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1

[김초엽, 김원영] 사이보그가 되다

일루젼 2021. 6. 16. 1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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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김초엽, 김원영
출판 :  사계절
출간 :  2021.01.15


시작하는 말

 

나의 첫 직장은 화상 전문 대학병원이었다.

5년 정도 근속하며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내가 그곳에서 가장 잘 배웠다고 생각하는 것은 누가 가르쳐준 적 없는 어떤 것이다. 

당시 근무처 바로 옆에는 영안실로 통하는 복도가 있었고, 병원의 위치 상 자상 환자들도 심심치 않게 왔다.

지금 생각해보면 첫 직장 치고는 조금 험한 구석이 있었다. 

 

그런 저런 나날 중에, 나도 모르게 '이것이 옳다'고 생각한 것은 '아무렇지 않게 행동하기'였다.

어떤 환자를 대하더라도 아무런 표정이나 어조의 변함없이 대하기.

움찔 놀라지도 말고, 지나치게 상냥해지거나 안타까운 표정을 짓지도 말고, 그저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대하기. 

쉽지는 않았지만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급여를 받는 프로니까. 

 

나중에 그게 참 고마웠다는 인사를 받았을 때 그 방향성이 맞았구나 싶어 조금 기뻤다. 

완전히 사라질 수 있는 상처라면 충분히 같이 아파해주고 걱정해줄 수 있다. 하지만 그런 것이 아니라 평생 가지고 가야 할 어떤 것이라면, 나라면, 그냥 아무렇지 않게 대해주는 게 가장 고마울 것 같았다. 고맙다기보다- 그랬으면 할 것 같았다. 

 

알면서도 상대가 먼저 말을 꺼내지 않으면 모르는 척 해주기.

나의 궁금함을 채우기 위해 사적인 것을 먼저 묻지 않기. 

 

 

 

리뷰 

 

이 책을 읽으면서 그때 생각들을 했다. 

우리 주변에 반드시 있을 눈에 보이거나 보이지 않는 장애를 가진 사람들. 

그들이 겪는 불편과 배제된 당연함.

 

김초엽과 김원영은 청각장애를 가진 SF작가와 휠체어를 타는 변호사다. 

그들은 청각 보조기와 보행 보조기와 결합된 사이보그이기도 하다. 

사이보그라니, 과장이라고? 

 

그렇다면 '사이보그'란 무엇인가?

인공물과 결합하지 않은 순수함이란 어디까지를 말하는가?

임플란트나 크라운을 했다면? 인공관절 수술을 했다면? 렌즈삽입 시술을 했다면?

 

6백만 불의 사나이가 사이보그라면, 이들은 사이보그가 될 수 없을까?

신체 능력의 증강과 보조는 어느 지점에서 갈라지는가? 

'걷기'를 위한 휠체어와 '걷기'를 위한 외골격은 어떤 차이가 있는가?

 

'장애'란 무엇인가?

그리고 그것을 내부와 외부에서 바라보는 시각과, 그에 따라 생각해봤음직한 담론은 어떤 것이 있는가?

장애와 관련된 기술은 모두 '따뜻해야'만 하는가? 그것은 '교정'되거나 '극복' 되어야만 하는 어떤 상태인가? 

 

어쩌면 장애의 문제는 수의 문제일지도 모른다. 절대다수가 정상으로 규정되는 현상. 

비장애인이 장애인들을 비장애 상태로 '치료'하려는 강박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상태가 자연스럽다고 생각하는 비장애인 중심주의이다. 그 반대적 특성을 가진 사람이 다수가 되었을 때, 그들이 '자연스럽다'라고 생각하는 상태로 비장애인을 '치료'하려 한다면 그것은 폭력인가, 아닌가?

우리는 각자를 선택의 주체로 존중하며 치열한 대화를 나누어야만 한다. 일방적인 시혜란 존재할 수도 없으며 해서도 안 된다.

 

각각의 장 안에서 펼쳐지는 두 사람의 생각을 따라가다 보면 '나'와 '우리'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해보게 된다.

(각 장의 구성과 개연성에 대해서는 다소 의아한 부분도 있었지만 대체적으로 좋았다.)

