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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옌즈양] 소환사 1-3

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1

by 일루젼 2026. 3. 3. 0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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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옌즈양 / 유소영
출판 : 문학수첩
출간 : 2017.03.29


저자 : 옌즈양 / 유소영
출판 : 문학수첩
출간 : 2017.04.24


저자 : 옌즈양 / 유소영
출판 : 문학수첩
출간 : 2017.05.22
 


 


뭔가를 읽는 게 지겨워질 때 최고의 처방은, 역시 소설이다.

동화나 전설 또한 '이야기'로서 소설의 일종이라고 본다면 -서사문학의 분류와 계보에 대한 것은 잠시 접어두도록 하자- 대다수의 인간이 생애 최초로 접하는 책은 소설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소설을 읽는 것은 독서의 초심으로 돌아가는 행위이자 이어가는 행위인 것이다.

 

따위를 주절거릴 수 있을 정도는 회복이 된 것 같다. 

 

얼마 전 자주 가는 도서관에서 연초 이벤트로 대출 가능 권수를 늘려주었었다. 호기롭게 손 닿는 대로 집어왔다가 기간 내에 다 읽느라 즐거운 곤욕을 치렀는데, 그 책들 중 <소환사>가 있었다. 

 

<소환사>는 곤충들을 다룰 수 있는 '곤충소환사'에 관한 이야기이다. 중국 작가의 글인데, 그래서인지 인용되는 사례나 용어들이 친숙하면서도 이국적이었다. 제갈량과 한신, 이백 정도는 한자문화권이었던 우리에게도 낯설지는 않으니까. 하지만 가까운 손윗사람을 존경의 의미를 담아 '세숙'이라 부른다거나, 이름을 축약해 부르거나 아(阿)를 붙여 부른다거나 하는 등의 변주는 신선했다.

 

<소환사>의 곤충소환사들은 공간을 넘나드는 무언가를 소환하지는 않는다. 이미 존재하는 곤충들을 자신의 의지대로 '다루는' 것에 가깝다. 명귀 같은 인공 곤충이 나오기도 하지만, 아무래도 주인공 반준이 실존 곤충들을 다루는 목파 소환사인지라 대부분의 에피소드는 충의 특성을 이용하는 편이다.

 

가장 아쉬운 점이라면 3권에서 번역 출간이 끊어졌다는 점.

'한신은 역사에 최초로 기록된 곤충소환사였다'라는 충격적인 설정을 던져놓고 -황실과 각 계파끼리의 암투가 본격적으로 진행되려는 참에- 멈춰버리다니. 반준의 손자로 보이는 이가 현대의 시점에서 묘사하는 반준 할아버지와 스무 살 정도의 젊은 반준을 오가는 재미가 쏠쏠했는데.

손자의 손목에 상처라면, 그가 마주치고 놀란 여인이라면?   

아마도 반준이 섭생술에 통달해 자신의 누나를 되살린 거겠지? 손자에게 굳이 시술할 필요가 있었던 걸까? 위급한 상황이었거나, 혹은 지난 인연 중 한 명이 기억을 잃었거나...?

 

등등의 상상을 펼치다 아쉬움 속에 마지막 장을 덮었다.

 

즐거웠지만, 연중(?) 소설을 추천할 수는 없으니.

어느 도전적인 출판사에서 뒷 이야기가 나왔으면 하고 바라본다.    

   

 


   

  

- "네? 시신이 살아나요?"
나는 믿지 못하겠다는 얼굴로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세상에 정말 그런 일이 있단 말인가?
"믿기 힘들지?"
아버지는 더없이 차분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음 이야기를 기다렸다. 한참이 지난 뒤에야 아버지는 천천히 입을 열었고, 그로부터 반 시간 동안 이어진 아버지의 말에 나는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황당한 이야기들이라 도저히 믿기지 않았지만 아버지는 좀체 거짓말이라고는 모르는 분이었다. 

- 중화민국 시기(1911~1949. 이 소설의 배경은 1931년 만주사변 이후 일본군의 동북지역 점령이 시작되던 시기로 보인다-옮긴이)의 일이었다. 병력을 보충하기 위해 크고 작은 군벌(1912년 청나라 멸망 후, 군사력을 기반으로 실질적으로 권력을 행사한 중국의 고급 군인 및 그들의 병력옮긴이)이 사방에서 장정들을 잡아들였다. 우리 고향인 북(北) 역시 이런 운명을 피하지 못했다. 군인들은 장정들 외에도 마을의 모든 것을 싹쓸이했다. 땅에서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을 때면 군벌은 무덤까지 모조리 파헤쳐 놓았다. 
물론 도굴꾼들처럼 깔끔하게 무덤을 뒤지는 것은 아니었다. 아무리 견고한 무덤이라도 폭약 1, 2킬로그램이면 커다랗게 구멍이 뚫렸다. 북몽은 가난하고 조그만 산촌이었지만 제법 큰 무덤 터가 형성되어 있었는데 마을 사람들은 이를 '44층'이라 불렀다.

- 장정들을 잡아들인 후, 우두머리인 사령관은 산 위의 44층으로 눈길을 돌렸다. 그곳은 풍수가 좋은 곳이었다. 삼면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나머지 한쪽이 물을 향하고 있는 데다 수양버들이 빽빽하게 자라 있었다. 무더운 여름에도 그곳에는 날벌레조차 꼬이지 않았다. 마을 사람들 말이, 이 무덤 터 두 곳을 지날 때마다 지독한 냉기가 느껴진다고 했다.
마을 사람들은 산 위 묘지를 신줏단지처럼 떠받들고 청명이나 동지 같은 특정한 절기가 아니면 감히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 그러나 병사들은 달랐다. 무덤 터에 한여름에도 모기가 꼬이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 그들은 거기에 분명 진귀한 보물이 들어 있을 거라며 관심을 가졌다. 

- 그런데 놀랍게도 그 무덤들 안은 모두 텅텅 비어 있었다. 금은보화는커녕 빌어먹을 시신 한 구조차 발견되지 않았다.
병사들의 호기심은 더욱 증폭되었다. 대체 누가 이런 곳에 이토록 많은 가짜 무덤을 만들었단 말인가? 혹시 진짜 무덤 하나를 은폐하기 위해 만들어진 건 아닐까? 게다가 44층이란 이름과 달리 무덤이 마흔세 기 뿐이니, 마지막 무덤은 대체 어디에 있단 말인가! 

- 누가 군벌을 그저 밥이나 축내는 식충이라고 했던가? 사령관이라는 자는 여간내기가 아니었다. 그는 이곳이 뭔가 특별한 장소일 거라고 생각했다. 묘지 사이에 있는 버드나무도 뭔가 묘한 느낌을 주었다. 얼핏 보면 그냥 아무렇게나 늘어선 것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나무와 나무 사이가 다섯 걸음 정도로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고, 가짜 묘는 하나같이 나무 두 그루 사이에 위치해 있었다. 사방을 둘러보던 그의 시선이 조금 떨어진 공터를 향했다. 
그곳만 나무 사이에 가묘(假墓)가 없었다. 공터에는 병사들이 얕게 파놓은 구덩이만 보였다. 잠시 그곳을 바라보던 사령관은 병사 몇 명에게 구덩이를 더 깊게 파보라고 명령했다.

- 할아버지는 검은색 솜저고리 차림에 담뱃대를 물고 있었다.

"왔느냐?"
할아버지가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나이가 나이인지라 걸음걸이도 비틀비틀하고, 예전에는 볼 수 없었던 미소까지 띤 모습이었다.
할아버지가 우리를 방으로 안내했다. 초라한 방이었다. 침상과, 무슨 나무로 만들었는지 모를 붉은색 궤가 몇 개, 낡은 소파 하나가 전부였다.
할아버지가 차를 따라주었다. 은은한 향기가 느껴졌다. 할아버지는 맞은편에 앉아 몇 마디 한담을 나눈 후 아버지에게 말했다.
"나가서 좀 돌아보렴. 목양과 할 이야기가 있다."
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나를 한번 쳐다본 후 밖으로 나갔다.

 

- 할아버지는 몇 차례 가볍게 기침하더니 곧 이야기를 시작했다.

"목양아, 오늘 내가 하는 이야기를 잘 기억해야 한다."

조금 어리둥절했지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곤충소환사'라고 들어봤느냐?"

- 나는 바로 고개를 저었다. '곤충소환사'라고? 풍수사, 관상가 같은 건 들어봤지만 곤충소환사라니, 대체 그게 뭐지?
"세상에는 수천, 수만 가지 곤충이 있지. 하지만 모든 곤충은 오행, 그러니까 금(金), 수(水), 목(木), 화(火), 토(土)로 나눌 수 있단다."

할아버지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볼 수 있는 충(蟲)은 대부분 '목'에 속한다. 목에 속하는 곤충은 사람에게 해를 끼치지 않지. 하지만 나머지 네 부류의 곤충은 그렇지 않단다."

- 1943년 당시 열아홉이었던 반준은 의원 집안 출신이었다. 보고 자란 것이 많아 어린 나이에도 상당한 식견을 지닌 그는, 여덟 살 때 이미 기상천외한 처방으로 원세개(袁世凱)의 측근이었던 장군 한 사람을 살려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당시 수도 내에서는 모두 그를 '반 나리'라고 불렀다.

- 반씨 집안은 전통의학에 정통할 뿐만 아니라, 가문 대대로 비전되는 학문도 가지고 있었다. 바로 용충학(用蟲學)이었다. 소문에 의하면 반씨 집안이 수도인 북경에 처음 뿌리를 내린 것도 의술이 아니라 '곤충소환술' 덕분이었다고 한다.

- 현묘한 이 기술은 잘만 사용하면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고, 주맥이 되는 산줄기를 찾고, 명산의 혈을 자를 수 있었다. 하지만 규칙 역시 매우 준엄해, 전수자는 반드시 동정을 잃지 않은 자로 음양안(陰陽眼)의 소유자여야 한다는 것부터 시작해, 곤충소환술을 둘러싼 여러 가지 신비한 이야기가 전해졌다. 

- 반씨 집안은 그렇게 매우 신비한 가문이 되었다. 천지사방에서 곤충소환술을 배우려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모여들었지만 결국 모두 거절당했다. 그래서 곤충소환술이 대체 무엇인지 아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 반준을 둘러싼 수수께끼 중 하나는 사시사철 검은 옷을 입고 다닌다는 것이었는데, 이 역시 곤충소환사가 지켜야 할 규칙 중 하나였다.

- 어느 해 5월, 날씨가 유난히 후텁지근하던 날 오후, 반준이 잠시 쉬고 있을 때 집사가 황급히 들어와 그를 깨웠다. 경찰 몇 명이 본채로 그를 찾아왔던 것이다. 
반준은 나이가 많지 않지만 타고난 품성으로 매우 든든한 인맥을 형성하고 있었다. 경찰국 내에도 왕래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가 옷을 갖춰 입고 거실로 나가자, 경찰 두 명이 몸을 굽혀 인사했다. 
"반 나리! 누굴 좀 만나주십사 모시러 왔습니다."
"음, 규칙은 알고 있겠죠?"
반준에게는 치료에 대한 철칙이 있었다. 일본인, 청나라 황실 사람, 풍씨 성을 가진 사람, 이렇게 세 부류의 사람은 치료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 마당에 교수대가 놓여 있었고, 껄렁껄렁한 교도관들이 총을 받쳐 들고 죄수 몇 사람을 감시하고 있었다. 흑백으로 이뤄진 감방을 보자 반준은 숨이 막힐 것 같았다. 
그는 차마 시선을 이리저리 돌리지 못한 채, 그저 앞에 가는 경찰들을 따라 곧장 안으로 들어섰다. 감옥은 부채꼴과 십(十) 자, 정(丁) 자 형태가 혼합된 양식이었다. 병감(병든 죄수를 따로 두는 감방-옮긴이) 한 칸 이외에 나머지 열여섯 개의 감방은 <천자문> 구절에 따라 천(天), 지(地), 현(玄), 황(黃), 우(宇), 주(宙), 홍(洪), 황(荒), 일(日), 월(月), 영(盈), 측(昃), 진(辰), 숙(宿), 열(列), 장(張)의 순서로 명칭이 붙어 있었다. 경찰은 그중에서도 '천' 호로 반준을 데리고 갔다. 제1호이니 천 호에 수감된 사람은 분명 죄질이 극히 불량한 죄수거나 특별한 신분의 인물이 분명했다.   

 

- 반준이 되물었다.
"음, 아주 특별하고도 잔혹한 과정이지."

