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자 : 안상아
출판 : 자크드앙
출간 : 25.12.08
올해는 트위드 자켓을 잘 입어보기로 하고, 겨우내 봄이 되면 입을 자켓을 고르며 지냈다.
활동하기 편한 옷 위주로만 즐겨 입다 보니 평소에도 너무 늘어지는 기분이 들어서, 자기 관리 차원에서 조금 더 신경 써야지 하고.
아직은 너무 쌀쌀한데- 하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왜 벌써 초여름이 온 것일까...
다소 허탈하지만, 옷차림이 얇아질 테니 바른 자세와 스트레칭에 더 힘을 쏟기로 한다.
삶을 버티지 않고 살고 싶었다. 버텨내고, 견디고, 그저 존재하기만 하는 게 아닌 '생'을 살고 싶었다.
이제와 과거를 돌이켜보면 많은 것들이 변했다. 지금은 어느 정도 안정적으로 생활하고 있고, 취미활동을 할 수 있을 정도의 여유도 있다.
하지만 여전히 과거의 어느 때처럼 무기력한 면도 갖고 있다. 이전에는 '할 수만 있다면'하고 바랐던 것들을, 원한다면 할 수 있기 때문에 미루게 되어 버렸다.
어디일까, 내가 놓치고 있는 지점은.
그렇게 스스로를 돌아보고 싶었던 순간에, 이 책을 알게 되었다.
<유행을 타지 않는 삶>은 호불호가 갈릴 수 있는 책이다.
누군가에게는 드물지 않은 감성 에세이로 느껴질 수도 있고, 은근한 자랑 섞인 셀프 PR로 느껴질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나는 필요한 때에 읽었고, 찾던 것을 얻을 수 있었기에 만족한다. 무엇보다 다듬어진 문장들이 마음에 들었다.
자신을 최우선, 정중앙에 놓기를 고집하기보다 적절히 존중할 수 있는 자세.
타인에 대한 배려를 자연스럽게 '선택'할 수 있는 유연함.
지나치게 비교하고 집착하지 않을 수 있는 초연함.
지금보다 약간만 더 가볍게, 기왕이면 더 아름답게, 내가 생각하는 답을 찾아가기.
타인의 모든 것이 마음에 들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니 내가 찾을 수 있는 단점을 찾기보다는, 볼 수 있는 장점을 보기 위해 노력하는 쪽이 서로에게 이롭지 않겠는가 생각한다.
동시에, 나는 아직 구습을 모두 버리지 못한 인간이기도 하므로...
미래의 나는 어떻게 달라졌을지 궁금하기도 하니, 아쉬웠던 부분을 언급해 두기로 한다.
저자의 여유의 상당 부분은 배우자의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
스스로를 위한 투자라는 개념에는 동의하지만, 그것이 적절 또는 적정한가의 기준이 나와는 조금 달랐다는 점.
공유 오피스, 어학 수업, 피니싱스쿨- 다양한 것들을 시작했으나 집중도나 결과물은 모호하다는 점.
(특히 피니싱스쿨의 수업이나 등록 및 수료 절차에 대해서는 언급이 거의 없어 의아했다)
여러 지점의 브랜드에 취업 문의를 했으나 결과적으로 채용되거나 면접을 진행한 적은 없다는 점.
등이 눈에 걸렸다.
이제 나는, 내 안의 어떤 부분들이 이것들을 눈에 걸리게 했는지를 찾아보려 한다.
성과가 나지 않으면 새로운 시작을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건 아닐지, 가성비라는 이유로 내가 더 만족할 수 있는 선택을 억제하고 있는 건 아닌지, 수입과 자본의 축적에 대해 불안함이 있는 건 아닌지 등등.
타인에 대해 잘했다, 잘못했다 등의 평가를 하는 건 지양하고 싶다.
하지만 나와 결이 맞는 사람을 알아보는 안목, 또 내가 되고 싶은 사람을 닮아갈 수 있는 안목은 더 예리하게 갈고닦고 싶다.
적절한 시기에 읽어서 좋았다.
끝.


Prologue
제네바에서 살아가는 법을 재구성하다
더 잘 살고 싶은 열망은 언제나 가득했다
- 부단히 고민하고 움직인 결과 서른 초입까지의 삶에는 큰 불만이 없었다. 계속 그렇게 산다고 해도 만족할 만한 틀속에 나를 넣어두었다. 어떤 일에 재능과 노력을 쏟을지에 대한 계획, 결혼을 약속한 남자친구와 그려지는 안정적인 미래, 주변 사람들과 잘 지낼 수 있는 사회적 기술. 나를 돋보이게 만들어주는 익숙한 태도 등등.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한 치의 오차 없이 굴러가는 하루하루의 반복되는 삶.
