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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명훈] 타워

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1

by 일루젼 2026. 4. 1. 0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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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배명훈
출판 : 문학과지성사
출간 : 20.02.20


       

"어떤 술은 화폐로 통한다."

 

첫 문장을 읽자마자 떨렸다. 홀린 듯이 읽어나갈 수밖에 없었다.

 

글의 첫 문장만큼 공들이게 되는 것도 드물 것이다. 따지고 들면 모든 시작이 그렇겠으나, 과정이 진행되며 덧입혀지기도 하고 가려지기도 하는 다른 창작 활동과는 달리 음악과 소설은 그 도입부가 가장 중요하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첫 인상, 첫 만남에서 감상자를 붙잡아야만 하기 때문이다. 

 

배명훈이란 작가를 처음 만난 건 <기병과 마법사>에서였다. 담담하면서도 날카롭고 매력적인 글을 쓰는 사람이란 생각이 들었다. 팝핑 캔디처럼 톡톡 튀는 위트는 아니지만, 입에 머금은 순간부터 삼킨 뒤까지도 은은하게 남는 차향과도 같은 고소(苦笑)와 뻐근한 벅참이 있었다. 마치 안목 있는 자가 눈여겨 보아야만 보였던 봉황 새김처럼, 은근하면서도 섬세한.

 

세상에는 읽지 않았어도 알고 있게 되는 작품과 작가들이 있는데-

대부분은 고전 명작들이지만, 종종 입소문 만으로 유명해지기도 한다. 간단히 말해 귀에 딱지가 앉도록 접하게 된다는 뜻이다. 

내게는 배명훈의 <타워>가 그런 책이었다. (그런데도 근 십 년을 읽지 않고 버텨냈으니 나도 한 고집하는 모양이다.)

 

그런데 우연히 읽게 된 <기병과 마법사> 덕에 배명훈 작가에게 빠져들고 말았다. 이 작가의 문장들을 더 읽고 싶었다. 비슷한 느낌의 글들을 쓰는지, 작품마다 색깔을 바꾸는 팔색조 같은 글을 쓰는지 알고 싶었다.

 

아직 <기병과 마법사>에 관한 단상도 다 정리하지 못한 상태에서 <타워>에 대해 이야기하려니 손가락 끝이 자꾸만 허공을 맴돈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아주 많은 것 같기도 하고, 한 마디도 더 보탤 것이 없는 것 같기도 하다. 

 

<타워>에 실린 단편들은 잘 만들어진 거울 같은 글들이다. 읽는 자가 보고 싶은 것들, 믿고 싶은 것들을 보여주되 그 자체로도 아름답다. 본문에 등장하는 '빈스토크'는 바벨탑이자 수도이자 국가다. 이 책을 읽는 독자는 자신도 모르게 자신이 아는 거대도시를 그에 투영해 읽게 된다. "멍." 속에 담긴 최고의 연기처럼.

 

'빈스토크'라는 명사가 어느 한 카페의 이름에도 사용된다는 점을 주목하자. 모든 시작은 그렇게 작은 하나에서부터 자라난다. 혹은, 모든 거대함은 작은 조각 속에 투영될 수 있다. 사회란 인간이 모여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혹은 인간은 사회를 만들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리고 '우리의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에 한 발 떨어져서 바라보는 빈스토크의 모습들은 거울을 보는 자의 민낯을 보여준다. 권력과, 사회구조와, 젠트리피케이션 또는 소외와 복지, 시위와 연대와 청탁 같은- 아무리 작은 조직에서도 누구나 발견할 수 있는 더없이 인간적인 관계의 흔적들을. 

 

어째서 그리도 회자되었었는지, 긴 시간의 절판 이후에도 사랑받을 수 있었는지 조금은 알 것 같다.

지금 읽어도 좋은 책이니 당시에도 좋았을 테다. 미래에는 좀 더 동화처럼 읽혔으면 싶지만, "그렇게 20년이나 지났는데도 여전히 세상이 아름답지가 않다면 이제는 다른 누구를 비난할 처지가 아니었다. 내 잘못이었다. 내가 잘못했다. 세상이 아름답지 않은 것은 바로 내 책임이었다."라는 문장이 나를 놓아주지 않는다. 이 책이 처음 출간된 뒤로 20년이 흐르기까지 고작 3년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이 책을 처음 읽었던 이들이 지금 다시 이 책을 읽는다면, 이제는 다른 것이 보일까?

 

작가가 여전히 글을 써주고 있어서 감사하다. 언젠가 그의 글이 자연을 찬미하게 되더라도, 흰 곰과 나무와 그 무엇에는 여전히 무언가를 비추는 반짝임이 있을 것이다. 그는 주머니 속의 송곳이므로.

 

좋았다. 

 


   

  

 

- 어떤 술은 화폐로 통한다. 사람이 살다 보면, 대가를 돌려받을 것이 확실치 않더라도 누군가에게 뭔가를 줘야 할 때가 있다. 뇌물, 상납, 청탁, 촌지와는 다르다. 이 경우에는 받는 사람이 무슨 일을 해주어야 하는지가 분명하고 주는 사람이 무엇을 제공해야 할지도 비교적 확실하다. 하지만 '감사의 선물', 혹은 '작은 정성'처럼 훨씬 더 섬세하고 민감한 형태의 지불-용역교환 관계에서는 도대체 무엇을 선물해야 할지, 또 선물을 받은 대가로 무엇을 해주어야 할지가 교환 관계의 액면에 구체적으로 명시되지 않는다. 그래야 나중에 발뺌할 수가 있기 때문인데, 비상시가 아니면 권력은 보통 그렇게 움직인다.

- 빈스토크 Beanstalk 미세권력연구소의 정 교수는 일찍이 이런 섬세한 교환 관계에서 선물을 제공하는 측이 받는 사람 마음에 쏙 드는 선물을 고르기가 얼마나 어려운가를 몸으로 체득하고, 사람들이 과연 어떤 방식으로 이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지에 주목했다. 

 

- "재단 감사 그 새끼, 도대체 뭘 먹여야 되는지 알 수가 없어. 지가 청백리야 뭐야? 수교연(수직교통연구소)은 뭐 먹였대? 차 같은 거 주면 되나? 홍삼 같은 거 어때? 에이 씨, 그냥 돈으로 발라?"
물론 안 될 말이다. 화폐에 해당하는 보편적인 교환 수단이 아무리 절실하게 요구되더라도 현금을 그대로 쓸 수는 없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이런 섬세한 관계에서 현금을 사용하는 행위는 언제나 부정한 것으로 여겨졌다. 발각되는 경우, 현금처럼 불리한 증거도 없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이 문제를 과연 어떻게 해결하고 있었을까? 
정 교수는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기가 막히게 활용되는 새 화폐들을 찾아 헤맸다. 그 결과 여러 종류의 물품 화폐가 발견되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술이었다.

- 술이 화폐로 통한다는 말은, 취향에 관계없이 누구에게 주더라도 선물의 가치가 일정한 선 이하로 떨어지지는 않는다는 의미이다. 똑같은 것을 이미 갖고 있더라도 받는 사람이 별로 섭섭해하지 않고, 종교적인 이유나 다른 윤리적인 이유로 예의에 어긋나는 선물이 될 위험도 적으며, 심지어 술을 전혀 입에 대지 ... 

