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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쓰다 신조 외] 쾌: 젓가락 괴담 경연

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1

by 일루젼 2026. 2. 10.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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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미쓰다 신조 / 쉐시쓰 / 예터우쯔 / 샤오샹선 / 찬호께이 / 이현아 / 김다미

출판 : 비채
출간 : 2021.11.24


       

           

음력 설이 얼마 남지 않았다.

업무 환경상의 큰 변화가 있었던 1월은 시간이 더디게 가는 느낌이었는데, 원래도 짧은 편인 2월은 정말 눈 깜짝하는 새 중순이 되어버렸다.

 

<쾌: 젓가락 괴담 경연>은 사실 작년 늦가을-초겨울쯤에 읽었던 책이다.

깊은 인상을 받았음에도 생각 정리가 되지 않아 미루고 미루다 지금에서야 손을 대 보지만... 과연 하고픈 말들을 기록할 수 있을지.

 

이 책은 단편 모음집이면서 동시에 장편 이야기이다. 일종의 '멀티버스'라고도 할 수 있는데, '젓가락'이라는 하나의 주제로 다섯 명의 작가가 자신의 국가와 문화가 담긴 기담을 풀어낸다는 점이 공통점이다.

 

사실 여러 작가가 공통 주제로 집필하는 단편집의 형태, '앤솔러지'는 그리 드문 기획은 아니다. 하지만 <쾌>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전체 이야기를 하나의 거대한 세계관으로 통합하기 위한 또 하나의 세부 기획을 더했다. 

 

초반의 세 작가가 '젓가락'과 '붉은 물고기 모양 반점'이라는 공통 키워드로 자신 만의 이야기를 자유롭게 펼친다. 

그렇게 확장된 이야기는 네 번째 작가가 이어받아, 그 세 이야기 사이에 숨겨져 있던 -사실은 새롭게 창조되는- 인과의 실들을 엮어낸다. 독자는 전혀 다른 시간대, 다른 국가에서 일어났던 기담들이 한 지점으로 모여드는 짜릿함에 전율하게 된다. 지난 이야기에서의 그리웠던 인물들이 다시 등장하고, 끝난 줄 알았던 서사들이 이어진다. 그럼에도 완결성 있는 또 하나의 이야기인 네 번째 이야기가 끝나면, 그곳에는 -

 

개인적으로 가장 마음에 남았던 이야기는 쉐시쓰 작가의 <산호 뼈>다. 예전 자오시즈의 <밤 여행자>도 그렇고, 나는 은근히 중국이나 대만 작가들과 감성이 잘 맞는 것 같다. 쉐시쓰 작가의 다른 작품을 더 읽고 싶어 찾아보았으나 국내에 소개된 작품은 <쾌>에 수록된 <산호 뼈>가 유일해서 너무 아쉽다. 등장인물인 위 선생(하이린쯔)을 주인공으로 한 또 다른 이야기를 鸚鵡洲(parrotkao) 작가와 함께 <不可知論偵探>로 풀어내고 있으니 관심이 가시는 분들은 찾아보실 것.

 


 

<젓가락 님> - 미쓰다 신조

 

그 유명한 미쓰다 신조가 맞다. 선두 작가로 내세울 만한 괴담/기담 계의 거장, 미쓰다 신조. 

그의 작품들 중에서도 국내에 소개되지 못한 작품들이 많다는 점이 무척 아쉽다. 

이야기 자체는 특유의 분위기와 모호함, 액자 속 액자처럼 현실과 꿈과 현재를 오가는 -깨닫는 순간 오싹해지는- 서술이 무척 매력적이지만. 

개인적으로는 평이했다고 생각한다. 미쓰다 신조는 조금 더 긴 호흡 속에서 끝을 향해 독자를 내몰아가는 '사냥꾼'적인 면모가 뛰어난 작가로, 아무래도 제한된 주제와 길이 안에서는 살짝 아쉬운 지점들이 있었다. 

 

 

<저주의 그물에 걸린 물고기> - 예터우쯔

 

세 번째 이야기. 첫 번째 이야기의 일본에서 훌쩍 떠나 홍콩 신냥탄이라는, 우리에게는 조금 낯설게 느껴지는 곳에서 '만들어진 괴담'에 관련된 오싹함을 보여준다. 저주로 인한 죽음 같았던 연인의 죽음, 숨겨졌던 진실과 진범, 그리고 모두 다 밝혀진 것 같은 현실에 남겨진 '진짜' 괴이. 

현대의 한국과 크게 다르지 않은 배경과 설정으로 상당한 속도감과 몰입감을 준다.

 

 

<악어 꿈> - 샤오샹선   

 

마을 전체를 삼켜버린 거대한 물고기, 악어에 대한 꿈같은 이야기를 흘려듣다 보면 어느새 함께 삼켜진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대만의 풍경은 어딘가 우리와도 닮아 있다.

이야기하는 여자는, 사라진 여자는, 그리고 다시 찾아낸 여자는.

어떤 면에서는 가장 '기담다운' 장치들이 많이 숨겨진 이야기였다.

'젓가락 님', '신냥탄 괴담'과 '왕선군'이 다시 등장하며 지금까지의 이야기들을 또 한 쌍의 젓가락으로 짝짓는 솜씨가 아주 매끄럽다. <산호 뼈>의 위 선생을 다시 만날 수 있으니 가계도가 조금 복잡하게 느껴져도 차근차근 흐름을 놓치지 말 것. 

 

 

<해시노어> - 찬호께이

 

마지막 이야기. <산호 뼈> 위 선생의 배다른 동생과 <저주의 그물에 걸린 물고기>의 귀신 신부가 대활약을 펼친다. 개인적으로는 <악어 꿈>과 잘 어울리는 한 쌍이라고 생각하는데, <악어 꿈>이 현실적, 여성적 시각에서 전체 이야기를 연결 지었다면 <해시노어>는 상대적으로 환상적, 남성적 시각에서 전체를 다시 한번 아우른다. 모호하게 남겨졌던 '왕선군'에 얽힌 비밀들이 밝혀진 -창조된- 다는 점도 흥미로운 포인트.

      

 

<산호 뼈> - 쉐시쓰

 

두 번째 이야기이자, 가장 마음에 들었던 이야기.

이야기를 끝까지 읽고 나면 첫 등장에서의 이미지는 완전히 지워지고, 담담하게 다정한 '그 애'만이 남는다.

 

결혼을 앞두고 15년 전 손을 놓쳤던 첫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품고 찾아온 의뢰인, 청 씨.

업계에서는 나름대로 유명하다는 도사, 위 선생. 

청 씨는 '여기서는 본명을 밝히지 않는 게 좋습니다'라며 자신을 '하이린쯔'라고 부르면 된다고 소개한 위 선생에게 오래도록 품어왔던 이야기를, 마치 속죄하듯 털어놓는다. 15년 전 여름, '그 애'와의 이야기들을.

 

하지만 마지막 장면에 이르면 '본명'은 또 다른 무게가 되어, 조금은 가벼웠던 첫 만남의 장면을 완전히 다른 느낌으로 바꿔버린다.

만약 자신이 '그 애'라면, 그때 일을 청 씨의 탓으로 생각하지 않을 거라며 담담하게 위로를 건네는 하이린쯔.

그리고 그가 건네는 박하사탕.

 

"이런 걸... 갖고 다니세요?"라는 한 마디에서.

마치 15년 간 나는 너를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었다고, 그때의 '그 애'는 아직도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 같아서.

그럼에도 너의 행복을 진심으로 기원하며, 경계에서 멈춰야 하는 나는 이 자리에 남는다고 말하는 것 같아서.

그 멈춤은 너의 탓이 아니라고 위로해주는 것 같아서.

 

아련하면서도 애절하게 남는, 이야기였다.

생각나는 것들이 많은, 이야기였다.

좋았다. 

   


   

 

- 안녕하세요. 아메미야 사토미(雨宮里深)라고 합니다. 여기 야외 파티에는 꽤 늦게 도착했어요. 어쩌다 선생님 괴담 이야기를 듣게 돼서 죽 듣고 있었는데, 생각나는 것들이 좀 있어서 이렇게... 

 

- 우선 젓가락으로 두 눈을 찔러 자살한 중학생 유령이 나온다는 폐가 이야기는 제 고향 이야기예요.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꽤 유명해서, 제가 대학생 때는 도시전설처럼 퍼져 나갔던 게 기억나네요. 그리고 갖고 있으면 속속 불행해진다는 여성용 정장 이야기가 나왔을 때... 오늘 입은 재킷이랑 색도 모양도 비슷하네... 그런 생각에 왠지 섬뜩하더라고요. 

- 마지막으로 산책로에 있는 간이 정자에서 비를 피했을 때의 괴담, 그건 제 이름이 '아메미야'다 보니까요, 지나친 의미 부여라고 생각하면서도 이상하게 겹치는 게 많다 싶고... 

- 왜 매일 밥이 나오게 된 건지는 잘 모르겠어요. 어쨌든 아이들은 불만이었지요. 물론 메뉴에 따라 다르긴 했어요. 카레라이스 같은 건 역시 인기가 있었으니까요. 그래도 처음에는 다들 투덜거렸죠. 
그런데 네코는 다른 애들이랑 달랐어요.
"여긴 급식으로 매일 밥이 나오넹?"
늘 말이 없던 애가 먼저 기분 좋은 얼굴로 말을 걸어온 거예요. 좀 놀랐죠. 그래도 그때는 밥을 좋아하나 보다, 그렇게 단순하게 생각했어요. 그래 놓고 밥을 자주 남겨서 그럼 왜 좋아한 건가, 좀 이상하다 생각하면서요.

- 그러던 어느 날, 급식 당번이 배식을 마치고 담임 선생님이랑 다 같이 "잘 먹겠습니다" 인사했을 때, 저는 네코를 보고 흠칫 놀랐습니다.
네코가 밥그릇에 담긴 밥 한가운데에 젓가락을 똑바로 꽂은 거예요.
네, 맞아요. 쓰야 때 시신 머리맡에 차려놓는 사잣밥처럼요. 네코는 그러고 나서 양손을 모으고 뭔가를 비는 것 같았어요. 깜짝 놀랄밖에요. 

- 친척 누구라도 돌아가셨나?

그렇게 생각하긴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학교 급식 때 사잣밥을 하다니, 다른 애들도 놀라지 않았을까 싶어 얼른 주위를 둘러봤어요. 누구 하나 신경을 안 쓰더라고요. 그래서 또 한 번 놀랐죠.

- 그때 제 친가 외가 조부모님은 모두 살아계셨거든요. 시골에 사셨는데 제가 놀러 갔을 때 마침 부근에 쓰야나 장례식이 있으면 조부모님은 아무렇지 않게 절 데리고 가셨어요. 그래서 저는 사잣밥이 뭔지 알고 있었죠. 반 아이들은 몰랐는지, 네코가 이상한 짓을 한다고 그냥 웃고 말더라고요. 다들 쓰나 장례식을 본 적이 없어서 그랬을 수도 있어요. 참석해 봤더라도 도시의 장의업체에서 진행하는 약식이라 전통적 의례 같은 건 못 봤을지도 모르죠. 

- 밥그릇의 밥에 젓가락을 똑바로 꽂는다.
반 아이들은 그 행동이 뭘 의미하는지 아마 몰랐을 거예요. 아니, 어떤 의미인지 모르는 건 저도 마찬가지였죠. 좀 더 큰 다음에 외할머니가 사잣밥을 지어 올리는 법을 알려주셨을 때, 그제야 섬뜩했으니까요. 


- 밥그릇 하나 분량의 밥을 짓되, 절대 쌀을 씻어서는 안 된다. 옛날엔 솥이 아니라 냄비를 썼는데 그것도 아궁이에서 짓지 않고 따로 모닥불을 지펴서 지었다. 밥을 짓고 나서는 사용한 도구와 주변을 깨끗이 해야 한다. 아무튼 그냥 짓는 게 아니었어요. 일반적이지 않은 듯한, 그런 절차였죠. 
이건 죽은 사람을 위한 음식이다.
새삼 실감이 나면서 선득했습니다. 초등학교 때는 죽은 사람한테 바치는 것이긴 해도 보통 음식하고 다를 게 없다고 생각했거든 요 그러다 그때 비로소 살아있는 인간은 입에 댈 수 없는 밥이라는 걸 알게 된 거죠. 몸이 벌벌 떨렸습니다.

- 어쨌든 초등학교 때는 사잣밥 만드는 법을 몰랐고, 사잣밥이 죽은 사람을 위한 음식이라는 인식도 없었어요. 시골 장례식에서 죽은 사람한테 바친 젓가락 꽂은 밥을 보고 적잖은 충격을 받았을 뿐이죠. 그래도 밥에 젓가락을 똑바로 꽂는 그 의식에서 무의식적으로 뭔가 불길함을 감지했던 건 확실해요.
장례식장이니 당연하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시각적인 인상이 강렬했달까요? 집에서 밥 먹을 때는 물론이고 외식할 때도 그렇고 그런 광경을 보는 경우는 절대 없었으니까요.
아, 맞다. 결혼 전에 일하던 회사 근처에 싸고 맛있는 밥집이 있어서 동료들이랑 자주 갔거든요. 그 가게 손님 중에 단골이라 할 만한 백인 남자가 있었는데, 식사하면서 늘 왼손에 신문을 들고 읽었어요. 
그 사람이 신문을 넘기려고 오른손에 든 젓가락을 밥에 찔러 넣은 거예요. 말 그대로 뜨악했죠. 동료들이랑 잠시 멍하니 서로를 보기만 했어요. 

- 다른 나무도 아니고 대나무로 만들었으니 충격이 더 컸죠.
아, 민속풍 소설을 쓰신다더니 역시 알고 계시네요.
네. 외가 쪽 시골에서도 대나무 젓가락은 장례식 때만 사용했어요. 그래서 평소 사용하는 건 절대 금물이었죠. 깜빡하고 썼다간 눈이 망가진다는 얘기도 있었고요. 
네? 정월에 대나무 젓가락을 사용하는 지방도 있나요? 저는 조부모님 동네 전통밖에 몰랐는데, 놀랍네요. 일본은 좁은 듯 넓다더니 정말 그 말이 맞네요. 

- 그 애가 몇 번이나 말을 멈춰가며 이야기해 준 의식의 순서는 잘 정리하면 이렇게 됩니다.
1. 야생 대나무로 직접 만든 젓가락을 하루에 한 번 식사할 때 밥그릇에 담은 밥에 똑바로 꽂는다.
2 그러고 나서 마음속으로 '젓가락님'에게 자기 소원을 말씀드린다.

3. 소원이 이루어질지 안 이루어질지는 젓가락님이 기별을 주신다. 기별이 없는 경우에는 그 소원은 포기해야 한다.
4. 이것을 팔십사일 동안 하루도 거르지 말고 계속한다.
5. 단, 그 사이에 젓가락님에게 들키면 무효가 된다.
6. 생선 반찬이 있으면 소원이 더 잘 이루어진다.
7. 만원하는 팔십사일 째에는 꼭 대나무 젓가락으로 식사한다.

8. 위의 내용을 반드시 지킨다.


- 이 내용을 철저히 지키면 어떤 소원이든 들어준다는 거였어요. 젓가락님이 인정한 소원이어야 하고, 젓가락님에게 들키지 않아야 한다는 조건이 붙긴 했지만요.
네. 젓가락님이란 대나무 젓가락을 말하는 건가 싶었지만 제가 그런 거냐고 물어봐도 네코는 고개를 저을 뿐이었어요.  

- 조금이라도 비위가 틀리면 그걸로 끝. 그럼 저는 집 안에서 죽을힘을 다해 도망을 다녀야 했어요.
그런 상황이었지만, 부모님은 형제끼리 싸우는 정도로만 생각하셨는지 한 번도 오빠한테 그만하라 하시질 않았어요. 제가 '폭력에 시달리고 있다' 하고 말을 했더라면 좀 달랐을지 모르겠지만...
왜 도와달라고 하질 않았던 건지. 이제 와 생각하면 이해할 수 없는데, 역시 어려서 그랬을까요? 어른이 되면 다 잊어버리지만, 어린 시절에는 다들 뭐든 참는 게 착한 건 줄 아는 것 같아요. 의식하든 하지 않든 간에요. 
언니요? 오빠가 그러는 걸 물론 알고는 있었어요. 그런데 오빠한테 따지거나 저를 보호하지 않았어요. 둘 사이에 끼어들지도 않았고 아무것도 안 했어요 언니나 동생이랑 사이좋은 애들이 부러웠어요. 든든하고 착한 오빠가 있는 애는 말할 것도 없고... 

저희 집은 남매도 자매도 서로 남 같았어요. 아니, 남이면 상대방 기분을 조금이라도 신경 쓸 텐데 어설프게 가족인 바람에 그러질 않았어요. 차라리 서로 모르는 척 지내면 좋을 텐데, 저는 오빠가 일방적으로 휘두르는 이해할 수 없는 폭력에 계속 고통받았던 거죠.

- 더 얘기 안 해도 아시겠지만... 저는 젓가락님께 오빠의 '처리'를 부탁했습니다.
네. '처리'였어요. '죽음'을 비는 건 아무래도 좀 껄끄러웠거든요. 날마다 '오빠란 놈 죽어버리면 좋겠네' 싶은 생각은 간절했지만 막상 닥치니 무서워져서... 그래서 '처리'란 표현을 골랐던 거죠. 오빠를 어떻게 처리할지는 젓가락님이 결정하시게 하자, 그렇게 꾀를 부렸던 거예요. 

- 부모님은 맞벌이에다 오빠는 늘 혼자 밥을 먹어서 저녁은 언니랑 둘이 먹었어요. 주말에도 마찬가지였고요. 젓가락님 의식을 비밀리에 거행하기에 저희 집만큼 적당한 집은 아마 없었을 거예요. 가족 전체가 식탁에 모여 앉는 날은 아주 어렸을 때를 제외하곤 몇 년 동안이나 없었으니까요. 

- 집 근처 작은 산의 대숲에서 꺾여 넘어진 대나무를 발견했는데 그걸 젓가락 두께와 길이로 가공하려면 톱이나 손도끼가 필요했어요 그런데 저희 집에는 없는 데다 빌릴 만한 곳도 없었죠. 문방구에 가서 물어봤더니 연이나 고무동력기 만들 때 쓰는 대나무밖에 없었고요. 이제 어쩌나 싶어 잠시 멍하니 서 있는데 문방구 주인이 왜 그러냐고 묻는 거예요. '이런 대나무가 필요하다' 설명을 하니, 홈센터에 가면 있을 거라고 하더라고요. 

- 청소부장이라는 아이는 네코랑 이미지가 비슷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아이들의 자기소개를 듣다 보니 이 애들은 현실에는 없다는 느낌이 싹트기 시작했습니다. 꿈에 나온 애들이니 당연한 건지도 모르겠지만, 가령 어떤 애가 실제 세상에 존재한다고 해도, 그 애도 역시 꿈을 꾸고 있다고 해야 할지... 어쨌든 그런 느낌이었어요.

- "근데 급식 당번, 어제 배식 때 일을 안 하던데."

도서부장이 재빨리 중대한 사실을 지적해 부회장에게 점수를 따자 선수를 빼앗긴 체육부장이 분해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래서 회장이 재 대신 일했잖아. 역시 회장."
보건부장이 회장을 추켜세우는 것을 듣고 있는데, 문득 '어제의 기억'이 불쑥 되살아나는 듯한 기분 나쁜 느낌이 들더라고요.
이 꿈을 꾼 건 그때가 처음이었고, 그래서 꿈속의 저한테는 그 방에서 눈을 떴을 때부터의 기억 말고는 없었거든요. 그런데 갑자기 꿈속 어제를 떠올리게 된 거니까요. 뭔가 이상했죠. 

- 회장과 체육부장이 시체를 옮겼고, 저는 그 뒤를 따라 도코노마로 가서 문제의 묘한 물건을 찬찬히 살펴봤죠. 외할머니가 해준 이야기에 나오는 '고토 젓가락'이랑 똑같네, 그제야 그 생각이 나더라고요. '고토의 날'에 대해서는 2월 8일과 12월 8일에 맞는, 절분(節分) 비슷한 날이라는 것 말고는 지금도 아는 게 거의 없지만... 아... 대충 비슷한가요? 그럼 괜찮겠네요. 옛날에는 고토의 날이면 좌우 두 줄로 늘어뜨린 줄에 가족들이 쓰던 젓가락을 묶어 사다리 모양으로 만든 것을 처마에 매달았다고 할머니가 가르쳐주셨어요. 액막이 역할이었던 거죠.

- 그런 고토 젓가락이랑 똑같아 보이는 물건이 도코노마 벽에 걸려 있었어요.
젓가락은 전부 여덟 개. 네 명분이었어요. 우리 인원과는 맞지 않았죠. 왜일까 생각하던 중에 꿈에서 깼습니다. 
저는 이 꿈이 젓가락님의 기별이라고 생각했어요. 마지막에 고토 젓가락이 나온 것 말고는 별달리 관련이 없는 듯한 내용이었지만 ... 

- 고토의 날 : 지역에 따라 날짜와 내용은 다르나 농사짓는 시기(2월-12월)와 정월 전후의 시기(12월-2월)를 구분하며 신에게 음식을 공양하고 의식을 치르는 풍습이 있으며, 각 시기의 시작과 끝을 '고토'라고 부름.

- 보건부장이 당당한 얼굴로 의견을 냈습니다.
"다들 푹 자느라 몰랐거나, 고통이 그리 심하지 않았다면?"

도서부장이 반박하자 보건부장은 당황하지 않고 말을 이어갔습니다.
"말이 나와서 말인데, 고통스러운 표정이 없는 것도 좀 이상해."
"독약이 아니면 두 사람은 뭐로 살해당한 거지?"
체육부장이 질문을 던졌고, 도서부장이 덧붙였습니다.

"그리고 범인은 대체 누구일까..."
모두가 서로를 쳐다보다 얼른 시선을 피하는 와중에 회장이 한마디 내뱉었습니다.
"동기가 뭘까?"
그 말에 모두 몸이 굳어지는 듯해서 저는 불쑥 위화감이 들었습니다. 모두가 동기에 대해 알고 있으면서 모른 척한다... 순간 그렇게 보였거든요.
"살해 방법이나 동기보다 범인을 찾는 게 먼저 아냐?"
부회장의 의견에 반대하는 사람이 없었던 건 동기에 대해서는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서가 아닐까, 제 느낌은 그랬습니다.

