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시키 가호 지음, 김소연 옮김/손안의책(사철나무) |
오래간만에 읽은 기분좋은 기담.
나는 기담 류를 상당히 좋아하는 편인데, 퇴마나 퇴요물과는 조금 노선이 다른 '기담'을 좋아한다.
이를테면 포송령의 '요재지이'나 이마 이치코의 '백귀야행', 혹은 하츠 아키코의 '세상이 가르쳐 준 비밀' 같은 그런.
('충사'도 좋다. 음, 소설보다는 만화 쪽이 많이 생각나네. 김탁환의 '부여 현감 귀신 체포기'는 좀 멀리 갔고...)
하타케나카 메구미의 '샤바케'도 그럭저럭 잘 읽었지만 거긴 약제상 도련님 외에 요괴들이 너무 비중이 적어서 ㅠㅠ
'집지기가 들려주는 기이한 이야기'.
작고 얇은 책으로, 쥐면 금세 읽는다. 각 챕터가 식물들의 이름인 것도 무척 마음에 들었다.
배롱나무, 고향초, 수련, 달리아, 어성초, 하눌타리, 대나무꽃, ..... 노간주나무, 애기동백, 용수염, ..... 남천, 머위, 바람꽃, 패모, 산초,....
한때는 일본적인 느낌에 거부감을 가졌던 적도 있었는데, 조금 더 나이를 먹다보니 그 나름의 풍취가 있는 것 같다.
나는 나중에 여유가 된다면 사실 정원은 일식으로 가꾸고 싶었다;; 작은 물레방아가 돌며 따박 따박 대죽으로 만든 물받이가 까딱 거리고 적당한 크기의 잉어가 자라는 작은 연못이 있고 석등이 있는 그런 정원. 손은 엄청 가겠지만.
딱 그 연못이 생각나는 글이었다.
[발췌]
<대나무꽃>
기차에서 내린 스님과 만났다. 안개비 같은 비가 내리는 오후다. 나는 원고를 보내러 역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이었다.
ㅡ 지금 돌아오십니까?
ㅡ 산에 잠깐 볼일이 있어서.
아무 생각도 없이 나란히 걷는다. 도중에 스님이 어떠냐고 말했다. 나는 좋다고 대답했다. 바둑 얘기다. 우리 집 앞을 그냥 지나쳐 스님의 산사 쪽으로 걸어간다. 수로를 건너 완만한 언덕길을 올라가니 안개비는 더욱더 약해져서 안개 자체가 되기 시작했다. 전혀 앞이 보이지 않는다. 길에 익숙할 스님도 지팡이로 발밑을 더듬고 있다.
ㅡ 이제 산문 근처까지 왔을 겁니다.
언덕길을 올라오기 시작한지 꽤 되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안개가 다소 걷히고, 양쪽으로 대나무숲이 펼쳐져 있었다. 스님의 산사로 가는 산길 주위에 이런 곳이 있었던가?
ㅡ 이건,
스님은 멈춰서서 중얼거렸다.
ㅡ옛날에 너구리에게 홀렸을 때와 똑같군.
ㅡ 그게 언젠데요?
왠지 모르게 비명처럼 높은 목소리가 나오고 말았다.
그 때 대숲 너머에서 칸델라 불빛이 다가온다. 안개 속을 흐릿하게 비추는 그 불빛을 보고 있는데, 가까이 다가옴에 따라 수건을 뒤집어쓴 여자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양쪽에 우거져 있는 대나무가 방해가 되어 걷기 힘들어 보인다. 고개를 살짝 숙이고 있어서 얼굴은 잘 보이지 않는다. 여자는 멈춰서더니 가늘지만 의외로 또렷한 목소리로,
ㅡ 모시러 왔습니다.
라고 말한다. 수건에 어울리지 않게 연한 붉은빛을 띤 비단옷을 입고 있다.
ㅡ 이보게, 이 놈은 여우일세. 어쩐지 너구리 때랑은 취향이 다르다 했지. 고상하다니까.
