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자 : 한로로
출판 : 어센틱
출간 : 25.07.25
작고 귀여운, 그래서 더 쌉쌀한 글.
<자몽살구클럽>은 처음에는 그냥 읽고, 두 번째로는 저자의 음악과 함께 읽으면 더 좋다.
어느 날 오후 게시판에서 우연히 발견한 '자'몽 '살'구 클럽 홍보지.
이 묘한 클럽은 '자'몽 '살'구를 어떻게 다루는 모임일까?
내가 정말, '살구' 싶어질 수 있을까?
각자가 제각각의 무게를 지고 버텨내는 삶.
누군가에게는 삶이 살아가는 것일 텐데,
왜 나에게는 버텨내는 것일까.
그래도, '우리'에게는, 기회가 있을까.
누군가는 남았고, 누군가는 떠났고, 또 누군가는 선택했다.
모든 것이 밝기만 하지 않아서 좋았고, 아팠고, 다시 좋았다.
자몽처럼 달큼하지만 쌉쌀한.
살구처럼 새콤하지만 달달한.
모두에게 한번쯤은 단맛이 찾아왔으면.
그리고, 그 단맛이 오래도록 남을 수 있었으면.

죽고 싶지만(힝ㅜㅜ) 실은 살구(아자~)
싶은 자들의 비밀스러운 모임
당신은 무엇 때문에 죽고 싶나요?
└그 이유가 명확한 당신! 우리와 함께합시다
당신은 무엇을 위해 살아가고 있나요?
└ 그 무엇을 모르는 당신! 우리가 필요합니다
가입을 원할 시, 뒷면의 "티켓"을 갖고
"내일 오후 5시 음악실"로 오세요
- 죽고 싶다는 두 마음을 굳이 저울질하는 미친 짓에 흥미 없지만 예은이보다는 내가 더 죽고 싶을 거라 확신한다. 이건 누구나 아는 팩트다. 예은이는 먹고 싶은 음식 다 먹고, 놀러 가고 싶은 곳 다 간다. 돈방석 위에서 태어나 부모님의 관심과 사랑을 독차지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학교 사람들의 동경 어린 사바사바까지 당연하게 받아낸다.
- 그런 주제에 죽고 싶다고? 부잣집 딸은 본인의 철없는 발언이 교실 구석 개찐따를 분노케 한다는 사실을 알 리 없다. 그래. 알 필요도 없다. 당장 내일 내가 죽어 책상 위에 국화꽃 한 송이 놓인다 한들 신경 한 톨 안 쓰고 명품 립스틱 발린 입으로 모순적인 죽음을 장난스레 뱉을 것이다. 그렇게 나는 이 교실에서, 이 세상에서 바로 잊힐 것이다. 쉽게 정리하자면 예은이는 가짜 죽음을 원하고, 나는 진짜 죽음을 원한다. 죽음이 코앞에 들이닥칠 때 예은이는 싫다 발악하겠지만, 나는 눈 감고 저승사자를 환영할 준비가 되어있다.
- 당신은 무엇 때문에 죽고 싶나요?
당신은 무엇을 위해 살아가나요?
- 나는 무엇 때문에 죽고 싶어 하고, 무엇을 위해 살아가고 있는가.
- 엄마를 마지막으로 본 건 하늘이 비를 무섭게 토해내던 여름날. 여덟 살의 내가 몸만 한 책가방 메고 한 손에는 우산까지 들어 엉거주춤 집으로 돌아오던 오후 한 시. 거의 다다른 집 앞에는 미친 여자가 비틀거리고 있었다. 비에 쫄딱 젖어 얇은 티셔츠 안으로 드러나는 앙상한 몸. 품에 챙겨 나온 짐이라고는 낡아빠진 파우치 하나. 부르튼 열 발가락을 숨기기에는 역부족인 슬리퍼. 몇 없는 머리카락이 축 처져 넘길 때마다 군데군데 보이는 땜빵. 핏줄 터져 불그스름한 눈. 수제비처럼 부은 귓불과 파르르 떨리는 보라색 입술.
- 나는? 엄마가 그토록 무서워하던 아빠 옆에 홀로 남겨진 나는? 나는 어떻게 살아가라고. 나 혼자 어떻게 아빠를 버텨내라고. '어떻게'에 대한 정답은 엄마가 가출한 순간부터 지금까지 알아낼 수 없었다. 다시 만나는 날이 온다면 그때 엄마를 붙잡고 물어봐야만 알 수 있을 희대의 난제였다.