- 젓가락님을 그만둬야만 했죠. 지금까지 힘들게 계속해왔는데 후회 없이 그만둘 수 있을까? 스스로에게 물어봤지만 좀처럼 답을 할 수 없었어요.
젓가락님은 계속하고 싶지만 꿈은 꾸고 싶지 않다.
모순되는 건 알지만 그게 솔직한 심정이었습니다. 그러면 결국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죠. 젓가락님은 계속하면서 어떻게든 꿈을 꾸지 않도록 비는 수밖에요.

- 여름방학이 시작된 지 벌써 한참이었어요. 그런데 여름방학이 시작되기 얼마 전에 담임 선생님이 "네코가 요즘 아무래도 쉬는 날이 많은데, 뭔가 알고 있는 거 없니?" 하고 물으셨던 게 그제야 불쑥 떠오르더라고요. 
그 무렵의 제 생활은 완전히 꿈 중심이었거든요. 기억에 남아 있는 거라곤 죄다 누가 죽고 난 뒤의 장면이었죠. 꿈속에서 다른 아이들하고 이야기를 해보니 저랑 애들이 여름 캠프 같은 단체생활을 하는 중인 것 같았는데, 왠지 저한테 죽음 이외의 기억은 거의 없었어요. 그랬는데도 현실 세계가 꿈에 침식당한 듯한 느낌이었죠. 그래서 네코에 대해서도 완전히 잊고 있던 거예요. 

- ... 부터 적는 내용은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많아서 어렵겠습니다"라고 거절했음에도 결국 그녀에게 부탁을 받아 생각해 본 내 나름의 해석이다. 이런 정황으로 모든 것을 설명하지는 못하는 점, 미리 양해를 구한다.

- 먼저 젓가락님의 기간이 팔십사 일인 것과 꿈속에서 아홉 명 중 여덟 명이 죽는 것은 젓가락과 관련이 있는 게 아닐까 싶다. 즉 전자는 '八四(하시)', 후자는 '八死(하시)"인 것이다. 의식을 위해 지켜야 할 규칙이 총 여덟 개인데, 여덟 번째 내용에 의미가 없는 것을 보더라도 '팔(八)'이라는 글자는 젓가락 자체를 나타내는 듯하다. 그리고 꿈속 세계의 정체는 단도직입으로 말해 '고도쿠(蠱毒)'로 보인다.

- '고도쿠'란 항아리 하나에 파충류나 벌레를 여러 종류 집어넣고, 마지막 한 마리가 살아남을 때까지 서로 잡아먹게 한 뒤 최종적으로 살아남은 것을 섬기면 신령한 능력을 얻는다고 믿는 주술이다. 젓가락님의 경우는 살아남은 사람의 소원이 이루어지는 개념이 아니었을지. 단, 그렇게 되면 아메미야 외의 여덟 사람도 현실에 존재하는 것이 된다. 이런 맥락에서 청소부장이 실제로는 네코였던 건가 생각하기도 했다. 그런데 그렇게 보기에는 두 사람이 젓가락님을 했던 기간이 일치하지 않는다. 다른 여덟 사람은 어디까지나 꿈속 존재로 보고 넘겨야 할까. 
하지만 그 여덟 명 가운데 연쇄살인 사건의 범인'이 있다면, 그건 어떻게 봐야 할까. 역시 모두가 실재한다고 보고 같은 방식으로 젓가락님 의식을 치르고 있었다고 가정하는 게 자연스러울지... 어느 쪽을 선택해도 모순이 발생해 그 이상의 해석은 불가능했다. 

 

- <젓가락님>, 미쓰다 신조

 


 


- 상상한 모습과 다르다.

- '위(魚) 선생'을 본 순간 머릿속에 제일 먼저 스친 생각이었다. 지나치게 큰 검은색 티셔츠에 구제 청바지를 입은 그는 학생같이 풋풋한 느낌마저 들어 '도사'라는 단어는 잘 연결되지 않았다. 그나마 특이해 보이는 부분이라면 소매 아래로 보이는 눈에 띄는 붉은 반점이었다. 그렇게 뚜렷한 형태를 지닌 모반은 드물다. 팔을 꽉 물고 절대 놔주지 않을 것 같은 물고기 모양으로, 팔뚝 절반을 차지하고 있었다. 
"들어오세요."
그의 말이 끝나는 찰나, 복도에 위태롭게 달려 있던 형광등이 번쩍였다. 문득 친구의 경고가 떠올랐다. 그분을 만나러 가려면 양기가 왕성한 대낮에 가는 게 좋다.

 

- 방은 크지 않았다. 긴 나무 탁자 하나와 구식 나무 팔걸이의자 한 쌍이 공간을 거의 다 차지하고 있었다. 에어컨은 없었지만 실내는 서늘했다. 등은 흐릿했고, 벽 쪽에는 안이 들여다보이지 않는 검은 유리장이 두 개 있었다. 
이곳을 방문하기 전까지는 향 연기가 피어오르고 음산한 제단이 있는 모습을 상상했는데 막상 와서 보니 생각보다 깔끔하고 썰렁한 것이 종교적인 분위기라고는 딱히 느껴지지 않았다.

- 도사는 팔걸이의자 앞으로 느릿느릿 걸어가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불쾌하고 음란한 눈빛은 전혀 아니었고, 차갑고 신중한 것이 마치 내가 그에게 위협이라도 되는 듯했다.
"앉으세요, 차 드릴까요?"
"괜찮습니다."
그리 대답했는데도 그는 느긋하게 차를 우렸다. 다시 한번 정중히 거절하려는데 그가 찻주전자를 살살 흔들더니 자기 찻잔에 차를 따랐다.
"미안합니다. 거의 두 달 동안 잠을 제대로 못 잤더니 뭐라도 좀 마셔야지 그러지 않으면 버틸 수가 없어서요. 평소에도 잠을 잘 못 자는데 요즘 어째 '피크'인지 눈만 붙이면 온갖 잡귀들이 다 달려드네요." 
그는 다크서클이 진하게 내려앉은 얼굴로 크게 하품을 하며 내게 물었다.

- "성이...?"
실내로 들어설 때부터 그는 아쉬운 건 손님이지 본인은 하나 아쉬울 게 없다는 분위기를 강하게 풍겼다.
"청(桯)입니다."
"청 씨."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하이린(海鳞子)라고 부르면 됩니다. 바다의 하이(海), 물고기 비늘의 린쯔(鱗子)요. 내 도명(道名)입니다."
그는 무심하게 주위를 쓱 훑어보았다.
"여기서는 본명을 밝히지 않는 게 좋습니다. '그들'이 들으면 상상도 못 할 귀찮은 일이 생길 수 있거든요."
나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은 규칙이 많은 곳임을 익히 들어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 '위 선생'의 존재를 처음 안 것은 지난해 겨울이었다.
처음에는 '위(于) 선생'인 줄 알았는데 물고기의 '위'였다. 도명에 물고기 비늘 린(鱗) 자가 들어가서인지 손에 있는 모반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 이런 일을 하는 사람은 보통 고객들의 입소문으로 유명해진다. 나도 친구의 불운 덕분에 운 좋게 그의 존재를 알게 됐다. 친구 집에 무슨 재앙이 덮쳤는지, 가족이 잇달아 병에 걸리고 세상을 떠나'대사'라는 사람들을 열 명도 더 찾아갔지만, 상황이 나아지지 않았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이 '위 선생'을 만나고 사흘도 채 안 돼 재앙이 멈췄다.
친구의 말을 듣고 그 '위 선생'이란 사람이 내가 찾는 사람이라는 걸 바로 알아차렸다.

- "그래요,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제가 연말에 결혼을 하는데요..."
그의 얼굴에 갑자기 불안이 서렸다.
"사주팔자를 봐달라거나 무슨무슨 날을 잡아달라고 온 건 아니겠지요?"
"네?"
"그러지는 마세요. 그런 건 잘 못합니다."

"..."
"솔직히 말하겠습니다. 제가 제공하는 서비스 가운데 딱 하나만 쓸만합니다."
그제야 나는 탁자 매트 아래에서 컬러 인쇄된 서비스 가격표를 발견했다. 언뜻 보면 분식점 메뉴판 같았다. 그는 죽 나열된 목록의 제일 아래쪽을 가리키며 손가락으로 톡톡 쳤다.
"바로 이거."
퇴마.
"귀신이 들러붙었다면 내가 깨끗하게 처리해 줄 수 있지만, 그걸 제외하면 다 삼류예요."
이렇게나 당당하게 자신을 삼류라고 털어놓는 사람은 난생처음 봤다.
그런데 반대로 말하면 '퇴마' 하나만은 자신 있다는 말 아닌가?

- "운수를 점치고 길일을 알고 싶다면 다른 고수를 추천해 드리겠습니다."
그는 친절한 표정으로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냈다. 오색찬란한 화면 속, 앵무새 떼가 열대우림을 날고 있었다. 아는 앵무새였다. 반려동물 모바일 게임인 '우주삼림'의 캐릭터로, 얼마 전 두 살짜리 조카가 하면서 노는 걸 본 적 있었다.
"괜찮습니다."
다급하게 그를 제지했다.
"저는... 인력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생겨서 찾아왔습니다. 결혼도 하니 새로운 가정에까지 가져가고 싶지 않아서요. 최대한 빨리 해결했으면 합니다."
"아."
그는 상당히 놀라는 표정이었다.
"당연합니다. 이해할 수 있어요. 그런 손님 많이 봤거든요. 그런데 청 씨는 조금 특수한 상황 같은데... 혹시 생각이 너무 많은 게 아닐까요?"

- 저는 '국왕(國王)'이라는 남자애네 무리랑 '동전 뒤집기' 놀이를 했어요.
'동전 뒤집기'는 도박이랑 조금 비슷해요. 먼저 그릇 하나와 동전 세 개를 준비하고 동전 하나에 붉은색을 칠해요. 우리는 색이 잘 벗겨지는 10콰이(塊)짜리 동전을 썼죠. 
먼저 사람 얼굴이 있는 면에 풀을 바르고 마르면 붉은색 수채물감을 얇게 바른 다음 말렸다가 다시 풀을 발라요. 이렇게 하면 물감이 떨어지지 않고 나중에 깨끗하게 벗겨지거든요. 번거롭긴 해도 물감을 깨끗이 벗겨내지 않으면 '동전 신'이 계속 따라다닌다는 말이 있어서 주의해야 했어요.  

- 첫 번째 사람이 정해지자 아이들은 시계 방향순으로 동전을 던졌어요. 동전 세 개가 모두 붉은 면이 나온 사람이 동전 신에게 '질문'을 하나 할 수 있었어요. 동전 신은 즉시 대답해주지는 않지만, 그날 집으로 돌아갈 때까지는 반드시 답을 주었죠. 답을 얻으면 동전신에게 공손하게 고맙다고 말하고 최대한 빨리 동전을 써버려야 해요.

- 저녁놀이 아찔할 정도로 붉어서 동전의 어느 면에 붉은색을 칠했는지 구분이 안 될 정도였어요. 평소 주의 끄는 걸 좋아했던 저는 제 차례에 동전 세 개가 모두 붉은색이 나왔으면 했어요.

- 제가 너무 예민했던 걸까요? 미친 듯이 뛰던 심장이 조금 진정되고 나서야 제 목적이 생각났어요.
저는 조심스럽게 젓가락을 훔쳐봤어요. 젓가락이 아주 아름다웠어요 선명한 붉은색에, 소용돌이 물결무늬가 젓가락을 감싸고 있었죠. 젓가락 끝은 은으로 상감이 되어 있고 머리 부분에는 은으로 된 뚜껑 같은 게 씌워져 있었어요. 거기에 구멍을 뚫어 체인을 걸었더라고요. 

 

- 젓가락은 놀라울 정도로 붉었어요. 위쪽에 세밀하게 아로새겨진 무수한 핏빛 소용돌이는 오래 보고 있으면 빨려들 것 같았어요. 아주 고르게 갈아 광택을 내서 윤이 자르르 흘렀지만, 눈을 자극할 정도는 아니어서 플라스틱이나 금속은 절대 아닐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렇다고 대나무나 다른 나무가 그렇게 요염한 붉은색을 낼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어요. 

 

- 결국엔 못 참고 그 애에게 물었죠.
"그 젓가락 굉장히 특이한데 뭘로 만든 거야?"
"그냥 봐서는 잘 모르겠지만 산호로 만든 거야."
"산호... 로도 젓가락을 만들 수 있어?"
"응. 소뼈나 상아로도 만들잖아? 산호도 그거랑 비슷해."
"하지만 그렇게 귀한 것으로 젓가락을 만든다는 말은 거의 못 들어봤는데."
"물론 산호는 젓가락에 적합하지 않지. 크기가 적당한 것을 찾기 어렵거든."
그 애는 젓가락을 가볍게 쓰다듬었어요.
"젓가락을 만들려면 통째로 된 것을 쓰는 게 좋아. 그래서 산호가지가 적어도 이 정도 길이는 되어야 해."

- 그 애 젓가락을 처음 봤을 때 그 애가 비슷한 말을 한 것 같았어요. 하지만 그때는 듣고 바로 잊어버렸죠. 너무 황당한 말을 진지하게 해서 비현실적이었거든요.
그 애는 인내심을 갖고 설명해 주었어요.
"이 젓가락은 우리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천 년 된 골동품이야. 이 안에 신선이 살고 있는데 우리는 '왕선군(王仙君)'이라고 불러."

- 왕선군의 본명은 '왕종천(王宗千)'이라고 했어요.
왕종천은 자기가 당나라 때의 부마라고 했대요.
황제는 왕종천을 부마로 뽑아놓고 어느 공주의 부마로 삼을지 결정하지 못해 연회를 베풀고 두 공주에게 창 뒤에 숨어서 살펴보라고 했대요.
연회가 끝나자 황제는 공주들의 생각을 물었어요. 오만한 성격의 첫째 공주는 왕종천이 야심이나 패기가 전혀 없고 관직도 높지 않아 내심 탐탁지 않았어요. 그래서 황제 앞에서 연회에 사용된 비취옥 젓가락을 두 동강 내며 말했어요. 
"과거 현종 황제께서는 재상 송회에게 금 젓가락을 하사하시며 그의 강직함을 칭찬했는데 부왕께서는 어째서 유약한 옥 젓가락을 하사하십니까?"
그 말에 황제는 기분이 나빠졌어요. 아비의 불편한 심기를 예리하게 포착한 둘째 공주가 재빨리 분위기를 수습했어요.
"순금은 강하고 곧아서 제련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반면 옥은 온화하지만 부서지더라도 구차한 모습은 보이지 않지요."
황제는 크게 기뻐하며 둘째 공주를 왕종천에게 시집보내기로 했어요. 혼수로 옥 젓가락을 주려고 했지만, 마침 옥 젓가락이 부러졌고 옥은 부서져도 구차한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고 했던 공주의 말이 떠올라 불길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붉은 산호로 젓가락 한 쌍을 만들어 공주의 혼수품으로 하사했죠.
공주는 그 산호 젓가락을 왕종천에게 주면서 말했어요.
"우리는 이것처럼 영원히 헤어지지 말아요."
과연, 두 사람은 혼인한 뒤 금실이 좋았고 서로를 공경했어요. 부마는 죽은 뒤 왕선군으로 변해 산호 젓가락을 지키며 부부의 인연을 보우하는 신령이 되었대요. 

- 저는 그 애에게 물었어요.
"근데 한 짝은 잃어버렸다고 했잖아? 신령이 지키는 중요한 젓가락을 어떻게 잃어버릴 수가 있어?"
그 애는 망설이다가 말했어요.
"그건 왕선군이 가져간 거야... 왕선군은 좋은 인연은 보호해 주지만, 악연일 경우에는 경고를 해줘. 당시 우리 부모님은 이혼 이야기로 시끄러웠거든. 어머니는 절대 안 한다고 하셨지. 그러던 어느 날 젓가락이 사라졌어. 외할머니는 선군이 어머니에게 경고한 ... " 

- 어머니가 살짝 웃으며 말씀하셨어.
"향을 올렸구나? 네가 올린 게 어떤 거니?"
어머니는 매일 밤 잠들기 전에 향을 피웠어. 향로에는 선향이 빽빽하게 꽂혀 있었지. 어떤 것은 다 탔고 어떤 것은 절반 정도 타다가 꺼져 높이가 제각각이라 언뜻 보면 방금 피운 향이 뭔지 분간이 되지 않았어.
내가 대답하지 않자 어머니가 갑자기 손을 뻗었어.
어머니는 손바닥으로 향들을 한꺼번에 내리눌렀어. 손바닥에 점점이 자국이 남았지만 어머니는 통증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듯이, 마치 맹수와 대치중인 것처럼, 먼저 시선을 돌리는 자가 잡아먹힐 것처럼, 아무것도 없는 제단 앞을 뚫어지게 노려봤어. 
얼마 뒤 향이 대충 다 탔고, 어머니는 묵묵히 향로를 깨끗이 정리한 뒤 새 선향에 불을 붙였어.
나는 무슨 대역무도한 악행을 저지른 것처럼 온몸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어.
어머니는 벌벌 떠는 나를 가만히 보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 그렇게 한참이 지나서야 어머니는 몸을 숙여 작은 목소리로 물었지.

"왕선군이 궁금했구나?"
나는 맞는 대답이 무엇일지 몰라 함부로 입을 열 수가 없었어. 어머니는 옷깃 속으로 손을 넣더니 목에 건 목걸이를 풀었어. 목걸이에는 붉은색 젓가락 한 쌍이 걸려 있었지. 

- 나는 어머니에게 싫다고 할 수 있는 아버지가 몹시 부러웠어. 사찰에 가는 것은 끔찍한 악몽이었거든. 피곤하고 무서웠을 뿐 아니라 사찰만 다녀오면 어머니가 크게 앓았어. 사지 관절이 공처럼 붉게 부풀어 오르고 며칠 밤낮으로 기침을 심하게 했지. 
외할머니는 왕선굳이 벌을 내려서 그런 것이라고 했어. 왕실군은 우리가 다른 신령을 모시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이라고 말이야. 그는 기도하면 반드시 응해주지만 엄격한 구석이 있어. 우리 집은 조상의 위패조차 모실 수 없었어.
하지만 왕선의 벌이 아무리 가혹해도 어머니는 절대 물러나지 않았어. 어디 신령이 영험하다는 소리를 들으면 아무리 멀어도 나를 데리고 갔지. 어머니가 기침할 때마다 나는 어머니를 괴롭히는 원홍이 왕선이 아닌 나 같아서 정말 무섭고 괴로웠어. 

- 한 번은 외할머니께 어머니는 왜 저렇게 왕선군이 나를 데려갈까 두려워하느냐고 물었어.
외할머니는 어머니가 왕선군에게 빚진 것이 있다고 하셨어.
왕선군은 속이 너무 좁다는 생각이 들었어. 신령은 뭐든 쉽게 가질 수 있잖아? 그런데 왜 이렇게 어머니를 괴롭히는 거지?
"저를 꼭 데려가야겠대요? 다른 것으로 돌려주면 안 돼요?"

외할머니가 두렵다는 듯이 말씀하셨어.
"왕선군께는 받은 그대로 돌려드려야 해. 재물을 받았으면 금패와 금실(金身)을 만들어드려야 하고, 명예를 받았으면 탑과 사찰을 만들어드려야 하며, 사랑이 이루어졌으면 그를 더 공경하고 경애해야 해."
"왕선군이 엄마에게 뭘 주었길래 저로 보답하라는 거예요?"

외할머니는 얼굴이 창백해지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어.

- 그해 겨울, 어머니의 폐에서 종양이 발견됐어.
그 일로 인해 집안에 대형 폭탄이 떨어졌어. 사실을 알게 된 아버지가 즉시 이혼을 요구했거든.
아버지가 이기적이고 잔인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그때 두 사람은 이미 감정의 골이 너무 깊이 파인 상태였어. 어머니의 병은 도화선에 불과했지.
아버지는 늘 나에게 어머니와의 결혼은 이상한 꿈 같다고 했고 이제 그 꿈에서 깨어나는 것뿐이라고 말했어.
사실 아버지는 재혼하신 거였어. 아버지가 어머니 앞에서 전처 이야기를 하는 경우는 아주 드물었어.  


- 이런 채로도 꽤 행복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가슴이 찌르는 듯 아팠어. 내가 무슨 자격으로 이런 생각을 할까? 상황을 이렇게 만든 건 나 아닌가?
지금도 나는 생각해. 그때 왕선군에게 그런 소원을 빌지 않았으면 좋았을 거라고.

- 나는 긴 이야기를 잠시 멈추고 생각에 빠진 하이린쯔를 보았다.

"선생님, 선생님은 젓가락에 정말 신령이 깃들 수 있다고 생각하세요?"
"그건 신이 아니라 귀신입니다."
"네?"
"영이 깃들었을 가능성은 있어요. 하지만 일단 단어부터 정정하는 게 좋겠습니다. 청 씨가 말한 왕선군은 귀신입니다. 그를 '신'이라고 부르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 '신'이라는 단어는 사람들에게 일종의 환각 작용을 일으켜 그것이 한 모든 일이 정의나 자비에서 나왔다고 착각하게 하거든요. 사실은 그게 아닌데."

- "하지만 만약 왕선군이 정말 신이라면요?"
"아닙니다. '신'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내 표정이 이상했는지 하이린쯔는 그제야 알겠다는 듯 설명했다.

"미안합니다. 혹시 종교 있습니까?"

- "어쨌든, 기분 나쁘지 않았길 바랍니다. 방금 한 말은 사견에 불과하니까요 저는 구십구 퍼센트 무신론자거든요."
구십구 퍼센트라고? 이게 무슨 뜻이지?
"괜찮습니다... 하지만 그 말씀은 선생님이 하는 일과 모순되지 않나요?"
나는 탁자 위에 놓인 '퇴마' 가격표를 보며 말했다.

