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1

[김보영] 7인의 집행관 - 떡밥을 풀어보는 리뷰 2 - 스포주의!!!

일루젼 2021. 5. 9. 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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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 주의! 지금부터는 뇌피셜이며 비공식적이고 개인적인 생각일 뿐임을 밝혀둠!! 스포주의!

 

 

 

모든 것은 자의적인 해석임을 미리 밝혀둔다.

 

서사적인 떡밥을 열심히 풀어서 마무리 해보자. 

 


 

영리한 자 

 

재사, 영리한 자. 창하국의 대사. 상왕의 치세 당시 손님 자격으로 머물던 중, 피고의 반역을 저지하다 전신에 회복이 불가능한 부상을 당했다. 그의 생명 유지 장치는 이 집행의 종결과 함께 떼어낼 것이다. 타국의 사신으로 살았으되 산 것이 아닌 몸이 되었다.

 

내가 다소 의아한 것은 영리한 그가 아무 계산 없이 나섰을까 하는 점이다. 국왕 시해를 막는 것이 유리했나? 피고를 막아낼 자신이 있어 공을 세우고자 했나? 그도 아니면 본능적으로 막아섰을 뿐이었나? 어쩌면 복수심에 사로잡히기 전의 그는 영민하나 의로운 면이 있는 자였을지도 모른다. '사이'에서의 모습을 보면 그가 조정자가 아닌가 싶어지지만 말이다.

 

창하국은 육신의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난다고 믿는 일종의 유물론적 신념을 가진 나라다. 수명국과 마찬가지로 그리 자세한 설명은 나오지 않는데, 피고에게 깊은 원한이 있음은 인정되나 타국의 사신이 한 나라의 왕자를 사형하는 일에 집행을 맡을 수 있었던 이유는 후반에 다루어진다. 피고와 조정자 모두에게 그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에게 시스템에서의 집행은 실제 사형을 진행하기 위한 절차요 조건일 뿐이다. 따라서 그에게 이 6번의 집행은 반드시 완수되어야만 하는 통과 의례일 뿐이다. 집행을 절대로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진행할 자. 신제적 죽음이 아닌 그 어떤 것도 믿지 않으므로 시스템 안에서 심리적인 죽음을 맞지 않을 자. 그에 더해 영민하고 본질과 핵심을 잘 짚는 자다.

 

- "그렇지 않습니다. 왕비께서는 자신이 얼마나 아름다워졌는지 알지 못하십니다. ... 왕비님, 우리 중에 자신의 모습으로 와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소암공이 언제부터 저리 왜소하셨으며, 양명왕께서는 왜 아직도 다리를 쓰지 못하십니까? 수경도 몰라볼 정도로 번듯해졌더군요."

 

- "이것은 제 자아상입니다. 사람이 자신을 보는 모습은 실제와 다르고 남이 보는 모습과도 다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저더러 다른 모습을 하거나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라 하시면 그리 간단히 할 수 없습니다."

 

"그 세계의 왕께서 왕비님보다 형제를 더 위하는 듯 보였던 것은 그것이 왕비님의 가슴속 깊은 곳에 자리 잡은 두려움이었기 때문입니다."

 

 

 

 

영리한 자의 세계

 

 

세계를 옮겨가는 사이, 피고는 전혀 다른 장면들을 떠올리기도 한다.

영리한 자의 세계로 들어가기 직전이 그러했다. 그 일 자체는 실제로 벌어진 일일 것이나, 세부적인 것들은 피고의 기억이 재구성된 것일 것이다.

 

 

- 나는 손에 들린 칼을 내려다보았다. 붉게 물들어 있는 것을 보니 다리를 꿰뚫은 사람은 나인 모양이다. 

'소심한 자'는 노인을 붙잡고 소리 내어 울었다. '고지식한 자'는 노인의 앞에 칼을 빼어 들고 서 있었다. 그의 왼손은 피에 젖었고 새끼손가락이 떨어져 나가고 없었다. 그것도 내가 한 일인 것 같았다. 

 

 

'소심한 자'와 '노인'과 '고지식한 자'가 함께 있다. '영리한 자'는 뒤에 남겨져 단말마의 비명을 내질렀다. 그러므로 이 장면은 영리한 자는 모르는 것이다. 노인은 "혈육을 살해한 고통", "나의 혈육이여, 내 피여, 저주받을 피여"라는 발언을 한다. 그렇기에 이 장면은 피고만의 기억이 덧씌워진 것으로 보인다. 이 부분은 노인에서 더 다루겠다. 

