사고와도 분명 연관이 있을 터였다. 깊고 가까이... 만일 현민이마저 그 명단에 들어간다면.
"죽일 거야. 죽을 때 죽더라도 같이 죽을 거야."
다른 길은 생각나지도,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함무라비법전이 왜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동해복수법에 기초한 형벌법이 되었는지 알 듯했다. 내 어깨에 생긴, <말레우스 말레피카룸> 속지와 똑같은 문양도 어쩌면 진희라는 마녀를 처단하라는 계시인지도 몰랐다. 죽은 진희가 내게 남긴 '너는 마녀를 살려두지 말지니라'라는 메시지도 그런 맥락으로 보자면 매한가지. 그렇게 따지면, 지금 내게 주어진 마녀의 능력도 마녀를 처단하는 용도로 써야 할 '망치'인지도 몰랐다. 

- 고개를 들어 머리 위의 허공을 노려보았다. 지금도 제 호루스의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을 마녀를 올려다보며 다짐했다.
"날 고통스럽게 한 만큼 너도 고통받게 될 거야."
내 품에서 위를 올려다보던 혜정이가 놀란 기색으로 말했다.
[안나린, 지금 너 머리... 꼭 메두사 같아.]
곁눈질로 보니 혜정이의 말대로 내 머리카락들이 메두사처럼 허공에 가지를 뻗고 너울대는 중이었다. 심호흡하며 마음을 가라앉히자 머리칼이 다시 차분히 내려앉았다. 
[나, 무서워. 너도, 진희도...]
"난 안 무서워, 아무것도..."

두려움이 사라졌다. 두려움이 가신 자리에 분노가 독사처럼 똬리를 틀고 꿈틀거렸다. 여차하면 누구든 독니로 깨물고 안 놔줄 기세였다.

- [그러지 말고 차라리 경찰에 신고하는 게 어때?]
"소용없는 거 알잖아."
현민이의 사고만 해도 그랬다. 진희가 제 호루스의 눈으로 차를 뒤쫓다 검은 연기로 운전석을 꿰뚫고 사고를 일으켰다고 한들 어느 누가 믿어 줄까. 직접 본 나조차도 믿기지 않는데... 초여름의 태양이 하천변을 뜨겁게 달구기 시작했다. 햇볕을 고스란히 받으며, 하천 너머로 피어오르는 아지랑이를 바라보았다. 

- '모현민, 살아 있어? 지금 내 목소리를 들을 수 있으면 대답해 줘. 제발...'
한참 만에 눈을 뜨고 돌아섰다.
[가려고? 괜찮겠어?]
혜정이가 물었지만 대답하지 않고 하천변 위로 올라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몇 블록 떨어진 건물에 피시방 간판이 보였다. 그리로 걸어갔다.
피시방 의자에 앉자마자 인터넷에 접속해 '마녀사냥'을 검색했다. 동명의 TV 예능 프로그램과 웹툰이 나왔고 그 밑에 지식백과와 뉴스 결과가 주르륵 떴다. 중간에 뜬 위키백과를 클릭했다.

 

- 오른편의 그림부터 눈에 띄었다. 마녀로 몰린 여자를 화형대에 묶어 불을 지피고 그 광경을 재판관과 군중이 지켜보는 그림이었다.
[마녀사냥(魔女 -, 프랑스어: Chasse aux sorcières)은 중세 중기부터 근대 초기에 이르기까지 유럽, 북아메리카, 북아프리카 일대에 행해졌던 마녀나 마법 행위에 대한 추궁과 재판에서부터 형벌에 이르는 일련의 행위를 말한다. '마녀사냥'을 '마녀재판'이라고 일컫기도 한다.]

- 그렇게 마녀사냥을 정의한 문서는 '유럽에서의 마녀재판'이라는 소제목으로 된 서두로 이어졌다.
[마녀는 본래 사악하지 않았다. 그들은 공동체 내에서 출산이나 질병치료 같은 의료 기능을 담당하거나 점을 치고 묘약을 만드는 주술적 기능을 수행한 집단이었다. 기독교 성서도 마녀를 우호적으로 묘사했다. 인간 한계를 초월하는 능력을 지닌 신비로운 존재로 여겨졌던 그들은 어느 날 졸지에 악마와 놀아나면서 신앙을 해치고 공동체에 해악을 끼친다고 낙인찍히기 시작했다.]
나도 애초에는 마녀와 상관없는 평범한 여고생이었다. 하지만 진희라는 마녀를 만나게 되면서부터 마녀로 낙인찍히고 돌아갈 수 없는 강을 건넜다.
스크롤을 쭉 내렸다.

- 중간 즈음에 '마녀재판의 실제'라는 단락 제목이 눈에 띄었다. 그 밑의 소제목은 '마녀재판을 하는 방법이었다.

글에 소개된 방법은 네 가지였다.

첫째, 눈물 시험. '마녀들은 사악하기 때문에 눈물이 없다, 그래서 혐의자가 눈물을 흘릴 수 있나 시험하라'는 말이었다. 마녀들이 사악해서 눈물이 없다고? 헛소리였다. 내가 소원을 빈 뒤로 마녀사냥을 당하는 동안 흘린 눈물만 해도 1리터는 족히 될 테니까. 그래서인지 '눈물 시험'이라는 말이 남 일 같지가 않았다. 이어지는 내용도 낯익기는 매한가지였다.

둘째, 바늘 시험. '타락한 악마들은 지울 수 없는 표식을 가지고 있으며, 마녀 또한 마찬가지라는 논리'라고 했다. 그래서 '마녀의 점이 나오면 형리는 그 자리를 누르거나 바늘로 찔러 감각을 느끼는지, 피가 흐르는지 시험한다고 ...

- "어쩌다 얻어걸린 거 아닐까?"
[그게 아니라, 내 말은 철근만이 아니라 벽돌이니 싱크홀이니 하는 것도 죄다 일종의 바늘이 아니냐 이거야. 다음 내용 한번 봐봐. 더 소름이다, 야.]

- [세 번째는 불시험(Feuerprobe)이다. 재판관은 혐의자에게 그들의 무혐의를 증명하는 방법으로 달구어진 쇠로 지지는 것을 견딜 수 있는지, 그리고 다치게 될지를 시험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제안했을 때 혐의자가 승낙을 한다면 그는 마녀가 된다. 마녀는 이 난관을 악마의 도움을 받아 헤쳐나갈 수 있다고 믿어졌기 때문이다.] 

- [불 테러!]
혜정이가 나보다 먼저 외쳤다. 누가 달군 쇠로 지지지도 않았고 내가 악마의 도움을 받아 난관을 헤쳐나가지도 않았지만, 엊그제의 테러 때문에 겪은 화재는 '불시험'이라고 불러도 무리가 없을 사건이었다.
[너, 소원 의식 치르면서 모닥불에 뛰어들기도 했잖아.]
그 커다란 불길의 벽. 그날 나는 그 불길을 오롯이 견뎌냈고 어디 한 군데 다치지도 않았다. 내용을 읽어 내려갈수록 마우스를 쥔 손이 떨려왔다. 이윽고 네 번째 방법에 이른 순간, 입에서 탄식이 절로 터졌다. 

- [네 번째는 물시험(Wasserprobe)이다. 일반적으로 물은 깨끗한 속성을 가지고 있다고 믿어졌다. 형리들은 혐의자를 단단히 묶고 깊은 물에다 빠뜨린다. 물은 깨끗한 속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마녀가 들어올 경우에는 물 밖으로 내쳐진다고 믿어졌다. 만약 혐의자가 물에서 익사한다면, 그는 혐의를 벗게 되겠지만, 물에서 떠오른다면 마녀로 간주되어 화형 되었다. 마녀든 아니든 죽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 [소오름! 너 저거랑 비슷한 환청 들었다며?]
"환청만이 아니야. 물에 빠졌을 때 온몸이 밧줄에 묶인 것처럼 안 움직였어."
[아, 그럼 헤엄을 안쳤던 게 아니라 못 쳤던 거였어?]

"처음엔 그랬지."
[하아, 진짜 희한하네. <마녀의 망치>인지 <말레우스 말레피카룸>인지 하는 책이 말도 안 되는 엉터리 아니었어? 근데 뭐 이리 딱딱 맞아떨어져.]

- 지금 생각해 보니 이상했다. 마녀사냥 지침서를 가지고 다니는 마녀라니...
[진희 고년, 알고 보면 환생한 재판관 아냐?]
"그런지도 모르지."
애초에 진희는 내 소원을 들어줄 생각이 없었는지도 몰랐다.
그저 세 가지 소원을 빌미로 마녀재판 혹은 마녀사냥을 했을 뿐인지도...

- '소원이 뭐야?'
진희가 아무렇지 않게 건넨 그 말로 시작한 이 지긋지긋한 소원놀음이 어느덧 이 지경에 이르렀다. 그때만 해도 그 말을 시간 때우는 농담 정도로 여겼다. 일이 이렇게 커질 줄 알았더라면 그냥 웃어넘겼을 텐데... 그랬더라면 내 일상이 아무 일 없이 평온하게 흘러갔을까. 진희는 사람의 욕망을 들을 줄 아니 그 질문도 최적기에 던진 떡밥이었을 터였다. 그걸 농담처럼 던진 이유도 그래야 내가 덥석 물리라는 계산이 있었을 테고...

 

- 피시방 천장을 올려다보며 내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볼 마녀에게 물었다. 
'넌 대체 뭐야? 나한테 왜 이래?'
어디선가 진희의 대답이 들려오는 듯했다.
'말했잖아. 우린 영원한 단짝이라고...'

- 그래, 단짝이든 헌신짝이든 어디 한번 해 보자. 혜정이가 메두사 이야기를 꺼냈을 때 묘안이 떠올랐다. 페르세우스는 메두사와 싸울 때 메두사의 얼굴을 직접 보지 않고 방패에 비친 메두사를 보고 목을 베었다. 그냥 페르세우스가 거울 같은 방패를 메두사한테 들이대서 메두사가 자기 얼굴을 보게 했으면 메두사도 돌이 되지 않았을까?
나의 메두사에게 거울을 보여 줄 때였다. 모니터의 시계를 보았다. 오전 9시를 갓 넘긴 시각이었다. 


