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자 : 황정은
출판 : 책과나무
출간 : 26.01.05
가장 맛있는 부분을 먼저 먹을 것인가, 아껴두었다 먹을 것인가.
예전의 나는 이것이 취향의 문제라고 생각했다. 보상을 미룰 수 있는 참을성과 관련이 있을 수는 있어도, 정답이 존재하지는 않는 문제라고.
하지만 최근에 그 생각이 바뀌었다. 이건 우선순위의 문제다.
무엇이 '가장 좋은' 것인지 알면서도 다른 것을 선택한다는 것은 일종의 회피다. '나는 아직 그것을 갖기엔 부족해' 같은 무의식의 영향일 수도 있고, 그 선택에 따라올 저항이나 반향이 두려워서일 수도 있겠지만 회피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 선택은 '지금의 최선'일 뿐이다. 차선이나 차차선을 택함으로써 변화한 다음 상황에서도 그것이 여전히 '최선'일지는 알 수 없다.
결과적으로, '가장 좋은' 것을 선택하지 않는 사람은 언제나 그것이 아닌 다른 것만을 고르게 된다.
반대로, '가장 좋은' 것을 망설임 없이 고를 수 있는 사람은 언제나 '가장 좋은' 것만 고르게 된다.
그러므로 이것은 연습의 문제일 뿐 취향이나 인내의 문제는 아닌 것이다.
맞다.
이 이야기는 내가 지금의 나에게 하는 이야기다.
정말 보고 싶은 것이 있으면서 대강 틀어둘 수 있는 '부담 없는' 것을 택하고,
읽고 싶은 것이, 기록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서 더 가벼운 '부담 없는' 것을 택하는 나에게.
언제나 한 두 걸음 회피하고 마는 나에게.
<개구리 정원의 살인>은 '가볍고 싶은' 마음으로 고른 책이었다.
여기서도 약간의 착오가 영향을 미쳤는데, 정말 죄송하게도 나는 이 책이 황모과 작가의 신작이라고 생각했다.
(한두 글자가 같다는 이유로 착각하는 일이 잦아지는 것 같아 조금 걱정이다. 끝까지 다 읽고서야 '글 풍이 좀 변하신 거 같은데?'하고 확인하다 사실을 알고 무척 당황했다.)
이 작품의 가장 큰 장점은 유연한 시점 변환과 여백이다.
마지막 한 조각까지 딱 들어맞는 일본의 미스터리 소설과는 달리, 약간의 모호함과 여백이 오히려 이 이야기를 '있을 법' 하다고 느끼게 해 준다.
아쉬운 점이라면 결말.
마무리를 위한 마무리로 느껴지는 면이 있었다. 어떤 면에서는 굉장히 한국적인 결말이기도 했는데, 그런 형태의 욕망이 살의나 혐오 같은 감정보다도 위험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싶었던 걸까 싶다. 하지만 어딘가 찝찝한 여운을 남기고 싶었다면 오히려 마지막 챕터가 없는 편이 더 전체 분위기를 잘 살리지 않았을까. 법의 테두리 안에서 가능한 단죄까지 피하는 것은 너무 부담스러웠던 걸까.
흥미롭게 읽었고, 교와 포레스트 같은 환경에서 사는 것도 좋겠다 싶었고 (이웃들은... ), 이제는 도망치는 걸 멈춰야 하는데 싶었다.
꽃이 예쁘게 피었다.
진짜 봄이다.
- [이정화]
3월의 아침은 싱그럽다. 십 대의 풋풋함을 닮았다고 할까. 새벽 여명이 차츰 밝아지는가 싶더니 투명한 아침빛이 창가를 간질이며 새하얀 망사 커튼을 은은한 노란빛으로 물들였다. 이어 부드러운 봄 햇살이 부부의 침실을 따뜻하게 감싸 안았다.
"아아, 아파."
이정화는 밤새 귀를 틀어막았던 이어폰을 신경질적으로 잡아 뺐다. 귓구멍에서 통증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어젯밤도 귀에 이어폰을 끼운 채 잠이 들었었다. 이게 다 다소니 연못 때문이야, 그녀는 낮게 투덜거렸다. 연못의 물을 빼지만 않았어도... 다소니 연못만 떠올리면 그녀는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 5년 전 초여름의 어느 날, 교와 포레스트는 개구리 소리가 한창이었다. 처음 집을 보러 왔던 그날, 이정화는 주방에서 보이는 전경과 들려오는 개구리 소리에 마음을 빼앗겼다. 개골개골, 와글와글, 개구리 소리는 리듬처럼 퍼지며 그녀의 마음에 잔잔한 평화를 불어넣었다. 그녀는 왠지 가슴속 허기가 채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 벌써 2년째 다소니 연못에 물을 넣지 않고 있었다. 2년 전 올챙이를 잡으러 갔던 초등학생이 미끄러져 크게 다친 사고 이후로 연못에는 더 이상 물을 채우지 않게 되었다. 개구리들의 합창이 사라진 수많은 날들, 이정화는 인공적인 소리에 기대며 허전한 마음을 달랬다. 그녀는 매일 밤 유튜브 영상을 켜 놓은 채 잠이 들었다. 자연의 정겨운 소리와 다르게 인공의 이어폰은 귀에 통증을 유발했다.