스님이 귓가에 속삭였다.
ㅡ 아까는 너구리 때랑 똑같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ㅡ 호오, 호오, 세상이란 정말 재미있구먼.
스님은 확실히 두루뭉술한 데가 있다. 그러나 그게 오늘은 더 심한 것 같다. 여우 여자는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스님도 따라간다. 별 수 없이 나도 따라갔다.
어느새 이렇게 대숲 깊숙이 들어와 버린 걸까. 안개가 움직이는 벽처럼 우리들에게 닥쳐오고, 여우 여자는 다그치듯이 좌우에서 덮쳐드는 대나무 장대를 뿌리치면서 계속 걸어간다.
얼마나 그렇게 걸었을까. 정신을 차려 보니 눈에 익은 산길로 나와 있었다.
그러자 갑자기 여우 여자가 이쪽을 향해,
ㅡ 돌아가라!
하고 스님에게 일갈했다. 스님은 평소 모습에 어울리지 않는, 묘하게 비굴한 웃음을 지었나 싶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연기처럼 사라져 버리고, 근처 풀숲에서 큰 소리가 났다. 그야말로 여우에게 홀린 얼굴을 하고 있는데,
ㅡ 저건 너구리입니다.
하고 여우 여자가 태연하게 말했다. 나는 그 여자의 분위기에 압도당해 머뭇거리며,
ㅡ 산에서 돌아오시는 길이라고 했는데.
ㅡ 일승사의 너구리 계곡 후도산을 말하는 것입니다. 회합이 있었던 게지요.
ㅡ 날 홀리려고 한 건가?
ㅡ 그냥 좀 놀려줄 생각이었겠지만, 기왕 이렇게 되었으니 좀 더 교묘하게 둔갑하려고 한 것입니다.
ㅡ 그건....
ㅡ 대나무꽃. 60년에 한 번 핀다는 대나무꽃이 지금 산사 주위에 활짝 피었습니다. 조심하십시오. 진짜 스님의 절은 이 앞에 있습니다. 자, 가시지요.
아마 스님이 보내주었을 여우 여자는 산사 산문 앞까지 나를 데려다주었다. 산문 근처에서 스님을 만났다.
ㅡ 무사히 도착한 모양이군.
스님은 큰 소리로 말했다.
ㅡ 예, 정말 힘들었습니다. 너구리니 대나무꽃이니.
ㅡ 아아, 그럴 테지. 오늘 아침에도 시주님 한 분이 오신다기에 기다리고 있었는데 끝내 오지 않았네.
ㅡ 그건 큰일 아닙니까? 사람을 더 보내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ㅡ 아니, 내일이 되면 가구야 아가씨 집에 가 있었다며 수줍은 얼굴로 찾아올 걸세.
그럴까? 홀려도 괜찮았을지도 모르겠다.
ㅡ 아쉬운 기분이 드는군요. 마중 온 사람이 너무 일렀나 봅니다.
그렇게 말한 후, 이건 실례라는 생각에 당황해서 여자 쪽을 바라보았지만 여자는 없었다.
ㅡ 마중? 나는 모르는 일일세. 무엇보다 자네가 올 줄도 몰랐으니까.
영문을 모르겠다. 우선 절로 들어가 스님과 바둑을 둔다. 신이 나지 않아서 졌다. 돌아갈 시간이 되어 또 산길을 내려가야 하나 생각하니, 만일 홀렸는데 그게 대나무꽃이면 좋을 것 같은, 그게 너구리면 기분 나쁠 것 같은, 종잡을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ㅡ 이보게, 고로가 데리러 왔네. 누가 보낸 걸까?
하고 스님이 정원 쪽을 보며 중얼거렸다. 내다보니, 분명히 고로가 영리한 얼굴을 하고 앉아 있다.
ㅡ 고로, 왔구나.