- [안나린, 설마 너 이 많은 애들 앞에서 진희랑 싸울 건 아니지?]
백팩 속의 혜정이가 긴장한 목소리로 물었다.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진희와 싸우되, 이제까지와는 다른 방식으로 싸울 테니까. 진희에게로 가서 무릎을 꿇었다.
"뭐 하는 거야?"
담임 선생님이 물었지만, 대답 대신 진희를 올려다보며 울먹였다.
"미안해, 진희야. 뭐 때문에 나를 이렇게 괴롭히는지 모르겠는데... 이제 그만해 주면 안 될까? 이렇게 무릎 꿇고 부탁할게. 제발..."
그제야 진희가 나를 돌아보았다. 그 애의 표정이 흔들렸다.
"어머, 왜 그래, 나린아. 얼른 일어나."
진희가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 "네가 그만하겠다고 할 때까지는 못 일어나."
그때 진희와 눈이 마주쳤다. 그 애의 얼굴에 일었던 동요가 또렷한 감정으로 눈빛에 맺혔다. 당혹감이었다.
'부탁이야, 제발 진희랑 똑같아지지 마.'
어젯밤 현민이는 내게 그렇게 당부했다. 진희와 똑같은 마녀가 되지 말라는 뜻으로 한 말이었을 터였다. 하지만 똑같아지지 않으면 맞설 방법이 없었다. 권선징악이나 인과응보도 선이 악보다 강할 때에나 가능한 일이었다. 이 세상을 지배하는 원리는 약육강식과 자연선택이었다. 살아남으려면 진희라는 선을 넘어야만 했다.

 

- "안나린, 지금 뭐 하는 거냐고!"
담임 선생님이 한층 높아진 목소리로 외쳤다. 이쪽을 바라보던 아이들이 웅성대기 시작했다. 스마트폰을 꺼내어 촬영하는 아이도 있었다.
바로 지금이었다. 무릎을 꿇은 채 진회를 흘끔 올려다보았다. 나를 내려다보는 얼굴이 굳었다. 그 애가 내 속셈을 알아차리기 직전, 선수 쳤다. 고개를 들어 염력으로 재빨리 그 애의 손을 조종했다. 무방비였던 진희의 손이 내 뜻대로 움직였다. 뒤로 홱 젖혀졌다가 앞으로... 표적은 내 뺨이었다. 커다란 반원을 그리며 날아온 진희의 손이 내 뺨을 후려쳤다. 풀스윙에 가까운 일격이었다. 눈앞에 플래시가 터졌다. 제대로 맞았다. 눈앞이 아찔하고 귀가 멍해질 정도였다. 최대한 자연스레 교실 바닥에 나동그라지며 흐느꼈다. 교실 안의 공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사방에서 웅성대는 소리가 났다. 

 

- "진희! 넌 또 뭐야!"
담임 선생님이 고함을 지르며 달려왔다.
"아녜요, 제가..."
진희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손사래를 쳤다. 저 애가 저렇게 당황하는 모습은 난생처음이었다. 짜릿했다.
"그래, 이렇게라도 해서 네 분이 풀린다면 쳐. 그리고.."

비슬비슬 몸을 일으켰다. 이제 영미 차례였다. 


- 안 그래도 내 신세와 그간의 우여곡절을 떠올리니 눈물이 절로 솟구쳤다. 교실 바닥에 눈물을 뚝뚝 흘리며 오들오들 떨기까지 했다.

그때 내 몸을 움직이려는 힘이 느껴졌다. 염력이었다.
진희 아니면 영미였다. 뒤늦게 내 몸을 조종해 어떻게든 사태의 반전을 이끌어 내려는 속셈이겠지. 필사적으로 버텼다. 까짓것 염력에는 염력으로 맞서면 되니까. 진희도, 영미도 조금 전에는 무방비였기에 내가 염력으로 몸을 움직이는 일이 가능했다. 하지만 내가 만반의 태세를 갖춘 지금, 그 애들이 제 뜻대로 내 몸을 움직이기는 호락호락하지 않을 터였다. 달려온 담임 선생님이 나를 일으켜 세웠다.

 

- "아녜요, 선생님. 얘들은 잘못 없어요, 다 제 잘못이에요."
오히려 진희와 영미를 감싸는 척했다.
"제가 그런 거 아니라니까요, 이거! 아아, 미치겠네."


- 영미가 철규를 노려보며 녀석에게로 다가들었다. 무슨 짓을 할 작정인 듯했다.
"김영미!"
그 외침에 영미가 멈칫했다. 진희였다.
"잠깐 나 좀 보자."
그렇게 말한 진희가 먼저 교실을 나갔다. 어디 조용한 데에서 향후 대책이라도 의논하려는 모양이었다. 영미가 진희를 따라나서며 철규에게 말했다.
"이따 계좌번호 줘. 폰 값 물어줄 테니까."
교실을 나가기 전, 영미가 독기 띤 눈으로 나를 쏘아보았다. 모른척했다. 이목이 많은 이상, 섣부른 짓을 하지는 못할 터였다.

- 눈빛. 나를 바라보는 아이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이전까지 나를 바라보는 아이들의 눈에 적개심이 번뜩였는데 이제는 동정심과 경외심이 어렸다. 어쩌면 악의와 선의란 같은 동전의 다른 면인지도 몰랐다. 

 

- [안나린, 얼른 애들 SNS 확인해 봐!!]

점심시간, 공터 벤치에 앉아 혜정이의 재촉대로 아이들의 SNS를 확인해 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단톡방과 우리 반 아이들의 SNS에는 아까 수업 시간에 있었던 사건을 찍은 사진과 동영상이 수두룩했다. 철규가 '반도의 흔한 불꽃 싸대기(Feat. 불꽃 사커킥)'라는 트윗으로 올린 동영상은 벌써 리트윗만 100회를 넘겼다. 멘션도 한둘이 아니었다. 도화선에 불이 붙었다. 이제부터는 알아서 불타오를 테니 폭발력을 갑절로 늘릴 화약만 그 옆에 한 뭉텅이 놓아두면 될 일이었다.

 

- [너 그렇게 안 봤는데 상당히 무섭다, 안나린.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어?]
"너한테 한 수 배웠지."
사실이었다. 스마트폰을 집어넣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디 가려고?]

"너한테 배운 거, 마저 실천하러..."

- [얘가 마녀밥 며칠 먹더니 간이 아주 배 밖으로 나왔네. 야, 니가 염력 좀 할 줄 안다고 무슨 짓을 해도 무사할 줄 알아?]
"13층 옥상에서 떨어지고도 살았는데 5층 정도야 껌이지. 설마 죽기야 하겠어?"
[설마가 사람 잡는단 소리 괜히 있는 거 아니다. 멀리 갈 것도 없어, 날 봐.]
"뭐, 삐끗해서 다치거나 몇 군데 부러지는 정도는 나도 각오하고 있어."
[그걸로 안 끝나면? 13층은 오히려 니가 어떻게 해볼 여유라도 있었지, 5층에서 떨어지는 건 진짜 눈 깜짝할 사이야. 까딱 잘못하면...]
"까딱 잘못하면 쟤가 날 지켜주겠지, 뭐."
그렇게 말을 가로채며 내 머리 위를 졸졸 따라다니는 호루스의 눈을 가리켰다.
[안나린, 미쳤구나, 정말.]

- 솔직히 무섭고 떨렸다. 살짝만 삐끗해도 중상 아니면 사망이었다. 하지만 이 길밖에 없었다. 담임 선생님과 반 아이들 앞에서 망신을 당했으니 조만간 진희와 영미가 어떤 식으로든 내게 보복하려들 터였다. 그전에 보복의 싹을 잘라야만 했다.

 

- 동준이가 내게 달려왔다. 녀석이 나를 붙들기 전에 뛰어내려야 했다. 난간을 붙들었던 손을 놓았다. 몸이 옥상 난간에서 떨어져 나와 허공에 떠올랐다. 건물 밑에서 지켜보던 아이들이 비명과 탄성을 내질렀다. 중력이 등 뒤에서 나를 끌어당겼다. 5층 아래로 떨어져 내리며 눈을 감았다.
"안나린!"
그때 그토록 보이지 않던 그 애가 그렇게 불러도 대답 없던 그 애가 눈앞에 나타났다. 내 호루스의 눈이 그 애를 찾아냈다. 전속력으로 교정을 가로질러 달려오는 사람은 분명 현민이였다.

- 처음에는 믿기지 않았고 그다음에는 궁금했다. 도대체 어떻게 살아 나왔고 왜 이제야 나타났는지...

그리고 눈물 나게 고마웠다. 살아 있어서, 이렇게 달려와줘서...
교정을 비스듬히 가로지른 그 애가 내가 떨어지는 쪽으로 내달려왔다. 호루스의 눈으로 내려다보는 그 광경은 재생 속도를 최대한 늦춘 동영상처럼 느리고 비현실적이었다.

- 1.6초, 내가 15미터 높이의 옥상에서부터 땅에 떨어지는 데에 걸리는 시간은 기껏해야 1.6초에 불과했다. 그 1.6초가 죽 잡아당긴 고무찰흙처럼 기다랗게 늘어났다. 전부터 익히 겪었던 시간의 슬로비디오 현상이었다. 이번에는 그 정도가 어느 때보다도 심했다. 몸이 떨어진다기보다는 떠오르는 기분이 들 정도였다. 현민이는 필사적으로 달려오는데 그 애와 나 사이는 점점 더 벌어지는 듯했고 내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다시는 그 애에게 닿지 못할 듯했다. 영원히...

- 아래로 몸을 틀며 눈을 떴다. 호루스의 눈으로가 아니라 내 눈으로 직접 그 애를 보고 싶었다. 만에 하나, 여기서 죽게 된다면 마지막으로 본 사람은 그 애이기를 바랐으니까. 아래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착각이나 환상이 아니었다. 틀림없는 현민이였다. 나를 올려다보며 달려오는 현민이의 눈과 마주친 순간, 왈칵 눈물이 솟구쳤다. 그 바람에 집중력이 흐트러졌다. 원래 계획은 몸이 땅에 떨어지기 직전, 염력으로 바닥을 밀어낼 작정이었다. 그렇게 하면 충격도 줄어들 테고, 다치더라도 죽지는 않으리라고 생각했다. 적어도 조금 전까지는...


- 콘크리트 바닥이 눈앞에 다가들었다. 순간, 강한 힘이 나를 홱 끌어당겼다. 똑바로 내리 꽂히던 몸이 그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염력이었다. 돌아본 곳에는 역시나 한 손을 든 진희가 서있었다. 뿌리치려 했지만, 그 애의 힘이 더 강했다. 그 힘이 나를 옴짝달싹 못하게 옥죄었다.
떨어지는 속도에 가속도가 붙었다. 내 몸은 끌어당기는 대로 떨어져 내렸다. 추락 지점은 정확히 그 애의 머리 위였다.
'뭐 하는 거야!'
이대로 떨어지면 정면으로 부딪치게 될 상황이었다. 진희의 얼굴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진희가 양손을 활짝 벌리며 웃었다. 이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 제 품으로 어서 오라는 듯.