"아니요, 모순되지 않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말해볼까요? '신'이라는 단어는 문화마다 의미가 크게 다릅니다. 혼용해서 사용한 결과 오늘날의 '신'은 의미가 모호해졌죠. 나와 고객의 인식이 같지 않으면 나중에 고객들은 무익한 환상을 갖게 돼 오히려 번거로워집니다. 그래서 나는 우선 고객과 공통된 인식을 정립합니다."
하이린쯔는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나 같은 사람들은 일반인이 말하는 신을 조금 큰 귀신 정도로 생각합니다."

- "신이... 귀신이라고요?"
"망자는 고독한 법이지요."
하이린쯔는 동정 어린 쓴웃음을 짓고 말을 이었다.
"그들을 영원히 기억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들은 산 사람들에게서 조금씩 잊혀가지요. 어떤 귀신은 인간에게 잊히지 않으려고 ... "


- "귀신은 애초에 인간이었으니 당연히 거짓말을 할 줄 알아요. 말하는 게 죄다 인간 세상에 있을 때 배운 거더군요. 그를 떠보려고 옥황상제의 이름이 뭐냐, 어떻게 생겼냐, 곁에 어떤 문신과 무신이 있었냐 물었더니 횡설수설하더라고요. 직업 도사에게 그런 허풍을 떨다니 죽음을 자초한 것이지요." 
순간 나는 말문이 막혔다.
"만약 신이 있다면 어떤 모습일 거 같으세요?"
"말했듯이 난 신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구십구 퍼센트 무신론자라고 하셨잖아요. 그러면 일 퍼센트는 신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거잖아요. 일 퍼센트로 생각하는 신은 어떤 모습이에요?"
이렇게 훅 들어올 줄은 예상하지 못했는지 하이린쯔는 미소를 거두고 한참 생각한 다음 입을 열었다.
"신은 인간을 사랑하겠죠."

하이린쯔가 말했다.

"인간을 구해주고, 인간이 착한 일을 하면 상을 주고 악한 일을 하면 벌을 주는 신. 대충 이런 게 이 세상 사람들이 상상하는 신의 모습입니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아요. 사랑받고 싶고, 구제받고 싶고, 착한 일을 하면 상을, 악한 일을 하면 벌을 떠올리는 건 인간입니다. 나는 '신'이란 우리의 바람을 반영한 모습이라고 생각해요." 

- 저는 평범한 중산층 가정에서 세 자녀 중 장녀로 자랐어요. 서로 미친 듯이 싸우긴 했지만 냉전 기간이 일주일로 제한되어 있었어요. 주말이면 부모님은 가족회의를 열어 우리가 속 시원하게 말하도록 하셨고, "됐어! 이번 주 싸움은 이걸로 일단락되었으니 다시 시작!" 하고 끝을 맺고 온 가족이 함께 놀러 갔죠. 
저는 그 애가 말하는 '귀찮음'이라는 게 뭔지 전혀 이해할 수 없었어요. 아마 영원히 이해하지 못할 테죠.

- 저는 그 애와 달랐어요. 이 점을 인정하는 게 정말 내키지 않았지만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그 애의 생존 방식을 바꾸는 수밖에 없었어요. 제가 이해할 수 없는 세계에서 그 애를 빼내는 것. 그때 저는 그런 생각이 얼마나 잔인한 것인지 몰랐어요.

- "너 대신 내가 가서 물어볼까?"

저는 신이 나서 말했어요.

"정말 네 아빠가 훔쳐 간 거면 젓가락을 본 순간 깜짝 놀랄 거야! 어쩌면 조금 무서워할지도 모르지. 어쨌든 이건 원래 왕선군의 젓가락이잖아? 왕선군이 보내서 왔다고 하면서 네 아빠 표정을 살피는 거야."
"안 돼! 이건 농담할 일이 아니야! 이 젓가락은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위험하다고."
그 애가 그렇게 화내는 건 처음이었어요. 너무 놀랐고, 조금 억울하기도 했죠.
"하지만... 왕선군은 벌써 떠났다면서? 그런데 뭐가 위험하다는 거야?"

- 하지만 신의 흔적은 고독한 체험이라 공유할 수도, 증명할 수도, 재현할 수도 없어. 그것의 존재 여부를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은 신의 흔적을 직접 대면한 사람뿐이야. 
나에게 그것은 신의 흔적이었어. 어릴 적 옻칠 상자를 연 순간. 아무것도 보지도 듣지도 못했지만 그의 존재를 강렬하게 느낄 수 있었던 것처럼.
나는 왕선군의 지시대로 그가 원하는 산호를 구했고, 마침내 젓가락은 다시 한 쌍이 되었어.
 
- 우리가 배워 아는 신은 이런 모습이 아니었어요.
신은 고요했고, 마귀만이 유혹의 소리를 낼 뿐이었어요. 그 애는 비틀거리며 일어나 바람이 부는 쪽으로 걸어갔어요. 바람에 떨리는 유리창이 모두 그 애를 향해 소리를 지르는 것 같았어요.
저는 무서웠어요. 그건 대체 뭐였을까요? 신? 악귀나 여귀(厲鬼)? 아니면 혹시 선군? 하지만 그 애는 그런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지 울면서 말했어요.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 "훔칠 방법은 스스로 생각한 겁니까?"

아득한 회상을 끝맺자 하이린쪼가 매섭게 물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면, 결국 '정확한 답'을 찾은 겁니까?"

"그건 비밀로 해도 될까요?"

"왜요?"
"선생님이 알 필요는 없는 것 같아서요."
내 대답에 당황했는지 하이린의 눈에 노기가 조금 서렸다.

"그래요? 그러면 도대체 내가 뭘 더 알아야 합니까?"
싫증을 내는 건지 어처구니없어 하는 건지 구분하지 못하고 있는데 그가 초조한 듯이 말했다.
"어차피 그는 당신의 거짓말을 믿었는데 여기에는 왜 온 겁니까?"

- 남은 젓가락 한 짝이 바다로 날아갔어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작은 물결조차 일지 않았어요. 달빛 아래 그 애는 해탈한 것 같았어요. 그 애 마음속에 있던 뭔가가 그 순간 산호와 함께 바다로 가라앉은 것 같았어요.  


- 그런데 그 순간 마음 깊은 곳에서 탐욕스러운 생각이 들었어요. 그 애가 가족에게 어떻게 설명하든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야? 그 애가 젓가락을 버렸으니 내가 이긴 거야.
저는 삐져나오려는 말을 삼키고 조용히 그 애의 손을 잡았어요 그 애가 저한테 물었어요.
"나랑 같이 저녁 먹을래?"
그러면서 처음으로 홀가분한 미소를 지어 보였어요. 저는 아무거나 괜찮다고 금기가 많은 네가 결정하라고 했고 그 애는 라면이 먹고 싶다고 했어요.

- 여름이었지만 저녁 해변은 추웠어요. 그 애는 라면 먹는 사람이 그렇게 부러웠다고 말했어요. 보는 것만으로도 몸이 따뜻해지는 것 같았다고요. 그 애는 몸에 지닌 젓가락으로만 식사해야 했어서 뜨겁고 기름진 국물 음식은 먹을 수가 없었대요.
사소한 일이었지만 저는 아주 행복했어요. 여기서 시작해서 내가 있는 세계로 그 애를 오게 한다. 자신만만하게 그런 생각을 한...

- 십오 년이 지났지만 그해 여름을 잊을 수가 없었다.
그 애를 다시 만난 것으로 충분했다. 하지만 막상 만나자 내가 또 그 애의 삶을 방해하는 게 아닐까 두려웠다.
나는 곧 결혼하는데, 너는?
어떻게 지냈어? 행복하니?
나보고 싶었어? 그날 대체 내가 무슨 짓을 했든 나를 용서할 수 있겠니?

- 하이린쯔의 손을 잡고 있던 손에서 조금씩 힘이 빠졌다. 덜덜 떨리는 손을 그의 팔에서 뗐다. 내 얼굴은 어느새 눈물범벅이 되어 있었다.
"제가 최선을 다한 건, 그저 그 애의 삶에서 왕선군을 없애버리고 싶어서였어요. 그게 그 애를 위한 최선이라고 생각했으니까요. 하지만 제가 한 모든 행동이 오히려 그 애를 바다에 빠뜨렸고 심지어 중요한 순간에 저는 그 애의 손을 놓았어요. 십오 년 동안 저는 하루도 그 일을 잊은 적이 없어요. 저는 정말... 너무 괴로웠어요. 어떤 결말이라도 다 받아들일 수 있으니 이제는 정말 끝내고 싶어요 이해하실 수 있겠어요?"
하이린쯔는 눈을 감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게 아닙니다. 그건 확실히... 왕선군과 무관하며 당신이 손을 놓은 것도 아닙니다."
"다 듣고서도 그런 말이 나오세요?"

-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냥 그렇게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 나는 그제야 내가 그에게서 무엇을 빼앗았는지 깨달았다. 한참이 지난 뒤 마침내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 바닥 사람들이 왜 나를 '물고기'라고 부르는지 압니까?"

내가 대답하기 전에 그가 말했다.
"물고기는 영원히 눈을 감지 않기 때문입니다."

- "내 어머니는 내가 열두 살 때 돌아가셨어요. 어머니는 병원에서 돌아가셨고 죽기 전에 다시는 집으로 돌아오지 못했지요.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야 나는 그 세계와 연결되기 시작했습니다. 유쾌한 일은 아니었어요. 늘 죽은 자의 목소리가 들렸으니까요. 그들은 나를 다른 세계로 데리고 가려고 했어요. 정신이 또렷할 때는 저항할 수 있었지만 잠이 들면 그들이 거침없이 밀고 들어왔고, 심지어 내 몸을 지배하기도 했습니다. 나는 반평생 거의 하루도 편안하게 눈을 붙여본 적이 없어요."
"왜 그렇게 된 거예요..."
"나도 모릅니다."
그가 고개를 저었다.
"생전에 어머니는 늘 나와 떨어지기 싫다고 말했어요. 어쩌면 이런 식으로 소원을 이루었는지도 모르죠! 이런 생활도 하다 보면 습관이 돼요. 하지만 딱 한 번,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편안함을 아주 짧게 느낀 적이 있어요. 어머니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사라졌지요. 잠깐의 적막이었지만 그때 나는 정말로, 일종의 해방감을 느꼈습니다. 어떤 신령이 나에게 손을 내밀어준 것이라고 믿었어요. 나는 내가 충분히 고통받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니 어머니를 그만 버리고 새로운 삶을 시작해도 된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바로 그 순간, 어머니의 목소리가 또 들렸습니다. 어머니는... 분명 내 생각을 꿰뚫어 본 것이겠지요! 어머니가 내 귀에 대고 계속 말했습니다."

- 그러지 마, 나를 버리지 마.

- "아..."

나는 온몸이 떨려왔다.

"그럼 그 말은..."
"그때 나는 깨달았습니다. 그 목소리는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고, 그 누구도 나를 구해주지 못할 것이라고요. 나는 평생 음과 양 두 세계의 경계선에서 눈을 감을 수 없는 물고기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입니다. 나는 정말 피곤했어요... 눈앞이 흐릿해지고 외부의 소리가 잦아들면서 누군가 천천히 내 의지를 대체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나는 그게 누군지 알았어요. 어머니가 나를 데리러 온 거였어요. 그날 해변에서 그 친구가 도대체 무엇을 들었는지, 또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나는 모릅니다. 다만 그가 나와 비슷한 사람이라면 기력이 쇠한 순간 귀신이 그 틈을 타 그를 지배하고 그를 대신해 손을 놓았을 겁니다."


- 하이린쯔가 눈을 들어 나를 쳐다봤다. 그의 맑고 부드러운 눈길에 그 겨울 오후의 교실이 떠올랐다. 그때도 그는 이런 눈길로 나를 보면서 붉은색이 칠해진 동전을 손에 든 채 "괜찮아, 아무 일도 없을 거야"라고 했다.
그는 그대로였다. 나는 그의 말이 사실인지 거짓인지 영원히 알 수 없을 것이다.

- "그러니, 더는 후회하지 말아요."

- "그 말... 다 진짜예요?"
그가 말하려는 순간 갑자기 창밖에서 세찬 바람이 불었다. 어찌나 사납게 부는지 창과 서랍장이 흔들리며 끽끽 소리를 냈다. 누군가의 날카로운 비웃음 같았다.
하이린쯔는 말없이 블라인드를 올리고 열려 있던 창문을 힘껏 닫았다.
"도를 닦은 지 십수 년이 돼서 이제는 그 소리들과 잘 공존하고 있습니다. 필요할 때는 잠깐 졸 수도 있고요. 이제는 그런 것에 내 의지를 빼앗기지 않아요. 그 친구도 분명 방법을 찾아서 잘 지내고 있을 겁니다."
"잘 지낸다면 왜 저한테 연락 한번 하지 않는 걸까요?"
"우리 같은 사람은 다른 사람과 깊이 엮이지 않는 게 좋습니다."

"외롭지 않을까요?"
"사람은 누구나 저마다의 생존 방식이 있죠. 저는 이대로도 좋습니다."
그는 내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 바로 그 순간,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평온함이 나를 감쌌다. 나는 잘 지내. 사실 내가 정말 듣고 싶었던 말은, 그 애가 직접 전하는 이 말 한마디였으리라.
눈물이 시야를 가렸다. 어쩌면 그의 말처럼 그 애는 경계선상의 물고기라 나는 영원히 그 애의 세계에 닿을 수 없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 애가 그곳에 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나는 허리를 깊이 숙이며 말했다.
"고맙습니다. 제가 알고 싶었던 것을 다 알았으니 이제 됐어요. 오늘 상담 비용은 나중에 알려주세요. 이 젓가락은 주인에게 돌려주어야겠지만 그 애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니... 괜찮으시다면 선생님께 드려도 될까요?"

 

- 그는 고개를 숙이며 조금 서글픈 듯 말했다.
"결혼을 앞둔 사람이 지닐 만한 물건은 아니니까요. 저에게 주세요. 제가 망자의 집념을 천도해 주겠습니다."
"그래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에게 산호 젓가락을 건네는데 조금 허탈했다. 십오 년이 지나 마침내 모든 게 제자리로 돌아갔다.

 

- 그리고 그가 말했다.
"잠깐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그가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 손바닥을 펼쳤다.
아이스 블루빛 박하사탕이었다.

 

- "이런 걸... 갖고 다니세요?"
"네. 울보 친구가 한 명 있거든요. 그 애는 이걸 먹으면 이상하게도 눈물이 멈춘대요."
나는 반사적으로 얼굴을 만졌다. 차갑고 축축했다. 하지만 눈물범벅이 된 건 그도 마찬가지였다.
"어때요, 한번 해볼래요?"
"선생님도 같이 먹으면요."
그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짓고는 나를 보며 웃었다.
"좋아요."
그가 투명한 비닐을 뜯자 유리 같은 사탕 두 알이 손바닥에서 뱅그르르 돌았다.
각자의 궤도를 돌다 스쳐 지나가는 별처럼.

- <산호 뼈>, 쉐시쓰

 

 





- 메이크업으로 인기를 끌며 수많은 '좋아요'를 받고 있었다. 하지만 영상으로 메이크업 테크닉을 선보이는 것과 남의 얼굴에 직접 화장을 해주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었다. 신은 리나에게 예쁘장한 얼굴을 주었고 화장품은 그녀의 미모에 날개를 달아주었지만, 자기와는 다른 사각형 얼굴과 주름진 피부, 작은 눈과 외꺼풀 앞에선 난감할 따름이었다. 자격증반에 등록한 리나는 여태껏 자기가 메이크업에 대해 수박 겉핥기식으로만 알았고, 자기 피부 타입에 적합한 화장품에만 익숙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 사람마다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얼굴이 있다. 이 점을 간과한다면 유명 연예인과 똑같이 만들어준다고 해도 고객은 만족하지 않는다. 강사의 말이 리나의 뇌리에 깊이 박혔다. 수업 내용은 실용적이긴 했지만 수업료가 무척 비쌌다. 지금 같은 처지가 아니었다면 절대 등록하지 않았을 것이다.

- '그 사건' 이후 리나는 의지할 곳을 잃었고, 홀로 살아가야 했다. 이 자격증을 취득해야 전문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될 수 있고, 그래야 사람들에게 사진을 찍혀야 하는 내레이터 모델을 겸업하지 않아도 되었으며, 더 나아가 네티즌의 시선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 아마추어 메이크업 아티스트와 전시장 홍보 모델로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휴대전화 진동이 또 울렸다. 리나는 곧 무너져 내릴 것처럼 휴대전화에 이마를 댔다.
제발 제대로 된 일이길. 부탁이다.
휴대전화를 들어 메시지의 닉네임을 얼핏 본 리나는 순간 얼어붙었다가 화가 치밀었다.
'귀신 신부'. 발신자의 닉네임이었다.

- 귀신 신부는 몇 달 전부터 인터넷상에서 유행하고 있는 도시전설의 주인공으로 리나의 남자친구인 아충(阿聰)과 관련이 있었다. 지금도 아충의 죽음이 귀신 신부의 저주 때문이라고 하는 사람이 있었다. 이런 닉네임을 사용하다니, 리나에게 상처를 주려는 게 분명했다. 휴대전화를 던져버리고 싶었지만 무기력하게 눈물이 흘러 황급히 닦아야 했다. 휴대전화는 한참 부릉대다 조용해졌다.

- 중국에서는 이름에 아(阿)를 붙여 애칭을 만드는 문화가 있음.

- 프로필에는 어둠 속을 유영하는 작은 붉은색 물고기 사진이 걸려 있었는데 꼬리 부분이 신부의 면사포처럼 퍼져 있었다. 계정정보에도 성별이 여성이라는 것 말고는 정보가 아무것도 없었다. 리나에게 저주의 말을 농담처럼 던지는 사람은 많았다. 죗값을 받을 거라고 악담을 퍼붓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스튜디오 사람들의 이름이 거론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비에 젖어서인지 아니면 차 안의 에어컨이 너무 강한 탓인지 리나는 온몸에 한기가 들었다.

- 구급차에서 아충은 괴로운 듯 리나의 손을 꽉 잡았었다. 괴로워하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 죽음은 절대 멀지 않은, 그렇게나 가까운 곳에 있었다. 리나는 이 죽음의 그늘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했다. 경찰의 무력함에 대한 분노를 내려놓고 이제는 그냥 자기 삶을 살고 싶었다.
누가 네 눈앞에서 네 남자친구를 죽였을까...
고개를 들자 내리는 비로 차창 밖 풍경이 흐릿하고 낯설게 변해 마치 다른 나라에 잘못 들어온 것 같았다.
내려야 할 정류장을 지나쳐버렸다.

- '신냥탄(新娘)의 귀신 신부'는 홍콩에서 유명한 귀신 이야기 중 하나다.
젊은 신부가 시집가는 길에 연못을 지나다 타고 있던 가마가 연못에 빠져 익사했다고 한다. 그때부터 그곳에 귀신 신부의 영혼이 남아 있다는 전설이 생겼고 '신부의 연못'이라는 뜻의 '신냥탄'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옆에 있는 연못은 '자오징탄(照鏡谭)'. 귀신 신부가 그곳에서 거울을 보면서 머리를 빗는다고 한다. 이후 근처에 신탄이라는 이름의 도로가 생겼고 이 도로에서 교통사고가 자주 발생하자 사람들은 귀신 신부의 장난이라고 했다. 

- 세월이 흐르고 홍콩이 급격하게 도시화되면서 '얼굴 없는 귀신'이나 '여우 신선' 같은 전설은 관련 지역과 건물이 사라짐과 동시에 사람들의 기억에서도 잊혔다. 그러나 신냥탄은 플로버 코브 컨트리 파크(Plover Cove Country Park)에 위치해 개발의 운명을 비껴갔고 전설은 계속됐다. 그저 요즘 사람들에게는 너무 먼 귀신 이야기라 별다른 재미가 없을 뿐이었다. 

 

- 그러나, 올해 3월 말부터 인터넷을 중심으로 귀신 신부의 저주가 다시 유행하기 시작했다. 
대부분 검색 순위를 높이려고 쓸데없는 내용을 모아놓는 콘텐츠괌 사이트들이었지만 퍼지는 기세는 상상을 초월했다. '쌀밥에 저주 대상의 이름을 쓴 젓가락 한 쌍을 꽂아서 신냥탄에 두면 귀신 신부가 그 사람의 영혼을 저승으로 데려가 자신의 결혼 축하주를 먹인다.' 이런 유의 소문이 빠르게 확산됐고, 익명의 제보가 제법 그럴듯하고 생생하게 올라왔다. 젓가락을 꽂은 밥그릇 뒤에 여자가 어른거리는 심령사진을 올린 사람도 있었다.  

- "우리도 그런 걸 만들어보는 거야."
"네 말은, 네 채널에서 하겠다는 거야? 그 방송 시청률은 폭발적이었지만 질책과 비판도 많이 받았어."
쓰제는 아충의 제안이 좋은 생각이라고 동조하지 않았다.
"비판하는 사람이 있어야 좋은 거야. 노이즈가 있어야 사람들이 무슨 일인가 싶어 찾아오지. 그리고 나는 그렇게 저급하게는 안 속여. 핵심은, 내가 그 거짓말을 까발리겠다는 거지. 다른 미신들은 가짜라는 걸 증명하기 어렵지만 내가 만들어낸 건 백 퍼센트 증명할 수 있잖아. 그러면 그걸 믿었던 사람들은 어떤 변명도 할 수 없게 돼. 이런 걸 바로 충격요법이라고 하지!" 
쓰제가 미간을 좁히며 반박하려고 했지만 이즈가 지지하고 나섰다.
"한번 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아. 근데 이야기를 전부 꾸며내기는 어렵지 않을까?"

- 리나는 예전에 유행했던 다양한 괴담과 저주에 관한 자료를 탁자 위에 가득 쌓아놓고 그중 가장 그럴듯한 이야기를 뽑아 귀신 신부에게 새로운 얼굴을 만들어준 것을 떠올렸다. 그랬다. 메이크업처럼, 의심을 사거나 폭로되기 쉬운 약점은 감추고 사람들이 관심을 보이고 돌아볼 만한 요소는 두드러지게 만들었다. 괴담은 복제하기 쉽고, 공포스러워야 하고, 참여할 수 있어야 하고, 그림이 있어야 하고, 영상의 형태로 인터넷에 퍼지기 쉬워야 했다... 

