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자 : 정세랑
출판 : 문학동네
출간 : 23.10.30
겨울이 끝나고 꽃잎이 날리고 옅은 땀이 배어나는 동안, 내내 <설자은>이 마음에 걸려 있었다.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 하고 싶은데 생각하면서도 선뜻 손이 가지는 않아 미루고 또 미루고만 있었다.
<설자은, 불꽃을 쫓다>를 가장 먼저 읽었다.
<설자은, 금성으로 돌아오다>의 표지를 알고 있었다. 흰 매가 내리 꽂히는 그림이, 스쳐 지나가던 내 눈에는 귀여운 귀와처럼 보여 완전히 다른 장르의 글일 거라 상상하고만 있었다. 그러다 다른 책을 반납하러 간 도서관에서 사서 앞에 놓인 <금성>의 표지를 보았다. 도깨비라고 생각했던 것이 흰 매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 문득 나도 읽고 싶어져 서가에서 <설자은>이라 적혀있는 책을 집어왔다. 그건 <금성>이 아니라 <불꽃>이었지만 당시의 나는 <설자은>이 여러 권이라는 것을 몰랐고, 그저 인기가 있어 금방 다른 에디션이 나왔구나 그렇게만 생각하고 읽었다.
다 읽고서야 생각했다. 이 이야기에는 생략된 부분이 너무 많아. 이들에게는 이전부터 쌓여온 이야기가 있어.
그리고 알았다. 내가 읽은 것은 <금성>에서 이어지는 설자은의 두 번째 이야기라는 것을.
아직 읽을 수 있는 이야기가 남아 있어서 기뻤고, 이 뒤의 이야기는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 슬펐고, 역순으로 읽은 이야기가 감상에 영향을 주는 건 아닐까 걱정됐다.
<금성>은 당장 읽을 수 없었다. 그날 내가 사서의 책상에서 보았던 표지는, 다른 누군가가 대출하기 위해 예약해 두었던 책인 모양이었다. 다른 도서관에서 구해온다 해도, 새 책을 구입한다 해도 당장은 읽을 수 없었다. 그날의 조급증과 갈증을 아직도 기억한다. 내키지는 않지만 전자책으로라도 읽을까 싶었으나, <설자은>은 꼭 종이책으로 읽고 싶었다. 그냥 그랬다.
기다리는 동안 배명훈의 <기병과 마법사>를 읽었다. 배명훈 작가의 말에서 다시 정세랑을 만났다. 정세랑의 <옥상에서 만나요>가 언급된 대목을 읽으며, 나는 내가 이미 읽었을 <이마와 모래>가 기억나지 않음을 한탄했다. 그리고 아주 조금 기뻐했다. 다시 읽을 수 있어, 하고.
<설자은, 금성으로 돌아오다>와는 전혀 상관이 없어 보이는 이 이야기들을 먼저 해야만 했다. 남들은 모를지라도, 이 순간을 잊었을 언젠가의 나에게, 그때 나는 이런 일들을 이런 순서로 겪었고, 그 과정에서 <설자은>을 '만났다'고 느꼈다는 것을 말해주고 싶었다.
내가 계절이 변해가는 동안 계속 기다렸던 것은, 이것들이 순차대로 가라앉는 것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어제 <옥상에서 만나요>의 25년 개정판을 다 읽었다.
정세랑 작가가 역사학을 전공했다는 것을 다시 알게 되었고, <알다시피, 은열>에서부터 <설자은>이 이어져왔음도 짐작할 수 있었다. "없었던 사람들의 없었던 사건입니다."라는 문장이 이상하리만큼 길게 남았던 이유를 알았다.
길게 설명해 드러내지 않는 어떤 것에서 '읽혀지는' 것들에 대해 생각했다. 드러나지 않았기에 확인할 수조차 없는, 그럼에도 한 순간에 번개같이 찾아오는 '읽힘'을.
<설자은, 금성으로 돌아오다>는 취향을 탈 법한 소설이다.
누군가는 시대에 맞춰 살아남으려 애썼던 형제자매들을 볼 것이고, 누군가는 그 시대에도 살아있었던 사람들을 볼 것이며, 또 누군가는 묘하게 남겨지는 여운들을 좇을 것이다. 누군가들에게는 역사소설이고, 장르소설이고, 환상소설이고, 미스터리소설이고...
내게는, <설자은>이었다.
나는 보여진 부분만을 읽을 수 있었지만, "없었던 사람들의 없었던 사건"을 "만난" 기분으로 읽었다.
이런 만남을 경험할 수 있게 해 준 정세랑 작가에게 깊은 감사를 표하며.
작가가 이 글을 쓰며 읽어왔던 책들을 내가 읽는다면 나는 무엇에 눈길이 갈지 궁금해하며.
행복해했다.
- 이 이야기는 680년대 후반 통일신라를 배경으로 기록과 유물의 빈틈을 파고들어 완전히 꾸며낸 이야기입니다. 없었던 사람들의 없었던 사건들입니다.
- 설자은은 오래 머물렀던 장안을 사신단과 함께 떠나, 육로로 등주까지 왔다. 유학생으로 처음 당나라 땅을 밟았던 곳에서 다시 떠나게 되다니 한 생이 끝난 듯한 감회가 일었다. 뜻밖의 전쟁으로 사신단이 오가지 않은 기간이 길었고, 덕분에 수학 기간이 배가 되어 지원 없이 고립되고 말았다. 지니고 왔던 것을 다 팔아야 했으며 스승과 친우들이 따로 일거리를 주지 않았다면 굶어 죽은 몸이 가는 뼈로 흩어진 지도 한참이었을 것이다. 두 나라의 사이가 드디어 회복되어 신라 왕경에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것은 사흘 먹지 않아도 허기를 느끼지 않게 된 다음이었다.
- 익숙한 듯 낯선 항구에 도착해서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맞는 바람을 기다리느라 등주에서도 한동안을 지내야 했는데, 그래도 길게 기다린 편은 아니라고 했다. 위태로울 정도로 얇아진 옷이 바닷바람에 펄럭였다. 신라 땅에 닿을 때까지만 해지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 배에 올라 자리를 잡고 앉았다. 살이 내려 몸이 닿는 곳마다 갑판이 그대로 느껴졌는데 큰 바다를 몇 번이고 건넌 배인지라 나뭇결이 매끈히 다듬어져 있어 다행이었다. 밤에는 배 위에 가볍게 지어진 뱃집 한구석을 차지할 수 있겠지만, 해가 떠있는 동안은 짐 상자에 기대어 있기로 했다. 설자은의 낡고 장식 없는 상자들 안에는 경전과 다른 책들이 들어 있었다. 짐을 싸는 동안 고작이 종이 묶음들을 위해 목숨을 걸었나 싶을 때도 있었고, 한 권 한 권이 소중해서 품에 품고 가고 싶을 때도 있었다. 상자 틈을 풀로 메우긴 했지만 그래도 바닷물이 닿지 않도록 적당한 곳에 두었다.
- "무겁네요. 뭐가 들었습니까?"
나르는 걸 도와준 선원이 허리를 펴며 물었다.
"다 책이오."
젊고 쾌활해 보이는 짐꾼에게 다른 의도는 없어 보였지만, 자은은 한 손으로 아직 잠그지 않은 상자를 열어 안을 보여주었다.
"귀중한 사람에게만 귀중하지."
육십 명이 넘게 타는 배에 도둑이 없을 리 없으니 일부러 큰 소리로 말했다. 괜히 밤중에 거친 손, 젖은 손으로 헤집어보지 않도록. 선원은 그런 자은을 향해 시원하게 웃으며, 상자를 잠그고 그 위로 기름 먹인 천을 덮는 것을 거들어주었다.
- "이 책들을 다 공부하신 겁니까?"
자은은 애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외워 쓸 수 있었다. 그럴 수 있는 머리 때문에 형제들 중 차출되어 두 번 큰물을 건너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다 배웠느냐고 물어온다면, 그건 평생의 과업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었다.
"금성으로 가십니까?"
배는 사신단이 탄 본선과 함께 당은포까지 가는데, 그곳에서 금성까지는 다시 육로로 칠백 리였다. 배에 탄 유학생, 구법승, 상인 들은 당은포에서 각자의 목적지로 흩어지겠지만 대개 금성으로 향할 터였다.
"금성 사람이오."
자은은 돌아가길 택했다. 다른 나라 출신 중에 아예 돌아가지 않고 당의 관리가 되는 길을 택하는 이들도 슬슬 늘었지만, 자은은 그 선택지를 고려하지 않은 지 몇 년 되었다. 금성을 떠날 때는 허물을 벗어던지고 온 줄 알았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그곳에 두고 온 쪽이 진짜이고 물을 건넌 자신이 허물인 것처럼 느껴졌다. 매미 껍데기처럼 색이 없고 안쪽이 텅 빈 무엇...
- 여러 번 주변을 살피는 얼굴에 날카로움이 느껴졌다.
"저 친구는 장신구래."
"그래? 아는 자야?"
"아니, 아까 잠깐 말을 섞어보려 했는데 저쪽은 원하지 않는 것 같더라고."
들리는 말을 들으며 장신구 상인의 부인과 딸을 살폈지만 딱히 치장을 하지 않은 채였다. 물건을 선보이고자 이것저것 달아줄 만도 한데... 저쪽도 도둑을 경계하는지 몰랐다. 아닌 게 아니라 장신구 상인은 상당히 날 선 상태로 보였고, 부인과 딸을 곧바로 갑판 아래로 내려보냈다. 남자들이 뱃집에 머물 걸 고려해 내려보내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출발도 전에? 전혀 쾌적하지 않을 텐데, 하고 자은은 여인들을 가볍게 걱정했다.
- 마지막으로 아슬아슬하게 배에 오른 건, 웃는 얼굴의 남자였다. 위험한 항해를 앞두고도 그리 신나나, 희한한 이구나 싶어 자세히 보니 정말로 웃고 있다기보다는 눈꼬리와 입꼬리가 묘하게 그런 모양이었다. 적절하지 못한 순간에는 오해를 받기 십상일 듯했다. 웃는 얼굴의 남자는 갑판 위를 쓱 둘러보더니 하필 자은 쪽을 향해 다가왔다. 남자의 옷과 신발, 짐의 남루함은 자은보다도 심해서 곧 먼지가 되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뱃삯은 어떻게 냈는지 궁금했다. 남자는 남자대로 싱글거리는 눈으로 자은을 살피고는 신기하다는 듯 웃었다.
"아니, 유학생이 왜 높으신 분들이 탄 본선에 함께 타지 못했소? 본선에 타서 얼굴을 디밀고 앞길을 도모해야 하는 것 아니오?"
초면에 자은이 속상해하고 있던 부분을 들추는 인간이었다. 바로 옆에 정박한 본선은 백 명 넘게 탈 수 있는 크고 근사한 배였지만 거기 자은의 자리는 없었다. 자은의 싫은 기색에도 아랑곳없이 가까이에 털썩 앉은 남자의 짐에서 무언가 쩔그렁거리는 소리가 났다.
- "... 내가 유학생이란 건 어떻게 알았소?"
