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자 : 배명훈
출판 : 북하우스
출간 : 25.05.27
이 말부터 해야겠다.
너무 좋았다.
이 책이 '시류'에 민감하게 다듬어진 글이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그 노림수를 빤히 보면서도 기쁘게 꿰뚫릴 수밖에 없었다.
<기병과 마법사>는 최근 강세인 여성적 작품들의 포인트를 아주 섬세하게 세공해서 녹여낸 '성장물'이자 가벼운 '전쟁물'이다. 그리고, '연애물'이기도 하고 '구원물'이기도 하다. 작가가 '요즘은 이런 거 좋아하지?'하고 내미는 데도 차마 부정하지 못하고 마냥 좋아할 수밖에 없어서, 마치 윤해를 만난 듯한 행복한 패배를 겪었다. 그 사이사이에 숨겨진 '난 이런 거 좋은데'하는 작가의 병력 운용에 설렜다. 문장도, 표현도 잠시 책장을 덮고 심호흡해 가며 읽어야 할 만큼 좋았다. 내 스스로 정의하지 못하던 나의 취향을 <기병과 마법사>라고 표현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동시에 느꼈다. 나는 이제 <은하영웅전설>을 다시 정주행 할 모든 준비를 마쳤다.)
내 상상 속의 윤혜는 <신부 이야기>의 아미르와 비슷하지만 좀 더 단아하고 수수한 이미지다. <기병과 마법사> 속의 인물들은 죄다 지금까지 내가 접해온 여러 작품들의 가장 이상적인 부분들만을 모아 다듬어낸 듯한 모습을 하고 있다.
비슷한 시기에 읽은 정세랑 작가의 <설자은> 시리즈와 공명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면 과한 상상일까.
'주머니 속의 송곳'과 흰매가 새겨진 '칼'이 거문담의 검은 벽 너머로 떠오르는 것을 본 것만 같다면.
왜 나는 <기병과 마법사>가 이리도 마음에 드는 걸까.
아마도 다음과 같은 이유들에서일 것이다.
이전 세대까지의 주류 작품에서 성별을 크게 부각시키지 않은 '인간'은 대부분 남성에 가까운 특성들을 가지고 있었다. 이성적이고, 현명하고, 적절히 다정하지만 '남성'적인. <기병과 마법사> 영혜는 중성적이다. 서술에서 여성이라고 명시되어 있을 뿐, 가만 들여다보면 딱히 여성적인 특성이 드러나지 않는다. 여성이라고 읽으면 여성적이고, 남성이라고 읽어도 무리가 없다. 그래서 독자는 '가장 이상적인' 면들만을 영혜에게 덧씌워 읽을 수 있다.
영윤혜. 왕가의 핏줄을 이었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살아남기 위해서는 스스로를 숨겨야만 하는 '송곳'이자 '칼'.
그의 아버지가 순응했던 운명을 거스른, 가장 약한 고리이자 가장 의미 있는 고리.
영혜는 '스스로를 구한다'. 결심 만으로 온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이능을 얻지는 않는다. (자신의 무의식을 통해 소환하는 마법을 익히기는 하지만, 그 능력을 인간과의 전쟁에서 사용하지는 않는다) 타인의 능력에만 기대지도, 도움을 청하지 못하지도 않는다. 필요한 도움을 청하고, 자신이 할 수 있는 것들을 하고, 잃을 줄 알면서도 선택한다. 그래서 독자는 '자신이 닮고 싶은' 면들을 영혜에서 본다.
영혜는 많은 것들을 잃었다. 그중에서는 지키고 싶었던 것도, 잃어도 상관없었던 것도, 가지고 있는지도 몰랐던 것들도 있었다. 틀림없이 아플 그 순간들을, 영혜는 과하지 않은 담담함으로 표현한다. 현실을 넘어서는 거대한 고통도, 상상하기 어려운 강렬한 감정도 드러내지 않는다. 각자가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고통을, 누구나 겪어보았을 고통을 '영혜'가 했을 법한 표현으로 드러낸다. 그래서 독자는 '자신이 겪었던 고통'들을 공감한다.
영혜와 다르나킨은 그 위로 자유롭게 투영할 수 있을 만큼 담박하고, 그 투영이 충분히 달콤할 만큼 우수한 이들이다. 대다수가 몰라볼지라도, 아는 이들은 알아볼 수 있는, 고귀하기에 고난을 겪지만 그만큼 뛰어난, '드러나지 않지만 화려한 봉황이 새겨진 책상'이다.
완벽한 인간은 없다. 그러나 모든 인간은 이상을 꿈꾼다.
자신이 한씨 일가 만큼도 권세가 없을지라도.
종탁금 만큼이나 비열하고 음습할지라도.
자신이 영혜와 다르나킨이라고 꿈꾸고 싶어 한다.
아. 알면서도 당할 수밖에 없다니.
너무 행복하고 분하다.
꿈만 꾸는 것은 얼마나 손쉽고 달콤하고 허망한가.
송곳이 될 수 없다면 바늘이라도, 그마저도 될 수 없다면 가시라도 되어야지.
드러날 때까지 갈고 닦아야지.
좋아한다면 그 정도는 닮기 위해 노력해야지.
배명훈을 좋아하게 되었다.
행복하다.
- 가을을 알리는 첫 바람에는 재앙의 기운이 완연했다. 소라울의 낮고 긴 성벽 안에 사는 사람들은 가까이에서 나는 피비린내에 질려 아무도 그 냄새를 맡지 못했다.
- 십이 년 동안 성군이었던 왕은 이듬해 3월에 폭군이 되었다. 이름 없는 충신은 머리가 깨지고, 세도를 누리던 권신은 머리만 달랑 남았다. 왕의 기병이 성내로 들어와 귀족, 고관대작의 저택 앞에 진을 쳤다. 사냥 때나 보던 정예 마군 기창대(騎槍隊)였다. 군권을 지닌 지방 귀족이 거병했다는 소식이 들리면, 기창병이 역당 수괴의 소라울 저택으로 밀고 들어가 가솔을 사냥했다. 다음 날 저자에는 사람 고기를 도축해 늘어놓은 점포가 생겨났다. 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그득하게 쌓인 고기 위에 사람의 머리가 대롱대롱 걸려 있었다.
- 조정의 대소신료는 적절한 때에 왕의 폭주를 막아내지 못했다. 성군이었던 시절을 기억한 탓이었다. 그러는 사이 왕은 조회(朝會)를 폐하고 국사에서 손을 떼다시피 했다. 왕이 있어야 할 자리는 엉뚱한 자들이 채웠다. 그들은 뇌물에 관직을 팔았고, 관직을 산 자는 관직값을 쥐어짰다. 백성의 고혈이었다.
- "위는 처음부터 그렇게 될 자였다. 십이 년이나 참으며 기다려준 게지."
아버지가 담담하게 말했다. 비통함이나 놀라움이 전혀 섞이지 않은 말투였다. 윤해가 숨을 어떻게 가다듬어야 할지 망설이는 사이 아버지의 말이 다시 이어졌다.
"귀족들은 위가 자신들에게 조정의 관직을 너그러이 허락한다고 믿었겠지. 위는 지방의 토호들이 인질이 될 식솔을 아무 경계 없이 내준다고 생각했을 게고."
- 아비는 역사책에 딱 한 줄로만 기록되는 게 삶의 목표인 사람이었다. "왕에게는 영유라는 이름의 형이 있었다." 그게 그가 감당할 수 있는 가장 긴 기록이었다. 영위의 형으로 태어난 건 돌이킬 수 없으나, 거기에 단 한 줄만 더 남아도 다음 줄은 죽은 이유를 길게 설명하는 내용이 될 거라고 했다. 자기는 역모를 꿈꾼 적이 없지만, 누군가 역모를 꿈꾼다면 반드시 자기 이름을 빌리려 할 거라고. 실제로 그런 역모가 일어나지 않더라도 동생은 내내 그 생각을 하고 있을 거라고.
- 지난 십이 년간 윤해는 제 아비의 망상이 숙부보다 깊고 위험하다고 여겼다. 누구라도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결국 아비가 옳았다.
- 아버지는 영민한 사람이었다. 고전에 능통하고 시문이 탁월하며 기예에도 두루 밝은 인물이었다. 왕이 되기에 적합한 사람이었다는 뜻이다. 어린 시절 윤해는 아버지가 돌 위에 물로 그림을 그리는 모습을 자주 지켜보았다. 완성되기도 전에 한쪽 귀퉁이가 증발해 사라지는 그림이었다. 거기에는 분명 천하를 호령하는 기상이 담겨 있었다. 험한 봉우리를 발아래 굴복시키는 호연지기도 자주 눈에 띄었다. 그러나 그 그림을 본 사람은 자기밖에 없었다. 봤다는 이야기도 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 모래 위에 작대기로 그린 그림은 그보다 오래 남았다. 물로 그린 것보다 획이 무뎠지만, 완성될 때까지 전체가 지워지지 않는 그림이었다. 아버지가 마당에 흙 그림을 그리면 윤해는 하던 일을 팽개치고 마루에 나가 앉았다. 발톱에서 시작된 조그만 그림이 어느덧 봉황이 되어 그 큰 마당을 가득 채울 때까지. 완성된 그림은 아주 짧은 시간 동안만 하늘을 우러렀다. 다음 순간 아버지가 비를 들고 마당을 다 쓸어버릴 테니.
- 아버지가 허락한 놀이가 또 있었다. 판과 기물 없이 말(言)로만 두는 장기였다. 규칙은 아버지가 정했고 놓이는 기물도 늘 달랐다. 말로 지형을 설명한 다음 그 위에 말로 기물을 놓고 말로 기물을 움직여 승부를 겨뤘다. 나이를 먹고 보니 그 놀이는 장기가 아니었다. 역사책에 있는 실제 싸움을 상상으로 책상 위에 옮겨놓은 거였다. 둘이 마주 앉은 책상 위에서 아버지는 백만 대군을 거느렸다. 백만을 동원해 먹이고 재워가며 성을 포위하고 적을 토벌했다. 말로만 이어지는 긴 원정길은 막히는 데 하나 없이 장쾌하고 유려했다. 진법에, 축성술에, 둔전에, 병기 하나까지 어느 하나 모르는 게 없는 이의 구상이었다. 그러나 그 놀이도 불을 끄고 잠이 들면 하나도 안 남았다. 아무도 기록하지 않았고, 어린 윤해 말고는 아무도 기억하지 않았다.
- 아비는 주머니 속에 든 송곳이었다. 길이가 길고 끝이 너무 날카로워 뚫고 나오지 않기가 더 어려운 재목이었다. 그런데도 그 송곳은 주머니를 빠져나간 적이 없었다. 그래서 더 대단했지만, 윤해는 그런 아버지가 답답하고 싫었다. '차라리 모반을 해버리지!' 그런 생각을 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한 줄보다 길게 기록되면 안 되는 운명이란 윤해에게도 고스란히 대물림될 것이었다.
- 그래서 윤해는 오랜만에 들어온 혼담이 당혹스러웠다.
- 그날 밤 윤해가 아비에게 물었다.
"아버지는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요? 목숨을 부지하려고요?"
왕의 형인 영유는 흔들림 없는 눈을 하고 자애롭게 대답했다.
"살려고. 나도 살지만, 너도 살리려고."
"정말로 사는 게 맞나요? 산몸에서 맨손으로 뼈를 꺼내는 자 옆에서."
"그렇지? 그럼 역시 모반을 준비하는 편이 나을까?"
아비가 진지하게 말했다. 그 말이 진심이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어쩌면 한순간 심장이 두근거렸는지도 모른다.
- 그러나 반정을 도모하기에는 이미 늦은 때였다. 누가 충신인지 잘 아는 어진 임금으로 산 날이 길었던 만큼, 폭군 영위는 누구를 먼저 없애야 반역의 씨앗을 확실히 짓밟게 되는지도 훤히 꿰고 있었다. 혹시 그런 사람이 남아 있지 않을까 떠올리기도 전에, 시간을 태평성대로 되돌릴 자들의 몸은 뼈와 살과 피로 나뉘어 성 밖 여기저기에 뿌려져 있었다. 반정의 가장 결정적인 연결 고리가 되어줄 사람들이, 독려하고 다독이고 계획하고 결행해서 일이 틀어지지 않도록 고삐를 죌 중신들이 짐승의 먹이가 되어 산속 깊은 곳에 뿔뿔이 흩어진 뒤였다.
둘이 마주 앉아 말로 두던 장기처럼, 무슨 수를 써봐도 금방 결판이 나는 싸움이었다.
- "살아요, 일단."
윤해가 말했다. 긴 침묵 끝에 간신히 비어져 나온 말이었다.
"그래, 살자."
아버지도 머릿속에서 윤해와 같은 장기를 두고 있었을 것이다.
- "이런 날을 내다보고 평생 그렇게 사셨군요."
