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 아시자와 요 (김은모)
출판 : 아르테 (arte)
출간 : 2021.02.05
따뜻해지고 나서는 처음으로 속도감 있게 읽은 책.
아무래도 소설이니 상대적으로 읽기 편하기도 했겠지만,
글의 상당 부분이 대화 형식으로 짜여 있었던 것도 크다.
어릴 때가 생각나 잠깐씩 버벅거린 부분이 있긴 했지만 뭐.
출간 시기 즈음 SNS 상에서 너무 많이 보여서 읽을까 말까 고민했었는데 나쁘지 않았다.
시원시원한 느낌. 미스터리 작가로서의 저자도 만나보고 싶고, 데뷔 당시의 순수 문학도 궁금하다.
다만 책을 덮고 나서도 끈적하고 찜찜하게 남는 오싹함은 미쓰다 신조 쪽의 손을 들어주고 싶다.
(비채와 레드박스는 도조 겐야와 츠루야 슌이치로 마저 내놓아라!!)
요즘의 내가 가지고 있는 도서 분류 기준은 소장, 보류, 판매, 수집이다.
소장은 다시 읽을 생각이 충분한 경우.
보류는 없으면 한 번쯤 생각나서 찾을 것 같은 경우.
판매는 즐거웠지만 여기서 안녕, 또는 잘못된 선택.
수집은 취미 관련 서적이거나, 안 읽을 것 같지만 가지고 있고 싶거나, 사전류처럼 계속 찾아봐야 하는 경우.
굳이 분류해보자면, 정말 즐겁게 읽었지만, 판매.
쉬어가는 책들을 읽으면 상대적으로 빠르게 읽고, 편하고, 즐겁다.
또 읽고나서 판매하는 경우에 묵혀져 있던 것을 비우면서 환전까지 하는 기분이라 약간의 성취감이 생기는데,
패스트푸드를 먹는 즐거움에 가깝지만 그래도 즐거운 것이 사실이다.
음. 그래서 자꾸 판매용 도서를 골라 읽게 된다는 것이 악순환.
계획 독서는 역시 무리였나.
손 가는대로 읽다 보면 또 흐름이 잡히겠지.
- 잊으려 들다니 용납하지 않겠다고 누군가가 나를 나무라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내내 마음에 걸렸지만 제대로 마주하지 않았던 일이다. 왜 그렇게 됐는지 모르면서 원인을 파헤치려 하지 않았던 건, 그 당시 내가 할 수 있었던 일과 했어야 했던 일을 알아차리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때 내가 이랬다면, 하고 후회할까 봐 두려웠다. 그래서 그 일을 정리해서 분석하지도, 남에게 이야기하지도 않고 지내왔다.
- 업무 외적으로 점술가와 만난 적은 없지만 예전에 어떤 점술가가 '콜드 리딩'이라는 기술을 알려주었다. '콜드'란 '계획 없이', '리딩'은 '읽기'이며 이 경우는 '사전 정보 없이 상대를 알아낸다'는 뜻이다. 즉, 처음 보는 상대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겉모습과 말투로 상대의 정보와 기분을 알아맞히는 화술을 가리킨다. 이 기술에 걸리면 나에 대해 잘 아는 것에 놀라 점술가가 신비한 힘을 지녔다고 믿게 된다. 그렇듯 상대의 정보를 알아맞히면서 '고객이 듣고 싶은 이야기'를 해주면 고객은 '용한 점쟁이'라고 감탄하며 기꺼이 복채를 내놓는다고 그 점술가는 말했다. 사람은 대개 뭔가 망설이는 일이 있을 때 점을 보러 오므로 그 사람이 바라는 답을 읽어내 '그게 정답'이라는 확신만 주면 되는 것이다.
- "다음에 만났을 때 손목에 감긴 붕대를 보여주며 '이번에는 실패했지만 또 헤어지자고 하면 진짜로 죽을 거야.'라고... 그때까지는 아직 그 사람을 좋아하는 마음이 남아있었지만, 그걸 보고 마음이 완전히 식었어요. 그 후로는 어떻게 하면 원만하게 헤어질 수 있을까, 그런 생각밖에 안 들더라고요."
쓰노다 씨의 목소리가 갑자기 떨렸다. 울음을 터뜨리나 했지만 울지는 않고 입술을 꽉 깨물었다. 괴로웠을 것이다. 한때 결혼까지 생각할 만큼 좋아했던 사람인데, 아니, 그래서 충격이 더 컸을 것이다. 헤어지면 죽겠다는 말은 엄연한 협박이다. 그는 여자 친구의 의사를 무시한 채 자기 마음만 앞세웠다. 신뢰 관계에 금이 가는 게 당연하다.
"어떻게 해야 좋을지 난감하더라고요. 헤어지고 싶지만 그러면 죽을지도 모르잖아요. 그 사람이 어디까지 진심인지 알 수가 없어서... 정말로 죽을 마음도 없으면서 허세를 부린다 싶다가도, 발끈해서 정말로 죽으면 어쩌나 싶기도 하고... 결국 헤어지자는 말은 취소하는 수밖에 없었어요."