- 소문을 퍼뜨린 지도 사 개월이 더 지났다. 신냥탄 다리 옆에 선 리나는 그제야 '그림이 있어야 한다'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깨달았다.
옅은 바람이 진녹색 수풀을 스치자 그 안에 가려져 있던 다양한 색과 재질의 밥그릇이 드러났다. 밥그릇에는 흰쌀이 가득했다. 일회용 젓가락이 선향처럼 가지런하게 밥그릇에 꽂혀 있었다. 이쪽에 몇 개, 저쪽에 몇 개. 다리 옆, 수풀이 무성한 곳을 헤치면 젓가락이 꽂힌 밥그릇이 보였다. 슬쩍 봐도 이삼십 개는 되어 보이는 게 마치 무덤의 축소판 같았다. 
떠도는 영혼을 위해 제사를 지내거나 신비한 의식을 치르는 것처럼, 이 조용한 곳에서 어떤 힘이 대답해 주기를 묵묵히 기다리는 것 같았다.

- 당시 그들은 타이완의 '각미반'과 일본의 '젓가락 님', 홍콩 현지의 귀신 숭배 집단을 부분 부분 참고해 괴담을 설계했기에 정말 어떠한 효과가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었다.
리나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귀신 신부 괴담이 한창 뜨거웠을 때 이런 풍경을 담은 사진을 많이 봤다. 그때는 전혀 무섭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고 오히려 웃으면서 "젓가락에 이름이 쓰인 사람은 반성 좀 해야겠네" 하고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곳에 와서 두 눈으로 직접 보니 가슴이 답답해지면서 알 수 없는 공포가 몰려왔다. 여기에 이름이 쓰인 사람은 모두 누군가에게 원한을 산 것이다. 이곳의 젓가락들에는 상대가 불행해지길 바라는 저주가 담겨 있다. 
왜 그때는 그냥 재미있다고만 생각했을까?

- [귀신 신부 : 영상에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많은 정보가 담겨 있어. 하지만 사람들은 진실을 알아내는 것보다 음란하고 퇴폐적인 정보, 속이 뻥 뚫리는 통쾌하고 단순한 정의를 더 좋아하는 것 같아. 정보는 단순하고 이해하기 쉬울수록 좋지. 너는 먹잇감 삼기 딱 좋은 대상이야. 예쁜 거 좋아하는 멍청한 여학생. 사랑싸움을 하다 잘난척하는 남자친구를 죽여버린 거지.]

- [귀신 신부: 몇 번만 동영상을 진지하게 보고, 스튜디오 상황을 고려한다면 이상한 점을 발견할 수 있을 텐데.]

 

- <저주의 그물에 걸린 물고기>, 예터우쯔

 




- "내 고향은 악어한테 먹혔어요."

여자가 남자의 귀를 깨물며 말했다. 개미처럼 귓속을 파고들어 간질이던 목소리가 벌꿀처럼 고막에 달라붙어 가장 친밀한 사람만 들을 수 있는 부드러운 소리를 냈다. 소용돌이에 휩싸여 깊은 못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음성이 달팽이관을 맴돌아 하늘과 땅이 뒤집히듯 빙글빙글 도는 것처럼 어지러웠다. 
침대 위에는 밍싱 화루수이(明星花露水) 냄새가 진하게 풍겼다. 남자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향기로, 싸구려 화장품처럼 가벼운 향이었다. 

 

- 여전히 나에게 시선이 집중되는 게 무서웠지만 하던 말을 계속했다.
"젓가락은... 동아시아 지역에서 가장 익숙한 식기로 식별성이 강해 우리 문화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젓가락 사용 가능 여부'를 아시아 문화에 융합된 기준으로 삼는 서양 사람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진짜인지 가짜인지 모르겠지만 서양 사람이 젓가락을 쓴다고 해도 우리는 그를 우리 사람으로 여길 필요는 없지 않을까요? '우호적인 타인' 정도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주술적 속박성이 젓가락의 첫 번째 특징이기 때문입니다. 젓가락은 '우리'와 '그들'을 나눌 수 있어요. 여러분은 일단 이 말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다른 집단을 식별하고 '관계'와 '규칙'을 규정할 수 있는 것, 주술적 속박성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특징입니다." 
말할수록 불안했다. 나 자신이 아주 보잘것없게 느껴졌지만 아는 척하면서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어떻게 말해야 하나. 주절주절 주술에 관한 이야기를 늘어놓자니 졸음을 부르는 저주 같고, 심지어는 마을대학(杜區大學)에서도 처음 듣는다고 할 정도였으니 대중 오락소설 출판 기념회에서 다룰 주제는 아니었다. 게다가 이 자리는 내 작품만 소개하는 것도 아니고 다른 우수한 작가들을 대표해서 말하는 자리였으니...

- 마을대학 : 타이완의 지역사회 교육기관으로 지역사회의 유지 및 발전, 지방 인재 육성을 목적으로 설립된 학교

- 역시 처음부터 말하는 것이 좋겠다. 지난해 나는 타이완, 홍콩, 일본의 작가가 모여 '젓가락과 관련된 괴담'을 주제로 릴레이 소설을 쓰는 다국적 소설 기획에 참여하게 됐다. 초청 작가 중에는 내가 오랫동안 존경해 온 분도 있었다. 릴레이 소설의 네 번째 주자인 나는 출판사의 계획에 따라 몇 차례 강연을 약속했는데 이번이 처음이었다. 제목을 논의하면서 내가 젓가락의 주술적 성격에 대해 말했더니 출판사 편집자가 그 즉시 "그 주제로 강연을 합시다!"라고 했다. 편집자는 "괜찮을까요?" "독자들이 재미있어할까요?"라는 내 말은 아랑곳하지 않고 나를 이곳으로 밀어 넣었다. '관객이 책도 내 강연처럼 재미없다고 생각하면... 그럼 다른 작가들한테 민폐인데...' 하는 생각이 문을 나설 때까지 계속되자 복통이 시작돼 위장약을 삼켜야 했다. 약의 유통기간이 지나지 않았기를 바라면서.

- 함께 작업한 우수한 작가들에게 폐를 끼칠까 걱정스러웠다. 하지만 어차피 벌어진 일, 그냥 출판사가 나에게 붙여준 '요괴 추리소설가'라는 이미지에 걸맞게 최대한 요괴와 민속학 쪽으로 접근했다. 재미없게 느껴져도 최소한 내 포지션에는 부합한 것이니 큰 실망은 하지 않으리라.

- "젓가락에 관련해서 사람들이 불길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각미반'만이 아니에요. 대부분 죽음과 관련이 있죠. 중국 장쑤(江蘇) 성 바오잉(寶應)에서는 식사할 때 밥그릇에 밥을 풍성하게 담아 위패 앞에 놓고 젓가락도 옆에 놓습니다. 이때 젓가락 위치가 중요한데, 죽은 사람이 생전에 쓰던 위치에 놓아야 해요. 우리도 평소 사용하지 않는 손으로 밥을 먹으려고 하면 어렵잖아요. 오른손잡이가 왼손으로 밥을 먹으려면 힘들지 않겠어요? 이렇듯 죽은 사람에게 밥을 올릴 때는 따라야 할 금기와 규칙이 많아요. 놓는 방식뿐 아니라 치운 다음에도 금기가 있죠. 죽은 자에게 올렸던 것은 바로 식탁에 올려서는 안 되고, 우선 주방으로 갖고 가서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이 먹을 것을 나눠야 해요. 방금 말한 각미반에도 금기가 있어요. 타이완의 어떤 지역에서는 각미반을 실내에서 짓지 않아요. 대낮에 야외에서만 지어야 하죠. 일본에도 비슷한 풍습이 있어요. '이치젠메시(一膳飯)'라고 하는데 마찬가지로 다양한 방법과 규칙이 있습니다. 이게 바로 젓가락 주술이 갖는 힘의 원천이에요. '규칙'이요."

- "어쩌면 여러분은 주술과 규칙이 무슨 관련이 있냐고 어리둥절해할 수 있지만, 한번 상상해 보세요. 규칙 없이 제사상에 산 사람의 식탁과 똑같이 밥그릇과 젓가락을 놓으면 각미반이나 이치젠메시를 구별할 수가 없어집니다. 젓가락을 단순히 식기로만 생각하고 아무렇게나 사용해도 된다면 '그렇게 하면 안 되는데'라고 생각하거나, 금기를 의식하게 될까요? 답은 그렇지 않다, 입니다. 규칙이 없으면 금기도 없으니까요."

- "여러분은 이런 경험이 있었는지 모르겠네요. 제가 어렸을 때는 흰밥에 젓가락을 꽂으면 어른들께 혼났어요. 각미반을 떠올리게 하고, 심지어는 죽음을 떠올리게 했으니까요. 각미반에 규칙이 필요한 이유는 산 사람의 세계를 분리하기 위해서이고 금기는 규칙 위에 세워진 것입니다. 사실 젓가락과 관련된 규범은 죽은 자에 대한 예의에만 국한된 게 아니에요. 산 사람의 세계에도 젓가락과 관련된 금기는 많죠. 젓가락을 사용할 때 채소와 국물을 식탁에 흘리면 예의가 없다고 하고, 그렇게 못 하게 하는 것처럼요. 젓가락을 교차해서 놓아도 안 됩니다. 음식을 집고 있는 다른 젓가락과 부딪쳐서도 안되고요 이쑤시개처럼 고기에 꽂아서도 안 되죠. 왜 이렇게 규칙이 많을까요? 간단합니다. 날마다 쓰는 젓가락에 규칙이 없는 건 사람이 지켜야 할 도리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 아닙니까? 규칙이라는 것은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규정하고 특히 권력관계를 반영합니다. 무엇을 할 수 있고 없고는 각 관계에 따라 변하죠. 옆에서 보는 사람이 없으면 우리는 젓가락을 사용하고 싶은 대로 사용할 겁니다. 그런 점에서 젓가락은 일종의 은유입니다. 규칙으로 가득한 삶이 우리가 가장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젓가락에 반영되어 있지요." 

- "이 점을 생각하면 이번 릴레이 소설에서 '젓가락'을 주제로 삼은 것은 매우 절묘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 편집자는 기념회가 끝났음을 알리고 사인회 시간으로 넘어갔다. 몇몇 독자가 책을 들고 줄을 섰다. 사인을 하는 동안 관객들은 하나둘 자리를 떠났다. 사인을 마치고 일어나려는데 육십 세 전후로 보이는 남자가 다가왔다. 격식 있는 차림의 남자는 테가 두꺼운 안경을 쓰고 있었다. 반백의 머리가 매우 눈에 띄었고 날카로운 인상을 주었다. 목소리도 청년처럼 크고 낭랑했다. 
"선생님! 선생님과 따로 이야기를 좀 나눌 수 있을까요?"
다소 의외였다. 내 독자는 대학생이나 사회 초년생이 많았고 그와 같은 나이대는 적었기 때문이다. 그가 건넨 명함을 보니 주간지 <J>의 기자로 이름은 '장원융(張文勇)'이었다. 숨을 들이마시며 편집자를 쳐다봤다. 편집자가 내 시선을 느끼고 내 쪽을 보았다. 

- 출판사 사람들이 뒷정리를 시작하자 공용 공간을 계속 차지하고 있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장 선생님, 다른 데로 가서 이야기 나누실까요?"
"좋습니다. 선생님 편하실 대로 하시지요."
사람이 없는 곳에 가서야 나는 자신을 책망했다. 다짜고짜 따라오라고만 하다니! 상대에게 무슨 일이냐고 먼저 물어봤어야 하지 않은가.

 

- 뭐라고 말을 시작해야 할지 머뭇대는데 장원융이 먼저 입을 뗐다.
"정말 멋진 강연이었습니다. 선생님은 주술이 문화권 안에서만 작동한다고 하셨는데, 그렇다면 선생님은 주술이 어떤 객관적인 법칙을 기반으로 하지 않는다고 보시는 것이지요?" 
"네. 개인적으론 그렇게 생각합니다. 평생 기독교에 대해 들어보지 못한 사람은 기독교가 말하는 천국에 절대 갈 수 없습니다. 천국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곳이 아니니까요. 사실 동양이든 서양이든 천국과 지옥에 관한 묘사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 변해왔습니다. 지금의 지옥이 맞고 3세기의 지옥은 틀렸다고 말할 수는 없지 않겠어요?"
"일리가 있네요. 제가 호기심이 생긴 부분은 릴레이 소설의 주제인 젓가락 괴담입니다. 선생님은 일본의 '젓가락님'에 대해 들어보셨습니까? 일본어로 '오하시사마'라고 합니다."
"젓가락님이요?"
들어본 기억이 있었다. 아마도 M선생의 트위터에서 보았을 것이다. M선생은 이번 릴레이 소설의 첫 번째 주자였다. 그와 작업하기 전에도 그의 트위터를 팔로우하고 있었다.  

- 어떻게 된 일인지 혼란스러워 도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이 의식을 알았다! 젓가락님이라고 부르지는 않았지만 과정은 매우 비슷했다. 아니, 달랐다. 내가 아는 의식은 팔십사일 동안 해야 한다는 조건이 없었고 모반도 나타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 꿈은... 분명 내가 아는 의식과 같았다. 

- "그런데 이게 정말 일본에서 유행하는 의식이라고요?"
"역시 요괴 추리 소설가시라 민속 분야에 대해 잘 아시는군요. 확실합니다. 타이완에서도 '젓가락 신선'이나 '저선(箸仙)'이라고 불리는 비슷한 의식이 전해지죠." 
"잠깐만요. 이건 제가 아는 젓가락 신선과는 달라요.”
"네? 그럼 선생님이 아는 젓가락 신선은 어떤 겁니까?"
"종류는 다양하죠. 타이완을 포함한 한자 문화권에서 젓가락은 때로 신을 부를 때 사용됩니다. 예컨대 집안에 누가 병이 나면 젓가락을 물에 세워 귀신을 소환합니다. 젓가락이 넘어지면 실패하는 것이니 젓가락이 설 때까지 계속 시도하지요. 젓가락이 서면 병에 걸리게 한 귀신이 젓가락에 내려왔다는 것을 뜻하고, 이때 칼로 젓가락을 자르면 병이 낫습니다. 이 밖에 접선(碟仙) 같은 것도 있어요. 젓가락을 특정한 형태로 놓고 두 사람이 잡으면 얼마 뒤 젓가락이 움직이죠. '신(神)' 같은 경우는 젓가락을 T자 모양으로 놓으면 가만히 두어도 가로로 놓은 젓가락이 스스로 돕니다."

- 중국에는 젓가락으로 점을 치는 전설이 있다. 당나라의 이융기(李隆基)는 중종의 황후인 위후(韋后)를 죽이고 군사를 일으키기 전에 점쟁이를 불러 점을 치게 했다. 점을 칠 때 젓가락이 스스로 들렸다가 떨어지기를 세 차례 거듭하면 대길의 징조로 여겼다. 사실 이런 것은 젓가락의 원래 기능과는 동떨어진 것으로, 젓가락에 진짜 신이 내린다기보다는 젓가락 특유의 형태 때문에 신을 소환하는 도구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 "아, 방금 말씀하신 것들은 모두 젓가락을 이용한 것이라 이름이 비슷한 거지요? 그런데 타이완에는 정말 다른 버전의 젓가락님 의식이 있습니다. 제가 증거를 보여드리지요."
장원융은 휴대전화로 인터넷 사이트 몇 개를 보여주었다. 그의 말대로 사이트에 글을 올린 사람들의 경험은 체계적으로 정리되지 않았을 뿐 젓가락님과 비슷했다. 
소름이 쫙 끼쳤다.
만약 이것들이 전부 사실이라면, 이 오래된 의식이 이렇게 많은 사람의 목숨을 앗아갔다는 말인가? 아니, 죽음까지는 이르지 않은 상황도 있었다. 하지만 질병으로 고통받거나 각종 사고를 겪는, ...

- "여전히 별 관심이 없으시다면 제 취재에 응하신다고 생각하고 B초등학교에 대해 아는 것을 말씀해 주실 수 있습니까? 부탁드립니다. 중요한 일이라서요! 요괴 추리 소설가로서의 호기심도 있을 것 아닙니까?"
내가 제일 못하는 게 이렇게 기세등등하게 나오는 사람을 상대하는 일이었다. 장원융의 얼굴이 점점 가까워지면서 침까지 튀었다. 나는 치밀어 오르는 짜증을 간신히 억누른 뒤 한숨을 내쉬었다.

- 장원융은 매우 기뻐했다. 내가 예상한 것보다 훨씬 더 시간이 너무 늦어 그는 나에게 연락처를 주면서 다음에 다시 연락하겠다고 했다. 떠나기 전 그가 말했다.
"참, 선생님, 제가 원고 마감까지 한 달 정도 남았다고 말씀드렸지요. 그래서 남은 기간에 아주 적극적으로 조사할 생각인데 괜찮으시겠죠? 많은 협조 부탁드립니다!"
아주 실례되는 인사였지만 미소를 짜내며 알았다고 하고 작별을 고했다. 장원융의 멀어지는 그림자를 보며 마음이 복잡해졌다. 다른 상황이었으면 분명 거절했을 것이다. 거절뿐인가, 다시는 언급도 말라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 여자가 웃으며(웃고 있다는 건 전적으로 여자 혼자만의 생각이지만) 말했다. 그건 대체 무슨 표정일까? 눈앞의 남자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남자는 긴장을 풀었다. 눈앞의 여자가 제 손으로 연인을 살해한 슬픈 유령 같아 놀라움과 두려움이 뒤섞인 연민이 불쑥 솟구쳤다.
"그러면 죽인 게 아니지. '아, 저 사람이 죽었으면 좋겠다' 하는 생각 한 번 안 해본 사람이 어디에 있어? 그래도 직접 하지 않았으면 살인이라고 할 수 없지." 
"정말요? 직접 하지만 않으면 살인이 아닌 거예요?"
여자의 목소리가 시계 초침보다도 가벼웠다. 남자에게는 당연한 일이 여자에게는 복잡하고 이해할 수 없는 수수께끼인 것 같았다. 남자는 자신의 말을 적극적으로 증명하지 않고 반문했다.
"왜지? 성가신 손님이라도 있나?"
"아니요." 여자가 남자에게 바짝 붙으며 나른하게 말했다. "한 번 죽인 뒤로는 성가신 손님 정도야 참을 수 있겠더라고요."

- "아주 오래된 일이에요."
여자가 웃는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은 표정을 지었다.
"정말 듣고 싶어요? 이야기나 듣겠다고 온 게 아니잖아요."
"괜찮아, 밤은 기니까... 처음 온 것도 아니고, 매번 같은 짓만 하는 것도 재미없잖아. 당신 이야기가 듣고 싶어."
여자는 남자의 몸에 기대 웃음소리를 흘렸다.
"좋아요. 그만 듣고 싶으면 언제든 말하세요. 혹시 재미없으면 말이에요. 내가 사람을 죽이고 싶었던 이유는... 그가 내 아이를 죽였기 때문이에요."
순간 공기가 침을 삼키기 어려울 정도로 얼어붙었다.

 

- 여자는 남자의 어깨에 가볍게 머리를 기댔다.
"당신네 나라에도 그런 일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옛날에 타이완에는 '민며느리'라는 게 있었어요. 여자아이가 어렸을 때 시댁으로 시집을 가는 것이지요. 나도 민며느리였어요. 시댁에 처음 갔을 때는 고작 다섯 살이었지요."

- 여자가 웃으며 남자를 가볍게 쳤다.
"아직 웃을 일이 더 남았어요. 내가 시댁에 갔는데 남편은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거예요."
"안 태어나? 그런데 어떻게 결혼을 해?"
"그게 타이완의 풍습이에요. 결혼이 중요한 게 아닌 거죠. 과거 여자아이는 '밑지는 물건'이었어요. 여자아이를 시집보내려면 지참금이 필요했는데 일찌감치 민며느리로 보내버리면 돈도 받을 수 있었죠. 요즘 말로 하면 결혼을 빙자한 인신매매예요." 
"하지만 그 집에서 계속 아들을 못 낳으면?"
"대충 양녀가 되는 거죠. 다른 집은 모르겠지만 우리 집은 노동력이 필요했거든요. 그래서 아들이 아직 태어나지 않았을 때에도 나는 쓸모가 있었어요. 게다가 예전에는 민며느리를 얻어 집에 들이면 복이 온다고 믿었거든요. 부인이 기다리고 있으니 하늘이 다음 아이는 반드시 남자아이를 주신다고요." 
"정말 근거 없는 미신이군."
"네, 맞아요. 근데 정말 복이 왔어요. 시집간 지 불과 일 년 만에 남편이 태어났거든요. 게다가 이란성 쌍둥이라 겹경사였어요. 사내아이는 남편 계집아이는 시누이가 됐죠. 아직도 기억나요. 내 눈앞에서 남편이 태어나던 모습이..."


- "어릴 때부터 운명이 정해진 게 어떤 기분인지 알아요? 기억이 있을 때부터 사람들이 당신한테 당신 미래는 이러이러하다고, 게다가 다른 선택은 없다고 말하는 거예요. 상상이 가요? '운명에 순응한다'라는 말을 자주 하죠. 다른 선택이 없으니 ... "

- "마을 사람들은 마신자(魔神仔)가 아이들을 데려갔다고 했어요."
타이완에서 제일 유명한 귀신이라고 하면 아마도 마신자일 것이다. 과학이 이렇게나 발달한 오늘날에도 산에서 이상한 일이 발생하기만 하면 대부분 마신자를 들먹일 정도이니. 마신자가 산에 온 사람을 끌고 가면 그 사람은 방향 감각을 잃고 환각을 보며 심지어 산에서의 만찬에 초대됐다고 생각한다. 끌려간 사람은 닭다리를 먹는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닭다리가 아닌 잡초와 진흙, 곤충 아니면 동물의 배설물이고. 

