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2017)

[김어준] 건투를 빈다

일루젼 2012. 3. 18. 0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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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투를 빈다
국내도서>시/에세이
저자 : 김어준
출판 : 푸른숲 2008.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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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어준 관련 책을 연달아 서너권쯤 읽고 나니 이제 슬슬 김 총수가 애용하는 에피소드들이 보인다. 어떤 타이밍에 쓰는지도.
하지만 또 그 소리다, 싶은 느낌은 없었다. 충분이 여러번 말해도 좋을 만한, 여러번 들어도 좋은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덕분에 나 역시 한 가지 얻은 것이 있으니, 이걸 얻고 그 정도의 내 시간을 내어줬다면 괜찮은 딜을 한 것 같다.

얼마나 사람을 만나고, 또 여행을 가고, 자기 객관화를 하면 총수만큼 '섹시'해질까ㅋㅋ
그 역시 잘못 판단할 때도 있고. 특히나 나와 근원적인 흐름이 다른 사람이지만-
그의 나이가 이미 마흔을 넘었음을 생각해보면 경탄보다는 의지가 불타게 된다.
총수의 기본 성향은 나보다는 업에 가깝지만, 사고 구조는 업보다는 나에 가깝다.
이걸로 아마도 나는 김어준이 저자나 표지에 찍힌 거의 모든 책을 다 읽은 셈인데 (닥치고 정치나 아뿔싸, 나는 성공하고 말았다, 라거나 나꼼수 관련 책들은 블로그 오픈 전에 읽었다) '짜식, 좀 쌈박한데' 한 마디는 날려주고 싶다.

건투를 빈다는 상담집이다.
누군가의 고민과 그에 대한 김총수의 답변을 크게 자아, 사회, 연애, 대인관계 등으로 나누어 실어두었는데 거칠다면 거친 그의 답변을 읽다보면 기분이 좋아진다. 당장 쓰는 어휘의 문제가 아니다. 어떤 마음, 어떤 뉘앙스로 그것을 썼느냐가 중요하다.
시원하고, 또 정감있다.



- 한 마리 동물로서 자신이 생겨먹은 대로의 경향성을 깨닫자. ... 지난 아테네 올림픽 때다. 우리 리포터가 풍물 취재로 한 어부를 인터뷰했다. 잡은 생선 중 크고 좋은 놈들을 따로 놓는 걸 보고 리포터가 당연하다는 듯 이쪽 상등품은 팔 거냐고 묻자, 어부는 무슨 소리냔 표정으로 먹을 거란다. 왜 값을 더 쳐줄 물건을 팔지 않느냐고 묻자 나머지 판 돈만으로도 먹고살 수 있단다. 좋은 놈들은 와이프랑 먹을 거란다. 행복관이 판이한 게다. 이런 어부, 우리나라엔 없다. 왜? 우린 그렇게 배우질 않는다. 스웨덴 교과서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인간에겐 소유욕과 존재욕이 있는데 소유욕은 경제적 욕망을, 존재욕은 인간과 인간이, 인간이 자연과 더불어 살고자 하는 의지를 뜻한다고. 그런데 그 존재욕을 희생해 소유욕을 충족시키는 건 병적 사회라고. 공교육이 처음 가르치는 게 그런 거다. 사회 시스템 역시 그 가치관에 기초해 구축되고.

아이가 어른이 되는 과정에서 가장 먼저 배워야 할 건 그렇게 자신의 삶을 어떻게 상대할 것인가, 그 기본 태도에 관한 입장에어야 한다. 우린 그런 거 안 배운다. 대신 성공은 곧 돈이라는 거, 돈 없으면 무시당한다는 거, 그 경쟁에서의 낙오는 인생 실패를 의미한다는 거, 그렇게 경제논리로 일관된 협박과  회유로 훈육된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는 초식동물처럼 산다. 초식동물의 군집은 가장 뒤처지는 놈이 포식자의 먹이가 되어 나머지의 안전이 잠정 담보되는 시스템이다. 거기에 공적 신뢰 따윈 없다. 결국 끝줄에 서지 않으려 끊임없이 서로를 경계하며 두리번거리는 왜소하고 불안한 낱개들만 남을 뿐. 자신만의 삶의 방식을 시도할 겨를도 없고 엄두도 안 날밖에. 우리네 평균적 삶이 그렇다. 여기까진 위로다. 갈피를 못 잡는 건 당신만이 아니란 거다.