- 그때 누가 내 옆구리를 낚아챘다. 현민이였다. 벼랑에서 떨어진 토끼를 낚아채는 독수리처럼 그 애가 진희와 나 사이에 끼어들었다. 양팔로 나를 받아낸 현민이가 나를 끌어안은 채 허공을 휘돌았다. 아이들의 탄성이 들렸고 눈앞이 어지럽게 흔들렸다. 그런데 현민이도, 나도 예기치 못한 변수가 있었다. 그 바람에 내 추락 지점이 진희에게서 벽으로 바뀌었다는 사실이었다. 염력으로 건물 벽을 밀어내야 하는데 몸이 가위에 눌린 듯 말을 듣지 않았다. 벽이 눈앞을 가득 메웠다.

- 죽었다.
이번에는 '죽겠다.'가 아닌 '죽었다.'였다. 무수한 영상과 소리들이 기억 속에서 폭죽처럼 쏟아져 나와 눈앞에서 펑펑 터졌다.

- '죽일 거야.' 
'마녀가 되게 해 줘. 너 같은...'
'설마 너만 진희한테 소원 빌었다고 착각한 건 아니지?'
'벗어나고 싶어, 이 지옥에서...'

'너 가져라.'
'너 나쁜 애 아닌 거 아니까.'
'네 소원을 이루어 줄 지니.'
'소원이 뭐야?'
'나, 도미니크 비제는 신의 대리인인 집행관의 자격으로 마녀 이렌느 슐츠의 화형을 언도하노라!'
'검은 태양의 눈에 대고 맹세하나니, 네놈들도 대가를 치르게 되리라!'
'내 불의 제물이 되어 간절히 비나니, 내게 저놈들을 심판할 힘을 주소서!'

- 태양을 뒤덮는 달그림자, 빛을 뒤덮는 어둠. 엄청난 충격이 나를 송두리째 뒤흔들었다. 그렇게 나는 죽었다.

- 눈을 뜨자 벽에 부딪힌 내 머리에서 솟구치는 피가 보였다.
현민이가 제 교복 셔츠를 벗어 그 피를 지혈하며 주위에 뭐라고 외쳤다. 선생님들이 달려와 현장을 들여다보고 혼비백산했다. 한 선생님은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주위를 에워싸고 스마트폰으로 현장을 찍어대는 아이들 사이에서 무표정한 얼굴로 서 있는 진희와 영미도 보였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깊은 물속에 잠겨 물 밖을 내다보는 듯한 기분이었다. 바닥에 드러누워 눈을 부릅뜬 나를 내려다보았다. 확실히 느꼈다. 나는 죽었다. 

- 현민이가 나를 꼭 부둥켜안았다. 선생님 하나가 다가와 그 앨 떼어놓으려 했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제야 다시 만났는데 이렇게 영영 헤어져야 한다니 슬펐다. 허공에 떠오른 채 그 애의 등을 내려다보는데, 위에서 내려온 기운이 나를 휘감았다. 따스하고 포근했다. 올려다보니 호루스의 눈이 있던 자리에 강렬한 빛의 터널이 생겨 나를 끌어당기는 중이었다. 어쩌면 지금 나는 안나린이 아닌, 호루스의 눈인지도 몰랐다. 그리로 서서히 떠올랐다. 나를 끌어당기는 빛의 터널로 막 빨려 들어가던 순간, 뭔가 내게 닿았다. 아래에서부터 뻗어 나온 한가닥의 빛줄기였다. 빛줄기는 나를 휘감고 놓아주지 않았다. 
현민이에게서 흘러나온 가느다란 빛의 명주실들이 가닥가닥 나를 휘감고 아래로 끌어당겼다. 죽음이라는 미궁에서 나를 끄집어내는 아리아드네의 명주실이었다. 그 명주실을 타고 현민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죽지 마, 안나린 죽지 마. 제발..."

나를 끌어당기던 빛의 터널이 서서히 멀어졌다. 아니, 실은 내가 터널에서 벗어나 아래로 내려가는 중이었다. 끝내 명주실은 축 늘어진 내 몸으로까지 나를 고이 돌려놓았다. 햇볕에 달아오른 바닥과 맞닿은 등의 감각이 살아났다. 나를 끌어안은 현민이의 품과 숨결도 얼굴에 와닿았다.

- 쏟아지는 햇살 사이로 현민이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하고 싶은 말도, 묻고 싶은 말도 많았다. 내가 입술을 달싹이자 그 애가 얼른 내 입술에 제 검지를 갖다 댔다.
"말하지 마."
현민이가 내 머리맡으로 손을 뻗어 뭔가 집어 들더니 내 품에 안겨 주었다. 잠시 후 구급차가 도착했고 구급대원들이 나를 들것에 실어 차 안으로 날랐다. 현민이는 나를 따라 구급차에 올랐다. 차에 오르기 전, 우리를 쏘아보는 가시눈을 느꼈다. 진희와 영미였다.

 

- 달리는 구급차 안에서도 현민이는 내게 눈길을 붙박고 움직이지 않았다. 그 애가 내 손을 꼭 잡아주었다. 이제야 영원 같은 1.6초를 건너 맞닿았다. 비로소 마음이 놓여 웃었고 다시금 정신을 잃었다.

- 눈을 뜨자 천장이 보였다.
[안나린, 정신 들어? 괜찮아? 괜찮은 거 맞지?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기나 해? 네가 죽은 줄 알았단 말이야!]
혜정이가 울먹이며 내 품에 폭 안겼다.
주위를 둘러보니 병실이었다. 게다가 1인실이었다. 머리맡을 올려다보니 창밖은 어두컴컴했다. 아까만 해도 낮이었는데 벌써 밤이 된 모양이었다. 벽시계를 돌아보니 저녁 8시를 갓 넘긴 시각이었다. 푹 자고 일어난 듯 머릿속이 개운하고 몸이 가뿐했다. 머리를 더듬어 보니 칭칭 감긴 붕대가 만져졌다. 벽에 부딪힌 정수리가 욱신거리기는 했지만 죽을 정도는 아니었다.  

 

- "이거 내 전화기 맞아?"
[어, 왜?]
전화기를 집어 들고 이리저리 살폈다. 전화기는 멀쩡했다. 나는 전화기를 교복 주머니에 넣은 채 옥상에서 뛰어내렸다. 주머니는 속이 깊지 않았다. 옥상에서 떨어져 바닥에 부딪히던 순간, 밖으로 튀어나와 박살 났어야 했다.
"이게 왜 멀쩡하지?"

- 그제야 내내 아귀가 어긋나던 퍼즐 하나가 딱 맞아떨어졌다.

- "나, 죽었었어."
[뭐? 죽었었어? 그걸 왜 대과거로 얘기해?]
"현민이가 날 살려냈으니까. 옥상에서 떨어질 때 진희가 염력으로 날 꼼짝 못 하게 했거든. 그때 현민이가 끼어드는 바람에 건물 벽에 머리를 들이받았어." 
 
- 머리를 뒤흔든 충격과 머리에서 솟구치던 피가 아니더라도 똑똑히 느꼈다. 내가 죽었음을...
"근데 현민이가 나를 살렸어."
정확히는 그 애에게서 흘러나온 명주실이...
[소오름. 현민이가 죽은 사람도 살리는 능력자라도 된다 이거야?] 
"정확히는 몰라도 걔한테 그런 능력이 있는 건 분명해. 그래야 아귀가 맞아."

 

- 공사현장에서 벽돌이 떨어진 날, 파편에 맞아 피를 철철 흘리던 현민이가 차에서 내릴 즈음에는 멀쩡해졌다. 철근 실은 트럭과 사고가 난 날도 그랬다. 그 애는 철근에 어깨가 꿰뚫려 수술받고도 금세 퇴원해 학교로 돌아왔다. 과학 준비실에서 진실을 묻자, 현민이는 키스로 답을 했다. 그날 나는 에너지 드링크를 세 박스쯤 마신 듯한 활력을 느꼈다. 현민이는 자기가 어릴 때부터 상처가 잘 낫는 편이었다고 둘러댔지만, 그 키스야말로 그 애가 내게 일러준 제 정체였다. 그리고 영미. 영미가 학교 신축 공사현장에서 나를 죽이려 했던 날, 영미도 분명 죽었다. 하지만 불과 한 시간 만에 멀쩡해져서 돌아왔다. 현민이가 영미를 되살렸다. 어쩌면 어젯밤에 현민이는 정말 죽었는지도 몰랐다. 아무리 호루스의 눈으로 찾아도 보이지 않았던 이유가 그거라면 말이 됐다. 그리고 그 애는 부활했다.

- 가만, 부활...? 분명 얼마 전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단어였다. 어디였더라?

그러다 번뜩 머릿속을 스치는 단어가 있었다. 전화기로 인터넷에 접속해 위키백과를 뒤졌다.
[죽음과 부활의 신 오시리스와 최고의 여성신 이시스의 아들이며 사랑과 미의 여신인 하토르의 남편이다.]

- [오시리스가 동생 세트의 질투로 죽임을 당하자 이시스가 주술로 오시리스를 부활시키고 호루스를 잉태하였다.]
내가 위키백과 검색 창에 입력한 단어는 '호루스 신화'였다. 오시리스, 죽음과 부활의 신이자 호루스의 아버지. 현민이가 오시리스와 관계가 있다면...

- [어라, 현민인 너한테 테세우스나 아리아드네 같은 애 아니었어? 걔가 오시리스랑 뭔가 연결고리가 있다면 인간계에서 신계로 레벨업되는 거잖아. 어허, 어째 모현민이 점점 넘사벽이 되어 가는 느낌적인 느낌인데...]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만해. 현민이가 설마 오시리스의 현신이라도 되겠어?"
나도 모르게 퉁명스레 쏘아붙였다. 현민이와 또다시 헤어지기 싫었다. 이제야 내게로 돌아와 줬는데... 혜정이의 까만 눈동자가 나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속마음을 들킨 듯해 헛기침하며 얼버무렸다.

- [테세우스는 아리아드네든 오시리스든 현민이 고 녀석이 보통 인간은 아니란 건 확실해.]
"그야 그렇긴 하지."
그렇지 않다면 현민이가 그 많은 사고를 겪고도 무사할 리도, 죽은 나를 살려냈을 리도 없었다.

- "어떻게 할 거야?"
진희는 생각에 잠긴 듯 앞에 놓인 아이스 카페라떼를 빨대로 휘저으며 이렇다 할 말이 없었다.
"뭐라고 말 좀 해 봐. 니가 시작한 일이잖아."
영미가 재촉하자 진희가 손가락으로 내 호루스의 눈을 가리켰다.
"저 염탐꾼 때문에 좀 성가셔서..."
역시 진희는 만만찮은 적수였다. 그 애가 영미 쪽으로 다가앉더니 뭐라고 나직이 속삭였다. 엿듣고 싶었지만 들리지 않았다. 영미의 눈이 번뜩 빛났다.