 

 

우리는 타인의 삶이 각자 너무나 고유하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쉽게 잊는다.
어떤 주관적 세계는 그 세계를 직접 경험하며 살아가는 사람조차도 전부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인간 보편의 삶에 대한 해석이 수도 없이 주어져 있지만 결국은 모든 사람이 각자 고유한 삶의 문제로 고민하는 것처럼, 그 보편의 해석조차 갖지 못한 사람들은 자신의 경험 세계를 설명하는 일이 훨씬 더 힘들다. 
여기서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 생겨난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어차피 우리는 서로의 삶을 상상하는 일에 언제나 실패할 수밖에 없으니 모든 것이 무의미한 걸까?
나는 그 질문에 답을 할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타인의 삶을 애써 상상하는 일이 의미 있다고 생각한다.

 

 

사는 나날 동안 예기치 못한 사고, 혹은 노화나 질환으로 인해 지금과는 다른 신체적-정신적 조건에 놓이게 될지도 모른다. 

나와는 관계없는 삶이라고 선을 긋기 전에 한 번쯤 진지하게 생각해 볼 주제라고 생각한다.

분화와 통합에 대해서도, 나와 타자에 대한 이해에 대해서도, 내게 없는 감각에 대해서도.

 

조금 더 생각을 해보고 싶고, 정리를 해보고 싶다. 

이 책이 던지는 질문들은 현실과 미래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고, 내가 고민 중인 영역에 대한 단초이기도 하다.

읽는 동안 즐거웠다.

 

 

 


 

- 한편 그렇게 화려하지는 않지만 이미 현실화된 사이보그 기술들도 있다. 주로 손상을 보완할 목적으로 쓰이는 기술이다. 영국의 아티스트 닐 하비슨은 처음으로 사이보그로서 '시민권'을 인정받은 사례라고 할 수 있는데, 선천적 색맹인 그는 색깔을 소리로 바꾸어 감지하는 특수한 센서를 머리에 부착한 채로 여권 사진을 촬영해 정부의 승인을 받았다.

 

- 그 미래는 언젠가 노화하고 취약해지고 병들고 의존하게 될 모든 사람이 마주할 미래이기도 하다. 살아가는 동안 누구나 어떤 시기에는 정상성의 범주에서 밀려난 존재가 된다. 단지 그것을 상상하지 않으려 애쓸 뿐이다. 그래서 나는 장애인 사이보그를 이야기하는 것이나 기술과 취약함, 기술과 의존, 기술과 소외를 살피는 것이 결국 모든 이들의 문제이기도 하다고 말하고 싶다. 독립적이고 유능한 이상적 인간과 달리, 현실의 우리는 누구도 취약함에서 자유롭지 않기 때문이다.

 

- 과학의 발전은 분명 장애가 있는 사람의 삶의 질을 높이고 고통을 줄여나가고 있다. 나는 이러한 과학적 발견과 기술의 응용을 지지한다. 그러나 과학이 장애에 관한 정체성 물음을 '장애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네가 인간이며, 조만간 그 장애는 극복될 것이므로 너는 더 '온전한' 인간 공동체에 포함될 수 있다고 전제하는 이상, 장애 그 자체의 의미를 규정하지 않는다는 점을 성찰해야 한다. 

 

- "나는 휠체어만 탔을 뿐(탔음에도 불구하고) 당신과 똑같은 인간"이라고 주장하는 대신, "나는 휠체어를 탔고 그 점에서 당신과 같지 않지만, 우리는 동등하다"라고 말하는 일은 어떻게 가능할까.

 

- 장애 언론 <비마이너>에 실린 <농민이 왜 음성 언어로 말해야 하는가?>라는 글은 이 광고를 보는 농인 및 청각장애인의 입장을 보여주는데, 가족들이 수어를 배워 김 씨와 소통하기보다 김 씨가 '말을 하고 듣기를' 바란 것은 전형적인 청능주의라고 지적하고 있다. 이 밖에도 많은 농인과 청각장애인들이 농인에게 목소리를 선물한다는 발상의 청인 중심적인 관점을 비판했다.