그러니 이 땅에서 어떻게 살 건지는 스스로 깨치는 수밖에 없다. 그러자면 가장 먼저 필요한 게 자신이 무엇으로 만들어진 인간인지부터 아는 거다. 언제 기쁘고 언제 슬픈지, 무엇에 감동하고 무엇에 분노하는지, 뭘 견딜 수 있고 뭘 견딜 수 없는지, 세상의 규범에 어디까지 장단 맞춰줄 의사가 있고 어디서부턴 콧방귀도 안 뀔 건지, 그렇게 자신의 등고선과 임계점을 파악해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윤곽과 경계가 파악된 자신 중, 추하고 못나고 인정하기 싫은 부분가지, 나의 일부로, 있는 그대로, 수용할 수 있어야 한다. 전혀 멋지지 않은 나도 방어기제의 필터링 없이 고스란히 받아들이게 되는 지점, 그런 지점을 지나게 되면 이제 한 마리 동물로서 자신이 생겨먹은 대로의 경향성, 그런 경향성의 지도가 만들어진다.

거기서부턴 더 이상 자신에 대해 관심이 없어진다. 더 이상 자기 합리화나 삶에 대한 하찮은 변명 따위에 에너지 소모하는 일, 없어진단 이야기다. 그리고 그때부터 모든 에너지는 생겨먹은 대로의 나를 세상 속에서 구현하는 것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게 된다. 더 이상 눈치 보거나 두리번거리지 않고. 그 다음부턴 쉽다. 꿈이니 야망이니 거창한 단어에 주눅 들거나 현혹되거나 지배 당하지 말고, 그저 자신이 죽기 전에 해보고 싶은 것들, 가보고 싶은 곳들, 만나보고 싶은 자들 따위의 리스트를 만들라. 그리고 그 리스트를 지워가며 삶의 코너 코너에서 닥쳐오는 놀라움과 즐거움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최대한 만끽하려 산다. 최소한 나는 그렇다.
건투를 빈다.