- 안주함이 부른 권태로움 때문이었을까? 지금 삶의 형태가 진정으로 '잘' 살고 있는 모양새인지 궁금해졌다. 동그라미가 가장 안정적이면서도 완벽한 모양이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그건 단지 익숙함에서 비롯된 착각은 아닐까 하는 그런 의심까지 말이다. 인생에는 정답이 없으며 개인의 행복은 각기 다르다고 하지만 그렇기에 더욱 다른 삶을 엿보고 싶어졌다. 아니, 직접 겪어보고 싶었다. 이왕이면 아주 다른 모양으로, 사각형, 세모, 육각형을 넘어서 별 모양, 십자가 모양, 이름도 모를 신기한 무언가로.
- 새로운 세계를 또다시 열어보라는 기회를 맞닥뜨린 건 우연이 아니라 운명이라고 믿었다. 난생처음 가본 스위스 제네바에서 신혼 생활을 시작하게 된 서른하나의 삶을 한국에서 14시간을 날아 도착한 낯선 곳, 이전의 별거 없던 삶이 그리워 쉽사리 돌아갈 수는 없는 거리였다. 어쩔 수 없이 친 배수진은 운명론에 무게를 실어주었다. 불어를 알아듣지 못하는 나는, 그들의 대화를 오직 눈빛과 손짓으로만 짐작해야 했다. 말이 지워진 자리에서 관찰은 깊어졌고 감각은 더욱 섬세해졌다. 그 누구도 나를 궁금해하지 않는, 그 누구에게도 나를 설명할 필요가 없는. 그렇기에 온전히 통제 가능한 변수들의 조율을 통해 새로운 삶을 실험해 보기에 완벽한 조건이었다.
- 낯선 곳이 아름답게 느껴지는 건, 그곳에 머물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닫기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단 한 번의 실험에서 예상한 만큼의 결과를 얻을 수 없는 것처럼 무수한 시행착오가 존재했다. 언제까지나 관찰자의 시선으로 타인의 삶을 태평하게 관조할 수만은 없었다. 이미 형성된 그들만의 견고한 울타리를 넘어가 자연스레 어울리기 위해서는 크고 작은 것들을 바꾸고 이해해야만 했다.
- 언어는 물론이요, 미세한 비언어적 요소와 그 기저에 깔려 있는 역사적 가치와 문화적 배경까지. 유럽의 중심에서 내세울 것이 아무것도 없는 나를 남이 함부로 대할 수 없게 스스로의 선을 만들어나가는 것, 이것 또한 기본적이고도 절대적으로 필요한 하나의 실험 변수였다. 그렇게 약 3년이라는 시간 동안 살아가는 법을 새롭게 배워 나갔고 그 과정에서 '잘 사는 법'에 대해 새로운 정의를 써 내려갔다.
- 그러나 제네바는 달랐다. 자전거로 달리는 배달부들, 마트와 백화점을 포함한 모든 매장이 문을 닫는 일요일, 가게에서 계산을 할 때조차도 필수로 주고받는 인사말...
느린 삶에서 어쩔 수 없이 나도 멈춰야만 했다. 이상하게도 그 불편함이 내 삶을 뒤돌아보게 만들었다. 나에게 필요한 건 새로운 유행이 아니라 다시 나답게 살아가는 감각이었다. 그 감각 속에서 나는 삶을 재구성하기 시작했다. 유행이 지나도 촌스럽지 않은 것들, 아니, 유행을 타지 않는 것들. 시간이 흘러도 내 안에서 여전히 자연스럽게 쌓여 있을 것들을 하나씩 모았다.
- 남들이 정한 방향을 따르지 않고, 나에게 맞는 속도와 리듬으로 살아갈 줄 아는 것.
욕망과 절제, 일과 쉼, 가까운 관계와 먼 관계 사이에서의 거리감을 유연하게 조율할 줄 아는 것.
매 순간을 부드럽게 흘려보내듯 아름다운 감각을 느낄 줄 아는 것.
세상과 함께 조화를 이루며 품격을 지키되 자신만의 취향을 다듬을 줄 아는 것.
타인이 아닌 나를 위해 조금은 이기적으로도 살아가는 용기를 낼 줄 아는 것.
- 어쩌면 유행을 타지 않는다는 건, 세상과 조금의 거리를 두겠다는 다짐일지도 모른다. 모두가 같은 방향으로 달릴 때 잠시 멈춰 서서, 정말 그 길이 나의 길인가 되묻는 태도. 남들이 부러워하는 삶이 아니라 내가 오래도록 납득할 수 있는 삶을 선택하는 일. 제네바는 그 연습을 하기에 적절한 도시였다. 남의 기준에서 벗어나 나만의 호흡으로 살아보는 것, 그 느린 걸음 속에서 비로소 자유로워지는 것. 나만의 유행을 타지 않는 삶은 그렇게, 외면이 아니라 내면의 조용한 반란으로부터 시작되었다.
- 프랑스어에 'Savoir-vivre'(사브아 비브르)라는 단어가 있다. 사전적으로 직역을 하자면 '알다'를 의미하는 'Savoir'와 '살다'를 의미하는 'Vivre'를 합친 것으로 사는 법을 안다'라는 뜻으로 풀이된다. 그러나 프랑스에서는 이를 타인과의 관계에서 지켜야 할 기본적인 예절은 물론, 상황에 맞게 우아하고 조화롭게 행동하는 태도까지 아우르는 말로 쓴다. 더 나아가 매 순간을 품위 있게 가꿔나가기 위한 일종의 '삶의 미학'으로까지 여겨지기도 한다.