풍씨가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그게 뭡니까?"
"'곤충제(蟲祭)'라는 거요."
그가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말했다.

 

- "목파 소환사들이 출현한 후 전해지기 시작한 계승 방식이오. 이 과정을 거쳐야 다음 세대 소환사들이 소환사의 진수를 터득할 수 있지. 자신이 기르고 부리던 목파의 영충(靈蟲)을 이용해 자결한 다음, 그 곤충을 자기 후손에게 전하는 것이오."
남자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반준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버지가 죽기 전 금속 상자를 그에게 준 일이 있었다. 그 안에는 푸른빛의 번데기가 들어 있었다. 
"바로 그 점에서 난 춘부장을 존경할 수밖에 없었소. 나와 그는 수십 년 교분을 쌓아왔소. 그는 목파고 나는 토파로 서로 상극이라 친구가 될 수 없는 사이였지. 그래서 우리 두 사람은 우리들의 왕래를 다른 이에게 알리지 못했소. 그는 자신의 능력을 나리에게 전수하고 싶어 했지만, 갑자기 불치병을 앓게 되어 대신 내게 편지를 보냈소. 반드시 반씨 일가의 소환술을 나리에게 가르쳐달라더군. 나리가 곤충소환술을 완벽하게 익힐 수 있도록 일부러 나리 앞에서 자신을 죽여달라고도 했지. 하지만 내가 도착했을 때 그는 이미 비수로 가슴을 찌른 상태였소. 세상 그 무엇보다도 복수심의 위력이 대단하다는 걸 알고 계셨던 거요." 
풍씨는 말을 마친 후 한숨을 내쉬었다.

- 방으로 돌아온 반준은 옷소매에서 철침을 꺼냈다. 머리카락처럼 얇은 침이라, 보통 사람이라면 발견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었다. 촛불 아래 번뜩이는 푸른빛이 섬뜩했다. 반준은 침을 자세히 들여다본 후 허리춤에서 조그만 상자를 꺼냈다. 손바닥 크기보다 약간 작은 상자였다. 상자 안에는 조금 전 철침과 똑같은 모양의 철침이 열두 개 들어 있었다. 

- 일명 '청사'라 불리는 이 쇠침은 이백의 <장진주 將進酒>의 한 구절인 "그대는 보지 못했는가? 귀한 집 사람이 거울을 보며 백발을 서러워하는 것을, 아침에 검던 머리 저녁때 백설이 되는 것을(君不見高堂明鏡悲白髮 / 朝如靑絲暮成雪)"에서 따온 이름이다.
목파 곤충소환사들은 주로 의술을 행하는 사람들이지만 치명적인 법보(法寶) 몇 가지를 가지고 있었고, 청사 역시 그중 하나였다. 허리춤에 찬 작은 상자의 한 부분을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청사가 발사되어 상대의 목숨을 빼앗을 수 있었다.

- 구양연운이 미소를 짓더니, 명귀를 살짝 몇 번 두드렸다. 그러자 명귀가 부르르 몸을 떨더니 비취빛 날개를 펴고 바닥에서 몇 번 뱅그르르 돌고는 입구를 향해 날아갔다. 구양연운이 몸을 날려 그것을 잡아 다시 몇 번 가볍게 두드리자, 명귀는 잠잠해졌다. 
"어? 어떻게 한 겁니까?" 
반준은 상당히 놀란 눈치였다.

 

- "조금 전 오라버니가 외운 주문에 궁, 상, 각 있죠? 그거 오성음계잖아요. 옛사람들은 음을 궁, 상, 각, 치, 우로 나누었는데, 그건 오행의 방위와도 연관이 있어요. 각각 중, 서, 동, 남, 북을 뜻하는 거죠. 그러니까 명귀 가운데를 세 번, 서쪽을 두 번, 동쪽을 한 번 두드리면 돼요."
"어느 정도로요?"
반준이 물었다.
"그게 또 절묘해요. 오음계의 높낮이를 생각하면 되거든요. 옛사람들은 오음이 '오장육부'의 '오장'과 연관이 있다고 생각했어요. '궁'은 비장으로 소리가 느리면서 완만하고, '상'은 폐로 소리가 촉박하면서 맑아요. '각'은 간이니 그 소리가 호흡을 하듯 길고, '치'는 심장으로 웅장하고 명징한 소리, '우'는 신장이니 낮고 섬세한 소리라 할 수 있어요. 그렇게 생각하면 '궁' 소리는 약간 느리게, '상'은 연속적으로 조금 빠르게, '각'은 가장 느리게 해야 해요."  

- "정말 뜻밖이에요! 한번 들어와 봐요!"
자오의 목소리가 흥분으로 들떠 있었다. 반준도 호기심이 일었다. 금순이 묘혈 안에 대체 무엇을 숨겨놓았기에 자오가 저토록 흥분하는 것일까?
아무리 점잖게 행동하려고 해도 반준은 이제 갓 스무 살 된 청년이었다. 원체 호기심이 많은 데다 명귀의 신비함을 맛보기도 한 그는 금파 소환사에 대해 더욱 강한 궁금증을 갖게 되었다. 반준은 자오가 했던 대로 천천히 구멍 안으로 몸을 집어넣었다. 

- 입구는 그리 크지 않지만, 내부 공간은 반준의 상상을 완전히 뛰어넘는 곳이었다. 자오의 도움을 받아 아래로 내려간 반준은 사방을 둘러보았다. 놀랍게도 묘혈 안에 방 두 개 크기의 공간이 있었다. 그리고 벽에는 얼핏 봐도 열 개는 넘는 남포등이 대낮처럼 환한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중간에 탁자가 몇 개 놓여 있고, 그 위에 톱니바퀴라든가 옥그릇 자투리와 함께 기괴한 모양의 도구들이 놓여 있었다. 
"벽에 걸린 도면 좀 봐요."
 

- 세 번째 도면에는 '삼천장(三千丈)'이라 적혀 있고, 가늘고 긴 하얀 실이 그려져 있었다. 반준은 단번에 수파의 시씨 일족 여자가 쓰던 병기를 떠올렸다. 다시 그 아래를 살펴보니 '삼천장'이란 이름이, 이백의 <추포가(秋浦歌)>의 일부 구절인 '흰 머리털이 자라 어느새 삼천길, 근심으로 인해 이처럼 길어졌다네(白髮三千丈 緣懋似箇長)'에서 나온 것임이 적혀 있었다. 또한 겉으로 보기에는 부드러운 채찍처럼 생겼지만 사실은 검과 같아 그 중량이 4냥 3돈이며, 구월족의 땅에 있는 진계산에서 나는 최고의 철광석을 이용해 스무 단계가 넘는 복잡한 공정을 거쳐 완성된다고 적혀 있었다. 

- "진계산이란 이름이 왜 이렇게 익숙하죠?"
자오가 골똘히 생각하며 물었다.
"전설에 의하면, 춘추전국시대 철검 주조의 대가 구야자(歐冶子)가 월왕 구천에게 전쟁을 승리로 이끌 병기를 만들어주려 했다고 합니다. 그는 최고의 재료를 구하기 위해 명산대천을 두루 돌아다니다가 용천안의 진계산에 이르렀다더군요. 울창한 숲, 북두칠성 같은 형태로 자리한 일곱 개의 우물, 바닥이 보일 정도로 맑고 청량한 그 우물 말고도 2천 평이 넘는 호수... 그야말로 검을 주조하기에 그보다 좋은 땅이 없었죠. 그곳에서 찾고 있던 철광석까지 발견했고요. 이렇게 해서 용천검이 탄생한 겁니다." 

- "난 마쓰이 나오모토라고 하오."
그는 다정다감한 목소리로 말한 후 주전자를 들어 다호에 뜨거운 물을 따랐다.
"다도에 대해 아시오?"
"조금 압니다."
도가 사상의 영향을 깊이 받고 자란 반준이었기에 유, 불, 도 삼가(三家) 사상의 정수를 담고 있는 다도에 문외한은 아니었다.

 

- "다도는 당대에 흥하여 송, 명에 성행하다가 청대에 쇠하였지요."

나오모토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도는 남포소명 선사가 일본에 전했고, 천리휴(일본 다도의 비조-옮긴이) 선사에 이르러 흥성했소. 그리고 그 후 300년이 지난 지금 화(和), 경(敬), 청(淸), 적(寂)(일본의 다도 정신을 집약한 말로 조화, 공경, 순수, 평정심 등을 의미한다-옮긴이)을 중히 여기는 사상으로 발전했지. 다도에 대한 최초의 책이라고 할 수 있는 <다경>은 중국에서 유래했지만, 일본의 다도가 한 수 위요."
그의 말에 반준이 냉소했다.
"화, 경, 청, 적이란 당대 다도의 유풍일 뿐입니다. 중요한 틀은 중국이 기본이지요."

- 계속해서 폭발음이 들려왔다.
"어린 세숙, 영사관에서 폭발이 일어난 것 같아요!"
자오가 하늘로 치솟는 불길을 바라보며 흥미진진하다는 듯 말했다. 반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북경 곳곳에서 화재가 발생한 듯했다.

"빨리 갑시다!"

 

- 일행은 다시 마차에 올랐다. 마차는 도시 서쪽 호피구 방향으로 질주했다. 호피구에는 도처에 과가루가 늘어서 있었다. 과가루란 성문, 성관(城關)의 건축 형식이 발전한 것으로, 거리, 개울, 협곡 입구를 가로질러 세워져 있었다. 돈대 구조로 되어 있으며 아래 구멍이 뚫려 있고, 돈대 위에 가옥이 있는데 일반적으로 두 층으로 되어있기 때문에 '누(樓)'라고 부른다.
연운은 어릴 적부터 신강에 살았기 때문에 그처럼 기이하고 우아한 건축물은 처음이었다. 연운의 입가에 절로 웃음이 번졌다. 건축물에 완전히 매료된 것 같았다. 

- "세숙도 날 너무 과소평가하네요. 쌍합제보다는 쌍합지(雙鶴地)란 이름이 맞을 것 같지만요. 풍수 책에, '쌍합지'에 유택을 정하면 후손을 보우할 수 있다고 했거든요. 유택을 만들면 수명을 늘릴 수 있다고요."
그가 반준에게 말했다.
"확실히 그렇죠."
반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오가 뭔가 더 말해주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자오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그냥 거기까지만 알아요"라고 말했다.

- 그것은 춘추시대 농가(農家)에서 유래한 것이었다. 농가는 처음에 '신농학파'라고 불렸다. 전설에 따르면 농가의 창시자가 신농이라고 한다. 그러나 여기서 자오가 말한 신농이란, 실제 지하에 사는 거미를 이른다. 
신농은 일반적으로 콩알만 한 크기로, 손바닥만 한 것도 있지만 그 정도까지 성장하는 것은 극히 드물었다. 일부 책에서나 그 기록을 찾아볼 수 있을 정도다. 신농은 오랫동안 땅속에서 살았기 때문에 눈이 퇴화했고, 그 대신 청각과 촉각이 매우 발달했다. 
또한 신농은 멸강나방을 먹이로 한다. 토파 소환사의 또 다른 소환술 중 하나는 곤충을 이용해 풍수 자리를 찾는 것이다. 그런데 이 멸강나방이 풍수 자리에 매우 민감하기 때문에, 조금 안다 하는 풍수가들은 유택을 골라 땅을 수척 파내 흙 속에 멸강나방의 알이 있는지를 확인한다.


- "상자 하나를 얻었는데 그 안에 들어 있었대요. 주나라 황제가 용연을 불길한 것이라 생각하고 어떻게 해서든지 없애려 하자, 그 용연이 도마뱀으로 변신해 후궁으로 숨어들었죠. 그런데 어린 궁녀 하나가 도마뱀과 부딪치면서 임신을 하게 되었고, 세월이 지난 후 여자아이를 낳았어요. 궁녀는 그 아이를 내다버렸고요. 후에 주나라 선왕 시절 민간에 동요 하나가 유행하기 시작했는데, '뽕나무로 만든 활, 억새로 만든 화살통이 주나라를 망하게 한다'는 내용이었어요. 얼마 후 주나라 왕은 뽕나무 활과 억새 화살통을 파는 상인들을 전부 잡아들이라고 했어요. 이에 도망친 한 상인 부부가 험한 산속에서 궁녀가 버린 여자아이를 주웠고요. 아이가 무척 고왔기에 부부는 그 아이를 키워 나중에 궁으로 들여보냈죠. 그런데 그 아이가 바로 포사(주나라 마지막 왕인 유왕의 총비. 망국의 징조로 여겨진다-옮긴이)였대요."


