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2017)

[노나미 아사] 얼어붙은 송곳니

일루젼 2012. 4. 26. 05:55
728x90
반응형

 

얼어붙은 송곳니 - 1996년 제115회 나오키상 수상작
국내도서>소설
저자 : 노나미 아사 / 권영주역
출판 : 시공사(단행본) 2007.08.23
상세보기

 

 

생각보다는 재미 있었지만, 누군가에게 권할 정도까지는 아니다.

내용 자체가 매력이라거나 구성이 탄탄하다기 보다는, 이미지적인 즐거움이 있었다.

 

아름다운 야성.

압도될 수 밖에 없는 기품과 마력적인 눈빛.

 

거칠고 공포스러운 괴물이 아닌, 비록 얼마 간의 혈통적 순수는 잃었으나 여전히 고아한 '늑대'에 가까운 울프독.

토템으로 숭배받을 만한 아름다움이 있는 동물인 늑대. 그의 매력에 기댄 글이라 해도 좋을 듯 하다.

 

사실 이 책에서 울프독 '질풍'을 덜어내면 나머지는 크게 인상 깊을 부분이 없는 글이었다. (내게는)

일본 특유의 정서가 묻어난다고는 하지만, 추격의 박진감이 있는 것도 추리의 탄탄함이나 극적인 반전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매력적인 캐릭터라고 말하기엔, 여주인공 다카코는 나름의 고충과 감정을 잘 드러냈지만 아무래도 곁가지가 너무 많은 느낌.

 

남성권위주의가 가득한 곳에서 존재를 증명해야 하는 여형사이자 라이더, 즉 '도마뱀'임에도 '공각기동대'의 여주인공 같은 흡입력과 마력에 가까운 매력을 뿜어내지도 못했고, 이혼 후 독신으로 지내며 가족과 일 사이에서 보여준 독백에서도 감성적인 매력이 부족했다. 흠, 그렇다고 현실감이 강렬한 캐릭터도 아니고....

 

황제 펭귄 다키자와도 평범하고 남성적인 사고를 가진 중년 남형사 외의 무언가를 보여주지는 못했다.

 

(비슷한 느낌을 주는 글 중에서는 개인적으로는 '이사카 코타로'의 "골든 슬럼버"가 더 재미있었다)

 

 

하지만.

 

하지만 '질풍'이 있다.

 

늑대라는 이미지 자체가 가지는 매력 (이 글 안에서 '질풍'이 보여준 매력 외에, 독자가 이미 갖고 있던 '늑대'라는 동물에 대한 호감도) 도 상당한데다.

마지막 '질풍'과 다카코의 질주 장면 만큼은, 무척 좋았다.

 

보통의 추격 질주 장면 같은 긴장감이나 치열함보다는.

 

시간이 정지된,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 회색의 고가도로와 터널을 바람 같이, 흐르듯이 달려나가는 거대한 한 마리 늑대와

그 뒤를 쫓는, 헬멧에 가려져 있지만 아름다울 것 같은, 몸에 딱 맞는 라이더 자켓을 입고 우아하게 속도를 올리는 검은 실루엣의 여성.

 

 

고요함. 

빠른 속도로 스쳐지나가는 배경 안에서 오히려 정지한 듯한 시간. 

세상에는 그와 나 단 둘 밖에 존재하지 않는 듯한 기분.

진정으로 너를 이해하는 것은 나, 그리고 그걸 알고 있는 너. 

 

 

이런 매력있는 이미지를 너무 잘 그려냈다.

 

 

다만, '한국형 스릴러' 다운 강렬한 반전이나 정밀하게 짜맞춰진 트릭은 없었다.

그렇다고 '일본형 스릴러'가 가지는 충격적인 전개나 매력이 넘치는 독특한 캐릭터도 없었다.

 

단지, 아름다운 늑대개, 울프독 '질풍'이 있었을 뿐.

 

 

이걸 영화화했다면 정말 도 아니면 모일텐데... 설사 모라고 해도 흥행 영화로 성공하기는 조금 어렵지 않았을까 싶다.

하울링의 감독이 '유하'였다고 하는데 내 기억에는 큰 이슈가 못된 걸 보면 성적은 그냥 그냥인 모양.

그래도 '질풍'을 어떻게 찍었을지가 궁금해서 한 번은 보고 싶다.

 

 

추가> 이 작품은 속칭 '여형사 오토미치 다카코' 시리즈의 첫권 격이라고 한다. 시리즈 물이었다니, 의외.

인기를 얻어서 속편 격으로 이어지게 된 게 아니라면, 많이 놀라울 것 같다. 시리즈를 염두에 둔 글이라고는 전혀 못 느꼈는데;

 

 

 

[발췌]

 

# 게다가 억지로 그런 눈치를 보였다가는 되레 위험할 수도 있다. 그런 부류의 남자는 틀림없이 여자를 여자로밖에 못 볼 것이다. 함께 일하는 파트너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자기와는 다른 성을 가진, 자기들과는 전혀 다른 생물로밖에 못 본다. 좋든 나쁘든. 그것을 다카코는 형사가 되고 나서 배웠다. 인간 대 인간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남자와 여자인 것이다.

 

 

# 다키자와가 그녀에게 말을 붙이지 않는 데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첫째, 다키자와는 여자를 믿지 않았다. 여자는 금세 거짓말을 한다. 배신한다. 마음이 변한다. 감정이 앞선다. 형사의 일은 신뢰 관계와 팀워크로 성립되는 것이다. 그런 인간을 동료, 파트너로 선택할 이유가 없었다.

둘째, 다키자와는 원래 여형사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형사는 남자의 일, 남자의 세계다. 늘 위험과 등을 맞대고 있고, 일도 고되다. 인간의 어두운 면만을 보게 되는 측면이 있고, 스트레스도 쌓인다. 근무 시간도 불규칙하고, 순간적인 판단력, 행동력도 요구된다. 그런 일을 일부러 선택해서 한다면 그만한 각오와 신념이 필요하다. 대충대충, 임시로 할 수 있는 일이 절대 아니다. ..... 아무리 남녀가 평등한 세상이라지만 대체 윗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하는 건가.

 

 

# 미워하는 데에도 에너지가 필요하다.

 

 

# 무슨 일을 해도, 무슨 음악을 들어도 기억과 결부되어 간다. 그것이 나이를 먹는다는 걸까. 기억하고 싶지 않은 풍경만 쌓여가는 것이 인생인가....

 

 

# 괜히 전화를 걸었다고 후회하고 있었다. 쓸데없는 생각은 하고 싶지 않다, 조금이라도 평정을 유지하면서 언제든지 바로 출동할 수 있는 태세로 있어야 할 이때에, 어머니의 감정적인 말은 다카코에게 쓸데없는 동요와 피로를 안겨주었다.

.... 이렇게 무익한 대화가 있을까. 양쪽 모두 자기 형편대로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은 안다.

 

 

# ㅡ도망치는 게 아냐.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질풍은 도망치는 게 아니다. 그 마음에는 공포심 따위 없는 것 같았다.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자신감 넘치고 거침없는 발걸음이었다.

.... 도로가 계속되는 한, 질풍과 함께 달리고 싶었다. 저 은색 동물을 뒤쫓고 싶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