- 유럽은 기본적으로 다민족, 다국적 사회다. 스위스만 해도 국어가 네 가지나 된다. 서로 다른 언어를 쓰는 사람들이 같은 나라 안에서 살고 있는 셈이다. 아이들이 학교에서 배우는 건 단지 지식이 아니라. '차이를 전제로 한 대화법'이다. 이건 말투나 태도의 문제가 아니라 문화의 기반이다. 프랑스에서 교육을 받은 친구가 이런 말을 한 적 있다.
"여긴 정답이 없는 질문을 던지는 훈련을 계속해. '네 생각은 어때?'가 제일 많이 듣는 질문이야."
- 유럽에서 만난 이들은 자기소개를 할 때 자신이 살아온 경로를 말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대학을 두 번 바꾼 친구, 40대가 되어서야 처음으로 직장을 구한 지인, 국적이 세 개인 이웃... 누구도 그걸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각자의 궤적에는 각자의 사정이 있다는 걸 이해하는 사회. 그런 배경이 있다 보니, 다름은 궁금한 것이 되었고, 설명은 권리이자 예의가 되었다.
- 유럽이 완전히 이상적인 사회라는 건 아니다. 그곳에도 여전히 계급과 인종 문제, 차별이 존재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은 다양할 수 있다'는 감각이 사회 전반에 훨씬 더 깊이 스며들어 있었다. 그 다름을 말할 수 있도록 허락하는 문화. 그리고 말이 길어질 수 있다는 여유.
- 증명할 것이 없고 가진 것이 부족할수록,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고 싶은 마음이 크면 클수록, 더욱 그럴듯하게 보여야 한다. 자신의 삶이 마음에 들지 않아 스스로 새로운 삶을 창조했다고 말한 프랑스 디자이너 가브리엘 샤넬의 말처럼 말이다. 고아원에서 자라며 세상의 벽이 얼마나 높고 차가운지 누구보다 일찍 알아버린 샤넬은 그래서 남들보다 더 절실하게 위로 올라가고 싶었기에 그럴듯해 보이는 법부터 연습했다고 한다.
옷을 잘 입는 건 기본이며 말투, 태도, 시선 하나까지도 이미 상류층 여성인 것처럼 자신을 꾸몄다. 아직 갖지 못한 걸 숨기기보단, 먼저 그 모습을 입어보는 용기가 필요하다는 ...
- 어쩌면 방법을 모르고 기회가 없는 사람에게는 돈이 가장 쉽고 간편한 수단이 될 수도 있다. 그들과의 접점을 만들 기회를 돈으로 살 수 있다는 점에서 말이다. 경제 자본을 통해 사회적 자본, 즉 돈을 통해 인맥을 얻는 일은 일상에서도 흔히 볼 수 있으니까.
그러므로 결국 그 돈을 쓸 수 있느냐 없느냐는 배짱과 배포의 문제로 귀결된다. 진짜 그 돈 몇십만 원, 몇백만 원을 투자해서 그 이상의 가치를 돌려받는 그런 일회성에 그치는 단순 인과관계를 말하는 게 아니다. '까짓것 해보지 뭐', '이 돈 없다고 큰일 나겠어?', '안되면 그때 가서 또 다른 방법을 찾으면 되지'라는 공격성, 배포, 삶에 대한 가벼운 태도. 결국은 자기 확신인 것이다. 단,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말이다.
인생이란 결국 스스로 감당할 수 있는 자신만의 확신의 범위를 온몸으로 부딪히며 넓혀 나가는 과정이 아닐까?
- 이 세상을 살아가며 꼭 혼자 다 해내야만 잘 사는 걸까? 나 혼자서 모든 걸 해결해야만 대단한 사람처럼 보일까? 예전의 나는 그렇게 믿었다. 누구의 손도 빌리지 않고 온전히 내 힘으로 일어서야 진짜 멋진 사람이라고, 그래야만 인정받는다고. 뭐든 처음부터 끝까지 내 손으로 해내야 마음이 놓였고, 그래야만 자존심이 세워지는 줄 알았다. 하지만 지금은 조금 달라졌다. 때로는 내가 다 하지 않아도 되는 길이 있다는 것. 조금 더 편한 길이 있다면 그걸 찾는 것도, 그 길을 걷는 것도 어쩌면 충분히 괜찮은 일일지도 모른다고.
- 물론 이 말이 누군가에게 기대는 기술처럼 들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전에 꼭 필요한 조건이 있다. 바로 나 역시 누군가의 눈에 '함께할 만한 사람', '시간과 에너지를 쓸 가치가 있는 사람'으로 보여야 한다는 사실이다.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해서는 기회가 굴러오지 않는다. 나를 먼저 드러내고, 상대에게 줄 수 있는 무언가를 갖추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 서로가 서로의 레버리지가 될 수 있다. 일방적으로 받기만 하는 관계가 아니라, 내가 가진 것을 내어주고 타인의 도움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태도. 그렇게 관계는 흐름을 타듯 살아 움직이고, 그 흐름이 언제 어떤 방향으로 내게 되돌아올지는 알 수 없지만 일단은 믿어보는 것이다.