"평생 그러고 살았지. 미안하다."
"왕위를 마다한 것도 그래서였나요?"
"그때 내가 왕위를 이었어도 딱 지금쯤 위가 모반을 일으켰을 거다."
- 그러기 전에 먼저 없애버리면 되지. 이렇게 될 걸 미리 다 알았는데. 윤해가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런데 아버지, 저도 송곳인데요. 그렇게 가르치셨잖아요.”
말을 내뱉자 눈물이 왈칵 치밀었다. 혼자 생각하던 말을 맥락 없이 꺼내놓은 건데도, 아버지는 잠깐 생각하더니 다정한 목소리로 정확하게 대답했다.
"칼날이지. 품은 내가 제일 잘 안다."
- 사람처럼 괴나리봇짐을 지고 네발로 황급히 산길을 오르는 회색곰 두 마리가 나왔다. 또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는 야인 여자가 진지한 얼굴로 윤해를 불러댔다.
열흘 뒤에는 변방에서 사자(使者)가 당도해 초원의 동태가 심상치 않음을 알렸다. 변방의 야인족이 세력을 규합하여 거병하였음을 알리는 보고였다. 기회를 틈타 젊은 장수 몇 사람이 출병을 자처하는 소(疏)를 왕에게 올렸으나, 왕은 속내를 알아채고 허락하지 않았다. 그들이 바라는 건 원한을 사지 않고 소라울을 떠나는 것이었다.
- 신료가 절반도 남지 않은 조정에서 변방의 일을 의논하는 사이, 사자가 가지고 온 또 다른 이야기가 여항을 떠돌았다. 변경 너머 초원 깊이 자리한 옛 유적지에서 봇짐 진 회색곰 두 마리가 목격되었다는 이야기였다.
"그건 또 무슨 해괴한 소리일까요? 곰이 괴나리봇짐을 등에 멨으면 그걸 메어준 자는 무사하지 못했을 텐데요. 그보다 어찌하여 이런 밑도 끝도 없는 소문이 산 넘고 물 건너 도성까지 당도하였을까요? 아무도 궁금하지 않을 텐데."
그렇게 말하는 호미에게 윤해가 물었다.
"본 데가 거문담이라 하였니?"
"예. 아씨."
"야인이 연맹 족장 탄생 설화를 날조하려다 소문이 잘못 전해진 게 아니고?"
"그렇다면 봇짐을 메게 하였겠습니까? 보따리장수 같아 조금도 상서롭지 않은 걸요. 두 마리가 나란히 네발로 뛰어 언덕 쪽으로 분주히 달아났다 하던데요."
윤해는 꿈이 생시 같고 생시가 꿈만 같아,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는 호미를 멍하게 바라보았다.
- 다음 날 꿈에는 전날 밤 꿈에 본 야인 여자가 말을 타고 나타났다. 손으로 자기를 가리키며 소리치는 모습이 선연했지만, 생시가 아닌 것만은 분명했다.
- 윤해는 꿈속에 오래 머무르고 싶었다. 눈을 떠 조반을 들다 호미가 전하는 소식을 들으면 저를 빼고도 세상일이 착착 진행되는 것이 아찔하게만 여겨졌다. 호미는 소라울 저자의 소문들 사이에 혼담이 오간 일을 조심스레 전했다. 전부 들어서 반가운 소식은 아니었다. 은씨 집안이 가세를 보존해 난조가 벼슬에 올랐다는 소리가 개중 제일 반가웠다. 나이 어린 호미는 윤해와 난조의 일을 모르는 듯 말을 전했다. 하기는 호미가 알 만한 사건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아무 일도 없었지만, 그저 그게 세상 전부인 시절도 있었다.
'내가 너만 한 애였을 때는 말이지.'
- 호미는 박새처럼 삐초삐초 잘도 조잘거렸다. 난조의 처가 어떠하고, 늦게 본 아들이 어떻게 생겼고, 소라울의 고관 나리 중에 축첩하지 않은 사내는 그분밖에 없을 만큼 부부의 금슬이 어떠하다는 등의 이야기였다.
- "그래서 그분이 이번에 서운에 드셨는데요."
"서운관(書雲觀)을 말하는 거니?”
"예, 구름도 기록하고 천문도 읽으신답니다."
"어려서부터 산학(算學)은 가르치는 박사가 놀랄 만큼 잘했더랬지."
"그분을 따로 아십니까?"
"들어 알고 있다. 고 자리에 앉아 조잘거린 게 어디 네가 처음이겠니? 그 소문을 맨 처음 들은 아이가 너일 리 없잖아. 방금 들은 이야기가 다 퍼지기 전에 아직 못 들은 사람에게 바로 전하는 게 제일 재미날 텐데, 성안에 나만큼 과문한 이가 또 있을까."
"어유, 아씨, 그 말씀은 반만 맞아요. 책상 옆에 쌓인 서책이 한 번에 옮기려면 허리를 삐끗할 정도로 무거운데, 사흘이 멀다고 새로 들이고 내시잖아요. 저는 아씨 서책 이야기가 궁금하답니다. 저는 들어도 못 알아들을 이야기겠지요?"
"호미야."
"예, 아씨."
"그거 다 병서야. 이 나라 책 중에 글이 살아 있는 건 이제 병서밖에 없어서 그래. 나는 죽어버린 글을 너무 많이 봤어. 그래서 십 년째 병서만 보고 있는데 이건 또 다 사람 죽이는 이야기이기도 해. 그걸 읽는 게 다 무슨 소용인지 모르겠어. 생생해서 읽는 건지 죽고 죽이는 이야기라 읽는 건지."
- 윤해가 병서를 읽는 건, 아버지와 두는 장기 때문이었다. 언젠가는 한번 아버지를 이겨보려고. 아주 특별한 날에만 마주 앉아 두는 그 대국이 드물게라도 계속 이어지게 하려고. 그러려면 계속 공부를 해야 했다. 마주 앉은 날이 언제가 되든, 흥미로운 수를 둘 수 있어야 했다. 아버지의 영민함이 영영 숨어버리지 않게 하려면. 그런데 이제는 그것도 다 부질없는 노릇이었다.
- "그래도."
"소일거리잖니. 별거 없어. 어젯밤에 꾼 꿈처럼 실없는 이야기야."
"예."
호미가 씩씩하게 대답하는 바람에 윤해의 마지막 말은 바위에 새긴 듯 견고해지고 말았다.
- 혼담은 뻔뻔하기 그지없었다. 영씨 성을 탐해 들어온 혼담일터인데, 그 참에 재산까지 다 털어 먹자는 속셈이 빤히 보였다. 혼담이 오간 지 얼마 되지 않아, 남편 될 자 종마금의 관작이 태사례(太師禮)까지 올랐다. 나이나 업적에 비해 과분한 작위였으나, 종씨 가문에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새 관작에 맞게 지참금을 올리라는 요구를 공공연하게 보내왔다.
- 부친은 그 요구를 군말 없이 수락했다. 물론 윤해는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잘 알았다. 종친의 재산은 허깨비 같아서, 잃으면 저절로 채워지고 남으면 어느새 사라지는 법이었다. 왕의 의심만 사지 않는다면, 누구에게 얼마를 빼앗기든 재산은 늘 그대로다. 충분히 누리되 집착을 보이지만 않으면 된다. 왕의 조카라면 어려서부터 저절로 몸에 익혀야 하는 마음가짐이었다.
- 윤해는 동갑내기 사촌인 공주 혜를 떠올렸다. 세상 돌아가는 일에는 아무 관심도 없고 원하는 것이 생기면 그저 가지면 되는 아이. 혜에게는 욕심이 있었다. 윤해에게도 있었지만 일곱 살이 되기 전에 잃어버린 감정이었다. 혜는 남의 욕심마저도 탐했다. 아이들의 연회에서 윤해가 오래 쳐다본 아이는 머지않아 혜의 단짝이 되었다. 어린 윤해는 아직 빼앗긴다는 게 뭔지 자세히 알지 못했지만, 살면서 그런 일이 수도 없이 반복되리라는 것은 어렴풋이 직감했다. 선왕께서, 그러니까 할아버지가 아직 정정하실 때였는데도 그랬다.
'도대체 얼마나 오래된 기억인지. 아버지만 비겁하다고 탓할게 아니네.'
그래도 종씨 집안의 요구는 비위가 상했다.
- 모욕감을 느꼈지만 드러내지 않았다. 모욕은 그 일이 일어난 맥락 속에 이미 분명하게 표현되어 있을 것이다. 그러니 재차 확인할 필요는 없다.
- 그가 사라지자 식솔들도 자기 자리로 흩어졌다. 호미가 방에서 나와 책 정리를 다 마쳤다고 일러주었다.
"그런데 아씨, 어찌 저를 도로 방에 들여보내셨어요?"
윤해가 대답했다.
"그자의 눈에 띄면 안 되거든."
"제가요? 어째서요?"
너는 어여쁘잖니. 이런 데서 저런 자의 눈에 들면 네 삶이 처참해져. 이런 시절에는 아버지도 바람막이가 되어주지 못할 거야. 아버지도 나도 실은 종이로 만든 벽이거든. 윤해는 가볍게 웃음을 지을 뿐 아무 말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 윤해는 아버지를 따라 사랑채로 들어갔다. 마금이 뭘 더 달라고 했는지 듣기 위해서였다.
"집을 달라더구나."
아버지가 담담하게 말했다. 나를 보러 온 것도 아니고 집을 보러 온 거구나, 윤해는 생각했다.
"준다고 하셨어요?"
- 마음껏 울었다.
엄마, 나도 송곳이야. 칼날이고 창이야. 그런데 내내 주머니 속에 갇혀 살았어. 이 나이가 되도록 신나게 밖으로 뛰어다니지도 않고 단풍놀이나 꽃구경을 가지도 않고 제일 안쪽방에 처박혀서 십오 년 넘게 책만 읽었다고. 멋진 날개를 달고 태어났는데 펼쳐본 적이 없어. 접혀서 몸에 딱 붙어 있는 것만 같아. 아빠는 도와주지 않아. 아빠가 있어서 더 답답해. 아빠는, 아버지는, 이게 운명이래. 대를 잇고 또 이어봐야 달아날 구멍은 생겨나지 않을 거래. 아빠는 역사책에 딱 한 줄로 남는 게 꿈인 사람이잖아? 나는 그게 꿈이 아니야. 나는 더 길게 남고 싶어. 엄마, 나도 송곳이라고. 아빠를 똑 닮은 송곳이라니까. 이대로 영원히 지워지고 싶지 않아. 이렇게 사라지고 싶지 않다고. 뼈를 보면 눈이 돌아가는 광인 옆에서는 단 하루도 살고 싶지 않아. 그래도 살아야 해? 이렇게 가늘게 이어지는 게 맞아? 나는 이걸 감당할 수가 없어.
- 그다음은 개가 나오는 꿈이었다. 어릴 적 키웠던 커다란 개였다. 개는 윤해를 등지고 서 있었다. 덩치가 정말 커다란 개여서 윤해를 향해 서 있었으면 무서웠을 것이다. 하지만 뒤돌아 서 있어서 든든했다. 개는 윤해를 지키고 서 있었다. 엄마가 말했다.
"얘는 곰개란다."
"곰개?"
"곰처럼 커서 공개, 고마, 가마, 가문, 거문, 이런 말은 다곰이라는 뜻인데, 모두 크다는 소리야. 곰처럼 아주! 봐, 곰개도 크지? 밤새 양을 못 물어가게, 늑대나 범과도 싸워서 이기는 개란다."
- 초원의 야인이 키우는 곰개라고 해도 사실 그렇게까지 크지는 않았다. 어렸을 적 기억이라 윤해가 작은 만큼 개가 커보이는 것뿐이었다. 꿈속의 곰개는 어린 윤해가 입을 벌리고 고개를 들어 올려다봐야 할 만큼 거대했다. 지금은 윤해가 어른의 몸이니 개의 덩치는 거의 소만큼 커져 있었다. 그런 짐승이 앞을 막고 서 있어서 그 너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마음이 놓였다.
'아, 거문담은 검은 담이 아니라 큰 담이라는 뜻이겠구나.'
- 다음 꿈은 또 야인 여자였다. 뭐라고 하는지 하나도 모르겠는데, 나타날 때마다 무언가 고래고래 소리치는 여자. 악몽은 아닌데, 그저 말이 안 통해서 답답할 뿐인데.
답답해하다가 잠이 깼다. 한밤중이고, 방 안이었다. 호미가 앉은 채로 꾸벅 졸고 있었다. 그날은 호미가 윤해의 곰개였다. 윤해는 손을 뻗어 호미의 손을 살며시 잡았다.