"승려는 척 보기에도 아니고, 뱃사람이라기엔 몸이 너무 작고, 상인이라기엔 짐이 너무 적고, 손가락은 붓을 너무 쥐어 비틀어져서?"
따지고 보면 그리 알기 어려운 사실은 아니었다.
"이쪽은 좁으니 다른 곳으로 가시오."
자은은 남자가 꺼져줬으면 했지만 그는 그럴 기미가 없었다.
"같은 유학생끼리 갑시다. 나는 목인곤이라고 합니다."
남자 쪽도 유학생이라는 말에 자은은 반응을 보이고 말았다.
"그쪽 손은 붓을 많이 쥐었던 듯하지 않은데?"
자은이 인곤의 유난히 손톱이 크고 둥근 손을 보며 말했다.
"붓은 관심이 없었지. 누반박사가 되려고 했거든. 돌과 철을 다루는 법을 전부 배워 오라고 겨우 제 얼굴이나 씻을 나이에 이쪽으로 보내졌는데, 그새 나라가 망해버렸네?"
- 인곤이 자조적으로 하는 말에 자은은 그가 백제 출신임을 알았다. 목씨 성이 그러고 보니 그쪽 성이었던 것도 기억해 냈다. 어디까지가 진담인지는 몰라도 그의 손은 확실히 재주가 좋아 보였다. 탑을 세울 기술이 있단 말인가? 그런 귀한 기술을 가지고 왜 삼한으로 돌아가는 것일까?
"탑이란 것 말이야. 내가 세울 줄 안다고 세울 수 있는 게 아니더라, 깨달았지 뭐요. 절을 지을 때 나를 기용해 줄 뒷배가 있어야지. 여기서 그 뒷배를 찾지 못했소. 삼한으로 돌아가면 찾을 수 있을까 하고."
자은의 속내를 읽은 것처럼 목인곤이 덧붙여 털어놓았다.
- "어린 시절 떠났다니, 떠나온 땅이 기억이나 나오?"
"거의 나지 않소. 나를 기다리거나 내가 찾아야 할 사람도 없고, 친척을 마주친다 해도 피차 못 알아보겠지."
돌아가야 할 이유도, 심지어 나라도 없는데 돌아가다니 어떤 의미로는 대단했다.
"바다에 빠져 죽는 것은 두렵지 않소? 나랏일을 맡은 사신들도 못 돌아갈 각오로 오가는 길인 것을."
"바다가 두려워서 그렇게 얼굴이 질렸소? 그렇다면 가는 길 내내 서로 등을 지켜주기로 하면 어떻소?"
- "밭이나 일구며 여생을 보내고 싶어서요. 이 나이가 되면 부귀영화보다 평온한 삶을 찾게 된답니다."
장신구 상인이 그렇게 말하며 딸에게 마른 음식을 더 권하자, 딸 쪽은 억지로 삼키는 듯했다. 자은도 젓가락을 놓았다.
그 밤에도 여인의 울음소리가 들렸으나 이내 작게 철썩하는 소리와 함께 그쳤다. 때렸다. 때렸음이 틀림없다. 뺨을 철썩 때린 게 아닌가? 자은은 자신이 금방 들은 소리가 그저 배에 부딪는 파도소리이기를 바랐다. 마음이 쓰였다. 오래 만나지 못한 자매들이 떠올랐기 때문일까? 몇은 이미 세상을 떴을지도 몰랐다. 금성을 떠나지 않은 그들이 세상을 뜨고 자은이 살아 돌아간다면 그것 또한 기이한 일일 터였다.
- "좀 먹겠소?"
목인곤이 주섬주섬 무언가를 들고 오며 물었다. 몇 점의 생선살이었다.
"이게 어디서 났소?"
"배 속도가 느려지니, 다들 낚싯대를 꺼내기에 가서 말을 붙여보았지."
"낚시꾼들이란. 나는 됐소."
"공자, 거의 투명해지고 있소."
"그게 무슨 소리요?"
"귀신처럼 뒤가 비칠 것 같단 말이오. 그대로 굶다가는 마전도의 귀신같은 게 되고 말겠소. 혹은 고사도나 득물도일지 모르지."
그 섬 이름들은 자은에게도 익숙했다. 항로에 놓인 기착지들이었다. 물이 떨어지거나 태풍을 만나거나 배를 갑자기 고쳐야 할 때 들렀다. 제물을 바치기도 하고 죽은 자를 묻기도 하는 바다 위의 물수제비 흔적 같은 점들. 육지가 그리워 그 섬들이라도 보면 속이 트일 것 같았다.
- "언제 닿는다 하오? 마전도에."
"바람이 돕는다면 이틀이면 닿는다 하더이다.”
자은이 고개를 끄덕이고 눈을 감았다. 인곤은 그 표정이 이틀 동안 내버려 둬 달라는 표정이라는 걸 알았지만 그 뜻을 따를 생각은 없었다.
- "유채 기름이 기록과 맞지 않게 크게 줄었습니다."
"아니, 날짜보다 넉넉히 가져왔는데 그것이 말이 되는가?"
선장과 선장의 수하가 아침부터 인상을 잔뜩 찌푸리며 나누는 이야기에 자은은 그거 아마 낚시꾼들이 밤에 써버렸을 거요, 하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 거리를 두고 따라오며 계속 도사릴 수는 있겠지만, 그때 가서 살피면 될 일이었다.
칼을 돌려주고 나서, 손에 남은 묵직하고 거친 감각을 곱씹고 있을 때 인곤이 또 말을 걸었다.
"공자는 칼이 낯설어 보이지도 않고 익숙해 보이지도 않는 군."
"칼이 한 자루 있었는데, 팔아먹었소."
처음부터 칼의 주인은 자신이 아니었다. 애착 없이 팔 수 있었던 물건이었다.
- "낭도 같은 거였소? 막 돌진하고 그랬소? 얼굴을 보니 낭도였을 것 같은데? 유명한 화랑을 따랐소? 나도 들으면 알 만한?"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었다.
"과거에 대해 입을 다물어야 하는 건 내 쪽 아니오? 신라인은 이제 무얼 말해도 자랑인 것을, 공자는 왜 그리 과묵하오? 망한 나라 사람을 조금쯤 놀려도 나는 받아줄 수 있소. 심심한데 얘기 좀 해보시오. 전쟁이 무서워 도망친 거요?"
"시끄럽소."
- 황급히 떠나오긴 했지만 그것은 도망보다 훨씬 복잡한 사정이었다. 해가 지고 밤안개가 피어오르자, 심술궂은 신선이 팔꿈치로 뭉개놓은 듯 하늘과 바다의 경계가 사라졌다. 안개를 노려보다가 자은의 마음은 그 밤으로 돌아갔다.
자은이 죽었던 밤.
- 낭도였나, 낭도가 아니었나.
다섯째인가, 여섯째인가.
자은인가, 미은인가.
이름을 얻은 걸까, 빼앗긴 걸까.
- 금성을 떠나기까지 몇 년 동안, 집안에 죽음이 휘몰아쳤다. 양친이 연이어 병으로 세상을 뜬 게 시작이었다. 열한 명의 형제자매 중에 첫째와 둘째 오라비는 전투 중에 싸우다 죽었다. 그래서 셋째가 첫째 역할을 하게 되었다. 넷째 언니는 아이를 낳다 죽었다. 흔하다면 흔한 일이라 두드러지는 비극은 아니었지만, 장례 다음 장례를 치르다 보니 눈물도 말랐다. 가족들이 모이면 부석한 낮으로 어디 가서 불공이라도 드려야 할지 의논하곤 했지만, 그즈음에는 그럴 가산도 부족했다. 혼이 바스러져가는 듯하다고 여기던 중 마지막으로 찾아온 죽음은, 장안으로 유학을 가기로 낙점을 받았던 다섯째 오라비의 것이었다. 출발을 앞두고 급환에 걸려 나흘 만에 속절없이 숨을 거둔 것이다.
- 황망한 일, 그뿐이어야 했다. 셋째로 태어나 첫째가 된 호은이 머릿속이 상당히 이상한 종자가 아니었더라면 더 일어날 일이 없었다. 호은은 다섯째 자은이 숨을 거둘 때 그 머리맡을 혼자 지키고는 아무도 부르지 않고 여섯째 미은 만을 불렀다.
"자은이 죽었다."
호은이 죽은 동생의 머리맡에 서서 말했다. 미은은 잠든 것처럼 보이는 자은의 몸에 손을 대려고 했다. 가장 가까운 오라비였다.
"아니, 만지지 마라. 소리 내어 울지도 마. 그러라고 부른 것이 아니다."
남아 있는 줄도 몰랐던 슬픔이 차올라, 호은의 말이 잘 들리지 않았다. 병자의 침상에 드리워두었던 천을 꽉 쥐었다.
"어떻게 이리 사람을 계속 데려가? 어찌 이리 갑자기 죽어?"
원망의 대상도 없이 원망하고 있을 때였다.
"목소리를 죽여라. 너는 이제 자은으로 살아야 하니까."
"뭐?"
"오늘 죽은 것은 너다. 미은이다."
- "너는 자은이 되어 글피에 배를 탄다. 자은 대신 장안에 가 공부를 하고 돌아오너라."
- 자은의 죽음을 지켜보다가 셋째 오라비가 돌아버린 줄 알았다. 크게 소리쳐 제정신으로 돌아오게 하고 싶었지만 미은은 저도 모르게 소리를 낮추었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이야기야? 그런 술수가 가능할 리 없어."
호은은 돌아버린 것치고 잠잠한 태도였다.
"얼굴이 꼭 닮았지. 자은이 크지 않았는데 네가 여자치곤 커서 키도 비슷하고. 그렇지만 키 같은 건 상관없어. 머리가 비슷하게 좋은 것이 너뿐이다. 다른 동생들은 나이도 어릴뿐더러 너처럼 주머니를 뚫고 나오는 송곳이 아니다. 어머니가 자은과 너를 낳으셨을 때 무엇을 달리 하셨는지..."
"웃기지 마. 꾸며낼 것 없이 오라비가 직접 가. 그럼 되잖아?"
"집안은 누가 돌보라고? 그러지 않아도 아슬아슬한 형편인데. 그리 대단히 꾸며내는 것도 아니다. 조용했던 자은을 아는 이는 적고, 너는 더더욱 그림자 아래 있지. 자은이 타기로 했던 배를 타라. 이미 치른 값은 돌려받을 수 없고 네가 완벽히 자은이 되어 돌아와야 이 죽어 망해가는 집안을 일으킬 일편의 방도라도 남는다."
"여인의 몸으로 그 멀리 갔다가 들켜서 죽어버리란 말이야?"
"사람이 죽고 사는 건 여기 있어도, 아무리 한자리에 머물러도 마찬가지다. 우린 이제 그걸 알지 않니?"
- "우리가 글을 배울 때 스승님은 너는 그만 배워도 된다고 방에서 내보냈지. 그런데 너는 떠나지 않고 창밖에서 귀로 배웠다. 나중에 스승님이 너를 혼내려 불러 모질게 시험해 보았을 때 네가 써낸 것이 내가 써낸 것보다 나았다. 나는 그 일을 잊지 않았다. 우리가 진짜 칼을 받았을 때 너는 나무칼을 쥔 채, 네가 쓰이지 않으면 신라가 잃는 것이라고 했지. 자, 내가 네게 쓰일 기회를 주겠다. 너는 이제 어쩔 것이냐?"