 

- 그는 곧장 연구소로 돌아가서 정 교수를 찾았다. 예상대로 정 교수는 일찍 퇴근하고 없었다. 이 박사는 정 교수에게 전화를 걸어 내막을 자세히 설명한 다음, 권력 네트워크 분석에 개를 포함시켜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물었다. 그러자 정 교수는 일단 이 박사를 점잖게 타일렀다.
"아니, 사람이 술에 취하면 이상한 짓 좀 할 수도 있지. 그걸 대뜸 개라고 표현하면 어떡하나? 배운 사람이 말이야."
이 박사는, 그런 의미가 아니라 사람들이 진짜 네 발로 걷는 개에게 술을 보내더라고 이야기했다. 그러자 정 교수는 별 문제도 아니라는 듯 오히려 버럭 화를 냈다.
"당연히 빼야지. 우리가 무슨 생태계 분석하자는 게 아니잖아. 이건 권력장 분석이라고."

- 바로 그 권력장(權力場)이 문제였다. 단순히 건물 내 권력자가 누구인지 밝혀내는 일이었다면 개 한 마리쯤은 빼도 상관없었다. 하지만 권력장은 좀 다른 문제였다. 그것은 마치 우주 공간이 천체의 질량 때문에 중력장이라는 형태로 일그러지는 것과 비슷한 일이었다. 그렇게 일그러진 공간을 지날 때면 질량이 없는 빛 입자도 직선으로 날아가지 못하고 공간을 따라 굴절될 수밖에 없었다. 권력장도 마찬가지였다. 공간 자체가 권력장의 형태로 일그러지고 나면, 권력에 전혀 민감하지 않은 사람도 마치 본인 스스로 권력의 눈치를 보기라도 한 것처럼 ... 

-

"몰라, 어쩌려고 그러는지. 그 개 빼고 시뮬레이션 돌리면 자꾸 엉뚱한 데에 권력 중심이 생기지? 내가 할 때는 고층이었는데, 입력 데이터가 달라지니까 아마 할 때마다 다르게 나오겠지. 그거 결국 정 교수가 처리해야 돼. 자기 이름으로 발표할 건데 자기가 해야지. 나중에 곤란한 일이라도 터지면 당신들이 책임질 수 있는 게 아니거든."
"정 교수님 지금 안 계세요. 아침부터 병원에 갔어요.”
"아, 그 여자 애 낳는다 그랬지? 가수였던가, 배우였던가, 뜨지는 못한 연예인 출신이랬는데, 조용히 안 지나가네. 아무튼 그 일은 나도 어떻게 처리하라고 말해줄 수가 없어요. 괜히 내 말대로 했다가 나중에 문제라도 생겨봐. 내가 시켜서 그랬다 그러면 나만 황당해지잖아. 무조건 정 교수 확답을 들어. 아니면 자기가 직접 할 때까지 손 놓고 있든지."  
송 박사는 전화를 끊고 다시 모니터를 멍하게 바라보았다. 다른 두 사람에게 이 박사와 상의한 내용을 전달했지만, 권력장 분석 프로그램에 관련된 기술 용어가 너무 많아서 두 사람은 무슨 말인지 거의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 향수 매장에서 파는 조그만 술병 모양의 향수병을 보고는 별 고민 없이 하나를 집어 들었다.
"이걸로 하죠 뭐. 마침 우리 술병 모양하고도 비슷하고."
황 박사는 선뜻 선물을 고르지 못하고 이 가게 저 가게를 기웃거리다가 송 박사가 돌아올 때가 다 돼서야 뭐가 있나 한 바퀴 둘러보고 오겠다며 자리를 떠났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송박사가 나타나더니, 고민 안 하고 산 건 좋은데 금값이 너무 올라서 결국 자기가 제일 손해 본 것 같다고 투덜댔다. 그리고 잠시 후에 황 박사가 손에 뭔가를 들고 돌아왔다. 

 

- "뭐 샀어요?"
"글쎄 한약방에서 이런 걸 파네요."
"뭔데요?"
황 박사가 손에 든 것을 내밀자 남 박사는 웅얼거리는 소리로 선물 겉표지에 적힌 설명을 읽었다.
"경락의 기가 원활히 흐르게 하여 혈액순환을 도와 어혈로 인한 통증을 근본적으로 치료하며..."

 

- 송 박사는 남 박사 손에 들려 있던 물건을 집어 들고 한참을 들여다보더니, 잠시 후에 황 박사를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다.
"아 진짜, 황 박사님. 그렇다고 이런 걸 사 오시면 우리 꼴이 우스워지잖아요. 몰약(沒藥)은 좀. 이거 때문에 우리 선물까지 이상해지잖아요. 하필 크리스마스이브에 금반지랑 향수랑 몰약이 뭐예요. 게다가 박사가 세 명이야."
"그래도 남 박사님 건 유향(乳)은 아니잖아요, 향수지. 둘이 완전 다른 거예요."
"예, 뭐. 어쨌거나 괜히 연상이 되기는 하죠, 선물 목록에 몰약이 끼어 있으면."

- 어떤 사람은 스스로 물품 화폐가 된다. 권력장이 그런 식으로 일그러져 있다면 그쪽으로 빨려 들어가지 않을 도리가 없다. 세 사람은 스스로 동방 박사 3종 세트가 되어 서둘러 647층으로 올라갔다. 

 

- 통치 기구가 알아서 합리화하고 정당화해 주는 신묘한 권위. 보이지 않기 때문에 아무리 비열한 짓을 저지르더라도 절대 추궁당하지 않는 권력.
권력장은 자객을 보내 적을 암살하지 않는다. 자기 손에 피를 묻히는 법도 없다. 대신 적이 칼을 꺼내 들어 스스로 자신의 정치적, 사회적 생명에 타격을 입히게 한다.

- 사람은 문명과 야만이 적당히 공존하는 사회에 살고 있지, 어느 사회든 야만이 없는 사회란 있을 수 없다. 문명 세계의 권력이 개인을 그렇게까지 절망적인 상황으로 몰아갈 때, 개인이 야만 세계의 폭력을 사용해서 거기에 저항하는 일은 생각보다 흔하다. 그래도 된다는 착각에 빠진 탓이다. 정 교수도 아마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폭력 말고는 저항의 수단이 없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기에, 문명 세계의 권력은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극단적으로 폭력을 혐오한다. 그리고 응징한다. 그런데 정 교수가 과연 그 사실을 몰랐을까. 아마 알았다 해도 아무 소용이 없었을 것이다.

- 세 사람은 문을 활짝 열어 보지도 못하고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아무것도 모르는 줄 알았던 정 교수가 사실은 개를 포함한 빈스토크의 권력 구조를 네 번이나 혼자서 그려보았을 줄은. 세 사람은 정말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 "이 시간에 여기는 어쩐 일이야?"
아무렇지도 않은 목소리였다. 세 사람에게는 그 말이 뭔가 알고 온 게 아니냐는 추궁으로 들렸다.
게임 끝이었다. 그는 이제 더 이상 인간이 아니었다.

- 고요한 밤 거룩한 밤에, 649층에서 비명 소리가 들렸다. 언제 비명 소리가 들려도 이상하지는 않은 곳이라 소리만으로는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그러나 사람들이 뛰기 시작하자 그때부터 비로소 실감이 났다. 보지 말았어야 할 광경을 보고 만 것이었다. 오지 말았어야 할 곳에 발을 디딘 것이었다. 
세 명의 박사는 호흡을 가다듬고 침착하게 병원 현관을 빠져나갔다. 정원을 지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천천히 병원 정문까지 걸어 나간 다음, 얼굴이 파래진 채로 아래층을 향해 달리고 또 달렸다. 야경이 펼쳐진 에스컬레이터를 지나 엘리베이터를 갈아타고 왔던 길을 따라 아래로 아래로.
정 교수는 그들을 뒤쫓지 않았다. 그 자리에서 그대로 경찰을 기다렸다. 빈스토크식으로 말하자면 경비원들을 기다렸다.