- "제가 뭘 잘못한 걸까요? 저 사람 이상한 거 맞죠?"
그 순간 묻고 싶은 말이 떠오른다. 혹시, 오늘따라 친구가 왜 말을 걸지 않았는지 사실 당신도 모르는 게 아닐까? 차라리 상상하지 말고, 조심스럽게 직접 물어볼 수도 있었을 텐데. 또 가게 직원이 왜 유독 나에게만 불친절한지를 혼자서 마음대로 추측해 버린 건 아닐까? 어쩌면 당신 스스로가 만들어낸 작은 피해의식에 스스로 빠져버린 건 아닐까? 물론 그게 고급 서비스를 받는 자리였다면 충분히 정중하게 불편함을 말해볼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게 아닌 상황이라면 어쩌면 그냥 신경을 끄는 게 더 나은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왜? 중요한 일이 아니니까.
허무하리만큼 간단한 이유이지 않은가.
쓸데없는 것에 집착하지 않는 연습이 필요하다.
- 사람도 마찬가지다. 누군가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 이상하게 기분이 꺼림칙할 때가 있다. 딱히 이유는 모르겠는데 왠지 나를 더 작게 만드는 사람, 괜히 하루 종일 마음이 뒤숭숭해지는 사람. 그게 아무리 오래 알고 지낸 친구라 해도 스스로에게 물어보면 답은 이미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어색함이 두렵고 미안함이 앞설 수도 있다. 하지만 기억해 보자. 당신의 마음까지 그 사람이 책임져주지는 않는다. 너무 과한 비유일지 모르지만, 불편한 관계를 계속 이어가는 건 냄새나는 화장실에 일부러 다시 들어가는 것과 뭐가 다를까. 남자친구와 끝이 보이는 싸움을 반복하고 있진 않은지, 가족이라는 이유만으로 매일 부딪히며 숨 막히는 집 안에서 애써 참아내고 있진 않은지, 나를 건강에서 멀어지게 만드는 음식을 관성처럼 입에 넣고 있지는 않는지, 끝없는 비교의 인 인스타그램 속에서 스스로를 깎아내리고 있진 않은지.
- 답은 늘 간단하다. 나오면 된다. 버리면 된다. 멀어지면 된다. 불편함을 느꼈다면 그걸 인정하는 게 먼저다. 그리고 그다음은 아주 단순하다. 거기서 나오는 것. 누가 당신을 거기에 붙잡아두고 있는 게 아니다. 보기 싫은 건 보지 않으면 되는 것이다. 거창하게 운동화 끈 조여매고 한강변으로 나가 시속 5킬로미터로 달리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나오자. 버리자. 당신은 아름다운 것만 있는 곳에서 편히 쉬기만 하면 된다. 세상엔 생각보다 많은 곳이 있고, 당신은 그중에서 좀 더 편안한 곳을 고를 수 있다.
- 그저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을 하고, 나의 세계를 내 방식대로 조금씩 구축해나가고 싶었던 것이다. 누군가의 말과 표정과 의도로 인해, 원래 이어가려던 흐름을 흐트러뜨리고 싶지 않았다. 그 점원이 어떤 의도를 갖고 내게 친절을 베풀었는지를 분석하기 전에, 그저 '나는 불편했다'는 감정을 인정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 삶은 그렇게 끊임없이 조언과 오지랖 사이 어딘가에서 경계가 흐릿해지는 순간들의 연속이다. 누군가는 나를 사랑해서, 혹은 나에게 중요해서 그 선을 넘는다. 하지만 그런 이유조차도 잠시 미뤄둬야 할 때가 있다. 무엇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은, 나만의 선을 그어보는 일이다.
- 어떤 것에 예민한가. 그 민감함의 역치는 얼마나 낮은가. 그래서 어떤 방식으로 방어막을 세워야 하나.
그 방어막이 무너졌을 땐 어떻게 나를 다시 회복시켜야 할까. 여기서 가장 강조하고 싶은 것이 있다. 누군가 당신의 선을 무시하고 들어와 마음을 어지럽히고 나간 뒤, 정작 그 순간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적이 있다면 자책하지 말자. 그 이유는 단 하나다. 아직 익숙하지 않았을 뿐이다. '이 부분에는 내가 조금 약한가 보다' 하며 인정하고, 스스로를 토닥여주자. 그리고 다음번엔 어떻게 나를 더 잘 지켜낼 수 있을지를 조용히 생각해 보자. 또 그게 잘 안 된다면? 괜찮다. 다시 연습하면 된다. 우리가 영어 문장을 자유롭게 쓰기 위해 얼마나 긴 시간 동안 많은 단어를 머릿속에 입력해 왔던가.