- 직접 가보기도 전에 누가 벌써 내놓은 기묘한 길을 얌전히 따라 걸었다. 길 끝에 놓인 건 소멸이었다. 어머니를 잃은 아버지는 새어머니를 들이지 않았다. 어머니를 못 잊어서가 아니라 길을 또 내지 않기 위해서였다. 윤해도 여태껏 배필을 얻지 못했다. 못한 게 아니라 안 한 거였다. 그러면 다른 길이 생기고 마니까. 두 사람이 걸어온 길은 끝이 정해져 있었다. 아버지가 싸우기를 포기한 날부터, 윤해가 혜에게 욕심을 내어준 날부터.
- 그 긴 세월을 요약하면 이런 말이 되었다. 멸문. 큰 소리를 내지 않고 모두가 조용히 사라지는 것. 그중에서도 맨 뒤에 태어난 윤해의 소멸이 중요했다. 그로써 집안의 계보가 완전히 끝나는 것이므로. 쫓아오는 게 늑대든 사냥개든, 자연의 허기든 인간의 살의든, 그 단호한 결말이 달라지는 건 아니었다. 그러니 목을 내밀어 받아들이는 수밖에.
- 그러나 윤해의 발은 살 자리를 찾아 바삐 움직였다. 등롱을 내려놓은 자리 근처에 발걸음의 주인이 다가섰다. 어둠의 장벽 안쪽, 희미한 빛이 마련해 둔 좁은 공터에.
'저건 종마금이야!'
윤해는 멀리서도 그의 그림자를 알아보았다. 목과 어깨의 생김과 약간 비척거리는 걸음걸이를 분명히 기억해냈다. 이건 어떻게 이어지는 이야기일까?
- 이제 정말 끝이었다. 부디 고통이 짧기를. 이제 바라는 건 그것밖에 없었다. 저 손이 뼈를 꺼내 가기 전에 숨통이 먼저 끊어지기를.
무릎이 꺾이고, 몸이 앞으로 고꾸라지기 직전이었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준비된 끝을 맞이하려는 찰나였다. 처음 겪지만 이미 너무 잘 아는 결말이었다.
정말 그걸 바란다고?
그때 이상한 목소리가 들렸다. 여자 목소리였다. 아무도 없는데. 짐승 셋과 남자 하나뿐인데. 침착한 목소리였다. 그보다 이상한 건 왠지 귀에 익은 음성이라는 점이었다.
윤해는 꺾이는 무릎을 세워 절벽 앞에 똑바로 섰다.
- 그걸 바라는 게 맞아?
다시 그 목소리였다. 맹렬하게 짖어대는 사냥개 소리 덕분에 무언가가 떠올랐다. 꿈에 나타나 알아듣지도 못할 말을 고래고래 외치던 사람. 야인 여자였다. 그 목소리가 틀림없었다.
'지금은 왜 알아들을 수 있는 거지? 결국 이건 내가 나에게 하는 말일까?'
호흡이 가라앉았다. 숨쉬기를 멈췄는지도 모른다. 마음이 침착해지고 정신이 또렷해졌다.
- '그래. 그럴게.'
방법은 모르지만, 정말로 윤해가 자신을 구하기로 마음먹은 순간이었다.
- 그러자 변화가 일어났다. 자아의 경계가 사라지고 무언가가 윤해를 향해 빠르게 밀려들어왔다. 어디서 오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게 뭔지도 몰랐다. 다만 몸속 어딘가에 공허가자리 잡더니 빠르게 몸 전체로 퍼져 나가는 느낌뿐이었다. 그 속으로 커다란 것이 밀려들어왔다. 기억이, 자아가, 세상이, 우주가, 삼라만상의 날카로운 이빨이, 혹은 공허 그 자체가. 구체적으로는 느낄 수 없고 단지 채움과 비움으로만 감지할 수 있는 무언가가 몸속으로 들어왔다가 몸 밖으로 빠져나갔다. 윤해는 얼핏 생각했다. 자기가 문이 된 것 같다고. 그 문을 통해 방금 무언가가 지나간 게 틀림없다고.
꿈을 꾸듯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래, 이건 다 꿈일지도 몰라. 산길을 헤맨 것도, 야회에 일손을 보태러 온 것도.'
정신을 잃고 고꾸라지기 직전에, 윤해는 시야를 가득 채운 무언가를 보았다. 뒷모습, 엉덩이, 꼬리, 그리고 커다란 머리가 달린 짐승의 뒤통수.
- 그래서 그 근방 초원에서는 거문담을 중심으로 방위가 나뉘었다. 마목인의 말로 동쪽이 정향(正向)인 것은 해가 뜨는 방향이 그쪽인 탓이었다. 이들에게 해가 지는 서쪽은 배향(背向)으로 불렸는데, 경작인에게 배향은 북쪽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임금의 용상이 남쪽으로 놓여 있어서였다. 그런 까닭에 술름고리의 경작인 성주가 북문인 배문을 지키라 명령하면 술름오름의 마목인 군장이 마병(馬兵)을 이끌고 서문으로 향하는 일이 허다했으므로, 결국 조정에서 방위를 통일하여 동면(東面)하고 선 거문담을 기준으로 북쪽을 좌, 남쪽을 우로 정했다.
- 우향, 우촌, 우동(右洞), 우면(右面), 우야(右野)는 모두 거문담 남쪽 지대를 이르는 말이었다. 어느 때는 작은 마을을 뜻하고 어느 때는 남쪽 초원 전체를 일컬었으므로, 지도에 경계를 표시할 수 있는 영역은 아니었다. 오히려 말하는 이나 듣는 이에 따라 칭하는 바가 다른 혼란스러운 이름이었다.
그 광대한 우향의 한가운데에 술름고리 성이 세워져 있었다. 영씨 왕조 사라국의 최북단, 경작인 세계와 마목인 세계의 경계에 자리한 변경 요새였다. 또한 마목인의 눈에 그 성은 경작인이 모아둔 부가 쌓여 있는, 초원에서 가장 탐나는 약탈 목표였다.
- 술름고리 방어군 좌기대대감(左騎隊大監) 다르나킨은, 석양을 받은 거문담의 그림자가 얼마나 길어질 수 있는지를 바라보며 새삼 경외감을 느꼈다. 자연물처럼 여겨지는 거대한 인공물. 고대인이 빚어낸 그 웅장한 그림자는, 머지않아 다르나킨의 눈앞에서 펼쳐질 일은 개의치 않는 듯 초원 저편을 한가롭게 뒹굴고 있었다.
그러나 그 한적함에 시선을 오래 빼앗기고 있을 수는 없었다. 그보다 훨씬 가까운 곳에서는 지난가을 정향 마목인 스무 개 부족을 규합한 추장 토르가이가 기병 2천, 보병 1천8백을 거느리고 술름고리 성을 노려보고 있었다. 토르가이의 군세는 좌우에 각각 기병 6백, 중앙에는 나머지 기병 8백으로 나뉘어 아군 진영을 향해 거리를 좁혀왔다. 중군 기병은 1천8백 보병의 호위를 받고 있었다.
- '돌격 명령만은 내리지 말았으면.'
다르나킨은 생각했다. 이런저런 잡생각을 하지 않는 다르나킨이었지만 불안한 예감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는 다음에 일어날 일을 알 것 같았다.
- 중군과 우군에 돌격 명령이 떨어지고, 대열이 고르지 않은 토르가이의 기병을 얕잡아본 아군 기창대가 밀집대형으로 돌격을 감행한다. 조운진(鳥雲陣)을 이룬 토르가이의 중군은 구름이 산봉우리를 넘듯, 혹은 새 떼가 삼림을 스치듯 중군 창보병 사이사이로 숨어든다. 마주 선 보병 대열을 정면에서 들이받기에는 다소 겁이 많은 아군 군마들이 빽빽하게 늘어선 창병 대열 사이에 난 틈으로 머리를 돌린다. 기수가 기대하는 바는 아니다. 그 방향으로 쭉 달려가면 돌격의 파도를 피해 숨어 있던 적 기병이 나타나 같은 눈높이에서 싸움을 걸어온다. 그사이 아군은 돌격 속도가 서서히 줄어들고, 결국 주력 기병 전체가 제자리에 멈춰 선다. 뒤를 돌아보는 순간, 말과 기수 모두가 깨닫게 된다. 조금 전 지나온 보병 대열의 틈새가 어느새 닫혀 있고, 긴 창을 든 적 보병이 빽빽한 숲처럼 사방에 정렬해 있다는 사실을. 그렇게 기병이 궤멸하고 만다. 왕이 직접 하사한 병장기로 중무장한 자랑스러운 술름의 1천5백 정예 기병이 전부 포위되어 섬멸당한다. 그게 다음에 일어날 일이었다.
- 다르나킨은 또 생각했다.
'토르가이가 마목인이기는 하지만, 다른 비슷한 정향 마목인 부족을 전부 복속시킨 비결은 기병이 아니라 저 창병 1천8백 명일 텐데. 창병을 기병에게서 떼어내기 전에는 무슨 수를 써도 승산이 없어.'
그러나 다음 순간, 어김없이 돌격 준비를 알리는 깃발이 올라갔다. 나팔 소리와 북소리가 들리고, 중군과 우군의 기창병이 밀집대형으로 간격을 좁히며 돌격을 준비했다.
- 태보를 노려보자 그가 기다렸다는 듯 덧붙였다.
"창강부원대군을 성주로 임명하시되 부임은 그의 여식으로 대신하게 하소서."
이 말은 태보 은함인이 부원대군 영유의 의견을 들은 후 스스로 판단하여 고한 방안이었다.
- 그리하여 윤해는 아비를 대신하고 왕실을 대표해 변경에 허수아비로 안치되었다. 내용은 유배에 가까웠고, 북방으로의 유배는 더 가혹한 형벌로 받아들여지는 법이었지만, 결국 소라울을 벗어나게 된 셈이었으므로 윤해는 그 처결이 내심 반가웠다.
- 그러나 일은 원하는 대로만 풀리지 않았다. 원한이 깊어진 종씨 가문은 탈출에 상응하는 대가를 원했다. 왕이 하사한 마차를 받으러 궁에 다녀오던 날, 윤해는 집 앞 공터에 갑자기 들어선 손님 없는 푸줏간을 보았다. 늘 그렇듯 좌판에 어느 짐승의 것인지 알 수 없는 뼈와 고기가 널려 있는데, 그 위에 호미의 머리가 걸려 있었다. 겪을 고초를 다 겪고 마지막에 베인 고통스러운 얼굴이었다. 윤해는 고개를 돌릴 틈도 없이 그 광경을 다 눈에 새기고 말았다.
- 종가는 그런 윤해의 마음을 읽은 듯 선수를 쳤다. 윤해는 욕심냈던 무언가를 또 잃고 말았다.
술름고리로 가는 마차 안에서 윤해는 며칠 동안 소리 죽여 울었다.
'나는 당신들을 한 점씩 천천히 씹어 삼킬 거야.'
그 결심에 이르기까지 닷새가 걸렸다. 그래도 눈물은 멎을 줄을 몰랐다. 깊이 잠들지 못해 꿈도 꾸지 못했다. 곰개를 불러낸 밤 이후, 야인 여자는 다시 꿈에 나타나지 않았다. 이제 윤해는 정말로 혼자였다. 꿈으로도 달아날 수 없는 외톨이. 꿈속에서 본 것들은 윤해가 자기 자신에게 하는 다짐이었을지도 모른다. 곰개가 현실이 되어 튀어나오는 조금 괴이한 다짐이었지만.
- 변경이 가까워지자 술름고리에서 먼저 전갈을 보내왔다. 전황에 대한 간단한 보고였다. 소라울로 장계를 올리는 김에 하나 더 작성해 형식상 지휘관인 윤해에게도 보낸 듯했다. 사라는 형식을 숭상하는 나라였다. 보낼 것은 보내야 하는 게 사라의 풍속이었다.
손에 잡히는 건 뭐든 다 읽는 윤해는 버릇처럼 장계를 읽었다. 그리고 숙소에 들기 전 술름고리로 파발을 보내, 부임하면 곧바로 읽고 싶으니 보다 긴 보고를 준비하라 일렀다.
- '이 좌기대는 도대체 몇 명이나 되는 거지? 매복하러 오는 적군을 역으로 매복해서 격퇴하는 건 도대체 어떻게 하는 거야? 병서라면 나도 볼 만큼 봤는데 그런 묘기는 어디서도 본 적이 없어. 아버지도 들어본 적 없을 거야. 그보다, 이렇게 했는데 왜 이 좌기대대감에게 패전의 책임이 있다는 거지?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마차가 술름고리의 영역에 들어가자 주둔군 기병이 와서 함께 호위했다. 윤해는 시위(侍衛)에게 넌지시 물었다.
"지금 합류한 게 혹시 술름고리 마군 좌기대인가요?"
시위가 놀라 되물었다.
"그걸 어찌 아셨습니까?"
모를 방법이 없었다. 좌기대는 어디에나 있는 게 술름의 법칙 같았다.