그때 어떻게 했어야 좋았겠느냐는 질문에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일단 이별을 통보했으면 아무리 괴로워도 취소하지 말고 밀어붙여야 한다는 건 입바른 정론에 지나지 않는다.
- 물론 이 세상에는 도저히 설명이 안 되는 일도 있으니, 내가 목격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귀신과 초능력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나는 일단 초자연적 현상을 믿기보다는 논리적인 설명을 추구하는 성격이었다.
- 얼핏 보기에 카메라 렌즈 같은 돋보기를 바로 알아본 것은 내가 평소에 사용하는 물건이었기 때문이다. 책 표지나 포스터를 컬러 인쇄할 때 빨강, 파랑, 노랑, 검정 네 색깔의 점을 그물코처럼 겹쳐서 다양한 색상을 표현하는데, 돋보기는 그 점이 뭉개지거나 어긋나지는 않았는지 확인하는 도구다.
- 여기까지 적고 나니 내가 왜 지금까지 이 일과 똑바로 마주하려 하지 않았는지 알 것 같았다. 나는 당시부터 이런 결론에 이르게 되리란 것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깊이 생각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 생각하면 할수록 견디지 못하리라는 걸 은연중에 알고 있었다. 알려고 들면 분명 그 끝없는 막막함에 집어삼켜지리라는 것을. 그건 평소 '죽음'에 대해 골똘히 생각하려 들지 않는 것과 비슷한 감각이었다. 생각하면 거의 본능적으로 위험을 느낀다. 더 이상 나아가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지도 모른다고. 알고 싶지 않다는 마음과 알아야 한다는 마음이 지금도 내 가슴속에서 힘겨루기를 벌이고 있다.
- 나무라는 말투가 아니라서 귀 뒤쪽이 더 화끈거렸다. 내가 여전히 도망치려 한다는 걸 간파당한 기분이었다. 결국 나는 '할 일을 다했다'는 만족감을 얻기 위해 <얼룩>을 쓴 걸까. 어쨌거나 나름대로 행동에 나서 정보를 모으려 노력했다는 증거를 남기고 싶었을 뿐, 진심으로 원인을 해명할 의지는 없었던 것 아닐까.
"어지간히 확신이 있는 게 아니라면 남에게 의지하는 편이 나아." 기미코 씨가 목소리를 한 톤 낮추어 말했다. "아니면 생각지도 못한 일이 일어났을 때 스스로를 믿은걸 후회할 테니까."
- 그들의 '예언'이 정말로 예지의 결과인지, 소 뒷걸음치다가 쥐 잡은 격인지, 아니면 무슨 트릭이 존재하는 건지는 모르지만, 사카키 씨가 정작 신기했던 것은 어떻게 그들은 '눈앞에 보이는' 광경을 '예지'로 단언하느냐였다. 예컨대 귀신이나 요괴와 같이 '비현실적'인 존재를 보았다면 자신이 헛것을 보았다는 걸 알겠지만 단순히 미래가 보인다면, 현재와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
물론 자신이 뭔가를 목격한 후 그것과 완전히 똑같은 일이 일어난다면 예지였다고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일이 벌어진 다음의 이야기다. 그들은 어떻게 사후에 알아채는 게 아니라 사전에 '예언'을 할 수 있을까. 그때 사카키 씨는 혼령이 똑똑히 보인다던 한 영능력자가 떠올랐다. 그 사람 말에 의하면 혼령은 흔히 말하듯이 반투명하거나 다리가 없지 않고 살아 있는 사람과 똑같이 보인다고 한다. 그래서 처음에는 다른 사람에게는 그 존재가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 이해가 가지 않아서 고생했다는 모양이다.
- 그 순간, 자신이 전에도 같은 생각을 한 적이 있다는 걸 깨닫는다. 아아, 이건 꿈이야. 알아차려도 마음이 편해지기는커녕 더 다급해졌다. 아무리 애써도 스스로의 의지로는 이 꿈에서 깰 수 없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이대로 가다가는 죽는다, 빨리 깨어나야 한다 싶어 눈을 깜박이고 뺨을 힘껏 꼬집었다. 그러나 무슨 짓을 해도, 이건 꿈이라고 아무리 스스로를 설득해도 깨어나지 못한다. 곧 정말 꿈이 맞는지 자신이 없어진다. 꿈이라는 걸 알고도 깨어나지 못하다니 이상하지 않은가. 꿈이라면 이렇게 정말로 아프거나 괴로울 리 없다. 애당초 꿈이란 대체 뭘까, 왜 나는 이걸 꿈이라고 생각했을까, 지금까지 현실이라 믿었던 쪽이 꿈 아니었을까.
