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쳐야
미친다 - 330쪽 | 223*152mm (A5신) | ISBN(13) : 9788987787848 2004-04-03 |
최근 친우와 이야기를 나누던 중, 그런 이야기가 나왔다.
유럽의 미술, 문화에 대해서는 그렇게나 관심을 기울이면서 정작 우리 것에는 지나치게 관심이 없는 것이 아닌가 하는.
루브르와 오르세는 시간과 돈을 모아 찾아가면서도 정작 국립중앙박물관조차 제대로 가본 적이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이건 잘못 된 것이다 싶었다는.
외국인 친구가 많은 친우는 그들과 함께 부석사도 가는 등 그래도 전통이나 고유 문화에 대해 알리려고 노력했던 편인데도 문득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다행히 나는 몇 번 간 적이 있어 면피는 했으나 그 생각 자체에 대해서는 깊이 공감하는 바이다)
그런 이야기가 오가는 중에 손에 잡힌 책이 이 책이었다.
저자의 약력은 자세히 모르겠으나, 사학을 전공하신 학자이자 교수이신 듯 하다.
고문을 읽기 쉽게 풀어내는 능력도 탁월하고, 그것을 이런 저런 일화들과 버무려 엮어낸 것이 아주 맛깔스럽다.
등장하는 선비들은 대체로 들어봤음직한 이들이었으나 내가 좀 더 깊이 있게 그들을 알았더라면 (그들의 사상이나 당시 정세 등)
훨씬 더 즐겁게 읽을 수 있었을 텐데 그 점이 좀 아쉬웠다.
다만 '연기 속의 깨달음' 장은 그 내용도 그러하였으나, 저자의 해석과 내가 받아들인 의미가 조금 달라 깔끔하지가 못하고 좀 미진한 감이 남는다. 그 장만 재독했는데도 그러한 걸 보면, 아직은 때가 아닌 듯해 시일이 더 지나고 난 뒤 다시 읽어보려한다.
저자의 서문이 무척 강렬하게 와닿았다.
[불광불급(不狂不及)!! 미치지 않으면 미치지 못한다. 세상에 미치지 않고 이룰 수 있는 큰 일이란 없다. 학문도 예술도 사랑도 나를 온전히 잊는 몰두 속에서만 빛나는 성취를 이룰 수 있다. 한 시대를 열광케 한 지적, 예술적 성취 속에서는 스스로도 제어하지 못하는 광기와 열정이 깔려 있다.]
책의 맨 처음을 여는 글의 첫 문단이다.
다소 기이하게 느껴지는 벽(癖)을 지녔던 이들의 관한 이야기인 '벽에 들린 사람들'에서 그런 이들이 만들어냈던 멋스런 '맛난 만남', 그리고 '일상 속의 깨달음'으로 이어지는 글은 한 폭의 수묵화를 보는 기분이었다.
[발췌]
# 노력이 따르지 않은 한 때의 행운은 복권 당첨처럼 오히려 그의 인생을 망치기도 한다.
불광불급(不狂不及)이라 했다. 미치지 않으면 미치지 못한다는 말이다. 남이 미치지 못할 경지에 도달하려면 미치지 않고는 안 된다. 미쳐야 미친다.
# "세상은 재주 있는 자를 결코 사랑하지 않는다." 홍길주는 <김영전>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능력 있는 사람이 손가락질 당하는 세상, 모자란 것들이 작당을 지어 욕을 하고 주먹질을 해대는 사회, 그러고는 슬쩍 남의 것을 훔쳐다가 제 것인 양 속이는 세상은 지금도 끝나지 않았다.
# 風枝鳥夢危 풍지조몽위 - 바람 부는 가지에 새의 꿈이 위태롭고
露草蟲聲濕 노초충성습 - 이슬 젖은 풀잎에 벌레 소리 젖누나
-김득신
# 이서우(李瑞雨, 1633~?)가 쓴 <백곡집서(柏谷集序)>의 한 대목을 인용하면서 글을 맺기로 한다.
- 대저 사람은 스스로를 가벼이 여기는 데서 뜻이 꺾이고, 이리 저리 왔다갔다 하느라 학업을 성취하지 못하며, 마구잡이로 얻으려는 데서 이름이 땅에 떨어지고 만다. 공은 젊어서 노둔하다 하여 스스로 포기하지 않고 독서에 힘을 쏟았으니 그 뜻을 세운 자라 할 수 있다. 한 권의 책을 읽기를 억 번 만 번에 이르고도 그만두지 않았으니, 마음을 지킨 사람이라 할 수 있다. 작은 것을 포개고 쌓아 부족함을 안 뒤에 이를 얻었으니 이룬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아! 어려서 깨달아 기억을 잘한 사람은 세상에 적지 않다. 날마다 천 마디 말을 외워 입만 열면 사람을 놀래키고, 훌륭한 말을 민첩하게 쏟아내니, 재주가 몹시 아름답다 하겠다. 하지만 스스로를 저버려 게으름을 부리다가 어른이 되어서는 그만두어버리고, 늙어서도 세상에 들림이 없으니, 공과 견주어본다면 어떠 하겠는가? -
# 만남은 맛남이다. 누구든 일생에 잊을 수 없는 몇 번의 맛난 만남을 갖는다. 이 몇 번의 만남이 인생을 바구고 사람을 변화시킨다. 그 만남 이후로 나는 더 이상 예전의 나일 수가 없는 것이다.
# 황상의 문집 중, 정약용의 글
- 내가 황상에게 문사 공부할 것을 권했다. 그는 쭈뼛쭈뼛하더니 부끄러운 빛으로 사양하며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 제가 세 가지 병통이 있습니다. 첫째는 너무 둔하고, 둘째는 앞뒤가 꼭 막혔으며, 셋째는 답답한 것입니다."