- 작은 순간에 섬세하게 반응하고, 작은 것들로부터 다정한 행복을 발견해 낼 수 있으니 그 또한 아름다운 능력이다. 그러니, 지금 그게 잘 되지 않는 당신이라면 잠시 멈춰 스스로를 바라보자. 있는 그대로의 스스로를 인정하고, 다정하게 토닥이자. 혹시 또다시 실패하더라도 묵묵히 일으켜 세워주자.
아마 다들 그렇게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다만 보이지 않을 뿐. 그리고 그게 바로 자기만의 방을 완성해 가는 어른들의 방식일지도 모른다.
Allure
움직이는 방식과 자신을 드러내는 태도에서 풍기는 고유한 분위기와 자세.
- 적당한 시간을 끄는 것은 신중함이라 불릴 수 있겠지만 그것이 지나치면 자기 선택에 확신이 없는 것이다. 자신이 고른 메뉴가 실패로 끝나는 것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한다는 방증이므로, 예상했던 맛을 반드시 느껴야만 했고, 메뉴 하나를 고르더라도 결과를 완벽히 통제할 수 있어야만 했다. 그러니 그렇게 삼사숙고해 메뉴를 골랐음에도 결과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실망감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었다.
- 사소한 일일지라도, 앞으로의 삶에서 맞닥뜨릴 수많은 선택의 순간마다 '적은 돈을 아끼는 것'이 '나의 불편함을 대신하게 두고 싶지 않았다.
버스를 기다릴 힘도 없을 만큼 피곤할 때나 짐이 많아 조금의 이동조차 수고롭게 느껴질 때는 단거리라도 택시를 타는 것. 비행할 때 비즈니스석진 아니더라도 몇만 원, 혹은 조금 더 지불하더라도 레그룸이 몇 센티미터 더 넓은 일반석 중 최상위 좌석을 예약하는 것. 비행기 티켓값을 아끼려다 스케줄 변경이 잦은 저가항공이나 너무 이르거나 늦은 시간대의 비행을 선택하지 않는 것.
- 아마 속으로 '뭐야, 이 여자는? 그렇게 원하면 자기가 내든지'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래서 결코 타협할 수 없는 소비에는 스스로 먼저 내겠다고 했다.
- 여기서 가장 중요한 핵심은 이것이다. 그렇게 해서 내린 선택이 결국 '얼마나 이득이 되는지'를 직접 보여주었다는 사실이다. 편안함에 조금 더 돈을 쓰더라도 이를 통해 더 큰 에너지를 얻고 그 에너지로 배우자를 든든하게 지원할 수 있다는 것. 이로써 궁극적으로 둘 사이의 관계를 더욱 기분 좋게 유지할 수도 있다는 것. 겉으로 보기엔 쓰지 않아도 되는 곳에 돈을 쓰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과적으로는 그 만족감이 나를 더 효율적으로 움직이게 만들어줬다. 심지어 더 큰 돈을 벌게 도와줬다.
- 정말 아끼고 싶은 것, 욕심내도 괜찮은 것 하나쯤은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시간을 들일만큼, 돈을 쓸 만큼 내 마음이 가는 것. 그런 걸 마음속에서 꺼내 조용히 다듬어본다. '이게 과연 나에게 더 나은 결과를 가져다줄까? 시간을 들일만큼, 돈을 쓸 만큼 가치가 있는 걸까?'라고 스스로에게 묻는다. 그리고 마음속에서 '그렇다'라는 대답이 들려온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누군가에게 설명해야 할 날이 온다면 "나는 이런 걸 좋아하고, 이런 걸 믿는 사람이에요"라고 말할 수 있으면 좋겠다. 괜히 눈치 보지 않고, 내 선택을 스스로 지킬 수 있는 배짱 하나쯤은 있다고. 이 정도 배짱은 부릴 수 있는 자유가 허락된 삶, 나는 이것이 우리가 추구해야 할 진짜 자유라고 믿는다.
- 물건이든 사람이든 시간이 쌓이면 이상하게도 무거워진다. 몇 년밖에 살지 않을 곳이라 생각했던 제네바에서 어느새 짐이 늘어나 있었던 것처럼, 사람과의 관계도 처음엔 가벼웠던 마음이 점점 무게를 더해간다. 버리고 또 버려도 자꾸만 쌓이는 물건처럼, 언제 놓아야 할지 모른 채 기약 없이 붙잡고 있는 감정들이 마음 어딘가를 차지한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정말 필요한 건 무엇일까. 언젠가 모든 걸 정리해야 할 순간이 온다면 과연 나는 무엇을 들고, 어떤 마음으로 떠날 수 있을까.
- 일행은 아니었다. 다가온 남자가 "죄송하지만 이 자리는 제가 맡아둔 테이블이에요"라고 말하자, 먼저 앉아 있던 남성은 곧장 "아, 몰랐습니다. 죄송해요"라고 자리에서 일어날 듯 반응했다.