- 괴담은 수수께끼를 내포하는 괴이 현상을 다루며 '왜 이런 현상이 발생하는가?'라는 문제를 찾아간다. 그것만으로도 이미 미스터리 요소가 있다고 여겼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괴이 현상을 앞두었을 때는 일단 논리적으로 설명이 가능한 지부터 검증해서 구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얼핏 괴이 현상으로 보이지만 논리적으로 해석해 설명할 수 있는 사건들이 존재한다. 그러한 사건들을 구분하는 작업을 거쳐야 절대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괴이 현상이 부각되리라고 여겼다. 그러나 그런 방식으로는 '논리적으로 설명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논리를 초월한 괴이 현상'을 잘못된 관점에서 결론짓는 꼴이 될지도 모른다.
- 즉 괴이 현상이 인간의 지성을 초월한 현상인 이상, 그걸 논리적으로 설명하려는 시도 자체가 틀렸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것이다. 말하자면 미스터리 소설에서 자주 거론되는 '탐정이 입수한 정보가 부족하거나 잘못됐을 가능성이 있으므로 탐정의 추리가 완벽한 진상인지는 작품 속에서 증명할 수 없다'는 문제와 비슷할지도 모르겠다. 미스터리 소설의 탐정처럼 자신이 입수한 정보를 바탕으로 '이렇게 보면 앞뒤가 맞는다'는 논리를 세워 기고만장하게 '이 괴이 현상의 원인은 이거다'라고 결론 내리는 것은 그 논리가 아무리 아름답고 설득력이 있어도 구조적인 탁상공론에 불과하다.
- "그 혼령과 연을 맺고 싶은 게 아니라면 무람없이 말을 걸어서는 안 됩니다."
- "예를 들어 교차로에 공양된 꽃을 보고 명복을 비는 것도 주의가 필요하죠. 남을 위해 기원하는 건 훌륭한 마음가짐입니다만, 아무 관계도 없는 고인에게 기도를 올리면 그때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연을 스스로 만드는 셈입니다.”
- "중국의 고사에서 비롯됐다는 둥 신도의 공양물이었다는 둥 모리지오의 유래는 그 설이 다양해. 모리지오 자체에 효과가 있는 게 아니라 모리지오를 지키기 위해 현관을 깨끗하게 유지하니까 풍수적으로 운이 트인다는 설도 있고, 그래서인지는 모르지만 풍수와 결부해서 장소와 색깔, 형태에 집착하는 사람도 적지 않아. 뭐, 이런 주술 계열은 잡탕이 되기 쉽지. 기시네라는 애도 모리지오를 하면서 부적은 불교계를 썼잖아."
- "미덥지 못하다 그거로군요." 이와나가 씨는 수긍이 간다는 듯 중얼거렸다. 하지만 사카키 씨는 "뭐, 꼭 그렇지만은 않아" 하며 볼펜을 돌렸다.
"이와나가 씨가 원하는 용한 영능력자 중에도 잡탕인 사람은 얼마든지 있어. 결국 신도계라느니 불교계라느니 하는 범주도 인간이 멋대로 나눈 거니까."... "하지만 잡탕일수록 문제를 일으킬 때가 많은 것도 사실이지." 하고 말하며 볼펜을 탁 잡았다.
"그런 사람은 독학인 경우가 많아서 모르고 금기를 어기기도 하거든."
"지금 들은 이야기에 금기랄 게 있었나요?" 내가 메모하던 손을 멈추고 물었다.
"비전문가가 액막이를 시도한 것부터 금기라고 생각하는데. ... 비전문가가 어설픈 지식과 힘을 믿고 함부로 액막이를 행하면 사고가 나지. 제대로 정화할 실력도 없이 자극만 해서 일이 더 까다로워졌는데도 오기로 버티다가 결국 빼도 박도 못할 지경에 처해서야 전문 영능력자에게 달려가는 패턴이...."
- 원래 영감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경험한 괴이 현상도 <얼룩>에 적은 그 일뿐이었기 때문이다. 괴담을 읽는 건 옛날부터 좋아했어도 괴이 현상을 실제로 체험한 사람을 만난 적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얼룩>을 발표한 뒤로 괴이 현상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기회가 부쩍 늘어났다. 그리고 실제로 괴이 현상이 발생한 현장을 찾아 액막이에도 입회하게 됐다.
괴담뿐만 아니라 무슨 일이든 '이런 게 필요하다', '이런 걸 알고 싶다' 고 공언하면 물건이나 정보가 쉽게 모인다는 말은 들어봤지만, 설마 하니 이렇게 진짜로 모여들 줄이야. 하지만 생각해보니 속으로 말만 걸어도 연이 생길 정도라면, 괴이 현상에 대한 이야기를 수집하고, 그 배경을 생각하고, 몇 날 며칠이고 궁리해 글을 쓰는 작업이 연을 만들지 않을 리 없다.
- 결국 초자연적인 괴이 현상을 아무리 논리적으로 따져본들 탁상공론에 불과할 것이고, 끝내 명확한 답은 찾을 수 없을 테니까. 그렇다고 전부 우연으로 치부할 수도 없다. 우연이라 믿으면 마음은 편해지겠지만, 흰 종이에 묻은 작은 얼룩을 완전히 지우기는 불가능하다. 의심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마음속에서 시작된 의심을 완전히 지우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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