- 아빠의 행패는 상대를 잃어 한동안 방황하다 나에게 고스란히 옮겨왔다. 생활비를 벌어오기는커녕 애미 닮아 술값 벌 능력 하나 없다는 개소리를 미성년자인 나에게 해대는 것이 일상이었다. 몇 년 내내 지랄하던 게 따분해진 건지 요즈음 들어 외박하는 날이 잦아진 것 같았다. 어른들의 재미는 집구석이 아닌 바깥에 있는 거라고. 이왕 나 모르게 집 밖에서 뒤지면 좋겠다고 생각한 것 이외에는 아무 감정이 들지 않았다.
- '부모는 자식의 울타리'라는 말을 빌리자면 나의 울타리는 개박살난 지 오래다. 고쳐질 거라는 희망조차 없다. 부서진 울타리를 리모델링하는 데에는 많은 시간과 돈이 필요하다는 것을 ...
- 이름, 나이, 얼굴 하나 모르는 나를 '우리'라는 새 울타리 안에다 넣어줄 수 있는지. 꿈, 사랑, 희망 아무것도 갖지 못한 내게 아무런 대가 없이 '함께'를 기약해 줄 수 있는지.
그렇게 함께한다면 '우리'는 죽고 싶은 이유를 죽이고 살아야 하는 이유를 살릴 수 있을지. '우리'는 '우리'가 바라는 대로 이 세상에서 무사히 살아남을 수 있을지. 엄마가 살기 위해 집을 떠난 것처럼 내가 살기 위한 방법이 언젠가 나타날 거라 스스로를 위로해 왔다. 그 언젠가가 지금이라면? 그 방법이 '자몽살구클럽'의 부원이 되는 거라면?
- 얇은 종이 한 장에 매달린 두터운 동질감이 혈관을 뚫고 들어와 나의 몸을 탐닉하기 시작했다. 곧이어 결심 직전의 존재에게만 보이는 증상들이 내게도 보였다. 심장박동이 빨라지고, 낯짝이 뜨거워지고, 이마와 머리카락의 경계선이 땀으로 젖어가고, 열 손가락 열 발가락이 밟힌 지렁이처럼 꿈틀거렸다.
- 종아리 뒤로 튀어 오르는 모래알들은 신경 쓰이지 않았다. 주머니 속을 구르는 티켓의 촉감 또한 나쁘지 않았다. 면접은 내일이지만 나는 이미자몽살구클럽의 명예로운 부원이 되어있는 것만 같았다. 오랜 시간이 흐르고 흐른 뒤의 나는 오늘의 햇빛을 원망하고 있을까? 아니면 고마워하고 있을까?
죽는 건 하루만. 진짜 딱 하루만 미뤄야겠다.
- 없다.
등굣길에 다시 마주한 게시판에는 자몽살구 클럽 홍보지만 사라져 있었다.
덜렁거리는 종이를 쓰레기로 착각한 누군가가 뜯어버렸을 확률을 급히 계산했다. 제발 그랬으면 했다. 오버 좀 보태서 클럽의 존재 유무에 나의 죽음이 달려있다. 내가 꿈을 꾼 걸까? 그래서 어제 그 모퉁이가 유난히 눈부셨나? 그렇다기에는 주머니 속 티켓이 말 안 된다.
- "그 아픔은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하루에 몇 번이고 되뇌게 하지. 우리 자몽살구클럽은 서로를 죽음으로부터 지켜 주고, 생존해야 하는 이유를 만들어 주기 위해 결성된 비밀 모임이야. 한 사람당 이십일의 자살 유예 기간이 주어질 거야. 그 시간 동안 그 사람이 이 세상에 무사히 살아남을 수 있도록 남은 부원들이 도와줘야 해. 이게 바로 자몽살구클럽의 유일한 활동이자 규칙. 여름방학이 오기 전까지 네 명 모두 살아남는 게 최종 목표라 할 수 있지. 비밀 유지를 위해 신입 부원은 한 명씩만 받고 있는데, 보현이는 작년에 들어온 신입 부원이고. 올해는 소하 네가 들어오게 된 거야. 그래서 홍보지도 사람 없는 시간대에 딱 하루 붙였던 거고. 여튼..."