- 셋째의 특징은 도발이었다. 여섯째는 태어나서 셋째를 한 번도 이겨본 적이 없었다. 자신과 꼭 닮은, 그러나 죽음의 색이 짙어져 가는 다섯째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긴 한숨을 쉬었다. 창밖에서 귀로 공부를 쫓아갈 때 몰래 책을 베껴줬던 것은 다섯째였다. 너와 나는 거의 같지, 하고 속삭이면서... 다섯째에게 빚이 있었다. 다섯째로 살면 다섯째를 살린 것 같을까?
- 그리하여 병으로 죽은 것은 여섯째 미은이 되었다. 미은은 자기 이름을 묻고 자은이 되었다. 남자 옷을 입고, 한때 낭도였고 글에 밝았던 한 살 위 오빠의 삶을 이어 살기로 했다. 그 결정에 따른 위기들이 없을 리 없었다. 먼 길 위에서, 학사에서, 저잣거리에서 하마터면 몇 번이고 험한 일을 당하거나 죽을 뻔했다. 셋째 호은은 가능한 위험들을 깊이 헤아리지 않았 ...
- 세 사람은 이제 포구에서 이어지는 저잣거리 깊숙이 걸어 들고 있었다. 왔던 길을 돌아갈지, 다른 길이나 다른 방도를 택할지 문득 알고 싶어졌다.
"어찌 되었든 사람을 둘이나 죽였는데 저대로 그냥 보낼 건가?"
"내가 늦은 것이니 받아들여야지. 득물도에서만 깨달았어도 잡을 수 있었을 텐데."
"일부러 미적거린 것은 아니고? 같은 여인이라고 심히 너그럽구먼."
자은은 인곤의 마지막 말을 듣지 못한 척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수저를 멈추고 인곤을 노려보았다.
- "나를 식객으로 들이게."
망한 나라 사람이 뻔뻔스럽게 요구해 왔다.
"금성에 가 자네 집에 나를 식객으로 들이면, 모르는 척하겠네. 자네도 여러 도움이 필요하지 않은가? 여남은 살의 사내를 흉내 내는 것과 다 자란 사내를 흉내 내는 것은 아예 다른 일일 터?"
자은은 옷에 맺힌 잔 소금을 털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날숨과 함께 말했다.
"일단 가기나 갑시다, 금성으로."
- 자은은 동생이 영리하게 자란 것 같아 흡족했다. 누구의 영리함 덕인지 몰라도, 집의 식솔들은 전부 예전과 다른 사람들로 갈려 있었다. 자은을 미은으로 기억하는 자는 남아 있지 않았다. 낯선 얼굴들이 준비해 준 사스래나무 욕조에 혼자 남아 몸을 뉘자 저도 모르게 눈이 감겼다. 작은 첨벙거림에 눈을 떠보니 도은이 목욕물에 말린 인동과 더운물을 더해주고 있었다.
- "언니가 돌아와서 좋아. 언니가 있었으면 했어."
"오늘만 마지막으로 그렇게 불러."
"알았어, 내가 빈틈없이 할게."
자은은 도은의 그간 일들을 언제 천천히 들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 호은이 자은을 부른 것은 다음날 조반을 들기도 전이었다. 자은이 들어서자 정리가 매우 절실해 보이는 서고 한가운데 앉아 있던 호은이 온 얼굴로 반가워했다. 그 반가움이 동기간의 그것이라기보다는 기대하지 않았던 판을 이긴 도박꾼의 것이라 자은은 역시 빈정이 상했다. 좋게 말하면 재기어린 것이고 나쁘게 말하면 뻔뻔한 표정은 그대로였지만 그새 고민이 많았는지 눈밑의 그림자는 짙어지고 턱밑의 그림자는 사라져 화는 다소 누그러졌다.
- "딱 맞추어 돌아와 줬구나."
"도은이도 비슷한 말을 하던데, 무슨 뜻입니까?"
'그게 말이다'로 시작된 설명은 몇 년 전의 반란 모의에 돌아가신 아버지의 친우들과 먼 친척 몇이 연루되는 바람에 온 집안이 가시방석 위랄지 벼랑 끝이랄지에 자리한 형국이란 내용이었다.
- "등에 붙은 눈이 많다는 거지. 그보다 일찍 돌아가셔서 망정이지, 살아계셨더라면 함께 모의했을 거라는 게 내 뒤에서들 하는 말이다."
"그거야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왕께서 형들이 휘하에서 싸우다 죽은 것을 아직 기억하시니 화를 피하고 있는 거지. 그것도 곧 소용없어질 만큼 걸음걸음이 아슬아슬하다."
- 자은의 집안은 증조부 때 진골에서 육두품으로 강등되었다. 방계의 방계였던 데다 피가 뜨거웠던 고조부가 골품이 낮은 상대와 혼인을 강행한 결과였다. 진골과 육두품 사이의 간극과 육두품과 오두품 사이의 간극 중 어느 쪽이 큰지에 대해서는 사람마다 의견이 다를 수 있겠지만 또 강등을 겪을 수는 없다 ...
- "자은 공이 바로 귀댁으로 가서 도와드릴 겁니다. 제가 모시고 갑지요."
목인곤이 자은 대신 흔쾌히 수락의 말을 했다. 자은은 기가 막혀서 인곤을 돌아보았다. 이 식객 놈이?
- 이목 때문에 산아가 아닌, 산아의 남동생 김기찬의 초대로 며칠 머무르는 형식을 취하기로 했다. 인곤은 신이 나서 짐을 꾸렸다. 짐의 크기로는 달포는 머무를 기세였다. 상문사에서 가져온 일거리도 한 뭉치였다. 양해를 얻은 것은 자은이나 호은의 깜냥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을 테고 어디까지나 산아와 그 집안 사람들이 이 실, 저 실을 잡아당긴 결과였다. 자은은 원래의 자은과 산아의 연분이 그리 길거나 짙은 것이 아니었기만을 바랐다. 잠깐 만나서는 들키지 않았지만 산아가 계속자은을 바라보다 보면 뭔가 어긋남을 느끼지 않을까?
- "그리 아름다운 여인이 엎드려 부탁하는데 단칼에 거절했다면, 그게 더 의심을 샀을 걸세. 얼른 짐을 싸게나."
속없는 인곤이 자은의 채비를 서둘게 했다.
"자네가 심심하다고 나를 위태롭게 만드는 건 곤란하네."
"아, 물론 여기 오고 심심하기야 했지. 내 재주에 비해 쓰임이 없이 빈둥거렸으니. 이러다 쫓겨나게 되는 건 아닌가 초조하기도 했고. 그와 별개로, 손바닥에 나타난 글씨라니..."
- "이름 뜻에 여러 기대를 담지 않으셨나 싶습니다. 제 이름은 단단히 마음먹을 기 期에 이을 찬 纘을 쓰셨고, 누이의 이름은 산호 산 珊에 어금니 아 牙, 형의 이름은 이를 지 至에 율령 율 律을 쓰셨으니까요."
아마도 산호와 더불어 뼛조각 장식물을 생각했겠지만, 어금니 아가 들어간 여자 이름이라니 심지가 있어 보이고 산아에게 어울렸다. 어금니가 있는 여자라 그 이름을 지어준 아버지의 위기를 구하고자 움직였겠지. 기찬이 산아의 이름자도 가르쳐준 것은 산아와 자은의 사이를 모르는 척하겠다는 표명이려나? 아니면 정말로 모르나? 연인이었다는 것을 알았다면 이름자 정도는 알리라 하고 뛰어넘었을 것이다.
"그럼 지율님께도 인사를 드릴 수 있습니까?"
이 집의 장자는 어떤 상태인가? 왜 초대의 말은 지율이 아닌 기찬에게서 온 것인가? 산아와 기찬 사이에 눈빛이 오갔다.
- "넷 다요?"
그건 기이한 일이었다. 삼존불의 경우에도 지장보살이 협시보살로 모셔지는 경우는 드물었다. 불상이 넷인 것도 특이한데 전부 지장이라니... 지장은 석가모니불이 떠나고 미래의 미륵불은 아직 오지 않은 혼란한 시대에 중생들을 구하기 위해성불을 미룬 부처라고 했다. 육도를 고루 누빈다고는 하나 특히 지옥도, 아귀도, 축생도로 꼽는 악도에 떨어진 이들을 구하는 보살로 명부전에 따로 모셔지는 게 보통이었다. 지옥에서 누구를 구하기 위해 절도 아닌 민가에 지장을 넷이나 모셨단 말인가?
- 지율의 아내 옥화와 기찬의 아내 연란은 그 자리에서야 만날 수 있었는데, 자은과 인곤이 아무리 산아의 손님이라도 부인들 쪽은 숨겨두고 얼굴을 보여주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각오했었기에 다행한 일이었다. 옥화와 연란 두 사람 다 가지런한 인상이었고 꾸밈이 비슷해서 자은은 이목구비의 오목조목함을 유의 깊게 외워야 했다. 동서지간이 자매지간처럼 보였고, 어쩌면 그것은 산아 때문인지도 몰랐다. 산아가 지닌 모란 같은 화려함은 다른 사람의 색까지 빨아들이곤 하니까. 자은은 만약 여인의 옷을 입고 그 자리에 앉았더라면, 물론 그런 일은 쉽게 일어나지 않았겠지만, 오히려 마음이 잔잔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흐드러진 꽃 같은 사람의 그늘에서 누구의 눈길도 끌지 않으며 편하게 숨을 쉬었을 것이다. 눈길을 끌고 싶은 욕구 따위는 늘 없었다. 거기까지 이르니, 산아는 얼마나 매일이 쉽지 않을지 헤아리게 되었다. 한껏 차려입은 모습은 어떤 종류의 포기일지도 몰랐다. 볼 테면 보시오, 무늬 비단을 감상하듯 보시오, 하는 속마음이 비친 게 아닐까?
- "전투 전날 마지막 연회가 베풀어졌습니다. 먹고 마신 것들이 몸 밖으로 나오기 전에 죽는 것이 아니냐, 그런 농담을 하며 웃던 얼굴들이 잊히지가 않습니다. 불가에서 눈의 흰자위들이 번쩍거렸지요. 그 바짝 곤두선 병사들을 위해 씨름 대회를 열었습니다. 독군님께서 우승한 자에게 상을 하나 주겠다 했는데 그 녀석이... 혜요가 이를 악물고 이기더니, 상으로 지율님의 옷과 갑옷을 달라고 했습니다."
"아."
죽을 게 뻔한 미끼 전투에서, 주인의 옷과 갑옷을 달라고 했다. 미끼 중의 미끼가 되겠다는 선언이었다. 어려서 듣던 옛이야기의 신하나 다름없었다.
"사방이 어찌나 조용해지던지요. 기이하게 들떠 떠들던 이들이 입을 다물었습니다. 지율님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화를 냈습니다. 왜 그딴 걸 달라하느냐, 진짜 상이 될 만한 것을 고르라, 나는 싫다... 따르는 사람이 그렇게 화를 내면 물러날 법도 한데 혜요는 한 치도 물러나지 않더이다. 어린 것이 약조를 어기지 말라고 똑바로 외치는 바람에, 독군님께서 결국 지율님의 뜻을 굽히셨지요. 지율님이 제일 좋은 비단옷과 늘 입던 갑옷을 혜요에게 주시면서 울었습니다."