- "그럼 용연향이 정말 용의 타액이야?"
"아, 그건 아닙니다. <강목습유(目拾遗)>라는 책에 의하면 용연은 비리고, 맛이 약간 시고 짜며 무독이라 했습니다. 아마도 여기에 어떤 독약을 탔기에 반박이 중독 증상을 보였을 거예요. 하지만 용연은 한 가지 특성이 있습니다. 바로 피와 섞이면 희한한 향기가 난다는 거죠. 그 향기가 은근히 사방 몇 리까지 계속 퍼져 나갑니다."


- 검은 옷? 반준은 문득 연고 없는 묘지에서 북경으로 돌아올 때 만났던 자가 생각났다. 설마 그 사람이?


- "지금 어디에 머무르고 계시오? 저녁에 형제들을 시켜 내보내 드리겠소."
곽성룡이 말했다.
"저..."
반준은 조금 난처했다. 어쨌거나 쌍합제를 알고 있는 사람은 적을수록 좋기 때문이었다.
"성만 빠져나가게 해 준다면 우리가 알아서 가겠습니다.”
곽성룡은 수년 동안 강호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이었다. 상대가 뭔가 기피할 때는 꼬치꼬치 캐묻지 않는 것이 상책이다. 마음속 이야기를 다 하고 살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특히 요즘 같은 시절에는 사리분별을 잘해야 조금이라도 수명을 연장할 수 있는 법이다.
"그러시오. 나리, 일행분 상처가 가볍지 않은 모양이오. 아직도 정신이 돌아오지 않은 것 같군."

- "사부를 구하고 싶지 않은 거야?"
"그럴 리가 있겠어요! 내게 어떤 사부님인데! 하지만 정말 어디 갇혔는지도 모르잖아요. 듣자 하니 그 감옥은 방도 엄청나게 많고 복잡하다던데, 무턱대고 들어갔다가는 구해내기는커녕 행방도 찾을 수가 없을 거예요." 
자오의 말도 일리가 있었지만 뜻밖에 시묘묘는 빙그레 웃더니 말했다.
"궁색하게 변명은. 이번에는 굴을 팔 필요가 없어. 그냥 당당하게 걸어 들어가자고."
"걸어 들어간다고요?"
종업원이 뜨거운 김이 폴폴 피어오르는 요리와 술 냄새가 물씬 풍기는 이과두주를 내왔다.
"먼저 먹자. 먹고 나서 만날 사람이 있어."

- 식사 후 두 사람은 그리 크지 않은 객잔에 묵었다. 앞서 들렀던 숙소들보다 훨씬 질이 낮은 여인숙이었다.
이런 여인숙은 계절을 불문하고 이불이나 요 같은 것들이 구비되어 있지 않았다. 한겨울에도 닭털 같은 것으로 추위를 피한다고 해서 '계모점(鷄毛店)'이라고 불렸다. 무더운 여름에도 어찌나 후텁지근한지 참을 수가 없을 정도였다. 모기나 파리는 말할 것도 없고 발 냄새, 땀 냄새에 도저히 사람이 지낼 만한 곳이 아니었다. 그러기에 "이리저리 바글바글 뒤섞여 엎어진 사람들의 코 고는 소리, 더러운 공기와 찌는 듯한 열기에 사람의 기운이 따뜻하네”라는 시 구절도 있지 않은가. 그야말로 '계모점'의 모습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시묘묘가 오늘 이곳을 숙소로 선택한 데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잡다한 사람들이 뒤섞여 있기 때문에 행적을 감추기가 쉬울뿐더러, 앞으로의 계획과도 관련이 있었다. 
 
- "조금 전에 말하지 않았던가? 밥 먹고 만나야 할 사람이 있다고."
"그래요. 언제 출발해요?"
자오가 말하며 일어났다.
"급할 것 없어. 조금 있으면 그 사람이 우릴 찾아올 거야."
시묘묘의 말에 자오는 어안이 벙벙했다. 성에 들어온 이후 시묘묘는 계속 차갑게만 굴뿐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대체 누가 그들이 이곳에 온 걸 안단 말인가? 자오는 의아한 눈으로 옆에 앉아 있는 시묘묘를 바라보았다. 무표정한 얼굴이 마치 얼음처럼 차가웠다. 
 
- 신기하기만 했다.
"연운, 왜 비홍을 골랐습니까?"
"우리 화파 소환사들도 만만치 않거든요."
구양연운이 득의양양하게 말했다.
"우리는 주로 큰 곤충을 부리죠. 자오처럼 징그러운 거미 따윈 상대 안 해요. 이 정도 작은 말쯤이야! 호랑이, 사자라고 해도 문제없어요. 게다가 화파 소환사들은 원래 말 관상도 볼 줄 알아요. <상마경(相馬經)>에 이르길, '왕'에 해당하는 말의 머리는 네모나야 하며 '승상'에 해당하는 눈은 밝아야 하고, '장군'에 해당하는 등은 강해야 하며 '성곽'에 해당하는 배는 두둑해야 하고, 네 다리는 '명령'이니 길어야 한다고 했어요. 이 말은 사지가 튼튼하고 슬개골이 단단한 데다 입술이 붉고 귀가 작으며 바짝 붙어 있으니 천리마가 틀림없죠."
"누이가 말 관상에도 일가견이 있을 줄은 몰랐군요."

- 달이 중천에 떠 있었다. 구양연운은 그렇게 몇 리를 달려간 뒤에야 고삐를 당겨 멈췄다. 반준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쾌재를 불렀다. 사방을 둘러보았다. 앞으로 몇 리 더 가면 서쪽 관도(官道)에 이른다. 관도는 매우 긴 이야기를 담고 있는 유서 깊은 곳이지만, 워낙 길이 잘 뚫려 있다 보니 지금은 일본군이 물자와 군비 수송을 위해 점거한 상태였다.

- 밝은 달빛, 한여름 밤, 풀숲 사이로 여름 곤충들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구양연운은 한순간 환상에 젖어들었다. 여기서 영원히 시간이 멈추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그런 생각도 잠시, 요란스러운 말발굽 소리가 그녀의 생각을 흩어놓았다. 이곳에 온 이유는 동생을 찾기 위해서였다. 더구나 지금은 사방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이 순간에도 누군가 자신들을 지켜보고 있을지 모를 일이었다. 
 
- "힘이 있으면 안이 실하고, 힘이 없으면 속이 허한 것이죠. 사기(邪氣)가 안에 뭉치면 기혈이 막히고 양기가 뻗어나가지 못합니다. 그래서 맥이 가라앉고 힘이 있으면 속이 실한 겁니다. 오장육부가 허약하고 양기가 부족하면 기맥이 요동치나, 기운이 없으니 맥은 가라앉고 무력해지죠."
"도통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그러니까 연응을 구할 수 있다는 거예요. 없다는 거예요?"
구양연운이 조바심이 나서 말했다.
"연응은 어려서부터 무술을 연마했기 때문에 몸이 아주 튼튼하고 맥에 힘이 있습니다. 이렇게 혼절한 상태로 깨어나지 못하는 것은, 너무 놀란 데다 화가 가슴에 맺힌 바람에 장기에 손상을 주었기 때문이죠. 그래서 침맥(푹신한 솜을 누르듯이 뼈에 도달할 때까지 맥관을 누르면 나타나는 맥-옮긴이) 증상이 나타난 겁니다."
반준이 가만히 소매를 걷어 올리더니 한쪽 옆에 서 있는 단이아를 바라보았다. 뭔가 의심스러워하는 눈치였다.

- "가슴에 맺혀 있는 답답한 기운을 빼내면 됩니다. 원래 강건한 체질이니 금방 회복될 거예요."
반준은 그렇게 말한 후 혼자 밖으로 나갔다. 그가 자기 말에 매 놓았던 작은 보따리를 가져오더니, 연운에게 연응을 부축해서 앉히도록 한 후 옷을 걷어 올렸다.
반준이 보따리를 열자 노란 비단주머니가 나왔고 그 안에는 아홉 개의 은침이 들어 있었다. 반준이 그중 하나를 뽑아 구양연응의 풍문혈(2번, 3번 흉추 사이에서 양옆으로 각각 두 치 되는 곳-옮긴이)에 살짝 찔러 넣고 가만히 돌렸다. 잠시 후 구양연응이 "아!" 하며 길게 숨을 ... 

- "수도 전체에 명성이 자자한 목파의 계승자 반준이 이처럼 어린 꼬마인 줄은 몰랐네!"
"그렇다면 어르신은 금파 소환사군요."
반준은 그렇게 말했지만 여전히 의혹은 가시지 않았다. 금파 소환사 계승자들에게는 대대로 규칙이 있었는데 그건 바로 제자를 두 명만 선택하며, 그것도 모두 난쟁이여야 한다는 점이었다. 이 밖에 또한 가지 가장 중요한 사실은, 그 두 사람이 거쳐야 하는 수련이 매우 엄격하여 오직 한 사람만 살아남을 수 있고 다른 한 사람은 반드시 죽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이로 볼 때, 노인은 지금 금파 소환사의 군자인 금무상과 엇비슷했다. 그렇다면 분명히 금무상의 사형제일 텐데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 "내가 금파 소환사라는 것을 정확하게 맞히다니! 과연 '인재는 어려서부터 출중함을 타고난다'는 말이 맞군."
노인이 미소를 지으며 담배를 한 모금 빨아들였다.
"하지만..."
반준이 입을 떼자마자 갑자기 노인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상하게 느꼈겠지? 왜 아직도 내가 살아 있는지."
"네."
반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난쟁이도 아니시죠."

 

- 노인이 감탄하듯 말하며 자신의 두 다리를 가만히 두드렸다.

"내 두 다리는 가짜일세." 

 

- 밀실을 둘러보았다. 우물 벽의 출구 외에 다른 비밀 통로는 없었다. 그런데 등유가 가득 담긴 항아리 두 개가 보였다. 항아리 바깥쪽으로 심지가 나와 있었다. 구양연운은 등잔을 밝힌 후 연응 곁으로 돌아와 반준을 바라보았다. 그는 계속 걱정스러운 표정이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분위기가 너무 침울했다. 어떻게 해서든지 이 분위기를 바꿔야 할 것 같았다. 
"그나저나 정말 궁금했는데, 금 세숙을 어떻게 알아봤어요?"

구양연운이 화제를 꺼냈다. 반준이 길게 숨을 내쉰 후 말했다.
"사실 처음에 연웅의 상처를 봤을 때부터 의심했습니다. 일전에 아버지가 천지라는 소환술에 대해 이야기해 주신 적이 있거든요. 그러다가 단소저의 손을 보고 확신했죠."

- "원래 세상의 곤충소환사들은 모두 한 가문이었습니다. 그러다가 분파가 되었는데, 각자 숭상하는 학파가 달랐죠. 그리고 금, 목, 수, 화, 토의 각 파마다 필요로 하는 손바닥 모양도 달랐습니다. 다른 문파에서는 세월이 흐르면서 더 이상 손바닥의 형태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게 되었습니다만 유독 금파 소환사만 독충을 다루기 때문에 손의 형태나 몸에 대한 요구가 엄격했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그들의 손을 보면 신분을 알 수 있는 것이죠." 

- 단이아가 다시 흥얼대기 시작했다. 그냥 흥얼거릴 뿐인데도 곡조에서 순박하면서도 깊은 맛을 느낄 수 있었다. 단이아가 아는 것은 한 소절뿐이었다. 반준은 집중해서 곡에 귀를 기울였다. 그의 얼굴이 점점 환해지더니 이내 미소가 떠올랐다. 
"분명히 이 곡일 거예요."
반준이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 "방금 단소저가 부른 곡은 <고산유수(高山流水)>라는 노래입니다. 유백아(중국 춘추시대 진나라의 대부로, 거문고의 달인이었다고 함-옮긴이)가 지은 고쟁 연주곡이죠."
반준의 말투는 자못 흥분에 겨웠다.
"맞아요. 그 이름이었던 것 같아요. 할아버지 말씀이 어렴풋이 기억나요."
단이아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어쨌거나 할아버지가 좋아하던 곡의 이름을 알게 된 셈이었기 때문이다.
"태산처럼 웅장하고 강물처럼 우렁찬 곡입니다. 지음(知音)의 인연으로 알게 된 유백아와 종자기의 우정이 담긴 작품이죠. 하지만 지금은 이 곡이 하남, 절강, 산동 등 지역별로 다르다는 걸 모르는 사람들이 많아요. 지금 가장 널리 알려져 있는 건 절강 지역의 곡조고요."