- B초등학교와 근처의 B마을은 모두 스딩에 있었다. 스딩, 핑시(平溪), 난강(南港), 시즈(汐止) 일대에는 산에 마신자가 있다는 전설이 성행해 이런 소문이 도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마신자설을 부정하는 사람도 있었다. 마신자에게 끌려갔다면 산을 수색했을 때 정신을 잃은 아이를 발견하지는 못해도 최소한 굶어 죽은 시신이라도 발견했어야 하는데 아무것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물론 아이들의 시체는 사람이 올라갈 수 없는 깊은 산속에 있을 수도 있었다. 그것이 마신자의 능력이니까. 게다가 생존한 아이가 산에서 있었던 일을 전혀 기억하지 못한 것도 마신자에게 끌려간 사례들과 부합했다. 

 

- "5학년 학생 중에 겨우 한 명만 남았다고요? 마신자가 도대체 몇 명이나 끌고 갔다는 겁니까!"
"그건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B초등학교는 지방에 있는 학교라 학년별 학생수가 많지 않았어요. 그해 5학년은 겨우 아홉 명이었죠. 장 선생님, 제가 왜 이 이야기를 선생님께 하는지 아세요? 생각해 보세요. 한 학년에 겨우 아홉 명인데 그중 여덟 명이 실종되고 딱 한 명만 생존했어요. 뭐가 연상되지 않나요?" 
장원융은 잠시 생각하더니 돌연 숨을 들이켰다.
"그건... 젓가락 신선의 꿈속 풍경과 같네요! 5학년 생 아홉 명, 마지막 한 명이 남을 때까지 꿈을 꿀 때마다 한 명씩 죽는 것도!"

- 나는 차갑게 말했다.

"선생님도 아시겠지만, 그때는 계엄 상황이었어요. 그리고 페이추이 댐을 건설하려면 수몰지구 주민을 이전시켜야 했는데 보상이 문제였죠. 당시 조사 인력이 현장을 방문해 농지를 평가했는데 B마을 농가들은 조사원이 열심히 조사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어요. 농지와 작물의 가치를 제대로 평가하지 않는다고 생각해 양쪽의 관계가 다소 긴장된 상태였죠."

- 그래요. 처음에 말한 대로예요. 나는 저주를 했어요. 내 아이를 빼앗아간 사람들을 다 저주했어요... 그들은 내 아이만이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내 존엄과 모든 것을 앗아갔으니까.

- 타이완의 설 명절은 짧아도 정월 대보름까지 이어져요. 애초에 원융을 만날 수 있었던 것도 정월 대보름에 열리는 떠들썩한 행사 덕분이었죠. 하지만 그해 정월 대보름에는 집 안에 갇혀 있었고 저녁식사 후에는 나 혼자만 남겨졌어요.
온 세상의 냉대를 받는 것에는 차츰 익숙해졌지만 이내 분노와 증오가 끓어올랐어요. 특히 그와 정월 대보름에 만났던 것을 생각하니 너무 외로워서 온몸이 덜덜 떨릴 정도였어요. 왜 나는 민며느리가 되었을까? 왜 나는 이 집에 팔려 왔을까? 겨우 다섯 살이었던 나에게는 선택권이 전혀 없었다! 

 

- 나는 그 집을 증오하고, 나를 팔아넘긴 친부모도 증오했어요. 제단을 지나다 조상 위패 앞에 놓인 왕선군이 보였고 문득 어릴 때 일이 떠올랐어요. 정월 대보름에 우리는 '저신'이라는 놀이를 했어요. 젓가락에 신을 불러오는 놀이였지요. 그 집에 온 뒤로는 정월 대보름에 저신 놀이 대신 '의자고(椅仔姑)' 놀이를 했어요. 의자고는 결혼을 안 한 여자아이들이 하는 놀이예요. 평소 사용하는 연지, 가위, 자, 거울을 준비한 뒤 두 사람이 주문을 외면서 대나무 의자의 다리를 잡으면 얼마 뒤 대나무 의자가 움직이기 시작하는데 그때 의자고에게 질문을 해서 미래를 점치는 거죠. 
무섭다고요? 하지만 정월 대보름에 항상 이 놀이를 했는걸요. 추석 때도 가끔 했고요. 아, 나도 같이했어요. 민며느리였지만 합방은 하지 않았기 때문에 참여할 수 있었죠. 내가 가족들에게 배제되었을 시간에 어쩌면 시누이는 의자고 놀이를 하면서 자신의 미래를 점쳤을지도 몰라요. 

- 그날 저녁, 혼자 있어서 그랬는지 고향에 있을 때 했던 저신 놀이가 떠올랐어요. 한 가족으로 인정해주지 않으니 나도 나 혼자만의 놀이나 하자 생각했지요. 그래서 제단으로 가 그 집의 역대 조상들 앞에서 왕선군을 꺼냈어요. 
저신 놀이 방법을 설명해 줄게요. 우선 쌀독을 가져다 젓가락 하나를 꽂고 다른 젓가락을 그 위에 가로로 놓아 T자 형태로 만들어요. 맞아요, 도라에몽의 대나무 헬리콥터처럼요. 그리고 쌀독 옆에 향을 피우고 주문을 외어요. 위에 놓인 젓가락이 움직이면 '저신'이 왔다는 뜻이에요. 
그날 나는 그렇게 했어요. 왕선군을 사용한 것은 일종의 복수였겠지요? 너희가 그렇게 소중하게 보관하는 물건을, 제단 위에 모셔놓고 제사를 올리는 산호 젓가락을 나는 저신 놀이 도구로 사용한다... 

- 그러니 독을 넣을 기회는 많았어요. 무슨 독을 써야 하는지도 알았고요.
우리 마을에는 산지인(山地人)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산지인이라고 알아요? 우리가 타이완에 오기 전부터 이곳에 살았던 토착민으로 우리보다 피부가 조금 까맣고 술을 좋아해요. 산지인이 왜 마을에 살게 되었는지는 나도 몰라요. 아니, 그곳은 원래 타이야 족(族)의 사냥터였으니 그들 내력에 의문을 표할 자격은 없죠. 
타이야족 사냥꾼이 '위텅'이라고 부르는 식물을 본 적이 있어요. 돌로 몇 번 쳐서 강물에 넣으면 위텅 즙이 물에 퍼져 얼마 뒤 물고기들이 기절하는데 이런 방법으로 물고기를 잡는 거예요. 현지 사람 중에도 아는 사람이 많아 딱히 비밀이 아니었어요. 

- 어머... 지금 앞에 있는 사람이 살인범일까 봐 무서운 거예요? 내가 정말 살인범이면 어떻게 할 건데요?
걱정하지 말아요. 안 죽였어요. 그냥 저주를 했을 뿐이에요. 

- 모든 것이 물속으로 가라앉았어요. 아이들이 실종된 산도 예외가 아니었죠. 마을은 물에 잠긴 외딴섬이 되어 아무도 찾지 않았어요.
남편을 잃은 나는 그 집에 남을 이유가 없었어요. 아빠 엄마도 나를 남게 할 핑계가 없었고요. 그래서 나는 그 집을 떠나 대도시로 왔어요. 대도시에서 살려고 했지만, 초등학교만 나와 일자리를 찾기 쉽지 않았고, 결국 이곳으로 오게 되었어요. 
아니요. 나 때문에 마음 아파하지 말아요.
동정받으려고 이야기를 한 게 아니니까요. 이야기는 이야기일 뿐이에요. 안 그래요? 당신은 이 이야기가 진짜인지 가짜인지도 모르잖아요.

- 떠난 뒤 나는 그 집 일이 전혀 궁금하지 않았어요. 한 가지만 빼고요. 시누이가 결혼하면서 나에게 편지를 보내왔거든요. 결혼식에 참석해 달라는 건 아니었어요. 편지에서 시누이는 사회생활을 시작한 뒤 원융을 만났고 그를 사랑하게 되어 결혼한다고 했어요. 나에게는 미안하지만, 결혼식에 오지 않았으면 한다고요. 시누이는 자기가 내 사랑을 가로챘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어요. 내가 자기에게 어떤 것은 스스로 쟁취해야 한다는 것을 일깨워주었다면서요. 
아니요. 원망하지 않았어요. 나는 시누이를 정말 사랑했고 진심으로 축하했어요. 저주한 것이 너무나 후회스러웠고 더는 원융을 생각하지도 않았거든요. 그가 내 시누이와 함께해서 행복하다면 좋은 일이었어요.

- 나중에 시누이가 아이를 낳았다며 사진을 보내주었어요. 잠깐만요, 보여줄게요. 여기, 사진 속 이 사람이 바로 내 시누이고, 품에 있는 아기가 시누이 아들이에요. 시누이가 목에 걸고 있는 게 왕선군이냐고요? 맞아요. 그녀는 왕선군을 체인으로 연결해서 항상 걸고 다녔어요. 
하지만 내가 보여주려고 하는 건 그게 아니에요.
보이죠? 시누이의 아이... 아이 팔에 물고기 모양 모반이 있지 않나요? 맞아요. 그 달밤에 위쯔 손에서 봤던 붉은색 형상과 같아요. 똑같아요. 완전히. 
그래서 나는 증오하지 않아요. 봐요, 가장 아름다운 결말 아니에요? 나의 위쯔가 환생했고, 게다가 원의 아들로 태어났어요. 이보다 나은 결말은 없을 거예요. 

- "다른 사람이 걸릴 확률이 제로라면 그때 누르겠습니다."
장원융의 대답은 도덕과 윤리에 부합했다. 장원융이 정말 그렇게 도덕적이든 아니든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그렇군요. 그러면 질문을 바꿔보지요. 버튼을 가진 사람이 아홉 명이고 버튼을 누르느냐 마느냐는 각자의 자유의지에 달려 있다고 가정합시다. 누르면 자기 목숨을 담보로 소원을 이루고 싶다는 뜻이고 안 누르면 목숨이 소원보다 더 소중하다는 뜻입니다. 당신은 우연히 그들 중 한 사람의 소원이 세상을 멸망시키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버튼을 누르는 사람이 적을수록 세상이 멸망할 확률이 커지는 거죠! 세상이 멸망하면 당신뿐 아니라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들도 모두 죽겠죠. 하지만 모두가 버튼을 누르겠다고 결심하면 세상이 멸망할 확률이 낮아집니다. 여덟 명이 죽겠지만 세상이 무사할 확률은 구 분의 팔이 되는 거죠. 그러면 선생님은 버튼을 누르겠습니까?" 
장원융은 숨을 들이켜고 무슨 말을 하려고 했지만 선뜻 입을 떼지 못했다.

 

- 한동안 고민하던 장원융이 내키지 않는 듯 말했다.
"말씀하신 상황은 너무 극단적입니다!"
"네, 맞아요.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 서로 죽이는 것은 도덕적으로 절대적인 잘못은 아닙니다. 그러니 그들을 비난할 필요는 없죠. 의식에 참여한 사람 모두가 핀천처럼 소원이 자기 목숨보다 더 가치 있다고 여겨서 자기 인생을 걸겠다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가 무슨 근거로 그들을 비난할 수 있을까요?" 
장원융은 아무 말도 못 했고, 핀천은 유쾌한 듯 웃었다.

 

- "역시 선생님이시네요! 선생님은 그렇게 재미없는 말을 할 사람 같지 않았단 말이죠. 솔직히 말해 그건 서로 죽이는 게 아니에요. 아홉 명이 자유의지로 사망률이 구 분의 팔인 버튼을 눌러서 구 분의 일의 행운을 쟁취하는 거죠."
"만약 그게 간단한 수학 문제라면 맞아, 네 말대로야. 운명의 신이 죽인 것이니 의식에 참여한 사람은 책임질 필요가 없지."

나는 의미심장하게 핀천을 쳐다봤다.
정말 주사위를 던져 희생자를 결정하는 거라면 나는 핀천의 말에 동의한다. 하지만 핀천은 자신의 승리를 확신하고 있다. 이건 완전히 다른 문제였다.

- "그 문제에 대한 얘기는 그만합시다. 선생님, B초등학교에 갈 때 주의해야 할 것은 없습니까?"
"해야 할 말은 전화로 다 했고요. 설령 말하지 않은 게 있다 해도 지금 해봐야 늦었습니다.”

- "다른 사람한테 들었을 리가 없어요. 가오수란과 결혼했던 아빠도 몰랐으니 다른 사람은 더더욱 몰랐을 겁니다."
모든 게 핀천의 말대로였다. 하지만 장원융의 표정을 보니 그는 아직도 이게 왜 중요하다는 것인지 모르는 것 같았다. 나는 한숨을 쉬며 씁쓸히 웃었다.
"나중에 이야기해 줄게. 하지만 먼저 확인해야 할 일이 있어. 이미 답을 알고 있지만... 장 선생님, 타이완 대학교 졸업하셨지요?"

- "예전에 이 마을에 '좡원융(莊文勇)'이라는 사람이 있었어요. 그는 타이완 대학교에 합격해 온 마을의 유명인사가 되었었죠. 선생님은 그 사람이 아니지요?"
"당연히 아니지요! 저는 이 마을 출신도 아닌걸요."
장원융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지만 그의 대답은 내 생각대로였다. 가히 만족스럽다고 할 수 있었다.

 

- "대충 이해가 가네요." 나는 감회에 젖었다. "젓가락 신선 의식은 어쩌면 범인의 죄책감이 변형된 것인지도 모르겠어요. 상황이 도대체 왜 이렇게 되었는지는 범인도 아마 잘 모를 겁니다."

- 정말 참을 수가 없었다.
핀천이 이렇게 바르게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니의 가르침 덕분인 게 분명했다. 키워준 은혜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아이에게 강요하면 아이는 부모의 꼭두각시가 될 뿐 자아가 없어진다. 나는 침착하게 그에게 권했다.
"조급해하지 마세요, 장 선생님. 어차피 송신은 핀천이 마지막 꿈을 꾸기 전에 하기 어려워요."
"왜요?"
장원융이 이상하다는 듯 나를 쳐다보았다.
"이런 강령 의식은 보통 정월 대보름이나 추석에 하거든요. 아직 설도 안 지났고 정월 대보름까지 계산하면 팔십사 일이 끝나기 전에는 할 수가 없어요."

- "아들을 믿어보세요. 핀천이 꿈속에서 살아남을 자신이 있다고 하지 않았나요? 그리고 핀천을 구할 수 없다면 왕선군을 내놓지 않을 겁니까? 잊지 마세요. 왕선군은 당신 손에 이십 년이나 갇혀 있었어요. 선생님은 그 자리가 왕선군이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라고 생각합니까? 잘못된 자리는 새로운 저주를 만듭니다. 그런 일이 절대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고 자신할 수 있으세요?"
장원융이 쓴웃음을 지었다.
"이번 여행에서 제가 거둔 가장 큰 수확은 설교 같네요."

- "아직 살아있습니다.”
팔십사일이 지났는데 핀천이 살아있다는 것은 그가 소원을 비는 미친 의식의 최후의 생존자라는 의미였다. 핀천은 소원을 이뤘지만 아무도 기뻐하는 사람이 없었다. 어쨌든 누군가 대가를 치렀다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 "안녕하세요."
차 안에 있던 사람이 먼저 인사했다. 조수석에 앉아 있던 그 사람이 고개를 약간 돌려 나를 쳐다봤다. 그와 시선을 마주치며 천천히,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는 삼십여 세의 청년이었고 수면 부족에 시달리는 듯했다. 나는 그를 알았다. 위(魚) 도사, 가오수란과 장원의 아들이었다. 이제껏 그가 위쯔의 환생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랬다면 젓가락 신선은 지금까지 이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의 팔에 있는 모반은 가오수란이 왕선군을 통해 어떤 저주를 내린 데 대한 대가라고 상상할 뿐. 하지만 오랜 시간 나는 혼자서 그를 내 아들로 여기고 있었다.
한 번도 그 앞에 모습을 드러낸 적은 없었지만.

- "이 사람 말이..." 위 도사가 장원을 가리키며 말했다. "당신이 내 어머니가 사람을 죽였다고 주장했다는데, 그건 당신의 일방적인 주장이고, 살인은 당신이 한 것 같은데요."  
보자마자 이런 말을 할 줄은 생각하지 못했는데... 쓴웃음이 나왔지만 이런 것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 농가가 많아 저녁에도 그렇게 어둡지는 않았다. 저만치에 내 고향을 삼킨 거대한 악어가 정면으로 보였다. 달빛 아래 꼬리를 흔들고 있는 그것은 정말 추악했지만 삼십 년도 더 지나서인지 조금 지쳐 보였다.

위 도사가 산호 젓가락 하나를 꺼냈다.

"왕선군 여기 있습니다. 오랫동안 제 곁에 없었다가 마침 얼마 전에 누가 돌려줬어요. 돌려준 사람이 여기에 귀신이 있냐고 물었고 나는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진실이 아니었지요. 작가님, 이제 이것을 작가님께 드리겠습니다."

그가 나에게 산호 젓가락을 건넸다.

"그리고 이거..."

장원융이 다른 한 짝을 나에게 건넸다. 

 

- 내 손에 왕선군이 다시 한번 온전하게 놓였다. 젓가락은 여자가 시집갈 때 해가는 혼수로 '빨리 아들을 낳아라' '짝을 이뤄라' 하는 의미가 있었다. 오늘날 젓가락은 두 짝이 다시 모이면 영원히 헤어지지 않고, 후손이 번창한다는 의미를 갖는다. 상서로운 말이면서 동시에 악몽 같은 속박이다. 좋음과 나쁨은 늘 동전의 양면과 같다. 

 

- "나도 있어야 한다고 했으니... 이제 내가 뭘 해야 합니까?"

장원융이 물었다.

"아무것도 할 필요 없어요. 그냥 여기 있으면 됩니다. 맞다, 그리고 거짓말하지 마시고요. 내가 무엇을 묻든 사실대로 답하면 됩니다."

나는 미소를 지으며 준비해 간 쌀독과 향을 꺼냈다.
달빛 아래서 젓가락 하나를 쌀독에 꽂고 다른 하나를 그 위에 올려 T자를 만들었다. 그리고 쌀독 옆에 쪼그리고 앉아 향에 불을 붙였다. 향에서 나는 은은한 붉은빛이 마치 반딧불이 같았다. 가늘게 피어오른 향기가 바람에 날렸다. 장원융과 위 도사가 옆에서 지켜보는 가운데 향을 땅에 꽂았다. 
그리고 주문을 외었다.

- 사십 년 전 이 주문을 욀 때와는 전혀 다른 마음이었다. 그래도 젊은 시절의 모습이 조금씩 겹쳐졌다. 아, 그때 내가 이렇게 슬퍼하고, 이렇게 증오했나? 바람에 눈물이 차갑게 식었다. 사그라진 재 같은 사랑, 꺼진 사랑의 회한 같은 마음이었다.
젓가락이 움직였다.

- "젓가락이 움직입니다!"
장원융이 긴장해서 말했다.
"저신아, 저신아, 위쯔니?"
눈물을 참으며 부드럽게 물었다. 젓가락이 빙글빙글 도는 게 왠지 망설이는 것 같았다. 하지만 곧 오른쪽으로 돌아 내 질문에 긍정했다.
 
- "사실 그때 답을 다 말하지 않았어요."
나는 고개를 숙인 채 감정을 털어놓듯 유유히 말했다.
"예전에 저주에 관해 말했지만, 도대체 저주가 뭘까요? 사람의 사람에 대한 원한일까요, 아니면 초자연적인 신령이 금기에 저촉한 자에게 내리는 처벌일까요? 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저주의 본질에는 가닿지 못해요... 저주는 '개인적'인 게 아니라 시스템적인 것입니다. 시스템에 속하지 않으면 저주에 걸리지 않아요. 우리 아시아인은 젓가락을 밥에 꽂으면 재수가 없다고 말하지만, 서양 사람은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이 사회 자체가 거대한 저주의 장치인 겁니다.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타이완 전통에는 여자와 임산부를 대상으로 한 금기가 아주 많아요. 금기를 어기면 배척을 당하지요. 하지만 그게 여성만의 문제일까요? 다른 문화 시스템에서는 같은 행동을 해도 여성이 비난을 당하지 않아요. 금기는 사회에 속한 것이지 성별에 속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타이완의 전통사회 자체가 여성을 겨냥한 저주라고 말할 수 있어요."


- "그렇다면 우리는 이 저주를 어떻게 풀어야 할까요...? 솔직히 저는 방법이 없다고 생각해요. 이 시스템에서 떠나는 수밖에요. 그럼 사회 시스템을 떠날 방법이 없는 사람은요? 타이야 족에게는 '마조(魔鳥)'라는 저주 전설이 있어요. 마조를 키운다고 의심받으면 온 가족이 전부 살해를 당해요. 증거는 필요 없고, 그냥 '사회규범에 부합하지 않는다'라고 하면 돼요. 그때 나도 그랬어요. 전통사회는 자주적인 여성을 필요로 하지 않아요. 이 사회에서는 여성이 자의식을 갖고 주도적으로 타인을 사랑하는 것은 이질적인 거예요. 그래서 저주가 발동하는 것이죠." 

- 예전에 그런 일들이 없었다면 어떤 인생을 살았을까, 그런 생각을 한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하지만 생각할수록 우리가 왜 이런 억압을 받아야만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나는 분명 다른 선택을 할 기회가 있었다. 사회의 기대에 부합하는 선택을... 하지만 왜 그렇게 해야만 잘 살 수 있는 것일까? 타고난 대로 사랑하고 기뻐하는 것이 왜 죄가 될까? 
내가 기대한 결말이 있다면, 그것은 분명 통속적인 해피엔드일 것이다. 여성이 이런 고통을 받을 필요가 없는 결말.

- "그 집을 떠나 대도시에 가서 내 짝을 찾았다면 상황이 달라졌을까요? 모르겠어요. 그저 사회에 받아들여지고 시스템 안에 남고 싶었는데. 결국 저주를 이어가고 새로운 저주를 만들기까지 했네요. 맞아요. 이어서 발생한 일들은 다 저주예요. 저주는 나에게 고통을 안겨주어 몰래 위텅을 모으게 했고, 수란은 불만이 쌓여 뭐든 제 손에 넣으려고 하다가 끝내는 왕선군을 통해 그 집을 통제했어요. 저주는 사회의 무능이에요."