- 남의 기대를 저버리는 연습을 하라. ...라캉이란 자가 있었다. 정신분석에 기호학적 접근 시도해 업계에선 자기들끼리 쳐주는, 시쳇말로 '좀 짱인 듯한' 프랑스 작자다. 이 양반이 이런 소릴 했다. 아이는 엄마의 욕망을 욕망한다고. 하여간 업자들 말로 가오 잡는 건 알아줘야 한다. 뭔 소리냐. 복잡한 거 다 배고 말하자면, 아이는 엄마 만족시키려고, 엄마가 원한다 여기는 걸 자신도 원하게 된다는 거다. 이게 골 때리는 게, 내가 뭔가르 루언하는 게 엄마가 원하니까 원하는 게 된 건지 아니면 내가 그냥 원하는 건지, 그 그분이 안 가는 거라. 어쨌든 어느 아이나 거치는 과정이다. 그리고 이걸 일반화해, 인간은 타인의 욕망을 욕망한다 했다. 그러니까 페미니스트들이 미스코리아 대회에 열 받는 건, 그 식으로 말하자면, 여성들이 남성의 욕망을 욕망하기 때문인 거라. 여성들이 남성의 욕망에 자길 맞춘다는 거지.
여하간 골자는 이렇다. 당신은 여태 부모를 비롯한 다른 누군가의 욕망을 위해 당신 인생 대부분을 소비하고 잇었다는 거다. 그게 다 자신의 욕망인 줄 알고. 말하잠녀 엄마의 욕망을 욕망한, 아이였던 거지. 특히 우리나라는 10대에게 요구하는 게 오로지 학교 성적밖에 없는 야만적인 사회인지라 당신처럼 성적이 좋은 학생일수록 그 마인드 세트를 벗어나기가 대단히 어렵다. 당신이 가끔 내가 뭘 위해 이러나 싶다가도 그 궤도를 한 치도 못 벗어난 건 그래서다. 공부만으로 만사형통이었거든. 그런데 그 영광의 노정을 질주하던 당신이, 어느 순간 갑자기 삐끗했다. 우리나라에선 그 노선, 하나밖에 없는데. 어릴 땐 공부고 커서는 돈이고, 거기서 탈락한 당신에게 일순, 환호는 멈추고 박수는 거둬진다. 버려진 거다. 지금껏 다른 이들의 욕망을 좇아 단일 노선만 달렸던 당신, 공부 이외의 방법으론,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법도 모른다. 공포가 업습할 밖에. ....
내 생각은 그렇다. 지금의 당신에겐 봉창 타격음이겠지만, 참 다행이다. 지금쯤 실패해서. 회복할 시간이 많아서. 아마 당분간 참담할 게다. 과거 영광과 낮아진 자존감 사이에서 방황도 할 게고. 그러나 그런 비용을 치르고라도 부모 욕망으로부터, 다른 이들의 기대로부터 스스로를 해방시킬 기회를 얻은 건, 당신 인생 전체로 보자면, 크게 남는 장사다.
물론 부모의 욕망에 응답하고자 하는 건 모든 아이의 숙명이다. 그리고 거기에 부응하지 못한 자책감으로부터 완벽히 자유로운 자도 없고. 거기까진 정상이다. 사실 인간은 평생을 그렇게 누군가의 욕망에 호응하느라 부산하다. 삶 자체가 인정 투쟁이라고. 하지만 모든 건 결국 밸런스의 문제다. 우리나라엔 남의 욕망에 복무하는 데 삶 전체를 다 쓰고 마는 사람들, 자기 공간은 텅텅 빈 사람들, 너무나 많다. 당신만의 노선을 찾고 그리고 거기서 자존감, 되찾으시라. 시간이 오래 걸릴지도 모른다. 쉽지도 않다. 하지만 그 길은 당신 스스로 찾는 수밖에 없다. 다만, 결코 친절해지진 말라는 거. 오히려 이제부턴 차근차근, 남의 기대를 저버리는 연습을 하라는 거. 남의 기대를 저버린다고 당신, 하찮은 삶 되는 거 아니다. 반대다. 그렇게 제 욕망의 주인이 되시라. 자기 전투를 하시라. 어느날, 삶의 자유가, 당신 것이 될지니.



자존감은 자신감과는 또 다르다. 자신감이 어떤 일을 해낼 수 있다는 자신의 능력에 대한 믿음이라면, 그건 우울했던 20대 초반의 몇 년간에도 부족하지 않았다. 무슨 일이든 해낼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다. 하지만 자존감은 아니었다. 그 시절 난 다른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날 입증해 보이려 했다. 그렇게 다른 사람들이 내게 기대했던 것을 저버리지 않기 위해 바동거렸다. 내가 괜찮은 사람이라는 승인을 다른 이들로부터 따내려 했다.
... 자존감이란 그런 거다. 자신을 있는 그대로, 부족하고 결핍되고 미치지 못하는 것들까지 모두 다 받아들인 후에도 여전히 스스로에 대한 온전한 신뢰를 굳건하게 유지하는 거. 그 지점에 도달한 후엔 더 이상 타인에게 날 입증하기 위해 쓸데없는 힘을 낭비하지 않게 된다. 누구의 승인도 기다리지 않고 그저 자신이 하고 싶고, 재밌어하는 것에만 잡중하게 된다. 다른 사람 역시 어떤 왜곡 없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 자신의 상황만이 각별하다고 생각하는 자체가 자존감이 무르다는 방증이다. 자존감이 든든한 자는 자신이라고 해서 특별할 게 없다는 걸 인정한다. 특별하지 않다는 게 스스로 못나거나 하찮다는 의미가 아니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에게 무심하다. 누가 나를 무시하지는 않는지 사주경계하느라 에너지를 쓰지 않는다고.
이 말은 남이 어떻게 생각해도 아무 상관 없다는 말과는 다르다. 남이 날 나쁘게 생각하면 기분 나쁘고, 남이 날 좋게 생각하면 기분 좋은 건 당연하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남이 날 어떻게 생각하든 그 기대를 충족시키고자, 그를 만족시키기 위해서, 힘을 낭비하지는 않는다는 거다.