- "물론 그렇습니다만, 불과 물이 그 집안의 기운을 정하지 않겠습니까? 기운이 흐려졌다면 징후가 보이지 않을까 하여 여줍니다."
인곤이 태연히 주장했다. 바다에서 미끄러운 것을 주웠구나, 자은은 새삼 생각했다.
"아, 그러면 제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기찬이 끄덕였으나 자은이 얼른 손을 내저었다.
"부인들이 보여주시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불과 물을 주관하는 분들이요."
여자들의 말을 들을 때가 되었다. 여자들이 자은을 힐끔 보았다. 산아가 자은을 보며 자신도 합류하는 게 좋을지 눈빛으로 물었지만 자은이 살짝 고개를 흔들었다.
- "우물은 집안에 없습니다. 하나 있으면 좋았을 테지만요."
옥화와 연란이 저택 밖, 여러 집이 함께 쓰는 우물로 자은과 인곤을 안내했다. 넷만 나간 것은 아니고 하인 여럿이 불을 들고 발밑을 밝혀주었는데, 안주인들과 손님들 사이에 서는 품새가 외간남자들을 경계하는 티가 났다. 자연스러운 듯 자연스럽지 않은 배치였고 자은은 속으로 웃었다. 자신도, 인곤도 경계할 만한 대상은 아닐 텐데... 변장이 먹힌 것 같아 안심되었다.
- 자은도 손가락을 넣어 찢기고 남은 부분을 만져보았다. 인곤이 아니었더라면 놓칠 뻔했다.
"그런데 이건 바다 건너의 오래된 책을 베낀 것이고 신라의 산야에는 똑같은 것이 나고 자라지 않을 텐데...”
"독군 어른이 누워 계신 것이 그리 설명될 수도 있겠어. 책에서 본 대로 버섯이든 무엇이든 구했으나 같지 않고 살짝 달랐던 게지."
- 책에는 그림이 없었다. 전부 글이었다. 거기다 약초의 이름에는 평소 쓰이지 않는 글자들이 드물지 않게 쓰였고, 그것들을 어떻게 사용하는지에 대한 부분도 복잡하기 이를 데 없었다. 글월을 대충 익힌 자가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니었다. 이 집안에 서고에 드나드는 게 이상하지 않으며, 돌절구를 훔쳤다 쓰고 난 후 서고 앞에 묻을 수 있고, 글을 해석하는 데 뛰어난 이는 누구일까?
산아와 약야 두 사람에게 다 도움을 청하기로 했다.
- "저도 글을 읽고 쓸 줄 압니다."
산아가 자은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엄하셨던 건지 자애로우셨던 건지 짚어 말하기 어렵지만 아버지가 일찍부터 글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자라는 내내 서고를 드나들었어요. 쓰는 것은 오라비나 동생만큼은 아닐 수 있지만 읽는 것은 그리 떨어지지도 않을 겁니다."
"하지만 산아님은 독군 어른이 쓰러지시고 난 후 사혈택에 돌아오신 거니까 다른 분들에 대해 말씀해 주시지요."
자은이 산아에게 부드럽게 부탁했다.
"어쩐지 저 자신에 대해 말하고 시작해야 할 것 같았어요. 숨기는 게 있다 여기실까 해서요."
"네, 뜻을 이해했습니다."
- 두섭은 울지 않았다. 안대를 하지 않은 눈이 강렬한 감정을 담고 있었지만 전혀 젖어들지 않았다.
"나를 괴롭혔던 것은..."
무현의 말에 두섭도 중봉도 숨을 들이켰다. 지율은 고개를 떨어뜨렸다.
"우리가 벤 적군이... 항상 적군은 아니었다는 것이네..."
자은과 인곤이 그 말에 서로를 바라보았다. 전쟁 시기에 삼한에 없었던 그들도 그 복잡함을 어렴풋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몇 년 전까지 함께 싸웠던 이들과 갑자기 창끝을 맞대고, 이이제이를 위해 직접 망하게 한 나라의 남은 군사를 은근히 지원하기도 했다. 더러운 전쟁이었다. 혼전 중의 혼전이었고, 엄하고 도리를 아는 사람일수록 안쪽이 무너져 내릴 수밖에 없는 나날이었을 것이다. 엎치락뒤치락 없이 명분이 틀림없는 싸움을, 하나의 적과 했더라면, 싸웠던 이들도 지금보다는 평안에 이를 수 있지 않았을까?
- "지옥에서, 지옥으로..."
끔찍하게도 그것이 김무헌의 마지막 말이었다. 몸을 떨며 피를 뿜더니, 고개가 뒤로 떨어졌다. 치마폭으로 아버지의 머리를 받아 든 산아가 자은을 바라보았다. 눈물이 흐르고 있었 ...
- "죄스럽군."
한참을 걷다가 인곤이 말했다.
"자네가 왜?"
"내가 저 집에 가보자고 했으니까. 내키지 않아 하는 자넬 부추겼지."
"기억도 나지 않아."
"며칠이었을 뿐인데 몇 년을 늙어버렸다는 옛날이야기의 주인공 같아졌어. 듣지 말아야 할 것들을 듣고 보지 말아야 할 것들을 봐버려서 겉의 나이와 속의 나이가 달라져버렸달까? 껍질과 안 사이가 벌어지며 찢어질까 두렵네."
인곤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 듯도 했다.
"정말로 업화였으면 좋았을 뻔했군."
자은이 한숨처럼 내뱉었다. 한숨에 한숨이 더해졌다.
- 산아가 찾아온 것은 독군의 장례가 끝나고도 한참 후였다. 말은 새지 않았다. 피바람을 부를 말들이 저택 안쪽에 그대로 고여 있는 것에, 자은은 안심했다. 동굴 안쪽의 금불들은 독군의 명복을 빌어줄 테고, 훗날 소문이 떠돈다 해도 소문은 힘이 없으리라. 그런 소문 한둘쯤 두르지 않은 집은 드물었다.
산아는 도은을 찾아온 것으로 되어 있어, 도은도 나란히 자은과 앉았다. 인곤도 얼른 불려 왔다.
- "더 일찍 인사드리러 왔어야 했는데, 늦었습니다."
자은은 산아의 얼굴이 상하지 않았는지 살폈다. 가까웠던 이와 가까웠던 이에 대한, 상대는 짐작하지 못할 친밀감이 자은에게 있었다.
"아닙니다. 밀린 일들이 많아 계절이 어떻게 지나는지도 몰랐습니다."
편하게 해 주려는 말인 것을 알아채고, 산아가 잔잔한 표정을 지었다.
"사람들이 떠나는 날들이 이어져서 짬을 내기 어려웠답니다."
누가 떠났는지, 인곤이 자은 대신 물었다.
"일단 두섭 아저씨가 떠나셨어요. 장례가 끝나자마자요. 어쩐지 후련해 보이셔서 아무도 잡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자신만 남을 수 없다며 중봉 아저씨도 고향으로 돌아가셨고, 자리에 누웠던 연란도 본가로 돌아갔습니다. 아이들은 그 댁에서 키워주시기로 했습니다. 사혈택은 아이들이 자랄 만한 곳이 아니지요. 언젠가는 그리 될지도 모르지만 한동안은 아닐 거예요."
"연란님이 평온함을 찾으시면 좋겠네요."
자은은 만나보지 못한 아이들에게도 같은 것을 바랐다.
- 옥화가 남은 것이 의외였다. 가장 떠나고 싶을 줄 알았는데.
"언니는 떠나지 않을 거예요. 저까지 미안한 마음이지만요."
칼을 휘두르고 거짓 갑옷으로 그것을 맞은 두 사람이 단출하게 남았다. 이제부터는 어떻게 될 것인가? 마음은 보답받을 것인가? 결국 한 사람만 남겨질 것인가? 어느 쪽이 되든 옥화가 행복했으면 했다. 의지가 있고, 성질머리가 있고, 미련한 구석도 있는 다시 만날 일 없을 그 여자가.
- "후회는 없으십니까? 저희를 부르지 않았더라면, 하고요."
밝히지 않는 것이 나았을 수 있었다. 업화를 불가해하고 불가역적인 것으로 두고, 묻고 지나갔다면.
"잃은 것을 잃은지도 모르고 살아가는 것은... 괴롭지요. 무엇을 잃었는지 아는 쪽이 낫습니다."
그 말을 하며 산아가 자은을 똑바로 보았기에, 자은은 가슴이 아팠다. 당신은 아직도 모르고 있다고 말해줄 수가 없어서.
"애써주신 것에 대한 은혜는 꼭 갚겠습니다."
산아가 어찌나 결연하게 말하던지, 자은은 굳이 그러지 않아도 된다는 말을 해둘 틈을 놓쳐버렸다. 무거운 걸음으로 찾아와, 한결 가벼워진 걸음으로 떠난 것만큼은 다행이었다.
- "나 저 언니가 좋아. 또 보고 싶어."
그때까지 이야기를 듣고만 있던 도은이 말했다.
"나도 마찬가지지만, 자주 만나서는 안 될 사이지."
자은은 아쉬움을 표했다.
"자네의 비밀을 털어놓는 날, 산아님은 연인의 죽음을 뒤늦게 겪어야 하겠군. 그건 할 짓이 못 되겠어."
"그러니 이대로 멀어지는 것이 좋을 거야."
"알겠네. 다음에 은혜를 갚는다며 산아님이 오시면, 자네는 나오지 마. 나만 나갈 테니."
평소 같으면 인곤에게 쏘아붙였겠지만, 그저 식은 차를 마시는 것으로 대신했다. 답답했던 것들이 내려가도록.
- 그 밤, 인곤과 길을 걸었다. 사방이 온통 번성하고 있어 빛과 차오르는 것들로 가득한 밤이었다. 그 무엇도 사그라들거나 끝나지 않을 것 같았다. 길 밖 흐린 어둠에 묻힌 것들은 머지않아 잊히고 말 것이었다.
"한 명쯤은 기억하고 있어도 좋을 뻔했어."
인곤이 혼잣말처럼 말했다.
"무엇을?"
"이 융성한 날들을 위해 누가 죽어야 했는지, 어떤 싸움을 했는지. 한 명쯤은 계속 곱씹고 있어도, 사로잡혀 있어도 좋지 않았겠는가? 천년왕국을 고대하며, 그것이 무엇 위에 세워지는지 이 흥청망청한 거리는 다 잊은 것 같군."
"천년이라... 이다음 천년이라."
자은은 사람들이 잊고 잊고 또 잊는다 해도 이 활기와 온기로 가득한 거리 위로 어둠이 드리워지지 않기를 기원했다. 누구에게 기원하는지도 정하지 않은 채.