<동원 박사 세 사람-개를 포함한 경우>

 

- 이번에 그 사업이 다시 문제가 된 것은 수직운송 업체들과 정치권 사이의 유착 관계 때문이었다. 유착에 관한 결정적인 단서들이 드러나자, 원래 비판을 하게 되어 있는 사람들이 먼저 비판을 시작했다. 그러자 시 정부에서는 비판하는 사람들을 불러다가 먼지를 털었다. 표현의 자유를 제한한 게 아니라 다른 규칙들을 엄격하게 적용한 것이다. 

- K는 털면 먼지가 나는 사람이었다. 다른 사람들보다 더 심하지는 않겠지만, 그렇다고 남들보다 덜할 거라는 자신도 없었다. 본인이 직접 붙들려서 먼지가 털린 적은 없었다. 다만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되는 모습을 지켜본 것뿐이었다. 조용히 들어앉아서 가만히 살펴보니 누구를 털어도 결국은 먼지가 나오는 모양이었다. 업무 추진비를 잘못 집행했다거나, 특정 학생의 학부모와 자주 식사를 같이했다거나, 등록된 주소지와 실제 거주지가 달랐다거나 하는 일들이, 잘못이 아니라고는 결코 말할 수 없는 사소한 과오가 한두 건씩 어김없이 발견되는 것이었다. 염라대왕 앞에 불려 가서 평생 동안 저지른 잘못을 모두 떠올리기 전에는 절대 떠오를 것 같지 않던 온갖 못된 짓들이 여론의 심판대에 횟감처럼 올려지는 것, 그 가능성만으로도 그는 충분히 두려웠다. 

- 맨 먼저 정부를 비판하게 되어 있는 사람들이 비판을 그만두자, 비판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이 비판을 시작했다. 그러자 경비대가 나서서 먼지를 털었다. 물론 이번에도 표현의 자유나 ... 

-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일이라고 몇 번이나 마음을 다잡아봐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결국은 공황 상태에 빠져서 누군가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안 되는 지경에 이르기 일쑤였다. 그래도 그는 꾸준히 정신과를 찾았다. 프리힐리아나에 가보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어떤 방법을 써도 저소공포증은 좀처럼 극복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화가 났다. 

- 그 집은 이름을 밝힐 수 없는 누군가가 준 마음의 선물이었다. 물론 공짜는 아니었다. 청탁의 의미가 분명했고, 뭘 어떻게 해달라는 건지 메시지도 명확했다. 처음 그 집을 소개받았을 때 그는 이 인간이 누구를 놀리려는 게 아닌가 싶었다. 스페인 남부 해안이라니, 그야말로 그림의 떡이었다. 그러나 집에 딸린 옵션을 보고는 생각이 달라졌다. 
옵션이란 다름 아닌 로봇이었다. 그다지 정교하거나 성능 좋은 로봇은 아니었다. 기능도 별로 없었다. 그저 조종하는 대로 집 안을 돌아다니고, 조잡한 팔로 물건을 집을 수 있을 뿐이었다. 집 밖으로는 나가지도 못했다. 로봇처럼 생겼다 뿐이지 그냥 기계라고 불러도 무방한 물건이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정확히 말하면, 그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로봇 자체가 아니라 로봇의 성능 좋은 카메라에 비친 바깥 풍경이었다. 로봇을 통해 그는 마치 자신이 그 집에 사는 것처럼 집 안을 돌아다니 ...  

- 좋은 뜻으로 하는 일인 만큼 그도 굳이 고집을 부리지는 않았다.
그런데 나중에 생각해 보니 그게 다 집주인의 계략이었다. 물론 로사는 진짜로 로봇 정비와 집 청소만 했을 뿐 다른 일은 전혀 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 대가로 지나치게 큰돈을 챙겨갔다. 그리고 지나치게 미인이었다. 누군가 그 아이의 존재를 알아낸다면, 그리고 그 사람이 나쁜 마음을 먹는다면, 이상한 소문을 퍼뜨릴 여지가 충분했다. "도대체 무슨 짓을 하기에 한 달에 두 번 일하는 대가가 말단 공무원 월급보다 많단 말인가!" 그 말 한 마디면 충분했다.

- 그 생각을 하면 K는 어쩐지 억울했다. 하지만 그는 로사가 좋았다. 로사는 착하고 성실한 젊은이였다. 약속을 어긴 적이 단 한 번도 없었고, 지각을 하거나 정해진 시간보다 일찍 집으로 돌아가는 일도 없었다. 친구를 데려와서 파티를 여는 일은 고사하고, 자기 물건을 함부로 갖다 놓는 일도 없었다. 집 안은 항상 청결했고 로봇도 늘 최상의 상태를 유지했다. 로사는 그런 아이였다. 어떤 식으로든 세상을 좀 더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 사람. 그는 로사에게 가는 '장학금'을 막고 싶지 않았다. 

- D가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물속으로 뛰어들자 K는 느릿느릿 팔다리를 움직여 물 밖으로 헤엄쳐 나갔다. 대답하기가 귀찮았다. 사실은 생각하기도 귀찮았다. 
"선생님, 선생님 정도면 그렇게 흔들리실 필요는 없지 않을까요. 선생님 영향력이라는 게 국내에만 한정된 게 아니니까요. 왜 그렇게 주저하시는지 모르겠네요. 혹시 마음에 걸리는 거라도 있으세요?"
D가 물었다.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설명하기에는 너무나 복잡한데, 오해를 사기는 너무나 쉬웠다. 차라리 아무 말도 하지 않는 편이 나았다. 순수한 마음이나 선의 같은 것은 말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가 없는 법이다. 오히려 말로 하면 할수록 어쩐지 사기를 치는 것 같은 인상을 준다. 그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D는 집요하게 K를 따라다니며 똑같은 이야기를 반복했다. 
 

- 문체도, 주제도, 손댈 것 하나 없이 그냥 그대로 갖다 쓰기만 하면 될 정도로 완벽한 구성이었다. '구상'이 아니라 '구성'이었다. 그렇게 완전한 이야기는 좀처럼 만나기 힘들었다.
그는 누운 자리에서 머릿속으로 소설 한 편을 다 썼다. 만족스러웠다. 그리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하지만 다시 그대로 자리에 드러누웠다. 눈을 멀뚱멀뚱 뜨고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역시 정답은 자연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누군가를 비난할 때가 아니었다. 졸음이 밀려왔다. 

- 한 달 뒤에 D는 K가 보낸 원고를 받았다. 반쯤 끝낸 원고였는데, 또 자연에 관한 이야기였다.
[태초에 나무가 서 있었다. 인류가 출현하기 훨씬 전이었으므로 신이라는 관념 또한 존재하지 않았다. 오로지 하늘과 땅과 바다와 풀, 그리고 나무밖에 없었다. 나무들의 신은 나무였다. 세상에서 제일 큰 나무였다. 5천5백 년을 한 곳에 뿌리박고 살아온 나무. 잎은 더없이 무성하고 푸르렀을 것이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자기보다 더 높은 곳까지 잎을 실어 나른 나무는 보지 못했으니 자랑스럽고 뿌듯하고 뭉클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나무가 수억 년의 잠을 깨고 다시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 그 무성하던 잎은 단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거대한 줄기만이 조직을 광물로 대체한 채 살아 있었을 때 모습 그대로 땅속 깊 ... ]

- [소리를 내봐.
그러자 세상의 모든 깨달은 나무들이 뿌리를 바짝 조여 대지를 움켜쥐었다. 나무는 그 소리를 들었다. 많았다. 수없이 많았다. 나무는 세상에 나무가 그렇게 많은지 몰랐다. 가까운 곳에서만 해도 수없이 많은 나무들이 그의 물음에 대답해 왔다. 나무들이 규칙적으로 대지를 움켜쥐는 소리가 마치 심장 뛰는 것처럼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대지가 또 하나의 심장을 얻은 것만 같았다.
소리를 낼 줄 아는 나무가 그 정도라면 들을 줄만 아는 나무는 훨씬 더 많을 것이다. 또한 들을 줄 모르는 나무는 그 몇 배에 달할 것이 분명했다. 철이 들지 않은 나무, 생각하지 못하는 나무까지 합치면 그 규모는 나무가 상상할 수 있는 범위를 훌쩍 뛰어넘을 것이 틀림없었다.
우리는 벌써 세상을 가득 채우고 있구나. 우리는 혼자가 아니라 숲이었구나.
그 말에 대지의 두 번째 심장이 격하게 요동쳤다.] 