- "조금 전 단소저가 부른 건 어디 건데요?"
구양연운도 관심이 가는 듯 반준에게 물었다.
"내 추측이 맞다면 하남 지역의 <고산유수>일 겁니다. 하남의 곡만 육중하면서도 격앙된 슬픈 정서를 담고 있거든요. 난해한 곡조라 쉽게 따라 부를 수가 없죠."

 

- "조금 전단 소저가 부른 데가 가장 대표적인 부분인데, 그걸로 볼 때 명귀의 주문은 분명..."
반준이 잠시 생각을 정리하더니 조금 전 단이아가 불렀던 부분을 흥얼거리다가, "궁 다섯, 상 둘, 각 셋!"이라고 말했다.

 

- 벽을 기어오르던 명귀가 갑자기 동작을 멈추었다. 
반준이 재빨리 벽 쪽으로 가서 명귀를 잡은 다음, 근처 벽을 둘러보았다. 잠시 후 그는 벽 가장 아래쪽에서 작은 구멍을 발견했다. 자세히 보지 않았더라면 눈에 띄지 않았을 구멍이었다. 구멍의 크기는 명귀 크기와 얼추 비슷했다.
 
- "이건 내가 알아요."
단이아가 말했다.
"청동관과 맞는 구멍의 음조를 정확히 찾아내면, 안에 있는 청동관이 튀어나와요."
"맞습니다! 그런데 단 소저는 음벽에 대해 모른다고 하지 않았나요?"
반준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음벽에 대해서는 몰라요. 다만 내가 어렸을 때 할아버지가 삼분손익법과 12율의 대응관계에 대해 가르쳐주신 적이 있어요. 당신의 말을 듣고 생각이 났어요."

- "연운이 모르는 게 있어요. 12음률은 삼분손익법의 정의를 바탕으로 한 거잖아요. 정의에 따라 죽관을 81부분으로 나눈 후 순서대로 삼분손익법에 따라 가감하면 죽관에서 각각의 음조에 해당하는 위치를 확정할 수 있는 거예요. 조금 전에 죽관에서 나는 소리를 들어봤어요. 그리고 죽관의 길이를 정한 다음 이를 81부분으로 나누었어요. 이렇게 해서 일정한 위치를 두드리면 열두 개의 청동관이 튀어나오죠."
구양연운은 단이아의 말이 여전히 알쏭달쏭하다고 느꼈다. 그러나 어쨌든 눈앞의 절벽을 통과할 수만 있다면 그것이 12음률이든, 14음률이든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 "그래요. 정말 진롱(玲壠·珍瓏)대국이군."
반준이 바둑판을 바라보며 말했다.
"진롱대국이라뇨?"
구양 오누이가 이구동성으로 물었다.
"그래요. 단소저가 정말 고생이 많았어요. 이처럼 급박한 상황에서 그처럼 교묘한 수를 두다니!"
반준의 말투에는 찬사의 뜻이 가득 담겨 있었다.
"진롱대국이란 일종의 상황을 말하는 겁니다. 일정한 형식은 없어요. 다만 고수들끼리의 대국에서나 나올 수 있는 무승부 상태죠. 이런 무승부 대국에서는 어느 한쪽의 허점도 발견할 수가 없어요."

 

- 진동이 점점 더 커졌다. 허공에 멈추어 있던 기둥이 제자리로 돌아가고, 밭밑의 지면이 서서히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 반준이 걱정스레 말했다.
"어떤 거죠?"
구양연운이 다급히 물었다.
"그건 모르겠습니다. 나도 이름만 들어봤을 뿐이거든요. 겪어봐야 알 것 같아요."

 

- "조금 전에 기탑에서 그 기둥들이 제자리로 돌아가면 더 이상 내게 해가 되지 않으리란 걸 어떻게 알았어요?"
"연운은 바둑을 둬본 적이 없으니 모를 거예요. 바둑은 '기'를 중요하게 생각해요. 바둑알이 기운을 잃었다면 패석이니 빼내야죠. 나중에 제자리로 돌아간 기둥은 바로 기가 다했기 때문에 제거된 거예요. 바둑알이 빠진 자리에는 알을 놓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진입점이라고 하고요. 연운이 진입점에 서 있었기 때문에 석주들에 해를 당하지 않았던 거예요." 
단이아가 정확하게 설명해 주었다. 바둑에는 완전히 문외한인 연운도 그 덕분에 대강의 판국을 이해할 수 있었다. 조금 전 제자리로 돌아간 기둥은 정말 다시 튀어나오지 않았다.
"바둑이란 건 정말 심오하네요. 이번에 잘 빠져나가면 단소저에게 한 수 배워야겠어요."

- "네, 네가 어떻게 반준의 청사를?”
시묘묘는 청사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과연 반준의 말이 틀림없었다. 이 세상에 반준 말고도 청사를 가진 사람이 또 있었던 것이다. 바로 눈앞에 서 있는 자였다. 더구나 그는 시묘묘의 집안에 대대로 전해지는 삼천척도 가지고 있었다. 그렇다면 다른 일파의 비술도 모두 파악했다는 것이 아닌가! 
"조금 전에 말하지 않았나. 너희 중국 놈들은 이처럼 뛰어난 소환술을 몇몇 문파가 나누어 가진 채 서로 끊임없이 시기하고 원수처럼 죽이고 있다고 말이야! 너희 수중에 이런 기술을 둔다는 건 한마디로 낭비지. 오직 일본인만이 이런 기술들을 결합해서 최대의 위력을 발휘하도록 할 수 있어!" 
청의 남자가 다시 삼천척을 휘둘렀다. 이번 목표는 풍만춘이었다.  

- "가문의 오랜 피와 땀이 묻어 있는 발명품이지."
시묘묘는 어리둥절하기만 했다. 기계에 문외한인 시묘묘는 '항공유'란 개념부터 이해하기가 벅찼다. 풍만춘이 시묘묘의 표정을 보고 미소를 지었다. 
"당연히 본 적이 없을 거요. 비행기란 물건이 날아가려면 반드시 연료가 필요하다오."
"풍 사부님, 그렇다면 금파의 비행기는 연료 없이 어떻게 난다는 건가요?"

- "<삼국지>를 읽어봤소?"
풍만춘이 웃으며 뜬금없이 <삼국지> 이야기를 꺼냈다.
"네. 어렸을 때 조금요. 그런데 그것과 비행기가 무슨 상관이죠?"
시묘묘가 여전히 이해가 안 간다는 듯 물었다.
"그럼 촉나라 재상 제갈량이 군량을 운반하기 위해 매우 정묘한 운송 도구를 만들었다는 이야기는 들어봤겠군."
풍만춘의 말에 시묘묘의 눈이 반짝거렸다.
"목우유마(木牛流馬)를 말하는 건가요?"
"바로 그거요."
풍만춘은 시묘묘가 역시 총명한 여자라고 생각했다.

- "사료에 따르면, 사마의가 북원(北原)의 위교(渭橋)를 점령하고 있을 때 제갈량이 기산(祁山)으로 여섯 번째 출정하면서 목우유마를 만들어 수십만 대군의 군량 운송 문제를 해결했다고 하지. 그러나 이 목우유마의 조종 방법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고 하오."
"네, 저도 책에서 본 적이 있어요. 목우유마는 자동으로 움직인다고요."

- "'기문둔갑'이란 말 들어본 적 있어요?"
단이아가 물었다.
"나도 생각났어요. 기문둔갑의 원리를 이용해 만든 것 같군요."

반준 역시 단이아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맞아요. 연운은 들어본 적 없을지도 모르지만, 이 기문둔갑은 <역경> 최고의 차원인 '예측'의 술수예요. 일명 '제왕의 학문'이라 불리죠. 천문과 지리에서는 이 예측의 기법이 중요하게 다뤄집니다. 앞에 보이는 이 여덟 가지 색의 곤충들은 '팔문'을 의미할 거예요."

- "휴(休), 생(生), 상(傷), 두(杜), 경(景), 사(死), 경(驚), 개(開)."
단이아가 문의 이름을 되뇌었다.
"이 팔문은 다시 휴, 생, 상, 두라는 네 개의 길문과 상, 두, 사, 경이라는 네 개의 흉문으로 나뉩니다. 바로 여덟 가지 색의 여치가 대응되지요."
여기까지 말한 반준이 잠시 뜸을 들인 후 다시 말을 이었다.
"만약 내 추측이 틀리지 않다면, 이 여덟 가지 색은 또한 각기 다른 일곱 종류의 독을 의미할 겁니다. 생문(生門) 이외의 일곱 개의 문은 각 문의 명칭에 따라 각기 다른 독약을 품고 있고요."

(리뷰자 주 : 생, 개, 경우에 따라 경(景), 휴 문까지를 길문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인 듯하다. 본문을 그대로 옮겼으나 경이 아닌 두가 중복되는 것을 보아 오류인 것으로 보인다.) 

- "연응이 조금 전에 중독된 독은 '경'문의 독일 거예요. 경 문은 팔문 가운데 흉문에 속하긴 하지만, 그저 두렵고 공포스럽기만 할 뿐 치명적인 독이 아니기 때문에 죽음에 이르지는 않지요. 그래서 연응의 경우에도 놀라긴 했지만 큰 위험은 없었던 거예요."
반준이 말을 이었다.
"아마도 검은색이 경문을 대표하는 것 같군요."

 

- "그럼 어떻게 해야 곤충의 바다를 통과할 수 있는데요?"

구양연운이 물었다.

"팔문 가운데 생문을 찾아야 안전하게 지나갈 수 있어요."

단이아가 대답했다.
"하지만 여치의 색이 계속해서 변해요. 노란색이었던 여치가 금세 하얀색으로 변했다가 또다시 노란색으로 변하니, 어떤 색이 생문을 의미하는지 안다고 해도 조금 이따가 다시 무슨 색으로 변할지 어떻게 알겠어요? 우리 모두 중독으로 죽을 수밖에 없을 것 같은데요."

 

- "그것이 바로 기문둔갑의 기막힌 특징이지요."
반준은 그렇게 말하며 마음속으로 금파의 선조들이 곤충의 바다에 숨겨놓은 술수에 감탄했다.
"진짜 기막힌 건 바로 목숨이 왔다 갔다 한다는 점이죠."
구양연운이 초조한 기색으로 말했다.

- "연운이 모르는 게 있어요. 이 기문둔갑은 방위, 일출과 일몰, 춘하추동, 달이 차고 기우는 법칙 등과 모두 관계가 있어요. 같은 방위라 해도 시간, 장소에 따라 달라지죠. 저 곤충의 바다도, 시간이 변하면서 여치의 몸 색깔이 변하잖아요. 색이 변한 뒤에는 몸에 지닌 독도 달라지죠. 다시 말하면, 색이 다른 여치가 각각 상징하는 문도 달라진다는 거예요. 곤충의 바다를 통과하려면 곤충의 바다가 변화하는 규칙을 파악하는 수밖에 없어요. 그런 다음에 생문이 나타나는 위치를 추측해야죠. 그게 이곳을 빠져나가는 유일한 방법이에요." 

- "동방칠수?"
구양연응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단이아의 말을 되풀이했다.
"동방은 창룡(蒼龍)이라고도 합니다. 일곱 개의 별을 연결하면 마치 거대한 용처럼 보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죠. 하지만 창룡은 대개 봄이나 초여름에 보이는데."
반준 역시 의아한 얼굴로 별들을 바라보았다.

 

- "조금 전 단소저가 하는 말을 듣고 나서야 확실히 저 밝은 점들이 창룡과 같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금파 선조들은 천문 지리에 대해 정말 모르는 게 없군요. 이런 동굴 깊숙한 곳까지 저렇게 신비하게 꾸며놓을 줄은 몰랐어요."
반준이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런데 단소저는 어떻게 저게 동방칠수라는 걸 알았어요?"

구양연운이 단이아를 바라보며 물었다.
"어려서부터 별 보는 걸 좋아했어요. 하늘의 뭇 별들이 마치 지상의 사람들을 응시하는 눈처럼 보였거든요. 할아버지가 매일 별자리 이름이랑 별에 관계된 이야기들을 들려주셨어요."
단이아의 얼굴에 어두운 그림자가 스치고 지나갔다. 분명히 할아버지와 함께했던 행복한 시간들을 떠올렸을 것이다. 단이아의 두 눈에 눈물이 반짝거렸다.

 


 

 

- 할아버지는 북몽 가장 안쪽에 그리 크지 않은 뜰이 있는 집에 살며, 마을 사람들과 거의 왕래를 하지 않았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은 그런 할아버지를 매우 존경했다.