- 고통은 결국 물고기가 되었다.

- <악어 꿈>, 샤오샹선



- 그것이 점점 다가온다. 나와의 거리 불과 2미터.
그것은 인간의 형태를 띠고 있으나 나는 그것이 인간이 아니라고 확신한다. 그것은 진흙이 잔뜩 묻은, 짚을 엮어 만든 것 같은 도롱이를 걸치고 머리에 대나무로 만든 낡은 삿갓을 썼다. 나는 그것의 얼굴을 볼 수 없다. 삿갓 아래 깔린 짙은 어둠은 마치 이계로 통하는 무저동(無底洞) 같다. 도롱이와 삿갓은 본질을 숨기려고 몸에 걸친 위장일 뿐이다. 

- 뜨드득, 뜨득, 뜨득.
도롱이가 움직일 때마다 진흙물이 뚝뚝 떨어져 그것이 지나가는 바닥에 거무스름하고 불규칙한 궤적이 남는다. 나는 그것의 위협에서 벗어나고 싶다. 그러나, 도망갈 곳이 없다.
이제 그것은 내 코앞까지 다가왔다.
그것은 도롱이에서 팔 같은 물체를 뻗었다. 검은 혈관이 그물처럼 퍼진 가늘고 긴 두 손가락으로 내 옷섶을 누르더니 천천히 내 가슴을 찔렀다.

- 놀람과 공포로 가득한 눈에 비친 수십 센티미터 길이의 손가락 두 개. 마치 마디가 있는 한 쌍의 대나무 젓가락처럼 보인다.
나는 그것의 접시 위에 놓인 먹이였다.

- 나는 배낭을 메고 홍콩 공항 입국장을 빠져나와 4번 주차장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수하물 찾는 시간을 줄이려고 배낭 하나만 메고 출입구에 가까운 좌석을 선택했건만, 다른 항공기에서 대규모 단체 관광객이 내려 입국 수속만 족히 사십오 분이 걸렸다. 어렵게 통과해 나오자 이번에는 서두르는 내 행동을 이상하게 여긴 세관 직원에게 붙잡혀 배낭을 샅샅이 검사당하고 거의 삼십 분이 지나서야 공항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핀천, 이런 걸 '얀파이닥만(因快得慢)'이라고 해. 아, 광둥어 모르나? 표준어로 하면 '서두르다가 망한다'라는 뜻이야."
아원(阿文)이 허둥지둥하는 나를 보면서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히죽거렸다.
 
- <가자희 歌仔戱>를 거뜬히 알아들을 수 있게 됐지만, 내 광둥어 실력은 '초급' 수준에 머물렀다. 선배를 동경했던 나는 고등학교 졸업 후 대학 역사학과에 진학해 정식으로 그의 후배가 되었다. 
타이완을 떠나 홍콩으로 향하며 그가 재미있고 알찬 일정을 준비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선배 때문에 깊은 번뇌에 빠질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사랑의 번뇌에.

- 일본 중세사에 관심이 많던 나에게 야오 선배는 마침 H대 미술박물관에서 '일본 예술 속 전통 종교'라는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며 토요일에 함께 가보자고 했다. 그는 자기 학생 중에 전시회에 관심 있다는 학생이 있는데 같이 가도 되겠냐고 물었고, 나는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H대 버스 정류장에서 지각한 야오 선배를 만나고 나서야 정류장 한쪽에서 고개를 숙인 채 모리 오가이(森鷗外)의 <무희>를 읽고 있는 청초한 소녀가 바로 선배가 말한 그 학생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너무 당황해서 그녀와 어떻게 인사를 나누었는지도 잘 기억나지 않는다. 선배를 기다리면서 힐끔힐끔 그녀를 쳐다봤기 때문이다. 하늘에 맹세컨대 처음에는 순수하게 그녀가 읽고 있는 책이 궁금해서 쳐다봤다. 그러다 그녀의 분위기에 이끌려 시선이 그녀 손에 들린 책에서 그녀에게로 옮겨졌을 뿐이다. 
"이쪽은 녜샤오쿠이(轟曉葵), 우리는 샤오쿠이(小 )라고 불러."

선배가 정식으로 소개해주었다.

- "홍콩에서는 '각미반'이라고 하지 않나? 밥그릇에 젓가락 한 쌍을 꽂고 조상에게 제사를 올리는. 방금 저쪽에서 봤는데."
내가 왼쪽을 가리키자 샤오쿠이 아버지도 왼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 차가 갑자기 휘청하더니 난간을 들이받았다. 차가 무엇을 들이받은 건지 아니면 차에 뭐가 부딪힌 건지 모르겠지만 강한 충격과 함께 하늘과 땅이 거꾸로 돌면서 눈앞이 캄캄해졌다. 안전벨트를 매지 않았던 나는 차 밖으로 튕겨 나가 산비탈을 굴렸다. 정신을 잃었다가 가까스로 깨어보니 사고 지점에서 상당히 떨어진 산 아래였다. 지나가던 아원이 나를 발견하지 못했으면 구조되지 못하고 죽었을지도 몰랐다.

- 아원은 특이한 청년이다. 키가 크고 말랐으며 스무 살에서 서른 살 정도 되어 보였지만 실제 나이는 그보다 더 많을 수도 있었다. 그는 낡은 갈색 바람막이를 입고 수염을 짧게 기르고 있었는데 이런 차림새가 자기 신분에 어울린다고 했다. 아원은 자기를 주룽 제일의 탐정, 이 도시 지하의 수호자라고 칭했다. 자기가 마신을 과학적으로 파헤치고 불가사의한 현상을 전문적으로 연구해 사람들의 재앙을 막아주었다고. 그날 아원은 신냥탄에서 신비한 각미반에 관한 도시전설을 조사하고 있었다고 했다.

- 의식이 돌아오자마자 내 상처보다 샤오쿠이가 먼저 떠올랐다.
샤오쿠이는 어디에 있지? 어떻게 됐을까? 괜찮은 걸까?
하늘은 공평했다. 나에게 행운을 선사한 다음 꼭 그만큼의 불행을 주셨으니.
심지어 내 불행이 무고한 사람에게까지 영향을 미치고 말았다.

- 샤오쿠이는 중상을 입었다. 목숨은 건졌지만 혼수상태였고, 그녀의 부모님은 차에 불이 나 현장에서 사망했다. 경찰은 차량이 갑자기 길가에서 튀어나온 멧돼지를 들이받았고 놀란 운전자가 자동차를 제어하지 못한 것 같다고 했다. 경찰 역시 차량 속도가 높지 않았는데 어떻게 이렇게 심각한 사고로 이어졌는지 이해가 안 된다고 했지만, 어쨌든 결과는 이랬다. 아이러니하게도 부딪친 멧돼지는 살았다고 했다. 

 

- 일련의 사실을 듣고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병원에서 온몸에 붕대를 감고 호스를 꽂고 있는 샤오쿠이의 모습을 보자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내가 신냥탄에 가지 않았다면 샤오쿠이의 부모님이 차를 세워 나를 태우지 않았을 것이고, 시간을 지체하지 않았을 것이며, 차에서 무슨 각미반 타령을 해서 샤오쿠이 아버지의 주의력이 분산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럼 멧돼지를 들이받지도 않았을 것이고, 샤오쿠이도 다치지 않았을 것이며, 친절한 샤오쿠이의 부모님도 사망에 이르지 않았을 것이다. 
나 때문이었다.

- "위험하다고?"
"목숨을 건 게임이고 승률이 구 분의 일밖에 안돼."
아원은 내가 홍콩에서 봤던 그 기괴한 각미반을 둘러싼 '신냥탄 젓가락 저주'에 대해 연구하다가 복잡한 스토리를 발견했다고 했다. '젓가락 저주'는 홍콩의 모 라이브 방송 BJ가 만든 허구의 괴담으로 이론상으로는 저주의 힘이 전혀 없었지만 어찌 된 일인지 정말 효과가 나타나 저주당한 사람에게 크고 작은 불행이 닥쳤다고. 
"그런 건 다 미신이라고 하지 않았어?"

- "'저주당한 사람에게 불행한 일이 생긴다고 믿는 것'은 미신이자만, 저주한 사람이 목표 대상에게 품은 악의는 확실히 존재해. 이 세상에는 인과법칙이라는 게 있어. 인과는 나비효과처럼 우리가 보지 못하는 현실 뒤에서 작용하지. 만약 어떤 사람이나 힘이 이 법칙에 개입하면 인과가 비틀어져서 원래는 연결될 수 없는 인과의 선이 서로에게 영향을 주게 돼. '카르마'라는 단어 들어봤어? 보통은 '업보'라고 번역하는데 그건 오역이야. '업보'는 선과 악만 생각한 거니까. 나는 '업'이라는 중성적인 번역에 찬성하는 편이야. 인간이 행하는 모든 결정과 행동이 업의 일부가 되지."

- 그의 아버지를 통해 내 아버지에게 전달했다. 그의 아버지는 내 아버지의 옛 친구였는데 친구 아들이 무슨 이상한 일을 저지른 뒤 날마다 죽은 자에게 제사를 지내며 속죄라도 하나 싶었단다.
아버지는 휴대전화 속 영상을 나에게 들이밀었고 나는 소원을 이루는 게임을 하고 있다고 솔직하게 말했다. 인터넷에서 관련 자료를 찾아본 아버지는 젓가락님이 목숨을 담보로 하는 게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뒤로 아버지는 나를 여기저기 끌고 다니면서 스무 명이 넘는 대사를 만났다. 뜻밖에도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찾아낸 사람은 무슨 도사나 스님이 아니라 유명 작가였다. 나는 그 작가의 소설을 꽤 좋아했다. 알고 보니 작가는 젓가락 신선 의식의 창시자로 사건에 관련된 인물이었다. 우리는 B초등학교에서 그녀의 고백을 들었고 하늘의 교묘한 안배에 전율했다. 

- "그건 나도 생각 못 했네. 수수께끼의 진실이 그럴 줄은."

진실을 알게 된 아원이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타이완에 오길 잘했네. 단번에 이렇게 많은 단서를 파악하다니... 꽤 오래 찾아다녔는데 이렇게 쉽게 찾게 될 줄은 몰랐어."
"이건 뭐야?"
"그 산호 젓가락."

 

- 아원은 자신이 처리했던 사건들은 모두 세 가지 요소에서 벗어나지 않는다고 했다.

바로 인(人), 사(事), 물(物). 

'인'은 사건을 발생하게 한 인물로 젓가락 신선 사건에서는 당연히 작가 선생과 내 아버지의 전처였다. '사'는 사건의 원인이나 숨겨진 이야기로 작가 선생이 젊었을 때 저신 의식으로 혼을 불러 점을 친 것과 B초등학교에서 발생한 실종 사건이 그에 해당된다. '물'은 사건을 일으킨 핵심 물건으로 귀신 소동에서의 저주받은 인형, 살인 사건의 흉기 같은 것이다. 젓가락 신선에서는 왕선군이 깃들어 있었다던 산호 젓가락이 사건을 일으킨 핵심 물건이다.

- "생각해 봐. 단순한 그리움이 이렇게 방대한 사건을 일으키고, 현실 너머에 우주같이 광활하게 펼쳐져 있는 '인과의 그물'을 건드릴 수 있을까?"
아원은 마치 학자가 논문을 발표하듯 논리를 펴나갔다.
"아니. 죽임 당한 그 태아가 손오공이나 나타마냥 환생한 것도 아니고 인간의 악의나 원념만으로 삼사십 년 동안 의식을 진행한 모든 사람이 똑같은 꿈을 꾸게 할 수는 없어. 사람을 급사시킨다는 건 더더욱 불가능하고. 원망을 무한대로 증폭시키고 인과법칙의 작용을 교란한 건 그 특수한 젓가락이야. 4G 신호탑처럼 원래는 지역에 한정된 신호를 넓게 확산시키는 거지."
아원은 대나무 젓가락을 스마트폰에 비유해 의식이 어떻게 '이용자'를 연결하고 B초등학교라는 '온라인 서버'에 '로그인'하게 하는지에 대해 장황하게 설명했다. 분명히 다 알아들었는데, 종합해서 생각하려니 컴퓨터 언어를 듣는 것처럼 머릿속이 꼬이는 느낌이 ...

- "네 도사 형이 이 자리에 있었으면 내 말에 동의했을 거야. 도가에 내단술(內丹術)이라는 게 있는데 호흡으로 체내 음양을 조절하고 도를 닦는 거야. '연정화기(煉精化氣), 연기화신(氣化神)'은 도가 신도라면 다 아는 기본 상식이지. 춘추전국시대 문헌 <행기명(行氣銘)>에는 '호흡이 깊어지면 쌓이고 쌓이면 뻗어나가며, 뻗어나가면 아래로 내려가고, 아래로 내려가면 안정되며, 안정되면 굳어지고, 굳어지면 싹이 트며, 싹이 트면 자라고, 자라면 쇠퇴하며, 쇠퇴하면 하늘로 돌아간다. 천기는 위로 향하며 지기는 아래로 향한다. 순행하면 살고 역행하면 죽는다'라고 되어 있어. 이렇듯 호흡은 생명의 근원이야. 젓가락 신선이 도술과 관련이 있다면 도가의 법으로 소원을 완성하는 게 도리에 맞지 않겠어?"

- 다급한 나머지 가장 하고 싶지 않았던 말을 내뱉었다.
"하, 그거 때문이었구나?"
아원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아니, 생일 지나서 이제 열다섯 살이야."
"열다섯이나 열넷이나 뭐가 달라! 미성년인 건 마찬가지인데!"

- 샤오쿠이가 내 팔뚝에서 눈을 떼지 않아 팔을 거두어들이지 못했다.
"샤오쿠이, 내가 설명을 좀 할게."
아원의 말투가 다소 진지해졌다.
"너는 팔뚝에 난 게 보기 싫은 모반이라고만 생각하겠지만 사실 그것은 기원이 있어. 그것은 네가 '하늘이 선택한 사람'이라는 뜻이야. 엄복(嚴復)의 <천연론>에 '하늘의 선택'이라는 단어가 나오거든? 그것에 비유해서 설명할게. 원래 의미와는 조금 다르지만 말이야. 인류 역사상 모반에는 늘 특별한 의미가 부여됐어. 고대 몽골인은 모반이 있는 사람은 무녀와 의사가 될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고, 에티오피아 정교회에서는 모반은 성모 마리아가 남긴 키스의 흔적이라고 했지. 이 세상에는 남다른 능력을 지닌 사람이 많은데, 몸에 심상치 않은 각인이 있는 경우가 많아. 그 물고기 문양도 그중 하나고. 핀천의 이복형은 샤오쿠이와 마찬가지로 날 때부터 왼쪽 손목에 그 물고기 모양 모반이 있었지. 지금 그는 귀신과 영혼을 처리하는 도사가 됐어. 너희는 모두 '하늘이 선택한 사람'이야." 
 
- "너 말이야, 정말로 여자 심리 좀 공부해라."
아원이 내 쪽으로 눈길도 주지 않으면서 툭 내뱉듯이 말했다.
"... 샤오쿠이의 상처를 건드려 더 아프게 하지 말라는 거야?"
바닥에 앉은 채로 아원에게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절반은." 아원이 곁눈질로 나를 보면서 불량하게 웃었다. "나머지 절반은 재미있는 일이 일어날 것 같아서."
저 자식을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다. 저 자식과 샤오쿠이를 괜히 만나게 했나? 그게 내 뜻대로 되는 일은 아니지만.

- 다음 날 오후 1시 반, 우리는 할리우드 로드에 있는 골동품점 위안취안탕 앞에 도착했다. 샤오쿠이는 완전히 회복하지는 않았지만, 우리의 부축 없이도 걸을 수 있었다. 나는 아원 충고대로 성숙해 보이기 위해 야오 선배의 양복을 입었다.
"우리는 린 사장이 왕선군을 이용해 이익을 꾀하는 사람인지 아닌지 아직 몰라. 그러니 명심해, 정보를 너무 많이 흘려선 안 돼." 출발하기 전 아원이 우리에게 당부했다. "하지만, 진정한 사기꾼은 구십 퍼센트의 진실과 십 퍼센트의 거짓을 적절하게 섞어 말하지. 적당히 사실을 섞어서 말하면 상대가 조사한다고 해도 탄로 날 일이 없어. 핀천, 너는 좀 성숙해 보이게 입어. 그 산호 젓가락에 대해 알고 싶어서 타이완에서 왔다고 말하는 거야. 그것이 집안의 가보이고 십여 년 전에 한 짝을 잃어버려 열심히 찾아다녔는데 못 찾았다고. 그러던 어느 날 네 아버지가 우연히 신문 인터뷰를 보다가 사진을 발견한 거지. 하지만 몸이 불편하셔서 아들인 네가 왔고. 상대가 먼저 젓가락을 내보이지 않는 한 우리가 다른 한 짝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려서는 안 돼."
"왜 핀천더러 만나라고 하는 거예요? 아원은 탐정이니 말도 더 잘할 거잖아요."
아, 나에 대한 샤오쿠이의 평가가 크게 추락했구나...
"핀천은 타이완 사람이잖아. 골동품점 주인은 홍콩 사람보다 외지에서 온 관광객한테 경계심이 덜하겠지. 그러면 적은 노력으로 많은 걸 얻을 수 있어." 

- "분명 그럴 거야." 아원이 장부를 살피며 말했다. "내가 말한 적 있지, 젓가락 신선 의식의 최근 십 년 통계 수치가 비정상적이라고. 누군가 배후에서 타인의 카르마를 '가불' 받아 이익을 챙기고 있어. 분명 누군가의 손에 들어갔을 거야."

- "아니, 그가 범인이라면 핀천에게 나머지 한 짝을 물어보면서 자기가 사겠다고 했겠지. 배후 조종자는 산호 젓가락의 힘을 잘 알고 있어. 네가 그라면, 젓가락 한 짝만으로도 큰 이익을 얻었는데 한쌍이 되면 호랑이가 날개를 단 격이라고 생각하지 않겠어?"
아원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 "핵심적인 물건이라고 했잖아. 주술이 왜 젓가락과 연결된 거야?"
정말 궁금한 문제는 아니었지만 작은 의문 중 하나였다.
"핀천, 젓가락이라는 단어의 유래를 알아?"
아원이 들고 있던 장부를 내려놓으며 반문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고대에는 젓가락이라는 뜻의 '쾌자(筷子)'라는 단어가 없고 '저(箸)'라는 글자만 있었어. 오늘날에도 '음식을 먹는다'는 말을 '하저(下箸)'라고 하는데 이건 '젓가락을 들다'라는 뜻의 '기쾌(起筷)'라는 말과 짝을 이루지. 일본어에서는 여전히 '저'라는 한자를 써. '하시'라고 읽지만."

 

- "'저'라는 글자는 전형적인 상형문자로, 고대에는 '자(者)' 자와 '자식(煮食)'의 '자' 자 모두 음식을 익힌다는 뜻으로 썼고, 익은 음식에 대나무 두 개(竹)를 꽂으면 음식을 집는 '젓가락(箸)'이 됐어. 옛날부터 화샤(華夏) 민족에게는 요리된 가축에 젓가락을 꽂아 신에게 바치는 풍습이 있었는데 이것 또한 '저'라는 글자의 상형적 의미를 나타내는 거야. 젓가락은 원래부터 제사에 쓰는 도구의 특징을 함께 갖고 있었어. 각미반의 유래는 수천 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가." 
"그렇게나?"
"물론 수천 년 전에도 각미반처럼 쌀밥에 젓가락 한 쌍 꽂고 삶은 오리알을 더했다는 건 아냐. 변화도 많았어. 그래도 변화에는 맥락이 있어. '저'가 '패'로 변한 것처럼."

- "몇 가지 설이 있는데 제일 믿을 만한 것은 고대 뱃사공 설이야. 뱃사공은 '멈추다'라는 뜻인 '주(住)'와 같은 발음인 '저(箸)'를 기피했어. 표준어로 '주'와 '저' 모두 '주'로 발음이 되거든. 홍콩 사람이 빈집이라는 뜻의 '공옥(空屋)'을 '길옥(吉屋)'이라고 하는 것처럼, 뱃사공은 배를 멈추고 싶지 않은 마음으로 '저'를 빠르다는 뜻의 '쾌(快)'라고 바꿔 불렀지. 나중에 그 위에 대나무 죽(竹) 자가 붙은 '쾌(筷)'로 원래의 '저'를 대신하게 된 거야. 이것은 또 영어의 스틱스(Chopsticks)의 유래기도 해."
"영어와도 관계가 있어요?"
"영어의 (Chop)은 칼이나 도끼로 빠르게 내리친다는 뜻이야. 18, 19세기에 광둥 사람들과 통상을 하던 서양인들이 노동자와 뱃사공이 '쾌쾌'라고 하는 소리를 듣고 '촙촙(Chop-chop)'이라는 새로운 말을 탄생시켰어. 둘 다 '빨리빨리' 하라는 뜻이지. '쾌자'도 이런 변형을 거쳐 '스틱스'가 된 거야." 

- "강자아? 곧은 낚싯바늘로 낚시한 강태공 주나라의 개국 군사(軍師)? 그가 젓가락을 발명했다고?"
나는 고전소설 <봉신방(封神榜)>의 내용만 대충 알 뿐 거기에 젓가락과 관련된 이야기가 있는 줄은 몰랐다.
"강자아 부인이 남편을 독살하려고 했다는 전설이 있는데 말이야..." 아원은 뜸을 들이면서 샤오쿠이에게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계속 말했다. "강자아가 음식을 먹으려고 손을 뻗었는데 작은 새 한 마리가 날아와 막았어. 그는 새를 따라 대나무숲으로 갔지. 대나무숲에서 새가 강자아에게 대나무로 고기를 집으라고 말해주었어. 강자아는 새가 한 말 대로 대나무로 가는 막대기 두 개를 만들어 집으로 돌아가 고기를 집어 들었어. 그런데 고기에 닿자마자 젓가락에서 연기가 나는 거야. 부인은 실패했다는 것을 깨닫고 그 뒤로 다시는 독을 넣지 않았지. 그런데 강자아는 계속 대나무 막대기로 밥을 먹었고 그 모습을 본 다른 사람들도 따라 해 널리 전파됐다는 거야."