그런데 그다음 대화가 흥미로웠다. 커피를 든 남성이 장난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혹시 저랑 함께 아침을 드시고 싶으셨던 거라면 계속 앉아 계셔도 괜찮습니다"라고 말한 것이다. 그러자 상대도 지지 않고 "그렇다면 제 아내에게 먼저 허락을 받아야 할 것 같은데요?"라며 재치 있게 응수했다. 두 사람은 그렇게 웃음을 주고받더니, 이내 각자의 아내까지 불러 네 명이 한 테이블에 모여 아침 식사를 즐겼다. 마치 오래된 친구들이 다시 만난 듯, 우연이 만들어낸 유쾌한 동석이었다.
- 서유럽의 공기는 한국보다 한결 느슨하다. 그 느슨함 속에는 농담처럼 가볍고, 재치처럼 날렵한 결이 깃들어 있다. 사람들은 낯선 이를 경계하기보다 순간을 함께 웃어넘길 여유를 더 소중히 여긴다. 마음에 여유가 있으니 낯섦이 곧 부담이 되지 않고, 오히려 작은 농담 하나가 관계의 문을 열어준다.
- 모르는 사람에게 불쑥 건네는 한마디 농담에는 단순한 웃음 그 이상이 담겨 있다. 삶이 늘 빡빡하고, 어깨가 잔뜩 굳어 있고, 미간이 날카롭게 접혀 있다면 결코 나올 수 없는 태도다. 처음 만난 사람 앞에서 상황에 맞는 농담을 스르르 흘려보낼 수 있다는 건 긴장이 풀려 있다는 뜻이다. 나아가 긴장이 풀렸다는 건 더 이상 상대의 표정이나 반응을 지나치게 계산하지 않고 있다는 뜻이다.
눈치를 보지 않는 자연스러움 속에는 '상대가 어떻게 받아들이든 나는 감당할 수 있다'는 여유와 자신감이 전제되어 있다. 그래서 농담 하나는 단순한 말이 아니라, 그 사람의 마음가짐과 태도의 총합을 보여주는 지표가 된다. 한마디 농담으로 분위기를 단숨에 바꾸는 힘은 부드럽게 상황을 주도하는 리더십으로 드러나고, 맥락에 맞는 언어를 택할 줄 아는 감각은 지성의 매력으로 이어진다.
- 실제로 프랑스 사람들은 식사 예절에서 '농담을 할 줄 아는 능력'을 중요한 요소 중 하나로 꼽는다. 그들의 식탁은 단순히 허기를 달래는 자리가 아니라 사회적 관계를 확인하고 교양을 드러내는 무대이기 때문이다. 이때 대화의 결은 지나치게 무겁거나 진지하기보다 가볍고 유쾌하며 서로의 기분을 북돋아주는 방향으로 자연스럽게 흐른다. 적절한 농담은 단순한 말의 장식이 아니라, 에티켓의 한 부분으로 여겨진다. 침묵하거나 무표정하게 앉아 있는 것은 무례로 해석될 수 있고, 이와 반대로 적당한 유머와 재치 있는 말로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드는 것은 상대에 대한 배려이자 세련된 태도로 간주된다. 실제로 파리의 살롱 문화나 부르주아 가정의 만찬 자리에서는 센스 있는 한마디 농담이 교양의 척도로 평가되곤 했다고 한다.
- 프랑스 파리에서 TGV를 타고 스위스 제네바 코르나뱅 Cornavin 역에 도착했을 때였다. 기차역 간판에 세 가지 서로 다른 철자가 나란히 적혀 있는 것을 보고 잠시 걸음을 멈췄다. 나중에 친구에게 물으니 모두 스위스 연방 철도를 뜻하는 약자라고 했다. 제네바에서는 CFF, 취리히에서는 SBB, 루가노에서는 FFS라 부른다는 것이다. 같은 철도지만 지역의 언어에 따라 이름이 달라지는 모습은, 스위스가 언어적 다양성을 얼마나 존중하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첫 번째 장면이었다.
- 앞서 말했듯이 스위스는 네 개의 공식 언어를 가진 나라인데, 제네바에선 프랑스어를 취리히에선 독일어를 루가노에선 이탈리아어를, 그리고 알프스 산맥 깊숙한 마을에서는 로만슈어를 사용한다. 국경을 맞댄 나라가 많다 보니 그 흔적이 고스란히 일상에 남아 있는 셈이다. 이 흔적은 기차 여행에서도 느낄 수 있었다. 기차에 오르면 먼저 프랑스어, 이어 독일어, 다시 이탈리아어, 때로는 영어까지 차례로 흘러나온다. 언뜻 번잡해 보일 수 있지만, 이곳 사람들에게는 지극히 당연한 질서다.
- 직원의 이름표 옆에 작은 국기들이 달려 있었는데, 그것도 하나가 아니라 3개씩이나 붙어 있었다. 처음에는 고개를 갸웃했다.
'저 사람이 일했던 나라들을 뜻하는 걸까? 아니면 그가 다녀온 여행지일까? 에이, 설마. 그런 걸 붙일 리는 없잖아?'