- 우리들의 모순적인 소원. 나는 알고 있다. 죽고 싶지만 실은 죽고 싶지 않은 서로의 진심을 알아줄 사람은 서로밖에 없음을. 내게 손을 건넨 언니들은 이미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것을. 누군가에게는 평범한 오늘이 우리에게는 연명을 좌지우지하는 시한폭탄 같다는 것을. 나는, 언니들은, 우리는 알고 있다. 얼마큼의 용기가, 연대가, 희망이, 사랑이, 내일이, 우리에게 간절한지. 이 자몽살구클럽만은 알고 있다.
- 나의 낡은 울타리가 고쳐지기 시작한다. 몇십 년을 움직이지 않던 먹구름이 바람 머금어저 멀리 날아가자 그 뒤 숨어있던 빛이 나의 가슴에 눈부시게 쏟아진다. 서서히 팽창하는 가슴 두 쪽에는 눈물겨운 따스함이 차오른다. 죽은 줄 알았던 희망들이 햇빛 아래서 무럭무럭 자라나 울타리 안을 빠르게 채운다. 피어난 희망들이 마침내 힘차게 합창한다.
살구 싶네,
살구 싶어라,
살구 싶어.
- "티비에서 일본 영화 <리틀 포레스트>가 나왔어요. 영상이 너어무 예쁜 거 있죠. 눈을 떼기 싫을 정도로 평화로웠어요. 그때 잠깐 본 그 영화를 시작으로 영화감독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원래 어릴 때 다 그러잖아요. 찰나의 순간에 눈 반짝이구. 그렇게 큰 꿈을 갖게 되구... 무튼 거기 주인공이 음식을 디게 맛있게 먹구. 또 디게 잘하는데. 그 주인공이 텃밭에서 갓 딴 토마토를 한입 베어 물다가 집에서 토마토 설탕 절임이랑 스파게티를 만들었어요. 우리 엄마가 과일을 디게 좋아해요. 그중에서도 토마토를 진짜 좋아해요. 보훈이 재우구 제 머리 쓰다듬으러 온 엄마한테 내년 여름이 오면 꼬옥 토마토 텃밭이 있는 곳으로 여행을 가자구. 그때는 보훈이도 꽤 클 거니까 둘이서만 몰래 오자구 엄마한테 말했어요. 그랬더니 엄마 웃음이 빵 터지면서 그러자고 하셨거든요. 그렇게 엄마 손길을 느끼다가 스르르 잠이 든 게 기억이 나요. 근데 지금 우리 엄마가. 으응, 우리 엄마가 뭐 좀. 많이 아파요. 아아, 별건 아니구... 폐암 ... "
- 오늘까지의 기억들을 양분 삼아 묵묵히 자라난다면 보현 언니는 얼마큼 멋있는 감독이 되어있을까? 얼마큼 부드럽고 사랑스러운 어른이 되어있을까? 나는 문득 언니의 미래를 가까이서 지켜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 세계가 알아주는 영화제에서 상을 받는 언니를 실시간으로 축하해 주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렇게 보현 언니와 같이 어른이 되고 싶다는 꿈이 생겼다.
- 보현 언니는 살았고 어쩌다 보니 나도 살았다. 언니의 생존을 위해 함께했던 이십일은 나의 생존과도 분명 연관됐다. 며칠을 버텨온 대로 하루하루 함께 헤쳐 나아간다면 우리는 죽음 대신 행복과 가까워질 수 있지 않을까? 무사히 늙어갈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언니의 어머니가 완치되는 날이 오고, 보훈이가 초등학교를 졸업하는 날이 오고, 옥상 위 토마토로 토마토달걀볶음을 직접 해 먹는 날이 오지 않을까? 희망의 연장선 끝에 가까스로 서있는 삶을 이제야 발견한 것만 같다.
- "이 비밀 클럽을 대체 왜 만들어야만 했는지. 단 한 번이라도 먼저 물어봐 주셨다면 태수는 떠나지 않았을 거야. 그토록 기다리고 기다리던 스물을 함께 맞이할 수 있었을 거야. 태수는 내가 하루하루 버티던 유일한 이유였어. 근데 나는 정작 그 이유가 되지 못했다? 태수가 지금이라도 살아 돌아온다면 죽게 내버려 두지 않을 텐데. 어떻게든 태수를 구해낼 텐데... 내가 멀쩡히 살아갈 수 있을까? 내가 이대로, 아무렇지 않게 살아도 될까? 열여섯의 태수를 두고 나 혼자 스물이 되어도 될까? 내가 어떻게 살아야 태수가 저 하늘에서 마음 편히 지낼 수 있을까. 대체 내가, 어떻게 해야만..."