 

- "아니요. 그 전설에는 잘못된 부분이 있어요." 샤오쿠이가 말했다. "제 기억에는 전국시대의 고서에 '주위상저이기자포(紂為象箸而箕子怖)'라는 말이 있어요. 상나라 주왕이 상아로 젓가락을 만들자 그의 숙부인 기자가 걱정했다는 뜻인데, 이를 통해 기자의 선지자적 면모를 부각하죠. 이것은 강태공 이전에 젓가락이라는 도구가 있었다는 말이에요."
"그러면 샤오쿠이가 들은 젓가락의 유래는 뭐야?"
"제가 본 책에서는 젓가락은 대우(大禹)가 발명했다고 돼 있었어요 우는 순(舜) 임금의 명령으로 치수 작업을 하던 중 계속되는 작업으로 쉴 시간이 없어 식사 시간을 절약하려고 나뭇가지나 얇은 대나무로 뜨거운 국물에서 고기를 집어 먹었다고 해요.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따라 했고요."

- 아원을 쳐다보자 그는 입이 찢어져라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하, 그 전설은 너무 터무니없어. 작업이 아무리 바빠도 밥 먹을 시간까지 아낄 리는 없잖아."
"하지만 새가 말을 하고 대나무 가지가 독에 닿아 연기가 났다는 것보다는 그럴듯하잖아요? 이렇게 생활과 밀접한 설이 더 현실적이라고요."

 

- "하나라 우임금의 치수에 관한 전설은 많아. 하지만 하나라의 다른 전설과 마찬가지로 모두 허구야. <한서·무제기(漢書·漢書紀)>에 주를 단 안사고(顔師古)가 인용한 <회남자(淮南子)>에 따르면, 우임금이 치수를 위해 큰 곰으로 변해 돌을 파고 있었는데 임신한 그의 아내가 밥을 갖고 오다가 그 모습을 보고 깜짝 놀라 돌로 변했다고 해. 우의 아들 계(啟)는 그 돌을 깨고 나왔다고. 이건 황당하지 않고? 그래, '현실에 밀접하게' 생각해 보자. 치수는 대규모 수리 공사라 혼자 힘으로는 못 해. 대규모 수리 공사를 주관하는 우임금이 '직접 수로를 팠다'라거나 '밥 먹을 시간이 없다'라는 것도 마찬가지로 말이 안 되지. 지도자가 침식을 전폐할 정도로 바쁘고 세부 사항까지 직접 처리한다면 그건 책임감이 강하다기보다 무능하고, 부하를 못 믿고, 효율성도 떨어져 지도자감이 안 된다는 거야."
"옛날 사람은 그런 생각이 없지 않았을까요? 그 시대는 단순했을 거예요. 요(堯) 임금은 순이 마음에 들어 선양했고, 순은 우를 높이 사서 왕위를 물려주었다고 하잖아요? 현대인의 복잡한 논리를 고대 사회에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무리라고 봐요." 
"현대인은 복잡하고, 고대인은 단순하다? 문명의 발전을 너무 높이 평가하지 마. 사실 인류는 수천 년 동안 별로 진보하지 않았어." 아원이 조소를 날렸다. "선양이니 하는 말은 모두 승자의 거짓말이라고 한 학자가 있었지. 모든 게 정치적인 조작일 뿐이라고."
 
- 스 박사가 선반에서 작은 청자 찻잔 세 개를 내와 우리에게 차를 따라주었다. 위 교수가 웃으며 스 박사는 차 전문가이고 찻잎도 귀한 것이라고 설명해 주었다. 하지만 나는 차는 문외한이라 한 모금 마셔봐도 도대체 뭐가 좋다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찻잔은 딱 봐도 귀해 보였다.
"스 박사는 옛 물건 감정 전문가야. 우리 H대학 미술박물관의 자문 중 한 명이지."

 

- 위 교수가 스 박사에게 린위안의 인터뷰와 우리의 그 진실과 거짓이 뒤섞인 이야기, 그리고 이곳에 온 이유를 설명한 다음 우리에게 말했다.
"십여 년 전, 고고학자 하나가 툰먼싸오관후(屯門掃管笏) 유적지에서 여러 왕조의 유적과 유물을 발굴했어. 멀게는 신석기시대부터 가깝게는 청나라 말기까지 다 있었지. 그중 한(漢) 나라 말기에서 위진남북조 시대의 고분에서 흥미로운 부장품이 많이 발견됐어."

"이십여 점의 부장품 중에서 젓가락 여덟 쌍을 찾았지요."
스 박사가 책장에서 문서 파일을 하나 가져와 사진 몇 장을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그것을 본 순간 나는 멍해졌다. 사진 속 젓가락의 형태와 길이가 산호 젓가락과 거의 비슷했기 때문이다. 젓가락 위아래의 굵기가 비슷하고 일반 젓가락보다 약간 짧았다. 심지어 비슷한 소용돌이 문양이 새겨져 있었고 그중 한쪽은 은 같은 금속으로 싸여 있었다. 세월에 은박이 부식되고 떨어져 나가 길이가 다를 뿐이었다. 하지만 사진 속 젓가락들은 붉은색이 아니었다. 옥을 조각해 만들었는지 녹옥(綠玉)의 천연 돌무늬가 있었다. 

- "학생 집안의 젓가락은 이 옥 젓가락의 원형일 가능성이 있어요."
"그냥 비슷할 뿐 꼭 관련이 있는 건 아닐 수도 있잖습니까?" 스박사가 왜 이렇게 비약해서 생각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우리는 고분 유적에서 문자가 새겨진 정방형 석각을 발견했어요. 문자는 대부분 마모됐지만, 마지막 한 면은 잘 남아 있어서 읽을 수 있죠."

- "사람이 삽혈을 통해 '선군'을 소환하여 소원을 이뤘다고 쓰여 있어요."
"아, 선군!" 나는 그제야 이 두 글자의 의미에 관심이 갔다. "맞아, 자네 가문에서 전해지는 이야기 속 왕선군."
위 교수가 차를 한 모금 마시며 말을 이었다.
"자네가 당나라 때 '왕종천'이라는 부마를 못 찾은 건 당연해. 이 젓가락은 그 시대의 것이 아니니까. 당나라는 기원후 7세기에 개국해서 10세기에 멸망했고 위진은 3세기에서 5세기까지 이어졌으니 이백 년 정도의 차이가 있지. 가보의 유래는 보통 구전으로 전해져. 예를 들면 명나라 사람에게는 진나라나 당나라나 모두 팔백 년에서 천년도 전의 먼 옛날에 있었던 나라야. 누군가 여기에 그럴듯한 이야기를 덧붙여 조상의 이름을 더 빛나게 하는 거지. 황제가 하사한 물건이다, 하고. 이런 과장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어. 현대인의 시각에서 보면 당송명청 다 같은 옛날이라 와전된 내용이 전해지는 것이지."

 

- "그러니까 '산호 젓가락에 신선이 깃들어 있다'라는 말이 전혀 근거가 없는 소리는 아니라는 말씀인가요?"
내가 물었다.
"출처는 있다는 거죠. 단지 젓가락에 정말 귀신이 붙어 있다는 게 아닐 뿐." 스 박사가 말했다. "고대 사람들은 '신(蜃)'이라는 무명조개가 도시의 환상을 보게 하는 기운을 내뿜는다고 생각했어요."

- "그분은 타이완에 사십니다." 위 교수의 추궁을 피하려고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루 선생님이 하셨다는 말씀은 뭡니까?"
"아, 그는 '자'가 '포박자(抱朴子)'일 거라고 했어."
"갈홍(葛洪) 말인가..."


- "맞아, 포박자 갈홍, 사람들은 '갈선옹(葛仙翁)'이라고들 불렀지. '포박자'는 그의 호야."
위 교수가 강의하듯 우리에게 설명했다.
"그는 진나라의 유명한 도교 신자로 스무 살 이후 광둥 성 뤄푸(羅浮) 산, 지금의 후이저우(惠州) 근처에서 은거했지. 시대와 장소가 비슷하니 무덤 주인과 갈홍이 알았을 수도 있어. 갈선옹은 명망 높은 인사였어. 동진(東晉)의 권신 왕도(王導)에게 발탁됐으나 도술과 연단(煉丹)에 심취해 관직에서 물러났고, 뤄푸 산으로 돌아와 은거하며 도를 수련했지."
"'자'자가 갈홍일 가능성이 없진 않지만 증명할 수 있는 증거가 없어요. 학술계에서는 갈홍의 생졸년도 아직 밝혀내지 못하고 있거든요. 우리 같은 사학자들은 학술적 측면에서 저주와 기도를 연구할 순 있지만, 불가사의한 힘을 진짜라고 말하는 건 연구자의 자세에 걸맞지 않은 감이 있어요."

- "루 선생님이 말씀하신 불가사의한 힘이 뭔데요? 단순히 무덤 주인과 갈홍이 안면 있는 사이였다고 가정하면 말이 되잖아요?"
내가 물었다.
"스 박사와 루 선생은 마지막 두 글자에 대한 견해가 달라." 위 교수가 설명했다. "스 박사는 무덤 주인이 도술에 빠진 관료였다고 생각해. 그가 신선을 만나고 싶어 도술 스승에게 간청했고 스승이 그에게 젓가락 한 쌍을 줬다고. 그런 다음 그가 젓가락에 피를 바르니 환각이 일어나 신선을 보게 됐고, 소원이 이루어지자 미련 없이 세상을 떠났다는 거야." 


- "'삽혈(唼血)'은 '삽혈로 동맹을 맺다'의 '삽혈(歃血)'과 같은 뜻으로, 입가에 피를 바르는 의식을 말해요. 나는 그 젓가락에 어떤 약물이 묻어 있었고, 그가 젓가락으로 피를 찍어 입에 바를 때 자연스럽게 흡입해 환각을 본 거라고 생각해요." 스 박사가 말했다. "도가의 연단은 수은과 납을 많이 사용하고, 중금속 중독은 정신을 흐리지요."
"하지만 루 선생은 다른 견해를 갖고 있어. 한 번은 모임에서 석각과 젓가락 이야기가 나왔는데, 그는 '삽혈'은 의식의 한 형식으로 그 관료가 자기 피를 젓가락에 묻혀 신선을 소환했고, 신선이 그 사람의 소원을 이뤄주었다고 해석했어."
"그건 서양의 악령 소환 의식이 아니야?" 스 박사가 비아냥거렸다.

- "말이 바뀐 거지. 내가 산호 젓가락에 귀신이 깃들어 있는 게 아니라 그게 연결 도구라고 말했지? 그 작가 선생이 죽은 아이와 접촉하는 데 사용한 것도 선군을 소환한다는 개념과 방법은 달라도 효과는 같아. 그런데 범인은 젓가락으로 기원하고 이익을 얻는 방법을 어떻게 알았을까? 정말 '선군'이 강림했다면 어렵지 않아. 말하다 보니 핀천이 한 말이 맞는 것 같네. 젓가락이 알라딘의 램프 같아." 
"난 그냥 아무 말이나 한 건데, 중동 이야기에 비유하기는 좀 그렇잖아."
"중동? 알라딘의 램프는 중국 이야기야."

- "알라딘은 <천일야화>에 나오는 이야기 아니야?"
내가 이상해서 물었다.
"맞아, 하지만 원본은 그것과 조금 달라."
아원이 손을 내밀어 으쓱하면서 희극 배우처럼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알라딘의 램프'는 18세기에 어떤 프랑스인이 유럽인을 위해 쓴 버전에 추가된 이야기야. 캐릭터들은 모두 아랍 이름에 이슬람교를 믿고 황제 대신 술탄이 등장하지만, 분명히 '중국의 어떤 도시에 가난한 재봉사가 살았는데 그에게는 알라딘이라는 아들이 있었다'라고 시작돼. 당시 유럽인은 동양에 대한 개념이 모호했으니 그럴 법도 했지. 근데 물건으로 사람의 소원을 이뤄주는 정령을 불러내는 민간 전설의 근원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정설이 없어." 

- "도교 신자라고 했으니 강령과 신선에 대한 배경지식이 있을 거예요. 그러니 제일 의심스럽지 않나요?"
샤오쿠이의 말대로였다.
"의심스럽지. 근데 증거가 없는 상태에서 함부로 결론을 내려서는 안 돼. 핀천의 형도 도사지만 젓가락으로 나쁜 일을 하려고 하지 않았어."
아원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아, 정말 모르겠다!

- "맞다, 옛날에 홍콩에도 마을이 있었어? 진나라 때의 무덤이 있을 줄은 몰랐어."
마침 생각난 김에 물었다.
"1950년대에 발견된 이정옥(李鄭屋) 고분은 그보다 오래된 한나라 때 묘실인데?" 아원이 웃으며 말했다. "이 도시는 변화가 너무 빨라서 이십 년만 지나도 풍경이 확 달라져. 하물며 이천 년이야..." 

 

- "'석문의 '자'자가 '포박자'라고 어떻게 확신하세요?"
"학생, 갈선옹 시대를 이해할 필요가 있겠어요. 광저우에는 뤄양(洛陽), 창안(長安)과는 달리 번화한 도시가 없었어요. 문화중심도 아니었고요. 갈선옹이 뤄푸 산에 도교 사원을 창건하고서야 도교 성지가 되었죠. 북송 소동파가 후이저우로 좌천됐을 때도 부임지보다 갈선옹이 연단했던 뤄푸 산 유적에 먼저 들러 참배했다고 하니 포박자의 위치가 어느 정도였는지 알 수 있겠죠? 당시 광둥 성 일대에서 '자'라고 칭할 수 있는 사람은 그 한 명뿐이었을 겁니다. 게다가 석각 내용이 도가와 관계가 있으니 다른 사람일 수가 없어요."
"그래서 선생님은 그가 젓가락의 원래 주인이라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나는 그가 젓가락을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 "갈선옹의 직업이 뭔 줄 압니까?"
"도를 수련한 도사 아닙니까?"
되물으며 슬쩍 아원을 쳐다봤다. 아원이 분명 답을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루 선생 말이 훨씬 중요했다. 그가 하는 말을 들으면 그가 범인인지 아닌지 판단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갈선옹은 화학자이자 생물학자, 의사였어요. 장군에 봉해지고 군대의 참모를 지냈지만 관직에 뜻이 없었죠. 은거하면서 수련하고 사물의 진리를 탐구하고 싶어 했어요. 학생은 도사가 뭐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선을 지향하고, 악을 쫓아내며, 귀신을 다스리는, 종교 제사장 같은 것 아닌가요?"
"아닙니다. 도교는 제세구민의 신앙적인 면도 갖고 있지만 실은 만물의 근원을 탐구하는 학문입니다. <주후구졸방(肘後救卒方)>은 구급 책자로 백성들이 응급 상황에서 간단히 처치할 수 있는 치료법과 손쉽게 구할 수 있는 약초를 적어둔 책이에요. 또 도사의 연단은 화학 실험의 원형으로 서양의 연금술처럼 지식을 확대하는 연구입니다."

- "뤄푸 산은 오늘날의 후이저우와 둥관(東筦) 사이에 있어요. 남동쪽으로 수십 킬로미터 가면 해변이 나와 내륙의 충산 준령(崇山峻嶺)과는 달리 산호를 쉽게 구할 수 있었죠. 갈선옹이 은거하던 시기에 문하생이 많았으니 문하생이 그에게 산호를 구해다 주고, 그가 그것으로 연단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갈선옹이 산호 젓가락의 제작자라고 단언할 수는 없지만, 그에게는 제조할 능력과 조건이 다 갖춰져 있었습니다."
"갈홍한테는 제자가 몇 명이나 있었습니까?"
"많았어요. 삼백 명 정도였다고 합니다." 루 선생이 잠시 멈추고 몇 초 동안 침묵했다가 말했다. "... 아까 학생 집안에서 왕선군의 전설이 전해진다고 했지요?"

- "광둥어에서 '황(黄)'과 '왕(王)'은 동음이에요. 학생의 조상이 잘못 전했다면, 원래 '황선군'이었다면요, 갈선옹의 제자 중에 도를 닦아 신선이 되어 사람들에게 지금도 공양받고 있는 인물이 있어요. 그의 이름은 '황초평(黃初平)'으로 '적송 황대선(赤松黃大仙)'이라고 부릅니다."
"홍콩의 그 황대선이요? 지하철역의...?"
나는 깜짝 놀랐다. 아는 게 많지 않았지만, 그 지명은 알았다.
"맞아요. 물론, 젓가락이 소환한 선군이 황대선이라는 말은 아닙니다. 무덤 주인이 소환한 것은 다른 신선이었는데 후세 사람이 '선군'이라는 두 글자를 기록했고 여러 대에 걸쳐 전해지다 보니 '황대선'과 섞여서 '황선군'이 되었다가 더 시간이 흐른 뒤에는 '왕선군'이라고 잘못 전해진 것이지요. 거기에 부마 이야기가 더해져 학생이 말한 최종 버전이 된 겁니다.”

- "갈 선생이 산호 젓가락을 만들었다면, '피를 젓가락에 묻혀 선군을 소환해 소원을 이룬다'라는 건 어떻게 된 일일까요?"
"그건 검증할 방법이 없습니다." 루 선생이 고개를 저었다.  


- "응, 아니야." 뒷좌석에 앉은 아원이 단호하게 말했다. "하지만 그는 몇 가지 기본적인 오류를 범했어."
"오류?"
"젓가락은 갈홍이 만든 게 아니야."
"그걸 어떻게 알아요?"
"광둥 연안에는 붉은 산호 서식지가 없거든." 아원이 웃으며 말했다.

 

- "붉은 산호는 섭씨 10도 내외의 저온 수역에서 서식해. 광둥 일대는 너무 뜨거워서 해저 150미터 아래로 내려가야 찾을 수 있을걸? 그런데 그 시대에는 그런 첨단 잠수 기술이 없었을 테고. 그리고 옛날에 붉은 산호는 황금보다 더 진귀한 보석이었어. 갈홍의 제자가 아무리 정성스럽다고 해도 그렇게 귀한 물건을 갈홍에게 주었을 리 없고, 갈홍이 받았다고 해도 그것으로 연단을 하지 않고 귀신을 소환하는 젓가락을 만들었을 리 없어. 알아둬. 도사한테는 부적이나 푸지(扶乩) 같이 신을 부를 방법이 많아. 서양의 흑마술 같은 이상한 걸 만들 필요가 없지."

- 푸지 : 나무로 된 틀에 목필을 매달고, 그 아래 모래판을 두고 두 사람이 틀 양쪽을 잡아, 신이 내려 목필이 움직이면 모래판 위 글자나 기호를 읽어 길흉을 점치는 것
 
- "그러니 '삽혈로 신을 청한다'라는 건 가짜다?" 내가 물었다.
"그건 또 아니야. 내가 알고 있는 바에 따르면 그건 사실일 거야. 이런 추측을 해볼 수는 있어. 만약 그 '자'가 정말 포박자라면 그는 우연히 이 젓가락을 얻고, 젓가락에 선군을 소환하는 힘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을 수 있어. 그는 실험광이었으니까... 아까 루 선생이 말한 <주후구졸방>에 광견병 치료법이 있거든? 사람을 문 개를 죽여서 그것의 뇌수를 감염자의 상처에 바르는 거야."
"너무 괴상해! 그걸로 정말 치료가 됐어?"
"합리적인 방법이라고도 할 수 있지. 천오백 년 뒤에 프랑스의 생화학자 파스퇴르가 광견병 백신을 발명하는데 그때 이용한 것도 감염된 동물의 뇌 조직을 배양한 거야."
이야기를 들으니 갈선옹이 신성한 건 모르겠지만 대단한 사람 같긴 했다.

- "루 선생도 '하늘이 선택한 사람' 아니에요? 나랑 핀천의 기운을 알아봤잖아요."
"그건 가짜야." 아원이 말했다. "가짜라고 하는 것도 정확한 말은 아니네. 어쨌든 그는 진짜라고 믿고 있으니까. 하지만 기운이 보인다고 하는 건 그의 착각일 뿐이야."
"확실해?"
"백 퍼센트 확실해." 아원이 나와 샤오쿠이 사이로 머리를 쑥 들이밀며 말했다. "내가 그에게서 기운을 못 느꼈거든."

- "도대체 그 '선군'은 뭘까요?"
다음 날 계획을 정한 후, 소파에 앉아 쉬고 있던 샤오쿠이가 물었다.
"뭐라고 생각하는데, 샤오쿠이?"
아원이 반문했다. 나는 이 문제는 전문가가 답하도록 두었다.
"소원을 이루어줄 정도로 강한 신선? 아니면 핀천 말대로 램프의 요정 같은 존재?”

- "보통 사람은 '신(神)'과 '선(仙)'의 개념을 혼동하는데 둘은 달라. '신'은 원래부터 그냥 '신'이지만 '선'은 인간이 변한 거지. 고대에는 '선'이라는 글자가 없었고 '선(僊)'이라는 글자를 썼어."
아원이 종이를 가져와 글자를 썼다.
"인간이 산속으로 '옮겨가서(遷)' 늙지 않고 죽지 않으면 '선(僊)'이 돼. 이게 원뜻이고 나중에 한자가 단순화되어 '선(仙)'이라는 글자로 대체된 거야.”
"잠깐만, 고대에는 인간이 신으로 변한 예가 있잖아?"


- "어제 네가 말한 강자아는 <봉신방>에서..."
"<봉신방>, 즉 <봉신연의(封神演義)>는 소설이잖아. 게다가 고대로부터 이천오백 년 후인 명나라 때의 작품이고. 신으로 봉해지는 봉신 어쩌고 하는 것은 다 억지야. 네가 진시황은 사실 현대인이고 시공을 초월해 과거로 가서 모험한 거라고 소설을 쓰는 거랑 다를 바가 없어. 내가 말한 건 '신선'의 원래 개념이야. 춘추전국시대 중원에서는 철학과 종교 사상이 싹튼 계몽시대가 시작됐어. '신선'은 사회학과 인류학이 만든 개념이고 인간이 봉신되고 죽은 사람이 신선이 된다는 '성선(成仙)' 역시 여기서 파생된 거야. 생각해 봐. 원래 늙지 않고 죽지 않아야 '선(仙)'이라고 부를 수 있어. 가오수란 집안의 산호젓가락 이야기는 부마가 죽은 뒤에 왕선군이 됐다고 전해지는데, 그건 굉장한 모순이 아닌가? '성선'이라는 말 앞에는 도를 깨달았다는 '득도(得道)'가 붙어야지, 세상을 떠났다는 '서세(逝世)'가 아니라.”