궁금증이 점점 커져 결국 직접 물어보았다. 그러자 직원은 환하게 웃으며 설명해 주었다. 그것은 자신이 구사할 수 있는 언어를 표시하는 방식이라고.
- 그때, 새로운 배움에 대한 갈증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나를 전혀 모르는 사람들에게도 자연스럽고 세련된 태도로 다가가야겠다. 국적과 배경을 초월해 서로를 존중하는 에티켓을 배우자.'
그렇게 선택한 것이 바로 스위스의 피니싱스쿨 Finishing school이었다.
- 피니싱스쿨이란 원래 19세기 유럽 상류사회에서 젊은 여성들이 사회에 나가기 전에 품격 있는 삶의 기술을 배우던 곳에서 출발했다. 단순한 지식이나 학문이 아니라, 교양과 사교, 언어와 태도를 세련되게 다듬는 공간이었다. 특히 스위스는 중립국이라는 특수한 위치 덕분에 세계 각지에서 모인 사람들이 교차하며 국제적 감각을 배울 수 있는 최적의 무대가 되었다. 그래서 스위스의 피니싱스쿨은 지금까지도 '세계 어디에서든 통하는 에티켓과 품격'을 배우는 곳으로 명성을 이어가고 있다.
- "아, 괜찮아요. 제가 닦을게요"라고 말했다. 그리고 건넨 티슈를 받으며 "감사합니다"라는 말까지 덧붙였다. 그 말이 잘못되었다는 뜻은 아니다. 어쩌면 그녀는 정말로 괜찮았을지도 모른다. 그 샌들이 비싼 것이든, 음식이 엎질러졌든, 별로 마음에 두지 않는 사람이었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꼭 그렇게까지 괜찮은 사람이 되어야만 했을까. 누군가의 실수 앞에서도 "괜찮아요”라고 먼저 말하고, "제가 닦을게요"라며 나서주는 태도는 어쩌면 자신의 불편함을 뒤로 미루는 습관처럼 보였다. 왜 우리는 사과를 받는 자리에서도 상대가 미안해할까 봐 오히려 그 마음을 배려해야 할까. 그건 정말 배려일까. 아니면 내가 더 불편해지지 않기 위해 감정을 눌러두는 또 다른 방식일까.
- 내가 상상해 보는 또 다른 가능성은 이렇다. 물이 쏟아진 그 순간, 굳이 억지 미소를 지을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티슈 좀 부탁드릴게요. 음식도 다시 주문해 주시면 좋겠어요"라고, 감정을 숨기지 않되 예의를 잃지 않는 방식으로 말할 수도 있었다. 혹은 "괜찮아요. 하지만 이건 새 신발이라 조금 속상하네요"라며 웃음 속에 진심을 담는 방법도 있었을 것이다.
- 이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는, 나 역시 언젠가 그렇게 애써 '괜찮다'고 말했던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뒤에는 늘 설명하기 어려운 서운함이 오래 남았다. '무례함'을 경계하느라 정작 나 자신에게는 예의 없게 굴었던 것이다. 누군가의 사과를 받아들이는 우리의 태도는, 결국 우리가 자신을 어떻게 대하는지를 드러낸다. 모든 감정을 내보이라는 말이 아니다. 다만 불편했다면, 그 감정을 잠시라도 정면으로 마주해 보자는 말이다.
- '취향 Taste'이란 무엇일까. 어원을 살펴보면 '맛보다'라는 의미의 라틴어 테스타레 Tastare에서 비롯되었다. 이 기원과 마찬가지로, 영어사전에서도 'Taste'의 첫 번째와 두 번째 정의는 다음과 같다.
1. 어떤 물질이 입이나 목에 닿았을 때 느껴지는 맛의 감각
2. 특정한 맛에 대한 개인의 선호
-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다루고자 하는 '취향'은 음식의 맛과는 관련이 없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개인이 선호하는 미적 감각 혹은 확고한 스타일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취향은 단순히 개인의 만족감에 머물지 않는다. 타인에게 드러나면서 당신을 구별 짓는 표지가 되고, 그 결과 사회적 이미지와 계급을 형성하는 하나의 장치로 작동한다. 다시 말해, 취향은 당신이 속한 집단 사이의 경계를 부드럽게 이동시키며, 그 안에서의 지위를 미묘하게 바꿔놓는다. 상징적인 방식으로, 은근하고 자연스럽게.
- 칸트는 근대 미학에서 취향을 이렇게 정의했다.
취향이란 감각의 본능적 반응이 아니라,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기술이자 아름다움을 지향하는 경향이다.'
- 그러나 부르디외는 20세기에 또 다른 차원의 접근법을 제시한다. 그는 취향을 개인의 문제로 한정하지 않고, 집단과 사회 계층의 문제로 확장했다. 사회적 지위에 따라 어린 시절의 가정교육과 학교에서의 교수 방식이 달라지고, 그 결과로 내면화된 사고방식과 행동양식(아비투스) 또한 달라진다는 것이다. 이렇게 형성된 차이는 집단 간 경쟁을 통해 '취향'의 '구분'을 만들어내며 결국 '고급 취향'이나 '좋은 취향'이라 불리는 것들은 사회적으로 우위를 점한 계층이 가진 특징적 취향일 뿐이라고 그는 보았다.