- 마음에 드는 게 하나도 없었다. 모두 다 기성세대의 잘못이었다. 나는 기성세대를 욕하고 비난했다. 열정을 가지고 부딪치고 도전하라는 말에, 열정을 바쳐 일한 만큼 돌려줄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두었냐고 반문했다. 또박또박 따져 물었다.

- 그런데 이제는 내가 바로 그 세대가 되었다. 그렇게 20년이나 지났는데도 여전히 세상이 아름답지가 않다면 이제는 다른 누구를 비난할 처지가 아니었다. 내 잘못이었다. 내가 잘못했다. 세상이 아름답지 않은 것은 바로 내 책임이었다. 나는 나를 즐겁게 하는 수많은 것들을 접어두고 이런 말들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 그다음은 말이 아니었다. 욕이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정신 나간 출판사가 그 글을 그대로 출간해 버렸다.
"당신들 미친 것 같아."
"감사합니다."
"허허. 나참."

- 물론 아무도 예술과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지 않았다. 다만 K를 털었더니 먼지가 났다. 프리힐리아나, 로사, 상식에 어긋난 청탁, 그리고 그 밖의 수많은 먼지들. 먼지는 생각보다 많이 났다. 주변 사람들뿐만 아니라 K 스스로도 깜짝 놀랄 정도였다.
"그러게 안 한다 그랬잖아."
"아니, 저도 그 정도로 심할 줄은 몰랐죠. 올곧은 분이라고 ... "

<자연예찬>



- 그 말에 은수는 민소를 떠올렸다. 스물다섯 살 동갑내기 첫사랑 민소. 그런 아이가 있었다. 착하고 똑똑한 아이였다. 5년 전이었다. 빈스토크로 옮기면서 자연스럽게 연락이 끊어졌는데, 지금 돌이켜봐도 미소부터 떠오르는 아이였다. 하지만 찾으려고 애쓴 적은 없었다. 

- 첫사랑이란 원래 그냥 묻어두는 법이다. 애써 다시 만나봐야 실망만 할 테니까. 그때는 은수도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아이에 불과했고, 아마 민소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잠깐 옛날 사진만 뒤져봐도 금방 알 수 있었다. 어쩌면 보지 않고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보나 마나 사진 속의 민소는 은수가 기억하는 것과는 달리 촌스러운 머리에 촌스러운 옷차림을 하고 순박한 ... 

- 출혈이 생각보다 심한 모양이었다. 그런데도 아무 통증이 없다니 아무래도 척추나 목을 다친 듯했다.
적에게 먼저 발견되면 큰일이었다. 하지만 아무에게도 발각되지 않는 게 더 큰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래도 그렇게 될 것만 같았다.

- "이야기가 깁니다."
은수는 병수의 말에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병수가 말을 이었다.
"김민소 씨를 개인적으로 아는 건 아닙니다. 처음 김민소라는 이름을 알게 된 건 4년 전입니다. 그때 저는..." 

- 4년 전이었다. 병수는 빈스토크 시 운영위원회 행정관으로 서른다섯 살의 평범한 직장인이었다. 그는 빈스토크 토박이였다. 그리고 빈스토크를 진심으로 사랑했다. 그래서 그는 빈스토크가 바벨탑에 비유되는 것에 심한 거부감을 느꼈다. 영토 내 모든 시공간이 빈틈없이 상품화된 현대 자본주의의 상징 같은 곳이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빈스토크가 꼭 악마의 소굴은 아니었다. 
"안 살아본 사람들이 알 리가 없지." 
주변국 사람들은 빈스토크를 암세포로 생각했다. 주변국 수도는 언어나 민족 구성이 빈스토크와 거의 동일했기 때문에, 빈스토크와는 국경선이 그어져 있을 뿐 사실은 서로 분리될 ... 

- 늦기 전에 조종사를 발견할 확률은 그다지 높지가 않았다.
해군은 민소를 버릴 생각이었다. 아니, 이미 포기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방위대는 병력을 움직일 생각이 없었다. 대신 빈스토크군 표시가 없는 민간 구조 헬기를 인근 지역에 수소문해서 구해놓은 모양이었다. 그렇게 마련된 장비가 겨우 여섯 대였다. 하루나 이틀 안에 타클라마칸 사막 전체를 탐색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 코스모마피아에 대한 빈스토크 방위군의 공식 입장은 무조건 선제공격이었다. 그러나 선제공격을 지지하지 않는 국가의 영토에서 코스모마피아의 위성 요격 미사일 기지가 발견된 경우에는, 빈스토크 또한 전투기를 직접 보내기가 어려웠다. 
그 경우에 해군은 민간 방위 업체를 고용하는 형식으로 문제를 해결했다. 빈스토크를 위해 일하지만 절대로 빈스토크군이 될 수는 없는 용병 조종사들을 파견 근로 형식으로 고용한 다음 그들을 활용해 폭격을 감행했다. 문제가 생겨도 책임지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다시 말해서 해군은 처음부터 민소를 구할 생각이 없었다. 그들은 민소를 버릴 생각이었다. 이미 7년 전에 세워놓은 원칙에 따라.

-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는데 위험을 감수할 수는 없잖아."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는데 포기할 수는 없다고 해야 되는 것 아닙니까?"
"우리 시민도 아닌데 뭘."
빈스토크 헌법은 방위대의 임무를 빈스토크 시민권자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것으로 제한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빈스토크는 원래 국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빈스토크는 그저 건물일 뿐이었다. 방위대의 원래 임무는 국적을 가르는 것이 아니라 입주자와 방문자 모두를 안전하게 보호하는 것이었다. 그런 게 진짜 빈스토크 스타일이었다. 그래서 빈스토크는 바벨탑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제는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가 아는 빈스토크는 그저 홍보를 위한 수사에 불과했다.

- ... 수직 방향 문서 유통이 어려웠고, 비용 절감을 위해 실험적으로 파란 우편함을 꼭 닮은 문서 수발함을 설치했다.
실험은 실패였다. 당일 문서 전달 성공률이 겨우 90퍼센트에 불과했다. 그러나 사내 연애는 다섯 배로 늘었다. 새트리스는 내부 문서 수발함을 폐지했고, 빈스토크는 파란 우편함을 만들었다. 실용성 때문이 아니라 정 때문이었다. 

- 편지가 돌기 시작했다. 은수가 보낸 편지는 599층을 출발해서 주로 450층에서 600층 사이 구간으로 재빨리 흩어져 갔다. 대외홍보국 직원들이 직접 배달했기 때문이다. 30분 뒤에는 홍보국 직원들이 은수의 편지를 복사해서 빈스토크 전 구역으로 보냈다. 3백 통이 조금 넘는 편지였지만 너무 늦은 시각이라 확산 속도는 빠르지 않았다. 그러나 외국인 관광객들이 늘 당황스러워하는 것처럼 빈스토크에는 밤낮을 바꿔서 생활하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전달 속도가 완전히 0이 되지는 않았다. 

