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2017)

[줄리언 반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일루젼 2012. 12. 18. 1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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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 8점
줄리언 반스 지음, 최세희 옮김/다산책방

268쪽 | 188*127mm | ISBN(13) : 9788963708386

2012-03-26

 

푸핫. 9월에 읽은 책을 12월의 중순도 넘은 지금에서야 리뷰를 쓰다니..

생각을 정리하고 숙성시켜 쓰기보다는 가물 가물 기억도 희미한 줄거리나 더듬는 게 아닐까 걱정된다.

 

2011 부커상 수상작,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훌륭한 반전 소설, 마지막 장을 읽어내리는 순간 당신은 다시 첫 장을 펴게 될 것이다!'라는 홍보문구 대로 행하게 된 소설.

 

하지만 이 문장의 의미는 사람마다 조금씩 다르게 느낄 것 같다.

앞을 다시 펴보게 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지만, 내 경우에 그것은 몸서리 쳐지는 전율에 의한 것은 아니었다.

이 소설이 그렇게 강렬한 반전을 선사할 수 있는 것은, 어쩌면, -일본 추리 소설 대다수가 그러하듯이- 모든 것을 명확하게 풀어내 독자들의 눈 앞에 들이대기 보다는 조금은 가리워진 채로 남겨두어 여전히 관음 중인 듯한 느낌을 주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본디 문 틈으로 빼꼼히 들여다보는 비밀스러움이 더 달콤하고 파격적인 법이니까....

 

이후 쓸 내용에는 결말 및 내용 전개에 대한 스포가 상당 부분 포함될 수 있으므로, 아직 책을 읽지 않은 채 소개 글을 원해서 읽는 분들이 계시다면 여기까지만 읽으시길 권한다.

 

 

콜린, 앨릭스, 토니, 그리고 에이드리언.

이 넷은 고교 시절 만나 각자의 생각을 나누기도 하고 지루한 시간을 흘려보내기도 하며 돈독한 친우가 되었다.

그리고 각자 대학에 진학한 넷. 주 화자인 토니가 베로니카라는 여자친구가 생기고, 그녀를 다른 친구들에게 소개하면서 비극은 시작된다.

 

소설은 시간을 넘나들며 전개되는데, 소설의 첫 번째 반전은 누군가의 기억이 실재와 얼마나 동떨어질 수 있는가 하는 점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면서 나타난다. 설사 그 행위 당사자라 할지라도 -보통은 가해자 쪽이- 얼마나 왜곡되게 기억할 수 있는 것인지. 그리고 제대로 기억되지조차 못한 그런 행위의 파편이 어떻게 작용하고 돌아갈 수 있는 것인지.

 

친구였으면서도 조금은 경외와 선망의 대상이 되었던, 자랑스러운 에이드리언.

그가 자신의 여자친구였던 베로니카와 사귀기로 헀다는 연락을 받은 토니는 분노와 실망, 절망과 배신감을 어찌하지 못하고 그런 감정들을 고스란히 담은 편지를 그와 그녀에게 보낸다. 그러나 그 문구와 내용은, 몇 십년이 지난 토니의 기억과는 전혀 다른 어떤 것이었다. 그리고 이해할 수 없었던 에이드리언의 갑작스런 자살과도 연결되는, 두려운 어떤 것이었다.

 

 

토니는 에이드리언의 자살 후 몇 십년이 지나서야 유언으로 그의 일기장을 받아주었으면 좋겠다는 메세지와 함께 약간의 돈을 남긴 포드 부인(베로니카의 어머니)으로 인해 다시 에이드리언과 베로니카와 마주하게 된다. 어떻게든 일기장을 주지 않으려는 베로니카를 설득하기 위해 협박하기도 하고 달래기도 하며 그녀와 접촉하는 동안 그는 상상도 하지 못한, 조각난 진실의 파편들과 마주하게 되는데...