내가 말했다.
"배우는 사람에게 큰 병통이 세 가지가 있다. 네게는 그것이 없구나. 첫째 외우는 데 민첩한 사람은 소홀한 것이 문제다. 둘째로 글 짓는 것이 날래면 글이 들떠 날리는 게 병통이지. 셋째 깨달음이 재빠르면 거친 것이 폐단이다. 대저 둔한데도 계속 천착하는 사람은 구멍이 넓게 되고, 막혔다가 뚫리면 그 흐름이 성대해진단다. 답답한데도 꾸준히 연마하는 사람은 그 빛이 반짝반짝하게 된다.
천착은 어떻게 해야 할까? 부지런히 해야 한다.
뚫는 것은 어찌 하나? 부지런히 해야 한다.
연마하는 것은 어떻게 할까? 부지런히 해야 한다.
네가 어떤 자세로 부지런히 해야 할까? 마음을 확고하게 다잡아야 한다."
당시 나는 동천여사(東泉旅舍)에 머물고 있었다. -
# 다산 정약용, <제황상유인첩(題黃裳幽人帖)>
- 책상 아래에는 오동 향로를 하나 놓아두고, 아침 저녁으로 옥유향을 하나씩 피운다. 뜰 앞엔 울림벽을 한 줄 두르는데, 높이는 몇 자 남짓이면 된다. 담장 안에는 석류와 치자, 목련 등 갖가지 화분을 각기 품격을 갖추어 놓아둔다. 국화는 가장 많이 갖추어서 48종 정도는 되어야 잘 갖추었다 할 만하다. 마당 오른편엔 작은 연못을 파야겠지. 사방 수십 걸음 정도면 된다. 연못 속에는 연꽃 수십 포기를 심고, 붕어를 길러야지. 대나무를 따로 쪼개 물받이 홈통을 만들어 산의 샘물을 끌어다가 못에다 댄다. 물이 넘치면 담장 틈새를 따라 채마밭으로 흐르게 한다. -
(나 또한 이런 곳에 살고 싶었다. 한국에도 이런 풍경이 있었구나.)
# 마음 맞는 벗들이 한 자리에 모여 허물없이 흉금을 털어놓는 광경은 참 아름답다. 아무 속셈도 없다. 굳이 말이 오갈 것도 없다. 바라보기만 해도 삶은 기쁨으로 빛나고 오가는 눈빛만으로도 즐거움이 넘친다.
# 박지원, <여경보(與敬甫)>
- 교묘하기도 하구나! 이 인연이 하나로 모임은. 누가 그 기미를 알겠는가? 그대는 나보다 먼저 나지 않고, 나 또한 그대보다 뒤에 나지 않아 나란히 한 세상에 살고 있고, 그대는 흉노처럼 얼굴 껍질을 벗기지 않고 나도 남쪽 오랑캐같이 이마에 문신하지 않으며 함께 한 나라에 살고 있소. 그대는 남쪽에 살지 않고 나는 북쪽에 살지 않아 더불어 한 마을에 집이 있고, 그대는 무(武)에 종사치 않고 나는 농사일을 배우지 않으며 같이 유학에 힘을 쏟으니, 이것이야말로 큰 인연이요 큰 기회라 하겠소.
비록 그러나 말이 진실로 같고 일이 진실로 합당하다면, 차라리 천고를 벗삼고 백세의 뒤를 의혹하지 않음이 나을 것 같구려. -
정작 박지원이 하고 싶은 말은 끝의 두 줄에 담겨 있다. 일껏 말해 놓고서, 품은 생각이 같고 사리에 맞는다면 그래도 차라리 천고의 위를 벗으로 삼고, 백세의 뒤에 올 사람을 믿는 것이 낫겠다고 했다. 다시 말해 그대와 나는 이렇듯 가까운 인연을 공유하고 있지만, 너하고는 생각도 다르고 마음도 안 맞아 안 놀겠다는 내용이다.
# 홍길주, <이생문고서(李生文藁序)>
- 사람이 일용기거(日用起居)와 보고 듣고 하는 일이 진실로 천하의 지극한 문장이 아님이 없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스스로 글이라 여기지 아니하고 반드시 책을 펼쳐 몇 줄의 글을 어설프게 목구멍과 이빨로 소리 내어 읽은 뒤에야 비로소 책을 읽었다고 말한다. 이 같은 것은 비록 백만 번을 하더라도 무슨 보람이 있겠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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