이게 되면 다음 중요한 건, '물끄러미' 파트. 바라보되, 물끄러미, 바라보기. 이건 뭐냐.(아, 씨바, 설명할 거 많네) 이건 시큰둥이란 건데 시니컬하곤 다르다. 길 가는데 쾅, 차사고 났다. 달아봐라. 사람 다쳤으면, 누구나 한 번은 죽는 거지 뭐, 무덤덤 씨불인다. 이건 시니컬. 반면, 쾅 했다. 안 돌아본다. 다치진 말아야 할 텐데, 그리고 그냥 간다. 이건, 시큰둥.
이제 그 차사고가 내 인생의 도로에서 났다 생각해보라. 느낌 오나? 삶의 통증 대부분은 자기만 힘든 줄 알아서 자기가 만드는 거다. 억울해서. 더구나 자기가 너무 중요한 줄 안다. 그래서 북받친다. 하지만 이, 시큰둥, 되잖아. 그럼 자기 인생 가지고 소설 안 쓴다. 자기가 누군지도 있는 그대로 보인다. 담백해진다고. 당연히 관점도 클리어해진다. 자, 여기까지가 자기객관화 패키지.


그럼 일방적이고 자기중심적이 아니라는 건 어떤 거냐. 장애인 이야기 나온 김에 거기서 풀어보자. 독일엔 정차 시 버스의 한쪽 면을 기울여 버스 계단의 턱을 없애고 휠체어가 올라탈 수 있도록 만든 시내버스가 벌써 십 년 넘게 운행되고 있다. 그들이 휠체어를 탄 장애인들이 남들의 도움을 받지 않고도 버스를 탈 수 있도록 한쪽으로 기울어지는 버스를 만든 이유는 장애인을 특별히 불쌍하게 생각하거나 비장애인들이 미안한 마음에 장애인들의 친구가 되어주겠다고 마음먹어서가 아니다.
밧줄이나 장비의 도움 없이도 누구나 1층에서 2층으로 올라갈 수 있게 하게 위해 계단이란 게 발명됐다. 마찬가지다. 대중교통이란 대중 누구나 그걸 타고 가고 싶은 곳으로 갈 수 있어야 하는 거다. 그리고 그 '누구나'에 장애인도 포함되어야 마땅한 거다. 그래서 '누구나' 탈 수 있도록 버슬르 개조한 게다. 장애인을 구분 지어 특별히 배려하는 게 아니라 '누구나'에 그야말로 누구나 포함된다고 여기는 사고, 일방적이고 자기중심적이 아니라 상대적이고 입체적으로 사고한다는 건 그런 거다. 내 입장이 아니라 상대의 입장에서 상대의 처지를 이해하는 능력, 그렇게 세상을 보편타당한 시각으로 바라볼 줄 아는 능력을 우린 지성이라고 한다. 역시 언제나 문제는 '지능'이 아니라 '지성'인 것이다.


존재를 질식케 하는 그 어떤 윤리도, 비윤리적이다. 관계에서 윤리는 잊어라. 지킬 건 인간에 대한 예의다.


어떻게 해야 하느냐. 결혼 할 달밖에 남지 않았다면 참는 게 상식적 판단이이겠으나 그 자의 경우는 결혼 후에도 전혀 개선되지 않을 가능성 농후해 보인다. 고로 한 번 더 당신이 그어놓은 선을 넘어온다면 당신의 기분과 입장을 분명하게 밝혀두는 게 낫겠다. 어떤 관계든 처음부터 분명히 해두지 않으면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바로잡기가 더 어려워지는 법이니까.
한 가지 주의할 점은 그런 관계미숙아들은 워낙 자기중심적인지라 돌려 이야기하면 그 중에 자신에게 유리한 대목만 선별 청취해 그마저도 자신이 편하도록 일방 해석한다. 그래서 실컷 이야기했더니 엉뚱한 소리 할 공산 크다. 그러니 기왕 이야기한다면 아주 단도직입적으로 이야기하는 게 필요하다.