- [현민이가 저걸 살려주면서 조건으로 건 거야. 널 살려주고 너랑 사귀겠다. 대신 나린인 털끝 하나도 건드리지 마라. 틀림없어. 아아, 모현민, 너 왜 이리 멋있냐!]
상황을 파악한 혜정이가 호들갑을 떨었다. 동감이었다. 새삼 현민이가 대단해 보였다. 나 하나 때문에 그동안 마음에도 없는 애랑 사귀는 척했다니... 그나저나 영미는 어떻게 저렇게 금방 내 병실로 왔을까. 저 애가 카페에서 진희와 밀담을 나눈 지 채 10분도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눈을 감고 진희를 찾아보았다. 내 예상대로 그 애의 염탐꾼이 병실 천장 위에 떠있었다. 카페에서 영미에게 뭐라고 속삭였는지도 대충 알 듯했다. 
영미를 총알받이로 보내놓고 뒤에서 지켜보겠다는 거였다. 이미 여론이 들썩이기 시작했고 진희와 영미는 마녀사냥의 제단에 올랐다. 게다가 지금 내 곁에는 현민이까지 있었다. 그러니 영미도 섣부른 행동을 하지는 못할 터였다. 

- "미안해, 나린아. 니가 그렇게 힘든 줄 몰랐어."
[뭐, 뭐야, 이거. 무릎 꿇기가 요새 트렌드야? 안나린, 조심해. 이년 이거 분명히 노림수가 있어. 언제 통수 칠지 모르니까 조심해.]
혜정이의 귀띔대로 나 역시 영미의 행동이 진심에서 우러난 사과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나도 그랬으니까. 가만, 나도 그랬다...?

- 영미가 내 앞에 머리를 조아리며 울먹였다. 막 여론이 들끓는 시점이었다. 이 시점에 내 병실에까지 찾아와 오늘 내가 저희에게 했던 방식을 그대로 따라 하는 행동이 진심일 리 없었다. 꿍꿍이가 있었다.
[니들이야말로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 이거냐? 하이고, 같잖아서 원.]
혜정이가 콧방귀를 뀌었다. 그때 영미가 나를 흘끔 올려다보았다. 안경 너머로 드러난 눈빛이 매섭게 번뜩였다. 역시 함정이었다. 내 손목이 뒤로 홱 젖혀졌다. 내 의지와 상관없는 행동이었다. 내가 아이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염력으로 저희에게 골탕 먹였으니 저희도 같은 식으로 나를 궁지에 빠뜨리겠다는 속셈일 터였다. 
내 손이 영미의 얼굴로 날아가려던 순간, 혜정이가 끼어들었다. 정확히는 마녀 인형이 염력으로 내 손바닥을 붙들었다. 

- "같이 있을래."
솔직히 현민이가 그렇게 말했을 때 살짝 설레기는 했다.
[안나린, 이럴 땐 그냥 못 이기는 척해. 자꾸 괜찮다고 하면 남자들은 진짜 괜찮은 줄 안다니까?]
혜정이가 옆에서 귀띔했을 때 솔깃했지만, 초인적인 의지로 현민이의 등을 밀어냈다.
"얼른 가. 얼른!"
내 성화에 못 이긴 현민이가 막상 병실을 나가자 가슴 한편이 휑했다. 지금에라도 다시 부르고 싶었지만 내 욕심만 차릴 때가 아니었다.

- "언니, 걱정 말고 오늘은 푹 자. 내가 밤을 새우더라도 지켜줄 테니까."
그렇게 큰소리를 떵떵 쳤던 나은이는 10시가 되자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아아, 이상하게 머리가 아프고 졸리네. 언니, 나 30분만 잘 테니까 깨워 줘? 꼭 깨워야 해."
10시 30분이 되자 그렇게 말한 그 애는 아예 침대에 한 자리를 차지하고 누웠다. 이내 코까지 골며 곯아떨어진 나은이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 손을 한 뼘쯤 내리자 영미의 몸이 한 층 밑으로 내려앉았다.

"아냐, 말할게! 그러지 마. 다 말할게. 제발 내려 줘, 내가 이렇게 빌게. 제발..."
영미가 손을 모아 싹싹 빌었다. 한때 그토록 나를 괴롭혔던 아이가 저렇게 비굴해진 꼴을 보니 후련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씁쓸하기도 했다. 그 애를 번쩍 끌어올려 난간 안쪽으로 내려놓았다. 옥상 바닥에 자빠져 가쁜 숨을 헐떡이던 영미가 헛구역질까지 했다. 만감이 교차하는 심정으로 바라보다 멈칫했다. 앞 건물의 대형 광고판 불빛에 비친 그 애의 팔이 어쩐지 이상했기 때문이었다. 팔과 손등이 얼룩덜룩했다. 옅은 자줏빛 반점들이었다. 조금 전 나와 벌인 염력 싸움이나 추락으로 생긴 멍이라 보기에는 그 모양새가 꺼림칙했다. 

- 영미가 고개를 들었다. 얼굴도 보랏빛이었다. 아까 병실에 찾아왔던 몇 시간 전만 해도 눈에 띄지 않았던 이상 증상이었다. 난간 너머에서 바람이 불어오자 불쾌한 냄새까지 풍겨왔다. 오래전, 앞집에 세 들어 살던 할머니가 돌아가신 적이 있었다. 독거노인이라 한동안 아무도 그 사실을 몰랐다가 나중에야 사람들이 발견했는데 그 이유가 바로 악취였다. 시체에서 풍기는 썩은 냄새. 그러고 보니... 저 반점들이 시반은 아닐까. 죽은 사람에게 생기는 옅은 자주색 반점.

- "너지?"
내가 다가들며 묻자 그 애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순진무구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뭐가?"
"혜정이가 부른 거. 너 때문이잖아."
"죽은 애가 누굴 불렀는데? 너? 넌 어디서 뭐 하다 오는데?"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이었다. 그 얼굴에 침을 뱉고 싶은 충동을 가까스로 억눌렀다. 지금은 혜정이와 나은이의 안위가 더 중요했다.
"시치미 떼지 마. 영미가 다 말했으니까."
"아아, 영미? 걔 아직도 살아 있어?"
"왜, 내가 죽였을까 봐?"
그 애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안 그래도 어차피 걘 이미 죽은 목숨인데, 뭐."

- "모든 일에는 대가가 따른다 이 말이지."
소원의 대가...?
"대가가 왜 이제야..."
"잠깐 늦춰진 거뿐이야, 누구 때문에, 근데 걔가 완전히 등을 돌렸으니 다시 톱니바퀴가 돌아가기 시작한 거지. 대가의 톱니바퀴..."
현민이를 말하는 듯했다. 영미가 현민이의 영향권 안에 있어서 한동안 소원의 대가가 작동하지 않았는데 현민이가 내게 돌아오면서 대가가 들이닥쳤다는 뜻일까.

- 그간의 정황과 진희의 말로 미루어보면, 영미가 빈 소원의 대가는 죽음이었다. 이미 영미는 신축 공사현장에서 한번 죽었다 살아났다. 그게 대가였다면 영미는 그때 죽었어야 했다. 만일 다시 대가가 닥치기 시작했다면... 영미에게 나타난 이상 증상이 무엇인지도 분명해졌다.
"너 정말..."
눈앞의 마녀를 보며 말을 잇지 못했다. 여태껏 제 편이었던 영미마저 소원의 제물로 내팽개치는 품을 보니 내 앞의 마녀는 말 그대로 냉혈동물이었다. 

- "너 가지 말고 거기 그대로 있어."
병실로 향하려던 순간, 그 애가 내 손목을 붙들었다.
"나린아, 잠깐만..."
몸을 움직이려는데 뜻대로 되지 않았다. 메두사의 눈과 마주친 사람처럼 온몸이 굳어 옴짝달싹할 수가 없었다. 현민이가 나를 되살린 후로 내 염력은 한층 더 강해졌다. 하지만 진희의 염력은 여전히 나보다 한 수 위였다. 진희가 가까이 다가와 내 귓가에 속삭였다.
"누가 죽든 결판내야 해."

- "참, 내가 전에 말 안 했지?"
그 애가 집게손가락을 튕겨 딱 소리를 냈다.
"무슨 말?"
"중도 제 머리를 못 깎는단 말..."
"무슨 헛소리야?"
"마녀의 소원."
"마녀의 소원?"
"어, 깜박하고 말 안 한 거 같아서. 마녀도 거울 보면서 자기 자신한테 소원을 빌 수 있거든. 딱 한 번 만이지만..."
"그 얘길 왜 지금 나한테 하는데?"
진희가 빙글거렸다.
"글쎄, 아마도 니가 소원을 빌고 싶어질 일이 있을 거 같아서..."

- 소원을 빌고 싶어질 일? 건드렸다. 이 마녀가 내 소중한 아이들을 건드렸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런 말을 지껄일 이유가 없었다. 머리끝까지 살의가 치밀었다. 마음 같아서는 여기서 당장 진희와 끝장을 보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병실에 두고 온 혜정이와 나은이가 무사한지부터 확인해야만 했다. 

- "아, 맞다, 맞다. 내 정신 좀 봐. 제일 중요한 걸 빼먹었네."

대꾸도 없이 노려보자, 마녀가 또박또박 덧붙였다.

"마녀의 소원을 빈 마녀는... 더는 마녀가 아니게 돼."

"닥쳐!"
몸을 뒤척여 가위눌림에서 깨어나듯 그 외침으로 몸의 결박을 풀어냈다. 로비를 오가던 사람들의 시선이 우리에게 쏠렸다. 그러든 말든 진희에게 다가들어 마녀를 노려보았다.

- 혜정이의 손글씨가 적힌 쪽지였다. 이 종잇장이 그 애가 즐겨 갖고 놀던 손수건 속에 들어 있었다는 사실만 봐도 혜정이의 것이 분명했다.
[마녀의 소녀가 되어 버렸다. 난 그냥 소녀이고 싶었는데...]

- "내가 사람을 살릴 수 있는 횟수. 마녀가 들어줄 수 있는 소원이 세 개인 것처럼..."
"두 번이지, 왜 세 번이야? 나린이랑 영미 둘이잖아."

"나. 나까지 셋이야."

- 역시 현민이는 애초에 혜정이의 존재는 물론, 소원과 관련된 규칙까지도 훤히 알았던 모양이었다. 동준이야 죽음이 닥치면서 혜정이의 존재를 알아차리게 되었는지 몰라도 현민이는 애초부터 진희와 나와 혜정이를 알아보았다. 진희가 소원놀음으로 사람을 망가뜨리는 검은 마녀라면 현민이는 사람을 되살리는 마인이었다. 진희가 달그림자라면 현민이는 태양이었다. 