- 침실 중문을 열고 거실로 나왔다. 개인과 공유 영역을 조화롭게 배치한 공간 설계는 교와 포레스트의 장점 중 하나였다. 부부의 프라이버시 확보를 위해 침실과 거실 사이에 중문을 달아 두었다.
그녀는 거실과 주방 곳곳을 돌아다니며 창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밤새 고였던 눅눅한 공기를 내보내고 신선한 바람을 들이고 싶었다. 겨울 끝자락 쌀쌀함이 느껴지는 찬바람이 살랑살랑 커튼을 흔들었다.
- 이정화가 거주하는 교와 포레스트는 수도권에 위치한 고급 아파트 단지다.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지세로 뒤로는 어치산, 앞으로는 다소니천이 흐른다. 교와 포레스트의 장점을 일일이 열거하자면 입이 아플 정도로 많다. 맑고 깨끗한 공기, 휴식과 평화를 선물하는 초록빛 숲의 전경..., 또한 어치산은 탁 트인 경관을 자랑하며 수많은 생명체의 보금자리이기도 하다.
- 커피머신에 전원을 넣고 크루아상 한 개를 그릴에 데웠다. 그러고는 커피와 빵을 담은 쟁반을 주방 통창 앞 탁자 위로 옮겼다. 주방 창가는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공간이다. 안락의자에 느긋이 앉아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진한 커피 향이 그녀의 오감을 깨운다. 감각이 살아나자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행복감이 가슴 깊이 번져 갔다.
- 기억 저편의 초여름 지금으로부터 5년 전, 이정화 부부는 교와 포레스트에 둥지를 틀었다. 그녀는 어치산의 고즈넉한 풍광과 산 정상까지 이어진 완만한 등산로, 다소니 연못의 매력에 푹 빠져들었다. 이사 첫날 주방 창가에 안락의자와 탁자를 옮겨 두었다. 그러고는 날마다 호젓한 아침 식사를 즐겼다. 커피와 빵뿐인 간단한 식사지만 멋진 경치를 감상하는 행복한 시간이었다.
- 해가 갈수록 짙어지는 어치산의 초록은 시선을 사로잡았고, 사계절마다 다른 색으로 물드는 아름다운 풍경은 선물처럼 그녀의 마음을 설레게 했다. 5년 전과 비교하면 어치산의 산세는 몰라볼 정도로 키가 커지고 울창해졌다.
- 다소니 연못에서 물을 빼게 된 계기는 2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해, 올챙이를 잡으러 연못에 들어갔던 한 초등학생이 이끼에 발이 미끄러지면서 바위에 머리를 세게 부딪쳤다. 아이는 충격으로 정신을 잃었는데, 주변에 사람이 없어 발견이 늦어졌다. 부상은 꽤나 심각해 두피가 찢어지고 출혈량이 많았다. 또한 물속에서 의식을 잃는 바람에 목숨이 위태로울 뻔했다. 아이는 뒤늦게 병원으로 옮겨져 봉합 수술을 받았고, 천만다행으로 건강을 회복했다. 그런데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그 아이의 부모가 시청에 민원을 제기했는데, 다소니 연못 때문에 아들이 죽을 뻔했다는 것이다. 이런저런 우여곡절 끝에 연못에서 물을 빼는 것으로 사태는 일단락되었다.
- "안락의자 위치를 바꿔야겠어."
그녀가 미간을 찌푸린 채 중얼거렸다. 더는 경치를 감상하며 아침을 맞고 싶지 않았다. 다소니 연못의 삭막한 풍경이 마음까지 쓸쓸하게 만들었다. 아예 창을 가려 버릴까? 그녀는 블라인드를 바닥까지 내려 탁 트인 시야마저 차단시켜 버렸다. 갈색의 블라인드로 유리 벽면을 막자 실내는 금세 어둑해지고, 아침인지 밤인지 분간할 수 없게 되었다. 어느새 집 안엔 음침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 우리 미아가 뱀에 물리기라도 하면... 상상만으로도 소름이 쭉 끼쳤다. 쓸모도 없고 흉측하기만 한 개구리들, 싹 다 없어져 속이 후련했다.
언젠가 관리사무소에서 긴급 안내방송을 했던 적이 있었다. 오소리가 지하 주차장에 침입했으니 집 밖으로 나오지 말라는 내용이었다.
'자연과 인간이 공존하는 아파트라더니 이제 오소리까지 산책하러 내려오네.'