- "그렇다면 젓가락을 훔친 범인이 소환한 '선군'은 신이에요, 선이에요?"
"그건 이계의 물체."
아원이 웃음을 거두고 진지한 표정으로 샤오쿠이를 봤다.  

- "'생물'이라는 단어는 쓰고 싶지 않아. '생물'은 인간이 정의한 거잖아. 다른 차원에서 온 '의식'라고 할 수 있겠네. 인간의 시각에서 이 '물체'를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해. 그건 소설 캐릭터에게 독자와 작가, 편집자의 존재를 이해하라고 하는 것처럼 당황스러운 일이지. 하지만 이 이계의 물체가 이 세계의 인과율에 간여해 카르마의 흐름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건 알 수 있어. 원흉이 그것을 이용하고 있는 것도." 

- "어째 공포 영화 같은데?"
분위기를 전환할 겸 나는 빈정거리는 투로 말했다.
"맞아, 이 세계가 한 편의 공포 영화야. 무지한 인간은 미지에 둘러싸여, 허공에 떠 있는 파란 구체의 표면에서 생활하면서 허공 밖에 뭐가 있는지 모르고, 구체 안에 뭐가 있는지는 더더욱 모르지. 문명을 건설했지만, 인간의 마음은 취약하기 짝이 없어. 수천수만 년이 흘렀는데도 여전히 본능에 지배당하고 욕망에 굴복해 이 작은 세계를 혼란과 모순으로 가득하게 했지. 자신들이 차원 사이에 있는 아주 작은 티끌에 불과하고, 이계의 어떤 존재에게 조종당하고 있다는 것은 더더욱 몰라. 어린아이는 개미를 갖고 놀다가 기분이 좋으면 설탕을 뿌려주고 기분이 나쁘면 개미굴에 물을 부어 개미의 운명을 바꾸잖아? '이계의 물체'에게 인간 세상의 인과응보나 개미의 행동 유형은 똑같이 미미해. 아무 의미가 없어." 
 
- "옌 상무, 여러 해 동안 이 자를 이용했으니 잘 알겠지. 그는 다른 사람의 에너지를 '먹어' 저장해야 너 대신 더러운 일을 할 수 있다는 걸. 우리 같은 신선이 먹는 에너지가 뭔 줄 알아?"
아원이 실실 웃으며 물었다.
"생, 생명력? 아, 아니면 수, 수명?"
옌짜이산이 겁먹은 표정으로 되물었다.
"아니, '스칸다(skandha)'야. 흔히 '온(蘊)'이라고 하지. 불경에서 자주 언급되는 '오온(五)'의 그 '온'."

- "오온이란, 색(色), 수(受), 상想), 행(行), 식(識). 간단히 말해서 인간의 생리와 심리를 구성하는 요소로, 정신과 추상적인 자아의 존재까지를 포함해. 가령 어떤 사람의 상온과 식온을 빼앗아가면 그는 꼭두각시가 되고, 수온을 빼앗아가면 오감을 잃은 식물인간이 돼. 이 가운데 행온은 인간의 행동과 욕망과 관련돼서 행온을 일부 가져가면 어떤 행위에 대한 욕망이 사라지지. 감옥에서 성범죄자에게 화학적 거세를 하는 것과 마찬가지야."

 

- <해시노어>, 찬호께이

 

해시노어(亥豕魯魚)


해시(亥豕)는 <여씨춘추(呂氏春秋)>에 나온 말이다. <사기>를 읽던 사람이 "진나라 군대의 돼지 세 마리가 황하를 건넜다(晉師三豕涉河)"라고 하자 자하가 "그게 아니고 기해 날에 강을 건넜다(己亥涉河)"라는 말이라고 정정해 주면서, '기(己)'와 '삼(三)'이 비슷하고, '해()'와 '시()'가 비슷하다"라고 덧붙였다.

노어(魯魚)는 <포박자>에서 나온 말로, "서책을 세 번 베끼면 '어()' 자가 '노(魯)' 자가 되고, '제(帝)' 자가 '호(虎)' 자가 된다"라고 했다. 글자 형태가 비슷해 베껴 쓰고 판각을 하다 보면 오류가 생긴다는 말로, 전달하는 과정에서 원래의 뜻을 잃는다는 말이다.

순서를 바꾸어 노어해시(魯魚亥乘)라고도 함.


 


산호 뼈 珊瑚之骨

쉐시쓰 薛西斯

 


후기가 한 줄도 써지지 않아 걱정이었다. 후기를 쓰는 건 작가의 천직이 아닐뿐더러 이번에 함께한 작가들은 모두 평소 내가 존경하던 분들이었다. 후기도 그분들 글과 나란히 실린다고 생각하니 불안이 앞섰다. 분량은 얼마나 돼야 할지, 진지하게 써야 할지 가볍게 써야 할지, 다른 사람은 어떤 식으로 후기를 쓸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어려움에 빠졌다.

켄 폴릿의 <대지의 기둥>에 등장하는 수도원 부원장이 건축가 톰에게 왜 대성당을 짓냐고 물었다. 톰은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지만 결국 한 마디로 말했다. "아름다우니까." 나는 이 말이 톰의 후기라고 생각한다. 나도 그런 후기를 쓰고 싶다. 모든 작가가 혼신의 힘을 다해 글을 쓰고, 톰과 같은 후기를 내놓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아름다우니까"라고 하면서 소설을 내놓을 수 없는 시대가 되었다. 우리는 갖가지 방법을 동원해 독자가 성당으로 들어올 이유를 만들어내야 한다. 이번 기획은 독자들의 호기심을 자극할 거리가 많다고 생각한다. 흔치 않은 다국적 작가 진영이 시작부터 궁금증을 자아낸다. 어떤 종류의 협력일까? 세 지역 작가의 소설 스타일은 어떻게 다를까? 제각각 뻗은 이야기를 하나로 모을 수 있을까? 심지어 우리 작가가 다른 작가에게 질 수 없지! 하며 경쟁심을 부추길 수도 있다. 

그런데, 훌륭한 선배들 앞에서 나는 어떤 추리 공포 소설을 써낼 수 있을까? 나는 젓가락의 음산하고 공포스러운 전설을 포기하고 공예품으로서의 정교한 면과 '쌍을 이루는' 축복의 이미지를 선택했다. 그리고 아름다움이 추악하기 짝이 없는 공포로 전락하고, 이야기 속에서 탐정과 살인자, 피해자의 위치가 반복적으로 역전되도록 설계했다. 그러면서 산호의 정체도 드러냈다. 타이완, 홍콩, 일본은 모두 물에 가까워 기획 초기부터 '바다'가 테마 후보로 올랐으나 아쉽게 마지막에 탈락했다. 그러나 홍콩에서 나고 자란 홍콩 토박이로서 이야기에 바닷소리를 넣고 싶었다.

소설을 갓 탈고했을 때는 피곤하다는 생각 뿐(함께 애써준 편집자에게 감사를!), '협력'이나 '경쟁' 같은 것은 실감이 나지 않았다. 예터우쯔 선생과 미쓰다 신조 선생의 흥미로운 소설을 읽고 나서야 피곤에서 벗어나 독자의 입장에서 이야기의 즐거움에 흠뻑 빠질 수 있었다. 동일한 테마와 제한이 주어졌지만 선택한 방향이 각기 달라 흥미로웠고, 스타일만으로도 세 지역 작가를 어렵지 않게 구별할 수 있었다.

하지만 샤오샹선 선생과 찬호께이 선생이 후반부 대단원의 막을 내리는 것을 기다리면서 방관자에서 다시 참여자로 돌아갔다. 어떤 부분은 내가 시작을 해놓고 다른 사람의 소설을 보면서 "진실이 이거였어!" 하고 감탄하기도 했다. 정말 빈틈없이 훌륭해 덕분에 내 졸작도 빛을 발하는 것 같았다. 이런 창작 형태를 경험해 본 적이 없어 그제야 내가 정말 대단한 기획에 참여했다는 것을 실감했다.

혼자 했다면 단색 석재로 된 단출한 성당을 만들었을 테지만 협력하니 재료가 풍부해지고 더 완벽해졌다. 대성당에 스테인드글라스가 생기고, 아치형 천장이 생기고, 첨탑이 생겨 시야가 확 넓어졌다. 참여 작가들과 이런 대담한 기획을 제안한 편집부에 감사한다. 특히 이 과정에서 책임이 가장 막중했을 이는 책임 편집자였을 것이다. 이렇게 훌륭한 건축 공사에 참여할 수 있게 되어 진심으로 감사한다.

덧붙여 나도 사람들이 참여할 이유를 열심히 만들고 있다. 가령 <산호 뼈>의 탐정은 나와 만화가 앵무주(鸚鵡洲)가 공동 작업하는 월간 <CCC 창작집>의 추리 만화 <불가지론 탐정>의 주인공으로 등장할 예정이다. 만화의 탐정이 마음속에 지닌 마지막 일 퍼센트의 유신론은 무엇인지 답을 줄 것이다. 

마지막으로 소소한 에피소드를 하나 털어놓자면, 타이완은 '산호 왕국'이라고도 불려 관광지 어디를 가나 산호 공예품점이 있다. 이 이야기를 쓰면서 자주 구경을 갔는데 한 번은 분재만 한 크기의 산호 조각을 가리키며 "이건 얼마예요?" 하고 물었다. 그러자 직원이 아주 가벼운 말투로 "그건 500만(한화 약 2억 원)이에요"라고 대답했다.

얼른 도망가고 싶은 충동을 누르며 미소를 지으면서 직원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동시에 소설 속 인물들의 산호를 향한 거친 행동이 떠오르면서 어떤 것은 모르는 게 더 행복할 수 있고, 서민의 행복은 바로 이런 소박함에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주의 그물에 걸린 물고기>

 

예터우쯔 夜透紫

 


의견을 내준 린쩌류(林赜流) 선생님, 나와 함께 길고 긴 수정 지옥을 건너준 책임 편집자 샤오 K에게 진심으로 감사한다. 샤오 K는 매우 친절한 편집자다. 특히 최근 일 년 동안 내가 개인적 사정을 핑계로 마감을 몇 번이나 미룬 것도 이해해 주었다. 하지만 원고에 대해서는 가차 없었다. 허점이 있는지, 개선해야 할 부분이 있는지 아주 엄격하게 반복 확인하면서 나보다 더 이 이야기에 집중했고, 나를 포기하지 않았다. 그녀의 채찍질로 내 소설은 초고보다 훨씬 짜임새가 생겼고, 완성도도 훨씬 좋아졌다. 이제 나는 초고가 담긴 파일을 열어볼 용기조차 나지 않는다. 그저 흑역사를 삭제해버리고 싶은 마음뿐. 

다시 소설 이야기로 돌아와, 다른 작가의 원고를 받기 전까지 우리는 상대가 무엇을 쓰는지 잘 몰랐고, 세 지역 작가가 모인 만큼 시작할 때부터 내가 쓰는 이야기에 반드시 홍콩 현지 전설과 특색이 들어가야 한다는 게 정해져 있었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홍콩은 요괴 이미지보다 사이버 펑크한 느낌이 강한 도시였다. 수많은 요괴 전설은 유실되었거나 희미해졌다. 현지의 불가사의한 전설을 찾으면서 동시에 기획에 어울리는 요소를 고려해야 해서 정말 머리가 아팠다. 결국 홍콩 사람이라면 다 아는 신냥탄 전설을 선택했고, 물에 관련된 소재가 다른 작가의 이야기와 연결되기를 바랐다. 

이 기획에 참여하면서 나는 예전에 릴레이 소설을 쓴 경험을 살려 앞 주자가 쓴 이야기의 요소를 많이 이용할 수 있기를 바랐다.
하지만 미쓰다 신조 선생의 원고를 받은 뒤 시간과 공간의 차이로 각 캐릭터를 직접적으로 연결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게다가 아쉽지만 추리소설의 합리성과 이야기의 완전성만 놓고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나의 뇌 용량을 다 써버렸다. 그래서 찬호께이 선생이 내 이야기 속 캐릭터를 발전시키고 다른 이야기 속 캐릭터와 상호작용시킨 것을 보고 환호성을 지르며 얼른 짐을 싸 내 캐릭터를 그 집에서 살라고 보내버렸다(웃음).

끝으로 평소 존경하던 작가들과 '같은 무대에 서게' 되어 영광이고, 진심으로 감사한다. 

 


 


악어 꿈 鰐魚之夢

샤오샹선 瀟湘神

 

 
처음 릴레이 소설이라는 기획을 들었을 때 바로 관심을 보이긴 했지만 기획의 규모를 실감하지 못했다. 그러다 첫 번째 주자가 미쓰다 신조 선생, 마지막 주자가 찬호께이 선생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는 거의 기절할 뻔했다.

미쓰다 신조 선생의 <잘린 머리처럼 불길한 것>은 지금도 가끔 꺼내 읽는 소설이다. 추리 테마가 매우 강한 작품으로 추리 소설 팬이 아니고 왜 이렇게 설계했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이에게도 추리문화의 골든 드롭(Golden Drop)으로 칭해질 만한 작품이다. 찬호께이 선생의 <13.67> 역시 본 순간 경탄을 금할 수 없었다. 구성이 매우 탄탄하고 홍콩 역사 부분도 힘이 넘쳤다. 이 두 작가와 함께 작업하게 돼 흥분되면서도 "와, 내가 정말 이분들과 함께할 자격이 있나?" 하고 소름이 돋았다.
 
하지만 이 릴레이 소설에서 흥미진진한 부분은 첫 번째와 마지막 소설만은 아니다. 부끄러운 말이지만 나는 쉐시쓰 선생의 작품을 읽은 적이 없다. 하지만 <산호 뼈>는 막힘없는 전개에 엔터테인먼트도 겸비해 다 읽자마자 아내에게 보여주고 친구들에게도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동시에 아직 홍보 단계가 아니니 주변에는 말하지 말라고 부탁했다.) 예터우쯔 선생도 대단했다. <저주의 그물에 걸린 물고기>는 마치 영화를 보는 것 같았다. 세 편의 소설을 무척 재미있게 읽었지만, 문득 의문이 들었다. 이렇게 반전이 가득하고 구조가 복잡하며 정보량이 많은데 정말 2만 자 안에 마무리 지었다고...? 그래서 나는 슬쩍 글자수를 확인해 봤다. 과연! 미쓰다 신조 선생만 애초 계획한 2만 자 규칙을 지켰다. 그렇다면 이야기의 후반부를 맡은 내가 무슨 수로 2만 자 안에서 해결한단 말인가?! 그래 다 덤벼라! 이런 마음으로 작업에 돌입했다!

하지만, 소설은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았다.
릴레이 소설인데 미쓰다 신조 선생만 일부러 미스터리의 여지를 남겨두었을 뿐, 다른 두 작품은 아무리 봐도 그 자체로 하나의 완성품이어서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었다! 나는 무척 고심했고, 2018년 연말에 넘기기로 한 원고를 2019년 4월에야 넘길 수 있었다. 그동안의 좌절과 고통은 말로 다 표현하기 힘들다. 내가 마감을 연기하면 출판사도 출간 스케줄이 있으니 다음 작가의 집필 시간이 줄어들 게 뻔했다. 정말 송구스럽기 짝이 없었다. 


이야기의 마지막 형태도 내가 예상했던 것과는 달랐다. 처음 구상한 이미지는 이랬다. 시간 배경은 대략 1980년대, 한 소년이 알몸으로 청록색 호수에서 수영하고, 햇빛이 소년의 몸에 흐르는 강물을 비추어 찬란한 금빛이 그의 가늘지만 탄탄한 신체 곡선을 부각한다. 다른 소년은 강변에 서 있고 두 사람은 예전의 비밀에 대해 말한다. 이때 렌즈가 위로 넘어가 호수 면과 소년의 몸을 지나 호수 아래의 폐허를 비춘다... 처음 내가 쓰려던 것은 낭만적이고 노스탤지어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청춘 스토리였다. 그러나 이야기를 수정하는 과정에서 이런 낭만적인 상상은 전부 사라지고 슬프고 애통한 이야기가 돼버렸다. 애초 구상과는 전혀 달라졌지만, 나의 스타일을 잘 보여주는 이야기였다. 그간 나는 기괴한 사회 기능에 대해 써 왔는데, 이 또한 내가 맡은 부분의 핵심 중 하나다. 이 이야기가 성 노동자의 어려움과 고충을 너무 가볍게 다루거나 심지어 낭만적으로 묘사한 것은 아닌가 고민에 빠지기도 한다. 릴레이 소설이라는 제한 하에서 나는 내 능력을 다 쏟았지만, 사회적 책임은 다하지 못한 것 같다. 미쓰다 신조 선생의 <유녀처럼 원망하는 것(幽女の如き怨むもの)>이 2019년 하반기에 타이완에서 출판되었는데 마침 성 노동자의 운명이 주제였다. 일본과 타이완은 상황이 다르지만 두 나라의 성 노동자 모두 체제와 사회 가치관의 피해자로, 독자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킬 만한 부분이 있었다.

 

<유녀처럼 원망하는 것>을 언급하니 떠오르는 게 있다. 나는 <악어 꿈>을 탈고하고 난 뒤 이 책을 읽었는데 책에 탐정이 진실을 밝히기 위해 유곽의 옛 고객들을 인터뷰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리고 <악어 꿈>에서 미쓰다 신조 선생으로 대표되는 작가 M선생도 비슷한 일을 한다... 예전 릴레이 소설 작업 때도 '각각의 작가가 채택한 요소가 의외로 맞물려 새로운 의미를 탄생시키는' 경우가 있었다. 마치 작가 뒤에 어떤 거대한 손이 전체적인 이야기를 짜는 것처럼. 이야기는 작가의 손을 떠났다가 다시 돌아와 작가의 손을 물어 작가가 이야기 속 일부가 되게 한다. 정말 우리 뒤에 더 높은 차원의 소설가가 있기라도 한 걸까? 경험을 해봐서 그런지 이런 망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해시노어 亥豕魯魚

찬호께이 陳浩基



2017년 여름, 편집자 K에게서 번역 소설 분야에서 벗어나 중국어 오리지널 창작 작품을 출판할 계획이라는 말을 들었다. 당시 K는 '같은 주제로 여러 명의 작가가 공동 집필'하는 단편 모음집 개념을 제안했다. 나는 매우 흥미로워 흔쾌히 응했고, 동시에 대담한 의견도 제시했다. 굳이 중국어권 작가로만 국한할 필요가 있냐는 것이었다. 나는 '좋은 작품은 국경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고, 출판사는 번역 소설 출판의 명가였기 때문에 다국적 단편 모음집을 내는 게 더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다. 회신에서 이런 제안을 했지만 그렇게 하기엔 걸리는 문제가 많아 정말 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결론적으로 편집자들은 갖가지 기술적 어려움을 극복하고 거물급 소설가인 미쓰다 신조 선생을 라인업에 합류시켰다. 매우 기뻤고, 그들의 능력에 진심으로 탄복했다.  

기획 초기, K는 나더러 릴레이 소설의 마지막 주자를 맡아달라고 했다. 물론 나는 마지막 주자의 고충을 익히 알았지만, 어느 정도는 자신이 있어 흔쾌히 승낙했다. 그때 나는 네 명의 소설가가 어떤 이야기를 써도 그것들을 하나로 연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밖으로 한 겹 나가서' 앞선 네 편을 이야기 속 이야기가 되게 하고 아울러 메타픽션 방법으로 각 소설의 요소를 연결하면 일사천리로 써 내려갈 수 있겠지, 하고 생각했다.
너무 순진한 발상이었다.

샤오샹선 선생의 <악어 꿈>은 시작부터 메타픽션 요소를 사용해 내가 간계를 부릴 수 없게 만들었다. 미쓰다 신조 선생과 쉐시쓰 선생, 예터우쯔 선생의 훌륭한 이야기를 거의 완벽하게 연결하는 탄탄한 구성이 돋보인 데다 작품에 사회 문화적인 의미도 부여했다. 네 편의 작품을 읽고 나는 놀랍고도 기뻤다. 기뻤던 것은 이렇게 재미있는 작품을 읽을 수 있고 참여까지 할 수 있다는 것 때문이었고, 놀랐던 것은 내가 유한한 시간 안에 흥미로운 결말을 생각해 내야 한다는 것 때문이었다. 나는 <악어 꿈>이 이미 이야기에 완벽한 마침표를 찍었다는 생각이 들어 내가 어떻게 연결하는 훌륭한 작품에 사족을 붙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섹

가장 고민스러웠던 것은 <악어 꿈>을 다 읽고 여운이 너무 좋았는데 내가 마지막 장에서, 이미 구원받은 캐릭터를 끌어내 다시 고난을 겪게 할까 싶어서였다. 그건 내 창작 원칙에 위배되는 것이었다. (나는 영화 <에이리언 3>의 설정에 매우 반감을 가졌기 때문에 비슷한 짓을 할 수 없었다.) 오랫동안 고민하다 생각을 바꿔 작품의 분위기를 잊고, 공포 미스터리를 포기하고, 다른 각도에서 이 이야기의 마지막 장을 쓰겠다고 결심했다. <해시노어>를 모험과 SF, 희극으로 만들자고 스필버그가 영화를 찍듯이! '재미있고 흥미로운'에 중점을 두어 독자가 유쾌한 결말을 읽기를 바랐다. 어쩌면 이것이 릴레이 소설의 최상의 맛일 수도 있다. 각 소설은 분명 독립되어 있지만 서로 연결이 되고, 분명 같은 인물인데 조금씩 차이가 있다. 마치 다국적 퓨전 요리, 수박을 넣은 문어 크림수프(이 기묘한 요리를 싱가포르에서 먹어봤는데 의외로 맛있었다)처럼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지만 조화를 이룬다. 분명 이런 독특한 맛에 빠지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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