- "접속자가 지금 27,470명이라구요."
"무슨 접속자?"
"뭐긴요? 아까 제가 만들어드린 거요. 타클라마칸 사막에 추락한 비행기 찾는 거."
병수는 잠이 확 달아났다.
"왜? 지금 이 시간에 2만 7천 명이 어딨어? 그것도 한밤중에."

"아, 어디 보자. 빈스토크에서 6천 명 조금 넘고, 우리나라에서 5천 명쯤 되고, 나머지는 다른 나라에서 접속했어요."
"왜?"
"왜는 무슨 왜요? 그냥 찾는 거지.”
"그러니까 그 사람들이 왜? 뭔가 오류 생긴 거 아니야?"
"오류 같은 거 없어요. 뭐가 있어야 오류가 나죠, 사진 하나 달랑인데, 조은수 씨가 빈스토크에 돌린 편지가 번역이 돼서 외국으로 갔어요. 그래서 그냥 찾는 거예요. 그냥. 이유가 필요한가? 원래 인터넷에서 하는 일이 그렇잖아요. 그냥 해요, 그냥." 

- 그리고 한 시간이 지나자 접속자 숫자가 4만 명을 넘어섰다. 그로부터 한 시간 뒤에는 7만 5천 명을 돌파했다. 파란색 칸이 점점 늘어만 갔다. 그 주위로 녹색 선이 불길처럼 번져갔다. 병수는 손을 놓고 전체 화면을 지켜보았다. 그는 그 광경이 이해가 안 갔다.
은수도 마찬가지였다. 오류가 아니라는 말에 은수는 깜짝 놀랐다.

- 막상 극한의 상황에 다다르자 구원에 이르는 길보다는 해탈이 더 가까워 보였다.
'이 상황에서 이런 황당한 생각이 들다니. 아직 죽을 때가 아닌가 보다.'
다시 정신을 잃었다.

- 잠시 후에 다시 정신이 들었다. 누군가의 시선이 또 한 번 느껴졌다. 위에서부터 누군가가 내려다보는 듯한 기분이었다. 너무나 강렬한 느낌이어서 그는 드디어 때가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느님이 분명했다. 영혼을 가득 채우는 이 뜨거운 시선. 하늘 문이 열린 게 틀림없었다.
멀리서 하느님의 사자가 날아오는 소리가 들렸다. 신의 사자가 내는 요란한 소리가 그의 귀에는 어쩐지 HH-60G의 엔진 소리처럼 들렸다.
'이상하다. 이게 아닌데.'
신이 보낸 헬리콥터가 머리 위를 맴돌았다. 헷갈렸다. 장르가 이상했다. 궁금해서 도저히 열반에 들 수가 없었다.

<타클라마칸 배달사고>



- 갈 데가 있나? 수중에 돈이 있어야 말이지.
그러던 어느 날이었어. 이불을 세 겹이나 덮어쓰고 책상 앞에 앉아서 손을 호호 불어가며 책장을 넘기는데 지나온 세월이 촥 떠오르면서 앞으로 살아갈 일이 막막해지는 거야. 대학 등록금은 고사하고 학원비도 못 낼 형편인데, 공부를 잠깐 접었다가는 그대로 영원히 공부하고는 이별일 것 같고, 그렇다고 내가 일을 잘하기를 해, 친척이 있어? 그때는 그냥 끝인 것만 같은 거야. 지금 생각하면 웃기지만, 그때는 진짜 그런 줄 알았어. 절망이라는 게 원래 그렇잖아. 객관적인 상황을 볼 수 없으니까 생각하면 할수록 더 절망적인 생각만 들고, 자살 생각이 들더라니까. 구체적으로 마음을 먹은 건 아니고 막연히 그런 생각이 들기 시작한 정도였지만. 그 3개월이 나한테는 너무 힘들었거든.  
그러다 몸살이 났는데, 자살이고 뭐고 손 하나 까딱 못 하고 누워 있으려니까 이러다 진짜 죽겠구나 싶은 거 있지. 그 정도로 아프면 난방도 잠깐 하고 그래야 되는데 그지? 난방하면 큰일 난다는 강박관념이 머리에 딱 박혀서 그 지경이 됐는데도 난방할 생각을 못한 거야. 전기장판도 오래 못 켰다니까. 
캄캄한 방에 혼자 누워서 그렇게 조용히 죽어가는데, 어둠 속에서 어렴풋이 온기가 느껴졌어. 이렇게 자다가 죽는 건가 보다 하고 스르르 잠이 들었는데, 아침에 일어나 보니까 아직 살아 있더라고. 잘 잤지 뭐. 푹 자고 났더니 몸도 한결 낫고. 

- 수평주의자들이 하나둘 소환되기 시작했지. 대체로 헛다리 짚기 일쑤였는데, 경비대 쪽에서는 별로 개의치 않는 눈치였어. 사건 자체보다는 수평주의 진영을 압박하는 게 목적인 것 같았거든. 
그러니 상대도 따라서 과격해질 수밖에. 수평주의 계열에서도 층 분리주의자들이 나타나기 시작하더라고. 원래 수평주의 이론의 핵심이 층 분리주의이기는 한데 전통적으로 이 사람들은 강경파가 아니에요. 그냥 층마다 자기 나름의 문화가 있으니까 그걸 인위적으로 엮지나 말았으면 좋겠다는 정도였지. 물론 72층 수평노조나 154층 일용노조처럼 처음부터 강성 노조로 출발한 데도 있지만 그 사람들끼리도 워낙 문화가 달라서 수직방향으로는 통합이 불가능했다고. 수평주의자들의 태생적 한계라고 해야 되나. 수직 통합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아무리 숫자가 많아도 정치적으로는 큰 힘을 발휘할 수가 없었으니까. 


- 그런데 수평주의자들에 대한 압박이 점점 심해지면서 분리주의자들이 드디어 통합을 하기 시작한 거야. '분리주의연대'라니. 사실 말이 안 되는 건데 그때는 그런 일이 막 일어났어.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말이야. 520층 노조가 가세하면서 그 여자도 거기에 가담한 모양이야. 굉장히 비중 있는 이론가였으니까, 선택의 기로에 서기를 강요당하지 않았겠어? 애매한 태도를 보이지 마라, 할 거면 하고 아니면 떠나라, 뭐 이런 식이었겠지. 

- 전화통에 불이 날 줄 알았는데, 안 그러더라고. 사태가 생각보다 심각했던 거지. 욕이나 퍼부어댈 상황이 아니었다고. 예상보다 훨씬 강력한 폭발이었으니까. 사제 폭탄이 그렇게 강력할 줄은 아무도 생각을 못했을 거야. 그 정도면 빈스토크에서는 거의 전략 무기급이거든. 
그런데 무엇보다 중요한 문제는 말이야, 폭발 지점이 하필 520층이었다는 거야. <520층 연구>에 나오는 그 아름다운 520층 말이야. 자세한 첩보는 아직 안 들어왔지만 상황은 대충 파악할 수 있잖아. 아직 진압되지 않은 건 520층 노조밖에 없었으니까.
진동이 멈추고 건물 전체가 무너지지는 않겠다는 확신이 든 순간, 철렁, 가슴이 무너져 내렸어. 그 여자! 그 여자 생각이 나더라고. 520층 주민 중에 내가 아는 유일한 사람 말이야. 