- 칠월 중순이 되자, 서라벌 육부 여자들의 걸음이 빨라졌다. 여름의 흥겨움 중 하나인 길쌈 대회가 시작된 것이다. 자은이 아직 어린 미은일 적, 베 짜는 어른들을 먼발치에서 선망하며 바라본 기억은 있었으나 이제 와서는 그 기억조차 다른 사람의 것만 같았다. 어른들 사이에 끼어 앉고 싶었던 그때의 바람은 영영 이뤄질 리 없게 되었지만 얼떨떨할 뿐 대단한 상실감을 느끼는 것은 아니었다. 신이 난 것은 도은 쪽이었다.
"북을 잡고 싶어."
도은이 또렷하게 말했다.
"북을?"
"베틀의 북 말이야."
- 말해보라는 뜻으로 받아들였는지 신나게 털어놓았다.
"첫 파혼은 여자 쪽이 갑자기 애를 배서... 그쪽 집안에서는 숨기려 했으나 그런 일은 잘 숨겨지지 않지. 이 집까지 전해지고 말았는데, 호은님이 찾아가서는 아이와 함께 그대로 오라고 말했다는 거야."
"그런 일이 없는 것도 아니고, 왜 잘못된 거야?"
"관대한 제안인 듯 말했으나 말을 잘못 더하셨지."
듣는 순간 예감이 좋지 않았다.
"그 아이를 낳고, 또 호은님의 아이를 낳아 두 아이가 어디에 뛰어나고 어디에 그렇지 못한 지 비교하면 몹시 재밌는 일이 될 거라 신이 난 채 말씀하셨다더군."
자은은 깊은 한숨을 쉬었다.
"그랬더니 그 집에서는?"
"여자 쪽이 그런 이상한 말을 신나게 하는 남자와 혼인하기 싫다고 며칠을 울어 일을 물렸다고 하네."
"이해할 만하군. 아이 아버지와 혼인했고?"
"그게 이미 혼인한 남자의 아이였다나 봐. 그 남자의 부인이 병에 걸려 죽자, 얼마 전에야..."
"하, 그런 상황에서도 설호은은 싫었던 것이군. 다음 혼사는 또 왜 망친 건데?"
- "두 번째 파혼이야말로 구설수를 크게 만들었네. 혼약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호은님이 그쪽 아가씨에게 서간을 보냈다는 군."
"서간? 의외로 간드러진 짓을 했나 보아. 혹시 또 그 서간이 무례했다던가?"
"자네 형님이... 수수께끼를 보내 맞히면 연을 맺자 했다네."
"뭐라고? 아, 이 되어먹지 못한 자가!"
자은은 얼굴이 화끈해졌다. 무례도 그런 무례일 줄은 몰랐다. 시험을 보는 것도 아니고 저가 뭐라고 남의 집 딸에게 수수께끼 따위를 보낸단 말인가. 얼굴을 훔치며 절레절레하는 자은을 보며 인곤이 웃었다. 그러고 보니 상문사에서도 호은의 동생이라 처음 말했을 때 젊은 축 몇이 코웃음을 쳤더랬다. 코가 막혀서 나온 소리인 줄 알았더니 뒤늦게 맥락을 파악하게 되었다.
- "듣길 잘했지? 모르고 있으면 큰일 날 이야기라니까."
"... 그 수수께끼 내용은 뭐였다고 하던가?"
일단 수수께끼 내용을 궁금해한다는 점에서 자은은 자신도 호은을 닮은 게 아닌지 부끄러웠다.
"보자, 이런 수수께끼였다. '이어야 자를 수 있으며 잘라서 잇게 하는 것은?'"
자은은 잠시 생각에 빠졌다. 인곤의 빙글빙글한 웃음이 ...
- 신라의 배신이자 안승의 배신이라 느꼈던 듯싶다. 그 봉기를 역시 구려인들로 이루어진 황금서당이 진압했지만 전사자가 적지 않았던 게 얼마 되지 않은 일이니, 아무리 지위가 높다 한들 소판 부인은 늘 가시방석 위일 수밖에 없어, 길쌈 대회의 한 편을 이끌면서도 있는 듯 없는 듯 진중한 모습이라고 도은이 말한 적 있었다. 베틀이 망가진 것은 소판 부인에게 좋지 않았다. 매우 좋지 않았다.
- 그에 반해 상대편의 왕녀는 비록 한층 더 방계이지만, 왕의 즉위 원년에 개편된 금전을 이끌고 있는 도철 부인이었다. 금전은 비단을 다루는 만큼, 나라의 직물 관련 관서에서 가장 크고 주목받는 곳이었다. 귀족들의 공방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가장 뛰어난 물건은 왕실 주도하에 내성에서 만들어졌다. 도철 부인이 재주가 뛰어난 모 수십과 그 아래 직인 수백을 통솔하여 짜낸 천들은 당나라에 바쳐지고 공을 세운 이들의 하사품이 되는 등 쓰임이 많았다. 애초에 공예에 몸을 깊이 담은 도철 부인이 길쌈 대회의 한 편을 맡은 것이 공평한지, 솜씨 좋은 이들을 뽑아 금전으로 데려가려는 속셈은 아닌지 말들이 돌았다. 도철 부인은 성격이 쾌활하고 화통해, 대회 내내 베틀에 손가락 하나 대지 않을 텐데 무엇이 문제냐며 수군거리는 이들의 입을 다물게 했다. 성격이 극과 극으로 다른 두 왕녀를 두고 흥미 반, 우려 반으로 지켜보는 이들이 많은 상황이었다.
- "소판 부인은 베틀이 부서진 걸 아셔?"
자은이 입을 열었다.
"응. 내가 울어버리자 일단 집에 가 있으라고 하셔서..."
도은을 안아 달래주었다. 인곤이 그 곁에 서서 소리 없이 입술로 말했다. 호은님의 일 때문에 괴롭힘을 당한 거야.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다는 걸 알았지만 심하군. 자은은 정말 그랬을까 생각해 보았다. 설호은이 밉다고 설도은에게 이렇게까지 할까? 길쌈 대회같이 크고 중한 일을 그르치게 하면서?
"눈 붙여라. 내일 해가 뜨면, 나와 같이 소판 댁에 찾아뵙자. 일이 완전히 어그러지기 전에 어떻게든 해보자."
자은의 제안에 도은이 잠깐 놀랐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믿어주는 마음이 고마웠다. 명석한 여동생이 꿈꾸어왔던 북을 잡았는데 괴롭힘이든 모함이든 받게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 소판 부인은 굳은 얼굴로 자은과 도은, 인곤을 맞았다. 체구가 작은 편인데 안색도 푸르러 이번 일로 근심이 깊은 것인지 원래도 다르지 않은지 걱정되는 모습이었다. 도은이 자은을 소개하자 경계하는 기색이 강했다.
"오라비라고? 상문사에 있고? 내 집엔 이미 사람이 많은데 그대의 도움까지 필요할지 모르겠어."
- 소판 댁에 사람이 많다는 것은 거짓이 아니었다. 사혈택과는 다른 의미로 기묘한 집이었다. 모서리마다 어두운 곳 없이 밝혀두고, 가인 家人들이 방마다 꽉 차 있어 겉으로는 흥성해 보였으나 그 모든 것이 습격을 대비하려는 방책이라는 점에서 서슬 퍼런 느낌이었다. 길쌈 대회의 베틀이 부서졌으니, 시끄러운 난리가 나는 게 당연할 텐데 들보의 쥐까지 죽어버린 듯 조용한 것도 예사는 아니었다.
- "부인, 제 오라비는 불미스러운 상황에서 가장 빛을 발하는 인재입니다. 바로 얼마 전에도 이름을 밝힐 수 없는 다른 부인께 아주 큰 버팀목이 되어드렸습니다. 오라비가 아니었다면 사람이 여럿 죽어나갔을 일이었는데 부인께서 그 일에 대해 전혀 들은 것이 없지 않으신가요? 오라비만큼 은밀히, 뒤탈 없이 해결할 사람은 또 없을 겁니다.”
울며 잠들었다가, 조금 나은 마음으로 깨어난 도은은 소판 부인을 설득하려 애썼다. 자은은 동생이 자신을 소개하는 말이 살짝 미묘하다고 생각했지만 넘기기로 했다.
- 소판 부인이 힘없이 이어 중얼거렸다.
"유리왕 때부터 이어내려 온 길한 대회가 이리 부정을 타다니. 내 집이 망조가 들어, 육백 년이 넘게 물려받은 중사를 그르쳤어. 왕과 왕비께서 맡기신 터라 도저히 거절할 수 없었거늘, 한사코 불가하다 해야 했나 후회가 깊네. 어찌 고개를 들고 다녀야 한단 말인가? 내가 죽었으면, 이 집이 불탔으면 하는 자가 한둘이 아닌데, 이번에야말로 목을 내놓아야 할 모양이야. 가라 하시는 곳으로 가고, 하라 하시는 일을 했는데 내가 부족하고 부덕하여 다 망쳐버린 게 아닌가 싶구나."
더운 날씨에도 손이 찬 지, 양손을 번갈아 주무르며 부인이 수심에 잠겨갔다. 부인의 넋두리에 답할 말을 찾지 못해 다들 곤혹스러운 눈치였다. 자은이 나설 수밖에 없었다.
"수렁에 빠졌다 생각될 때야말로 차분히 손 닿는 곳을 짚어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뜻밖의 단단한 것이 잡힐 수도 있고요. 제게 그 역할을 맡겨주시지요. 제 동생의 차례에 베틀이 부서졌으니, 부인의 명예에 비할 바는 아니어도 작은 명예나마 지키고 싶습니다."
자은이 말하는 모양을 쳐다보고 있던 부인이 망설이는 듯했다.
"그대가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자은은 인곤을 팔기로 했다. 얼른 뒤에 서 있던 인곤을 감싸 앞으로 밀었다.
"제가 백제 장인을 데리고 왔습니다. 베틀 같은 건 백 조각으로 부서졌다 해도 그대로 맞출 수 있습니다."
- "더위를 피하기 좋아 고른 방이었는데..."
부인이 대답했다. 이 모든 일이 지나고 나면 부인이 이 방을 영영 쓰지 않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은은 부서진 조각을 맞춰보고 있는 인곤의 발을 슬쩍 밟았다. 얼른 부인을 안심시켜 드리도록.
"부인, 조각을 맞추지는 못하겠지만 이대로 본떠 깎을 수는 있겠습니다. 부서지지 않은 부분도 꽤 있어서 그리 오래 걸리지도 않을 겁니다."
"정말인가?"
"예. 제게 며칠만 주시지요."
"대회에 시비가 없으려면, 부서진 것과 꼭 같아야 하네."
"그럼요. 아무도 문제 삼지 못하게 똑같이 만들어내겠습니다.”
인곤이 일어서며 자은에게 고개를 돌렸다.
"내가 더 필요한가?"
"응? 아아, 가보게, 가보게."
바로 목재를 구하러 가고 싶은 뜻을 간파하고 보내주었다. 인곤은 뛰쳐나가듯 자리를 떴다. 심심하지만 않으면 의욕이 넘치는 편이었다. 자은이 이번엔 도은에게 물었다.
"천을 구할 수 있겠니? 내 눈에는 그럴 수 있을 것 같은데."
- 도은의 눈물 글썽이던 눈이 그 물음에 커졌다.
"아아... 실을 이을 수 있을 것 같아!"
"나도 좀 보자꾸나."