 

- 기가 지니는 수어를 쓰는 김 씨에게 목소리를 '선물'했다. 그런데 이 목소리가 향하는 대상은 청인들이다. 정작 농인인 김 씨나 나와 같은 청각장애인들은 기가 지니가 만든 목소리를 명확하게 들을 수 없다. 그러니까 기가지니가 김 씨에게 선물한 '목소리'는 청각장애인을 위한 목소리가 아니라, 청인들이 청각장애인에게서 듣고 싶어 하는 목소리다.

 

- 농인 유튜버 하개월이 진행한 '인공 와우 사용자들과의 인터뷰'를 보면 인공 와우 시술을 했지만 이후에도 여전히 농인 정체성을 유지하는 당사자들이 있다. 시간이 흘러 인공 와우를 더 이상 착용하지 않거나 제거한 사용자들도 있었다. 그들은 공통적으로 재활 훈련과 언어 치료 과정에서 매우 힘든 일을 겪었다고 말한다. ... 이러한 상황은 사이보그 기술이 단일한 해답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또다시 보여준다. 인공 와우는 '회복의 기술'이지만 결코 완전한 기술은 아니며, 절대적인 답이 될 수도 없다.

 

- 인간과 다른 지각 세계를 가진 동물들을 이야기할 때 움벨트 umwelt라는 말을 쓴다. 객관적인 현실이 아니라 하나의 생물체가 주관적으로 인지하는 세계, 그 개체가 살아온 또한 지각하는 환경을 일컫는 말이다. 외계까지 갈 것도 없이 이 행성 지구에는 다른 감각을 가진 생명체들이 아주 많다.

 

- 움벨트는 각각의 종에 따라 차이가 클 뿐만 아니라 하나의 종 안에서도 개체마다 다르다. 리처드 사이토웍은 <공감각>이라는 책에서 평범한 인간들과 다른 감각 세계를 가진, 더 큰 움벨트를 가진 공감각자의 '현실의 결'이 얼마나 고유한지를 이야기한다. 공감각자들은 색에서 소리를 듣고 숫자에서 촉감을 느끼는데, 공감각 능력이 없는 사람들은 그들의 세계를 상상해볼 수조차 없다. 사이토웍은 이렇게 쓴다. 

"우리는 순진하게도 우리가 아는 것이 세상의 전부라고 가정한다. 이 좁은 자기 참조적 현실이 우리의 움벨트를 구성한다."

 

 

 

더보기

 - 장애가 있다고 규정된 우리의 몸을 쉽게 부정하고 치료하고 구원하겠다는 주장을, 그것이 설사 과학적 의견에 토대를 두고 있더라도, 우리는 신중하고 비판적으로 바라본다.

 

- 지금 이곳의 삶을 소외시키거나 나 자신을 온전하지 못한 존재로 규정할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를 우리는 우려한다.

 

- 영웅의 성장 서사는 장애와 테크놀로지의 관계에 그대로 적용된다. 

 

- 나는 누구의 방해나 강제도 없이 어느 날 갑자기 집에서 두부를 부치다가 퇴직금을 들고 아르헨티나 최남단 도시 우수아이아로 여행을 떠나자고 마음먹을 수 있다. 그러나 어젯밤 잠들기 직전 페이스북 타임라인에서 남미 여행 광고를 (기억하지도 못하지만) 본 것이라면? 나의 뇌는 사실상 24시간 디지털 네트워크에 연결되어 있다. 내 과거 이미지와 생각들은 네트워크 어딘가에서 디지털 정보로 코드화 되어 끊임없이 떠돌고, 각기 분산된 장소에서 다른 사람의 뇌와 실시간으로 영향을 주고받는다. 외부와 분리된 독립된 '정신'을 가진 '나'라는 주체는 애초에도 환상이었을지 모르지만 점점 더 의문의 대상이 되고 있다. 

 

- 트랜스휴머니즘에서 사이보그는 어디까지나 우리가 더 자유롭고 독립적인 인간이고자 하는, 우리의 휴머니즘적 주체성을 강화하는 수단으로써의 존재 방식이다. 그러나 (비판적) 포스트휴머니즘에서 사이보그란 이질적인 것들이 뒤섞인, 정보과학 시대의 '잡종적인' 주체성을 상징한다. 