- 아, 이러면 안 되는데! 이게 아닌데!
기동 연습 때문이었어. 그런 걸 몇 년간이나 해오는 바람에 우리는 이게 장난인 줄 알았던 거야. 전쟁놀이로 착각한 거지. 입체로 된 장기판으로 두는 고차원 장기 정도로 생각했나 봐. 그걸 할 줄 안다는 게 그렇게 우쭐할 수가 없었어. 흔치 않은 기술이었으니까. 하지만 그 순간, 도대체 내가 무슨 짓을 한 건가 싶더라고. 더럭 겁도 나고.
물론 나야 아무 짓도 안 했지. 내가 판단해서 한 일이 아니잖아. 그냥 시키는 대로만 한 것뿐이었으니까.  

 

<엘리베이터 기동연습>



- 그 생각이 딱 드는 거야. 아, 뭔가 오는구나. 그래서 코끼리 등에서 내려서 옆자리에 가만히 섰어. 얼굴을 보니까 진짜 이상하더라고. 나만 그렇게 생각한 게 아니었나 봐. 주변이 갑자기 조용해지는 거 있지. 문득 고개를 들어보니까 가까이에 있던 사람들이 전부 멍하게 아미타브를 바라보고 있는 거야. 
묘한 기분이었어. 뭐라 말로 설명할 수가 없는 기분이었지. 깨달음의 순간을 옆에서 지켜보다니. 그걸 뭐라고 하면 좋을까. 돌보던 코끼리가 부처가 되려는 순간을 어떻게 말로 풀어서 설명할 수 있을까. 그런데 나는 그걸 어떻게 알아챈 걸까. 내가 깨달은 것도 아닌데. 깨달은 건 아미타브였는데. 그게 어떻게 나한테 전해졌을까. 
그런 순간이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전부터 하고 있었지만, 아무 징후도 없이 그렇게 갑자기 그 순간이 닥칠 줄은 몰랐어.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이 전혀 없어서 뭘 어떻게 느껴야 할지, 어디를 유심히 바라보고 있어야 할지 하나도 알 수가 없는 거야. 
그래서 아미타브의 눈을 들여다봤어. 어디를 보고 있는지 알 수 없는 눈이었는데, 분명 뭔가를 보고 있는 눈이었어. 그게 뭐였을까? 세상 건너편에 있는 무언가였을까, 아니면 자기 안에 들어 있던 무언가였을까? 
갑자기 시간이 멈춘 것 같았어. 딱 한순간만 지나면, 그 한순간 ... 

 

<광장의 아미타불>



- 그 말에 최신학은 자세를 고쳐 잡고 코스모마피아가 빈스토크 쪽으로 대륙간탄도미사일을 겨누는 이유를 다시 한번 설명했다. 그러자 고 의원을 비롯한 국방위원회 소속 의원들이 곧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돌아갔다. 
'저 표정은 뭐지? 생전 처음 듣는다는 표정이잖아.'

 

- 어렵게 빙빙 돌려서 설명을 하기는 했지만 빈스토크가 공격을 받는 이유는 간단했다. 선제공격을 했기 때문이다. 공식 집계 같은 것은 만들어본 적도 없지만 지난 10년간 빈스토크는 코스모마피아 주둔 의심 지역에 대한 공습으로 최소한 2만 명 이상의 민간인 사상자를 내고 80만 명 이상의 난민을 발생시켰다. 빈스토크 전체 인구보다 많은 숫자였다.  

- 일반인 중에는 그 사실을 모르는 사람도 많았다. 정보를 통제했기 때문이 아니다. 단지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시에서 심각한 수준의 허위 정보를 흘린 적도 없었다.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을 정도의 뻔한 거짓말을 뉴스에 내보낸 적은 있었다. 물론 그런 경우에도 국방위 소속 시의원들에게 틀린 정보를 제공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될 일이 아니었다. 그들은 사태의 심각성을 잘 알고 있었다. 

 

- "그러니까 요지는, 우리 쪽에서 먼저 도발한 전쟁이라는 겁니다."
"아니, 정부 담당자라는 사람이 어떻게 국방위원회에서 그런 말을 입에 담을 수 있어요? 우리 쪽에서 먼저 도발을 하다니."

- 그랬는데, 항공모함 두 대를 잃자마자 의회는 적반하장으로 돌아서서 그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다.
"도대체 왜 그런 겁니까? 답변하십시오."
"왜냐고요?"
그는 말을 잇지 못했다. 수많은 생각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중에는, 이번에야말로 빈스토크가 망하겠구나 하는 생각도 포함되어 있었다. 심판을 막을 의인 열 명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질문에 답해야 할 사람들이 질문을 던지는 위치에 몸을 숨기려 하기 때문이었다. 책임져야 할 사람들이 책임을 지지 않기로 한 날. 그렇게 심판의 날이 다가왔다. 

-

어차피 시간문제였다. 상대에게는 이미 마하 25의 속도로 궤도를 도는 인공위성을 공격할 수 있는 기술이 있었다. 심판의 날이 당장 들이닥치지 않는다고 안심할 상황은 아니었다. 심판의 날과 빈스토크 사이에 놓인 것은 결코 넘지 못할 두터운 기술 장벽이 아니라, 단지 인공위성 파괴 무기를 지상 목표 타격용으로 전환하는 실용적인 문제에 불과했다.

 

- "얼마나 걸리죠?"
"길어야 2년."
그 순간 회의장에 평화가 찾아왔다. 종이 한 장에 가려진 아슬아슬한 평화. 
길어야 2년, 짧으면 6개월.
이 분위기는 뭐지? 2년이 길다는 건가? 뭐 하자는 거지? 이번 시의회 임기 안에 처리할 필요는 없다 이건가. 그때까지 또 아무것도 안 할 거야?'


- 아무튼 평화가 찾아왔다.

- 그러나 시의원들이 정말로 아무것도 안 하고 시간만 보낸 것은 아니었다. 그날 이후 다량의 자금이 빈스토크를 서서히 빠져나가면서 최상층 부촌에서부터 부동산 가격 하락을 알리는 징후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17년 만이었다. 

 

- "빨리도 움직이는군. 매물이 아주 쏟아져 나오는구만. 그런데 집값이 왜 이렇게 천천히 떨어져?"
"사려는 사람이 많으니까요."
"누가 사? 자금이 해외로 다 빠져나가는 판에 그거 살 만한 투자자가 있어?"
"국내 자금으로 소화되는 모양입니다. 개인이..."
"개인이?"
"주거 목적으로 구매하는 모양입니다."
최신학은 그만 말문이 막혔다.
약 2주 뒤 모친이 그에게 전화를 걸어 610층에 있는 실내 정원이 딸린 집 한 채를 새로 계약했다는 이야기를 했을 때는 그만 소리를 버럭 지르고 말았다.

"지금 거기를 왜 들어가요? 물어보고나 하시지."
"됐다. 나는 자식들한테 손 벌릴 생각도 없고 이래라저래라 잔소리 들을 생각도 없다. 놔두면 더 떨어진다 그러는데, 그때 되면 그 집도 벌써 나가고 없을 것 같아서 얼른 계약했다. 손해 좀 보면 어떠냐. 욕심은 없어. 정원도 있고 얼마나 좋아. 키울 데 없어서 그때 그놈 보내버린 거 생각하면 진짜. 평생 그런 집에서 한번 살아보는 게 소원이었는데, 잘됐지? 돈 걱정은 마라. 그만한 능력은 되니까." 