그녀는 이게 다 연못에 물을 넣자고 주장하는 어리석은 무리들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녹지 환경이 어쩌고 떠들어 대면서 위험인자만 끌어들인다. 오소리가 침입하는 판국에 멧돼지가 출몰하지 말란 법 없다. 주택 밀집 지역에서 멧돼지를 사살했다는 기사를 간혹 접하고는 한다. 야산에 서식하는 멧돼지가 주거지역으로 내려오는 경우가 왕왕 있다는 것이다. 아무리 친환경이 좋다지만 이건 아니지. 이래서는 고급 아파트 단지의 위엄이 서지 않는다.
- 푸르른 숲이 병풍처럼 둘러싼 교와 포레스트는 도심 속 숨겨진 안식처와도 같았다. 전원의 고요함을 누리면서도 대중교통과 생활 인프라가 잘 갖춰져 많은 이들로부터 찬사를 받았다. 또한 도심 접근성도 뛰어나 기업이나 관공서, 금융기관, 백화점 등이 지근거리에 포진해 있었다. 높은 일류대 진학 ...
- 여자들이 한 목소리로 부르짖었다. 그녀들은 언제라도 맞장구를 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물주가 심기 불편하다는데 비위 맞추는 건 당연지사,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 받은 만큼 돌려줘야 제대로 된 사람이라 할 수 있지 않은가.
- 심상치 않은 기류를 감지했는지 남은 두 여자들도 뒤늦게 대화에 합류했다. 먹는 데만 집중할 때가 아니었다.
"말도 안 된다. 이제 와서 연못에 물을 왜 넣어?"
민준 엄마가 돌연 성을 냈다. 그녀는 젓가락으로 집었던 복튀김마저 접시에 내려놓았다.
"그러게. 그 많던 모기들 싹 다 없어져 좋아하고 있었는데, 새삼스럽게 물을 왜 넣는다는 거지? 공무원들도 할 일 참 되게 없다. 제 밥그릇이나 챙길 것이지, 일은 왜 만들어서 한대?"
은지 엄마는 매운탕 속 복어 살을 더 발라 먹고 싶었지만, 지금은 분위기 맞추는 게 우선이었다. 그녀는 애꿎은 공무원들을 질타하며 허공에 지청구를 해댔다. 사실 은지 엄마야 연못에 물을 넣든 말든 관심조차 없었다. 김영은이 왜 핏대를 세우는지 그녀는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다.
- 그러나 지금은 보는 눈이 많았다. 속내를 훤히 내보였다간 매너남 이미지에 심각한 타격이 올 수 있다.
강우혁은 천천히 여자에게 다가갔다. 그러고는 그녀의 스윙 자세를 잡아 주었다. 되도록 신체 접촉을 하지 않으려 조심하는데, 여자가 느닷없이 손을 끌어 그의 몸을 자신의 상체에 밀착시켰다. 순간 소름이 쭉 끼쳤지만, 그는 내색할 수 없었다.
"어머나 강배우님, 어쩌면 스윙 폼이 이리도 훌륭하실까. 호호호."
여자가 호들갑스럽게 웃으며 그를 추켜세웠다. 여자의 시선이 예사롭지 않았다. 그는 끈끈이 테이프에 걸려든 애처로운 파리 신세가 되어 여자에게 잡히고 말았다.
"여사님 폼이 워낙 좋으셔서 제가 봐 드릴 게 없네요.”
강우혁은 슬쩍 몸을 빼려고 시도했다.
"아까부터 내내 지켜보고 있었는데, 강배우님 골프 실력이 프로급이던데요."
"부끄럽습니다. 제가 프로도 아니고 지도할 정도의 실력은 안 됩니다."
그는 어떻게든 빠져나가려 안간힘을 썼으나 여자는 쇠심줄처럼 질겼다.
- 강우혁은 양혜숙의 행태가 너무나 역겨워 토가 나올 지경이었다. 타석에 선 여자들 모두가 운동을 멈추고 두 사람을 지켜보았다. 양혜숙이 찰거머리처럼 달라붙어 농락하는데도 그는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당하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강 배우님, 우리 커피 한잔할래요? 제가 분위기 좋은 카페를 알거든요."
낯짝에 철판을 깔았는지 이번에는 커피를 마시자고 청한다. 그는 지긋지긋한 마녀한테서 얼른 벗어나고만 싶었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더니 늙은 마녀한테 용코로 걸렸네, 그는 속으로 한탄했다. 강우혁은 선약을 깜빡했다고 변명하며 간신히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 한재빈도 멋진 남자긴 하지만, 강우혁과는 비교할 수 없었다. 게다가 그는 유부남이었다.