- "너... 알고 있었구나."
현민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마녀가 된 것도...?"
"어."
"근데 왜 날 도와줬어?"
현민이가 대답했다.
"너, 나쁜 애 아닌 거 아니까."
익히 들었던 대답이었다. 모현민, 너도 정말 못 말리는 일편단심이구나. 현민이가 내 손을 붙들며 말했다.
"네가 혜정이를 살렸어."

- 현민이와 혜정이와 나. 우리 셋은 동준이를 둘러싸고 손을 맞잡았다. 눈을 감자 우리를 내려다보는 호루스의 눈이 보였다. 그 눈이 우리를 빨아들였다. 시간과 공간을 거스른 환영이 눈앞에 들이닥쳤다.

- "자, 이제 사실은 밝혀졌다. 나, 도미니크 비제는 신의 대리인인 집행관의 자격으로 마녀 이렌느 슐츠의 화형을 언도하노라!"
재판관이 외쳤다. 그의 눈빛에 구애를 거절당한 남자의 광기가 희번덕거렸다. 놈은 나를 사랑했다. 아니, 나를 가지려 했다. 내가 한사코 거부하자 놈은 나를 욕보이려 했고 그마저도 실패로 돌아가자 끝내 나를 마녀로 몰아넣었다.

 

- "좋다. 네가 끝내 내 여자가 되지 않겠다면 누구의 여자도 못되게 해 주겠다."
사흘간의 회유와 협박에도 내가 굴하지 않자 놈은 그렇게 나를 죽이기로 했다. 나를 사랑했던 마녀재판관은 그렇게 나를 마녀로 만들었다.

- "검은 태양의 눈에 대고 맹세하나니, 네놈들도 대가를 치르게 되리라!"
그때 불길로 뛰어들던 그림자가 있었다. 목동 하인즈였다. 그는 불길에 휩싸인 나를 부둥켜안으며 내게 속삭였다.
"너 나쁜 애 아닌 거 알아."
그의 입술이 내 입술을 덮었고 달그림자가 태양을 뒤덮었다. 한 덩어리가 된 하인즈와 나를 불길이 집어삼키던 순간, 앞날을 내다보았다. 오늘처럼 달그림자가 태양을 집어삼키는 해에 우리가 다시 태어나리라는 사실을...


- 하인즈가 불길에 휩싸인 나를 끌어안고 입을 맞추던 바로 그 순간이 내게는 영원이었다. 그 순간, 시간의 흐름이 느려졌다. 죽음의 불길이 온몸을 휘감았고 우리는 그대로 커다란 불덩이가 되었다. 그러나 뜨겁지도, 두렵지도 않았다. 이제 우리는 어둠을 밝힐 불이었으니까.

- 눈을 떴다.
수백 년을 거스른 환영에서 벗어나 현실로 돌아왔다. 빗발이 굵어졌다. 내 얼굴을 타고 연신 흘러내리는 물이 빗물인지 눈물인지도 확실치 않았다. 마냥 서글펐다. 수백 년 전의 잘못과 죄악이 지금도 여전히 되풀이된다는 사실이... 오랜 세월 동안 수없이 반복된 이 지긋지긋한 악의 고리를 끊어버릴 수는 없을까.
 
- "네 말대로 얘가 가짜라면 호루스의 눈으로 혜정일 떠올렸을 때 왜 혜정이 유골이 안치된 봉안함이 아니라 얘가 보이는 건데?"
내 말에 진희가 픽 웃음을 터뜨렸다.
"왜 그럴까? 간단해. 실제론 내가 만들어낸 끄나풀에 불과하지만, 너한텐 걔가 오혜정이니까. 너, 호루스의 눈을 너무 맹신하는 거 아니니? 저건 진실을 그대로 보여 주는 수정구슬이 아니야. 네가 믿는 걸 보여 줄 뿐인 분신이지."
 
- "어머, 니네 그새 그렇게 사이가 애틋해졌어? 애써 진실을 외면할 만큼? 가만 보니까 되게 재밌다. 근데 과연 헛소리하는 쪽이 어느 쪽일까? 너희의 가장 큰 문제가 바로 그거야. 믿고 싶은 기억만 믿느라 정작 중요한 기억은 까맣게 잊어버리는 거."
"언니! 기억하면 안 돼!"
나은이가 또 한 번 외쳤다. 그제야 저 애도 분명 내가 모르는 진실을 안다는 직감이 들었다. 요즈음 여느 아이가 겪었더라면 충격이 엄청났을 사건들을 겪으면서도 저 애는 의외로 침착하거나 무심했다.

- 모터사이클로 홍주 시내를 질주한 후, 그게 나은이의 부탁이었다던 동준이의 말이 떠올랐다. 모터사이클로 빠르게 내달릴 때 눈앞에 보이던 광경은 호루스의 눈이 대상을 찾아 시내를 관통할 때 보이던 광경과 흡사했다.
'뭐야, 이거? 깜짝 선물? 언니, 나 줄라고 사 왔구나?'
첫 번째 소원을 빌던 날, 진희가 준 지니를 들고 왔을 때 그 헝겊 주머니를 받아 들고 나은이가 했던 말도 기억났다. 단순한 장난이 아니었다. 확인하려 했던 거였다. 나은이도 알았던 거였다. 마녀와 관련된 일들을...

 

- "도대체 이러는 이유가 뭐야?"
"사바트라고 알아?"
[사바트고 샤베트고 함 뜨자니까?]
"마녀들의 집회. 마녀사냥이 한창이던 중세엔 '사바트'라는 마녀들의 집회가 있다고들 믿었대."
"그래서?"
"깊은 밤에 마녀들이 깊은 숲 속이나 산꼭대기, 묘지 같은 으슥한 장소에 모이는 거야. 주최자는 악마 마녀들은 악마에게 충성서약을 맺고 아이를 제물로 바쳐. 그리고 빙 둘러서 춤을 추다 악마랑 난잡한 관계를 맺는다는... 괴담보다도 못한 헛소리지.”

- 진희가 양팔을 활짝 벌렸다.
"오늘 널 여기까지 부른 건, 우리만의 사바트를 위해서야. 어때, 설레지 않아?"
그 애의 눈빛이 광기로 번뜩였다.
"미쳤구나, 너."

- "안심해. 우리의 사바트엔 악마나 제물 같은 건 없으니까."

진희가 눈을 감고 양손을 가슴팍 앞의 허공으로 끌어모았다. 보이지 않는 물건을 끌어안는 듯한 모양새였다. 그러자, 희미한 형체가 그 애의 가슴팍에 나타났다. 네모진 형태였다. 형체는 서서히 또렷해지더니 이내 제 모양을 갖추었다. 옅은 갈색양장 표지의 두툼한 고서였다. 무슨 책인지는 펼쳐보지 않아도 뻔했다. <말레우스 말레피카룸>.
"<마녀의 망치>. 이게 바로 마녀를 만들어낸 마법의 책이야."


- "중세에는 마녀사냥의 지침서였던 이 책이 이제 우리 같은 마녀한테는 마녀 생활 지침서가 됐어. 웃기는 아이러니지."

- "궁금하지 않아? 어쩌다 마녀사냥 지침서가 마녀 생활 지침서가 됐는지..."
"넌 그 책 때문에 마녀가 된 거야?"
내가 되묻자 혜정이가 끼어들었다.
[저 책 때문에 마녀가 됐겠어? 세상에 제일 한심한 인간들이 책이니 영화 때문에 인생 망쳤단 인간들이야. 책, 영화가 뭔 죄냐고? 애초에 그런 책, 영화 안 봐도 인생 깽판 칠 인간들이 죄지.]

- "이 엄청난 책의 지은이는 하인리히 인스티토리스 크레이머란 이단심문관이었어. 그 인간이 왜 이 책을 쓰게 된 줄 알아?"

"알고 싶지 않아, 그딴 거."
"알아야 해. 1485년 오스트리아의 인스부르크에서 불륜 저지른 자들을 마법으로 저주해 병들거나 죽게 했단 혐의로 한 여자가 재판에 회부됐지. 하인리히는 그 재판의 심문관이었는데 재판에서 개망신만 당하고 졌어. 왜인 줄 알아?"
진희가 굵은 목소리를 내어 하인리히의 주장을 재연했다.

"피고가 부린 마법의 원동력은 피고의 난잡한 성생활에 있습니다!"
[개망신당할 만하네.]
혜정이가 처음으로 진희의 말에 동의했다.
"웃기는 사실은 하인리히가 그 재판에 회부된 피고를 남몰래 좋아하고 있었단 거야."

- "재판 전 하인리히는 피고에게 유리한 심문을 해 주겠다고 회유하려고 했어. 물론 퇴짜를 맞았지. 뜻대로 안 되자 하인리히는 앙심을 품었어. 재판에서 진 뒤 하인리히가 자길 무시한 피고와 재판정과 세상에 복수할 마음으로 이를 갈며 쓰기 시작한 책이 바로 이거야. 말레우스 말레피카룸!" 
"그런 책을 왜 네가 갖고 있는 건데?"
내가 물었지만, 진희는 대답하지 않고 책을 허공에 떠오르게 해서 책장을 사르륵 넘겼다.
"1486년 하인리히는 라틴어로 된 3부 256페이지짜리 희대의 불쏘시개를 완성했어. 마녀는 주문을 외워 병을 퍼뜨린다. 여자는 나약하고 정욕으로 가득해서 악마의 유혹에 빠지기 쉽다, 마녀는 악마와 정을 통한 몸이니 화형으로 없애야 한다. 마녀들이 득세하면 인류도 신의 심판을 받아 멸망하게 된다. 기타 등등..." 
진희가 소리 나게 책을 덮었다. 천둥이 세상을 울렸다. 장대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 "비뚤어졌으면서도 교활한 놈이야. 미리 받아둔 교황청 성명서를 이 역대급 쓰레기에 교묘히 끼워 넣어 정식 승인을 받은 마녀사냥 지침서로 꾸미고 퀼른대학 요하네스 슈프렝거 교수까지 공저자로 끼워 넣었지. 거기에 출애굽기의 한 구절까지 인용해 화룡정점을 찍었고."
"너는 마녀를 살려두지 말지니라."
나도 모르게 그 구절을 읊었다. 진희가 손가락을 탁 튕겼다.

"빙고! 이 책은 그 자체로 엄청난 권력이 됐어. '권위에의 복종'이란 말 들어봤어?"

 

- 인터넷에서 들어본 적이 있었다. 스탠리 밀그램이란 심리학자가 실험 참가자들에게 교사 역과 학습자 역을 맡게 하고, 학습자가 문제를 틀릴 때마다 교사가 학습자에게 전기충격을 가하는 단추를 누르게 했다는 실험. 교사 역을 맡은 참가자 대부분은 연구원이 모든 책임을 지겠다는 말에 별 망설임도 없이 최고치의 충격 버튼까지도 순순히 눌렀다.
"예나 지금이나 대중은 소수의 권위에 한없이 약해. 이 불쏘시개는 의외로 세상에 금세 퍼졌고 엄청난 권력의 교본이 됐어. 달랑 150부로 시작한 이 책이 금속활자의 보급으로 오스트리아는 물론, 유럽 전역, 나아가 전 세계에 수만 부가 팔려나간 거야." 
비극의 역사였다.