 

- 수나우라 테일러의 <짐을 끄는 짐승들>이 대표적이다. 여기서 장애인은 '인간으로서' 동등하기에 권리의 주체가 되는 것이 아니라 동물로서, 동물과 함께 해방의 주체로 등장한다.

 

- 장애의 가시성과 비가시성, 장애 당사자가 그중에서 무엇을 선택하고 어디까지 드러낼 것인가 하는 문제는 아주 복잡하다. 

 

- 어쨌든 우리는 월요일 밤마다 모여 '과학기술 지식이 어떻게 사회적으로 만들어지는가'에 대한 질문과 답을 나름대로 찾아나갔다. 물론 전공자들이 아닌 인접 분야 학부생과 대학원생들로 구성된 모임이었으니 그다지 전문적이지는 않았지만, 연구 사업 계획서를 한 번이라도 써본 대학원생들은 '과학기술 지식은 사회적으로 만들어진다'는 명제를 쉽게 이해하고 받아들였다. 나는 그동안 내가 아주 견고한 학문이자 방법론이라고 생각했던 과학이 실은 그렇게 견고하지 않다는 것을, 사회적 맥락과 권력 구조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것을 긴 토의를 거치며 서서히 배워갔다.

 

- 크립 테크노사이언스는 기존의 지식 생산과 소비라는 정형화된 구도를 뒤집는다. 장애인을 위한 기술이 아니라 장애인과 장애 공동체가 직접 만들고 건설하는 기술 정치의 실현을 목표로 한다. 

 

- 이 곳의 전시물들은 대부분 다중 감각을 통해 접근할 수 있어서, 조각품들은 흔들리고 진동하며, 소리를 내고, 직접 만져볼 수 있도록 되어있다. 그래서 하나의 감각이 손상되어도 다른 감각을 이용해 전시물을 감상할 수 있다. 이 작품은 관객들이 접근성 기술에 대해 생각해보도록 유도한다.

 

- 장애인들에게 필요한 가구는 신체의 형태와 운용 방식에 적합한 편리한 가구일까? 아니면 일상을 우아하게 만들고 자신의 개성을 드러내는 고유한 가구일까?

 

- 우리는 과학기술을 도구 이상으로 흠모하는 모종의 문화적 태도가 존재하는 사회에서 살고 있다. (테크노페티시즘) 한편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이 장애인의 몸에 대해 혐오든 숭배든 성적 대상화든, '능력(기능)'이 아니라 그 디자인에 관한 어떤 종류의 감정이나 충동을 지니고 있다. 테크놀로지와 장애인의 몸이 하나의 이미지에서 만날 때면, 어떤 '불쾌함의 골짜기'로 빠질 위험이 거의 없이 테크놀로지와 장애 자체를 페티시적으로 바라보는 일이 한층 수월해진다.

 

- 우리가 맞이할 시대에 더 많은 가능성은 더 강한 팔 근력, 더 높은 시력, 더 민감한 청력이 가져다줄까? 아니면 무수히 많은 삶의 경험이 자동화되고 매끄럽게 이어져 seamless 나도 모르게 '삼매경'에 빠지게 되었을 때 잠시 '덜컹'하고 틈새를 만들어 나의 위치와 행위 주체성, 내가 지금 빠져든 활동의 의미와 필요를 성찰할 수 있는 능력이 가져다줄까?

나는 후자라고 믿는다. 그리고 이러한 역량은 단일하고 매끄러운 경험보다는 이질적인 것들과 큰 단차를 포함한 채 연결되어 본 경험에서 강화될 것이다.

 

- 우리의 '휴먼 스케일'은 약간의 가시광선, 좁은 범위의 가청 주파수, 몇 미터 범위의 높이와 거리 감각에 한정되어 있다. 벌들이 꽃의 무늬를 어떻게 읽는지, 개미들이 어떻게 화학물질을 통해 서로 대화를 나누는지 인간은 아주 어설픈 상상만 할 수 있을 뿐이다. 때로는 과학의 도구들이 다른 움벨트를 분석할 수 있는 단서를 가져다주지만, 극히 희미한 단서에 불과할 뿐 그들의 움벨트를 직접 경험하게 하는 것은 아니다. 