인원수를 맞춰야 해서 마지못해 정현아를 끼워 넣었으나 그녀는 틈만 나면 강우혁을 향해 추파를 던졌다. 호시탐탐 강우혁을 노리는 통에 도무지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성형 미인 정현아는 이십 대에 버금가는 젊음과 아름다움을 유지하고 있었다. 외모로는 그녀를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했다. 라운딩을 하며 온종일 기싸움을 벌이고 나니, 전상미는 몹시 피곤해졌다. 술 한 모금 마시지 않았는데도 몸이 천근만근이었다.
- 그녀는 강우혁의 이름 석 자만 떠올려도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그는 두 살 연하로, 연상인 남편한테선 느낄 수 없었던 신선함을 주었다. 연하를 선호하는 여자들의 마음을 이해할 것도 같았다. 강우혁은 그녀에게 설렘을 일깨워 준남자였다. 설렘... 이 얼마나 청신한 감정인가. 그녀는 솜털처럼 연약하고 유리처럼 깨지기 쉬운 이 감정을 오래도록 간직하고 싶었다. 강우혁과 미래를 설계하고자 함이 아니었다. 그저 날것 그대로의 감정을 오롯이 만끽하고 싶은 것뿐이었다. 지금이 아니면 다시는 느껴 보지 못하고 죽을 수도 있다. 꾹꾹 눌러두기엔 인생이 너무 짧지 않은가.
- 게다가 외도 문제에 있어선 남편도 떳떳하지 못한 터라 그녀는 스스로를 책망하지 않았다. 남편의 외도를 눈치챈 적이 있지만, 가정을 깨고 싶지 않았기에 굳이 뒤를 캐지 않은 것이다.
물론 남편에게는 고마움도 가지고 있었다. 사업 수완이 좋은 그는 가족에게 안정적인 생활환경을 제공해 주었다. 전상미는 남편 덕분에 늘 풍요로운 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남편은 더 이상 그녀를 설레게 하지 못한다. 자기는 슬쩍슬쩍 한눈을 팔면서 아내의 행동만 제약한다면 너무 불공평하지 않은가. 당신이 바람을 피울 때도 난 가정을 지키며 성실히 살았다고, 전상미는 그에게 외치고 싶었다.
- 난 누굴 돌보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 아니야. 그가 잔소리를 늘어놓을 때마다 전상미는 마음속으로 항변했다. 남편은 나를 가정부로 여기는 걸까?
여자로 보지 않는 것은 참을 수 있다. 하지만 사람으로 보지 않는 것은 견디기 힘들다. 아내를 투명인간 취급하는 것인지 남편은 정나미 떨어지는 행동을 거리낌 없이 했다. 함부로 방귀를 뀌고, 트림을 하고, 코를 파고, 이를 쑤셨다. 속 모르는 남들은 배부른 소리 한다고 하겠지만, 본시 사람이란 남의 큰 상처보다 제 손톱 밑의 가시가 더 쓰리고 아픈 법 ...
- 지 형사와 황 형사는 단지 안 체육시설을 둘러보기로 했다. 교와 포레스트는 총 3개의 단지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명성에 걸맞게 부대시설도 훌륭했다. 두 형사는 강우혁이 거주했던 1단지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어치산과 다소니 공원은 1단지에 인접해 있었다. 단지마다 피트니스센터와 골프연습장, 배드민턴장과 탁구장, 테니스장 등이 마련돼 있었다. 그 외 사우나, 독서실, 카페테리아, 스카이라운지도 있었다. 주민들은 저렴한 비용을 내고 편의시설을 이용하는 것이다. 좋은 아파트는 역시 다르구나, 지 형사는 속으로 부럽다는 생각을 했다. 부대시설이라곤 공터에 설치된 탁구대 한 개가 고작인 자신의 아파트를 떠올렸기 때문이다.
- 주방 쪽에서 달콤 쌉싸름한 커피 향이 넘어왔다. 그윽하고 풍부한 향이 매우 맛있는 커피일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따뜻한 김이 피어오르는 커피 쟁반을 조심스레 든 전상미가 고요히 거실로 걸어 들어왔다. 그녀는 탁자 위에 쟁반을 내려놓았다. 머그잔에 담긴 커피와 케이크 접시가 눈에 들어왔다. 황 형사가 케이크 접시에 눈길을 고정한 채 코를 벌름거렸다. 점심시간이 가까워 배가 많이 고픈 모양이다.
"식기 전에 드세요."
전상미는 그렇게 말한 뒤 자기 몫의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지 형사는 그녀에게 명함을 내밀었다. 그녀는 잠자코 지형사의 명함을 받아 들었다.
- 지 형사는 의도적으로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러나 윤석민은 디 형사의 도발에 걸려들 만큼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그의 얼굴은 무표정 그 자체였다.
"그걸 밝힐 사람은 형사님입니다. 저는 더 할 말이 없습니다."
지 형사는 윤석민을 노려보았으나 증거를 들이밀지 않는 한 그를 옭아맬 방법이 없었다. 강력 1팀은 눈물을 머금고 그를 집으로 돌려보냈다.