- "그런데 그 책이 왜 마녀 생활 지침서가 됐단 거야?"

내가 묻자 진희가 대답했다.
"이 책이 세상에 있지도 않았던 마녀를 만들어 냈으니까. 무에서 유를 창조했다고나 할까. 놀랍지 않아? 그전까지만 해도 세상에 마녀는 없었어. 마녀사냥으로 희생된 가짜들만 있었지. 그런데 바로 게오르겐탈이란 작은 소도시에서 마녀로 몰려 죽은 이렌느 슐츠라는 열일곱 살배기 여자애가 화형 당해 죽던 날, 진짜 마녀가 생겨났어." 
내가 환영에서 보았던 이렌느 슐츠의 목소리가 귓전을 울렸다. 

'검은 태양의 눈에 대고 맹세하나니, 네놈들도 대가를 치르게 되리라!' 

세상에 없었던 마녀를 만들어낸 원흉은 바로 마녀사냥이었다.

- "이렌느 슐츠가 죽고 난 후부터 개기일식이 있는 해마다 하나둘 마녀가 태어나기 시작했어. 개기일식이 있었던 2001년에 태어난 우리도 그중 하나야."

"우리?"
"그래, 우리."
"이 책은 하인리히가 만들어낸 불쏘시개랑은 달라. 같은 말레우스 말레피카룸이지만 내용도, 목적도, 심지어 지은이도 다르지. 이 책의 지은이는 이렌느 슐츠야. 정확히 말하자면 이렌느 슐츠가 죽기 직전 세상에 남긴 염원이고 마력이지."

- "마녀의 운명을 타고난 '마녀의 소녀' 손에서 자연 발생해. 걔가 이렌느 슐츠 또래가 되었을 때... 한 해에 태어나는 마녀의 소녀는 셋이지만 먼저 각성하는 애는 <말레우스 말레피카룸>을 손에 넣은 마녀의 소녀야. 일종의 선구자겠지. 걔는 가까운 친구들한테 소원 떡밥을 던지고 그 대가를 스탯 포인트로 쌓아가면서 점점 힘이..."
"그만! 도대체 나한테 이러는 이유가 뭔지나 말해!"
내가 말을 끊자 진희가 나를 빤히 바라보다 말했다.
"넌 기억하지 못하지만, 네가 바로 그 마녀의 소녀야."

 

- <말레우스 말레피카룸>이 내게로 날아왔다. 반사적으로 그 책을 붙잡았다. 책을 붙든 순간, 비명을 내지르며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떠올랐다.
망각 속에 봉인되어 있던 기억들이 머릿속에서 부글부글 솟구치더니 흘러넘치기 시작했다. 내용물이 끓어 넘치는 마녀의 가마솥처럼...

- "뭐 좀 보여? 보여야 정상이지. 넌 그 책이 너한테 생겨난 뒤로 마녀의 능력과 임무, 요령, 주의사항, 기타 등등을 저절로 익히게 됐다고 했어.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기억 회복에도 도움이 되나 보네."

- "어때, 안나린? 돌아온 거야?"
진희가 물었다. 자리에서 일어서며 대답했다.
"그래, 돌아왔어."
진희의 말이 맞았다. 내 기억을 지운 장본인은 바로 나였다. 여태껏 나는 내가 진희라는 미노타우로스에 맞서는 테세우스인 줄로만 알고 아리아드네의 명주실을 찾아 헤맸다. 내가 메두사에 맞서는 페르세우스인 줄로만 알고 메두사의 머리를 벨 방법을 찾아 헤맸다. 그런데 나야말로 미노타우로스였고 메두사였다.

- 초등학교 3학년 때, 철모가 내게 돌멩이를 던졌던 날, 내가 그 돌멩이를 피했던 기억은 사실과 달랐다. 그날 나는 돌멩이를 튕겨냈다. 내게로 날아왔던 돌멩이는 그대로 철모에게로 되돌아가 녀석의 이마에 명중했다. 깨진 이마를 감싸 쥐고 울고불고하는 녀석을 지나치며 녀석에게 말했다.
"다시는 힘없는 애들 괴롭히지 마."
녀석은 다시는 아무도 괴롭히지 못했다.

- "돌아온 기분이 어때?"
진희가 물었다.
"나쁘진 않아."

 

- 혜정이가 품고 다녔던 쪽지도 혜정이가 아닌 나를 두고 한 말이었다.
[마녀의 소녀가 되어 버렸다. 난 그냥 소녀이고 싶었는데...]

 

- "너도 진작 알았어, 내 정체?"
혜정이에게 물었다.
[그냥 어렴풋이 짐작만 했지.]

 

- 두 번째 소원을 빌던 날, 거울 속의 내가 왜 웃었는지도 알듯했다. 마녀 인형을 품에 안고 나를 바라보며 웃던 그 얼굴은 마녀 안나린의 얼굴이었다.

- '너, 나쁜 애 아닌 거 아니까'라는 현민이의 말에는 중요한 부사 하나가 빠졌다.

'이제'.

그 애가 한 말의 참뜻은 '너, 이제 나쁜 애 아닌 거 아니까'였다.

 

- 유진이는 나 때문에 마녀가 되었고, 나 때문에 진희가 되었다. 그런 진희가 사고를 일으켜 아빠와 엄마가 죽었다. 그래서 그날 나는 빌었다. 제자리에서 떨어져 나와 발밑에 나뒹구는 사이드미러에 비친 내 얼굴을 보며 마녀의 소원을... 
"돌이키고 싶어. 다 돌이키고 싶어. 이 모든 걸 전부 다 돌이키고 싶어."

- 얼토당토않은 소원이었다. 제아무리 마녀라 해도 시간까지 거스를 수는 없으니까. 그 무엇도 본래의 상태로 돌아가지 않았다. 마녀의 소원은 시간을 거스르는 대신 마녀의 능력과 기억을 앗아갔다.

- "네가 원했던 게... 이거지?"
진희에게 물었다. 그 애가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진작 이렇게 하면 됐잖아. 왜 그렇게 날 괴롭히고 많은 사람들한테 민폐를 끼친 건데?"
"간단해 생각해 봐. 네 기억이 진작 돌아왔다면 네가 과연 나한테 마녀가 되고 싶단 소원을 빌었을까?"
"그럼 그동안 소원놀음을 벌인 목적이 나를 지금의 나로 소환하려던 거였어?"
"뭐, 이래저래 복잡하게 빙 돌아오긴 했지만..."

- "그 소원 덕분에 알게 됐어. 2001년, 세상에 태어난 마녀가 너 말고도 또 있단 것, 그게 바로 이 당산고에 다니는 진희란 것. 자, 인제 어느 정도 감이 와?"
그때 덩어리를 이루어 날아온 의자들이 진희를 덮쳤다. 내가 염력으로 날린 의자들이었다. 진희가 의자 더미 속으로 사라졌다.
"그래, 이제 감이 오네. 넌 그 소원의 대가로 죽었어. 그리고 지금의 진회로 되살아났지. 내가 네 세 번째 소원을 들어주지도 않았는데..."

- 유진이는 내게 세 번째 소원을 빌고 싶어 했다. 하지만 내가 저 아이를 피했다. 첫 번째 소원이 그 대가로 저 애의 영혼을 거두어갔으니까. 영혼이 사라진 유진이는 괴물이 되었다. 마녀의 힘과 소원놀음에만 광적으로 집착하는 괴물. 저 아이를 그 지경에 이르게 한 장본인이 바로 나였다. 못 견디게 무거운 죄책감이 내 어깨를 짓눌렀다.

- 그즈음 유진이는 교통사고로 죽었다. 두 번째 소원의 대가였다. 그 사고로 또 다른 마녀였던 진희도 죽었다. 각성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던 아이였다. 죄책감은 아예 거인의 발이 되어 나를 통째로 깔아뭉갰다. 그래도 마녀의 소원을 빌기는 쉽지 않았다. 마녀의 소원에도 등가교환이 따르기 때문이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그것이 그 대가였다. 
 
- 소원과 대가의 순서가 바뀌었지만 상관없었다. 대가를 먼저 치렀으니까.  

 
- "웰컴 백, 마녀 안나린."
진희가 의자 더미 사이에서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뒤이어 의자를 부려 내게 폭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쉴 새 없이 의자가 날아들었다. 내가 염력으로 의자를 튕겨내는 와중에도 진희는 여유롭게 말을 이었다.
"그거 알아? 사실 그날 목표물은 너였어. 네 부모가 아니라... 난 그때 네가 차에서 못 빠져나온 줄 알았거든."


- "세 번째 소원은 죽은 진희한테 빌었거든. '세상에서 가장 강한 마녀가 되고 싶어'라고..."
사실 한 마녀에게 세 가지 소원을 빌어야 한다는 규칙은 없었다. 저 영악한 아이는 그 사실마저 일찍이 알아차렸다.

- 수수께끼가 풀렸다. 저 마녀는 나와 같이 죽을 작정이었다.
작년에도 그랬다.
엄마 아빠를 죽게 한 사고가 그랬듯 유진이의 죽음도 단순한 교통사고가 아니었다. 졸음운전으로 인한 충돌사고가 아니라, 유진이가 스스로 택한 자살이자, 살인이었다. 유진이는 그렇게 사고를 일으켜 마녀 진희를 죽이고 새로운 진희로 거듭났다. 

- 그날, 나를 죽이고 저도 죽을 작정이었다. 내가 옥상에서 떨어지던 날, 진희가 양손을 활짝 벌리며 제품으로 어서 오라는 듯 나를 끌어당긴 이유도 매한가지였다. 진희는 그렇게 무소불위의 마녀로 거듭날 작정이었다. 단어 하나가 커다랗게 불어나 머릿속을 가득 메웠다.
융합.

- "이쯤에서 그만할 거면 애초에 시작하지도 않았어."
진희가 제 옆에 비죽 튀어나온 철골을 염력으로 뚝 떼어내어 허공에 떠오르게 하더니 그 철골을 구부려 9자 형태를 만들었다.
"9는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수야. 3의 제곱수니까 극도로 확장된 3이라고 볼 수 있지. 9를 엔네아드라 부르기도 해. 고대 이집트의 아홉 신을 뜻한대."
그 애가 손을 활짝 펴자 허공의 철골이 세 토막 났다.
"9는 새로운 창조를 위한 파괴를 의미하기도 해. 여러 언어에서 '새롭다’는 단어가 9를 뜻하는 라틴어 '노벰(novem)'에서 유래됐다니 재밌지 않아9자 모양으로 양수 속에서 아홉 달을 채워야 태어나는 인간의 숙명도 그렇고, 추격자를 따돌리려고 제 동생을 아홉 토막으로 잘라 바다에 버렸다는 메데이아 얘기도 꽤 의미심장하지." 