남자들은 끊임없이 이너 서클을 만든다. 그렇게 우린 한통속이라는 의식을 조직한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계보가 만들어진다. 위로 갈수록 승진은 계보를 탄다. 집안 생계 운운하는 것은 남자들의 옹색한 핑계요, 자기합리화에 불과하다. 그 말이 진정이라면 소녀 가장 승진이 가장 고속이어야 한다. 하지만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이런 남성 중심의 권력 구조 속에서 약자인 여성이 어떻게 살아 남느냐. 먼저 생각해볼 수 있는 건 정면 대결이다. 룸살롱도 간다. 그저 여자로서 호기심에 한번 따라가보라는 게 아니라 그 어떤 자리에도 바질 생각 없다는 걸 분명히 하는 거다. 성별로 구분되는 여자가 아니라 다부지고 근성 있는 조직원의 한 명이라는 걸 명백히 보여주는 거다. 남자들 방식으로 남자들과 싸우는 거다. 하지만 이 방식엔 큰 비용이 뒤따른다. 견제와 태클, 아주 심해질 게다. 여성 직장인의 보이지 않는 승진 상한선인 '유리 천장'이란 단어가 괜히 만들어진 게 아니다. 여성성을 무기로 사용하라는 처방을 비롯해 온갖 여성용 처세술 서적이 넘치는 것만 봐도 그 천장 뚫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닌 것이다.
물론 남자보다 몇 배의 노력으로, 오로지 실력으로 승부해 성공하는 여성들, 존재한다. 대단한 여성들이다. 하지만 소수다. 하여 내 생각은 그렇다. 그런 결전의 다짐 이전에, 먼저 그 조직의 문화부터 찬찬히 살펴보는 게 우선이다. 어느 회사나 고유의 조직 문화가 있다. 대표의 품성, 업종의 특성 혹은 기업 역사가 만들어낸, 그 조직 문화의 남성성 정도부터 가늠해보시라.
극히 남성적인 문화가 지배하는 곳이라면 그렇게 정면 승부에 기력을 쏟느니 일찍 털고 나오는 게 현명하다. 그런 조직, 업종이라면 승진하면 할수록 오히려 더 힘들어진다. 대개 그런 조직, 업종의 상층부가 실력을 발휘하는 방식은 업무를 열심히 하는 게 아니다. 남자들끼리의 학연, 지연을 비롯한 각종 연줄과 의리와 인연 등이 실력을 좌우한다. 그리고 그런 건 공범 의식 가진 남자들이 목숨 걸고 지키고자 하는 기득권이다. 인터셉트, 매우 힘들다고. 그러니 본격적인 승부를 걸기 전에 먼저 직장 문화부터 꼼꼼히 살펴보는 게 우선이다. 그런 후 아니다 싶으면 과감하게 떠나는 게 낫다. 아니면 그냥 묻어서 가거나. 다행히 세상이 바뀌고 있긴 하지만 주류는 여전히 그러하다.
미안하다, 여자야.


우선 이 이야기부터 해두자. 그런 고민 한단 자체가 당신 당신이 우려한 만큼 나쁜 사람은 아니라는 뜻이다. 위로가 아니라 사실이 그렇다. 손쉬운 자기합리화로 이런 갈등 처리해버리는 자, 부지기수다. 그러니 자기비하는 그만 하시라.
그다음, 자신을 가장 오해하는 자가 누구냐, 바로 자신이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 마음에 드는 자기만 자기라고 생각하고, 나머지 자기는 외면하거나 모른 척한다. 때론 남들은 다 아는, 명백히 나쁜 자기도 여러 방어기제를 동원해 부정해버린다. 주변 사람들은 다 아는데 자기만 자기가 그러는 줄 모르는 거지. 많은 사람들이 그러고 산다.


완전연소. 서로가 상대에게 할 수 있는 최대한을 남김없이 주고받아 더 이상 아무런 아쉬움도, 미련도 없는 정서적 충만감에 다다른 연애를 말하는 건데, 그런 걸 경험하고 나면 상대가 다른 사람을 찾아 떠나게 되더라도 서로를 붙들지도 않을 뿐 아니라 진심으로 상대의 행복을 기원해줄 수 있게 돼. 태울 수 있는 건 모조리 다 태워버린 거니까. 그런 거 흔히 겪는 일도 아니고 누구하고나 겪을 수 있는 것도 아니긴 한데, 연애의 절정이란 그런 거야. 시시한 연애 열 번보다 그런 연애 한 번이 백만 배 낫다. 그러니 당신이 연인에게 해줄 수 있는 것에 최대한 집중해. 그래도 그녀가 떠난다? 그럼 인연이 거기까진 거야.