- 정현아의 남편 박상철은 마흔세 살로 공연기획사 대표였다. 출석 요구에 흔쾌히 응한 사람답게 박상철은 지 형사에게 명함을 건네며 소탈한 태도로 악수를 청했다. 그는 크지 않은 키에 다부진 몸매가 돋보이는 남자였다. 까무잡잡한 피부는 윤기가 났고, 헤어스타일 또한 깔끔했다. 의복에도 신경을 쓰는지 몸에 맞춘 여름 정장이 썩 잘 어울렸다. 한마디로 자기 관리를 잘한 사람이었다.
- "박 사장님, 사업은 잘되십니까?"
지형사는 그의 명함을 들여다보며 가볍게 근황을 물었다.
"공연기획은 계절 장사입니다. 여름철은 비수기라 한 해중에서도 매출 꼴찌입니다. 해변 콘서트도 하고 여름 축제 같은 이벤트도 벌이지만, 아무래도 여름은 수입이 줄죠. 그래도 직원들 월급 주고 먹고살 만큼은 법니다. 형사님. 그 정도면 충분하지 않습니까. 하하하."
박상철은 호방하게 웃어 젖혔다. 그의 태도, 눈빛, 걸음걸이 하나하나에 성공한 사람의 자신감이 묻어났다. 이런 사람일수록 자신의 세계를 지키려는 의지가 강한 법이다. 강우혁은 그의 세계에 함부로 뛰어든 침입자였다. 그가 침입자를 대하는 태도는 어떤 것일까?
- 사장으로 보이는 40대 남자가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고 있다가 형사들을 반겼다. 두 형사가 자리를 잡자 남자 직원이 주문을 받으러 왔다. 남직원이 메뉴판을 건네주었다. 무인기기가 점령한 세상에서 사람이 직접 주문을 받으니 반가웠다. 지 형사가 대뜸 남직원에게 물었다.
"이 집 주력 메뉴가 뭐예요? 제일 잘 나가는 걸로 먹고 싶은데요."
남직원은 지 형사에게 배가 고픈지를 물었다. 손님 입장에서 세심하게 배려하는 직원이 믿음직했다. 지 형사가 그렇다고 대답하자, 그는 프라이드치킨과 골뱅이소면을 추천했다. 꽤나 괜찮은 조합이다. 이런 것이 바로 대면 주문의 장점 아닌가.
"생맥주 두 잔과 프라이드치킨, 골뱅이소면 주세요."
남직원은 차게 식힌 잔에 따른 생맥주와 손가락과자를 가져다주었다. 음식이 나올 때까지 요기를 하라는 의미다. 살얼음이 낀 맥주는 보기만 해도 더위가 날아가는 느낌이 들었다.
- "황 형사, 시원하게 한잔 마시자고."
수사에 지친 두 형사는 찬 맥주를 들이켜며 긴장의 끈을 잠시 내려놓았다. 황 형사가 손가락과자 서너 개를 입에 넣고 아작아작 씹었다.
"이 맛에 맥주 마시는 거지."
지 형사가 맥주 거품을 손등으로 닦으며 만족스럽게 웃었다. 황형사 역시 특유의 무구한 미소로 선배의 말에 호응했다.
"맥주 정말 시원한데요. 그런데 초저녁부터 이렇게 마셔도 되는지 모르겠네요."
말은 그렇게 해도 황 형사의 입가에는 기분 좋은 미소가 감돌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맥주 한 잔의 기쁨이다. 맥주 한잔으로도 이렇게 행복해질 수 있다니... 그러나 피해자는 더는 이런 기쁨을 누릴 수 없다. 그 누구도 타인의 생명을 빼앗을 권리는 없는 것이다. 범인을 잡아야 한다는 욕구가 지형사의 내부에서 끓어올랐다.
- [명현기]
"사람이 죽었어요. 빨리 좀 와 줘요. 여기는 교와 포레스트..."
양혜숙의 남편 명현기는 정신이 반쯤 나간 상태로 112에 신고했다. 그는 스마트폰을 손에 쥔 채 무너지듯 소파에 주저앉았다. 창문을 열고 싶었으나 언젠가 본 형사 프로그램에서 그런 사소한 행위가 현장을 훼손할 수도 있다는 말을 들은 기억이 나 자제했다. 정신이 반쯤 나갈 정도로 놀랐는데, 그런 것이 생각난다는 자체가 신기했다.
- "증거를 잡을 수 없다면 다른 방법을 써 보자고."
"다른 방법이요?"
형사들의 시선이 일제히 팀장에게 쏠렸다.
"공범들 중 제일 약한 고리를 공략하는 거야. 공범인 공동피고인의 진술은 다른 공동피고인에 대한 범죄 사실을 인정하는 증거로 사용할 수 있어."