- 마지막 말은 전 재산을 쏟아부었다는 의미였다. 모친은 5년 전에 그 개를 지인에게 보내버린 것을 두고두고 아쉬워했다. 최신학 역시 마찬가지였다. 키울 데만 있었어도. 
영리한 놈이었다. 빈스토크 토박이 개답게 3차원 공간을 인지하는 능력이 뛰어났다. 어디에 흘려놓아도 혼자서 엘리베이터를 얻어 타고 집으로 찾아올 만큼 영리한 짐승. 그냥 그런 줄로만 알았는데, 어느 날 그 개는 스타가 돼서 나타났다. 영화배우라니. 그 개는 유명한 마약 수사견 시리즈의 주인공으로 발탁되었다. 개가 사는 집이 자기네 집보다 비싸다는 소식을 듣고 그는 말 그대로 참담한 기분이 되고 말았다. 젠장. 

- "잘하셨어요."
최신학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그 와중에도 정부는 금융시장 붕괴를 막기 위해 해외 자본 유치에 총력을 기울였다. 그중에는 이슬람 금융 유치를 위한 조치, 특히 무라바하나 이자라 방식을 이용한 부동산 거래와 관련한 인지세 이중과세를 방지하는 법안도 포함되어 있었다. 

 

- "뭐? 무슨 법안을 통과시켜? 이제 아주 별짓을 다 하는구만. 빈스토크에 무슬림이 몇 명이나 된다고. 그 돈까지 싹싹 긁어서 있는 놈들 이주 자금이나 만들어주자는 거야 뭐야?" 
최신학은 분통을 터뜨렸다. 진짜 문제가 생기면 제일 먼저 달아나버릴 인간들이 아무 일도 없을 때만 애국자인 척하는 게 싫어서였다. 그들은 빈스토크를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았다. 진정으로 빈스토크를 사랑하는 사람은 최신학 자신이었다. 그에게는 빈스토크에 대한 절대적인 사랑의 증거가 있었다. 저소공포증이었다.

-

"충분히 요격할 수 있습니다."
정부의 공식 입장이었다. 그러나 그 말은 진실이 아니었다. 빈스토크는 미사일을 몸으로 받아낼 준비를 하고 있었다. 물론 비밀이었다. 버틸 수 있다는 보장은 없었다. 그것 역시 비밀이었다. 

- 그의 임무는 상층 구역에 위치한 정부 소유 부동산을 팔아서 하층 구역에 새 정부 부지를 마련하는 일이었다. 분명 좌천이었는데, 일의 성격만 따지자면 영전에 가까웠다. 
최대한 비싸게 팔고 최대한 싸게 사야 한다는 원칙은 여기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상한 소문이 돌아서 부동산 시장이 요동치기 전에 재빨리 일을 처리해야 했다. 그는 빈스토크 최고의 부동산 전문가들로 팀을 꾸렸다. 비싼 팀이었지만 돈 걱정은 할 필요가 없었다. 일 자체도 생각만큼 어렵지 않았다. 실제로는 시중 금융기관이나 로펌 같은 일 잘하는 민간기관 인사들이 주축이었고 그는 그저 관리자 역할에만 충실하면 그만이었다. 
"절대로 정보가 새 나가서는 안 됩니다."
"물론입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 그렇게 반년이 지난 어느 날이었다. 본격적으로 일이 진행되기도 전에 150층에서 200층에 이르는 구간의 부동산 가격이 뛰기 시작했다. 최신학은 우선 해당 지역 부동산 거래 내역을 검토했다. 거래 내역 확인 결과 대부분 정치권 내부 관계자의 소행으로 드러났다. 욕이 튀어나왔다. 물론 어느 정도 예상은 했던 일이었다. 그러나 예상을 훨씬 뛰어넘을 만큼 많은 돈이 새 중심지 부지로 유입되고 있었다. 반년 간 준비해 온 계획을 처음부터 다시 수립해야 할 지경이었다. 

- 그런데 자료를 정리하다 보니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있었다. 외국 은행 몇 개가 해당 지역 부동산을 일부 매입하기 시작했는데, 매입 가격이 시세보다 약간 높아서 그 일대 부동산 실거래가 상승을 주도하는 듯한 분위기였다.
"저거 저렇게 매입해대면 안 될 텐데. 그런데 언제부터 은행이 부동산을 매입할 수 있게 됐지?"
최신학이 물었다.
"은행이요? 그럴 리가 없는데. 어디 보자. 아, 동남아시아 쪽 은행이네요. 아마 이슬람 금융 자본 유치 때문에 그러는 걸 겁니다. 이자라 거래일걸요. 아니면 체감 무샤라카 형태로 들어온 돈이거나 인지세 이중과세 문제는 해결이 됐는데 이자라 거래를 무슨 거래로 볼 것인가 하는 문제는 아직 금융 당국에서 정리가 안 됐거든요. 그래서..." 

- "설마 미사일이 떨어지기야 하겠어? 그런 거 아니잖아. 그렇지?"
"예."
"그러니까. 무식한 사람들이나 이민 간다고 난리지. 사람들 대부분 안 그렇잖아. 미사일 날아오면 요격하면 된다며. 아들이 정보국 요원인데 내가 그런 헛소문에 휘말려서야 되겠어?" 

 

- 그러나 모친은 빈스토크가 미사일 요격에 성공할 확률이 30퍼센트도 채 안 된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대부분의 시민들이 마찬가지였다. 실제로 그날이 오면, 긴급대피조치를 내려서 인명 피해야 최소화할 수 있겠지만 재산 피해는 어쩔 수가 없었다. 어느 보험도 전쟁으로 인한 재산상의 손해를 보상해주지는 않으니까. 
하지만 최신학은 모친에게 그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아니, 그 누구에게도 알릴 수가 없었다. 본인 재산을 처분하지도 않았다. 내부자 중에는 이미 그런 일에 나선 사람들도 꽤 있었지만 그는 아니었다.
그의 역할은 부동산을 직접 거래하는 일이 아니었다. 다만 팀을 꾸리고, 부지런히 정보를 수집할 따름이었다.  

- "형식상 이자는 어디에도 발생하지 않겠지만."
"그냥 장기 임대하고 똑같은 거잖아요."
"다르죠. 부동산 소유권이 은행에 있으니까요."
"소유권이라면?"
"실물거래 없이 돈과 돈 사이에서만 거래가 이루어지는 걸 죄악시하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실물 소유권이 반드시 움직여야 해요. 무라바하도 그렇고 이 경우에도 실물 소유권은 일단 은행으로 넘어가요. 그래서 금융 위기 때도 이슬람 금융을 주로 취급하는 은행들은 상대적으로 영향을 덜 받았어요. 실물을 가지고 있으니까."
"그러니까, 형식상 은행이 사는 거지만, 실제로는 은행이 사는 게 아니라..."
"사실상 그냥 대출을 한 거죠. 돈만 내주고 이자를 받아먹으면 샤리아에 어긋나니까, 중간에 실물이 이동하게 한 거예요. 은행이 구매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상 구매를 한 사람은 은행이 아니라, 은행에서 대출을 받은 고객이겠죠. 아니면 채권 투자자이거나. 물론 그걸 채권이라고는 안 부르겠지만, 아무튼 예전에는 실물 소유권이 은행에 넘어갔다가 개인에게 다시 넘어가는 두 단계 모두에 대해 세금을 부과했는데요, 그걸 사실상 한 건의 거래로 보자는 게 인지세 이중과세 방지법이고요. 사실상 한 건이 맞으니까요. 그런데 금융 당국에서는 아직 이 부분이 정리가 안 돼서, 은행이 구매한 걸로 처리한 거예요."