- 그해 여름에 겪었던 일은 마치 공포영화 한 편을 본 것처럼 내 뇌리 깊은 곳에 박혀 있다. 이 '영화'는 밤이 깊어질 때마다 욱신거리는 내 왼쪽 손목의 상처에서 시작되었다. 근 한 달 동안이나 북몽에서 겪었던 엄청난 고통은 상상조차 하기 힘들다. 

 

- 더욱 놀라운 것은, 북몽에서 돌아온 후 3년 동안 계속된 악몽이었다. 꿈속에서 나는 언제나 거대한 번데기 한 마리에 짓눌려 숨을 쉴 수가 없다. 그리고 다시 3년이 지난 어느 날 밤, 나는 마침내 그 번데기 악몽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 할아버지의 소식을 다시 들은 것은 2008년 금융위기 때였다. 나는 졸업 후 실업 상태였다. 아버지에게 도움을 요청하자, 당시 쉰이 넘은 나이에 몸값이 꽤나 높았던 아버지는 전화로 할아버지 이야기를 꺼냈다. 
머리가 멍해지며 다시 검은 옷차림의 무뚝뚝한 할아버지 얼굴이 떠올랐다. 오래전에 통증이 사라졌던 상처 부위에서 다시 살짝 아픔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15년 전 여름방학 때의 일이 욱신거리는 팔의 통증과 함께 점차 머릿속에 떠오르기 시작했다. 

 

- 아버지는 할아버지가 말기 암에 걸렸다고 알려주었다. 의사가 몇 번이나 입원 치료를 받으라고 했지만 고집불통 노인네는 한사코 거부하고 북몽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나는 할아버지가 북몽을 떠날 수 없었으리라 생각했다. 그 괴상한 마을을 떠나지 못하는 이유는 아마 아버지도 모를 것이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었다. '그녀'를 본 적이 있기 때문이다. 할아버지가 지하실에 가둬둔 아름다운 여자의 '시신' 말이다. 

- 아니, 그건 시신이 아니었다. 부르르 떨리던 몸, 황홀할 정도로 아름다운 눈빛을 나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그렇다. 그녀는 살아 있었다. 다시 통증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마치 나에게 고통을 남겨준 그날을 돌아보지 못하게 막으려는 것 같았다. 예전에 누군가가, 오래된 기억은 평생 사라지지 않으며 어떤 것들은 심지어 유전자를 통해 전해지기도 한다고 말했던 적이 있다. 다만 그 기억을 여는 비밀스러운 방법을 찾을 수가 없을 뿐이라고. 아마도 내 손목의 이 상처가 그 기억을 여는 열쇠인지도 모른다. 

- 사흘 뒤 나는 약속대로 차를 몰고 아버지와 함께 북몽으로 돌아갔다. 할아버지는 여전히 마을 가장 안쪽에 있는 집에 살고 있었다. 몇 칸짜리 허름한 회색 기와집, 크지 않은 뜰에 윤기가 반지르르한 닭 몇 마리를 키우고 있었다. 내 얼굴을 보자 할아버지는 지나치게 흥분하는 것 같았다. 두 눈에 평소 볼 수 없던 따뜻한 기운이 퍼지는 것을 보면서, 할아버지에게 가졌던 인상을 많이 바꿀 수 있었다. 

- 할아버지는 한숨을 내쉰 후 가만히 내 어깨를 도닥거리며 말했다.
"목양아, 좀 피곤하구나!"
그러더니 심하게 기침을 시작했다.
나는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할아버지에게 물 한 잔을 따라주었다. 할아버지는 물을 한 모금 마신 다음 한숨을 내쉬었다.
"그 일 때문에 아직도 할아버지가 밉지?"
순간, 방 안의 공기가 얼어붙는 것 같았다. 고개를 숙였다. 손목 위 상처가 눈에 들어왔다. 통증은 어쩌다 희미하게 느낄 정도였지만 ... 

- 밥이 반 정도 담겨 있고, 그 앞에 짠지 한 접시가 놓여 있었다. 양쪽에는 나란히 수십 구의 시체가 널려 있었다. 정중앙에는 관도 놓여 있었다. 조금 전 악취는 이 시체들에서 풍기는 냄새였으리라. 반준은 대체 어떻게 시신과 함께 지낼 수 있는지 상상할 수조차 없었다.
"반준, 나 좀 일으켜주게."
"네."
반준은 들고 있던 등잔을 탁자에 내려놓은 뒤 남자를 부축해 관 옆으로 이동했다. 남자가 관을 짚고 몸의 균형을 잡더니 말했다.
"관 뚜껑을 열어보게."
반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힘을 조금 주자 뚜껑이 열렸다. 관 뚜껑을 여는 순간 괴이한 향내가 풍겨 나왔다. 향내가 방 안 가득한 악취와 섞여 토악질이 나올 것 같았다.

- 놀랍게도 관 안에는 벌거벗은 여자의 시신이 완벽한 모습으로 보존되어 있었다. 반준이 의혹에 찬 눈초리로 남자를 바라봤다. 남자가 관 옆에 있는 날카로운 단검을 가리켰다.
"저걸로 여자의 팔뚝을 가르게."
잠시 멍하니 정신이 나가 있던 반준이 고개를 끄덕이며 관 옆에 놓인 단검을 손에 쥐었다. 그러나 감히 손을 댈 수가 없었다. 관 속에 들어 있는 여자는 얼굴이 발그레한 것이 마치 단잠에 빠져 있는 것 같았다.

- "갈라."
남자가 명령하듯 말했다. 반준은 그제야 이를 악물고 단검으로 여자의 왼쪽 손목을 살짝 찔렀다. 그런데 놀랍게도 피가 나오지 않았다. 손목을 가르자 여자의 피부가 쩍 벌어지더니 그 안에서 마치 알처럼 생긴 둥글둥글하고 매끄러운 물체 몇 개가 떨어졌다. 반준이 놀라 칼을 떨어뜨렸다. 

- 광풍이 몰아치더니 방 안의 등이 모두 꺼져버렸다. 시리도록 새하얀 번개가 칠흑 같은 밤하늘을 질주하더니 혼돈의 하늘을 반으로 갈랐다. 이어 천둥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굵은 빗방울이 떨어졌다. 보기 드물게 북경 전체에 폭우가 쏟아졌다. 
엄청나게 퍼붓는 빗속에서 반준은 얼이 나간 사람처럼 조그만 골목길을 걸어갔다. 머릿속 깊숙한 곳에서 똑같은 질문이 끊임없이 되풀이되고 있었다. 
'대체 누구 짓일까.'

- 반준이 조금 전 남자의 집에서 본 것은 목파 일가에만 비밀리에 전해지는 곤충술 가운데 하나였다. 목파 곤충소환사들에게는 청사 이외에도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넣을 수 있는 몇 가지 비술이 있었다. 그 가운데 가장 악독한 수단이 바로 조금 전 목격한 섭생술(攝生術)이다.

- 이 비술의 이름은 양생(養生)의 도에서 유래했다. 오래전 한 곤충소환사의 아내가 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그는 아내의 시신을 부패하지 않게 보존하는 방법을 연구했다. 그러던 중 어떤 종류의 벌은 다른 생명체의 몸 안에 알을 낳는데, 그 알을 품고 있는 시신은 부패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곤충소환사는 죽은 아내의 몸에 벌의 알을 이식해 시신이 부패하지 않는 것을 확인했다. 그는 너무 기쁜 나머지 그 벌에게 희봉(姬蜂)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3년 후 어느 날 밤 집에 돌아와 보니 아내의 시신은 만신창이가 되어 있고, 수많은 '희봉'이 방 안을 날아다니고 있었다. 다급한 나머지 그는 집에서 도망쳤다. 반년 후 그가 살던 곳은 죽음의 도시가 되었고, 수많은 백골만 남게 되었다.
그 후 섭생술은, 계속 전해지기는 했지만, 목파 곤충소환사들의 금기사항이 되었다.  

- "파석출당(破石出當)이오!"
안에서 화답하는 소리가 들렸다.
반준이 의자에 앉았다. 시묘묘가 반준의 귀에 대고 작은 소리로 물었다.
"뭐라고 그러는 거야?"
"시 소저는 잘 모를 거예요. 여기 전당포 사람들끼리 하는 말이 있지요. 다른 사람들이 못 알아듣게 자기들끼리 쓰는 은어입니다."

반준이 미소를 지었다.
"'연경화룡'이란 말도 이 업계에서 쓰는 말이었어?"
시묘묘는 확실히 머리가 좋았다.
"여기서 '연화'란은, '경화'란 금을 말합니다. '채패자'는 고화(畵)를, '흑패자'는 고서(書)를 말하는 거고요."

- 바로 그때 안에 있던 사람이 고함을 질렀다.
"묘이(妙以)!"
반준이 돌연 의자에서 일어섰다.
"왜 그래?"
시묘묘가 놀라 바라보았지만 반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계산대의 남자는 반준이 그들 말을 알아듣자 초조한 표정이었다. '묘이'라는 말은 '없다'는 뜻이었다. 대체 누가 하상을 가져갔을까?

- 농담과 광택이 적절하고 문양의 흐름이 자연스러웠다.
"당삼채를 볼 줄 아시나 보군요?"
넋이 나가 당삼채를 바라보는 반준을 보고 경년이 물었다.
"당삼채는 소중한 골동품이긴 하지만 방에 진열하기엔 맞지 않는 작품이죠."
반준이 고개를 돌리며 옆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네?"
경년이 이해가 안 간다는 듯 반준을 바라봤다.
"좀 자세히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귀한 물건이긴 하지만 그게 유행한 당나라 때에는 부장품으로만 쓰였거든요."

- "곤충소환사에 대해 알고 계시다니, 그럼 한번 맞혀보시지요."

반준이 태연하게 말했다.
 

- 금소매가 연응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말했다.
"일본 놈들은 그저 어떻게 하면 무력으로 중국을 정복할까만 궁리하지. 하지만 저 조그만 섬나라 문화와 유구한 중국의 문화를 어떻게 비교할 수 있겠니? 물론 이들에게도 장점은 있어. 환상이 사실이 되었을 때 거의 미친 듯이 발광하지. 그들이 미쳐 날뛰어야 우리가 그들을 이용할 수 있어. 내우외환일 때만 그런 게 나타나거든!" 
"그런 거라니요? 그게 뭔데요?"
연응은 자신만만해하는 어머니를 바라보며 눈썹을 추켜올렸다.

"곤충소환사 일족의 비밀이지. 역사를 뒤집을 만한 비밀."

금소매는 그렇게 말한 후 일어나 창밖을 바라봤다.
"전설에 따르면 이 비밀은 천하가 혼란스러워야 나타난다고 했단다. 그걸 얻으면 천하를 얻을 수 있지!"

- 반준이 두 손을 모았다. 애신각라 경년이 차를 한 모금 머금었다.
"반 나리, 곤충소환의 기술은 예전부터 있었지만 옛사람들은 단 한 번도 이에 대한 기록을 남기지 않았습니다. 이유가 뭔지 아십니까?"
"사실 아버님께서 돌아가신 후 저도 소환술의 기원을 찾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옛 선조들은 아무런 기록을 남기지 않았더군요."
고금의 학문에 통달한 반준은 그 지혜가 당대 어느 유학자 못지않았지만 곤충소환사에 관한 어떤 기록도 찾을 수 없었다.
"유일하게 곤충에 대해 소개하고 있는 건 중의학(中醫學) 책 뿐이었습니다."

- "중의에서는 천하의 곤충을 금, 목, 수, 화, 토의 오행으로 분류하는데 곤충소환사 다섯 가문은 여기에서 시작됐죠."
"그런데 그것도 잘못되었어요."
반준이 의혹에 찬 눈초리로 애신각라 경년을 바라봤다.
"중의에서는 곤충을 모충(毛蟲), 우충(羽蟲), 나충(倮蟲), 개충(介蟲), 인충(隣蟲)으로 분류합니다. 털이 난 모충은 360종으로 기린이 으뜸이고, 깃이 달린 곤충 360종 중에서는 봉황이 으뜸입니다. 나충 360종의 으뜸은 성인(聖人)이며, 껍질이 있는 개충의 으뜸은 신귀(神龜), 비늘이 달린 인충 360종의 으뜸은 교룡입니다. 모충은 목, 우충은 화, 나충은 토, 개충은 금, 인충은 수에 속하지요. 이는 당시 곤충소환사 일족이 부리던 곤충과는 전혀 다릅니다. 어찌 그로부터 기원했겠습니까?"

 

- "하하, 그 점이 바로 곤충소환사 선조들이 고명하신 부분입니다."