 

나는 중반까지는 국가간의 알력에 의해 전쟁을 피하는 조건으로 이루어진 협상이 아닌가 싶었다. 그러나 노왕이 다리를 잃고 재사가 식물인간이 된 것은 훨씬 예전의 일이었고 피고의 재판은 새로운 왕의 죽음으로 일어났다. 이 부분을 고려하면 재사가 집행관이 된 것은 다소 부자연스러운 부분이 있었다. 그 부분을 더 생각해봤어어야 했는데, 나는 영리한 자와 고지식한 자 두 번 다 낚였다.

 

재사는 타국의 사신이었고, 피고를 곁에서 오래 지켜본 자가 아니었다. 현재 생명 유지 장치에 의존해 숨만 쉬고 있는 자신의 비참한 모습. 그는 그 모습을 피고에게 주었다. 녹아내린 피부와 기괴해진 외모. 산 채로 불에 태워지는 고통. 죽을 수 없는 상태에서 가해지는 극한의 괴로움. 재사는 피고의 정신에는 크게 관심이 없었고 그렇기에 그의 세계에서 피고는 자신의 본모습에 가까운 사고를 할 수 있었다. 

 

 

- "이번 인생이 마음에 드는가. 어떤 인생을 주어야 네가 울며 몸부림치는 것을 볼까. ...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가 사는 지옥이 내가 사는 지옥만 하지 않은 것 같다."

 

- "삶이 죽음보다 더한 고통임을 가르쳐주고 싶었을 뿐이다."

 

- "내가 설칠 기회가 없었으니까. 자네가 나를 보는 관점이 다른 집행관들과 달랐어. 자네가 내게 복수심을 품고 있었지만 악인으로 보지는 않았던 거지." 

 

 

같은 시각에서 스스로 움직일 수 없는 현실이 그에게는 지옥이며, 자신은 이미 죽은 자이다. 그래서일까? 그의 세계는 귀신이 활보할 수 있는 세계이다. 후에 조정자의 정체를 추측하는 과정에서 그가 귀신이 존재하는 세계를 설계했다는 이유로 의심을 받는데, 창하국은 그런 개념이 없음을 생각해보면 충분히 가능한 의심이다. 그러나 아무 그림도 그려져있지 않은 흰 족자가 그 자체로 신의 형상이 되는 것을 보면 이는 재사가 사신으로 와 보고 들은 부도국의 이미지가 덧씌워진 세계로 보인다. 없는 것을 믿는 자들, 그렇기에 귀신을 믿는 자들.

 

 

- 현판에 축귀 그림이 그려져 있다. 무사 한 사람이 말을 타고 달리는 그림이다. 무사는 손잡이에서부터 칼날까지 새카만 검을 들고 있는데, 반쯤 부서진 투구에는 산발한 머리카락이 잡초처럼 삐져나와 있고 ... 하지만 무사가 찌르는 곳에는 아무것도 없다. 무시무시한 장수가 전력을 다해 아무것도 없는 곳을 찌르는 풍경이 우스꽝스러우면서도 기괴한 느낌을 주었다.

 

- 족자가 걸려 있던 자리에 덩그러니 흰 자리가 남아 있었다. 형체가 없는 신의 신상은 부술 수 없다. 부순 그 자리가 다시 신상이 된다. 

 

 

재사는 이미 이상함을 감지하고 있었다. 지금 이 집행이란 것에는 사형 전의 복수 그 이상의 어떠한 의미가 있다는 것, 뭔가 자신이-혹은 모두가- 알 지 못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 

하지만 그게 무엇이 되었건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목적을 위해 선택하고 행동하고자 했었다. 그것이 자신을 믿는 '영리한 자'이므로.

그는 시스템이 아니었으나 시스템의 적이 피고라면 자신과 목적이 같다 여겼고, 어서 이 집행이 끝나기를 원했기에 그에 영합했다. 

 

 

- "너는 이미 느끼고 있다. 무엇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이미 눈치챘을 것이다. 네가 모르는 일이 이 모든 일의 이면에 있다는 것을. 이곳에 다른 싸움이 있으며 그 일이 내 죽음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일이고, 네가 이미 그 싸움에 속해 있다는 것을."