도은의 말에 소판 부인도 가셨던 혈색이 조금 돌아왔다. 지금까지 짰던 천만 구할 수 있어도 다행한 일이었다. 두 여자는 얼른 바닥에 앉아 자세히 살피기 시작했다.
"공을 들이면 거의 티도 나지 않을 거예요. 어쩔 수 없이 늦어지기야 하겠지만요."
"어쩌면 이 일을 비밀로 해둘 수도 있겠구나. 사람을 보내 새벽에 여기 있던 이들의 입을 막아야겠다."
유약한 성격의 소판 부인이지만 그 정도 입막음을 해낼 위세는 있었다. 아무도 소판 부인의 뜻을 거스르지는 못할 것이었다.
- "베틀을 아는 자가 베틀을 부쉈습니다."
자은은 결론 내렸다.
"천을 수습할 수 있게 실을 길게 남겨두고, 베틀만 부쉈지요. 그마저도 고칠 수 있게 부쉈어요. 일을 돌이킬 수 없게 하려면 천을 세로로, 최대한 들쭉날쭉하게 찢었을 것입니다. 가운데를 쭉 그은 다음 잡아당기면 끝이었을 거예요. 왜 할 수 있는데 하지 않았을까요? 이 주춤거림을 어찌 헤아려야 할까 ... "
- 사람을 보내 은밀히 산아를 불러내었다. 이래서야 밀회 같지 않은가, 편치 않아 일부러 도은과 더 어린 동생 경은과 서은까지 데리고 나갔다. 그 둘은 자은을 한없이 어렵게 여기는데도 동석시켰다. 흔한 계곡 놀이를 가장한 셈이었다. 물가의 큰 돌 위에 둘러앉아 담소를 나누다가, 목소리를 낮추고 산아에게 사정을 털어놓았다. 이번엔 산아 앞에 자은이 엎드렸다.
"저편의 안쪽을 알아야겠습니다. 도와주십시오."
산아가 수국처럼 환하게 웃었다. 아름다움에 대해 자주 말하는 것은 경망스러운 짓이나, 산아에 대해서는 말을 아끼기 어려웠다.
"이리 빨리 제게 은혜를 갚을 기회를 주셔서 기쁠 뿐입니다. 며칠의 시간을 주시면 알아오도록 하겠습니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다시 만나기는 어려울 거예요."
"아, 아무리 트인 곳에서 뵈어도 곤란하시군요."
자은은 미안해졌다.
"아니, 자은 공 때문이 아니라 도은 낭과 제가 다른 편에 속하니까 지켜보는 눈들이 매서울 거예요. 길쌈 대회는 모두 예민해지는 시기니까요. 육부 여자들 중에 이 경쟁에 진심이 아닌 이는 드물지요. 베틀을 부술 정도일 줄은 몰랐지만요... 그러니 알아낼 것을 알아낸 후에, 댁에 믿을 수 있는 사람을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 승산이 있는 사람만이 베틀을 부술 이유가 있었다. 애를 써봐야 중간쯤 갈 사람이 저지른 일일 수는 없었다. 자은은 도은이 즐겨 쓰는 산가지로 계산을 하고, 그 계산을 두 번 더 확인하는 것을 흥미롭게 지켜보았다.
"넷."
도은이 답을 주었다.
"?"
"다른 여섯은 승산이 없어. 의심받지 않기 위해 손을 늦췄다 해도 이 정도로 늦추지는 않았을 거야."
자은은 도은에게 그렇게 고른 넷의 이름을 목간에 쓰게 했다.
"그래, 너는 이제 가서 이기는 데 가진 걸 다하여라. 필요하면 또 부를 테니."
"누가 벌인 일인지 알아낼 수 있겠어?"
"알아내야지. 내년의 대회를 위해서."
자은이 늦잠을 자는 식객을 깨우러 갔다.
- 인곤이 목간을 꺼내 들고, 형지의 이름 옆에 '가 可' 하고 적어 넣었다. 더 알아보고 싶었지만 시간이 없어 그쯤 해두고 다음 여자로 넘어갔다.
두 번째 여자, 보예는 막 열넷을 넘긴 나이인데도 형지에 뒤처지지 않는 양의 베를 짜냈다. 굉장한 솜씨가 아닐 수 없었다. 보예에 대해 알아보자마자 곧 혼인을 앞두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는데, 그 상대가 환갑이 넘은 남자였다. 흔한 일은 아니지만 없는 일도 아니었다. 그런 상황이라면 자은이라도 혼사를 파하고 금전으로 들어 죽기 직전까지 베를 짜고 싶을 터였다.
"간절하기로 치면 이쪽이겠어."
"그것만으로는 답이 될 수 없지만."
- 네 번째 여자 연련은 효녀로 유명했다. 바느질 일감을 받아 병들어 자리에 누운 부모를 모시고 사는데, 맡은 일을 잘 해내기로 소문이 나 있었다. 베 짜기는 해 본 적 없었으나 이번에 배우더니 몇 년이나 해온 사람들 못지않게 뛰어난 기량을 보였다. 효녀이기만 하면 그렇게 유명해지지 않았겠지만 자태가 고와, 수염도 안 난 낭도부터 근처에 사는 대아찬까지 연련을 첩으로 들이려 했던 모양이다. 음심에 더해 효녀를 구해 보살핀다는 명분까지 얻고 싶은 자들이 줄을 이었고, 어린 나이부터 수차례 거절을 하며 이제 서른에 다다랐는데 포기 못한 구애자들이 아직도 있다고 했다.
"억지로 자루에 넣어 가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라 해야 하나?"
"밤마다 문에 굵은 막대를 괴어놓은 채 잔다는군. 깊이 잔 게 언젠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고 주변에 털어놓았다 해."
"내성에서 살 수 있다면 보호받기 좋을 테니 도철 부인이 내건 자리가 솔깃했겠어."
- 네 여자의 삶을 살피면 누가 저지른 짓인지 쉽게 알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네 명 다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금전의 자리를 원할 만했다. 남은 시간은 줄어드는데, 답은 절로 드러나지 않고 자은의 머리가 뜨거워졌다.
"더는 못 견디겠어."
자은이 긴 머리를 들어 올려 목덜미로 바람이 들게 했다. 더위 때문에 붉어진 눈밑과 입술이 위태로워 보였다. 인곤이 흘끔 보았다가 눈을 돌렸다.
"집이 곧이야. 내일은 안에서 쉬는 게 어떻겠나? 쉬다 보면 우리가 놓친 게 떠오를지도 모르고."
"아냐, 집까지도 못 가겠어."
인내심을 잃은 자은이 그대로 둑을 걸어내려가더니 신발을 풀숲에 둔 채 첨벙첨벙 내로 들어갔다. 신발을 가지런히 둔 것도 아니고 공중에 차듯 벗어서 엉망으로 나동그라졌다. 자은은 적당한 지점을 찾는 듯하더니 그대로 물속에 앉아버렸다. 인곤은 말을 잃고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들어가는 것은 문제가 아니었다. 옷이 젖어 나오는 게 문제였다.
- "자네도 들어오지 않겠나? 아아, 차다, 차, 겨우 살겠어."
둥근 돌에 기대어 허리 밑까지 물에 잠긴 채 자은이 인곤을 불렀다. 인곤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보름이 가까워지니 달은 또 어찌나 밝은지. 인곤은 대답 대신 웃옷을 벗었다. 나중에 필요하면 자은에게 빌려줘야 할 것이었다. 인곤도 첨벙첨벙 물로 걸어 들어갔다. 자은이 고른 곳은 앉아 있기 딱 좋았다. 이른 시간이었더라면 사람들로 북적거렸을 것이었다.
"아아아아."
인곤은 베개처럼 완벽한 돌에 머리를 얹고 저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이대로 죽을 때까지라도 있을 수 있겠어."
그 말에 자은이 웃었다.
"해골이 되어서도 편안할 거야."
"차고 맑은 물에 조금씩 조금씩 씻겨 사라지는 거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아무것도 개의치 않으며, 눈감고 세월을 흘려보낸다? 그보다 더 감미로운 일은 없겠군."
- 자은이 웃으면서 손으로 물을 떠 얼굴을 씻었다. 이마를 몇 번이고 씻었다. 그 몸짓이 어떤 마음에서 비롯된 것인지 알 것 같아 인곤은 애잔해지고 말았다. 자은이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아무것도 개의치 않고 세월을 흘려보내는 모습은 도저히 그릴 수 없었다. 타고나길 그럴 수 없는 사람도 다른 삶을 꿈꿀 수는 있겠거니, 오늘 밤은 위로해 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 "그쪽은 얼마나 알고 있는 건가?"
지은이 묻자 귀희가 한숨을 푹 쉬었다.
"다 저지르고 말해줬어요. 엉엉 울더니만 어쨌든 베를 열심히 짰죠."
마음이 약한지 강한지 알 수 없는 여자였다. 친우를 위해 육백 년 전통의 겨루기를 방해할 만큼 강하면서도 천을 망칠 만큼 못돼먹진 않았다. 울면서 죄를 고백하면서도 친우는 끝까지 보호하려고 했다. 어느 한쪽이라면 마음이 나았을까, 착잡해진 세 사람은 바로 소판 댁으로 향했다.
- 소판 부인은 베틀이 부서진 연유에 대해 다 듣고 나더니, 자은이 부인을 뵌 이래 최초로 웃었다. 웃는 것을 잊었던 사람 특유의 다듬은 듯한 웃음이었다.
"내겐 그런 이가 없었지. 날 위해 그런 말도 안 되는 짓을 해줄 이가 있었다면 달랐을까?"
부인의 눈빛이 지난날의 갈랫길로 돌아간 듯했다.
"그대들이 내 심부름을 조금만 더 해줄 수 있을까?"
셋 모두 고개를 조아렸다.
"이 일을 알고 있는, 베틀이 부서졌던 날 여기 있었던 여자들을 고이 모아 오게나."
하루 종일 걸어 발바닥이 욱신거렸지만, 그 정도는 더 할 수 있는 일이었다.
- 비밀을 지켜온 여자들이 모인 것은 길었던 해가지고 나서였다. 소판 부인은 자은의 도움을 받아 다시 한번 여자들에게 일어난 일을 알려주었다. 다들 사정을 알게 되어 안도한 듯했으나, 그 자리에 불려 온 것은 다소 불편해하며 소판 부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난 그대들을 이끌어야 하는 입장이지. 당장 도철 부인에게가 그 애가 짰다는 양만큼 천을 자르게 할 수 있네. 우리 편과는 달리 매일 짠 양을 사람별로 기록해 두었으니 어려운 일도 아니고 공평한 해결책일 거야. 베틀이 망가졌던 며칠을 확실한 승리로 보상받는 것이 어떤가?"
여자들이 제일 연장자인 듯 보이는 여자를 툭 건드렸다.
"부인, 그렇게 중한 일을 저희에게 물으시면 곤란합니다."
소판 부인이 베틀로 다가가 걸려 있는 천을 손바닥으로 조심히 쓸었다.
"나는 한 올도 보태지 않았어. 그대들이 만들었지. 내가 맡은 일은 그대들이 베 짜기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지붕이 되고 벽이 되는 것이었는데 실패했고. 그러니 그대들이 그 애들을 어떻게 벌하고 싶은지 묻는 게 마땅해."