 

에이드리언(J)은 베로니카의 아이가 아닌 그녀의 남동생이 되는 것이며, 그로써 토니의 예언은 완전에 가깝게 실현된 것이고,

결국 에이드리언은 고교 시절의 롭슨과 다를 바가 없었던 것이다...

 

 

혼란스러운 머리와 한것 뒤집혀 울렁이는 마음으로 마지막 책장을 덮었었다.

 

나까지 조각조각 난 듯한 기분이었는데... 약 한 달 반이 지난 지금에 와서는 그랬었다는 기억만이 남아잇으니...ㅋ

 

이번에는 '가독성'을 기준을 기준으로 선정했다는 심사위원 평과 함께 많은 논란 속에 2011 부커상을 수상한 문제작. 

 

꼭 한 번 읽어봤으면 하는 책이다.

 

 

 

 

[발췌]

 

# 우리는 시간 속에 산다. 시간은 우리를 붙들어, 우리에게 형태를 부여한다. 그러나 시간을 정말로 잘 안다고 느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지금 나는 시간이 구부러지고 접힌다거나, 평행우주 같은 다른 형태로 어딘가에 존재할지도 모른다는 이론적인 얘길 하는 게 아니다. 그럴리가, 나는 일상적인, 매일매일의, 우리가 탁상시계와 손목시계를 보며 째깍째깍 찰칵찰칵 규칙적으로 흘러감을 확인하는 시간을 말하는 것이다. 이 세상에 초침만큼 이치를 벗어나지 않는 게 또 있을까. 하지만 굳이 시간의 유연성을 깨닫고 싶다면, 약간의 여흥이나 고통만으로 충분하다. 시간에 박차를 가하는 감정이 있고, 한편으로 그것을 더디게 하는 감정이 있다. 그리고 가끔, 시간은 사라져 버린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것이 정말로 사라져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 우리 셋은 에이드리언 몰래 그의 상황을 이리저리 따져본 후, 하나의 이론을 정립했다. 행복한 가족생활을 영위하려면 애초에 가족을 만들지 말아야 한다는 것, 아니면 최소한 함께 살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 "음, 한 가지 의미에서 보자면, 저는 제가 알지 못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습니다. 그건 철학적으로 자명합니다."
그는 전에 그랬듯 잠시 뜸을 들였고, 그 바람에 우리는 그가 은근히 조롱을 하는 건지, 아니면 우리 모두의 차원을 넘어서 고도로 진지한 상태인 건지 다시 한 번 궁금해졌다.
"사실, 책임을 전가한다는 건 완전한 회피가 아닐까요? 우린 한 개인을 탓하고 싶어하죠. 그래야 모두 사면을 받을 테니까. 그게 아니라면 개인을 사면하기 위해 역사의 전개를 탓하거나. 그도 아니면 죄다 무정부적인 카오스 상태 탓이라 해도 결과는 똑같습니다. 제 생각엔 지금이나 그때나 개인의 책임이라는 연쇄사슬이 이어져 있는 걸로 보입니다. 그 책임의 고리 하나하나는 모두 불가피한 것이었겠지만, 그렇다고 모두가 아무렇지도 않게 다른 모두를 비난할 수 있을 정도로 그 사슬이 긴 건 아니죠. 하지만 물론, 책임소재를 묻고자 하는 저의 바람은 실제로 일어난 사건에 대한 공정한 분석이라기보다는 제 사고방식의 반영에 가까운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것이야말로 역사의 중점적인 문제 아닌가요, 선생님? 주관적 의문 대 객관적 해석의 대치, 우리 앞에 제시된 역사의 한 단면을 이해하기 위해, 역사가 해석한 역사를 알아야만 한다는 사실 말입니다."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그는 장난을 치고 있지 않았다, 전혀. 추호도.
조 헌트 영감은 손목시계를 들여다보더니 미소를 지었다.
"핀, 내가 앞으로 오 년 후면 은퇴를 하는데, 자네만 좋다면 내 참고서적 한 권을 물려주고 싶네."
영감 역시 장난치는 게 아니었다.