 

- "우리는 모두가 자신이 가장 원하는 세상을 만들고 있습니다. 시스템은 그 소원을 이루기 위해 가장 적절한 방식으로 우리를 보좌하고 있습니다. 단지 우리가 자신이 가장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하는 것 뿐입니다." 

 

- 뾰족귀의 얼굴에 웃음이 떠올랐다. 기시감이 드는 웃음이었다. 승리를 확신하는 자가, 거짓을 말해야 하는 줄을 알면서도 진실을 입에 담고 싶은 유혹을 견디지 못하는 웃음. 

 

 

재사가 귀신을 죽이고자 했던 것은 그것이 옳다 보았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죽어가는 자신에게 보다 의미를 가지는 일이기 때문이었을까? 모든 일의 진정한 원흉이 그것 때문이었다면, 복수의 대상은 바뀔 수 있을까? 아마도 그의 선택은 그가 생각한 대상이 수경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가 집행관을 수락했던 것이 피고 때문이었듯이. 그리고 그는 7막 신의 세계를 열지 않았다. 

 

 

- "집행이 시작되기 전에 점검용으로 열리는 세상 말이지. 다른 참관인이 들어갈 가능성은 없었던 건가?"

"들어갈 수 있습니다. 들어가려 하지 않았을 뿐이지요."

 

- "죽음의 규칙은 모두에게 같습니다. 우리가 총으로 죽는다면 집행관도 총으로 죽습니다. 단지 그럴 상황을 만들지 않겠지요."

 

- 하지만 천장이 일그러지면서 떨어져 나온 전등이 막 수경을 향해 날아온 창을 맞히고 떨어진다는 건 제정신으로 볼 만한 풍경이 아니었다.

 

- "왜 수경은 수신이 되지 않았소?" ...

"제가 만든 세상이 아니라 잘 모르겠군요." 

 

- "난 너를 괴롭힐 생각이 없어. 죽일 생각이지."

"한 명씩 죽이는 것으로는 알아낼 수 없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난 한 명씩 죽일 생각이 없어. 널 죽일 생각이니까. ..... 난 네놈이 누군지 모르겠어. 수경은 죽었어. 너희 나라는 심장만 뛰면 살아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그러나 영리한 자의 세계에서도 피고의 죽음은 그가 원했던 방식으로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 나는 몇 번인가 피를 토했고 그대로 의식을 잃었다. 죽음이 이리 쉽게 찾아올 줄은 또 어찌 알았겠는가.

 

 

 


 

 

고지식한 자

 

수경. 물거울. 죄인에게 아내를 잃었고 그 자신이 상해를 입었으며 주인이자 왕이며 친구인 자를 잃었다. 

사내는 마찬가지로 입체 영상이었는데, 이 자리에 있을 신분이 아니든가 뭔가 다른 사정이 있는 모양이었다. 가무잡잡한 피부에 곱슬머리였고 거친 인상이었다. 죽은 사람처럼 눈을 감은 채 뜨지 않는다.

 

미친 놈의 세계에서 '나'는 고지식한 자를 만난다. 그에 대한 묘사는 다음과 같다.

 

- 제법 잘생긴 친구였다. 깔끔하게 빗은 머리에 눈매가 날카롭고 콧날이 바르며 눈썹이 짙었다. 몸이 다부졌고 푸른빛이 도는 양복은 칼로 자른 듯 말끔하게 다림질을 해놓았다. 단지 왼쪽 새끼손가락 하나가 잘려 나가 있었는데, 그래서 마지막이 된 네 번째 손가락에는 붉은 보석이 박힌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진품이라면 값을 매기기 어려울 터였다. 그에게 어울리고 않고를 떠나서, 이 세상 전체에 어울리지 않는 물건이었다. 무슨 무덤에서 발굴한 것이라고 이름 붙여 박물관에 전시해두어도 될 법했다. 사실 그의 존재 자체가 이 세상에 어울리지 않았다. 그는 좀 더 고전적이고 경직된 세상에서 온 것처럼 보였다. 아직 도덕이나 윤리, 신하된 도리나 선비의 올곧음, 장수의 기개 따위가 국가적인 가치로 여겨지던 순진한 시대에서.

 

- 고지식한 자. 내가 속으로 웃으며 생각했다. 저 멍청이는 이런 상황에서도 학교 선생님처럼 군다. 적에게 포위되어 막 목이 베어 넘어갈 상황에서도 누가 역사책 같은 걸 들고 와 질문하면 앉아서 답을 가르쳐주고 있을 놈이다.