우선, 당신의 주장과 그 논거들, 죄, 모순 덩어리야. 볼까.

a) '아무리 좋은 사람, 잘 맞는 사람 만나도 싸운다. 안 싸우면 발전이 없으니까.' 미쳤나. 좋고 잘 맞는 사람 만나자고 다들 그 고생인 게야. 그런 사람 만났으면 그 자체로 대단한 행운이라고. 감지덕지해야지. 시도 때도 없이 물고 빨고 해야지. 그 아까운 시간을 왜 싸워서 증발시켜. 이종격투기 하나. 싸워서 발전하게. 그리고 좋고 잘 맞으면 이미, 행복해야 하는 거예요. 당장의 행복을 왜 유보해. 손에 쥔 행복도 제대로 간수 못 하는 주제에, 그게 얼마나 아까운 건지 모르면서, 어떻게 나중에 행복해지나. 것도 매일 싸우면서.

b) '모든 걸 참는 건 내가 아니다. 자아를 포기하는 거다. 마음에 담아두는 건 거짓말이다. 정직이 신조라서 그렇게 못한다.' 이야, 이런 '로직'의 자기합리화는 또 처음 봐요. 그러니까 난 정직해 못 참으니까 너만 참으라는 거 아냐. 어머. 그럼 참는 건 부정적이네. 참는 자여 화 있나니 지옥이 너희 것임이라. 이거네. 아이 깜짝이야. 게다가 자존이 무너지신다. 아니죠. 어디서 발명된 '자존'인지 몰라도 우리 사바세게에선 화나는 대로 화내고, 말하고 싶은 대로 말해버리는 거, 그거 '성깔'이라고 해요, 성깔.


여기서 다시 한 번 중요한 거. 결코, 설득하려고 하진 마시라. 그걸 받아들이고 아니고는 그녀 맘이다. 그녀도 그게 구속이 아니라 느껴지면, 그럼 요구하지 않아도 수용한다. 하지만 그렇게 느끼라고 강제할 수는 없다. 해서는 안 된다가 아니라, 불가능하다.


연인, 남이다. 연인이 남이라는 걸, 이 기본적인 걸, 인정하지 못하는 사람들, 참 많다. 그들은 사랑의 이름으로 모든 것이 가능해야 한다고 말한다. 모든 것이 가능하지 않다면, 그건 사랑이 부족해서라고, 울부짖는다. 이런 자들과 놀면 안 된다. 유아적이고 이기적인 이런 자들은, 사랑과 폭력을 구분할 줄 모른다. 사랑이란 모든 걸 내 뜻대로 할 수 있어 하는 게 아니라, 어떤 것도 내 뜻대로 되지 않건만 사랑하지 않을 도리가 없어서, 하는 거다.


정답, 남자들이 발명했다. 진짜? 진짜. 왜? 다른 놈들이 자기 여자 채 가는 게 겁나서. 여자들 꼼짝 못하게 하려고. 정말? 정말.
섹스에 관한 한 수컷들은 다른 수컷들 절대 못 믿어요. 그래서 수컷들은 대신 암컷들을 통제하기로 한 거예요. 정절, 순결 따위의 족쇄 이데올로기를 고안한 거죠. 열녀비가 뭐예요. 남자가 자기 죽고 나서조차 여자가 딴 놈한테 가는 게 싫은 거라. 죽을 때조차 곱게 안 뒈지는 거예요. 그래서 성이란 게 다 권력의 문제라는 거예요. 힘있는 쪽이 자신에게 유리한 가치를 신화화해 불변의 질서인 양 유포하는 거죠. 종교도 동원되고 문학도 동원되고, 상징 체계는 다 동원돼요. 그래서 남자들의 욕심이 합법, 율법, 도덕으로 변장을 하죠. 생각해봐요. 여자가 불편한 걸 왜 여자가 만들겠어요. 여자가 불편한 건 다 남자들이 발명한 거에요. 그러고는 어릴 때부터 학습시켜 스스로도 믿게 만드는 거예요. 그리고 혹여 그 경계를 밟는 행위는 다 품성의 문제로 환원시켜버리죠. ... 자, 이 말 외워둬요. 성은 권력의 문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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