- "우린 3이야. 이렌느 슐츠라는 9가 셋으로 쪼개진 미완의 3. 안나린 너도, 죽은 진희도, 나도... 이제 9가 될 시간이야."
"아니, 넌 살인자일 뿐이야."
내가 쏘아붙이자 진희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살인자가 아니라 순교자야. 9라는 완전체를 위해 3을 희생하는 순교자. 봐, 작년 10월 27일까지만 해도 유진이었던 내가 이젠 진희가 됐잖아. 9일 만에 진희로 부활했을 때의 기쁨, 넌 모를걸? 이제 알게 해 줄게."
 
- "인간의 역사는 해선 안 되는 일의 되풀이였어. 저게 바로 우매한 인간들이 우리한테 저질렀던 짓이라니까? 우린 인간들에게 대가를 치르게 할 운명을 타고난 마녀의 소녀들이야." 
"그 대가, 너나 치러!"
몸을 돌려 염력으로 철골 구조물을 진희에게로 날렸다. 철골을 피하느라 그 애의 집중력이 흐트러지자 불길이 잦아들었다.

 

- 눈을 감았다. 그리고 나 안나린을 떠올렸다. 머리 위에 도사린 호루스의 눈이 강당 바닥에 널브러진 나를 비추었다. 호루스의 눈이 보는 내 모습은 내가 눈을 뜨는 순간 사라지게 마련이었지만 방법이 없지는 않았다.

- 오른쪽 눈은 감은 채 왼쪽 눈만 떴다.
호루스의 눈이 올려다보였고, 동시에 강당 바닥의 내가 그대로 내려다보였다.
두 광경이 하나로 겹쳐진 순간, 호루스의 눈은 나를 비추는 거울이 되었다. 그제야 내 의도를 알아차린 진희가 괴성을 지르며 내게로 날아들었다. 그 애가 나를 덮친 순간, 그 애를 올려다보며 마녀의 소원을 빌었다.

- "지옥으로 꺼져 버려. 지옥으로 꺼져 버려. 지옥으로 꺼져 버려."

 

호루스의 눈을 이루었던 눈동자가 점점 밝아졌다. 개기일식 때 달그림자에 가렸던 태양이 점점 드러나는 듯한 모양새였다. 이윽고 호루스의 눈이 태양의 눈으로 바뀌어 강당 천장에 떠올랐다. 눈부시고 뜨거웠다. 강당을 송두리째 녹여버릴 듯한 빛과 열기였다. 천장의 구조물과 조명은 이내 형체도 없이 녹아 버렸다. 태양의 눈이 블랙홀처럼 주위의 모든 것을 끌어당기기 시작했다. 강당 바닥을 뒹굴던 <말레우스 말레피카룸>이 가장 먼저 날아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 내게 폭 안길 듯한 착각에 또 울었다. 밤새 그치지 않을 비처럼 눈물도 그치지 않을 터였다. 그 애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고마워, 혜정아. 잊지 않을게.'

- 마녀와 마녀의 소녀가 사라진 자리에 그냥 소녀와 소년만 남았다.

 

"늦겠다."
대문을 나서던 순간, 굵직한 목소리가 옆에서 들려왔다. 현민이였다.
"야, 나이 차 타고 다니기 불편하다니까 왜 자꾸 와?"
자가용 옆에 서 있던 현민이가 차 뒷문을 열고는 내 등을 떠밀며 말했다.
"나은아, 타. 너도 데려다줄게."
"아싸, 역시 우리 형부밖에 없다니까?"
나은이가 뒷좌석에 오르며 능청을 떨었다. 그 애의 입에서 나온 '형부'라는 단어에 얼굴이 펑 달아올랐다.

- "야, 형부는 무슨... 누가 형부야?"
마지못해 차에 오르며 나은이에게 따졌다.
"둘이 안 깨지고 오래오래 사귀다 보면 형부가 될 수도 있는 거지, 뭐. 그죠, 형부?"
현민이와 나 사이에 앉은 나은이가 현민이에게 팔짱까지 끼며 아양을 떨었다.
"어? 아... 뭐..."
당황해서 더듬대는 현민이의 얼굴도 붉게 물들었다. 차가 출발했다.

- 이제야 비로소 크레타의 미궁에서 빠져나온 듯했다. 토끼 굴과 이어진 이상한 나라를 빠져나온 앨리스, 오즈에서 캔자스 시골로 돌아온 도로시. 번데기에서 세상으로 나온 누에나방. 고치에서 날개돋이 한 매미마녀와 소원이라는 불구덩이에서 벗어나 돌아본 세상은 아름다웠고 삶은 눈부셨다.

 

- 자습이 시작되자 그 애가 에어팟을 꽂고 나직이 콧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내게도 익숙한 멜로디였다. 김윤아의 <착한 소녀>.

- 주머니 속의 전화기가 진동했다. 담임 선생님의 눈치를 보며 전화기를 꺼내어 책상 밑으로 몰래 확인했다. 제목 없는 이메일 한 통이 와 있었다. 발송인은 유진이였다. 메일을 열어 보았다. 내용은 한 줄도 없었다. 사진 한 장이 전부였다. 그 사진을 하염없이 들여다보았다.

- 우리는 그 얼마나 오랫동안 나란히 한 길을 걷는 중일까.




- "소원 들어주는 원숭이 손 얘기 알아?"

진이에게 물었다. 이제 막 홍주고 축제를 구경하고 나오던 참이었다.
"그게 뭔데?"
진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내게 물었다. 무슨 뜬금없는 소리냐는 투였다.

- "100년도 더 된 외국 소설에 나오는 건데, 오늘같이 음침한 날씨에 어느 노부부가 사는 집에 손님 하나가 찾아와선 미라가 된 원숭이 손을 하나 보여 줘. 그 손에 어느 수도사가 주문을 걸어놔서 그게 소유자의 세 가지 소원을 들어준다면서."
심드렁하게 말을 꺼냈지만, 이 이야기를 꺼내려고 몇 날 며칠을 고민하고 준비했다.
"어디서 들어본 거 같은데? 그거 으스스하게 분위기 잡다가 나중에 나중에 깜짝 놀라게 하는 얘기 아냐?"
진이가 장난기 어린 얼굴로 나를 째려보았다.
"들어 봐, 일단 손님은 이 물건의 첫 번째 소유자가 세 번째 소원으로 자기 죽음을 빌었다는 둥, 이런 물건은 세상에서 없어져야 한다는 둥, 현명한 소원을 빌어야 한다는 둥 분위기만 겁나 잡다가 원숭이 손을 놓고 가. 집 문제로 골치를 썩던 노부부는 장난 삼아 당시론 상당히 큰돈인 200파운드가 필요하다고 원숭이 손한테 빌어보고."
"그래서?"
진이의 얼굴에 호기심이 어렸다.
"아무 일도 안 생겨, 그날은.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 하고 넘어간 다음 날, 사람 하나가 노부부 집에 찾아와선 이러는 거야. 당신네 아들이 직장서 일하다 기계에 딸려 들어가서 죽었다고. 그리고 그 보상금으로 200파운드가 나올 거라고."
그렇게 말하고는 짐짓 대수롭지 않은 척, 길가에 뒹구는 보도블록 조각을 툭 걷어찼다.

- 진이의 얼굴을 흘끔 보니 이야기에 꽤나 빠져든 눈치였다. 어쩐지 미안했지만 운을 뗐으니 이야기는 끝맺어야 했다.
"아들 장례 치르고 일주일이나 지났나, 자식 잃은 슬픔에 잠도 못 자던 아내가 남편을 막 조르기 시작해. 원숭이 손한테 두 번째 소원을 빌라고..."
"아들이 살아 돌아오게 해 달라고?"
"빙고. 아내의 성화에 못 이겨 남편이 소원을 빌지. 근데 바람만 불던 밖에서 갑자기 누가 현관문을 똑, 똑, 똑, 두드리는 거야."
때마침 눈앞으로 길고양이 한 마리가 휙 지나갔다. 기겁한 진이가 고양이가 사라진 골목 모퉁이를 돌아보며 몸서리를 쳤다.
"소름 끼쳐. 그래서?"
"아내는 아들이 돌아왔다고, 문 열어 줘야 한다고 막 재촉하는데, 남편은 밖에서 문 두드리는 게 너무 무섭고 꺼림칙한 거야. 그래서 아내가 문을 열어 주러 간 사이에 세 번째 소원을 빌지."

- 안나린, 이런 소원놀음을 꼭 시작해야 하니? 막상 이야기를 꺼내니 나 자신에게도 회의가 들었다. 내가 잠시 말이 없자 진이가 물었다.
"소원 취소?"
"아마 그랬겠지. 밖에서 문 두드리는 걸 사라지게 해 달라거나. 그게 그거지만."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
"갑자기 노크 소리가 그쳤다. 현관문을 열어 보니 밖엔 썰렁한 바람만 불고, 아무도 없더래. 노모는 구슬프게 흐느껴 울고 가로등만 텅 빈 거리를 비추더란 얘기."
진이가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이야기가 더 있는 줄 아는 모양이었다.
"끝이야?"
"어."

- 그제야 그 애가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내 어깨를 툭 쳤다.
"뭐야, 그게 반전도 없고, 감동도 없고. 그 얘길 왜 한 거야?"
글쎄, 내가 이 이야기를 왜 꺼냈을까.

- "그냥, 너 심심할까 봐."
거짓말이었다.
"에이, 나 심심할까봐 해 준 소리가 아닌 거 같은데? 네년의 음험한 꿍꿍이속을 냉큼 털어놓지 못할까!"
진이가 내 목을 조르는 시늉을 하며 재촉했다. 이런 반응을 기대하기는 했지만, 막상 이렇게 나오니 선뜻 본론으로 들어가기가 망설여졌다.

- "장난해? 세상에 마녀가 어딨어?"
어젯밤, 나은이에게 털어놓았을 때도 그 애는 믿지 않았다. 하지만 사실이었다.

- 한 달 전, 잠을 자다 가슴이 묵직해서 깼다.
처음에는 나은인 줄 알았다. 중학생이 되어 방을 따로 쓰게 된 후에도 그 애는 잠이 오지 않는 밤이면 살금살금 내 방으로 와서 내 옆에 잠들곤 했다. 게다가 자다가 툭하면 내 배에 다리를 올려놓아서 잠을 설치게 하곤 했다.
눈을 뜨고 보니 난데없는 책 한 권이 떡하니 내 위에 올라와 있었다.