애신각라 경년이 조용히 말했다.
"그들은 사람들이 쉽게 곤충소환사 일족의 비밀을 알아내지 못하도록 일부러 둘을 섞어버렸습니다. 양자는 서로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 같아 보이지만 분류 방법이 다른 걸 제외하면 곤충은 옛날의 그 곤충들이 맞습니다."

- "반 나리, 사실 황가에는 '전란이 일어나면 곤충소환사가 출현하고, 곤충소환사를 얻으면 천하를 얻을 수 있으며, 30년이면 반드시 주인이 바뀐다!'라는 말이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천하에 대란이 발생하거나 사방에서 싸움이 일어나면 곤충소환사가 출현하는데, 이 곤충소환사 일족의 비밀을 얻은 자가 천하를 얻을 수 있다는 겁니다. 다만 이러한 천하는 30년 뒤에 주인이 바뀐다고 합니다. 주인이 바뀐다는 말에 모든 제왕이 이를 경원시했던 겁니다."
"정말 그런 말이 있습니까?"
반준은 자신의 귀를 믿을 수가 없었다.

- 반준은 자신이 우물 안 개구리처럼 느껴졌다. 이렇게 놀라운 이야기는 지금껏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애신각라 경년이 들려준 이야기는 반준이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내용들이었다.

- 당나라 초기, 당 고조 이연(李淵)이 처음 국호를 만들고 아직 정세가 안정되지 않았을 때였다. 당시 북방의 돌궐은 막강한 군사력으로 북쪽 길을 통해 장안에서 10리 정도 떨어진 역참까지 공격해 왔다. 결국 이연은 굴복하여 공물을 바치기로 했고 그제야 북방은 평온을 되찾을 수 있었다. 

- 당 태종 이세민(李世民) 집권 초기, 국력이 조금 호전되긴 했지만 전대의 병폐를 일순간에 모두 치유할 수는 없었다. 당시 북방지역에서는 여전히 돌궐이 소란을 피우며 북방 변경지대를 위협하고 있었다. 이세민은 이를 갈았지만 짐짓 실력을 숨긴 채 때를 노렸다. 국력이 점차 강성해지자 당 태종은 드디어 돌궐을 공격했다. 
돌궐족은 쭉 북방지역에 살면서 유목생활을 해왔다. 매우 강한 민족성을 가진 그들은 이미 당나라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기 때문에 일찍부터 대비가 되어 있었다. 이세민은 친히 정벌에 나섰다. 사전에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기에 이세민은 전투가 금세 끝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전투는 장기전으로 치달았고, 돌궐족이 군량부대를 습격하는 바람에 결국 수십만 대군의 군량에 문제가 발생했다. 
당시 군량을 운반하는 관도는 이미 난민들로 북새통이었다. 원래 장안에서 북쪽 땅까지 보름이 조금 넘게 걸리는 길이었는데, ...

- 이세민의 말에 노인은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이세민이 황망히 그를 잡았다.
"어찌하여 가시려 합니까?"
"폐하께서 사실대로 말씀하지 않으시니 이 늙은이는 이곳에 있어도 전혀 도움이 안 될 듯합니다."
노인은 담담하게 말한 후 성큼성큼 밖으로 향했다. 이세민이 황망히 노인의 팔을 잡았다.
"군량에 대한 일은 군사기밀이라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실 이틀 치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이건 정말입니다."
노인이 큰 소리로 웃었다.
"그렇다면 폐하께서는 이틀 안에 3천만 근을 이곳으로 운반해 달라는 겁니까?"
"물론 빠를수록 좋습니다."
이세민이 노인을 안내해 의자에 앉혔다.
"좋습니다. 폐하께서는 오늘 밤 군사들에게 명해 이곳에서 남쪽으로 2리 떨어진 곳에 군량창고를 세우고 주위에 횃불을 켜놓으라고 하십시오. 내일이면 군량 3천만 근이 창고에 들어 있을 겁니다."
노인이 웃으며 수염을 쓸어내렸다.

- "다만 폐하께서 약속해 줄 일 두 가지가 있습니다."
"군량 3천만 근이 생긴다면 두 가지가 아니라 천 가지, 만 가지라도 약속드리겠습니다."
다음 날 바로 군량을 가져오겠다는 말에 조금 의심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첫째, 군사들에게 명령을 내려 오늘 밤 군량창고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든지 당황하지 말고, 가까이 다가와 살피지도 말라하십시오. 둘째, 절대 이 일을 외부 사람에게 발설해서는 안 됩니다."

- "정말 신선이 틀림없구나!"
그때 병사 하나가 허겁지겁 달려와 숨을 헐떡이며 이세민 앞에 무릎을 꿇었다.
"폐하, 조금 전 얻은 소식에 따르면 어제 수십만 마리의 쥐가 경성에서 이곳으로 미친 듯이 달려왔다고 합니다. 오늘 새벽 관도와 풀숲에서 수많은 쥐 시체가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말하며 병사가 죽은 쥐 한 마리를 손바닥에 받쳐 들었다. 이세민이 보니 쥐는 죽어 있었는데 입이 얼마나 부풀었는지 몸통보다 훨씬 컸다. 쥐의 입을 벌려보라고 명령한 그는 깜짝 놀랐다. 입안에서 곡식이 한가득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 그는 군량을 막사로 운반하라고 하는 한편 군사들을 이끌고 관도로 향했다. 도로에 죽은 쥐 수천 마리가 깔려 있고, 도로 양측 풀밭은 쥐떼에 밟혀 엉망으로 짓이겨져 있었다. 그는 돌궐을 대패시킨 후 사방으로 노인을 수소문했지만 행적을 발견할 수 없었다. 다만 그자가 곤충소환사라는 것만 기억할 뿐이었고, 그와의 약속에 따라 이 일을 세상에 알리지 않다가 임종 전에야 이치(李治, 당의 세 번째 황제로 태종의 아홉 번째 아들-옮긴이)에게 알려주었다.

 

- "황실에서도 비밀 중의 비밀이니 나리가 알 리가 없지요."
"정말 믿을 수가 없군요."
반준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하하! 그다음 이야기는 더 신기하실 겁니다."
애신각라 경년이 말했다.
"사서에 기록된 곤충소환사가 딱 한 명 있는데, 다만 사람들이 곤충소환사라는 신분을 이야기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 "그게 누굽니까?"
반준이 놀라서 물었다.

"회음후(淮陰侯) 한신(韓信)입니다."
애신각라 경년이 자신 있게 말했다.

- "한신은 곤충소환사의 후손이자, 당시 곤충소환사의 비밀의 유일한 계승자였습니다. 그는 남의 사타구니 밑을 기어가는 과하지욕(膀下之辱)을 참은 사람입니다. 초나라 사람이었던 한신은 서초패왕 항우에게 투항했습니다. 그러나 배척을 당하고 자신을 중용하는 사람이 없자 결국 항우를 버리고 유방에게 투항했지요. 항우는 함양으로 들어온 후 유방을 한중 분지로 쫓아냈습니다. 유방은 중원으로 가려했지만 진령이 가로막혀 있었기 때문에 갈 수가 없었습니다. 항우는 옛 진(秦) 나라 땅을 장감(章邯), 사마흔(司馬欣), 동예(董翳)에게 주고 옹왕(雍王), 새왕(塞王), 적왕(翟王)에 봉해 유방을 견제하도록 했지요. 유방은 마음은 북으로 향했으나 능력이 없음에 괴로울 뿐이었습니다. 바로 그때 한신이 유방에게 '명수잔도 암도진창(明修棧道 暗渡陳倉)'의 계책을 내놓았습니다."

 

- "사실 당시 한중을 나와 중원으로 가는 길은 네 갈래였습니다. 첫째, 자오도(子午道, 당시에는 蝕中道라 칭함). 이곳은 한왕 유방이 한중으로 들어갔던 길로, 잔도를 수리한 곳이지요. 둘째, 포사도(褒斜道), 이곳은 당시 진(秦) 혜문왕(惠文王)이 촉나라를 얻을 때 갔던 길입니다. 이 길은 중원에서 가까우며 진령양 기슭으로 통하는 요도이기도 합니다. 셋째, 기산도(祁山道)입니다. 이 길은 한중 서쪽에서 감숙 약양(略陽)으로 간 후 서북쪽으로 꺾은 다음, 하변(下辯), 서현(西縣)을 지나 북으로 감숙 천수(天水)의 농서(隴西) 지역으로 들어가 다시 농산(隴山) 동쪽을 넘어 관중 지역으로 내려갑니다. 삼국시대 제갈량이 수차례 위나라를 칠 때 기산(祁山)에서 용병하여 갔던 길이 바로 이 길입니다. 네 번째, 당락도(儻駱道)입니다. 삼국을 통해 진령을 넘어 관중과 한중을 잇는 가장 빠른 옛길입니다. 당나라 덕종(德宗), 희종(僖宗)이 전란을 피할 때 모두 이 길을 통해 한중으로 갔지요. 그러나 '구불구불 80리, 아흔세 번 돌아가는 길'이라 매우 험하고 가파른 길입니다. 그런데 결국 한신이 선택한 길은 당시 길이 나 있지도 않았던 진창이란 곳이었습니다. 사서를 살펴보면 세상 사람들은 한신이 몰래 진창을 건너고 제갈공명이 두 번 기산으로 출정했을 때 이 길을 갔다고만 알고 있지, 한신이 어떻게 이 길을 알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지요."

- 애신각라 경년이 미소 지었다.
"사실 한신이 진창을 몰래 건너기 전까지 진창이란 길은 존재하지도 않았습니다."
"존재하지 않았다고요?"
"네."
애신각라 경년은 매우 들떠 있었다.
"한신은 장군에 임명되기 전 이미 몰래 한중 주위의 산세를 살펴 한왕 유방을 위해 중원으로 가는 지름길을 선택하려고 했습니다. 지름길의 필수 조건은 첫째 빨라야 하고, 둘째 기발한 계책을 이용해 승리를 거둘 수 있는 곳이어야 했습니다. 결국 그는 진창에 길을 만들기로 결정했지요. 그가 사용한 기술은 가문 대대로 전해지는 곤충소환술이었습니다. 그는 엄청난 개미떼를 동원해 황무지에 길을 만 ... "

- "이게 낙상이에요."
낙상을 받아 든 반준이 상자를 옆 탁자 위에 놓았다. 자칫 실수라도 하면 금용과 단이아를 다치게 할 수 있었다. 그는 탁자에 낙상을 잘 올려놓은 다음 화선지로 덮고, 붓으로 물을 찍어 화선지에 베껴놓은 점을 따라 물을 한 방울씩 떨어뜨렸다. 화선지에 그려진 낙인마다 물이 스며들었다. 반준은 그제야 붓을 내려놓고 조심스럽게 화선지를 들어 올렸다. 
낙상의 마흔다섯 개의 흑·백점 위에 열다섯 개의 물자국이 남았다. 단이아가 신기한 듯 반준 옆으로 다가왔다. 상자 위 열다섯 개의 물 자국을 바라보는 단이아의 입가에 절로 미소가 번졌다.

 

- 반준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팔짱을 낀 채 잠시 깊은 생각에 잠겼다. 금파 계승자인 단이아는 반준이 망설이는 이유를 알고 있었다. 사실 그녀 역시 의심하던 중이었다. 하락상의 장치는 금파 곤충소환사가 수대에 거쳐 지혜를 짜내 만들어놓은 것이다. 설사 열다섯 개의점이 있다 해도 순서를 어떻게 배열하느냐가 문제였다. 배열 순서가 다르면 철침이 발사될 수 있으니 정말 골치 아픈 일이었다.

- 반준이 낙상에 있는 마흔다섯 개의 흑점과 백점을 가리켰다.