하고 말을 걸자 일어서서 꼬리를 흔들었다. 별 수 없이 스님에게 인사를 하고 아무 일도 없이 무사히 산을 내려와 집으로 돌아왔다.
부엌에서 차를 끓여, 스님이 준 만주를 고로와 툇마루에서 나눠먹고 있는데 문득 배롱나무가 이상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가까이 다가가 자세히 보니, 놀랍게도 온 몸에 대나무 장대와 대나무꽃 같은 하얀 꽃이 달려 있는 게 아닌가.
마치 대숲에서 격투라도 벌인 것 같았다.
'아하' 하고 생각했지만, 모르는 척해 두었다.
<무궁화>
....
ㅡ 그럼 파내세, 고도, 파내서 깨끗이 해 드려야 하지 않겠는가.
하고 서둘러 말했다. 고도는 약간 진저리가 난 듯이,
ㅡ 자네는 어찌 그리 단순한가? 나는 당시- 처음으로 저 현상을 보았을 때 아직 어렸지만, 그래도 그 때 같이 있던 숙부님이 이런 말씀을 하시는 걸 듣고 납득했다네. ..., 그래야만 저렇게 안타깝고 아름답게 떠오르는 법일세. .... 밖으로 파낸다 하더라도 호기심의 시선을 받을 뿐이겠지. 그럼 가장 소중한 그 순수의 부분이 위태로워질 뿐이지 않겠는가.
....
내가 내 생각에 남몰래 기쁨에 잠겨 있자,
ㅡ 보게, 와타누키, 사라져 가네. 덧없고 아름답군. 내년에도 또 나올 걸세, 분명히.
고도는 등나무 의자에 앉은 채 전에 없이 아련한 눈을 하고 무궁화를 바라보고 있었다.
<바람꽃>
....
고도는 잠시 생각하는 것 같더니,
ㅡ 나는 자네에게 할 말이 없네. 인간 세상의 말로는 표현할 수가 없어.
나도'으음'하고 잠시 생각하고 나서,
ㅡ 하지만 나는 그걸 말로 표현하고 싶다는 생각일세.
ㅡ 멋없는 짓일세.
나는 '아아, 그렇다, 이게 고도와 나의 결정적인 차이로구나'하고 깨달았다. 나는 갑자기 우리들 앞에서 홀연히 모습을 감춘 고도에게 원망 같은 기분이 치밀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ㅡ 자네는 인간 세상을 버린 걸세.
ㅡ 자네는 인간 세상의 미래를 믿을 수 있나?
펜과 잉크 말인가? 인간 세상은 훨씬 더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조만간 도깨비 아이 따윈 완전히 사라져 버릴 것이다. 벌레잡이 같은 장사도 세상에서 쫓겨날 게 틀립없다.
ㅡ ..... 모르겠네.
나는 궁지에 몰린 토끼 같은 심정으로 중얼거렸다. 고도는 살짝 미소짓는 듯하더니,
ㅡ 뭐, 상관없어.
하고 대답했다.
ㅡ 한동안은 세찬 남풍으로 엉망이 될 걸세.
그런 말을 남기고 족자 안으로 돌아갔다. 벽가에는 평소 보지 못하던 순백색의 섬세한 조화(造花)가 떨어져 있었다. 하계에 더렵혀지지 않은 맑은 기척을 주위에 풍기고 있다. 아아, 이게 바람꽃인가 하고 몸을 굽혀 주워들었다.
이래서야 깊은 산 속에서밖에 서식할 수 없는 것도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산초>
...
ㅡ.... 뭐랄까, 최근 번역되어 나온 로제티의 문장을 떠올리게 하더군요. 이런 느낌입니다.
하고 나도 술이 들어간 김에 가볍게 읊어 보았다.
....
ㅡ... 제게는 소중한 물건입니다. 그렇지, 아까 그 시는 아마 이렇게 시작했을 겁니다.
..... 이것은 한때 그대가 존재했던 날의 흔적.
바라보니 그대가 기대어 있는 듯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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