- 술름고리의 방벽은 높지 않았다. 소라울을 둘러싼 울과 비슷하나 그보다는 약간 높고 조금 더 두꺼웠다. 방벽을 '울'이 아닌 '고리'로 만든 건 돌담이 아니라 중간중간 돌출된 방어탑이었다. 탑 옆쪽에 난 창으로 활을 쏘면 벽을 기어오르는 적을 떨어뜨릴 수 있었다. 경계를 표시하는 울타리가 아니라 진짜 방어 시설인 셈이었다.
- "대감 이상 군관은 좌기대대감 하나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대영솔께서 직접 전장에 나서야 군의 기강이 바로 서고, 고리와 마리가 오름까지 더불어 탄탄하게 정립(鼎立)하여 설 것입니다."
마목인에게는 절대 지휘를 맡길 수 없다는 소리였다. 윤해는 왕에게서 제수받은 자기 직함을 새삼스레 떠올렸다. 보기대대영솔(步騎隊大令率) 영윤해. 부재 성주인 아비를 대신해 술름고리의 보병과 기병을 모두 거느리는 관리. 아비의 딸로 태어났다는 진술을 넘어 역사책에 남을 두 번째 기록이었다. 허수아비 역할 이상을 해서는 안 되는 직책. 소라울을 간신히 벗어났어도 아비의 가훈은 여전히 유효했다.
- 영유와 영윤해에게 한사량의 청탁은 반역의 혐의를 쓰고 죽으라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윤해는 한사량이 소라울의 일에 무지하다고 여겼다. 사량이 청탁의 대가로 보낸 물건의 목록을 보면 더 그랬다. 어디서 구했는지, 소라울에서도 보기 드문 화려한 문갑이며 장롱, 책상 같은 가구들이 줄줄이 마당에 늘어서 있었다.
'저걸 들이면 나는 죽습니다. 이건 유배고, 안치를 확인하러 온 시위가 아직 소라울로 돌아가지도 않았어요.'
윤해는 그 자리에서 선물을 물리고, 객사를 수리하라고 지시했다.
- ... 자극해보고 있었다. 어디를 공격하면 어느 부족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알아보려는 것이었고, 결국은 잘 훈련된 토르가이의 중군 보창대를 기병으로부터 분리할 방법을 찾아내기 위함이었다.
그 일을 계속하면서 가끔 고개를 돌려 가마 탄 여자 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한 가지 생각에 오래 머물고 싶지는 않았지만 딱 하나만은 간절히 바랐다.
'제발 돌격 명령은 내리지 말았으면.'
- 가마 옆에는 기수가 늘어서 있었다. 아마도 그들의 발 앞에는 휘(麾)가 대략 열 개쯤 널려 있을 것이다. 사라 사람들은 깃발 신호를 좋아했다. 전장에는 많아야 열 개쯤 가지고 다니지만, 병서에 나와 있는 건 도합 스물네 종류나 됐다. 혼란스러운 싸움터에서 병사들이 제대로 수행할 수 있는 명령은 기껏해야 다섯 개쯤이다. 그중에서는 추격이 제일 쉽고, 진의 간격을 펼치거나 좁히는 건 그래도 할 만했다. 후진 명령은 거의 있으나 마나였다. 후진기가 오르면 병사들은 천천히 뒤로 물러나는 게 아니라 그 자리에서 즉시 패주한다. 너무 이르게 전의를 상실하고, 대열을 이탈해 무기를 버리고 냅다 뒤로 달린다는 뜻이다.
- 그 많은 휘 중에서 다르나킨이 가장 싫어하는 건 돌격기였다. 기창 돌격은 정말이지 과대평가된 전술이었다. 잘 훈련된 보병의 벽을 중무장한 기병의 힘만으로 정면에서 깨부수겠다니. 상대가 오합지졸이면 의외로 잘 먹히는 전술이기는 하다. 돌격 명령을 내리는 마군장은 속수무책으로 깨지는 적의 보병 대열을 보며 명장이 된 듯한 기분마저 느낀다. 살아 돌아오는 경우라면 다 그렇다. 반대로 궤멸한 기병은 처참한 기분을 느끼겠지만, 궤멸하였으므로 기분이 어땠는지 말할 기회가 없다. 성주 한음사에게 일어난 일이었다.
- '아!'
불길한 예감이 또 들어맞았다. 언덕 위 가마 옆에 휘가 올랐다. 돌격 준비 명령이었다. 중앙에 있는 아군 오합지졸 기병에게 돌격대형으로 간격을 좁히라는 지시가 떨어진 것이었다.
제일 싫어하는 명령이었지만, 다르나킨은 길게 생각하지 않고 적진의 변화를 살폈다. 적 보창대의 움직임이 기민해졌다. 좌우로 길게 늘어선 대형 전체의 길이는 변함이 없지만, 끝에서 끝까지 쭉 이어져 있던 대열 중간중간이 갈라지며 일선 보창대 전체가 여덟 개의 네모로 나뉘었다. 즉, 중간중간 빈틈이 생겨나는 대신 각각의 덩어리는 전보다 훨씬 빽빽해졌다. 보병 이선의 변화도 일선과 비슷했는데, 다만 밀집된 대형의 개수가 일곱으로 하나가 적었다. 돌격하는 아군 기병이 일선의 빈틈을 지나면 이선에 놓인 또 다른 창병 대열과 ...
- 그때 손님이 고개를 숙여 예를 표하며 대단히 공손한 투로 말했다.
"대영을 이제야 뵙습니다. 토르가이의 군세가 북으로 물러갔기에 전장을 정리하고 귀환했습니다."
낭랑한 목소리였다. 글 읽는 선비와는 또 다르게, 전장에서 오래 살아남은 자의 강인함이 담긴 음색이었다. 기골이 장대하기보다는 호리호리하게 날렵한 몸매였으나, 다부진 몸에 눈빛이 강렬한 사내였다.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하며 윤해가 물었다.
"그대는 혹시?"
"좌기대대감 다르나킨이라 합니다."
"설마."
이름이 다르나킨이라 했다. 달낙현이라고, 심지어 어디에는 월낙현이라고도 씌어 있는 이름의 원래 소리는 저렇게 발음되는 모양이었다. 윤해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직책에 맞는 대답을 했다.
"다르-나킨 대감. 수고가 많았소. 덕분에 구원군을 기다릴 시간을 며칠이나마 더 벌었습니다."
- 그러자 낙현이 말했다. 짧지만 가장 필요한 말이었다.
"덕분입니다."
"덕분? 내가 뭘 했다고? 이제 부임해서 짐이나 풀었을 뿐인데."
"휘를 들어주신 덕분에."
"휘? 그거야...”
윤해는 의아했다. 그저 시험 삼아 들어본 것뿐인데. 그것도 한사량의 성화에 못 이겨 전황에 방해가 안 될 만큼 아주 조금만 움찔거렸을 뿐인데. 윤해가 다시 말했다.
"그거야 대감이 움직이는 걸 보고 따라 한 것뿐이잖소."
그 말에 낙현이 밝게 웃었다. 분명 많은 말이 생략된 듯했으나 낙현은 짧게 한마디를 보탤 뿐이었다.
"돌격기는 들지 않으셨으니까요."
낙현이 꾸벅 고개를 숙이고 문을 나갔다. 윤해는 좀처럼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마목인의 이름을 여러 번 소리 없이 발음해 보았다. 다르나킨, 다르나킨, 하고.
- 다르나킨이 답했다.
"추장(酋長)은 곧 깃발입니다. 추장 자신이 사기이고 기세지요. 깃발이 제대로 서 있으면 사소한 패전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반대로 깃발이 꺾이면 아직 싸울 수 있는 싸움도 지레 포기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러니까, 군의 기세는 높으나 추장의 기세는 꺾여 있는 때가 있다?"
곧장 핵심으로 파고드는 질문에, 다르나킨은 새삼 대영솔이 병법을 꽤 잘 이해하고 있을 거라 짐작했다. 싸움에서 중요한 건 당장 사상자를 얼마나 내느냐가 아니라 무리의 기세를 꺾는 일이라는 것 정도는.
- 대영솔의 방 한쪽에 쌓여 있는 병서가 괜한 장식품은 아니라는 사실은, 가마를 타고 언덕에 올라 휘를 들고 내리는 솜씨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저 좌기대의 움직임에 맞춘 것뿐"이라고 겸손하게 답하기는 했지만, 그렇다 해도 신기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술름의 어느 사라인 성주도, 마목인 목감이 이끄는 좌기대에 본대를 맞출 생각은 한 적이 없었다. 형식을 너무 숭상한 나머지 눈앞의 일을 외면한 결과였다. 그런데 지금의 대영솔은 형식이 아니라 실재를 보고 있었다. 그것 말고는 아무것도 안 보이는 듯했다.
"그렇습니다."
다르나킨은 짧게 대답했다. 더 긴 설명을 해야 할 줄 알았는데, 그럴 필요가 없어 보였다.
- "그러니까 간자에게 토르가이의 기세를 써서 보내라고 했다는 말이지요? 단지 그것만."
"보내는 첩지는 짧을수록 안전하니까요."
"좋네요. 자, 그럼 그 나쁜 소식이란 건 뭔가요? 애매한 건 또 뭐고?"
"여기를 보시면."
천조각을 보느라 눈을 떨구는데, 다시 책상이 눈에 들어왔다. 화려하고 섬세한 무늬가 표면에 가느다랗게 새겨져 있었다. 깊지도 않고 선이 또렷하지도 않아서 과시하는 문양은 아니었다.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아예 눈에 띄지도 않을 장식이었다. 눈이 침침한 노인이나 그 비슷하게 눈이 나쁜 경작인이라면 그저 소박한 물건으로 보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마목인의 눈에는 훤히 보였다. 책상 다리를 휘감고 올라오는 작은 곡선이 상판에서 어렴풋이 봉황의 형상으로 합쳐지는 모습이.
"대감?"
다르나킨은 다시 정신을 붙들고 말을 이었다.
"여기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첩지에 적힌 글은 길지 않습니다. 너무 짧아서 무엇에 관한 내용인지 모르면 뜻이 애매하지요. 혹시 이날 첩보 내용을 알아보시겠습니까?"
"글쎄요. 이게 글자는 맞나요?"
"아닙니다. 막대기를 그린 겁니다. 풀이하면, 토르가이가 몽둥이로 측근 중 누구를 팼다는 뜻입니다. 아마도 휘하의 장수겠지요."
"저런. 적이 먼저 주웠어도 그렇게 새기기는 힘들겠군요."
"그렇습니다. 이런 날은 적의 사기가 높지 않습니다. 이런 날일수록 겉으로는 군기가 바짝 들어 보이지만 실제로는 반대지요. 그렇게 쓰는 게 요령입니다. 이걸 잘하는 유능한 간자인데, 최근에 이자가 이 일에 너무 맛을 들이는 바람에 표현이 약간 난해해졌습니다."
- "너무 운치 있게 쓰려고 애쓴다? 시문을 짓듯이?"
"시문을 짓듯이! 그 말씀이 맞습니다."
다르킨은 이 영민한 사라인이 마음에 들었다. 대영솔은 그 방에 놓인 가구 같았다. 자기를 드러낼 생각이 없고, 자세히 보지 않으면 소박하다 못해 투박해 보일 지경이지만, 조금만 눈여겨보면 알 수 있었다. 소박하되 아름답고 검소하되 화려하며 단순하되 정교한 최상품이라는 사실을. 품을 많이 들여 정성스레 매만지고 흠결이 없도록 오래 다듬은 물건이라는 것도.
자세한 사정은 몰라도, 대영솔이 자기를 숨기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일 것이다. 조금만 오래 눈이 머물러도 금방 고귀함이 드러나고 말 테니. 그런 사람은 고난을 겪는다. 초원에서나 소라울에서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 웃음기는 전혀 없었다. 그건 진심이었다. 감정을 뺀 건조한 사실. 조정에서 보낸 왕의 사자가 종일 비가 내려 안 그래도 거추장스러운 날에 갑옷에 투구까지 제대로 갖춰 입고 보란 듯이 사람들 앞에서 종친인 윤해의 이름을 불러대던 왕의 정예 마군 전령이, 소라울뿐만 아니라 아마 사라 전체에서 말을 제일 잘 타는 이 중 하나일 무관이, 알고 보니 말도 하나 제대로 탈 줄 모르는 자라는 소리였다. 말밖에 모르는 마목인 목감의 눈에는 그렇게밖에 안 보인다는 뜻이었다.
"그래서요?"
윤해가 흥미로워하며 물었다.
"맞붙으면 이길 수도 있습니다. 해봐야 아는 싸움이지만."
윤해의 귀에 그 말은 이런 뜻으로 들렸다. 당신이 선을 넘으면 나도 그 옆에 서겠다는 말로.