"마흔다섯 개 점의 방위는 낙서의 방향과 완벽하게 일치해요. 낙서는 예전에 귀서(龜書)라고 불렸는데, 전하는 바에 따르면 신묘한 거북이의 등에 업혀서 올라왔다고 합니다. 그 방위를 보면 9를 위에 이고, 1을 아래에 밟고 있으며, 좌는 3이고 우는 7이며, 2와 4는 어깨가 되고, 6과 8은 다리가 되며, 5를 가운데 거하게 하니 오방의 흰색 다섯 개는 음수이고, 사방 모서리 검은 점은 양수입니다."
단이아가 낙상 위 흑점과 백점을 바라봤다. 절로 고개가 끄덕거려졌다. 단이아가 반준에게 고개를 돌렸다.
"이 점은 모두 열다섯 개예요. 열다섯 점의 배치는 낙서의 삼오설 (三五說)에 부합하니, 바로 삼오합일의 뜻이지요."
반준은 물로 찍은 열다섯 개 점을 바라보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 "연운 말로는 낙서가 오행과 관련이 있다더군요. 오행은 음과 양으로 나뉘잖아요. 세 번째 오(五)는 어디에 있나요?"
"하하! 단소저도 모르는 게 있군요. 이른바 3과 5라는 것은 바로 삼가(三家)의 합일된 수를 말하는 겁니다. 북방의 제1문은 물이 되고, 서방의 제2문은 불이 되고, 동방의 제3문은 나무가 되고, 남방은 제4문으로 금석이 되고, 중앙은 흙이 되지요. 나무(3)는 불(7)을 생하여 일가를 이루고 중앙의 5와 합하여 15가 됩니다. 금(9)은 물(1)을 생하여 일가를 이루고 중앙의 5와 합하여 15가 되고요. 흙은 중앙에 머물며 일가를 이루고 스스로 15가 됩니다. 3가(三家)가 서로 만나 음양배합하는 것을 3과 5가 합일한다고 하고, 3과 5가 합일하는 것은 결국 일음일양(一陰一陽)의 이치입니다. 이 가운데 5의 1문이 바로 원빈(元牝, 도가에서 말하는 만물의 어머니-옮긴이)의 문이지요."

- 반준은 낙상에 응집된 몇 개의 물 흔적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 문(門)에 생도 있고, 사도 있으며, 순과 역도 있어요. 오행이 착란하여 분산하는 곳도 이곳이고, 오행이 정리되고 모이는 곳도 이곳입니다. 이것을 얻으면 오원(五元)이 모두 살고 오물(五物)이 변화하며 희로애락의 감성이 변해 인의예지의 본성이 되지만, 이를 잃으면 오원이 훼손되고 오물이 발산되어 인의예지의 본성이 변해 희로애락의 감성이 되고 말지요. 여기 인(仁), 의(義), 예(禮), 지(智), 신(信) 다섯 가지가 바로 오상(五常)이에요. 오상 가운데 인은 오행의 목에 해당하며, 대응하는 방향은 동쪽이지요. 의는 오행 가운데 화이고 대응하는 방향은 서쪽이며, 예는 금으로 남쪽, 지는 수로 북쪽, 신은 토로 가운데를 나타냅니다."

 

- 반준이 중앙의 점 세 개를 차례대로 가볍게 한 번씩 두드린 다음 말을 이었다.
"인의예지는 모두 신에 근본을 둡니다. 바로 중간의 이 세 점이에요. 인에 신이 있어야만 진정으로 어짊을 행할 수 있지요."
그런 다음 다시 동쪽의 점 세 개를 두드리고 말했다.
"의에 신이 있어야 진정한 의가 될 수 있고, 예에 신이 있어야 진정한 예가 될 수 있으며, 지에 신이 있어야 진정으로 지혜로울 수 있어요. 신 하나로 인의예지가 가능하니 마음 가는 대로 변화할 수 있지요."
그가 재빨리 낙상 위의 물방울을 순서대로 두드렸다. 잠시 후 낙상에서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단이아와 반준은 멍한 눈으로 앞에 있는 낙상을 쳐다보았다. 소리가 점점 커지더니 마침내 철컥 소리와 함께 낙상 위에 있는 덮개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밀려나며 뚜껑이 열렸다. 두어 걸음 다가가 낙상 안에 있는 물건을 본 두 사람은 깜짝 놀랐다. 단이아가 의심스러운 눈으로 반준을 쳐다봤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죠?"

- 반준이 낙상을 닫아 단이아에게 건넸다. 그때 풍만춘이 커다란 그릇 하나를 받쳐 들고 들어왔다. 몸에 걸친 하얀 앞치마 때문에 정말 주방장 같아 보였다. 그가 문으로 들어서자마자 큰 소리로 외쳤다.

"기름이요!"
단이아가 웃음을 터뜨렸다. '기름이요!'는 북방에서 큰 잔치가 있을 때 사람들 옷에 기름이 튈까 봐 요리사들이 자주 외치는 소리였다. 풍만춘이 뒤에 서 있는 반박에게 말했다.
"자자! 좀 도와주쇼. 동북 요리 맛을 보여주리다!"

- 반박이 탁자를 가져오자 풍만춘은 커다란 그릇을 그 위에 올려놓고는 말했다.
"반준, 아마 이런 음식은 먹어본 적이 없을 걸세."
반준과 단이아가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그릇을 바라봤다. 안에는 토마토, 가지, 호박, 피망, 납작콩, 감자, 버섯, 두부가 담겨 있고 그 위에 삼겹살과 당면이 얹혀 있었다. 내용물이 화려했다.
"풍 사부님, 이... 이거 먹을 수 있는 거예요?"

단이아는 이렇게 이상한 요리는 먹어본 적이 없었다.

"먹을 수 있냐고?"

- 그곳에서 멀지 않은 안양성에서 금소매는 도무지 마음을 가라앉힐 수가 없었다. 수십 년 동안 고심하며 준비해 온 일이 드디어 이루어지려는 순간이었다. 평소 자신을 철저히 위장하고 있었지만 지금 이 순간만은 마음속 흥분을 가라앉힐 수가 없었다. 
금소매는 여러 해 전, 화려하게 장식된 친왕 저택의 광경을 떠올렸다. 아름답게 차려입은 시녀들이 얼굴에 함박웃음을 띤 채 본채로 이어지는 회랑에서 다과를 들고 있었다. 본채 뒤 정자에서는 어머니가 그녀의 이마에 입맞춤을 해주고 있었다. 그녀는 앙증맞은 치파오 차림이었다. 어머니의 도움을 받아 신발을 신은 금소매는 어머니 머리의 금비녀를 장난스레 만지작거렸다. 

 

- 뒤채 연회장에서 <백사전>의 주요 대목이 무대에 오르고 있었다. 금소매가 가장 좋아하는 부분이었다. 축하연이 벌어질 때마다 그녀는 매번 이 부분을 부탁했고, 공연이 시작될 때면 아직은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눈앞의 무대에 온 정신이 팔렸다. 무대 위 배우의 표정 하나, 몸짓 하나도 오랫동안 잊을 수가 없었다. 특히 금소매는 허선(약재를 구하러 산에 갔다가 백사를 만나 사랑하는 사이가 된다-옮긴이) 역의 연기자를 유달리 좋아했다. 그날따라 허선 역을 맡은 여자 연기자의 목청이 유난히 돋보였다. 천상의 소리에 박자와 호흡이 절묘하게 들어맞았다. 허선의 창이 시작되자 그녀는 어머니를 밀치고 뒤채로 뛰어갔다. 시녀 몇 명이 행여 그녀가 다치지나 않을까 급히 금소매의 뒤를 따라갔다.

- 그러나 폭죽은 터지지 않았다. 대신 어머니가 달려와 그녀를 안고 방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 후 벌어진 모든 일은 그녀의 기억 깊숙한 곳에 묻히고 말았다. 고통스러운 기억은 대개 무의식적으로 잊히기 마련이다. 잊히지 않는 것은 귓가에 시끄럽게 울려 퍼지는 총소리, 하얀 피부에 푸른 눈을 가진 강도들이 흉악하게 웃고 있는 모습. 겁탈당한 시녀들의 비명 소리, 도망가는 소리, 처참한 울음소리, 하늘로 치솟는 불꽃, 가슴에 비수를 꽂은 채 피를 흘리며 그녀 위로 쓰러진 어머니의 모습이었다.

- 금소매는 고개를 저었다. 더 이상 생각할 수가 없었다. 어느새 눈가에 눈물이 가득 고여 조금만 움직여도 주르르 흘러내릴 것 같았다. 때로 기억은 이처럼 이상한 것이었다. 어떤 일들은 기억하고 싶을수록 더 쉽게 잊혔다. 그러나 평생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들은 오히려 더욱 선명해졌다. 금소매는 아바마마가 자신을 안고 얼굴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이렇게 말했던 순간을 기억하고 있었다. 
"이제 꼬마 숙녀가 아니지? 어머니의 복수를 해야 한다!"

- "왕야! 잘 생각하십시오. 정말 위험한 일이옵니다. 조금이라도 실수가 있을 경우 어린 공주님의 목숨이 위태롭습니다."
늙은 태감이 안타까운 듯 말했다. 아바마마가 금소매의 작은 손을 쥐며 말했다.
"이 애는 애신각라의 자손이오. 청 제국을 위해 죽는다면 그 역시 영광스러운 일이오."
어린 금소매는 두 어른의 대화가 이해되진 않았지만 며칠 전 '죽는' 장면을 너무 많이 봤기 때문에 울고불고 난리를 쳤다.
"아바마마, 아바마마, 난 안 죽을 거예요. 아바마마를 떠나지 않을 거예요."
그러나 그녀가 입을 열자마자 아버지가 갑자기 그녀의 손을 뿌리치며 말했다.
“데려가라!"
고개를 숙이고 있던 태감이 왕을 힐끗 바라보더니 다시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화석격격(化碩格格, 순치 황제 이후 친왕의 여식을 부르던 말)! 소인하고 같이 가시지요."

- "서호 용정차군요."
반준이 조용히 말했다.
"헤! 이분은 척 보고 차를 아시네. 대단하네요!"
종업원은 반준이 냄새만으로 차 이름을 대자 감탄해 마지않았다.

"뭘요."
반준이 겸손하게 말했다.
"이런 작은 찻집에서 우전 용정을 마시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 "우전 용정이 뭐예요?"
단이아가 잔뜩 호기심 어린 눈으로 두 사람을 바라봤다.
"절기로 청명 전에 딴 차를 명전차, 곡우 전에 딴 차를 우전차라고 해요. 소저는 잘 모르시는군요."
종업원이 재빠르게 설명해 주었다.
"예로부터 우전은 상품, 명전은 진품이란 말이 있지요."
"차를 좀 아는군요."
반준이 차 한 모금을 마셨다. 청아하고 그윽한 향기가 입안 가득 퍼졌다.


 

 

- 아마도 우리 대부분은 가끔 어떤 일이 일어났을 때 꼭 예전에 똑같은 일을 경험한 적 있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을 것이다. 또한 분명히 본 일이 없는데도 어렴풋이 어디선가 본 것 같다고 생각할 때도 있다. 그래서 때로 꿈속에서 있었던 일인가 보다 생각하기도 한다. 나도 그 순간 그런 느낌이 들었다. 
그 여자를 봤을 때 나는 순간 피가 얼어붙는 것 같았다. 나는 황급히 그 자리를 벗어나 계단을 내려가 차로 돌아갔다. 핸드폰이 요란하게 울리는데도 감히 전화를 받을 수가 없었다.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부들부들 떨며 핸드폰을 한쪽에 내팽개친 다음, 차를 몰고 호텔로 돌아왔다. 
 

- 2008년 여름, 반준 할아버지가 입원한 지 일주일이 지났을 때였다. 그동안 나는 할아버지가 해준 이야기를 많은 친구들에게 들려주었다. 한 사람만 제외하면, 대부분은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냐는 듯 고개를 저었다. 현실적으로 너무 이상한 이야기 아니야? 현실성이 전혀 없어! 친한 친구인 동량의 반응도 이와 같았다. 

- "풍 사부님은 수영도 잘하시네요."
연운이 감탄했다.
"하하. 어려서 송화강변에서만 놀아서 언젠가 꼭 황하 물 맛을 보고 싶었지."
풍만춘이 웃었다.
"풍 사부님, 이런 물고기 보신 적 있어요? 어째 물고기가 비둘기 같네요?"
단이아가 금용이 들고 있는 잉어를 신기한 듯 쳐다보며 말했다.  

- 단이아의 말에 풍만춘도 물고기를 살펴보았다. 머리가 작고 입이 납작했다. 긴 몸체의 앞부분은 동글동글한 데 비해 뒤쪽은 납작했으며, 등은 고동색이었다. 잠시 물고기를 들여다보던 풍만춘의 얼굴이 절로 환해졌다.
"하하. 이런 행운이! 예전부터 황하 상류에 비둘기어가 있다는 말을 들었는데 오늘 그 물고기를 보게 될 줄은 몰랐네!"
"비둘기어라고요?"
단이아와 연운이 동시에 말했다. 그러고 보니 물고기가 보면 볼수록 날개를 펼친 비둘기 모양이었다.
"음, 동어(銅魚)라고도 하지. 하지만 보통 비둘기어라고 한다네."

풍만춘이 잔뜩 흥분해서 말했다.
"이 물고기, 적어도 열 살은 된 것 같은데, 저녁에 내가 물고기찜을 해주지!"

