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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선가 읽은 듯 하다 싶었더니 박완서 씨의 마지막 소설집 '친절한 복희씨'에 일부 수록 되었던 글이었다.
물론 발표된 것은 '그 남자네 집'으로써가 먼저다.
개인적인 의문은 어째서 단편들이 덧붙여진 장편으로써의 글의 일부를 다른 책에 다시 재수록했는가 하는 점인데,
인지도 때문이었을 수도 있겠고, 작가의 애착도 때문이었을 수도 있겠다.
두 권 모두를 읽은 감상을 말하자면.
개인적으로는 '친절한 복희씨'에 수록된 '그 남자네 집'을 더 좋아한다.
그 말이 담는 약간은 아련한 지난 날의 추억과 간지러운 듯 계면쩍은 듯 가만히 눈을 내리깔게 되는 그 느낌은 오히려 조금 덜 이야기하는 그 단편이 더 잘 살려주었다.
하지만 장편으로 만나는 '그 남자네 집'은 또 다른 색깔을 담고 있다.
쉰을 넘긴 작가가 돌아본 젊은 날의 기억이기 때문일까, 단편이 20대의 젊은 날의 기억을 쏙 뽑아내 이야기하고 있다면 장편은 그에 덧대어 긴 시간을 살아온 다음 돌이켜 본 그 순간과 그래서 희석되고, 어쩌면 변색되어가는 그 기억까지 아울러 말하고 있었다.
나는 아직 삼십대도, 사십대도 살아내지 못했기 때문에 그 젊은 색채 위로 덧대어진 색감이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다.
어쩌면 나는 아직도 철이 들지 못한 '그 남자', '현보'인 모양이다.
결국은 첫사랑을 하나의 좋은 추억으로 접어놓고, 삶이 무료하고 지칠 때면 한 번씩 꺼내어 보는 위안거리로 남겨놓은.
그러나 끝까지 잊지는 않았던.
크게 꾸미지도 그렇다고 비꼬지도 않은 글은 담담하게 이어진다.
카바이트 냄새란 어떤 것일까.
그녀가 그려낸 당시 생활상 중 일부는 내게는 너무 낯설어 멀었다.
그러나 그녀가 그려낸 '나'의, 그가 느끼는 감정들은 시간을 넘고 거리를 넘어 내 것처럼 느껴졌다.
마치 한 생을 다 산 듯, 후련하면서도 안타까운 마음으로 책을 덮었다.
[발췌]
# 그는 음반을 조심조심 마치 애무하듯이 다루었다. 그는 전축이 돌아가는 동안 다음에 걸 음반을 골라서 호호 살짝 입김을 불어넣기도 하고 작은 브러시로 닦아내기도 했다. 그 브러시는 원래는 음반 청소용이 아니라 화장할 때나 쓰는 것일 수도 있었다. 서양 여자의 속눈썹을 연상시키는 정교하고 섬세한 브러시였다. 부드러울 것도 같고 빳빳할 것도 같은 그 솔에 닿으면 전류가 통할 것 같은 기분이 들곤 했다. 음반을 어루반지고 싶어서 그러는지, 먼지를 닦으려고 그러는지, 분간이 안 되는 그의 골똘하고도 탐미적인 손놀림 때문일 것이다.
# 우린 이제 마지막 남녀가 아니라 수많은 남자 여자 중의 하나였다. 한 사람에게 몰두하는 일이 얼마나 집중력을 요하는 중노동이라는 걸 서서히 깨달아가는 중이었다. 직장에서나 집에서나 신경 써야 할 잡무가 많은데도 그게 오히려 휴식이 되었다. 연애질에서 비켜나 있을 수 있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렇다고 그 남자에게 싫증이 난 건 아니었다. 연애의 권태기가 온 것 하고도 달랐다. 만일 그 남자를 못 만났더라면 그 시절을 어떻게 넘겼을까. ... 그 남자하고 함께 다닌 곳 치고 아름답지 않은 데가 있었던가. 만일 그 시절에 그 남자를 만나지 못했다면 내 인생은 뭐가 되었을까. 청춘이 생략된 인생, 그건 생각만 해도 그 무의미에 진저리가 쳐졌다.
# 나의 눈물에 거짓은 없었다. 이별은 슬픈 것이니까. 그러나 졸업식 날 아무리 서럽게 우는 아이도 학교에 그냥 남아 있고 싶어서 우는 건 아니다.
# 솜털의 떨림 같기도 하고 운명의 떨림 같기도 한, 자신에게도 설명할 수 없는 어떤 것, 그것을 비밀이라고밖에 말할 수가 없는 것이다. 비밀이라고 해서 부끄럽거나 부도덕한 것하고는 다르다. 내 마음의 밑바닥에서 솜털이 일어서는 것 같은 떨림은 절대로 남에게 설명할 수도 없거니와 누구하고 공유할 수도 없는 것이다.
# 그래. 실컷 젊음을 낭비하려무나. 넘칠 때 낭비하는 건 죄가 아니라 미덕이다. 낭비하지 못하고 아껴둔다고 그게 영원히 네 소유가 되는 건 아니란다.
# 양가를 잘 아는 사람이 중간에 든 연줄혼인은 그런 일이 없지만 두 사람의 사랑만 믿고 맺어진 혼인은 양쪽 집안의 사는 방법의 차이 때문에 여자가 힘들어하는 일이 많다고 했다.
# 나는 옆에 누워 있는 핏덩이가 하나도 예쁘거나 소중하지 않았다. 낳아놓기만 하면 모성애는 저절로 우러나는 건줄 알았는데 전혀 아니었다. 저것 때문에 아무데도 자유로 갈 수 없고, 정 가고 싶으면 달고 다녀야 할 생각 때문에 나는 수렁처럼 깊은 우울증에 빠졌다. 헤어날 수 있을 것 같지 않은 우울증이었다. 모성애가 우러나기는 커녕 일생일대의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했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나는 배고파 하는 아기에게 등을 돌리고 누워서 서럽게 울었다. 아기가 불쌍해서가 아니라 잃어버린 자유 때문에 우는 자신을 마녀처럼 느꼈다.
# 그 잘생긴 남자의 와이픈지 애인은 아마 땅속에 있나봐. 그 남자는 매일 같이 거기 와서 꽃을 바치고, 오른손 손가락을 자기 입술에 댔다가 묘비에다 대고는 한참을 있다가 가는 거지. 그 손놀림이 어찌나 우아하고 육감적이고도 정신적인지, 나는 꼭 아름다운 남녀의 길고긴 키스신을 보는 것처럼 넋을 잃고 바라보다가 그 남자 눈에 띨세라 반대 방향으로 가버린다우. 그런 지극한 사랑을 받는 묘를 보고 나면 딴 묘는 초라하고 불쌍해서 보기도 싫어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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