윤해는 자기도 모르게 낙현의 얼굴을 오래, 빤히 바라보았다. 계단 아래 선 그와 눈의 높이가 맞아서, 아주 가까이에서 마주 보고 서 있는 듯했다. 낙현이 더없이 맑은 눈으로 윤해를 마주 보는 바람에 두 사람은 오래 눈을 마주했다. 윤해가 문득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무지개 쪽으로 돌릴 때까지.
"의외로 다정하십니다. 그러나 설 곳을 정해야 할 때가 되면 한씨 집안의 동태를 먼저 참고하세요."
낙현은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고 고개를 한 번 숙이고는 ...
- 날이 밝기를 기다리며 마당으로 나갔다. 눈이 내리는 철이 아니어서, 객사에도 깨어 있는 사람은 없었다. 밖에는 위병이 서 있겠지만 담 안쪽은 아직도 조용했다. 윤해는 방에서 초를 들고 나와 벽에 걸린 등롱불을 옮겨 담았다. 그런 다음 다시 방으로 돌아와 책을 펼쳤다. 책상 옆에 놓인 책이 다 병서였다.
한참 뒤에 밖에서 기척이 들려왔다. 객사 관속들이 잠에서 깨어난 모양이었다. 또 한참을 기다리니 대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 고리에 사는 구실아치들이 등청하는 모양이었다. 문을 지키던 위병이 교대하는 소리도 들렸다. 또 얼마 뒤에는 마리에 사는 자들이 등청했다.
그런데 얼마 후, 좌기대대감이 뵙기를 청한다는 소리가 들렸다. 의외의 방문이었다. 일찍 깬 김에 직접 마당으로 나가보니 정말로 낙현이 와 있었다.
- "아침부터 어쩐 일이십니까?"
그가 인사말을 건너뛰고 대뜸 물었다.
"혹시 지난밤에 푸른 잉어가 나오는 꿈을 꾸셨습니까?"
"예? 그걸 어찌 아시고?"
"어서 나오셔서 말에 오르시지요."
"지금이요?"
- "아무나 그럴 수 있는 것도 아니고요."
"역시 그건 쉽지 않겠지요? 다시 제대로 묻겠습니다. 내가 선을 넘으면 대감은 내 옆에 서시겠습니까?"
이번에는 기다리지 않고 곧바로 대답이 돌아왔다.
"물론입니다."
"좋습니다. 그럼 계획을 말씀드리지요. 도순검사가 임명돼도 나는 술름고리를 떠나지 않기로 했습니다."
"알겠습니다."
윤해가 다시 힘주어 말했다.
"반역이라는 뜻입니다."
"그것도 알고 있습니다."
"술름에서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어서요."
"예.”
윤해는 설명을 덧붙이려다 그만 입을 다물었다. 무슨 말을 해도 알겠다는 대답만 짧게 돌아올 것 같았다. 술름의 좌기대대감은 원래 그런 사람이었다.
말을 잔뜩 준비했는데 생각보다 짧고 싱거운 대화였다. 그래도 분명 정신은 맑았다. 윤해에게는 또다시 이겨야 할 싸움이 생겼다.
- "그래요? 이상한데, 그런 건 갑자기 필요해지는 물건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대들이 또 무슨 재미난 일이라도 꾸미고 있는 게 아닌 다음에야."
하살루타는 아리송한 표정으로 다르나킨을 내려다보았다.
"그런 게 뭐가 있겠습니까. 그래봐야 겨울옷일 뿐인데요."
"이보시오. 다르 목감. 이 늙은이는 술름의 자리에 크게 욕심이 나지 않아요. 아직은 필요한 게 아니라."
"하지만, 언젠가는 요긴하게 쓰실 겁니다."
그러자 하살루타가 웃으며 말했다.
"그걸 장사치의 말로 하면 돈을 빌려달라는 거나 다름없지. 언제 갚을지는 알 수 없고. 이 나이가 되면 몇 년 뒤라는 게 점점 가짜처럼 보여서 말이오. 그대 나이에는 시간이 거문담의 돌담 같겠으나 내 나이에는 초원에 쌓인 눈 같거든. 시간을 빌려올 자식도 없고 말이야. 그러니 면세니 차리니 하는 이야기는 넣어두셔도 됩니다. 그것 말고 내가 진짜로 궁금한 게 있는데."
다르나킨은 자세를 바로 했다.
"그게 뭡니까?"
"내 창고의 재고 이야기는 어떻게 안 거요?"
"아."
- 사라인은 그 점을 우월하게 여긴다. 글을 읽고 쓰는 걸 문명이라 하고, 그들이 붙여둔 방(榜)을 읽지 못하는 족속을 야인이라 부른다.
반면, 마목인 아이는 열 살이면 말을 타고 질주한다. 경작인 중에 그런 아이는 대단히 드물다. 귀한 집안이면 아이를 말에 태우지 않고 천한 집안에는 어린아이를 태울 말이 없다. 열몇 살에 말 타는 법을 처음 배운 이가 기병이 되는 건 마찬가지로 한계가 분명한 일이다. 그게 경작인의 마군이다. 좋은 갑옷을 입고 복잡한 글자가 그려진 깃발로 화려하게 치장하지만, 경작인의 마군은 말 타는 솜씨가 어눌하다.
'그래서 달 대감이 사라의 마군은 이길 수 있다고 자신한 거였어.'
다르나킨은 어려서부터 그 둘을 다 했다. 그것 때문에 어느 한쪽에도 단단히 속하지 못했지만, 술름의 목감으로 자라는 데는 더없이 적합했다.
- 여기에는 이야기가 해준 이야기가 하나 더 붙어 있었다. 부지런히 오가기만 할 뿐 세상에 속하지는 못한 낙현의 삶이 꽤 외로웠으리라는 것. 아무도 윤해에게 그런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윤해는 그 사실을 그냥 알게 되었다.
- "유서 깊은 술름의 제주(祭酒)"라 칭하며 시장에 내놓은 꼴을 보았을 때는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었다. 그런 버러지 같은 놈들이 감히 술름의 정통을 넘보다니! 술름마리에서는 단 하루도 살아보지 않은 자들이! 아버지인 한음사가 성주로 있던 시절에는 감히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그게 겨우 지난 한해 사이에 일어난 변화였다. 그 박탈감이 한채주의 마음을 갉아먹었다. 한사량도 한채주도 원귀가 되어가기는 마찬가지였으나 둘은 미묘하게 다른 형태의 원귀였다.
- 그런데 희한하게도 영윤해는 그 점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다. 대영이 한채주에게 성주 자리를 약속하려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다르나킨은 한참이나 고개를 갸웃했다. 술름고리 객사 안, 신발을 벗고 바닥에 깔린 방석 위에 앉은, 생각이 많은 다르나킨이었다. 얼마 전 다르나킨은, 대영솔이 어떤 이야기는 객사에서 하고 어떤 이야기는 밖에서 꺼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함께 고민할 이야기와, 듣고 아무 생각 없이 실행하기를 바라는 이야기를 구별한다는 뜻이었다. 그러니까 이건 함께 고민해야 할 내용이었다.
- 다르나킨이 물었다.
"서문의 동가를 구슬려 한가를 견제하는 게 더 적합하지 않은지요?"
"그렇습니까?"
대영솔이 웃으며 반문했다. 다르나킨이 말했다.
"한씨는 원한이 깊을 텐데요. 대영솔께도, 저에게도."
"그건 사실입니다. 언젠가 뒤를 치려 할 테니 분명 대비를 해야겠지요. 하지만 한씨에게는, 동씨에게 없는 게 있습니다."
"그게 뭡니까?"
"애착입니다."
"애착이요?"
"동씨는 장사로 일어난 자들이라 뿌리내릴 곳이 꼭 술름이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술름고리가 함락되는 게 이득이 되면 고리의 함락을 두고 거래하겠지요. 반면에 한씨는 곧 죽어도 술름을 지켜야 합니다. 고리 뿐만 아니라 마리까지요. 지금도 술름이 자기 거라고 믿는 자들이라 자기한테 이득이어도 술름이 깨지는 건 못 봅니다. 한가는 대대로 지주 집안인데, 땅은 어디로 들고 달아날 수가 없어서 그렇지요. 겨울이 되면 우리는 견고하게 버티는 싸움에 들어갈 터인데, 동씨는 성문을 지켜내지 못합니다. 한씨는 그 일을 할 거고요."
"그렇기는 한데, 그 한씨가 술름을 지키려고 사라를 상대한다고요? 술름에 사는 누가 들어도 낯선 말로 들릴 텐데요."
"아, 그렇기는 하지요. 그래도 그게 맞습니다."
- 다르나킨은 하살루타나 수랏치가 자기에게 던진 것과 비슷한 질문을 대영솔에게 건넸다.
"그런데 대영솔, 그런 건 어떻게 다 아시는 겁니까?"
"어떻게요? 글쎄요. 그냥 알게 되었습니다. 특별히 어떻게라고 할 건 없고요. 우리가 내밀 건 지키지 못할 약속뿐이라, 그걸 좋은 값에 사갈 자를 열심히 찾는 것뿐입니다. 한채주는 목숨을 내놓겠지요. 제일 높은 값을 쳐줄 자입니다. 그래도 동가나 채가를 놓치면 안 됩니다. 때가 되면 그쪽도 꼭 함께해야 하니 대놓고 좋은 건 그 두 가문에 먼저 내밀어야겠지요. 이익을 좇아 움직이는 자들이니까요. 발을 빼기에는 너무 늦은 시점까지 계속 발을 묶어놓으려고요."
그 말을 들은 다르나킨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외람되오나, 사기 같습니다."
그러자 대영이 웃음을 터뜨렸다.
"실은 사기가 맞습니다. 나는 정말로 이길 생각이지만, 내게 판돈을 대는 자들은 나를 완전히 믿지는 않는 게 정상입니다. 그게 상식인데, 상식이 작동하지 않게 해야 하지요. 허황된 꿈을 팔아서요. 그런데 내가 오늘 대감과 상의하려는 건 그런 문제가 아니라 다가올 싸움에 관한 겁니다. 한채주가 보창대와 보사대를 맡아 수성하면 얼마나 버틸까 하는 것이지요. 사라에서 토벌군이 온다면 병력은 3만에서 5만 정도 ... "
- 어쩌면 윤해 자신도 자기가 그렇게 웃을 수 있는지 몰랐을 것이다. 대영솔은, 영윤해는, 초원이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어려서 글도 익히고 말타기도 익힌 다르나킨이 결국 마목인이 된 것처럼. 윤해에게는 더 넓은 세계가 필요했다. 그래야 자기 본모습대로 유쾌하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다르나킨에게는 윤해가 필요했다.
- 다르나킨이 말했다.
"하지만 대영과 제가 똑같이 말 위에서 종이와 붓을 들고 글을 쓴다고 가정해 보시지요. 기마는 문제없지만 글은 삐뚤삐뚤한 저와, 말에 오르면 뭔가 불안하지만 글은 어떤 상황에도 정갈하게 잘 쓰시는 대영솔의 싸움입니다. 과연 누가 더 나을까요?"
윤해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대감이 쓰는 게 낫습니다. 말에 오르면 생각이 좀 없어지는 듯하지만, 그래도 그쪽이 낫습니다."
"어째서 그렇습니까?"
"말 위에서 글을 쓰면 저는 언젠가 낙마해서 완성하지 못할 테고, 대감은 말 위에서 평생 먹고 자고 하면서 언젠가는 병서를 완성할 테니까요."
우스개로 하는 말이었지만, 어쩐지 그 말에는 뼈가 있었다. 다르나킨은 윤해의 마음에 드리운 짙은 그림자를 알아보았다.
- 윤해가 말했다.
"대감께 세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우선 거사가 시작되면 제 아버지의 목이 술름으로 배달될지도 모릅니다. 그걸 절대 내게 보이지 마세요. 내 눈에 들어오지 않도록 대감이 잘 수습해주셔야 합니다."
담담한 목소리였다. 대영솔의 마음에 드리운 가장 짙은 그림자. 반역의 제일 직접적인 대가. 소문으로 전해 들은 부원대군과 그의 딸과 소라울의 임금에 얽힌 사정. 소라울에서 일어난 몇 번의 참극. 또 술름에 오기 직전, 윤해의 몸종에게 일어난 일.
- 다르나킨은 소리 내어 답하지 않고 고개만 끄덕였다. 윤해가 그걸 봤는지는 확실하지 않았지만, 대답을 들으려고 건넨 말은 아닐 것이었다. 다르나킨은 생각했다. 그 목이 진짜 부원대군의 것이 맞는지 확인하는 건 그자의 눈을 빌려야겠다. 소라울에서 온 서운관감. 윤해의 오랜 벗이라는 사내. 그가 아직 술름에 머무르는 동안에는. 그런데 그가 소라울로 가버리면 그 뒤는 어쩌지?
- 또 윤해가 말했다.