 

-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하하. 이곳 귀무산은 확실히 멋진 곳이야. 황하가 불어나면 양쪽 심산유곡 가득 안개가 피어오르지. 태양이 떠오르면 안개와 산중 습기가 하나 되어 이곳 특유의 기이한 짙은 안개가 형성된다네." 
노인이 허리 뒤쪽에서 물담배를 꺼내 불을 붙인 후 몇 모금을 빨았다. 그러자 안개가 마치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담배 연기와 함께 주위로 퍼져나갔다. 노인이 힘껏 담배를 빨아 가만히 내뿜자 연기가 퍼지는 곳마다 안개가 멀리 흩어졌다.
넋 나간 사람처럼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는 반준을 본 노인의 얼굴에 웃음이 번졌다. 그가 흩어지는 안개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게 바로 자네에게 말하려고 했던, 짙은 안개에 숨겨진 이야기 일세."

- "사람들은 황하의 오솔길에 귀무산이 있다는 것만 알 뿐, 그 안에 담긴 의미를 알지는 못하지."
노인은 짐짓 의미심장한 얼굴로 다시 담배를 깊게 빤 후 연기를 뿜었다. 눈앞의 짙은 안개가 흩어졌다. 노인이 다시 입을 열었다.
"'무타장(霧打墻)'이란 걸세."
반준은 갈수록 알 수가 없었다. 귀신이 벽을 두드린다 하여 '귀타장(鬼)'이란 말은 들어봤어도, '무타장'이라니, 그건 또 무슨 소리인가!

 

- 노인은 난감해하는 반준의 표정을 살피며 이야기를 이었다.
"이 짙은 안개를 보게, 얼핏 안개처럼 보이지만 사실 이 안에 비밀이 숨겨져 있지."
노인의 말에 반준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그럴 리가!

 

- 반준이 노인을 바라보며 잠시 머뭇거리다 말고 말했다.
"그렇다면 저게 '소요봉(逍遙蜂)'이란 말씀이십니까?"
그 말에 노인이 눈을 반짝이며 신기하다는 듯 반준을 훑어보았다. 그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그렇다네."
"제 말이 맞단 말씀인가요?"
반준은 노인의 반응에 대충 짐작하고 있었다. 노인이 여전히 눈을 가늘게 뜬 채 고개를 끄덕거렸다.
"자네가 말한 것처럼 이 농무의 반은 안개, 반은 소요봉이라네."

 

- "소요봉이란 곤충이 얼마나 작은지 거의 볼 수가 없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게다가 수명도 정말 짧고요. 장자는 <소요유(逍遙遊)>에서 '아침에 났다가 저녁에 사라지는 버섯은 초하루에서 그믐까지의 한 달 일을 알지 못한다'고 했지요. 대부분 아침의 버섯을 버섯류로 알고 있지만 사실 매우 작은 곤충이에요. 삼경에 알을 깨고 나오고, 사경에 날개를 펼치고, 오경에 교배를 하고, 해가 나오면 죽지요."
노인은 소요에 대해 상세히 알고 있는 반준을 보고 감탄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처럼 작은 곤충은 죽기 전 동물의 체온이나 소리에 이끌리는데, 그들이 한데 모이는 이유는 아마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
반준이 눈앞에 펼쳐진 어두컴컴한 안개를 바라보며 말했다.
"더구나 죽기 전에 내뿜는 냄새는 사람을 환각에 빠뜨리고요. 조금 전 저 역시 그들의 냄새에 이끌린 건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 반준은 그 앞에 서서 눈앞에 펼쳐진 바둑판을 신기한 듯 바라봤다. 왠지 눈에 많이 익은 대국이었다. 흑백 각기 이백 개가 넘는 알이 놓여 있었는데, 이미 물과 불의 형세를 이루어 치열한 대국이 펼쳐져 있었다. 반준은 어느새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 노인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노인이 살짝 고개를 들어 반준을 쳐다봤다. 반준은 꼼짝하지 않고 바둑판에 정신을 집중하고 있었다. 노인의 입가에 알 듯 모를 듯 웃음이 번졌다. 그가 검은돌을 판 위에 얹었다. 
반준이 상자에서 돌 하나를 집어 손에 쥐었다. 생각을 정리하는 듯 보였다. 눈앞의 대국은 이미 진롱(珍瓏)의 형세를 펼치고 있었다. 흰돌은 험준한 지형에 기대 완강하게 저항하고 있었지만 이미 눈이 없어졌으므로, 검은돌과 흰돌의 공배 두 개뿐이었다. 검은돌은 눈이 하나뿐이니, 흰돌이 공배를 채우면 죽음이 확실하다. 만약 공배에 돌을 놓으면 좌충수를 두는 것이다. 검은돌이 곧바로 기습해 오겠지만, 이 또한 죽음뿐이었다.

- "바둑은 장기와 달라, 장기는 왕이 죽으면 다른 이들도 모두 죽지만 바둑은 병사마다 모두 진영이 있고 내딛는 걸음마다 전투를 벌인다네. 취사선택의 과정에서 서로 견제하고 제약하며 유인하니 모든 병사가 평등하지. 장군은 출중한 존재로, 목숨이 붙어 있는 한 역할을 할 수 있어."
노인은 돌을 든 채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 반준을 힐끗 쳐다봤다.
"오래전 목파 군자랑 이 마지막 대국을 벌였네. 그런데 3년이 지나고도 대국을 끝내지 못했지."
그의 말에 반준은 더 확실히 이 형세를 본 적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소 아버지가 바둑의 마지막 대국을 펼쳐두고 멍하니 바라보던 기억이 떠오른 것이다. 아버지 말씀이, 당시 바둑 형세는 할아버지가 남기신 것으로 죽을 때까지 다음 수를 놓지 못한 것이 평생의 한으로 남았다고 했다.

 

- 반준이 정신을 집중하는 사이 시간은 점차 흘러갔다. 칠성무당벌레 한 마리가 머리 위 나무에서 바둑판으로 떨어졌다. 엄지손톱만 한 칠성무당벌레는 바둑판에 떨어지자마자 일곱 색깔 껍데기 속에 사지를 움츠린 채 옴짝달싹하지 않았다. 마치 일곱 색깔 바둑알처럼 보였다.
반준은 잠시 칠성무당벌레를 바라보더니 숨을 불어 그것을 날려버렸다. 무당벌레는 그 즉시 날아올라 반준의 눈앞에서 한 바퀴 빙글 돌고는 나뭇가지로 올라갔다. 반준이 막 흰돌을 놓으려 할 때였다. 노인이 경멸하듯 웃었다.
"청년, 잘 생각하게. 그곳에 놓으면 결과는 뻔하다네."


- 반준이 어찌 그것을 모르겠는가? 칠성무당벌레가 떨어진 곳은 바로 흰돌의 공배 위치였다. 이 자리에 돌을 놓으면 스스로 공배를 채우는 것이니 흰돌은 자기 목숨 줄을 끊는 것이었다. 반준이 빙긋 웃더니 전혀 주저하지 않고 그곳에 흰돌을 두었다. 노인이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반준이 조금 전에 놓은 돌을 먹어치웠다. 그러나 수를 두는 순간, 노인의 얼굴에 피어났던 웃음기가 싹 가셔 버렸다. 노인이 자신의 문을 활짝 열어 흰돌을 되살아나게 만든 것이기 때문이다. 이로써 판세가 완전히 기울었던 대국에 다시 불을 붙인 꼴이 되고 말았다.

- 잠시 바둑판을 지켜보던 노인이 껄껄 웃기 시작했다. 그는 스스로를 위로하듯 말했다.
"불가(佛家)에 이르길, 내가 지옥에 들어가지 않으면 누가 지옥에 들어가겠는가라고 했지! 선택의 갈림길에서 삶과 죽음의 이치가 바로 이런 것이지. 집착하는 사람은 결코 삶을 버리고 죽음으로 향하지 않아. 그래서 결국 한계에 처하게 되고, 대의를 중히 여기는 사람 ... "


- "진정한 곤충소환사라면 자연의 도를 알아야 해."
노인이 넘실대는 반딧불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천문과 지리, 사계절의 변화에 통달해야 비로소 변화무쌍하게 곤충을 부릴 수 있네. 세상 어느 누가 저렇게 거대한 곤충 무리를 통제할 수 있단 말인가?"
노인이 자문자답하듯 말했다.
"오직 자연의 변화만이 가능하다네."
반준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알 것 같습니다."
"청년, 자연의 이치야 자네 스스로 깨닫는 거고, 여기 자네에게 줄 물건이 하나 있네."
노인이 말하며 소매 안에서 상자를 꺼냈다. 반준이 가지고 있는 청사 상자와 똑같았다. 그가 가만히 상자를 열었다. 안에는 청사와 모양이 흡사하긴 하지만 조금 다른, 가는 실이 들어 있었다. 반준은 한눈에 오후에 방에서 봤던 물건임을 알아보았다.

- "이게 진짜 청사지. 자네가 갖고 있는 물건은 전해지는 도면에 따라 제작한 것이나, 그건 완전한 도면이 아닐세."
반준의 의문이 깊어졌다. 목파 곤충소환사 집안에 대대로 전해지는 물건이 모조품이었단 말인가. 노인이 청사를 반준에게 건네며 조용히 말했다.
"수십 년 전 반씨 집안에 줬어야 하는 물건일세. 이제야 청사를 부릴 수 있는 사람에게 가게 되었군."


- 그때 또 다른 청년 하나가 손에 다호를 들고 나왔다. 그는 반딧불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남자의 모습에 미소 지었다.
"관수, 무슨 생각하고 있나?"
"조금 걱정이 돼서."
마당에 서서 반딧불을 바라보고 있던 남자는 관수였다. 그가 고개를 돌렸다. 또 다른 청년이 마당 돌 탁자 앞에 앉아 차를 따르고 있었다. 순식간에 차향이 사방에 퍼졌다. 관수가 웃으며 말했다.
"경년, 이차 영강 작설 같은데?"
"맞아. 그 차 맞네.”
애신각라 경년이 미소 지었다.

- "<다경>에는 이 차의 산지가 한중 영강현이라고 되어 있지."
관수가 차를 한 모금 마신 후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관수 자네가 하고 싶은 말은 그게 아니겠지?"
경년은 관수의 관심이 어디에 가 있는지를 알고 있었다.
"그래. 차질이 없으면 세숙은 한중을 지나 감숙에 닿았을 거야."
관수가 근심스러운 기색으로 다시 차를 마시고는 말했다.
"사실 걱정이야. 만일 모든 것이 자네의 추측대로 된다면 신강에 도착한 후 세숙은 더욱 험한 꼴을 당하겠지."

"그래."
애신각라 경년이 가만히 차를 한 모금 넘긴 후 눈을 감은 채 잠시 생각에 잠겼다.
"하지만 그것 말고 다른 방법이 있나?"

- 관수가 한숨을 길게 내쉬더니 주먹을 쥐었다.
"세숙이 스스로의 힘으로 이번 재난을 무사히 극복하길 바랄 뿐이네."
 
- "'유명', 즉 저승꽃이지요. 그래서 이 난꽃을 유명란이라 합니다."
"그렇군요."
설귀가 가만히 생각을 더듬으며 말했다.
"반 나리 말씀은, 우리 딸아이의 병은 이 보재가 원인이라는 건가요?"
반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에 귀족들은 아름답다는 이유로 보재를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이 보재는 유명란을 먹을 뿐만 아니라 인체 내에도 기생합니다. 보재가 체내에 들어가면 그 사람은 긴 잠에 들어가 깨어나지 않고 몸에서 악취를 풍기지요. 그런데 이 곤충은 소음을 극히 싫어해요. 시끄러우면 인체를 벗어나 난꽃으로 들어가 알이 됩니다. 게다가 더러운 것을 싫어하기 때문에 개의 피를 이용해 가뒀던 겁니다." 

- "따님 몸은 이제 문제없습니다. 며칠 지나면 깨어날 겁니다. 보양처방을 해드릴게요. 금방 일어날 수 있을 겁니다."
반준이 말하며 붓을 들어 화선지에 처방을 써서 설귀에게 건넸다. 설귀가 처방을 받아 들고 읽어보더니 고개를 돌려 입구에 놓여 있는 어린아이 종이인형을 쳐다봤다.
"그런데 저 물건은 왜 준비하라고 하셨습니까?"
"선생님은 이 일의 배후에 자리한 원흉이 누군지 알고 싶지 않으십니까?"
반준이 차분하게 웃으며 물었다. 설귀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반준을 바라봤다.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속내가 깊은 눈앞의 청년에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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