 

- 깨끗한 목소리다. 한 번도 신념에 어긋나는 일을 해보지 않은 사람만이 낼 수 있는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 그가 살아온 인생 전체에 질투를 느꼈다.

 

- 하지만 따지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그의 네 번째 손가락에는(그것이 마지막 손가락이었다. 새끼손가락은 없었으므로) 붉은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내가 잘라낸 손가락이다. 반지에는 태양을 상징하는 금빛 문양이 박혀 있었다. 

 

맨 처음 등장부터 언급되었던 반지. 나는 그 반지가 선우가 죽으며 호위무사였던 그에게로 전해진 것이라 생각했다. 노왕의 왕좌가 붉고 금빛의 문양이 있는 것과 같이, 태양을 상징하는 것과 같이. 그러나 그런 상징적인 반지가 신분 순위로는 절대 돌아가기 힘든 그에게 돌아갈 수 있었을까? 집행관이 된 것까지는 그의 강직하고 올곧은 면과 왕을 제일 가까이에서 모시던 자였기 때문이라 하더라도, 미심쩍은 부분이다. 물론 나는 의심하지 못했지만 말이다. 

 

- 수경이 들고 있는 것은 명일검이다. 비치는 듯 얇고 가느다란 검신에, 금색 손잡이에는 태양의 문양이 새겨져 있는 것이다. 원래 선우의 것인데 아마 생일선물로 받았을 것이다. ..... 지금 내 기억이 제대로 돌아가고 있다면.

 

- 다른 것이 있어. 나는 그의 ......에서 생각의 잔향을 들으며 생각했다. 내가 이 녀석에게 직접적으로 뭔가를 했어. 직접 그 심장에 칼을 박고 후벼 파는 것과 비슷한 뭔가를.

 

- "네가 이 모든 것을 감당할 만한 자라면 내게 와라."

수경이 웃기 시작했다. 이상한 웃음소리였다. 한참 웃는 듯하더니 고개를 숙이고 한참 침묵했고, 다시 웃었다.

"그래서 한 일인가."

 

 

고지식한 자의 세계

 

자신이 연 세계를 공유한다는 것은 자신을 온전히 드러내 보인다는 뜻이다. 이는 작품 내의 설정이기도 하지만 모든 창작자에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닌가 싶다. 무언가로부터 나온 것은 그 이전 것을 반영한다. 드러낼 수 없는 이는 보이는 것을 주저한다.

 

- "저뿐입니다.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했습니다."

 

고지식한 자는 자신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집행의 진행 과정까지 가릴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그 현장에 다른 참관인들이 동석하는 것은 막았다. 처음 읽을 때는 다른 집행관들보다 위계가 낮은 고지식한 자가, 다른 이들의 방해를 받지 않고 피고에게 정정당당을 추구하는 결투를 신청하기 위해서인 줄 알았다. 분노한 다른 집행관들이 방해할 수 없도록. 

 

- 내부인일 것이다. 선조의 지식에도 조예가 있고, 경비체계와도 연이 닿아 있을 것이다. 재력도, 자기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리 생각하면 대상은 꽤 좁힐 수 있었지만, 굳이 감옥에 갇힌 사람을 빼내서 우주 한복판까지 납치할 만큼 정신 나간 놈은 잘 떠오르지 않았다.

 

- 내가 가끔 부하들과 하는 놀이가 있다. 녀석들에게 몰래 내 기억을 바꾸게 한 뒤 나를 가장 오래 속인 놈에게 상을 준다.

 

친위대장으로 왕을 모셨으니 왕가의 지혜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부도국 사람들이 우주라는 개념이 있었다는 것이 놀랍다면 놀라운 일이겠으나, 다른 부분을 보면 수명 역시 길었고 하계라는 개념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기억을 바꾼다는 개념도 있었고, 이어서 금지된 일이라는 내용도 나온다. 그렇다면 어디까지가 장난으로 넘어갈 수 있는 범위일까? 바뀐 것을 깨닫지 못하면 왜곡된 기억에 먹힌다. 

 

- "저를 알아보시겠습니까? 

