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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프롤로그 - 호모 코레아니쿠스를 찾아서
근대화 - 프랑켄슈타인 - 낯선 근대인을 만나다
인간개조 / 기계화 / 회사인 / 출세를 위한 몸 / 국가대표 / 매스게임 / 속도전 / 존재미학
전근대성 - 죽은 양반의 사회 - 미완의 프로젝트
전사들의 나라 / 정념의 제국 / 데카르트와 황우석 / 전 인민의 양반화 / 위계를 위한 예법 / 식탁의 해부학
오감 / 취미 / 어린이와 어른이 / 카리스마 / 벤다이어그램 / 죄의식과 수치심 / 공포와 습관
미래주의 - 디지털, 사이보그 그리고 짝퉁 - 테크네와 메트릭으로 무장하라
미래주의 / 디지털 구술문화 / 디지털 삼국지 / 새로운 문맹 / 글쓰기의 르네상스 / 분열자 / 디지털 유리알 유희
역사의 종언 / 짝퉁 / 유령 / 이미지의 마법 / 아우라의 파괴 / 토털 키치 / 토털 스크린 / 된장남과 된장녀
에필로그 - 너 자신을 디자인하라
진중권.
저서 '미학 오딧세이'로 유명하지만 그보다는 '논객'이라는 수식어로 더 친숙한 이름이다.
2007년 처음 발간된 이 책은 그 특유의 날카로운 시선을 통해 바라본 한국과 한국인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 시선은 크게 셋으로 나뉘는데, -더욱 크게 보자면 단 하나, 바로 '근대화'라는 키워드를 두고 그 전후로 바라보았다고도 할 수 있겠다- 근대(modern)와 근대 이전(premodern), 그리고 근대 이후(postmodern)이라는 큰 틀이 바로 그것이다.
그가 인용하거나 차용한 개념들 중 일부는 그나마 조금 접해본 적이 있는 것들이었으나, 대부분은 다소 낯선 것들이었다. (혹은 설핏 안다고 생각했으나 그의 글 안에서 쓰인 맥락으로 보건대 안 것이 아니었던) 해서 나로서는 드물게 같은 문장을 덮었다 다시 펴가며 몇 번을 되읽어나간 책이었다.
최근 약 두어달 정도 글을 읽지 않는 동안, 상념이라 부르기도 민망한 잡념들이 균사처럼 머릿 속 여기저리를 날아다니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들이 자리잡고 자라날, 이어져 나갈 토대/토양이 없음을 알기에 이 현상을 마주하는 내 개인적 심경은 그리 유쾌하지만은 못하다.
현재 발디딘 곳을 바라보고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마주하기 위한 반성은 다음 걸음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필요한 것이지, 아무 것도 변하지 않은 채로 반성만 한다고 다음 걸음이 디뎌지는 것도 아니다. 이런 경우는 반성에 현재까지 허비하고 잇는 것이다. 지나친 자기 반성은 마약과도 같아서 그 순간의 날카로움과 아픔이 반드시 미래의 달콤함을 약속하는 것이 아님을 알면서도, 마치 약속된 보상이 있는 양 열심히 제 살을 쥐어뜯게 된다. 이 또한 정도를 넘어서면 무의미하다 못해 쓸데없는 짓이다.
생각의 정제.
그것이 주는 낯설음은 낯설음에 멈추지 않고 퍼져나가, 이윽고 낯섦 자체가 하나의 아픔이 되어 무의미한 자기 반성을 이끌어내려 한다. 관성을 유지하고자 하는 것은 비단 질량계만이 아닌 모양이다. 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지금, 이 순간이 되어야 하며 그렇게 사는 것이 현재를 온전히 살아나가는 것이 아닐까.
- 해서 생각이 나면 말을 먼저 던져두기보다 조금이라도 행한 뒤 평을 해야겠다 싶다. 그것이 바른 의미의 자기반성일 것이다. 한데 지금 이리 주절거리는 것들도 결국 생각의 정제와는 먼, 구술적이고 즉각적인 낙서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어 마주할 낯도 없는데 불현듯 면구스러워진다.