"두 번째는, 내게 작은 칼 하나를 주시고 가장 확실하게 내 목숨을 끊는 법을 알려주세요."
- 사실 윤해는 태평하지 않았다. 윤해의 잠이 느는 건 거문담의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애쓰는 시간이 많아진다는 뜻이었다. 다르나킨은 그렇게만 이해했고, 윤해는 한 가지에 더 몰두했다. 마법을 연마하는 것이었다.
- 윤해는 언젠가 마법이 필요해지리라는 것을 알았다. 다가올 전장에서 사용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건 역부족이었다. 소라울에서 곰개를 불러낸 일을 전장에서도 똑같이 할 수 있다면. 그때는 거문담 한가운데가 아니라 분명 눈앞에 곰개를 불러낼 수 있었는데.
하지만 윤해는 방법을 알 수 없었다. 원하는 것을 원하는 때에 눈앞에 펼쳐내는 방법을. 지금의 마법은 그저 꿈이 제멋대로 현실의 문턱을 넘는 것뿐이었다. 튀어나오는 것도 제각각이었고 나온 뒤에는 통제도 되지 않았다.
- 문제는 다가올 토벌군과의 싸움이 아니었다. 윤해는 그 뒤에 올 더 큰 싸움을 생각했다. 1021년마다 한 번, 거문담 한가운데에 놓인 문을 열고 이 세상으로 비집고 나오는 어두운 존재. 그게 얼마나 크고 무시무시한지는 잘 알고 있었다. 윤해가 직접 그 존재가 되는 꿈을 꾸어서 알게 된 일이었다. 거대한 몸체를 길게 뻗는 여러 개의 팔을, 몸 전체를 감싼 피부의 견고함을, 세상을 파괴할 근육의 강인함을, 그리고 하늘을 덮을 듯 쫙 펼쳐질 날개의 장대함을.
- "그런데 이게 정말 성공일까?"
윤해는 깜짝 놀라 하마터면 잠이 깰 뻔했다. 몽롱한 정신이 맑아지지 않도록 애쓰며 윤해가 물었다.
"내 말을 알아들어?"
마로하는 윤해의 손을 이끌어 시선 방향을 돌리며 말했다.
"알아듣는데, 네가 생각하는 그런 건 아니야."
"왜? 그럼 말해봐. 언제는 내 말을 알아듣고 언제는 못 알아듣는 건 왜 그런 거야?"
마로하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래, 너는 손이 많이 가는 예언자였지. 기억이 난다. 들어봐. 이건 네 잘못이 아니라 내 잘못인데, 정확히 말하면 내 잘못도 아니야. 나는 알아듣는데 그 마로하는 못 알아듣거든."
- "자세히 봐. 너 지금 다른 시대의 나를 불러냈어."
"뭐?"
그 말이 맞았다. 지금의 마로하는 평소에 보던 것보다 나이가 많아 보였다. 원래는 자기보다 어려 보였는데, 지금은 같거나 더 많아 보였다.
- 낙현이 그 일을 보고했다. 어느 부족의 옷도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마로하는 다른 시대의 사람일 것이다. 적어도 1021년, 혹은 2042년이나 3063년 전일지도 모른다. 그럼 거문담은 언제부터 저 자리에 서 있었던 걸까? 정향에서 보는 꼭대기의 윤곽은 언제 저 모습대로 무너졌을까?
- 바로 등 뒤까지 다가갔으나 마로하는 윤해의 기척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뒤를 돌아보니 눈 위에 발자국이 남아 있지 않았다. 이 꿈에서 둘은, 서로 닿지 않은 채 포개진 두 세계에 따로 담겨 있었다.
- 내년 춘분 직후라니, 이제 시간이 얼마 없었다. 윤해에게는 이겨야 할 큰 싸움이 다가오고 있었다. 1021년마다 나타나는 예언자의 임무였다. 그걸 준비하려면 자기를 일깨워줄 예언자가 필요했다. 윤해는 나이 많은 마로하에게서 들은 말을 가슴에 새겼다. 윤해가 먼저 젊은 마로하를 일깨워야 한다는 말.
- 윤해는 정신을 집중했다. 현실에서 마음을 모으는 것과는 다른 방식이었다. 꿈의 방식으로, 꿈과 생시를 연결하면서도 그 어느 쪽도 망가뜨리지 않는 방식으로 정신을 움직여야 했다. 처음에는 막연했지만, 이제는 알 것 같았다. 생각과 의지를 수족처럼 마음껏 부리는 방법을, 그것은 긴 잠처럼 보이는 오랜 수련의 결과였다.
- "대감, 내 청 하나를 지키지 못하셨으니, 대신 다른 부탁을 들어주시겠소?”
낙현이 고개를 숙였다.
"내 아버지의 고통을 일찍 끝내주세요."
- 한 번도 날개를 펼치지 못하고 초원에서 얼어 죽은 봉황. 아비의 삶을 기록할 두 번째 문장이 윤해의 가슴에 새겨졌다. 그는 딱 한 줄로만 남겠다는 삶의 목표를 이루지 못하고 생을 마감해야 했다. 소멸의 운명을 거부한 윤해의 선택 때문이었다. 윤해는 그 선택을 후회하지 않았다. 그래도 아버지를 생각하면 슬프고 미안했다. 미안하다는 말을 직접 하지 못해 조금 더 미안했다.
윤해는 아버지의 말을 떠올렸다. 그와 나눈 그 많은 말 중 마지막까지 남은 한마디였다.
"칼날이지. 품은 내가 제일 잘 안다."
- 고리의 망루에서 화살 한 발이 날아올랐다. 나는 법을 잊은 봉황은 북풍에 심장이 꿰뚫렸다.
- 밤사이 술름의 성벽에는 사다리가 한 번도 걸리지 않았다. 두 달 만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윤해는 다르나킨을 오름으로 내보내 명령을 기다리게 했다. 이제 윤해의 곁에 남아 있는 건 한채주였다.
그가 자꾸 적의 숨통을 끊어놓자고 다그치는 통에 달래느라 애를 먹었다. 윤해는 이제 그를 무시할 수 없었다. 변방의 작은 고리가 사라 전체와 맞서 두 달이나 버틴 건 누가 뭐래도 그의 공이 맞았다. 싸움이 끝나면 그는 성주가 될 것이다. 그럴 자격이 있었다. 그런데 과연 어떤 성주가 될까? 윤해는 깊이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그건 윤해의 싸움이 아니었다.
- 오후에 큰 눈이 내렸다. 고리의 병사들이 밖으로 나가 성문 앞에 쌓인 눈을 부지런히 치웠다. 성문이 막히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는 동안에도 토벌군은 가만히 웅크리고만 있었다. 윤해는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저게 매복이 아니라는 확신이 들 때까지.
그때 오른쪽 망루에서 병사 하나가 달려왔다.
"마리의 한가 저택에서 말 탄 사람 수십 명이 나왔습니다."
종탁금이었다.
"기를 들었던가?"
"들지 않았습니다."
아직도 확증은 없었다. 행영이 몰래 전장을 빠져나간다는 확실한 증거는.
- "지금입니다! 출정합시다."
"아직이에요. 만약 함정이라면, 이게 저들의 마지막 기회입니다. 기회를 내줄 필요는 없습니다. 이것만 아니면 질 수 없는 싸움이에요."
윤해는 신중하게 진을 살폈다. 진으로 표현되는 적의 기세를, 군중(軍衆)의 사기를 면밀히 살폈다. 명령은 떨어지지 않은 듯했지만, 적진에서는 서서히 퇴각의 조짐이 나타났다. 행영의 퇴로와 가까운 곳, 군진의 맨 후방에서 시작된 움직임은 서서히 고리를 포위한 토벌군의 일선 방향으로 퍼져갔다. 그러면서 추세가 점점 빨라졌다.
- 조금 더 지나자 마목인이 아닌 윤해의 눈에도 분명히 보이는 것들이 있었다. 무기를 챙기지도 않고 황급히 달아나는 사라의 병사들이. 또 버려진 깃발이. 그래도 윤해는 진을 살폈다. 퇴각하는 사람들의 모양을 그들이 이루는 대형을 진의 모양에 토벌군의 기세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꽁꽁 얼어 우뚝하게 보이던 적의 기세가 순식간에 파사삭 부서지고 있었다. 패주(敗走)였다.
- 망루 위에 휘를 올렸다. 윤해가 지닌 수십 개의 휘 중 수행하기 가장 쉬운 명령, 추격이었다.
- 다르나킨은 좌기대를 이끌고 고리 동편에 모습을 드러냈다. 추격이 시작되자 사라의 토벌군은 추풍낙엽처럼 쏠려 나갔다. 거기에 적군은 없었다. 어제까지 군에 속해 있던 말과 사람의 무리가 여기저기 뭉쳐 있을 뿐이었다. 속속 무너지는 적병을 술름고리 보창대에 맡기고 다르나킨의 좌기대는 다음 사냥감을 향해 부지런히 달려갔다.
다르나킨은 대영솔의 약속을 떠올렸다.
"그러면 저는 대감께 지금까지 알려진 것 중 가장 강력한 기병전술을 펼쳐드리겠습니다."
윤해는 약속을 지켰다. 그것은 부인할 수 없는 진실이었다. 그가 아는 한 세상에 영윤해처럼 기병을 잘 이해하는 사람은 없었다.
- 어떤 사람들은 기병을 위력으로 이해한다. 돌격을 숭상하는 자들이 특히 그렇다. 말에 오른 병사들이 무리를 지어 눈앞으로 달려드는 모습은 보기만 해도 위협적이니까. 또 다른 사람들은 기병을 속력으로 이해한다. 기병이 말을 타고 날렵하게 전장 여기저기를 누비면 5백 명이 3천 명처럼 보이기도 한다. 다르나킨이 따르는 방식이다. 그러나 이 둘은 모두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통할 때가 있고 통하지 않는 때가 있다. 적의 기세나 훈련 정도, 혹은 기병과 보병을 함께 사용하는 진법의 숙련도에 따라 결과가 다 다르게 나타나는 법이다.
- 그런데 기병을 이해하는 또 다른 방식도 있다. 주목하는 사람은 별로 없지만, 아무도 부인하지 않는 강력한 운용 방법이다. 바로 패주하는 적을 추격할 때 기병이 갖는 절대적인 우위다. 그야말로 절대적인 우위여서, 이 순간이라면 일당십이 아니라 일당백도 정말로 가능하다.
다르나킨과 좌기대는 그 바람을 타고 있었다. 북풍에 몸을 싣고 파죽지세로 달려가는 그의 기병을 막아서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또한 그 무엇도 그의 좌기대로부터 달아날 수 없 ...
- "그렇죠. 그런데 깨어날 수 있을까요?"
"그럴 수 있을 게다. 아니어도 할 수 없지. 여기 있는 동안은 여기서 할 수 있는 일을 하거라. 한편으로는 잘된 일 아니니? 감정이 격해져도 깨지 않으니. 평소에는 잠이 깰까 봐 시도하지 못했던 걸 연마해 볼 수도 있겠지."
"아버지는 그게 문제예요. 딸이 사경을 헤매고 있는데."
"미안하다."
그 말에 윤해는 말문이 막혔다. 감정이 복받쳤지만 정말로 잠이 깨지는 않았다. 꿈이 견고해진 건 사실인 것 같았다.
- 윤해가 말했다.
"죄송해요."
이 말은 진심이었다. 아버지가 한 사과는 결국 윤해가 지어낸 말이었지만, 윤해가 한 사과는 진심이었다.
아버지가 말했다. 대답 대신 딴소리였다.
"나라면 지지 않았을 게다. 위는 끝까지 마군으로 포위하라 명했지만, 나라면 마군을 멀찍이 물리고 보병으로 지구전을 펼쳤을 거야. 왕의 권위가 손상되었겠지만, 그건 감수했겠지."
"그래서 아버지가 아니고 숙부가 임금인 거잖아요."
"허허허, 그렇게 되나? 아무튼 그 수로는 네가 나를 이기지 못했을 거야.”
- '그래, 그때 사라진 건 그냥 내가 아니라 자아의 경계였어! 어디까지가 나고 어디까지가 나 아닌 것인지 구별할 수가 없었지.'
그다음을 떠올리는 건 훨씬 쉬웠다. 자아의 경계가 없어지자, 무언가가 자기를 향해 빠르게 밀려들어왔다. 그게 뭔지도 모르고, 얼마나 많은지, 얼마나 큰지도 알 수 없었다.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도. 다만 윤해의 존재 한가운데에 텅 빈 무언가가 자라났다는 건 알 수 있었다. 공백이 자란다는 건 그 자리가 비워진다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공허가, 빈칸이, 허무가, 아무것도 없음이, 윤해가 차지해야 할 공간을 대신했다. 그리고 그게 점점 커졌다. 윤해의 온몸이 완전히 무(無)에 압도당할 만큼.