그 말을 듣는 순간, 순식간에 여러 가지 가능성이 떠올랐다. 기억 제거 시술, 가짜 기억, 인격 조정 프로그램, 바보로 만드는 약. 내 머리가 전반적으로는 쌩쌩하게 돌아가는 것 같지만, 그중 하나라도 당했다면 내가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 기억은 모두 이어져 있다. 우주의 모든 것이 서로 이어져 있고 영향을 끼치듯이 기억도 그렇다. 혼자 존재하는 조각 같은 것은 없다. 논리가 없는 기억은 자리 잡지 못한다. 만든 기억에는 언제나 모순이 있다. 모순이 깊어지면 기억은 돌아온다. 작은 것을 바꾸지 않을 바야에 차라리 전체를 바꾸는 것이 낫다. 

 

그리고 고지식한 자가 집행을 포기하자 그를 대신한 시스템이 집행을 되돌려 진행한다. 피고가 본 노왕을 시해하려는 고지식한 자, 그를 막기 위해 죽이는 피고, 같은 일을 되풀이한다며 입이 찢어지게 웃는 노왕. 이는 현재 시스템 안에서 일어나는 현실이며 동시에 과거에 있었던 유사한 사건이다. "존재할 가치가 있는 것이 전혀 그렇지 않은 것에 의해 사멸해 버리는 순간에 보통의 인간이 지르게 되는" 그런 비명이 가득차는 순간. 

 

여기서 되풀이된 것은 피고가 착각하여 죄없는 이를 죽인 것일까? 그렇다면 피고가 본 것은 무엇인가? 그가 본 것이 현실인가, 타인들이 본 것이 현실인가? 피고에게는 죽일 수 밖에 없었던 마땅한 이유가 있었지만 그것은 그만이 본 것이다. 그것이 피고의 광증이며, 그의 죄목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에게는 그가 본 진실의 파편만이 존재한다. 완벽한 사실이란 것이 진실로 존재할 수 있는가?

 

- "제가 한 일이 아닙니다."

"네가 했어도 상관없어. 어차피 네 집행이다."

 

- "저를 알아보시겠습니까?"

"그래. 모습은 좀 다르지만."

"이것은 제 자아상입니다. 시스템이 우리의 모습을 우리의 기억에서 꺼내어 만들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자신을 보는 모습은 실제와도 다르고 남이 보는 모습과도 다릅니다."

 

- "대군께서는 변함이 없으십니다."

"네가 만든 모습이니까. 네가 네 기억에 근거해서 내 모습을 만들었다. 네 시선으로 만들었으니 너로서는 차이를 알 수 없는 거다. 하지만 다른 사람의 눈에도 그러리라는 보장은 없다."

 

수경이 숨기고자 했던 것은 자신이 수경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기억이 돌아온 피고가 모습이 다르다고 말한 것은, 완전한 기억을 찾으며 '수경'에 대한 기억 역시 돌아왔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가 진정 누구였는지를 기억하지 못했던 것은 왜일까? 

 

'수경'이라는 인물 자체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게 이럴 일인가 싶다. 

애초에 서사를 정리하겠다는 욕심을 버렸어야 했다. 

벅찬 마음에 복선들을 정리해보겠다는 헛된 생각을 품었다. 

 

토성과 크로노스, 야누스와 양극자까지 간다는 건 과욕이다.

수명장자와 바지왕, 주작과 봉황과 삼족오까지만 가도 좋겠다.

 

(왜 아직도 4막인가....??? 10막.....???까지 가고 그 다음으로 가야하는데....??)

 

 

어린 시절 좋아했던 작가로 이우혁과 이영도가 있었다. 이번 책 리뷰를 쓰면서 이영도 작가의 <드래곤라자>가 많이 생각이 났다.

한 존재를 규정하는 것은 단일한 정의가 아니며, 스스로가 스스로를 내면적으로 규정한 것도 아닌, 타자의 시선을 통해 관찰된 모습들의 복합체라고 말했었다. 

 

"인간은...... 유피넬과 헬카네스의 총애를 동시에 받습니다. 원래 불안하죠. 우리는 관계 속에 형성되는 존재입니다. 엘프나 페어리, 드워프들을 부러워할 수도 있겠지만, 부러워한다 해서 우리가 인간이 아닌 것은 아닙니다."

"모르겠어요. 무슨 말인지."

"페어리인 당신은 이해하기 어렵겠지요. 인간에게 있어 나는 하나일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나'는 단수형이 아닙니다. 나라는 것은 원래 다면적이고 여럿입니다. 그래서 자기를 위해 산다는 말이 원래 통하지 않는 존재가 우리 인간입니다."

 

 

리뷰2는 여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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