부족한 생각의 조각들이나마 조금 남겨 놓자면, 진중권의 글을 읽어나가며 낯설거나 새롭기보다는 공감되는 부분이 많았다. 그러나 비슷하게 느꼈다고 생각하는 나를 다시 들여다보면 그저 말초적인 감각의 수준, 가호에 그쳐 있었다. 그에 대해 관심을 두고 생각을 이어나가보지도, 다른 무엇과 연결시켜보지도, 아니 그에 앞서 문장화시켜보지도 않은 수준의 것을 이미 다듬어놓은 이의 구체화된 글을 읽으며 그것이 내 생각이었던 양 대강 덧씌우며 주억거리는 것이- 참-. 이전들과는 달리 기묘한 느낌을 느꼈다.
초반 일부분에서는 한병철의 '피로사회'가 연상되었는데, 채 다 읽지 못하고 던져두었던 그 책을 다시 읽어보고 싶다.
지나친 가지는 나무를 병들게 하나, 가지가 하나도 없는 나무 역시 정상은 아니다.
가지가 뻗을 정도의 줄기를 이루지 못하고 고만 고만한 풀잎들을 끌어모으며 땅에 코를 박고 헤맨들 그것들이 고목이 될 일은 요원할 것이다. 반대로 지나치게 뻗어나가는 가지들을 쳐내지 못하고 퍼진다면 그 역시 관목에 그칠 것이다.
잡스러우면서 내용없는 주절거림, 여기서 끝.
# 이 책에서 이어서 읽고 보고 싶은 것들.
- 월터 J. 옹 <구술문화와 문자문화>
- 노르베르트 엘리아스 <문명화과정 1,2>
- 빌렘 플루서 <디지털시대의 글쓰기>
- 장 보드리야르 <시뮬라시옹>
- M. 엘리아데 <성과 속>, <종교형태론>
- 레비 스트로스 <야생의 사고>, <신화학 1,2>
- 대니얼 고든 "어떤 나라"
<발췌>
# 길들이기는 회사에 들어가기 전에 이미 시작된다. 최근 입사시험에서 '면접'의 중요성이 커지고 있다. 실력보다 인성이 더 중요하다는 인식 때문이라는데, 인터넷에 떠도는 '면접시험 프로그램'을 보면, 인성은 물론이고 화법과 복장까지 기업이 선호하는 인간상을 제시해놓고 있다. 이 순간에도 수많은 젊은이들이 이런 프로그램에 맞추어 자신의 신체를 뜯어고치려 애쓰고 있을 것이다. 이는 경쟁을 매개로 시장이 행사하는 자발적 성격의 강제라 할 수 있다.
국가 주도의 경제가 민간 주도로 넘어가면서, 오늘날에는 국가를 대신하여 시장이 인간의 신체를 개조하는 역할을 넘겨받았다. 요즘 신문 지면에서 '맞춤형 인재'라는 말을 종종 본다. 이 말은 주로 대학에서 기업의 요구에 맞는 인간을 생산해주는 시스템을 가리킨다. 이제 인간도 양복처럼 맞춰진다. 여기서 일어나는 일은 산학협동만이 아니다. 기업의 요구대로 맞추어진 인재는 지식이나 관심사 뿐 아니라 세계관 자체도 기업의 코드에 맞추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면접인>
# 외국인을 만나면 제일 먼저 "너 어느 나라에서 왔니?" 라고 묻는다. 이 질문은 한 개인을 졸지에 특정한 나라의 국가대표로 만들어버린다. 이것이 바로 유난히 애국적인 나라의 '국가주의 코드'다. -<국가대표>
# 레스토랑에 앉아 있는 것은 '노동'이 아니라 '여가'에 속하는 활동이다. 식사를 하거나 술을 마실 때에 나는 협업의 '집단적' 시간표에서 벗어나 나 자신만의 사적 시간을 즐긴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노동의 기계적 속도가 여가의 영토까지 정복했다. 여가 시간마저 노동의 집단적 시간표에 따라 조직된다. 이것은 우리의 문화가 '삶을 위해 일하는 문화'가 아니라 '일을 위해 사는 문화'임을 의미한다. -<속도전>
# '궁정적 합리성'은 그 후 제3 신분인 부르주아 계급이 궁정에 진출하면서 서서히 '상인적 합리성'으로 변모해간다. 궁정의 부르주아는 귀족계급의 고귀한 '혈통'에 열등의식을 느끼며 그들의 행동방식을 모방하는 데에 급급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귀족의 교양과 예법을 완전히 흡수하면, 시민계급은 이제 그것을 시대의 요구에 맞게 변형시킨다. 이로써 아직 중세적이었던 '궁정적 합리성'은 근대의 '상인적 합리성'으로 변화한다. .....