그때 무언가 커다란 것이 밀려들어왔다가 빠져나갔다. 자아가, 세상이, 우주가, 삼라만상이, 인연의 덫과 끊지 못한 슬픔이, 멸족의 운명이, 생의 감각이, 그리고 또 허무 자체가. 무가 유로 바뀌는 감각이, 생명체의 감각으로는 감지할 수 없고 단지 존재와 부재로만 구분할 수 있는 우주의 근원에 닿은 무언가가.
- 드디어 윤해는 답을 얻었다.
'맞아! 나는 문이었어!'
- 꿈속의 윤해가 긴 명상에서 깨어나 자리에서 일어났다. 윤해는 마당으로 나갔다. 여느 꿈과 마찬가지로, 걸음을 옮기자 바닥이 생겨나고 풍경이 펼쳐지는 꿈이었다. 소라울에 있는 아버지의 집 마당이 눈앞에 펼쳐졌다. 호미는 아직 집에 들이지 않았고, 숙부도 아직은 성군 소리를 듣던 시절이었다. 아버지가 손에 긴 막대기를 들고 두 손으로 꾹꾹 눌러가며 마당에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발톱에서 시작해서 몸통과 날개로 퍼져나가 점점 봉황의 형태를 갖춰가는 그림. 세상을 다 끌어안을 듯 우아한 자태로 날개를 편 봉황은 하늘을 향해 높이 솟구쳤다. 두리번거리지 않고 영물답게, 큼직큼직하고 시원시원한 모습이었다.
그림이 완성되자 아버지는 사라졌다. 그림을 다 그린 아버지가 비를 들고 봉황 그림을 쓸어버렸듯, 윤해의 꿈은 그림을 그린 아버지를 쓱싹 지워버렸다. 이제 살아남은 건 봉황 쪽이었다.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듯 역동적인 기세로 꿈틀거리는 봉황.
- "이제 뭘 불러내야 하지? 너는 알고 있어?"
윤해가 물었다.
"알잖아. 네가 답을 알아낼 때까지는 말조차 제대로 통하지 않을 거라는 걸."
"시간이 정말 얼마 안 남았어. 이 꿈도 곧 깨고 말 텐데, 춘분 전에 내가 답을 찾아낼 수 있을까?"
"충분히. 그건 복잡한 문제가 아니야. 깨닫기만 하면 바로 되는 거라고. 그러니 깨어난 다음에 해도 늦지 않아. 그리고 언제까지나 누워 있을 수는 없지 않아? 이제 곧 몸이 쇠약해질 텐데, 일어나서 네 손으로 음식을 먹고 네 두 다리로 일어서야지. 네 세계에도 할 일이 많잖아."
"그건 그렇지만.”
"명심해. 너는 세상과 세상을 잇는 문이야. 작은 파멸의 신전이지. 지금도 봐. 전에는 아무리 해도 알아듣게 설명할 수 없었는데 이제는 이렇게 말로 할 수 있잖아. 네가 스스로 터득해서 가능한 일이야. 다음 문제도 그렇게 풀어가면 돼. 이제 거의 다 왔어. 너는 평범하지 않아. 그 어느 예언자도 스스로 문을 열지는 못해. 그건 파괴자들의 능력이지 우리 능력은 아니니까. 그런데 너는 그걸 할 수 있어. 오직 너만. 너는 제일 약한 고리이지만 그래도 제일 특별한 고리야."
- '대영솔을 연모하는구나. 그런데 왜 자기 마음을 믿지 못하지?'
다르나킨은 생각했다. 대영솔에게 그 눈은 상처가 될 것이다. 자기를 사모하는 사람마저 절대적인 믿음을 보이지 않는다면. 다르나킨은 또 생각했다. '내 눈도 흔들리고 있으면 어쩌지?'
- 차마 발이 떨어지지 않았지만, 난조는 결국 윤해의 말을 받아들였다. 언젠가 그는 오열할 것이다. 이별이 확정된 후에. 그러나 아직 발길을 돌릴 여지가 있는 곳에서라면 그는 오열조차 하지 못할 것이다. 다르나킨도 언뜻 알고 있었다. 은조가 자기 연모의 핑계로 윤해의 마법을 언급하는 걸 들은 적이 있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난조는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객사를 떠나는 발걸음이 이다지도 무거운 건 모두 윤해 주위에 펼쳐진 마법 때문일 거라고. 자신이 느끼는 감정은 연모가 맞지만, 그렇기에 진짜 연모는 아닐 거라고.
다르나킨에게도 빤히 읽히는 그 마음을 대영솔이 알아채지 못할 리 없었다. 말을 마친 윤해는 잠든 사람처럼 눈을 감고 있었다. 더 듣지 않겠다는 의미인지, 정말로 기력이 없어서인지는 알 수 없었다. 난조가 마법을 핑계로 또 한 발 물러서는 걸 직접 보지 않은 건 어쨌든 다행이었다.
- 다르나킨의 의심도 말이 안 되는 건 아니었다. 어쨌거나 파멸의 신전이기는 하니까.
게다가 초원의 풀은, 거문담 한가운데에 있는 진짜 파멸의 신전이 아니라 술름고리에 새로 부임한 예언자를 지목했다. 어째서 그랬는지는 윤해도 알 수 없었다. 다만 초원의 마목인들은 그 예언을 덜컥 믿고 싶었을 것이다. 그들에게 풀은 태양 다음으로 위대한 신이었을 테니. 더구나 목소리를 낼 줄 모르는 초원의 풀이 스스로를 죽여 누군가를 지목했다면, 초원을 바다로 알고 살아가는 자들이 그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그게 초원의 삶이었다.
- '하지만 그 이야기는 뭔가 이상해. 나도 꿈에서 그 소용돌이를 본 적 있어. 분명 그건 거문담 쪽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는데 어째서 그게 나를 향한다는 거야? 게다가 애초에 이건 좌향 노파의 이간질일 수도 있잖아. 눈이 걷히기 전에는 확인이 안 되니까. 왜 달 대감은 내게는 묻지도 않고 그쪽 말부터 덜컥 믿고...?'
물론 그건 정신을 잃고 헤매던 밤, 미닫이문에 드리운 기괴한 형상의 그림자를 직접 보지 못해 하는 생각이었다. 의원들도 다르나킨도, 윤해에게 그 기괴한 형상에 관해 이야기해 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것이 윤해의 밑바닥이었으므로, 윤해를 아끼는 자라면 차마 본인에게는 할 수 없는 말이었다.
그걸 모르는 윤해는 혼자만의 생각을 이어갔다. 애꿎은 심정이 가득했지만, 윤해는 자기를 믿지 못하는 다르나킨을 위해 먼저 마음을 열기로 했다.
- 비록 가까이에서 윤해를 보좌해 왔어도, 다르나킨 또한 윤해의 마법을 직접 접해본 적은 없었다. 그건 같은 예언자가 아니면 실감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꿈을 어떻게 현실로 불러내는지, 어떻게 해야 잠에서 깨지 않고 보다 생생한 꿈을 꿀 수 있는지, 어떻게 스스로 문이 되어 세상을 잇는 통로를 여는지. 그런 경험을 함께 나눌 사람은 이쪽 세상에는 아무도 없었다. 윤해는 전승이 끊긴 시대의 유일한 예언자였으니까.
- 윤해의 세상에는 펼치지도 않은 마법을 펼쳤다고 오해하거나, 반대로 펼치려는 마법을 펼칠 수 없으리라 의심하는 자들 뿐이었다. 정말 모두가 그랬다. 그게 윤해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그래도 다르나킨의 의심은 왠지 억울했다. 세상 사람들이 다 그렇대도 다르나킨만은 달랐으면 했다. 윤해는 더 강한 걸 불러내지 못해 조바심이 나는데, 다르나킨은 윤해가 너무 무서운 걸 불러낼까 근심이었다. 하지만 그는 다르나킨이 아닌가. 세상 사람들이 다 자기를 몰라봐도 좌기대의 달낙현이 자기를 의심하는 건 정말이지 너무나 야속한 일이었다.
- "내가 도대체 뭘 하겠다는 건지 궁금했지요? 지금 이 나무가 들어섰듯 무언가를 불러낼 겁니다. 봐도 이해는 안 가겠지만, 그래도 한 번은 보여드리고 싶었습니다. 내가 펼치는 마법을요. 대감 덕분에 열심히 연마해서, 지금은 잠들지 않고도 원하는 걸 정확히 불러냅니다. 원래는 거문담에 빼앗긴 거라고 합니다. 그쪽이 더 강한 문이라, 약한 문인 제가 불러낸 것들이 전부 거문담 한가운데에 나타나고 만 거지요. 요즘의 나는 그걸 뺏기지 않는 연습을 했고, 이제 단 하나도 빼앗기지 않습니다. 대감은 아직 거문담에 사람을 붙여두셨지요? 내 말이 맞지 않습니까? 하나라도 내 통제를 벗어나 잘못 튀어 나가는 게 있던가요?"
다르나킨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없습니다. 전혀."
"그러니 믿어보세요. 나는 내가 원하는 것만 확실하게 불러낼 거고 어느 하나도 저 사특한 문에 빼앗기지 않을 겁니다. 그래서 그 일을 막아낼 거예요. 하늘과 땅과 바다의 절반이 불에 타버리는 대재앙을요. 초원의 풀이 누구를 지목했는지 나는 모릅니다. 그게 초원의 예언이래도 어쩔 수 없어요. 나는 이제 다른 누군가가 쓴 운명대로 살지 않을 겁니다. 그러기 위해 지금껏 싸웠어요. 이제 와 그러기를 멈추지는 않을 겁니다. 그래야 내가 나로 남을 수 있어요."
- 그 말을 하는 윤해의 마음은 걷잡을 수 없이 격해졌다. 그것은 윤해가 스스로 써낸 자기 삶의 이유였다. 소라울의 어느 저택에서, 또는 어느 산속에서, 소멸의 운명을 따라 조용히 지워져야 했던 존재가 술름의 겨울을 두 차례나 겪으며 마침내 찾아낸 자신의 쓰임새였다. 윤해는 자기 것인 그 이유가 진심으로 탐났다. 사촌인 혜에게도, 혹은 파멸의 신전에도, 아니면 그 거대한 짐승에게도, 그 이유만은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힘껏 움켜쥐고 싸워 이겨낼 것이다. 욕심을 부리고 끝내 집어삼킬 것이다.
- 윤해가 몸을 틀어 말에서 내렸다. 아직 몸이 성치 않아 조금은 위태로운 움직임이었다. 그러자 다르나킨이 다가와 윤해의 허리를 붙들었다. 그럴 것 같았다. 이 사람이라면 분명 그래줄 거라 믿었다.
윤해는 재빨리 몸을 돌려 그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그러면서 아까 했던 질문을 다시 속삭였다. 가슴이 너무 벅차올라 속삭이는 소리밖에는 나오지 않았다.
"정말로 나를 벨 수 있겠어요? 이런 나를 그대가?"
다르나킨은 아무 생각이 없어졌다. 어쩌면 하살루타가 준 신발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게 아니면 폭설에 말을 몰고 찾아와 눈앞에 마법을 펼쳐 보인 다음 자기 품에 안겨 속삭이는 사람 때문일지도 몰랐다. 그 사람이 다름 아닌 영윤해였으므로.
- 윤해가 얼굴을 묻은 채로 또 속삭였다.
"이것만은 알아주세요. 누구에게도 말하고 싶지 않지만, 사실 나는 내가 이 재앙을 막아낼 수 있을지 확신이 없습니다. 다만 내가 찾아낸 내 역할이기에 할 수 있는 만큼 하려는 것뿐이지요. 만약 그래도 안 되면, 그래서 세상 마지막 날이 오면, 그때는 그대가 내 곁에 있어주기를, 내가 바라는 건 단지 그뿐이에요."
그 말에 다르나킨은, 좌향에 살던 어린 시절에 그의 부모가 종말에 관해 한 말을 떠올리며 대답했다. 세상 마지막 날이 오면.
"제가 바라는 것도 오직 그뿐입니다."
- 소라울에서보다 훨씬 늦게, 술름고리에도 봄이 왔다. 눈이 녹자 윤해는 초원 모든 방향으로 마병을 보내 풀이 자란 모양을 살핀 후 보고하라고 했다. 과연 초원에는 소용돌이가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중심은 술름고리였다.
그 보고를 전하는 낙현의 눈에는 조그만 의심도 남아 있지 않았다. 다행이었다. 그가 다시 초원 제일의 마목인으로 돌아가 있어서 윤해에게는 그가 필요했다.
- 그날 밤 꿈에 마로하가 나왔다.
"예언자는 원래 이런 거야?"
윤해가 마로하에게 물었다.
"뭘?"
"포위되고, 손가락질당하고, 표적이 되고."
"원래 그래."
"더 대접받는 시절도 있다며."