"하지만 공범이 수사 단계에서 자백을 해도 피고인이 재판에서 부인하면 유죄의 증거로 쓸 수 없다는 대법원 판례도 있는데요."
항시 법전을 곁에 두고 찾아보는 손 형사가 반론을 펼쳤다.
"피의자가 법정에서 부인하지 못하도록 공범의 진술을 확실하게 받아야지."
지 형사는 팀장의 말이 이해되었다. 공범 중에는 약한 고리가 있게 마련이다. 약한 고리의 자백을 강한 고리의 유죄증거로 사용하는 것이다.
- "너무 위험하지 않아?"
정현아가 앞뒤 트임을 한 눈을 크게 떴다. 그녀의 눈 크기가 비현실적으로 커졌다. 김영은은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금방이라도 짜증이 폭발할 것 같았다. 일은 제가 저질러 놓고 어린아이처럼 징징거린다. 기껏 밥상을 차려 줬더니 밥까지 떠먹여 달라는 격이다.
"안 하면 어쩔 건데? 해결 방법은 있고?"
- [박상철]
박상철은 아이들 방을 차례로 돌며 남매의 잠든 모습을 지켜보았다. 언제 봐도 사랑스러운 아이들이다. 가족을 지켜냈다는 뿌듯함이 그의 얼굴에 생기를 돌게 했다. 익숙한 동작으로 위스키와 잔, 얼음 등을 꺼내 식탁 앞에 고요히 자리를 잡았다. 한 잔 마신 뒤 푹 잠들고 싶었다. 아내는 깊은 잠에 빠졌는지 침실 쪽은 평온한 정적에 감싸여 있었다. 그는 막 집에 들어온 참이었다.
- "당신, 늦었네."
정현아가 가운을 걸치며 침실에서 나왔다.
"나 때문에 깼어? 조용히 마시려고 했는데."
"위스키만 마시려고? 간단하게 뭐라도 좀 줄까?"
정현아는 냉장고에서 햄과 치즈, 과일 등을 꺼냈다. 그녀는 본인의 잔도 가져왔다.
"나도 한 잔 줘."
그는 아내의 잔에 위스키를 따르고 얼음을 몇 개 넣어 주었다. 정현아가 유리잔을 돌리며 얼음을 달그락거렸다. 호박색의 액체가 잔 속에서 찰랑거린다. 아내의 눈길이 위스키의 물결치는 표면 위를 떠돌고 있다. 허황한 기운이 사라진 그녀의 눈빛이 공허해 보인다. 연애 때부터 술을 즐겼던 아내다. 둘이서 오붓하게 술잔을 기울이고 있으니 신혼 시절로 돌아간 것 같았다. 두 사람은 가볍게 술잔을 부딪쳤다.
"당신이랑 마시니까 좋은데. 우리 가끔씩 한잔할까?"
박상철이 아내의 눈에 시선을 고정하며 말했다. 그의 말에 정현아가 배시시 웃었다.
"그게 뭐 어렵다고?"
- 어렵지 않은 일을 지금까지 잊고 살았다. 밖에서는 의리 있고 배려 깊다는 평가를 받는 그였지만, 아내는 도통 챙기지 못했다. 일을 핑계로 날마다 밖에서 약속을 만들었고, 주말에는 지인들과 어울려 라운딩을 나갔다. 아내도 자신과 똑같은 욕망을 지닌 존재라는 생각을 한 번도 해보지 못했다. 그는 아내를 새로운 시각으로 보았다. 성형수술로 변해 버린 그녀의 얼굴이 낯설었다. 아내가 성형에 집착하게 된 이유도 공허함 때문이 아니었을까? 마음 붙일 곳이 없었던 아내는 성형에 매달렸고, 결국 강우혁이라는 덫에 걸리고 말았다.
'나는 아내를 용서할 수 있을까?'
그는 스스로에게 묻고 또 물었다. 그러나 아내는 그를 선택해 결혼했고, 남매를 낳고 키운 여자였다. 먼저 가정부터 지키고 보자. 용서를 하고 말고는 그 뒤 천천히 생각하도록 하자.
- "지 형사, 그 아파트 사람들 되게 이상하지 않아?"
강력 1팀 손 형사가 막 탐문을 마치고 돌아온 지 형사에게 물었다.
"무슨 말이야?"
"내가 탐문한 사람들은 전부 피해자한테 우호적이지 않더라고."
- 지 형사가 공감한다는 듯 되묻자 손 형사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단지 안 악당들이 없어져서 되레 다행이라는 분위기더라고."
"나도 그렇게 느꼈어. 피해자들 평판이 되게 나빴잖아.”
"그래서 목격자도 나오지 않은 것 같아."
손 형사는 그의 마음을 들여다보기라도 한 것처럼 똑같은 의견을 내놨다.
"손 형사, 주민들이 보고도 못 본 척했다는 말이야?"