귀족계급에서 시민계급으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문명화는 근대적 형태로 변형된다. -<전사들의 나라>
# 그의 무례는 아마 직업에 대한 독특한 관념에서 나온 것이리라. 즉 그는 제 직업을 '기능적'인 것이 아니라 '신분적'인 것으로 이해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그래서 자신에게 온갖 예를 갖출 것을 요구하되, 자신은 시민들을 막 대해도 된다고 굳게 믿는 것이다. 여기서 예절을 바라보는 수직적 관점과 수평적 관점은 정면으로 충돌한다. 수평적 예의는 수직적 무례로 간주되고, 수직적 예의는 수평적 무례를 낳는다. -<위계를 위한 예법>
# 외국의 공항에서 한국어만 들리는 또 하나의 사정이 있다. 공공장소에서도 한국인은 멀리 있는 상대를 부를 때에 큰 소리로 외치곤 한다. "야, 어디 가?" 멀리 있는 상대도 소리를 지른다. "기다려. 화장실 좀 다녀올게!" 같은 상황에서 서구인이라면 직접 걸어서 상대에게 다가간 후에 조용한 목소리로 물을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목소리가 벗어나서는 안 될 공간의 범위가 있으며, 그 영역을 넘어설 경우 타인의 평온을 침해하게 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오감>
# 성인에 비해 시야가 좁은 아이들은 종종 공을 쫓아서 차도로 뛰어든다. 공은 눈에 보이는데, 달려오는 차는 보이지 않는 것이다. 어른들도 마찬가지여서 시야가 좁은 이는 좌충우돌 크고 작은 에티켓의 접촉사고를 내게 마련이다. 물론 자신은 그 사실을 의식조차 못하겠지만. 바로 여기서 '한국인은 남을 배려할 줄 모른다'는 푸념이 나온다. 하지만 배려하고 싶은 마음이 없어서 그러는 것 같지는 않다. 내가 보기에 거기에는 좀더 깊은 원인이 있다.
한마디로 한국인은 근거리 지각에 따르는 쾌, 불쾌에 그다지 민감하지 않다. 일단 내가 불쾌해야 남도 불쾌할 것이라는 데에 생각이 미치지 않겠는가. 자신이 불쾌하게 느끼지 않는 행동은 당연히 남에게도 별 생각 없이 하게 된다. 한마디로 이것은 '배려'의 문제이기 이전에 먼저 '감각'의 문제다. 이른바 에티켓의 전제가 되는 것은 바로 불쾌를 불쾌로 느끼는 미적 취미다. -<오감>
# 루리아라는 학자가 러시아 혁명 직후 아직 구술문화 단계에 있는 촌락공동체에서 필드 워크를 했다. "당신의 성격을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이 물음에 한 농민은 이렇게 대답했다. "그걸 왜 저한테 묻지요? 동네 사람들에게 물어보세요." 자기가 자기를 평가하는 '반성'의 습속은 구술문화엔 낯선 것이다. 다른 이는 화를 버럭 내며 말하기를, "우리는 잘하고 있어요. 그렇지 않다면 다른 일들이 우리를 이렇게 대접해주겠어요?" 구술문화는 이렇게 평가의 기준을 다른 이들의 반응에서 찾는다.