"그래도 믿지 않는 사람들이 많지. 그게 다 인간이 어리석기 때문이야."
"어리석기 때문이라니?"
"역서에 정확한 날짜가 씌어 있고 비석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다 새겨져 있는데, 예언자가 예언할 게 뭐가 더 있겠니?"
"생각해 보니 그것도 그러네. 왜 예언자라고 부르는 거지?"
"빤히 보이는 재앙을 아무도 믿지 않으니까. 더 좋은 시기여도 다 그래. 백 년만 지나면 사람들은 세상의 절반이 불타 없어진 이야기를 전설이나 신화라고 믿어. 아무리 정확하게 써서 전해도 그런 일은 실제로 안 일어났다고 믿는 거지."
- 포위망에서 벗어나기 위해 달아나던 때의 질주가 어떻게 다른지를. 반드시 목을 베겠다는 예리한 살기가 어떻게든 살아남겠다는 다급한 독기로 바뀌는 데는 긴 시간이 필요하지도 않았다. 뱁새가 날아가다 떨어지는 시간. 영윤해에게 필요한 건 겨우 그뿐이었다.
- 윤해는 시야를 가로막은 눈 언덕을 등지고 남쪽으로 돌아섰다. 우뚝 솟은 거문담이 성큼 다가와 있었다. 윤해는 이제 알고 있었다. 거문담의 거대한 장벽은 적도 아니고 두려워할 대상도 아니라는 사실을. 그것은 예언자를 도와 짐승을 가두기 위해 고대인이 마련해 둔 함정일 뿐이었다. 진짜 위협은 거문담 아래에 있었다. 장벽 한가운데 아무것도 없는 넓은 공터에.
- 윤해는 거문담 맨 아래로 시선을 옮겼다. 1021년. 인간이 충분히 어리석어지는 시간. 그런 길고 까다로운 주기로 두 세계를 연결해 세상을 파괴할 검은 짐승을 뱉어내는 사악한문. 윤해의 적이 거기에 있었다.
윤해는 생각했다. 자기가 거문담을 바라보듯, 거문담 또한 자기를 내려다보고 있을 거라고. 전승이 끊어진 시대의 예언자, 재앙을 상대할 운명을 지닌 자 중 가장 준비가 늦고 가장 취약한 고리. 그게 바로 영윤해였다.
- 춘분이 지나고 삼 일째 되는 날이었다. 파멸의 신전은 이제 기병과 마법사의 영역 안에 들어와 있었다.
- 저마다의 방식으로 재앙을 막아냈을 텐데, 그럼 나에게 주어진 능력은 대체 뭐였을까? 인간이 가장 어리석은 시대에, 이어진 전승도 없이 스스로 깨어나 꼭 맞는 곳에 정확히 가 있는 게 도움이 되는 역할이란 과연 무엇일까? 끝없이 이어진 1021년 주기의 싸움에서 예언자가 결국 패배하는 광경을 직접 목격하는 것? 정말로 그게 장점이긴 한 걸까? 역시 그건 마로하가 위로의 말로 건넨 뜻 없는 소리는 아니었을까?
윤해는 마로하의 말 속에 자기가 미처 깨닫지 못한 진실이 있었으리라 직감했다. 마로하는 알려주고 싶었겠지만, 윤해가 깨닫기 전에는 말로 옮겨지지 않는 무언가. 결국 윤해 스스로 깨달은 뒤에야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비밀스러 ...
- 그 광경을 지켜보며, 윤해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정신을 집중했다. 이제 그것을 소환할 차례였다. 윤해는 문이 되기로 했다. 작은 파멸의 신전이 되었고, 크기가 크지는 않아도 가장 정교하게 세계와 세계를 잇는 통로가 되었다. 그것을 불러내려면, 불러내서 온전하게 살아 숨 쉬게 하려면, 윤해 스스로가 섬세한 문이 되어야 했다. 아버지의 집에 있던 가구처럼.
그거라면 자신이 있었다. 지난 몇 달간 잠에 빠져 살며 오래 연마한 마음의 기교도 도움이 됐다. 꿈속인 듯, 생시인 듯, 몽환과 현실을 이어 낯선 것을 찾아낸 다음 정확하게 눈앞에 불러내는 기예.
- "그렇게 될 거야. 네가 답을 찾아냈으니까. 우리가 혼자가 아니라는 걸 드디어 깨달았으니."
윤해가 짧게 대꾸했다.
"내가 가장 약한 고리랬지?"
"아니, 가장 특별한 고리라고 했지.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스스로 깨어나 필요한 때에 꼭 맞는 곳에서 끝까지 버텨낼 거라고."
"그래. 잘 버텼지.”
윤해의 목소리에 피로가 묻어났다. 마로하가 다정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면서 윤해에게 물었다.
"영윤해, 우리 마법의 첫 번째 고리가 되어주겠어?"
윤해가 대답했다.
"그래. 기꺼이."
- 시간이 다시 흘렀다. 텅 빈 윤해의 내면이 무언가로 가득 채워졌다. 채움과 비움으로만 감지되는 무언가. 문이 된 윤해의 안을 꽉 채우고 들어온 특별한 존재의 섬세한 무게감.
그다음에 이어진 건 비움이었다. 상실의 기쁨. 무언가가 빠져나가서 개운해진 안도감. 잠시 머금었던 것이 더 넓은 곳에서 활짝 피어나기를 바라는 즐거움.
마로하가 문을 건너왔다. 아득한 시간을 건너, 세상과 세상사이의 까마득한 간극을 지나.
- 늘어선 예언자의 행렬을 보며 윤해는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제야 마로하가 말하던 특별한 고리라는 게 무엇을 뜻하는지 알 것 같았다. 시간과 시간을 잇고 세상과 세상을 이어 한자리에 불러낼 수 있는 진귀한 마법. 그 마법의 첫 번째 고리.
다른 세계의 마법사를 자기가 속하지도 않은 세계에 불러내는 건 예언자들에게도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그런 건 문제가 되지 않았다. 어떻게 불러내도 문이 된 윤해에게로 모두 빨려 들어올 테니. 윤해의 영향이 미치는 영역 안에서 예언자들의 소환 마법은 어김없이 정확했다.
- 스무 번째 소환이 이루어졌을 때, 바닥에 끌릴 만큼 긴 옷을 이불처럼 뒤집어쓴 키 큰 여자가 나타나 윤해에게 인사하며 투덜거렸다.
"하여간 참 성가신 예언자라니까. 이 많은 사람을 꼭 순서대로 불러내야 처음 하려던 걸 할 수 있다니. 그 노인네 말이야. 이 순서를 알아낸 것만 해도 대단하지만, 그래도 이건 너무 길지 않아? 연쇄 소환술이라니, 누가 상상이나 했겠어? 이봐, 거기! 그러니까 잘 봐두라고. 이 많은 사람이 다. 언젠가 이렇게 불려 올 날을 기다리면서 살았다니까! 당신 때문에, 각자 다른 세상에서 말이야."
그 여자가 마지막 예언자를 불러내며 소환 지점을 향해 말했다.
"드디어 갚았네. 이걸로 빚은 다 없어진 거다."
그러자 모두의 눈앞에 그 예언자가 나타났다. 윤해가 불러낸 마로하만큼 또렷한 윤곽을 지닌 예언자였다. 예언자의 운명을 깨달은 날, 모두의 꿈에 나타나 따뜻하게 안아주며 너는 혼자가 아니라고 말해준 사람. 따로 태어난 모든 예언자를 찾아가 말을 걸고 위로하고 연결해 준 마법사, 예언자들의 예언자가 윤해에게 손을 내밀었다.
- 윤해는 그 사람의 얼굴을 알아보았다. 모두가 공들여 불러낸 대예언자의 이름도 어쩐지 이미 알고 있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저건...'
윤해는 예언자가 내민 손을 맞잡았다. 그러면서 속으로 외쳤다.
'저건 나야!'
정말이었다. 그것은 분명 윤해였다. 미래의 윤해. 곱고 건강하게 수십 년을 더 살아온, 미숙하지 않은 예언자 영윤해.
- 접혀 있던 시간이 길게 펼쳐졌다. 윤해는 그 윤해에게서 활짝 열린 길을 보았다. 윤해가 알던 자기 운명은 다 거짓이었다. 부원대군의 딸 앞에 놓인 길은, 결코 짧게 살다 사라질 운명이 아니었다.
- 함께 살아갈 사람이 있었다. 혼자 버려진 윤해를 도와 날개가 되고 말이 되어준 사람.
다르나킨이 말을 타고 달려오고 있었다. 그날 초원에서 살아남은 5천 몇백 명 중에 그 사람이 포함된 건 정말 큰 선물이었다. 윤해는 생각했다. 그래, 그거면 됐어. 이 사람만 있으면 어떻게든 다시 살아낼 수 있겠지. 다르나킨 또한 비슷한 생각을 했다. 이 사람이 접어놓은 초원에서라면 언제까지라도 행복할 수 있을 거야.
- 먼 길을 달려온 기병과 마법사는 마침내 온전한 안식에 이르렀다.
작가의 말
여기가 원본인 판타지
올해로 데뷔 이십 년이다. "등단" 제도로 데뷔하지는 않았으니 소위 "문단"의 셈법으로 환산했을 때 맞아떨어지는 경력은 아니다. 데뷔 전에도 쓰고 있었고, 데뷔하고 삼 년 정도는 '내가 작가가 맞나?' 고민하고 있었으니 20이라는 숫자 자체도 큰 의미는 없다. 중요한 건 내가 아직 지치지 않았고 뒤로 물러나고 싶은 마음도 별로 들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런데 이건 혼자서 어떻게 해볼 수 있는 게 아니라 느슨하게 이어진 동료 집단의 연대 가운데에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나는 사십 대가 되어서야 내가 뭘 쓰고 있는지 정리된 표현으로 말할 수 있게 되었다. 내가 쓰는 건 '작동하는 세계와 인간의 이야기'다. 단순히 배경으로 놓인 게 아니라 스스로 움직이는 세계와, 그 안에서 살아가는 인물이 서로 만나는 이야기다. 나의 이십 년은 나를 둘러싼 세계의 이십 년이기도 하다.
든든한 버팀목인 정세랑 작가와는 소설의 소재 하나를 나눈 적이 있다. <옥상에서 만나요>에 수록된 <이마와 모래>를 기억하는 독자라면, 거기에 등장한 '화살 편지'라는 소재가 이 책 2장에서는 어떤 모습으로 펼쳐졌는지 비교해 보기 바란다.
김초엽 작가는 신기한 동료다. 경력이 늘수록 '이게 소설이야, 논문이야?' 싶을 만큼 소설 한 편을 위한 연구 분량이 많아지는 신세를 한탄하고 있을 무렵에 나타나, 그런 방식으로 쓰는 사람이 또 있다는 걸 보여준 작가다. 이 소설 집필기간에 우리는 전쟁 이야기를 즐기는 일에 관한 대화를 나누었다. 김초엽 작가의 <아무튼, SF 게임>에 수록된 <전쟁 게임을 즐기는 평화주의자>라는 소제목에 빗대자면, 나는 '전쟁소설을 쓰는 평화주의자'다. 이 입장의 모순에 대해 꽤 고민했는데, 그렇다고 소설가가 전쟁 장면을 일부러 밋밋하게 쓸 수는 없으니 일단 열심히 쓰자는 게 내 결론이었다. 이 책의 영향을 받은 누군가가 현실에서 기병 전투를 시도하는 일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을 것 같기도 했다.
... 볼까 하고 학술 자료를 검색했더니 한반도 지역의 기병에 관한 역사학과 군사학 분야의 논문 수십 편의 목록이 나왔다. 그중 서른 편 정도를 추려 정독하는 동안 소설의 주인공이 발을 딛고 설 사회 문화적 배경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태어나 처음으로 한겨울 온돌 위에 맨발로 올라선 다르나킨이 느낀 당혹스러운 행복감은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감정이다. 또한 소설에서 마목인으로 표현한 유목민과 초원에 관해서는, 중앙유라시아사 분야의 세계적인 권위자인 김호동 교수님의 연구에서 간접적인 영향을 받았다. 1998년에 중앙아시아사 수업을 들은 이후 유목과 초원은 내 소설의 오랜 탐구 주제 중 하나가 되었다.
이 소설의 어딘가에서 왠지 모를 생생함이 느껴졌다면, 그건 이 이야기의 숨겨진 지향점이 '바로 여기가 원본인 판타지'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숨겨둔 지향점이므로 독자가 자세히 알 필요는 없지만, 다른 창작자나 미래의 연구자는 궁금해할지도 모르기에 기록으로 남겨둔다. 지금도 많은 문학인이 "소설은 결국 인간에 관한 이야기"라고 규정하지만 내 소설은 어디까지나 "작동하는 세계와 인간의 이야기"이며, 이 소설에 담긴 세상의 작동 원리를 구상한 배경은 위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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