여자들이 이번엔 도은을 툭 건드렸다. 자은은 도은이 다른 여자들의 신망을 산 것이 흡족해, 들키지 않도록 고개를 돌리고 미소 지었다. 도은은 소판 부인을 보는 대신 여자들을 돌아보았다.
"도철 부인은 상을 분명히 주시는 분이라고 들었어요. 그런 분은 대개 벌도 분명히 주시죠. 우리 편처럼 은밀할 리 없어요. 아무리 말을 단속해도 새어나갈 거예요. 우리끼리 정한 것대로 마무리지어지지 않겠죠. 그리고 개운치 않게 끝나면 내년에는..."
- 도은이 내년을 언급하자 여자들이 수런수런 말을 나누었다. 일어난 일은 속상한 일이다. 그러나 이제 중요한 것은 여자들의 즐거운 여름을 이대로 유지할 수 있느냐 하는 더 큰 문제였다. 무언가가 부정을 탔다는 판단이 들면 사람들은 화를 내며 태우고 없애는 데 익숙하다. 여자들이 대회를 위해 나다니는 걸 마음에 들지 않아 하는 이들은 적지 않으니, 말이 나면 오래된 왕실 행사라는 명목으로 눌러둔 불만을 여봐란 듯 터뜨릴 것이다. 길쌈 대회가 아예 없어지진 않을지 몰라도 인원수를 줄인다든지, 기간을 줄인다든지 여러 제약이 생기기 쉽다. 또 그 선명한 성정의 도철 부인은 내걸었던 상도 없애버릴 것이다. 금전의 모가 될 수 있는 상이 없어지면 그것만 바라보며 쉴 새 없이 베를 짠 저편의 여자들이 안되었다... 긴 말들이 오가지 않았지만 이때껏 지킨 비밀을 계속 지켜보겠다는 ...
- "나이가 젊으니 열심히 일하며 기다리면 나중에 모 자리가 또 났을 때 최우선으로 뽑아준다고도 하셨대."
그 얘기에 인곤이 이마를 짚었다.
"그게 뭐람, 그럴 줄 알았으면 아무 짓도 안 했어도 되었잖아. 아이고, 다 소용없는 짓이었네."
- 대회가 끝나고도 소판 부인과 여자들은 만남을 이어가는 듯했다. 그것이 대회의 목표였으니 바람직한 일이었다. 육부의 여자들은 아무것도 빼앗기지 않았다.
- "너는, 그런 게 되고 싶지 않니?"
자은은 내내 물으려 했던 것을 동생에게 물었다.
"나? 그런 것? 아, 금전의 모 같은 것?"
도은이 곧바로 알아듣고 되물었다. 그러고는 어떨지, 하며 고개를 갸웃했다.
"호은 오라비가 너에게 이 집 살림을 억지로 맡기며 부려먹고 있는데, 네가 어떻게 살고 싶은지 제대로 정하지 않으면 휘말려버릴 거야."
자은이 묻는 뜻을 설명했다.
"아아, 그런 뜻으로 물었구나."
도은의 얼굴이 밝아졌다.
"나는 지금이 좋아. 부려 먹히는 걸 모르고 부려 먹히는 것도 아니고 머리 아플 때도 있고 곤궁할 때도 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있으니 한동안은 이렇게 지내고 싶어. 그러니 괜찮아. 걱정해주지 않아도 돼. 그리고 두 사람이 와서 무언가 재밌어졌으니까. 매일 똑같이 살면 한 계절을 돌아봐도, 한 해를 돌아봐도 하얗게 기억이 나지 않아. 어쨌든 올해는 기억날 일이 가득이지."
자은도, 인곤도 그 말에 웃었다. 금성에 돌아와 불미스러운 일에만 엮인다 싶었는데 재미로 쳐주다니 도은의 관점이 달랐다.
- "그건 그것이고, 밤에 등잔 기름을 낭비하면 둘 다 쫓아내 버릴 줄 알아."
동생의 엄포에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를 더 쓰고 부리시오. 이 집에서 먹고 쓰는 것을 갚을 수 있게."
최근 기름을 많이 쓴 것은 인곤인 듯 궁색하게 말해왔다.
"자네의 뛰어남은 위험한 눈길을 모을 수 있으니 적당히 내 동생 말을 듣고 기름을 아끼게나."
자은의 충고인지 칭찬인지 애매한 말이 그래도 인곤의 마음에 들었는지 더는 말을 잇지 않았다. 세 사람은 어둠과 침묵에 ...
- 아니, 그보다는 나이를 알기 어려운 얼굴이었다. 왕의 온몸에서 발산되는 강고함은 많은 것을 즉시 이해하게 했다. 즉위하자마자 반란을 진압할 수 있었던 것, 나라의 기틀을 새로이 세우는 결정들을 연달아 밀어붙일 수 있었던 것, 태자 시절부터 왕의 사람들이었던 이들이 여전히 변치 않은 것... 강고함이라는 것은 그토록 육체에 담기나? 자은은 불현듯 그것이 궁금해졌다. 꼭 그런 것만은 아닐진대, 상대가 아주 쉽게 이쪽을 죽일 수 있음을 알고 바라볼 때 더 잘 느껴지는 것일 수는 있겠다 싶었다.
- "오늘 저녁 왜 여기 불려 왔는지 궁금들 하겠지."
왕의 목소리는 그러하리라 여겼던 것보다도 낮았다. 낮기에 어쩔 수 없이 뭉툭하게 퍼지고 마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한두 단어를 놓치게 하는 목소리였다. 자은은 사람들이 일제히 몸을 왕에게로 기울이는 것을 보고 따라 기울였다.
"그대들이 내 손발이 되기에 적합한 인재라 들었다."
어디서 들었을까? 다른 이들에 대해서라면 몰라도 자은에 대해서는? 호은조차 자은이 부름을 받자 당황했는데?
"나는 해야 할 일이 많아. 그 일들을 하려면 온 신라가 내 뜻대로 움직여주어야 해. 그대들이 마땅히 서야 할 곳에 서서 가진 힘을 다해야 해. 앞으로 그대들에게 나는 요구하고 요구하고 또 요구할 것이야. 때로는 그 요구가 그대들이 여기기에 ... "
- "넓은 끈으로 티 나지 않게 목을 졸라 밀어 넣은 게 아니겠습니까?"
진오룡이 억지를 부리고 있다는 것이 명백해지자 아무도 대꾸하지 않았다. 오룡의 친우 몇이 오룡의 의견에 동조하는 듯한 말을 웅얼거렸지만 거기에 확신은 없었다. 별일 없이 집에 가나 했더니 가긴 글렀구나, 하는 체념으로 몇이 쭈그리고 앉았다.
"그런데 아까..."
인곤이 자은에게 귓속말을 했다.
"그래, 알고 있어."
자은이 인곤을 조용히 시켰다. 백제인이 눈치챈 것을 자은도 눈치챘다. 그렇다면 다른 누군가도 눈치챘을 것이다. 여기 모인 사람들, 왕이 부른 사람들은 바보가 아니니까. 자은이 아닌 다른 이가 오룡보다 나은 해를 내놓으면 된다. 오룡과 가깝거나, 오룡에 살짝 못 미칠 정도로 가진 게 많은 진골 중 한 사람이 좋겠다. 자은이 여기서 오룡에 반하는 것은 최악의 결정일 터였다.
인곤이 푸, 작게 입바람을 불고는 뒤로 물러섰다. 자신은 읽을 수 없는 어떤 흐름을 자은이 읽었음을 알고는 따르기로 한 것이다. 바로 납득되지 않아도 항상 따라준다는 것이 고마웠다. 두 사람은 합이 맞았다.
- 자은이 인곤과 함께 한 걸음 더 그림자 속으로 물러서려고 할 때였다.
호은이 자은의 무릎 뒤를 세게 발로 찬 것은.
자은은 거의 구르다시피 하여 죽은 매잡이의 시신 위로 엎어졌다. 화가 나 뒤돌아보자. 어둠 속에서 흰자위와 이가 유별히 빛나는 호은의 얼굴이 보였다. 자은의 심정으로는 광기로 빛나는 것 같았다.
"제 아우가 뭘 좀 확인하고 싶은 모양입니다."
호은이 어서 해보라는 듯 자은에게 손짓했다. 자은의 머릿속에 주마등처럼 어린 시절이 지나갔다. 놀이를 할 때도 제일 비열하고 희한한 수를 써서 함께 놀기 싫은 형제였다. 어째 착한 오빠들이 다 죽고 저것이 살아남았담, 자은은 터져 나오는 욕을 뱃속 깊이 밀어 넣었다. 자은의 엎드린 등 뒤로 횃불들이 다가왔다. 그림자 속에 숨을 기회는 날아가버렸다.
- 자은이 하찮아서 말에 밟히게 하는 것쯤은 아무 일도 아니었다. 날뛰는 말이 몸을 숙이고 있던 자은을 덮쳐왔다. 허망하게도 이리 죽는구나 했을 때 대신 밟힌 것은 타고 있던 딸에서 뛰어내려 자은 쪽으로 몸을 덮은 인곤이었다.
"인곤!"
말은 더 짓밟지 않고 달아났다.
"괜찮은가?"
달아나는 말과 다른 방향으로 웃으며 멀어지는 오룡의 무리가 보였다. 자은은 분노보다도 비참함을 느끼며 인곤을 살폈다.
"팔이 부러졌어."
인곤은 부러진 팔을 스스로 만져본 후 신음했다.
"다행히 조각나지 않고 두 동강 난 것 같군.”
"그게 다행인가?"
"팔을 자르긴 싫으니까."
"왜 그랬나? 밟히지 않을 수도 있었어. 내가 피했을 수도 있잖은가?”
고마움보다 걱정이 커 자은이 인곤을 몰아붙였다.
"주인의 옷을 입고 대신 죽을 수는 없어도, 이 정도는 하고 싶었네."
바보 같은 말이었다. 호은이 전보다 더 크게 혀를 찼다.
"이제 죽는 날까지 쫓아내기 어려워졌군."
"그렇습니까? 그렇게 말씀하신 걸 기억하겠습니다."
세 사람은 터덜터덜 걸어 집으로 돌아갔다. 잃어버린 말은 그날 오후에나 찾을 수 있었다.
- 그 기이했던 연회가 열리지 않은 것만 같았으나, 가끔 한밤에 자다 깨면 흰 매의 잔영이 눈꺼풀에 남아 있을 때가 있었다.
매는 마음을 홀리지.
하루 보았던 자은도 홀린 것을 보면, 새지기가 흘렸던 것도 있을 법한 일이었다고 여겨졌다.
- 왕이 자은을 부른 것은 스물 하루가 지난 다음이었다. 상문사에서 운 좋게 화롯가 곁의 자리를 배정받아, 반쯤 잠에 빠질뻔했는데 십수 명이 와 자은 하나를 데려갔다. 한 번도 간 적 없는 월성의 깊은 곳까지.
그 많은 사람과 함께 있을 때도 몸이 떨리게 두려웠는데, 왕과 독대하려니 돌바닥에 녹아들어 없어지고 싶었다.