- 하지만 그런 것들은 여기서 다룰 주제가 아니다. 배경을 드러내지 않아도 되는 상황에서 오히려 무기가 될 수 있는 것이 있다. 바로 '에티켓'이다. 취향, 매너, 예의범절이라고도 부르는 바로 그것이다. 무엇이 좋고 나쁜지를 구분할 줄 아는 선택적 안목, 때와 장소에 맞는 적절한 말과 행동이 가능한 상태, 나를 존중하고 스스로를 차별화하는 개인적 차원을 넘어 타인을 배려할 수 있는 공동체적 이타심까지. 이것들이 곧 에티켓의 핵심이다.
- 당신은 중요한 클라이언트와 카페에서 미팅을 갖기로 하였고, 당신은 클라이언트보다 일찍 도착하였다. 이때 당신은 카페 안에서 어디에 위치한 테이블에 앉아 있을 것이며, 상대방을 어느 쪽에 앉도록 자리를 비워둘 것인가? 음료는 먼저 시켜둘 것인가, 아니면 본인 것만 시켜둘 것인가? 계산은 어떤 방식으로 하는 것이 센스 있는 것일까? 클라이언트가 도착했을 때는 어떤 제스처를 취하고, 명함은 어떻게 건네줘야 하며, 스몰 토크는 어느 선까지가 적절한 것일까?
- 다이닝 식사를 마친 후 집에 가려는데, 당신이 마음에 두고 있던 한 남성이 자신과 같은 방향이라며 집까지 바래다주겠다고 말한다. 당신은 감사의 인사를 전하며 승낙했고, 약 30분 동안 함께 드라이브를 하게 되었다. 즐거운 대화를 이어가던 중 문득 침묵이 찾아온다. 이때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새로운 화제를 던져 밝고 쾌활한 이미지를 이어갈 것인가, 아니면 그 침묵마저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며 당신만의 여유와 무게감을 지킬 것인가?
- 모두 쉽지 않은 질문들이다. 그리고 이 질문에 대한 정답은, 물론 없다. 비슷한 방향을 가리킬 수는 있겠지만 답은 상대와의 관계, 상황, 분위기에 따라 수백, 수천 가지가 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그 순간의 공기를 깨뜨리지 않으면서도 자신을 불리한 위치에 두지 않는, 즉 셀프 호구가 되지 않는 감각을 익히는 일이다. 나는 잘 단련된 취향이 바로 그런 본능적 감각을 키워주는 힘이라고 믿는다.
- 그러므로 자신의 취향이 분명하다면, 어떤 선택을 할 때마다 정보를 찾고 비교하는 데 쓰이는 시간과 에너지가 줄어들 것이다. 그만큼 시행착오의 가능성도 낮아진다. 취향이 비슷한 사람들, 익숙한 환경에 머무르면 굳이 자신의 행동을 길게 설명할 필요도 없다. 생각을 털어놓을 때에도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된다. 불편함이 줄어든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는지, 어떤 물건과 서비스와 경험이 나에게 가장 큰 만족을 주는지를 알고 그에 맞는 결정을 내리는 일이다. 그 선택의 과정 자체가 이미 '아름다운 삶'의 한 방식이다.
- 반드시 한강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50평짜리 강남 아파트에서 대리석 바닥을 유유히 걸으며 에르메스 그릇으로 식기장을 가득 채워야만 아름다운 삶이라고 할 수는 없다. 방 안에 뿌리는 룸 스프레이의 향이 당신의 호흡을 편안하게 해 주고 잔잔하게 깔린 BGM이 어느새 흥얼거림을 이끌어내며 거실 한가운데 걸어둔 그림이 삶의 영감을 불러일으킨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답다. 매일의 일상 속에서 스스로를 아끼고 대접하며 자신을 가꾸는 그 태도 자체가 진정한 아름다움의 형태다.
- 말이 길고 설명이 장황할수록 아마추어이다.
- 결국 취향은 꾸미는 것이 아니라 살아내는 방식이다. 의도하지 않아도 드러나고, 감추려 해도 엿보이며, 침묵 속에서도 말하는 언어다. 그렇기에 우리는 '어떻게 보일까'를 고민하기 전에 '나는 어떤 사람이고 싶은가'를 먼저 물어야 한다. 좋은 취향을 갖는다는 건 곧 좋은 삶의 태도를 갖는 것이며, 매너는 그 취향을 타인과 나누는 세련된 방식이다.
- 그리고 이 모든 것은 누군가가 나를 평가하기 전에, 내가 나를 존중하는 방식에서 비롯된다. 당신이 어떤 삶을 살아가고 싶은지 알고 있다면, 그에 어울리는 태도를 선택하라. 그것이야말로 삶을 아름답게 만드는 가장 우아한 전략이며 가장 현실적인 출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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