- "뭐야, 이거."
두툼하고 낡아빠진 양장본 고서였다. 그 책을 집어 든 순간, 어떤 목소리가 들렸다.
"마녀를 찾아라!"
어디서 방송을 크게 틀어놨나 싶어 고개를 번쩍 들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직 어둠이 가시지 않은 새벽이었다. 귀를 기울여보았지만, 창 너머는 마냥 고요하기만 했다.
잘못 들었나? 머리맡에 두었던 전화기를 들여다보니 새벽 3시였다. 토요일이라 앞으로 대여섯 시간은 족히 더 자도 되는 날이었다. 목침 대신 써도 손색이 없을 책일랑 침대 옆으로 던져버리고 다시 이불속을 파고들었다. 
"마녀를 찾아라! 독 있는 뱀처럼 박살 내버려라!"
다시금 그 목소리가 들렸다. 정확히는 목소리들이었다. 여러 사람이 동시에 외치는 목소리가 왜 자꾸 들리는지 몰랐다.

- 그 책과 환청이 시작이었다. 처음에는 영 꺼림칙해서 책을 내다 버렸다. 그런데 자다 눈떠보면 그 책은 어느새 다시 내게로 돌아와 있었다. 그러기를 몇 번이나 되풀이하다 포기했다. 어떤 초자연적인 힘을 지녔는지는 몰라도 평범한 책이 아님은 확실했다. 

 

- 신기한 사실은 난생처음 보는 문자로 적힌 그 책이 술술 읽힌다는 사실이었다. 나중에 알아보니, 그 책은 중세에 마녀사냥의 지침서로 쓰였던 <말레우스 말레피카룸>이었다. 그런데 내게 온 책은 알려진 바와 내용이 달랐다. 라틴어로 적혔다던 내용도 실은 독일어였다. 3부로 이루어진 책은 왜 마녀가 생겨났으며, 마녀는 무엇을 할 수 있고,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상세히 일러주는 일종의 지침서였다. 

- 책이 손에 들어온 후로 염력이 강해졌다. 어려서부터 위급한 순간에 처할 때마다 내가 염력을 부렸던 이유도 알게 되었다. 눈을 감고 대상을 떠올리기만 하면 천리 밖에 있는 대상도 비춰 주는 호루스의 눈은 덤이었다. 그 책에 따르면, 나는 개기일식이 일어난 해마다 태어나는 마녀의 소녀였다. 

- "너 말야."
한참을 망설인 끝에 진이에게 진짜 용건을 꺼냈다.
"나 뭐?"
"너라면 뭘 빌겠어?"
"뭐야, 생뚱맞게.”
진이의 반응은 예상대로였다.

- "내 말은, 그 원숭이 손이 네 눈앞에 있고 그게 진짜로 세 가지 소원을 들어준다면 넌 무슨 소원을 빌겠냐, 이거지."
이것이 마녀의 생활지침서 <말레우스 말레피카룸>이 일러준 나의 첫 번째 임무이자 의무였다. 가장 친한 친구의 세 가지 소원을 들어주라. 그리고 주의사항과 대가도 미리 일러두라.
싫어도 해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죽게 된다고 했다.

- "말도 안 돼. 그런 게 있음 다 부자 되고 다 여신 되게?"
맞는 말이지만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이었다.
"대가가 따른다면? 그것도 아주 살벌한 대가가 너라면 어떡할래?"
내가 묻자 진이가 어깨를 으쓱했다.
"글쎄... 대가가 없을 소원을 빌면 되지 않나? 미리 지능적으로 치밀하게 계획을 짜서 애초에 대가를 방지하는 소원, 그러니까 갑자기 벼락부자가 되게 해달라거나 전교 1등을 하게 해 달란 멍청한 소원이 아니라, 등가교환의 여지가 없는 소원을 비는 거지."

- 등가교환의 여지가 없는 소원이라...
"과연 그런 소원이 있을까?"
"그렇게 따지면 과연 소원 들어주는 원숭이 손이란 것도 있을까? 애초에 말이 안 되는 얘긴데 뭘."
"그건 그래."
진이의 말이 맞았다. 하지만 말도 안 되는 이야기가 실제로 일어나는 곳이 바로 이 세상이었다.

- "솔직히 그 얘기도 가만 보면 쫌 그래. 원숭이 손한테 소원 빌고 생긴 일들이 소원을 빌어서 그게 진짜로 이루어진 건지, 아님 그냥 절묘한 타이밍에 터진 우연의 일치인지 누가 알아? 그 집 현관을 노크한 사람도 알고 보면 그냥 길 물어보려고 두들긴 건데 두 내외가 괜히 아들인 줄 착각하고 설레발치다 그 사람 가고 난 담에 문을 열었는지도 모르고..."
이야기가 더 엉뚱한 데로 빠지기 전에 말허리를 잘랐다.
"결론은, 너라면 한번 해 보겠다 이 말이지?"
"그런 게 진짜 있다면야... 밑져야 본전이다 생각하고 해 볼지도 모르지."

- 머릿속에서 경고등이 켜졌다. 여기서 멈춰야 한다는 직감이 들었다.
하지만 내 입은 의지와 상관없이 진이를 물고 늘어졌다.

"그래? 소원이 뭔데?"
"소원?"
"어, 네가 지금 가장 간절히 바라는 거."
빌지 마, 그냥 여기서 끝내.

- "간절히 바라는 게 어디 한둘인가. 근데 너 오늘 진짜 이상하다? 눈빛도 음흉한 게. 약 먹었냐?"
정말 이상하기는 했다. 입이 멋대로 움직였다. 입술이 바짝바짝 마르고 가슴이 두근거렸다. 현기증마저 일어서 마음 같아서는 소원이고 뭐고 집어치우고 집에 가서 쉬고 싶었다. 내가 소원을 들어주는 마녀라니... 내가 생각해도 어처구니없었다. 그런데 내 입은 여전히 뭐에 씐 듯 움직였다.
"괜찮으니까 말해 봐, 나한테만 살짝. 소원이 뭐야?"

나를 빤히 바라보던 진이가 말했다.
"너 오늘따라 꼭 무슨... 마녀 같다?"

- 가슴이 덜컥했다. 하지만 내 혀는 내게서 독립 선언이라도 한 듯 능청스럽게 받아쳤다.
"모르지, 나야말로 세 가지 소원을 들어주는 마녀인지도..."
이마에 진땀이 맺혔다. 급발진하는 차를 탄 기분이었다. 친한 친구를 상대로 이딴 영업 시작하는 게 아니었어, 차라리 다단계를 하고 말지! 그런데 진이의 입에서 뜻밖의 말이 나왔다.

- "야, 세상에 그런 게 있다면 나도 되고 싶다."
"무슨 말이야?"
"마녀 말이야. 네가 세 가지 소원을 들어주는 마녀일지도 모른다며? 그렇담 나도 마녀 할래. 우린 단짝이니까."

- 그 소원을 듣는 순간, 이상하게도 눈앞이 아찔해졌다. 기시감이었다. 현기증이 일어 중심을 잃고 비틀거렸다. 하마터면 뒤로 벌렁 넘어질 뻔했는데 누가 나를 붙들어 주었다. 돌아보니 키가 훤칠한 내 또래 남자애였다.
"괜찮아요?"
남자애가 물었다. 가까이에서 보니 잘생긴 얼굴이었지만, 표정이 어두웠다. 처음 보는 얼굴인데 이상하게 친숙했다. 나도 모르게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아, 네에... 괜찮아요. 고맙습니다."
그 애에게 눈인사를 건넸다. 남자애가 마주 고개를 끄덕였다. 

 

- "내 소원이 그렇게 충격적이었나?"
"그건 아닌데 왠지 그 말... 전에도 들은 적 있는 거 같았어."

어쩐지 다 낯익었다. 마녀가 되고 싶다는 말도, 넘어질 뻔한 나를 붙잡아 준 저 남자애도...
"아, 영화 <박하사탕>에서 봤어. 남주가 여긴 처음인데 옛날에 와 본 적이 있는 거 같다고 그러니까, 여주가 그러더라고. 그런 건 꿈에서 본 거라고..."
진짜 꿈에서 봤나? 차라리 그랬으면 좋으련만... 공연히 기분이 어수선하고 가슴이 두근거렸다. 어쩐지 앞으로 무슨 큰일이 벌어질 듯 불안했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당장에라도 비가 쏟아질 듯 흐린 날씨였다. 날씨 탓이라 여기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 마녀가 뭐, 대순가? 남보다 좀 더 특별할 뿐인데, 뭐...

그렇게 내 현실을 정당화했다. 하지만 가장 친한 친구를 끌어들인다는 일이 못내 꺼림칙했다. 이제 책에 나온 대로 진이에게 소원을 이루어 줄 지니를 주고 소원 의식을 일러줄 차례였다.
버스정류장에 이르러 진이와 나란히 섰다.
어쩐지 뒤통수가 간지러웠다. 돌아보니, 방금 나를 잡아주었던 남자애가 내 뒤에 서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기분 탓인지는 몰라도 그 애의 눈빛도 불안해 보였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남자애가 얼른 고개를 돌렸다.

- 찜찜한 기분을 날릴 양으로 더 호들갑을 떨며 전화기를 들여다보았다. 막 출시된 최신기종이었다. 진이가 카메라 앱을 불러오더니 나를 끌어당겼다.
"붙어라, 안나린, 인증샷 간다."
전화기를 들고 이리저리 자세를 잡던 진이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 저기 좀 봐."
진이가 가리키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해가 막 먹구름에 가려지는 중이었다. 주위가 삽시간에 어두컴컴해졌다.
"꼭 개기일식 같지 않냐?"

- 구름에 가려진 해를 올려다보노라니 이상하게도 눈앞이 부옇게 흐려졌다.
"그거 알아? 내가 태어나던 날 개기일식이 있었대."
개기일식이라는 말도 어쩐지 의미심장하게 들렸다.

- "이거 잘 나오면 톡으로 보내줘."
내 말에 진이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폰 바꾸고 첨 찍는 사진이니까 발송예약 걸어서 메일로 쏴줄게. 정확히 1년 뒤에 받아 보게."
"왜?"
"그냥, 그때도 우리가 지금처럼 단짝일지 궁금해서... 1년짜리 타임캡슐이라고나 할까."

- 활짝 웃어 보이려 했는데 얼굴이 자꾸만 일그러졌다. 진이가 폰카 셔터를 눌렀다. 나와 진이는 물론, 어깨너머로 보이는 모터사이클 커플과 한 남자애가 프레임에 담겼다.


- 순간, 세상이 고요해졌다.
적어도 내가 서 있는 이 버스정류장에서는 시간의 흐름이 멎은 듯했다. 아니, 멎었다기보다는 시간의 흐름이 한없이 느려진 듯했다.
영원 같은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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