우리가 자라면서 부모로부터 늘 들었던 말이 바로 '남 보기 부끄럽지 않게 살라'는 소리. 학교에서도 '누가 뭐라 하더라도 네가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하며 살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이렇게 남의 시선을 의식하는 사회에서는 삶의 목표마저 남의 눈에 맞춰지고, 사람들은 남의 욕망을 욕망하게 된다. 중요한 것은 누가 뭐라 하든 올바로 사는 것, 혹은 누가 뭐라 하든 내 멋대로 사는 게 아니라, 이른바 '남부럽지 않게' 사는 것, 혹은 '여봐란 듯이' 사는 것이 된다. -<죄의식과 수치심>
# 생존의 공포는 개개인에게 '동일성(identity)'에 대한 열망을 낳고 결국 모두의 획일성으로 실현된다. 놀이의 기쁨은 '차이(difference)'에 대한 욕망에서 나와서 혁신과 창안으로 이어진다. 책을 그리고, 그림을 그리고, 음악을 듣는 것만으로 창의성이 생기지 않는다. 한국에서 창의성의 결여는 두개골 용적의 한계가 아니라 신체 전체의 한계. 그것은 인식론적 현상이 아니라 이제까지 한국인이 살아온 역사를 반영하는 존재론적 현상이다. -<공포와 습관>
# 구술문화가 강한 곳에서는 인터넷의 사용도 남다르다. 문자문화에서 인터넷 사용이 '정보적'이라면, 구술문화가 강한 곳에서의 인터넷 사용은 '친교적'이다. 문자문화의 인간들은 정보가 필요할 때에만 인터넷에 접속해 정보를 찾은 후에는 곧바로 나온다. 반면 구술문화가 강한 한국의 네티즌들은 찾을 정보가 없어도 인터넷에 접속하여, 여기저기 남의 블로그나 홈페이지로 마실을 다닌다. 문자문화에서 인터넷은 정보의 교류를 위한 망이나, 구술문화에서 인터넷은 관계 맺음의 망으로 기능한다. -<디지털 구술문화>
# '미래의 문맹자는 글자를 못 읽는 사람이 아니라 그림을 못 읽는 사람'이라는 말이 있다. 문자문화 이후에 다시 영상문화가 찾아왔다. 하지만 문자가 없던 선사시대의 영상과 달리 21세기의 영상은 텍스트로 그린 것이다. 프로그래밍을 하는 이들은 영상의 바탕에 깔린 문자-숫자 코드를 읽는다. 반면 프로그래밍 당하는 이들은 영상을 세계로 착각한다. 그들이 영상을 대하는 태도는 주술적이다. 선서시대의 원시인이 벽화 위의 이미지를 현실로 착각하는 새로운 주술 속에 산다.
프로그래밍을 하는 이들은 문자-숫자 코드로 그림을 그리고, 이로써 가상의 '창조자'가 된다. 반면 프로그래밍을 당하는 사람들은 그림을 세계로 받아들임으로써 가상의 '소비자'에 머문다. -<새로운 문명>
# 토론 사이트에 의견을 올리고, 홈페이지에 제 이야기를 쓰고, 사실 오늘날처럼 많은 이들이 글쓰기를 하는 시대도 일찍이 없었다. 하지만 그로써 문자문화가 강화되는 것은 아니다. 인터넷 글쓰기는 구술 문화에 가깝다. 오랜 사색으로 정제해낸 생각을 주옥같은 언어에 담는 독백적 글쓰기가 아니라, 반응이 오가는 상황에서 입에서 나오는 소리를 곧바로 글자로 옮겨 적는 대화적 글쓰기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글쓰기의 범람 속에서도 글쓰기는 위기에 빠질 수 있는 것이다. -<글쓰기의 르네상스>
# 서구 사회는 튼튼한 문자문화의 바탕 위에서 천천히 영상문화로 이행하고 있지만, 한국은 문자문화가 허술한 상태에서 급속히 영상문화로 넘어가고 있다. 여기에는 어떤 불안함이 있다. 문자 능력의 바탕이 없으면 아무리 진화한 정보적 신체라 하더라도 디지털 '기능공'의 수준을 넘지 못하기 때문이다. 문자문화가 강한 곳에서는 네트워크를 통해 지식과 정보가 오가지만, 문자문화가 약한 곳에서는 그저 뜨거운 교감과 반감이 오갈 뿐이다. 한국의 인터넷은 공허하다. -<너 자신을 디자인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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