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지가 무척 마음에 들었던 책.
처음 이 책의 표지에서 '사막을 사랑한 미녀와 그녀를 사랑한 야수의 아주 특별한 사막 신혼일기'라는 문구를 읽었을 때까지는 큰 기대가 없었다. 출판사 '막내집게'가 사라지며 저가에 풀린 김에 구매해두었었는데, '싼마오'라는 저자도 생소했고 적당히 달달한 신혼여행 에세이려니 싶어 구석에 던져두었더랬다.
그러다 가벼운 재생지의 재질과 표지가 마음에 들어 집어들었는데, 저자 소개를 읽으며 상당히 놀랐다. '싼마오'는 우리나라에는 거의 소개되어 있지 않은 작가다. 2011년, 좋은생각에서 '허수아비 일기'라는 산문집을 추가로 발매하긴 했으나 27권의 전집이 존재한다는 그녀의 작품 중 한국어로 번역된 책은 그 책과 막내집게에서 내놓은 '사하라 이야기'와 '흐느끼는 낙타', 총 세 권이 전부이다.
사막을 사랑하게 되어 반드시 직접 사하라 사막을 보아야만 하겠다며 떠난 그녀도, 그런 그녀를 좇아 미리 사막으로 떠난 호세도 기인이라면 기인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이방인, 여행자로 사막을 찾은 것이 아니라 사막을 사랑하는 이들로 그곳을 향했던 것이다. 그래서 태양 아래에서는 녹아내릴 듯 불타오르고, 달 아래에서는 영하로 얼어붙는. 모래 바람이 휘몰아치는 그 사막 한가운데에 정착해 그들만의 궁전을 이룩한다.
몇 장의 사진과 스쳐지나가는 여행객으로서의 시선과 감성을 담은 글이 아니라 좋았다. 처음에는 싼마오의 재기넘치는 글들에 당황하기도 했지만, 중반을 넘어서면서부터는 어째서 그녀가 그토록 많은 사랑을 받았던 작가인지 수긍할 수 있었다. 그녀는 그저 철 없고 발랄한 중국(대만) 아가씨가 아니었다. 자신이 원하는 바를 잘 알고 있고 그 목소리에 귀 기울일 줄 아는 사람이었고, 꿋꿋함을 잃지 않고 사랑하는 모래 언덕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사람이었으며,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우면서도 그 모든 것을 사랑할 줄도 아는 사람이었다. 무엇보다 단편적으로나마 묻어나는 그녀의 소양은 문득 문득 나를 놀라게 했다.
위화, 루쉰, 싼마오. 그리고 모옌. (모옌은 아직 읽지 못했다)
중국 작가에 대한 이미지라는 것이 조금은 생겨날 듯 하다.
그 어떤 순간에도 웃음과 위트를 잃지 않는 따뜻함.
때로는 눈을 번쩍 치켜뜨게 만드는 대담함과 엉뚱함.
(물론 아큐정전은 그 웃음조차 씁쓸해지긴 하지만)
'흐느끼는 낙타' 를 읽기 시작했다.
요즘은 책을 읽는 절대 시간이 많이 준데다, 글씨 위로 자꾸만 떠오르는 생각들이 있어 예전처럼 읽기 어렵다.
책을 읽어 방을 정리하는 건 포기.... 주말에는 어떻게든 방을 정리해볼 생각이다.
싼마오와 호세의 집에 천국새 한 다발을 들고 찾아가고 싶다.
[발췌]
# 나는 여성 해방 운동의 열렬한 지지자는 아니지만, 결혼해서 나의 독립적인 인격과 자유로운 마음까지 잃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결혼하고 나서도 나는 '누가 뭐래도 내 방식대로' 살 거고, 거기에 지장이 있다면 결혼하지 않겟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강조했다.
호세는 그때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바로 당신이 '당신 방식대로' 사는 걸 좋아하는 거야. 당신만의 개성과 기풍을 잃어버린다면 당신하고 결혼할 필요가 뭐가 있어!"
오호라, 자못 사내 대장부다운 논조인지라 나는 마음을 푹 놓았다.
# 호세의 가장 큰 장점은 내가 무슨 일을 하더라도, 다른 사람들은 미친 짓이라고 비웃는 일까지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호세와 함께 있으면 무척 유쾌했다.
# "집에 가서 가구 만들자. 탁자에 못 박을 게 남았다며. 나도 커튼을 반밖에 못 만들었어."
"결혼 전날에도 일을 하라고?"
보아하니 호세는 미리부터 결혼을 축하하며 게으름을 피우고 싶은 것이었다.
"그럼 뭐 하고 싶은데?"
"당신이랑 영화보고 싶어. 내일부터 당신은 내 여자 친구가 아니잖아."
그래서 우리는 사막에서 단 하나뿐인 삼류 영화관에 가서 <그리스인 조르바>를 보았다. 이렇게 나는 나의 처녀 시절에 작별을 고했다.
# 끝없이 광활한 하늘 아래 가득 펼쳐진 금빛 모래 위를 오직 우리 두 사람의 작은 그림자만이 걷고 있었다. 사방은 죽은 듯이 고요했다. 사막, 바로 이 순간의 사막은 더없이 아름다웠다.
"당신은 아마 걸어서 결혼하러 가는 최초의 신부일 거야."
호세가 말했다.
"나는 낙타를 타고 고함을 지르며 달려가고 싶었다고. 그 기세가 얼마나 웅장하겠어! 으, 너무 안타깝다!"
나는 낙타를 타고 가지 못하는 것이 못내 한스러웠다.
# 나는 무척 감동했다. 사막에서 신선한 우유가 든 케이크를 맛보는 게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더구나 케이크 위에는 결혼 예복을 입은 한 쌍의 인형이 서 있는 게 아닌가! 웨딩드레스를 입은 신부 인형은 눈까지 깜빡였다. 나는 어린아이처럼 인형 두 개를 케이크에서 뽑으며 외쳤다.
"인형은 다 내 거야!"
"당연히 당신 거지. 설마 내가 그걸 뺏어 가겠어?"
호세는 케이크를 잘라 건네주고는 그제야 내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 주었다. 비로소 우리의 결혼식은 모두 끝났다.
# 저녁을 먹고 난 후, 우리는 옥상으로 올라갔다. 등불을 켜자 한 떼의 날벌레들이 몰려들었다. 벌레들은 쉬지 않고 불빛 주위를 맴돌았다. 마치 그 불빛이 유일한 삶의 목적인 것처럼. 우리는 그 날벌레들을 바라보며 말없이 앉아 있었다.
"무슨 생각해?"
호세가 물었다.
"이 날벌레들은 불을 향해 돌진할 때 극도로 행복하겠지."
# 토요일이었다. 이번 주말에는 사막을 여행할 계획이 없었던 호세와 나는 밤새도록 책을 읽었다.
# "혼자 오겠다고 그렇게 우기더니. 내가 아니었으면 당신도 베이베 소리 들었어!"
하지만 나는 지붕 위의 저 미치광이들을 보는 게 즐거웠다. 적어도 저렇게 신바람 나는 죄수들은 본 적이 없었다. 마치 <금고기관>의 한 장과도 같은 장면이었다.
# "괜찮아요. 감상할 줄 아는 사람에게는 값을 매길 수 없이 귀한 거고, 이해 못하는 사람에게는 한 푼의 가치도 없는 거니까요."
# 사람이란 참 이상하다. 다른 사람이 자신을 증명해주기 전에는 자기 가치를 모르는 경우가 많다.
-> 글을 읽는 내내 느꼈지만, 호세와 싼마오는 참으로 잘 어울리는 한 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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