- 하늘을 가로지르는 무지개는 며칠 쏟아지던 비를 거짓으로 몰아세울 만큼 선명했다.
- 음악선생님은 남은 손으로 보현 언니와 내게 오라 손짓하셨다. 엉거주춤 다가서자 우리 둘을 한 번에 끌어안고는 뒤통수를 번갈아 어루만지셨다. 품 안에 맴도는 그녀의 라벤더 향은 아주 오래 어른의 향으로 기억될 것 같았다. 이런 어른마저 그리워하는 태수 언니의 일상은 어땠을까? 만난 지 반년도 안 된 나에게도 하태수란 인간은 마음 저 깊숙이 박혀 욱신거리는데 이년 넘게 가르친 음악선생님은, 팔 년 넘게 함께한 유민 언니의 마음은 어디까지 뚫려버린 걸까?
유민 언니는 지금 어떠한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을까.
살아간다는 말보다는 버텨간다는 말이 적합하지 않을까.
- 눈물은 햇빛과 쉴 틈 없이 교류하며 커다란 빛을 낳는다. 그보다 반짝이는 태수 언니와의 기억들로 가득한 악기 보관실에 그녀의 모든 게 쏟아진다. 태수 언니에게 닿아야만 할 열여섯의 아우성은 가끔 어긋나는 음정에도 아랑곳 않고 힘차게 뻗어나간다.
- 매일 세상이 쥐여주던 어둠 끝에
홀로 숨죽여 울고 있던 너를
안아주지 못한 날 용서해
어린 아픔 나의 사랑 이젠 안녕
너만의 미소는 나를 피워내던
봄날이었어
겨울이 온대도 너를 떠올리면
시들지 않아
하루 또 하루 지나가도 보고 싶을
너의 모든 걸 잊지 않을 거야
다음에도 만나자 약속해
어린 아픔 나의 사랑 이젠 안녕
어린 아픔 나의 사랑 이젠 안녕
- 사람은 참 간사하다. 죽고 싶을 때는 당장 눈 뒤집고 혀 깨물다가도 언제 그랬냐는 듯 밤 호수처럼 잔잔해질 때가 있다. 나에게는 지금이 그 순간이다. 아무렇지 않게 편의점에서 저녁 메뉴를 고민하는 순간. 언제 또 버튼 눌려 '쉽게 죽는 법'을 검색하게 될지 모르는 순간. 주변 사람들도 같이 살얼음판 위를 지나는 듯한 지금이 순간.
- 구 일이 지나면 다 괜찮아질 것이다. 그럴 거라 믿는다. 보현 언니가 그랬던 것처럼. 유민 언니가 그랬던 것처럼. 나도. 살아남을 수 있을 거 ...
부끄럽지만 이 소설과 함께하는 동안 많이 울었습니다. 자몽살구클럽 친구들이 우리 동네에 사는 아이들처럼 느껴져 가슴이 더 아팠달까요? 저는 자몽살구클럽의 부원들이 이 책 속에 갇힌 가상 인물들이라 생각되지 않습니다. 이 글을 쓰는 동안에도, 당신이 이 글을 읽는 동안에도 지금 어디선가는 수천 명의 태수가 죽음을 다짐하고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자몽살구클럽>은 우리의 곁을 이미 떠나버린 태수들과 가정폭력에 시달리는 소하들, 꿈을 망설이는 보현이들과 꿈이 없는 유민이들. 이 아이들이 무사히 자라날 수 있는 세상을 만들고 싶다는 마음, 그렇게 좋은 어른이 되고 싶다는 마음에서 시작된 책입니다. (당신의 마음도 저와 같아졌을까요?) 이 책을 기획하고, 쓰고, 퇴고한 시간을 다 합치면 일 년이 조금 되지 않네요. 버킷리스트 중 하나였던 소설 집필을 이렇게 빨리 실현시키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그렇기에 여러모로 부족한 글이지만, 부디 흥미롭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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