 

- 어쩌면 인간이라는 종 안에서도 사실은 인지 세계의 일부만이 공유되는 것은 아닐까? 지구 상의 생명체는 서로 너무나 다른 움벨트와 감각 세계, 미학을 가지고 있을뿐더러 인간이라는 하나의 종 안에서도 이 감각 세계들은 흔히 어긋나고 미끄러진다.

 

- '우주선 설계하기'는 장애가 환경과 상호 작용하여 구성되는 상황에 대한 하나의 사고 실험이다. 건강하고 장애 없는 몸을 가진 개인조차 그를 환대하지 않는 물리적, 사회적 환경에서는 얼마든지 장애를 경험할 수 있다. 이 사고 실험은 접근 가능한 세계를 단지 '상상하는' 일조차도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완전한 상상의 영역에서도 보편은 거기 속하지 못한 이들을 밀어낸다.

 

- 시각장애인으로 살던 버질은 실명된 눈을 다시 검진해보았다가 백내장 수술을 통해 시력을 회복할 수 있다는 진단을 받는다. 가족들은 버질이 시력을 회복하는 '기적의 순간'에 감격의 눈물을 흘리지만, 정작 버질의 시력 회복 과정은 혼란스럽기만 하다. 그는 수술 이후에 색상과 움직임, 형체를 볼 수 있었지만 그것을 인식하는 시각 기억이 없었다. .... 우연히 2차 실명을 맞는다. 버질이 다시 촉각의 세계로 돌아와 느낀 것은 절망이 아니라 '제 집 같은' 편안함이다. 

 

- 사이보그는 언제나 멸시와 우월 사이에 있는 위태롭고 불안정한 존재다. 그렇다면 트랜스휴먼의 최전선에 서 있는 아이콘이 아닌, 마주치는 사람마다 인상을 찌푸리는 소외된 기계 인간도 아닌, 단지 인간이 가진 하나의 중립적 특성으로서 '사이보그성'을 상상할 수 있을까. '사이보그 중립'에는 몸의 위계를 줄 세우고 적합한 몸만을 세계의 구성원으로 받아들이는 정상성 규범에 저항하는 일이 전제된다.

 

- 타인이란 애초에 온갖 바이러스와 세균, 편견과 다른 생각, 동의하기 어려운 이념의 운반체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초래한 상황이 절절히 보여주듯이 사회적 거리두기(물리적 거리두기)는 우리의 생물학적 안전에 이롭다. 그러나 우리가 잘 아는 편안한 공동체를 벗어나 바깥세상을 향할 때, 열려 있는 상호 작용의 장으로 나아갈 때, 그 위험과 불일치 속에서만 가능한 우정, 환대, 사랑과 연대의 만남들이 있다.

 

- 발달장애인에게 심한 당뇨가 있으니 강제로라도 커피 믹스를 자제시켜야 하는가라는 돌봄 윤리의 문제는, 자기 결정권과 건강 보호라는 가치 충돌에 관한 물음으로 보였다. 

 

- 결국 한국 사회가 장애인에 대한 시혜와 온정만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기 때문이 아닌가, 장애인을 위해 갖춰야 할 접근성을 사회 정의의 실현으로 보는 관점 자체가 자리 잡지 못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었어요. 그래서 저 나름대로 정리한 입장은, 기업의 기술 홍보 영상이나 장애인을 위한 접근성 기술이 항상 '따뜻한'이라는 수식어와 함께 등장하는 것을 비판적으로 바라보지만 기본적으로는 '없는 것보다는 낫다'는 것이에요.

 

- 앤드류 솔로몬이 동시대를 살아가는 유사한 경험을 가진 사람들의 '수평적 정체성'을 강조하면서 그것이 인터넷 시대에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소중한 연대라는 취지로 말하잖아요. 우리는 다른 문화와 도시에 속해 있지만, 나와 연결된 어떤 경험을 가진 사람을 찾을 수 있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으니까요. 지금 하는 이야기를 대담에 실어도 좋을지 잘 모르겠지만, 초엽 님과 이런 이야기를 나누는 건 참 좋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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