- 손 형사의 날카로운 지적이 그의 귀에 날아와 화살처럼 박혔다. 두 건의 살인사건을 수사하면서 지 형사의 마음을 불편하게 짓눌러 온 의문의 실체가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그것의 정체는 바로 '침묵의 유대'였다.
- 그는 언젠가 신문 기사에서 읽었던 미국의 콜드케이스 사건을 떠올렸다. 미국 미주리주 동북부의 스키드모어에서 1981년에 벌어진 살인사건이다. 피해자는 47세의 남자 켄렉스 맥엘로이로, 그는 인구 450명에 불과한 작은 마을의 무법자였다. 신문 기사를 요약하면 대략 이렇다. 켄 맥엘로이는 협박부터 절도, 폭행, 방화, 스토킹, 미성년자 성폭행까지 온갖 무자비한 범행을 저지르고도 법의 심판을 피해 간 남자였다. 키 182cm, 몸무게 120kg에 육박하던 그는 늘 옆구리에 총을 차고 마을을 휘젓고 다녔다. 켄 맥엘로이는 각종 범죄로 22차례나 체포됐지만, 그때마다 풀려나 주민들을 괴롭혔다.
사건 당일 그는 스물세 살의 어린 아내와 동네 주점에서 오전부터 술을 마셨고, 그 뒤 트럭 운전대를 잡았다. 총 여덟 발의 총알이 그의 뒤통수를 겨눴는데, 그중 두 발이 켄 맥엘로이의 목과 머리에 명중됐다. 인근에 모여 있던 60여 명의 주민들이 대낮의 총격 현장을 목격했으나 그들은 경찰 조사에서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고 진술했다. 이것이 바로 '침묵의 유대'이다. FBI는 1년 만에 수사를 종결했고, 결국 '아무도 못 본 살인사건'이 되었다. 이는 불합리한 사법 체계에 환멸을 느낀 주민들이 범죄자와 법에 맞서 직접 보복한 사건이다.
- 다시는 예전의 그녀로 돌아올 수 없을 것 같았다. 더는 아내를 방치할 수 없다는 위기감이 그의 결심을 굳혔다.
- "당신은 내가 어떻게 해 줬으면 좋겠어?"
그는 진심으로 그것이 궁금했다.
"그 인간이 없어졌으면 좋겠어. 그렇지 않으면 난 그 인간한테서 벗어나지 못할 거야."
"내가 다 알아 버렸다고 말해. 그러면 더 이상 협박당하지 않을 텐데."
"아니야, 여보. 강우혁은 내 피 한 방울까지 쪽쪽 빨아 마실 인간이라고.”
"무슨 말이야? 나한테 폭로하겠다고 협박하는 게 아니었어?"
전상미의 어깨가 크게 들썩였다. 또 울음을 터트리려는지 끅끅 소리를 냈다. 윤석민은 또다시 눈물 바람을 하는 아내를 보자 속으로 깊은 피로감을 느꼈다. 뭘 잘했다고 우는 거야? 눈물은 자기 연민에서 나오는 부산물일 뿐이다. 게다가 그녀는 한번 울면 족히 10분은 기다려야 한다.
- 머릿속으로 그리던 것과 아내가 직접 털어놓은 말 사이엔 가늠할 수 없는 충격의 차가 있었다. 그는 격심한 분노에 사로잡혔다. 강우혁도 강우혁이지만, 눈앞의 아내가 더 끔찍하게 여겨졌다. 감히 남편 앞에서 다른 남자와의 성관계 동영상이 있다는 말을 해? 그는 아내에게 달려들어 그 가증스러운 입을 찢어 버리고 싶었다. 그녀가 강우혁과 했을 행위를 상상하면 그보다 더한 행동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 "아아, 어떡하지? 언니. 살인죄는 형량이 얼마나 돼? 검색해 볼까?"
"안 돼, 현아야. 그런 거 검색하면 절대로 안 돼. 검색한 내용만 가지고도 범인으로 의심받을 수도 있어. 형사들이 판 함정에 걸려들면 안 돼."
- "두 피해자는 모두 평판이 좋지 않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두 건의 살인은 교와 포레스트라는 아파트 단지를 이해하지 않고는 풀 수 없습니다. 교와 포레스트 주민들은 아파트를 단순한 거처 이상으로 여깁니다. 주민들한테 교와 포레스트는 삶의 중심이자 자긍심의 상징입니다. 연못에 물을 채우는 문제로 갈등을 겪은 것만 봐도 주민들의 넘치는 아파트 사랑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주민들은 강우혁과 양혜숙이 교와 포레스트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판단했는지 모릅니다."
지 형사는 거기까지 말한 뒤 다섯 명의 용의자들 중 누구 하나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한 명씩 천천히 시선을 옮겨 갔다. 그러나 역시 반응을 보인 사람은 없었다.