"너의 이름을 두 번 들었다. 처음 들었을 때는 잊고 두 번째에는 새겨두었지."
바닥에 이마를 댄 채 그게 언제였을까, 자은은 추측해 보았다. 사신단으로부터 한 번, 소판 댁으로부터 한 번일까?
"너를 직접 보자 세 번째는 내가 부르게 되는구나."
왕이 계단을 걸어 내려왔다.
"설자은."
자은의 이름을 불렀다. 자은이 대답했지만 목소리가 형편없게 나와 혀를 깨물었다.
- "나의 흰 매가 되어라."
무슨 뜻인지 몰라 고개를 들자, 칼이 하나 자은 앞에 놓였다. 단점보다는 길고 장검보다는 짧았다. 소매 속에 숨은 자은의 팔을 재서 만들어진 것 같은 길이였다. 칼자루의 형상은 하늘에서 사냥감을 향해 화살처럼 내리 꽂히고 있는 매였다. 손을 뻗어 그 칼을 드는 순간, 뒤로는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 "어떤 것을 명하시는 것입니까? 밝지 못한 저에게 일러주십시오."
왕이 웃었다. 스스로를 낮춘 것이 우스웠던 것일까?
"내가 베라는 것을 베어라. 또 네가 베어야 할 것을 베어라. 보름마다 이곳으로 와 무엇을 베었는지 고하라."
자은은 왕의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붓을 들기 위해 멀리 다녀왔는데 칼을 들라니, 불식 간에 칼이 손바닥에 닿는 느낌이 설었다. 자은의 손에 생긴 굳은살과 하나도 맞아떨어지는 부분이 없었다.
- "오늘로 관부를 집사부로 옮기고 대사의 관직으로 임하라. 집사부는 다른 어느 관부에도 하는 일을 소명할 필요가 없다. 설대사는 특히나 왕께서 따로 쓰실 뜻을 표하셨으니, 따르며 기밀을 지키는 데 신중하라. 이 자리에서 물리시면 집사부로 오너라."
- 왕이 중시를 물렸다. 중시는 들어왔던 문으로 돌아갔다. 문틈으로 자은이 걸어보지 못한 회랑이 보였다. 자은은 중시의 부연을 듣고도 가시지 않은 혼란 속에 있었고, 집사부에 가서 더 파악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물러나라는 명을 기다리는데 명은 떨어지지 않고 왕이 자은의 바로 앞까지 왔다. 몸을 굽히고는 불쑥 커다란 손을 자은의 옷깃 안으로 넣었다. 자은은 굳어 숨을 멈추었다. 왕은 인곤이 일부러 높이 세워준 자은의 옷깃 안, 가늘고 울대 없는 목을 만졌다. 목을 쥘 수도 조를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확인한 후 손을 거두고는 첫 번째보다 크게 웃었다.
- "찾고 골랐더니, 이를 데 없이 흰 매와 같구나."
작가의 말
코로나19 팬데믹 시기를 지나는 동안, 저는 미스터리 장르에서 큰 위안을 얻었습니다. 언제나 원인이 밝혀지고, 답이 주어지고, 해결이 있는 이야기들이 때로 그렇지 못한 현실의 중압감을 잊게 해 주었습니다. 몇백 권을 읽고 나서, 한 권을 더하게 되었습니다.
늘 애호했던, 쓰고 싶었던 장르이기도 했습니다. 고등학교 도서관에 <성녀의 유골>(엘리스 피터스, 최인석 옮김, 북하우스, 1997)로 시작되는 캐드펠 수사 시리즈가 있었는데, 완전히 빠지고 말았던 기억이 납니다. 십수 년이 흘러 다시 읽어보려 할 때 혹 재미를 느끼지 못하면 어쩌나 싶었는데 기우 중의 기우였습니다. 책장을 펼치자마자 1137년의 영국 시루즈베리로 떠나게 되더군요. 구백 년 전의 사람들을 그토록 생생하게 일으켜 세울 수 있다니 감탄할 뿐입니다.
편집자로 일할 때, 김탁환 작가님의 '백탑파 시리즈'에도 마음을 빼앗겼습니다. 젊은 실학자들이 범죄를 좇아 달릴 때 뒤에서 따라 달리는 기분으로 읽었지요. 업무 중에 지나치게 몰입하고 말았습니다. 그다음에는 조지핀 테이의 <시간의 딸>(권도희 옮김, 엘릭시르, 2014), 미야베 미유키의 <외딴집>(김소연 옮김, 북스피어, 2007)같이 멋진 작품들을 연달아 만났습니다. 제가 쓴 이야기는 앞서 읽은 이야기들에서 태어났을 겁니다. 장르문학의 근사함은 여러 시대의 작가들이 크고 높은 탑을 이어 쌓는 데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작은 돌을 보태고 싶습니다.
시대 배경을 고르는 일은 고민스럽지 않았습니다. 고대사의 이야기와 역사가 아직 분리되지 않은 형태로 기록된 부분에 매력을 느끼곤 했고, 그 어떤 비극에도 안전한 심리적 거리를 가질 수 있는 점 역시 좋았습니다. 특히 신문왕 시대에 항상 끌렸습니다. 큰 전쟁이 끝난 통일신라는, 한껏 융성을 향해서 가다가 어느 순간 무너지기 시작했지요. 풍요 속에 숨어 있는 붕괴의 씨앗 같은 것을 천삼백 년이 넘게 지난 지금 제대로 헤아릴 수는 없겠지만, 먼 시대를 거울삼아보는 일은 언제고 의미가 있다고 여깁니다.
첫 번째 이야기인 갑시다. <금성으로>에서는 바람에 의지하는 나무배를 타고 바다를 건넜던 옛사람들의 용기와 막막함이 뒤섞인 내면을 그려보고 싶었습니다. 사실 육두품 도당 유학생은 조금 더 뒷시대에 많이 찾아볼 수 있어서, 설자은은 드문 사례라고 설정해 두었습니다. 나라의 지원을 받지 않고 국자감이 아닌 사설 학사에서 공부한 것으로 하면 어떨까 하고요. 또 2006년 발견된 예군과 예식진의 묘지명에 대해 읽고 소재를 얻었습니다. 백제 출신들이 당나라에서 어떻게 살아갔을지 찾아보니 흥미로웠습니다. 실제 후손들은 자리를 잘 잡았기 때문에, 예훈은 방계의 친척 정도인 가상의 인물입니다. 2018년 9월 <미스테리아> 20호에 게재했던 것을 수정했습니다. 그때는 곧 이어 쓸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꽉 채운 오 년이 걸렸네요. 처음 쓰는 장르라 몸 바꾸기가 오래 걸린 것 같습니다.
두 번째 이야기, <손바닥의 붉은 글씨>는 애거서 크리스티 분위기의 저택 미스터리를 신라를 배경으로 써보고 싶어서 구상한 결과입니다. 금성에 금입택이라고 불렸던 화려한 저택들이 있었다는 것에서 착안했습니다. 연천 호로고루성에 가보았던 경험의 영향도 있는 듯합니다. 삼국시대의 성들이 더 발굴되고 보존되면 좋겠습니다. 독군의 인물상은 660년 소정방이 진군 날짜를 어겼다 하여 목을 요구했던 독군 김문영에 대해 읽은 후 만들어냈습니다. 장군은 아니지만 책임을 지기 위해 목은 내놓을 수도 있는 독특한 자리가 아니었을까 해서요.
<보름의 노래>에는 이 책에서 보기 드문 실존 인물이 나옵니다. 신라에 투항했던 고구려인 안승과 혼인한, 문무왕의 질녀로 추정되는 여성입니다. 그 여성이 후에 어떤 삶을 살아야 했을지, 나라의 이익을 위해 혼인했는데 그 결과로 조마조마한 일들을 겪지는 않았을지 가늠해 보았습니다. 이름을 모르는데 지어내고 싶지 않아 소판 부인으로 불렀습니다. 길쌈 대회의 세부는 완전히 꾸며낸 것입니다. 길쌈 대회는 유리왕 때 시작되었다고 하니 주인공들의 시점에서도 육백 년 넘게 옛날 일이지요. 옛날의 옛날이라니 묘합니다. 길쌈 대회가 그렇게나 이어졌을지 알 수 없지만, 이어졌다면 그래도 여름인데 실내로 대회 장소를 옮기지 않았을까 추측해 보았습니다. 장마나 태풍을 감안해도 마당에 베틀을 두는 것은 곤란했을 듯하고요. 베틀 위의 천막이 아주 튼튼했을 가능성도 없진 않지만요. 그리고 왕실 수공업을 이끌던 '모'라는 여성 관원이 있었다는 데에서 소재를 얻었습니다. 모의 지위가 뭇사람들이 탐낼 만한 지위였을지는 확인하기 어렵고 많은 노비들이 혹사당했으리라 짐작되지만, 전문직인으로 자부심이 있었으리라는 상상으로 썼습니다.
마지막 이야기인 <월지에 엎드린 죽음>은 월지에 답사를 갔을 때 본 입수구와 출수구가 인상 깊어서 쓰게 되었습니다. 월지에서 키웠다는 동물들을 떠올리며, 그렇다면 그 동물들은 누가 돌보았을지 지어내보았습니다. 이야기 속의 매는 문무왕 11년 소부리주에서 흰 매를 바쳤다는 기록 한 줄에서 부풀려냈는데, 실제 그 매가 사람들 손에서 얼마나 살았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신문왕을 제멋대로 그리는 것은 아무래도 죄송스러워서, 신문왕릉에 가서 사과드리고 왔는데 그곳이 신문왕릉이 아닐 확률이 높다는 것을 알게 되어 곤란해졌습니다.
계절마다 경주에 가 다음 이야기를 건져오고 싶습니다. 이 시리즈가 세 권이 될지, 열 권이 될지 확실하지 않습니다만 열 권을 넘어서면 좋겠습니다. 설자은과 함께 금성을 누벼주시면 기쁠 거예요.
2023년 가을
정세랑
참고 자료
<거꾸로 보는 고대사>, 박노자 지음, 한겨레출판, 2010
<답사여행의 길잡이 2-경주>, 한국문화유산답사회 엮음, 돌베개, 1997
<삼국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한국역사연구회 지음, 청년사, 1998
<삼국유사>, 일연 지음, 김원중 옮김, 민음사, 2007
<송골매 바다를 지배하다>, 박지택 지음, 투나미스, 2018
<신라 국가제사와 왕권>, 채미하 지음, 혜안, 2008
<신라 중대의 정치와 권력구조>, 이영호 지음, 지식산업사, 2014
<신라와 바다>, 김창겸 지음, 문현, 2018
<신라인의 기록과 신라사 복원>, 박남수 외 지음,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2022
<역주 삼국사기>, 김부식 지음, 정구복 외 옮김,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2011
<우리 역사 속 수학 이야기 - 흥미로운 조상들의 수학을 찾아서>, 이장주 지음, 사람의무늬, 2012
<재당 신라인사회 연구>, 권덕영 지음, 일조각, 2005
<팰컨>, 헬렌 맥도널드 지음, 김혜연 옮김, 경향미디어, 2017
<한국 고대, 목면과 향료의 바닷길>, 박남수 지음, 경인문화사,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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