 

# 인생에 문학 같은 결말은 없다는 것. 우리는 그것 또한 두려워했다. 우리 부모들을 보라. 그들이 문학의 소재가 된 적이 있었나? 기껏해야 진짜의, 진실된, 중요한 것들의 사회적 배경막의 일부로서 등장하는 구경꾼이나 방관자 정도라면 모르겠다. 그 중요한 것들이 무어냐고? 문학이 아우르는 모든 것이다. 사랑, 섹스, 윤리, 우정, 행복, 고통, 배반, 불륜, 선과 악, 영웅과 악당, 죄악과 순수, 야심, 권력, 정의, 혁명, 전쟁, 아버지와 아들, 어머니와 딸, 사회에 맞서는 개인, 성공과 실패, 살인, 자살, 죽음, 신 같은 것들. 아, 외양간올빼미도 있군. 물론 다른 종류의 문학도 있다. 연극적이고, 자기반영적이고, 눈물을 자아내는 자전적인 문학. 하지만 그런 건 지루한 자위에 지나지 않는다. 진정한 문학은 주인공들의 행위와 사유를 통해 심리적이고, 정서적이고, 사회적인 진실을 드러내야 했다. 소설은 등장 인물이 시간을 거쳐 형성되어가는 것이니까.

 

# 리처드 호가트와 스티븐 런시먼, 요한 하위징아와 한스 아이젱크, 윌리엄 엠프선, 그리고 존 로빈슨 주교의 [하나님께 맹세컨대]와 테렌스 래리의 만화 시리즈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 영국의 사회문화학자, 영국의 역사학자, [중세의 가을]을 쓴 역사학자, 독일의 심리학자, 영국 비평가이자 시인, 영국 감리교회 주교로 섹스, 낙태, 여성해방운동을 논한 자유주의적 신학서.

 

# T.S. 엘리엇, 오든, 맥니스, 스티비 스미스, 톰 건, 테드 휴즈, 그리고 조지 오월과 아서 쾨슬러의 '레프트 북클럽' 판본들과 소가죽으로 장정한 19세기 소설들 몇 권, 아서 래컴이 삽화를 그린 동화책 두어 권과 그녀의 마음의 양식인 [성 안의 카산드라]가 꽂혀 있었다. 나는 한순간도 그녀가 그 책들을 다 읽진 않았을 거라고 의심하거나, 그것들이 소장가치가 있는 책일까를 두고 의문을 제기하진 않았다. 더 나아가서, 그 책들은 그녀의 마음과 성격의 유기적인 연장선인 듯 여겨졌다. 반면에 나의 책들은 나와는 기능적으로 분리된 것으로, 내가 장차 본받으려는 특성을 각인시키기 위해 압박을 가하고 있는 듯 느껴졌다. 이런 차이점에서 나는 약간의 공포를 느꼈고, 그래서 시집들이 꽂힌 그녀의 책꽂이를 쭉 훑어보다가 필 딕슨 선생의 말을 빌려 입을 열었다.
"테드 휴즈가 노래할 동물이 바닥나면 어떻게 될까 궁금한 건 당연한 일이지."

 

 # 그는 행위를 근거로 정신 상태를 판단할 수 있다고 했다. 헨리 8세를 비롯한 기타 등등의 역사에서 그 사례를 찾을 수 있다고 했다. 반면에 개인의 삶에서는 그 반대가 진실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즉, 현재의 정신 상태를 근거로 과거의 행위를 판단할 수 있다.

# 우리는 살면서 좌충우돌하고, 대책없이 삶과 맞닥뜨리면서 서서히 기억의 창고를 지어간다. 축적의 문제가 있지만, 에이드리언이 의미한 것과는 무관하게 다만 인생의 토대에 더하고 또 더할 분이다. 그리고 한 시인이 지적했듯, 더하는 것과 늘어나는 것은 다른 것이다.