- "여러분, 무당개구리를 본 적이 있습니까? 무당개구리는 비단개구리라 불릴 만큼 생김새가 독특하고 도발적인 피부색, 굼뜬 움직임 등으로 유명합니다. 저는 강우혁 씨를 무당개구리에 비유하고 싶습니다. 배우라는 직업과 수려한 외모 등 강우혁 씨는 여러모로 무당개구리와 닮았습니다."
황 형사는 선배가 평소와는 다르다는 생각을 했다. 선배가 언제부터 개구리에 해박한 지식을 가졌지? 그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지 형사의 설명이 이어졌다.
"2000년대 초반 상업적, 관상용 목적으로 무당개구리가 다른 나라로 수출되었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어찌 되었을까요? 무당개구리에서 전파된 항아리곰팡이가 다른 나라의 양서류들을 죽게 만들었습니다. 항아리곰팡이는 한반도에서 생겨났고, 다른 국가의 양서류들은 이 곰팡이에 면역 능력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강우혁 씨는 화려하고 멋지지만, 교와 포레스트에는 맞지 않는다고 주민들은 판단했던 것이지요. 한마디로 생태계 교란 외래종이죠. 한 가지 더 개구리 얘기를 해 볼까요. 중남미 열대우림에는 작은 몸집의 독개구리가 삽니다. 현란한 빛깔과 무늬를 가진 이 개구리는 지구상에서 가장 강력한 신경독을 분비합니다. 뱀들은 이 독개구리를 공격하지 않습니다. 뱀들이 어떻게 알고 이 개구리를 공격하지 않는 걸까요? 화려함은 언제나 독을 품는다는 걸, 그들도 알고 있을까요? 강우혁 씨 역시 보기에는 아름답지만, 치명적인 독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를 가까이하면 파멸이 찾아오지요."
- 지 형사는 말을 끊고 한 번 더 좌중을 둘러보았다. 그러나 그들은 정적 속에서 말없이 그를 주시할 뿐이었다. 그의 명연설에 박수를 보내는 사람도 없었다. 뒷자리의 황 형사가 마음의 응원을 보냈을 따름이다.
- 그녀의 얼굴은 분노와 억울함이 뒤섞인 듯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지 형사는 그들 앞에 물증을 제시하지 못했다. 핵심 증거를 내놓지 못한 형사들 앞에서 용의자들은 동요 없이 태연하게 버텼다. 그는 포아로처럼 심리전을 펼치며 용의자들을 압박하려 했으나 결국 자백을 끌어내지 못하고 작전은 실패로 돌아갔다.
"다른 건 몰라도 결속력 하나는 인정해야겠군."
지 형사는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녹취 하나, 메시지 한 줄조차 남기지 않았다. 다섯 명의 휴대전화는 말 그대로 깨끗했다.
- [김영은]
... 김영은은 이 정도면 무사히 마무리된 셈이라 여겼다. 기대 이하의 존재로 평가했던 전상미와 정현아는 뜻밖에도 흐름을 바꾸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멍청한 것들, 뭐 변호사의 조력을 받을 테니 제 살길 알아서 잘 헤쳐 나가겠지. 그녀는 경찰의 영상복원기술을 믿었다. 아니나 다를까, 경찰은 강우혁 살인범들의 얼굴을 육안으로 식별할 수 있을 정도로 이미지를 훌륭히 개선해 냈다.
- 김영은은 교와 포레스트에 평화가 찾아온 데 만족하고 있었다. 어렵게 되찾은 평화였다. 강우혁과 양혜숙은 교와 포레스트에 거주할 자격이 없는 인간들이었고, 전상미와 정현아는 불륜을 저질러 단지의 품위에 씻기 어려운 오점을 남겼다.
- 그간 쉴 틈 없이 이어지는 번잡스러운 과정들을 거치느라 골치깨나 썩었다. 지저분한 쓰레기들이 치워진 교와 포레스트는 세찬 비에 씻긴 듯 산뜻하게 변모했다. 어지럽던 흔적들이 사라지자 아파트는 다시 맑고 정갈해졌다.
탁자 위 스마트폰에서 고상한 클래식 멜로디가 흘러나왔다. 김영은은 우아한 동작으로 스마트폰의 수신 버튼을 눌렀다.
"미아 엄마, 오늘 뭐 해?"
수연 엄마의 명랑한 음성이 전화기 속에서 들려왔다.
"나 별 계획 없는데."
그녀는 내심 수연 엄마의 전화가 반가웠다.
"그럼 은지 엄마랑 민준 엄마 불러서 함께 점심 먹을까?"
"그거 좋지. 장소는 자기들이 정해서 위치 보내 줘. 시간 맞춰 나갈게."
김영은은 밝게 수락하고 전화를 끊었다. 해가 될 리 없는 여자들이다. 나는 이런 사람들이 좋더라, 그녀는 마치 자신에게 들려주듯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녀의 입가에 뿌듯한 미소가 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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