 

<샤리아에 부합하는>



- "뭐 하던 애야? 옷도 이상하게 입고."
연수 언니(여, 당시 나이 36세)의 말이었다. 나는 이두 언니를 유심히 지켜보았다. 이두 언니는 520층 헬스장 생태계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예를 들어 그 시절 520층 여자들은 헬스장에서 반바지를 입는 일이 거의 없었다. 긴 운동복 바지에 밝은 단색 반팔 티셔츠가 표준 복장이었고, 무거운 것을 드는 운동보다는 달리기나 요가 같은 운동을 선호했다. 단발머리인 경우 헤어밴드를 하는 게 일반적이었으며 양말은 흰색 혹은 노란색을 선호했고 운동 전에는 늘 블랙커피를 마셨다. 별다른 이유는 없고 단지 그게 유행이었을 뿐이다. 언니는 그중 단 하나도 우리와 비슷하지 않았다. 누가 봐도 외지인이 분명했던 셈이다. 

- 진짜로 이상했던 점은, 언니가 중년 남자들이 중심인 헬스장 정기 모임에 회원으로 가입했다는 사실이었다. 물론 헬스장을 찾는 이삼십 대 회원들은 중년 남성들과는 절대 어울리지 않았다. 말을 하거나 인사를 나누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운동기구까지도 완전히 분리해서 사용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남녀가 완전히 분리된 헬스장이 있었다면 모두가 그쪽으로 몰려갔을지도 모른다.


- "왜 피하냐고? 글쎄, 일단 무섭잖아. 색깔 이상한 반바지 같은 거 입고 우르르 몰려와서 막 어후어후 소리 내면서 운동하고 자기들끼리 이 사장, 박 사장, 그러면서 으하하하 떠들고. 그렇게 어후어후 운동하는 티 팍팍 내놓고는 끝나면 모여서 고기 먹으러 가고."

이웃에 사는 대학생 지현 씨(여, 22)는 헬스장을 찾는 중년 남성들에 대해 그렇게 반말로 증언했다. 다른 사람들의 의견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랬기 때문에 어느 날 이두 언니가 어후어후 하는 무리를 따라 고기를 먹으러 가는 모습을 보고 나를 포함한 또래 회원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 "왜 따라갔냐고? 일이니까 어쩔 수 없지. 그런 데서 입소문이 유통되는 거니까. 그거 하려고 여기로 이사 왔는데 선택의 여지가 어딨어. 젊은 애들 따라다녀 봐야 나올 것도 없고. 그렇잖아. 자기 것만 딱 하고 집에 가버리는 사람들이랑 어울려서 뭐해."
이두 언니의 말이었다. 중년 남성을 제외한 모든 계층의 회원들은 헬스장에 같이 다닌다는 이유로 모임을 만드는 경우가 전혀 없었다. 같은 시간에 운동을 끝마쳤다고 샤워를 같이하는 일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샤워장에서 마주쳤을 때 서로 말을 건네는 법도 없었다. 물론 언니는 예외였다. 


<카페빈스토킹 Cafe Beans Talking- <520층 연구> 서문 중에서 >



 - Q. ... 보

여준 현란한 액션 연기였을지 몰라도, 당신을 최고의 배우로 만든 것은 역시 낮은 코>에서 보여준 정적인 내면 연기인 것 같다. 

A. 나에게 <낮은 코>는 축복 같은 작품이다. 그 작품을 촬영하는 동안 나는 내가 아닌 것 같았다. 나 스스로의 모습에 깜짝깜짝 놀랐다. 다시 하라고 하면 그만한 연기는 못 해낼 것 같다. 시간이 많이 주어진다고 해서 반드시 더 잘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 사실을 확인시켜 준 작품이었고, 내가 아직도 변화할 여지가 있다는 사실을 여실히 드러낸 작품이었다.

Q.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어느 부분이었나.
A. 물론 마지막 장면이었다. 그 장면이 마지막 촬영이기도 했는데, 마지막 대사를 연기하는 순간 내 안에 있던 그 무언가가 몸 밖으로 빠져나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잊을 수 없는 순간이다.

Q. 어떤 대사였나? 다시 한번 재연을 부탁해도 될까.
A. "멍." 간결한 대사였다. 조금 전에 말한 것처럼 재연은 불가능하다. 앞으로도 영원히 그럴 것이다. 

Q. 최고의 자리에 올랐는데, 앞으로도 계속 도전하고 싶은 영역이 있나?

A. 새로운 일을 시도할 생각은 없다. 지금 내가 하는 일에 만족한다. 아무나 할 수 없는 경험이었고, 이 일을 하는 동안 충분 ... 

 

<내면을 아는 배우 P와의 '미친 인터뷰'>

 

 


 

초판 작가의 말



쓸 말은 다 썼다고 생각했는데 작가의 말이 남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원고를 마무리하자마자 서술자는 서둘러 퇴근해 버렸고 이제 아무리 써도 반성문 비슷한 글밖에 안 나올 텐데, 그래서 이 순간에 작가의 말을 써야 하나보다. 

예전에 어느 선생님께서 성격 좋은 사람은 작가가 못 된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그때그때 말로 풀어내지 못하고 꽁하게 마음에 담아두었다가 나중에 아무도 안 보는 데 가서 글로 쓰는 사람이 작가가 된다는 말씀이셨다. 

이 책을 쓰면서 나는 세 마디의 말을 마음에 담았다. 첫 번째는 "이런 웃기지도 않은 개그 따위 별로 읽고 싶지도 않다"라는 취지의 혹평이었다. 이게 개그로 보이다니, 그날 내내 기분이 나빴는데, 그냥 꽁하게 마음에 담아두었다.

두 번째는 "이 글 때문에 떠나려던 발길을 멈추고 좀 더 기다리기로 했다"라는 말이었다. 나에게 이 말은 "세상을 떠나려다 잠시 결정을 미루기로 했다"는 말로 들렸다. 얼마나 진지하게 한 이야기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내가 작가이다 보니 일단은 마음에 담아야 했다. 

나머지 하나는 이 책의 편집자들이 한 말이다. 어느 순간부터 이 사람들이 이 책을 "우리 책"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는데 그 말이 또 마음에 남았다. 그들은 그렇게 불러도 좋을 만큼 열심히 일했고 때로는 나 이상으로 영감에 가득 차 있기도 했다. 

이 글을 쓰는 동안 나를 긴장하게 했던 말들이다. 이렇게 말로 풀어낸다고 그 긴장이 다 덜어지는 건지는 잘 모르겠으나, 마음에 담아둘 새 말들을 찾을 때까지 당분간은 꽁하지 말아야겠다. 

도와주신 많은 분들에게 감사하며, 무한한 영감의 원천이신 L씨의 건강을 기원한다. 특히 오랜 친구이자 후원자인 주희에게 말로 다할 수 없는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2009년 5월

배명훈

 


 

신판 작가의 말



2009년에 출간된 저의 첫 단행본 <타워>는, 당시 출판계에 꽤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다고 합니다! 안타깝게도 저는 그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지내다가 몇 년 뒤에 소문으로 전해 들었습니다. 화제가 된 줄 몰랐고 이 책으로 인해 제 삶이 윤택해지지도 않았으며 책 자체도 관리가 잘 안 돼서, 2009년판 <타워>는 몇 년 후 절판되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저에게 타워는 도착점도 반환점도 아닌 출발점이었습니다. 그 후로 10년이 넘도록 매년 한두 권씩 책을 내며 달려가느라 출발점을 되돌아볼 여유가 없다 보니 이 책의 절판 상태가 오래 유지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P턴 하듯 크게 한 바퀴를 돌아 출발점 근처를 지나게 되면서, 이 책을 재출간할 기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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