 

# 이십대에는 자신의 목표와 목적이 혼란스럽고 확신이 서지 않는다 해도, 인생 자체와, 또 인생에서의 자신의 실존과 장차 가능한 바를 강하게 의식한다. 그후로... 그후로 기억은 더 불확실해지고, 더 중복되고, 더 되감기하게 되고, 왜곡이 더 심해진다. 젊을 때는 산 날이 많지 않기 때문에 자신의 삶을 온전한 형태로 기억하는 게 가능하다. 노년에 이르면, 기억은 이리저리 찢기고 누덕누덕 기운 것처럼 돼버린다.

 

# "무슨 책 읽어?"
베로니카가 내 쪽으로 문고판 책의 표지를 보여주었다. 슈테판 츠바이크의 책이었다.
"드디어 알파벳 순서의 마지막까지 섭렵했구나. 츠바이크 다음에 다른 작가는 없을 것 아냐."
갑자기 초조해졌던 이유는 뭘까? 나는 또다시 스무 살짜리처럼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슈테판 츠바이크의 책은 한 권도 읽은 적이 없었다. 

 

# 시간을 부정하는 사람들은 말한다. 마흔은 아무것도 아니야, 쉰 살은 돼야 인생의 절정을 맛보는 거지, 예순은 새로운 마흔이야..... 시간에 대해 내가 아는 건 이 정도다. 객관적인 시간이 있다. 그리고 주관적인 시간도 있다. 가령, 손목의 요골동맥 바로 옆에 시계의 앞면이 오도록 차는 경우. 이런 사적인 시간이야말로 진정한 시간이며, 기억과 맺는 관계 속에서 측정될 수 있다. 

 

# 그런데도 나중에 일어날 일을 명명하는 행위 자체 -콕 집어 나쁜 일이 일어나길 바라자 실제로 똑같이 나쁜 일이 일어나는 것- 에는 여전히 몸이 오싹해질 만큼 초자연적인 데가 있다. 저주를 퍼부었던 젊은 시절의 나와 그 저주가 실제로 일어나는 것을 목도한 노년의 내가 느끼는 감정은 사뭇 다르다는 사실. 이는 말도 안 될 정도로 서로 무관하다.

 

# 인간은 생의 종말을 향해 간다. 아니다, 생 자체가 아니라, 무언가 다른 것, 그 생에서 가능한 모든 변화의 닫힘을 향해. 우리는 기나긴 휴지기를 부여받게 된다. 질문을 던질 시간적 여유를.

 

# <옮긴이의 말>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의 탁월함은 차진 스토리 안에 삶과 시간과 기억이라는 문제를 역사와 개인의 관점에서 성찰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 시작은 역사가 무엇이냐는 교사의 질문에 에이드리언이 라그랑주를 인용해 '역사는 부정확한 기억이 불충분한 문서와 만나는 지점에서 빚어지는 확신'이라고 대답하는 장면이다. 우리가 인류의 진실한 도정이라 믿고 있는 역사는 사실 역사학자 개인의 해석이 담긴 '허구'에 가깝다는 이른바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역사관은 낯선 것이 아니다. 그러나 토니 개인의 기억과 진실의 문제로 초점이 모이면서, 이 명제는 반스 특유의 문학적인 가치로 빛을 발하기 시작한다.
우리의 기억은, 아니 우리가 기억한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것은 얼마나 자주 우리를 기만하고 농락하는가. 그런 기억에 의존해 진리를 만들어가는 우리의 이성이란 얼마나 얄팍하고 안이한가. 올더스 헉슬리는 "각자의 기억은 그의 사적인 문학"이라고 말했다. 헉슬리는 기억을 통해 인간은 역능적으로 시간을 소유할 수 있다고 설파하려 했겠지만, 반스는 그 '문학'이 자기본위적인 기만, 망상적인 허구일 수도 있음을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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